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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펼쳐진 것은 어느 집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가정식에 손님 접대용 반찬이 두어 종류 섞인 비교적 평범한 상이었다.
그러나 그 평범한 반찬들이 하나같이 매우 맛깔스럽다는 걸 서정운은 알고 있었고, 뭘 집어먹든 만족스러운 맛이리라는 것도 알았다. 사모의 손맛은 웬만한 요리 명인쯤은 뺨을 치고도 남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에 넣는 음식들이 무슨 맛인지 모르겠는 건, 서정운의 마음이 다른 곳에서 맴돌고 있는 탓이다.
“사부님…….”
말없이 우물우물 음식을 씹어 삼킨 서정운이 맞은편에 앉은 스승을 부르자, 스승은 “왜?” 하고 대꾸하며 갈비찜 접시에서 제일 큼직한 덩어리를 집어 서정운의 밥그릇에 놓아 주었다. 이 계절엔 비름나물이 맛있지, 매실절임도 좀 먹어 봐라, 너 더위 많이 타잖냐, 더위에는 매실이 좋다더라, 서정운의 숟가락이 빌 때마다 이 반찬 저 반찬 권하는 스승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서정운은 “아니요, 그냥 불러 봤어요.” 하고 고개를 저으며 다시 밥술을 떴다.
“너는 피죽도 못 얻어먹고 다니는 놈처럼 왜 이리 말랐어. 좀 많이 먹어, 많이.”
스승이 혀를 끌끌 차며 반찬을 이것저것 강권하는 가운데, 부엌에서 사모가 오이냉채 사발을 들고 오며 말을 거들었다.
“그러게, 정운이 요즘 왜 이렇게 말랐니? 일 바쁜 것도 좋지만 몸은 좀 챙겨야지. 잘 먹고 다니니? 굶는 거 아니지?”
“여보, 전에 홍삼 절편 만들어 놓은 거 아직 남아 있나? 그거 정운이 갈 때 좀 들려 보냅시다.”
“그러잖아도 그거랑 반찬 몇 가지랑 해서 싸 놨어요. 나중에 잊지 말고 가져가렴.”
스승의 옆자리에 앉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모에게 서정운은 웃으며 고개를 꾸벅 했다. 언제 봐도 참 다정한 분이고, 금슬 좋은 부부였다.
“이 녀석이 여름을 타는지 요새 통 기운이 없어. 몸보신 좀 시켜야겠는데 뭐 좋은 것 좀 해 주구려.”
“그러게요, 애 까칠해진 것 봐. 여름인데 보양식 좀 먹어야겠네요. 그렇지, 정운이 개라도 잡아줄까? 마침 어리고 통통한 놈들이 여섯 마리나 있는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두 손을 마주치며 말하는 사모의 앞에서, 서정운은 하마터면 먹던 갈비를 뿜을 뻔했다.
“……. ……. ……아니요. 아닙니다, 사모님. 전 괜찮습니다.”
서정운이 휴지로 입가를 닦으며 중얼거리자 스승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부인에게 말한다.
“그래, 그놈들은 아직 어리니 좀 더 키운 다음에 잡읍시다. 한 삼십 년 지나면 먹을 만해지겠지. 허허허허.”
“그럴까요? 호호호호. 그럼 올해는 토종오리를 고아 봐야겠네요.”
“오리! 오리 맛있겠구먼.”
“……. ……. …….”
역시 다시 봐도 참 금슬 좋고 죽이 척척 맞는 부부라고 생각하며 서정운은 잠자코 수저만 놀렸다. 그러다가 이내 가만히 웃고 만다.
오랜만에 와도 낯익은 분위기다. 한창 본산에 드나들 때에는 종종 본채에서 이들 가족과 더불어 식사를 하곤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서정운이 가족이라 부를 만한 사람이 있다면 이들일 것이다.
“호영이는요?”
“희수--여동생-- 병원 데려다주러 갔다. 오늘 희수 검진일인데 김 서방이 부산에 출장을 갔거든.”
“아아, 그러고 보니 희수 출산일이 얼마 안 남았죠? 다음 달에 본채로 와서 몸조리까지 마친 다음에 돌아갈 거라면서요.”
“응. 그냥 조리원 들어가랬더니 굳이 내가 해 준 밥 먹겠다고 친정으로 오겠다지 뭐니. 기집애, 제 엄마 고생하는 건 모르고.”
“하하, 집밥만큼 맛있는 게 어딨겠어요. 희수야말로 몸보신 좀 해야겠네.”
서정운이 말하기 무섭게 스승이 불쑥 말한다.
“거 여섯 마리 중 한 마리는 희수 고아 줄까? 허허허허.”
“그럴까요? 호호호호.”
“……. ……. ……. …….”
그런데 걔가 삼십 년 뒤에도 몸보신이 필요하겠어? 허허허허, 그러게나 말이에요 호호호호, 하고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이야기를 주고받는 부부를 앞두고 다시 밥알만 세는 서정운이었다.
털 뭉치들은 딱 스물아홉 해만 즐겁게 살다가 행복하게 무지개다리 건너는 게 제일 좋겠다…….
“헌데 희수 걱정하지 말고 너는 너나 좀 챙겨라. 얼굴이 이게 무어냐, 쯔쯔.”
스승은 아까부터 서정운의 낯빛이 마음에 안 든다고 연신 타박을 하며 혀를 찼다. 서정운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요즘 좀 바빠서 그래요.”
“그래, 너 본산에도 일주일에 한두 번 나올까 말까 한다며. 것도 밤에만 잠깐 얼굴 비추고 금방 간다고 호영이한테 들었다.”
“예, 차차 한가해질 것 같긴 한데 아직은 좀 그러네요.”
“그래.”
스승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 서정운의 빈 숟가락에 이번에는 나물을 듬뿍 얹어 준다. 서정운은 웃고 만다.
한동안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다. 가끔 “여보, 냉채 좀 더 주구려.”, “정운아, 너 밥 더 먹어라.”, 그런 말이나 오갈 뿐이다.
그러던 차에 문득,
“힘드냐.”
스승이 불쑥 물었다.
서정운은 젓가락을 멈칫했다. 힘드냐. 그 낮고 조용한 말이 유난히 마음에 스미는 건 스승이 이미 서정운의 마음속을 다 알고 있는 탓일 거다.
“견딜 만합니다.”
잠시 침묵하던 서정운이 조용히 대답하자 흘끔 눈을 들어 서정운을 올려다본 스승은 “그러면 그 얼굴이나 좀 어찌하고 그리 말해라.” 하고 투덜투덜한다. 그러다 갑자기 눈썹을 찌푸리며 불퉁하게 말했다.
“그놈은 요새 왜 그래.”
서정운은 입을 다물었다.
그놈이 누구인지도 알고, 요새 어떻다는 건지도 안다. 그러나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어쩌면 알 수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확실히 안다 할 도리는 없었다.
“……, 대회 준비하느라 그런지 예전과 좀 달라지긴 했더군요.”
“대회가 문제가 아니야, 대회가. 대회 따위야 내년에도 후내년에도 찾아오는 것이고, 또 설령 거기서 1등을 한다 한들 제 길 바로잡지 못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스승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서정운은 침묵하다 고개를 약간 꾸벅한다.
