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1권) (1/15)

다정하게 불러줘요, 선배 1

이상한 선배 (1)

생활 한문. 기억 안 나요?

차재희가 그렇게 물었다.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조용한 곳이 아니면 알아듣기 어려울 만큼 낮고 울림 없는 음성이기도 했다.

어쨌든 서이수는 기억을 더듬었다. 이름을 물었더니 ‘사람 기분을 좆같이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비꼬아 대는 후배를 자신이 대체 언제 만났었는지 기억해 내기 위해 지난 가을 학기를 되짚어 보았다.

* * *

사천 국제 대학교 경영학과, 2학년 2학기.

스물세 살, 서이수.

오늘 이수는 한국에 온 것을 두 번째로 후회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위해서 한문 따위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절대 한국에 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한문이 교양 필수 과목이라고 알려 주지 않은 신유진에게 다시 한번 메시지를 보냈다. ‘씨발’이라는 두서없는 욕설에 그녀는 단번에 상황을 파악하고 답장을 보내왔다.

Eugene

대충 출석이나 하고 d받아 ㅋㅋㅋ f만 안 뜨면 되잖음

12:43

남의 일이라고 말은 참 쉽게 한다. 이수는 쳐다보기도 싫은 생활 한문 수업 교재와 휴대폰을 같이 뒤집어 버렸다. 답장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냥 SAT를 봤어야 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겠다던 신유진의 말을 믿는 게 아니었다. 세계 여행 중인 신유진은 자신을 한국으로 불러들인 건 까맣게 잊고 다음 학기에나 복학할 생각인 듯했다.

이수는 한번 시작한 일은 끝을 봐야만 하는 성격이었다. 아무리 하기 싫어도 저 더러운 글자를 목숨 걸고 외울 자신의 미래를 알기에 신유진의 제시안은 해답이 될 수 없었다.

생활 한문. 이 빌어먹을 과목에 자꾸만 발목이 잡혔다.

이수가 한국에 온 것을 처음으로 후회한 순간은 1학년 1학기 때였다. 교양 필수라고 해서 신청했던 첫 번째 생활 한문 수업에서 이수는 넋이 나가 버렸다.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저따위 비효율적인 상형 문자를 도대체 왜 배워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이 수업을 패스하지 못하면 졸업을 못 한다는 사실에 충격받았다.

두 번째 수업을 들었던 날은 아예 기억이 없다. 너무나도 끔찍한 기억이라 아마 뇌가 자동 검열 삭제를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수업에선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아 결국 드랍을 했다.

하지만 생활 한문은 교양 필수 과목이었다. 1년 동안 외면했지만 이제는 승부를 보아야 했다. 그러나 수업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이수는 가슴이 꽉 막혀 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머리를 쓸어 올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진짜 싫다.

짜증스럽게 교재를 노려보고 있는데 시야에 돌연 끼어드는 사람이 있었다. 넓은 어깨에 차이나 칼라 셔츠, 그 위로 단정하게 정돈된 새까만 머리칼. 덩치도 큰 게 매너도 없이 앞자리에 앉는다. 이런 놈이 앞에 있으면 가뜩이나 집중 안 되는 수업이 머리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자리를 옮길까 고민하는데 그가 대뜸 몸을 돌렸다.

깜짝이야. 눈매를 찡그린 이수가 남자를 바라봤다. 반듯하게 생긴 놈이었다. 윤기 나는 머리칼은 뻗친 것 없이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새까만 눈동자는 반짝거렸다. 촘촘한 속눈썹도, 예쁜 콧날도, 마른 장밋빛 입술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선배.”

그가 대뜸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도 정갈했다. 아주 오래된 나무를 깎아 만든 것처럼 큰 울림 없이 담백한 음성이었다. 다만 다른 이들보다 한 톤 낮게 깔린 탓에 이수는 그가 자신을 부른 것인지 그냥 선배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것인지 헷갈렸다.

혼잣말하는 미친놈일 수도 있고, 결정적으로 이수는 저렇게 생긴 후배를 몰랐다. 대꾸하지 않고 쳐다보니 가만히 웃는다. 웃는 얼굴이 예쁘다는, 다소 낯선 생각이 들었다.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을 때에야 이수는 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다는 걸 알아챘다.

“선배, 안녕하세요. 이 수업 들으세요?”

정말 이상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수업을 듣지 않는다면 여기 앉아 자리를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나? 내가 그렇게 할 일 없는 새끼처럼 보이나. 가뜩이나 기분이 좋지 않았던 탓에 말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수는 생각도 없이 의미도 없이 던져진 이름 모를 후배의 질문을 무시했다. 휴대폰을 들어 확인하니 1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올 생각으로 강의실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 인문대와 경영대 사이에 있는 비좁은 흡연 구역을 찾아갔다.

“아…….”

담배를 입에 문 상태로 주머니를 한참이나 뒤적거렸다. 아침에 쓰고 남은 반창고, 담뱃갑의 포장 비닐이 나왔다. 막상 있어야 할 게 없었다.

사실 30분 전까지만 해도 하늘이 흐렸다. 개강을 기념하는 건지 좆같은 생활 한문 수업의 미래를 예지하는 건지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렸고, 이수는 우비를 쓰고 학교에 왔었다. 자전거를 타고 오는 동안 혹시나 젖을까 봐 가방에 넣어 두고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다시 올라갔다가 오기엔 시간이 애매했다. 누구라도 있으면 불이라도 빌리련만, 흡연 구역은 썰렁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올라가자, 물고 있던 담배를 꺾어 버리려 할 때쯤이었다. 저벅저벅, 느릿한 걸음 소리와 함께 건물 사이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 그놈이었다.

주머니를 뒤적거린 그 후배는 이수를 빤히 응시하며 보란 듯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어서 탁,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인다. 짜증 나는 상황이었다. 말을 씹어 놓고 불을 빌리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그냥 들어가기엔 생활 한문 수업에 대한 스트레스가 너무 컸다. 게다가 바람결을 타고 날아오는 담배 연기가 흡연 욕구를 더욱 자극했다.

……그냥 빌려 달라고 할까. 이수가 입을 열려고 할 때, 고맙게도 그가 먼저 운을 뗐다.

“불, 없으세요?”

“어.”

빌려 드릴까요? 자연스럽게 그 질문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가타부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이수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아까부터 말하는 걸 보니 언어적으로 문제가 있는 놈인 것 같기도 했다.

“서이수, 맞죠? 선배 이름.”

“알면서 왜 물어봐. 호구 조사해?”

“그런 건 아니고요.”

또 웃는다.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이제 수업 시작까지 5분이 남아 있었다. 씨발, 금연을 하든가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이수는 인성 밑바닥에 깔린 사교성을 끌어모았다. 자존심을 달래 가며 입을 열었다.

“라이터 빌려줄래?”

“제 이름은 아세요?”

아무래도 저 새끼는 인지 능력이나 베르니케 영역에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대화가 힘들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여태까지 그와 다투었던 사람 중에서도 이 정도까지 동문서답을 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어디서 이런 게 튀어나왔지. 이수는 불붙지 않은 담배를 5분간 들고 있었던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냥 가자. 상대하기도 귀찮아 이번엔 진짜로 담배를 꺾어 버리려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불, 빌려 드릴까요.”

또 두서없이 대뜸 그렇게 묻는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기다리던 문장이었기 때문에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 줄이 질긴 담배를 다시 입에 물고 그가 라이터를 건네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후배는 그의 기대를 처참히 배반했다.

“대신 앞으로 인사하고 지내요, 선배.”

그렇게 말하며 나른히 눈을 접어 웃는다. 누구든 마음이 풀어질 만큼 부드러운 미소였지만 이수는 그저 열이 받았다.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더 이상은 참아 줄 수 없었다. 그에게로 성큼 다가간 이수가 팔을 뻗었다. 보송한 솜털이 난 후배의 목덜미를 잡고 끌어 내렸다. 그가 놀란 표정으로 제 담배를 치우려 했지만, 이수가 조금 더 빨랐다. 담뱃대를 잡아채려는 손목을 붙잡아 내린다. 그러면서 뒤돌려진 손바닥에 난 상처에 눈길이 닿았지만 금방 떨어졌다.

한껏 당황한 후배를 보니 기분이 풀렸다. 지진이 이는 동공이 눈꺼풀 아래로 몇 번 사라졌다 나타났다. 이수는 단정한 낯을 뜯어봤다. 스물, 혹은 스물하나. 멀리서 볼 땐 이목구비를 이루는 선이 굵게만 보였으나, 가까이서 본 얼굴엔 아직 앳된 구석이 남아 있었다.

매캐한 담배 냄새 사이로 보드라운 섬유 유연제의 향기가 났다. 봄바람에 조금 상기된 뺨은 그의 목덜미처럼 보송보송해 보였다. 그와 눈을 맞추며 이수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에 자신의 연초 끝을 맞댔다. 잠깐 기다렸지만 불이 옮겨붙지 않았다.

“빨아야지.”

담배를 한쪽으로 빼 물고 그렇게 말했다. 그제야 후배는 눈을 내리깐 채 숨을 들이마셨다. 주홍빛으로 타오르는 연초 끄트머리에서 드디어 바라 마지않던 담뱃불을 얻었다.

담배 한 대 피우려고 이게 무슨 짓거린지. 괜한 자괴가 몰려왔다. 이수는 손을 놓고 그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후에 돌아섰다. 사실은 쓰다듬은 게 아니라 단정한 머리칼을 헤집어 놓은 것에 불과했다. 귀찮게 만든 것에 대한 작은 화풀이였다.

이수는 인문대 건물에 등을 기대고 섰다. 혈관을 타고 도는 니코틴이 사람을 여유롭게 만들었다.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었는데 마음이 급하질 않았다. 늦게 들어갔는데 교수가 화를 내며 나가라고 하면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가 줄 수도 있었다.

그냥 드랍할까?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보다 한참 전에 볼일을 마친 후배는 경영대 건물에 기대선 채 이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분함을 되찾은 이수도 그를 자세히 훑어봤다. 아까는 담배에 눈이 멀어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지만, 반대편에 선 후배는 분명히 이수보다 키가 컸다.

병원에서 나온 지 꽤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나아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불안해지는 것과 심장이 두근거릴 때마다 두려움을 느끼는 일이었다. 그러한 상황이 닥칠 때마다 이수는 심각한 불쾌감을 맛봤다.

지금도 또한 다르지 않았다. 미세하게 신경을 거스르며 차오르는 불안감에 이수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차재희예요, 제 이름.”

귓가에 그런 말이 들려왔다.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정보였고, 알 필요도 없었다.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이수는 소임을 다한 꽁초를 공용 재떨이에 비벼 끄고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아침에 쓰고 남은 밴드를 꺼내 들고 차재희에게 다가갔다. 아까 손바닥에 상처가 난 것을 보았다. 병원에서 나고 자란 이수는 저런 꼴을 두고 보지 못했다. 타인에게 무신경한 성정과 관계없이 보고 배운 습관에 불과했다. 상냥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손바닥에 붙여. 상처 덧나니까 내놓고 다니지 말고.”

“…….”

그 자리에 차재희를 남겨 두고 돌아선 이수는, 곧바로 강의실로 들어가 백팩을 들고 나왔다. 두 번째 드랍이었다.

이수는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만 기억하기도 벅찼다. 그가 살아온 삶의 형태 자체가 그랬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면 봄이었고, 눈을 깜빡이면 또 여름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늘 같은 병실, 늘 같은 하루. 어릴 때부터 계절의 변화만을 실감하는 일상은 큰 저장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드랍하는 순간부터 생활 한문 수업에 관련된 기억은 삭제되었고, 머릿속에는 ‘언젠간 패스해야 한다’라는 강박적인 문장 하나만이 남아 버렸다.

그리하여 기억을 더듬어도 저 싸가지 없는 후배에 대해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이수는 자신이 너무 멀리 갔나 싶어 생활 한문 이야기를 나누었던 가장 최근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 * *

“생활 한문? 작년에 또 드랍했다고?”

신유진이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한 시간 전이었다. 작년 여름, 호주에서 일정을 맞춰 여행한 이후 7개월 만에 보는 것이었다. 그녀가 복학함에 따라 이수는 1년 만에 다시 경영학과 과방에 발을 들였다. 실내는 새내기들과 복학생들로 북적였다. 이수는 모르는 얼굴이 대부분이었다.

