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하게 불러줘요, 선배
2
이은규
겁 없는 선배 (1-2)
수요일로 넘어가는 자정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테라스에 쏟아지는 빗소리가 두꺼운 유리창을 통과해 두둑, 두둑, 하고 들려왔다. 신이 난 리키가 펫 도어로 뛰쳐나가 뛰어노는 동안 이수는 언제나처럼 라테르를 했다.
[파티] 타격 : 막판 ㄱ?
[파티] 김똘복 : 전 좀 더요 ^^
[파티] 힐러 : 저도 두 판 정도 더 가능해요 ^_^
[파티] 5CPR : 2시까지 ㄱ
[파티] 타격 : 아 낼 야비군인데.. 일단ㄱㄱ
힐러는 랭작 파티에 수월하게 적응했다. 기본적으로 센스가 남달라서 어떨 때는 감동을 능가하는 슈퍼 플레이를 보여 주기도 했는데, 타격이 싼 똥을 치우는 힐러를 보면 이수조차도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힐러 잘 구했다. 말도 잘 듣고, 실력도 좋고, 정말 뿌듯했다.
새벽 2시까지 최상위 던전을 세 번 더 돌았다. 운이 좋게 아무도 실수하지 않는 판이 나와서 나쁘지 않은 점수로 랭킹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이수가 마이크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다들 내일 보고. 힐러, 고생했어.”
─ 고생하셨어요!
곧바로 마이크를 켜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활기찼다. 이수는 컴퓨터를 그대로 켜 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아무리 봄비라지만 흠뻑 젖으면 감기에 걸린다. 이수가 리키를 불렀다.
“릭!”
테라스 앞에서 수건을 들고 기다리니 곧 리키가 펫 도어로 몸을 들이밀었다. 짧은 털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웃는 듯한 모양새로 입을 활짝 벌리고 헥헥거리는 게 기분이 썩 좋아 보였다.
보송보송했던 수건이 완전히 젖어 들 때까지 리키의 털을 말려 주었다. 얌전히 기다리던 리키가 뽀뽀해 달라며 그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촉촉한 콧잔등 위에 입을 맞추니 이수의 뺨에 얼굴을 비빈다.
“너…….”
빨리 사람 돼. 그렇게 농담하려던 이수가 돌연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꿈을 꾼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리키가 사람이 된 꿈.
무슨 내용이었지? 그러나 기억해 내려 해 봐도 확실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한참이 지나 떠올리길 포기한 이수가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날 밤, 이수는 진짜 개─같은─꿈을 꿨다.
차재희와 뽀뽀하는 꿈이었다.
* * *
“야. 넌… 네가 동성애자인 거 언제 알았어?”
─ 흐으음. 어렴풋이 알았던 건 여섯 살 때부터고… 확실히 깨닫게 된 건 열두 살?
“어떻게 알게 됐는데.”
─ 에이미라고 친한 친구가 있었거든. 체육 시간에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걔가 갑자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거야. 근데 막 심장이 뛰고 미칠 것 같더라고. 그때 그냥 본능적으로 알았지. 아, 나는 여자를 좋아하는구나.
“그래…….”
생각보다 시답잖은 계기였다. 그래,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에 웃음기라곤 없었다. 신호를 기다리던 이수는 간밤에 꾸었던 쓰레기 같은 꿈에 대해 생각했다. 차재희랑 씨발. 입에 올리기도 싫다. 인상을 구긴 채 또다시 물었다.
“그럼 야한 꿈 같은 거 꿀 때도, 그, 여자가 나와?”
─ 어. 당연하지. 뭔데? 서이수, 몽정했냐?
“헛소리 말고. 남자가 나온 적은 없어? 한 번쯤은 있을 거 아니야. 전혀 성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잖아. 꿈이 그런 거 아니야?”
─ 야. 너 강아지 나오는 꿈 꾸고 싼 적 있어?
끼익. 브레이크를 밟은 이수가 인상을 구겼다.
“뭔 개소리야.”
─ 지금 네가 하는 말이 그건데. 나한테 남자는 종이 다른 동물이나 무생물하고 같아서 말이지……. 아 뭐냐고! 왜 이런 걸 물어봐?
씨발. 그럼 야한 꿈에는 정말로 그 대상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나온다는 소린가? 이수는 인정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되지. 신유진이 신이야? 쟤 말이 다 맞아? 그럴 리가 없다. 신유진도 틀린다. 엄청나게 잘 틀린다. 저 말은 틀렸다. 신유진이 특이 케이스인 것이다. 이수는 자기 합리화를 하며 중얼거렸다.
“니가 이상한 거네.”
─ 무슨 꿈을 꿨는데 아침부터 지랄이세요. 누구 나와선 안 될 사람이 나왔어? 말하는 걸 보니까 남자인 것 같은데.
“신경 꺼.”
─ 아 누군데!
“끊어.”
─ 야!
종료 버튼을 누르자마자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이수는 휴대폰을 무음으로 돌려 버렸다. 잊자. 그냥 잊어버리자. 요즘 통 혼자 해결한 적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았다. 오늘 밤에는 뭐라도…….
거기까지 생각하던 이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차재희랑 뽀뽀하는 꿈 꾸고 자위하면 꼭 차재희 때문에 그러는 것 같지 않나. 이건 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순간 음습해지려던 머릿속이 씻은 듯이 맑아졌다.
순수해진 정신으로 액셀을 밟았다. 이수는 경영대 건물 앞에 차를 세워 두고 내렸다. 원래는 교수들이 주차하는 곳이지만 날이 궂은 날은 이수의 차지였다. 그가 사천 교육 재단을 소유한 사천 총수 일가와 혈연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교수들이 없었다. 그들이 눈치껏 비워 두는 자리였지만 이수는 거기까지는 몰랐다. 그냥 늘 운이 좋다고 생각할 뿐.
검은 장우산을 펼치니 방수천을 때리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바닥에서 튀어 오른 물방울이 발목에 흩뿌려졌다. 오늘만큼은 차재희를 안 마주쳤으면 좋겠다. 보면 기분이 더러워질 것 같았다. 오늘은 도서관도 가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가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차재희와 마주쳤다.
“…….”
골똘한 표정으로 경영대 로비를 서성이는 차재희는, 한 손에 커다란 수건을 들고 있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가 우산의 물기를 털어 내는 이수와 눈이 마주쳤다. 이수는 정말 질린다는 낯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재희는 어쩐지 실망한 기색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선배, 차 타고 왔어요?”
시무룩한 얼굴에 눈길이 갔다. 습기에 축 늘어진 앞머리. 새까만 눈동자. 언제나처럼 반듯한 콧날. 채도가 낮아 차분해 보이는 입술은 평소보다 조금 튀어나온 채였다. FPS 게임을 하면서 저격 총의 줌(ZOOM)을 당긴 것처럼 그곳에 시선이 가 박혔다. 씨발. 속으로 욕을 씹은 이수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를 타든, 걷든, 기어 오든 니가 알 바야?”
“……일부러 이래요?”
“뭐.”
눅눅한 공기가 내려앉은 로비는 텅 비어 있었다. 재희는 거친 손길로 머리를 쓸어 올리곤, 손에 든 수건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뚜벅뚜벅 걸어오는 재희를 이수는 피하지 않았다.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미 마주친 이상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서로의 목소리만이 들릴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서 재희가 속삭였다.
“내가 좆같이 구는 게 좋아서 일부러 성질 긁는 거죠.”
“성질 안 긁어도 좆같이 굴던데?”
받아치는 말에 재희가 짧게 웃었다. 지척에 선 두 사람 사이에 날카로운 기류가 흘렀다. 이수는 무리 없이 그를 올려다봤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차재희에게 이것 하나만큼은 고마웠다. 그의 시선에 익숙해진 나머지 이수는 이제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봐도 마음이 불안하지 않았다. 신체에 새겨진 기억이 지워지고 있었다.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던 재희가 말했다.
“최근 며칠은 그런 적 없는 것 같은데요.”
“그러시겠지. 살아 있는 게 무슨 죄라고.”
“아. 선배 옆에서 숨만 쉬어도 내가 좆같다, 이 말이에요?”
“눈치 빠르네. 많이 컸어.”
옆을 지나던 누군가가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려다가 사라졌다. 둘 다 희미하게 웃는 낯이었지만 끼어들기 힘든 분위기였다.
이수는 발칙한 후배를 올려다봤다. 닫혀 있는 입매, 그러나 입꼬리가 살짝 비틀어져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다. 말하자면, 차재희가 어떤 기분일지 여러 가지로 해석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이수는 지금 차재희의 표정에 빡쳤다는 꼬리표를 붙였다.
“재희야, 화났어?”
빈정거리자 재희가 눈을 돌리며 헛웃음을 쳤다. 최근 이수는 그를 파헤치는 중이었다. 그가 이수가 열받는 부분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이수도 그가 화를 내거나 반응을 보이는 지점을 확실하게 알고 그를 괴롭히고 싶었다.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니까. 이수는 차재희를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차재희.”
“왜요.”
불퉁한 대답이 돌아왔다. 마음의 눈을 가늘게 뜬 이수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재희야.”
“……네.”
이번엔 얌전했다.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고.
“오늘은 내가 기분이 안 좋으니까 이만 꺼져 줄래? 내일도 보고 금요일에도 봐야 하는데 오늘은 더 이상 기분 잡치기 싫어서.”
“선배가 그렇게 말하니까 더 확실하게 잡쳐 드리고 싶네요.”
일단 화를 내는 포인트는 확실히 알겠다. 이수는 픽 웃으며 재희를 피해 강의실로 향했다. 뒤에서 쫄래쫄래 쫓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머리를 관통하는 이름이 있었다. 리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신유진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재희 말이야. 네가 아는 누구랑 닮았어.’
걸음을 멈춰 섰다가 휙 뒤돌았다. 희미한 미소가 장착된 기본 페이스의 차재희가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뜬 이수가 그에게 손짓했다.
“야. 무릎 굽혀 봐.”
“싫은데요.”
“……재희야. 머리에 뭐 묻어서 그래.”
놀랍게도 차재희는 자기가 한 말을 반드시 지키는 인간이었다. 친하게 지내면 좆같이 굴 일이 없다는 그 말처럼, 이수가 접고 들어가니 의심스러운 기색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무릎을 슬쩍 굽혀 주었다.
뭐지? 이 새끼, 이렇게 다루기 쉬웠나? 이수는 차재희를 없애 버릴 마땅한 방법을 못 찾는다면 적당히 기분을 맞춰 주다 떨궈 버려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희야- 하고 차재희를 부르면 이상하게 소름이 돋는 느낌이라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수는 손을 뻗어 차재희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예쁜 이마가 드러나게끔 손끝으로 잡아 올리니 얼추 느낌을 알겠다. 여기서 눈을 접으면…….
“웃어 봐.”
“울고 있는 거로 보여요, 지금?”
“더 활짝.”
“왜, 아주 입을 찢으라고 하지 그래요.”
재희가 황당한 기색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아니지. 차재희에게는 당근이 필요하다. 오그라드는 손발과 토기가 치미는 속을 내리누르며, 이수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너 웃는 거 예쁘잖아. 보고 싶어서 그래.”
자기가 말해 놓고도 영 아니다 싶었는지 이수가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그것을 모를 재희가 아니었다.
“이건 무슨 개수작이에요?”
“씨발, 됐어. 말자.”