“제가 조금 더 제대로 봐줬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그게 어찌 네 탓이더냐. 너는 그놈 갈 길 제대로 알려 주었더만. 그놈이 자기 길 찾아 놓고는 그걸 제대로 다스리지를 못하니 그렇지. 그건 남이 봐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본인이 다스려야지, 남이 어찌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남이 해 줄 수 있는 거였더라면 지금 수일이 그놈이 그리 곤혹스러워하지도 않지, 하고 스승은 어두운 기색으로 혀를 찬다. 여느 때처럼, 동생이 곤혹스럽다 하면 꼴좋다 놀리는 모습은 털끝만치도 보이지 않는다.
“잘 찾아갈 것입니다.”
서정운은 조용히 말했다. 그 말은 기원인 한편 믿음이기도 하다. 그렇듯 성실하고 꾸준한 남자다. 잠시 헤매더라도 필경 잘 다스려 갈 터였다.
외려 제대로 못 다스려 헤매고 있는 건 나지……,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는 소리 없는 숨을 삼키고 만다.
그러는 사이에 반찬 접시들은 차차 비어 갔고, 스승과 사모의 압박에 떠밀려 밥을 세 공기나 먹은 서정운은 터질 듯한 배를 움켜쥐고 일어나야 했다.
낭패다. 너무 과하게 먹었어. 이를 어쩌지.
끙끙거리며 일어나 돌아갈 채비를 하는 서정운에게, 달력을 보던 스승이 물었다.
“너 다음 주말엔 한가하냐.”
“다음 주말이요? ……아.”
스승의 시선을 따라가 달력을 쳐다본 서정운은 어느새 하계 선수권이 다음 주말로 다가온 것을 새삼스럽게 되새겼다.
“벌써 다음 주말이네요. 일이 있긴 한데 아마 뺄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럼 나랑 같이 대회장에나 가 보자.”
스승의 말에 서정운은 “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스승은 서정운이 가지 않을까 봐 미리 선수라도 칠 셈이었겠지만, 서정운도 대회에는 가 볼 요량이었다. 비록 멀리서나마 선수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그 남자가 어떻게 분투하는지도.
“개막 전날 미리 대회장 체크해 보고 선수들 모의 대련도 해 볼 텐데, 그날은 올 수 있겠느냐?”
“오전에는 일이 있지만 오후에는 괜찮을 겁니다. 그러면 그날 점심 이후에 대회장으로 바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나도 오전에는 본산에서 일을 보고 점심쯤 가 볼 요량이니, 적당히 시간 맞추어 오려무나.”
스승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사모가 부엌에서 커다란 보자기에 싼 꾸러미를 두 뭉치 들고 왔고, 무거워 보이는 꾸러미를 얼른 받아 든 서정운에게 “냉장고에 넣어만 두지 말고 꼭꼭 챙겨 먹어라.”라고 짤막하게 잔소리를 한다. 서정운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럼 가서 쉬어라.”
“예, 사부님. 그러면 대회장에서 뵙겠습니다. 사모님,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사람에게 각각 꾸벅꾸벅 인사를 건넨 것을 마지막으로, 서정운은 사랑채에서 나왔다. 무얼 그리 많이 챙겨 주셨는지 어깨에 묵직한 무게가 실리는 꾸러미를 들고 본채에서 나와 주차장에서 가까운 본산으로 넘어간다.
휴일 오후의 본산은 조용했다.
대회 직전이라 휴일에도 수련하러 오는 선수들은 제법 많을 테지만, 대수련장 근처가 아니면 휴일 본산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본산의 부지는 대단히 넓어서 사람들이 종종 드나드는 특정한 건물에 가거나 혹은 누군가를 의도하고 찾아다니지 않는다면 우연히 사람을 마주치는 일은 그다지 없었다. 특히나 휴일에는 더 그렇다.
저만치 수십 미터쯤 떨어진 앞에서 서정운이 아는 사범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같은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게 아니라면 이렇게 우연히 한쪽에서 보더라도 다른 한쪽은 모르고 지나가는 일도 흔했다.
이렇게 한적한 휴일이 좋았다.
대수련장 근처로만 가지 않으면 오늘이 휴일이라는 걸 본산 어디서든 느낄 수 있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뙤약볕. 저 멀리서 그 더위를 몰아내려는 듯 요란하게 울어 대는 쟁쟁한 매미 소리. 이 밝은 볕 아래 인기척이라곤 없이 드넓고 고요한 옛 건물들.
대낮의 이 기묘한 적막감 속에서, 서정운은 몇 걸음 걷지도 않아 머리가 뜨거워지는 느른한 더위가 기분 좋다고 생각했다.
멀리 어디선가 평화롭게 두어 번 개가 짖는다. 저희들끼리 놀고 있는 모양이다.
“…….”
이 더운 날 함부로 까불고 돌아다니다가 자칫 어느 집 냄비에 들어갈 줄 알고……, 서정운은 피식 웃으며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외당 방향이었다.
평소에도 인적이 드문 외당에 이르기까지 서정운은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대수련장 쪽에서는 오늘도 연습하는 선수들이 제법 있는지 가끔 고함 소리며 기합 소리가 아련한 훤소로 들리긴 했지만 그것은 먼 세상에서 들리는 소리 같다.
서정운에게 현실의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가 외당에 이르렀을 때, 외당 뒤꼍에서 저희들끼리 장난치며 뒹굴고 있던 강아지 여러 마리의 소리가 들려온 때다.
그놈들은 서정운이 외당으로 들어서자 그걸 또 금방 알고 냉큼 달려와 발치에 붙어서 왈왈거렸다. 이제 슬슬 나이 반 살이 넘어가는 놈들은 이제 강아지라기보다는 개에 가까워, 여섯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오면 좀 움찔하게 된다. ……심지어 서정운이 들고 있는 반찬 보자기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기라도 하면.
“야, 야, 저리 가. 늬들 줄 거 아냐.”
이놈들이 갈비찜 냄새를 귀신같이 맡았구나.
그러나 머리는 좋은 놈들이라, 내려놓은 꾸러미에 몰려드는 걸 몇 차례 꾸짖자 아쉬운 눈으로 흘끔거리면서도 알아서 슬슬 물러난다.
서정운은 평상에 앉아 놈들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 주며 피식 웃었다.
“늬들, 탕거리 될 뻔한 건 알기나 하냐? 어이구, 이 포동포동한 것 좀 봐. 한 마리만 잡아도 서너 명은 족히 먹겠네.”
이 더운 여름에 감량이 시급한 건 체급 조절해야 하는 선수들이 아니라 네놈들일 성싶다, 하고 놈들을 쓰다듬어 준 서정운은 가뿐한 숨을 내쉬며 평상에 드러누웠다. 며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차에 배가 불러오니 나른하게 졸음이 왔다. 잠시 눈 붙였다 가도 좋겠다.
“…….”
그러나 막상 누우니 몸은 나른하게 늘어지는데 잠은 오지 않았다. 홀로 남자 다시 머릿속이 번잡해지는 탓이다.
간밤에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간밤만이 아니다. 이미 수일간 밤마다 잠을 거의 못 자고 있었다.
한무화가 찾아오는 탓이다.
자정 한참 넘어, 그때까지 수련을 한 뒤 찾아오는 것일 그는 그 늦은 시각에 딱 한 번 초인종을 울린다.
이미 수일 전부터 그랬다. 밤이면 한무화는 서정운의 집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서정운은 문을 열어 주지 않았고, 그러면 그는 밤이 이슥할 때까지 그 앞에 있다가 돌아가곤 하는 것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대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서정운도 자지 않았다. 밤새 불이 켜져 있는 창을 보며 한무화도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깨어 있어도 서정운은 그를 안에 들이지 않았고, 무작정 찾아온 그는 불평 한마디 없이 그저 문 앞에 서 있기만 하다 돌아갔다.
