서정운은 화환이 길을 따라 늘어서고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드는 본산의 거대한 대문을 스쳐 지났다. 그대로 담장을 따라 길을 거슬러 올라, 보다 인적이 뜸하고 작달막한 나무 대문에 다다른다. 정무도의 본산이 아닌, 한씨 가문의 종가로 들어서는 문이다.
닫혀 있었지만 잠겨 있지는 않은 문을 밀고 들어간 서정운은 한적한 앞마당을 가로질러 사랑채를 지나쳐 걸었다. 멀리 돌담 너머 정무도 본산 쪽에서는 사람들의 훤소가 아득하게 들려오고 있었지만 이곳은 마치 딴 세계인 듯 조용하다.
원래도 종가 본채 쪽에는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오늘은 대부분이 본산 쪽의 일을 거드는지, 본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별당까지 가는 동안 서정운은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봄볕이 따가울 정도로 내리쬐었다. 눈이 부시다. 저 멀리는 아득하게 시끌시끌한데 이곳은 고요하고 때때로 산새 소리가 들려오는 이 이질감은, 그러나 낯설지 않았다.
본채의 가장 깊은 곳, 산자락과 맞붙어 있는 별당에 이르자 아득하던 훤소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방 한 칸에 마루가 전부인 작은 집채에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루에 다리 포개고 앉아 그저 흐뭇하게 뜰을 내려다보고 있던 노인은 서정운을 보고는 주름진 얼굴에 흠뻑 웃음을 머금었다.
노인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서정운은 노인이 가만가만 손짓으로만 부르는 걸 보고 계단을 올라가, 노인이 손바닥으로 두드린 옆자리에 앉았다.
나란히 앉은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마당을 데우는 볕과, 어디선가 나풀나풀 날아오는 민들레 씨앗과, 멀리 새 소리, 상그러운 풀 냄새, 그런 것 따위에 잠겨 있을 뿐.
이윽고,
“수수꽃다리 향이 좋구나.”
노인이 말했다.
“종다리도 웁니다.”
서정운도 말했다. 둘은 서로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노인이 멀리 버드나무로 시선을 주며 서정운의 무르팍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태일이가 기어이 너를 불러냈구나.”
“기어이 불려 나왔으니 어르신도 뵙고 꽃향기도 맡고 새 울음도 듣고, 좋습니다.”
“안에는 들렀다 왔느냐?”
“어르신 먼저 뵈러 왔습니다.”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의 주름진 손을 가만히 쓸어내리던 서정운은 문득 툇마루에 놓여 있는 바둑판을 보았다.
“바둑으로 소일하십니까?”
“아아.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손주가 종종 찾아와 바둑을 두자 그래.”
“손주요?”
“응. 올 초에 수일이가 제 종질을 양자로 들이지 않았니. 그래 내가 손주가 새로 생겼지. 너는 본 적이 없더냐?”
“아아, 예, 저는 아직 못 봤습니다.”
서정운은 그제야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의 손주라니, 정원사범 두 분의 아들딸 가운데 노인을 찾아와 바둑을 두자고 할 성싶은 사람이 좀체 짐작이 가지 않아 어리둥절했었는데 이제야 알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슈퍼 루키에 대해 들었던 그 사납고 거친 이미지와는 걸맞지 않아 의외이기도 하다.
서정운은 바로 얼마 전에도 손이 닿았던 것처럼 반질반질 닦여 있는 바둑판을 바라보다 웃었다.
“그 손주분이 얼마 전 춘계 선수권에서 뜻밖의 성적을 거두어 한동안 떠들썩했던 모양인데, 좀 어떻던가요?”
“아직은 덜 여물었지 무어. 하지만 기가 정하고 순해 잘 크겠더라.”
“그래요? 하하, 우리 사부님이 속을 끓이시겠는데요.”
“그러게 누가 동기간에 싸우며 정련이니 체련이니 나누라더냐. 어디서든 좋은 싹 나왔으면 잘 키워 보는 게지. 네 사부는 여태 너랑 호영이 데리고 그만치 자랑했으면 되었다.”
허허 웃는 노인 옆에서 서정운도 말없이 웃었다. 노인은 흐뭇하게 주름진 눈매로 서정운을 보다 묻는다.
“그래, 너는 어찌 지내니.”
“저야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 하고 노인은 얼마간 고개를 주억거리다 말했다.
“네 길 따라 잘 걸어가고 있으면 된 게지.”
서정운은 다시 웃기만 한다.
길 따라 잘 걸어가고 있는지 아닌지, 그 길은 아득하게 길어서 길 끝에 다다르기 전에는 알 도리가 없다. 그 길은 나만 걷는 길이라 남들도 알려 줄 수가 없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세상에 ‘옳은’ 길이라는 것은 없어서, 그저 그것이 내게 ‘좋은’ 길이기를 바랄 뿐이다.
“헌데 그보다,”
문득 노인이 정색을 하며 서정운을 보았다.
“너 그리 지내다 처자들에게 원성 과히 사겠더라. 그러다 아무도 네게 시집와 주지 않으면 어쩔 테냐.”
짐짓 염려스러운 낯을 하고 꾸짖는 척 말하는 노인에게, 서정운도 “그러게요, 아무도 시집와 주지 않으면…….” 하고 짐짓 미간을 찡그리고 고민하는 척하다 말했다.