“잠깐만요. 시도는 나쁘지 않았어요.”
더럽다는 듯 손을 털어 내려 하는데 재희가 이수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대로 힘을 주어 제 앞머리를 고정시켜 둔 채로, 재희가 활짝 웃는다. 끌려 올라가는 입꼬리와 예쁘게 접힌 눈매. 그리고 보조개가 팬 뺨을 바라보던 이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새끼… 리키처럼 생겼잖아. 리키가 인간이 되면 차재희처럼 생겼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분위기가 똑같았다. 래브라도 리트리버 특유의 웃는 얼굴이 차재희와 굉장히 비슷했다.
어젯밤의 꿈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어제 리키랑 뽀뽀하고 잤기 때문에 그런 개꿈을 꾸게 된 것이다. 이수는 차재희에게 저도 모르는 사심이 있어서 그딴 꿈을 꾼 게 아니라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여태 차재희에게 이상하게 마음이 약해졌던 이유도 알아냈다. 미스터리를 푼 이수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됐어요?”
여전히 손목을 붙잡은 채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목표를 달성했으니 다시 차재희를 괴롭힐 순서였다.
“너, 진짜 개같이 생겼다.”
“……아니, 장난쳐요?”
순식간에 인상을 구기는 그를 두고 돌아섰다. 강의실로 향하는 이수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 * *
목요일 오전에 듣는 사회봉사와 리더십 수업은 교양 필수 과목이었다. 팀원들과 함께 봉사 활동을 하고 리포트를 써야 하는데, 인증 샷을 찍어 올리는 부분 때문에 팀플레이가 강요됐다. 수업이 끝나고 조원들과 둘러앉은 이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신방과 신입생이라는 여자애들 셋은 종알종알 말이 많았고, 경영 졸업반인 김희중은 반대로 관심이 없었다.
“아니면, 보육원은 어때요?”
“그러게! 나 애들 진짜 좋아하는데!”
“아, 벌써 귀엽다. 보육원 찾아볼까요?”
신입생들은 말을 할 때마다 셋이 한 세트로 이야기했다. 머리 아파. 이수가 고개를 저었다.
“보육원은 일회성 자원봉사자는 잘 안 받아.”
“아… 그래요?”
“저희 부모님이 오랫동안 봉사 다니신 곳 있어요. 거기다가 한 번만 어떻게 안 되냐고 물어볼까요?”
“헐. 대박. 물어봐 봐.”
말하는 꼴이 저들끼리 벌써 보육원으로 결정한 것 같았다. 이수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거는 신입생 아무개를─이름을 잊어버렸다─제지했다. 생각이 없는 건지, 하고 싶지 않은 건지. 아이스 초코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안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왜 안 되는지가 중요한 거 아니야?”
“네?”
“애들은 사람들한테 정을 쉽게 줘. 그만큼 쉽게 상처받고. 가벼운 마음으로, 선심 쓰듯, 하루 봉사하고 온다는 생각으로 가면 안 된다는 뜻이야. 그래서 보육원 쪽에서도 봉사자들 가려서 받는 거고.”
“아…….”
“리포트 쓰자고 애들한테 상처 주고 싶어? 그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을 거 아니야.”
최대한 나긋하게 설명하려 했으나 뒤로 가서는 조금 짜증이 올라오는 바람에 날카로운 말이 튀어 나갔다. 옆에서 휴대폰을 두드리던 김희중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이수가 슬며시 눈썹을 치켜올렸다.
김희중과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다. 1학년 때 술자리에서 몇 번, 전공 수업에서 몇 번.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아가리에 본드를 처바른 상태를 유지하길 바라는 놈 중 하나였다.
“선배님…….”
신방과 여자애1이 두 손을 모은 채로 눈을 깜빡인다. 이수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해 보라는 듯 턱짓했다. 그 여자애가 뺨을 붉힌 채로 수줍게 속삭였다.
“올타에서 보던 거랑 되게 다르시네요…….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인데 정말 속이 깊으신 것 같아요.”
“맞아요!”
“그 사람들이 잘 모르고 떠드나 봐요. 선배님 되게 좋은 분 같으세요.”
그놈의 올타. 지긋지긋한 소리에 이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녀들의 눈에 비치는 서이수는 올타에서 보고 상상한 이미지와 판이했다. 소문으로 듣기에는 정말 싸가지 없고 인성질이 기가 막히는 쓰레기였는데, 실제로는 까칠하고 잘생긴 선배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이들에게는 다정하기까지 하다니……. 여자애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물론 과제에 불성실하게 참여하는 순간 서이수의 독설은 남녀를 가리지 않았지만 그녀들은 그것까지는 아직 몰랐다.
그래도 덕분에 대화는 순조롭게 흘러갔다. 그녀들은 이수의 제안에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결론적으로 봉사 활동은 서울 근교의 유기견 보호소로 가게 되었다. 이미 이수가 후원하고 있는 곳이라 할 일도 별로 없었고 관리도 잘되어 있는 곳이었지만 굳이 그 사실은 알려 주지 않았다.
신입생들이 먼저 떠나고 이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여태까지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던 김희중이 입을 열었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이 맞나 봐.”
“…….”
지금 나한테 말을 건 거야? 니가? 나한테? 그런 시선으로 쳐다보니, 김희중이 눈치 없이 히죽 웃었다. 이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차재희도 조온나게 착한 척하더니, 요즘 둘이 어울려 다닌다며? 너도 하는 짓이 그 새끼랑 똑같네. 애들이 상처를 어쩌고저쩌고. 천하의 서이수가 그 지랄 하는 거 보니까 존나 재밌다. 걔한테 물들었냐?”
차재희가 가식을 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또 있었나? 동질감이 느껴질 만하건만, 그 뒤에 이어진 말 때문인지 전혀 공감대가 서질 않았다.
자격지심과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김희중은 뭐든 제멋대로 판단하고 해석하는 경향이 짙었다. 한마디로 제 좆 꼴리는 대로 생각하는 인간이란 소리다. 이수가 대답하지 않았지만, 김희중은 주절거리며 말을 이었다.
“걔도 그러잖아. 선배님, 형, 하면서 은근히 사람들 깔보고, 무시하고…….”
“뭐 착각하는 것 같은데.”
“착각?”
“차재희가 좆같은 새끼인 건 맞는데, 그런 성격은 아니지.”
이수는 습관처럼 정확한 사실을 짚고 넘어갔다. 차재희가 착한 척한다는 말에는 일부 손을 들어 줄 수 있겠지만, 객관적으로 그가 누군가를 얕잡아 보고 무시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저건 순전히 김희중의 낮은 자존감으로 인한 삐뚤어진 시선이 만들어 낸 편견이었다.
열심히 착한 척해서 듣는 소리가 고작 이런 거다. 이수는 이 순간을 동영상으로 찍어 차재희에게 보내 주고 싶었다.
네 좋은 모습만 본 사람이 저렇게 생각하고 있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아직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렇게 말해 주고 차재희가 김희중에게 욕하는 꼴을 보면 참 재밌을 것 같았다. 순간 웃음이 나려 하는 이수에게 김희중이 소리쳤다.
“이 새끼가 선배한테 꼬박꼬박 반말이야!”
둘 다 별로지만, 솔직히 차재희와 김희중을 나란히 놓고 하나를 고르라면 차재희였다. 화를 낼 때도 조용했던 놈을 떠올리자, 저 앵앵거리는 목소리가 한층 더 듣기 싫어졌다. 이수가 무심하게 말을 던졌다.
“너는 그냥 웬만하면 말을 하지 마. 들을 때마다 귀가 썩는 느낌이니까.”
“하! 진짜 꾸준한 새끼네, 이거.”
“좆같은 주둥이 싸 물라고 했잖아. 내장 지방이 대가리까지 차올라서 귓구멍이 처막혔어?”
목소리가 싸늘하다 못해 시렸다. 세상엔 왜 이렇게 병신 같은 새끼들이 많을까. 왜 나를 가만두지 못해서 안달일까. 이수는 뒷담화를 정말로 싫어했다. 남의 험담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동조를 얻으려고 하는 태도는 역겹기 짝이 없었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랐다.
“이, 이게 진짜!”
“아… 씨발 새끼야. 거기서 한 마디만 더 하면 아가리 찢어 버린다.”
순간 카페가 침묵에 휩싸였다. 안 보는 척하면서 힐끗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하얗게 질린 김희중을 버려두고 이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흡연실로 갔다. 더 이상 상대하기도 귀찮았다. 시간도 아까웠고.
김희중과 멀어졌음에도 지저분한 목소리가 귓가를 더럽히는 느낌이 남아 있었다. 이수는 불을 붙인 담배를 천천히 빨아들였다. 여유를 갖고 느긋하게 피우고 나니 머리가 맑아졌다.
한참 후에 나와 가방을 가지러 가는데 뜨거운 시선이 쏟아졌다. 카페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왜 저래. 짜증을 억누르며 돌아온 자리에 김희중은 사라지고 좀도둑이 한 명 있었다.
이수의 아이스 초코를 훔쳐 마시던 유진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뭐 하냐?”
“아이스 초코 마시는데.”
“왜 여기 있냐고.”
“김희중이랑 왜 싸웠어?”
신유진은 싸움 구경을 좋아했다. 아니, 재미있는 일이라면 다 좋아한다. 싸움이든, 술자리든, 뭐든.
근데 소식이 이렇게 빠른가. 김희중이 떠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다. 그새 일러바치기라도 한 건가. 이수가 인상을 구기며 입을 열기 전에 유진이 설명했다.
“누가 올타에 동영상 올렸어. 난리 났는데 볼래?”
대답하기도 전에 휴대폰을 들이민다.
<실시간 공학관 카페 상황> 그러한 제목으로 올라온 게시글에 이수와 김희중의 대화가 녹음된 동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두 사람이 앉아 있었던 곳의 바로 뒤편에서 찍은 것이었다. 돌아보니 자리는 이미 빈 상태였다.
『걔도 그러잖아. 선배님, 형, 하면서 은근히 사람들 깔보고, 무시하고…….』
『뭐 착각하는 것 같은데.』
『착각?』
『차재희가 좆같은 새끼인 건 맞는데, 그런 성격은 아니지.』
첫 부분은 빠진 걸 보니 옆에서 듣다가 싸우려는 것 같아 녹화를 시작한 듯했다. 하다 하다 별일이 다 생긴다.
‘서는 욕하는 거 과외라도 받았음?’, ‘살벌한 거 봐 ㅠ 지렸다ㄷㄷ’, ‘도대체 무슨 일이야ㅠㅠ 경영러 소환!’, ‘차랑 서랑 무슨 일 있었음?’ 이수는 댓글을 몇 개 보다가 유진에게 휴대폰을 돌려줬다. 할 일도 없는 인간들이 많기도 하다. 유진이 눈을 과도하게 깜빡이며 물었다.
“이거 무슨 얘긴데?”
“알 거 없어.”
“뭔데. 니가 왜 차재희 실드를 쳐?”
그 말에 이수가 인상을 썼다.
“무슨 실드야. 좆같은 새끼라고 욕한 거 못 들었어?”
“흐흥.”
“웃지 마. 너 여기서 뭐 해. 수업 안 가?”
“갈 거야. 갈 건데. 너 좀 이상하다?”
유진의 얼굴이 흥미에 물들었다. 재희에게 듣기론 두 사람의 ‘친해지길 바라’ 프로젝트에 큰 진척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유진이 본 이수는 좀 달랐다. 그녀는 이수의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그를 떠보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이수야, 차재희 지금도 불편해?”
