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 없는 선배 (2)
주점으로 돌아온 이수는 술을 몇 잔 마셨다. 굳이 소화제를 먹지는 않았다. 약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니까.
신유진이 말했던 대로 주점은 쾌적했다. 스타일리쉬하게 꾸며진 실내는 방문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파란 천막이 아니라 유진이 개인적으로 돈을 주고 빌린 흰 천막은 무척이나 크고 높았다.
천장에는 LED 전구를 매달았고, 한편에 가져다 놓은 원목 서랍장 위엔 스피커가 놓여 있었다. 어쿠스틱 감성의 팝송이 공간을 휘감는다. 마치 글램핑을 하러 온 것 같았다.
스피커 옆의 캠핑 의자에 앉은 이수가 손에 든 캔을 기울였다. 절반쯤 비워진 맥주는 그가 평소 즐겨 마시던 것이었다. 유진은 저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었다. 이수의 대학 생활에 추억을 심어 주기 위해, 그에게 좋은 기억을 만들어 주기 위해.
그것을 알기에 이수도 최대한 이 분위기를 즐기려 애썼다. 종종 박지혜와 부산에서 보았던 후배들─이름을 잊어버렸다─이 말을 걸어왔다. 싱거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웃기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시간이 지날수록 기분은 가라앉았다.
“선배.”
차재희가 그에게 말을 건 것은 9시경이었다. 총학에서 진행하는 행사가 시작할 시간이었다. 사람들이 대부분 빠져나간 그곳에서 유진과 지혜 그리고 안정훈을 비롯한 이수의 동기들이 내부를 정리하는 것을 재희도 거들었다.
술기운이 오른 이수는 소주 한 병을 한 번에 마시면 죽을까, 기절할까 궁금해하는 중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소주병을 딸까 말까 고민하는데, 누군가가 그걸 치워 버렸다. 녹색 병에 따라붙는 시선 끝에 허리를 숙인 차재희가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 물어 온다.
“괜찮아요?”
다정하게 던져지는 물음이 불편했다. 이수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진은 안정훈과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다. 굳이 대화에 끼어들어 붙잡힐 여지를 주는 대신 조용히 사라지는 쪽을 택했다. 느릿하게 걸어 천막을 벗어나는데 따라붙는 발소리가 있었다.
왜 이렇게 귀찮게 굴지. 이수는 한숨을 삼키며 공학관으로 향했다. 화장실에 들러 찬물로 세수를 하는데 모자를 놔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진에게 전화해야겠다 생각하며 몸을 돌리니 앞을 가로막고 선 남자가 보였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턱 끝을 닦아 내는 손길이 조심스럽다. 이수는 이해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 재희의 손을 쳐 냈다.
“마지막 경고야.”
“……선배.”
“다음에 나한테 손대면 손목이든 손가락이든 씹창 날 줄 알아.”
경고하고 떠나려는 이수에게 재희가 물었다.
“우리, 할 이야기 있지 않아요?”
“없어.”
“…….”
단호히 대꾸하곤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흡연 구역을 향해 걷는 내내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가까스로 도착해 벽에 몸을 기댔다. 어쩐지 벤치에는 앉고 싶지 않았다.
깊이 심호흡하며 담배를 빼 물었다. 불을 붙이고 두통이 이는 이마를 누르고 있으니 지긋지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
“씨발, 할 말 없다고 했잖아!”
버럭 소리를 지르니 다가오던 차재희가 걸음을 멈춰 섰다.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수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어쩌다 일어난 사고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성과 협의되지 않은 행동이었다. 술에 취해, 분위기에 휩쓸려, 성적 자극에 반응했던 것이다. 답안지가 눈앞에 있는데 얼굴 맞대고 토론할 일이 아니었다.
“무책임해요, 이건.”
그러나 차재희는 눈뜬장님처럼 굴었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걸 모른 척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한쪽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당연히 차재희였다.
“무책임?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난 니가 원했던 대로 받은 만큼 돌려줬을 뿐이야.”
사실을 적시하는 말에 재희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방금 한 말은 책임을 온전히 재희에게로 떠넘기는 문장이었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서로 실수했다고 치부하고 넘기면 되는 일이었는데 왜…….
“정말 그게 다예요?”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떨려 왔다. 그럼 다지, 뭐가 더 있어. 자신과 차재희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며 반문했다.
“무슨 의미로 묻는 건데. 너도 실수한 거 아니야? 뭐 다른 의미가 있어?”
아니라고 말해. 아니라고 하라고.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지만 차재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답답해진 이수가 덧붙였다.
“작용, 반작용. 20대 남성에게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신체적 반응. 너도, 나도 술 마셨고, 충분히 가능한 사고였어. 그거 말고 또 다른 게 있냐고.”
없어야 했다. 무엇이 되었건 간에, 이수는 자신이 나열한 것을 제외한 어떠한 변명에도 손을 들어 줄 마음이 없었다.
이수는 차재희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이유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다. 학기 초, 대부분 결론이 나는 쪽은 차재희가 서이수를 이용하려 한다는 쪽이었다. 그런데도 상관없었다. 그는 쉽게 당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고, 차재희는 그렇게 영악하지도 않았으니까.
부산에서 이야기를 나눈 후로는 긴가민가했다. 사람은 한 면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1부터 5까지 드러난 주사위 밑면에 6이 아닌 꽝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수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정, 정직, 배려, 성실, 상냥과도 같은 단어들로 정의되는 차재희의 밑면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히든 키워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솔직함이든, 아이 같은 천진함이든 그의 아랫면을 본 사람은 자신뿐일 수도 있을 거라고 여겼었다.
처음엔 짜증 나고, 열받고, 싫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수의 세상에 발을 들인 불청객. 서로를 불편하게 했지만 결국은 편하지 않은 것에 익숙해져 버린 방문객. 이수는 힘겹게 정의한 관계의 성질을 뒤바꾸고 싶지 않았다.
그는 변화에 쉽게 적응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차재희를 여태까지와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는 일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일었다. 또 다른 변화를 맞이하고 싶지 않아, 이수는 재희가 다른 이유는 없다고 말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이수는 아까 본 장면을 떠올리며 설득 아닌 설득을 했다.
“영지 두고 이런 얘기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돼. 네가 고민할 이유가 뭐가 있어?”
“영지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요?”
“……아까 봤어. 둘이 끌어안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진짜 아니에요, 선배! 그건!”
재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뭐라 설명하기도 전에 이수가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차재희. 왜 나한테 변명을 해?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야.”
“아니,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야.”
모래 위에 담배꽁초가 거칠게 쑤셔 박힌다. 신경질적인 한숨이 터졌다.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 처먹지. 이수가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서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니가 씨발, 누구랑 붙어먹든 내 알 바 아니니까. 나한테 설명할 필요 없다고.”
단정한 얼굴이 일그러진다. 재희의 떨리는 시선은 이수에게 한참이나 머물렀다. 깊이 상처받은 사람처럼 입만 벙긋거리길 여러 차례. 마침내 새어 나온 말은 고집스러웠고, 또 이수를 화나게 만들었다.
“영지 혼자… 저 좋아하는 거예요. 저는 아무 감정도 없어요. 오해하지 마요, 선배.”
오해? 이수의 눈앞에 수많은 잔상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녀의 뺨에 묻은 먼지를 떼어 주던 손길, 체할까 봐 걱정해 주던 목소리, 식사할 때 따뜻한 물을 챙겨 주던 배려, 끌어안는 이를 밀어내지 못하던 차재희.
이수의 낯에 희미한 조롱이 스쳤다. 그러면서 나한테 무책임하다고?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되는 건 아니야, 재희야.”
“…….”
“너야말로 무책임하잖아.”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재희의 눈썹이 휘어졌다. 축 처진 눈꼬리로 우물거리며 묻는다.
“제가, 뭘요…….”
“그렇게 신경 쓰는 척, 다정한 척, 생각해 주는 척해 놓고 영지 혼자 너를 좋아하는 거라고? 씨발, 양심이 있어야지.”
“…….”
영지가 재희를 좋아한다면, 그 감정이 자라나게 물을 뿌리고 햇살을 비춘 사람은 차재희였다. 그래 놓고 이런 식으로 발을 빼는 건 정말 비겁한 처사였다.
고백을 거절했을지언정 이런 식으로 외면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러면서 전혀 관계없는 서이수에게, 영지가 저 혼자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건……. 그녀의 입장에서 조금 비참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태 네 행동을 봐. 온갖 여지 흘리고 다닌 주제에, 영지 혼자? 그게 지금 내 앞에서 할 말이야?”
“…….”
차재희는 어렸다. 반듯한 얼굴로 어른인 척 웃고 있지만, 그 속은 한없이 미성숙했다. 낯선 상황에 부딪히면 앞뒤 안 가리고 제 감정부터 챙기고야 마는 어린아이.
이 순간 이수는 차재희라는 인간을 완전히 파악했다. 그는 가식을 떨지도 않았으며, 누군가를 이용하려 한 적도 없었다. 직접 말했던 것처럼 이수에게만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낼 뿐이었다.
짜증 내고, 매달리고, 서운해하고.
“그럼 선배는… 아니에요?”
저렇게 오기를 부린다. 아이처럼.
“내가 뭐.”
“선배도 나한테 반창고 주고, 웃어 주고, 내 이름도 불러 줬잖아요.”
이수의 짤막한 대꾸에 재희가 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입술을 깨문 채 쏘아보는 눈빛이 불만에 절어 있었다. 알고 나니 보였다. 차재희가 자신에게 좆같이 행동했던 이유가.
“씨발, 그게 뭐 대수라고.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니가 날 좋아하기라도 해?”
그저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좋아하는 여자애를 괴롭히는 것처럼 자신을 못살게 굴었던 것이다. 다만 그 이유가 애정은 아니었다. 당연히 받아야 할 관심을 받지 못하니 치기를 부린 것이다. 그게 맞았다. 재희가 입술을 뱉으며 대꾸했다. 퉁 튕겨 나온 살갗에 핏방울이 배어 나왔다.
“아뇨. 선배도 나한테 무책임하다고 말할 권리 없다는 뜻이에요. 난 아니지만, 누군가는 선배의 그런 호의에 좋은 감정을 품을 수도 있으니까. 근데 선배는 안 받아 줄 거잖아요. 그러니까 선배도 무책임해요.”
이수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차재희와 자신의 행동은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이름 부르고, 웃고, 남는 반창고 쥐여 줬다고 누굴 좋아하는 게 가능한가? 그걸 애정이라고,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나? 만에 하나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그건 끝이 정해진 하찮은 감정일 것이었다. 쉽게 준 마음은 뺏어 오기도 쉬우니까.
“그깟 거에 마음을 주면, 그게 호구 등신 새끼지.”
그 말에 차재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열이 들끓는 눈빛으로, 이수를 노려볼 뿐이었다.
* * *
수요일, 목요일 수업은 모두 휴강이었다. 리키는 민우와 펫 스파에 갔고, 집 안은 텅 비었다. 이수는 영화를 틀어 놓고 소파에 누워 있었다. 별로 집중은 되지 않았다. 하늘 위에 떠가는 구름처럼 장면이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호구 등신 새끼라는 말에 죽일 듯이 노려보던 시선이 떠오른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차재희는 한참이나 그 상태로 있다가 선배 참 잘났네요, 지껄이곤 가 버렸다. 그러고는 자정이 넘어 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엊그제 일은 저도 술 마시고 실수한 거였어요. 죄송해요. 없었던 일로 쳐요. 영지에겐 따로 사과했어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짤막한 문장을 보는 순간 마음속 한구석이 탁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럼 그렇지. 그랬을 것 같았어. 이유 모를 안도감이 밀려왔다. 모든 의문이 풀렸다. 이수는 차재희가 제게 집착 아닌 집착을 하는 이유도 얼추 깨달았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이해했다. 그런데 이 기분은 뭘까…….
머리를 거칠게 헤집은 이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으로 가니 오전에 가사 도우미가 만들어 두고 간 연어 샌드위치가 보였다. 입맛이 없어서 절반만 먹고 버렸다. 탄산수를 꺼내 들고 컴퓨터 앞에 앉아 알바천당을 확인했다. 펫 시터 지원서가 여러 개 도착해 있었다.
간단한 인적 사항을 확인해 몇 명을 거르고 나니 두 사람이 남았다. 이수는 그들에게 연락해 면접 일정을 조율했다. 둘 다 오후에 시간이 난다고 해서 두 시간 뒤에 차례대로 만나기로 했다. 장소는 이수의 집 근처에 있는 카페였다. 모르는 사람을 집에 들이기는 싫었고, 리키와 함께 만나야 했으므로 선택한 곳이었다.
이수는 담배를 빽빽 피우며 길드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 도중에 정치라는 놈과 시비가 붙어 키배2)를 거하게 떴고, 결국 128시간의 채팅 금지를 먹긴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승리였다. 길전에서는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형아, 리키 왔어요오.”
리키의 목줄을 쥔 채 그를 모사하는 민우는 조금 귀여웠다. 고생했어. 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은 이수는 옷을 갈아입었다. 검은색 반소매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였다. 마지막으로 모자를 눌러쓴 후 리키를 데리고 나왔다.
