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4권) (10/15)

다정하게 불러줘요, 선배

4

이은규

다정한 선배 (1)

뉴욕, 18살, 서이수.

내려다보는 시선이 칼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동정과 연민으로 얼룩진 의료진의 표정은 이수가 방금 들은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것처럼 거세게 박동함과 동시에 죽음의 기억이 물밀듯 밀려들어 온다. 이수는 시트를 움켜쥔 채로 가쁜 숨을 토해 냈다. 비쩍 마른 손등 위로 창백한 핏줄이 돋았다.

“이수야, 치료만 하면… 괜찮아질 거니까…….”

“나가, 다 나가요.”

“이수야.”

“나가라고!”

소리를 지르고 손에 잡히는 모든 걸 내던진다. 절망에 물든 낯은 금세 분노로 일그러졌다. 바닥으로 던져진 화병이 깨져 나갔다. 폴대가 쓰러지며 터져 버린 수액의 냄새가 코를 찔러 왔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먼저 병실을 나갔다. 엉망으로 된 병실에는 이수와 그의 부모만이 남아 있었다.

비릿한 숨을 토해 낸 이수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냥 어지러운 거라고 생각했는데, 단순히 피곤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왜 나를 가만두지 못해. 왜 자꾸 죽음으로 내몰려야 해.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내가. 뭘 더 어떻게 하라고, 여기서.

“알고… 있었어요?”

버티는 것도 디디고 설 곳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수는 그 작은 몸 하나 의지할 곳이 없었다.

힘들 때 반추할 기억도, 생의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대상도, 뛰어내리고 싶을 때 말려 달라 찾아갈 이도 없었다.

심장이 멎을 때마다 텅 빈 유리병 같은 삶은 산산조각 났다. 의사들은 그것을 억지로 끌어모아, 이어 붙여, 이수를 다시금 살게 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목숨을 건진 채로 이제야 겨우, 빈 공간을 채울 기회를 얻었나 싶었는데…….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 죽음은 또다시 이수의 발목을 붙잡았다.

차라리 병원에서 나가지 않았더라면 희망을 가질 일도, 이토록 절망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익숙한 듯 체념하며 치료를 받고 운명에 몸을 내맡겼을지 몰랐다. 하지만 병실 밖을 나섰던 몇 개월간의 기억이 이수를 무너트렸다.

허무가 정신을 장악했다. 자신은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죽음을 염원한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가혹할 수는 없었다.

세상이 속삭이고 있었다. 너는 살아서는 안 된다고, 너의 발버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이렇게 될 거, 알고 있었죠?”

메마른 목소리가 침묵을 찢었다. 아무런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충분했다. 천수인과 서훈은 이수의 절망을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퇴원을 앞두고 들떠 있는 아들 앞에서 그들은 차마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10년이 넘도록 본 적 없던 미소를 짓는 아들에게 백혈병의 징조가 보이니 병원에 좀 더 머무르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은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부모의 면피는 죄악으로 돌아와 아들의 숨통을 짓눌렀다.

퇴원 후 이수는 주기적으로 검진을 받으라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았다. 병원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이식한 심장에도 아무 문제 없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괜찮을 거라고 여겼다.

몇 달간 여행을 다니며 엄청나게 피곤했지만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으니까. 숨이 차오를 때까지 걸어 본 것도, 바닷물에 몸을 담가 본 것도, 밤을 새워 가며 하늘을 바라본 것도 처음이었으니까 그토록 힘든 게 당연한 줄 알았다.

이수는 매일같이 전화가 올 때마다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다. 입맛이 떨어지고 출혈이 일기도 했지만 원래 그런 건 줄 알았다.

천수인과 서훈은 이수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가 병원에 실려 갔다는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그랬다.

“네가 퇴원할 당시에는 확진된 게 아니었단다……. 그저, 그럴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을 뿐이야…….”

천수인의 말에 이수가 냉소를 내비쳤다. 서늘하게 식은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다. 창백해서 곧 없어져 버릴 것처럼 희미한 채로 그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자신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은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 가능했다. 부모는 그저 아들과 좌절의 순간을 공유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뱉은 말에 낙담하는 아들을 보며 가해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 싫었던 것이다.

결국은 이렇게 될 거였는데.

“……치료 안 받아요, 나가요.”

“이수야!”

“나가라고 했잖아요!”

소리를 지르자 천수인이 몸을 떨었다. 서훈은 딱딱히 굳은 표정으로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이수를 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는 제 부인을 데리고 사라졌다.

닫혀 버린 문 너머로 다투듯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것도 듣기 싫어 이수는 베개를 들어 머리를 감쌌다. 이대로 숨이 막혀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회장님!”

“여긴, 어떻게…….”

이수가 깨어난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무렵이었다.

밖이 시끄러웠다. 누군가 찾아온 것 같았다. 닫히다 만 문틈 사이로 낯선 목소리들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에 와 닿는 말은 없었다. 그저 무감했다. 그 어떤 것도 감흥이 없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이수는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창가로 다가가 섰다. 나풀거리는 환자복이 달빛을 받아 희게 빛난다. 이수는 창에 손을 짚은 채로 도시를 내려다봤다. 아니, 세상보다 더 가까운 곳. 까마득한 아래를 보았다. 10초? 5초? 떨어지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굳이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이수는 그 순간 죽기로 마음먹었다. 18년 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심장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넝마가 된 채 살아나고 싶지 않았다. 만일 지금이 아니어도, 그들의 말대로 항암 치료가 성공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 그러니 상관없었다.

이수는 유리병 같은 삶을 내던지기로 결심했다.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도록, 그러나 모래알처럼 흩어져 세상을 부유하고 싶었기에.

병실은 창이 활짝 열리지 않았다. 이수가 지나갈 만큼의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옥상으로 가야겠다.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어…….”

문가에 낯선 남자애가 서 있었다. 짧은 머리칼에 이수보다 큰 키, 딱딱히 굳은 얼굴을 주시하던 이수는 그에게 누구냐고 물어보려다가 관뒀다. 아무 상관 없는 일 아닌가. 그를 방문한 불청객이 누구이든 간에, 이제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수는 그 이름 모를 남자애를 스쳐 병실을 나왔다. 휴게실 쪽에서 들려오는 천수인과 서훈의 목소리를 피해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밤이 깊었기에 마주치는 사람은 없었다. 옥상까지는 겨우 두 개 층만 올라가면 되었다. 빠듯하게 차오르는 숨을 느끼며 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감쌌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이수는 그 미풍에서 자유를 느꼈다.

망설임은 없었다. 난간을 타고 오른 이수는 두 발로 세상 앞에 섰다.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과 꺼지지 않는 불빛, 두 눈을 가득 메운 삶의 풍광에서 이수는 제외된 상태였다. 녹아든 적 없었기에 마지막 순간에도 어울리지 못했다.

이수는 괴리감이 느껴지는 풍경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황홀한 자극에 사로잡혔다.

세찬 바람에 몸이 휘청였다. 중심을 잃을 때마다 이수는 전에 겪어 본 적 없는 짜릿한 감각을 경험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전율은 이미 죽어 버린 듯했던 정신세계에 벼락같은 빛을 뿌렸다. 이수는 그 순간을 음미하며 한참 동안 난간을 거닐었다.

“이수야!!”

옥상 문을 열고 나타난 천수인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이수는 기묘한 흥분감에 휩싸인 채였다. 죽음과 줄다리기를 하는 느낌은 지독한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이수는 제 앞에 무릎 꿇은 부모를 바라봤다.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와 닿지 않았다. 어째서 이렇게 쉽게 포기하려 하느냐는 말에는 고개가 기울어졌다.

난 태어났을 때부터 혼자였어. 그 말에 신유진은 대답했다. 처음부터 혼자인 사람은 없어, 응당 네 옆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너를 방치한 것뿐이야. 그렇게 말했다.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당신들이잖아. 그런데 왜 울어? 이 세상에 마음 붙일 곳 하나 없게 만든 게 당신들인데, 왜? 내 삶의 이유가 되지 못한 당신들을 탓해. 나는 잘못이 없어.

이수는 허공을 딛듯이 한 발을 들어 올렸다.

“안 돼!!”

세찬 강풍과 함께 전신이 뒤흔들렸다. 여태까지 불어온 바람 중 어느 때보다도 거셌다. 끝이 코앞이었다.

그러나 이수는 떨어지지 않았다. 머리를 망치로 내려치는 듯한 카타르시스와 긴장감에 휩싸인 채 제 두 발만 내려다보았다. 내가 있을 곳은 여기라는 듯, 생에 집착하며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식은땀으로 젖어 든 두 손이 차게 식어 내린다. 이수는 깨달음에 몸서리쳤다.

“나랑 내기를 해요.”

승부였다.

“만약 내가, 여기서 살아 나간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그게 무엇이든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해요.”

버틴 게 아니었다. 자신은 여태까지 죽음과 기나긴 싸움을 해 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또한 승리했다. 의사들이 도왔든, 심장을 갈아 끼웠든 간에 살아남은 것은 자신이었다. 이긴 것은 자신이었다.

이수가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각인된 허무는 그 사실을 주지시켰다. 그러나 허무는 이수를 함락시키기 위한 죽음의 끄나풀이었다.

“내가 그 잘난 서일을 갖는다고 해도, 평생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해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두겠다고 약속해 줘요.”

지금, 이 순간을 버티면 승리한다. 허무에 잠식되지 않고 살아남으면 게임은 계속된다. 끝없이 이길 수 있었다.

“내 손으로 목숨을 끊는다고 해도, 그때는 나를 말릴 수 없을 거예요.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오로지 내 선택이어야 해요.”

시간이 흘러서 기어코 죽음이 나를 데리러 온다면, 그 전에 내가 먼저 도망쳐야지. 그럼 내가 이기는 거잖아.

그렇게 이수는 살아남았다.

* * *

찬 바람이 느껴졌다. 또 에어컨이다. 범인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리키.”

멍하니 눈을 뜬 이수가 잠긴 목소리로 리키를 불렀다. 그러나 평소같이 왕왕거리는 대답이 아니라 옆에서 뚱한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일어나자마자 리키부터 찾아요?”

“……너.”

휙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남자의 존재를 깨달았다. 이수의 팔을 베고 누운 차재희는 그를 한껏 끌어안고 있었다. 어쩐지 어깨가 아프더라. 저리 꺼져 보라고 몸을 꿈틀거렸지만 재희는 더 힘을 주어 그를 껴안았다. 결국 벗어나는 것을 포기하고 몸에 힘을 풀었다.

그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자신이 쓰는 것과 같은 바디 워시지만 차재희 특유의 체취가 섞이면 한결 포근하고 편안한 느낌이 되었다. 부드러운 머릿결에 코를 파묻고 있던 이수가 순간 콜록거리며 기침을 했다. 에어컨을 대체 언제 틀었는지, 목이 부은 것처럼 욱신거린다.

차재희를 갖게 된 지 사흘째. 그 후로 관계는 없었지만 어쨌든 그가 이수의 집에 머무른 것도 사흘째였다. 평생을 혼자 살아온 탓에 누군가가 집에 계속 함께 있는 것이 영 낯설었다. 존재를 잊고 있다가 화들짝 놀란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이수가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 하나 있었다.

차재희랑 정말, 생활 패턴이 더럽게 안 맞는다. 재희를 끌어안아 으슬한 몸을 추스르며 이수가 물었다.

“너, 집에 안 가냐?”

“선배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하루씩 더 있기로 했는데, 지금 그 소리 열 번째 하는 거니까 다음 주에 갈 거예요.”

“지랄 말고…….”

“목소리는 왜 그래요? 감기 오나?”

너 때문이잖아, 이 새끼야. 그렇게 짜증을 내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풀 죽은 모습이 귀엽긴 하지만 괜히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잘 켜지 않는 이수와 달리, 차재희는 에어컨을 틀지 않으면 48시간 동안 산책을 나가지 못한 리키처럼 온몸을 늘어트리고 녹아내리곤 했다. 그 모습이 보기 안쓰러워 에어컨을 틀었더니 재희는 팔팔해지고 이수는 골골거렸다.

자는 시간도 완전히 달랐다. 새벽까지 게임을 하고 늦게까지 자는 이수와 달리 재희는 학기가 끝났는데도 12시에 자고 6시에 일어났다.

이수는 술을 마신 날이 아니라면 잠귀가 밝아 예민하게 반응하곤 했는데, 차재희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새벽 4시에 잠들어 피곤한 상태로 6시에 꼼지락거리는 기척을 느끼고 깰 때마다, 그를 한 대 쳐서 기절시켜 버리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또 사람이 왜 그렇게 붙임성이 좋은지. 이수는 김성희와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며 요리를 하는 차재희를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새끼가 어디서 눈웃음을 쳐.

같이 있으며 짜증 났던 부분을 말하자면 끝도 없다. 이수는 물건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늘어놓는데 재희는 그 꼴을 보지 못하고 당장 쓰지 않는 물건들을 서랍에 정리해 버렸다.

그냥 처박은 거면 왜 이딴 짓을 해 놓느냐고 화라도 낼 텐데, 어찌나 깔끔하게 정리해 두었는지 가사 도우미가 입주 가정부를 들였느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사용한 건 바로바로 치워야 하는 성격이나, 쓰레기를 방치하지 못하고 곧바로 정리를 한다거나, 시도 때도 없이 스킨십을 해 온다거나─그래도 이건 나쁘지 않았다─, 하여튼 할 말이 많았지만 이수는 참을 인을 새겼다. 차재희 한정으로 발휘되는 인내심은 그래도 제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왜 나 말고 리키 먼저 찾았냐니까요?”

아픈 목을 부여잡고 있는데 재희가 툴툴거렸다. 어지간히 서운했나 보다. 이수는 좀 놀려 볼까 하다가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아 그냥 재희의 목덜미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부드럽지만 단단한 살결이 좋았다. 뭔지는 몰라도 불쾌한 꿈을 꾼 것 같은데, 잔상처럼 남았던 찝찝함은 어느새 가시고 없었다. 등을 어루만지는 손길을 느끼며 이수가 입을 열었다.

“키스해.”

“말 돌리지 마요.”

그렇게 중얼거려 놓고 재희는 고개를 꺾어 이수에게 입을 맞췄다. 도무지 이길 수가 없다. 어젯밤에는 한껏 짜증을 내며 이럴 거면 집으로 꺼지라는 말에 화가 났다가, 이수가 한숨을 쉬며 이리 와, 하고 던진 한마디에 쪼르르 달려가 버렸다.

서이수가 안아 준다는데 어떻게 거절해? 서이수가 키스하라는데 어떻게 무시해? 절대 못 한다.

“하아. 선배…….”

쪽쪽거리는 소리가 길게 이어지고 입술이 비벼졌다. 이수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로 재희를 받아들였다. 코끝에 스치는 체취가 익숙하다. 젖은 살을 마찰하는 느낌도, 입 안에 제 흔적을 묻히듯 깊숙이 파고드는 혀도 몽롱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수면으로 떠올랐던 정신이 침잠하듯 파고든다.

물속에 떠 있는 것처럼 먹먹한 와중에 질척거리는 소리만 또렷하게 들렸다. 점차 거칠어지는 몸놀림에 자연스레 아래가 달아올랐다. 배를 찌르는 무게감을 느끼며 이수는 슬며시 눈을 떴다. 새까만 눈동자가 그를 직시하고 있었다. 음습한 빛을 숨기지 않은 채로, 입술을 살짝 떼어 낸 재희가 이수에게 속삭였다.

“아직이에요……?”

선명한 의도가 담긴 말에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흘 동안 두 번째 관계를 피하던 중이었다. 그러니까 무슨 마음의 준비냐 하면, 차재희에게 박을 자신이 없었다는 뜻이다.

