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대수련장에서 각자 개인 연습을 하고 있는 수련생들은 여느 때와 달리 표정이 굳어 있었다. 표정만 그런 게 아니라 더없이 진지하게 움직이는 몸짓도, 자세도, 힘 조절도, 심지어는 근육의 움직임까지, 온 신경을 안 쓰는 데가 없었다.
특히나 그중 두어 명, 과거에 같은 사범에게 배웠던 전적이 있는 선수들은 머리털 끝까지 긴장한 채 거울을 응시하며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정확히는, 거울 속에 비치고 있는 한 남자---대수련장 문 옆의 의자에 편안히 앉아 팔짱을 끼고 있는 옛 스승 서정운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나 살피며.
‘야……, 저분 왜 안 가시냐…….’
‘아니 그보다는 왜 오셨다냐…….’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술 먹지 말고 연습해 둘걸…….’
그들은 거울 속으로 서로 시선을 마주쳐 가며 눈짓으로 바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입술 모양까지 움직여 가며 대화하던 그들은 서정운과 눈이 딱 마주친 순간 뻣뻣하게 굳어 거울 속의 자신과 눈싸움을 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때.
“재윤아.”
왔다.
이름을 불린 수련생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심경으로 거울 속의 스승을 마주 보곤 “어, 예, 사범님.” 하고 공손히 두 손 모으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서정운은 그런 옛 제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 혹시 어디 가서 나한테 배웠다는 소리 하고 그러니?”
“예? 어, 아, 어, 그, 어, ……예.”
당황해서 잠시 버벅거리다 간신히 대꾸하는 제자를 보고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던 서정운은 제자와 눈을 마주치며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지금 그러고 있어? 제대로 안 할래?”
“죄, 죄송합니다!”
수련생이 진땀을 뚝뚝 흘리며 외쳤을 때였다. 퍼엉! 하고 대수련장 저편에서 커다란 소리가 났다. 무심결에 거울 속으로 시선을 주자, 체련의 연습 구역에서 눈에 띄게 체격이 좋은 남자가 자기 몸통만 한 모래 부대를 바닥에 호쾌하게 메어친 참이었다. 한무화다. 그는 이미 아까부터 몇 번이나 반복해서 메어치기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쌀 한 가마니 무게는 족히 나갈 부대를 쉬지도 않고 메어친 지 한참인데도 힘든 기색 하나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잘하네.”
서정운이 감탄스레 중얼거렸다. 혼잣말처럼 작은 그 목소리를 알아들은 것은 아까부터 그의 옆에서 못마땅한 기색으로 인왕상처럼 버티고 서 있던 한호영뿐이었다.
“확실히 저 정도면 지금 상태에서 굳이 다듬지 않아도 웬만한 차이는 제압할 수 있다고 했다는 한수일 사범님 말씀도 납득이 가긴 해.”
“그래도 그건 웬만큼만 잘하는 상대와 시합을 했을 때의 이야기죠.”
“그게 아쉬운 부분이지.”
한호영의 대꾸가 부루퉁하든 말든, 서정운은 홀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혀를 찼다.
그때 한무화는 한 번 더 모래 부대를 메어치며 입속으로 무어라 수를 세더니, 처음 생각했던 수를 채웠는지 그제야 자세를 반듯하게 일으키더니 긴 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 전혀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는지 이마에 땀이 솟아올라 있었다.
옆에 내려놓았던 수건과 물병을 집어 들어 땀을 닦으며 물병을 기울이는데, 병이 비었던 모양이다. 가볍게 병을 흔든 한무화는 서정운 쪽으로 걸어왔다. 서정운이 앉은 의자 바로 옆에 정수기가 있었다.
어, 온다, 온다, 은근히 긴장하는 기색인 서정운을 옆에서 한호영이 가느스름하게 곁눈질해 노려보는 가운데, 한무화가 정수기 앞에 섰다. 물병에 물을 받는 그의 몸에서 더운 김이 물씬 끼쳤다.
“근육을 좀 더 유연하게 써 봐.”
서정운이 말하자 막 물병을 입으로 가져가던 한무화가 흘끗 시선을 주었다. 한결 더 가느스름해지는 한호영의 눈길은 물론, 알게 모르게 그쪽을 바라보던 몇몇 수련생의 기묘한 눈길도 모였다. 저 양반이 웬일이지, 자기 제자 아니면 거들떠도 안 보는 사람이…….
“유연하게라면, 어떻게 말입니까?”
“아랫배에서부터 팔 끝까지 근육이 차례로 물결처럼 움직인다는 느낌으로. 지금 상태로도 나쁘지 않긴 한데…….”
서정운은 자리에서 일어서 한무화의 하복부를 눌렀다.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려 하는 그에게 “버텨.”라고 말하곤, 그 자리에 버티고 서는 그의 하복부를 손바닥으로 단단히 누른다.
“여기서부터 움직이는 거야. 등과 어깨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다리는 중심 잡고 서서 끄떡도 안 하도록 단단히 버티고.”
“……. 힘이 분산되는 것 같은데요.”
“제대로 못 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근육의 흐름 전체를 반동 삼아서 힘을 한곳에 집중시키는 거야.”
한무화는 마시려던 물병도 내려놓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서정운의 말을 되새겨 보는 듯 동체의 근육들이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그대로 얼마간 피부 한 겹 아래의 근육들을 느리게 움직이던 그는 훌쩍 돌아서는가 싶더니 다시 모래 부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모래 부대를 메어치기 시작하는데, 그 움직임은 조금 전보다 훨씬 느리고 어딘지 어설퍼 보였다. 조금 전의 그 거침없고 우람차던 움직임과는 달라, 외려 자세가 흐트러진 것 같다.
한무화는 얼핏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한동안 그대로 있던 그는 다시 모래 부대를 메어친다. 그것은 더 느리고, 더 흐트러져 보였다. 모래 부대도 원래대로 정확한 낙하지점이 아니라 반걸음쯤 비껴 난 곳에 떨어진다.
“…….”
서정운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뚫어져라 그를 쳐다보다 흘끗 시선을 주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인다.
“제대로 했어.”
서정운은 그 말만 했고, 남자는 군말 없이 다시 모래 부대를 들었다. 이번에도 메어치기는 어설프다. 그런 그를 지켜보며 서정운은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저렇게 한 번에 몸 쓰는 걸 이해하기 쉽지 않은데. ……물건은 물건이구나.”
“아무렴요. 그런데 사형, 잠깐 나 좀 봅시다. 그 기특해 죽겠다는 얼굴 좀 집어넣으시고요.”
쟤가 무슨 사형 제자예요?! 하고 툴툴거리면서 한호영은 삭막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서정운의 팔뚝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어? 조금만 더 보고…….”
“아 일단 나와 봐요! 나랑 얘기 좀 해요!”
끌려 나가지 않으려고 버티던 서정운이었지만, 그보다 한 체급 큰 한호영이 억지로 질질 잡아당기는 데에야 결국 버티지 못하고 혀를 차며 끌려 나가고 말았다.
그제야 서정운의 시야 안에서 뻣뻣하게 굳어 쉬지도 못하고 연습을 하고 있던 수련생---정확히는 서정운의 옛 제자---들은 다른 때보다 백 배쯤 지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걸음을 늦추었다. 아예 멈추지는 못하고 설렁설렁 걸음을 움직이면서도 시선으로는 언제 저 사부님이 다시 돌아올까 빈틈없이 살피기를 그치지 않으며 기운 빠진 목소리로 숙덕거렸다.
“사범님이 웬일로 여기를 다 오셨대.”
“몰라, 왠지 모르겠는데 최근 들어 가끔 오시더라고. 나도 요새 바빠서 뜸하게 왔더니 자주 뵙지는 못했는데,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오시나 봐.”
“정무도 다시 시작하신 거야, 그럼?”
“아니, 그냥 보기만 하다가 가시던데. 당신 제자 하는 꼴이 영 못 봐주겠다 싶을 때에만 한두 마디 하시고.”
영 못 봐 주겠어서 결국 한마디 듣고야 만 오늘의 제자 김재윤은 퀭한 얼굴로 고개를 뚝 떨어뜨렸다. 그 옆에서 동기가 위로하듯 어깨를 두드린다.
“좋게 생각해. 그래도 저분한테 지적 듣고 싶어 하는 수련생이 얼마나 많았냐, 다 오래 못 버티고 떨어져 나가서 그렇지. 당신 제자 아니면 그런 말씀도 안 해 주시잖아.”
“그래……, 그건 그렇지……. ……, ……그런데 저 체련 놈은 뭐야?”
갑자기 고개를 치켜든 제자가, ‘오빠’가 웃어 준 다른 팬을 노려보는 아이돌 팬 같은 눈길로 거울 속 한무화를 노려보았다. 딱 보기에도 무시무시하게 무거워 보이는 모래 부대를 거뜬하게 메어치는 그 건장하고 탄탄한 근육들을 얄밉게부럽게 노려보며.
“몰라. 올 때마다 저놈을 좀 유심히 보시긴 하시던데…….”
“정원사범님이 뭐라고 하셨나? 저놈 약점 좀 찾아내라고?”
“아니, 며칠 전에 정원사범님도 수련장 나오셨다가 서 사범님 보고 놀라시던데, 네가 웬일로 왔냐고.”
게다가 약점을 찾아내는 것치고는 서 사범님답지 않게 조언도 해 주시고, 그러게 저 양반이 웬일이라냐, 심지어 말투도 완전히 순한 거 들었어? 타박 한마디 안 하고? 우리 같았으면 욕을 아주 바가지로 먹었을……, 이미 제자 둘은 바싹 붙어 서서 머리 맞대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정확한 몸짓과 걸음은 멈추지 않았고 시선도 빈틈없이 거울 속을 살피고 있었으니, 과연 호랑이 같은 사범님한테 단련될 대로 단련된 제자들이라 하겠다.
