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5)

다정한 선배 (2)

차재하는 음주 후 교통사고를 냈고,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차재우가 국내선을 타고 코네티컷으로 가는 중이었지만, 일 때문에 오래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성미희가 혼절했기 때문에 재희가 당장 미국으로 가야 했다.

그날 이수에게 들렀다가 공항으로 간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 재희가 정신을 차렸을 땐 차재하가 누워 있는 집중 치료실 앞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본 동생의 모습은 처참했다. 퉁퉁 부어 있는 얼굴은 차트가 없다면 차재하라는 걸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고, 한쪽 다리와 팔은 부목을 덧대고 있었다.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 채 눈도 뜨지 못하는 동생을 보는 순간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재희는 밖으로 나와 한참 동안 울었다.

* * *

차재하는 재희가 도착하고 이틀 후 눈을 떴다.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대충 마치고 돌아온 재희가 면회 시간에 맞춰 집중 치료실로 들어갔을 때였다. 마른 손등에 로션을 발라 주고 있는데 손이 움찔거렸다. 그 생명의 미동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무언가를 찾듯 손가락을 움직이던 차재하는 곧 재희의 손을 강하게 맞잡았다.

“혀, 형……. 어디… 갔다, 왔어.”

“재하야! 정신 들어?”

“벤… 씨… 새끼, 들…….”

“뭐?”

차재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다시 눈을 감았다. 아무도 없어서 무서웠어. 너무 무서웠어. 아이처럼 웅얼거리는 말과 함께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렀다.

“가지… 마. 옆에……. 있어, 줘, 형…….”

뺨을 닦아 주던 손이 굳었다. 형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재희는 그런 환청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의무를 버리고 도망치려던 자신을 탓하던 목소리가 이제는 재희의 발목을 붙잡으려 했다.

“아무 데도 안 가.”

당분간은, 그 마지막 말은 애써 삼켰다. 재희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다만 지워 낼 수 없는 부채감 때문에 차재하가 병원을 퇴원할 때까지만 그를 돌보기로 마음먹었다. 재희가 떠나고 그의 의무까지 대신해야 할 동생에 대한 마지막 책임감이었다.

그래도 차재하는 회복이 빨랐다. 의식을 되찾고 이틀 후에는 눈을 멀쩡하게 뜬 채 유동식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정도였다. 의사는 이대로라면 그가 한 달 안에 퇴원할 수 있을 거라는 소리를 했다. 재희도 당연히 그렇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차재하는 며칠 뒤부터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고 일어나면 식사가 나올 때까지 배고프다는 소리를 반복했고, 재희가 자리를 비운 동안 대소변으로 매트리스를 더럽히기도 했다. 더우면 옷을 벗어 던졌고, 추우면 이불 속에 파고들어 가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난방을 높여 달라는 소리를 반복했다.

재희로서는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자신감 넘쳤던 동생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의사는 정밀 검사 결과만 놓고 보면 큰 우려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현대 의학으로도 잡아낼 수 없는 미세한 손상의 가능성을 무시할 순 없다고 했다.

인간의 뇌는 섬세하고 연약한 부위입니다, 그렇게 설명하며 의사는 차재하의 상태를 두고 사고의 충격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일환으로 일시적, 혹은 영구적 장애가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빠른 영어로 뱉어지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스펠링을 적어 달라고 하고 한참이나 의학 사전을 뒤졌다. 유아 퇴행, 충동 조절 장애. 한글로 된 병명을 찾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한순간에 빛을 잃어버린 동생을 앞에 두고, 재희는 그의 증세가 일시적이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차재하의 이상 행동은 한 달이 넘도록 지속됐다. 그가 먹기 싫다며 식판을 던질 때마다, 산책하는 동안 요의를 참지 못해 환자복을 노랗게 물들일 때마다 마음이 푹 꺾여 버리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유아 퇴행이 온 것 같다고…….”

