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last. (27/28)

the last.

영상 속에서 남자는 단정하고 고요했다.

그는 상당히 큰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상대 선수 또한 워낙 거구인 터라 상대적으로 그리 커 보이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의 정돈된 분위기와 어우러져 그를 작아 보이게까지 했다.

그러나 남자가 신호를 듣고 시선을 들어 상대 선수를 바라보며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그 모든 공기는 일시에 바뀌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집채보다 거대한 맹수였다.

그 맹수는 이빨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발톱을 세우지도 않았고, 포효하지도 않았다. 어떠한 노골적인 위협이나 공격의 기미도 없이, 그저 그 거대한 몸을 떨쳐 일으키는 것만으로 주위의 모든 것을 압도하며 눌렀다.

아직 젊으나 진중하고, 진중하나 무겁지 않다.

느리나 둔하지 않았고, 빠르나 경박하지 않았다.

단숨에 좌중의 시선을 압도하는 그 남자는 여태 수차례 정상에 올라서 만인을 내려다보았던 왕자王者와 마주쳤고, 그 어떤 적의나 경계도 없이 마치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 중 일부인 것처럼 그를 맞아들이고 그에게 파고들었다.

손끝의 움직임 하나, 호흡 하나마저 모두 자신의 뜻대로 다루는 양. 흐트러짐도 막힘도 없이 물 흐르듯이.

그 고요하고 자유로운 맹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실상은 용암 같은 열기였음을 그들이 알게 된 것은, 어느 사이인지도 모르게 열화와 같은 기세를 뒤덮었던 그가 대련이 끝남과 동시에 다시 그 적막하고 단정한 형세로 돌아간 뒤였다.

영상이 끝날 때까지, 수많은 관중들이 함께했을 그 영상 속에서는 아무런 소리도--크게 숨 쉬는 소리조차도 나지 않았다.

*

근 수년래, 혹은 그 이상, 각종 스포츠 관련 방송 매체나 신문지상에서 이토록 왕성하게 한 인물의 성과에 대해 떠들어 댔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날 각 신문 스포츠난의 헤드라인을 휩쓴 것은 정무도 하계 선수권 대회의 기사였는데, 헤드라인과 더불어 대문짝만하게 난 사진은 모든 지면에서 동일했다.

정무도의 정원사범 한태일이 대단히 불쾌하고 험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시상대에 서서 앞에 선 사람에게 막 금메달을 걸어 주려 하고 있었고, 정무도의 또 다른 정원사범 한수일이 바로 그 시상대에 서서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얼굴로--불퉁하게 일그러진 건지 크나큰 기쁨에 차 있는 건지 분간할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한태일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놀랍고도 해학적인 사진 아래에는 올해 초에 정원사범 한수일이 자신의 양자이자 직계 제자로 맞이한 한무화 선수의 대리로 시상대에 올라갔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고, 그 아래로는 정무도를 시작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음에도 엄청난 기량으로 춘계 선수권 대회 우승을 차지한 데에 이어 이번에는 그보다 훨씬 규모가 큰 하계 선수권 대회에서마저 우승을 차지한 불세출의 천재 선수에 대한 소개글이 장문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기사 옆에는 그 놀라운 선수의 사진이 따로 조그맣게 실렸고, 그 선수가 대련 중 발목에 부상을 당한 탓에 시합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회장을 떠나 시상대에 오르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사연으로 기사는 마무리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본산으로 배달되어 온 모든 신문의 스포츠난은 꾸깃꾸깃 뭉쳐진 종이 쓰레기가 되어 쓰레기통을 가득 채웠다.

서정운이 앉아 있는 본채의 대청 구석에도 신문 한 부가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있었는데, 그 바로 위에는 둥그렇게 구겨 버린 종이 뭉치가 얹혀 있었다.

그러나 그런 기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아침에 그 기사를 처음 보았을 때에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아연해졌던 서정운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기사를 두 번쯤 읽어 본 뒤에야 겨우 내용이 머리에 들어왔고, 세 번쯤 읽고 나서야 사태가 파악되었다.

한참 멍하니 기사를 쳐다보고 있다가 정신이 들자마자 한무화에게 전화를 한 서정운은, 한무화가 『예, 사범님.』 하고 전화를 받기 무섭게 물었다.

‘너 어제 우승했어?’

『예.』

‘…….’

『…….』

저렇게 간결하고 아무렇지 않은 대답이 돌아오자 순간적으로 힘이 빠져 버린 서정운이었다.

‘왜 어제 얘기 안 했어?’

『딱히 물어보지 않으시길래 굳이 말하지 않았습니다.』

‘…….’

이게 지금 무슨 말이냐……, 한편으로는 대단히 이놈다운 말이긴 한데……, 서정운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물어보지 않으면 굳이 말하지 않는다? 알았어. 그럼 앞으로 서로 그렇게 하는 걸로 하자.’

한무화는 그제야 갑자기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사범님, 그런 게 아닙니다. 별로 중요한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랬을 뿐입니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열심히 변명하는 한무화에게, ‘다 됐고, 오늘 잊지 말고 병원에나 가.’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은 서정운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어이가 없다 못해 뒤통수가 뻐근할 정도였다.

중요하지 않을 리 있나.

설령 한무화가 서정운과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엄청나게 놀랄 만한 소식이었을 것이다. 정무도 하계 선수권 대회 우승이라는 게, 그렇게 가볍게 여길 타이틀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우승이라니.

도무지 믿기지 않아 기사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서 얼떨떨하고 이상한 기분으로 아침을 보낸 서정운은 두어 시간쯤 지나서야 겨우 실감이 나 자기 일처럼 기뻐졌다. 가슴이 둥실둥실 뜨고 마냥 기분이 좋아서, 오늘 저녁은 맛있는 거라도 먹어야겠다, 그렇게 즐거워했었지만.

“…….”

지금 이 자리에서는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서정운의 머릿속에 대회 우승 소식 같은 건 까맣게 지워지고 없었다. 머릿속에 남은 건 그저, 지금 막 한호영이 말해 준, 서정운은 까맣게 몰랐던 일뿐.

“……. ……. 정말로……, 무화가 그런 말을 했다고……?”

“예. ……아니 어떻게 그걸 사형이 모를 수가 있지?”

한호영은 어물어물 서정운의 낯빛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괜히 말했나 싶은 눈치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어제 새벽에? 대회 전에? 여기서?”

