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2) (9/28)

*

“생각해 보면 말이야. 왜 숨겨야 하지? 사람을 좋아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잖아?”

손가락으로 강아지들이랑 놀아 주다 말고 갑자기 불쑥 말하는 서정운을, 한호영은 ‘이 인간이 뭐래는 겨……’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달 밝은 밤에 뭘 잘못 잡쉈나, 어이없어 하늘의 둥근 달을 쳐다보다 말했다.

“그럼 뭐, 만방에 떠드실라고요? 나 체련의 저 남자가 좋더라 하고? 안 그래도 여성 편력이 화려하신 양반이, 거기다가 희한야릇한 괴소문까지 하나 더하고 얹으시게?”

“아니 뭐, 만방에 떠들지는 않아도 고백 정도는 괜찮잖아.”

“그러니까 고백을 하면 당장 만방에 소문이--, ……안 날지도 모르겠네, 그놈이라면. 그놈은 어디서 도통 제가 먼저 입을 여는 법이 없으니까.”

한호영은 벌컥 말하다 도중에 목소리를 떨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잡힐락 말락 하는 손가락에 안달을 하며 달려드는 강아지 두세 마리쯤은 눈 감고도 수월하게 데리고--가지고-- 놀면서, 서정운이 한호영을 보았다.

“그렇게까지 없지는 않은데. 먼저 나서서 말하거나 하지 않을 뿐이지, 말 걸면 대답도 잘하고 요즘은 얘기도 곧잘 하던데.”

“그놈이? 그놈은 체련에서도 다들 대하기 어렵다고 한 걸음 물러서서 대하는 모양이던데요.”

“대하기 어렵다니, 전혀 안 그래.”

“……하긴 사형이랑은 제법 잘 지내는 것 같긴 하더라만.”

한호영은 강아지풀을 뜯어서 살랑살랑 흔들며 중얼거렸다.

얼마 전에 보고 놀라긴 했다. 서정운에게 볼일이 있어서 그를 찾아다니다가 뒤꼍에서 한무화와 나란히 앉아서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그를 발견하고 무슨 일인가 하고 다가가 봤더니, 가느다란 소면이 좋다는 둥, 덜 익힌 파스타면도 맛있다는 둥 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참이었다.

늘 누가 먼저 말을 걸지 않는 이상은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말을 건다 해도 딱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하지 않는 한무화였다. 넉살 좋기로 이름난 한호영조차 대하기가 거북한 그가 저런 하잘것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거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무뚝뚝하고 뭘 생각하는지 모를 저 얼굴을 보고도 사형은 잘도 즐겁게 웃는구나 싶어서 신기하기도 했다. 남들이라면 내가 뭘 잘못 말했나 눈치를 볼 무표정한 얼굴이 사형한테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다.

기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호영을 얼마 있지 않아 발견한 서정운과 눈이 마주쳐서, 그제야 ‘사형, 할아버지가 찾으세요.’라고 말을 전하자 서정운은 의아한 얼굴로 일어서 자리를 떴다. 한무화와 강준걸을 맡아서 가르쳐 보겠다고 하고선 지도를 모두 다 서정운에게 떠넘겨 버린 큰 어르신이다. 아마도 그냥 애들 가르치는 건 좀 어떠냐고 안부나 물으러 찾으신 것일 터였다. 그 김에 바둑이나 한 판 두시겠지.

서정운이 자리를 뜨고 나자 한무화와 둘이서 그 자리에 남은 한호영은 잠시 멀뚱하게 그와 마주 보았다. 같은 집에 사는--비록 집채가 워낙 넓어 연습 때가 아닌 평소에 마주치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사촌이라 다른 사람들보다는 상대적으로 한무화와 잘 지내는 한호영조차 썩 편한 상대는 아니다. 워낙에 분위기 자체가 위압적인 데가 있는 남자였다.

……이놈이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사형의 감각은 대관절 어떻게 생겨 먹은 거야?, 새삼스럽게 괴이쩍다고 여기면서 그 옆에 털썩 주저앉은 한호영은 몇 살 어린 사촌 동생--별반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에게 그나마 편하게 말을 걸었다.

‘사형한테 지도받느라 힘들지? 본인 제자들한테는 원래 굉장히 혹독하게 구는 사람이라 악명이 자자했어. 다들 어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사람이거든.’

‘그렇습니까?’

연습 때 사형이 얼마나 지독하게 사람을 몰아세우는지 잘 알기 때문에--그리고 사형이 연습 시간에 한무화에게도 엄격하고 독하기 짝이 없게 대하는 걸 여러 번 봤기 때문에-- 위로차 말을 걸었는데, 한무화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웃했다. 아니 이놈이 저도 연습 때마다 그렇게 당하면서…….

‘사람이 늘 웃고는 있지만 워낙 단호한 데다 입에는 칼 물고 있잖아. 지도할 때에는 특히나. 사형한테 배우면 실력도 늘지만 무엇보다도 정신 수양에 아주 큰 도움이 된다는 농담 아닌 농담도 있었을 정도라고. 오죽하면 지도사범들 중에 제일 상대하기 어렵고 무서운 사범으로, 온갖 까탈스럽다는 사범들 다 물리치고 독보적인 1위로 꼽혔었다니까.’

그러니까 너도 마음 상하는 일 있어도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이겠거니 하고 참아, 얼마 안 남았잖아, 라고 나름대로 상냥한 마음으로 사촌 동생을 다독거려 주는 한호영이었지만,

‘확실히 서정운 사범님이 지도에 있어 엄격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대하기는 어렵지 않은 분입니다. 외려 편안한 느낌이 드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요.’

‘…….’

얘는 또 뭐냐. 여기 눈이 삔 인간이 하나 더 있었구나. 아까도 어제도 그저께도 수련 때 그렇게 독하게 갈구는 말을 들어 놓고, 이놈은 둔한 거냐 담대한 거냐 뭘 모르는 거냐.

아무리 봐도 농담하는 기색은 아닌 한무화를 뜨악하게 쳐다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한호영이었다.

“……, 그래, 하긴 그놈도 사형더러 편하다고는 하더라.”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의심스럽기 그지없는 그 말을 새삼 곱씹어 보며 한호영이 중얼거리자, 강아지들에 열중하고 있던 서정운이 반색을 하며 돌아보았다. 그 결에 하마터면 강아지에게 손끝을 깨물릴 뻔했지만 보지도 않고 귀신처럼 잘도 싹 피한다.

“그랬어? ……호영아, 무화 말이다. 걔도 나 좀 괜찮게 생각하는 거 아닐까? 응? 그러지 말란 법 없잖아?”

“…….”

뭐래는 겨 이 인간이……, 싸늘하게 쳐다보는 한호영의 흰 눈은 보이지도 않는지 서정운은 혼자 들떠서 중얼거렸다.

“어차피 다음 주면 대련하니까 이제 사범 노릇도 끝이잖아. 그럼 스승과 제자의 금단의 사랑도 아니게 되고.”

“언제는 둘도 없는 내 새끼라며.”

“어……, 그건 맞아. 내가 가르쳤던 애들 중 제일 훌륭했어. 자질도, 태도도.”

서정운은 이내 진지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한호영도 그 말에는 완전하게 동감이었다.

