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5)

겁 없는 선배 (3)

All about your timetable.

[운영] Server 복구 완료 안내.

안녕하세요!

올타 운영진입니다 ^_^

사국대 익명 게시판이 순간 접속 트래픽 초과로 다운되었다가 복구되었습니다.

다만 특정 인물에 대한 게시글이 server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리젠되는 관계로, 48시간 동안 특정 글자들을 금칙어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금칙어 안내는 따로 하지 않습니다.

사국대 학우 여러분!

즐거운 대학생활도 좋지만, 웬만하면 새 글이 아닌 댓글로 이야기를 나눠주시길 바랍니다 ㅠㅠ!!

감사합니다 _ _)

3시간 전 등록 신고하기

댓글 (239)

익명의 학우 1언론 탄압임 ㅠㅠㅠㅠㅠ

익명의 학우 2너무한거 아니냐.. 초성까지 다 막힘..흑흑..ㅠㅠ..

익명의 학우 3server 진짜 개 씹구리다 오늘만 몇 번 터진거임? 돈 벌어서 머함?

 ➥올타 완전 무료잔아 양심장착좀;

익명의 학우 4그래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섟읷숛랑 찫잯흯랑 대체 왜 그런 건지 아는 사람..제발..말해줘..

익명의 학우 5ㅋㅋㅋ둘다 받침 없는 이름이라 언급 쌉가능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섷잏숳, 챃쟇힇

익명의 학우 6부를거 존나 많은데?? 이참에 그냥 익게 닫자 영자야. S, C, isu, isoo, car, j 대충 써도 다 알아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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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All about your timetable.

나 Sir Isu인데.

S/e/o 는 왜 안 써져 씨발.

Car한테 내가 억지로 한 거임.

개 좆 같은 추측 ㄴㄴ

1시간 전 등록 신고하기 수정 삭제

댓글 (3)

익명의 학우 1응~ 니가 s면 난 c~ 사칭ㄴㄴ

익명의 학우 2car가 일부러 그런 거예요. S가 당한 거지. 말도 안 되는 소리네요.

 ➥너야말로 말이 되는 소리를 하자.. S가 당하고 있을 놈이냐;;;

* * *

All about your timetable.

S와 Car 사건의 진상 알려드립니다.

제가 진짜 두 눈으로 봤어요.

무대에ser 멀리 떨어진 곳에 둘이 앉아 있다가,

Car가 억지로 S한테 그렇게 한 거예요.

절대 S가 위계 질ser에 의한 성추행이라거나 동성애자이거나, 그런 게 아닙니다. 협박한 것도 아니에요!

1시간 전 등록 신고하기(취소)

댓글 (17)

익명의 학우 1얼마나 잘생겼길래? 나도 오티갈걸..

익명의 학우 2지랄을 하세요 눈알 닦아드려요? [삭제하기]

 ➥진짜입니다. 제 말이 맞아요.

 ➥맞긴 뭐가 맞아. S가 억지로 한 거라니까. [삭제하기]

 ➥제가 직접 봤다니까요? 아니에요.

 ➥아니 씨발 개 헛소리를 처하고 있는데 그 말 책임질 수 있음? [삭제하기]

 ➥계속 욕하시면 고소하겠습니다.

 ➥그쪽도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당하고? 손잡고 police station 갈까? 개씹소리 자제 바람. [삭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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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씨발. 별 미친 새끼들이 다 있네.”

댓글을 달던 이수가 마우스를 내팽개쳤다. 모니터를 지나 바닥에 처박힌 걸 리키가 물고 돌아왔다. 침 묻은 마우스를 다시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냉장고로 가서 500mL짜리 생수 한 병을 원샷해 열을 식혔다.

순간 자존심이 상해서, 승부에 눈이 멀어서, 그런 이유로 저지른 짓이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다들 공연을 보는 와중에 둘을 주시하던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오전부터 두 사람이 사국대 번화가에 함께 있는 사진, 호수에서 빠져나오며 손을 잡아 준 사진, 상의를 탈의한 차재희와 함께 걷던 사진, 노래를 부르는 사진까지 등록되며 온종일 올타가 들썩거리던 와중이었다.

폭탄처럼 던져진 사진 한 장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분 만에 삭제되긴 했으나 축제 기간에도 올타에 상주하는 커뮤니티 인싸─현실 아싸─들에 의해 박제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서이수가 차재희를 협박했다, 차재희가 서이수 안드로이드를 만들어서 테스트하는 중이다, 사실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다, 위계질서에 의한 성추행이다, 서이수가 차재희를 꼬시는 거다, 별의별 말이 다 나돌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차재희에 대한 부정적인 글도 꽤 올라왔다. 주로 서빠들에 의한 까글이었다. 그걸 보다 못한 이수가 익명 게시판에 글을 몇 개 썼지만, 사칭이라며 비웃음당하고 묻혀 버렸다.

어떤 미친 새끼는 차재희가 서이수에게 억지로 키스하는 걸 봤다며 박박 우겨 댔다. 아마 자신의 돌아 버린 팬─인정하긴 싫지만─중 하나인 것 같았다.

이수는 쉴 새 없이 리젠되는 글을 보다가 결국 휴대폰을 들었다. 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삐리삐리.

웬 이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상을 찌푸린 이수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유진이 말했다.

─ 여기는 인조인간 신유진 1호. 서이수 안드로이드는 응답하라.

“닥쳐. 짜증 나니까.”

사납게 쏘아붙인 말에 스피커 너머로 숨넘어가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 아, 씨발 존나 웃기네 진짜. 이수야아. 너희들 때문에 웃겨 죽을 것 같아. 뱃가죽에 근육통 생기겠어.

“조용히 하고 SNS에 글 좀 올려.”

─ 야, 이 양심 없는 새끼야. 설명부터 해 줘. 뭔데? 진짜 협박했어? 아님, 진짜 둘이 사귀어? 너무 막장 드라마 아니야?

“개소리 말고. 내기한 거야.”

─ 내기? 진짜 내기였어? 아, 미치겠다.

내기라는 말에 유진이 완전히 자지러졌다. 뭐가 그렇게 재밌지. 이따위로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지만 신유진은 한번 웃음보가 터지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굴었다. 가만히 한숨을 쉬며 그녀가 웃음을 멈추길 기다렸다. 2분 정도가 흐르고 나서야 유진이 말했다.

─ 재희가 겁도 없이 덤볐네. 서친놈이 지는 내기를 할 리가 없잖아.

“걔가 그걸 알겠냐. 아, 쓸데없는 소리 말고. SNS에 내가 차재희 동의 없이 한 일이라고 글 올려. 대충 그런 뉘앙스로.”

─ 이야알. 너 지금 재희 걱정하는 거야?

걱정을 안 하게 생겼나.

‘형이 이겼다?’

그렇게 말했을 때 차재희는…….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왔다. 이수는 눈앞의 기억을 지워 내며 말했다.

“걔가 그냥 예시로 들었는데 내가 그냥, 씨발. 하여튼 말하자면 복잡해. 지금 당장 올려.”

─ 알겠다. 명령을 수행하겠다. 삐리삐리.

“아 진짜, 닥쳐라.”

신경질을 내며 전화를 끊은 이수가 즐겨찾기 해 둔 자신의 SNS 계정에 접속했다. 자신의 사진이 올라옴에도 아이디는 몰랐다. 가끔 신유진이 쓸데없는 말을 하지는 않나 감시할 뿐이었다.

새 글을 기다리던 이수는 놀아 달라고 보채는 리키와 테라스에서 공놀이를 하고 돌아왔다. 새로 고침을 하니 신유진이 작성한 글이 올라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서이수입니다. 오늘 저녁 대운동장 스탠드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현재 올타에 여러 말들이 오가고 있는데 대부분 사실이 아닙니다. 온종일 올라온 사진들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저와 차재희 학우 사이에 작은 내기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경영과 후배인 차재희 학우는 공연 도중 일어난 일에 전혀 책임이 없으며, 모든 것은 차재희 학우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저의 독단적인 행동입니다. 섣부른 추측은 자제해 주시길 바라며, 차재희 학우에 대한 공격적인 발언은 그만 멈춰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더불어 인터넷상의 명예 훼손은 이름을 지칭하지 않더라도 대상을 특정 지을 수 있는 글이라면 충분히 적용 가능합니다. 현 시간부로 저에 대한…….

거기까지 읽은 이수는 유진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23:39

더불어부터 다 지워.

Eugene

걍 두지?

23:40

23:40

그냥 지워

Eugene

알겠다. 삐리삐리!

23:41

23:44

차단함

이수가 이마를 짚었다. 골치가 아팠다. 서재의 콘솔 서랍에서 아스피린을 한 알 꺼내 씹어 먹고 욕실로 들어갔다. 김이 날 정도로 뜨거운 물로 씻는데도, 찝찝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하얗게 질린 채 자신을 바라보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차재희는 분명 둘 다 못 할 것 같은 행동이라고 이야기했다. 뭐냐는 말에 우스갯소리로 꺼낸 말이었다. 하자는 말이 아니라.

내가 진짜 잘못한 것 같은데, 이건. 미적지근한 죄책감이 가슴 언저리를 맴돌았다.

가운을 입고 나온 이수는 침실로 향했다. 휴대폰을 들고 맨몸으로 이불 속에 파고들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차재희의 번호를 차단 해제하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제대로 울리기 전에 숫자가 떠올랐다.

00:00

00:01

─ …….

그러나 재희는 말이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이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차재희.”

─ 네.

“화났어?”

─ ……제가요? 왜요?

왜요? 이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내내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떻게 보아도 화난 사람 같았다. 괜찮냐고 물어봤을 때도 말없이 턱을 0.5mm 정도 움직였을 뿐이다. 그래서 당연히 화난 줄 알았다.

“말을 안 하길래.”

─ ……먼저 말 걸지 말라면서요.

그 말은 차재희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정식 종목이 아니었기에 내심 무승부, 혹은 재경기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어쨌든 서이수는 승리를 외면하는 법이 없었다. 머릿속에서 재경기라는 단어를 깡그리 지워 버리며 말했다.

“그럴 거라는 소리였지. 아직 말하진 않았잖아.”

─ 그런데 그렇게 말할 거잖아요.

시무룩한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온몸을 감싼 침구가 한없이 포근했다. 이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차재희가 귀찮게 굴면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어렵게 얻은 기회를 고작 말 걸지 말라는 소원으로 날려 버릴 순 없었다.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아니야. 생각이 바뀌었어.”

─ 그럼 뭔데요?

“나중에 말해 줄게.”

잠시 침묵하던 재희가 조심스레 물어 왔다.

─ ……왜 그런 글을 올렸어요? SNS요.

“그런 글이 뭔데.”

─ 다 선배 잘못인 것 같잖아요. 사람들이 욕하고 있어요.

이수는 낮에 그에게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해 줄까, 하다가 관뒀다. 착한 건지, 등신인지……. 아마 전자겠지.

“병신들이 떠들든 말든. 신경 꺼.”

─ ……선배는, 아니. 선배가 그렇게 뭐든 아무렇지 않게 말할 때, 가끔 기분이 이상해요. 정말 괜찮아요?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남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관심 없을 뿐이야.”

무심한 대꾸에 재희가 웃었다. 보이지 않는 전파를 타고 낮은 웃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선배다워요, 꼭 저를 잘 아는 듯 뱉는 말에 이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얼른 용건을 끝내 버리려 입을 열었다.

“사과하려고 전화했어.”

─ 선배가 왜요?

“그냥. 내가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 흔한 일 아니니까… 이유 묻지 말고 받아.”

나른히 풀린 목소리에 차재희는 또 웃었다.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오는 음성이 듣기 좋았다. 졸음이 몰려왔다. 이수는 눈을 감았다.

“됐지. 나 잔다.”

─ 선배.

불러 놓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수의 눈이 끔뻑 감길 때쯤 재희가 물었다.

─ 우리, 진짜 친하죠?

“어. 조금.”

─ 네. 조금.

재희가 이수의 말을 따라 했다. 그러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자신의 바람을 전했다.

─ 내일은 조금 더 친해지면 좋겠어요.

“그래.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그 말이 입 안에서 흩어졌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하루를 뒤로하고 이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잘 자요, 선배.

* * *

“그, 선배님. 갑자기 이런 말 하기 좀 이상한데…….”

“뭐. 그만두겠다는 건 아니지?”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새로운 펫 시터, 문율은 똥그란 눈을 굴리다가 결심한 듯 고개를 쳐들었다.

“제, 제가 힐러예요.”

뭔 소리야. 이수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틀 전인 축제 마지막 날. 이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휴대폰을 아예 꺼두고 집에서 게임만 했다. 다음 주 금요일이 대규모 업데이트 날이라 감을 잃지 않기 위해 쉴 새 없이 던전을 돌았다. 오후에는 잠깐 짬을 내서 이력서를 확인했다. 거기서 새로운 지원자를 골라내 집 근처 카페로 불러냈다.

리키를 데리고 나갔는데 문율이 있었다. 율이라는 귀여운 이름만 기억하고 얼굴은 잊고 있었기에, 이수는 한참을 빤히 바라보다가 문율이 알은체를 하고 나서야 그가 독문 과제 팀원2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동명이인인 줄 알았는데.

여하튼 딱히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 고용할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리키가 얘가 내 펫 시터다! 강력하게 주장하며 문율의 허벅지에 똬리를 틀었다. 이수의 눈에는 리키와 덩치가 비슷해 보이는 문율이었기에 끌려다니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리키는 그가 정말로 마음에 드는 듯 착한 강아지 행세를 했다. 그렇게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토요일부터 근무하기로 했고, 일요일인 오늘 리키와 율은 오랜 단짝 친구처럼 테라스와 거실에서 땀을 흘려 가며 놀던 중이었다. 데스크톱 근처까지 굴러온 공을 주운 율이, 스치듯 본 모니터에서 익숙한 아이디를 발견해 내고 심사숙고 끝에 입을 연 것이다.

“선배님 고정 파티에 있는 사제요. ‘힐러’. 그게 저예요. 방금 공 줍다가 모니터 봤어요! 매일 만나고 선배님한테 신세도 많이 지고 있는데 모르는 척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말씀드려요.”

“…….”

이수가 황당하다는 듯 문율을 바라봤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우연이 다 있지. 그 힐러가 얘라고? 그 착하고, 말 잘 듣고, 실력 좋은 힐러가 저 컴공 문율이라고? 눈매를 좁힌 이수가 과제용 데스크톱의 전원을 켰다. 예비용으로 깔아 둔 라테르를 실행했다.

“로그인해.”

“앗, 네. 잠시만요.”

율은 소파 앞의 테이블로 달려가 제 휴대폰을 들고 오더니, 2차 인증을 활성화시키고 로그인했다. 정말이었다.

힐러 님, 접속을 환영합니다.

1인 1계정 1캐릭터. 111 원칙을 고수하는 라테르이기에 힐러라는 아이디는 두 명일 수가 없었다. 순간 어이가 없어진 이수가 헛웃음을 흘렸다. 최근 라테르를 하며 만난 인간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힐러가 문율이라고 생각하니 애가 좀 괜찮아 보였다.

“너… 금요일에 수업 있잖아. 다음 주에 업뎃 끝나고 바로 접속 가능해?”

이수가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그것이었다. 문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교양 수업이라 세 번까지 빠져도 된다는 말을 전해 왔다. 펫 시터 알바도 이수가 미리 말해 주기만 하면 상관없다고 했던 휴가를 쓰려고 했던 것 같았다.

너 정말 겜창이구나…….

이수는 문율이 더욱더 마음에 들었다. 그날 두 사람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CPR 님, 선배님, 통일되지 않은 호칭을 어떻게 할까요 고민하기에 그냥 형이라고 부르라 했다. 문율은 무척이나 귀엽게 웃었다.

* * *

월요일.

재희가 이수와 율을 보며 입매를 늘렸다. 얼핏 보면 웃고 있는 것 같지만 이수는 이제 그 표정이 마뜩잖을 때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까 이수는 강의실에 들어오자마자 율을 발견하고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물어볼 것도 있었고, 차재희를 놀리려는 의도도 없잖아 있었다. 재희는 약간 충격받은 얼굴로 그들을 보다가, 이내 이수와 가장 가까운 자리로 옮겨 왔다. 그 후 내내 저 표정이었다.

“형, 근데…….”

“그렇지. 이게 어려운 거야?”

“아뇨, 그냥 꽤 많이 복잡한…….”

두 책상 중앙에 복잡한 포트폴리오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걸 보며 오랫동안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리던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이수를 노려보다시피 하던 재희가 표정을 풀었다. 그에게 이수가 물었다.

“너, 저녁에 뭐 해?”

그 질문에 뚱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집에 갈 건데요.”

“시간 되면 이번 주 과제는 오늘 저녁에 하자. 우린 금요일에 할 일 있어서.”

“우… 리요? 선배랑 문율?”

문율, 이라는 호칭에 율이 흠칫했다. 서이수가 자신에게 친근하게 굴 때마다 율아, 하는 호칭이 문율로 바뀌는 게 딱히 기분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율은 흘끔 차재희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이수는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벤처 회사를 차리고 게임을 제작할 생각이었다. 그 목표의 기반이 되는 AI 알고리즘이 있었는데, 컴공과인 율에게 그것에 관해 물어본 참이었다. 이수가 포트폴리오를 다시 가방에 챙기며 대답했다.

“어. 시간 되지?”

“……돼요. 어디서 할 건데요?”

“카페로 가든지. 율아, 괜찮지? 아, 저녁에 집에 잠깐 들렀다 가.”

“넵.”

“…….”

재희가 입을 다물었다. 집이라고? 우리라고? 나한테는 우리라는 말 함부로 쓰지 말라고 그러더니, 이름도 얼굴도 기억 못 했던 게 엊그젠데 언제부터 문율이랑 ‘우리’가 됐지? 단정한 낯에 생기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요?”

“몰라도 돼.”

“어쩌다 보니까…….”

왜 말이 달라? 나한테 숨기는 거라도 있나? 차재희의 웃음이 한결 진해졌다. 손끝으로 책상 위를 툭, 툭, 두드리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그럼 저희 집으로 가요.”

“그러든지.”

이수는 심드렁하게 대꾸하고, 율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교수가 들어오고 재희는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6시에 경영대 로비에서 만나요. 선배, 자전거 타고 왔으면 놓고 가요. 제 차 타고 가면 되니까.”

수업이 끝난 후 차재희는 그 말만 남겨 두고 사라졌다. 이수는 그러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고 율을 데리고 공학관으로 갔다. 가는 동안 수많은 시선이 따라붙었다. 키스 사건의 여파가 끝나지 않았는지,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과도한 관심이 쏟아졌다. 물론 이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좀 더 나눴다. 사국대에는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학생들이 많았는데, 율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게다가 일전에 컴공과의 누군가가 무슨 무슨 국제 프로그래밍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을 들었었는데, 그것도 바로 문율이었다.

“너 뭐, 프로그래밍 천재. 그런 거야?”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부끄러운 듯 율이 뺨을 긁적였다. 목덜미까지 울긋불긋하게 달아오른 것이 수줍음을 많이 타는 듯했다. 토끼같이 똥그란 눈을 보며 이수가 웃었다.

“알았어. 어쨌든 니가 보기엔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란 소리지? 그럼 나 도와줄래?”

“어떻게 도와 드리면 될까요?”

“난 최대한 빨리 알고리즘을 완성하고 싶어. 니가 혼자서 코드를 짤 수 있다면 좋겠지. 내가 프로그래밍 용어는 잘 몰라서. 대충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네, 네.”

고개를 끄덕이는 율에게 이수는 펫 시터에 이은 두 번째 계약을 제안했다. 환경이 필요하다면 모든 것을 제공할 수 있었다. 이수가 원하는 것은 자신이 구상한 연역적 알고리즘의 현실화였다. 문율은 그 현실화를 조금 더 빨리 이루어 줄 수 있는 수단이었고.

“취업 목표가 어디야.”

“플렉스요.”

“……플렉스?”

라테르 제작사였다. 라이벌이 강력했다. 이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율이 혹할 만한 조건을 내걸었다.

“계약하면 숙식 제공에 네가 일하는 만큼 급여도 지급하고, 장비 필요하면 모두 준비해 줄게. 졸업하고 나서 정식 채용하고, 취업 비자 내주고, 미국 영주권 따게 도와줄 수 있고, 공부 더 하겠다면 지원해 줄 수 있어. 그러니까 나랑 같이 게임 만들어 볼래?”

똥그란 눈을 여러 차례 깜빡이던 문율은, 이내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더 실력 있는 개발자들이 많은데 왜 나에게 이러시냐, 게임 회사를 설립하려면 많은 돈이 들어가는데 투자자는 구했냐, 만들려는 게임이 추구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이냐 등등.

순하고 맹할 줄 알았는데 딱히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이수는 율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했다. 이야기가 끝나고 문율은 일단 알겠고, 고민을 좀 해 보겠다는 말을 남겼다.

식사를 끝마친 두 사람은 각각 공학관과 인문대로 갈라졌다. 그리고 컴개 수업이 끝난 후, 이수는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저기, 오빠! 잠깐 시간 있으세요……?”

수업을 듣는 내내 자꾸 시선을 던지던 여자였다. 같은 강의실에 있었으니 거의 석 달 동안 같은 수업을 받은 것 같은데, 기억이 전혀 없었다. 걸음을 멈춘 이수가 여자를 내려다봤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여자는 이수를 보며 웃었다.

“혹시 시간 되시면, 지난번에 도와주신 것도 있고… 제가 할 말도 있고, 그래서 그런데……. 괘, 괜찮으시면 저랑 같이 저녁 드실래요?”

“……내가 뭘 도와줬는데?”

생전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내가 얘한테 무슨 짓을 했지? 도와줬다니, 대체 뭘? 고개를 기울인 이수가 여자를 빤히 들여다봤다. 여자는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개미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저번에 컴퓨터 부팅 안 될 때 도와주셨잖아요…….”

아. 다행히도 얼마 되지 않은 일이라 기억이 났다. 그런데 그걸 도와줬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심지어 부팅이 안 된 게 아니라 모니터의 전원선이 헐거워서 그랬던 거였다. 이수는 제 앞에 선 조그마한 여자를 살폈다. 단순히 도와준 게 고마워서 그러는 건 아닌 듯했다. 이수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지금 혹시 나한테 고백하려는 거야?”

“아! 그……! 아니, 그게! 아니, 아닌 게 아닌데!”

적잖이 당황한 모습만 봐도 답이 나왔다. 이수는 무심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미안한데, 난 관심 없어서.”

“아……. 그, 네. 아, 네에…….”

제대로 이야기해 보기도 전에 거절당한 여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디지털 강의실을 뛰쳐나갔다.