자신이 지금 앉아 있는 사랑채 건물을 검지로 가리키며 서정운이 다시 확인했고, 한호영은 입맛을 쩍쩍 다시며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정운은 망연히 넋이 나갔다.

그저 백배사죄할 마음만 안고 스승을 만나러 본채로 찾아온 서정운이었다.

휴일이라서 본산이 아닌 본채로 찾아왔는데, 사무실에 볼일이 있어서 잠깐 본산에 갔다며 스승은 자리를 비운 참이라 서정운은 하릴없이 사랑채 대청에 앉아 스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엊그제 오후, 체육관에서 그런 몹쓸 꼴을 보인 뒤로 연락이 끊어졌었으니 일단 그것부터 사죄하고, 또 한무화와 이리저리 되어 버렸으니 그것도…….

서정운이 무거운 마음으로 스승을 기다리던 때, 때마침 사랑채를 지나가던 한호영이 ‘어, 사형!’ 하고 다가왔다.

‘아버지 뵈러 오신 거예요?’

‘응. 본산 사무실에 볼일 있어 가셨대서 길 엇갈릴까 봐 그냥 기다리는 중이야. …….’

서정운은 그렇게 대답하며, 어딘지 모르게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흘끔흘끔 눈치를 살피는 한호영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에 걸려 있는 눈치인데 왜 이놈답지 않게 이러나, 하고 생각할 때 불현듯 머리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맞다.

그러고 보니 그제 밤새도록 전화한 목록 중 상당수가 이 녀석이기도 했었지…….

그제 밤의 상황을 떠올리자--그 상황에서 벌어진 여러 일들을 이 눈치 빠른 녀석이 알아채지 못했을 것 같지도 않고-- 민망해진 서정운이었으나, 어차피 나누게 될 말이다. 서정운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먼저 말을 꺼내었다.

‘그러고 보니 너 그제 밤에 전화했었지.’

‘예? 아, 예. 그건 뭐 이제 됐고…….’

한호영은 몹시 복잡스러운 눈길로 서정운을 쳐다보는가 싶더니 갑자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저는 뭐……, 앞날이 너무 고단해 보여서 절대 권하고 싶진 않지만 어쨌든 그걸로 사형이나 무화가 만족한다면 아무래도 좋은데……, 뭐 그냥 저어 멀리 뒤편에서 축하는 해 드리겠는데…….’

‘……?’

느닷없이 방언 터진 듯 생소리를 줄줄 늘어놓는 한호영을 서정운은 생뚱맞게 쳐다보았다. 이놈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나 이해해 보려고 눈을 껌벅거리는데,

‘근데 사형, 아무리 반쯤 억지로 허락은 받았다지만 아버지 화 많이 내실 거예요.’

어젯밤에 집에 와서도 어찌나 펄펄 뛰시던지, 하고 또다시 땅 꺼지게 한숨을 내쉬는 한호영에게 서정운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 뭘 반쯤 억지로 허락을 받아?’

‘어제 새벽에 무화가 아버지한테 한 얘기 말이에요.’

‘……?? 무화가 사부님한테 뭘?’

‘……. ……사형 몰라요?’

그제야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대단히 미심쩍은 얼굴로 되묻는 한호영을 보고 뭔가 불길한 예감이 다가온 서정운이었다. 하지만 설마 그 불길한 예감의 정체가,

‘무화가, 하계 선수권에서 우승할 테니까 사형 저 달라고, 어제 새벽에 아버지 찾아와서 무릎 꿇고 대뜸 선언했는데……, 사형한테 얘기 안 했어요?’

…………이런 것일 줄은 몰랐다.

그 순간 서정운은 혼이 빠져나간 듯 10초쯤 넋 놓고 한호영을 바라보았고, 그다음 순간에는 한호영의 어깨를 덥석 붙들고는 대관절 그 새벽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자초지종을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털어놓으라고 흔들었으며, 마지막으로는 차라리 어느 땅 깊은 곳에 들어가 버리고 싶은 기분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렇구나……, 사형은 몰랐구나…….”

한호영은 자기가 말해 놓고는 서정운이 삽시에 창백해진 낯으로 한동안 아무 말을 못 하자 괜한 말을 했다 싶었는지 흘끔흘끔 서정운의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서정운은 사부님을 어떤 낯으로 뵈면 좋을지 알 수가 없어져서 그분 돌아오시기 전에 얼른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어차피 서정운이 찾아왔다는 소식은 당신 귀에도 들어갈 텐데 아무 소용이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게다가 어찌 되었든 언제가 되었든 사부님 얼굴을 뵙긴 뵈어야 한다.

……죽을 것 같았다.

낯부끄럽고 쑥스러워 죽을 것 같았다.

아무리 그분이 그럭저럭 알고는 계신다 하지만 내켜 하시는 것도 아니고 외려 반대하셨는데, 그분을 찾아가 단도직입으로 이야기를 꺼낼 건 뭐냐.

“그래서……, 사부님은……?”

피로가 쓰나미처럼 몰려와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서 중얼거리는 서정운에게, 한호영은 낯을 찌푸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게……, ‘난 이기거들랑 보자고 했지 그렇게 해 준다고는 안 했다!’라며, 무화를 만나 주지도 않고 있어요.”

“…….”

“…….”

한호영은 말해 놓고도 부친의 유치함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지 멋쩍게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러다 절망에 잠겨 있는 서정운을 흘끔 보더니 위로하듯 말한다.

“뭐……, 좋게 생각해요. 사형이 혼자 애달아 하며 무화한테 목매는 것보다는 그래도 무화도 사형 없이 못 살더라 하는 쪽이 낫잖아요.”

“낫긴 뭐가 나아!”

서정운은 벌컥 소리치곤 한층 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왜 그게 더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얼굴이 어찌나 뜨거운지 도저히 손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니 근데 무화 그 녀석은 어느 틈에 그렇게……, ……하긴 낌새가 조금씩 보이긴 했지…….”

한호영은 이상하다는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저 혼자 납득한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동안 얼굴을 덮은 채 꼼짝도 하지 않던 서정운은 지옥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한수일 사범님은……?”

“말도 마세요. 지금 거기도 난리예요.”

“왜?”

그야 이 상황에 무슨 난리가 난들 이상하지는 않겠지만, 하고 서정운이 손바닥에서 얼굴을 들자, 한호영은 눈을 껌벅껌벅하며 서정운을 보다가 “왜냐니, 사형 그럼 이것도 몰라요……?”라고 다시금 몹시 불길한 서두를 던지더니 말하는 것이었다.

