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equel. (28/28)

sequel.

서정운은 바쁜 남자였다. 별일이 없는 한 언제나 일거리가 넘치는 남자였는데, 그러다 보니 본산에는 일주일에 한 번 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대체로 그나마 한가하다는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와서 한두 시간 남짓 한무화를 보다 가곤 했다.

“어차피 주말마다 사형네 집에 가서 연습한다면서, 일주일에 한두 시간 겨우 시간 내서 올 정도로 바쁘면 그냥 안 오는 게 편하지 않아요?”

“그래도 일단은 지도사범이라는 명목이 있잖아. ……음, 괜찮아.”

잠시 땀을 닦으며 쉬는 김에 서정운의 옆으로 간 한호영은 사형의 뒷말이 향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괜찮다는 말은 몇 걸음 떨어진 앞에서 개인 수련을 하고 있는 한무화에게 건넨 말이다.

한무화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물끄러미 서정운을 보다가 같은 수련을 다시 한번 반복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더 느리고 정확하게, 공들여서.

“하긴 명목은 어쨌거나 지키는 게 좋긴 하죠, 안 그래도 사람들 말도 많은데.”

한호영은 이온 음료를 홀짝 마시며 중얼거렸다.

정련의 사범 서정운이 체련의 기린아 한무화의 지도사범으로 정식 등록된 일로 인해 협회 내부는 한동안 그야말로 벌집을 쑤신 듯이 시끄러웠다. 며칠간 사무실에는 관련 문의며 항의가 끊이지 않았고 사범들이나 선수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그 화제가 반드시 나왔다. 본산 소속의 사범 및 선수들도 당연히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과 그 당사자들의 각 스승인 정원사범님들께서 입 꾹 다물고 일언반구가 없으니 다른 사람들은 불만이 많아도 정식으로 항의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흐지부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밉게 보는 사람은 태산같이 많았으니, 명목상이라도 최소한의 할 일은 하는 게 좋긴 하다, 아무렴. 게다가,

“사형 요즘 잠잠해졌어요. 여자 소문도 별로 안 나고. 지도사범으로서 아주 바람직하다고 아버지가 흐뭇해하시던데요.”

“각별히 신경 쓰고 있거든. ……응, 잘했어.”

담담하게 대꾸하는 서정운의 말은 이번에도 뒷부분은 한무화에게 던진 거다. 한무화는 이번에도 서정운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똑같은 수련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보다 더욱더 공을 들여서.

“사형의 그 사나운 여자 운이 각별하게 신경 쓴다고 어떻게 되는 거였어요? 그럼 미리 좀 각별히 신경 쓰지 그랬어요?”

“아니야. 진짜 신경 많이 쓰고 있다고. 내가 요즘 여자애들한테 ‘오빠 변했어’ 소리를 얼마나 많이 듣는지 알아?”

“나쁘지 않네요. ……그래도 애인 생기니까 달라지긴 하나 봐.”

뒷말은 누구 들을세라 바싹 소리 낮춰 수군거리는 한호영의 옆에서 서정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벼운 가십 하나라도 나면 내가 피곤해져. 그런 날엔 무화가, …….”

그러나 말을 하다 말고 도중에 딱 멈춰 버리는 서정운을 한호영이 지그시 쳐다보았다. 왠지 사형 얼굴 색깔이 점점 짙어지는데……, 하고 생각하며 한호영이 가느스름한 눈을 하고 물었다.

“무화가 뭐, 막 뭐라 그래요? 사형 가십 나면? 막 추궁하고 따지고 화내고 그래?”

“그건 아닌데……. 그걸 좀 화내는 거라고 봐야 하나……. 여하튼 좀 그래.”

애매하게 말을 흐리는 사형의 얼굴빛이 점점 더 짙어진다. 더 물어 봐야 귀가 썩을 얘기만 들을 성싶어 거기에서 입을 다무는 현명한 한호영이었다. 서정운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린다.

“그리고 이젠 더 터지면 안 돼.”

“왜요?”

가십이 뭐, 터져도 될 때가 있고 안 될 때가 있나, 한호영이 흘끔 쳐다보며 묻자 서정운이 어렴풋이 눈살을 찌푸린다.