이수가 사는 아파트엔 프라이빗 엘리베이터가 한 대 있었는데, 층 전체를 사용하는 펜트하우스 가구 전용이었다. 41, 42, 43층 주민이 사용할 수 있는 그 승강기는 주차장과 지상으로 이어지는 출입구가 따로 있었다. 덕분에 이수가 다른 주민들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이수와 보폭을 맞춰 걷는 리키는 어딜 가나 관심의 대상이었다. 커다란 래브라도 리트리버에게 향하는 시선은 곧 주인에 대한 호감으로 치환되었다. 이수는 그들을 무시하며 걸었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 것과 별개로 매일같이 짜증은 났다. 매너도 없이 리키를 추행하려 드는 사람들은 정말 최악이었고, 리키를 핑계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은 지독히 귀찮았다.
카페에 도착하니 면접자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네, 앉으세요.”
인상은 괜찮았다. 성격도 서글서글하니 나쁘지 않아 보였고, 리키에게 끌려다니지 않을 만큼 체격도 괜찮았다. 하지만 이수의 판단보다 중요한 건 리키의 선택이었다.
제 주인을 닮아 예민하고 까칠한 구석이 있는 리키는 펫 시터를 함부로 고르지 않았다. 민우를 고용하기 전에 갈아 치운 사람만 열두 명이 넘었다.
가만히 리키의 반응을 살피던 이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별달리 관심을 보이지 않는 태도를 보니 벌써 텄다. 예의상 몇 마디와 함께 면접비를 건네고 떠나보냈다. 시급이 높기에 아쉬워하긴 했지만 노란 지폐를 받은 면접자는 세상 행복한 얼굴로 인사하고 사라졌다.
이어진 두 번째 면접자도 마찬가지였다. 리키는 킁킁 냄새를 몇 번 맡더니 고개를 팽하니 돌리곤 이수만 바라봤다. 까칠한 녀석의 볼을 꼬집어 주곤 면접을 마무리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한강을 산책하는데 유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 서이수 씨?
“왜.”
─ 모자 가지러 안 오십니까?
“다음 주에 줘.”
─ 하……. 이 과대는 정말 실망했다. 내가 준 선물을 이렇게 내팽개치고 떠난 서이수에게, 누나는 정말 정말 실망했다…….
“낮술 했냐?”
혼자 콩트를 찍는 유진의 목소리가 근엄하기 짝이 없었다. 복학생들에게 배운 훈련소 조교 성대모사인 것 같았다. 떨떠름한 질문에 유진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 이수야, 오늘 주점 좆됐어.
“왜.”
─ 씨발, 누가 경찰에 신고했다고 철수하래!
“잘됐네. 불법이잖아. 그거.”
─ 아아니이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주점이라는 게 몇십 년을 이어 내려온 대학 축제 전통인데, 어떻게 이렇게 융통성도 없이 곧바로 철수하라고 하냐고오. 내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유진의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했다. 확실히 공을 들이긴 했다. 엄청나게 신경 썼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근데 뭐 어쩌라는 건지. 철수하라면 해야지. 이수가 대꾸하지 않았지만, 유진은 위로 같은 건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 하여튼, 그래서 남은 음식이랑 술 그냥 다 풀기로 했어. 학부생들 불러서 경영대 앞에서 판 깔려고. 총학에서 힘 좀 썼나 보더라?
신유진이 전화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수가 인상을 찡그렸다.
“안 가.”
─ 아, 눈치 빠른 거 보소. 왜애. 오늘은 진짜 내가 옆에 딱 붙어 있을게.
“내가 니 말을 믿게 생겼냐?”
─ 아니, 못 믿지. 내가 생각해도 못 믿지……. 근데 넌 여기 올 수밖에 없어. 왜냐고? 나한텐 인질이 있으니까.
“그냥 죽여. 범죄자하곤 원래 협상 안 해.”
이수의 단호한 말에 유진은 툴툴거리면서 그를 물고 늘어졌다. 어차피 가게 될 게 뻔했지만, 이수는 그녀가 하는 짓이 웃겨서 시간을 좀 끌었다. 그녀가 말하는 인질은 이수가 두고 온 모자였다. 가지러 오지 않으면 회전 오븐에 구워 버리겠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자기가 준 선물로 협박하는 인간은 신유진밖에 없을 터였다.
집에 도착한 이수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나왔다. 자전거를 어제 학교에 두고 왔기에,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번호를 요구하는 여자들을 정중하게 거절하며─됐어요─산책하듯 걷다 보니 정문까지 한 시간이 걸렸다.
공학관 앞은 정신이 없었다. 축제를 구경 온 사람들과 일반 부스들, 푸드 트럭, 그 사이사이에 철수 중인 주점 때문에 걷기가 힘들 정도였다.
“오빠! 안녕하세요!”
경영대 앞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신유진도 박지혜도 아닌 김영지였다. 순간 어제 보았던 모습이 떠올랐지만, 잔상은 금방 잊혔다. 영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충혈된 눈동자는 가릴 수 없었기에, 이수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영지 안녕.”
“와아. 유진 언니가 불러야 온다더니 진짜였네요. 오빠, 너무한 거 아니에요? 정훈 오빠가 아까 메시지 씹혔다고 울던데.”
안정훈에게서 이수야, 뭐 함? 하고 메시지가 오긴 했다. 딱히 대답할 마음이 들지 않아 확인만 하고 덮어 두었는데, 같이 있을 때 보낸 것이었나 보다.
“안정훈이랑 별로 안 친해서. 유진이 어딨어?”
“헐. 정훈 오빠는 되게 친하다고 생각하던데……. 아, 언니 잠깐 과방에 갔어요. 선배들 다 어제부터 고생 많이 하셔서 쉬라고 들여보냈어요.”
“그래. 고마워.”
“이따 봬요!”
꾸벅 인사한 영지는 앞에 놓여 있던 유리병으로 손을 뻗었다. 건물로 향하던 이수는 흘끗 영지를 보았다가, 다시 길을 되돌아갔다. 낑낑거리며 비틀어 대던 바비큐 소스의 뚜껑을 손쉽게 열어 주고,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후 자리를 떴다.
과방에 도착하니 신유진과 박지혜, 안정훈이 모여 있었다. 3학년 학생회였다. 꼰대들은 발도 못 들일 거라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나타날 때마다 불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김희중을 비롯한 몇 인간들은 어제부터 코빼기도 안 보였다.
“이수서!”
“오, 콜보이 오빠 왔네요.”
“야, 서이수. 나 진짜 존나 서운하다. 내 톡은 씹어 놓고…….”
신유진과 박지혜는 이수보다 두 살이 어렸지만, 안정훈은 삼수생이라 동갑이었다. 인사를 대강 받아 준 후 유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피곤해 보이는 신유진이 어깨에 머리를 기대 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걸어왔어. 어제 자전거 놓고 가서.”
“차는 주차장에 세워 놓고 고사 지내?”
“어.”
유진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정훈이 말을 걸어왔다. 커다란 안경을 쓴 안정훈은 적당히 사교적이고 적당히 눈치 있고 적당히 모난 성격이었다. 종종 짜증 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이름을 외울 만한 친분은 있었다.
“야, 서이수. 유진이 없어도 과 행사에 참여 좀 해.”
“왜.”
“왜긴 왜야. 동기끼리 얼굴도 보고, 술도 마시고 그렇게 인맥도 다지고 하는 거지, 뭐.”
“안정훈. 잘 생각해.”
“뭐를?”
눈을 키우는 안정훈을 보며 이수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얼굴 비치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
“당연히, 어……. 음.”
“내가 분위기 씹창 내면 살리는 건 네 일이잖아.”
그 말에 유진이 낄낄거리며 웃었고, 박지혜는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렀다. 분위기 메이커인 신유진과 안정훈이 서이수의 뒤처리를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신입생 때부터 이수가 판을 뒤집으면 그걸 다시 정리한 게 두 사람이다. 최근 이수가 과 행사에 참여하지 않아 잊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정훈은 데구루루 눈을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한 말 취소, 재빠른 태세 변환에 이수가 싱겁게 웃었다.
“다들 여기 계셨네요.”
출입문이 열리고 차재희가 나타난 것은 그즈음이었다.
차재희는 과 생활을 열심히 했다. 개총을 비롯한 금요일 술자리마다 얼굴을 비치는데, 그를 따라 후배들도 줄줄이 나타나니 그가 입학한 이후로는 경영과 학생회가 조용할 날이 없었다. 1학년 과대에 이어 2학년 과대를 맡은 재희는 유진을 따라 여러 가지 일을 도맡고 있었다. 지금도 유진의 부탁을 받아 경영대 과사에 다녀온 참이었다.
“어, 재희야! 조교님이 뭐래?”
“이따가 내려오신대요. 교수님들도 같이 오실 것 같아요.”
“아, 잘됐다. 고생했어.”
“고생은요. 형, 오셨네요. 지혜 누나, 아까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단정하게 웃은 차재희는 안정훈에게 인사를 건네고, 지혜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무표정하게 자리를 지키던 이수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
이수는 당연히 대꾸하지 않았다. 차재희의 인사를 받아 주지 않은 지 꽤 되었다. 그저 습관적으로 시선을 들어 지겹지도 않냐고 쏘아볼 뿐이었다. 대답은 이수가 아닌 정훈에게서 나왔다. 그는 두 사람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서이수, 재희 인사 왜 씹냐? 얘랑 또 싸웠냐?”
그 질문에 이수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뭐만 하면 싸웠대.
“싸우긴 뭘 싸워.”
“야, 분위기가 싸한데 뭘. 재희야, 이수가 너 괴롭혔어?”
“씨발, 뭘 괴롭혀.”
짜증스러운 대꾸에 정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말없이 웃고 선 재희를 올려다본다. 이수의 말을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이수도 재희에게 시선을 던졌다. 여기서 아가리 닫고 있으면 진짜 뒤진다. 그렇게 쏘아보니 재희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부정했다.
“싸운 거 아니에요, 형.”
“들었지?”
이수가 어깨를 으쓱한다. 재희의 말에 안정훈은 의심을 지웠다. 하루 이틀도 아닌 일이었기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안정훈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를 의심하지 않고 새겨듣는 인간. 그런 이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기분이 오르내릴 만큼 이수는 타인에게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딱 한 명, 요즘 그를 뒤흔드는 인간이 있기는 했다.
“싸운 게 아니라, 선배가 저를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거죠.”
눈을 접어 웃으며 하는 말에 이수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 새끼가 또 시작이네.
“와아아. 서이수 진짜 존나 매정하다. 우리 재희 미워할 데가 어디 있다고 쟤를 싫어하냐?”
안정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목소리를 키운다. 하지만 이수는 차재희의 장난질에 놀아날 마음이 없었다. 억지로 지어낸 미소와 함께 재희를 올려다봤다.
“나 차재희 안 싫어하는데.”
“야, 야. 눈에 힘이나 풀고 말해. 누가 봐도 개구라야.”
정훈의 말에 유진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고개를 든 그녀가 이수의 볼을 꼬집었다. 격의 없는 스킨십에 재희의 시선이 둘 사이를 오갔다. 균열 없이 얌전한 얼굴이었지만, 이수는 어쩐지 차재희의 기분이 별로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유진이 웃는 목소리로 그를 타박했다.
“야, 너랑 친해지고 싶다는 애한테 왜 그래? 잘 좀 해 줘어!”
“충분히 잘해 주고 있는데.”
“그래? 재희야, 이수가 잘해 줘?”
빙긋 웃은 차재희가 이수와 눈을 맞췄다. 새까만 눈동자 속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무슨 말을 할지 뻔히 예상이 갔다.
“잘해 준다는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선배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바라는 게 많네, 차재희.”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씹어뱉는 목소리는 어찌하지 못했다. 이수는 자신을 가장하는 일에 능숙하지 않았다. 그에 반해서 차재희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이었다.
팔짱을 낀 채 그 반질반질한 낯짝을 빤히 바라봤다. 제 앞에선 인상을 잘도 구기는 주제에, 남들 앞에선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는 그 단정한 낯을.
어제 주점에서도 그랬다. 진상 아닌 진상을 부리는 타과생들에게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고 대꾸하던 차재희는 마치 인형 같았다. 부산에서 화를 내던 모습과의 괴리를 곱씹고 있는데 문득 유진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너 재희한테만 차재희, 차재희 하더라.”
“그럼 이 새끼 저 새끼 할까?”
무덤덤한 대꾸에 재희가 끼어들었다.
“이 새끼 저 새끼, 벌써 많이 했잖아요. 그것도 좋았어요, 선배.”
“와 씨, 서이수 이 나쁜 새끼.”
이 씹새끼 보게. 이수가 입 안에서 혀를 굴리며 차재희를 올려다봤다. 해보자는 건가? 슬슬 빡치기 시작한 이수에게 재희는 맑은 웃음으로 대꾸했다. 언제까지 차재희라고 부를 건데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러네. 오빠, 다른 사람한테는 다 유진아, 지혜야 하잖아요.”
옆에서 고개만 끄덕이던 박지혜가 가세한다. 맞는 말이긴 했다. 이수는 남들을 이름으로 부르는 일에 익숙했다.
미국에 있을 때 간호사들의 명찰 뒤에 있는 성을 부르던 습관이 한국에서는 뒤에 있는 이름을 부르는 습관으로 바뀌었다. 성만 따서 부르는 것이 이상한 한국에서, 성과 이름을 붙여 부르면 상대방은 어쩐지 주눅이 들어 그를 대했다. 그에 반해 이름만 부르면 좀 더 대화가 편한 느낌이라 이수는 아무렇지 않게 영지야, 세희야 하고 부르고는 했다.
