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2) (21/28)

*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하는데?”

“글쎄요……, 좀 더 사귀어 보다가 천천히 얘기해 봐야죠.”

“나이도 있는데 너무 오래 끌지 마. 마음에 드는 사람 나타났으면 그냥 바로 잡는 것도 좋아.”

한호영의 사촌 누나는 익숙한 손길로 아기의 기저귀를 갈며 말했고, 그 옆에서 그녀의 어머니도 “그럼, 그럼. 너무 따지지 말고 얼른 가.”라고 맞장구쳤다. 그 옆에서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이가 나무뿌리에 걸려 비틀거리는 걸 얼른 잡아서 안아 들며 서정운은 웃기만 했다.

아무래도 올해 종친회의 가장 큰 가십거리는 서정운의 반지가 될 성싶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서정운은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반지 얘기를 듣고 있었다. 물론 반지 얘기에는 애인, 결혼 얘기가 세트로 따라온다.

역시 오늘 밤에 돌아간다고 하길 잘했지, 서정운은 종친회는 내일까지였지만 아침에 사부님이 언제 갈 거냐고 묻는 말에 그냥 오늘 밤에 돌아가겠다고 대답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러다가는 내일까지 주야장천 반지 얘기만 듣다 끝날 것 같았다.

첫날 오랜만에 보는 친지들과 환담을 나누며 떠들썩하게 지나간 종친회는, 이틀째는 첫날보다는 차분했다. 어르신들은 선산에 다녀오시겠다며--선산이라 해 봐야 본산의 바로 뒷산이었지만-- 설렁설렁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완만한 산길에 오르셨고, 중장년들은 선산에 따라가기도 하고, 쉬기도 하고, 몇몇이 모여 족구나 피구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한 무리가 뒷산에 있는 야트막한 계곡에 가서 발 담그고 놀고 오자는 이야기를 꺼내었고, 한떼의 사람들은 얼씨구나 하며 계곡 낚시로 물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먹을 냄비며, 계곡에서는 역시 백숙이 최고라며 백숙 해 먹을 냄비와 재료 따위를 싸 들고서 뒷산에 올랐던 것이다.

서정운은 원래라면 외당에서 한가롭게 뒹굴거리며 낮잠이나 자려고 했지만 이 사촌 누나에게 ‘우리 그이는 큰아버지 따라 선산에 가서 큰 애 볼 사람이 없어. 계곡 갔다가 애 다치면 안 되니까 네가 같이 가서 우리 애 좀 보자!’라며 반강제적으로 끌려와, 계곡을 낀 숲에 앉아 위태롭게 아장거리는 네 살짜리 사내아이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년 가을에 둘째를 낳은 사촌 누나는--물론 서정운과는 피 한 방울 안 섞였지만-- 새로 기저귀를 채운 아기를 돗자리에 눕히고는 다리를 죽죽 주물러 주며 “애도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그냥 빨리 낳아서 빨리 키우는 게 편하지.”라고 토달거린다.

서정운은, 확실히 그 말마따나 마흔에 들어선 누나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활달한 네 살 남자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큰 솥 두 군데에 매운탕과 백숙을 나눠 끓이고 있는 곳으로 다다닥 달려가는 걸 얼른 안아 들었다. 내려 달라고 버둥거리는 아이를 내려놓느니 차라리 끼고 있는 게 더 편했던 서정운은 얼른 들어 올려 목말을 태워 버렸다. 그러자 아이는 좋아라 하며 내려올 생각을 안 했다.

“어차, 조심조심, 떨어질라. ……아, 맛있는 냄새, 다 돼 가요?”

아까부터 줄곧 이어진 사촌 누나와 그 모친의 반지, 연애, 결혼, 출산, 육아의 장광설을 피해 음식 준비팀으로 슬그머니 걸음을 돌린 서정운이었지만.

“어, 거의 다 됐어요. 아이구, 준이, 삼촌 목말 탔쪄요? 정운 씨 애 잘 보는 거 보니까 금방 결혼해도 되겠다.”

“그래, 애인도 생겼으니 금방이지 뭐. 뮤지컬 하는 아가씨랬나?”

“집도 그럭저럭 괜찮게 사는 아가씨라며? 우리 딸애가 말하는 거 들으니까 그 반지 엄청 비싼 거라던데.”

“아유, 설마 반지를 아가씨가 샀겠어? 정운이가 샀겠지. 반지까지 샀으니 올해 가기 전에는 결혼하겠네. 얼마나 좋았으면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저런 비싼 걸 턱 하니 사 줬을까?”

“늘씬하고 이쁘다잖아. 정운이 눈에 들었을 정도면 웬만한 미인 대회 입상자쯤은 되지 않겠어?”

“뭐? 미인 대회 입상자라구? 어쩐지~.”

“응? 정운이, 올해 가기 전에 결혼하는 거야? 그럼 가을은 좀 이르고, 겨울에 가겠네?”

“………….”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이야기들이 여기는 한결 더하다. 모인 입들이 많다 보니 각각 한마디씩만 해도 여러 마디인데 심지어 시너지 효과까지 발군이다. 서정운은 소문이 어떤 식으로 부풀려지는지 눈앞에서 목격하며 말을 잃었다.

이제 자신은 올겨울에 미인 대회 입상자인 상냥하고 집안 좋은 20대 후반의 여배우와 결혼하지 않으면 욕을 무더기로 먹을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을 어디서 찾는다지……, 목 위에 올라탄 아이를 살살 흔들어 주며 고민에 잠기는 서정운에게 한호영의 둘째 당숙모가 칭찬하듯이 말해 준다.

“그래도 애 좋아하고 잘 놀아 주는 거 보니까 좋은 아빠 되겠네. 좋은 아빠가 좋은 남편도 되는 법이야.”

“하하……, 애랑 잘 놀아 주는 걸로 치자면……, 저기 좋은 아빠 또 하나 있네요.”

서정운은 완만한 비탈의 저만치 아래에 흐르고 있는 계곡에서 놀고 있는 한 무리 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개구진 아이들과 어른 몇몇이 섞여 계곡에 발 담그고 놀고 있었다. 발 담그고 있다 해 봐야 물장구치고 물놀이하느라 거의 다 흠뻑 젖어 있었지만, 찬 계곡물 때문에 입술이 파랗게 질려서도 아이들은 즐겁게 뛰놀아 댔다. 그 가운데에 “삼촌, 삼촌!” 떠들어 대는 아이들을 팔에 하나씩, 다리에도 하나씩, 등짝에도 또 하나, 그렇게 대롱대롱 매달고도 힘든 기색이라곤 없이 놀아 주는 한무화가 있었다.

힘도 좋다, 하는 감탄과 함께, 아이들이랑 놀아 줄 때는 저 무표정한 얼굴로 제법 웃기도 하는구나, 하고 서정운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귀찮거나 힘든 기색도 없이 아이들과 잘 놀아 주고 있는 그는 정말로 좋은 아빠가 될 것 같았다.

그때 드디어 음식이 다 됐는지 솥 안을 확인한 고모가 아래 계곡을 향해 “그만 놀고 올라와서 밥 먹어요!” 하고 외쳤고, 계곡에서 놀던 아이들과 어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물에서 나와 수풀 쪽으로 올라왔다.

입술이 파랗게 질려 달달 떨면서도 즐거이 재깔거리는 아이들에게 수건 하나씩 둘러 주고서 돗자리에 앉히고, 어른들도 바위나 풀숲 같은 데 앉아 음식조가 무작위로 나눠 주는 그릇을 받아들었다.

물가에서 바짓단이며 셔츠 자락의 물기를 꾹 쥐어짜곤 뒤늦게 천천히 올라온 한무화에게도 고모가 백숙 그릇을 넘겨준다.

“어쩌면 그렇게 애들이랑 잘 놀아 줘요? 애 다섯을 주렁주렁 매달고, 기운도 좋으네.”

“예.”

대수롭잖게 대꾸하곤 숟가락을 드는 한무화에게 고모의 여상한 말이 이어진다.

“정운이 말마따나 좋은 아빠 되겠어.”

백숙을 한술 뜨려던 한무화의 손이 멈추었다. 흘끗 시선을 들어 서정운을 보는 시선에, 서정운은 공연히 이유 없이 당황했지만 애써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 것 같던데. 애들 잘 보더라.”

“…….”

한무화는 말없이 서정운을 보았다.

지난밤 끝내 서정운의 뒤를 따라오지 않았던 한무화다. 서정운이 한호영과 더불어 사랑채에 다다를 때까지, 그리고 거기에 잠시 앉아 있다가 스승이 많이 취하기 전에 술자리에서 모시고 나올 때까지도 한무화는 오지 않았다.

기억에 남아 있는 건 뚫어지게 서정운을 바라보던 새카만 눈.

