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소리는 없었다. 그러나 마치 귀에 거대한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웅장한 기척이었다. 호쾌하고 거센 힘이 움직임을 만들어 내고, 그 움직임은 다시 장대한 기척을 만들어 낸다.
그 기척 끝에 한무화가 있었다.
“--.”
한무화가 개인 수련을 하며 일련의 움직임을 마쳤을 때, 넓은 대수련장은 평소보다 훨씬 조용했다. 많은 이들의 시선이 그가 서 있는 자리로 모여 있었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다. 오로지 한무화만이 그 시선들을 모르는 듯--혹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 평연히 연습단에서 내려섰을 뿐이다.
“저 정도면 하계 선수권 성적, 상당하겠는데요. 10위권에는 충분히 들어서겠어요. 아니 잘하면 5위권에도…….”
한호영의 옆에 서 있던 수련생이 감탄스레 중얼거렸다. 정련과 체련이 연습하는 구역은 명확하게 나뉘어져 있었음에도, 멀찍이서 연습하는 한무화를 지켜본 이들은 체련만이 아니었다.
그가 연습단에서 내려서자 그제야 시선을 돌리고 자신의 연습에 열중하기 시작하는 선수들의 모습이 여럿 보인다. 그런 가운데,
“이 자리 내가 쓰겠다고 표시해 뒀는데 왜 말도 안 하고 멋대로 쓴 거야?”
한무화가 내려선 연습단으로 올라가면서 체련 선수 하나가 거칠게 말했다. 연습단 모퉁이에 있는 의자에 놓인 물병과 수건이 그 선수의 것이었던 모양이다.
연습단에서 내려서 물을 마시던 한무화는 그 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그 선수와 수건, 물병 따위를 시선으로 훑더니 덤덤히 말한다.
“자리가 비어 있길래,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서 잠시 썼습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기다리는 동안 몸이 식어 버리면 준비 운동부터 다시 해야 한단 말이야.”
선수는 불쾌한 듯 투덜거리곤 됐다는 듯이 등을 돌렸다. 한무화는 그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곧 시선을 거두어 다시 물을 마신다.
싸움이라고도 할 수 없는 사소한 부딪침은 그걸로 끝났고, 사람들의 시선은 흩어졌다. 설령 그들이 싸운다 한들 구경만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하계 선수권 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다들, 특히나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자신의 연습에만 집중하기에도 바빴다.
“겨우 몇 분 연습단 좀 쓴 것 같고 뭘 몸이 식기까지나 한다고. 자리 맡아 놓은 것 자체가 이상한 거지. 저쪽도 같은 체련끼리라도 분위기는 썩 좋지 않네요.”
한호영의 옆에서 수련생이 중얼거렸다. 팔짱을 낀 채 뭔가 생각에 잠겨 있던 한호영이 반쯤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나 저기나, 지금은 다들 날카로울 때니까.”
게다가 어차피 대회에서 순위를 결정짓는 건 개인의 기량이다. 정련이냐 체련이냐는 선수 개개인에게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같은 체급의 선수라면 모두가 경쟁자였고, 다른 체급이라 해도 탁월한 선수는 질시의 대상이었다.
특히나 정무도의 각종 대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성대하게 열리는 하계 선수권 대회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하계 선수권에서 일정 순위권 이상을 획득하는 건 다른 대회에서 이기는 것에 그 영예를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무화라면 더 그렇겠지. 뭐 어쨌든, 체련 선수들 입장에서 봐도 저놈이 갑자기 나타난 굴러온 돌인 건 똑같잖아. 그런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고 몇 안 되는 순위권을 차지해 버리기라도 하면 안 억울하겠냐.”
한호영이 심상하게 말했다.
웬만한 박힌 돌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굴러온 돌이다. 배타적인 성향인 어떤 이들에게는 더 밉상일 조건이었다. 그 말에 금세 납득했다는 듯 수련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죠. 나도 같은 체급이었더라면 배 아파 죽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정말 굉장해요. 근래 들어 부쩍 실력이 더 오른 것 같은데요.”
수련생은 다시금 감탄스레 한숨을 내쉰다. 한호영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미 연습단에서 내려선 한무화를 어딘지 미심쩍게 바라보며 입매를 찌푸릴 따름이다.
“게다가 선수들 죄다 평소보다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게 눈에 보이는데, 한무화 선수만 혼자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아요. 태평하달까, 대담하달까…….”
“……, 내 눈엔 저놈이 제일 아슬아슬해 보이는데.”
한호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기울였을 때였다.
“저놈은 왜 저 모양이야?”
뒤에서 불쑥, 괴이쩍다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깜짝하며 돌아보자 어느새 왔는지 한태일이 거기 서 있었다. 주위에 있던 선수들도 그제야 정원사범이 온 줄을 알고 얼른 더 열심히 연습하기 시작했고, 한호영 옆에 있던 수련생도 재빨리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태일은 눈썹을 찌푸린 채 한무화를 보고 있었다.
“제 길을 찾아가긴 한 것 같은데, 왜 다스리질 못하고 있어?”
“아, 아버지, 기척도 없이 언제 오셨어요.”
“그리고 넌 왜 놀고 있냐.”
“예? 아니 저야 뭐, 선수도 아니고.”
“지도사범이면 선수보다 더 바빠야지, 그리 손 놓고 놀아?!”
대뜸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인 한호영은 펄쩍 뛰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면서 시선을 돌리니 저쪽 문으로는 한수일이 막 들어서고 있었다. 두 분이 이렇게 같은 때에 오신 걸 보니 상원사범들과 더불어 회의라도 마치고 오셨나 보다. ……그런데도 꼭 이렇게 따로 멀찍한 문으로 들어오시다니, 변함없이 두 분 사이 단란도 하시다.
한수일도 눈살을 찌푸리고서 심각한 얼굴로 한무화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성큼성큼 한무화에게 다가가는 게 보인다.
평소라면 그런 한수일을 보고 코웃음 치며 비웃었을 한태일도 꾹 다문 입매를 찡그린 채 한무화를 보고 있었다.
“저놈 저리하면 안 되는데……, 무어 일단 아직은 지켜봐도 될 테지만.”
한호영은 나직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한태일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러나 한호영이 조심스럽게 무어라 운을 떼기도 전에, 이내 한태일은 “흥!” 하고 코웃음 쳤다.
“그래 봐야 체련 녀석인데 내 알 바 아니지! 아무렴, 어련히 알아서 잘하려고.”
어디 두고 보자는 뉘앙스로 위풍당당히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저 끝까지 들렸는지, 한수일이 흘끔 노려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태일은 더욱더 턱을 치켜들었다. 두 노인의 말 없는 기 싸움에 삽시에 대수련장 안의 분위기가 고요하고 험악해졌다.
아 싫다……, 이러다 또 등 터지겠어……, 슬그머니 고개를 움츠리던 한호영을 때마침 구해 준 것은 전화벨 소리였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한호영은 얼른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내 들며 대수련장 밖으로 나와 버렸다. 누가 이렇게 고맙게 도와주었나 액정을 보니, 요즘 얼굴 보기 힘든 서정운이다.
“어, 사형! 마침 전화 잘하셨어요!”
「왜. 또 사부님이랑 정원사범님이랑 한자리에 모이셨어?」
“…….”
이 사형은 가끔 보면 귀신이라니까……. 전화 받자마자 저 말만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바로 나올까.
“어, 대수련장 둘러보러 오셨는데 두 분 나란히 오셨지 뭡니까. 근데 사형은 안 와요? 벌써 며칠이나 안 왔잖아요. 대회도 얼마 안 남았는데 좀 와 보지?”
「밤에 잠깐 갈게. 한 열한 시쯤? 그전까지는 시간이 안 나.」
다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 유능한 사형은 벌써부터 바빴다.