유진은 시기가 지난 화제를 입에 올렸다. 그러면서도 대화에 집중하기보다 과방에 들어서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기 바빴다.

“어, 안녕. 미쳤냐, 서이수? 응! 안녕!”

“야. 인사를 하든 대화를 하든 하나만 해.”

짜증 섞인 말투에 유진이 씩 웃었다. 그러곤 이수의 팔에 팔짱을 끼며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수는 유진을 16살 때부터 알았다. 그녀가 미국에서 유학하던 당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실려 갔던 병원이 이수가 나고 자란 곳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가로세로 5m 남짓한 병실이 이수가 알던 세계의 전부였다. 유진은 그의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한 불청객이었다. 그녀를 만난 후 이수는 병원 밖의 삶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유진은 그의 인생에 가장 큰 변화를 일으켰고, 덕분에 이수는 피를 나눈 형과 여동생보다 유진에게 더 큰 유대감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공식적으로 커밍아웃을 한지라 그녀가 레즈비언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둘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아서 아무도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제야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아니, 그래서 왜 드랍했는데?”

“하기 싫으니까. 씨발, 그딴 걸 왜 배워야 되는데.”

“그냥 내 말대로 하라니까?”

“나보고 D를 받으라고? 그게 성적이냐?”

“그럼 뭐 어쩌라고.”

둘이 말을 주고받을수록 주변이 조용해졌다. 이수는 원래도 직설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유진을 만나기 전까지는 나긋하고 조용한 병원식 말투를 사용했었다.

16살의 이수가 14살의 신유진을 만났을 때, 그녀의 거칠고 험악한 말씨는 이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처음엔 불쾌했지만 함께 지내다 보니 그녀의 언어 체계를 스펀지처럼 흡수하게 되었다. 덕분에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으면 꼭 싸우는 것처럼 들릴 때가 많았다. 지금도 그랬다.

“야, 생활 한문은 그냥 외우면 되는 거야. 그림이라고 생각해.”

“그림이 아닌데 어떻게 그림이라고 생각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말이 안 되는 건 한자도 못 외우는 니 기억력이겠지.”

“너는 꼭 외우는 것처럼 얘기하네?”

이수의 짜증스러운 대꾸에 유진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사실 신유진도 생활 한문은 F를 받고 미뤄 둔 상태였다.

다른 건 몰라도 신유진은 공부에 관해서 만큼은 정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이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반교양 과목인 ‘독서 문화의 이해’ 수업을 들으러 갈 시간이었다.

이수는 이번 학기에 19학점을 신청했다. 이름을 부르기조차 싫은 ‘그’ 수업은 4학년 2학기 때 정면 돌파할 계획을 세웠다. 졸업 학점을 모두 이수한 후에 그가 자신 있는 과목과 함께 최소 학점만 신청해 2학기는 거기에만 시간을 쏟아부을 예정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코 A+를 받을 수 없으리란 생각에 3학년 때 무리를 하기로 한 것이다.

이수가 일어나자 유진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수업 끝나고 와. 점심 같이 먹자.”

“어.”

“그, 2학년 중에 중국어 잘하는 애 있거든? 걔 소개해 줄게. 너 작년에 과생활 안 했으니까 모를 거 같아서. 한문 가르쳐 달라고 해.”

“……너도 안 했잖아?”

신유진은 분명 작년 봄에 여행을 떠났다. 근데 2학년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의아하게 쳐다보니 그녀가 어깨를 으스댔다.

“나 작년이랑 이번 연합 엠티, 오티 다 갔다 왔거든. 그때 안면 텄지.”

휴학할 예정인 주제에 술자리를 찾아다녔다는 말이 뭐 자랑이라고. 술도, 사교도 즐기지 않는 이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어쨌든 그가 상관할 일은 아니었고, 이수가 신경 쓸 부분은 중국어 잘하는 애가 있다는 쪽이었다.

“누군데, 중국어 잘하는 애.”

“있어.”

그렇게 대꾸하며 유진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소개해 준단 핑계로 밖으로 불러낼 게 뻔했다. 이수는 정말 짜증 난단 표정으로 과방을 나와서 인문대 강의실로 향했다.

경영대를 벗어나는 동안 선후배들이 인사를 건네 왔지만, 이수는 대충 네, 어, 안녕, 그래, 하고 대꾸할 뿐 단 한 번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인사를 하니까 받는 것일 뿐, 이름도 몰랐기 때문이다. 강의실에 도착한 이수는 앞에서 세 번째 줄에 자리를 잡았고, 뒤이어 도착한 교수는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첫 번째 과제 발표는 4월 둘째 주부터 시작할게요. 독서 문화 축제에 대한 상세한 계획표를 첨부한 프레젠테이션으로 평가합니다. 상대 평가이고, 참신한 주제일수록 가산점이 부여됩니다. 팀은 제가 짜 왔는데요. 얼마 안 되지만 고학년생들은 후배들 잘 다독여 가며 리더십을 발휘해 보라고 1, 2학년들과 묶었으니 참고하세요. 그럼 팀 호명하겠습니다.”

씨발. 분명 강의 계획표에 팀 과제라는 말은 없었다. 짜증이 올라왔다. 이수는 그 공산주의적인 수업 방식을 정말로 혐오했다. 공산주의가 괜히 망한 게 아니었다. 인간의 이기적인 사고방식은 결코 균등한 노동력의 제공을 이뤄 낼 수 없었다.

이수가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1학년 1학기 때였다. 발표를 이틀 앞두고 조장이 잠수를 탔고, 발표자는 당일 날 교통사고가 났다며 수업에 오지 않았다. 결국 과제 미제출로 이수는 그 수업에서 D를 받았다. A와 A+로만 이루어진 성적 사이에 남은 치욕의 기록이었다.

이수는 그때의 자신이 참 순진했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못 해 봐서 그랬을 것이다. 타인을 근거 없이 맹신한 결과가 Dirty한 성적표로 되돌아왔다. 그 성적표는 지금 액자에 박제되어 그의 서재에 걸려 있었다.

아무리 강의 계획서를 샅샅이 훑어도 좆같은 팀 과제가 복병처럼 나타날 때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그때마다 같은 팀원을 믿지 말자고 다짐하듯 성적표를 걸어 둔 것이었다.

거짓말쟁이 교수들은 강의 계획서를 <미시오> 혹은 <당기시오> 스티커처럼 취급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제 좆대로 하고야 마는 표지판 같은 거랄까.

“문율, 김병수. 나주원, 강성원…….”

교수는 계속해서 이름을 불렀다. 손을 든 사람들끼리 얼굴을 확인하고 자리를 옮긴다. 다행이라면 팀 과제가 있다는 말을 첫 수업 시간에 말해 주었다는 사실이고, 불행이라면 이 수업을 취소하고 다른 수업을 들을 마음이 이수에게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계획대로 완벽하게 짜 둔 시간표를 손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두어 번의 좌절을 겪은 이후 그는 그 나름대로 팀 과제를 헤쳐 나가는 방법을 찾아냈다. 모든 실망은 기대에서 근원한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 이수는 팀원에게 절대 기대를 걸지 않았다.

“서이수, 차재희.”

이수가 손을 들었다.─그가 기억하기론 팀원의 이름을 들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몇 분 지나지 않아 잊어버리긴 했지만─팀원은 그의 뒤쪽에 앉은 모양이었다. 정면에는 그를 제외하고 손을 든 사람이 안 보였다.

교수는 팀을 전부 호명하고 한 시간 일찍 수업을 끝마쳤다. 그녀가 강의실을 나가자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팀원을 찾아 이동했다.

이수는 그 자리에 가만 앉아 있었다. 누군가가 이동해야 한다면 그게 굳이 자신이 될 필요는 없었다. 알아서 찾아오겠지. 그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턱을 괸 채 펜대를 굴리고 있으니 누군가 책상 앞에 나타나 섰다. 고개를 들지 않은 덕에 상대방이 검은색 슬랙스에 크림색 니트를 입은 것만 알아보았다.

“선배.”

울림 없이 낮은 목소리였다. 이수는 그런 특징을 가진 음성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아마 제세동기의 전기 충격으로 인해 청각 세포가 손상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보다 선배라는 호칭은, 나를 아는 사람인가? 궁금증이 일었으나 굳이 묻지는 않았다. 이수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과제는 나 혼자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신경 꺼.”

“……네?”

이게 바로 이수가 찾은 공산주의 해결법이었다.

“팀 과제라고 같이할 마음 없어. 이름 올려 줄 테니까 그냥 신경 끄라고. 네가 자료 조사했다고 적고 내가 발표할 거고, 정리해서 일주일 전에 넘겨줄 테니까 그거 보고 어떤 내용인지 파악만 해. 이름이 뭐라고 했지?”

여태까지의 경험상 버스 태워 준다는 제안을 거절한 사람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등신이 아니고서야 누가 거절해.

그러나 그 등신이 바로 여기 있었다. 꽤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연 팀원은, 이수에게 가시 돋친 말을 건넸다.

“……그거 아세요?”

“뭐.”

“선배는 사람 기분을 좆같이 만드는 재주가 있어요.”

지익. 포스트잇에 자신의 메일 주소를 적던 이수가 움직임을 멈췄다. 정말로 뜬금없는 선전 포고였다.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고개를 든 그가 팀원을 마주 봤다.

새까만 눈동자가 이수를 직시했다. 이수는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의사며 간호사들이 자신을 내려다보던 시간이 떠올라 불안해졌고, 머릿속에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불쾌감에 휩싸이곤 했다. 지금도 다르진 않았다.

“앉아.”

그렇게 말했지만 팀원은 꼿꼿이 선 채로 미동이 없었다. 탁, 펜을 소리 나게 내려 둔 이수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상대방을 쏘아봤다.

“야. 내려다보지 말고 앉으라고. 내가 일어설까?”

날 선 말투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팀원의 얼굴이 흐트러졌다. 그는 어쩐지 자괴감에 물든 표정으로 이수의 앞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바닥이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 덕분에 이번엔 이수가 그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말을 싸가지 없이 하기에 양아치 새낀 줄 알았더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새까만 머리칼과 눈썹, 쌍꺼풀 없는 깊은 눈매. 굳게 닫혀 있는 입매와 달리 입꼬리는 슬쩍 위로 올라가 있었다. 습관적으로 잘 쪼개는 스타일인 듯했다. 목을 살짝 덮는 크림색 스웨터에 검은색 오버핏 울 코트. 어깨에 둘러멘 백팩의 끈까지 살펴본 이수는 어쩐지 기시감을 느꼈다.

선배라고 부르던 것도 그렇고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건 확실했다. 근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가 안면을 튼 상대방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었다.

아주 좆같은 새끼라 잊어버렸거나, 존재감이 없어서 기억하지 않았거나. 대부분 그런 경우였다. 어쨌든 좋은 이유는 아니라는 뜻이다. 이수는 시선을 들어 팀원을 빤히 응시했다.

자리에 앉으며 이상하게 긴장한 표정을 짓던 그도 어느샌가 이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사람 기분을 좆같이 만드는 재주가 있는 선배였다.

“왜 대뜸 욕을 하고 지랄일까?”

대답은 곧장 돌아오지 않았다. 팀원은 잠깐 고민하는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이수는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이름 물어본 게 그렇게 기분이 안 좋으셨어요, 후배님?”

“…….”

“씨발, 왜 말을 못 해. 아까처럼 해 보지.”

“제 이름 진짜 모르세요?”

팀원은 그렇게 말했다. 자세히 보니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다. 어디였지? 잠깐 생각해 봤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책상 위를 손끝으로 두드리다가 대답했다. 일단 팀원의 이름을 잊은 건 자신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었으므로 부러 목소리를 부드럽게 풀어 냈다.

“아까 교수님이 말했는데 못 들었어. 그게 그렇게 화가 났어?”

“아뇨. 우리 작년에 만난 적 있잖아요.”

“우리라는 말 함부로 쓰지 말고. 모르겠는데.”

“……생활 한문. 기억 안 나요?”

