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intermission 3. (12/28)

intermission 3.

아직 6월인데 밤은 후덥지근했다.

서정운은 ‘그래도 가만히 앉아 있으니까 살짝 쌀쌀해지긴 하는데.’라며 팔을 쓸었지만, 한무화는 서정운이 돌아간 뒤로도 한참 창틀에 걸터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시원해지지 않았다.

여름이 되면 제법 덥겠다. 한무화는 서정운이 주고 간 육포를 질겅거리며 생각했다. 간을 하지 않아 늘 담백한 육포는 오늘따라 더 담백한 것 같다. 맛을 잘 모르겠다.

한동안 한무화와 나란히 앉아 별것 없고 하잘것없는 이야기를 나누던 서정운은 한호영의 전화를 받고 돌아갔다. 「저녁 먹다가 잠깐 화장실 가는 것 같던 사람이 도통 돌아오지 않아 화장실에서 빠져 죽었나 싶어 전화해 봤습니다.」라고 토달거리는 목소리가 전화 밖으로도 들려왔다. 서정운은 「화장실 간 사람을 왜 찾아. 찾지 마.」라고 못마땅하게 대꾸하고 전화를 끊었으면서도 ‘슬슬 가 봐야겠다.’라며, 한무화에게 육포만 한 줌 건네주곤 자리를 떴다.

그리고 한무화는 그곳에 홀로 남아 육포를 우물거리며 밤바람을 맞고 있었던 것이다.

멀리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옆에서 어린것들이 어미 따라 알알 짖어 대는 소리도 들린다.

좀 나눠 줄까, 한무화는 육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지만 이내 마지막 한 조각도 입에 넣어 버리고 말았다. 왠지 나눠 주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

내가 지금 기분이 나쁘지 않구나. 한무화는 약간 희한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오늘은 하루 종일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아침부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속에 뭔가 묵직한 게 들어앉아 있는 기분이었는데.

이유는 알고 있었다. 수련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다. 오전부터 어쩐지 집중이 안 된다 싶은 기분이었는데, 오늘 오후 상원사범이 가르쳐 준 기술을 거듭하고 또 거듭해도, 주위에서는 잘한다 굉장하다 해 주지만 자신의 몸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 들지 않고 계속 뭔가 약간 어긋난다 싶었다.

그런 때에 그 간극을 해결해 줄 사람을 한무화는 알고 있었다. 서정운이다. 여태 계속 그랬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눈이 좋아서 사람의 사소한 동작 하나만 스치듯 보고는 어떻게 고치는 게 가장 좋을지 금방 알아냈다. 그렇게나 정련 선수들을 싫어하는 한무화의 양부도 서정운을 볼 때는 아깝다는 듯 혀를 차곤 할 정도다.

그러나 그런 서정운은 한무화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 아니, 도움을 주고 안 주고의 문제가 아니다. 아예 밀어내는 것처럼 단호하게 잘랐다.

처음에 한무화는 놀랐다. 아침에 서정운이 한무화에게서 눈길을 돌린 때부터다. 정련과 체련의 갈등은 이미 잘 알고 있었고 서정운의 입장도 익히 이해하고 있었음에도, ‘어……?’ 하는, 상상도 한 적 없는 현실에 맞닥뜨린 기분.

그게 몹시 뜻밖이었고, 두 번째로는 그걸 뜻밖이라 놀라워하는 스스로를 깨닫고 또다시 그것이 뜻밖이었다. 이렇게 사람의 반응에 놀라는 기분이 든 건 처음인 성싶었다.

하지만 그러려니 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그냥 그대로 잊어버리고 자신이 하던 대로 자신의 일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계속 묵직하게 속이 들어찬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아침 먹은 게 소화가 안 되나 싶어 소화제도 먹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계속 속이 불편하게 얹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얹힌 느낌이 한층 더 심해진 것은 저녁 무렵이다. 수련생들이 간식을 챙겨 와 나눠 준 직후, 오후 내도록 연습을 해도 동작이 좀처럼 몸에 붙지 않아 한무화는 결국 서정운에게 가서 물어봤다.

