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11/28)

4.

서정운이 본산 사무실에서 수련 합숙 관련 서류를 받아 나왔을 때 사무실 건물 밖에는 한호영이 쭈그리고 앉아 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소 닭 보듯 놈을 한번 쳐다본 서정운은 그대로 스쳐 지나갔고, 한호영은 그런 서정운의 뒤통수에 대고 “사형! 나 못 봤어요?” 하고 외치며 벌떡 일어나 쫓아갔다.

“어째 고뇌에 잠겨 있는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척 그냥 지나갑니까. 참 야박하십니다.”

“고뇌 방해하지 않으려고 그랬지.”

“사형 때문에 고뇌하던 중이었다고요.”

내가 담배라도 피웠더라면 지금쯤 담배꽁초가 한 갑은 내 발치에 떨어져 있었을걸요, 하고 혀를 차는 한호영을, 서정운은 이번에도 소 닭 보듯 멀뚱히 보다가 서류 봉투로 자신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물었다.

“별로 궁금하지는 않다만 네가 물어보라는 것 같으니 물어보자.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는 그 고뇌가 뭔데.”

“지금 본산에, 사형이 눈독 들인 여자가 있다는 소문 짜하게 깔린 건 아세요?”

“그런 여자가 있대? 나도 몰랐네. 누구래.”

한호영은 그 태평한 대꾸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게 왜 그 여자 수련생이 고백했을 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거절을 해서 소문의 씨앗을 뿌렸냔 말이다.

“지금 다들 그게 누구냐고 수군거리고 있다고요. 심지어 그 서정운이 사범 수련 합숙에 참가하는 것 보라면서, 본산에 그 여자가 있는 게 틀림없다고 떠드는 판인데 이 노릇을 어쩔 거예요, 사형.”

서정운은 서류 봉투로 목덜미를 톡톡 두들기다 물었다.

“그런데 그게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고민이야?”

“아니죠.”

“그런데 왜 고민해. 내가 뭇여자들을 음란한 눈초리로 눈여겨본다는 소문이 하루 이틀 돈 것도 아니고.”

“사형…….”

그래, 이런 사람이었다. 이 인간은 이랬었지. 백날 내가 고민해 줘 봤자 아무 소용없는 인간이었는데, 왜 고민은 나의 몫인가.

한호영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곤 그나마 현실적인 염려를 하나 꺼낸다.

“이러다 자칫 무화가 사형이 저 좋아한다는 걸 눈치라도 채면 어쩔 거냐고요.”

“알아.”

서정운은 심상하게 대꾸하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엉? 잠시 그 자리에 망연히 서 있던 한호영은 눈을 껌벅거리며 황급히 그 뒤를 쫓아갔다.

“알아? 안다구요? 사형이 자기 좋아하는 걸 걔가 알아? 어떻게?”

“어떻게는, 말했으니까 알지.”

한호영은 입을 딱 벌렸다. 저 양반이 지금 아주 태평하게 말하고 있는데, 이게 태평할 문제가 맞던가.

“그, 그래서요……?”

“그래서는, 차였지.”

“…….”

어, 아주 깔끔하다.

삽시에 할 말이 없어진 한호영이었다.

“그게 언제쯤이었는데요?”

“회식 있었던 날 밤.”

회식 있었던 날 밤이라면 대략 1, 2주 전쯤이다. 그날이라면 금방 기억이 떠올랐다. 새벽에 왠지 모르게 둘이 분위기가 심상찮아서 뭔가 싶었는데 물어봐도 둘 다 별말을 안 하고 또 그 뒤로 그럭저럭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 것 같길래, 좀 걸리긴 했지만 그냥 넘어갔던 것이다. 과연, 그때였군.

가만히 손가락을 꼽아 본 한호영은 그 정도 시간이 지났으면 이미 소문이 열 바퀴쯤 돌고도 남았을 텐데 조용한 걸 보니 딱 그들의 선에서 그친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하긴 사형이든 무화든 어디서 그런 얘기나 흘리고 다닐 인사들은 아니지.

일단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사형이 무화에게 고백했다거나 차였다거나 하는 얘기보다는 차라리 저 뜬소문이 백배 천배 낫다--, 그런 뒤에야 한호영은 왠지 모를 복잡한 심경에 잠겼다. 뭐 당연한 결과이긴 한데, 금쪽같은 우리 사형을 차다니 그놈이 제가 좀 잘났으면 잘났지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팔이 안으로 굽은 한호영이었지만, 그러나 가볍게 혀를 차며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돌렸다.

“에휴, 그래요, 차라리 잘됐어요. 그냥 확 부딪쳐서 깨지고 깔끔하게 마음 접는 게 낫지. 당장은 가슴 좀 아프겠지만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왜 접어.”

……이건 또 뭔 개 풀 뜯어먹는 소리지…….

“차였다면서요.”

“차였지.”

“그런데 안 접는다고요?”

미심쩍게 묻는 한호영에게 서정운은 잠시 생각해 보는 눈치였지만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무화가 별로 신경을 안 쓰더라구. 그런데 굳이 억지로 서둘러 접을 필요가 있을까?”

“아니 사형 그게 무슨 봉창 두드--.”

갑자기 속에 천불이 치솟은 한호영이 벌컥 외치려 할 때, 그러는 사이에 중문 옆의 문간채에 다다른 그들의 저만치 앞에서 양반은 못 될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담을 따라 방들이 길게 이어져 있는 문간채 중 한 방에서 막 나오던 한무화는 그들을 보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서정운도 그를 보곤 웃으며 손을 들었고 한호영은 순식간에 합죽이가 되어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방 배정받고 오신 겁니까?”

사범 수련 합숙 때에 숙소로 사용하게 될 문간채 중간쯤의 어느 방이 한무화가 머무를 방인 모양이었다. 본채에 기거하는 직계손이라도 합숙 기간 동안에는 정원사범 두 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예외 없이 문간채에 머무르는 것이다.

“응. 넌 그 방이야? 내 옆옆방이네.”

합숙 관련 서류를 받고는 형식적이나마 미리 숙소를 둘러보러 온 서정운은 그제야 한호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랑 같은 방이던데.”

“알아요. 우일이랑 나랑 사형이랑 한 방. 사무실에서도 사형 자다가 칼침 맞을까 봐 걱정됐었나 보죠, 방 배정한 거 보니.”

한호영은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합숙 기간 동안 3인 1실로 한호영과 같은 방을 쓰게 될 사람은 이 감당하기 힘든 사형과, 사형의 몇 안 되는 착한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나마 숙소에서는 거의 잠만 잘 뿐이니 상관없긴 하다.

한호영이 삭막하게 인상을 긋고 있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고 방을 대충 들여다보고 온 서정운은 한무화에게 즐거이 말을 건네고 있었다. 넌 누구랑 같은 방 쓰냐, 아 그분들이라면 무난하고 괜찮지, 정련과 체련은 방을 따로 쓰는 게 관례니까,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둘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게 왜 이리 어이가 없는지 모르겠다.

아니 고백을 했다가 차였다면서 저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거야? 사형이야 그렇다 쳐도 저놈은 대체 뭔 생각이냐. 한호영은 흰 눈으로 한무화를 쳐다보았다.

……아무 생각 없어 보인다. 그래, 원래 그런 놈이지. 그래서 또 속이 터졌다.

한호영이 가슴만 텅텅 두드리는데, 어디선가 휴대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누구 건가 했더니 서정운의 전화였던 모양이다. 서정운이 대화를 멈추고 전화를 받는다.

“예, 서정운입니다. 예, 강 사범님. ……예, 제 차 맞습니다. ……범퍼를요? 많이 긁혔나요? ……그 정도면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예, 그럼 일단 가서 보겠습니다. 잠시만 계세요.”

전화를 끊은 서정운은 “나 잠깐 주차장에 갔다 올게.”라며 문간채에서 내려왔다. 한호영이 흘끗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요, 누가 차 긁었대요?”

“어, 강훈 사범님이 내 옆에 차 대다 범퍼 살짝 긁었나 봐. 잠깐 갔다 올게.”

“그래요. 그 새가슴 같은 분이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겠네.”

서정운은 고개를 끄덕이곤 걸음을 돌렸다. 그러다 멈칫 발을 멈추더니 시름에 젖어 지친 얼굴을 하고 있는 한호영을 물끄러미 보다가 가볍게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차차 접어지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

억지로 서둘러 접지 않아도 차차.

그 말이 서정운의 바람이고, 또한 한호영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라는 걸 한호영은 안다. 한호영은 금세 주차장 쪽으로 멀어져 가는 서정운을 바라보다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사람이 아예 못됐으면 걱정이나 안 하지.

“사람이 똑 부러지는 행세는 혼자 다 하면서 아주 맹탕이라니까, 맹탕…….”

혀를 끌끌 찬 한호영은 문간채를 둘러보며 이쪽으로 오고 있는 한무화를 보았다. 오늘도 여전히 속을 알 수 없이 표정이 희박한 얼굴이다. 한호영은 백 년은 늙은 것 같은 기분으로 한무화를 보다가 불쑥 물었다.

“사형이 좋아하는 사람, 누군지 알아?”

한무화는 한호영을 보더니 약간 사이를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누군데.”

한무화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한호영을 보기만 했다. 한호영은 아오, 진짜, 하고 중얼거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넌 그래도 괜찮아?”

한호영이 혀를 차며 묻자 한무화도 한호영이 알고 있음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잠시 생각하다 대꾸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요.”

“야, 무화야, 솔직히 얘기해 봐. 어떻게 할 수 있으면 그냥 끊고 싶지, 응?”

한호영은 간절하게, 아주 은근하게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만 하면 당장 사형에게 달려가서 ‘싫다는 애 붙들고 왜 그러느냐’고 버럭거리며 뜯어말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저 만사에 무심하고 관심 두지 않는 남자는 한호영의 기대를 부수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이 절 어떻게 여기든 그건 제 문제가 아니라서 별로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

텄다, 텄어.