근 한 달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한마디 불평도 없이 서정운이 안 보는 순간조차 게으름 한번 부리지 않고 꿋꿋하게 버틴 사람은 한호영이 아는 한 한 명도 없었다. 웬만큼 독하다 싶었던 제자도 한 번쯤은 눈물 뽑곤 했는데, 한무화는 눈물은커녕 표정 변화도 없이--표정 변화가 있었으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놀라운 일이었을 것 같긴 하지만-- 굳건히 견뎌 냈다.

동시에, 저렇게 성장이 빠른 경우도 한호영은 본 적이 없었다.

일견 한무화는 한 달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한 게 없어 보였다. 서정운은 그에게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것들만 수백 수천 번 거듭시켰고, 한무화는 군말 없이 따랐다. 그가 새로 배운 최상위의 고급 기술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기초야말로 그 근간을 바로잡아 다듬는 데에는 수년의 시간도 부족하다는 걸 한호영은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태어나서부터 줄곧 정무도 본산의 종손으로 자라면서, 천재적이라고 일컬어졌던 그 실력만큼이나 타인을 보는 눈썰미도 무섭게 빼어났다.

그래서, 고작 한 달 사이에 마치 털갈이를 한 것처럼,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듯하지만 사실은 사람이 바뀌었다 할 정도로 잘 다듬어졌다는 걸 알아본 한호영은 가슴속에 얼음물을 들이부은 것 같았다. 그것은 천재라는 소리를 숱하게 듣고 자랐던 한호영조차 실로 부럽고 새카맣게 질투가 날 만큼의 자질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형이 사람 다듬는 것 하나는 정말…….”

한호영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서정운은 여상하게 한호영을 흘끔 볼 뿐 별 대단치도 않은 얼굴로 강아지들만 어루만질 뿐이다.

지난주부터 지방 지원으로 시찰을 나갔다가 엊그제 돌아와 한무화를 지켜본 숙부가 정작 욕심나는 눈으로 쳐다본 것은 서정운이라는 걸 한호영은 알고 있었다.

한무화에게 기초 수련만 시키는 걸 두고 체련 수련생이나 선수들 사이에서는 원성과 비난이 자자했지만 볼 줄 아는 사범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이다.

“……벌써 한 달 다 됐네.”

한호영이 둥그스름한 달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다음 주면 사범 수련 합숙 참가 여부를 두고 한무화가 상원사범들 앞에서 대련을 하게 된다. 젠체하는 꼰대 영감님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보는 눈만큼은 있으니, 아마 다들 눈알이 굴러 나오도록 놀랄 거다.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대련은? 준걸이는 결국 사형이 하라는 거 거의 안 한 모양이던데.”

“준걸이가 이기겠지. 새로운 방향으로 더 발전하긴 어렵겠지만 지금 상태로도 나름대로 충분히 완성되어 있는 녀석이라서. 게다가 국제 규모 대회에서 수십 번이나 싸워 온 경험은 무시할 수 없지.”

“그야 물론, 아무리 그래도 준걸이가 정무도를 이십 년을 넘게 하고 요 몇 년 중량급 우승을 놓친 적이 없는 녀석인데, 향후 몇 년간은 무화가 준걸이를 따라잡기는 힘들겠죠.”

“아냐. 내년까지야.”

서정운은 강아지들의 귓등을 살살 긁으며 이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마치 날씨 얘기라도 하듯 여상하게 말했다.

“올해는 힘들겠지만 내년부터는 무화가 이겨.”

한호영은 껌벅껌벅 서정운을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믿기 어려운 말이다. 하지만 서정운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이 사람만큼 눈썰미가 귀신같은 사람은 없었다.

“그거야말로…… 결정적으로 판도가 변하는 순간이겠네요. 에고, 울 아부지 머리털 빠지시겠네.”

그리고 나도 쉴 새 없이 시달리겠구나, 한호영은 벌써부터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정운은 자기 일 아니라고 아주 태평하다.

“하지만 올해쯤은 져도 괜찮지. 게다가 다음 주 대련은 어차피 승패가 중요한 대련이 아니잖아. 이겨야 사범 수련에 참가시켜 준다는 것도 아니고. 무화가 얼마나 ‘잘’ 지느냐가 관건이지. 그건 전혀 걱정 안 해도 될걸.”

“제가 어디 걱정하는 걸로 보입니까?”

한호영은 강아지풀을 흔들며 툴툴거렸다. 강아지 한 마리가 그걸 보고 폴랑폴랑 달려든다. 요놈 귀여운 것 보게, 하고 그놈 코끝에서 강아지풀을 흔들어 주며 한호영은 흘끗 서정운을 보았다.

“……사형도 사범 수련 합숙에 참가시키면 어떻겠냐는 얘기도 상원 영감님들 사이에서 나오는 모양이던데.”

“관둬.”

“그러게 누가 애를 그렇게 기가 막히게 잘 가르쳐 놓으랍니까. 몇 년 만에 나온 사람이 그렇게 애를 반짝반짝 닦아 놓으니까, 영감님들이 그새 사형 그렇게 욕했던 것도 잊어버리고 다시 끌어오라고 망령이시지.”

여자를 달고 다녀 정무도의 체면을 깎는다는 둥 윗사람한테 고분고분 예의 차릴 줄도 모른다는 둥 갖은 험담은 다 하면서 사형 중원사범 시키는 것도 기를 쓰고 반대했던 영감님들이, 하고 혀를 차며 투덜거리던 한호영은 뜸하게 입을 다물고 있다가 물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해 보니 나름 괜찮지 않았어요?”

서정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강아지들만 매만져 줄 따름이었지만, 그 강아지들도 슬슬 노는 데에 지치고 졸음이 오기 시작했는지 한 마리, 두 마리, 평상 아래에 엎드려 있는 어미에게로 간다.

즐거웠을 것이다. 한호영의 사형은 정무도를 몹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편, 그는--비록 본인의 자질은 그 반대였다 해도-- 스스로 익히는 것을 남 가르치는 것보다 즐거워했던 사람이었다. 자질 있는 선수의 놀라운 성장을 지켜보는 것은 기쁨인 동시에 고통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쁘진 않았어.”

서정운은 담담히 대꾸했다. 마지막 한 마리마저 제 형제들과 어미에게로 가 버리자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 낸다. 그러면서 한호영을 보고는 피식 웃는 그 얼굴이 새삼스럽게 더럭 반갑고 기뻐, 한호영은 가슴이 울컥했다.

서정운은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다 싶은 듯 시계를 보더니 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수련을 마친 뒤 잠깐 누렁이나 보고 가야겠다며 외당으로 찾아왔다가 이제야 돌아가는 것이다. 지금쯤 수련생들은 대수련장 청소와 정리를 마쳤을 즈음일 터였다.

“오늘 나오는 게 마지막이야. 지난달에 넘겼던 뮤지컬 작업에 수정 들어갈 게 있대서 한 일주일은 거기 잡혀 있어야 해.”

대수련장 쪽으로 걸어가며 서정운이 말했다. 며칠 전에 얼핏 그런 얘기를 들었던 것 같은 기억을 떠올리며 한호영이 물었다.

“한동안 일 쉰다면서요.”

“수정 작업이니까. 예전에 해 놓은 일까지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실질적으로는 오늘로 마지막이었지.”

“다음 주 대련 때는 와요?”

“글쎄, 굳이 내가 올 필요가 있나? 상황 봐서 시간 나면 오고.”

