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선배 (2)
학기가 끝나고 한동안 자유의 몸이었다. 이제 규칙적인 생활을 철폐하고 다시금 불규칙한 생활 계획표에 몸을 맡길 시간이 왔다.
새벽에 잠든 이수는 월요일 오후에 느지막이 일어났다. 게으름뱅이처럼 느린 걸음으로 침실을 벗어났는데 문율과 리키가 리빙 룸에서 펫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리키, 너는 저런 애가 좋아? 취향이 독특하네…….”
율이 무릎 위에 올라앉은 리키를 끌어안은 채 중얼거렸다. 화면에선 푸들과 골든 리트리버 사이에서 태어난 골든 두들 암컷이 귀여운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파닥거리는 리키의 꼬리를 간질이며 율이 말을 이었다.
“난 좀 듬직하고 멋있는 개가 좋더라……. 리키, 너처럼.”
웃겨서 쳐다보고 있으니 인기척을 느낀 리키가 고개를 돌렸다. 입을 벌리며 헥헥거리더니 소파를 넘어 뛰어왔다. 혼잣말을 들었을까, 민망해진 율은 뺨을 긁적이며 웃었다.
“일어나셨어요?”
“어. 밥 먹었어?”
“네! 아까 생식 챙겨 먹였어요.”
리키의 턱을 쓸어 주던 이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황당하단 듯 머리를 쓸어 올리며 다시 물었다.
“아니, 너. 너 먹었냐고.”
“아…….”
똥그란 눈으로 배시시 웃은 율이 고개를 저었다. 이따가 먹으려구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이수가 주방으로 향했다. 가사 도우미가 만들어 두고 간 잠발라야가 먹음직스러운 향을 풍겼다.
그 옆에 팬케이크도 구워져 있었지만, 이수는 정오가 지나면 아침 메뉴를 패스했다. 포스트잇에 적힌 대로 오븐을 설정한 이수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말끔히 씻고 나오니 적절한 타이밍에 조리가 끝났다. 그릇을 꺼내 음식을 덜어 낸 이수가 율을 불렀다.
“율.”
“네!”
“와서 먹어. 많아.”
쪼르르 달려온 율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옴뇸뇸, 턱을 움직일 때마다 가느다란 머리칼이 흔들렸다. 토끼처럼 새하얗고 찰떡 같은 볼도 야무지게 움직였다. 다섯 입 먹고 스푼을 내려놓은 이수는 물을 꺼내 마시고 턱을 괬다. 차재희와 마찬가지로 문율도 먹는 걸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가 얼추 식사를 끝냈을 즈음 이수가 물었다.
“알고리즘은 어때.”
“워낙 복잡한 데다가 아직 초기라서 뭐라고 말씀드릴 만한 성과는 없어요. 차곡차곡 쌓고 있으니 조금 기다리셔야 될 거예요.”
“집은 구했고?”
“아뇨, 아직……. 그쪽이 다 재개발 때문에 비워지면서 고시원도 꽉 찼더라고요…….”
율이 울상을 지었다. 집주인의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은 날, 율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재개발 때문에 6월 말까지 집을 비워야 한다는 말이었다. 율의 자취방 집주인은 여든 살 먹은 노인이었는데, 재개발 보상금 건을 자식이 처리하면서 모자간에 소통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노인은 자식이 율에게 연락했을 거로 생각했고, 자식은 그 반대로 알고 있다가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부랴부랴 율에게 통보를 해 왔다. 하필 그 집이 재개발 구역의 가장 끄트머리에 위치한 덕에 문율 또한 스스로 알아낼 기회가 없었다.
부모님은 이혼 후 재혼하셨고, 하나뿐인 누나는 결혼할 남친과 이미 살림을 합쳤다고 했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였다. 물병을 굴리던 이수는 가만히 조건을 따져 보았다.
추후 액세스 프로젝트의 핵심이 될지도 모르는 인재에게 어디까지 투자할 수 있을까……. 아직 학생이지만 문율은 천재였다. 사촌 형을 통해 컴공과 교수에게 슬쩍 물어보았더니 율은 이미 웬만한 프로그래머들을 뛰어넘는 지식과 실력을 갖춘 상태라고 했다.
길드원도 그랬지만, 이수는 일을 처리할 때 율처럼 말 잘 듣는 스타일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잠시 효율을 가늠하던 이수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따라와.”
딱 한 마디였으나 율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이수를 따라왔다. 납치당하기 좋은 성격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에 탄 이수가 42층을 눌렀다.
바로 아래층 펜트하우스에는 기구한 사연이 있었다. 약 1년 전, 수십억의 집값에도 불구하고 이수와 아래층 주민 간에 층간 소음으로 인한 불화가 빚어졌다. 30kg의 리키가 뛰는 소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두 사람 사이에 싸움이 붙었던 것이다.
몇 번 고성이 오가고 건설사에 손해 배상 청구를 하라는 말에 몸싸움까지 일어난 이후, 열받은 이수는 42층을 매수하고 월세로 살고 있던 입주자를 쫓아내 버렸다. 그 후로는 계속 아랫집을 비워 두었다. 또 좆같은 놈이 들어오면 이번엔 정말 참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지문을 찍고 들어가니 현관이 휑했다.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실내에 답답한 공기가 맴돌았다. 햇빛이 비치는 내부는 위층과 분위기가 달랐다. 스튜디오식으로 리모델링한 이수의 집과 달리 전 집주인의 취향이 반영되어 포근한 느낌을 풍겼다.
집을 한번 둘러본 이수가 무심하게 말했다.
“여기 살아.”
“……네?”
율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때 숙식 제공한다고 했었잖아. 그러니까 여기 네 숙소로 쓰라고.”
“네……?”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반문한 율은 이내 그의 말을 이해하고 손을 내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분에 넘치게 과도했다.
숙식 제공이란 말에 혹하긴 했지만 이런 건 바라지도 않았다. 절대 안 된다며, 말도 안 된다며 극구 거절하는 율에게 이수는 반강제적으로 숙소를 제공했다.
조막만 한 손을 끌어다가 지문 등록을 해 주고, 업체를 불러 청소를 해 둘 테니 언제든 들어오라고 말했다. 율은 울상을 지으며 부담스러움을 호소했지만 고용주는 막무가내였다.
“율. 내가 너 스폰하는 것도 아니고 계약 이행하는 건데 이런 식으로 거절하면 곤란하지.”
짜증스럽게 내뱉는 말에 율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이수는 비즈니스적 태도를 요구했다. 회사에서 사택을 제공하겠다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는 회사원이 어디 있냐고 눈치를 주니 할 말이 없었다. 맞는 말이긴 했다. 율이 입을 다물고 나서야 매서운 눈매가 풀어졌다.
리키와 펫 스파에 가야 하는 율을 다시 43층에 올려다 놓고, 이수는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차에 올라탔다.
목적지는 몇 번 가 본 적 있는 평창동의 저택이었다. 서훈과 천수인, 서이나가 사는 집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다. 유진은 자신의 부모님이 사는 집을 본가라고 불렀지만, 본(本) 자의 뜻을 알고 나니 이수는 그 집을 그렇게 칭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평창동 집이라고만 불렀다.
대문 앞에 차를 세워 두고 초인종을 눌렀다. 대낮이라 고용인들만 집을 지키고 있었다. 둘째 도련님의 등장에 가사 일을 총괄하는 김희옥 여사가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도련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네.”
건성으로 대꾸한 이수가 희옥에게 물었다.
“와인 셀러가 어디죠.”
“안내해 드릴게요. 이쪽으로 오세요, 도련님.”
희옥은 저택 지하의 와인 저장고로 이수를 이끌었다. 꽤 넓은 공간이었다. 카펫이 깔린 바닥 위로 안락의자와 협탁이 놓여 있고, 양쪽 벽면은 모두 병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최소 수백에서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와인들이었지만 이수의 눈에는 거기서 거기였다. 대충 훑어보던 그가 김희옥 여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여기서 제일 귀한 게 어떤 거예요?”
“선물하시게요?”
“네.”
여러 가지를 물어 오는 희옥에게 이수는 신경주 회장의 취향을 늘어놓았다. 희옥은 고심 끝에 서훈이 힘겹게 구한 빈티지 와인을 한 병 꺼내 들었다. 서일 그룹 로고와 서훈의 서명이 박힌 패키지에 포장하여 이수에게 건넸다. 인자한 미소를 지은 희옥이 이수에게 물었다.
“도련님, 아가씨 8월에 약혼식 올린다는 얘기 들으셨어요?”
대꾸하지 않았지만 희옥은 나긋나긋 덧붙였다.
“아가씨가 결혼하신다는 게 저는 상상이 안 돼요. 이 집을 떠나시는 것만 생각해도 슬프네요…….”
20년째 근무 중인 김희옥 여사는 서이나가 태어났을 때부터 그녀를 돌봐 온 사람이었다. 희옥의 머릿속에 서이나가 어떤 이미지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수는 그녀의 결혼이 어떤 의미를 갖는 건지 알았다.
한국에 오고 얼마 되지 않아 서이준이 서이나에게서 도망치듯 이수에게 달려온 적이 있었다. 서이나가 어디 중견 기업의 막내와 결혼을 시켜 달라고 난리를 쳐 댄 것이다. 저를 엿 먹인 남자의 인생을 망쳐 버리겠다는 것이 이유였다. 물론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천수인과 서훈이 꼼짝하지 않자 서이나는 서이준에게 매달렸다. 사업적으로 얽혀 있는 관계였기에 이준은 그녀의 불순한 의도를 알고 외면하려 했지만, 서이나는 막무가내였다. 그렇게 1년을 난리 친 끝에 허락이 떨어졌다고 들었다.
서일 그룹은 정략혼을 해야 할 만큼 허덕이지 않았다. 서이준은 후계자의 의무라며 먼저 나섰지만, 이수와 이나에겐 압박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나는 역으로 상대방에게 서일의 이름으로 압력을 넣었다. 그렇게 이루어진 약혼이었다.
‘갑질하는 악처가 될 거야!’
서이준에게 소리치던 목소리가 잊히질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서훈과 천수인은 서로에게 충실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서이나는 어째서인지 결혼에 대한 환상이 없었다. 환상은커녕 껍데기 취급했다. 결혼을 어떻게 그렇게 홧김으로 결정하냐는 서이준의 훈계에 서이나가 뭐라고 했던가.
어차피 결혼 따로 애인 따로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었다. 저런 또라이가 또 있을까. 서이나에게 걸린 남자가 불쌍할 뿐이었다.
* * *
상급 영어 시험은 교수와의 스피킹 테스트였다. 준비할 것도 없었다. 이수는 모국어인 영어로 몇 가지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성적은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A+였다. 그렇게 3학년 1학기가 막을 내렸다.
다사다난한 4개월이었다. 개강 후 첫 수업에서 차재희를 만났었는데, 그때 재희가 했던 말을 이수는 아직도 잊지 못했다. 사람 기분을 좆같이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했었지. 참 황당하고 어이없었는데…….
그날을 떠올리던 이수는 문득 차재희와 처음 만났던 날이 언제였는지 궁금해졌다. 저녁이나 사 주면서 물어볼까.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들어 올릴 때였다. 계단으로 향하는 이수를 붙잡는 손이 있었다. 뜨거운 체온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
이수가 시야를 가리는 모자를 살짝 치켜올렸다. 언제나 단정한 낯의 재희가 미소 지었다. 이수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일단 재희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여전히 얼굴이 아파 보여서 신경이 쓰였다.
재희는 당황한 듯 한쪽 눈을 찡그리며 웃더니, 주변을 둘러본 후 이수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 그러고는 쪽, 손등에 입을 맞춘다. 이게 돌았나. 기겁한 이수가 손을 털며 차재희의 얼굴을 밀어냈다.
“미쳤냐?”
“아뇨. 시험 끝났어요?”
“어. 넌 저번 주에 끝난 거 아니야?”
계단을 내려가는 이수를 재희가 쫓아갔다. 옆에서 짤랑거리는 인기척이 익숙했다. 이게 그리웠다. 차재희와 내외하는 동안 이수는 생각지 못했던 허전함을 느꼈었다. 옆에 와서 말을 붙이는 존재가 귀찮다고만 느꼈었는데, 자리가 비고 나니 쓸쓸했다. 이수는 제 입꼬리가 슬며시 끌려 올라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맞아요.”
“근데 여기서 뭐 해.”
“보고 싶어서요.”
멈칫. 발걸음을 멈춰 세웠던 이수가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는 듯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옆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친놈. 속으로 혀를 차곤 담배를 꺼내 들었다.
뜨거운 바람이 건물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라이터의 불길보다 후덥지근했다. 초여름이었다. 차재희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롱 패딩을 입고 있었는데.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지. 그동안의 기억을 되새기던 이수가 조용히 눈을 들어 올렸다.
건너편 벽에 기대 담배를 피우던 재희가 그와 시선을 맞췄다. 바람이 향하는 곳으로 연기를 내뱉는다. 그리고 떠오르는 예쁜 미소에 이수는 마음이 저릿했다. 가슴께를 어루만지다가 물었다.
“차재희. 우리 처음 만난 날이 언제야.”
“궁금해요?”
고개를 끄덕이자 재희가 가만히 눈을 굴렸다. 이수를 샅샅이 훑어보며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말해 주면 뭐 해 줄 건데요.”
“뭘 하고 싶은데.”
“키스해도 돼요?”
곧바로 던져진 질문에 이수는 사레가 들렸다. 매캐한 연기에 눈물이 찔끔 났다. 한참을 괴로워하는 그를 보면서 재희는 말없이 웃었다.
아무래도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옆에 있으라는 말을 뭐, 고백 같은 걸로 오해한 게 아닐까.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가 당황스러웠다. 이수가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내가 일요일에 너한테 연애하자고 했냐?”