한호영은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형도 말이 안 통하는 양반인데--정확히는 말로 당해 낼 수가 없는 거지만--, 이놈도 다른 의미로 말이 안 통하는 놈이다. 대관절 사형은 이놈이 어디가 좋다는 건지도 모르겠고, 또 한편으로는 이 무뚝뚝한 놈이랑 어떻게 그렇게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후자는 본산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흘러 다니는 의문이기도 했다.

본산의 수련생이고 사범이고 연상이고 연하고 가릴 것 없이 만인이 대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손꼽는 게 한무화였다. 무슨 얘기를 해야 될지 모르겠다, 같이 있으면 왠지 눌리는 기분이 든다, 부담스럽다, 무섭다 등등.

그런데 저 서정운은--아무리 얼마 전 일시적으로 한무화를 지도하긴 했다지만--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저 남자를 대하면서 뭔가 이야기도 화기애애하게 곧잘 나누는 눈치였으니, 사람들이 신기해할 만도 하다. (반대로, 저 북풍한설 같은 사범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는 한무화를 신기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호영은 섬돌 옆에 소담스럽게 자라나 있는 민들레를 쓰다듬는 한무화를 가느스름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한숨만 내쉬고 말았다.

이제 주말 지나고 나면 보름간 사범 수련 합숙이다.

별일이 있지야 않겠지만, 그 보름간이 제발 아무 일 없이 무사무탈하게 지나가기를 빌고 또 빌 따름이었다.

*

사범 수련 합숙은 매년 6월마다 2주 동안 본산에서 이루어진다.

정무도의 하원사범과 중원사범을 주요 대상으로 하며 사범이 아닌 수련생 중에서도 특출한 인재를 소수 선발해, 총 마흔 명을 상원사범이 지도하는 것이다.

국내 정식 등록 선수만 수천 명에 달하는 가운데 그 마흔 명에 선발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 수련 합숙에서 보게 되는 면면들은 대체로 대규모 대회에서 순위권에 드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오전에는 정무도와 관련된 이론적인 강습과 토론, 그리고 자유 연습을 하며 오후에는 실질적인 기술 교육과 대련을 한다. 저녁 식사 뒤에는 명목상으로는 자유 연습으로 규정되어 있으나, 개인적인 볼일을 보거나 전국 각지에서 모이는 사범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친목을 다지는 게 일반적이다.

하원․중원사범 이상에 대부분이 순위권에 드는 현역 선수. 그러다 보니 대체적으로는 정규․비정규 대회에서도 여러 수련 합숙에서도 종종 얼굴 마주치게 마련이라 어느 정도씩은 안면이 있는 이들이 태반이다. 개인적으로는 모른다 해도 건너건너라도 아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사범 수련 합숙이 시작된 첫날, 정원사범의 인사말이 있기 전부터 참가자들은 친숙한 분위기로 인사를 나누곤 했다. 단, 누구의 눈에도 뚜렷하게 정련과 체련으로 사람들의 무리가 나뉘어져 있긴 했지만.

마흔 명 남짓의 인원쯤은 넉넉하게 수용하는 본산의 대수련장, 아직 정규 시작까지는 시간이 제법 남았지만 이미 사람들의 태반이 출석해 인사와 세상 이야기, 사람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는 그곳에, 한 남자가 들어섰다.

운동선수들만 모인 그곳에서도 눈에 띄게 체격이 큰 그 남자는 가볍게 주위를 둘러보곤 창가로 가 자리 잡고 앉았다. 딱히 아는 사람도,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고 싶은 생각도 없어 보이는 그는 아침 공기가 감도는 바깥마당을 내다본다.

‘아아, 저 남자가 이번 춘계 선수권 중량급에서 우승했다는 체련의 바로 그…….’

‘원래는 한수일 정원사범님 사촌 조카라던데 양자로 들였다며.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굉장하단 말야?’

‘영상 봤는데 힘도 있고 순발력도 있고, 상당하긴 하더라.’

‘글쎄, 내가 보기엔 운도 한몫했던 것 같은데. 올해 춘계 선수권 중량급은 솔직히 빈집털이였잖아. 강준걸도 해외 연수 가서 선수권 참가 안 했고, 김용원도 워크숍이 있었고, 한동식도 전용배도 바로 그다음 달 모범시합 나간다고 춘계 선수권은 빠졌고. 중량급 잘하는 놈들 다 빠진 자리였는데 운 좋게 꿰차고 들어간 거지.’

‘우리 체련 입장에서야 새로운 기대주가 등장한 거니 나쁠 건 없지. 이김에 정련 놈들 콧대 좀 밟아 줄 수도 있겠고.’

일각에서 남자를 두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목소리까지는 들리지 않더라도 그 호기심 어린 시선이나 호의 어린, 혹은 적의 어린 눈길은 느껴질 텐데도 남자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런 말쯤은 들리든 안 들리든 개의치 않는다는 빛이다.

그러나 누군가 “반가워요, 한무화 선수.” 하고 인사하는 말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한무화와 비슷한 또래인 성싶은 호리호리한 체구의 청년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기억 안 나요? 그때 춘계 선수권 대회에서 잠깐 인사했었는데. 왜 그, 대기실에서요.”

“예.”

“…….”

“…….”

기억이 난다는 건지 안 난다는 건지, 그 한마디 대꾸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던 청년은 악수를 마친 뒤에도 말이 돌아오지 않자 어색하게 웃으며 먼저 말을 이었다.

“그때 시합 봤어요. 와, 굉장하더라고요. 정말 충격적인 데뷔전이었지 뭡니까. 아마 선수권에 처음 출전해서 우승한 사람은 한무화 선수가 처음일걸요.”

“예.”

“…….”

“…….”

“하하……, 이, 이번에도 정련의 정원사범님이 한 선수 수련 합숙 참가에 반대하셨는데 시범 대련 보고 허락하셨다면서요. 그 깐깐한 분 기준에 맞추기 쉽지 않았을 텐데, 정말 열심히 노력하셨나 봐요.”

“예.”

“…….”

“…….”

청년은 결국 포기하고 물러섰고, 근처 자리에 있던 본산 소속의 체련 사범이 청년과 아는 사이였는지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성격이 원래 좀 저래. 나쁜 녀석은 아닌데…….” 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귀엣말해 준다.

그 청년의 이후로도, 놀라운 소문을 몰고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말을 붙여 봤다가 비슷한 과정을 겪고 물러나는 이들이 몇이나 생겨났다. 언짢은 기색을 띠는 사람도 개중에는 있었다.

“되게 말없고 무뚝뚝하다고 전해 듣긴 했는데 진짜 보통 아닌데. 저거 친한 사람이 있긴 하냐?”

낯을 찌푸리며 묻는 그에게 본산 소속 사범은 턱을 긁적이며 애매하게 대꾸했다.

“어, 그게……, 친한지는 모르겠고 그럭저럭 말을 좀 트는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은 있는데…….”

“저 남자랑 말을 튼 사람이 있기는 하다고? 누군데?”

“음, 그게 말이지…….”

본산 소속 사범이 뭔가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이름이라도 떠올린 듯 모호하게 말을 흐릴 때였다.

대수련장의 문을 열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바로 뒤에 따라 들어오는 남자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며 들어온 그는, 대수련장 안을 무심히 둘러보더니 정련 측 사범들이 앉아 있는 쪽으로 가서 적당히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같이 들어온 남자가 “사형, 앞으로 가서 앉으세요.”라고 말하자 “뭐 그렇게 반가운 얼굴 보여 주겠다고 앞에 앉겠어. 너나 앞에 가서 앉아.”라고만 대꾸하고 만다.

아주 짧은 순간 조용해졌던 대수련장 안은, 이내 사방이 나직한 수군거림으로 가득 찼다.

‘서정운이잖아, 서정운. 저 작자가 여기 웬일이야?’

‘몰랐어? 이번 수련 합숙에 참가한다고 말 많았는데. 나도 그 소문 듣고 설마 했는데 진짜였나 보네.’

‘정무도 그만둔 거 아니었어? 게다가 예전에도 사범 합숙 같은 데에는 참가하지 않았던 양반이 무슨 일이래?’

‘아, 내가 거기에 대해서 들은 말이 있는데, 본산에 저 사람이 눈독 들인 여자가 있다나 봐. 그 여자 때문에, 그 여자 자주 보려고 일부러 여기 참가한 거라던데.’

‘여자아? 참 여전하네. 제 버릇 개 못 주는구만. 그래, 이번에 노리는 여자는 누구래?’

‘몰라. 듣기로는 올해 막 하원사범 된 ……라는 얘기도 있고, 체련 수련생 중 누구라는 얘기도 있고. 아까 아침 먹을 때 식당에서 보니까 경기 북부 지원 ……이랑도 좀 그래 보이던데.’

호기심과 비난이 섞여 있는 그 수군거림도, 싸늘한 눈길도 알 만하건만 서정운은 그들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반대편 체련 쪽의 창가에 앉아 있는 한무화만 잠깐 보다가 시선을 돌렸을 뿐이다.

‘정련도 안 됐어, 저런 인간이 끼어서.’

누군가 비아냥거렸을 때였다. 앞쪽에 앉아 있던 한호영이 들으라는 듯 크게 혀를 차며 “진짜 더럽게 시끄럽네.” 하고 내뱉었다.

“이병욱 사범님? 정련은 걱정 마시고 체련이나 걱정하십시오.”

한호영이 체련 측에 앉아서 제법 큼직한 목소리로 수군거리던 남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게 대놓고 말이 날아오자 잠시 당황한 눈치였던 그는, 그러나 곧 눈을 부릅뜨며 대꾸한다.

“우리야 말 함부로 지껄이고 여자나 밝히는 인간이 없는데 왜? 내가 뭐 틀린 말 했습니까, 서정운 하원사범님?”

