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선배 (2)
학식 같은 주말이 지났다. 형편없었다는 뜻이다. 이수의 주말을 망친 사람은 당연하게도 차재희였다.
목요일 오후, 재희에게 독설을 쏟아부은 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이수는 어딘가─아마도 차재희─에 정신이 팔려 앞에 있던 방지 턱을 보지 못하고 넘어졌다. 손바닥이 갈려 나간 탓에 주말 내내 게임은 손도 못 대고 영화만 봤더랬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도 집중이 되질 않았다. 갑자기 주인공이 죽어 버리길래 뭐 이딴 쓰레기 같은 영화가 있냐고 욕을 퍼부었는데 놓친 부분이 있나 싶어 뒤로 돌렸다가 40분 정도가 기억에서 삭제된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줄거리가 삭제된 자리를 대체한 것은 차재희의 세상 억울한 표정이었다.
씨발……. 진짜 오해인가?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차재희 때문에 기분을 잡친 것도 맞고, 불쾌한 것도 맞다. 하지만 이수는 짜증을 내고 욕을 퍼부어도 누군가에게 제대로 화를 내 본 적이 드물었다.
누군가를 좋아하기도 어려운 만큼 누군가를 싫어하기도 힘든 사람이 바로 이수였다. 그 증거로 이수는 이전에 싸웠던 이들에게도 앙금이 전혀 없었다. 물론 호감도 없었지만.
그런데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사과하는 상대를 무시하고 성질대로 행동했으니 찝찝함이 남을 만도 했다. 올타에서 혐성, 혐성하지만 그는 나름의 기준으로 인성질을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던 중 일요일 저녁에 신유진이 이수에게 연락을 해 왔다. 밖으로 나오라고 하길래 그냥 집으로 불렀다. 이수의 집에 놀러 온 유진은 양손 가득 맥주를 들고 왔고,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캔을 땄다.
“재희가 그렇게 말했어? 뭐, 판단이야 네가 하는 거지만……. 진짜 오해 아니야? 이수야, 나는 걔가 그렇게 나쁜 애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 오래 본 건 아니지만 여태 가식적이라는 생각은 한 적이 없어.”
“확실해?”
“알잖아.”
기업형 조폭인 대감 그룹의 막내딸인 신유진은 어릴 적부터 주변에서 많은 견제를 받아 왔다. 이 사람 저 사람 뭔가를 노리고 달라붙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들 중에는 악의를 품은 사람도 여럿이었다.
그 때문에 유진은 주변인을 잘 살필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성장 과정을 거치며 사람 보는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유진이 틀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겠다.
“너… 자꾸 재희한테 마음 약해지고 그러지 않아?”
맥주를 네 캔째 비우던 유진이 문득 그렇게 물었다. 이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로 뜨거워진 눈알만 도르륵 굴렸다. 얼핏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여태 이수와 이런 식으로 트러블이 있었던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신입생 환영식 때 이수가 뺨을 갈겼던 선배도, 과제 때문에 멱살 잡고 싸웠던 동기도, 역시나 과제 때문에 쌍욕을 퍼붓고 싸웠던 타과생도 있었는데 그들과 그렇게 된 후 이수는 단 한 번도 그들의 인성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철회하거나 수정하려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차재희는 왜? 그 의문에 유진은 생각지도 못했던 답을 던졌다.
“재희 말이야. 네가 아는 누구랑 닮았어.”
“누구?”
“글쎄…….”
이수는 술을 마시면 절제력이 바닥을 드러내는 타입이었다. 졸음, 짜증, 호기심, 뭐든 참지 못했는데 특히나 궁금한 건 무조건 답을 알아야 했다.
대체 누굴 닮았단 말이지. 이수는 주변인을 포함해 알고 있는 학우들의 이름을 전부 다 외쳐 봤지만─10명 중 7명은 이름이 틀렸다─, 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는 말만 던졌다.
궁금증이 풀리지 않으니 짜증이 났고, 나중에는 서로 쿠션을 집어 던지며 다퉜다. 낄낄거리던 유진은 새벽 1시가 되어서야 잠들었다. 그녀가 게스트 룸으로 들어간 후 이수는 소파에서 그대로 눈을 붙였다.
아침 7시, 얼굴을 핥는 리키로 인해 눈을 뜨니 죽을 맛이었다. 시간 맞춰 출근한 가사 도우미에게 늘 먹던 메뉴가 아닌 뜨끈한 수프를 부탁했다.
뜨거운 물로 오랫동안 씻고 나오니 8시가 좀 넘어 있었다. 독서 문화 수업은 11시 시작이었기 때문에 시간은 충분했다. 제집인 양 배를 긁으며 나오는 유진과 아침을 먹고, 자전거를 타고 아파트 상가에 있는 병원에 들렀다. 손바닥의 상처를 보고 의사는 뭐 이런 거로 왔냐는 듯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수가 해 달란 대로 항생제 연고와 소염제까지 약을 지어 줬다.
“아……. 돌팔이 새끼.”
마취 연고를 달라고 해야 했나. 그립 핸들을 잡는 손바닥이 병원에 들르기 전보다 아릿했다. 그러나 굳이 차를 끌고 갈 마음은 들지 않아 그대로 학교로 향했다.
날씨가 얄궂거나 화요일처럼 풀강이 아닌 날에는 대부분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이수는 한평생 창밖으로만 접했던 계절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을 좋아했다.
눈이 멀어 버릴 것처럼 화창한 날도, 작은 빗방울이 뺨을 때리는 날도, 속눈썹 끝에 서리가 맺히는 날도 그에겐 당연하지 않은 날들이었다. 여러 번 생사의 경계를 오간 이수는 결국 자신이 죽음과의 줄다리기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되는 그 순간들을 정말로 사랑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학교에 도착한 이수는 인문대 앞에 자전거를 세웠다. 안장에 걸터앉아 담배를 한 대 피우고, 화장실에서 손을 씻은 후 약을 대충 펴 바르고 강의실로 갔다.
수업까지 30분이나 남아 있었는데 문을 여니 창가에 앉아 있는 인영이 보였다. 햇살을 받아 내는 얼굴이 무표정했다. 굳게 다물린 입매와 단정한 머리칼을 바라보며 이수는 갈등에 빠졌다.
풀어? 말아?
풀자니 기세등등하게 쏟아 낸 독설이 마음에 걸렸고, 말자니 억울하다고 토로하던 매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이 아른거렸다.
“안녕하세요, 선배.”
때마침 차재희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강의실의 고요를 담백하게 가르는 음성이었다. 이수의 마음은 순식간에 한쪽으로 기울어 버렸다.
누구는 저 때문에 주말도 망쳤는데 저토록 낮고 평온한 목소리라니. 배알이 꼴린 이수는 대꾸 없이 그와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목요일에 던진 협박이 먹혀들었는지, 재희는 더 이상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문제는 수업이 끝난 후였다. 만나서 과제 이야기를 하기로 했는데 차재희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이수는 저도 모르게 살짝 긴장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빠져나간 강의실에서 마주 앉은 차재희는 여태까지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남들과 같이 이수를 대했다.
“……선배 생각은 어떠세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런데 독서 문화 축제라고 하면 다들 북 카페를 먼저 떠올리지 않을까요? 물론 선배 아이디어가 다른 학우들보다 연출적인 면에서 더 좋은 점수를 받긴 하겠지만, 전 조금 더 독특하게 뻗어 나가도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차피 실제로 진행하는 게 아니니까요. 여기 이 부분. 되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보시면…….”
축제 구성의 골조를 짜며 이수는 유진과 지혜의 말을 납득했다. 차재희는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면서도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알았고, 부드러운 워딩으로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리드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의 말대로 다정하고, 상냥했다.─그런데 그땐 대체 왜 그랬지?─
정말 과제에 집중하려는 건지 성가실 정도로 빡빡하게 굴기도 했는데, 이수가 슬쩍 짜증을 내도 너무 정중하게 ‘음, 저는 이게 더 낫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선배가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의견을 따를게요. 누가 맞고 틀린 문제가 아니니까요.’ 하고 할 말도 없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과 팀이 됐다면 2학점짜리 수업에 이 정도로 정성을 기울여야 하느냐고 욕을 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재희는 한 시간 내내 이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의견을 제시하고 받아들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오늘의 차재희는 아주 괜찮은 인간이었다. 박지혜만큼이나 괜찮았다. 서로 앙금만 없으면 앞으로 잘 지내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아무리 서이수라도 마음이 풀어질 수밖에 없었다. 애정 결핍이니, 자의식 과잉이니 말이 너무 심했나. 진짜 내 오해였나? 좀 미안해진 이수가 입을 열었다.
“차재희. 다음 수업 있어?”
“네. 경영 과학 세 시간 연강이에요.”
“잘됐네. 나도 컴개 세 시간 연강인데. 끝나고 저녁 사 줄게.”
이수로서는 흔치 않은 아량을 발휘한 순간이었다. 신유진의 말대로 차재희가 그가 아는 누군가를 닮아서인지 모르겠으나,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게 아니면 저번 주 월요일 이후로 그에게 실수─차재희의 주장이지만─한 적이 없어서 일 수도, 깍듯하고 정중하게 돌변한 태도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이수는 당연하게도 차재희가 수락할 거라고 생각했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어디서 몇 시에 만나자고 할까 고민하고 있으니 차재희가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흠 없는 목소리로 깔끔하게 거절한다. 이수가 멍하니 시선을 드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차재희가 보였다. 사선으로 내려다보는 눈길에 자연스레 불쾌감이 일었다. 인상을 찡그리니 재희는 고개를 꾸벅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
“프랑스어 수업 때 뵙겠네요. 안녕히 계세요.”
그러곤 강의실을 홀랑 나가 버렸다. 이수는 어쩐지 허탈한 심정으로 앉아 있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자신의 제안을 수락할 이유가 없었는데, 차재희랑 똑같은 짓을 해 버렸다. 귀가 빨개질 만큼 부끄러웠다.
그렇게 발표 준비가 시작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수의 마음속에는 한 줄기 의심이 남아 있었다. 이 새끼가 언제 돌변해 가면을 벗어던질지 몰라, 하면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팀플레이는 문제없이 흘러갔다. 두 번의 미팅을 성공적으로 끝낸 이수는 더 이상 재희와의 마주침이 껄끄럽지 않았다.
“근데 책 터널은 진짜 재밌을 것 같아요.”
“그런가.”
“홀로그램이나, 아니면 요즘 4D도 대단하잖아요. 트랙 만들어서 기차 같은 거 타고 천천히 움직이면서 이야기를 따라가는 거죠.”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던 이수가 액정 너머의 차재희를 바라봤다. 새까만 눈동자가 강아지처럼 반짝거렸다. 축제 메인 요소 이야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상상의 나라로 가 버린 후배는 퍽 기분이 좋아 보였다.
“선배는 어떤 동화가 좋을 것 같아요?”
독서를 특별하게 즐길 수 있는 공간에 대해서 대화하던 중이었다. 재희는 이수가 처음에 제안했던 ‘동화 속의 한 장면을 그대로 재현한 북 카페’ 아이디어를 각색해 동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책 터널을 구성하자고 말했다.
기발한 발상이었다. 특히 책 축제의 타깃인 아이들에게 좋은 반응을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재희의 질문에 고민하던 이수가 말했다.
“헨젤과 그레텔?”
“그, 계모랑 아빠가 애들 버리고 가는 내용인데 그걸요……?”
“축제에는 사람이 많으니까. 조약돌 따라가는 것처럼 정신 똑바로 차리고 길을 잃지 말라는 교훈을 주기에 좋지 않을까.”
전혀 좋지 않았다. 재희는 이 사람이 진심인가, 싶은 표정으로 이수를 바라보다가 그의 얼굴에 웃음기 하나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가 괜찮지? 하고 묻는 이수에 기겁하며 입을 열었다.
“그것도 좋은데 조금 더 밝은 분위기가 낫지 않을까요? 현실성을 살리기 위해서 과자 집 같은 거 실제로 만들면 좋겠지만 위생 문제도 있고, 그러니까. 음. 어린 왕자는 어때요?”
“걔 죽잖아.”
“아. 근데 헨젤과 그레텔의 마녀도 죽잖아요…….”
“…….”
뭐 어쩌라는 건지. 이수는 다섯 살짜리 아이들이라도 죽음에 대한 인식은 충분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등장인물이 죽어도 상관없다면 어린 왕자보다는 헨젤과 그레텔이 낫지 않나? 터널을 완주한 아이들에게 과자 집 만들기 키트 같은 걸 주면 좋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차재희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건 어때요?”
“그게 무슨 내용인데.”
“앨리스가 토끼 따라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면서 겪는 모험이에요. 진짜 토끼 나오면 귀엽겠다.”
“동물 학대야.”
심드렁하게 대꾸한 이수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책 터널 구성 동화는, 헨젤과 그레텔.’ 마음대로 적어 넣으며 터널을 공원 어느 쪽에 배치해야 할지 생각했다.
“동물 좋아하세요?”
“어.”
왼쪽? 아무래도 대기 줄이 길 테니까 번잡하지 않게 행사장 입구와 멀리 떨어진 쪽이 좋겠다. 재희와 너무 진지하게 토론하는 바람에 이수는 책 축제를 실제로 개최할 것처럼 몰입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공원의 지도를 그려 보는데 재희가 물었다.
“고양이도 좋아하세요?”
“어.”
구성은 이쯤 하면 됐다. 정리된 목록만 봐도 축제의 전체적인 모습이 눈에 훤했다. 발표할 때 설명만 잘하면 A+는 문제없을 것 같았다. 이수는 시계를 확인했다. 2시가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다. 점심을 먹으러 갈 시간이었다.
“선배, 혹시…….”
“야.”
“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쓸데없는 말이 많아.”
여태 차재희가 한 말 중 과제와 관련이 없는 건 방금 전의 질문, 딱 두 개뿐이었다. 하지만 이수에게는 그것도 과했다. 싸늘한 지적에 재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시선을 내리깔며 머쓱하게 죄송해요, 하고 웃더니 노트와 공책을 덮었다.
“나 간다.”
“같이 가요, 선배.”
강의실에서 헤어지고 담배를 피우러 갔다가 마주친 이후, 재희는 대화가 끝나면 당연하단 듯 이수의 뒤를 쫓았다. 사실 쫓는다는 말도 애매한 게 어차피 재희 또한 항상 가는 곳이었다.
인문대와 경영대의 좁은 벽 사이에 있는 흡연 구역엔 사람이 몇 없었다. 이미 6교시 수업이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수는 인문대 벽에 몸을 기댄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재희는 늘 그래 왔듯이 옆도 아니고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항상 그곳에 섰다. 거리를 두는 사람처럼, 혹은 얼굴을 마주 보고 싶은 것처럼.
“…….”
담배를 피우러 오면 늘 종알거리는 놈이 오늘따라 말이 없었다. 공학관까지 가기 귀찮아 점심을 거를 생각을 하던 이수는 그 낯선 침묵을 알아차렸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늘 단정한 얼굴이 어쩐지 시무룩해 보였다. 주인의 큰 소리에 괜히 놀란 강아지처럼 눈치를 보는 모습에 이수가 물었다.
“뭔데.”
“네?”
“아까 뭐 물어보려고 했잖아. 뭐냐고. 대답해 줄게.”
아까 한마디 해서 그런 것 같은데, 좋은 아이디어를 냈으니 이 정도쯤은 해 줄 수 있었다. A+ 앞에서 아량이 넓어진 이수의 물음에 재희가 환하게 웃었다. 흰 뺨에 팬 보조개에 눈길을 주고 있는데 웬 뜬금없는 질문이 던져졌다.
