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한씨 문중의 종친회는 매년 7월 초엽에 열리곤 했다.
해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2, 3일에 걸쳐 열리는 종친회에는 정재계 각 곳에 포진해 있는 문중 친척들이 바쁜 와중에도 당일로라도 들렀다 가곤 해, 그 규모가 작다 할 수 없었다.
문중 회의도 하지만 일가친척들이 오랜만에 얼굴 마주해 소식을 나누는 친목 도모가 주요 목적인 종친회는 정무도 행사와는 엄연히 구분되어 있었으나, 정무도를 계승하는 이들이 한씨 문중의 종가이다 보니 종친회에서 마주치는 이들의 상당수가 정무도 관계자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정작 한씨 문중에 속하지 않은 이들일지라도 정무도 핵심부에 깊이 관련되어 있으면 종친회에도 불려오곤 했는데,
“……그게 의무 사항은 아닌데 말입니다…….”
한호영은 에너지 드링크를 홀짝홀짝 들이켜며 중얼거렸다.
본산에 도착하자마자 본채로 가 큰 어르신과 정원사범들께 인사를 드리고 나오던 서정운은 안마당의 아름드리나무 아래 걸터앉아 있던 한호영을 보고 그리로 걸어갔다.
“너는 종손이란 놈이 손님맞이 안 하고 뭐 해.”
“아이고, 사형, 아침부터 내내 시달리다 지금 겨우 잠깐 숨 돌리는 겁니다.”
한호영은 콧잔등에 주름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과연 낯빛이 은근히 수척한 것이 하루 종일 맘 편히 쉬지 못한 낯빛이긴 하다. 이 녀석을 보면 종가 종손이라는 게 할 짓이 못 된다는 생각이 종종 들곤 했다.
“사형이야말로 종가 어르신 큰 제자라는 양반이 어째 어르신들한테 인사만 드리고 바로 나오셨습니까.”
“내 성이 한가더냐?”
“……그런 분이 결국 오시기는 오셨구랴.”
나는 안 가겠다느니 어쩌니 하시더니, 하고 한호영이 흰 눈으로 흘겨보았다. 서정운은 그 옆에 앉으며 막 에너지 드링크를 들이켜던 한호영의 뒤통수를 살짝 밀어 주었다. 풉! 하고 음료를 쏟은 한호영이 투덜투덜거리며 옷을 털어 낸다.
“유 사범은 결국 파원됐다며.”
“예, 이제 일반 사범이죠. 그나마 사범직 박탈은 아닌 게 어디예요.”
서정운은 말없이 본채를 바라보았다. 일반 사범에서 하원사범으로 등원하기 위해 쏟았던 그 오랜 노력들이 허사가 된 셈이다. 그 사건에 대해 서정운은 소문들이 옳다는 근거가 나오지 않아 그 이상의 징계는 떨어지지 않았지만, 오늘 이곳에 들어서면서도 스친 몇몇 면면들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게 해서나마 원하는 걸 얻기나 했으면 됐지.”
서정운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 서정운을 안쓰럽기도 하고 속도 상한다는 복잡한 눈으로 쳐다보던 한호영이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말할까 말까, 내키지 않는 투로 입을 연다.
“무화랑은 따로 좀 봤어요? 합숙 도중에 나간 뒤로는 사형 본산에 오는 거 오늘이 처음이잖아요.”
“응? 아니, 그 주말에 잠깐. 기술 좀 봐달라고 해서 왔었거든. 저녁에 약속 있어서 한두 시간 보고 금방 돌려보냈어.”
약속이 있었다기보다는 일부러 잡았던 거지만, 하고 서정운은 손을 내민다. 한호영은 “이거요?” 하고 들고 있던 드링크 병을 거꾸로 들었다. 이미 텅 빈 지 오래다. 그 대신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그 안에서 초콜릿을 한 조각 꺼내어 건네주며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가끔 물으시더라구요. 무화랑 사형은 따로 보는 것 같더냐고.”
“그래서, 첩자는 너냐?”
“아오, 제가 잘도 그러겠습니다!”
한호영이 성질을 내며 서정운의 발을 차는 시늉을 했고 서정운은 장난이었던 듯 피식 웃으며 발을 피했다.
“안 봤어. 일 때문에 진짜로 바쁘기도 했거든.”
“아, 그때 말했던 그 뮤지컬이었던가 하는 그 일요?”
“응.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고. 일단 한고비 넘기긴 했는데 한동안은 계속 바쁠 것 같아.”
“그럼 사형 하계 선수권 대회 연습은 어쩌려고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걱정스레 눈을 둥그렇게 뜨는 한호영을 서정운은 이놈이 뭘 잘못 먹었나 싶은 얼굴로 빤히 보았다. 무화도 그렇고, 이놈들이 짰나…….
“하계 선수권이 나랑 뭔 상관이야? 난 선수도 아니고 지도사범도 아닌데.”
“아니라니? 아버지는 당연히 지도사범진에 사형도 꼽아 두고 계시던데요?”
안 그럴 거면 사범 수련 합숙은 왜 참가했겠냐면서, 라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한호영을 서정운은 멍하니 쳐다본다. 이내 앓는 소리를 삼키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아니야, 아니라니까.”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그러나 반쯤 풀이 꺾여 있었다. 그는 사부를 진지하게 대해서 이겨 본 적이 없었다.
종친회가 끝나면 본산에서는 본격적으로 하계 선수권 대회 준비를 시작하게 된다. 정무도의 각종 대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하계 선수권 대회는 선수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 하계 선수권을 준비하는 선수들은 이미 몇 달 전부터 수련을 하고 있었다.
“무화도 이번에 선전을 기대해 볼 만하던데…….”
한호영이 불쑥 중얼거렸다.
“그 녀석 요즘 기세가 무섭더라구요. 정말 하루하루 사람이 달라지는 것 같아서……,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무서울 정도예요.”
그간 사슬에 묶여 있다가 드디어 풀려난 것처럼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것은 서정운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사범 수련 합숙을 끝내고 그 주말 서정운의 집으로 찾아왔을 때에도 그랬다. 서정운은 제대로 몸에 배지 않는다며 기술을 구사해 보이는 한무화를 보며 적잖이 놀랐었다.
서정운이 본산에 나가지 않은 지 고작 며칠인데, 그 사이에도 한무화는 눈에 띄게 가다듬어져 있었다. 서정운이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욱 빨리, 삽상하게, 그는 그의 모습을 이루어 가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한무화는 천천히 기술을 피로해 보인 뒤 서정운을 돌아보았고, 서정운은 묵묵히 그를 지켜보다가 ‘힘이 많아서 그래.’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예전이라면 보다 많은 말들을 곁들여야 했을 텐데, 이제 한무화는 그 막연하고 단순한 말만으로도 금세 자신이 간과했던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 깨닫는다.
서정운이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본인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천천히 기술을 펼쳐 보이는 그의 움직임은 조금 전보다 확연하게 나아져 있었고, 횟수를 거듭함에 따라 점점 더 나아졌다. 더 이상 서정운이 입을 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러니까.
이렇게 때문에, 그는 아껴 다듬어야 할 정무도의 커다란 나무인 거다.