“그러면 뭐 어쩔 수 있나요, 제가 가야지.”
노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호되게 서정운의 등짝을 내리치며 “인석아, 누가 받아 준다더냐!” 하고 호통친다.
서정운은 아야야, 하고 등을 문지르며 같이 웃었지만, 왠지 그 웃음을 점차 줄이더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역시 안 받아 주겠죠……?”
조금 우울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혼잣말처럼 작았다.
응? 하고 노인이 다시 물으려는 찰나, 서정운의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노인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한 서정운이 통화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대뜸 그를 부르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사형, 왜 이렇게 안 와요? 마중까지 보냈는데, 길 잃었어요?」
서정운은 미간에 주름을 그었다.
“눈 감고도 다닐 길을 잃었겠어? 지금 본채 별당이다. 어르신께 인사드리고 있었어. 아직 시간 넉넉하게 남았잖아.”
「아, 할아버지랑 말씀 나누고 계셨구나. 난 또 혹시나 하고.」
한가할 리도 없는데 계속 전화를 걸어 대는 사제의 행태에 미간 주름이 한 줄 더 늘어나는 서정운에게 “호영이냐?” 하고 옆에서 노인이 웃었다. 서정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간 안에는 갈 테니 끊어.”라는 말만 남기고 그대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 버렸고, 전화 소리를 무음으로 돌린 뒤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노인은 허허 웃더니 손을 내저었다.
“찾는 사람이 있으면 가 보아야지. 그만 가 보려무나.”
“예, 어르신. 그럼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인사 좀 나누고 그래. 간혹 싫은 소리 좀 듣는다 해도 크게 신경 쓰지 말고.”
“제가 그런 걸 신경 쓰는 성격이었더라면 이렇게 싫은 소리를 듣게 되기나 했겠습니까.”
서정운이 말하자 노인이 껄껄 크게 웃었다. 그래, 네 말이 맞구나, 하고 말하는 노인의 주름진 얼굴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현직에 있을 때에는 엄격하고 무섭기로 이름 높았던 분인데, 은퇴한 뒤로는 너그럽고 평화로운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엄격하고 무서운 사범님이었던 시절부터 노인을 좋아했던 서정운은 그에게 깊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런 뒤 지금의 노인에게 더없이 마침맞은 별당을---곳곳에 고즈넉한 봄이 가득한 그곳을--- 둘러보고는 물러 나왔다.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인데도 한적하고 조용했던 본채와는 달리 본산 쪽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아직 승단식까지는 시간이 제법 많이 남아 있었는데도 본산 내는 이미 일찌감치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명절이나 사부님 생신 같은 날이면 인사를 드리러 본산에 들르곤 하니까 본산 자체가 그리 오랜만이랄 건 없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북적이는 행사가 있는 날에 오는 건 오랜만이다.
서정운은 물살을 가르듯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갔다. 모처럼 만나 인사를 나누며 안부를 묻는 이들 사이를 지나가다 간혹 낯익은 얼굴들과 마주쳐 몇 마디쯤 나누기도 했지만 그의 걸음을 오래 붙드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를 찾기도 쉽지 않도록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와중에도 그가 가는 길을 따라 그의 모습을 쫓는 시선들이 들러붙었다.
서정운 사범이다. 누구라고? 서정운 사범. 왜 그……. 아아, 그 사람. 그게 저 사람이야? 사범은 무슨, 이제 그냥 외부인이지. 여기엔 뭐 하러 왔대? 한태일 사범님이……. 나도 정련이긴 하지만 저 사람은 도무지…….
수군거림이 그의 걸음마다 따라붙었지만 그중 무엇도 그의 발을 잡아 두지 못했고 그에게는 닿지도 못한 채 흐려졌다.
승단식이 열릴 대수련장을 빙 돌아 지나쳐 안쪽으로 향하던 그의 걸음을 멈춘 것은 “사형!” 하고 부르는 목소리였다. 서정운이 흘끔 돌아보자 그 인파들 속에서 그를 어떻게 발견했는지, 한호영이 대수련장에서 내려와 그에게 반쯤 뛰다시피 잰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을 뿐, 서정운은 그가 오거나 말거나 무심히 고개를 돌리고선 가던 길로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고, 한호영은 아예 뛰어와서 서정운의 팔을 붙들었다.
“어디 가요? 아버지 대수련장에 계시는데.”
“이거 놔. 아직 시간 넉넉하게 남았잖아. 사부님이야 사람들이랑 인사하시느라 바쁘실 텐데 내가 미리 가서 병풍 칠 필요 뭐가 있어. ……넌 아까부터 자꾸 전화질이더니 왜 또 따라와.”
한호영의 손을 뿌리치고 가던 길 계속 가던 서정운은 그 뒤를 유유히 따라오는 한호영을 수상쩍게 바라보았다.
“내가 왜 자꾸 전화했겠어요. 사형 오면 그 핑계로 잠깐 자리 비우려 그런 거지. 아침부터 여태 병풍 치고 있었다고요. 지금 안 쉬어 두면 이제 저녁까지는 못 쉴 텐데 나도 숨 좀 돌립시다. 같이 가요.”
“내가 어디 가는 줄 알고.”
“누렁이 보러 가는 거 아녀요?”
