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묵직하게 가라앉은 새벽 공기는 언제나 정갈한 느낌이 든다.
기척 없이 고요하고 무거운 공기. 그 공기가 조금씩 가벼워짐에 따라 점차 어둠이 물러가는 하늘.
그런 무렵, 아무도 없이 드넓고 컴컴한 대수련장에는 낡은 목조 건물 특유의 건조한 나무 냄새가 습한 새벽 공기와 섞여 독특한 냄새를 만들어 낸다. 그 적막하고 서늘한 공기. 어슴푸레한 실내. 온몸에 스미는 고립감.
서정운은 그런 것들이 좋았다.
이른 새벽, 웬만큼 아침잠이 없는 이들이라도 아직 이부자리에 있을 그 시각에 대수련장에 홀로 반듯하게 앉아 눈을 감고 그 모든 것을 느끼는 것은 오래전 서정운이 즐겨 하던 일 중 하나다.
그리고 지금도.
아직 어둠이 미처 걷히지도 않은 시각 불도 켜지 않은 대수련장에서 서정운은 마치 오래 입어 온 낡고 깨끗한 옷을 입은 것처럼 편안한 기분으로 앉아 있었다.
멀리서 뻐꾸기 소리가 들렸다. 종다리 우짖는 소리가 뻐꾸기 소리를 꾸민다. 새벽 소리다.
“…….”
서정운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멀리 새 소리에 섞여 반대 방향 멀찍이서 자갈 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주차장에 차가 들어왔나 보다. 이렇게 이른 시각에 누가 왔나. 그러나 그 소리는 금세 사라졌고 서정운도 다시 정적을 즐겼다.
장지문이 점차 부옇게 밝아 왔다. 아직은 푸르스름한 새벽이 물러가지 않았지만 멀리서 아침은 차근차근 다가오고 있나 보다.
그리고 바깥에서 희미하게 가까워 오는 발소리.
서정운은 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묵직한 발소리는 대수련장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린 개의 가벼운 발소리와 가쁜 숨소리도 섞여 들린다.
서정운은 일어나 대수련장의 장지를 열었다. 컴컴하던 장내에 바깥의 부연 새벽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그 바깥에는 한무화가 새벽 공기를 두르고 다가오고 있었다.
“…….”
서정운을 본 한무화의 걸음이 조금 늦어졌다. 온 마당 곳곳을 훑고 다니며 한무화를 졸랑졸랑 따라오던 털 뭉치 한 마리도 서정운을 보더니 왈! 왈! 반갑게 짖는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너였어?”
거의 동시에 입을 연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입을 닫았다.
한무화가 의아하게 서정운을 올려다보았다. 서정운은 아니, 하고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주차장에서 차 소리가 났는데 발소리가 가까이 오길래 손님이라도 왔나 싶었지. 손님이 오기는 너무 이른 시각이긴 하지만.”
손님은 아닌 모양이다. 하긴 합숙 중에는 참가자를 만나러 가족이나 친지가 찾아오거나 뭔가 필요한 물건을 건네주러 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별 기척이 없는 걸로 봐선 그런 이들인 성싶었다.
“너는 왜 벌써 일어났어.”
서정운이 묻자 한무화는 돌계단을 올라오며 “눈이 일찍 떠져서 연습이라도 할까 하고 나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간밤에 서정운이 그의 수련을 봐주고 기진맥진해서 돌아간 게 자정 넘어서다. 그러면 필경 그 이후에도 제법 연습하다 돌아갔을 한무화는 수면 시간도 체력도 서정운보다 부족해야 마땅할 텐데, 아주 멀쩡해 보였다.
하긴 원래 체력도 괴물 같은 놈이었지, 서정운이 속으로 감탄 반, 질투 반 생각하는데 계단을 다 올라선 한무화가 물었다.
“사범님은 연습 마치고 나오시는 길입니까?”
“아니, 그냥 앉아 있었어. 본산에서 지낼 때에는 가끔 새벽에 대수련장에 나와서 앉아 있곤 했었거든.”
이 고적한 고요가 좋았다. 어슴푸레한 어둠도, 서늘한 공기도, 새벽 냄새도. 마루에 앉아 가만히 손으로 나무 바닥을 쓸어 보는 서정운을 바라보다가 한무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어울립니다.”
“……. 응?”
듣다 듣다 대수련장에 앉아 있는 게 어울린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 서정운이었으나, 이내 어이없이 웃고 말았다.
“대수련장이랑 어울리는 건 또 뭐야.”
“정말입니다.”
농담기 없이 평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한무화를 보며 서정운은 고맙다고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그러는 사이에 뜰에서 풀숲을 뒤지고 있던 강아지가 계단 위로 폴랑폴랑 뛰어올랐다. 나랑도 놀아 달라는 듯 한무화와 서정운 사이를 오가며 흙 묻은 발로 더듬는 강아지는 이제는 한 손으로 들어 올릴 수 없을 만큼 부쩍 자라 있었다.
“이놈은 너 가는 데마다 따라다니네.”
서정운은 강아지의 귓등을 살살 긁어 주다 웃었다.
“난 어릴 때부터 커다란 개를 기르는 게 꿈이었어. 매일 산책 시켜 주고 놀아 주고 예뻐해 줄 자신도 있는데.”
“키우시면 되지 않습니까?”
“동물 털 알레르기가 있거든. 이렇게 잠깐씩 데리고 노는 건 괜찮은데, 같이 오래는 못 있어.”
서정운이 아쉽게 말하자 한무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개를 기르고 싶었습니다.”
“길렀다면서?”
예전에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서정운이 의아하게 묻자 한무화는 열심히 꼬리를 흔들고 있는 털 뭉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예. 하지만 집에서 기르는 개라서 가족 중 하나라는 느낌에 가까웠습니다. 저는 제가 돌보고, 저를 따르는 개를 기르고 싶었습니다.”
아직까지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기르지 못했습니다만, 하고 말하는 한무화를 서정운은 의외롭게 쳐다보다 웃었다.
“생각보다 독점욕이 있는 편인가 보네.”
그러자 한무화는 잠시 생각해 보는 눈치였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서요.”
“왜, 그래도 탐나는 물건을 차지할 때라든가, 사람 사귈 때라든가 있잖아. 남한테 나눠 주거나 양보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 때가. 그럴 때가 별로 없으면 독점욕도 별로 없는 거겠지.”
“그렇다면 별로 없는 편인 것 같긴 합니다만……,”
한무화는 어딘지 석연찮은 듯 중얼거리다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할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뭐든 가볍게 대답하는 법이 없다. 서정운은 곁눈으로 한무화의 옆모습을 보다 웃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한무화의 입술에 닿는다.
“…--.”
서정운은 저도 모르게 얼른 눈을 돌리고 말았다.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갑자기 심장이 퉁 하고 튀었다.