기특하고, 아쉽고, 감탄스럽고, 애틋한 감정이 뒤섞였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만 있는 서정운의 앞에서 수차례 움직임을 반복한 한무화는 그럭저럭 움직임이 몸에 익은 듯했다--아니, 그럭저럭이 아니라 저 정도면 거의 완벽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문득 시계를 본 그는 서정운을 돌아보았다.
‘저녁에 약속 있다고 하셨었지요. 언제쯤 나가셔야 합니까?’
‘응? 아--, 이제 슬슬 나갈 준비 해야지.’
사실 학창 시절 동호회 모임이라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긴 했지만, 서정운도 시계를 보며 말했다. 늦게 가도 상관없지만 오늘은 정시보다 일찍 가겠구나 생각하며.
한무화는 고개를 끄덕이곤 서정운에게 다가섰다.
‘예, 그럼 오늘은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서정운 사범님이 원하시는 건 평소와 같으십니까?’
언제나 지도 후 서정운이 바랐던 것은 똑같았으므로 한무화가 던진 그 물음도 형식적인 투다. 서정운의 집으로 와 그의 수련실에서 연습을 하고 나면 늘 한무화가 앉아서 서정운과 입술을 겹치곤 하는 그 자리에 막 앉으려던 한무화에게, 서정운이 ‘어, 아니,’ 하고 말했다.
‘아냐. 그냥 밥이나 사 줘.’
‘--, 밥이요?’
한무화는 자리에 앉으려다 멈칫했다. 그리고 잠시 뚫어져라 서정운을 바라본 그가 의아한 낯을 띠더니 확인하듯 되물었다. 서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 아냐. 그냥 나가는 길에 커피나 사 줘. 그게 낫겠다. 한동안은 일 때문에 시간이 안 날 것 같으니까, 언제 볼지도 모르는데 굳이 미루지 말아야지.’
‘…….’
서정운은 그의 얼굴을 마주 보지 않으려 슬쩍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지금도 반사적으로 이렇게 저 입술을 맛보고 싶은데, 그를 보기라도 하면 견딜 수 없이 욕심이 세어질 것 같았다.
서정운의 옆얼굴에 한무화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언뜻 시야 한 귀퉁이에 들어온 그의 얼굴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은 듯 몹시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내,
‘……예. 그러면 나가는 길에 사 드리겠습니다.’
하는 조용한 대답이 돌아왔고, 서정운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서정운을 응시하고 있는 한무화와 눈이 마주치곤 멈칫하고 만다. 생각에 잠긴 듯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언제 볼지도 모른다는 건, 언제까지 바쁘시다는 겁니까?’
‘음, 글쎄……,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제법 걸릴 거야.’
적어도 너를 봐도 이렇게 가슴이 욱신거리지 않을 정도가 될 때까지는 바쁠 거다. 그게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속으로만 그렇게 말하는 서정운을 한무화는 묵묵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말하려는지 언뜻 그의 입매가 움칫하는 듯했지만 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그날은 끝이 났다.
“……어림도 없지, 어림도 없어…….”
서정운은 자책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한동안 안 보려 그랬는데. 안 보다 보면 좀 잊히려니, 바쁘다 보면 생각도 안 하게 되려니, 그렇게 생각하며 꾹꾹 참았는데, 그 인내는 보름도 안 돼서 바닥났다.
아무리 몇 날 며칠 밤새워서 일에만 골몰해도 계속 생각이 떠올랐고, 잊히지도 않았다. 하루하루 갈수록 점점 더 보고 싶어 죽을 것만 같다. 그래서 결국 ‘안 가!’ 하고 한호영에게 기세 좋게 외쳐 놓았던 종친회까지도 이렇게 어슬렁어슬렁 찾아오고 말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의지박약한 인간인 줄은 몰랐는데…….”
“정무도 통틀어 사형만큼 독한 인간이 없는데 무슨 소리세요.”
이 양반이 벌써 더위를 먹었나, 옆에서 한호영이 코웃음 치며 속 모르는 소리를 한다. 서정운은 홀로 머리를 쥐어뜯다가 중얼거렸다.
“……무화는?”
“공항 갔어요. 미국에서 친척 형 오거든요. 무화네 집이랑 잘 지냈던 집이라서 무화가 마중하러 갔어요.”
그렇구나, 어쩐지 안 보이더라, 하고 우울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서정운을 가느스름한 눈으로 쳐다보던 한호영이 “그런데 사형, 나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건데……,” 하고 미심쩍게 입을 열었다.
“그 반지는 뭐예요?”
몹시 수상쩍다는 듯이 서정운의 왼손을 쳐다보며 묻는 한호영에게 서정운이 흘끔 시선을 던졌다.
“애인 생겼어.”
“……, 옝?”
머리 위에서 폭탄이 터져도 이렇게 황당하지는 않겠다는 얼굴로 쳐다보는 한호영에게 서정운은 약지에 낀 반지를 돌돌 돌리며 덧붙였다.
“……라는 걸로 해 두려고. 그럼 여자가 좀 덜 붙을 것 아냐.”
사실 큰 효과는 없는 것 같긴 하지만.
뮤지컬 작업을 하면서 현장에 몇 번 나가는 동안 이미 ‘그 반지는 뭐냐’라는 한바탕 소란을 겪고 난 서정운이었다. 삽시에 사람들의 관심이 들끓어 당장 소문의 표적이 되었지만, 애초에 제대로 된 여자가 들러붙지 않았던 서정운에게서 이제 와서 ‘애인이 있다 한들 골키퍼는 바꾸면 그만’이라고 주장하는 진상 및 꽃뱀이 떠나갈 리 없었다.
하지만 서정운은 반지를 빼지 않았다. 손에 익지도 않았고 또 자칫하면 빠질 듯 헐렁해서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게 꼭 마지막 하나 남아 있는 지푸라기 같아서.
“그래서 효과가 있긴 해요……?”
헛소리도 무슨 이런 헛소리가 다 있지? 싶은 얼굴로 멍하니 서정운을 쳐다보던 한호영이 의심스럽게 물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래요, 뭐든 시도해 봐서 나쁠 거야 없겠죠. ……아니지, 외려 사형만큼 여자 운 사나운 사람이라면 ‘애인도 있는 놈이 딴 여자한테 집적거린다’는 소문이 새로 퍼질지도 몰라…….”
너무 그럴싸한 추측이라 항변할 말도 떠오르지 않는 서정운이었다. 이놈은 가끔 쓸데없이 지나치게 예리하단 말이야…….
“그런데 난 또 하나 더 신경 쓰이는 게,”
한호영이 다시 미심쩍은 눈초리로 반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휙 손을 뻗어 그 반지를 만지작거려 보고는 말했다.
“이거 사형이 산 거 아니죠? 크기가 안 맞잖아.”
“…….”
이것 봐, 쓸데없이 지나치게 예리하다니까.
“누구예요?”
서정운은 못 들은 척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에 구멍 날 것처럼 빤히 쳐다보는 한호영의 눈길 앞에서 서정운의 얼굴이 점점 더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니 왜 이렇게 빨개지나, 의아하게 쳐다보던 한호영은, 그러나 이번에도 쓸데없이 지나치게 예리했다. 갑자기 눈을 부릅뜨더니,
“걔가 사 줬어요, 설마?!”