저렇게 비싼 척 말해 봐야 결국은 그놈 보고 싶다고 올 거면서 뭘, 하고 코웃음 치는 한호영이었다. 나한테 문자질해서 그놈 근황이나 캐묻지 말라고, 한호영이 한껏 비아냥거리려 입을 열었을 때였다.

“--선배로서 얘기해 주는 거야. 그 작자 여자 소문 더러운 거 몰라? 정신 차려.”

외당에서 대수련장으로 가는 길목, 평소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곳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워낙 주위가 조용해 선명하게 들린다.

어라, 준걸이잖아, 하고 중얼거리며 한호영이 걸음을 늦추었을 때,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여자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선배님한테 그런 얘기 듣고 싶지도 않고,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멍청아, 너 그러다 신세 조져. 그 작자 때문에 신세 망친 여자가 한둘인 줄 알아? 오죽했으면 본산에서도 쫓겨났다가 이번에 정원사범님 체면 봐서 잠깐 사범 맡으라고 불러들인 거야. 그런 파렴치한이 좋다고? 이게 똑똑한 척하더니 완전 맹물이야, 맹물.”

한호영의 걸음이 딱 멈추었다. 서정운도 걸음을 멈춘다.

저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매우 명백했다.

저런 류의 험담은 앞에서든 뒤에서든 워낙 숱하게 들어서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그래도 역시 기분 좋은 화제일 리는 없다. 정작 서정운은 신경도 안 쓰는 기색이긴 했지만 한호영이 낮게 혀를 차며 막 입을 열려고 했을 때, 다시 여자 목소리가 한층 더 신경질적으로 이어졌다.

“제가 누굴 좋아하든 말든 그건 제가 알아서 할 문제고요, 제가 고백해서 차이든 신세를 망치든 선배님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니까 그냥 관심을 꺼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 하는 것마다 괜히 간섭하시는 것도 싫고요.”

“이게 사람이 좋은 마음으로 도와주려 해도……!”

남자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리고 시계를 쳐다본 서정운이 다시 걸음을 떼며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준걸아. 너 내일 동부 지원에 모범 지도하러 가야 한다며. 그거 준비하느라 집에 일찍 가 봐야 한다고 마무리 연습 생략하고 나가더니, 아직 안 갔어?”

“--!!”

설마 거기 누가 있을 줄은 몰랐는지 소스라치게 놀라며 돌아보는 강준걸의 얼굴이 보였다. 그 앞에서 긴장한 빛으로 서 있던 여자도 돌아본다. 종종 서정운에게 수줍게 차나 과자 따위를 갖다주곤 했던 예쁘장한 수련생이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서정운은, 언제나 여자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다정한 남자 서정운은, 평연히 강준걸을 보고 있던 얼굴에 문득 겸연쩍은 빛을 띠더니 목덜미를 문질렀다.

“어…… 미안해요.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고 지나가던 길이라서. ……내일부터는 일이 바빠서 못 나올 거예요. 그동안 차랑 과자 챙겨 줘서 고마웠어요.”

서정운이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난데없이 본인이 나타나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으로 서 있던 그녀도 덩달아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서정운이 그들을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얼결에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서정운 사범님,” 하고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부른다. 서정운이 돌아보자 그녀는 긴장으로 굳어진 얼굴로 똑바로 서정운을 보고 있었다.

“서정운 사범님, 저, 사범님이 좋아요. ……혹시, 혹시라도,”

그 뒷말은 미처 잇지 못하고 서정운을 보고만 있는 그녀를, 서정운은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점차 놀란 빛은 가시고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서정운은 웃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그 말과 함께 가만히 고개를 숙인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해 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의 예의로.

그녀는 일순 울 것 같은 얼굴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후련하다는 얼굴로, 또 한편으로는 이미 짐작했던 결과를 받아들이는 빛으로, 그렇게 서정운을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무어라 말을 하려는지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결국 그 입술에서는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고, 그녀는 그대로 돌아서 자리를 떴다.

도중에 강준걸이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그녀가 흘끗 그를 쳐다보며 피하듯이 비껴가는 걸 보고는 멈칫 걸음을 멈추고 만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강준걸은 눈동자를 희번덕 굴려 서정운을 노려보았다.

“아무 년이나 닥치는 대로 따 먹고 다니면서 윗사람 똥구멍 핥아서 사범 노릇하는 개차반한테 속아 넘어가는 저년이 병신 같은 년이지, 씨팔!”

이를 갈며 혼잣말인 양 욕설을 내뱉는 강준걸에게, 안색을 바꾼 한호영이 “뭐? 저게 지금 눈에 뵈는 게 없나……. 야, 강준걸이! 너 이리 와 봐!” 하고 험하게 외쳤지만 강준걸은 들은 체도 않고 휙 돌아서더니 성큼성큼 걸어가 버린다.

그러나 그때였다.

울화가 치민 듯 사나운 걸음걸이로 발을 옮긴 그가 몇 발짝 떼기도 전에, 어둑한 나무 그늘 아래서 느닷없이 어둠을 찢는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왈! 왈!”

“--.”

그 소리에 움찔 놀라 돌아본 강준걸도, 거의 동시에 그쪽 방향으로 시선을 준 서정운이나 한호영도, 그제야 그곳에 한 사람이 서 있는 걸 깨달았다. 어두운 밤인 데다 나무 그늘에 덮여 있어서, 남자가 한 팔에 안고 있던 조그만 강아지가 짖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가능하면 끝까지 조용히 있을 작정이었는지, 별안간 짖어 버린 강아지를 내려다보며 혀를 찬 남자는 나무 아래서 걸어 나왔다. 한무화다.

강준걸은 한무화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낯을 한층 험하게 일그러뜨리더니 “에이, 씨팔!” 하고 내뱉고는 걸어가 버렸고, 이내 그 자리에는 우연찮게 그 길을 지나가려다 멈춘 세 명만 남게 되었다.

한무화는 묵묵히 강준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무표정한 얼굴로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는 한무화의 뒤에서, 서정운은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강준걸 때문이 아니다. 그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 자리에 난데없이 나타난 인물.

설마 거기 한무화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는데.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저 새끼가 아무리 여자한테 차였어도 그렇지, 까마득한 선배를 두고 뭐가 어쩌고 어째? 아오, 저걸 그냥…….”

한호영이 이를 갈며 중얼거리든 말든, 그런 말도 서정운의 귀에는 안 들어온다. 지금 서정운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은 오직 하나.

들었을까. 안 들었겠지. 못 들었을 거야. 못 들었어야 하는데.

녹슨 로봇처럼 삐걱삐걱, 천천히 고개를 돌린 서정운은 불안스런 눈초리로 한무화를 보았다. 그러다 더듬더듬 입을 연다.

“어……, 무화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그제야 서정운에게 고개를 돌린 한무화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정확히 저 자리에 멈춰 선 건 여자분이 사범님께 좋아한다고 말할 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확인 사살이라도 당한 것처럼 대번에 낯빛이 흐려진 서정운이었다. 그래도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이라도 건져 보려고, 한참을 어물거리다 다시 물었다.

“그러면, 어, 나,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한 거, ……, 들었어?”

“예? 예.”