섹스는, 어쨌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좋았다. 정말로 황홀한 쾌감, 뇌가 녹아내릴 것처럼 뜨거운 쾌락에 이수는 매료되었다. 그걸 차재희도 느껴 보았으면 했다. 또한 남자의 자존심을 걸고 재희를 깔아뭉개고 싶기도 했고.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정말 미치도록 아팠던 것도 사실이었다. 고통은 희미해졌으나 처음 재희가 안을 파고들었을 때 느꼈던 감상은 명료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항암 치료보다 더 아파. 그냥 죽어 버리는 게 낫겠다. 몸이 갈라질 것 같아. 찢어지면 어떡하지. 뭐 그런 끔찍한 감상이 대부분이었고, 그렇기에 이수는 재희를 고통스럽게 만들기 전에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어쨌든 재희는 기다리고 있었다. 서이수가 제 뒤를 노리고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천천히 해요. 괜찮으니까.”

“어…….”

쪽, 쪽, 입꼬리부터 귓가까지 입을 맞춘 재희는 이수의 귓불을 살짝 깨물고는 몸을 일으켰다. 점심시간도 됐고, 이수가 일어날 때도 되어서 식사를 준비해 놓고 깨우러 왔던 것이었다. 잘 때 옷을 벗고 자는 이수의 습관 때문에 본의 아니게 시간을 지체하긴 했지만 어쨌든 오늘은 꼭 밥을 먹이고 말리라 다짐했다.

“점심 먹게 씻고 나와요.”

재희가 사라지고 이수가 몸을 일으켰다. 맨몸으로 거실까지 나가기엔 너무 추워서 침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 부스에서 뜨거운 물로 씻고 나니 으슬으슬한 느낌이 좀 가셔 있었다. 이러다가 한번 호되게 앓을 것 같은 느낌에 이수는 침실 에어컨의 리모컨을 숨겨 버렸다. 차재희가 찾지 못하도록.

리빙 룸으로 나오니 레오와 리키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어제 차재희의 친구가 데리고 온 차레오는 제 주인을 닮아 붙임성이 정말 좋았다.

서로 냄새를 맡는 듯하더니 리키와 레오는 금세 친구가 되어 집 안을 뛰어다녔다. 레오가 우다다거리면 리키가 따라가고, 리키가 뛰면 레오가 그 뒤를 쫓았다. 두 녀석을 골고루 예뻐해 준 후에 이수는 식탁에 앉았다. 재희가 아침 일찍부터 공들여 준비한 식사가 놓여 있었다.

간장으로 간을 한 도미 조림과 가벼운 토란국, 각종 반찬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속이 얹히는 느낌이었다. 별로 먹고 싶지 않은데…….

“먹어 봐요.”

기대감 어린 얼굴을 보고 이수는 한숨을 삼켰다. 재희가 발라 준 생선 살을 지단과 함께 먹고, 국에 만 밥을 두 숟가락 먹은 후에 수저를 내려놨다.

까만 눈썹이 팔자로 휘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안 들어갔다. 너 먹어. 턱을 괸 이수는 물을 마시며 재희가 밥을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우물거리며 식사를 끝마친 그가 묻는다.

“나갔다 오면서 뭐 사다 줄까요?”

“드디어 가냐?”

“……오늘 그, 한주연 누나 만나러 가요.”

이수의 눈매가 잔뜩 찡그려졌다. 그랬지, 참.

갑자기 짜증이 치밀었다. 그때 백화점에서 보았던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부모님의 소개로 만났다는 것을 듣고 안심했다가 스물한 살짜리한테 선을 보게 하는 미친 인간들이 어디 있냐고 화가 났다가 그래도 장인 장모 될지 모르는 사람들이라 참았다.

어쨌든 다시 만나지 말라고 말했고, 알았다고 하길래 잊어버리려고 했었는데. 어제저녁에 재희는 한주연과 나눌 이야기가 있다며 오늘 그녀를 만나고 오겠다고 말했다. 전화로 하라고 했지만 예의가 아니라나.

어제 다투었던 일이 떠오르니 또 기분이 착, 착,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수는 말없이 물병을 내려놓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양치질을 한 후에 컴퓨터 앞에 앉아 담배를 빼 물었다. 탁,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이자마자 깊이 빨아들였다. 한 모금에 절반이나 타들어 간 연초가 하얀 재를 흩뿌렸다.

[시스템] 라테르에 접속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길드] 타격 : 아 씨팔만오면딱인데

[길드] 힐러 : 안녕하세요 ^_^

[길드] rnid : 길마도 양반은못됨ㅋㅋㅋㅋㅋㅋㅋ

[길드] 타격 : ㅅㅂ천민새끼 ㅋㅋㅋ

[시스템] 타격 님이 5CPR 님께 파티를 신청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N)

[길드] 5CPR : ?

[길드] 타격 : 상레 ㄱ 딜러 1자리남음

접속하자마자 레이드를 가자고 파티를 걸어왔다. 어차피 할 일도 없었던지라 이수는 흔쾌히 수락 버튼을 눌렀다.

[시스템] 5CPR 님이 공격대에 참가했습니다.

[시스템] 타격 님이 5CPR 님에게 공격 대장 권한을 위임합니다.

[길드] 5CPR : 뭔데

[길드] 타격 : 나 마이크 고장남 ㅠㅠ

[길드] 5CPR : 병신이 헤드셋을 몇개를 씹어처먹는지.

타격을 욕하면서도 이수는 헤드셋을 연결하고 파티원을 둘러봤다. 길드원 몇에 오다가다 아이디만 몇 번 본 고인물 유저들이 섞여 있었다. 이수가 공격 대장(공대장)을 맡자 유저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씨팔의 리딩이라니……. 아시아 서버에 널리 알려진 인성질 대표 주자 5CPR의 공격대는 까다롭기로 악명이 높았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한숨과 욕설이 난무하는 지옥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깔끔하게 리딩하는 공대장도 드물었기에 다행히도 이탈자는 없었다.

“5분 후 출발. 늦으면 추방.”

이수는 물을 한 병 갖다 놓고 담배를 빼 물었다. 재희는 옷을 갈아입는지 드레스 룸에 들어가 한참을 나오질 않았다.

아무거나 입고 가지 뭘 골라. 한숨 한 번에 연초가 빠르게 타들어 간다. 5분이 지나고 막 던전으로 진입해 레이드를 시작할 때였다. 모니터 너머로 재희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이수는 순간 오더를 내리는 것도 잊고 그를 노려봤다. 마이크를 끄고는 재희에게 쏘아붙였다.

“너 지금 맞선 보러 가냐?”

“……네?”

재희가 당황해서 반문했다. 맞선이라니. 집에서 가지고 온 것 중에 그나마 가장 무난한 옷이었다. 그저 평소대로 검은색 슬랙스에 옅은 푸른빛이 감도는 셔츠를 입고, 소매를 조금 걷어 올렸다.

눈치 빠른 한주연이 어차피 거절할 거면 생일 선물이라도 받아 달라고 하기에 백화점에 들를 생각으로 머리를 만지기도 했다. 정말로 선을 보러 갔던 날은 아침부터 샵에서 단장을 했으니 그때와는 전혀 비교할 수 없는 몰골이었다. 재희가 의문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정장도 아닌데 왜 그래요? 아직도 화났어요?”

“내 옷 입고 가. 트레이닝복.”

“……농담이죠?”

어색하게 웃으며 던진 말에 대꾸가 없었다. 이수는 장난치는 것 같냐는 살벌한 표정으로 마우스를 클릭했다. 거대한 용 한 마리가 날아올라 유저들 앞에 선다. 마이크를 켠 이수가 오더를 시작했다. 재희는 제겐 눈길도 주지 않고 게임에 집중한 채 드레스 룸을 턱짓하는 남자를 황당하게 바라봤다.

“친구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트레이닝복을 입고 가요.”

“마이크 켰으니까 말 걸지 마.”

“…….”

이수의 시선이 모니터에 고정되었다. 피해라, 뭐 해라, 각종 스킬 이름과 게임 용어가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나직한 목소리로 유저들을 이끄는 이수는 옆에 삐딱하게 선 재희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그의 표정이 점점 심통 맞아지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레이드에 집중했다.

“90까지 맞딜하고, 씨발!”

순간 티셔츠 위로 닿는 손길에 이수가 욕설을 터트렸다. 곧바로 사과하고 딜링에 집중했으나 말랑한 유두가 꼿꼿해질 때까지 가슴께를 간질이는 손가락이 있었다. 차재희였다. 하지 마라, 마이크에 들릴락 말락 한 작은 목소리로 이수가 으르렁댔다.

하지만 잔뜩 골이 난 재희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슬쩍 뒤로 다가간 재희가 바퀴 달린 의자를 뒤로 쭉 빼냈다. 마우스와 키보드를 놓칠 수 없었던 이수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그는 완전히 무력했다.

재희는 냉큼 의자 위에 앉은 후 다시 그에게 다가갔다. 개새끼야, 하지 말라고. 두 번째로 아르릉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코웃음 친 재희는 이수를 끌어당겨 제 무릎 위에 앉혀 놓고 그가 게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힐러 희생, 쓰고… 자부.”

이를 악문 채 오더하는 목소리가 순간 흐트러졌다. 뜨거운 손가락이 유두와 아래를 동시에 더듬었다. 이수는 치솟는 흥분을 감당하지 못하고 좆을 세웠다.

미친 또라이 새끼, 진짜.

속으로 욕을 씹었지만 멈추고 쫓아내지도 못했다. 5CPR 공대에 리트라이란 없다. 자신이 공격 대장을 맡은 이상 하늘이 무너져도 한 번에 클리어해야 했다.

이수가 독기를 품은 채 게임을 지속하는 동안 재희는 마음껏 그를 유린했다. 티셔츠를 들춘 손이 판판한 가슴을 모아 주물럭거리더니 유두 끝을 아프지 않게 긁어내렸다. 이수가 허리를 뒤틀며 피하려 했지만 재희는 그 짓거리를 멈추지 않았다.

드로어즈 안으로 들어간 손이 분홍색 페니스와 고환을 동시에 움켜쥐었다. 젖꼭지 좀 만졌다고 발딱 선 주제에,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귀여워서 재희는 이수의 목덜미를 살살 핥아 주었다. 흰 살갗 위로 바짝 소름이 돋았다.

“아, 씨발, 좀.”

─ 제가 뭐 실수했어요?

“아니, 아뇨.”

헤드셋 너머로 들려오는 고인물 유저의 대꾸에 이수가 다급하게 대꾸했다. 키우는, 개새끼가, 자꾸, 치대서요. 짧은 문장이 더 짧게 끊어져 나왔다.

재희의 단정한 손끝이 프리컴을 흘리는 요도구를 쑤셔 댔다. 찌릿한 통증과 쾌감에 이수가 신음을 삼켰다. 기계적으로 마우스와 키보드를 누르면서도 온 신경이 재희와 맞닿은 부분에 쏠려 있었다.

엉덩이 밑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존재감과 가슴을 괴롭히는 손. 탁탁, 자위하듯 제 좆을 훑어 주는 커다란 손바닥과 목덜미에 쏟아지는 숨결.

마우스를 집어 던지고 달려들고 싶은 충동이 잇따랐다. 그러나 이수는 꾹 참았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이런 하급 유혹에 넘어갈 순 없었다.

“잘 참네요, 선배.”

헤드셋을 슬쩍 들친 재희가 이수의 귓가에 속삭였다. 은근한 열기가 흘러넘치는 낮은 음성이 욕망을 들쑤셨다. 재희의 헐떡이는 숨소리를 듣고 싶다는 생각과 폴리곤 도마뱀 새끼의 모가지를 따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충돌했다.

“30에서… 하아, 딜컷하고 패턴 넘길, 게요.”

입을 열 때마다 성기에 압박이 가해지는 게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힘겹게 목소리를 짜냈지만 신음은 숨길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사정할 것처럼 극한까지 끌어 올려진 쾌감에 이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돌아 버리겠네.

[공격대] 타격 : ㅋㅋㅋ씨팔 딸치면서함?

[공격대] 타격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왜케 ㅆㅂ 헐떡거려

[공격대] 타격 : 건방지게 따맃면서1143```

[시스템] 에보네아가 타격 님의 시체를 보고 포효합니다!

[공격대] 타격 : 아..ㅈㅅㅈㅅㅈㅅㅠㅠ

이수를 의심하던 타격이 스킬 대신 1143```을 채팅에 치고 장렬히 전사했다.

“병신 새끼.”

순간 치솟는 분노에 욕을 씹는데 귓가에 웃음소리가 닿았다. 전신이 벼락에 맞은 듯 떨려 왔다. 몸을 섞었던 날을 떠올리게 하는 달콤한 숨결이 집중을 흐트러뜨렸다.

에보네아의 앞발이 캐릭터를 후려친다. 이수는 다급히 회피하며 입을 열었다.

“패턴 넘기고, 집중… 윽!”

귀두 끝을 감싸며 움직이는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고, 속도가 높아졌다. 서서히 퍼져 나가는 절정이 이수의 머릿속을 백색으로 물들였다. 아니, 아니, 아니, 잠깐만. 그러나 들이닥치는 쾌감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몸이 휘청이며 고개가 뒤로 꺾였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이수의 뺨을 재희가 살살 물었다 놓았다.

울컥울컥, 구멍을 타고 나온 정액이 재희의 손바닥에 쏘아졌다. 기다렸다는 듯 온몸을 적시는 탈력감에 이수는 혀를 깨물며 정신을 차렸다. 죽을 뻔한 5CPR을 힐러가 살려 놓았다. 다행이었다.

숨을 돌리는 동안 목덜미를 할짝거리던 혀가 위로 올라왔다. 재희는 이수의 머리칼을 잘근거리며 씹었다. 사정에도 불구하고 욕구는 가실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오히려 점차 고조되기 시작했다. 기억력 좋은 신체는 며칠 전 느꼈던 극한의 쾌감을 재현하고 싶어 했다. 다시금 일어서는 이수의 페니스를 보고 재희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대로 박아 줄까요?”

“지랄… 말자.”

─ 저요?

─ 누가 또 실수함?

이런 씨발. 헤드셋 너머로 들려오는 질문에 이수가 채팅으로 ㄴㄴ를 연타했다. 혼자 바쁜 이수를 보며 재희는 큰 소리로 웃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손안에 묻은 정액을 치덕거리며 회음부를 쿡쿡 찌른다.

하체를 움찔거린 이수가 마우스를 잡은 팔꿈치로 재희를 때렸다. 뒤진다, 진짜. 속삭이는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이 구멍 주위를 더듬었다. 치솟는 신음을 삼킨 이수는 허벅지를 꽉 모아 붙였다. 차재희가 속살거린다.

“될 것 같은데, 응? 벌려 봐요…….”

“후방, 보호막, 내가 깨요.”

이수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재희는 주름을 동그랗게 덧그리며 그의 어깨에 이를 박아 넣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책상에 엎어 놓고 쑤셔 박고 싶은 충동이 끊이질 않았다.

남들에게 들릴까 신음을 꾹 참은 채 자신을 받아 내는 이수가 보고 싶었다. 재희의 손가락이 구멍을 파고들려 할 때였다. 이수가 음산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말했다.

“이번에, 후방, 딜, 내가 박는다고.”

“…….”

“내 차례야.”

[공격대] 타격 : 아니, 하셈;; 누가 뭐라함? 왜 혼자 풀발??

[시스템] 타격 님이 에보네아의 저주에 사로잡혔습니다! 3초 안에 해제하지 못하면 공격 대원 전원에게 디버프가 부여됩니다!

[공격대] 타격 : 아.. ㅈㅅㅈㅅ

그게 단순히 공대원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재희가 슬며시 손가락을 뺐다. 아직도 포기를 안 했단 말이야……? 그때 합의한 거 아니었어?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재희가 의자를 뒤로 뺐다.

이수는 또다시 마우스와 키보드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고, 재희는 그에게 의자를 돌려준 후에 슬금슬금 리빙 룸을 벗어났다.

“차재희.”