새벽부터 무슨 쓸데없는 생각이야. 그만둬. 생각하지 마. 서정운은 애써 강아지를 쓰다듬는 데에 집중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며칠이다. 밤마다 저 입술에 닿은 지 거의 한 주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 감각은 기억에 선명하게 새겨진 지 오래다.
밤마다 도장에서 한무화의 수련을 도와주고 난 뒤에는 그곳에서 나오기 전에 그와 입술을 겹쳤다. 익숙해질 것 같으면서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아 언제나 한무화에게는 얌전히 앉아 있게 하고, 그의 눈을 가린 뒤 서정운이 입술을 갖다 댄다. 그러면 한무화는 순순히 입을 벌리고, 그런 뒤에는 서정운의 혀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서정운에게는 매일 밤마다 낯설고 새로운 기분이었는데도 한무화는 그렇지 않았는지, 하루하루 지날수록 그는 점점 더 익숙하게, 당연한 듯이 서정운의 혀를 빨아들이고 입술을 핥으며 깨문다. 뭘 어떻게 하면 서정운의 혀가 흠칫거리고 입술이 떨리는지 이제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한무화는 하루마다 더욱 능란하게 서정운의 입안을 헤집었다.
그것은 때로--불현듯, 이것이 입맞춤 이상의 어떠한 행위인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농밀해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몸속까지 달궈지는 느낌이다. 의식마저 아릿하게 흐려지는 감각.
그것은 간밤에도 마찬가지였다.
몸속부터 머릿속까지 열기에 녹아 버린 초콜릿 같아, 흐릿한 의식 속에서 문득 이건 섹스라도 하는 것 같지 않은가--라고 생각한 찰나,
그 생각에 흠칫해 눈을 뜬 서정운은 한무화의 눈 위를 덮고 있던 손이 어느 결에 그의 뺨을 감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한무화가 눈을 뜬 채 서정운을 보고 있다는 것도.
‘--.’
그토록 가까운 거리에서는 얼굴이든 표정이든 제대로 보였을 리 없는데도, 서정운은 얼결에 그에게서 얼굴을 뗐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밀쳐지듯 거리가 생긴 뒤에도 한무화는 뚫어질 듯 서정운을 보고 있었다. 서정운의 얼굴로, 입으로, 눈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기는 그 새까만 눈이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걸까. 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나. 그 열기를 탐닉하는 데에 넋을 놓고 있었던 나는.
머릿속이 낱낱이 까발려진 기분이었다.
그야 물론 서정운이 그를 좋아한다는 건 이미 둘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 이제 와서 숨길 것도 없지만, 욕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얼굴을 보인다는 건 마치 머릿속을 벌거벗겨지는 듯한 느낌에 가깝다.
“…….”
그래서 결국 어젯밤에는 잠을 설치고 말았다. 생각할 때마다 자신의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쥐구멍을 그리워했다.
결국 거의 뜬눈으로 나와 새벽 공기라도 쐬며 머리를 식히려고 했는데. 그리고 이 차분한 공간에 머무르다 나와 거의 성공할 뻔했는데.
서정운은 멀쩡하기 그지없는 한무화의 얼굴을 곁눈질로 흘끔 보고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가 이렇게 번뇌에 젖어 있든 말든 이 남자는 신경도 안 쓰겠지. 나도 신경 끄자.
서정운이 머릿속에서 억지로 잡념을 몰아내 버리고 발치의 털 뭉치만 살살살 얼러 주고 있을 때였다.
어느새 하늘은 제법 밝아져 있었고, 멀찍이에서 사람이 오가는 기척이 하나둘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기척 중 하나가 저벅저벅 흙을 밟으며 대수련장으로 다가왔다.
“어? 무화 일찍 일어났, 네. ……, …….”
대수련장의 모퉁이를 지나 이쪽으로 돌아선 남자는 체련의 젊은 사범 중 하나였다. 하품을 하다가 한무화를 보고 인사를 건네던 그는 한발 늦게 서정운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말을 흐렸다. 입에 벌레라도 넣은 것처럼 표정을 구긴 그는 각각 정련과 체련인 이 둘이 왜 같이 있나 미심쩍은 눈치로 그들을 번갈아 보았고, 서정운은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적하던 새벽 공기는 이제 흩어졌다. 더 이상 이곳은 서정운이 마음 편하게 쉴 공간이 아니다.
낮 동안에는 한무화와 거의 말을 섞지 않는 서정운은 한무화에게 인사 대신 짧은 시선만 스치듯 주고는 대수련장의 계단을 내려왔고, 떨떠름한 낯을 하고 있는 체련 사범에게 묵례만 까닥 하고는 그 옆을 스쳐 지났다.
“저 사람은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대? 남몰래 새벽같이 여자랑 밀회라도 하나?”
멀어져 가는 서정운을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던 체련 사범은 설렁설렁 한무화에게 다가오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아!” 하고 작게 외치더니 눈을 껌벅인다.
“그 여잔가 보다, 정련의 유희정 사범. 아까 화장실 갔다 오다 보니까 그 여자도 일찌감치 방에서 나와 어디 가더만. 둘이 몰래 만난 거 아냐?”
“그렇지 않습니다. 혼자 계셨습니다.”
“네가 와서 얼른 피했나 보지.”
“……. 그 여자분은 곧 결혼하실 거고, 서정운 사범님은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걸 어떻게 알아. 서정운 사범이 그런 거 따지는 인간인 줄 알아? 저 사람이라면 남의 결혼 깨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지.”
순진해 빠진 소리 말라는 듯 혀를 쯧쯧 차던 체련 사범은 소리를 낮추며 은근하게 물었다.
“좀 전에 보니까 너랑도 얘기 좀 하는 모양이던데, 여자 얘기 같은 건 안 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하고 김이 빠진 것처럼 시큰둥하게 입매를 찡그리던 그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비뚜름하게 웃었다.
“하긴 아무리 저 사람이라도 너한테만큼은 그런 얘기 못 하겠지.”
발치에서 빙글빙글 도는 강아지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려 주던 한무화가 의아하게 사범을 보았다. 짤막하게 사이를 두고 “어째서입니까?” 하고 묻자 사범이 실실 웃으며 야릇한 눈으로 한무화를 보았다.
“너 인마, 소문 다 났어. 뭐, 아랫도리에 팔뚝만 한 게 하나 붙어 있다며? 여어, 대물!”
한무화는 난데없이 튀어나온 뜬금없는 소리에 기묘한 표정으로 빤히 그를 보았다.
“그런 얘기가 왜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라 며칠 전부터 이미 돌았어. 매일 밤마다 욕실을 공동으로 쓰는데 그런 소문이 안 나겠냐. 어제도 저녁 자리에서 그 얘기 잠깐 나왔었는데, 넌 없었지?”
