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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mission 2. (14/28)

intermission 2.

샤워를 마치고 나온 한무화는 젖은 몸을 닦다 말고 멈칫했다. 어깨에 아직 아주 어렴풋한 위화감이 남아 있었다.

대단치는 않다. 언제나 자신의 몸 상태를 민감하게 느끼는 한무화가 아니었더라면 미처 느끼지도 못하고 지나갔을 정도의 희미하고 둔탁한 위화감이었다. 하루 이틀 지나면 씻은 듯 사라질 거다. 그러나 아주 작은 신호에도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한무화의 철칙이었고, 그것은 운동선수로서의 그에게 매우 큰 장점이기도 했다.

한무화는 어깨를 주무르며 다시 테이핑을 해 두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늘 스스로 해 왔기 때문에 익숙했다.

샤워하느라 지금은 풀었지만, 서정운이 해 준 테이핑은 아무리 수차례 물어 가며 정성 들여 감아 줬다고는 해도 한무화가 직접 한 것처럼 익숙하지는 않았다. 편하긴 했지만 평소 한무화가 하는 것과는 미묘하게 감는 버릇이 달랐던 것이다. 서정운은 한무화가 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단단하게 감는 편이었다.

“…….”

욕실에도 아마 약상자가 있었을 텐데, 하고 한무화는 젖은 머리를 닦으며 걸음을 돌렸다.

그때, 욕실 문이 열리며 남자 두 명이 들어왔다. 대수련장에 딸린 공동욕실이라 누가 들어와도 이상할 건 없다. 선반에서 약상자를 꺼내다 뒤를 돌아본 한무화는 그들이 둘 다 낯익은 체련 사범임을 확인하고는 가볍게 목례했다.

“어, 무화구나. 너 사범 수련 합숙 참가하게 됐다며! 축하한다. 대단해. 일반 수련생이 사범 수련 합숙에 참가하기 쉽지 않은데. 그런데 웬 약상자야?”

“어깨에 테이핑을 해 두려고요. 약간 위화감이 있는 정도라 걱정할 만큼은 아닙니다만.”

“어, 그래. 미리 조심해 두는 게 좋지. 곧 합숙 시작되는데. 그래도 합숙에서는 거의 다치는 일 없을 거야. 죄다 사범들--그중에서도 잘한다 하는 사범들만 모아서 하는 합숙이니까.”

실력이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본인이든 상대든 연습에서 다치는 일도 적다. 한무화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몸이야 평화롭겠지만 분위기는 험악하겠지. 정련과 체련의 사범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숙식을 같이하는데. 그래, 그러고 보니 이번에 정련에서 그 누구냐, 서정운 사범도 참가한다며.”

“그치가 어쩐 일이냐. 정무도 관둔 줄 알았더니만. 맞다, 무화 네가 최근에 그치한테 지도받았었지? 뭐 들은 거 없어?”

옷을 훌훌 벗어 바구니에 넣으며 커다랗게 대화하는 사범들이 한무화에게 물음을 던졌다. 한무화는 약상자에서 붕대를 꺼내어 돌아서며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미 한무화의 습성을 적당히 파악한 사범들은 그 대답을 듣자 더 물어봤자 별거 없겠다 싶었는지 그 이상 캐묻진 않았다.

“에이, 나 그치 싫은데.”

“뭐 어때, 어차피 정련 체련은 대부분 따로 연습하는데. 별로 마주칠 일도 없을걸.”

“아니, 그래도 좀 거북하다고. 난 그렇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인간은 별로더라.”

“그렇긴 해. 아마 그 인간은 피도 눈물도 없을걸.”

사범들끼리 이야기를 나눈다. 자신의 탈의 바구니를 놓아둔 곳으로 걸음을 옮기던 한무화가 무심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자기들끼리 떠들던 사범들 귀에는 제대로 안 들어간 모양이었다. 옷을 다 벗은 사범들이 수건만 챙겨서 돌아서며 “어? 뭐라고?” 하고 물었지만, 한무화는 이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고개를 저었다.

“지금 무슨 말 한 것 아니었어? ……. ……으헉.”

의아하게 되물으며 욕실 쪽으로--한무화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던 사범이 갑자기 움직임을 떡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아직 옷을 걸치지 않고 있던 한무화의 아랫도리에 가서 박혔다. “왜?” 하고 뒤따라오던 다른 사범도 마찬가지, “……헉.” 하고 중얼거리며 멈춰 선다.

“너……, 너……, 거기에 뭘 달고 있는 거야……?”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으로 한무화의 사타구니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사범이 이윽고 질린 투로 중얼거렸고, 바구니에서 속옷을 꺼내어 입던 한무화는 그가 왜 그러나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가 그의 시선을 따라가 자신의 사타구니를 보곤 납득한 양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반응이 처음은 아닌 듯 아무렇지 않게 속옷을 걸쳐 입는 태도에 스스럼이 없다.

“우와……, 무슨 팔뚝……, 너 그거 서면 더 커질 거 아냐.”

“예.”

“그래 갖고 여자랑 할 만은 하냐? 여자들이 뭐라고 안 해?”

속옷을 입어도 그 위로 불룩하게 드러나는 형태에서 눈을 못 떼며 사범이 물었고, 한무화는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처음에는 힘들어하는데 몇 번 하다 보면 익숙해집니다.”

“어……, 그래……, 하긴 여자는 거기로 애도 낳으니까…….”

“그, 그렇지……, 뭐 남자랑 하는 것도 아니고…….”