“…….”
이놈은 옛날부터 가끔 이상한 데서 눈치가 귀신같이 빠르단 말야……, 서정운은 가느스름한 눈으로 한호영을 보다가 걸음을 돌렸다. 한호영이 그 뒤로 설렁설렁 따라온다.
“오자마자 황 사범님이랑 한판 하셨다면서요?”
“한판은 무슨, 인사나 나눈 거지.”
“그분은 뭔 말인들 해 봐야 본전도 못 건질 거 뻔히 아시면서 왜 그러셨대요. 하도 오랜만에 봐서 사형이 어떤 사람인지 잊어먹었나?”
“내가 어떤 사람인데.”
“‘큰 어르신과 제 사부 딱 두 분 빼고는 누구 상대로든 안하무인에 독불장군인 작자.’”
한호영이 과거 서정운에 대한 총평이었던 말을 고스란히 종알거리는 옆에서, 서정운은 걸어가면서 가볍게 자신의 무릎 상태를 가늠해 본다. 그러기 무섭게 한호영이 이번에도 귀신같은 눈치로 두어 발짝 물러섰다.
“너 요새 수련 제대로 안 하지? 피할 생각을 하지 말고 막을 생각을 해, 막을 생각을.”
“흥, 사형이 불시에 변칙적으로 기술을 걸면 그거 제대로 막아 낼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피하는 게 백번 낫지.”
“이놈이 명색이 사범이란 놈이 말하는 것 봐라……? 사지 멀쩡히 움직이지도 못해서 몇 년도 더 전에 정무도 그만둔 일반인에게 할 말이냐, 그게?”
서정운이 눈가에 빙긋이 웃음을 띠며 한호영을 보았다. 아무래도 저게 웃는 게 아닌 것 같, 까지 한호영이 생각했을 때에는 이미 서정운이 한호영의 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고, 그가 팔을 뻗어 오는 걸 보고 얼른 방어에 나선 한호영이었으나,
“---.”
자세를 낮추어 방어 태세를 잡은 한호영만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았을 뿐, 서정운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도로 원래 자리로 돌아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허실虛實 구분도 못 하고……, 저런 게 중원사범이라니.”
쯧쯧, 왜 승단식만 있고 강등식은 없는 거야? 능력도 안 되는 놈들은 죄다 단을 깎아 버려야 하는데, 하고 혀를 차며 걸어가 버리는 서정운을 보며, 그래 저 사람은 페이크로 사람 허를 찌르는 것도 주특기였지, 하고 한호영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쫓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그들은 사람들이 북적이던 대수련장에서 멀어져 외당에 가까워졌고, 누렁이가 종종 낮잠을 즐기곤 하는 외당은 이날도 한적했다. 여기까지 들어오는 외부 손님은 거의 없기도 하고, 내부 관계자도 오늘은 대부분이 대수련장에 몰려 있는 탓이다.
“그래도 오늘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에요. 일기 예보에서 주말에 비 온다 해서 걱정했었는데.”
한호영은 이제야 한숨 돌린다는 듯 길게 기지개를 켰다. 서정운은 외당 뒤에 놓여 있는 평상 앞에 웅크려 앉아 ‘츳츳츳’ 하고 혀를 차며 한호영의 말에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래, 한강변에 나가서 산책하기에도 썩 좋은 날씨지. 아주 좋아. ……없네.”
주머니에서 꺼내든 육포를 살랑살랑 흔들며 평상 아래를 들여다본 서정운은 덩그러니 깔려 있는 담요를 보고 중얼거렸다.
“없어요? 그럼 본채에 있는 거 아닌가? 그런데 웬 한강변?”
“본채에도 안 보이던데.”
“꼬맹이들 데리고 산책이라도 갔나 보네. 누렁이 요즘 제 새끼들 데리고 마실 나가는 데에 재미 붙였어요. 강아지들 조롱조롱 달고서 산으로 들로 신나게 쫓아다니더라고요. 그런데 웬 한강변?”
“흐음. 온 김에 새끼들도 보고 누렁이 얼굴이나 보고 갈까 했더니.”
서정운은 육포 뭉치를 담요 위에 놓아두고 일어섰다. 평상에 앉아 있던 한호영이 제일 위에 놓여 있는 육포 조각을 집어 들어 우물거리며 말했다.
“승단식 끝나고 다시 와 봐요. 그때쯤이면 대충 낮잠 자는 시간 맞을 것 같은데. 그런데 웬 한강변?”
서정운은 시계를 보며 한호영의 옆에 걸터앉았다.
“산책하러. 두 시 전에는 승단식 일정 끝나겠지?”
“그렇겠죠? 식 자체야 점심 전에 끝날 거고 그 뒤에 점심 먹으면서 얘기 정도 하면 그 시간쯤에는 얼추……. 근데 산책하러 한강까지 가게요? 그 근처에서 뭐 약속이라도 있으세요?”
“약속을 한 건 아닌데 그 시간쯤 산책을 하거든. 시간대가 잘 맞으면 마주칠 수 있으니까.”
“…….”