그 무렵 레이드는 얼추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는 딱히 오더할 구간이 없었다. 마이크를 끄고는 재희를 불렀다. 얼굴이 한껏 붉어진 이수는 흥분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밝은 눈동자가 지글지글 끓고 있어서 차재희는 섬뜩함을 느꼈다.

“넌 내일 못 걸어 다닐 줄 알아.”

“……갔, 다 올게요.”

최대한 예쁘게 웃은 재희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 도망치듯 리빙 룸을 벗어났다. 이수는 레이드가 끝나고 던전을 몇 번 돈 후에 집에서 나왔다.

약국으로 가서 차재희를 아프지 않게 해 줄 각종 러브젤과 여러 형태의 콘돔을 구매해서 돌아왔다. 재희를 기다리며 게이 포르노를 흐린 눈으로 감상해 복습하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구급상자도 가져다 놓았다. 마음의 준비도 끝났다.

그러나 공격권은 이수에게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표정이 왜 그래.”

“……선배.”

그날 저녁, 현관에 들어선 재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요즘 계속 낯빛이 안 좋긴 했는데 지금은 정말 최악이었다. 이수는 놀란 채로 재희를 끌어안았다. 저보다 덩치가 큰데도 불구하고 재희는 어린아이처럼 이수에게 폭 안겨 왔다.

목덜미에 쏟아지는 숨결이 흐느끼는 것처럼 떨려 왔다. 왜, 무슨 일인데. 이수가 나직하게 물었다.

“동생이, 재하가, 미국에 있는데……. 차 사고가 나서… 크게 다쳤, 다쳤대요…….”

“얼마나.”

“머리가, 머리를 다쳐서, 지금 수술 중이라고 하는데…….”

자신이 말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정확히 인지할 수가 없었다. 재희는 울먹거리며 제가 들은 것을 설명했다.

폐차 수준으로 사고가 아주 크게 났고, 차재하는 두부 손상이 극심해서 긴급 수술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 말을 전해 준 차재우는 자신이 오래 있을 수 없으니 누군가 병원으로 당장 와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미희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차대범은 당연히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재희가 미국으로 건너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용케 설명을 알아들은 이수가 그의 등을 살살 쓸어 주었다. 차분함을 잃지 않은 채로 물었다.

“비행기 표는 끊었어?”

“형이, 재우 형이…….”

재희는 말을 잇지 못하고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수가 대신 그의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차재우가 보낸 메시지에 예약 화면을 캡처한 사진이 보였다. 열 시간도 채 남지 않은 당장 내일 새벽 비행기였다.

이수는 일단 재희를 끌고 가 소파에 앉혀 두고, 그에게 미지근한 물을 내어주었다. 한참 동안 등을 토닥여 주고 그가 더 이상 숨을 몰아쉬지 않게 되었을 때 입을 열었다.

“좀 괜찮아?”

“…….”

재희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괜찮지 않았다.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다. 모친에게 자살한다고 말했을 때 그녀가 어떤 반응을 되돌려 주었는지 얘기하던 차재하가 떠올라서, 붉어졌던 눈시울이 떠올라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럴 애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스스로를 몰랐듯 동생에 대해서도 또한 제대로 몰랐던 것 아닐까, 차재하가 안 좋은 선택을 한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밀려왔다.

하필이면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결심한 날이 떠올라서 재희는 동생에게 일어난 일에 책임감을 느꼈다. 자신이 지고 있던 짐을 대신 지게 된 차재하가 그 압박감에 목숨을 끊으려 한 것만 같아서 죄책감을 느꼈다. 차재하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하니 그럴 리가 없었음에도 그랬다.

그렇지만 이수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러나 익숙하게 내뱉어지는 말에 이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 지금 하나도 안 괜찮잖아.”

“……나, 정말.”

“개소리 말고. 안 되겠다. 나랑 같이 가. 너, 그 꼴로 혼자 못 보내겠어.”

재희는 멍한 얼굴로 이수를 바라봤다. 그가 휴대폰을 들어 인터넷 창을 열고, 자신과 같은 시간대의 비행기 표를 예약하려 하는 것을 보고 다급히 그것을 뺏어 들었다.

폰을 빼앗긴 이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재희를 바라봤다. 그 서늘한 표정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재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돼요. 선배는 여기 있어요. 나, 나 혼자 갈 수 있어요.”

“고집부리지 말고 내놔. 너 지금 상태 안 좋아.”

이수가 짤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더 하얘질 것도 없다고 생각한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놀란 건 알지만 재희는 지금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었다. 저 꼬락서니로는 입국 심사대에서 약쟁이로 오해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싫어……. 싫어요…….”

입을 꾹 다문 재희가 고집을 부렸다.

“차재희.”

“안 돼요…….”

“…….”

그가 제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간신히 잦아들었던 숨소리가 다시 격해지고 있었다. 패닉 상태였다. 같이 가는 게 무슨 대수라고 저렇게 거부 반응을 보이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진정할 수 있도록 등을 도닥여 주던 이수는, 그러다 문득 떠올렸다. 혹시 가족들을 숨기고 싶은 걸까.

이수는 한강에서 대답을 피하며 웃던 재희를 떠올렸다. 차재희와 같이 병원에 가게 된다면 그의 가족들과 만남을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게 싫어서 저러는 거라면……. 이해는 갔다.

“차재희.”

“…….”

재희가 말없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붉어진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온갖 두려움이 혼재된 눈동자를 보는데 속이 쓰렸다. 이수는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 주고 그를 끌어안았다. 알았어, 여기 있을게. 그러니까 그만 울고 진정해.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몸의 떨림이 멎었다. 이수는 더 이상 같이 가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울음은 멈췄으나 여전히 정신이 없는 재희를 도와 짐을 싸 주고, 저녁을 먹인 후에 잠깐 잠을 재웠다.

이수의 팔베개를 한 채로 잠든 재희는 간헐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그럴 때마다 이수는 그를 꽉 끌어안아 주었다. 시간이 촉박해 두 시간도 채 자지 못하고 일어나야 했지만, 눈을 뜬 재희는 아까보다 훨씬 침착해진 상태였다. 언제나처럼 단정하게 가라앉은 표정을 보자 이수도 마음이 놓였다.

“가자, 지금 나가야 해.”

괜찮다고 거절하는 것을 기어이 끌고 나와 제 차에 태웠다. 조수석에 앉은 재희는 이수만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제한 속도를 넘나드는 속도에 기겁해야 할 사람이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정신이 남아 있질 않았다.

갑작스러운 사고가 아직까지도 믿기지 않았다. 차재하에게 일어난 일에 자신의 책임은 없음에도 마음이 무거웠다. 걱정과 자책이 혼재된 상태에서 재희는 이수를 떠나 있어야 하는 상황이 두려웠다.

그가 자신을 잊을까, 몇 번이나 그랬던 것처럼 이름을 잊어버리진 않을까……. 무서웠다.

“선배.”

“어.”

“미안해요…….”

이수는 대꾸 없이 고개를 돌려 재희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이 꼭 동생 사고를 니가 낸 거냐, 나한테 미안할 이유가 뭐가 있냐, 이런 느낌이었다.

이수의 손을 꽉 쥔 채로 손가락 끝에 하나하나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 재희는 불안한 마음이 진정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동생도, 자신도, 이제 막 시작된 이 관계도 모두 다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주차장으로 가지 말고, 선배. 내려주고 바로 집으로…….”

그 말을 무시하고 이수는 주차장 진입로로 향했다. 병원 안까지 데려다주고 싶은 걸 참았으니 입국장 앞까지는 가야 했다. 미안해서 입을 꾹 다문 재희를 끌고 공항 청사로 들어섰다.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닌데 집안 사정이 어려운 건지 비즈니스도 아닌 이코노미였다. 재희가 티켓팅을 하기 위해 줄을 서는 동안 이수는 자고 있던 서이준을 깨워 그에게 좌석 업그레이드를 부탁했다. 서이준은 그게 이수 본인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황당해하면서도 곧바로 알았다는 대답을 돌려줬다. 얼마 후 체크인을 하던 재희가 이수를 돌아봤다. 멀리서 그를 지켜보던 이수는 그 시선을 무시했다.

“혹시… 아니에요.”

차재우가 분명 일반 좌석으로 예약을 했을 텐데, 티켓팅을 하던 도중에 좌석이 업그레이드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운이 좋아도 이코노미에서 비즈니스도 아니고 퍼스트로 변경되는 일은 없었다. 재희는 이수에게 의문을 표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별것도 아닌 거에 신경 쓰지 말라고 화를 낼 것 같았다.

따로 마련된 게이트로 향하며 재희가 우울한 낯을 했다. 여러모로 속이 복잡했다. 제일 걱정되는 것은 차재하의 상태였고, 그다음은 이수였다. 그를 혼자 남겨 두고 가는 일에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가서 연락해.”

“선배……. 최대한 빨리 올게요.”

“네 가족 일이잖아. 충분히 있다가 와.”

재희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결국 힘없이 웃고는 몸을 돌렸다. 꽉 붙잡고 있던 손가락이 떨어지고, 온기가 멀어져 간다.

이수는 그 순간 기이한 감상에 휩싸였다. 자신을 등지고 걸어가는 뒷모습이 마치 잠깐의 만남을 뒤로하고 병실을 떠나가던 가족들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불렀다.

“차재희.”

돌아보는 얼굴이 수척했다. 이수는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남들이 보건 말건, 세상에 둘만 남은 것처럼 두 뺨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당황한 듯 눈을 크게 키웠던 재희도 이내 캐리어를 잡은 손을 놓고 이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짧고 강렬한 키스가 끝나고, 재희에게 이마를 맞댄 이수가 그와 눈동자를 마주한 채로 속삭였다.

“언제 돌아올 거야.”

“……개강하기 전에, 올게요.”

그때쯤이면 성미희가 미국으로 건너올 수 있을 것이다. 차재하의 수술은 잘 끝날 것이고, 무리 없이 회복할 것이고, 금방 퇴원할 거니까. 재희는 개강하기 전에 모든 일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의 대답에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릴게.”

그렇게 또다시 혼자였다.

* * *

6월 30일

차재희

선배, 자요? 잠깐 나왔는데 금방 다시 들어가봐야해요.

23:18

23:20

아니. 안 자. 괜찮아?

차재희

좋아요 :) 다행히... 동생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괜찮아요.

23:22

23:23

동생 말고, 너.

차재희

괜찮다고 말하고 싶지만, 안 괜찮아요. 사실은.

23:25

23:29

전화 못 받아서 미안. 시간 날 때 다시 해.

00:08

진동 오는 거 못 봤어. 다시 걸어.

00:29

바빠?

차재희

재하한테 쇼크가 와서... 정신이 없었어요. 자요?

6:17

7월 2일

00:00

생일 축하해

차재희

어떻게 알았어요? 같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고마워요, 선배 :>

00:23

00:31

필요한 거 있어? 생일 선물로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00:33

뭐든 좋아. 차는 어때? A7 너무 작잖아.

차재희

어..:);;;;; 너무 과해요.. 선물 없어도 돼요, 괜찮아요!

00:59

1:23

어쨌든, 주고 싶어. 생각해봐

차재희

그럴게요...!

1:26

차재희

보고 싶어요.

10:25

.. (메시지 작성 중…)

7월 3일

차재희

선배, 자요?

7:11

차재희

재하가 오늘 눈을 떴어요. 날 보더니 한참이나 울었어요... 많이 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어린애라는 걸 느꼈어요.. 사실 잠깐 자리 비웠을 때도 일어났었다는데 혼자 있어서 너무 무서웠대요.

7:18

차재희

선배도 무서워요?

7:21

차재희

혼자 남겨둬서 미안해요, 선배.

7:22

12:23

이제 일어났어..

12:25

안 무서워. 나 겁 없는 거 알잖아. 신경 꺼.

12:32

그리고 너도 어려.

7월 5일

차재희

시간이 너무 안 맞아서 아쉬워요.. 목소리 듣고 싶은데.

18:45

차재희

화났어요?

18:52

18:52

아니. 갑자기 끊어진 거야.

차재희

아.. 여기 신호가 잘 안 터지나봐요

통화는 1층으로 내려가서 하래요..

18:53

차재희

시간 날 때마다 전화해도 돼요?

18:55

18:56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매일 밤 11시에 전화를 걸게.

18:58

넌 오전 9시에 통화 버튼을 눌러.

차재희

좋아요 :)

19:00

7월 6일

차재희

선배, 자요?

9:47

차재희

잘자요.

10:00

12:11

[전달][7월 2일 10:25 차재희 님의 대화]

차재희

직접 말 해줘요:(

15:27

15:31

안 자고 뭐해. 거기 새벽 1시 아니야?

차재희

옆 병실에 블루코드 떠서 깼어요..

빨리요, 선배.

15:32

차재희

[전달][7월 6일 15:27 차재희 님의 대화]

15:34

차재희

응?

15:35

15:37

[음성 메시지]

7월 8일

차재희

전화 못 받아서 미안해요

00:23

차재희

동생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어요.. 원인은 모르겠는데.

00:25

차재희

무서웠어요.

00:26

00:59

무서울 때마다 메시지 남겨 놔

1:02

적어놨다가 그만큼 안아줄게.

차재희

무서워요.

1:24

차재희

지금도 무섭고..

1:28

차재희

지금 또 무섭다

1:30

차재희

완전 무서워..

1:41

차재희

아직도 무서운데 어떡해요?

1:49

차재희

(식은땀 흘리는 중)

1:58

2:00

지랄 말고

차재희

ㅠㅠ

2:19

7월 9일

차재희

동생 검사 받으러 들어갔어요. 복도에서 기다리는 중. 뭐해요?

9:50

차재희

아, 자겠구나.. 좋은 꿈 꿔요, 선배

9:55

10:28

안 자. 산책하러 잠깐 나왔어. 전화 할래?

차재희

1층으로 내려가고 있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10:30

10:55

간병인한테 맡기고 좀 쉬어. 니가 고생한다고 해서 더 빨리 낫는 거 아니잖아.

차재희

화내서 미안한데 그래도 혼자 두고 싶지 않아요..

11:01

차재희

화났어요?

11:17

난 혼자 뒀잖아 (메시지 작성 중…)

(메시지 작성 취소)

11:28

아니.

7월 13일

차재희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안 와요. 바빠요?

12:50

차재희

선배 생각 엄청 나요. 갑자기 궁금한데.. 솔직히 처음에 나 어땠어요?

12:51

12:59

이중인격자라고 생각했어

차재희

난 선배 무서웠는데 :(

13:02

13:13

내가 뭘 했다고 무섭대

차재희

그냥.. 솔직히 이러다가 한 대 맞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13:15

13:17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차재희

...??

13:20

7월 19일

차재희

생각해 봤는데...

11:51

차재희

난 어쩌면 선배한테 첫눈에 반했던 걸지도 몰라요

11:54

12:10

?

차재희

그때 과방 소파베드에서 자고 있을 때, 선배 엄청 예뻤어요

12:14

12:16

??

차재희

???

12:17

12:19

그런 소리 처음 들어 봐

차재희

기분 좋아요?

12:20

12:21

한 번만 더 하면 차단.

차재희

:(

12:22

8월 1일

차재희

돌아가는 비행기 예약 했어요! 8월 14일에 어머니 오시면 교대할 거예요.

7:47

차재희

동생도 많이 나아졌어요. 조금 불안하긴 한데, 약물 조절하면 괜찮을 거래요.

7:51

11:24

티켓 사진 보내줘. 데리러 갈게.

차재희

[사진]

20:51

차재희

새벽 도착이니까 오지 마요. 택시 타고 갈게요!

20:53

20:59

[사진]

21:00

JFK 1터미널에서 만나

차재희

네..??

22:02

8월 7일

차재희

다시 한번 생각해봐요, 선배.

23:29

차재희

14시간만 기다리면 되는데 표가 아깝잖아요..

23:30

23:34

안 아까워. 돈 많아. 신경 꺼.

차재희

그래도...