“그래서, 정원사범님한테는 뭐라고 하셨어? 왜 오셨대?”
“아, 그게, ……누렁이랑 놀러.”
“……. ……응?”
제자들은 그 순간만큼은 거울을 살피는 것도 잊고 뚫어져라 서로를 마주 보았다. 뭘 잘못 듣지는 않았나 빤히 쳐다보는 동기에게, 그 대답을 들려준 동기는 약간 자신 없는 눈치로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던데. 누렁이 새끼들이 아주 예쁘다고, 어린것들과는 어릴 때 놀아 줘야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자라난다고.”
“……. ……. ……그분이 누렁이를 예뻐하긴 하셨는데…….”
“응…….”
어째 뭔가 좀 석연찮은 기색으로 나란히 침묵하는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둘이서 백날 석연찮아 봐야 명쾌한 답이 나올 리도 없어, 결국 한 명이 한숨을 쉬며 침묵을 끊었다.
“뭐, 그래도 사범님이 오시니 좋긴 하네.”
“좋다고?”
“어. 그동안 해 온 것들을 검사받는 느낌이잖아.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아닌지. 막상 말씀 들으면 마음은 몹시 찔리고 아프다만, 그래도 좋긴 해.”
“네가 저분 밑에서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이제야 알겠다, 이 매저야.”
“남 말 하시네.”
“…….”
그렇게 머리 맞대고 수군수군하던 두 사람은, 누가 들어오는지 거울 속에서 대수련장 문이 벌컥 열리는 걸 보고는 화들짝하며 얼른 떨어져 서서 열심히 거울을 노려보며 자세를 반듯하게 정돈하는 것이었다.
“사형……,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대수련장 밖으로 나와 으슥한 나무 아래로 서정운을 끌고 간 한호영이 대뜸 내뱉은 말이었다. 서정운은 그 사나운 기세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꾸했다.
“뭐가.”
“제가 사형 다시 돌아오시라고, 가끔이라도 선수들 좀 봐달라고 했을 때는 귓등으로도 들은 척 안 하시더니!”
“난 돌아온 적 없다. 그냥 어쩌다 우연히 요새 좀 시간이 나서 구경하러 아주 잠깐씩 오는 것뿐이지.”
“사형이 언제부터 그렇게 우연히 시간 날 때 구경하러 여기를 아주 잠깐 일주일에 한두 번씩 오셨다고 그래요?”
“왜, 올 수도 있지. 내가 뭐 못 올 데라도 왔어?”
“동기가 불순하다고요, 동기가!!”
기어이 벌컥 소리를 지르고야 만 한호영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주저앉았다. 이놈이 왜 이래, 라는 눈으로 내려다보긴 했지만 나름대로 찔리는 바가 있긴 했는지 서정운은 잠자코 있었다.
“사형, 제발요……. 사형도 지금 사형이 어떤 입장인지 아시잖아요.”
한호영이 웅크린 채 앓듯이 중얼거렸다. 풀이 꺾인 목소리는 정말로 염려로 가득 차 있어서 서정운은 그를 내려다보다 한숨 섞어 말하고 만다.
“그래서 입 다물고 있잖아.”
“그럼 뭐 해요, 행동이 평소 같지 않은데!”
한호영은 빽 고함을 질렀다.
저 인간이 왜 한무화를 저렇게 살피고 있나, 이미 정련에서도 의아하게 여기고 체련에서도 수상쩍게 여기고 있었다. 워낙에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러니까 더 눈에 띈다. 체련에서는 농담처럼 ‘서정운 사범 적진 시찰하나?’라는 말도 한다는데, 그게 또 아예 농담만은 아닌 투였다. ……차라리 적진 시찰이면 마음이나 편하지. 한호영은 다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날, 한호영은 사형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날이다. 승단식이 있었던 4월의 어느 좋았던 날.
좋은 날이었다. 날씨도 좋았고, 사람들도 많이들 왔고, 분위기도 시종 화기애애하고---뭐 정련, 체련 각자가 서로 흉을 보느라 자기들끼리 화기애애했을 수도 있으나--- 평화로웠고, 승단식도 아무 문제 없이 잘 진행되었고, 준비해 뒀던 식음료도 마침맞았고, 모든 게 완벽했다.
그래서 한호영은 기분이 좋았다.
승단식은 정무도의 연례행사들 중에서도 손꼽히도록 큰 행사인데, 올해도 깔끔하게 탈 없이 지나가는구나 싶었다.
승단식을 마치고 빈객들의 점심 식사도 끝나, 이제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거나 서로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끼리 각자 나뉘어 이야기를 더 나누거나 하면 되었다. 비록 한호영은 본산의 정원사범의 아들이자 종손이라는 이유로 저녁까지는 손님을 치를 예정이긴 했지만, 그래도 오후에 접어들어 한산해지자 기분도 한적해졌다.
그렇게 한숨 돌리고서야 한호영은 문득 서정운을 떠올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승단식이 끝나면 점심 식사를 겨우 입에 대는 시늉이나 하고는 곧바로 돌아갈 줄 알았더니, 점심 식사 뒤 다과까지 마치도록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길래 어쩐 일인가 싶던 참이었다. 그 만나고 싶다는 둥 얘기하고 싶다는 둥 하는 놈을 보러 한강에 가겠다더니, 어째 간다던 시각이 훨씬 지났는데 여태 안 가고 저러고 있나 했다. 그러다 잠시 손님 접대에 바빠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보이지가 않았다.
그새 간 건가, 인사나 하고 가지, 한호영은 잠깐 숨이나 돌릴 겸 손님들 사이에서 빠져나와 서정운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그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놈이랑 한창 얘기 중인가 생각하다가 한호영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저 양반이 생전 처음으로 누구한테 반했다고 하더니 그게 남자라니 이 웬 날벼락인가 싶다. 대관절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미청년이길래.
에라, 강아지들이나 보러 가자. 시름을 잊으려면 작고 보송보송하고 어린 것들이 최고다.
옮기는 걸음걸음 한숨을 폭폭 쉬면서 누렁이와 그 강아지들을 보러 외당으로 향하던 한호영은, 그러나 외당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걸음을 늦추었다.
외당 뒤꼍, 누렁이가 그 아래에서 종종 낮잠을 자곤 하는 평상에 서정운이 앉아 있는 게 멀리서 보였다.
어, 아직 안 갔었네, 하고 막 서정운을 부르려던 한호영은 그 옆에 누가 앉아 있는 걸 그제야 알아채고 누군가 싶어 고개를 뺐다. 그러나 고개를 길게 뺄 필요도 없이 서정운의 몸집으로 가려지지도 않는 그 건장한 체격의 옆 사람이 누군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한무화다.
으잉, 어쩌다 저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냐. 희한한 조합이네.
그렇게 생각하며 그들에게 설렁설렁 다가가는데,
‘알고 있었으면 귀띔이나 해 주지 그랬어요.’
서정운이 말하는 게 들렸다. 저건 또 뭔 소리냐, 한호영은 그때까지만 해도 대수롭잖게 생각하며 그들을 보았다. 강아지 한 마리를 허벅지 위에 얹고 있던 한무화가 ‘굳이 왜?’라는 얼굴로 무심히 서정운을 쳐다본다. 서정운은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던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랬구나……, 한수일 사범님 양자라는 게…….’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다 한무화를 보더니 빙긋이 웃는다.
‘말 놔도 되죠?’
‘예.’
한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로 따지든 항렬로 따지든 서정운은 한무화에게 얼마든지 말을 놓을 수 있는 입장이었지만, 한호영은 그 말을 들으며 ‘웬일이여 사형답지 않게’ 하고 희한하게 여겼다. 겉으로는 사람들 어려워하지도 않고 편하게 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낯깨나 가리는 양반인데. 아무리 나이 어린 후배라 해도, 본인 제자쯤 되지 않으면 상대가 먼저 말을 놓으라고 해도 웬만해서는 말을 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 한무화가 지그시 서정운 쪽으로 시선을 떨어뜨렸고, 서정운은 자신의 옆에 착 달라붙어 엎드려 있는 누렁이의 귀 뒤를 슬슬 긁어 주다가 그 시선을 느끼곤 그를 보았다.
‘왜?’
‘아니……, 저는 피해 다니거든요.’
‘아아, 누렁이? 얘는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확고한 애라서, 큰 어르신이랑 사부님이랑 한수일 사범님만 따르거든.’
그 말마따나, 짐승 주제에 눈치는 귀신같아서 집안에서 가장 윗선에 있는 웃어른 셋에게만 복종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시큰둥한 누렁이는 한호영에게도 이렇다 할 충심을 보인 적은 없었다. 개 주제에 건방지다고 생각하며 한호영은 누렁이를 흘끔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누렁이가 귀를 쫑긋 세웠지만 엎드린 채로 돌아보지도 않는다.
서정운은 말없이 쳐다보는 한무화의 시선이 여전히 끊이지 않자 다시 의아하게 되물었다.
‘왜?’
‘서정운 사범님도 따르는 걸로 보입니다.’
‘아아, 나는 그분들이랑은 좀 다른데……. 얘가 날 좋아해.’
서정운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눈꼬리에까지 웃음이 밴다.
그걸 보며 한호영은 다시 정말 사형답지 않네, 하고 생각했다. 정말로 웃는 건데 저건. 한편으로는 무화 저놈도, 변함없이 말수도 적고 표정도 희미하긴 했지만 저렇게 편하게 누구랑 얘기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어느새 저렇게 말을 트게 됐지??