어째 대화가 어디선가 미묘하게 어긋나는 것 같다……? 하고 생각하며 눈만 껌벅껌벅하던 한호영이 문득 육포를 우물거리던 입을 딱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이 사형이 좀 이상한 얘기를 했었는데. 어떤 사람과 한강변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자꾸 생각난다는 둥, 보고 싶다는 둥. 마음이 편하다는 둥. 그때 그 얘기의 결론이 어떻게 났었냐면…….
“요전에 말했던 그, ……남자요?”
한호영이 미심쩍게 물었지만 서정운은 생각에 잠겨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며 한호영은 미심쩍은 기색이 점점 더 짙어졌다.
“사형……?”
“호영아. 나 드디어 운명적인 사람을 만난 것 같다. 이런 마음은 처음이야.”
육포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한호영은 입을 헤벌리고 멍하니 서정운을 보았다. 뭐지, 대화가 아까부터 미묘하게 어긋나는……, 아니, 어긋나야만 할 것 같은데!
“잠깐만요, 사형, 정리가 좀 안 되는 것 같은데. 아까부터 우리 대화가 좀 어긋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한호영이 급하게 말하자 웬걸, 서정운은 대단히 진지한 얼굴로 한호영을 보며 말했다.
“아니. 우리 대화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고 보는데.”
“---.”
저 얼굴은 농담이 아니다. 저 말로 봐서는 이해를 잘못한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아니, 문제가 좀 있다고 봐요, 사형.
한호영은 진땀이 새어 나오는 이마를 짚으며 한 손을 들었다.
“잠시만요. 그러니까 지금, 누군지 모를 그 남자가 운명적인 사람이라는 소리예요? 그---그 사람이, 사형더러 좋대요?”
“아니. 내가 좋아하는 거야.”
“그럼 그 사람은……?”
“……. 어떻게 하면 나를 좋아해 줄까?”
한호영은 진지하게 고민하는 기색으로 되묻는 서정운을 보며 말을 잃었다. 농담이죠? 하고 묻고 싶은데 아무리 봐도 농담이 아닌 것 같다. 이런 농담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한참을 입 벌리고 서정운을 쳐다보기만 하던 한호영이 버럭 외친 것은 서정운이 “어떨 것 같아?”라고 다시 물었을 때였다.
“어떻긴 뭐가 어때요? 사형 미쳤어요? 아무리 여자 운이 사나워도 그렇지, 그렇다고 남자한테 눈을 돌려요?!”
“이놈이 말을 해도 꼭 내가 일부러 남자를 찾기라도 한 것처럼……, 아냐, 우연히 좋아하게 된 상대가 남자였을 뿐이라고.”
“그 진부한 변명은 또 뭐냐고요?!”
한호영은 머리를 감싸 쥐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이건 또 웬 청천벽력인가 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남자가. 여자가 하도 줄줄 따라서 뭇 남자들에게 온갖 빈축을 다 사고 있는 서정운이. 지금도 오늘 모처럼 이 사람이 여기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까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는 여자 수련생들이 한 바닥 깔려 있는 판에.
갑자기 두통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한호영이 애써 목소리를 억누르고 입을 열었다.
“뭐 하는 사람인데요.”
“몰라. 그런 얘기는 안 했어.”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몰라요? 그런 얘기도 안 하고 뭐 했어요?!”
“산책하면서 몇 번 마주쳤을 뿐이라니까.”
첩첩산중이요, 설상가상이다. 한호영은 머리를 움켜쥔 채 겨우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어, 어떤 사람이에요……?”
“조용하고 차분하고 자기 일에 열심이고, 귀여워. ……귀엽고 사랑스러워.”
뒷말을 덧붙이는 서정운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이 번졌다. 그것은 그가 평소에 흔히 빙긋이 웃곤 하는 그 웃음과는 달라, 수줍고도 마음 흐뭇한 웃음이다.
……망했다. 그 웃음을 본 순간 한호영은 생각했다. 진짜다. 언놈인지 몰라도 진짜 반한 거다. 이 사형은 본인이 이렇다 판단하고 결정 내린 일에는 굽히는 법이 없는데, 큰일이다. 어쩜 좋아.
여태 그렇게 예쁘고 귀엽고 늘씬한 여자들과 염문을 뿌리면서도 정작 제대로 쿵짝이 맞은 적은 없었으면서, 대관절 그 남자는 남자라면서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럽길래? 세상에 둘도 없이 곱고 여린 미소년인가?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사형한테 호감은 좀 있어요?”
“모르겠어. 그래도 싫어하지는 않지 않을까? 내가 뭔가 얘기를 하면 대답은 그럭저럭 잘해 주거든. 먼저 나한테 뭘 물어보거나 말을 잘 걸거나 하지는 않지만.”
“……, 사형…….”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
어느 유명한 책 제목을 떠올린 한호영이 차마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안타까운 눈으로 서정운을 쳐다보기만 했다.
서정운은 외당 뒤꼍의 커다란 물푸레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년보다 일찍 핀 하얀 꽃 더미가 봄볕 아래 살랑거리고 있다.
“이런 건 처음이야. 이렇게 궁금하고, 보고 싶고, 얘기하고 싶고. 올지 안 올지 모르면서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가서, 올 시간이 훨씬 지나도 계속 기다리고. 오면 들떠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아무 이야기나 하다가 그 사람이 가 버리면 기운이 축 빠지고.”
“…….”
