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련장으로 다가갈수록 희미하던 목소리는 점차 뚜렷해졌다.
그것은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는데 거칠게 고함지르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사범 몇몇이 “누구시냐”, “이런 데서 이러시면 안 된다”고 타이르는 모양이었지만 남자는 막무가내로 그들을 뿌리쳤고, 그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유희정 어딨어? 안 나와?!”
남자가 고함치며 부르는 이름을 듣고 서정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자, 소식을 들었는지 마침 문간채 쪽에서 유희정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참이었다. 그녀는 남자를 보고는 일순 낯빛이 하얘졌으나 곧 입술을 꾹 깨물고 그리로 다가갔다.
“수형 씨 여기서 뭐 하는 짓이에요?”
그녀가 냉랭하게 말하자 남자가 그쪽을 돌아보았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자리를 터 준다. 남자를 만류하던 사범들이 “유희정 사범님”, “이분이 유 사범님을 찾아오신 모양인데,” 하고 난처하고 의아한 눈초리로 남자와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남자는 “하하, 이제 나타나셨어?” 하고 내뱉더니 그녀에게로 걸음을 옮기며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어 흔들어 보였다.
“너야말로 뭐 하는 짓이야? 아침부터 전화하더니 일방적으로 결혼 못 하겠다고 통보를 해? 이유를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도 안 하고 끊어 버리고, 달랑 미안하다고 문자질이야?”
수런스럽던 주위가 한층 조용해졌다. 유희정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문 채 남자를 노려보기만 했고, 남자는 “하,” 하고 코웃음 치며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그래, 그래, 어차피 나도 너랑 결혼할 생각 없었어. 너처럼 결혼 앞두고도 다른 놈이랑 놀아나는 년이랑 결혼을 왜 해? 그냥 두고 보고 있었을 뿐이지, 이년이 무슨 짓거리를 하나.”
주위는 조용했다. 뒤늦게 소란을 듣고 온 이들만 뭐야, 무슨 일이야, 하고 수군거릴 따름이다.
그 와중에 누군가 그 자리에 다다른 서정운을 보더니 옆에 선 사람에게 뭐라고 수군거렸다. 이내 서정운을 흘끗거리는 작은 소리도 조금씩 번져간다.
그런 숱한 소리들 속에서, 커다랗게 눈을 홉뜬 유희정의 얼굴이 금시에 질렸다. 곧바로 무어라 대꾸하지 못하고 남자를 쳐다보던 그녀는 이윽고,
“여기서 소란 부리지 말고 따로 얘기해요. 이쪽으로 와요.”
간신히 떨림을 억누른 목소리로 중얼거리곤 다른 방향으로 한 걸음 떼며 고갯짓했지만 남자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사람들 앞에서 창피당하기는 싫은가 보지? 그러면 이따위 짓이나 하지 말았어야 할 거 아냐!”
남자가 한 손에 말아 들고 있던 종잇장을 내던졌다. 유희정에게로 날아가다 도중에 팔락팔락 흩어지며 떨어진 몇 장의 종이에 얼핏 사진과 숫자, 글자 따위가 인쇄되어 있는 게 보인다. 흥신소에서 가져다주었을 법한 그 종이들을 내려다보는 유희정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진다.
“주말에도 본산에 연습 있어서 꼼짝도 못 한다며? 그래놓고 주말 내내 호텔에 있었던데? 어느 호텔인지도 말해 볼까? 둘이서 내내 방에 처박혀 그 짓 하느라 나오지도 않고 룸서비스를 뭐 뭐 시켜 먹었는지도 말해 봐?”
남자를 말리던 사범들이 다가와 “선생님, 사정은 알겠습니다만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라고 다시 만류하려 했지만 남자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거칠게 어깨를 뿌리쳐 그들의 손을 떼어냈다.
“어느 놈이야?”
“--.”
“왜 말을 못 해? 꼴에 그놈은 지켜 주고 싶은가 보지? 내가 오늘 이 연놈들 둘 다 낯짝 보고 망신 주려고 찾아왔으니까 말해 봐. 네 멋대로 사람 갖고 놀다 네 멋대로 결혼 안 한다 사람 병신 만들었으면, 그쯤은 각오했을 거 아냐?!”
파랗게 굳어 있던 유희정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주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서정운은 그녀를, 그 남자를, 그리고 서정운까지도 흘끔거리며 수군대는 사람들 속에 섞여 서서 뚫어질 듯 그녀를 보았다. 늘 활달하고 강단 있었던 여자다. 이럴 때 차라리 악다구니를 쓰면 썼지 물러서지를 않을 여자가 벼랑 끝에 선 것 같은 얼굴로 서 있었다. 입을 여는 순간 아주 중요한--치명적인 뭔가가 깨지기라도 하듯이.
그게 누구인가.
“--.”
불현듯 서정운의 머릿속에 어떠한 일이 스친 그때,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에이, 씨발, 또 서정운이지, 아님 누가 있어, 무책임하게 무심코 내뱉는 소리.
하필 그 순간 사람들의 수런거림이 우연히 멎어 그 속삭임만 크게 울렸고, 그 말을 중얼거린 당사자조차 그렇게 크게 울릴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기색으로 고개를 움츠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서정운에게 멎었고,
“뭐? 지금 뭐랬어? 어느 놈? --너야?”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던 남자는 사람들의 눈길이 흐르는 곳을 따라가 서정운에게서 시선을 멈추었다. 다음 순간 눈을 부릅뜬 그는 아무것도 눈에 뵈는 게 없는 듯 다짜고짜 서정운에게 달려들며 멱살을 움켜쥐려 들었고, 그 직전에 서정운의 뒤쪽에 서 있던 한무화가 그의 손목을 붙잡으며 막아섰다.