종친회 즈음부터 일을 재개한 그는 복귀하자마자 일거리가 밀려드는지 거의 본산에 오지를 못했는데, 그즈음부터는 한호영도 본격적으로 선수들의 하계 선수권 대회 준비를 돕느라 바빠져서 사형과 따로 본 적은 거의 없었다.
거의 한 달이 넘어가고 있는데 그사이에 고작해야 통화 몇 번, 그리고 사형이 가끔 본산에 선수를 봐주러 오는 게 며칠에 한 번쯤. 그나마 사형이 오는 것도 정기적이진 않아서 언제 올지는 그날그날 연락을 주곤 했다.
그전의 사범 수련 합숙 때까지는 그래도 일주일에 서너 번은 보다가--게다가 수련 합숙 때에는 매일같이 얼굴 마주치다가-- 갑자기 뜸해지니, 며칠에 한 번이라는 게 사실 그렇게 뜸하게 보는 건 아닌데도 왠지 오래 못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하계 선수권 대회 지도사범도 아버지 명으로 형식적으로 등록해 둔 것이다 보니 억지로 나오라고 할 건 아니었고, 사형도 거의 일 마치고 밤에 들렀다가 그나마 2, 30분 봐주고 돌아가는 걸 보면 그 나름대로 시간을 내서 나와 보는 것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하루라도 더 보면 좋긴 하겠다. 비록 입은 독사 같아도 고칠 점 짚어 내는 데에는 귀신같은 사람이었으니.
“열한 시? 너무 늦는데. 그때쯤이면 선수들 대부분 돌아갔을 텐데, 차라리 시간 좀 더 날 때 오지 그래요?”
「아냐, 또 며칠은 시간 안 나. 지난번에 갔을 때 풀어 두고 온 손목시계도 찾아올 겸해서 오늘 잠깐이라도 시간 날 때 가 보려고.」
“아, 그거 제가 챙겨 뒀어요.”
「어, 나중에 줘. ……그리고 그때까지 남아서 연습하는 놈들만 보면 되지 열심히 하지도 않는 놈들 봐서 뭐 해. 내 눈만 번거로워지지.」
“…….”
그래, 이런 사람이었지……. 아무리 그래도, 열한 시 넘어서까지 연습하는 독한 놈들이 몇이나 된다고…….
하지만 보통은 그 시간이면 그냥 안 오고 다음에 온다 할 텐데, 그 늦은 시각에도 어쨌든 짬이 나니 오겠다는 것만 봐도 이 양반도 반대 입장이라면 그 시각까지 연습할 양반이라, 뭐라고 반박하지도 못하겠다.
“그래요. 그때까지 몇 명쯤은 남아 있겠지.”
「남 이야기 하기 전에 너부터 좀 연습하면 어떨까 싶다.」
“나? 내가 왜? 난 선수도 아닌데.”
「요새 너 보면 내 눈이 많이 번거롭더라. 내 눈 닿는 데서 사라지든가 제대로 연습하든가 둘 중 하나는 해.」
“……. 그러죠 뭐.”
한호영은 불퉁하게 내민 입으로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오늘 밤 늦게 오겠다는 게 전화한 용건이었는지 서정운은 곧 별다른 말 없이 전화를 끊었고, 한호영은 흘끔 대수련장 안을 돌아보았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의 불꽃 튀는 분위기는 여전한 성싶다. 좀 더 빈둥거리다 들어가야지.
“…….”
그러나 막 창문틀 아래 웅크리고 앉으려던 한호영은 멈칫한 채로 잠시 침묵했고, 이내 “에이.” 하고 투덜거리며 걸음을 돌렸다. 요즘 좀 게으르긴 했다. 하지만 세 시간 연습하던 걸 두 시간 오십오 분쯤으로 줄였을 뿐인데 그걸 귀신같이 알아보는 저 날카로운 매의 눈을 계속 번거롭게 할 수야 없는 노릇이다.
한호영은 씁쓸하게 입맛을 쩍쩍 다시며 대수련장으로 들어섰다.
하계 선수권이 얼마 남지 않은 여름날, 대수련장 안은 연일 선수들의 열기로 후끈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
서정운은 그가 말한 대로 정확히 열한 시에 왔다.
그리고 한호영은 그가 온다는 소식을 아무에게도 전하지 않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열한 시 넘어 그가 등장한 걸 보자마자 그때까지 대수련장에 남아 연습하고 있던 성실한 선수 몇 명의 낯빛이 거무죽죽해졌던 것이다. 미리 말했더라면 한 명도 안 남아 있었을지도 몰라…….
서정운이 재킷을 벗으며 대수련장 안을 한 바퀴 둘러보는 동안 그 넓은 곳은--비록 사람은 두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안 남아 있었다고는 하나--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사람들의 얼굴이 딱딱해지는 게 확연히 보였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멀어지면 그제야 몸에서 힘을 푸는 것이다.
“…….”
참 묘한 마성이 있는 남자란 말이야……, 저놈의 독설 듣기 싫어 죽겠다고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도, 또 저 남자가 아무 말 안 하고 넘어가면 은근히 실망하는 기색들이거든.
문에서 제일 가까운 자리에서 몸을 풀 겸 개인 수련을 하는 와중에 거울 속으로 그 정경을 지켜보며 한호영이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정운의 눈길이 한호영에게 딱 닿았을 때, 한호영은 냉큼 수련을 그만두고 돌아섰다. 남들이야 어떻든 자신은 혹독한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굳이 야단을 왜 맞나.
“오늘은 그래도 연습하는 척이라도 좀 했나 보지?”
누군가에게 문자라도 왔는지 전화를 확인하며 한호영 쪽으로 걸어온 서정운은 옆의 의자에 재킷을 걸쳐 놓고 앉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 보는 줄 알았는데 그새 또 봤나 보다. 하여간 귀신…….
“뭐, 짚어 줄 만한 사람 없어요?”
“글쎄, 일단 지금은 딱히 안 보이네. 각자 제일 자신 있는 것들만 연습하고 있나.”
서정운이 대수롭잖게 말한 순간 정곡이라도 찔린 것처럼 움찔움찔하는 사람이 한호영의 눈에 최소 서넛은 띄었다. 서정운도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으나 별말 않고 넘어간다. 그러는 사이 또 문자가 온 듯 전화로 시선을 주며 눈살을 찌푸리는 서정운에게, 한무화가 곁눈질로 그 전화를 넘겨다보며 말했다.
“여자 이름 같은데……? 또 붙기 시작했어요?”
“…….”
“향수 냄새도 나는 것 같은데……?”
입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하는 서정운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요즘 일하느라 바쁘다는 서정운은 바빠진 만큼 일 관계로 만날 사람도 늘어난 모양이었는데, 얼마 전까지 애인이 생겼다는 소문이 떠들썩하게 퍼졌던 그가 얼마 있지 않아 다시 그 애인과 깨졌나 보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래저래 여자들의 연락이 쇄도하는 모양이었다.
“그 반지 그냥 끼고 있지, 왜 버렸어요?”
“……. 내가 버린 거 아냐.”
짧게 대꾸하는 서정운의 목소리가 어찌나 삭막하고 침울한지 한호영은 차마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저 흘끔, 무표정하지만 우울해 보이는 사형의 얼굴을 훔쳐보고는 괜히 혼잣말처럼 아무 필요도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슬슬 무화 올 때 됐는데. 아까 한강 쪽으로 로드웍 돌고 온댔으니까…….”
그 말을 들은 서정운이 답 문자를 찍다 말고 움찔했다.
“……, 무화 이 시간이면 본채 도장으로 옮겨가서 따로 연습하는 거 아니었어?”