더럭 소리를 지르는데, ‘걔’가 누군지는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피차간에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대답할 것도 없었다. 슬슬슬 시선을 돌리는 서정운을, 아예 어깨를 붙들고 돌려 앉히면서 한호영이 재차 묻는다.
“걔가 왜?!”
“……. 그냥, 가르쳐 줘서 고맙다고. 이걸로 방패라도 해 보라고.”
한호영은 입을 떡 벌리고 서정운을 쳐다보았다. 이걸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도 안 온다는 얼굴이다. 그러다 손으로 얼굴을 덮은 한호영은 낮은 침음을 흘리며 “사형…….” 하고 중얼거렸다. 더 이상 뒷말이 이어지지 않는 그 부름에 걱정과 염려가 스며 있다는 걸 서정운은 안다. 그래서, 그는 한호영의 등을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걱정할 것 없어. 나도 헛생각은 안 해. ……그래도 어차피 의미 없는 물건인데, 이쯤은 갖고 있어도 되잖아.”
아무 의미도 없는 반지인데. 하다못해 우정 반지라는 의미조차도. 서정운은 천천히 반지를 돌리며 씁쓸한 숨을 쉰다.
그런 서정운을 한심하다는 듯, 안쓰럽다는 듯, 속상하다는 듯 쳐다보던 한호영도 덩달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리다 문득 눈썹을 치켜올렸다.
“쟤는 우리 집 식솔이면서 왜 양반 못 되게 이 타이밍에 나타난답니까……. 에고, 멀리서 형님 오셨네.”
그렇게 말하며 어차, 하고 일어나는 한호영의 저 앞으로 두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무화와, 그가 공항까지 데리러 갔다는 그 친척인 듯한 남자다.
서정운의 심장이 쿵 뛰었다. 못 본 지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몇 년은 지난 것 같다. 그새 반갑고 그리워서 심장이 통통통 뛰었다.
두 사람 쪽으로 걸어가며 “형님 오셨어요?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하고 쾌활하게 말을 건네는 한호영의 뒤로, 서정운은 일어날까 하다가 나무 그늘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한무화를 멀리서 찬찬히 살핀다.
고작 보름이니 별반 달라진 게 없을 텐데도 요전에 보았을 때보다 왠지 수척해 보였다. 하계 선수권 준비에 들어갔을 테니 체중도 신경 써야 할 테고 연습량도 늘었을 테지만, 그래도 말라 보이는 게 안쓰럽다.
새로 온 친척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건네는 한호영의 옆에서 그들을 보다가 무심히 고개를 돌리는 한무화의 턱선도 보다 날카로워졌다고 서정운이 생각하던 때, 시선을 느낀 듯 한무화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다.
“…….”
얼결에 그대로 꼼짝 않고 그를 응시하는 서정운을 한무화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거기에 있는 게 서정운이 맞나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1, 2초 쳐다보던 그는, 그다음 순간 이쪽으로 성큼 걸어 나섰다.
시선도 떼지 않고 곧바로 서정운에게 걸어오는 그를 보며, 서정운은 뒤늦게야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인다.
“오랜만이야. 좀 야위었네.”
“언제 오셨습니까?”
“좀 전에. 저분이 네가 마중 갔다는 그 친척분이야?”
서정운이 턱짓으로 한호영이 있는 쪽을 가리키자 한무화는 그제야 아주 잠깐 시선을 떼 그쪽을 돌아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릴 때부터 집이 멀지 않아서 종종 왕래했었던 사촌 형님입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네.”
“예. 부모님들이 바쁘셔서 사촌 형제들과 자주 같이 시간을 보냈었는데 우리 형제들이랑은 나이 차가 좀 나서, 어릴 때 돌봐 준 삼촌 같은 느낌입니다.”
간결하게 설명해 준 한무화는 물끄러미 서정운을 보았다. 서정운은 한호영과 그 사촌 형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주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낱낱이 서정운을 바라보는 한무화의 눈길이 꼭 오랜만에 본 주인을 반가워하는 강아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잖아도 통통 뛰고 있던 가슴이 점점 빨라진다. 안 되는데.
“바쁜 일은 끝나셨습니까?”
“아니, 아직이지만 잠깐 짬이 나서.”
얼굴을 못 보겠다. 마음을 잘라야 한다고--최소한 줄이기라도 해야 한다고-- 작정한 마당인데, 얼굴을 보면 막아 놨던 둑이 터진 것처럼 확 더 반해 버릴 것 같았다.
묵묵히 앞만 보고 있는 서정운을 보며 한무화가 입을 다물었다.
“……사범님.”
의아한 눈치로 한동안 서정운을 보고 있던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연 순간, 서정운은 튕기듯이 훌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맞아. 사무실에서 본산 오면 들르라고 했는데 잊고 있었네. 잠깐 갔다 와야겠다.”
누가 봐도 자리를 뜨려 하는 기색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지만, 서정운은 지금은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조금만 더 심장이 진정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면 저도 같이,”
“아냐, 너는 네 사촌 형님 챙겨 드려야지. 네 볼일 아닌데 올 필요 없어.”
서정운은 손을 내저어 한무화를 만류하곤 얼른 자리를 떠 버렸다. 성큼성큼 걸어 본산 쪽으로 넘어가면서 서정운은 자신이 마치 도망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같은 게 아니다. 도망치는 거다. 억눌러야 하는 마음에서.
“오는 게 아니었는데.”
서정운은 한숨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봤더니 그새 마음이 가라앉긴커녕 더 세차게 뛰었다.
그래서 그는, 뒤에 남겨진 것처럼 우두커니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는 한무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는 것도 몰랐다.
*
오후 내내 친척들이 한둘씩 끊이지 않고 찾아왔다. 와서 인사만 나누고 금세 돌아간 이도 있고 앞으로의 3박 4일간 주욱 머무를 이도 있는데, 그들을 맞이하는 본채의 식솔들은 내도록 바쁘기 짝이 없었다.
저녁쯤 되자 이날 올 사람은 거의 다 모여, 본채는 잔치라도 열린 것처럼 번잡했다. 그나마 가장 커다란 일거리라 할 수 있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자 하루 종일 분주히 돌아다녔던 본채 사람들은 그럭저럭 쉴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서정운도 마찬가지였다.
열 살도 되기 전부터 본산에 드나들기 시작해 이제는 본채에 사는 식솔들이나 마찬가지인 서정운이다. 심지어는 한수일조차도 실상은 ‘좀 까다롭고 거북한 작은아버지’ 같은 느낌일 정도였으니 다른 가족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서정운이 손님이라는 인식은--본인조차도-- 없어 온종일 짐 나르고 집채 정리하고 장 봐 오는 등 쉴 틈이 없었는데, 심지어는 저녁을 먹은 뒤 문중회의를 하는 자리에도, 서정운에게 왜 안 들어오냐고, 얼른 들어오라고 부르는 친척조차 있었을 정도다.
그러나 들어갈 리 없다.
