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하게 불러줘요, 선배
3
이은규
좋아하는 선배 (1)
이수를 만날 수가 없었다.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하고, 메일을 여러 통 보내 상황을 설명했지만, 그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43층엔 여전히 접근할 수 없었고, 경영대 로비에 세워진 자전거도 그대로였다.
절망스러웠다. 모든 걸 망쳤다.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재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이수에게 어떻게 다가갔어야 했을지 알지 못했다.
과제를 제대로 끝내고 차단을 당해야 했나? 그 상태로 다시 시작했어야 했나? 남들에게 그러하듯 다정한 배려만을 베풀어야 했나? 그러면, 만일 그리했다면 자신이 이렇게까지 서이수와 친해질 수 있었을까?
고민해 보았지만 그러한 모습은 좀처럼 그려지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자신은 박지혜처럼 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오다가다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는 사이, 하지만 결코 내면을 들여다볼 수는 없는 사이. 재희가 바라는 것처럼 서로에게 깊숙이 스며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제 서이수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때문에 재희는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그를 실망시키고 화나게 했음에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때로 되돌아가도 똑같이 행동하고 말았으리라는 생각에 재희는 스스로에 대한 환멸에 물들었다.
이기적이라는 걸 안다. 강요라는 걸 안다. 나를 좋아해 달라고, 보아 달라고, 집착하고 억지를 부렸음을 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서이수는 자신의 이름을 또 잊어버렸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후회하지 않는다.
서이수가 아니었다면, 서이수와 친해지지 않았다면. 차재희라는 인간이 이렇게 유치하고 이기적이라는 사실은 평생 아무도 몰랐을 터였다. 심지어 본인마저도. 그래서 재희는, 이수를 놓을 수가 없었다.
그를 찾아 헤맸던 외로운 밤, 재희는 꿈속에서 잊고 있던 기억을 하나 떠올렸다.
‘차재희! 저거, 네 시계 아니야?’
고등학생 때 일이었다. 평소 아끼고 아끼던 시계를 그날따라 무슨 바람으로 차고 갔던 건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아마 보여 줄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보고 싶다고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친구들이 그걸 구경하겠다고 해서 손목에서 풀어 건네줬었다. 내심 걱정이 되었지만 조심하겠다는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이 한데 모여 시계를 이리저리 돌려 보는 동안 재희는 또 다른 친구의 등쌀에 못 이겨 매점에 갔다가 돌아왔다. 그리고 교실에 들어섰을 때 그를 맞이한 건, 전면 유리가 박살 난 손목시계였다.
친구들은 침묵한 채 재희를 바라봤다. 어떡하지, 화를 낼까, 그런 표정들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긴장감 속에서 시계를 내려다보던 재희는 괜찮아 수리하면 돼, 하고 웃었다.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는데.
형 차재우에게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었다. 가장 아끼던 물건이었다. 그걸 왜 함부로 다뤄. 소리치고 싶었지만 재희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차분한 그의 태도에 안도하는 눈빛들 속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야, 얘한텐 이런 거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하 씨, 괜히 쫄았네.’
‘차재희, 그냥 하나 더 사는 게 낫겠다. 완전 고물 됨.’
내가 맡겼으니까, 내가 자리를 떴으니까, 모든 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재희는 웃기만 했다. 하지만 속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계를 가방 깊숙이 넣어 둔 재희는 매점에 카드를 두고 왔다는 핑계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고는 변기 위에 올라가 한참 동안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화를 눌러 삼키느라 목구멍이 찌릿하고 아팠다. 사실은 울음을 삼켰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때 재희는 못 들었으면 좋았을 말들을 들었다.
‘씨발, 십만 원 날렸네.’
‘등신아, 내가 화 안 낸다고 했잖아.’
‘이쯤 되면 소시오패스 아니냐? 뭐 그런 거 있잖아. 감정 결여? 그런 거. 아니, 씨발. 나 같으면 거기 있던 새끼들 다 존나게 팼을 텐데.’
아. 꿈을 꾸던 재희는 그제야 생각해 냈다. 친구 중 한 명이 제일 아끼는 물건이 뭐냐고 물었고, 그는 손목시계라고 답했다. 구경시켜 달라는 말에 학교에 들고 갔었는데, 그들은 재희가 화를 내는 일을 두고 내기를 벌였던 거였다. 그러나 그는 평소처럼 웃으며 넘어갔고 비슷한 일은 이후로도 몇 번 더 있었다.
그날 집에 돌아가 성미희에게 호되게 혼이 났었다. 차재우가 사 준 것을 이렇게 함부로 굴리면 어떡하느냐고 오랫동안 쓴소리를 들었다. 재희는 그때도 아무 말 못 했다. 내가 한 게 아니라고, 친구들이 그랬다고 변명하지 못하고 죄송하다고 수리해 달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몇 달 후 시계는 깔끔하게 되돌아왔지만, 그의 눈에는 이전과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 후로 그 시계는 상자 밖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 여덟 살의 재희처럼.
이수를 만나기 전엔 언제나 그래 왔던 것 같다. 다정한 사람. 화를 내지 않는 사람. 상처받지 않는 사람. 재희는 늘 그 프레임 속에 갇혀 있었다.
* * *
차재우와 차재하가 한국으로 들어왔다. 1박 3일간의 아주 짧은 방문이었다. 고작 하루를 머무르려고 열두 시간을 날아온 이유는 하나였다. 부친인 차대범이 그들을 호출했다.
작은 연구실에서 시작한 씨엔 인더스트리를 중견 기업으로 키워 낸 차대범은 부인인 성미희와 마찬가지로 야망이 크고 성미가 독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눈 하나 깜짝 않고 칼을 휘두를 수 있는 인간. 그게 바로 차대범이었다.
또한 IMF 때 몰락한 거대 기업인 성주 건설의 외동딸이었던 성미희에게는 윗세계를 향한 열망이 있었다. 어정쩡한 중견 그룹의 사모가 아니라, 당당하게 사모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신분 상승에 대한 꿈이 있다. 그것은 차대범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그 목표를 위한 세 아들의 희생─그들은 의무라고 칭하는─은 성미희 차대범 부부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계속 싫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날카롭게 반응한 것은 차재하였다.
“차라리 다른 사람을 붙여 주세요. 걔는 죽어도 싫어요.”
차재하에게는 몇 년 전에 약혼자로 정해진 여자가 있었다.
서일 그룹. 그쪽에서 먼저 원한 일이었다. 서일은 밑으로 서른 개가 넘는 계열사를 끌어안고 있는 재계 순위 8위의 대기업이었으며, 그중 서일 그룹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서일 중공업은 씨엔 인더스트리를 1차 협력체로 두고 있기도 했다. 게다가 재계 서열 4위인 사천 그룹의 전(前) 회장 천수란과 서일 중공업의 부회장직을 겸임하고 있는 천수인은 자매지간이었다.
그야말로 로열패밀리였다. 그들과의 혼약은 씨엔 입장에서는 하늘에서 떨어진 동아줄이고, 신분 상승을 위한 골든 티켓이었다. 그렇기에 서일에서 차재하를 상대로 혼담을 넣었을 때, 차대범은 단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이미 얘기가 끝났다. 무를 수 없는 일이니 그렇게 알아 두거라.”
“서이나는 싫다고요!”
차재하가 버럭 소리쳤다. 그 고성에 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모르겠다. 며칠째 온 정신이 서이수에게 팔려 있었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무력감 속에서 겨우 기운을 차려 나온 식사 자리였다. 생기 잃은 눈동자가 가족들을 훑는다. 지루한 표정의 차재우, 잔뜩 화가 난 차재하. 가장 수요가 높은 아들에게 차마 손대지 못하는 성미희와 마뜩잖은 표정으로 제 자식을 노려보는 차대범.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 왔다. 습관적으로 주먹을 쥐려다 손을 내려다봤다. 어설프게 둘러놓은 붕대를 보니 자연스레 연상되는 기억이 있었다.
“……희!”
그날, 공학관 카페에서 이수와 마주 앉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새콤달콤했던 자몽의 냄새, 머리를 적신 수증기의 열기, 무심한 얼굴, 그러나 반창고를 붙여 주었던 다정한 손길.
울컥, 설움이 솟구친다. 한 가지로 정의하기 힘든 감정들이 속을 어지럽혔다. 선배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이미 엉망인 살갗은 더 찢어질 자리도 없었지만, 그것도 모른 채 재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차재희!”
사나운 고함에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느리게 굴러갔다. 어느새 모든 이들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나. 왜들 이러고 있지. 대화를 따라잡지 못하겠다. 재희가 멍하니 입을 다물고만 있자 차대범이 한심하단 듯 혀를 찼다.
“손은 어쩌다 그랬어?”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차재하가 완강히 고집을 부리니 화살이 재희에게로 넘어온 것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괜스레 긴장이 됐다. 집중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차대범은 재희에게 날카로운 비난을 퍼부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요즘도 쓸데없는 짓 한다고 밖으로 나도는 건 아니겠지? 행실 똑바로 해!”
“네. 조심할게요. 죄송합니다.”
다행히도 대답을 고심할 필요가 없는 꾸지람이었다. 머릿속에 입력된 정답을 내뱉었다.
스무 살 때 호되게 혼이 난 이후로는 그들 앞에서 요리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부모들은 재희의 취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남부끄러운 줄 알라고 호통을 치며 값비싼 취미를 갖길 강요했다. 그 때문에 재희는 주기적으로 골프를 치고 승마를 하러 다녔다. 시시때때로 클럽에서 마주치는 부모의 지인들에게 자신의 수준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걸 제외하고 부모들은 차재희라는 인간에 대해서 티끌만큼의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집에서나마 재희는 하고 싶은 요리를 마음껏 했다. 그것이면 되었다. 굳이 인정받지 않아도… 괜찮았다.
자를 대고 그린 듯 단정한 미소에 차대범이 혀를 찼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성미희가 통보했다.
“차재희. 2주 후에 선견 막내딸이랑 약속 잡아 뒀다. 가서 만나 보렴.”
“…….”
선견 물산의 막내딸. 계속해서 결혼을 강요당하고 있지만 사실 재희는 얼굴도 모르는 여자였다.
3개월 전, 아들의 반항에 성미희는 처음으로 손을 올렸다. 재희에게는 정말 뼈아픈 하루였다. 그다음 날 있었던 일까지 생각하면 최악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 이후로 성미희는 더 이상 혼담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래서 포기한 줄 알았는데…….
그럼 그렇지. 그들에게 혼인 당사자의 의견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누리고 산 것에 대한 의무, 그 안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대답 안 해?”
침묵을 지키자 차대범이 버럭 성질을 냈다.
재희는 한참을 망설였다. 약혼 그리고 졸업 후 이어질 결혼까지 하나도 와닿지 않았다. 와닿기는커녕 상대방에겐 미안한 말이었지만, 차대범과 성미희처럼 정략혼으로 이어진 관계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재희는 모르는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자신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를 위해 노력할 수는 있겠지만, 스스로 만족할 수는 없을 거란 생각이 강했다.
부모의 뜻을 따랐던 진로 선택과는 달랐다. 요리를 전공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비합리적인 일이었기에 대학도, 과도 그들이 정하도록 내버려 두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미래를 이루어 갈 가족, 그것만큼은 절대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중요한 사건이니만큼 자신의 의지로 결정하고 싶었다.
심장이 죄어들었다. 반항하는 자신을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일기에 다가올 폭언이 두려웠다. 재희는 한참 동안 입을 달싹거렸다. 대답을 재촉하는 고성이 터지고, 마침내 결심이 서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싫… 어요.”
“차재희!”
성질이 불같은 차대범이 유리잔을 집어 던졌다. 허공을 날아간 컵이 벽에 처박혔다. 산산조각 난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간발의 차로 머리에 맞지는 않았지만 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재희는 알 수 없었다. 아버지의 폭압에 그의 마음 또한 갈기갈기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고통 속에서 반발심이 치솟았다. 내가 대체 왜 그래야 해? 회사는 차재우와 차재하에게 넘어간다. 씨엔을 위한 청사진에 자신의 역할은 있으나 마나 했다. 선견 물산과 정략혼을 하든 안 하든 크게 달라질 게 없단 말이다.
그렇다면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되잖아. 어차피 서일이 있으니까. 재하가 그쪽과 혼인을 하기만 한다면……. 나까지는…….
거기까지 생각한 재희는 문득 자신의 이기심에 치를 떨었다. 나는 안 되고, 재하는 되고? 그런 게 어디 있어, 차재희. 의무를 져야 한다면 셋 다 똑같은 짐을 져야 해.
재희가 이를 악물었다. 상반된 감정들이 거칠게 뒤엉켰다. 하지만 같은 의무를 진다고 해서 같은 권리를 나눠 받는 게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차재우와 차재하에게 주어진 것들. 그것에 비하면 저에게 돌아온 것은 보잘것없었다.
그런데 왜……. 내가 이런 취급을 받아 가면서까지……. 생각이 급격히 기울었다. 재희가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안 할래요.”
“차재희. 너 정말 이럴 거니?”
싸늘한 목소리였다. 성미희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냐는 듯 재희를 쏘아보았다. 차재우와 차재하에겐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이었다. 그 시선을 받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싫다고, 그것만은 내 뜻대로 할 거라고 말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재희는 저항보다 순응에 익숙했다. 21년을 그렇게 살았다. 부모의 말에 순종하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 그가 사랑받아 온 방식이었다.
눈앞이 핑핑 돌았다. 방금은 어떻게 말했었지. 싫다는 말을 어떻게 꺼냈지. 불과 몇 초 전의 일인데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재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죄송하다는 말이 튀어 나갈 것 같았다.
그런데 순간 눈앞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서이수였다.
“……저는.”