근데 차재희는 재희야, 하고 부르기가 꺼려진단 말이지. 왜일까. 이수가 생각에 잠기기 직전 신유진과 박지혜 그리고 안정훈이 똘똘 뭉쳐 그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네! 너, 남자애들도 이름 잘 부르면서. 왜 재희만 차재희야!”
“진짜요! 오빠, 우리 같이 부산도 갔다 왔는데 좀 너무한 거 아니에요?”
“맞아! 재희 괴롭히지 마!”
“시끄러워.”
지금이야 이수가 과 생활에 열의가 없다지만 1학년 때는 아니었다. 네 사람은 꽤 오랫동안 어울렸고 술자리도 종종 가졌었다. 지혜와 정훈은 서이수가 알려진 것처럼 나쁜 놈이 아니라는 것도, 사실은 꽤 말랑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신유진은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셋은 이런 식으로 곧잘 이수를 몰아가곤 했다. 유진의 말을 따르자면 놀리는 맛이 있다나 그랬다.
셋이 차재희와 친하게 지내라며 종알거리는 동안 사건의 주범은 반대편 소파의 팔걸이에 걸터앉은 채 이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즐거워 보이는 낯짝이 심히 거슬렸다. 어떻게 할 거예요? 그 시선을 이수는 무시하려 했다. 그러나 대낮부터 낮술을 처마셨는지, 유진이 잔뜩 흥분한 기색으로 못을 박았다.
“재희도 좀 다정하게 불러 줘!”
그 말에 이수는 인상을 구겼고, 재희는 웃음을 터트렸다. 듣기 좋은 목소리가 구슬처럼 동그랗게 뭉쳐져 흘러나왔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모르겠다. 마뜩잖은 얼굴로 올려다보는 이수에게 그가 물었다.
“들었죠?”
보조개를 패며 웃은 재희가 이수와 눈을 맞췄다.
“다정하게 불러 줘요, 선배.”
그렇게 말하는 음색이야말로 한없이 다정하고 따스해서, 꿀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달콤했다. 유진과 지혜가 아우, 소리를 치며 오두방정을 떨어 댄다. 이수는 코웃음을 쳤다. 다정하게는 무슨. 좆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대꾸하려 했다.
“아. 근데 얘는 그게 안 돼, 재희야. 서이수하고 그렇게 안 어울리는 단어도 없어. 아니면 니가 좀 가르쳐 줘 봐.”
“맞아. 나 전에 시험 망쳤을 때 이수 오빠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술 마실 시간에 공부를 더 했어야지, 그러는 거 있지……. 완전 무정해! 재희는 진짜 엄청 위로해 줬는데.”
“와 씨. 나한테만 그런 거 아니었네. 상급 영어 물어보러 갔더니 금밤마다 술 처마실 시간에 미드나 보랬어……. 아까 내 톡도 씹고, 매정한 새끼.”
신유진과 박지혜, 안정훈이 입을 모아 그렇게 말하지만 않았더라면 정말로 헛소리 취급하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미묘하게 비교하는 듯한 뉘앙스에 근본 없는 승부욕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수의 입매가 삐뚤어졌다.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웃는 얼굴로 그가 입을 열었다.
“나도 다정한데?”
“다정이가 다 나가 죽었냐?”
“헐, 오빠가 다정한 거면 전 다정의 화신이에요.”
“아닌데? 전혀 아닌데?”
한 마디를 하면 세 마디가 되돌아왔다. 동기인지, 적인지. 딱히 동지 의식은 없었지만 그래도 제 편을 들어줄 인간이 한 명쯤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유진과 지혜, 정훈은 완벽한 차재희의 앞잡이였다. 이수의 미간이 꿈틀했다. 다시 한번 주장했다.
“나도 하려면 해. 차재희만큼.”
“이수야, 재희는 본투비 다정이야…….”
“아, 네. 말은 쉽죠. 오빠는 절대 못 할걸요?”
“맞아. 야, 쟤는 탯줄 자르고 ‘의료진 여러분 고생하셨습니다’ 하고 인사했을 애야.”
내가? 차재희보다 못한 부분이 있다고? 난 다정하지 않은 거지, 다정하지 못한 게 아닌데? 줄줄이 지껄여지는 개소리 속에서 오기가 불쑥 솟았다.
차재희를 보며 어리다고 생각했지만, 서이수 본인에게도 감추지 못하는 미성숙함이 있었다.
밋밋하고 지루했던 어린 시절은 서이수를 자극에 민감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경쟁, 승부, 서이수를 설레게 하는 것들. Winner, 승리자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는 순간, 승리의 짜릿함에 도취되어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순간. 이수는 그런 것들에 집착이 강했다.
그리고 지금, 서이수의 머릿속에선 갑작스러운 다정함 뽐내기 대회가 시작됐다. 주최자는 서이수, 참가자도 서이수, 심판도 서이수였다.
내가 차재희보다 더 다정할 수 있는데? 그게 뭐라고. 리키에게 하듯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어려운 것도 없었다.
이수의 생각에 재희가 기름을 부었다.
“아니에요. 선배도 가끔 보면 되게 다정해요. 영지나 세희한테 하는 거 보면요. 그냥 저를 싫어하시니까, 저한테만 안 그런 거겠죠…….”
시무룩한 목소리에 팔자로 휘어지는 눈썹. 그래, 한번 해보자. 이수가 이를 악물고 부정했다.
“안… 싫어한다니까?”
“정말요?”
그래, 이 새끼야. 이수는 욕을 물어 삼켰다. 신유진과 박지혜, 안정훈에게 자신이 차재희를 이길 수 있다는 걸 보여 줘야 했다. 그래야 이 근원 모를 패배감이 지워질 것 같았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걸 보니까, 내가 다 서운하네. 재희야, 기대해. 오늘 내가 얼마나 다정한지 보여 줄게.”
이수가 웃었다.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다정한 웃음이었다. 양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눈매에 힘을 풀고, 그럼 된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를 보며 재희도 웃었다. 어쩐지 조금 상기된 얼굴로 그가 보조개를 내보였다.
“저, 되게 기뻐요. 기대할게요. 다정하게 대해 줘요, 선배.”
그렇게 서이수의 섀도복싱이 막을 올렸다.
All about your timetable.
경영 와꾸가 솔직히 사국 최하수준아니냐?;
부들부들 떨면서 들어온 경영러들아 잘왔어
아까 경영대 앞에서 차랑 서 뭐야?
빨리 설명해..!
차랑 서랑 왜 비게퍼에 심취했는지 설명하라고!
빨리!!!!!!!!!!
쾅!!!(책상내려치는소리)
2시간 전 등록 신고하기
댓글 (121)
익명의 학우 1비게퍼가 뭐야?
➥business gay performance
➥ㄳ
익명의 학우 2안과 가봐.. 서가 차 엄청 싫어하는데 웬 비게퍼?
➥아니 잘못본게 아님; 둘이 진짜 난리였다니까?
➥여긴 현실이야 호게모이 필터 끄자
➥진짜라고 ㅜㅜㅜ
익명의 학우 3너도 봤어..? 야 나두.. 나 지금 구급차 부를까 고민중; 혈당이 치솟아서 내려가질 않아.. 존나 달달햇다.. ㅅㅂ 나 경영인데 내생에 차랑 서랑 그러고 있는 거 보게 될 줄 몰랐다.. 죽어도 여한이없어...
➥나만 본 거 아니지?ㅠㅠㅠㅠㅠㅠ 와 뭔데 진짜 궁금해 죽겠어ㅠㅠ 뭐 들은 거 없어? 리얼루 궁금해 갑자기 왜그러는지 ㅠ 둘이 사귀나?
➥알페스 자제 좀.
➥아니.. 뭔 알페스야 그냥 물어본건데ㅠㅠㅠ
대댓글 더 보기
익명의 학우 4뭘 했는데 대체?ㅠㅠ 본눈 공유점..
➥둘이 막 끌어안고, 여기저기 만지고..막..진짜.. 특정될까바 정확히 말은 못 하겠는데 우리과에서 경영 술자리 근처에 판깔았거든..? 진짜 우리과 완전 여초인데 다들 술은 안마시고 경영보느라 눈알 다 빠짐ㅋㅋㅋ
댓글 더 보기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수는 난관에 부딪혔다. 리키한테 하는 것처럼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차재희는 개가 아니었다. 리키는 머리를 쓰다듬으면 쓰다듬는 대로, 배를 긁어 주면 긁어 주는 대로 좋아했지만, 차재희는 달랐다.
다정하게 대해 줘요, 선배.
그렇게 대화를 끝낸 이들은 식사 준비가 얼추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경영대 앞마당으로 나갔다. 월요일부터 고생한 학생회가 휴식을 취하는 동안, 새내기들과 2학년들이 발 벗고 나서서 판을 깔아 둔 참이었다.
전날 빈말로도 맛있다고 할 수 없었던 로스트 치킨을 구웠던 회전 오븐은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자글자글 익혀 냈고, 그 옆엔 남은 소주와 맥주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유진이 흐뭇한 얼굴로 웃었다. 오늘 아주 끝장을 보겠다며 중얼거리는 소리에 이수가 인상을 구겼다.
서이수, 신유진, 차재희. 이렇게 앉았지만 과대인 신유진은 챙겨야 할 사람이 많았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둘 사이에 들어오기가 귀찮았는지 유진은 재희를 옆자리로 밀어 버렸다. 자연스레 그와 나란히 앉게 된 이수가 맥주를 한 모금 마셨을 때였다.
“선배.”
“뭐.”
“어떻게 해 줄 거예요?”
“뭘.”
무심한 대꾸에 재희가 나른히 웃었다. 캠핑 의자에 등을 기댄 차재희. 미드나이트블루의 린넨 셔츠 위로 반듯한 얼굴에 여유가 가득하다. 이수는 그 표정에 자극을 받았다. 선배는 절대 나 못 이겨요, 어쩐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서. 물론 차재희는 이게 승부라는 생각조차 없었다.
“어떻게 해 줄까. 니가 말해 봐.”
“진짜 엄청 다정해서 막 눈물 나게요.”
“지랄을 하세요…….”
“벌써 포기하는 거예요?”
포기, 라는 단어에 눈썹이 꿈틀했다. 이수가 애써 미소 지었다. 아니, 이 개새끼야. 속으로 중얼거리며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었다.
회전 오븐에서 돌아간 소고기 안심과 큐브 삼겹살은 정말 먹기 좋게 익은 상태였다. 바비큐 소스가 묻은 안심이 재희의 입가로 직행했다. 간식 주듯 하면 되는 거잖아. 예뻐하는 것처럼. 이수는 상대방─사람─의 기분을 고려해 행동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오직 리키에게 쏟아부은 일방적인 보살핌이 그가 아는 다정의 전부였다.
“입 벌려.”
고기를 입술에 찔러 넣으니 재희가 웃으며 입을 벌렸다. 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안심이 쏙 사라진다. 차재희는 오물오물 턱을 움직이며 이수에게 한쪽 얼굴을 내밀었다.
볼록한 뺨이 씰룩거린다. 뽀뽀해 달라는 뜻인가? 차재희나 리키나 하는 짓이 똑같았다. 개 같은 놈. 이수는 속으로 욕을 씹으며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푸웁, 옆자리에 앉은 경영대생들이 술을 뿜는다. 차재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빨개진 얼굴로 콜록거리며 기침하더니 소리치듯 물었다.
“뭐예요?”
“뭐가요. 존나게 다정하게 굴어 주고 계시잖아요.”
짜증스러운 대꾸에 재희가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소스 닦아 달란 소리였어요. 선배, 두 번만 다정했다간 온 세상 사람들한테 다 입 맞추고 다니겠네요.”
아……. 그제야 차재희가 내밀었던 뺨에 묻은 소스가 눈에 들어왔다. 이 씨발놈은 주둥이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차오르는 민망함에 이수가 물티슈를 뽑아 그에게 던졌다.
“손이 없냐?”
팔랑팔랑 날아 재희의 무릎 위에 떨어진 물티슈가 그의 바지를 적셨다. 재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걸 들더니, 한쪽으로 치워 버렸다. 그러곤 이수에게 요청했다.
“선배가 닦아 주세요. 다정하게.”
“…….”
“보여 준다면서요.”
싱글거리는 낯이 이상하게 만족스러워 보였다. 아무래도 말려들고 있는 것 같은데. 이수는 찜찜한 표정으로 재희를 살폈다. 뚫어 버릴 듯 쏘아보는 시선에 차재희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말린 거지, 씨발……. 이수가 옆에 놓인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진퇴양난이었다. 그만두자니 지는 것 같아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고, 계속하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중요한 건 이수가 어느 쪽을 택해도 차재희에겐 손해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수가 다정하게 굴든, 백기를 들고 자신이 매정한 서이수임을 인정하든 차재희는 거리낄 게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수가 택한 것은 역시 경쟁에서의 승리였다.
차재희가 잃을 게 없다면 자신은 뭐라도 얻어야 했다. 스스로 만족할 만큼, 혹은 신유진이든 박지혜든 안정훈이든 자신이 차재희보다 다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분해서 잠을 못 잘 것 같았다.
핏줄을 타고 흐르는 알코올은 서이수의 이성적 사고를 방해했다. 이수는 차재희가 제발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이 짓거리를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를 도와주기라도 하듯 재희가 몸소 시범을 보였다.
“선배, 모르겠으면 나만 따라 해요. 이렇게.”