“선배, 혹시 고양이 주워 본 적 있으세요?”
고양이를 주워? 왜 저런 이상한 질문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치 대화의 물꼬를 트려는 듯한 느낌이 났다. 그러나 이수가 허용한 아량은 딱 질문 하나에 답변 하나, 거기까지였다.
“있어.”
“그럼 작년에.”
“거기까지.”
“……대답해 준다고 했잖아요.”
어쩐지 분한 표정의 재희가 심통이 난 표정을 지었다. 얼마 가지 못해서 평소대로 돌아오긴 했지만 불퉁한 기색을 완전히 지워 낼 순 없었다. 모래 위에 담배를 비벼 끈 이수가 경영대를 향해 걸으며 말했다.
“있다고 대답했잖아. 불만 있으면 다음부턴 질문을 모아서 한 문장으로 해.”
“…….”
작게 한숨을 쉰 재희는 말없이 이수를 따라왔다. 옆에서 쫄랑거릴 때마다 심각하게 귀찮았지만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목적지가 같았으니까. 경영대 과방을 향해 걷다가 재희가 문득 물었다.
“선배는 저한테 궁금한 거 없으세요?”
정말 말이 많다. 어떻게 저렇게 끊임없이 말을 걸 수가 있지. 하지만 사실 이수도 그에게 궁금한 게 딱 하나 있었다.
“있어.”
“뭔데요?”
“왜 맨날 웃고 다녀?”
화를 내도, 짜증을 내도, 욕을 해도, 차재희는 웃었다. 곤란할 때도, 머쓱할 때도, 다른 사람이라면 인상을 찌푸려야 할 때도 웃었다. 그게 참 신기했다. 감정을 숨기지 않는 이수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래도 추측은 해 본 적 있었다. 습관이거나, 자신을 숨기려 하는 거거나, 자신을 꾸미려 하는 거거나 그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어머니가 저 같은 사람은 많이 웃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웃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이수는 걸음을 멈췄다. 차재희를 빤히 올려다봤다. 너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순간 물어볼 뻔했지만 그 호기심은 금세 자취를 감췄다. 어지간히 꼴 보기 싫었을 때도 차재희의 단정한 미소는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구석이 있다고 느꼈었다. 웃는 게 예쁘니까 그랬겠지. 혼자 결론을 내린 이수는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Eugene
이수수 수업 끝남? 새언니가 근처에 놀러왔다가 훈제연어 샌드위치 만든 거 주고 갔는데 드쉴? 지혜랑 인문대 잔디밭에 있음!
14:12
과방이 있는 복도로 진입하기 전, 유진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훈제연어 샌드위치는 입 짧은 그가 곧잘 먹는 음식이었다. 이수는 바로 가겠다고 답장을 보내고 발길을 돌렸다.
“어디 가세요?”
“알 거 없어.”
“……목요일에 봬요, 선배!”
무심한 대꾸에도 소리 높여 인사하는 차재희를 두고 걸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을 걸 알았다. 쓸데없이 예의가 바른 차재희는 박지혜와 비슷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게 나쁘지 않았다.
* * *
3월의 마지막 주 월요일.
언제나처럼 수업이 끝난 후 과제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였다. 차재희가 교수님과 면담이 있다면서 잠깐 학과 사무실에 다녀오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점심 먹을 시간이 없어지는데.”
“아…….”
재희가 난처하게 뺨을 매만졌다. 전임 교수인 김영경 교수를 만나러 간다고 했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김영경 교수는 은근히 말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또 수업이 끝난 저녁에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웬만하면 과제로 인한 일은 6시 이전에 해결하고 싶었다. 무심히 시계를 확인한 이수가 제안했다.
“그럼 나 공학관 레스토랑에 가 있을 테니까, 끝나고 거기로 와. 밥 먹으면서 얘기해.”
“…….”
“싫으면 말고.”
이전처럼 거절하려나, 싶어서 덧붙이니 재희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왠지 모르게 상기된 뺨으로, 입술을 깨문 채 웃더니 조심스레 되묻는다.
“그래도… 돼요?”
“너만 괜찮으면.”
“좋아요! 저는…….”
좋아요. 한 번 더 덧붙이는 목소리가 수줍었다. 이수는 말간 웃음을 띤 얼굴을 보다가 가볍게 웃었다. 은근히 아이 같은 면이 있었다.
두 사람은 강의실을 나와 헤어졌다. 이수는 곧바로 공학관으로 가서 메뉴를 주문하고, 이따가 일행이 도착하면 음식을 내어 달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노트북을 꺼내 다른 과목의 과제를 처리했다. 자료 수집에 골머리를 앓고 있을 무렵 뒤에서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수도 김영경 교수와 면담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꽤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차재희는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돌아왔다.
“죄송해요. 오래 걸렸죠.”
가쁜 숨을 내쉬며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는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 엉망이었다. 뛰어온 듯했다. 굳이 안 그래도 됐는데.
이수는 노트북을 치우며 서버에게 음식을 내어 달라고 눈짓했다. 기다란 유리잔에 새로운 물이 채워지는 동안 차재희는 손수건을 꺼내 땀방울을 닦아 내고,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했다. 젖은 채 위로 쓸어 올려지는 머리칼 사이로 하얀 이마가 드러났다. 무심결에 그 이마가 예쁘다고 생각한 이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힐끗, 기민하게 알아차린 재희가 눈치를 본다.
“그, 면담은 빨리 끝났는데 이거 때문에 학생회관 제본소 잠깐 들르느라 늦었어요. 죄송해요.”
“됐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이게 뭔데?”
재희가 가방에서 웬 카탈로그를 꺼내 들었다. 옥장판이라도 팔려는 건가. 의심스럽게 받아 들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이수와 재희는 한 달 동안 독서 문화 축제를 구상했다. 실제로 존재하는 공원을 토대로 행사장의 위치와 독서 터널의 전개도 따위를 작성하기도 했다. 재희가 건넨 것은, 바로 그 독서 문화 축제의 팸플릿이었다.
두꺼운 종이 위에 심플한 글씨체로 ‘SNC BOOK FESTIVAL’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커버를 펼치니 안쪽에는 상세하게 그려진 축제장의 지도와 안내 문구가 보였다. SNC, 서이수와 차재희의 이니셜을 딴 것 같았다. 손끝으로 글자를 매만지던 이수가 재희를 바라봤다.
“귀여운 짓을 했네.”
그렇게 칭찬하는 이수는 드물게 미소를 띤 채였다. 이런 걸 준비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아주 기특했다. 열심히 한다더니 정말로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이수의 반응을 살피던 재희는 눈이 마주치자 허둥지둥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 질주의 열기가 남았는지 귓가가 아직까지 빨갰다. 그 순진한 얼굴에서 가식적인 면모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한 달 만에, 이수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순순히 인정했다. 차재희는 괜찮은 인간이다.
그러나 대망의 발표 날. 그 괜찮은 인간은 잠수를 탔다.
발표 일주일 전.
이수와 재희는 언제나처럼 빈 강의실에서 얼굴을 맞대고 앉았다. 그들이 구상한 독서 문화 축제는 실제로 주최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상세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지도와 포스터는 물론, 재희가 만든 축제 팸플릿이 교수님을 포함한 수업 인원만큼 프린트되어 준비되었다.
PPT는 이수가 만들었고, 발표는 차재희가 하기로 했다. 자신 있다고 맡겨 달라는 말에 군말 없이 오케이한 포지션이었다. 서이수 본인도 자신이 설명하는 것보다는 차재희가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이야기하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배, 이거 USB 제가 들고 갈게요. 집에서 연습해 보게요.”
“어.”
“백업 파일 있죠?”
“집에서 쓰는 컴퓨터에 있는데, 그거 안 가져오면 어차피 소용없잖아. 그러니까 잃어버리지 마.”
교수가 발표 자료와 PPT 파일을 넣어 제출하라고 나눠 주었던 USB였다. 발표 당일에 내지 않으면 과제는 미제출로 처리하겠다고 경고했다.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다른 놈이었다면 발표자였더라도 USB를 절대 넘겨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수는 차재희를 믿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월요일.
‘오늘은 좀 늦나 보네.’
수업 시간 30분 전, 강의실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이수는 차재희를 의심하지 않았다.
‘과방에 들렀다가 오나.’
수업 시간 20분 전, 여전히 아무도 없었지만, 서이수는 차재희를 의심하지 않았다.
‘화장실 갔나?’
수업 시간 10분 전, 서이수는 차재희를 의심하지 않았다.
‘……설마.’
수업 시간 5분 전, 서이수는 차재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닐 거야.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서이수는 현실을 부정했다.
‘씨발…….’
다시 한번 걸었다. 받지 않았다. 서이수는 배신감에 휩싸였다.
‘이 씹새끼.’
교수님이 들어오고 난 후, 텅 빈 옆자리를 응시하던 이수는 분노를 삼켰다. 책상 밑으로 휴대폰을 든 채 ‘독문 과제 팀원’에게 메시지와 전화를 수도 없이 날렸으나 1 표시는 사라지지 않았고, 전화를 받는 일도 없었다. 개새끼. 좆같은 새끼…….
차재희를 믿은 인간이 등신이었다. 배신감에 이가 갈렸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수는 차재희의 이름을 뺀 PPT를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뒤통수를 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습관적으로 대비를 한 것이었다. 차재희의 이름을 지우면서도 이걸 쓸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대가 컸던 만큼 충격도 컸다.
씁쓸한 화를 억누르며 이수는 메일함에 든 파일을 확인했다. 증발해 버린 누군가와 다르게 멀쩡히 잘 있었다. 팀원이 잠수를 타서 USB를 갖고 오지 못한 거니, 교수가 그 정도는 고려해 줄 것 같았다.
이수는 발표지를 보며 순서를 기다렸다. 그러나 두 시간의 수업이 끝나 갈 때까지도 교수는 이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다음 주로 밀리는 건가? 설마 아니겠지. 의아하게 생각하며 기다렸는데 수업 종료를 20분 앞두고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
“발표가 어쩔 수 없이 다음 주로 미뤄진 팀이 있어서, 김민영 학생이랑 최철호 학생은 오늘 급하게 발표하게 됐습니다. 준비가 다 되었다고 말해서 한 주 앞당긴 건데, 완성도가 조금 떨어져도 참작은 하겠습니다. 시작하세요.”
말을 끝낸 교수는 이수를 보며 사정을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뭐야? 지금 우리, 아니 내 발표 이야기하는 건가? 어처구니없어진 이수는 헛헛한 웃음을 흘렸다.
차재희는 말없이 잠수를 탔고 자신은 혼자 발표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교수는 어쩔 수 없이 미뤄졌다고 말한다. 느낌이 꼭 이미 협의가 되었다는 말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수는 차재희가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글부글, 속이 끓어오른다. 그러는 사이 마지막 팀의 발표가 끝났고, 이수는 강의실을 나가는 교수를 붙잡았다.
“교수님.”
“아, 서이수 학생. 아쉽겠어요. 오늘인 줄 알았을 텐데.”
“네, 저도 오늘인 줄 알았는데요.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을까요?”
“음?”
그 말에 교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차재희 학생이 분명 서이수 학생에게 연락한다고 했는데, 못 받았나요? 오전에 엘리베이터에 갇혔다기에 다음 주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엘리베이터에…….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엘리베이터에 갇혀? 아니 뭐 그런 변명을 믿었단 말인가? 이 교수는 호구인가? 그딴 거짓말을 믿게? 이수는 제자리에 선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차재희가 교수에게만 연락하고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은 이유는 명백했다. 한번 열받아 보라고, 엿 먹어 보라는 거지. 씨발.
짜증이 차올라서 사고가 힘들었다. 빈 강의실에서 한참 동안 마음을 가라앉힌 이수는 가방을 들쳐 메고 흡연 구역으로 내려갔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과방에 가 볼 생각이었다.
건물을 나와 걸어가며 차재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경영대와 인문대 건물의 틈새로 들어간 순간, 저 멀리서 동기들과 웃으며 떠들고 있는 차재희를 발견했다.
뚜르르르. 신호음은 가는데……. 차재희 저 씨발 새끼, 전화 안 받고 뭐 해? 기가 차다 못해 혈압이 오르는 심정으로 그를 주시했다. 느낌상 통화가 소리샘으로 연결되기 직전, 차재희가 전화를 받았다. 한 손에 든 담배 끝에선 연기가 피어오르고, 조금 얇아진 롱 코트를 입은 채 반듯하게 선 그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맺혔다. 반면 이수의 입 안엔 욕설이 맺혔다. 가증스러운 새끼. 한 달 동안 속이느라 고생 많았네.
“어, 재희야.”
이를 악물고 부르니 차재희가 인상을 찡그리며 휴대폰을 떼어 냈다. 발신자를 확인하곤 다시 귀에 갖다 붙인다. 급할 것 없이 느릿한 손길로 연초를 한 모금 빨고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 네, 선배.
“어디야?”
─ 음, 저 경영대요. 수업 끝나셨어요?
“끝났지…….”
수업 끝났냐고? 경영대라고? 지금 전화 받자마자 무릎 꿇고 죄송합니다, 선배님. 해야 할 상황 아닌가? 이수는 그가 뒤늦게라도 그런 말을 하길 기다렸다. 과제는 어차피 다음 주로 미뤄졌으니 괜찮았고, 순수하게 팀원인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배신감과 짜증을 느낄 뿐이었다. 사과를 한다면 받아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차재희는 그의 기대를 또 한 번 배반했다.
─ 그러셨구나. 그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 다음 주에 봬요.
그러……. 그러셨구나?
상냥하고, 말 잘 듣고, 믿음직스러운 차재희. 그렇게 정의하고 정립해 두었던 관계가 와장창 깨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수는 일찍이 이토록 복잡한 분노를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수많은 감정으로 뒤범벅되어 화가 나기도 하고 웃음이 나오기도 하는, 동시에 머리끝까지 열이 오르는 듯한 느낌은 살면서 처음 겪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망설임 없이 차재희를 향해 걸어갔다. 이야기를 나누던 차재희와 동기들이 다가오는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이수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어, 안녕하세요!”
그러고 보니 다른 애들은 선배님이라고 ‘님’ 자를 꼬박꼬박 붙이는데, 차재희는 한 번도 선배님이라고 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건방진 새끼. 진작 알아봤어야 하는데. 이수는 속으로 욕을 씹으며 웃었다.
“안녕. 재희는 방금 전화했다고 인사도 안 하는 거야?”
멍하니 이수를 바라보던 재희는 그 말에 그제야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배. 어느샌가 익숙해진 그 인사에 이수의 웃음은 더욱더 진해졌다. 재희가 과제에 대해 입을 열기 전에 그가 먼저 선수를 쳤다. 차재희의 수법은 파악했다. 두 번 당해 주고 싶지 않았다.
“미안한데 내가 과제 때문에 재희랑 할 말이 있어서. 자리 좀 비켜 줄래? 말이 길어질 것 같은데 옆에서 기다리기엔 날이 춥잖아.”
차재희를 한번 따라 해 봤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지만 뭐가 좋은지 후배들은 아, 네네! 하고 말 잘 듣는 병아리들처럼 종종거리며 경영대로 들어갔다.
굳은 표정의 차재희는 이수가 말을 꺼내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수는 일단 담배를 꺼내 물었다. 폭력을 행사하지 않기 위해서 니코틴이 절실했다. 차재희와 멀리 떨어진 인문대 외벽에 기대고 선 채, 침묵하고 있는 팀원을 바라봤다.