이수는 빠르게 과거를 짚어 봤다. 그러나 이름조차 언급하고 싶지 않은 ‘그’ 수업은 딱 네 번 들었고 두 번 다 드랍했다. 기억하고 자시고 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씨발, 이름 좀 기억 못 할 수도 있지. 존나 특이한 이름이면 모를까, 자신이 과잉 기억 증후군도 아니고 필요 없는 정보를 저장해 둘 이유도 없었다.

“몰라.”

“…….”

“내가 니 이름을 기억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 그 수업 드랍한 지가 언젠데.”

심드렁하게 대꾸했지만 후배는 끈질겼다.

“그 전에 만났던 것도 기억 안 나요?”

“야.”

얼마 되지 않는 인내심이 바닥났다. 눈을 치켜뜬 이수가 사나운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과제가 상대방 이름 기억하기야?”

“아뇨.”

“그럼 수업 첫날부터 서로 기분 망쳐 주기야?”

“아니에요.”

대답은 잘했다. 대체 뭐 하는 놈이지? 머리를 쓸어 넘긴 이수가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왜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해? 나랑 하기 싫으면 교수님한테 저 새끼 보니까 기분 좆같아서 못 하겠다고 다른 놈으로 바꿔 달라고 해. 그러기 싫으면 입 다물고 버스나 타.”

이쯤 말했으면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했다.

주절거리며 생각해 봤지만 이수는 자신이 뭘 잘못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름? 기억 못 할 수도 있지. 내가 왜 쟤 이름을 기억해야 해? 완전 자의식 과잉 아닌가? 지가 뭔데.

이름이 뭐냐고 물었을 때 어쩌고예요, 한마디만 했으면 이렇게 서로 날을 세우고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상대방이 예민하게 반응한 상황이었다.

근데… 저 표정은 뭐야? 팀원은 입술을 깨문 채로 책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인다. 그 표정이 꼭 소파에 실수하고 기죽은 강아지 같아서 괜히 마음이 찝찝했다. 그는 눈을 내리깐 채 꽤 오랫동안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욕한 건 죄송해요. 실수였어요.”

단순한 사과였다. 진심인지는 알 바 아니었고, 상황이 정리된 듯하여 이수는 나긋한 어조로 대답했다.

“알면 됐고. 메일 주소 적어. 정리해서 보낼 테니까 발표 일주일 전에 확인해.”

“근데 이건 팀 과제잖아요.”

“……뭐?”

그 말인즉슨, 버스를 탈 생각이 없다는 말이었다. 이수는 골치가 아파져 오는 것을 느꼈다. 과제는 시작도 안 했는데 피곤하게 구는 놈이랑 몇 주간 연락하고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 뒷골이 당겼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선을 들어 올린 팀원은 그를 보며 웃었다. 예쁘게 접히는 눈매와 자연스럽게 끌려 올라가는 입꼬리. 한쪽 뺨에 옅게 패는 보조개에 눈길이 갔다.

이수는 생각했다. 이 새끼, 약 빨았나? 지금 쪼갤 타이밍이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같이해요, 선배.”

“……네가 제대로 하겠다면 할 수는 있어. 근데 난 상대방 사정 안 봐줘. 부모님이 돌아가시든, 차 사고가 나든, 싱크홀에 빠졌든 네 할 일 안 하면 이름 뺄 거야.”

엄청 까다롭게 굴 거니까 웬만하면 빠지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눈치가 좀 없는 후배는 이수의 말을 경청한 후에 진지하게 대답했다.

“네. 부모님 건강하시고 면허 1종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싱크홀은… 잘 피해 보도록 할게요.”

순간 어이가 없어서 맥이 풀렸다. 그러면서 또 쪼개는 것이 기가 찼다. 이수는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번호. 그 말에 꾹꾹 키패드를 누르는 손가락이 단정하고 예뻤다. 그가 자신의 휴대폰에 전화를 건 후에 이수에게 폰을 돌려줬다.

“그래서 이름이 뭔데.”

“차재희예요.”

“제이?”

“차, 재, 희.”

차재희. 그 이름을 저장하고 두 사람은 과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 과제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독서 문화를 접하게 하는 것이 중점이었다. 그들은 독서 문화 축제에 어떤 행사를 열어야 좋을지 몇 가지씩 생각해 오기로 했다.

대화가 끝나고 시간을 확인하니 유진과 약속한 시각까지 3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이수는 유인물을 가방에 챙기고 일어섰다. 담배나 한 대 피우고 과방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출구를 향해 가는데 차재희가 쫄래쫄래 쫓아오며 말을 붙였다.

“바로 수업 있어요?”

“아니.”

“점심 같이 드실래요?”

“아니.”

“아직 화나셨어요?”

아까의 첫인상이 강렬하게 박혀 버린 탓인지, 눈치를 보는 모습이 어울리지 않았다. 맹랑하게 시비를 걸 때는 언제고 자신의 안색을 살피는 모습이 웃겼다. 이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내가 너한테 화를 낼 이유가 없잖아. 니가 뭐라고.”

“…….”

“아깐 그냥 짜증 났던 거니까 신경 끄고, 과제나 잘하자. 간다.”

그대로 몸을 돌려 강의실을 나왔다. 흡연 구역을 향해 걷는 걸음이 차분하고 느릿했다.

순간 짜증이 난 건 맞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다만 그걸 여과 없이 표현하다 보니 상대방이 이수가 화났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애써 아까의 소요를 잊으려 했다. 이미 같이하기로 한 일이니 굳이 불안감을 안고 갈 필요는 없었다.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그때 가서 화를 내도 늦지 않았다.

담배를 끝까지 태운 후에 경영대로 향했다. 사물함에 들러 다음 수업인 ‘컴퓨터의 개념 및 실습’ 교필 서적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컴개는 디지털 강의실에서 진행되는 절대 평가 기준의 수업이었다. 대학에서 절대 평가라는 말은 날로 먹는다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면 상대적이라는 말만큼 개같은 기준도 없었다.

“어! 오빠아! 안녕하세요!”

“지혜 안녕.”

과방으로 가니 지혜가 인사를 해 왔다. 이수는 스물두 살에 입학했다. 그의 동기들은 그보다 두 살이 어렸다. 1학년 때는 그래도 대학 생활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신유진과 함께 과 생활을 꽤나 열심히 했었다. 박지혜는 그때 친해진 동기였다.

그녀는 성격도 둥글고 공부도 잘했다. 사천 국제 대학교는 입학 시 면접 비율이 높고 등록금이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덕분에 유복한 가정의 자제들이 많이 등록했는데, 그러다 보니 간절함 없이 학사 과정을 엉망으로 밟는 놈들이 꽤 많았다.

구멍 난 인재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이사장은 머리를 썼다. 한국대에 지원할 법한 높은 성적의 인재들을 전액 장학금과 더불어 사천 그룹 정규 인턴십 그리고 해외 유학 자금 지원이라는 미끼로 끌어들였다. 학부생 중 꽤 많은 수가 전액 장학금을 지원받는 인재들이었고, 이수가 친분을 나누는 사람들도─몇 안 되지만─주로 그쪽이었다.

“오랜만에 왔네요! 유진이 없으면 과방에도 안 오고, 너무 한 거 아니에요?”

“바빴어.”

“게임 하느라요?”

“잘 아네.”

“라벤에서 오빠 얘기 종종 봤어요.”

그 말에 이수가 짧게 웃었다. 무슨 이야기가 올라오느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라테르’ 커뮤니티에는 이수를 욕하는 유저들이 수두룩하게 많았다. 종종 길드 전쟁을 걸기 위해 아이디를 확인하러 가고는 하지만, 그는 대체로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을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다. 정확히는 남들의 생각이 궁금하지 않았다. 이수는 타인에게 무관심했다.

심장이 고장 난 덕분에 18년을 병원에서 살았다. 주기적으로 바뀌는 간호사들. 가끔 보는 의사들. 그들보다도 얼굴을 보기 힘들었던 가족들. 그 속에서 이수는 늘 혼자였다.

외골수를 타고나고, 또 그렇게 길러진 이수는 주변을 잘 돌아보지 않는다. 그래서 지혜가 반갑게 인사하고 나서야 알았다. 차재희가 같은 과 후배였다는 사실을.

“지혜 누나. 안녕하세요.”

“어, 재희야! 안녕!”

“네. 그리고… 또 보네요, 선배.”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예의 바른 태도로 고개를 꾸벅인다. 그 인사를 받으며 이수가 중얼거렸다. 경영이었네. 그 말을 들은 재희의 낯이 희미하게 굳어졌다.

“유진이 온대요, 오빠?”

“어. 오는 중일걸? 나 저쪽으로 간다.”

“네에.”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이 많아졌다. 이수는 창가의 스툴로 자리를 옮겼다.

사천 국제 대학교 경영학과는 사회과학 대학과 건물을 같이 쓰지만, 단독으로 경영대학 소속이었다. 학생 수가 타 과에 비해 많은 탓에 과방이라고 불리는 과 휴게실도 엄청나게 컸다.

출입구 근처로는 공용 컴퓨터 두 대와 프린터, 왼쪽으로는 널찍한 소파, 그 옆에는 벽면 가까이 커다란 테이블에 의자 열 개가 놓였다. 파티션이 둘러진 창가 좌측에는 수면용 소파 베드와 리클라이너 그리고 우측에는 바 형식으로 된 테이블과 높은 스툴이 자리했는데 이수는 지금 그곳에 앉아 있었다.

거기서 소파에 둘러앉은 후배들을 바라봤다. 힐끔힐끔 그에게 시선을 주면서도 저들끼리 떠드느라 바쁘다. 전부 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들이 새내기였을 때 이수는 과 행사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오다가다 과방에 몇 번 들락거린 게 다였다. 그러면서 몇몇 신입생과 인사를 나눈 것도 같지만 기억은 나지 않았다.

“아! 맞다, 재희야. 너 올타에 올라온 글 봤어?”

“올타? 어떤 거?”

“이거.”

예쁘장한 여자애가 휴대폰을 든 채 차재희에게 바짝 붙었다. 이수는 신유진에게 언제 오느냐고 메시지를 보내며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딱히 보고 싶어서 본 건 아니었다. 그가 앉은 자리에서 편하게 등을 기대면 딱 보이는 위치였다.

여자애가 컬이 진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차재희를 보고 웃는다. 차재희는 빼지 않고 휴대폰을 쥔 그녀의 손을 붙잡은 채로 액정을 들여다봤다. 이내 그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아까 과제 이야기를 하던 중 이수를 보며 뜬금없이 던졌던 미소였다. 웃음이 헤펐다.

“영지야, 여기 뭐 묻었다.”

눈썹에 붙은 먼지를 떼는 손길이 섬세했다. 발갛게 뺨을 붉히는 연지… 아니 영지였나. 하여튼 그 둘 주변의 2학년들은 저마다 시선을 주고받았다. 먼지를 털어 낸 차재희는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익숙한 듯 분위기를 환기하고 그대로 화제가 전환된다. 놀랍게도 2학년 무리의 중심은 차재희였다.

뭐야? 지킬 앤 하이드도 아니고……. 의문이 생긴 이수는 신유진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13:12

Eugene

?금나좀보채라 가고있다고

13:12

13:13

차재희 원래 싸가지 없지?

Eugene

재희? 왜? 싸웠어? ㅅㅂ좀만 기다리지ㅠㅠ 가는 중임

13:15

뭐라는 거야. 인상을 찌푸리며 메신저를 껐다. 할 일이 없어서 잠깐 라테르 커뮤니티를 둘러보는데 매일같이 올라오는 비난 글 말고는 볼 게 없었다. 신박할 것 없는 욕설 중 패드립을 치는 아이디를 복사해 길드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시간은 어느새 1시 2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3시부터 교필이라 시간이 넉넉지 않았다. 평소 아무거나 먹지 않는 이수이기에 나갔다 오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12시 50분에 수업이 끝났을 텐데 신유진은 30분이 넘도록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슬슬 짜증이 났다.

야, 그냥 따로 먹어……. 메시지를 보내고 있으려니 출입문이 벌컥 열렸다. 싸움 구경에 환장한 여자가 나타났다. 신유진은 눈에 불을 켜고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이수의 물음 때문에 차재희와 정말로 싸운 줄 알았나 보다. 분위기를 살피더니 기대감이 팍 식는 것이 눈에 빤히 보였다.

“유진 언니!”

“누나, 안녕하세요!”