“예, 어제저녁에는 외당에서 큰 어르신과 식사를 해서.”
“그래그래, 그런데 서정운 사범은 어제 거기 있었거든. 그 얘기를 듣고는 얼굴빛이 희한해지더니만 그 뒤로 입 꾹 다물고 한마디도 안 하는 거야. 자존심깨나 상했나 보지. 제아무리 여자관계 복잡하게 놀아나는 인간이라 해도 거기 크기는 보통이거든. 전에 보니까 나랑 비슷, 아니 나보다 작아 보이더만.”
사범이 뻐기듯이 고개를 치켜들며 코웃음 쳤다. 그런 사범을 쳐다보던 한무화의 미간에 문득 주름이 졌다.
“……. 전에 어떻게 보셨습니까?”
“어? 수련 마치고 욕실에서 씻다가 서정운 사범 들어오길래 봤지. 그때 같이 씻고 있던 놈들 한꺼번에 시선이 그리로 몰리더만. 그렇게 여자랑 난잡하게 놀아나는 놈 거시기는 어떻게 생겼나 궁금한 게 나만이 아니었던 거지.”
크기는 평범한데 색깔은 좀 발긋발긋하더라, 하고 시시덕거리는 그를 한무화는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약간 왼쪽으로 휜……, ……, ……흠, 흠. 아침부터 할 얘기는 아니긴 하네.”
손짓까지 곁들여 이야기하던 사범은 조용히 바라보는 한무화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다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온기 하나 없이 가라앉아 있다.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슬그머니 말을 돌린 그는 “뭐 여하튼,” 하고 말을 이었다.
“아무리 서정운 사범이라도 본인보다 대물인 사람 앞에서 여자 자랑은 못 하겠지, 아무렴.”
“…….”
“너는 그런데 여자 안 사귀어? 한국 온 지 반년이 지났는데 어째 그런 얘기를 못 들어 봤네. 맘에 드는 여자 없었어?”
한무화는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그제야 천천히 거두었다. 그러곤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다.
“없었습니다.”
“설마 그럼 반년 동안 한 번도 그거 안 했냐……?”
“안 했습니다.”
한무화의 대답은 담담했는데 외려 사범이 눈을 부릅떴다. 못 들을 말이라도 들었다는 것처럼 한무화를 쳐다보다가 애석하다는 듯 혀를 찬다.
“기껏 좋은 물건 갖고 있으면서 그 좋은 걸 아깝게 안 쓰냐. 가끔 좀 쓰고 그래. 그 큰 거 오래 묵혀 뒀다가 한꺼번에 쓸라치면 여자 죽는다.”
“……. 유념해 두겠습니다.”
“반년이나 안 했다니, 거시기가 좀 써 달라고 욕 안 하냐? 꽉 찼다는 기분 안 들어?”
사범은 감탄스럽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발치에 발라당 드러누워 학학거리는 강아지의 배를 어루만져 주던 한무화는 “아니요, 별로, …….”라고 대답하다 말고 말을 멈추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최근 들어 좀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별것 아닌 걸로 힘이 들어갈 때가 있어서…….”
도중에 말을 흐린 한무화는 다시 생각에 잠긴다. 사범이 호기심 어린 눈치로 한무화를 보며 “어떨 때?” 하고 물었지만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한무화는 생각에 잠긴 채 대꾸가 없다.
그가 무심결인 듯 가만히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얼굴선을 타고 내려가던 손끝이 입술에 닿는다. 그 순간 손은 그 자리에 멈춰 한동안 입술 위에서 떠나지 않는다.
“…--.”
문득 그 입술이 아주 약간 움직였다. 혀가 입술 안쪽을 핥듯이 스치고 지나간다. 느리게 숨을 들이쉬는 기척은 아무의 귀에도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강아지만, 한무화의 손길 아래 배를 맡기고 드러누워 있던 강아지만 별안간 움찔하고 몸을 일으키더니, 굶주린 맹수라도 만난 양 후다닥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 가 버린다.
어, 저놈 저 먼지 구덩이 속에 들어가면 어쩌냐, 이리 나와, 츳츳츳, 하고 사범이 마루 앞에 웅크리고 앉아 강아지를 불렀지만 강아지는 나올 줄을 몰랐고, 한무화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가려고?”
사범이 고개를 들어 한무화를 올려다보며 묻자 그는 대수련장의 문을 열며 말했다.
“연습 좀 하다 갈까 합니다.”
“새벽부터 열심이네.”
“요즘 집중이 잘 안 되어서요.”
“네가 어쩐 일이냐, 무슨 일이라도 있어?”
사범은 마루 밑을 들여다보며 건성으로 중얼거렸고 잠시 침묵하던 한무화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대수련장 안으로 들어갔다.
*
“섹스하고 싶어.”
해가 머리 위를 넘어간 평화로운 오후, 붓꽃이 핀 뜰이 내려다보이는 정갈하고 조용한 한옥의 툇마루에 앉아 있던 서정운이 불쑥 중얼거린 혼잣말이었다.
서정운의 옆에는 작은 다과상을 사이에 두고서 한호영과, 그의 소꿉친구 겸 동창이자 한국작곡자협회에서 일하느라 서정운과 업무로 얽혀 있기도 한 여자 지승혜가 앉아 있었는데, 둘은 동시에 침묵하며 빤히 서정운을 바라보았다.
넋 놓고 뜰을 내려다보다 한발 늦게 그 시선을 알아차린 서정운은 어리둥절하게 둘을 번갈아 보다가, 별안간 흠칫하며 말했다.
“혹시 내가 입 밖으로 말했나……?”
“나 반지 낀 거 안 보여? 토끼 같은 남편이 집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데, 오빠 미쳤니?”
지승혜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쏘아붙이기 무섭게 서정운은 “너랑 하고 싶다는 거 아냐!”라고 외쳤는데, 그러자마자 이번에는 한호영이 스산하게 물었다.
“그럼 누구랑……?”
“--.”
대번에 입을 다물어 버리는 서정운을 흰 눈으로 응시하던 한호영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다른 사람이 있으니 차마 대놓고 따져 묻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거리는 한호영이었다. 그런 속도 모르고, 한호영과는--덩달아 서정운과도-- 워낙 어릴 때부터 소꿉친구로 지내 친남매나 마찬가지인 지승혜는 발랄하게 재깔거렸다.
“뭐 어때. 하고 싶을 수도 있지. 하고 싶은 것 자체는 죄도 아니고 문제도 없지. 단 정운 오빠라면 막상 진짜로 했다간 꽃뱀한테 덜컥 걸려서 또 신세 망칠 게 뻔할 뿐이지.”
