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정우일의 근처 바닥에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땀방울이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는 건 말할 나위도 없었다.
느리고 정확한 움직임이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 시합이나 대련을 할 때에는 빠르고 힘 있는 움직임이 선호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빠르게,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몸을 단련하지만 정우일은 그러지 않았다. ……몇 년 전까지는.
“…….”
아마 지금 내 몸에 흐르고 있는 땀의 9할은 식은땀일 거야……, 정우일은 자신이 지금 무슨 정신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것은, 무척 오랜만에 옛날과 같은 방식으로 느린 움직임을 구사하려니 팔 하나 긋는 것조차 ‘이거다’ 싶은 움직임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
남들의 눈에 백번 훌륭하고 정확해 보여도 소용없다. 그 움직임이 정말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정확한지 어떤지는 본인이 몸으로 느끼게 된다. 그리고, 아주대단히엄청나게 매서운 눈썰미를 지닌 인물의 눈에도 고스란히 보이는 게 분명했다.
정우일은 자신의 뒤에 서서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 시선을 뼈저리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런 지 얼마나 지났을까,
“우일아. 너 그동안 편하게 잘 놀았나 보다.”
빙그레 웃음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썩둑, 그 목소리에 심장이 썰리는 것 같다. ……올 것이 왔구나.
“가만있자, 내가 너 마지막으로 봐준 뒤로 몇 년이나 됐지?”
“……, 유, 육 년 됐습니다.”
“그것밖에 안 됐어? 한 십 년 치는 망가진 것 같은데.”
정우일은 거울 속으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흘끔 보았다. 서글서글하고 인상 좋은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을 띤 하원사범 서정운이 거기 있었다. 정우일은 꽁꽁 얼어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너 올해 말에 하원사범으로 등원한다며.”
“……그, 그렇다고 들었습니다만 아직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하하, 왜, 난 확실히 알겠는데. 그 실력으로는 등원 못 하지.”
“…….”
정우일은 식은땀만 삐질삐질 흘릴 뿐이었다. 그 근처에서 덩달아 자신의 움직임에 몹시 신경 쓰며 연습하고 있던 사람들도 쥐죽은 듯 조용히 침묵하며 진땀을 흘린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봄바람 같은 웃음을 띤 서정운이 정우일에게 다가섰다. 그가 다정하게 정우일의 어깨에 손을 올린 순간, 정우일은 하마터면 펄쩍 뛸 뻔했다.
“우일아.”
“……, ……, …….”
“제대로 해야지?”
“죄,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응? 정우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서정운은 그 말을 끝으로 걸음을 돌렸다. 어디서 연락이라도 왔는지 휴대 전화를 꺼내어 확인하며 대수련장 바깥으로 나간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대수련장 밖으로 사라지자 그제야 정우일을 중심으로 살얼음이 얼어 있던 그 주위가 겨우 조금 녹았다.
바로 근처에서 개인 연습을 하고 있던 한호영이 다가와 정우일의 등을 툭툭 두드려 준다.
“고생 많다. 오랜만에 욕먹으려니까 힘들지?”
빠르고도 정확하게 몸을 쓴다는 평을 들으며 사범들 사이에서도 실력으로 상당히 인정받고 있는 정우일이다. 웬만한 사람들 기준에는 썩 훌륭한 그였지만, 그의 스승의 기준은 높고도 까다로웠다. 하지만 불평하거나 대들 수는 없었다. 일단 첫째로 스승의 눈은 정확하기 그지없었고, 둘째로 그랬다가 저 혀에 무슨 난도질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셋째로는,
“예……. 그래도 오랜만에 이렇게 야단맞으니 좋네요.”
정우일은 진이 빠진 얼굴에 힘이 없으나마 웃음을 띠며 말했다. 한호영은 그런 그를 흰 눈으로 보며 “너 매저지……?”라고 중얼거렸지만 정우일은 별반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만날 그 정도면 잘한다는 소리만 듣다가 이렇게 날카로운 비판을 들으니 외려 그게 명쾌하달까, 쇄신되는 기분이랄까. 서정운 사범님은 참 여전하셔서 좋네요.”
“야 이 매저야……. 하여간 사형 밑에서 좀 오래 버텼다 하는 놈들은 죄다 이렇다니까.”
한호영이 혀를 끌끌 차며 “가까이 오지 마.”라고 내뱉을 때였다.
쾅!!
호쾌한 소리가 지척에서 울렸다.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대련단 위, 한 남자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정확하게 등을 부딪치며 쓰러졌다. 그리고 그의 다리를 걸며 앞섶을 잡아채어 쓰러뜨린 그 상대는 손을 놓고 바로 일어서며 도복을 정돈한다.
그 커다란 소리와 위맹한 움직임에 저도 모르게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정우일이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굉장하네요, 한무화 선수……. 저 정도로 힘도 있고 속도도 있으면서 정확도까지 있다니.”
“음.”
짤막하게 중얼거린 한호영도 감탄스런 눈으로 그쪽을 바라본다. 점점 입댈 데가 없어지고 있단 말이야, 라고 중얼거리는 혼잣말에도 찬탄이 서린다.
“서 사범님한테 지도받은 뒤로 더 선이 날렵하고 깔끔해졌어요. 한 달쯤이었던가요? 이제 더 이상은 지도받지 않는 거죠?”
“음. 체련 쪽에서 워낙 말이 많아서.”
우리 쪽에서도 별로 달가워하지는 않았고, 라고 한호영이 말하자 정우일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서 사범님은 정련에서도 특히나 정원사범님 직계 제자이고, 저쪽은 또 체련의 정원사범님 양자이니. ……뭐 한 달이면 서 사범님한테 지도받았다 하기도 어렵겠네요. 서 사범님 밑에서 버텼다 하려면 적어도 연 단위는 되어야…….”
저 선생님은 우리 선생님이지, 라고 유치원생이 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우일이 턱을 당겼다. 그때 언뜻 한무화가 이쪽을 보는 것 같았다. 공연히 움찔해서 고개를 뒤로 물린 정우일이 한호영에게 속삭였다.
“들렸을까요?”
“글쎄, 별로 먼 거리도 아니니까. 그런데 들었으면 어때. 욕한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요, 왠지 눈매가 좀 무뚝뚝한 것 같아서.”
“원래 그런 녀석이잖아. ……그런데 사형은 어딜 갔길래 이렇게 안 와?”
“글쎄요, 아까 전화 받으러 나가시는 것 같던데. ……여자 전화 아닐까요? 보니까 소문 좀 도는 것 같던데…….”