그에게는 싫다, 아니다, 거절하는 말을 쉽게도 내뱉을 수 있었다. 선배 앞에서는 어떻게 그랬지.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돌이켜 보았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그대로 꺼내 보였던 순간, 그때의 자신이 어땠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재희는 눈앞에 이수가 있다고 상상하며 입을 열었다.
“결혼만큼은, 싫습니다. 절대 싫어요. 괘씸하다고 생각하셔도 할 말 없지만, 절대 양보할 생각 없어요. 죄송해요. 차라리 다른…….”
말을 잇는 와중에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살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선득했다. 창백한 뺨을 가로지르는 선이 생겨났다. 성미희의 다이아몬드 반지에 긁힌 뺨에서 피가 흐른다.
뭐지. 상황 파악이 어려웠다. 통증 또한 없었다. 그렇기에 성미희가 무슨 짓을 한 건지 감을 잡는 데 시간이 걸렸다. 짧은 적막이 지나고, 재희는 마침내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고개를 드니 험악하게 일그러진 모친의 얼굴이 보였다. 네까짓 게 배은망덕하게 그런 말을 하냐는 듯, 주제도 모르는 자식에 대한 분노와 실망이 묻어난 얼굴이었다.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차재희, 네가 감히…….”
“미쳤어요?”
차재하가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엄격하고 매정했을지언정 성미희는 단 한 번도 자식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린 자식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한다는 이유만으로 뺨을 때리다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차재하의 내면에서 들끓던 환멸감에 불이 붙었다.
차재하가 재희에게 다가갔다. 손수건으로 뺨을 닦아 준다. 그러고는 멍하니 앉은 재희의 앞을 막아섰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재하야, 네가 나설 일 아니야.”
상냥하게 말한 성미희는 곧바로 태도를 바꿨다.
“차재희.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니? 이 배은망덕한 것아! 네가 먹는 거, 입는 거, 전부 다 회장님이랑 내 밑에서 나온 건데, 어떻게 그딴 무책임한 말을 해!”
성미희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재희는 그저 제 어미만 바라보았다. 낳아 준 이가 쏟아 내는 격노에 그는 익숙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복종하고, 예쁨을 받아 왔기에 두 번째로 받아 보는 날 선 분노가 당황스러웠다.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화낼 일이었나? 내가 잘못한 건가? 그런 의문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판단력을 잃은 재희를 대신해 차재하가 소리쳤다.
“그런 말이 뭔데요! 싫은 걸 싫다고 하지 뭐라고 그래요! 왜 형한테까지 이러냐고요!”
“차재하, 끼어들지 말고 앉아라.”
재하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랬지. 싫은 걸 싫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저렇게 화를 내시는 걸까. 재하랑 내가 틀렸나? 내가 지금 배부른 투정을 하는 거였나……. 답을 모르겠다.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였다. 재희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쥐었다.
“씨발, 그냥 내가 할게요. 그럼 되잖아! 나 하나면 충분하잖아!”
“차재하!”
차대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재희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책감 어린 시선으로 차재하만 올려다보았다.
나 하나면 충분하잖아. 차재하의 말이 메아리친다. 나까진 안 그래도 되잖아. 그러한 제 생각과 반대되는 말을 듣는 순간, 재희는 저항의 의지를 잃어버렸다. 저런 애를 두고…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재하가 상대방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면서도, 그를 팔아넘기고 자신은 그 결과에 기대려 했다. 내가 부모님이랑 다른 게 뭐야? 구역질이 났다. 스스로가 역겨웠다. 재희가 두 눈을 꼭 감았다.
“제가…….”
이 죄책감을, 미안함을 지워야만 한다. 재하가 자신을 보호하려 했듯, 자신 또한 그를 지켜 주어야만 했다. 형이니까. 그보다도 한참이나 못나고 모자랐지만 그래도 형이니까…….
어차피 원래 그렇게 되어야만 했던 일이다. 철없는 반항이었다. 자신이 부모의 은혜도 잊고 날뛰었던 것뿐이다.
재희는 희생에 익숙했다. 타인의 괴로움을 지켜보느니, 자신이 모든 것을 인내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생각을 바꾸자마자 요동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재희는 습관적으로 자신을 억누르고 있었다.
“제가, 제가… 결혼할게요. 재하한테 그러지 마세요.”
“형!”
미쳤냐는 듯 돌아보는 차재하의 눈동자에는 굽어지지 않는 신념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재희에게는 그게 없었다. 차대범과 성미희는 그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키워 냈다. 그래서 재희는 스스로를 위하는 일에 인색했다.
재희가 차재하의 손목을 꽉 붙들었다. 네 걱정을 모두 내가 가져갈 테니 그러지 말라는 듯 웃었다.
“원하시는 대로 할 테니까. 대신 재하는… 싫다는 결혼… 시키지 마세요.”
저를 위해 차재하가 희생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반대이길 바랐다. 그렇게 함으로써 재희는 아까의 자신을 지워 버리고 싶었다. 동생 뒤에 비겁하게 숨으려 했던 것이 싫었다.
재희가 힘겹게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성미희는 이제야 자존심을 굽히는 재희를 용서하지 못했다. 그녀가 차재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우선순위가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 목록에서 재희는 가장 밑바닥을 차지하고 있었다.
성미희는 자신을 실망시킨 자식에게 악의적인 조롱을 쏟아 냈다.
“재희야, 너를 원하는 곳이 선견밖에 없는데, 너 하나 결혼시키고 재하 결혼을 무르는 게 말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수준이라는 게 있지 않겠니.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어미의 체벌이었다. 동시에 자존감을 무너트리는 말이었다. 그 말 한마디에 재희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다리가 풀려 쓰러질 뻔한 걸 가까스로 견뎠다. 테이블을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진짜… 두 분 눈에는 우리가 사람으로 보이긴 해요? 피 섞인 자식으로 보이긴 하냐고!”
차재하가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른다. 세상이 웅웅 울렸다. 재희는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알았다고 할 걸 그랬다. 학기 시작 전, 재희가 처음으로 뺨을 맞은 날부터 성미희의 태도는 돌변했다. 엄격하긴 해도 애정을 베풀었던 모친은 그날 이후로 사라지고 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다면 처음 말이 나왔을 때부터 받아들이는 게 나았을 뻔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터였다. 속이 무너지는 괴로움도, 자신이 가치 없는 인간이라고 깨닫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이었기에 후회해도 늦었다. 다만 앞으로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재희는 고개를 들었다. 익숙해진 미소를 그려 냈다. 다정하고, 따스해서 마주 웃어 주고픈 웃음이었다.
“제가 더 열심히 할게요. 죄송해요, 어머니.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원하신다면 다른 사람들도 더 만나 보고, 그쪽 마음에 들도록 노력할게요. 그러니까 재하한테 화내지 마세요.”
성미희가 원하던 대답이었다.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노력을 다짐하는 둘째 아들. 다정하고 말 잘 듣는 인형으로 돌아온 아들을 보며, 성미희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둘을 바라보던 차재하가 성질을 내며 룸을 나가 버렸다. 식사는 시작도 하지 않았으나 이미 분위기는 깨져 버린 뒤였다. 차대범과 성미희도 곧 자리를 떴다.
침묵 속에 내던져진 재희는 제 손끝만 내려다봤다. 차재우는 실내가 텅 비고 나서야 일어났다. 천천히 다가와 재희의 어깨를 짚었다.
“재희야, 결혼 이야긴 내가 잘 말해 볼게. 걱정하지 마.”
툭,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닿았다. 차재우 또한 성미희와 차대범이 원하는 ‘의무’의 대상이었다. 그에게는 유명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가 내정되어 있었다. 재희는 습관처럼 자신의 감정을 부정했다.
“아니야, 형. 나 정말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내가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봐. 화내실 만했지.”
“……그래?”
느지막이 대답하는 차재우의 낯에 안타까운 기색이 스쳤다.
“응. 빨리 가서 잠깐이라도 쉬어. 이따 또 비행기 타려면 피곤할 텐데.”
웃는 동생은 꼭 인형 같았다. 차재우는 말없이 재희를 내려다보다가 그를 꼭 끌어안았다.
차재우가 호텔로 떠나고 재희는 직원들이 테이블을 치우러 들어왔을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점 없는 눈빛으로 걸어갔다.
차를 어디다 세워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지하 2층을 모두 뒤진 후에 3층으로 내려왔다. 그곳에서 재희의 세단 보닛에 걸터앉은 차재하를 만났다. 아까 룸을 나간 후 계속해서 기다린 듯, 그의 발치에 담배꽁초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형.”
“…….”
재희는 차재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그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가 버린 꽁초를 주웠다. 머리 위로 차재하가 한숨을 쏟아 냈다. 착하기만 한 제 형이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재희가 몸을 일으키자 차재하가 그를 올려다봤다.
“얘기 좀 해. 진짜 그 여자랑 결혼할 거야? 하기 싫으면 하지 마, 어? 안 그래도 되잖아.”
“……재하야.”
“그냥 버텨 봐, 형. 응? 싫다는 사람 결혼식장에 억지로 끌고 들어가겠어?”
재희는 말없이 차 문을 열었다. 운전석에 올라타자 차재하도 조수석에 앉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채근해 보지만 재희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차재하와의 대화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결혼은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제는 그랬다. 재희는 부질없는 저항을 그만두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다면 적어도 부모에게만큼은 상처받지 않아도 되었다.
이수를 놓고, 그들의 뜻에 따르고, 그러면 부서져 버린 유리잔처럼 자신이 산산조각 나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었다.
이수에게로 갈 수 있다면 그렇게 조각나도 괜찮을 텐데, 그가 다시 이어 붙여 줄 테니까. 하지만 이수는 그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두지 않았고, 재희는 살기 위해 수그려야만 했다.
여태 그래 왔던 것처럼 순종하고 인내하는 것으로 초라하게 남은 자신이나마 지켜야 했다.
“돌겠네, 진짜!”
답답한지 소리를 지른 차재하가 시트를 몇 번이나 내려쳤다. 재희는 고개를 숙인 채로 침묵을 고수했다. 괜한 희망을 갖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더 밑바닥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매몰차게 돌아서던 이수, 냉랭하게 자신을 쏘아보던 모친, 소리를 지르던 부친. 그것으로 충분했다. 재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팠다. 차재하가 뭐라고 하든 변하는 것은 없다. 그러니까.
“내가 성미희 씨한테 무슨 얘기까지 했는지 알아, 형?”
차재하는 화가 날 때마다 모친을 타인처럼 이름으로 칭했다. 정확히는 그녀와 자신이 핏줄이라는 사실을 되새기고 싶지 않을 때였다. 재희는 그럴 때마다 어머니라고 불러야 한다고 차재하를 타일렀지만 오늘만큼은 그것을 지적할 여유가 없었다.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재희를 두고, 차재하가 눈시울을 붉혔다.
“걔하고 결혼하느니 목매달고 뒤져 버릴 거라고 했더니, 죽더라도 혼인 신고 하고 죽으래. 그게 엄마라는 여자가 할 말이야?”
“재하야…….”
말문이 막혔다. 재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다만 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건 성미희의 매정한 대꾸가 아니라, 차재하가 목을 매달겠다고 말한 부분이었다.
차재하는 자기애가 넘쳐흐르는 인간이었다. 자신의 자존감이 바닥을 긴다는 걸 얼마 전에야 알게 된 재희와 달리, 차재하는 언제나 제 세상의 중심인 스스로를 사랑했다. 그런 동생이 그런 말을 입에 담았다는 사실에 재희는 충격을 받았다. 그때 입술을 떠는 그를 보며 차재하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야. 형, 내가 진짜로 그러려고 한 건 아니야. 그냥 협박이었지…….”
“아…….”
덜커덩거리던 심장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다행이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재희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장난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
힘없는 타박이 돌아왔다. 차재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제 머리를 엉망으로 흩트렸다. 이런 말을 하려고 온 게 아니었는데 소스라치게 놀라는 형을 보는 순간 무슨 이야기를 하려 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다만 차재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던 성미희와 달리 속상해하는 재희를 보고 큰 위로를 받았다. 혹시라도 모친의 말에 자신이 상처받았을까 봐 무어라 변명하려 드는 재희에게, 차재하가 먼저 말했다.
“알아. 성미희 씨는 나를 잘 아니까, 내가 진짜로 자살 시도 같은 거 할 사람 아니라는 거 알고 한 말일 거야. 그런 건 신경 안 써. 그렇게 단언할 정도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양반이 결혼을 밀어붙인다는 게 화가 날 뿐이지.”
“……어쩔 수 없잖아.”
“형은, 아. 씨발. 모르겠다.”
차재하는 쉽게 단념하는 듯 보이는 재희가 너무나도 갑갑했다. 그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아픔을 겪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재희가 부모님에게 뭔가를 싫다고 표현하는 것을, 차재하는 오늘 처음 보았다. 적어도 그의 기억 속에서 차재희는 거절의 ㄱ 자도 모르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차재희를 꺾어 놓으려 하는 성미희를 보는 순간…….
차재하는 절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재희의 손을 움켜쥐었다. 뭘 하다가 다친 건지 붕대에 칭칭 감긴 손바닥을 꽉 쥔 채로 말했다.
“형. 싫으면 계속 싫다고 해. 난 절대 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안 할 거야.”
“…….”
“형도 그렇게 해. 내가 도와줄 테니까.”
네가, 나를, 대체,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데? 선배를 내 앞에 데려다줄 거야?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게 만들어 줄 거야? 그게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어, 재하야.
재희는 말없이 웃었다. 이수와 함께하며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불가능해진 이 순간에, 재희는 그저 살고 싶어졌다. 부모에게서 버림받지 않게, 여전히 다정하고 말 잘 듣는 차재희여도 좋으니까.
부서지고 싶지 않았다.