변함없이 단정한 얼굴, 찬 바람에 조금 상기된 뺨. 새까만 눈동자에 보기 좋은 입술까지 만나는 모든 이의 호감을 살 만한 외모였다. 저 얼굴로 왜 내 호감 살 생각은 안 하지? 그런 생각이 치밀었을 땐 이미 욕설이 터져 나간 다음이었다.
“진짜 좆같네.”
“……왜 그러세요?”
“왜 그러세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는 차재희의 말을 이수가 따라 했다. 깊숙이 빨아들인 담뱃대가 절반 가까이 타들어 간다. 한숨을 쉬듯 연기를 내뱉은 이수가 두통이 이는 이마를 더듬거렸다. 이렇게까지 짜증이 난 건 오랜만이었다. 1학년 기말 과제 때문에 동기와 멱살을 잡고 싸운 이후로는 없었다.
관자놀이를 꾹꾹 문지른 이수가 재희에게 물었다.
“몰라서 물어, 지금?”
“몰라서 묻는 거예요. 화나셨네요?”
“니가 뭐라고 내가 화를 내? 씨발, 짜증 나서 그러지.”
그 말에 차재희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 꼭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었다. 순진하다고 생각했는데 모조리 착각이었다. 이게 어디서 내숭을 떨어. 이수가 한껏 비꼬는 말투로 물었다.
“차재희 씨, 고장 난 엘리베이터를 타셨어요?”
“네. 고장 난 엘리베이터를 타 버렸어요.”
유치원인 줄 아나. 성실하게 말을 따라 하는 차재희 어린이를 보며 이수는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서 교수님한테 연락했고요?”
“네. 교수님한테 연락드렸어요. 오늘 제시간에 못 갈 것 같다고.”
“그다음은요.”
“네?”
자신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한 달 동안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의견을 나눈 팀원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그걸 모를 리가 없다.
차재희니까. 서이수가 자신의 오판을 인정할 정도로 배려심 많고 다정한 차재희니까 당연히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차재희는 연락하지 않았다. 문자도 한 통 보내지 않았다.
순간 ‘저, 잘할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웃던 말간 얼굴이 떠올랐고, 이수는 불쾌감에 절여졌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에 속이 울렁거렸다.
“재희야.”
그 부름에 차재희는 불안한 듯 바닥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게 사람을 더 열받게 하는지도 모르고 어색하게 눈을 접어 웃는다. 배신감에 젖어 든 이수는 감정의 파도에 속절없이 휩쓸렸다.
“봐줬더니 진짜 좆같이 군다, 너.”
“선배.”
“씨발, 귀여워해 주는 데도 한계가 있어.”
“선배가 언제 저를 귀여워했다고 그러세요.”
따박따박 받아치는 말대꾸에 기가 막혔다. 이게 귀여워해 준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이수는 남들과는 다르게 과제를 하며 재희에게 칭찬을 해 주었고─‘나쁘지 않아’─, 아무런 의심 없이 USB도 맡겼으며─습관적으로 자기 이름만 박힌 PPT를 만들긴 했지만─, 밥을 사 주기도 했다─한 번이지만 시도는 두 번이었다─.
그것뿐인가, 처음의 사건이 자신의 오해였음을 인정하고 차재희를 좋게 보는 중이었다. 과제를 이대로 잘 끝냈다면 형 동생 하는 사이 정도는 될 수도 있었다.
이수와 그렇게 지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감안하면 그로서는 차재희를 엄청나게 귀여워한 셈이었다. 그런데, 언제 저를 귀여워했느냐고? 말문이 막혀 쳐다보고 있으니 재희가 담뱃불을 붙이며 입을 열었다.
“저한테 맨날 욕하고 짜증 냈잖아요.”
그게 귀여워하는 거예요? 그런 물음이 담긴 말이었다. 과제 이야길 하다 의견이 맞지 않을 때면 씨발이라는 감탄사를 내뱉곤 했다. 거기에 대곤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하거나 찔린 게 아니라, 원래 이런 사람인 걸 어쩌란 말인가.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널 귀여워하면 나라는 인간의 본질이 바뀌기라도 해? 꼬우면 너도 해.”
“진심이세요?”
“아니, 씨발.”
말하다 보니 어이가 없었다. 왜 이딴 이야기를 하고 있지? 그렇게 느낀 것은 이수뿐만이 아닌 듯했다. 미간을 찡그린 재희가 물었다.
“근데 왜 화나신 거예요? 아직도 모르겠어요. 이번 주에 발표 못 해서요?”
“그래. 그거. 왜 내가 내 발표 뒤로 미뤄졌다는 소릴 교수님한테 들어야 해?”
따지고 드는 이수의 음성에 서운함이 묻어났다. 희미해서 본인조차도 느끼지 못했지만.
“교수님 말고 나한테 먼저 연락했으면 내가 대신 발표했을 거야. 완벽하게 준비된 걸 다음 주까지 끌고 갈 이유가 없으니까. 교수님이 네 상황 이해해 주신 만큼 내가 발표했어도 됐겠지.”
그 말에 차재희가 다가왔다. 멀리 있을 땐 얼추 맞았는데 가까워질수록 높아지는 시선이 이수는 불편했다. 인상을 구기며 쳐다보니 근처에서 멈춰 선다. 그는 순수한 의문이 서린 얼굴로 이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만약 연락받았으면, 선배가 대신 발표했을 거예요?”
“어.”
“PPT가 없는데 어떻게요?”
의문이 담긴 질문에 이수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등신이야? 메일로 원본 보내 놨어.”
“어차피 USB 없으면 소용없잖아요. 근데 왜 보내 놨어요?”
그걸 몰라서 묻나? 그런 표정으로 쏘아봤다. 그러자 재희는 가만 생각하는 듯하더니 픽, 짧은 웃음을 흘렸다. 궁금증을 띠던 얼굴이 실망으로 이지러졌다.
“선배, 날 못 믿었구나. 내가 안 올 수도 있으니까, 그때는 USB가 없어도 교수님이 괜찮다고 하실 테니까……. 그래서 보내 놓은 거죠?”
“내가 너를 어떻게 믿어? 하는 짓을 봐. 안 믿길 잘했지.”
“혹시 거기 내 이름 뺀 버전도 있어요? 그건 아니죠?”
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잘못은 자기가 한 주제에 따지고 드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까짓 게 뭐라고 내가 100% 신뢰해야 해. 그렇게 주장하려 했지만, 이수는 사실 재희를 온전히 믿었었다.
두 종류의 PPT를 메일에 보내 둔 것은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서였다. 정말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만들면서도 차재희 때문에 쓸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이 정도면 병이라고 자조했었다. 그것도 모르고 차재희는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있었나 보네요. 선배는 진짜…….”
“니가 그걸 따질 권리가 있어? 그래서, 결국 넌 나한테 연락 없이 잠수 탔고 날 물 먹였어. 팀원한테 기본적인 배려도 없는 새끼를 내가 왜 믿어 줘야 해? 의심을 확신하게 한 사람이 너야, 차재희.”
불신이 가득한 말에 재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포근한 섬유 유연제 향과 옅은 담배 냄새가 밴 체취가 이수를 덮친다. 그게 낯설지 않다고 느껴지는 이 순간이 불편했다.
차재희의 속셈이 빤히 보였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오해하게 만들고, 사람들 앞에서 화내게 만들어서 또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려는 거겠지. 우습지도 않았다. 같은 짓에 두 번이나 당할 바보는 아니었다.
이수는 입에 칼을 물고 기다렸다. 무슨 개소리든 받아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난 후 재희가 망설이다 꺼낸 말은 이수가 예상치 못했던 사과였다.
“제가 한 번 더 확인했어야 하는데. 미안해요, 선배.”
“……뭐?”
“저 선배한테 연락했어요. 메시지 보냈는데…….”
기준에 한참이나 못 미치는 허접한 변명이었다. 이수가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이게 어디서 약을 팔아.”
“잠깐만요.”
차재희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잠금을 해제하고 메신저를 켠다.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 수백 개가 쌓인 틈새에서 그가 이수와의 대화창을 열었다. ‘이상한 선배’라고 저장된 이름이 보였지만 무시했다. 그는 ‘차재희’를 ‘독문 과제 팀원’으로 바꾼 지 오래였다.
“아……. 메시지… 보내셨네요. 죄송해요, 못 봤어요.”
작게 중얼거린 재희가 이수에게 제 휴대폰을 건넸다. 연기가 수준급이었다. 이수는 별 지랄을 다 한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넘겨받았다.
여기까지 읽으셨습니다.
이상한 선배
차재희, 너 왜 안 와?
11:00
⁝
이상한 선배
야, 전화 안 받아?
11:17
⁝
이상한 선배
야
11:28
이상한 선배
씨발 장난쳐?
11:29
이상한 선배
차재희?
11:32
이상한 선배
뒤지셨어요?
11:39
이상한 선배
씨발놈아
11:48
이상한 선배
진짜 좆 같다
12:00
이상한 선배
차재희
12:04
이상한 선배
사고났냐?
12:05
이상한 선배
대답 좀 해
12:08
이상한 선배
이새끼가 뒤졌나, 진짜
12:38
너 왜 안 와? 제일 처음 보낸 메시지 아래로 이수가 보낸 욕설 수십 개가 주르륵 떠올랐다. 그리고 맨 밑, 차재희가 전송하려 했던 동영상과 짤막한 문단이 눈에 들어왔다.
전송 실패, 빨간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뭐야, 저거. 이수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노려봤다.
전송실패
[동영상]
전송실패
선배, 교수님한테는 연락 드렸어요. 죄송합니다. 다음 주에 잘 할게요ㅠㅠ
“메시지를 보냈는데… 전파가 안 터져서 안 갔나 봐요. 교수님이랑 전화할 땐 멀쩡해서 갔을 줄 알고 꺼 버렸는데……. 죄송해요, 선배. 제 불찰이에요.”
힘없이 말한다. 믿을 수 없는 특수 효과처럼, 그 호소감 짙은 목소리에 이수는 가슴 언저리에 뭉쳐 있던 울화가 탁 풀려 버리는 것을 느꼈다. 짜증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의 눈치를 보며 차재희가 동영상을 재생해 보여 줬다.
비상 전원이 들어온 엘리베이터의 전광판에는 ‘EMERGENCY’라는 글자가 떠돌았다. 승강기가 멈춘 것을 확인시켜 준 차재희가 말했다.
『선배, 집에서 내려가는 중인데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멈춰 버렸어요. 연락했는데 한 시간이 넘게 걸린대요. 그래서 수업 시작 전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교수님께는 제가 영상 통화 걸어서 다음 주로 발표 미뤄도 된다는 확언 받았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수업 때 못 보겠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선배.』
붉은빛이 점멸하는 틈새로 울림 없이 정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영상의 재생이 끝난 후에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이딴 변명을 믿는 교수가 호구라고 생각했었는데, 믿지 않고서는 못 배길 상황이었다.
영상 통화까지 걸어 가며 확인시켜 주는데 어느 누가 발표를 미뤄 주지 않을 수 있을까. 상심한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려 가며 죄송해요, 교수님, 하고 말했을 차재희를 상상하니 교수의 반응이 당연한 것 같았다.
허탈함 뒤에 찾아온 것은 민망함과 그로 인한 짜증이었다. 이수가 아까보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동영상은 전송 끝날 때까지 확인 안 하면 전송 실패 잘 뜨는 거 몰라?”
“몰랐어요.”
“교수님한테는 전화해 놓고 나한테는 왜 메시지 보냈는데? 전화했으면 받았을 거 아니야.”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선배가 메일이랑 메시지로 대화하자고 말했던 게 생각나서 일부러 안 했어요. 통화는 불편해하시는 건가 싶어서요.”
“아까 내 전화는 왜 늦게 받았는데?”
“잘못 거신 줄 알았어요. 지금까지 저한테 전화하신 적 없잖아요.”
준비라도 한 것처럼 술술 흘러나오는 대답이었다.
아, 짜증 나. 혼자 열을 낸 것이 우스워져 이수는 이마를 짚었다. 이러나저러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였다. 일부러 그랬든 아니었든 간에 이수는 그때 과방에서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마치 혼자만 나쁜 사람이 된 기분.
비슷한 상황이 두 번이나 이어지는 게 정말 우연일까? 엘리베이터, 전파, 전송 실패. 그럴듯한 개연성이었지만 어딘가 찜찜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게다가 타인으로 인해 감정이 요동치는 것은 이수에게 정말 낯선 상황이었다. 변화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가 일었다. 어떤 이유로든 간에 자신이 자꾸만 생각을 바꾸게 만드는 차재희가 불쾌했다.
이렇게는 안 된다. 형이고 동생이고 나발이고, 차재희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빠르게 결심한 이수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네 사정 알겠고 다음 주엔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어.”
“그럼 이제 화 푸시는 거예요? 진짜 죄송해요…….”
표정이 밝아진 재희가 상기된 낯으로 웃었다. 순진해 보이는 말간 얼굴을 보며 이수는 또 속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죄 없는 놈을 미워하는 것 같아서 그게 정말 싫었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앞으로 어울리지 않으면 느낄 일도 없는 감정이었다.
“아니, 우리 과제 끝나면 상종하지 말자. 나, 너 불편해.”
“…….”
“대답. 안 해?”
차재희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입을 조금 벌린 채 말이 없었다. 팔자로 휘어지는 눈썹을 보던 이수는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더 있으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뗐다. 그가 흡연 구역을 벗어날 때까지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 * *
4월 셋째 주, 차재희가 자신했던 것처럼 발표는 성공적이었다. 침묵 위에서 정직하게 뱉어지는 그의 목소리는 청자의 집중력을 최대한으로 발휘시켰다. 신경 써 만들었던 팸플릿과 축제 포스터, 안내 지도도 교수에게 엄청난 호응을 끌어냈다. 늘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수업에 임하던 교수가 활짝 웃으며 박수를 쳐 댔으니 말 다 했다.
수업이 끝난 후, 이수는 재희와 나란히 선 채 사진까지 찍었다. 그들을 모범으로 삼아 다음 학기 수강생들이 더 뛰어난 과제를 제출해 주길 바라며 우수 과제 제출자로 등록하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선배.”
교수가 강의실을 떠나자마자 재희가 이수를 불렀다. 그러나 이수는 대꾸하지 않고 백팩을 챙겨 떠났다. 과제는 끝났고, 더는 차재희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많았다.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데, 반대로 아니 불 세 개면 사람을 죽이고도 남지 않겠는가. 이수는 차재희를 볼 때마다 불안하고, 불편하고, 불쾌한 상황에 직면하는 게 싫었다.
또한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고야 마는 차재희의 저 태도에 환멸이 났다. 분명 상종하지 말자고 하지 않았나, 귓등으로 듣지도 않는 행태에 열이 뻗쳤다. 그러다 보니 차재희에 대한 평가는 다시금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중이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피곤했다. 이수는 이제 정말 차재희를 상대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선배!”
뒤에서 차재희가 소리쳤다. 그러나 이수는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다음 수업인 컴퓨터의 개념 및 실습까지 두 시간이 비었는데, 신유진은 한 시간 후에나 수업이 끝났다. 공강 한 시간이면 밥을 먹을 곳은 학식뿐이다. 이수는 기다려 달라는 유진의 메시지를 가뿐하게 씹어 넘겼다.
점심을 먹으러 공학관으로 간다. 걸어서는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으나 자전거를 타면 금방이었다. 꽃샘추위가 물러난 교정은 활기가 넘쳤다. 한 달이 좀 지났다고 익숙한 듯 교정을 거니는 새내기들과 한창 인생이 재미있을 2, 3학년들 그리고 졸업을 앞둔 4학년들은 한데 어우러져 공간을 채워 나갔다.