대화의 순서상 당연히 들었을 수밖에 없다. 한무화는 별 당연한 걸 다 묻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이번에야말로 서정운은 확인 사살을 당한 심경으로 심장 부근을 움켜쥐었다.

“저기, 그게, 어…… 사실은, 말하려던 게 아닌데, 그러니까,”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허둥지둥 말을 주워섬기는 서정운을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던 한무화는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었는지 “아아,” 하고 말했다.

“전 그런 일에는 관심 없습니다. 어디서든 말하지도 않을 거고요.”

그의 입을 통해 뭔가 말이 새어나갈까 봐 걱정한다고 여긴 듯, 한무화는 안심해도 좋다는 투로 단호하게 말했다. 서정운은 “아니 그게 아니라…….” 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다 풀썩 어깨를 떨구고 말았다.

서정운이 좋아한다는 게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기색은 전혀 없으니 다행이긴 한데, 저렇게 깔끔하게 관심조차 없어 하다니.

안심과 실망 사이를 방황하는 서정운의 안색이 이상했는지, 자신의 대답에 뭔가 문제가 있었나 돌이켜보는 눈치이던 한무화가 덧붙여 말했다.

“좋아하신다는 분과 잘되시길 바랍니다.”

마무리 한 방이다.

순식간에 낯빛이 거무죽죽해지는 서정운을 보며 한호영도 내심 ‘윽.’ 하고 말을 삼켰다. 우와, 이건 빼도 박도 못하게 그냥 ‘너한테 관심 없음’이로구나. 하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아닌 밤중에 뜬금없이 세 명이 잇따라 실연하는 현장을 보고야 말았다. 무슨 상황이 이따위냐 싶다.

한호영은 흘끔 서정운의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어……, 사형, 저 먼저 가 볼게요. 사람들 연습 끝내고 제대로 마무리랑 뒷정리 했나 좀 봐 봐야 할 것 같아.”

‘이 거북한 상황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다’라고 쓰인 얼굴로 그렇게 말한 한호영은 가볍게 서정운의 어깨를 두드리곤 한무화에게 눈인사를 남기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이 웬 때아닌 날벼락 같은 사태지, 오늘은 여러 사람에게 골고루 액일이로구나, 하고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멀어져 가는 한호영의 뒤로 강아지만 발랄하게 왈왈왈 짖을 따름이었다.

“…….”

사제마저 떠나가고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서정운의 머릿속은 황망한 공백이었다. 가슴에 실연의 칼날이 푹 찔린 것 같은 기분으로 휘청거리며--실제로는 좀 느릴 뿐 멀쩡한 걸음이었지만-- 화단 쪽으로 걸어가 조그만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한무화가 강아지를 내려놓자 그놈이 대뜸 달려와 앞발로 서정운의 바지를 눌러 대며 흙을 묻힌다.

“……외당 가던 길이야?”

서정운은 강아지를 따라와 그 앞에 선 한무화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물었다. 목소리에도 힘이 없다.

“예, 이 녀석이 어미를 찾아서요.”

“응. 외당 평상 밑에서 자고 있어.”

“예.”

그렇게 대답한 한무화는, 강아지가 요리조리 풀숲을 뛰어놀자 잠시 바라보다 서정운의 곁에 앉았다. 어린 것들이 뛰놀면 노는 대로 지켜보며 놔두는 게 이 남자의 방식이었다. 좋은 아빠가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하자 또 가슴이 푹푹 아팠지만.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한무화가 서정운을 보더니 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안 피곤했는데 네 말을 듣고 갑자기 기운이 빠져서 그런 거야--라고는 차마 못 하고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음……, 좀 피곤하긴 하네.” 하고 얼버무렸다.

“이제 대련은 못 나오신다고요.”

“응. 일해야 할 게 좀 생겨서.”

서정운은 가만히 한숨을 삼키고는 한무화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두운 데서 봐도 역시 잘생기고 사랑스러운 남자다. 실연을 당해도 마음을 끊을 수가 없을 것 같으니 큰일이었다. 하긴 얼굴만이 아니라 성격도, 태도도 나무랄 데 없었지.

서정운은 한무화의 어깨를 가만히 다독였다.

“그간 짧은 동안이었지만 열심히 했다. 여태 여럿 지도해 봤는데, 너만 한 사람 없었어.”

“……. 이제는 지도 안 하십니까?”

“원래 이번에 지도를 맡게 된 것 자체가 우연히 벌어진 사고 같은 거였으니까.”

어쩐지 한무화의 물음에 아쉬움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단순한 기분 탓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아쉬워해 주는 것 같은 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나쁘지 않았다. 매일매일 한무화를 보면서, 이 엄청난 자질이 못내 부럽고 스스로의 처지에 고통스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눈부신 진보를 곁에서 바라보는 게 기뻤다.

그래, 나쁘지 않았다. 분명히 서정운은 심장이 뛰었고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지금 분명하게 느껴지는 아쉬움이 놀라울 정도로.

서정운은 가만히 운동화 끝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음 짓곤 한무화를 돌아보았다.

“다음 주 대련은 어때, 잘할 자신은 있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 스스로가 더 나아졌다는 건 알겠습니다.”

지나치게 자만하지 않고 지나치게 겸양하지 않는다. 늘 진지하게 생각한 뒤에 진심을 말하는 한무화를 바라보다가 서정운이 불쑥 물어본다.

“사범 수련 합숙에 참가 못 하게 되면 어쩔래.”

“괜찮습니다. 이 일에서는 이미 노력한 만큼 얻었습니다.”

서정운은 그 담담한 대답에 웃고 말았다. 정말로 즐거워져서 소리 내어 웃으며 한무화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듯 쓰다듬었다. 이 올곧은 소년 같은 남자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어서.

한무화는 무표정한 얼굴 아래 약간 희한한 빛을 띠고 서정운을 보았다. 서정운이 가끔 이렇게 허물없이 쓰다듬을 때면 그는 그렇게 쳐다보곤 했다. 그런 거침없는 손길이 낯설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피하거나 뿌리치지는 않고 얌전히 있는 게 또 사랑스러워서, 서정운은 쉽게 그에게서 손을 뗄 수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너 지금 되게 낯설다는 얼굴 하고 있다.”

“……그렇습니까?”

“응. 꼭 한 번도 머리 쓰다듬어진 적이 없는 사람 같아.”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다지 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나마 어릴 때 그랬었고 좀 자란 뒤부터는 거의 없긴 했습니다. 아주 가끔 부모님이나 애인이 터치했던 정도라서요.”

보통들 그렇지 않습니까?, 라고 의아한 듯 되묻는 한무화에게서 서정운은 아주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사실은 더 쓰다듬고 싶었지만 부모님이나 애인……, 왠지 벅차고 기가 죽는 느낌이다.

“응……, 뭐……, 하지만 넌 내 새끼잖아…….”

풀 죽어서 우물우물 변명처럼 말하자 한무화가 웃었다. 피식, 조금 어이없다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납득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예.” 하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봐서는 납득 쪽이 더 강한 것 같았다.

풀숲에서 풀벌레랑 놀기라도 하는지 흙바닥을 열심히 파헤치며 엉덩이를 흔들고 있는 털 뭉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서정운은 불쑥, 그러나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물어보았다.

“미국에서는 애인 없었던 적 없었다며. 여기서는 애인 안 사귀어?”

“일부러 안 사귀려는 건 아닙니다만 굳이 애써 사귈 생각은 없습니다.”