체련인 자신이 정련인 그에게 물어보면 조금 곤란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얼핏 했지만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정련, 체련, 그런 것이 다 뭐란 말인가.

그러나 이번에도 뜻밖에,

--네 자리로 돌아가.

차분하게 밀어내는 조용한 목소리.

그런 목소리는 처음 들었다. 그래서 묵묵히 그를 바라보다가 결국 하릴없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고 나서도 한동안 그 목소리가 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와 함께 하루 종일 묵직하던 속이 급기야는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먹은 게 단단히 체했나 보다.

여태 소화가 안 되거나 체한 적은 거의 없었는데 오늘은 날이 안 좋은가 보다 생각하며 한무화는 저녁을 거르기로 했다. 그리고 조용하고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본채의 도장으로 넘어와 연습에 열중했다.

……하지만 안 된다. 연습을 하고 또 해도 도무지 가닥이 잡히지 않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원래라면 상관없어야 했다. 진창에 빠져 꿈쩍도 못 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전혀 진척이 없어도 끊임없이 연습에만 열중했던 나날들은 여태 한없이 많았다. 그러니 이제 하루쯤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다 해서 새삼스럽게 화가 날 일이라곤 전혀 없다. 그저 될 때까지 묵묵히 꾸준히 거듭할 뿐이고, 여태까지 줄곧 그렇게 나아왔다.

그런데도.

오늘은 좀 이상하다. 속이 묵직하게 얹힌 탓일까, 기분이 몹시 가라앉아 있었다. 저 아래에서 뭔가 불쾌하게 일렁였다. 천천히 자신의 동작에 집중하려 해도 제대로 집중이 되지 않았고, 자신이 오늘따라 거칠어져 있다는 걸 스스로도 알겠다.

필요한데.

나한테 그게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뭐가?

불현듯 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멈칫 움직임을 멈춘 때.

등 뒤에서 조용한 숨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부터 거기에 누군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신경 쓰지 않았다. 본채의 도장이라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긴 하지만 아예 사람이 오지 않는 곳은 아니니, 누군가 연습이라도 하러 왔으려니 했었다. 그러나 그 숨소리. 그 작은 기척이 유난히 귀에 익었고, 한무화는 저도 모르게 그쪽을 휙 돌아보았다.

거기에 서정운이 서 있었다. 서정운이 묵묵히 한무화를 지켜보며 서 있었다. 평소처럼 낯익은, 차분하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힘이 너무 확산되어 있어. 힘을 발산하는 게 아니라 수렴하는 거야. 뻗어 내지 말고, 안으로 모으듯이.’

조용히 말한 그는 한무화에게 다가와 등 뒤로 몸을 겹쳤다. 그러고는 한무화의 팔에 자신의 팔을 겹친 뒤 천천히 팔을 움직였다. 이런 느낌으로, 그렇게 몸으로 가르쳐 준다.

등 뒤에 닿아 있는 체온이 유난히 낯익다는 기분이 들었다. 겹쳐진 팔의 살갗이 따뜻하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

아까 먹었던 소화제가 그제야 듣는 것처럼, 묵직하게 얹혀 있던 속이 가라앉는다. 본인의 움직임에의 집중력도 돌아왔다. 거칠게 일어 있던 기분도 차분히 한풀 죽는다.

오늘 하루의 평소 같지 않았던 상태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한무화는 자신이 여느 때와 같은 상태로 돌아온 것을 느꼈다.

아, 그렇군. 알겠다. 이 동작은 이렇게 하는 거였구나. 이렇게 좀 더 조심스럽게, 깔끔하게. 동작이 커지지 않도록.

머릿속에 불이 켜진 듯, 오후 내내 몸에 붙지 않았던 동작이 금세 이해되었다. 한무화는 이내 편안해진 마음으로 연습에 임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아무도 없는 창틀에 걸터앉아, 선선하게 등에 닿는 밤공기처럼 한무화도 선선한 기분으로 육포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

연습이 잘 안 되는 날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흔했는데 오늘은 왜 그렇게 유난히 속이 까슬거렸는지 모르겠다.