“아. 오늘은 대련단에서 실전 대련 연습을 할 거랬거든요.”
본채 도장에는 실 사이즈의 대련단은 없잖아요, 하고 한호영은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하계 선수권 대회 준비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면서 한무화는 밤 아홉 시 이후에는 본채의 도장에서 따로 연습을 하곤 했다.
늘 새벽 한두 시 넘어서까지 연습을 하는 그가, 대수련장에서 연습을 하다가 다른 선수들이 거의 다 돌아갈 무렵인 자정쯤 그들과 같이 대수련장에서 나와 본채 도장으로 옮겨가면 수련의 흐름이 끊긴다며, 하계 선수권 준비 기간 동안에는 그 시간에 본채 도장을 쓰라고 한수일이 말했던 것이다.
“어, 그러고 보니, 그럼 사형 무화 오랜만에 보는 거겠네요. 사형 늘 사람들 연습 봐줄 때 이 시간에 왔잖아.”
한호영이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잠깐 눈동자를 굴리던 서정운은 전화를 주머니에 넣더니 선뜻 일어섰다.
“난 이만 간다.”
“예? 사형, 지금 막 왔,”
“바빠. 일하다 온 거야.”
서둘러 재킷을 집어 드는 서정운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도망치는 것처럼 보인다. 한호영은 뭐라고 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잠시 그를 쳐다보다 도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대신 왠지 좀 씁쓸한 심경으로 서정운을 쳐다보다 잠자코 배웅하려고 일어설 뿐이었다.
“그래요, 그럼 조심해서 가시고, --아, 맞다, 사형, 시계!”
갑자기 생각난 한호영이 막 말을 건넬 때였다.
그 말마저 듣는 둥 마는 둥 서정운이 막 대수련장의 문 쪽으로 걸음을 뗐을 때, 타이밍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문이 열렸다.
이제 막 운동을 마치고 들어온 듯 땀에 흠뻑 젖어 희미한 열기를 피워 올리며 한무화가 들어섰다.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고 시계를 확인하며 들어오던 그는 자신 쪽으로 막 걸어오려던 인기척을 느끼곤 무심히 고개를 들다가 몇 발짝 앞에 멈춰 선 서정운을 보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뚫어져라 서정운을 보는 눈길은 마치 그가 실물인지 확인이라도 하는 것 같다.
“언제 오셨습니까?”
“……, 조금 전에.”
한무화는 시계를 보며 “이렇게 늦게 말입니까?” 하고 의아한 빛을 띠었지만 곧 선선히 말한다.
“오실 거면 연락주시지 그러셨습니까. 하마터면 못 뵐 뻔했습니다. 요즘은 밤에는 본채의 도장에서 연습하고 있어서요.”
“응, 들었어.”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본산에는 거의 한 달쯤 안 오신 것 같은데…….”
짤막하게 대답하는 서정운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며 한무화가 말할 때였다. 막 서정운의 옆으로 다가온 한호영이 시계를 내민다.
“사형, 지난주에 왔을 때 풀어 놓고 갔던 시계. 또 까먹고 가실라고?”
“--.”
서정운의 얼굴 위로 아차 싶은 기색이 스친다. 그것은 한무화의 표정이 사라지는 것과 거의 동시였다.
순간적으로 당황하는 서정운을 빤히 내려다보던 한무화가 고개를 기울였다.
“지난주에 못 뵈었던 것 같은데, 언제 오셨었습니까?”
“……, 밤에, 잠깐 시간이 나서.”
눈을 마주치지 않고 짤막하게 대꾸하는 서정운을 한무화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불현듯 무슨 생각이 머리를 스친 듯 그의 입매가 움칫한다.
“늘 이 시각에 오셨다 가십니까?”
“어……, 일이 많다 보니 시간이 이때밖에 안 나서.”
아무렇지 않게 말해야 하는데, 태연하게 말하면 될 텐데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머리 위로 묵묵히 내려오는 시선을 마주 볼 수 없다. ……안 되겠다.
서정운은 시계를 주머니에 넣으며, 옆에서 어리둥절하게 둘을 보며 목덜미를 긁적이는 한호영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나 간다. ……무화도, 나중에 보자.”
아주 잠깐 한무화에게 시선을 주는 듯 마는 듯 던지고는 걸음을 옮기려던 서정운은, 그러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한무화가 말하는 목소리에 붙들리기라도 하듯이 멈칫했다.
뚫어져라 서정운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둔 한무화는 다시 시계를 보더니 겉에 걸치고 있던 후드 집업을 벗었다. 쉴 생각도 없는 듯 바로 연습단으로 걸어가며 말한다.
“오신 김에 잠시 봐주십시오. 잘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른 말은 없이 그 말만 하며 걸어가는 그에게 서정운은 애매한 시선을 주었다. 서정운은 정련과 체련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그를 봐주지 않는다는 걸 그 역시 알고 있을 텐데, 그는 그렇게 말하곤 가장 가까이에 비어 있는 연습단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너희 쪽 사범님께 봐달라고 해.”
서정운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지만 한무화의 대꾸는 담담했다.
“저는 서정운 사범님이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수련장 안에 남아 있던 시선들 몇 쌍이 그들을 스쳤다. 체련의 선수가 정련의 사범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암묵적으로는 금기에 가까운 일이기도 했다.
몇 밖에 없는 입이라도 말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다. 서정운은 미간을 찡그리고서 한무화를 보았다. 한무화는 평연한 기색으로 연습단 위에서 자세를 바로잡고는 시작 전에 서정운을 본다.
“난 안 봐.”
서정운이 딱 잘라 말했다. 그러나 서정운을 묵묵히 보다 시선을 돌린 한무화는 더 이상은 말하지 않고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정운은 고개를 돌렸다. 그냥 나가 버리려고 대수련장 문 쪽으로 걸음을 돌렸지만, 그 걸음은 두어 걸음도 안 가 멈추고 만다.
“…….”
눈살을 찌푸린 채 문고리를 노려보고 있던 서정운은 결국 다시 돌아섰다. 그러나 여전히 한무화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고, 가장 가까이에 서서 연습하고 있던 정련 선수를 본다.
“사사주회 할 때 팔꿈치 높이는 버릇 고쳐. 그 빈틈을 걷어차여도 늑골에 전혀 타격 입지 않을 자신 있는 게 아니면. --너는 왜 아까부터 똑같은 동작을 하는데 보폭은 제멋대로야. 키가 세 뼘쯤 차이 나는 선수들이랑 대련할 걸 미리 대비라도 하는 모양이지?”
이미 지적 시간은 끝났겠거니 하고 있던 선수는 움찔 놀라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 옆에 멍하니 서 있던 선수도 얼결에 지적을 당하곤 얼른 자세를 바로 한다.
서정운은 정련 선수들만 둘러볼 뿐 한무화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한무화는 묵묵히 연습단에서 자신의 연습을 계속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에게 봐달라고 했던 게 빈말이기라도 했던 듯 전혀 다른 데에는 신경을 빼앗기지 않는다.
“넌 왜 팔짱 끼고 구경만 하고 있어. …….”
마지막으로 제일 가까운 데에 서 있던 한호영에게로 시선을 돌린 서정운은 그에게 냉랭하게 말하다 도중에 입을 다물고 만다.
한호영은 서정운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가운데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의 방향에 한무화가 서 있다는 걸 서정운은 알고 있다.
돌아보지 않으려 했다. 한무화가 연습하는 걸 이곳에서 봐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무심코 돌아보고 만 것은 한호영의 표정 때문이다.
한무화를 지켜보고 있는 한호영의 표정이 미묘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그것은 약간 의아한 듯도 하고, 불안스러운 듯도 하고, 갈피를 못 잡는 듯도 한 얼굴이었는데, 그 여러 감정들 중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것은 염려였다.