그 사이에서 이수만 동떨어진 채였다. 세상과 유리되어, 자신만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혼자였던 이수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공학관 레스토랑에 도착한 이수는 여러 번 그러했듯 주문 기준인 2인분의 가격을 지불하고 코스 요리를 시켰다. 턱을 괸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메시지가 도착했다.
서이나
오빠
할아버지 위독하시대
13:18
서이나
올 거야?
13:19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친구인 유진보다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여동생이었다. 스무 살에 한국으로 완전히 들어오기 이전에는 얼굴을 몇 번 본 적도 없다. 지금도 1년에 네다섯 번 보는 사이인데 성격도 안 맞아서 가까워질 틈이 없었다. 그럴 생각도 없었고.
13:20
안 가.
답장을 보내자마자 전화가 왔다. 모친이었다. 조부의 일로 그에게 연락하기 미안해 서이나를 시켜서 메시지를 보낸 게 분명했다. 이수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네.”
─ 이수야.
“안 가요.”
─ ……그래도.
서이나는 모친 천수인을 빼닮았다.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력하며, 매정하고 독한 기질이 있다. 그 말은 천수인 또한 냉정하고 성질이 사납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 성격은 이수에게만큼은 통용되지 않았다.
병원에서 이수의 곁을 지킨 사람은 천수인이 아닌 유모였으며, 대부분의 날에 그녀는 한국에서 큰형 서이준과 여동생 서이나를 양육하느라 바빴다.
천수인이 어린 아들을 미국에 내버려 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언제고 심정지를 일으킬 수 있는 아들을 당장 의학적 조치가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게 할 수 없다는 게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는 이수의 조부인 서대영 때문이었다.
“기다리지 마세요.”
─ 이수야…….
이수의 나이 열 살, 원인 모를 세 번째 심정지를 겪었다. 천수인은 더 이상 그를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이준과 이나를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오려던 천수인을 붙잡은 것은 서대영이었다. 사람은 난 곳에서 자라야 한다며, 이수의 부친인 서훈도 한국에서 수학해 훌륭하게 자랐는데 굳이 미국으로 가려 하냐는 불호령을 내렸다.
이수는 미국 출생이다. 그러니 그 아이는 그곳에서 자라는 게 마땅하다. 그곳에는 서이수 하나, 이곳에는 서이준과 서이나 두 아이가 있으니 너는 한국에 있는 것이 합리적이다.
당시 서훈은 서일 그룹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가 평생을 일궈 온 목표였고, 그룹을 온전히 물려받기 위해선 서대영의 협조가 필요했다. 결국 천수인은 이수 대신 서훈과 한국에 남게 될 두 아이를 택했다.
“장례식 때나 연락해요.”
이수는 한국으로 들어와 서대영을 보았던 날을 기억한다. 옆에 선 아버지만큼이나 인상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인자하고 마음씨 넓어 보이는 얼굴과 달리 속은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과도 같았다. 필요하다면 핏줄마저도 도려낼 수 있을 만큼 냉정한 사람.
이수는 타인과 깊은 교류를 맺은 적이 없었기에, 누군가를 지극히 싫어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서대영을 처음 본 순간, 의도치 않게 튀어나온 감정은 그조차도 제어할 수 없었던 날것 그대로의 경멸이었다.
그의 부모와 조부의 차이점은 하나였다. 서훈과 천수인은 그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었지만, 서대영의 머릿속에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서이수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그저 남들에게 내보이기 좋은 손주가 하나 늘었다는 생각에 과시욕을 내비칠 뿐이었다.
‘뒤질 때가 되면 안 하던 짓을 한다더니.’
‘이수야!’
‘평생 한국에서만 살아오신 분이 수술하러 미국 간다는 말이… 씨발. 솔직히 웃기잖아요.’
말 그대로였다. 난 곳에서 자라야 한다며 이수를 홀로 내버려 두었던 늙은이가, 죽을 날이 가까워지니 그토록 좋아하는 한국 땅을 떠나 외국물 먹은 의사를 찾아간다던 말이 이수는 너무나도 웃겼다. 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그를 서훈도 천수인도 말리지 못했다.
조부는 그날 이수의 부모와 말다툼을 벌이다 쓰러졌고, 여태 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수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종종 서대영이 떠오를 때마다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 것을 두고, 그는 자신에게도 어쩔 수 없이 그 꼰대의 매정한 피가 흐르나 보다 생각하곤 했다.
“끊어요.”
입맛이 뚝 떨어졌다. 이수는 음식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한동안 바쁜 시간을 보냈다.
라테르에서 5월 말 업데이트를 발표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수의 길드원들은 새 힐러를 찾아 공개 파티를 누볐고, 끝내 완성되진 않았어도 완벽함에 대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힐러를 찾아냈다.
‘힐러’
클로즈 베타 때부터 플레이했다는 레어 닉네임의 힐러는 일단 피지컬이 좋았다. 라테르 홈페이지에서 체크할 수 있는 신체 반응 속도가 180ms로 프로게이머에 근접한 수치가 나왔고, 게임에 대한 이해도도 상당했다. 다만 랭킹 작업 파티에 익숙하지 못해 버벅거리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이수의 파티는 지금 그를 데리고 온갖 던전을 싸돌아다니는 중이었다.
타격
힐러ㄱ?
1:27
힐러
넵 ^_^ 금방 갈게요!
1:30
기본적으로 겜창이고, 성격도 모난 곳 없이 둥글고, 애가 좀 괜찮다. 저 정도라면 신규 던전 퍼스트 클리어는 무난하게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이수는 밤마다 라테르에 시간을 쏟아부었고, 낮에는 공부를 했다.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는데도 이상하게 도서관에서 공부할 땐 집중이 잘됐다. 시험 기간이 가까워지자 이수는 도서관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는 열람실이 아닌 비문학 쪽 서가에 자리를 잡는 편이었는데, 인적이 드물면서도 도서관 특유의 고요한 수선스러움이 느껴져 집중력이 최고로 끌어올려지는 곳이었다.
그렇게 이수가 도서관을 주기적으로 드나든 지 열흘이 좀 넘었을 무렵이었다.
“안녕하세요, 선배.”
불청객이 나타났다.
이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옆을 돌아봤다. 차재희가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헨리넥 셔츠에 슬랙스, 언제나처럼 단정한 차림이다. 그의 손에 들린 전공 서적과 노트, 펜 따위를 훑어본 이수는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지치지도 않나. 정말 징글징글한 새끼였다.
혹시 나를 따라온 건가? 설마, 아니겠지. 아무리 할 일 없는 놈이라도 이런 짓까지 할까. 이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며칠 정도는.
“일어나.”
이틀 동안 그의 맞은편에 앉은 건 우연이라고 칠 수도 있었다. 서가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그뿐만은 아니었으니까. 차재희도 책을 빌리러 왔다가 분위기가 괜찮은 듯해 자리를 잡았으리라. 그렇기에 이수는 그를 피하지 않았다. 무시하는 거면 됐지, 굳이 자리까지 옮겨 가며 그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요일 오후. 독서 문화 수업이 끝난 후 레스토랑에서 차재희를 또 마주쳤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설마 하는 생각이 더 컸다. 밥을 하도 잘 처먹기에 정말로 밥 먹으러 왔나 보다 싶었다.
화요일은 풀강이라 도서관에 가지 않았다. 다만 투자론이 끝나고 딱 한 시간이 비는지라 어쩔 수 없이 신유진과 학생 식당에 가게 됐는데, 그곳에서 당연한 것처럼 차재희를 만났다. 신유진이 눈치도 없이─혹은 일부러인지─같이 먹자고 부르는 통에 한 테이블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점심을 먹었다.
차재희는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고, 이수는 무시했다. 어쩐지 속이 불편해져서 밥 한 숟갈, 국물 한 입만 먹고 말았다. 그래, 뭐. 학생 식당이니까 학생이 있는 건 당연한 거지. 이수는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일어나라고.”
하지만 수요일 오후, 차재희가 반질반질한 낯짝으로 다가와 한약재 냄새를 풍기는 컵과 자몽 냄새가 나는 테이크 아웃 잔을 데스크 위에 올려 두었을 때는 이수도 짜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씨발놈이 대체 뭘 하자는 건지. 노트를 덮은 이수가 차재희를 쏘아봤다. 일어나라는 말에 반응이 없었다. 오른손에 든 펜을 굴리며 자신의 공책을 바라보기만 한다. 태연자약한 모습에 심기가 뒤틀린 이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재희.”
재희는 이수가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눈동자로 빤히 올려다본다. 얼핏 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낯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냐는 듯, 뻔뻔하게 묻는 시선에 이수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 얘기 좀 해.”
“왜요?”
왜요? 지금 왜요라고 했나? 기가 차서 내려다보니 말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겠다는 얼굴이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긴 이수가 그의 팔목을 붙들었다. 그리고 남은 손으로는 자몽 티가 담긴 테이크 아웃 잔을 들어 올렸다. 조금 전에 사 온 건지 표면이 아직 뜨끈했다.
음료 때문에 열이 오르는 손가락만큼이나 뜨거운 차재희의 피부를 느끼며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차재희는 종이 인형처럼 일어나 스르륵 그를 따라왔다.
1층의 흡연 구역으로 나가기 전, 이수는 출입문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컵을 던져 넣었다. 탁, 음료가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뒤에서 탄식이 들려왔다.
“선배, 진짜 이상한 거 알아요?”
도착하자마자 차재희의 손목을 내팽개치고, 담배에 불을 붙이는데 들려온 말이었다. 저건 또 무슨 수작이야. 이수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재희는 한쪽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입술 끝을 늘리고 서 있었다.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이수에게 손을 내민다. 어쩌라는 거냐고 쳐다보니 그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담배 빌려주세요.”
“나한테 지금 담배 빌려 달란 소리가 나와?”
“갑자기 끌려 나와서 못 갖고 나왔어요.”
“내 알 바 아니고. 너.”
왜 나 쫓아다녀? 그렇게 물으려고 했다. 그러나 재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근처에 선 남자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더니 단정한 미소를 지으며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 담배에 불까지 얻어 자리로 돌아왔다. 참, 가지가지 한다. 이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재희를 바라봤다. 한쪽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꼴이 굉장히 건방져 보였다.
“너, 왜 나 쫓아다녀?”
이수가 던진 질문에 재희는 코웃음을 쳤다. 차재희가 코웃음을 친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기에 이수는 이 새끼가 드디어 가면을 벗는구나 싶었다.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심정으로 그가 대답하길 기다렸다. 그러나 차재희는 여러 번 그리했듯 이수에게 쉽게 답을 내주지 않았다.
“그러는 선배야말로 저한테 왜 이러세요?”
“그걸 나한테 물으면 니가 제정신이 아닌 거지.”
“제 자몽 티는 왜 버리셨는데요?”
“……뭐?”
멍하니 반문하는 이수를 두고, 재희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제 자몽 티를 왜 버렸냐고 묻잖아요.”
“야.”
“설마 선배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 이렇게 나오시겠다?”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지 깨달은 이수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 위를 분홍빛 혀가 쓸고 지나간다. 빡쳤음을 분명히 드러내는 제스처였다. 그 장면을 지그시 바라보던 재희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두 잔 다 네 거였는데 내가 혼자 오해했다는 말이지, 지금?”
“네. 제가 왜 선배한테 자몽 티를 사다 바치겠어요. 선배가 뭐라고.”
“그래. 내가 오해했나 봐. 텅텅 빈 열람실 제쳐 두고 6층 구석에 있는 비문학 서가까지 찾아오고, 학식도 잘 처먹는 새끼가 공학관 레스토랑까지 쫓아오길래 나한테 할 말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거지? 다 우연이고, 내 착각이다?”
사람을 호구 등신으로 아나.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누가 봐도 의도가 명백한 상황인데. 이쯤 되어서 이수는 정말로 궁금해졌다. 나한테 이러는 목적이 대체 뭐지?
처음엔 차재희가 본인의 평판을 위해 자신을 이용했다고 생각했다. 인성으로 유명한─진실이 무엇이든─서이수를 이용하면 돌아오는 것이 많을 테니까. 그러나 이수가 생각하기엔 차재희는 첫날을 제외하곤 계속 리스크만 떠안고 있었다.
온갖 욕을 다 들어 먹고 있는데 이렇게까지 버티는 이유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투자 대비 저효율. 똑똑한 차재희가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아니면, 믿기지는 않지만 생각을 바꿔서 과방에서 차재희가 말했던 것이 진심이었다고 치자. 친해지고 싶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친분을 위해서 이런다기엔 지나치게 신경을 긁고 다닌다는 점이 거슬렸다. 대체 어느 누가 친해지고 싶은 선배를 저따위로 시건방지게 쳐다본다는 건지.
“같은 학교 다니는데 어떻게 안 마주쳐요? 자의식 과잉이에요, 그거.”
뻔뻔한 낯으로 그렇게 말하는 걸 보고 있자니 맥이 풀렸다. 어린애를 상대하는 것처럼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걸 보니 기분이 많이도 상했었나 보다. 이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실천하는 찌질한 후배와 눈을 맞췄다.
“작년에 비하면 올해는 마주치는 빈도가 희한하게 많은데 이것도 내 착각인가?”
“선배가 기억을 못 해서 그렇지, 작년에도 여러 번 봤어요.”
“아, 네. 그러시겠죠.”
이수는 작년의 자신이 궁금해졌다. 차재희한테 무슨 짓을 했지? 욕이라도 퍼부었나? 무슨 실수를 저질렀나?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작년 일에 대해 차재희가 은근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지나간 일을 굳이 묻고 싶지는 않았다. 이수는 담뱃재를 털어 내며 그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지랄할 건데.”
“전 지랄한 적 없어요.”
“말꼬리 잡지 말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좋은 말로 물어볼 때 대답했으면 좋겠는데.”
그 말에 재희는 짧은 웃음을 흘렸다. 땅을 내려다보며 어이없다는 듯 눈을 굴린다. 그의 벌어진 입술 새로 흰 연기가 어지러이 흩어졌다. 그 너머로 재희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수는 재킷 주머니에 양손을 쑤셔 넣고 기다렸다. 그러나 잠시 후 재희가 던진 말은 이수가 기다리던 답변이 아니었다.
“언제까지 이 지랄 할 거냐는 게 좋은 말이에요?”
“이 새끼는 뭘 물어보면 대답을 제대로 하는 법이 없어.”
짜증이 확 솟구친 이수가 미간을 구겼다. 차재희는 이수를 열받게 하는 법을 알았다. 꼭 누군가가 서이수의 신경을 거스르게 하려거든 이렇게 해라, 하고 족집게 과외를 해 준 것 같았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이수는 긴 숨을 뱉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차재희 때문에 지나치게 동요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짜증을 있는 대로 내긴 했지만, 원래도 신경질적인 성격이니 자신한테 과민 반응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좋은 말로 안 하면 뭐라고 물을 건지 알려 줘?”
“아니요.”
“재희야, 씨발 언제까지 똥 마려운 개새끼처럼 빌빌거리면서 쫓아다닐 거야?”
“…….”
차재희도 제 마음대로 하는데 이수라고 마음대로 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이수가 웃는 낯으로 되물었다.
단정한 얼굴에서 점점 표정이 지워져 갔다. 재희는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이수를 응시했다. 또 지랄하며 받아칠 줄 알았는데, 어쩐 일로 차재희는 답변을 내놓았다.
“……제가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예요.”
“스무고개 하세요? 네가 원하는 게 대체 뭔데.”
“선배랑 친해지고 싶어요.”