커다란 손바닥이 이수의 뺨을 감쌌다. 입술 끄트머리에 내려앉은 엄지보다 신경 쓰이는 건, 키스할 때처럼 가까워진 거리였다. 몸을 숙인 재희는 이내 다른 손을 뻗었다. 이수의 귓가와 턱 선 위로 단정한 손가락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손끝이 그의 뺨을 살짝 눌러 쓸었다. 부드럽게 마찰하는 살갗은 당장이라도 오그라들 것처럼 경련했다.
지척에서 마주 본 눈동자가 새까맣다. 온갖 것이 뒤섞인 검은색, 혹은 순수한 밤하늘의 색채. 차재희는 눈을 접어 웃었다.
“알겠어요?”
온기가 멀어져 간다. 두 사람 주변에 침묵이 내려앉았으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수는 차재희가 한 것처럼 그의 한쪽 뺨을 감싸 쥐고, 손끝으로 소스를 문대 닦았다. 닦았다기보다는 피부에 펴 발랐다는 말이 더 맞을 듯한 행동이었지만, 차재희는 만족한 것 같았다. 보조개까지 팬 채로 쪼갰다.
“와 씨, 눈 뜨고 못 보겠다.”
근처에 앉아 있던 안정훈이 소주를 원샷하고 자리를 떴다. 빈자리는 어디선가 달려온 새내기가 채웠다. 어느새 주변에 여자애들만 수두룩했다. 그러나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이수는 섀도 매치를 이어 나갔다.
맨정신으로는 아무래도 힘들어서 알코올의 힘을 더 빌렸다. 1/3쯤 비워진 맥주 캔을 들어 두어 모금 더 마셨다. 그러는 동안 차재희는 여자애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둘러보니 늘 붙어 있던 영지는 저 멀리 3학년 틈바구니에 낀 상태였다. 이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뺨이 홧홧했다. 술기운에 열이 올랐다.
“독서 문화? 응, 그거 재미있어.”
“팀플 두 번이나 한다고 하던데요?”
“맞아. 중간, 기말 다 팀 과제야. 난 팀으로 하는 걸 좋아해서… 일부러 들었거든.”
대화를 듣다 보니 이상했다. 강의 계획서에는 팀플의 ㅌ 자도 없었는데, 어떻게 일부러 들을 수가 있지? 이수가 재희의 어깨를 툭 쳤다. 고개를 돌린다.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차재희는 정말 자연스럽게 웃었다. 미소가 입가를 떠나지 않았다. 항상 웃는 얼굴. 저게 다정함의 베이직인가. 이수는 머릿속에 요점 정리를 하며 물었다.
“강의 계획서에 팀플 소리 없던데 어떻게 알았어?”
“독서 문화요?”
“어.”
“아……. 선배는 올타 안 하죠. 올타 수업 평가 게시판에 검색하면 수강했던 사람들이 올려놓은 후기 같은 거 있어요. 거기에 다 나와 있어요.”
그놈의 올타. 그게 대체 뭐길래. 고개를 끄덕인 이수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깔아 놓고 한 번도 열어 보지 않은 ‘All about your timetable’ 어플을 찾아 실행했다. 회원 가입을 하긴 했는데, 그 이후의 절차가 복잡했다.
학사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재학생임을 인증하라고 하는데……. 학사 메일이 뭐지. 이수는 학사 포탈에서 수강 신청이랑 성적 확인만 할 뿐, 메일은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헤매고 있는데 문득 어깨가 무거워졌다.
그가 내쉬는 숨결마다 술 냄새가 진득했다. 이수에게 머리를 기댄 차재희의 손에는 물이 든 맥주잔이 들려 있었다. 그만 마셔야 할 만큼 취했나. 어이가 없어서 내려다보니 재희의 눈매가 또다시 기분 좋게 휘어졌다.
“선배가 매일매일 다정했으면 좋겠어요.”
속삭이는 목소리가 몽글몽글했다. 이것도 다정의 일환인가. 이수는 어깨를 쳐 내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포탈을 뒤졌다. 물을 마시던 재희가 물었다.
“올타 가입하는 거예요?”
“어. 학사 메일이 뭐야.”
“학사 포탈 메인에서……. 이거 들어 봐요.”
이수가 맥주잔을 받고, 재희가 그의 휴대폰을 들었다. 메인 화면에서 마이 페이지로 넘어가더니 어쩌고저쩌고 복잡한 절차를 걸쳐 그가 재학생 인증을 받는 동안, 이수는 차재희가 마시던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아, 씨발.”
“왜요.”
“소주를 왜 여기다 처마셔!”
이수가 버럭 짜증을 냈다. 쉴 새 없이 홀짝거리길래 물인 줄 알았더니, 그가 제일 싫어하는 소주였다. 미친놈인가, 진짜. 입 안에 남은 씁쓸한 맛을 씻어 내기 위해 물을 찾았다. 생수병의 뚜껑을 따서 입에 쏟아붓고 있으니 옆에서 누군가 혀를 찼다.
“야아. 재희 괴롭히지 말라고.”
어디선가 나타난 유진이 이수의 정수리에 턱을 올렸다. 목을 끌어안은 채로 과도한 스킨십을 시도하는 것이 딱 주정뱅이의 몸짓이다. 술 냄새가 어마어마했다. 신유진의 날숨에 저까지도 취해 버리는 느낌이었다.
“꺼져, 이 알코올 중독자야.”
“우리 이뚜 오빠 왜 또 짜증 나또?”
“아, 혓바닥 진짜.”
고개를 털어 내니 유진이 낄낄 웃으며 떨어져 나간다. 비어 버린 이수의 옆자리에 앉더니 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아, 존나 힘들다.”
어느새 허리를 세운 재희는 희미하게 웃는 낯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수가 손을 들어 유진의 목덜미에 갖다 댔다. 뜨끈한 열기가 전해져 왔다. 아까부터 피곤하다고 하더니.
평소에는 소주 다섯 병을 가볍게 마시는 유진이지만,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에는 두세 병에도 쉽게 취하곤 했다. 오늘이 그런 날인 모양이다.
유진이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재희랑 좀, 친하게 좀 지내. 어?”
“차재희 엄마세요?”
“야, 내가 과댄데 그럼. 내가 재희 엄마도 되고, 네 엄마도 되고 막 그런 거지!”
“끔찍한 소리 말고 집에 가.”
“미쳤어? 잠깐 쉬다가 내일 아침까지 달릴 거야.”
눈을 부릅뜨며 다짐하는 말에 이수가 혀를 찼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유진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진이 앉은 의자는 등받이가 없었다. 이수는 자신이 앉아 있던 캠핑 의자를 그녀 쪽으로 밀었다.
“여기 앉아.”
“오올. 나 걱정해 주는 거?”
“뒤통수 깨지는 꼴 보기 싫어서.”
걱정이라고는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에 유진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재희와 눈을 맞추곤 이 새끼가 이런다니까, 중얼거렸다. 차재희는 말이 없었다. 팔짱을 낀 채 미소로 무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수는 또 차재희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남들은 모르는 부분을 저 혼자 알고 있다는 사실에 묘하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져서, 그냥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이수가 마시다 만 생수를 원샷한 유진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난 괜찮은데, 이거 영지 줘야겠다. 영지 오늘 엄청 달리네.”
이수가 힐끗 재희를 내려다봤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에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어쩌다 보게 되었을 뿐,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으니까.
물 한 병을 더 원샷한 유진은 이수의 어깨를 때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연스레 몸을 일으킨 차재희도 자신의 의자를 내밀었다.
“누나. 누나는 이거 가져가서 쓰세요.”
“아유, 우리 재희는 어쩜 이렇게 착할까. 할미가 너 때문에 산다, 살아.”
장난기 넘치는 너스레에 재희가 작게 웃었다. 이수는 가지가지 한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 주곤 발을 뗐다. 술을 마시니 자연스럽게 담배가 생각났다. 흡연 구역으로 향하니 당연하게도 차재희가 쫓아왔다.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앞마당에서 멀어질수록 소란함도 자취를 감췄다. 아득하게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이수는 건물 틈새를 지나 깊숙이 들어갔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오래 있으면 기가 빨렸다. 조용한 곳을 찾아 사과대 중정으로 갈 생각이었다. 머리가 아플 때 이수가 종종 찾는 곳이었다. 쓸쓸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장소는 점심시간을 제외하곤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벤치에 앉아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런데, 없었다. 담배도. 라이터도. 기억을 더듬은 이수는 아까 휴대폰을 꺼내며 담뱃갑을 돗자리 위에 내려 두었던 것을 떠올렸다.
“없어요?”
돌아갈까, 고민하고 있으니 재희가 물어 왔다. 차재희가 피우는 담배는 이수의 것보다 니코틴 함유량이 적었다. 밍밍해서 싫은데, 생각하던 이수는 그럼 두 대를 피우면 되잖아, 깨달음을 얻고 차재희에게 손을 펼쳐 보였다.
“빌려줘.”
“갚을 거예요?”
“나중에 한 보루 사 줄게. 두 개 줘.”
“이자가 세네요.”
재희가 담뱃갑을 열어 보더니 딱 두 대가 남은 것을 확인하고 그대로 이수에게 건넸다. 라이터는 없었다. 하나를 빼 물고 손을 내밀자 어깨를 으쓱한다. 이수가 눈을 치켜떴다.
“불. 내놔.”
“다 썼어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흔들어 보이더니, 이수가 뺏어 갈 틈도 없이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다. 하지만 재희의 입에 물린 담뱃대는 붉게 타오르는 중이었다.
“아니, 씨발. 장난쳐?”
“아뇨. 가져가요. 대 줄게요.”
차재희는 필터를 문 채 예쁘게 웃었다. 정말 성가신 놈이었다. 사람을 귀찮게 하는 법을 알았다. 머리를 쓸어 올린 이수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고갯짓했다.
가까이 오라는 소리를 알아들었는지, 재희는 뒷짐을 진 채로 허리를 숙였다. 머리칼이 서로의 이마를 간질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이수가 고개를 들어 연초 끝을 맞댔다.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혀 들어갔다.
잔뜩 날이 선 이수와 달리 재희의 눈빛은 느른히 풀린 상태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보다.
일렁이는 속을 무시하며 필터를 빨아들였다. 종전보다 환하게 타오르는 불길과 함께 열기가 그에게로 옮겨 왔다. 가슴 속에 차오르는 매캐한 연기를 느끼며, 이수가 재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아……. 아프잖아요.”
“너, 술버릇 있지.”
“없어요.”
“까지 말고. 있잖아.”
차재희는 술을 마시면 잘 치대는 것 같았다. 몸을 기댄다거나, 입술을 갖다 붙인다거나, 인간이 좀 쉬워지는 느낌이다. 풀어진 눈동자만 봐도 딱 눈에 보였다. 술버릇을 주장하는 이수의 태도에 재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진짜 없는데. 뭐가 있어 보여요?”
“어.”
“어떤 거요?”
“존나…….”
말을 고르던 이수가 술에 취해 주변인에게 음란한 짓을 일삼는 주정뱅이에게 딱 어울리는 단어를 찾아냈다.
“쓰레기 같아.”
“…….”
차재희가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쏘아봤다. 저러면 좋더라. 요즘 이수는 차재희가 짜증을 내비칠 때마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가면을 깨부수는 희열감이라고 할까. 그런 느낌이었다.
제 몫의 담배를 모두 피운 재희가 이수의 옆에 앉았다. 린넨 셔츠에서 배어 나오는 섬유 유연제 향기가 포근했다. 바싹 마른 이불에서 날 법한, 그런 냄새였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 중정 곳곳에서 들려오는 풀벌레의 울음이 한데 어우러진다. 그 사이로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다른 어떤 소리보다도 그게 더 듣기 좋았다.
이수는 제 옆에 앉은 남자가 차재희임을 새삼 인식하며 고개를 뒤로 꺾었다. 재희의 셔츠와 비슷한 색채의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기분이 나쁘지 않은 날이었다.
“선배.”
이수의 연초가 거의 타들어 갔을 무렵 재희가 그를 불렀다. 팔을 뻗어 옆에 내려 둔 담뱃갑에서 돛대를 꺼내더니, 자신의 입술 사이에 끼운다. 줬다 뺏는 건가, 불만스레 쳐다보니 재희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라이터 없잖아요. 그거 다 피우기 전에 제가 불 받을게요.”
“……그래.”
타당한 말이었다. 기울어진 고개 틈새로 다시금 끝이 맞닿는다. 눈을 내리깔고 불이 옮겨붙는 것을 확인한 이수가 필터를 물지 않은 쪽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안개처럼 흩어지는 모습이 꼭 신기루 같았다. 몽롱하게 그것을 바라보던 이수가 시선을 느끼고 재희에게로 눈을 돌렸다.
차재희는 담배를 입에 문 채 미동이 없었다. 자신의 턱 언저리, 혹은 입술에 머무르는 눈길을 확인한 이수가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불행한 사고가 일어났던 그날처럼 차재희의 눈동자에서 음습함을 읽었다.
“선배.”
담배를 빼내어 제 손가락 사이에 끼운 재희가, 벤치를 짚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단정한 낯에 균열이 일었다. 그 사이로 새어 나온 것은 감출 수 없는 조바심이었다.
이수는 이런 분위기에 익숙지 않았다. 애써 눈을 피하며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차재희가 뱉은 울림 없는 낮은 음성이 머릿속에 박혔다.
“키스해도 돼요?”
떨려 오는 동공이 이수의 얼굴을 더듬었다. 머리칼에 절반쯤 가려진 이마, 길게 뻗은 눈썹, 충격을 받은 듯 크게 뜨인 눈매, 반듯한 콧날, 벙긋거리는 예쁜 입술까지. 화산 지대의 진흙탕처럼, 재희의 끈적한 시선은 절절 끓었다.
