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무화는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침착하고 평온하게 고여 있는 기분은.
원래부터가 늘 무덤덤해 동요하는 일은 거의 없었던 한무화다.
그러나 그것과는 다르다. 그의 속에는 아주 작은 바람조차 완전히 멎어 버린, 바람결 하나 없이 고요하게 멈춰 있는 호수가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깊은 호수의 밑바닥, 그 땅속에는 은근하고 꾸준한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이렇듯 차분한 흥분이라니.
“…….”
한무화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기실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몸을 풀고 있는 이들은 저마다 긴장하거나 투지에 찬 모습이다. 그들의 주위로 열기가 일렁이는 걸 알겠다.
그러나 그 모든 것과 무관하게 동떨어져 앉아, 한무화는 자신의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빈손을 가만히 주먹 쥐어 본다. 그 손안에는 여전히 타인의 체온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간밤 내내 이 손에 담았던 체온이다.
그는 아직껏 잠들어 있겠지.
그가 잠든 것은 새벽이 되어서였다. 어제 오후 집으로 간 이후로 계속 한무화와 몸을 겹치고 있다가 새벽에나 잠든 것이다.
그것도 정말 이상했다. 그런 적은 처음이었다.
열기가 꺼지지 않았다. 아무리 그를 안고 또 안아도 열기가 사그라들지 않았다.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몸을 섞고 있는 동안에만 겨우 해갈되는 그 목마름은, 한무화가 그의 몸에서 떨어지는 순간에는 다시 돌아와 들러붙었다. 그래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를 삼켰다. 삼키고 또 삼켜도 채워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제는 구석구석까지 모두 다 알고 있는 그 낯익은 몸을 부둥켜안고 그 안에 자신을 밀어 넣는 것이다. 그렇게 빈틈없이 하나가 되었다는 걸 확인한 다음에는 그 안에 자신을 새겨 넣어 절정을 맞았다. 그것은 섹스라기보다는 차라리 작은 죽음처럼 느껴질 정도로 절대적인 절정이었다.
그 작고 짧은 죽음 끝에, 생명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활기찬 생기를 얻어 눈을 뜨는 것이다.
그 기묘한--채워지지 않는--더없이 가득 차는-- 절대적인 만족.
그것을 무엇이라 말해야 하는지 한무화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절대적인 만족, 절대적인 안정감이라 할 수밖에는.
그 절대적인 감각들은 너무도 풍요롭고 달아서 계속 계속 탐이 나고 갈증이 났다. 조금이라도 더, 한 방울이라도 더, 그렇게 끊임없이 욕심을 냈다. 시간의 흐름도, 다른 무엇도 아무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곳에 그들은 오로지 둘만 있었다.
죽음을 겪을 때마다 생명이 차오르는 느낌으로.
‘--.’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한무화만이었던 듯하다. 아니, 어느 도중까지는 그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역시 거듭 몸을 열 때마다 그 몸이 더욱 농익어 흐드러지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한계선까지였던 듯, 도중 언제쯤부터 그는 늘어지고 말았다.
그가 죽은 듯 늘어져 깜박깜박 의식을 잃기 시작한 것이 몇 번째쯤부터인지 한무화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생전 처음 맛보는 이 아득하도록 달고 향기로운 과실에 취해 탐닉하고 또 탐닉할 뿐.
몇 번이나 의식을 잃었다 깨기를 반복하는 그를 품에 넣으며, 한무화는 그에게 입 맞추고 그를 쓰다듬었다. 그의 온몸 구석구석 자신을 새겨 넣고 싶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내 것이다.
그 엄청난 만족감과 충족감은, 그러나 동시에 흉포한 독점욕과 모든 것에 대한 경계심까지도 일구어 세운다. 그만큼 소중하고 귀한 것이다.
한무화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 낯선--이 놀랄 만큼의 만족감이 신기해서, 질리지도 않고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깨어 있을 때에도, 잠들어 있을 때에도. 끊임없이 입 맞추고 쓰다듬고 안으면서.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몰랐다. 아마 언제까지라도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도중에 그가 울음을 터뜨리지만 않았더라면.
‘……너무하잖아.’
목이 쉬어서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몇 번째인지 알 수 없이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뜬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이미 끊임없이 울어 빨개진 눈이 다시 젖었고, 한무화는 여태껏의 울음과는 다른 그 어렴풋한 원망과 질타가 섞인 울음에 당황해서 멈칫하고 말았다. 그를 품에 안고 그의 몸속에서 느리게 헤엄치던 것을 멈추고, 어떻게 하면 그가 울음을 멈출까, 당혹스레 서정운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깨어나도……, 또 깨어나도……, 계속 이러고 있어. 왜, 왜 끝이 안 나…….’
그는 아마도 참으려고 했던 것 같았다. 한무화에게 그렇게 사랑한다고 속삭여 주었던 남자다. 한무화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얼마든지 내주었을 것이다. 이번만 하면 되겠지, 이번만, 설마 더 할 리 없어, 이게 마지막일 거야, 더는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러나 끝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희망에 그는 결국 서럽게 울고야 말았다.