염려. 그것은 한무화를 지켜보는 시선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일 터인데.
“--.”
서정운은 흘끗 한무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시선은 그의 움직임이 멎을 때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몇 분, 짧다고 할 수 있지만 길다고도 할 수 있는 그 시간이 끝나 갈 즈음, 한무화가 거의 마무리에 들어갈 무렵에 서정운이 눈썹을 꿈틀했다.
“왜, …….”
그러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그 말은 이내 입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진지한 눈길만 남아 한무화의 움직임을 좇는다. 한호영은 그런 서정운을 흘끗 보고는 다시 한무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거칠다. 비록 이 사형처럼 귀신같이 예리하지는 않았지만 한호영도 본산에서 공으로 있었던 게 아니다. 거칠다--라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그것은 마치 단정하게 뒤집어쓰고 있던 꺼풀을 벗어던지고 그 안에서 길들지 않은 끝없이 거대한 맹수가 뛰쳐나온 것 같았다.
이제야 원래의 모습으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양한 그것은 비할 데 없이 위맹하고 압도적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양날의 검처럼 아슬아슬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순간 제힘에 겨워 무너지지 않을까 싶도록.
그러나 그것은 누가 가다듬어 줄 수 있는 것도, 붙들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스스로가 다스려야만 하는 어떠한 것이라서--눈에 보이더라도 도울 도리가 없는 것이다.
“…….”
서정운은 말없이 한무화를 지켜보았다.
이윽고 한무화는 움직임을 접었고, 모든 것을 갈무리해 멈추었다.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그의 얼굴 위로 희미하게 땀이 배어났다.
그와 동시에 한무화의 시선이 서정운에게 닿는다.
그 깊은 속에 새카맣게 일렁이는 무언가를 담고 있는 고요한 시선은, 그 일렁임을 숨기려고도 않고 고스란히 드러내어 서정운을 본다.
서정운은 희미하게 몸을 움츠렸다.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다 꿰뚫어 보는 듯한 그 거침없는 시선은 마치 서정운을 낱낱이 핥는 것 같다. 실올 하나 걸치지 않고 무방비하게 그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감각.
“--, 난 간다.”
움칫, 몸을 움츠린 서정운은 서슴없이 돌아섰다. 한호영에게 짤막한 말을 건네곤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대수련장에서 나와 버린다.
인사를 할 틈도 없이 갑작스럽게 나가 버리는 서정운을 보고 뒤에서 한호영이 “어, 사형?” 하고 부르는 것 같았지만, 서정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왔다.
어두운 길을 거슬러 주차장으로 향하면서, 서정운은 대수련장 건물이 보이지 않을 위치까지 와서야 겨우 걸음을 늦추었다.
“……난 몰라…….”
서정운은 한숨처럼 중얼거리며 가만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심장이 세게 뛰고 있었다. 서정운은 천천히 큰 숨을 들이쉬며 가만히 가슴 위를 두드렸고, 그럼에도 한동안 시끄럽던 심장은 얼마 뒤에야 조금씩 잦아들었다.
“뭐 하는 짓이야,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무렇지 않게 인사 나누고 나오면 됐잖아.”
서정운은 입속으로 중얼중얼, 스스로를 질타하며 한숨을 내쉰다. 느려진 걸음이 무거웠다. 뒤를 흘끗 돌아보긴 했지만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서 인사를 건네고 나올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결국 마주치고 말았다.
일부러 이 시각에 왔는데. 언젠가는 마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드디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주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먼발치에서나마 우연히라도 스치고 싶었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얼굴을 보니 더럭 반가웠다. 동시에 더럭 불편해졌다. 이 상반된 기분이 주욱 계속되고 있었던 걸 서정운은 알고 있었다.
“…….”
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종친회 이후부터 서정운은 한무화를 더는 보지 말아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아무리 끊자고 마음먹어도 막상 얼굴을 보면 끌리고 마는 감정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차라리 보지를 말자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렵지는 않았다. 보고 싶다고, 만나고 싶다고 호소하는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는 것만 죽도록 어려웠을 뿐, 피하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침 일도 다시 시작해서 실제로 바빠지기도 했고, 본산에 의무적으로 나와야만 하는 이유도 없어졌다. 왠지 모르게 예전보다 전화가 잦아진 한무화와 별 용건은 없는 짧은 통화를 나눌 때마다 보고 싶다고 보고 싶다고 심장이 소리치긴 했지만,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본산에는 언제쯤 나오십니까?’
‘주말에 찾아뵈어도 괜찮겠습니까?’
한무화의 꾸준하고 성실한 청에도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아 일을 핑계로 거절할 수 있었다.
그렇게 거의 한 달이 지나도록 서정운은 그를 만나지 않고 지냈다. 간혹 본산의 사무실에 볼일이 있어서 낮에 왔다가, 도저히 그냥은 발이 떨어지지 않아서 살짝 대수련장을 들여다보고만 가려고 들렀다가 그와 마주친 일이 두어 번 있긴 했지만, 그때는 주위에 사람도 많고 한무화 역시 대회를 앞둔 단체 수련 등으로 바빠 인사 몇 마디만 나누고 돌아설 수 있었다.
……그냥 그렇게만 지냈더라면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듯이 인사를 나누고 돌아설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던 것은, 바로 지난주에 있었던 일 때문이다.
지난주, 한호영의 사촌 형이자 이번 년도 종친회에서 간사 역할을 맡았던 중원사범이 서정운에게 연락을 했었다.
‘정운아, 목요일 밤에 종친회 뒤풀이로, 어르신들 빼고 사촌들 몇 명 모여 저녁 먹을 건데 너도 오지 않을래? 욱이나 기준이는 연락 안 할 거야.’
어릴 때부터 친척 형님처럼 잘 알고 지낸 그는 워낙 성격이 털털하고 사람이 좋은 데다 한창 서정운이 정무도를 하던 무렵 도움을 받았던 일도 많아서, 서정운은 그가 부르는 자리에는 웬만하면 빠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서정운과 사이가 나쁜 사촌들은 부르지 않을 거라고 덧붙이는 그에게 피식 웃으며 ‘예, 그러죠, 뭐.’라고 대답한 서정운은 그다음 순간 멈칫했다.
‘그런데, 어……, 호영이도 오죠? 무화도 오나요?’
눈치 빠른 한호영이었더라면 이 물음에서, 무화만 물어보면 이상하게 여길까 봐 일부러 한호영의 이름까지 끌어넣었다는 걸 눈치챘겠지만 다행히 이 사람 좋지만 살짝 둔한 형은 거기까지는 생각지 않은 모양이었다.
‘호영이는 온댔는데 무화는 안 올걸. 하계 선수권 얼마 안 남았잖아. 그 녀석 요즘 늦게까지 연습만 하지 다른 데 거의 안 가.’
‘그렇구나……, 아쉽네요.’
그렇구나, 라고 말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서정운은, 너무 대놓고 안심한 티를 냈나 싶어 얼른 아쉽다는 말을 덧붙였지만 이번에도 사람 좋은 사촌 형은 ‘그러게. 다음에도 기회가 있겠지.’라고 말할 따름이었다.
하긴 한무화라면 요즘 매일 밤늦게까지 수련에 열중하고 있으니 그런 자리에 나오지는 않을 거다. 바로 엊그제에도 ‘늦은 시각이라도 좋으니 본산에 들러서 잠시 봐주실 수 없을까요. 새벽이라도 상관없습니다.’라는 문자를 보내 왔다. 그래서 한동안은 주중에도 주말에도 바빠서 도저히 시간이 안 날 것 같다고 답하면서, 여전히 늦은 시각까지 성실하게 노력하는 남자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무화가 안 온다면 그 자리에 나가도 되겠다.