남자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 가까이 큰 한무화에게 가로막히자 일순 움칫하는 듯했다. 그러나 머리끝까지 오른 핏기는 그 정도로 가시지 않아, “넌 뭐야!” 하고 고함을 지르며 한무화를 떠민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은 한무화가 무표정하게 남자를 내려다보며 입을 연 그때,
“--좋은데 어떡해.”
희미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되는 줄 알아. 그러면 안 되는 줄, 될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그래도 좋은데 어떡해.”
유희정이 파랗게 질려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막아 두고 있던 마음속의 둑이 구멍 나기 시작한 것처럼, 그 안에 겨우 담아 두었던 것들이 막을 도리도 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처럼 점점 더 세게 떨었다.
“안 보려고 했어. 안 만나려고, 끊어 버리려고 했어. 그래도, 그래도 안 되는 걸 어떡해. 그래도 좋은데 어떡해. 차라리, ……내가 죽어 버리는 게 차라리 더 편할 것 같은데--.”
가느다랗게 흘러나오는 소리는 속삭임에 가까웠는데도 마치 비명 같다.
벼랑 끝에 혼자 서 있는 사람처럼. 아무도 의지할 수 없고 아무에게도 터놓을 수 없이 그저 혼자만 그 무게를 꽁꽁 부둥켜안고서.
지금 서정운이 좋다고 그러는 거야? 결혼까지 앞두고서? 정신 나갔군, 서정운이는 결혼 앞둔 여자를 어떻게 후려 놨기에, 흐릿한 소리들이 중구난방으로 들리다 말다 한다. 그 소리들 속에서 문득,
“서 사범님 잘못이 아닙니다.”
“--.”
서정운은 바로 옆에 선 한무화를 올려다본다. 한무화는 한 손으로 남자를 붙든 채, 서정운에게나 들릴 만한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아. 그렇구나. 서정운은 그제야 그 역시 유희정이 좋아한다는 것이 서정운이리라고 짐작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여태 본산 안을 잡스럽게 떠돌아다니던 소문들이 그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어느 정도 과장은 되었을지언정 큰 줄기는 그 소문이 맞는 모양이라고 짐작했었나 보다. 어딜 가든 별일 하지 않아도 여자를 홀리는 서정운에게 그녀도 제풀에 홀렸으리라고.
한무화는 서정운을 비난하고 있지 않았다. 외려 그를 감싸 주고 있었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감싸 줄 일이라곤 전혀 없음에도.
“책임질 사람이 져야지. 혼자 빠져 있으면 되나? 누군지 몰라도 불러서 삼자대면하라 그래.”
누군가 조그맣게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흘러나왔다.
이미 지저분한 소문이 숱하게 돌았던 두 남녀를 이김에 단죄해 버리면 좋겠다는 공기가 이곳의 한 켠에 분명히 깔려 있었다.
“서 사범님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한무화가 다시 나직이 말했다. 서정운은 물끄러미 그를 보다가 가만히 주위를 둘러본다.
왜, 누구길래 그래,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시선이, 눈빛이, 그 모든 것이 비난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누구야. 누군데. 모든 걸 다 밝혀. 말해. 말해야 해. 넌 죄를 지었으니 그래야 할 의무가 있어. 네가 나락으로 떨어지더라도.
그녀를 향하는 시선들이 그녀에게는 얼마만큼의 폭력이고 얼마만큼의 공포일지.
그녀는 호소할 수 없다. 그녀가 잘못했으므로. 벼랑의 돌조각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위에서 공포에 질려 떨고 있을 뿐.
“--.”
서정운은 잠자코 유희정을 바라보았다. 비난하듯이 그를 흘끔거리는 시선들도 있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비통하게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이 그 자신 속에 있는 얼굴과도 어렴풋이 겹쳤다.
서정운은 소리 없는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 걸음 내디딘다.
“사형!”
조금 떨어져 있는 인파들의 가장자리에서 서정운을 본 한호영이 낯을 찡그리며 낮게 외쳤다. 그 부름은 서정운을 만류하는 것이다. 그러나 혀를 차는 기색이 섞여 있는 그 부름은 이미 소용없으리란 걸 알고 있기도 했다.
또 호영이에게 바가지로 욕을 먹겠구나, 서정운은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그를 주시하던 시선들이 ‘역시.’라는 확신으로, 이어 비난으로 바뀐다. 그 가운데 다시 한 걸음 내디딘 때,
“--.”
어깨를 붙잡는 커다란 손이 있었다. 돌아보자 한무화가 굳은 얼굴로 서정운을 내려다보며 붙들고 있었다.
서정운은 그를 보며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그 단단히 굳어진 얼굴이, 험한 무표정이, 왠지 모르게 불안해 보인다고.
“나라도 옆에 있어야지.”
서정운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그토록 감추려 하는 비밀을 덮어 줄 수 있도록. 그 비밀이 드러나면--원하던 사람을 얻으면 결국 온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게 될 그녀가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서나마 숨을 수 있도록.
“이번에도 그러시는 겁니까?”
한무화가 말했다. 서정운은 그 나직한 목소리를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알아듣지 못한 건 ‘이번에도’이다. 이번에도라니.