“요전에 가십 터졌을 때 무화가 좀 많이 언짢아하는 눈치길래, 다음에 또 뭐 터지면 그땐 뭐든 무화가 원하는 거 하나 들어주기로 했었거든.”

“……. ……굉장히 위험한 약속을 해 버렸네요.”

“어, 말하고 나서 좀 후회하긴 했는데, 그래도 그 뒤로 조심하고 있으니까. 터질 것도 없고. ……잘했어. 아주 좋아.”

서정운은 한무화에게 뒷말을 던지며 웃음 지었다. 이번에는 감탄이 섞여 있는 만족스러운 웃음이다. 그리고 그걸 본 한무화는 이제야 무표정한 얼굴 위로 화색을 띠며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쟤를 보면 왠지 내 과거가 생각난단 말야……, 초등학교 때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멋지게 보이고 싶어서 기를 쓰고 운동 연습을 하던 과거가……, 하고 한무화를 보며 생각하는 한호영이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한호영은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잠시 머뭇거리다 서정운에게 말했다.

“그런데 사형……, 오늘 스포츠지 석간에 사형 가십 기사 났던데.”

별 대단한 건 아니라서 신경 안 썼었지만, 하고 덧붙이는 한호영의 말에, 서정운은 한무화를 바라보며 웃음 짓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잠시 그대로 석상이 되어 있던 서정운이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얼굴도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 있는데, 동공만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뭐?”

*

“난 비빔국수…….”

평소에 거의 먹지 않는 메뉴를 찾는 서정운을 한무화는 흘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별말 없이 가게 주인에게 “비빔국수 하나, 멸치국수 하나요.”라고 주문하곤 컵에 물을 따라 서정운에게 건네준다.

얘 울면 좀 봐주던데 미리 울어 놓는 게 좋을지도 몰라……, 하고 속으로 생각하는 서정운이었다.

스포츠지 가십난에 겨우 한 토막, 심지어 내용도 대단찮은 기사였다. 모 여가수에게 이상형을 묻자 ‘서정운 선생님처럼 다정하면서도 강한 사람이요.’라고 대답한 걸 토대로, 서정운과 그녀가 최근에 언제 어디서 만났었는지부터 시작해 그 지역의 모텔 현황, 다정하면서도 강하다는 말에 은근히 숨겨진 의미가 있을 거라는 밤 생활 추측까지, 삼류 가십지에서 흔히 쓸 만한 소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껏은 뭐 소설이 아닌 적이 있었던가.

서정운은 떨고 있었다. 심지어 한무화가 한마디 언급조차 없는 게 더 불안하다.

서정운은 그 쥐꼬리만 한 기사를 부디 한무화가 못 보고 넘어가길 빌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정운에 대한 기사가 뭐 한 토막이라도 났다 하면 당장 본산 안에는 심심해하는 사람들의 입을 타고 그 소문이 부풀려져서 한 바퀴 돌았던 것이다.

“그 가십 말이야……, 그거 사실 아냐……. 나 걔랑 직접 본 거 매니저랑 같이 저녁 먹는 자리에서 딱 한 번뿐이었어.”

아까부터 묵직하게 가슴을 누르는 압박감을 더 견디지 못한 서정운은 결국 제 입으로 먼저 털어놓고 말았다.

매도 먼저 맞는 심경으로 말하자 마침 그때 나온 국수 그릇을 받아들던 한무화가 서정운을 보더니 무덤덤하게 말했다.

“압니다. 언제는 사실이었던 적이 있습니까?”

“그건 그렇지…….”

서정운은 오늘따라 유난히 빨개 보이는 비빔국수를 받아들며 중얼거렸다. 그래, 물론 알고 있겠지. 한무화가 서정운을 그런 쪽으로 의심할 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한무화와 이런 관계가 된 이후로도 여러 차례 가십을 겪은 서정운이었고, 그때마다 딱히 한무화가 서정운에게 뭐라고 한 적은 없었다. 대부분은 정말로 뜬소문이었고, 서정운이 뭔가 잘못을 저질러서 가십이 터지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사람들 입에 돌아다니는 헛말이라는 걸 알고는 있어도, 그런 기사가 날 때마다 한무화는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걸 서정운이 어떻게 알았느냐면, 그런 기사가 나는 날에는 그가 유난히 집요하게 밤새워 서정운을 몰아붙이며 침대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는 걸, 대략 서너 번째의 가십이 터졌을 즈음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 날은 그야말로 죽는 날이었다. 그러고 나면 사나흘은 아랫도리가 무겁고 몸이 나른해 제대로 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지난번에는--지난번 가십은 한창 인기 상승 중인 여자 아이돌이 상대라서 오랜만에 좀 오래가긴 했다-- 주말 내내 침대에서 나가지 못하고 시달린 끝에 기진맥진해서, 울어서 얼굴이 퉁퉁 부은 채로 먼저 약속했던 것이다.