서정운은 그렇게 한숨을 내쉬며, 한편 마음속 한구석으로는 정말로 아쉬워하는 스스로를 억지로 지워 버리며, 약속한 대로 그날 모임에 나갔다.
저녁 모임은 나쁘지 않았다. 서로 무난하게 잘 지내는 사람들 여남은 명이 모여 친척들 이야기며 일 이야기며 세상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녁을 먹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그대로 술자리로 옮겼다. 술자리도 조용하고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라, 서정운도 느슨해진 마음으로 그들 사이에 섞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각이 꽤 늦어지던 어느 때, 뒤늦게 참석한 사람만 없었더라면 끝까지 즐거웠을 것이다.
‘어? 지금 온다고? 근처에 있어? 그래, 그럼 와. 여기가 어디쯤이냐면…….’
옆에 앉아 있던 사촌 형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는, 누구냐고 묻는 주위의 말에 본산 체련 수련생인 친척의 이름을 말하는 걸 서정운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저 잠깐, 무화랑 그럭저럭 잘 지내던 그 친척 동생이구나, 라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설마 그 친척 동생이 한무화와 함께 나타날 줄은 몰랐다.
‘늦었습니다--.’ 하고 쾌활하게 말하며 자리로 들어서는 친척 동생의 바로 뒤에 서 있는 한무화를 본 순간, 술잔을 기울이다가 그와 눈이 마주친 서정운은 하마터면 술을 쏟을 뻔했다.
‘…….’
그 자리에 서정운이 있을 줄은 한무화도 몰랐던 모양이다.
놀란 듯 약간 눈을 크게 뜨고 서정운을 보던 그가 무표정한 얼굴 위로 언뜻 반가운 기색을 띠는 게 보였지만, 갑작스럽게 뜻밖의 얼굴을 마주친 서정운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순간 한무화의 얼굴이 의아한 빛을 띠며 굳어졌다.
‘어, 무화도 왔네? 어쩐 일이야, 오늘도 늦게까지 연습하는 거 아니었어?’
‘주말에 경남 지부에서 사람들 오거든요. 그래서 오늘이랑 내일 밤에 건물 보수해 둔다고, 열 시까지만 연습하고 나가라더라고요. 그래서 어쩔까 하다가, 쉬겠다는 녀석 꼬드겨서 같이 왔죠.’
한무화를 보고 사촌 형이 반갑게 묻자 같이 온 친척 동생이 대답했다. 앉을 자리가 마땅찮아 문 근처 자리에 나란히 앉는 두 사람을 보다가 사촌 형이 문득 서정운을 돌아보며 벙긋이 웃었다.
‘잘됐네, 정운아. 너 무화 보고 싶어 했잖아.’
‘……, ……아, 예…….’
원래부터 목청이 큰 사촌 형의 잘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서정운은 이번에야말로 마시려던 술을 쏟고 말았다. 한무화의 시선이 똑바로 다가오는 게 느껴진 서정운은 고개를 숙이고 얼른 술을 닦는 척했다.
‘어? 둘이 친했어?’
누군가 묻자 사촌 형이 벙글거리며 말했다.
‘정운이한테 오늘 나오라고 연락했더니, 무화도 오느냐고 물었었거든. 그렇지, 정운아?’
그대로 그 자리에서 사라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정운은 아득해지는 머리로 생각하면서, 자신에게로 말끝을 돌리는 사촌 형에게 ‘아, 예.’ 하고 어물어물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한무화와 눈이 마주쳤다.
한무화는 서정운을 보고 있었다. 기묘한 빛을 띠었던 그의 얼굴이 차차 무겁게, 어둡게 가라앉는다. 서정운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이 지독히도 따가웠다.
그는 알아차렸던 것이다. 서정운이 한무화의 참석 여부를 물어본 이유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는 걸.
그 이후로 서정운은 자신이 무슨 정신으로 그곳에 앉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도, 자신이 뭐라고 맞장구쳤는지도, 음식 맛도 술맛도 전혀 머리에 남지 않았다.
테이블 저편의 떨어진 자리에 앉아서 별말 없이 술잔을 기울이며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무화의 시선만이 온 신경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서정운은 그 자리에서 먼저 일어서고 말았다. 그것도, 한무화가 화장실을 가느라 잠깐 자리를 비운 틈에 급하게 볼일이 생겼다고 말하곤 서둘러 빠져나와 버렸다.
가게에서 나와 후다닥 택시를 잡아탄 지 수십 초도 되지 않아 주머니 속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지만 받지 않았다. 누군지 알 것 같아서 쳐다보지도 않았다.
한참을 울리다가 끊긴 전화에는, 집에 도착한 뒤에야 ‘미안. 일이 바빠서. 나중에 연락할게.’라고만 메시지를 보냈을 뿐이다.
“……정말 뭐 하는 거야…….”
서정운은 긴 한숨을 쉬며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때도, 지금도, 꼭 도망이라도 치는 것 같다. 아니 실제로 서정운의 심경은 도망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그때 일만 없었더라도 오늘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인사를 하고 나올 수 있었을 텐데, 그때의 기억이 계속 마음속에 묵직하게 남은 탓에 오늘도 서둘러 나오고 말았다.
“…….”
……그래도 보니까 좋구나.
서정운은 밤하늘에 걸려 있는 달을 올려다보며 터덜터덜 걷다 불쑥 생각했다.
그래도 보니까 좋다. 계속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써 피해 오고 있었지만, 이렇게 우연히 짧게라도 스쳐 지나면 그예 심장이 뛰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일부러 한무화가 없을 시각을 골라 본산을 찾으면서도, 행여나 멀리서 스치지라도 않을까 늘 주위를 둘러보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어쩌자는 거야, 이 멍청아…….”
서정운은 긴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하루의 마무리가 아주 별로구나, 혀를 차며 걸음을 옮기던 그때, 서정운의 주머니 속에서 휴대 전화가 진동했다.
일순 움찔하고 어깨를 움츠린 서정운은, 설마 무화가 전화라도 했나, 불안인지 기대인지 스스로도 모를 심경으로 전화를 꺼내었다. 그러나 발신인을 확인하곤 금세 마음이 푹 꺼진다. 이번에 함께 작업하는 곳에서 서정운에게 유난히 들러붙는 여자애였다. 서정운은 낙담한 마음으로 액정 화면을 쳐다보며 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
「왜냐니?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지. 오빠 어디예요?」
발랄한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전해져 왔다.
“바깥. 바빠. 용건 없으면 끊는다.”
「아냐, 오빠, 잠깐만! 나 오빠한테 조언 구하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했단 말이에요. 좀 들어 봐요. 나 요새 너무 속상한 게…….」
그렇게 말을 꺼내기 시작한 여자애의 용건은, 그러나 처음에 예상했던 대로 용건이랄 게 없었다. 작업하는 곳에서 누구누구랑 자꾸 부딪쳐서 힘든데 이렇게 대처하기엔 무엇 때문에 안 되고 저렇게 대처하기엔 무엇 때문에 안 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라는, 서정운에겐 아무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들을 한 귀로 들으면서 서정운은, 문자를 보내도--업무 문자가 아닌 한-- 답하지 않고 전화도 세 번 걸러 한 번이나 받을까 말까 한데 얘도 참 끈기 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끈기만 있으면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는 짝사랑이라니 부럽다고 생각했고, 그러자 이 와중에 그런 생각이나 하는 스스로가 처량해져서 서정운은 우울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래서 내일 조명 오빠한테 얘기해 보려고요. 어떨 것 같아요?」
“그러든가. 좋은 방향일지 나쁜 방향일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결론이 나긴 하겠지. 그래서, 얘기 끝난 거야? 그럼 끊는다.”
