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mission 4.
그것은 누구의 눈에도 명확했다.
소리도 없이, 깨끗하게 선명한 선을 그리며 허공을 돌아든 남자는 몸을 틀 사이도 없이 바닥에 떨어졌고, 압도적인 힘에 눌려 바닥에 부딪혔음에도 전혀 타격이라곤 없는 것처럼 멍하니 천장을 보며 누워 있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
“--.”
한무화는 짧은 숨을 내쉬곤 남자에게서 물러섰고,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듯 고요하던 주위는 한무화가 대련단 위에서 내려간 뒤에야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한무화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명확했다. 이미 몇 년밖에 되지 않은 이력치고는 놀랄 정도의 수준에 달해 있던 남자가, 이제 한층 더 가속도가 붙은 것처럼 무섭게 자라나고 있다. 잘 모르는 사람의 눈에조차 보일 정도로.
한무화 역시 알고 있었다. 어느새 그는 그 평생토록 붙들려 있을 것만 같던 진창에서 벗어나 있었고, 그의 두 다리는 자유롭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달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달릴 수는 없다. 달리기에는 목이 말랐다. 알 수 없는 갈증이 얼마 전부터 목구멍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것만이 그의 발목을 무겁게 붙들고 있었다.
“와……, 굉장한데. 이러다 하계 선수권 대회에서도 우승하는 거 아냐?”
“하하, 하계 선수권은 정무도 정규 대회들 중에서 제일 크게 열리는 대횐데, 최상위 선수들 다 빠졌던 춘계 선수권이랑은 비교도 안 되지. 뭐 그래도 가능성이 없지야 않겠다. 기대할게.”
대련단 옆에서 팔짱을 끼고서 진지한 눈으로 지켜보던 선수들 몇몇이 한무화에게 말을 걸어왔다. 같은 체련 선수로 웃는 낯을 뒤집어쓰고 있음에도, 그것이 순수한 격려나 칭찬이 아니라는 건 그 웃음기 없는 시선을 굳이 볼 필요도 없이 느껴졌다. 감추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경계. 시기. 질투.
여태 여러 운동들을 해 오며 각각 상당한 수준까지 올라갔던 한무화에게는 흔하게 있어 왔던 일이다. 대수로울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이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 보라고, 서정운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낮에는 그를 알은체하지 않았던 건가. 저들과의 관계를 한무화는 손톱만큼도 개의치 않았었는데.
“…….”
이것은 이날의 마지막 대련이었다. 사범 합숙 수련이 끝날 날도 코앞으로 다가왔다. 땀을 닦으며 대수련장에서 나온 한무화는 저녁 시간이었음에도 아직 밝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름이 확연히 다가와 있었다. 저녁에도 덥다.
그때 휴대 전화의 알림음이 울렸고, 한무화는 전화를 꺼내었다. 서정운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러면 점심 지나서 와. 오후에 볼일이 있어서 나가야 하지만 한두 시간쯤이라면 시간이 될 거야.」
한무화는 가만히 숨을 들이쉬었다. 아까부터 줄곧 묵직했던 마음이 조금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주말에 찾아가도 되겠느냐는 한무화의 물음에 제법 오랜 시간을 두고서야 처음 돌아온 대답은「주말에 일이 있어서 안 될 것 같아」였다.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 열세 글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한무화는 새로 배운 기술이 몸에 좀체 익지 않으니 잠시라도 봐주면 좋겠다고 재차 청했고, 점심쯤 보냈던 그 문자에 답이 온 게 지금이었다.
그나마도, 전화를 했더니 받지 않고 한참 뒤에야 「다른 일을 하느라 전화가 온 줄 몰랐어. 무슨 일이야?」라고 문자로 연락이 와서, 문자를 주고받아 나온 결과다.
“…….”
한무화는 가만히 문자를 보다가 전화를 집어넣었다. 기묘하게 까끌거리는 기분이다. 이유 모를 초조감과, 목구멍이 메말라 까슬까슬하게 일어나는 느낌. ……목이 마르다.
어느 결에 털 뭉치가 졸랑졸랑 다가와 한무화의 발치에서 맴돌았다. 꼬리를 흔드는 어린것을 달랑 집어 든 한무화는 그놈을 팔에 안고 걸음을 옮겼다. 이렇듯 알 수 없이 일렁이는 기분을 달랠 방법을 그는 수련 말고는 달리 알지 못했다. 본채의 도장으로 가 봐야겠다.
사범 수련 합숙은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앞으로 하루 이틀이면 끝이다. 그러고 나면 주말이 온다.
본산에서 본채로 넘어가 돌담을 끼고 걸어가는 도중에 품에서 바르작거리는 털 뭉치를 내려놓고 그놈과 나란히 걸어가던 한무화를 도중에 멈춰 세운 것은, 외당과 이어지는 갈림길에서 마주친 큰 어르신, 그의 조부였다.