여태 한두 번 당한 것도 아닌데 어때, 새삼, 한 번 더 당하면 그만이지, 맘껏 해, 오빠, 활기차게 조잘거리는 여동생--피는 안 섞였지만--을 한 대 때려 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하지만 이거도 일단은 여자였지, 하고 눌러 참으며, 서정운은 잠자코 차만 마셨다.
하지만 설마 입 밖으로 중얼거렸을 줄은 몰랐다. 속으로만 생각했다고 여겼는데 실수다.
뻔히 그 상대까지 짐작하고 있을 한호영의 도끼 같은 시선이 거북해 애써 눈길을 피하면서, 서정운은 자신의 집 뒤뜰에 곱게 핀 붓꽃만 내려다보았다. 수련 합숙 기간에도 주말에는 자유로이 시간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주말이면 귀가해서 집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던 것이다.
서정운도 주말을 맞아 한주 내 비워 둔 집을 청소도 해야겠고, 또 일 관계로 볼일이 있다는 지승혜와 만날 요량까지 해서 집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그런데 설마 그녀가 저녁때 동창회에 같이 가기로 했다며 한호영까지 달고 올 줄은 몰랐다.
“근데 오빠가 웬일이야, 그런 말을 다 하고? 그런 데에 별로 흥미 없는 사람 아니었어?”
“……, 섹스에 흥미 없는 남자가 어딨어…….”
서정운은 입속으로 웅얼거리며 차를 마셨다. 딴에는 그렇긴 하지, 하고 지승혜가 고개를 까닥인다.
그러나 사실 서정운은 그녀의 말마따나 성욕이 딱히 풍부한 인간은 아니었다. 안 해도 상관없고 간혹 당길 때 혼자 처리해도 괜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슬슬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하루하루, 한무화와 입술을 겹칠수록 감각이 더 예민하게 살아나는 것 같았다. 잊고 있던 욕구까지 촉발될 만큼. 입맞춤이 날마다 조금씩 더 길어지고 농염해진다는 것도 한몫하고 있었다.
걔는 아직 나이도 어린 것이 도대체 왜 입만 맞추는데도 저렇게 테크닉이 좋은 거지? 서정운이 고뇌에 잠겨 깊은 한숨을 내쉴 때였다. 마루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던 휴대 전화에서 문자 수신음이 울렸고, 서정운을 보며 종잇장처럼 낯을 구기고 있던 한호영이 전화를 집어 들었다.
문자를 확인하던 한호영의 표정이 기묘해지는 걸 보고 지승혜가 “왜 그래?” 하고 묻자 그제야 서정운도 한호영에게 시선을 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별건 아니고……, 얘가 뭔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한호영은 목덜미를 벅벅 긁으며 고개를 기우뚱했다.
“다음 분기 전용 주차장 배정 때문에 얘기하다 김 실장님이 그러시던데, 엊그제 새벽에 희재 차가 들어왔다 나간 기록이 남아 있더래요. 그래서 희재 왔었냐고 묻길래 난 모르는 일이라서 희재한테 문자를 보냈었거든요. 그게 지금 답이 왔는데……, 애가 영 횡설수설이네. 인사하러 들렀다가 시간이 일러서 그냥 가……? 이게 뭔 소리야.”
“희재? 아아, 유 사범 사촌 동생 말이지? 유 사범이라도 보러 왔었나 보지. 부산에 있다더니 올라왔나 보네.”
“그래요? 그럼 그렇게 말하면 되지 뭘…….”
“오랜만에 들렀는데 다른 사람은 안 보고 간 게 미안했나 보지.”
서정운이 여상하게 말하자 한호영은 “하여간 거기는 사촌이 참 사이도 좋아.” 하고 중얼거리며 답문자를 보낸다.
서정운은 차를 호로록 들이켜며 아침에 보았던 유희정의 모습을 떠올렸다. 줄곧 어두운 기색이던 그녀가 오늘은 웬일로 한껏 들뜬 기색으로 화장에 옷차림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고서 외출하길래 주말이니 예비 신랑과 데이트라도 하나 보다, 안색이 밝아져서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고 보니 유희정 사범님 괜찮대요? 좀 문제 있어 보이던데.”
한호영이 문자를 찍으며 중얼거려서 서정운이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한호영이 전화에 시선을 준 채 말을 잇는다.
“아까 나 나오기 직전에 본산 사무실로 연락 왔었거든요. 유희정 사범님 약혼자라는 사람한테서. 유 사범님한테 연락이 안 된다고, 무슨 일 있냐고. 목소리가 좀 험하더라고요. 주말에도 본산에서 수련 있다고 말한 모양이던데…….”
서정운은 차를 마시다 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문자를 송신하고 전화를 내려놓은 한호영은 애매한 눈치로 서정운을 보았다. 아마 서정운도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거다.
“……, 무슨 오해라도 있나 보지. 결혼 전에 많이들 싸운다고 하니까.”
한호영은 “그건 그렇죠.”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썩 명쾌하지 않은 눈치였지만 더 이상 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서정운도 잠시 입매를 찌푸리고 있었지만 이내 머리에서 지워 버린다.
“뭐야, 뭐, 수상한 얘기야?”
옆에서 조용히 둘을 번갈아 보며 듣고만 있던 지승혜가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지만, 시계를 본 서정운은 그 말엔 대꾸하지 않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고, 그보다 일 얘기 할 거 얼른 얘기하고 둘 다 돌아가. 올 사람 있어.”
“올 사람? 누구? 여자야? 여자라서 우리 쫓아내려는 거야?”
“남자다, 남자.”
대번에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내미는 그녀의 이마를 밀어 버린 서정운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도 한호영이 어김없이 스산한 시선을 보낸다.
“남자 누구요……?”
“…….”
대뜸 입을 다물어 버리는 서정운을 보고 한층 수상쩍게 눈매를 좁힌 한호영이 짧은 침묵 뒤에 물었다.
“설마 무화 오기로 했어요……?”
“……, 우리 집에 있는 정무도 자료 보여 주기로 했어.”
서정운이 변명처럼 중얼거리는 말을 듣자마자 한호영은 당장 눈을 세모꼴로 치떴다.
“정무도 자료가 본산에는 없대요? 본산 자료 소장실에 온갖 영상, 미디어, 서적들이 쌓여 있는데 걔를 여기 왜 불러요?”
“하지만 내 개인 소장 자료는 중요 엑기스만 뽑아서 깔끔하게 압축 정리해 놨으니까, 와 보라 그랬지.”
한호영은 말을 잃었다. 어이가 없다 못해 힘이 빠진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한호영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앓듯이 중얼거렸다.
“사형도 참 어지간하십니다……. 모처럼 쉬는 주말까지 걔를 봐야겠어요?”
서정운은 대답 대신 차만 마셨다. 그런 서정운과 한호영을 번갈아 보던 지승혜가 궁금하다는 투로 “왜? 그게 누군데?”라고 말했을 때였다.