평소와 같은 듯하면서도 평소와 달리 무겁게 굳어 있던 그 표정 없는 얼굴.

금세라도 무어라 말할 것 같던--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던 굳게 닫힌 입매.

그 기억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 지워지지 않는 서정운의 앞에서, 한무화는 서정운을 보았다. 아직껏 썩 유쾌하지도 선선하지도 않은 기색으로 서정운을 보고 있던 한무화는 어느 순간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옆 바위 위에 내려놓더니 서정운에게 걸어왔다. 그러곤 어? 하고 당혹스레 쳐다보는 서정운에게로 불쑥 손을 뻗는가 싶더니, 그때까지 서정운의 목 위에 앉아 있던 작은 사내아이를 달랑 들어 올렸다.

“식사하십시오.”

아이를 엄마 옆에 내려놓은 한무화는 서정운에게 말하곤 도로 그릇을 집어 들었다. 기분이 좀 풀린 건가, 서정운이 한무화에게 무어라 말을 걸려 할 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고 돌아오던 남자가 한발 먼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무화 너 어제 밤새운 것 같던데. 그러고도 그럴 체력이 남아 있어?”

하긴 사흘 밤을 새우고도 2천 미터 산쯤은 거뜬히 타는 놈이었지, 라며 한무화의 옆에 앉는 그는 미국에서 잠깐 들어왔다는, 한무화와 어릴 적부터 가까이 지냈다는 친척 형이다.

“밤새웠어? 밤을 왜 새워?”

“보니까 새벽까지 수련하고 들어온 모양이던데. 새벽에 보니까 얘 도복 입고 땀에 흠뻑 젖어서 들어오더라고.”

친척 형이 대수롭잖게 말하자 사람들의 감탄스런 시선이 한무화에게 모인다. 그래, 저 정도로 노력을 하니까 그렇게 잘하는 거지 운운하는 경탄과 납득이 자리에 감돈다.

서정운은 얼굴선이 약간 거칠어진 한무화를 보았다. 역시 얼마 전보다 야위었다.

“성실히 노력하는 건 좋지만 건강 해치지 않을 정도까지만 해.”

서정운이 말을 건네자 한무화가 시선을 들어 서정운을 보았다.

“지나치게 하지는 않습니다. 어제는 집중이 되지 않아서 조금 오래 수련하다 보니 날이 밝았습니다.”

그 말에 친척 형이 별일 다 본다는 투로 말한다.

“어쩐 일이야, 집중력만큼은 어디서든 뒤지지 않을 녀석이. 그래, 밤새도록 수련한 거야?”

“아닙니다. 생각할 게 있어서 한동안은 앉아 있었습니다.”

“생각? 뭐.”

한무화는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묵묵한 반응에 익숙한 듯 친척 형은 여상하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 생각은 끝났어?”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어느 길로 가야 할지를 몰라서, 아직 생각하는 중입니다. …….”

조용히 대답하던 한무화는 고모가 막 매운탕을 퍼서 서정운에게 건네주는 그릇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래, 너라면 잘하겠지, 대단찮게 말하는 친척 형의 말을 뒤로하고 한무화는 몇 걸음 옮겨 서정운에게 갔다.

“아직 입 대지 않았습니다.”

한무화는 서정운에게서 아무렇지 않게 매운탕 그릇을 받아 들더니 어리둥절해하는 그에게 자신의 백숙 그릇을 대신 들려 주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매운탕을 먹기 시작하는 그를 서정운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 “고마워.” 하고 중얼거리곤 그도 숟가락을 뜬다. 그걸 본 친척 형이 한무화에게 의아하게 물었다.

“너 생선수프 별로 안 좋아하잖아.”

“서 사범님은 매운 거 잘 못 드십니다.”

무심히 대꾸하는 한무화의 말을 들으며 서정운은 가슴속이 뜨끈해졌다. 그의 배려가 마음에 스며서 고맙고 기쁜 동시에 쌉싸래한 기분이 든다. 말없이 소금 그릇을 당겨 백숙에 간을 하는 서정운에게, 놀란 듯 눈을 둥그레 뜬 친척 형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무화랑 아주 사이가 좋으신가 봐요. 이 녀석 남한테는 진짜 관심 없는 녀석인데.”

“그런가요?”

“예.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오죽했으면, 제 동생이 모형 자동차광이라서 무화한테도 생일 때마다 모형 자동차를 줬거든요.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도 그러니까 거의 이십몇 년이죠. 그런데도, 작년에 무슨 얘기를 하다가 모형 자동차 전시회를 가자고 했더니 ‘그런 거에 관심 있었어?’ 하고 묻더라니까요.”

친척 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심지어는 그걸 두고 서운하다고 제 동생이 무진이--무화 큰형--한테 얘기했더니, 무진이가 ‘걔는 내가 재작년에 차린 회사가 뭐 하는 회사인지도 모를걸. 한 번도 안 물어보더라고.’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더라나요. 그러니까 그 옆에서 무경이--무화 둘째 형--가, ‘무화는 나 다니던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학교에서 날 보곤 ‘형도 여기 다녔어?’라고 물었던 애야. 이미 초등학생 때부터 그랬었는데 새삼스럽게 뭘 그래.’라고 변호해 주더라고요.”

친척 형의 너스레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놀랐다기보다는 왠지 그럴 것 같았다는 납득의 웃음이 대부분이다. 우와 매정하다, 상처받겠다, 장난스레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정운도 헛웃음을 웃다가 물었다.

“그 정도로 사람들한테 관심이 없었어요?”

순간, 그때까지 별반 신경 쓰는 기미도 없이 담담하게 식사만 계속하던 한무화가 멈칫하는 기색으로 서정운을 보았다. 왠지 눈치라도 살피는 강아지 같다.

“예. 좀 말수도 적고 무뚝뚝하긴 해도 무화가 알고 지내다 보면 사람 배려도 잘하고 정도 있잖아요. 그런데 무심하긴 해요. 먼저 남한테 관심을 두는 경우를 거의 못 봤어요. 아, 맞아, 심지어 몇 년 전에는 그런 일도 있었지,”

친척 형은 갑자기 뭐가 생각났는지 너털웃음을 웃었다.

“나랑 같이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이 녀석에게 전화가 온 거예요. 액정이 슬쩍 보였는데 누군지 이름 같은 건 안 뜨고 전화번호 숫자만 떴고요. 그런가 보다 하는데, 통화하는 내용을 들어 보니 이게 굉장히 친밀한 사이 같은 거예요. 무슨 사소한 물건 같은 걸 대신 사다 준다는 둥, 주말에 드라이브를 간다는 둥 하는 대화였거든요. 그래서 전화 끊은 뒤에 누구냐고 물어봤더니 그 당시 사귀고 있던 애인이었던 거죠. 세상에, 애인인데 전화번호 저장도 안 되어 있었던 거예요!”

다시 생각해도 웃기는지 친척 형은 한참을 웃었고, 한무화는 왠지 모르게 서정운을 흘끗 보더니 “지금은 안 그럽니다.”라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남에게 관심 없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하고 서정운도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럼 네가 먼저 전화할 때에는 어떻게 했어?”

“--, 보통은 통화 기록에 남아 있으니까, 통화 기록에서 리다이얼합니다.”

“아……, 그 말투를 보아하니 그때 그 사람에게만 그랬던 게 아닌가 본데.”

서정운이 장난처럼 웃으며 말하자 한무화가 곤혹스러운 빛을 띠었다. 무어라 말하려 해도 딱히 변명할 말이 없는지 그답지 않게 잠시 어물거리다가 “중요한 사람에게는 안 그럽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래도 본인이 관심 두는 게 거의 없어서 그렇지, 일단 관심 가지고 나면 집요할 만큼 끈기 있고 성실하게 하니까요.”

친척 형은 나름대로 훈훈한 마무리로 말을 마쳤고, 서정운도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한무화답다. 서정운은 좀체 웃음이 그치지 않아 말없이 빙글거렸다.

남이 뭐라고 하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한무화는 무뚝뚝한 얼굴로--원래 무표정해서 크게 표시가 나지는 않았지만-- 말없이 매운탕을 먹었다.

“…….”

이런, 소금을 좀 많이 넣었구나, 서정운은 국물을 떠먹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솥에서 국물만 좀 더 퍼다 넣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일어나려 할 때,

“주십시오.”

서정운의 그런 기색을 언제 보았는지 한무화가 다가와 서정운의 그릇을 들고 갔다. 소금을 넣었던 때부터 보았었는지, 말하지도 않았는데 국물을 더 부어서 도로 갖고 온다.

“고마워.”

서정운이 말하자 그는 고개만 한 번 숙이곤 다시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가 매운탕을 마저 먹는다. 그 얼굴이 여전히 무뚝뚝한 것도, 하지만 국물은 딱 맞게 싱거워진 것도, 그새 큼직한 살점도 하나 더 떠다 준 것도, 그 모든 것이 다 가슴에 유쾌하게 통통 튄다. 심장도 덩달아 통통 튀었다.