이수가 가만히 생각했다. 차재희를 보면 불편하고, 불안하고, 불쾌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 시기는 지났다. 미운 정도 정이라는 건지 재희와 뾰족한 말을 주고받는 것도 익숙해졌다.
입을 다문 차재희는 불편하지 않았고, 내려다보는 시선에 불안하지도 않았고, 그러니 불쾌하지도 않았다. 다만 살살 신경을 긁어 댈 때마다…….
“귀찮아.”
한참 과제 하는데 놀아 달라고 보채는 리키처럼 귀찮을 뿐이었다. 장족의 발전이었다.
유진은 이수를 보며 웃었다. 자신의 한쪽 입꼬리가 끌려 올라가 있다는 것을 서이수만 모르는 듯했다. 잘하고 있군, 차재희. 그녀가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야, 나 수업 가야 해.”
“그래서 어쩌라고?”
“경영대까지 데려다줘.”
“귀찮게 해, 진짜…….”
짜증을 내면서도 이수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어차피 프랑스어 수업 때문에 인문대로 가야 했다.
유진은 호수를 지나 경영대를 향해 걷는 내내 쓸데없는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대부분은 자신이 최근 작업에 공을 들이고 있는 여자에 대한 수다였다. 이수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경영대에서 유진과 헤어지고 인문대로 향했다. 한 발, 한 발 떼는 움직임이 아주 느릿했다. 프랑스어. 차재희와 함께 듣는 수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 올타를 봤을 텐데 무슨 말을 할까. 이수는 벌써 귀찮음을 느꼈다.
오늘따라 날씨가 좋았다. 햇빛이 눈을 찌른다. 새파란 하늘에 양떼구름을 바라보던 이수는 돌연 걸음을 돌려 인문대 잔디밭으로 향했다. 수업 시작 전까지 비어 있는 강의실이어서 올라가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이런 날은 밖에 있고 싶었다.
5월 셋째 주. 바람은 시원했으나 봄볕은 온몸으로 견뎌 내기엔 뜨거운 감이 없잖아 있었다. 이수는 그 따가운 햇살이 좋았지만 다른 학생들은 싫었던 모양이다. 늘 붐비던 풀밭이 기분 좋게 고요했다.
가방에서 작은 담요를 꺼내 펼쳤다. 그 위에 엎드려 누운 채 책을 꺼내 들었다. 온갖 경제 용어가 난무하는 전공 필수 서적은 표지가 조금 너덜너덜했다. 손에 익은 샤프를 든 채 몇 번이고 읽은 내용을 되새겼다.
담요 밑으로 느껴지는 풀 끝이 뾰족했다. 햇빛도 살갗을 찌르는 듯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김희중과 있었던 불쾌한 소요가 잊히는 느낌이었다. 나른히 풀린 기분에 이수는 옅은 미소를 띤 채로 학업에 몰두했다.
잔디밭을 가로지르는 발소리가 들려온 건 수업까지 30분 정도가 남았을 무렵이었다. 그 순간, 이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선배.”
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투자론에 목숨을 건 사람처럼 활자만 읽어 내렸다. 재희는 말없이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냥 앉으면 풀물 드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담요 끄트머리를 내어줄 생각은 없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샤프를 쉼 없이 돌렸다. 빙그르르 돌아가는 회전축을 의식하며 공부를 하던 이수는 문득 차재희가 곁에 있어도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 이렇게 편해졌지. 미간을 찡그린 채 기억을 더듬었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의도적인 무시와는 달랐다. 그냥, 곁에서 맴도는 차재희라는 이상한 후배가… 어쩐지 익숙했다. 마치 금붕어 똥처럼.
“왜 내 편 들었어요?”
뜬금없이 그렇게 묻는다. 신유진도 저 소리를 하더니, 둘 다 뭘 잘못 처먹었나. 이수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앞에 좆같은 새끼라는 말은 못 들으셨나?”
“아……. 그건 이제 애칭처럼 느껴져서 몰랐어요. 욕한 거였어요?”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불청객이 무릎을 끌어안은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재희는 한여름에도 절대 반바지를 입지 않을 것 같았다. 몇 벌이나 가지고 있는 건지 궁금한 슬랙스가 오늘은 카키색이었다. 바지 밑단 아래로 발목이 드러나 있다. 흙먼지가 묻은 로퍼를 힐끔거린 이수가 책을 덮었다. 한쪽 팔에 머리를 기댄 채, 모로 누워 재희에게 물었다.
“김희중이 너한테 뭐라고 했는지 안 궁금해?”
“더 있어요? 사람들 깔보고 무시한다는 거 말고.”
“더 있어.”
“뭐라고 했는데요?”
말을 전하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궁금했다. 차재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이수가 아까의 대화를 떠올리며 말했다.
“너한테 착한 척한다고 하던데. 내가 너한테 물들었대.”
“선배가…….”
기대했던 반응은 없었다. 손가락으로 이수와 자신을 번갈아 가리키던 재희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렸다. 바람결에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리하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누가 들어도 웃긴 말이었다. 서이수가 차재희한테 물들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 반대가 아닌가?
“내가 선배한테 물든 게 아니고요?”
“기분 나쁜 소리 하지 마.”
“……대체 방금 어느 부분이 기분이 나빴어요?”
진지하게 묻는 재희를 보고 이수가 대꾸했다.
“뭐가 됐든 너랑 나랑 손톱만큼이라도 닮는 것 자체가 기분 나빠.”
“아쉽게 됐네요, 우린 닮은 점이 꽤 많은데.”
“지랄 마. 호모 사피엔스인 거 빼고는 없어.”
강한 부정에 재희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이수의 이마를 쿡 찔렀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어처구니가 없어 쳐다보니 쿡, 쿡, 단정한 손끝이 눈썹과 코끝, 뺨 그리고 입술을 차례로 찔렀다. 뭐라고 반응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었다.
“너… 정신 나갔냐?”
“아직 멀쩡해요. 그리고 우리 닮은 부분 이렇게 많잖아요.”
“우리라는 말 함부로 쓰지 말랬다.”
으르렁거리는 말에 재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시 손가락을 들길래 손목을 꺾어 버릴 기세로 노려봤지만, 재희의 손끝은 스스로를 향했다. 이마, 눈썹, 코끝, 뺨. 그리고 입술. 자신의 얼굴을 차례로 내리누른 재희가 이수에게 말했다.
“눈, 코, 입, 뺨, 똑같죠?”
“그래, 너랑 김희중이랑 많이 닮았네.”
다른 호모 사피엔스를 입에 올리자 재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도 그건 싫은 모양이었다. 선배도 마찬가지거든요, 이수는 그렇게 중얼거리는 놈을 노려봤다.
이제 좀 꺼졌으면, 싶은 마음을 눈빛에 담아 보냈지만 차재희는 눈치가 없었다. 그저 나른하게 풀린 얼굴로 졸려요, 하고 중얼거리더니 접혀 있던 담요 한쪽을 쓱쓱 잡아 폈다. 재희가 그 위에 상체를 뉘었다.
호텔에서도 그러더니 남의 공간 침범하는 게 취미인가 보다. 발로 밀어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 보기 좋게 웃을 뿐이었다.
“올라갈 때 깨워 줘요, 선배.”
느른한 목소리에 이수가 곧바로 거절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릴 전문적으로 하네.”
“내가 전에 깨워 줬잖아요. 갚아요.”
“그런 적 없어.”
“있어요. 기억해 봐요.”
그렇게 말한 재희는 알츠하이머 어쩌고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이수는 이걸 확 걷어차 버릴까, 하다가 말았다. 전에도 느꼈지만 자는 모습만큼은 천사였다. 날개가 아니라 주둥이로 나불거리며 날아다니는 천사.
이수는 다시 전공 서적을 펼쳤다. 수업까지 20분 정도가 남아 있었으나 차재희가 말한 대로 해 줄 생각은 없었다. 5분쯤 남겨 두고 혼자 올라갈 생각이었다. 담요는 그냥 버리고 하나 새로 사면 된다. 얼마 하지도 않는걸.
그런 생각으로 또 샤프를 돌리는데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힐끔 보니 깨워 달라던 인간이 눈을 말똥말똥 뜬 채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부담스러웠다.
“자.”
“선배, 그거 아세요?”
“그 질문 한 번만 더 하면 진짜 뒤진다.”
“사실 저 낮잠을 못 자요. 지난번에 부산에서 선배 옆에서 잠든 게, 제가 기억하는 첫 낮잠이었어요.”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이수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기절시켜 줘?”
“…….”
입매를 지그시 늘린 재희가 다시 눈을 감았다. 이수는 차재희가 정말 잠들었으면 했다. 오늘 프랑스어 수업 때 샹송을 부르기로 했는데, 정신 나간 교수가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얼굴을 마주 보며 부르라고 시킨단다. 작년에 프랑스어를 수강한 박지혜에게 들은 말이었다. 그때 같이 노래 부른 타과생이랑 잠깐 사귀었었다나. 지혜는 그런 소릴 했었다.
차재희랑 얼굴을 마주 보고 샹송을 부를 생각을 하니 토할 것 같았다. 오늘은 무조건 다른 사람하고 앉아야 했다. 이수는 자라, 자라, 속으로 그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렇게 한 몇 분쯤 지났을까. 차재희의 눈꺼풀이 또 슬그머니 올라갔다. 이수가 버럭 성질을 냈다.
“씨발, 자라고!”
“선배, 궁금한 거 있어요. 대답해 주면 잘게요.”
“뭐. 빨리 물어봐.”
“작년에 생활 한문 왜 드랍했어요?”
“좆같아서. 됐지?”
이수가 손을 뻗었다. 재희의 눈꺼풀을 아래로 끌어 내리고 이마를 토닥였다. 거칠기 짝이 없는 손길에 오던 잠도 달아날 판이었다. 그러나 이미 수업까지 10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이수는 그가 잠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냥 화풀이였다.
보조개를 드러내며 씩 웃은 재희가 그에게 또 물었다.
“그럼 언제 들을 거예요? 패스 못 한 거잖아요.”
“4학년 2학기.”
“그때 나랑 같이 들어요.”
“그때까지 네가 살아 있으면.”
“무슨 뜻이에요?”
차재희는 정말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깊은 한숨을 내쉰 이수가 책을 소리 나게 덮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계속 나불거리면, 내가 니 목을 조를지도 모른다는 소리야.”
“…….”
차재희가 표정을 굳혔다. 이수는 시계를 확인하고 가방에 책을 쑤셔 넣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차재희를 발로 걷어차듯 밀어내고 담요를 접었다. 그러는 동안 재희는 제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다. 봄바람에 날아오른 풀잎이 살포시 날아가 고개 숙인 그의 머리 위에 안착했다.
새싹이 난 것처럼 정수리에 잔디가 꽂혀 있었다. 그러나 이수는 아는 체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웃음을 삼키며 인문대를 향해 걸으니 쫄래쫄래 따라온다. 리키 같았다.
강의실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며 아까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생활 한문을 같이 듣자고 하면서 그때는 왜 드랍했냐고 물었다. 드랍한 걸 알고 있는 걸 보면, 작년에 그 수업에서 차재희를 만났었던 게 분명했다.
“너, 작년에 생활 한문 들은 거 아니야?”
“맞아요.”