한씨가 아니라서일 뿐만 아니라, 문중회의라고 해 봐야 오랜만에 만난 집안 어르신들이 온갖 잡담들을 아주 길게 늘어놓는 자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주로부터 삼 대, 육촌까지 불려 들어간 자리에서 빠져나온 서정운은 포도 한 송이를 야금야금 먹어 치우며 안채 마당에 있는 커다란 버드나무 아래에 앉아 이제야 겨우 찾아온 육신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제야 숨 좀 돌리겠다. 서정운은 사랑채며 안채며 별채며,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이 모여앉아 환담을 나누는 기척들을 멀찍이 들으며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선선하고 좋은 여름밤이다.
어디선가 누렁이가 나타나 서정운의 옆에 앉았다. 사료 비린내가 나는 걸 보니 이놈도 배 채우고 왔나 보다. 서정운은 놈의 귓등을 북북 긁어 주었다.
“그 어두컴컴한 데서 뭐 해요? 음침하게.”
그때, 아까 문중회의에 끌려 들어갔던 한호영이 이쪽으로 슬리퍼를 직직 끌고 걸어왔다. 그는 서정운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에고고, 죽겠다.” 하고 중얼거린다. 그러곤 서정운의 포도 줄기 가운데를 뚝 잘라 반을 가져갔다.
“넌 왜 여기 있어. 문중회의 끝났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말 많은 어르신들 모이셨는데. 이제 약주까지 깔리면 자정 되기 전에 끝이나 나면 용치.”
하도 지겨워서 난 잠깐 피신 나왔어요, 하고 한호영은 포도를 뚝뚝 따먹었다.
“어차피 수십 명 들어앉은 자리에서 나 하나 잠깐 자리 비운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고, 할 얘기라고 해 봐야 매년 하는 선산 관리나 토지 개발, 사업 얘기나 하겠지, 올해는 별로 중요한 안건도 없어요. 지금도 그냥 어르신들 잡담 나누고 있는데 뭐. 올해 정무도 하계 선수권은 어떻게 되겠느냐, 그런 얘기 하시던데.”
과연, 어르신들이 정련과 체련으로 갈려 한동안 아웅다웅할 눈치가 보이니까 재빨리 도망 나왔나 보다.
“……무화 얘기 꺼내는 어른들이 많으시더만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입 많이 탔나 봐요. 하긴 그럴 만도 하지.”
한호영이 중얼거렸다. 서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주머니 안에 송곳 넣어 둔들 그게 표가 안 나겠냐.”
“주머니 안도 아니지, 사실. 그놈은 처음 등장하면서부터 춘계 선수권에서 대뜸 우승하긴 했었지.”
한호영은 콧잔등에 주름을 지으며 툴툴거렸다. 서정운은 웃었다. 하긴 여러모로 사람 입을 안 탈 수가 없는 남자다. 한호영은 포도알을 씨째로 우둑우둑 씹으며 말을 이었다.
“하계 선수권까지 사형이 무화 좀 더 다듬어 주면 어떻겠냐는 말도 잠깐 나왔어요. 아버지가, 정련 사범이 왜 체련 선수를 가르치냐고 역정을 내셔서 그 말은 금방 들어갔지만.”
정련이고 체련이고 나는 하계 선수권이랑 무관하다니까, 하고 서정운이 주장했지만 한호영은 귀담아듣는 눈치도 아니었다.
멀리 불이 켜져 있는 사랑채 건물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고 있던 서정운이 물었다.
“무화도 지금 저 안에 잡혀 있는 거지?”
“예. 작은아버지 옆에 앉아 있죠, 뭐.”
그래, 하고 서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버드나무 줄기 끝만 말없이 응시하는 서정운을 한호영이 흘끗, 마뜩잖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단 눈으로 쳐다본다.
참 복잡다단한 심경이다. 사형이 한무화에게 애태우는 건 반대하는데, 한편 사형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또 안쓰럽기도 하고.
한호영은 찌푸린 얼굴로 포도알을 씹다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울 아버지도 무화를 아끼긴 해요. 요 몇 년, 아니 몇십 년 거슬러 올라가도, 정무도 통틀어 그놈만 한 사람은 없었을걸요. 나만 해도 정련이고 체련이고 다 떠나서 그놈이 어디까지 성장하는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인데. 그러니까, 사형이 무화를 가르친다 한들 역정 내는 척은 해도 별말씀은 안 하실 거예요.”
“내가 싫어. 힘들어. 지금으로도 충분히 힘들다.”
서정운은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안 보고 버텨도 이렇게 마음 끊기 힘들어서 결국 도로 질질 끌려오고야 말았는데, 하물며 지도도 지금처럼 잠깐잠깐만 봐주는 게 아니라 정식으로 보게 될 양이면 마음 가다듬을 자신이 없었다.
한호영은 찌푸린 눈으로 서정운을 보다가 또다시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 그래도, 오늘 밤에도 무화 봐주기로 한 모양이더만요.”
“……. 피하려고 했는데…….”
결국은 잡히고 말았다.
오후 내 한무화를 피해 다닌 서정운이었다.
마치 누구를 찾아다니기라도 하는 것처럼 본채 안을 서성이고 다니던 한무화가 서정운을 발견하고 다가와서 말을 걸라치면,
‘어, 미안. 지금 창고에서 무쇠솥들 좀 꺼내다가 부엌으로 옮겨다 줘야 하거든.’
‘잠깐, 얼른 숯 뒤꼍으로 갖고 가서 불 지펴야 해. 급하댔어.’
‘안채에서, 모란채에 이불 몇 채 있는지 세어 봐 달랬는데 그것 좀 대신 해 줄래? 난 사부님한테 가서 본산 건물 이용 인가를 받아다가 사무실에 전해 줘야…….’
서정운은 서둘러 그 자리를 뜨거나 혹은 한무화를 떠나보내거나 했던 것이다. 물론 그때그때 했던 말이 거짓말은 아니라 오후 내내 워낙 바쁘긴 했다. 그러나 반쯤은 일부러 피한 게 아니었다고는 말 못 한다.
그런 일이 세 번쯤 거듭되자 한무화의 무표정한 낯이 눈에 띄게 더 무표정해졌지만, 그럼에도 그는 꾸준히 서정운을 찾아왔고 나중에는 ‘사범님, 이번에는 뭘 하면 됩니까?’라며 말을 걸어왔다.
결국 저녁이 거의 다 되어 더 이상 서정운이 도울 일이 사라졌을 즈음, 한무화는 다시 어김없이 서정운에게 찾아왔고 서정운은 더 이상 할 일도 시킬 일도 없었다.
‘아니, 이제 쉬어도 될 것 같아. 고생했어. 고마워.’
서정운이 가볍게 한무화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하자 한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 묵묵히 서정운을 바라보던 한무화가 ‘그러면 이제 여쭤보겠습니다만,’ 하고 입을 열었다.
‘제가 서정운 사범님께 뭔가 잘못을 했습니까?’
차라리 그 말투가 비난하는 것이었거나 따지는 것이었더라면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의아하고 또 조심스러운 말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서정운은 외려 말이 막혔다.
‘아니야.’
서정운은 고개를 저으며 그제야 한무화를 제대로 올려다보았다. 물끄러미 서정운을 내려다보는 그의 침착하고 잠잠한 눈매가 마주 보인다. 다시 심장이 울렁거렸지만 그 까맣고 순한 눈매를 보는 사이에 천천히 심장 소리가 잦아진다. 부드럽고 편하게.