다음에도 또 가십이 난다면 그땐 뭐든 네가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고--그러니까 오늘은 제발 그만 좀 재워 달라고--.

바로 그다음이, 오늘이 된 셈인데.

이렇게 아무 말도 안 하는 걸 보니 어쩌면 그때 내가 했던 말은 까먹은 건지도 모르…….

“우셔도 안 됩니다. 제가 바라는 건 해 주셔야 합니다.”

“…….”

비빔국수를 후룩후룩 먹으며 눈물이라도 짜 보려 노력하던 서정운은 옆에서 한무화가 담담하게 선수 치는 말을 듣고는 툭,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까먹은 것도 아니었고 울어도 소용없구나.

우울하게 국수를 삼키는 서정운을 한무화가 쳐다보았다. 손을 뻗어 서정운의 입술에 묻은 양념을 엄지로 닦아 준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 손가락을 핥았다. 그러고도 아직 입술에 뭐가 묻었는지 두어 번 더 입매를 문질러 준 뒤 다시 손가락을 핥는다.

“언제 봐도 두 분 사이가 참 좋으십니다.”

젓가락을 새로 갖다주던 주인이 말했다. 움찔, 보이지 않게 어깨를 굳힌 서정운은 얼른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예. 애가 참 착해서요.”라고 대꾸한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한무화에게 두근거려서이기도 하고, 주위 상황에 눈 돌리느라 바빠서이기도 했다. 다행히 가게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

가끔, 아니 종종 한무화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보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섹슈얼할 수도 있는 일을 하곤 했다. 누가 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소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 스스럼없는 태도는 친근함과 수상함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고 있었지만,

“……하지 말라니까.”

서정운이 속삭이자 한무화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싫으십니까?”

조용히 묻는다. 뜻밖에 진지한 목소리라 서정운은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싫다기보다, 자칫 사람 눈에 잘못 띄면 곤란하잖아.”

“저는 상관없습니다.”

“……, 아니, 너는 상관없더라도…….”

일순 말이 막힌 서정운이 우물거리자 그런 서정운을 내려다보던 한무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범님은 안 내켜 하셨었지요.”

납득했다는 듯 중얼거린 그는 국수를 훌훌 들이켜며 여상하게 말했다.

“별것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사범님과 저는 아무도 새삼스레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겁니다.”

“……, 뭐 그건 그렇지만…….”

서정운은 애매하게 입을 다물고 국수만 먹었다.

그건 그렇다.

아무도 서정운과 한무화를 수상쩍게 보지는 않았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외당에서 나란히 손 꼭 잡고 이마 맞대고 붙어 앉다 있다가 길 잘못 들어 찾아온 수련생들 눈에 띄기도 했는데, 놀랍게도 전혀 의심스런 말은 돌지 않고, 오히려 사제지간에 사이가 참 좋더라, 정련과 체련으로 갈라져 있다지만 그렇게 나쁘게 볼 것만은 아니더라, 라는 훈훈한 결론만 내려졌던 것이다.

만일 서정운과 같이 있었던 게 여자 수련생이었더라면, 서로 평상 반대쪽 끝에 멀찍이 떨어져 정좌를 하고 앉아서 날씨 얘기만 하고 있었더라도 당장 ‘그들이 벌건 대낮에 남들 눈 피해 후미진 곳에서 만나 불미스러운 짓을……’운운하는 소문이 돌았을 거라고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었던 서정운은, 그때 처음으로 자신의 화려한 여성 편력의 역사(의 소문)에 감사했다.

