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시간도 아니었다.
딱 그 반. 수련실에 들어선 지 30분이 지나고 있는 시계를 본 서정운은 이미 완벽하게 타이밍을 잡아 기술을 구사하고 있는 한무화를 바라보았다.
“금방 하네.”
서정운이 중얼거리자 정확한 몸놀림으로 다리를 움직인 한무화가 반듯이 섰다. 그리 힘들지도 않았던 듯 아주 살짝 땀이 배어 나온 이마를 손등으로 가볍게 훔친다.
“예. 생각보다는 쉽게 익혀지는 것 같습니다. 요즘 들어 집중이 잘되지 않아서 더 걸릴 줄 알았습니다만.”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 네가 집중 안 된다고 하면 다른 선수들이 너 재수 없다고 욕할걸.”
서정운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한무화는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정말입니다. 요 근래 집중이 잘되지 않습니다.”
“별로 그런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왜, 무슨 일 있어?”
서정운이 묻자 한무화는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러나 얼마간 그대로 있어도 결론은 나지 않는 듯 고개를 젓고 만다.
“잘 모르겠습니다.”
무심한 표정이나마 낮은 한숨이 섞여 나오는 걸 보니 정말로 고심하는 기색이긴 하다. 잡생각이 많을 성격도 아닌데, 하고 서정운은 의아하게 그를 본다.
“집중이 어떻게 안 되는데.”
“낮 동안 내도록 신경이 곤두서 있는 느낌입니다.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 밤에 너 연습할 때 보면 괜찮아 보이던데.”
“예, 밤에는 괜찮습니다. 집중도 평소처럼 되는 편입니다.”
서정운은 고개를 기울였다. 낮에는 정련과 체련의 사범들과 함께 활동하는 데다 서정운이 지켜봐야 하는 선수도 있는 탓에 한무화를 볼 틈이 거의 없다. 하지만 밤에 본채 도장에서 그를 볼 때에는 여느 때와 전혀 다르지 않아서, 그런 줄 몰랐다.
“여러 사람이랑 단체 연습을 하는 게 안 맞나? ……하지만 요전에 대수련장에서 너 지도했을 때만 해도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는데.”
서정운은 턱을 문지르며 고민에 잠겼지만, 여태 계속 고심해 왔을 한무화도 모르는 걸 서정운이 알 리 없었다. 왜 그런지 여러모로 궁리해 봤을, 그러나 어째서인지 좀체 모르는 듯한 한무화의 미간에 희미하게 주름이 져 있었다.
저 무심하고 앞만 바라보는 남자가 저렇게 낯을 찌푸리다니, 그 나름대로 고민이 되긴 하나 보다.
“…….”
한무화를 바라보던 서정운은 문득 손을 뻗었다. 그 손이 톡, 한무화의 머리에 닿고서야 한무화가 서정운을 본다.
서정운은 그의 짧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넘겼다. 사박사박, 메마르고 보드라운 감촉이다.
“앞만 보고 가다 보면 어느새 벗어나 있을 거야. 괜찮아. 진창에 그렇게 오래 있다가 이제야 묽어졌는데, 이쯤은 견딜 만하잖아. 안 그래?”
서정운이 조용히 말하며 웃었다. 위로로 하는 말이 아니다. 이 남자라면 분명히 그럴 거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었다. 서정운도, 그 자신도.
한무화는 서정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시선을 떨구며 고개를 끄덕인다.
“예.”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도 느슨해진다. 순순히 힘을 빼고 편안하게 늘어지는 강아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커다랗고 순한 강아지. 어쩜 이렇게 사랑스럽지, 서정운은 벙글벙글 웃으며 한무화를 쓰다듬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서정운의 손길이 조금씩 잦아들 무렵, 언제까지라도 그대로 얌전히 있을 것 같던 한무화가 시선을 들더니 자세를 반듯이 했다. 그 결에 높이가 올라간 머리에서 서정운의 손이 절로 떨어진다.
“지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조금 더 연습하면 몸에 익게 잘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응.”
오늘 그건 따로 지도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지만, 하고 서정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이제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사적으로 목덜미부터 뜨끈해진다.
어, 잠깐, 그러고 보니 이렇게 되면 이다음엔 으레…….
서정운은 아직껏 해가 지지 않은 밝은 창밖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늘 캄캄한 밤에만 익숙해 있다 보니 이 밝은 대낮이 왜 이리 낯선지 모르겠다.
“사범님이 원하시는 건 오늘도 같습니까?”
이제는 익숙해질 법한 물음인데도 유난히 선명하게 귀에 들어오는 건 역시 날이 워낙 밝아서다. 대낮부터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서정운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한무화는 전혀 아무렇지 않게 평소대로 창가로 가 창틀에 걸터앉았다.
“잠깐, 거긴 아냐, 거긴 바깥에서 보인다구.”
서정운이 당황해 그의 소매를 끌어당기자 한무화는 별 상관 없지 않느냐는 듯이 쳐다봤지만, 순순히 서정운이 이끄는 대로 끌려와 수련실 한구석의 방석 위에 앉았다.
서정운은 잠시 망설였다. 창틀에 앉혀 눈높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던 도장에 비해 방석에 앉힌 지금은 서정운도 무릎 꿇고 앉을 수밖에 없다. 한무화가 정좌를 하고 앉으니 서정운이 무릎을 디딜 데가 마땅치 않았지만, 다소 불편은 해도 잠시 버티는 것쯤이야 괜찮지, 하고 생각하곤 그의 다리 앞에 무릎을 댄다.
“…….”