그래. 이대로라면.

여전히 볼 때마다 심장은 떨리고 마음도 애틋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호의를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라면.

그러면 모든 것이 아무 문제도 없이 잘될 것 같았다.

“왜 혼자 그렇게 웃고 있어?”

옆에서 닭다리를 뜯고 있던 사촌 누나가 서정운을 보고 물었다. 서정운은 “아니요, 별건 아니고,”라며 고개를 젓는다.

“이대로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고, 사람들 마음도 좋고. ……이대로 가면 좋겠어요. 편하게, 가벼운 마음으로 가끔 볼 때마다 반갑게 지내면서.”

사람들과도, 그리고 한무화와도.

그래, 편하게, 가벼운 마음으로, 가끔 어쩌다 볼 때면 기분 좋게 대화 몇 마디 나누며. 그렇게 지낼 수 있기를.

사촌 누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그러면 좋지.”라고 대꾸한다. 그러면서 옆에서 칭얼거리는 아들의 입에 닭고기를 발라 넣어 주곤 아기를 보고 있는 어머니를 흘끔거리며 식사를 서두른다.

서정운은 이 평화로운 오후의 정경 속에서 가만히 웃으며 먹을 것을 삼켰다. 그러나 그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문득 나직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린 듯했다. 혼잣말처럼 조용한 목소리는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은 듯, 서정운만 고개를 든다. 한무화가 서정운을 보고 있었다.

곧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시선을 떨어뜨린 그는 그릇의 마지막 한 숟갈을 비우곤 그릇을 개수통에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아직껏 밥 먹느라 바쁜 사람들 사이를 홀로 성큼성큼 스쳐지나 계곡으로 내려간 한무화는 하류에 있는 깊은 물웅덩이 쪽으로 뛰어들었고, 첨벙--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일었다.

“허허, 저 녀석 보게. 저렇게 뛰어들기에는 물이 차가운데. 가만있어도 몸에 열이 펄펄 나나 보지.”

젊어서 좋다, 하고 친척 형이 허허 웃으며 중얼거린다.

그리고 서정운은 웅덩이 아래로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오른 그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숱한 물방울들이 햇빛에 비쳐 반짝반짝 눈부시게 빛나는 것을 보며, 저 빛 방울들 속에서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미는 한무화를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

서정운을 앞둔 한태일 정원사범은 5초간 말이 없었다. 눈썹을 치켜올리고서 서정운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두어 번 훑어보았을 뿐이다.

“어디서 이런 상거지꼴을 하고 나타났어? 뻘밭에 구르다 왔더냐?”

“아뇨, 그게, 누렁이랑 씨름 좀 하다 보니…….”

머리카락부터 시작해서 신발에 이르기까지 흙투성이가 되어 있는 서정운이 겸연쩍게 말했다. 목덜미를 긁적이는 손에서도 흙모래가 부슬부슬 떨어진다.

옷이 젖어 있지만 않았더라도 대충 털면 그리 티는 안 났을 텐데, 하필 누렁이를 마주친 것은 계곡에서 돌아오던 길이었다.

계곡에 내려가지 않고 나무 그늘 아래서 놀다만 올 작정이었지만, 결국은 아이들 등쌀에 못 버티고 계곡까지 끌려 내려갔다. 물장구를 치며 놀아 주다 보면 아이들에게 떠밀려 물에 빠지리라는 건 이미 예측한 결과였고, 쫄딱 젖어서 귀갓길에 오른 것까지도 괜찮았다.

그러나 운동화를 말리려고 볕 잘 드는 외당으로 갔다가 거기서 누렁이와 여섯 마리 광포한 강아지 일당을 맞닥뜨리고 만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털 뭉치가 왈! 하고 서정운에게 펄쩍 뛰어올라 매달리려고 하다가 젖은 옷에 발자국만 남기고 주르륵 미끄러져 버리는 것을 계기로, 마침 심심해 죽으려 하던 강아지 일당은 한꺼번에 왈!!!!! 하며 서정운에게 달려들었다.

흙 묻은 발로 달려드는 강아지 여섯 마리를 젖어 있는 상태로 맞이한 서정운의 몰골은 결과적으로 대단히 비참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지켜보고 있던 누렁이가 아직 잃지 않은 동심을 뽐내며 자신도 끼워 달라고 달려들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가 없어졌다.

“아니 개한테 못 당해 내고 이 꼴이 돼? 옆에서 아무도 안 잡아 주던?”

“어……, ……무화도 막 방금 전까지 저랑 똑같은 처지였는데, 지금은 욕실에서 씻고 있을 겁니다.”

서정운이 젖은 운동화를 들고 외당으로 가자 그 뒤로 한무화도 젖은 신발을 들고 따라왔는데, 한발 앞서 강아지들에게 당하고 만 서정운을 그 나름대로 도와주려고는 했으나, 서정운과 뒹구는 사이에 더더욱 흥분해 한층 더 난폭발랄해진 강아지 여섯 마리를 당해 내기에는 그 역시 역부족이었다. 그 어미까지 강아지들에게 합세하고 나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흙투성이가 되는 데에는 몇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한태일은 허, 하고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웃더니 “다 큰 사내놈 둘이서 왜 개 몇 마리를 못 당해 내?!” 하고 빽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사부님, 사부님도 주차장에 세워 둔 자동차 바퀴 뒤에서 강아지가 자고 있으면 그 차는 차마 못 타고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시잖아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잠자코 있는 착한 제자 서정운이었다.

“얼른 가서 씻어, 다 큰 녀석이 꼴사납게 그러고 다니지 말고!”

“예, 그러려던 참이었는데 사부님이 절 찾으신다고 들어서……. 무슨 일이십니까?”

“아, 그거, 별건 아니고,” 하고 한태일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너 오늘 밤에 돌아갈 거라며.”

“예.”

서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종친회의 일정은 내일이 끝이다. 내일 오전이면 친척들은 거의 돌아갈 거고, 오늘도 이미 돌아간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종친회에 불려오긴 했지만 여기에 머물러야 할 이유는 없는 서정운은 언제든 원할 때 돌아갈 수 있었고, 집도 멀지 않은데 굳이 여기서 하룻밤 더 자고 갈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아침에 식사하는 자리에서 한태일에게 이미 그런 뜻을 말했었던 것이다.

“그래, 그러면 너 가기 전에 사무실 들러서 하계 선수권 지도사범 등록해 두고 가거라.”

한태일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고, 서정운은 멈칫하며 스승을 보았다. 그런 서정운을 한태일이 비스듬히 쳐다보며 무슨 말 할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정식으로 지도하라는 소리 안 할 테니 걱정 붙들어 매. 너 일도 다시 시작해서 바쁘다며. 그냥 하계 선수권 대회 시작하기 전까지 짬 날 때 가끔 와서 애들 좀 훑어나 봐 주고 가. 일주일에 한 번쯤이라도 되니까. 그것도 영 바쁘면 더 뜸해도 어쩔 수 없고.”

“--.”

서정운은 무어라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싫다거나 하지 않겠다는 소리도, 뜻만 목구멍까지 솟았을 뿐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이미 한태일이 그 나름대로 충분히 여러 발짝 물러서서 제안했다. 저런 말이면, 실상은 서정운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해도 뭐라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물어보지 않아도 안다.

몇 년 정무도에 발을 끊고 있다가 요 근래에야 겨우 다시 조금씩 드나들기 시작한 제자를, 그런 명목을 붙여서라도 계속 붙여 두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의 인식 속에도, 서정운 본인의 의식 속에도.

“너 얼굴 좀 자주 보여 주렴. 요 몇 년 명절 때에나 겨우 잠깐 얼굴 비쳤잖으냐.”

그래도 제자라고 있는 것이 자주 보니 좋긴 하더만, 하고 한태일이 먼 데를 보며 중얼거린다. 그 말속에 서운하고 아쉬운 빛이 담겨 서정운은 더욱더 말을 하지 못한다.

가끔 한 번씩, 명목만 남겨 두어도 좋고 뜸해도 좋으니 이렇게 간혹 얼굴이라도 보여 주렴, 예전에는 괄괄하고 혈기 왕성했던 사부님도 이제는 노인이 되었다. 워낙 건강하고 정정해 협회에서의 활동은 왕성하게 하고 있다 하나 그것도 잠시다. 시간은 순시에 흐르고 희끗희끗한 머리칼은 이내 새하얗게 세어 그는 쪼그라든 노인이 될 터였다. 지금도 옛날보다 퍽 작아졌는데.

서정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가끔 찾아뵙겠습니다.”

