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5)

좋아하는 선배 (3)

학회 모임이 있었던 날, 뻔히 보이는 답을 찾지 못하는 이수를 두고 재희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와 계속 함께 있다간 급한 마음에 실수를 할 것 같아서였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렇게 물은 것 자체가 실수였을지도 몰랐다.

보채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까, 고민해 봤지만 결국은 메시지조차도 보내지 못했다.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또 그런 질문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다음 날. 언제나처럼 새벽 6시에 집을 나섰다.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피트니스 센터에서 세 시간 동안 몸을 혹사시키고 돌아왔는데, 휴대폰에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남아 있었다. 혹시 선배인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잠금을 풀었으나 아니었다. 모친 성미희였다.

등골이 서늘했다. 성미희는 전화를 여러 번 하는 법이 없었다. 딱 한 번 남겨 두고 확인하길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다섯 번이라니……. 재희는 초조함을 감추며 모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 차재희. 집으로 오렴.

성미희는 딱 그 한마디만 남겨 두고 통화를 끊었다. 목소리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성미희를 화나게 할 만큼 큰 잘못을 했던가. 시험을 망치긴 했으나 성적이 나오지도 않았고, 그걸 확인하는 사람도 아니었으니 그것 때문은 아닐 것이다.

……혹시 선배와의 일을 알았나? 그렇게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혀 왔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성미희가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관심을 쏟을 리가……. 아닌가.

자꾸 결혼하기 싫다고 그래서, 뭔가 이상해서 감시라도 한 거라면……. 긴장감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던 재희는 빠르게 준비한 후 청담동에 위치한 본가로 향했다.

입이 바싹바싹 말라 왔다. 근처에 차를 세워 두고 한참이나 심호흡을 한 후에 벨을 눌렀다.

“재희예요.”

스피커 너머로 당장이라도 성미희가 고함을 내지를 것 같아서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문을 열어 준 것은 집안일을 총괄하는 한주령 여사였다.

직각으로 재단된 돌계단을 딛고 올라서니 정원이 나왔다. 한주령이 정성 들여 가꾸는 정원은 갖가지 꽃이 만개한 화원이나 다름없었다. 그 깊숙한 곳, 나무 그늘에 놓인 테이블에 성미희와 중년 여인이 앉아 있었다.

피트니스에서 만나서 온 건지 둘 다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다가오는 재희를 보고 성미희는 가식적으로 웃어 보였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씨엔보다 좀 더 규모가 큰 청서 유업의 사모인 김영숙이었다.

“안녕하세요.”

“왔니?”

“어머, 재희야! 오랜만이다. 너는 어쩜 이렇게 볼 때마다 잘생겨지니.”

“감사합니다. 잘 지내셨어요?”

김영숙이 고개를 돌린 순간 성미희에게서 쏘아지는 눈빛에 질식할 것 같았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반갑게 인사한 김영숙이 재희에게 자리를 권했다. 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두 분이 대화하시는 데 방해될 것 같아서요. 다음에 석연이랑 같이 한번 봬요.”

흔한 겉치레 인사였지만 차재희가 웃으며 말하면 모든 말이 진심 같아 보였다. 김영숙도 그렇게 느꼈는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그래. 석연이가 좋아하겠다. 참, 재희 요즘 학교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시끄러웠다며? 그것 때문에 이렇게 살이 빠졌나? 사람들이 뭣도 모르고 하는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 응?”

“아. 네……. 감사합니다.”

심장이 쿵 떨어져 내렸다. 무슨 일을 말하는 걸까. 설마. 마른침을 삼킨 재희가 힐끗 성미희를 바라봤다. 성미희는 아주 냉랭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김영숙에게서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게 분명했다.

“석연이가 종종 네 얘기를 해. 지는 수업도 만날 빼먹으면서 재희 형이 이러쿵저러쿵, 너한테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몰라. 요즘에 석연이랑 종종 보지?”

“아니요. 2학년 들어서는 학회도 하고 학생회 일 때문에 바빠서 연락 못 한 지 좀 되었어요.”

김영숙의 아들인 정석연은 사국대 국제 통상 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학기 초에는 몇 번 만났지만 최근엔 연락을 거의 하지 않았다. 재희는 사교적인 김영숙의 대화에 몇 번 맞장구를 쳐 주다가 자리를 떴다.

2층으로 올라가려는 재희를 한주령이 붙잡았다. 식당으로 끌려가 오랜만에 한 여사가 차려 주는 식사를 맛보았지만 이미 입맛이 떨어진 상태였다. 몇 숟갈 넘기지 못하고 결국 수저를 내려놓았다.

거의 반년 만에 돌아온 자신의 방에서 재희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집을 뛰쳐나가지도 못한 채로 시간만 보냈다. 교수형을 기다리는 사형수가 된 느낌이었다.

창밖으로 정원을 내다보고 있으니 한 시간쯤 후에 김영숙이 집을 떠나갔다. 잠시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성미희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을 집어 던졌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어쩐지 그 분노가 자신을 향하는 것만 같았다. 재희는 창문에서 멀리 떨어져 성미희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방에 들어선 그녀는 다짜고짜 재희의 뺨을 후려쳤다.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은 쉬웠다. 앞선 두 번의 폭행에서 후련함을 느낀 성미희는 이제 아들을 때리는 일에 망설임이 없었다.

“너, 제정신이니?”

“……죄송해요.”

정확히 어떤 것이 성미희의 심기를 거슬렀는지는 몰랐지만 재희는 습관적으로 먼저 사과를 했다. 그러면서 제발 서이수에 대한 일만은 아니길 바랐다. 그에게까지 불똥이 튀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재희가 고분고분하게 굴면 성미희는 화를 가라앉히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죄송? 이게 죄송하다고 될 일이야?”

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었기에 이러는 걸까.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바랐다. 그러나 이어진 말이 재희의 기대를 무너뜨렸다.

“학교에서 대체 뭘 하고 다니기에 남자랑 붙어먹는다는 소문이 나돌아!”

재희의 낯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많고 많은 것 중에 하필이면…….

재희가 습관적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직 손톱이 자라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꽉 쥐어진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고개를 푹 숙인 그에게 성미희가 분노를 쏟아 냈다.

“선견에서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러니? 게이? 내 아들이 동성애자라고? 어디서 그딴 더러운 소리를 듣게 해!”

“…….”

“차재희. 대답 안 해? 할 말 없어? 너, 지금 화났다고 시위하는 거니? 어디서 배워 먹은 버릇이야, 그게!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어?”

아니, 성미희는 본심을 드러내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성미희가 가르친 것은 순응하고, 포기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차재희라는 인간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인간인지도 가르쳐 주었고.

재희는 땅바닥만 바라보며 대꾸하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이수에 대해서까지는, 그에게 자신이 진심이라는 것까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정석연이 올타에서 한동안 시끄러웠던 이야기를 김영숙에게 전했고, 김영숙은 그걸 듣고 떠들어 댄 모양이다.

안 좋은 소리에 체면을 구겨서 화가 났을 뿐, 성미희는 차재희 본인의 성 정체성에 관해서 만큼은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그게 마냥 고마울 일도 아니라는 것에… 속이 쓰렸다.

재희가 침묵을 지키는 것을 반성으로 받아들였는지, 성미희가 누그러진 한숨을 내뱉었다.

“재희야.”

“……네.”

“뭐가 그렇게 어렵니. 응? 좋아하는 여자라도 있어? 어차피 정략결혼이야. 백년가약, 그런 거 아니고 전략적 제휴 같은 거라고. 여자 따로 만나고, 살림 따로 차려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 없어. 모르겠니?”

충격이었다. 차대범과 성미희 사이에 애정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성미희가 직접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그들 또한 뒤로 숨겨 둔 애인이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재희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낯으로 성미희를 바라본다. 이쯤 되니 어느 쪽이 이상한 건지 정말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바는 확고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었다. 이런 상황에 처할 때마다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서이수뿐이었다. 재희는 자신의 탈출구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는, 그런 거 싫어요. 결혼만큼은 제가 정말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과 하고 싶어요.”

단호한 말에 성미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성미희는 결혼에 대한 환상이 없었다. 남들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결혼마저도 거래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사랑? 그런 건 같이 살다 보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성미희도 한때는 차대범을 좋아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냉랭한 목소리가 비수처럼 꽂힌다.

“지능이 떨어지는 줄은 알았지만…….”

재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까지 멍청할 줄은 몰랐구나, 차재희.”

강하게 움켜쥔 주먹이 풀릴 줄을 몰랐다. 재희는 먹먹한 통증을 씹어 삼키며 이수를 떠올렸다. 괜찮아. 선배가 있으니까. 선배만 있으면 돼. 그러면 아무 문제 없어. 그러면…….

“사랑? 허울 좋은 소리지.”

그것만큼 무의미한 것도 없어. 성미희는 서늘한 목소리로 가르치듯 이야기했다. 전혀 동의하지 못했지만, 재희는 성미희의 화를 돋우지 않기 위해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이수를 끌어안고 싶었다. 그러면 좀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그러나 성미희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그가 도망이라도 갈까 걱정되었는지, 애먼 사람을 들먹였다.

“토요일에 서일 창립 기념일 행사. 잊지 않았겠지? 일요일도 마찬가지고. 허튼짓하지 말고 그때까지 집에 붙어 있으렴. 한 여사 쫓겨나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객기를 부린다면 10년 동안 가족처럼 지내 온 한주령을 내쫓겠다는 말이었다. 인정머리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성미희가 자신의 모친이라는 사실에 재희는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또한 두려웠다. 성미희에게 저도 모르게 배운 것들이 있을까 봐서.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부모의 결점을 닮지 않았길 바랄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어찌 되었든 한주령 여사는 재희가 좋아해 마지않는 여인이었기에, 그는 이틀 내내 방 안에 처박혀 있었다.

이수에게 전화를 해 볼까. 메시지라도 보내 볼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연락을 하게 되면 그리움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갈 것만 같아서, 재희는 일단 욕심을 억눌렀다. 선배가 먼저 연락할 수도 있으니까……. 그때 받아야지.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재희는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몇 번이고 노려보기만 했다.

* * *

서일 그룹의 창립 기념일 행사는 호화로웠다. 사천 호텔의 가장 화려한 대연회장에서 치러졌고, 각계각층의 인사가 모였다. 차대범과 성미희가 차재하의 정혼에 목을 매는 이유를 강제적으로 납득하게 되는 날이었다.

이런 곳에 참석하는 것은 원래 차재우의 일이었다. 그러나 국제 특허권 사용 문제로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차재우는 바쁜 시간을 쪼개 또다시 1박 3일로 한국을 찾을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서일의 사위가 될 차재하가 오는 것이 맞았겠으나, 차재하 또한 대학에서 동기들과 진행 중인 프로젝트로 바쁘다는─재희는 그 거짓말을 믿지 않았지만─모양이었다.

차재희를 데리고 오며, 성미희는 당부 아닌 당부를 했다. 수준 떨어트리지 말아라. 고분고분 굴어라. 하던 대로만 해라. 선견과 혼담이 오가고 있으면서도 성미희는 더 나은 곳에서 차재희를 눈독 들이길 바라고 있는 느낌이었다.

F/A, 혹은 옥션 경매에 내놓은 물건이 된 느낌이 편치만은 않았으나 재희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죽기보다 싫었지만 차분히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입을 다물고 인형처럼 인사를 나누던 연회장에서, 재희는 뜻밖의 진실을 맞닥뜨렸다.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차재희라고 합니다.”