산책을 하다 돌아가는 길인 듯한 조부는 한무화를 보고는 주름진 얼굴에 활짝 웃음을 띠며 마침 적적하던 참인데 잘되었다, 바둑이나 두지 않으련, 하고 한무화를 외당으로 이끌었고, 한무화는 순순히 그의 뒤를 따랐다. 고적하고 아늑한 외당은 한무화가 마음에 들어 하는 곳 중 하나였고 조부와 바둑을 두는 것도 좋아했다.
“허허, 인석, 어느새 이렇게 늘었느냐? 나 몰래 정운이랑 대국 많이 했나 보구나.”
바둑판이 흰 돌과 검은 돌로 슬슬 채워지기 시작할 즈음 노인이 허허 웃었고, 한무화는 “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한적할 때에는 종종 서정운과 나란히 시간을 보내며 바둑도 제법 두곤 했었다. 서정운은 바둑판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길 때면 아는지 모르는지 늘 빙그레 웃음을 띠고 있었는데, 그 웃음 진 입매와 진지한 눈매가 묘하게 뚜렷이 대비가 되어 그럴 때면 한무화는 서정운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헌데 요즘 정운이는 왜 보이질 않으냐.”
노인의 물음에 한무화는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일이 있어서 도중에 합숙을 그만두셨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한무화를 보았다. 그 묵묵한 표정을 보고 있던 노인은 굳이 더 묻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뭔가 일이 벌어졌다 한들 후회할 일만 아니면 되었다. 정운이는 제가 후회할 일은 하지 않는 녀석이니 그건 염려할 것 없지.”
노인은 딱, 돌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바둑을 두다 보면 대국하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도 보이거든. 그 녀석은 후회할 길로는 가지 않는 녀석이야. 그래, 딱 하나, 정무도를 관두었던 것 빼고는. 그놈만큼 정무도를 제 살처럼 아끼는 놈이 없거든.”
그래서 결국 다시 돌아와 발을 걸치지 않았느냐, 하고 노인이 껄껄 웃었다. 그러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놈도 소문은 그리 돌아도, 좋은 아가씨 잘 만나 자리 잡고 나면 성실하게 잘살 텐데. 제 배우자 생기면 딴 데 눈 돌릴 놈은 아니니.”
돌을 집어 들던 한무화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곧 까만 돌을 손안에서 가만히 굴리며 한무화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다. 그는 본인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는 성의를 다할 터였다. 설령 그 자신의 마음이 어떻다 한들. --그때, 한무화의 손을 떼어 내고 그녀에게 갔던 것처럼.
“--.”
불현듯 한무화의 옆에 엎드려 있던 털 뭉치가 귀를 쫑긋하더니 고개를 들어 한무화를 보았다. 겁먹은 것처럼 가느다랗게 끼잉, 하고 소리 내는 그놈을, 한무화가 가만히 손 내밀어 다독여 준다. 그런 뒤 딱, 바둑돌을 내려놓은 그는 그 직후에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허허, 어쩐 일로 너답지 않게 마음이라도 흐트러진 게냐.”
노인이 허허 웃더니 돌을 내려놓았다. 한무화는 지그시 형국을 보다가 천천히 돌을 놓았고, 그 뒤로 한동안 돌 놓는 소리만 드문드문 이어졌다.
문득 노인이 웃었다.
“너는 후회할 일이 생겨도 금방 바로잡는 편인데……, 아직은 수가 좀 거칠어.”
노인이 흰 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돌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조심해야 해. 때로 바로잡을 기회가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니.”
딱.
그 소리와 함께 한무화는 국면이 막힌 것을 깨달았다. 그는 돌을 집어 들 생각도 않고 뚫어질 듯 바둑판을 응시했다.
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근래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각이다.
그래, 마치 그때 같다.
‘네가 나를 좋아한다면--누가 날 필요로 한들 가지 않을 거야. ……내가 좋아질 것 같아?’
서정운이 말했던 때.
서정운은 그렇게 하면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가 바라는 답을 주면 그는 이제 한무화의 손을 걷어 내지 않을 터였다.
그 찰나 처음 든 생각은 좋아질 것 같다고 말해서라도 옆에 두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어 두 번째로 든 생각은 본인의 단순한 바람 때문에 그런 거짓말을 할 생각이 든 스스로에 대한 아연함이었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거짓말--그 말의 기묘한 괴리감.
한무화는 서정운을 높이 사며 존중하고 있었다. 인간적으로도 좋아했고, 함께 있으면 편안했다. 그러나 서정운이 한무화에게 끌리는 것과 같은 종류의 감정으로 그에게 끌리지는 않는다--그렇게 여겼다.