별일이 다 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기웃하는 한호영의 귀에 서정운이 말을 잇는 게 들려왔다.
‘그런데 서정운 사범님이라니, 네가 그 호칭을 쓰니까 어쩐지 좀 이상한데. 그보다는 형이라든가, ……, ……아니, 아냐.’
본인이 말해 놓고도 겸연쩍은 눈치로 얼버무리는 서정운을 보며, 한호영은 이번에야말로 어이가 없어 멍해졌다. 저 양반이 뭘 잘못 먹었나.
‘사형, 여기서 뭐 해요? 누구 만나러 간다더니, 안 가요?’
한호영이 귀를 후비적거리며 더럭 외치자 서정운은 어디에 정신을 팔고 있었는지, 다른 때라면 이 정도 거리까지 다가온 한호영을 몰랐을 리 없는데 퍼뜩 놀라며 돌아보았다.
이내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며 미간에 슬며시 주름까지 가는 서정운을 보며 그렇지, 저래야 내 사형이지, 하고 생각한 한호영은 변함없이 무표정한 한무화와 눈인사를 나누며 ‘아, 그러고 보니,’ 하고 말했다.
‘작은아버지가 너 찾으시는 것 같던데.’
자랑스러운 양아들을 만방에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던 숙부를 떠올리며 한호영이 말하자 한무화는 ‘예.’ 하고 말하며 선뜻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만.’ 하고 짤막한 말을 남기곤 걸음을 돌리는 그에게, 왠지 아쉬운 얼굴을 한 서정운이 얼른 물었다.
‘오늘은 한강 안 가?’
……읭?
이건 뭔 소리냐, 끔벅끔벅 눈만 껌벅이는 한호영의 앞에서 한무화가 ‘예, 안 갑니다.’ 하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하긴 오늘은 한수일 사범님 도와서 저녁까지 손님을 치러야 할 테니……. 그래, 가 봐. 다음에 또 보자.’
서정운의 말에 한무화는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곤 자리를 떴고, 서정운은 물끄러미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미심쩍게 응시하고 있던 한호영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요? 한강은 또 뭐고?’
‘음……, 쟤가 걔야.’
한무화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도록 시선을 떼지 않으며 서정운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한호영은 점점 더 수상쩍은 얼굴을 했다.
불길한 예감이 아주 강하게 든다. 한강 하니까 아주 안 좋고 터무니없는 상상이 떠오를 것 같은데. ……아냐, 하지만 설마.
‘걔가 누군데요.’
‘말했잖아. 한강에서 가끔 마주친다는 사람.’
건물 뒤로 돌아간 한무화는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그제야 서정운은 한호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덤덤한 눈길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마주 보던 한호영이 중얼거렸다.
‘귀엽고 사랑스럽다면서요.’
‘귀엽고 사랑스럽잖아.’
이게 말이여 막걸리여.
저놈이 그놈이라는 부분을 중점적으로 놀라야 하는지 저놈이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인다는 부분을 중점적으로 놀라야 하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진 한호영은 한동안 말을 못 했다.
‘……정말 쟤라고요? 사형이 보고 싶다던 사람이? 쟤? 무화?’
‘응.’
혼이 빠져나가면 이런가 보다.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호영이 어버버, 말도 못 하는 사이에 서정운은 한숨을 쉬며 ‘오늘은 한강 갈 필요 없겠다.’ 하고 중얼거리더니 누렁이를 한번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볼장 다 봤다는 투로 ‘그럼 난 이만 가야겠다. 마저 수고해라.’라는 말을 남기고 그가 유유히 사라질 때까지 한호영은 한마디도 못 하고 눈만 껌벅이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대체 뭔 일이 벌어진 거다냐. 내가 뭔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벌건 대낮에 눈 뜨고 꿈이라도 꿨나 보다.
……아니 정말, 제발 꿈이길 바랐다.
이 모든 게 다 뭔가의 착오이거나, 혹은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사형이 얼른 제정신 차리길 바랐다. 그렇지 않으면 어쩌나, 상상만으로도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차마 그 이후로 서정운에게 전화도 해 보지 못하고 혼자 벌렁벌렁 가슴만 졸이는 한호영이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그 뒤로 서정운이 슬금슬금 본산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고로 정무도를 그만둔 이후로는 딱 발 끊어 버리고 특별한 볼일 없이는 도통 본산에 찾아오지를 않던 서정운이 갑작스럽게 이유도 없이 찾아 들기 시작한 이유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짚이는 데가 있었던 한호영은, 저놈이 웬일로 저렇게 얼굴을 내미느냐며 멋모르고 기뻐하시는 아버지를 보며 정말로 심경이 복잡했다.
아버지 그게 아니구요, 사형이 흑심이 있어서 그러는 건데요, 그 흑심이라는 게요…….
“차라리 여자 수련생을 마음에 두고 오는 거라면 내가 두 팔 벌려 환영해 줄 수나 있지……. 아니 그래, 지금이라도 생각 좀 바꿔 보면 어때요? 지금 대수련장 안에 평소보다 유난히 여자 수련생들 많은 거 알아요? 다 사형 온다는 얘기 듣고 사형 보러 온 거라고. 물론 사형이 걔들한테 눈을 돌리면 또 온 사방에서 욕을 죽도록 퍼먹겠지만, 그래도 난 이번만큼은 철저하게 사형 편이 돼 줄 테니까 차라리 걔들한테 눈을 돌려 봐요!”
“이놈은 또 뭘 잘못 먹고 와서 헛소리야. 언제는 여자 운 사나우니까 조심하라며.”
“모가지에 꽃뱀을 둘둘 두르고 온다 해도 저놈보다는 환영해 줄 수 있겠습니다!”
한호영은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으로 말하는 서정운에게 벌컥 소리쳤다. 원래 남의 눈 무서워하지 않는 양반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되니 속이 답답하다 못해 터져 나갔다.
나무 밑에 웅크리고 있던 한호영은 아예 흙바닥에 주저앉아 버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형……. 저 사형이 사람들한테 더 이상 모진 소리 듣는 거 싫어요.”
그러잖아도 평판이 곱지 않은 사람이다. 성미도 까탈스럽고 결벽한 구석이 있어 같은 정련 내에서도 적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주제에 여자 운은 지지리도 나빠서 어떻게 된 게 곁에 맴도는 여자마다 하나같이 소문이 더럽게 나는 바람에 지저분한 욕은 배 터지게 먹었다. 그런데 저 성미는 대체 뭔 성미인지 굳이 변명도 하지 않아, 안 먹어도 될 욕까지 먹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한호영이 아는 서정운은 그렇게까지 욕먹을 사람이 아니었다---물론 아예 욕먹을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못 하겠지만---. 그러나 본인이 변명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다음에야 주위에서 변호해 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이제는 저렇게 모질고 험한 소리를 듣고만 있는 걸 속 태우며 보고만 있는 실정이었다.
그걸 몇 년을 그랬는데, 그러다 이제 이 사람이 정무도 그만두고 이 업계 떠나서 좀 덜하겠구나 싶었는데---그래도 간간이 꾸준히 과거사로 욕먹긴 했다---, 이제 와서 이건 또 웬 날벼락이냔 말이다.
남자다. 게다가 체련이다. 심지어 유망주이기까지 하다.
욕먹는다. 백 퍼센트 욕먹는다. 백 퍼센트는 무슨, 아주 들통으로 욕을 퍼먹고 또 퍼먹어도 모자라 평생 퍼먹고 살 거라는 데에 손모가지를 걸겠다.
“사형. 사형 그렇게 욕먹을 때마다 저 진짜 속상하다고요. 아버지도, …….”
아버지도, 사형제들도, 사형이랑 가까운 몇 안 되는 사람들도, 모두 속상해한다. 그러나 그 말은 하다 그만뒀다.
“알아.”
잠시 침묵하던 서정운이 조용히 말했다. 그 잠잠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차마 표현하지 못한 씁쓸함과 미안함에 젖어 있다. ……그럴 줄 알았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는데.
“알아, 호영아.”
“……혀엉.”
고개를 들어 어둑어둑한 나뭇가지만 올려다보고 있던 서정운이 가만히 한호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맥없는 손길이 한없이 부드러워, 한호영은 또 서글퍼진다.
“들어가자. 나도 그만 가 봐야겠다.”
한숨을 들이켜며 말하는 서정운을 따라 한호영도 일어섰다. 그대로 돌아서려다가 ‘이런, 웃옷을 두고 왔네.’라며 대수련장으로 가는 서정운의 뒷모습을 우울하게 쳐다보며 뒤따를 뿐이다.
정말로 저놈한테 반했다는 것도 알겠다. 저렇게 예뻐 못 견디겠다는 눈길에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음색이라니. 저 사람이 저러는 건 처음 봤다.
아주 어릴 때부터 더불어 지낸 친형 같은 사람이다. 이미 서로 알 만큼 알았다. 저 사람이 독하고 인정머리 없다고 소문났어도 안 그렇다는 걸 안다. 그래서, 저 사람이 저렇게 침울해하는 걸 보니 또 마음이 짠해지는 것이다. 에휴우…….
“……그렇게 보고 싶다는데 어쩌겠어요. 사형이 뭐 내가 말린다고 들을 사람도 아니고. 이 김에 자주자주 와서 우리 애들 지도나 좀 해 주세요.”
한호영이 부루퉁하게 중얼거리자 앞서가던 서정운이 흘끗 돌아보았다. 침울하던 뒷모습과는 달리 표정은 평소랑 똑같다.
“내 제자도 아닌 애들을 내가 뭐 하러?”
“그럼 그놈은 어디 사형 제자랍니까?!”