재희가 서훈과 천수인 부부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우아한 상앗빛 드레스를 입은 천수인이 고개를 까딱였다.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차재희는 누구에게든 호감을 끌 수 있는 단정하고 잘생긴 얼굴을 갖고 있었다. 천수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이준, 서이수와 또 다른 느낌의 재희를 보며 천수인이 웃었다.

“그래, 재희 군. 반가워요. 내가 누군진 알죠? 난 천수인. 이쪽은 우리 남편, 서훈 회장님.”

“반가워요. 재하 군이랑은 느낌이 또 다르네.”

그렇게 말한 서훈은 미소를 지어 보이곤 차대범과 함께 사라졌다. 잘해라. 입 밖으로 내진 않아도 얼음장 같은 차대범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재희가 떠나가는 이들에게 묵례했다. 천수인은 옆에 선 서이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쪽은… 본 적 있죠? 서이나, 아주버님 되실 분한테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오빠.”

살구색 드레스를 입은 서이나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재희가 웃으며 인사하자 서이나가 생긋 마주 웃었다. 치켜 올라간 눈매에 사나운 인상. 서이나와는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누군가의 여름 별장 파티에 초대받은 차재하를 데리러 갔을 때 그의 친구들 무리에서 보았었다.

서이나의 오빠라는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마뜩잖은 표정을 짓고 있던 천수인은 그녀를 뒤로 불러내 귓가에 무슨 말을 속삭였다. 서이나는 입술을 비죽 내밀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테라스 방향으로 사라졌다. 자리로 돌아온 천수인이 미안해요, 하고 웃더니 재희에게 샴페인 잔을 쥐여 주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사국대 경영학과 다닌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네, 맞습니다. 얼마 전에 2학년 1학기 끝마쳤습니다.”

“그럼 혹시……. 서이수라고 알아요?”

“……네?”

이곳에서 들을 거라 생각지 못했던 이름이었다. 재희가 눈을 깜빡였다. 순간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서이수도… 서씨였다.

입을 달싹이던 재희가 아연한 기색으로 천수인을 바라봤다. 호박색에 가까운 밝은 빛의 눈동자. 연한 갈색 머리칼. 창백하리만치 흰 피부.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 얇은 속쌍꺼풀.

재희가 사랑하는 남자와 닮은 부분이 많았다.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보며 천수인이 난색을 표했다.

“이수랑 사이가 별로 안 좋아요? 그 애가 성격이 좀 까칠하긴 해. 그렇죠?”

“그게, 서이수라는 선배가…….”

우리가 말하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 맞느냐고 물으려 할 때였다. 서이준과 서이나가 사람들을 가르고 나타났다.

“부회장님.”

군더더기 없는 클래식한 정장 차림의 서이준은 딱딱하고 경직된 분위기를 풍겼다. 정신을 차린 재희는 고개 숙여 인사하며 그를 살폈다.

금욕적인 인상. 서이수와는 닮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안도감이 일었다. 서씨는 많다. 서일은 한국 기업이고, 서이수는 미국인이다. 닮은 사람도 많다. 같은 이름도 많다. 그러니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안도는 금방 깨어졌다.

“왜 둘뿐이야?”

“서이수는 안 온대요.”

“……서이나. 잠깐 이리 와 보렴. 재희 군, 미안해요. 우리 둘째랑 같은 경영과라 인사나 하려고 했는데, 잠깐 서 대표랑 이야기 좀 나누고 있어요.”

천수인의 말에 심장이 바닥으로 쿵 내리 처박히는 느낌이었다. 경영과에 서이수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그런데 둘째라니. 서이수가… 서일의 자식이라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사국… 이수가…….”

서이준이 재희에게 말을 붙였다. 그러나 재희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차재하와 서이나가 결혼하면 이수와는 사돈이 된다. 피가 섞이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가족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재벌들의 세계는 더 했다. 전략적 제휴 관계일지라도 자식들의 결혼은 그 가족들에게도 또한 의미가 컸다.

이래도 되는 건가? 서이수는 이걸 알고 있을까? 내가 씨엔 인더스트리의 차남이라는 것을, 그의 여동생과 결혼할 남자의 형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재희가 입술을 짓씹었다. 핏기가 가신 얼굴이 창백한 빛으로 물들었다.

재희에게 이수의 학교생활을 물으려던 서이준은 이상을 감지했다. 딱, 눈앞에서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에 재희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괜찮아요?”

“아……. 죄송, 죄송합니다.”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괜, 괜찮아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꾸하는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렸다. 서이준이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받아 들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재희는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이 사람은, 그럼 선배의 친형……. 몰랐던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도 벅찼다. 눈앞이 핑핑 돌았다. 그러자 서이준은 다시 손수건을 집어 재희의 이마에 배어 난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가서 좀 쉬죠. 이쪽으로 와요.”

서이준은 재희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어깨를 밀고 걸었다. 걸음을 옮기긴 했으나 어디로 걷고 있는지도 몰랐다. 마리오네트처럼 서이준이 안내하는 곳으로 간 재희는 곧 미약한 온기가 남은 안락의자에 푹 파묻혔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서울 시내가 익숙지 않았다.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낯설어 보였다.

달칵, 라이터가 돌아가는 소리에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여름 바람에 느릿하게 말라 가는 식은땀에 오한이 들었다.

실수였다. 이런 추태를 보여선 안 됐는데. 여기까지 온 기억이 희미했다. 어머니가 봤을까. 아버지가 보는 것보다는 어머니가 나을 텐데. 책잡힐 짓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순간 너무나도 정신이 없었다. 재희가 손을 쥐었다 펴며 고개를 돌렸다. 담배 연기가 흩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옆자리에 앉은 서이준을 보는 순간 다시금 현실이 깨어졌다.

사돈이 될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서이수가 서일 그룹 사람이라는 게 제일 큰 문제였다.

재희는 만약 가족들을 버리게 된다면, 그가 허락만 해 준다면 이수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졸업까지만 버틴 후에 이수의 재력과 별개로 24시간 일을 해서라도 그를 먹여 살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수가 서일 그룹 사람이라면, 그게 가능할까? 아니, 그 또한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서일이니까, 어쩌면 이수는 자신보다 더 큰 희생을 요구당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차대범과 성미희가 걸어 놓은 의무라는 이름의 올가미보다 더 날카로운 무언가가 이수를 압박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나 때문에, 선배도 나처럼 가족들과 등을 돌려야 한다면? 그건… 그걸, 나는 용납할 수 있나?

재희는 언제나 상대방의 괴로움을 대신 품어 주려 하는 편이었다. 하물며 그것이 서이수라면……. 선배가 모든 것을 포기할 정도로 내가 가치 있는 인간일까. 재희는 내면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어 갔다.

선배가 나 때문에 가족들에게 외면받고 핍박을 당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 나는 그럴 만한 값어치가 없는 사람이니까. 선배가 한 번 괴로워하느니, 내가 열 번 참고 아픈 것이 나으니까. 그러니까…….

아니, 섣부른 생각이다. 애초에 서이수는 자신과 깊은 관계를 맺을 마음이 없을 수도 있었다. 뼈아프지만 재희가 보기엔 그랬다. 선배는요, 그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것처럼 아팠다.

“아…….”

어쩌면 내가 누군지 알고, 그냥 가볍게 만나려는 걸지도 모르잖아. 선배는 나만큼 절박하지 않으니까. 굳이 내가 아니어도 괜찮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런 생각 해 봤자…….

마른 뺨을 타고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재희 군, 많이 아파요?”

깜짝 놀란 서이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호출하고는 재희를 달랬다. 조금만 참으라며 다독이는 손이 차가웠다. 그게 이수의 손이라면 좋으련만.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재희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끝없이 눈물만 닦았다. 그의 주말은 그렇게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이준의 비서실장에게 부축을 받아 나가는 동안 성미희와 눈이 마주쳤다. 성미희는 그것도 참지 못하냐는 듯 한심하단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집으로 돌아가란 뜻이었다. 목구멍이 들러붙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연회장을 떠났다.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는 것을 극구 거절하고 청담동 본가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기절하듯 잠들었다. 제 살을 깎아 먹는 자괴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새벽 일찍 재희를 깨운 것은 성미희였다. 그녀는 차대범이 무척 화가 났다는 것을 강조하며 선견 막내딸과의 만남을 실수 없이 마무리하라고 했다.

집에서 나온 재희는 성미희의 지시에 따라 샵으로 이동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듬었다. 아무래도 어제 선견보다 높은 입찰자는 없었던 것 같다고 속으로 자조했다. 탈의실에 체중계가 있어 올라가 보니 몸무게가 5kg이나 줄어 있었다. 그걸 알고 나서야 거울 속의 자신이 낯설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오후 1시. 한주연이라는 이름의 여자를 만났다. 재희보다 다섯 살이 많은, 스물여섯 살의 한주연은 아담한 키에 동글동글한 눈매가 인상적인 귀여운 외형의 소유자였다. 엄청난 베이비 페이스라 재희와 나란히 서니 나이 차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녀는 대화를 주도할 줄 알았고, 유쾌한 성격에 모난 곳 없이 둥근 사람이었다. 함께하는 시간이 편안해질수록 재희는 곧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속이 울렁거렸다. 그런데 두 시간이 넘는 식사를 끝마치고 평창동의 티 룸으로 이동했을 때, 한주연은 뜻밖의 이야길 꺼냈다.

“사실, 재희 씨한테 혼담 넣자고 푸시한 게 나였어요.”

“……네?”

한주연과는 만난 적이 없었다. 모르는 사람을 좋아하기라도 했단 말일까. 당황스러웠다. 눈을 깜빡이는 재희를 보며 한주연은 난처한 듯 웃었다. 말을 꺼내기 어려운 듯, 몇 번이나 차를 입에 머금고 말문을 뗐다.

“사실 나, 만나는 사람 있어요.”

“…….”

안도와 의문이 동시에 치솟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재희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 위해 한주연은 혼담을 넣게 된 계기를 말해 주었다.

“정략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를 거역할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자라 왔고,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그런데 이왕이면… 마음 없는 결혼을 해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나를 편하게 해 줄 사람, 내가 편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과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건넨 선택지가 하나같이 어찌나 엉망이던지.”

거기까지 말한 한주연은 살포시 웃었다. 재희의 당혹스러움을 이해한다는 듯, 그래도 들어 달라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로 말을 이어 나갔다.

“어쨌든 그중에서 가장 나아 보이는 사람이 재희 씨였고,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조사를 좀 했어요. 미안해요.”

“아…….”

전혀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정략결혼을 대하는 한주연의 태도는 차재희 본인보다 성숙했다는 것이다. 그저 싫다고 거부하는 대신 한주연은 타협책을 찾았다. 재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어쨌든 재희 씨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이런 말을 꺼내기가 더 미안하지만……. 나는 재희 씨랑 연인이 될 생각은 없어요.”

“……그럼요?”

“파트너라고 할까요? 서로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고, 일상을 공유하지 않고, 다만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말하자면 쇼윈도 부부?”

저걸 현명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지나치게 현실적이라고 해야 할까.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고 정략결혼은 해야 하고. 가족과 연인, 둘 다 지키기 위해 쇼윈도 부부를 자처하는 여자를 보며 재희는 씁쓸한 감상을 느꼈다.

“혹시 기분 나빴나요? 그렇다면 사과할게요.”

“아뇨, 딱히……. 그렇지는 않아요.”