“왜.”

“시간이 아깝습니다.”

“…….”

어떤 사람들이 들으면 뭐 저런 배부른 소리를 하는 놈이 다 있냐고 분개할 발언이다. 서정운은 그 뜻밖의 대답에 잠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어?” 하고만 되물었다. 그러자 서정운의 당혹감이 전해졌는지 한무화가 말을 덧붙였다.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저는 정무도로 저 자신을 단련해 가는 것이 제 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 사이사이 비는 시간에 옆에 있는 여자와 사귈 수는 있겠지만, 정무도를 할 시간을 할애하면서까지 하고 싶은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까지 관계를 이어 가고 싶은 사람을 만나 본 적도 없고요.”

차분하게 말하지만 그것은 대단히 확고한 그 나름의 진실이었다. 서정운은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그렇군.” 하고 한숨 섞어 고개를 끄덕인다.

“정답이란 게 딱히 없는 일이니까, 그게 네 생각이라면 그대로도 나름대로 괜찮겠지만 좀 아쉽긴 한걸.”

“뭐가 말입니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랑 비슷한 것 같긴 한데……. 소중해서 시간을 들이는 것도 있겠지만, 시간을 들인 만큼 소중해지는 것도 있거든. 나한테는 사람 관계가 그런 거라서.”

사람도, 사물도, 일도, 그런 게 있다. 좋아하기 때문에 시간을 들이는 것도 있을 테지만, 시간을 들이다 보니 좋아지는 것도 있었다. 조금씩 천천히. 그리고 오래도록 남아서 가슴 벅차게 좋아지는 것은 서정운에게는 주로 후자였다.

한무화는 잠시 생각해 보다 물었다.

“시간을 들이다 보면 안 좋아하는 사람도 좋아하게 됩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난 그런 편이었어. 연애 감정을 두고 말하자면, 그런 감정이 생기게 되느냐 아니냐는 약간 별개의 문제이긴 하지만 적어도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긴 했지. ……왜 안 사귀어 본 것처럼 말해, 애인 끊인 적 없다면서.”

서정운이 희한하다는 눈치로 묻자 한무화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명확히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빛으로 말했다.

“저는 거의 대부분 상대가 먼저 사귀자고 해서 사귀었고, 헤어지게 될 때까지 제 감정은 비슷했습니다. 시간을 일부러 마련해서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

여태 이 남자랑 사귀었던 여자들을 몹시 부러워했었는데 이 순간만큼은 좀, 아니 많이 가엾어졌다. 얘랑 사귀면 정말 힘들겠구나. ……그래도 사귈 수나 있으면 좋겠다…….

또다시 우울해지는 서정운에게, 잠시 더 생각에 잠겨 있던 한무화는 그래도 역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물었다.

“사범님은 그러면 지금 좋아한다는 분이, 오래 두고 보는 동안 좋아지신 겁니까?”

“어? 아니……, ……처음부터 좋았어.”

난데없이 날아온 질문에 서정운은 심장을 움켜쥔 것처럼 놀랐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대답했다. 그래 봐야 당황한 기색도 역력하고 얼굴도 금세 뜨거워져서 소용은 없다. 한무화는 그런 서정운을 희한하다는 듯이 차근차근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좋았어. 처음부터. 이유 없이. ……그런데 보고 있는 동안 점점 더 좋아져. 시간이 지나고 하나씩 더 알게 될수록 조금씩 더 좋아지고 있어.”

“그렇군요.”

한무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알지 못하는 그 감정을 알려고 애쓰는 양 제법 오래 생각에 잠겨 있었지만, 그러나 결국은 알지 못한 듯했다. 그래서 그냥 인사처럼 말을 건넨다.

“그분이랑 잘되시길 바랍니다.”

“……응.”

울 것 같다. 마음이 흥건하게 젖어, 이대로 꼭 쥐어짜면 물기가 한 바가지는 나올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서정운은 맞잡은 손끝으로 시선을 준 채 생각에 잠겨 있는 한무화를 본다. 그 표정 없고 담담한 얼굴이 살짝 우울해 있는 게 보인다.

아. 그렇구나. 너는 그걸 알고 싶은 거구나. 무언가가 못내 소중하고 사랑스럽다는 그 감각을.

서정운은 손을 뻗었다. 가만히 한무화의 머리 위에 손을 얹자 그가 의아하게 돌아본다.

“너도 차차 알 수 있을 거야. 지금 모른다고 우울해할 것 없어. 너도 분명히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될 테니까.”

너와 비슷한 사람. 올곧고 착한 사람. 널 좋아할 사람. 네가 좋아할 사람.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한 방울, 한 방울, 맑은 물에 떨어진 잉크가 푸르게 번져 물 전체를 물들이듯 네가 마음 다해 소중하게 여길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길 빌었다. 내가 아니라도 괜찮다. 그런 사람을 만나서 네가 정말로 뿌듯하고 먹먹하게 마음이 차오르는 느낌을 가졌으면 좋겠다.

서정운은 가만히 한무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짤막한 머리카락이 뜻밖에 보들보들하다. 그 느리고 부드러운 손길 아래서 한무화는 무척 이상한 것이라도 보는 것처럼 서정운을 보았다.

그러는 사이에 조금씩 천천히 한무화의 어깨가 느슨하게 늘어졌고, 힘을 빼고 편안히 앉은 그는 그대로 얌전히 머리를 맡긴 채 털 뭉치만 바라보았다. 아주 약간, 아주 조금 그의 머리가 서정운 쪽으로 기울어졌다. 쓰다듬기 편하기라도 하라는 것처럼.

서정운은 애틋하고 울적한 마음으로 천천히 그를 쓰다듬으며, 앞으로 잠시나마 바빠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동안은 마음이 심란할 것 같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대수련장 쪽에서 사람들이 정리를 마치고 나가는지 어렴풋이 기척들이 들려왔고, 서정운은 아쉽게 손을 거두며 일어섰다. 이미 달이 머리 위에 떠 있었다.

“다음 주, 대련 잘해.”

서정운이 말하자 한무화도 일어서며 물었다.

“안 오십니까?”

“시간 보고…….”

머리로는 안 와야지, 안 봐야지, 마음에서 잘라야지, 백번 생각하겠지만 왠지 막상 그날이 오면 결국은 못 견디고 쪼르르 보러 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들어 서정운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어쩌겠어, 이성이 감정을 이길 수 있나. 반쯤은 포기하고 만다.

서정운은 휘영청 달 아래 유난히 더 커다래 보이는 한무화를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그간 고생 많았어. 너 대련 잘하면 상이라도 줄게.”

“상……. 뭘 주실 겁니까?”

“글쎄, 아무거나 너 먹고 싶은 거라도 사 주지 뭐.”

먹고 싶은 거라……, 딱히 먹고 싶은 건 없는데……, 하고 중얼거리던 한무화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수롭잖게 말한다.

“그러면 그때 가서 제가 원하는 거 하나 해 주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러자, 그럼. 그런데 대련 잘할 자신은 있나 보지.”

서정운이 빙긋이 웃으며 농담처럼 묻자 그제야 한무화는 약간 난감한 빛을 띠었다.

“아마 이기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난 이기라고 안 했어. 잘하라고 했지.”

