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3)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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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운이 작업을 마무리하고 자정이 훨씬 넘어 돌아왔을 때에는 외당 한 채가 통째로 술에 절어 있었다.

회식을 외당에서 한다고 했을 때부터 이놈들이 맘 편히 밤새워 술 퍼마시려고 그러는구나 싶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새벽 한두 시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하나같이 시체가 되어 뻗어 있을 줄은 몰랐다.

“한창 마시는 중일 줄 알았더니 어째 멀쩡한 놈이 하나도 없어……?”

서정운은 웃옷을 벗으며 황당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늘 더불어 술잔을 기울이기로 했다는 여남은 명의 사범들이 죄다 고주망태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제정신인 놈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 무화는 안 보이지, 하고 쓰러져 있는 면면들을 훑어본 서정운은 바로 앞에서 한 손에 술잔을 움켜쥐고서 술상에 머리 대고 쓰러져 있는 한호영의 뺨을 가볍게 철썩철썩 때렸다. 이놈도 “으으으으.” 하고 중얼거릴 뿐 반응이 없다.

“아니 고작 두세 시간 전에 통화하면서는 멀쩡하더니만…….”

서정운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웃었다. 저녁에 스승에게 전화해서 사범 수련 합숙에 참가하겠다고 말씀을 드리자 얼마 안 있어 그 소식이 전해졌는지 한호영이 전화를 했었다. 사형이 어쩐 일이냐고 몹시 놀라 하고 기뻐하면서.

그때만 해도 목소리가 또렷하고 멀쩡했는데 그새 인사불성이다.

“어이, 한호영이, 일어나 봐. 다들 왜 벌써 이 꼴이야?”

서정운이 멱살을 잡고 흔들자 한호영이 으으으으, 하다가 갑자기 움찔하더니 목 졸린 음색으로 “나, 나 화장실……, 우욱…….” 하며 손으로 입을 덮는다. 젠장, 욕설을 지껄이며 한호영을 질질 끌고 화장실로 데려가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게워 내기 시작했고, 서정운은 이대로 이놈을 변기에 처박아 버릴까 고민하며 그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정신 좀 들어? 얼마나 퍼마셨길래 이래.”

“사, 사형……, 언제 오셨……, 우욱,”

“골고루 한다, 아주.”

혀를 끌끌 차며 한호영이 구역질을 멈출 때까지 등을--감정을 실어 힘껏-- 두드려 준 서정운은, 이제 됐다는 듯 비칠비칠 세면대로 가 입을 헹구는 한호영에게 물었다.

“시간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얼마나 마셨어.”

“모르겠어요, 그냥 아주 쉬지 않고 들이붓긴 했는데…….”

“쯧쯧, 젊지도 않은 놈이 무리를 하고 그래. 그런데 무화는? 왜 안 보여?”

갑자기 한호영의 퀭한 낯빛이 한층 더 퀭해졌다. 우읍, 하고 입을 붙드는 게 또 토하기라도 할 기세다.

“그놈 얘기는 하지도 마세요. 그놈 완전 밑 빠진 독…… 우욱,”

“야, 야, 야, 이리 오지 마, 변기 네 옆에 있잖아.”

또다시 한바탕 꾸엑꾸엑 구역질을 한 한호영이 시커먼 몰골로 해 준 이야기는 자업자득이나 다름이 없었다. 온 사람들의 주목을 일신에 모은 놀라운 슈퍼 루키와 처음으로 함께하는 술자리이고 하니, 이놈을 집중포화해서 술독에 담가 보자는 게 여남은 명이 암암리에 합의한 목표였단다. 그리하여 말술인 그들이 한 잔 먹을 때 슈퍼 루키에게는 두 잔, 세 잔 강권하는 전형적인 체육계 술판이 벌어졌고, 그 결과로--.

“괴물……, 그놈은 괴물이에요, 사형…….”

그렇게 구역질을 하고도 술기운이 빠지지 않는지 한호영은 흐느적거리며 술판으로 다시 돌아가 픽 쓰러져 버렸고, 금세 죽은 듯이 곯아떨어져 버리는 그놈을 찰싹찰싹 때리며 “야! 지금 애를 그렇게 술을 먹여 놓고, 애가 없어졌는데 잠이 오냐? 잠이 와?!” 하고 서정운이 외쳤지만 깨어날 기미는 없었다.

서정운은 바닥에 줄줄이 늘어져 있는 시체 더미를 보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이놈들 죄다 하나같이 말술들인데, 이놈들이 이렇게 되도록 술을 먹였다면 한무화도 멀쩡하지는 않을 텐데 대관절 어디 가서 안 보이는 거야.

혀를 찬 서정운은 어쨌든 어디 쓰러져 있을지 모르니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외당에서 나섰다. 그러나 그가 막 문을 열고 대청으로 나와 섬돌 위로 내려서려 할 때,

“서정운 사범님? 언제 오셨습니까?”

돌계단 아래에서 올라오던 시커멓고 커다란 인영과 마주쳤다.

한무화다.

염려로 마음이 초조해졌던 서정운은 맥이 탁 풀려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계단을 올라와 그 앞에 멈춰 서는 한무화를 보고는, 뭐야 생각보다 아주 멀쩡하잖아, 라고 생각한다.

“어, 좀 전에. 어디 갔다 왔어?”

“누렁이 잘 있나 보고 왔습니다.”

이 오밤중에 뜬금없이 웬……, 하고 생각하던 서정운은 불현듯 물씬 풍겨 오는 술 냄새를 맡았고, 그다음 순간 한무화가 멀쩡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걸 취소했다. 얼핏 멀쩡해 보이긴 하는데 아주 살짝씩 몸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래, 하긴 저 말술들을 혼자 다 상대해서 눕혀 버리고 이 정도면 충분히 괴물 소리 들을 만하다.

“너 많이 마셨지. 몸도 안 좋으면서 주는 대로 퍼마시는 놈이 어딨어.”

서정운은 혀를 차며 한무화를 데리고 대청으로 올라섰다. 혼자 신발 벗고 잘 올라오긴 하는데 역시 몸을 구부리거나 펴거나 할 때마다 조금씩 몸이 휘청거린다. ……그런데 그게 또 귀여워 보이니, 술 한 방울 안 마신 자신이 더 제정신이 아닌 것 같긴 했다.