얼마나 잦을지, 얼마나 뜸할지는 몰라도 끈을 놓지 않고서.

서정운이 조용히 말하자 한태일은 그제야 먼 곳을 보던 시선을 돌려 제자를 보았다. 그 눈매가 부드럽게 굽어 있다. “그래, 그래.” 하며 다독다독 서정운의 어깨를 두드린다.

“장차 어깨 무거워질 네 사제도 좀 도와주고, 정련의 젊은 애들도 챙겨 봐주고, 그리해 주렴. ……무화 그놈도 가끔은 봐주고.”

그가 정무도의 흙 위에서 거대한 나무로 잘 자라도록.

서정운은 한태일의 당부에 이번에도 “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빙긋이 웃는다.

“하지만 무화는 워낙 부쩍부쩍 늘어서, 머지않아 제가 입 댈 게 없어질 것 같습니다.”

그러자 한태일은 슬쩍 뿔이 났는지 그예 불퉁하게 대꾸한다.

“한참 멀었지 뭘! 배움에 끝이 있을 것 같더냐! 평생을 노력해도 항시 부족한 게 배움인 법이다!”

서정운은 뿔 난 스승을 보며 웃고 말았다. 나이가 드시긴 드셨나 보다. 이분도 한 번씩 귀여워지는 때가 생기는 걸 보면.

“그래, 여튼 내 이야기는 다 끝났으니 그만 가 봐라. 가서 얼른 씻어, 온 사방에 개 냄새 풍기면서 흙 뿌리고 다니지 말고.”

“……, 냄새 많이 납니까?”

“진동을 하는구먼!”

조만간 날 잡아서 누렁이와 여섯 악동들을 목욕탕으로 밀어 넣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서정운은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과연, 물에 젖은 옷이라 더 그런지 개 비린내가 제법 난다. 얼른 씻어야겠다.

“얼른 씻고 밥 먹어라. 밤에 간댔지? 너무 늦기 전에는 가고.”

“예. ……밤에 본채 도장에서 무화 잠깐 봐준 다음에 갈 겁니다.”

말 안 해도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한편으로는 말 안 하면 왠지 일부러 숨기는 듯한 기분이 들 것 같아 서정운은 한태일에게 말했다. 한태일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마뜩잖은 듯 무어라 구시렁거렸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 좁고 외진 데서 무어 연습하겠다고. 밤에는 사람도 없는데 널찍한 대수련장에서 연습해.”

거기가 시설도 더 좋지 않으냐, 하고 말하며 고개를 돌린다.

서정운은 잠시 한태일을 보다가 가만히 웃었다. 그리고 선선히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 좁고 외진 곳에 서정운과 한무화가 둘만 있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이다. 그 커다란 나무에 가느다란 톱자국이라도 날까 봐--서정운이 그럴 리 없다는 것은 잘 알면서도-- 염려하는 노인의 노파심에.

그때 한태일의 부인이 사랑채로 오더니 저녁 식사 준비 다 되었는데 지금 차릴는지 물었고, 한태일은 그리하시라 하며 서정운에게 가 보라고 손짓했다.

그제야 사랑채에서 물러난 서정운은 해는 저물었지만 아직 밝은 기가 남아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좋은 하루다. 약간의 쌉싸래한 기분이 남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좋은 하루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서정운은 젖은 옷에 체온을 빼앗겨 슬슬 추워지기 시작하는 몸을 손바닥으로 비비면서 서둘러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으, 개 냄새……, 하고 중얼거리며.

그러나 좀 더 늦게 왔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욕실로 들어서서 문간에서 미리 개 냄새가 풀풀 나는 젖은 웃옷을 벗어 던진 서정운은 막 탈의실에서 옷을 다 입고 나가려던 친척 중년 남자와 마주쳤다.

씻기에는 어중간한 시간이기도 하고, 본채에도 욕실이 있는데 설마 본산의 공동욕실을 쓰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던 서정운은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누가 있었구나, 하고 의외롭게 생각하며 들어섰다. 혼자 편하게 씻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왔던 터라 누가 있어서 좀 놀라긴 했지만 그 중년 남자는 마침 나가는 참이었다.

“……?”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남자와 스쳐 지난 서정운은, 그런데 저분 표정이 왜 저렇게 풀 죽어 있나,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개인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잊어버렸다.

“어으……, 개 냄새.”

이 옷은 따로 빨아야겠다, 서정운은 갈아입을 새 옷과 훌훌 벗은 옷을 따로 놔두고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기분 탓인지--아니겠지만-- 흙투성이인 머리에서도 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고개를 숙이고 머리카락을 툴툴 털며 욕실로 들어가던 서정운은 문을 열자 훅 끼쳐오는 더운 김과 함께 물소리가 나는 걸 깨닫고는 고개를 들었다.

샤워 거치대 앞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본 순간, 곧 개운해질 마음에 기분 좋게 들어왔던 심경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벽의 거울이 김으로 부옇게 흐려져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뒷모습만으로도 저 넓은 어깨와 등, 커다란 체격은 못 알아볼 리 없다. 한무화다.

쟤가 왜 여기에 있지.

그야 물론 한무화도 씻어야 하긴 했다. 서정운과 더불어 개의 발자국 범벅, 침 범벅, 그리고 한 놈이 너무 좋아서 줄줄 지려 버린 오줌까지, 온몸에 덮어쓴 그가 욕실에 있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의문인 것은 지금이 합숙 기간도 아니고 본산에서 수련을 마친 뒤인 것도 아닌데 왜 본채에 거주하는 그가 본채의 욕실에 있지 않고 본산의 공동욕실에 있느냐 하는 부분이다.

도로……, 도로 나가자, 반사적으로 그 생각이 든 서정운이었지만, 미처 돌아서기 전에 문 열리는 기척을 들은 한무화가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다.

“…….”

그 역시 서정운이 이리로 올 줄은 몰랐던지 약간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나 별다른 기색 없이 고개를 꾸벅하며 “오셨습니까.” 하고 인사하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나가기도 애매해진 서정운은 잠시 난감하게 서 있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피하는 게 더 우스워질 것 같았다.

“왜 여기서 씻고 있어?”

두어 칸 띈 옆자리에 앉으며 서정운이 묻자 한무화는 흘끔 서정운을 돌아보고는 대답했다.

“더운 탕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계곡물이 차가웠어서요.”

아아, 과연, 본채 욕실에는 넓은 탕은 없지, 하고 서정운은 조금 전에 스쳐나간 그 남자가 여기서 씻은 이유도 납득을 한다. 한편으로 남자가 몹시 풀 죽고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이유도--물론 전혀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어렴풋이 짐작을…….

“…….”

안 돼. 보지 마. 시선 돌리지 마.

서정운은 알몸으로 앉아 있는 한무화의 사타구니를 시야에 넣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동시에, 자신 역시 알몸으로 앉아 있다는 것이 확연하게 의식이 된다.

아냐, 의식할 것 없잖아. 같은 남자 몸인데 새삼스럽게 뭘. 게다가 어차피 마음도 차곡차곡 접어 가는 참이고……. …….

괜히 왔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개 냄새를 풀풀 풍기고 다닐지언정 오지 않았을 텐데.

서정운은 얼른 씻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에 물을 끼얹었다. 하지만 젖은 옷을 입고 너무 오래 있었더니 으슬으슬해서, 한무화의 말마따나 더운 탕에서 몸을 녹이고 싶긴 했다.

“큰아버지와 말씀은 잘 나누고 오셨습니까?”

그때 한무화가 불쑥 말을 건넸다. 서정운이 그리로 시선을 주자 그 역시 욕실에 들어온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는지 샤워 타월에 비누를 문질러 거품을 내고 있었다.

그래도 그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거니 잔뜩 긴장해 있던 마음도 조금쯤은 풀리는 것 같아, 서정운은 가벼운 숨을 내쉬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별일은 아니었고 하계 선수권 때문에 잠깐. 사무실에 들러서 지도사범 등록해 두고 가라고.”

“하계 선수권 지도사범을 맡으실 겁니까?”

“음……, 거의 형식적으로만.”

서정운은 쓰게 웃었다. 원하던 바는 아니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아주 가느다랗게나마 끈이 남아 있다는 데에 약간은 가뿐한 기분마저 든다. ……결국은 이렇게 될 것이었나 보다.

서정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습니다.”

조용히 중얼거리는 그 말은 서정운을 위한 말이다. 그를 위해서 잘되었다고. 서정운은 한무화를 돌아보고는 웃었다. 응,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한무화도 눈매가 느슨해졌다.

“맞아. 그러고 보니 밤에 본채 도장 말고 대수련장에서 보자.”

서정운이 별안간 생각나서 말하자 한무화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예,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대수련장은 저 혼자 연습하는 데에 이용하기엔 너무 넓지 않습니까?”