서정운을 응시하고 있는 한무화의 눈 위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다른 손으로 그의 어깨를 짚고 몸을 기울인다. 서정운의 무게가 묵직하게 실렸을 텐데도 너른 어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입술이 겹쳐지고--평소와 같이 벌어지는 그의 입술 사이로 서정운이 살금살금 혀를 밀어 넣는다. 곧이어 한무화가 입안에 들어온 사탕이라도 빨아들이는 것처럼 서정운의 혀를 빨아 당겼다. 혀와 이로 짓누르며 당기는 그 느낌에 서정운은 숨을 멈춘다.
거의 매일을 하는데도 왜 심장은 익숙해질 줄을 모를까, 서정운은 고막을 가득 채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어렴풋한 머리로 생각한다. 또 하나, 왜 나날이 얘는 비약적으로 발전해 가는 것 같을까.
이미 이것은 작은 섹스를 하는 듯한 기분이다. 몸속까지 전류가 저릿저릿하게 흐르는 것 같은 감각에,
“--!”
저도 모르게 한무화의 어깨를 짚은 손에 움찔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자마자 서정운은 입을 뗐다. ‘나 지금 느꼈다’라고 고스란히 말하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삽시에 얼굴이 더워진다.
한무화의 눈 위에서 손을 치우자, 오늘도 그는 감지 않은 눈으로 서정운을 본다. 이때의 시선은 마치 위협이라도 받는 듯한 기분이 들 만큼 맹렬해, 서정운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눈길을 돌리며 몸을 뒤로 물렸다.
“바닥에 그냥 앉히니까 내가 좀 불편하다. 무릎이 아프네…….”
아무 말이나 생각나는 대로 중얼거리며 서정운이 무릎걸음으로 한 걸음 물러섰을 때, 그런 서정운을 뚫어질 듯 보고 있던 한무화가 별안간 손을 뻗었다.
“여기까지는 가르쳐 주신 몫으로 하고, 오늘은 소장하신 자료를 보여 주신 몫까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어……? 서정운이 무어라 할 틈도 없었다.
서정운의 허리를 붙잡아 끌어당긴 한무화는 거의 품에 안다시피 할 정도로 서정운을 바싹 당겨 그의 골반 앞을 밀어 누르듯이 앉혔다. 부지불식간에 한무화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아 버린 서정운이 순간적으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어, 하고 눈을 껌벅거리는데, 한무화는 곧바로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 입술이 겹쳐진 뒤에야 서정운은 그가 오늘 두 번째로 입맞춤을 하고 있다는 걸 인식했다.
“…--.”
무어라 하려고 입을 열기 무섭게 파고드는 한무화의 혀가, 조금 전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맹렬하게 밀려들었다. 그 가운데 서정운은 한무화의 눈이 바로 지척에서--제대로 보일 리가 없는 거리임에도 명확하게 서정운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고, 심장이 떨어지는 듯해 황급히 그 눈을 가렸다. 그럼에도 그 눈길은 마치 손바닥 따위는 꿰뚫고서 이쪽을 낱낱이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눈을 하고 있었던가.
살 오른 먹잇감을 앞둔 굶주린 짐승 같은.
--잡아먹힐 것 같다.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친 찰나, 움찔 움츠러드는 서정운의 몸짓을 고스란히 느끼기라도 한 듯 그의 골반에서 허벅지로 이어지는 관절 위를 붙잡고 있던 한무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달아나려는 먹잇감을 붙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서정운의 혀를 자신의 입속으로 빨아 당겨 짓씹는 감각에 이내 머릿속이 흐려졌다. 아니, 흐리다기보다는 덥다. 머릿속이 더웠다. 열기가 돌아다니는 몸속처럼. 그래서 서정운은 어느 결에 자신의 몸이 기울어 그의 허벅지 위에 샅이 바싹 붙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천천히, 물이 흐르는 것처럼.
그 흐름은 느리다가, 어느 순간 빨라졌다가, 다시 느려졌다가, 그런 완급을 거듭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빨라져 가고 있었다.
곤란한데, 이대로는, 그런 생각이 얼핏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조차 급해지는 흐름 속에 이내 지워져 버린다. 차차, 차차 급격해지는 흐름. 들떠 오르는 열기에 머릿속까지 몽롱해지는 그 격류 속에서,
“--.”
서정운은 어느 순간 퍼뜩 움직임을 멈추었다.
움직임을 멈춘 것은, 어느 결엔가 그의 허벅지에 비벼지던 자신의 샅에 더운 기운이 몰려 부풀어 올랐다는 걸 깨달은 탓이다.
그것은 옷자락을 사이에 두고 바싹 닿아 있는 한무화가 모를 리가 없어, 서정운은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은 채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내려가는 손 아래로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한무화는 한 번도 눈을 감았던 적이라곤 없는 것처럼 뚫어져라 서정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새카만 눈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뱀 앞의 개구리가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어떡하지. 망했다. 난 몰라. 미쳤나 봐. 어떡하면 좋지.
낭패한 기분만 머릿속에 꽉 차면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일, 일단은 일어나야겠, 하고 서정운이 울 것 같은 심경으로 막 무릎걸음으로 일어나려 할 때였다.
“섹스하고 싶으십니까?”
한무화의 입에서 나직한 말이 새어 나왔다.
처음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 수 없어 서정운은 눈을 껌벅이며 한무화를 보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무표정한--그럼에도 눈매가 유난히 선뜩하게 느껴지는-- 그를 쳐다보는 서정운에게 한무화가 덧붙여 말한다.
“섹스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면서요.”
“어……?”
멍하니 중얼거린 서정운은 그제야 아까 지승혜가 재깔거렸던 말을 떠올렸다. 그 말을 옆에서 한무화가 듣고 있었다는 것도.