자박, 흙을 밟으며 뒤꼍으로 돌아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묵직하고 느리게 다가오던 그 걸음걸이는 뒤뜰에 다다르고 나서야 멈추었다. 세 사람의 시야에 커다란 남자의 모습이 들어왔고, 그 남자 역시 마루 위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을 보았다.
“대문이 열려 있길래 들어왔습니다. 앞마당에서 불렀는데 못 들으신 것 같아서 허락 없이 이쪽으로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손님들이 와 계셨군요.”
그 남자 한무화는 다른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지 그들을 훑어본 뒤 서정운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고, 서정운은 약간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시계를 보곤 손을 끄덕였다.
“어, 올라와. 생각보다 빨리 왔네.”
얘네들을 보낸 뒤에 맞이할 생각이었는데 계산이 어긋났다. 한수일 정원사범님과 다른 상원사범님들과 더불어 점심 식사를 하고 오겠다기에, 그 말 많은 어른들과 점심 먹고 온다면 대충 서너 시는 되어야 오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서정운이 내심 혀를 차는 가운데 한무화는 계단을 올라와 서정운에게서 두어 뼘 떨어진 옆에 앉았다. 그리고 서정운 너머에 앉은 한호영에게, 이어 지승혜에게 차례로 목례를 건넨다.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한호영의 옆에서 지승혜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한무화를 보며 얼른 빈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그런 뒤 곧바로 직업의식을 발휘해 명함을 꺼내어 건넨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국작곡자협회에서 일하고 있는 지승혜라고 해요. 서정운 선생님과는 일 관계로 아는 사이이고, 어릴 때부터 이웃 오빠로도 잘 알아 온 사이예요. 호영이 친구이기도 하고요.”
“예. 한무화입니다.”
“…….”
생글생글 웃으며 더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지승혜였지만, 그 뒤에 더 말이 나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는 한호영이 불퉁한 어조로 대신 설명해 주었다.
“본산 수련생이야. 미국에 있다가 반년 전에 들어왔어. 내 사촌이기도 하고. 사형이랑은 뭐어 그냥저냥 그럭저럭 지내는 사이인 것 같고. 원래 말이 별로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
“어머, 그래? 네 사촌? 별로 안 닮았네. 남자답게 훤칠하게 생기셨다. 어쩜, 딱 내 취향이네. 혹시 애인 있으세요?”
생글거리며 붙임성 좋게 말을 거는 지승혜에게, 이번에는 서정운이 냉랭하게 대꾸했다.
“너 유부녀잖아. 토끼 같은 남편이 집에서 기다린다며.”
“어머, 오빠는? 내가 뭘? 애인 있냐고 물어보기밖에 더 했어?”
지승혜는 곱게 눈을 흘기곤 한무화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원래 애교도 많고 붙임성도 많은 동생이라 예뻐하는 앤데 오늘은 좀 얄밉다고 생각하며 서정운은 다 식은 차만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자 눈치 빠르게 새 잔을 쪼르르 따라 주며 방긋이 웃는 그녀를 보고, 그래 얘를 어떻게 미워하겠니, 하고 서정운은 피식 웃고 만다.
한무화는 말없이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고 서정운이 말을 덧붙였다.
“일 때문에 할 얘기가 있어서 잠깐 온 거라서 금방 갈 거야. 저놈은 그냥 따라온 거고. 잠깐만 기다려 줘.”
“저는 괜찮습니다. 천천히 볼일 보십시오.”
한무화가 선선히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서정운의 옆에서 지승혜가 다시 말을 건넨다.
“어머, 목소리도 되게 좋으시다. 나 낮고 묵직한 저음 되게 좋아하는데.”
“그렇습니까?”
“예. 제가 무지 좋아하는 목소리예요.”
짧게나마 순순히 대답해 주는 한무화와 영업용 미소를 남발하고 있는 여동생을 곱잖게 쳐다보며 서정운이 말을 섞었다.
“너 전에는 내 목소리가 좋다고 하지 않았니……?”
“물론 오빠의 허스키한 목소리도 섹시하지. 오빠 목소리 섹시하다고 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아. 하지만 오빠는 그런 소리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테고, 이분은 뉴페이스잖아. 목소리도 좋으시고 외모도 훤칠하시고, 어쩜. 애인 있으세요? 있으시겠죠? 혹시 없으시면--,”
“야, 야, 유부녀가 어디 내 집에서 비윤리적이고 불건전한 관계를 도모하려 해? 너네 남편한테 이르기 전에 쓸데없이 외간 남자한테 흘리지 말고 얼른 할 얘기나 하고 가.”
아무리 귀여운 여동생이라도 내내 귀엽기만 할 리는 없었던 서정운이 혀를 차며 따끔하게 대꾸하자 지승혜는 대번에 눈초리를 치켜올렸다.
“어머, 뭘 일러? 나처럼 정숙한 사람을 두고 무슨 생각 하니? 난 그냥 애인 없으면 소개팅이라도 시켜 주겠다고 할 생각이었지!”
“무화 정무도 말고는 관심 없어. 괜히 방해하지 말고 그냥 둬.”
“어머, 왜 오빠가 그래? 누가 보면 오빠가 이분 좋아하는 줄 알겠다!”
이건 대체 웬 아수라장이냐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차만 마시던 한호영이 쿨럭, 소리 없이 사레들려 어깨를 들썩였다. 변함없이 무표정한 한무화 옆에서 서정운도 순간적으로 얼음이 되었지만, 그녀는 그런 분위기를 알아채지 못하고 “오빠는 자기는 주위에 여자가 넘쳐나면서 남의 연애는 왜 방해하려 그래?” 하고 잇따라 쏘아붙였다.
얘가 눈치가 부족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라고 서정운이 안도하는 찰나,
“그리고 남 걱정 하지 말고 오빠 걱정부터 해. 대낮부터 섹스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라면 오빠 위험하다구.”
쩡.
이번에야말로 서정운은 얼음이 되었다.
말하고 나서야 지승혜가 “어머, 난 몰라.” 하고 순진한 척 눈을 깜박이며 살짝 한무화의 눈치를 보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래도 좋았다. 또다시 사레들린 한호영도 이번에는 소리를 미처 참지 못하고 쿨럭거리는 가운데, 한 번, 두 번 눈을 깜박인 한무화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정운을 보았다.
서정운은 차마 그쪽을 쳐다보지 못하고 반대쪽으로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며 더듬더듬 중얼거린다.
“아니, 나는 그냥, 뭐, 한참 오래 안 했다……, 그냥 그런 의미였지, 굳이 하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안, 안 해도 돼, 아니, 할 생각도 안 했어, 전혀.”