한주연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으리라. 재희는 그녀의 결정을 존중해 주고 싶었다. 거절과 수락을 떠나서.

“상황이 좀 우습죠? 스물한 살짜리 데려다 놓고 한다는 말이 쇼윈도 부부 타령이라니. 무례했다면 화를 내도 괜찮아요. 그런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시도라도 해 보고 싶었어요. 난처하게 만들었다면 미안해요.”

어색하게 웃는 뺨이 조금 달아올라 있었다. 한주연이 재희의 눈치를 보며 차를 마셨다.

재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그것 또한 하나의 해답이 될 수도 있었다. ……아니, 아니다. 아무리 한주연과 합의를 했다고 해도 사회적 시선으로 보면 혼인 신고서에 도장을 찍는 순간부터 한주연과 그 남자, 자신과 서이수의 관계는 불륜일 뿐이었다.

서이수를 내연남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는 그러한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아니, 애초에 서이수가 자신을 위해 불륜남이 되어 줄 생각이 있을 리가 없었다. 지나친 바람이었다. 멍청한 생각이었다.

재희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걸 거절의 뜻으로 알아들었는지 한주연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급하게 결정할 필요 없어요. 그냥, 일주일만……. 생각해 줄 수 있을까요?”

“저는…….”

“재희 씨. 나 정말 회장님하고 사모님한테도 잘할 자신 있고, 재희 씨한테도 친누나처럼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진지하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결혼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 아버지들은 또 다른 사람 찾아올 거 알잖아요. 그러니까… 한번 고려해 봐요.”

재희는 입술을 씹었다. 부도덕한 관계였다. 재희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으로는 결코 응할 수 없는 거래였다. 입이 바싹 말라 왔다.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일단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간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주연을 보는 순간 부정의 말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얼마나 절실한지 알 것 같았기에 결국 재희는 생각해 보겠다는 말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는지 한주연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잘 생각해 보고, 거절해도 좋아요. 강요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당해 보니까 그거 정말 기분 별로더라구.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해야 되는 거. 어쨌든 내가 무리한 요구한 거니까, 혹시 재희 씨가 안 되겠다 싶으면 이번 혼담은 내 쪽에서 무르는 걸로 할게요. 그게 보기 좋잖아요. 나야 뭐, 변덕 하루 이틀 부리는 것도 아니니까. 아버지한테 좀 혼나고 말지.”

재희의 부담감을 지워 주려는 듯 한주연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맑고 따스한 웃음이라 재희도 따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티폿을 말끔히 비워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희가 한주연을 데려다주려고 했으나 잠시 후, 두 사람이 정작 도착한 곳은 백화점이었다.

“미안해요. 뒷조사하다가 본 건데, 그걸 또 입에 올리는 게 좀 웃기죠? 나 너무 모양 빠진다.”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재희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던 한주연은 선견 물산에서 수입하는 의류 매장으로 재희를 데려갔다. 생일 선물을 사 주겠다고 하는데 미안해서 그러는 것이 틀림없었다. 몇 번이나 사양했지만 정말 괜찮으니 받아 달라는 말에 재희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이수와 신유진을 보았다.

그녀가 옷을 들고 귀찮게 구는데도 서이수는 별 반응 없이 서 있었다. 나한텐 그렇게 짜증을 내면서……. 울컥 서러움이 솟았다. 메시지도 한 통 안 보내더니 유진과 만나고 있다는 사실에 서운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아는데, 신유진이 서이수를 이성으로 보지 않고 서이수 또한 그러지 않으리라는 걸 아는데도……. 재희는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난 남자 만날 생각 없어.’

이수가 했던 말은 잊을 만하면 부메랑처럼 돌아와 재희의 마음속에 생채기를 냈다. 자신이 없었다면 서이수가 누굴 만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함께했던 수많은 일들. 짧은 키스, 깊은 입맞춤, 살을 맞대고 교감하는 행위를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 한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재희는 딱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느끼고 있을 즈음, 이수가 고개를 돌렸다. 재희가 그곳에 있다는 걸 알기라도 하듯 정확히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눈이 마주친다. 서이수는 희미하게 웃었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반가운 듯 크게 뜨이는 눈동자를 마주 보던 재희는 그의 곁에 붙어 선 신유진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 자리에 선 사람이 자신이길 바랐다. 같이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고, 옷을 골라 주고, 이수의 일상을 지키는 사람이 자신이었으면 좋겠다. 다른 여자가, 신유진이 아니라 차재희였으면 좋겠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될 거라고 생각해? 서이수랑, 내가?

순간 머릿속에서 치고 들어온 속삭임에 재희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수와의 격차를, 그와 자신이 지고 있을 의무와 희생을 생각하는 순간 지나치게 무겁다 느꼈던 사랑의 무게는 발에 채워진 족쇄로 돌변했다.

내가 선배한테 내 감정을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강요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당해 보니까 그거 정말 기분 별로더라구.’

안 그래 보여도 마음 쓰이는 일은 두고 보지 못하는 다정한 남자였다. 그에게 몇 번이나 좋아한다고 말하고, 마음을 드러냈던 게 부담으로 다가가진 않았을까.

사실 내가 좋지 않은데, 거절하기 힘들어서 확답을 미루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또 애처럼 울까 봐. 나한테 미안해서 그러는 게 아닐까.

서이수는 의사 표현이 확실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재희는 자신이 만들어 낸 착각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몇 주간 마음속에 쌓여 버린 우울이 그를 밑으로, 밑으로 끌어 내렸다.

“재희 씨, 이거 어떤 것 같아요?”

침잠하는 그를 잡아챈 것은 한주연의 목소리였다. 재희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가을용 카디건을 들고 선 한주연이 옷을 들고 뭐라 뭐라 설명했다.

재희는 말없이 웃어 주었다.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선물이라는 건 사 주는 사람 마음인 거니까. 한주연이 멀어지고 다시 고개를 돌리려는데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익숙한 향기가 흐려져 간다. 서이수였다. 인사도 제대로 못 했는데.

“선배!”

재희가 다급히 불렀지만, 이수는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매장을 떠났다. 외면하는 뒷모습에 심장이 패대기쳐지는 느낌이었다.

아까 웃어 준 것 같은데 잘못 본 걸까. 엊그제 그렇게 떠나 버려서 화가 난 걸까. 연락을 안 해서 그런가. 미안하다고 해야 했는데. 아니, 선배가 내 연락을 기다렸을 리가 없나…….

따라가고 싶었지만 망설여졌다. 혹시라도 화를 낼까 봐, 꺼지라고 말할까 봐서……. 우물쭈물 입구를 바라보고 선 재희에게 유진이 다가왔다. 그녀는 한주연을 힐끗거리며 속삭였다.

“재희야, 누구야? 너랑 잘 어울린다.”

“…….”

재희를 자극하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다. 그제야 재희는 이수가 자신과 한주연의 사이를 오해했음을 깨달았다. 아……. 다른 사람 눈에 어떻게 비칠지를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이 이수와 유진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듯, 이수도 기분이 나빴을 수 있었다.

좋아한다고 해 놓고 다른 여자와 백화점에서 쇼핑이나 하고 있는 모습은 상식적으로 이해 불가능한 부분이었다. 한주연과 아무 사이도 아니었지만, 이수는 그걸 모르니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해명을 하고 싶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 줘야 하는데, 한주연은 그럼 어떡하지. 힐끗 돌아본 그녀는 옷을 고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바쁜 일이 생겨서 가 본다고 할까. 아니면 아무거나 대충 고르라고 할까. 아, 그건 또 예의가 아닌데. 갈팡질팡하고 있으니 유진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가 봐, 내가 둘러댈게.”

그 한마디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재희는 눈이 마주친 한주연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 매장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수는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로 갔지. 담배 피우러 갔을까. 아니면 주차장으로 내려갔을까.

“누나, 선배 차 끌고 왔어요?”

“응, 발레파킹 맡겼어.”

다시 매장으로 들어가 그렇게 물은 재희는 유진의 답변이 끝나기도 전에 뛰었다. 발길이 향한 곳은 계단이었다. 날듯이 뛰어 내려간 지하 주차장에서 발레파킹 부스를 찾았다. 이수는 없었다.

직원을 붙잡고 차가 나갔느냐 물었으나 고객의 개인 정보라 알려 줄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벌써 가 버린 걸까. 아니면, 어디로 간 거지. 입술을 씹다가 뒤늦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초조해져서 몇 번이나 더 걸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유진에게 전화해 그가 돌아오지 않았음을 확인한 재희는 차를 끌고 집으로 향했다. 정신이 없어서 길을 잘못 들었다가 시위가 진행되는 근방을 지나는 바람에 한 시간이나 지체해야 했다.

불안감이 점점 몸집을 키워 갔다. 화가 많이 났나. 실망했을까. 줏대 없는 놈 같아서 싫어졌을까. 그것만 아니었으면 좋겠어……. 꼭 내가 아니어도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런 생각만 안 했으면 좋겠다…….

아파트에 도착한 재희는 간절하게 바라며 인터폰을 호출했다. 통화음이 길어질수록 절망이 더해졌다.

그러던 순간 달칵, 프라이빗 출입구의 문과 엘리베이터 문이 동시에 열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질주했다. 뭐라고 하지. 선을 봤다고 말할까. 싫어하면 어떡하지.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해야 하나. 하지만 그런 이야길 하기 위해서는 가족들, 특히 부모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희는 망설여졌다. 이수에게만큼은 숨기고 싶은 부분이었다.

43층을 향해 올라가면서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렸다. 그래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그 앞에 이수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익숙한 향기가 났다. 바로 앞에 아까 그를 외면하고 떠났던 남자가 서 있었다. 이수를 본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의 움직임은 재희의 머릿속에 느릿하게 각인되었다.

기다란 손가락 사이에 끼인 담배를 빨아들인다. 초조하게 바닥을 차고 있던 이수가 고개를 들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표정이 복잡한 형상으로 허물어졌다.

“선배.”

그렇게 부르자 이수는 바닥에 담배를 집어 던지며 재희에게 다가왔다. 손을 뻗어 목을 조르듯 타이를 잡아당긴다. 재희는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쿵, 닫혀 버린 엘리베이터 문에 몸을 부딪침과 동시에 입술이 맞닿았다. 진하게 남은 담배 냄새 사이로 서이수의 체취가 가득했다. 거칠게 가르고 들어오는 혀에 재희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아찔했다. 당장이라도 어둠 속으로 집어 삼켜질 것 같은 공포와 이수에게 입술이 삼켜지는 짜릿함에 소름이 돋았다.

재희는 눈을 꼭 감았다. 이렇게라면 죽어도 좋아. 그런 몹쓸 생각을 하며 이수를 끌어안았다. 어째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높이 쌓인 우울감을 한 번에 날려 버릴 정도로 그와의 접촉이 기꺼웠다.

굶은 사람처럼 강하게 빨아들이는 힘에 아랫입술이 아릿하게 아파 왔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이수에게라면 이것보다 더한 고통도 내어줄 수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목에 뻐근하게 감기던 통증이 사라졌다. 이수가 타이를 놓아주었다. 그와의 접점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싫어서 재희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하아, 차재희.”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긁었다. 재희는 그제야 눈을 뜨고 이수를 마주 봤다. 그리고 단번에 깨달았다. 그가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기회는 한 번뿐이야.”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전에 없이 또렷했다. 타액에 젖은 입술이 움직이며 그토록 바라던 말을 흘려 냈다.

“내가… 널 가질 거야.”