대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를 문 안에서 지켜보면서, 서정운은 숨이 쉬어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언제까지 저럴 건지. 하루하루 지날수록 심장이 더욱 짓눌려, 이제는 터질 것만 같이 아슬아슬했다. 그래서 결국은 그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주체할 수 없어, 서정운은 전화를 집어 들고 말았다.
『어, 사형.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한호영은 아직 잠들지 않았던 듯 생생하게 전화를 받았다.
‘무화 요즘 어때.’
전화를 받자마자 묻는 서정운에게, 한호영은 갑작스럽게 왜 묻나 싶었을 텐데도 아무 반문 없이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안 좋아요.』
‘……어떻게.’
『정무도도 엉망이고……, 수련은 다른 때보다 더 열심히 하는데, 그게 너무 지나쳐요. 몸을 혹사시키는 것처럼.』
오죽하면 작은아버지가, 이렇게 몸 상해 가며 수련할 바엔 이번 대회는 결장하자고 무화한테 말씀하셨을 정도예요, 라고 대꾸하는 한무화의 목소리가 흐렸다.
‘그래서, 이번 대회는 안 나가기로 했어?’
『아뇨, 그래도 나가겠대요. 연습이라도 안 하면 견딜 수가 없다던가…….』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물어도 말을 안 하고, 한호영은 그렇게 중얼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문득,
『무화, 사형이랑 무슨……, ……아니에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다 한호영은 도중에 그만두었다. 전화 너머에서 희미한 한숨 소리만 넘어온다.
서정운은 잠시 말없이 있다 ‘그래, 쉬어라.’라고 말을 맺었고, 한호영은 갑작스런 전화였음에도 아무 반문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서정운은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앓는 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진심 어린 분노가 욕설과 함께 튀어나왔다.
저놈이 미쳤나.
나이 먹을 만큼 먹어서, 무슨 첫사랑에 미쳐 버린 소년도 아니고, 당장 코앞에 닥친 중요한 일이 따로 있는 상황에, 이렇게 앞뒤 재지 않고 무턱대고 제 몸을 깎아 내다니.
머리끝까지 화가 솟았다. 그와 함께, 펑펑 울고만 싶은 서러움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은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며칠 만에, 줄곧 밤마다 찾아오던 저 남자를 이기지 못하고, 뜰을 지나 대문 앞으로 가 멈춰 섰다.
대문을 사이에 두고 있어도 서정운이 나오는 기척은 바깥까지 들렸을 터였다. 대문을 등지고 서 있던 한무화가 이쪽으로 돌아서는 발걸음이 대문 아래 틈으로 보인다.
서정운은 대문을 열었다. 바로 앞에 한무화가 서 있었다.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우두커니 선 그는 서정운을 바라보았다. 차근차근, 그것이 서정운이 맞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고 서정운도 이 거칠고 여윈 남자가 그가 맞는지 확인한다.
‘…….’
한무화가 문득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서정운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반걸음쯤 물러선다. 그리고 동시에--눈을 크게 뜨며 멈춰 서정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이윽고 어둑한 기색으로 천천히 그 손을 거두는 한무화를 본다. ……그러려던 게 아닌데.
그러나 서정운은 그를 묵묵히 보다가 낮게 말하고 만다.
‘……가.’
서정운을 바라보던 한무화는 서정운만큼이나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싫습니다.’
‘뭐 하자는 거야, 밤마다 찾아와서. 이런 방식은 아니잖아.’
‘방식……. 그럼 어떤 방식이면 됩니까?’
한무화가 되묻는 말에 서정운은 대답할 수 없었다. 한무화는 서정운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을 이었다.
‘방식이 아닙니다. 여러 방식 중에서 이런 방식으로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하는 것 말고는, 어떻게 하면 서정운 사범님을 볼 수 있는지--볼 가능성이라도 있는지, 모릅니다.’
‘--.’
‘보고 싶은데, 보러 오는 것 말고 무슨 방식이 있습니까?’
서정운은 대답하지 못했다.
보고 싶으니까 보러 온다. 볼 수 있든 없든.
서정운을 집에서 끌어낼 다른 수나 꾀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그 앞에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기만 하면서.
한무화는 서정운의 얼굴을 낱낱이 바라보았다. 뭐 달라진 건 없나, 눈썹 속의 작은 점 하나까지 차근차근 살피는 눈길은 ‘보고 싶었다’는 말 그대로, 눈길만으로 서정운을 상냥하게 더듬는다.
목구멍으로 울컥 뜨거운 게 치밀어 입을 꾹 다물고 마는 서정운을 한무화는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제가 사범님을 괴롭히고 있습니까?’
한무화가 물었다. 그렇게 까칠해진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그 안에는 염려가 스며 있다.
‘마르셨습니다.’
‘네가--.’
서정운은 저도 모르게 말하려다 멈추었다.
네가 더 말랐다. 보는 내가 더 힘들 정도로 안색이 안 좋다.
‘사범님을 괴롭히고 싶지 않은데…… 보고 싶습니다.’
한무화가 한숨처럼 나직이 말한다.
‘보니까 좋습니다.’
그 말뿐.
몇 날 며칠이나 기다려 겨우 얼굴 한 번 보았을 뿐인데도 그렇게 말하는 그를 서정운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가.’
겨우 그 말만 하고는 문을 닫고 만다.
문밖에서 한동안 침묵하던 그가 낮게 말했다.
‘보고 싶습니다. ……안고 싶고, 입 맞추고 싶습니다. 끌어안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담담하게 흘러오는 말.
‘……사범님.’
그 조용하고 담담한 호소를 견디지 못해 서정운은 걸음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사범님.
그 목소리가 귀에 남아 떨어지지 않았다.
그 뒤로도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던 한무화는 밤하늘이 희미하게 밝아 오기 시작할 즈음에야 그곳을 떴고, 그런 뒤에도 결국 서정운은 한숨도 자지 못하고 하얗게 날을 밝혔던 것이다.
“--.”
서정운은 앓는 소리를 삼켰다.
보고 싶다. 나도.
왜 보고 싶을까. 왜 안 보고 싶겠어.
밤마다 그가 찾아오는 것도, 힘든 한편으로 가슴 저리게 좋았다.
한무화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것도, 자신을 좇는 것도, 좋지 않을 리 없다. 이토록 마음에 품었던 사람은 처음인데, 하물며 그 사람이 자신을 원한다는 게 어떻게 좋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제는 좋으면 좋은 만큼 묵직하게 내려앉는 무게도 무거워져서, 서정운은 금세라도 가슴이 짓눌려 질식할 것 같았다. 숨쉬기가 힘들다.
연애는 타이밍이라고 누군가 말했었다. 연애는 때가 맞아야 한다고.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시기와 그가 나를 좋아하는 시기가 안 맞아도 안 되고, 나나 그의 주위 환경이 마음을 열 수 있는 시기가 아니라면 그 또한 안 되니, 그런 것들이 맞물려야 한다.
그런데,
“참 안 맞는구나…….”
좋아하는 시기도, 환경도, 둘 다 맞지 않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아주었더라면. 조금만 더 일찍 돌아봐 주었더라면. 그러면, 어쩌면 그는 그것을 핑계로 스승도 그의 앞날도 못 본 체할지도 몰랐는데.
“…….”
안 되겠다……. 그만두자.
서정운은 쓴 숨을 내쉬며 평상 위에서 돌아누웠다. 억지로 낮잠이라도 청해 머리를 비워야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묵직하게 눌린 마음은 언제까지고 가벼워지지 않았고, 머리도 비워지지 않았다.
