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op By Drop 4-intermission 5. (22/28)

intermission 5.

등 뒤에서 대수련장 문이 열리는 기척이 났다.

“……무화구나.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해?”

늦은 시각에 대수련장에 불이 켜져 있어서 들러 봤다며 고개를 비죽 들이민 사람은 지방에서 올라온 당숙이었다.

한무화는 대수련장 가운데 반듯하게 정좌를 하고 있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서정운 사범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밤에 여기서 지도를 받기로 해서요.”

“어? 서정운 씨? 서정운 씨 좀 전에 돌아가는 것 같던데? 좀 급하게 돌아가는 눈치길래 애인이라도 만나러 가나 싶더니만.”

당숙은 눈을 껌벅이며 고개를 기웃거렸다. 한무화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자 그는 공연히 자신이 당황한 듯 약간 허둥거리는 눈치였다.

“아닌가? 아닌데, 서정운 씨 맞는데. 어르신한테 인사하고 주차장으로 가는 게 돌아가는 모양이었는데. 아, 혹시 깜빡했나? 깜빡했나 보다. 아직 멀리 안 갔을 테니까 얼른 전화해 보면…….”

당숙은 허둥허둥 자신의 전화를 꺼내어 한무화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잠시 그 전화를 쳐다보던 한무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약속했던 사람이 그냥 돌아가 버렸다는데도 전혀 화난 기색도, 당황한 기색도 없이 담담한 한무화를 보고 당숙은 “어, 그래,” 하고 느릿느릿 전화를 도로 집어넣었다. 좀 놀란 빛은 보일 법도 한데, 이렇게 될 수도 있다고 짐작이라도 했던 것처럼 평연했다.

“그래, 여튼 그러면……, 혼자라도 연습하다 가게?”

당숙은 주춤주춤 발걸음을 돌리며 물었고, 한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먼저 들어가 주무십시오.”

“어, 그래. 열심히 해라.”

당숙은 대수련장에서 나갔고, 그곳에는 다시 조금 전처럼 정적 속에 조용히 정좌하고 앉은 한무화만 남았다.

그대로 묵묵히 앉아 있던 한무화는 제법 시간이 지난 뒤에야 조용한 숨을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와서 다행인지도 모른다. 아니, 안 오길 잘했을 것이다.

아까부터 줄곧 한무화는 이 대수련장에서 서정운을 품에 넣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서정운은 성기에 쏟아지는 자극과 쾌감을 견디지 못해 새빨갛게 무르익은 얼굴로 연신 울음 같은 호흡을 내쉬고 있었고, 한무화는 굳이 그를 머리에서 몰아내려 하지 않았다. 외려 더욱 격렬하게, 더욱 탐욕스럽게 그를 몰아세운다. 그가 아무리 울며 바르작거려도 그를 놓지 않고.

그러다 어느 순간 떠올리는 것이다.

그를 가진다면.

온전히 품는다면.

그의 몸속에 자신을 밀어 넣고 그 속의 체온을, 점막을, 쾌락을 생생하게 맛본다면.

“--.”

그래. 그는 오늘 밤 이곳에 오지 않길 잘했다. 그가 왔더라면 그 생각은 어쩌면 지금쯤 현실이 되어 있었을지도 몰랐다.

한무화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내디뎌, 서정운이 가장 먼저 바로잡기 시작했던 기본 보법을 밟기 시작한다. 아주 기초적인 보법부터 시작해 점차 복잡하고 섬세한 걸음으로, 거기에 무릎을, 다리를, 손, 팔꿈치, 어깨, 몸통을, 하나씩 움직임을 추가해 가며 몸을 움직인다. 정무도의 가장 기본적이며 근본적인 움직임들을 천천히 구사하는 그의 동작은 하나도 막힌 데가 없었고 부족한 데도, 과한 데도 없다.

그 모든 움직임을 소화하며, 한무화는 생각하는 것이다.

둑이 터진 것 같다. 한번 터져 구멍이 생기고 나자 그 구멍은 점점 더 커지다 이윽고 와르르 무너져, 이제는 걷잡을 수 없었다.