한무화는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흐느끼는 그를 보고서야 뒤늦게 반성하며--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쉬운 기분으로-- 그에게서 나왔던 것이다.
그래.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다. 적당히 기분 좋게 배가 찬 사자처럼 만족스러웠다.
그는 부드럽게 입 맞추는 한무화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어 준 뒤 사흘은 깨어나지 않을 사람처럼 깊이 잠들었다. 그리고 한무화는 그 뒤로도 한동안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 그의 집에서 나왔다.
계속 거기에 있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한무화는 알고 있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덜 힘들 수 있다면, 한무화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해야 했다.
『--한무화 선수. 대기하십시오.』
그때, 대기실 방송으로 한무화를 부르는 소리가 울렸다.
한무화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체육관을 향해 나서는 그의 주위로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흘러 다녔다.
저 남자가 춘계 선수권에서……, 아아 그 빈집털이?, 어제 연습 본 녀석 말로는 엉망이라고…….
악의마저 서린 그 짧은 말들은 허공을 돌아다니다가 한무화의 귓속에는 들지도 못하고 그대로 스러지고 만다.
그가 나아지면 나아질수록,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를 물어뜯으려는 일들은 많아질 거라고 했다. 그러나 한무화는 그런 데에 신경 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를 물어뜯어 치명적으로 해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오로지 그 자신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사람.
그 사람만 자신의 것이라면 아무것도 염려할 게 없다. 주위의 부수적인 일들은 그저 흘러가는 일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한무화는 그를 얻었고, 자신 속의 비어 있던 것을 채웠다. 다시는, 아무도, 그것을 도로 끄집어내지 못할 터였다.
“이곳에서 대기하시면 됩니다. 이번 대련이 끝난 뒤 호명하면 대련단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대련단 옆의 대기석에서 안내역을 맡은 남자가 말했다. 한무화는 고개를 끄덕이곤 곧이어 다가올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마음속은 고요한 호수 같았다. 호수에는 바람 하나 없다. 그 밑바닥에서는 지열처럼 거대하고 조용한 열기가 일렁이고 있는데, 호수는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맑고 차가웠다.
이상하다. 이상한 기분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가져야 할 스스로의 모습이라는 걸 알겠다. 이것이 지금의 자신에게 가장 편안한 모습이라는 것도.
『--선수.』
곧 한무화는 누군가의 이름과 함께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천천히 대련단 위로 올랐다. 반대편 계단에서 그와 겨루게 될 다른 선수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한무화 못지않게 커다란 체구에 근육으로 다져진 상대를 앞두고, 한무화는 그를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이내 기록 영상 따위에서 몇 차례 보았던 선수였다는 걸 떠올린다. 몇 번의 우승 기록이 있었던 남자였던 것 같다.
문득 이 남자를 이기게 될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답은, 이길 것이다.
물론 알 수 없다. 어쩌면 질지도 모른다. 진다면…… 1년을 기다려야겠지. 한무화는 문득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 시간은 까마득하게 길고 또 괴로울 터였다.
그러나 초조하거나 불안하지는 않았다.
어떠한 결과가 나오든 자신은 그저 자신이 뜻하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결국은 온전한 자신에 다다라 있을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들은 모두 자신에게 있을 터였다.
“시작!”
가운데 섰던 심판이 뒤로 빠지며 대련 시작을 알렸다.
한무화는 시선을 들어 상대를 본다. 상대는 이미 한무화를 향해 닥쳐오고 있었다.
……하지만 질 수는 없지. 나는 벌써 갈증이 나기 시작했으니.
한무화는 발을 내디디며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이상하게도 크게 염려되지 않았다.
오늘은 아주 좋은 하루가 될 터였다.
*
눈을 떴을 때에는 한 뼘쯤 열어 놓은 창문 틈으로 늦은 오후의 노란 햇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이부자리에 누운 서정운은 자신이 언제 깼는지, 언제부터 그 노란 빛을 보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한참을 그렇게 넋 놓고 있다가 창틈으로 얼룩새 한 마리가 지저귀며 파다닥 날아가는 걸 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
지금 몇 시쯤 된 거지, 서정운은 멍하고 몽롱한 머리로 생각했다. 낮게 기울어진 노란 빛을 보아서는 저녁이 다 되어 가는 것 같은데, 하고 시계를 보려고 손목을 들어 올렸다. 고작 손목 하나 들어 올리는데도 온몸이 욱신거리며 쑤시고 결린다.
뭐야, 왜 이렇게 힘들어, 왜 이렇게 몸이 무겁지, 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내쉬며 손목을 본 서정운은 평소 잘 때에도 버릇처럼 차고 자곤 하는 손목시계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언제 풀었더라, 흐릿하게 생각하던 서정운의 눈에 자신의 팔뚝이 들어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팔뚝에, 어깨부터 시작해 그 아래로 여기저기 벌레 물린 것처럼 작은 흉이 져 있었다. 특히나 팔 안쪽처럼 살이 연한 곳은 온통 얼룩덜룩 멍이 들어 있다. 무슨 전염병에라도 걸린 것 같다.