─ 뭐? 당장 수술이라도 하라고 해! 넌 대체 거기서 뭘 한 거야! 동생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성미희와 차대범은 현실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갈 길 잃은 분노는 가장 만만한 자식을 향했다. 그러한 그들의 태도로 인해 재희의 죄책감은 지워지긴커녕 나날이 커지기만 했다. 차재하가 그렇게 된 게 정말 자신 때문인 것 같았다.

재희는 그럴수록 9시에 집착하게 되었다. 이수에게 전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그의 지나간 하루를 듣는 순간만큼은 자신을 둘러싼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빼곡히 차올랐다.

무심한 선배는 9시를 제외하면 결코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었다. 그와 대화를 이어 가기 위해 재희는 시도 때도 없이 메시지를 보냈다. 어느 날은 다음 날 통화를 하며 이야기할 거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 일을 몇 번 겪은 이후로는 메시지로 지나간 일들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재희가 묻지 않으면 이수는 그 어떤 화제든 먼저 입에 올리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재희는 자신이 이수에게 매달리고 있다는 느낌을 수시로 받았다. 자신감이 떨어졌다. 이러다 어느 날 연락이 뚝 끊겨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자존감이 바닥에 처박힐 즈음엔, 이수가 보내 준 음성 메시지를 들었다.

─ ……음. 이런 말은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말문을 뗀 이수는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개미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 나도 보고 싶어, 차재희.

그 아홉 음절의 울림이 얼마나 큰지 서이수는 모를 것이다. 재희는 이수의 고백 같은 말을 듣고 또 들었다. 테이프였다면 늘어나고 늘어나서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되었을 때까지.

* * *

차재하의 병세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버틴다는 말이 적절하다고 생각할 만한 시간이 흘렀다.

─ 재희야, 어머니 13일에 나가신다니까 14일에 들어와. 고생 많았어.

그러던 8월, 드디어 성미희가 미국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고 소식을 듣고 혼절했던 성미희는 재희에게서 차재하가 뇌 손상을 입은 것 같다는 비보를 접하고 여태껏 그를 대면하는 것을 미뤄 둔 참이었다.

측정이 의미 없는 고 지능자였던 아들에게 영구적인 장애가 생길 수도 있다는 말은 성미희에게 있어선 지구가 멸망하는 수준의 자연재해나 다름없었다. 성미희는 한 달이 지나서야 아들의 상태를 마주할 준비가 됐다.

한국으로 들어가는 비행기를 예약하자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그 감각에 죄책감을 느끼길 여러 차례. 재희는 할 만큼 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수가 말한 것처럼 차재하를 영원히 돌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보낸 예약 화면을 보고, 이수는 자신이 JFK 공항으로 마중을 나오겠다고 했다. 재희는 다급히 전화를 걸었다.

“선배, 무슨 소리예요. 인천 공항을 잘못 말한 거죠?”

─ 아니, 제대로 들었어. JFK로 갈게. 1터미널 앞에서 만나서 같이 들어와.

“……이쪽에 볼일 있어요?”

─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너 데리러 간다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재희는 이수의 말을 당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물론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만나고 싶은 건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퍼스트를 타고 올 게 분명한 이수였기에 14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천만 원 돈을 낭비한다는 걸 용납할 수가 없었다. 재희는 그에게 더는 미안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니, 선배.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알아서 갈게요. 응?”

─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 그럼 내가 JFK에 볼일 있어서 가는 걸로 해. 너 데리러 가는 거 말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 됐고, 끊어. 이 얘기는 여기서 끝내.

재희는 메시지로 이수를 설득하려 애썼다. 물론 돌아온 건 엄청난 짜증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수와 연락이 끊겼다. 메시지도, 전화도 오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기쁨과 슬픔이 아닌, 자괴와 절망의 극단을 오갔다.

재희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화를 낼 때처럼 싸늘한 눈동자를 매일 밤 마주했다. 그 굳어 버린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걸 볼 수만 있다면, 모두 괜찮아질 텐데. 악몽 속의 이수는 결코 웃는 법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항으로 오라고 할 걸, 아니. 이전에 병원으로 오겠다고 했을 때 그러라고 할 걸, 그 후회를 재희는 몇 번이고 긍정하고 또 부정했다.