“어……, 아니, 그게, 어쩌다 그냥 나온 말인데, 가끔 그럴 때가 있잖아, 별다른 이유는 없는데 그냥 문득 하고 싶을 때. 그래서 나왔던 말이지,”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굉장히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엉망진창인 머리로 고심하던 서정운은, 변명해 둬야 할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 성싶은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내가 요즘 섹스를 하고 싶긴 한데, 너랑 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어.”
스스로도 너무 변명하는 티가 난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말이라도 저렇게 해 둬야 빠져나갈 구석이라도 생길 것 같았다. 점점 줄어드는 목소리로나마 “정말이야.”라고 못까지 박아 본다.
순간, 아직껏 서정운의 골반을 붙잡고 있던 그의 손아귀에 어렴풋이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쪽으로 신경을 돌리기 전에 먼저, 서정운을 묵묵히 쳐다보고 있던 한무화가 입을 뗀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특정하게 바라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누구든, 그냥 뭐.”
이 화제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던 서정운은 적당히 얼버무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누구든, 하고 되풀이해 중얼거리는 한무화의 낮아진 목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보다는 아직 한무화의 허벅지 위에 닿아 있는 사타구니가 죽도록 신경 쓰였던 것이다. 그래서 골반을 붙잡고 있던 한무화의 손을 떼어 내려고 그의 손을 붙잡았을 때,
“수련실을 쓰게 해 주신 몫이 남은 것 같습니다. 섹스를 하고 싶다고 하셨다고요?”
되레 한무화가 서정운의 손을 걷어 냈다. 그러고는 서정운의 몸을 더욱 바싹 끌어당겼다. 한무화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은 채 거의 끌어안다시피 맞붙은 몸의 아래로, 아랫배가, 샅이 맞닿는다. 그리고 서정운은 단단히 부풀어 있는 자신의 샅 위로, 옷감 너머에서 한무화 역시 단단해져 있는 걸 깨닫는다.
어, 일순 하얗게 비어 버린 머리로 뭔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섹스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정도까지는 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 저도 지금이 그런 때인 것 같거든요. 별 이유 없는데 하고 싶어졌습니다.”
평소보다 약간 나직한, 아주 약간 낮아졌을 뿐인데도 무섭도록 위험스럽게 들리는 음색이 서정운의 귓가에 닿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귀 아래의 턱을 깨무는 단단한 이가, 목덜미에 훅 끼치는 더운 숨결이 다가왔다.
“--.”
귓불도, 뺨도, 입술도, 모두 잡아 삼켜 버릴 것처럼 탐욕스럽게 베무는 감각 속에서, 서정운은 일순 이 남자가 자신이 모르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알고 있던 조용하고 담담하고 무심하던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여기에는 무서운 기세로 그를 잡아먹으려 드는 거대한 욕구만 남은 것 같았다.
“무, 화, 잠까,”
그러나 서정운이 미처 말을 맺기도 전에 한무화는 서정운에게 입 맞추어 그 말을 삼켜 버렸다. 서정운은 갈 곳 없이 떠도는 손을 그의 어깨에 댄다. 밀어내야 한다고 아주 짧은 순간 생각했지만, 그 손은 이내 그의 어깨를 움켜쥐고 만다. 아까부터 커다랗게 울리는 심장이 몸속에서 요동친 탓이다.
거침없는 기세로 탁류가 흘렀다. 온몸의 감각들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 그 노도 같은 기세를 막을 수 없어 서정운은 이내 휩쓸리고 만다.
어느 결엔가 서정운의 골반을 단단히 움켜쥔 한무화가 서정운을 더 바싹, 추어올리듯이 끌어당기고 있었다. 탁, 탁, 탁, 서로 부딪친 샅은 금세 부풀어 올랐다. 단단한 살덩이가 서로 맞부딪칠 때마다 더욱 단단하게 부풀며 옷 속에서 흔들린다.
점점 빨라지는 움직임 속에서 서정운의 샅이 한껏 부풀었을 때, 마치 그걸 알기라도 한 것처럼, 한무화가 자신의 샅 위에 서정운의 샅을 누르고서 허리를 추어올리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찌르듯 쳐올릴 때마다 바싹 맞붙은 샅이 비벼져, 결국,
“--.”
서정운이 억눌린 울음 같은 소리를 토해 낸다. 그 순간 한무화의 몸이 움칫하며 움츠러드는 듯했다. 그가 서정운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와 동시에--서정운은 바지 속이 축축하게 젖어 드는 걸 느꼈다.
오늘은 한 번도 한 적 없는 경험을 이것저것 하는구나…….
서정운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불현듯 생각했다.
그것은 정말로 ‘불현듯’이었다. 왜냐면, 아까부터 계속 눈은 뜨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있었으니까. 줄곧 인형처럼 넋 놓고 누워 천장을 보고 있긴 했는데, 보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혼이 빠져나간 양 있었다.
눈 뜬 채로 기절을 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신기한 경험이다.
그런 생각을 불쑥 떠올린 뒤로도 한동안 멍하니 누워 있던 서정운은 어느 순간 눈동자만 도르륵 굴려 벽시계를 보았다. 시각은 다섯 시를 지나 여섯 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만있자, 아까 수련실에 들어온 게…… 하고 시간을 꼽아 본 서정운은 자신이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넋 놓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뒤로 두 번, 아니 세 번을 더 했나. 당연히 한 번만 하고 그칠 줄 알았는데, 그 직후 곧바로 그가 서정운의 바지 속으로 손을 밀어 넣더니 혼비백산하는 서정운에게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그대로 직접 서정운의 성기를 훑어 올려 사정시켰다. 몸과 마음이 다 충격적이라 서정운은 그즈음부터 슬슬 넋이 나가기 시작했는데, 축 늘어졌던 서정운이--당연히 이번에야말로 끝이라 생각하고-- 앞으로 민망해서 얘 얼굴을 어떻게 본다지, 하고 멍한 머리로 생각하고 있는데 한무화가 그의 성기를 바지 밖으로 끄집어내는 기척이 났다. 어……? 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둘의 성기를 한 손에 겹쳐 쥔 한무화가 둘을 한꺼번에 훑어 올리기 시작했고, 이미 연속으로 사정해 시들었던 서정운은 거의 반강제적으로 발기를 당해야만 했다. 그렇게 세 번째의 절정을 맞이한 이후로 서정운은 눈 뜬 채 의식이 끊겼다.