서정운은 놀라서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미처 일어나 앉기도 전에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휘청거리며 쓰러질 뻔했다가 간신히 팔꿈치로 이불을 짚어 상반신을 지탱했다.
힘들었다. 몸이 엄청나게 힘들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의 근육이란 근육은 다 아픈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눈앞이 아찔하도록 욱신거리는 건, 아랫도리다.
“……. ……. …….”
욱신욱신욱신, 맹렬하게 저리는 아랫도리의 감각을 곱씹는 사이에 서정운의 흐릿하던 머리는 천천히 맑아졌고, 곧이어 잊고 있던 간밤의 기억도 되살아났다.
동시에 서정운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얼굴만이 아니라 온몸도 덩달아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렇다.
어제.
그랬었다. 맞아. 그랬었…….
“--.”
사실 되살아난 기억이라고 해 봤자 제대로 된 기억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늦저녁 즈음의 어느 시점부터 기억은 서정운의 바닥난 체력과 함께 끊어지기 시작했다. 그 기억은 군데군데 잘라 낸 필름을 모아 놓은 것처럼 끊겨 있었는데, 그 필름 조각들은 죄다 남세스럽기 그지없어서…….
“……난 몰라……”
고개를 이불에 푹 박아 버리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서정운은, 밤새도록 울었던 목마저 바싹 쉬어 칼로 긋는 것처럼 아프다는 사실만 더 확인했을 따름이다.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었다.
“난 몰라……, 어쩌지……. 어쩌지…….”
새빨간 얼굴을 이불에 묻고서 그 말만 백 번쯤 중얼거리는 서정운이었지만, 이제 와선 돌이킬 수 없었다. 아니, 아주 약간의 무게감이 가슴속에 얹혀 있긴 하지만, 다시 돌아가지는 않을 터였다.
서정운은 숨이 막히기 직전에야 이불에서 빨갛기 그지없는 얼굴을 들었다. 그래, 이미 벌어진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씩씩하게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런 직후에 “어으으윽.” 하고 중얼거리며 구부정하게 몸을 움츠리긴 했다.)
이제 서정운이 갈 길은 하나다. 그는 한무화의 손을 붙들고 나아가며, 그가--설령 작은 나무에 그친다 하더라도-- 무럭무럭 잘 자랄 수 있도록 볕도 잘 들게 해 주고, 물도 잘 주고, 때가 되면 가지치기도 해 주고 벌레도 잡아 주면서 잘 보살필 터였다. 그러다 누가 톱이라도 댈라치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은 온 힘을 다해 막아 주며, 할 수 있는 한의 일을 다 하며 나아가야지.
그것이 이제 손을 맞잡기로 한 사람에게 서정운이 해야 할 일이었다. 뒤돌아보거나 다른 길을 찾는 게 아니라, 앞으로 꾸준히 잘 나아갈 길만을 생각하는 것이.
서정운은 가뿐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조용한 집 안의 기척에 귀를 기울인다.
그런데 얘는 어디 갔지, 설마 몸 상태가 요 모양 요 꼴인 나를 두고 그냥 돌아가 버린 건……, 그런 생각을 하다가 불현듯 오늘이 대회 날이라는 걸 떠올렸다.
아뿔싸.
서정운은 삽시에 낯빛이 창백해졌다.
서정운도 갔어야 하는 자리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리 봐도 오후, 이미 몹시 늦어진 오후였고, 대회는 거의 파할 즈음이었다.
“으아……, 난 몰라……. 아니 왜 아무도 연락을 안 해 준 거야?”
이번에는 허여멀건 낯빛으로 절망스럽게 중얼거린 서정운은 황급히 더듬더듬 주위를 살폈다. 머리맡에 곱게 놓여 있는 휴대 전화를 집어 들자 전원이 꺼져 있었다. 벌써 배터리가 다 됐나 의심하기엔, 전화에는 충전선이 곱게 꽂혀 있었다. 아무래도 누군가 고의로 꺼 놓은 것이 분명했는데 그게 누군지는 불 보듯 뻔했다.
잠깐 진심으로 한무화에게 분노한 서정운이었으나, 이미 늦었다. 서정운은 아이고……,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떨구고 말았다. 그나마 대회에서 별다른 역할이 없기에 망정이긴 하지만 가기로 약속했던 자리에 하루 온종일 퍼 자느라 못 가다니, 불찰도 이런 불찰이 없다.
“무화는 잘하고 있으려나…….”
서정운은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 대회에 가려 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그거였는데. 잘하든 못하든 그 자리에서 그를 지켜봐 주고 싶었다.