“근데 나랑 또 듣겠다고?”
“재수강하면 되죠.”
그 좆같은 수업을 왜 두 번이나 들으려고 하지? 이수는 차재희가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나, 생각했다. 아니면 시험을 망쳤나. 하지만 차재희는 중국어를 잘한다고 했다. 영어를 잘하는 이수가 알파벳과 영어 단어에 약할 리 없는 만큼, 그도 한문은 빠삭할 터였다. 아니, 그러고 보니까…….
“야. 너 왜 프랑스어 듣냐?”
“들으면 안 돼요?”
“중국어 잘한다며. 그럼 그거 듣지 왜 이거 듣냐고.”
“아…….”
외국어 수업은 난도가 높지 않았다. 신유진이 중국어를 잘한다고 표현할 정도라면 아마 별 무리 없이 A+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왜 하필 이걸 들을까? 설마 나 때문은 아니겠지. 이수가 자의식이 지나친 상상을 하고 있을 때 재희가 대답했다.
“대학교에서 배운 게 아닌데 그걸 들으면……. 어쩐지 치팅하는 느낌이라서…….”
“…….”
그딴 걸 대체 누가 신경 쓴다고? 한심하게 보는 듯한 시선에 재희가 뺨을 문질렀다. 이수의 입꼬리가 경련했다. 부끄러워하는 그의 정수리에는 여전히 풀 한 포기가 팔락이고 있었다. 재희의 열없는 표정에 이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컨셉질에 충실하네.”
“컨셉 아니거든요.”
불퉁한 대꾸를 무시하며 풀을 뽑아냈다. 그러곤 슥슥 문지르듯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짜증을 낼 줄 알았는데, 차재희는 눈을 굴리더니 허리를 숙여 고개를 들이밀었다. 리키와 닮았다고 인식해 버려서일까. 인정하긴 싫지만, 귀여웠다.
* * *
금요일, 서이수와 차재희 그리고 문율이 한자리에 모였다.
수업을 끝마치고 카페로 달려온 문율은 오자마자 이수와 재희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는 머리칼이 조금 땀에 젖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뛰어올 일인가. 이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공강이신데 죄송해요. 저 때문에 또 학교까지 나오시고. 재희도 미안해.”
그다음 상황은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차피 만나야 하는 건데. 괜찮아.”
과제를 해야 하니까 만나는 건 당연한 건데, 그게 왜 미안한 건지, 차재희는 뭐가 또 괜찮다고 하는 건지. 미안할 일이 맞아서 괜찮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자기도 똑같은 상황에 처하면 미안해질 거 같아서 그 마음을 이해하고 괜찮다고 하는 건지. 뭐가 되었든 간에 이수의 눈에는 둘 다 이상했다.
자신 몫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온 율이 이수를 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배시시 웃는 모습이 귀여워서 이수는 저도 모르게 짧게 웃어 버렸다. 얼굴에 날아와 박히는 시선을 모른 체했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이수가 율에게 물었다. 율은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커피를 꼴딱 마시고는 대답했다. 두 번이나 만났는데, 이름을 잊었다고 해서 불쾌해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문율입니다. 외자예요.”
“그래. 대답 잘하네.”
“…….”
그렇게 말하며 옆을 보니 차재희가 단정한 낯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 어쩌라고요. 그 시선에 이수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이름이 뭐라고? 그렇게 물었을 때 차재희가 ‘차재희입니다’ 하고 대답했으면 어땠을까. 확실히 금방 잊어버렸을 것 같았다.
“생각해 온 거 누구부터 말해 볼까요? 선배부…….”
“율이 먼저 해 봐. 궁금하네.”
“앗, 네!”
그답지 않게 웃으며 권하는 이수의 태도에, 재희가 희미하게 낯빛을 굳혔다. 그리고 대화가 진행될수록 재희의 말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서이수는 차재희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신경을 살살 긁어내리고 있었다.
아래는 모두 서이수의 발언이다.
“율이는 생각이 독특하네.”
“차재희,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율이 말이 맞아.”
“야. 그건 빼자고 했잖아.”
“차재희. 씨발, 말이 안 통해.”
“율아, 이해돼?”
이수의 목소리에 확연한 온도 차를 느낀 것은 비단 재희뿐만이 아니었다. 율이 슬금슬금 눈치를 봤다. 처음과 비교해 딱딱히 굳어진 차재희와 어쩐지 즐거운 기색이 가득한 서이수.
율은 순간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뭐든 셋이 하면 더 나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교수님의 제안에 오케이를 했는데, 잘못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올타에서 봤던 것처럼 두 사람의 사이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지난 발표가 정말 인상 깊었던지라 팀워크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율은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으로 대화를 이어 갔다. 얼추 이야기가 끝나고 이수가 흡연실에 간 사이, 차재희가 말을 붙였다.
“문율.”
“어… 어?”
율, 에서 문율이 되어 버린 호칭에 적잖이 당황했다. 재희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율이 미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혹시 내가 뭐 실수했어?”
“아니. 그건 아니고… 너, 컴공인데 바쁘지 않아?”
나긋하고 다정한 말투, 그런데도 어딘가 불편했다. 율이 긴장한 채 되물었다.
“응?”
“프로그래밍이니 시험이니 뭐니, 한창 바쁠 시기잖아. 안 그래?”
“어어, 바쁘긴 하지. ……왜?”
무슨 이야길 하려고 그러지. 어쩐지 중요한 말인 것 같아 율이 귀를 기울였다. 재희는 곧 눈을 접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과제에 이름 올려 줄게. 버스 탈래? 발표 전에 자료 정리해서 보내 줄게.”
“……응?”
“바쁘잖아. 교양 수업에 신경 쓰기 힘들고, 고작 2학점짜리 과제에 시간 쏟기 아깝고. 나랑 이수 선배, 과제 대충하지 않아. 너한테 많이 부담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어때?”
내가 너무 예민했나 보다. 재희는 정말, 착한 애구나……. 율은 차재희의 배려에 감동했다. 컴공이 유난히 바쁜 것도 아니고, 자신 또한 다른 과제들로 정신없을 게 분명한데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문율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니야! 열심히 할게! 내가 아까 말했던 것처럼 리뷰 검색해서 취향에 맞는 책 추천해 주는 프로그램 코드 짜 볼 테니까,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고마워, 재희야.”
“아니, 그냥…….”
간절한 눈빛으로 뭐라 말하려던 재희가 입을 다물었다. 서이수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율에게 방금 한 말은 비밀로 해 달라고 속삭였다. 선배가 좀 예민한 스타일이라. 그렇게 덧붙이니 이해하는 눈치였다.
다시금 과제에 관한 대화가 이어졌다. 이번 발표자는 이수였고, 자료 취합과 PPT 제작은 재희가 맡기로 했다. 세 사람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코드와 수식에 짜 맞춰져 있을 줄 알았던 문율은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는 상대였다. 이수가 여태 만나 온 컴공 학생 중에 가장 나았다.
헤어지기 전에 이수는 율의 번호를 받아 저장했다. 곧바로 차재희의 번호는 차단하고 할 말 있으면 메일을 보내라고 말했다. 재희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카페를 떠났다.
* * *
이수도 한때는 대학 축제에 환상을 가진 적이 있었다. 시끌벅적하고 재미있는 분위기 속에서 술에 진탕 취해 집에 기어 들어가는 추억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신유진이 말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학년 때 축제는 최악이었고─첫날엔 유진에게 집적거리는 외부인과 시비가 붙었고, 둘째 날엔 기분을 풀어 주겠다던 유진과 술을 마시다가 잠들어서 잔디밭에서 깨어났고, 셋째 날엔 신입생을 부려 먹기 위해 혈안이 된 선배와 다퉜고, 마지막 이틀은 열받아서 집에 처박혔다─2학년 때는 아예 일주일 동안 게임만 했다. 그 덕분에 올해도 축제에는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이수가 과제에 정신을 판 사이에 유진은 경영과 대표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수를 며칠 내내 귀찮게 했다. 주점의 꽃이 되어 달라는 헛소리를 무시하고 홍보라도 뛰어 달라는 개소리를 몇 번 씹고 나니 연락이 없었다. 이렇게 싱겁게 나가떨어질 신유진이 아닌데, 아마 과대 일이 바쁜 것 같았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느지막이 일어난 이수는 뭘 할까 고민했다. 교양 필수 과목인 ‘컴퓨터의 개념 및 실습’ 수업은 휴강을 하지 않아서 어차피 학교에 가야만 했다. 다만 일찍 가 있느냐, 집에서 시간을 때우다 가느냐의 차이였다.
잠깐 라테르를 할까 했지만, 대규모 업데이트를 앞두고 딱히 할 일이 없었다. 퍼스트 클리어 준비는 끝났고, 밤마다 힐러를 트레이닝하는 일만 남아 있을 뿐이다. 고민하며 릭과 놀고 있는데 유진에게 메시지가 왔다.
Eugene
이수수수수 와서 점심이나 같이 먹자
푸드 트럭 엄청 많이 옴!!!
10:38
Eugene
누나가 사줄게^^
10:39
10:40
나대지 말고
Eugene
구롬 이뚜 옵빠가 따뚜뗴요
10:42
10:45
차단함. 12시 과방
이수는 신유진을 차단하고 메일함을 확인했다. 주말에 차재희가 보내 놓은 메일이 몇 개 쌓여 있었다.
선배, PPT 궁금한 거 있는데요. 이틀 전.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안 볼 거면 메일이라도 빨리 확인해요. 이틀 전.
저기요. 하루 전.
이게 선배가 저를 귀여워하는 방식인 거죠? 1시간 전.
내용은 별것 없었다. 제목이 곧 내용인 수준이다. 다만 마지막 메일에 좆같은 새끼한테 정말 잘해 주시네요, 하는 빈정거림이 들어 있을 뿐이었다. 메일을 삭제한 이수는 스팸 문자 보관함에 들어가 차재희가 보내 놓은 것을 확인했다. 시답잖은 파워포인트 질문이었다. ‘포탈에 검색해. 핑거 프린스야?’ 짤막한 답장을 보내 놓고 다시 차단했다.
씻고 나온 이수는 현관에 놓여 있던 자전거를 끌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5월 말. 햇살이 뜨거웠으나 아직 바람은 선선했다. 흰색 반소매 티셔츠에 연청 데미지 진. 햇빛을 가리려는 것이 아니라 머리칼이 날리는 게 싫어서 쓴 베이지색 모자는 거꾸로 뒤집힌 채였다. 창백해 보일 정도로 새하얀 피부는 뙤약볕에도 타는 일이 없어 가능한 일이었다. 매끈한 콧날 아래로 짙은 분홍색 입술이 촉촉하다.
이수의 집은 서울 숲과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주상복합 아파트였다. 한강변에서 이어지는 천 옆으로 자전거 도로가 나 있는데, 거길 거슬러 올라가면 사국대가 나왔다. 자전거를 타고 20분을 달리자 보이는 교정이 오늘따라 낯설었다. 통행이 금지된 도로변을 따라 푸드 트럭이 줄지어 서 있고, 동아리와 학부생들이 세워 둔 천막이 솟구쳐 있었다.
여기저기 활기가 넘쳐흘렀다. 그러나 이수는 그 분위기에 동화되지 못했다.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은 느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어.”
“안녕하세요!”
“안녕.”