차재하가 떠나고, 침묵 속에 남겨진 재희는 또다시 이수를 떠올렸다. 서이수를 잘 몰랐을 땐 그가 마냥 무서운 사람이라고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아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따뜻하고,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모르는 사람과의 결혼, 기약 없는 미래, 상상만 해도 싫었다. 하지만 그 여자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만나 보면 잘 맞을 수도 있잖아. 재희는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생각했다.
차라리 선배를 몰랐더라면 더 나았을까, 내가 누구인지 몰랐더라면 덜 아팠을까, 하고…….
물론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 재희가 뭐 잘못했어?
이수가 신유진의 전화를 받은 것은 일요일 오전의 일이었다. 화요일 오전에 재희와 그렇게 헤어지고 난 후, 이수는 계속 집에 처박혀 있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차재희를 떠올리며 괘씸함에 욕을 씹다가, 이유가 있었겠거니 싶다가, 그 이유가 무엇인지까지 파고들면 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맸다.
차재희가 정말 개새끼인가.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최근의 그를 떠올려 보면 그렇지 않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이수는 분명 그의 순진하고 순수한 면을 보았다.
서이수는 독단적이다. 자신의 판단을 200% 확신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여태 재희에 대해 정의 내린 것들이 틀렸다고 인정하기가 싫었다.
마음이 이리저리 튀었다. 결론이 나지 않는 상태로 시간만 흘렀다. 그러던 중, 이수에게 전화를 건 유진은 대뜸 그런 질문을 던졌다. 차재희가 뭘 잘못했느냐고. 눈치도 빠르다.
“왜?”
─ 재희는 죽상으로 너 찾아다니지, 너는 연락도 안 되고 학교도 안 나오지……. 둘이 뭐 있는 것 같아서. 싸웠어?
“몰라. 이걸 싸웠다고 해야 하나.”
달칵, 달칵 마우스를 클릭하며 대꾸했다. 무덤덤한 목소리에 유진이 흐으으음, 하고 길게 침음을 흘렸다. 내일 발표할 자료를 훑어보던 이수가 문득 이상함을 깨달았다.
신유진은 자신의 인간관계에 딱히 이래라저래라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유독, 차재희에 대해서만큼은 많이도 참견했다.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너, 차재희 좋아하냐?”
─ 그게 무슨… 개소리지?
심각하게 대꾸한 유진이 낄낄거리며 말을 이었다.
─ 아니, 좋아하긴 하지. 착하고 귀여운 후배. 근데 너 지금 다른 뜻으로 물은 거 맞지?
“어. 관심 있냐고. 성적으로.”
─ 우리 이수, 병원 가 봐야겠네. 기억 안 나? 아쉽게도 누나는 헤테로도 바이도 아닌 완벽한 레즈거든.
누나라는 말에 혀를 찬 이수가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근데 왜 이렇게 차재희 일에 관심이 많아?”
─ 뭐? 실망인데, 서이수. 내가 재희 일에 관심이 많겠냐? 니 일에 관심이 많은 거지.
그 말을 곱씹던 이수는 일전에 몇 번 머리를 스쳤던 생각을 떠올렸다. 차재희는 꼭 ‘서이수를 열받게 하려면 이렇게 해라’ 하고 과외를 받은 것 같다는… 생각. 이거 완전 신유진이 할 만한 짓 아닌가. 이수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차재희한테 뭐라고 했냐?”
─ 으음.
의심은 곧 확신이 됐다.
“씨발, 너 맞지.”
─ 별 얘기 안 했어.
별 얘기가 무슨 얘긴데. 순간 보이지 않는 손이 떠올랐다. 차재희가 저지른 일에 누군가가, 특히 신유진이 개입했다면 상황이 어렵지 않게 이해가 갔다.
순진하고 정직한 차재희가 재밌는 일에 미쳐 버린 신유진의 조언을 받았다면, 그 배경에 자신과 친해지고 싶다는 이유가 있었다면 도무지 이해 불가능한 엘리베이터 사건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 재희가 너랑 엄청 친해지고 싶어 하더라고. 그래서 뭐, 몇 가지 조언을 해 줬지. 우리 이수는 자극적인 걸 좋아하고, 화를 잘 안 낸다고.
황당했다. 친해지고 싶다고 말하면서 별 좆스럽게 굴었던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또한 놀라웠다. 새삼스럽지만 신유진과 친구가 맞긴 맞았다. 신유진은 정말로 자신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누가 친해지자는 사람한테 저렇게 개같이 굴어,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확실히 그게 정답이었다.
그토록 성가시게 굴지 않았다면 이수는 진작에 차재희의 이름을 잊어버렸을 것이다. 차재희는 그와 친해지기 위해서 최선의 방법을 택했다. 이수와 가장 친한 유진에게 조언을 구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게까지 친해지고 싶었나. 대체 뭐 때문이지. 그런 생각과 함께 치미는 의혹에 입맛이 썼다. 뚱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개소리가 점점 늘어, 신유진.”
일부러 속인 건 맞지만, 모든 행동의 이유에는 자신이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짐과 동시에 불편해졌고 또 허탈했다. 며칠을 고민한 문제의 원인이 신유진이었다니. 이수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캐물었다.
“또 뭐라고 했어, 너.”
─ 응? 그냥……. 으음. 니가 재희 무시한다길래 2단계 진입이라고 알려 줬고…….
“이게 무슨 미션이냐? 뭔 2단계야.”
─ 너, 기억 안 나? 우리 병원에서 크게 싸우고 나서 니가 나 일주일 동안 무시했잖아. 그래도 내가 매달리니까 그제야 나 받아 줬으면서. 아니야? 맞잖아!
그랬나? 예전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수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백 년 전 얘길 하고 있어.”
─ 난 똑똑히 기억하거든? 그때 개무시당해서 존나 열받아 가지고……. 이 새끼, 진짜 내가 가만 안 둔다. 이러면서 내 발밑에 무릎 꿇게 해 주겠다고 칼을 갈았는데.
“됐고. 또.”
─ 그거 말곤 또 없는데. 잘 지내는 것 같길래 신경 껐지. 아, 최근에 너 만나는 사람 있냐고 물어봤었어.
담뱃재를 털어 내던 손길이 멈칫했다. 찝찝한 표정으로 담배를 비벼 껐다. 이내 이수가 휴대폰을 들고 일어났다. 소파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는다.
속이 또 좋질 않았다. 요즘은 종종 이랬다. 차재희를 생각하다 보면 돌연 블랙홀이 생겨난 것처럼 가슴이 푹 패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회오리치는 심연이 주변을 우그러트리고 온갖 잡다한 감정을 끌어들였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생각들만 마음속을 떠돌았다.
─ 그게 다야.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재희랑 싸웠어?
싸웠다고 해야 하나. 골똘히 생각하던 이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사소한 오해.”
─ 뭐야. 대화로 풀어, 대화로.
“닥쳐. 니가 문제야, 신유진. 니가 제일 문제라고.”
─ 아, 됐고. 그래서 결론은? 재희랑 친구 먹었어?
친구?
이수는 재희와 보낸 밤을 떠올렸다. 생각만 해도 아래가 얼얼할 만큼 자극적인 기억이다. 이런 감각을 나누는 대상을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쾌락을 제외한 감정을 나눈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수는 재희와 함께하는 동안 자신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 그와 얼마나 많은 말들을 주고받았는지 떠올렸다. 차재희는 최근 자신의 일상에서 유진보다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친구 맞아. 일단은.”
앞으로도 친구 사이를 유지할 수 있을까. 선택은 차재희에게 달려 있었다.
* * *
차재희는 피할 수 있지만, 월요일은 피할 수 없었다. 그를 만날 날이 왔다. 독서 문화의 이해 수업의 발표를 하는 날이었다.
생각은 얼추 정리되었다. 유치한 단어지만 차재희와 절교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 이수는 이번에 확실히 경고할 참이었다. 다시는 저를 속일 생각 하지 말라고, 그런 일은 한 번이면 족하다고 말해야 했다.
차재희는 수업 시작 시간보다 한참이나 빨리 온다. 이수는 교수가 오기 전에 재희와 이야기를 끝내려고 평소보다 더 빨리 학교로 향했다. 그런데 도착한 강의실이 텅 비어 있었다. 오늘 좀 늦나. 자리를 잡고 기다리는데 수업이 가까워질 때까지 재희는 나타나지 않았다.
설마 이번에도 잠수는 아니겠지. 그럼 진짜 죽여 버리겠다고 다짐하고 있을 때 차재희가 나타났다. 교수보다 1초 먼저 강의실로 들어선 그는 이수가 있는 곳을 쳐다보지도 않고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뭐지. 순간 위화감이 들었으나 교수님 때문에 안쪽까지 찾아오기가 난처했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발표는 순조롭게 끝났다. 교수는 이번에도 물개 박수를 치며 환히 웃었다. 이번에는 이수와 재희 그리고 율. 셋이서 사진을 찍었다.
“형, 그때 제안하신 거 말이에요.”
수업이 끝난 후, 율이 대화를 걸어왔다. 이수는 율에게 잠깐만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 그 1초 만에 차재희는 사라지고 없었다. 뭐야. 바쁜가? 차재희의 다음 수업은 두 시간 후였으나, 다음 주부터 본격적인 시험 기간이었으므로 공부를 위해 먼저 자리를 떴을 수도 있었다. 이수는 그렇게 판단 내리곤 율과 점심을 먹었다. 게임 제작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사실 이수는 이미 수많은 프로그래머를 만났다. 그러나 서일 그룹 차남이라는 그의 배경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연역적 알고리즘을 게임에 적용하는 일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그가 누구인지 아는 이들은 게임 제작보다는 콩고물에 더 관심이 많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관심을 보인 사람은 문율이 처음이었다. 두 사람은 계약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대화가 끝나고 공학관을 나오면서 이수는 재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재희]
선명한 세 글자가 액정에 떠올랐다. 그러나 신호음이 제대로 가기도 전에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음성 안내가 흘러나왔다. 이수의 입매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역시 받지 않았다. 경영대를 향해 걸으며 메시지를 보냈다.
14:36
차재희. 보면 전화해. 아무 때나.
그리고 오후 다섯 시 반. 수업이 끝나고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숫자 1은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슬쩍 벌어진 입술이 느릿하게 적셔졌다. 대화 창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키패드를 두드렸다.
17:33
할 말 있으니까 전화해.
망설이던 이수는 말을 덧붙였다.
17:34
화 안 났으니까. 쫄지 말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어 두고 흡연 구역으로 향했다. 도서관으로 가기 전에 담배를 한 대 피우고 갈 생각이었다. 아. 혹시 차재희도 비문학 서가에서 공부하고 있으려나.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관심을 끌려고 그랬던 거니까, 지금은 굳이 거기까지 가지 않았을 것 같았다. 이수는 재희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내심 궁금해하며 코너를 돌았다.
그리고 저 멀리, 경영대 벽에 기대선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차재희는 피곤한 기색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게 그런 거였다. 왼뺨에 길게 난 상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 어딘가 야윈 느낌. 오른손 손바닥에 감아 둔 붕대까지 시선이 미쳤다.
얼굴은 왜 저래. 레오가 긁었나? 손은 또 뭐고. 왜 맨날 오른손만 다칠까. 요리하면서 베는 건가. 실력이 형편없네. 그를 향해 걷는 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재희가 다가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이수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멍하니 이수를 바라보던 재희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뭐야? 커다란 덩치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야, 재희야! 어디 가?”
그의 동기들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거 지금……. 작아지는 뒷모습을 보던 이수가 깨달음을 얻고 소리쳤다.
“야, 이 씹새끼야! 너 거기 안 서?”
지가 잘못해 놓고, 도망을 쳐? 황당해진 이수가 재희를 쫓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 차재희는 눈을 크게 뜨더니 그대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저게 돌았나, 진짜. 별수 없이 이수도 뛰었다.
살면서 전력 질주를 한 적이 없었다. 수술을 받기 전에는 당연히 못 했고, 심장을 이식한 후에는 검사를 위해 러닝 머신을 몇 번 뛰어 본 게 다였다.
차재희는 쌩쌩 잘도 달렸다. 하지만 이수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달리기를 잘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차재희는 사과대 건물로 들어가 복도를 내달렸다. 적막이 내려앉은 실내에 두 남자가 뛰는 소리가 쿵쿵 울렸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이수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을 즈음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차, 재희, 하아, 미친, 새끼야…….”
그 자리에서 숨을 고르다가 결국 주저앉았다. 온몸에 진이 빠졌다. 땀에 흠뻑 젖은 이마를 닦아 내고 심호흡을 했다. 급격한 운동에 어질어질, 현기증이 일어 바닥을 짚은 채 가만있었다. 재희는 그 모습을 두고 보지 못했다. 쭈뼛거리며 다가오더니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묻는다.
“괜찮아요?”
“안, 괜찮아…….”
슬며시 고개를 들어 재희를 쏘아봤다. 저보다 더 빨리 뛴 주제에 그는 호흡만 조금 흐트러진 채였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서로를 훑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수척하고… 창백하다. 나 때문인가. 우울한 낯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수가 재희에게 물었다.
“넌, 괜찮아?”
재희에게 이 정도 운동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심장을 움켜쥐는 이수의 모습에 걱정이 솟구쳤다. 괜히 뛰었나. 방금의 행동이 후회되었다. 일단 재희는 습관처럼 웃었다.
“괜찮아요. 이 정도 뛰는 건.”
“아니, 그거 말고.”
어느새 숨을 고른 이수가 차분히 대꾸했다. 재희의 면면을 살피며 무심하게 질문을 던진다. 괜찮냐고. 그 네 글자가 주는 울림이 컸다. 목구멍이 얼얼했다. 괜찮다고 말해도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주는 이가 서이수라서. 하필이면 이 선배라서. 재희는 입술을 씹었다.