“아뇨.”
“근데 왜 이래?”
이해 못 하겠다는 말투였다. 재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수가 집에 찾아왔던 날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재희는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설렘과 불안이 동시에 들이닥쳐 진정할 수가 없었다. 이수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건 좋았다. 그런데 문득, 그가 언젠가 떠나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위태로웠다. 서이수를 얻으면 가족을 잃고, 가족을 얻으면 인생을 잃었다. 어느 하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재희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확신이 서게 만들어 주면 될 일이었다. 기울어지는 저울에 무게를 싣는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담배를 비벼 끈 재희가 이수에게로 다가갔다. 일단 저 모순된 선배에게 해 줄 말이 있었다.
“선배, 엄청 까졌네요.”
“무슨 개소리세요, 또.”
짜증스럽게 받아친 이수가 눈을 치켜떴다. 그를 내려다본 재희가 살포시 웃었다.
“내 손에 그렇게 흠뻑 싸 놓고. 이제 와서 연애 타령이에요?”
뜬금없이 던져진 더티 토크에 이수는 말문이 막혔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치명타를 입은 듯했다. 입을 벙긋거리던 이수는 곧 발을 들어 반격했다. 재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비명을 내지른 재희가 그를 쏘아봤다.
“왜 이렇게 폭력적이에요?”
“야. 내가 진짜 폭력적이었으면 넌 벌써 뒤졌어.”
살벌한 말에 순간 지난주 토요일의 이수가 떠올랐다. 음……. 재희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이전에 서이수가 했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자신을 귀여워했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김희중을 대하는 그를 보며 완벽하게 납득했다.
까불었던 것에 비하면 정말로 많이 봐줬고 예뻐해 줬다. 그렇게밖에는 생각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그날의 이수는 무서웠다. 자신에게 화를 내던 모습과 온도 차가 극심했다.
“개수작 부릴 생각 하지 마.”
“알았어요. 그럼…….”
뭐라고 하지. 잠깐 고민하던 재희가 2주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에게 거짓말을 들켰었던 날, 이수의 집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일이 그렇게 되어 버리는 바람에 집은커녕 계단에서 방화문만 두드렸었기에 아쉬움이 남았다. 재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선배 집에 놀러 가도 돼요?”
“그러든지.”
“지금요. 언제 만났는지는 가서 말해 줄게요.”
이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될 것 없었다.
두 사람은 일단 경영대 로비에서 헤어졌다. 재희의 차에는 자전거 캐리어가 없었고, 이수는 학기가 끝났으니 자전거를 집에 끌고 가야 했기 때문이다. 공용 현관에서 만나기로 한 두 사람은 각자 집으로 향했다.
재희는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이수가 오려면 십여 분이나 남았지만 가슴이 뛰어서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벤치에 앉아 이수를 기다리며 재희는 생각에 잠겼다. 혼자 있을 땐 문득문득 두려움이 몰려왔다. 이수가 다녀간 날 이후로 내내 그랬다.
자신을 향한 성미희의 서늘한 태도, 차대범의 못마땅한 시선 등이 주위를 맴도는 듯했다. 가족의 울타리에서 이탈하려는 자신을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또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옭아매려 할지 상상해 보면 숨이 콱 막혀 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재희는 이수를 떠올렸다. 나랑 같이 있어, 그렇게 명령하는 서이수를 떠올리면 불안이 조금 가셨다. 그 바람이 영원하길 빌며 마음을 다독였다.
“뭐 해. 가자.”
어느새 도착한 이수가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재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뒤를 쫓았다. 자전거를 끌고 가는 이수의 이마가 살짝 젖어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타니 긴장감이 치솟았다. 폐쇄된 공간에 가득 들어찬 이수의 체취가 전신을 찔러 왔다. 재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43층입니다, 짧은 알림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너른 복도에 문이 딱 하나 있었다. 거기서 방화문까지의 거리가 20m는 되는 것 같았다. 재희가 아무리 소리친다 한들 집에서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의 거리가 그토록 멀었다. 재희는 울적한 기분을 지워 내려 애썼다.
“너, 혹시 큰 개 무서워해?”
“아뇨, 좋아해요.”
문득 던져진 질문에 재희가 고개를 저었다. 동물이라면 다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보다 개를 키우나? 의외인 듯싶다가 레오를 예뻐하던 모습을 떠올리니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수가 패널에 지문을 찍으니 문이 열렸다. 현관으로 들어서는데 현관과 집 내부의 복도를 구분하는 문턱이 없었다. 희한하다고 생각하며 신발을 벗는 재희를 이수가 제지했다.
“신발 신고 들어와.”
“네?”
“불편하면 슬리퍼 신어도 되고.”
어리둥절한 그를 남겨 두고 이수가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신발을 신은 채 걷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재희는 그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실내는 가정집 같지 않았다. 카페, 혹은 스튜디오처럼 꾸며진 모습이 생소했다.
두리번거리는 재희를 남겨 두고 이수가 테라스를 열었다. 달려 나오지 않을 때부터 예상했지만 리키는 집에 없었다.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율이 20분 전에 리키를 데리고 나간 상태였다. 자율적으로 하루에 서너 시간씩 리키를 돌보는 탓에 율은 아침에도 오고 오후에도 오고 저녁에도 오고 그랬다.
잠시 기다리던 재희가 이수에게 의아하게 물었다.
“강아지는요?”
“펫 시터랑 나갔어.”
말로만 듣던 펫 시터를 쓰는 사람이 여기 있었다. 재희는 이수가 옷을 갈아입으러 간 동안 집 안을 구경했다. 신기한 게 많았다. 콘솔 게임기도, 타이틀도, 공간 중앙의 컴퓨터도, 그 위의 침니 후드도, 커다란 펫 도어도, 에폭시로 마감한 바닥재도 모조리 신기했다.
한 90평쯤 될까. 재희가 사는 집의 세 배 정도 되는 크기였다. 이 큰 집에 혼자 사는 건가. 가끔 쓸쓸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재희는 이수가 사라진 곳을 기웃거렸다.
옷을 갈아입는다더니 샤워를 하는 듯했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이어진 후에 문이 벌컥 열렸다. 흰 티셔츠에 숏츠를 입은 이수가 머리에 수건을 덮어쓴 채 나왔다.
늘 뒤로 넘기던 머리칼이 앞으로 내려와 이마를 가렸다. 나른해 보이는 얼굴은 열기에 덮여 예쁜 복숭앗빛이었다. 얼마나 뜨거운 물로 씻은 건지 목덜미도 온통 울긋불긋했다. 재희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저녁 먹을래?”
무심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저 혼자뿐인 듯했다. 재희는 주방으로 향하는 이수를 따라갔다. 걸음걸음마다 흩뿌려지는 달콤한 바디 워시의 향이 하반신을 점점 무겁게 만들었다. 걸음을 빨리한 재희가 식탁 의자를 꺼내 앉았다.
“뭐 있어요?”
“클램 차우더랑……. 샌드위치.”
“좋아요.”
그래도 손님이라고 이수는 재희를 앉혀 두고 식사를 차렸다. 샌드위치는 접시에 담아내고, 클램 차우더는 뜨겁게 덥힌 후에 크루통을 얹어 후추와 함께 내주었다. 이수가 샌드위치 두 입과 수프 그릇에 담긴 클램 차우더를 다섯 스푼 먹는 동안 재희는 남은 샌드위치 두 개와 클램 차우더 두 그릇을 먹어 치웠다. 턱을 괸 채 바라보는 시선에 재희가 민망하게 웃었다.
“왜 그렇게 봐요.”
“잘 먹어서.”
머쓱하게 뺨을 문지른 재희가 이수의 그릇을 흘끔거렸다. 생각해 보니 그는 음식을 정말 조금 먹는 편이었다. 그릇을 싹 비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학식이든, 레스토랑이든, 집에서든 그랬다.
위가 작은 편인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재희는 혹시 서이수가 늘 예민한 이유가 배가 고파서가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에 사로잡혔다. 사람이 허기를 느끼면 신경이 곤두서기 마련이다. 밥을 저만큼만 먹고 다니니, 그게 까칠한 성격의 이유가 될 수도 있겠거니 싶었다.
“선배.”
“어.”
“원래 그렇게 조금만 먹어요?”
이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릇을 식기 세척기에 넣어 두고 자리로 돌아왔다. 재희는 그가 건넨 물을 받아 마시며 왜요? 하고 물었다.
병원에 있을 때의 습관이었다. 활동량이 적으니 식사를 많이 하면 속이 불편했다. 그래서 소식하던 버릇이 남아 있었다. 어차피 허기를 잘 느끼지도 않았고 먹는 것을 즐기는 사람도 아닌지라 이수는 식사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만 적게 먹더라도 맛에는 까다로운 편이라 학식 같은 형편없는 음식은 정말 입만 대는 수준으로 먹곤 했다.
“배부른 거 싫어.”
간단한 대답이었다. 배부른 게 왜 싫은 건지 싫어지게 된 계기가 있는 건지 재희는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짜증 내면서 귀찮아할 게 뻔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이수가 물었다.
“그래서. 처음 만난 날이 언젠데.”
“아. 맞다.”
잠깐 잊고 있었다. 재희는 1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과방에서 깨워 달라고 부탁했던 것, 난방을 틀었다가 욕을 하며 일어난 것 그리고 말도 없이 떠나 버린 것까지.
이수는 정말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이야기가 끝나고도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한참이 지나고서야 아, 하고 뭔가 깨달은 소리를 냈다. 혹시 기억이 난 걸까. 재희가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이수를 보았다.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너는 기억 안 나는데, 그날 왜 과방에서 잤는지는 알 것 같아.”
“……왜였어요?”
“그때 라테르 신규 던전 나와서 그거 퍼스트 클리어하느라 밤새웠었거든.”
그 말을 시작으로 둘은 잠깐 라테르에 대한 이야길 나눴다. 어쩌다 그 게임을 시작하게 됐는지, 넌 약속 언제 지킬 거냐 하는 압박 같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라테르. 서이수는 정말로 그 게임에 진심인 것 같았다. 라테르 이야길 할 때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한쪽 눈을 찡그린 채 웃는 얼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는 모습, 하나하나 보기 좋았다.
그 모습을 보는 동안 재희는 끝도 없이 치솟는 성적 긴장감을 흩트리려 애썼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혼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한참 이야길 나누다가 이수가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때 과방 이후로 또 만난 적 있어? 생활 한문이랬나?”
“그 전에 한 번 더 있어요.”
“언제?”
레오를 맡겼던 날이었다. 하지만 말하는 걸 보아하니 그날도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새삼 신기하면서도 지극히 서이수답다고 생각했다.
턱을 괸 채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이수도 그를 마주 봤다. 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심술을 부릴 것처럼 점점 치켜 올라가는 눈썹을 응시하다가, 재희는 속삭였다.
“키스해 주면 말할게요.”
“지랄을 하세요.”
무너지지 않는 철벽에도 재희는 굴하지 않았다. 이수를 보며 예쁘게 미소 지었다. 깊이 팬 보조개가 존재감을 드러낸다. 재희가 다시 한번 말했다.
“한 번만, 응? 싫어요……?”
이수는 입이 바싹 말라 오는 것을 느꼈다. 그 또한 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씻고 나왔을 때부터 끈적하게 달라붙는 시선에 몸이 녹아내릴 듯했다.
하지만 육체적인 유혹에 굴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무시하는 중이었다. 흥분한 채 짐승처럼 붙어먹고 싶지 않았다. 이수는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한 감정에 대해 욕망의 개입 없이 이성적으로만 판단 내리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형이니까 모범을 보여야 한다. 요부처럼 구는 차재희를 피하기 위해서 이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번만 더 개소리하면 쫓아낸다.”
“…….”
불만스러운 시선을 뒤로하고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재희가 일어나 따라왔다. 일단 분위기를 깨기 위해 거실로 왔는데, 이다음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집에 남자가 놀러 온 것은 처음이었다. 유진이 집에 놀러 오면 술을 마시곤 했지만, 차재희와는 당분간 술을 마시면 안 될 것 같으니 딱히 할 게 없었다.
가라고 한다고 갈 것 같지도 않고, 뭐 하지. 영화나 볼까. 고민하고 있으니 재희가 테이블 위에 놓인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열여섯 칸으로 나뉜 표에 새까맣게 색칠이 되어 있고, 중간중간에 적나라한 욕설이 쓰여 있었다. 지난번에 신유진과 했던 빙고 게임이었다.
“이런 식으로 연구해요?”
“뭐?”
“선배가 욕을 잘하는 이유가 있었구나…….”
“뭔 소리야. 신유진이랑 빙고 한 거야.”
게임이라는 말에 재희가 인상을 찡그렸다. 서이수 아니랄까 봐. 살면서 욕설 빙고는 또 처음 봤다. 드문드문 보이는 다양한 좆의 향연을 곱씹던 재희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랑도 빙고 해요.”
그 말에 이수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니가 씨발 말고 아는 욕이 있어?”
“그거 말고요.”
“그럼 뭐.”
갑작스러운 도전에 아드레날린이 솟았다. 빙고 게임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실력보다 운이 중요한 탓에 승률이 높지 않았다.
그래도 차재희는 내가 이기지. 차재희는 겉으로는 완벽해 보여도 속을 들여다보면 어쩐지 허접한 구석이 있었다. 그 덕에 자꾸 얕보게 되었다.
이수는 넓은 아량을 발휘해 주제 선택권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메모지를 한참 내려다보던 재희가 마침내 결정한 듯 말했다.
“스포츠요.”
“스포츠 이름 대기?”
“네. 근데, 적어서 서로 바꾸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대방이 안 해 봤을 것 같은 걸 쓰고……. 경험한 거에만 색칠하기요.”