이 오빠가 왜 이래 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지승혜도, 안쓰러워서 차마 못 보겠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리는 한호영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야에서 비껴 있는 한무화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것만 알겠다.
“하고 싶을 수도 있지 뭘. 그거야 사람의 본능적인 욕구인데.”
낯빛이 거무죽죽해진 서정운이 영 보기 불쌍했는지, 웬만하면 눈에 불을 켜고 헐뜯을 한호영이 못마땅한 투로나마 편들어 준다. 그러나,
“안 그러냐?”
하고, 한무화에게마저 동의를 구하지만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 움찔하는 서정운의 마음에 돌이 하나 더 얹혔다.
한무화는 잠시 침묵했지만 곧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래, 그런 거지 뭐. ……사형은 왜 사형답지 않게 이 정도에 당황하고 있어요. 어울리지 않게.”
한호영이 혀를 차자 그 옆에서 지승혜도 희한하다는 얼굴로 서정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게, 왜 오빠답지 않게 그래? 평소라면 혀로 칼을 날렸을 사람이. 어머, 얼굴까지 빨개.”
너무 의외라서 당황스럽다, 오빠, 하고 재미있다는 듯이 말하는 지승혜의 앞에서 서정운은 죽을 맛이었다. 어디를 파면 쥐구멍이 나올까, 그 생각밖에 안 든다. 그냥 모조리 다 돌려보내고 싶었다.
“난 말야, 나는 절대로 오빠 같은 사람을 내 남자로 두지는 않겠지만, 가끔 보면 오빠가 자기 남자로 좋은 사람이 절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끌린다는 여자들 마음이 이해가 간다니까. 아무 이유도 없는데 사람이 보면 가끔 굉장히 사랑스럽다? 도화살이란 게 있긴 한가 봐.”
“남자도 도화살이란 게 있냐?”
“그럼, 있지. 내가 보기에 정운 오빠는 사주 볼 필요도 없이 백 프로야, 백 프로. 동성끼리는 그런 거 잘 안 느껴지나?”
지승혜와 나란히 도란거리던 한호영은 콧잔등에 주름을 지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이 양반한테 만날 욕먹고 깨지는 게 일인데 그런 게 느껴지겠냐.”
“그래? ……그런가요?”
의아하게 묻는 뒷말은 한무화에게 던지는 말이다. 그녀로서는 낯선 사람이 겉돌지 않게 일부러 말 붙여 주는 배려이겠지만, 서정운은 마음에 돌이 두 덩이쯤 더 얹힌다.
한무화는 고개를 살짝 돌린 채 진땀만 뻘뻘 흘리고 있는 서정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말마따나 복숭아꽃 색깔로 달아오른 목덜미며 귓불 따위를 보다가 고개를 기울인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기분 탓인지, 평소랑 똑같은 저 목소리까지 왠지 한층 더 무뚝뚝하게 들리는 것 같다.
왜 나는 집에 비상용 쥐구멍 하나쯤 갖추어 두지 않았을까 후회해 마지않는 서정운을, 지승혜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서 가느스름하게 바라보았다. 왼손 약지의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짐짓 한숨을 내쉰다.
“내가 정숙하니 망정이지, 아니면 어쩔 뻔했어.”
“……됐고, 너 빨리 가. 일 얘기 하러 왔댔잖아. 얼른 해. 그리고 어서 가.”
서정운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려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낯을 수습하며 중얼거렸다. 빨리 쫓아 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 목소리가 어지간히 퉁명했는지, 지승혜는 살짝 서정운의 눈치를 보며 “내가 뭐 일 때문에만 왔나, 오랜만에 오빠 얼굴도 보려고 온 거지.” 하고 토달거리더니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일단 오빠 일 말인데, 슬슬 활동 시작해도 될 것 같아. 그 여자애 지난달에 해외로 떴거든. 상대 남자가 다 막아 주기로 했다나 봐. 오빠랑 관련된 기사도 다 지워 주기로 했지만 인터넷 쪽은 솔직히 아예 깨끗이 없앨 수는 없을 테고, 어쨌든 너무 눈에 띄지만 않으면 다시 일 재개해도 될 것 같아.”
“……그 여자애는 괜찮고?”
“걔? 걔야 그 남자한테 한두 푼 받은 게 아닌데 뭐. 그리고 자기가 저지른 일인데 괜찮고 자시고가 뭐 있어. 어휴, 오빠는 그렇게 날름 당해 놓고는 걔 걱정할 생각이 드니?”
오빠도 어지간하다, 진짜, 하고 혀를 차는 지승혜였지만, 서정운은 그녀가 괜찮다는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걔라도 괜찮아야지, 안 그러면 나 입 다물고 욕먹은 것만 억울하잖아.”
“어휴, 맘도 좋으세요. 하긴 뭐 하루 이틀이어야지. ……자, 그래서 이건 이은수 씨가 건네주라는 거. 뮤지컬 준비하는데 오빠랑 같이 일하고 싶어 하더라구. 오빠한테 의뢰하려 한다니까 그 극단 여자애들이 죄다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더라나. 거절하면 이제 오빠 엄청 원망 살걸. 일정이 좀 촉박한지 다음 달부터라고 말씀하시던데, 아마 곧 직접 연락하실 거야.”
거절도 내 맘대로 못 하는 거냐? 하고 중얼거리며 두툼한 서류 봉투를 받아 든 서정운은 그 안에 들어 있는 대본들이며 자료를 대충 확인하고는 봉투째로 옆에 내려놓았다. 그 옆에서 한호영이 문득 생각난 듯 끼어든다.
“다음 달? 다음 달에 우리 종친회 있는데, 올 시간은 나나?”
“너네 집안 종친회를 내가 왜 가.”
“종친회라 해 봐야 본산 직계들 단체 소풍이나 마찬가진데요 뭘, 보나 마나 아버지가 사형도 부르시겠지.”
“안 가.”
“정말 안 와요? 우리 집안 직계 가족 다 가는데……?”
한호영이 가느스름한 눈길을 던지며 이죽거렸다. 한무화를 스쳐 서정운을 바라보는 그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서정운은 씁쓸하게 입을 다문다. ……그래, 반한 내가 죄인이다.
“됐고, 이제 얘기 다 끝났으면 둘 다 가.”
서정운은 본인이 앞장서 툇마루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으며 들짐승 몰아내듯 팔을 휘휘 저었다. 여러모로 얄미운 요놈들을 얼른 치워 버리고 싶었다.
단호한 축객령에 “아직 동창회 가려면 시간 한참 남았는데?”, “좀 쉬다 가면 안 돼요?” 하고 불평불만을 터뜨리는 두 사람이었지만,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얼른 가.”라는 말만 돌려주는 서정운을 보곤 씨알도 안 먹히겠다 싶었는지 순순히 마루에서 내려섰다.