경영대로 들어서니 꾸벅 인사를 해 오는 후배들 또한 생기가 넘쳤다. 처음 맞는 축제에 새내기들은 한껏 들떠 있었고, 예쁘게 꾸민 얼굴에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중간중간 마주치는 졸업반들은 여전히 흐물거렸지만, 이전에는 변한 지 6개월쯤 된 좀비 같았다면 오늘은 방금 변신한 좀비 같았다.
과방에 들어서자마자 차재희와 마주쳤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영지와 이야기를 나누던 재희가 이수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배.”
“앗, 오빠! 안녕하세요!”
“영지 안녕.”
차재희의 인사는 씹었다. 처음엔 두 사람의 분위기에 당황했던 영지도 이제 익숙하단 표정이었다. 재희도 마찬가지였다. 받아 줄 거라고 기대도 안 했다는 듯 단정하게 웃으며 다시 영지와의 대화로 돌아갔다. 다들 놀러 나갔는지 과방엔 두 사람뿐이었다. 칵테일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나누던 둘도 곧 그곳을 떠났다.
이수는 파티션 너머의 리클라이너에 앉아 휴대폰을 꺼냈다. 신유진을 차단 해제하니 메시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마지막 메시지를 확인한 이수가 인상을 구겼다.
Eugene
야야야야ㅑ. 수연이가 천막 설치하다가 손 다쳐서 나 지금 병원감ㅠㅠ 밥 혼자 먹어야겠다
11:49
별로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기다리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이수는 오랜만에 라테르 커뮤니티를 들여다봤다. 각종 뻘글이 난무하는 가운데 그의 길드원들에 대한 글이 있어 몇 개 정독했다. 좀 지나고 나서 동기인 안정훈이 나타났다. 양손 가득 작은 케이스를 들고 온 그는 이수를 보고 반색했다.
“이수서이수서이수서. 뭐 해? 여기서.”
평소에도 텐션이 높은 안정훈이었는데 축제 때문인지 더 시끄럽게 느껴졌다.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신유진 기다려.”
“잘됐다. 이따가 1학년 남자애들 오면 이것 좀 전해 줘.”
“뭔데.”
“슬라임. 이따 총학에서 무슨 보디빌딩 대회 하는데 애들이 삼각팬티에 처넣는다고 사다 달라고 부탁해서. 나 밥 먹으러 간다. 꼭 전해 줘!”
대답하기도 전에 안정훈이 사라졌다. 이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케이스를 바라봤다. 슬라임이 뭐지. 호기심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뚜껑을 열자 이상한 냄새가 풍겼다. 건강에 좋지 않을 것 같은 냄새였다. 반투명하고 말캉한 게 꼭 뭍으로 나온 해파리와 비슷했다. 이수는 미심쩍은 눈길로 슬라임을 찔렀다.
“뭐야?”
순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이상한 감촉이었다. 손가락 끝을 감쌌다가 질척거리며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름은 진짜 잘 지었다. 촉감은 낯설었지만, 게임에 나오는 슬라임과 정말 비슷해 보였다.
케이스를 흔들며 출렁거리는 슬라임을 바라보고 있으니 박지혜가 들어왔다. 대낮부터 벌게진 얼굴로 두리번거리던 지혜가 이수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오빠! 혼자 뭐 해요?”
“신유진 기다려. 너 얼굴이 왜 그래.”
“아, 빨개요?”
“존나. 어디 아파?”
그 말에 킥킥거리며 웃은 지혜가 고개를 저었다. 지혜는 자연스럽게 케이스를 열어 손바닥 위에 슬라임을 올려놓았다. 주물럭거리는 손길이 거침없다. 그녀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밖에 칵테일 버스 왔는데 너무 맛있어서 두 잔이나 마셨어요.”
그 말을 듣고 나니 희미하게 술 냄새가 풍기는 것도 같았다. 인상을 찡그린 이수가 제정신이냐는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몇 시인 줄은 아냐?”
“축제인데 뭐 어때요. 으, 감촉 개 좋아.”
지혜는 치덕거리는 슬라임을 손바닥에 몇 번 내려치더니 아, 하고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작은 손바닥 위에 녹색의 포장지가 올라왔다. 박지혜는 술에 취하면 주변인들에게 뭔가를 쥐여 주는 습관이 있었다.
“이거 젤리요. 오빠 단 거 좋아하죠? 드세요.”
“고마워.”
“저 갈게요. 바빠요. 이따 주점에 놀러 오세요.”
“어……. 가.”
발소리가 멀어진다. 다시 혼자 남았다. 창문을 타고 넘어오는 시끌벅적한 소리는 그저 소음처럼 느껴졌다. 축제에서 느낄 수 있는 설렘, 고양감 그런 것들에 이수는 전혀 감화되지 않았다. 신유진이 언제 오려나. 그녀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기만 했다.
10분쯤 지났을까. 심심함을 견디다 못한 이수가 젤리의 포장을 뜯었다. 달콤한 냄새가 풍긴다.
‘풋 젤리, 화난 수박 향.’
수박이 왜 화가 났을까. 이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상한 형태의 그 젤리를 둘둘 말아 한입에 처넣었다.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한 번. 두 번. 세 번.
젤리를 씹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진다. 미쳤냐, 박지혜……. 이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 근처의 쓰레기통으로 달려갔다. 급하게 뱉어 낸 젤리 뭉치가 흥건히 젖어 있다. 콜록거리며 기침을 몇 번 한 이수가 허리를 세웠다. 순식간에 빨갛게 부풀어 오른 입술과 눈물이 차오른 눈동자.
화난 수박 향이 아니라 사람 화나게 만드는 수박 향이었다. 엄청나게 매웠다.
습, 하고 바람을 빨아들여 매운 기를 없애려 했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포장지에 불을 내뿜는 그림이 화를 내는 것을 형상화한 건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입에서 정말 불이 나오는 것 같았다. 매운맛에 면역이 없는 이수에게는 고문 도구와도 같은 젤리였다.
물, 아니 우유가 필요하다. 자리로 돌아간 이수가 다급히 휴대폰을 챙겨 나왔다. 편의점에 가야 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입에 남은 매운맛이 몸집을 부풀린다. 남들에게는 살짝 매콤한 수준이었지만, 이수는 머리가 띵하게 아려 올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출입구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문이 스르르 열렸다. 차재희였다. 이수는 그 지긋지긋한 얼굴보다 그의 손에 들린 테이크 아웃 컵에 눈길이 갔다. 새하얀 우유. 이수가 간절히 원하던 우유가 눈앞에 있었다. 재빨리 손을 뻗었다. 물기가 맺힌 표면이 차가웠다.
“이거, 나, 줘.”
“……그러세요.”
웬일로 말을 잘 듣는 차재희가 기특했다. 이수는 망설이지 않고 재희가 물고 있었던 빨대를 입에 물었다. 컵 안에 든 얼음이 잘그락거린다. 그가 우유를 마시는 동안 재희는 이수를 바라봤다.
희미하게 분홍빛이 도는 낯에, 불긋하게 달아올라 젖은 눈매. 퉁퉁 부어오른 입술에 차례로 눈길이 닿는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목울대는 고운 얼굴과 달리 남성의 선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느끼며 우유를 마시던 이수는 이상함을 느꼈다.
우유가 우유가 아니었다. 첫맛은 시원했고, 두 번째 맛은 무척이나 달았고, 끝 맛이 더럽게 썼다. 마지막 한 모금까지 마시고 나니 매운맛은 가셨으나…….
“이거 씨발, 우유 아니지.”
“누가 우유를 여기다 담아 마셔요.”
아무도 없다고 불퉁한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저 이중인격자 새끼. 이수가 입 안에 남은 찝찝한 맛을 지워 내며 미간을 찡그렸다. 이 쓴맛은 분명, 술이었다. 그의 추측에 확신을 더하듯 차재희가 말했다.
“아이리시 크림이에요. 알고 달라고 한 거 아니었어요?”
“여기 무슨 알코올 중독자 모임이냐? 왜 다 낮술을 처하고 지랄이야.”
속에서 올라오는 술기운에 이수가 버럭 짜증을 냈다. 모자를 벗어 머리를 쓸어 올리는 손길이 거칠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희가 대뜸 손을 뻗었다. 커다란 엄지가 순식간에 이수의 눈가를 훑고 지나갔다. 붉어진 눈매가 일그러진다.
“왜 울어요, 선배?”
“한 번만 더 손대면 손목 나갈 줄 알아.”
“우유는 왜 찾았어요?”
“이거 도수 몇이야. 아니, 씨발. 됐어.”
부산 이후로 이런 대화가 종종 오갔다. 둘 다 저 할 말만 하고 있었다.
아이리시 크림의 도수는 17도 정도였다. 맥주 반 캔에도 취해 버리는 서이수로서는 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이번 축제도 참 병신 같았다. 신유진, 박지혜 그리고 차재희. 알코올 중독자들이 하루를 망치고 있었다. 수업은 어떻게 가지. 진짜 개같다. 쿵쿵거리는 심장께를 어루만지며 이수는 파티션을 돌아 들어갔다.
소파 베드를 펼쳐 누우니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수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건들면 뒤진다.”
“내가 선배를 왜 건드려요? 가끔 보면 자의식 과잉이에요.”
“아, 네. 넌 뒤끝 장난 아니시네요.”
몇 번이나 우려먹으려는 건지. 빈정거린 이수가 눈을 감았다. 속이 좋지 않았다. 매워서 헥헥거리는 거랑 술 때문에 울렁거리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후자겠지만, 차재희 앞에서 이러고 있으니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대낮에 우유 마시듯 술 처마시는 놈 앞에서 이게 무슨 꼴이지. 이수는 빌어먹을 젤리를 준 박지혜를 잠깐 원망하다 말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술기운이 올랐다. 얼굴에 열기가 느껴진다. 손을 들어 뺨을 매만진 이수는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려 누웠다. 끔뻑거리며 눈을 뜨니 테이블 너머로 차재희가 보였다. 다리를 꼰 채 팔짱을 낀 모습이 정말 시건방졌다.
남들 앞에서는 저렇게 앉지도 않는다. 정자세로 앉아서 인형처럼 웃는 주제에, 제 앞에서는 처키처럼 구는 것이 마냥 우스웠다. 힘없이 풀어진 입매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순간 재희가 물어 왔다.
“선배, 술버릇 있는 거 알아요?”
“그딴 거 없는데.”
“있는데요.”
“지랄 마세요. 없어요.”
술에 취하면 졸리다. 그 외에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는 것 정도랄까. 그건 술버릇이라고 할 수도 없지 않나. 단호하게 대꾸한 이수가 손을 뻗었다. 테이블에 쌓여 있는 상자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상자를 열어 슬라임을 꺼냈다. 지혜가 그랬던 것처럼 손바닥에 놓고 치덕거리니 꽤 느낌이 좋았다. 말랑말랑한 것이 찹쌀떡 같기도 하고, 텅 빈 리키의 고환 같기도 하고…….
이수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거 씹으면 어떤 느낌일까. 젤리 같을까, 아니면 푸딩? 아니면 해파리? 주정뱅이가 슬라임을 입으로 가져가려 하는 순간이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억 안 나요? 새벽에 해운대에서.”
“니가 좆같은 소리한 거?”
“아니요. 그 전에. 그리고 나만 한 것처럼 말하지 마세요. 선배도 좆같은 소리 했잖아.”
이수가 치켜뜬 눈으로 재희를 올려다봤다.