머리가 하얗게 비어 버린 이수는 왜냐고 묻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의 만면 가득 떠오른 의문을 알아챈 재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선배도, 나도 술 마셨고…….”
“…….”
“20대 남성에게 흔한 신체적 반응이 지금 막 활발해졌고…….”
조금씩, 조금씩. 차재희는 이수가 알아채지 못할 만큼 느린 속도로 다가왔다.
“아니지. 질문을 바꿔야겠네.”
예쁘게 웃으며 입술을 적신다. 재희가 이수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나 지금, 선배한테 실수해도 돼요?”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이게 무슨 느낌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어서 이수는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름을 갖다 붙였다. 위기의식이었다.
“안 되지, 미친놈아!”
이수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들어 재희의 이마를 밀어냈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자신을 쓰러트리고 올라탈 것 같은 표정이었다. 쓰레기 같은 놈. 술주정을 기가 막히게 했다. 헛숨을 터트리며 노려보니 또 시무룩한 똥개 같은 표정을 짓는다.
“진짜 안 돼요?”
“아니, 씨발……. 되겠냐?”
어이가 없어 반문하니 차재희가 입매를 늘렸다. 그를 남겨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주체할 수 없이 뛰는 심장을 뽑아 버리고 싶은 와중에 재희가 담배를 내밀었다. 받아서 한 모금만 깊이 빨아들인 후 공용 재떨이에 쑤셔 박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할 것 같았다. 차재희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술에 취했으면 집에 들어가서 처자야지. 보이는 사람 붙잡고 입술을 비비려고 하는 건 정신 나간 짓이었다.
“술버릇이 개같아, 너.”
짜증스러운 말투에 차재희가 금세 눈매를 찡그렸다.
“선배도 더럽게 다정하고요.”
“술 두 번만 더 마셨다간 경찰서에 끌려갈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다정하게 걱정해 주는 건데 모르겠어?”
“아니, 이건.”
“이건 뭐.”
서이수의 표정이 살벌했다. 한 치의 헛소리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날카롭게 쏘아지는 눈빛에 재희가 입을 다물었다.
“말을 끝까지 해. 이건 뭐.”
“이건…….”
말을 잘못했다간 망한다. 분명히……. 한참 동안 눈을 굴리던 재희가 힘겹게 인정했다.
“술… 버릇인가 봐요…….”
“인정하는 거지? 너 씨발, 술 처마시면 주둥이 닫고 다녀.”
“네…….”
“다음에 또 실수 이 지랄 하면 진짜 처맞는다.”
“네에…….”
팔자로 처지는 눈썹이 애처로웠다. 이수는 마뜩잖은 얼굴로 혀를 차고 경영대를 향해 걸었다. 딱히 말하지 않아도 차재희는 알아서 따라왔다. 보폭을 맞춰 걷는 걸음에 아까보다 기운이 빠져 있을 뿐이었다.
경영대 앞마당으로 돌아가니 여전히 술판이 한창이었다. 단체로 게임을 시작했는지 대부분의 사람이 큰 돗자리에 모여 있었다.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이수는 집으로 돌아갈 타이밍을 쟀다. 신유진만 어떻게 피하면 될 것 같은데, 문제는 신유진이 이수의 근처에 앉아서 1분에 한 번씩 그를 감시하듯 쳐다봤다는 것이다.
“야, 서이수. 게임하자.”
“안 해.”
이수는 팀 과제와 마찬가지로 여러 사람과 함께하는 일을 싫어했다. 성장 환경이 인간의 성격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고 하지만, 환경으로도 어쩔 수 없는 기질이라는 게 있다.
이수는 천성적으로도 외골수 기질을 타고났는데, 그걸 더욱 극대화한 것이 환경이었다. 원래도 외향적이지 못한 사람이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살았으니 남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걸 잘 알면서도 이수가 이런 자리에 나타나는 것은, 뭐든 익숙해지면 좋을 거라는 신유진의 확고한 철학에 동의한다기보다는 그녀가 자신을 생각해 주는 마음을 기꺼이 여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수의 노력은 함께 있어 주는 것에 그치고 결코 함께 어울리는 것까지는 나가지 못했다. 자리를 지키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가능했던 일이다.
이수는 비어 버린 작은 돗자리에 다리를 뻗고 앉았다. 가로등 불빛을 조명 삼아 라테르 커뮤니티를 들여다봤다. 2학년 과대인 차재희도 마냥 이수 옆에 붙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곳저곳 불려 다니다가 20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돌아왔다.
이수는 몰랐지만, 절대 취하는 법이 없는 차재희는 술자리에서만큼은 공공의 적이었다. 게임만 하면 모든 이들이 그를 타깃으로 삼지만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술에 진 적이 없었다. 그래도 사람이 많으니 힘들긴 힘들었던 모양이다. 눈을 끔뻑이며 돌아온 재희가 이수의 곁에 앉았다. 진한 술 냄새가 풍겨 왔다.
“힘들어요, 선배.”
“어쩌라고.”
“하나도 안 다정해요.”
“재희야, 힘들면 집에 기어 들어가세요.”
억지웃음과 함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희는 재미있다는 듯 웃더니 몸을 뉘었다. 돗자리 위에, 이수의 허벅지를 베고서. 묵직한 무게감에 이수가 짜증을 내며 휴대폰을 내렸다.
“술주정 진짜 더럽네.”
“다정하게 대해 준다고 했잖아요, 선배. 약속 지켜요. 한 입으로 두말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이수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치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귀를 쫑긋했다. ‘이수는 안 된다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는지 신유진이 낄낄거리며 하는 말이 그의 심기를 긁었다.
코웃음을 친 서이수가 손을 들었다. 재희가 눈을 번쩍 뜬 채 올려다본다.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이수는 얼마 전에 계단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잔디를 뽑아내고 쓰다듬어 주었을 때 차재희가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내려다본 얼굴이 반듯하게 잘생겼다. 술 때문인지 평소보다 하얗게 질린 피부는 그래도 보기 좋은 살굿빛이었고, 마른 장밋빛 입술은 기분 좋게 휘어져 있었다. 차재희의 검은 머리칼은 대단히 부드러웠다. 적당한 굵기로 손에 감기는 느낌이 리키와 정말 비슷했다.
“만족해?”
“글쎄요.”
대답을 피하는 모습이 얄미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짜증은 나지 않았다. 이수는 쓰다듬음에 약간 심취한 채로 올타를 들여다봤다. 말로만 듣던 올타 익명 게시판에는 별 쓰레기 같은 글들이 난무했다.
[손목에 집 한 채 달고 다니는 서 vs 반지하 원룸 사는 차]
경영러의 선택은? 이라는 투표에서 차재희가 압도적으로 자신을 이기는 것을 보고 잠깐 황당하기는 했지만 금방 잊어버렸다. 다른 것도 볼 게 많았다. 차재희가 말했던 강의 평가 게시판에는 익명으로 올라온 수강 후기가 가득했다. 이수는 그것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선배.”
“왜.”
“향수 써요?”
“아니.”
시답잖은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 줬다. 차재희는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웠다. 이수의 발치를 바라보며 허벅지에 슬쩍 고개를 파묻는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스킨십이었으나 다정한 선배 역할에 충실하는 중이었으므로 굳이 밀어내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리키 같았다. 차재희는 전생에 개였을까? 깊은 숨을 들이쉬던 재희가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선배한텐 늘 좋은 냄새가 나요.”
“그래.”
어쩌라고. 습관적으로 대답하려던 이수가 무심하게 덧붙였다.
“너도.”
차재희는 다시 돌아누웠다. 반짝반짝하는 눈동자가 이수를 올려다봤다. 꾸밈없이 솔직했다. 맑았고, 또 깊었다. 이수는 휴대폰을 내려 두곤 재희와 시선을 맞췄다.
“나한테 좋은 냄새 나요?”
“어.”
“어떤데요?”
“뭐…….”
말을 고르던 이수가 문득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씩, 놀리듯 미소 짓는 얼굴을 보고 재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단정한 얼굴에 아찔한 충동이 스쳤다.
“포근한 개 냄새?”
“…….”
불만을 표시하는 재희를 보며 이수는 웃음을 터트렸다. 보기 드물게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누군가를 설레게 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재희도 맑게 웃었다. 조금 더 툴툴거리고 싶었지만 어쩐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치 재채기처럼.
그날 저녁은, 그렇게 좋았다.
* * *
이수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해가 지고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술에 미친 인간들이 기어코 술독에 빠져 죽을 모양인지, 마무리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수는 신유진이 담배를 피우러 간 틈을 타 사라지기로 했다. 휴대폰을 챙기니 재희가 따라 일어났다.
“갈 거예요?”
“어.”
“벌써요?”
“아쉬워?”
이수의 반문에 재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돗자리에서 뒹군 탓에 늘 단정하던 머리가 엉망이었다. 대충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며 속삭인다.
“선배 옆에 있으면 편해서요. 다들 말을 안 거네요.”
“귀찮으면 집에 가면 되잖아. 피곤하게 사네.”
한심하단 눈빛에 재희가 영혼 없이 웃었다.
“말투가 너무 따뜻해요, 선배.”
서늘한 눈매가 찌푸려진다. 두 시간 전 이후로 입에도 대지 않은 알코올은 성실히 분해되어 사라지고 없었다. 이성이 돌아오니 싫증이 났다.
충분히 할 만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차재희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되지도 않는 짓을 하는 것이 부질없이 느껴졌다. 이 기묘한 승부에서 이기고야 말겠다는 다짐으로 시작했으나, 생각해 보니 승리를 해도 돌아오는 게 없었다.
누가 트로피를 주는 것도 아니었고, 서이수가 차재희보다 다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목적의식이 흐려질수록 의욕도 떨어졌다.
이수는 마지막 시도를 했다. 차재희에게 한 걸음 다가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말 정성스레 정리해 줬다. 그러곤 모호한 표정으로 입술을 물고 선 재희에게 속삭였다.
“존나 다정해서 눈물 날 것 같지?”
차재희는 웃었다. 비스듬히 끌려 올라간 입꼬리를 보아하니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이수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몸이 끌려갔다. 그의 허리에 팔을 감은 재희는 힘을 주어 이수를 껴안았다. 숨이 막혀 올 정도의 압력에 자연스럽게 욕이 튀어나왔다.
“야, 씨발. 뭐 해.”
“한참 멀었어요, 선배.”
한 음절, 음절마다 목덜미에 파묻어진 입술에서 뜨거운 숨결이 튀어나왔다. 척추 결을 따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이수는 속이 메슥거렸다. 이 빌어먹을 술주정. 인상을 구기며 걷어차려 했으나 뒤에서 안정훈이 ‘야, 선후배 사이 존나 좋네!’ 소리치는 말에 발을 내렸다.
“이 짓거리 언제까지 할 거야.”
대신 살벌하게 씹어뱉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차재희는 늘 그러했듯, 질문에 답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선배, 경쟁하는 거 좋아하죠. 나랑 내기할래요?”
“무슨 내기.”
“서로 한 가지씩 행동을 제시하고, 그걸 실행하는 거예요. 예전에 친구랑 했었는데 엄청 재밌었어요.”
이수는 승부를 걸어오면 절대 피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이기기 힘든 종목이라면 며칠 밤을 새워서라도, 몇백 번을 지더라도 한 번의 승리를 위해서 목숨을 거는 인간이었다.
차재희가 설명한 내기의 룰은 이랬다.
1. 주제 제시는 번갈아서 한다.
2. 둘 다 실행하면 다음 주제로 넘어간다.
3. 한쪽이 실행하고 한쪽이 포기하는 순간 끝난다.
내용 자체는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보상이 뭔데.”
“진 사람이 소원 하나 들어주기로 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수는 실소를 터트렸다. 이게 겁도 없이 내가 뭘 바랄 줄 알고. 그러나 차재희는 여유가 넘쳤다. 전혀 거리낄 것 없다는 태도에 이수도 승부욕이 일었다.
“콜.”
치킨 게임의 시작이었다.
‘내가 말 붙이기 전에 먼저 말 걸지 마.’
이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 소원을 알려 준다면 차재희는 내기를 무르거나 기를 쓰고 이기려 들 테니까.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게 귀찮아서 정해 둔 소원이었다.
이수는 재희가 무엇을 요구할지 궁금하지 않았으나 차재희는 늘 그렇듯 먼저 주절거렸다.
“제가 이기면, 형이라고 부를래요.”
“그러시든지.”
이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뭘 바라든 상관없었다. 그에게는 차재희가 절대 자신을 이기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 * *
내기는 바로 다음 날 시작됐다.
아침에 학교에서 보자는 말에 이수는 옷을 대충 챙겨 입고 모자를 쓰고 나왔다. 며칠째 학교에 방치 중인 자전거 대신 SUV에 올라탔다. 집에 갈 때 자전거를 싣고 올 생각이었다.
교정은 여전히 복잡했다. 아직 축제가 한창이었기 때문에 이수는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가는 길에 차재희를 만났다.
“선배.”
베이지색 니트 칼라 셔츠에 롤업한 생지 데님, 발목이 드러나는 워커. 머리칼을 뒤로 넘긴 반듯한 얼굴에서 빛이 났다. 차재희는 확실히 머리를 넘기는 게 더 예쁘다.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며 모자를 뒤돌려 썼다. 신경을 쓴 재희와 달리 이수는 늘 입는 검은색 무지 티셔츠에 슬림한 트레이닝 바지 차림이었다. 딱 집 앞을 마실 나온 백수 같았다.