“너 주량이 얼마야.”

“센 적이 없어서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좀 과하게 마시긴 한 것 같습니다.”

“술버릇은 없나 보지?”

“대체로 없는데, 기억이 끊기는 경우는 가끔 있긴 합니다. 하지만 별로 심하지는 않고, 보통은 그냥 잡니다.”

“그 정도면 양호하네. 과하게 마셨다면서 왜 안 자. 그러잖아도 오늘 피곤했을 텐데.”

변함없는 무표정도 그렇고 목소리도 그렇고 아주 멀쩡한 것 같은데 몸만 흔들흔들한다. 전혀 이 남자답지 않은 그 모습이 우스워서 서정운은 픽 웃고 말았다.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선 한무화는 술에 절어 사방에 늘어져 있는 시체들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이제 자도 될 것 같습니다.”

“왜.”

“술을 권할 사람은 더 이상 남지 않은 것 같아서요.”

서정운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은근히, 아니 대놓고 승부욕이 있는 놈이다. 제 입으로는 승부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지는 걸 엄청나게 싫어하는 놈이었다.

서정운은 컵에 물을 가득 따라 건네주었다. 쌀쌀한 밤공기가 들어오고 있는 창문을 닫고 돌아온 한무화가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 들어 단숨에 들이켠다.

“너 내일 되면 속깨나 아플걸.”

“해장 국수 마시고 풀면 됩니다.”

얘 왜 이렇게 귀엽지. 서정운은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한무화는 그래도 머리가 묵직하기는 한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눈꺼풀도 무거워 보인다. 곧 자겠는걸, 하고 서정운이 생각했을 때 그가 불현듯 떠오른 듯이 말했다.

“저 사범 수련 합숙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응, 들었어. 잘됐어.”

한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동안 머리를 짚고 그대로 벽에 기대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저대로 잠든 건 아닌가, 방으로 옮기는 게 좋겠다, 서정운이 그렇게 생각하고 막 다가서려 할 때,

“계속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는데,”

한무화가 중얼거렸다.

“진창에 박혀 있는 것 같았는데, 요즘은 조금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뻑뻑하게 굳어 있던 진창이 조금 묽어진 것 같아요. ……어서 걸음을 내디뎠으면 좋겠습니다.”

혼잣말처럼 희미한 목소리에는 어렴풋한 열기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간절한 바람이다. 평생이 걸려도 된다. 그래도 묵묵히 견디며 꾸준히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간절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머지않아 그럴 수 있을 거야.”

한무화가 시선을 들어 서정운을 보았다. 반쯤은 잠들어 있는 것처럼 노곤하고 불그스름한 시선을 마주 보며 서정운은 한 번 더 조용히 말했다.

“그럴 수 있어. ……그러니까 오늘은 이만 쉬어.”

한무화는 잠시 더 서정운을 바라보았다. 그 눈매가 천천히 내려갔다. 마치 안도하고 그대로 의식을 놓아 버린 것처럼,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던 그는 눈을 감더니 느릿느릿 미끄러져 내린다.

서정운은 얼른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어깨 위로 무겁게 무너지는 한무화를 받쳐 들고는 일순 휘청했다.

“무화야……, 무겁다……. ……자니……?”

서정운이 애써 버티며 말해 봤지만 돌아오는 건 술 냄새 물씬 풍기는 숨소리뿐이었고, 그 무거운 몸은 점점 더 축 처졌다. 이거야 완전 곯아떨어졌다.

“너랑 나랑 한 체급 넘게 무게 차가 난다는 걸 좀 고려해 줬으면 좋겠는데……. 난 운동도 몇 년이나 쉰 몸이란 말이야…….”

어미 품에서 긴장을 푼 강아지처럼 축 늘어지는 한무화의 한쪽 팔을 어깨에 걸머멘 서정운은, 그러나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곤 더 이상 군말 없이 비척거리며 그를 옮겼다.

저 시체들 사이에는 마땅히 놓을 만한 데가 없어 안쪽 방으로 데려가 눕혔는데, 고작 그것만으로 어깨가 뻐근해졌다.

이놈이 무거운 건 사실이지만 나도 근력 운동을 너무 안 한 모양이다, 한무화를 바닥에 얌전히 눕히고 난 서정운은 그 옆에 앉아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어깻죽지를 주물렀다. 한무화를 내려다보자 그는 세상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렇게 좋을까.”

정무도가. 그 힘들고 고생스러운 게.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것이 빈말이라는 걸 서정운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서정운도 그렇게 열중했었다. 이제는 그 길에서 내려섰어도 그때의 그 느낌, 바람, 갈망, 환희, 그런 것들은 고스란히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제는 자신의 몫이 아닌 것들이다. 그것은 이제 이 남자의 몫으로, 이 남자가 좇고 있었다.

“…….”

그래, 그런 널 보니 좋다. 네가 원하는 길로 갔으면 좋겠다. 나의 아쉬움과 나의 부러움 따위는 스러져 버릴 정도로 네 앞길이 눈부셨으면.

서정운은 가만히 손을 뻗어 한무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깊은 잠에 빠져 알 도리도 없을 텐데 그가 나직하고 편안한 한숨을 내쉰다. 약간 고개를 기울이는 게 마치 서정운의 손에 머리를 비비는 것 같아 서정운은 피식 웃고 만다.

머리를 쓸어내린 손이 그의 뺨에 닿았다. 일순 움츠러든 손가락은, 그러나 천천히, 조심조심, 그의 뺨을 쓸어 본다.

좀 더 거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부드럽다. 그게 왠지 신기해 가만가만 뺨을 쓸어내리는 손가락 끝에 턱의 까슬한 느낌이 닿았다. 턱에 수염이 자라는 그 까끌거리는 느낌은 서정운도 매일 아침 면도를 할 때마다 느끼는 건데, 그것마저 기묘한 기분이 들어 가만히 그의 턱을 어루만졌다. 그러다 언뜻 손가락 끝에 닿는 입술.

“…--.”

살짝, 살짝, 아주 조심스럽게 쓸어 본다. 굳게 다물린 입술은 말라 있었지만 부드러웠다.

어떡하지. 너무 부드럽잖아. 아니 사실 그렇게까지 부드럽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래도 엄청나게 부드러운 감촉이다. 손끝이 녹는 것 같아. 어떡하지. 굉장히, 굉장히…….