그만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행위 내도록 서정운의 입이 자유로웠던 순간은 손꼽을 정도로밖에 없었던 탓이다. 거침없이 서정운의 입속 모든 곳을 탐하는 한무화의 입술과 혀는 서정운의 의식이 날아갈 때까지 떨어지질 않았다.
……그 뒤로는 기억이 혼미하다. 뭘 더 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어렴풋한 기억에 한무화가 서정운을 반듯이 눕혀 주고 더러워진 몸도 닦아 주고 담요도 덮어 준 것 같긴 한데, 그것도 잘 모르겠다. 여하튼 서정운은 수련실 한가운데 담요를 덮은 채 반듯하게 누워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그리고 얘는 어딜 간 거지…….
씻으러 간 건가 싶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시간이 지나치게 많이 흘렀다. 게다가 집 안에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밖으로 나간 것 같다. 그러고는 한참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설마 돌아갔나. 그래, 돌아갔을 수도 있지. 원래 자료 보러 오기로 한 거니까, 자료도 다 봤겠다 그대로 돌아갔다 해도 이상할 건 없다. ……아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대로 돌아가 버린 거면 이건 꼭, 속된 말로 하자면 따먹고 튄……. ……아니지, 그렇게 따지자면 내가 먹은 쪽이지.
호시탐탐 욕심을 냈던 것도 자신이고, 섹스를 하고 싶다고 했던 것도 자신이다. 즉 욕구를 채운 걸로 말하자면 그쪽보다는 외려 이쪽의 욕구를 채웠다는 게 타당한데…….
“…….”
서정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너무 지나치게 욕구를 발산한 아랫도리가 좀 많이 나른하긴 했지만 당연하게도 몸은 멀쩡했다. 서정운은 아무도 없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수련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조용하고 고적했다. 아직 해가 저물지 않은 바깥 담장은 저녁 햇살이 비쳐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신성한 수련실에서 대낮부터 무슨 짓을 한 거야……, 민망하고 겸연쩍은 감정이 뒤늦게야 회오리처럼 밀어닥쳤다.
아니 하지만 이게 뭐지. 그 남자가 좋지만 차마 대놓고 욕심을 내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이런 짓 저런 짓 꿈꿨던 자신의 희망에 너무 딱 맞아떨어지는 이 꿈결 같은 일은,
“……, 정말로 꿈꾼 건가.”
백일몽에서 깨어난 것 같은 기분으로 서정운이 수련실에 우두커니 주저앉아 중얼거렸을 때.
현관을 열고 집 안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그 묵직한 걸음은 복도를 지나 곧장 안쪽으로 들어와 수련실에 다다랐다.
서정운이 고개를 들자 미닫이문이 열리며 그 사이로 한무화가 들어섰다.
“…….”
“일어나셨습니까?”
아니, 잔 적도 없는데……, 라는 말은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눈앞에 이 남자가 있는 게 왠지 꿈속에서 사람이 걸어 나온 것처럼 미묘하게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한무화가 서정운의 옆으로 다가오는 순간 꿈은 현실이 되었고, 멍해 있던 서정운의 정신도 깨어났다.
“……!!”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이 남자와 여차저차 했었다. 되새겨 떠올리기에도 부끄러운 일들을 했던 것 같은데.
서정운은 삽시에 확 뜨거워지는 얼굴을 얼른 가라앉히려고 애쓰며 바로 옆에 앉는 한무화를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얘는 왜 이렇게 멀쩡해 보일까. 그야 원래 무표정한 얼굴이긴 하지만, 그보다 얘도 최소 세 번은 사정을 했을 텐데--게다가 서정운을 위에 앉히고 흔들어 대느라 체력 소모가 만만찮았을 텐데-- 너무 지나치게 멀쩡하다.
“……안 피곤해?”
“……? 아니요.”
서정운이 불쑥 묻자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던 한무화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피곤하냐는 물음이 왜 나오는 건지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다.
얘 생각보다 무서운 애일지도 모르겠어, 서정운이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하는데, 한무화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을 내밀었다.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작은 상자를 얼결에 받아 든 서정운은 의아하게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 셀러브리티 잡지에서 가끔 보는 호화 브랜드의 로고가 박힌 이 상자는 뭐지.
서정운은 흘끗 한무화에게 시선을 주고는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걸 보고는 말을 잃었다. 그런 서정운에게 한무화는 대수롭잖게 말했다.
“쉬시는 동안 가까운 데서 적당히 사 오느라 그리 좋은 물건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용도에 맞게 쓸 수는 있을 겁니다.”
그 말에서 바로잡아 주고 싶은 부분이 몇 군데 있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서정운은 물끄러미 상자를 내려다보다가 눈동자만 들어 한무화를 보았다.
“……용도에 맞게……? 이걸……?”
“예.”
“……. 반지를……?”