그 순간 재희가 어떤 기분이었냐 하면, 이대로 추락해 죽어 버려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갖다 놔도 저 한마디만 못할 것 같았다.

정말 미쳐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것보다 더 행복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렇다면 앞으로 남은 건 불행뿐일 것 같아서.

이대로 이수의 품 안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다. 바보 같은 생각. 서이수를 두고 어딜 가. 누구 좋으라고.

“가려면 지금 가.”

마지막 대답을 앞두고 여태껏 쌓아 온 부정적인 감정들이 발악하며 휘몰아쳤다. 차대범과 성미희가 주변을 둘러싼 채 미쳤다고, 제정신이냐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차재하가 형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비난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위하기 싫었다. 서이수만 있으면 아무것도 상관없어. 살면서 처음으로,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재희가 속삭였다.

“가둬 줘요, 차라리.”

이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매끄럽게 끌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두고 보지 못하고 재희가 입술을 갖다 붙였다.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서이수가 자신을 원한다. 기꺼이 그에게 신체 소유권을 이전해 주고 싶었다.

할짝거리던 움직임은 금세 거칠어졌다. 재희의 부드러운 혀끝이 이수의 안을 휩쓸었다. 허리를 매만지는 손길이 다급했다. 당장 눕히고 벗겨 버리고 싶었으나 아직 로비였다. 재희는 셔츠 사이로 손을 집어넣으며 활짝 열린 현관문으로 향했다.

걷는 동안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키스할 때마다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이수는 욕설을 씹으면서도 재희를 빨지 못해 안달이었다.

“씨발, 왜 이렇게 멀어.”

헐떡거리며 혀를 섞던 이수가 아직까지도 현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깨닫고 짜증을 냈다. 재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안아 줄까요? 작은 속삭임에 도리질을 친다. 이수가 그의 손을 잡고 걸음을 빨리했다. 꽉 맞잡은 손으로부터 열기가 피어올랐다.

침실까지는 가지도 못했다. 소파에 던지듯 눕히려는 걸 재희가 재빨리 포지션을 바꿨다. 이수를 아래에 깔고 키스를 퍼부었다. 이상함을 느낀 듯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이수는 말없이 그의 입맞춤을 받아 주었다.

둘 다 슈트를 입은 덕에 움직임이 뻣뻣했다. 상체를 들어 올려 재희의 턱 끝에 입을 맞추며 이수가 재킷을 벗었다. 아무 데나 팽개치며 넥타이를 끄른다. 재희도 옷을 벗으려 했으나 이수가 제지했다. 손목을 붙잡힌 재희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요.”

바빠 죽겠는데. 조급하게 묻자 이수가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예쁘니까 벗지 마. 그 말에 정장 바지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서이수의 솔직함이 독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절대 아니었다. 행동을 멈춘 재희는 곧 반쯤 벗겨진 이수의 드레스 셔츠 위로 고개를 처박았다.

“아……!”

얇은 천 위로 유두가 빳빳이 섰다. 혀끝으로 핥아 주자 이수가 허리를 뒤틀었다. 얇고 탄탄한 굴곡이 아름답게 휘어졌다. 재희의 커다란 손이 그의 등골을 어루만졌다.

찌릿한 감촉에 이수는 눈을 감았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차재희의 손이 닿을 때마다 전신의 세포가 깨어나는 것처럼 각성 상태가 찾아왔다. 그 모든 감각이 향하는 곳은 페니스였다. 경련하듯 발기하는 성기 위로 차재희의 손이 닿았다.

돌겠네……. 몇 번이고 겪은 일임에도 그가 만져 줄 때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수는 제 손으로 벨트를 풀고 바지를 반쯤 벗어 내렸다. 드로어즈 위로 점점이 찍힌 낯부끄러운 흔적을 무시하며 분홍색 좆을 꺼냈다. 한시가 급했다.

“만져, 읏, 만져 줘…….”

“…….”

갑작스러운 요구에 재희는 이성이 끊어지는 듯했다. 서이수는 결코 뭐 해 줘, 라고 말하지 않는다. 메일 보내. 연락해. 언제나 명령문이었다. 그런 남자가 처음으로 부탁하는 게……. 페니스를 만져 달라고…….

재희는 웃음을 삼켰다. 발갛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으며 기둥을 어루만졌다. 꺼덕거리는 성기가 예쁘기도 예뻤다. 쓸데없이 여기까지 예쁘고 난리야.

“만져 주기만 하면 돼요……?”

은근히 속삭이며 귀두를 훑어 주자 이수가 몸을 떠는 것이 느껴졌다. 손끝으로 요도구를 매만지며 선액을 펴 발랐다. 맨질맨질한 피부가 실크보다도 부드러웠다. 흣, 흐느끼듯 신음하는 이수는 상처 입은 짐승 같았다. 급소를 드러낸 채 잡아먹히길 기다리고 있는 포식자.

탁탁, 좆을 치대자 이수가 허리를 쳐올렸다. 유려하게 움직이는 골반을 느끼며 재희가 허리를 세웠다. 한 손으로 그의 자위를 도우며 이수의 바지를 마저 벗겼다.

단추를 풀다 만 셔츠 밑으로 드러난 하반신이 먹음직스러운 자태를 드러냈다. 털 하나 없이 매끈한 음부와 번들거리는 귀두 끝. 재희는 정장 안에 갇힌 페니스에 고통을 느끼며 벨트를 끌렀다. 조명 아래 드러난 검붉은 것이 이수의 좆 옆에 나란히 붙었다.

“아, 흣!”

“대답해 봐요… 선배.”

정말 그걸로 만족해요? 함의가 깃든 질문에 이수가 눈을 떴다. 흐릿하게 번진 동공이 재희를 올려다본다. 평소보다 붉어진 입술에 깨문 자국이 선명했다. 페니스를 비비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재희가 그의 뺨에 입을 맞댔다.

귀엽고 사랑스럽다. 쾌락에 정신을 못 차리는 서이수가 좋았다. 누구 앞에서도 보여 준 적 없을 그의 약한 모습을 보게 된 사람이 자신이라 좋았다. 고환을 주물럭거리자 이수는 끙끙거리면서 속삭였다. 박고 싶어. ……못 들은 척했다.

“아… 윽!”

얼마 가지 않아 이수가 정액을 쏟아 냈다. 경계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형편없이 풀어진 얼굴을 보고, 재희도 뒤늦게 사정했다. 비릿한 액체가 한가득이었다. 재희는 그에게 입을 맞추며 은근슬쩍 정액을 묻힌 손을 내렸다.

좆의 뿌리를 훑듯 강한 힘으로 누른 채 쓸어내리자 이수가 한숨을 터트렸다. 열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재희를 바라본다. 그에게 미미하게 웃어 주며 손끝을 움직였다. 애널과 고환 사이, 회음에 미끈한 액체가 닿자 이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재희의 팔뚝을 움켜쥐는 차가운 손과 달리 숨겨져 있던 틈새는 뜨겁기 그지없었다.

“하아, 거기. 씨발. 이상해…….”

“이상한 거 아니고, 좋은 거예요.”

“아!”

“선배……. 응? 맞죠?”

허리를 뒤트는 것을 따라가며 슬슬 문지르자 반응이 아주 격했다. 미친 듯이 요동치는 분홍색 성기가 제 아랫배에 맞닿았다 떨어진다. 재희의 귀두 끝에서도 투명한 액이 뚝, 뚝 흘러 그의 살갗 위를 적셨다.

재희는 이수의 셔츠를 풀어 헤치며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꼿꼿이 선 유두가 달콤한 색감으로 재희를 유혹했다. 혀를 내어 핥으니 간드러진 교성이 터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 꼭 딸기 맛이 나는 것 같았다. 츱츱, 유륜을 감아올리며 흡입하자 이수가 손을 들어 재희의 머리채를 쥐었다. 또 시작이었다. 더 하라는 듯 가슴께에 머리통을 밀어 내린다.

“아, 으읏.”

긁어내리는 신음에 삽입의 욕구가 한층 거세졌다. 재희는 이수가 정신을 못 차리는 틈을 타 정액에 흠뻑 젖은 손가락을 구멍 주위로 가져다 댔다. 거기까진 성공이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예쁜 분홍빛 주름을 어루만지자 이수의 반응이 한층 격해졌다. 좋아, 조금만 더. 잘하고 있어. 자신을 다독이며 애널에 손가락을 하나 밀어 넣는 순간이었다.

“악!”

“아니, 아니, 아니, 씨발! 이건 아니지, 차재희!”

머리털이 뽑히는 고통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촉촉해진 눈망울을 보며 힘을 빼긴 했지만, 이수는 여전히 재희의 머리채를 쥔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열기가 남은 얼굴에 너 지금 선 넘었어, 어쩐지 그런 말이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이수가 제정신이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당장이라도 쌍욕을 퍼부을 것처럼 살벌했다.

“무슨 짓이야?”

“뭐가요…….”

“너, 지금 나한테 무슨 짓 하려고 한 거냐고.”

“…….”

올 것이 왔다. 호락호락하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저렇게 사납게 눈을 치켜뜰 줄은 몰랐다. 약간 쫄아 버린 재희는 그러나 물러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었다. 이수가 그를 보며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아니, 씨발. 야. 누군가 넣어야 한다면, 그건 나야.”

“왜요?”

“왜긴 왜야. 내가 형이고.”

“나이가 벼슬이에요? 나이 많은 사람이 삽입해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어요?”

진지한 표정으로 반박하는 그를 보고 이수가 헛숨을 뱉었다. 물론 맞는 말이었지만 자신이 박히는 건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심리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일이었고, 이렇게 훌륭한 페니스를 그냥 놀리는 것도 말이 안 됐다. 단호하게 거절하려는데 재희가 덧붙였다.

“나이만 많으면 뭐 해요. 나보다 키도 작고, 손도 작고.”

“그게 씨발, 무슨 상관인데.”

“좆도 작으면서.”

갑작스러운 공격에 할 말을 잃은 이수가 재희를 노려봤다. 그건 그렇긴 한데……. 아니, 아니지. 뭐가 그래.

결코, 절대, 뒤를 내어줄 수는 없었다. 이수는 박고 싶었다. 좁고 뜨거운 어딘가에 좆을 쑤셔 넣고 사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재희가 쉽게 수긍할 것 같지 않아 보여서 이수는 그를 설득시키기 위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분위기가 완전히 깨져 버리자 재희의 눈썹이 팔자로 휘었다. 하지만 시무룩한 척해도 소용없었다. 이수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이수가 입을 열었다.

“꼭 큰 사람이 해야 한다는 법 있어?”

“효율적으로 생각해야죠. 선배 거 넣어 봤자 난 느끼지도 못할 거예요.”

“지랄하네. 그 정도로 차이 나진 않거든.”

재희는 말없이 코웃음을 쳤다. 이게 진짜. 이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쏘아보니 그 또한 자세를 바꿨다. 정액으로 엉망이 된 타이를 끌러 내는 모습에 이수는 눈길을 빼앗겼다가 정신을 차렸다. 쓸데없이 색기가 흘러넘쳤다.

정자세로 앉은 재희가 자신의 공격권을 주장했다.

“아까 말한 내가 형인데, 라는 부분은 전혀 설득력이 없어요. 굳이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죠? 꼰대처럼 굴지 마요.”

“꼰대는, 씨발…….”

“내가 넣으면 선배가 하는 것보다 만족도가 더 클 테니까, 효율적으로 가요. 그게 맞잖아.”