생각보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올타에서의 유명세와 다르게 서이수를 직접 겪어 보면, 특히 그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기 전에는 그가 퍽 친절하다는─소문에 비해 상대적으로─느낌을 받는 학우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친절함은 사실 전혀 친절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네들에게 특별 대우로 인식되고는 했다. 이수는 기억에조차 남지 않은 일들이 그들에게는 어떤 각별한 순간으로 각인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 일들이 쌓이고 쌓여서 누군가는 연심을 키웠다. 이수는 물론 관심이 없었다. 예전에는 이런 일이 생기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신유진이 난리를 친 끝에 약소한 인간의 도리로나마 ‘미안하지만’ 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덧붙여 거절하게 된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 없는 이수는 그 마음이 거절당하는 기분을 알지 못했다. 그저 신유진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를 통해 속이 쓰리겠거니 할 뿐이었다. 그리고 내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은 사람을 아프게 만드는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찝찝함을 갈무리하고 경영대 로비로 가니 차재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율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자판기에서 생수를 뽑아 마시고 있으니 재희가 다가왔다.

“선배.”

“뭐.”

“…….”

무심한 대꾸에 차재희가 입매를 늘렸다. 불만에 찬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게, 꼭 할 말이 아주 많은 사람처럼 보였다. 이수는 지껄여 보라는 듯 물을 마시며 기다렸다. 그러나 차재희는 물 한 병이 다 비워질 때까지도 침묵을 지켰다. 어쩌면 망설이는 것 같기도 하고. 도리어 왜 저러나 궁금해진 이수가 물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문율이랑 친해요?”

생수병을 구기던 이수가 움직임을 멈췄다. 데자뷔가 일었다. 탐색하는 시선으로 차재희를 훑는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붉어진 귀 끝, 초조하게 바닥을 차는 신발, 꼬물거리는 손가락. 어쩐지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어이없는 웃음이 샜다.

“너, 나 좋아하냐?”

“……네?”

“아니, 무슨 고백하는 애처럼 굴잖아. 평소대로 해, 차재희.”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수의 눈길은 그를 떠나지 않았다. 순간 스치는 당황과 아연한 기색, 모든 것을 읽어 냈다. 찜찜한 의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뭐야, 설마, 아니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게 되뇌며 긴장하고 있는데 재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느새 의심스러운 태도는 사라지고 불손한 눈빛이 쏘아지고 있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좀 하지 마요. 좋아할 구석이 있어야 좋아하지.”

“내 말이 그 말이야.”

“맨날 욕하고, 맨날 짜증 내고, 맨날 나만 무시하는데 내가 미쳤다고 선배를 좋아해요?”

“알았으니까 1절만 해.”

그럼 그렇지. 이수가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차재희는 둑이 터진 것처럼 불만을 쏟아 냈다.

“자기는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 나한테는 이래라저래라.”

“내가 언제 너한테 이래라저래라 했어?”

“평소대로 해라, 1절만 해라, 지금 그랬잖아요.”

이게 근데 돌았나. 퉁명스러운 대꾸에 이수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눈매가 서늘하게 굳었다.

하지만 왜인지는 몰라도 기분이 상한 차재희는 기세를 굽히지 않았다.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듯 이수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게 어처구니없었다. 갑자기 급발진해서 들이받은 건 차재희였다.

“너, 점점 기어오른다?”

이수가 한바탕할 기세로 그렇게 물었을 때, 타이밍 좋게 문율이 등장했다. 로비의 유리문을 벌컥 열고 뛰쳐 들어온 율이 헉헉거리며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저 왔어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됐어, 수업 때문인데.”

사과하는 율을 만류하는 이수를 보며 재희는 얼굴을 확 찌푸렸다. 누군가 눈치채기 전에 풀어지긴 했으나 불쾌함까지 가신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꼴이 우스워서, 재희는 엘리베이터로 몸을 돌렸다.

“……따라와요.”

계단을 통해 주차장으로 내려간 재희는 뒷좌석에 가방을 먼저 던져 넣고, 그 옆에 율이 올라타자마자 문을 닫았다. 서이수의 성격을 보건대 뒷좌석에 앉을 것만 같아서였다.

유치한 질투였지만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형, 형, 율아, 율아 하면서 시시덕거리는 꼴은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내가 미쳤지. 맨날 욕하고, 맨날 짜증 내고, 맨날 무시만 하는데. 어디가 예쁘다고 저 선배를 좋아해. 좋아하길…….

그렇게 자조하던 재희는 그래도 입을 다문 서이수는 굉장히 섬세하게 예쁜 얼굴이라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얼굴뿐인가. 손가락도 예뻤고, 목소리도 미(美)성이라는 말밖에는 쓸 수가 없다. 환하게 웃을 때는 또 어떻고. 몇 번 못 봤지만, 이수의 웃는 얼굴은 재희의 뇌리에 선명하게 박혀 지워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 달 전, 부산에서의 짧은 입맞춤은 재희를 오래도록 괴롭혔다. 눈을 감고 있어도, 뜨고 있어도 자꾸만 떠올랐다. 이수를 볼 때마다 불쑥, 불쑥, 입을 맞춰 그때의 기억을 덮어쓰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는 술에 취해서 그런 거라고, 맨정신으로 뽀뽀하면 분명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어쩌다 보니 칵테일을 다섯 잔이나 마신 상태로 또 입술을 맞대 버렸지만. 어쨌든 지워 버리려 했던 성적 충동은 그 순간 파도가 아닌 해일이 되어 재희를 덮쳤다.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뽀뽀했을 때, 재희는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이수와 혀를 섞고 싶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한 것도 섞고 싶었고.

그리고 마침내 이수의 약한 모습─말랑한 혀끝과 녹아내릴 듯 달콤한 속살 같은 것들─을 마주한 순간, 차재희의 머릿속엔 저 때문에 헐떡대는 서이수를 내려다보고 싶다는 다소 거칠고 과격한 욕망이 뱀처럼 똬리를 틀었다.

단 한 번도 성애의 대상으로 생각해 본 적 없는 남자를 상대로, 그것도 그 서이수를 상대로 그런 기분에 휩싸인다는 건 그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내가? 대체? 왜? 그러한 의문에 사로잡혀 며칠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신이 왜 그랬는지, 서이수는 어떤 심정으로 제게 키스를 했는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대화를 거부했고 모든 것을 실수로, 사고로 치부했다. 그런 태도가 재희는 정말로 분했다.

대체 왜 이렇게 억울하고 섭섭하지? 그렇게 고민하던 재희는 자신이 그와의 키스를 어떠한 관계 발전의 계기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다.

정신 차려, 이건 아니야. 그렇게 자신을 책망했지만 음습한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유혹의 뱀은 시시때때로 아가리를 벌리고 재희를 집어삼키려 했다.

하지만 차재희는 차분하고 이성적인 인간이었고, 뱀과 목숨을 건 혈투를 벌이면서도 그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내기만 아니었다면, 이런 상황에 처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장난으로 꺼낸 말에 이수가 혜성처럼 쇄도해 입을 맞추던 순간. 재희는 욕망에 남김없이 잡아먹히고 말았다. 이성을 씹어 먹고 허물을 벗은 뱀은 잡다한 감정들의 집합체였다.

성욕, 질투, 그리움, 소유, 독점, 애정, 갈망, 비참, 그러한 단어들이 모여 만들어 내는 것의 이름은, 몇 달 동안 자신을 괴롭히고, 이수를 쫓아다니게 만든 그 감정의 이름은, 말하자면 짝사랑에 가까웠다.

“운전을 진짜 재미없게 하네.”

무덤덤한 말에 재희는 운전대를 잡은 채 옆을 살폈다. 짝사랑은 인간을 소박하게 만들었다. 조수석에 앉은 서이수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자신의 일상에 녹아든 그가 좋았다. 뒷좌석에 문율이 없었더라면 더 바랄 게 없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옆만 흘끔거리는데 이수가 전면 창 너머를 빤히 바라봤다. 지하 주차장으로 진입하기 위해 낮은 방지 턱을 넘는 순간이었다. 서이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 여기 살아?”

“네. 왜요?”

“나도 여기 사는데.”

끼익! 당황해서 밟은 브레이크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콩, 유리창에 머리를 박은 이수가 버럭 짜증을 냈다.

“아, 씨발. 무면허야?”

“1종인데, 아니. 선배 여기 살아요? 몇 층이요? 언제부터요? 이사 왔어요? 한 번도 못 봤는데.”

“5년 됐는데. 43층.”

아. 최상층. 재희는 순간 미미한 패배감을 맛봤다. 자신이 서이수 앞에서 내세울 건 키가 5cm 정도 더 큰 것뿐이었다.

어쨌든 롤스로이스 고스트와 컬리넌을 보고 예상했던 일이어도 충격은 충격이었다. 급격한 빈부 격차가 느껴졌다. 정말로 미국 부동산 재벌의 자식이 맞는 걸까. 의기소침해진 재희가 중얼거렸다.

“출입구가 달라서 못 만났나 봐요. 주차장도 다르고.”

“주차장 달라서 다행이네.”

“왜요?”

“운전을 이렇게 하는데 마주쳤어 봐. 내가 너 밀어 버렸을 것 같아서.”

“…….”

말을 저렇게 하는데 왜 좋아하는 걸까, 저 선배를, 내가. 재희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지정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차재희는 두루두루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건 외부 공간에 한해서였다. 그 또한 개인 공간에 타인을 들이는 일은 드물었다.

그런데도 그들을 데리고 온 것은 문율이 서이수의 집에 들락거린다는 사실 하나 때문이었다. 그건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자위하며 자신의 경계를 먼저 허문 것이다. 이수 또한 자신을 그의 공간에 들여 주길 바라면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재희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 고양이 있는데 괜찮죠?”

“상관없어.”

“나도.”

지하 3층에서 올라간 엘리베이터가 4층에 멈춰 섰다. 2층까지는 주상 복합 상가, 3층은 커뮤니티 센터라서 4층이 아파트 1층이었다. 재희는 가장 안쪽의 401호로 향했다. 지문을 찍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현관으로 고양이가 마중 나왔다. 하얀 뱃가죽의 차레오가 방문객을 빤히 바라봤다.

“레오. 손님 왔어.”

이옹.

재희가 먼저 들어가고, 뒤에 있던 이수는 발목에 머리를 비비는 레오를 안아 들었다. 발톱 한 번 세우지 않고 얌전히 안기는 꼴이 강아지와 다를 바 없었다. 이수가 희미하게 웃으며 레오와 고양이 키스를 나눴다. 눈을 깜빡이던 레오가 아기 고양이처럼 냐, 하고 울었다.

“개냥이네.”

“귀여워요…….”

예상은 했지만 이수는 레오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을 지켜보던 재희는 심통이 나는 것을 느끼며 몸을 돌렸다.

“슬리퍼 신고 들어오세요.”

이수와 율은 그제야 레오를 안고 안으로 들어섰다. 차재희의 집을 본 이수의 감상은 ‘집도 딱 저 같은 데 사네’ 이거였다.

화이트&우드 톤으로 꾸며진 집은 무척이나 포근하고 따스한 느낌이었다. 오크 컬러의 마루, 벽지도 군더더기 없는 하얀색. 가구는 모두 같은 색감의 원목이었고 딱 필요한 물건들만 놓여 있었다. 테이블이나 콘솔 위에 올라와 있는 것도 없이 정말로 깔끔하고 정갈했다.

특이한 건 주방이었는데, 요리에 전혀 관심 없는 이수가 흥미로운 눈으로 한참이나 살필 정도였다. 이사 오면서 개조를 한 건지, 인덕션만 놓인 이수의 집과 달리 이곳에는 중식집에서나 쓸법한 커다란 가스버너와 3구 가스레인지, 인덕션, 직화 오븐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후드 레인지도 업소에서 쓸 법한 커다란 것이었는데, 얼마나 청소를 열심히 했는지 기름때 하나 없이 깨끗했다.

조리대로 쓰는 아일랜드 식탁의 끝에는 원목 상판이 덧대어진 바가 있었고, 그 옆으로는 무릎까지 오는 높이의 마루에 좌식 테이블이 자리했다. 식탁이든 어디든 먼지 한 톨 없었다. 차재희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집 엄청 좋다, 재희야.”

율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칭찬했다. 사람 사는 곳 같지 않았던 4300호와 달리 이곳은 정말 마음씨 따뜻한 사람이 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세 사람은 곧 좌식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거실엔 TV도 없이 소파와 책장만이 놓여 있었는데, 과제를 논하기에는 마땅치 않은 자리였다. 재희가 배 도라지 차와 생강차 따위를 준비했고, 셋은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시작했다.

율은 자신이 짠 프로그램을 두 사람의 메일로 보내 주었다. 몇 가지 책의 감상평을 입력하면 그걸 분석하고, 검색 기록과 자주 입력되는 단어들을 기반으로 리뷰를 찾아 취향에 맞는 도서를 추천해 주는 시스템이었다. 아무리 프로그래밍에 대해 모르는 차재희와 서이수라도 이걸 하루아침에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알았다.

독서 문화는 2학점짜리 일반교양이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세 사람 다 성적에 미친놈들 같았다.

“궁금해서 묻는 건데, 새벽 2시까지 나랑 ‘그거’ 하면서 이걸 언제 짰어? 잠은 안 자?”

“오픈 소스도 몇 개 썼어요. 그리고 프로그래밍은……. 그냥 온종일 머릿속에서 풀어내다가 수업 틈틈이 옮겨 적고 집에 가서 한 번에 죽 입력하는 식으로 해요. 그냥 뇌 한구석에서 돌아가는 느낌이라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아요.”

율이 부끄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희는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거? 새벽 2시……? 둘이서 그 밤에 대체 뭘 하는데. 이상한 상상이 뭉게뭉게 피어오름과 동시에 속이 부글거렸다. 차재희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뜨거운 시선을 느낀 율이 고개를 든다. 차재희를 보고 놀라더니 이수에게 귓속말했다. ‘혹시 게임 하는 거 비밀이에요, 형? 재희가 궁금해하는 것 같아요’ 그 말에 이수는 입을 열었다. 딱히 차재희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대명사로 지칭한 문장 때문에 문율이 오해받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게임 얘기야.”

“……게임요?”

“으응. 나랑 형이랑 라테르 같이하거든.”

“라테르?”

차재희가 아는 게임이라고는 테트리스, 친구인 강주현이 매일 초대 메시지를 보내는 코코아 레이싱밖에 몰랐다. 아, 지뢰 찾기도 안다.

라테르가 뭐지. 새벽 2시까지 그걸 한다고? 둘이서. 같이. 오붓하게?

현실은 누군가 실수를 할 때마다 쌍욕이 난무하는 전장과도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재희는 하하 호호 형, 율아, 웃음을 날리며 블록을 쌓는 두 사람을 상상했다. 유치한 질투심이 불쑥 몸집을 키웠다.

“나도 할래요.”

“……뭘. 라테르?”

“네.”

“니가?”

무시하는 듯한 시선에 재희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가 코웃음을 쳤다. 차재희는 생긴 것부터 게임을 못 하게 생겼다. 캐릭터나 움직일 줄 알면 다행이었다.

과제는 금방 끝났다. 서로 맡은 부분을 얼마나 진행했는지 확인하는 게 다였다. 세 사람은 상가 2층에 새로 생긴 PC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30분 후.

“진짜……. 존나 못 한다. 피지컬이 아깝다.”

“그래도 처음인데 저 정도면 잘하는 거 아닐까요?”

“에임을 봐. 저게 사람 새끼 수준인가.”

뭐든 안 그렇겠냐마는 서이수의 라테르에 대한 플레이 기준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공개 파티에서 만나는 웬만한 유저들은 그에게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다.

차단 목록이 꽉 차 버리는 바람에 이수는 엑셀에 블랙리스트를 따로 정리해 두었는데, 끝 번호가 현재 1489번이었다. 그러니 난생처음 MMORPG 게임을 접하는 차재희의 손놀림은 지금 이수의 눈에 끔찍해 보였다.

재희는 굳은 얼굴로 11레벨의 탱커 캐릭터를 움직이고 있었는데, 타격점이 영 불안했다. 자존심이 상한 게 분명해 보이는 표정에 율이 다급히 재희 편을 들었다.

“저는 처음에 저것도 못 했어요. 그래도 반속이 프로 게이머 수준인데 시스템에 익숙해지면 저보다 더 잘할 것 같아요. 처음이니까 삼인칭으로 바꿔서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어때, 재희야?”

라테르는 일인칭과 삼인칭 전환이 자유로웠다. 타격 보정이 되는 만큼 데미지는 떨어지지만, 초보가 하기엔 일인칭보다 삼인칭이 훨씬 나았다. 율이 보기에 일인칭 전환은 만렙을 찍은 이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그러나 진성 겜창 서이수의 생각은 달랐다.

“처음부터 일인칭으로 익숙해져야 실력이 오르지, 나중에 가서는 안 좋은 버릇 들어. 오를 실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창백한 얼굴로 이수를 바라보던 재희가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입을 꾹 다문 채 화장실로 걸음을 옮긴다. 화났나? 율은 안절부절못하며 이수를 바라봤다. 그러나 냉랭하기 짝이 없는 서이수는 재희의 기분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결국 율이 그 뒤를 쫓았다. 화장실로 달려가니 찬물로 세수를 하는 재희가 보였다.

“재희야, 괜찮아?”

“문율.”

또다. 어쩐지 서늘한 호칭에 율은 움찔 몸을 물렸다. 페이퍼 타월로 물기를 닦아 낸 재희가 그를 내려다봤다. 키가 15cm나 차이 나는 덕분에 율은 차재희를 마주 보기 위해 고개를 꺾어야 했다. 분명 다정하고, 상냥하다고 들은 것 같은데. 문율이 본 차재희는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서이수와 있을 땐 까칠해 보이기도 했고, 이렇게 저를 문율이라고 부를 때는… 조금 무서웠다.

“어……?”

“선배는. 저거 잘해?”

“라, 라테르? 잘하지……. DPS 랭킹 아시아 서버 1위야.”

“디피… 뭐?”

반문하는 재희에게 율이 상세히 설명했다.

“DPS, Damage per second. 초당 딜링, 그러니까. 으음. 아시아 서버 공격수 유저들 중에서 제일 딜링을……. 공격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보면 돼.”

“아시아 서버 사람들 중에서 제일 공격적인 사람이라고?”

“틀린 말은 아니야. 비슷해.”

현실 반영인가. 고개를 끄덕인 재희는 찬물로 손을 씻었다. 말이 없었다. 율은 머쓱하게 선 채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고민했다.

“좀 어렵지? MMORPG 게임 중에 제일 난도가 높아.”

“어려운 게 아니라, 멀미가 나서.”

“멀미?”

게임 시스템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시간만 더 있으면 적응할 수 있었다. 다만 멀미가 심한 재희에겐 정신없이 움직이는 일인칭 시점이 고역이었다. 그건 누가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삼인칭으로 플레이하면 좀 낫겠지만, 차재희는 이수의 말에 자극을 받았는지 율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일인칭을 고집했다. 중간에 약국에 내려가 멀미약까지 사 먹고 마우스를 움직였다.

세 사람은 저녁 9시가 되어서야 PC방에서 나왔다. 율의 자취방 집주인이 갑작스레 그를 불러냈기 때문이었다. 1층에서 율을 배웅하고, 건물 앞 흡연 구역에서 이수와 재희는 얼굴을 맞대고 섰다.

담배에 불을 붙인 이수가 재희의 안색을 살폈다. 아까부터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못한다고 너무 뭐라고 해서 그런가? 왜 자꾸 저런 쓸데없는 정보를 인식하게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눈에 빤히 보이니 계속 신경이 쓰였다. 이수가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차재희.”

“왜요.”

가만 생각해 보니 기분이 좋으면 네, 하고 기분이 안 좋으면 왜요, 하고 대꾸하는 듯하다. 그 미묘한 차이를 되새기며 이수가 물었다.

“왜 기분이 안 좋아?”

그 질문에 재희는 마치 누군가의 살인 사건 현장을 목격한 것처럼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서이수가 자신의 기분을 파악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순간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이수의 얼굴은 순수한 의문을 띤 채였다.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항상 웃는 얼굴로 대꾸하고 있으니 불쾌할 말을 내뱉고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빠르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재희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제 기분이 안 좋아 보여요?”

“어.”

“그게 신경 쓰여요?”

그 말에 이수는 눈매를 찡그렸다. 시선을 내리깐 채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이는 모습에 재희는 위기를 느꼈다. 지랄의 전조였다.

이수가 자신의 변화를 알아차린 이 기념비적인 순간에 짜증을 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질문에 질문으로 받아치는 걸 싫어한다. 방금의 대화를 되짚어 본 재희가 다급히 대답했다.

“왜 기분이 안 좋냐면…….”

“…….”

빤히 보는 눈길을 마주하며 재희가 말을 골랐다. 빨리. 빨리, 아무거나. 짜증 내기 전에.

“요즘 안 좋은 꿈을 꿔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꿈을 꾸긴 했다. 안 좋은 건 아니고 터무니없는 꿈이었다. 차마 서이수를 앞에 두고 그걸 떠올릴 수 없었던 재희는 땅바닥만 쳐다봤다. 시선을 피하는 듯한 행동에 이수는 멈칫했다가 물었다.

“혹시 나 때문이야?”

“……네?”

“그때 키, 아니. 축제 때 그 일 때문에 그런 거냐고. 올타에서…….”

이 역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재희는 이수가 자신에게 사과했던 밤을 떠올렸다. 뭐가 미안하냐는 말에 그냥이라고 대답하던 서이수.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던 SNS 게시글.

재희는 그날 서이수를 욕하는 글들에 열심히 반박 댓글을 달았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사람과 고소 운운하며 싸우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자신을 향한 인신공격도 꽤 많이 보았다. 그러나 딱히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자신이 감내하는 만큼 서이수를 향한 비난은 줄어들 거란 판단에서였다.

그런데 병신들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말라던 서이수가, 제 마음이 다쳤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재희는 이제 서이수가 말로만 듣던 것처럼 근본 없는 인성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시도 때도 없이 가시를 세우는 고슴도치처럼 온통 뾰족뾰족해서 그렇지, 속을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따스한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재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양심을 외면했다.

“맞아요. 그것 때문에 잠이 잘 안 와요.”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잖아. 저를 생각해 주는 서이수 때문에 설레서, 그게 어떤 성적 흥분으로 변질되어서 잠을 못 자는 거니까. 재희는 열심히 자기 합리화를 했다.

“그래서 그런데…….”

재희가 두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수와 같이 있고 싶었다. 자신이 일상을 보내는 공간에 이수가 조금 더 머물러 주었으면 했다. 누구에게도 해 본 적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집에서 더 놀다 가실래요?”

“피곤한데.”

이수는 정말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그렇게 대답했다. 재희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그렇지. 집에서 뭘 하겠다고.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니 정말 온다고 해도 난감했을 터였다. 재희는 그렇게 자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침울하게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데 머리 위로 웃음기 섞인 음성이 떨어져 내렸다.

“고양이 보러 갈래.”

좋아하는데 주변에 키우는 사람이 없어서. 그 뒷말은 듣지도 못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서 재희는 이를 악물고만 있었다.