규칙이 복잡했다. 저게 뭔 말이야. 이수가 곱씹고 있자 재희가 부연했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안 해 봤을 것 같은 스포츠를 최대한 많이 적는 게 포인트예요.”
“그래. 그런데 네 말은, 바꾼 표에 둘 다 승마가 적혀 있어도 승마해 본 사람만 색칠한다는 거잖아. 그건 빙고가 아닌데.”
“역 빙고라고 쳐요.”
가만히 생각하던 이수가 이 이상한 게임의 허점을 지적했다.
“안 했는데 해 봤다고 거짓말할 수도 있잖아. 진짜 했는지, 안 했는지 누가 판단할 건데? 증거라도 제출해?”
타당한 지적이었으나 재희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이어서 던져진 말에 이수는 자존심이 상했다.
“선배, 그렇게 비겁한 사람이에요?”
“……시작해. 16칸. 채워.”
승부는 받아들이겠지만 객관적으로 이수가 불리했다. 서이수는 신체를 움직이는 일 따위에 별 관심이 없었다. 즐기는 스포츠라고 해 봤자 고작해야 자전거 타기와 사격이 전부였다.
첫판은 빨리 끝내고 다음으로 넘어갈 생각으로 이수는 건성건성 칸을 채웠다. 일부러 차재희가 해 봤을 것 같은 운동만 적어 넣다가 나중에는 그것도 귀찮아서 배영, 평영, 접영 같은 걸 늘어놓았다. 몇 분 후, 두 사람은 표를 교환했다. 이수는 대충 훑어보고 패배를 직감했고 재희는 반대로 승리를 확신했다.
“선배부터 해요. 스쿼시. 해 봤어요?”
“아니.”
짧게 대꾸한 이수가 펜을 들었다. 그러고는 재희에게 말했다.
“이거 내가 졌어. 빨리 체크하고 다음 거 해.”
“뭐예요. 재미없게.”
재희가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수는 차재희가 적어 놓은 표에 색을 칠했다. 승마, 클레이 사격, 사격, 수영. 딱 네 가지만 까맣게 칠해졌다.
자신의 표를 맨 앞부터 칠해 나가던 재희가 멈칫했다. 펜을 내려놓은 이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럭비를 안 해 봤어요? 미국인인데.”
“넌 양궁 쏴 봤어? 편견이야.”
……양궁이라면 쏴 본 적이 있었다. 차재희는 스포츠광이다. 정말 온갖 것을 다 해 봤다. 이수가 적어 넣은 것 중 안 해 본 건 마라톤뿐이었다. 스쿠버 다이빙, 번지 점프, 테니스. 세 개까지 칠한 재희의 얼굴에 궁금증이 가득했다.
“스키도 안 타 봤어요?”
“어.”
“아니……. 스키는 그렇다고 치고. 농구도 안 해 봤다고요?”
“어. 씨발, 빨리 넘어가자고.”
채근하는 이수를 보며 재희는 조금 당황했다. 축구, 농구는 어릴 때 한 번씩은 다 해 보지 않나. 당연히 자신의 승리를 예감하고 선심 쓰듯 적어 넣은 것이었는데 그것도 안 해 봤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농구는 학교에서 체육 시간에 수행 평가를 보기도 했었다. 미국 교과 과정이 한국과 같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미드를 보면 농구 하는 장면이 꼭 들어가던데. 혹시 심장 때문에 그런가? 그래도 공 던지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뭔가 찜찜한 느낌에 재희가 펜을 내려 두었다.
“선배. 운동 안 좋아해요?”
“싫어해.”
“축구도 안 해 봤어요?”
“야, 색칠한 거 안 보여? 한 번만 더 물어보면 죽여 버린다.”
살벌한 말이 돌아왔지만 재희는 포기하지 않았다. 정말로 건강 때문인가? 아니면 친구가 없었나? ……설마. 그런 생각으로 어릴 때 안 해 봤을 수가 없는 놀이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래도 술래잡기는 해 봤죠?”
그러나 이수는 고개를 내저었다. 언제나처럼 무덤덤한 표정이 더 재희를 뜨끔하게 만들었다. 난처함을 느낀 재희가 입을 다물었다. 그 표정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이수가 짜증스럽게 설명했다.
“병원에서 자랐어. 그딴 거 할 기회도 없었고, 관심도 없어.”
“…….”
“차재희. 표정 관리해. 동정받는 거 딱 질색이니까.”
동정은 아니었다. 다만 마음이 아플 뿐이었다.
이수는 외롭지 않아 본 적이 없어서 자기가 외롭다는 걸 몰라. 순간 유진의 말이 떠올랐다. 재희는 어린 서이수를 상상해 보았다. 술래잡기할 친구도 없이 새하얀 병실 안에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을 아이.
자고 있을 때의 그는 바람이 불면 곧 사라져 버릴 것처럼 희미해 보였는데, 그 이미지와 재희가 상상한 이수의 어린 모습이 겹쳐지니 무척이나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그 시절을 자신이 채워 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메모지를 내려다보던 재희가 펜의 뚜껑을 닫았다.
“내가 졌어요.”
갑작스러운 패배 선언에 이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싫었다. 별것도 아닌 일을 무겁게 취급하는 차재희가 짜증 났다. 이수가 서늘한 목소리로 그를 채근했다.
“지랄 말고 칠해.”
“진짜예요. 나머지 안 해 봤어요.”
“씨발, 열받게 할래?”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차재희는 입매를 늘린 채 고개만 저었다. 저런 표정으로 고집을 부리는 놈을 꺾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저 새끼는 뭘 처먹고 자랐길래 저렇게 고집이 세. 이수가 부글부글 속이 끓는 것을 느끼며 재희를 노려봤다. 하지만 재희는 결백하다는 듯 그의 시선을 받아치며 입을 열었다.
“승마 안 해 봤으니까 나중에 가르쳐 주세요.”
“닥쳐.”
“나 군대 가기 전에 사격도 알려 줘요.”
“좆이나 까세요.”
“수영은… 가르치지 말고 선배가 구해 줘요.”
어이가 없었다. 코웃음을 치며 노려보니 재희가 예쁘게 웃었다. 황당하게도 그 웃음에 노여움이 흩어져 갔다.
“스쿠버 다이빙은 내가 알려 줄게요.”
“관심 없어.”
“번지 점프할 때 무서우면 내가 손잡아 줄게요.”
“…….”
“테니스는 공에 안 맞게 조심해야 되니까 꼭 나한테 배워요, 선배.”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배려를 강요하고야 마는 차재희가 얄미울 법도 하건만, 그보다는 알 수 없는 따스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짜증은 흩어지고 애정이 빈틈없이 차오른다. 꼼지락거리는 두 손. 미워하지 말라고 아이처럼 웃는 얼굴. 화를 낼까 눈치를 살피는 태도. 다정하고 또 사랑스러운 차재희.
“선배도 나도 못 해 본 거 되게 많으니까… 나중에 같이해요.”
그렇게 말하며 재희는 메모를 짚었다.
스노보드랑 스키, 썰매는 겨울에 타러 가요. 가을에 시원해지면 나랑 축구도 하고 농구도 해요. 나중에 밤낚시도 가요. 바다 위에서 불 끄고 있으면 하늘이 정말 예쁘대요.
차재희는 자신과의 미래를 기약하고 있었다. 이수는 귓가로 흘러들어 오는 그의 음성에 집중했다. 나직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상상력이 풍부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앞으로 함께할 날들이 쉽게도 떠올랐다. 이미지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처럼 선명했다. 그가 말하는 문장들에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겨울엔 별을 보러 가요.”
재희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수는 이미 별을 보고 있었다. 애정으로 가득 찬 눈동자가 반짝였다. 심장이 간지럽게 뛰었다. 이수는 바다에 한 걸음 다가갔다.
“차재희.”
참지 못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참아 보려 했지만 참아지지 않았다. 당장 저 남자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충동과 이성이 맞붙으면 언제나 승자는 정해져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내가 이긴 거 맞지.”
“……맞아요.”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이수가 목덜미를 감싸 당겼다. 갑작스러운 힘에 버티지 못하고 끌려갔다. 재희가 입술을 깨문 채 이수를 응시했다. 지척에서 서로의 숨결이 섞여 들어간다.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았다.
이수의 연한 눈동자는 가까이서 보면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 안에 갇혀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재희는 손을 뻗어 소파 위에 놓인 이수의 손등 위를 덮었다. 그리고 서이수는 망설임 없이 그와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차재희는 서이수의 내면에서 들끓는 무언가를 보았다. 찌릿한 예감이 재희를 관통했다. 그것은 뜨거운 욕망 혹은 저와 같은 질척거리는 애정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수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은 그 감정은, 욕망이 발현될 때에야 나직이 빛을 발했다.
이수에게서 긴 한숨과도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 마음은, 아직 잘 모르겠어.”
“……기다릴 수 있어요.”
나직한 대꾸에 이수가 웃었다. 작은 떨림이 전해져 왔다. 재희는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꼈다. 이수는 내리뜬 눈으로 그의 입술을 더듬고 있었다. 긴장감에 입이 말랐다.
“근데 지금은… 너한테 키스하고 싶어.”
이윽고 속삭이는 목소리에 짜릿한 만족이 치솟았다. 재희는 애써 웃음을 삼켰다. 상기된 뺨 위로 흔들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수에게서 감출 수 없는 조바심이 묻어났다. 그게 좋았다. 자신에게 안달 내는 서이수가 믿기지 않으면서도 좋았다.
확신도 못 하면서, 양심도 없지. 그렇게 튕기고 싶었지만 밀어내면 밀려나는 서이수였기에 재희는 다른 말을 꺼냈다.
“봐줄게요, 한 번은.”
짧게 웃은 이수가 고개를 기울였다. 살갗이 맞닿았다. 이수는 조심스레 재희의 윗입술을 머금었다. 살짝 힘을 주어 빨더니 혀를 내밀어 파고들어 왔다. 이수의 키스는 시작과 끝이 차재희였다. 습관처럼 익숙한 몸짓으로 재희에게 입술을 겹쳤다.
맞잡은 손이 미끄러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듯 누운 재희가 이수를 끌어당겼다. 달콤한 체취에 취할 것 같았다. 정신이 몽롱했다. 입술을 중심으로 퍼지는 흥분감에 헐떡거리는 숨이 터졌다. 티셔츠 밑으로 이수의 허리와 골반을 쓸어내리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서이수는 신사답지 못한 면이 있었다. 부드럽게 시작한 입맞춤은 금세 짐승처럼 돌변했다. 재희를 잡아먹을 듯 얽어 오는 혀가 이리저리 비벼졌다. 척척한 소리와 함께 헐떡이는 숨소리가 점점 짙어져 갔다.
“하아, 선배.”
고개를 떼어 낸 이수가 숨을 몰아쉬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두 뺨과 벌어진 입술, 그 사이로 빼꼼히 드러낸 혀가 음란하게 젖어 있었다. 호박색의 눈동자가 흐렸다. 고개를 쳐드는 욕망에 위기감을 느낀 이수가 재희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상체를 세우는 그를 재희가 붙잡았다. 한 손으로는 등골을 어루만지고, 한 손으로는 귓가를 쓸며 예쁜 미소를 지었다.
“한 번만 더 해 줘요… 응?”
머리가 핑 도는 듯했다. 재희의 얼굴을 배회하던 시선이 다시금 한곳에 꽂혔다. 흐트러진 얼굴로 웃고 있는 차재희가 오늘따라 섹시했다. 미친 거 아닌가. 얘한테 어떻게 이런 느낌을 받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참을 수가 없었다.
입술을 축이러 나온 재희의 혀가 이수의 입 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쭉쭉 빨아들이는 힘에 타액이 난잡하게 뒤섞였다. 이상하게 달았다. 이수는 그게 생명수라도 되는 양 재희에게 매달렸다.
허리를 꽉 붙든 차재희의 두 손이 뜨거웠다. 그곳으로부터 불길이 일어 전신으로 옮겨붙었다. 피부밑으로 빠르게 흐르는 혈액이 뾰족했다. 거기에 찔린 것처럼 온몸이 따끔거렸다. 아래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이수는 자연스레 그에게 하반신을 비볐다.
“읏…….”
거칠기 짝이 없는 키스를 받으며 재희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어쩐지 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달려드는 것 자체로 황홀하고 짜릿한 일이었지만 이건 뭔가……. 찝찝함을 느낀 재희가 이수의 허리를 감아 안으며 그를 돌려 눕혔다.
이게 맞지. 흡족한 웃음과 함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수의 보송보송한 살결이 금세 젖어 들어갔다. 가늘게 뛰는 동맥을 따라 입을 맞추자 이수가 짧은 신음을 흘렸다. 눈만 들어 올려다보니 그는 입술을 문 채 소리를 참고 있었다. 뭘 했다고 이렇게 흥분해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수의 반응에 재희도 성감이 고조되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바지 속이 답답했다. 달칵, 재희는 슬랙스의 버클을 풀며 이수의 허벅지를 쓸어 만졌다. 매끈한 다리가 보기보다 단단했다. 그의 성기가 숏츠 위로 뚜렷한 윤곽을 드러냈다. 손을 뻗어 움켜쥐니 허리가 튀었다.
“아……. 윽!”
이수의 아랫입술을 쭉 빨아들인 재희가 웃음기 띤 목소리로 물었다.
“키스만 하고 싶어요, 선배?”
“…….”
“응? 대답해 봐요…….”
재희가 얇은 천 위로 귀두를 만지작거렸다. 버릇처럼 그에게 허리를 치대는 이수를 재희가 제지했다. 쉬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달래듯 허벅지를 주무른다. 안쪽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은근했다.
미적지근한 힘에 이수는 갈증을 느꼈다. 알지 못했던 어떤 자기 파괴적인 충동이 있는 것 같았다. 뭐든 거칠게 해 주었으면 싶었다. ……진짜 미쳤나 보다. 키스만 할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다른 곳으로 튀었다.