아니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이곳에는 오지 않는 것이 나았다. 전화와 메시지로는 평소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꾸며 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지구 반대편에 있으면 이렇듯 진득한 우울을 이수에게 전염시킬 일도 없었다.

그에게 동생의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재희는 늘 당당했던 차재하가 얼마나 볼품없는 모습으로 병상에 쭈그리고 누워 있는지 이야기하며 울음을 터트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울적한 모습을 보여 이수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도 않았다. 곁에 있어 주지도 못하는 주제에, 마음이나 쓰이게 하는 한심한 짓거리는 절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수와 연락이 끊기자 그 모든 선택이 틀렸던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괴로움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날,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수

나 지금 병원이야. 화 안 났어.

18:20

병원이라고, 화나지 않았다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에 발밑이 무너져 내렸다. 세상에 이렇게 쓸모없는 인간도 없었다. 아플 때만큼은 곁에 있어 주고 싶었는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색색거리는 숨소리에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미안함의 눈물을 감추며 재희는 오지 말라는 자신의 의사를 전했다. 그러나 서이수는 단호했다. 메신저를 통해 지지부진한 언쟁이 또다시 이어졌다.

속이 복잡했다. 너무 힘들고, 또 괴로운데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보기 위해서 JFK 공항까지 날아오겠다는 이수만 생각하면 행복해서 웃음이 나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했다. 어쨌든 당장 입원 중인 사람이 여기까지 온다는 건 말이 안 됐다.

18:43

올 생각 하지 마요. 병원에 있어요. 거기로 갈게

8월 13일. 그렇게 메시지를 남겨 두고 재희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곧 성미희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병상에 앉은 차재하는 멍하니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매일같이 난리를 치더니 오늘따라 조용했다. 어디가 아픈 건지, 온종일 한숨만 내쉬었다.

재희는 차재하의 얼굴을 닦아 주고 머리도 만져 준 후에 그를 휠체어에 앉혔다. 걸을 수는 있지만 걷기 싫다고 떼를 쓸 때가 많아서 밖에 나갈 땐 휠체어를 사용하는 편이었다.

“어머니는?”

“로비에 도착하실 시간 됐어. 같이 마중 나가자.”

“응…….”

차재하가 바싹 마른 입술을 축였다. 재희는 얌전한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휠체어를 밀었다.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차재하가 덥다고 말했다. 재희는 동생에게 손부채질을 해 주었다.

병원 로비로 내려가니 사람이 꽤 많았다. 병문안을 온 사람과 접수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들의 곁에 휠체어를 세워 둔 채 재희는 성미희를 기다렸다. 차재하가 입을 연 것은 성미희가 막 택시에서 내렸을 즈음이었다.

“형, 나 목말라.”

“아……. 로비에는 정수기 없는데. 이따가 어머니 오시면 올라가서 마시면 안 될까?”

“목말라. 더워. 시원한 물 갖다 줘.”

“재하야, 잠깐만 참아 봐……. 응?”

“물!”

지금의 차재하는 고집을 부리면 이길 수가 없었다. 재희는 결국 차재하에게 여기 꼼짝 말고 앉아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그러고도 믿을 수가 없어 근처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동생을 1분만 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고 나서 복도 끝에 있는 정수기로 달려가 차가운 물을 떠 왔을 때, 눈앞에는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와우. 화끈한데?」

팔짱을 끼고 선 백인 남자가 그렇게 소리치며 휘파람을 불었다. 웅성거리는 소음이 로비를 둘러쌌다. 그리고 그 소란의 중심에 차재하가 서 있었다.

덥다고 말했을 때 병실로 돌아갔어야 했는데. 재희는 그 순간에도 자신을 탓했다. 환자복 상의를 벗어 던진 차재하는 바지를 끌어 내리고 있었다. 이마가 땀으로 번들거렸다. 당황한 재희가 물 잔을 팽개치며 달려갔다.