--갖고 싶어. 딱 한 번만이라도.

그 생각이 머리를 스쳤을 때는 이미 서정운은 가만히 고개를 떨어뜨려 한무화에게 입 맞추고 있었다. 입술에 닿는 메마른 느낌은, 그러나 숨이 멎도록 부드럽고 기분 좋았다.

“…….”

그때 한무화가 얼핏 고개를 돌렸다. 서정운은 움찔 입술을 떨어뜨리며 꽁꽁 얼어붙었다. 숨죽이고 그대로 굳어 있는 서정운의 아래에서 한무화는 그저 뒤척였을 뿐인 듯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술 냄새가 섞인 숨결이 서정운의 턱 끝을 간질인다. 그 냄새에 취할 것 같았다.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서정운은 다시 고개를 떨구고 만다. 입술이 닿는다. 어떡하지, 조금 전보다 더 달다.

술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넋 놓고 살짝살짝 입술로 그의 입술을 쪼던 서정운의 귀에, 문득 한무화가 낮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꼬대인 듯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는 자세히 귀 기울여 보니 누군가에게 영어로 건네는 말이었다.

『바넷사, 지금은 좀 자야겠어, 나중에.』

그렇게 중얼거린 한무화는 가볍게 턱을 들어 서정운에게 입을 맞춘 뒤 그대로 잠들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한무화가 먼저 입술을 스치자 움찔해서 얼어붙었던 서정운은 깊고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는 한무화를 내려다보는 사이에 어쩐지 마음이 쓰려 왔다.

바넷사, 그게 여기 오기 전에 사귀었던 애인의 이름인가. 그녀는 종종 이렇게 입 맞추었던 모양이지. 그러면 그 역시 마주 입 맞춰 주고. 그게 아무렇지 않고 당연한 관계였던 거다.

서정운은 가슴속이 묵직해졌다. 누군가는 이 사랑스럽고 탐나는 남자를 당연한 듯이 차지했었다. 그게 왠지 마음 아프고 또 속이 상해 서정운은 한무화의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깨지 않을 정도로 살짝, 상처도 나지 않도록. 그렇게 잘근잘근, 통하지도 않을 화풀이처럼 조심조심 깨문다.

그때.

한무화가 한숨을 쉬는가 싶었다.

『바넷사, 나는 지금 졸리다니까. ……그래, 알았어.』

잠에 취해 중얼거린 그는 손을 뻗더니 서정운의 뒷머리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그리고 그대로 끌어당겨 입술을 겹친다.

“--.”

그것은 여태 새처럼 살짝살짝 입술을 쪼았던 접촉과는 다른, 숨 막히도록 농밀한 입맞춤이었다. 혀뿌리까지 삼켜 버릴 것처럼 깊게 혀를 얽으며 빨아 당기는 감각에 머릿속이 아찔하게 흐려진다. 마신 적도 없는 술이 겹쳐진 입술을 통해 그에게서 고스란히 흘러드는 것 같았다.

잠시 그렇게 입술을 탐하던 한무화가 입을 떼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의 입술은 이내 서정운의 뺨에 여러 번 입 맞추며 스쳐 가 귓불에 닿는다. 선뜩하게 몸을 움츠린 서정운의 귓불을 부드럽게 깨물며 애무하던 한무화는 입술을 목덜미까지 미끄러뜨렸고, 잠시 그 근처를 지분거리다가 귀 아래쪽을 따끔할 정도로 깨물었다.

“--!”

순간 짧게 소리를 낼 뻔했던 서정운이 몸을 움칫한 것과 동시에, 한무화의 입술은 다시 귓불로 돌아왔다. 그리고 속삭인다.

『됐지……? 그만 자고 나머지는 나중에 하자…….』

가볍게 서정운을 끌어안은 한무화는 마지막으로 한 번 입술에 입 맞추곤 천천히 서정운의 등을 다독였다. 한 번, 두 번 두드리던 그 손은 이내 느려지다 힘을 잃고 툭 떨어진다.

그곳에 남은 것은 머릿속이 어지러울 만큼 지독한 술 냄새와 곤하게 내쉬는 깊은 숨소리, 그리고,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휘저은 양 아무 생각도 제대로 할 수 없이 뺨도 귀도 목도 새빨개져서 숨도 못 쉬고 굳어 버린 서정운뿐이었다.

결국 서정운은 뜬눈으로 꼬박 밤을 지새웠다.

무슨 정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반쯤 혼이 나간 것 같은 상태로 안쪽 방에서 나와 한동안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어느 순간에야 큰 방에서 흘러나오는 고주망태들의 잠꼬대며 코 고는 소리, 이 가는 소리 등의 기척을 듣고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본산에 소속되어 있는 젊은 사자들, 장래가 촉망되는 사범들이라고 하면 누가 믿을까 싶을 정도로 나태하고 추한 꼬락서니로 널브러져 있는 후배들을 넘어 다니며 빈 술병도 모아 놓고, 더러운 테이블도 정리하고, 심지어는 바깥에 마구 벗어 던진 신발까지 정돈했다.

그런 뒤에는 켜켜이 겹쳐져 불편하게 자고 있는 후배들을 좀 가지런하게 눕혀도 주고, 개중 미운 후배 놈들은 괜히 뺨을 찰싹 때려도 보고, 그 와중에 옆 놈이 뺨을 맞으니까 잠결에도 눈치 빠르게 다음 차례는 저라고 생각했는지 지레 두 팔 들어 얼굴을 가리며 “사형……, 아파요……, 아파요……,” 하고 부들부들 엄살을 부리는 한호영은 발로 한번 밟아도 주고, 그렇게 조르륵 누운 후배들 위로 이불도 가져다 덮어 주었다.

아무튼 닥치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움직여서 조금이라도 다른 데로 신경을 돌리지 않으면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렇게 말끔히 실내를 정리하고 고주망태들을 반듯하게 이불 덮어 눕혀 놓았을 즈음에는 그래도 꽤 시간이 지나, 환기시키려고 열어 놓은 창문 밖으로는 군청색 하늘이 조금씩 밝아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쯤 되자 날밤을 꼬박 새운 머리도 적당히 몽롱해져 금세라도 폭발할 것만 같던 머릿속도 미친 듯 두방망이질 치던 가슴속도 조금쯤은 가라앉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예 산뜻하게 기분이 복구되지는 못해서, 서정운은 따뜻한 물 한 잔 들고 나가 툇마루 끄트머리에 무릎 끌어안고 앉아 멍하니 뜰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잠들어서 의식도 없는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한 것 같다. 그런데 외려 돌아온 건 죗값이라기보다는 선물 같으니, 이래도 되는 걸까. 흔쾌히 기뻐할 수 없는 건 일말의 양심과 죄책감 탓이다.