손이든 어디든 좆을 쑤셔 넣고 싶었다. 경험한 적도 없건만 유전자에 새겨진 수컷의 본능은 강렬했다. 그 본능이 이성을 잠식하려 할 때 재희의 손끝이 고환을 스쳤다.
“아… 씨발.”
욕망이 그의 이성을 충동질했다. 여기까지만 하자. 이제 그만. 그러한 내면의 외침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흩어졌다. 아래로 내려간 재희가 티셔츠 위로 유두를 빨았다.
좆도, 가슴팍도, 빌어먹을 천 쪼가리 밑에서 이렇게까지 느끼고 있다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황당함보다는 욕심이 앞섰다. 이수가 상체를 살짝 들어 올려 옷을 벗어 냈다. 그러자 재희는 허리를 세운 채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뭐 해요?”
“닥쳐.”
“키스 다 했는데, 옷은 갑자기 왜 벗어요?”
차재희는 갑자기 발을 뺐다. 이수는 발끈했다. 먼저 만진 게 누군데…….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여유만만한 재희를 노려봤지만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울컥 새어 나오는 쿠퍼액을 의식하던 이수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다가 보았다. 슬랙스 위로 선명하게 선 흉기의 윤곽선을.
“…….”
아래를 더듬던 시선이 다시 위로 올라갔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지만 그 또한 진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어디서 조신한 척이야. 순간 여유를 되찾은 이수가 눈을 찡그렸다. 비스듬히 올라가는 입꼬리와 함께 묻는다.
“여기까지만 할 거야?”
유혹과도 같은 질문에 재희는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그는 이수가 백기를 들길 바라고 있었다. 저를 원한다고, 어떻게 해 달라고, 분명한 의사 표현을 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서이수는 물론 그렇게 해 줄 마음이 없었다.
흰 손가락이 자신의 숏츠 아래를 파고들어 갔다. 이수가 나른한 웃음과 함께 좆을 꺼냈다. 예쁘게 모양 잡힌 분홍색 페니스가 재희의 두 눈에 담겼다. 긴장감이 역력한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본다. 그를 놀리듯 이수가 제 성기를 위아래로 쓸었다. 윽, 작은 신음과 함께 대퇴근이 수축했다. 만지고 싶었다.
“건들면, 읏, 뒤진다.”
이수를 향해 손을 뻗던 재희가 몸을 움찔했다. 서이수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재희는 이런 상황에서까지 저를 이겨 먹으려 드는 이수에게 질려 버렸다. 간절하게 뭔가 좀 해 달라는 소리를 들으려 몸을 뺐더니, 역으로 매달리게 만들고 있었다.
슥, 보들보들한 피부 위로 손이 스칠 때마다 젖은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세상이 하얗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눈길로 저를 더듬으며 자위하는 서이수는 세상에 다신 없을 발정제였다.
재희는 저 멍든 딸기 같은 좆을 입에 머금고 싶었다. 쭉쭉 빨아 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떤 신음을 흘릴까. 끙끙거리며 매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도 재희는 참았다. 서이수에게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빙고 하면서 한 번 져 줬으니까, 이번엔 질 수 없었다. 바지 지퍼를 내리는 소리에 이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씨발, 미친, 새끼…….”
“누가… 할 소린데요.”
재희는 부끄러워서 돌아 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남에게 자위하는 모습을 보여 주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수를 내려다보며 검붉은 좆을 만지작거리는 손끝이 살짝 떨려 왔다. 속이 탔다. 당장이라도 그와 입을 맞추고 살을 부대끼고 싶었지만, 안간힘을 다해 참았다.
슬랙스 사이로 삐져나온 성기는 터질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귀두를 감싼 손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자위를 시작했다. 등골을 타고 한기 같은 쾌감이 흘렀다. 그것만으로도 숨이 찼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남자는 결코 그 음란한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포르노를 감상하듯 열기에 젖은 눈동자로 상대방을 핥았다. 상상 속에서 이미 수십 번도 입 맞추었건만, 현실의 둘은 서로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은 채 사정했다.
“으윽…….”
이수의 복부 위로 정액이 쏟아져 내렸다. 얼마나 참았는지 가슴까지 튀었다. 손바닥에 토정하며 그를 내려다보던 재희는 그 순간 백기를 들었다.
연유를 찍은 딸기처럼 유륜 위에 흩뿌려진 흰 액체를 보는 순간 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행동은 생각보다 더 빨랐다.
“아!”
좆을 훑으며 후희를 즐기던 이수가 허리를 튕겼다. 유두를 뽑아낼 듯 빨아내는 힘에 다시 피가 돌기 시작했다. 시들려던 좆이 살아나는 것을 느낄 새도 없이 이수는 차재희가 제 정액을 처먹었다는 사실을 인지해 냈다.
“미친, 흐읏, 놈아.”
머리를 밀어냈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한 손으로 이수의 아랫배와 두 성기에 좆물을 처바르며 재희는 개처럼 달라붙었다. 혓바닥이 살갗을 스칠 때마다 아릿한 쾌감이 일었다. 극도의 흥분은 고통과도 같았다.
젖꼭지를 감아올린 혀가 겨드랑이를 타고 올라와 이수의 어깨를 물었다. 붉은 자국을 짙게 새겨 넣은 재희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무섭게 풀려 있었다. 이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짐승처럼 재희가 낮은 목소리를 흘려 냈다.
“내가 졌어요, 선배.”
발간 뺨 위로 보조개가 팬다. 눈을 접어 웃은 재희가 이수에게 달려들었다. 한 번만 더 해요, 작은 속삭임과 함께 시작된 패팅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 * *
차재희와 단둘이 있으면 이성을 잃어버린다. 같이 씻자고 매달리는 걸 떨쳐 내고 이수는 침실에 붙은 욕실에서 샤워했다. 커다란 창 때문에 야외 노출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잘 쓰지 않는 곳이었다. 뜨거운 물로 개운하게 씻어 내고 나니 정신이 들었다.
키스로 시작해서 서로를 바라보며 자위를 하고, 결국엔 온몸을 비벼 댔다. 입술은 부풀고 가슴은 물줄기만 닿아도 아렸다. 상체 곳곳에 남은 붉은 흔적과 열상을 입은 듯 화끈거리는 아래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미친놈들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또 아까의 일을 떠올리다 보니 아랫배가 찌릿했다. 돌았구나, 진짜. 발정기의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이수는 욕실을 나서기 전 찬물로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비워 냈다.
리빙 룸으로 나오니 엉망이었던 소파가 깨끗했다. 비린내는 가시고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가사 도우미가 이 시간에 다녀갔나. 그 생각을 하던 이수가 수건을 들고 욕실에서 나오는 차재희를 발견했다.
빌려준 옷이 타이트하게 맞았다. 티셔츠 아래로 근육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 가만 바라보고 서 있으니 쪼르르 다가온 재희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쪽, 자연스러운 스킨십에 이수가 눈을 들어 올렸다. 웃음기 가득한 눈매가 예쁘게 휘어져 있었다. 빠듯하게 죄어 오는 심장을 느끼며 재희를 밀어냈다.
“하지 마라.”
“청소 요금이에요.”
그렇게 말하고 재희는 이수의 귓가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가슴께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이수는 그를 버려두고 뒤돌았다. 할 일이 있었다.
데스크톱으로 가서 마우스를 휘저으니 대기 모드가 풀리며 모니터에 빛이 들어왔다. 마을에 놓인 이수의 캐릭터 주변으로 길드원들이 몇몇 모여 있었다. 말을 걸어오는 이들을 무시하고 공방으로 이동해 아이템 제작 상황을 확인했다. 그런 그를 재희가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옆자리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나도 거기 가입시켜 줘요.”
“뭐. 길드?”
“네.”
인상을 찡그린 이수가 친구 목록을 열었다. 차재희의 캐릭터는 아직 레벨이 13이었다.
WASD 길드는 가입 조건이 엄청나게 까다로웠다. 추천제로만 가능했는데 기본으로 최상위 던전과 상급 레이드 50회 이상 클리어에 캐릭터 숙련도 4.0 이상, PVP 직업별 랭킹 제한까지 있었다. 사실 플레이 매너를 평가하는 유저 평점 3.0 이상도 가입 조건 중 하나였는데, 5CPR 캐릭터의 유저 평점이 0.9대로 하락한 이후로는 있으나 마나 한 것이 되었다.
원래 새로운 탱커로 영입하려고 하긴 했지만, 만렙도 안 된 캐릭터를 받아 줄 순 없었다. 이수가 코웃음을 치자 재희가 서운한 얼굴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율이 나타난 건 그즈음이었다.
“형! 저희 왔어요! 어? 재희 놀러 왔구나.”
“어…….”
“문율, 안녕.”
리키와 얼마나 뛴 건지, 동그란 이마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율이 재희를 발견하고 반갑게 웃었다.
반면 이수는 등골이 서늘했다. 현관문과 거리가 떨어진 탓에 고용인들이 집에 들어오는지 모를 때가 많았다. 율이 들어올 거라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닌데, 아까는 완전 잊고 있었다. 좆될 뻔했네. 경악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어. 리키는?”
그 물음에 재희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이 시간에 집에 들른 율이 못마땅했는데, 리키라는 이름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 남자도 이 시간에 집을 들락거린다고? 평일 밤 9시에? 대체 뭐 하는 인간인데? 백수야? 재희가 질투에 찬 눈빛으로 이수와 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힐끗, 그의 눈치를 본 율이 웃으며 말했다.
“테라스로 뛰어갔어요. 지치지도 않나 봐요.”
“민우랑 다닐 때보다 더 좋아하네. 고생 많았어. 택시 타고 가.”
“아니에요. 버스 타도 시간 충분해요! 저 가 볼게요. 재희야, 나중에 보자.”
“잘 가.”
곧 오후 10시, 고정 팟 소집 시간이었다. 율은 이수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재희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떠났다. 율이 떠난 후 이수는 다시금 제작에 열중했다.
그 옆에 앉은 재희는 그들의 대화를 곱씹었다. 리키가 지금 이 집에 있는 건가? 테라스로 뛰어갔다고 표현한 걸 보면, 어린애인가? 혹시 사고 쳐서 낳은 아들……? 말도 안 돼.
충격에 빠진 채 재희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섹스도 안 해 본 것 같은데 애가 있을 리가. ……설마 인공 수정을 통한 대리모 출산은 아니겠지? 말도 안 되는 가정을 떠올리던 재희는 이수의 눈치를 봤다. 짜증을 낼지도 모르지만, 직접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
“리키가… 누구예요?”
입 밖으로 내고 나니 속이 다 시원했다. 이전부터 얼마나 물어보고 싶었었는지 이수는 모를 것이다. 망설이며 던진 질문에 그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누구긴.”
휘익, 이수가 휘파람을 불었다. 꼭 마당에 나간 개를 불러들이듯 가벼운 몸짓이었다. 머릿속에 번뜩 스치는 것이 있었다. 하. 한숨을 쉰 재희가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선배가 아까 말한 개 이름이… 설마 ‘리키’예요?”
“어. 왜 안 오지? 릭!”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이수가 릭이라는 애칭과 함께 다시 한번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고 얼마 가지 않아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새까만 덩치가 나타났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검은색 래브라도 리트리버, 리키가 이방인을 빤히 쳐다봤다. 재희는 잔뜩 굳은 채 말이 없었다.
킁킁거리며 재희의 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고는 반응을 살피듯 이수를 바라보고는 경계를 풀었다. 다만 주인 냄새를 흠뻑 묻힌 재희를 질투하듯, 리키는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바닥에 앉았다. 다리에 기대지는 무게감에 이수가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
“인사해. 리키야.”
이수가 재희에게 리키를 소개했다. 그 새까만 개를 바라보며 재희는 떨떠름한 감상에 휩싸였다.
리키라는 놈을 질투하며 천불이 일었었다. 이수가 그에게 뽀뽀하고 엉덩이를 만질까 봐 속이 쓰렸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토록 자신을 괴롭혔던 존재가 요 앙큼한 대형견이었다니.
‘리키, 너… 그럴 줄 알았어. 이렇게 예쁘고… 귀여울 줄 알았다고.’
‘너 진짜 개같이 생겼다.’
이수가 했던 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개같이 생겼다는 말이 진짜 ‘개’ 같다는 말이었나. 순간 울컥할 정도로 자존심이 상했다.
살면서 잘생겼다는 말은 많이 들어 봤어도 개를 닮았다는 소린 또 처음이었다. 재희는 마뜩잖은 눈빛으로 리키를 뜯어봤다.
대형견 특유의 순진무구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잘생기긴 했다. 개치고는……. 근데 그래 봤자 개였다. 이건 좀 아니지.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얘랑 닮았어요?”
“어. 니가 봐도 비슷하지?”
“……선배 눈이 좀.”
안 좋아요? 슬며시 덧붙인 말에 이수가 어이없다는 듯 재희를 돌아봤다.
“야, 잘 봐.”
그렇게 말하며 리키의 이마와 콧잔등에 키스를 퍼붓는다.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차재희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한 마리의 개가 되고 싶었다. 서이수에게 저렇게 사랑받을 수만 있다면 개를 닮았단 소린 백 번을 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의 키스 세례에 리키가 입을 헤 벌리며 웃었다. 서이수가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었던 듯하다. 살짝 접히는 눈매 하며 부드럽게 끌려 올라간 입꼬리는 차재희가 보기에도 자신의 웃는 얼굴과 꽤 닮은 점이 많았다.
이수가 만면 가득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봐. 엄청 사랑스럽지. 귀엽잖아.”
“…….”
당연히 맞장구를 쳐야 할 타이밍이었는데 대답이 없었다. 뭐지. 눈이 있으면 모를 수가 없는데. 그렇게 생각한 이수가 옆을 돌아봤다.