어찌 되었든 이미 대회는 끝나 갈 무렵이었고, 노오랗게 저물어 가는 하늘을 보며 서정운은 한숨을 쉬었다. 이왕 지나가 버린 일보다는 이제 한무화가 염려가 된다. 간밤에 거의 자지 않고 나갔을 텐데, 대회 성적이야 아무래도 좋다손 치더라도 자칫 다치지나 말고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럭저럭 폐회식까지 마치고 돌아오면 바로 돌아온다 해도 저녁은 될 텐데, 그보다 지금 몇 시쯤 되었을까.
눈 떴을 때 가장 처음 떠올렸던 의문을 이제야 다시 떠올린 서정운은 휴대 전화를 켰다. 전원을 켜고 잠시 기다리자, 휴대전화가 제대로 작동을 시작하기 무섭게 전화의 알림음이 띠링띠링띠링띠링 불난 듯이 잇따르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냐, 눈을 껌벅이며 휴대 전화를 들여다본 서정운은 그다음 순간 굳어 버리고 말았다.
부재중 전화 41통. 몇 통 제외하고는 거의 다 한호영과 한태일로부터의 발신이었다. 그 외 확인하기도 두려운 문자 메시지 다수.
“……. ……. …….”
서정운의 낯빛이 싸악 굳었다. 휴대 전화를 움켜쥔 손끝까지 차가워질 지경이다.
이걸 잊고 있었구나. 난 몰라………….
아직껏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고 반쯤 잠들어 있던 머리가 이번에야말로 얼음물을 들이부은 듯 깨어났다.
그랬다. 그러고 보니 어제 오후, 체육관에서 스승에게 현장을 들켜 버리곤 그대로 한무화에게 끌려 나온 이래 연락을 못 했다.
별안간 천 근쯤 되는 돌덩이가 가슴 위에 턱하고 실린 것 같았다. 당장 피해 갈 수 없는 난관이 눈앞에 버티고 있었다. 심지어 그 난관은 초장부터 대뜸 최후의 관문이 떡 하니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
“…….”
어떡하지……. 전화를 드리긴 해야 하는데, 걱정하고 계실 테니--혹은 열화같이 노여워하고 계실 테니-- 어서 연락을 드려야 하는데, 휴대 전화를 쥐고서 달달 떨리고 있는 손가락이 차마 통화 버튼을 누르지를 못하겠다.
전화를 해야지, 해야지, 골백번 망설이며 안절부절못하던 서정운의 귀에 문득 담장 밖에서 가까워져 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참 이상하다. 담장 밖을 지나다니는 걸음 소리는 숱하게 많은데도, 그 걸음 소리만큼은 누군지 알겠다.
서정운은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대문 앞에서 멎은 발소리는 이어 철컹, 대문을 열고 들어온다. 어느 틈에 열쇠는 또 갖고 나갔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서정운은 무심결에 피식 웃었다.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기분이 흥성거리며 들뜬다. ……안 되겠다. 당장 숱한 난관과 고난을 앞두고 고뇌에 빠져 있던 참에도 저 기척을 듣자마자 이렇게 좋으니, 이젠 글렀다. 누가 뭐라 해도 저 남자를 꼭 붙들고 갈 도리밖에 없었다.
서정운은 쌉싸래하게 한숨을 쉬는 한편, 그런데 아직 돌아오기에는 시간이 이른데……, 하고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이내 그가 일찌감치 탈락한 거라면 벌써 돌아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납득하는 동시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음에도 아쉬워한다. 썩 좋은 성적은 거두지 못하더라도 후반부까지는 남을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뭐 어때, 이제부터 힘내서 다시 부지런히 단련하면 되지, 하고 마음을 고쳐먹고 서정운은 방문 쪽을 향해 앉았다. (도저히 일어나서 마중을 나갈 상태는 못 되었다.)
현관으로 들어선 기척은 곧바로 안방으로 걸어왔다. 곧 방문이 조용히 열리며 낯익은 사람이 들어선다.
대회장에서 옷도 갈아입지 않고 바로 온 듯, 여전히 도복 차림인 한무화는 꽃다발을 대여섯 다발쯤 아무렇게나 쑤셔 담은 커다란 스포츠 백을 걸치곤 방 안으로 들어서다 서정운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어, 꽃다발……?, 하고 서정운이 눈을 껌벅거리는데, 한무화가 스포츠 백을 내려놓으며 다가왔다.
“언제 일어나셨습니까?”
“어, 지금 막. 너는 대회 나갔다 온 거야?”
“예.”
“일찍 왔네. 아직 대회 끝날 시간 안 되지 않았어?”
“대련만 마치고 바로 돌아왔습니다.”
서정운이 깔고 있는 이부자리 옆에 앉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한무화에게, 서정운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최종부까지 남았다 해도 시상 대상이 아니면 굳이 폐회까지 남아 있을 필요는 없다. 성적이 썩 좋지 않거나 먼 지방에서 온 선수들의 경우는 본인의 시합만 마치고 나면 바로 돌아가는 경우도 없진 않았다. 마지막 시합만 딱 끝내고 곧장 돌아왔다면 그럭저럭 맞을 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 순위권에 든 거 아냐?”