아직껏 입술에 감각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 감각을 떠올리자 다시 숨이 막히며 심장이 커다랗게 울린다. 삽시에 얼굴이 도로 뜨끈해져서 무릎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잘하는 게 정무도만이 아니었다. ……바넷사 부러워.

본 적도 없는 여자를 부러워하며 긴 한숨을 내쉰 서정운은 어느새 제법 밝아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날씨가 좋을 성싶었다. 그러나 새벽 공기는 아직 쌀쌀해 몸을 움츠린 서정운은 조그맣게 재채기를 했다.

안 되겠다.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쳤다. 일단 지금은 모든 걸 잊고 집으로 돌아가서 따뜻한 이불 속에서 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서정운이 팔뚝을 문지르며 막 일어서려 했을 때였다. 방문이 덜컹하고 열리더니 한 사람이 어슴푸레한 새벽 공기 속으로 나왔다.

아니 저 고주망태 시체들 중 누가 벌써……, 하고 놀라워하며 돌아본 서정운은 나온 사람을 확인하고는 쩡 하니 얼어붙었다. 약간 잠이 덜 깬 것 같긴 했지만 상당히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한무화다.

조금 침착해졌나 싶던 머릿속이 삽시에 도로 아수라가 되었다.

어. 어떡하지. 아냐. 쟤는 몰라. 진정해. 괜찮아. 어쩌지.

나른함이 남아 있는 눈으로 뜰을 내려다보며 대청에 서서 찌뿌듯하게 어깨며 목덜미를 주무르던 한무화가 툇마루 끝에 앉아서 굳어 있는 서정운을 보았다. 언뜻 눈썹을 치켜올린 그가 이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사범님, 오셨었습니까? 언제 오신 겁니까?”

“어……?”

서정운은 껌벅껌벅 한무화를 보며 열심히 머릿속을 정리했다. 가만있자, 기억을 못 하나 보다. 그러고 보니 술을 넘치게 마시면 기억이 좀 끊기기도 한다더니. 그래, 그렇다면 당연히 자는 동안 벌어진 일 따위는 알 리가 만무하지.

아주 살짝 머릿속이 밝아진 서정운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웃어 보였다.

“어, 일 마치고 좀 늦게 왔어. 오니까 다들 뻗어 있더라. 다들 많이 마셨나 보지?”

“예. 평소보다 좀 과하게 마셨습니다. 방 안은 사범님이 정리해 주신 겁니까?”

“응? 어, 뭐 할 것도 없고. 나랑 마셔 줄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고. 잠도 안 와서 그냥 설렁설렁 치웠지.”

한무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정운의 옆에 앉았다. 아직껏 남아 있는 술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 왔다. 흘끗 시선을 주자 까끌하게 수염이 돋아난 턱선이 보인다. 그리고 입술. ……당장 심장이 야단을 부려 얼른 눈길을 돌려 버렸다.

“그러면 저도 사범님이 방에 데려다주신 겁니까?”

“어……? 어, 아니, 내가 왔을 땐 넌 이미 자고 있던데.”

심장이 펄떡 뛴 서정운은 얼떨결에 황급히 둘러댔다. 그런 뒤에야 방에 데려다줬다는 말쯤은 해도 됐을 텐데 싶었지만, 워낙 뒤가 켕기고 제 발이 저리다 보니 저 방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았던 걸로 해 두고픈 마음이 컸다.

한무화는 별다른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범님 오실 때까지는 버티려 했는데 어제는 사범님들이 유난히 술을 권하셔서……. 술은 그래도 센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나 봅니다.”

“……, 응, 많이 마신 것 같긴 하더라…….”

저 말술들을 모조리 눕혀 버리고 마지막까지 홀로 멀쩡하게--는 아니었지만-- 일어나 있었던 놈이 저런 말을 하니 좀 그렇다……. 당장 저기 쓰러져 있는 한호영만 해도 일당백을 하는 주당인데 저놈을 저렇게 보내 버릴 정도라니. 이놈도 정말 밑 빠진 독처럼 들이부었겠다.

그때 한무화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 저 수련 합숙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어, 들었어. 잘됐네.”

간밤에 나누었던 대화를 똑같이 되풀이하면서 서정운은 빙긋이 웃었다. 그런 서정운을 보며 한무화도 웃었다. 눈매에, 입가에 희미하게 스쳐 가는 웃음이 꼭 소풍을 앞둔 소년 같다.

에고 사랑스러워라……. 서정운은 손을 뻗어 가만가만 한무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엔 좀 희한한 눈으로 쳐다보곤 했던 한무화도 이젠 그냥 얌전히 있다.

꼭 커다란 강아지 같다. 커다랗고 순하고 예쁜 강아지. 그 강아지가 커다랗게 하품을 했다. 뻐근한지 어깻죽지도 주무른다. 서정운은 옷 아래에 붕대가 감겨 있을 그 어깨로 눈길을 주었다.

“어깨는 좀 어때.”

“괜찮습니다. 살짝 뻐근한 정도입니다.”

“들어가서 좀 더 쉬지 그래. 어제 피곤했을 테고 술도 많이 마셨는데.”

“괜찮습니다. 술은 금방 깨는 편입니다.”

그렇게 들이붓고는 몇 시간 만에 잠 깨어 멀쩡하게 걸어 나온 걸 보면 확실히 한호영이 말한 대로 괴물은 괴물이다. 서정운은 감탄 섞어 물었다.

“숙취도 없어?”

“거의 없는 편입니다. 아침을 가볍게 먹긴 합니다만. 해장으로는 멸치국수 정도면 딱 좋을 것 같습니다.”

잠시 생각하다 말하는 한무화에게 서정운은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를 했었다. 날 조금 더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먹으러 가면 되겠다.