한호영이 몸이라도 풀듯이 가볍게 목을 꺾으며 중얼거리자 정우일이 은근하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한호영은 그런 정우일에게 가느스름한 눈길을 흘끔 주었다. 이놈도 멋모르는 소리 한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던 그는 헛웃음을 웃으며 “그런 소문이 어디 한두 번 돌았어야지.”라고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바로 그때, 양반은 못 되려는지 서정운이 대수련장으로 들어왔다. 그때까지 한호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정우일은 얼른 후다닥 거울 앞에서 자세를 잡았지만, 한발 늦었던 모양이다. 그들에게 다가온 서정운이 빙긋이 웃으며 한 말은 “우일이 열심히 놀고 있었구나.”였고, 정우일은 바싹 얼어서 거울과 눈싸움만 했다.
그런 그를 보고 끌끌 혀를 찬 한호영이 서정운을 돌아보았다.
“그러는 사형은 애만 연습시켜 놓고 어디서 놀다 왔어요?”
“협회에서 연락 와서 잠깐 전화하고 왔어. 상황 봐서 조만간 슬슬 다시 일 시작해도 괜찮을 것 같아.”
“어, 그래요? 생각보다 빠르네. 그럼 합숙은 어쩌고?”
“아무리 빨라도 1, 2주 안에 당장 시작하게 되지는 않겠지.”
한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제자리 뛰기를 하는 걸로 몸 푸는 시늉을 마친 그는 도로 정우일의 옆에 서서 지긋한 시선을 주고 있는 서정운에게 다가갔다.
“사형, 나도 좀 봐줘요. 연차련을 연속 보법으로 밟았더니 미묘하게 걸음이 좀 둔해지는 느낌인데, 왠지를 모르겠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서정운은 그 말이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한호영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주 깔끔하게 무시한다.
그래, 이 양반이 이런 양반이었지, 쓰게 입맛을 다신 한호영이 “사형, 나 좀 봐달라니까요.”라며 서정운의 앞을 가로막자 그제야 서정운의 찌푸려진 시선이 한호영에게 닿았다.
“싫어. 내가 왜.”
“싫어, 왜라니……, 사제잖아요.”
“그래, 사제지, 제자가 아니지. 내가 봐줘야 할 책임은 없는 거라고. 난 지금 우일이 하나만으로도 골치 아프니까 너까지 볼 여유 없어.”
이놈 이렇게 망가진 거 어떻게 잡는다지, 사뭇 고민스러운 눈치로 눈살을 찌푸리고 쳐다보는 서정운의 시선 앞에서 정우일은 한층 더 뻣뻣하게 굳어만 갈 뿐이었다. 한호영은 어이없다는 듯 서정운을 쳐다보다 허, 하고 툴툴거렸다.
“지금 이 안에 우일이보다 버벅거리는 인간이 천지인 마당에 뭘 걔만 붙들고 있어요? 우일이 정도면 충분히 잘하는 거지! 사형도 좀 적당한 선에서 만족할 줄을 알아야지 말이야, 사람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정운에게서 싸늘한 시선이 돌아왔다.
“우일이 정도면 충분히 잘해? 만족……? 한호영이, 네가 그러니까 연차련을 연속으로 밟는 정도로 걸음이 둔해진다는 거야.”
싸늘한 시선뿐 아니라 대뜸 정강이까지 까인 한호영은 “악!!” 하고 주저앉으며 정강이를 끌어안고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정운은 외려 혀를 차며 “쯧쯧, 그 정도도 못 피하는 저 굼뜬 거 얻다 쓰나, 그냥 버려야지.”라고 중얼거린다.
“사, 사형……, 너무하……,”
“걸음 둔해지기 싫으면 마지막 걸음에 체중이나 싣지 마, 멍청아. 연속으로 밟는데 마지막 걸음에 온 무게를 다 주니까 그 뒤부터 밀리지.”
한심스럽게 한호영을 쳐다보며 내뱉은 서정운은 정우일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
“그리고 다른 놈들이 버벅거리든 말든 내가 알 게 뭐야. 지금 이 안에 내가 챙겨야 될 내 새끼는 우일이밖에 없어.”
--쾅!!
서정운의 말이 끝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다시 지척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우일이 거울 속으로 움찔 시선을 돌리자 한무화가 대련 상대를 대련단에 메어꽂고 있었다. 조금 전보다 더 거침없고 위세 어린 움직임이다.
“…….”
그 움직임이 어찌나 맹렬하고도 깨끗하게 떨어지는지, 정우일은 일순 그쪽에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모범 교본처럼 상대를 메어꽂은 한무화는 도복을 정돈하며 돌아서고 있었다. 문득 그가 이쪽으로 시선을 준 것 같았다. 평소처럼 무심한 눈길로, 그러나 어딘가 썩 유쾌하지 않은 기미로 서정운을 보는가 싶던 그는, 그러나 잘못 본 건가 싶도록 금세 고개를 돌려 버렸다.
땀을 닦으며 정수기를 향해 걸어가 버리는 그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정우일이었지만, 바로 그 뒤에 들려온 “우일아, 뭐 구경하니?”라는 서정운의 다감한 목소리에 쭈뼛 털을 곤두세우며 황급히 거울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정운도 한무화 쪽을 보고 있는 것 같더니, 그새 귀신같이 정우일을 보고 있었나 보다. 정말이지 여러모로 매의 눈썰미다.
“너 올해 말에 등원…….”
“…….”
“……해야겠지?”
“하, 하겠습니다. 반드시 하겠습니다.”
정우일은 진땀을 뻘뻘 흘리며 바짝 긴장해 외쳤고, 서정운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 그 역시 본인의 연습을 시작한다.
잘 벼린 칼날로 베어 내는 것처럼 한 치 어긋남도 없는 그 느린 움직임을 넋 놓고 보다 말고, 정우일은 거울 속에서 서정운과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얼른 자세를 잡기 바빴다.
*
정무도 협회는 재정이 대단히 튼튼한 협회로 손꼽힌다. 문중 종가를 대단히 존중하며 따르는 유수의 재벌들과 정재계 거물들이 줄줄이 친척으로 널려 있는 곳이라는 걸 배제하더라도, 대단히 우수한 재정관리팀은 해마다 협회의 자산을 눈덩이처럼 불려 주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수련 합숙의 식단까지 호화판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매일 정해진 식단에 따라 식판에 배식받아 먹을 뿐.
그리고 저녁 식판을 받아 든 서정운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음식들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그날의 저녁은 백미밥에 김치, 감자고추장조림, 낙지볶음에 나물과 샐러드 약간, 그리고 육개장.
“……미친 거 아냐?”
저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을 확 새긴 서정운은 절로 튀어나오는 욕을 중얼거리며 돌아서다 멈칫했다. 바로 뒤에 서 있던 인물과 맞닥뜨려 부딪칠 뻔했다.
얼굴은 여러 번 봤지만 사이가 좋았던 기억은 한 번도 없는 체련의 사범이다. 서정운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는 그를 무심히 스쳐 지나는데, 그와 함께 온 듯 바로 뒤에 서 있던 한무화를 본 서정운의 시선이 멈칫했다.
“…….”