목이 말랐다. 이제 이 갈증이 무엇인지도 안다. 서정운과 쾌락을 공감하던 때, 견디지 못한 신음이 귀를 파고들어 바로 그때 그 자신도 절정에 이르던 순간, 그 끊이지 않던 갈증이 일시에 해갈되던 그 기분을 한무화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갈은 그때뿐, 잠시 목마름을 잊었던 목은 이제 더더욱 갈증을 호소하며 타고 있다.

“…….”

한무화는 허공에 호를 긋고 있는 자신의 손끝을 보았다. 그 손으로 서정운을 붙들었다. 그를 낱낱이 훑어, 급기야는 그의 모든 것을 삼켰다.

한무화는 기이한 눈으로 자신의 손과 자신의 몸을 보았다.

아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것은, 그를 안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미 부분부분 알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몸을 가까이 맞댄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자연스러운 듯한--지금껏 이러지 않았던 것이 차라리 부자연스러운 것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로, 그 느낌은 익숙했고 친근했다.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을 이제야 찾은 것처럼.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낯익은 느낌.

그것은 동시에 내 것이어야 한다는 느낌이기도 했다.

그래. 내 것이어야 한다.

……어떻게.

여태 어떻게 이 욕심을 모를 수 있었는지. 어떻게 이 욕심을 모르고 눌러 둘 수 있었는지. 사실은 처음부터 깨닫고 있었을 텐데도.

“--.”

그가 자신을 볼 때마다 눈매를 휘며 웃는 게 좋았다. 손을 가볍게 머리에 올린 뒤 머리카락이 손바닥에 닿으면 그 순간부터 살짝 힘주어 쓰다듬는 것도. 무화야, 자신의 이름도 그가 부르면 다르게 들렸다. 새벽이면 대수련장에 홀로 앉아 그 공기에 녹아들 듯하던 모습도, 강아지와 진지하고 진득하게 놀아 주는 것도, 사범으로서 그의 옆에 반듯이 서서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거침없이 짚어 주는 혹독한 말조차.

무엇 하나.

그 무엇 하나 기억에 담겨 있지 않은 게 없었다. 어느 하나도 흘려보낸 게 없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다.

--급하게 돌아가는 눈치길래 애인이라도 만나러 가나 싶더니만.

문득 머리에, 조금 전 당숙이 흘렸던 말이 스치고 지났다.

“--.”

탕!! 다리를 휘둘러내려 바닥을 내리 찬 발길질에 온 대수련장이 쩌렁쩌렁할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나무 마루에 금이 간다.

한무화의 움직임이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온유하고 느리던 움직임이 점차 삽상하고 호쾌해진다.

한무화는 아무 데나 던져 버린 반지를 떠올렸다. 서정운에게 맞지도 않았던 반지다. 맞지 않는 반지 따위는 몇 번이고 빼앗아 내던져 버릴 수 있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만 하려 들지 마.

서정운의 말도 스쳐 지난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대로 해야겠습니다. 이번만큼은.”

한무화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말을 나직이 읊조렸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 것으로. 설령 그가 싫어하더라도.

“--!”

이윽고 한무화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 상대를 허공에서 휘둘러 내렸고, 들리지 않는 우렁찬 소리가 공기를 진동시킨 뒤--격렬하고 거대하던 진동이 일시에 사라지고, 그곳에는 정적만 남았다.

고요한 무. 그러나 그 아래는 전혀 끝나지 않고 변함없이 깔려 있는, 느리고 거대하지만 맹렬한 탐욕.

이거구나.

한무화는 불현듯 깨달았다.

이게 내가 가져야 할 내 움직임이다. 부족해. 부족해. 좀 더. 이렇듯 목말라하는 탐욕스러운 것이 내 온전한 모습이다.

한무화는 가만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거기에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것처럼.

익숙하다. 처음부터 이래야 했던 것처럼, 여태 잘못된 길에서 헤매다 이제야 자신의 길로 돌아온 것처럼 이 자리가 익숙했다.

모든 것이. 이제 제자리가 어디인지 알았다.

한무화는 천천히 아무도 없이 드넓은 대수련장을 둘러보았다.

편안한 익숙함, 그리고 끝없는 탐욕.

이것이 나라는 인간의 본질이고, 내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알아 버린 건 어쩔 수 없었고 돌이킬 수 없었다.

“…….”

한무화는 느린 숨을 길게 내쉰 뒤 걸음을 돌려 미련 없이 대수련장에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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