재희는 말을 이으며 재킷을 벗었다. 수천만 원대 정장 두 벌이 바닥에서 나뒹굴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이수는 눈을 내리깐 채 소매 단추를 푸는 재희를 바라봤다. 천 아래로 드러나는 상완근의 굴곡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남은 차재희의 근육을 떠올리며 이수는 느릿하게 반박했다.

“크다고… 꼭 만족도가 높으리란 법은 없어. 그리고 애널 섹스가 얼마나 위험한 건데, 나 장 파열로 죽으면 책임질 거야? 네 건 해도 해도 너무 크잖아.”

“그렇게 말하면 선배가 한 말을 돌려줄 수밖에 없어요. 그 정도로 차이 나진 않으니 선배나 나나 위험한 건 똑같고. 또 선배가 슬라임 먹으면서 한 말을 갖다 붙이자면 인간은 쉽게 안 죽어요.”

“……또 옛날이야기 꺼내네. 찌질하게 굴지 말라고 했지.”

논리로 질 것 같으니 이수는 뜬금없는 태클을 걸어왔다. 승기를 잡은 것 같았다. 재희가 단정하게 웃으며 이수에게 치명타를 입힐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위험하니까 더 내가 해야죠.”

“왜?”

“처음이잖아, 선배.”

“…….”

“박을 줄도 모르면서.”

잔뜩 굳어진 입매에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 알았지. 저 개새끼. 재희가 이수에게 다가가며 눈을 접어 웃었다. 더 할 말 있어요? 이수는 그를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생각해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조금 당황스럽고 긴장이 됐다.

이전에 보았던 게이 포르노를 떠올리자 아랫배가 빠듯하게 죄어들었다. 씨발… 그걸… 저걸… 거기다가… 어떻게 넣어? 입이 바짝 말랐다. 자신은 차재희에게 망설임 없이 박을 생각을 한 주제에, 막상 박히는 대상이 된다고 생각하자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멍하니 생각하던 이수는 늘어진 성기를 타고 흐르는 정액의 느낌에 정신을 차렸다. 일단, 일단 침실로 가자. 침을 꿀꺽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대충 주워 들었다. 재희가 깜짝 놀라 눈을 키웠다.

“어디 가요? 화났어요?”

“일단… 니가… 해. 침실로 가.”

한번 해 보고, 차재희가 어떻게 하는지 잘 봐 뒀다가 돌아가면서 하면 된다. 깔끔하네. 이수는 속으로 그렇게 다짐했다.

휴대폰만 뺀 후 옷을 빨래 바구니에 던져 넣고 침실로 향했다. 털썩, 쓰러지듯 침대에 누운 이수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자꾸 입이 말랐다.

페니스는 죽은 듯 죽지 않은 듯 이상한 형태로 휘어졌다가 늘어지길 반복했다. 섹스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 때문이었지만 이수의 눈에는 꼭 준비 운동으로 푸시업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를 보냈다. 산책을 나가 있는 율에게 오늘 집에 손님이 있으니 리키를 데리고 자 달라고 부탁했더니 흔쾌히 알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휴대폰을 엎어 두고 긴장감을 흩트릴 무렵 재희가 들어왔다. 손에 들고 온 것을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놓는다. 이탈리아어가 쓰인 올리브유를 바라보던 이수는 곧 용도를 깨닫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씨발…….

작게 웃은 재희가 옷을 벗는 소리가 들렸다. 스륵, 셔츠와 바지를 벗는가 싶더니 이불 속으로 온기가 더해졌다. 갑자기 작정하고 섹스하는 분위기가 되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심장 소리가 아랫집에까지 들릴 것 같았다. 말없이 숨만 쉬고 있으니 재희가 손을 뻗어 뺨을 어루만졌다.

“선배.”

“뭐.”

“나 좀 봐 줘요.”

애틋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단정한 얼굴이 조금 수척해 보였지만 새까만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났다. 눈이 마주치자 차재희는 예쁘게 웃으며 버드 키스를 쏟아 냈다. 턱 선을 따라 내려온 입술이 목울대를 지나 빗장뼈에 닿는다. 촉촉한 숨이 느껴지는 곳을 시작으로 간질간질한 감각이 퍼져 나갔다.

닫힌 문을 열듯 쇄골 중앙에 여러 번 입을 맞춘 재희가 슬쩍 눈을 들어 올렸다. 이수는 진득한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아까 왜 그렇게 갔어요?”

재희는 그렇게 물으며 가슴 중앙의 흉터를 핥았다. 새살이 얽힌 부위에 타액이 덮어질 때마다 아래로 피가 쏠렸다. 피부가 재생되며 신경이 과다하게 몰리기라도 한 듯, 뜨겁고 말랑한 감촉이 황홀한 감각을 자아냈다. 으, 이수는 손바닥으로 열이 오르는 뺨을 숨겼다. 살짝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야, 아까 그 여자.”

“……부모님 소개로 만난 사람이에요.”

“이제 만나지 마.”

이수의 단호한 음성에 재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을 통제하려는 서이수의 태도는 부모와 달리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더 강하게 자신을 옥죄어 줬으면 싶었다. 이불을 걷어 내며 재희가 이수의 위로 몸을 옮겨 갔다. 무릎을 세우고 침대를 짚은 채 내려다본다.

울긋불긋해진 목덜미를 응시하다 고개를 숙였다. 얼굴을 가린 이수의 손에 코끝을 비비적거렸다.

“가리지 마요. 응? 선배가 어떤 표정 짓는지 보고 싶어.”

달콤한 목소리를 이기지 못하고 이수가 손을 내렸다. 재희는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이마를 맞댔다. 미약한 온기를 나누며 두 사람은 서로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이수의 눈동자 속에 망설임이 녹아 있었지만 관계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곧 진입하게 될 미지의 영역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이었다.

서이수가 겁먹은 모습은 외려 재희를 자극했다. 지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반, 이대로 그를 울려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반. 어떻게 할까 저울질하며 재희는 허리를 내려 그와 하반신을 맞댔다. 뜨거운 기둥이 맞부딪혔다. 이수의 귀두에 자신의 것을 비비며 재희가 물었다.

“알고 있어요? 내가 누군지.”

우리가 사돈 될 사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 이게 일반적이지 않은 관계가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물었는데 돌아오는 답변이 심플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만 알면 돼.”

그 순간 북받치는 환희에… 재희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에게 키스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것저것 따지고 고민하고 슬퍼하는 것에 지쳤다. 지금만큼은 그저 이수를 갖고 그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싶었다.

혓바닥이 조심스레 치열을 더듬었다. 입 안이 뜨겁고 습하다. 그곳도 이와 비슷할까. 재희는 조바심을 덜어 내며 이수와 혀를 섞었다. 침입자를 반갑게 맞아들이는 살덩이가 타액에 절어 있었다. 누구 것인지 모를 액체와 함께 이수의 혀를 빨아올렸다. 흣, 작은 신음과 함께 그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재희는 그대로 턱 선을 타고 내려왔다.

이수의 살결은 너무 연약해서 살짝만 빨아도 붉은 얼룩이 남았다. 첫눈이 내린 땅 위에 발자국을 남기듯, 재희는 정성스럽게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아, 윽.”

재희가 군살 없는 허리를 쓸어내리며 유두를 빨아올렸다. 심장 근처에 가해지는 자극에 긴장감과 쾌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이수는 떨리는 입술을 악문 채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차재희와 살을 맞댈 때마다 뇌가 녹아내리는 것처럼 열이 올랐다. 피부 밑을 헤엄치는 쾌락의 조각들이 그와의 마찰에 하나, 둘,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아!”

제 것이 아닌 뜨거운 손이 페니스를 감쌌다. 이수가 재희의 어깨를 붙들었다. 귀두를 긁어내린 손끝이 기둥을 타고 내려갔다. 만질만질한 고환을 주물럭거리자 이수가 허리를 뒤틀었다. 몇 번을 만져 줘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가장 연약하고 중요한 부위를 타인의 손에 내맡기는 것은 생각보다 큰 각오를 필요로 했다.

재희는 퉁퉁 부풀어 오르는 젖꼭지를 뱉어 내며 상체를 내렸다. 찔끔찔끔 흘러내린 선액에 분홍색 좆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걸 망설임 없이 입에 머금었다.

“야! 차재, 으읏!”

크게 뜨인 눈이 허공을 더듬었다. 페니스가 본데없이 뜨거웠다. 질척거리는 혀가 성기 끝을 빠듯하게 휘감는다. 소용돌이치듯 피어오르는 감각에 온몸이 저릿했다. 감전이라도 된 듯 손끝이 따끔한 느낌과 함께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상했다. 이런 건……. 손으로 만지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좀 더 고차원적인, 말하자면 황홀한 것을 뛰어넘어 무섭기까지 했다. 덜컥 찾아오는 쾌락을 반갑게 맞이하지 못하고 이수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 흑, 하지 마.”

눈만 들어 그를 올려다본 재희는 입 안에 압력을 가했다. 입술을 모아 좆을 빨아올리자 짤막한 교성과 함께 허리가 휘었다.

서이수의 살결도 부드럽다고 생각했는데, 페니스는 그보다 더했다. 녹아 없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여리고 보들보들한 촉감에 재희는 거리낌 없이 혀를 움직였다. 기둥을 꽉 쥔 채 혀끝으로 구멍을 파고들자 허벅지를 파들거리던 이수가 욕을 짓씹었다.

“씨발, 하지, 말, 아윽!”

“싫어요?”

고개를 숙여 고환을 핥아 주자 이수가 말을 멈췄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는데 삐죽 솟은 눈썹이 잔뜩 찡그려져 있었다. 당장 올라가 표정을 확인하고픈 것을 참으며 재희는 늘어진 주머니를 할짝거렸다.

툭, 위로 끌려 올라간 음낭이 아래로 떨어질 때마다 이수의 허벅지 안쪽에 심이 섰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좋으면서. 재희가 다시 한번 물었다.

“싫어? 정말?”

그렇게 물으며 이수의 오금을 밀어 올렸다. 이수가 힘을 준 채 버텼지만, 고환을 입 안에 넣은 채 핥아 주니 무의미한 저항이 되어 버렸다.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로 미지근한 공기가 닿았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아래를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이수가 허벅지에 힘을 주어 닫으며 다시 한번 거부의 의사를 표현했다.

“싫… 으응!”

순간 회음을 스치는 혓바닥에 온몸에 힘이 죽 빠졌다. 강렬했다. 완벽한 절정을 향한 쾌락의 조각이 또 하나 제자리를 찾았다. 제 입에서 터져 나간 믿지 못할 신음은 이수의 귀에도 들렸다. 씨발. 수치심에 머리가 터져 나갈 것처럼 열이 올랐다.

“이 개새… 아!”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재희를 밀어내려 했지만, 차재희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번엔 애널을 핥았다. 뜨겁고 축축한 숨결이 비밀스러운 곳에 닿았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전신이 떨려 왔다. 숨이 막힐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이수는 욕을 하려던 것도 잊고 제게 일어나는 일에 집중했다.

단단히 힘이 들어간 혓바닥이 주름을 하나하나 훑고 쓸 때마다 온몸을 깃털로 간질이는 것처럼 야릇한 성감이 퍼져 나갔다. 그 이상의 것을 원하게 되는 쾌감이었다. 츕, 그리고 차재희가 살을 빨아들였을 때 이수는 참지 못하고 페니스에 손을 가져다 댔다. 자위를 시작하니 재희가 웃음을 흘렸다.