대수련장 문을 열고 들어가는 서정운의 뒤통수에 대고 버럭 치밀어 오른 부아를 쏟아낸 한호영이었다. 그러고도 부아가 가라앉지 않아 뭐라고 더 꽥꽥거리려 하던 그가 입을 다문 것은, 대수련장 안에 서 있던 한수일 사범을 봤기 때문이었다.
“아, 작은아버지 오셨어요.”
문이 열리는 기척에 이쪽으로 시선을 주는 한수일과 눈이 마주친 한호영이 인사하자 한수일은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이곤 서정운에게 눈길을 돌렸다. 서정운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잠시 지그시 바라보다가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곤 다시 시선을 돌린다.
그들이 나간 사이에 외출에서 돌아왔는지, 체련의 사범 두셋과 함께 대수련장 한쪽에 우뚝 서서 수련생들의 연습을 지켜보는 한수일의 시선은 한무화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한무화는 여전히 모래 부대를 메어치고 있었다. 동작 하나하나를 천천히 맛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리고 완만하게. 그러면서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양 이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는다.
여전히 그의 움직임은 어딘지 어설퍼 보였고 부대가 떨어지는 위치도 계속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아까의 그 거침없고 위맹하던 움직임과는 전혀 딴판인 그 상태로, 한무화는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같은 움직임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다 가끔 우두커니 멈춰 서 뭔가를 생각하다가 다시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다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또 한 번 메어치고.
“아니……, 무화가 왜 저러지? 잘하던 녀석이 갑자기 왜…….”
한수일의 옆에 서 있던 체련의 중원사범이 당황한 듯 중얼거리더니 한무화에게 얼른 다가갔다.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여기까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한무화가 간간이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거나 하며 짤막짤막하게 대답하는 건 보인다.
그러던 중 중원사범이 뭐라고 물어보자 한무화가 짧게 대답했고, 다음 순간 중원사범이 고개를 홱 돌려 서정운을 쳐다보았다. 마치 노려보는 듯 사나운 눈길로 서정운을 보며 한무화에게 무어라 확인하듯이 몇 마디 더 물어본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이쪽으로 걸어왔다. 원래 서 있던 한수일의 옆자리가 아니라 서정운에게로 곧바로 다가온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서 대뜸 물었다.
“서 사범, 서 사범이 무화한테 연습 지도를 해 주셨다던데 정말입니까?”
한무화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서정운은 이건 또 뭐야 하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곤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지도라고까지 말할 만한 건 아니고 그냥 몇 마디 거들었을 뿐입니다.”
중원사범은 “아니 거들다니,” 하고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서정운을 보다가 낯을 찌푸렸다.
“잘하고 있던 선수한테 무슨 말을 했기에 갑자기 저 모양이 됐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걸 지금 거들었다고 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저한테 고맙다는 말씀은 안 하셔도 됩니다. 한무화 선수가 워낙 자질이 좋아서 금방 따라오고 있는 거니까요.”
여전히 한무화에게 시선을 준 서정운이 건성처럼 대꾸하는 말을 들은 중원사범은 그대로 넘어가기라도 할 것 같은 얼굴로 눈을 부릅뜨고 서정운을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무화만 진지하게 응시하는 서정운에게, 그가 겨우 억누른 목소리로 꾸짖듯 말했다.
“서 사범! 서 사범이 대관절 무슨 지도를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는 몰라도, 이미 몇 년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감도 많이 잃은 모양이고 또 그 방식이 우리 선수한테는 안 맞는 것 같습니다!”
중원사범은 한 호흡 고른 뒤 서정운을 비롯해 그 옆에 선 한호영까지 같이 노려보며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우리 체련 선수의 연습에 정련에서 참견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요. 눈에 차지 않는 데가 있어도 우리 선수들은 우리 방식대로 수련하겠습니다. 혹여 자칫하다 외려 망가질지도 모를 일 아니겠습니까? 그야 물론 고의는 아니시겠습니다만.”
중원사범의 가시 돋친 말에 한호영이 내심 혀를 찼다. 그러나 구태여 뭐라고 대꾸해 봐야 소용없을 게 뻔해,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만다. 그러나 한호영이 그렇게 말하기 무섭게 서정운이 “죄송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하고 말했다.
“어쨌든 그렇게 말씀하시니 주의하겠습니다.”
빙긋이 웃으며 사무적으로 말하는 서정운을 보고 중원사범은 성에 안 찬 듯 무어라 더 말하려는 눈치였지만, 그때 그들의 대화 따위는 듣고 있지도 않았던 양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한무화를 응시하고 있던 한수일이 나직이 말했다.
“그만하게.”
중원사범은 그제야 입을 다물며 한수일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한무화를 보고 있는 그를 살피곤 서정운을 흘끔 노려본 뒤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가선 한무화에게 말했다.
“무화야, 그렇게 하지 말고 원래 하던,”
“그냥 둬.”
그러나 한수일은 이번에도 중원사범의 말을 도중에 잘랐고, 중원사범은 멈칫하며 어리둥절하게 한수일과 한무화를 번갈아 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쪽으로 잠시 시선을 주는가 싶던 한무화는 별다른 말이 없자 다시 하던 대로 연습을 계속한다.
서정운은 묵묵히 그를 보고 있다가 웃옷을 집어 들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서정운이 한수일에게 묵례하자 한수일은 그제야 한무화에게서 시선을 떨어뜨려 그를 보았다. 한동안 지그시 서정운을 보던 한수일은 나직이 혀를 찼다. 희미한 아쉬움이 그 짧은 소리에 담겼지만 그것도 잠시, 한수일은 다시 무뚝뚝하게 고개를 돌렸고 서정운은 그대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
한호영이 울컥해서 성질을 낸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 쟤는 뭐 금딱지라도 붙여 놨어? 사범이 지도 조언도 못 해 주게?!’
‘뭐, 정련과 체련은 서로 터치하지 않는 게 암묵적인 룰이긴 하지. 너도 나더러 체련 애 가르칠 바엔 정련 애나 한 번 더 봐주라며.’
‘그거랑 다르죠! 우리끼리 얘기하는 거랑 상대방에게 얘기하는 거랑 같아요?! 어쨌거나 같은 정무도 협회 산하의 사범인데, 사범이 선수 지도해 준다고 뭐라고 하는 법이 어딨냔 말야?!’
정식으로 항의할 테다! 하고 펄펄 뛰던 한호영이 전화를 끊은 뒤 어떻게 했는지는 서정운이 알 바 아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여러모로 서정운의 마음이 심란해진 것은 분명했다.
안다. 서정운이라고 모를 리 없다. 본인의 일인데, 제일 잘 안다. 한무화가 좋아해서는 안 될 인물이라는 건 너무나도 명백했다.
남자지. 체련의 기대주지. 심지어는 사숙의 아들---사부의 조카이기까지 한 데다, 무엇보다도 저 성격. ……들이대 봤자 정말 씨알도 안 먹힐 성격인 게 뻔히 보였다.
“……. 휴……, 관두자, 관둬.”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정답이다.
“그래, 그냥 잘라 내야지. 음. 끊자. 이제 본산에도 가지 말고.”
서정운은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런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요 얼마간 뻔질나게 찾아왔던 그곳, 한강 둔치였다. 그것도 한무화가 지나갈 즈음인 시각이다. 그가 지나가는 자전거 도롯가에 있는 벤치. 그곳에 앉아 “끊자, 끊어.”라고 중얼거리며 시선은 계속 길 저편으로 주고 있는 서정운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입을 꾹 다문 그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나 지금 뭐 하고 있니…….
out of sight, out of mind라고 했다.
차라리 안 보면 천천히 잊히겠거니 하는데, 그러니 이제 한동안 본산에도 가지 말자 싶어 지난주부터 꾹 참고 안 갔는데, 그러면 뭐 하나, 이렇게 한강변에 마침맞은 시간에 나와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내가 이렇게 의지박약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게 사랑의 마력인가, 머리를 감싸 쥐고 벤치에 웅크려 앉은 서정운은 (한호영이 들었더라면 질색팔색을 하며 닭살 털어 낼 말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 안 되겠다. 여기서도 얼른 떠나자. 얼른 집으로 가 버리는 거야. 그리고 당장 짐 싸서 차라리 한 몇 달 외국에라도 있다 와야지.
당차게 결심한 서정운이 벌떡 일어서려 할 때, 마치 그 순간을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주 기세 좋게 “왈!!!”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덩이 아기 베개만 한 털 뭉치가 날아들었다.
아뿔싸.
한발 늦었다…… 라고 생각하며 옆을 돌아보는 서정운은, 그러나 숨길 수 없는 반가움을 얼굴에 담고서 저만치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한무화를 보았다. 얼른 강아지를 집어 들어 품에 안은 서정운은 변함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이는 한무화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오늘은 나왔네. 요 며칠 계속 안 와서 오늘도 안 오려나 했는데.”
“예. 서정운 사범님은 매일 오십니까?”
“응? 아---어…… 뭐……, 요새 시간이 많기도 하고.”
서정운은 괜히 찔리는 기분에 얼른 얼버무렸다. 한무화는 대수롭잖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고 보니 협회에서 한동안 일 쉬라고 권고받으셨다고 하셨었지요.” 하고 중얼거린다. 서정운은 얼른 “어, 맞아. 한 몇 달은 이렇게 지내게 될 것 같아서, 그래서 아주 한가해졌거든.” 하고 맞장구쳤다. 설마하니 ‘너 만날지도 몰라서 매일 나오고 있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도 이렇게 얼굴 마주 보니까 또 가슴 뛰고 좋은 것이, 아무래도 안 되려나 보다. 본산에는 안 간다 쳐도, 여기까지 안 나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누굴 좋아하게 되면 이렇구나.