담배를 비벼 끈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4층으로 올라갔다. 이수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차레오를 찾았다. 이수와 레오가 소파에서 뒹구는 동안 재희는 늦은 저녁을 준비했다.

속이 간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수에게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여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나도 기뻤다. 새우탕을 준비하려 껍질을 까고 있을 때 바에 앉은 이수가 말했다.

“나 저녁 많이 안 먹어. 가벼운 걸로 해.”

“아……. 그럼 혹시 감바스 좋아해요, 선배?”

“페페론치노 안 들어간 거로.”

“네. 그럼 감바스 만들어 줄게요.”

꿈을 꾸는 것 같다. 이 평범한 대화는 뭐지? 이수와 너무나도 정상적이고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듯한 느낌에 재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왜 저렇게 잘해 주지? 왜 짜증을 안 내지? 왜 욕을 안 하지? 치솟는 의문이야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감바스가 완성되고, 오븐에 노릇하게 구운 바게트와 직접 만든 화이트 상그리아까지 곁들였다. 바에서 이수와 마주 앉은 재희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은근한 주홍 불빛 아래 그림자가 진 얼굴. 늘 예민하게 날이 서 보이던 얼굴이 오늘따라 풀어져 보였다. 신이 난 재희는 화이트 와인을 한 병 더 땄고, 혼자서 그걸 거의 다 마셨다. 이수에게 음흉한 속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넌 요리가 취미야?”

“네. 음식 만드는 거 좋아해요.”

“양식?”

“아뇨. 사실 서양 요리는 잘 즐기지 않아서. 아시안이요. 한식, 일식, 중식, 베트남이나 태국 요리도 좀 해요.”

의외네. 그렇게 말하며 이수는 작게 웃었다. 재희는 바싹 마른 입술을 핥으며 고개를 돌렸다. 술을 많이 마셨다고 치부해 보지만 이수 때문에 속이 울렁거린다는 걸 알았다. 긴장돼서 미칠 것 같았다. 조리대 위에 자리를 차지하고 누운 차레오가 한심하게 쳐다보는 것 같아, 괜히 뱃가죽을 찔러 쫓아내 버렸다.

“다른 취미 가질 생각은 없어?”

이수가 그렇게 물어 온 것은 저그에 덜어 둔 상그리아가 바닥을 드러냈을 즈음이었다. 술에 취한 이수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팔을 베고 누운 채였다. 턱을 괸 채 그를 내려다보던 재희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떤 거요?”

“아까 한 거. 라테르. 나랑 같이해 볼래? 도와줄게.”

“……못한다고 욕했잖아요.”

이수는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처음엔 그랬다. 에임이 정말 병신 같다는 말밖에는 표현이 되질 않았다. 그런데 무슨 짓을 한 건지, 잠깐 자리를 떴다가 돌아온 후로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정확한 조준, 빠른 방어, 완벽한 회피. 캐릭터 생성 전에 테스트해 본 순간 반응 속도도 154ms였다. 안 그래도 현재 탱커인 김똘복은 9월에 창업을 앞두고 있다. 이수는 그때까지 김똘복을 대체할 사람을 찾아야 했다.

저 성실한 차재희를 겜창으로 만들면 어떨까. 라테르에도 성실하지 않을까……. 게임에 뇌가 절은 서이수는 그런 흑심을 품고 401호에 발을 들였다. 오락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건실한 청년을 살살 꼬셔 볼 생각으로.

그의 제안에 재희는 한참 동안 고민하더니 좋아요, 하고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뭔데.”

이수는 제 고정 파티원들에게 아량이 넓은 편이다. 좋다고 말하는 순간 차재희는 이미 예비 멤버가 되었다. 이수가 느긋하게 되물었다. 그러자 우물쭈물, 입술을 물었다 놓은 재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자고 가요, 선배.”

그렇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은근해서, 이수는 순간 기시감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라고 했고, 아니라는 걸 아는데, 왜 저 말에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까. 이수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감기려는 눈을 똑바로 뜨며 물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서이수는 바보가 아니다. 비록 섹스 경험은 없지만 자고 가라는 말이 단순히 수면을 취하고 가라는 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건 안다. 하물며 그 말을 한 사람이 입술을 맞대고 그에게 좆을 세웠던 후배라면……. 충분히 그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수는 낮에 보았던 차재희를 떠올렸다. 페니스 사이즈가 몇이냐, 첫 몽정은 언제냐 이런 개인적인 질문도 아니고 한참을 뜸 들이다가 한다는 말이 고작 ‘문율이랑 친해요?’였다.

차재희가 자신의 교우 관계에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차라리 지나가는 말로 물었으면 대답을 해 줬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무서워하는 얼굴로 친하냐고 묻는 건……. 정상적인 반응은 아니지.

입맛이 썼다. 이수는 입술을 한 번 축이곤 테이블을 두드렸다. 차재희는 대답이 없었다. 불안하게도.

“무슨 뜻이냐고 묻잖아.”

그리고 이수를 정말로 불편하게 만드는 건, 여태까지 차재희의 행동에 짝사랑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면 모든 것이 납득 가능해진다는 사실이었다.

짝사랑은 불가능해 보이는 모든 일을 가능케 하는 마법의 감정이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생각은 아니었다. 4학년 선배에게 가슴앓이를 하던 신유진을 보고 깨달은 것이었다.

이해 불가. 해독 불가. 접근 불가. 차재희에 대해서 내렸던 그 판단을 뒤엎을 수 있다. 그가 이수를 좋아해 이토록 매달려 왔다고 말한다면.

이수는 가물거리는 시선을 들어 재희를 바라봤다. 술기운에 머리가 핑 도는 와중에 정신은 또렷했다.

“재희야.”

“네…….”

“너, 정말 나 좋아해?”

좋아하는 감정이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수는 내가 좋아하지 않지만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곁에 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기다림은 지긋지긋했다. 그게 누가 되었든, 자신에게 진심인 사람이 있다면 이수는 그를 끝없는 기다림 속에서 외로워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 좋아해? 차재희에게 벌써 세 번째로 던지는 질문이다. 이수는 같은 이야길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럼에도 자꾸 저렇게 묻게 되는 것은 차재희의 행동이 단순히 호감으로 치부하기에는 헷갈리는 부분이 있어서였다.

이번에도 재희는 말을 아꼈다. 턱을 괸 채 이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확답을 주든, 주지 않든 이수는 자신이 여지를 잘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여학생에게 그랬던 것처럼.

한 모금 남은 상그리아를 습관처럼 마시며 입을 열었다.

“그냥 얘기해 두는 건데. 난 남자 만날 생각 없어.”

“…….”

“그러니까… 네 안에 뭐든 있으면, 접어. 이런 관계라도 유지하고 싶다면.”

스물한 살. 충분히 성적 혼란을 겪을 수 있는 시기다. 혹은 실수처럼 저지른 키스가 부메랑처럼 돌아와 차재희를 뒤흔들어 놓았을 수도 있다.

이수는 눈을 깜빡이며 재희와 시선을 맞췄다. 차재희는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로 지그시 이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고는 한참이 지나 웃었다. 깨끗하고 단정하게, 감정을 읽어 낼 수 없는 미소였다.

“선배, 내가 말했잖아요. 선배랑 있으면 편하다고.”

“…….”

“미국에서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한국에서는 친구끼리 밤늦게까지 놀고, 같은 침대에서 자고, 목욕탕이랑 찜질방도 가고 그래요. 그래서 자고 가라고 한 건데…….”

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마를 꾹꾹 문질렀다. 빈 그릇을 치우는 손길이 한없이 느릿했다.

“선배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내가 잠깐 잊고 있었네. 말이 너무 잘 통해서.”

“그래? 몰랐어.”

이수는 적당히 어깨를 으쓱했다. 뭐가 됐든 이만하면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재희는 싱크대에서 대충 헹궈 낸 그릇을 식기 세척기에 차곡차곡 쌓았다. 팅, 팅, 유리와 사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세제를 넣고, 작동 버튼을 누르며 돌아서고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니까 그냥 자고 가요. 나랑 영화도 보고. 내일 아침에 2교시죠? 나 1교시니까 일어나서 깨울게요.”

“그래. 약속 지켜.”

“알았어요. 먼저 씻어요. 씻고 있으면 옷 갖다 줄게요.”

이수는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욕실을 향해 걸어갔다. 탁, 문이 닫히고 난 후 재희는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쿵, 쿵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 * *

네 개의 방은 침실, 드레스 룸, 서재 그리고 미디어 룸으로 나뉘었다. 거실에 TV가 없다 했더니, 방음 처리가 된 방에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80인치짜리 TV와 빔 스크린, 어마어마한 크기의 스피커, 벽면 한쪽에 빼곡히 들어찬 DVD까지. 영화를 꽤 좋아하는 듯했다. 그리고 이수는 방문 옆에 서 있는 1:1 크기의 캡틴 아메리카 스태츄를 보고 혀를 찼다.

“시빌 워 안 봤냐?”

“봤죠. 왜요?”

“그걸 보고도 이걸 집에 둘 생각을 해?”

“……캡아 싫어해요? 시빌 워 때문에?”

재희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고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캡틴 아메리카를 변호하기 시작했다.

“아이언맨 편을 들고 캡아를 싫어하는 사람의 논리는 완전히 모순이에요. 친구인 아이언맨을 어떻게 배신할 수 있냐고 말하는데, 그럼 역으로 친구인 버키를 토니가 죽이게 놔뒀어야 한다는 거예요? 둘 다 친구잖아요. 캡틴이라구요. 캡틴은 버키가 토니 부모를 죽인 게 아니라, 토니가 버키 부모를 죽였다고 하면 반대로 토니 편을 들었을 거예요. 그런 사람이니까! 아니면 토니가 버키를 죽이게 놔둔다고 해서 나아지는 게 있었을까요? 아뇨, 오히려 더 안 좋아졌을걸요? 토니는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했으니까, 거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을 거라고요. 캡틴은 두 친구를 지키기 위한 선택을 했을 뿐이에요!”

이수는 그답지 않게 격렬히 말을 쏟아 내는 재희를 바라봤다. 얼마나 몰입했는지 누가 들으면 정말 캡틴의 친구인 줄 알 것 같은 태도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이해가 안 된다고, 뾰로통한 얼굴로 이야기한다. 차재희가 스물한 살짜리 남자애라는 사실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야, 씨발. 알았어. 그만해. 캡틴 무죄.”

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손을 뻗는다. 재희의 덜 마른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애처럼 굴긴. 중얼거린 말에 재희가 이수의 손을 쳐 냈다. 심통 난 채로 물었다.

“됐어요. 영화 골랐어요?”

“대부분 본 거라. 너 보고 싶은 거 봐.”

“거의 다 봤다고요?”

“어.”

“선배, 영화 좋아하는구나…….”

그렇게 말하며 재희는 입술을 깨물고 웃었다. 이수가 2인용 리클라이너에 앉아 몸을 늘어트리는 동안 재희는 심사숙고 끝에 고른 블루레이를 틀어 놓고 주방으로 가서 포도와 캔 맥주를 들고 돌아왔다. 분명 혼자 와인 한 병을 다 비운 것 같은데. 잔뜩 질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이수도 캔을 받았다. 평소 즐겨 마시는 브랜드였다.

맥주 반 캔만 마셔도 힘들어서 그렇지, 술을 아예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더 마시면 잠들거나 기억이 흐릿해질 뿐이었다. 원래는 필름이 끊기는 줄 알았는데, 유진의 말을 들어 보면 그렇게 잊은 기억은 아예 돌아오지 않는 모양이다. 이수는 나중에라도 잊어버린 기억을 떠올리는 경우가 있었으니 필름이 끊기는 건 아니었다.

익숙한 로고를 훑어보다가 캔을 땄다. 그와 동시에 영화가 시작됐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였다. 한 열세 번쯤 본 듯하다. 놀란도 좋아하고, 밀리터리 영화도 좋아하는 이수의 인생작이었다.

눈에 익은 장면을 응시하던 이수가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차재희가 옆에 있었다. 스크린의 불빛에 젖어 든 채로, 팔걸이에 턱을 괸 자세가 나른해 보인다. 그를 보며 이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쌉싸름한 음료가 목구멍을 적시고 넘어간다. 상그리아를 이미 두 잔이나 마셨다. 확실히 평소보다 과음이었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인정하긴 싫지만 인정해야 할 때가 왔다. 차재희와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급강하 폭격기 슈투카의 엔진 소리를 들으며 이수는 재희와 보낸 석 달을 떠올렸다.

그래, 마치 폭격 같았다. 차재희는 강렬한 첫인상을 남기며 날아와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선사했다. 강제로 만들어 낸 격렬한 감정의 소요가 한차례 폭풍을 일으키고, 먼지가 가라앉은 자리에 그가 만든 흔적이 남았다.

차재희는 이수가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기억의 공간에 되돌아보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사건을 몰고 왔다. 그렇게, 그는 그토록 바라던 염원을 이루어 냈다.

시작이 어찌 되었든 간에 재희는 어느샌가 이수에게 친구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토록 불편했던 녀석과 이리도 편하게 영화를 보고 앉아 있는 상황이 아주 재미있었다.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는지 재희가 이수를 돌아보았다. 그 웃음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뜬금없이 감독을 칭찬했다.

“놀란은 천재예요.”

“미쳤지.”

이수도 동의했다. 영화보다 상념에 집중한 그와 달리, 재희는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종종 크리스토퍼 놀란과 배우들에 대한 화제가 던져졌다. 톰 하디의 필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다크 나이트는 과대평가되었다는 이수의 말에 재희가 반박하기도 했다.

영화가 끝나 갈 무렵, 시간은 어느새 새벽 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수는 눈을 절반쯤 감은 상태였다. 리클라이너는 편했고, 옆에 앉은 차재희에게서 나는 섬유 유연제 향기가 온몸을 감쌌다. 아니, 사실 빌려 입은 옷에서 풍기는 냄새일 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나른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잔잔히 흐르는 음악을 인식하고 눈을 떴다. 스크린 위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언제 끝났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애쓰는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래요?”

“어……. 여기서 잘래…….”

“들어서 데려다줄게요. 침대까지.”

“너… 나 못 들어…….”

중얼거린 이수가 몸을 둥글게 말았다. 일어나면 토할 것 같았다. 그런 그에게 재희가 속삭였다.

“내가 선배 안아 들면, 부탁 하나 들어줘요.”

씨발, 못 든다니까. 머릿속으로 중얼거린 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키 차이, 고작 5cm. 체격 좋은 성인 남성을 번쩍번쩍 드는 건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차재희가 군인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 세상이 덜컹거렸다. 순간 토기가 치민 이수가 재희의 팔을 꽉 붙들었다. 허공에서 달랑거리는 다리가 어딘가에 툭, 부딪히며 흔들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 빛 한 점 없는 어둠. 푹신한 침대 위에 눕혀진 이수가 눈을 감은 채로 웃었다. 힘 좀 쓰네. 말은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정신이 몽롱했다. 꿈결에서 듣는 것처럼 은밀한 목소리가 들렸다.

“필름 끊길 것 같아요?”

“……아니.”

“와인 한 모금 더 마시면요?”

“아마도……. 아, 나 잘래……. 말, 걸지 마.”

남의 집에서 자 본 적은 없지만 그 사실이 무색하게 졸음이 쏟아졌다. 너무나 익숙해진 섬유 유연제 냄새 때문일 것이다. 한쪽으로 돌아누운 이수가 이불을 끌어안았다. 발소리가 멀어진다. 재희는 거실로 나가 도수 높은 와인을 한 잔 따라 들고 왔다. 협탁 위에 올려 두고 이수를 부른다.

“선배, 부탁 들어준다고 했잖아요. 한 잔만 더 해요.”

“너… 씨발, 나 죽이려고 그러지…….”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재희가 희미하게 웃었다. 귓가를 간질이는 음성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건 아니고…….”

단정한 손끝이 이수의 이마를 쓸었다.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지만 그 열기가 나쁘지 않았다. 술 때문에 내려간 체온 덕분에 이수는 의식하지 못한 채로 그의 손끝에 얼굴을 비볐다. 나직한 웃음과 함께 차재희가 중얼거렸다.

“나 선배한테 키스할 건데, 기억 못 했으면 좋겠어.”

수마와 싸우며 정신없는 와중에 한 번에 와 닿지 않는 말이었다. 축, 늘어지는 몸을 느끼며 이수가 마침내 의미를 깨달았다.

“미친, 새끼…….”

힘없는 목소리가 흩어졌다.

또 술주정 시작이네. 너 한 번만 더 그러면 처맞는다고 한 것 같은데. 이 쓰레기 같은 새끼야. 이수는 자신이 말을 하는 건지,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선배, 약속은 지켜야죠. 입 벌려요.”

다만 그런 말이 던져지고 몇 초 뒤, 재희와 입술을 맞댔다는 것만 알았다. 이수에게 약속이라는 말은 법적 조치와도 같았다. 기운이 빠진 채로 입을 벌렸다. 쌉싸름한 액체가 입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뺨을 감싼 손바닥과 입 안으로 차재희의 체온이 녹아들었다. 누운 채로 받아 마시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입가로 흘러내린 와인이 베개를 붉게 물들인다.

“흘리면 어떡해요, 애도 아니고…….”

입술을 떼어 낸 재희는 이수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참을 수 없이 좋은 냄새가 났다. 깨물고 상처를 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붉은 궤적을 따라 올라가며 와인을 핥아 냈다. 혀끝에 감겨 오는 살결이 녹아내릴 것처럼 달콤했다.

방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희미한 불빛에 이수가 인상을 찡그린 것이 보였다. 싫은 걸까. 이러면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재희는 멈출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는 새에 영역 표시라도 해 버린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수는 재희의 향취를 온몸으로 풍기고 있었다. 가만두고 볼 수 없을 만큼 유혹적이었다.

이수가 사용한 바디 워시의 향, 이수가 입은 옷에 밴 익숙한 냄새. 모든 것이 꼭 서이수가 차재희의 소유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착각임이 분명한데도 재희는 끓어오르는 욕망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입 맞출래요.”

침대로 올라간 재희가 이수의 위에 올라탔다. 이미 빳빳이 선 재희의 성기는 트레이닝복 안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발기한 지 한참이나 되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옆에 앉은 이수를 의식하며 프리컴을 질질 흘려 댔다. 아는 내용도 잊어버릴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그에게 키스하기 전, 파도처럼 이는 조바심을 이기지 못하고 재희가 허리를 움직였다. 맞닿은 하체가 뭉근하게 비벼진다.

“아……. 이 개… 같은.”

서이수는 예민하다. 성격은 물론이고 자극에도 마찬가지였다. 과방에서 키스했던 날 깨달았다. 전혀 자신에게 흥분할 이유가 없음에도 이수는 그날 페니스를 세웠다.

재희는 정신을 차리려 애쓰는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열이 오른 이수의 뺨이 손바닥 안에 들어찬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웠다. 맞닿은 입술도 뜨겁기 그지없었다.

“읏…….”

두 입술이 포개졌다. 와인이 머물렀던 입 안은 향긋한 타액을 머금고 있었다. 재희의 혀가 이수의 안을 쓸었다. 가지런한 치아부터 연분홍빛 잇몸 그리고 점차 얽히기 시작하는 혓바닥까지.

헐떡이는 숨소리가 침실을 울린다. 뜨끈한 귓가를 만지작거리며 재희는 이수를 탐하는 일에 열중했다. 싫지 않은가. 이수의 손이 재희의 허리 위에 올라왔다. 꽉 붙드는 힘에 아래가 찌릿했다.

이수가 저를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전신이 열에 들끓었다. 어딘가에 좆을 쑤셔 박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억누르며, 그의 입 안에 자신을 밀어 넣었다.

“하아, 씨발…….”

잠깐 숨을 돌리는 틈을 타 이수가 욕을 씹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재희의 눈에도 그의 얼굴이 달아오른 것이 보였다. 혼란에 빠진 눈빛으로, 혹은 본능에 젖은 눈동자로 이수가 그를 올려다봤다.

나도 선배랑 비슷해 보일까. 음습한 욕망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한없이 야한 얼굴. 재희는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이수가 자신을 보고 욕망했으면 좋겠다고.

“너… 왜, 이렇게. 술만, 마시면.”

힘겹게 뱉어지는 목소리가 뚝, 뚝 끊겨 왔다. 재희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 이수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어느샌가 익숙해져 버린 그의 체취를 흠뻑 들이마셨다. 혀를 내밀어 목선을 핥자 이수가 얕은 신음을 흘렸다. 파르르 떨리는 몸체가 그저 유혹적이었다. 그 신음이 교성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재희가 입을 열었다.

“선배, 싫어요?”

“…….”

“아니면… 좋아?”

쪽, 턱 선을 따라 입술이 부딪혔다. 간지러운 느낌에 이수는 회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출구를 향하는 눈동자가 잘게 떨려 왔다. 우습게도 그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재희가 딱딱해진 하체를 비비자, 이를 악문 것이 우습게 성감이 고조되었다. 이수는 가까스로 소리를 참아 냈다.

“선배, 섰어요……. 알아요?”

그렇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달콤했다. 숨이 콱 막혀 올 만큼. 이수는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입… 닥쳐.”

이거 아니잖아, 서이수. 정신 차려. 되뇌어 보지만 쉽지 않았다. 자제력은 한없이 낮아졌고, 낯선 자극에 반응하는 신체는 점점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다시 키스해, 혀를 빨아, 숨이 막힐 때까지 입을 맞추라고 해, 욕망의 충동질과 함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괜찮아요. 20대 남성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이니까…….”

“아……!”

재희가 이수의 귓불을 깨물었다. 이어서 질척이는 소음이 선명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귓바퀴를 따라 핥는 혀. 그 뜨겁고 축축한 느낌에 이수의 페니스가 쿠퍼액을 쏟아 낸다.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드로어즈 속에 파묻힌 채 욕망의 배설을 고대하는 페니스는 별것 아닌 접촉에도 꺼덕거렸다. 만지고 싶어서 손이 움찔거렸다.

“우리… 한 번만 더, 실수해요……. 응?”

은근히 속삭이는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전신의 감각을 일깨우는 듯한 유혹에 이수는 혀를 깨물었다. 실수가 아니라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실수로 넘기고 싶을 뿐이었다. 애정에서 비롯된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아니야. 그만. 밀어내자.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의 다짐을 무너트리는 손길이 닿았다. 티셔츠를 파고든 손끝이 이수의 허리를 문질렀다. 온몸에 전율이 일며 몸이 튀어 올랐다. 참아내지 못한 신음이 샌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또다시 차재희가 침입했다.

“아…….”

혀를 맞댈 때마다 이성이 지워진다. 정신없이 그를 받아들이며 이수는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저어졌는지는 모른다. 피스톤질하듯 비벼지는 성기의 감촉이 황홀했고, 입 안으로 흘러들어 오는 차재희의 타액에 온 신경을 빼앗겨 버렸으니까.