“재하야! 여기서 이러면 안 돼!”

차재하가 속옷을 벗지 못하도록 재희가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마침 회전문 사이로 익숙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의 기억은 재희의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더워 죽을 것 같단 말이야!”

“잠깐만, 재하야!”

차재하가 발버둥을 치는 탓에 드로어즈가 절반쯤 내려가고 뽀얀 엉덩이가 드러났다. 성미희는 자신의 걸작이라 자부하던 막내아들의 추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짧은 비명을 내지른 그녀의 눈이 하얗게 까뒤집어졌다. 캐리어의 손잡이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신형이 허물어졌다.

눈앞이 깜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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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러 필독 나 오늘 진짜 신박한 조합 봄;

경영러들아 컴공 토끼 아러?? ㅁㅇ있자너..

눈 땡그랗고 찰떡같이 생긴 애!!!1

와 오늘 나 공학관에 볼일 있어서 갔다가 카페 들렀는데 거기서 토끼랑 서를 봤거든?

얘네 언제 이렇게 친해졌냐...

대체 뭔 조합이여?

둘이서 노트북 보면서 토끼가 뭐라고뭐라고 막 하니까 서가 약간 실소? 하듯이 웃었는데.. 나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오

뭐야..? 둘이 엄청 잘 어울리더라.. 존나 호랑이굴에 들어간 토끼조합ㅠㅠㅠ

한 달 전 등록 신고하기(취소)

댓글 (7)

익명의 학우 1ㅁㅇ이 누구야? 컴공에 귀여운애가있어..? 난맨날 체크무늬 고추들밖에 못봤는데

 ➥ㄴㄷ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익명의 학우 21학기때 차랑 서랑 문이랑 독서문화의 이해와 토론 수업 들었잖음 거기서 친해진듯? 기말때 셋이발표함

 ➥머하는 수업이길래 서랑 친해질수가있냐..?

 ➥ㅋㅋㅋㅋ나도궁금해서 이번학기에 수강신청함ㅋㅋ

익명의 학우 3그래도... 차랑 더 잘 어울려요 [삭제하기]

 ➥ㅇㅇㅇㅇ둘이 같이 있으면 거기가 바로 극락이제..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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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현필법 수업 현황.txt

1. 오늘 현필법 수업하면서 칭찬 릴레이 함.

2. 서랑 문이랑 내 옆자리에 앉음

3. 문이 먼저 서한테 ‘배려심 깊고 상대방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 좋은 형’이라고 유언비어 내뱉음.

3. 서가 문 머리 쓰다듬으면서(내눈을의심)

4. ‘말 잘 듣고 착해서 예쁘다’고 문 공격함..

저거 공격 맞지..? 갱얼쥐한테나 하는 칭찬이잖아?

개같다는소리아님?

맞지? 맞다고해줘

2주일 전 등록 신고하기(취소)

댓글 (11)

익명의 학우 1구라치지마라;;;

익명의 학우 2뭐지? 문이 뭐 잘못했나??

익명의 학우 3현필법이 뭐야?

 ➥현대 사회에 필요한 인재가 되는 법, 교필수업

 ➥ㄳ

익명의 학우 4당연히 공격이지 서가 누굴 칭찬할 리가 없잖아ㅠㅠ

익명의 학우 5문은 맞는 말 했는데요. [삭제하기]

 ➥ㅋㅋㅋ서빠등장

 ➥?댓글 왜수정함? 방금 분명 ‘문은 맞는말 했는데요 서는 빈말어쩌고’ 이렇게 달려있었는뎅

 ➥잘못 보셨어요.. [삭제하기]

 ➥서버오류인가봐요 [삭제하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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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러들 8282 중도 앞에 무슨 일이야?

서가 안아주는 사람 누구임?

왜우는거임?

???머임머임?

1시간 전 등록 신고하기(취소)

댓글 (217)

익명의 학우 1이건 또 뭔.....?

익명의 학우 2서가 누굴 안아줘? 실시간임? 중도어디/

 ➥중도 정문로비앞 벤치ㅇㅇ

 ➥가는중..