어찌나 여자를 밝히고 여자에게 위험한 인간으로 악명 높게 인식이 박혔는지, 그가 남자랑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참 고마운 일이다. ……왠지 좀 씁쓸했지만.

“다 드셨으면 일어나시겠습니까? 내일 아침 수련 시간까지는 이제 열두 시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무화가 시계를 보며 말했고, 잠시 딴생각을 하던 서정운은 그제야 자신의 눈앞에 닥쳐온 현실을 깨닫고는 쿨럭, 마지막 한 젓가락 먹던 비빔국수에 사레가 들려서 쿨럭쿨럭쿨럭, 미친 듯 기침을 했다. 매운 걸 먹다 사레들리니 정말로 눈물이 났다.

*

“……, …….”

흐릿한 눈에는 시계가 잘 보이지 않았다. 눈에 힘을 주고 간신히 시계를 보자 이제 겨우 자정을 좀 넘긴 참이었다.

그럼 아침이 오려면 몇 시간이나 더 남은 거지……, 머릿속으로 아득하게 꼽아 보던 서정운이었지만, 그 생각도 금세 끊겼다.

방금 전 절정을 마치고 등 뒤에서 더운 몸을 겹치고서 서정운을 끌어안은 채 한동안 멈춰 있던 한무화는, 거칠게 들썩이던 숨이 천천히 잦아들자 그제야 몸을 일으켜 서정운의 몸속에서 자신의 중심을 끌어냈다.

주르륵, 몸속을 꽉 채우며 빠듯하게 담겨 있던 것이 잠시 그대로 버티고 있다가 단숨에 미끄러져 빠져나갔다.

서정운은 몸을 움찔 움츠렸다. 몸속에서 뭔가가 미끄러져 나가는 이 느낌만큼은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동시에, 이미 한풀 꺾여 있던 서정운의 성기도 한 번 움찔 흔들리며 남은 흔적을 방울방울 떨군다.

한무화와 몸을 섞는 것은 좋았다. 이 사랑스러운 남자를 끌어안고 있자면 마음속이 뿌듯하게 차오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몸이 힘든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이번에야말로 찢어지지는 않을까 염려되는 아슬아슬한 크기도 크기였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체력을 지닌 젊은 무도인은 하고 또 하고 또 해도 제가 먼저 ‘그만하자’고 끝을 내는 법이 없었다.

아마 오늘도 이걸로 끝이 아니겠지……, 끝은커녕……, 서정운은 아직도 하늘이 새카만 창밖을 보다 앞이 까마득해져 눈을 감았다.

“이제는 좀 잘 맞는 느낌이 듭니다.”

“……, ……?”

그때 한무화가 중얼거렸다. 기진맥진해 늘어져 있던 서정운은 의아하게 눈동자만 굴렸다. 한무화는 다시 서정운을 뒤에서 끌어안아 자신의 품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사범님 몸속이 너무 좁아서 제게는 지나치게 빠듯했는데, 요즘 들어서는 슬슬 제게 맞을 정도로 벌어진 것 같습니다.”

아직은 조금 더 벌어지면 좋겠습니다만, 하고 뒤에서 무심하게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며 서정운은 오랜만에 사랑이 미움으로 뒤바뀌는 걸 느꼈다.

내가 지금 죽도록 지쳐서 늘어져 있지만 않았더라도, 이렇게 등 뒤에서 안고 있지만 않았더라도, 이놈의 두 뺨을 손바닥으로 콱 붙들어 꼬집고서 짤짤 흔들어 줬을 텐데……, 서정운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기분인 채로 생각했다.

“그 여가수와는 저녁 한 번 먹었던 겁니까?”

왔다.

서정운은 불시에 들이닥친 질문에 어렴풋이 몸을 굳히며 서슴없이 대답했다.

“어, 저녁 딱 한 번. 그것도 매니저랑 같이.”

“그렇군요.”

한무화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한무화는 서정운의 가십 기사를 보아도 서정운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결코 유쾌해하는 기색은 아니었고, 서정운도 이해했다. 그래서 가십이 날 때마다 그가 서정운을 밤새도록 몰아붙여도 순순히 받아들였고, 아주 가끔 가십이 좀 심각할 경우에는 한무화가 원하는 것들을 하나씩 들어주며 달래기도 했다.