차재희의 허리를 감싼 채로 입을 맞췄다. 온기를 나누어 받는 느낌이 좋았다. 생경한 만족감과 함께 밭은 숨소리 사이로 척척한 소리가 끝없이 흘러나왔다. 혀뿌리를 빨아들이는 압박감에 힘없이 딸려 올라갔다가, 다시 침대 위로 처박혔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전신이 내리꽂히는 느낌이 들었다. 추락감은 이지를 일깨웠다. 다급히 고개를 돌린 이수가 부정했다.

“실수, 하아. 아니잖아…….”

재희는 우물거리는 입을 가만두지 않았다. 부어오른 아랫입술을 개처럼 핥으며 손을 뻗었다. 티셔츠 밑으로 꼿꼿이 선 유두가 걸렸다. 손톱 끝으로 긁어내리자 허리를 뒤튼다. 서이수가 도망치는 모습은 오히려 차재희의 욕정에 불을 지폈다.

주먹질을 하고 밀어내면 그대로 밀려날 텐데. 이수는 그러지 않았다. 그도 동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냥 생각 없이 저질러도 좋으련만, 서이수는 자존심이 셌다.

“술, 마셨잖아요. 우리.”

재희는 그에게 변명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만날 생각 없는 후배에게 성적으로 흥분하는 일에 대한 마땅한 핑계. 우리 취했잖아, 그 사실을 알려 주자 이수는 입을 다물었다.

“아… 흐윽.”

옷 위로 혀를 내밀어 핥자 이수가 고개를 꺾었다. 젖은 천 아래로 윤곽을 나타낸 유두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재희는 그대로 입에 담아 이를 세웠다. 끝을 깨물자 머리칼을 틀어쥔다. 하지 말라는 건지, 더 하라는 건지 모를 정도로 미약한 힘이다.

늘 날카롭게 벼려져 있던 서이수였다. 쾌감에 젖어 몸을 늘어트린 그의 모습은 차재희의 정복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평소보다 무뎌진 채로, 작은 자극에도 겁먹은 듯 몸을 떠는 서이수를……. 울리고 싶다.

깨달음이 아찔했다.

“선배 말이 맞았어요.”

“아!”

재희가 이수의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장골을 스치는 손길만으로도 허리가 튕겼다. 무릎으로 그의 허벅지를 내리누른 재희가 이수의 귀두를 손에 쥐었다. 축축하게 젖은 채 꺼덕거리는 성기가 꽤 큼지막했다. 고개를 처박고 빨아 먹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재희는 가까스로 이수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을 맞댄 채로 나직이 속삭였다.

“그냥 내가 쓰레긴가 봐.”

미친놈……. 이수가 뱉어 낸 욕설이 재희에게 삼켜졌다. 츕, 혀를 빨며 손을 움직인다. 거칠게 끌어 내린 바지가 엉덩이 중간까지 걸쳐졌다. 튕겨 나온 좆이 매끈했다. 손을 내려 확인해 보았으나 맨질맨질한 고환에도 털 하나 없었다. 씨발……. 폭력적인 생각을 지워 내며 재희가 팔을 움직였다.

귀두를 쥐고 흔드는 손길이 느릿했다. 흐, 끓어오르는 신음과 함께 이수가 재희의 팔을 붙잡았다. 은근히 밀어내는 힘을 재희는 받아 주지 않았다.

“그만……. 윽!”

“선배.”

재희가 이수의 티셔츠를 걷어 올렸다. 어둠 속에서도 가슴을 가로지르는 상처는 희미한 윤곽을 드러냈다. 무슨 상처인지는 몰라도 많이 아팠을 것 같아 마음 한편이 뻐근했다.

재희가 혀를 내어 흉터를 핥았다. 혀끝이 닿을 때마다 이수는 앓는 소리를 냈다. 이를 문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실수가 아닌데, 밀어내야 하는데, 동시에 반대된 생각이 불쑥 치솟았다.

다른 이의 손에 몸을 맡긴 채 쾌락에 젖어 들고 싶었다. 근질거리는 느낌을 벗어나 흠뻑 사정하고 싶었다. 양가감정에 시달리는 이수에게 재희가 도움을 주었다.

“어차피 잊어버릴 거잖아……. 응?”

갈등이 무너져 내린다. 이수는 자극에 몸을 내맡겼다. 생전 처음 겪는 남자의 손길에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신체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귀두를 마찰하는 손바닥에서부터 퍼져 나온 열기가 전신을 휘돌았다. 뇌가 끓어올랐다. 알지 못했던 본능이 눈을 떴다. 이수가 허리를 쳐올렸다. 좆을 쑤시듯 재희를 향해 박아 넣는다. 굽혀진 손가락 사이에서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은 쾌감이 밀어닥쳤다. 올라갔다가 침대로 내리꽂히는 둔부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더, 더, 더 강하게.

점점 거칠어지는 허리 짓을 재희는 무리 없이 받아 냈다.

“잘하고 있어요…….”

“윽, 으읏…….”

이수의 발딱 선 유두를 빠는 동안 재희는 붉은 자국을 내고 싶은 욕구를 아주 강하게 억눌러야 했다. 잊어버릴 테니까. 흔적이 남으면 안 되니까. 비겁하게 술에 취한 사람을 유혹해 냈다는 죄책감과 동시에, 서이수가 제 밑에서 풀어진 얼굴로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감이 들끓었다.

춥, 춥, 유륜을 감아올릴 때마다 이수는 재희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앞섶을 그의 고환에 문지르며 재희는 이수의 좆을 움켜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아! 으…….”

순간 이수의 전신에 힘이 들어갔다.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로, 숨을 멈추고 재희의 손아귀에 정액을 쏟아 냈다. 울컥울컥 모습을 드러낸 정액은 지극히 뜨거웠다. 손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서이수가 사정했다. 내 손 안에서, 싫다고 밀어내던 후배 밑에서, 개처럼 허리를 흔들며, 비밀스럽게 신음하며……. 차재희는 반쯤 풀려 버린 눈동자로 제 바지를 끌어 내렸다. 흉흉하게 선 기둥에 서이수의 좆물을 묻히고 손을 흔들었다.

이수는 몽롱하게 풀어진 눈동자로 재희를 올려다봤다.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로 모습을 감추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그의 위에서 무릎을 세워 엎드린 채, 재희는 자위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을 빨고 핥아 가며, 이수의 체액을 윤활제 삼아 페니스를 흔들었다.

“선배…….”

헐떡이는 숨과 함께 탁, 탁, 좆을 치대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쌔근쌔근 잠들어 버린 서이수를 보며 재희는 몇 번이고 사정했다.

내가 정말 미쳤나 봐요……. 자책감 어린 목소리를 뒤로하고 이내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 * *

이수가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어디지. 침실인가. 몸을 감싼 침구가 포근했다. 누가 에어컨을 켰지. 리키인가……. 공기가 서늘한 덕분에 뜨뜻미지근한 이불 속이 더 안락하게 느껴졌다. 서이수는 냉방을 좋아하지 않는다. 에어컨을 켜고 자는 날이면 늘 미열이 났다.

이옹. 이마를 짚어 보던 이수의 배 위로, 별안간 털 뭉치가 뛰어들었다. 더듬더듬 손으로 만져 보자 말랑한 뱃살이 만져졌다. 이옹. 고양이가 애교를 부리며 손등을 살짝 물었다 놓는다. ……레오.

그제야 이수는 어제 차재희의 집에서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덩케르크를 봤고, 맥주를 마셨고, 크리스토퍼 놀란이랑 톰 하디 이야기를 했고……. 잠들었나?

“레오. 네 형아 어딨어.”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기침을 몇 번 하고 목을 가다듬으니 전신에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감기가 왔나 보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코가 맛이 가 버렸는지 이상한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이수는 침대 근처를 더듬었다. 협탁 위에서 휴대폰을 발견해 냈다. 6:18. 이른 아침이었다.

방은 창문이 있긴 한가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어두웠다. 이수는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창가로 다가갔다. 이중으로 쳐진 암막 커튼을 걷어 냈는데 그 뒤로 롤 블라인드가 바닥 끝까지 내려가 있었다. 리모컨을 찾아 올리니 서서히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차재희의 침실에서는 텅 빈 놀이터와 산책로가 내려다보였다. 43층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곳이다. 이수의 침실에서 보이는 것은 서울숲과 한강 그리고 아파트들뿐이었다. 같은 건물에 있어도 이렇게 전망이 다를 수 있구나. 산책로를 눈에 담다가 방을 나왔다.

정돈된 느낌을 풍기는 거실은 적막했다. 레오는 우다다 달려가 이수의 눈치를 보며 소파에 발톱을 긁었다. 개나 고양이나. 픽 웃은 이수는 일단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 두 개에 냉동고 하나. 요리가 취미라던데 가전만 보면 식당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첫 번째 냉장고에는 본 적 없는 다양한 종류의 소스와 향신료, 오랫동안 보관 가능한 식자재가 들어 있었고, 두 번째 냉장고에는 금방 상하는 재료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흥미롭게 보다가 곧 문을 닫았다.

생수를 꺼내 바에 걸터앉았다. 속이 쓰리다 못해 아렸다. 상그리아 두 잔에 맥주를 더 마셨으니 난리가 날 만했다. 이수는 숨도 쉬지 않고 물 한 병을 모두 비웠다. 시원하게 내려가는 속과 함께 끊어진 기억이 살아날 듯 말 듯 했다.

분명 침실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차재희가 안아 준 것 같은데……. 자존심 상하게. 페트병이 살벌한 소리를 내며 구겨진다. 스툴에서 일어나 조리대 근처로 향했다. 빈 병을 버릴 곳을 찾던 이수가 인덕션 위에서 포스트잇이 붙은 냄비를 발견했다.

재희는 운동 중.

7시 전에 일어나면 덥혀 드세요. 밥은 밥솥 안에 있어요!

재희라는 이름에 형광펜까지 칠해져 강조되어 있었다. 혀를 차며 뚜껑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시원하게 끓여진 북엇국이었으나 이수는 아침에 밥을 잘 먹지 않는다. 다시 뚜껑을 덮어 놓고는 집 안을 탐험했다.

거실에 있는 책장은 꽉 차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부터 윤동주의 별 헤는 밤까지. 문학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다음으로는 드레스 룸을 구경했다. 주인 없는 집을 쏘다니는 게 좀 무례한가 싶었지만 정말 궁금한 게 있었고 차재희는 화를 낼 것 같지 않았다.

드레스 룸의 불을 켠 이수가 헛웃음을 쳤다. 백화점의 쇼룸에 온 것 같았다. 재킷, 상의, 바지. 카테고리별로 나누어진 옷들이 새 제품처럼 정리되어 있다. 그러니까, 넥 부분이 위로 올라와 반듯하게 접힌 채였는데, 비슷한 디자인의 옷들은 색상별로 또 나누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정말, 정말 궁금했던 차재희의 슬랙스는 이수가 세어 본 결과 총 48벌이었다. 색상, 채도별로 정렬되어 옷걸이에 걸려 있는 슬랙스는 비슷해 보여도 디테일이 조금씩 다른 것들이 많았다.

슬랙스에 미친놈……. 혀를 찬 이수가 옷 방의 문을 닫고 나왔다. 이번엔 서재로 들어갔다. 공부방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곳엔 책상과 데스크톱, 커다란 책장 하나만 놓여 있었다.

이수는 느긋한 걸음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전원을 켜고 라테르 홈페이지에 들어가 클라이언트를 다운로드받았다. 다행히도 사양은 나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고정 파티에 들어오게 되면 새것으로 바꿔 줘야 하겠지만 그 전에 쓰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라테르 유저 커뮤니티에서 탱커 운용법 게시글을 즐겨찾기하고, 모니터에 띄워 둔 채 거실로 나왔다. 6시 57분. 시간을 확인하고 집에 올라갈까 고민하고 있으니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수는 생수를 한 병 더 꺼내 바의 스툴에 걸터앉았다. 턱을 괸 채 집주인을 기다리니, 발소리도 없이 복도 사이로 재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젖은 머리칼을 정돈하며 나타난 차재희는 여전히 운동복 차림이었다. 무릎 위까지 오는 팬츠에 흠뻑 젖은 티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뚝이 마치 화가 난 것 같았다. 웨이트에 혹사당해 부풀어 오른 근육들이 보기 좋은 짜임새를 드러냈다.

“……선배.”

이수를 발견한 재희가 몸을 주춤했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문다. 그러고는 은근히 시선을 피했다. ……뭐지?

“어, 언제, 일어났어요?”

“아까. 차재희, 왜 말을 더듬지?”

“내가… 언제요.”

이수가 눈매를 좁혔다. 재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지만 붉어진 낯은 감추지 못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 딱히 기억나는 게 없었지만 이상하게 찜찜했다. 쏘아보는 이수를 뒤로하고 재희는 씻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욕실로 사라졌다.

이옹. 바 위로 뛰어오른 레오가 이수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등을 쓸어 주며 차재희의 술버릇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킁킁 냄새를 맡는 레오의 축축한 콧등이 돌연 목덜미에 닿았다. 정해진 수순처럼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순간이 연상되기 시작했다. 살결에 비벼지던 입술, 뜨거운 숨결 그리고 목소리.

‘흘리면 어떡해요.’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일었다. 차재희……. 이 새끼가 왜 내 목을 핥았지……? 경악한 채 남은 기억을 쥐어짜 냈다. 그리고 또다시 떠올랐다.

‘나 선배한테 키스할 건데, 기억 못 했으면 좋겠어.’

차재희와 또다시 키스했다. 지난밤의 기억이 흐릿하게 재생되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건, 그 입맞춤이 정말 미치게 좋았다는 사실이었다.

질척거리며 얽어 오던 혀와, 입 안을 적시던 타액.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과 별개로 그 행위 자체에 거부감이 일지 않았다는 사실이…….

씨발.

희게 질린 이수가 가방과 휴대폰을 챙겨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 차마 차재희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자책감이 들었다. 재희가 술을 마시면 발정 난 개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그걸 제지하지는 못할망정 똑같이 짐승처럼 굴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내가 형인데.

일반 입주민 엘리베이터는 홍채 인식을 해야지만 펜트하우스 층에 진입 가능했다. 당황한 이수는 그것도 잊은 채 거의 3분간 그 자리에 못 박혀 서 있었다. 힘겹게 집에 도착하니 재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수는 거절 버튼을 누르고 메시지를 보냈다.

7:09

몸 안 좋아서 집에 옴.

다시 전화가 왔다. 거절했다.

독문 과제 팀원1

많이 아파요?

7:10

7:11

신경 ㄴㄴ

독문 과제 팀원1

혹시.. 기억 났어요...?

7:12

그럼 이걸 기억 못 할 줄 알았나. 이수는 당장 답장하지 못하고 멍하니 휴대폰만 내려다봤다. 그냥 모른 척할까. 잊어버리고 없었던 일로 해? 미친 듯이 고민하고 있을 때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독문 과제 팀원1

선배.... 죄송해요...

7:23

뭐가 죄송해. 술 먹고 달려든 거? 아니면 기다렸단 듯 받아 준 선배하고 키스한 거? 뭐가 됐든 별로 사과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꼭 자신이 당한 것 같으니까.

물론 차재희가 괘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욕망에 져 버렸다는 사실에 패배감을 느끼는 게 더 컸다. 그때 사과대 중정에서 그랬었던 것처럼 밀어냈어야 했는데, 성욕은 정말 컨트롤이 불가능한 걸까.

인간을 이성이 지배하는 동물이라 규정짓는 이수이기에, 인간 자격이 없는 짐승이 된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빠르게 키패드를 두드렸다.

7:25

키스는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도 해. 신경 꺼.

일부러 가벼운 말로 응수했다. 이수는 재희가 이 일을 무겁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했다. 힘겹게 얻은 친구를 그깟 술 때문에 저지른 실수로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없던 일이 되어야 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메시지를 보낸 이수가 휴대폰의 전원을 껐다. 아스피린을 두 알 꺼내 씹어 먹고, 김이 나는 뜨거운 물로 씻었다.

젖은 머리칼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곧바로 수업을 들으러 가야 했지만 이수는 드레스 룸으로 향하는 대신 소파에 앉았다. 당장 면피하고 싶었던 상황을 벗어나 여유가 생기니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정상이 아니지 않나.

친구라고 부르는 후배와 세 번이나 키스했다. 첫 번째는 실수, 두 번째는 내기. 그렇다면 세 번째는? 이건 실수도 내기도 아닌 고의였다.

왜? 차재희가 술 마시면 개가 되는 새끼라서? 거기에 말려들어서? 하지만 이수는 스스로를 잘 알았다. 술에 취한다고 해도 하기 싫은 일은 절대 하지 않는 게 바로 자신이었다.

아무리 절제력이 없어졌다고 해도, 차재희를 밀쳐 내지 않은 건 자신 또한 그 상황에 큰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아니, 정정하자. 이수는 생각할 때만큼은 스스로를 속이는 짓을 그만두기로 했다.

어제 그와 키스하던 기억은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히 살아나는 중이었다. 그냥 거부감을 느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 또한 원했다. 차재희와 혀를 맞대고 숨을 섞기를 원했다.

그래도 술 때문이라고, 인간도 짐승이니 본능에 반응해서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다고 변명하면 모든 게 쉬웠다. 하지만 이수는 그렇게 단순히 사고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욕구에는 원인이 있다. 식욕은 배가 고파서 혹은 좋아하는 음식이라서. 수면욕은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혹은 도피성 방어 기제로 인해서. 행동의 근거가 신체적일 수도, 정신적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럼 차재희와 키스하고 싶은 욕구는 어디서 나온 걸까. 성욕? ……애정?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수업도 빠진 채 오랜 시간 고민했지만 답이 나오질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시간이 필요했다.

침대와 작은 책장, 테이블과 협탁 그리고 화병. 이수의 마음은 18년간 머물렀던 병실만큼이나 황량했다.

그는 창밖으로, 휴게실의 티브이로 많은 것들을 접했다. 기쁨, 슬픔, 사랑. 남들은 쉽게 앓고 지나치는 것들을 모두 간접적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한 감정들을 자신의 세상에 들여온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수는 차재희를 향한 자신의 마음에 알맞은 이름을 붙일 수가 없었다.

이수는 화요일, 수요일 이틀 동안 재희를 피했다. 목요일엔 프랑스어 수업을 빠지기까지 했다.

생각을 정리하기 전까지는 그를 마주 보고 싶지 않았다. 까딱했다간 또 다른 실수를 저질러 버릴 것 같아서였다. 문제에 직면하길 좋아하는 서이수답지 않은 태도였다.

하지만 그를 만난 후로는 늘 그랬다. 차재희는 서이수를 자주 이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수는 자신이 지금 이상하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렇게 깊이 고민하는 동안 시간이 흘렀다.

금요일. 라테르에 대규모 패치가 예고된 날이다. 이수는 새벽 4시부터 이어진 점검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아직도 아파요? 선배, 전화 좀 받아 봐요. 왜 그래요? 제가 잘못했어요.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내던 차재희는 이제 포기한 건지 연락이 없었다. 그를 무시하는 것이 어른스럽지 않은 태도라고 생각했으나 한편으로는 여태 많이도 씹었는데 이제 와서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신유진 연락도 자주 씹는데 차재희라고 뭐 다를 거 있나. 그렇게 합리화해 보지만 마음 한편은 여전히 찝찝했다.

이수는 라테르 커뮤니티를 둘러보며 보이스톡을 연결했다. 탱커인 김똘복과 서브 탱커&딜러인 타격, 메인 딜러인 5CPR 그리고 힐러. 네 명은 각자 마이크를 켜 둔 채 자기 할 일을 했다. 게임 내에도 음성 채팅이 있었지만, 서버 다운이 염려되어 퍼스트 클리어를 도전할 땐 보이스톡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이수는 문율을 파티에 영입한 게 라테르를 시작한 후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 으음. 막넴은 인간형인 것 같아요. 한 손에 칼 들고 있고, 형태 변화 한 번 있는 것 같고요…….

헤드셋 너머로 문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지금 패치 파일을 뜯어보는 중이었다. 패턴까지는 알 수 없었고 가능하다고 해도 알아보려 하지 않겠지만, 암호화되지 않은 채 올라오는 렌더링 이미지는 라테르 게임사인 플렉스에서 암암리에 공개하는 힌트 파일이었다.

보통 기자들이 가장 먼저 패치를 분해해 커뮤니티 사이트에 게시하곤 했지만, 문율 덕분에 이수는 남들보다 한발 빠르게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인간형 어떤 거 있었지? 아르템, 로드리고, 갈바트로스.”

─ 크로커다일이랑 그… 그거. 그거. 그거.

─ 그림자 왕이요?

─ 어어, 맞아. 야. 씨팔. 무패턴일 수도 있겠는데?

“그러게. 똘복 님, 그왕 잡아 봤어요?”

패턴이 없으면 오로지 피지컬 싸움이다. 이수의 물음에 탱커 김똘복이 대답했다.

─ 아니요. 그왕 끝나고 시작해서요. 라벤에 자료 남아 있나? 한번 찾아볼게요.

“네. 힐러랑 타격은 알지?”

─ 넵, 알아요!

─ 좆밥이지.

그 말에 정보 사이트를 뒤지던 이수가 코웃음을 쳤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타격을 비웃었다.

“야. 너, 씨발. 그때 갈 때마다 똥 싸 놓고 무슨 좆밥이래. 너 때문에 던초 천 장 썼잖아, 씹새끼야.”

타격은 그 말을 못 들은 척했다. 던초는 인스턴트 던전 초기화 주문서로, 개당 현금 만 원꼴 하는 아이템이었다. 라테르는 던전에 들어가 첫 번째 보스3)를 클리어하는 순간부터 재입장 제한 시간이 걸리는데, 그 때문에 랭킹작에는 던초가 필수였다. 마지막이나 두 번째 보스에서 삐끗하면 재입장을 해서 첫 보스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그림자의 왕 던전이 진행되는 두 달 동안 타격이 정말로 개 민폐를 끼쳤다. 덕분에 이수는 던전 초기화 주문서를 구입하는 데에만 천만 원가량을 썼다.

타격, 김똘복, 힐러. 이수의 고정 팟은 게임 인생을 그에게 바치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은 사람들이었다. 이수는 플레이에 필요한 모든 아이템과 최신형 데스크톱, 생활 유지비를 제공하고 그들은 이수에게 최상의 컨트롤과 팀워크로 보답하는 관계다.

그러므로 이수가 마땅히 지불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때 타격은 좀 심했다.

라테르에 집중하다 보니 복잡한 생각이 점점 잊혀져 갔다. 오후 1시. 연장 점검이 끝나고 서버가 열렸다. 이수는 토요일 오후 9시까지 컴퓨터 앞을 떠나지 않았다.

명불허전. 신규 던전의 퍼스트 클리어는 WASD 길드의 차지였다.

* * *

월요일이 밝았다. 차재희와 키스한 지 딱 일주일 되는 날이었다.