한결 느슨해진 기분으로 뜰을 내려다보고 있던 서정운은 한무화가 두어 번 마른기침을 하는 걸 보곤 물 잔을 내밀었다. 따뜻했던 물은 이미 미지근해져 있었지만 마침 목이 말랐던 듯 단숨에 마셔 버리는 한무화에게는 외려 마시기 편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라며 빈 잔을 돌려주면서 입가에 맺힌 물방울을 손끝으로 훔치던 한무화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대로 잠시 뭘 생각하는 듯 희미하게 고개를 기웃한 그는 등 뒤로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방 안을 둘러보았다.

“더 갖다줄까? 뭘 찾아?”

“아니, 아닙니다.”

한무화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손을 내미는 서정운에게 빈 잔을 건네주며 여상하게 말했다.

“꿈에 예전 애인이 나왔는데 그 꿈이 굉장히 선명해서, 있을 리 없는데 한번 둘러봤습니다.”

덜컹, 하마터면 받아 들던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슬아슬하게 잔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받아 든 서정운은 멀쩡한 잔을 괜히 살펴보며 웅얼거렸다.

“어……, 무슨 꿈이었는데.”

“그게 예전에 가끔 있었던 일인데, 여기 오기 전까지 만났던 여자가 섹스를 무척 즐기는 편이었는데 자고 일어나는 시간대가 저와 달라서 제가 잘 때 종종 깨워서 조를 때가 있었거든요. 그럴 때 버릇이 자고 있는 제 입술을 깨무는 거였는데,”

별달리 겸연쩍은 빛도 없이 말하는 한무화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애꿎은 잔만 뚫어져라 살피며 식은땀을 흘리는 서정운이었다.

입술을 깨무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입술을 대지도 말아야 했는데. 아니 아니 애초에 쓰다듬지를 말았더라면.

“그러면 적당히 일어나서 상대하든가, 도무지 잠이 안 깨면 그녀가 좋아하는 곳에 입 맞춰서 달래 주고 자곤 했습니다. 그런데 아까 그런 꿈을 꿨는데 정말로 감촉이 남아 있는 것 같아서……,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현실감이 있었습니다.”

신기하다는 투로 중얼거리며 가만히 자신의 입술을 쓸어 보는 한무화를 서정운은 여전히 바라보지 못하고 꽃무늬 잔에 그려진 꽃잎 개수만 세고 앉았다.

“그랬구나……. 오랜만에 꿈에서 애인도 보고 좋았겠네.”

“헤어지고 왔기 때문에 별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 제가 자는 동안 혹시 누가 방에 들어왔던가요?”

아무래도 기이한 느낌이 가시지 않는지 고개를 기울이다 묻는 한무화에게, 서정운은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하고 웅얼거리며 어깨만 가볍게 들썩였다. 한무화는 하긴 그렇겠지, 라는 투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마는 눈치였다.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입을 열면 당장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역시 사람이 죄짓고는 못 사는 거였다.

다시는 이러지 말아야지……, 서정운이 마음 깊이 새길 때였다.

덜컹,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 안에서 구부정하게 몸을 구부린 한호영이 터벅터벅 무거운 걸음으로 곰처럼 걸어 나왔다. “어 속 쓰려……, 어 죽겠다…….” 하고 중얼거리며 손에 들고 나온 숙취 해소 음료 뚜껑을 따다닥 딴 한호영은 퀭하게 삭은 좀비 같은 형상으로 음료를 마시다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지, 서정운과 한무화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쿨럭!!!” 하고 음료를 뿜어낸 한호영은 순식간에 잠이 깬 얼굴로 입가를 닦았다.

“사형 거기서 뭐 해요? 안 잤어요? 무화 넌 왜 거기 있어?”

“늬들 바라지하느라 못 잤다. 왠지 모르게 주위가 산뜻하고 늬들 누워 있는 꼴이 가지런하다 싶지 않던?”

서정운이 혀를 차며 말하자 그제야 방 안을 새삼스럽게 들여다본 한호영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넌 술에 절어 죽어 가던 놈이 좀 더 누워 있지 왜 벌써 나왔어.”

“어, 아니에요. 그래도 간밤에 토하고 나서 술이 좀 깼었어요. 심신이 지쳐서 그대로 잤을 뿐이지. 무화 너는 왜 나와 있냐.”

한호영은 그들에게 다가오며 음료를 훌쩍 마시더니 “마실래?” 하고 반쯤 남은 병을 한무화에게 건네었지만 한무화는 손을 저었다.

“괜찮습니다.”

“왜, 좀 마셔. 술 깰 때 편해. 너도 숙취 심할 텐데.”

“전 거의 깼습니다. 숙취도 없고요.”

한호영은 그 말마따나 대단히 멀쩡해 보이는 한무화를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허, 하고 헛숨을 내쉬었다.

“주는 족족 다 받아 마시곤 벌써 멀쩡하게 일어나 있는 것 좀 보래……. 저보다 적게 마신 다른 놈들은 죄다 시체 돼서 누워 있는데, 이 괴물…….”

“그러게 누가 그렇게 퍼먹이래. 선배라는 놈들이 심보를 곱게 써야지, 쯧쯧.”

아주 꼴좋다고 사납게 노려보는 서정운에게 한호영이 억울하다며 투덜거렸다.

“잘하는 놈 새로 들어오면 으레 거치는 통과 의례잖아요. 그래도 나는 말렸다고요, 사형. 난 이놈한테 딱 한 잔 권했어요. 나머지는 다 다른 놈들이 권한 거라고요.”

“그래서 뭐, 잘했다고? 보니까 작정하고 애 하나 보내 버리려고 했더만.”

한호영은 무어라 입을 뻐끔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저 안에서 자고 있는 원흉들을 쳐다보았지만 그런들 그들 중 아무도 일어나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결국 한호영은 더더욱 억울한 눈으로 서정운을 보며 불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다들 한 번은 거쳐 가는 길인데 뭘……. 사형 너무 그렇게 편애하지 마세요, 간밤에도 잠결에 보니까 애 방에 눕혀 주고 한참 돌봐주다 나오는 것 같더니만.”

내 때는 술독에 파묻혀 죽어 가도 본체만체하시더니 차별 너무하십니다, 하고 툴툴거리던 한호영은, 그렇게 툴툴거리느라 깨닫지 못했다. 움찔한 서정운이 그대로 굳어 버린 걸.