“개새끼 혓바닥에 정신을 못 차리네요…….”

“하아, 닥, 쳐.”

입술이 움직이며 스치는 미미한 마찰로는 부족했다. 갈증이 났다. 그런 이수를 알기라도 하듯, 재희는 눈을 접어 웃으며 행동을 멈췄다. 그의 주름을 살살 문대기만 했다.

그 의도를 모를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좆을 흔들어도 방금 경험한 것에 한참이나 못 미쳤다. 씨발, 싸고 싶은데……. 그러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한마디만 해요.”

“지, 읏, 랄을…….”

재희가 다시 주름을 핥았다. 이수는 갈급한 손길로 페니스를 만졌지만, 또 진행이 되질 않았다. 이수가 끙끙거리며 좆을 훑는 동안 맛보기라도 하라는 듯 애널을 정성 들여 빨아 주다가 그가 허리를 들썩일 때쯤 다시 움직임을 멈췄다.

한계를 돌파하기 전에 사라져 버린 쾌감이 아쉬워 돌아 버릴 것 같았다. 미치게 싸고 싶었다. 이수의 새하얀 허벅지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 안쪽에 입을 맞추며 재희가 속삭였다. 치켜뜬 채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선배, 이럴 때 한 번만 져 줘.”

응? 그리고 부드럽게 덧붙여진 다정한 물음에 이수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이제 그런 거 따질 사이 아니잖아. 자기 합리화를 하며 속삭였다. 빨아 줘, 차재희……. 개미 기어가듯 흘러나온 목소리였다. 사정에 대한 갈증과 수치심에 물들어 있는 이수의 애원은 재희를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그의 다리를 밀어 올리며 회음에 고개를 처박았다. 타액으로 범벅이 된 애널이 재희를 맞이하듯 벌름거렸다. 재희는 전혀 거부감 없이 그곳에 혀를 맞댔다. 그저 좋았다. 이수가 자신에게 이곳을 허락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츱츱, 소리를 내어 빨고 뽀뽀하듯 입을 맞출 때마다 이수가 몸을 떨었다. 자기가 어떤 소리를 내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서이수가 내는 비음이 섞인 신음은 아무런 접촉 없이도 차재희를 사정 직전의 상태까지 몰아갔다.

혀를 세워 애널을 쿡쿡 쑤셔 주자 이수가 목을 긁는 소리와 함께 사정했다. 재희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신음과 풀어진 동공, 울컥울컥 정액을 쏟아 내는 분홍색 좆을 보며 페니스를 몇 번 훑기도 전에 체액이 흘러나왔다. 이불에 손을 대충 닦은 재희가 팔을 뻗어 올리브유를 가져왔다. 더는 못 참겠다.

“아…….”

밭은 숨을 내쉬던 이수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재희는 그에게 올라가 머리를 쓸어 올려 주고 진하게 키스했다. 거부하지 않고 입을 열어 준 이수는 긴장감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밝은 갈색 눈동자가 형편없이 흔들렸다. 그저 사랑스러웠다. 입술을 떼어 내고 그의 뺨을 핥은 후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손가락과 애널 주변을 기름에 흠뻑 적신 후 이수를 올려다봤다. 그새 가라앉은 얼굴이 창백했다. 재희는 다시 올라가 그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무서워요?”

“……조금.”

“조심할게요. 겁먹지 마, 응?”

애 취급당하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지만 이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과 기대는 다리가 되어 심장을 질주하게 했다. 쿵쿵, 거칠게 울리는 심장 박동이 귓가에 닿았다. 이제는 그것이 죽음의 신호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으…….”

이수에게 웃어 준 재희의 손가락이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낯선 이물감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 뜨거운 감촉에 탄성을 터트리는 재희의 얼굴은 금세 붉어졌다. 우물우물, 입술을 벙긋거리더니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는다. 사랑스러웠지만 감탄할 겨를이 없었다. 두 마디를 넘어 끝까지 들어온 손가락이 안을 더듬는 감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나만으로도 느낌이 이런데, 저걸 어떻게 넣어. 차재희의 좆을 흘끔거린 이수의 낯빛이 굳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희는 힘을 주어 이곳저곳을 더듬다가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었다. 불편함이 더해졌다.

“힘, 빼 봐요. 선배.”

“어떻게… 윽. 이상해. 씨발.”

말 그대로 이상했다. 안을 휘젓는 손가락을 당장이라도 뱉어 내고 싶을 만큼 느낌이 기괴했다. 이걸로 느끼는 게 가능한 일일까. 기대감은 줄어들고 긴장만 치솟았다.

이수는 자꾸 힘이 들어가는 다리를 어쩌지 못하고 재희가 하는 대로 기다리기만 했다. 손가락이 어쩌고 중얼거리던 차재희는 그럼에도 올리브유를 쏟아 가며 손가락을 두 개 더 밀어 넣는 데에 성공했다. 그쯤 되자 감각이 결을 달리했다.

“흐읏…….”

페니스와 얼추 비슷한 두께가 안을 들락거리기 시작하자 이게 진짜 섹스구나 하는 느낌이 났다. 손가락 틈새로 기름이 샐 때마다 찰박거리는 마찰음이 들렸다.

아, 이물감과 별개로 차오르는 야릇한 감각에 이수가 신음을 흘렸다. 그러자 준비가 됐다 싶었는지, 재희가 손가락을 빼며 무릎을 세워 앉았다. 비어 버린 구멍이 허전했다. 어서 들어와 줬으면 싶었다.

재희가 검붉은 좆에 오일을 꼼꼼히 발랐다. 어디까지 처넣으려는 건지 기둥 끝까지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침내 애널에 귀두가 닿았다. 한 손으로 위치를 맞추며 재희가 위로 올라와 이수에게 속삭였다.

“선배.”

“…….”

“좋아해요, 정말.”

대뜸 던져진 고백에 화답할 겨를도 없이 재희가 입을 맞춰 왔다. 이수는 입술을 벌려 그의 혀를 받아들이며 온몸에 긴장을 풀었다. 그 순간, 애널을 맴돌던 귀두가 살을 파고들어 왔다. 아! 비명이 재희의 입 안으로 삼켜졌다. 손가락과 비교할 수 없는 크기였다. 얻어맞은 듯한 통증에 이수의 눈가가 젖어 들었다. 또르륵,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며 재희는 미쳐 버리겠다는 듯 웃었다.

“아, 윽! 아파!”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그렇게 소리쳤다. 접합부를 시작으로 온몸이 찢어질 것 같았다. 뜨거운 것이 안으로 조금씩 밀고 들어온다. 오일을 퍼부은 것이 무색하게 뻑뻑하다고 느껴졌다. 폭력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선득한 고통이었다. 순식간에 발갛게 달아오른 눈매로 이수가 고개를 저었다.

“잠깐, 잠깐, 씨발, 이거, 아니야. 아닌 것 같아.”

“이거… 하아. 맞아요.”

닥치라는 듯 재희는 다시 이수에게 키스했다. 천천히 움직이는 허리와 함께 안으로 파고드는 성기의 존재감이 점점 묵직해졌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이대로 갈라져서 죽는 것 같았다. 이 새끼는 뭘 먹고 좆만 이렇게 커 가지고. 이수는 속으로 욕을 씹으며 참아 보려 했다.

그러나 흐린 눈망울로 아래를 내려다봤다가 페니스가 아직 절반도 들어오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는, 정말 죽어 버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었던 항암 치료 때보다 더한 통증이 찾아왔다. 차라리 보질 말걸. 인내가 무색하게 비명이 터졌다.

“아니, 아니라고! 씨발, 나 죽어!”

“아……. 잠깐만.”

그렇게 말하는 재희의 동공이 풀려 있었다. 과방에서 키스했던 날 보았던 것처럼, 제정신이 아닌 듯한 표정에 이수는 흠칫 놀랐다. 맞닿은 신체가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페니스는 말할 것도 없었고 이수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쏟아 내는 숨은 한여름의 열풍만큼이나 절절 끓었다.

움직임을 멈춘 재희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많이 아파요?”

“뒤질 것 같아.”

“난 너무 좋은데…….”

우울하게 중얼거리는 말끝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씨발……. 아래에 집중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고개를 돌려 차재희를 내려다봤다. 그는 팔자로 눈썹을 휜 채 애처롭게 이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약점이라도 자극하듯 한껏 불쌍한 표정을 유지하던 재희가 이수를 조르듯 물었다.

“10분만 더 해 보면 안 돼요……?”

“…….”

“조금만… 응? 선배.”

그렇게 사랑스럽게 말하는데 빼라고 할 만큼 서이수는 냉정한 인간이 못되었다. 인상을 찡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시무룩했던 표정이 활짝 밝아진다. 그를 보며 이수가 말했다.

“시리야. 10분 타이머.”

─ 알겠습니다. 10분 타이머를 설정했습니다. 시간 재는 중!

“…….”

재희는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이수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듯 다시 자세를 잡았다. 머리 옆을 짚은 팔에 힘줄이 섰다. 이수는 격통에 얼룩진 교접점이 아닌 그 보기 좋은 근육에 정신을 집중한 채로 재희를 받아들였다.

그래도 통증은 여실히 느껴졌다. 천천히, 천천히 허리를 밀어 올리며 페니스가 안으로 진입해 왔다. 어느 순간 내벽 안쪽에서 찌릿한 감각이 이는 것도 같았는데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려서 뭐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

검붉은 성기가 마침내 끝까지 모습을 감췄다. 비어 있어야 할 곳이 꽉 들어차 있으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만족감이 피어올랐지만 동시에 찾아오는 아릿한 감각은 지워 낼 수가 없었다. 이수는 입술을 꾹 깨문 채 얼른 10분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얼이 빠진 듯한 표정의 차재희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페니스가 밖으로 빠져나갔다가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꿰뚫리는 것처럼 힘들었다. 축 늘어진 다리 사이로 좆이 드나드는 모습에 마른침이 삼켜졌다.

그리고 귀두가 내벽 어딘가를 긁을 때마다 알 수 없는 쾌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으음, 낯부끄러운 신음을 삼키며 이수가 옆에 놓인 차재희의 손목을 붙들었다.

“하아, 아직도 아파요?”

“어, 좀…….”

이수의 대답에 재희는 살짝 실망한 얼굴로 올리브유를 쏟아부었다. 매트리스고 나발이고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또 그만두고 싶지는 않아서 한 선택이었다. 상쾌한 냄새와 함께 한껏 벌어진 주름 사이로 기름진 페니스가 들어가는 모습이 지독히 선정적이었다.

처음보다 붉어진 이수의 애널은 재희의 좆을 야금야금 먹어 치웠다. 그리고 자신을 천천히 밀어 넣던 재희는 어느 순간 이수가 몸을 떠는 것을 알아챘다. 좆이 절반 좀 넘게 들어간 부분에서 눈에 띄게 달라진 반응이 왔다. 바짝 힘이 들어간 허벅지 그리고 점점 형태가 잡혀 가기 시작하는 이수의 성기.

“아읏……!”

재희가 말랑거리는 둔부를 받쳐 든 채 허리를 돌려 그 부분을 자극했다. 이수가 눈을 질끈 감으며 신음을 터트렸다.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좆이 움직일 때마다 분홍색 페니스가 고개를 들었다. 마침내 발딱 선 것을 확인하고 재희가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내벽이 경련했다. 구멍은 성기를 끊어 낼 것처럼 조이다가도 이수가 숨을 쉴 때마다 벌름거렸다. 정말 미치도록 뜨겁고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서이수의 약한 부분, 약한 모습, 모든 것을 얻어 냈다는 만족스러움에 사정감이 들끓었다. 무력하게 자신을 받아 내는 이수의 모습이 안쓰럽다가도 저열한 정복감이 재희를 사로잡았다.