상자 안에는 심플한 은색 반지가 하나 들어 있었고, 서정운은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아무리 물건의 의미 같은 건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반지만큼은 무슨 의미인지 모를 리 없다. 그러니까 아무리 주위에 무심한 한무화라도 그냥 우연히 어쩌다가 이 타이밍에 아무 의미 없이 서정운에게 반지를 선물이랍시고 들고 왔을 리는 없었다. ……그래, 심지어 바로 이 타이밍에.
서정운은 말이 막혔다. 목 안이 꽉 막힌 것 같다. 갑자기 얼굴이 더워지며 심장도 쿵, 쿵, 쿵 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바로 직전에 그렇게 뜨거운 접촉을 하고서 곧바로 나가서 반지를 사왔다는 건, 즉 커플ㄹ…….
그러나 생각이 끝까지 가기 전에 문득 반지가 하나라는 걸 깨달은 서정운은 한무화를 올려다보았다.
“네 건?”
“……? 전 필요 없습니다.”
이번에도, 왜 그런 걸 묻는지 그 자체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답한 한무화는 엉? 하고 눈을 껌벅거리는 서정운에게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걸 끼고 다니시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여자를 막아 줄 수 있을 겁니다. 애인이 있다고 여기고 미리 떨어져 나가는 사람도 없지는 않을 테니까요.”
“……, 그러니까 그 용도라는 게…….”
부적이었구나.
홀로 부풀었던 마음이 순식간에 꺼져 버린 서정운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래, 물론 그렇겠지.
“고마워. 그런데 이런 걸 받아도 돼? 너무 과한데.”
이 로고가 박혀 있는 물건이라면 넝마라도 금덩이 값으로 팔릴 텐데, 하고 염려스레 한무화를 본 서정운은, 오늘 세 번째로 또 서정운의 말 자체를 전혀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을 하는 한무화를 보았다.
“……? 받으셔도 됩니다.”
과하다는 말은 왜 나온 건지 아예 이해를 하지 못한 듯 답도 하지 않는 한무화를 보며, 서정운은 잊고 있던 사실을 새삼스럽게 되새겼다. 아, 그래, 그냥 가까운 데서 적당히 사 왔댔지. 맞아, 얘네 일가친척 죄다 죽을 때까지 사치낭비만 해도 돈 떨어질 일 없는 사람들이었어…….
“응, 고마워. 잘 쓸게.”
웬만해서는 빈부 격차를 느낄 일이 그다지 없는 서정운은 오랜만에 상대적 박탈감에 젖어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더 마음에 걸리는 건 따로 있다. 원래는 한무화를 보는 순간부터 바로 떠올랐어야 했는데 반지를 받는 바람에 잠깐 잊고 있었다.
서정운은 차마 한무화와 눈을 마주칠 수 없어 반지만 내려다보다가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아까 네가 자료나 수련실에 대한 보답으로 해 준 거, 말인데.”
“아, 예. 부족하셨습니까?”
망설이다 말을 꺼낸 서정운과는 대조적으로 한무화의 대답은 몹시 가볍게, 서슴없이 돌아왔다. 서정운은 그제야 시선을 들어 한무화를 보았다.
한무화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덤덤한 낯으로 서정운을 보고 있었다. 특별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듯 평소와 똑같은 얼굴이다. 그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그 표정을 차근차근 읽어 보다가, 서정운은 가만히 한숨을 삼킨다.
그렇구나. 다른 의도라곤 없이 말 그대로 보답이었던 거다. 다른 때보다 농도만 좀 많이 짙었다 뿐이지 의도는 평소와 똑같은.
“……아니, 전혀 안 부족했어. 외려 넘친 것 같아서 내가 좀 미안할 정도인데.”
서정운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웃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한편 그렇게까지 마음 무겁지는 않았다. 아주 살짝 우울할 뿐. 짝사랑에도 익숙해졌나 보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서정운 사범님께 지도받고 도움받을 일이 많습니다.”
서정운은 담담하게 말하는 한무화를 보며 “그래.”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소 심경이 복잡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좋다. 서정운이 나쁠 일은 없었다. 외려 오늘은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아무렴, 좋아하는 사람과 육체적인 즐거움을 나누었는데 횡재했다고 생각해야지.
게다가 덤까지 따라왔다. 아무 의미 없이 그냥 던져 준 거라 해도 어쨌든 반지다.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반지를 선물 받는 게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반지는 한 번도 껴 본 적 없는데.”
서정운이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며 중얼거리자 그를 보고 있던 한무화가 뜻밖이라는 듯 물었다.
“그렇습니까?”
“응.”
“마음에 드십니까?”
“응.”
서정운은 손에 낀 반지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한무화를 보았다. 기쁜 빛이 그대로 드러난 얼굴은 눈매부터 입매까지, 정말로 행복한 듯이 휘어져 있었다.
한무화는 난생처음 보는 것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뚫어질 듯 서정운을 바라보았다. 둥그스름한 눈매며 부드럽게 휜 입매, 연하게 웃음 주름이 지는 눈초리까지, 하나하나 바라본 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한무화의 눈매가 희미하게 가늘어졌다. 입가도 느슨하게 풀린다.
아. 웃는다. 얘가 웃는 건 드문데.
서정운은 아마 한무화 본인도 모르는 성싶은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불현듯 이렇게 순한 강아지처럼 웃고 있는 그가 못 견디게 사랑스러워져서 그의 머리를 북북 헝클어뜨리듯이 쓰다듬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의 희미한 웃음기는 지워지지 않고 되레 더 훈훈하게 흐드러지는 것 같아, 서정운은 가슴이 뛰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살짝 애틋해지기도 하는 기분으로, 이 사랑스런 남자를 언제까지고 쓰다듬쓰다듬 어루만지는 것이었다.
*
휴일을 보낸 직후의 월요일은 종일 나른한 공기가 가시지 않는 것 같다.