“어, 안녕 안녕 얘들아! 왜 이렇게 복작거려.”

“신유진, 오랜만이다?”

“아, 오빠! 안녕하세요.”

상황이 끝난 줄 알고 맥 빠진 목소리로 대충 인사를 주고받는다. 신유진으로 말하자면 경영대 최대 인싸라고 할 수 있다. 술자리란 술자리엔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학점은 바닥으로 유지하며 이름을 모르는 선후배가 없는 지극히 외향적인 사람.

이수는 지루한 표정으로 신유진을 훑어 내렸다. 아침엔 패딩을 두르고 있어 몰랐는데 신유진의 이번 학기 컨셉은 레옹인가 보다. 귀밑으로 떨어지는 똑 단발에 초커. 수업에 가기 전 화장을 했는지 새까맣게 칠한 눈 화장이 꼭 마녀 같아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생글생글 웃는다. 또각또각 부츠 소리를 내며 걸어오더니 물었다.

“서이수. 재희랑 싸웠어?”

그 순간 절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All about your timetable.

줄여서 올타라고 부르는 재학생 커뮤니티에서 밈(meme) 취급을 받는 서이수다. 그의 이름은 익명 게시판에 수시로 언급되며, 사국대 연예인으로서 소비되고 있었다.

사국대생이 아닌 사람들은 일반인이 어째서 그렇게까지 화제가 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이수는 사국대 커뮤니티 중독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신입생 때부터 여러 사건으로 익게를 오르락내리락하던 그는 어느 순간 서이수를 모르면 사국대생이 아니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유명해졌다. 제3자를 통해 서이수가 익게에 올라오는 글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난 후로는 정말 별의별 글이 다 올라왔다.

그래서 이제 갓 입학해 올타에 가입한 새내기들은 서이수라는 사람이 정말로 궁금했다. 방학 중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언급되는 서이수라는 선배가 대체 얼마나 잘생겼는지, 얼마나 혐성인지, 얼마나 싸가지가 없는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한참 전부터 저들끼리 떠들면서도 이수를 신경 쓰고 있었고, 오티에서 공개 커밍아웃한 선배가 그쪽으로 다가가자 자연스레 집중이 그쪽으로 쏠리던 참이었다.

그리하여 ‘재희랑 싸웠어?’ 그 질문에 새내기들은 죄다 차재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리엔테이션과 총 엠티에서 만난 선배, 차재희는 현재 경영학과에서 서이수만큼 유명한 사람이었다. 근데 그 둘이 싸웠다고? 불시에 모두의 시선을 받게 된 재희는 당황한 표정으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아니요. 제가 이수 선배랑 싸울 리가 없잖아요.”

차재희가 그렇게 대답했지만, 분위기는 오히려 더 이상해졌다. 신유진은 서이수를 보며 물었는데, 대답은 차재희에게서 나왔다. 그 상황에서 둘 모두의 성격을 아는 재학생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둘이 싸우긴 했는데, 착한 재희가 서이수에게 실드를 쳐 주고 있구나, 라고.

이미지가 그랬다. 차재희는 지난 1년간 1학년 과 대표로 지내며 수많은 미담을 흩뿌렸다. 그는 누군가와 트러블이 생겨도 절대 상대방 탓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또한,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친절한 성격은 여태 단 한 번도 어긋나 보인 적이 없었다. 덕분에 그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이 많았고, 재희는 이수의 뒤를 잇는 올타 익게의 두 번째 밈이었다.

이수도 그러한 분위기를 느꼈다. 차재희가 해명하자마자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들.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눈에 뻔히 보였다. 솔직히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은 없었다. 다만 신유진이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기에 사실을 정확하게 짚어 주고 싶었다.

“싸우진 않았어.”

재희의 말을 인정한 이수가 부연했다.

“뜬금없이 욕을 먹긴 했고.”

덧붙여진 말에 장내에 미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수도 차재희처럼 사실만을 발설한 것이었다. 그러나 재학생들은 그가 또 인성질을 한다고 느꼈다. 차재희를 향해 동정의 시선이 쏟아졌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저 차재희가 욕을 했을까 싶어 혀를 차는 학우도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서이수는 그런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수는 이런 일에 익숙했다.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고, 머릿속에는 밥을 먹으러 갈 생각뿐이었다. 지금 나가도 공학관 레스토랑에 다녀올 시간이 빠듯했다. 그러나 장난기에 물든 신유진의 표정을 보는 순간, 오늘 점심은 망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진은 이수와 재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몸을 돌렸다. 난처해 보이는 얼굴의 차재희. 심드렁한 표정의 서이수. 재미있는 조합이었다.

“재희가 너한테 욕을 했어?”

신유진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의외라는 듯 재희를 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기까지 했다. 확실히 원래 아무한테나 욕하고 다니는 캐릭터는 아니었나 보다.

차재희는 아까 죄송하다고 사과하며 실수라고 말했지만, 사실 이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어느 누가 실수로 씨발도 아니고 미친도 아니고 ‘그거 아세요? 선배는 사람 기분을 좆같이 만드는 재주가 있어요’라고 25음절짜리 문장을 내뱉는단 말인가.

서이수가 실수로 과제 불참자에게 아량을 베푼다든가 실수로 활짝 웃는 일이 일어날 리 없는 것처럼, 그것도 분명 실수가 아니었다. 벼르던 말이었거나 숨겨 둔 인격이 드러났던 것이리라. 그리고 그 말을 벼르고 있었을 만큼의 접점이 그들에겐 없었으므로, 아마 ‘실수’로 가식 떠는 걸 잊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차재희의 귀 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민낯이 드러날까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수는 그를 보며 짧은 웃음을 흘렸다.

“무슨 짓 했냐, 서이수?”

자신을 두고 혐성이니 하는 우스갯소리가 나도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수는 결코 무고한 사람한테 인성질을 한 적이 없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신유진은 그렇게 물었다. 그녀에겐 이 상황이 그저 재미난 해프닝에 불과했다. 이수는 말없이 제 친구가 순간을 즐기도록 놔뒀다. 대꾸하지 않으면 금방 지나갈 일이었다.

“유진 누나. 이수 선배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러나 나직한 음성으로 시작한 차재희의 발언이 그를 아주 우습게 만들어 버렸다.

새까만 눈동자가 이수를 직시한다. 그 상태로 차재희가 말을 이었다. 별일 아니다 싶어 넘어가려 했던 이수의 기분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잘못은 제가 했죠. 제가 먼저 욕한 거 맞아요.”

분명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는데도 피해자 코스프레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아까 화 안 나셨다고 하기에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녔나 봐요.”

그 말에 이수는 화났으면서 안 났다고 말하는 찌질이가 되어 버렸고.

“죄송하다고 하긴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좀 부족했죠?”

미안하다고 했는데 받아들이지 않는 속 좁은 인간이 되어 버렸고.

“사실 선배하고 예전부터 친해지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선배 행동에 좀 서운했나 봐요. 제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 같아요.”

호감을 갖고 다가온 후배가 욕을 할 만큼 못된 짓을 한 선배가 되어 버렸고.

“아까 말했던 것처럼 정말 실수였어요.”

실수라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사람들 앞에서 잘못을 걸고넘어지는 쪼잔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 차재희의 목소리가 두 갈래로 들렸다. 이수는 마치 웃는 사람처럼 입꼬리를 늘린 채로 그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재밌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을 마친 재희는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해요, 선배.”

그러면서 예쁘게 눈을 접어 웃는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마음이 녹아내릴 만큼 따스한 미소였다. 이수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다들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잘못은 제가 했죠. 제가 먼저 욕한 거 맞아요. 아까 화 안 나셨다고 하기에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녔나 봐요. 죄송하다고 하긴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좀 부족했죠? 사실 선배하고 예전부터 친해지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선배 행동에 좀 서운했나 봐요. 제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 같아요. 아까 말했던 것처럼 정말 실수였어요. 죄송해요, 선배.’

대사만 놓고 보면 진정성이 느껴질 만한 사과였다. 애초에 이수는 재희에게 화가 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둘이 있는 상황에 저런 말을 들었다면 진심으로 반성하는구나 싶어서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과방이었다. 신유진이 사적인 일을 끌어와 묻긴 했으나 정말 사과할 마음이 있었다면 이수를 불러내 따로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서이수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사건에 대한 정확한 언급 없이 미안하다고 하는 건 어떤 의도가 깃들었다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저 새내기, 헌내기들이 그가 대체 차재희에게 무슨 ‘행동’을 했을까 무엇을 상상하든 제 알 바 아니었으나, 기분은 더러웠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자신을 우습게 만드는 이 상황이 말이다.

“야아. 재희가 너랑 진짜 친해지고 싶었나 보다. 아까 내가 중국어 잘하는 애 소개해 준다고 했잖아. 그게 재희야. 이번 기회에 둘이 친해지면 되겠네.”

침묵을 깬 것은 신유진이었다.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이 가볍다. 그의 심기가 뒤틀렸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이수는 가만히 선 채 그 손길을 받아 내다가 가방을 챙겼다. 뚜벅뚜벅 차재희를 향해 걸어갔다. 쏟아지는 시선에 뒤통수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차재희는 약간 긴장한 낯이었다. 입술을 핥으며 사선으로 이수를 내려다본다. 속이 울렁거리고 불쾌감이 치밀었다.

내가 뭐라고 대꾸할지 궁금하지? 함의를 가득 담아 검은 눈동자를 마주 봤다. 가까이 선 차재희에게선 어울리지 않게 포근한 섬유 유연제 향기가 났다. 이수는 그와 눈을 맞춘 채로 신유진에게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

“뭐, 한자 안 배운다고?”

“어. 이런 애한테 뭘 배워.”

이수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쳐졌다. 이윽고 흘러나온 그의 음성은 한없이 나긋했지만,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한 번 본 사이에 이름 하나 기억 못 했다고 사람 기분을 좆같이 만드느니 어쩌니, 하는데……. 씨발, 나 얘 무슨 연예인인 줄 알았잖아.”

낮은 웃음소리가 과방에 울려 퍼졌다.

“그 주제에 가르치긴 뭘 가르쳐.”

“…….”

딱딱히 굳은 재희를 보며 이수가 빈정거렸다.

“하는 짓 보니 한자 못 외우면 한 대 치겠던데?”

“선배.”

“차재희.”

반박하려는 듯 입술을 뗀 재희가 다시 입매를 굳혔다. 눈동자가 좌우로 열심히 굴러간다. 조금 위로 치켜 올라간 눈썹 앞머리 때문에 아까와 비슷한 표정이 됐다. 쓰레기통을 뒤지다 들킨 강아지 같은 표정.

얼굴만 놓고 보면 꽤 귀여웠지만, 이수는 가식 떠는 인간들을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부모의 기만에 놀아났던 때만 떠올리면 피가 차게 식었다. 서이수가 서늘한 목소리로 지적했다.

“한 번 만난 사이에 이름 좀 기억 못 할 수도 있지. 그걸 왜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거 자의식 과잉이야. 알지?”

“……한 번 아니에요.”

이를 악물고 하는 대꾸에 이수의 낯에 걸린 웃음이 가셨다. 이 새끼는 대체 뭐가 문제야.

“한 번이든, 두 번이든, 씨발. 난 쓸데없는 거 기억 안 해. 그게 무슨 뜻인 줄 알아? 내 전두엽이 차재희라는 세 글자를 삭제해 버릴 정도로 니가 나한테 아무런 감흥도 주질 못했다는 소리야. 알아듣겠어?”

날 선 음성이 공격처럼 퍼부어졌다. 냉랭하게 굳어진 분위기 속에서 이수가 비웃음 섞인 인사를 건넸다.

“어쨌든 축하해. 이걸로 됐지? 이제 니 이름 못 잊어버리겠다.”

서이수. 어느새 곁에 다가온 유진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만하란 소리였다. 이수는 그녀의 손을 떼어 내며 시선을 내렸다. 차재희는 담담한 얼굴로 다만 입술을 깨물고 서 있었다. 꽉 쥐어진 오른손의 손등에 핏줄이 파랗게 돋았다.

이수는 작게 웃으며 그 손등을 툭 쳤다.

“한 대 치겠다?”

“그만해, 이수야.”