하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부모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와 선후배 이상의 무언가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서이수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재희는 극심한 자괴감을 맛봤다. 무엇 하나 제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아니, 말이 틀렸지. 뭐 하나 제 손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수가 재희를 올려다보며 손을 내밀었다. 망설이다 붙잡았다. 손바닥이 맞닿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그 안에 상처가 가득해서 아프기도 했다. 재희는 이수를 일으켜 준 후 떠나려고 했지만 그대로 손목이 붙잡혀 버렸다. 악력이 거셌다.
“따라와.”
“……저 공부하러 가야 해요.”
웅얼거렸지만 이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빈 강의실을 찾아 그를 밀어 넣는다. 텅 빈 공간엔 시험 기간을 앞둔 학생들의 긴장감이 남아 있었다. 딱딱히 굳어 있던 공기가 두 사람의 등장으로 인해 흐트러졌다.
이수를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재희는 짧은 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봤다. 사과대 중정이 눈에 들어왔다. 유월, 잎이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벤치가 보였다. 여전히 사람이 없었다. 재희는 그곳으로 눈길을 던졌다가 고개를 돌렸다.
책상 위에 걸터앉은 이수가 재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두 뺨 위로 관찰하는 시선이 닿았다.
“얼굴은 왜 그래.”
나긋한 목소리에 울컥했다. 하던 대로 짜증 내고 욕이나 하지. 재희는 이 순간 그런 것들을 바라고 있었다. 더 이상 이수에게 마음을 주지 않을 계기, 그에게 이끌리지 않을 이유 같은 것을 찾아야 한다. 가슴속에 꽉꽉 들어찬 감정을 모두 도려내야만 했다.
“별거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손은 또 왜 그러고.”
“…….”
이수가 팔을 뻗는다. 오른손을 잡아채려는 것을 가까스로 빼냈다. 재희는 손을 뒤로 숨긴 채 고개를 숙였다. 서이수의 다정함은 독이다. 상처에 닿으면 자신을 아프고 또 괴롭게 만들 무책임한 다정이었다.
“신경 꺼요…….”
이수의 눈매에 힘이 들어갔다. 입을 다문 채 재희를 쏘아본다. 차재희가 평소 같지 않았다. 그게 묘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그때 화낸 것 때문에 그런가. 아니면 엘리베이터 사건 때문에 양심에 찔려서 그런가. 그것도 아니면.
‘너 만나는 사람 있냐고 물어봤었어.’
왜 그딴 걸 물었는데. 입 안이 썼다. 너, 나 좋아해? 몇 번이나 물었는지도 모를 질문을 다시 한번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따져 보고 말 문제가 아니었다. 차재희와의 관계에 대한 확립을 미룰 수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 물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메시지 안 봤어?”
“……네.”
어물거렸지만 확실한 대답이었다.
“못 본 게 아니라, 안 봤다고?”
그래도 이수는 한 번 더 되물었다. 재희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
“…….”
“차재희. 너 왜 도망쳐?”
평소에는 잘만 대꾸하더니 오늘따라 말수가 적었다. 입에 풀칠을 했나. 아니면 화낼까 봐 무서워서 이러나. 이수는 짜증을 억누르며 설명했다.
“화 안 났어. 안 났으니까 쫄지 말고 똑바로 들어.”
“…….”
“신유진한테 얘기 들었어. 걔가 개소리했다며. 그것 때문에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아니. ……이해는 해.”
재희가 살짝 턱을 들어 올렸다. 내려다보는 주제에 올려다보는 듯한 눈동자로 본다. 겁먹은 강아지 같았다. 그가 얼마나 복잡한 심경인지도 모르고 이수는 말을 이었다.
“한 가지만 알아 둬. 난 거짓말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어. 그러니까 앞으로 이런 일 없게 해.”
그 용서가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외려 원망스러웠다. 수요일에, 목요일에, 하다못해 토요일에라도 말해 주었더라면 좋았을걸. 왜 단념하려고 마음먹고 나서야.
“……여태 연락도 안 받았잖아요. 근데 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 그럴 때 방해받는 걸 싫어해서 휴대폰을 꺼 뒀던 거지, 네 연락만 피한 건 아니야.”
차재희라는 존재만을 외면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다행스러웠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수가 용서해 준다 한들 이젠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재희는 이수를 곁에 둔 채 모르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너무 비참한 일이니까. 그렇기에 펴 보지도 못한 짝사랑을 접어야 했다. 정말로 밑바닥에 처박히기 전에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쉽게 돌아설 수가 없었다. 서이수가 붙잡잖아. 선배가 나를 용서해 주잖아. 저 남자를 내가 어떻게 외면해.
하지만 재희는 알고 있었다. 이 끝에 있는 건 헤어짐뿐이다.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도, 표현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끝을 맺을 수밖에 없는 사랑이었다.
왜 나는 이런 것밖에 못 해. 왜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울컥 치미는 설움에 재희는 입술을 물었다.
“또 있어?”
이수가 그렇게 물었다. 서늘한 눈매가 재희를 향한다. 그러나 눈동자 안에 가득 담긴 것은 냉랭하지 않은 믿음이었다.
“나한테 거짓말한 거, 또 있냐고. 있으면 지금 다 말해.”
심장이 빠듯하게 죄어 왔다. 가장 마음에 걸렸던 말이 하나 있었다.
……선배를 좋아할 구석이 없다고 말했잖아요. 그거 다 거짓말이에요. 사실은 다 좋아요.
캐러멜 같은 머리칼도, 작고 반듯한 이마도, 길고 얇은 눈썹도 좋아요. 사나워 보여도 웃을 때는 무척이나 귀여운 눈매도 좋고요. 눈을 내리뜰 때 보이는 속쌍꺼풀의 선도, 팔락이는 속눈썹도 좋아요. 부드럽게 꺾인 코끝도, 그 밑에 딸기 우유처럼 달콤해 보이는 입술도 좋아해요.
턱 선이 그늘을 드리우는 가느다란 목도, 그 밑에 굳게 닫힌 빗장뼈도 비밀스러워서 좋아요. 아팠겠지만, 그래도 선배를 낫게 만든 붉은 흉터도, 나보다 손도 작으면서 악력은 더 센 것도 멋져요.
내 말 한마디에 반응하며 짜증을 내는 것도 이젠 싫지 않아요. 내가 화를 내면 똑같이 화를 내는 것도 좋아요. 안 그런 척하면서 상대방이 난처해질까 봐 많이 고민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요. 선배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배려했다는 것도, 나를 정말 많이 봐줬다는 것도 알아요.
선배의 모든 부분을 좋아해요. 좋아하지 않을 구석이 없어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재희는 지루한 고백을 애써 삼켜 냈다. 이수가 채근했다.
“기회는 한 번이야. 거짓말한 거 없어?”
“……많아요.”
“빼지 말고 말해.”
포용력 있는 태도에 재희는 불쑥 욕심이 생겼다. 이수는 남자와 만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마음속에 뭐가 있든 접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과 친구로 남고 싶어서 여기까지 달려와 주었다.
그런 서이수가 자신의 짝사랑을 알게 된다면, 그런데도 자신이 그의 친구로 남고 싶어 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정말로 나를 밀어낼까?
차재희는 서이수와의 관계만큼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나친 바람이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을 살아 있게 만드는 유일한 존재가 자신의 생각을 존중해 준다면, 재희는 그를 위해 많은 것들을 감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마 그를 향한 애정을, 희망을 버리지 못하겠다.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도서관에서 선배가 버렸던 자몽 티. 선배 주려고 산 거 맞았어요. 저번에 번화가에서 번호 딴 거, 그거 문율이었고…….”
“…….”
이수는 황당하단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의 고백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다정하지 않다고 말한 거, 다 거짓말이에요. 선배 엄청 다정해요.”
그리고 그 이후의 말들은… 이수를 당황시켰다.
“부산에서 있었던 일을 두고 불쾌한 신체 접촉이라고 했었던 것도 거짓말이었어요. 사실은 싫지 않았어요. 문율이랑 셋이 과제 했던 날. 집에서 자고 가라고 할 때 선배가 편해서 그랬다는 말도… 사실은 더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런 거였어요.”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지금.
“과방에서 키스했던 거, 실수 아니었어요. 하고 싶었어요.”
“차재희.”
“그냥 들어요.”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눈빛은 힘없이 떨려 왔다. 재희는 이수의 얼굴을 눈길로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PPT 엉망으로 만들었던 거, 일부러 그랬어요. 선배가 자꾸 나 피하니까 붙잡으려고.”
“…….”
“악몽 꿨다고 안아 달라고 한 것도 거짓말이에요. 안기고 싶어서 그랬어요.”
……왜?
이수는 방금 재희가 뱉은 말들을 모조리 잊어버리고 싶었다. 지금 관계의 주도권은 차재희에게 있었다. 그가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이수는 그를 밀어내거나 혹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재희가 방금 쏟아 낸 고백들은 이수로 하여금 차재희를 외면하게 만드는 문장들이었다. 직접적인 표현은 없더라도 충분히 유추 가능한 말이었다.
왜. 대체 왜. 받아 줄 수 없다고 말했잖아. 접으라고 말했잖아.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해.
자백할 기회를 저버리는 것은 이수가 그토록 혐오하는 기만과도 같았음에도, 이수는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길 바랐다. 힘들게 가까워진 재희와 멀어지고 싶지 않아서, 그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서, 그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왜 그랬냐고 안 물어봐요?”
그 질문에 이수는 왜, 라고 짧게 물었다. 왜 그랬냐는 뜻이 아니라 사실은 왜 그 이야기를 하냐는 뜻에 가까웠다. 그러나 재희는 이렇게 대답했다.
“선배랑 친해지고 싶었어요.”
“…….”
“선배랑 친구 하고 싶어요. 앞으로도, 계속.”
숨김없는 목소리는 진심만을 담아냈다. 가슴에 미묘한 압박이 느껴졌다. 폐가 굳은 것처럼 숨쉬기가 답답했다.
그 말만 하면 됐잖아. 친구 하고 싶다는 말만 했으면 이런 기분 느낄 일 없잖아. 이수는 미약한 배신감에 휩싸였다.
관계의 끝을 예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게 자신을 털어놓고야 마는 재희가 원망스러웠다. 이수에겐 그의 말들이 인연을 끊자는 소리로만 들렸다. 자신을 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지.”
조금 떨리는 음성이 새어 나왔다.
“키스하고 싶었다고, 같이 있고 싶었다고, 안기고 싶었다고.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지. 넌 친해지고 싶은 사람하고 그런 걸 해?”
“그냥 말 그대로 사실이에요. 전에는 그랬고, 앞으로는 그러길 바란다는 거지. 선배랑 친구로 지내고 싶어요.”
그렇게 대꾸한 재희는 조용히 웃었다. 이수는 화가 났다. 그런 마음으로 어떻게 친구로 지내. 내가 등신인 줄 아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뭐 하자는 거야, 차재희.”
“뭐가요.”
“너야, 나야. 누굴 속이려는 건데, 지금.”
좋아한 게 아니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자신이 그렇게 믿어 주길 바라는 건지 모르겠다. 차재희가 대답을 피했기에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불가능한 일이었다.
둘 다 바보가 아니니까 당연한 일이다. 외면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감정이 아니었다. 너를 좋아하지만 계속 곁에 머물고 싶어. 눈에 빤히 보이는 사실과 의도를 모른 체할 수는 없다.
“친구가 되고 싶은 게 아니잖아.”
“아니요. 맞아요.”
재희의 고집스러운 대답에 이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거칠게 흩트린다.
차재희의 말은 자기 최면에 가까웠다. 키스하고 싶고, 같이 있고 싶었지만 결코 이수를 좋아한 것은 아니라고. 친구가 되고 싶은 것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마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이수는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 싫었다.
“친구, 그래. 너는 그렇게 생각해.”
“…….”
“근데. 내가 보기엔 그게 아닌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확신을 요하는 이수의 태도에 재희는 절망했다. 이것마저도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 서이수는 끝내 자신을 밀어낼 셈이었다. 그는 어리광을 받아 주지 않았다. 바보처럼 한 번만 눈감아 주면 될 걸, 단호하게 잘라 낼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원래부터 그랬는지도 모른다. 언제든 자신을 밀어내려고 준비를 해 왔을지도 몰랐다. 약혼하지 않겠다는 말에 자신을 곧바로 잉여 인간 취급하던 부모처럼……. 이수도 자신이 귀찮고 성가셔서, 기회만 되면 붙잡은 손을 놓아 버릴 속셈이었는지도 모른다. 재희의 마음이 파랗게 물들었다. 우울에 젖어 든 그에게 또다시 질문이 날아들었다.
“너, 나 좋아해?”
직시하는 이수의 눈동자는 선명한 확신의 빛을 띠었고, 더는 속일 생각 말라는 단호한 경고가 깃들었다.
그렇다고 말하든 아니라고 하든 나를 버릴 거잖아. 이미 정해 놓은 주제에 왜 물어봐. 속이 쓰렸다. 재희는 마지막으로 발악했다. 이수가 자신을 여태 많이 봐줬음을 알기에, 한 번만 더 눈감아 달라고 애원하듯 대꾸했다.
“……몰라요.”
나직한 한숨이 둘 사이를 가른다.
“네 마음인데 왜 몰라. 네가 알아야지.”
이수는 여지를 주지 않았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정말 아무것도 없나. 마음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처럼 아팠다. 재희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여태 살면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한 일이라고는 딱 두 가지뿐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하기 싫다는 것 그리고 이수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것. 그런데 둘 다 제 뜻대로 할 수가 없었다. 하나는 선택권조차 주어지지 않았고, 하나는 친구 이상으로 넘쳐난 마음이라서 거절당했다.
그 감정조차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라난 것이었다. 저 혼자 부풀고 부풀어서, 재희의 세상을 집어삼켰다.
“재희야.”
“알면요. 내 마음 알면… 어떻게 할 건데.”