“사부님이 대수련장에서 연습하라고 하셨거든. ……내가 너한테 몹쓸 짓이라도 할까 봐 염려되시나 봐.”

뒷말은 농담처럼 덧붙이며 피식 웃는다. 거품이 인 샤워 타월로 막 몸을 문지르려던 한무화가 멈칫하더니 기묘한 빛으로 서정운을 쳐다보았다. 서정운이 농담이야, 농담, 하고 웃으며 손을 내젓자 그제야 그는 묵묵히 몸을 닦기 시작한다.

물론 자신의 과거--지도를 미끼로 뽀뽀를 강요했던 파렴치한 행위--를 생각하면 사부님의 그 염려도 아예 잘못 짚은 건 아니지만, 이제는 안 한다. 안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일단은 무럭무럭 자랄 나무를 지켜보려고도 하거니와,

“…….”

서정운은 옆에서 샤워 타월로 몸을 문지르는 한무화에게 무심코 시선을 주었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다리를 닦는 그의 손길로 별생각 없이 시선을 주었다가, 그 결에 그 가운데에서 묵직하게 흔들리는 물건이 눈에 들어와 버렸다.

역시 난 게이는 아니었나 보다……. 이 남자를 보면 마음이 설레고 좋고 사랑스럽긴 한데, 저걸 보고 막 흥분되거나 하진 않아……. 대체 뭘 먹으면 저렇게 되지…….

“어릴 때부터 그 크기였어?”

저도 모르게 말한 뒤에야 서정운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움찔했다. 한무화도 멈칫하더니 기묘한 눈으로 서정운을 보았다. 젠장. 입을 때려 주고 싶다.

“……. 어릴 때는 물론 지금보다는 작았습니다만, 대체로 비례했습니다.”

“어, 좋았겠네.”

“…….”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얼결에 대답해 버리고 만 서정운은, 묵묵히 쳐다보는 한무화의 시선을 받으며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입술을 꽉 움켜쥐고 말았다.

“별로 좋고 말고가 없었습니다.”

한무화는 서정운을 바라보다 대답했고, 서정운은 이번에는 입 꾹 다물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하긴 이 남자는 남과 비교하거나 과시하는 성격도 아니니 별반 아랑곳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다 문득 예전 일을 떠올린 서정운은 피식 웃고 말았다.

“호영이도 거기가 큰 편이거든. 그 녀석은 그런 걸 은근히 뿌듯해하는 놈이라서 어릴 때엔 종종 내 거랑 대 보면서 싱글거리기도 했는데,”

“…….”

일순 한무화의 눈매가 아주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썩 유쾌하지는 않은 눈길이었지만 잠자코 그의 말을 듣는다.

“그러다 중학생 때였나, 학교 친구들 집에 불러서 놀다가 그런 말을 해 버린 거야. 자기 물건이 웬만한 놈들 것보다 길고 두껍다고. 그 자리엔 남자애들도 있었지만 여자애들도 있었고, 불행히도 사모님마저 마침 그 앞을 지나가다 그 얘기를 들으신 거지.”

젊었던 시절, 비록 조용했지만 성정은 사부님 못지않게 강단 있었던 사모님은 당장 아이들을 다 집으로 돌려보내고 한호영을 안채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네가 그 나이면 이제 그렇게 어린 나이도 아닌데, 또래 여자아이들까지 있는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할 양이면 차라리 잘라 버려라. 잘라서 입 꾹 닫고 있는 게 크다고 아무 데 못 가리고 떠들어 대는 것보다 낫다!’

날이 시퍼런 재단 가위까지 갖다 놓고 말씀하신 어머니 방에서 물러 나온 뒤로, 한호영은 두 번 다시는 아무 데서도 그런 얘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가끔 다른 녀석들이 그런 화제를 꺼내면서 자랑을 하면 나한테만 ‘나도 큰데’, ‘나도 큰데’ 하고 툴툴거리는 정도지.”

서정운이 말을 맺자 말없이 듣고만 있던 한무화가 입을 열었다.

“……왜 사범님께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뭐 일단 내가 사모님께 가서 일러바칠 일은 없으니까 그런가 보지.”

서정운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어차피 수련하고 나면 공동욕실에서 씻으니까, 굳이 말 안 해도 다 알아. 남자들이 워낙 남의 물건에 민감하잖아.”

“공동욕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한무화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입매를 찌푸렸다. 서정운에게 시선을 주며 “사범님은 공동욕실 쓰지 마십,”까지 말하는가 싶던 그는, 서정운이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자 도중에 말을 멈추고 만다.

“어? 공동욕실? 왜?”

“……. ……아닙니다.”

한무화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비누 거품이 묻은 몸에 물을 끼얹었다. 그러곤 한동안 말이 없는 한무화의 옆에서, 서정운도 입을 다물고 머리를 감았다. 흙모래로 버적거리는 머리를 말끔하게 헹궈 낼 즈음,

“저는 제 크기에도 남의 크기에도 딱히 신경 쓴 적은 없습니다. 이성도 아니고,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한무화가 무심히 말하는 걸 듣고 서정운은 웃었다. 비누 거품을 낸 타월로 몸을 닦기 시작하며 농담처럼 말했다.

“이성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나 보지? 어쩐지 의외인데.”

“……. 특정한 이성을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 없습니다만, 성욕이 없는 건 아닙니다.”

한무화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짧은 침묵이 뒤따른 뒤,

“외려 욕구가 강한 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은.”

거의 혼잣말에 가깝도록 나직한 음색이다. 곧 선뜻 일어선 한무화는 걸음을 옮겨 탕으로 갔다.

더운물이 차 있던 탕에서 물이 넘쳤다. 탕에 들어가 몸을 담근 그는 탕 안의 석단에 앉아 긴 숨을 내쉬었다. 탕의 물이 파문을 그리다 잦아들었다. 탕에서 피어오른 더운 김이 일렁인다.

서정운은 몸을 닦으며 거북하다는 생각을 했다. 희미하게 불편하다는 느낌이 드는 이 기분은, 욕실의 벽을 등진 한무화가 이쪽을 향해 앉아 있는 탓이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시야 한구석에 들어오는 한무화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뺨에 시선이 닿는 것 같다. 그리고 몸을 문지르는 손에도, 거품이 구석구석 퍼져나가는 몸에도.

“--.”

신경과민이다. 그저 별 뜻 없이 쳐다보고 있는 것을 의식하는 쪽이 더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서둘러 몸을 닦고 거품을 씻어 낸 서정운은 짧은 순간 고민했다. 탕에 들어가고 싶긴 했다. 피부는 더운물로 적셨지만 오래도록 싸늘한 기운이 배었던 몸속은 아직 서늘한 기분이 들어, 더운물 속에서 몸을 데우고 싶었다. 하지만,

“…….”

바보같이 뭘 의식하는 거야. 서정운은 내심 혀를 차곤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일어서 탕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역시, 정면으로 걸어가는데 저렇게 빤히 쳐다보지는 말아 줬으면 좋겠다…….

그나마 탕으로 들어가 일렁이는 물 아래 몸을 담그고 나자 좀 진정되긴 했지만 공연히 심장이 뛰었다.

더운물을 떠 얼굴을 문지르며 길게 한숨을 내쉰 서정운은 그제야 좀 마음이 가라앉아 맞은편에 앉은 한무화를 마주 볼 수 있었다. 아까부터 줄곧 서정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서정운이 조용히 말했다.

“너 야위었어.”

한무화는 희미하게 눈썹을 올리는가 싶더니 “그렇습니까?” 하고 말했다.

“응. 수련을 하더라도 몸은 좀 챙겨 가면서 하면 좋겠는데.”

“수련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하고 있습니다만…….”

말을 흐린 한무화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요즘 좀 힘들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정무도는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있는 것 같던데.”

“그렇습니까? 그것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그렇다면 그 외에 어떤 부분이 힘들다는 걸까. 서정운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 앞에서 한무화는 생각에 잠겨 침묵했다. 이윽고,

“나 혼자 좋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인연인 건 아니다.”

한무화가 불쑥 중얼거린 그 갑작스런 말이 서정운 자신이 지난밤 여동생에게 했던 말이라는 건 몇 초쯤 지난 뒤에야 알아차렸다. 한무화는 잠시 서정운을 바라보다가, “그 말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말을 맺었다.

서정운은 이 느닷없는 화제에 두어 번 눈을 껌벅이면서 그 자신도 그 말을 돌이켜 보았다.

“그렇지. 나 혼자의 생각만으로 인연을 엮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좋아하는 게 낫다는 생각은 들어.”

“나 혼자 좋아하더라도 말입니까?”

잠시 생각하다 되묻는 한무화에게 서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서럽고 힘든 일이다. 웃어도 소용없고 울어도 소용없고 내가 무얼 해도 소용없다. 그 막막한 무력감과 절실한 고독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정운은 좋아하는 쪽을 선택할 터였다.