오후 교육이 시작되기 전까지 잠시 눈이라도 붙여야겠다고 생각하며 서정운은 점심을 적당히 먹고는 일찌감치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렇게 남겨요?”
맞은편에서 자신의 식판을 말끔하게 비워 가던 한호영이 반도 넘게 남은 식판과 서정운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졸려. 입맛도 없고. 한숨이라도 더 자는 게 낫겠어.”
“뭐, 주말에 무리라도 했어요?”
“…….”
정신이 무리했다.
토요일, 한무화가 서정운의 집에 들렀다 간 뒤로 서정운의 머릿속은 내도록 쉬지 않고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혹사당했다.
심지어 어제 일요일에도, 뜬금없이 한무화가 서정운의 집에 찾아와서는 ‘사범님 댁은 조용하고 단출해서 마음이 편합니다.’라며 낮 내내 하는 일 없이 쉬다 갔는데, 바둑이나 두고 각자 책이나 보고 낮잠이나 자고 하는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서정운은 내도록 바로 지척에 있는 한무화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두근거리고 울렁이는 감정에 혹사당해야 했다.
그렇게 연 이틀을 정신적으로 무리하게 혹사당하고 나니 몸까지 나른해질 수밖에.
서정운은 대답 대신 가볍게 한호영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걸음을 돌렸다. 외당 쪽이 한적하고 낮잠 자기 좋겠지, 하고 생각하는 그의 등 뒤로 누군가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유희정 사범도 오늘 새벽에야 돌아와선 오전 내내 나른해하더니만 주말에 둘이 나란히 무리라도 했나 보지.”
서정운은 흘끗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지만 그뿐, 걸음을 멈추지 않고 식당에서 걸어 나갔다.
지난주 저녁 식당에서의 작은 소란 이후 둘 사이가 수상쩍다는 소문은 거의 기정사실인 양 와전되어 흘러 다니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근거 없는 헛말이야 신경 쓰지 않은 지 오래고 맥없이 흐르다 마는 소문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지만…….
“…….”
식당에서 막 나서던 서정운은 뜰의 구석진 벤치에 홀로 앉아 있는 유희정을 보았다. 과연 누군가의 말마따나 나른한 기색의 그녀는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사랑에 겨운 눈길로,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을 띠고 있다.
그냥 지나쳐 가려던 서정운은 걸음을 멈추었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걸음을 돌려 그녀에게 간다. 서정운이 가까이 가자 고개를 든 그녀는 서정운을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너 여기 말이야, 자국 남았어.”
서정운이 자신의 목덜미를 톡톡 두드리며 말하자 처음엔 영문 몰라 하는 눈치이던 그녀는 이내 짚이는 데가 있었는지 “어머.” 하고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얼른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 버린다. 목덜미에 순흔이 남아 있는 걸 여태 몰랐던 모양이다.
저걸 본 사람들이 또 뒤에서 얼마나 입방아를 찧었을까--그리고 아마 저 입술 자국을 낸 사람은 서정운일 거라는 소문도 장하게 돌았겠지-- 하고 혀를 차다가 서정운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희재가 또 문자 보냈데요. 아침 일찍 근처에 볼일 있어 왔다가 주변에 차 세울 데가 마땅찮아서 잠깐 본산 주차장에 세웠다가 시간이 급해서 그냥 돌아왔다고 나중에 꼭 인사하러 오겠다네……. 이런 문자는 왜 보낸 거야, 무슨, 제 발 저려서 미리 선수라도 치는 놈처럼.’
전에 주차 기록 남았던데 왔었냐고 물어봤던 게 그렇게 놀랄 일이었나? 하고 아까 오전 강론을 마치고 쉬는 시간에 마주쳤을 때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며 툴툴대던 한호영이 떠올랐다.
“…….”
서정운은 유희정이 사라져 간 방향으로 잠시 시선을 주다가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외당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알 바 아냐, 내 알 바 아냐, 그렇게 속으로 되뇌면서.
식당의 뒷마당을 지나 외당으로 이어진 외길로 접어들자 금세 인적이 끊겼다. 울창하지는 않아도 나무들이 듬성듬성 우거져 있는 길을 따라 걷자 곧 외당이 보였다. 오늘도 저기서 누렁이가 낮잠을 자고 있는지 외당 옆 작은 뜰에 강아지 두세 마리가 졸랑거리는 게 보인다.
어디, 저기에 우리 털 뭉치는 있나 없나, 고개를 주욱 빼 강아지들을 둘러보며 걸음을 내디디던 서정운은 곧 엉덩이를 흔들며 꼬리를 팔랑거리는 털 뭉치를 발견했다. 털 뭉치는 운동화 끈을 신나게 물어뜯으며 놀고 있다가 서정운의 기척을 듣고는 이쪽을 돌아보더니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어 대며 달려왔다.
그리고 운동화 끈의 주인, 외당 마루에 걸터앉아 무릎 위에 팔을 걸치곤 강아지들을 쳐다보고 있던 한무화가 서정운을 보고는 고개를 꾸벅 한다.
“어……, 점심 안 먹었어?”
“일찍 먹고 나왔습니다. 그 녀석이 식당 앞에서 기다려서요.”
한무화가 서정운의 발치에서 빙글빙글 뛰는 털 뭉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서정운은 털 뭉치의 주둥이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고는 피식 웃으며 한무화가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가 그 옆에 앉았다.
“여긴 사람이 거의 없어서 좋네.”
낮 동안에는 정련과 체련 양측의 시선을 생각해 한무화에게 거의 말을 붙이지 않는 서정운이었다. 그러나 외당에는 오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마음 편히 이야기할 수 있겠다. 한무화는 그런 서정운을 내려다보다가 말한다.