“……고 싶어.”
어느 순간 불쑥, 차마 입 밖으로 내지도 못한 말을 입속으로만 속삭인 그때.
강아지들이 떠들썩하게 짖는 기척이 났다. 비록 언제 그랬냐는 듯 아주 금방 조용해지긴 했지만, 반갑게 짖어 대는 소리가 한두 마디 울리다 그쳤다.
눈을 떠 고개를 든 서정운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한무화를 보았다. 강아지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하던 그는 서정운이 일어난 걸 보고 일순 난처한 빛을 띠었지만 곧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주차장에 차가 있어서, 오신 줄 알았습니다.”
“……어.”
“주무십시오. 방해하려던 것 아닙니다.”
한무화는 서정운에게서 얼마간 떨어진 평상 끄트머리에 앉았다. 서정운은 곧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아니……, 아냐. 그러잖아도 일어나려던 참이었어.”
그가 올 줄은 몰랐다.
심장이 뛴다. 이렇게 낮에 보는 게 얼마 만일까. 심장이 뛰어 똑바로 볼 수도 없었다.
외당은 한무화 역시 가끔 찾는 곳이니 그가 와서 이상할 일은 없지만, 대회 전의 마지막 휴일인 오늘은 선수들이 대수련장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 날이었다. 그 역시 거기에 있을 줄 알았는데.
한무화는 벗어 두었던 신발을 도로 신으려는 서정운을 보고는 얼른 서정운의 팔뚝을 잡았다. 움찔하며 돌아본 서정운은,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 아래 희미하게 다급한 빛을 숨기고 있는 한무화를 본다.
“쉬다 가십시오.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얼굴만 보러 온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더 있다 가셔도 됩니다.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
건드리지 않을……. 서정운의 눈길이 얼결에 팔뚝을 잡고 있는 한무화의 커다란 손으로 떨어지자, 그 손도 얼른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제 말이 정말이라고 보여 주기라도 하려는 듯 한무화가 한 뼘쯤 더 떨어져 앉는다.
“안색이 안 좋습니다. 잠시 눈 붙이고 가십시오.”
서정운을 보지도 않고 강아지들에게만 시선을 준 한무화가 무뚝뚝하게 말한다. 마치 서정운을 보면 자신의 말을 지키지 못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이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 그의 옆모습을 서정운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색은 네가 더 안 좋아. 대회까지 일주일도 안 남았는데, 너 몸 관리 그렇게 안 해서 어쩔 거야.”
“몸 관리는 잘하고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한무화를 서정운은 묵묵히 바라보다 말한다.
“너 요새 거칠어.”
꾸중이 담겨 있는 그 조용한 말이 정무도를 두고 하는 말임을 한무화는 이내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마 본인의 상태에 대해서는 본인이 가장 잘 알 테니, 서정운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수 없었을 거다.
허벅지 위에 주먹을 내려놓고 반듯하게 앉은 자세로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한무화가 말했다.
“어떤 것이 제가 가져야 할 궁극적인 형태인지 알겠습니다. 그 형태가 완전히 제 것이 되도록 수련해야 한다는 것도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형태는 뜻밖에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거칠어서, 다스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다스려야 하나, 그런 생각도 듭니다.”
그 자체가 온전한 하나의 형태일 수 있는데, 하고 한무화가 말한다. 서정운은 뚫어져라 한무화를 보았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쪽으로 가면 안 된다.
그런데도 한무화는 이미 반쯤은 그 방향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 안 되는데도.
“아냐. ……다스릴 수 있지만 그대로 풀어 두는 것과, 다스리지 못하고 그냥 풀어 두는 건 달라.”
네가 힘들어진다. 그렇게 하면 정말로 궁극적인--오롯하고 순전한 끝에 다다를 수 없을 거다.
한무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예, 노력하겠습니다, 다른 때라면 서정운에게 그렇게 대답했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깊이 생각해 본 뒤 본인이 납득해야만 대답을 하는 그가 침묵한다.
대답 대신 오래도록 이어진 침묵 끝에,
“서정운 사범님.”
한무화는 말한다.
부르는 게 아니다. 그 이름을 입에 담아 보는 거다.
“서정운 사범님.”
다시 한번. 그리고 서정운은 그가 이렇게 서정운을 부르는 게 처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서정운이 없는 곳에서도 그는 수십 수백 번을 불렀을 것이다. 무화야, 무화야. 서정운이 그랬던 것처럼.
“……힘듭니다.”
마지막 말은 마치 속삭이듯이, 촛불이 꺼지는 것처럼 힘없이 입속으로 사라진다. 한무화가 이렇듯 꺼질 듯이 속삭이는 목소리는 처음이라, 서정운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움직이지도 못했다.
힘듭니다.
그가 한 번도 했던 적이 없었을 그 말은 한없이 무겁게 서정운을 누른다. 이대로 질식할 것 같았다. 심장이 짓눌려 숨을 쉴 수 없다.
이렇게 힘들었구나. 차마 입 밖으로 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그것이 힘들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남자가.
그럼에도 서정운은 그를 보듬어 줄 수가 없다. 위로도 해 줄 수 없다.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가까이--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있으면서도.
불현듯.
피하는 듯하면서도 줄곧 이 거리에 있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희미한 미련으로, 그와의 연을 끊어 낼 작정을 굳히지 못하고 있었던 거다.
이렇게 힘들어하도록.
--그래서다.
그래서 서정운은 그 연이, 그 자신의 삶에 아주 커다란 부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야말로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무도를 그만둬야겠다고.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도록.
그리고 이제 정말로 더는--그를 스치듯이라도 볼 핑계조차 없애야겠다고.
*
1만 오천 석 규모의 거대한 실내 체육관은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정무도 하계 선수권 대회 개최 하루 전.
웬만한 경기의 국제 대회를 뛰어넘는 규모로 개최되는 하계 선수권은 여름철에 몰려 있는 여러 스포츠 대회 가운데서도 특히나 사람들과 각종 매체의 관심을 모으는 대회였다.
그러다 보니 그에 따른 준비도 몇 달 전부터 시작하곤 했는데, 드디어 그 마지막을 맞은 전날에는 경기장의 각종 설비들을 최종적으로 체크하고 경기 진행에 한 점의 오차도 없도록 만전을 기하는 것이었다.
체육관 관계자는 물론 정무도의 각종 관계자를 비롯해, 내일 대회에 참가할 선수들도 미리 방문해 사전에 설비와 진행을 꼼꼼하게 체크하는 이날은, 관중만 없다 뿐이지 여타 모든 것은 대회 당일과 같아 체육관 안에 시종 긴장감이 흘렀다.
내일 진행될 순서에 따라 선수들이 차례로 대련단에 올라 가볍게 연습을 해 보는 가운데 체육관의 설비 체크를 비롯해 각 방송 매체의 위치 조정 등도 빠짐없이 진행되었다. 모두가 긴장감을 두르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때,
“--멈춰!!”
체육관 중앙의 메인 대련단 옆에서 커다랗게 내지르는 고함이 울렸다.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그쪽으로 몰린다.
대련단 위에서 예행으로 대련을 하고 있던 선수 둘이 대련단 가장자리로 몰려 있었다. 몸과 몸이 부딪치다 균형이라도 잃어 한데 나뒹굴기라도 하는 것처럼 테두리 로프까지 밀려간 그들 중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로프 바깥으로 떨어지려는 찰나였다.
“--!”