23:36

23:38

자꾸 짜증나게 할래?

8월 8일

차재희

화났어요?

23:00

차재희

전화 안해줄 거예요?

23:01

8월 9일

차재희

선배, 무슨 일 있어요?

3:21

차재희

일어나면 연락 해줘요.

4:02

차재희

아직 자는 중?

7:59

차재희

화난 거 아니죠?

8:23

차재희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9:01

차재희

이제 그 얘기 안 꺼낼게요.....

9:37

차재희

계속 이럴 거예요?

19:49

차재희

선배...

23:01

차재희

화 풀리면 말해줘요..

23:52

8월 10일

차재희

선배.

23:00

8월 11일

차재희

서이수.

23:00

8월 12일

차재희

진짜 이럴 거예요?

8:17

차재희

잘못했어요. 전화 좀 받아요..

8:18

8:20

나 지금 병원이야. 화 안 났어.

차재희

어디가 아픈데. 전화 좀 받아 봐요.

8:23

차재희

받으라고.

8:25

8:29

목소리가 안 나와. 독감.

차재희

그럼 숨소리라도 들려줘요..

8:30

8월 13일

차재희

올 생각 하지 마요. 병원에 있어요. 거기로 갈게

8:43

8:58

내일 아침에 퇴원해. 1터미널에서 만나.

차재희

[부재중 보이스 톡]

20:00

차재희

[부재중 보이스 톡]

20:21

차재희

[부재중 보이스 톡]

20:22

차재희

[부재중 보이스 톡]

20:38

차재희

[부재중 보이스 톡]

21:01

차재희

[부재중 보이스 톡]

21:09

차재희

[부재중 보이스 톡]

22:21

차재희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요? 많이 아파요?

22:41

차재희

전화해줘요.

22:52

차재희

내일 못 갈 것 같아요. 메시지 보면 바로 전화해요, 선배..

22:53

* * *

“아……. 씨발.”

끝없이 울리는 알람에 이수가 눈을 떴다. 병원에 입원한 지 일주일이 됐다.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설상가상 때아닌 독감에 걸렸다. 얼마 전 가족 모임을 가졌다가 해외에 나갔다 온 서이나에게 재수 없게 옮은 것이다.

하필 타미플루에 부작용을 일으킨 적이 있었기에, 이수는 꼼짝없이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해열제를 투여받았지만 잘 듣지 않아서 며칠 동안 고열에 시달렸다.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고 얻어맞은 것처럼 욱신거리기도 했다. 기침하다가 늑골까지 부러졌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휴대폰을 들 기운도 없었다.

내일 차재희 데리러 가야 하는데. 짜증 나게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핑핑 도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침대를 세웠다. 희미하게 떨리는 손으로 협탁 위의 휴대폰을 쥐었다. 22:57. 차재희에게 전화할 시간을 알리는 알람이 끝없는 소음을 뱉어 내고 있었다.

“도련님, 물 드릴까요?”

잠금을 해제하는데 간병인이 다가왔다. 저녁에 잠깐 들렀던 천수인은 이미 가고 없었다. 하루하루가 바쁜 사람이니 이해했다. 사실은 안 오는 편이 더 나았다. 옆에 있으면 귀찮고 성가셨다.

간병인이 건네준 미지근한 물을 마시며 이수가 전화 목록을 확인했다. 차재희에게 수백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뭐지. 눈을 찡그리며 메시지를 먼저 확인했다.

‘내일 못 갈 것 같아요.’ 그 문장을 보는 순간 기껏 내렸던 열이 다시 오르는 느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어쨌거나 기분은 좋지 않았다.

욕을 씹은 이수가 긴장한 채 서 있는 간병인을 내보냈다. 곧바로 재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밤 11시, 그곳은 지금 오전 9시였다. 두어 차례 시도한 끝에 차재희가 전화를 받았다.

─ 선배, 괜찮아요?

“왜 못 와?”

─ 목소리가……. 열은 내렸어요? 좀 나았어요?

“왜 못 오냐고.”

─ ……말하기가 좀, 그래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짜증이 치솟았다. 집에 혼자 틀어박혀 있는 내내 미국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차재희가 결코 반기는 기색이 아니라 딱 한 번 얘기를 꺼내고 말긴 했지만, 허락만 했다면 그쪽에 집이라도 렌트했을 터였다.

JFK 공항으로 마중 나가겠다 했을 때도 오지 말라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그게 뭐 별일이라고, 그게 뭐가 힘들다고.

하필 이런 때 서이나한테 독감을 옮은 것도 열받는데 차재희까지 저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니 순간적으로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두통이 찾아왔다. 이수가 한숨을 깊이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해를 못 시키겠으면 납득이라도 시켜 봐.”

─ …….

“대체 무슨 일인데. 나한테 못 할 말이야?”

서늘한 음성에 재희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 ……집안일이에요. 그냥, 어머니가 왔다가 재하를 보고 쓰러지셨어요. 재하 곁에는 못 있으실 것 같아서 제가 남아야 할 것 같아요.

“동생이 많이 안 좋아? 괜찮아졌다며.”

─ 조금……. 복잡해요, 사정이.

말을 꺼리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수는 더 캐묻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쪽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결론은 차재희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강하기 전에 오겠다고 약속했으면서.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기분이 바닥을 치는 걸 막지 못했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을 게워 내고 싶었다. 이 불쾌감과 서운함을 어떻게 지워야 할지 모르겠다.

“그럼, 언제 올 건데.”

힘겹게 건넨 말에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대답이 돌아왔다.

─ 아직 잘 모르겠어요…….

“…….”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언제 시간이 날지 모르겠다던 가족들은 이수를 한 번 떠나면 아주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일이 반복되고,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돌아오는 사람이 아니라 왔다 가는 사람이 되어 버렸었다.

차재희는, 너는 그래선 안 돼. 반드시 돌아와야 해.

“……기다릴게.”

서러운 기시감을 느끼며 이수는 전화를 끊었다.

All about your timetable.

차 휴학 실화냐..

4학년 막학긴데 차 못본다고 생각하니까 할미 가슴 찢어진다..

내 어두운 미래를 밝혀주는 한줄기 빛이었는데..ㅠㅠㅠ

한 달 전 등록 신고하기

댓글 (11)

익명의 학우 1올타에서 이런 똥글이나 싸고 있으니 미래가 밝을리가 ㅠ

익명의 학우 2???차 휴학했어?ㅠㅠㅠㅠㅠㅠㅠ

익명의 학우 3ㅠㅠㅠㅠ설마군대감? 와꾸낭비ㅠ

 ➥근데 군복입어도 이쁠듯..ㅋㅋㅋㅋㅋㅋㅋ

 ➥ㄴㄴ 듣기론 뭐 미국갔다고하던데

 ➥설마 유학가나.....?

익명의 학우 4결혼한다는 소문도 돌던데?

 ➥?무슨.. 슴한살인뎅..

 ➥?????????????????

 ➥뭐...?└(⊙0⊙)┐

 ➥지랄 마 [삭제하기]

* * *

All about your timetable.

요즘 서랑 문 왜케 붙어다녀?

나랑 동선 꽤 겹치는데 보면 일주일에 세 번은 같이 있네?

둘이 같이 있을 때 문 존나 맹수한테 물려가는 애기토끼같음ㅋㅋㅋ 얘 진짜 귀엽다..ㅠ

우리과는 술쳐마시고 토끼눈 된 새끼들밖에 없는데 ㅅㅂㅠㅠ 인생 불공평 ㅠ

일주일 전 등록 신고하기

댓글 (9)

익명의 학우 1진짜 너무 귀여워!!!

익명의 학우 2문 때문에 이번 달 월보 3쇄 증판한 거 암?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실 나 이번 월보 두 개 쟁임..ㅎ

 ➥ㅎㅎ익명이라 덧붙이지만 나도.. 3개..ㅎ..

 ➥다 이해한다ㅠㅠ 토끼 머리띠 신의 한수였어..ㅠㅠㅠㅠㅠㅠㅠㅠ 나 홈마인데 진심으루다가 문 쫓아다니고 싶어짐 ㅠ

 ➥제발찍어줘.. 사국 연예인들 홈마스터해조..

익명의 학우 4서 인별에 올라온 사진 봤음? 둘이 찍은 거 보고 기절할뻔했자너... 누가 찍어줬을까 ㅠ 카메라가 되고 싶다..

 ➥ㅅㅇㅈ이 찍음ㅋㅋㅋ 신 인스타에 셋이 찍은 사진도있음ㅋ

 ➥둘이은근케미쩔어ㅋㅋㅋㅋㅋㅋ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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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서 VS 서문

여러분의 선택은?

1시간 전 등록 신고하기

댓글 (8)

익명의 학우 1알페스자제...

 ➥222

 ➥33333 고소각

 ➥이런 걸로 무슨 고소각이 섬??

 ➥이름 안쓰여져있어도 누구라고 유추 할수있으면 충분히 가능함;;

익명의 학우 4서는 뭔 앞뒤로 바쁘냐

 ➥시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밎진놈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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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는 게임 기획에만 관심이 있었지만, 회사를 차리기 위해선 아무리 전문 경영인을 둔다고 해도 게임 제작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문율에게 컴공과의 교양 수업을 추천받았는데, 율은 이수를 위해 친절하게도 같은 수업을 듣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두 사람은 수강 신청을 앞두고 나란히 앉아 시간표를 짜고 있었다.

“형! 현대 사회에 필요한 인재가 되는 법. 이 수업 들으셨어요?”

“아직.”

“아! 그럼 같이 들으실래요?”

“무슨 요일이야?”

“목요일 오전이에요.”

시간표를 훑어본 이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일반교양 하나만 끼워 넣으면 완성이었다. 뭐가 좋을까. 올타에 올라온 수업 평가 글을 찾아보고 있는데 옆에서 율이 고개를 내밀었다.

“하나 남으셨으면 이거 같이 들어요! 저도 친구가 추천해 줬는데 과제도 어렵지 않고 재밌대요.”

“문화 인류학?”

“네! 저 후배랑 같이 듣기로 했는데, 괜찮으시면!”

“그러든지.”

그렇게 시간표를 짜다 보니 문율과 수업 세 개가 겹치게 되었다. 확실한 건 신청일에 마우스 질을 해 봐야 알겠지만, 셋 다 경쟁률이 높은 수업은 아니라 아마 그대로 듣게 될 것 같았다.

문율이 42층으로 사라지고 이수는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마음은 이제 정말 사그라지고 없었다. 차재희는 개강 전까지 돌아올 수 없는 듯 보였다.

가족이 아프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안다. 재희가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짜증이 났다. 다른 형제도 있고 부모도 있는데 왜 멀쩡히 학교를 다녀야 할 차재희가 그래야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고, 이왕 그러고 있을 거면 간병인이라도 써서 몸이라도 편했으면 좋겠는데 굳이 고생을 자처하는 재희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질투였다. 자신의 곁을 지켰던 가족은 없었기에, 이수는 재희의 보살핌을 받는 차재하가 부러웠다. 아주 작은 마음이지만 그런 감정이 분명히 존재했다.

차재희

입맛 없어도 밥 좀 잘 챙겨 먹어요. 선배 먹는 거 보면 진짜 걱정 돼요..

12:23

15:39

너도 마찬가지야. 병원밥 맛없으면 나가서라도 사 먹어.

이수는 재희가 보낸 메시지에 답장을 하고 무의미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요즘은 뭘 해도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라테르를 하면 잠깐 집중할 수 있었지만 모니터 앞을 벗어나는 순간 쓸쓸한 현실로 돌아왔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메신저를 확인했지만 그쪽은 새벽이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영화를 한 편 보고, 레오에게 간식을 챙겨 먹이고, 산책을 갔다 왔음에도 애교를 부리는 리키와 한강을 한 바퀴 돌고 나서야 이수는 그토록 기다리던 시간을 맞이했다.

오후 11시였다. 정각을 알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제대로 신호가 가기도 전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 선배.

“안녕.”

─ 안녕, 뭐 해요? 오늘 잘 있었어요?

“테라스에 나왔어. 낮에는 시간표 짰어.”

서로의 안부를 전화로만 물은 지 두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이수는 현실과 약간 차이가 있는, 먼 거리를 날아오는 재희의 목소리가 이제 익숙했다.

한 손에 휴대폰을 든 채 다른 손으로 익숙하게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고 연기를 한 모금 빨아들일 때 수화기 너머로 라이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부터 둘은 전화를 하면서 나란히 담배를 피웠다. 그럴 때마다 이수는 인문대와 경영대 건물에 등을 기대고 선 채 서로를 바라보던 시간을 떠올렸다. 대부분은 차재희를 견제하며 쏘아보았던 순간들이었다.

차재희가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이수는 그러한 기억들을 다른 색으로 덧칠하고 싶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거의 끝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버리고 선베드에 몸을 뉘었다. 재희가 작은 목소리로 오늘 아침에 대해서 설명했다.

─ ……근데 진짜 오늘 밥 맛없었어요.

“뭐가 나왔는데.”

무심히 대꾸한 이수가 쿠션을 들어 올렸다. 6월 말에 재희와 함께 누워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코를 파묻어 봤지만 체취가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눅눅한 늦여름의 냄새가 이수를 덮쳐 왔다. 멀리 던져 버렸다.

─ 귀리 죽 같은 거? 이것저것 들어 있었는데 무슨 종이 죽 먹는 느낌이었어요.

“아, 나도 그거 존나 싫어.”

─ 먹어 봤어요?

“어. 어릴 때 아프면 맨날 오트밀이 나왔어. 근데 그거 먹으면 더 아픈 느낌 나.”

웃을 줄 알았는데 묘한 침묵이 찾아왔다. 가만한 숨소리를 들으며 이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웃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게 착각은 아닌 듯했다.

차재희는 동생의 상태에 대해서 일절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다만 재활을 한다, 약을 먹는다, 검사를 한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추측하기만 했다. 머리를 크게 다쳤다고 들었는데, 아마 뇌 손상이 와서 회복이 힘든 장애를 입은 모양이었다. 그런 거라면 전문 간병인을 쓰는 게 훨씬 나을 텐데도 재희는 그러지 않았다.

종종 그에게서 힘들었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수는 그러니까 왜 네가 그러고 있느냐고 짜증을 냈고, 재희는 동생이니 직접 돌봐 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면 이수는 평생 네가 끼고 살 거냐고 되물었고, 재희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가족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었다. 차재희가 이 아파트에 사는 걸 보면 없는 집도 아닐 텐데 한창 공부해야 할 아들을 데려다가 간병이나 시키고 있다니. 그러나 그것보다 더 이해 불가능한 것은 사고를 꼭 자신이 낸 것처럼 구는 차재희였다.

재희는 가족들을 떠나고자 마음먹었기에, 그 자리에 남겨져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동생에게 부채감을 느껴서 그러는 것이었지만, 이수는 그걸 몰랐다.

그래서 이수는 그가 보이는 책임감이 정말로 싫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재희는 이제 이수에게 동생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차재희의 목소리에 유난히 힘이 빠진 날들이 있었다. 그런 날은 그가 지쳤다는 걸 이수가 먼저 알아채고는 했는데, 오늘이 그랬다.

“힘들어?”

─ …….

재희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달칵거리며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소리, 흐느끼듯 떨리는 숨을 들이쉬는 소리, 가늘고 길게 뻗어져 나오는 한숨이 말을 대신했다.

그러한 순간들이 쌓이고 쌓인 상태였다. 인내심이 한계치를 초과했다. 참을 만큼 참았고, 배려할 만큼 했고,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이수는 이렇게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를 외롭게 두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 바 있었다. 차재희가 이수의 아들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었지만 지금 이수는 그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결심은 빨랐고 행동은 거침없었다.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돌려놓고 비행기를 예약했다.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것으로, 당장 다섯 시간 후에 떠나는 표를 끊었다.