시선을 뜰로 주고선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어렴풋이 웃고 있던 한무화가 문득 눈썹을 치켜올리는 것도 몰랐다.

“그러셨습니까?”

한무화가 무심히 서정운을 돌아보았다. 그 물음은 대수롭잖은 투였다. 그저 뭔가 살짝 이해를 잘못한 부분이라도 있었나 보다, 그 정도의 무게였을 뿐이다.

그러나 석상처럼 굳어 버린 채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어,”라고 우물거리는 서정운을 보고는 의아한 기색을 떠올린 한무화는, 이상하다는 듯이 서정운을 보다가 잠시 시선으로 허공을 더듬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한무화는 다시 고개를 기울이며 서정운을 보았고, 그 순간 ‘아뿔싸.’ 하는 빛이 얼굴 위로 선명하게 드러난 서정운을 보곤 의아하던 기색이 이상하다는 기색으로, 이상하다는 기색은 곧 미심스러운 기색으로 바뀌었다.

“서정운 사범님, 혹시 새벽에,”

“아니,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여상하게 물어오는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더럭 외친 서정운은 이내 아차 싶었다. 눈앞이 순간적으로 까맣게 물든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니 뭘? 하고 옆에서 한호영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는 가운데 그 자리에는 정적이 흘렀다.

아직껏 뭔가 명확지 않은 눈치로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인 한무화가 물끄러미 서정운을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시선이 서정운의 목덜미, 귓불 바로 아래에 닿는다. 거기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얼핏 미간이 좁아지는 한무화를 보고, 불현듯 새벽의 기억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친 서정운은 생각할 새도 없이 엉겁결에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하나님.

한무화는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묵묵히 서정운을 바라보았고, 서정운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 눈을 감고 말았다.

까마득하게 긴 듯하던 그 정적은 그러나 그리 길지 않았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둘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보던 한호영이 음료를 홀짝홀짝 들이켜며 미심쩍게 물었고, 그제야 한무화는 서정운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한호영을 보았다. 그러나 곧,

“서정운 사범님,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한무화는 서정운에게 직선적으로 말했고, 서정운은 그 말을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뭐야, 뭐? 왜 그러는데? 하고 영문 모르는 얼굴로 눈만 껌벅이는 한호영을 남겨 놓고 한무화는 마루에서 내려서 외당 뒤꼍으로 돌아갔고 서정운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낯을 하고서 그 뒤를 느릿느릿 따라갔다.

이대로 바닥에 지구 반대편까지 구멍이 났으면 좋겠다. 땅속으로 푹 꺼져서 여기서 사라져 버릴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영혼을 사겠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결국 서정운은 외당 뒤꼍에 멈춰 선 한무화와 맞닥뜨리고야 말았다.

한무화는 변함없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오로지 미간에 보일 듯 말 듯 한 주름만 하나 가 있었다.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미심쩍은 채로 남아 있다는 듯이.

그는 말없이 서서 그의 쇄골 언저리에만 시선을 주고 있는 서정운을 보며 입을 열었다.

“명확하지 않은 것보다는 짚고 넘어가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만, 서정운 사범님.”

“……응.”

“저 잘 때 혹시 제게 입 맞추셨습니까?”

직구가 날아왔다. 못 알아듣는 척할 여지조차 없는 솔직한 물음에 서정운은 아무 대답을 못 했다. 그러나 쇄골에서 가슴 근처로 조금 더 시선을 떨어뜨리는 서정운을 보며 한무화는 정답을 알았을 터였다.

서정운의 머리 위로 침묵이 떨어졌다. 그 침묵은 얼마 있지 않아 낮은 한숨으로 깨어졌고, 곧이어 나직하지만 명확한 말로 돌아왔다.

“서정운 사범님이 여자들과 쉽고 가볍게 어울리는 분이라는 말은 여러 번 들었습니다. 저와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는 않았습니다만, 이런 장난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냐.”

서정운은 시선을 들었다. 한무화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떨렸지만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장난 아니었어.”

장난이라니. 내가 너한테 그런 걸로. 그럴 리 없다. 그럴 수도 없다.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한 번도 너를 가볍게 여긴 적이 없었다. --그래서 기어이 서정운은 한숨처럼 속삭이고 만다.

“네가 좋아서 그랬어.”

그것은 한무화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말이었나 보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 얼핏 기묘한 빛이 스쳤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놀란 것도 같고 난감한 것도 같고 이상한 것도 같은, 그 얼굴을 차마 더 볼 수 없어 서정운은 도로 시선을 떨구었다.

입이 바싹 마르는 것 같다. 심장이 울렁거려 메슥거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내가 이렇게 심약한 인간이었던가. 만일 이런 상황에서는 모두가 다 이런 거라면, 여태 날더러 좋다고 했었던 여자들도 모두 이런 기분이었던 걸까. 아아, 그래서 벌을 받는 건지도 모르겠다.

“미안해.”

서정운은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네가 좋아. 처음부터 좋았어.”

이렇게 고백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렇게 얼결에, 어설프게.

한무화는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사범님이 좋아한다는 사람이 있다고 했었던 게 저였습니까?”

서정운은 고개를 끄덕였고, 한무화는 다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희미하게 난감한 기색이 떠오른 얼굴만 봐도 결론은 이미 알 수 있었건만, 이런 때마저 서둘러 결론을 내지 않고 차분히 생각한 그는 얼마간의 시간 끝에 입을 열었다.

“생각해 봤습니다만,”

“--.”

“저는 서정운 사범님을 높이 사고 있습니다. 정무도를 하는 데 있어 실력도 두말할 나위 없거니와 누구보다도 눈이 정확하고 뛰어납니다. 인간적으로도, 비록 나쁜 평판이 많고 그 소문의 내용은 제가 싫어하는 부분이긴 합니다만, 서정운 사범님을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서정운은 한무화를 보았다. 이제는 읽기가 쉬워진 그 무표정을 살핀다. 거기에는 위로도 가식도 없었고, 그러나 경멸이나 비난도 없었다.

“하지만 저는 남자를 상대로는 성적으로 끌리지 않고, 불쾌할 것까지는 없지만 딱히 유쾌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서정운 사범님의 그런 말씀은 달갑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을 맺는 한무화는 담담했다.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빛으로 그저 예사롭게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게 더욱 현실을 명확하게 알려 주는 것 같아서, 차라리 화를 내거나 비난을 했더라면 더 편했을 것 같다고 서정운은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이며 진실이었고, 한무화는 담담하게 서정운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래.”