사람들이 크게 부릅뜬 눈으로 굳어 그들을 주시하는 가운데, 로프 밖으로 상체가 기울었던 남자가 로프를 붙들었다. 그러나 그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로프는 길게 늘어났고, 남자는 하체까지 로프 밖으로 넘어가고 만다.
그대로 떨어지기 직전, 남자가 아슬아슬하게 대련단 바닥을 움켜쥐었다. 웬만한 악력으로는 불가능할 텐데도 바닥을 쥔 손으로 몸무게를 버틴 그는 간신히 대련단에서 떨어지지 않고 몸을 가누었다. 그리고 상대 선수의 도움을 받아 다시 대련단 안으로 들어온다.
그제야 긴장해서 쳐다보던 사람들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대련단 밖으로 떨어지더라도 고작해야 50센티미터 정도의 단차이니 크게 다치지는 않을 테지만, 대회 전날이다. 사소한 부상이라도 얼마든지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무화야, 이리 내려와라. 잠깐 좀 보자.”
대련단 밖에서 심각하게 남자를 지켜보고 있던 정원사범 한수일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남자에게 손짓했고, 막 방금 하마터면 대련단 밖으로 떨어질 뻔했던 남자--한무화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대련단에서 내려가 한수일을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한동안 조용해져 있던 주위는 그제야 웅성거리는 소리가 잔파도처럼 번져 갔다.
“아까 대기실에서 연습할 때도 힘을 제대로 못 가누는 것 같더니 몇 번째야.”
“저 상태면 차라리 이번 대회는 안 참가하는 게 나았을 것 같은데. 저러다 다치지는 않으려나.”
걱정의 꺼풀을 쓰고 중얼거리는 선수들은, 그러나 일견 안도하는 빛을 띠고 있다. 특히나 같은 체급의 선수들은 안도의 빛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실력이 좋은 선수에게 순수하게 감탄할 수 있는 것은 자신과 같은 자리에 설 일이 없을 경우뿐이다.
“지금 한무화 선수였죠? 그래도 춘계 선수권에서 우승까지 했었으니, 당장 이번 하계 선수권에서 메달권까지 가기는 힘들더라도 적어도 10위권 안에는 들지 않을까 했는데……. 저래서야 좀 힘들지도 모르겠군요.”
체육관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스탠드 위에 서 있던 남자가 말했다. 체육관 대관을 담당하는 실장인 그는 정무도를 오래 배운 본산의 수련생이기도 했는데, 문밖으로 나가는 한수일과 한무화의 뒷모습을 보며 입매를 찌푸린다. 하지만 그는 이내 옆에 선 노인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정련 측에서는 잘된 일이긴 하네요. 그래도 제법 유력한 선수였으니까요.”
그의 옆에서 체육관을 내려다보고 있던 노인은 정련의 정원사범 한태일이었다. 지금 막 체육관에 도착해 체육관 전체를 둘러보고 실내 경기장으로 온 그는 한무화가 대련단에 올라섰을 때부터 진지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희미하게 낯을 찌푸리고 있다가 그 남자의 말을 듣고는 짧게 코웃음 쳤다.
“흥, 어차피 저 스스로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녀석이라면 애초에 유력이고 뭐고 꼽을 가치도 없지. 저 모양이어서야 당장 이번 대회는 차치하고, 앞으로도 전망 없어. 뭐 체련 녀석이 어찌 되든 내 알 바 아니네만.”
“하하……, 그래도 한수일 정원사범님은 심려가 크신 눈치시던데요……. 어쨌든 시설은 이제 다 둘러보셨으니 사무실로 가셔서 대회 진행 계획서를 마지막으로 다시 살펴주십시오, 사범님.”
노인의 눈치를 보며 적당히 대꾸한 실장은 걸음을 돌리며 앞장섰고, 잠시 더 체육관을 내려다보던 노인도 그 뒤를 따라 돌아섰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던 서정운도, 한무화가 나간 문을 묵묵히 쳐다보고 있던 시선을 거두어 뒤를 따른다.
“그러고 보니 서 사범님, 애인이랑 헤어지셨다면서요.”
사무실로 걸음을 옮기던 실장이 문득 서정운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일순 콧잔등을 찡그린 서정운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는 실장을 보고 혀를 찼다.
“그 얘기가 여기까지 왔습니까?”
아니 그전에, 애인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한 적이 없는데 이미 그 소문은 디폴트로 전해져 있었다는 소리다. 아무리 본산 수련생이라도 요즘은 일이 바빠 본산에 거의 오지도 않는 실장인데, 사람 말이라는 게 정말 무섭도록 빠르다.
“지금 또 누구를 만나기 시작한 모양이라는 말까지 들려오던데요 뭘.”
그런 소문이야 늘 있어 왔으니 신경도 안 쓰지만, 서정운은 씁쓸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서정운이 반지를 끼기 무섭게 그에게 애인이 생겼다고 그 주위 일대를 강타했던 소문은, 마찬가지로 그의 손가락에서 반지가 사라지기 무섭게 그새 애인과 헤어졌다는 소식으로 바뀌어 다시 한번 주위를 휩쓸었다.
한동안 그의 전화통은 상태가 말도 아니었다. 커플링까지 했을 정도면서 그렇게 순식간에 헤어지다니 무슨 일이냐, 어떻게 된 거냐, 새 여자는 누구냐--헤어진 이유가 서정운의 여자 문제일 거라고 모두들 너무 당연한 듯이 믿어 의심치 않았다-- 등등, 한바탕 태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그 시기와 거의 때를 맞추어 서정운의 낯빛이 나날이 초췌해지니 소문은 온갖 버전으로 꼬리에 꼬리를 문 모양이지만, 거기까지는 알 바 아니다.
“그냥 뭐 그렇게 됐습니다.”
서정운이 짤막하게 대꾸하자 실장은 궁금한 눈치이긴 했지만 더 물어보지는 않았고, 앞서가던 노인이 흘끗 서정운을 돌아보더니 못마땅한 기색으로 끌끌 혀만 찰 따름이었다.
그때 실장이 누군가에게 전화가 온 듯 통화를 하기 시작했고, 그 뒤를 묵묵히 따라 걸어가던 노인이 별안간 서정운에게 시선을 주었다.
“너 그런데 탈적脫籍 신청했다면서. 그게 무슨 소리냐.”
그 묵직한 물음이 날아온 순간 서정운은 심장이 퉁 뛰었다. 마치 야단맞을 짓을 들켜 버린 아이처럼 손끝까지 움찔 움츠러든다.
사무실에 연락한 게 오늘 오전인데 그 이야기가 벌써 사부님 귀에 들어갔구나. 하긴 들어가지 않았을 리 없다. 어차피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여기에 오면서부터 이미 각오하고 왔다.
“아무래도 정무도를 더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만두려는 판에 굳이 적에 이름을 더 올려 둘 것도 없을 것 같아서, 명부에서 지워 달라고 연락했습니다.”
“그런 일은 스승에게 먼저 얘기를 했어야지, 어찌 네 마음대로 한다더냐?”
한태일이 걸음을 멈추더니 벌컥 역정을 냈다. 몇 걸음 앞에서 통화하며 막 사무실로 들어서던 실장이 놀라서 돌아본다. 서정운은 부릅뜬 눈으로 쳐다보는 스승을 마주 보며 담담히 말했다.
“사부님은 예전처럼 그냥 적이나마 남겨 두라 하실 것 아닙니까.”
“일이 바쁘거나 못 나올 연유가 생기면 한동안 쉬면 되는 것이지, 적까지 싹 없앨 게 뭐라더냐!”