별 개소릴 다 듣는다 싶었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직선적인 시선과 굳게 다물린 입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은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말해 주고 있었지만, 이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차재희에게 잘해 준 적 한 번 없고, 시도 때도 없이 짜증을 냈으며, 자존심을 긁는 말을 퍼부었고, 그에게 내뱉은 욕설만 한 트럭이다.
그런 인간하고 친해지고 싶은 사람은 없어야 하는 게 맞다. 그러니 차재희는 진짜 이상한 새끼였다.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새끼 혹시 소시오패스, 그런 건가?
이수는 문득 그런 의심을 했다. 소시오패스들이 사회적으로 인망이 높고 성공한다던데, 지금 보니 차재희가 딱 그런 짝 아닌가. 그 생각처럼 그의 행동은 순수한 친목의 의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뭔가 더러운 꿍꿍이속이 있을 것만 같았다. 이수는 대체 무슨 속셈이냐고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이잉.
휴대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부친, 서훈이었다. 아무래도 좋은 소식이 도착한 것 같았다.
─ 이수야. 할아버지 방금 돌아가셨다.
그의 목소리는 침통하기 그지없었으나 이수는 별다른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첫 번째를 제외한 네 번의 심정지를 겪을 동안 이수는 늘 혼자였다. 서대영도 그렇게 죽길 바랐는데, 서훈이 곁을 지켰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아쉽기만 할 따름이었다.
“이따가 갈게요.”
─ 준비하고 바로 와야 해.
“학교예요. 이따 갈게요. 끊어요.”
서훈이 말을 잇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이수는 다시 울리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느긋하게 연기를 피워 올렸다. 차재희는 건너편에 선 채 말이 없었다. 자신이 무슨 대답을 돌려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재희를 빤히 바라보던 이수는 그의 눈동자가 얼핏 기대감에 물드는 것을 보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친하게 지내자는 말에 돌려줄 만한 답은 꺼지라는 말이나 내가 대가리에 총 맞았냐? 너랑 친하게 지내게 등의 거절 멘트뿐이었지만, 그것마저도 쉽게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질문을 할 때마다 사람을 복장 터지게 만드는 놈이니 자신도 똑같이 해 주고 싶었다. 뒤에서 당황한 차재희가 선배, 하고 소리 높여 부르는 것을 무시했다. 이수는 그대로 올라가 가방을 챙겨 나왔다.
집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서이준이 보내 준 주소로 차를 몰았다.
장례식은 성대했다. 수백 개의 근조 화환이 주차장까지 늘어졌다.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물밀듯 밀려 들어왔다. 기자들이 몰려들었고, 뉴스 기사까지 떴다. 신유진이 너희 할아버지 아니야? 하고 메시지를 보낼 정도였다.
한국 재벌 문화를 모르는 이수는 행사인지 장례식인지 모를 블랙 코미디 같은 이 상황이 불편하고 낯설었다. 반면 서이준과 서이나는 달랐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맞이하느라 바빴다. 웃는 얼굴로 무장한 채 정치인, 기업가들과 인사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에 이수는 괴리를 느꼈다. 피만 좀 섞였다 뿐이지, 그들은 자신과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이수 또한 그들과 나란히 서 있어야 했지만,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채 불쾌감을 내비치는 그에게 서훈과 천수인은 상주로서의 태도를 강제하지 못했다. 6년 전, 아들을 기만한 대가로 그들은 부모로서의 권리를 잃어버렸다. 결국 이수는 장례식이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그곳을 빠져나왔다.
흡연 구역의 벤치에 앉은 이수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쳐다보는 시선이 거슬려 담배만 빽빽 피우고 있는데 돌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이수. 너 여기 있어도 돼?”
신유진이었다. 이수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집에 안 간 게 어디야. 넌 왜 왔냐?”
“아빠가 가 보라고 난리 쳐서.”
위로하러 혹은 너 상심했을까 봐, 하는 예의상의 말도 없었다. 이수는 짧은 웃음을 흘렸다. 신유진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솔직하다. 그가 신유진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이수의 조부를 두고 거참 씹새끼네 하고 말했던 것도 유진이었다. 그 말에 이수는 자신이 혼자여야만 했던 이유가 타당치 못했던 것임을 깨달았었다. 공허한 어린 시절이 누군가의 잘못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망하는 마음이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득 부모나 서대영이 떠오르면 비웃음부터 나오는 게 현실이었다.
신유진이 아니면 몰랐을 것이다. 어린아이를 외딴 나라에 혼자 남겨 두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겪었던 외로움과 기다림은 부당했다는 것을…….
그러나 이제 와서는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수는 그의 부모를 딱히 미워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지나치게 무심한 성정이었으나 이수를 그렇게 만든 것이 그들이었기에 서훈과 천수인 또한 그에게 애정을 강요하지 못했다.
담뱃재를 털어 낸 이수가 유진에게 턱짓했다.
“들어가서 밥이나 먹고 와.”
“서일 그룹 전임 회장님 장례식인데 뭐 맛있는 거 주냐? 호텔 셰프라도 불렀어?”
“몰라. 신토불이 노친네니까 학식 같은 거 있겠지. 나물, 뭐 그런 거.”
“밥 안 먹었으면 같이 가자. 아, 맞다. 이수야. 재희도-.”
순간 유진이 손뼉을 치며 눈을 키웠다. 이수는 재빨리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여기서까지 그 징글징글한 이름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유진아.”
“응?”
“나 튈 거니까 빨리 들어갔다 나와.”
“뭐야, 알았어.”
신유진은 눈치가 빨랐다. 이수가 재희의 이야기를 꺼리는 것을 알고 군말 없이 몸을 돌렸다.
기자들이 혼자 남은 이수를 흘끗거렸다. 그러나 공식 석상에 모습을 비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서 그가 서일 그룹의 차남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곳에 단 한 명도 없었다. 외모가 하도 눈에 띄어서 연예인인가 생각할 뿐이었다.
“서이수.”
줄담배를 피우고 있으니 경호원을 대동한 남자가 나타났다. 양복을 차려입은 사내들은 흡연 구역에 있던 기자들을 정중하게 몰아내고 주변을 둘러쌌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이수가 그를 보며 웃었다.
“형.”
친형인 서이준보다 친밀한 사촌 형, 사도혁이었다. 이수가 다니는 대학교를 운영하는 사천 교육 재단을 소유한 사천 그룹의 막내아들. 호텔 체인 그룹을 운영하는 그는 유독 이수에게 살갑게 굴었다. 같은 칠삭둥이로 태어난 이수에게 동질감을 느껴서였다.
“잘 지냈어?”
“그럭저럭. 결혼 준비 잘돼 가?”
씩 웃는 도혁과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 또한 유진과 비슷한 성격이었다. 말하는 데에 거침이 없고 어떻게 보면 신유진보다 적나라했다.
사천의 망나니라고 불리던 그는 이수가 병원에 있을 때 약물 중독으로 근처 재활 센터에 입소해 하루가 멀다 하고 이수를 찾아왔었다. 어릴 때 일이긴 했지만 둘은 그때 나름의 친분을 쌓았다.
도혁은 이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화했다. 서이준이 보면 부러워 죽을 만한 광경이었다. 그가 떠나고 밖으로 나가니 때마침 유진이 나타났다. 이수가 주차장을 눈짓했다.
“차 끌고 왔냐?”
“아니, 너랑 필름 끊길 때까지 마시려고 택시 타고 왔는데?”
“뭐래. 알코올 중독 치료 센터 갈래? 장례식장에서 무슨.”
눈살을 찌푸린 이수를 보며 유진이 그것도 모르냐는 듯 혀를 찼다.
“어어! 서이수, 뭘 모르네. 한국 장례식장에선 술 마시고 화투, 코오리안 카드 게임 알지? 그게 기본 옵션이라고.”
뭐라는 거야. 이수는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며 똑같이 혀를 차 주었다. 주차장을 향해 걸으며 집까지 데려다 달라는 유진의 말에 1초 정도 고민을 했다. 부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 정도는 해 줘도 되지, 뭐. 결론을 내린 이수는 세단에 그녀를 태우고 반포를 향해서 출발했다. 가는 길에 천수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 이수야, 어디 갔니? 이나 결혼할 집안에서 인사 왔는데 너도 얼굴 좀 비쳐야지. 사돈댁인데.
“집에 가는 중이에요.”
─ …….
“할 만큼 했어요. 끊어요.”
스피커 너머에서 침묵만 되돌아온다. 이수는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얼굴을 비친 것만으로도 할 일을 다 한 셈이었다. 천수인과 서훈은 그의 행동에 결코 제재를 가할 수 없었다.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
통화가 끝나자 유진이 흐음, 하며 말문을 열었다.
“서이수. 주말에 뭐 해?”
“게임.”
“하. 요즘 사진 안 보내 주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구만? 맨날 집에만 처박혀 있지, 너?”
“뭔 소리야, 시험 기간이잖아. 야, 말 나온 김에 묻자. 그거 언제까지 할 건데? 귀찮아 죽겠어.”
신유진은 졸업 후 시작할 쇼핑몰 사업을 위해 SNS 계정을 운영하고 있었다. 자신의 것과 이수의 것, 두 가지였다.
1년 전, 유진은 계정을 만들며 이수에게 종종 사진을 찍어서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별일도 아니었기에 승낙했다. 그녀는 가끔 이수가 입으면 어울릴 옷들을 사 들고 왔고, 그는 밖에 나갈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옷을 입고 사진을 찍어 보냈다.
얼굴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데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일전에 확인했을 때 팔로워가 십만 명이 넘었던 거로 기억한다. 어쨌든 이 짓거리를 1년 넘게 할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시작도 안 했을 거였다. 장사는 취미로 할 거라면서 뭘 그렇게 공을 들이는 건지 모르겠다.
“사업 시작할 때까지 해야지. 니가 모델도 좀 해 주고.”
“아, 지랄 마세요.”
“왜요, 오빠. 유진이가 부탁하는데 안 들어줄 거예요?”
“진짜 하지 마라.”
오빠 소리에 속이 니글거렸다. 박지혜는 원래도 오빠라고 불렀으니 그러려니 했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너거리며 욕하고 대거리를 걸었던 유진이 오빠 소리를 하면 속이 영 불편했다. 정색하자 유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는다. 또 오빠 소리를 할까 싶어 이수가 다시 화제를 돌렸다.
“주말에 뭐 하는지는 왜 물어봐.”
“우리 학회에서 부산으로 놀러 가는데 같이 갈래?”
“엠티?”
“응. 바다 보러 가자. 가서 사진도 좀 찍고.”
사진은 핑계고 그냥 놀러 가자는 말이었다. 둘이 가면 모를까, 학회 엠티를 내가 왜 가. 이수는 어이가 없어져서 유진에게 물었다.
“오티, 연합 엠티, 개총, 학생회 엠티, 신입생에 2학년 엠티까지 따라가더니 학회 엠티도 가냐?”
“엉. 아, 애들이랑 노는 거 진짜 존나 재밌어. 이 맛에 학생회 하는 건가 싶다니까. 나 과대할까? 어때? 잘 어울려?”
“말만 들어도 피곤해.”
상상만 해도 최악이었다. 엠티든 뭐든 갈 때마다 자신을 들들 볶아 댈 것을 생각하면 신유진은 절대 과대를 하면 안 됐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니 유진이 이수를 설득하려 들었다.
“아니, 하여튼. 지혜도 가고 신입생이랑 2학년 애들 중에서도 괜찮은 애들만 모였어. 학회 진짜 비밀리에 심혈을 기울여서 뽑았단 말이야. 같이 가자. 응? 재밌을 거야.”
“몇 명인데. 너랑 박지혜 말고는 다 모르는 애들일 텐데.”
“여섯 명 정도? 니가 아는 애도 있고, 다들 너 데려오라고 성화야.”
“개소리하지 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앉았다. 이수가 어이가 없어서 쳐다봤지만, 유진은 그를 꼭 데려가고 싶은 듯했다. 신유진이 종종 끈덕지게 매달려 올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패자는 서이수였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혀 짧은 소리를 냈다.
“아니, 이뚜 오빠. 가치 가여어. 녜? 녜?”
“아, 미친……. 하지 마. 차 박아 버린다.”
그러나 이수의 타박에도 유진은 굴하지 않았다. 반포동 아파트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의 혀는 점점 짧아졌고, 종내에는 무슨 말인지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괴기스러운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내리라고 했지만 버티고 앉아 온갖 하트와 윙크를 날려 대는 통에 이수는 결국 그녀의 제안을 수락해야만 했다.
“호텔 주소 보낼게! 12시까지 오면 돼.”
“알았어. 들어가.”
유진을 들여보낸 이수는 부산까지의 경로를 찾아봤다. 킬로수를 확인한 그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부산이라면 전에 한 번 가 봤었다. 머물렀던 사흘 내내 비가 내린 탓에 잿빛 하늘만 바라보다 온 기억이 있다. 도로 위에서 열이 받아 뒷목을 잡을 뻔했고, 마지막 날에는 클랙슨과 손바닥을 합체한 채로 운전대를 잡았었다.
전혀 기대되지 않는 여행이었다.
* * *
며칠 뒤, 이수는 이른 아침부터 운전대를 잡았다. 하늘이 선명하게 맑은 빛을 띠는 5월 초의 황금연휴였다.
양재 IC까지 길이 조금 막히는 걸 제외하면 도로는 부산까지 뻥 뚫려 있었다. 연휴가 짧은 탓에 서울을 빠져나가는 사람이 생각보다 적은 듯했다.
오랜만에 액셀을 밟으며 달리다 보니 11시가 되기도 전에 부산에 도착했다. 짠 내가 물씬 풍기는 도시는 여전히 난폭해서, 혼잣말로 별의별 욕을 다 쏟아 내며 운전하다 보니 어느새 호텔이었다. 시내에서만 한 시간을 지체했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었다.
발레파킹 직원에게 세단을 맡긴 이수는 곧바로 체크인 카운터로 향했다. 아마 신유진이 예약했을 이 호텔은 장례식에서 보았던 그의 사촌 형, 사도혁의 소유였다. 그에게 전화해 유진의 이름으로 결제한 것을 매입 취소시킨 이수는, 도혁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신의 카드로 숙박비를 다시 결제했다. 카드사에서 연락이 갔는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유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 뭐야, 안 그래도 되는데.
“웃음기나 감추고 말해. 어디야.”
─ 아, 티 났어? 우리 지금……. 한 10분이면 도착할 것 같아.
“내 이름 대고 카드 키 받아.”
─ 응. 아마 한 명은 먼저 도착해 있을 텐데. 내 차에 지금 다섯 명 타 있고. 걔는 근처에 볼일 있다고 해서 따로 가기로 했거든.
한 명? 순간 느낌이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신유진이 학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신이 아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었다. 지혜는 따로 언급했으니 그녀는 아닐 테고, 학회에 들 만한 사람 중에 이수가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 봤자. 안정훈과… 씨발.
“야.”
─ 응?
“차재희한테 나 온다고 말 안 했지?”
─ 어. 하지는 않았는데. ……왜?
“나 그냥 갈 테니까 니들끼리.”
“선배.”
놀아. 그 말이 입 속에서 흩어졌다. 아, 재수도 없지……. 이를 악물고 중얼거린 그가 전화를 끊으며 고개를 돌렸다. 운명적 악연의 상대가 다정한 웃음과 함께 서 있었다.
두툼한 흰색 반팔 티셔츠에 다크 그레이 컬러의 슬림 진, 살짝 롤업된 밑단 아래로 얼룩 한 점 없는 아이보리색 스니커즈를 신은 차재희. 늘 댄디하던 평소와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왁스를 발라 고정한 머리칼 아래로 반듯한 이마가 드러나 있다. 예쁘게 각이 진 이마가 솔직히 보기 좋았다.