“무화 우승자 인터뷰 하면서, ‘서정운 하원사범님이 지도해 주신 덕이 컸습니다. 향후 정식으로 제 지도사범으로 모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라고 해 버렸다구요. 그것도 생방송에서. 덕분에 지금 정련 쪽도 그렇지만 체련은 아주 발칵 뒤집혔어요.”

선수권 우승자가 특정 사범을 지도사범으로 모시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말해 버렸다. 일단 그게 관습적인 예의에 맞니 아니니 하는 건 젖혀 두고 공개석상에서 그렇게 말을 해 버렸으니 협회 체면상 들어주는 척은 해야겠는데, 모처럼 체련에서 나온 기린아한테 어떻게 정련 사범을 붙여 주겠냐면서 체련에서는 아주 벌집을 쑤신 분위기라고, 한호영이 입을 쩍쩍 다시며 중얼거렸다.

이번에야말로 서정운은 혼이 나가 버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는 아주 깊이 고개를 숙인다. 땅 밑까지 파고 들어갈 기세로 거의 엎드리다시피 몸을 웅크리고 한참을 있던 그는, 이윽고 지옥에서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화 어디 갔어.”

아무리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라도 미울 때는 있는 법이다. 그 녀석을 당장 멱살을 잡아 흔들어도 시원찮을 것 같은 이런 기분은 참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가슴속 밑에서부터 원망과 분노가 끓어올랐던 게 얼마 만이던가.

“병원 간다고 나가던데요. 사형이 병원 가라고 했다면서. 하여간 사형 말은 참 잘 들어.”

“…….”

삽시에 원망과 분노의 불길이 슬그머니 누그러들었다.

역시 한번 예쁘고 사랑스러운 애는 끝까지 예쁘고 사랑스럽구나, 하고 생각하며 그런 스스로를 욕하는 서정운이었다.

그런 서정운을 한심스럽다는 듯이 지켜보던 한호영이 한숨 쉬며 말했다.

“하지만 말이에요, 사형, 입 안 타게 아무리 조심해도 모자랄 판에, 전 좀 걱정됩니다.”

“나만큼 걱정되겠냐…….”

서정운이 땅끝까지 꺼질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을 때였다. 문득 고개를 든 한호영이 “어, 아버지.” 하고 말했고, 움찔한 서정운은 얼른 자세를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태일이 몹시 불퉁하고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서 사랑채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삭막한 기세를 온몸에 둘둘 두른 노인은 그를 기다리고 있던 서정운을 보더니 낯빛이 순식간에 더 흉흉해졌다. 꾹꾹 참아 왔던 게 그예 폭발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랑채가 떠나가라 벌컥 호통을 친다.

“누가 널더러 그놈을 그렇게까지 잘 가르쳐 놓으라던?! 누가 그 어린놈을 대뜸 이기게끔 만들래?! 체련 놈이 우승을 해 버렸잖냐, 새파랗게 어린 체련 놈이! 고 맹랑하고 되바라진 놈이 우승을 해 버렸으니, 정운이 너 이제 어쩔 거냔 말이다, 이놈아!!”

미묘하게 다른 주제의 이야기가 두서없이 뒤섞여 버렸다는 것도 모르고 사정없이 고함을 내지르는 한태일의 앞에서, 서정운은 그저 넙죽 엎드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허리까지 굽히며 “죄송합니다, 사부님.” 하고 중얼거릴 따름이다.

“아니 뭐 그래도……, 정련이든 체련이든 어쨌든 다 한 가족인데 희대의 총아가 나타나면 좋은 거죠 뭘…….”

서정운이 좀 안쓰러웠는지 곁에서 한호영이 은근히 거들고 나섰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몹시 노한 듯 어깨를 들썩이며 씨근거리고 있던 한태일이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시끄럽다, 이놈아! 너는 지금 네 사형이 그놈한테 무슨 꼴을 어떻게 당하는지 알고 맘 편한 소리나 지껄이고 있어?!”

아니 사형이 당하긴 뭘, 하고 중얼거리던 한호영은 한태일이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는 시선에 찔끔해서는 입을 다물었고, 서정운도 얼음상처럼 굳어 버렸다.

마당에 우뚝 서서 씨근거리며 사나운 기색으로 서정운을 노려보던 한태일은 문득 입을 꾹 다물더니 사랑채로 올라왔다. 얼른 옆으로 비켜서는 서정운의 앞을 스쳐 대청으로 올라간 한태일은 끙, 하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쟁반에 담겨 대청 구석에 놓여 있던 주전자를 끌어당기더니 물을 한 사발 부어서 벌컥벌컥 마신 한태일은 그제야 속을 아주 조금 가라앉힌 듯 자세를 반듯하게 펴고는 서정운을 본다.

“너, 정운이,”

그러나 여전히 서슬 퍼런 기색으로 서정운을 부른 한태일은 부들부들 떨리는 입매를 꾹 다물었다가 간신히 억누른 말투로 말했다.

“너 엊그제, 무화 그놈한테 그렇게 끌려가서, 강, ……강, ……무슨 험한 꼴은 안 당했느냐?”

말하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지 한태일의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순간 엊그제 체육관에서 한무화가 자리를 뜨기 전에 한태일에게 남겼던 말을 떠올린 서정운은 낯빛이 노래졌다가 파래졌다가 빨개졌다.

“아닙니다, 사부님. 설마 그럴 리가요, 아닙니다!”

서정운이 단호하게 부정하며 외치자 그제야 한태일의 낯빛이 슬쩍 풀리는 것 같았다. 잔뜩 부풀어 있던 어깨도 약간 가라앉는다. 그걸 본 서정운은 여태 한태일이 그 말을 몹시 마음에 걸려 하며 염려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계속 연락이 안 되는 제자 때문에 얼마나 애를 태웠을지.

“그래, 그래, 그러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게지? 응?”

“그야 물론--…, …….”

스승의 말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던 서정운은 얼결에 말을 멈추고 말았다. 물론 걱정하시는 일은 전혀 없었다고 당당히 외치려다 보니 또 그렇게 떳떳하지만은 않은 것이…….