서정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들어 한무화를 보았다. 묵묵히 서정운을 보던 그는 어렴풋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뭔가 생각지 못한 것이라도 본 것처럼.

“그래, 알았어. 당황하게 해서 미안해.”

서정운은 선선히 말하며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이런 식으로 알릴 생각은 없었어서, 나도 좀 당황했어. 간밤에는 얼결에 실수했고……. 미안. 앞으로는 너 곤란하게 안 할게.”

한무화는 어딘지 기묘하다는 빛으로 서정운을 내려다보다가 다시금 고개를 꾸벅한다.

“죄송합니다.”

“아냐, 신경 쓰지 마. 어쩔 수 없지. 나도 아직은 그렇게 많이 좋거나 했던 건 아니고 그냥 좀 괜찮다 싶은 정도였으니까. 외려 너 불편하게 해서 내가 미안한걸.”

나는 차라리 지금 미리 차여서 다행인데, 라고 농담처럼 말한 서정운은 문득 생각난 듯 아, 하고 웃음을 거두었다.

“사범 수련 합숙에 참가하겠다고 정원사범님께 말씀드리긴 했는데……, 혹시 너 불편하면 그만둘까?”

“아닙니다. 저는 서정운 사범님과 여태껏처럼 변함없이 지내고 싶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대로.

서정운은 웃었다.

“그래, 나도.”

그래, 여태까지처럼.

가벼운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인 서정운은 발치를 쳐다보던 시선을 들어 한무화를 보았다. 그리고 빙긋이 웃었다. 그런 서정운을 희한한 것이라도 보는 양 무뚝뚝하게 보고 있던 한무화도 그 웃음을 보고는 약간 표정을 푼다.

서정운은 물끄러미 한무화를 보다가 가만히 손을 뻗었다. 처음 만나는 강아지에게 손을 뻗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이 강아지가 으르렁거릴까 얌전히 있을까 가늠해 보며 아주 천천히, 경계하지 않도록 다가가는 것처럼 뻗은 손은 이윽고 한무화의 머리에 닿았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쓰다듬는다.

손이 다가오는 걸 말없이 보고 있던 한무화는 언뜻 겸연쩍은 듯은 했지만 순순히 머리를 맡겼고, 서정운은 피식 웃으며 두 번, 세 번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래, 여태까지처럼.

서정운은 조금만 쓰다듬다가 손을 거두었다. 그러곤 외당 쪽을 고갯짓한다.

“들어가자. 아직 새벽이라 추워. 너 옷도 얇은데.”

한무화는 괜찮다고 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서정운을 보더니 잠자코 입을 다물었고, 서정운은 그대로 걸음을 돌려 외당으로 돌아갔다. 이른 새벽에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없어서, 자박자박 흙을 밟으며 뒤를 따라오는 기척만 조용히 들려올 뿐이었다.

*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는 차인 거구나.

서정운은 멍하니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난생처음 있는 일이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사람을 좋아해 본 적이 없고 고백도 해 본 적 없으니 차이든 뭐든 할 일이 없었다.

“……배고파…….”

서정운은 불쑥 중얼거렸다. 버석, 발에 밟히는 풀들은 어느새 말라 있었다. 그가 벤치에 주저앉을 때까지만 해도 아직 새벽이슬에 젖어 있었는데, 그새 시간이 그렇게나 지났나 보다. 하긴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하며 눈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아까보다 늘어나긴 했다. 아침 해도 제법 높이 솟았다.

저만치서는 오늘도 한강 물이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었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표정도 변함없이 활기찬데, 늘 앉는 벤치에 몇 시간째 앉아 있는 자신만 혼자 딴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난 이만 가 봐야겠다. 아직 일 마무리가 조금 남아서, 마저 하러 가야 하거든. 회식에 얼굴 비추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잠깐 와 봤을 뿐이야.’

외당 앞에서, 외당에 들어가지 않고 계단 밑에 우뚝 서서 그렇게 말하면서 서정운 스스로도 참 빤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다 끝내 놓고 온 거지만, 그랬는지 아닌지 남이 알 게 뭔가.

뒤를 따라오던 한무화는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잠시 서정운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나름대로 서정운의 심경을 헤아려 준 것일 터였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라고는 했지만 당장 그 순간만큼은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그렇게 이른 새벽 본산 문을 나선 서정운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디도 갈 곳이 없어, 하릴없이 차를 몰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한강 둔치에 다다라 있었다.

인적 드문 새벽부터 익숙한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노라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마구 슬픔이 북받치는 것도 아니었고 괴로운 것도 아니다. 그저 멍하니, 딱히 어떠한 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축 늘어져 있는 몸만큼이나 심장도 축 늘어져 있어서, 그대로 한참을 앉아 있었을 뿐이다.

하긴 뭐 그리 슬플 것도 없나.

오늘 고백을 하게 된 것도 전혀 예기치 못한 사고였고,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고 하물며 잘된다거나 좋은 결과를 꿈꾼다거나, 그랬던 적도 없었다. 그러니 별달리 애통할 것도 괴로울 것도 없는데.

“……배고파.”

서정운은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원래라면 오늘은 국수를 먹으러 가기로 했었는데.

혼자라도 갈까. 멀지도 않고. 배도 고프고.

서정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풀밭을 가로질러 차도 너머 골목 안에 있는 국숫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실연을 당해도 배는 고프구나. 이렇게 기운 빠지고 낙담해 있어도 배는 고프고 뭔가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게 왠지 우습고, 한심하고, 어이없고, 슬펐다. 외려 차인 것보다 그게 더 슬프다는 생각마저 든다.

서정운이 국숫집에 이르렀을 때 가게는 이제 막 문을 열고 있었다. 밑준비를 마치고 ‘준비 중’이라는 팻말을 막 치우던 가게 주인은 서정운을 보고는 놀란 듯 “이 시간부터 웬일이세요.”라며 활짝 웃었지만, “그냥 갑자기 먹고 싶어서 왔어요.”라고 말하며 빙긋이 웃는 서정운을 보더니 문득 웃음을 지우며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곤 들어오라며, 주방 안으로 들어가 물을 끓이기 시작한다.