이수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말했잖아. 그럼 난 너 못 봐.”
재희는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럴 거면 반창고를 왜 붙여 줬어. 왜 재희라고 불러 줬어. 나한테 왜 웃어 줬는데. 그날 밤, 선배도 나한테 입 맞췄잖아. 이럴 거면 왜 그렇게 무책임한 애정을 베풀었는데.
“대답해. 나 좋아해?”
마지막 질문이었다. 그리고 재희는 적나라한 자백 대신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그가 앉은 책상 위로 손을 짚었다. 허리를 숙여 이수에게 키스했다. 언제나처럼 좋은 향기가 났다. 재희는 충격으로 뜨인 눈을 마주 봤다.
재희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얇은 근육으로 뒤덮인 상반신을 천천히 쓸어 만졌다. 비스듬히 겹쳐진 코끝에서 서로의 숨결이 섞인다. 재희는 이수를 향한 갈망을 마지막 입맞춤에 털어 넣었다.
폭풍우처럼 쏟아지는 고백에 이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헐떡거리는 호흡과 함께 혓바닥이 비벼진다. 슥, 잇몸을 쓸어 줄 때마다 이수는 더 들어오라는 듯 입을 크게 벌렸다.
살덩이를 빨아들이자 이수가 신음했다. 재희의 팔을 꽉 붙든다. 지나친 자극에 흥건히 배어 나온 타액을 재희가 샅샅이 핥았다.
살갗을 맞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수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쿵, 쿵, 세상이 흔들리는 것처럼 귓전을 뒤덮는 맥동에 눈앞이 아찔했다. 가슴이 죄어 오는 느낌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끌어안고 싶을 정도로 포근한 향기가 여전히 사방을 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잊지 못하는 기억이 밀려들어 왔다. 본능적 이끌림을 거부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수가 재희를 밀쳐 냈다.
형형한 눈빛이 이수를 향한다. 애정과 욕망 그리고 절망으로 뒤덮인 눈동자가 반짝였다. 두 뺨이 젖어 있었다.
“……이게 내 대답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도 흠뻑 젖어 있었다. 패닉에 빠진 이수를 뒤로하고 재희가 떠났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싸늘하게 식어 내리는 가슴팍을 매만지며… 이수는 알 수 없는 허전함에 몸을 떨었다.
터질 것같이 뛰는 심장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속이 꺼져 버릴 것처럼 명치가 아릿했다. 이러다 안이 텅 비어 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느낌이 이상했다. 뭔가를 토해 내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움켜쥐고 싶은 것 같기도 한 기이한 감각이었다.
온기의 공백이 컸다. 이수는 서늘하게 식은 입술을 매만졌다.
좋아해요.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이수는 재희의 눈을 통해 보았다. 유리구슬 속에 담긴 폭풍우 같았다. 쏟아붓는 빗소리도, 지축을 뒤흔드는 천둥도, 격랑이 이는 파도도 이수는 모두 보았다. 다만 무형의 감정을 느꼈을지언정 이수는 재희의 마음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제대로 거절하기도 전에 재희는 떠나가 버렸다. 자신을 향한 마음을 오롯이 간직한 채로.
잘된 일이다. 굳이 어색할 일 없게 되었으니까. 알아서 마음 정리하겠지. 차재희는 똑똑하니까. 일부러 그럴 거라고 생각하려 애썼다. 그러나 자꾸 엇나가려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이수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다.
해가 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그가 곧바로 서이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 응, 이수야. 웬일로 전화를 다 했어?
“김성민 교수님한테 지금 들러도 되나?”
─ ……잠깐만. 실장님, 자리 좀 비켜 주세요. 고맙습니다. 아, 그리고.
서이준이 비서실장에게 무어라 지시를 건네는 소리가 들렸다. 이수는 정문을 향해 걸었다. 손끝이 가슴팍을 더듬는다. 아까보다 훨씬 안정된 상태였으나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심장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았다.
“아직 회사야?”
─ 응. 처리할 일이 좀 남아서. 교수님은 왜. 어디 아파?
“검사 좀 받아 보고 싶은데. 지금 당장.”
─ 연락하라고 했으니까 바로 가면 될 거야. 어디야. 집이야? 데리러 갈까? 나도 같이 갈게.
“아니. 별거 아니니까 신경 꺼. 그리고 이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이수의 말에 서이준은 비밀을 지키는 조건으로 병원으로의 동행을 요구했다. 끈질긴 설득에 이수는 결국 알았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정문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로비에서 내리니 벌써 도착한 서이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수야, 어디가 아픈데. 많이 안 좋아? 저녁은 먹었어?”
이수에게 별 관심이 없는 서이나와 달리, 서이준은 이수를 무척이나 아꼈다. 잔소리처럼 느껴지는 걱정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이수는 온갖 검사를 받았다.
퇴근했다가 불려 나온 심장외과 김성민 교수는 갑작스러운 VVIP의 방문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최우선 순위로 검사를 끝마친 이수가 진료실에서 주치의를 마주했다.
“지금까지 나온 결과만 봐서는… 전혀 이상이 없습니다.”
“확실해요?”
의심이 가득 묻어나는 태도에 김성민이 식은땀을 흘렸다. 이마를 한 번 쓸어내리고, 결과지를 다시 샅샅이 훑는다. 그러나 전혀 문제가 없었다. 수술을 한 지 5년도 더 된 심장은 안정된 상태였고, 백혈구 수치도 정상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김성민이 이수에게 물었다.
“혹시 주로 어떤 상황에서 두근거림을 느끼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최근 불안함을 느낀 일은 꽤 많았다. 일단 오늘 저녁에도 그랬고, 저번 주에도 그랬고, 일전에 부산에서도 그랬고, 또 그전에도. 기억을 떠올리던 이수가 눈을 찡그렸다. 그 대부분의 상황에… 차재희가 함께였다.
몰랐던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불확실한 가정이 머리를 스쳤다. 그럴 리가. 이내 고개를 저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그걸 모르는 김성민은 턱을 매만지며 설명했다.
“심박이 빨라지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딱히 신체적인 문제가 원인이 아닐 수도 있거든요. 염려하시는 바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일단 수치상으로는 심장이 아니라 어떤 심리적인 문제일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심리요?”
“으음.”
차트를 들춰 본 김성민이 이수의 심리 분석 결과지를 훑어봤다.
“어떠한 심리적 반응으로 인해서 심박이 빨라지기 시작했을 때, 심정지에 대한 트라우마가 떠올라서 반응이 더 격화될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무슨 심리적 반응이요.”
“……어. 음.”
이수는 재촉하듯 테이블을 두드렸다. 톡, 톡, 손끝이 둔탁한 소리를 빚어낸다. 고민하던 김성민이 말을 늘어놓았다.
“하나로 콕 집어서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 저는 심리학 박사가 아니고 제 말이 정확하다고 자신할 수도 없지만, 가슴을 뛰게 하는 것들 있잖아요. 작게는 설렘, 가볍게는 기쁨부터 무겁게는 공포……. 감정이 고조되면 신체가 반응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요. 또 긴장했을 때도 그렇고요. 뭐, 좋아하는 사람을 볼 때나……. 아시죠? 하하. 전 아직도 아내만 보면 그렇게 심장이 터질 것 같더라고요.”
톡.
이수가 움직임을 멈췄다. 입술을 달싹거리다 이내 다문다.
진료실 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내가 말실수를 했나. 김성민이 싸하게 굳은 낯을 힐끔거렸다. 그 순간 지잉, 작은 진동과 함께 울리는 전화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수는 화면에 뜬 사랑하는 부인이라는 글자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들을 말도 없을 것 같았다.
“늦은 시간에 감사합니다, 교수님.”
꾸벅 인사를 건네고 진료실을 나왔다. 서이준은 이미 밖에서 결과를 전해 들은 듯 아까보다 훨씬 진정된 상태였다. 이수는 반강제적으로 그와 저녁을 먹은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샤워 후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다.
차재희의 새까만 눈동자가 뇌리를 떠나질 않았다. 몰아치던 키스도, 소중한 것을 품에 안듯 자신을 끌어안던 손길도, 흠뻑 젖어 있던 두 뺨도…….
김성민 교수의 말은 이수에게 생각할 거리를 남겼다.
일전에 차재희와 키스하고 싶었던 욕구를 두고 이수는 이미 신체적 혹은 정신적 원인 사이에서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는 끝내 신체적 이끌림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이유를 두고 또다시 같은 고민이 생겨났다. 의학 전문가는 이를 두고 심리적인 반응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심리적 반응. 떠오르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내가 차재희를 좋아한다고? 말도 안 된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코웃음을 친 그는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수는 사소한 감정의 변화를 잘 인식하지 못했다. 제 마음을 들여다볼 줄 몰라서, 하늘 위에서 바다를 보듯 자신을 보았다. 그렇게 본 바다는 늘 같았다. 사실은 격하게 요동치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언제나 평온했다.
무신경하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차재희에게 위안을 준 그 무신경함은 서이수 자신에게는 무지를 선사했다.
* * *
화요일은 정신없이 바빴다. 다음 주에 시험 대부분이 몰려 있었고, 그다음 주에 마지막 시험까지 끝내야 학기가 마무리되기 때문이었다. 공부할 것도, 준비할 것도 많았다. 이렇게 반년이 지나고 있었다. 시간이 빠르기도 빨랐다.
이수는 유진과 대충 저녁을 먹은 후 도서관으로 향했다. 늘 앉던 비문학 서가에서 공부를 했다. 텅 빈 앞자리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공부하는 내내 휴대폰이 조용했는데도 메시지가 오지는 않았나, 계속 신경이 쓰였다. 쫓아다니던 놈이 없으니 편해야 하는데 외려 기분은 자꾸 가라앉았다.
수요일 오후에도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난 이수는 지하 1층 편의점으로 향했다. 초코 우유를 사 들고 흡연 구역으로 갔다. 시험 기간이라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가장 구석진 곳에서 천천히 담배를 피웠다.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서 짜증이 솟구쳤다. 이마를 문지르는데 문득 머릿속을 파고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나도 좀 어려웠어. 그런 문제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언제부터였을까. 이제는 시끄러운 곳에서도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꼭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된 것처럼, 그의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이수를 찾아왔다.
이수는 고개를 돌려 재희를 바라보았다. 단정한 얼굴을 눈에 담는 순간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낯선 변화에 입술을 매만진 이수는 자신이 차재희를 반가워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얼굴이 굳었다. 난 너 못 봐. 그렇게 말한 건 자신이었다. 그래 놓고 무슨.
씁쓸히 자조하며 담배를 하나 더 빼 물었다. 탁, 불을 붙이고 턱을 괴었다. 아지랑이 같은 연기 너머로 그와 눈길이 닿았다. 재희는 올곧은 시선으로 이수를 마주 봤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말없이 자리를 떠나간다.
속이 쓰렸다. 이수도 곧 도서관을 나섰다. 집에 돌아간 후로도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 * *
목요일. 프랑스어 강의실.
시험을 앞둔 마지막 수업이었다. 30분 전에 도착한 강의실은 텅 비어 있었다. 이수의 미간이 미세하게 일그러지는 듯했으나 찰나였다. 이수는 출입구와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노트를 들여다보고 공부하고 있으니 학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업 시작 5분 전, 뻐근해진 목을 풀어 내던 이수가 강의실로 들어서는 차재희를 발견했다. 빈자리는 딱 두 곳이었다. 창가 쪽 자리와 이수의 바로 옆자리. 그리고 재희는 망설임 없이 그를 지나쳐 안쪽으로 향했다.
……. 마음속에 삐죽 가시가 돋는 느낌이었다. 왜지? 이수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숙였다. 노트를 내려다보는데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피할 일은 아니지 않나. 여기가 제일 가까운 자린데 굳이 체력을 낭비해 가면서까지 저기 앉아야 되나? 피어오르는 불만과 함께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차재희에게 신경이 쏠려서 도통 글자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재희는 멀리서 보기에도 수척했다. 날카롭게 드러난 턱 선과 생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 뺨을 가로지르는 상처는 여전히 붉었다. 보지 않으려 해도 눈길이 갔다. 왜 저렇게 불쌍하게 다니는데. 동정심이라도 자극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불쑥 원망이 치솟았다. 그러게, 친구로 지내자고 할 때 그러자고 했으면 됐잖아. 뭐 그렇게 대단한 마음이라고 그걸 거절해.
이수는 지금이라도 가서 취소하지 않겠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바보 같은 소리라는 건 안다. 그런다고 마음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입맞춤의 기억이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재희와 함께 지내고 싶었다. 그와 함께 웃고 떠들고 다투는 시간이 재미있었다. 게다가 차재희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집에서 자고 가면 라테르를 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회피하며 도망쳤다. 약속은 지켜야 할 거 아니야. 거기까지 생각하던 이수는 속으로 욕을 씹었다.
씨발.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은 점점 열기를 더해 갔다.
금요일, 토요일, 이틀 연속 도서관에 출근한 이수는 흡연 구역에 내려갈 때 종종 재희를 마주쳤다. 제 동기들과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차재희는 그 뒤로 이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마음에 붙은 불이 꺼질 줄을 몰랐다.
* * *
일요일 오전엔 서이준과 점심을 같이했다. 서이준이 뭐라 뭐라 떠들어 댔지만 별로 귀에 들어오진 않았다. 서이준은 말이 너무 많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대꾸하다 보니 어느새 식사가 끝나 있었다.
“창립 기념일 행사할 때 올 거지?”
“봐서.”
“잠깐 왔다 가. 너도 이제 얼굴 비쳐야지. 내 친구 중에 IT 쪽에서 일하는 놈 하나 있는데 얼마 전에 한국 들어왔거든. 소개해 줄게. 실리콘 밸리 출신이라 도움받을 수 있을 거야.”
“알았어.”