완벽한 인싸 스타일인 재희와 달리, 이수는 트레이닝 바지에 니트 재질의 운동화를 신고, 차콜 컬러의 후드 안에 티셔츠 하나를 받쳐 입은 완벽한 아싸였다. 운전한다고 거꾸로 뒤집어쓰고 있던 모자가 그나마 복학생 같은 느낌을 상쇄시켰다.
이수는 떨떠름한 얼굴로 차재희를 바라봤다. 낯짝이 두꺼운 건지, 수치를 모르는 건지. 아무리 무시해도 끝없이 다가오는 차재희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수가 인사하는 대신 빈정거렸다.
“질리지도 않냐?”
“선배는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버릇 좀 고쳐. 진짜 좆같아.”
짜증을 내는 이수에게 재희가 미소와 함께 받아쳤다.
“선배는 욕하는 버릇 좀 고쳤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수는 욕 좀 그만하라던 자신의 타박에 신유진이 맨 처음 내뱉었던 말을 그대로 전해 주었다.
“이건 욕이 아니야. 감탄사지.”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슬쩍 눈살을 찌푸렸던 재희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표정을 풀었다. 의식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그 모습을 보는데 차재희와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기분을 어쩌고 하고 내뱉었을 때, 분명 차재희는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이수의 안색을 살폈었다. 그 후에 자신에게 사과할 때도 그랬고, 종종 말을 받아칠 때도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얼굴을 했었다. 꼭 돌다리를 건너기 전에 두드려 보는 것처럼.
그런데 그런 망설임이 점차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이제는 자신의 앞에서 말을 고르려는 기색조차 보이질 않았다. 첫 만남과 너무나도 상반된 태도였다.
이게 혹시… 내가 만만한가? 인상이 구겨지는 찰나에 신유진과 다른 이들이 나타났다. 순간 떠올랐던 추측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이수가 이틀간 일행이 될 사람들을 훑었다. 박지혜와 연지를 제외한 둘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재희가 반갑게 그들을 맞았다.
“유진 누나, 운전하느라 힘들지 않았어요?”
“아, 말도 마. 양재 빠져나오다가 짜증 나서 뒤지는 줄 알았네.”
“고생 많으셨어요. 지혜 누나도, 영지도 일찍 일어나서 오느라 힘들었겠다. 세희랑 수진이도.”
거짓이라고 착각할 수 없을 만큼 진심 어린 미소였다. 10초 전까지 짜증을 내고 틱틱거리던 태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보면 볼수록 극적인 변화였다. 그를 보며 코웃음을 친 이수가 후드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었다.
마주치기 전이었다면 그냥 집으로 돌아갔을 텐데, 이미 만나 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최대한 무시하면서 시간이나 때우다 돌아가는 수밖에. 멍하니 있으니 지혜가 어깨를 툭 치며 인사를 건네 왔다. 오빠. 안 올 것 같았는데 왔네요? 그 말에 싱겁게 웃어 주었다. 오기 싫었어. 그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유진은 재희와 한참 얘기하다 말고 이수의 존재를 떠올린 듯 그의 팔뚝을 때렸다.
“야. 넌 인사도 안 하냐? 이쪽은 2학년 김영지. 이쪽은 1학년 정세희, 강수진. 얘들아, 인사해. 이 오빠가 바로 그 서이수야.”
여자애들 세 명이 조르륵 인사한다. 놀러 와서 기쁜 듯 상기된 뺨이 아기 같고 귀여웠다. 그리고… 연지가 아니라 영지였구나. 겨우 그 이름을 새겨 넣은 이수가 신유진을 쏘아보며 말했다.
“오빠 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안녕.”
“이뚜 오빠 미국인이니까 상급 영어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
“아, 진짜. 미쳤네, 신유진.”
인상을 와락 구긴 이수가 몸을 돌렸다. 체크인해. 그 말을 남기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데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니겠지. 하지만 차재희에 있어서만큼은 그 네 글자가 통용된 법이 없었다. 결국 서브 스위트로 향하는 프라이빗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가 고개를 돌렸다. 말끔한 낯의 차재희가 문제 있냐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서 있었다.
“설마 너랑… 나랑, 같은 방 쓰냐?”
“네.”
“씨발…….”
모르는 사람과 한 공간에 머무는 건 질색이었다. 차량, 집, 그는 퍼스널 스페이스를 침해당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중에서도 침실은 이수에게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다. 그가 18년을 머물렀던 병실처럼, 이수에게 있어서 잠을 자는 곳은 타인이 침범 불가능한 자신의 세상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거길 차재희랑 같이 쓰라고? 객관적으로 보면 침실이 두 개였으므로 융통성을 발휘할 만했으나, 서브 스위트 ‘룸’이라는 명칭이 이수의 합리적 사고를 방해했다.
이수가 품속에서 카드를 한 장 꺼냈다. 그것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건네니 받지 않고 쳐다본다. 멀거니 선 재희를 향해 그가 해야 할 일을 설명했다.
“가서 네 방 따로 잡아. 난 다른 사람이랑 같은 방 못 써.”
“저도 선배랑 같은 방 쓰기 싫어요.”
“어쩌라고. 내가 네 기호도 물어봤어?”
“근데 황금연휴라서 빈방이 없어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한 무더기의 가족인지 뭔지 모를 일행들이 그들 옆을 스쳐 지나갔다. 빌어먹을 연휴도 짧은데 뭔 놈의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이수는 한숨을 쉬었고 재희도 짧게 탄식했다. 그가 손에 든 백팩을 어깨에 걸쳤다. 그러더니 이수를 보며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 싫으시면 그냥 차에서 잘게요. 뒷좌석에서 구겨져서 자면 되죠.”
“아, 씨발.”
또, 또, 또 저만 나쁜 놈 만든다. 저 상태로 신유진에게 가서 뭐라고 말할지 눈에 선했다. 서이수 선배가 저랑 같이 자기 싫다고 그래서 그냥 차에서 자기로 했어요. 그럼 또 그들은 차재희를 불쌍하고 배려심 많은 놈 취급하겠지.
그것이야말로 저 소시오패스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일 것이다. 결론에 다다른 이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재희를 밀어 넣었다.
“재워 주시는 거예요?”
“닥쳐.”
“저도 선배 불편하다는 거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닥치라고.”
이수가 재희를 쏘아봤다. 날이 갈수록 주둥이를 나불거리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다. 얄미워서 한 대 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49층에 도착하니 복도에 문이 딱 두 개였다. 서브 스위트는 작은 거실과 큰 욕실 하나, 침실 두 개로 이루어졌는데 그중 메인 침실에는 작은 욕조가 딸린 욕실과 드레스 룸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 방은 당연히 이수가 차지했고, 재희는 이수의 방 건너편에 있는 침실로 들어갔다.
자신만의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긴장이 풀렸다. 게임을 하느라 밤을 새우고 온 참이었다. 온몸을 짓누르는 피곤에 이수는 침대에 누워 선잠이 들었다.
피곤함이 일정 경계를 넘어서면 오히려 신경이 곤두서고 각성 상태로 가수면에 빠지는 일이 종종 있는데, 이수가 지금 딱 그런 상태였다.
베개에 파묻힌 채로 눈을 감고 있는데 자신의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 침구에서 올라오는 마른 빨래 냄새, 바스락거리는 이불의 재질 같은 것이 선명하게 느껴지며 정신이 허공을 유영했다. 얼마나 누워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눈을 찌르는 햇살의 궤적만이 이수에게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선배, 자요?”
점멸하는 시야 사이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 누군가의 발걸음, 매트리스 한쪽이 출렁이는 느낌. 그러나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이수는 쉽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공간을 침범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숨소리가 귓가에 스며드는 것을 알면서도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선배, 일어나 봐요. 그런 말이 주위를 빙빙 돌았다. 언제 던져진 것인지도 모를 문장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머릿속에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이수가 눈을 떴을 때, 그가 깨어나길 기다리던 재희는 침대 끝에 팔베개를 한 채 잠들어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시간을 먼저 확인했다. 방에 올라온 지 한 시간이 지난 상태였다. 차재희는 언제부터 여기서 이러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야.”
이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팔자 좋은 불청객을 내려다보았다. 얕게 오르내리는 가슴팍. 그리고 가느다랗게 내쉬는 숨소리. 저도 모르게 호흡을 멈춘 채 훔쳐보게 됐다.
이렇게 생기 없는 차재희는 낯설었다. 이마 위로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 홑꺼풀인 줄 알았던 눈에는 아주 얇은 속쌍꺼풀이 있었다. 붓을 꺾어 그린 것처럼 선이 예쁜 콧날 아래로 마른 입술이 보였다. 습관처럼 위로 끌려 올라간 입매는 미소를 만들어 냈다. 보송보송한 뺨 그리고 동그랗게 이쁜 귓바퀴 너머로 목덜미에 난 솜털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얄밉게 굴던 게 겨우 한 시간 전인데, 그런 모습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얌전해 보였다. 잠든 모습이 꼭 아이 같기도 하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 너 나한테 자꾸 왜 이래? 궁금증이 치솟았다. 그러나 그 물음은 입 안에만 머물렀다.
새근새근 잘 자는 놈을 어쩐지 깨우고 싶지 않았다. 눈만 마주치면 부딪히니 이 찰나의 평화가 달가운 것 같기도 했다.
이수는 물끄러미 재희를 바라보았다. 입을 다문 차재희는 그렇게 불편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또한, 눈을 감은 잘생긴 얼굴이 보기 좋기도 했다.
차재희가 인어 공주처럼 말을 못 하게 되면 잘 지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오후 4시, 호텔 근처에서 식사한 이들은 해운대로 향했다. 유진이 재밌을 거라고 큰소리를 쳤던 아쿠아리움은 인파로 터져 나가기 직전이었다. 가뜩이나 사람 많은 것을 싫어하는 이수는 짜증이 덕지덕지 묻은 표정으로 혼자 떨어져 걸었다. 입을 벌리고 유리창 앞에 선 아이들이 귀여웠지만, 그 기분은 10분을 채 가지 못했다.
“오빠, 이거 대박 귀엽죠. 와! 진짜 이쁘다. 한 마리 키우고 싶다. 우와! 얘 좀 봐요! 안녕, 물고기야!”
“지혜야.”
“네!”
“입 좀 다물어.”
“네…….”
이수에게 신경이 쓰인 유진과 지혜가 번갈아 찾아왔으나 그것마저도 귀찮았다. 이수는 조잘거리는 다섯 명의 여자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뒤처졌다.
베이지색 스웨트 셔츠, 스트레이트 핏 블랙 진에 깔끔한 스니커즈. 신유진이 가져온 옷은 이수의 체격에 딱 들어맞았다. 여전히 뒤돌려 쓴 모자 때문인지 얇게 뻗은 눈썹, 그 아래로 속쌍꺼풀이 진 눈매가 반항적으로 느껴진다. 그의 창백한 피부는 수족관 조명 때문에 푸르게 보였다.
보라는 물고기는 안 보고 이수를 구경하던 아이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히며 도망갔다. 이수가 싱거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두툼한 아크릴 벽 너머로 거대한 개복치가 헤엄치고 있었다.
넓고 납작한 얼굴에 조막만 한 입술. 한창 유행했던 개복치 키우기 게임의 캐릭터화가 참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을 침대에 던졌다가 그 진동을 인식해 죽어 버렸던 레벨 187 개복치를 떠올린 이수는 문득 미소 지었다. 그날 정말 열받았었는데… 지금은 그냥 재밌는 기억으로 남았다.
“선배. 그거 아세요?”
갑작스러운 침입에 입가의 미소를 채 지우지 못한 이수가 시선을 돌렸다. 언제 왔는지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차재희가 서 있다. 천천히 끌려 내려오는 입꼬리를 의식하며 이수는 이내 마뜩잖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딘가 익숙한 그 질문은 그가 이수에게 처음으로 시비를 걸었던 날 내뱉은 말이었다. 또 무슨 개소리를 하려고. 침착하게 받아칠 준비를 하고 있으니 재희가 개복치를 바라보며 물었다.
“개복치 먹어 봤어요?”
“먹을 게 없어서 저딴 걸…….”
저게 먹어도 되는 어류인가? 저걸 먹는 사람이 있나? 하고많은 물고기 놔두고 왜 저걸. 불쌍한 개복치를 보고 있으려니 웃음기 띤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진다. 근처를 지나며 왁자지껄 떠드는 청소년들 때문에 차재희의 음성은 이수에게 닿지 못했다.
이수는 뭐라고 종알거리는 재희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언제나 단정했던 얼굴은 평소와 달리 들떠 보였다. 입술이 달싹거리는 것을 보고 그냥 무시할까 하다가, 이수는 재희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개복치를 어떻게 먹는데. 그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왜요?”
갑작스레 좁혀진 거리에 의아한 물음이 던져진다. 바로 옆에서 개복치 게임에 대해 떠들어 대는 청소년 무리는 당장 자리를 뜰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이수는 손을 뻗어 재희의 귓불을 잡고 끌어당겼다. 아프게 하려는 건가 싶어서 인상을 찡그리던 재희는 예상외로 미약한 힘에 의도를 알아채고 고개를 숙였다.
차재희의 귓불은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웠다. 리키의 고환을 만지는 느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이수는 차재희가 알면 지랄할 듯한 생각을 지워 내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시 말해 봐. 뭐라고 하는지 못 들었어.”
화들짝 놀라며 뺨을 떼어 낸 재희는 어쩐지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평정을 되찾고, 몸을 살짝 돌려 이수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개복치를 레벨 190까지 키워 봤다는 청소년의 말에 옅은 패배감을 느끼면서도, 이수는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차재희의 음성은 굉장히 듣기 좋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포항에 가면, 개복치 대창 구이를 파는 곳이 있어요. 양념을 발라서 구워 먹는 건데, 곰장어랑 비슷한 맛이 나요.”
“대창? 내장 말하는 거야?”
“맞아요. 개복치 살은 딱히 맛이 없어서 별다른 요리가 없고, 대창 구이나 무침, 껍질을 데쳐 먹는 게 대부분이에요.”
맛이 없으면 안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 식성이 까다로운 이수는 내장 요리를 일체 입에 대지 않는다. 그렇기에 굳이 맛없는 생선을 먹겠다고 대창까지 손질해 먹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야만인 보는 눈길에 재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짧은 웃음을 흘렸다. 이수도 웃었다. 차재희가 개복치 내장을 구워 먹는 모습이 상상되질 않아서.
“선배는 수달이 좋아요, 해달이 좋아요?”
“…….”
“전 해달이 조금 더 귀여운 것 같아요.”
그때부터 재희는 이수를 졸졸 쫓아왔다. 딱히 대꾸하지 않았는데도 혼자 떠드는 모습에 또 무슨 꿍꿍이인가, 생각하다가도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는 얼굴을 보면 머릿속이 비워졌다.
그게 은근히 불쾌했다.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게, 타인에 의해 기분이 좌지우지되는 게 싫었다.
“가끔 운 좋으면 돌고래도.”
“야.”
“네?”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좀 가.”
그 말에 차재희는 불퉁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더 귀찮게 하고 싶은데 놀러 왔으니까 참을게요, 툭 던지고 간 말에 이수는 진심으로 그의 머리를 열어 보고 싶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차재희가 떠나고 15분 정도 더 수족관을 구경했다. 밖으로 나왔을 때 머릿속에 남은 건 개복치 대창 요리뿐이었다.
“자, 자. 저녁은 이 학회장이 쏘겠습니다.”