재희가 있는 병원까지 가는 길을 찾아 두고, JFK 국제공항에 있는 렌트카 업체에 렌트를 신청했다. 재희와 전화를 끊기도 전에 그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이었다.

─ 이제 잘 거예요?

“아니. 할 일 있어서.”

─ 알았어요. 나 이제 들어가요. 선배, 이따가 좋은 꿈 꾸고, 내일 봐요.

“어. 내일도 재활 시간 똑같아?”

─ 그렇죠. 왜요?

“그냥. 내일 어디 갈지도 몰라서. 알았어. 시간 봐서 전화할게.”

─ ……어디 가는데요?

이수는 백팩에 옷을 대충 욱여넣으며 대답했다.

“도착하면 알려 줄게.”

─ 알았어요……. 조심해서 다녀요. 안녕.

“안녕.”

전화를 끊은 이수는 그대로 고정 파티 단톡방에 들어갔다. 사흘간 쉬겠다고 말했더니 타격이 ‘사장님, 게임 접으시는 거 아니죠?? 네? 형님?’ 하고 매달리는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다. ㅇㅇ라고 친절히 답변하고 문율에게는 따로 연락을 했다.

잠깐 집을 비우니 레오와 리키를 챙겨 달라는 말에 율은 고민하지도 않고 알았다고 대답했다. 추가 근무 수당은 당연히 챙겨 주지만 그래도 말을 잘 듣는 게 기특했다.

운전대를 잡고 공항으로 가는 길은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제한 속도를 훨씬 넘어섰는데도 도착하는 길이 멀기만 했다.

재희가 부담스럽지 않게 잠깐 얼굴만 보고 올 생각이었다. 날이 갈수록 잦아드는 웃음 때문에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수는… 이 충동적인 과정을 통해서 깨달았다.

상대방이 돌아오지 않으면 자신이 찾아가면 된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이른 새벽이었다. 오랜만에 찾은 JFK 공항은 밤 비행기를 타고 온 여행객들로 북적였다. 20년 가까이 뉴욕에서 살았지만 대부분 병원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도 한국보다는 이곳이 더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게 우스웠다.

게이트를 나와 택시를 타고 24시간 운영하는 렌터카 업체로 이동했다. 빌린 차는 역시 롤스로이스였다. 이수가 그 브랜드의 위압적인 실루엣을 좋아해서이기도 했고, 렌터카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사진 중 가장 선팅이 진해 보였던 차여서 고른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마주한 유리창은 투명하기 그지없었다.

롤스로이스 던에 올라타자마자 이수는 지붕을 닫았다. 실내가 약간 어둑해졌으나 여전히 안과 밖의 구분이 모호했다. 한숨을 쉬며 구글 맵에 저장된 병원을 향해서 출발했다.

비행기가 착륙했을 땐 여명이 오기 전이었는데 어느새 해가 뜬 상태였다. 선글라스를 쓴 채 운전을 하는데 문득 화가 났다.

이렇게 쉽게 올 수 있는 곳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산책하듯 방문할 수 있었는데 뭣 때문에 차재희와 생이별한 채 전화로만 그리워해야 했는지 모르겠다. 가족들을 보여 주기 싫은 거라면 근처에 머물며 잠깐 와서 얼굴만 봤어도 됐을 텐데.

이수는 창문을 내리고 짜증을 떨쳐 내려 애썼다. 여기까지 와서 기분이 안 좋은 상태로 그를 만나고 싶진 않았다.

JFK 공항에서 병원까지 80마일이 좀 넘었다. 뉴욕주를 빠져나오니 시야가 확 트였다. 이수가 지나는 유료 도로는 롱아일랜드 해협을 오른쪽에 둔 채로 길게 이어졌다. 예일대에서 멀지 않은 병원에 도착하니 오전 8시가 좀 넘어 있었다.

병원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외관이 세련되어 보였다.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간밤에 재희가 보낸 메시지에 답장을 보낸 후 문을 열고 내렸다. 8월 말의 코네티컷은 한국과 날씨가 비슷했다. 눈을 찌르는 햇살에 벗어 두었던 선글라스를 다시 꺼내 썼다. 차재희를 만날 시간까지 여유가 좀 있었다.

‘병실 창문 밖으로 동쪽 정원이 보이거든요. 근데 어제 태풍 때문에 나무가 부러졌어요, 선배.’

재희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이수는 긴 복도를 지났다. 그와 통화하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재희는 늘 아침에 전화를 받았으므로 전날에 그가 무엇을 했는지 얘기했었다.

재희는 차재하가 깨어나기 전에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고 병실로 돌아가 동생의 식사를 챙겼다. 차재하가 낮잠을 자면 정원을 산책하기도 했고,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는 중정에서 책을 읽기도 했다.

이수는 재희가 자주 가는 곳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자신이 없는 동안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다녔는지 궁금했으니까.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동쪽 정원이었다. 병실에서 창문을 열면 내려다보인다는 그곳은 이수가 상상했던 것보다는 작고 초라했다. 재희는 그곳을 볼 때마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고 했었다. 반면 이수는 이렇게 별것 아닌 정원이 그의 심리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그가 약해져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비밀스러운 방문을 들키지 않도록 그늘에 숨어 걸었다. 병실은 정원이 아주 잘 보이는 2층에 있다고 말했다. 응달에서 고개를 들어 2층을 살폈다. 대부분 다 창문이 닫혀 있었다.

요행을 바라는 것을 접고 재활 센터에 가 있으려고 할 때였다. 한 병실의 창문이 열리고, 차재희가 나타났다.

이수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창이 닫히지 않도록 고정하고, 걸레로 창틀을 닦아 내는 표정이 굳어 있었다. 차재희가 저토록 무표정한 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많이 지쳐 있다는 게 한눈에 보였다.

병원 생활이라면 이수만큼 잘 아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지루하고, 우울하고, 병을 고치러 왔다가 다른 병을 얻어 나가는 게 바로 병원이었다. 그런 곳에 멀쩡한 사람이 두 달이나 있었다. 전문 지식도 없이 동생을 간호하면서.

이수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차재희를 훔쳐봤다. 몇 달 만에 보는 얼굴이 수척하게 굳어 있으니 걱정과 속상함만 더 커졌다.

재희는 창가에 앉아 정원을 내다봤다. 이수를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동생과 대화하는지 안쪽으로 고개를 몇 번 돌리더니, 어느 순간 고개를 푹 숙인 채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다. 곧 이수의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차재희

[사진]

8:25

차재희

오늘 아침은 그냥 씨리얼 먹었어요.

8:26

8:27

그걸로 밥이 돼?

곧바로 답장한 이수가 다시 병실을 올려다봤다. 무표정하게 제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얼굴이 환히 밝아지고 있었다. 멀리서도 확연히 보였다. 눈꼬리가 풀어지고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정말로 그리웠던, 익숙한 미소에 이수는 다급한 설렘을 느꼈다.

저 남자를 정말 보고 싶었다.

차재희

그냥저냥? 어디에요? 놀러 갔어요? :)

8:29

8:30

어. 좀 멀리.

차재희

어디요? 놀러갔는데 왜 이렇게 답장이 빨라요? 내가 방해하는 거예요? 유진 누나랑 갔어요?

8:31

물음표 폭탄에 웃음이 터졌다. 나무 뒤에 숨은 이수가 키패드를 두드렸다.

8:31

혼자. 방해아님.

차재희

어디로 놀러 갔는데요? 밤이니까.. 바다? 메시지만 보지 말고 좋은 거 많이 봐요, 선배 :)

8:32

선글라스를 벗어 가방에 넣어 두고, 이수는 고개를 내밀었다. 답장이 올까, 휴대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차재희가 보였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희미한 웃음을 띠던 얼굴이 덤덤하게 변해 갔다. 그 모습을 보다가 뒤늦게 답장을 보냈다.

8:36

보고 있어.

8:37

좋은 거.

그 메시지를 남기고 뒤돌았다. 재희도 창문을 닫고 있었다. 재활 센터로 갈 시간이었다. 이수는 그가 이동하는 길과 멀리 떨어진 반대쪽 통로를 이용했다. 보여 주고 싶어 하지 않는 동생을 볼 마음은 없었다. 차재희를 난감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전화 통화를 하며 들었던 길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식당과 입원실을 잇는 통로. 중정을 향해 난 테라스. 재희가 밤을 지새웠을 집중 치료실 앞의 복도. 그가 외로이 거닐었을 곳을 따라 걸으며 심장이 부푸는 것 같았다.

8시 57분.

이수는 재희가 찾아올 장소로 향했다. 재활 센터 로비 옆의 흡연 구역은 가림막이 쳐져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곳이었다. 이름 모를 꽃이 핀 화단 옆으로 벤치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8시 59분.

절반쯤 타들어 간 연초를 입술 사이에 문 채로 이수는 입구만을 바라봤다. 저벅저벅, 익숙한 발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리고 피곤한 낯의 남자가 안쪽으로 들어섰다.

고개를 숙인 채 담뱃갑을 꺼내 드는 그는 멀리서 본 것보다 훨씬 수척해 보였다. 이수는 천천히 연기를 빨아들이며 그를 훑어봤다. 딱 맞았을 티셔츠가 조금 헐렁했고, 턱 선이 한결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리고 기억보다 마른 뺨은 부드러운 인상을 딱딱해 보이게 했다.

담뱃대를 들지 않은 손으로 휴대폰의 시간을 확인하며 차재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9시 정각이 지나 있었다. 전화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를 얼마나 실망스럽게 만드는지 이수는 깨달았다. 그가 이곳에서 얼마나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차재희.”

“…….”

나직이 부른 목소리에 재희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멍한 표정으로 이수를 바라본다. 빠르게 눈을 깜빡이는 모습에 현실감은 없었다. 몽롱하게 풀어지는 눈동자가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안녕.”

이수가 인사했다. 재희는 눈을 감았다. 미간이 찡그려질 정도로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가 떴다. 앞에 선 남자는 흰 티셔츠에 짧은 바지, 집 앞에 나온 사람처럼 가벼운 차림이었다. 사라지지 않는 모습이 환상이 아니라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지쳐 있던 얼굴이 기쁨으로 이지러졌다.

“좋아하는 거 보고 싶어서.”

“선배…….”

“잠깐 들렀어.”

웃으며 던져지는 말에 재희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를 맞이하듯 자리에서 일어난 이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서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재희는 떨림을 감추려 애쓰며 심호흡했다.

기억에서 희미해져 가던 체취가 세포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다. 목덜미를 쓸어 주는 손끝의 체온도, 괜찮으냐 물어 주는 다정한 목소리도, 자신을 살게 하는 남자의 존재도 한순간에 선명해졌다.

혹시라도 갑자기 찾아온 성미희나 차재우와 마주칠까 봐 꺼려졌던 마음이 지금만큼은 비워지고 없었다. 동생 때문에 쌓인 좌절이 휘발되어 날아갔다. 재희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웃었다.

“어떻게,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이수는 대꾸 없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뒤로 감추려 하는 걸 억지로 끌어 올려 보니 손바닥이 엉망이었다. 속상한 마음을 비집고 한숨이 나왔다. 별거 아니에요, 중얼거리는 것을 무시하고 깊이 팬 상처에 입을 맞췄다. 손톱이 짧게 깎인 중지를 만지작거리며 짜증을 삼켰다.

“재활 10시에 끝나지?”

“네……. 선배, 밥은 먹었어요? 언제 도착했어요? 피곤하지는 않아요?”

“5시 반에 내렸고, 밥은 안 먹었는데 생각 없고, 피곤하니까 차로 가자.”

빠르게 대답하고는 차재희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재희는 머뭇거리더니 손가락을 내려 그와 손을 맞잡았다. 이러한 관계를 굳이 숨기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수가 싫어할까 봐 긴장했던 재희는 그가 곧 손아귀에 힘을 주는 것을 느끼며 웃었다.

이수는 주차장으로 빠르게 걸었다. 뒤에서 쫓아오며 이것저것 물어 오는 재희에게 최대한 성실히 대답해 주고, 문을 열자마자 그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미리 조수석 좌석을 접어 둔 덕에 차재희는 무리 없이 뒷좌석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가 들어가자마자 이수도 몸을 구겨 넣었다.

투 도어(Two door)라도 롤스로이스인 덕에 내부가 좁지 않았지만 그래도 180cm이 넘는 장신의 남자 둘이 포개어 앉으니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순식간에 내부를 채우는 긴장감에 두 사람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재희가 더 무겁다는 합리적인 계산하에 이수가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았다. 마주 본 채 내려다보이는 얼굴이 붉게 상기되기 시작했다. 이수는 가만히 손을 들어 그의 뺨 언저리를 매만졌다.

“선배……. 보고 싶었어요.”

보조개를 내보이며 그렇게 말하는데 화답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수는 그의 머리를 꽉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나도, 보고 싶었어. 가슴팍에 닿은 뺨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재희는 작게 웃으며 이수의 허리를 감쌌다. 티셔츠 밑으로 들어온 손이 부드러운 살결을 어루만졌다.

한여름에도 서늘한 피부 위로 언제나 뜨거운 손끝이 닿았다. 불길이 옮겨붙은 것처럼 열기 가득한 숨이 터져 나왔다.

“재희야.”

이름을 부르며 새까만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그에게선 낯선 냄새가 났다. 알지 못하는 비누 냄새, 익숙하지 않은 섬유 유연제 냄새, 희미한 병원 냄새. 그래도 좋았다. 차재희였으니까.

“시간이 없어. 나 10시에 출발해야 돼.”

“…….”

재희가 한껏 황당한 얼굴로 이수를 올려다봤다. 5시에 도착했는데 왜 바로 가냐는 물음이 담겨 있었다. 이수는 순간, 그런 표정을 지을 거면 왜 여태 오지 말라고 했었느냐고 따지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짜증을 내는 대신 설명했다.

“내일 수강 신청 때문에 바로 돌아가야 해. 진짜 잠깐 얼굴 보러 온 거야. 니가… 신경 쓰여서.”

그 말에 재희는 눈썹을 휘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는 알겠는데 이런 이야기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어.”

이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기울여 재희에게 키스했다. 두 달간 머릿속에서만 재생되던 장면이 현실에서 이루어졌다.

촉촉한 입술을 핥고 빠는 몸짓이 애틋했다. 바보같이 고생만 하고 있는 차재희를 위로하기 위해 이수는 자신의 모든 숨을 불어넣는 것처럼 그에게 키스했다.

“하아, 씨발…….”

차를 잘못 빌렸어. 그렇게 속삭이며 좆을 꺼내 문지르고 싶은 충동을 삭였다. 주차장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그대로 보였다. 선팅이 이따위인 줄 알았다면 눈길을 끄는 롤스로이스 대신 차체가 높은 픽업트럭을 빌렸을 것이었다. 바닥에서 뒹굴 수 있었을 테니까.

아쉬움을 지워 내며 재희와 혀를 섞었다. 오랜만의 접촉에 야릇한 쾌감은 눈덩이처럼 순식간에 커졌다. 반바지 안으로 들어와 엉덩이를 움켜쥐는 손에 이성을 잃을 뻔했다. 구멍을 벌리듯 양손으로 볼기를 잡아당기는 힘에 기운이 쭉 빠졌다.

“선배, 이러려고 온 거예요?”

언제 우울했냐는 듯, 장난기를 띤 목소리가 은근했다. 재희는 저도 모르게 하반신을 비비고 있는 이수를 타박하며 그의 탄탄한 둔부를 쥐어짜듯 주물럭거렸다. 높이 튀는 신음에 바지 속의 성기가 끝없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전신을 관통하는 흥분감에 모든 것이 잊히는 듯했다.

사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던 의사의 목소리도, 넌 대체 뭘 하고 있느냐 묻던 아버지의 격노도, 아이처럼 떼를 쓰며 경기를 일으키는 동생도…….

잠깐의 현실 도피가 지독히 달콤했다.

“섹스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어? 대답해 봐요, 선배.”

“그런 거, 아니야, 아, 씨발…….”