서정운은 그가 내려놓은 가방에서 흘러넘치고 있는 꽃다발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한무화는 대수롭잖게 고개를 끄덕인다.
“예, 들었습니다.”
“…….”
메달은…… 역시 없구나.
헛된 줄 알면서도 일말의 기대를 품고서 한무화의 목덜미 근처를 살펴보았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그래도 꽃다발을 받아 온 걸 보니 10위권 내의 순위권에는 든 모양이다.
요 근래 갑자기 부진하기도 했거니와 오늘 몸 상태도 썩 좋지 않을 거라서 아예 순위 밖으로 밀려났더라도 어쩔 수 없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썩 훌륭한 결과다.
하지만 순위권에 든 선수는 통상적으로는 폐회까지 자리를 지키는 게 상례였는데, 시합만 마치고 돌아왔다니 이놈도 나중에 사범님께 잔소리깨나 듣겠다.
서정운은 그러거나 말거나 평소와 다름없이, 별반 우울하거나 언짢은 빛도 없이 평연하게 무표정한 한무화의 얼굴을 구석구석 바라보았다.
“그래서 어땠어. 만족스럽게 마쳤어?”
한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짧은 대답이다. 그러나 망설임 없이 명쾌한 대답이었다.
그럼 됐다. 그거면 됐다.
시합의 결과에 상관없이, 어떠한 결과를 얻었든 그것이 본인이 만족할 만한 내용이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수고했어.”
서정운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고, 한무화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서정운은 가방에서 흘러넘쳐 바닥에 툭 떨어지고 마는 큼직한 꽃다발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래도 순위권치고는 상당히 많이 받았네. 웬만한 메달권 수상자만큼은 받은 것 같은데.”
그래도 나름 춘계 선수권 우승자라고 배려해 준 모양이지, 아니면 한수일 정원사범님이 미리 신경 써 줬거나. 서정운이 꽃다발의 향을 맡고는 옆에 내려놓으며 말하자 한무화는 이번에도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도 순위권이면 폐회까지 있다 오지 그랬어.”
“처음부터 제가 해야 하는 일만 마치면 바로 돌아올 생각이었습니다.”
시상대에 오르는 건 다른 사람이 해 줄 수 있는 일이니까요, 라고 말하면서 한무화는 서정운을 살폈다. 응? 시상대? 하고 서정운이 의아하게 여길 틈도 없이 한무화의 시선이 서정운을 낱낱이 뜯어보기 시작했다.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서정운이 어딘가 많이 불편하지는 않은지, 안색이 어둡지는 않은지, 차근차근 살피는 그 진지한 시선을 마주 보는 사이에 서정운은 문득 어색하게 눈을 껌벅였다.
이렇게 뚫어져라 바라보는 게 처음도 아닌데 갑자기 또 얼굴이 뜨거워졌다. 말도 없이 마주 보고 있자니 왠지 쑥스러워진 탓이다. 간밤의 열기가 아직 남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괜히 낯부끄러워 슬슬슬 시선을 떨어뜨린 서정운은, 문득 도복 바지 아래로 드러난 한무화의 발목에 눈길을 멈춘다. 발목이 눈에 띄게 푸르스름하게 부어 있었다.
“다쳤어?”
서정운이 대번에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제법 아팠을 텐데도 한무화는 그때까지 잊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새삼스러운 눈길로 그 시선을 따라갔다.
“아, 예. 대련 도중에 좀 접질렸습니다.”
“좀이라니……, 이 정도면 심하잖아.”
서정운은 한무화의 바지 자락을 끌어올렸다. 곧 고스란히 드러난 발목은 약간 접질렸다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부어 있었다. 이건, 접질리고 나서도 한동안 무리해서 버텼을 성싶은 부상이다.
“몸 상하면서까지 무리하지 말라고 했었잖아. 운동선수가 제일 하지 말아야 할 짓이라고.”
서정운은 조심조심 그 위를 더듬어 보며 혀를 찼다. 상처 위가 뜨끈뜨끈하다.
“예. 하지만 마지막 경기였습니다.”
한무화의 대답에 서정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 경기에서든 무리해서 안 되는 건 마찬가지지만, 마지막 경기라면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연일 이어지는 경기가 기다리고 있어서 어느 정도까지는 몸을 사려 둬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한계까지 다 부딪쳐서라도 이기고 싶은 마음은 과거 서정운도 여러 번 맛보았던 것이다.
“그나마 이제 한동안은 공식 일정이나 대회가 없어서 다행이네.”
“예.”
“있어 봐, 좀 식힌 다음에 테이핑하자.”
서정운은 물수건이라도 가져오려고 막 일어서려 하다 멈칫했다. 허리 아래가 욱신 하며 잊고 있던 통증을 호소했다. 으, 하고 무심결에 내뱉으며 도로 주저앉고 마는 서정운을 보며, 한무화가 당황한 듯이 얼른 일어섰다. 그리고 서정운을 대신해 약상자와 물수건 따위를 챙겨 온다.