 ➥ㅁㅊ.. 뭐냐ㄷㄷㄷ 우는 사람한테 자기 가디건 꺼내서 덮어줌..

 ➥말 도 안 돼

 ➥삭제된 댓글입니다.

 ➥저거 서 가디건 맞잖아

 ➥사진은 지우는 게 ㅡㅡ 도촬은 범죄임

 ➥ㅈㅅㅈㅅ 지움.

익명의 학우 3지나가다 살짝 봤는데 걔 아닌가.. 공대토끼?

 ➥ㅁㅇ?

 ➥ㅇㅇ나랑 같은 수업 듣는데 오늘 저 체크 셔츠 귀여워서 기억에 남음..

익명의 학우 4우리 토끼가 운다구..? 왜울지..?ㅠ 함미한테 와 애기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서보다 따듯하게 안아주께...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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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재희가 서이수를 일부러 감시한 건 아니다. 다만 이수와 연락이 되지 않는 시간 동안 할 일이 없었고, 공부는 집중이 되질 않았으며, 병원 밖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아서 올타를 자주 들여다봤을 뿐이었다.

그리고 올타에는 서이수에게 미친놈들이 상당히 많았고, 서이수에 대한 그 미친놈들의 관심은 상상을 초월했다.

서이수는 자신의 일상을 세세히 공유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오전 9시에 그와 전화를 하면서 전해 듣는 내용과, 올타에서 본 서이수의 일거수일투족은 상당히 큰 괴리가 있었다.

‘그냥, 별일 없었어. 교필 수업 때 문율이랑 칭찬 같은 거 했어.’라고 말했던 날. 이수는 그 빌어먹을 교필 수업에서 문율에게 웃어 주며 말 잘 듣고 착해서 예쁘다는, 차재희는 들어 본 적도 없는 찬사를 퍼부었다.

또한 ‘그냥 평소랑 똑같았어.’라고 말했던 날에는 문율과 카페에서 알콩달콩 붙어 있었다는 목격담이 열 번은 올라왔다.

이수와 문율이 수업을 하나도 아니고 두 개도 아니고 세 개나 같이 듣는다는 사실도 재희는 올타를 통해서 알았다. 두 사람이 매일 옆자리에 앉아 수업을 듣고 점심을 같이 먹는다는 사실도, 종종 문율이 이수의 차를 얻어타고 다닌다는 사실도 모두 다 올타를 보고 알았다.

자신이랑 찍은 사진은 하나도 안 올리면서, SNS에는 문율의 사진이 세 번이나 올라왔다. 심통이 나서 다이렉트 메시지로 투덜거렸는데 확인도 안 했다. 심지어는 팔로우도 받아 주지 않았다. 신유진이랑은 했으면서.

8월 말, 이수의 깜짝 방문 이후로 그가 자신을 떠날까 하는 불안함은 거의 다 사그라졌다고 생각했다. 정말 좋아하지 않는다면 한 시간을 보기 위해 왕복 서른 시간을 낭비하는 미친 짓은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개강 이후, 올타를 통해 이수의 일과를 접할수록 서운함은 다시금 몸집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그저 길드원이자 펫 시터, 같이 게임을 만드는 부하 직원 정도로 생각했던 문율의 존재감이 이수에게 나날이 커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올타에 차와 서의 언급보다 서와 문의 언급이 많아질수록 재희는 이수의 머릿속에서도 차는 지워지고 문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하게 되었다.

그 서&문의 언급이 절정을 찍었던 날. 128번의 부재중 전화를 남기는 동안 재희는 온갖 망상에 시달렸다.

문율이랑 같이 집에 갔을까? 올타에서 그랬던 것처럼 집에서도 문율을 안아 줬을까?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줬을까? 카디건은 왜 덮어 줬지? 물건 빌려주는 거 싫어한다고 했는데, 문율이랑 나랑 별다를 바 없는 거야?