“예전 같아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이번에야말로 미련을 끊어야겠어서 아예 탈적을 하렵니다.”
“무어 그리 끊어야 할 미련이 많다고?”
“많습니다. 사부님.”
많다.
미련이 너무 많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차라리 아예 보지를 말아야겠다. 본산에 갈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 이제는 누가 대문 앞에 선들 내다보지도 않을 테다. 아니, 아예 집을 다른 곳 멀리로 옮겨야겠다.
그렇게 보지 않으면 시간이 흘러흘러 기억도 퇴색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보지 않을 것이다.
조용히 말하는 서정운을, 한태일은 크게 부릅뜬 눈으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서정운의 얼굴 구석구석을 무섭게 노려보는 그 시선을 서정운은 담담히 마주 본다.
스승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이다. 예전부터 그런 분이었다. 아무리 서정운이 숨기려 하고 감추려 한들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다 내보이는 수밖에.
제자는 이렇게 약합니다. 마음도 약하고 의지도 약하고, 그래서 택할 방법이 이것밖에 없습니다.
오래도록 무서운 눈으로 서정운을 응시하던 한태일의 주름진 얼굴이 어느 순간 더욱 묵직하게 주름지는가 싶었다.
“너……,”
그러나 한태일이 막 입을 열었을 때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둘의 눈치를 살피던 실장이 대충 통화를 마무리해 끊고는 얼른 그들에게 다가왔다.
“저어, 사범님. 오늘은 체육관 내에 사람도 많고 방송 관계자도 제법 오가고 있습니다. 긴히 하실 말씀이시라면 사무실 안에 따로 응접실이 있으니까 거기에서 말씀 나누시면 어떠실지…….”
실장은 조심스러운 투로 그들에게 말하며 사무실의 문을 열었고, 입을 꾹 다문 한태일은 잠시 더 서정운을 노려보다가 언짢은 기색으로 휙 걸음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스승의 뒤를 따르는 서정운에게 실장은 갑자기 무슨 일이냐는 듯 의아한 눈길을 보냈지만 서정운은 대꾸하지 않았다.
“사범님, 조용히 말씀 나누시려면 응접실은 이쪽…….”
“일없네. 내일 대회 진행 이야기나 하세.”
한태일의 눈치를 보며 말을 꺼낸 실장은 한태일이 심기 사납게 대꾸하자 눈동자만 돌려 서정운을 살피곤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여기 앉아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자료 가져오겠습니다.”
실장은 사무실 안쪽의 테이블에 한태일을 모시고 얼른 자신의 자리로 달려갔고, 테이블에 앉은 한태일은 무거운 얼굴로 생각에 잠겨 서정운을 바라보았다. 서정운은 말없이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들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너 당장 내일 대회 어떻게 되든 그건 아무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앉은 테이블은 응접실의 바로 앞쪽에 있었는데, 두 칸으로 나뉜 응접실 가운데 한 곳에서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무거운 염려가 배어 있는 그 목소리가 한수일의 것이라는 걸 서정운은--그 앞에 앉아 있던 한태일도-- 이내 알아들었다.
“대회는 안 나가도 돼. 설령 당일 불참으로 벌점을 얻더라도, 그것도 아무 상관 없어. 내가 말하는 건 당장 오늘내일의 문제가 아니라 이 말이다.”
“예.”
그리고 낮게 대꾸하는 무심한 목소리는 한무화다.
서정운의 낯이 굳었다. 가만히 깍지 낀 손이 하얗게 도드라진다. 그런 서정운을 한태일이 바라보다 나직이 혀를 찼다.
“너 얼마 전부터 길을 잘못 들고 있어. 아니, 보아하니 네 길은 맞게 찾은 듯한데, 전혀 다스리지를 못하고 있지 않으냐. 헌데 그거야 본인이 갈고닦으며 시간이 지나면 되는 문제라 하나, 내가 보기엔 네가 그리 썩 다스리지를 않는 것 같아 하는 말이야.”
“…….”
“무화야!”
“가져야 하는 게 있습니다.”
한무화가 말했다. 순간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응접실 안에서도, 그리고 심장이 꿈틀한 서정운도.
곧 옳거니, 싶은 기색으로 한수일이 급히 다그치듯이 말했다.
“그게 뭔데. 내 마련해 줄 테니 말해 봐라.”
“그러실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줄 수 없습니다.”
“그래 그게 뭔데!”
답답하다는 듯 한수일이 꽥 외쳤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입을 다물면 더 물어봐야 말하지 않는 한무화의 성격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 한동안 화가 나 씨근거리던 한수일이 잠시 후 앓듯이 중얼거렸다.
“그게 정무도보다 중하냐. 너 여태 줄곧 해 온 이것보다.”
긴 침묵이 뒤따랐다.
한무화는 깊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엇이든 쉽게 대답하지 않는 그 성격대로. 그리고 그 긴 생각 끝에,
“저를 채워 줍니다.”
한무화가 말했다. 더 덧붙는 말은 없었다.
짧은 침묵 후 허, 짤막한 숨소리가 들렸다. 힘이 빠지는지 소파에 털썩 등을 기대는 기척도 들린다. 그 뒤로는 한동안 응접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서정운은 입을 꾹 다물고 호흡을 멈추었다. 그러지 않으면 뜨거운 것으로 꽉 막힌 목구멍을 비집고 나온 숨결이 흔들릴 터였고, 그 흔들리는 숨결에는 어떠한 소리가 섞여 나올지 몰랐다. 그것이 신음이든, 한숨이든, 혹은 누군가의 이름이든.
그런 서정운의 앞에서, 별안간 한태일이 언짢게 내쏘았다.
“무얼 어찌할지 갈피도 못 잡는 놈 붙들고 뭘 하냐. 관둬라!”
버럭 내지른 소리는 응접실 안까지 다다르기는 충분했다. 잠시 응접실 안의 기척이 뚝 끊기는가 싶더니, 반쯤 닫혀 있던 문을 쾅 열어젖히며 안에서 한수일이 나왔다.
우는 아이 뺨까지 맞은 양 머리끝까지 성이 난 얼굴로 한태일을, 이어 그 앞에 앉은 서정운까지도 노려보던 한수일은 뭐라고 쏘아붙여야 하나 고민하는 눈치로 입을 어물거렸으나 딱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점점 붉으락푸르락해지는 낯으로 외쳤다.
“형님이야말로 탈적한다는 놈 여기까지 왜 끌고 오셨소? 그간 온갖 추문 다 뿌리고 다니던 제자놈 이제 또 한동안 안 보일 테니 앓던 이 하나 또 얼마간 잠잠해지시겠구려!”
탈적한다는 이야기는 어느새 저분 귀에까지 들어갔구나, 서정운은 머리 위로 쏟아지는 고함을 묵묵히 견뎠다. 이번에는 한태일이 성이 나서 낯빛이 바뀐다.
서로를 세차게 노려보는 두 노인보다 명확하게 서정운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열린 문 안쪽에 앉아 있는 한무화였다.
문 너머에 앉아 있던 서정운을 보고는 얼핏 눈을 크게 떴던 한무화는, 얼어붙은 얼굴로 미동도 없이 서정운을 응시하고 있었다. 깜박이지조차 않는 눈이 새카맣게, 아주 새카맣게 물드는 것이 보인다.
“탈적.”
문득 한무화의 입술이 달싹인다. 그게 무슨 말인지 얼른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듯 혼잣말처럼 되뇌면서도 그의 시선은 서정운에게서 떠나지 않는다.