「오빠! 잠깐만요! 조금만 더 통화해요. 나 집에 거의 다 왔어. 우리 집 근처 어두워서 혼자 걸어가기 무섭단 말이에요.」
“너 아파트 단지 사는 거 다 알아. 끊어.”
「치, 얘기 좀 하면 어때서. 오빠 미워.」
전화 너머에서 입을 비죽거릴 게 보인다. 초등학생 꼬맹이라도 상대하는 것 같아서 서정운은 피식 웃고 만다.
“맘껏 미워하시구요, 얼른 조심히 들어가서 맛있는 거 먹고 푹 쉬세요. 내일 여차하면 한바탕 파이트 뜰지도 모르는데.”
「오빠!!」
“끊는다. 잘 자.”
서정운은 그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끊기기 직전까지 전화 속에서 무어라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서정운은 웃고 만다.
너는 좋겠다. 마음에 있는 사람한테는 이렇게 편하게 전화할 수 있어서. 자주 마주칠 수 있어서. 억지로 피하지 않아도 되어서.
참 좋겠다.
서정운은 부러운 마음으로 전화기를 내려다보다 힘없이 웃는다.
그러나 그 웃음은 도중에 멈추고 말았다.
뭔가 발끝에 걸렸다.
작달막하고 말랑말랑하고 졸랑거리는 털 달린 것이다. 학학학학, 꼬리까지 흔드는.
“…….”
낯익은 털 뭉치다.
어라, 이놈이 이 시간에 여기까지 돌아다니고 있네, 하고 허리를 굽혀 놈을 쓰다듬어 주려 하던 서정운은 문득, 그런데 이놈은 늘 누구를 따라다니지 않았던가……?,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 순간,
“왜 벌써 가십니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을까.
지금 막 거기에 온 것은 아닌 듯, 한무화가 느슨히 서 있었다. 마치 서정운의 통화가 끝나길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 같다.
멈칫, 움직임을 멈춘 서정운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돌아서 한무화와 마주 섰다.
한무화는 묵묵히 서정운을 보고 있었다. 그 무표정한 얼굴이 왠지 모르게 낯설어서, 서정운은 눈앞에 있는 남자가 누구인가, 알면서도 뚫어져라 바라보고 말았다.
그는 얼마 사이에 눈에 띄게 초췌해져 있었다. 각진 턱이 더 단단하게 드러나 있다. 그런 그를 보자 서정운은 욱신 하고 심장이 움츠러들어 잠시 숨을 삼켰다.
“……, 일이 남아서.”
낮게 중얼거리면서도 참 어설픈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정운에게는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고, 한무화는 서정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요즘 바쁘다고 하셨었지요. 한 달쯤 전부터 계속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 기억납니다.”
“…….”
서정운은 무어라 변명하려다 도로 입을 다물었다. 역시나 할 말이 없다. 한무화는 더 이상 거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말을 꺼낸다.
“지금 통화한 사람이 그 냄새 주인입니까?”
서정운은 한무화가 묻는 말에 잠시 어리둥절하게 있다가 이내 자신의 옷에 묻어 있는 향수 냄새를 떠올렸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작업을 하다 왔는데 같이 일하던 누군가의 냄새가 묻어 왔다. 대충 아니라고 대답하면 되지만 그 향수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순간 머뭇거리고 말았고, 그런 서정운을 보며 한무화가 다시 물었다.
“애인입니까?”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 굳이 묻는 말에, 혀를 찬 서정운은 믿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대답했다.
“응.”
“…….”
한무화가 물끄러미 서정운을 보았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무심한 눈으로 서정운을 응시하던 그는, 그새 자신의 발치로 다가온 털 뭉치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별로 좋은 농담이 아닙니다. 그냥 하신 말씀이란 걸 알고는 있지만 기분이 나쁩니다.”
“……. 여기까지 왜 왔어.”
서정운은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가 굳이 여기까지 따라온 것도,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심장 위에 무겁게 얹혔다.
“오랜만이라서 잠시나마 얼굴 더 보려고, 배웅하러 나왔습니다.”
한무화는 몸을 일으켜 서정운에게 시선을 주었다.
“오면 안 되는 거였습니까?”
서정운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 서정운을 보며 한무화가 “아니면,” 하고 입을 뗀다.
“안 오길 바라셨습니까?”
“--.”
얼핏 입술이 떨렸다. 서정운은 입을 꾹 다물며 한무화를 바라보기만 했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뚫어져라 서정운을 바라보던 한무화가 그 쥐 죽은 듯한 침묵 속에서 입을 연 것은 얼마쯤 지나서였다.
“생각해 봤습니다. 한동안 계속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굳이 그 방향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계속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한무화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얼마간의 사이를 둔 뒤 나직이 말을 이었다.
“사범님이 저를 밀어내는 것 같습니다.”
단정하듯 말끝을 맺은 한무화는 서정운의 얼굴을 낱낱이 바라보았다. 그 안의 아주 작은 것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한 그 시선은, 그러나, 아니라고 말해 주길 기다리고 있다.
거칠게 야윈 낯은 무겁게 가라앉아, 형형한 눈으로 서정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정운의 입술을.
아니라고. 그 답만을 기다린다는 듯.
“…….”
서정운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희미하게 벌어진 입술에서는 끝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서정운은 도로 입을 다물고 만다.
그것이 답이다.
한무화의 얼굴에서 표정이 씻은 듯 사라졌다. 무서울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에서 눈만이 커다랗게 벌어진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듯--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듯.
한동안 침묵하던 한무화가 입을 열었다.
“사범님이 불편해하실 거라고는 생각했습니다. 당장 급하게 서둘러서 어떻게 될 노릇은 아니니, 천천히 시간을 두고서 맞춰 가 보려고 했고요.”
“--.”
“그러는 동안 저는 사범님이 적어도 예전 같은--원래 저를 대하셨던 것 같은 태도로는 있어 주실 줄 알았습니다.”
목구멍을 간신히 비집고 새어 나오는 듯한 그 나직한 말에 서정운은 아무 대답을 못 했다.
예전 같은 태도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허물없게.
그렇게 지낼 생각이었다. 그렇게 지내고 싶었다. 한무화의 저 거침없이 다가오는 새까만 시선이 계속 기억을 끄집어내고 심장을 뒤흔들지만 않는다면.
“내가,”
서정운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 앓는 소리처럼 뒷말을 잇는다.
“……그럴 만큼 뻔뻔하지 않아.”
한무화는 얼마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고 뚫어져라 서정운을 지켜보던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절 볼 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입니까?”
“--.”
그때라는 것이 언제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종친회 때의 저녁이다. 동시에 서정운은 묻어 두려 했던 감각을 떠올리고 만다. 맨 살갗이 겹쳐지는 느낌, 직접 맞닿던 더운 체온, 그리고 노골적으로 닿았던 욕망까지.
서정운은 삽시에 몸에 열이 올랐다. 몸속까지 더워지는 느낌이다. 차마 그대로 한무화를 마주 볼 수 없어 시선을 떨구며 당혹스레 눈을 깜박이는 서정운을, 한무화가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본다. 그 까만 눈이 유난히 까맣게 빛난다.
“저도 그렇습니다.”
한무화가 말했다. 그러면서 걸음을 뗀다.
“단지 저는 서정운 사범님을 안 볼 때에도 계속 그때의 기억을 되새기고 있기 때문에, 볼 때든 안 볼 때든 큰 차이가 없을 뿐입니다.”
“--.”
서정운은 커다랗게 깜박이는 눈으로 한무화를 보았다. 그런 서정운의 표정 하나하나를 모두 시야에 담으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그 이후로 계속 생각이 납니다. 꼭 제가 발정 난 개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계속 서정운 사범님과 자는 생각만 떠오르는데, 이런 적이 처음이라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속. 계속 그 생각만 납니다.”