“고등학생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뒤로 어머니와 둘이서 살았는데, 난 어머니를 정말로 사랑했어. 딱히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는 흔하고 평범한 아들이었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필요하다면 목숨도 드릴 수 있었을 거야. 어머니도 날 그렇게 사랑해 주셨고.”

하지만 서정운은 알고 있었다. 완벽의 형태에 가까운 사랑을 받고 거기에서 큰 기쁨과 만족을 얻으면서도, 어머니는 마음 한 켠으로 늘 외로웠다. 서정운 역시 그랬듯이.

“의미가 있는--마음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랑은 따로 있는가 보다. 그때 생각했지.”

사람에게서는 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애정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내가 근본적으로 외로운 인간이라는 것을 얼마간이나마 잊을 수 있는 사랑은 따로 있다고.

“그래도 결국은 모두 다 양분이 되더란 말이야.”

서정운은 웃었다. 자신의 마음을 채워 주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 주었던 사람들에게 받은 소중한 기억들은 어느 날엔가 힘든 오늘을 버텨 나갈 양분이 된다. 그 소중한 기억은, 그러나 대단하고 중요한 것일 필요는 없다.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돼. 아주 작은 배려이지만 이 사람이 나에게 마음 써 주었구나 알 수 있는. ……그렇지, 오늘 내 매운탕을 백숙으로 바꿔 준 거라든가 말이야.”

서정운은 한무화를 보며 웃었다. 한무화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희미하게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지만, 그것은 서정운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터였다.

대부분의 양분이 그랬다. 커다랗고 놀라운 일들보다는 일상 속에서의 사소한, 그 본인조차 기억하지 못할 작은 일들이 오래오래 남곤 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가 널 좋아했었던 것도 나중에는 네게 작은 양분이 될 때가 올 거야.”

그러니까, 나 혼자 좋아해 괴롭고 아프더라도, 그 사람을 위해 나는 좋아하는 걸 택할 거다. 먼 훗날 그 사람이 그 작은 양분으로 그날을 견뎌 나갈 수 있길 바라며.

서정운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먼 날을 떠올린다. 희미하게 휘어진 입술을 바라보던 한무화의 입매가 꿈틀했다.

“좋아했었던…… 입니까?”

“그때쯤엔 너나 나나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모르잖아.”

서정운은 언제 올지 모를 앞날을 떠올린다. 그날이 왔을 때 한무화가 서정운을 떠올리며 조금이라도 따끈한 기분을 느낀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문득 애틋해졌다. 그때는 지금의 이 감정도 빛바래 기억 속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벌써 아쉬워 심장이 저렸다.

서정운은 손에서 헐겁게 돌아가는 반지를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이 감정을 접어야 하는 지금은 이미 그 앞날을 향해 가고 있다. 이대로 있으면 더 가슴이 묵직해질 것 같았다.

“난 이만 나가 봐야겠다.”

서정운은 그렇게 말하곤 일어섰다. 서둘러 나가 버리려 석단에 막 발을 딛고 몸을 돌릴 때였다.

“--.”

문득 가볍게 손가락을 스치고 떨어지는 허전한 감각.

서정운이 일어서며 일으킨 물보라 속으로 퐁, 조그만 소리를 내며 반지가 떨어졌다. 일렁이는 물속으로 떨어진 반지는 흐름에 밀려 한무화의 발치에서 멈춘다.

반지를 내려다본 서정운은 얼결에 한무화를 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한무화가 조금 전부터 줄곧 표정 없이 서정운을 보고 있었던 걸 깨닫는다.

그 무표정한 얼굴은 평소와 달랐다. 어딘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르다. 그 안에는 늘 담겨 있는 온기라곤 없이, 본능적인 경계심이 이는 무언가가 가라앉아 있다. 서정운을 응시하는 그 새카만 눈도 무얼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몸은 충분히 데워졌는데도 가슴속 한구석이 알 수 없이 서늘해지는 기이한 감각 속에서 서정운은 마른침을 삼켰다. 나가야 한다, 그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아……, 반지 좀 주워 줄래?”

한무화의 발꿈치 옆까지 밀려간 반지를 보며 서정운은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잠시 기다려도 그대로 앉은 채 움직이지 않는 한무화에게 의아한 시선을 준다.

눈이 마주쳤다. 유난히 낯설어 보이는 까만 눈으로 찬찬히 서정운을 보던 한무화가 말했다.

“직접 주우십시오.”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를 들은 순간 서정운은 움직임을 멈추고 빤히 한무화를 보았다.

화가 난 것 같, ……지는 않, ……아니, 모르겠다. 저 무표정한 얼굴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한무화는 말없이 서정운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고, 잠시 그를 마주 보던 서정운은 그에게 다가섰다.

한무화의 두 발 사이, 발꿈치 근처에 반지는 떨어져 있었다.

서정운은 그의 다리 사이에서 무릎을 굽히며 반지를 보았다. 그래 봐야 시야에 들어오고 있는 그의 중심 쪽으로 몸을 기울이면서도 한사코 반지에만 시선을 주었다. 갑자기 몸이 더워졌다. 두세 뼘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그의 중심이 어렴풋이 일어서는 듯 시야 끝에 잡히는 것은 물결이 일렁이는 탓일 거다.

“--.”

입을 굳게 다문 서정운이 손을 뻗어 반지를 움켜쥐었을 때, 갑자기 한무화가 일어섰다. 미리 말도 기척도 없이 갑작스럽게 일어섬과 동시에 그의 중심이 서정운의 얼굴 앞으로 다가왔고, 당황한 서정운은 얼른 몸을 뒤로 물리다가 물살에 떠밀려 넘어지고 말았다.

탕 안에 주저앉은 서정운은 눈을 껌벅이며 고개를 들었고, 한무화는 서정운의 앞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장난치지 마.”

서정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한무화는 잠시 사이를 두고 되물었다.

“장난이요?”

“일부러 이런 거잖아.”

이게 갑자기 무슨 성희롱이야, 너답지 않게, 하고 서정운은 혀를 찼다. 정말로 한무화답지 않은 장난이라고 생각하며 무덥게 달아오른 심장을 애써 가라앉힌다. 그러나,

“일부러는 맞습니다. 그런데 장난은 아닙니다.”

나직이 말하는 것과 동시에 한무화는 손을 뻗었다. 물속에 아연히 앉아 있던 서정운은 불시에 그에게 붙들려 훌쩍 일으켜 세워졌다가--그다음 순간에는 탕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한무화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바로 눈앞으로 다가온 한무화를 마주 보며 서정운은 몇 초쯤 아무 생각도 못 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그런 몇 초가 지난 뒤 불현듯 현실로 끌려온 그는, 자신을 뚫어질 듯 응시하는 한무화의 새카만 시선과, 허리를 단단히 붙들고 있는 커다란 손과, 자신의 벗은 사타구니와 맞닿아 있는 그의 단단한 허벅지를 깨닫는다.

실올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과 알몸이 바싹 붙어 있는--노골적이고 후덥지근한 체온.

“어, 잠, 잠까,”

“어젯밤 내도록 생각해 봤습니다만, 저는 역시 큰아버지의 염려가 납득도 안 되거니와 바라지도 않습니다.”

허둥거리며 일어나려는 서정운을 한무화의 커다란 손이 지그시 내리눌렀고, 그와 함께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정운은 멈칫 입을 다물며 시선을 든다. 한 뼘도 떨어지지 않은 앞에서 한무화의 까만 눈이 서정운을 응시하고 있었다.

“제게 안 좋은 이야기가 붙고, 제가 흐트러질까 봐……?”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한무화는,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큰아버지는 잘못 생각하고 계십니다. 저를 망가뜨리는 건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서정운의 허리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바로 코앞까지 한무화의 얼굴이 다가왔다. 그렇게 가까운데도 그 새카만 눈은 선명하게 잘 보인다. 이제야 서정운은 그 안에 분노--혹은 그와 비슷한 어떤 격한 감정이 담겨 있다는 걸 안다.

“저는 서정운 사범님이 제 곁에 있기를 바랍니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 했다.

“비단 제게 지도 말씀을 주시는 것만이 아닙니다. 절 피하지 마십시오. 멀리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저는 서정운 사범님이 제게서 거리를 두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잇새로 중얼거리는 낮은 목소리와 동시에, 서정운의 입술에 한무화의 입술이 닿았다. 그의 혀가 가볍게 입술을 밀어 연다.

“거리가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빈틈이라곤 없도록. 간밤에 내린 결론은 그것입니다.”

입술이 겹쳤다. 동시에 서정운의 허리를 움켜쥐고 있던 손에도 힘이 들어가 서정운의 샅을 바싹 끌어안았다.

“--.”