도중에 입을 다물며 순간적으로 당황하는 기색을 띠는 서정운을 지켜보던 한태일의 낯빛이 다시 거무죽죽해졌다. 그걸 보고 서정운이 다급하게 덧붙인다.

“아닙니다, 사부님. 그야 약간 좀 일이 있긴 했지만 그게 절대로 강제로 하거나 억지로 한 건 아니고 서로 합의해서--.”

“시끄럽다!!”

다시 우레 같은 노성이 터져 나왔고, 서정운은 눈을 감고 말았다. 순식간에 죄인이 되어 고개를 도로 푹 숙이고 마는 서정운의 앞에서 한태일은 물그릇으로 마루를 땅땅 두들기며 고함쳤다.

“아니 이놈아, 여자를 잘 만나랬지 사내놈을 잘 만나라더냐?! 너처럼 인물 좋고 신수 좋고 재주 좋은 놈이 왜 사내놈이랑 그래?! 그리고 또 왜 하필이면 무화 그놈이야?! 두 놈 다 앞날 창창한 놈들이, 앞으로 얼마나 고생할지가 안 보여?!”

목에 핏대를 올리며 고함고함을 지르는 스승 앞에서 서정운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도리밖에 없었다. 그 거센 분노 속에도 구석구석 안타까움과 염려가 배어 있어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서정운이 깊이 고개 숙인 채 말하자 씨근씨근 어깨를 들썩이며 그를 노려보던 한태일은 끄으응, 앓는 소리를 내며 거친 숨을 내쉬더니 휙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한동안 그곳에는 정적만 흘렀다.

고개를 숙인 채 미동조차 없는 서정운과, 그 옆에서 눈동자만 굴리며 눈치를 살피는 한호영의 앞에서, 한태일은 마당 구석만 노려보며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태일이 길고 언짢은 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혀를 끌끌 차며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무화 그놈은 어린놈이 제 앞날 힘들어질 줄도 모르고…….”

“…….”

“너도 힘들어지는 건데 어쩌려고 그래! 어린놈이 헛짓을 하면 너라도 말렸어야지!”

한태일이 마루를 내리치며 꾸짖자 서정운은 달리 할 말이 없어 고개를 숙이며 같은 말만 하고 만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관둬!”

서정운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움츠렸다. 한태일이 홧김에 내뱉는 말 같지만 사실은 그러기를 바라면서 꺼내는 말이라는 걸 안다. 지긋하게 바라보는 한태일의 시선이 느껴졌다.

묵묵히 그 시선을 받고 있던 서정운은 깊이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사범님.”

그렇게 못 하겠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스승에 대한 송구함과, 이 험난한 감정에 대한 씁쓸함에 가슴속이 메어 억눌린 목소리로 “……죄송합니다.”라고 한 번 더 희미하게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

한태일은 일순 욱해서 다시금 버럭 날뛰려는 기색이었으나, 험악하게 일그러진 낯으로 서정운을 노려보던 그는 끄응, 하고 어깨를 늘어뜨리며 다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대로 오랫동안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었다. 서정운도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기다릴 따름이다.

서정운이 스승을 아는 만큼 스승도 서정운을 알 터였다. 그가 어떤 때에 어떤 기색으로 말을 하는지, 그 말이 얼마나 굳고 얼마나 돌이켜지지 않을지 알았다. 얼마나 숱한 고민 끝에 저지른 짓일지. 얼마나 굳은 각오로 험난한 앞날을 마주하려 하는지도.

문득 한태일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짧은 사이에 그는 몇 년이나 나이를 먹은 듯, 주름진 얼굴에서 기력이 빠졌다.

“큰 어르신께나 감사하다 인사해라.”

한태일은 언짢은 빛은 가시지 않았으나 조금 전보다는 더 누그러뜨린 투로 불퉁하게 말했다. 고개를 든 서정운은 찌푸린 낯을 하고서 서정운을 보고 있던 한태일과 눈이 마주친다.

아까부터 저렇게 보시고 계셨던가. 염려스럽고 걱정스럽게.

“예.”

문득 뜨거운 것이 목을 눌러, 서정운은 간신히 대답한다. 그런 서정운을 보며 한태일은 다시금 무겁게 한숨을 내쉰다.

“그래. ……그래도 그놈이 주위 안 돌아보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놈이니, 그나마는 걱정 덜겠다.”

혀를 차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한태일은 잠시 사이를 두고는 힘 빠진 목소리로 묻는다.

“정운아. 좋으냐.”

그놈이 좋으냐.

이리된 게 네게는 좋은 일이냐.

너는 괜찮은 게냐.

그것이 한태일이 무엇보다도 서정운에게 묻고 싶은 말이다.

서정운은 망설임 없이 “예.”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고, 한태일은 한참 침묵하다 “그래.”, 그 말만 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한태일은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리 올라와 앉아라.”라며 옆 바닥을 두드려 서정운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아련하게 뜰을 내려다볼 따름이었다.

곧 안채에서 다과상을 내어다 주었고 세 사람은 나란히 앉아 별 이야기 없이 차를 마셨다.

다소 쌉싸름하나 누긋한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그 짧은 평화는 “형님, 잠시 저랑 이야기 좀 하십시다!” 하고 한수일이 들이닥치는 통에 깨어지고 말았다.

낯을 구긴 채 삐뚜름한 기색으로 사랑채에 들어오던 한수일은 대청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을 보고 멈칫하더니 서정운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대번에 한수일의 눈초리가 치켜 올라간다.

“자네도 와 있었던가?”

아주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한 한수일은 계단을 올라오며 가느스름하게 서정운을 노려보았다.

“자네가 여자 홀리는 재주가 썩 좋은 줄은 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무화까지 이리 홀려 놓을 줄은 몰랐구먼.”

그러나 한수일이 냉랭하게 말하기 무섭게 분기탱천해 버럭 고함친 사람은 한태일이었다.

“몹쓸 짓을 한 건 무화 그놈인데 어디 내 제자를 탓하고 있느냐? 거칠거칠한 돌멩이를 잘 갈고 닦아 옥석을 만들어 주었더니 그 벼락 맞을 놈이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우직하고 순한 놈인 줄 알았더니 그놈이야말로 아주 흉악하기 짝이 없더라!”

“아니 형님, 돌멩이라니요?! 제가 이국만리 타향에서 애써 골라 온 보물 중의 보물인데 어찌 말씀이 그렇습니까? 나타나자마자 대뜸 하계 선수권 우승을 먹어 치운 어마어마한 보물을 두고 눈이 삐셨소? 그놈은 이미 옥석이었습니다.”