저녁 동창회까진 시간이 너무 남는데, 영화라도 볼까, 뭐 보지, 조잘거리는 둘의 등까지 손수 떠밀어 버리는 서정운이었다.
“그럼 나중에 봐, 오빠. 무화 씨, 다음에 뵐게요.”
한무화에게까지 잊지 않고 화사하게 인사하는 지승혜에게, 툇마루에서 내려와 계단 위에 서 있던 한무화는 말없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어쩜, 무뚝뚝한 것도 멋지다. 아까워라.”
“네 손가락의 반지나 빼고 말해라.”
지승혜의 등짝을 철썩 두드린 서정운은 그들을 얼른 대문간으로 밀어 버렸고, 몹시 못마땅하고 미심쩍은 얼굴로 서정운과 한무화를 쳐다본 한호영까지 그녀를 따라 대문 밖으로 나서는 걸 확인한 뒤에야 서정운은 긴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귀들을 몰아낸 기분이다. 삽시에 주위가 고요해진 것 같았다.
이제 이 집에는 한무화와 서정운 둘만 남았고 드디어 조용한 평화가 돌아왔지만.
“…….”
아니, 어쩌면 이게 더 거북한지도 모르겠어…….
서정운은 그 자리에 뿌리박힌 것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꾸역꾸역 돌렸다. 한무화 혼자만 남아 있는 툇마루로 돌아가는 게 왜 이리 마음 무거운지 모르겠다.
왜 무화는 생각보다 이렇게 일찍 와서.
왜 승혜 저건 쓸데없는 얘기를 해서.
왜 나는 속으로 해야 할 말을 무심코 입 밖으로 중얼거려서.
천근만근 같은 발을 질질 끌어 뒤꼍으로 돌아간 서정운은 계단 위 툇마루에 홀로 반듯하게 앉아 있는 한무화를 눈동자만 들어 올려다보았다.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한 폭의 평화로운 그림 같다. 내 집, 내 안뜰에 앉아 있는 그를 보며 원래라면 더없이 뿌듯해했을 텐데.
계단 밑에서 한결 더 걸음이 무거워져 어물거리고 있는 서정운을 한무화가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더 머뭇거릴 수도 없어 느릿느릿 계단을 올라간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사범님들이랑 말씀 많이 나누다 올 줄 알았는데.”
“예. 굳이 제가 있어야 할 자리는 아닌 것 같아서 식사만 마치고 곧 나왔습니다.”
서정운이 약간 떨어져 앉으며 말을 붙이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한무화는 잠시 사이를 두고 물었다.
“제가 일찍 와서 곤란하셨습니까?”
“어? 아니, 별로. 곤란할 게 뭐 있어. 하하…….”
얘가 웬일로 이런 말을 다 하나, 최대한 태연하게 웃으며 말하는 서정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무화는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만다.
“친하신 분인가 봅니다.”
“승혜? 응, 워낙 어릴 때부터 알아서, 여동생 같은 애야. 호영이 소꿉친구라서 호영이랑 더 친하지. 신랑도 다 아는 사이고. ……결혼했어. 반지 봤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던 서정운은 불현듯 머리를 스친 일말의 염려에 혹시라도 관심 가지지 말라고 뒷말을 굳이 덧붙인다. 한무화는 대수롭잖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예. ……다시 일을 시작하시게 되면 여름의 하계 선수권 대회는 어떻게 하시는 겁니까?”
서정운은 눈을 껌벅이며 한무화를 쳐다보았다. 한무화는 왜 서정운이 저렇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쳐다보는지, 그걸 모르겠다는 듯 마주 본다.
“하계 선수권 대회라니, 나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인데. 난 선수가 아니잖아.”
“선수가 아니라도 지도사범 역시 바빠지지 않습니까?”
“난 지도사범도 아닌데.”
대화가 끊기며 정적이 흘렀다. 뚫어져라 마주 보던 그들의 사이에 어떤 오해가 있었는지 서정운은 이내 알아차린다.
“난 직위가 사범일 뿐이지 더 이상 사범 일을 보지 않아. 정확히는 정무도 자체를 그만둔 거나 마찬가지인 몸이야. 이번 수련에 참가한 것도 일시적인 일이고. 앞으로는, ……글쎄.”
서정운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파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예전처럼 본업 같은 형태로 정무도를 할 생각은 없었다. 이미 몇 년이나 손을 놓았고, 이제 달리 자리 잡은 일이 있다. 이제 와서 과거로 돌아갈 마음은 없다.
다만 아주 약간은, 그래도 아주 조금쯤은, 가끔 본산에 들러 그 자신의 수련을 하는 건 괜찮지 않을까, 그런 마음이나 들 뿐이다. 몇 년을 돌아보지 않으면서도 기어이 잘라 내지 못했던 미련을 이제야 가만히 돌이켜 쓰다듬어 보면서.
한동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서정운은 조용히 자신을 응시하는 한무화를 돌아보았다. 명확한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대답 대신 가만히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들어가서 자료 보자. 볼 만한 것들만 따로 추려 뒀어.”
“…….”
한무화는 그 이상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서정운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왔다.
역시 다시 봐도 집중력이 엄청난 남자다.
심지어는 눈까지 좋아 사소한 부분도 놓치지 않았다. 특히나, 사소한 것 같지만 실상 매우 중요한 포인트라 할 만한 부분들은.
“1분 40초쯤, 저 정련 선수가 체련 선수에게 동체로 달려들기 직전에 중심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것 같았는데요.”
영상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중얼거리는 한무화의 말을 듣고서 서정운은 저도 모르게 잠깐 그의 옆얼굴로 눈길을 주었다.
“맞아. 그래서 저 자세로 후선주축이 가능했던 거야. 어깨 반동 때문이 아니라.”
보통은 그냥 흘려 버릴, 혹은 눈치채지도 못할 아주 미세한 신호를 알아차린다. 이건 단순히 눈이 좋고 집중력이 좋다는 걸 넘어서, 뭐가 중요한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는 뜻이다.
……이 남자가 서정운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될 날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그것은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것 같았다.
서정운이 기대감인지 서운함인지 모를 숨을 가만히 내쉴 때였다. 곧 다음 영상이 시작되었고, 유난히 떠들썩한 배경 소리들 속에서 대련단에 선 두 선수가 비쳤다. 이런, 하고 서정운은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서정운이 아직 현역에 있었던 무렵, 그의 전성기라 할 수 있었던 때의 시합 영상이다.
지금보다 몇 년은 더 젊은 서정운이 영상 속에서 대련 개시 신호와 동시에 서슴없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지금의 서정운이 이미 알고 있는 그 결과는 무승부로 끝나지만, 좋은 대련이었다.
한무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분 30초의 대련이 끝날 때까지 말 한마디 없이 시선 한번 떼지 않고 영상을 지켜보던 그는, 대련이 끝난 뒤에야 불쑥 중얼거렸다.