“누가 먼저 시작할까요?”
“동전 던지기 해.”
“좋아요.”
막상 말을 꺼낸 이수는 동전이 없었다. 빈 주머니를 털어 보이자 재희가 바지춤에서 백 원짜리를 하나 꺼냈다. 서이수가 앞, 차재희가 뒤.
“던질게요.”
허공에서 반짝인 동전을 이수가 잡아챘다. 곧바로 손바닥을 펼친다. 100. 뒷면이었다. 씩 웃은 재희가 이수에게 물었다.
“아침 먹었어요?”
“대충.”
“한 끼 더 먹으러 가요.”
가벼운 답변에 이수가 태클을 걸었다.
“야.”
“배불러요?”
“한가하게 밥이나 처먹자는 소리는 아니지?”
설마 개수작을 부리는 건 아니겠지? 그럼 재미없는데. 의심이 가득한 눈길에 재희가 짧게 웃었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다는 듯, 한쪽 눈을 찡그린 채 대꾸한다.
“쉽게 보면 곤란해요, 선배. 불닭 먹으러 갈 거예요.”
씨발…….
차재희, 이 빌어먹을 새끼.
이수가 퉁퉁 부어오른 입술을 식히며 재희를 노려봤다. 가장 작은 사이즈의 돌솥 불닭을 해치우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이수가 물을 두 통 마시고, 붉어진 눈매를 눈물로 적시는 동안 차재희는 즐거운 표정으로 그를 관람했다.
10분 만에 그릇을 비운 차재희는 물도 딱 한 잔만 마시고 말았다. 턱을 괴고 웃음을 머금은 낯짝을 뚝배기로 후리고 싶은 것을 참아 내며, 이수는 꿋꿋이 식사. 아니, 셀프 고문을 끝마쳤다.
얼마나 매운지 속이 쓰리고, 입가가 얼얼하고, 두통이 일었다. 마음속으로 이를 갈고 심호흡을 한 이수가 얼음을 입에 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은 당연히 재희가 했다. 유리문을 민 그가 웃으며 물었다.
“맛있죠?”
“닥쳐.”
“선배 차례예요.”
언제까지 웃나 보자. 이수가 코웃음을 쳤다.
불닭을 파는 식당은 사국대 후문 쪽의 번화가에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니 거리가 번잡했다. 사국대 번화가는 원래도 유명했는데, 오늘내일 대운동장에서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사람이 많았다.
그 모습을 느긋하게 훑어본 이수는 망설이지 않고 제시문을 던졌다. 주제는 사실 이 골목에 도착했을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가서 남자 번호 얻어 와.”
“……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멍한 얼굴로 반문하는 재희에게 이수가 또박또박 다시 한번 말했다.
“남자 번호, 받아 오라고.”
한국에서는 커밍아웃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게이를 따로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남자가 남자 번호를 따는 일은 게이 바나 게이 퍼레이드가 아니고서야, 수많은 거절을 동반하는 일일 것이다. 엄청나게 쪽팔릴 거란 소리다.
차재희가 수락할 확률 반, 거절할 확률 반. 거절한다 해도 서이수는 기꺼이 미션을 수행할 자신이 있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녔다. 재희는 입술을 달싹이며 고민하더니, 곧 눈에 힘을 주고 돌아섰다. 수락이었다.
이수는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 500mL 초코 우유를 사 왔다. 빨대를 꽂아 마시며 차재희가 고군분투하는 꼴을 바라봤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당황스럽게 인상을 쓰며 떠나갔다. 사국대 재학생으로 보이는 남자들은 재희와 이수를 번갈아 보며 웃다가 사라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차재희는 너무하다는 표정으로 이수를 돌아봤다.
귀 끝까지 빨개진 채로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길 여러 차례.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체구가 작은 남자 한 명이 번호를 건넸다. 옷 입은 꼴을 보아하니 공대생이었다. 땅바닥만 쳐다보며 다가온 재희가 거친 손길로 이수에게 제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됐죠!”
그렇게 소리 지르는 얼굴이 불닭을 먹을 때보다 붉었다. 민망함과 수치심, 언뜻 죄책감까지 드러난 표정에 이수는 웃음을 삼켰다. 순진한 새끼.
“수고했어.”
재희의 어깨를 툭 치고 걸음을 뗐다. 이수는 여유만만한 태도로 저 멀리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얼굴을 아는 사람이었다. 신유진을 따라 가 본 적 있는 바(bar)의 사장이다. 미국에서 살다 왔다는 말에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이수가 기억하기로 그는 바이 섹슈얼이었다.
차재희가 데려온 불닭집과 바는 바로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수는 낯익은 바의 간판을 발견하는 순간 주제를 정했다. 자신에게는 쉽고, 차재희에게는 어려운 일이 될 것 같아서.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30대로 보이는 사장이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그가 제 얼굴을 기억하든, 못 하든 관심 없었다. 이수는 고개를 돌려 차재희를 턱짓했다.
“제 친구가 사장님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부끄러워서 말을 못 붙이고 있어서요. 혹시 괜찮으시면 번호 좀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보기 좋게 웃는 얼굴이 사악했다. 이수는 당연하단 듯 차재희를 팔았다.
사장은 재희를 힐끔 보고는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이내 이수의 휴대폰을 받아 키패드로 자신의 번호를 입력하며 물었다.
“유진이 친구죠?”
“기억하시네요.”
“그쪽이 잊기 쉬운 얼굴은 아니지. 게임 하는 거예요?”
“……글쎄요.”
눈치가 빨랐다. 모르는 척 대꾸하자 사장이 휴대폰을 돌려줬다. 어쨌든 목표는 달성이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건네고 돌아가려는데 이수의 등 뒤에 대고 사장이 말했다.
“그래도 저쪽 좀 잘생겼네. 내 스타일인데, 그쪽이 반칙한 거 비밀로 할 테니까 말 좀 잘해 줘요.”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에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해 볼게요, 무심한 대답에 언제든 좋으니 바에 놀러 오라는 말이 덧붙여졌다. 이번엔 무시했다.
편의점 옆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차재희는 굉장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번호가 찍힌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불만스럽게 입을 다문다. 이수가 목표를 너무 쉽게 달성한 게 분한 모양이었다. 가요,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오기가 가득했다.
후문을 향해 나란히 걷다가 생과일 주스 집을 발견했다. 이수가 여러 대의 믹서기 앞에서 발을 멈췄다. 초코 우유로 중화되지 않은 통증이 남아 있었다.
“야. 뭐 마실래? 사 줄게.”
“딸바요.”
뭐라는 거야. 알아듣지 못한 이수가 고개를 돌리자 재희는 딸기와 바나나 그림이 그려진 메뉴를 가리켰다. 별걸 다 줄여 불렀다.
고민 끝에 오렌지 주스를 고른 이수는 가게 알바생이 믹서에 시럽을 쏟아붓는 것을 보고 곧바로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2,500원인 이유가 있었다.
테이크 아웃 잔을 건네받은 두 사람은 생과일주스를 마시며 나란히 걸었다. 눈앞에서 들이부어지는 설탕 시럽에 놀라긴 했으나, 싸구려 음료 맛은 나쁘지 않았다.
“선배 인기 좋네요.”
문득 재희가 그렇게 말했다. 너 말하는 거지? 이수는 그 말을 삼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웬일로 차재희와 평화로운 오후였다.
후문으로 들어서고 공학관 사거리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이 많아졌다. 차재희는 20분째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기가 빨리는 것을 느끼며 이수가 물었다.
“다음은 뭐야.”
“생각 중이에요.”
“시간 끌지 마.”
“보채지 좀 마요.”
이게 진짜. 얄미운 대꾸에 이수가 차재희의 머리를 흩트렸다. 짜증을 내며 몸을 빼는 것을 끝까지 따라가 헤집어 놓았다. 재희는 불만이 가득한 눈빛으로 이수를 노려봤다. 저녁에 여자라도 만나러 가려 했던 건지, 예쁘게 넘겨 두었던 머리가 엉망이 됐다. 손으로 다시 정돈하며 투덜거린다.
“왜 맘대로 만져요?”
“너도 내 머리 만지든가.”
“짜증 낼 거잖아요.”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쓰레기통에 빈 잔을 던져 넣은 이수가 다시금 그를 채근했다.
“빨리 정하라고.”
재희는 빨대에서 입술을 떼며 주변을 둘러봤다. 두 사람은 지금 공학관 앞의 호수를 지나고 있었다. 바닥을 뒤지면 6·25 때 쓰던 수통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도는 호수였다. 물론 그 정도로 오래된 곳은 아니다. 물이 하도 탁해서 하는 말이지.
1.5M. 수심 주의.
표지판을 본 재희가 이수를 보며 말했다.
“정했어요.”
“뭐.”
“호수에…….”
이수의 시선이 어두침침해 보이는 수면을 향했다. 더럽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들어가… 기.”
재희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이수가 호수에 뛰어들었다. 금빛으로 물결치던 수면이 유리처럼 깨어진다. 풍덩, 단조로운 소리와 함께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재희가 아연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봤다.
“하아, 재희야.”
수면을 가르며 나타난 이수가 거친 숨을 뱉어 냈다. 그가 흠뻑 젖은 모자를 벗었다. 눈을 찡그리며 머리를 쓸어 넘긴다. 창백한 뺨을 타고 물방울이 흘렀다. 늘 더럽다고 여겼던 호수의 물이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깨끗하고 투명한 빙하수처럼 느껴졌다.
언제나 차가웠던 서이수라는 남자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연한 갈색 머리칼이 햇살을 반사해 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얼굴로 이수가 싱겁게 웃었다.
“재미없다.”
분홍빛 입술이 물기를 머금은 채 움직인다. 열 오른 목덜미를 숨기기 위해, 차재희는 몸을 던졌다. 세 번째 무승부였다.
호수에서 나온 두 사람은 체육관으로 갔다. 개인 샤워실이 갖춰져 있는 곳에서 각자 씻고 옷을 헹궈 냈다. 옷은 갈아입을 것이 없어 물만 짜낸 후 다시 입어야만 했다. 젖은 옷을 입고 나온 두 사람 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이수가 짜증을 내고 있으니 재희가 밖으로 나가 수건을 빌려 왔다. 둘은 탈의실에 나란히 앉아서 물기를 닦았다. 재희에게 딱 하나 있던 백 원짜리로 드라이기에 전원을 넣고, 1분 15초씩 돌아가며 머리까지 대충 말렸다. 젖은 수건으로 신발을 닦으려 애쓰는 이수를 보며 재희가 물었다.
“정했어요?”
“고민 중이야.”
그 말에 차재희가 기다렸다는 듯 투덜거렸다.
“시간 끌지 마요.”
“까분다.”
뭘 해야 할까. 지금은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이수는 일단 차재희를 끌고 나왔다. 걷다 보면 생각이 날 것 같았다.
탈수기에 돌렸음에도 신발은 여전히 축축했다. 은근한 불쾌감을 느끼며 이수는 교정을 한 바퀴 돌았다.
따스한 햇살 아래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미묘한 조화 덕분에 덥지도, 춥지도 않은 쾌적한 날씨였다. 이럴 때 테라스에서 낮잠을 자면 딱 좋을 텐데, 나른함을 지워 내려 머리를 털어 냈다.
“물 튀잖아요.”
“어쩌라고.”
무책임한 대꾸에 하, 허탈하게 웃은 재희가 간격을 좁히며 다가왔다. 이수의 팔을 툭, 치더니 궁금하단 듯 묻는다.
“선배, 어제 한 말 진짜예요?”
“야. 나 진짜 궁금한 거 있는데.”
“네?”
우뚝 걸음을 멈춘 이수가 재희를 돌아봤다. 어째서인지 만면 가득 짜증이었다. 내가 또 뭘 잘못한 거지, 어리둥절한 재희를 보며 이수가 쏘아붙였다.
“질문을 할 때 한 번에 말하면 안 되냐? 니 화법 진짜 거슬려. 궁금한 게 있으면 어쩌고저쩌고한 거 진짜예요? 하면 되잖아. 왜 꼭 진짜예요? 그거 아세요? 하고 그다음에 질문을 갖다 붙이는 거야? 그럼 내가 대답을 두 번 해야 되잖아. 어디서 그런 말투를 배웠어?”
말을 많이 하면 죽는 병에 걸렸나 싶을 정도로 단답형인 사람이 짜증 내고 화를 낼 때만큼은 청산유수였다. 설핏 인상을 찌푸린 채 그 말을 곱씹던 재희는,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왜 맨날 시도 때도 없이 신경질을 부리는지 알 수 없었는데 어쩐지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알았어요. 그럼 다시 물어볼게요. 어제 나 안 싫어한다는 말 진짜예요?”
“난 거짓말 안 해.”
단호히 대꾸하고 돌아섰다. 이수의 머릿속엔 내기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옷이라도 벗으라고 할까? 그건 좀 너무한가? 일단은 아껴 둘까, 아니면 한 번에 세게 나갈까. 난 어디까지 벗을 수 있을까, 속옷만 아니면…….
골몰히 생각하고 있는데 옆에 있어야 할 놈이 없었다. 어디 갔지. 뒤돌아보니 방금 그 자리에 선 차재희가 멍하니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해? 포기했어?”
“아뇨!”