“옥석이고 뭐고 저한테 잘해 준 사람을 해치는 놈은 세상에 아무 쓸데 없다! 너는 그놈더러 분수 모르고 윗사람한테 함부로 눈독 들이지 말라 하여라!”

한태일이 그간 참았던 몫까지 터뜨리는 기세로 성질을 내며 외쳤다. 한수일도 썩 그리 유쾌하지는 않은 낯으로 눈을 사납게 굴리다가 흘끔 서정운을 보더니 혀를 찼다.

“허허, 형님, 저라고 무화 저러는 게 안 당황스럽겠습니까. 저라고 내 인생에 다시 볼 일 없을 황금 같은 놈이 제 발로 진창길을 걷겠다는데, 속이 안 타겠느냐고?! 허나 내 타일러도 보고 꾸짖어도 보았으나 저놈 고집이 쇠고집인 걸 어쩌겠소. 난 이제는 단념했고 저놈이 저러는 바에야 뭐 어쩔 수 없겠으니, 형님은 그저 약속이나 지키십시오.”

“약속은 무슨 약속?”

“무화 우승하면 정운이 저놈 무화 준다지 않았습니까. 허면 서정운이도 이제 우리 체련으로 와야지요.”

한수일이 눈 둥그렇게 뜨고 한태일을 똑바로 쳐다보며 꺼낸 이야기에, 그 자리에는 씻은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머얼리서 오가는 사람들의 기척, 아득히 차 지나가는 소리, 이따금 개 짖는 소리 따위가 딴 세상의 소리인 양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바늘 하나 떨어져도 천둥소리처럼 들릴 것 같은 정적이 흐르는 그 자리에서, 오로지 한수일만 천연덕스러울 뿐 한태일과 한호영과 서정운 셋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가 하는 얼굴로 아연해져 있었다. 그중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리고 눈을 까뒤집은 것은 수십 년 겪어 온 동생의 심보를 재빨리 알아챈 한태일이었다.

“아니 이눔이……! 야 이눔아! 너는 지금 네 아들이 사내놈더러 좋다는데, 아들 앞날보다 체련 키울 욕심이 더 먼저 생각나더냐! 이런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을 다 보았나!”

한태일이 크게 격노해 손가락을 마구 휘저으며 외쳤으나 한수일은 눈 하나 까딱 않고 딱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며 대꾸했다.

“개인의 사사로운 일이 어찌 정무도의 앞날보다 중요하겠습니까? 이제 우리 체련에서 우승자도 나오고 순위권에도 상당수 진입하고 있으니, 이때에 고삐를 바짝 쥐고 박차를 가해야지 사소한 일로 대사를 그르칠 수야 있겠습니까?”

“이런 악독한 놈 같으니라고! 너는 네 아들 염려도 안 되더냐!”

“허허, 형님, 염려할 사람을 염려하라 하셔야지요. 무화 저놈 앞날이야 창창하기 그지없는데 뭐 염려할 게 있겠습니까. 저 나이에 이미 정무도의 성취도 저만큼이나 이루었겠다, 누가 뭐라 하든 귀 팔랑거리며 들어먹을 성격도 아니겠다, 뭘 해도 해낼 놈인 데다 하물며 평생 펑펑 놀고만 지내도 먹고살 걱정도 없는데, 아니 대관절 염려할 게 무어란 말입니까?!”

……듣고 보니 그렇긴 해…….

수염을 부르르 떨며 “이놈이……, 이놈이……!” 하고 입을 뻐끔거리면서도 말을 잇지 못하는 스승의 옆에서 서정운은 불현듯 깨달음을 얻은 듯한 기분으로 내심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내가 여태 누굴 걱정했더란 말인가, 새삼스레 무릎을 치는 서정운에게 한수일이 대뜸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자네가 살펴봐 주지 않으면 아직 어린 저놈이 좀 심기心機가 흔들리기는 하는 모양이니, 일단 자네는 체련으로 옮겨 오는 게 좋겠네.”

“어허, 이놈이!!”

“형님, 어른이 체통이 있지 스스로 한 약속은 지키셔야지요. 선수권에서 우승하면 정운이 무화 준다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언제 그리 말했더냐! 난 그저 이기기나 하거들랑 보자 했지 준다고 안 했다!”

“낫살 먹은 어른이 어찌 그리 유치하게 말장난을 치시오!”

“내가 무어 말장난을 친다 그러느냐? 그리고 또, 너는 어디 은근슬쩍 밥숟갈 얹으려고? 내가 무화한테 한 얘기지, 체련 두고 한 얘기더냐? 어림도 없다!”

난데없이 치열하게 싸우기 시작하는 노인들 사이에서, 서정운은 이 시점에서는 말해 봐야 헛된 줄 알면서도 옆에 앉은 한호영에게 “두 분 모두 나 탈적 신청한 거 잊으셨나…….” 하고 중얼거렸고, 그런 서정운에게 한호영은 코웃음 치며 “정원사범이 직인을 찍어야 통과되는데, 당연히 반려됐지 무슨 소리예요.”라는 비웃음만 되돌려줄 뿐이었다.

노인들의 싸움은 험하고도 유치했다.

당대 정무도의 가장 큰 어르신들이라는 위엄도 없었고 유서 깊은 종가를 짊어지고 있다는 본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일흔에 가까워지는 나이의 차분한 연륜도, 노년을 함께하는 형제간의 훈훈한 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 고래들의 싸움 사이에 끼어 두 새우, 한호영과 서정운이 언제쯤 자신들의 등이 터지려나 전전긍긍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서벅, 서벅, 묵직하고도 가뿐한 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서정운이 귀를 세우며 그쪽을 보았다. 이미 누구의 기척보다도 낯익은 소리다.

얼마 있지 않아 세 번째 새우, 양반은 못 될 한무화가 그 자리로 들어섰다.

누군가를 찾기라도 하는 듯 사랑채로 들어서자마자 그곳에 있는 인물들을 눈으로 훑은 한무화는 그 사이에 있는 서정운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눈인사를 건네며 다가왔다.

두 노인이 맹렬하게 다투는 모습을 보고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으로 꾸벅 인사를 하는 한무화를 보며, 이 새우는 어지간해서는 등 터질 일이 없겠군, 하고 생각하는 한호영이었다.