차재희는 뭐 저리 혼자 기억하는 게 많을까. 작년에 있었던 일도 말해 주지 않는 주제에 뭘 또 물어봐.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수는 지나간 일을 들추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툭하면 과거 일을 끄집어내는 차재희는 정말 구질구질한 놈이었다.
“너, 혹시 그거야? 과잉 기억 증후군. 뭐 그런 거.”
“아뇨.”
“그럼 왜 그렇게 쓸데없이 기억하는 게 많아?”
“쓸데없다니…….”
중얼거린 차재희가 하, 코웃음을 쳤다. 다리를 풀어 내리더니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려 두 손을 맞잡았다. 그 위에 턱을 올려놓은 재희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다.
차재희가 저럴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지랄을 떨기 전에 단정한 낯이 풀어지는 순간, 그때만큼은 이유를 모르게 속이 근질거렸다. 낯선 감각에 신경이 금방 곤두서곤 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럴까, 바라보고 있으니 별 예상치도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때린 놈은 발 뻗고 잔다는 말이 맞네요.”
“단어 선택이 잘못된 것 같은데.”
“가해자라고 할까요?”
“…….”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무리 취했어도 술주정으로 사람을 팬 적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있기는 했다. 1학년 신환회 때 신유진에게 성희롱 발언을 한 4학년의 뺨을 갈긴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유가 충분했고, 차재희는…….
거기까지 생각한 이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차재희는 충분히 맞을 짓을 하고도 남을 놈이었다. 입을 놀릴 때마다 머리끝까지 열이 받았던 적이 한두 번인가? 근데 아무리 그래도 술김에 싸웠으면 기억이 날 텐데, 아무리 되새겨 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수가 반신반의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너 때렸어?”
“비슷해요.”
“똑바로 말해. 때렸어, 안 때렸어.”
“때린 것까진 아닌데 불쾌한 신체 접촉이 있었어요.”
씨발……. 뭐지? 순간 뇌리를 스치는 잔상에 이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니지. 아니다. 이수는 부정했다. 그건 부산에 다녀온 이후에 꾼 꿈이었다. 주물럭, 주물럭. 손안의 슬라임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점점 거칠어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게 없다. 이수가 천장을 보고 누운 상태로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때렸으면 고소해.”
“때린 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맞았다고 해도 고소해가 아니라 미안하단 말이 먼저 나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기억도 안 나는데 무슨 사과를 해.”
“선배는 법정 가면 감형 받긴 글렀네요.”
빈정거리는 말에 이수가 짧게 웃었다.
“심신 미약이라고 주장하면 돼.”
뻔뻔해…….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라임을 다시 입에 갖다 대던 이수가 고개를 돌렸다. 조금 풀어진 눈매로 재희를 지그시 바라본다.
두 사람은 시선을 맞댄 채로 한참을 서로만 응시했다. 이수는 저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하고, 재희는 해야 할 말을 골랐다.
침묵을 깬 것은 차재희였다.
“선배. 그때 한 말 기억나요?”
“찌질한 말 좀 하지 마.”
“……왜 좋게 나가도 지랄이에요?”
“니가 뭐 기억나냐고 물어본 게 한두 번인지 알아, 지금?”
그 말에 재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파 베드로 다가오더니 테이블 위에 걸터앉는다. 흰색 차이나 칼라 셔츠와 각 잡힌 슬랙스. 언제나와 같은 단정한 옷차림이었다. 늘 맡아지던 섬유 유연제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달콤한 향기가 뒤섞여 있었다. 쥐었다 폈다 하는 손바닥이 이상하게 초조해 보였다.
체취가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 이수가 눈을 치떴다. 뭐 하는 짓이지. 그 눈빛을 무시하며 재희가 물었다.
“그때 꼬우면 너도 욕하라는 말, 유효해요?”
“너 방금 지랄이라고 하지 않았냐?”
방금도 해 놓고서는 뻔뻔하기 그지없는 질문이었다. 차재희가 욕하는 건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심드렁한 대꾸에 재희가 입매를 늘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수는 만지작거리던 슬라임을 입가로 가져갔다. 한 번만 씹어 보자, 그러나 목표를 달성하기 전에 재희가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아까부터 뭐 하는 거예요.”
“한 번만 더 손대면 손목 나간다고 말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참견질이야. 붙들린 손목이 뜨끈하다.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수는 원래도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편인데, 술을 마시면 더 했다. 이수가 차재희를 무시하고 슬라임을 틀어쥐었다. 불쑥, 한쪽으로 튀어나온 슬라임이 그의 입가에 닿았다.
차재희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그거 먹어 보려는 거 아니죠?”
“남이사 처먹든 말든. 신경 끄세요, 후배님.”
“선배, 먹으면 죽을지도 몰라요.”
“뭘 모르시나 본데, 사람이 그렇게 쉽게 안 죽어요.”
빈정거린 이수가 느슨하게 풀린 시선을 슬라임에 꽂아 넣었다. 말문이 막힌 차재희의 손을 털어 냈다. 그리고 슬라임을 다시 입가로 가져다 댔다. 죽긴 뭘 죽어. 한번 씹어만 볼 건데. 그러나 이번에도 그를 막아서는 손길이 있었다.
“아니, 진짜 죽는다고요.”
다급하게 손목을 틀어쥐기에 이수는 손바닥을 펼쳤다. 가슴께로 떨어져 내린 슬라임을 재빨리 반대쪽 손으로 주워 들었다. 입으로 처박을 듯 빠르게 쇄도하는 왼손을 재희가 한 번 더 막아 냈다. 짜증이 솟구쳤다. 이수의 두 손목을 꽉 붙잡은 차재희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런데도 술버릇이 없다고 생각해요?”
“놔라.”
“안 먹는다고 약속하면 놓을게요.”
“왜 이렇게 참견질이야. 짜증 나게.”
재희를 노려보던 이수가 슬라임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곤 손목을 비틀어 반대로 차재희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키도, 덩치도, 근육도 재희가 앞섰지만, 악력만큼은 이수가 우세했다. 두툼한 뼈를 세게 틀어쥐며 끌어당기는 힘에 재희가 순간 테이블에서 미끄러졌다. 그를 붙잡은 이수도 함께였다.
짧은 비명과 동시에 두 사람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뒤통수를 박은 재희가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흘린다. 이수는 차재희 위에 올라탄 채로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급격한 움직임에 심장이 쾅쾅 울렸다. 속도 울렁거렸다.
“씨발, 그러니까 손대지 말라고 했지.”
“머리 깨진 것 같아요.”
“까는 소리 하지 말고.”
“진짜 아파요, 선배.”
퉁명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차재희가 눈을 떴다. 눈꼬리에 찔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제야 이수는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뻗었다. 몸을 숙여 동그란 뒤통수 밑으로 손을 집어넣으니 조그맣게 부풀어 오른 혹이 느껴졌다. 술기운 때문에 눈앞이 핑글 도는 와중에 뇌진탕은 아니겠지, 걱정이 됐다. 이수가 누그러진 말투로 물었다.
“얼마나 아파.”
“죽을지도 몰라요.”
“이깟 걸로 안 뒤져.”
“선배가 아파 봐야 그런 소리 안 하죠!”
버럭 소리를 지른 재희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아픈 것 같았다. 눈매를 따라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흘러내린다. 한껏 억울한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
“슬라임이 뭐로 만든 건지는 알아요? 풀로 만들었다고요. 글루! 나한테는 먹을 게 없어서 개복치를 먹냐고 그러더니, 선배는 먹을 게 없어서 그딴 걸 먹으려고…….”
“그냥 한번 씹어 보려고 한 거야.”
“씹는 거나 먹는 거나.”
“씨발, 그러니까 손대지 말랄 때 안 댔으면 이럴 일도 없잖아. 왜 이렇게 귀찮게 굴어!”
미안함은 금세 가시고 신경질적으로 돌변한 태도였다. 재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물에서 건져 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어쩌고 중얼거리는 소리에 이수가 마뜩잖게 입매를 굳혔다. 이게 진짜.
“그렇게 아프면 나도 머리 박을까? 그럼 닥칠래?”
“진심이에요?”
“니가 원하면 그대로 해 줄게.”
“선배.”
솔직히 짜증 나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말하다 보니 정말로 궁금해졌다. 간이 알코올을 분해하는 것보다 알코올이 이성을 분해하는 게 더 빨랐다. 몸을 일으킨 이수가 소파 베드에 걸터앉았다.
“여기서 떨어질까? 그럼 돼?”
어느새 이수의 머릿속에는 차재희가 얼마나 아팠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서이수는 확실히 술주정이 있는 게 맞았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몹쓸 짓을 한 게 여러 번이었다. 달걀을 깨지 않고 프라이팬에 올린 적도 있고, 2층에서 뛰어내린 적도 있다. 술에 취하면 통제력이 없어졌다. 맨정신이면 미쳤다고 안 할 짓을 서슴없이 했다.
이수는 재희가 떨어질 때와 비슷한 높이를 가늠하며 몸을 기울였다. 그러나 머리가 바닥으로 처박히기 전에 벌떡 일어난 차재희가 그를 감싸 안았다. 쿵, 머리통을 감싼 손바닥이 돌바닥에 부딪힌다. 이수는 그대로 누운 채로 재희를 올려다봤다. 눈빛에 불만이 가득했다. 자기가 먹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아픈 것도 아닌데 자꾸 막아서는 그가 못마땅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게 선배 사고방식이에요?”
이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누워서 잠들었어야 할 시간에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으니 힘들었다. 허벅지 위에 올라앉은 차재희가 무거웠고, 짜증 났고, 성가셨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재희는 물음을 덧붙였다.
“선배가 나한테 욕하면, 나도 욕해도 되고.”
“…….”
“선배가 나 때리면, 나도 때려도 되고.”
“…….”
“그래요?”
목소리가 점점 서늘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이수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휙휙 돌아가는 환풍기 소리가 허공을 가른다. 그리고 기다란 한숨 소리도.
“대답해요.”
차재희가 점점 무거워졌다. 눈꺼풀도 무거워졌다. 이수는 그를 밀어내려다 포기했다. 입 닥치고 있으면 알아서 꺼지겠거니 생각했다. 거머리처럼 달라붙을 때 무시하면 불만스러운 얼굴로 사라지곤 했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재희는 끈질기게 대답을 요구했다.
“똑같이 해도 되냐고요.”
“해, 이 미친 새끼야.”
“그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이수는 색색거리는 숨만 내쉬며 뒷말을 기다렸다. 어떤 개소리를 지껄인다 한들 받아 줄 작정이었다. 차재희에게는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뒤이어 그가 뱉은 말은 이수의 상상을 초월하는 발언이었다.
“선배가 나한테 키스하면, 나도 선배한테 키스해도 돼요?”
“무슨 개씹소릴 하고 있어.”
곧장 욕설이 튀어나왔다. 생각만 해도 토할 것 같았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위장이 꺼져 버리는 느낌에 이수가 눈을 떴다. 그리고, 코앞까지 다가온 차재희를 발견했다.
누가 봐도 이상한 자세로, 그의 뒤통수를 감싸 쥔 채 허리를 숙이고 있는 차재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까만 눈동자가 지글지글 끓었다. 뭐야. 이거. 그답지 않게 당황한 이수가 고개를 돌렸다.