먹구름 낀 하늘에서 보슬비가 내렸다. 투둑, 툭 빗방울은 비닐을 때리고 종종 이수의 뺨에도 날아와 박혔다. 수온이 미지근했다. 일기 예보를 보아하니 거칠어지진 않을 것 같아 이수는 우비를 쓰고 나왔다.

한강에서 사국대로 이어지는 자전거 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비 오는 날 자전거를 타는 정신 나간 인간은 흔치 않다. 천천히 길을 따라 달리는 동안 머릿속에선 쉴 새 없이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가라앉길 반복했다.

단순히 욕망에 사로잡혀서라고 하기엔, 객관적으로 서이수는 성욕에 지배되는 인간이 아니었다. 스스로 해결하는 일도 드물었고 그쪽으로 관심이 많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차재희를 좋아한다고 치자니, 말이 안 됐다. 그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 대부분은 부정적이었다. 귀찮고 성가시고 짜증 나고. 귀엽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편하다는 게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잖아.

그럼 대체 뭐지. 고민 끝에 이수는 가장 큰 가능성으로 각인 효과를 꼽았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 오리가 가장 먼저 본 짐승을 어미로 인식하고 따르는 것처럼, 자신 또한 생에 처음으로 맛본 강렬한 쾌감을 차재희와 동일시한 것이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차재희를 볼 때마다 성적 흥분을 느끼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 말이 됐다. 이성적으로는 친구라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키스해선 안 된다고 소리치면서도 신체적으로는 입을 벌리고 있는 자신을 정말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이수는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자신을 똑 닮은 아이를 낳아 제가 받지 못한 사랑을 주고, 세상 누구보다도 꽉 찬 어린 시절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애인이 없을 땐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즐기는 신유진 덕분에, 이수는 몸 가는 데 마음 간다는 말의 뜻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걱정이 됐다.

이렇게 차재희와 계속 얽히다가 서로 좋아하게 된다면 어떡하지. 차재희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 어떻게, 뭐, 생식기를 떼어 내고 인공 자궁을 이식해도 애를 낳을 순 없다. 그리고 또한, 자신은 재희와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간단하다.

차재희는 술을 마시면 개가 되고, 그런 그에게 자신은 쉽게 동조한다. 그걸 해결하고 싶다면 그런 상황에 처할 일이 없도록 만들면 된다. 어렵지 않다. 이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자전거를 현관 지붕 아래에 세워 두고, 우비를 벗어 물기를 털어 냈다. 책이 젖지 않도록 방수 백에 담아 가방에 넣은 후에 로비로 들어섰다.

“선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차재희가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손에 바디 타월 같은 커다란 수건을 든 채로.

이수는 문득 얼마 전 일을 떠올렸다. 그날도 비가 왔고……. 차재희는 수건을 들고 로비를 서성거렸었다.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날 기다렸던 거구나.

멍하니 시선을 주고 있으니 재희가 다가왔다. 수건으로 조심스레 이수의 뺨에 튄 빗방울을 닦았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종아리와 발목까지 꼼꼼하게 물기를 지워 냈다.

“안 추워요?”

차재희의 다정한 태도는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연인을 다루듯, 감기라도 걸릴까 저렇게 조심스럽게……. 가까스로 세워 둔 가설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심기가 불편해진 이수가 재희를 일으켜 세웠다.

“차재희. 나한테까지 이럴 필요 없어.”

“……이럴 필요?”

“쓸데없이 이렇게 신경 쓸 필요 없다고.”

“…….”

차재희는 입을 다물었다. 눈을 내리깔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이 또 묘하게 속상해 보여서 이수는 그의 손에서 수건을 빼앗아 들었다.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어쨌든 고마워. 올라갈게.”

그래도 눈치는 있는지 재희도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같이 가요.”

강의실을 향해 걷는 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참을 수 없이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차라리 무시할 때가 나았다. 선을 넘어 버린 친구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이수는 알지 못했다.

어느새 독서 문화의 이해 수업의 발표가 다음 주로 다가와 있었다. 교수에게서 USB를 받아 든 이수가 새삼 시간의 흐름을 상기했다.

수업이 끝나고 세 사람은 마지막으로 과제 이야기를 나눴고, 공학관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은 후 헤어졌다. 이수는 저를 불러세우는 재희를 무시하고 도망치듯 인문대로 향했다. 너무 이상해 보이나,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 당장은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리고 오후 5시 반, 컴퓨터 개론 수업이 끝났다. 디지털 강의실을 나오던 이수는 벽에 기대선 차재희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백팩을 메고 손에 휴대폰을 꽉 쥔 재희가 이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황해서 바라보고만 서 있으니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선배. PPT 다 만들었는데 집에 가기 전에 한 번만 봐 주세요.”

다행히도 재희는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성적에 미친 대학생 1, 혹은 2를 맡은 성실한 차재희. 안심한 이수는 계단에 걸터앉았다.

옆에 바싹 붙어 앉은 재희가 긴장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조작했다. 메일함에 보내 둔 읽기 전용 파일을 다운받아 실행하고, 이수에게 건넨다.

표지가 왜 저래……? 이수는 순간 제 눈을 의심하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아주 놀라운 결과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페이지가 휙, 휙, 넘어갈수록 손길이 거칠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장까지 확인했을 때, 이수에게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희야.”

“네.”

빠드득, 휴대폰을 틀어쥔 손에 파랗게 힘줄이 돋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긴 한숨을 내쉰 이수가 최대한 짜증을 억누르며 그에게 물었다.

“나랑 다시 같은 팀 됐을 때, 너 나한테 뭐라고 했지?”

“둘보단 셋이 낫다고, 도움이 되겠다고요.”

“그랬지? 그런데…….”

이게 뭐야? 이수는 참담한 심정으로 다시금 PPT를 넘겼다. 뒤에서 앞으로, 자신이 본 끔찍한 레이아웃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걸 확인하는 동안 그는 오랜만에 열이 받았다. 마침내 고딕 양식 글씨체로 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는 첫 페이지로 돌아왔을 때, 이수가 폭발했다.

“니가 사람 새끼야? 씨발, 해마 좆만큼도 도움이 안 되잖아!”

분노를 주체 못 해 고성이 터져 나왔다. 버럭 소리를 지르자 재희가 입매를 늘리며 받아쳤다. 이수가 익히 아는 얄미운 차재희였다.

“열심히 했는데 왜 말을 그렇게 해요?”

“열심히만 하면 뭘 해! 잘해야지!”

속이 터졌다. 아홉 살짜리 초등학생이 만들어도 이것보단 더 잘 만들겠다. 어떻게 저따위 센스로 여태 과탑을 했지? 이수는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아무리 내용이 더 중요하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이 눈으로 보고 이해할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차재희가 만든 PPT는 정말 가독성이 최악이었다.

메일로 별 같잖은 질문 던질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이수는 재희가 보냈던 수많은 질문들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한테 원본 보내.”

“선배가 고치게요?”

“그럼 씨발, 이딴 걸로 발표하겠냐? 눈이 있으면 보고 말해.”

“선배가 고치면, 내 이름 뺄 거예요?”

거기까진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말을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차재희 이 새끼가 한 게 대체 뭐야. 제일 중요한 걸 이따위 퀄리티로 만들어 놓고 A+ 받길 기대하는 건가? 양심이 아주 비트 코인 수준이었다.

차재희의 과제 참여도 점수를 평가하자면 10점 중 1점이다. 지옥에서 올라온 가시성의 프레젠테이션은 결코 용납받을 수 없다. 몽골인이 와도 글씨를 못 읽어 낼 판이었다.

그런 사고의 흐름을 알아챈 듯, 재희가 이수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빼앗아 가며 말했다.

“안 돼요. 선배가 알려 주세요. 제가 고칠게요.”

“고치는 건 니 양심이나 뜯어고치고. 원본 내놓으라고.”

차재희가 매일 슬랙스만 입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센스가 좆도 없으니 그런 거였어. 이수는 빠르게 납득하며 재희를 채근했다.

“원본, 메일로 보내 놔.”

“싫어요.”

“씨발, 그럼 뭐 어쩌자고.”

“옆에서 알려 주시면 제가 고칠게요. 금방 배워요.”

굳게 다물린 입매가 고집스러웠다. 한숨을 폭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수는 석 달 동안 차재희가 제 고집을 꺾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진짜 징글징글하다. 디지털 강의실로 들어가는데 재희가 그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짜증을 내며 돌아보니 단정하게 웃는 낯에 보조개가 팼다.

“원본 파일이 집에 있는 데스크톱에 있어요. 집으로 가요.”

“그딴 좆같은 PPT, 누가 훔쳐 간다고 읽기 전용으로 만들어?”

“선배가 알려 줬잖아요. 읽기 전용으로 저장하는 거.”

첫 번째 팀플 이야기였다. 이수가 그에게 맡겼던 교수의 USB에는 편집 불가능한 파일이 들어 있었다. 혹시라도 뒤통수 맞을 가능성을 고려한 습관적 행위였다. 그걸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찌질한 새끼. 이수가 욕을 씹으며 재희의 뒤를 따랐다.

그의 아우디 A7에는 자전거 캐리어가 없어서 이수는 자전거를 놓고 가야만 했다. 두 사람은 곧 빗방울이 마르지 않은 세단에 올라탔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차재희는 운전을 정말 얌전히 했다. 아니, 좋게 말하면 얌전히고 이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속 터지게 답답한 스타일이었다. 완벽한 정속 주행. 남들은 주황색 불빛이 스타트 신호라도 되는 양 미친 듯이 달려드는데 차재희는 그런 게 없었다.

“저녁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선배?”

“밥 처먹을 시간에 과제나 해.”

“금방 끝날 거예요. 밥 먹고 가요. 맛있는 거 해 줄게요.”

이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 집에서 밥이 목구멍에 넘어갈까 싶었다. 저 혼자 각인 효과라고 결론 내리긴 했으나, 어쨌든 비이성적으로 입술을 맞대고 흥분했던 공간에 다시금 발을 들인다는 사실이 못내 찝찝했다.

재희가 옆에서 종알거리는 동안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전처럼 지하 주차장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문이 열리자 레오는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이수를 반겼다.

“선배를 기억하나 봐요.”

“레오야, 니 형아가 너 바보 취급하네.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이수가 비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신발을 벗던 재희가 놀란 듯 그를 돌아봤다.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표정이다. 운동화를 벗던 이수가 눈을 치떴다.

“뭐.”

“그거 다시 해 봐요, 선배.”

“뭘.”

“형아요. 엄청 귀여웠어요.”

인상을 찌푸린 이수가 레오를 들어 올렸다. 콧잔등에 입을 맞추곤 차재희에게 들으라는 듯 속살거렸다.

“레오야, 니 형아는 가끔 저런 개소릴 해.”

이옹.

긍정하는 레오를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뒤에서 헛숨을 뱉은 재희가 그를 따라 들어왔다. 이수는 곧장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집처럼 데스크톱의 전원을 켜고 레오를 쓰다듬고 있으니 옷을 갈아입은 차재희가 들어왔다.

“마실 거 줄까요?”

“따뜻하고 단 거.”

“핫 자몽 티 해 줄게요.”

“그러든지.”

이수는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레오와 장난을 쳤다. 재희는 트레이에 자신 몫의 대추차와 핫 자몽 티 그리고 접이식 의자를 들고 돌아왔다. 두 사람은 자리를 바꿨다. 재희가 편집 가능한 파일을 열고, 이수는 옆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며 훈수를 두었다.

금방 배운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진도가 빨랐다. 한 번만 알려 줘도 차재희는 다음 페이지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같은 동작을 실행했다.

대화를 나누지 않을 때도 서재를 둘러싼 공기가 평온했다. 이수는 재희의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숨결이 섞인다. 지척에서 들리는 차분한 음성은 듣는 사람을 나른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타인하고 밀폐된 공간에 있으면서 편안함을 느낀 적이 몇 번이나 있더라.

“이 정도면 됐어요?”

“어.”

이수가 눈가를 꾹꾹 누르며 대꾸했다. 완벽했다. 서이수 스타일로 재탄생한 PPT는 수정 이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탁월한 가독성을 자랑했다. 이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가서 잠깐 쉬고 싶었다. 한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서 던전을 돌아야 했다.

“나 간다.”

“선배.”

언제나처럼 다정한 목소리. 재희가 손을 뻗었다. 이수의 가방끈을 붙잡는다. 관성을 받은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가 휘청였다. 왜. 이수가 재희를 빤히 내려다봤다.

“가지 마요.”

“……뭐?”

과제에 집중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당황스러웠다. 마치 떠나는 연인을 붙잡는 듯한 문장도, 긴장감이 역력한 목소리도. 너 왜 그런 얼굴로 그런 말을 해. 내가 잘못 들은 거지? 그렇게 되묻기도 전에 재희가 안달 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랑 할 얘기 있잖아. 밥 먹고 가요.”

“무슨…….”

“저번 주에 있었던 일이요. 그것 때문에 선배가 나 계속 피했잖아.”

차재희는 이런 일에 대해서만큼은 회피하려 들지 않는다. 마른 입술을 축인 이수가 물었다.

“……지금 말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그러나 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요. 밥 먹고 가요……. 조금만 더 있다가 얘기 끝나고 가요, 선배.”

무슨 거창한 말을 하려고 마음의 준비까지 필요해. 이수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입을 다문 채 저를 올려다보는 차재희의 얼굴이 간절해 보였다. 그도 저처럼 많이 고민한 것 같았다.

일련의 사고들에 대해서 정확한 의견 교환이 필요했다. 차재희도 술주정을 받아 준 자신의 행동을 애정으로 착각했을지 모를 노릇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재희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진다. 반면 이수는 급격한 피로감에 젖어 들었다. 거실로 나와 소파에 드러누웠다. 휴식이 필요했다. 축 늘어진 채 눈을 감고 있으니 재희가 물어 왔다.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매운 거 빼고 아무거나.”

“간단한 거요?”

“어.”

잠시 고민하던 재희가 되물었다.

“에그 누들이랑 소고기 볶음 해 줄까요?”

“그러든지.”

왠지 모르게 혼자 신이 나 보였다. 앞치마를 두른 차재희가 주방으로 사라졌다. 이수는 눈을 감았다. 잠깐 쉬려고 했는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신경 쓰였다. 피곤해서 그런지 소음이 더 날카롭게 느껴진다. 결국 뒤척거리던 이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통이 이는 이마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재희가 다가온다.

“아파요?”

“시끄러워서.”

“침대에 잠깐 누워요, 선배. 이따가 다 되면 깨워 줄게요.”

그 말에 이수가 재희를 올려다봤다. 타인에게 쉽게 침실을 내어주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긴. 저번에도 그랬지. 차재희의 침대에 몇 명이나 누웠다 갔을까. 새삼 리키처럼 사람을 참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멍하니 생각하고 있는데 재희가 이수의 이마를 짚었다. 물기가 묻었음에도 그의 손이 더 뜨거웠다. 열을 재 보는 듯하더니 이수를 일으켜 세워 침실로 밀어 넣었다. 조도가 낮은 간접 등을 켜고는 편하게 있어요, 하고 문을 닫고 나간다.

그리고 힘없이 걸어가 침대에 누운 이수는……. 혼란에 휩싸였다.

‘선배, 섰어요……. 알아요?’

키스만 한 게 아니었다.

‘술, 마셨잖아요. 우리.’

포근한 침구의 감촉과 기억 속에 남은 짙은 섬유 유연제 냄새. 차재희의 체취가 한껏 밴 그 공간에서 잃어버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살결을 핥던 질척이고 뜨거운 혀. 밀어내긴커녕 좀 더 거칠게 집어삼켜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자신.

‘내가 쓰레긴가 봐.’

그렇게 속삭이면서 아래를 잡고 흔들던 뜨거운 손. 그 안에 흠뻑 사정하며 몸을 떨었던… 밤.

“씨발.”

경악한 이수가 욕을 씹었다. 둘 다 미친 거 아니야? 기억이 돌아오자 넋이 나갔다. 그날 밤의 일이 술 때문이든 성욕 때문이든, 하여튼 원인을 차치하고 본 결과가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솔직하게 인정해야만 했다. 차재희의 손을 빌린 자위─이걸 자위라고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는 이수가 여태껏 행한 자기 위로들 중 최고였다는 것을. 전에 겪어 본 적 없는 벼락같은 쾌락을 선사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처음 라테르를 플레이했을 때처럼 급진적인 중독성을 발휘시키는 짜릿한 경험이었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만으로도 아래가 저릿했다. 이수는 절반 넘게 힘이 들어간 페니스를 바라보며 욕을 씹어 삼켰다. 다급히 휴대폰을 꺼냈다.

“선배.”

재희가 나타났을 때는 다행히도 소리를 줄인 채 들은 반야심경이 확실한 효과를 발휘하고 난 다음이었다. 이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차재희를 돌아봤다. 허리에 두른 앞치마가 축축이 젖어 있었다. 손을 닦은 그가 고갯짓했다.

“다 됐어요.”

“어…….”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나는데 별안간 또 이마에 손이 닿았다. 언젠가부터 아무렇지 않게 스킨십을 해 오고 있었다. 그 언젠가가 아마 그날이겠지. 멍하니 재희를 올려다보다 손을 쳐 냈다.

“왜 자꾸 만져.”

“……아파 보여서요.”

“신경 꺼.”

무심한 말투에 재희가 입매를 늘렸다. 먼저 뒤돌아 나가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아파 보이질 말든가요. 나와요.”

저걸 진짜 한 대 쳐 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며 뒤따랐다. 주방으로 가니 오늘은 바가 아닌 좌식 테이블에 식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릇 한가득 담긴 에그 누들과 소고기 볶음. 불미스러운 사건도 잊고 내심 감탄했다. 비주얼이 대단한데 심지어 맛도 좋았다. 베이징에서 먹어 본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가벼운 취미 같지 않았다.

“맛있어요?”

“먹을 만해.”

칭찬에 박한 이수였기에 재희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듯 웃었다. 입이 짧은 이수는 에그 누들 반 접시와 소고기 볶음 두 점을 먹고 젓가락을 내려놨다. 2인분치고는 양이 많았다. 저걸 누가 다 먹을까, 싶었는데 차재희는 식사도 성실히 했다.

밥 잘 먹어서 예쁘다는 게 이런 거구나. 술에 취하면 쓰레기가 되지만 외관은 참 그럴듯했다. 이수는 턱을 괸 채 재희를 한참이나 관찰했다.

밖에서와 달리 집에서의 차재희는 살짝 흐트러져 보였다. 대충 쓸어 넘긴 머리칼, 잘 입지 않는 핏한 티셔츠 아래로 드러나는 근육의 결. 단정하고 또 다정해 보였던 인상과 다르게 정제되지 않은 남자의 매력이 느껴졌다.

“……왜 그렇게 봐요.”

“잘 먹길래.”

데구루루 눈을 굴린 재희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소고기 볶음은 아직 절반가량 남아 있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이수에게 물었다.

“맥주 마실래요?”

그리고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이수는 진심으로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술 때문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데, 또 술을 마시자고? 진짜 알코올 중독자 아니야? 이수가 눈매를 좁혔다.

“제정신이야?”

“……맥주 마시자는 게 뭐가요.”

대꾸가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차재희야말로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듯하다. 놀러 온 줄 아나.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니 술버릇을 생각해. 지금 내가 밥이나 먹자고 여기 앉아 있는 거 아니잖아. 술 마시고 좆 비벼 놓고 또 맥주 소리가 나와?”

그 말에 재희가 입을 벌렸다. 당혹감이 스쳤다. 키스는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도 해, 그 메시지에 딱 거기까지만 기억하는 줄 알았다.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말하는 걸 보니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면 이수가 자신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럼… 왜? 왜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하지?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희미한 기대감을 품는 재희에게 이수가 경고했다.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술버릇 고쳐, 차재희. 아무한테나 그렇게 들이대고 집적거리다가 큰일 나. 전자 발찌 차고 싶어? 병원이라도 가 보라고.”

말하다 보니 차재희가 정말 운이 좋았다 싶었다. 술자리란 술자리마다 빠지지 않고 간다는데 저렇게 질척거리면서도 여태 말 한 번 나온 적이 없다는 게 대단했다. 평소 이미지 관리를 잘해서 그런 걸까. 그럴지도 몰랐다.

아니면, 받아 줄 만한 사람한테만 그랬을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이상하게 속이 끓었다. 변태 새끼……. 노려보고 있으니 재희가 한참이나 있다가 물었다. 그 또한 기분이 좋지 않은 듯 표정이 굳은 채였다.

“선배 눈에는, 내가 발정 난 개새끼처럼 보여요?”

“그럼. 아니야?”

“…….”

“……아니냐고.”

술만 처마시면 키스하고 또……. 그 뒷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어서 삼켜 버렸다. 이수의 말에 재희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몇 번이나 쓸어내린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이수도 짜증이 났다. 딱 봐도 맞는데 아니라고 할 것 같아서였다. 한참이나 지난 후에 입을 연 재희는 정말로 이수의 말을 부정했다. 다만 그 부정의 방향이 이수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아무한테나 그러지 않아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저.”

정말 확실한 사실인 것처럼 단호한 목소리였다. 어쩐지 그 뒤에 나올 말이 예상되었다. 이수의 낯빛이 서서히 굳어진다. 아니야. 차재희는 내 생각대로 움직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이번에도 아닐걸. 하지만 처음으로, 차재희는 이수의 예상과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행동을 했다.

“선배라서 그랬어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충격적인 문장이었다. 그를 친구로 인정한 이수를 조롱하듯, 여태까지의 관계를 모두 비틀어 버릴 수 있는 말이었다.

“선배라서 키스하고 싶었어요.”

“차재희.”

“아무나 아니고, 선배라서…….”

“그만해.”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이수는 재희를 연애 대상으로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남자와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러니 그가 자신을 정말 좋아한다면 여기에서 관계를 끊어야 했다.

이수는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돌려줄 수 없는 답을 기대하는 이를 곁에 두고 싶지 않았다. 기다림은 상처였다. 뼈아프게 새겨진 괴로움을 상대방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앞서, 이수는 재희와의 관계가 틀어지길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았다.

아직, 아직 여지가 남아 있었다. 이것을 고백이 아닌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후배의 고민으로 받아들일 여지. 그에게 혼란을 부여하는 존재가 자신이라는 사실만 빼면 이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걸 정체성 확립에 대한 고민으로 받아들이려면 그 전에 확인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이수가 조심스레 묻는다.

“너… 원래 호모 섹슈얼이야?”

“그게 중요해요? 지금 중요한 건, 내가.”

“닥치고 대답이나 해 봐. 맞아, 아니야.”

불만스레 입을 다물었던 재희가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저었다.

“선배랑 이렇게 되기 전까지는, 이성애자인지 알았어요.”

“말조심해. 우리 뭐 된 적 없으니까.”

“…….”

마뜩잖게 쏘아보는 눈빛을 뒤로하고 이수가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남자랑 스킨십한 거, 내가 처음이었어?”

“……네.”