“무화 너! 너 이놈 잘 왔다! 너 이 배은망덕하고 후안무치한 놈아! 너 계속 내 제자 붙들고 늘어질 테냐?”

“아니 왜 약속 지킬 생각은 않고 멀쩡한 애를 잡으려 하시오?! 형님이야말로 참 낯이 두꺼우십니다!”

한무화를 보고 성을 내며 손가락질을 하는 한태일과 그런 한태일의 팔뚝을 붙들며 눈을 부릅뜨는 한수일을 무심히 쳐다보던 한무화는 그들이 다시 둘이서 싸우기 시작하자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제 일로 다투는 줄 알 텐데도 귓등 하나 기울이는 눈치가 아니었다. ……등이 터지긴커녕 남들 삿된 소리 때문에 힘들어할 앞날은 없겠다. 안심된다고 해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하나……, 한호영이 복잡한 심경으로 생각하건 말건, 한무화는 그에게도 눈길 주지 않고 서정운에게 다가갔다.

“주차장에 차가 있는 걸 보고, 와 계신 줄 알았습니다.”

“어. 병원에선 뭐래?”

“인대가 좀 상했는데 크게 걱정할 건 없다고 합니다.”

한무화가 서정운의 옆에 앉으며 말하자 서정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잘됐네.” 하고 대답한다.

정신없이 싸우는 두 노인과 다정하게 말을 주고받는 두 남자 사이에 홀로 오도카니 앉은 한호영은 차만 홀짝거리면서 자신의 애매한 위치를 유지했다. 이 어르신들이야 늘상 이러시던 분들이니 그렇다 쳐도, 이 둘은 관계가 얼레리꼴레리하게 되었다는 걸 알고 봐서 그런지 그냥 이야기만 나누는데도 참 새삼스러워 보인다. 색안경을 끼고 봐서 그런가, 그냥 옆자리에 앉는 것도 심상찮게 보였다…… 라고 생각하던 한호영이었지만.

“…….”

한호영의 눈에, 서정운의 바로 옆에 앉은 한무화가 마치 인사 대신인 양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다가 놔주는 게 보였다.

……언제부터 악수가 손등을 쥐었다가 놓는 걸로 바뀌었나……, 세모꼴로 눈을 뜨며 그들을 쳐다보는 한호영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 이번 대회 결승 영상 봤어.”

서정운이 생각났다는 듯 한무화에게 말했다. 한무화는 별반 대수롭지도 않다는 투로 “그렇습니까?”라고 말했고, 서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대단히 훌륭한 대련이었다. 아마 향후 오래도록 정무도의 모범 영상으로 기록될 것이다.

한호영은 대회장에서 직접 그 대련을 보았을 때에도 눈을 떼지 못했지만, 서정운과 함께 다시 영상을 보면서 두 번째로 보는 것임에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물 흐르는 듯 유연하고 자유로운 움직임. 자신의 움직임 하나하나, 호흡의 순간순간마저 다스리는 몸짓. 그 모든 것을 몸에 밴 듯 편안하게--그러나 그 밑바닥에 거대한 열기를 깔고 이루어 낸다.

놀라웠다. 놀랍다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다.

한호영뿐 아니라 그 옆에 있던 아버지도, 숙부도, 다른 사범들도 숨죽이고 바라보았던 것을 한호영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는 충분히 우승할 만했고, 적어도 이 남자가 현역에 있는 동안에는 이 남자를 이길 이는 나오지 않을 터였다.

한호영은 이미 현역에서 내려온 데다 정무도가 타인과 경쟁을 하는 무도가 아니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본인도 경쟁의식이 강한 편은 아님에도-- 감탄과 함께 불시에 솟구치는 질투와 부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서정운조차도 마찬가지라는 걸, 한호영은 그와 함께 영상을 보며 처음 알았다. 영상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눈조차 거의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는 서정운의 얼굴에도 찬탄과 더불어 뚜렷한 질시와 선망이 새겨져 있었다. 한무화를 저토록 아끼는 서정운조차도.

같은 정무도를 하는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는 거구나, 한호영은 자신의 속이 좁다고 우울했던 마음을 조금 털어 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면서도 남자를 지켜보는 서정운의 시선에 분명하게 담기는 기쁨과 뿌듯함을 읽고, 아아, 하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렇구나. 사형은 정말로 저 남자를 아끼고 있었다.

“--런데, 접질리기 직전에 무게를 싣는 점을 잘못 잡았잖아.”

“그러나 그 직전에 비켰으면 우측 하복부가 빈 채로 드러나 그곳을 노리고 들어왔을 겁니다.”

한호영이 둘을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긴 동안에도, 서정운과 한무화는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놓쳐 버린 앞 이야기는 굳이 몰라도 되겠다. 또 정무도 얘기다. 아마도 한무화의 대련에 대한 감상평이 한바탕 지나갔을 터였다.

한무화는 서정운의 이야기 사이사이마다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 상황에서 그렇게 공격받으면 피할 수가 없을 텐데……, 어떤 방법이 있습니까?”

“아니야, 그 상황에서 피하는 게. 그 상황을 피했어야 해. 그러려면 다섯 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다섯 수……, 후방에서 좌측 반신을 당겼을 때부터입니까?”

“그래. 거기서 후방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어린 꼬마 남자애들이 로봇 장난감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신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은, 어느새 조용해진 두 노인이 지그시 그 둘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둘이 나란히 앉아 누가 보아도 잘못 볼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상냥한 빛이 어린 낯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기쁘게 도란도란 정무도 이야기를 나눈다.

거기에는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모든 것들이--대화하는 상대도, 대화하는 내용도, 따끈따끈한 햇볕도, 한가로운 시간도, 모두-- 다 있었다.

그들이 대화를 멈춘 것을 막 손짓을 하며 말을 꺼내려던 서정운이 한태일과 눈이 딱 마주치고서였다. 스승과 시선을 마주 본 채 잠시 눈을 껌벅껌벅하던 서정운은, 갑자기 멋쩍은 낯으로 입을 다물었다.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걸 들키기라도 한 것 같은 기색으로 “죄송합니다.”라고 조그맣게 말한다.

한태일은 묵묵히 서정운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시선에 담긴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흐뭇함과, 아쉬움과, 체념과, 어렴풋한 만족.