혼잣말처럼 조용조용한 말들을 들으며 한호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점점 더 염려스러운 눈으로 서정운을 바라보기만 할 따름이다. 그런 한호영을 서정운이 흘끔 보았다.
“뭘 그렇게 걱정해. 내가 현실 감각도 없는 어린애일까 봐? 이런 느낌이 처음이라 신기할 뿐이야. 현실과 꿈은 구분 잘하고 있으니 안심해, 그런 한심한 얼굴로 보고 있지 말고.”
그렇게 말하며 빙긋이 웃는 서정운의 얼굴은 한호영이 흔히 보았던 그의 얼굴과 같다. 한호영은 여전히 석연찮은 빛이 남아 있는 기색으로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서정운이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더니 일어섰다.
“슬슬 가 봐야겠어. 두 시 전에 칼같이 나가려면 조금 일찍부터 얼굴 비춰 둬야지.”
구분 잘하고 있는 거 아닌 거 같은데요, 사형!
그러나 한호영이 항의하기도 전에 서정운은 먼저 대수련장 쪽으로 걸어 나섰고, 한호영은 무거운 걸음으로 뒤를 따라가며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이게 웬일이냐.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두들겨 맞아도 이것보다는 정신이 덜 혼미하겠다. 이건 뭐 일평생 생각도 안 해 봤던 일이 난데없이 터지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제대로 사고가 돌아가지도 않는다.
가만있자, 그러니까 요는 사형이 남자한테 반했다는 거지. 그래, 어디서 듣기로는 동성애자는 자기가 이성애자인 줄 알면서 평범하게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자각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즉 사형은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거고, 사형은 남자고, 그 남자도 남자고, 나도 남자고……, ……어.
한동안 걸어가던 서정운은 뒤에서 따라오던 기척이 갑자기 끊기자 의아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한호영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몹시 혼란스러운 얼굴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서정운을 보고 있었다.
“왜 그래.”
“사형, 저기요, 저는 대를 이어야 할 종손이잖아요.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사형, 저는 안 됩니다.”
“……? 갑자기 뭔 뚱딴지같은, ……. ……!”
대관절 무슨 생각을 어떤 논리로 전개하다가 그런 결론이 나왔는지 스스로도 모를 혼미한 정신으로 주절거리던 한호영은, 이놈이 갑자기 웬 헛소리를 하고 있나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던 서정운이 뭔가를 깨달은 듯 순식간에 삭막해진 낯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제야 번뜩 정신을 차렸다.
“호영아.”
“헉?! 사, 사형, 제가 지금 무슨 소리를 했……?!”
한호영이 당황해 어버버거리는 앞에서 서정운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이불에 오줌 싸서 키 쓰고 동네에 소금 얻으러 다니던 시절부터 근 30년을 알아 왔지만, 나는 네가 귀엽다거나 사랑스럽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사형, 저기, 그렇게 목소리 낮추지 마시고 제 얘기를 좀,”
“나는 늘 정신 수양을 한다는 마음으로 오로지 인내와 끈기로만 너를 돌봐 왔어. 그 인고를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체벌의 힘이었지.”
“사, 사형, 사형! 저기! 저기서 강용민 사범님이 손 흔들며 인사를 하시는데요!!”
조용히 어깨를 주무르며 이쪽으로 다가오려는 서정운을 혼비백산한 얼굴로 바라보던 한호영은 갑자기 뭘 봤는지 저 뒤쪽을 향해 미친 듯이 손을 흔들며 외쳤다. 하늘의 도우심보다 더 고맙게도, 심지어는 그 뒤에서 “한 사범! 그 앞에는 서 사범인가? 야아, 이게 얼마 만이야!” 하고 반갑게 부르는 소리도 따라왔다.
예전에 곧잘 알고 지냈던 동년배 사범의 목소리에 서정운은 걸음을 멈추었다. 혀를 찬 그는 기억해 두겠다는 눈길을 한호영에게 보낸 뒤 돌아서서 “그러게, 오랜만이야, 강 사범.” 하고 옛 동료에게 인사를 건넨다.
한호영은 벌렁거리는 심장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그들은 대수련장 가까이 와 있었고 주위에는 사람도 제법 많았다. 아무리 사형이 남의 시선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곤 하지만, 내외부 인사가 이렇게 많이들 와 있는 자리에서 한호영을 패대기치지는 않을 터였다. 게다가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인사 나누느라 바빠질 테니 이쪽을 걸고넘어질 겨를도 없다.
얼른얼른 더 사람 많은 곳으로 가야겠다 싶어 “진짜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라고 인사하는 척하며 그들을 대수련장 쪽으로 슬슬 몰아가는 한호영이었다.
그런 한호영의 빤한 속셈을 모를 리 없는 서정운이었지만, 어차피 그는 기억력이 대단히 좋았고 또 앞으로도 한호영을 따로 볼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서정운은 잠자코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승단식을 하는 대수련장 근처는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그중에서도 유난히 사람들이 크게 덩어리져 있는 무리가 둘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오늘 그를 이곳으로 오게 한 스승을 찾아낸 서정운은 그리로 걸어갔다. 무리 지어 있던 이들 몇몇이 서정운을 보고는 길을 비켜 주었고, 그들의 가운데에 있던 정원사범 한태일이 서정운을 보고는 “오, 정운이 왔구나.” 하고 손을 내밀었다.