아주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에 서정운을 마주 본 한무화가 식판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 여상한 몸짓에서, 왜 서정운의 눈에는 한무화의 입술이 유난히 눈에 새겨졌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얼굴 언저리가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서정운에게 눈길을 든 한무화가 무어라 하려는 듯 입을 여는 성싶었지만 서정운은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다. 되돌아보지도 않고 서둘러 테이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린다.
얼굴이 덥다. 제발 색깔까지 빨개지지 않았기만을 바라며 서정운은 창문을 열어 놓은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예쁜 입술이다. 약간 큼직하고 굳게 다물린 입매는 누가 봐도 예쁘다기보다는 남자답다는 쪽에 가까웠지만, 서정운의 눈에는 그게 몹시 어여뻤다. 어여쁠 뿐 아니라 맛까지 달았다.
……그래, 달았다. 사람 입술이 그렇게 단맛이 나는 줄은 처음 알았다. 지난밤, 밤새도록 입술에 단맛이 붙어 있는 것 같아 자다가도 여러 번 깨었다.
“…….”
안 돼, 얼굴이 진짜로 뜨거워질 것 같다. 생각하지 말아야지. 서정운은 식판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가만히 손부채질을 하며 빈자리를 둘러보았다.
제일 시원하게 창문을 열어젖힌 자리를 찾아 걸음을 옮기던 서정운은, 그러나 도중에 걸음을 늦추었다. 창가의 구석진 자리에 식판을 앞두고 혼자 앉아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유희정이 눈에 들어왔다. 창가에 심은 나무가 유난히 버석거리며 바람을 맞고 있는 그 자리가 이 식당에서 가장 시원해 보였다.
……하지만 서정운도 물론 알고 있다. 저 자리에 가서 앉으면 무슨 억측 섞인 소문들이 또 떠돌지. 고작 바람 좀 더 쐬자고 굳이 소문을 찾아 들어갈 필요는 없는 노릇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그러나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서정운은 짧게 혀를 차곤 그리로 걸음을 옮겼는데, 첫째로는 이미 뒷소문을 겪어 온 연월이 워낙 오래라 이제 와서는 뒷말 따위 신경도 쓰이지 않았고, 둘째로는 희미하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던 탓이다.
“밥 안 먹고 뭐 해. 예비 신랑이랑 대화 중이야?”
서정운이 그녀의 맞은편에 식판을 내려놓으며 말을 걸자 그녀는 대화에 깊이 열중하고 있었던 듯, 움찔하고 놀라는 눈치로 서정운을 올려다보았다.
“어, ……깜짝 놀랐잖아. 기척이라도 좀 내지.”
“사람들 오가는 다 트인 식당에서 무슨 헛소리야. 죄라도 지었나, 뭘 그렇게 놀라.”
서정운은 코웃음 치며 자리에 앉았다. 휴대 전화를 옆에 엎어 놓고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든 그녀는 가볍게 눈을 흘긴다.
“내가 죄지어 봤자 수백만 여자들 가슴에 피멍 들게 한 너만 하겠어? 근데 여기 육개장 맛있다. 좀 싱거운 것 같긴 하지만.”
장난처럼 말하며 식사를 재개하는 그녀를 흘끔 쳐다본 서정운은 별말 없이 샐러드를 집었다.
유희정은 서정운이 아직 본산에서 사범을 하던 무렵에 반년쯤 더불어 지낸 동갑이라, 썩 친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럭저럭 말은 트고 지내는 사이였다. 워낙 성격이 화통한 데가 있어서 약간 거북한 면도 있긴 했는데 그 당시 그녀와 대조적으로 침착하고 조용한 성격의 사촌 동생이 단짝처럼 붙어 다니며 그녀를 적당히 붙들어 주면서 균형을 잡아 주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꼭 바늘과 실처럼 같이 다녔었는데…….
“희재는 잘 지내? 이름이 희재 맞지? 네 그 사촌 동생.”
서정운이 과거를 떠올리며 묻자 유희정이 잠깐 사이를 두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난달부터 회사 일 때문에 부산 가 있어.”
“아아, 아까 통화하던 게 희재였어?”
“아……, ……응.”
짧게 대답하곤 말없이 식사를 하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서정운은 나물 반찬 약간에 밥을 커다랗게 한술 떴다.
낮에 서정운이 협회에서 온 전화를 받으러 잠깐 대수련장 밖으로 나갔을 때, 뒤꼍에서 통화하고 있던 그녀와 마주쳤었다.
‘응, 다음 달 첫 주 토요일. 그때 지혜 결혼했던 그 예식장. 준비는 거의 끝났고 이제 결혼만 하면 되지 뭐. ……넌 언제까지 부산에 있을 거야? ……오래 있네. ……나 피하느라 일부러 가 있는 건 아니고?’
싸늘한 낯빛으로 쏘아붙이듯 나직이 말하던 그녀는 서정운의 발기척을 듣고는 깜짝 놀라며 돌아보더니, 가볍게 눈인사를 하곤 멀찍이 걸음을 옮겼다. 굳이 따로 말 섞는 사이도 아니라 그대로 서정운도 통화를 마치고 다시 돌아왔지만, 그때 그녀의 안색이 워낙 좋지 않았던 터라 모래알처럼 까끌하게 기억에 남긴 했다.
“너 결혼해서 희재 서운해하겠네. 둘이 되게 친했잖아.”
“……. 그렇지도 않아. ……아, 잠깐만.”
그때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고, 서둘러 전화를 집어 든 그녀는 액정 화면을 보더니 낯을 찌푸렸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받는다.
“응, 나예요. 지금 저녁 먹는 중. 영준 씨도 어머님 잘 모셔다드렸어요? ……왜 또 짜증을 내고 그래요. 합숙 날짜가 이렇게 잡혔다고 몇 달 전에 이미 얘기했었잖아. 난 이게 내 직업이고 내 일인데 결혼 앞뒀다고 등한시할 순 없잖아요. ……그럼 이거 아니면 뭘로 짜증 내는 건데. ……짜증 내는 거 아니긴, 내고 있으면서.”
아무래도 상대는 예비 신랑인 듯, 몇 마디 주고받다가 그녀는 “됐어요, 계속 그럴 거면 나중에 통화해요.”라고 대꾸하곤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전화를 테이블에 내려놓는 손길이 거칠다.
“…….”
여기 앉는 게 아니었는데……. 서정운은 뒤늦게 후회하며 조용히 밥만 우물거렸다. 주위에서 흘끗거리는 시선 따가운 거야 감수하겠지만 이런 분위기는 많이 거북했다.
“……예비 신랑이야? 결혼 준비할 때 많이 싸운다고는 하더라만. 바쁜 거 지나고 나면 나아지겠지.”
“몰라. 요즘 따라 부쩍 짜증이야. 무슨 의처증 걸린 사람처럼 자꾸 전화해 대. 얼른 결혼해 버리려고 선보고, 사람 적당히 괜찮고 나 좋다길래 그냥 결혼하기로 했는데 요새 자꾸 생각이 많아지네.”