서정운은 빤히 한무화를 보았다. 서정운에게 얌전히 안겨서 열심히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의 머리를 슬슬 손가락으로 쓰다듬고 있는 한무화는, 아주 조금씩이지만 한마디씩 말수가 늘고 있다. 그것도 반갑고 기쁘다.
“연습은 잘돼 가?”
벤치에 앉은 서정운은 가져온 육포를 털 뭉치에게 한 조각, 한무화에게 한 조각 건네주고 자기 입에도 한 조각 물면서 털 뭉치를 풀밭에 내려놓았다. 한무화는 잠시 생각하다가 애매하게 고개를 기웃했다.
“그럭저럭 되고 있긴 합니다.”
저 석연찮은 대답을 보니 썩 잘돼 가고 있진 않은 모양이다. 하긴 얼마 전 한호영이 전화하다가 ‘체련의 상원사범들이 그놈을 제대로 못 배겨 내고 있다더만요. 지금 다 지원에 출원 많이 나가 있을 시기잖아요. 본산에 남아 있는 상원사범 중에는 그놈이랑 타입이 잘 맞는 사람이 없나 봐요. 흥, 아주 쌤통이다!’ 하고 외쳤던 걸 떠올리고는, 서정운은 “흠.” 하고 중얼거리며 육포만 우물거렸다.
“본산에는 안 오십니까?”
그때 잠자코 있던 한무화가 불쑥 물었다. 서정운은 흘끗 시선만 돌렸다.
“음? 뭐……. 내가 가면 좋겠어?”
“예.”
적당히 얼버무릴 작정이었는데 뜻밖에 간결한 대답이 돌아와서 서정운은 빙글거리던 얼굴 그대로 멈칫했다. 왠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왜?”
“서정운 사범님의 지도 말씀이 도움이 됩니다.”
“…….”
기운 빠질 만큼 솔직한 대답이다. 하긴 그것 말고 뭘 바라겠어. 약간 낙담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기쁘기도 하다. 서정운은 으음, 하고 육포를 물어뜯으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체련에도 좋은 사범님이 많은데.”
“예. 여러 분들이 봐주고 모두 나름대로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각기 짚어 주는 포인트가 다른데, 서정운 사범님이 짚어 주는 부분이 제게는 가장 명쾌하고 알기 쉽습니다.”
“아마 다들 짚어 주는 부분이 결론적으로는 같은 걸 텐데 말이지. 정무도는 예藝와 닮은 데가 있어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결국 다 같거든. 다만 그 궁극적인 걸 얻기 위해 가는 길이나 과정이 사람마다 다르고 가르치는 방식도 사범마다 달라서…….”
그래서 본인과 맞는 스승을 만나는 것도 복이라고 하지만…….
서정운은 물끄러미 한무화를 바라보며 좀 아쉽다, 하고 생각했다. 직접 말로 거든 건 한두 번뿐이지만 그간 본산을 드나들며 한무화를 지켜보는 동안 이 방향으로 끌어 주면 좋을 텐데, 저 방향으로 끌어 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여러 번 들었었다.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 되어 버렸지만.
서정운은 한숨을 쉬며 육포만 우물거릴 뿐이었다. 그가 반 조각도 먹기 전에 벌써 한 조각을 후딱 다 먹어 버린 한무화를 보고 한 조각 더 꺼내 주는데, 문득 팔꿈치 옆면의 쓸린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다쳤어? 어쩌다가?”
“아. 김원호 사범님과 대련하다가 바닥에 쓸렸습니다. 조르기에 걸려서 빠져나오려다가요.”
“아하, 김원호 사범님이랑……. 네가 하체를 들어서 몸을 뒤집었으면 그래도 빠져나올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서정운이 오십 줄에 들어선 체련의 노련한 상원사범을 떠올리며 중얼거리자 한무화가 기묘한 눈으로 빤히 서정운을 보았다. 서정운이 “응? 왜?” 하고 그를 보자, 한무화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일반 연습 대련이었는데 그때 영상을 찍었던가 해서요. 보셨습니까?”
“어?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분이라면 특기가 후방조르기인 데다, 팔꿈치가 쓸린 거나 네 버릇으로 봐선 네가 측면으로 틀어서 빠져나오려고 했을 것 같아서. 아니야?”
“맞습니다.”
“하지만 못 빠져나왔을걸. 아니야?”
“맞습니다.”
“그분 후방조르기는 제대로 걸리면 웬만해선 못 나와. 그나마 너는 순발력이 있는 데다 체격도 크니까 완벽하게 걸지는 못했을 건데, 그래도 지금 네가 제한 시간 내에 빠져나올 수 있을 만큼 호락한 분은 절대 아니지, 그분이.”
“……. 그러면 그 상황에서 하체를 들어 몸을 뒤집으면 나올 수 있었던 겁니까?”
“장담은 못 하지만, 그래도 그 자세에서는 하중이 더 세게 걸리니까. 완력 싸움이 되면 그분이 널 못 당해 내지. 뭐, 기술이 워낙 좋으시니까 빠져나올 수 있었을 거라고 단언은 못 하지만.”
그분한테는 후방조르기로 제대로 걸리면 못 나온다고 봐야 돼, 그나마 너는 체격에 완력이 워낙 압도적이니까 가능성이나마 있는 거고, 라고 덧붙이며 서정운은 미리 사 두었던 커피 캔을 뜯어 홀짝였다. 한무화에게도 캔을 건네어 권해 봤지만 그는 생각에 골몰해 캔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서정운은 아쉽게 다시 캔을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아니 뭐 내가 간접 키스라거나, 뭐 그런 귀여운 흑심이 꼭 있었던 건 아니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리는 서정운에게, 한참 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한무화가 물었다.
“그러면 거기서 빠져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못 나온다니까. 게다가 사실 김원호 사범님 같은 분은 네가 상대하기 제일 까다로운 타입이야. 너는 주로 한판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편이지만 그분은 조금씩 타점을 얻어서 판정승으로 이기는 게 더 장기인 분이라고. 나랑 비슷한 타입이야.”
한무화가 뚫어져라 서정운을 보았다. 정말로 뺨을 쿡쿡 찌르는 것만 같은 그 시선에 서정운은 괜히 또 가슴이 뛰어서 껌벅껌벅 그를 본다.
“……왜.”
“그러면 서정운 사범님과 대련을 해도 비슷한 느낌인 겁니까?”
“그건 아니지. 체급도 체격도 장기도 다르니까. 대련할 때의 느낌은 사람마다 다 달라. 내가 말한 건, 평소의 네 특기를 살려서 이기기에는 까다로운 타입이다, 라는 의미고.”
한무화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에게 새로 육포를 건넸지만 이조차 시선도 안 주고 깊이 생각에 잠겨 있다. 그 육포를 털 뭉치에게 건네주며, 서정운은 정말로 이 남자는 정무도에만 모든 관심이 쏠려 있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다른 이야기에는 시큰둥하면서 정무도 얘기만 되면 무섭게 진지해진다.
얘는 대관절 연애는 어떻게 할까. 애인이 있긴 할까. ……그야 있겠지.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애인이 없을 리 없지. 연애도 잘할 거야.
혼자 제풀에 우울해진 서정운이 커피를 쓰게 삼킬 때였다. 한무화가 불쑥 말했다.
“서정운 사범님과 해 보고 싶습니다.”
“---.”
하마터면 커피를 뿜을 뻔했다. 아니 실제로 한두 방울쯤 뿜고야 만 커피를 얼른 손등으로 훔치곤 당혹스레 한무화를 바라본 서정운은, 코앞에서 아주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천천히 움직이는 그의 입에서,
“저와 대련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래, 저런 말이나 나올 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서정운은 입안에 담겨 있던 커피를 아주 천천히 삼키는 동안 고민했다. 원래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안 하는 거다. 정무도를 그만둔 뒤로 서정운은 가끔 들이닥쳐서 아주 끈질기게 엉겨 붙는 한호영만 반어거지로 몇 번 상대해 줬을까 말까, 본인의 제자들조차 상대해 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
사람한테 반한다는 건 정말 무서운 거구나. 서정운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입을 꾸짖으며 절감했다. 아냐, 그래도 이건 아냐, 얼른 내뱉은 말을 취소하려 했지만,
“언제든지요. 지금 당장에라도. 본산으로 가시겠습니까?”
무표정한 낯임에도 대번에 화색이 도는 한무화의 얼굴을 보며 서정운은 ‘윽, 겁나 귀여워.’라고 생각해 버리고 말았고, 결국 한숨 반 앓는 소리 반으로 “아냐, 아무리 그래도 본산은 아니야. 아무도 못 보는 곳……,” 하고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반짝 고개를 들었다.
“어. 우리 집 갈래? 우리 집에 수련실 있는데.”
한무화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서정운은 다시금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심장을 끌어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정운은 현역 당시 기본이 단단하고 상당히 실력이 좋은 선수였다. 비록 가르치는 쪽에서 더 능력을 인정받기는 했지만 정원사범 한태일이 어디서든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대제자로, 그에 걸맞은 능력은 충분히 넘칠 만큼 갖추었다.
걸음마나 겨우 할 무렵부터 차근차근 시작한 정무도는 이미 그의 몸에 익을 만큼 익어 비록 그만둔 지 몇 년이 지났어도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고, 수재라고들 하는 그의 사제 한호영도 그와 대련할 때는 여간 고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상대와 한 체급 넘게 차이가 난다 하더라도.
아무리 상대가 놀라운 자질을 갖추고 엄청난 완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고작 4년 차라는 남자에게 이렇게 고전할 줄, 서정운은 생각도 못 했다.