삽시에 정련 측과 체련 측 자리가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갈라져 있던 두 무리가 감추고 있던 적대감을 드러낸다. 정련 놈들, 체련 저 인간들 운운하는 소리가 크게 작게 흘러 다닌다.

그 가운데, 남자가 빈정거린 상대인 서정운은 짧게 혀를 차더니 귀찮다는 기색으로 남자를 보았다.

“첫 번째로, 이병욱 사범님이 말을 사리는 건 꼬투리 잡혔을 때 제대로 대꾸할 자신도 없고, 꼬투리 안 잡히게 바른말만 할 자신도 없으니까 애초에 그냥 말 자체를 안 하시는 거고, 나는 말 함부로 지껄이지만 틀린 얘기는 하지를 않고. 두 번째로, 여자는 이병욱 사범님이 능력이 안 돼서 못 밝히는 거고, 나는 내가 밝히지 않아도 저쪽에서 알아서 찾아오는 거고. 세 번째로, 하원사범에게 당해 내지도 못하면서 연공서열로 주워 먹은 중원사범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고. ……뭐 일단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이병욱 중원사범님.”

“뭐--.”

“이미 알고 있었던 명확한 차이를 새삼스럽게 알려 주실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고맙습니다.”

대꾸하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 건성으로 대꾸하며 빙긋이 웃는 서정운은 별반 화난 빛도, 불쾌한 빛도 없었다. 남자는 사나운 눈으로 서정운을 노려보다가 내뱉었다.

“몇 년 쉬셨다더니 입 놀리는 솜씨는 여전하신데, 어디 정무도 솜씨도 그대로인지 대련 때 자세히 지켜봅시다.”

“보는 눈도 없으신 분이 뭘 또 자세히 보겠다고……, 뭐 그러시든가요.”

피식 웃으며 말하는 서정운에게 급기야 남자는 화가 치솟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주위 몇 명이 그를 말렸고, 수런거리던 소리는 한층 더 시끄럽게 흘러 다녔다.

저 작자는 몇 년 지나도 그대로네, 사고로 팔다리가 부러질 게 아니라 혀가 부러졌어야 하는데.

틀린 말도 아닌데 뭘 발끈해. 난 서정운이가 맘에 드는 건 아닌데 체련 저놈들은 더 싫더란 말이야.

장내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정련과 체련이 한데 모인 자리의 분위기가 훈훈했던 적은 딱히 없으니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과연 혀가 독한 사람 하나가 끼어 있으니 달아오르는 것도 금방이다.

본인이 도발에 큰 몫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고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고개를 돌리던 서정운은 문득 체련 뒤쪽의 창가에서 이쪽을 무심히 보고 있던 한무화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 ……다기에는 이미 내가 저놈을 쥐 잡듯 잡아 가며 가르친 과거가 있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눈만 껌벅이며 바라보는 서정운에게 이내 한무화가 꾸벅 인사를 했다. 어? 하고 생각한 서정운은 다음 순간 그게 일상적인 아침 인사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 뜻도 없는, 그저 ‘안녕하십니까’.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이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게 인사라니. 그 상쾌한 의외성에 서정운은 웃고 말았다. 그래서 서정운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마주 인사한다.

그러나 때가 안 좋았다. 그러잖아도 험악해져 있던 판국에 그 중심에 있던 서정운의 일거수일투족은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그가 인사한 상대를 확인한 체련 사범 중 하나가 한무화에게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던졌다.

“저 사람이랑 친해요?”

사실 정련, 체련이라 해도 개인적으로는 허물없이 잘 지내는 사범들도 적지 않았지만 지금의 이 상황은 아비도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도 형이라 부르지 못할 분위기다. 말 한마디에 따라 순식간에 역적이 될 판국이었다. 서정운은 내심 아차 싶었다. 그리고 그 덜컥 다가온 걱정대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입니다.”

잠시 생각하던 한무화는 그렇게 대답했고, 체련 사범들의 분위기는 한층 험해졌다. 한무화를 바라보던 시선도 못마땅해진다.

“아아, 그러고 보니 저 사람한테 배웠다고 했었지……?”

“예.”

이번에도 불만스런 시선이 날아들든 말든 담담하게 대꾸하는 한무화다. 그리고 서정운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 저런 성격이었지.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뭐라고 하든 신경도 안 쓸 거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는 체련이었고, 이 자리는 그에게 있어 거의 처음으로 체련 측 주요 인물들과 밀접하게 어울리는 자리인데 불화가 있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잠깐만. 나는 별로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은데. 큰 어르신 분부로 잠시잠깐 봐주긴 했지만 내 뜻은 아니었으니까. 고작 한 달 갖고 나한테 배웠다고 하기엔 내 입장도 좀 그렇지 않겠어?”

서정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일시에 그에게로 시선이 모였다. 미심쩍게 한무화를 바라보다가 서정운에게 돌아간 시선들은 금세 적의로 가득 찼다.

저한테 배운 게 뭐 그렇게 좋은 일이라고 잘난 척이야. 저 작자는 옛날부터 거만하기 짝이 없었지. 그래 본들 뭐 해, 제자라고 해 봐야 몇 명 되지도 않는 데다 제자들한테도 성격 지랄 맞다고 욕먹는 작자가.

삽시에 장내에는 욕설이 넘실거렸고, 정련과 체련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일촉즉발로 험악해졌다.

그 가운데 한무화는 빤히 서정운을 보았고 서정운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 한무화에게 근처에 있던 체련 사범이 위로하듯 말해 준다.

“저 인간 원래 저런 인간이니까 신경 쓰지 마요, 한무화 선수. 하여튼 저 인간은 저 혀 때문에 망하는 날이 있을 거야. 쯧쯧.”

한무화는 그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으나 아무런 대꾸 없이 도로 서정운을 보았다. 그러나 서정운은 더 이상 그쪽으로는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정련과 체련 간의 험악함 속에 외려 그 각각은 서로 똘똘 뭉쳐 화합하는 분위기 속에서, 대수련장의 문이 열리며 본산의 최고사범인 정원사범 두 명과 수련 합숙을 지도할 상원사범 몇 명이 함께 들어왔고, 그 험한 분위기는 더 크게 불거지기 전에 그대로 흐지부지 눌렸다.

그렇게, 올해의 사범 수련 합숙이 예년보다 한층 불온한 분위기로 시작되었다.

*

“사형도 참 어지간하십니다. 아니 굳이 그렇게 도발할 건 또 뭐랍니까? 아주 그냥 불에 기름을 붓지.”

툴툴거리는 한호영에게 서정운은 어이없다는 눈길을 보냈다.

“이놈 봐라. 더럽게 시끄럽다고 이병욱이한테 제일 먼저 일갈한 놈이 누군데 나한테 뒤집어씌우고 있어.”

“아니 나야 원래 좀 다혈질이니까 그렇다 쳐도, 사형은 나보다 윗사람이면 윗사람답게 좀 말리든가 해야지 그걸,”

“나한테 언제부터 그런 미덕이 있었다고 그래. 그보다 이놈의 정련과 체련은 몇 년 만에 돌아와도 왜 이렇게 여전한 거야? 어쩌면 이렇게 화기애애하고 인간들도 성숙한지.”

서정운은 물을 마시며 대수련장 안을 둘러보았다.

오후도 이미 늦어져 저녁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점심 식사 이후에는 매일 상원사범들이 번갈아 가며 정무도의 고급 기술과 함께 일반 사범이나 수련생에게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교수법을 강의하고,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진 뒤부터는 각자가 그날 배운 기술을 연습해 체득하는 자유 연습 시간을 가졌다.

자유로이 개인 연습을 하거나 대련을 하면서 기술을 습득하는 이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지금도 아주 깔끔하게 정련과 체련으로 나뉘어 있었다. 대수련장의 동쪽은 정련, 서쪽은 체련이다.

동쪽 안쪽의 모서리에서 홀로 개인 연습을 하던 서정운에게, 연습으로 땀범벅이 된 채로 물컵을 들고 다가온 한호영이 혀를 차며 말을 건넨 것은 해가 불그스름하게 산 위에 걸린 즈음이었다.

“몇 년 만에 돌아온 분치고는 녹슨 데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려. 사형은 그냥 걸어 다니는 교본이라니까.”

“넌 눈이 녹슬었냐. 아까부터 몸이 둔해져서 제대로 움직이지를 않아서 짜증이 나 죽겠는데.”

“됐고요, 오늘 강 사범님이 가르쳐 주신 거. 우사지르기에서 선회주축으로 넘어가는 거, 그거나 다시 좀 보여 줘요. 도무지 매끄럽게 넘어가지를 않아.”

“예전에 이미 사부님께 배웠던 거잖아. 그때 제대로 연습 안 해 두고 뭐 했어.”

매섭게 눈을 부라리는 서정운에게 한호영은 “연습 백날 해도 제대로 하기 힘든 기술이잖아요.”라고 툴툴거리며 대뜸 오늘 배운 대로 팔을 휘둘렀다. 서정운이 어렵잖게 팔을 들어 막아 내며 “팔만 휘두르는 게 아니라 등부터 쓰는 거야, 등부터. 견갑골의 뿌리부터 움직이는 거라고.”라며 한호영의 등을 호되게 후려친다. 그러자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아까부터 서정운의 눈치를 살피며 연습을 거듭하고 있던 정련의 다른 사범 몇몇도 슬슬슬 다가와서 그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핀다.

서정운과 한호영은 명색이 정원사범 한태일의 제자이다. 사범 수련 합숙에서 상원사범들이 가르쳐 줄 만한 웬만한 고급 기술들은 이미 배운 적이 있는 기술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배워서 아는 것과 몸에 배도록 익히는 것은 다른 문제라, 한호영은 서정운에게 두들겨 맞아 가며 다시 익히는 것이었다.

그때, 대수련장의 서편에서 쾅!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체련의 중원사범이 쓰러져 엎드려 있었고, 오늘 배웠던 기술을 써서 대련을 하던 중인 듯 그 위를 한무화가 누르고 있었다.