이준은 이수의 미래 계획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이수는 그에게 꽤 많은 사람을 소개받았다. 다만 딱히 소득은 없었다. 이수의 ‘Access Project’는 도박성 짙은 사업이었기 때문에 계획적이고 안정적인 투자를 원하는 서이준의 지인들과는 마음이 맞지 않았다.
서이준은 이수를 만날 때마다 늘 그를 데리러 오고 데려다주길 원했는데, 오늘도 다를 바 없었다. 재벌가 장남답지 않게 소박한 이준은 오늘 테슬라를 끌고 왔다. 고요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조용한 실내가 마음에 들어서 이수는 세 번째 차를 뽑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이수를 아파트 로비에 내려 준 서이준이 환히 웃으며 인사했다.
“남은 시험 잘 보고, 용건 없어도 연락 좀 해.”
“어. 들어가.”
“갈게.”
공용 현관으로 들어선 이수가 엘리베이터를 호출했다. 지하 3층부터 층마다 멈춰 서던 승강기가 마침내 경쾌한 소리와 함께 도착했다. 스르륵, 작은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걸음을 떼려던 이수가 멈칫했다. 안쪽에 차재희가 서 있었다.
수척한 얼굴. 손에 들린 약봉지. 이수가 눈매를 찡그렸다. 어디 아픈가. 그러나 그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벙긋거리던 재희가 입매를 꾹 닫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기 때문이었다. 이수에게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 차재희는 그대로 계단으로 직행했다.
─ 문이 닫힙니다.
안내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사라지는 동안 이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비상구만을 바라보고 선 채였다.
“저, 씨발…….”
내가 무슨 똥이야? 아무리 봐도 더러워서 피한다는 느낌이었다. 내가 보지 말자고 했지, 피하라고 했나? 왜 사람 기분 더럽게 이렇게까지 하는데. 당장 쫓아가서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속이 아팠다. 나 때문인가. 저렇게까지 힘들어할 정도로 내가 차재희에게 그렇게 큰 의미였나. 대체 왜. 내가 뭘 했다고. 욕하고 구박만 한 것 같은데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이해되지 않는 차재희가 미련스럽게 느껴지기도 했고, 답답하기도 했다.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그를 곁에 두고 싶지 않으면서도 다시 이전처럼 돌아가고 싶다는 양가감정이 이수를 괴롭혔다.
그다음 주에는 시험이 몰려 있었다. 전공 시험이 경영대의 전공 강의실에서 이루어지는 바람에 필연적으로 그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차재희는 여전히 이수를 외면했다. 보지 말자고 한 것은 자신이었음에도 저토록 철저히 보지 않으려는 꼴을 보니 심기가 뒤틀렸다. 멱살을 잡고 적당히 피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날이 갈수록 짜증만 더해졌다.
* * *
몇 개의 전공 필수 수업은 시험이 주말에 치러졌다. 이수는 투자론 때문에 금요일 밤을 지새웠다. 가장 악명 높고 자신 없는 과목이었다. 토요일 오전, 경영과 전공 강의실에서 9시부터 11시까지 진을 빼고 나온 이수는 중급 회계 시험을 보러 가던 신유진에게 붙들렸다.
“서이수! 점심 같이 먹게 과방에서 기다려.”
“집에 갈 건데.”
“아, 쫌. 나 할 말 있단 말이야! 진짜 진짜 중요한 얘기니까 과방에서 자고 있어. 어? 알았지?”
짜증스럽게 유진을 쏘아본 이수는 과방으로 향했다. 죽을 지경이었다. 잠이 없는 이수였지만 목요일에도 세 시간밖에 못 잔 상태라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알은체를 하는 후배들에게 대충 인사를 해 준 이수는 리클라이너에 쓰러지듯 누웠다. 가방에서 담요를 꺼내 얼굴까지 덮어 두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꿈도 꾸지 않고 숙면에 빠진 그를 깨운 것은, 귓가로 흘러들어 온 차재희의 목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이수에게 건넨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정확하게 들려왔다. 슬며시 눈을 뜬 이수가 담요를 걷어 냈다. 한숨이 나왔다.
미약한 두통이 일었다. 이마를 꾹꾹 누르고 있는데 파티션 너머가 시끌벅적했다. 그중에서 낮고 울림 없는 목소리, 늘 정직하게 상대방을 향하는 차재희의 음성만이 또렷하게 들렸다.
“아뇨, 괜찮아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서이수 선배님한테 들었어요.”
서이수 선배님. 낯선 호칭이 마음을 찔렀다. 작게 난 구멍 사이로 욕심이 퐁퐁 샘솟았다. 돌아 버리겠네, 정말.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린 이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재희와 멀어지고 싶지 않다. 그가 바라는 애정을 줄 수 없었지만 이수는 여전히 그와 친구이고 싶었다. 그게 차재희에게 얼마나 괴로운 일이 될 줄 알면서도, 그러고 싶었다.
니코틴이 절실했다. 가방에서 담배를 꺼낸 이수가 파티션을 돌아나갔다. 꾸벅 인사하는 후배들 사이로 차재희와 김희중이 보였다. 꼴 보기 싫은 낯짝에 짜증이 폭발하듯 치솟았다. 차재희한테 그딴 소릴 지껄여 놓고 무슨 양심으로 말을 붙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수가 있다는 걸 모르는 듯, 김희중이 한껏 들뜬 사람처럼 말했다.
“그래? 고맙다, 재희야. 걔가 성격이 좀 그렇잖아. 걔랑 얘기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실수 좀 했지 뭐. 너도 알지? 서이수, 존나 지랄 맞은 거.”
김희중은 누굴 깎아내리지 않으면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 같았다. 힐끔거리는 후배들에게 조용히 하란 신호를 보내고 스툴에 걸터앉았다. 차재희가 뭐라고 할까. 팔짱을 낀 채 지켜보는데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재희는 오른손을 꽉 쥔 상태였다. 김희중이 보지 못하게 등 뒤로 숨긴 팔에 파랗게 힘줄이 돋을 정도로, 전완근이 바짝 설 정도로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한 대 치고 싶은가. 그런 생각을 하며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수는 그의 손에서 달라진 점을 발견했다.
손바닥에만 감겨 있던 붕대가 중지에도 감겨 있었다. 그리고 김희중의 개소리가 길어질수록, 재희의 손끝은 서서히 붉어졌다. 망연히 바라보다 알았다. 피였다. 그걸 깨닫는 순간 속이 콱 막혀 왔다.
선배랑 있으면 편해요. 차재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난밤, 자신을 훑어 주던 그의 손바닥은 상처 하나 없이 매끈했다. 부드럽고 뜨거워서 아픔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손이었다.
그 전에는 어땠지. 이수는 차재희의 손바닥에 반창고를 붙여 주었던 날을 떠올렸다. 그 당시 이수는 그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수도 없이 뱉어 냈었다.
과방에서 사과하며 손을 쥐고 있던 차재희. 역시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서 있던 차재희. ……씨발. 전신에 열이 올랐다. 답답하고, 속이 상하고, 미안했다. 그리고, 화가 났다.
하지만 다른 건 다 이해해도 왜 화가 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이수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내가 끼어들 일 아니잖아. 그렇게 되뇌는데 김희중의 개소리를 견뎌 내느라 스스로를 아프게 하고 있는 차재희가 보였다. 참을 수 없었다.
“야.”
스툴에서 일어난 이수가 김희중에게 다가갔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는 재희의 낯이 창백했다. 순간 한계치를 넘어선 분노가 머리를 잠식했다. 그 노여움이 어디를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이수가 김희중을 쏘아봤다.
“지랄 맞은 새끼를 욕하고 싶었으면, 그 새끼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했어야지. 안 그래?”
빈정거리는 말에 김희중이 초라하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를 내려다보며 이수는 극렬하게 치솟는 폭행의 욕구를 참아 내려 애썼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분노를 김희중에게 풀고 싶었다.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했다.
이수는 이유 없이 누군가를 때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제게 뭐라고 하든 신경 써 본 적이 없었으므로 김희중이 자신을 욕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렇게 화가 난다는 건 아귀가 맞지 않았다. 그러나 이수는 자신이 이상하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서, 서이수…….”
“넌 왜, 맨날, 씨발. 아가리에 좆대가리를 꽂고 다녀?”
공기가 가라앉았다. 침묵이 서늘했다. 불시에 팔을 뻗은 이수가 손끝으로 그의 뺨을 약하게 쳐 댔다. 의도가 분명한, 모멸감을 주려는 행동이었다. 얼굴이 벌게진 김희중이 주먹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그러나 이런 것 따위로는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불쾌해지기만 했다.
“그러지 마세요……. 선배님.”
차재희가 이수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 다정한 음성을 듣는 순간 이수는 깨달았다.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화나게 만드는지.
넌 왜 듣고만 서 있어? 나를 좋아하잖아. 그런 주제에 단 한마디도 못 해? 내 앞에서 지랄하고 대들던 것처럼 하면 되잖아, 뭐가 그렇게 어려워서… 너를 아프게 해.
답답하게 구는 차재희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수가 씹어뱉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도 이 새끼가 한 말에 동의해?”
그 말에 재희가 눈을 키웠다. 재희는 김희중이 한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이수에 대해서 안 좋은 말을 했다는 건 알지만, 여태까지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험담을 할 때 그래 왔듯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 뿐이었다. 그런데.
“차재희. 대답해 봐. 너도 김희중처럼 생각해서 입 닥치고 서 있었어?”
이수가 저런 오해를 할 줄은 몰랐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재희가 고개를 저었다. 상처받은 눈동자가 거칠게 떨려 왔다.
재희는 그저, 어떻게 그 악의를 멈추게 할 수 있는지 몰라서. 그래서.
“그게. 아니라…….”
그가 말을 더듬었다. 꼭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하고,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속상하기도 한 얼굴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차재희는 누가 자기 욕을 해도 웃고 넘어가는 놈이었다. 그렇게 참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그런 차재희가 이수를 욕하는 말은 웃어넘기지 못했다. 반박하지 못하고 서 있는 자신을 대신 아프게 했다. 이수의 서슬 퍼런 시선이 재희의 오른손에 가 닿았다. 그것을 알아채고 약점을 감추듯 손을 제 등 뒤로 숨긴다. 그런다고 괜찮아지는 것도 아닌데.
“그게…….”
재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게 울면서 입을 맞춰 놓고 그 사람을 위해서 아니라는 말 한마디 할 수 없을 정도로 차재희는 많은 것을 참고 있었다.
왜? 속이 쓰라렸다. 이수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닥치라고 한마디 하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워서 너를 괴롭히고 있어. 대체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이수가 그렇게 질문을 던지려 할 때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그, 그렇게 면전에 대고 물으면 재희가……!”
“야.”
작게 욕설을 씹은 이수가 김희중을 돌아봤다. 이 씨발 새끼는 낄 데 안 낄 데 구분을 못 해.
차재희를 볼 때와는 달랐다. 이수는 어떠한 감정조차도 내비치지 않는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평생 개새끼처럼 침 흘리고 싶으면 거기서 더 지껄여. 아가리 찢어 줄 테니까.”
살벌한 말에 수군거리던 소리가 뚝 멎었다. 적요하게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김희중이 딸꾹질을 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당장 김희중의 뺨을 갈기고 싶었다. 이수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할 때마다 손등에 핏줄이 섰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초점이 어긋난 시선을 붙든 것은 익숙하게 들려오는 호칭이었다.
“선배, 그만… 해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이수가 재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썹 끝을 아래로 늘어트린 채로 그는 애원하고 있었다. 한계를 지나 융기했던 것들이 한순간에 푹 꺼지는 느낌이었다.
차재희가 그렇게 말하면 뭐든 들어줘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여러 번 그랬다. 진정제를 맞은 듯 차분해지는 자신을 보고 이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답답하게 구는 차재희 때문만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에게도 화가 났다. 이수는 지금 당장 재희에게 묻고 싶었다. 자신이 그를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알고 싶고, 확인하고 싶었다.
“차재희. 얘기 좀 해.”
그렇게 말하고 출구를 향해 걷는데 뒤늦게 들려오는 대답이 있었다.
“저는, 할 말 없어요…….”
걸음을 멈춘 이수가 가빠지려 하는 호흡을 골랐다. 그렇게 피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가까스로 말을 뱉었다.
“내 손에 끌려 나올래, 니 발로 걸어 나올래.”
“…….”
재희가 입술을 씹었다. 얼마나 잘근잘근 물어 댔는지 창백한 얼굴에 거기만 피처럼 붉었다.
이수는 기다리지 않았다. 출입문을 향해 가는 그의 뒤로 차재희가 따라붙었다. 조용히 걷는 걸음이, 신발이 바닥을 딛는 소리가 친숙했다. 며칠간 속에서 들끓었던 불길이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두 사람은 몇 걸음 떨어진 채로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계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수의 SUV가 주차되어 있었다. 스마트 키로 문을 연 이수가 재희에게 턱짓했다.
“타.”
운전석에 올라탄 이수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내에 한동안 침묵만 흘렀다. 재희는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은 채로 말이 없었고, 이수는 그런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손등이 보이게 놓인 오른손은 여전히 주먹을 쥔 상태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속이 아팠다. 무척이나.
팔을 뻗어 재희의 오른쪽 손목을 쥐었다. 버티는 것을 무시하고 끌어당기니 금세 힘이 빠졌다. 재희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수는 손에 감긴 붕대를 풀었다. 중지 끝에서 흐른 피에 안쪽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
“……차재희.”
붕대가 모두 풀리고 마침내 재희의 맨손이 눈에 들어왔다. 이수는 복잡한 감상에 휩싸였다. 손바닥엔 꿰맨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상태로 핏방울을 밀어냈고, 중지의 손톱은 빠지고 없었다.