“예. 잘 지내셨어요?”
고개 숙여 인사한 서정운은 자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한태일의 옆에 섰다. 평소라면 첫 제자인 서정운 대신 맏이 노릇을 하고 있는 둘째 제자 한호영이 서곤 하는 자리를 자연스럽게 차지하는 그를 만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정운은 그보다 먼저 와 있던 사형제들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자신의 직계 제자들을 모조리 불러 모아 철갑처럼 주위에 두른 한태일은 몹시 흐뭇한 기색이었다.
“어이구, 정원사범님 제자분들이 웬일로 다 오셨네요.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계신 걸 보니 박력이 엄청납니다, 그려. 하나같이 이름 높고 걸출한 분들이시라, 정원사범님은 제자분들을 그저 보기만 해도 뿌듯하고 배부르시겠습니다.”
“허허, 무어, 내 제자들이 다른 건 몰라도 노력과 열성만큼은 어디 가서든 뒤지지 않지요. 허허허, 허허허허.”
자식 칭찬보다 제자 칭찬을 더 흐뭇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고슴도치 한태일이 주위 말들에 호방하게 웃었다. 자신이 직접 기른 제자 중 어디서든 한가락 하지 않는 이가 없다는 게 한태일의 큰 기쁨이자 자랑거리였다. 그나마 그중 유일한 오점이라고 할 만한 게 있다면,
“헌데 서정운 사범님은……, 연예계 쪽으로 넘어가셔서도 변함없이 잘 지내고 계신 것 같더군요. 요즘 여러모로 특히나 바쁘실 것 같아서 못 오실 줄 알았는데 이렇게 뵈니까 반갑네요.”
누군가 서정운에게 건네는 물음에 은근히 뼈가 담겨 있다. 과거 워낙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서정운의 행적에 그를 거리끼는 사람은 정련 안에서도 수없이 많았던 터라, 외려 그를 좋게 보는 사람이 드물 지경이었다. 그것만이 한태일의 제자 양성 전적에서 유일하게 오점이라면 오점이라 할 만했지만,
“아무리 바빠도 이번 승단식의 각 단 체급별 대표들 서른 중 넷이 서 사범이 가르친 선수들인데, 스승된 도리로 와 봐야지요. 안 그러냐, 정운아.”
한태일은 매우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서정운을 돌아보았다.
설마요, 이미 내 손 떠난 사람들을 뭘 챙겨요, 사부님이 안 불렀더라면 안 왔죠, 라는 말은 입속으로 삼킨 서정운은 빙그레 웃으며 “하하, 사부님 찾아뵈려고 온 거죠.”라고만 말하고 말았다.
“네 명이나……. 허……, 서정운 사범님한테 배운 선수들 중에 빼어난 인물들이 많다더니 과연 그렇군요.”
감탄스레 중얼거리는 말들 속에서 서정운보다 한태일이 더 뿌듯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각 체급별로, 각 단별로 승단하는 사람들의 대표 격으로 본산에서 승단식을 치르게 되는 선수들 서른 가운데 넷. 그것은 분명 엄청난 숫자였고, 그것이 바로 서정운을 맹렬하게 비난하는 이들조차 그를 함부로 깎아내리지 못하는 이유였다.
“내가 여태 살아오면서 서 사범보다 훨씬 기량이 뛰어난 선수도, 자질이 훌륭한 선수도 여럿 보았지만, 사람을 기르는 데에 있어서는 서 사범만 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지요.”
한태일이 단언했다. 주위에 있던 이들의 쏟아지는 시선들 속에서 서정운은 애매하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밉게 보는 이들도 많은데 이렇게 얼굴에 금칠을 해 주시니 좀 면구스럽긴 했지만 아무렴 어떨까, 면전에서 먹칠을 하고 드는 인간들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버티는데 금칠을 견디는 것쯤이야---때로 그게 더 힘들기도 하지만--- 일도 아니다.
그보다는 아무 쓸모도 의미도 없는 말들이나 나누는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고 후딱 승단식을 마친 뒤 얼른 한강변에나 가고 싶은 서정운이었다.
“그러면 서정운 사범님은 올해 6월에 있을 사범 수련 합숙에도 참가하시려나요?”
“글쎄……, 뭐 그러면 좋기야 하겠지만…….”
누군가 던진 말에 한태일이 애매하게 말을 흐리며 서정운을 보았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서정운은 빈틈없이 상큼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저는 몸이 좋지 않아 정무도는 그만뒀으니까요.”
“아, 그랬었지요. 참 안타까운 사고였습니다. 헌데, 선수로는 현역에 있기 어렵더라도 사범직은 계속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적어도 사범 수련 정도만이라도 참석하시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하하,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새로 몸담은 일이 많이 바빠져서요.”
입에 침 하나 바르지 않고 반드르르하게 말한 서정운은 “저도 참 아쉽습니다.” 하고 단호하게 말을 마쳤고, 물음을 던진 사람은 아쉬운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서정운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곧 다른 사람이 정원사범에게 인사를 건네 와서 화제는 다른 방향으로 돌아갔고, 서정운은 그 옆에 버티고 서서 간혹 웃으며 인사나 주고받는 정도로 굳이 길게 이야기할 일은 없었다.