한무화를 마주 보던 서정운은 천천히 한수일에게로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그가 조금 전 했던 말에 조용히 대꾸한다.
“한동안이 아닙니다. 다시는 본산에는 가지 않을 겁니다. 그러려고 탈적하는 겁니다.”
한수일은 자신에게 말하는 서정운을, 이놈이 뭔 소리냐 싶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곤 눈썹을 잔뜩 치켜올리더니 코웃음 친다.
“그래 본들 얼마간이지!”
“아닙니다. 정무도는 이제 아예 보지도 않을 겁니다.”
아예 보지 않으면 잊힐 것이다. 계속 생각나고 떠오르는 시간이 오래더라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견디고 견디다 어느 순간 돌아보면 젊음 다 보낸 뒤가 되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될 터였다.
너도 그럴 것이고, 나도 그럴 것이다.
서정운의 시선이 다시 한무화에게 옮겨간다. 그 새까만 눈이 빛 한 점 없이 칠흑으로 물드는 것을 보며, 그 말 없는 말을 그 역시 알아들었다는 걸 알아차린다.
그때다.
얼어붙은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앉아 망연히 서정운을 바라보던 한무화의 얼굴이, 문득 꿈틀한 것 같았다.
천천히 악문 턱에 힘이 들어간다. 까맣게 빛을 잃었던 눈이 그 깊숙이서부터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싹 바뀌어 버린 낯빛은 무표정을 넘어서 소름 끼치는 어떠한 것으로 바뀌어 갔다.
마치 툭, 툭, 그를 동여매고 있던 끈이 끊어져 버리는 것처럼.
억지로 짓눌러놓고 삭이고 있던 흉포한 것이 기어이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쳐드는 것처럼, 한무화가 서정운을 노려보았다.
단숨에 뻗쳐 나는 그 사나운 기세에 서정운이 저도 모르게 굳어 버린 그때, 한무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정운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그는 성큼성큼 서정운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팔꿈치를 단단히 붙잡아 일으켜 세운다.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무,”
이를 갈듯이 내뱉은 한무화는 서정운이 당혹스럽게 입을 열기도 전에 두말없이 그를 움켜잡고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뒤에서 눈 휘둥그레 뜨고 아연하게 앉아 있던 한태일이 “아니 이놈이--.” 하고 무어라 외치는 소리도, 서정운을 끌어내고는 닫아 버리는 문에 가려져 도중에 끊기고 만다.
얼결에 끌려 나와 버린 서정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한무화에게 붙들려 몇 걸음을 더 걸은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무화야, --한무화! 뭐 하는 짓이야, 어디 가려고!”
한무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돌아보지도 않는다. 어마어마하게 화가 난 기운이 그 뒷모습에서 뿜어져 나왔다.
서정운은 도중에 걸음을 멈추려 했다. 이대로 계속 끌려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뜻밖에, 쉽게 멈출 수 있을 줄 알았던 걸음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팔을 붙들고 끌어당기는 힘이 놀랄 만큼 압도적이다.
“한무화! --한무화! 내 말 안 들려? 정신 차려!”
“무슨 정신 말입니까?”
그제야 한무화에게서 대꾸가 돌아왔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돌아보지 않았고 걸음도 멈추지 않았다.
“저는 아주 멀쩡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거침없이 복도 끝으로 걸음을 옮긴 한무화는 비상문을 빠져나가면서 처음으로 흘끗 서정운을 돌아보았고, 혼잣말처럼 나직한 속삭임이 덧붙었다.
“아니면 이제 더 이상은 차릴 정신도 없거나.”
“--.”
건물 밖으로 통하는 비상문을 나선 한무화는 체육관 뒤로 나가서도 한동안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거대한 체육관의 뒤편에는 사람이 다니지 않았다. 건물 모퉁이를 돌자 평소 아무도 쓰지 않는 듯 녹이 슬어 있는 비상계단이 나온다.
한무화는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서정운을 돌아본다. 서정운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한무화를 쳐다보았다.
“탈적하신다는 건, 저 때문입니까?”
한무화가 물었다.
“아니야, 정무도는 원래 그만둘 생각이었던, …….”
고개를 저으며 말하던 서정운은 도중에 멈추었다. 잠시 한무화를 마주 보고 있다가 낮은 한숨을 쉰다.
“그래. 너와는 더 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
한무화의 입매가 굳었다. 뚫어져라 서정운을 노려보던 그가 말한다.
“서정운 사범님께 정무도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사범님 개인의 달성뿐 아니라, 정무도 자체를 더없이 아끼고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한무화의 턱에 힘이 들어간다. 바로 이어지지 않는 뒷말은 잠시 사이를 둔 뒤에야 이어졌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절 안 보시려는 겁니까?”
서정운은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한무화만 보았다. 그런 서정운을 천천히, 살피듯이 뚫어지게 바라보며 한무화가 확인하듯이 다시 물었다.
“정말로--저를 안 보시려는 겁니까.”
서정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굳게 다문 입은, 그 답이 긍정이기 때문이다.
서정운을 바라보던 한무화의 낯빛이 여러 번 바뀌었다. 그 시커멓게 죽은 낯빛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 아득하게 어두운 빛 끝에, 한무화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짧은--혹은 긴-- 침묵이 흐른 후,
“그렇게 하십시오. 사범님이 그렇게 하시겠다면 그러셔도 됩니다.”
한무화가 말했다.
뜻밖에 선선히 받아들이는 그를 보며 서정운은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 금방 납득할 줄은 몰랐다.
마음이 느릿하게 안도감이 차올랐다. 동시에 어렴풋한 안개처럼 낙담과 비슷한 감정이 스몄지만, 모른 척했다.
이제 이걸로 된 거다. 이제 그는 그가 가야 할 길로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서정운이 아쉬운 한숨을 삼키며 한무화에게 꾸벅, 고개를 끄덕였을 때,
“계속 참으려 했습니다. 기다려 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더는 안 되겠습니다. 사범님이 사범님 원하시는 대로만 하시겠다면, 저도 제가 원하는 대로 해야겠습니다.”
그 목소리가 여태껏과 다르다는 걸 알아차린 건 그때다. 그 단단하고도 단호한, 얼음 같은 목소리.
“저는 사범님이 정무도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지도도, 조언도, 안 해 주셔도 좋습니다.”
서정운은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보며 가슴속이 서늘해졌다. 냉혹할 정도로 사나워 보이는 이 남자는, 여태 서정운이 알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사범님이 절 안 볼 수는 없을 겁니다.”
“--, 무화,”
“저는 볼 겁니다. 사범님이 설령 어딜 가시더라도, 뭘 하시더라도. 그건 사범님이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혼자 결정하지 마십시오.”
서정운은 입을 다물었다. 한무화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하고 조용했지만, 분명 달랐다. 어떠한 거절도 부정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게 이토록 명확하게 전해질 수도 있다니.
한무화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뚫어질 듯 응시하는 서정운을 내려다보다 천천히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어차피 원하시는 대로는 안 될 겁니다.”
그 말과 동시에, 한무화가 서정운의 머리를 감싸 쥐고 끌어당겼다. 입술이 겹쳐진다. 눈을 크게 부릅뜬 서정운이 물러서려 했지만, 거절을 용납지 않는 압도적인 힘이 서정운의 머리를 눌렀다.
“--.”
거칠게 입술을 열고 들어온 혀가 입속을 탐한다. 입술을 깨물고 혀를 깨무는 행위는 입맞춤이라기보다는 마치 탐식하는 것처럼 사나웠다. 신음조차 입속으로 잡아먹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 --만해!”