“그때, 부산에서… 내가, 너한테? 그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차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답을 찾았다. 둘 다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문제의 발단은 그를 리키로 착각했던 자신의 실수였고, 순진한 차재희는 그 낯선 경험에 속절없이 휩쓸리고 만 것이었다. 이수는 자신의 가설을 설파했다.

“차재희. 각인 효과라고 들어 봤어?”

재희의 눈빛이 불안하게 떨려 왔다. 그를 직시하며 이수는 말을 이었다.

“갓 태어난 오리들은 처음 본 생명체를 부모로 인식하잖아. 알지? 이것도 그거랑 비슷한 거야.”

“…….”

“내가 너한테 저지른 실수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서, 나를 볼 때마다 그 기억이 떠올라서, 딱히 나라서가 아니라 어쩌면 양성애자일 수 있는 네가 성적으로 처음 접촉한 남자가 나라서, 나를 볼 때마다 그런 욕구를 느끼는 거라고. 파블로프의 개처럼.”

이수의 말투는 확고했고, 확신에 차 있었다. 분명해. 그럴 수밖에 없다. 객관적으로 봐도 자신은 차재희에게 어떠한 애정을 불러일으킬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욕하고 다투고 애처럼 티격태격하기나 했지, 차재희의 마음을 빼앗을 정도로 정이 가는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저게 맞았다. 차재희의 표정도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혼란스러워 괴로워하고 있는 얼굴. 이수는 자신의 가설에 설득력이 더해지는 것을 느꼈다.

“너도 확신 못 하잖아. 이게 어떤 감정인 건지. 그냥 추측하는 거지.”

“선배는, 몰라요. 내가 지금 무슨 생각 하는지.”

“내가 니 생각은 당연히 모르지. 근데 헷갈리지 마. 이거, 좋아하는 감정 아니고 성욕이야. 너한테나 나한테나, 서로 접해 본 적 없는 신문물 같은 거라서 호기심이 생기는 거라고.”

“…….”

재희는 입을 꾹 다문 채 듣기만 했다.

“Curiosity killed the cat.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 알아? 고양이는 목숨이 아홉 개인데, 아홉 개의 목숨을 모두 날려 버릴 정도로 호기심이 위험하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여기서 접어. 잊어. 너하고 나 사이에 있었던 일.”

재희에게서 긴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수는 그가 결론을 내리길 기다렸다. 말로는 설득 불가능한 문제였다. 스스로 깨닫기 전까지는.

재희는 이마를 감싸 쥔 채 테이블만 내려다봤다. 생각이 많아 보인다. 그런데 잠시 후 지잉, 짧은 진동과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눈동자에 언뜻 알 수 없는 빛이 스쳤다. 이내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선배, 43층까지 걸어 올라갈 수 있어요?”

“왜 그딴 짓을 해.”

뜬금없는 소리였다. 말을 돌리는 건가. 이수가 짜증스럽게 대꾸하니 재희가 되물었다.

“못 가요?”

“심장 마비로 뒤지는 꼴 보고 싶으세요?”

43층까지 걸어 올라갔다간 새로 갈아 낀 심장이 고장 날지도 몰랐다. 그런 미련한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이수의 뾰족한 반문에 재희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자고 가요, 그럼.”

엘리베이터 결함으로 인한 시스템 긴급 점검으로 전 층의 승강기를 운행 종료합니다. 안전을 위한 조치이니 입주민 여러분의 많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 관리소장 발신

“아니, 씨발. 장난치나.”

메시지를 본 이수가 욕설을 터트렸다. 관리비를 1년에 몇천씩 내는데 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 하느냐고 짜증을 냈다.

재희는 어깨를 으쓱하며 어쩔 수 없죠, 하고 중얼거렸는데 이수는 그 태도에 더 열이 받았다. 자기 일 아니라 이거지. 살기 어린 시선이 재희를 쏘아봤다. 니코틴이 절실했다. 남의 집임을 고려해 인성 밑바닥에 깔린 배려심을 끄집어냈다. 이를 악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담배. 펴도 돼?”

차재희의 집은 흡연 청정 구역이었다. 그러나 재희는 빡친 것이 분명한 이수에게 밖에 나가서 피우고 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침실 안쪽 화장실로 가요.”

이수가 말없이 일어나 침실로 사라졌다.

식탁 앞에 혼자 남은 재희는 그의 말을 곱씹었다. 각인 효과? 오리? 파블로프의 개? 저를 무슨 짐승 취급하는 서이수의 발언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사람을 뭐로 보고……. 한숨이 튀어나왔다. 속이 답답했다.

네 생각을 어떻게 아냐고 짜증 내는 이수에게 솔직하게 소리치고 싶었다. 선배가 놓고 간 옷을 붙잡고 매일 밤 자위한다고, 몇 번씩이나 사정하고도 욕구가 가시질 않아 또다시 그 얼굴을 떠올린다고. 선배가 무심하게 대꾸하면 속이 아리고, 다른 사람을 보면서 웃을 때마다 돌아 버릴 것 같고, 빤히 보면 그대로 입을 맞추고 싶은데, 이게 단순한 호기심이냐고. 그게 맞느냐고…….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이 감정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인정하는 순간 그대로 떠나가 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만 석 달이 걸렸다. 이수를 잃고 싶지 않은 것은 재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일단은 기다려야 했다.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자신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령 자신이 바라는 대로 그의 연인이 될 수 없다 하더라도 재희는 그저, 이수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이 감정을 들켜서는 안 됐다.

족쇄라도 단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졌다. 재희는 긴 한숨을 내쉬며 자책했다. 실수였다. 그날 밤의 일을 기억할 줄은 몰랐는데…….

그러는 와중에도 작은 실마리를 붙들고 질투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재희는 이마를 감싸 쥔 채 아까의 대화를 떠올렸다.

‘너한테나 나한테나, 서로 접해 본 적 없는 신문물 같은 거라서 호기심 생기는 거라고.’

유진은 이수가 지금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 했었다. ‘리키’는 현재 진행형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재희는 이수가 동성애자, 혹은 양성애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한테나’? 그 말은 남자와의 접촉이 서이수에게도 처음이었다는 소리 아닌가. 그럼 리키, 그 남자는? 만났던 남자가 아니라면, 설마 좋아하는 사람일까? 나처럼… 선배도 그를 짝사랑하고 있는 건 아닐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과방에서 이수와 키스한 이후로 재희는 얼굴도, 나이도 모르는 리키라는 남자를 떠올릴 때마다 속이 뭉개지는 느낌을 받았다. 괴로웠고, 질투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신문물이라니. 그럼 리키는 대체 뭐 하는 새낀데…….

재희가 일그러지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알고 싶고, 묻고 싶고, 알려 주고 싶고, 안달 나 미칠 것 같았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하루하루가 온통 서이수였다.

* * *

담배를 두 대나 태우니 기분이 한결 나았다. 엘리베이터 고장은 차재희 말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빌어먹을 우연이라고 생각하자. 머리를 털어 잡생각을 지워 내며 나갔다. 테이블을 치우던 재희가 이수에게 턱짓했다.

“먼저 씻어요.”

이수는 말없이 욕실로 들어갔다.

토요일 오후에 퍼스트 클리어를 달성하고, 잠깐 수면을 취한 후 재공략. 월요일 새벽까지 쉬지 않고 달렸던지라 피로도가 극에 달해 있었다. 이수는 신체 군데군데가 울긋불긋해질 때까지 뜨거운 물을 맞았다.

수건 장에는 수건이 딱 두 개 남아 있었다. 작은 걸로 머리를 닦고, 베스 타월을 쓰려고 보니 끝에 레오라고 쓰인 네임택이 보였다.

차레오 씨 전용 욕실인가……. 세면대 밑에 있는 고양이 화장실을 힐끗거리며 문을 열었다. 살짝 열린 틈으로 재희를 불렀다.

“차재희. 나 옷 줘.”

거실이 잠잠했다. 이옹. 나오라는 주인은 안 나오고 레오만 나타났다. 이수가 레오의 턱을 긁으며 다시 재희를 불렀다.

“차재희.”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아직 씻고 있는 것 같았다. 이수가 몸을 대충 닦고 머리에 수건을 덮어쓰고 나왔다. 아무거나 꺼내 입으면 되겠지. 물기를 털어 내며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레오가 곁을 따른다.

불을 켜고 티셔츠가 놓인 선반으로 다가갔다. 홈웨어인 듯한 흰색 반소매 티를 꺼내 머리를 집어넣었다. 이옹. 레오가 발목에 묻은 물기를 핥았다. 그리고 조용한 걸음 소리와 함께 재희가 나타났다.

이수는 피곤에 절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목에 검은색 수건을 두른 차재희는 장골 아래에 헐렁하게 걸쳐진 트레이닝 바지만 입은 채였다. 보기 좋은 상반신이 눈길을 잡아끈다.

이수는 말없이 팔을 끼워 넣으며 재희의 근육을 감상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 차재희가 시체처럼 굳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눈동자가 어디를 향했는지도. 이수가 동공 지진을 일으키는 재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털 없이 매끈한, 짙은 분홍색의 좆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흔한 크기는 아니다. 눈을 몇 번 깜빡인 이수가 짧게 웃었다. 이 새끼, 놀랐나 보네.

“왜. 너무 커?”

“…….”

재희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시겠지. 이수의 페니스는 한국 남성의 평균 성기 사이즈를 훨씬 웃돌았다.

차재희의 귀 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재희에게 다가갔다. 병원에서 다양한 종류의 노출에 시달린 탓에, 그는 자신의 신체를 남에게 보여 주는 일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게 차재희를 미치게 하는 줄도 모른 채 그가 으스댔다.

“재희야. 부러워?”

“……무슨.”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돌린다. 눈을 피한 재희가 변명했다.

“작아서… 되게 작아서 본 거예요.”

털이 없는 건 알았지만, 백자지인 줄은 몰랐다. 어둠 속에서 제가 만지작거렸던 것이 저런 색이었다는 사실에 재희는 충격받은 상태였다. 중얼거리는 말에 이수가 고개를 기울였다. 입가에 비웃음이 새겨졌다.

“아닌 것 같은데.”

“……선배보다 내가 더 크거든요.”

“야.”

작게 웃음을 터트린 이수가 재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축축이 젖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갈라졌다. 늘 차갑던 이수의 손이 이 순간만큼은 뜨거웠다. 신체적 반응을 참지 못하고 재희가 불안한 시선을 들어 올렸다.

“나 8인치 넘어.”

서이수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기고만장한 태도였다. 그 순간 재희는 그날 밤 맛보았던 정복감을 떠올렸다. 제 밑에서 헐떡거리던, 자존심 센 서이수.

아래로 급격히 피가 쏠렸다. 이성과 욕망이 싸우기 시작했다. 재희는 이수가 한 말을 떠올렸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 하지만 서이수는 언젠가 이런 말도 했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안 죽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마저 자신을 유혹하는 것 같았다. 이수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몸집을 부풀리는 욕망은 차재희의 절제력을 앗아 가 버렸다.

선배가 마음을 줄 때까지 기다리는 건 기다리는 건데, 만약을 위해서 보험은 들어 놔도 되지 않을까. 몸정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잖아.

급전개되는 사고 속에서 재희가 머리를 쓰다듬는 손목을 잡아챘다. 그에게서 은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이수를 움직이는 건 쉬웠다.

“선배. 그럼 누가 더 큰지 내기할래요?”

“보상이 뭔데.”

내기라는 말에 이수가 눈을 반짝였다. 그는 절대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호텔 스파나 수영장 탈의실. 많은 곳을 다녔지만, 이수는 형 서이준을 제외하고 저보다 사이즈가 큰 한국인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자신이 차재희의 아기자기한 페니스를 깔아뭉갤 것이라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 있었다. 물론 일전에 과방에서 좆을 비볐을 때 꽤 묵직하긴 했지만, 그때는 바지를 입고 있었으니까 그랬을 거다.

“작은 사람이, 더 큰 사람 소원 들어주기. 어때요?”

“좋아.”

냉큼 대답한 이수는 이미 승리자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잴 건데. 줄자 있어? 아니면 종이 같은 거나.”

“없어요. 침대로 가서 재요.”

“침대에서 뭘 어떻게 하자고.”

재희가 이수의 손목을 잡아끈다. 긴장감에 여러 번 적신 입술로 말했다.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끓는 듯했다.

“확실하게 해야죠. 세워서 직접 대 봐요.”

“미친놈…….”

떨떠름했으나 그것보다 확실한 게 없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음경은 자극에 따라 크기가 자유자재로 줄었다가 늘어나는 마술 몽둥이니까, 완전히 섰을 때 측정하는 것이 그나마 정확했다.

이미 승리의 고양감에 도취된 이수는 자신이 사자의 아가리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음…….”

그리고 침대 앞에 선 두 얼간이는 어떻게 좆을 세울 것이냐, 하는 난관에 봉착했다. 물론 그렇게 의논하는 시점에 차재희의 성기는 완벽하게 부풀어 오른 상태였기에, 사실은 이수의 페니스가 문제였다. 재희의 앞섶을 보며 이수가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넌, 씨발. 왜 벌써 섰는데?”

“습관성 발기예요. 무시해요. 누워요, 선배.”

“내가 왜 누워.”

“한쪽이 올라타서 맞대 봐야죠.”

“그러니까 왜 내가 눕냐고.”

“아, 그럼 가위바위보 해요.”

패자는 차재희였다. 잠깐 미간을 구겼던 재희는 이내 인상을 풀고 침대 위에 누웠다. 애초에 속옷을 입지 않았던 이수는 그대로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았다.

그때부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생각했다. 이제 와서야. 이수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재희를 노려봤다. 의심으로 정신이 팔리는데 아래로 피가 쏠릴 리 없었다. 무릎으로 선 채 그러고만 있으니 재희가 픽 웃었다.

“선배, 쫄려요?”

짧고 강력한 도발이었다. 그럴 리가. 쏘아붙인 이수는 좆을 가리는 티셔츠를 말아 올렸다. 겨드랑이에 꼈더니 팔을 움직이기가 불편했다. 결국 돌돌 만 끝을 입에 살짝 물고 페니스에 손을 갖다 댔다.

공기가 푹푹 찌는 느낌이었다.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이거, 씨발.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스스로 병신 같다고 자조하면서도 웃고 있는 반반한 낯짝을 일그러트려 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이건 음란한 행위가 아니라, 남자의 자존심과 목숨을 건 싸움이고 결투였다.

“세워 봐요.”

샤워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손끝은 여전히 붉었다. 재희는 침대 등받이에 기댄 채로 서이수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가느다랗고 예쁜 손가락이 먹음직스러운 성기를 휘감았다. 귀두를 살살 쓸어 만지며 자위하듯 제 것을 세운다. 분홍빛 기둥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재희는 심장이 터질 듯 뛰는 것을 느꼈다.

질척한 시선이 이수의 전신을 쓸었다. 한 뼘 길이의 흉터는 붉은색. 유두와 페니스는, 달콤해 보이는 멍든 딸기색이었다. 제일 먼저 먹어 치워야 할 것처럼 조바심을 불러일으키는 아주 야한 색이다.

이수는 눈을 내리깐 채 제 성기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답지 않게 긴장한 모습이 또 미치게 꼴렸다. 다 마르지 않은 갈색 머리칼 끝에서 물방울이 똑, 똑, 떨어져 내렸다.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린 그가 티셔츠를 악물며 손을 움직였다.

남자임이 분명한 신체였지만, 어렴풋이 드러나는 유려한 선에서 재희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얇은 근육이 붙은 허리, 부드러운 날이 선 대퇴근 같은 것들. 저와는 확연히 다른 곡선이다. 몸을 훑는 것이 느껴졌는지 이수가 눈을 들어 재희를 바라봤다.

그토록 사나운 서이수도 부끄럼을 탄다. 그의 상기된 두 뺨을 당장 빨아올리고 싶었다. 귀엽고, 또 사랑스러웠다. 서이수를 두고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정말 미쳤다고 생각하면서도 속내를 숨길 수가 없다.

재희가 조심스레 팔을 들었다. 그의 양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렸다. 매끈한 피부와 닿는 것만으로도 쌀 것 같았다. 별것 아닌 접촉에도 이수는 몸을 움칠 떨었다.

“빨리해요. 기다리는 동안 죽으면 선배가 세워 줘야 되니까.”

“발기 부전이지, 씨발. 5분도 못 기다리면.”

티셔츠를 툭 뱉어 내고 하는 말이 그거였다. 재희는 상체를 일으켜 옷자락을 둘둘 말아 다시 그에게 물려 주었다. 잠깐 입을 다물고 있었으면 했다. 그에게 눈빛으로 욕을 쏘아 낸 이수가 다시금 좆을 세우는 일에 집중했다.

눈을 감고 제 것을 어루만진다. 둥글게 말린 손가락 사이로 귀두가 부드럽게 스쳤다. 슥, 슥, 물기 없는 살갗이 마찰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재희는 딱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제 앞에서 자위하는 서이수는… 상상했던 것보다 딱 백 배, 천 배 정도 더 야했다.

재희의 허벅지 위에서 이수가 몸을 떨었다. 읏, 짧은 신음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자취를 감췄다. 기둥을 쓰는 손길이 빨라지고, 마침내 완전히 발기한 성기가 손바닥 틈새로 모습을 드러냈다.

굵은 핏줄이 선 페니스는 누구든 자랑스러워할 만큼 대단한 기세를 자랑했다. 티셔츠를 뱉어 낸 이수가 눈을 떴다. 열기에 젖은 눈동자가 수치심과 흥분에 물들어 번들거렸다.

“벗어.”

차재희는 여전히 바지를 입은 채였다. 이수가 한쪽으로 비켜섰다. 재희는 살짝 몸을 일으켜 하의와 속옷을 동시에 벗어 내렸다. 툭, 튕겨 나온 것이 제 아랫배에 부딪힌다.

“씨발…….”

이수가 경악에 찬 시선을 보냈다. 음모 아래로 드러난 그것은, 정말로 크고, 굵고, 흉흉했다. 성기를 둘러싼 핏줄도 두꺼웠고, 축축이 젖은 귀두는 거짓말을 보태 체구가 작은 성인 여성의 주먹만 했다. 이수의 본능이 소리쳤다.

졌다…….

“올라와요.”

다시 침대에 누운 재희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검붉은 좆을 내려다보던 이수는 고개를 저었다.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대 볼 것도 없었다. 대충 봐도 차재희의 것이 1인치는 더 컸다.

비참하지만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눈으로 봐도 답이 나오는데, 직접 대 볼 필요까지는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흉기 옆에서 늘 자랑스러웠던 자신의 것이 초라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확실하게 해요.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고.”

“씨발……. 내가 졌다고…….”

망연자실해진 이수의 좆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그것을 본 재희가 팔을 뻗어 그를 잡아당겼다. 불시에 끌려온 이수가 베개에 파묻혔다. 재희는 몸을 돌려 그의 위에 올라탔다. 역전된 자세로 그를 내려다본다. 하반신 위에 존재감이 묵직했다.

“꺼져.”

이수가 짜증을 내며 씹어뱉었다. 여전히 낯빛이 붉었다. 재희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몸이 떨릴 때마다 이수의 성기에 그의 음낭이 스쳤다. 깃털로 간질이는 것처럼 별 느낌도 없었지만 이수의 좆은 주제도 모르고 또 몸집을 부풀렸다. 재희가 흥분을 감추며 말했다.

“재 볼게요, 선배.”

“야, 그냥……! 읏!”

눈을 질끈 감은 이수가 입술을 씹었다. 두 성기를 움켜쥔 차재희의 손은 무척이나 커다랬고, 또 뜨거웠다. 땀이 배어 나온 축축한 살갗이 은근한 열기와 함께 비벼진다.

술도 안 마셨는데 숨을 쉬기 힘들 정도의 흥분이 일었다. 재희는 허리를 움직이며 길이를 맞췄다. 페니스가 은근히 마찰되었다. 열심히 움직였지만 이수가 온몸에 힘을 준 덕분에 좆의 뿌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재희가 손을 내려 이수의 한쪽 오금을 붙들었다.

“다리 벌려 봐요, 제대로 해야죠.”

“내가 졌… 다니까?”

확인 사살을 받을 필요까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위험했다.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아까 뭐라고 했냐, 서이수. 호기심이 어쩌고 한 건 자신이었다. 그런 주제에 좆 좀 비볐다고 온몸으로 흥분하고 있으니 차재희를 볼 낯이 없었다. 정신 차리자, 제발. 이수가 고개를 내저었지만 차재희는 막무가내였다.

“선배가 나중에 딴소리할지 누가 알아요. 얼마나 차이 나는지 봐야 해요. 내기에 응했으면 정정당당하게 싸워요. 비겁하게 꼬리 내리고 도망갈 생각 하지 말고.”

그 말을 들은 서이수가 어떻게 다리를 벌리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부글부글, 짜증이 끓는 눈으로 노려보며 몸에 힘을 풀었다. 재희는 이수의 두 다리를 제 허벅지 위에 한 쪽씩 올렸다. 벌어진 틈새로 훅 찬 바람이 끼쳐 들어왔다. 엉덩이에 잔뜩 힘을 준 채 고개를 돌렸다.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재희가 아래를 움직여 좆의 뿌리를 찾아 맞춘다. 회음이 벌어지고, 음낭끼리 맞닿는 느낌에 내쉬는 숨마저 떨려 왔다. 재희의 손가락도, 두꺼운 페니스도 엄청나게 뜨거웠다.

그와 살갗이 스칠 때마다 이수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열기가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기분이다. 뇌가 절어 드는 흥분 속에서 본의 아니게 몸을 움찔거릴 때마다 재희는 낮게 웃었다.

마침내 커다란 손바닥이 두 개의 성기를 한 번에 감싸고, 귀두 근처를 부드럽게 틀어쥐었다.

“내가… 한 2센티 더 크네요.”

“알았으니까 꺼져, 이제.”

키도 크고, 좆도 크고, 세상 부러운 것 없는 차재희였다. 이수가 손을 들어 재희의 가슴팍을 밀었다. 하지만 꼿꼿이 허리를 세운 그는 자리에서 비킬 생각이 없었다. 뭔데. 페니스를 쥔 손바닥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당황한 이수가 차재희와 두 성기를 번갈아 바라봤다.

짙은 분홍빛 그리고 흉흉하게 검붉은 귀두 끝이 나란히 젖어 있었다. 순간 엄청난 수치심이 일었다. 왜, 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거 왜 이래. 이수가 재희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 놓고 비키라고. 끝났잖아.”

“진 사람이 소원 들어주기로 했잖아요.”

“씨발, 내려와서 얘기해!”

“안 돼요.”

꽈악, 재희의 손아귀 힘이 거세진다. 표피에 가해지는 압박에 전신의 힘이 빠졌다. 이수가 쓰러지듯 누웠다. 입술이 잘근잘근 씹힌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쥐어짜고 싶었다. 그만 뛰라고. 혈액 순환을 멈추라고 하고 싶었으나 아래로 빠듯하게 피가 쏠리는 것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차재희가 구멍만 빤히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투명한 선액이 흘러나왔다. 이수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왜, 흣. 손 좀, 놓으라고!”