“저 때의 서정운 사범님과 대련해 보고 싶습니다.”
서정운은 곁눈으로 한무화를 보고는 웃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지, 그건. ……하지만 그럴 수 있다 해도, 지금의 너라면 이길 수 있을 거야.”
“이기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고개를 저은 한무화는 말을 고르는 듯 얼마간 침묵한 끝에 말을 이었다.
“저는 분명 보통 이상으로 강하고, 앞으로 더욱 강해질 겁니다. 그리고 서정운 사범님은 자연스럽지요. 정무도가 몸에 잘 맞는 편한 옷인 것처럼 몸에 배어 있습니다. 서정운 사범님은 저만큼 강해질 수 없을 거고, 저는 서정운 사범님만큼 몸에 밸 수 없을 겁니다.”
한무화는 조금 전의 영상을 다시 되돌리며 중얼거린다.
“저는 서정운 사범님과 대련하고 싶습니다. 제가 이기더라도 반드시 배울 게 있습니다.”
그 혼잣말 같은 말을 들으며 서정운도 영상을 본다.
그 안에서 움직이는 젊은 날의 자신은 지금의 자신이 보아도 흠잡을 데가 없다. 무승부? 패배?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잘못된 대응을 하지 않았고, 허술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이기고 지는 것은 상대의 문제일 뿐 서정운의 문제가 아니었다.
서정운은 한숨처럼 웃었다.
그래, 저 때의 내가 너와 대련을 했더라면 나도 즐거웠을 것이다.
한무화는 그 영상을 두어 번 더 돌려 본 뒤 서정운의 다른 영상들을 찾아서 재생시켰다. 그리 자주 대련에 나섰던 건 아니라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서정운의 대련 영상은 모두 바닥났다.
“오랜만에 다시 보니 새롭네. ……확실히 내가 잘하긴 했어.”
이러니 아무리 욕할 거리가 태산 같아도 실력으로만큼은 욕을 못 하지, 서정운이 만족스레 고개를 주억거릴 때였다.
같은 영상을 세 번째로 돌려보던 한무화가 문득 말했다.
“사범님 대련에는 유난히 여자 관객들의 환호가 많군요.”
“어……?”
“인기가 많으시긴 했었나 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때도.”
“……, 어, 뭐 그럭저럭.”
이 화제가 나오자, 별반 죄지은 것도 없는데 갑자기 떳떳했던 마음이 사그라지는 서정운이었다. 한무화는 무심히 영상으로 시선을 주며 말을 잇는다.
“체련의 여자 사범과 수련생들 사이에서도 서정운 사범님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상당수가 가십이나 험담이긴 합니다만, 서 사범님 이야기에는 다들 관심이 비상해지더군요.”
“어……, 그래? 몰랐네.”
“남자 사범들도 비슷합니다. 개중에는 부러워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서정운은 한무화를 보았다. 평연한 그 말투가 어떤 어감인지 알 수 없었다.
“넌 그런 데에는 신경 안 쓰잖아. 주위에 여자가 많든 말든.”
말없이 영상을 보고 있던 한무화는 그 대련이 끝나자 영상을 다시 재생시키며 말한다.
“서정운 사범님이 다소 지나치게 여지를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은 듭니다.”
“여지?”
“빈틈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본인보다 약한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는 것은 좋은 일이겠지만 서정운 사범님은 좀 지나친 감이 있어요.”
서정운은 의외로운 기분으로 그를 보았다. 어쩐 일로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그게 이상하고 한편으로는 당혹스럽기도 해서 찌푸리듯 웃고 말았다.
“왜. 언제는 상냥하다며.”
“…….”
한무화의 시선이 영상에서 떨어져 서정운에게로 옮겨 왔다. 무심하게 서정운을 바라보는 시선조차 왠지 모르게 무뚝뚝하다.
“정말로 아끼는 사람에게만 상냥해도 될 것 같습니다. 훨씬 더 범위를 좁혀서요.”
서정운은 껌벅껌벅 한무화를 본다. 조금 전부터 그답지 않은 화제다. 다른 사람의 일에는 관심이 없는 남자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한편으로 그 말은 비난처럼 들리기도 해, 불시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다.
“여지 준 적 없어.”
물끄러미 한무화를 보던 서정운은 한숨처럼 속삭였다.
일부러 누군가에게 상냥하게 대한 적도 없다. 서정운은 상냥한 것과 상냥하지 않은 것의 기준도 몰랐다. 그는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와 알게 된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면, 자신이 감내할 수 있는 선에서, 그들이 덜 힘들기를 바랐을 뿐이다.
“제대로 애인이라도 생기면 여난이 반으로 줄 거라고, 호영이가 차라리 아무 여자든 사귀라고도 했지만,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을 그 이유만으로 사귀는 것도 좀 아닌 것 같고.”
한무화는 서정운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언뜻 입속으로 혀를 차는 것 같았지만 더 이상은 말하지 않는다.
왠지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서정운은 영상 속의 자신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쉰다. ……생각해 보면 저 무렵에도 어느 여자 수련생에게--손조차 잡아 본 적 없이 그저 우연히 종종 마주치기에 그때마다 잠깐씩 세상 이야기나 나눴을 뿐인데-- 사귀지도 않을 거면서 왜 오해하게 만들었냐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었지.
그런 오해를 사지 않을 방법이 있다면 굿이든 뭐든 나도 이미 했을 거라고.
서정운이 속으로 우울하게 중얼거릴 때였다.
“저 기술이 몸에 잘 붙지 않습니다.”
한무화가 영상을 앞으로 돌리며 말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 영상을 본 서정운은 잠시 지켜보다 그에게 의아한 시선을 주었다.
“대퇴 후려 넘기는 거……? 저건 그리 어렵지 않은 건데.”
“타이밍을 맞추는 게 쉽지 않습니다.”
“아아, 약간 그렇긴 하지. 하지만 금방 할 수 있을 거야. 지금 해 볼래?”
서정운이 묻자 한무화는 고개를 끄덕이곤 영상을 끄고 일어섰다. 이미 몇 차례 서정운의 집에 들렀던 적이 있는 그는 서정운보다 앞서 수련실로 건너갔다.
몇 걸음 뒤에서 그를 따라가는 서정운은 셔츠에 청바지인 그의 차림새를 보며 도복만큼은 아니겠지만 연습하는 데에는 불편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얇은 여름 니트에 면바지인 자신도 마찬가지.
그러나 연습에 앞서 습관적으로 차림새를 체크하긴 했지만, 지금은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한무화가 말한 부분은 그가 이야기했다는 게 의외일 정도로 쉽게 몸에 익는 기술이었다. 한무화라면 한 시간 정도라면 충분히 몸에 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