환자는 그냥 앉혀 둬야 하는데……, 하지만 솔직한 심경으로 내가 쟤보다 훨씬 더 아플 것 같긴 하다……, 심지어 내가 이렇게 아픈 건 다 쟤 때문이거든……, 서정운은 슬쩍 부루퉁하게 생각하며 한무화가 가져온 것들을 받아 들었다.
한무화의 부은 발목 위에 차가운 물수건을 얹어 놓고 약상자 안에서 테이핑할 물건들을 꺼내며, 서정운이 불쑥 물었다.
“사부님은, 아무 말씀 안 하셨어?”
오늘 대회에서 한무화는 한태일과 마주쳤을 터였다. 어제 그렇게 사라진 이후로 처음 맞닥뜨렸을 텐데 괜찮았을까.
한무화는 고개를 숙인 채 웅얼거리는 서정운을 묵묵히 내려다보다가 “예.” 하고 대답했다.
“다소 언짢으신 기색이었지만 별말씀은 없으셨습니다. 게다가 대회 진행 때문에 다른 분들과 계시고 여러모로 바쁘셔서, 대회장에서 저와 따로 이야기할 틈은 없었습니다.”
“그렇구나. 하긴 그랬겠지.”
서정운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뒤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서정운을 한무화가 물끄러미 바라본다.
“우울하십니까?”
한무화가 조용히 물었다.
그 목소리에 다정한 염려가 스며 있다는 걸 서정운은 안다. 그래서 일순 아니라고 할까 했지만, 잠시 있다가 “응.” 하고 대꾸하고 만다. 서정운이 뭐라고 대답하든 이 남자는 금세 알아차릴 터였다.
한무화는 침묵했다. 서정운도 침묵한다. 그러다 눈동자를 들어 보니, 시선을 떨구고 있는 한무화가 왠지 모르게 풀 죽은 강아지 같아서 서정운은 조그맣게 웃고 말았다.
가만히 손을 들었다. 바삭, 한무화의 짧은 머리에 손을 댄 서정운은 그의 발목에 올려놓은 수건을 내려다보는 채 한동안 그를 쓰다듬었다.
순순히 그 손길을 받고 있던 한무화의 기색이 어렴풋이 누그러드는 게 느껴졌다. 얼마간 그대로 얌전히 있던 그는 손을 들어 서정운의 손을 그러쥐었다. 그리고 그 손을 입가로 당겨 손바닥에 입을 맞춘다.
그 아무렇지도 않고 스스럼도 없는 접촉에, 서정운은 새삼스럽게 그들이 그래도 되는 관계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다시금 낯이 더워지면서 애틋하고 따뜻한 어떤 감정이 가슴을 꽉 메운다.
“괜찮아. ……사부님을 생각하면 그야 좀 마음이 무겁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야.”
서정운은 그를, 혹은 스스로를 달래듯이 말하다가 문득 가볍게 웃었다.
“곧 사부님 찾아뵈면 울며 매달려 봐야지. 무화 아니면 안 되겠다고. 그러면 아마 사부님은…….”
‘나가라! 너는 더 이상 내 자식이 아니다!’, ‘그놈만큼은 안 된다. 그놈은 사실 네가 어릴 적 헤어진 친동생이야!’, ‘이 돈 받고 헤어져 주게. 섭섭지 않게 넣었네.’ 등등, 등등.
느닷없이 통속적인 상황 몇 가지가 동시다발로 떠오른 서정운은 얼른 머리를 내저었다. 아니 이게 아니라…….
“그래도 결국은 받아 주실 테니까.”
당신 자식이다. 서정운이 자신의 제자를 아끼는 것보다 훨씬 더 당신 자식들을 아끼는 분이었다. 노여워하며 크게 꾸짖더라도 결국은 이리 오라고 손짓하실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런 분을 마음 아프게 하는 게 몹시 괴롭지만,
“괜찮아.”
서정운은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리곤 한무화를 보았다. 그러니 나를 염려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렇게 눈길로 말하며.
한무화는 서정운을 지그시 마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낯이 한결 느슨하게 풀어진다.
“……전화하기는 좀 두렵긴 하지만. ……어차피 지금은 대회 마무리 중이라 바쁘실 테니까 조금만 더 있다 해야지…….”
아까부터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중얼거렸던 변명을 다시 한번 되풀이한 서정운은 한무화의 발목에서 물수건을 걷어내고 그 위에 테이핑을 하기 시작한다. 다행히 아주 심각해 보이지는 않지만 일단 임시 처치를 해 두고 내일은 병원에 가 보라고 해야겠다.
한무화는 서정운이 붕대를 감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정운이 어떻게 감든 불편하지 않은 듯, 핀으로 붕대를 고정시킬 때까지 그는 서정운이 몇 번 시선을 주어도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테이핑을 마친 서정운은 단단하게 감긴 붕대 위를 가볍게 손으로 쥐어 보고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괜찮아?”
“예.”