재희가 비비적거리던 입술을 떼어 내고 이수의 티셔츠를 끌어 올렸다. 창을 투과해 들어오는 햇빛이 창백한 피부와 짙은 분홍색 유두를 또렷하게 비췄다.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안 된다고 지랄을 떨어 대는 이수를 무시하며 입술을 갖다 붙였다. 혀끝으로 눌러 돌리며 쪽쪽 빨아 주자 빠듯하던 숨결이 점점 흐트러졌다. 이수가 헐떡대며 머리칼을 그러쥐는 것이 느껴졌다.

“밖에서, 하아, 보인, 다고……. 그만, 그만해. 미친놈아…….”

“그러면 이렇게 해요.”

개처럼 빨던 혀를 갈무리한 재희가 순간 몸을 돌려 누웠다. 얼떨떨하게 숨을 몰아쉬는 이수는 그의 가슴 위에 올라앉은 자세로 무슨 지랄이냐는 시선을 보냈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과 열이 올라 울긋불긋한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빨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재희는 이 순간 제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이수를 보며 위안을 얻고 싶었다. 이토록 강한 남자도 그럴 때가 있으니, 자신도 잠깐 그런 시기를 겪고 있는 거라고 합리화하고 싶었다. 이렇게 약해진 상태로 우울을 느끼는 순간은 금세 지나가 버릴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궤변일지도 몰랐다. 상관없었다.

재희가 이수의 골반을 붙잡아 제 머리 쪽으로 끌어당겼다. 중심을 잃은 이수의 상체가 뒤로 넘어가며 도어트림에 뒤통수를 부딪혔다.

“야, 이 씨발, 아읏!”

그가 화를 내기 전에 바지와 드로어즈를 끌어 내렸다. 사실은 다리가 위로 뻗어 있었으므로 끌어 올렸다고 해도 맞았다. 그렇게 드러난 매끈한 회음과 애널에 재희는 곧바로 고개를 처박았다. 주름을 핥는 혀에 이수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재희와 달리 이수의 체취는 그대로였다. 어울리지 않게 베이비 로션의 향처럼 부드러운 냄새가 났다. 보송보송하던 음부가 금세 질척하게 젖어 들었다. 재희는 이수의 애널을 정성 들여 핥으며 손을 들어 그의 페니스를 어루만졌다.

“아, 잠깐, 차재희, 흐윽, 아니, 이거…….”

눈앞에서 별이 튀는 것 같았다. 이수는 어떤 문장도 하나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자극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차재희가 구멍을 소리 내 빨 때마다 영혼이 빨려 나가는 것 같았다. 고환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귀두를 훑어 주자 사정감이 밀려왔다. 그가 없는 동안 자위도 한 번 하지 않았기에 묵묵히 쌓여 있던 욕구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뾰족하게 선 혀끝이 애널을 찔러 댔다. 그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한 감각 속에서 이수가 몸을 경직시켰다. 팽팽하게 휘어진 허리가 바들바들 떨려 왔다. 재희의 손안에 흠뻑 사정한 이수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금방이라도 멈출 것처럼 뛰는 심장이 두려웠다. 죽음에 근접한 듯한 박동 사이로 첩첩거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가 사정했다는 걸 알면서도 재희는 뒤를 빠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제야 등 밑에서 꿈틀거리는 성기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잠깐만……. 양심에 찔린 이수가 몸을 뒤집어 앉았다.

“난 괜찮은데, 선배.”

“…….”

바지를 반쯤 내린 상태로 차재희의 가슴에 걸터앉은 이수는 눈앞의 페니스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회색 면바지 위로 드러난 굴곡이 흉포하기 짝이 없었다. 그걸 차마 입에 넣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대신 이수는 재희의 바지를 끌어 내리고 그의 성기를 손으로 만졌다. 하아, 낮게 새어 나오는 한숨을 들으며 귀두를 쓸고 고환을 주물럭거렸다. 공포스럽게까지 느껴지는 굵기와 터질 듯 부푼 핏줄이 눈에 들어왔다.

저걸 뒤에 넣을 일은 다신 없어야 한다고 다짐하며 손을 움직였다. 탁, 탁, 자위를 하듯이 좆을 잡아 흔들자 재희도 얼마 가지 않아 사정했다. 끝도 없이 터져 나온 정액이 손바닥을 가득 메웠다.

서로 쌓아 두었던 걸 터트리고 나서야 이성이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이수는 숨을 가다듬으며 시계를 확인했다. 9시 32분이었다.

따뜻하고 성숙한 위로를 하러 찾아왔는데 결국 30분 동안 한 짓이 개처럼 물고 빨고 딸이나 치는 일이라니. 이런 씨발. 맨정신에 실내가 안 보이는 차를 빌리려 했던 건 까맣게 잊은 채, 이수는 자신이 욕망의 노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체액으로 엉망이 된 손을 대충 옷에 문질렀다. 어차피 여벌이 있으니 상관없었다. 이수가 옷을 벗어 갈아입는 동안 재희는 뒷좌석에 가만히 누운 채로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한 시간 보려고 열네 시간을 날아온 거예요?”

문득 던진 질문에 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9시 40분이었다. 재활 센터에 다시 데려다주기 전까지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한 대 피울래?”

“좋아요.”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시동을 걸었다. 버튼을 눌러 지붕을 오픈하자 뜨거운 바람과 햇살이 밀려들어 왔다. 다시 뒷좌석으로 건너간 이수가 몸을 일으킨 재희의 옆자리에 앉았다. 몸이 나른했다.

졸음을 삼키며 담배를 빼 물고 불을 붙이려 하는데, 재희가 그의 라이터를 뺏어 들었다. 가만 쳐다보고 있으니 제 것에 먼저 불을 붙이곤 웃으며 입을 연다. 사랑스러운 눈매가 휘어졌다.

“내가 작년 생활 한문 수업 때 선배 봤었던 이야긴 안 해 줬죠?”

“어. 과방이랑 레오 얘기만 들었어.”

“그때 선배가 나한테 라이터 빌려달라고 했었는데, 성격이 얼마나 급하던지.”

“내가?”

인상을 찌푸리는데 재희가 이수의 뒷목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연초 끝을 맞대며 이수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봤다. 이수는 왜 이러나, 싶으면서도 불이 붙기를 기다리며 필터를 빨았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불은 안 붙고 타기만 할 뿐이었다. 잇새 한쪽으로 담배를 밀어낸 이수가 말했다.

“빨아야지.”

재희가 이수의 뺨을 쓰다듬으며 숨을 들이쉬었다. 주홍빛으로 타오르는 불길이 이수에게로 옮겨 왔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나서야 목덜미를 붙든 손이 떨어져 나갔다. 이수가 시트에 몸을 늘리며 물었다.

“뭐 한 거야, 방금.”

“불 얻을 때 다른 사람한테도 그렇게 해요?”

가느다란 눈썹이 희미하게 찡그려졌다. 이수는 말없이 담배를 피우다가 되물었다.

“내가 너한테 그랬어? 불 빌려 달라고 하면서?”

“네. 기억 안 나죠?”

“전혀.”

“……그럼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겠네.”

중얼거리는 말에 이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차재희를 만나기 전이라면 몰라도 앞으로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재희는 몸을 편안히 기댄 채로 이수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열기가 가시지 않아 분홍빛으로 물든 귀 끝이 사랑스러웠다. 햇살에 젖은 머리칼은 평소보다 더 밝아 보였다. 이토록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건 정말 딱 두 달 만이었다. 미국으로 건너온 후로는 계속 괴로웠다.

차재하 때문에도 그랬고, 재희 스스로의 자괴 때문에도 그랬다. 그중에서도 재희가 먼저 메시지를 보내지 않으면 9시까지 온종일 연락도 없는 무심한 남자가 그를 가장 많이 괴롭혔는데, 오늘의 일로 이제 그가 자신을 떠날까 하는 걱정은 많이 줄어들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요?”

9시 45분. 시계를 본 재희가 물었다. 이수는 눈을 감은 채 자신을 어루만지는 손길을 만끽하던 중이었다. 소중한 것을 다루듯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는 차재희는 언제나처럼 다정했다. 마음이 충만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반문했다.

“너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그렇게 툴툴거린 재희가 말을 이었다.

“진짜, 엄청, 많이 보고 싶었어요. 맨날 선배 이름 부르면서 울었어요.”

“건방지게 이름을 불렀어?”

“네. 이수야, 하면서.”

웃음기 감도는 목소리에 이수가 눈을 떴다.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로 재희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 시선에 숨이 막힌다고 느낄 무렵에 이수가 물었다.

“근데 왜 오지 말라고 했어?”

“…….”

재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뻔뻔하게 대꾸할 줄 알면서, 자신이 말하고 싶지 않은 주제에 대해서만큼은 회피성 방어 기제가 작동하는 듯했다. 이수는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을 느끼며 재희와 손을 얽어 잡았다. 놓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붙잡은 채로 말했다.

“니가 말하기 싫어하니까 더 묻지는 않을게.”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재희가 문득 입을 열고 속삭였다.

“……선배가 나한테 실망할까 봐 무서워요.”

무척이나 작아서 못 들은 척 넘어갈 수도 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수는 그가 하는 말을 똑똑히 들었다. 실망이라는 건 기대에서 비롯된다. 이수는 재희에게 그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가 하는 일이라면 바람을 피우는 것만 빼고 전부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니 실망할 일도 없었다.

“내가 너한테 실망을 왜 해?”

“……내가 선배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무슨 소리야. 차재희가 너 말고 어디 또 있어?”

“아니, 그러니까 선배가 기대하는 모습과 내가 너무 달라서, 실망할까 봐 무서워요.”

재희는 자신의 밑바닥을 보이는 것이 무서웠다. 가족 구성원 중 자신이 가장 못났다는 것, 형제들에 비해 유난히 뒤떨어진다는 것, 부모가 제일 사랑하지 않는 자식이라는 것, 그래서 부모에게 무시당하는 게 바로 그라는 걸 이수가 알게 되는 게 싫었다.

이수에게는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으니까. 누구나 그런 욕심이 있는 거니까……. 재희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므로 이수는 그의 깊은 속내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야, 들어 봐.”

다만 여태까지와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해서 자신이 그에게 실망할 거라는 생각은 정정해 주고 싶었다.

“니가 나를 때렸어.”

“내가 언제 선배를 때렸어요!”

“아니, 씨발. 가정이라고. 들어 봐. 조용히 하고.”

가정이라는 말에 당황하던 재희가 입을 다물었다. 마뜩잖게 늘어난 입매를 보건대 왜 저런 가정을 하느냐고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수는 말을 이었다.

“니가 나를 때렸다? 그래도 난 이 새끼가 감히 나를 때려? 하고 실망할 일 없어. 얘가 주먹질도 할 줄 아네, 하고 말겠지. 그다음에 니가 나한테 처맞는 거는… 기정사실이니까 혹시라도 진짜로 때릴 생각은 하지 말고.”

인상을 찌푸린 얼굴이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고 싶은 듯했다. 이수가 부연했다.

“나는 너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한테든지 뭔가를 기대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까 니가 내 기대에 못 미칠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어.”

“…….”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난 너를 잘 몰라. 내가 생각하는 너는, 네가 나한테 보여 주는 모습들로 만들어지는 거야. 실망 안 해. 난 그대로 받아들일 거니까.”

이수의 사고는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타인이 어떠한 사람인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차재희가 살인자라면 살인자인 대로, 또라이라면 또라이인 대로 상관없었다. 그라는 존재가 자신의 삶에 편입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할 뿐이었다.

초라한 차재희든, 비참한 차재희든, 잉여 인간인 차재희든 자신은 개의치 않는다는 말은 재희에게 크나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입술을 꾹 깨문 채 웃은 재희가 이수를 끌어안았다.

“사실 선배가 내 이름… 잊어버릴까 봐 걱정했었는데 이제 진짜 그런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

내가 붕어 새끼로 보여?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렇게 받아치려다가 말았다. 대신 이수는 시간을 확인하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 헤어질 시간이었다.

아쉬운 듯 손을 만지작거리는 재희를 끌고 재활 센터로 돌아갔다. 로비로 그를 밀어 넣기 전, 기둥 뒤에 숨은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은 채 다시 한번 키스했다.

“보고 싶으면 말해. 언제든 올 수 있으니까.”

이수의 말에 재희는 조용히 웃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다가 돌아서길 반복했다. 10시를 1분 남겨 두고 나서야 재희가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짧은 해후는 그렇게 끝이 났다.

* * *

차재희를 만나고 돌아온 집은 어쩐지 떠나기 전보다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행히도 허전함은 얼마 가지 않았다. 개강 이후로 바빠진 스케줄에 외로움을 느낄 틈도 없었다. 그게 더 나았다. 재희의 부재를 인식하지 않기에는.

학교에서 이수와 율은 하루가 멀다 하고 얼굴을 맞댔다. 학교에서, 집에서, 라테르에서. 거의 24시간을 붙어 있다 보니 친해지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율은 프로그래밍과 게임에 재능이 넘쳤지만 그것에만 몰두하지는 않았다. 천재들이 흔히 그러하듯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지 않았다는 소리다.

이수와 달리 대인 관계도 원만했고, 누구 하나 그에게 인상을 찌푸리는 일이 없었다. 차재희와는 또 달랐다. 경영학과생들이 재희를 다정하고 착한 놈이라고 규정짓고 그만큼의 행동을 바라고 대한다면, 컴공 학우들은 그저 문율을 열렬히 사랑했다.

그래서 9월 말, 율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이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 형… 흐끅.

“……문율, 너 울어?”

─ 우는, 우는 거… 아닌데… 흑.

“울잖아. 뭔데. 지금 어디야.”

─ 중도, 흐윽, 앞이에요…….

“거기 있어.”

빠르게 짐을 챙겨 내려갔다. 중앙 도서관 앞, 가로등 옆의 벤치에서 율은 눈가가 새빨갛게 짓무른 채로 울고 있었다. 학우들이 흘끔거리는 것을 보고 이수는 가방에서 카디건을 꺼내 그에게 덮어 주었다. 얼굴이 가려지자 율은 방금보다 더 서럽게 울었다.

꼭 마음이 고장 난 사람처럼, 울지 않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아주 오랫동안 흐느꼈다. 이수는 율을 그저 내버려 두었다. 흘려보내고 쏟아 내야 하는 감정도 있는 법이니까.

“집으로 가자.”

“네…….”

한 시간이 지나서야 진정된 율은 어딘가 넋이 나가 보였다. 이수는 찜찜함을 느끼며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를 끌고 와서 다행이었다.

율은 재희와 동갑이지만 그보다 한참이나 어려 보여서 자꾸 신경이 쓰였다. 집으로 가겠다는 것을 밥이라도 먹여 보내려고 43층으로 데리고 올라왔다. 엊그제 리키를 데리러 42층에 들렀을 때 냉장고가 텅 비어 있는 걸 봤었는데, 그게 마음에 걸려서였다.

도우미가 만들어 놓고 간 굴라쉬와 빵을 데워 건넸다. 이수는 건성으로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율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게 먼저 연락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왜 형한테 전화했냐면요…….”

“말해.”

“사실은, 저, 저도 남자 좋아해요…….”

잠깐 그 말의 의미를 되새기던 이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고백 타이밍은 아니었는데. 혼자 김칫국을 마시고 있으니 율이 말을 이었다.

“저번에 리키랑 산책 갔다가 집에 들어왔는데 선배랑, 재희랑 뽀, 뽀뽀하고 있는 거 봤어요. 당황해서 다시 나갔다가 들어왔는데……. 죄송해요, 훔쳐봐서.”

“아니… 니 잘못은 아니지.”

망할. 차재희와 섹스하고 난 다음 날의 이야기였다. 분명 리키 발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가 멀어지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봤었구나. 그나마 다행이었다. 10분 뒤에 왔다면 면전에서 언급하지 못할 꼴을 보았을 것이다. 이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래서……. 이런 이야길 할 사람이 형밖에 없어서요……. 사실은, 제가 좋아하는, 흐윽, 친구가 있었는데요……. 흐끅…….”