유희정은 입맛이 떨어진 듯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왜 얼른 결혼해 버리려고 해. 무슨 일 있었어?”
서정운이 물었지만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창밖을 보았다. 서늘한 밤바람이 불어든 탓에 팔뚝에 닭살이 돋았는데도 그녀는 추운 줄도 모르는 듯 바깥만 본다.
사람 마음이란 게 정말 마음대로 안 되나 봐, 그녀가 문득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러나 서정운은 흘끗 그녀를 보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사만 계속했다. 얼른 대충 먹고 일어나야겠다 싶어 거의 맨밥만 꾸역꾸역 씹는데, 그녀가 갑자기 서정운을 휙 돌아보더니 장난스레 눈을 반짝였다.
“나 옛날에도 정운이 너 참 잘생겼다고 생각했거든. 그냥 한눈에 딱 미남은 아닌데, 보면 볼수록 애 참 훈훈하고 반듯하게 생겼다 싶었단 말야. 남자는 어쨌든 잘생겨야 돼. 딸 외모는 아빠 닮는다잖아. 그런 의미에서 내 딸 아빠로는 네가 딱 좋을 것 같은데……, 정운아, 너 불장난 좋아하잖아. 어떻게 생각해?”
“--!”
하마터면 입안에 있는 걸 뱉을 뻔했다. 쿨럭쿨럭, 사레들린 재채기를 간신히 안으로 구겨 넣으면서 서정운은 물과 함께 입안의 것들을 삼켜 버렸다.
문득 오래전 한호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형은 정말 여자 운 하나는 겁나게 사납다니까요. 어디서 그런 이상한 여자들이 잘도 붙나 몰라. 완전 자석입니다, 자석.
……그때는 왜 저주를 하냐고 그놈의 머리통을 후려갈겼었는데.
서정운은 당장에 따가워지는 뭇 시선들을 뼈저리게 느끼며 침착하게 입가를 닦았다.
“아무 생각도 안 해. 전혀 아무 생각 안 해.”
“왜? 나 아직 결혼 안 했어.”
“……, 그래서 뭐, 결혼 전에 아쉽지 않게 놀아 보겠다고?”
얘가 이렇게까지 이상한 애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됐나, 아니면 그저 내가 몰랐을 뿐인가, 서정운이 헛웃음 섞어 대꾸하며 유희정을 바라볼 때였다.
“아--진짜 드러워서 못 들어 주겠네. 이게 뭐 하는 수작질이야. 하기는, 개가 똥을 끊지.”
건너 테이블에서 숟가락을 탕하고 내려놓으며 사납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넘어왔다. 서정운이 그쪽으로 시선을 주자 체련의 사범이 이쪽으로 반쯤 몸을 돌리고는 경멸 어린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어딘지 좀 낯이 익어 기억을 더듬다가 이내 아까 오전에 강론 시간에 서정운과 논쟁이 붙었다가 판판이 깨지고 물러났던 남자라는 걸 떠올렸다.
이 정도 일이야 이미 예전에 여러 차례 겪어 본 적 있어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서정운이었지만, 그 너머 자리에 앉아 있다가 큰 소리가 나자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 가운데 한무화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내심 우울하게 혀를 찼다. 별로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모습인데.
“유희정 사범님 조만간 결혼 준비한다더니, 결혼 준비는 잘되고 있습니까? 뭐 상담할 거 있으면 차라리 나한테 해요, 서정운 사범 같은 사람한테 하지 말고.”
남자가 시비조로 빈정거렸다. 낯빛이 바뀐 유희정이 안색을 굳힌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의 얘기 엿듣는 게 취미세요?”
“엿듣다니,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다 들리는데. 유 사범님, 내가 유 사범님한테 아무 감정 없어서 좋은 마음으로 하는 말인데, 그치랑 함부로 말 섞지 마요. 그러다 엮이면 어쩌려고 그래요?”
남자는 유희정에게 혀를 차며 말하고는 서정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평연한 기색으로 마주 보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인상이 한층 험해졌다.
“서 사범 여자 버릇 안 좋은 건 잘 아는데, 아무리 그래도 결혼 앞둔 여자까지 집적거리는 건 좀 아니지 않나? 하긴 뭐 온갖 짓을 다 하셨으니 아직 결혼도 안 한 사람 꼬드겨 내서 놀아나는 게 뭐 대수냐 싶겠지만, 인간이 좀 인간답게 삽시다, 어? 같이 정무도 하는 사람으로서 아주 낯을 못 들겠으니.”
목소리에 독이 올랐다. 하긴 서정운이 생각해도 강론 시간에 자신이 저 남자를 너무 깨 놓긴 했다. 하지만 사람이 말을 해도 좀 이치에 맞는 말을 해야 말이지, 강론 시간에 제 의견이라고 주장하는 족족 다 헛소리였으니 원…….
서정운은 입을 닦은 휴지를 깔끔하게 접어 식판 위에 내려놓으며 귀찮은 기색으로 남자를 보았다.
“그쪽 사범님이 낯을 들든 말든 그건 상관없는데……, 아……, 그런데 성함이 어떻게 되셨죠?”
남자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와락 구겨졌다. 그냥 적당히 얼버무려 버릴걸, 서정운은 뒤늦게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여하튼, 당사자 앞에서 대단히 당당하게 말하는 그 근거 없는 발언은 좀 자제해 주면 좋겠는데요.”
“근거? 허, 아니 지금 두 분이 거기서 그렇게 노닥거리는 말을 버젓이 다 들었는데 그런 얘기가 나옵니까? 서정운 사범 얼굴 두껍다더니 정말 보통이 아니십니다?”
“사실과 추측을 구분해서 파악하는 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닌데……, 아아, 하긴 아까 강론 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어려워하시는 것 같긴 했습니다.”
제가 과한 걸 요구했나 보군요, 하고 가볍게 손을 젓고는 이걸로 얘기 마치겠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리는 서정운을 보고, 남자가 울컥한 기색으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이 인간이,” 하고 잇새로 중얼거리는 그의 주위에서 그를 말리는 작은 소란이 일었다. 어찌 되었든 주위의 입장에서도 큰 소란이 벌어져서 좋을 일은 없었던 것이다.
남자도 홧김에 몸을 일으키긴 했지만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던 듯, 만류하는 손길에 못 이긴 척 도로 자리로 돌아갔다. 들으란 듯이 욕설을 내뱉는 소리만 남기고, 어설프게나마 작은 소동은 가라앉았다.
‘그런데 이건 저 여자가 잘못한 거 아니에요? 지금 말만 들어선 여자가 좀 그런 것 같은데.’
‘결혼 앞둔 여자가 미쳤다고 아무한테나 그러겠냐, 서정운이가 먼저 살살 홀렸겠지. 아까 낮에도 뭐 대수련장 뒤에서 둘이 같이 있었다더만.’