계속되는 만류에 이수는 긴 숨을 내쉬었다. 수축해 있던 근육이 풀어졌다. 피부가 찌릿할 만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신입생들은 입을 벌린 채 경악하고, 재학생들은 서이수가 또 서이수했다는 표정이다.

이수에게서 날카로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련하고 무고한, 참 대단하신 후배님이었다. 불쾌해서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이수는 유진에게 점심은 다음에 먹자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출입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그의 걸음을 멈춰 세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선배.”

차재희였다.

“정말로 죄송해요.”

끝까지 착한 척이다. 대꾸하지 않고 과방을 나왔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안쪽이 소란해졌다. 차재희를 부르고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그대로 경영대 건물을 떠났다.

* * *

“화났어?”

“하루 이틀이야? 무슨 대수라고.”

대뜸 던져진 질문에 반문하며 불을 붙였다. 어둠이 내려앉은 흡연 구역에 주홍색 불길 두 개가 타올랐다. 이수와 유진이 나란히 선 채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3월에 미련이 남은 겨울바람은 건물 사이를 거칠게 비집고 들어왔다. 휘이잉 바람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머리칼이 엉망으로 휘날렸다. 롱 패딩 안에 후드를 껴입은 이수는 모자를 당겨 쓰며 담배를 피웠다.

유진 또한 아침에 보았을 때처럼 발목까지 내려오는 패딩 차림이었다. 그녀가 한 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채 이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건데.”

“아까 말한 그대로야. 교양 수업에서 차재희랑 같은 팀 돼서 이름이 뭐냐고 물었더니, 나한테 사람 기분을 좆같이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그러던데.”

“뭐?”

사레가 들린 유진이 캑캑거리며 기침을 했다.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서 눈물을 닦아 낸다. 이수는 입술에 필터를 문 채로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그게 다야? 이 씨발 새끼야! 너 이름 뭐야! 그렇게 물어본 거 아니지?”

“뭔 개소리야.”

“아니, 그럼 진짜 이름만 물었는데 재희가 그랬다고? 차재희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

“아니.”

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서이수는 남을 속이는 것을 싫어했다. 허어, 이것 참. 하고 과장되게 고개를 저은 유진이 이수 반대편으로 연기를 흩뿌리며 물었다.

“그래서 원래 싸가지 없냐고 물어본 거야?”

“어.”

“왜 그랬을까. 진짜 이상하네. 걔 엄청 착하거든.”

그 말에 이수는 인상을 찡그렸다. 신유진은 작년에 과 생활을 안 했다. 차재희를 옆에서 지켜볼 시간이 없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왜 저렇게 속단할까. 신유진은 기분파이기는 해도 사람에 대해서만큼은 섣불리 판단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누군가를 두고 정말 착하다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의아해진 이수가 담배를 비벼 끄며 질문했다.

“너, 걔 잘 알아?”

“알지. 개강 전에 학회 한다고 애들 모았는데 차재희가 거기 있었거든. 어쩌다 보니 한 2주 넘게 봤어.”

어쩐지. 중국어를 잘한다고 소개해 주려 한 사람이 차재희라는 것을 알고 이수도 잠깐 궁금증이 일었었다. 몇 번 보지도 않았을 텐데 어떻게 아는 걸까 하고. 아무래도 학회를 준비하며 꽤 많은 시간을 보낸 모양이었다.

신유진 같은 인싸들은 사고방식이 이상했다. 학기 중에 지긋지긋하게 볼 얼굴들을 방학 중에도 만나다니.

“근데 정말 짜증도 안 내고, 애가 진짜 괜찮아. 여행하면서 올타도 자주 들여다봤는데 애들이 너랑 얘랑 계속 갖다 붙이길래 누군가 싶어서 올라온 글도 찾아봤어. 착하다, 다정하다, 상냥하다 이 세 단어로 표현하던데.”

“할 짓도 없는 병신들인가.”

“니가 익게 중독자들 삶의 낙이잖아. 아니, 하여튼 올타를 떠나서 내가 본 차재희는 감정적인 성격이 아니란 말이야? 분노 역치가 높다고 해야 하나? 내가 몇 번 슬슬 긁어 봤지만 절대 화 안 내던데…….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한테 욕을 했지?”

이수는 어깨를 으쓱하면서도 일부러 차재희를 긁어 봤다는 말에 혀를 내둘렀다. 또라이…….

감정적이지 않다고? 아까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전혀 인정할 수 없었다. 신유진은 사람을 잘 보는 편이었지만, 사람이 항상 맞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수는 이번만큼은 그녀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한 번 만난 사이라는 말에 이를 악문 채 대꾸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한 번 아니에요.’

생활 한문 이전에 또 만난 적이 있다는 소린가? 고개를 기울인 이수가 생각에 잠겼다. 치익, 담배를 한 대 더 빼 물었지만 작은 불빛이 사라질 때까지도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All about your timetable.

버거킹 쏘는 차 vs 학식 짭버거 쏘는 서

ㅈㄱㄴ경영러의 선택은???

7시간 전 등록 신고하기

댓글 (17)

익명의 학우 1밸런스 파괴잔어 ㅅㅂ 밸패시급

익명의 학우 2삑! 차재희 자작글입니다!

익명의 학우 3킹재희

익명의 학우 4킹재희22

익명의 학우 5킹재희33333

익명의 학우 6난버거킹보다 학식버거가 더 맛나던데...ㅋ

 ➥네 다음 버거킹 알바

익명의 작성자아 ㅅㅄㅂ 반대로 씀 ㅠ

익명의 작성자학식 짭버거 쏘는 서 vs 버거킹 쏘는 차 이거임

 ➥?병신인가?

익명의 학우 7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시발

익명의 학우 8학식 짭버거 쏘는 차 vs 버거킹 쏘는 서

 ➥이걸 말하고 싶은 거지?^^

익명의 학우 9먼말인가했네 ㅅㅂㅋㅋㅋ 당연히 학식 차 아님??? 이걸 질문이라고 해?

익명의 학우 10서의 혐성은 버거킹으로 상쇄되지않는다. 오늘 또따시 입증된사실임ㅠㅠ

 ➥?????????무슨일 있었음?

 ➥서랑 차랑 오늘 과방에서 싸움ㅠ 서 나가고 차 막 울려고햇음ㅜ0ㅜ

‘그’ 수업을 위해 이번 학기에 19학점을 신청한 탓에 서이수의 화요일은 꽤 빡빡했다. 투자론과 관리 회계라는 세 시간짜리 전공 수업 두 개와 한 시간짜리 교양 필수 상급 영어 수업을 듣는다.

미국인이니 상급 영어는 날로 먹겠지만, 앞의 두 개는 3학년 전공 수업이라 첫날이라고 일찍 끝내 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이수는 컨디션 조절을 위해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병원에서 지겹게 잔 덕분인지 이수는 잠이 없는 편이었다. 끽해야 하루에 여섯 시간쯤 자면 지겹게 잤다고 느끼며 깨는 날이 많았다. 어쨌든 겨우내 불규칙한 생활을 하다가 개강 후 컨디션 조절을 해 보겠다고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잠들었는데, 결론적으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 됐다.

지이잉. 지이잉.

새벽 2시. 이수의 휴대폰이 반짝이며 빛났다. 잠귀가 밝은 탓에 잠든 지 한 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눈을 번쩍 뜨며 일어났다.

[타격]

저장된 이름을 확인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 시간에 길드원인 타격이 전화할 일이라면 한 가지뿐이었다. 길게 기지개를 켜니 스피커 너머로 야행성 겜창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랭킹 털림

“몇 점?”

─ 27점.

“씨발 새끼들.”

─ 님만 오면 됨.

“5분만 기다려.”

전화가 뚝 끊긴다. 이수의 인기척을 느낀 릭이 잠에서 깨 다가왔다. 반쯤 풀린 눈동자로 꼬리 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거실로 나갔다. 센서가 움직임을 인식하며 자동으로 불이 켜졌다. 야간용 저조도 조명이 부드러운 빛을 내뿜었다.

이수의 집은 사람 사는 곳 같지 않았다. 거실과 다이닝 룸의 벽을 터서 확장했는데, 카펫이 깔린 침실과 달리 리빙 룸의 바닥은 에폭시로 마감되어 있었다. 카페에서나 볼 법한 모던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로 꾸며져 스튜디오 같은 느낌이 났다.

8인용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소파 앞에는 8K의 100인치짜리 TV가 놓여 있었고, 그 옆 장식장에는 여러 종류의 콘솔 게임기와 타이틀이 한가득이다.

하드 게이머답게 데스크톱도 두 대 있었다. 하나는 게임용, 하나는 과제용으로 노트북과 연동하여 쓰는 것인데 둘 다 1년에 두세 번씩 업그레이드되는 초고사양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두 개의 책상은 벽에 붙어 있지 않고 다이닝 룸이었던 공간의 중앙에 놓였고, 그 위에는 기이하게도 침니 후드가 달려 있었다.

“리키, 간식 먹었잖아.”

냉장고에서 500mL 생수병을 꺼내 든 이수가 간식을 달라고 달려드는 릭을 발로 밀어냈다. 윤기 나는 새까만 털을 지닌 래브라도 리트리버 리키(릭)는 이수와 5년째 함께 살고 있는 반려견이었다. 달라붙는 릭을 또다시 밀어내며 이수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얼굴에 피곤이 가득했으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네 시간 후에 있을 점검 전까지 던전 클리어 랭킹 1위를 되찾아야 했다. 게임을 하면 이겨야 하고, 경쟁을 하면 1등을 먹어야 하는 게 바로 서이수였다.

마우스를 휘젓자 슬립이 풀리며 화면이 켜졌다. 서이수의 게임용 컴퓨터는 점검 시간 이후를 제외하면 24시간 라테르가 실행되고 있었다. 하나뿐인 캐릭터로 로그인하니 곧바로 파티 신청이 들어왔다. 리모컨을 들어 침니 후드를 작동시킨 후 담배를 빼 물었다. 불을 붙이고 나서 채팅을 쳤다.

[파티] 5CPR : ㄱ

전화를 받은 후 던전으로 출발하기까지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27점 차이가 난다는 소리는 라이벌 길드 놈들이 이수의 파티보다 0.27초 더 빠르게 클리어했다는 소리였다.

탈것을 소환해 달리며 이수는 담배를 빠르게 불태웠다. 첫 보스를 잡기 직전 재떨이에 꽁초를 쑤셔 박으며 공략을 시작했다.

“아, 씨발.”

그러나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수의 길드는 랭크를 탈환하지 못했다. 문제는 힐러였다. 꽤 오래 합을 맞춰 왔지만 최근 들어 삐끗해서 실수하는 일이 잦았다.

리더인 이수가 부르면 오고, 가라면 가는 게 바로 서이수의 고정 파티였다. 그들은 전원 겜창으로 이루어져 있다. 겜창이란 무엇인가. 게임에 인생을 파는 창놈이란 뜻이었다. 그리고 놈들의 인생을 산 것이 바로 서이수였다.

전 서버 랭킹 1위를 위해 이수는 그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연애질을 한다고 라테르에 접속이 뜸한가 싶더니 기어이 힐러 새끼가 감을 잃어버린 것이다.

점검까지 한 시간도 남지 않았기에 이수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답지 않게 ㄱㅊ, 신경ㄴ, 하고 상냥하게 실수를 눈감아 주며 다독였다. 그렇게 점검을 2분 남겨 두고 겨우겨우 랭킹 1위를 탈환했다. 상대방과는 18점 차이였다. 그리고 6시, 점검으로 인해 캐릭터 접속이 해제되기 전까지 이수는 팀 보이스로 쌍욕을 퍼부었다.

“개동 새끼야. 이따위로 할 거면 길탈해, 그냥. 몇백 번을 돈 던전에서 실수를 이렇게 해? 내가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아냐? 씨발, 막넴에서 리트가 몇 번이야? 뭐? 뭘 잘했다고 소리를 질러.”

헤드셋 너머로 고성이 오갔다. 힐러인 감동은 사람이 실수 좀 할 수 있는 거 아니냐며 뻔뻔하게 나왔고, 그에 더 열이 받은 이수는 너 같은 새끼는 길가에 널려 있다며 하기 싫으면 꺼지라고 응수했다. 그리고 6시 1분.

감동

씨팔 좆같아서 안함 ㅂ2

06:01

감동 님이 채팅방을 나갔습니다.