한태일은 문득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 사이에 또다시 백 년쯤은 늙은 것처럼, 작달막하고 노쇠한 노인의 모습으로 돌아가 가만히 찻물로 입술을 축인 그는 잔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 봐들. 나는 피곤해서 쉬어야겠다.”

한숨처럼 건네는 그 갑작스런 말에 서정운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얼른 따라 일어났다. “예, 사부님. 쉬십시오.” 하고 인사했지만 그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가볍게 손만 내젓고는 방으로 걸어 들어가는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서정운이 불쑥 말했다.

“사부님, 죄송합니다.”

그러자 한태일은 방에 들어가다 말고 멈춰서더니 서정운을 돌아보았다. 그 얼굴은 이미 평소와 같은, 서정운이 오래도록 알아 온 꼬장꼬장한 스승의,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일없다!”

그래도 여전히 불퉁하게 내뱉은 한태일은 더 이상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어깨 너머로 말하는 것이다.

“노인네 속 이걸로 한 번 썩였으면 앞으로 더 썩이지는 말어!”

그 말만 남기고 탁, 미닫이문을 닫아 버리는 스승의 뒤로 서정운은 고개만 숙였다. 그리고 한동안 고개를 들지 않는 서정운을 바라보며 한호영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찌 되었든 불벼락은 일단 한풀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다행이네요, 사형, 아주 행복한 마음으로 축복해 줄 마음까지는 들지 않지만 그래도 잘됐어요. 그렇게 생각한다.

여전히 사납게 구겨진 얼굴을 하고서 닫혀 버린 미닫이문을 노려보다가 그들에게 시선을 돌린 한수일은, 심경이 복잡하다는 눈길로 그들을 지켜보다가 에잉, 하고 혀를 차며 일어났다.

“형님이 저러시니 내가 뭐 할 말이 있어야지……, 쯧쯧.”

대청에서 내려가 신을 신으며 “무화 너는 발목 나을 때까지 관리 잘하고, 수련은 빼먹지 말고. 여튼 오늘까지는 푹 쉬어라.”라고 한무화에게 말을 건넨 한수일은 돌아서 계단을 내려가려다가 서정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서 사범은 얼른 체련으로 적 옮기고.”

한수일이 말하기 무섭게 당장 방 안에서 “저눔이 자꾸 헛소리질이야! 냉큼 꺼져, 이눔아!!” 하고 한태일의 노성이 터져 나왔고, 그제야 한수일은 좀 흐뭇해진 얼굴을 하더니 휘적휘적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었다.

멀어져 가는 한수일의 뒷모습을 아연히 쳐다보던 서정운은 곧 힘 빠진 웃음을 웃고 말았다. 참 여전한 양반들이시라니까, 방 안까지는 들리지 않을 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사부님 조용히 쉬시려면 우리도 가야겠다.”

서정운도 소리 낮추어 말하며 대청에서 내려왔다. 이곳에 왔을 때보다 한결 가뿐해진 그의 얼굴을 보고 한호영도 조금 편해진 마음으로 그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온다.

몇 걸음 앞서 걷던 서정운은 한무화가 따라오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한무화는 아직껏 대청에 서서 생각에 잠긴 얼굴로 방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자, 무화야.”

서정운이 부르자 한무화는 망설임이 남는 듯 서정운을 보았다가 다시 방문을 본다.

“큰아버지께 다짐받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만,”

거기까지 말하고 조금 더 생각하는 눈치이던 한무화는, 곧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돌렸다.

“나중에 다시 와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곤 계단을 내려오는 한무화의 뒤에서 ‘얘기 다 끝났는데 뭘 와, 오지 마 이놈아.’라고 불퉁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성싶었지만 정확히 들려오지는 않았다.

셋은 고적한 정적이 감도는 사랑채를 뒤로하고 물러 나왔다.

날은 몹시 더웠다. 여름도 막바지에 접어들어 머리 위에서 해가 맹렬하게 내리쬔다. 멀리서 들리는 매미 소리만 귀에 청량하다.

그 무덥고 한적한 휴일의 흙길을 걸으며, 한호영은 반걸음쯤 앞에서 걷고 있는 사형을 보았다. 그리고 반걸음쯤 뒤에서 걸어오는 한무화를 본다. 나란히 걷지도 않고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는데도 어쩐지 그게 자연스럽고 아무렇지 않았다.

“아버지, 아침에 사무실에 지도사범 등록하러 다녀오신 거예요.”

한호영이 손등으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눈썹을 들며 그를 돌아보는 서정운의 이마에도 땀이 배어나 있었다.

“사형은 이제 무화 지도사범이라고요. ……당신 입으로 약속한 건 지키시는 양반이시잖아요.”

한호영은 못마땅하다는 투로 툴툴거렸다. 커다랗게 눈을 껌벅이는 서정운도, 뚫어져라 한호영을 쳐다보는 한무화도 마주 보기 싫어 콧잔등에 주름을 지으며 저만치 우거져 있는 버드나무만 노려본다.

그래 본들 사형의 적까지 옮긴 건 아니다. 정련 사범과 체련 선수. 심지어는 그러잖아도 온갖 소문이 자자한 사범에, 이제 막 태풍의 눈으로 떠오른 선수다.

앞으로도 또 한동안은 정련과 체련 둘 다 난리를 치게 생겼는데, 아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을 것 같았다.

한호영은 당장 한 주가 시작되는 내일부터 몰아칠 폭풍이 벌써부터 예상되었다. 눈앞이 아득해지는 건 이 더위 때문만이 아니다.

“아, 몰라, 아버지랑 작은아버지가 알아서 하시겠지 뭐.”

한호영은 머리를 휘젓고는 생각을 멈춰 버렸다.

그래, 게다가, 아무리 난리 법석이 벌어진들 영원히 가는 난리는 없는 법이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또 거기에 익숙해질 터였다.

한호영은 흘끗 둘을 돌아보았다.

둘은--어쩌면, 딱 한호영이 예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정운은 이를 어쩌나 시름에 겨운 얼굴로, 싫지는 않은데 난감하기도 하고 곤란하기도 한데 또 괜찮기도 한, 그런데 좀 겸연쩍다 싶은 표정을 하고서 한호영을 보다가 한무화에게 시선을 주었다.

한무화는 변함없이 무표정했다. 변함없이 표정 변화가 딱히 없는 얼굴로 한호영을 보다가 서정운을 마주 본다.