웅성거리는 말들이 공기 중에 섞여 흐려진다.
그 일련의 상황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서정운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미 남자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보다는 눈앞에서 낯빛을 굳히고 질려 있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서정운은 이윽고 낮은 한숨을 쉬었다.
“저 정도 말에도 그렇게 신경 쓰여 하면서 불장난은 무슨 불장난이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결혼 준비나 잘해, 이 아가씨야.”
가만히 손을 뻗어 가운뎃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딱 튀긴 서정운은 “아!” 하고 이마를 감싸 쥐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신경 안 쓴다 해도 여하튼 슬쩍 짜증은 나고 또 이 여자가 하나 예쁠 이유도 없어서 사정없이 튀겼으니 아프긴 할 거다. 알 게 뭐람.
나물과 샐러드, 밥 말고는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식판을 들고 반납대로 걸음을 돌리는 서정운의 귀에 문득 그녀가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혼잣말이 들렸다.
“……차라리 너한테 반했더라면 좋았을걸…….”
들릴락 말락, 한숨 같은 그 소리에 그녀를 말없이 내려다본 서정운이었지만 그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 우울한 음색이 마음에 걸리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저만치에서 이쪽으로 묵묵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한무화의 눈길이 백배는 더 마음에 걸렸다.
좋은 모습만 보여도 모자랄 판에 자꾸 왜 이러냐.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쟤는 신경도 안 쓰겠지.
그게 더 우울해지는 서정운이었다.
*
심장이 서늘해졌다.
한무화를 상대하다 보면 간간이 그럴 때가 있었다. 그래서 이제 더는 놀라지 않겠노라 해도, 막상 닥치면 그때마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놀라게 된다.
서정운이 정무도를 한 지는 30여 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 자체가 재능이 뛰어났고, 탁월한 자질을 갖춘 사람들은 다 모인 본산에서 수련을 했다. 천재다 수재다 하는 사람들이라면 숱하게 만났다. 그러나 서정운은 이 남자만큼이나 현격하고 월등한 자질을 가진 사람은 여태 보지 못했다.
“--.”
빠르다. 그 커다란 몸을 웅크리고 서정운에게 닥쳐드는 그를 두 눈으로 번연히 보면서도 피할 수 없었다. 고작해야 한판으로 끝나 버리지 않기 위해 그에게 붙들려 날아가는 몸을 허공에서 뒤트는 정도.
타앙--하는 소리가, 들려야 했다. 그대로 바닥에 나가떨어져 몸이 부딪히는 소리가.
그러나 몸을 뒤튼 서정운이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에 서정운을 붙든 한무화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순간적으로 허공에서 움직임이 멈춘 서정운은 그 직후 거의 타격이 없이, 소리조차 없을 정도로 가만히 바닥에 떨어졌다.
“괜찮으십니까?”
바닥에 누운 서정운의 위로 한무화의 그림자가 커다랗게 그늘졌다. 서정운은 눈앞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무화를 올려다보며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흥건하게 땀에 젖어 있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몸을 기울인 한무화에게서도 땀이 뚝뚝 흘러 서정운의 얼굴 위로 떨어진다. 그걸 보고 얼른 한무화가 몸을 치웠다.
“--, …….”
심지어는 그 무서운 속도로 순간적인 공격에 나서면서 자신의 힘까지 조절했다. ……엄청나다. 이건 정말 놀랍다고 할 수밖에 없겠어.
서정운은 마음의 놀라움과 몸의 피로가 뒤섞인 한숨을 길게 내쉬며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한무화가 내미는 물컵을 받아 들어 목을 축인다.
“조금 더 지나면 내가 더 이상 봐줄 필요가 없겠어.”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 부딪히셨습니까?”
한숨처럼 중얼거리는 서정운에게 고개를 저으며 대꾸하던 한무화는, 서정운이 습관처럼 골반을 주무르는 걸 보고 물었다.
“아니, 아냐. 안 부딪혔어. 너 마지막에 허공에서 한 번 붙든 다음에 내려놨잖아. 이건 그냥 고질병. 힘 좀 많이 썼다 싶으면 욱신거리거든. 밤이라 피곤하기도 하고. 좀 있으면 괜찮아져.”
서정운은 고개를 젓곤 얼른 골반에서 손을 뗐다. 한무화의 무심한 얼굴이 찌푸려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다.
열어 놓은 창으로는 새카만 하늘이 보였다. 오늘 밤은 바람이 없다. 나무들도 잔잔했다. 격렬하게 몸을 쓰고 난 뒤에는 무더운 열기만 남았다.
“오늘 배운 기술은 비교적 몸에 잘 붙는 것 같습니다. 아직은 어설픈 감이 들지만 조금 더 하다 보면 익숙해질 것 같아요.”
이미 그 정도면 충분히 익숙하게 구사하고 있는 건데, 라고 생각하며 서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체격 조건에서 가장 쓰기 편한 기술이지. 나 정도만 돼도 약간 벅차. 그래서 난 거의 안 쓰는 기술이기도 해.”
경중량 이하 급에서는 거의 쓰는 사람이 없을걸, 하고 서정운이 설명을 덧붙였다.
“체급별로 각각 유리한 공격기나 방어기가 있잖아. 물론 같은 체급이라도 사람마다 체형이 다르기 때문에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최고 수준까지 단련을 하더라도 본인의 체형에 따라 한계가 있는 기술이 있어. 호영이 같은 경우도 뭐든 잘하지만 체형적으로 십자조르기 종류에는 취약하거든. 기술로 커버하긴 하지만.”
한무화는 서정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묵묵한 얼굴로 얌전히 앉아서 한마디 한마디를 귀담아듣고 있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져, 서정운은 속으로 웃고 만다.
이렇게 성실한 남자였다. 그런데 무서운 재능까지 겸비했다. ……그래, 못할 리가 없지.
본채의 도장은 본채에서도 안쪽 깊숙이 외따로 떨어져 있어 평소에도 인적이 드물었다. 하물며 수련 합숙 기간쯤 되면 밤에 굳이 여기에 와서 수련을 더 하는 사람은 없다. 한무화 정도로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아닌 한.
그래서 이곳에서는 정련이든 체련이든 누구의 눈에도 띌 염려를 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 눈에 띈다 해도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은 문중의 직계 가족 정도이니 크게 문제로 불거질 일이 없기도 하다.
이곳에서 무도를 익히는 조용하고 고적한 시간.
“…….”
한밤의 데이트 같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떠올렸다는 건 비밀로 해야지. 서정운은 느슨해지는 입가를 문지르며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지치긴 한다. 하루 종일 강론을 듣고 기술 연마와 자유 연습을 하는 것도 피곤한 일인데 심지어 이 밤에 그 누구보다도 괴물 같은 상대와 반쯤은 대련을 하다시피 하니.