“왜냐면…….”

두툼한 목울대가 위아래로 꿀렁였다. 타액을 여러 번 삼켜 넘긴 재희가 좆에서 시선을 떼고 한참 만에 고개를 들었다. 핀트가 나간 듯한 표정이었다. 흐릿하게 풀어진 눈동자로 이수를 내려다봤다.

“선배가 가만히 있는 거, 그게 내 소원이에요.”

“이… 미친…….”

욕을 퍼부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가만히 있는 동안 무슨 짓을 할지 뻔히 그려졌다. 괴롭힘당하듯 아프게 빨렸던 유두,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손길, 타의로 사정하던 순간의 감각. 모든 게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바람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렸다.

“어려운 일 아니잖아요.”

재희가 이수의 페니스를 훑어 내렸다. 그 손아귀에 허리를 쳐올리고 싶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아까 차재희한테 뭐라고 했어, 서이수. Curiosity killed the cat. 이수는 머릿속으로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런데도 그 극렬한 쾌감을 다시 경험하고 싶다는 욕구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전신을 관통하듯 짜릿했던 성감을 재구성하고 싶다. 이대로 신음하다가 사정하고 싶다. 혼란에 파묻힌 이수를 내려다보며 재희가 웃는다.

“얌전히 있어요. 내가 알아서 할게.”

두 페니스를 부드럽게 쓸어 만지며 차재희가 다가온다. 무릎을 세워 상체를 숙인 그가 이수와 이마를 맞댔다. 익숙한 섬유 유연제 향기 대신, 솜털을 쭈뼛 세우는 체취가 스며들었다.

이수는 재희를 올려다보며 명치가 쪼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긴장으로 얼룩진 너머에 기대와 욕망 또한 자리하고 있었다. 차재희와 눈을 마주 볼수록 그러한 갈망은 더욱 커져 가기만 했다.

어쩐지… 입을 맞추고 싶었다. 차재희와 혀를 섞는 느낌을 안다. 제 것을 남이 쥐고 흔들어 주는 느낌을 안다.

결정과 체념은 동시였다. 이수는 미래에 대한 생각을 접어 두는 편을 택했다. 마약 중독자처럼 쾌락에 몸을 내맡겼다. 강렬하게 새겨진 순간을 또 한 번 맞이하고 싶다.

이수가 눈을 감았다. 지그시 감긴 눈매 위로 재희가 입을 맞췄다. 무언의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그는 이수에게 빠져나갈 여지를 주었다.

“정말로 싫으면, 때리고 가 버려요.”

“……닥쳐.”

“책임지라고 안 할 테니까…….”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았다. 이수의 뺨에 제 숨결을 흩뿌리며, 재희가 속삭였다. 선배가 미치는 꼴 보고 싶어. 그 말이 시작이었다. 허겁지겁 포개진 입술이 여러 번 열렸다 닫혔다. 이수의 입 안으로 들락거리는 혀가 질펀한 타액을 쏟아 냈다.

읏, 앓는 소리와 함께 이수도 그에게 반응했다. 제게 열렬한 입맞춤을 퍼붓는 상대가 차재희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잊으려 애썼다. 이수는 자신이 목마른 짐승처럼 그가 주는 쾌락에 매달릴 뿐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아… 윽!”

재희는 꼬리잡기하듯 이수의 혀를 빨아들였다. 입을 벌린 채 눈매를 찡그린 서이수. 입술이 맞닿은 틈으로 삐져나오는 숨이 열락에 젖었다. 반쯤 감긴 눈매, 시선을 피해 허공을 더듬는 눈길. 그러나 머리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는 손길은 이수가 그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매번 뾰족한 말만 뱉는 입술이 왜 이렇게 예쁜지. 재희는 눈앞이 하얘지는 것을 느끼며 손을 내렸다. 털 없이 매끈한 고환을 주물럭거리자 그의 목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야릇한 신음이 튄다.

그것만으로도 사정감이 몰려왔다. 지금 싸 버렸다간 서이수에게 조루라는 비난을 피할 수가 없을 것 같아, 재희는 제 좆을 밀어내고 상체를 내렸다. 이수의 성기만 손에 쥔 채 그의 티셔츠를 밀어 올렸다. 선단을 어루만지며 가슴팍에 입을 갖다 댔다.

“흣!”

유두 끝을 핥자 허리가 튀어 올랐다. 소리를 낸 자신이 수치스러워 미치겠다는 듯 이수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울긋불긋한 흰 피부와 멍든 딸기와도 같은 젖꼭지. 이렇게 야한 걸 왜 여태 몰랐지. 재희는 혀를 내어 가슴 끝을 감아올렸다. 시트를 틀어쥐는 손 위로 파릇한 핏줄이 섰다.

성기를 위아래로 흔들자 반응이 격렬했다. 입술을 씹는 치아까지도 하얗고 가지런했다. 엄지로 기둥 아랫부분을 꾹 눌러 쓸자 몸을 비튼다. 그 상태로 손을 치대자 이수가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선배……. 하아.”

탁, 탁, 그때처럼 이수는 허리를 쳐올렸다. 재희의 손에 좆을 쑤셔 박듯 허리 짓을 해 댔다. 거칠고 서툴러서 또 색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물결치듯 흔들리는 신체를 내려다보며 재희는 손도 대지 않고 사정하고 말았다. 좆물은 이수의 회음과 고환 주변에 툭, 투둑 떨어졌다. 이수는 눈치채지 못했다.

재희가 유두를 빨 때마다 정신이 딸려 나가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텅 빈 채로 그저 온몸을 지배하는 본능에 충실했다. 쾌락, 또 쾌락. 사정을 위한 몸짓. 헐떡거리는 숨결과 함께 제가 무슨 소리를 내고 있는지도 몰랐다.

“으, 흣, 아!”

짤막한 교성과 함께 이수가 허리를 들어 올렸다. 재희의 아랫배에 쏘아지는 정액이 끝도 없었다. 헉헉거리며 몇 번 더 허리를 추어올린 이수가 한껏 붉어진 눈매로 재희를 올려다봤다. 차재희를 제외한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알지 못했던 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벽이 무너져 내린다. 끝없이 이어지는 환락의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나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만, 다만. 눈앞에 있는 이 남자와.

“차재희…….”

키스하고 싶었다. 그의 이름을 부른다. 이리 와. 이수가 그의 뒷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제게 일어난 일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재희는, 거칠게 입술을 맞부딪히는 이수 때문에 정신을 차렸다. 서이수가 먼저 다가왔다는 사실에 마음이 빠듯하게 벅차올랐다.

타액에 범벅이 된 두 살덩이가 정신없이 움직였다. 쾌락 혹은 애정. 살짝 엇나간 갈망이었으나 결론적으로 그들은 서로를 원하고 있었다.

재희의 손이 그의 전신을 더듬는다. 표본을 만들어 전시해 두고픈 장골과 군살 없이 탄탄하고 슬림한 허리, 티셔츠 밑에서 부어오른 유두와 곧게 뻗은 쇄골. 뜨거운 손끝이 그곳을 매만지자 이수가 옷을 벗었다. 이내 완전히 드러난 상반신에 재희가 입술을 묻었다. 연약해 보이는 목덜미와 넓고 둥근 어깨, 역시나 매끈한 겨드랑이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간지러, 윽!”

쪽, 빨아들이고 씹는 살결이 연했다. 서이수에게 이렇게 말랑말랑한 부분이 있다는 걸 누가 또 알고 있을까. 재희는 그걸 아는 이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싶다는 대상 없는 질투에 사로잡혔다가, 이내 이수의 반응에 빠르게 안심했다. 누가 봐도 처음이었다.

손길 하나하나에 신음하고 젖어 드는데, 어떻게 처음이 아닐 수가 있을까. 구질구질한 사실에 집착하는 자신이 우스우면서도 재희는 그런 마음을 버릴 수 없었다. 서이수가 이렇게 예쁘고, 야하고, 또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걸 혼자만 알고 싶었으니까.

쪽, 쪽, 가볍고 깊은 입맞춤이 쏟아졌다. 이수는 재희가 무슨 짓을 하든 내버려 두었다. 간지러운 접촉과 함께 살짝 시들었던 성기에 다시금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이수는 슬슬 전신을 죄이는 긴장감에 입술을 축이며 재희를 돌려 눕혔다. 풀썩, 방심하고 있다가 아래에 깔린 그가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내 차례야.”

단단한 음성이 재희를 옭아매려 했다. 단박에 고개를 젓는다. 몸을 일으키려는 것을 억지로 밀어 눕힌 이수가 재희의 두 손목을 잡아 결박했다. 그리고 빤한 눈길로 그를 내려다봤다.

두 사람 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른하게 풀린 동공이 재희의 곳곳을 핥는다. 서이수 자신과는 다른 몸이었다. 단정한 얼굴과 달리 차재희의 신체는 굵고, 거칠었다.

그의 가슴팍에 손을 올리니 터질 듯 박동하는 심장이 느껴졌다. 긴장한 얼굴의 재희를 내려다보며 이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랫배가 뻐근하게 압박되었다. 피부밑, 장기 속의 어딘가에 실타래가 꼬여 있는 듯했다.

“하아, 좀, 이상해… 지금…….”

차재희를 보고 있자니 점차 흥분감이 차올랐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 와중에 욕망은 선명했다. 꼿꼿이 선 페니스를 느끼며 이수가 고개를 기울였다. 차재희가 했던 것처럼 여기저기 물고 빨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자꾸 입 맞추고 싶었고, 한 번의 사정으로 해소되지 않는 갈증을 털어 내고 싶었다.

재희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은 이수가 허리 짓을 시작했다. 살갗이 미끄러지며 비벼진다. 은근히 고조되는 성감에 입이 바싹 말라 왔다. 으음, 하는 신음과 함께 이수가 눈을 감았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다만 보여 주고 싶지가 않았다. 부끄럽고 또 민망했다. 재희의 손목을 놓아준 손이 이번엔 눈을 가렸다. 손바닥 밑에서 파르르 떨려 오는 속눈썹을 느끼며 이수가 계속해서 패팅을 이어 나갔다.

“아……. 선배, 윽.”

재희의 손길이 이수를 더듬었다. 마른 허리를 지나 내려온 손아귀가 그의 엉덩이를 움켜쥔다. 단단한 근육 위로 말랑한 살덩이가 적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힘을 주어 주물럭거리는 느낌에 이수는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흣!”

재희의 뺨 옆으로 고개를 처박은 이수가 그의 목덜미에 밭은 숨을 쏟아 냈다. 열기 띤 호흡이 부딪힐 때마다 재희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마찰만으로 해갈되지 않는 삽입의 욕구가 그를 충동질했다.

서이수의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그 안에 저를 쏟아 내고 싶은 열망이 짙어진다. 엉덩이를 더듬던 손가락이 슬쩍 아래를 향했다. 정신없이 허리를 움직이던 이수가 그 순간만큼은 기민하게 반응했다.

“아!”

차재희의 어깻죽지를 세게 깨문 그가 입술을 떼지 않은 상태로 속삭였다.

“손, 대기만, 해…….”

뒤이은 말들은 묵음 처리되었으나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살벌한 협박에 웃음이 터진 재희가 고개를 돌려 이수를 찾았다. 입술에 진하게 키스하며 그를 끌어당겼다.

이수의 몸짓에 맞춰 재희가 피스톤질하듯 허리를 쳐올렸다. 강하게 스치는 페니스로부터 극렬한 쾌감이 몰려왔다. 고환이 부딪힐 때마다 야릇한 통증이 수반되었다.

그리고 이내 쾌락으로 변모하고야 마는 그 감각이 지극히 새로웠다. 이수의 부드러운 입술과 매끈한 좆, 맨들맨들한 고환까지 모조리 씹어 삼키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다. 맞닿은 체온은 끝도 없이 올라갔다. 이러다 불이 붙지 않을까 싶을 만큼.

“하아, 으읏.”

작게 욕을 씹은 이수가 몸을 떨며 사정했다. 뜨겁게 뿜어져 나온 정액을 재희는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힘없이 쓰러진 그에게 입을 맞추며 돌려 눕혔다. 등을 끌어안은 채 옆으로 누워 이수의 페니스 위에 정액을 펴 발랐다. 미끈거리는 감촉에 이수가 몸을 떨었다.

가쁘게 오르내리는 가슴팍을 끌어안으며 재희는 그의 허벅지 사이로 팽팽히 선 제 좆을 밀어 넣었다. 순간 둔부를 스치는 감촉에 이수가 그의 머리채를 쥐었지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슬쩍 힘이 빠졌다.

“씨, 발. 뭔데…….”

“넣는 거 아니에요.”

“아니, 윽!”

“별거 아니죠……. 응?”

재희가 그의 다리 사이로 피스톤질을 시작했다. 부드럽게 스치는 살결이 쫀득하게 재희의 좆을 감싸 왔다.

재희는 이수가 숨 돌릴 틈 없이 그의 성기를 어루만졌다. 진득한 좆물이 젤처럼 표면을 감쌌다. 예쁜 귀두 갓을 어루만지자 그의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슥, 슥 살덩이가 비벼지는 소리와 함께 이수의 좆에서 찔걱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맨손으로 만지는 것과는 느낌이 또 달랐다.

예민한 신경을 찌르듯 날카로운 쾌감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이수는 이를 악문 채 재희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퍽, 퍽, 허리를 쳐 대는 힘에 둔부가 뭉개질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안쪽까지 전해지는 진동이 신체 내부의 어떤 극점을 자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세게…….

“선배, 하아…….”

허리는 물결치듯 아름답게 움직였다. 두 남자가 만들어 내는 신음이 메아리치듯 번갈아 터져 나왔다. 낮게 긁어내리는 음성이 수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흐물흐물하게 풀어진 상태의 서이수는 차재희를 끝도 없이 자극했다.

그 밤은 길고, 또 길었다.

* * *

더 이상 쏟아질 체액도 없을 때까지, 두 사람은 아주 긴 시간 동안 살을 맞대고 있었다. 헐떡거리느라 맛이 간 목소리, 절정에 다다를 때마다 힘을 준 탓에 전신에는 얼얼한 근육통까지 일었다. 정액 범벅이 된 몸이 찝찝하고 더러웠지만 씻을 기운도 없었다. 이수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천장만 바라봤다.

밤은 길었고, 현타는 더 길었다. 욕망이 자취를 감춘 새벽, 형형하게 눈을 뜬 이성은 이수의 뺨을 갈겼다.

미친 거 아니야? 술에 취한 게 아니라 맨정신이었다. 그 일이 있기 30분 전에 호기심은 접어 두라고 엄격하게 충고한 것도 자신이었고, 아무한테나 집적거리다가 큰일 난다고, 병원이나 가 보라 한 것도 자신이었다.

그리고. 먼저 입을 맞추고, 그의 손길에 신음하고, 그에게 허리 짓을 해 댄 것도 자신이었다.

이수는 스스로 정해 둔 ‘사람 새끼’의 기준에 어제의 자신이 한참이나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욕망에 지는 것도, 책임지지 못할 사람과 유사 성관계를 맺는 것도, 결혼하지 않을 사람과 밤을 보내는 것도 모두 자신의 가이드라인을 벗어난 일이었다. 인간 자격 상실이다.

스스로 자제력이 없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차재희하고만 있으면 이렇게 될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흐린 불빛이 모로 누운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단잠에 빠진 차재희는 정말로 천사 같았다. 지그시 감긴 눈매 하며, 오물거리는 입술, 가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기도 하고, 끌어안은 이수의 팔에 뺨을 비비기도 했다.

이수는 가만히 손을 뻗었다. 흩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니 반듯하니 예쁜 이마가 드러났다. 그대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기분 좋은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더 해 줘요, 선배. 그 말을 듣는데 속이 따끔했다.

일순 불쾌한 감각이 일었다. 손을 떼어 낸 이수가 제 심장 언저리를 매만진다. 뭐지, 이건. 인식하지 못했던 심장이 언젠가부터 거칠게 뛰고 있었다.

18년을 같은 병실에서 살았다. 그의 세상은 고정된 것에 익숙했다. 이수는 낯선 변화를 본능적으로 거부했다. 자연스레 그것을 외면할 여지를 찾는다.

‘책임지라고 안 할 테니까…….’

그렇게 말한 것은 차재희 또한 저를 책임질 마음이 없어서일 것이다. 그 또한 이 비정상적인 관계에서 기인하는 쾌락에 중독되었을 뿐이다. 그리 생각하면 되었다. 그러면, 아무 문제 없었다.

사고를 멈춘 이수는 손을 뻗어 조명을 껐다. 곧 침실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수면은 오래가지 않았다. 원체 예민한데 신경까지 곤두서 있었고, 옆에 사람도 있으니 깊은 잠이 들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두 시간을 뒤척거리던 이수는 피곤에 절은 상태로 눈을 떴다. 짤막한 한숨이 새어 나간다. 이 와중에 차재희는 쥐 죽은 듯 잘만 자는 게 어이가 없었다.

이수가 다시 손을 뻗었다. 옅은 빛이 되돌아왔다. 휴대폰이라도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이수는 저를 바라보는 새까만 눈동자를 먼저 마주쳐야만 했다. 언제 깬 건지 차재희가 졸음기 하나 없는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

두 사람 다 말이 없었다.

재희는 잠에서 깬 지 오래였다. 옆에 있는 사람의 존재가 믿기질 않아서, 어제 있었던 일이 꿈만 같아서, 내가 지금도 망상 속을 거닐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불안한 마음에 평소보다 일찍 깨어났다.

규칙적으로 내쉬는 숨소리를 듣고도 확신이 서질 않았는데, 불빛에 모습을 드러낸 이수를 보니 모든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어제의 그 달콤하고 뜨거웠던 순간을, 서이수와 함께했다.

그러나 무표정한 얼굴을 눈에 담는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없던 일로 치자고, 잊어버리라고, 또 실수였다고 말하고 저를 밀어낼 것만 같아서. 재희는 꾸물거리며 이수에게 파고들었다.

“미쳤냐?”

불이 옮겨붙을 것처럼 뜨거운 체온이었다. 이수는 질색했다. 이건 마치 정사 후의 연인 같지 않은가. 쓱 밀어내자 눈썹이 팔자로 휜다.

“선배, 나 무서운 꿈 꿨어요.”

“어쩌라고.”

“안아 줘요.”

“…….”

그렇게 말하는 모양새가 꼭 아이 같아서 이수는 차마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병원에 있을 때 무서운 꿈을 꾸어도 저를 안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지새운 밤이 수두룩하게 많았다. 그 기억을 떠올리자 기분이 이상했다.

이수는 과거의 저를 포옹하는 심정으로 재희에게 팔베개를 해 주었다. 맨몸에 와 닿는 살이 뜨거웠다. 서늘한 공기와 맞물려 안도감을 주는 체온에 이수는 안정감을 느꼈다. 재희는 그의 어깨에 입을 맞추고는 이수의 가슴팍 위로 손을 올렸다. 세로로 뻗은 흉터에 손끝이 닿는다. 거길 한참이나 만지작거리더니 나직하게 물었다.

“못 잤죠.”

“어.”

“나 때문에요?”

“……원래 잘 못 자.”

차재희는 대꾸 없이 몸을 더 붙여 왔다. 원래 이렇게 치대는 성격인가. 하는 짓이 진짜로 리키 같아서 이수는 웃음이 났다.

한동안 편안한 침묵이 흘렀다. 서로의 숨소리만 흐르는 가운데 이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상하지 않아?”

“뭐가요?”

“이 관계.”

재희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침대 헤드에 머리를 기댄 이수를 올려다본다. 그러면서도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엔 조금도 힘을 풀지 않았다.

이수의 말대로 이상한 관계였다. 싸우고, 키스하고, 다투고, 몸을 부대끼는 사이.

사실 재희는 이제 그만 싸우고 싶었다. 이수와 날 선 말들을 주고받기 싫었다. 좋아한다고 속삭이고 싶었다. 여기도 저기도 모두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었다. 옆에 있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도망갈 거잖아. 그러니까 이수가 이 관계에 의문을 갖기 전에, 재희는 못을 박아 둬야 했다. 그가 이 쾌락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빠져들 때까지. 그래서 결국엔 자신에게 마음을 내어줄 정도로 정이 들 때까지 그를 붙잡아 둬야 했다. 시작은 마음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끝이 중요한 거니까.

재희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안 이상해요.”

“넌 이런 거 많이 해 봤어?”

“아뇨. 하지만 서로가 원한다면 쾌락을 밑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관계가 통상적이진 못할지라도 이상하진 않다고 생각해요. 우린 성인이고, 서로의 행동에 책임질 수 있는 나이니까.”

재희의 말을 곱씹던 이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서로의 합의로 이루어진 관계. 차재희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쾌락뿐이라면 이수 또한 그에 응해 줄 수 있었다. 그 또한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었으므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으나 미묘하게 속이 얹히는 기분도 들었다. 이수가 생각에 빠진 동안 단정한 손끝이 흉터를 더듬었다. 긴 궤적을 따라 움직이던 재희가 그를 다시 올려다봤다.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이다.

“무슨 흉터인지 물어봐도 돼요?”

재희는 조심스레 그렇게 물어 왔다. 축제 때도 물어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대답하지 않았었다. 별것 아니었지만 골려 주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꼭 오래된 상처를 헤집는 것처럼 물어보니 그럴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이수가 심심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심장 이식 수술.”

“…….”

“고장 난 거 갈아 끼운 거, 그게 다야.”

무덤덤한 태도에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듯, 재희는 말없이 그를 끌어안기만 했다. 제 나름의 위로인 것 같았다. 학생회관에서 옷을 입혀 주던 차재희가 떠올랐다. 그 순간 이루 말할 수 없이 마음이 따스해져서, 이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허벅지에 와 닿는 몽둥이가 점점 크기를 부풀려 갔다. 이 새끼는 진짜 발정이 났나……. 속으로 질색하며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재희는 끈질겼다. 그의 허리에 팔을 감은 채 더 세게 끌어당겼다.

“씨발, 소름 끼쳐. 그것 좀 치워.”

“습관성 발기라고 했잖아요. 신경 쓰지 마요.”

“지랄하네.”

“그럼 아침이라서 그런 걸로 해요.”

사실 이수의 사정도 별반 다를 것 없었기에 말문이 막혔다. 문득 상황이 참 기가 막히고 황당했다.

이수는 지금도 차재희를 친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저와 신유진이 뭔가 성적인 스킨십을 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차재희는 왜 그게 될까. 내가 진짜 동성애자인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으니 재희가 물어 왔다.

“지금은 괜찮아요?”

“뭐.”

그는 대답하는 대신 이수의 가슴께에 얼굴을 비볐다. 쿵, 쿵, 거세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속삭인다.

“여기요.”

“살아 있는 거 보면 괜찮겠지.”

“다 나은 거 아니에요?”

“몰라. 뒤지면 뒤지는 거지.”