안부 인사를 주고받으며 북적북적 오가는 인파들 속에 서 있으면 따가운 시선들이 한결 명확하게 느껴진다. 그 시선은 호의보다 악의에 가까운 것들이 더 많았으나 서정운은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는 이 자리나 어서 끝났으면 좋겠다.
한태일의 옆에서 그린 듯이 웃으며 지겨워하고 있는 서정운의 귀에 멀찍이서 개가 짖는 소리가 언뜻 들어왔다. 누렁이 소리다.
금세 그 낯익은 소리를 알아들은 서정운은 눈매를 구부렸다. 저 녀석이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어디 멀리 마실 나갔다가 이제야 돌아왔나 보다. 승단식 마치면 점심 먹고 적당히 슬쩍 일어나서 저 녀석이나 보러 가야지. 그러곤 어디 붙들리기 전에 얼른 한강으로 튀어야겠다.
……오늘은 올까.
그 남자가 한강으로 나오는 건 불규칙적이었다. 정해진 요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정해진 날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일정한 거라곤 시간 정도다. 언제 오냐고 물어도 ‘시간 될 때요.’라고만 대꾸할 뿐.
어느 때에는 며칠 연달아 오고 어느 때에는 일주일 내내 안 오기도 하는 남자를 그나마 만날 수 있는 건 서정운이 거의 매일 강가에 나가는 탓이다.
나올 수 있는 날에는 연락을 달라거나 혹은 따로 약속을 하자고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요즘처럼 험한 세상에 몇 번 마주쳐 얘기만 나눈 생판 타인이 함부로 그런 얘기를 했다간 수상쩍은 인물로 찍혀 두 번 다시 못 보게 된다 해도 할 말이 없다. 일단은 꾸준히 마주쳐 낯을 익히면서 조금씩 남자에 대해 알아 가는 수밖에.
오늘은 오려나. 오면 좋겠는데. 지금은 뭘 할까. 서정운이 상념에 잠겨 조용히 한숨을 쉬었을 때였다.
턱.
발등에 뭔가 묵직한 것이 얹혔다.
“……?”
시선을 떨어뜨린 서정운은 자신의 발 위에 반쯤 올라앉아 있는 노르스름한 털 뭉치를 보았다. 이게 뭐지, 눈을 껌벅이며 바라보고 있으려니 말똥말똥 까만 눈으로 서정운을 올려다보며 꼬리를 파닥거리는 모습이 어째 무척 낯익다. 아니 낯익은 정도가 아니라…….
“너…….”
얘가 왜 여기 있지?, 서정운은 노랑둥이 강아지를 껌벅껌벅 바라보았다. 그런 서정운의 기색을 알아챘는지, 옆에 서 있던 한호영이 서정운의 발치를 보고 “어.” 하고 중얼거리더니 그 강아지를 달랑 들어 올렸다.
“요놈, 어디서 나타났어? 사형, 누렁이 새끼예요. 좀 전에 어디서 누렁이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새끼들 데리고 산책 갔다 돌아왔나 보네.”
“……누렁이 새끼?”
“예. 딱 봐도 닮았죠? 새끼 여섯 마리 중에 색깔도 생긴 것도 얘가 제일 많이 닮았어요.”
“……, 그래, 닮았네.”
근데 내가 얘랑 아주 꼭 닮은 애를 하나 아는데 말야……, 서정운이 멍하니 눈만 껌벅거리며 강아지와 마주 보는 사이, “요놈이 제 어미 예뻐했던 사람은 또 어떻게 귀신같이 알아보고서 사형 발등에 올라앉았대요. 자, 하지만 지금은 손님들 많이 오셔서 오빠들이 바쁘니까 나중에 놀자. 저리 가 있어.”라며 한호영이 몇 걸음 떨어진 화단에 강아지를 내려놓고 돌아왔다. 강아지는 제 몸집에 비해 높다란 화단에서 뛰어내릴까 말까 고민스레 왔다 갔다 하면서도 서정운을 향해 “알! 알!” 짖으며 꼬리 쳤다.
……내가 쟤랑 목소리까지 아주 꼭 닮은 애를 하나 아는데……, 정말 아주 붕어빵 틀에 찍어 낸 것처럼 똑 닮았는데…….
뚫어져라 강아지만 쳐다보고 선 서정운의 옆에서 한호영이 귀엣말을 속삭였다.
“어이구, 사형 눈을 못 떼시네. 쬐그만 게 제 엄마 쏙 빼서 되게 귀엽죠? 승단식 끝난 뒤에 천천히 보시고, 지금은 슬슬 승단식 시간 다 돼 가니까 대수련장으로 들어……, 아, 작은아버지 오신다.”
뒷말에는 짧게 혀 차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껌벅껌벅 강아지만 쳐다보던 서정운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승단식 시작할 시각이 다 되어 사람들이 슬슬 대수련장 안으로 들어가는 가운데, 반대쪽에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던 무리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한수일 정원사범을 필두로 한 체련의 수뇌진이다.
사람들에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인대가 끊어져 다리에 깁스를 했다는 말대로 한수일은 목발을 짚고서 옆에 선 사람의 부축을 받아 걸어오고 있었다. 다소 마르고 강퍅한 인상의 한수일은 주위 사람들과 넉넉히 웃으며 걸어오다가 대수련장 입구 앞쪽에 서 있던 한태일을 비롯한 그 무리를 보고는 웃음을 거두었다. 그건 한태일도 마찬가지라, 너그럽게 이야기를 나누던 입을 꾹 다물고 동생을 쳐다보았다.