한무화는 담담하게 말하면서도 서정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시선 끝에서 서정운은 자신이 벌거벗겨져 있다는 느낌이 들고 만다. 그만큼 노골적인 욕망이 드러난 시선이 서정운을 낱낱이 핥고 있었다.
그 시선만으로도 얼굴이 달아오른다. 몸이 더워졌다.
한무화는 그런 서정운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세 걸음째를 떼는 순간,
“……!”
서정운은 그대로 돌아서 주차장을 향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금세라도 뛰고 싶은 다리를 간신히 억누른 것은, 달리기 시작하는 순간 뒤에 웅크린 맹수가 당장에라도 덮쳐 누를 것 같은 본능적인 감각 때문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머릿속이 마구 헝클어진다. 이 당혹감의 이유를 천천히 생각해 보려 해도,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발소리가 그치지 않아 머릿속이 진정되지 않았다.
“왜 따라와.”
서정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니라 반문이었다.
“왜 달아나십니까?”
“--.”
누구야, 이건. 온순하고 사랑스러웠던 강아지는 어디로 가고, 뒤에는 언제 물어뜯을지 모를 거대한 사냥개가 따라오고 있었다. 따돌려도 따돌려도 사냥감을 놓치지 않을 것 같은.
얼마 가지 않아 주차장에 다다른 서정운은 차 열쇠를 꺼내었다.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세워 둔 차가 반짝, 점멸하곤 잠겼던 운전석이 열렸다.
그러나 서정운이 막 운전석의 손잡이를 잡으려 했을 때, 여태 느릿하게 거리를 두고 따라오던 한무화가 그의 뒤에 섰다.
“피하시는 건 좋은 방식이 아닙니다. 한 달 전부터, 피하시면 안 되셨습니다.”
조용한 목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넘어온 손이 서정운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이내 나직해지는 목소리가 귓가로 가까워졌다.
“바쁘다고 하셔서 못 뵙고 기다리는 동안, 계속 생각했습니다. 보고 싶다. 만나고 싶다. 이야기하고 싶다. 만지고 싶다. 안고 싶다. 먹어 치우고 싶다--그 생각이 점점 더 커졌는데,”
서정운의 손을 운전석 손잡이에서 떨어뜨린 한무화가 고개를 기울였다. 목소리가 더욱 가깝게 다가온다.
“그런데 계속 밀어내려 하시는 것 같아서, 계속 초조해졌습니다. 사람이 초조해지면 그만큼 불안정해져서 차분하게 생각을 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
“그리고 이렇게 불안정한 기분에 오래 시달리면, 그만큼 점점 더 이성적인 생각보다는 제가 바라는 가장 본능적인 것만 예민하게 닦여서 머릿속에 남는다는 것도요.”
“--, 비켜. 난 돌아가야겠어. 나중에 얘기하자.”
서정운은 아직껏 손을 잡고 있던 한무화의 손을 뿌리쳤다. 잠시 그대로 꿈쩍 않고 움켜쥐고 있는가 싶던 손은 이내 순순히 떨어졌다.
“그 나중에는 언제입니까?”
“……그,”
“지금 돌아가시면 다시 저를 피하실 것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거칠어졌다. 간신히 억눌렀던 화를 끝내 완전히 참아 내지 못한 것처럼.
순간 서정운은 심장이 크게 뛰었다. 반사적으로 차 문을 열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그 손은 도중에 잡히고 만다.
“서정운 사범님의 차는 안에서 움직이기에는 좁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더운 체온이 등 뒤로 바싹 붙었다.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으며 몸을 포갠 그가 서정운의 목덜미에 이를 세운다.
“하지 마!”
서정운이 몸을 틀며 소리 낮추어 외쳤다. 그러자 목덜미를 깨물던 입술은 순순히 떨어져 나갔지만, 허리를 끌어안은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비켜,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야. 언제, --.”
언제 사람이 올지, 누가 올지, 누가 볼지 모를 곳이다. 그나마 이 시각에 주차장에 오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망정이지만, 한편으로는 언제 누가 와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서정운이 나직이 나무라며 꾸짖어도, 변함없이 허리에 두른 팔은 떨어지지 않는다. 약간의 여유를 두고 겹쳐진 몸도.
“다른 사람의 눈에 띄면 안 되는 건, 큰아버지가 서정운 사범님께 당부하셨다는 그 말씀 때문입니까?”
“그, 렇,”
“그리고 절 멀리하시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
“그 말씀이 그렇게 마음에 걸리십니까?”
서정운의 바로 뒤에서 한무화가 말했다.
“그러면, 섹스만 안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잇새로 나직이 내뱉은 말이 서정운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 말과 함께 서정운을 끌어안은 팔에도 숨이 막힐 정도로 힘이 들어갔고, 한 손이 내려와 바지 위로 서정운의 사타구니를 움켜쥔다.
“무,”
더럭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서정운은 귀 아래를 깨무는 감각에 몸을 움츠리며 말을 멈추고 만다. 사타구니를 주무르는 손도 거침이 없어 금세 몸속에 저릿한 느낌이 올라왔다.
“처음부터 말씀드렸었습니다. 저는 누가 봐도 상관없습니다.”
한무화의 목소리도 희미하게 거칠어져 있었다. 뒤에서 바싹 끌어안고 맞붙어 있는 그의 체온이 여실하게 느껴졌다. 조금 전부터 단단하게 일어서 서정운의 허리 아래를 찌르고 있는 감촉 역시 명확하게 알겠다.
몸이 확 달아올랐다. 엉망진창인 머릿속까지 쿵쿵쿵 요란하게 뛰는 심장 소리가 전해지는 것 같다.
“하지 마.”
서정운이 당혹스레 말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뺨을 물어뜯다가 목덜미로 내려간 입술은 살갗을 한층 더 세게 빨아들였고, 사타구니를 움켜쥐었던 손은 아예 퍼스너를 내리고 바지 속으로 직접 파고들어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 우악스런 손길 속에서 서정운 자신도 금세 뻣뻣하게 힘을 받기 시작하는 걸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하지 말,”
“계속,”
한무화가 서정운의 귓가에 말했다.
“계속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머릿속에서 늘 서정운 사범님은 저와 이렇게 하고 있어서,”
한무화는 자신의 샅을 서정운에게 바싹 붙였다.
“이게 현실인지 아닌지도 모를 지경입니다.”
옷감 너머로 그의 발기가 서정운과 밀착했다. 그는 그대로 허리를 추어올리기 시작했고, 천 너머에서 살덩이가 점점 더 부푸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만큼 서정운 자신 역시 아랫도리를 훑어 올리는 커다란 손안에서 점점 부풀어 가고 있었다.
“밀어내지 마십시오. 전 이게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이 가지 않기 때문에, 밀어내시면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한무화가 자신의 손목을 붙드는 서정운의 손을 뿌리쳤다.
“한 달 내내, 아니 그전부터 줄곧, 그럴 리 없다고, 그러지 않을 거라고, 그 생각만 했습니다. ……이렇게 뻔한데도.”
잇새로 나직이 중얼거리던 말은 어느 순간 나직한 포효로 터져 나온다.
“내가 없는 자리에만 가시고, 내가 있는 곳에는 오시지 않고, 아주 잠깐의 시간조차 나에게는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하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잘 만나고 계시는데,”
“--.”
“그래도, 그렇지 않을 거라고 계속 저 자신에게 되뇌어 왔습니다.”
한무화가 억지로 목소리를 낮춘다.
“그러니까, 밀어내시면 안 됩니다.”