“이번에도, 마음에 둔 사람이 있더라도, 서정운 사범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더 우선인 겁니까? 사범님의 기분은 접어 두고?”
억지로 억누른 것 같은 그 낮은 소리를 들으며, 그제야 서정운은 한무화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조금 전에 외당에서 이야기했던 옛일의 연장이다. 그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
아니야. 그녀가 마음에 둔 사람은 내가 아니야.
그 말은 할 수 없다. 그것은 그녀를 공포로 몰아붙이는 비밀이다. 하지만 하나만은 분명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나마 그녀를 숨겨 줄 수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누구나 그럴싸하다고 믿을 만한 사람이-- 자신뿐이라면, 자신은 그녀를 덮어 줄 것이다.
서정운은 차분히 한무화를 보다가 어깨에 올려진 그의 손을 잡고 가만히 떼어 낸다. 한무화의 커다란 손은 움찔하며 그대로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서정운은 그 손을 기어이 떼어 냈다. 그리고 돌아서 더는 돌아보지 않고 유희정에게 걸어갔다.
믿어지지 않는 눈으로,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정운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다가가 가만히 어깨를 쓰다듬어 주고 등을 다독여 준다. 그녀의 떨림이 겨우겨우 억누르는 울음처럼 조금씩 더 거세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비난하는 소리가 한결 크게 술렁였다. 설마, 하고 일말의 의혹을 품고 있던 시선들마저 확신으로 바뀌며 맹렬한 비난의 시선으로 꽂혔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숱하게 날아드는 그 날카로운 경멸과 비난, 악의들 속에서, 서정운은 그녀를 덮듯 가만히 감쌌다.
“--.”
한무화에게 붙들려 있던 남자가 거칠게 고함을 지르며 욕설을 퍼붓는 소리도, 마구 날뛰기 시작하는 그를 몇몇 사람들이 만류하는 기척도, 멀리서 본산의 상원사범 몇이 달려와 무슨 일이냐고 꾸짖는 것도, 아득하게 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 같았다.
*
한호영은 혀를 차며 아무 말도 안 했다. 싸늘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를 두르고서 서정운과 유희정과 더불어 별실 안에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상원사범이 이게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인지 서면으로 보고를 하라는 영이 떨어졌고, 얼결에 그 일을 떠맡게 된 게 그 현장에 있었으며 그 당사자인 (걸로 의심되는) 서정운의 사제이자 유희정과 같은 정련의 젊은 기수 총괄 사범인 한호영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 이후로 곧 그 자리에 있던 관계자들은 사무동의 별실로 자리를 옮겼다. 사범들이 반강제로 데리고 가는 동안에도 유희정을 찾아왔던 그 남자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고, 별실에 들어서서도 한동안 난리를 피웠다.
그렇게 한바탕 떠들어 대고 나서는 그럭저럭 속이 풀렸는지--사실 그 자리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셈이었다--, 유희정과 서정운을 사납게 노려보고는 ‘조만간에 고소장 날아갈 줄 알라’며 으른 뒤 돌아가 버렸고, 그 뒤부터 서정운과 유희정은 오후 내도록 윗선의 사범들에게 불려 다니며 줄지어 면담을 해야 했다.
면담이라고 해 봐야 둘 다 거의 입을 다물고 있었기에 사범들은 결국 역정을 내며 한호영에게 서면 보고를 올리라고 하는 걸로 끝이 났지만, 한바탕 홍역처럼 그 난리를 치르고 나니 이미 시각은 저녁이 되어 있었다.
그런 뒤 그들이 다시 별실로 돌아왔을 때에는 본산 사범 수련 합숙 중 기강을 흐트러뜨리고 본산의 위신을 깎은 것에 대한 징계로, 서정운과 유희정 두 사람은 즉각 합숙 수련을 중지하고 퇴거할 것, 논의 후 엄중한 처분이 있을 테니 기다릴 것, 그 두 가지 요지의 지시가 내려와 있었다.
“……미안해. 너한테는 피해 안 가게 할게.”
오후 내내 거의 입을 열지 않았던 유희정이 하루 사이에 수척해진 낯으로 묵묵히 앉아 있다가 불쑥 꺼낸 말이었다.
흘끗 그녀에게 시선을 주는 서정운의 옆에서, ‘이 사태를 대체 어떻게 보고하란 소리야.’ 하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끙끙거리고 있던 한호영은 어이없이 그녀를 쳐다보더니 싸늘하게 대꾸했다.
“아니 지금 이미 피해란 피해는 다 줘 놓고 이제 와서 무슨 헛소리랍니까.”
“아니지, 유 사범이 나한테 피해를 준 게 아니라 내가 마음대로 나서고는 아무 말 하지 않은 거지.”
서정운이 대신 변호해 주자 한호영이 허, 하고 눈에 불을 켰다.
“사람들이 제멋대로 오해하고 사형 욕하는 소리 다 들으면서 끝까지 입 꾹 닫고 아무 말 안 했잖아요! 자기 정부 숨기려고 애먼 사형 욕먹게 놔두고, 그게 뭐예요?!”
“호영아.”
서정운이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말이 심해진다, 그 의미다. 한호영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그래도 열통이 솟는지 책상에 볼펜을 내던진다.
“아오, 진짜, 그냥 내가 콱 터뜨려 버릴까 보다! 희재 그 새끼도 미쳤지!”