아쿠아리움을 나와서는 호텔 근처에서 저녁을 먹었다. 유진이 예약한 일식집은 맛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피곤한 탓에 입맛이 없어 얼마 먹지 못했다. 방에 들어가서 쉬고 싶었는데, 유진은 오늘 일정의 하이라이트가 남았다며 이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5월의 밤바람은 낮과 달리 싸늘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모래사장으로 향했다. 그래도 학회장이라고 신유진이 생각보다 많은 준비를 했다. 이날을 위해 사두었다며 각종 피크닉 세트를 꺼내 놓은 것이다.
아기자기한 컬러의 타탄체크 무늬 돗자리, 블루투스 스피커, 가벼운 원목 테이블에 술잔, 거기에 충전해서 사용하는 조명까지 가세하자 촬영용 스튜디오 같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여자애들─이름을 부르기가 귀찮아 이수는 그들은 여자애들로 대신해 부르기로 했다─은 신이 나서 사진을 수백 장씩 찍어 댔고, 쉴 새 없이 찰칵거리는 소리에 질려 버린 이수는 그들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피웠다. 해풍에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쓸어 올리고 수평선을 바라봤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남빛 바다, 다홍빛 경계, 아직 노을에 젖지 않은 머리 위의 하늘은 여전히 파르스름했지만, 몸을 돌려 바라본 너머의 도시는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밤은 동쪽 바다로부터 밀려 올라왔다. 이수는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세상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이수야.”
신유진이 다가왔다. 그녀가 건네는 맥주를 망설이다 받아 들었다. 한 모금 마시니 씁쓸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바다에서 마시는 술맛이 나쁘지 않았다. 말없이 서 있는데 옆에서 캔을 찌그러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맥주 500mL를 순식간에 해치운 신유진이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로 물었다.
“재밌지?”
“아니.”
“즐거워?”
즐겁나?
오늘 하루를 되짚어 봤다. 오랜만의 장거리 운전은 나쁘지 않았지만 부산에 진입한 후에는 짜증이 났다. 호텔에서 차재희를 만나고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가, 아쿠아리움에서 조금 회복되었다. 저녁 식사도 괜찮았고, 바닷바람도 시원했다. 골똘히 생각한 이수가 대꾸했다.
“나름.”
“애들은 니가 와서 좋은 것 같은데.”
그 말엔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박지혜를 제외하면 다들 자신을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대체 어딜 봐서 좋다는 말이지? 이수가 고개를 돌렸다.
여자애들은 차재희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보통 여자 여럿에 남자 한 명이 끼어 있으면 머슴 신세가 되기 마련인데, 차재희는 그렇지 않았다. 여자 형제가 있기라도 한지 대화를 곧잘 주도하고 그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았다.
가만히 보고 있을 즈음 차재희의 말에 여자애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봐도 차재희만 있었으면 더 좋아했을 것 같았다. 유진이 이수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을 확인했다.
흐음, 고개를 기울이며 조심스레 묻는다.
“재희랑 아직도 사이 별로야?”
“왜.”
“아까 재희한테 너 온다는 얘기 안 했으면 그냥 가려고 했던 거 아니야?”
“……맞아.”
유진이 난처한 얼굴로 사과했다.
“미리 말 못 해서 미안.”
이수는 고개를 저었다. 장례식 날 차재희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주제를 돌린 것은 자신이었다. 유진은 학회에 그가 아는 사람이 있다며 눈치를 주었다. 일전에 차재희와 학회를 준비하며 알게 됐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니 당연히 이수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유진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가 깊이 생각하지 않은 탓이었다.
“불편하면 지금이라도 갈래? 아니면 방 따로 잡아 줄까?”
“연휴잖아. 빈방 없어.”
이제 와서 그러면 꼭 도망치는 것 같지 않은가. 이수는 차재희에게 얕보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래도… 아니면 재희를 우리 방에서 재울까?”
“미쳤냐?”
순간 유진의 말에 헛웃음이 터졌다. 이게 겁도 없이. 황당하게 쳐다보니 유진이 주절거렸다.
“어차피 엠티 가면 맨날 같이 뒹구는데 뭐가 대수라고. 재희가 그럴 애도 아니고. 뭣보다 네가 당장 불편하잖아.”
확신하듯 말하는 유진에 이수는 할 말이 없어졌다. 왜 이렇게 순진한 건지. 그러다가 신유진과 순진이라는 단어는 절대 조합이 불가능한 단어라는 사실을 깨닫고 혀를 찼다. 차재희를 저렇게까지 믿는 이유는 뭘까.
이수는 유진에게 닿았던 시선을 들어 다시 재희를 바라보았다. 지혜의 말에 웃음을 짓던 차재희가 뭔가를 느끼기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속을 알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재희가 순간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뺨에 살짝 팬 보조개, 예쁘게 접힌 눈매 따위를 보는 순간 이수는 인상을 찡그렸다.
“불편하긴 하지…….”
쟤만 보면 기분이 더러워. 그 말은 가까스로 삼켜 냈다. 빌어먹을 맥주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다. 귓전에서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에 불안감이 치밀어 올랐다. 머리가 핑 도는 느낌에 이수는 유진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 술 오른다.”
“올라갈래?”
“아니, 잠깐 누워 있을래.”
“잠들면 버리고 간다.”
“그러든가.”
짧게 웃은 이수는 모래사장에 맥주 캔을 묻어 놓고 돗자리 위에 누웠다. 핏줄을 타고 빠르게 도는 알코올이 현기증을 불러일으켰다. 토할 것만 같은 느낌에 이수는 두 눈을 감았다. 이래서 집이 아닌 곳에서는 술을 잘 마시지 않았다. 시원한 바닷바람의 유혹에 넘어가 버린 5분 전의 자신이 멍청하게만 느껴졌다.
어쩌면 예정된 순서였는지도 모른다. 어둠이 내렸고, 술을 마신 몸이 노곤했고, 정신은 피로했다. 전신을 잠식하는 수마에 이수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술에 취한 이수는 말 그대로 개꿈을 꿨다. 사랑해 마지않는 리키가 사람이 되어 그를 찾아오는 꿈이었다.
‘리키, 너 그럴 줄 알았어.’
사람이 된 리키는 그가 상상했던 것처럼 까맣고 예뻤다. 이수는 생각만 했을 뿐인데 리키는 그의 말을 알아듣고 대답을 했다. 뭐가. 그 짤막한 대꾸에 종종 심통을 부리는 리키의 성질이 묻어났다.
이수는 리키의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해 그의 콧잔등에 입을 맞췄다. 늘 반짝이는 새까만 눈동자는 별빛을 머금었고, 그의 털에선 늘 쓰던 강아지 샴푸 냄새 대신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났다.
‘너 또 침대 위에서 뒹굴었지. 형아가 올라가지 말라고 했잖아.’
그 말에 리키는 콧방귀를 끼었다. 이수는 손을 뻗어 녀석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또 그러면 혼나. 그 말에 리키는 으르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한 사람이야.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멀리 떠나가 버렸다. 도망치는 뒷모습이 꼭 인간 같아서 이수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가, 돌연 눈을 떴다.
“리키?”
의미 없는 부름이 지나가고 나서야 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깜빡인 이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술 냄새가 진득하게 밴 한숨이 흘렀다. 황당했다. 넓은 돗자리 위에 자신 혼자뿐이었다. 농담도 구분 못 하는 신유진 같으니. 허탈하게 웃은 이수가 피로에 뻐근한 눈두덩이를 매만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선명하게 밝아진 시야로 빛무리가 진 하늘이 가득 들어찼다. 순간 이수는 데스 밸리에서 보았던 밤하늘을 떠올렸다. 무서워서 눈을 감을 수조차 없었던 하늘을.
그 밤, 구름 한 점 없었던 밤. 짙푸른 장막을 찢고 나온 별들은 무척이나 많았다. 별빛으로 빈틈없이 메워진 하늘이 무거워 보였다. 그 때문에 그 사막의 천장은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위태롭게 느껴졌다.
그 밤은 이수가 인생에서 가장 큰 허무를 실감한 날이었다. 죽음의 경계를 넘고 넘어 뛰쳐나온 세상이었다. 그러나 병실 밖으로 나온 자신은 너무나도 작고 볼품없는 존재였다.
당시의 이수는 종종 자신이 남들보다 더 위대한 존재일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한 번도 겪기 힘든 일을 네 번이나 겪었고, 마침내 18년간 이어 온 죽음과의 사투에서 승리하고 말았으니까. 인생에 곡절이 없었던 사람들보다 나은 인간이 되어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드넓은 은하수를 보는 순간, 이수는 존재의 초라함을 느꼈다. 숨이 턱 막혀 왔다. 극도의 허무가 그를 덮쳤다. 자신이 버티고 버텨 온 모든 시간은 이 세상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했음을, 생존이란 무의미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데스 밸리 여행은 그에게 허무를 각인시킨 사건과도 같았다. 그러나 당시 그가 느꼈던 감상과는 별개로, 처음 보는 순간 그를 압도했던 별이 빛나는 밤하늘은 이수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것에 비하면 이곳은… 흐리다.
몽롱한 정신으로 이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호텔에서 나오는 불빛 때문인지, 해운대의 하늘은 반짝이지 않았다. 좀 더 밝게 빛나는 별을 보고 싶은데.
이수가 바닷바람에 싸늘하게 식은 손을 들어 올렸다. 카디건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누군가가 자신에게 옷을 덮어 주고 갔다. 포근한 섬유 유연제 향기가 난다. 그 밑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린 이수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망설임 없이 사촌 형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 서이수. 지배인 올려 보낼까?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나온 질문이었다.
“지배인?”
─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이 시간에 전화했길래.
그 말에 확인해 보니 새벽 2시였다. 해가 7시쯤 졌으니까 다섯 시간이나 이곳에 누워 있었던 셈이다. 뭐지. 이렇게까지 오래 잘 리가 없는데. 모르는 새에 기절이라도 한 건가. 이수가 그에게 짧게 사과했다.
“미안. 이렇게 됐는지 몰랐어. 형, 통화 괜찮아?”
─ 말해. 술 마셨냐?
“어. 나 지금 해운대인데……. 불 좀 꺼 줘.”
느릿하게 흘러나온 문장에 스피커 너머에서는 잠깐 말이 없었다. 내가 지금 뭐라고 했지. 사촌이 황당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가 뻐근했다. 이수가 생각을 더듬으며 제대로 된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해변에 누워 있는데, 호텔 조명이 너무 밝아서 별이 안 보여.”
─ 뭐?
휴대폰 너머로 하하, 유쾌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렴풋이 정신이 들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참 어이없는 부탁이었다. 당장 영업 중인 호텔의 불을 끄라니. 이수는 제가 말하고도 말이 안 되는 소리인 듯해 도혁을 따라 웃었다. 아냐, 됐어. 그렇게 말하려고 하는데 문득 애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가 해 달라면 해 줘야지. 5분만 기다려, 아주 잠깐일 테니까 잠들지 말고 눈 크게 뜨고 있어.
“어. 고마워, 형.”
─ 이깟 걸로 무슨. 서울 올라오면 전화해. 네 형수 되실 분이 너 궁금해하고 있어. 술 마셨지? 바다 들어가지 말고.
걱정을 늘어놓는 그에게 성실히 대꾸했다. 이수는 통화가 끝난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고, 누군가의 옷을 목 끝까지 끌어 올렸다. 소금기가 듬뿍 담긴 바다 내음 사이로 좋은 냄새가 났다.
바람에 날아온 모래가 머리칼 밑에서 버석거리고, 뺨과 손발은 차게 식어 있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알코올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만의 외출이라 그런 건지.
나중에 시간 나면 부산에 또 와야지 하고 시작한 생각은 곧 바닷가에 집을 사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도 여기는 너무 머니까 강원도가 어떨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해변과 하늘을 비추던 불빛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아.”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이수는 희미하게 발광하기 시작하는 별을 보며 미소 지었다. 도시에 남은 광원들 때문에 그렇게 반짝이진 않았지만, 이 정도로 충분했다.
잘못 들어선 길에서 뜻밖의 행운을 만난 것 같았다. 이수는 낮에 되돌아가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두 눈에 하늘을 담았다.
그리고 하나, 둘, 별을 세던 이수는 귀를 기울였다. 작은 모래 알갱이가 이리저리 흐트러지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누군가가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다. 파도 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스쳐 갈 줄 알았던 묵직한 존재감은 점점 이수를 향해 다가왔다.
“선배.”
물밀듯 밀려들어 온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그 음성의 주인을 인식하기도 전에 호텔에 불빛이 되돌아왔다. 하늘과 해변을 비추는 조명에 이수는 순간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사라지고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그가 보였다.
헝클어진 머리칼, 피곤해 보이는 얼굴, 빤히 보는 시선에 당황한 듯 입술을 핥는 모습. 이수는 그제야 자신이 덮고 있던 옷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어울리지 않게 포근한 섬유 유연제를 쓰는 남자. 이수를 불안하고,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 이수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얼굴을 밀어냈다. 싱겁게 물러난 재희가 물어 왔다.
“괜찮아요?”
“안 괜찮을 게 뭐 있어.”
그렇게 내뱉는 목소리가 여전히 잠겨 있었다. 목을 가다듬으며 상체를 일으키니 차재희의 카디건이 흘러내렸다. 이수는 그것을 대충 털어 내밀었다. 빌려 달라고 한 적 없으니 굳이 고맙단 말은 하지 않았다.
재희는 받아 든 카디건을 챙기는 대신 이수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순간 황당해졌다. 이수는 긴소매였고, 차재희는 반소매를 입었다.
배려가 지나치면 조롱처럼 느껴졌다. 차재희라서 더 그랬다. 이 새끼는 어쩜 내가 싫어하는 짓만 골라 할까. 고양되었던 기분이 점차 가라앉았다.
“치워.”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수의 등 뒤로 재희의 카디건이 떨어진다. 술이 제대로 깨지 않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수는 현기증을 참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재희는 덩그러니 팽개쳐진 제 옷을 집어 올렸다. 짧은 한숨을 쉬는가 싶더니, 이수에게 물었다.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왜 그렇게까지 나를. 그런 함의가 깃든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수는 자신이 차재희를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서 면전에 대고 손가락을 꼽아 가며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남들에게 보이기 싫은 약한 부분에 대해 언급해야 했으므로.
이수에게 열 살 이후의 기억은 명확했다. 병실에서 겪었던 세 번째, 네 번째 그리고 항암 치료를 받던 중 찾아왔던 마지막 심정지의 순간을 그는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갑작스레 평온이 깨지고 숨이 가빠지는 것이 시작이었다. 심장이 요란하게 쿵쾅거리기 시작하면 두려움이 차올랐다. 그 세찬 박동이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인 건지, 죽어 간다는 신호인 건지, 아니면 세상이 흔들리는 건지 이수는 알 수가 없었다.
점점 빠듯하게 차오르는 긴장감 속에서 고동은 점차 간격을 늘려 갔다. 그리고 종내에 침묵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렇게 이수는 죽었다. 몇 번이나.
차재희를 보면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내려다보는 시선에 자신을 둘러싼 의사들이 최악을 가정하던 순간이 떠올랐고, 불안감에 가슴이 죄어들었다. 연쇄 작용처럼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하면 곧 숨이 멎어 버릴 것만 같았다.
나를 두렵게 만드는 네가 싫으냐고?
“어. 싫어.”
이수가 단호하게 대답하며 덧붙였다.
“너만 보면 기분이 더러워.”