그의 안에 자신을 쏟아 내고 싶었다. 정액을 몇 번이고 쏟아 내서 자신의 냄새가 가시지 않을 정도로 더럽히고 싶었다. 퍽, 퍽, 허리 짓을 할 때마다 둔부에 부딪히는 고환이 차진 소리를 만들어 냈다. 힘없이 흔들리는 분홍색 좆에서 찔끔찔끔 쿠퍼액이 흘러나왔다. 살짝 벌어진 이수의 입술이 움직였다.

“재희, 야. 흣.”

이수가 그렇게 부르는 순간, 온몸의 세포가 산화하는 느낌을 받았다. 제 좆을 품은 채 달뜬 얼굴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서이수가… 꿈만 같았다.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재희는 좆을 쑤셔 박으면서 사정했다.

그러면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아, 성기가 밖으로 나왔다 들어갈 때마다 희멀건 정액이 거품져 밀려 나왔다. 그걸 못 느꼈는지 흥분이 극에 달한 이수가 손을 내려 제 페니스를 움켜쥐었다.

“하아, 안 돼요.”

“아, 읏, 하, 지 마.”

재희가 그 두 손을 결박해 내리누른다. 손목에 가해지는 압박에 이수가 숨을 헐떡였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이 일었다. 일전에 생각한 것이 맞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 숨겨진 자기 파괴적인 성향이 있었다. 차재희가 언뜻 보여 주는 강압적인 태도가 싫지 않았다. 외려 흥분을 더해 주었다. 무력하게 하반신을 드러낸 채 그를 받아들이며 이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고통은 가신 지 오래였다. 차재희가 내벽 어딘가에 있는 극점을 자극할 때마다 그곳으로부터 미쳐 버릴 것만 같은 쾌감이 치솟았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기분이었다. 그저 쾌락, 더 큰 쾌락, 그보다 더한 쾌락만을 위해 사는 사람처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찰박거리며 좆이 안을 쑤실 때마다 또렷한 관능이 피어올랐다.

“더, 아! 세게…….”

이수의 주문에 재희가 피치를 높였다. 빠르게 구멍을 쑤셔 줄 때마다 만족감도 커졌다. 내장을 헤집는 듯한 느낌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대로 망가져도 좋을 정도로 황홀했다.

눈물이 흐르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이수는 끝없이 재희를 재촉했다. 빨리, 더, 나를 죽음으로 몰아가 줘. 아찔한 쾌락에 정신이 나가 버리는 찰나,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알람이 울렸다. 눈이 번쩍 뜨였다.

피스톤질에 집중하던 재희가 이수의 머리맡에서 요란하게 진동하는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가쁜 숨을 내쉬며 그가 눈을 깜빡이고는 이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입꼬리가 짓궂은 호선을 그려 낸다.

“이제 그만할까요?”

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휴대폰이 어딘가에 부딪혀 박살 나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웃음을 터트린 재희가 그를 돌려 눕혔다.

윽, 새로운 자세에 이수가 신음을 흘렸다. 벌름거리는 구멍을 채우며 들어오는 페니스가 아까보다 더 깊은 곳을 찔러 왔다. 아랫배가 얼얼했다. 또 다른 지평을 여는 것처럼 신선한 자극이었다.

재희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좆으로 내려찍는 듯한 감각이 잇따랐다. 쾌감은 더욱 극렬했다. 베개에 얼굴을 처박은 이수가 엉덩이를 치켜올렸다. 퍽, 퍽, 음낭이 맞부딪히자 온몸이 찌릿했다.

이수는 그 순간 정말 알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대체 왜 그랬으면 좋겠는지 모르겠지만, 이성이 날아가 버린 몸뚱이는 그의 주둥아리를 제어하지 못했다.

“머리, 흑, 눌러 줘…….”

그 말에 재희가 우뚝 행동을 멈췄다. 내가 지금, 씨발 뭐라고 했지? 그러나 이성이 돌아오기 전에, 웃음을 터트린 재희는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커다란 손이 머리칼을 거칠게 움켜쥔다. 베개에 내리누르는 힘에 두피에 미약한 통증이 일었는데 문제는 쾌감이 배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수의 고개를 옆으로 돌린 재희가 상체를 숙였다. 씨근거리는 숨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혀를 내어 귓가를 빨고 씹으며 속삭이는 목소리가 음습하기 짝이 없었다. 좆이 찌릿했다. 너무 좋아서.

“이런 취향이야?”

“아, 씨발…….”

이수가 욕설을 내뱉자 재희가 좆을 깊이 밀어 넣었다. 귓불을 끊어 먹을 것처럼 잘근거리며 퍽, 세게 쳐올리자 이수가 안달 나는 신음을 흘렸다. 재희가 다시 한번 속삭였다.

“한 번만 더 욕하면… 입에 좆 물릴 줄 알아.”

돌았구나, 서이수.

얼굴에 화끈하게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멈췄던 씹질이 재개됐다. 재희는 짐승처럼 이수의 뒷목을 물어뜯으며 허리를 움직였다.

이수가 원한 것처럼 거침없고 배려 없는 섹스였다. 유두를 꼬집힐 때마다 눈물이 났지만 그것 또한 성감으로 치환되었다. 뒤틀린 성벽에 의문을 느낄 새도 없었다. 이수는 현재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물처럼 엉킨 내벽을 가르고 들어온 페니스가 한 부분을 집요하게 긁어냈다. 뇌가 촛농처럼 녹아내린다. 전신에 힘이 빠지는 느낌과 함께 눈앞이 희게 물들었다.

사정감과 고통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몸짓에 마침내 쾌락의 마지막 조각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완성된 그림은 눈앞에 환희의 바다를 펼쳐 냈다. 퍽, 터져 나가듯 정액을 쏟아 낸 이수가 숨을 헐떡이며 눈을 감았다.

* * *

창을 타고 넘어오는 빛에 재희는 눈을 떴다.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한 몸이 무거웠다. 평소보다 일찍 깨어난 탓에 머릿속이 몽롱했다. 덕분에 눈앞에 이수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아. 죽은 듯 잠들어 있는 남자의 눈썹이 꿈틀하는 것을 보고 그제야 자신이 어제 이수와 벌였던 일들을 기억해 냈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뺨을 가리며 재희가 침음을 뱉었다. 더, 세게. 채근하던 목소리가 선명했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너무, 너무… 과했나? 서이수의 머리채를 잡다니, 제정신인가? 아무리 해 달라고 했어도 그렇지 어떻게 감히. 하지만 반성이 무섭게 베개에 처박힌 채 신음하던 무력한 얼굴을 떠올리자마자 아래가 뻐근했다. 평소의 그와 너무나도 달랐다. 순응, 아니 순종하는 서이수는…….

까만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갔다. 이수의 낯은 창백하게 느껴질 정도로 핏기가 없었다. 그 순간 뒤척이며 흘러내린 이불에 정사의 흔적이 남은 몸이 드러났다. 퉁퉁 부은 가슴께 주변으로 새빨간 얼룩이 가득했다.

여러 번의 배출이 무색하게 밑으로 신호가 왔다. 마른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한참이나 맞고 나서야 이성을 되찾았다.

재희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욕조에 쭈그리고 앉았다. 정신을 차리니 미뤄 두었던 걱정들이 파도처럼 떠밀려왔다.

차대범, 성미희, 차재하, 서이나, 한주연.

그 이름을 곱씹으며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이수는 아직 서이나와 차재하의 접점을 모르는 것 같았다. 가족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해 보면 ‘서이수’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말해 주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던 재희는 고개를 내저었다. 혹시라도, 정말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이수가 자신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문제라면 굳이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다.

비겁하다고 해도 좋으니 재희는 이수가 절대 자신을 버리지 못할 때까지 그 사실을 꼭꼭 숨기고 감춰 두고 싶었다. 그게 얼마 후 있을 두 사람의 약혼식 날이 될지, 결혼식 날이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해서 이수가 충격을 받고 자신에게 화를 낼지언정, 그동안 쌓인 정으로나마 자신을 버리지만 않아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재희는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 내며 고개를 돌렸다. 리빙 룸에 있는 욕실과 달리 침실에 딸린 욕실은 한쪽 벽면이 통째로 유리였다. 그 너머로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서울숲이 내려다보인다.

요즘 재희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흔한 말로 절연이다.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가족들, 특히 부모에 대해서 큰 불만이 없었다. 보고 배운 것들, 그들의 말을 따르고 고개를 숙이고 자라 온 시간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수를 통해 행동의 자유를 만끽하고 난 후로는, 자신이 그 안에서 병들어 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재희는 하루라도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

부모의 부재는 개의치 않았으나─사실 이것이 괜찮다는 것이야말로 정말 괜찮지 않은 문제였다─그들의 지원이 끊긴다는 것은 재희가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르바이트 한 번 안 해 봤다. 양말 한 짝까지도 차대범과 성미희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산 것이었다. 자신에게서 부모를 빼면 정말 몸뚱어리 말고 남는 것이 없었다. 재희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또 바보같이 살아왔는지 깨달았다.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바쁜 동기들을 보면서 힘들겠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를 떠올리니 그들이 대단하고 또 멋져 보였다.

사실 차재희는 고작 스물한 살이었다. 부모에게서 지원을 받는 것도, 자립하는 것도 평범한 일이었지만 재희는 그들의 품 안에 안주하며 현실을 모르고 살아온 저 자신을 멍청하다고 자학했다.

사천 국제 대학교는 시설과 교수진에 비해 입학 시 성적 커트라인이 높지 않은 만큼 등록금이 무척이나 비쌌다. 집을 나와 아르바이트를 하며 성적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장학금을 탈 수도 없고, 장학생도 아니었기에 1년에 수천이나 하는 학비를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이수를 먹여 살리려면 그래도 졸업장은 따야 했다. 결국 선택지가 하나뿐이었다. 졸업까지 그들의 그늘에서 죽은 듯 버텨야 한다는 사실이 재희의 발목을 붙잡았다.

족쇄를 찬 사람처럼 무기력하게 욕조에 기댔다. 졸업까지 2년 6개월. 그 시간이 정말로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며칠 전까지는 부모와 연을 끊으려 하는 자신이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성미희의 말대로 자신이 입고 먹고 자는 모든 것이 그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었기에, 안 해 본 것 없이 풍족하게 자라 온 것은 사실이었기에, 고작 정략결혼 때문에 그들을 버리려는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뇌해 봐도 답은 하나였다.

성미희와 차대범이 자신에게 해 준 것에 부채감을 느낄지언정 고마움은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많은 것을 주었지만, 그중에는 재희가 받고 싶지 않았던 것들도 더러 있었다.

자유를 억압하는 틀, 상처가 되는 말, 재희의 자아를 죽이고 병들게 한 문장들. 이제는 그것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함부로 규정짓지 않았으면 했다. 그저 서이수가 보는 ‘차재희’로, 온전한 인간으로만 남고 싶었다.

“……뭐야.”

문득 들려온 허스키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언제 들어온 건지 피곤에 절은 이수가 문간에 서 있었다. 그의 사타구니로 향하는 시선을 가까스로 끌어 올렸다. 잔뜩 찌푸려진 미간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인다. 혹시라도 관계 도중 있었던 일 때문에 화를 낼까 봐, 재희는 최대한 예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일어났어요, 선배?”