“대단한데……, 벌써 몸에 익혔잖아.”

누군가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한무화가 물러나자 곧 자리에서 일어선 중원사범도 반쯤은 당혹스럽고 반쯤은 감탄하는 눈치로 “굉장한데. 벌써 이렇게 훌륭하게 구사할 수 있다니.”라고 한무화를 칭찬한다.

그러나 한무화는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뭔가 미심쩍은 듯, 몸에 안 맞는 옷이라도 입은 것처럼 산뜻하지 못한 눈치다.

한무화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던 서정운과 눈이 마주친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서정운은 고개를 돌려 버렸고 무어라 입을 열려던 한무화는 멈칫, 도로 입을 다물고 만다.

그때, 그러는 동안에도 서정운과 끊임없이 손을 섞으며 종종 얻어맞고 있던 한호영이 화가 난 듯 벌컥 외쳤다.

“아오, 아파요, 이제 알겠으니까 좀 고만 때려요, 사형!”

“알겠다는 놈이 왜 제대로 막지를 못하고 계속 얻어터져.”

“아, 진짜, 내가 오랜만에 돌아온 노친네 좀 봐줬더니 이 사람이! 그럼 나랑 대련이나 해 줘요.”

“양심이 있어라. 몸도 성치 않고 몇 년이나 손 놓았던 늙은이를 상대로 체급도 다른 놈이 무슨 대련이야.”

“핸디 걸고 하면 되잖아요. 왼팔은 안 쓸, ……수는 없고, 누르기 종류랑 좌완기는 쓰지 않는 걸로 할게요.”

“전측보도 쓰지 말고.”

“헉……, 그럼 사형 이길 자신 없는데요!”

“호영아, 내가 누누이 말했지. 대련을 이기려고 하니?”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였다. “좋아요, 그 조건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럼 갑니다!”라고 외치며 한호영이 서정운에게 달려들었고, 서정운은 일순 멈칫했으나 그리 당황하는 눈치도 없이 방어에 나섰다. 그와 함께 삽시에 그들 주위에는 둥글게 둘러싼 관중이 생겨났다.

둘 다 정원사범의 직계 제자다. 과거 현역 시절에 연속 우승자로 이름 높았던 한호영과, 예전부터 정무도의 각종 기술을 교본처럼 소화한다고 이름 높았던 서정운이다. 심지어 사람들의 눈앞에서 대련을 하는 건 몇 년 만인 터.

정련뿐 아니라 체련 측에서도 그들의 대련에 시선을 집중했고, 드넓은 대수련장은 삽시에 조용해졌다. 들리는 소리라곤 그들의 몸이 맞부딪치는 소리뿐이다.

……, --, 숨죽인 가운데 누구라 할 것 없는 감탄스런 숨소리가 때때로 흘러나온다. 용호상박, 그것이 가장 걸맞은 말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모범시합이라 할 수 있는 대련이었다.

실상 승패를 가늠하자면 명확했다. 몇 년의 공백, 체급 차, 그리고 원래도 대련 능력으로는 크게 차이 나지 않았던 두 사람이다. 한호영이 우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술 하나하나가 느리고 정확하게 진행되는 그 대련은 둘 중 누구도 승패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다. 그 순간순간 얼마나 적절한 기술을 구사해서 얼마나 유효한 결과를 얻어 내느냐.

그것은 서로가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었고--.

“아……!”

한호영이 공격하는 사이에 순간적으로 드러난 빈틈을 정확하게 찔러든 서정운을, 한호영이 엉겁결에 피하며 붙들어 메어쳤다. 그러나 그 순간 아뿔싸 싶은 얼굴로 짧게 혀를 찬 건 한호영이다.

한호영의 손길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정확하게 메어쳐진 서정운은 매트리스에 등을 대고 누운 채 가슴을 들썩여 거친 숨을 쉬며 그를 바라보았고, 비 오듯 땀을 흘리며 무서운 눈으로 서정운을 내려다보던 한호영은 어느 순간 손을 놓고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아--, 내가 이럴 것 같았다니까.”

“전측보 안 쓰기로 해 놓고 썼겠다…….”

“알아요. 제가 졌다고요.”

한호영은 부루퉁하게 대꾸하며 그냥 드러누웠다. 교대하듯이 일어나 앉은 서정운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호영을 내려다보더니, “그래도 몇 년을 그냥 허송세월로 놀지는 않은 모양이네.”라고 중얼거리며 웃는다. 한호영도 지친 얼굴로 피식 웃었다.

그제야 고요한 침묵에 잠겨 있던 대수련장의 정적도 풀렸다. 둘에게 집중되어 있던 시선이 풀리며, 사람들의 나직한 속삭임이 듬성듬성 흐려진다.

저 정도였나. 몇 년을 쉬어도 여전하군. 아니 약간 둔해진 것 같기는 해. 하지만 저렇게 정확하게 구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걸. 감탄과 질시, 못마땅함과 한숨이 뒤섞인 소리들이 피어오르다 흩어졌다.

“아……, 내 고관절……. 너 노인 공경도 모르고 인정사정없이 덤볐다 이거지.”

골반 근처를 주무르며 눈살을 찌푸린 서정운이 쓰러져 누워 있는 한호영의 배를 주먹으로 퍼억 두드렸다. 한호영이 펄쩍 몸을 웅크리며 모로 누워 부르르 떨고 있는데, 대수련장 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본산에서 배우는 수련생들이, 수련 합숙을 하며 기술 연마를 하느라 애쓰는 사범들을 위해 가벼운 다과를 준비해 들고 온 것이다. 사범 합숙 수련 때마다 본산의 인원들이 사범들을 챙겨 주는 것은 상례였다.

“안녕하세요. 사범님들 수고 많으십니다. 좀 드시고들 하세요.”

시원한 마실 것과 간편한 과자, 과일 따위를 마련해 온 그들은 일회용 접시에 솜씨 좋게 사람 수대로 음식들을 조금씩 나눠 담더니 사범들에게 나눠 주며 돌아다녔다. 제각기 연습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 틈에 잠시 숨을 돌리며 목을 축이고 출출한 배를 달랜다.

“시간이 좀 애매한데. 한두 시간 있다가 저녁 먹을 텐데.”

음식 접시와 종이컵을 건네주러 다가온 수련생에게서 그것들을 받아 들며 시계를 본 서정운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접시를 나눠 주고 있던 여자 수련생이 그 소리를 들었는지 생긋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이 처음이라서 이래저래 준비하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더라구요. 내일부터는 좀 더 일찍 올게요. 죄송합니다.”

“예? 아니, 죄송하다니, 어찌 되었든 챙겨 주는 건데 우리가 고마워해야죠. 나야말로 괜한 말 해서 미안해요. 그래도 내일부터는 더 일찍 와 준다니, 고마워요.”

서정운은 본산을 오가는 동안 몇 차례 얼굴 마주친 적 있는 그녀에게 빙긋이 웃으며 인사했다. 누구나 당연히 할 만한 응대, 당연히 갖출 만한 예의였음에도, 사람이 사람이니만큼 순간적으로 그들에게 주위의 미묘한 시선이 몰렸다.

‘야, 저 여자냐? 서정운이가 노린다는 그 여자가?’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만 또 모르지. 워낙 여자한테는 다 흘리고 다니는 인간이잖아.’

‘남자가 저렇게 말했어 봐, 어 내일부터는 시간 잘 맞춰서 가져와, 그랬을걸.’

‘그런데 조금 전에 수련생들 들어올 때 왠지 서정운 사범이 재빨리 사람들 훑어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 노린다는 여자가 수련생 중 누군가인 게 틀림없어.’

‘누구지? 야, 저기 있는 저 여자도 예쁘지 않아? 서정운이 충분히 노릴 만하겠는데?’

‘모르지. 치마 두르면 다 홀리고 보는 인간이잖아. 여기에 안 온 여자일지도 몰라.’

‘……노리는 여자가 한 사람이리라는 보장도 없지.’

‘헉……, 발상의 전환이다. 그런데 듣고 보니 굉장히 그럴싸해.’

수군거리는 소리는 한동안 끊이지 않아, 그들이 가벼운 다과를 마치고 수련생들이 빈 접시 따위를 모아 들고 나간 뒤에도 그 화제가 얼마간 이어졌다. 심지어는 들은 체 만 체하던 서정운이 급기야 미간에 주름을 하나 긋자 ‘야, 여자들 나가니까 당장 표정 바뀌는 것 봐라.’라는 소리가 도는 실정이었다.

“난 내일쯤 수련생 중 하나가 사형의 숨겨 놓은 애를 데리고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아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 같아요.”

그렇게 중얼거리는 한호영의 뒤통수를 서정운이 눈길도 주지 않고 호되게 후려갈겼을 때였다. 문득 그들의 옆으로 다가서는 발걸음이 있었다. 주위의 훤소가 아주 잠깐 잦아들며 시선이 날아온다.

한무화가 서정운의 몇 걸음 앞, 체련의 영역에서 명확하게 벗어난 곳에 서 있었다. 서정운이 멈칫,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낯으로 그를 마주 본다.

“왜?”

서정운이 묻자 그를 마주 보던 한무화가 말했다.

“오후에 배운 기술, 몸에 잘 붙지 않는 느낌인데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서정운의 침묵은 그들을 바라보던 이들의 침묵만큼 길지 않았다. 잠시 한무화를 바라보던 서정운은 평연히 대꾸했다.

“싫은데.”

그 대답은 한편으로는 예상했던 반면, 또 한편으로는 의외였던 모양이다. 한무화는 표정 없이--그러나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이상한 얼굴로-- 서정운을 바라보았다.

“물어볼 상대가 틀렸어. 상원사범님께 다시 여쭤보든가 체련 쪽에서 물어볼 만한 사람을 찾아보든가 해.”

“--.”

“네 자리로 돌아가.”