서정운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눈을 껌벅이며 서정운을 보던 한무화도 웃었다. 맞아, 이런 분이었지,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넉넉하게 웃으면서 한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담담하게, 하지만 분명한 자신감이 깔려 있는 음색으로 말했다.

“예.”

*

대련의 결과가 어떨지는 기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한무화가 얼마나 다듬어질지, 사범 합숙수련에 참가시키는 데에 아무런 이견이 없을 만한 실력이 될는지--사실상 춘계 선수권 우승자라는 것만으로도 그 조건에는 이미 부합하고 있었지만--, 한 달 동안 꾸준히 대수련장에서 연습해 온 그를 보아 온 사람이라면 이미 대련을 볼 필요까지도 없이, 그 결과는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로지 기초만 거듭하고 또 거듭한 한 달 남짓. 그 끝에 그가 보여 준 것은, 외려 불허가 떨어진다면 그게 편협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도록 놀라운 진전이었다.

예리하고 날카롭게 다듬어진--웅장하고 풍부한 선.

서정운이 본채의 도장에 이르렀을 때에는 대련이 막바지에 다다른 때였다. 대련의 결과가 나게 될, 그 직전의 순간.

원래는 조금 일찍 와서 한무화가 대련단에 올라가기 전에 격려라도 해 줄 요량이었는데, 수정 작업도 막바지에 밀려서 미처 시간에 맞추지 못했다. 작업을 다 마치고 가려 했는데, 그랬다간 대련을 못 볼 마당이라서 결국 작업을 약간 남겨 두고 와야만 했다. 대련을 본 뒤 다시 마무리 작업을 하러 돌아가야 하는데, 이럴 바에는 애초에 여유 있게 나올 걸 그랬다고 후회하며 서정운이 마구 달려 도장에 이르렀을 때에는 대련 종료가 30초도 채 남지 않은 때였다.

그리고 거기에서 서정운이 본 것은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는, 땀범벅이 되어 숨이 넘어갈 듯 거친 호흡을 헐떡이며 서로를 물어뜯고 있는 두 마리의 맹수였다.

강준걸이 우위에 있었다. 그것은 놀라운 게 아니었다. 선수권 대회의 연속 우승자다. 비록 한무화가 올해 춘계 선수권에서 우승했다 하나, 그것은 강준걸이 빠진 대회에서 빈집을 차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러나 강준걸에게 등을 내어 주고 바닥에 짓눌린 채 한쪽 팔을 뒤로 꺾여 있는 한무화는, 어떻게 빠져나올 도리도 없고 그대로 시간이 지나면 질 수밖에 없는 패색 짙은 상황에서, 다른 이들 같았으면 이미 항복을 외쳤을 고통을 묵묵히 견디고 있었다.

“--.”

위험해 보일 정도로 팔이 꺾여 있었다. 저 정도면 인대가 상할 텐데. 자칫하면 관절도.

한무화의 얼굴에 땀이 흥건히 맺혀 있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눈에 스며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통스런 기색이라곤 없이 입을 꾹 다문 채 앞을 노려보고 있다.

멍청아, 그만해. 서정운은 무심결에 입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때다.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그 소리가 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한무화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서정운은 심장이 싸하게 식었다. 분명 누가 봐도 패배가 코앞에 닥쳐 있건만, 저것은 거대한 사냥감을 바로 앞에 두고 있는 맹수의 얼굴이다.

바로 그때, 한무화가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강준걸이 뒤에서 단단히 짓누른 팔에 온 체중을 싣고 힘을 더한다. 그 어마어마한 힘에도, 그러나, 조금씩 한무화의 몸이 들렸다. 팔 하나로 그 자신과 강준걸의 힘과 무게를 모두 버티면서 한무화가 몸을 들어 올리자 그 결에 뒤로 꺾인 어깨가 더더욱 뒤로 젖혀졌다.

천천히 한무화의 몸이 강준걸의 아래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만큼 조금씩 더 어깨가 꺾인다.

보는 이가 고통스러워질 정도로 젖혀진 어깨에서 마치 뚝--, 소리가 들린 것 같은 순간,

마치 기적처럼 한무화가 강준걸의 아래에서 벗어났다. 온몸에서 땀을 뚝뚝 흘리며 안간힘을 써 한무화를 짓누르고 있던 강준걸이, 그를 놓쳤음을 깨닫자마자 황급히 일어나 자세를 고쳤다. 그러나 그것은 한무화가 자세를 가다듬는 것보다 아주 미세하게 늦어,

퍼억--, 한무화가 다리를 휘둘러 하퇴 전체로 강준걸의 몸통을 날렸고, 강준걸이 몇 걸음 거리나 뒤로 날려가 바닥에 등을 부딪치며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위로, 강준걸을 후려차 날림과 동시에 몸을 날린 한무화가 온 체중을 실어 강준걸의 몸 위로 주먹을 휘둘러 내려--.

“그만!!”

심판이 다급하게 고함을 쳤다. 동시에 전자판의 숫자가 0.00으로 바뀌며 제한 시간이 끝났음을 알린다. 그리고,

콰직.

강준걸의 목 바로 옆, 대련단에서 아슬아슬하게 비껴 낸 마룻바닥에 한무화의 주먹이 틀어박혔다. 나무판이 쪼개져 쩌억 금이 갔다. 주먹의 옆면이 강준걸의 목에 닿을락 말락 한다.

커다랗게 눈을 부릅뜬 강준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얼어붙은 얼굴 위로 뚝, 짐승의 땀방울이 한 방울 떨어진다. 강준걸이 목덜미를 움칫했다.

그다음 순간 한무화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시무시한 기백을 피워 올리던 맹수는 어느새 그 열기를 갈무리하고 무심한 낯을 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흐트러진 옷깃을 단정히 정리한 그는 넋 나간 얼굴로 느릿느릿하게 일어선 강준걸과 마주 인사를 하곤 대련단에서 내려갔고, 대련단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던 사범의 지시에 따라 도장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도장 안에는 그들을 지켜보던 정련, 체련의 정원사범을 위시한 주요 사범들만 남았다.

“이건 무승부로군.”

“제한 시간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대단히 뜻밖의 결과가 나왔을…….”

사범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에는 놀란 기색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서정운의 옆에서 한호영도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 저런 괴물이 다 있어……. 호락호락 금방 지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설마 준걸이랑 호각으로 겨룰 줄은 정말로 몰랐는데. 아무리 그래도 몇 년은 더 걸릴 줄……. 사형, 사형이 여태 괴물을 돌봤다니까요.”

“팔……. 저 멍청이, 저 정도면 틀림없이 인대가 상했을 텐데.”

그러나 서정운은 한호영에게는 대꾸하지 않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그렇게 심하진 않을 거예요. 전에 보니까 무화, 혼자서도 웬만한 부상은 처치 잘하더라고요. 다른 사람이 도와주려니까 혼자 하는 게 더 익숙하다고 자기 스스로 하던데, 외려 남이 처치해 주는 것보다 더 잘하더만.”

지금쯤 테이핑하고 있을 거예요, 라며 한호영은 말을 이었다.

“체련 선수가 이긴 셈이니 맘 편히 감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속은 좀 시원하네. 준걸이 저거 속이 좁아터져서, 그날 뒤로 사형 험담깨나 하고 다니더라고요. 언제 한번 날 잡아서 야단 좀 쳐 줘야지 했는데, 오늘 아주 체면 제대로 구겼네.”