고개를 저은 재희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이수를 앞서 나가는 귀 끝이 새빨갛게 물든 채였다.
완전히 마르지 않은 니트 칼라 셔츠가 밀착된 뒷모습이 보였다. 새삼 어깨가 참 넓다는 생각을 했다. 한참이나 어린 정신 연령과 다르게 성숙한 남자임이 분명한 신체였다.
저걸 벗겨 버릴까. 그를 골리려는 의도가 명확히 구체화되고 있을 무렵 차재희가 돌연 몸을 돌렸다. 이수를 보며 뒷걸음질 치는 채로 보기 좋게 웃는다. 재희가 물었다.
“선배, 그럼요. 나 좋아요, 이제는?”
“돌았냐?”
고민하지 않고 나온 대답에 실망스러운 표정이 스쳤다. 이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으며 그의 꽉 막힌 사고방식을 지적했다.
“싫어하지 않는다고 해서 좋아하는 건 아니지.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살면 재미없어, 차재희.”
“싫지도 않고 좋지도 않으면 어떤데요?”
“내 생각이 왜 그렇게 궁금한데?”
“뭐. 그냥, 궁금할 수도 있죠.”
인상을 찌푸린 이수가 묵비권을 행사했다. 재희가 허리를 숙였다. 이수를 들여다보며 보조개를 폭 팬 채로 투정을 부리듯 웃는다.
“선배, 말해 줘요. 응?”
“궁금하면 내기에서 이겨. 그럼 대답해 줄게.”
“진짜…….”
단호한 대꾸에 차재희는 답을 듣길 포기했다. 더럽고 치사하다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차재희와 나란히 걷고 있으니 학생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웅성거리는 이들을 무시하며 이수는 목적지로 향했다. 이내 발 디딜 틈 없이 사람이 많아졌을 때, 여태 손에 들고 있던 축축한 모자를 눌러쓴 이수가 입을 열었다.
“야. ‘벗기’ 하자.”
“옷이요?”
“뭐든 몸에 걸친 거.”
“……진심이에요?”
재희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봤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그들은 다시 공학관 앞이었다. 무대가 설치된 대운동장이 근접했고, 푸드 트럭과 축제를 구경 온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 여기서 옷을 벗으라고? 기함했으나 이수는 흔들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만한 눈빛으로 묻는다.
“포기할 거야?”
“……아뇨.”
고작 이런 일에 포기할 거라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다. 차재희가 결연한 표정으로 상의를 벗었다.
이수는 내심 놀란 채로 그를 훑어 내렸다. 공들여 빚은 조각상처럼 세밀하게 짜인 근육이었다. 전혀 과하지 않고, 딱 보기 좋게 예쁜 몸. 나도 운동을 좀 할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탐나는 신체였다.
주변에서 숙덕대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시선이 내리꽂혔다. 차재희는 부끄러운 듯 뺨을 문지르며 이수를 보챘다.
“선배는요. 포기예요?”
그럴 리가. 이수는 재희를 보며 웃었다. 그러고는 느릿한 몸짓으로 모자를 벗어 들었다.
“됐지?”
“……아, 장난치지 마요.”
손에 들린 모자를 보고 재희가 정색했다. 헝클어진 제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길이 거칠었다. 황당함이 물씬 묻어나는 행동에 이수가 씩 웃었다.
“내가 ‘벗기’라고 그랬잖아.”
“그건 모자잖아요!”
재희가 불공정함을 토로했다. 차재희는 이런 쪽으로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것 같았다. 지나치게 정직했다. 승부에서 정직함은 약점이었다. 페이크를 쓸 줄 알아야 했다. 이수가 만면 가득 여유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모자를 썼다의 반대말이 뭐야.”
“…….”
“뭐냐고.”
“……모자를 ‘벗었다’요.”
“됐지?”
웃음기 띤 상냥한 물음에 차재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에 점점 사람이 몰리고 있었다. 재희는 약아빠진 선배를 끌고 학생회관으로 향했다. 걷는 내내 뺨이 붉었다. 어떻게든 얼굴을 가리려 애쓰던 재희가 중얼거렸다.
“치사해요, 진짜.”
“넌 나 절대 못 이겨.”
두고 봐요, 이를 바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학생 식당과 제본소, 서점, 각종 동아리 부실 등이 모여 있는 학생회관은 늘 붐비는 곳이었다. 하지만 축제 탓인지 오늘은 복도에 적막만 감돌았다. 그곳에 들어서고 나서야 재희는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어둑한 조명에도 확연히 보일 정도로 낯빛이 붉었다.
“내 차례죠. 선배도 벗어요.”
기껏 생각해 낸 게 그거였다. 혼자 죽지 않으려고.
“그거면 되겠어?”
“공연 끝날 때까지요.”
단호한 태도에 이수가 짧게 웃었다. 옷 벗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이름도 모르는 의사와 간호사들 앞에서 맨몸을 내보인 일이 셀 수 없이 많았기에, 그 정도 노출은 온종일도 할 수 있었다. 이수는 망설일 것 없이 티셔츠를 벗었다.
“뭐… 수술, 했어요?”
그리고 당황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새까만 동공이 이수의 가슴팍을 배회했다. 실수했다는 듯 지그시 깨문 입술 사이로 탄식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명치 위로 길게 뻗은 분홍색 흉터는 심장 이식 수술의 흔적이었다.
고장 난 심장은 생살을 가르고 나왔다. 그와 동시에 이수도 세상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얼마 가지 못해 되돌아와야 했지만, 이수에게 그 흉터는 퇴원 수속을 밟던 날을 떠올리게 만드는 추억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타인이 보기엔 아픈 상처 같은 느낌이겠지. 순진한 차재희는 미안하다 못해 죄책감이 어린 표정으로 입술을 씹고 있었다. 방금의 기세등등한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수가 아무렇지 않게 턱짓했다.
“신경 꺼. 가자.”
“어떻게 신경을……. 아니, 이렇게는… 안 돼요.”
“뭐가 안 돼.”
티셔츠를 손에 쥔 이수는 별생각이 없었다. 누가 쳐다보든, 차재희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알 바 아니었다. 하지만 휘어진 눈썹을 보는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만약 이것 때문에 저 착한 후배가 내기를 무르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승리였다. 이수는 머리를 굴릴 틈 없도록 재희를 채근하기 시작했다.
“실수했어요. 죄송해요, 선배.”
“신경 끄라니까? 가자고.”
“아니, 어떻게 신경을 꺼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재희가 놀라며 이수의 안색을 살폈다. 이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자책하는 차재희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대로 밀어붙이면 정말 포기할 기세다.
그런데 후회로 물든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자신이 무엇을 요구할지 알게 된다면 그때도 차재희는 목표보다 배려를 우선시할까. 호기심이 솟았다. 이수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입을 뗐다.
“다시 입어?”
“입어요. 취소할게요.”
“그럼 니가 지는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해요?”
재희는 인상을 찡그렸다. 누가 보기라도 할까 주변을 경계하며 눈빛으로 재촉한다. 옷 입어요. 그러나 이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보다 못한 재희가 그의 손에 들린 티셔츠를 뺏어 들었다. 탈탈 털어 주름을 펴더니 그에게 들이밀었다. 이수가 다시 제 옷을 받아 들며 말했다.
“내가 이기면 해 달라는 거 다 들어줄 거지?”
“알았으니까 그딴 거 신경 끄고 입으라고요.”
“더 이상 나한테 말 걸지 말라고 할 건데.”
웃음기 섞인 말에 재희가 움직임을 멈췄다. 안절부절못하던 얼굴에 실망과 충격이 깃들었다. 그리고 얼핏, 분노도 본 것 같았다. 다가가면 멀어지고, 잡으려 하면 도망치는 이수가 그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진짜 입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차재희의 눈빛이 돌변했다.
“진심이에요?”
“입을까?”
“진심이냐고.”
대꾸 없이 머리를 끼워 넣으려 하는데, 재희가 이수의 옷을 잡아챘다. 검은색 티셔츠가 꾸깃꾸깃 구겨진다. 서늘한 바람이 둘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낸 차재희가 씹어뱉듯 말했다.
“입지 마요. 취소 안 해.”
“그러시겠지.”
차재희의 배려는 딱 거기까지였다. 그 또한 목표 앞에서는 자신의 이득을 우선시하는 뻔한 인간이었다. 이수는 가만히 머리를 쓸어 올리며 출구를 턱짓했다. 미약한 물기가 남은 머리칼이 이리저리 흩어진다.
그런데 그 순간. 얼굴 위로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포근한 향기가 전신을 감쌌다. 뭐지.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니트 칼라 사이로 머리가 쏙 빠져나왔다.
“팔. 내놔요.”
울퉁불퉁 뾰족한 음성으로 차재희가 말했다. 멀거니 선 이수를 노려보며 제 옷에 팔을 끼워 준다. 이수는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그가 하는 짓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재희는 힐끗, 그의 눈치를 보며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이건, 선배가 벗었는데 내가 입혀 준 거니까. 무승부예요.”
“…….”
제게 입혀진 옷을 내려다본 이수가 순간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내 짧은 한숨과 함께 얼굴이 풀어졌다. 무르다, 물러.
베이지색 니트 칼라 셔츠. 차재희의 옷은 부드럽고 또 따뜻했다. 아주 좋은 냄새가 났다.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또 몰랐는데. 이수는 길을 가다 유리 조각을 밟은 것처럼, 차재희의 배려심에 푹 찔려 버리고 말았다.
“착하다고 해야 할지…….”
“거기까지 말해요.”
“등신 같다고 해야 할지…….”
멈추지 않는 말에 재희는 입술을 씹었다. 눈을 피하며 이수에게 턱짓했다. 짜증이 났는지 말을 돌리고 싶어 하는 기색이 보였다.
“선배 차례예요.”
“따라와.”
이수는 차재희가 들고 있던 제 옷을 뺏어 들고 걸음을 뗐다. 혹시 옷을 바꿔 입게 되진 않을까, 헛된 희망을 품었던 재희는 이내 실망과 부끄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그의 뒤를 따랐다. 촘촘한 근육질의 상반신은 여전히 노출 상태였다.
학생회관 앞의 흡연실로 들어간 이수가 담배를 빼 물었다. 사국대생들이 경악에 찬 눈길로 두 사람을 훑어봤다. 흘끗거리며 휴대폰을 두드리는 걸 보니 익명 게시판에 똥글을 싸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해탈한 표정으로 담뱃갑을 꺼내는 차재희는 주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이수는 느긋하게 담배를 태우곤 주변을 둘러봤다. 흡연 구역 근처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시선이 마주치려 할 때마다 몸을 돌리지만, 저와 차재희를 보러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멍한 표정의 재희는 땅바닥을 쳐다보며 한 손으로 제 뺨을 문질렀다. 불안하게 떨리는 눈썹이 애처로워, 이수는 아량을 베풀었다.
“야.”
공용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재희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머리 위로 검은색 티셔츠가 내려앉았다.
“봐줬다.”
무심한 말투였지만 차재희는 기뻤다. 재빨리 티셔츠를 껴입고는 아이처럼 웃는다. 이수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다 몸을 돌렸다.
서로 옷을 바꿔 입은 두 사람은 대운동장으로 갔다. 본 공연이 시작되기 전 학생회가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는데, 아직은 자리가 널널했다. 두 사람은 무대가 보이는 스탠드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둘 다 말이 없었다. 재희는 이수의 흉터에 대해 생각했고, 이수는 이 내기를 어떻게 한 번에 끝내 버릴 수 있을까. 치명타를 먹일 방법을 궁리했다.
“무슨 흉터인지 물어봐도 돼요?”
“물어봐도 되냐고 허락받아야 할 정도로 민감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면 안 묻는 게 맞지 않냐?”
“예의상 한 말이에요. 알려 주세요. 궁금해요.”
뻔뻔한 대꾸에 이수가 그를 돌아봤다.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괸 이수와 달리, 차재희는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아침부터 난리를 치느라 몰골이 엉망이었다. 제대로 말리지 못한 머리칼은 조금 뻗쳤고, 이수의 티셔츠는 너무 딱 맞았다. 언제나 살짝 여유 있는 사이즈의 상의를 입는 덕분에 차재희는 티에 청바지를 입어도 단정해 보이는 느낌이 있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딱 맞게 핏된 검은 티셔츠 때문인지 덜 마른 생지 데님이 한층 스타일리시해 보였다. 빤히 보고 있으니 재희가 대답을 채근했다.
“선배, 알려 줘요.”
“질문은 이기고 해.”
“…….”
“정했어. 다음 거.”
아직 강력한 한 방은 모르겠다. 이수가 무대를 가리켰다. 학생회에서 노래 부를 사람을 찾고 있었다. 공연 시작까지 한 시간. 학생들의 재롱 잔치로 시간을 때울 셈인 듯했다.
“노래 부르기.”
“……선배도 할 거죠?”
“모르지. 너 먼저 해.”
재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솔직한 심정으로 서이수가 무대에 올라가서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말 1초도 상상이 가질 않는 모습이었다. 민망한 거 시키고 그만둘 속셈인가? 그런 의심이 들었지만 밑져야 본전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재희가 무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수는 여전히 턱을 괸 채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천막에 가서 학생회 임원들과 이야기를 나눈 재희는 세 명의 학우들이 노래를 부른 이후에, 무대 위로 올라갔다.
─ 와, 오늘 여기 계신 학우분들 다 계 탔습니다! 작년에 총학 신입생 오티에서 엄청난 노래 실력으로 학우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차재희 학우가 마이크를 들었어요!