소파 베드 밑에 처박힌 쓰레기가 눈에 들어왔다. 억지로 그곳에 초점을 맞췄다. 쓰레기 같은 새끼. 차재희는 취한 게 틀림없었다. 박지혜처럼 칵테일을 두 잔 마시고 남은 걸 들고 온 걸지도 몰랐다. 대낮에 왜 이렇게 독한 술을 처마시는 건지. 덩달아 알코올 때문에 빠르게 뛰어 대는 심장이 불안했다. 대답을 강요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해도 되냐고.”
“씨발, 니 맘대로 해! 내가 미쳤다고 너한테.”
그런 짓을 하겠냐……. 그 말이 입 안에서 흩어졌다. 미친 알코올 중독자가 그에게 입술을 갖다 붙였다.
이수의 반응은 재빨랐다. 발길질이 먼저 나갔다. 차재희가 비명을 내질렀다.
“왜 때려요!”
“이 씹새끼가 돌았나!”
“똑같이 하라고 했잖아요!”
“내가 언제 너한테……!”
버럭 소리를 지르던 이수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두 입술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던 바닷바람. 조명의 불빛에 젖어 든 차재희. 손바닥에 감긴 목덜미의 감촉. 코끝에 스쳤던 섬유 유연제 냄새. 그 기억들이 한데 뒤섞인 채 쏟아졌다.
내가 미쳤구나. 이수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리고 그걸 본 재희는 결정적 증거를 잡은 사람처럼 눈을 반짝였다.
“기억나죠? 기억났어요, 지금. 선배 얼굴에 다 드러났어요.”
“씨발…….”
“다시 할 거예요. 눈 감아요.”
“왜 눈을, 아니 개소리하지 마. 뭘 다시 해!”
이수가 소리쳤지만, 재희는 기세등등했다. 밀쳐 내는 이수의 팔을 붙잡아 내리누른다. 악력에 체중이 더해지니 바닥에 누운 상태에서는 더는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낯선 충격은 신체의 통제권을 앗아 갔다. 밀어낼 힘도 없었다. 내가 왜 그랬지. 생각하던 이수는 그날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리키가 정말로 사람이 된 줄 알았다. 술김에 그렇게 착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차재희가 개같이 생긴 게 문제였다.
“한 입으로 두말할 거예요? 똑같이 하라고 했잖아요.”
“아니, 이건.”
“아니는 무슨. 중간에 멈췄으니까 다시 할래요.”
차재희는 단호했다. 어찌나 영악한지, 이수가 거부할 기세를 내비치자 그의 자존심을 살살 긁었다.
“선배, 그렇게 자기가 한 말도 안 지키는 무책임한 사람 아니잖아요. 맞죠?”
“또라이 같은 새끼.”
몸을 움직여 봤지만 꿈틀거릴 수조차 없었다. 이수가 속으로 욕을 씹었다. 저 주정뱅이는 기어코 거머리처럼 입술을 갖다 붙일 생각인 듯했다.
뽀뽀가 대수야? 씨발.
결국 이수는 자기 합리화를 하며 포기한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별것도 아닌 일이었다. 무엇보다 한 입으로 두말한다고 말 바꾸는 사람 취급당하기가 싫었다.
리키랑 뽀뽀한다고 생각하자. 그러면 된다. 그때도, 지금도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됐다. 차마 맨정신일 수가 없어서 이수는 그렇게 자신을 세뇌했다.
최대한 차재희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얼른 이 거지 같은 시간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러나 차재희는 한참이나 미동이 없었다. 얌전해진 이수를 내려다보며 마른 입술을 몇 번이나 축이고 나서야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 순간, 기다리다 못한 이수가 눈을 떴다.
재희의 내리뜬 눈꺼풀 아래로 검은색 눈동자가 음욕에 젖어 번들거렸다. 이수는 그것을 못 본 척하려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평소와 확연히 다른 그의 표정은 눈앞에서 떠나질 않았다. 긴장감에 심장이 쿵쿵 울렸다.
이수가 그랬던 것처럼, 부드럽고 촉촉한 재희의 입술이 그의 윗입술을 덮었다. 뺨 언저리에 뜨거운 숨결이 흩뿌려졌다. 머리가 하얗게 비어 버렸다. 키스를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설마 차재희와 이럴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수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5, 4, 3, 2. 그때 완전히 맞닿았다 싶은 아랫배가 움찔거렸다. 0, 아니 1. 아닌가. 2였나? 무서운 기세로 몸을 부풀리는 무언가가 느껴질 무렵, 재희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속눈썹을 셀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차재희가 제 입술을 핥았다. 이어서 음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씨발……. 미쳤네.”
이수가 할 말이었다. 머릿속에 물음표가 띄워졌다. 그러나 너무 당황한 나머지 문장이 완성되어 나오질 않았다. 너, 나한테 왜 좆을 세워? 그 말을… 어떻게 뱉어야 할지 몰랐다.
아니, 그냥 말 그대로 내뱉으면 되는 것이었지만 자신에게 이런 상황이 닥칠 줄은 몰랐기에, 그것도 그 대상이 차재희일 줄은 몰랐기에 이수는 일단 사고를 종료했다. 생각을 멈추고 이성적으로 이 좆같은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차재희는 그에게 있어 이해 불가의 대상이었다.
해독 불가, 접근 불가, 역지사지 불가. 그러니 그가 무슨 생각으로 발기했는지 알 턱이 없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뒤이은 행동도 예상하지 못했다.
한껏 풀어진 눈의 재희가 열띤 숨을 내쉰다. 이마에 총구가 들이밀어진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이수는 차재희에게 사로잡힌 패잔병이나 다름없었다.
“이건 받은 만큼 돌려준 거예요. 선배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말한 차재희가 점점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건… 아이리시 크림값이에요.”
담백하고 정갈했던 목소리가 오늘따라 진득했다. 이수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재희에게 키스를 받았다.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지. 숨이 콱 막혀 왔다. 조심스럽게 살갗을 핥는 혓바닥도, 폐부를 가득 메운 차재희의 체취도, 붙잡힌 손목에서 느껴지는 높은 체온도 모두 낯설었다. 할짝거리는 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어 왔지만 어쩐지 보이지 않는 막에 가로막힌 것처럼 현실성이 없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빨아 대던 차재희가 그에게 입술을 맞댄 채로 속삭였다.
“입 벌려 봐요, 선배.”
응? 조르는 듯한 목소리에 기가 찼다. 미친 변태 새끼야, 하고 욕을 퍼부으려고 했으나 재희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살짝 벌어진 틈으로 자신을 꽉 밀어 넣었다.
충격적일 만큼 야릇한 감촉이었다. 말랑한 혓바닥, 뜨거운 마찰, 모두 일찍이 경험해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입을 벌린 채 넋을 잃은 이수에게 차재희는 열렬히 구애했다. 치열을 훑는 움직임이 애절하기 짝이 없었다.
혀를 맞대는 감각이 새로웠다. 우물 밑바닥을 긁어내 물통을 채우는 것처럼, 이수는 아주 서서히 흥분에 젖어 들었다.
차재희랑, 내가, 씨발, 지금, 키스를. 드문드문 전개되는 생각을 불쑥불쑥 치솟는 자극이 끊어 냈다.
“읏…….”
재희의 손이 이수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두 손이 자유로워진 지 오래였지만 이수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이성이 차재희의 뺨을 갈기려 할 때마다 욕망이 폭력성을 억눌렀다. 결국 두 주먹만 꼭 쥔 채로, 이수는 재희와 입술을 맞댔다.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페니스가 아랫배에 비벼졌다. 입 안에서 느껴지는 감촉과 더불어 재희의 성감이 그대로 전해지는 느낌에 이수도 덩달아 아랫배가 근질거렸다.
아니야, 이거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들려고 할 때 재희가 그의 혀를 감아올렸다. 척척한 소리와 함께 혀뿌리를 빨아들이는 압박감에 온몸에 힘이 풀렸다. 날카롭게 벼려지던 생각들도 흐물흐물 풀어져 나갔다. 이수는 차재희의 머리채를 쥐다시피 한 채로 입을 벌렸다.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더, 더, 더.
“선배…….”
“아!”
거칠어지는 행동을 제지하기 위해 이수의 아랫입술을 깨문 재희가 그를 달래듯 뺨과 귀를 지분거렸다. 손끝이 움직이는 길을 따라 소름이 일었다.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눈가가 뜨거웠다.
이수가 밭은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린다. 재희는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처박았다. 나 미쳤나 봐요. 웅얼거리며 살결에 문대지는 입술이 축축했다. 살짝 빨아들이는 느낌이 생경했다. 압력점을 따라 거미줄처럼 퍼져 나가는 자극이 뇌를 녹여 버리는 듯했다. 발끝까지 찌르르 달아오르는 느낌에 이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식으로 애무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키스도 딱 두 번째였다. 아니, 방금의 경험에 빗대어 보면 그걸 키스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첫 경험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 그에겐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과방, 남자, 차재희. 다 말이 안 됐다. 술김에 꿈을 꾸는 거라고 생각하자. 몽롱한 정신으로 이수는 그렇게 되뇌었다. 그러나 귓가에 박히는 젖은 목소리가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빨리.”
가쁜 숨결에 조급함이 묻어났다.
“받은 만큼 돌려줘요, 선배.”
땀에 젖은 이마가 맞닿았다. 역광임에도 불구하고 별을 머금은 듯 반짝이는 눈동자를 이수는 무시할 수 없었다.
“빨리요. 응?”
그렇게 보채는 음성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접어 웃는 차재희가 예뻤으므로, 속삭이는 말이 듣기 좋았으므로, 받은 만큼 돌려준다고 자신이 말했으므로, 자극이 오면 반응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므로, 이수는 온갖 이유를 갖다 붙이며 재희를 돌려 눕혔다.
자연스레 이수의 허리를 붙드는 손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 티셔츠 속으로 들어와 척추를 훑어내리는 손길에 등골이 찌릿했다. 한참 전에 전원이 나간 이성은 재부팅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이수는 어설픈 몸짓으로 재희에게 키스했다.
조심스럽고 능숙했던 차재희와는 달랐다. 서이수의 입맞춤은 거칠고 서툴렀다.
“선배……. 조금만, 하아. 천천히…….”
재희가 이수의 어깨를 붙들며 그렇게 말했다. 어딜 가르치려고 들어. 마뜩잖은 표정으로 재희를 잡아먹으려 할 때였다. 벌컥, 출입문이 열렸다.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이수는 용수철처럼 튀어 나가 차재희에게서 떨어졌다.
“진짜 괜찮지?”
“아, 언니이. 걱정하지 마세요! 저 괜찮아요! 하나도 안 아파요!”
유진과 수연의 목소리였다. 파티션 입구까지 도망치듯 몸을 물린 이수가 숨을 가다듬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땀에 젖은 이마, 부어오른 입술. 당황한 표정으로 상체를 세우는 차재희. 엉망으로 흐트러진 옷차림에 여전히 부풀어 있는 앞섶. 누가 봐도 수상한 모양새였다.
미쳤다, 씨발. 미쳤다고…….
이수는 재희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휴대폰을 챙겨 뒤돌았다.
“선배!”
다급한 차재희와.
“뭐야. 있었어? 안에 재희도 있… 야! 서이수!”