서정운이 가만히 한숨을 쉬며 창가로 가 앉자, 서정운의 설명을 듣고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한무화가 천천히 다시 몸을 움직여 보기 시작하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배고프지 않으십니까?”
“나? 그럭저럭. 갑자기 왜, 너 배고파?”
갑자기 뜬금없는 물음을 던지는 한무화에게 서정운이 의아하게 되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만 사범님은 저녁을 거의 안 드시지 않았습니까?”
그 말을 듣고서야 서정운은 저녁 자리를 떠올렸다. 아마도 지금쯤 본산에 있는 사람들의 입을 한 바퀴 돌았을 그 사소한 소란의 자리에는 그러고 보니 이 남자도 있었다.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지만 이 남자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던 일을 떠올린 서정운은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아 “어……, 뭐 그렇긴 했지만……,” 하고 어물거렸다.
“저녁 먹는데 시끄러웠겠다. 미안해.”
약간 풀 죽어 중얼거리는 서정운을 내려다보던 한무화는 “아니요,”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저녁 반찬 말입니다. 대부분 매운 음식들이었어서. 사범님 매운 거 못 드시지 않습니까.”
“……어?”
서정운은 눈을 껌벅이며 한무화를 쳐다보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 뜻밖의 놀람에 뒤이어 심장이 울렸다. 설마 그런 걸 기억하고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주위에는 관심이라곤 없는 이 남자가. ……어쩌지. 정말로 기뻐질 것 같은데.
“응. 하지만 밥은 거의 다 먹었으니까 그렇게 배고프진 않아.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어떡하지. 생각할수록 정말 기쁘잖아. 외려 대련을 끝낸 직후보다 더 가슴이 더워지는 기분이었다. 서정운은 공연히 목이 마른 기분이 들어 물을 들이켰다.
그런 서정운을 묵묵히 내려다보던 한무화가 말을 이었다.
“저녁 먹는데 시끄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사범님이 굳이 그 여자분과 같은 자리에 앉지 않으셨더라면 그런 일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은 했습니다.”
서정운은 물을 삼키다 멈칫했다. 목을 넘어간 물은 과연 가슴을 조금 식혀 주었다. 한무화의 목소리는 평소대로 담담했는데도 왠지 모르게 꾸지람이라도 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서정운은 흘끗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하다. 그다지 비난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훈훈한 얼굴도 아니다. 이 무표정은 좀 읽기 힘든데……, 하고 생각하며 서정운은 컵을 내려놓았다.
“힘들어 보였거든.”
가벼운 숨을 내쉬며 말하는 서정운에게 한무화는 얼핏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냥 지나치기엔 좀 마음에 걸려서.”
“친하신 분입니까?”
“그렇게 친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예전에 한동안 본산에 같이 있었어.”
한무화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정운을 보았다. 그 시선을 받고 있자니 왠지 한호영이 종종 서정운에게 던지곤 하는 말이 떠올랐다. 사형은 여자한테 너무 물러요. 너어무 무르다고.
“……어릴 적에 어머니가 여자한테는 상냥하게 대해야 한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거든. 여자뿐 아니라 노인에게도 아이에게도.”
서정운은 오래전을 떠올렸다. 늘 약자에게 다정했던 어머니다. 그것은 숨 쉬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나보다 약한 사람들이잖아. 게다가 여자는 타고나기를 나보다 약하게 타고났고. 그래서인가, 평소에 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데, 웬만하면 그냥 내주게 되더라.”
우는 걸 보고 싶지 않다. 힘들어하는 것도 보고 싶지 않다. 정작 그런 생각을 하다가 더 힘들게 만드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랬다. 그냥 지나치기엔 신발 속의 작은 모래알처럼 마음에 걸렸다.
……그러니까 사형이 그 모양 그 꼴로 욕을 먹는 거라고, 자업자득이라고, 또 어디선가 한호영이 펄펄 뛰며 버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유 사범도 가끔 말을 지나치게 할 때가 있긴 하지만 나쁜 애는 아니거든. 이번에 몇 년 만에 다시 보니까 애가 좀 지나쳐 보이긴 하더라만, 결혼 준비한다니까 이래저래 힘든 일도 많겠지.”
서정운은 어딘지 우울해 보이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을 맺었다. 어찌 되었든 잘 지냈으면 좋겠다.
한무화는 말없이 서정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무표정이 왠지 읽기 힘들어 물끄러미 그를 마주 보는 서정운에게, 어느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서정운 사범님을 보면 가끔,”
“가끔?”
도중에 입을 다문 한무화에게 서정운이 물었다. 말을 고르는 듯하던 한무화는 한발 느리게 덧붙였다.
“상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가끔 상냥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미묘한 말이 칭찬인지 욕인지 일순 분간할 수가 없는 서정운이었다.
“가끔만 상냥해?”
서정운이 농담처럼 웃었지만 한무화는 이번에도 농담하는 기색은 없이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본인의 어떠한 기준이 있는데,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유난히 상냥하신 것 같습니다.”
“기준이라……. 생각 안 해 봤는데.”
“이를테면 서정운 사범님께 배웠던 제자라든가 말입니다.”
잠시 더 생각하다 덧붙이는 한무화의 말에 서정운은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가 애매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내가 이래 봬도 제자들한테 독하게 굴기로 소문난 사람인데.”
“아닙니다. 상냥하십니다.”
“…….”
저렇게 담담하게 단정 지어 말하니 얼른 대꾸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상냥이라니. 혹독하다거나 매정하다는 말이라면 익숙하지만 저건 처음 듣는 말이다. 호영이가 들으면 웃겠다. 서정운 스스로도 워낙 낯선 말이라 피식 웃고 말았다.
“너한테나 상냥하게 대하는 거지. 왜냐면 내가 너를,”
그러나 말을 하다 말고 서정운은 도중에 멈칫했다.
……잠깐. 나 지금 무슨 말을 꺼낸 거지.
“……. …….”
말하다 말고 그대로 멈춘 서정운은 눈만 껌벅거렸다. 갑자기 진땀이 뻘뻘 솟아난다. 어떡하지. 지금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서정운은 아주 천천히 눈동자만 들었다. 그러다 서정운을 응시하고 있는 한무화와 눈이 딱 마주친다.
“저를?”
한무화가 조용히 되물었다.
서정운은 잠시 그대로 어물어물하다가 간신히 들릴 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알잖아.”
“뭘 말입니까?”
평연히 되묻는 한무화를, 서정운이 다시 눈동자만 들어 쳐다보았다.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무덤덤한 얼굴이 서정운을 보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무딜 수가. 어이가 사라지는 심경으로 망연히 한무화를 바라보는 서정운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의아한 양 서정운을 마주 보며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정운은 미간을 주무르며 앓는 소리를 삼켰다.