일부러 뽑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까 느꼈던 감각이 되풀이됐다. 속이 콱 막혀 숨을 쉬기 힘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된 건지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수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손. 왜 이래.”
재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손을 움켜쥐며 모른 척해 달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잘게 흔들리는 머리칼이 이마를 덮는다. 이수는 가만히 그를 들여다봤다.
평소 알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불순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퉁명스럽게 대꾸하던 차재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음 가득 상처 입은 남자만 눈에 보였다.
미쳐 버리겠네, 정말. 한숨만 터져 나왔다. 머리를 쓸어 올린 이수가 재희에게 물었다.
“왜 이러냐고. 묻잖아.”
“……습관이에요.”
“손톱 뽑는 게 어떻게 습관이 돼?”
순간 날카로워지는 목소리에 재희가 이수에게 시선을 주었다. 새까만 눈동자에 혼란이 가득했다. 나한테 왜 이러는데. 더는 못 본다고 말해 놓고 이렇게 여지를 주고야 마는 이수가 재희는 원망스러웠다.
예전처럼 깔끔하게 무시하면 되는데. 그럼 알아서 마음 접을 텐데. 왜 나를 신경 쓰는지. 왜 나를 그런 표정으로 봐서 자꾸만 미련을 갖게 만드는지. 재희는 이수에게 묻고 싶었다.
“왜 그렇게 화를 냈어요?”
선배답지 않게, 왜 그렇게까지.
평소와 달리 지나치게 과민한 반응이었다는 것을 이수도 물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재희에게 들려줄 말이 없었다. 나답지 않게, 너를 아프게 한 나에게 화가 났다고. 차재희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를 그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되물었다.
“내가 먼저 물었잖아.”
“…….”
재희가 입술을 씹었다. 아니라는 걸 안다. 서이수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안다. 그냥 생각보다 다정한 사람이니까, 궁금해서, 호기심을 참지 못해서 물어본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선 그의 질문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희망 고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기대하는 제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짜증 나고 화날 때……. 아니면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걸 못 할 때… 그래요. 주먹을 쥐면서 참는 게 습관이라서. 그래서.”
“……일부러 그러는 거야?”
“네?”
“자해냐고. 아픈 거 알면서. 일부러.”
자해라는 단어에 재희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오랜 습관이라……. 아픈 건 느껴 본 적이 없어요.”
“…….”
딱딱히 굳은 표정의 이수가 재희의 손을 매만졌다. 꿰맨 지 꽤 되어 보임에도 여전히 아물지 않은 손바닥. 몽글몽글 핏방울이 배어 나오는 손끝. 손톱은 아무리 봐도 일부러 뽑은 게 분명해 보였다. 그걸 보는데 화가 끝도 없이 솟구쳤다. 이걸 왜 못 느껴. 이렇게 피가 나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차재희.”
“네.”
“……병신이야?”
재희의 시선이 휘청였다. 이수는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에 휩싸였다. 자신 또한 차재희를 상처 입혔다는 사실에 미안함을 느끼면서, 동시에 분노를 느꼈다.
“왜 참아. 왜 너를 아프게 하면서까지 참아. 왜 그렇게 등신같이 구는데.”
차재희가 미련해서. 바보 같아서. 한때 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차재희가 답답해서. 그 멍청한 후배를 아프게 만든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화가 나서. 또 이제는 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든 자신이 싫어서. 이수의 분노는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언제는 잘만 떠들어 놓고 왜. 그런 새끼들 때문에 니가 왜 아파야 해?”
그런 새끼들에 자신 또한 포함이었다. 왜 나를 좋아해서, 왜 내가 너를 상처 입히게 만들어. 미안하고 속상했다. 겪어 본 적 없는 감정의 홍수에 사고가 멈추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뇌가 타들어 갈 것처럼 열이 오른다. 욕을 짓씹은 이수가 핸들에 머리를 기댔다. 분을 삭이기 위해 심호흡을 했지만 소용없었다.
“씨발, 니가 왜!”
핸들을 내려치는 주먹질에 클랙슨이 짧게 울렸다. 씨근덕거리는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공을 찢는 소리가 몇 차례 더 울리고, 이내 침묵이 찾아왔다.
이수도, 재희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가만히 제 손을 내려다보던 재희가 입을 연 것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수의 자책은 재희에게도 닿았다. 그래서 알려 주고 싶었다. 처음엔 이수 때문에 아프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시간이 더 많았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선배가 아니면, 누구한테도 그게 안 돼요.”
조용한 목소리에 이수가 고개를 돌렸다. 재희도 붉어진 눈매로 이수를 마주 봤다. 새까만 눈동자에 어물어물 물기가 어렸다. 재희는 울음을 참기 위해 입매를 당겼다.
“나도 화내고 싶은데, 안 되는 걸 어떡해.”
그럼에도 수척한 뺨은 속절없이 젖어 들었다. 이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재희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기분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일은 있어선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참아야 한다고 여겼다.
재희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았다. 다정하고, 상냥하고, 성실하고, 배려심 많은 차재희. 그 틀에 맞춰 행동하려고 노력해 왔다는 사실을 이수를 만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선배 만나기 전에는 그게 이상한 줄도 몰랐어.”
그리고 그 틀에서 벗어나도 괜찮다는 것도, 그렇게 자유로워진 차재희는 사실 이기적이고 유치한 인간이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모두 이수가 알려 준 것들이었다.
“……고마워요, 선배.”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걸.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수 덕분에 짧은 시간이나마 재희는 진정한 자신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앞으로는 그게 아니게 되겠지만,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꾹꾹 눌러 담은 채 살아가야 하겠지만, 재희는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다정한 껍데기 안에 이기적이고 솔직한 차재희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면 되었다. 더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그렇기에 재희는 이수에게 완전한 이별을 고해야 했다. 그가 자신을 밀어내도록, 자신의 적나라한 마음을 고백해야 했다.
“선배가 아니었으면, 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몰랐을 거야.”
특별한 누군가.
“아직도 거기서 웃고 있었겠지. 인형처럼.”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누군가.
“선배랑 같이 있을 땐 늘 솔직했어요. 처음으로.”
그게 너라는 말.
“좋아해요.”
차재희가 힘없이 웃었다. 두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좋아해요, 정말로.”
쿵, 하고 부딪혀 오는 마음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벽이 허물어진다. 세상이 또다시 확장되었다. 차재희가 이수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한 발, 한 발, 침략하는 거인처럼 마음의 경계를 밟아 없앴다.
쿵, 쿵. 강렬하게 뛰는 심장이 저릿했다.
“……좋아해요, 선배.”
빛처럼 직선적인 문장이었다. 그 고백에 화상이라도 입은 듯 전신이 화끈거렸다. 불길처럼 집어삼키는 열기 속에서, 이수는 떠나가는 재희를 붙잡지 못했다. 그저 질식하지 않기 위해 바둥거릴 뿐이었다.
* * *
“그래서……. 야! 내 말 듣고 있어?”
유진이 손바닥을 휘저었다. 멍하니 그릇만 내려다보던 이수가 눈을 들어 올렸다. 상념이 깊었다. 무슨 이야기 중이었지. 기억을 더듬고는 확신이 서지 않는 어조로 물었다.
“중… 급 회계 어려웠다고?”
“하나도 안 들었네. 그건 아까 에피타이저 나올 때 한 얘기거든!”
눈을 가늘게 뜬 유진이 테이블을 가리켰다. 살구 크럼블 파이가 단내를 풍기고 있었다. 디저트였다. 이수는 제 식기에 음식을 먹은 흔적이 남은 것을 확인하고 조금 놀랐다. 누가 떠먹여 준 건가 싶을 정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좋아해요, 묵직한 네 글자의 울림이 멈추질 않는다. 잊으려 해도 메아리치듯 되돌아와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수를 괴롭히는 것은 그 투명한 고백을 들은 자신의 반응이었다.
불길이 옮겨붙은 것처럼 온몸을 달구던 열기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다. 차재희의 얼굴만 떠올려도 전신이 홧홧했다. 돌겠다. 정말. 찬물을 원샷한 이수가 손에 들린 스푼을 내려놨다. 한숨이 흘러나왔다. 힐끗, 이수의 눈치를 본 유진이 입을 열었다.
“김희중 때문에 그래?”
“아니.”
“그럼? 아까 재희랑 나갔다며. 화해 안 했어? 요즘 둘이 같이 다니지도 않고.”
“……화해할 일 없어.”
무덤덤한 말투였다. 유진은 재희가 안타까웠다. 왜 하필 서이수한테 코가 꿰여서……. 안쓰러운 녀석. 혀를 차며 살구 크럼블을 박살 내는 유진에게 이수가 물었다.
“야.”
“엉?”
“넌 너한테 맨날 욕하고 짜증 내는 사람 좋아할 수 있냐?”
“굳이 그런 쓰레기를……?”
쓰레기라는 말에 인상을 찌푸렸던 이수가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자기한테 맨날 욕하고 짜증 내는 인간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유가 뭘까?”
“이상 성욕자인가? 마조히스트……. 그런 거?”
“…….”
그런 놈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마뜩잖은 표정의 이수가 말없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런 그에게 유진이 지나가는 어조로 말했다.
“근데 꼭 그럴싸한 이유가 있어야 누굴 좋아할 수 있는 건 아니지.”
“…….”
“정말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서도 시작할 수 있는 감정이잖아. 사랑이라는 건.”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 이수는 불현듯 지난 축제 때 재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선배도 나한테 반창고 주고, 웃어 주고, 내 이름도 불러 줬잖아요.’
‘근데 선배는 안 받아 줄 거잖아요. 그러니까 선배도 무책임해요.’
차재희는 어쩌면 그때부터……. 거기까지 생각한 이수는 그날 자신이 재희에게 뭐라고 대답했었는지 기억해 냈다.
‘그깟 거에 마음을 주면, 그게 호구 등신 새끼지.’
씨발……. 그날도 차재희는 스스로를 괴롭혔을까. 깨달음이 아팠다. 격한 후회가 이수를 덮쳤다. 테이블을 두드리던 움직임이 멎었다. 이런 자신이 낯설었다. 쥐었다 폈다 하는 손아귀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살면서 후회 같은 건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차재희만 관련되면 왜 이렇게 평정을 잃는지 모르겠다. 온통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답답하게 차오른 숨이 터졌다. 유진이 이수를 흘끗거렸다.
“서이수, 왜 그러는데.”
이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스물두 살밖에 안 됐지만 유진은 연애 경험이 풍부했다. 짧고 가벼운 만남부터 1년이나 지속되는 깊은 만남까지. 조언을 구하기엔 최적의 상대였다. 이수는 속내를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혼자서는 이 답답함을 해소할 길이 없었다. 도움이 필요했다.
“유진아.”
“응?”
“옆에 있으면 귀찮은데 안 보이면 또 짜증 나고. 등신같이 구는 꼴이 답답한데 또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나를 화나게 만드는데… 또 웃게 만들고. 이런 감정이… 이런 사람이. 나한테 있어서 어떤 의미일 것 같아?”
유진은 얼핏 당황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친구가 되랬더니……. 대체 뭘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차재희는 박수를 받아 마땅했다. 서이수가 저런 질문을 하는 것은 유진도 처음 보았다. 이수를 저렇게 흔든 사람은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장하다, 차재희. 대견함을 감추며 커피를 홀짝인 유진이 입을 열었다.
“너는 뭐라고 생각하는데.”
“……친구?”
“으음.”
스푼을 휘휘 젓던 유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서이수가 아는 건 그것뿐이겠지. 안쓰러운 후배를 위해서 그녀는 힌트를 던져 주기로 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아니면. 뭐.”
“좋아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
충격받은 이수에게 유진이 설명했다.
“누굴 좋아한다는 게, 꼭 같은 갈래의 감정으로만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잖아. 어떨 때는 싫기도 하고, 어떨 때는 좋기도 하고. 싸우면 죽이고 싶게 미웠다가도 화해하고 나면 좋아 죽을 것 같고. 그런 거잖아.”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퉁명스러운 대꾸에 유진이 픽 웃었다. 저 서이수가 저러한 고민을 털어놓을 정도라면 재희가 무던히도 노력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었겠구만. 속으로 혀를 찬 유진이 손가락으로 이수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이수야. 정말 모르겠으면 뭐가 문제인지가 아니라, 뭘 하고 싶은지를 생각하고 그대로 해. 그럼 될 거야. 왜, 알에서 깨어난 거북이는 자기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면서 결국엔 바다로 가잖아.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다행히도 하고 싶은 일은 명확했다. 차재희와 함께 있고 싶었다. 여태까지 그러했듯 같이 수업을 듣고, 다투고 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화해하고 싶었다. 영화를 보는 것도 좋았고, 게임을 하는 것도 좋았다. 늘 즐거웠던 것은 아니지만 차재희와의 기억은 언제나 선명하고 짙었다. 이수는 자신의 세계에 남은 그 얼룩들이 좋았다.
다만 이수가 찾고 싶은 것은 이유였다. 차재희 앞에만 서면 평소와 달라지는 이유. 그를 향하는 마음의 정체. 차재희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었다.
“그래도 모르면?”
혹시나 하는 반문에 유진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걸 어떻게 몰라.”
모를 수가 없지. 덧붙이는 말에 이수는 시선을 내렸다. 움켜쥔 손을 응시하며 한 남자를 떠올렸다.
그래. 모를 수가 없지……. 상처도, 애정도. 무척이나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차재희와 자신은 닮은 구석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니가 도움이 될 때가 있네.”
“정리 좀 돼?”
“어, 많이.”
이수는 가볍게 웃곤 이제 본론을 말하라며 유진을 채근했다. 결론적으로 유진이 이수에게 말하고자 했던 건, 부친인 신경주 회장의 칠순 잔치─신유진의 표현을 빌리자면─에 참석해 달라는 말이었다. 신경주 회장이 이수를 데리고 오라고 유진을 아주 들들 볶은 모양이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라 흔쾌히 허락했다.