버럭 외치는 한호영의 말에 묵묵히 앉아 자신의 깍지 낀 손만 내려다보고 있던 유희정이 움찔한다. 서정운이 혀를 차며 “호영아.”라고 한 번 더 부르자 그제야 한호영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한호영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하기는 별달리 말을 하지 않을 뿐, 저 단순한 성격치고는 유난히 눈치가 빠른 한호영이었다. 서정운이 알아챈 걸 그가 모를 리 없다.
유희정의 깍지 낀 손 위로 파랗게 핏줄이 도드라졌다. 수척한 안색이 다시금 창백해진다. 꾹 다문 입술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한 그때, 그녀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꺼내 본 그녀는 액정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하곤 그 전화만 동아줄처럼 꼭 붙들고 있을 뿐이었다. 금세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가 봐. 마중 온 사람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
서정운이 말하자 다시금 어깨를 움찔한 그녀는 무어라 중얼거리는 듯했다. 워낙 작아서 들리지 않았지만 아마도 고맙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내 일어서서는 도망치듯이 나가 버렸고, 그렁그렁 고여 있던 눈물이 기어이 쏟아진 것은 문을 나섰을 때였다.
탁, 문이 닫히고 서정운과 한호영만 남은 자리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한호영은 어이구, 쯧쯧, 하는 얼굴로 서정운을 쳐다보다가 “나야말로 울고 싶다, 진짜,” 하고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아버지 화나셨어요. 좀 전에 사무실에서 연락 들어갔나 봐. 경기도로 시찰 나가신 양반이 불같이 화내시면서 당장 돌아오겠다고 하셨대. 어쩔 거예요, 사형.”
“오시는 길에 풀리시겠지. 화 금방 내시고 금방 푸시는 분이잖아. 벼락처럼 야단맞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오늘 사부님 낮에 시찰 나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어, 하고 서정운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보다는 유 사범이 힘들겠지.”
징계는 가볍지 않을 것이다. 명확한 당사자인 그녀라면 사범직을 박탈당할 수도 있었다. 아니,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앞으로 정무도를 하는 한은 계속 그녀에게는 꼬리표가 따라다닐 거다.
“지금 사형이 남 걱정 할 때예요?”
“왜? 난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는데. 그냥 백 가지쯤 되던 소문이 백한 가지쯤으로 불어났을 뿐이지.”
어차피 여자 관련된 평판은 이미 흉흉할 대로 흉흉했고, 사범직을 박탈당한다 한들 상관없었다. 외려, 정무도를 그만두겠다고 한 지 몇 년이나 지난 아직껏 본산의 적에 올라 있어서 번거롭다고 했었던 서정운이다. 그러니 더 잃을 것도 없다.
한호영은 아무렇지 않은 기색의 서정운을 쳐다보다가 휴, 하고 한숨만 내쉬고 말았다. 의자에 주욱 기대어 앉은 서정운은 깍지 낀 손바닥에 머리 뒤를 받치고서 허공을 보았다. 그러다 문득 “……왜,” 하고 중얼거린다. 한호영이 의아하게 쳐다보았지만 서정운은 아무 말 없이 허공만 볼 뿐이었다.
왜 좋아졌을까. 안 되는 줄 알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 피식 웃고 만다. 사람 마음이 본인 맘대로 된다면 얼마나 편하겠어.
서정운은 어차,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가서 짐 싸야겠다. 쌀 것도 별로 없지만. --그럼 호영아, 수고해. 미안.”
보고서 용지를 붙들고 끙끙거리는 한호영의 어깨를 두드려 준 서정운은 가볍게 걸음을 돌렸고, 한호영은 원망스레 서정운의 뒤통수를 향해 무어라 왈왈거렸지만 서정운은 끝까지 듣지도 않고 별실의 문을 나섰다.
이제야 겨우 홀로 남은 서정운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어깨에서 힘을 풀었다. 어느새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사무동에서 막 나서던 때,
“…….”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을까. 사무동 문 앞에 서 있는 한무화를 보고 서정운은 걸음을 멈추었다. 저만치 길 끝을 바라보고 있던 한무화는 기척을 느꼈는지 서정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유희정 사범님, 나가시더군요.”
“……. 응.”
서정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멈추었던 걸음을 내디뎠다.
“지금쯤은 주차장에 마중 나온 사람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그 남자입니까?”
서정운은 잠시 한무화를 쳐다보다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그때 다른 건물에서 서류 봉투 따위를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던 사무직원이 그들을 보더니 미묘한 눈초리로 둘을 훑어보곤 사무동으로 들어갔다. 이미 본산 전체에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은 소문이 퍼질 만큼 퍼져 있는 모양이었다.
“오후 내내 사람한테 시달렸더니 피곤한걸. 좀 조용한 데가 좋겠어.”
서정운은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겼고, 한무화도 잠자코 그의 뒤를 따랐다.
밤마다 다니며 발길이 익숙해진 대로 걸어가다 보니 본채의 도장으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외당으로의 갈림길을 지나 도장에 다다를 때까지 그들은 거의 말을 나누지 않았다.
이제는 낯익은 아담한 집채에 이르러 서정운은 뒤꼍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도장을 이용할 것도 아니고, 사람 없는 뒤꼍에서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제비꽃이 피어 있는 뒤꼍 화단의 작은 바위에 걸터앉은 서정운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가 길게 내쉬었다. 정신없었던 오늘 하루가 이제야 끝난 기분이다. 그런 서정운을 묵묵히 내려다보다가,
“서정운 사범님인 줄 알았습니다.”