서정운은 그렇게 말을 맺고는 돌아섰다.

한무화는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원래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가 거울을 마주 보며 개인 연습을 하는 서정운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체련의 나이 든 중원사범 중 하나가 저쪽에서 다가오더니 “한무화 선수, 이쪽으로 오세요.”라며 그를 끌어당긴 다음에야 그는 조용히 걸음을 돌렸다.

서정운은 그제야 거울 속으로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가만히 주먹을 그러쥐고 있는 그의 커다란 뒷모습이 유난히 눈에 아렸다. 마음이 쓰리다.

알려 주고 싶은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알려 주면서 잡아 주고 싶은데. 상냥하게 말해 주고 싶은데. 실망시키고 싶지 않고 씁쓸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데.

수련 합숙을 하면서 하루 종일 가까이에서 얼굴 보는 건 좋은데, 이걸 미처 생각지 못했다. 바보같이.

“왜 넌 체련인 거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는 서정운의 혼잣말을 들은 사람은 그 옆에 있던 한호영뿐이었고, 한호영은 흰 눈으로 서정운을 쳐다보다가 허, 하고 어이없이 한숨을 내쉴 따름이었다.

*

저녁 식사 자리는 제법 북적거렸다.

그러나 이것도 첫날이니 그럴 뿐, 내일부터는 반 이하로 떨어질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합숙 기간 동안 저녁 식사는 본산에서 하게 되어 있으나, 저녁 식사 이후에는 사범들끼리 시간을 보내곤 하는 게 보통이었으므로 외부로 식사를 하러 나가는 사람들도 제법 되었다. 명목상으로는 저녁 식사 뒤 자유 연습 시간이지만, 지켜지는 항목은 ‘자유’뿐이다.

그러나 오늘은 첫날이라 정원사범이나 상원사범도 식사 자리에 함께하다 보니 참가자 대부분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도 정련과 체련은 눈에 띄게 구분되어 앉아 있었다.

서정운은 정련의 정원사범이자 스승인 한태일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시선은 이따금 체련 쪽을 훑곤 했다.

……없다. 한무화의 모습은 그 속에 보이지 않았다. 한수일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누군가에게 한무화의 행방을 물어보는 모양이었는데, 그러다 답을 듣고 흐뭇한 얼굴을 하더니 식사를 시작했다. 굳이 그런 한수일의 기색을 보지 않아도 한무화가 어디에 있을지는 짐작이 가는 서정운이었다.

이미 자리에 없다는 걸 확인했으면서도 때때로 체련 쪽을 살피곤 하던 서정운에게, 오랜만에 전국에서 정련의 주요 사범들이 모여 식사를 함께하는 화기애애한 자리에서 갑자기 화제가 날아왔다. 한태일이 “그러고 보니,” 하고 서정운에게 말을 건넸던 것이다.

“너 마음에 둔 아가씨가 있다던데.”

한태일이 갑자기 말을 거는 통에 젓가락질을 멈추고 스승을 바라보던 서정운은 쿨럭, 기침을 하며 입을 막았다. 하마터면 음식을 뱉을 뻔했다.

“……그 얘기가 사부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까?”

천천히 입가를 닦으며 서정운이 말하자 스승은 이미 확신이라도 했는지 호기심 어린 투로 대뜸 물었다.

“그래, 누구냐?”

“……아닙니다, 뜬소문입니다.”

서정운이 말하자 스승이 가느스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주위에서 흥미롭게 바라보는 시선보다 그 눈길이 한층 더 따가운 것은, 스승의 의심에는 그럴싸한 이유가 있었던 탓이다.

서정운이 사범 수련 합숙에 참가하고 싶다고 스승에게 연락했을 때부터 이미 스승은 ‘그래, 그렇게 하거라.’라고 흔쾌히 허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헌데 네가 갑작스럽게 어쩐 일이냐? 뭔가 이유라도 있느냐?’ 하고 은근하게 물어 왔었다. (이제 와서는 어쩌면 애초에 저 소문의 근원지가 스승인지도 모르겠다는 의심마저 들었다.)

역시나 스승은 서정운이 뜬소문이라 해도 별반 믿지 않는 눈치로, 그러나 캐묻지도 않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식사를 계속했다.

“그래, 어찌 되었든 여자놀음은 슬슬 그만하거라.”

“예.”

서정운은 솔직하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 옆에서 이번에는 한호영이 흰 눈으로 서정운을 쳐다보는 게 ‘그래서 남자놀음을 하시려고……?’라는 눈치였지만, 부루퉁하게 밥만 퍼 넣는 입에서는 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많이 놀아 본 사람이 외려 결혼하고 나면 가정생활은 잘한대요. 많이 놀아 봤으니까 아쉬울 게 남지 않은 거죠.”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하원사범 유희정이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경기 북부 지원에 소속되어 있는 그녀는 예전에 본산에서 반년쯤 지냈던 적이 있어 본산 소속 사범들과도 제법 편하게 지내고 있었다. 동시에 서정운과 동갑이라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는 그녀는 그의 여성 편력 소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포함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 새삼 특이할 건 없었지만.

“허허, 그래? 정운아, 어떠냐? 정말로 그런 것 같으냐?”

스승이 너털웃음을 웃으며 서정운에게 물었고, 스승에게마저 ‘많이 놀아 본 인간’으로 찍힌 서정운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글쎄요.” 하고 대답했다.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많이 놀아 본 적이나 있어야 알지. 생각할수록 입맛만 써질 뿐이라 서정운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러자 유희정이 생글거리며 맞장구쳤다.

“하긴 그래요. 그래도 사람 인연이라는 건 모르는 법이니까,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알 수 없죠.”

환하게 웃는 그녀의 주위로 짤막한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 사이에 눈길도 오간다. 내일쯤 되면 틀림없이 그녀와 서정운이 반 동거라도 한다는 소문이 매우 신빙성 있는 듯이 퍼져 있을 게 분명했다.

얘 왜 이래……, 선본 남자랑 얼마 전에 결혼 날짜도 잡았다고 들은 것 같은데. 예전에도 육식 동물처럼 적극적인 데가 있긴 했지만 이렇게 막 덤비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하긴 그때는 얘랑 단짝처럼 다녔던 얘 사촌이 얘를 많이 붙들어 주긴 했었다. 이번에는 그 사촌은 합숙 참가 안 했나……. 서정운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닦았다. 밥을 거의 다 먹기도 했고 입맛도 사라져서 수저를 내려놓는다.

다행히 화제는 곧 다른 쪽으로 넘어갔다. 늦여름에 있을 하계 선수권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정무도의 각종 대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할 수 있는 대회를 두고 사범들은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정운은 목을 축이며 다시 체련 쪽 테이블을 보았다. 이미 사람들이 식사를 거의 마쳐 갈 즈음인데도 여전히 한무화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저녁 식사 자리에는 아예 나타나지 않으려나 보다.

“…….”

서정운은 하계 선수권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는 스승이며 사범들을 둘러보았다. 저 잠시,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잠깐 화장실에라도 간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식당에서 나온 뒤에야 서정운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좀 숨이 편안히 쉬어지는 기분이었다.

바깥에는 이미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고, 제 주인--정원사범--을 쫓아온 건지 누렁이가 식당 밖에 앉아 있다가 서정운이 나오는 걸 보고는 꼬리를 쳤다. 근처에서 뛰놀고 있던 강아지 몇 마리도 졸랑졸랑 꼬리를 흔든다.

슬슬 여름에 접어드는 청량한 밤공기를 폐 깊이 들이쉬었다. 흙냄새와 나무 냄새가 물씬 섞인 공기가 사람에 취한 기분을 씻어 주는 것 같았다. 서정운은 깊이 숨을 내쉬며 강아지들마다 한 번씩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걸음을 옮겼다.

인적 드문 길을 걸어 대수련장으로 향하던 그는 도중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방향을 바꾸어 본채 쪽으로 넘어간다.

본채 안쪽에는 문중의 직계 가족과 직계 제자가 조용히 수련하고자 할 때 이용하는 작은 도장이 있다. 아마 그곳에 있을 것이다. 이유 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널따란 부지를 가로지르는 길은 밤에도 한적한 숲처럼 고적하고 맑아 서정운은 산책을 하는 양 느리게 걸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위에서 번잡하던 사람들의 훤소는 온데간데없고 멀리서 밤새 울음소리가 들린다. 어디선가 꽃 냄새가 흘러왔다.

길은 두 갈래, 외당으로 가는 길과 도장으로 가는 길로 나뉘었다. 왼쪽 저 안쪽에 있는 작달막한 집채에 불이 켜져 있는 게 보였다. 큰 어르신이 깨어 계신가 보다. 서정운은 잠시 그 아른거리는 불빛을 보다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갔다. 우거진 나뭇가지 아래를 지나 조금 걸어 들어가자 아담한 집채가 나왔다. 역시나, 그 집채에도 불이 켜져 있다.

장지문에는 커다란 그림자가 비치며 일렁이고 있었다. 느리게 움직이는 그 그림자를 보며, 서정운은 그림자의 주인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동작 하나하나에 세심한 신경을 쏟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문득 기특해지고 마음이 뿌듯해지는 건 정무도를 하는 사람으로서 그를 아끼는 마음이고, 가슴이 뛰며 심장이 울렁거리는 건 그를 보고 싶어서 찾아온 마음이다.

“…….”

서정운이 도장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 안에서는 한무화가 문을 등진 채 수련에 임하는 중이었다. 단순한 동작임에도 손가락 끝까지 신경을 쏟아 움직이는 그의 몸에서는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기척을 들었을 텐데도 돌아서지 않고 묵묵히 본인의 움직임에 열중하며 집중하는 한무화를, 서정운 역시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지켜본다.

“……?”

어쩐지 평소보다 기색이 거칠다. 한동안 차분하고 매끄럽게 잘 가다듬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집중이 잘되지 않는 듯 움직임에 힘이 다소 지나치게 들어가 있었다. 선이 거칠다.