여기까지는 한호영이 예상한 범위였는데, 별안간 한무화가 손을 들어 아무 이유도 없이 서정운의 뺨을 한 번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 손길이 몹시 부드럽고 상냥했다. 이 남자가 이럴 수도 있는 남자였나,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순간 얼어붙은 한호영은, 대체 둘만 있을 때 이 무심하고 무뚝뚝한 남자는 어떤 모습을 하는 걸까 궁금해지기도 했으나…….

“…….”

아니, 궁금해하지 말자. 걱정할 필요도 전혀 없겠다.

한동안 저들 주위에서 사람들이 벌 떼처럼 떠들어 대겠지만, 이미 굳게 마음먹고 난 다음에야 그런 건 신경도 안 쓸 인사들이었다.

비록 당장 서정운이 한무화의 손을 붙잡아 내리긴 했지만, 한호영은 이 벌건 대낮부터 사람을 앞에 두고 무려 뺨을 어루만지는 낯 뜨거운 행각을 벌인 두 양반들을 도저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주 대놓고 도끼눈을 뜨며 들으란 듯 허! 하고 헛웃음을 대차게 웃고는 그대로 돌아서 버렸다.

“난 갑자기 왠지 모르게 배알이 꼴리는 게, 부엌 가서 소금이나 좀 얻어다가 마당에 뿌려 봐야겠습니다. 그만 살펴들 가십시오.”

최대한 밉살스럽게 말하고 돌아서던 한호영은 엉덩이를 걷어차였으나, 그래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성큼성큼 걸었다.

뒤에서 “호영아! 나중에 보자.” 하고 서정운이 인사를 건네서 손만 들어 휘휘 내저었다. 이윽고 등 뒤에서 저들이 멀어져 가는 기척이 났다.

그렇게 얼마간 휘적휘적 걸어가던 한호영은, 그들의 기척이 더 이상 들리지 않을 즈음이 되어서야 걸음을 멈추곤 돌아보았다.

저만치서 두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휴일의 한적한 길을 둘이 나란히 걸어간다. 무얼 얘기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끔 서정운이 피식 웃고, 그런 서정운을 한무화가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건 알겠다.

문득 서정운은 뭘 봤는지 손을 들어 한무화의 머리에서 뭔가를 떼어 주었다. 꽃씨나 먼지나 뭐 그런 거라도 묻었나 보다. 가만히 허공에서 손가락을 털어 낸 서정운은, 아주 잠깐 망설이는 듯했지만 결국 그러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듯 한무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한무화가 기우뚱하게 몸을 기울이는 게 보였다. 마치 머리를 쓰다듬는 걸 더 편하게 해 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고, 그 조그만 바람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듯 서정운의 손길은 금방 떨어졌다.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걸어가는 서정운의 뒤로, 아주 잠시 걸음을 멈추었던 한무화는 묵묵히 따라갔다. 그렇게 몇 걸음 걸어가던 한무화가 갑자기 허공에서 나풀거리는 뭔가를 보았는지 잽싸게 낚아챈다. 이번에도 꽃씨인지 먼지인지, 뭔지 모를 그것을 슬그머니 제 귀 위쪽--잘 보일 만한 곳--에 꾹꾹 눌러 붙인 한무화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걸어 나서며 서정운에게 말을 걸었고, 서정운은 여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보다가 한무화의 귀 위로 시선을 주더니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 계절에 웬 꽃씨가 이렇게 많지?, 하고 의아스러운 눈치로 한무화의 귓가에서 그것을 다시 떼어 주는 서정운의 손이 그의 머리에서 떨어지기 전에, 한무화가 그 손을 그러쥐었다.

살며시 그 손바닥에 입 맞춘 한무화는 그 손을 내려, 붙잡은 그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서정운은 얼핏 당황스런 눈치였지만, 그래도 그 손을 빼지 않고 순순히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목덜미가 발개진 게 더위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다.

“…….”

그리고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호영은,

진짜로 배알이 꼴려 오며 눈꼴이 시기 시작한 한호영은,

허……, 하고 어이없는 숨을 내쉬며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마는 것이었다.

저리 좋을까. 여태 삼십여 년 사형을 알아 왔지만, 사형이 저런 눈으로 누구를 보는 걸 언제 본 적이나 있던가. 심지어 한무화는 또 어떻고. 저 무표정하고 무심한 사촌 동생이 저렇게 구는 것도 단언컨대 본 적이 없었다.

한호영은 휴……, 한숨을 내쉬었다.

“울 아버지 심경을 알겠네……. 에고, 아부지…….”

머리를 긁적거리며 다시 한번 긴 한숨을 내쉰 한호영은 도로 시선을 들어 둘을 보았다. 그들은 이제 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래……, 뭐……, 좋아 보이긴 하네.”

몹시 떨떠름하나마 빈말은 아닌 투로 중얼거린 한호영은, 정말로 위장약이나 얻어먹어야겠다 싶어 걸음을 돌렸다.

날씨가 참 무덥다. 딱 늦여름 날씨다.

멀찍이 저들이 사라져간 방향에서 왕!, 반갑게 짖는 소리가 들렸다. 한 마리가 아니었는지 덩달아 왕! 왕! 하는 소리가 이어진다. 이 무더운 날씨에도 저놈들은 활기차게 형제들과 놀고 있는 모양이었다. 또 사형이랑 저놈 발치에 좋아라 달려들고 있겠구나, 한호영은 피식 웃었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두 손바닥 위에서 꼬물거렸던 놈들이 어느새 덩치도 목소리도 부쩍 자랐다. 요즘은 심지어 제법 점잖기까지 했다.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숨기지 못하고 좋아라 펄쩍거리며 꼬리를 흔들어 대는 건 여전했고, 앞으로도 여전할 터였다.

한호영은 걸음을 늦추며 이제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뒤를 돌아보았다. 발랄하게 짖는 강아지 소리만 간혹 들려올 뿐이다.

“……왠지 예감이 들어, 불길한 예감이…….”

한호영은 폭,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가볍고 흔흔하다.

“왠지 저 양반들도 저렇게 변함없을 것 같단 말야…….”

사형 성격도 뻔히 알고 저놈의 성격도 알겠다.

저렇게 손을 꼭 잡아 버린 다음에야 이제는 그 손을 놓지 않을 터였다.

“…….”

한호영은 다시 돌아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폭폭 한숨은 쉬고 있었지만 그 걸음도 가볍고 흔흔하다.

그래.

솔직히,

썩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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