채팅방으로 초대하기

타격

?

06:01

타격

??

???

06:02

감동 님이 채팅에 참여했습니다!

타격

님 또 왜그러셈;

06:03

감동 님이 채팅방을 나갔습니다.

채팅방으로 초대하기

타격

아.. 씨팔 때문에 또 탈주 닌자가......

06:04

김똘복

다시 올 거예요^^ 감동 솔직히 탈주 몇 번째인지 기억도 안남ㅎㅎ 다들 즐잠여ㅎ

06:06

지랄을 하고 있네. 채팅방까지 나가 버리는 행태에 이수는 더 열이 받았다.

06:09

타격. 점검 끝나면 새 힐러 구하고 저 새끼 길드 추방해

타격

아....

06:11

휴대폰을 엎은 이수가 두 눈을 꾹 문질렀다. 육체적 피로에 정신적 피로감이 더해져 근래 들어 가장 피곤한 날이 되어 버렸다.

오늘 첫 수업은 10시였다. 하지만 이 상태로 침대에서 잠들면 9시에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이수는 늘 하던 대로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검은색 후드에 트레이닝복, 그 위에 아이보리색 야상을 걸쳐 입고 집을 나왔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얼마 전 배를 타고 도착한 새 차에 올라탔다. 비닐도 벗기지 않은 롤스로이스 컬리넌 블랙 배지는 전장 5.3m의 대형 SUV였다. 주차 라인 세 칸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세 칸 다 서이수 전용이었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운전대를 잡은 이수는 학교를 향해 출발했다. 종종 이렇게 밤을 지새울 때는 과방에 가서 자는 편이었다. 잠귀가 밝은 탓에 그곳에선 깊이 잠들 수 없었고, 그래서 수업 시간에 맞춰 깨어나기도 용이했다.

경영대 앞에 주차한 그는 사물함에서 투자론과 관리 회계 전공 서적을 꺼내 들고 과방으로 갔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6시 50분이니 한 세 시간 정도는 잘 수 있다. 수면용 소파 베드에 누워 알람을 맞추고 야상을 덮었다. 이수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수 오빠.”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정신이 들었다. 온몸을 뒤덮고 있던 피곤이 안개처럼 흩어지고, 대신 탈력감이 찾아왔다. 자도 잔 것 같지가 않았다. 씨발……. 머리가 띵하게 아려 오는 느낌에 이수가 앓는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를 깨운 사람은 동기인 박지혜였다. 박지혜가 이수를 보며 웃었다.

“오빠, 던전 돌다 왔죠?”

“……어떻게 알았어.”

잔뜩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알람이 울리기 3분 전인 9시 47분이었다. 강의실은 과방 바로 맞은편이어서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이수가 가방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박지혜도 라테르를 플레이하지만, 서버가 달라서 만난 적은 없었다. 신유진을 따라서 어쩌다 가게 된 PC방에서 서로 같은 게임을 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 후로 종종 라테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화요일이잖아요. 완전 뻔해. 랭작했겠죠. 아, 같은 수업 듣는 것 같은데 안 일어나길래 깨웠는데… 오빠, 투자론 맞죠? 책 보고 알았어요.”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에 올려 두었던 전공 서적을 가리킨다. 그런데 투자론과 관리 회계 책 위에 테이크 아웃 커피 잔이 놓여 있었다. 위에 붙은 포스트잇이 눈에 들어왔다. 이수가 인상을 찡그리며 포스트잇을 떼어 냈다.

이수 선배. 좋은 하루 보내세요.

또박또박 눌러 쓴 정갈한 글씨체였다.

“오오, 신입생인가?”

“누가 줬는지 봤어?”

“아뇨. 재학생이 오빠한테 커피 줄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말하곤 박지혜가 킥킥거렸다. 이수는 지혜를 보며 짧게 웃곤 포스트잇을 구겨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누군지 몰라도 쓸데없는 짓을 했다. 한 손에 책,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일어나 지혜에게 턱짓했다.

“투자론이라며. 가자.”

“네에.”

파티션을 돌아 나가 출입문을 향해 걸었다. 투자론 담당 교수의 수업은 아주 지루하고 재미없기로 유명했다. 지혜의 걱정 어린 너스레를 들으며 쓰레기통에 컵과 포스트잇을 던져 넣었다. 콱, 종이컵이 처박히고 식어 내린 커피가 흐르는 소리가 났다. 그는 모르는 사람이 준 음식엔 절대 손을 대지 않았다. 밀봉된 것도 안 먹는 마당에 커피라면 버리는 게 당연하다.

“어, 재희 안녕!”

박지혜의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막 문을 열고 들어온 차재희가 빤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반질반질한 낯은 오늘도 단정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다. 물론 속은 그렇지 않았지만. 이수는 말없이 그를 지나쳤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런 말이 들려온 것도 같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 * *

Eugene

나 12시 반쯤 끝남. 점심?

10:45

10:55

ㅇㅇ

수요일은 1교시부터 세 시간짜리 연강을 듣고 나면 공강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전공 수업은 첫 시간이라고 간단하게 끝낸다거나 하는 게 없었다. 첫날부터 출결과 전공 서적 소지 여부를 파악하고 매의 눈길로 수업 태도를 훑어 내렸다.

이름값 하는 김영경 교수는 경영대에서 깐깐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보통 세 시간 연강 수업은 쉬는 시간 없이 두 시간 반 동안 수업한 후 30분 일찍 끝내는 식으로 진행되는 데 반해, 김영경 교수는 50분 수업 후 10분을 쉬는 수업 방식을 유지했다. 덕분에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돌아온 이수는 메신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타격

저기요? 힐러가 없음 ㅅㅂ

10:31

타격

걍 감동한테 ㅈㅅ 두글자만 보내셈. 그럼 내가 다시 데려옴

10:34

6개월 동안 다섯 번이나 가출한 놈이다. 이수는 그 힐러와 손절하기로 결정했으므로 다른 힐러를 찾으라는 말을 남겨 두고 휴대폰을 껐다.

이수는 좋게 말하면 주관이 강했고, 나쁘게 말하면 독선적이었다.

서이수는 미국에서 태어났다. 계획된 출산은 아니었다. 모친 천수인이 출장으로 뉴욕을 방문했을 때 갑자기 찾아온 진통이었다. 억제제를 맞았으나 수축을 잡지 못했고, 결국 이수는 2kg도 되지 않는 7개월의 조산아로 세상에 나왔다. 자가 호흡이 불가능했던 탓에 오랫동안 신생아 중환자실의 인큐베이터에 머물렀던 이수는 첫돌을 넘긴 이후에 퇴원했다.

그러나 그가 병원 밖으로 나갔던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공항으로 가던 도중 원인을 알 수 없는 심정지가 왔고, 그는 다시 응급실로 돌아가 심폐 소생술을 받고 살아났다.

그 누구도 죽음의 원인을 알지 못했다. 출생 직후 심장 기형을 발견하긴 했지만, 의료진은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MRI를 비롯한 수많은 검사를 해 보아도 정확한 원인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수는 그렇게 병원에 머무르게 되었다. 원인을 해결하지 못했으니 또다시 심정지가 발생할 확률이 있다는 의료진의 조언 때문이었고, 그의 부모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18년이나 이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꽉 막힌 병실에서 자라난 이수의 어린 시절은 텅 비어 공허했다. 이수에게만큼은 집(home)이었던 그 공간에는 언제나 이수 혼자뿐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기다림과 외로움의 상처로부터 자신을 지켜 낸 자아는, 타인의 침범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이수는 누군가를 받아들이지도, 누군가의 의견을 받아들이지도 않는 고집불통이 되어 있었다.

이수는 징징거리는 타격에게 다시 한번 메시지를 보냈다. 새 힐러 찾아.

“오빠아! 점심 같이 드실래요?”

수업이 끝난 후, 두툼한 전공서를 가방에 집어넣고 있으니 지혜가 다가왔다. 사실 신유진과 박지혜는 동갑으로 이수보다 두 살이 어렸다. 다만 미국에서 만난 유진은 이수에게 자연스레 반말을 하지만, 뼛속까지 유교걸인 지혜는 꼬박꼬박 오빠라고 부르며 존댓말을 했다. 박지혜의 보수적인 사고방식은 이수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답답할 때도 있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선을 지키고야 마는 그 태도가 좋았다.

11시 50분. 손목시계를 확인한 이수가 지혜에게 물었다.

“나 12시 반에 유진이랑 밥 먹기로 했는데, 같이 갈래?”

“아 좋아요, 좋아요! 그럼 과방 가서 기다려요.”

“먼저 가 있어. 잠깐 내려갔다가 갈게.”

“알았어요!”

담배를 피우려는 것을 알아챈 지혜가 힘찬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이수는 흡연 구역으로 내려가 연초를 빼 물었다. 불을 붙이고 서 있으니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얼굴을 때리는 냉기에 정신이 번쩍 든다.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패딩의 지퍼를 올리고 후드를 올려 썼다. 잠시 후, 담배를 비벼 끄고 올라가려 하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또 타격이었다.

“왜.”

─ 진짜 감동 안 받음?

“몇 번 말해. 다른 사람 구해.”

─ 아……. 쓸 만한 놈이 없다고.

“커뮤에 구인 글이라도 올리든가. 그게 니가 할 일이야. 끊어.”

─ 개새끼.

“수고.”

휴대폰을 집어넣은 이수가 몸을 돌렸다. 경영대로 들어가려는 그를 붙잡는 사람이 있었다.

“서이수!”

“……12시 반에 끝난다며.”

유진이 발목까지 내려오는 패딩을 입은 채 종종거리며 걸어왔다. 그 옆에 선 차재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같은 수업을 듣는 모양이었다. 억지로 인사하듯 눈을 내리까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이수가 한쪽 눈썹을 슬그머니 치켜올린다.

작년에는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 개강 3일 차에 세 번이나 봤다. 계속 얼굴을 마주칠 사이에 한마디 건넬 만하건만, 이수는 말없이 새 담배를 빼 물었다. 유진도 이러려고 왔을 테니 기다렸다가 같이 올라갈 생각이었다.

“교수님이 점심 약속 있다고 30분 일찍 끝내 주시더라. 밥 뭐 먹을래?”

“학식 빼고.”

“허어. 죄송하지만 제가 1시에 수업입니다.”

“그럼 혼자 처먹지 나를 왜 불렀을까?”

이수가 대뜸 짜증을 내도 유진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같이 먹을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탁, 라이터를 켜 불을 붙인 유진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조그마한 손을 뻗어 이수의 턱에 리본을 예쁘게 묶었다. 유진은 후드 끈만 보면 묶지 못해 안달이었다. 턱 밑에 달랑거리는 리본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보나 마나 차재희였다.

왜 저렇게 봐. 어지간히 불만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과제를 같이 하자던 말을 취소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럴 생각은 없어 보이고…….

이수는 힐끗 차재희에게 시선을 던졌다. 춥지도 않은지 두툼한 스웨트 셔츠에 코트 차림이었다. 각 잡힌 슬랙스에 로퍼. 바짓단 아래로 드러난 복숭아뼈가 조금 붉었다. 멋 내다 얼어 죽지. 이내 관심을 끄며 유진에게 말했다.

“지혜도 같이 먹자. 과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랭.”

대답한 후 연기를 뱉어 낸 유진은 재희를 턱짓했다.

“그럼 재희도 데려가자. 우리 중급 회계 같이 듣는다?”

“…….”

그 말에 이수는 차재희가 양심이 있으면 됐다고 거절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담배를 든 손으로 이마를 긁적이더니, 괜히 바닥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한 번 핥고, 허락을 구하듯 눈을 들어 올려 이수를 바라봤다. 거절을 잘 못 하는 컨셉인가. 기가 찬 이수가 대신 고개를 저었다.

“싫은데.”

“야아. 치사하게 왜 그러냐?”

유진이 질척거릴 기세라 이수는 재희에게 질문을 던졌다.

“차재희. 너 나랑 얼굴 맞대고 밥 먹고 싶어?”

당연히 아니라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네.”

그 간결한 대꾸에 이수는 할 말을 잃었다. 빤히 보며 뻐끔뻐끔 연기만 내뱉고 있으니 유진이 두 사람 사이의 묘한 기류를 의식하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차재희와 이런 식으로 데면데면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수는 독서 문화 수업을 포기할 마음이 없었고, 과제는 완벽하게 해내야 했으니까.