유진은 짜증을 내면서도 좋은 듯, 정장은 자신이 골라서 보낼 테니 꼭 그걸 입고 오라고 당부했다. 그녀는 정장을 입은 이수의 사진을 SNS에 올릴 생각에 신이 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간 이수는 일단 침대로 직행했다. 휴식이 필요했다.
정말로 푹 자고 일어나니 오후 10시였다. 오랜만에 머리가 맑았다. 단 하나 남은 시험은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상급 영어였고, 차재희에 대한 생각도 정리가 된 상태였다.
조금 이기적인 결정이지만, 이수는 마음 가는 대로 하기로 했다. 사실 원래 성격이 그러했다. 이수는 백혈병 완치 이후로 하고 싶은 일을 참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자신은 그래도 되는 사람이었다. 힘들게 맞이한 삶이다. 그러니 세상은 그에게 원하는 것을 내놓을 이유가 충분했다.
샤워를 끝내고 재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 클래식한 조합으로 옷을 차려입고 집을 나왔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4층을 누르고 내려갔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차재희가 회피할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
401호의 벨을 눌렀으나 응답이 없었다. 문을 두드리니 안쪽에서 이옹, 하고 레오가 대답했다. 쭈그리고 앉은 이수는 벽에 기댄 채 레오와 이야기를 나눴다.
“레오. 네 형아 어디 갔어.”
이옹.
“자고 있으면 깨워 봐.”
이이이옹.
텅 빈 복도에 이수의 목소리만 울렸다. 자정이 넘어 해가 뜰 때까지 이수는 자리를 지켰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기다림은 익숙했다.
401호의 문이 열린 것은 새벽 6시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달칵, 잠금이 풀리는 소리에 이수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서서히 벌어지는 틈새로 차재희와 눈이 마주쳤다.
“…….”
재희는 꿈을 꾸는 듯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가만히 선 채 이수만 내려다보다가 입술을 꾹 물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을 참는 듯한 모양새여서 이수는 몸을 일으켰다. 손을 뻗어 그 상처 깊은 입술을 잇새에서 빼 주곤 말했다.
“이제 내 앞에서 하고 싶은 말 참지 마.”
그 포용에 재희는 막힌 숨을 터트렸다. 봇물 터지듯 흘러나온 한숨은 바싹 말라 있었다. 재희는 이수를, 이수는 재희를. 두 사람은 서로를 눈길로 더듬었다.
얼굴을 보니 좋았다. 목소리를 들어서 행복했다. 찾아와 줘서 고마웠다. 그럼에도 재희는 망설였다. 서이수가 대체 무슨 이유로 이곳에 와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무서웠다. 한참 만에 입을 연 것은 차재희였다. 그가 먼저 용기를 냈다.
“왜……. 왜 왔어요?”
“내 번호 차단했어?”
“아뇨. 어제, 일찍 잠들어서…….”
여상하게 말을 붙여 오는 이수가 당황스러웠다. 더 이상 보지 않을 생각으로 고백했다. 서러움에 사무친 작별 인사였다. 그걸 못 들은 듯 행동하는 이수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안 볼 거라고 해 놓고 왜 자꾸 찾아와서 들쑤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덤덤한 얼굴에 실망하다가도 마음 깊은 곳에서 불쑥 솟는 기대감을 어찌할 수도 없었다. 이수를 마주 보고 선 짧은 시간 동안 재희의 기분은 진창에 처박혔다가 끌어 올려지길 반복했다.
“할 말 있어. 들어가.”
“…….”
“여기서 해?”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 무심한 태도에 재희는 문을 열었다. 이수를 안으로 들이고 뒤따랐다. 시험도 망쳤는데 청소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 집이 엉망이었다. 바 위의 쓰레기를 대충 모아 치웠다. 그러는 동안 이수는 팔짱을 낀 채 재희를 지켜보고 서 있었다.
“너. 아팠어?”
“아……. 조금요.”
이수가 바닥에 떨어진 해열제를 주워 들었다. 8정짜리 패키지는 절반이나 비어 있었다. 차재희는 여전히 수척했다. 아니, 어제보다 더 안 좋아 보였다. 그가 차를 끓이겠다며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이수는 가만히 그에게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머리칼을 헤치고 이마를 짚었다. 아직 뜨끈한 게 미열이 남아 있었다. 눈을 찡그린 이수가 그를 스툴로 잡아끌었다. 괜찮다는 걸 억지로 앉혔다. 대신 차를 준비하려는 그를 재희가 잡아당겼다.
“……선배.”
멈칫하며 돌아보는 얼굴이 건조했다. 그 표정이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어서 재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수의 손목을 움켜쥔 손이 풀어졌다가, 다시 힘이 들어갔다. 입술을 우물거리던 재희가 혼란스러운 눈동자로 물었다.
“나한테 왜 그래요?”
원론적인 이유는 서이수 본인도 몰랐다. 아직까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저 가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수가 재희를 내려다봤다. 새까만 눈동자가 여전히 물기에 젖은 듯 보였다. 좋아해요, 그렇게 말하며 두 뺨을 흠뻑 적시던 그가 떠올랐다. 순간 마음이 저릿했다. 알 수 없는 기분을 떨쳐 버리며 이수는 입을 열었다.
“미안해.”
“……뭐가요?”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속이 답답했다. 재희의 반문에 이수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짜증이 날 때 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움직임에 낯빛을 굳히는 재희를 보고 이수는 속이 죄어드는 느낌을 받았다.
너, 생각보다 나를 잘 알고 있구나. 자신이 차재희의 기분을 파악하듯, 그 또한 그래 왔던 것이다. 몸짓 하나에 깃든 의도를 눈치챌 만큼 자신을 깊이 살펴 왔다는 사실에 이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까짓 거라고 치부해선 안 되는 감정이었다. 죄책감이 한결 더해졌다.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어 냈다.
“어제. 말을 그렇게 해서……. 사실은 네가 아니라 나한테 화가 났어. 내가 너를 아프게 해서, 그게 후회되어서 화가 났는데…….”
“…….”
“씨발, 내가 이런 걸 잘 못 해. 내 인간관계 알잖아. 나, 너랑 신유진밖에 없어. 그냥 네가 답답해서 그런 거야. 너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서 말한 게 아니라.”
차마 병신이란 단어를 또 입에 올릴 수가 없어서 이수는 말을 뭉뚱그렸다. 재희는 가타부타 대꾸가 없었다. 그저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못 본다고 했다가, 갑자기 찾아와서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굴고 있으니. 이수는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재희가 생각을 끝내고 솔직한 반응을 보이길 기다렸다. 욕을 해도, 화를 내도 상관없었다.
보글보글,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을 끄기 위해 몸을 돌리려는 이수를 재희가 다시금 끌어당겼다. 조금 더 가까워진 거리에서 재희는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나한테 왜 그래요?”
본질을 꿰뚫는 물음이었다. 차재희는 정말로 알고 싶었다. 먼저 밀어내 놓고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단순히 사과를 하고 싶어서 이 새벽에 자신을 찾아온 건지. ‘너랑 신유진밖에 없어’ 그렇게 관계의 불변을 고하는 까닭은 무엇인지. 그런 당신에게 무언가 기대를 걸어 봐도 되는 건지…….
이수가 자신을 받아 준다면, 그렇게만 해 준다면 재희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앞에만 서면 재희는 솔직해졌다. 이번에도 그랬다. 체념과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덮어 두었던 욕심이 다시금 몸집을 불리려 했다.
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그저 웃기만 하는 인형이 아니라, 화도 내고 소리 지를 수 있는 인간이고 싶다. 재희는 이수 같은 사람을 또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재희에게는 서이수가 필요했다. 자신에게 숨을 불어넣는 존재가 절실했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는 눈길이 애절했다. 이수는 재희를 내려다보며 마음을 다졌다. 이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재희와는 결이 다른 고백이었다.
“나는 누굴 좋아해 본 적이 없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확신하지 못한다. 처음이었기에, 차재희와 함께한 모든 날이 새로운 지평이었기에. 그를 향한 모든 마음이 겪어 본 적 없는 낯선 조류였기에. 이수는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몰랐다.
“그래서 너를 향한 내 감정이 너와 같다고 자신할 수가 없어. 근데, 한 가지는 분명해.”
그렇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이 있다. 해가 지는 방향, 나침반의 바늘이 가리키는 곳,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절대적인 무언가를 향하는 지표가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신경이 쓰이고, 눈앞에 있는 너에게는 마음을 쓰게 돼. 너랑 같이 있고 싶고, 여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네가 내 곁에 머물렀으면 좋겠어.”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얼핏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수는 파도 소리와 거친 바람만으로 바다를 보았노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한 치의 의심도 망설임도 없는 순간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답을 찾을 때까지 내 곁에 있어.”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순간을 이수는 찾고 싶었다.
“나 피하지 마, 차재희. 나랑 같이 있어.”
아주 당당한 요구였다. 이수의 말을 들으며 재희의 기대감은 서서히 증폭되었다. 마음이 쓰인다는 말이 그토록 격렬한 풍파를 일으킬 줄은 몰랐다. 가뜩이나 바람 잘 날 없는 내면이 한바탕 뒤집어졌다.
서이수 또한 자신과 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양된 순간 찾아온 깨달음은 절망스러웠다. 생각만으로도 심장에 찌릿한 통증을 느끼며 그가 입을 열었다.
“……답을 찾았는데, 나랑 다르면요? 선배 마음이 나와 같지 않다면요. 그럼… 어떻게 할 건데요?”
그렇게 되면 그때 가서 돌이킬 수 있을까. 지금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수의 곁에 머무르며 이보다 더 부풀어 오른 애정이 보답받지 못한다면, 그 반향을 견딜 수 있을까.
거절을 알면서 고백했던 것만으로도 며칠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는데 그건 또 어떻게 버티지. 상상만 해도 목이 졸리는 느낌이었다. 어두운 미래를 가정하는 재희에게 이수는 전혀 도움 되지 않는 말을 전했다.
“네가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때까지 떠나 있을게. 그다음에… 다시 친구 해.”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이수가 떠나는 순간 탈출구는 닫혀 버리고 자신은 어둠 속에서 말라 죽어 갈 것이었다.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재희는 요 며칠 끙끙 앓았다. 서이수를 놓을 방법을 몰라서 서투르게 도려내 보려다가 이도 저도 아닌 채로 아파하기만 했다. 지금도 이렇게 괴로운데, 그때 가서 나보고 어떡하라고 그렇게 무책임한 말을 해. 재희가 이를 악물었다.
“정리가 안 되면요. 끝까지 안 되면요. 그땐 나를 떠날 거예요?”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떨려 왔다.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아마도 그렇게 되리라.
하지만 이상하지. 희한하게도 그런 미래는 그려지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수는 차재희가 없는 앞으로의 일상이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러길 바라서인지, 저도 모르는 믿음이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러했다.
이수의 긍정에 재희는 원망을 쏘아 냈다.
“그럼 싫어요. 그냥 지금 가요, 선배. 나 흔들지 마.”
이수와의 미래를 그리려면 재희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어쩌면 이름을 제외한 모든 것을 놓아야 할지도 몰랐다. 차재희가 원하는 것은 고작 몇 개월의 연애, 추억으로 남을 연인이 아니었다.
각인 효과. 재희는 알껍데기 속의 자신을 알게 해 준 이수를 맹목적으로 사랑할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이수가 확답을 주지 못한다면, 재희는 차마 그 불분명한 미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질 않았다. 그것은 차재희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재희야.”
그러나 서이수는, 차재희가 도망칠 기회를 빼앗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이어지는 말에 재희는 허를 찔린 듯했다.
“저번에 내기에서 이긴 거 소원 안 빌었잖아. 지금 말할게.”
이기적인 선택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서이수는 원래 이랬다. 죽음을 넘고 넘어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 다짐했다. 원하는 일은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고, 갖고 싶은 것은 무조건 갖고야 말겠다고. 그리고 이수가 지금 바라는 것은 재희와의 일상이었다. 이수는 뒷걸음질 치는 그를 말 한마디로 옭아맸다.
“차재희. 나랑 같이 있어.”
명령과도 같은 말이었다. 재희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사랑해 마지않는 남자가 하필 서이수라서. 약아빠진 선배라서.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라서. 재희는 그 이기적인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약속 지켜.”
그가 자신에게 수많은 약속을 지켰듯 재희 또한 그래야만 했다. 빠져나갈 여지가 없었다.
재희가 이수를 올려다보았다. 싫다고, 흔들지 말라고 말해도 고집을 부리는 남자가 밉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그렇게까지 자신을 욕심내 주어서 고마웠다. 눈물이 차올랐다. 재희가 젖은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 진짜 이기적이에요.”
재희는 여전히 무서웠다. 언젠가 이수가 그를 떠나 버린다면 스스로를 지켜 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수가 마음을 주기만 한다면,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재희는 많은 것을 인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토록 강렬한 염원을 느끼게 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어쩌면, 하고 자꾸만 기대하게 만들었던 사소한 행동들에 재희는 모든 것을 걸어 보기로 했다.
“그걸 이제 알았어?”
체념한 듯한 재희를 보며 이수는 미소 지었다. 짓궂고 또 맑아서 소년 같아 보이는 미소였다. 심장이 폭주하는 것을 느끼며 재희는 이수를 또다시 잡아당겼다. 힘없이 끌려오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팍에 뺨을 맞댔다.
“잠깐만 이러고 있어요.”
“……야.”
우는 것을, 불안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재희는 그의 품 안에 고개를 파묻었다.
“나 아프니까……. 한 번만.”
이수는 눈매를 찡그리면서도 재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불편하지 않았다. 안겨 오는 체온이 따스했다. 손에 부드럽게 감겨 오는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봐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