그것을 본인도 아는 듯 턱을 굳게 다문 한무화의 비스듬한 뒷모습이 여느 때보다 묵직하게 가라앉아 보였다. 그럼에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짜증도 내지 않고 포기하지도 않고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그를 서정운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사람 인연이라는 건 모르는 법이니까.

아까 들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인연이란 모르는 법이다. 이렇게 좋아질 줄 누가 알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서정운은 고개를 젓고 말았다.

아니다. 처음부터, 알고 보면 좋아할 수밖에 없었을 남자다. 저렇게 본인에게 성실하고 흔들림 없는 남자를 안 좋아할 도리는 처음부터 없었다.

내가 좋아하게 된 사람이 너라서 다행이다. 비록 거절을 당했을지언정 이 감정이 빛바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서.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뿌듯하고 좋아지는 사람이라.

서정운은 가슴 가득 차오른 숨을 가만히 내쉬었다.

그때다.

누가 있든 말든 돌아보지 않고 본인의 움직임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한무화가 별안간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땀이 흘러 들어간 탓일까, 불빛에 반사된 눈동자가 유난히 반들거려 보여 서정운은 움찔하고 말았다. 묵직한 열기가 피어오르는 도장 한가운데 화를 눌러 참은 짐승 한 마리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

“……, 서정운 사범님.”

설마 거기에 서정운이 서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불쑥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한풀이 꺾였고, 그제야 서정운은 눈앞의 인물이 겨우 익숙한 남자의 모습으로 보였다.

“힘이 너무 확산되어 있어. 힘을 발산하는 게 아니라 수렴하는 거야. 뻗어 내지 말고, 안으로 모으듯이.”

서정운은 한무화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뚫어져라 서정운을 보는 그의 등 뒤로 돌아가, 뒤에서 몸을 겹치다시피 해 그의 팔을 잡았다. 희미하게 그의 등 근육이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서정운은 자신의 팔과 겹쳐 그의 팔을 잡은 채 천천히 움직였다.

우사지르기에서 선회주축으로. 팔을 힘 있게 그어 내린 뒤 곧이어 팔 전체를 휘두르며 팔꿈치로 원을 그리듯 구부린다. 그리고 목표하는 곳으로 부드럽게 파고들듯이 내리찍는 것이다.

그것은 부드럽게, 그러나 맹위 있게, 누구도 피하지 못할 속도와 정확함을 갖추고, 그렇게 이루어진다.

“……알겠어?”

한무화와 팔을 겹친 채 천천히 일련의 움직임을 구사한 뒤 서정운이 속삭였다. 잠시 침묵하던 한무화가 “한 번 더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한다. 서정운은 두말없이 다시 팔을 움직였다.

겹쳐진 몸이 따뜻하다. 서정운의 가슴에 닿은 한무화의 등에서 단단한 근육이 움직이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팔을 움직이면서 함께 움직이는 가슴 근육의 움직임도 한무화에게는 고스란히 전해질 터였다.

“팔만이 아냐. 팔이 시작되는 뿌리부터 움직인다고 생각해.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잘 생각해 봐.”

“한 번 더……, 위치를 바꿔서 다시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한 한무화는 서정운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등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서정운을 뒤에서 끌어안듯이 몸을 겹치고 팔을 겹쳐 잡는다.

서정운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등 뒤를 넉넉하게 감싸는 남자의 몸이 이번에는 더욱 분명하게 느껴졌다. 땀에 젖은 몸의 체취까지 선명하게 코에 배는 느낌이다.

“--.”

서정운은 가만히 팔을 움직였다. 움직임 하나하나, 한무화가 온 신경을 다해 집중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서정운의 아주 미세하고 작은 움직임까지. 아마도 심장의 떨림마저 전해졌을 것이다.

그 느리고 영원할 듯이 길던 움직임이 한 흐름 끝난 뒤.

그대로 멈춰 침묵하던 한무화가 “한 번 더,”라고 말하려는 찰나, 서정운은 가볍게 그를 밀치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만. 내 집중력이 버티지 못하겠다고.”

한무화는 물끄러미 서정운을 보다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빈 팔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어딘지 아쉬운 듯도 하고 부족한 듯도 하다. 그러나 천천히 팔을 그어 보는 그의 표정은 이미 여느 때와 같은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느리게 몸을 움직이며 방금의 움직임을 되새겨 보는 듯하던 그가 문득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안 봐주시는 줄 알았습니다.”

심장까지 데워진 듯한 기분에 손부채질을 하며 창가로 가던 서정운이 그를 돌아보았다. 분명 무표정한 얼굴인데도 왠지 불퉁하고 한편으로는 서운해하는 어린애 같아, 그게 참 이상하다.

“……한수일 사범님도 내가 널 지도하는 건 끝이라고 못 박으셨거니와, 널 봐주면 체련 측에서 싫어해. 나야 상관없다지만 그러다 자칫 너까지 미움 사게 된다고.”

“저는 상관없습니다.”

조용하고 단호하게 말하는 한무화를 서정운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실제로도 그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싫어.”

서정운은 고개를 저었다.

서정운 자신이 정련에서 어떤 험담을 들어도 개의치 않는 것처럼 한무화 역시 남의 험담에는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생각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한무화가 다른 사람에게 뒷말을 듣거나 겉도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그것이 서정운으로 인한 것이라면 더욱.

“나랑 가까이 지내면 척지기 십상이야. 넌 이 자리에 계속 있을 거고, 이곳이 네가 걸어갈 자리잖아. 그렇다면 사람들과 척지지 마. 굳이 잘 지낼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굳이 겉돌 이유도 없지.”

그러나 한무화는 서정운의 말에 납득하지 않는 눈치였다. 미간을 찌푸린 그는 잠시 생각하다 무뚝뚝하게 말했다.

“한호영 사범님은 서정운 사범님과 잘 지내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분이 겉돌거나 대인 관계가 나쁜 걸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 녀석은 정련이잖아. 너랑은 달라.”

한무화의 미간에 새겨진 주름이 조금 더 짙어졌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저는 사람들이 무어라 떠들든, 서정운 사범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가르침 받는 쪽이 더 좋습니다.”

“내가 싫다니까.”

“저는 상관없습니다.”

한무화는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본인이 납득하지 않는 한은 누가 뭐라 하든 듣지 않을 남자다. 서정운은 그를 뚫어져라 보다가 쓰게 웃었다.

“그래서, 너 험한 소리 듣게 되면, 그걸 들을 내 기분은 생각 안 하고?”

“--.”

한무화가 멈칫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은 듯 꼼짝도 않고 서정운을 바라보는 그에게, 서정운이 한숨처럼 중얼거린다.

“내가 너 좋아한다는 거, 신경 쓸 필요는 없지만 잊지는 말았으면 좋겠는데. 널 좋아하는 건 내 자유고 네가 배려해 줄 의무는 없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한무화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정운을 바라보는 묵묵한 얼굴은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짐작할 수 없다.

여러 생각들이 뒤섞인 것처럼 얼마간 서정운만 쳐다보면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던 그가 어느 순간 입을 열었다.

“정련, 체련 나누는 건 제가 알 바 아닙니다. 저는 정무도를 몸에 익혀 나갈 수 있으면 그만이고, 서정운 사범님이 절 잘라 내는 게 싫습니다.”

“난 널 자르지 않아.”

“사범님의 입장은 알겠습니다. 머리로 알고 이해도 합니다. 그런데, 유쾌하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분이 안 좋습니다. 그래서 계속 수련도 제대로 집중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뜻밖이었다. 무엇에든 관심이 없는 대신 정무도에만큼은 그 무엇보다도 집중하며 열중하는 남자가. 문득 서정운은 조금 전에 느꼈던 그 거칠었던 선을 떠올렸다. 서정운이 잡아 주자 금세 침착하게 다듬어졌던 움직임이다.

“저는 서정운 사범님이 저를 봐줬으면 좋겠습니다.”

한무화가 똑바로 서정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서정운은 그 불시에 날아든 말에 저도 모르게 얼음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다.

“……. ……. …--.”

알고 있다. 잘 알고 있다. 한무화가 말하는 게 정무도의 지도를 뜻한다는 건. 그 외의 다른 뜻이라곤 전혀 없다는 걸 서정운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를 좋아하는 서정운의 귀에는 공연히 의미심장하게 들려와서 주책없이 심장이 뛰었다.

안 돼. 그러지 마. 그런 뜻 아니라는 거 알잖아. 안 돼. 안,

“…--.”

그러나 머릿속에서 아무리 이성이 외쳐도 소용없었다. 삽시에 얼굴이 빨개지는 걸 알겠다. 어떡하지, 심지어 이렇게 얼굴까지 뜨거워지자 표정 관리마저 안 됐다.

서정운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한무화를 쳐다보다가 결국 한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덮어 버리고 말았다. 그가 어딘지 기묘한 듯이, 조금은 당혹스러운 듯이 서정운을 바라보는 저 진지한 시선에서 조금이라도 달아나려고 얼굴을 가려 버린다. 그런데도 손등 위로 그의 시선이 뚫어질 듯이 느껴졌다.

“……보지 마.”

서정운이 불퉁하게 중얼거리자 한무화는 왠지 당황한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다른 데를 보거나 시선만 돌려도 될 걸 착실하게 고개를 푹 숙여 버리는 그를 손가락 사이로 흘끔 쳐다보며, 서정운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꼭 강아지 같다. 화가 나 있더라도 주인의 말은 착실하게 잘 듣는 커다란 강아지. 귀엽고 사랑스럽기 이를 데 없는.

……안 되겠어. 난 이 남자에게 너무 약하단 말야. 알고는 있지만, 끊을 때는 끊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역시 안 되겠다.

서정운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바삭, 남자의 짤막한 머리카락이 손끝에 닿았다. 그 까끌하고도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살살살 쓰다듬자 그제야 한무화는 시선을 들었다. 서정운의 손길을 방해하지 않도록 천천히 고개를 들며.