피곤한 상황이었다. 무시하고 혼자 하겠다고 말하면 교수에게 꼰지를 것 같아서 섣불리 나설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표면적으로라도 풀기는 풀어야 하는데……. 골똘히 생각하던 이수는 결론을 내렸다. 대충 서로 욕하고 싸우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과제 하나 하는데 굳이 밥까지 먹는 사이로 발전할 필요는 없었다. 딱 과제 끝날 때까지만 상부상조하고 번호 지우고 갈라서면 되지 않나.

“차재희.”

“네.”

“선택지를 줄게. 골라.”

재희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는 공용 재떨이에 꽁초를 박아 넣으며 입을 열었다.

“1번. 나랑 점심을 먹고 독서 문화 팀플을 포기하고 버스를 탄다.”

“…….”

“2번. 신유진한테 바쁜 일 있다고 말하고 꺼진다. 과제는 계속한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요?”

“어.”

선택지가 아주 극단적이었다. 차재희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수는 가만히 벽에 기대선 채 대답을 기다렸다.

하나밖에 더 있나? 당연히 1번 아닌가. 머리가 있으면 이해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차재희는 판단력에 문제가 있는 건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해서 이수는 그의 결정을 도와주기 위해 부연 설명했다.

“1번을 선택하면, 나랑 밥도 처먹고 과제도 안 해도 되고 아주 좋겠다. 그치? 근데 2번을 선택하면 밥도 못 먹고 쫓겨나는데 성질 더럽고 사람 기분 좆같이 만드는 재주가 있는 선배랑 몇 주 동안 말을 섞어야 되겠네.”

“2번이요.”

“그래. 잘 선택……. 뭐?”

“2번 할게요. 점심은 제가 빠질게요.”

왜 저래 진짜. 이해되지 않는 비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이수가 떨떠름한 얼굴로 재희를 쳐다봤다. 결국엔 둘이 과제를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만드는 결과물이 대체 얼마나 만족스러울지 모르겠다. 그 생각을 하니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

“니 마음대로 해. 간다.”

이수는 고개 숙여 인사하는 차재희를 두고 자전거 거치대로 향했다. 유진에게는 그냥 집에 간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학식 따위나 처먹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오기가 끓어올랐다.

이수는 집에 도착해 독서 문화 수업의 과제를 준비했다. 다음 주 수업이 끝난 후 차재희와 만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버스를 태워 주겠다고 큰소리를 쳤으니 차재희가 ‘내가 할 게 없구나’ 인정할 정도로 완벽하게 해내야만 했다. 이수가 상상력을 쥐어짜는 동안 펫 시터인 민우가 리키를 데리고 산책을 다녀왔다. 그날 이수는 노트북 앞을 떠나지 못했다.

* * *

다음 날인 목요일. 중간에 네 시간이 비는 우주 공강을 직면한 이수는 본의 아니게 학생 식당에 끌려와 있었다. 범인은 당연히 신유진이었다. 서이수를 학식에 끌고 갈 수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다.

“서이수 봐. 존나 사형수 같아.”

“아, 진짜. 오빠 인상 좀 펴요.”

원체 입이 짧은 이수는 밥과 소고기 뭇국, 그 외 잡다한 반찬들을 딱 한 입씩 집어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간도 세고 식사에 집중이 되지 않아 음식이 목구멍에서 막힌 채 안 내려갔다.

어제 그렇게 간 게 미안해 기껏 밥을 사 주겠다고 나오랬더니 둘 다 수업이 있다며 이수를 질질 끌고 학식으로 데려왔다. 내 돈 내고 이딴 걸 사 먹는다는 게 더 짜증이 났다.

이수의 표정을 보며 웃던 유진과 지혜는 곧 신입생에 대한 화제로 넘어가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골이 아파져 식판을 한곳으로 밀어 둔 채 턱을 괬다.

병실에서의 식사는 늘 조용하고 여유로웠다. 이수는 그 익숙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사회에 나온 지 5년이 되어 가는데도 이렇게 수백 명이 모여 떠드는 공간에서 밥을 먹는 건 여전히 불편했다.

식사를 포기하고 여러 인간 군상을 훑어보던 이수는 돌연 인상을 찡그렸다. 이 정도면 운명적 악연인가. 개강 후 나흘이 지났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보게 되다니.

빈자리를 찾던 재희가 단정한 얼굴을 희미하게 굳혔다. 그는 동기로 보이는 여자애들 두 명과 함께 있었다. 예쁘장한 여자애가 그들을 발견하고 반갑게 다가왔다.

“언니, 안녕하세요!”

유진과 지혜에게 목례하곤 이수에게는 고개를 꾸벅 숙여 안녕하세요, 선배님. 하고 격식을 차린다. 이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까먹은 그 후배는 학식에서 선배들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 취해야 할 당연한 행동처럼 그들에게 옆자리에 앉아도 되겠냐고 물으려 했다. 그러나 언니 옆, 까지 말했을 때 그녀를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연지야.”

차재희의 낮고 울림 없는 음성은 사위가 시끄러우면 잘 들리지 않았다. 배경 음악처럼 흩어지는 목소리 때문에 이수는 입 모양을 보고 대충 후배의 이름을 불렀겠거니 짐작했다. 사실은 연지가 아니라 영지라고 했다.

“식사 거의 다 하신 것 같은데 우리 그냥 저쪽에 앉자.”

“응? 지혜 언니랑 유진 언니는 아직…….”

“여기 복도 쪽이잖아.”

그렇게 말하며 차재희는 눈을 접어 웃었다. 등 뒤에 꼬리가 보이는 것 같은데 착각일까. 영지는 그 웃음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같이 온 동기가 고개를 돌려 지혜와 눈을 맞추며 호들갑을 떨었다. 언니, 쟤 웃는 것 좀 봐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람들 많이 지나다니는데 너 체할까 봐 걱정돼. 보면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아… 그, 그래! 저기로 가자, 희진아.”

“식사 맛있게 하세요!”

여자애들이 먼저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차재희는 잠깐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가 버렸다. 가증스러운 태도에 이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자신의 옆에 앉기 싫은 거면서 걱정하는 척 다른 사람을 핑계 대고 좋은 소리는 다 들어 먹는다. 이수는 누가 돈을 주고 시킨다고 해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권력자에게 다정함은 권력의 수단이다. 문득 토마스 홉스가 한 말이 생각났다. 차재희는 그들의 동기들을 통솔하는 무리의 중심이었다. 늘 다정한 척, 착한 척, 어떤 상황에서도 화를 내지 않는 척하면서 때로는 자신에게 그러했듯 누군가를 고의적으로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게 만들었을 것이다. 단정하고 다정해 보이는 낯 뒤에 그러한 이면이 있다는 걸 누가 또 알고 있을까. 차재희는 누구에게나 솔직한 서이수가 정말로 싫어하는 타입의 인간이었다.

“서이수!”

“……어?”

문득 소리쳐 부르는 이름에 정신이 들었다. 텅 빈 식판을 집어 든 유진이 미심쩍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긴. 표정이 존나게 심각하던데.”

“맞아, 맞아. 오빠 무슨 일 있어요?”

내가 왜 이렇게 차재희한테 신경을 쓰지. 그에겐 미묘하게 자꾸 신경을 거스르는 구석이 있었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 눈앞에서 알짱거려서 그러나. 이수는 머리를 털어 생각을 지워 냈다. 가방과 식판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다음 주부턴 니들끼리 먹어. 개밥 같아서 못 먹겠어.”

“뭐라고오? 진짜 도련님 티 내고 있네.”

“시끄러.”

식판을 반납하고 그들과 헤어졌다. 이수는 화장실에서 찝찝한 입을 씻어 내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3학년 전필 수업은 수업만으로는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심도가 있어 시간을 내서 따로 공부를 해야만 했다.

열람실이 아닌 서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세 시간이 넘게 책을 들여다봤다. 목이 아파 올 무렵 시간을 확인하니 3시 45분이었다. 4시부터 두 시간 동안 프랑스어 수업이 있었다. 이수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인문대로 향했다.

“씨발.”

뭐야? 대체.

“안녕하세요, 선배.”

또 차재희였다.

이 새끼가 나를 스토킹하나? 자의식이 풍만한 상상을 하다가 관뒀다. 졸업하려면 영어를 제외한 외국어 수업을 두 개 이상 들어야 했다.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아랍어, 프랑스어 그 다섯 개의 수업과 언어별 세 명의 교수를 포함하면 같은 수업을 들을 확률은 15분의 1이나 되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느 학기에 들어도 상관없는 수업이라 차재희와 겹치는 3년의 여섯 학기를 곱하면 90분의 1 확률이겠지만… 씨발. 우연이겠지.

그 생각을 읽어 내기라도 한 듯 재희가 말했다.

“올해는 자주 마주치네요.”

“계속 말 걸 거야?”

“네?”

“그럼 자리 옮기려고.”

“…….”

입을 벙긋거린 재희가 단정하게 웃으며─민망하지도 않나. 어떻게 이 상황에 저렇게 웃을 수 있는지 이수는 신기할 따름이었다─말했다. 이따가 저랑. 거기까지 들은 이수는 가방을 들고 일어나 자리를 옮겼다.

재희가 황망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알 바 아니었다. 얼마 가지 않아 교수가 들어왔고, 이수는 맨 앞에 앉아 수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50살은 넘어 보이는 프랑스어 교수는 김영경 교수만큼이나 깐깐했다. 첫 시간부터 프랑스어 알파벳과 발음 기호를 모조리 외워 오라는 과제를 남겼다.

백팩을 메고 강의실 밖으로 나온 이수는 또다시 차재희와 맞닥뜨렸다. 내가 지금 보스전을 하고 있나? 계속 리트라이 중인가?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익숙한 상황이었다.

“선배.”

“왜. 비켜.”

“저랑 이야기 좀 해요.”

“내가 왜.”

짜증을 내며 반문하자 재희는 말간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과제… 하기 싫으세요?”

“뭐?”

“성적에 민감하시다면서요. 최고점 받게 열심히 할게요. 저, 자신 있어요. 그러니까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이게 지금 협박인지, 애원인지. 이 새끼의 여태 행실을 보면 과제 하기 싫어? 최하점 받고 싶으면 계속 이따위로 나와, 하는 협박인데. 표정만 보면 간절히 애원하는 것 같았다.

과제에 훼방을 놓으려면 얼마든 놓을 수 있었다. 잘하겠다고 정말로 잘 참여하는 척해 놓고 나중에 잠수를 타 버린다든가, 발표 날 내용을 바꿔서 팀원이 교수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도록 엿을 먹인다든가─이수가 한 번 그런 적이 있다─.

딱 나흘 동안 네 번을 만났지만, 차재희는 그 가능성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는 놈으로 보였다. 결국 아쉬운 건 성적에 집착하는 쪽이었다. 이수는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 어디서 얘기하자고.”

“공학관 카페로 가요.”

“그러든지.”

인문대 옆의 호수를 지나면 공학관이 있었다. 공학관은 15층으로 사국대 건물들 중 가장 크고 높았고, 식당가와 레스토랑, 카페가 즐비했다. 좀 가까우면 매일 그곳에서 식사를 하련만, 아쉽게도 경영대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이수는 무덤덤한 얼굴로 재희의 뒤를 따랐다. 꽃을 틔우려면 한참이나 남은 벚나무 길을 지나고, 갓 제대한 복학생이 제물로 바쳐지는 똥물 호수를 지나서 공학관에 도착했다. 2층에 자리한 비교적 조용한 카페로 들어선 재희는 자신이 사겠다는 듯 이수를 돌아봤다.

“아메리카노 드세요?”

“핫 자몽 티.”

“……선배 혹시 커피 안 드세요?”

“디카페인만 마셔.”

그렇게 대답했는데 어쩐지 차재희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수는 시도 때도 없이 쪼개는 후배를 남겨 두고 자리를 찾아갔다. 뒤에서 배도라지 쌍화 꿀차를 주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페는 무척이나 조용했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은 이수는 등을 기댄 채 바삐 오가는 학생들을 내다봤다. 저 새끼들 중 팀 과제를 먹튀해 본 새끼들이 몇 명이나 될까. 아마 최소 절반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러다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트레이를 든 차재희가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앞머리가 배도라지 쌍화 꿀차와 뜨거운 자몽 티에서 피어오른 수증기에 조금 젖어 들었다.