차재희는 입술을 꾹 깨문 채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목덜미가 붉었다. 반짝반짝하는 눈동자가 이수를 향했다. 그 시선이 신호라도 되는 듯 심장이 뛰었다. 재희가 이수에게 물었다.
“나도 사랑스러워요?”
“……너랑 얘랑 같냐? 말이 그렇다고.”
말실수를 깨닫고 퉁명스럽게 받아쳤지만 재희는 짓궂은 표정으로 이수의 손을 끌어당겼다. 주먹 쥔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더니, 그 끝에 입을 맞췄다.
쪽, 쪽,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감촉에 온몸의 근육이 수축한다. 마음속 어딘가가 충만해지는 느낌이었다. 어색해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놓아주지 않았다. 선배, 나직한 울림에 이수는 재희와 눈을 맞췄다.
“나도 키스해 줘요.”
“…….”
결국은 또 이야기가 그쪽으로 흐른다. 이수는 이게 진짜 발정이 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예쁘게 접히는 눈매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다음은 뺨이었다. 깊게 팬 볼우물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확실히 차재희랑 리키는 달랐다. 어떻게 다르냐면, 리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차재희가 조금 더 사랑스러웠다. 한 2% 정도.
그러니 저렇게 애교를 떨면.
“나도 예뻐해 줘요……. 응?”
참을 수가 없었다.
아까도 많이 했는데, 뭐. 이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재희에게 입을 맞췄다.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이마에, 휘어진 눈매에, 보드라운 뺨에, 마지막으로 촉촉한 입술에.
뽀뽀만 하고 떨어지려는 것을 재희가 잡아챘다. 이수의 목덜미를 붙잡으며 혀를 얽어 온다. 눈을 맞춘 채 입술을 물었다 놓는 것이 여간 달콤한 것이 아니었다. 잇새를 가르고 들어와 혀끝을 빨아 대던 재희가 이수의 허리를 끌어당기는 순간이었다.
왕!
둘 사이에 앉아 쪽쪽거리는 걸 지켜보던 리키가 난리법석을 떨어 댔다. 화들짝 놀란 이수가 몸을 떼어 냈지만, 리키는 저를 두고 이 개 같은 인간과 뽀뽀를 한 걸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온몸으로 치대고 들러붙었다. 이수의 입가를 남김없이 핥는 혓바닥을 보며 재희는 경쟁자가 만만치 않은 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 그만, 리키!”
몸을 뒤로, 뒤로 물리던 이수가 짜증을 내며 Stop이라고 외쳤다. 그 말 한마디에 얌전한 강아지가 된 리키는 이수의 의자 주위를 빙글, 한 바퀴 돌더니 그의 손등에 코를 슥 문지르고 리빙 룸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쓸쓸한 뒷모습을 보던 재희가 문득 말했다.
“선배를 많이 좋아하나 봐요.”
“그렇지, 뭐.”
“나도 그래요.”
뜬금없는 말에 이수는 얼굴을 굳히더니, 재희를 쏘아본 후에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돌렸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예뻐서 재희는 그의 붉어진 목덜미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10시가 되었고, 이수는 힐러와 타격, 김똘복과 함께 랭킹작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재희가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지난번에 PC방에 갔을 때는 이수가 율과 이야기를 하느라 바빠서 그의 컨트롤을 구경할 기회가 없었다. 얼마나 잘하기에 사람을 그렇게 무시하나, 솔직히 굉장히 기대했는데……. 실력을 떠나서 이수의 파티 플레이 때문에 재희는 충격을 받았다.
말이라는 건 면대면으로 나누지 않거나 글자로 표현될 때 좀 더 오해의 여지가 큰 법이다. 그런데 얼굴도 안 보이는 사람에게 저렇게 욕을 해도 되는 건가.
“아, 타격 이 씨발놈아. 너 그냥 손목에 의수 달아. 그게 더 반속 빠르겠다, 병신아.”
정말 걱정될 정도로 살벌했다. 혹시 무슨 원수지간인가? 경쟁자들끼리 억지로 던전을 돌아야만 하는 강제적인 요소가 있는 걸까? 설마 아는 사람한테 저렇게 욕을 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재희는 화면에 비추는 타격이란 닉네임 밑에 WASD 라고 쓰여 있는 글자를 발견하고 두 번째로 충격을 받았다.
길드원한테 저렇게 말한다고? 저러다 칼 맞는 거 아니야?
재희가 이수의 안위를 걱정하는 동안, 이수는 옆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차재희가 신경 쓰였다. 잠시 고민하다가 마이크는 남겨 두고 스피커만 출력을 전환했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타격─으로 추정되는─의 멘트에 재희는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 아, 씨발. 무패턴 진짜 좆같네.
“니 손이 좆같은 거겠지.”
─ 그럼 내 좆 열한 개임? 오졌다.
“병신인가……. 아니, 야! 씨발, 피하라고!”
타격이란 남자는 이수의 욕설에 면역이 된 듯,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역으로 이수를 열받게 하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파티에는 김똘복이라는 닉네임의 점잖아 보이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고, 문율은 이수와 타격 사이에서 싹싹하게 분위기를 띄우려고 노력했다.
재희는 이수와 문율이 하하 호호 즐겁게 웃으며 게임을 할 것이라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을 비웃었다. 무슨 특별한 사이일지도 모른다고 착각하고 질투했는데, 결론은 펫 시터이자 길드원이었다. 전혀 신경 쓸 것이 없었다.
긴장을 푼 재희는 팔짱을 낀 채 게임을 관전했다. 타격 때문에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리트라이1)가 계속되었다. 그동안 재희는 쌍시옷으로 시작하는 욕설이 몇 번이나 터지는지 세다가 178번에서 관뒀다. 게임을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이수의 라테르 플레이 시간은 학기 중에는 네 시간 정도였다. 수업이 끝난 후 공부를 하고, 저녁 10시부터 2시까지 게임을 하고 잔다. 하지만 종강 후에는 달랐다.
학기 중이 아닐 때의 생활 패턴은 무척이나 불규칙했다. 졸리면 자고, 시간이 지나면 일어났다. 밥을 먹고 간단히 산책을 하고, 종종 영화를 보거나 쉬는 시간을 제외하면 눈을 떴다가 감을 때까지 라테르와 함께했다.
밤낮없이 생활하는 탓에 일주일 내내 가사 도우미를 못 만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리고 이제 학기가 끝났으므로 이수는 슬슬 플레이 시간제한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재희는 시험 기간을 제외하면 12시에 자고 6시에 일어나는 규칙적인 아침형 인간이었다. 그래서 재희는 자정이 지난 후부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이수가 옆을 돌아본 새벽 1시쯤에는 이미 잠들어 버린 상태였다.
“야, 일어나.”
귀찮게……. 담배를 피우며 발로 툭툭 차 보았지만 깰 생각을 안 했다. 게스트 룸까지 끌고 갈 덩치는 아니라 이수는 등받이를 눕혀 주는 것으로 손님에 대한 예의를 다했다.
새벽 4시, 이수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도 재희는 잠에 취해 있었다. 목이 아픈지 끙끙거리면서도 잘 잤다. 이수는 그를 버려두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재희는 5시 59분에 눈을 떴다. 언제나 그렇듯 알람이 울리길 기다렸다가 종료 버튼을 눌렀다. 사위가 조용했다. 눈을 깜빡이며 옆을 본 재희가 인상을 찡그렸다.
깨우지도 않고 가 버리다니. 불퉁하게 입을 내민 채 뻐근한 목을 돌렸다. 뼈가 맞춰지는 소리와 함께 끙끙거리는 신음이 흘렀다.
“…….”
그때 희미한 발소리가 들렸다. 선배인가, 하고 고개를 돌린 재희는 눈을 게슴츠레 뜬 리키를 발견했다. 자다 깼는지 멍한 얼굴의 리키는 재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기분 탓이겠지만 여태 안 가고 뭐 했냐고 구박하는 눈빛이었다. 슬쩍 손을 내밀어 냄새를 맡게 해 주었으나 리키는 한 번 킁, 하더니 콧방귀를 끼고 다시 소파로 돌아가 버렸다.
머쓱해진 재희가 괜히 휴대폰을 확인했다. 메시지가 천 개 넘게 쌓였다. 단톡방들은 읽지 않고 숫자를 지워 버리고, 개인에게서 온 연락만 확인했다. 가장 친한 친구인 강주현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강주현
째ㅐㅐㅐ 주말에 머함?
3:41
강주현
나랑 노쉴??
3:42
재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확인하지 말 걸 그랬다.
주말 일정만 떠올려도 숨이 막혔다. 토요일은 차재우와 차재하를 대신해 부모님과 파티에 참석해야 했고, 일요일은 선견 막내딸과 약속이 있었다. 이미 정해진 약속이라 무를 수가 없었다. 서이수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면 얻어맞는 한이 있어도 수락하지 않았을 텐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예의가 아닌 건 알지만, 재희는 선견의 그 여자를 만나는 자리에서 사과할 생각이었다. 결혼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이야길 듣고 이해해 준다면 고마운 일이었지만 당연히 화를 낼 것 같아서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가족들을 생각하니 죄책감과 후회, 두려움이 물밀듯 밀려와 뒤섞였다.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속에서 연기가 나는 것 같았다. 입 안이 썼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재희는 우울함을 떨치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라면 운동을 가야 할 시간이었지만 이 집에서 나가면 다시 들어오기 힘들 것 같아 오늘 하루는 쉬기로 했다. 대신 기지개를 한 번 켜고 집 안을 구경했다.
커다란 전창 너머로 한강이 내려다보였다. 계절은 어느새 여름에 접어들었다. 재희는 풋풋한 풀 내음을 떠올리며 창가에서 혼자 근력 운동을 했다.
서이수는 예민해 보여도 은근히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었다. 운동을 끝낸 재희는 그의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를 꺼내 욕실로 들어갔다. 제집처럼 편안하게 씻고 나오니 주방이 부산했다. 음식을 준비하던 가사 도우미가 재희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엄마얏!”
그 소리에 리키가 놀랐는지 왕왕거리며 뛰어왔다. 왜, 왜, 무슨 일인데? 두리번거리며 호기심을 내비쳤다. 이수가 말했듯 사랑스러운 녀석이었다. 재희는 가사 도우미에게 꾸벅 고개 숙여 사과하곤 리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세상에.”
“많이 놀라셨어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제가 원래 간이 작아서……. 유진 씨 말고는 이 집에 놀러 오는 사람이 없거든요. 근데 갑자기 남자분이 나타나셔서, 도둑인 줄 알고…….”
자신을 김성희라 소개한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올해 서른여섯 살인 그녀는 일류 요리 대학 출신으로 이 집에서 4년째 일하고 있었다. 한식을 잘 먹지 않는 이수를 위해 사모님이 특별히 부탁해 근무하는 것이라 했다. 가사 도우미가 아니라 요리사였다.
붙임성 좋은 재희는 김성희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이수의 부모님이 궁금했지만, 사적인 영역을 타인에게 묻는 건 예의가 아니었기에 꾹 참았다.
대신 이 정도는 괜찮겠지, 싶어서 이수가 잘 먹는 음식들에 대한 정보를 캐냈다. 핸드폰에 적어 넣으며 연습을 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우울감이 가셨다. 대화를 나눌 사람이 있어 다행이었다.
김성희가 음식을 하고, 새로 도착한 가사 도우미가 청소를 하는 동안 재희는 이수의 과제용 컴퓨터를 켰다. 어제 이수가 던전을 도는 걸 구경하고 있을 때 심심하면 옆에 있는 걸로 게임을 하라고 말했었다. 그걸 떠올리며 이수가 깨어날 때까지 레벨을 올렸다.
정오가 되었을 때쯤 이수가 나타났다. 멍한 얼굴로 데스크톱을 향해 오던 그는 재희를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휴대폰을 켜서 시간을 확인하고는 귀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안 갔냐?”
단정히 미소 짓던 입매가 삐뚤어졌다. 재희는 주말까지 이 집에서 버텨야겠다고 결심했다. 불퉁하게 쳐다보고만 있으니 혀를 찬 이수가 다가왔다. 마우스를 움직여 대기 모드를 해제해 제작을 돌려놓고, 다시 리빙 룸으로 사라졌다.
재희는 75라고 찍힌 이수의 레벨을 확인하고 열의를 불태웠다. 이수는 30분 뒤 다시 나타났다. 밥을 먹고 씻었는지 아까보다 훨씬 눈매가 또렷했다. 뜨거운 물로 씻는 게 습관인 건지, 씻고 나올 때마다 울긋불긋해지는 목덜미에서 재희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시선을 모른 체하며 이수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위잉, 작은 소음과 함께 돌아가는 침니 후드가 연기를 빨아들였다. 모니터를 힐끔거린 이수가 혀를 찼다.
“아직도 22야?”
“잘 안 올라요.”
“메인 퀘만 따라가면 되는데.”
“그것보다 던전 도는 게 더 재밌어요.”
미련했지만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겜창이라면 자고로 던전에 진심이어야 하는 법이다. 이수는 제작된 물건을 회수하고 로그아웃을 했다. 가끔 쓰는 신유진의 계정으로 접속했다.
새까만 털을 가진 강아지 얼굴의 2등신 캐릭터가 보였다. 24레벨 힐러인 마령사, 아이디는 <채금풀어2CPR놈들아>였다. 5CPR 캐릭터가 채팅 금지를 먹었을 때 키배용으로 사용하는 캐릭터다. 고정 파티원들은 아직 접속하지 않았으므로 딱히 일정이 없었다. 그래서 이수는 차재희를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시스템] 채금풀어2CPR놈들아 님이 차제이 님께 파티를 신청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N)
그렇게 스파르타식 교육이 시작되었고, 한 시간 만에 파투 났다.