생각하니 다시 서러운 듯, 율은 눈물을 질질 짜며 짝사랑의 역사를 늘어놓았다. 이수는 끈기 있게 그의 말을 들었다.

듣다 보니 저까지 열받을 정도였다. 이수는 율에게 왜 하필 그런 놈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려다가 관뒀다. 차재희 입장에서는 자신도 그런 쓰레기였을 것 같아서 양심에 찔렸다.

어쨌든 이야기를 끝낸 율이 울다 지쳐 소파에서 잠들었을 때는 새벽 1시였다. 그냥 둘까, 하다가 조그만 몸체를 떠는 것이 안쓰러워 손님방에 넣고 이불까지 덮어 주고 나왔다. 제 주인을 닮은 건지, 다정하게도 레오가 그 곁을 지켜 주었다.

이수는 대화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율을 위로하느라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눠서 그런지 정신적 피로감이 극심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운 이수가 휴대폰을 보고 깜짝 놀랐다.

부재중 전화 128통.

온통 차재희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정신이 없어서 재희와 통화하는 것도, 메시지를 남기는 것도 잊어버렸다. 이수는 다급한 손길로 전화를 걸었다. 초조하게 신호음을 기다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받았다.

“차재희.”

─ …….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느끼며 이수가 입술을 핥았다. 대답해, 왜 그래. 조급한 마음에 다시금 이름을 불렀다.

“재희야.”

─ …….

“미안해, 일이 좀 생겨서 신경을 못 썼어.”

─ 어디에요? 이 시간까지 뭐 했어요? 누구랑 있었어요?

“왜 화를 내?”

─ 뭐 했냐고 묻잖아요.

이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추궁하듯 물어 오는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짜증이 올라오려다 말았다.

눈앞에 8월 말의 차재희가 떠올랐다. 전화가 걸려 오지 않자 실망한 듯 슬픈 표정을 짓던 그 창백한 얼굴과 마른 뺨. 지구 반대편에 있는 자신의 목소리에 기대던 어린 남자.

보고 싶다고 말하면 언제든 달려가겠다고 했지만, 재희는 그 후로 보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이수에게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아마도.

가슴이 아렸다. 이수가 명치를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서 보고 싶다는 말도 꺼내지 못하는 재희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네 목소리를 듣지 못해 서운하다고, 왜 내게 전화하는 걸 잊었느냐고, 왜 나를 뒷전으로 놓느냐고,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서툴게 이야기했다.

─ 나랑 대화하기 싫어요?

“아니.”

─ 나 싫어졌어요? 나 필요 없어요?

그 물음들 때문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재희가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는지 모두 느껴졌다. 이럴 때마다 속이 끓어올랐다. 그를 옆에 두고 보살피고 싶었다. 이수가 그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필요해. 지금 당장이라도 여기로 끌고 오고 싶어.”

재희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러나 고요히 가라앉는 숨소리만으로도 그가 진정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그럼 말해 줘요, 여태 뭐 했길래 전화를 한 통도 안 받았는지.

낮은 목소리는 꼭 애원하는 것처럼 들렸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함께 있었던 일주일 동안 차재희는 종종 버려질까 두려워하는 얼굴로 이수를 바라보곤 했다. 그 표정이 떠올라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눈썹이 팔자로 휜 채 울상을 짓는 남자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보고 싶다는 말을 참았다. 차재희가 그곳에서 버티고 있는 이상 그가 자신에게 미안해할 계기는 주고 싶지 않았다. 보고 싶다고 말하면, 그는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탓할 것이다.

이수는 이제 재희가 얼마나 연약한 마음을 갖고 있는지 알았다. 그래서 그의 의심을 가라앉힐 말을 먼저 꺼냈다.

“문율한테 일이 생겨서. 대화를 좀 길게 했어.”

─ ……무슨 일인데요. 어디서요?

“집에서 이야기 나눴고, 율이는 지금 손님방에서 잠들었고, 무슨 일인지는 말 못 해.”

─ 왜요?

“율이 프라이버시야. 내가 말할 자격 없어. 직접 물어봐, 궁금하면.”

이걸로 마음이 풀렸을까.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제때 처치하지 못한 피로가 곱절로 늘어나 이수를 덮쳤다. 몸을 웅크리며 이불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분위기는 별로였지만 스피커 너머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숨소리는 듣기 좋았다.

이수는 베개를 베고 눈을 감은 채 그의 이름을 불렀다.

“차재희.”

─ …….

“너, 왜 그런 말을 해?”

─ ……무슨 말이요.

우물거리는 목소리에 물기가 어린 것 같았다. 타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이수라지만, 재희는 예외였다. 눈빛, 손짓, 숨 쉬는 것만 봐도 그가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허락했던 순간부터는 그에게 일어나는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고 싶었다. 머리를 열어서 다른 이들의 이름을 모두 도려내고 자신의 이름만을 새겨 넣고 싶은 인간은 차재희가 처음이었다. 좋아하지 않고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 나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네가 싫어졌냐고 물었잖아. 다시는 그런 질문 하지 마.”

─ …….

차재희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문득 속 깊은 곳에 욱여넣었던 마음이 용천수처럼 솟았다. 좁은 차 안에서 마주했던 시간으로는 해갈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주체 되지 않는 그리움이 넘쳐흘렀다. 벽이 무너졌기에 이수는 그 감정을 제 안에만 담아 둘 수가 없었다. 아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아. 덧붙여진 말과 함께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수는 가만히 몸을 떨었다. 이불 속에 있는데도 온몸이 시렸다. 갑주처럼 전신을 두른 것이 무엇인지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외로움이었다. 차재희는 서이수에게 외로움을 알려 주고 가 버렸다.

“대체 언제 와?”

이수는 눈을 들어 천장을 확인했다. 에어컨은 꺼져 있었다. 그러나 냉기가 가시질 않았다. 귓가를 덥히는 휴대폰 그리고 그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문장.

─ 금방 갈게요……. 화내서 미안해요. 나도 보고 싶어요, 선배.

지구 반대편의 남자에게서 얻을 수 있는 온기는 작고 또 작았다. 이수는 그의 목소리를 소중하게 품은 채 잠이 들었다.

* * *

차재희가 서러움을 쏟아 냈던 주의 주말, 이수는 이른 아침 그에게서 영문 모를 전화를 받았다.

─ 선배! 일어났어요?

오전 9시, 그쪽은 오후 7시였다. 재희의 동생이 저녁을 먹을 시간이라 이 시간에는 통화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어젯밤에는 재희가 중요한 일이 있다고 말하는 바람에 전화도 하지 못했다.

“무슨 일 생겼어?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뭔가 불길한 예감이 치솟았다.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는데 이상한 질문이 돌아왔다.

─ 오늘 어디 가요? 집에 있을 거예요?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은근히 들떠 있었다. 뭐야, 사람 걱정시켜 놓고 왜 이렇게 신이 났지? 이수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안 가. 집에 있을 거야. 무슨 일 있냐니까?”

─ 없어요! 이따가 저녁에 집으로 갈게요, 선배. 나 지금 배터리가 없으니까 끊어요……!

그러고는 전화가 뚝, 끊겼다. 27초. 짧은 통화 시간을 나타내는 숫자를 바라보던 이수가 다시 차재희의 이름을 눌렀다. 그러나 정말로 전원이 꺼졌는지 연결할 수 없다는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차재희가 남긴 말 한마디가 이수의 마음속에서 메아리쳤다. 저녁에 집으로 갈게요, 돌아오겠다는 뜻이었다. 미국으로 떠난 지 석 달만이었다.

저녁이 몇 신데? 5시? 6시? 7시? 데리러 간다고 할까 봐 미안해서 일부러 도착 시간을 말하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차를 끌고 가서 게이트 앞을 지키고 있을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출구는 하나가 아니었고 혹시라도 공항에서 엇갈렸다가는 괜히 만나는 시간만 더 늦어질 수 있었다.

차재희를 본다고 생각하니 옅은 흥분이 일었다. 이수는 서재로 가서 숨겨 두었던 재희의 생일 선물을 확인했다. 그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 사 두었던 옷과 석 달째 서랍에 처박혀 있었던 준비물도 꺼내 놓았다.

가뿐한 기분으로 아침을 먹은 이수가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휴대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재희일까 싶어 봤더니 서훈이었다. 천수인이면 몰라도 서훈은 이수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가 전화를 받아 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 이수야, 집이니?

“네. 왜요?”

─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서 그런데 지금 평창동으로 와 줬으면 싶은데.

이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차재희에게 집에 있겠다고 했는데……. 별로 내키지 않은 채로 물었다.

“금방 끝나죠? 시간 별로 없어요.”

─ 두어 시간이면 될 거다.

“기다리세요.”

무슨 이야길 하는 데 두어 시간씩이나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서훈이 불렀으니 어지간히 중요한 일이겠구나 싶었다. 어쩌면 이전부터 말이 오가던 해외 주식 건일 수도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새로 뽑은 테슬라를 끌고 나왔다. 그리고 40분 후, 이수는 똥 씹은 표정으로 평창동의 저택 앞에 서 있었다. 대문 옆에 선 서이나의 차량을 본 것이다.

8월에 이수에게 독감을 옮겼던 서이나는 ‘ㅈㅅ’이라는 메시지 하나로 자신의 곤궁한 양심을 드러낸 전적이 있다. 면상을 보면 욕이 나올 것 같아 담배를 문 채 마음을 다스리던 중이었다.

탁, 다가오는지도 몰랐던 세단이 정차하고 그 안에서 서이준이 내렸다. 창립 기념일 행사 때만큼이나 반듯하게 차려입은 서이준을 보고 이수가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 무슨 일이 있나? 하지만 이수는 옷을 차려입고 오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서이준이 이수의 어깨를 토닥였다.

“왔어? 안 들어가고 뭐 해, 이수야.”

“서이나 상판 보기 싫어서.”

“아……. 오늘은 좀 참아 줄래.”

“무슨 일인데?”

서이준은 대꾸하지 않고 이수를 대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계단을 올라 작은 아치형 문을 지나니 매끈하고 흰 조약돌로 만들어진 돌 정원이 나타났다. 진입로를 휘감은 가느다란 물줄기는 인공 연못으로 향했다. 똑, 똑, 물방울 흐르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발소리가 어우러졌다.

“오늘 이나가 결혼할 집안사람들 만날 거야. 말하자면, 상견례.”

“……근데 나를 왜 불러. 중요한 얘기 있다더니 그거였어?”

“음, 중요한 얘기 맞지. 근데 상견례라고 사실대로 말했으면 안 왔을 거잖아.”

상냥히 웃으며 하는 말에 기가 찼다. 이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본채로 들어섰다. 긴 복도를 지나가니 후원이 내다보이는 거실에 천수인과 서이나가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치니 서이나는 그래도 중요한 날이라고 기분을 망치기 싫었는지 오빠 왔어? 하고 환히 웃는 낯으로 인사했다.

“이수 왔니? 서 대표한테 이야기 들었고? 위층에 옷 가져다 뒀으니 갈아입고 내려오렴.”

저들의 호칭에는 당최 적응할 수가 없었다. 천수인과 서훈은 서이준을 서 대표라고 불렀고, 서이준은 그들을 각각 회장님과 부회장님이라고 칭했다. 이수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이나의 결혼은 그의 인생에 결코 중대사가 아니었지만, 부모에게는 중요한 이야기가 맞았으므로 이렇게 끌어낸 것이 틀렸다고 말하기도 뭐했다. 상견례 때 가족끼리 만나는 일이 있다는 것은 신유진을 통해 들은 바 있다. 서일이라는 대기업의 특성상 결혼도 장례식처럼 비즈니스적으로 이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까진 아니었나 보다.

어쨌든 짜증은 좀 났다. 차재희가 오늘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면 이미 한마디 하고 집으로 돌아갔을 텐데, 기분이 좋아서인지 아직은 참아 줄 만했다.

“아니, 하여튼. 엄마, 그럼 내가 그 오빠랑 결혼하면 차재하 그 새끼 윗사람 되는 거잖아…….”

“서이나. 그 말버릇 좀 어떻게 못 하겠니?”

서이나는 오늘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떠들어 대고 있었다. 이수는 마음속으로 그녀의 배우자 될 사람을 동정했다. 적당히 자리를 지키다 집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얼마 전 테일러가 와서 신체 치수를 재간 적이 있었는데, 오늘을 위한 일이었던 듯하다.

이탈리안 핏의 더블브레스트 슈트는 이수에게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아주 연한 물빛 셔츠와 검은색에 가까운 와인색 타이, 거기에 집으로 불러들인 스타일리스트들이 머리까지 만졌다. 한참이 지나서야 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수는 그러나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2층으로 올라가야 했다.

복도 깊숙한 곳에 서훈의 서재가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잠시 후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안경을 쓴 채 서류를 보고 있는 서훈이 보였다.

“부르셨어요.”

“잠깐 앉아 봐라.”

이수는 서훈의 마호가니 책상 앞에 놓인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푹신하니 전신을 감싸 오는 쿠션감에 짜증이 미미하게 가시는 느낌이었다.

서재는 아주 컸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과 서류들, 한쪽에는 즐겨 마시는 와인과 위스키가 정렬되어 있고 곁방으로 향하는 복도에는 사냥용 엽총이 벽에 걸려 있었다. 옆에 놓인 협탁에는 서훈이 즐겨 하는 시가 케이스가 놓였는데, 이수도 익히 아는 물건이었다.

뚜껑을 열어 두툼하게 말린 담뱃잎과 시가 커터를 꺼냈다. 커터로 앞뒤를 싹둑 자르고 불을 붙이는데, 뒤늦게 그를 알아챈 서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중요한 자리인데 나중에 하는 게 어떻겠니.”

“5분만 있다 갈 거예요.”

“5분이고 1분이고, 예의가 아니지.”

“사람 불러 놓고 일하고 있는 건 아버지만의 예의인가 보죠?”

서훈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독한 담배 냄새가 피어올랐다. 시가를 뺏어 치워 두고 이수의 맞은편에 앉는다. 무표정한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서훈이 말했다.

“중요한 자리니까 말조심하길 바란다.”

“중요한 할 말이 겨우 그거예요? 그런 자리면 나를 왜 불렀어요.”

따박따박 튀어나오는 대꾸에 서훈이 혀를 찼다. 말수 적고 얌전했던 아들은, 사춘기를 기점으로 기질이 사나워졌다. 말 한마디를 지지 않았고 누군가가 시비를 걸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미련하게 참고 넘기는 것보다야 나았지만 종종 도가 지나칠 때가 있었는데, 그 도가 지나친 날이 오늘은 아니었으면 했다. 눈가를 매만진 서훈이 이수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 집 둘째가 네 후배라더구나. 차재희라고.”

서훈에게서 들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이름이었다. 이수는 얼빠진 표정으로 서훈을 바라봤다. 저게 무슨 소리야. 내가 아는 그 차재희? 차재희가 서이나랑 결혼할 집 아들이라고? 들은 적 없는 이야기였다. 아들의 충격을 인지하지 못하고 서훈이 말을 이었다.

“아는 사이라며. 그럼 그 집 막내가 사고를 당한 것도 들었나? 그것 때문에 일이 우습게 됐어.”

“아는 사이라고 누가 그래요. 차재희가 그래요?”

“그쪽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아마 그랬겠지.”

아니, 그럼 사고를 당해 누워 있던 차재희의 동생이 서이나가 악처가 되겠다고 부르짖었던 그 남자란 말인가? 이수는 그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회복이 힘든 장애와 부인이 서이나. 둘 중 어느 것이 더 불행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참으로 기구한 팔자였다.