한무화는 앉은 채로 가만히 팔을 휘둘러 그 동작을 다시 구사해 보았다. 아직 몸에 익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능란하게 움직였다. 오늘 밤을 깎아 조금 더 연습하다 보면 그럭저럭 몸에 익을 것 같았다.

이제는 기분도 괜찮고 속도 편하다. 집중도 잘되겠다.

기분 좋게 팔을 뻗던 한무화는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팔에 어렴풋이 감각이 남아 있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겹쳐졌던 체온이다. 살갗 너머로 느껴지던 근육의 움직임과 체온, 체취 따위가 불현듯 되살아났다. 그 기억을 따라 끌려 나오는 감각은 입술에 닿았던 체온이다.

생각보다 더웠다.

적당히 따뜻하고 적당히 부드러울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과 달리 서정운의 입술은 살짝 말라 있었는데, 혀를 밀어 넣은 그 안은 놀랄 정도로 뜨겁고 축축했다. 그래서 한무화는 그 순간 얼마 전의 밤을 생생하게 되새겼다. 살짝살짝 깨무는 입술을 꿈결인 양 잠결에 깊이 맛보았다 떨어졌던 바로 그 감각이다.

얼핏, 여기에서 나오고 싶지 않다, 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생각이 명확해지기 전에 한무화는 밀려났고, 마치 단잠에서 불시에 깨워진 것 같은 기분으로 그는 눈앞에 서 있는 서정운을 보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는 서정운의 손가락 사이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보였다. 그 색깔이 유난히 선명하게 눈에 들어와 한무화는 그 빛깔을 뚫어져라 보았었다.

“…….”

한무화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잡생각이 너무 길다. 왠지 모르게 머리가 번잡해질 것 같아 얼른 고개를 저어 생각을 뿌리친 그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 감각을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되새겨야겠다고 생각했다.

힘을 발산하는 게 아니라 수렴하듯이. 뻗어 내지 말고 안으로 모으며. 팔이 시작되는 뿌리부터 움직이며,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생각하면서.

한무화는 서정운이 해 줬던 말을 하나씩 떠올리면서 몸을 움직였다. 아까 분명히 조금 더 연습하면 몸에 익을 것 같은, 느낌을 잡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조금만 더 연습하면.

하지만.

“--.”

한동안 몸을 움직이던 한무화는 혀를 차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집중이 안 된다. 지금은 기분이 그다지 나쁜 것도, 속이 불편한 것도 아니었는데 왠지 또 집중이 되지 않았다.

한무화는 배가 고파서인가 생각하며 위장 근처를 짚어 보았다. 문득 허기가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속이 편해지니 이제야 허기가 지는지도 모르겠다.

떡도 육포도 먹었으니 그리 배고플 리는 없는데도 왠지 속이 빈 것 같았다. 아니, 배가 고프다기보다는 갈증에 가까운 것도 같다.

한무화는 아까 서정운이 내려놓고 간 빈 컵을 집어 들었다. 거기에 하나 가득 물을 따라 단숨에 삼켰다. 하지만 잠깐 시원해지는가 싶을 뿐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물을 한 컵 더 마셔 보았지만 마찬가지.

한무화는 눈살을 찌푸린 채 가만히 목을 쓸어 보다 창밖을 보았다. 열어 놓은 창 바깥에는 아무도 없이 새카맣고 고요한 밤공기만 남아, 서늘한 공기를 조금씩 조금씩 방 안으로 흘려 넣고 있었다.

덥다.

한참을 앉아 있었는데도 몸의 열기가 식지 않았다. 이마를 닦아 보았지만 더 이상 땀은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왜 이리 후덥지근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한무화는 갈증이 달래지지 않는 물을 마시고, 더위가 가시지 않는 손부채질을 하며 가벼운 숨을 내쉬었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어서 그런가, 이유 없는 생각을 해 본다.

이제 날이 지나 곧 여름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몹시 더 더워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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