“굳이 그렇게까지 신경 쓰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만.”
“아니야. 나랑 얘기하고 지내면 네 입장이 좀 애매해진다니까.”
“저는 상관없습니다.”
“내가 싫어.”
서정운은 짤막하게 말을 끊으며 손을 들어 한무화의 머리카락을 북북 헝클어뜨렸다. 한무화는 뭐라고 더 말하려는 눈치이다가 천천히 눈매를 누그러뜨리며 입을 다문다.
따끈따끈하게 볕이 쏟아졌다. 나란히 앉아 아무 말 없이 침묵 속에 있어도 마음 편안한, 기분 좋은 낮이다. 원래는 낮잠을 자러 온 거였지만 뜻밖에 한무화가 선물처럼 앉아 있으니, 아까워서 잠잘 마음도 들지 않았다.
기분 좋게 가느스름한 눈으로 멀리 산을 바라보다 시선을 떨어뜨려 손끝으로 강아지들의 주둥이를 톡톡 건드려 놀아 주는 서정운을 바라본 한무화가 문득 고개를 기울였다.
“……. 반지는 왜 안 끼셨습니까?”
서정운은 응? 하고 한무화를 보더니 얼핏 겸연쩍은 빛을 띠었다. 반지라는 말만으로도 왠지 이것저것 떠올라 낯이 더워진다.
“낮에는 연습이나 대련을 하느라 손을 험하게 쓰잖아. ……반지 상할까 봐.”
말하면서도 쑥스러워서 뒷말이 흐려진다. 한무화는 눈썹을 올리더니 말했다.
“그렇게 쉽게 상하지 않을 겁니다. 끼고 다니지 않으면 사 드린 의미가 없습니다.”
서정운은 고개를 끄덕이곤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반지를 꺼냈다. 혹시라도 잃어버릴까 봐 차 열쇠에 매달아 두었던 반지를 풀어 그 반들반들한 겉면을 손가락으로 한 번 닦는다. 보기만 해도 아까운 걸 어떻게 끼나.
절대반지를 쥔 골룸이 된 기분이다……, 반지를 보기만 해도 저절로 입가가 느슨해지는 서정운이었다. 그런 서정운을 지켜보던 한무화가 누그러진 목소리로 “상하면 다시 사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한다.
“아냐, 그렇게 손쉽게 대체하고 싶지 않다고.”
서정운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리곤 한 번 더 반지의 겉면을 손끝으로 닦았다. 몹시 소중한 것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한무화는 물끄러미 서정운을 보았다. 문득 멋쩍기라도 한 것처럼 잠깐 시선을 떨어뜨려 신발 끝을 본다. 천천히 다시 서정운의 얼굴로 눈길을 돌리는 한무화의 입매가 희미하게 휘었다.
“빼지 마십시오.”
반지를 끼는 서정운에게 한무화가 말했다. 서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에서 살짝 헛돌 정도로 낙낙한 반지는 햇빛이 반사되어 더욱 반짝거렸다.
그렇게 좋은지 반지만 쳐다보고 있는 서정운을 한무화는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서정운의 입술 위로 떨어졌다. 일순 한무화의 얼굴에서 느슨하던 웃음기가 사라진다. 뚫어질 듯 서정운의 입술을 눈으로 덧그리던 한무화가 시선을 돌리더니 한동안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불현듯,
“서정운 사범님은,”
말을 꺼내다 멈추는 한무화를 서정운이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여태 누군가를 이성으로……, 그러니까 연애 대상으로 좋아하셨던 적이 있습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물음이었다. 말하고 나서 한무화도 어렴풋이 눈살을 찌푸리는 게, 그 자신도 얼떨결에 던진 물음인가 보다.
한무화의 물음치고는 워낙 뜻밖이라 빤히 그를 쳐다보던 서정운의 얼굴이 어느 순간 달아올랐다. 껌벅껌벅 당황스레 눈을 껌벅이며 한무화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서정운을 보고, “저 말고 말입니다.”라고 얼결인 듯 덧붙인 한무화는 머쓱한 기색으로 자신의 얼굴을 문지른다.
“없어. 좋아할 뻔했던 사람이라면 있지만.”
잠시 생각하던 서정운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좋아할 뻔했던…….” 하고 그 미묘한 대답을 되풀이하며 한무화가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
“음. 대학 졸업하기 전이니까 오래전인데, 후배 여학우가 있었거든. 조용하고 별로 눈에 안 띄는 애였는데, 언제나 자기 할 일을 열심히 성실하게 하는 애였어. 그러다 할 일이 없을 때면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서슴없이 도와주러 가는 애였는데,”
서정운은 이미 오래도록 시간 너머에 묻어 두었던 기억에서 먼지를 털어 내었다. 이제는 빛이 바래 선명하지는 않지만 옛일이라는 것만으로 이유 없이 그리워지는 기억들 중 하나다.
“처음에 별생각 없었는데 자꾸 시선이 가는 거지. 혼자 있을 때는 뭘 할까 궁금해지고, 안 보이면 괜히 주위를 둘러보게 되고, 아무 얘기나 말을 붙여 보고 싶고.”
서정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무화는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좋아할 ‘뻔’했던 겁니까?”
그 말을 듣고 서정운은 웃고 말았다.
“글쎄, 사실은 아직도 정확한 경계를 잘 모르겠는데,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해. 그래서 그 애한테 그런 얘기를 해 볼까 했었는데,”
하지 못했다.
“딱 그때, 나 좋다고 따라다니던 여자애 하나가 이렇게 괴로울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자살 기도를 했거든.”