한무화가 조용히 말했다. 아무 맥락 없이 나온 말인데도 이내 그것이 유희정의 상대를 뜻하는 말임을 알아차린 서정운은 열없이 웃었다.
“아니야. 설마 내가 정말로 유 사범이랑 예비 불륜 행각이라도 했겠어? 남의 눈 피해서 새벽에 몰래 만나고 밤에 몰래 만나고 주말에도 몰래 만나 가면서?”
“그런 소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희정 사범님이 서정운 사범님에게 반했다는 말은 사실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걔가 나한테 왜 반하겠어.”
“누가 서정운 사범님에게 반한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니까요.”
담담하게 말하는 한무화는 농담을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서정운은 머쓱하게 그를 보다가 “어, 고마워.” 하고 장난처럼 웃고 만다. 그러나 한무화는 여전히 빈말을 하거나 장난스런 기색은 없었다. 그는 넉넉하게 맞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손에 쥐었던 어떤 것이라도 떠올리듯이.
“유 사범님이 반했던 사람이 정말로 서정운 사범님이었더라면,”
잠시 사이를 둔 한무화가 시선을 들어 서정운을 보았다.
“사범님은 지금쯤 유 사범님과 계시겠지요.”
그 진지하고 조용한 목소리가 뭘 말하려 하는지 모르겠다. 서정운은 지그시 그를 바라보다 “글쎄,”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랬더라면 이런 사태 자체가 벌어지지 않았을걸.”
한무화는 말없이 서정운을 보았다. 서정운도 의아하게 그를 마주 보았다. 어째서일까, 여느 때와 같이 무심한 얼굴, 담담한 목소리인데도 평소와 다른 기분이 든다. 그게 무엇인지 몰라 서정운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를 좋아하시면서도, 다른 사람이 사범님을 필요로 한다면 그 사람에게 가시는 겁니까?”
그 말을 하는 한무화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목소리도 건조하다. 썩 유쾌하지 않은--희미한 불편함이 배어 있는 음색이다.
서정운은 뚫어져라 한무화를 보았다.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그의 얼굴에 무언가 숨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낱낱이 바라본다.
무심한 얼굴 밑에 언짢은, 달갑지 않은 어떠한 감정이 있는 것 같았다. 문득 뭔가 묵직한 풍선 같은 것이 퉁, 서정운의 가슴을 두들기는 것 같다.
그래서 서정운은, 변덕스런 바람에 밀려 일어난 모래 먼지처럼 가슴 저 밑바닥 어딘가에서 갑작스럽게 너울거리는 어떠한 감정으로--그 아슬아슬하고 불안한 두근거림은 굳이 말하자면 ‘기대’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말하는 것이었다.
“네가 나를 좋아한다면--내 마음을 받아 준다면 가지 않겠지. 그러면 내 마음뿐 아니라 네 마음도 챙겨야 하니까. 누가 날 필요로 한들 가지 않을 거야.”
그리고 한마디. 덧붙일까 말까, 아주 짧은 찰나에 수만 번을 고민한 끝에, 그 먼지처럼 피어오른 감정에 밀려 덧붙이는 말.
“날 좋아할 생각이 있어? 내가--좋아질 것 같아? 단순히 가까운 사이 이상으로?”
그리고.
한무화는, 스스로는 생각도 못 한 어떠한 말을 들은 것처럼,
그대로 굳은 듯 멈추어 서정운을 보았다.
“--.”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그 정적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고작해야 3, 4초 남짓이었을 거다. 그럼에도 그 시간은 서정운이 한무화의 얼굴에서 그 ‘생각조차 못 했다’는 빛을 읽어 내기에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고, 지키지 못할 말도 하지 않고 확실하지 않은 말도 하지 않는 그의 성격을 떠올린 것도 금방이었으며, 동시에 이것이 얼결에 그에게 재차 고백했다가 재차 차인 두 번째 실연의 순간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아마도 한무화는 예전보다는 훨씬 서정운을 가깝게 여기게 된 모양이었다. 서정운이 그의 손을 밀어내고 다른 사람에게 간 걸 서운하게 여길 정도로는. 그러나, ……거기까지였던 모양이다.
너울거리던 먼지는 차차 가라앉았다. 짧은 순간 퉁하고 튀었던 가슴도 다시 잠잠해진다.
서정운은 웃었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뚫어질 듯 그를 바라보고 있는 한무화의 어깨를 두드렸다. 됐어, 대답 안 해도. 이 이야기는 이걸로 끝낼 테니. 그렇게 말없이 전한다.
순간 한무화의 낯빛이 더럭, 희미하게 변한다. 그 굳어지는 얼굴빛을 보며 서정운은 곤란한 기분이 들었다.
대답해 주지 못하는 게 미안한 걸까. 날 좋아해 주지 않는다는 게 그가 미안해할 일은 아닌데도. ……괜한 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네가 마음 쓸 것 없어. 괜찮아, 넌 날 좋아하지 않아도. 내가 널 좋아하는 걸 싫다고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사범님, 저는,”
한무화가 언뜻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을 때였다.
“어, 아, 아, 아버지, 사형이 저기 있나 본데요,”
당혹한 기색이 역력한 빛으로, 들으라는 듯이 크게 외치는 한호영의 목소리가 모퉁이 저편에서 들려왔다. 그와 거의 동시에 모퉁이를 돌아서 뒤꼍으로 막 걸음을 디디는 한태일의 모습이 서정운의 시야에 들어왔다. 한태일의 뒤를 이어 한호영이 거무죽죽하게 질려 안절부절못하는 낯으로 나타난다.