그래, 그냥 편하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거다. 이제 와서 감추려 들 일도 아니고, 이 남자는 단순하고 담백하게 대하는 게 정답이지 않았던가.
“……내가 널 좋아하니까 그런 거야.”
그러니 자연히 네게 상냥할 수밖에 없는 거라고, 서정운은 최대한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워지는 얼굴은 어쩔 수 없었다. 뻘뻘 흘러나오는 진땀도 멎지 않는다. 목덜미까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한무화는 그런 서정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별로 놀라지는 않은 빛이다. 그야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니 놀라지야 않을 테지만, 어쩐지 예상했던 답을 듣기라도 한 것 같은 기색인…….
서정운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더운 얼굴을 쓸어내릴 때,
“예.”
한무화는 짤막하게 대답하며 여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입가가 느슨해지는 것도 같은데, 표정이 희박해서 잘 알 수가 없다. 이 남자의 무표정은 이제 읽기 쉽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은 왠지 좀 어려웠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손부채질로 얼굴을 식히던 서정운은 그 침묵이 초 단위로 무거워지는 것 같아 결국 얼마 있지 않아 일어서고 말았다.
“시간도 늦었고, 슬슬 가 봐야겠다. 너는 연습 더 하다 가려고?”
“예, 잠시 더 하다 갈까 합니다.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시계를 본 한무화가 꾸벅 인사를 했다. 서정운은 “그래,” 하고 대답하곤 한숨처럼 웃으며 덧붙였다.
“고마워할 만해. 오늘 낮 내도록 강론 듣고 교육받고 수련한 것보다 너 한두 시간 봐주는 게 더 힘들었거든.”
농담처럼 한 말이긴 하지만 아예 농담은 아니다.
괴물처럼 무섭게 성장하는 이 남자를 붙잡고 한순간도 긴장을 놓치지 않고 반쯤은 대련을 하다시피 지도하는 것이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얼마나 극심하게 소모되는 일인지.
“나중에 밥이라도 사.”
한무화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건넨 이 말은 형식적인 농담이었지만, 잠시간의 생각 뒤에 돌아온 한무화의 대답은 진지했다.
“그러면 저도 서정운 사범님이 원하시는 걸 해 드리겠습니다. 수련 합숙에 참가하신 것도 제 부탁을 들어주셨던 것이기도 하고.”
“어? ……어, 뭐 그렇긴 하지만…….”
그제야 서정운은,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하고 생각했다.
원래는 한무화가 사범 수련 합숙 참가 여부를 두고 대련을 잘해 내면 밥이라도 사겠다고 했다가, 그게 어쩌다 보니 원하는 걸 해 주는 걸로 되었다가, 결국 수련 합숙에 참가하게 되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면 밥을 사는 대신 원하는 걸 해 주는 것도 타당하겠다 싶지만,
“…….”
원하는 것, 하고 한무화를 올려다본 서정운의 눈에 문득 그의 입술이 들어온 건 꼭 우연만은 아니었을 거다. 아직 더워진 얼굴이 미처 식지도 않아 있었다.
바로 지난밤이었다. 저 입술을 맛보았었던 게. 그리고 그것이, 얼핏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순간 숨이 막혀 버릴 만큼 달았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다. 그 감각이 선명하게 되살아나 서정운은 희미하게 몸을 사렸다.
안 된다. 다시 욕심이 나 버렸다. 한 번 더. 한 번만 더. 그러면 안 될까. 그토록 달았는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니지. 하지만 한 번만 더.
서정운은 이마를 짚었다. 그 짧은 동안 머릿속으로 수천 번도 넘는 갈등이 오갈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어떡하지. 안 되는데. 그래도. 아니 역시 안 되는 것 같, 아니 하지만.
그 숱한 갈등 끝에 불쑥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그럼 뽀뽀라도 해 주든가…….”
양심도 없는 감정이 이겨 버렸다. 그래도 양심의 꺼풀은 남아 있었는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지만, 그 작은 목소리는 고요한 방 안에서 한무화의 귀에 잘 전해진 모양이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별 고민도 없이 돌아온 한무화의 대답은 무척 간결해서, 외려 서정운이 움찔 놀라고 말았다. 농담한 척이라도 해야 하나 고심하던 것도 순간 잊어버리고 만다.
“해도 되겠어? 너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았나?”
그런 식으로 가볍게 노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었던 한무화의 말을 떠올리며 물었지만 그는 평연하게 대답했다.
“저나 사범님께 특정한 상대가 있었더라면 물론 하지 않을 일입니다만, 그렇지 않은 한은 개의치 않습니다. 그리고 주고받는 것은 서로 원하는 걸로 명확하게 하는 편이 낫다고 보기도 합니다.”
“……. 깔끔해서 좋네.”
꼭 무슨 거래라도 하는 것 같아 마음 한 켠이 가라앉긴 했지만, 그 덕에 서정운은 좀 더 쉽게 태연한 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심장이 쿵쿵 울려서 이 소리가 들리지나 않을까 불안스럽긴 했지만 적어도 표정만큼은 대수롭지 않게, 별것 아닌 양.
“내가 이득 보는 장사 같은데.”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한무화를 잠시 쳐다보다가 서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서정운의 말이 떨어지자 한무화가 서슴없이 그에게로 걸음을 내디뎠다. 갑작스레 거리가 줄어들자 그만큼 갑작스레 심장이 쿵 떨어진다. 한무화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어 서정운의 머리를 그러쥐려 했을 때, 서정운이 황급히 “잠깐만,” 하고 두 손을 들었다.
“내, 내가 할래.”
깜짝 놀란 심장이 쿵쿵쿵쿵 시끄럽게 뛰었다. 가볍게 눈썹을 치켜 올린 한무화는 좋을 대로 하라는 듯 얌전히 걸음을 멈추었고, 서정운은 그의 소매를 붙잡아 당겨 창틀에 걸터앉혔다. 그러자 한무화보다 서정운의 눈높이가 높아진다.
한무화에게 다가서던 서정운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담담하게 바라보는 저 눈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머릿속이 폭풍우 속에 요동치는 배 같아서 뭘 생각할 만한 상태가 아니기도 했다.
얼결에 손을 뻗은 서정운이 한무화의 눈을 덮었다. 그렇게 눈을 가리고 나자 초속 100미터쯤 되는 마음속 폭풍이 초속 99미터쯤으로 줄어든 것 같기도 했다.
눈이 가려진 한무화는 아주 약간 몸을 뒤로 물리는가 싶었지만 곧 순순히 그대로 있었다. 그가 눈을 깜박거리는지 손바닥에 살짝살짝 속눈썹이 바스락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서정운은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눈을 가린 손 아래로 곧게 뻗은 콧날, 큼직하고 잘생긴 입술, 부드럽게 각진 턱선이 눈에 들어온다. 어느 것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게 없어 가슴이 떨렸다.
차마 그대로 계속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서정운 자신도 눈을 감아 버렸다. 그리고,
“--.”