그런데.
‘--.’
뭐지.
불현듯 낯설어졌다. 당혹스러울 만큼 낯설다.
눈앞에 서 있는 남자가, 이미 익숙하게 알아 온 이 사람이, 한무화가 여태 알아 온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뭔가 달라진 것 같다. 뭔가. 뭔가 중요한 것이.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달라진 건 나인가.
그러나 여전히 갈피를 잡을 수 없다.
한무화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서정운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서정운 역시 한무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어 한무화는 조금 전에 들은 그 말이 서정운의 새삼스러운 고백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미 예전에 한무화에게 한 번 마음을 드러냈던 적이 있는 그가 다시 한번 드러내어 표현한 것이다.
서정운의 표정 아래에 깔려 있는 긴장감. 그 떨림. 일말의 기대, 그리고 불안.
숨이 막혔다.
한무화는 목구멍 속이 꽉 막힌 것 같은 기분으로 서정운을 보았다. 그것은 몹시 기묘한 기분이었다. 분명 숨을 쉬고 있는데도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것 같고, 혀가 움직여지는데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감각이 당혹스럽도록 낯설고 이상해서 한무화는 서정운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지금 말해야 한다.
본능적으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뭘.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뭔가 중요한 것을 말해야 했다. 머릿속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말들 속에서 중요한 진실을 잘 골라내어 명확하게 말해야 하는데. 그중 자신이 골라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얼른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
물끄러미 한무화의 얼굴을 구석구석 보고 있던 서정운이 문득 웃는가 싶었다. 가만히 웃으며 한무화의 어깨를 두드린 그가 한 걸음 물러선다. 됐어,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한무화는 더럭, 가슴속에 뭔가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걸 느낌과 동시에 깨달았다.
그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어쩌면 두고두고 후회할지도 모를 어떠한 기회를.
아니다. 뭐든 말을 해야 한다. 찰나의 순간 어긋나 버린 걸 바로잡아야 했다.
그러나 그가 미처 말을 골라내기 전에 그 자리에는 다른 이들이 찾아들었고, 그 순간은 그대로 닫혀 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놓치지 말았어야 할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다시 한번 생각한 것은, 그날 밤이다. 그날 밤, 도장에서 나오는 그를 기다려 같이 길을 걸어가던 때.
--이 정도가 가장 좋은 거리였는데.
한무화의 머리를 쓰다듬던 서정운이 중얼거렸을 때, 한무화는 목구멍까지 물음이 차올랐다. 뭘 없었던 걸로 하는 거냐고. 뭘 못 들은 걸로, 뭘 말 안 한 걸로 하겠다는 거냐고.
그러나 한무화는 결국 그 물음을 꺼내지 못했고, 스스로도 왜 그걸 물어보지 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하루, 이틀, 사흘,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서정운과 연락이 뜸해지게 되면서, 왜 그때 묻지 못했는지를 서서히 알아차렸다.
그것은 어떠한 느낌을 확인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서정운이 가만히 한무화를 밀어내고 있다는.
“--.”
묵묵히 바둑판을 내려다보고 있던 한무화는 어느 순간 손을 들었다. 그 손은 딱--, 거침없이 돌을 놓았다.
석상이 된 듯 한참을 미동조차 없이 앉아 있던 그가 그 돌을 내려놓은 순간, 멈춰 있던 시간은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국면을 내려다보던 노인이 희게 센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빙그레 웃는다. 뒤이어 까만 돌을 쫓아 흰 돌을 내려놓는 노인의 손길도 거침이 없었다.
딱. --딱. 딱. --딱.
잇따라 울리는 돌 소리 속에서 둘 중 누구도 물러서는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흰 돌을 쫓는 까만 돌은 거침없는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본인이 위험에 드러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살을 베어 내는 타격도 감수하며, 오로지 가장 원하는 것 하나만을 이루기 위해 맹렬한 공세를 편다.
한동안 침묵 속에 공방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노인이 웃었다.
“허허, 이놈……, 노인을 이렇게 힘들게 하다니, 원하는 건 어떻게 해서든 얻을 놈이로구나.”
한무화도 희미하게 웃었다. 여전히 눈으로는 바둑판을 덧그리며 그가 담담히 말한다.
“바둑은--좋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내가 뭘 놓치고 있는지가 보이니까요. 어떻게 해야 할지도.”
힘든 것은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를 때다. 그것이야말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래, 지금처럼.
“그래, 그래. 뭐든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차차 보이는 법이지.”
노인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한무화는 노인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차차 보일 것이다. 그러고 나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자연히 따라올 터였다.
한무화는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며, 그때쯤 되면 이 해소되지 않는 목마름도 잦아들리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