고개를 끄덕인 한무화는 시선을 들어 서정운을 보았다.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그를 서정운도 의아하게 마주 보았다. 그런 서정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며 반듯하게 고개를 숙인다.
그 새삼스러운 인사에 눈을 껌벅이던 서정운은 곧 그것이 앞으로의 긴 나날을 시작하는 인사임을 깨달았다.
서정운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웃었다.
“응. 나도 잘 부탁해.”
앞으로 오래도록 잘. 함께 더불어 살아갈 긴 시간 내도록.
한무화의 무표정하던 얼굴 위로 어떤 표정이 번져 갔다. 그것은 벅찬 만족감과 닮아 있었다.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어딘지 쑥스럽고, 또 뿌듯하다.
저렇게까지 좋아하다니……, 서정운까지 공연히 쑥스러워져 시선을 떨구고 눈만 깜박였다. 그런 서정운을 보고 있던 한무화가 문득 입매를 꾹 다무는가 싶었다. 아주 잠깐 서정운의 눈치를 살피는가 싶던 그는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천천히, 천천히, 안심시키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느리게 서정운에게로 다가온 그는, 물끄러미 한무화를 바라보고 있던 서정운에게 이윽고 입을 맞춘다.
메마른 입술이다. 이제는 익숙한 그 입술이 곧 부드럽고 조심스레 서정운의 입술을 벌리며 겹쳐졌다. 그 사이로 조심조심 미끄러져 들어오는 혀도 낯익다.
조용하고 온유한 입맞춤.
그것은 무척 익숙하고 편안한 감각이었다.
한무화가 서정운을 넉넉하게 끌어안는다. 서정운도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숨결이 하나로 섞이며 체온이 겹쳐진다.
아. 그렇구나.
내가 오래도록 바라던 것은 이것이었구나.
불현듯 서정운의 머릿속에 어떠한 깨달음이 스친다.
오래전부터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바라 왔던 것. 언젠가 찾을 수 있길, 언젠가 가질 수 있길 무의식 속에서 바라며 계속 찾아 왔던 것. 그것이 이것이었다고, 이제야 깨닫는다.
그것은 어쩌면 한무화도 마찬가지라서, 어느 순간 나직이 흘려내는 숨결에 나른하고 묵직한 안도가 스몄다.
이 사랑스러운 사람이 내 몫이라서 다행이다.
이 사람을 얻을 수 있어서 정말 잘됐어.
서정운은 가슴이 빼곡하게 차오르는 이름 모를 감정에 문득 목이 뜨거워져, 그 저릿한 감정을 가슴속에 억지로 눌러 두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불안스럽게 일렁이는 불온한 느낌으로 바뀌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닿았다 떨어지길 거듭하는 입맞춤이 조금씩 더 깊어져 감에 따라 서정운을 끌어안은 한무화의 팔에도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서정운의 등을 감싸고 있던 그의 손이 천천히 등을 쓸어내려 허리 부근에서 멈추었을 때에는 그 느릿한 손에 어떠한 의도가 담겨 있다는 걸 서정운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입술에 닿던 그의 입술이 느릿하게 뺨을 스쳐 목덜미 아래까지 타고 내려갔다는 걸 감안하지 않더라도 그랬다.
“무, 무화야.”
서정운이 그를 조그맣게 불렀다. 그 목소리가 희미하게 긴장되어 있는 건 그 입술과 손길에서 간밤의 기억을 떠올린 탓이다.
이미 욕망이 일렁이기 시작한 새까만 눈이 서정운을 보았다.
“무화야……, 내가 좀 많이 아파…….”
서정운이 호소하듯 중얼거린 순간, 한무화는 멈칫하더니 몸을 조금 떨어뜨렸다. 진지한 눈으로 서정운을 차근차근 훑어보며 그가 염려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린다.
“아프십니까? 어디가 아프십니까?”
“어……, ……, ……거기가.”
“거기?”
한참을 뜸하게 망설이다 울긋불긋한 얼굴로 겨우 중얼거린 서정운이었지만 한무화는 얼른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의아하게 되묻는 그에게 서정운은 다시 한참 망설이다 눈동자를 딴 데로 돌리며 말했다.
“엉덩이……, 아래……, 거기가 좀 아파. 지난밤에 좀 지나치게 과하게 해서…….”
퉁퉁 부은 것 같아, 하고 계속 딴 데를 보며 중얼중얼하는 서정운의 말을 듣고서야 한무화는 그의 말을 알아차린 듯했다. “아.” 하고 중얼거리더니 그 뒤로 잠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 간밤에 심하게 한 줄은 본인도 알 거다. 이게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심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새벽녘에 완전히 의식을 잃기 직전에는 이 남자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재고해 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심각하게 생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나마 푹 자고 일어나고 나니 기분은 쾌청해서 그런 생각은 씻은 듯 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것과 이것은 별개다.
“그래서 당분간은 그……, 좀 가라앉을 때까지는, 관계는 피했으면 하는데.”