“봐줄게. 밤에만.”

“--.”

“낮에는 안 돼. 난 네가 곱지 않은 시선 받는 것도, 괜한 말 듣는 것도 싫어. 그러니까 볼일 없이는 나한테 가까이 오지 마. 대신 밤에는 여기서 너 연습하는 거 봐줄게.”

한무화는 말없이 서정운을 보았다. 그 말이 썩 내키는 것은 아닌 눈치였지만 잠시 뒤 고개를 끄덕인다. 불만스러워도 말은 착하게 잘 듣는 사랑스러운 강아지 같아서 서정운은 웃으며 그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불현듯 서정운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 안에서 꺼낸 건 식당에서 나오는 길에 들고 나온 떡 한 덩이다. 서정운이 손바닥만 한 떡을 건네자 한무화가 의아한 얼굴로 그걸 받아들었다.

“너 밥도 안 먹었잖아. 연습도 좋지만 먹어 가면서 해야지.”

“……오늘 배운 게 좀처럼 몸에 익지 않아서 그게 더 마음에 걸렸고,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습니다.”

“안 고파? 오후 내내 그렇게 연습을 해 놓고?”

“예, 조금 전까지는 고프지 않았는데, ……지금은 고픈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고개를 꾸벅 숙인 한무화는 비닐 래핑을 벗긴 떡을 덥석 베물었다. 제법 큰 떡인데 두 입 만에 다 먹겠다. 하나 더 가져올걸, 하고 뒤늦게 후회하면서 서정운은 도장 구석에 놓여 있는 주전자에서 물도 따라 건네주었다.

먹성 좋은 것까지 사랑스럽다. 눈에 콩깍지가 씌긴 단단히 씌었나 보다. 창틀에 걸터앉은 한무화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그 옆에 나란히 앉던 서정운은 무심결에 “에고…….” 하고 중얼거리며 골반 근처를 툭툭 두드렸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잊고 있던 통각이 다시 돌아오는 것 같았다.

한무화가 떡을 먹다 말고 의아하게 눈길을 주었다. 서정운은 대수롭잖게 고개를 젓는다.

“아까 호영이랑 대련할 때 바닥에 좀 세게 찧었나 봐. 사고가 났을 때 고관절 쪽을 꽤 크게 다쳐서 아직도 좀 안 좋거든.”

그래도 뭐 그리 대단치는 않아, 라며 골반 옆을 가볍게 두드리는 서정운을 바라보던 한무화는 약간 느리게 물었다.

“사고가 난 건 몇 년 전이라고 들었는데, 아직 안 좋으신 겁니까? 언제쯤 나으시는 겁니까?”

“아니, 다 나았어. 이 이상은 더 나을 게 없지. 하지만 사람 몸은 한번 망가지고 나면 다 낫더라도 완전히 원래대로는 돌아올 수 없는 거라서.”

그래서 정무도를 그만두었다. 그때까지 본인이 원하는 대로 그 미세한 움직임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그 몸을 더 이상은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고통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미련째로 잘라 버리려 이곳을 떠났다.

괜찮아. 어차피 그렇게까지 목매어 애썼던 건 아니었어. 난 달리 잘하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으니 이쯤은 괜찮아.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쉬우십니까?”

한무화가 물었다. 서정운은 무어라 대답하려다 말을 멎었다. 그렇다, 아니다,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멈춰 있던 그는 말했다.

“불공평하다는 생각은 했지.”

“불공평이요.”

응, 하고 서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픽 웃었다.

“난 어릴 때부터 여자 운이 안 좋았거든. 희한할 정도로 안 좋았어.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 빼고는 무엇이든--머리든 외모든 재능이든 형편이든 거의 대부분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았단 말이야. 그래서 나는,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으니 여자 운이 안 따라 주는 걸로 나름대로 공평한 거다, 그렇게 생각했었어. 내 삶은 공평하다고.”

그래서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았다. 아쉽거나 서운한 일이 여러 번 있었어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그런데 정무도를 그만두게 됐거든.”

어느 날 갑자기. 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마음의 대비를 할 겨를도 없이 상실은 갑자기 닥쳤다.

“그때 생각이 들었어. 나는 공평하다고 생각했었던 내 삶이 어쩌면 아직 불공평했던 걸까. 그래서 나한테서 하나가 더 사라진 걸까. ……하지만 그러기엔 좀 큰 걸 가져가 버려서, 외려 반대로 불공평해진 것 같은데.”

삶이 불공평한 것은 고통이다. 다른 사람들은 온전히 차 있는 것 같고 나만 한 귀퉁이가 뚝 떨어져 비어 있는데, 그곳의 빈 공간은 조금씩 견디기 쉬운 것으로 마모될 뿐,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넌 어때, 삶이 네게 공평한 것 같아?”

서정운이 묻자 한무화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고개를 젓는다.

“잘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딱히 넘친다거나 부족하다는 생각을 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너는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이다’라는 말은 여러 번 들었습니다만.”

그것은 어떤 이의 입에서 질투와 시기를 담고 나온 말일까. 한무화의 표정이 썩 선선하지 않다. 그러나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서정운은 웃었다.

“잘됐네.”

“잘됐습니까?”

의아한 시선을 주는 한무화에게 응, 하고 서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삶이 네게 공평하길 바라. 네가, 공평하다고 여기는 삶을 살기를.”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노력한 만큼 주어지는 삶을. 그렇다면 그는 그 끈질긴 노력과 성실로 그가 원하는 것들을 분명 그러쥘 수 있을 테니. 그렇게, 그가 공평한 삶을 살길 바랐다.

한무화는 물끄러미 서정운을 보았다. 혼잣말처럼 조용하지만 분명한 진심을 담고 한마디 한마디를 속삭이는 서정운의 옆얼굴을, 바로 옆에 앉아 뭔가 기묘하고 희한한 것이라도 보는 것처럼 구석구석 본다. 그러다,

“서정운 사범님도 그러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도 진심이 배어 있었다. 그래서 서정운은 “응. 고마워.”라며 웃고 만다. 그를 보는 한무화의 눈꼬리도 느슨하게 휘어졌다.

열어 놓은 창으로 느리게 밀려드는 밤공기는 그만큼 느리게 서늘함을 전해 준다. 뚝뚝 흘러내리던 땀은 어느새 멎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열기는 식지 않아, 한무화와 나란히 앉아 맞닿아 있는 서정운의 왼쪽 어깨에까지 더운 체온이 전해진다.

조용하고 서늘한 밤공기 속에서 선명하게 전해지는 그 체온이 기분 좋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서정운 사범님은,”

한무화가 입을 열었다. 서정운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 말은 어쩐지 금방 뒤가 이어지지 않아, 잠시 기다리다가 의아하게 그를 돌아보았다.

한무화의 얼굴에는 얼핏, 말을 꺼내지 말 걸 그랬나, 후회하는 빛이 어려 있었다. 늘 오래 생각한 뒤에야 말하는 이 남자답지 않게 무심결에 솟아오른 뭔가를 뱉어 내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뭐.”

서정운이 부드럽게 재촉하자 한무화는 사이를 두고 말했다.

“서정운 사범님은 왜 제가 좋습니까?”

서정운은 입을 다물었다. 껌벅껌벅, 뚫어져라 한무화를 쳐다보며 말을 못 한다. 한무화는 이번에도 그답지 않게 괜히 말했다는 듯한, 조금 머쓱한 것도 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생각도 못 한 말이었다.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감정에 관심을 두지 않는 이 남자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상대를 내가 좋아한다는 것도 일종의 불공평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한무화는 지그시 서정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러면, 안 좋아하면 어떻습니까? 이를테면 제가 서정운 사범님께 호감을 가진 만큼만 서정운 사범님도 제게 호감을 가진다면. 그러면 공평하지 않습니까?”

서정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빤히 한무화를 바라본다.

오는 만큼 간다면. 그것은 분명 공평할 터였다. 하지만,

“아니, 나는 이건 그냥 불공평한 게 좋겠어. ……부담스러워?”

서정운이 쓰게 웃었다. 그 순간 한무화의 무표정 위로 당혹스러운 빛이 스쳤다. 무심결인 듯 서정운의 팔을 붙잡으며 고개를 젓는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서정운 사범님이 그쪽이 편하시지 않을까 했습니다. 그뿐입니다.”

서정운은 눈을 껌벅이며 그를 보았다. 설마 이렇게 정색을 할 줄은 몰랐다. 그 진지한 기색의 한무화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서정운은 어느 순간 웃었다.

“알아, 네가 다른 뜻이 없다는 건. 그래, 그게 편할지도 모르지. 그런데, 나는 네가 좋아. 내가 널 좋아한다는 것도 좋아. 괴로울 때도 분명히 있지만, 그래도 나는 좋아하지 않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쪽에 설 거야.”

조용히 말한 서정운은 잠시 생각하다가 “글쎄……, 그리고 과연 내 의지대로 안 좋아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고.”라고 덧붙였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불가항력의 사고 같은 거라서. 왜 좋아하는지는 나도 몰라.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데에 이유가 있다면 나도 알고 싶어. 그러면 훨씬 편하겠지. 좋아할 사람을 내가 고를 수 있을 테니.”

그러면 삶의 아주 많은 부분이 편해질 터였다. ‘괜찮은’ 사람을 좋아하고, ‘괜찮지 않은’ 사람은 좋아하지 않고. 마음대로 된다면.

문득 서정운은 웃었다.

“예전에 아는 친구랑 길을 가는데, 건너편에 지나가던 사람이랑 아는 사이였는지 반갑게 손 흔들고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지나치더니, ‘짜증 나.’ 하고 중얼거리는 거야. 그래서 내가 ‘왜, 싫어하는 사람이야?’ 하고 물었는데, ‘아니, 내가 좋아하는 사람.’ 하고 대답하는 거지.”