무심한 말투에 재희가 헛웃음을 쳤다. 서이수는 큰일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어쩐지 서운한 마음이 든 재희는 티셔츠 위로 드러난 돌기를 살짝 깨물었다 놓았다. 그러고는 이수가 욕을 하기 전에 벌떡 일어나 도망쳤다.

“밥해 줄게요. 씻고 좀 쉬고 있어요.”

문이 닫혔다. 저 새끼를 진짜 어떻게 하지. 잠깐 고민하던 이수는 온몸에서 풍기는 비위생적인 냄새를 인식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실에 딸린 욕실은 거실에 있는 것의 절반 정도 크기였다. 욕조 대신 샤워 부스가 놓여 있었는데, 거기나 여기나 꿉꿉한 냄새 없이 깨끗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수는 어느새 눈에 익은 우드 톤의 거실을 떠올렸다. 청소를 엄청 열심히 하는 듯했다. 취직을 못 하면 가사 도우미 일을 해도 잘할 것 같다. 음식도 잘하고.

뜨거운 물로 한참이나 씻고 나오니 침실이 정돈되어 있었다. 깨끗한 시트와 갈아입을 옷. 방 안에 감도는 포근한 향을 맡은 이수가 작게 웃었다. 내조도 잘하겠네.

이수는 조용해진 침실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다시 일어났을 땐 7시가 좀 넘은 시간이었다. 마침 운동을 끝낸 재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선배, 일어났어요?”

“어.”

“아까 자는 것 같길래 운동 다녀왔어요. 금방 씻고 나올게요. 식사 같이해요.”

“그러든지.”

펌핑된 근육을 바라보는데 이상하게 열이 올랐다. 심호흡을 한 후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발톱을 뜯고 있던 차레오가 반색하며 다가왔다. 리키가 생각난 이수가 메신저를 열었다. 율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어제저녁에 집에 들러서 산책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수가 늦는 것 같아서 사료를 잔뜩 채워 두고 간다는 말도 덧붙여져 있었다. 잘했어. 답장을 보내고 고정 팟 단톡방에 들어갔다. 어제저녁에 저를 한참이나 기다린 듯, 타격이 부르짖은 씨팔이라는 채팅 수백 개가 주르륵 떠올랐다.

대충 답장을 보낸 이수가 소파에 몸을 뉘었다. 아직까지 기운이 없었다. 씻고 나온 재희가 밥상을 모두 차릴 때까지 이수는 그 상태로 늘어진 채였다.

“선배, 아침 먹어요.”

그 말에 비척비척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좌식 테이블의 벽면에 쿠션까지 놓여 있었다. 기대어 앉으라는 배려였다. 피곤한 얼굴로 밥상을 내려다봤다.

1인용 원목 트레이 위에 식사가 오밀조밀 담겼다. 갓 지은 쌀밥에 희멀건 재첩국, 간장 불고기와 소금 간을 한 도라지 나물, 하트 모양의 달걀말이까지. 이수는 느릿한 손길로 재첩국을 한입 마셨다. 해산물을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시원하니 맛도 나쁘지 않았다.

밥 두 숟갈에 불고기 한 점, 도라지 한 줄기에 달걀말이 한 입 그리고 재첩국 세 모금. 식사를 끝마친 이수가 수저를 내려 두었다. 재희가 긴장한 표정으로 묻는다.

“맛없어요?”

“아니.”

“근데 왜 벌써 내려놔요?”

“원래 아침밥 잘 안 먹어.”

“아…….”

이수는 보통 디카페인 커피 한 잔과 얇은 팬케이크 한 장으로 아침을 때운다. 이 정도면 많이 먹은 축에 속했다. 원래도 까다로운 입맛의 소유자인데, 입도 짧았다.

어쨌든 이수의 식사량은 차재희가 보기엔 새 모이 수준의 소식이었다. 저만큼 먹고 일상생활이 가능한가? 그런 생각을 하며 재희는 빠르게 식사를 끝마쳤다.

새 칫솔로 양치질을 한 이수가 거실로 나왔다. 오늘 이수는 2교시, 재희는 1교시 수업이었다.

오전 7시 50분, 재희가 이수에게 물었다.

“선배, 자전거 없으면 차 끌고 다녀요?”

“날씨 괜찮으면 걸어가.”

“오늘도 걸어갈 거예요?”

“어.”

“그럼 그냥 제 차 타고 가요.”

그럴까……. 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희는 조금만 기다리라 말하곤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이수는 제 몰골을 내려다봤다. 차재희의 티셔츠에 차재희의 트레이닝 바지. 핏은 나쁘지 않았으나 중요한 건 바지 안에 속옷을 안 입었다는 사실이었다. 집에 들러야겠다. 그리 결론 내리곤 드레스 룸의 문을 열었다.

흰색 셔츠에 코발트블루 컬러의 슬랙스. 손목에 메탈 시계를 차던 재희가 그를 돌아봤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미소가 다정하다.

“옷 빌려줄까요?”

“아니. 집에 가서 갈아입고 올게.”

“아…….”

“전화할게.”

그러고는 현관으로 향하는데 재희가 그의 뒤에 대고 외쳤다.

“저도 같이 가도 돼요?”

이수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진다. 입 안에서 혀를 굴리며 생각하다가 이내 턱을 까닥였다.

“그러든지.”

이수의 집에 방문하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타인을 집에 들인다는 것은, 이수에게 있어 무척이나 뜻깊은 일이었다. 그 사람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해 애쓰겠다는 뜻이었고, 언제든 나를 방문해도 좋다는 뜻이기도 했다.

차재희는 그렇게, 기어코 이수의 마음 한 자리를 차지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가요, 선배.”

예쁘게 웃는 재희와 함께 로비로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이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것저것 눈에 자꾸 거슬리는 게 있었다. 푸른색 슬랙스도 슬랙스지만, 걷어 올린 소맷단 아래의 팔뚝이나 끌러진 단추 사이로 드러난 붉은 자국 같은 것들에 계속 시선이 끌렸다. 빤히 보고 있으니 재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제 뺨을 문질러 부끄러움을 지워 낸다.

“왜 그렇게 봐요?”

“…….”

이수의 눈길이 집요하게 그의 목덜미를 쓸었다. 밤새 물어뜯은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저러고 가겠다고? 떨떠름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단추를 채워 주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이유를 찾던 재희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이수는 보조개가 팬 예쁜 얼굴을 올려다봤다.

TPO에 민감한 강대원 교수의 수업에서 발표를 한다고 했다. 덕분에 머리를 깔끔하게 쓸어 넘겨 반듯한 이마가 드러나 있었다. 곧게 뻗은 눈썹도, 그 밑으로 푹 꺾이는 눈썹 뼈도, 강아지처럼 새까만 눈동자도 낯설지 않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는 저를 내려다볼 때면 세상 다정한 눈빛을 띠었다. 물론 불손하고 불순해서 너 눈을 왜 그렇게 뜨냐고 묻고 싶을 때도 많기는 하지만.

가려진 자국을 확인하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지상 1층에 머무르는 엘리베이터는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프라이빗 엘리베이터로 타고 올라가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비상구 문이 벌컥 열리고 중년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 무전기를 든 그는 재희를 발견하곤 반갑게 알은체를 했다.

“재희 군, 잘 지냈어요?”

“소장님. 안녕하세요.”

아파트 관리소장이었다. 하다 하다 관리실 직원하고도 친하게 지내나. 차재희의 발이 넓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쯤 되면 병 아닌가 싶었다.

짜증스럽게 승강기를 노려보는 이수를 두고 두 사람은 반갑게 이야기를 나눴다. 산책로에 나타난 유기 토끼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아직 지상 1층에 멈춰 있는 숫자에 열이 받은 이수가 소장에게 질문했다.

“선생님. 엘리베이터 점검 아직 안 끝났어요? 1층에서 안 올라오는데요.”

“음? 아, 누가 새벽에 구토를 해 놔서 지금 1층에서 닦고 있어서 그런가 봅니다. 반대쪽으로 가시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요. 그러고 보니 점검 한번 할 때도 됐네요.”

말이 이상했다. 어젯밤에 긴급 점검을 한다고 했으면서 점검을 할 때도 됐다고? 관리소장이라면서 점검한 것도 모르나?

그런데……. 돌연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러고 보니 문율도 리키와 산책을 다녀왔다고 했었다. 대체 어떻게? 이상함을 느낀 이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재희가 먼저 물었다.

“어제 승강기 전체 긴급 점검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응? 긴급 점검요? 아유, 그럴 리가요. 43층까지 있는데 전체 점검했다간 큰일 나죠. 이건 비밀인데, 여기 42층, 43층 소유주가 성격이 좀…….”

제 성격이 어쩌고 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승강기 전체 긴급 점검, 그것 때문에 이수는 어제 차재희의 집에 머물렀다. 그럼 그 메시지는 누가 보낸 거지? 이수가 설명하라는 듯 재희를 올려다봤다. 차재희는 한껏 당황한 채로 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니, 이거……. 이렇게 메시지 왔었는데요.”

“응? 이거 우리 관리실 번호 아닌데. 우리는 앞에 딱! 붙이잖아요! 서울 최고의 고품격 아파트에 입주하신 주민 여러분! 하고!”

소장은 썩 자랑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수는 점점 얼굴이 굳어졌다. 그를 불안하게 내려다보던 재희가 다급하게 변명했다.

“선배, 정말로 관리실에서 온 건 줄 알았어요.”

“……긴급 점검 같은 거, 없었다는 말이죠?”

“예, 물론이죠. 우리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얼마나 튼튼한데요. 사천 그룹 것 아닙니까! 뭐, 문제 있나요? 메시지는 다른 아파트에서 번호를 잘못 입력한 것 같은데…….”

황당했다. 하필 그런 일이 일어난 밤, 자신을 붙잡아 두었던 메시지가 누군가의 실수로 보내진 거라는 게 정말 우연일까. 의심이 고개를 들려 했지만 이수는 곧바로 부정했다.

자신 또한 입주민인데 메시지가 도착하지 않았다. 어제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지만, 충분히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는 점이었다. 이게 만약 그의 계략이라고 해도, 차재희는 그렇게 허술하게 일을 꾸밀 정도로 멍청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근본 없는 내기를 받아들인 것은 자신이었다.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아니, 모든 걸 다 떠나서 이수는 차재희가 이런 일을 의도할 정도로 영악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방금 떠오른 의문을 지워 버리려 했다. 이어진 소장의 말이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참, 재희 군. 그때 과제는 잘했어요? 엘리베이터 멈춘 동영상 찍어야 한다고 패널 열쇠 빌렸던 날 기억나요? 나 그때 CCTV 보면서 엄청 마음 졸였는데, 어떻게 됐는지도 안 물어봤네.”

“아……. 음. 네……. 잘, 했어요.”

말꼬리를 흐리는 차재희. 이수의 낯이 싸늘하게 굳었다. 뭐야, 이거? 엘리베이터를 멈추려고 패널 열쇠를 빌려? 순간 귀를 의심하고 싶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소장의 말은 부정하고 싶은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해 주었다.

“하하. 승강기를 멈추다니 안전 관련 캠페인인가, 별 이상한 과제가 다 있네, 했죠.”

이수의 기억은 순식간에 4월로 되돌아갔다. 그날 있었던 일이 선명하게 재생됐다.

메시지를 보냈다며, 동영상을 보냈다며, 끝까지 확인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고 사과하던 차재희. 흩어지는 분노 속에서 민망함과 짜증을 동시에 느끼던 자신.

그 전엔 뭐라고 했지? 차재희는 자기를 믿지 못했던 이수를 참 대단하다는 듯 비꼬기까지 했었다. 왜 화났는지 모르겠다고 되묻던 순진한 면상이 떠오른다. 차재희는 이수가 왜 연락을 안 했냐고 묻기 전까지 메시지에 대해 모른 척을 하기도 했다.

그제야……. 거기까지 떠올리고 나서야 이해가 갔다. 전화를 걸었을 때 받지 않고 기다리던 모습. 미소를 띤 채 액정을 내려다보던 얼굴. 그에게 해명을 들은 후에도 마음 한편에 남았던 찝찝함.

이 씹새끼가… 일부러 그랬던 게 맞았구나.

“하…….”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탄식하듯 뱉어지는 숨결에 재희가 입술을 짓씹었다. 이내 무어라 중얼거렸으나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이수는 자신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차재희라는 인간에게 집중했다.

너 정체가 뭐야.

한때는 개새끼인 줄 알았다. 나중에는 순진하고, 어리숙하고, 미성숙한 어린애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거짓말쟁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보았던 모습들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진실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뭐 하는 새끼야, 너.”

싸늘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관리소장은 이상한 분위기를 파악하고 자리를 뜬 지 오래였다. 재희가 일순 입을 다물었다. 그건 질문도 아니었고, 타박도 아니었다. 차재희라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의문이었다.

재희는 쉽게 변명하지 못하고 입술만 씹었다. 여태까지 보아 왔던 서이수와 달랐다. 그가 정말로 화가 났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입을 잘못 놀렸다간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온기 하나 내비치지 않는 눈동자가 무척이나 시렸다. 마음이 아플 정도로.

서릿발처럼 재희를 응시하던 이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차재희.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거짓말하고, 가식 떨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남을 기만하는 인간들. 난 그런 새끼들 정말 혐오해.”

떨리는 목소리가 배신감에 물들어 있었다.

“학기 초에 너를 그런 놈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렇게 밀어냈던 거고.”

차재희가 정말 나를 일부러 속인 걸까. 말을 이으면서도 확신하지 못했다. 저까지 웃게 만들었던 미소가, 이마를 짚어 주던 다정한 손길이 이수를 헷갈리게 했다.

“근데 씨발, 뭔데?”

“선배…….”

저 애절한 부름마저도 꾸며 내는 게 아닐까. 믿을 수가 없었다. 순진하다고 생각했던 새까만 눈동자가 낯설게 느껴졌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다. 깊고 깊어서 검게 물든 것을 자신은 여태 들여다보지 못했다. 이수는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허탈하게 웃었다.

“난 진짜 모르겠다, 너를.”

차재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저었다. 그런 거 아니라고,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그의 눈빛이 말해 주었다. 그러나 내면에 쌓아 둔 믿음이 흔들렸다. 그 위에서 자라난 감정도 필연적으로 흩어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기다란 한숨이 터진다. 이수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중요한 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저 낯짝을 쳐다보기도 싫다는 사실이었다.

때마침 한참을 기다린 승강기가 도착했다. 이수는 망설임 없이 올라탔다. 방향제를 쏟아부었는지 냄새가 지독했다.

떠나려는 그를 보고 정신이 들었다. 재희가 급하게 소리쳤다.

“선배! 제가 다… 설명할게요! 잠깐만요!”

따라 타려는 차재희를 막아섰다. 이수는 무표정하게 그를 밀어냈다.

“꺼져.”

재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상처받은 눈동자. 흘러넘친 슬픔에 파도처럼 휩쓸리고야 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이수는 무감했다. 누가 울어야 할 상황인지도 모르겠다. 온통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이수는 재희를 외면하며 43층으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절망에 젖은 얼굴을 뒤로하고 문이 닫혔다. 온몸을 감쌌던 체취가 방향제와 뒤섞였다. 그게 원래 어떤 향기를 풍겼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서이수가 떠났다. 재희는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꽉 움켜쥔 손끝이 손바닥을 파고든다. 그러나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껍데기의 상처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눈앞에 잔상처럼 남은 이수의 무표정이야말로 재희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만큼이나 움직임도 굳어 있었다. 서이수가 저를 밀어내는 순간 온몸의 나사가 빠져 버린 것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재희는 가까스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대체 누가 이런 장난을 한 건지 알고 싶었다. 두어 차례 신호가 가고 난 후,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 예, 관리실입니다.

“안녕하세요. 제가, 어제, 엘리베이터 긴급 점검 문자를… 받았는데. 여기서… 보낸 게 맞나요?”

목소리가 뚝뚝 끊겨 나왔다. 울컥 치솟는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며 재희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 예, 맞습니다. 점검은 새벽에 끝났습니다. 불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 아파트가… 어디에 있는 거죠.”

─ 하하. 송도에 있습니…….

거기까지 들은 재희가 전화를 뚝 끊었다. 송도. 미국에 있는 차재하가 한국에 들어올 때 종종 머무르는 곳이었다.

잊고 있었던 기억이 재생됐다. 관리실에서 메시지 오는 게 귀찮다고 번호를 바꾸어 두겠다고 말하던 동생에게, 그는 혹시 모르니 그대로 두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랬는데. 분명히 그렇게 말했는데…….

떨리는 손끝이 키패드를 눌렀다. 미국에 있는 차재하에게 전화를 건다. 받지 않았다. 다시 걸었다. 두 번이나 시도한 끝에 차재하가 전화를 받았다. 파티라도 하는 건지 시끄러운 소리가 쏟아졌다. 그러나 재희는 적막 속에 혼자였다.

─ 형? 웬일이야.

“……차재하.”

─ 응. 무슨 일 있어?

너. 내가 번호 바꾸지 말라고 했잖아. 혹시 모르니까 니 번호 그대로 등록해 두라고 말했었잖아. 왜 사람 말을 안 들어. 왜 네 맘대로 행동해서 나를 곤란하게 만들어!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내가 왜 너 때문에…….

그렇게 화를 내고 싶었는데. 그러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애꿎은 주먹만 쥐었다 폈다 하는 동안, 재희의 손바닥에 상처는 점점 깊어졌다. 손톱 끝에 피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 왜 말을 안 해. 나 바빠. 풀 파티 중이야. 할 말 없으면 끊고.

“재하야.”

─ 어어어. 왜 전화했냐고. 잘 지내나 걱정돼서?

그렇게 묻는 동생 앞에서, 결국 차재희가 뱉을 수 있는 말은 이런 것뿐이었다.

“송도에 있는 아파트……. 관리실에서, 연락 왔어. 엘리베이터… 고장 났다고…….”

왜. 대체 왜. 나는 왜 화를 못 낼까…….

지난날의 차재희는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부모로부터 몇 번이나 들어 왔던 말이었기에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타인을 불편하게 만드는 감정을 표출하는 건 미성숙한 행동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상대방을 배려하는 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는 걸 이수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재희는 여태까지 이수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수도 없이 내비쳤다. 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욕을 했다. 처음엔 죄책감을 느꼈다. 나중엔 후련하고 가벼웠다.

재희는 자신이 성숙함으로 포장한 인내로 여태껏 많은 일들을 참아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를 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지 못한 거였다.

그것이 이상하다는 걸 숨기기 위해 인내와 배려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신이 성숙하고 친절한 사람이라고 강박적으로 사고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는데.

이수와 있을 때 재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편안했다. 감정을 솔직하게 표출해도 자신을 비난하거나 이상한 사람 취급하지 않는 그에게서 해방감을 느꼈다.

오래도록 깨끗한 손바닥을 보며 자신이 어느 정도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여전히 타인에게는 화를 내는 일이 불가능했다. 목구멍 끝에 걸린 것처럼, 날카로운 말들이 가시처럼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왜? 나 왜 이래?

이상했다. 정상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괴로움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다정함으로 무장한 남자는 사실 새까맣게 곯아 있었다. 그동안 쌓아 둔 울분이 재희를 썩게 했다. 속이 문드러지는 느낌에 그는 가슴팍을 내리쳤다.

퍽, 퍽……. 손끝에서 흐른 피에 셔츠가 피투성이가 되어 간다. 그러나 재희는 어떠한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머리가, 마음이 고장 나 버린 것 같았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했다. 귓가로 차재하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 형, 나 지금 바쁘거든. 나중에 전화해. 걱정해 줘서 고마워!

전화가 끊겼다. 하고 싶었던 말은 하나도 하지 못한 채.

검게 전환된 화면을 바라보던 재희는 벽에 머리를 박았다. 여전히 아무런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바보. 병신 같은 새끼, 차재희. 스스로를 욕하며 재희는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어 갔다.

어쩌면 모친의 말이 맞았다. 자신에게는 내세울 만한 장점이 하나도 없었다. 형제들보다 나은 것이라곤 오직 인간관계에 있어서 능숙하다는 것 하나뿐이었는데. 이젠 그것도 못 했다.

서이수랑 친해지는 거. 그거 하나를 못 해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버렸다. 정말 모자란 새끼였다. 쓸모없는 인간. 변명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등신.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남을 기만하는 인간들. 난 그런 새끼들 정말 혐오해.’

이수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 성격을 기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말도 맞는 것 같다.

자신을 보며 이수는 강박증과 애정 결핍이라는 말을 입에 올린 적 있었다. 그 말이 다시금 가슴을 찔러 댔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무엇 하나 잘난 것 없는 사람이었기에, 다정하고 배려심 넘치는 모습으로 나를 포장했던 것 아닐까. 그렇게라도 사랑받기 위해 타인을 기만했던 건 아닐까. 실은 화도 내고 짜증도 낼 줄 아는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그런 나를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까 봐 거짓으로 꾸며 냈다.

스스로를 속여 온 날들이 눈앞에 스쳐 갔다. 어떤 순간에 진심이고 어떤 순간에 거짓이었는지 재희는 알지 못했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순간들은 있었다.

서이수에게는 언제나 진심이었다. 처음 만났던 날부터, 단 한 번도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그를 향해 웃어 주고 다정한 말을 건넬 때, 언제나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을 담았었다.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던 적이 없다.

“선배…….”

심장 언저리를 매만지던 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피가 흐르는 손바닥도, 부어오른 이마도 무감각한데 마음은 여전히 아렸다. 이수가 주는 아픔만이 오롯이 느껴졌다.

서이수만이 저를 살아 있게 만든다. 그 사실에 절망했다. 이대로 그와 멀어진다면, 그를 놓쳐 버린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누구에게 말하지.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짜증이 나면 짜증이 난다고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 재희는 이수가 아닌 타인에게 그러한 마음들을 쏟아 내는 방법을 몰랐다. 처음이었다. 재희의 모든 감정을 끌어안아 준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언제나 솔직한 서이수였다. 그렇기에 재희 또한 솔직해질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을 또 어디서 찾아.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럽고,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존재를… 대체 어디서 찾아야 해.

이렇게는 안 된다.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야 했다. 미안하다고,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다고.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나를 외면하지 말아 달라고……. 빌고 또 빌어야 했다.

이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하에 처박힌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가 없어서, 재희는 계단을 올랐다. 4층에서 43층까지 쉴 새 없이 뛰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가슴이 아파 왔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맥동했지만 그게 힘들어서인지 이수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43층 로비로 향하는 철문은 굳게 닫힌 채였다. 안에서만 열 수 있는 방화문은 불청객의 방문을 허용하지 않았다.

재희는 문을 두드렸다. 이수의 벽을 무너트렸듯, 쉴 새 없이 자신을 던졌다. 손바닥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붉은 손자국이 셀 수 없이 찍혔다.

“선배……. 할 말이 있어요.”

그러나 절망에 사로잡힌 목소리는 벽 너머에 닿지 못했다.

“선배를 좋아해요……. 그래서 그랬어요. 미안해요…….”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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