‘아니야, 그런 거.’
서정운은 다시 한번 말하고는 새삼스럽게 한무화를 살폈다. 역시 야위었다. 굳은 턱선이 요전보다 더 두드러졌다.
‘너 왜 이렇게 말랐어.’
서정운이 혀를 차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무화는 천천히 느슨해진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연습은? 잘돼?’
‘꾸준히 하고는 있습니다. 밤에 잠시 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서정운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가만히 그를 보고 있는 한무화의 까만 눈을 보며 차마 거절할 수 없었고, 결국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어차피 어르신들 잡담은 밤이 이슥하도록 계속될 거다. 한호영의 말마따나 약주까지 깔렸으니 자정 전에는 끝나지 않을 터였다.
“자질이 너무 좋았어…….”
조금만 재능이 덜했던들. 조금만 못했던들. 그러면 조금쯤은 욕심내어 볼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래 본들 정작 본인이 날 좋아하지 않으니 아무 소용이 없긴 하지, 하고 서정운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서정운을 보며 한호영도 한숨과 함께 혀를 끌끌 차던, 그때였다.
“정운 오빠!”
갑자기 안채에서 여자애 하나가 달려 나오더니 서정운에게 맹렬하게 뛰어왔다. 거의 부딪칠 기세로 달려와 그의 바로 앞에서 멈춰 선 그녀는 서정운의 왼손을 덥석 잡아 들어 올리더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이네. 뭐야, 이게. 웬 반지야.”
“…….”
어릴 때부터 주말이면 가끔 본채에 놀러 오곤 하던 한호영의 사촌 여동생이다. 워낙 옛날부터 본산에 다녔던 서정운과도 남매처럼 잘 지내곤 했던 그녀는 서정운의 왼손 넷째 손가락을 더듬으며 눈을 치떴다.
“누구야. 어떤 여자야. 얼른 소상히 말해 봐!”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본 서정운은 선선히 입을 열었다.
“일하다 만났고, 키는 평균보다 훨씬 크고 몸매도 좋고 눈에 띄는 미인이며 목소리도 근사하고 예체능 계열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이야. 내가 먼저 고백했고 나이는 스물일곱에 사랑스럽고 성실하고 조용하고 착한 사람. 데이트는 그냥 서로 시간 날 때 하고 특별할 것 없이 그냥 집에서 놀거나 한강에서 산책하거나 맛있는 거 먹으러 가거나 해. 가족들은 해외에 사는데 일 때문에 한국 들어왔고 결혼 얘기는 아직 없어.”
녹음테이프 재생 버튼을 누른 것처럼 줄줄줄 읊어 대는 서정운의 답은 이미 오늘 열 번도 넘게 되풀이되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친척 아가씨들은, 놀랍게도, 서정운과 마주쳐서 ‘정운 오빠, 안녕? 오랜만이야.’라고 인사를 한 뒤 3초도 안 되어 당장 눈이 휘둥그레져선 서정운의 손가락을 붙들고 그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지금도 안채에 있던 이 여동생이 갑자기 달려 나와 물어본 걸 보니, 저 안에서는 현재 서정운의 애인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인 모양이었다.
어째 묘하게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설정이시네요, 실제 모델이라도 있나벼, 하고 옆에서 한호영이 서정운에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서정운은 팔꿈치로 놈의 옆구리를 찍었다.
“어쩜 이럴 수가 있어! 나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오빠랑 결혼하려 했는데!”
“……너네 부모님이 정운 사형 무진장 싫어하시는 건 알고 있냐?”
“무슨 상관이야? 어디 멀리 달아나서 결혼하고 혼인 신고 해 버리면 그만이지!”
당차게 대꾸하는 여동생을 질린 낯으로 바라보던 한호영은 “역시 사형은 뭔가 있어요……, 굿이라도 해야 하는 뭔가 있어……, 어째 붙어도 꼭 이런 애들이…….” 하고 중얼거렸고, 또다시 한호영의 옆구리를 찍는 서정운이었지만 그의 표정 역시 썩 상쾌하지는 않았다.
“어디가 그렇게 좋았는데? 언제 사랑에 빠진 거야?”
그래도 아직 어리긴 어리다. 여동생은 질투라기보다는 외려 첫사랑 얘기라도 듣는 것처럼 반짝거리는 눈으로 서정운의 옆에 착 달라붙었고, 세상 모든 여자에게 공평하게 상냥한 서정운은 그녀를 보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글쎄,” 하고 진지하게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성실하고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야. 무뚝뚝해 보이지만 사실은 상냥하고. 보통은 가볍게 흘릴 일이나 말도 깊이 생각해서 대답하고.”
서정운의 대답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 구체적인 설정에서 누군가가 연상되는지 점점 낯빛이 스산하게 썩어 가던 한호영은 도중에 일어섰다. 다 먹고 남은 포도 줄기를 아무렇게나 내버리며 “귀 썩기 전에 포도나 한 송이 더 얻어 와야겠다.”라고 투덜거리며 부엌 쪽으로 걸어간다.
“그래서? 첫눈에 반했어?”
서정운은 피식 웃곤 눈을 반짝이며 재차 묻는 여동생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옛날에는 동화책을 읽어 달라고 조르더니 어느새 자라서 이제는 사랑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른다.
어느새 조그만 아이는 이렇게 자랐고, 시간은 느린 것 같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어느 날 돌이켜 보면 지금 자신의 이런 감정들도 퇴색된 추억처럼 남았을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이 어서 오면 좋겠다, 어서 덜 아파졌으면, 서정운은 그런 생각을 하며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몰랐지. 산책하다가 우연히 마주쳐서 몇 마디 얘기를 나눈 것뿐이라 그냥 좋은 사람이구나 싶었거든. 그런데 몇 번 더 마주치는 사이에 보면 볼수록 왠지 모르게 자꾸 끌리는 거야. 계속 생각나고, 보고 싶고,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고.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좋아했던 것 같아.”
여동생은 낭만적인 상상에라도 젖어 있는 양 서정운을 바라보며 속삭인다.
“정운 오빠, 여태 그렇게 염문을 뿌리고 다녔어도 커플링은 한 적이 없는 사람인데 인연이란 게 있긴 한가 봐. 오빠 좋다는 언니들이 그렇게나 많았는데.”
“……. 나 혼자 좋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인연인 건 아니니까.”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마음이 욱신했다. 거짓말이 대부분인 이 대화에서 이 말만큼은 서정운의 진심인 탓이다.
나 혼자 좋아한다고 되는 건 아니었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는데.
여동생은 여전히 낭만적인 상상 속에 있는 듯 “그렇지, 인연이란 건 그런 거겠지? 특별한 거.” 하고 속살거리더니 서정운의 옆구리를 괜히 쿡 찔렀다.
“그 언니가 그렇게 좋아?”
“--.”
서정운은 일순 말이 목에 걸린 듯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천천히, 이제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진심을 거짓 이야기에 섞는다.
“응, 좋아.”
한숨처럼 꺼질 듯한 목소리는 분명한 진심이다. 그런 것은 아직 철없는 아이라도 금세 알아채는 모양이다.