“선배랑 안 할래요.”
“나도 너랑 못 해 먹겠다. 뭔데, 씨발. 손이 퇴화했어?”
재희가 그날 멀미약을 먹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이수는 그의 스킬이 빗나갈 때마다 한숨을 쉬고 짜증을 내고 참견질을 해 댔고, 이수가 멀미약을 먹은 이후의 자신에게 가능성을 보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재희는 자기가 먼저 하자고 해 놓고 구박하고 욕을 씹는 이수에게 억하심정이 들고 서운했다.
“멀쩡하거든요?”
“아니야. 그리고 눈도 퇴화한 것 같아. 두더지세요? 그게 안 보여?”
“처음인데 못 볼 수도 있죠!”
발끈한 대답에 이수가 코웃음을 쳤다.
“아니, 없어.”
반박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대꾸였다. 재희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이수를 쏘아봤다. 이수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웠다.
아무래도 그날 잘못 본 것 같았다.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어떻게 저런 되먹지 못한 컨트롤에서 가능성을 봤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던데 차재희의 떡잎은 썩었다. 회생의 여지가 보이질 않았다.
탱커를 다시 찾아야겠다. 아직 시간은 충분했지만 귀찮은 작업이었다. 한숨을 폭 내쉬고 있으니 재희가 입을 열었다.
“이럴 거면 왜 같이하자고 했어요?”
“나도 궁금하네. 내가 왜 그랬을까?”
“…….”
비꼬는 듯한 반문에 이번엔 재희가 한숨을 쉬었다. 바닥을 내려다보는 얼굴이 언뜻 속상해 보였다. 의자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던 이수가 눈을 찡그렸다. 그렇게까지 마음 상할 일인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못하는 걸 못한다고 하지 뭐라고 한단 말인가.
서이수는 나쁜 말을 좋게 하는 법을 전혀 몰랐다. 잠깐 자신의 말투에 대해 생각하던 이수가 이전부터 궁금하던 질문을 꺼냈다.
“야.”
“왜요.”
“넌 내가 왜 좋아?”
진짜로 궁금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말투 그대로 대화를 시도한다고 가정하면, 자신은 그에게 격렬한 폭행의 욕구를 느낄 것 같았다. 결코 좋아하는 마음이 생길 것 같지 않았다.
그 물음에 재희는 코웃음을 쳤다. 구박을 받을 대로 받아서 한껏 삐뚤어진 상태였다. 불순한 눈빛과 함께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궁금해요. 내가 왜 선배를 좋아할까?”
한동안 얌전하다 했더니 또 시작이었다.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기. 저걸 진짜. 이수가 담배를 비벼 끄곤 팔짱을 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데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차재희의 휴대폰이었다. 재희는 발신인을 확인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유진 누나.”
─ 어, 재희야. 메시지 봤어? 말이 없길래.
“아뇨, 잠시만요.”
─ 응. 학회 방.
확인하지 않고 넘겨 버렸는데 무슨 말이 오갔었나 보다. 잠시 후 학회 단톡방을 확인한 재희가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늘 오후 3시에 서울숲 근처에서 만나자는 공지가 있었고, 지금은 2시가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어제 급하게 정해진 약속이었다.
난감했다. 재희는 이수의 집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유를 말하며 거절할 수는 없었고, 서이수를 앞에 두고 말을 둘러댈 수도 없었다. 재희가 어물거리며 고민하는 사이 이수는 리키가 소파를 뜯는 소리를 들었다.
“릭! 안 돼!”
리키를 부르는 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유진이 반응했다.
─ 뭐야……? 재희야, 너 이수랑 같이 있어?
“아……. 음, 네. 놀러, 놀러 왔어요.”
─ 아하. 그래? 놀러 갔구나아.
유진은 말꼬리를 늘리며 재희의 말을 의미심장하게 되풀이했다. 양심에 찔릴 새도 없이 유진이 말했다.
─ 그럼 이수랑 같이 나와. 이 새끼 어제부터 내 연락 계속 씹더니. 재희랑 있어서 그랬구나. 둘이 어어엄청 재밌게 놀고 있나 봐. 그치?
“아. 잠… 잠시만요.”
뭔가 눈치챈 건 아니겠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재희는 리키를 혼내고 있는 이수에게 말을 꺼냈다.
“선배, 유진 누나가 근처에서 학회 모임 할 건데 같이 나오라는데요.”
“꺼지라고 해.”
“……들으셨어요, 누나?”
─ 지금 나한테 꺼지라고 한 거지?
유진이 낄낄거리며 웃더니 이수를 바꿔 달라고 했다. 리키를 혼내고 돌려보낸 이수는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뭐.”
─ 야. 이 요망한 서이수! 순진한 재희 데리고 뭐 하는 짓이야?
“하…….”
어이가 없었다. 순진한 재희? 이수는 인상을 구긴 채 재희를 바라봤다. 이수는 저렇게 음란한 놈은 처음 보았다. 요망하단 말은 차재희에게 써야 하는 수식어였다. 술만 마시면, 혹은 스킨십만 했다 하면 180도 돌변하는 놈에게 순진하다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었다.
아니, 그런데 그것보다……. 뭐지? 이수는 유진에게 차재희와 있었던 일을 말한 적이 없다. 설마 차재희가 이야기했나? 하지만 흘끔 본 재희는 그 ‘순진한’ 눈망울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떠보는 거구나. 빠르게 눈치챈 이수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개소리 작작해.”
─ 대박… 재미없게. 뭐 해? 재희랑 나와.
“게임 할 건데.”
─ 아, 미친놈아. 좀 나와라.
신유진은 포기를 몰랐다. 차재희만큼이나 고집이 셌다. 꺼지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으나, 신경주 회장의 칠순 잔치에 입고 갈 정장을 주문해 뒀다고 생떼를 부렸다. 정장이라면 이수도 꽤 많았다. 자기가 입히고 싶어서 산 주제에 옷값을 하라고 징징거리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어차피 또 한동안 얼굴 볼 일이 없을 것 같아서 맞춰 주기로 했다.
휴대폰을 돌려받은 재희는 머쓱한 표정으로 이수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그는 전화를 받기 전의 일을 까맣게 잊은 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뒤끝이 없는 것만큼은 정말 최고였다.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드레스 룸으로 이동하는 이수를 재희가 졸졸 쫓아갔다.
“선배, 옷 빌려줘요.”
“39층만 내려가면 니 집인데.”
“귀찮단 말이에요.”
재희는 옷을 핑계로 다시 이수의 집에 들를 계획을 세웠다. 어차피 종강했는데 최대한 오래 붙어 있고 싶었다.
이수는 성가셔하면서도 사이즈가 맞지 않아 옷장에 처박아 두었던 블랙 데님 진을 꺼냈다. 거기에 유진이 사다 주었던 오버 핏 인디고블루 티셔츠를 함께 건넸다. 이수는 짙은 네이비 컬러의 티셔츠에 검은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었다.
서울숲까지는 먼 거리가 아니라 걸어가기로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어슬렁어슬렁 걷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꽂혔다. 혼자 있어도 눈에 띄는 두 사람이 같이 걸으니 쳐다보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서울숲 근처의 카페에서 유진은 둘을 보자마자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뭐야? 커플 룩이야?”
“네?”
당황한 재희를 두고 이수가 유리창에 비치는 모습을 들여다봤다. 진과 트레이닝 바지, 종류가 달랐으나 위아래로 비슷한 색감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커플 룩, 혹은 시밀러 룩. 유진은 허둥대는 재희를 놀리며 웃었다. 젊은 사내를 희롱하는 노인네 같았다. 이수가 한심하단 표정으로 혀를 찼다.
“이거, 내가 이수한테 사 준 건데……. 이상하네. 서이수는 자기 물건 절대 안 빌려주는데.”
이수는 카페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유진의 말에 극구 부인하는 차재희를 바라봤다.
장난기 가득한 태도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게 더 의심스러워 보인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재희는 정말 심각한 표정으로 오해라고 해명했다. 이수는 그 꼬락서니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은근히 짜증이 났다.
“오빠! 안녕하세요!”
“안녕.”
박지혜를 비롯한 학회원들이 도착하고, 그들은 뒤늦은 점심을 먹으러 갔다.
오른손 중지와 손바닥, 붕대가 사라진 자리를 반창고가 대체했다. 며칠 만에 상처가 나았을 리가 없는데도 그 손으로 재희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수는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
수저를 놓고, 영지에게 뜨거운 물을 떠다 주고, 에어컨 바람이 차갑다는 말에 세희와 자리를 바꿔 주고, 학회원들에게 필요한 일을 손수 나서서 처리한다.
그걸 보며 궁금증이 일었다. 저런 태도는 차재희라는 인간 본연의 성질인지, 아니면 하고 싶은 말을 참아 내듯 하기 싫은 마음을 참고 있는 건지 알고 싶어졌다.
그러다가 문득 일전의 대화가 떠올랐다. 왜 매일 웃고 다니느냐고 묻자 재희는 어머니가 자기 같은 사람은 자주 웃어야 한다고 말해서, 어릴 때부터 습관이 들었다고 했다.
그때 이수는 그의 웃는 얼굴이 예뻐서 그런 거라고 치부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렇게 단순하게 사고할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식사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이수는 생각했다. 어쩔 수 없이 익숙해진 게 아닐까. 재희가 자라는 동안 그에게 찾아왔었을, 모든 걸 참아 내야만 했던 수많은 상황이 그로 하여금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건 아닐까. 그렇게 발산되지 않은 것들이 차재희가 스스로를 아프게 하도록 만든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선배, 맛없어요?”
깨작거리는 이수에게 재희가 물었다. 상념에 잠겨 있던 눈동자가 깨어났다. 이수는 고개를 들어 차재희를 바라봤다.
뺨을 흠뻑 적신 채 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기분 좋게 상기된 얼굴만 남아 있었다. 이수는 어쩐지 묻고 싶어졌다. 지금도 무언가를 참고 있느냐고.
“그냥 그래.”
“쟤 원래 잘 안 먹어. 재희야, 니가 대신 많이 먹어.”
이수의 대답에 유진이 말을 얹었다. 재희는 단정하게 웃고는 다시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자신 몫의 접시를 말끔하게 비우면서도 수시로 이수를 힐끗거렸다.
식사가 끝나고 유진을 비롯한 여자애들은 성수동 카페 투어를 가겠다며 사라졌다. 이수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한강을 향해 걸었다. 계속해서 말이 없는 그가 신경 쓰였는지, 재희가 눈치를 보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선배.”
“왜.”
“기분 안 좋아요?”
“……아니.”
유월의 강바람에 물비린내가 잔뜩 묻어 날아왔다. 이수는 인상을 찡그린 채로 벤치에 걸터앉았다. 당연하다는 듯 옆에 앉는 재희에게로 고개가 돌아갔다. 그는 이수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어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차재희.”
무심한 부름에 재희가 어깨를 움찔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마주 보는 시선이 떨렸다. 이수는 쫄지 말라는 뜻으로 그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어 주고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니가 그랬잖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솔직하게 말하는 게 안 된다고. 내 앞에서만 그게 된다고.”
“……네.”
“왜 그러는지 물어봐도 돼?”
이수는 재희가 제게 상처만 준 자신을 좋아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가 자신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자신이 그에게 무엇을 주었는지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재희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망설이는 눈빛으로 땅바닥을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말해 줄게요.”
재희는 자신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을 참고, 부정적인 것들을 마음속에 꽁꽁 감추어 두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타인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사랑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좋은 모습이라는 건, 성미희의 한마디에서 비롯되었다. 재희는 형제들만큼 사랑받고 싶어서, 모친이 원하는 다정하고 상냥한 어른의 모습을 연기해 왔다. 그렇게 애정을 갈구해 왔다.
가정으로부터 비롯된 결핍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재희는 이수에게 성미희와 차대범이 자신을 어떻게 키웠는지, 자신의 형제들이 얼마나 잘났고 그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차재희라는 인간은 얼마나 못나 보이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이수가 차재우와 차재하의 이야기를 듣고 성미희와 똑같은 생각을 할까 봐, 자신을 참으로 한심하다고 생각할까 봐. 이수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지만 두려움이 불러일으킨 만에 하나, 그 가정이 재희를 입 다물게 했다.
“말 못 하는 거면 됐고.”
“……그게 궁금했어요, 선배?”
조심스러운 물음에 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싶지만 말해 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었다. 이수 또한 차재희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수두룩하게 많았으니까.
벤치를 짚은 손끝에 재희의 손가락이 닿았다. 이수는 손을 빼지 않았다. 재희는 좀 더 대담하게 움직였다. 이수의 손등 위로 손바닥이 덮였다. 피부를 축축이 적시는 온기가 느껴졌다.
“아직도 확신이 안 서요?”
이수가 고개를 돌렸다. 초조한 얼굴로 저를 응시하는 남자를 바라봤다.
“선배, 나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아요? 솔직하게 대답해 봐요.”
“조금.”
무심한 그 대답에 재희는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반창고를 붙인 손으로 제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재희는 이수에게서 자신을 향한 마음을 보았다. 입을 맞출 때, 눈빛 속에 자리하던 욕망과 갈구를 똑똑히 보았다. 그것이 단순한 성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히.
“선배, 나한테 키스하고 싶잖아요.”
“무슨 얘길 하자고.”
냉랭히 대꾸하는 이수를 보며 재희가 그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이수는 손을 빼지 않았다. 봐, 전에는 건들기만 해도 화를 냈으면서. 그러한 태도는 어렴풋한 확신을 더해 주었다. 재희가 그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도 선배를 알고 싶어요.”
“…….”
“나는 선배만 보면, 키스하고 싶어요.”
“정신 차려, 우리 아직 아무 관계도 아니야.”