그런 것 따위는 알 바 아니다. 누가 욕을 하든 말든 서정운은 그런 건 애초에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그보다도,

“저 어깨 저거, 테이핑하기 전에 찜질 먼저 해야 할 텐데.”

서정운이 인상을 찌푸린 채 중얼중얼하자 한호영이 혀를 찼다.

“어련히 알아서 잘 안 하고 있을까 봐. 쟤 웬만한 의무반보다 응급 처치 잘하더라니까요. 대련하다가 저 정도 다치는 건 흔한 일인데 뭘 유난이에요. 아, 그보다 사형, 오늘 사범 수련 합숙 인원도 확정됐고 내일 휴일이기도 한 김에 본산 젊은 사범들 몇 명 모여서 회식하려는데 사형도 같이 가요. 무화한테도 오라고 했어요.”

“나 저녁에 도로 일하러 가야 돼. 마무리 남았어. ……아니 그것보다, 넌 지금 애가 다쳤는데 술 마실 기분이 나냐?!”

속이 상한 서정운이 애꿎은 한호영에게 버럭 소리쳤을 때였다.

“서정운 사범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때 갑자기 서정운에게 화살을 던지는 인물이 있어 돌아보자, 한수일이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러자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있던 한태일을 비롯, 다른 사범들도 일제히 서정운을 본다.

여태 이 대련의 최초의 목적--한무화의 사범 수련 합숙 참가 여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범들의 앞에서, 한수일이 다시 질문을 되풀이했다.

“정무도 정련의 사범인 자네가 보기에, 체련의 한무화 선수가 아직 단이 없는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사범 수련 합숙에 참가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보나?”

조용한 실내에서 서정운에게 시선이 모였다. 의심, 비난, 격려, 호기심, 일일이 헤아리기 힘든 감정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한수일을 마주 보던 서정운은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제가 지도한 선수 중에서도 손꼽히게 뛰어난 선수입니다.”

장내가 술렁였다. 정련 측 사범들이 보내는 비난의 시선이 짙어진다. 서정운의 여상한 시선이 문득 스승의 위에서 멎었다. 한무화가 대련단에 서 있던 때부터 한태일은 줄곧 언짢은 얼굴을 하고 있긴 했지만 서정운에게 보일 듯 말 듯 아주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때 한수일이 다시 말했다.

“흠. 이후로는 자네가 지도할 일은 없을 터이네만, 여하튼 좋네. 그러니까 자네는 무화가 사범 수련 합숙에 참가해도 무방하다는 게지?”

이제 더 이상은 네가 가르치는 선수가 아니다--라고 명확하게 경계를 긋는다. 볼일이 끝나니까 당장 팽개치는구나. 하지만 뭐 그러려니 했다. 이렇게 될 줄도 알고 있었다. 정련과 체련의 사이는 물과 기름이니, 비록 큰 어르신이 핑곗거리가 되어 주었다고는 하나 정련의 서정운이 체련의 한무화를 지도한 것부터가 대단히 특이한 예였던 것이다.

서정운은 재차 못 박듯 묻는 한수일을 비롯, 좌중을 둘러보았다.

“굳이 시간 낭비할 필요 있습니까? 이게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인지부터가 의문입니다. 한무화 선수가 사범 수련 합숙에 참가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그건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어느 분의 눈에도 명백한 일 아닙니까?”

뻔한 일, 뻔한 결론을 두고 노인네들이 쓸데없는 신경전이나 벌이는 이런 자리가 처음은 아니지만 지금은 한층 더 짜증 나고 초조한 서정운이었다. 지금 애가 다친 판국에!

서정운은 말을 마치자마자 일어서 자리를 떴고, 그 뒤로 “아니 저저저저 버릇없는!”, “거참 여전히 무례한 인사로다.” 하고 욕하고 혀를 차는 소리들이 따라왔지만, 그런 소리들은 도장 문을 닫고 나오자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정운은 본채의 도장을 이용하게 되는 경우 으레 선수들의 대기실로 쓰이곤 하는 별실로 건너갔다.

한무화는 그곳에 있었다. 그곳에 혼자 반듯하게 정좌하고 앉아 있다. 그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뭔가 썩 유쾌하지 않은 듯 미간에 주름이 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서정운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멈춰 섰고, 그제야 서정운에게 시선을 준 한무화는 표정 없는 얼굴로 돌아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길 필요 없다고 했잖아.”

서정운이 혀를 차며 다가가자 한무화의 미간에 다시 주름이 떠올랐다.

“무승부였습니다.”

이거였구나. 기분이 편치 않은 이유가.

이길 거라고 생각했던가. 무승부만 해도 모두가 크게 놀라 마지않는 결과인데, 심지어는 한무화 쪽에 무게가 실린 무승부였음에도.

뜻밖에 욕심 사나운 데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긴 거야. 다치면서까지 이길 필요라곤 없었는데.”

서정운은 한무화를 나무라며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한무화는 흘끔 서정운에게 시선을 주더니 천천히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준걸이는?”

“본산에 가 있겠다며 그리로 넘어갔습니다.”

하긴 그 속 좁고 자존심만 센 놈이 체면 구긴 마당에 그 상대와 나란히 앉아 있을 리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 바 아니다.

“어깨 좀 보자. ……벌써 처치 마친 거야?”

아무리 처치가 능숙하다곤 해도 한무화가 자리를 뜬 뒤로 서정운이 여기 오기까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 서정운이 의아하게 묻자 한무화가 “아니요, 아직.” 하고 고개를 젓더니 옆에 놓여 있던 약상자를 내민다.

“사범님이 해 주시겠다고 하실 것 같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정운은 약상자를 열다 말고 물끄러미 한무화를 보았다. 한무화는 왜 그러냐는 듯이 서정운을 보곤 무심히 도복을 벗는다.

어쩌지. 어쩜 좋을까. 이 착하고 순한 강아지 같은 남자가 너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또 마음이 욱신거린다.

그러나 심장이 뛰어 허둥거리던 서정운은 한무화의 드러난 어깨를 보자 금세 가슴이 싸하게 가라앉았다. 불그스름하게 멍이 들어 부어 있다. 염려했던 것만큼 심해 보이지는 않아 그나마 다행이긴 했지만, 그래도 상당히 아플 터였다.

서정운은 조심스레 그의 어깨를 매만져 보았고, 한무화는 제법 아플 텐데도 그런 내색이라곤 전혀 없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인대가 약간 늘어난 것 같은데, 병원에 갈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일주일 정도면 말끔해질 겁니다.”

“…….”

말없이 일어서 방에서 나간 서정운은 본채의 주방으로 가 얼음을 대접 가득 얻어 왔다. 비닐에 얼음을 넣고 마른 수건으로 감싸 한무화의 어깨에 얹으며 다시금 혀를 찬다.

“몸 상해 가면서까지 이길 필요는 없는 대련이었는데.”

“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승부욕이 많은가 보지.”

서정운은 한무화를 쳐다보며 의외라는 투로 말하자, 한무화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는 걸 싫어하긴 합니다만, 승부에 그렇게까지 집착하는 편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랬어. 지더라도 승패 자체는 아무 상관이 없는 대련이었는데.”