“어머, 정말 진짜로 좋아하나 봐. 목소리가 진심이야.”
호들갑스럽게 말하는 여동생을 보며 서정운은 열없이 웃었다. “그럼 진심이지, 이 녀석아.” 하고 여동생의 이마를 톡 튀긴다.
“어휴, 우리 정운 오빠 주기는 너무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좋다는데 내가 양보해야지 뭐. 잘되면 좋겠다, 오빠.”
어른스레 양보하는 여동생에게 서정운은 웃으며 “고마워요.”라고 대답했다. 이루어질 수는 없겠지만 말이나마 고맙다. 잘되면 좋겠다는 말은--비록 그녀는 진실은 모르고 있었지만-- 처음이었다.
가만히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서정운이 담담히 웃고 있던 때, 커다란 거봉을 한 손 가득 들고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던 한호영이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이상한 얼굴을 하고 걸음을 늦추는 게 보였다. 약간 찌푸린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한 것 같기도 한 기색으로 걸음을 멈춘 한호영을 서정운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뭐 해, 포도 갖고 왔으면 이리 내.”
당당히 그거 내놓으라고 손짓하자, 싫다고 불퉁하게 튕기다가 아까워 죽겠다는 기색으로 반절쯤 내놓아야 할 한호영이 왠지 좀 난감한 기색으로 걸어오더니 어쩐 일로 순순히 포도를 건네주었다. 그런 뒤에야 서정운의 뒤쪽을 향해 떨떠름하게 말을 건다.
“……그런데 무화 넌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냐. 문중회의는 어쩌고?”
포도가 후두둑 떨어졌다.
손에서 미끄러진 거봉은 바닥에 떨어지자 알알이 굴러갔고, 여동생이 “엄마야, 포도!” 하고 외치며 얼른 방울방울 줍기 시작했다.
포도를 놓친 자세 그대로 굳어 있는 서정운의 뒤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굳이 있을 필요 없는 자리인 것 같아 나왔습니다. 서 사범님께 밤에 지도를 받기로 해서 둘러보다가 이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서 와 봤습니다.”
서정운은 삐걱삐걱 돌아보았다. 네댓 걸음 떨어진 나무 아래에 한무화가 서 있었다. 한무화는 묵묵히 서정운을 보고 있었다.
저 까만 눈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전혀 모르겠다.
언제부터 들었던 걸까. 내가 얘기한 걸 다 들었을까. 애인 있는 척하면서 그 애인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다 그를 빗대어 말한 것도 들었을까. 가만, 내가 뭐라고 했더라.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엉망이 된 서정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무화를 마주 보기만 했고, 그런 서정운을 무표정하게 보고 있던 한무화는,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잠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만 지금 시간 괜찮으십니까?”
조금 전의 대화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서정운에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서정운은 지금의 이 상황에서 화제를 돌릴 수 있다면 어떤 지푸라기라도 붙잡을 수 있었다.
아름답다.
한무화의 움직임을 보며 서정운은 생각했다.
그의 움직임은 힘이 있었고 강했으며 온유했다. 무엇에도 침범당하지 않되 무엇이든 포용하는 그 흐름은 분명 아직 얼마간의 미숙함이 남아 있었지만, 그 미숙함조차 덜되거나 덜떨어진 것이 아닌, 점차 앞으로 나아가는 아이의 그것처럼 눈을 뗄 수 없는 기대감이 있었다.
단락단락 분명히 구분 지어져 있었으나 흐르듯이 유려한 그 움직임들을 바라보며 서정운은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 이런 것을 망가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것에 구정물이라도 끼얹어서야 안 될 말이었다. 설령 살아가는 나날 동안 어떠한 일로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진창에 나뒹굴지 사람의 앞일은 알 수 없는 노릇이라지만, 그것이 나로 인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서정운이 다시금 일렁이던 심장을 가만히 가다듬고 있을 즈음 한무화가 천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마무리까지 깨끗하고 정갈하다.
“좋은 움직임이야.”
서정운이 말하자 한무화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잘 체감이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제가 제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썩 잡히지 않습니다.”
“곧 너도 알게 될 거야. 가끔은 본인보다 다른 사람이 먼저 보는 경우도 있는 법이니까. --아까 문중회의에서도 네 얘기가 화제로 나왔었다면서.”
한호영이 했던 말을 떠올린 서정운이 얘기하자 한무화는 “예.”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대수롭지 않은 투로 덧붙였다.
“하지만 하계 선수권 준비는 잘되어 가는지, 몸 상태는 괜찮은지, 그런 류의 이야기들이 다였습니다.”
“정무도 회의도 아니고, 한가 문중회의에서 특정인의 이름이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거야.”
서정운은 피식 웃었다. 그 꼬장꼬장한 어르신들이 웬만한 실력 갖고는 정무도를 논하는 자리도 아닌 데서 선수의 이름을 들먹였을 리 없다. 그만큼 한무화는 이미 그들의 눈에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서정운 사범님 이야기도 나왔었습니다.”
그러나 한무화가 그렇게 말했을 때, 서정운은 웃음을 지우며 눈을 껌벅였다.
자신의 이야기가 나올 이유가 뭐였을까. 선수도 아니고, 가르치는 걸로는 좀 쓸 만하다 하나 근래 딱히 눈에 띄게 활동한 것도 아니다. 어르신들이 이야기할 만한 것이라면,
“서정운 사범님이 사귀는 사람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늘씬하고 상냥한 미인이라고요.”
서정운은 그렇게 말하는 한무화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생각도 못 한 말이 돌아왔다. 아니 그야 말이 문중회의지 실상은 어르신들 오랜만에 모여 수다를 나누는 자리이니 무슨 화제가 나온들 이상할 건 없지만, 그런 얘기까지 나왔단 말인가. 심지어는 본채에 그 소문이 돈 것 자체가 오늘 오후 무렵부터, 여자들을 중심으로였는데 어느새 그 얘기가 5, 60대 영감님들이 대부분인 그 자리까지 갔을까.
“듣기로는 뮤지컬 작업을 하다 만난 20대 후반의 아가씨인데 부모님은 해외 부임을 나가서 혼자 한국에서 일하고 있고, 생활 습관이 수수하고 검소한 사람이라는 것 같았습니다.”
“…….”
대체 그건 누구지, 뭐가 어떻게 돼서 살이 저렇게 붙었나, 서정운은 아연하게 한무화를 바라보았으나 금세 정신을 차렸다. 하긴 터무니없는 소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던 게 한두 번이었던가.
서정운은 이내 피식 웃으며 평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들이 그런 얘기 나누시면서 노셨군…….”
한무화는 서정운의 그 웃음 띤 입매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말했다.
“그 이야기들이 워낙 구체적이어서 저도 정말인지 헷갈릴 뻔했습니다.”
한무화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게다가 한동안 뜸하시기도 해서, 저는 어쩌면 저 말이 정말인지도 모르겠다고…….”
일순 무어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서정운은 껌벅껌벅 한무화만 쳐다보았다. 한무화의 시선이 문득 아래로 떨어졌다. 서정운이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를 눈으로 더듬은 그의 눈매가 어렴풋이 누그러진다.