이번에도--이번은 심각하지는 않지만-- 원하는 걸 들어주어야 할 텐데. ……과연 그게 뭘까. 서정운은 두려웠다. 한무화가 작정하고 원하는 걸 들어달라고 할 때에는 뭐든 쉬웠던 적이 없었다.

주말 내내 호텔에서 실올 하나 못 걸치고 침대 속에서만 뒹굴어야 했던 적도 있고, 머릿속에 담아 두기조차 부끄러운 방식으로 몸을 섞었던 적도 있었으며, 요전에는 휴일 대낮에 외당에서 섹스해 보고 싶다고 해서 식겁을 했었다.

이번에는 뭘까. 서정운은 잔뜩 긴장한 채 그의 말을 기다렸다.

“제가 만일,”

생각을 마친 듯 한무화가 입을 열었다. 서정운이 움찔했다. 거기서 도중에 말을 멈춘 한무화는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본산에, 저와 사범님의 관계를 밝히자고 한다면.”

“안 돼!!”

벌떡 일어서--려다가 허리가 욱신거려 도중에 무너지듯 엎어지고 만 서정운은 당혹스레 한무화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농담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뚫어져라 한무화를 바라보던 서정운은 차차 낯빛이 기묘하게 이지러졌다. 어쩐지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닌 기색이었다.

“무화야. ……그러지 말자.”

불안스레 눈을 크게 뜬 서정운이 속삭이자 한무화는 그를 물끄러미 보다 한숨처럼 말한다.

“사범님은 알리고 싶지 않아 하시지요. 저를 위해서인 것도 압니다. 저와는 생각이 다르지만, 사범님의 생각을 이해는 합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사범님이 정말로 하고 싶지 않아 하는 일이라면 저는 하지 않습니다.”

서정운은 그제야 아주 조금 안심하며, 한편으로는 여전히 불안스럽게 한무화를 보았다. 그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의 낯빛이 묵직하게 가라앉은 이유도.

한무화는 한동안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가십이 나더라도 그 자체에 불쾌하지는 않습니다. 사범님이 그럴 리 없다는 걸 잘 압니다. 가십의 내용 자체에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득 한무화의 입매가 굳어졌다.

“이 사람들은 사범님과 고작 밥 한 끼를 같이 먹어도, 심지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식사를 해도 사범님과 깊은 관계가 아니냐는 의심을 사는데, 저는 뭘 해도 그렇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한무화의 목소리가 딱딱했다. 뭔가를 참는 것처럼 억누른 음색이다.

“이 정도 행위라면, 일반적으로는 사귀거나 혹은 성적인 호감을 나누는 관계라고 충분히 의심을 살 법한 일을 해도, 아무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아무도, 제가 사범님과 이런 관계를 가지는 대상이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겁니다.”

그 목소리는 그답지 않게 불만스럽게 굳어 있어서, 그가 말하고 있는 의미도 언뜻 이해가 될 것 같은데 바로 머릿속에 닿지 않아서, 서정운은 기묘한 기분으로 그를 응시한다.

한무화가 서정운을 보았다. 무뚝뚝한 얼굴은 언뜻 겸연쩍은 듯도 했지만 그보다는 언짢은 빛이 더 컸다.

“전 그게 싫습니다. 꼭, 제가 사범님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같습니다.”

“--.”

서정운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떡하지. 어쩌면 좋을까.

쿵쿵쿵, 점점 커지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당혹스레 한무화를 볼 뿐이다. 마음이 가득 부풀어 올라 숨까지 막히는 것 같았다. 이 사랑스러워 죽을 것 같은 남자 때문에.

“그래서,”

잠시 다른 데를 보던 한무화가 말했다.

“사범님이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은 압니다만, 이 정도는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무뚝뚝하게 말한 그는 가만히 서정운의 손을 붙들었다. 다른 손으로 사이드테이블에 걸쳐 두었던 옷 주머니를 뒤적인 그는 그 손을 서정운에게로 갖고 온다. 그리고,

“…….”

어.

서정운은 일순 머릿속이 비었다.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조이는, 손가락에 딱 들어맞는 위화감.

반지다.

“……, …….”