“게서 지금 무슨 얘기들을 하고 있는 게야?”
눈썹을 치켜올린 한태일이 꼬장꼬장하게 내뱉으며 형형하게 서정운을 노려보았다. 흘끗 한무화도 무섭게 노려보았지만 그는 안중에도 없는 눈치였다.
“……사부님.”
서정운이 중얼거렸다. 그 뒤에서 ‘난 몰라.’라는 얼굴로 진땀을 흘리고 있는 한호영이 눈에 들어온다.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들렸던 걸까.
하얗게 표정을 지우곤 눈만 껌벅이며 사부를 바라보는 서정운을, 한태일은 범 같은 눈으로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 옆에서 한호영이 어물어물 중얼거렸다.
“사형이 무화랑 사이가 좋아요, 아버지. 아무래도 사형이 좀 가르치기도 했다 보니까…….”
“그래 본들 체련인데 사이좋아서 뭐 하려구?!”
노인은 못마땅하게 내뱉었다. “예? 아니 뭐 그거야…….” 하고 얼버무리면서도 한호영은 어라 하는 얼굴로 흘끔 노인의 눈치를 살폈다. 약간 핀트가 어긋난 대답을 듣고는, 사형이 한 말을 못 들으셨나 싶어 살짝 낯빛이 풀린다.
노인은 불퉁한 눈길로 서정운과 한무화를 흘겨보았다.
“두 놈이 여기서 뭐 해.”
“……이야기를 좀 나누고 있었습니다, 사부님.”
“무슨 이야기.”
서정운은 입 다물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노인은 험한 눈초리로 서정운을 노려보다가 불쑥 말한다.
“너 요새 밤마다 여기서 몰래 이놈 가르친다며.”
순간 움찔하며 눈만 껌벅껌벅, 아무 대답을 못 하는 서정운을 보고 노인이 코웃음 쳤다.
“내 집에서 가르치는데 그걸 모를 줄 알았더냐? 낮에는 생판 모른 척하면서 밤에는 본채 도장에서 무화 봐주더라고 이미 첫날부터 내 귀에 다 들어왔다, 이눔아.”
“--.”
“이제는 네 제자도 아닌데 체련 놈을 뭘 봐줘?!”
꽥 호통치며 불쾌감을 피로한 노인은, “제가 부탁드린 겁,” 하고 말하는 한무화에게 “넌 가만있어!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어디 어린놈이 끼어들어!” 하고 꾸짖었다.
그래도 차라리 이편이 더 마음 편하다는 기색으로 한호영이 가슴을 쓸어내릴 때, 노인이 휙 걸음을 돌려 도장으로 들어가며 서정운을 고갯짓으로 불렀다.
“정운이 너 이리 들어와라. 듣자 하니 오늘 나 없는 새 본산 한바탕 뒤집었다던데, 얘기 좀 들어 봐야겠다.”
“아버지, 그건 사형이 뒤집은 게 아니라…….”
“내가 언제 너더러 물었더냐! 너희 둘은 돌아가서 너희 할 일 해!”
다시 고함을 꽥 지른 노인은 도장으로 들어가 버렸고, 서정운은 두 사람에게 눈짓으로 인사하곤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안에서 노인이 “두 놈은 얼른 돌아가!” 하고 호통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고, 얼굴을 우그러뜨린 한호영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한무화의 어깨를 두드려 나가자고 손짓했다. 한무화는 잠시 도장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천천히 걸음을 돌렸다.
그들의 기척이 사라진 뒤꼍을 뒤로하고 도장 안으로 들어간 서정운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노인은 이미 도장 안쪽에 정좌를 하고 앉아 서정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서정운은 노인의 맞은편에 반듯이 앉으며 말했다. 노인은 마뜩잖은 눈초리로 서정운을 바라보다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넌 왜 제대로 맺고 끊지를 못해서 늘 이 사달을 만들어? 네가 네 마음 하나 편하자고 내 얼굴에 먹칠하는 걸 알아, 몰라?”
“죄송합니다, 사부님.”
“일없어! 오랜만에 좀 돌아오는가 싶더니 이건 뭐 이리 탈을 달고 살아. 애초에 너는 너무 물러 터졌어! 못된 척은 온 천하에 다 하고 다니면서 어찌 그러냐, 에이, 쯧쯧!”
노인은 벌컥 꾸중을 하고는 혀를 찼다. 서정운은 다시 “죄송합니다, 사부님.” 하고 고개를 꾸벅한다. 그 말 말고는 할 말이 없는 탓이다.
노인은 옛날부터 엄하고 꼬장꼬장했지만 서정운에게는 자애로운 사부였고 아버지였다. 늘 서정운에 대해서는 별말 하지 않는 노인은 서정운이 무얼 하든 나무라지 않았다. 예전에도 지금도, 나무라는 게 아니다. 서정운을 염려하는 말들이다. 그래서 늘 더 죄송했다. 그리고 노인의 결론은 늘 같았다.
“되었다, 그게 네놈 천성인 걸 어쩔 테냐. 쯔쯔, 제 놈이 평생 고생하지 뭐 내가 고생하나.”