숨이 막혔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감각은, 그러나 처음 맞는 감각 같다. 마치 뿌리째 잡아먹힐 것처럼 무섭도록 격렬한 감각이었다.

한무화의 혀가, 입술이, 서정운을 삼킨다. 서정운의 혀도, 입술도, 이어 뺨이며 턱, 코끝, 내려가 목덜미까지, 어느 곳이라도 빼놓지 않으려는 듯 깨물고 빨았다.

한무화의 팔뚝을 움켜쥔 서정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몸은 철벽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밀어도, 아무리 버둥거려도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단단하다.

“무, 무화, --.”

서정운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한무화의 입술이 서정운의 말을 막았다.

“그, 그만 하, 너, 너한테, 안 좋,”

간신히 몇 마디의 말을 중얼거린 서정운이었으나, 다음 순간 뜨끔하게 입술을 물어뜯기는 감각이 닥쳐왔다.

“제 걱정이라면 하실 것 없습니다. 적어도 이런 방식으로 걱정해 줄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한무화가 그렇게 속삭이며 서정운의 입술을 물어뜯었다. 마치 맹수가 성나서 으르렁거리는 것 같다.

띄엄띄엄 끊어지는 의식 속에서 서정운의 아래로 무언가 닿았다. 단단하게 부풀어 서정운을 쿡쿡 찌르는 것이 무엇인지, 보지 않아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뒤이어 닥쳐오는, 맹렬하게 서정운의 아랫도리를--마찬가지로 반응을 보이며 부풀기 시작한 서정운의 중심을-- 찔러 대기 시작하는 고양된 마찰.

“--.”

안 된다. 안 되는데. 의식이 몽롱해진다. 오랜만에 닥쳐온 감각은 어느 때보다도 거세어서 이성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서정운은 제 입술을 핥던 한무화의 혀를 핥았다. 한무화가 목구멍 속으로 낮은 웃음을 터뜨리는 기색이 전해져 왔다.

어느 순간 서정운은 아주 짧게 의식이 끊어졌다. 고작 1, 2초 정도의 짧은 시간 후 아랫도리에 탈력감이 느껴졌다.

자신이 사정했음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도 몇 초 더 지난 뒤였다. 그리고 다시 몇 초 뒤, 한무화의 것은 여전히 성이 나 있다는 걸 깨닫는다.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내쉬는 서정운의 손이 한무화의 팔에서 미끄러졌다. 붙잡을 힘조차 잠시 빠져 버린 탓이다. 그러나 도중에 다시 그의 팔을 붙드는 서정운의 손을 한무화가 내려다보았다.

그가 서정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서정운의 손가락에 걸려 있는 반지를 뽑아내더니 그 반지를 탕 밖으로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챙--, 멀리서 반지가 부딪쳐 구르는 소리가 들리다 멈췄다.

“제가 생각을 잘못했던 것 같습니다. 서정운 사범님께 애인이 있다고 떠들어 대는 건 좋은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눈을 크게 뜨며 한무화를 쳐다보는 서정운에게 한무화가 나직이 속삭였다.

“싫, 저건 내,”

소리가 난 쪽으로 가려고 일어서려 하는 서정운을 한무화가 붙들었다. 그 힘에 도로 눌려 앉고 마는 서정운을, 더 이상 무어라 할 틈도 없이 다시 한무화가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는 다소 여유 있게, 그러나 여전히 탐욕스런 손길로, 입매로, 한무화는 서정운을 훑어내린다.

더웠다. 몸속이 달아올랐다. 그 안에서 넘실거리며 느껴지는 건 분명한 쾌감이다. 막 방금 쾌감을 폭발시킨 아랫도리가 이내 다시 저릿저릿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한무화의 손이, 입이 닿을 때마다 서정운은 그 모든 곳에 전기가 닿는 것처럼 흠칫거렸다. 그럴 때마다 한무화가 기분 좋게 웃는 게 살갗 너머로 느껴졌다.

쾌감 속에 이성을 놓은 서정운이 한무화의 목덜미에 이마를 대고 가쁜 숨만 내쉬고 있던 때,

“--.”

서정운이 움칫 어깨를 움츠렸다. 깜짝 놀라 눈을 깜박이며 한무화를 올려다본다.

여태 한 번도 손이 직접 닿았던 곳이 없는 안쪽에 가만히 와 닿는 감촉이 예민하게 느껴졌다. 꼭 다물려 있는 아래를 쓰다듬던 한무화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그를 쳐다보는 서정운을 뚫어질 듯 응시하면서 그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하, 하지 마, 으, --이상, ……어, 어, 이상해, 이상해.”

서정운은 큰 눈을 껌벅이며 어쩔 줄 몰라 한무화를 움켜쥐었지만, 서정운을 바라보는 한무화의 눈은 외려 더 새카맣게 반들거렸다. 그의 숨결 또한 거칠다. 손가락이 하나 더 늘어났다. 서정운의 몸이 다시 움찔 튀어 오른다.

“이, 이상해, 무화야, 무화, 하지, ……기, 기분 나, 빠,”

“하지만 서정운 사범님, 발기하셨습니다.”

한무화의 짤막한 대꾸를 듣고 서정운은 몸을 움츠렸다. 그 말대로, 분명 소름 끼치게 낯설고 생경한 감각임에도 불구하고 아래가 달아올라 있었다. 나른했던 몸이 녹진하게 풀려 가는 걸 스스로도 알겠다. 그때 손가락이 하나 더 늘어났고 서정운의 몸이 다시 튀었다. 빠듯하게 벌어지는 느낌은 낯섦을 넘어 두려움에 가까웠다.

그 손가락들은 한동안 서정운의 몸속을 넓히기라도 하려는 듯 안쪽을 누르며 문질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쪽마저 젖는 것 같다는 착각까지 들 즈음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몸속을 빠듯하게 채우고 있던 것이 빠져나가는 그 소름 끼치는 느낌에 서정운이 부르르 몸을 움츠린 때,

“--!”

서정운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펄쩍 뛰었다.

막 방금까지 손가락이 들어와 있던 곳의 입구에 뭔가 닿았다. 단단하고 뜨겁게 부푼 거대한 것이.

설마.

서정운은 커다랗게 홉뜬 눈을 껌벅껌벅하며 한무화를 본다. 한무화는 그런 서정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표정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탐욕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큰아버지의 염려는 모두 틀렸지만, 하나는 맞았습니다.”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당혹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서정운을 내려다보던 한무화가 속삭였다.

“둘만 있으면 몹쓸 짓을 할지도 모른다, 그건 맞는 말이었습니다.”

염려할 대상은 틀린 것 같지만 말입니다, 라는 속삭임은 서정운의 귀에 들어왔지만 머릿속까지는 닿지 않았다.

한무화가 허리를 가볍게 밀었다. 그러자 아래를 벌리며 밀고 들어오려는--무시무시한 압박감.

“무, 무화야! 무화야, 무화야, 하지, 하지 마,”

서정운은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황급히 속삭이며 한무화를 움켜잡았다.

맙소사. 말도 안 된다. 말도 안, 어떻게 저걸,

한무화가 고개를 떨어뜨려 서정운에게 입 맞추었다. 그 결에 서정운은 말이 막혀 버린다.

“--.”

아래를 누르며 벌리는 느낌. 아직 끄트머리조차 들어오지 않았는데 몸 자체가 벌어지는 그 생경하고 빠듯한 감각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래서 서정운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 --….”

울었다.

울었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는지도 모른다. 눈에 더럭 고여 나온 물방울이 두세 방울 툭툭툭 떨어졌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 순간 한무화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물끄러미 서정운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에서 서정운은 띄엄띄엄 간신히 속삭였다.

“……아파. ……진짜로 아프단 말이야. ……무화야.”

목소리에 울음마저 섞이는 건 정말로 놀란 탓이다. 몸까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한무화는 그런 서정운을 기묘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희미하게 일그러진 얼굴 위로 갈등이 스쳤다.

“무화야, 무화야……”

서정운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라곤 모르는 듯이 거듭 그 이름만 속삭였고, 이윽고, 서정운의 머리 위에서 쓴 한숨이 조용히 새어 나왔다.

서정운의 아랫도리를 짓누르고 있던 살덩이가 천천히 떨어졌다. 서정운은 그제야 안도해 몸에서 힘을 빼고 늘어지고 만다. 아직껏 놀란 심장은 미친 듯이 쿵쿵거리며 뛰고 있었다.

“그러면 이걸로.”

그때, 한무화가 서정운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인 것 같았다. 이내 서정운의 손을 잡아 가만히 끌고 간 그는 그 손에 자신의 중심을 쥐여 준다. 그리고 그 손등 위를 덮어 쥔다.

“--.”

서정운은 희미하게 어깨를 움츠렸다. 자신의 손바닥 안에 빠듯하게 들어차 있는 이 어마어마한 부피감.