불러 세우는 유진을 뒤로하고 뛰었다. 쾅, 과방 출입문이 부서질 듯 닫혔다. 이수는 도망치듯 달렸다. 뛰고 또 뛰어서 과방에서 멀리 떨어진 남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고장 표시가 붙은 좌변기 칸에 들어가 뚜껑을 내리고 앉았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것 같아 선택한 곳이었다. 문을 잠그고, 기나긴 한숨을 내쉰 이수가 돌연 칸막이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씨발!
열이 오른 뺨이 뜨거웠다. 입 안에 아직까지 차재희의 타액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이수는 텅 빈 휴지통에 침을 몇 번이나 뱉다가 이게 무슨 개짓거리냐 싶어서 관뒀다.
귀가 얼얼했다. 목덜미에 와 닿던 습한 열기와 허리를 지분거리던 손길을 떠올리니 또다시 아랫도리에 피가 쏠렸다.
미친 거지, 서이수. 아무리 발정할 놈이 없어서, 차재희한테. 씨발, 이게 무슨.
머릿속에서 휘몰아치는 자괴감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이건 자의가 아니었다. 절대 아니었다. 자신은 섹스 경험이 없었고, 성적 자극에 약했다. 좆같은 주정뱅이의 꼬임에 넘어갔을 뿐이다. 그런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이수는 계속해서 되뇌었다. 이건 실수, 사고, 그러니까 예상할 수 없었던 재난 같은 거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끝도 없이 자신을 세뇌했다.
* * *
그날 밤. 문을 두드리는 리키를 무시하고 침대 위에서 노트북을 펼쳤다. 어두운 방, 모니터의 불빛이 이수의 초조한 낯을 비춘다.
터치 패드를 조작하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이수는 warning 경고를 무시하고 아이피를 우회해 게이 포르노 사이트에 접속했다. 무슨 성적인 의도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낮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싶어서였다.
이수는 지금 자신이 동성애자, 혹은 양성애자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그의 첫 몽정 상대는 분명 여자였다. 첫 키스 상대도 그 애였는데, 이수가 병원에 있을 때 옆 병실에 잠시 머물렀던 아이였다.
찰리를 만난 것은 딱 두 번이었다. 처음엔 스쳐 지나갔고, 그다음엔 이수가 찾아갔다. 새벽에 복도를 산책하던 중 열려 있는 병실에서 찰리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던 게 이수였다. 다음 날 심장 수술을 앞두고 있었던 그녀는 수줍은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은 해가 뜰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고, 헤어지기 전 찰리는 이수에게 키스했다.─지금 생각해 보니 긴 뽀뽀였다─그날 밤, 이수는 생애 첫 몽정에 충격을 받았었다.
찰리는, 그러니까 찰리라는 이름은 성별을 떠나 사용되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수는 그 애를 여자애라고 확신했다. 금발에 푸른 눈, 엄청나게 예뻤으니까. 아마 샬롯(charlotte)의 애칭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수는 자신이 이성애자라고 생각했다. 양성애자일 가능성을 닫아 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수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지금 게이 포르노를 시청할 준비를 끝마친 참이었다.
필요한 것은 모두 준비해 두었고 재생 버튼만 누르면 된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이수는 10분이 지나고 나서야 터치 패드에 손가락을 올렸다.
『hi.』
『hey, lovely boy.』
털이 숭숭 난 두 남자가 나온다는 점에서 일단 인상이 찡그려졌으나, 이수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인사를 나누고 키스를 시작한 두 남성은 어느 순간부터 섹스를 하고 있었다.
10분 정도, 그들의 정사를 지켜보던 이수는 파리한 낯으로 노트북을 덮었다. 표정에 얼핏 안도감이 묻어났다. 아랫도리는 잠잠했다. 자신이 차재희를 성적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다행이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이수는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성애 포르노를 틀었다. 하지만 10분이 지나도 아랫도리는 여전히 잠잠했다. 뭐지, 씨발……? 좆에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불안한 상태로 기억을 더듬은 이수는 최근 한 달 동안 자신이 발기한 상대가 차재희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혼란에 휩싸였다. 그리고 자연스레 차재희가 떠올랐다.
그 새끼는 왜 나한테 키스했을까. 왜 나한테 발기를…….
이수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 * *
화요일. 새벽 내내 말끔하게 비워 낸 머릿속이 가벼웠다. 전공 수업인 관리 회계와 투자론은 휴강이었고, 9교시에 교양 필수인 상급 영어 수업만 출석하면 되었다. 덕분에 이수는 오전부터 라테르에 심취해 있었다.
두 시간 전, 고정 멤버가 접속하지 않아 오랜만에 길드원들과 공개 파티에 갔다. 거기서 한 유저와 시비가 붙었다. 던전 내에서 PK(player kill)1)가 일어났고, 그 불씨는 삽시간에 길드 전쟁으로 번졌다. 이수는 잠에 취한 타격과 김똘복을 깨운 후 사람들을 죽이러 다니느라 바빴다.
핑핑 돌아가는 침니 후드 아래에서 담배 연기가 끝도 없이 피어올랐다. 미간을 찡그린 채 정신을 집중하는 그를 멈추게 한 것은 산책을 갔다가 돌아온 펫 시터 민우의 목소리였다.
“형. 저 드릴 말씀 있는데요. 바쁘세요?”
“어. 잠깐만.”
눈치를 보는 모습이 신경 쓰였다. 리키의 펫 시터는 3년 동안 일을 해 왔는데, 형 서이준에게 소개받은 아이였다. 집단 따돌림으로 고등학교를 자퇴한 민우는 사회 복지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서이준을 만났고, 서이준은 알바 자리를 찾던 민우를 이수에게 소개해 주었다.
리키와 산책을 하고 스파를 데려가고 다른 강아지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일 말고는 딱히 하는 게 없었지만, 이수는 그에게 많은 보수를 지급했다. 성실하고 착한 아이라 마음에 들기도 했고 리키가 민우를 무척이나 좋아했기 때문이다.
죽어 버린 캐릭터를 마을로 귀환시킨 이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에서 리키와 놀고 있던 민우에게로 다가갔다.
“그만두려고?”
“앗, 네. 알고 계셨네요. 대표님한테 들으셨어요?”
일전에 이준과 클럽에 갔을 때 들었다. 민우는 서일 그룹의 장학생 프로젝트에 선발되어 8월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이수는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고 민우와 이야기를 나눴다. 다행히도 다른 펫 시터가 구해질 때까지는 계속 일을 해 주기로 했다.
느지막이 접속한 타격에게 공격대장을 넘긴 이수는 알바천당에 구인 공고를 올렸다. 리키를 돌볼 사람은 직접 만나 봐야만 했다.
Eugene
야ㅑㅑ뭐해
15:49
Eugene
오늘 교필있지?? 끝나고 주점 들렀다 가!
15:50
15:54
ㄴ
5시에 있을 수업 때문에 나갈 준비를 하는데 메시지가 도착했다. 간결하게 대꾸한 이수는 검은색 티셔츠에 같은 컬러의 데님 진을 입고 모자까지 눌러썼다.
그가 주로 입는 스타일은 그런 것들이었다. 후드, 티셔츠, 슬림핏 혹은 스트레이트핏 진이나 트레이닝 바지. 공대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성의 없는 패션이었지만 피지컬이 받쳐 주니 그것마저도 올타에 모델 핏으로 언급되었다.
이수는 리키의 콧잔등에─머뭇거리며─입을 맞추곤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오늘도 날씨는 좋았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는데 유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전거의 속도를 늦추며 한 손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왜.”
─ 어디야?
“학교 가는 중. 왜.”
─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이수의 인상이 삽시간에 구겨졌다. 자전거 도로 옆으로 빠진 그가 안장에 앉은 채 한쪽 다리로 바닥을 디뎠다. 그 상태로 담배를 피우려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이수는, 이내 한강 공원이 금연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작게 욕을 씹었다. 스피커 너머로 유진의 의아한 물음이 던져졌다.
─ 무슨 일이야? 재희랑 몸싸움했어? 둘 다 꼴이 말이 아니던데.
몸싸움? 그래, 뭐 굳이 말하자면 그런 거였다. 욕망에 눈이 먼 두 짐승의 몸싸움이었다. 그러나 이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로 말을 돌렸다.
“주점은 왜 오라고. 누구 치울 사람 있어?”
─ 있으면 치워 주려고?
“니가 원하면.”
─ 존나 감동이다, 이수야……. 아쉽지만 그건 아니고, 와서 저녁 먹고 가라고.
“가겠냐?”
대학 축제 주점에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이수의 떨떠름한 대꾸에 유진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 야, 내가 과대잖아. 꼰대 새끼들 진짜 발도 못 붙일걸. 기분 나쁠 일 없을 거야. 네 생각해서 메뉴도 엄청 신경 썼단 말이야아. 어? 올 거지? 올 거지?
“생각해 보고.”
─ 너, 로스트 치킨 좋아하지? 내가 그것 때문에 회전 오븐까지 대여했어. 진짜 오면 깜짝 놀랄걸?
“몰라. 끊어.”
─ 아 어제 밥 못 먹었잖아아아아! 주점 내일이 끝이란 말이야. 올 거지? 와라? 와야 돼?
찡얼거리기 시작하는 유진을 무시하고 이수가 휴대폰의 전원을 껐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안 갈 수는 없었다. 다만 그곳에 가면 분명히, 무조건, 100% 차재희를 마주치게 될 거란 생각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어떤 얼굴로 그 또라이 변태 새끼를 봐야 할지 모르겠다. 이수는 잔뜩 짜증이 난 채로 페달을 밟았다. 학교까진 금방이었다.
한 시간짜리 수업은 열받을 정도로 금방 끝났다.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세 대나 피운 이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경영대 주점을 향했다.
축제 부스는 공학관과 대운동장 근처에 집중되어 있었다. 사국대에서 제일 힘이 쎈 학부답게 경영대 주점은 가장 목이 좋은 공학관 앞 사거리 중앙에 위치했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곳에서 이수는 손쉽게 유진을 찾아냈다. 네온 컬러의 원피스에 머리칼까지 연보랏빛으로 칠할 만한 미친 여자는 딱 한 명뿐이었다. 신유진은 번쩍거리며 자체 발광했다. 그녀에게 다가가는데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서이수다,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이수왔수?”
싱글싱글 웃는 유진의 패션을 비웃어 주고, 이수는 맛에 대한 언급 없이 로스트 치킨을 몇 조각 먹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차재희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느냐고 물어보려다가 이수는 입을 다물었다. 그깟 키스가 뭐라고? 모르는 사람하고도 할 수 있는걸. 그런 것에 신경 쓰는 게 웃겼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수는 지난밤 자신의 어설픈 키스와 차재희의 능숙한 혀 놀림을 비교하며 자괴감에 빠졌었다. 스물한 살짜리 후배보다 못했다는 패배감이 승부욕을 자극했는데, 그걸 또 이겨 먹자고 덤벼드는 건 미친 짓이었다. 여러모로 불만스러운 상황이었고, 그로 인한 짜증은 오직 차재희의 몫이었다.
미치겠네. 시끄러운 사람들 사이에서 차재희만 떠올리고 있으니 기분이 더러웠다. 이수는 유진에게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고 말하곤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공학관 흡연 구역으로 들어섰을 때, 그곳에서 제 머릿속을 점령한 남자를 봤다.
영지가 벤치에 앉아 울고 있었다. 그 앞에 선 차재희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영지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리고 저를 끌어안는 그녀를, 재희는 밀어내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로스트 치킨은 맛이 없었다. 속이 얹히는 느낌에 이수는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