못마땅하게 혀를 끌끌 찬 노인은 곁눈으로 서정운을 흘겨보며 “아 이런 사달 계속 만들지 말고 그냥 적당한 처자 찾아 결혼이나 해!” 하고 꽥 소리를 지른다. 서정운은 말없이 웃고 말았다.
평소라면 이 정도로 그치고 말 노인이다. 여상하게 세상 이야기나 몇 마디 나누고 그만 가 보라고 할 노인이었다. 그러나 서정운이 웃는 낯을 한참 동안이나 지그시 보고 있던 노인은, 문득 고개를 돌리더니 불쑥 물었다.
“너 여자가 싫으냐.”
서정운의 입가에서 웃음이 가셨다. 물끄러미 노인을 보던 그는 약간 고개를 떨어뜨리곤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러면, 남자가 좋으냐?”
서정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 아까 들으셨던 거다.
등줄기에 땀이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서정운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조용히 말한다.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노인은 반듯이 노인을 마주 보는 서정운을 보고는 눈매를 찡그렸다. 아장거리는 꼬마일 때부터 서정운을 키워 온 노인은 가느스름하게 그를 노려보다가 허, 하고 헛웃음을 웃으며 고개를 돌린다.
“네놈이 아무렴 잘도 그러겠다. 그런 놈이 여자 소문이나 줄줄 달고 다녀?”
“…….”
서정운은 약간 고개를 숙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인도 그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입을 꾹 다물고 도장의 미닫이문 위에 걸린 편액만 노려볼 뿐이다. 정무正武.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네가 무얼 하든 괜찮아.”
뚫어져라 편액을 보던 노인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네가 무얼 하든 너는 내가 키운 아이이고, 무얼 하든 네가 하는 일이라면 나는 그러마고 할 게다. 내가 키운 내 새끼 어찌 이쁘지 않을까. 천금보다 중하고 무얼 내놓아도 아깝지 않지.”
“--.”
“헌데,”
편액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노인이 이윽고 고개를 돌렸다. 서정운을 지그시 바라보는 눈매가 무겁다.
“정무도만큼 중한 건 없다.”
그 말은 그 순간 서정운의 가슴에 무겁게 실렸다.
솜 위로 물을 끼얹은 것처럼 그 말은 새기면 새길수록 점점 더 무거워진다.
“무릇 오래 이어져 온 것은 때에 따라 명맥만 간신히 유지할 때가 있고, 무럭무럭 성장하는 때가 있는데, 왕성하게 성장할 때에는 늘 시대를 끌어가는 사람이 있을 때였어. 그런 사람은 하늘이 내려 쉬이 나타나지 않는 법인데,”
노인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뗐다.
“무화는 정무도를 무럭무럭 키울 게다.”
“--.”
그럴 것이다. 그는 필경 그럴 터였다. 저 부단하고 끊임없는 노력과 그 아래에 끝 모르게 쌓여 있는 자질이라는 거름으로, 그 자신이 엄청난 거목으로 무럭무럭 커 나갈 터였다.
그렇기에,
“크게 자랄 나무는 망치지 말고 잘 아껴 다듬어 주어야지.”
그 조용한 말은 차가운 물처럼 서정운의 솜 같은 심장에 소리 없이 스민다. 차갑게. 차갑게. 그리고 무겁게.
서정운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침묵을 노인은 더 이상 방해하지 않았고, 제법 오랜 그 침묵은 서정운의 짧은 대답으로 깨어졌다.
“예.”
노인은 지그시 서정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가벼운 한숨을 흘린다. 그래,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동안 고개를 주억거리던 노인은, 그러나 곧 눈꼬리를 치켜올리더니 불퉁하게 말을 뱉었다.
“허나 벌써부터 지나치게 잘 아껴 다듬을 것 없다. 어쨌든 수일이 아래에 있는 놈인데 뭐 그리 빨리 키우겠다고. 천천히 자라라 해라. 너무 빨리 커서 내 아래에 있는 아이들 빛 가리지 말고.”
한창 빛 볼 우리 애들부터 아껴 줘야지 체련 따위, 하고 퉁명스럽게 말하는 노인을 보며 서정운은 웃었다.
그렇게 웃던 입매가 문득 움찔하고 떨릴 것 같았지만, 그러나 서정운은 입가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그렇구나. 그래. 정무도는 나도 소중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점점 자라날 한무화 역시 소중하다. 사람의 입은 얼마나 혹독한 창과 칼인가. 거기에 한무화가 베지도 찔리지도 않길 바랐다.
그래서 서정운은 점점 무겁게 젖어 가는 마음을 품고도 울상은 하지 않았다.
*
외당과 도장으로 길이 나뉘는 갈림길 모퉁이에 한무화는 서 있었다.
온 김에 정심수련이나 하고 가야겠다고 하는 스승을 남겨 두고 홀로 걸어 나오던 서정운은 발기척을 듣고 이쪽을 돌아보는 한무화를 보고는 걸음을 늦추었다.
“……, 나 기다렸어?”
그 뒤로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 하고 다가가는 서정운에게 한무화는 대답 대신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큰아버지께 말씀 많이 들으셨습니까?”
“약간이지 뭐, 화를 내도 금방 풀리시는 분이라서.”
대수롭잖게 말하는 서정운을 보고 한무화도 그러면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정운은 그런 한무화를 보다가 가만히 고개를 돌리며 희미하게 웃고 만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 짐 싸서 집에 가면 한밤이겠다.”
“오늘 바로 나가시는 겁니까?”