한무화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래, 서정운도 그때 딱 저랬다. 좋아하는 사람과 우연히 스쳐 지나가며 반갑게 인사도 했는데, 진심을 담아 짜증 난다고 말하는 친구를 보면서.

“그러면서 그 친구가 말하는 거야. ‘쟤가 정말 나쁜 놈이거든.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에 다른 사람 마음은 전혀 배려를 안 해. ……그런데, 그런데도 싫어지지 않아. 나쁜 놈이다, 끊어 내는 게 좋다, 백번을 생각하는데, 그런데도 쟤가 좋단 말이지.’”

아……, 짜증 나, 그렇게 덧붙이는 친구의 말에 진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고통스러울 게 뻔한데도 내 의지대로 잘라 낼 수가 없는 마음.

“사람을 좋아하는 건 이유도 없고, 공평하지도 않은 일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이 남자의 현재는 그야말로 공평한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서정운은 한무화를 보며 웃었다.

하지만 공평하지 않아도, 서정운은 아무것도 없는 공평보다는 지금의 이 불공평이 좋았다.

“게다가 봐, 하물며 넌 나쁜 놈도 아니란 말이야. 널 좋아하기를 잘했다--좋아한 사람이 너라서 잘됐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렇습니까.”

“응. 부담스러워?”

서정운이 묻자 한무화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별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단지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게 처음이라서 좀 낯선 기분은 듭니다.”

“낯설어? 불쾌하다든가?”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닌데, ……잘 모르겠습니다.”

한무화는 적절한 말을 고르려는 듯 잠시 말을 끊었으나 결국 생각나지 않았는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적절한 말이 무엇인지 계속 고심하는 양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서정운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이렇게 우직하고, 성실하고, 굳건한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어. 아무리 불공평하더라도.

서정운은 가만히 손을 뻗어 한무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얌전히 그 손길을 받고 있는 한무화의 어깨에서 아주 어렴풋이 힘이 빠지는 듯했다. 편안하게 늘어지는 것처럼.

공평하면--만일 그것이 아무것도 없는 공평이 아니라 양쪽 모두가 묵직하게 채워져 있는 공평이라면, 그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좋을지, 얼마나 기쁠지, ……한편으로는 그것이 자신의 몫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아서, 그게 얼마나 부럽고 간절히 탐나는 일인지, 서정운은 그런 것들을 떠올린다.

그러다 불쑥,

“바넷사랑은 오래 사귀었어?”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이다. 말하고 난 직후에 자신의 입을 꿰매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차, 하고 인상을 구기는 서정운을 한무화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 이름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 ……그때, 불렀거든. 잠꼬대하면서. ……그날 밤에.”

어물어물 그렇게 말하다 말고 서정운은 그새 확 더워지는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날 밤의 아주 짧았던 접촉이 떠오른다. 그것은 짧으면서도 몹시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 감각이었다.

한무화는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심장이 요란스럽게 뛰어 어쩔 줄 모르던 서정운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그는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고 평연하게 말을 이었다.

“일 년 조금 안 되었으니까 오래 사귄 편입니다.”

“……. 일 년…… 그게 오래야?”

“예. 보통은 몇 달 지나지 않아 헤어지자고 했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런 얘기를 했었다. 연애보다는 운동에 열중하는 그를 견디다 못해 여자들이 떨어져 나갔다고. 서정운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짝사랑은 힘들지…….”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서정운을 응시하던 한무화는 잠시 생각하다가 마치 위로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사범님도 아마 오래 걸리지는 않으실 겁니다.”

“…….”

이게 위로라는 건 알겠는데, 그 나름대로 서정운을 배려해 주는 말이라는 건 알겠는데, 전혀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서정운은 한무화의 뺨을 쓰다듬듯이 손바닥으로 감쌌다가 그대로 꽈악 움켜쥐고 말았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제법 아픈지 한무화가 움찔 얼굴을 찌푸리는 게 손바닥 안으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일 년 채 안 갔다는 바넷사조차 부러울 지경인 나한테 무슨 망발이야, 그게.”

“--부럽습니까?”

손아귀 전체로 힘껏 꼬집힌 뺨이 얼얼한지, 야단맞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약간 떨구곤 뺨을 문지르던 한무화가 물었다.

“원래 가져 보지 않은 것엔 미련이 오래 간다고.”

“가져 보지 않은 것…….”

그렇게 중얼거리던 한무화가 말했다.

“그때 서정운 사범님이 입 맞추지 않았던가요? 그 정도로는 조금이나마 ‘가져 보았다’는 축에 들지 않습니까?”

어제 먹은 아이스크림 맛있었냐고 묻기라도 하는 것처럼 평연한 말투였다. 표정도 그 말투 못잖게 무심하다. 쩡하고 얼어 버린 건 서정운 혼자뿐이었는데, 그 아무렇지 않은 한무화를 껌벅껌벅 보는 사이에 서정운은 그게 그에게는 아무렇지 않게 얘기할 수 있을 만한 일이라는 걸 알아차린다.

그래, 그야 그렇지. 이렇게 당황하는 게 더 이상한,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스킨십이다. 아무것도 아니지. 아무것도 아냐. 어른의 여유는 뒀다가 어디 쓸 거야.

머릿속으로 백번쯤 ‘어른의 여유’를 읊조린 서정운은 아무렇지 않게, 가볍게 웃고 만다.

“그 정도로 무슨. 잠결이라 제대로 한 것도 아닌데. 왜, 제대로 해 주게? 그럼 또 모르지.”

“그렇습니까?”

이번에도 대답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왔다.

그러나 그 대답과 동시에 뻗어와 서정운의 뒷목을 감싸 쥔 손은 아무렇지 않지 않았다--적어도 서정운에게는 전혀 아무렇지 않지 않았다.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마치 거기 소금 좀 건네 달라는 가벼운 청을 그 자리에서 흔쾌히 들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무화가 서정운에게 입술을 겹쳤다.

어……?

일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느새 겹쳐진 입술을 열고 들어온 낯선 혀가 입속을 헤집고 들더니 혀에 농밀하게 감긴다. 그리고,

“--!”

가까운 곳에서 물씬 풍기는 땀 냄새. 낯익은 한무화의 체취. 그러나 심장이 멎을 만큼 낯선 입안의 열기에 숨이 막힌다.

순간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몸속 깊은 곳에 불이 붙은 것 같은 느낌이다.

“농, --농담, 이, 었,”

겹쳐진 입술 사이로 한마디, 두 마디, 띄엄띄엄 내뱉은 서정운은 저도 모르게 한무화를 밀쳤다. 천 근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그대로 버티는 듯한 느낌이 전해졌다. 더욱 당혹스러워 서정운이 손에 더 힘을 준 찰나, 마치 거짓말처럼 그 무게가 뒤로 물러섰다.

“농담이었습니까? 죄송합니다.”

가볍게 발이라도 밟은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사과하며 물러난 한무화가 바로 코앞에서 서정운을 내려다본다. 서정운은 눈만 껌벅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쩌지. 어째야 하나. 아무렇지 않게 태연하게 몇 마디 핀잔이나 주고 말아야 하는데, 얼굴이 더워진다. 금세 달아오른 열기가 얼굴은 물론 귓불, 목덜미까지 번지는 걸 금세 알겠다. ……망했다.

대수롭잖은 기색이던 한무화도 순식간에 빨개진 얼굴로 굳어 버려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서정운을 보고는 그제야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냥 모기를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알고 보니 참새였었나 하는 눈치다.

“죄송합니다.”

한 번 더 사과하며 고개를 꾸벅 숙이는 한무화에게 서정운은 간신히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최대한 태연한 투로, 비록 낯빛은 사괏빛이 되어 있었지만 표정이나 말투만이라도 아무렇지 않게.

“아니……, 뭘 이 정도로.”

그러나 아무리 표정과 말투가 아무렇지 않아도 잘 익은 얼굴빛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한무화가 난처한 듯 서정운을 보다가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 정도는, 서정운 사범님이라면 많은 여자분들과 자주 하셨을 줄로…….”

“……, ……그건 그렇, ……, ……지 않아……. 그렇게 막 자주 안 한다고. 좋아하는 사람 아니면 안 해.”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자고 있는 한무화에게 몰래 입 맞추다가 사달이 났던 서정운이니까 이쯤이야 장난이든 농담이든 별것 아니지 않느냐고. 하지만.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안 됐다. 외려 그게 더 꼴이 우스울 것 같아 서정운은 포기하고 어깨를 늘어뜨리고 만다. 뜨거운 얼굴이 식지 않았다.

안 되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는데. 무화가 당황할 건데.

“미안. 못 들은 걸로 해 줘.”

서정운은 자신의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곤 중얼거렸다. 그리고 애써 표정을 가다듬고 한무화를 올려다보자, 그는 염려스러운 얼굴로 서정운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서정운을 보고 외려 그가 어쩔 줄 몰라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서정운의 말에 그는 “예.” 하고 착실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실제로 그 말대로 그는 얼른 까먹은 것처럼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그게 또 사랑스럽고 이 무뚝뚝한 배려가 마음에 스몄다. 그래서 서정운은 손을 뻗고 말았다. 이 사랑스런 남자를 쓰다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한무화는 그 손길에 머리를 맡긴 채 얌전히 있다가 한마디 불쑥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 뭐가 죄송해. 난 좋았는데.”

당혹스럽고 당황했지만 싫지 않았다. 싫을 리가.

서정운은 여전히 열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무뚝뚝하게 중얼거리면서도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고, 심지어는--빨간 사과 같은 얼굴로 말해 봐야 애초에 글렀다는 걸 알면서도-- “뭐 이런 것도 가끔은 괜찮네.”라고 허세까지 부려 본다.

그러나 한무화는 그렇게 빨갛게 굳은 얼굴로 센 척하는 서정운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도 전혀 딴죽이라곤 걸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그는 순순히,

“예. 괜찮습니다.”

하고, 짤막한 대꾸만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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