납득이 갈 듯 말 듯 한 눈길을 서로 교환한 두 사범은 갑자기 낯빛이 우울하고 어둑해졌다. 그런 그들의 옆에서, 한무화는 속옷 위로 바지를 입으며 오래전 딱 한 번 남자와 잠자리를 했었던 경험을 떠올렸다.

별반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은 경험이다. 좋다 싫다 할 게 없었다. 한무화에게 한 번만 자 달라고 애원한 남자와, 별반 호모포비아도 아니었기에 같이 호텔로 갔다. 물리적으로 성기를 자극해 발기도 했고 남자와 자는 것 자체에 한무화는 별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죽도록 아파했고, 그럼에도 한무화의 물건을 제 아랫도리에 넣어 보겠다고 끙끙거렸고, 그러다 그럭저럭 끝났다. 좋지도 즐겁지도 않았던 기억이다.

그 뒤로는 남자와 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딱히 남자에게 끌리지도 않았던 한무화다. 그저 감정적으로 그 남자든 혹은 다른 여자들이든 특별히 더 좋고 싫고의 차이가 없었기에 애원을 들어주었을 뿐이다.

그렇다. 감정적으로 차이가 없었다.

그들이 한무화에게 원했기 때문에--그리고 한무화가 그것이 딱히 싫지 않았기 때문에 사귀거나 자거나 했을 따름이다.

여태 누군가가 특별하다거나, 유난히 끌린다거나, 흔한 표현대로 심장이 뛰거나 마음에 애틋해지거나 한 적이 한무화는 없었다. 그래서 그게 어떤 건지 몰랐다.

“…….”

--네가 좋아.

--처음부터 좋았어.

문득 흐린 목소리가 귓속에서 울렸다.

그리고 그 말을 들었던 순간 자신의 기분을 떠올린다.

자신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저것을 받아들일 도리가 없었다. 지금까지처럼. 그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 지금까지처럼.

그것은 한무화가 알고 있는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감각이었다.

“……런데 말야, 여자의 눈물은 무기라는 말, 정말 딱 맞는 것 같지 않아? 이중의 의미로 무기 맞는 것 같다니까.”

셔츠를 입기 전에 테이핑을 하려고 의자에 앉은 한무화의 옆에서 사범들은 여전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랫도리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결에 화제가 그렇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평소에 싸우거나 할 때 울어도 뭘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서 이건 정말 무기 맞구나 싶은데, 침대에서 좋아 죽겠다고 우는 소리도 아아주…….”

가끔 소리만으로도 갈 거 같다니까, 하고 시시덕거리는 사범에게 “그건 좋은데, 그래도 난 평소에는 제발 안 울었으면 좋겠어. 이건 뭐 정말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사람 환장한다니까.” 하고 다른 사범이 툴툴거린다. 그러다가 테이핑 위치를 가늠하고서 붕대를 감기 시작하는 한무화에게 말을 돌린다.

“야, 넌 안 그래? 미국에선 여자들 별로 안 우나?”

“사람마다 다릅니다만,”

한무화는 붕대를 감으며 말했다.

“전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칠 때까지 기다립니다.”

“뭐? 야, 눈앞에서 여자가 우는데 그게 그냥 기다려져?”

“위로해 주면서 기다립니다만,”

한무화는 무심히 대답하며, 그들이 말하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기분을 예전에 떠올려 본 적이 있던가 생각해 보았다. 없었다.

슬퍼하며 울면 위로해 준다. 화가 나서 울면 다독여 준다. 힘들어서 울면 격려해 준다. 그러나 그 울음을 이해는 해도 그것이 본인의 감정에 영향을 미쳤던 적은 없다. 그래서 누가 울든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고, 신경 쓰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때 문득 떠오르는 기억 하나.

비빔국수를 먹으며 맵다고, 매워서 눈물이 난다고 하며 줄줄 울던 남자.

“……안 울면 좋겠습니다.”

한무화는 혼잣말처럼 불쑥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처음 하면서, 처음이라 무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한무화는 그 옆에서 말없이 멸치국수를 먹었었다. 먹으면서, 하나도 맵지 않은 자신의 국수를 내어 주고 그에게서 그 새빨간 국수 그릇을 빼앗아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안 울었으면 좋겠어요.”

한무화가 다시 중얼거린다. 옆에서 사범이 “그렇지, 그렇지.” 하고 맞장구쳤지만 그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무화는 잠자코 붕대를 감았다. 워낙 익숙했기 때문에 테이핑은 금방 다 되었다.

“와, 능숙하네. 굉장히 쉽게 쉽게 하잖아.”

감탄하는 사범의 말을 들으며 한무화는 붕대를 고정시킬 핀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고정시키기 직전에,

“…….”

잠시 멈추어 있던 한무화는 도로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사범이 의아하게 쳐다본다.

“왜 풀어? 잘 감아 놓고서.”

“다시 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평소 자신이 하던 것보다 조금 더 단단하게. 서정운이 천천히, 한무화에게 수십 번을 물어보며 감아 주었던 것처럼.

그것은 여태 스스로 테이핑을 해 온 한무화의 습관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었지만, 왠지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것이 외려 자신이 한 것보다 더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는 게 자신에게 잘 맞는 것이었던 듯.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 하고 두 사범은 욕실로 들어갔다. 탈의실에 혼자 남은 한무화는 다시 천천히 붕대를 감았다. 서정운이 해 줬던 방식대로.

마지막으로 붕대를 핀으로 고정하면서 한무화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것이 자신에게 더 편안하게 잘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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