그 낮은 말과 동시에 한무화는 서정운에게 맞닿은 샅을 거침없이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점차 빨라지는 속도 속에서, 한무화는 낮고 거친 숨을 내쉰다. 그것은 그의 말대로 발정 난 개 같았지만--그러나 어느 결에 서정운은 자신도 비슷한 소리를 내며 숨을 몰아쉬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안 되는데, 이를 어쩌지, 엉망이 된 머리로 생각도 제대로 못 하고 당혹스럽게 굳어 있던 서정운이 흠칫 몸을 움츠린 것은, 거의 한계까지 발기했을 즈음 한무화가 서정운의 바지를 끌어 내린 탓이었다.
서늘한 공기가 맨 살갗에 닿았다. 그러나 서늘하다고 느낄 틈도 없이 한무화가 뜨겁게 부푼 샅을 서정운의 허벅지 사이에 댄다.
“--하지 마!”
황급하게 외친 서정운의 억누른 목소리는 거의 울 것 같았다.
설마 하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럭 닥쳤다. 그만큼 한무화의 기색이 선뜩하도록 낯설다. 그날, 얼핏 아래를 밀고 들어오려 하던 순간의 느낌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이미 서정운의 성기도 한무화의 손안에서 젖기 시작하고 있었고, 서정운의 허벅지 안쪽을 밀어 누르기 시작하는 한무화의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대로 조금만 더 밀어 올리면 저것은 또다시 서정운의 몸을 벌릴 터였다.
“하지 마……!”
울 것 같다. 아니, 우는지 아닌지도 엉망인 머리로는 분간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저 얼른 저것에서 달아나야 한다는 마음뿐이었고, 이 장소도 불안스러워 제정신이 아닐 지경이었다.
“무화야. ……무화야.”
서정운은 뭐라고 더 말하면 좋을지도 몰라 맥없이 그의 이름만 부르며 몸을 움츠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한무화는 잠시 움직임을 늦추는 듯했다. 망설이기라도 하듯 얼마간 서정운의 몸을 끌어안은 채 멈춰 있던 그는, 그러나 오래 멈춰 있지 않았다.
“그대로 가만히 계십시오.”
무뚝뚝한 답이 돌아왔다. 그와 함께 한무화는 서정운의 허벅지 사이에 자신의 물건을 밀어 넣었다. 곧 그 묵직하게 일어선 것은 허벅지 살 위로 마찰하며 점차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거기서 더욱더 부피감을 늘리는 그의 물건과 함께 서정운 자신도 한계까지 차올랐다.
얼마 있지 않아,
“--.”
툭, 투둑, 그들의 발치에 희뿌연 액체가 흩뿌려졌다. 그것은 몇 번이나 간헐적으로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움찔거리며 움츠러드는 서정운의 몸을 한무화가 거세게 끌어안았다. 토정할 때마다 근육이 잘게 떨리는 느낌이, 바싹 붙어 있는 서로의 몸에 선명하게 전해진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간헐적인 경련이 잦아든 뒤에도 한무화는 서정운을 놓지 않았다.
거친 숨을 눌러 쉬느라 들썩이는 몸이 겹쳐진 채로 서로의 호흡을 서로에게 전한다. 더운 숨결이 피부에 닿았다.
이윽고 그 숨결마저 완전히 진정되어 고요해졌을 때,
“……너, 뭐야.”
서정운이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러려고 왔어?”
그 힘없는 목소리에, 한무화의 몸이 멈칫하는 것이 등을 타고 전해졌다.
“내가 너 피했다고, 화가 나서 이러는 거야?”
“아닙니다.”
한무화가 몸을 약간 떨어뜨리며 곧바로 대답한다. 그 굳어진 목소리에서,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정색하고 있는 걸 알겠다.
“그러면, 내가 널 좋아하니까, 이제 네가 나더러 좋아한다고만 하면, 그러면 너 좋을 대로 해도 돼? 섹스 생각만 난다니까, 나는 네가 상대하라면 하는 거야?”
“--그게 아닙,”
“그게 아니면 이게 뭐야.”
서정운의 낮은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여전히 등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한무화를 뿌리치며 돌아선 서정운은, 눈을 부릅뜬 그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금세라도 허물어지려는 낯빛을 이 악물고 간신히 참는 서정운을 보며, 한무화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라고 안 힘든 줄 알아? 나라고 피하고 싶어서 피해?”
“안 피하면 되잖습니까.”
“내가 그게 안 되는데 어쩌라고! 나는 그렇게 못 하겠는데! 네 생각만 맞는 것 같아? 내가 안 된단 말야, 내가!”
서정운이 이를 악물고 외쳤다. 이를 악물지 않으면 고함과 함께 목구멍 안에 맺힌 뜨거운 것까지 같이 쏟아질 것 같다.
“왜 이제 와서 이래. 여태 계속 아니라고 하다가, 왜 뒤늦게 이러냔 말야. 왜 사람 속상하게 이래!”
조금 더 일찍 말했더라면.
조금만 더 일찍 받아 줬더라면, 그래서 스승이 제 삿된 마음을 눈치채고 경고하기 전에 이미 그와 어떤 약속을 나누었더라면, 그러면 서정운은 어떻게든 스승에게 이해받고자 했을 것이다. 정 안 된다면 ‘먼저 한 약속이 우선’이라는 핑계를 방패 삼아서라도 그의 손을 붙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어마어마하게 자랄 나무라는 게 너무나 확고하게 보여 버렸고, 그 나무에 흠이라도 날까 염려하는 스승의 걱정에 진심으로 동감했고, 또, 누차 거절당했었던 제 마음도 그만큼 움츠러들어 버렸다.
그래서, 안 되겠다.
여전히 욕심나 죽겠고 갖고 싶어 죽겠지만,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서정운은 목구멍 안에서 뜨거운 게 솟아올라 말을 삼켰다. 그러지 않으면 이번에야말로 울어 버리고 말 거다. 울면 한무화가 얼마나 당혹스러워할지, 어쩔 줄을 몰라 할지도 안다. 그러니까 울면 안 된다.
이게 화풀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무화의 잘못이 아니다. 그냥 때가, 상황이 어긋나 버린 거다.
그런데, 그 화풀이를 듣고서 한무화가 억울하고 화난 얼굴을 하면서도 또 야단맞은 강아지처럼 아무 말도 못 하는 게 더 속상해서, 한무화의 낯빛이 시커멓게 무너지는 게 또 괴로워서, 서정운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어느 순간 맥없이 팔을 늘어뜨리고 만다.
“--.”
서정운은 등을 돌렸다.
저런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그러면서 모진 말은 왜 했나. 또 속이 상한다.
“……죄송합니다.”
그가 잘못한 건 없는데도 나직이 말하는 게 또 마음 아프다.
“하지만, 제발,”
띄엄띄엄 끊기며 들려오는 낮은 속삭임.
“아무것도 못 하겠습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아무것도. ……그러니 제발, 사범님.”
아주 천천히, 느리게 한무화가 손을 뻗었다. 서정운이 밀어낼까 두렵기라도 한 것처럼 가만히 서정운의 팔에 손을 얹은 그는, 서정운이 우두커니 서 있자 아주 조심스럽게 끌어안아 왔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그는 고개를 기울여 서정운의 뺨에 입 맞추었다. 그저 입술만 살짝 닿는 접촉은 두 번, 세 번 거듭되었다.
서정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 말라고 해야 할 텐데, 그 말이 입술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조심스런 손길이 마음 아파서. 또, 그 손길이 너무도 좋아서.
그 조용한 포옹은 오래도록 그치지 않았다.
한무화는 한참을 그대로 있었고 서정운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등에 닿아 있는 체온이 더웠다. 여름이라 몸 전체가 덥다.
그러나, 그래도 떨어질 생각이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