……조금 전에 넣으려 했던 게 이……, 생각만 해도 진땀이 배어 나와 서정운은 부르르 몸을 움츠렸다. 곧 한무화가 서정운의 손을 덮어 쥔 채로 손을 훑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정운은 자신의 손안에서, 더 이상 커질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더욱 부피감을 늘려 가는 걸 고스란히 느꼈다.

한무화가 다른 손으로 서정운의 성기를 쥐었다. 흠칫 움츠러드는 서정운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그 손 또한 훑어 올린다.

한무화의 허벅지 위에 그를 마주 보고 올라앉은 채, 서로의 성기를 쥐고 있는 이 희한한 모양새에 당혹스러워할 정신도 없이, 서정운은 다시 차오르기 시작하는 욕망에 몸을 움츠렸다.

손안에서 거대하게 부풀어 올라 젖어 들기 시작하는 한무화의 물건도, 그의 손안에서 흥분해 물기를 내뱉기 시작하는 자신의 물건도, 둘의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욕망이 한계에 이르렀을 즈음 서정운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한무화에게 몸을 기대고 말았다. 자신의 품에 들어오다시피 한 서정운을 내려다보는 한무화의 눈매가 어렴풋이 휜 것 같았다.

욕망을 훑어 올리던 손길이 점차 빨라지다 어느 순간 멎었고,

“--.”

목구멍 안에서 길게 울리는 신음도, 희뿌옇게 터져 나온 욕망도, 어느 쪽이 먼저인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수구를 타고 물이 내려가는 소리가 아까부터 이어지고 있었다. 물이 빠지는 탕의 수위가 조금씩 낮아지고 있다.

서정운은 탈의실 평상에 인형처럼 우두커니 앉아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는 한무화가 서서 마른 수건으로 서정운의 머리카락을 닦아 주고 있었다.

“…….”

하나씩 기억이 떠올랐다. 드문드문 의식이 끊기긴 했지만 대체적으로는 다 기억났다. ……안 났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기억을 통째로 지워 버리면 좋겠다.

“……, ……, …….”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며 머리를 쥐어뜯는 서정운을 묵묵히 내려다보던 한무화가 손을 멈추었다.

“이제 정신이 드셨습니까?”

“……정신은 아까부터 들어 있었어.”

“예. 물론 기절하신 적이 없다는 건 압니다. 사정하실 때 잠깐씩 넋을 놓긴 하셨던 것 같습니다만.”

저렇게 담담하게 말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서정운은 다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다.

“미쳤어, 미쳤어…….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반쯤 강제적으로 휩쓸려 넘어가 버리긴 했지만, 사실 밀어내려면 밀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한무화의 체격이 서정운보다 훨씬 크고 힘도 압도적으로 세다곤 해도, 서정운 역시 오래도록 운동을 해 온 사람이다. 제대로 저항했더라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되어 버린 건 결국 어느 정도는 서정운이 손을 놓아 버렸기 때문이고, 그래서 한무화의 탓만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분명히 쾌락을 느끼며 허리를 흔들었던 기억도 남아 있기에 더 할 말이 없기도 하다.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서정운을 내려다보던 한무화는 물기가 걷힌 머리에서 수건을 걷어내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한다.

“사범님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서정운은 입을 다물었다. 울 것 같은 기분으로, 그리고 그런 눈길로 한무화를 쳐다보던 그는 잠시 사이를 둔 뒤 한숨처럼 말한다.

“이건 아니야.”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뭔지 계속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해도 달리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무화야.”

한무화는 서정운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입을 연다.

“제가 사범님을 좋아하면,”

“--.”

“사범님의 마음을 받아 준다면, 가지 않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 조용한 말 속에서 예전의 기억이 떠오른 서정운은 입을 다물었다.

분명 서정운은 한무화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그가 자신을 받아 준다면, 마음을 받아 준다면 어디도 가지 않겠노라고. 그렇게 되고 나면 자신뿐 아니라 그의 마음까지 챙겨야 하게 될 의무 또한 생길 테니까, 그러면 누가 자신을 필요로 한들 그에게서 떠나지 않으리라고 했었고,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는 사범님이 좋습니다. 저는 사범님이 절 멀리하지 말았으면, 늘 저와 함께 있으면서 절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앞에서 서정운의 눈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면서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고하는 한무화를, 서정운은 숨을 멈춘 채 바라보았다.

심장이 울컥 더워졌다. 쿵쿵거리며 세차게 튀어 오르는 심장 박동이 목구멍까지 꽉 메우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말을 왜 지금 해.”

일순 울 것 같던 표정을 가다듬고서, 서정운은 한숨처럼 속삭였다. 아쉬움이 밴 단단한 시선 앞에서 한무화의 표정이 멈칫했다.

그 말을 그때 했더라면. 그래서 서정운이 기쁘게 고개를 끄덕인 뒤였더라면. 그러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알량한 의무를 핑계 삼아 그의 곁에 계속 붙어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서정운의 고백을 거절했었고, 그러고도 다시 고백했던 때에도 다시 거절했었다.

이제 서정운은 스승이 경계하고 염려하는 이야기를 먼저 받아들였고, 한무화는 그때보다도 더욱더 성장해 있었다. 그때보다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소한 것 같지만 아주 커다란 차이였다.

“그때는 지났어. 네가 놓은 거야.”

“--, 이제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네가 원하는 대로만 하려 들지 마. 상황은 네가 원하는 때에, 네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만은 않아. ……이젠 내가 놓기로 했어.”

서정운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한무화의 까만 눈이 얼어붙었다.

“……만일 그때 잡았더라면,”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나직이 묻는 목소리가 무뚝뚝하다.

“그때 사범님을 잡았더라면, ……그런 뒤 큰아버지가 사범님께 어떠한 말씀이든 하셨더라면, 그래도 사범님은 큰아버지의 말씀을 들으셨을 겁니까?”

“지금 말해 봐야 의미 없는 가정이야. 너는 그때 이야기했어야 해.”

그랬더라면 좋았을 텐데. 정말로. 그랬더라면.

서정운은 다시금 밀려오는 아쉬움을 억지로 삼켰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도 일렁이며 칭얼거리고 있는 심장을 달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직껏 몸속에 남아 있는 미열도.

……안 되겠다. 어서 일어나야겠다.

한무화를 더 마주 보고 있을 자신이 사라졌다.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머릿속은 여전히 정리가 되지 않았고, 한동안도 정리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미쳤지, 왜 그랬을까, 하지만 좋았는데,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데, 온갖 생각들이 뒤섞여서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울 것 같았다. 정말로 울고 싶은 기분이다.

왜. ……왜 이제 와서.

서정운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욕실에서 기운을 너무 뺀 탓인지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서정운의 몸이 약간 앞으로 기우는 순간 한무화가 그를 부축하려는 듯 다가서 팔을 뻗었다. 그의 두터운 팔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서정운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

한무화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선다.

믿어지지 않는 거라도 본 것처럼, 뚫어지게 서정운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팔을 내린 그는 굳은 얼굴로 서정운을 지켜보며 그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서정운은 애써 태연한 기색으로 옷을 벗어 둔 곳으로 갔다. 아무렇지 않은 낯을 하고 있으면서도 도로 옷을 걸치는 손길이 초조하고 조급해졌다. 그런 서정운을 한무화는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미쳤어, 하는 게 아니었는데.

서정운이 한숨과 함께 중얼거린 말은, 입속으로만 중얼거렸다고 생각했는데 입 밖까지 나왔던 모양이다. 불현듯,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무 말 없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묵묵히 서정운을 바라보고 있던 한무화가 입을 열었다. 마지막 옷가지인 셔츠를 걸치고서 한숨을 내쉬던 서정운이 멈칫하며 그를 보았다.

한무화가 서정운과 시선을 맞춘 채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텐데 말입니다. 제 목마름이 무엇으로 해갈되는지.”

“--.”

낯선 목소리다. 일견 평소처럼 담담한 듯한 목소리는, 그러나 서정운이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서늘하고 위험한 빛을 품고 있었다. 저 차분하게 바라보는 까만 눈만큼이나.

“그러나 어차피 시간문제였을 겁니다.”

한무화는 조용히 말했다.

“전 이미 알았고, 알아 버린 건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 나직한 말은 어떠한 결정에 마침표를 찍는다.

서정운은 말없이 한무화를 바라보았다. 한무화 역시 그 시선을 마주 본다.

“…….”

서정운은 무어라 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잠시 뒤 도로 입을 다물고 말았고, 아무 말 없이 걸음을 돌렸다. 느릿하게 발을 끌며 욕실에서 나간 그가 등 뒤로 문을 닫을 때까지 한무화는 그 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이윽고 그곳에는 고요만 남았다.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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