어물어물 말을 하면서 문득 서정운은 자신이 너무 앞서나간 건 아닌가 싶은 의심이 불쑥 들었다. 이 남자는 그저 입만 맞추었을 뿐인데, 그냥 등덜미를 좀 쓰다듬었을 뿐인데 괜히 내가 김칫국 마시고 지레 꺼낸 얘기면 어떡하지, 그럼 좀 많이 민망한데, 하고 흘끔 눈동자를 들어 한무화의 눈치를 본다.
한무화는 육포를 빼앗긴 털 뭉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망연히, 그런 사태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한 듯, 까만 눈을 껌벅이며 서정운을 쳐다보고 있다.
“…….”
내가 잘못 짚은 게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잠깐 안심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저렇게 처연해진 눈망울을 보니 갑자기 죄책감이 드는 서정운이었다. 이건 그냥 육포를 빼앗은 게 아니라, 육포를 줄 것처럼 굴다가 빼앗은 것 내지는 이미 준 육포를 빼앗은 것과 비등한 류의 죄책감마저 들었다.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왜 내가 미안한 마음이 들지, 하고--한호영이 들었더라면 ‘사형이 그래서 안 되는 거예요!’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을 법한-- 생각을 하면서, 서정운은 잠시 망설이다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냐……, 생각해 보니 괜찮을 것 같기도 해……. 가, 가볍게라면 그냥 내가 좀 참으면…….”
눈을 질끈 감으며 어물어물 말하는 서정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무화는 문득 눈매를 누그러뜨렸다. 달달 떨면서도 너를 위해 내가 어떻게든 해 보겠노라 하는 서정운을 지켜보며 그의 입가가 어렴풋이 휘어졌다.
“아닙니다. 참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쉬는 걸로 하겠습니다, 하고 선선히 말한 한무화는 다시 서정운에게 몸을 기울여 입 맞추었다. 이번에는 입술에만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맞춤이다.
“1년도 기다릴 각오였습니다.”
“……? 아냐, 설마, 1년까지는 안 걸려.”
한무화의 말에 서정운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설마 아래가 낫는 데 1년씩이나 걸리려고. 해 봐야 며칠쯤일 텐데. 그런데 얘가 지금 ‘오늘은’ 쉬는 걸로 하겠다고 했던가…….
“예. 1년이나 참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한무화가 웃었다.
서정운은 그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만다. 한무화가 얼굴 가득 웃고 있었다. 눈가에도 입매에도 부드럽게 웃음이 새겨진다.
그 모습이 참 예뻐서--너무도 사랑스러워서, 서정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그의 입술을 훔쳐 버린다.
“응, 며칠만 기다렸다가. 한…… 일주일 정도.”
“……. 예, 노력해 보겠습니다.”
저 ‘오늘은’이 괜히 기억에 남아 서정운이 슬쩍 날짜를 덧붙여 말하자 한무화가 일순 말을 뚝 멈추었다. 육포 봉지가 별안간 저만치 멀어져 당황한 것 같은 얼굴이다.
그러나 갑자기 자신 없어진 듯 난감한 얼굴을 하고서도 한무화는 물끄러미 서정운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게 꼭 실망스러워 기운이 빠져 버린 털 뭉치라도 되는 것 같아서, 서정운은 웃고 말았다.
좋다.
역시 좋았다.
이 남자도. 이 남자와 이렇게 체온을 겹치는 것도.
비록 앞으로의 염려가 가슴 한구석에 묵직하게 남아 있긴 했지만, 그조차 충분히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았다. 이제는 결코 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무화야.”
서정운이 불렀다.
“예?”
한무화가 의아하게 대답한다.
“무화야.”
“예.”
서정운이 다시 부르자, 한무화는 이제는 의아한 빛을 거두고 담담하게 대답한다. 몇 번을 불러도 몇 번을 그렇게 대답해 줄 듯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다.
서정운은 다시 한번 “무화야”, 그를 부르며 눈을 감았다. 다시 “예.” 하고 들려오는 짧은 대답이 귀에 스민다.
잠시 뒤 서정운의 감은 눈꺼풀 위로 낯익은 감촉이 닿았다.
익숙한 듯이 닿았다 떨어지길 거듭하는 그 입술은, 그러나 한편으로 설레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주 어렴풋이 떨리고 있었다.
서정운은 웃었다.
나와 같구나. 나도 네 입술이 이제는 익숙한데. 그런데도 닿을 때마다 설레는데.
“…….”
서정운은 가분한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감고 있으려니 아직 지쳐 있는 나른한 몸에 다시 졸음이 왔다. 그래서 서정운은 그대로 눈을 감은 채 한무화에게 몸을 맡기기로 했고, 이내 기분 좋게 번지는 노곤함이 의식을 덮었다.
사범님……? 한무화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곧 그 목소리마저 조용해지고, 넉넉하게 끌어안는 따뜻한 체온만이 의식의 마지막까지 남았다.
모든 것이 오롯하게 갖추어진 한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