그때도 한호영이 말했었다. 사형은 정말이지 여자 운이 나빠도 어쩌면 이렇게 나쁘냐고. 모처럼 괜찮아 보이는 여자에게 마음이 가서 한동안 지켜보다 막 이야기해 보려던 찰나에, 하필 딱 그때에 최악의 방식으로 앞을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그 여자애랑 사귀었지. 죽겠다는데 놔둘 수 없잖아.”
그래, 그리고 한호영에게 욕을 먹었었다. 사형은 그래서 안 되는 거라고. 그런 애가 진짜로 죽을 것 같냐고, 심지어 그런 애면 진상 중에서도 상진상인데 그런 거랑 사귀냐고, 몇 년 치 욕을 그때 다 들어먹었다.
한무화도 딱히 욕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비슷한 기색을 띤다.
“그런 방식에 넘어갈 필요가 있는 겁니까?”
“어떤 일을 필요 때문에만 하진 않잖아.”
서정운은 웃었다. 이번에는 서정운의 구두끈에 매달리는 털 뭉치에게서 발끝을 살짝살짝 피해 놀아 주면서 그때를 떠올렸다. 확실하게 죽는 방법은 택하지 않았더라도, 살 수도 있지만 죽을 수도 있는 방법으로 시도했었다.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좋아할 뻔했다는 그 여자분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무 일도 없이 끝났지. 다른 사람을 사귀게 됐다니까.”
내가 아무리 뒷소문이 많다지만 정말로 비양심적인 짓을 한 적은 없다고, 라며 서정운이 웃었다.
“하지만 서정운 사범님은 그분을 좋아하셨던 것 아닙니까?”
“음……. 만일 이미 그 후배에게 고백해서 좋은 답을 들은 뒤였다거나 하면 상황은 달라졌겠지. 그러면 내가 우선시해야 하는 건 그 후배였을 테니까. 하지만 그때까지 그건 나 혼자의 마음이었던 거고, 그때 내가 같이 있어 줘야 했던 건 후배보다는 그 여자애라고 생각했거든.”
혼자의 마음이라도 아쉬웠다. 씁쓸하고, 이제 더 이상은 보지 말아야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도 약간은 아팠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자신에게 지켜야만 하는 게 있는 것도 아닌데, 금세라도 꺼질 듯이 저렇게 불안스러워 보이는 사람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한무화는 묵묵히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제 개인적으로는 썩 납득할 수는 없지만, 서정운 사범님이라면 그러셨을 것 같긴 합니다.”
“나라면? 하하, 그때그때 다른데.”
또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고, 하며 가볍게 웃는 서정운에게 한무화도 눈매를 누그러뜨리며 편하게 물었다.
“그래서 결국 그렇게 사귀게 되었다는 그 여자분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 한동안 사귀다가 뭐든지 나랑 같이하겠다고 해서 걔도 정무도를 시작했는데,”
서정운은 도중에 잠깐 말을 멈추더니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나한테 배우더니, 한 달도 안 돼서 이렇게 지독한 사람인 줄 몰랐다고 화내면서 떠났어.”
한무화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지도 못한 결말이었는지, 혹은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너무도 잘 이해가 가는 결말이었는지, 소리 내어 웃는 한무화를 처음엔 불퉁하게 바라보던 서정운도 곧 웃고 말았다.
“저라면 절대 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웃음을 멈춘 뒤에도 아직껏 웃음기가 남아 있는 얼굴로 한무화가 말했다. 서정운도 “그렇지, 너라면.”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한무화는 단순히 한무화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제자로서도--명확히 서정운의 제자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아주 훌륭하고 사랑스러웠다. 무슨 이야기를 하건 담백하게 받아들이고 잠시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설령 한강변에서 우연히 마주치지 않았더라도, 처음부터 체련의 기대주로서 마음의 빗장을 걸고 마주쳤다 하더라도, 결국은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내가 정무도를 할 줄 알아서 다행이야.”
정무도를 할 줄 알아서 만족스럽다거나, 더 욕심이 난다거나, 혹은 애초에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거나, 그런 생각은 했었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는데.
그래도 이 남자에게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으로나마 이 남자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도.
“내가 정무도를 못 했더라면 너랑 이렇게나마 지내게 될 일도 없었겠지.”
서정운이 중얼거린 순간 한무화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뚫어져라 서정운을 바라보는 알 수 없는 시선을 받고서야 서정운은 혹시 비난으로라도 들렸나 싶어 손을 저었다.
“다른 의미는 없어. 정말로 그냥 잘됐다는 거야.”
“……. 서정운 사범님이 정무도를 못 했더라면…….”
그렇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한무화는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지금처럼 지내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생각 끝에 그렇게 말하고서도 서정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동안 더 생각하는 듯싶던 한무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한무화가 막 입을 열었을 때였다.
평상 아래 배를 깔고 엎드려 있던 누렁이가 귀를 쫑긋 세웠다. 낮잠에서 깨어나기 싫은지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대수련장 쪽으로 코끝을 돌리고는 귀를 쫑긋쫑긋 한다.
그 작은 움직임을 따라 서정운도 대수련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무화도 그쪽을 본다.
여기에서 대수련장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외당 근처가 워낙 조용한 탓에 희미하게 그쪽이 떠들썩해진 기척은 전해졌다. 어렴풋이,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목소리가 언성을 높이는 걸 알 수 있었다.
“뭐지……, 어째 좀 소란스러운데.”
서정운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한동안 잠잠히 있었다. 그러나 조금 더 시간이 지나도 그 희미한 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결국 서정운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신발에 들러붙은 털 뭉치를 떼어 내곤 대수련장으로 걸어나서는 서정운의 뒤로 한무화도 선뜻 일어서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