학생회장의 말이 끝나자 귀가 찢어질 듯한 환호성이 쏟아졌다. 어느새 무대 주변을 가득 메운 인파들이 하나같이 차재희에게 열광하고 있었다. 인기도 많지. 이수는 실없이 웃으며 차재희를 주시했다.
먼 거리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시선은 직선으로 맞물렸다. 재희도 이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빨리 듣고 싶으시죠? 경영과 차재희 학우가 부릅니다. MIKA의 Ready To Call This Love.
잔잔한 피아노 반주가 흘러나왔다. 사위가 침묵에 잠겼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첫 소절이 시작되었다.
─ I'm afraid of the world.
나는 세상이 무서워요. 그렇게 시작되는 노래는 간절한 기다림과도 같은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확신하지 못하는 상대방에게 이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를 준비가 되었느냐 끝없이 물어 온다.
차재희처럼 구질구질한 노래였다. 그러나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정말로 듣기 좋았다. 음악을 즐기지 않는 이수가 듣기에도 퍽 낭만적이었다. 귀를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노래가 끝나고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앙코르 요청이 이어졌지만 재희는 허리를 꾸벅 숙이고 빠르게 무대를 내려왔다. 돌아오는 길에도 알은체를 하는 학우들에게 쉼 없이 묵례했다. 긴장했는지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이수를 내려다보고 선 재희는 어쩐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선배 차례예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떨려 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수는 재희의 어깨를 한 번 꽉 쥐었다가 놨다.
“노래 잘 부르네.”
솔직한 감상을 남겨 두곤 무대를 향해 걸어갔다. 공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재희가 노래를 워낙 잘 부른 탓에 기가 죽었는지 더는 참여자가 없었다.
저질 개그를 쏟아 내던 학생회장은 갑자기 나타난 이수를 동아줄처럼 여겼다. 노래 제목을 알려 주기도 전에 그를 무대 위로 데리고 가더니 오두방정을 떨었다.
─ 아, 서이수 학우! 지금 올타에서 난리거든요. 차재희 학우랑 둘이 온종일 뭘 하고 다니는 거냐고! 막 인증 샷도 올라오고 별의별 난리가 났……. 네?
이수가 학생회장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마이크 들고 욕해도 되냐는 물음이었다. 다급히 고개를 저은 학생회장은 크흠, 헛기침하곤 진행을 이어 나갔다.
─ 서이수 학우가… 이 노래를 부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오늘이 아마 서이수 학우의 이미지 대반전의 날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직접 들어 보시죠!
서이수는 학생회 쪽을 바라보며 신호를 기다렸다. 곧 그의 목소리와 어쿠스틱 기타의 반주가 동시에 흘러나왔다. 재희는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였다. 서이수가 노래를 부르는 걸 볼 수 있다니, 이것만으로도 종일 민망함을 감수한 가치가 있었다.
이수가 부르는 노래는 굉장히 나긋나긋해서 자장가 같은 느낌이었다. 몽글몽글. 무표정한 얼굴로 예쁘게도 불렀다. 심장이 간질거렸다. 재희는 만면 가득 미소를 띤 채로 그를 바라봤다. 그런데, 뚝. 제대로 듣기도 전에 노래가 끊겼다.
방송 사고인가. 눈을 깜빡이며 주시했지만 이수는 마이크를 넘기고 그대로 무대를 내려왔다. 재희가 어안이 벙벙한 채로 다가오는 이수를 맞이했다.
“뭐예요?”
“뭐가.”
“왜 부르다 말아요?”
“끝이야.”
정말로 끝이었다. 약아빠진 서이수는 자신이 아는 가장 짧은 노래를 골랐다. 애니메이션 코코(COCO)에 나오는 ‘Remember me’. 1분짜리였다. 보려고 본 건 아니고 리키가 강아지였던 시절, 코코에 관심을 보인 적이 있었다. 그때 일주일 내내 틀어 놓았기에 저절로 귀에 익은 노래였다.
의심하는 재희에게 이수는 휴대폰을 꺼내 보여 줬다. 재생 시간을 확인한 차재희가 한숨을 쉬었다.
“선배 진짜…….”
“다음은 뭐야.”
“잠깐만요. 생각 좀 해 볼게요.”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각자 생각에 잠겼다. 이번엔 둘 다 같은 생각을 했다. 상대방을 한 번에 보내 버릴 강력한 한 방. 대체 뭘 해야 이 순진한 놈─약아빠진 선배─이 기겁하고 패배 선언을 할까.
사실 차재희가 말을 걸지 못하게 하겠다는 결심은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이수는 일찍이 겪어 본 적 없는 내기에 심취해 있었다.
온라인상에서, 성적에서 누군가와 매일같이 경쟁하지만 그 라이벌들은 언제나 존재가 희미했다. 어렵지 않은 랭킹 1등, 누구든 받을 수 있는 A+를 여러 개 받으면 되는 다소 긴장감 떨어지는 승부.
그에 반해 이건 차재희라는 경쟁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고, 상대방이 제시하는 행동을 무조건 해내야지만 승리할 수 있었다. 실패하면 2등이 아닌 패배다. 물러날 곳이 없으니 승부에 대한 갈망은 격화됐다.
그래서 이제 이수는 보상보다 차재희를 이기는 일 자체에 집중하고 있었다. 한 가지 좋은 생각을 떠올린 이수가 고개를 돌려 재희를 바라봤다. 그는 이마를 감싸 쥔 채 고뇌하는 중이었다. 답을 내리길 기다리던 이수가 참지 못하고 힌트를 주었다.
“내가 절대 못 할 것 같은 걸 골라 봐.”
“……들어 봐요, 선배. 이거는 그냥 예시예요.”
“말해.”
혹시라도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실행할까 봐, 차재희는 예시일 뿐이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이따가 무대 난입하라 그러면 할 거예요?”
“고작 그거야?”
“걸그룹한테 사인 받아 오라고 하면요?”
“못 할 것 같아?”
“……나 때리라고 하면, 아니 이건 못 들은 거로.”
다급히 말을 바꾸려 했지만 이수가 먼저 코웃음을 쳤다.
“고맙지.”
“하. 그럼 선배를 스스로 때리라고 하면요? 절대 그렇게 할 건 아닌데.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
“몇 대면 돼?”
“…….”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대답에 재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절망이 아른거렸다. 패배가 눈앞이었다. 지면 자신에게 더 이상 말을 못 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지 그는 굉장히 초조해 보였다.
이수는 굳이 재촉하지 않았다. 차재희가 안절부절못하는 상황도 나름 재미있었다.
어느새 공연이 시작되려 했다. 대형 조명이 꺼지고 은근한 불빛이 대운동장을 비춘다. 주변이 시끄러웠다. 사방을 빼곡히 채운 사람들 틈에서 그들만이 공연에 관심이 없었다.
재희는 한참 동안 머리를 굴렸다. 이수는 그가 생각을 끝내길 기다리며 소음을 날려 보내는 일에 열중했다.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으니 점점 세상이 멀어져 갔다.
병원에 있을 때 종종 하던 행동이었다. 그때는 항암 치료로 인한 통증을 지우기 위해 이런 식으로 침잠하곤 했다. 사고를 분리하고, 마침내 세상과 유리되고, 이수는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먹먹해진 귓가로 차재희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선배랑 이러고 있으니까 좋아요.”
뜬금없는 말이었다. 이수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돌아봤다. 상기된 낯에 수줍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진짜 친해진 것 같아요.”
“…….”
“선배, 우리 친해요?”
몽롱한 머릿속에 차재희의 질문이 떠돌아다녔다. 친하다는 기준이 뭘까.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상념하던 이수가 물었다.
“네가 생각하는 ‘친하다’의 뜻이 뭔데.”
잠깐 고민하던 재희가 대답했다.
“내가 상대방을 알고, 상대방이 나를 아는 거요. 상대가 뭔가를 바라기 전에 내가 알아서 배려하는 거.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해 주기도 전에, 상대방은 내가 그렇게 해 줄 거라고 이미 믿고 있는 거요.”
상당히 구체적이고 깊은 답변이었다. 저게 친하다는 뜻이라면 이수에게 친한 사람은 신유진뿐이었다. 가족들도 제외하고 오로지 신유진. 딱 그녀 혼자였다.
자기가 말해 놓고도 차재희는 인상을 구겼다.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질문에 대한 답을 그 스스로 한 셈이다. 이수는 재희를 놀려 주기 위해 물었다.
“너, 나에 대해서 잘 알아?”
“……아니요.”
“내가 너를 위해서 뭔가 해 줄 것 같아?”
“아뇨.”
망설임 없는 즉답에 이수가 되물었다.
“그럼 우리 친한 건가?”
“아니요…….”
“잘 아시네요.”
바본가. 혀를 차고 무대로 시선을 던졌다. 인디 가수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퉁, 퉁, 퉁겨지는 현의 울림은 주홍빛으로 젖어 드는 세상을 꽤나 아름답게 물들였다. 이수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감수성 짙은 음악을 싫어했다. 타인에 의해 감정적으로 고조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다가다 듣거나, 우연히 TV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듣는 게 다였다.
그래도 어쩐지 오늘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왜일까. 하루를 되짚어 보던 이수는 자신이 오늘 꽤 많이 웃었음을 깨달았다.
남자에게 거절당해 어깨를 늘어트리던 차재희, 한 번에 번호를 받아 내는 것을 보고 경악한 차재희, 호수에 빠져 눈을 찡그린 채 웃던 차재희, 손에 든 모자를 보고 툴툴거리던 차재희, 대충 던져 준 티셔츠를 보고 미소 짓던 차재희, 가슴이 울릴 정도로 듣기 좋은 노래를 부르던 차재희.
여전히 성가시고 귀찮았지만, 차재희는 오늘 이수의 하루를 웃음으로 물들였다. 자신이 아닌 타인으로부터 기인한 즐거움은 낯설었다. 그런데 그게 나쁘지가 않았다. 이수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조금.”
“네?”
못 들은 듯 반문하는 재희에게, 이수가 말했다.
“조금 친해. 우리.”
그 말에 재희는 아주 기쁘게 웃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일상이 늘 그렇듯, 평온함은 길게 가지 않았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자리를 쉽게 벗어날 수도 없는 상태에서 차재희의 고민은 아주 오래 이어졌다. 기다리다 못한 이수가 짜증을 냈다.
“씨발, 결정 장애야?”
“진짜 모르겠어요.”
“머리 굴려. 내년까지 할 거야?”
“그럼 선배는 골랐어요?”
“정한 지 백 년 됐어.”
“뭔데요. 선배가 먼저 해요, 그럼.”
사실 좀 미친 제시문이었다. 너 죽고 나 죽자는 행동이기도 했다. 이수가 바지를 내리는 순간 차재희가 항복 선언을 할 것 같기에 결정한 것이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지. 이수는 생각을 지워 내며 물었다.
“네 차례잖아. 생각을 바꿔 봐. 내가 못 할 것 같은 거 말고. 네가 절대 못 할 것 같은 행동은 뭐야.”
“……글쎄요.”
“존나 답답하네.”
신경질적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스탠드에 계속 앉아 있었더니 불편해 죽을 것 같았다. 집에 가고 싶었다. 재희는 그런 이수를 보며 눈매를 찡그리다가 말했다.
“둘 다 못 할 것 같은 행동은 하나 있는데. 잘 모르겠어요.”
“말해. 뭔데.”
“키스하기요.”
이 새끼도 어지간히 제정신이 아니구나. 이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서이수가 그보다 더 미쳤다는 사실이다.
이수에게 감정 없이 남자 후배와 입 맞추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분명한 목적을 위해 키스를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쯤은 몇 번이고 할 수 있었다.
“역시 이건 아니죠?”
다만, 차재희가 그걸 제시한다고 해도 이수가 그에게 먼저 입을 맞추지 않는다고 한다면. 여기는 한국이고, 자신은 몰라도 차재희가 후폭풍에 시달릴 일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인성 밑바닥에 깔린 배려심이라지만 서이수도 그 정도는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런데 이수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재희가 순간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선배라도 이건 안 되겠죠? 뭐, 그때 보니까 키스도 못 하긴 했는…….”
재희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두 사람이 그가 내린 ‘친하다’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정말로 이수에 대해 잘 몰랐다. 못 한다는 말은 승부에 미친 서이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재희야.”
재희의 말을 끊어 낸 이수가 고개를 기울였다. 완전한 오기로 그리고 관객들에게서 전염된 듯한 열기로.
무대를 향한 환호 속에서, 두 사람은 스탠드에 앉은 채로 입을 맞췄다. 그때보다는 조금 더 부드럽게… 차재희가 했던 것처럼.
이수는 재희의 아랫입술을 머금고 벌어진 틈으로 제 숨을 불어넣었다. 재희의 커다랗게 뜨인 검은 눈동자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눈을 내리뜬 이수는 곧 시선을 들어 재희와 눈을 맞췄다. 그 상태로 두 사람의 혓바닥이 맞붙었다.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던 후배는 예상치 못한 선배의 공격에 맥을 추지 못했다.
매끄럽게 움직이는 혀가 재희의 입 안을 샅샅이 훑었다. 아주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누군가의 정신을 쏙 빼놓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윗입술을 살짝 깨물고 놓은 이수가, 그에게 가벼운 버드 키스를 남기곤 몸을 물렸다. 그러고는 축축이 젖은 입술을 닦아 주며 웃었다.
“형이 이겼다?”
서이수의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