“그 남자가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한무화의 대답은 간결했고, 또한 뜻밖이었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라곤 없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나 보다. 서정운은 그의 어깨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나도 그렇긴 하지만 마음에 안 드는 남자 때문에 네가 다치는 건 더 마음에 안 들어.”

그렇게 말하며 얼음 수건을 한 번 뒤집어 주는 서정운을 한무화가 빤히 내려다보았다. 수건 아래에 벌겋게 부어 있는 어깨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서정운을 바라보던 그가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서정운은 한무화를 올려다보곤 피식 웃고 말았다. 그걸 보고 한무화도 느슨하게 표정을 푼다.

“준걸이는 괜찮나 모르겠네. 그 녀석도 꽤 호되게 맞은 것 같던데.”

“괜찮을 겁니다. 뼈 있는 곳이나 위험한 곳은 피했습니다. 사범님은 사람 다치는 거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서정운은 눈을 껌벅이며 한무화를 보았다.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대수롭잖게 말한 남자는 얼음 수건 위로 어깨를 주무르며 몸을 가늠해 보고 있었다. 서정운은 웃고 말았다.

“그래서 네가 다치고?”

“이 정도는 다친 축에도 들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변명처럼 대답하다가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이는 한무화에게, 이번에야말로 서정운은 소리 내어 웃는다.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정말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사랑스러워서.

서정운은 한무화의 머리를 북북 헝클어뜨리듯 쓰다듬었다.

“잘했어. 반만.”

반만……, 하고 중얼거리던 한무화는 생각에 잠기는 기색이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도로 살살 단정하게--라고 해 봐야 머리카락이 짧아서 헝클어지나 단정하나 비슷비슷했지만-- 쓰다듬어 주는 서정운에게 그가 진지하게 묻는다.

“그러면, 대련을 잘하면 제가 원하는 걸 해 주겠다고 하신 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

서정운은 눈을 껌벅였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었던 것 같다. 대련 잘하면 밥이라도 사 주겠다고. 아, 그러다가 원하는 걸 해 주는 걸로 됐던가. 서정운은 선물을 기대하는 아이처럼 자신을 응시하는 한무화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해 주지 뭐. 뭘 해 줄까?”

“그러면 사범 수련 합숙에 참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한무화의 대답은 미리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선선히 돌아왔지만, 서정운의 대답은 선뜻 나가지 않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요구였다. 동시에, 풀려난 발목이 다시 붙들리는 듯한.

“……왜.”

“더 알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 부족한 점. 보완할 점.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을지.”

정면으로 시선을 주고 있는 한무화에게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던 서정운은 더듬더듬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일단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아침에 식사 자리에서 큰아버지가 할아버지와 말씀 나누시다가 서정운 사범님께 참가 의향을 물어봐야겠다고 하셨습니다. 서정운 사범님이 결정하실 수 있을 겁니다.”

“…….”

서정운은 다시 말을 잃고 물끄러미 한무화를 보았다. 침착하게 답을 기다리듯 서정운을 보고 있던 한무화는 문득 시선을 떨어뜨렸다 들더니 한풀 꺾인 음색으로 말한다.

“싫으시면, 밥을 사 주셔도 됩니다.”

그것은 굳이 강요하지 않는 부드러운 단념이었다. 그러나 서정운의 대답을 기다리는 한무화의 시선에는 분명한 욕망이 담겨 있었다. 더 나아지고 싶다. 더 나아지기 위해 그에게서 어떤 사소한 도움이라도 받고 싶다. 그게 필요하고, 그걸 원한다.

그 갈망, 목마른 욕심을 서정운은 알고 있었다.

이 남자는 이렇게나 정무도에 욕심이 많구나.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대신 오로지 거기에만 목말라 있다.

서정운은 그것을 한 방울쯤은 채워 줄 수 있을 터였다. 넘칠 듯 말 듯 한 그 풍요로운 자질 위로, 한 방울.

“--.”

서정운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연다.

“뭘 먹고 싶은데?”

한무화는 말없이 서정운을 보았다. 무심한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스치는 듯했지만 이내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글쎄요, 지금 생각나는 건 국수 정도인데요.”

“국수……, 그 집 국수? 그래, 먹으러 가자.”

서정운은 얼음 수건을 치우고 한무화의 어깨를 가만히 만져 보았다. 이 정도면 테이핑을 해도 되겠다. 약상자에서 붕대를 꺼내며 고갯짓하자 한무화는 약간 팔을 벌려 준다. 조금씩 팔과 어깨를 움직여 가며 불편하지 않도록 붕대를 감으며 서정운이 말했다.

“수련 합숙 전에 가자. 합숙 시작하면 밤에 국수 먹으러 나오기도 귀찮아질 정도로 지치거든.”

“그 정도 체력은 됩니다.”

“너야 그렇겠지만 난 그 정도 체력이 안 되거든.”

서정운의 손길에 따라 조금씩 어깨를 움직여 주던 한무화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빤히 서정운을 본다. 찜질을 조금 더 할 걸 그랬나, 하고 중얼거리다 한무화와 시선을 맞춘 서정운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국수는 네가 사.”

“--, 예.”

한무화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에 넉넉하게 웃음이 번졌다. 부드럽게 접히는 눈매도, 둥글게 휘는 입매도 사랑스럽기 그지없어 서정운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바라는 건 뭐든 해 주고 싶은데 어쩌겠어.

“얘기를 꺼내니까 먹고 싶어지네. 오늘 밤에 먹으러 갈까? 난 지금 바로 일 마무리하러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일 끝나면 시간이 좀 늦어지긴 하겠지만.”

“아, 오늘은 안 될 것 같습니다. 오늘은 회식이 있다고 해서요.”

선뜻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칫한 한무화가 고개를 저었고, 서정운은 그제야 아까 한호영이 오늘 본산 사범들 몇몇이 회식할 건데 오라느니 어쩌니 했던 얘기를 떠올리며 “아아, 그거.” 하고 말했다.

“가려고? 쉬는 게 낫지 않겠어?”

“본산에 온 뒤로 회식 자리는 처음이기도 하고, 그런 자리에서 서로 얼굴 익혀 두는 것도 좋다고 아버지가 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사범님은 안 가십니까?”

원래 술자리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아서 썩 내키지는 않는데, 하고 생각했지만 서정운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나도 가지 뭐. 일 끝나고 갈게. 국수는 내일 해장 삼아 먹든가 해도 되겠네.”

한무화는 “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한무화와 시선을 마주친 서정운은 빙긋이 웃고는 붕대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마저 붕대를 감고 테이핑을 마친 서정운은 불편한 데가 없는지 한무화에게 묻고는 핀으로 고정했다. 제대로 고정되었는지 확인하면서 “그런데,” 하고 말한다.

“수련 합숙에 네가 참가 못 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한무화의 웃음이 뚝 멎었다.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지, 뚫어져라 서정운을 쳐다보는 얼굴은 허를 찔린 기색이다.

참가 못 하게 되어도 괜찮다고 말했었던 한무화는, 그러나 이제는 괜찮지 않은 눈치였다. 무표정한 얼굴 아래 제법 묵직한 염려를 담고 도장 쪽--주요 사범들이 그의 참가 여부를 한창 논의하고 있을 그곳--을 바라본다.

“그러게요…….”

그 무뚝뚝한 음색에도 그답지 않은 염려가 실려 있어서, 서정운은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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