“---.”
그러나 더 어이없었던 것은, 서정운을 보고 있는 한무화의 눈빛에도 그런 생각이 선명하게 스쳐 지났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몇 년이나 쉬었던 사람인데. 자신보다 한 체급 이상 낮은 사람인데. 완력이나 근력으로도 자신보다 훨씬 처질 사람인데.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한테 순순히 꺾여서야 될 말이냐.
……그래도 대련 따위 하는 게 아니었는데. 이건 자칫 한순간이라도 긴장을 놓는 순간 지는 거다. 그럼 그게 무슨 망신이야.
……하지만 이렇게 긴장되고 피부 한 꺼풀 아래의 모든 세포가 살아나는 것 같은 대련이 얼마 만이던가.
서정운은 이미 한무화가 연습하는 것을 여러 차례 봐 왔다. 그래서 그의 실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유난히 눈썰미가 좋은 덕에 남들은 눈치 못 챘을 그의 버릇이나 장단점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래도 자신의 공백도 크고 무엇보다 체급 차가 워낙 나니 이기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그래도 막상 부딪쳐 보니 이 정도나 될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훨씬 더 힘에 부쳤다.
……3. ……2. ……1.
마지막 몇 초가 끔찍할 정도로 길었다.
초침이 정확히 숫자 6에 가서 멈추는 순간,
“시간 끝.”
서정운이 턱까지 차오른 숨으로 속삭이듯 간신히 말했고, 서정운의 뒤꿈치에 차여 쓰러지면서도 막 서정운의 앞섶을 움켜쥐어 내던지려 했던 한무화는 주먹을 움켜쥔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일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바로 눈앞에서 서정운을 올려다보고 있는 한무화의 얼굴이 일렁이는 열기로 들뜬 채 멈추어 있다. 아직 사냥을 끝내지 못했는데 그 직전에 주인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만 투견의 얼굴이다.
바로 코앞에 있는 사냥감을 물어뜯을까 말까,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갈등하던 투견은 시계를 흘끔 보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에서 힘을 풀었고, 서정운은 일어설 힘조차 남지 않아 그대로 주저앉은 채 거친 숨으로 어깨를 들썩이며 그를 보았다.
놀랐다. 정말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대련이라 해도 정식 대련이 아닌 연습 대련이었다. 체급 차가 있으니 한무화에게 핸디캡을 두고 맞붙었다. 이 정도면 이기지는 못해도 적어도 호각은 되겠지, 여유롭게 생각했던 서정운이었으나.
“…….”
고작해야 2분 30초. 정무도의 대련 한 판에 주어진 시간. 그 시간을 보낸 서정운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땀에 절어 있었다. 한무화 역시 마찬가지다. 서정운만큼은 아니었지만 얼굴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역시 체력만큼은 댈 바가 아니었는지, 선뜻 일어선 한무화는 수련실 구석에 놓아두었던 주전자와 컵을 들고 와 물을 따라 서정운에게 건네었다. 서정운은 지친 손을 들어 물로 목을 축인 뒤에야 겨우 중얼거렸다.
“잘하는데.”
“…….”
“판정으로 갔으면 네가 이겼을지도 몰라.”
비록 명확하게 승패를 판가름할 만한 타격은 없었지만 판정으로 승패를 가리면 한무화가 이길 수도 있는 대련이었다.
그러나 한무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컵을 단숨에 비우고 입을 굳게 다문 채 창밖을 노려보는 게, 불만이 가득한 빛이다.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이제 슬슬 남자의 얼굴을 읽는 데에 익숙해진 서정운은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욕심이 많은 놈이다.
“마지막에 앞섶을 잡는 순간, 이거야말로 확실하다고 생각했는데.”
한무화가 창밖을 노려보다 불쑥 중얼거렸다.
“시간이 다 돼서 일부러 잡혀 주셨던 거죠.”
“당연하지.”
서정운이 힘없이 웃으며 대꾸하자 한무화는 다시 컵에 물을 따라 마시며, 흥분이 조금 가라앉은 기색으로 서정운을 보았다. 여전히 불만스럽고 다소 짜증까지 나는 얼굴은, 한편으로는 놀라워하는 기색이다. 기술에 호락호락 걸려 주지 않아서 짜증스럽고, 걸려도 얼마 있지 않아 빠져나가 버리는 게 놀랍다.
“뭘 그렇게 봐. 설마 내가 순순히 져 줄 줄 알았어?”
“……. 몸무게가 몇이시죠?”
“너보다 15킬로 이상은 적게 나갈걸.”
한무화는 한결 더 분한 빛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저 무표정도 읽고 있으려니 재밌잖아. 어떡하지. 점점 더 사랑스러워지는데.
서정운은 문득 기분이 좋아져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 땀에 젖은 목덜미에 닿는 나무 바닥의 싸늘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좋았다.
“지금 네가 잘못하고 있는 건, 이기지 못한 게 아냐.”
“……?”
“대련을 왜 한다고 생각해. 본인에게 부족한 게 뭔지를 알기 위해서 하는 거다. 어때, 네게 뭐가 부족한 것 같아?”
한무화는 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 얼굴에서 언짢은 빛을 지우고 생각에 잠겼고, 서정운은 그 묵묵한 옆얼굴을 바라보다 말했다.
“나는 판정승에 강해. 그러잖아도 네게는 까다로운 타입인데, 네 체급인 중량 2급에는 나 같은 타입이 거의 없으니까 대할 일이 많지 않아서 더 까다롭기도 했을걸.”
한무화는 한동안 더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한마디만 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의 표정이 한결 개운해진 것이, 그 나름대로 뭔가를 손에 쥐었나 보다. 서정운은 가만히 웃었다.
이제 5월, 슬슬 해가 저물어 선선할 무렵이 되었는데도 막 대련을 마친 몸에는 공기가 무더웠는지 한무화는 땀에 젖은 셔츠 자락을 펄럭여 부채질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에어컨 없어. 선풍기도. 수련실에서는 몸 식으면 다치기 쉬우니까 그런 건 갖다 두지 않았어.”
서정운이 말하자 한무화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땀에 젖은 셔츠를 벗었다. ……엄마야. 순간적으로 얼어 버린 서정운의 앞에서 그는 아무렇지 않게 상반신을 드러낸 채 셔츠를 훌훌 털어 창틀에 걸쳐놓는다.
어쩌지. 눈 둘 데를 모르겠다. 남자 몸인데. 여태 수백 수천 번은 더 보았고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남자 몸인데.
서정운이 혼자 당황해하며 눈동자를 굴리는 동안 한무화는 천천히 실내를 둘러보았다. 작달막한 단층 한옥의 안쪽에 있는 수련실. 커다란 여닫이 창문을 열면 바로 뒤꼍의 작은 뜰이 내다보이는 그 조용한 나무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무도를 연습하기 위해 비워 놓은 곳이다.
“좋은 수련실이군요. 손질도 잘되어 있고. 지금도 쓰시나 봅니다.”
서정운은 서까래가 드러나 있는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음, 하고 짧게 대답했다.
“가끔 호영이가 혼자 조용히 연습하고 싶다고 찾아오거든.”
한무화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치고는 먼지 하나 없는 창틀이며 반지르르하게 잘 손질된 나무 바닥으로 시선을 주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잠시 창밖의 뜰을 내다보고 있다가 서정운을 돌아보며 말한다.
“대련, 한 번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 네 체력이 괴물처럼 엄청난 건 이미 알고 있는데……, 내 체력도 좀 생각해 주면 좋겠어.”
아직껏 바닥에 드러누운 채 서정운이 중얼거리자 한무화는 그제야 지친 빛으로 누워 있는 그를 살피더니 약간 아쉬운 기색으로 “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가만히 있기엔 힘이 남아도는지 앉은 채로 바닥을 짚더니 그대로 천천히 바닥에서 몸을 띄우기 시작하는 한무화를 다소 질린 기분으로 바라보다가 서정운이 웃고 말았다.
“너 힘 좋다는 말 자주 듣지?”
“종종 듣습니다.”
“원래부터 좋았던 거야, 아니면 운동을 하다가 좋아진 거야?”
두 팔로만 바닥을 버티고 몸을 곧게 편 한무화는 잠시 생각해 보는 동안에도 근육의 느릿한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워낙 어릴 때부터 운동을 해 와서 명확하게 구분이 가지는 않습니다만, 운동을 하는 남자들에게서도 자주 듣는 걸 보면 원래 좋은 편인 것 같기는 합니다.”
“하하, 그야 운동 안 하는 사람들이나 여자들과 비할 수는 없겠지. …….”
웃으며 대꾸하던 서정운은 문득 웃음을 흐렸다. 애매하게 말끝을 흐리고 흘끔 눈동자만 굴려 한무화를 쳐다본 그는 슬그머니 물었다.
“……여자는 주위에 많아?”
“지금은 없습니다.”
어, 그래, 하고 중얼거린 서정운은 슬금슬금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가라앉히려고 가만히 숨을 들이쉬었다. 없단다. 지금은 없단다. 예전에는 많았다는 소리렷다. 그러나 여하튼 지금은 없단다. 서정운은 애써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하긴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됐지. 미국에선 어땠어?”
“적당히 있었습니다.”
“적당히……, 여러 명?”
“예. 오래 간 사람은 없어서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길어야 일 년 정도라서.”
서정운은 의외라는 눈길로 한무화를 보았다.
“뜻밖이네. 누구를 사귀면 몇 년 진득하게 사귈 것 같았는데.”
“저는 그러고 싶었는데, 여자 쪽에서 싫어하더군요. 운동에 뒷전으로 밀린 것 같다고.”