서정운은 한무화의 손가락이 살며시 닿았다 떨어진 자신의 왼손을 껌벅껌벅 바라보았다. 약지에 심플한 은색 반지가 끼워져 있다. 예전 언젠가 받았던 것과 비슷하지만 같지는 않은, 서정운의 손가락에 크지도 작지도 않게 딱 맞는 반지.

서정운은 멍하니 한무화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했는데, 그래도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겠다. 꼭 뭔가 중대한 간청을 하고는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받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한무화가 말했다.

“곤란할 때엔 빼셔도 됩니다만, 늘 지니고 다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서정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진지한 얼굴을 서정운도 마주 본다. 늘 담담한 얼굴이 이렇게 긴장한 걸 언제 또 봤을까.

……이렇게라도.

비록 반지를 보면 다들 그 반지에 대해 물어볼 테고 서정운은 그 물음에 진실을 대답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더라도.

서정운의 옆에 서는 것이 다름 아닌 한무화임을 그렇게라도 확인하도록.

그것이 한무화의 바람이다.

“…….”

예전에 그 낙낙한 반지를 줬던 때의 한무화를 떠올려 보았다. 대수롭잖게 반지를 던져 줬던 그와, 지금 이렇게 굳어진 얼굴로 긴장해 있는 그는 전혀 다른 사람 같다.

“……뺐다 꼈다 하면 무슨 의미가 있어. 안 뺄래.”

서정운이 중얼거렸다.

한무화는 언뜻 미묘한 얼굴을 했다. 서정운의 말이 어떤 뜻인지 금방 갈피를 잡지 못한 얼굴이다.

한무화는 반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그 위를 매만지는 서정운의 기색과, 차차 빛깔이 붉어지는 눈가, 그런 것들을 본다. 그런 작은 신호들의 의미는 몹시 명백해서, 이윽고 한무화의 얼굴에 안도, 그리고 기쁨 이상의 벅차고 커다란 무언가가 느리게 번져 간다.

“--.”

어느 순간 한무화가 서정운을 끌어안았다. 품에서 놓아주지 않을 듯 꼭 끌어안는 그의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정말로 긴장했었던 것처럼.

이렇게까지 긴장할 일이었을까, 서정운은 의아하게 생각하다 불현듯 깨닫는다.

그는 예전에 서정운에게 이미 한 번 반지를 준 적이 있었다. 아무 의미도 없이. 나중에는 아무렇지 않게 빼앗아 내팽개쳤을 만큼.

그토록 가볍게, 대수롭잖게 줘서는 안 되었었는데.

이렇게 소중하게, 마음을 담아 건네줬어야 했었는데, 그 첫 기회를 그는 어이없이 흘려 버렸다.

“…….”

서정운은 한무화에게 힘껏 끌어안긴 채, 그의 어깨에 얹혀 있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거기에 딱 맞게 끼워져 있는 반지를 본다.

서정운은 웃고 말았다.

한무화가 서정운에게서 빼앗아 던져 버렸던 반지가--비록 아무 의미 없던 물건이었으나마-- 못내 슬프고 아쉬웠었는데, 그것이 이제는 손에 딱 맞는 것으로 되돌아왔다.

내 것으로. 나를 위한 것으로.

그게 한없이 기뻐서 마음이 터질 것처럼 벅차올랐다.

이대로는 정말로 마음이 터질지도 몰라서 서정운은 한무화를 꼭 끌어안았다. 그를 아주 세게 끌어안아서 자신의 마음 위를 누른다.

“무화야.”

서정운은 그를 불렀다. 아주 작은 부름이었는데도 그는 희미하게 고개를 숙여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서정운은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이 그 어떤 말보다도 더 소중하고 사랑스러웠기에.

서정운은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있는 자신의 손에, 반들반들하게 빛나는 반지 위에 가만히 입 맞추었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누가 백번 천번을 묻더라도, 누가 아무리 귀찮게 굴더라도, 서정운은 기쁜 마음으로 입 다물고 그들에게 시달릴 수 있었다.

얼마든지.

언제까지라도.

서정운의 팔 안 가득 담겨 있던 한무화가 어느 순간 숨 막힐 정도로 거세게 서정운을 끌어안았다. 다시는 놓지 않을 것 같은 그 단단한 팔 안에서, 서정운은 가분한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Drop By Drop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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