그 말에 차재희가 허리를 세웠다. 손안에 든 카디건을 엉망으로 구기는가 싶더니 돗자리 위로 내팽개쳤다. 툭 떨어지는 소리에 이수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차재희는 여느 때와 같았다. 가면을 벗은 낯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짜증과 억울함, 너는 뭐가 그렇게 잘났냐는 물음이 담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수는 차재희가 저한테 이렇게까지 감정을 쏟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밀어내고, 욕하고, 무시했다. 거기서 관두면 되잖아. 왜 이렇게 들쑤시고 다니지? 나한테 왜 이래? 그에겐 너무나도 낯선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건 재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거예요?”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이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겪어 보는 극렬한 거부 반응에 대한 상처, 충격 그리고 오기. 재희는 입술을 꾹 깨문 채 말을 골랐다. 얇은 살갗 위에 빨갛게 자국이 날 때까지 망설이던 그는 이수에게 불공정함을 토로했다.
“선배도 맨날 저한테 욕하고 짜증 내잖아요. 근데도 저한테 사과한 적도, 미안해한 적도 없잖아요.”
“그래서.”
“실수였다고 몇 번이나 말했어요. 미안하단 소리도 여러 번 했고. 그런데요. 저는 그러면 안 돼요? 선배도 맨날 나한테 그렇게 행동하는데 저도 똑같이 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 이럴 거면 차라리 실수가 아니라 그냥 고의였다고 칠게요. 선배랑 나랑, 똑같은 사람이라고 치자고요. 그러면.”
지이잉. 차재희의 휴대폰이 길게 진동한다.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문 재희는 짜증스러운 몸짓으로 이마를 짚었다. 스스로 너무 흥분했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호흡을 고르며 휴대폰을 꺼내 든다. 유진 누나예요, 그렇게 중얼거린 재희가 전화를 받았다.
이수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찡그려져 있던 이마가 풀어지고 수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웃음 짓는 얼굴을 바라봤다. 서이수는, 그러니까 차재희의 저런 점이 가장 싫었다.
5년 전, 심장 이식 수술 후 퇴원을 앞둔 이수에게 백혈병의 전조가 있다는 것을 의사와 그의 부모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확신이 아닌 의심이었기에 그들은 이수에게 사실을 말하는 대신 그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택했다.
18년 만에 퇴원할 생각에 들떠 있는 아들에게, 네 번의 심정지를 이겨 내고 살아남은 이수에게 그들은 차마 퇴원이 힘들겠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다. 부모임에도 이수를 잘 알지 못했던 이들의 잘못된 선택이었다.
퇴원 후, 데스 밸리로 여행을 다녀온 이수는 삶의 덧없음을 의식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런 중 불시에 찾아온 백혈병은 이수의 생각에 확신을 더해 버렸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던 와중에 화가 났다. 그들을 의지한다거나 믿는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건만, 배신감에 사무쳤다.
그는 자신을 기만하던 부모의 얼굴을 아직도 기억했다. 이수를 위해서라던 모든 핑계는 결국 아들의 절망을 지켜보고 싶지 않았던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이수는 거짓말을 하고 남을 속이는 사람을 극도로 싫어했다.
“선배.”
차재희 같은 인간들. 자신을 가장하며 타인을 속이고 기만하는 인간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남을 속이려 드는 사람은 정말 질색이다.
그러니 그를 싫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수는 묵묵히 담배만 피웠다. 울렁거리는 속을 잠재우며 오늘에야말로 저 새끼와 끝을 보겠다고 다짐했다.
신유진과 전화를 끊은 재희는 아까보다 진정된 상태였다. 긴 한숨 소리가 썰물의 빈틈을 메웠다. 울컥한 감정이 잦아들고 차재희는 진심을 끄집어냈다.
“어쨌든 정말로……. 다시 한번 사과할게요. 그날 제가 욕했던 건 진짜 실수였고…….”
“차재희. 사과할 필요 없어. 니가 나한테 욕을 하든 뭘 하든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야. 그것 때문에 너를 싫어하는 게 아니니까.”
잠깐 밝아지던 낯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재희는 이수의 말을 한참 동안 곱씹었다. 그럼 왜……? 그런 의문을 품은 눈빛으로 이수를 바라봤다. 이수는 가까스로 비웃음을 삼켰다.
잘생기고, 다정하고, 빠지는 것 하나 없는 차재희. 여태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아왔겠지. 노력 따위 필요치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차재희는 자신을 밀어내는 이수의 태도에 당황했고, 종내엔 그에게 매달렸다. 어려운 문제의 해답을 찾기 위해 풀이를 반복하는 것처럼 끝도 없이 다가왔다.
지금도 그랬다. 재희는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뭐 때문에 그러는데요?”
서이수는, 말하자면 자아가 있는 난제였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답은 모조리 오답으로 처리하는 아주 까다로운 문제.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이수는 차재희가 간과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
“난 너 같은 스타일 안 좋아해.”
무심한 대꾸에 미간을 구긴다. 한숨을 쉬며 입술을 적신 재희가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흩트렸다. 내가…….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이내 마른 웃음을 흘리며 욕설을 씹었다.
“내가, 씨발 선배한테 연애하자고 했나?”
연애? 갑작스레 튀어나온 말에 이수는 자신의 단어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마지막 연기를 내뱉은 그가 뒤늦게 문장을 수정했다.
“정정할게. 난 너같이 가식 떠는 새끼들 혐오해.”
그 말에 차재희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휘어졌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입매가 그의 불순한 눈빛과 행동을 대표했다.
“말이 심하네요?”
“못 알아듣는 것 같아서.”
“아, 네. 귀에 꽂히긴 하네요. 가식 그리고 혐오. 근데 어쩌죠. 전 선배 앞에서 가식 떤 적 없는데.”
그 말에 이수가 웃었다. 이 새끼가 어디서 개구라를 치고 있어.
“혹시 학식에서 있었던 일 말하는 건 아니죠? 영지가 잘 체하는 건 사실이에요. 자꾸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니까 그쪽 자리 피하고 싶었던 것도 맞고. 친구끼리 그 정도는 신경 써 줄 수 있잖아요?”
들킨 게 그때뿐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어이가 없어진 이수가 그를 빤히 바라봤다. 정말로 그것뿐이냐고. 그렇다고 생각하냐고.
재희가 그 시선을 맞받아친다. 그러다 아, 하고 무언가 깨달은 듯 어깨를 들썩였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동자, 살짝 벌어진 입술, 평소와 달리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칼은 차재희를 소년처럼 보이게 했다. 무언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처럼 반짝이는 표정이었다.
“선배 좀 웃기네요.”
“내가 웃겨? 인생이 각박한가 봐.”
웃을 일도 참 없지. 그 말에 재희가 바닥을 내려다보던 눈을 들어 올린다. 꼿꼿하게 선 태도에 직선으로 떨어져 내리는 눈길이 불량하기 짝이 없었다. 이수는 불쾌감을 감추며 그를 올려다봤다.
“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저를 재단하고 있잖아요. 지금까지 선배가 봐 온 제 행동들이 꾸며 낸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내가 등신으로 보여? 딱 봐도 그런걸.”
“등신 맞아요. 잘못 봤어요, 선배가.”
이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제 입으로 등신이라 칭하는 것과 상대방이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부정으로 물은 질문에 차재희가 긍정하는 것을 보니 기분이 이렇게 더러울 수가 없었다. 짜증이 분노로 치환되기 일보 직전이다. 이수가 두통이 이는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서늘한 목소리로 그에게 묻는다.
“왜 내 앞에서만 이렇게 아가리를 못 털어서 지랄일까?”
그거야말로 정말 차재희에게 던지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아니, 씨발. 쉬운 새끼들 놔두고 왜 나한테 지랄이야. 사람 피곤하게. 그게 딱 서이수의 심정이었다.
차재희는 뭐라고 대답할까. 니가 싫어서? 너를 괴롭히고 싶어서? 이수는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깐 고민하던 차재희가 뱉어 낸 대답은 추측했던 것과 판이했다. 그는 이수의 예상대로 행동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선배가 편한가 봐요.”
순간 실소가 나왔다. 편해? 내가? 경영대에서 사람 제일 불편하게 만들기로 소문난 서이수가 편하다고? 이수가 재희의 말에 태클을 걸었다.
“난 너를 편하게 해 준 적이 없는데.”
“전 그렇게 느꼈어요.”
“그냥 니가 나를 쉽게 보는 거 아니고?”
유난히 많이 봐주긴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던진 질문에 날카로운 반응이 돌아왔다.
“좆같은 소리 마세요. 쉽긴 누가 쉬워요.”
짜증스럽게 뱉는 말이 정말로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전에도 들었던 단어이지만, 한 달간 얌전했던 차재희가 다시 ‘좆’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니 그렇게 이상할 수가 없었다. 황당한 표정의 이수를 제쳐 두고 재희는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려워요. 선배같이 어려운 사람 처음이에요.”
이번에는 꼭 산책을 못 간 강아지처럼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극적인 표정 변화 때문에 더더욱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코웃음을 친 이수가 대꾸했다.
“그럼 관둬.”
“……선배랑 친해지고 싶은데 어떡해요.”
“아니, 씨발. 그러니까 왜 하필 나한테 지랄이냐고.”
“내가 어떻게 알아요!”
이 새끼 취했나? 이걸 왜 나한테 물어봐? 이수가 인상을 구겼다. 주정뱅이랑 상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술에서 깨고 나면 모르는 척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니 이 말다툼이 부질없어졌다.
그러나 차재희의 숨결에선 미약한 술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것은 뭍으로 밀려 올라오는 바다 냄새가 전부였다.
“당사자가 모르면 누가 알아.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세상엔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도 많아요.”
퉁명스럽게 내뱉는 말에 이수가 코웃음을 쳤다.
“니 장르가 미스터린 줄 알아? 내가 보기에 넌 스릴러야. 이중인격자 소시오패스 살인마.”
“그럼 선배는 메디컬 드라마예요. 거기 나오는 알츠하이머 걸린 환자.”
“이 새끼가 진짜…….”
따박따박 받아치는 대꾸가 혈압을 올렸다. 한 대 쳐 버릴까 하다가 이수는 간신히 폭력성을 억눌렀다. 서울에서 보는 새끼랑 부산까지 와서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간 저 얄미운 낯짝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이수는 담뱃갑을 뒤지며 차재희의 되바라진 말대꾸를 되새겼다. 알츠하이머, 그건 분명 저 찌질한 놈이 몇 번이고 이야기했던 작년의 만남을 두고 하는 말일 터였다. 연초에 불을 붙인 이수가 심화를 다스리며 물었다.
“작년에 나랑 언제 만났는데. 그거나 말해 봐.”
“싫은데요.”
……저걸 대체 어떻게 조지지. 띵하게 아려 오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좆같이 굴다가, 애처럼 굴다가, 당최 종잡을 수 없는 새끼였다. 거기다 고집도 더럽게 세다.
그만하고 꺼지면 저도 편하고 상대방도 편할 일을 어디까지 끌고 가겠다는 건지. 저 새끼가 원하는 게 대체 무엇인지,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말은 왜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수와 친한 사람은 드물었지만, 친해지고 싶어 했던 사람들은 많았다. 그들과 비교해 보면 차재희의 행동은 친해지고 싶다는 말이 무색하게 뾰족했다.
피곤하다. 차재희한테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야 할 이유가 없는데. 담배를 빨리 피우고 올라가 버릴 생각으로 뻐끔뻐끔 연기만 내뱉고 있을 때였다. 침묵하던 차재희가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선배.”
“뭐.”
차재희는 ‘선배’라고 부를 때만큼은 목소리가 퍽 따스했다. 저런 연기력은 타고나는 건가. 깊은 생각을 하기 싫어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재희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가식 떠는 사람 아니에요, 저.”
“다들 그렇게 말하지.”
심드렁한 대꾸를 재희가 울컥해 받아쳤다.
“전 원래 다정해요! 선배 앞에서만 조금 더 솔직해지는 거지.”
이수가 차재희를 빤히 바라본다. 타인과 함께 있는 차재희에게 ‘다정’이란 단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말은 없었다. 그걸 자기 입으로 말할 줄은 몰랐지만…….
지금 차재희의 말은 자신은 결코 남을 기만한 적이 없으며, 너의 말은 전부 오해라는 뜻이었다. 물론 독서 문화 과제를 할 때는 이수도 그런 생각을 잠깐 했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사건 이후로 어딘가 찜찜한 마음이 생겨났고, 그 후로는 차재희가 이상한 놈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수가 삐딱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왜? 왜 내 앞에서만 솔직해지는데?”
“……모르겠어요, 저도.”
눈을 굴리며 하는 대꾸에 웃음을 삼켰다. 모르긴 뭘 몰라. 편한 게 아니라 쉬운 거고, 쉬운 게 아니라…….
“재희야.”
이수의 다정한 부름에 재희가 눈동자를 키웠다. 얼핏 순진해 보이는 새까만 눈망울이 조명을 받아 별처럼 빛났다. 그 눈을 마주한 채로 이수는 차재희가 자신에게 말하려 하지 않는 진실을 끄집어냈다.
“내가 좀 만만하지?”
“……네?”
“내가 씨발, 너한테 너무 잘해 준 것 같아. 내 앞에서 편할 리가 없는데 그딴 말을 하는 걸 보면 말이야.”
긴장감 어린 낯이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수는 재희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편하다고, 친해지고 싶다고, 포장할 필요가 없었다. 두 눈에 뻔히 보이는 사실이 있는데 왜.
“내 앞에서만 그렇게 좆같이 구는 이유, 딱 하나잖아. 모르겠어? 너는 그냥 만만한 거야, 내가.”
싸늘한 음성이었다. 차재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수를 응시했다. 그러면서 또 이렇게 되어 버렸다는 자조와 짜증이 담긴 몸짓으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긴다. 재희는 계속해서 엇나가는 이수의 태도에 진심으로 열이 받았다.
“잘해 주긴, 씨발. 내 이름을 몇 번을 말했는데 그거 하나 기억도 못 해 놓고.”
“재희야, 이제 막 나가는 거야?”
이거 봐, 너 가식 떨고 있었잖아. 이수의 말에 섞인 비웃음을 읽어 낸 재희가 그에게 한 발짝 다가왔다. 가까운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을 이수는 피하지 않았다.
네 밑바닥을 드러내 보라는 듯, 가만히 재희를 노려보고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 대체 무슨 속셈으로 이러는 건데, 제발 그 까만 속을 드러내, 이 짓거리도 지겨우니까.
이수의 외침이 들렸을까. 한동안 침묵하던 재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제 알겠어요.”
차재희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서늘하고, 또 씹어뱉는 듯한 목소리였다. 입가에 맺힌 냉소는 선명한 이목구비를 날카롭게 느껴지게 했다. 저게 차재희의 민낯일까, 이수는 화를 내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선배는 내가 좆같이 굴지 않으면 내 이름도 기억 못 하잖아. 그러니까 별수 있나. 이렇게라도 지랄을 떨어 봐야지.”
그 차가운 얼굴에서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가지런히 감겨 있던 눈매, 순수가 묻어나는 표정으로 잠들어 있던 차재희를 떠올리자 더더욱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연기는커녕 둘 다 차재희의 본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수는 혼란스러워졌다.
“근데 그게 싫으면…….”
차갑게 식은 손끝이 이수의 어깨에 닿았다. 옷에 붙은 모래를 털어 내며, 차재희가 속삭인다.
“우리 친하게 지내요. 응? 선배.”
그럼 내가 이렇게 좆같이 굴 일도 없잖아. 그렇게 덧붙이는 음성이 지극히 따스했다. 차재희가 눈을 접어 웃는다. 차게 식은 뺨에 보조개가 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