서정운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몸을 땅에서 띄운 채 천천히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는 한무화를 껌벅껌벅 바라보다가 말했다.
“예전부터 지금만큼 운동에 열중했던 거야? 그야…… 여자들이 서운할 만도 했겠는데. 보통은 애인에게 차이는 게 무서워서라도 취미나 운동은 적당한 수준까지만 하는데.”
“글쎄요. 운동 쪽이 더 열중하게 되기도 했고, 여자는 별로 아쉽지 않았기 때문에요.”
다른 사람이 하면 엄청나게 재수 없고 잘난 척하는 걸로 들릴 발언인데 이 남자는 말투가 어찌나 무덤덤한지 그냥 사실 자체를 이야기하는 걸로 받아들이게 된다. 서정운은 반은 감탄, 반은 장난으로 웃고 말았다.
“와……, 바람둥이.”
“서정운 사범님만큼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번에 돌아온 대꾸에 서정운의 웃음은 딱 멈추고 말았다. 어……, 하고 눈만 껌벅이는 서정운에게, 한무화는 팔굽혀펴기를 계속하며 여전히 무심하게 말했다.
“전 그런 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거…… 가 뭔데?”
“이성 관계에서 처신이 지저분하거나 애매모호한 태도로 사람을 대하는 것,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상대에게도 본인에게도 해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게 낫다고 봅니다.”
서정운은 입을 다물었다. 심장이 욱신 하며 움츠러든 것은 그 말이 비난처럼 파고든 탓이다. 그 말에 충분히 찔릴 만큼 숱한 소문들이 있었기에 더 그렇다.
“……, ……얼마 전의 그 기사라면 사실이 아닌데. 사정이 좀 있어서 정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습니까?”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서정운은, 그러나 변함없이 무덤덤한 한무화의 짧은 대꾸를 듣고 깨달았다. 한무화는 단순히 자신의 생각을 말했을 뿐 별달리 서정운을 비난하려는 뜻은 없었다---라기보다, 서정운의 과거나 소문에 관심 자체가 없었다. 정무도라는 방면에서만 관심이 있을 뿐, 서정운이라는 인물 개인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자신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는 안도감이 먼저인지, 자신은 그의 관심 대상이 전혀 아니라는 것에 대한 낙담이 먼저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서정운이었지만 가만히 자신의 가슴께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어? 운동 좋아했던 건? 보니까 여러 가지를 했던 것 같던데. 그것도 상당한 수준까지.”
한무화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좋다기보다는 그냥 하는 게 당연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부모님도 늘 바쁘셨고 형들도 바빠서 제가 뭘 하든 간섭을 하지 않았고, 딱히 하고 싶은 게 있었던 것도 아니었거든요.”
“좀 쓸쓸했겠네.”
그 말을 듣고 다시 생각에 잠기는 한무화를 보며 서정운은 웃었다. 그래, 이런 게 좋은 거다. 보통은 적당히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할 것을, 이 남자는 이렇게 가만히 생각해 본 뒤에 이야기했다. 주위에 무관심하지만 주위를 무시하지는 않는 이 사소한 진지함이 어떻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습니다.”
“그랬어? 나도 어릴 때 부모님이 맞벌이였기 때문에 혼자 있었던 시간이 친구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았거든. 난 좀 쓸쓸했는데.”
책을 읽든 정무도를 하든 쓸쓸함을 잊을 만한 일들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잊는 것과 없어지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때 어렸던 자신이 쓸쓸했었다는 것도 그 당시에는 몰랐다. 한참이 지나고서, 어른이 된 뒤에도 아주 오래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팔굽혀펴기를 멈춘 한무화가 잠시 서정운을 바라보는가 싶었다. 그러다 다시 ‘……75, ……76,’ 하고 팔굽혀펴기를 재개하며 말했다.
“쓸쓸하다는 건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서 자라서 바쁜 가족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은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부든 독서든 운동이든 뭐든 열심히 했는데, 내가 나아지고 있다는 걸 가장 명확하게 체감할 수 있는 게 운동이었고, 그래서 운동에 더 열중하기가 쉬웠던 것 같습니다.”
서정운은 일어나 앉아 물끄러미 한무화를 보았다. …89, …90, 입술만 움직여 숫자를 세며 팔굽혀펴기를 하는 그의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바닥에 뚝 떨어진다. 그 모습에, 본 적도 없는 어린 그의 모습이 겹쳐진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소년.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열중하는 어리고 어여쁜 아이.
“……착한 애였네.”
“그렇습니까?”
한무화는 대수롭잖게 대꾸했고, 서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정하잖아. 그래서 널 좋아하는 거지.”
서정운은 웃었다. 그런 서정운을, 한무화는 이상하고 희한한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눈썹을 치켜올리며 쳐다보았다. …100, 하고 중얼거린 걸 끝으로 천천히 몸을 바닥에 내린 한무화는 반듯하게 정좌하고 앉아 어깨를 가볍게 돌리며 무심히 말했다.
“그렇습니까?”
“응.”
“누가 말입니까?”
“응?”
생글생글 웃으며 한무화를 보고 있던 서정운은 웃는 얼굴 그대로 멈추었다. 얼른 기억 속에서 대화를 거슬러 올라가 본 서정운은 ‘잠깐, 혹시 내가 해선 안 되는 말을 한 건…….’ 하고 일순 고뇌에 휩싸였다.
“그야…… 뭐……, 다들. 한수일 사범님도 그렇고 다른 분들도 그렇고, 널 아끼는 사람 많잖아. 나도 그렇고.”
뒷말은 아주 작게 살짝 덧붙인다. 그러나 그렇게 긴장한 게 무색하게, 한무화는 별생각 없이 물어보았던 듯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버지도 다른 사범님들도 잘 챙겨 주십니다. 제가 체련 선수로 쓸 만한가 봅니다.”
“아니, 물론 넌 훌륭한 선수지만, 그런 걸 떠나서 널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거야. ……분명히 있어.”
서정운이 웃으며 “부러운데.” 하고 덧붙이자 한무화는 다시금 희한하다는 눈으로 서정운을 보았다.
“서정운 사범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텐데요. 주위에 여자도 끊이지 않는다고 들었고.”
“어…… 뭐……, 그냥 그렇지. 너는, 어떤 여자가 좋아?”
위험한 화제다. 조금 전의 뜨끔했던 기분을 되살리며 웃는 얼굴로 굳어 있던 서정운은 얼른 화제를 돌리려고 아무 말이나 꺼냈는데, 그런 뒤에야 자신이 썩 괜찮은 질문을 던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이 남자의 취향은 어떤 사람인가.
“글쎄요, 별로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만……. 건강한 여자가 좋을 것 같습니다.”
“…….”
이건 또 무슨 특이한 취향이냐……. 그야 허약한 사람보다야 건강한 사람이 좋긴 하겠지만 얘는 가끔 특이하게 예상을 빗나간 대답을 한단 말이야…….
“아, 그건가? 하늘하늘하고 가녀린 타입보다는 활동적이고 건강미 넘치는 타입?”
“아니요, 그렇게 나눠서 생각해 본 적은 없고……. 섹스하던 도중에 상대가 의식을 잃어서 곤란했던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의식까지 잃지는 않더라도 도중에 기력이 떨어져서 늘어져 버린 적은 제법 많았고요. 그래서 어느 정도는 체력이 맞는 사람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었습니다.”
“……, ……어……, 혹시 말이야, 성적으로 좀 특이한 취미라도 있나? 많은 체력을 요하는 특이한 플레이를 즐긴다거나…….”
잠시 얼음이 되었던 서정운이 더듬더듬 조심스레 묻자 한무화는 여상하게 고개를 저었다.
“평범합니다. 힘이 유난히 좋다는 말은 듣습니다만.”
“…….”
아무리 들어도 이건 자랑이다. 아무리 이 남자가 좋다지만, 한편으로 같은 남자로서 시기와 질투가 끓어오르지 않을 수 없는 발언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저 표정은 그냥 무덤덤하게 사실을 얘기하고 있을 뿐 딱히 자랑하려는 의도는 없는 것 같으니, 왠지 그게 더 분했다. 서정운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좋겠네……. ……애인 없었던 적 없지?”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요.”
그래, 그렇겠지. 없었을 리가.
서정운은 물을 마시며 땀을 닦는 한무화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다시 봐도 잘생긴 얼굴이다. 남자답게 굵직하고 뚜렷한 면영이다. 비록 한호영은 입에 게거품을 물며 그게 어디가 귀엽고 사랑스럽냐고 숫제 미친놈을 보는 눈으로 서정운을 흘겨보았지만, 서정운의 눈에는 충분히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게다가 저 벗은 몸은 또 얼마나 건장하고 늠름한지.
……남자 몸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릴 줄은 몰랐는데. 알고 보면 난 원래 게이였던 걸까……?
“미국엔 게이가 많지?”
무심결에 불쑥 묻고 나서야 헙 하고 입을 다문 서정운이었지만, 한무화는 별반 이상하게 여기는 빛도 없이 순순히 대답했다.
“한국보다는 많습니다. 정확히는 본인이 게이라는 걸 드러내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해야겠지만요.”
“그런 사람들은 좀 어때?”
“……? 평범합니다.”
한무화는 서정운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게이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는 뜻이었는데, 라고 서정운이 덧붙이기 전에 한무화는 이내 다른 방향에 생각이 미친 듯 “아아,” 하고 말했다.
“잠자리 말입니까? 평범합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서정운은 얼음이 되어 버렸다.
바삭바삭 얼음 가루가 떨어질 것처럼 얼어 있던 서정운이 더듬더듬 간신히 입을 연 것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한 한무화가 아직 땀이 다 마르지 않은 셔츠를 걷어 다시 몸에 걸치고 난 다음이었다.