언제 어디서 마주쳐도 삭막하고 흉흉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두 형제 노인들의 조우에 주위의 긴장이 높아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조마조마한 심경으로 두 어르신네를 번갈아 살피는 이들 속에서 드디어 둘이 마주 섰다. 또각, 걸음을 멈추는 한수일의 목발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곧 승단식 시작하는데 들어가시지요, 형님.”
“음. 그러잖아도 들어가려던 참이다.”
아무렇지 않은 말만 주고받는데도 두 노인 사이에 얼음이 뚝뚝 쌓이는 것만 같았다. 그때 한수일의 매서운 눈길이 한태일의 옆에 서 있던 서정운에게 옮겨갔고,
“서정운 군이 왔었군. 아니지 참, 지금도 본산에 적을 두고 있다니 아직은 사범이라고 불러야겠군. 워낙 보이지 않아서 잊고 있었네. 오늘은 웬일로 예까지 왔나, 서 사범. 그간 잘 지냈고?”
트집인 듯 아닌 듯 꼬장꼬장하게 말을 건네는 한수일에게, 그러나 서정운은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서정운의 시선은 한수일의 옆에 서서 그를 부축하고 있는 커다란 남자에게 붙박여 있었기 때문이다.
저렇게 큰 남자를 왜 이제야 봤을까.
남자는 한수일의 옆에 서서 그에게 한쪽 팔을 내어 주고 있었는데, 짙은 색 정장 때문인지 유난히 묵직하고 위압적으로 보였다.
……그래서, 서정운은 무표정하게 자신에게 시선을 주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몹시 낯익었음에도, 처음 만나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생경하게 남자를 응시했다.
서정운이 뚫어져라 남자를 보는 걸 알았는지, 한수일이 자랑스레 남자를 소개했다.
“아, 그러고 보니 서정운 군은 처음 보던가? 그래도 춘계 선수권 이후로 방송이나 신문에도 나왔으니 누군지는 알지? 인사하게. 내가 올 초에 양자로 들인 내 아들이야. 이번 춘계 선수권 중량급에서 우승을 했지. ---무화야, 예전에 네 큰아버지께 직접 배워 사범을 했던 서정운 군이다. 지금은 그만뒀지만.”
그새 화단에서 용감하게 뛰어내렸는지 작은 털 뭉치가 조르르 달려와 남자의 발등 위에 올라갔고, 남자는 털 뭉치를 집어 들어 손바닥 위에 담고서는 무심한 시선을 서정운에게 돌렸다.
“한무화입니다.”
그 말로 끝.
그 낮고 무덤덤한 목소리도, 짤막한 말투도, 무표정한 얼굴이나 무심한 기색도, 심지어는 강아지를 올려놓은 그 커다란 손바닥까지도 서정운이 알고 있는 그 사람 그대로였는데, 그 인사도 차림새도 주위에 선 사람들도 딴 세상에 떨어져 버린 기분이 들 만큼 낯설었다.
“……, 서정운입니다.”
서정운이 중얼거리자 남자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뜻밖이라거나 놀라는 빛이라곤 조금도 없는 그 간결하고 무뚝뚝한 몸짓도 서정운이 알고 있는 사람의 것 그대로다.
한강변에서 며칠에 한 번쯤이나 마주치곤 했던 남자다. 편안한 차림으로 자전거를 달리곤 하던 그 과묵하고 진중한 남자가, 못내 보고 싶고 만나고 싶던 사람이 지금 바로 눈앞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자리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꼬리표를 달고서 서 있다.
“---.”
무어라 말이라도 할 듯 서정운의 입술이 얼핏 움직인 그때, 대수련장 안에서 진행 보조원이 나왔다.
“승단식 시간이 다 됐습니다. 들어가서 자리에 앉아 주세요.”
보조원의 알림에 한수일은 “그럼 먼저 들어가 있겠습니다, 형님.” 하고 한태일에게 인사하고는 걸음을 옮겼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연히 서정운에게서 시선을 거둔 남자는 한수일을 부축해 등을 돌렸다. 다른 체련 측 인사들도 그 뒤를 따른다.
못마땅한 기색으로 그들을 보고 있던 한태일도 곧 “우리도 들어가자.”라며 걸음을 돌렸고, 그 자리에 망연히 서 있던 서정운은 대수련장으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무리에서 뒤처졌다. 홀로 남아 있는 서정운을 보고 대수련장으로 들어가던 한호영이 다가왔다.
“왜 그래요, 사형? 어서 들어가요.”
“……. 저 사람이 그 슈퍼 루키야……?”
“예? 아아, 작은아버지 옆에 서 있던 키 큰 남자 말이죠? 예, 걔예요. 한무화.”
“한무화…….”
그런 이름이었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서정운은 실감이 나지 않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할 따름이었다. 이미 남자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졌는데도 그쪽만 멀거니 바라보며.
왜 그래요? 사형? 사형? 하고 한호영이 몇 번 불렀지만 그 소리도 바람 소리처럼 스쳐 갈 뿐, 서정운은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기분으로 한동안 그곳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