친하다고 말한 걸 보면, 차재희는 우리가 사돈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그럼 왜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했지. 의문이 들긴 했지만 잠깐이었다. 이수도 자신이 서일 그룹 둘째라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재희가 생각보다 가까이 얽힌 집안의 자식이라는 게 놀라울 뿐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 서이나가 누구와 결혼하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사돈인데 뭐, 어쩌라고. 빠르게 결론 내린 이수는 다시금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그 평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하여튼, 이수야. 네가 학교생활을 어찌하는지는 대충 들어 알겠는데, 혹시라도 그 집 둘째와 사이가 좋지 않더라도 오늘은 참는 게 좋겠구나. 그 이야기 하려고 불렀다.”

“……무슨 소리예요?”

“내가 어려운 부탁을 했나?”

“아니, 차재희가 오늘 여기 온단 말이에요? 지금?”

서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심지어 서이나가 경악스러울 정도로 버릇없이 굴어도 눈 하나 깜빡 않는 서이수였다. 그런 아들이 저 정도로 격한 반응을 보인다면 그냥 돌려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 서훈이 다시 말문을 뗐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밖에서 누군가 알려 왔다.

“도착했습니다, 회장님.”

“금방 나가지요.”

그렇게 대꾸한 서훈은 이수에게 몇 마디를 더 당부했다. 정 못 참겠으면 차라리 양해를 구하고 나가라고 했지만, 이수는 그 말을 전혀 듣지 못했다. 멍한 얼굴로 서훈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이수는 부친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잠깐만. 설마, 아침에 오늘 어디 가느냐고 물어봤던 게 그러면…….

별채로 가는 길이 멀고도 멀었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과 혹시나 하는 의심이 부딪쳤다. 그렇게 별채 1층에 마련된 응접실로 발을 들였을 때, 이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차재희가 정말로 이곳에 있었다.

* * *

서훈, 천수인, 서이준, 서이나.

차대범, 성미희, 차재우, 차재희, 차재하.

그들이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나누는 동안 이수의 시선은 재희에게 못 박혀 있었다. 재희는 이수를 보고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흠칫 놀랐으나, 그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의 등장에 당황한 것뿐이었다.

그런 차재희의 태도에 이수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저녁에 온다고 해서 그때 비행기에서 내리는 줄 알았더니, 통화했을 때부터 이미 한국에 있었던 것이다. 아주 발칙하게 속여 먹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저녁에 집으로 오겠다는 말만 했으니 속인 건 아니었다. 제대로 말하지 않았을 뿐.

어쨌든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왜 집에 있느냐고 물었는지, 자신이 이 자리에 나오지 않길 바랐던 건지, 나오길 바랐던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실시간으로 짜증이 차올랐다. 구겨지는 미간과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끝. 가만히 그를 보던 서이준이 손을 뻗어 이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작은 악력에 정신을 차리니 차재희의 부모로 추정되는 인간들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식 귀한 줄 모르고 차재희를 간병인으로 쓰고, 미국까지 가는 비행기 표도 이코노미로 예약하는 인간들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수는 건성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안녕하세요.”

“……이수가 이런 자리를 좀 불편해해요.”

말투에서 느껴지는 무심함에 천수인이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 차대범은 사람 좋은 척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하, 괜찮습니다. 그때 이수 군이랑 미국에서 한 번 본 적 있죠? 병원에서 우연히요.”

“아… 그랬죠, 참.”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천수인을 보고 이수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차재희의 부모를 본 적이 있다고? 금시초문이었다. 어깨를 으쓱이자 천수인이 희미하게 미간을 구겼다. 이수를 괜히 불렀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천수인이 군더더기 없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너 다시 입원했을 때 잠깐 들르셨었는데. 그때 정신이 없어서 기억 못 할 수도 있겠구나. ……그때, 금방 돌아가셨으니까 아마 인사를 제대로 못 했을 거야.”

다시 입원했을 때라면, 난간에 올라갔던 날일까. 아니면 항암 치료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일 수도 있었다. 병원에 있는 건 비밀이었는데 대체 어떻게 알고 왔었지? 차재희도 거기 있었을까? 그래요, 궁금증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뭔가를 깨달은 듯한 목소리는 이수가 아닌 차재희에게서 흘러나왔다. 이수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8월 말에 봤을 때보다 살이 더 빠진 듯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밥을 잘 챙겨 먹었다더니 거짓말이었을지도 몰랐다. 마른 얼굴은 여전히, 어쩌면 이전보다 더 관능적이었지만 기분이 상했다. 그가 하고 싶어서 한 다이어트가 아니었을 테니까.

뜨거운 시선에 재희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수를 보다가 슬며시 웃었다. 얕게 패는 보조개를 보고 코웃음을 쳤다. 순간 가라앉는 분위기에 천수인이 한숨을 쉬며 말을 돌렸다.

“재하 군은…….”

“에어컨 좀 틀어 주시면 안 되나요?”

차재하에게 괜찮으냐고 물으려던 천수인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을 끊어 먹은 차재하는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손부채질을 하고, 정장 재킷을 벗어 던졌다. 사륵, 옷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에 재희를 노려보고 있던 이수가 눈을 돌렸다.

차재희와 하나도 닮지 않은 차재하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해 보였다. 손을 떨며 넥타이를 빼더니, 셔츠 단추까지 풀어 헤친다. 왜 저래?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응접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서훈의 수행 비서가 시스템 에어컨을 켰다.

짜증이 날 정도로 찬 바람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차재하는 만족하지 못하고 더, 더, 온도를 낮춰 달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트립쇼라도 할 기세였다. 그제야 이수는 차재하의 상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나쁘다는 걸 깨달았다.

“사고 이후로 좀… 죄송합니다. 병원은 계속 다니고 있어요.”

아픈 아들이 부끄러운 듯, 수치심을 숨기지 못하고 벌건 얼굴로 변명하는 여자는 차재희의 모친이었다. 매정해 보이는 여자의 얼굴에 아들에 대한 안쓰러움과 걱정 따위는 하나도 비치지 않았다.

순간 이수는 성미희에게서 몇 달 전 세상을 떠난 조부의 모습을 봤다. 짙은 혐오감이 피어올랐다. 저 사람이 차재희의 엄마라고? 속에서 알 수 없는 천불이 일었다. 그가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린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치료는… 잘 진행되고 있나요?”

에어컨 앞에 서서 셔츠를 펄럭이는 차재하를 흘끔거리며, 천수인이 조용히 물었다. 대화는 거의 천수인과 성미희가 주도했다. 서훈과 차대범은 테이블 끝에서 비서들과 함께 서류를 훑어보느라 바빴다.

이럴 거면 난 대체 왜 부른 거지. 짜증이 몸집을 불려 갔지만 차재희가 이곳에 있는 이상 자리를 뜰 마음은 없었다. 긴장한 듯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재희는 시도 때도 없이 이수를 힐끔거렸다.

그러다가.

“아, 소변 마려워요.”

차재하가 그렇게 말하며 바지 버클을 푼 건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무덤덤한 이수조차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유아 퇴행이라도 온 것 같았다.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차재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하야 잠깐만 참아 봐, 하고 그를 달래서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응접실에 침묵이 흘렀다. 서훈과 차대범마저도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실낱같은 웃음소리가 고요를 깼다.

“풉…….”

서이나는 얼마 가지 못해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참아 내지 못한 웃음이 스산하게 퍼져 나간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이수는 그녀를 한심하단 듯 쏘아봐 주고는 내부를 둘러봤다. 천수인의 눈빛이 자못 심각했다. 서훈과 서이준 또한 마찬가지였다. 성미희는 세상이 무너져 내린 듯 망연자실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차대범은 화가 나 보였다.

그리고 차재희는 입술을 꾹 깨문 채 테이블만 내려다봤다. 이제야 그가 왜 동생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저런 비극을 제 입으로 설명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을 테다.

“자리를 옮기죠. 여긴 서 대표가 신경 좀 써 줘요.”

잠시 후 천수인이 우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서훈과 천수인, 차대범과 성미희. 두 부부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도 서이나의 웃음은 멈출 기미가 안 보였다. 그들을 배행하고 돌아온 서이준이 단호한 목소리로 서이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도 끄떡없었다. 차재희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기에 결국 이수가 나섰다.

“그만해, 서이나.”

“뭐래, 참견하지 마.”

이름을 부르자마자 팩 쏘아보는 기세가 대단했다. 누구 동생인지 싸가지가 어마어마하다. 짜증스럽게 노려보고 있으니 그제야 웃음을 그친 서이나가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눈물이 맺힌 눈가를 닦더니 재희를 향해 활짝 웃는다. 감히 누굴 보고 웃어? 황당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서이나가 이해하기 힘든 소리를 꺼냈다.

“잘 부탁드려요, 재희 오빠. 아무래도 우리가 결혼할 것 같죠?”

우리라는 건, 저랑 차재하를 가리키는 말인가? 아무리 봐도 아파 보이는데, 그렇게까지 결혼을 추진할 정도로 억하심정이 크단 말인가? 이수는 악처가 되겠다며 소리를 지르던 서이나를 떠올렸다. 차재하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궁금해졌다.

가만히 생각하고 있는데 재희가 입을 열었다. 이수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며, 조용히 묻는다.

“정말로 나랑 결혼할 생각이야?”

누가 철근으로 뒤통수를 후려친 것 같았다.

“아우, 물론이죠. 쟤보다는 오빠가 낫죠.”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에 현실성이 없었다. 저게 무슨 개소리야.

이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차재희와 서이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내가 잘못 들은 거지? 그렇다고 해. 그러나 서이나가 지껄이는 말에 퓨즈가 뚝 끊기는 듯했다.

“오빠, 저랑 결혼하면 차재하가 꼬박꼬박 형수님이라고 부르게 해 주세요. 꼭이요. 네? 아셨죠?”

여우처럼 꼬리 치는 눈웃음을 보던 이수가 육성으로 욕을 씹었다.

“아니, 씨발.”

“아, 깜짝이야! 왜 욕을 하고 난리야?”

“니가 쟤랑 결혼을 왜 해.”

노기 띤 음성이 싸늘했다. 서이나는 뭐 그딴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이수를 쏘아보며 대꾸했다.

“왜긴 왜야. 차재하가 병신 됐으니까 그렇지.”

“서이나, 말조심해. 가족 되는 사람 앞에 두고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아, 오빠. 죄송해요…….”

서이나가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사과를 하는 동안, 이수의 머릿속은 뒤죽박죽 엉망이었다.

차재하가 아프면 아픈 거지, 왜 차재희가 그 자릴 대신해? 아니. 그 전에 ‘정말로 나랑 결혼할 생각이야?’라니. 알고 있었다는 저 태도는 뭐야? 저게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이게 뭐 하자는 거야. 나를 두고, 서이나랑 결혼을 해? 차재희가? 이런 씨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의문과 의심 그리고 폭발하기 직전의 화를 참지 못하고 이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밀려나는 의자 소리에 서이준과 서이나가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수는 차재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얘기 좀 해.”

“선배, 이따가 설명…….”

“끌려 나올래?”

이를 악물고 하는 말에 재희가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가만히 있었다간 정말 멱살이라도 잡고 끌고 갈 기세라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차재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서이나가 뾰족한 목소리로 이수의 화를 돋웠다.

“아니, 서이수! 내 남편 될 사람한테 왜 말을 그따위로 해?”

“넌 입 다물어.”

“야!”

“닥치라고 말해야 알아들을래?”

서늘한 목소리에 서이나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찻잔을 움켜쥐었다. 제 말버릇은 생각도 못 하고 차재희 앞에서 이런 식으로 수치를 당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불쾌했다.

상견례고 나발이고 뒤집어엎으려는 것을 말린 것은 당연히 서이준이었다. 동생들의 발작질에 중재자로 끼어든 서이준은 이수에게 차재희를 데리고 나가라고 눈짓했다.

이수는 응접실을 나와 별채 2층으로 향했다.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뚜벅뚜벅, 귀에 익은 규칙적인 소음에 마음이 진정되나 싶었으나 잠깐이었다. 가장 구석방에 들어가 문을 닫자마자 눌러두었던 분노가 폭발했다.

“씨발, 이거 뭔데?”

“선배, 이따가 저녁에…….”

“당장 설명 안 해?”

재희가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에 더 열이 뻗쳤다. 이수는 그의 잇새에 끼워진 입술을 빼 주고 손바닥을 확인했다. 오른손이 엉망이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상처가 깊었다. 머리끝까지 치솟은 감정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이수에게 붙잡힌 손목에 하얗게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강하게 틀어쥔 힘에 재희가 신음을 터트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아파요, 작은 중얼거림에 이수는 손을 풀었다.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물었다.

“왜 한국 들어왔다고 말 안 했어? 여기 온다는 건 왜 숨겼어?”

“숨긴 게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도중 대나무처럼 뾰족 솟는 의심이 있었다. 이 씨발 새끼가 나한테 비밀로 하고 서이나랑 결혼하려던 건 아니겠지? 환승? 감히 나를 상대로? 인내를 상실한 이수가 쏘아붙였다.

“내가 오지 말았으면 싶었어? 너, 서이나랑 결혼할 거야? 내가 걔 오빠인 거 알고 있었지? 그래서 내가 오나 안 오나 확인했어? 뒤지고 싶어 환장했지?”

“아니, 선배.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씨발 설명을 해 보라……!”

쪽, 화를 내는 이수에게 재희가 입을 맞췄다. 날카롭게 벼려져 있던 눈빛이 흐물흐물하게 풀어졌다. 이수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아, 선배……!”

잠깐 진정시키려던 거였는데. 당황한 재희가 밀어내려 했지만 이수는 받아 주지 않았다. 쿵, 차재희를 문으로 밀치더니 먹잇감의 숨통을 끊는 맹수처럼 달려든다. 입술이 거칠게 부딪혔다. 잔뜩 긴장한 재희를 뜯어 먹듯 이수가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윽, 작은 신음과 함께 입이 벌어졌다. 그 틈을 파고드는 혀끝이 재희의 안을 날카롭게 찔러 왔다. 이수의 격노를 대변하듯 사납고 난폭한 움직임이었다.

아랫입술을 물어뜯고, 혀를 빨아들이는 힘에 자비가 없었다. 댐이 허물어진 것 같았다. 이수는 쌓아 둔 욕망을 분출하듯 재희를 깔아뭉갤 기세로 그를 덮쳤다.

순식간에 부풀어 오른 하체가 맞닿고 가라앉은 공기가 끈적끈적하게 변질될 때쯤,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총성처럼 울렸다. 발정기의 짐승처럼 서로를 탐하던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 입술을 떼어 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여전히 음습하게 젖은 채였다.

“이수야, 둘이 여기 있어? 들어오라고 하시는데.”

“금방… 갈게.”

서이준이었다. 재희를 노려보며 대꾸한 이수는 문밖이 조용해지자 다시금 그에게 다가갔다. 이번엔 짧고 부드러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서로의 타액을 머금고 그루밍하듯 핥아 준다. 허리에 얹어진 손에 힘이 들어가고, 이내 입술을 떼어 낸 재희가 이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아이를 어르듯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진정이 좀 됐어요? 무슨 오해를 하는 거예요. 내가 선배 동생이랑 결혼을 왜 해요.”

“지금 내가 오해를 안 하게 생겼어?”

또다시 느껴지는 지랄의 전조에 재희는 이수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저녁에 설명해 주려고 했어요…….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요, 응?”

씨근거리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온몸을 적시듯 쏟아지는 온기가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익숙한 체취를 들이마시니 허전했던 마음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아래층에서 무슨 대화가 오고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차재희는 내 것이고,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 그것만이 중요했다. 이수가 재희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 이제 아무 데도 못 가.”

재희가 나지막이 웃었다. 그 웃음을 들으며 이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차적인 분노는 가라앉혔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언제고 다시 폭발할 수 있었다. 몸을 떼어 낸 이수가 재희를 직시하며 말했다.

“설명해, 너랑 서이나가 결혼한다는 개좆같은 소리에 대해서.”

그러니까, 사건의 시작은 7월. 차재하가 사고가 났던 때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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