이것 봐, 서이수. 전에는 우리라는 말도 함부로 쓰지 말라고 했었으면서. 재희는 이수가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은 그 주어가 좋았다. 그러는 동시에 조바심이 났다.
당장 일요일에 그 여자를 만나야 했다. 그러기 전에 재희는 이수에게서 확답을 받고 싶었다. 이런 상태로 그녀를 거절했다가 이수도 끝내 자신을 받아 주지 않는다면, 재희는 비참한 추락을 맛보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자꾸만 조급해졌다.
“나는 선배를 알고 싶고, 선배한테 키스하고 싶고, 선배를 좋아해요.”
“…….”
“선배가 나만 보고, 나에게만 웃어 줬으면 좋겠어.”
언제나 무덤덤한 밝은 갈색 눈동자가 이 순간만큼은 미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재희는 이수를 보며 물었다. 어려운 문제가 아니잖아. 한마디만 해 줘요, 제발.
“선배는요?”
하지만 이수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자아는 언제나 병실 안에 웅크린 채였다. 무채색의 동떨어진 세상. 새하얀 벽에 사면이 가로막혀, 창문 너머로만 밖을 볼 수 있었던 지난날의 서이수.
그곳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던 이들은 이수의 곁에 잠시만 머물다 갔다. 그들이 떠난 후의 허전함은 어린 이수에게 아픔이고 상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음을 닫아 두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차재희는 달랐다. 기다리지 않았음에도,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문을 부수고 들어온 그는 이수의 곁에 머물려 했다. 떠나는 이들에게 익숙해진 이수에게, 떠나지 않는 차재희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존재였다.
이것은 본능적인 거부였다. 어릴 적에 쌓아 둔 상처 때문에 이수는 언제고 떠날지도 모르는 재희를 쉽게 붙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수에게는 확신의 순간이 필요했다. 언젠가 그가 곁을 비우더라도 상처보다 더 큰 것이 남을 것임을 암시하는 순간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이수는 그에게 확답을 주지 못했다.
* * *
토요일, 서일 그룹 창립 기념일 행사가 열렸다. 직원들과 함께하는 행사는 낮에 치러졌고, 저녁에는 서일과 연계된 기업의 수뇌부들이 참석한 파티가 주최되었다.
이수는 처음으로 참석하는 공식 행사였다. 천수인과 서훈은 그를 여러 사람에게 소개하고 싶어 했지만 이수는 당연히 거절했다. 서이준의 축사가 시작되자마자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서일의 핏줄이 분명한데 제대로 소개하질 않으니 뒤에선 이수를 두고 서훈의 사생아, 혹은 천수인의 사생아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서훈과 천수인, 서이준과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은 그가 둘째란 사실을 알고 의구심을 품었다. 사지 멀쩡한 자식을 수십 년 동안 밖으로 내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약점, 혹은 비밀을 캐내기 위해 사람들은 이수의 주위를 맴돌았다.
하지만 무표정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수에게 누구도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다크 네이비 컬러의 슈트는 입을 다문 그를 한층 까다로워 보이게 만들었다.
수많은 사람 중 서이준만이 유일하게 그에게 말을 걸었다. 종종 누군가를 데리고 와서 소개하기도 했는데 이수는 불성실한 태도로 그들을 맞이했다. 이번에 서이준에게 소개받은 사람도 별 도움은 되지 못했다. 스펙은 몰라도 기본적으로 잘난 체를 하는 스타일이라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
뚱하게 흘러나오는 대꾸에 서이준이 결국 친구를 내보냈다. 문을 닫고 커튼을 치더니 이수의 옆자리에 앉았다.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아?”
“그냥.”
사람들 틈에서 부대낄 상태가 아니었다. 엊그제 말없이 가 버린 차재희에게 신경이 쏠려 있었다. 여태 연락도 한 통 없어서 짜증이 나기도 했다. 이수가 담배를 꺼냈다. 서이준은 그에게 불을 붙여 주고, 저 또한 한 대를 물었다.
나란히 앉은 형제는 대화 없이 연기만 뿌려 댔다. 가족들과 있을 때 이수는 말을 거의 안 하는 편이었다. 딱히 할 말도 없었고, 궁금한 것도 없었다. 오늘도 서이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나 약혼식 이야긴 들었어?”
“어.”
“그쪽 가족들은 만나 봤어? 둘째가 사국대 다닌다고 하던데. 경영이랬나.”
“관심 없어.”
무덤덤한 대꾸에 서이준이 픽 웃었다. 너도 참, 부드러운 목소리에 애틋함이 담겼다. 서이준은 이수가 벽을 치고 자신을 대할 때마다 은근한 서운함을 느꼈다. 이수가 한국으로 들어온 이후에는 좀 친해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결코 곁을 내어주는 법이 없었다.
용건이 없으면 단 한 번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고, 서이준이 연락해도 받아 주는 일이 드물었다. 메시지와 전화를 씹는 것도 여러 번, 통화를 해도 늘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동생을 짝사랑하는 느낌에 머쓱할 때도 있었지만 언젠가는 마음을 열겠지 하는 생각으로 서이준은 꾸준히 이수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가 스물네 살의 동생과 대화할 만한 화제를 입에 올렸다.
“넌 관심 있는 사람 없어? 요즘도 게임 하니?”
“……어.”
첫 번째 질문에 멈칫했던 이수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한국 사회는 굉장히 보수적이었다. 재벌 총수 일가의 구성원이 동성애자라고 밝혀진 경우는 없었다. 뒤에서야 남자와 붙어먹든, 여자와 붙어먹든 알 바 아니었으나 앞에서는 죄다 이성애자인 척했다.
만약 자신이 차재희와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어 커밍아웃을 한다면 가족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조용히 담배를 피우던 이수가 서이준에게 물었다.
“형은 이성애자야?”
“나?”
뜬금없는 질문에 서이준이 웃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니. 편식 안 해.”
“…….”
이수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제 형을 올려다봤다. 이수보다 여덟 살이 많은 서른두 살의 서이준은 부친 서훈을 닮아 굉장히 얌전하고 금욕적인 인상을 풍기는 남자였다. 가늘게 다물린 입매와 올곧아 보이는 얼굴. 언제나 깔끔하고 지적인 느낌이었기에 ‘편식 안 해’라는 표현이 낯설게 다가왔다.
웃음기를 지운 서이준은 어떤 사람일까. 어떤 남자를 만났을까. 이수는 잠깐 생각해 보다가 말았다. 형제의 성생활까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결정에 그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궁금할 뿐이었다.
“이수, 넌?”
“일단 이성애자는 확실히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담백한 반응에 다시 서이준을 돌아봤다. 무언가를 가늠하듯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서이준도, 부모님도 자신이 무슨 짓을 벌이든 상관할 수 없었다. 괜한 고민이었다.
십여 분 뒤 이수는 자리를 떴다. 연회장을 나서기 전, 어쩐지 차재희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없었다.
이수는 어쩌면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차재희를 찾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듣기 좋은 목소리를, 다정한 몸짓을, 자신을 향한 곧은 시선을 찾아 주변에 신경을 쏟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차재희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다음 날은 서울 외곽에 있는 대감 그룹의 기와집으로 향했다.
기업형 조폭인 대감 그룹의 금지옥엽 막내딸. 위로 다섯 명의 오빠를 둔 유진은 어화둥둥 예쁨만 받고 자랐다.
대감의 신경주 회장은 현대식 사대주의를 표방하는 가치관을 지녔는데, 말하자면 남들 눈에 개방적이고 세련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난 노인이었다. 그의 다섯, 아니 남다른 둘째를 제외한 네 아들들 또한 별다를 바 없었다.
신경주에게 보고 배운 것이 있었기에 형제들은 그녀의 커밍아웃에 놀랐을지언정 그녀를 핍박하거나 외면하지 않았다. 충격을 숨긴 채 ‘하하, 요즘 세상에 LGTV가 무슨 대수냐’고 어깨를 두드리는 큰 오빠 신정구 앞에서 유진은 LGBTQ라고 정정할 생각 없이 그저 웃었다.
그래도 처음엔 서먹서먹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는 금쪽같은 여동생이 시꺼먼 사내놈을 데려오느니 다른 여자를 애인이라고 데려오는 일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남매들의 사이는 더 돈독해졌다.
정오부터 시작된 가든파티에서 이수는 신씨들에게 지독하게 시달렸다. 유진의 형제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말이 많았다. 겨우겨우 자리를 피해 창고 뒤로 도망쳤더니, 거기엔 유일하게 말수가 적은 신유진의 둘째 오빠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독한 담배 냄새가 났다. 검은색 셔츠에 검은색 정장. 제 아버지의 70번째 생일날에 장례식 가는 사람처럼 입고 왔다며 신씨들이 타박 아닌 타박을 해 댔지만, 신교연은 끄떡하지 않았다.
“-윤희수 씨…….”
이수를 발견한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신교연을 볼 때마다 그 삼백안이 께름칙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런 남자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전화를 하고 있었다. 연인인가. 차재희 때문인지 자꾸 저런 것만 보였다.
이수는 그의 시선을 피해 뒤뜰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신씨들의 수다에 머리가 울렸다. 이마를 짚으며 담배를 피우고 있으니 얼마 가지 않아 신유진이 나타났다.
“이수야아.”
형제들과 술을 들이부은 주제에 유진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컨디션이 좋은 모양이었다. 이수의 옆에 앉아 제 담배를 꺼내 문 그녀가 슬쩍 웃음을 흘렸다.
“어제 재희 봤어?”
아니, 겉만 멀쩡하지 속은 취했나 보다. 창립 기념일 행사가 있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저렇게 묻는다. 이수는 인상을 찡그린 채 고개를 저었다. 바빴어. 간결한 대꾸에 유진이 빙긋 웃었다. 의미심장했다.
“어떻게 하려고 그래?”
“뭘.”
“재희랑 말이야. 만나 보려고?”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
무뚝뚝한 말투는 언제나 똑같았다. 하지만 유진은 재희에 대한 이수의 마음이 생각보다 깊다는 걸 알았다. 늘 무덤덤한 인간이 차재희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유진의 시선에 과장된 감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갓 잡은 생선처럼 팔딱거리는 표정과 말투는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었다.
“좋아해?”
“뭘.”
“모르는 척하지 말고.”
유진이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이수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서이수답지 않게 고민이 많아 보이네?”
그렇게 물어 오는데 속이 얹히는 기분이었다. 차재희와의 관계는… 생각할 게 많았다.
이수는 졸업 후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 실리콘 밸리, 액세스 프로젝트. 몇 년 전부터 선명하게 그려 오던 것들이었다. 꿈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고 인생 계획이라고 하면 알맞은 목표들.
이제 졸업까지 겨우 1년 반이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만약 차재희와 연인 관계가 되고 그때까지 만남이 지속된다면 꽤 큰 문제가 생기는 셈이다. 차재희가 자신을 따라 미국으로 가 줄 것인지, 하는 것들.
솔직히 좋아한다는 마음을 인정하지도 못했는데 거기까지 생각하는 자신이 우스웠지만, 이상하게도 차재희와의 미래를 떠올리면 그런 걱정부터 들었다.
그가 한국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자신을 위해 희생할 것인가, 혹은 차재희가 그걸 희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기꺼이 따라가겠다고 할 것인가 하는 쓸데없는 가정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것 말고도 걱정할 거리가 쏟아졌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도 자꾸만 떠올랐다. 이수로서는 처음으로 맺게 되는 관계였기에, 액세스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것처럼 주의 깊게 살필 수밖에 없었다.
“이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연인이 되고 난 후, 한국에서의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 동성애자로 살아가려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차재희는 이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이성애자인 줄 알았다고 했다. 이수는 자신의 존재가 그에게 어떠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까 걱정이 되었다. 그 때문에 차재희가 언젠가 이 만남을 후회하지 않을까, 먼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타인에게는 무심해도 이수는 자신과 관련된 일에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 왔다. 차재희를 연인으로 받아들이는 건 그를 친구로 두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수의 말에 유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지.”
“……너한테나 쉽지. 나 만나기 전에는 이런 적도 없었다는데.”
이수는 작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차재희한테는 충분히 어려운 길이야.”
이수를 바라보던 유진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어려운 길?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거길래 길이래, 길은. 이 정도면 이미 사랑이었다. 서이수가 차재희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유진이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재희가 너를 위해 얼마나 각오하고 있을지는 차재희 본인만 알고 있을 텐데. 니가 지금 걱정해서 되는 일이 뭐야.”
각오. 이수가 유진의 말을 곱씹었다. 차재희는 나를 위해 얼마나 각오하고 있을까.
문득 이수는 그가 보인 눈물을 떠올렸다. 좋아해요, 그렇게 고백하며 재희는 두 뺨을 흠뻑 적시도록 울었다.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이제 와서야 고민했다.
서러워서, 슬퍼서, 단순히 감정이 북받쳐서 아니면 무서워서.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복잡하다.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다. 그에게 직접 듣는 것이 아니라면 추측은 무의미했다.
며칠째 가슴에 돌덩이라도 얹힌 듯했다. 답을 찾을 때까지 내 곁에 있어. 이수는 그 말이 재희를 얼마나 힘들게 할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은 또 달랐다.
입 밖으로 내진 않아도 안달 난 것이 보였다. 속을 앓고 있는 것이 뻔히 보였다. 답답하고 서러운 듯 저를 바라보는 차재희를 마주할 때마다 이수 또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을까. 확답을 주지 않은 채 그를 곁에 두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수를 알고 싶다고, 이수에게 키스하고 싶다고, 이수를 좋아한다고. 재희는 그렇게 말했다. 이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재희를 알고 싶었고, 재희에게 키스하고 싶었다. 그가 사랑스럽고 애틋했다.
이보다 더 큰 확신이 정말로 필요한 건가. 그런 게 있긴 한가. 이수는 고심하며 담배를 한 대 더 꺼내 물었다. 담배에 불을 붙여 준 유진이 속닥거렸다.