코끝이 살짝 부딪쳤다. 뒤이어 겹쳐지는 입술의 감촉.
약간 메마른 듯한 입술이 낯익다. 숨이 막히는 것 같다. 그 입술을 살짝 누르며 조금 더 깊이 접촉한 순간, 한무화가 입을 열었다. 서정운은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안으로 조심스레 혀를 밀어 넣는다. 곧 한무화가 입을 더 벌리며 약간 고개를 틀었고, 서정운은 자신의 혀를 빨아 당기는 감촉에 움찔하고 만다.
더 이상은 내가 한다, 네가 한다를 나눌 경계도 기준도 없이, 입술과 혀가 얽혀 서로의 입안을 드나들었다.
더운 열기가 확 끼쳤다. 잡아먹히는 것 같기도 하고 잡아먹는 것 같기도 하다. 머릿속이 흐려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분명한 것은, 달았다. 역시 숨이 막힐 정도로 달았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
“--!”
그게 몇 초였는지, 혹은 몇 분이었는지, 시간 감각조차 없이 그 달고 뜨거운 감각을 탐닉하고 있던 서정운이 움찔하며 고개를 떼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아랫도리가 뜨끔해진 것 같았다.
가슴이 철렁해서 얼른 아래로 눈길을 돌리자 별다른 기미는 없었지만, 일순이나마 몸속의 심지에 불이 붙으려다 겨우 그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안 되지, 안 돼. 여기까지. 더 이상은 위험해. ……이 녀석 위험할 정도로 입맞춤을 잘하잖아.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서정운은 열기가 가시지 않는 가쁜 숨을 고르면서 천천히 한무화의 눈 위에서 손을 뗐다. 곧 뚫어져라 서정운을 바라보는 한무화의 까만 눈이 드러난다.
“끝입니까?”
서정운의 더워진 얼굴, 목덜미, 젖어 있는 입술, 희미하게 떨리는 손끝 따위를 찬찬히 바라본 한무화가 말했다.
이렇게 안색 하나 안 바꾸고 태연할 수가.
자신의 달아오른 낯빛이 한층 더 겸연쩍어진 서정운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이때만큼은 한무화의 저 담담한 안색도 차분한 목소리도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서정운의 기분까지 가다듬어 주는 것 같다.
“어, 응. ……잘하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
뭐지, 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데 굉장히 잘난 척하는 것 같은 이 느낌은. 같은 남자로서 살짝 배알이 꼴리는 것도 같고…….
“서정운 사범님은 좀 서투르십니다.”
“……. 안 물어봤는데?”
살짝이 아니라 제대로 배알이 꼴렸다. 서정운의 얼굴이 삽시에 부루퉁해졌다. 이놈이 원래 말수가 적던 놈이, 슬슬 나를 상대로는 말수가 좀 늘어난 것까지는 좋은데 쓸데없는 말까지 늘어나 버렸다.
그제야 한무화도 쓸데없는 말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죄송합니다.”라고 말했지만, 이미 늦었다.
서정운은 미간에 주름을 지은 채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며 물러섰다. 여전히 심장은 마구 뛰고 있었고 몸속도 무더웠지만, 불퉁해진 얼굴로 그 기색들을 덮을 수 있어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난 가 볼게. 오늘 고생 많았어. 그럼 연습 좀 더 하다 가.”
서정운이 쌀쌀맞게 말하자 창틀에서 일어선 한무화는 곤혹스러운 빛을 띠더니 그답지 않게 변명처럼 덧붙였다.
“서투르긴 했지만 나빴던 건 아닙니다. 괜찮았습니다. 아주.”
“…….”
나쁘지 않았다. 괜찮았다. 아주.
아무리 들어도 변명의 3단 콤보 같은 말이다. 그러나 무표정한 얼굴 아래로 당황해하는 그 기색이 이제는 선명하게 읽혀, 서정운은 빤히 그를 보다가 웃고 말았다. 역시 화를 못 내겠다.
“내일 봐.”
서정운이 그의 팔뚝을 가볍게 툭툭 두드리며 인사하자 한무화의 표정도 느슨해졌다. “예.” 하고 고개를 숙이는 몸짓이 또 굉장히 사랑스러워서, 서정운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내일 밤에 뵙겠습니다. 내일도 지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 ……공짜 아닐지도 몰라.”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뒷말이 덧붙기까지 머릿속으로 얼마나 치열한 갈등이 오갔는지 모른다. 그러나 서정운의 그런 고심 따위는 우습게 날려 버리며, 한무화는 자판기 커피 한잔 사겠다는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예,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리겠습니다.”
“……. 내가 뭘 원할지 알고 그렇게 쉽게 대답해.”
이놈 이거 큰일 나겠네, 자칫 사기꾼이라도 만났다간 홀랑 벗겨 먹히겠어, 서정운이 물가에 내놓은 아이 타이르듯 하자 물끄러미 그를 보던 한무화의 시선이 잠시 그의 입술을 스친 것 같았다.
“뭘 하시든 그렇게 대단할 것 같지는……. ……아니, 뭐든 별 상관없습니다.”
“--.”
배알이 꼴리다 못해 빈정이 상해 버렸다. 더럭 항의라도 하려고 입을 연 서정운이었지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여성 편력이 나만큼 화려하게 소문난 사람이 있을 것 같아?! 라고 할까 싶었지만 그게 더 꼴이 우스워질 것은 자명한 사실.
결국 서정운은 2, 3초쯤 굳어 있다가 그대로 돌아서고 말았고,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리는 서정운의 뒤로 한무화의 무심하고 예의 바른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라는 인사만 날아왔다.
탁!, 성질났다는 걸 여실히 보여 주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미닫이문이 닫혔고, 비슷하게 부아가 치밀었다는 걸 명확히 알려 주는 발소리가 점차 도장에서 멀어져 갔다.
이윽고 그곳에는 고요한 밤공기와 미처 식지 않은 열기와 한무화만 남았다.
피식, 어느 순간 한무화는 흘려내는 숨결처럼 조용히 웃었다. 그러고는 인기척이 끊어진 캄캄한 바깥뜰을 바라본다.
그러던 어느 때 그는 문득 웃음을 지웠다. 그리고 가만히 자신의 입술을 쓰다듬는다. 불현듯 목이 말라진 짐승처럼 할짝, 혀로 입술을 덧그렸다.
“……. ……?”
얼핏 고개를 기울인 그는 잔 가득 물을 따라 마셨다. 그럼에도 딱히 만족스럽지는 않은 듯 빈 잔을 내려다보다가 “목말라.” 하고 중얼거린다. 다시 한 잔 더 마셨지만 여전히 갈증은 남아 있는 듯 자신의 목을 주무르던 한무화는 곧 고개를 가볍게 내젓고는, 잔을 내려놓고 다시 대련단 위에 자세를 가다듬고 서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