이수의 반대편에 앉은 재희는 트레이를 내려놓고 손등으로 앞머리를 살짝 흩트렸다. 그때 이수는 보고 배운 습관을 자극하는 상처를 발견했다. 오른손 손바닥에 빨갛게 팬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저렇게 두면 흉 지는데. 곪을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했을 때는 이미 가방을 뒤적여 밴드를 꺼내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냐 자조하면서도 차재희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손바닥에 붙여.”

“……붙여 주세요.”

“왼손은 장식이야?”

이게 어디서 어리광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까칠하게 대꾸했지만, 차재희는 만만치 않았다. 뜨거운 수증기에 뺨을 발갛게 익힌 채로 웃었다.

“저번에도 해 봤는데 한 손으로 못 하겠던데요. 붙여 주세요, 선배.”

제정신인가. 이수는 인상을 구기면서도 거칠게 포장을 뜯었다. 트레이를 한쪽으로 밀어 둔 재희가 오른손을 펴서 테이블 위에 올린다. 손바닥 중앙에 깊이 팬 듯한 상처가 나 있었다. 피딱지가 앉은 피부 주변이 붉다. 뭘 하고 다니길래 이런 곳에 이런 상처가 나나 싶었지만 알 바 아니었다.

이수가 무심한 손길로 반창고를 붙여 주었다. 양쪽 끝을 꾹 눌러 떨어지지 않게끔 고정하고 손을 떼어 냈다. 좀 웃겼다. 차재희는 손까지 정갈했다.

결벽증에 편집증이 있는 사람이 손톱 결까지 공들여 만든 단백질 인형 같았다.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포장지를 치우고 있으니 이수의 머리 위로 낮은 웃음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힐끗 고개를 드니 차재희가 입술을 깨문 채 웃고 있었다.

“넌 원래 그래?”

“뭐가요?”

“시도 때도 없이 쪼개는 거.”

그 말에 재희가 머쓱하게 또 앞머리를 매만졌다. 반창고가 붙어 상처가 가려지니 훨씬 보기 좋았다. 이수는 뜨끈한 자몽 티가 든 머그잔을 손에 든 채 의자에 등을 기댔다. 다리를 쭉 뻗어 찌뿌둥함을 풀어 내며 배도라지 쌍화 꿀차를 마시는 차재희를 쳐다봤다. 이상한 한약재 냄새가 여기까지 나는 듯했다. 가만 보고 있으니 소리 없이 차를 머금은 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왜요?”

“뭐가 왜야. 할 말 있다고 부른 건 너잖아.”

“아… 그랬죠.”

“빨리 말해. 집에 가야 해.”

그 말에 재희는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을 맞잡은 채 말을 고르는 듯했다. 이번엔 어떤 욕을 하려나. 성질이 개같이 급하시네요. 아니면 원래 그렇게 뒤끝이 길어요? 하고 물어 올 수도 있었다.

이수는 심상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봤다. 카페 벽면의 스피커에선 지겨운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 아래로 재희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일단… 죄송해요. 죄송하고……. 또.”

“…….”

“그날 제가 욕했던 건 정말 실수 맞아요. 저도 모르게 화가 나서 그랬어요. 생활 한문 때 처음 만난 것도 아니고 선배랑 그전에도 몇 번이나 봤었기 때문에…….”

이수는 전혀 기억이 없었다.

“제가 주제넘었어요. 몇 번 봤으니까 제 이름을 기억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또 물어보시니까 자존심도 상했고……. 저는 선배 기억하고 있는데 선배는 그게 아니니까. 거짓말 안 하고 아직도 제가 그때 왜 욕까지 했는지는 저도 잘 이해가 안 가는데…….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아마도… 서운했던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해요.”

솔직히 말하자면 같잖아서 웃음도 나지 않았다. 차재희의 말대로라면 저도 모르게 투정이라도 부렸다는 소리였다. 뭐, 거기까지는 받아들일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실수가 아니지 않나? 자몽 티를 한 모금 머금은 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서운해서 욕은 했는데 실수였다. 사과했는데 내가 받아 주지 않아서 그랬다. 이거네.”

“‘그랬다’라는 말이…….”

“주제넘었던 줄도 알고, 미안한 줄도 알았으면 나를 불러내서 따로 사과했어야지. 과방에서, 애들 앞에서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 건 나 엿 먹어 보라고 한 거 아니야?”

“절대 아니에요!”

차재희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그것마저도 의도된 행동으로 보였다.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둘을 힐끔거렸다. 팔자로 휘어진 눈썹을 보며 이수가 물었다.

“야. 너 지금 억울해?”

이내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흘렀다. 억울하다고? 사람 우습게 만든 건 차재희였다. 그날 말은 안 해도 과방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서이수가 뭔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차재희가 욕을 했겠지’라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그래 놓고 면전에서 모욕적인 말을 들은 게 억울하고 분한 건가? 내가 저지른 짓에 비해서 돌아온 게 과하다 싶어서? 비웃음이 스며든 낯을 보고 재희가 항변했다.

“억울한 게 아니라… 오해를 풀고 싶은 거예요, 선배. 그때 유진 누나가 그렇게 물으니까 정말 당황해서. 선배랑 제가 싸웠다고 생각할까 봐 설명한 거였어요. 그게 아니라 그냥 제가 잘못한 거였는데, 저 때문에 사람들이 선배를 오해할까 봐. 그래서요.”

“그래? 그런 것치곤 화법이 아주 교묘하던데.”

“……제가 일부러 선배 엿 먹이려고 그런 것 같아요?”

허탈한 음성에 이수는 잠깐 고민했다. 모든 감정을 제쳐 두고 차재희의 행동만 보면 정말 미안해하는 것 같기는 했다.

내가 정말 그랬을 것 같아요? 정말로요?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었다. 주변의 평판도 다르지 않았다. 신유진도, 박지혜도 한결같이 차재희에 대해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애가 왜 하필 나한테 욕을 했을까? 신입생이라면 모르고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경영대 재학생이라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을 리가 없었다. 수업에서 먼저 알아본 것도 차재희 아니었던가.

이수는 올타에 자신에 대해 어떤 말이 도는지 신유진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것들 때문에 재학생들은 늘 자신 앞에서 조금 더 긴장하고 행동을 조심하는 편이었다. 이수가 생각지 못했던 익명 게시판의 성과였다.

그런데 늘 착하고, 화도 안 내고 신중하다는 평가를 받는 차재희가 하필 나한테 화를 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은근히 말을 돌려 깎아내렸다? 이수는 차재희가 자신을 이용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서이수와 얽히면 훨씬 더 극적인 효과가 날 테니까.

“너, 아까 학식에서 내 옆에 앉기 싫었지?”

“……맞아요.”

굳이 부정은 하지 않는다. 이수는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었다.

“그래 놓고 그 여자애 걱정하는 척 둘러대면서 자리 옮기게 유도한 게 너잖아. 네가 원하는 대로 컨트롤한 거잖아. 그런 네 말을 대체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네.”

“……그 이유만 있는 건 아니에요. 물론 영지 핑계를 댄 것도 일부 맞지만, 다른 건 오해예요.”

“오해. 그래, 오해.”

차재희는 좀 건방지고 오만하다. 이수는 재희의 새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여전히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이다.

“네 말이 맞는다고 쳐. 다 오해라고 쳐. 근데 재희야, 하나만 묻자.”

“…….”

“내가 왜 오해를 풀어야 해?”

그 말에 재희의 눈빛이 요동쳤다. 당황스럽게 이수의 낯을 더듬는 시선이 떨려 온다. 그것을 마주하며 이수가 말을 이었다.

“난 솔직히 니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관심 없고, 니가 억울하든 말든 상관없거든. 중요한 건 이거야. 난 그날 기분을 잡쳤고, 그 이후로 너를 볼 때마다 불쾌해.”

“…….”

“그런데 굳이……. 너를 위해서 내가 이해심을 발휘해야 하나? 네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해서 이 오해를 풀어야 하나? 내가 왜?”

계속해서 불쾌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차재희는 자신에 대한 오해가 있다면 당연히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상대방의 기분이 어떠하든 간에 말이다.

그러나 이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차재희가 어떤 인간이든 상관이 없었다. 그러니 굳이 심력을 소모하기도 싫었다. 이수가 되물었다.

“내 쥐좆만 한 상냥함을 베풀어야 할 정도로 네가 나한테 가치 있는 인간일까?”

신랄한 지적에 커다란 덩치가 움찔거렸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세게 문다. 이수는 차재희가 자신의 입장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고 조용한 물음이 던져졌다.

“선배는… 제가 정말 실수를 했든, 일부러 그런 거든 상관이 없는 거죠? 저한테 관심이 없으니까…….”

“맞아. 이제야 이해하네. 난 너한테 바라는 거 딱 하나야.”

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굳게 다물린 입매가 고집스러워 보인다. 그 와중에 끝이 조금 위쪽으로 휘어져 있는 게 이수는 또 우스웠다. 자주 웃는 사람들은 입술 끝이 위로 올라가 있다고 들었는데 차재희를 보니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겠다. 단정한 웃음이 예쁘긴 했다. 행동은 그렇지 못했지만.

쓸데없는 생각을 지워 내며 이수가 말했다.

“차재희. 내 성질 더러운 거 알지? 올타 보는 것 같은데 거기 내 얘기 많이 올라올 거 아니야. 모르면 찾아보든가.”

“……알아요.”

그 와중에 성질 더러운 거 안다고 긍정하는 꼴이 또 웃겼다. 보면 볼수록 웃기는 놈이다. 이수는 잡념을 털어 내듯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며 생각을 환기했다.

“굳이 내 오해 풀려고 할 필요 없어. 어디 가서 너 또라이 같다고 말하고 다닐 것도 아니고, 네가 지금 오해 푼다고 한들 나중에 또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너나 나나 장담 못 하니까. 그러니까 우리 시간 낭비 말고 과제만 하고 헤어지자. 피차 그게 좋지 않겠어? 너도 내 눈치 보는 거 피곤할 텐데.”

이쯤 되면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했다. 뇌가 있고 씨발 생각이 있으면 알아들어야지.

“나중에 오해 안 생기게 할게요. 지금은 풀고 싶어요.”

그러나 고집스러운 차재희의 말에 이수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이 새끼 나한테 왜 이래, 진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떼쓰는 어린애도 아니고 오해를 안 풀겠다고 하면 지구 끝까지 쫓아다닐 기세였다. 차재희가 그렇게 나올수록 이수도 성질이 돋아났다.

“피곤하네……. 사람 곤란하게 만들어. 나도 사람이라 웃는 낯에 욕하기는 쉽지 않은데.”

그렇게 중얼거린 이수는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새하얀 두 손에 가려졌던 얼굴이 드러나고, 만면 가득 짜증을 구겨 넣은 채 입을 연다.

“차재희. 이 씹새끼야.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재희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인형처럼 얼굴을 굳힌 채 이수의 입술이 움직이는 궤적만 바라보고 있었다. 니가 무슨 소릴 지껄이든 고집을 부릴 거다. 그렇게 보여서 더 열받았다.

“모든 사람이 널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해? 너를 오해하고, 너를 나쁜 사람으로 여기는 건 두고 볼 수가 없어? 그런 사람을 보면 씨발 막 그 사람에게까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고 그래?”

“저는 그냥.”

“입 닥치고, 재희야. 알아? 그거 강박증이야. 애정 결핍이고.”

창백한 낯이 충격에 물들었다. 재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이수만 바라봤다. 그를 직시하며 이수는 대화의 끝을 알렸다.

“네 결핍은 니 말 한마디에 좋다고 자지러지는 동기들한테나 가서 채워. 나한테 와서 지랄 말고.”

“선배…….”

“아가리 싸 물고, 다음 주에 수업 끝나고 보자. 그때도 이렇게 질척거리면 나도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협박하듯 말을 씹어뱉은 이수는 차게 식은 자몽 티를 원샷했다. 빈 잔을 트레이에 올려놓고 간다, 한 마디를 남기고 카페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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