“이제 튀자. 귀찮아.”
“어디로.”
“백화점. 나, 빙수 먹고 싶어.”
신유진은 백화점 최상층에서 파는 팥빙수를 그렇게 좋아했다. 호텔에서 파는 것보다 맛있다던가. 어차피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으므로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돌아간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이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고 싶었다. 잠시 후 담배를 비벼 끈 두 사람은 후원을 돌아 나왔다.
“기사님. 고스트 갖다 주세요.”
유진의 속삭임에 대기하고 있던 전속 기사가 이수의 차를 끌고 돌아왔다. 이수는 그에게 팁을 쥐여 주고 운전대를 잡았다. 차내에 신유진의 술 냄새가 진동했다. 창문을 활짝 열자 바람이 몰아쳤다. 날이 그렇게 덥지 않았다.
유진의 새 여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이수는 백화점으로 차를 몰았다. 발레파킹을 맡기고 내리니 유진이 그에게 팔짱을 껴 왔다.
그녀가 준비한 짙은 그레이 컬러의 슈트는 군더더기 없는 슬림핏으로 딱 맞아떨어졌다. 흰 셔츠에 블랙 내로우 타이. 짧은 바짓단과 검은색 윙 팁 슈즈 사이로 복숭아뼈가 드러났다.
유진은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심플한 에이 라인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이수가 입은 슈트와 비슷한 재질의 차콜 컬러여서 그런지 두 사람은 꼭 연인 같아 보였다.
“이수 오빠, 유지니 파삥수 사 주꼬예요?”
“입 다물어.”
“잉, 오빠 화나쪄요?”
“닥치라고.”
사람들이 흘끔거리니 유진이 과장되게 잔망을 떨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수는 유진을 저리 밀쳐 버리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걸었다.
빙수를 먹으면서도 시답잖은 이야기가 오갔다. 그가 말을 아꼈기에 유진은 더 이상 재희에 대한 화제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유진은 다음 학기에 또 여행을 갈 거라고 떠들어 댔다.
“야, 너 과대잖아. 그래도 돼?”
“응? 아, 정훈이가 나 대신 수고 좀 해 주기로 했어.”
“아니, 과대로서의 책임감 같은 거 없냐?”
“뭐 어쩌겠어. 올해 아니면 언제 또 열릴지 모르는데.”
캐나다인가 어디에 유진이 꼭 가고 싶었던 산맥이 있는데 올 9월에 한 달 동안만 출입 제한이 풀린다는 공지가 올라온 모양이었다. 몇 년 전부터 벼르던 것이라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신유진은 고민도 하지 않고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대체 저럴 거면 나보고 왜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라고 한 거지? 대학 생활 4년 중에 절반은 얼굴도 못 보게 생겼다. 이수는 짜증스럽게 그녀를 쏘아보다가 이내 표정을 풀었다. 그래도, 차재희가 있으니까 신유진이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조잘거리며 빙수를 비운 유진은 사진을 찍자며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옆에 찰싹 붙어 팔짱을 끼며 채근한다.
“이수서! 좀 웃어 봐.”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하라고.”
“장례식 갔다 온 사람 같잖아. 내외하지 말고.”
이수는 유진에게 머리를 기댔다. 인상을 찡그리고 있긴 했지만, 입꼬리가 올라갔으니 웃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 결과물도 나쁘지 않았다.
<오랜만에 내 사랑 유진이랑♥>
유진이 타이핑하는 것을 지켜보던 이수는 지랄 말라며 휴대폰을 빼앗아 문장을 고쳐 썼다.
<오랜만에 신유진이랑.>
무뚝뚝해진 멘트를 보며 신유진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녀가 사진에 적용할 필터를 고르는 동안 이수는 휴대폰을 들고 차재희에게 메시지를 보낼까 말까 한참 고민했다.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뭐든 좋으니 머릿속을 점령한 여러 가지 가정과 생각들에 대해 털어놓고 싶었다. 이수는 재희와 저녁 약속을 잡으려 메신저를 켰다.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차재희의 프로필 사진을 눌렀는데 평소와 달랐다. 웃고 있는 사진 주변으로 팡파레가 터지듯 꽃잎이 날렸다.
[곧 차재희 님의 생일입니다!]
그 문구를 바라보고 있는데 유진이 옆에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 맞다. 다음 주에 재희 생일이라고 했는데. 와, 잊을 뻔했다. 선물 사야 되는데.”
“……니가 얘 선물까지 챙겨?”
“응? 아아. 재희가 내 생일 때 향수 사 줬었단 말이야.”
이수는 말없이 입매를 굳혔다. 차재희라는 세 글자 옆에 다른 이름이 붙을 때마다 여간 짜증이 나는 것이 아니었다. 신유진도 예외는 아니었다. 뭐 그렇게 친한 사이라고 생일까지 챙기지. 괜히 부아가 치밀어 냉기를 풍기고 있으니 유진이 이수를 잡아끌었다.
“선물 사러 가자! 너, 설마 모르는 척할 건 아니지?”
“……가.”
가족들에게도 뭔가를 선물한 적이 없었지만, 어쩐지 차재희의 생일은 챙겨야만 할 것 같았다. 이상한 승부욕이 발동되었다. 누구에게서도 받아 본 적 없는 선물을 줘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하지만… 뭘 사 줘야 하지? 시계? 예쁜 건 당장 구하기 힘들었다. 차? 이것 또한 마찬가지. 그 두 가지를 제외하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수가 유일하게 생일을 챙기는 유진은 매년 원하는 게 확실했다. 갖고 싶은 걸 말하라고 하면 제품 번호까지 적어 줘서 따로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랬기에 먼저 나서서 뭔가를 주려고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단 유진과 컨템포러리 매장으로 향했다. 그녀가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옷을 둘러봤다.
차재희는 단정하고 사랑스럽게 생겼지만, 이마를 드러내면 시원하게 웃는 소년 같은 느낌이 있었다. 이것저것 옷을 들고 재희에게 입혀 보는 상상을 하는데, 어쩐지 안 어울리는 옷이 없었다. 이걸 다 살 수도 없고……. 뭐가 제일 나을까. 고심하고 있으니 유진이 흰 티셔츠를 하나 들고 왔다. 가슴팍에 귀여운 강아지가 수놓아져 있었다.
“이거 어때? 재희랑 너랑 체격 비슷하지?”
“한 사이즈 크면 될걸.”
둘 다 옷을 사 주는 건 좀 그런가. 이수가 다른 걸 떠올리는 동안 유진은 티셔츠와 카디건 같은 걸 여러 벌 들고 와 그에게 들이댔다. 마네킹처럼 선 채 거울만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익숙한 향기가 맡아졌다.
차재희 냄새였다. 뭐지. 탐색하듯 고개를 돌리던 이수가 재희를 발견했다. 매장에 막 들어선 듯, 입구 근처에 선 차재희는 그와 마찬가지로 정장 차림이었다.
말끔한 딥 블루 컬러의 슈트, 재킷보다 한 톤 밝은 슬림 타이는 검은색 핀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깔끔하게 쓸어 넘긴 머리칼 밑으로 훤칠한 이마가 드러났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가슴이 빠듯하게 죄어 왔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정장을 입은 재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예쁘고, 또 멋졌다. 3개월 전의 자신에게 차재희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날이 올 거라고 말해 주었다면, 아마 그 말을 한 사람은 자신에게 뺨을 몇 대 얻어맞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차재희에게 설레고 있다는 것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수는 며칠 만에 보는 재희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하지만 늘 곧게 뻗어 있던 눈썹은 찡그려져 있었고, 새까만 눈동자는 속상함과 섭섭함에 물들어 있었다. 지그시 깨문 입술이 어쩐지 화를 참고 있는 듯도 보였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의미를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뭐야. 재희네?”
재희 지금 질투 나나 봐, 유진이 그렇게 속삭이기 전까지 몰랐다.
질투? 유진이 옆에서 옷을 들고 뭐라 떠들어 댔지만 들리지 않았다. 차재희가 신유진한테 질투를 한다고? 믿기지 않는 그 말을 증명하듯, 유진이 자신의 어깨와 팔 등을 매만질 때마다 재희의 단정한 낯은 미세하게 일그러져 갔다.
이수는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자신을 열망하는 남자의 얼굴을 머릿속에 새겼다. 생소하다고 느꼈지만, 언젠가 저런 표정을 본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기억을 되새기던 이수의 무표정은 곧 깨져 버렸다.
“재희 씨, 이거 어떤 것 같아요?”
어디선가 나타난 여자가 재희에게 무언가를 들이밀었다. 이수에게서 눈을 뗀 재희가 그녀를 내려다봤다. 고개가 자연스레 기울어졌다.
동글동글한 눈에 작은 코, 앙증맞은 입술, 두 뺨이 발그레했다.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앳되어 보였다.
서로를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사랑스러운 커플이었다. 그들을 보며 이수는 처음 겪는 괴로움을 느꼈다. 뭔데, 이거.
심장이 우그러졌다. 빈자리에 노여움이 들끓었다. 알 수 없는 서운함과 분노가 주체 되지 않았다. 웃음 띤 얼굴로 차재희와 대화하는 여자를 보는 순간, 그의 팔을 잡아끄는 여자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을 부숴 버리고 싶은 파괴적인 충동이 치솟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저열한… 감정이었다.
심장이 섬뜩하게 발작했다. 이수는 빠른 걸음으로 매장을 벗어났다. 라운지의 개인 화장실로 들어간 그가 문을 걸어 잠갔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왜 이러지. 전신에 불길이 이는 것 같았다. 폭발하기 전의 활화산처럼 무시무시한 감정이 복받쳤다.
차재희가 그녀에게 웃어 주는 것을 보았을 때, 그 여자를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씨발…….”
미친 거 아닌가. 이수가 수전을 돌려 찬물을 틀었다. 얼굴이 얼얼해질 때까지 물을 끼얹었다. 그러나 진정이 되질 않았다. 알 수 없는 감정은 점점 몸집을 부풀렸다. 숨을 쉬기 힘들 만큼 가슴속에 꽉 들어찼다. 그 사이로 차재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가 나만 보고, 나에게만 웃어 줬으면 좋겠어.’
마주 보며 웃는 두 사람을 떠올리는 순간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자신을 맞이했다. 정신이 아득했다.
‘선배는요?’
이수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거울 속에서, 그는 차재희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선 자신을 발견했다.
물에 젖은 손이 거울을 더듬는다. 섭섭함, 분노, 속상함, 서러움 그리고 질척거리는 애정과 소유욕. 모든 것이 뒤섞인 눈빛이 절절 끓고 있었다.
세상이 쿵 내려앉았다. 그제야 이수는 완전히 자각했다. 차재희를 좋아한다. 아니,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자신은 지금.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를 독점하고 싶었다.
이수는 드디어 바다를 눈에 담았다.
차재희와 나란히 선 채 바라보는 세상은 그가 알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너울 치는 파도에… 짠 내 가득한 바닷바람에 온몸이 젖어 들 때마다 이수는 성장통의 기쁨과 아픔을 동시에 느꼈다.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가슴께를 매만지다가 돌연 문을 박차고 나왔다. 이수는 매장으로 돌아가는 대신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실낱같은 이성이나마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지금 그를 본다면 자신을 제어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린 순간 이미 집에 도착해 있었다. 주차장에서 차를 어떻게 끌고 온 건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오다가 누군가를 치어 죽였다고 해도 모를 정도로 넋이 나간 상태였다.
텅 빈 집 안에 이수 혼자뿐이었다. 그곳에서 차재희를 생각했다. 인식하고 나자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천천히 스며들듯 자신의 일상에 녹아든 차재희. 그에게 마음을 주기 시작한 지 꽤 오래되었다. 단번에 그렇게 된 건 아니다. 이수 본인조차도 알지 못할 만큼, 정말로 조금씩 조금씩. 그는 그 사랑스러운 남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떼어 주었다.
이수는 이제야 비로소, 무채색이라고 생각했던 제 세상이 여러 가지 감상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난 몇 달간 자신이 쏟아 낸 감정의 스펙트럼은 놀라울 정도로 다채로웠다. 이걸 이제야 알았다는 게 어이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찬란했다.
그 모든 순간이 차재희였다. 그가 남긴 기억의 얼룩이 이수의 삶을 덧칠했다. 이수의 세계는 그렇게 확장되었다.
이수가 심장 언저리를 매만졌다. 언젠가부터 시작된 두근거림이 불쾌하지 않았다. 그가 만들어 낸 울림이 오히려 기꺼웠다.
“차재희…….”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자 당장 그를 보고 싶어졌다. 두 눈 가득 자신만을 담아내는 남자가 그리웠다. 이수의 휴대폰에는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쌓여 있었다. 모두 재희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에게 통화를 걸려고 할 때였다. 인터폰이 울렸다.
차재희일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이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으로 향했다. 선명한 화면 속에 아까 보았던 모습 그대로의 재희가 서 있었다. 굳은 얼굴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를 보다가, 이수는 승인 버튼을 눌렀다. 공용 엘리베이터는 세대에서 버튼을 눌러 주어야지만 펜트하우스 층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수는 집에서 기다리지 못하고 문을 열고 나갔다. 오늘따라 엘리베이터가 느렸다. 초조함을 참지 못해 담배를 하나 빼 물었다. 불을 붙이며 43에 가까워지는 숫자를 바라봤다.
39, 40, 41.
연기를 뿜어내고 메마른 입술을 축였다.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재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걸음을 서두르던 그가 눈을 크게 뜬 채 이수를 보았다.
“선배.”
익숙한 향기. 다정한 목소리에 심장이 터져 나갈 듯 뛰어 댔다.
차재희를 좋아한다.
끓어오르는 열망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