서정운이 한무화의 어깨를 움켜쥐고 밀어내었다. 일순 떨어지지 않는가 싶던 한무화는, 그러나 순순히 한 발짝 물러섰다. 마치 아주 잠깐의 양보라도 해 주는 것처럼.
서정운은 당혹스레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훔치며 한무화를 노려보았다.
“여기가 어딘 줄,”
“어디든 무슨 상관입니까?”
띄엄띄엄 서정운이 내뱉는 말 뒤로 한무화는 여상하게 대꾸한다. 서정운은 아연하게 한무화를 바라보았다.
원래부터 주위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남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단순히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아니다. 모든 게 될 대로 되라는 듯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버리는 것만 같다.
별안간 속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아무도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주제에 그걸 함부로 여기는 게 화가 나고, 그걸 저 손에 단단히 쥐여 주지 못하는 스스로가 속상해서.
“이 멍청아, 네가 망가진단 말이야!”
서정운은 저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무표정하던 한무화의 눈썹이 희미하게 꿈틀한다.
“제가 왜 망가진다는 겁니까?”
서정운은 한무화를 노려보았다. 옥죈 심장이 숨통을 막는 것 같다.
너는 모르지 않을 거다. 너는 네가 무엇인지, 내가 왜 이러는지, 왜 이래야 하는지 너는 알아야 한다.
“너 같은 사람은 흔하지 않아.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다시 볼 수 없을 거야.”
서정운이 울음이 나올 것 같은 속을 억지로 누르며 말했다.
“너는 위에 설 텐데--머지않아 분명히 그렇게 될 텐데, 그러면 네가 아무 짓도 하지 않더라도 너를 물어뜯으려 드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아질 거야.”
그래, 아주 작은 흠집만 있어도. 지금도 그가 발을 헛디디길 은근히 바라는 눈길들이 있는데 하물며 더 위로 올라간다면.
“흠이 생길 거란 말이야…… 내가 널 계속 본다면.”
결국은 자신이 그에게 흠을 만들지도 모른다. 이렇게 미련 끊지 못하고 계속 질질 끌며 보는 사이에. 당장 지금도, 이렇게 입을 꾹 닫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가 애틋하고 사랑스러워서 머리라도 마음껏 쓰다듬어 주고 싶은데.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한무화를 무섭게 노려보던 서정운은 차차 몸에서 힘이 빠졌다. 축 처진 마음에서 힘이 빠진 탓이다. 사납게 쏘아보던 눈에서도 힘이 빠져, 결국 서정운은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네가 이렇게까지 될성부른 나무가 아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넌 엄청나게 될성부른 나무란 말이야. 내 살아생전에 다시는 못 볼 만큼.”
아주 거대하고 울창하게 자랄 나무다. 그것은 필경 아름답고 훌륭한 나무일 터였다. 그래서 서정운은 그 나무를 울 것처럼 바라보며 말했다.
“정신 차려, 한무화.”
“--.”
한무화의 무표정한 얼굴이 얼핏 변하는가 싶었다. 서정운은 그런 그를 똑바로 바라본다.
“네 고삐를 제대로 쥐어. 그대로 풀어 놓지 마. 네가 가다듬고 네가 다스려야 해. ……무화야.”
한무화는 서정운을 쳐다보기만 했다. 무섭게 굳어 버린 얼굴로 침묵을 지키는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해야 했고, 그렇게 되어야 했다.
“그렇게 하면, 제게 뭘 주실 겁니까?”
한참의 침묵 끝에 한무화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서정운은 허를 찔린 듯 표정을 잃었다.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리겠습니다. 사범님께서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라도, 사범님이 그걸 원하신다면 평생 진창 속에서 발버둥 치라 해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 사범님은 제가 원하는 걸 주셔야 합니다. 이번에는 사범님이 제게 주실 차례입니다.”
“--, 무슨 궤변이야, 이건 날 위해서가 아니라,”
“누굴 위한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바라는 사람은 서정운 사범님이고, 심지어는 이게 궤변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더 이상 제게는 제가 바라는 것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단호하게 잘라 말한 한무화는 더 이상은 인내가 다해 버린 듯 거칠게 서정운을 끌어당겼다.
이번에야말로 잡아먹을 듯이 입술을 겹친 그는 서정운이 안간힘을 써 밀어젖혀도 꿈쩍도 하지 않고, 외려 더 깊이 혀를 빨아들이고 숨결을 삼켜 버렸다.
빈틈을 없애 버린 건 입술뿐만이 아니다. 한무화는 서정운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몸이 맞붙었다. 옷감만을 사이에 두고 가슴이, 허리가, 배가 바싹 붙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단단해지며 일어서기 시작한 샅이 맞붙었다. 이미 맞닿아 있는 곳을 더욱 빈틈없이 겹치기라도 하려는 듯 바싹 밀어붙이는 아래의 감각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
입술이, 혀가, 이가, 모든 것이 서정운의 입을, 얼굴을, 목을 쓸고 지난다. 맹수가 사냥감의 목줄기를 물어뜯는 것처럼 한무화가 서정운의 목을 깨물었다.
동시에 그가 바지 위로 서정운의 골반을 단단히 움켜쥔 때.
자박. 흙 밟는 소리가 났다. 그 발소리는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멈춘다. 그리고 몇 초간의 아연한 정적 끝에,
“이, 이놈들이…….”
놀람과 노여움으로 떨리는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그 순간 서정운은 찬물을 끼얹은 듯 심장이 식었다. 심장도, 머릿속도, 몸도, 삽시에 얼어붙고 만다.
서정운이 얼음처럼 굳어 버리자 그를 탐식하던 한무화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나 놀람이나 낭패감 따위는 없이, 오로지 방해받았다는 불쾌감만을 드러내며 뒤를 돌아본다.
비상계단 아래에는 한태일이 서 있었다.
사무실에서 나간 뒤로 계속 그들을 찾아다닌 듯 씨근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그는 눈을 커다랗게 부릅뜬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하나님.
서정운은 퍼렇게 질린 채 한태일을 바라보기만 했다. 뭐든, 뭐라고든 해야겠는데 얼어붙은 혀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부릅뜬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던 한태일은 별안간 숨이 막히는지 거칠게 어깨를 들썩이며 “이……, 이……, 이놈들이……,” 하고 더듬거렸다. 형형한 눈으로 서정운을 노려보다 한무화에게로 사납게 시선을 돌린 그는, 별반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고 새까맣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 한무화와 눈이 마주치자 울컥해서 고함을 질렀다.
“지금 뭐 하는 게야?!”
그 소리가 서정운을 향한 것인지 한무화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둘 모두를 향한 말일 터였다.
한무화는 창백하게 굳어 있는 서정운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러다 곧 다시 한태일에게로 시선을 돌린 그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서정운 사범님을 강간하려던 참입니다.”
“--, 뭐,”
찢어질 듯 눈을 부릅뜬 한태일이 일순 말이 막힌 듯 입만 벙긋거리는 사이에, 한무화는 마찬가지로 커다랗게 눈을 홉뜨고 그를 쳐다보는 서정운을 일언반구 없이 둘러메었다.
“무, --.”
당황해 무어라 외치려던 서정운은 갑자기 허공에 몸이 떠 균형을 잃었고, 한무화는 서정운을 떠멘 채 그대로 계단을 내려와 한태일의 옆을 스쳐 서슴없이 걸음을 옮겼다.
어안이 벙벙해 있던 한태일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한무화는 저만치 걸어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