“응. 징계 내용 중 하나가 즉각 퇴거였거든.”
숙소인 문간채 쪽으로 걸어가는 서정운과 걸음을 나란히 하고 따라가던 한무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이제 밤에 봐주실 수 없겠군요.”
“그러게.”
“주말에 가르침 받으러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주말, 하고 중얼거리며 서정운은 잠깐 생각해 보았다. 별다른 일이 있지 않은 한--혹은 별다른 일이 있더라도 그 약속을 미루고서라도-- 한무화에게 아낌없이 시간을 내어 주는 서정운이었다. 지금도 선뜻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망설인 것은, 얼굴 마주치면 마음 다잡기가 쉽지 않아서다. 지금도 바로 옆에 있는 한무화의 기척을 느끼며 이렇게 심장이 덜컹거리는데.
“글쎄……, 시간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일단 그때 가서 연락하는 걸로 하자.”
한무화는 조금 이상한 얼굴을 했다. 그로서도 뜻밖이었던 것 같다. 물끄러미 서정운을 바라보던 그는, 그러나 그럴 수도 있으리라는 듯 순순히 “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이미 캄캄한 밤이 된 하늘에는 보름달이 걸려 있다. 어둑한 길을 왜 이리 밝게 비춰 주는지 모르겠다. 옆에 선 사람의 얼굴이 이렇게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도 좋을 텐데.
외길을 걸어 나와 본채의 돌담길에 이를 즈음, 그제껏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던 한무화가 별안간 입을 열었다.
“서정운 사범님.”
서정운이 돌아보자 한무화는 그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까 말씀 말입니다만,”
“무슨 말?”
의아하게 되묻는 서정운에게 한무화가 말한다.
“가까운 사이 이상으로 좋아질 것 같으냐고 말씀하셨잖습니까.”
순간 목 안쪽이 꽉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가슴속이 욱신하고 조여드는 것 같아 일순 호흡마저 줄어든다.
서정운은 빤히 한무화를 보았다. 여느 때와 같이 무표정하고 담담한 그 얼굴은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생각하던 서정운은 그때 짧은 찰나 한무화의 낯이 굳어졌던 걸 떠올렸다. ……그래, 미안해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무슨 말이든 듣고 싶지 않았다. 물에 퉁퉁 불어 있는 마음은 조금만 손대도 생채기가 날 것 같았다. 지금은.
“계속 그게 마음에 걸려서 기다렸던 거야?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었는데. 그거, 없었던 걸로 하는 게 좋겠어.”
“……. 예?”
한무화가 되물었다. 잘 못 들었다는 듯. 아니, 잘 들렸을 테지만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이.
“못 들은 걸로 해. 나도 말 안 한 걸로 할 테니까.”
서정운은 한무화를 마주 보며 조용조용 말했다. 한무화는 그런 서정운을 뚫어질 듯 바라본다. 아직껏 이해하지 못한 듯,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것처럼 쳐다보던 한무화가 희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것마저, 뭐가 뭔지 잘 몰라 당혹스러워 하는 커다랗고 어여쁜 강아지 같아서,
“…….”
서정운은 손을 뻗었다. 바스락 소리가 날 것만 같은 짧은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쓸어 본다. 얌전히 그 손길을 받으면서도 기묘한 눈으로 서정운을 구석구석 바라보는 한무화를, 서정운도 말끄러미 쳐다본다. 천천히,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쯤은 괜찮겠지. 이쯤은 괜찮을 거야. 그렇게 생각한다.
“이 정도가 가장 좋은 거리였는데.”
서정운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한무화는 이상한 얼굴을 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잘은 모를 것임에도, 마치 본능이 그에게 뭐라고 속삭이기라도 한 듯 표정이 기묘하게 움틀거린다. 허를 찔린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빛으로.
“서정--.”
빤히 서정운을 들여다보던 한무화가 언뜻 눈썹을 꿈틀하며 막 입을 열었을 때였다.
본산으로 이어진 나무 문이 삐걱 열리며 돌담 저편에서 한 사람이 본채로 넘어왔다. 사무직원 중 누군가와 거기까지 같이 온 듯 “그래, 그럼 그렇게 처리하도록 해.”라고 말하고는 정무도가 아닌 가족의 영역으로 넘어선 그는 한수일이었다.
자신의 양아들과 서정운을 거기서 떡하니 마주칠 줄은 몰랐던 그는 멈칫 걸음을 멈추고는 둘을 번갈아 보다가, 이윽고 서정운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역시 오늘은 외부 시찰을 나갔다가 늦게야 돌아왔지만 이미 오후에 벌어진 소란에 대해서는 들은 바였다.
“자네 아직 안 돌아갔었나? 합숙 중단하고 퇴거하게 되었다더니? 헌데 무화 넌 어디를 가는 길이냐?”
못마땅하게 눈썹을 치켜올리고서 서정운에게 말한 그는 곧이어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무화에게 말을 이었다.
서정운은 한무화가 대답하기 전에 먼저 한수일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나오지 마.”
한무화에게 짤막하게 덧붙여 말한 서정운은 선뜻 걸음을 옮겨 나무 문턱을 넘어섰다. 그리고 한무화가 걸음을 뗄 틈도 없이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나무 문을 닫았다.
끼익…… 탁.
그 소리와 함께 문은 굳게 닫혔고, 서정운은 그대로 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은 처음에는 느릿했지만 점차 빨라졌고, 그렇게 본산의 문에 다다를 때까지 그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