서정운은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차라리 그랬더라면 외려 마음을 가다듬기는 편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다 이런 이야기를 한무화와 나누고 있다는 게 씁쓸해졌다. 스스로가 처량해지는 기분이다. ……안 되겠다, 일어나는 게 낫겠어.
서정운은 시계를 보곤 늘 조용한 본채의 도장에도 오늘만큼은 멀찍이서 여러 집채들의 훤소가 아련히 들려오는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지금쯤은 어르신들 약주 나누고 계시겠네. 좀 있다 가서 사부님 모시고 나와야겠다. 너무 늦게까지 드시면 내일 힘드실 거야, 사부님이 아무리 말술이라지만 이제 연세가 있으시거든.”
너도 한수일 정원사범님 모시고 나와, 라고 서정운이 말하자 한무화는 정무도로 더 물어보거나 할 것은 없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시끌시끌한 창밖으로 한번 시선을 던진 그는 여상히 서정운을 돌아보았다.
“그러면 오늘은,”
“……?”
“사범님께서 바라시는 건 예전과 같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 다가오는 한무화를 보고서야 서정운은 잊고 있었던 걸 떠올렸다. 동시에 한동안 잊고 있던 욕심이 생각난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그의 입술로 갔다. 한때 지도를 핑계로 날마다 맛보았던, 놀랄 만큼 달고 뜨거운 입술.
“--.”
불시에 욱신하고 심장이 뛰었다. 그와 함께 눌러 두었던 욕심까지 한꺼번에 치밀어올랐지만, ……안 돼, 안 돼, 금단 현상까지 나타나려는 것 같아. 얼른 자리를 떠야지.
서정운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애써 그만큼 가벼운 투로 입을 열었다.
“아아, 그거. 글쎄, 별로 한 것도 없는데……. 그래도 해 준다니까, 커피로 받을게. 지금은 늦었고 내일 낮에 커피나 사 줘.”
내가 지금 제대로 웃고 있는 건 맞겠지, 서정운은 스스로 의심하면서도 빙긋이 웃으며 한무화를 보았다. 얼핏 벽에 걸린 거울을 보니 제대로 웃고 있는 것 같긴 하다.
한무화는 서정운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 말은 몹시 의외였던 듯--혹은 어렴풋이 짐작을 했음에도 설마 그 짐작이 맞을 줄은 몰랐다는 듯, 뚫어져라 서정운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다. 그런데도 그것은 어쩐지 평소보다 묵직하고, 한편으로는 화난 걸 참는 것처럼까지 보여, 서정운은 얼굴에서 아주 천천히 웃음을 지우며 한무화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서정운을 묵묵히 내려다보던 한무화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생각했었습니다. 정확히는 아까부터가 아니라 얼마 전부터입니다만,”
미묘하게 목소리가 메마르게 들린다. 여전히 굵고 낮은, 듣기 좋은 목소리인데도. 서정운은 눈썹을 들며 그를 보았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한무화가 말을 이었다.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정운 사범님께 뭔가 잘못을 한 건가 싶었는데 그게 뭔지 알 수 없었고, 서정운 사범님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
알고 있었던 거다. 서정운이 은근히 그를 피하고 있다는 걸 한무화도 알고 있었다. 하긴 모를 리가 없다. 그는 오래 생각하긴 하지만 감이 무딘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예전과는 다르고, 제가 뭔가를 잘못해서 화가 나신 게 아니라면 그 이유가 무엇일지를 생각해 봤습니다만,”
얼핏 입술이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는 서정운을 내려다보며, 한무화는 까다로운 문제라도 맞닥뜨린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사범님께 지도를 받고 늘 했던 대로 원하는 걸 해 드렸던 제일 마지막이 사범님 댁에서 뵈었을 때였는데,”
서정운은 그날을 떠올렸다. 그 주말, 서정운은 뜻밖의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한무화와 상당히 짙은 스킨십을 나누었고 그날 저녁 이 반지를 받았었다. 그때만 해도 더없이 행복했다.
“혹시 그날 제 힘이 지나치게 셌었습니까?”
그러나 생각에 잠겼던 한무화가 그렇게 물었을 때, 서정운은 아주 짧은 순간 머릿속이 비었다. 힘이 지나치게 세다,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멍하니 생각하다가 그날의 행위를 떠올린 서정운은 불시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니, ……아니, 아냐.”
“그러면 제가 사범님의 혀를 너무 세게 빨았던가요? 입술을 깨물었던 게 많이 아프셨습니까?”
“아냐. 아냐.”
“성기를 너무 세게 잡았습니까? 제 성기와 너무 딱 붙여 붙잡고 훑어서, 쓸리거나 아프셨던가요?”
“아냐, 그런 게 아냐.”
전혀 다른 방향의 잘못된 생각이다--라는 것보다, 서정운은 일시에 몰아치는 저 말들과 기억들이 당혹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얼굴이 덥다. 머릿속까지 익을 것 같았다.
하나씩 꼽아 보던 한무화가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혹은 말을 꺼내길 망설이는 것도 같다. 그러다,
“그러면 제가 덜 해 드려서입니까?”
눈치 없이 매번 하라는 것만 딱 하고 그만둬서 질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라도 한 양 한무화가 물었을 때,
“아냐. 아냐. 그런 게 아냐. 전혀 달라. 난 그저,”
얼굴이 더할 바 없이 달아오른 서정운은 머릿속까지 푹 익어 버린 기분으로 고개를 저었다.
불현듯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음을 자르는 건 이렇게 어렵구나. 목으로 치밀어오른 뜨거운 것을 삼키기도 버겁다.
한무화는 말없이 서정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목까지 오른 더운 것을 간신히 삼킨 서정운은 일시에 피로감이 밀려와,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며 조용히 대꾸한다.
“이런 류의 일은, 너랑은 더 이상 할 생각이 없어.”
“--.”
한무화의 새카만 눈동자가 희미하게 벌어지는 듯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혹은 예상하지 않으려 했던-- 말이라도 들은 양,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서정운의 얼굴 속에서 뭔가를 찾아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뚫어져라 바라본다.
“저랑은 더 할 생각이 없다…….”
서정운의 말을 따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에 이상한 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어떠한 감정에 가까운지 미처 짐작조차 가지 않는 기묘한 빛이다.
“정말로 사귀는 분이-- 생기셨습니까?”
한무화의 눈이 까맣다. 늘 까맣고 순하던 눈이 기이하게 굳어 서정운을 본다.
“--.”
“정말로……?”
몹시 이상하다는 투로 한무화가 중얼거렸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피어오른 의심이 깨끗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눈이 새카맣게, 서정운의 얼굴을 낱낱이 들여다본다.
그것은 왠지 한순간이라도 눈을 떼면 그 순간 달려들어 목줄기를 물어뜯을 맹수를 앞둔 것 같아서, 서정운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천천히 “……아냐.” 하고 속삭인다.
그제야 한무화의 커다랗던 눈동자가 아주 조금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석연찮은 게 풀리지 않은 듯 “그러면 왜,” 하고 다시 묻는다.
그때.
“사형--.”