뭘 먹을까. 어차피 둘뿐인 메뉴, 평소라면 쳐다보지도 않을 메뉴판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불현듯 먹고 싶어진 걸 말한다.

“비빔국수 하나 주세요.”

주인은 흘끔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재료를 꺼내 온다.

주인과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는 가게에 홀로 앉아 서정운은 새삼스럽게 가게를 둘러보았다.

테이블 몇 개밖에 없는, 허름하고 낡았지만 깨끗한 가게다. 이곳에 처음에 왔던 게 학생 때부터니까 단골로 다니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주인이 비빔국수를 내어 주었다. 보기만 해도 매워 보이는 그 새빨간 국수를 비비며 서정운은 이걸 언제 먹었었더라, 하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여기서 비빔국수를 먹었던 적은 딱 두 번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고교 때부터 서정운을 혼자 키워 준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십여 년 전, 사십구재를 마치고도 몇 달이나 더 지났던 어느 날 이유 없이 불현듯. 그리고 또 한 번은 몇 년 전 사고로 크게 다쳐 정무도를 그만두었던 무렵, 작곡 쪽으로 일이 잘 풀려 아무 문제 없이 일상을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

그리고 오늘 세 번째로 먹는 비빔국수는 여전히 매웠다. 이 집은 굉장히 맛있긴 한데 그만큼 굉장히 맵단 말야…….

서정운은 비빔국수를 후룩후룩 들이켰다. 그러는 사이에 비빔국수 그릇 속으로 눈물방울이 한 방울 툭 떨어졌다.

“여전히 맵네요.”

서정운이 중얼거리자, 가게 주인은 서정운을 보지 않고 “예.”라고만 대꾸하며 맑은 장국을 건네준다. 툭. 툭. 간간이 그릇 속에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서정운은 눈물 나도록 매운 국수를 꾸역꾸역 삼켰다.

그때,

드르륵, 가게의 낡은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며 가게 주인이 “어서 오세요.”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우물우물 국수만 먹던 서정운은, 가게 안으로 막 들어서던 발소리가 뚝 멎어 버린 걸 몇 초 뒤에야 깨닫고는 무심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멈춰 서서 서정운을 내려다보고 있는 커다란 인영을 보았다. 빛이 들어오는 문을 역광으로 등지고 선 그 그림자는 몹시 낯익어서, 얼굴 윤곽만 보고서도 그게 누군지는 바로 알았다.

“…….”

왜 하필.

왜 하필 이럴 때 여길 오는지. 어제도 오늘도 정말이지 타이밍이 안 맞는 날이다.

천천히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럴 때마저 변함없이 무표정한 얼굴을 한 한무화는, 그러나 어렴풋이 찌푸린 듯 만 듯 미묘한 눈길로 서정운을 보고 있었다.

“……, 해장 국수 얘기했던 게 머리에 남아서……, ……속 풀기 좋겠다 싶어서 왔습니다.”

그답지 않게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주절거린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 서정운에게서 한 자리 떨어진 옆자리에 앉았다. 멸치국수를 주문한 그는 반듯하게 앉아 잠자코 있었고, 서정운도 한동안 말없이 국수만 후룩거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멎지 않았다.

“나도 멸치국수를 먹을 걸 그랬나 봐.”

서정운이 불쑥 중얼거렸다. 입안에 아직 국수가 남아 웅얼거리는 목소리였지만 한무화는 금방 알아들은 듯했다. 금방 나온 멸치국수를 서정운의 앞으로 밀어 주려는 시늉을 해서, 서정운은 “아냐, 더 먹기엔 배불러.” 하고 고개를 저었다.

“다음부터는 그냥 멸치국수만 먹어야겠어. 이건 너무 매워서 눈물이 날 정도란 말야.”

이렇게 뻔하고 어설픈 변명이라니. 그러나 서정운은 조용히 웅얼거리며 계속 그 매운 국수를 삼켰고, 한무화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무화도 국수를 먹고 서정운도 국수를 먹는다.

후룩후룩후룩. 국수 먹는 소리만 날 뿐 가게 안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주방 안에서 주인이 켠 듯 라디오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가게의 열린 문으로는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고, 아주 멀리서 길거리의 훤소가 아련하게 들려온다.

이곳만 마치 동떨어진 공간인 것처럼.

그렇게 그들은 나란히 앉아 묵묵히 국수를 먹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네가 좋아.”

서정운은 기어이 말하고 만다.

아직은 그렇게 많이 좋거나 했던 건 아니라는 것도, 그냥 좀 괜찮다 싶은 정도였다는 것도, 틀렸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타이르며 애써 새기려 했지만 결국은 안 되었다. 이렇게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나는 이 남자를 참 많이 좋아했던 거라고. 어느새. 어느새 이렇게.

그래서 속삭이고 만다.

그것은 한없이 낮고 작은 목소리였다. 들릴락 말락 한 그 소리는 어쩌면 들리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한무화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그대로 계속 국수만 후룩후룩 먹을 뿐이다. 서정운도 계속 국수를 삼켰다.

그러던 어느 때, 문득 서정운의 앞으로 커다란 손이 불쑥 다가왔다. 그 손에는 휴지가 두 장 들려 있었다.

“…….”

서정운의 말을 받아 주지는 않았지만 자리를 뜨지도 않고 말없이 그가 건네주는 그 휴지를 서정운은 가만히 받아들었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그래도 되는구나.

비록 받아들여 주지는 않지만, 나 혼자 좋아하는 건 되는 거구나. 그걸 비난하거나 언짢아하지는 않겠구나.

문득 심장이 울컥했다. 꼭 조인 심장에 고여 있던 물기가 일시에 짜여 나오는 것처럼, 툭툭 떨어지던 눈물이 줄줄줄 새기 시작했다. 한무화는 휴지를 서너 장 더 뽑아 주었고, 서정운은 구겨진 휴지로 뺨을 훔치며 국수를 우물거렸다.

이 감정을 당장 억지로 짓누르거나 죽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적어도 차차 사그라뜨릴 수 있을 만큼의 시간 유예는 생겼다.

그게 그나마 퍽 다행이라서, 그래도 슬퍼서, 그래도 다행이라서, 서정운은 국수를 먹는 내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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