“……남자랑 자 봤어?”
“예. 한 번.”
“어쩌다가……?”
“몇 년 알고 지낸 친구였는데 어느 날 저랑 자 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때는 마침 애인이 없을 때였고 친구도 진지하게 부탁을 해서, 자 봤습니다.”
이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고 싶은 말이나 물어보고 싶은 말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와 머릿속에서 엉킨 것 같았다. 서정운은 한동안 이 말 저 말 고르다가 다 버려 버리고, 가장 중요한 성싶은 것을 물었다.
“그래서, 어땠어?”
“딱히 좋고 싫고 할 건 없었지만, 제가 게이가 아니라는 건 알게 되었습니다.”
“……, 못 하겠다 싶었어?”
“물리적인 자극으로 발기를 시켜서 하긴 했는데, 썩 즐겁지 않았습니다. 굳이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습니다.”
과거에 이렇게 복잡한 심경이었던 때가 언제 있었던가. 없었던 것 같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안도인지 실망인지 모를 기분들이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가운데, 한무화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쪽으로는 사고방식이 자유분방한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라서, 저랑은 잘 맞지 않습니다.”
“……. 넌 보수적인 편인가 보지.”
한무화는 다시 생각하다 말했다.
“보수적이라고 할 만한 부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본인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상식적인 성인 사이에 서로 합의가 된 일이라면 그들이 어떤 행위를 하든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피해를 보거나 상처받는 제삼자가 생긴다면 그래선 안 된다고 보고, 적어도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을 맺는 그를 서정운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아. 역시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사람이 좋아지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지는 건. 이렇게---실망하고 낙담해야 할 순간마저도--- 사랑스러워 보이다니.
서정운은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한무화가 의아한 시선을 향한 뒤에야 그걸 깨닫고는, 그럼에도 웃음을 거둘 수 없어 그대로 말했다.
“착해.”
“……. 그렇습니까?”
한무화는 미묘한 얼굴을 했다. 어린 꼬마에게나 할 법한 말을 진지하게 하는 게 어색했는지, 혹은 그저 그 말 자체가 겸연쩍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그 말이 낯설었을 뿐인지, 무표정한 얼굴 가죽 아래로 미묘해하는 게 고스란히 보여서 서정운은 다시 웃고 만다.
“응, 착하고 다정해.”
좋아진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서 잘됐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좋아하는 감정 자체를 거리끼지는 않을 수 있었다.
한무화는 물끄러미 서정운을 바라보았다. 셔츠 위에 트레이닝 점퍼까지 걸치면서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를, 서정운은 그제야 조금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지금 이 무표정은 어째 좀 알아보기 힘든 무표정인데…….
“왜?”
서정운이 묻자 한무화는 별것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서정운 사범님이 그렇게 평판이 안 좋은데도 주위에 여자가 끊이지 않는다고 해서 왜 그런가 싶었는데,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아서요.”
“응? ……, 그 이유가 뭔데?”
복잡미묘한 심정으로 묻는 서정운을 잠시 바라보던 한무화가 천천히 입을 열었을 때였다. 트레이닝 점퍼 주머니 안에서 전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일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들려오는 건 오로지 전화 소리뿐. 이윽고 한무화는 “잠시만요.”라고 말하곤 전화를 꺼내었고, 액정을 확인하더니 곧 통화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예, 아버지.”
헉. 한수일 사범님이구나.
그럴 이유는 없는데도 괜히 뜨끔한 기분이 들어서 서정운은 당장 입을 다물었고, 전화 속에서는 낯익은 노년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어디냐.」
“서정운 사범님 댁입니다.”
「……뭐?」
너그럽던 목소리가 대번에 까칠해졌다. 덩달아 서정운도 어깨를 굳히고 만다. 아니 그야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지만, 거짓말할 남자도 아니지만, 굳이 그렇게 곧이곧대로 말할 필요는 없을 텐데.
「네가 왜 거기 있어?」
“이야기를 나누다 잠시 들렀습니다.”
「거기서 뭘 하,」
거기까지 들은 서정운은 얼른 한무화의 팔을 덥석 잡았다. 의아하게 내려다보는 한무화에게 다급히 속삭인다.
“잠깐, 나 좀 바꿔 줘. 나도 정원사범님께 인사 좀 드려야겠다.”
“……? 아버지, 서정운 사범님이 인사드리겠다고 바꿔 달라십니다. 잠시만요.”
서정운은 한무화가 내미는 전화를 받아들고는 가볍게 심호흡을 한 뒤 송화구에 대고 말했다.
“사범님, 서정운입니다.”
「음, 그래. 거 어찌 된 노릇인지 무화가 그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모양이로구만.」
“예, 지나가다 우연히 만나서 얘기를 하다가, 마침 집 근처이고 해서 잠깐 들렀을 뿐입니다. 아무래도 사범님 아드님이고 제 스승님의 조카분이기도 한데 막역하게 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세상 이야기나 조금 나누던 참입니다.”
「흠…….」
한수일은 가타부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는 전화를 붙잡고, 서정운은 역시 알기 어려운 양반이라고 생각했다. 뭘 생각하는지 짐작할 여지를 도무지 주지 않는다. 꼬투리 잡히지 않고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단 말이야.
「그래, 무화한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는 많이 들려줬나? 자네가 한참 선배이니 해 줄 이야기도 많았을 테지, 응?」
왔구나. 서정운은 그 은근한 말속의 숨은 의미를 여러모로 곱씹어 보며 대답했다.
“하하,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뭔가를 알려 주기엔 이미 좋은 이야기들을 충분히 많이 듣고 있을 테니까요. 그냥 한가롭게 아주 사소한 잡담이나 나누었을 뿐입니다.”
「흠…….」
“……. 금방 돌려보내겠습니다.”
역시 힘들다. 훤히 다 꿰뚫어 보는 것 같으니 원.
개인적으로 대련이라도 했다는 걸 알게 되면 또 체련에서 비난이 빗발칠 텐데, 적당히 입막음을 해 두고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서정운이 “그럼 다시 무화 바꾸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였다.
「늘 정해진 시간대로 움직이는 녀석이 웬일로 늦도록 안 들어오길래 전화해 본 것뿐이네. 편하게 얘기 나누고 천천히 보내도 돼.」
“……예.”
이건 또 웬 말씀이지, 그 속에 담긴 뜻을 읽어 내려 애썼지만 결국 알아내지 못하고 까다로운 얼굴로 한무화에게 전화를 넘겨준 서정운이었다. 한무화는 서정운이 하는 양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다가 전화를 받아들었다.
“예, 아버지. 전화 바꿨습니다.”
「음, 그래. 평소보다 늦길래 어쩐 일인가 해서 전화해 봤다. 게서 밥은 먹고 오려고?」
“아닙니다. 이제 이야기 마치고 슬슬 돌아가 보려던 참입니다.”
「그래? 거 천천히 얘기 더 해도 되겠구먼. 그럼 조심해서 오도록 하고.」
예, 아버지, 하고 한무화는 몇 마디 정도나 더 하고 전화를 끊었고, 까맣게 꺼지는 액정화면을 보고서야 서정운은 긴장해 있던 마음을 풀며 중얼거렸다.
“역시 싫어하는 사람과 통화하면 긴장된다니까…….”
“제 아버지가 싫으십니까?”
한무화가 아무렇지 않게 묻는 말에 서정운은 쓰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니, 네 아버지가 날 싫어하시지.”
“그렇습니까?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만.”
한무화는 잠시 생각해 보는 눈치였지만 그 이상 굳이 더 말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해가 넘어가고 있는 붉은 하늘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늦어지기 전에 가 보겠습니다.”
언제나 선뜻 왔다가 선뜻 가 버리는 남자다.
서정운은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날도 저물겠다, 집에서 전화도 왔겠다, 더 잡아 둘 핑계도 없어 덩달아 일어섰다.
하지만 좋은 날이었다. 집으로 찾아온 것도 그렇거니와 이렇게 길게 이야기한 건 처음인 성싶다. 대련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놀라웠고. ……아.
“오늘 나랑 대련한 건 다른 데서는 말하지 않는 걸로 하자.”
서정운이 말하자 현관에서 운동화 끈을 새로 묶던 한무화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 서정운을 바라보던 그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끈을 마저 묶고 일어섰다.
“본산에는 이제 언제쯤 오십니까?”
“어? 글쎄…….”
거기서 널 보는 건 여러모로 안 좋을 것 같아서 안 가려던 참인데, 라고는 차마 못 하고 말을 흐리는 서정운에게 한무화가 여상히 말한다.
“종종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내가 연습하는 데에 도움이 좀 되지?”
“예, 많이 도움 됩니다.”
그래, 그렇겠지……, 뭘 기대했던가. 낙담하는 한편, 그럼에도 종종 보고 싶다는 그 말이 가슴에 파고들어서 심장이 쿵쿵거리니 이것도 병이다. 나을 수 없는 병. 그 병에서 헤어날 도리가 없는 병자 서정운은 결국 안되는데안되는데 생각하면서도,
“어……, ……주말 지나고 갈게. 종종 보자.”
그렇게 말하고야 말았고, “예, 그럼 곧 다시 뵙겠습니다. 쉬십시오.”라고 인사하고 나가는 한무화의 뒤통수에 대고 손을 흔들어 주다가 그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손을 툭 떨구었다.
못 끊겠다. 끊을 수가 없어. 저렇게 사랑스러운 걸 어떻게 끊나.
호영이한테 또 욕을 바가지로 먹겠구나, 서정운은 혀를 차며 무거운 걸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