밖에서 길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장지 바로 앞에서, 문을 열기 직전에 노크 대신 주의라도 환기시키듯이 길게 서정운을 부르는 사람은 한호영이다. 나 왔소, 그렇게 알린 그는 그러고도 몇 초쯤 사이를 둔 다음에야--행여나 못 볼 꼴이라도 볼까 싶었는지-- 느릿느릿 문을 열었다.
정말로 오고 싶지 않았다는 낯빛을 한 한호영이 방 안으로 고개를 디밀었다.
“사형, 아버지가 사형 불러 오래요.”
대뜸 말한 그는 한무화와 서정운을 번갈아 보며 내키지 않는 투로 변명처럼 덧붙였다.
“무화는 어디 갔냐고 작은아버지가 찾으셔서, 사형이랑 같이 도장 갔다고 했더니……, 체련 놈이랑 둘만 두는 법이 어딨냐고, 나더러 후딱 가 보라고 아버지가 그러셔서…….”
그 순간 서정운은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들었다.
체련 놈이랑 둘만--이 아니다. 그것은 핑계일 뿐, 서정운과 한무화가 둘만 있다니 불안하셨던 거다. 행여나 서정운이 불순한 짓이라도 할까 봐. 그리고 그런 의도를 알기 때문에 한호영도 몹시 머쓱한 얼굴로 “사형이 아무려면,” 하고 입속으로 구시렁거리는 거다.
서정운은 씁쓸하게 웃었다.
“안 그런다니까…….”
“나야 알죠. 내가 몰라서 왔겠습니까.”
한호영이 투덜거렸다. 그런 그들을 의아하게 보고 있던 한무화는 이내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한호영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이야기 마치면 다시 사랑채로 갈 테니 먼저 돌아가 주십시오.”
“어……, 그게 나도 그러고 싶긴 한데…….”
한호영은 애매하게 눈매를 찡그리며 웅얼거렸고 한무화는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을 보다가 서정운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웃고 말았다.
“그럴까 봐 온 거야.”
서정운이 조용히 말하자 한무화가 의아한 시선을 돌렸다.
“그럴까 봐 보내신 거라고. 남들 이목 피해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만한 일이라도 생길까 봐.”
한무화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정운을 보았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린 듯 꿈틀, 굳어진다. 그런 그를 찬찬히 마주 보며 서정운이 말을 이었다.
“사부님이 너 많이 아끼셔. 한수일 사범님도 그렇겠지만, 우리 사부님--네 큰아버지도. 정련이고 체련이고, 사실은 커다란 틀 안에서는 개의치 않으시거든. 그저 훌륭한 인재라면 누구든 아끼는 마음으로 지켜보시는 건데, ……너는 유난히 아끼시거든.”
서정운은 한숨처럼 웃었다.
“그래서 너한테 안 좋은 이야기라도 붙을까, 네가 자칫 흐트러지기라도 할까, ……그게 널 망가뜨릴까 봐 염려하시는 거야.”
“--.”
한무화의 얼굴 위로 어떠한 깨달음이 스쳐 갔다. 지금 흘러온 이 대화의 모든 이유를 이제야 안다. 뚫어질 듯 서정운을 보다가 “저는,” 하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억지로 누른 양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 걸로 제가 흐트러진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서정운은 한무화에게서 물러섰다. 아주 약간이다. 반걸음쯤.
“너에게는 상관없는 거리잖아.”
한무화의 얼굴이 멈칫했다. 입을 다문 채 서정운만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서정운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내가 마음에 거리를 두려 할 뿐이지 네게는 상관도 없고 달라질 것도 없어. 다만, 널 보고 있으면 마음 접는 게 힘들어서 한동안 피했는데……, 그래서 네가 고민했나 보다. 미안해.”
서정운은 열없이 웃으며 가볍게 한무화의 어깨를 두드렸다. 불현듯 한무화의 눈매가 굳어졌다.
“전 그런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 나직한 목소리는 몹시 단호해 서정운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던 손을 멈칫하고 만다.
“큰아버지가 무슨 염려를 하고 뭘 원하시든 저는 그런 걸 바란 적이 없습니다.”
화가 난 것처럼 억누른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떴다. 이 남자가 언짢아하는 걸 언제 본 적이 있던가. 서정운은 기묘한 기분으로 그를 보다 되물었다.
“네가 바란 건 뭔데?”
순간 한무화는 눈을 크게 떴다. 생각도 못 한 부분을 묻기라도 한 것처럼 뚫어져라 서정운을 바라보면서 그는 혼잣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느리게 말한다.
“서정운 사범님이, ……계속 제 곁에서 절 이끌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생각이 한 덩어리씩 튀어나오는 것처럼 한무화는 말 한마디마다 서정운을 보았다. 그 안에 자신이 바라는 답을 끄집어내기라도 하려는 것 같다.
“조언은 해 줄 거야. 아마 머지않아 내 조언이 필요 없게 될 테지만, 그때까지는 내 힘닿는 대로 봐줄게.”
그것은 서정운의 희망이기도 하다. 그가 얼마나 더 성장할지, 어디까지 갈지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난 지금 힘들여 마음을 차곡차곡 접어 가는 중이니까, 한동안은 거리감이 좀 느껴지더라도 기다려 줘. 이러다 보면 다시 편하게 지내게 될 테니까.”
“제가 바란 건--.”
한무화가 나직이 외치려다 멈춘다.
바란 건.
그가 바란 것은 이미 나왔다. 서정운은 그가 바라는 대로 조언을 해 줄 것이다. 그의 성장으로 보아서는 그조차 오래가지 않을 일이었다.
서정운은 도중에 말을 멈춘 채 그를 뚫어질 듯 바라보기만 하는 한무화를 마주 보았다. 무뚝뚝해 보여도 다정한 남자이니까 서정운의 마음이 상했을까 봐 염려해 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아.”
서정운은 가만히 손을 뻗었다. 그 손이 한무화의 머리에 닿는 순간 희미하게 한무화가 움칫하는 것 같았다.
“괜찮아, 나는.”
염려해 주지 않아도 된다. 나는 네가 미안해하거나 날 안쓰러워하는 게 더 힘들다. 너는 네 길을 가면 된다. 이건 내 문제다.
서정운은 한 번, 두 번, 그를 쓰다듬다 그 손도 이내 떼고 말았다. 이 정도는 되겠거니 했지만 이것도 관두는 게 낫겠다. 이 까슬까슬하고 기분 좋은 감촉마저 미련이 생길 것 같다.
“금방 괜찮아져. 괜찮아.”
서정운은 주문처럼 말했다. 괜찮기를 바라는 거다.
무엇이?
무엇이든.
서정운은 조용히 긴 숨을 내쉬었다. 물끄러미 한무화를 바라보다 이윽고 그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가자. 어르신들 기다리시겠다. 약주 너무 많이 드시기 전에 모시고 나와야지.”
그렇게 말하곤 서슴없이 걸음을 돌렸고, 애매하게 찌푸린 얼굴로 문간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한호영에게 턱짓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할 말이 아주 많지만 꿀꺽 삼킨 기색으로 나가 버리는 한호영의 뒤로 서정운도 따라 나갔다.
서정운의 뒤를 따라오는 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그 자리에 그저 우두커니 머물러 있을 뿐.
그러나 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