“어…….”

이수는 재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집에 간 줄 알았는데……. 샤워 부스로 들어가는 찰나에 귀 끝까지 열이 올랐다. 민망해 죽어 버릴 것 같았다. 무슨 노래 제목도 아니고, 섹스하면서 더 세게, 빨리, 거칠게, 그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씨발…….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술이라도 마셨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맨정신으로 그랬다는 게… 참. 서이수, 이 미친 새끼.

레버를 돌리자 샤워기에서 김이 피어오를 정도로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수는 물을 맞으며 후들거리는 다리로 벽에 몸을 기댔다. 전신이 밟힌 것처럼 욱신거렸고, 목도 아팠다.

애널도 얼마나 부었는지 걸음을 걸을 때마다 쓰라린 것이 느껴졌다. 섹스 두 번 했다간 병원에 실려 가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쉬는데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뜨니 샤워 부스의 문을 잡고 선 차재희가 보였다. 들어가도 돼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단정한 얼굴이 어쩐지 풀 죽어 보였다. 왜지. 의아함을 느낀 이수가 그를 올려다봤다.

“아!”

샤워기 아래로 들어온 재희가 비명을 질렀다. 열이 많아서 늘 미지근한 물로 씻는 그에게 이수가 틀어 놓은 온수는 고문처럼 느껴질 정도로 뜨거웠다. 재희의 반응에 이수는 레버를 살짝 돌렸다. 여전히 뜨끈하지만 참을 수 있을 정도의 온도였다.

빗방울처럼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했다. 흠뻑 젖은 창백한 얼굴이 말도 못 하게 예뻤다. 재희는 조심스레 그를 끌어안았다.

“선배.”

“왜.”

“키스해도 돼요?”

눈을 몇 번 깜빡인 이수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침부터 개소리를 지껄여. 어쩐지 그렇게 화를 낼 것만 같은 표정이었는데.

이수의 혀가 재희의 입술 위를 거닐었다. 나뭇잎에 맺힌 물방울을 핥듯 정성스럽게 빨더니 완전히 살을 맞대 왔다. 두 입술 사이로 작은 틈이 생겼다. 그곳으로 물인지 타액인지 모를 액체가 줄줄 흘렀다. 재희는 눈을 감은 채 이 믿지 못할 행운을 받아들였다. 아침부터 서이수에게 키스를 받다니, 오늘 해가 서쪽에서 뜬 게 틀림없었다.

입맞춤이 계속되는 동안 밀착된 신체의 곡선을 따라 이수의 손이 움직였다. 재희의 단단한 가슴팍과 허리를 더듬더니, 탄탄한 엉덩이를 움켜쥔다.

아직도 포기를 안 한 건가. 순간 차오르는 위기감에 재희는 이수의 목덜미로 입술을 내리는 척하며 하반신을 뒤로 뺐다. 다행히도 이수는 더 이상 그의 뒤를 노리지 않았다. 가는 목덜미에 잘근잘근 잇자국을 낸 재희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어 올렸다. 수증기에 숨이 막혔다.

“물이 너무 뜨거워요.”

“아……. 다 씻었으면 나가 있어.”

“천천히 나와요.”

“어.”

달콤한 키스가 거짓이었던 것처럼 그의 말투는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재희는 이수의 귓가에 깊이 입 맞추고는 밖으로 나왔다. 욕실 옆에도 작은 드레스 룸이 있었다. 몇 벌 되지 않는 실내복 중에서 재희는 검은색 티셔츠와 긴 트레이닝 바지를 꺼내 들었다.

옷을 입고 침대 가로 다가간 재희가 탄식했다. 방이 엉망진창이었다. 한숨을 쉬며 베갯잇부터 시트까지 침구를 걷어 냈다. 다행히도 방수 시트였는지 매트리스는 멀쩡했다.

비위생적인 천 뭉치를 똘똘 뭉쳐 침실을 나섰다. 세탁실로 가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가사 도우미가 재희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보는 남자에 의아한 기색이었으나 상관할 일은 아니라고 여겼는지 빨랫감을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극구 거절하며 세탁기에 직접 시트를 집어넣었다.

빨래를 돌리고 나온 재희는 이수가 나오길 기다리다가 테라스로 나갔다. 리키는 문율이 데리고 있다고 했고, 청소도 딱히 할 게 없었다.

테라스 한편에 놓인 큼지막한 아치형 선베드에 몸을 눕혔다. 평소보다 늦게 잤는데 일찍 일어나기까지 해서 그런지 딱 죽을 맛이었다.

그늘에 누웠지만 여름을 듬뿍 담은 바람은 눅눅하고 뜨거웠다. 곧 7월이었다. 한증막에 온 기분을 느끼며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청담동 본가에 머무르게 된 날부터 레오를 돌봐 주고 있는 강주현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강주현

ㅊㄹㅇ가 나 깨뭄ㅡㅡ

00:10

강주현

[사진]

[사진]

3:01

강주현

소파 새로 사놓고 가라 이 개새기야..

3:02

레오가 발톱으로 가죽 소파를 죄다 뜯어 놓은 모양이었다. 미안하단 말을 남기고 며칠만 더 부탁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야행성인 강주현은 잠든 건지 답장이 없었다. 대화 목록으로 돌아간 재희는 어쩐 일로 차재하가 보낸 메시지도 확인했다.

재하

형, 별일 없지?

4:27

재하

어머니가 아직도 그 소리 해?

4:28

7:12

무슨 소리?

이해할 수 없어 되물었더니 곧장 답장이 왔다.

재하

결혼 말이야

7:13

7:14

그건 왜?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재하

어떻게 신경을 안 쓰냐? 하여튼 알았어.. 너무 걱정하지 마.

7:15

7:16

너야말로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왜 그래?

7:17

재하야?

재하

형, 내가 형 사랑하는 거 알지?

7:19

뜬금없는 말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재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차재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방금까지 메시지를 보내 놓고 전화는 받지를 않는다.

어쩐지 수상한 느낌에 메시지를 보내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술을 마셨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대화 창을 나와 버렸다.

메신저에는 읽지 않은 메시지가 아직도 수천 개 쌓여 있었다. 단톡방을 모두 나가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메시지를 전부 읽음으로 처리했다. 메신저를 끄기 전 마지막으로 한주연이 보내 놓은 것을 확인했다.

한주연

어제 유진 씨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급한 일이 뭔진 모르겠지만 잘 해결했길 바라요 ^^!

19:07

한주연

재희 씨 덕분에 좋은 동생 만난 것 같아요 : ) 고마워요! 생각 정리되면 연락주세요~!

22:02

성격 좋은 신유진이 한주연과 어울린 모양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나쁜 사람이 아니어서. 그녀의 부탁을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부디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을 찾길 바랄 뿐이었다.

선견 쪽에서 혼담을 물리면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까다로운 성미희가 그래도 자식을 땡처리하듯 치워 버릴 리가 없었다. 새로운 상대를 구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니 졸업 때까지 한두 번만 더 버티면 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재희는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지만 혹시라도 이수가 부모에게 휘둘리는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할까 봐, 나중에 빈털터리가 된 자신을 싫어할까 봐 무서웠다.

기분이 착잡해졌다. 담배를 찾아 빈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재희는 옆에 놓인 테이블 위에서 붉은색 담뱃갑을 발견했다. 이수가 놓아둔 것이었다. 망설이다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평소 피우던 것보다 두 배는 독한지라 한 모금 빨자마자 눈물이 핑 돌았다. 만 하루만의 니코틴이라 그런지 머리도 어질어질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기분이 풀어지는 듯한 느낌에 재희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덜 마른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리고 있는데 발소리가 들렸다.

“뭐 해, 여기서.”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입에 물고 있던 것이 사라졌다. 눈을 뜨니 반쯤 타들어 간 연초가 이수의 입술 사이에 물려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숨을 깊이 들이마시더니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다.

꼭 석고로 만든 천사 같았다. 언제나처럼 무덤덤한 얼굴인데도 눈빛은 따스하게 느껴졌다. 재희는 그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풀썩, 선베드에 힘없이 쓰러진 이수가 무슨 짓이냐는 표정으로 재희를 쏘아봤다. 재희는 그가 화를 내지 못하도록 눈을 접어 웃으며 물었다.

“궁금한 거 있어요.”

“뭐.”

“어제 선배가 한 말, 진짜예요? 나를… 갖겠다는 말.”

눈을 찌푸린 이수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팔짱을 낀 채 쿠션에 등을 기대더니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어쩐지 지랄의 전조처럼 느껴져서 재희는 긴장한 채로 그를 바라봤다.

“왜 그런 걸 물어?”

“그냥……. 궁금해서요. 어떤 상황이 와도 나를 놓지 않을 건지.”

“무슨 상황이냐에 따라 다르겠지.”

심드렁한 목소리가 조금 실망스러웠다. 혹시 홧김에, 충동적으로 한 말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지. 지금은 그렇게 말한 걸 후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괜히 물어봤을까. 물어보지 말걸. 시무룩해진 재희가 입술을 깨문 채 눈알을 굴렸다.

이수는 재희를 바라보다가 혀를 찼다. 손을 뻗어 깨물린 입술을 문질러 빼 주고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에게서 느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확히 뭐가 궁금한 건데.”

“만약에… 제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렇게 물어 놓고 슬슬 눈치를 본다. 저런 상황이 온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도망칠 것이었으므로 실제로 발생할 일 없는 가정에 불과했다. 하지만 같이 밤을 보냈음에도 불안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 어리석은 물음에 화를 내도 좋으니, 재희는 자신을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 이수가 자신을 절대 놓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싶었다.

그 질문에 지그시 재희를 바라보던 이수는 곧 코웃음을 쳤다.

“네 부인은 실종 신고를 해야 할 거야.”

“……무슨 소리예요?”

“널 가둬 두겠단 소리야. 목줄을 채워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정말로 좋았다. 이수가 자신을 감금해 준다면 정말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지금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개소리 지껄이는 거 보니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이제야 재희는 사람들이 ‘피폐물’에 열광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가둬 놓고 기르겠다는 소리가 저렇게 기껍게 들릴 줄이야.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끼며 이수를 끌어안았다. 이수의 팔을 들어 자신의 허리에 둘러놓고, 그의 가슴팍에 뺨을 맞댄 채로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만약에, 내가 바람피우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건 좀 아니었나. 재희가 말을 무르려고 할 때였다. 이수에게서 음산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변호사를 알아볼 거야.”

“…….”

“살인죄 형량을 최대한 낮춰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누가 죽는 건데? 상대방? 아니면 나? 등골이 찌릿해진 재희는 굳이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콩콩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재희가 중얼거렸다. 선배 좀 미친 것 같아요. 그 말에 이수는 가볍게 웃었다.

“잘못 걸린 것 같아?”

“……아니요. 좋아요.”

허리에 둘렸던 손이 위로 올라온다. 재희의 어깨를 꽉 끌어안은 이수가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흩어지는 머리칼 사이로 달아오른 얼굴이 보였다.

새까맣고 순진한 눈망울. 언제부터 이렇게 예뻤지. 재희를 내려다보던 이수는 이내 홀린 듯 그에게 키스했다.

가정을 이루면 자식에게 자신이 받지 못한 사랑을 쏟아붓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꽉 찬 어린 시절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이제 그 꿈은 요원해졌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랑을 쏟을 대상이라면 차재희 하나로 충분했다.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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