나는 약속도 안 지키고 예쁘지도 않은데, 문율은 말도 잘 듣고 착해서, 그래서 예뻐서… 이제는 내가 필요 없어졌을까? 나는 이제 선배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닌 걸까?

차재하도 내팽개친 채로 휴대폰만 붙들고 있었다. 이러다가 미쳐 버릴 것 같아서 두려워질 때면 이수가 남겨 둔 음성 메시지를 재생했다.

─ 나도 보고 싶어, 차재희.

선배가 살면서 처음으로 보고 싶어 한 사람이 나니까, 나를 그리워하는 사람이니까, 그럴 리가 없어. 그렇게 자신을 세뇌하며 수십 번, 수백 번을 반복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수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 미안해, 일이 좀 생겨서 신경을 못 썼어.

그렇게 건조한 목소리로 말하는 남자에게 재희는 울컥 화가 났다.

미안해? 미안하면 다야? 문율이 나보다 우선이야? 나한테는 신경도 못 쓸 정도로 걔한테 정신이 팔렸어? 나는 가졌으니까 끝이야? 잡은 물고기니까 굶어도 상관없어? 나를 갖겠다고 했잖아. 그럼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이렇게 버려두면 안 되는 거잖아…….

그런 마음에 이수를 추궁하고 화를 냈다. 한국을 떠나온 건 자신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가 싫어할 걸 알면서도 일부러 더 날 선 물음을 던졌다.

이수가 한 번만 져 주길 바라면서, 문율보다 자신을 더 특별하게 대해 주길 바라면서, 울고 있는 문율을 안아 주었듯 자신의 서러움도 알아주길 바라면서.

─ 그럴 리가 없잖아. 필요해. 지금 당장이라도 여기로 끌고 오고 싶어.

재희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이수의 옆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그 부드러운 살결에 코를 파묻고 이수의 체취에 질식해 죽어 버리고 싶었다. 어쩌면 이때 이수가 재희의 어리광을 받아 주지 않았다면 재희는 완전히 절망하고 말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수는 재희가 바랐던 대로 해 주었다.

─ 보고 싶어. ……대체 언제 와?

서이수가 애틋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마음을 풀지 않을 수가 있을까. 쌓여 있던 서운함은 눈처럼 녹아 없어지고, 꾹꾹 삼켜 놓았던 그리움이 배가 되어 재희를 짓눌렀다.

서이수를, 그 까칠하고 예민한 남자를 제 품에 안고 잠들고 싶었다. 잠에서 깨어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콧등에 입 맞추고 싶었다. 온기를 찾아 잠결에 맨살로 부대껴 오는 남자를 끌어안고 싶었다.

“금방 갈게요……. 화내서 미안해요. 나도 보고 싶어요, 선배.”

말이 씨가 된다는 격언을 믿어 보려고 금방 간다는 말을 내뱉었다. 사실은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까마득했지만…….

어쨌든 놀랍게도, 전화를 끊은 다음 날 재희가 한 말은 불쾌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게 무슨 소리세요?”

“제대로 못 들었니? 재하 대신 네가 결혼하라고.”

“……네?”

귀로 들은 말이 뇌까지 전달이 되질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재희는 멍하니 제 앞에 선 모친을 바라봤다.

성미희는 해쓱했으나 두 눈에 독기가 흘렀다. 자식이 제 역할을 못 하면 다른 자식으로 그 빈자리를 채우겠다는, 배 아파 낳은 아들을 부품 취급하는 여자의 얼굴에서 인간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피부에 와닿지 않는 현실에 재희가 입을 다물고 서 있자, 성미희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다시 한번 상황을 설명했다.

“애초에 혼담이 오갈 때, 우리 요구로 서일하고 계약서를 썼어. 서일 전자에서 우리가 특허권을 가진 디스플레이 필름을 사용해 로열티를 지급하는 조건을 달고, 정당한 이유 없이 계약 파기를 원한다면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고 명시했지.”

“재하가 아픈데, 정당한 이유… 있는 거잖아요.”

“그렇지. 근데, 계약 파기를 요구하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 서일이란다.”

서일에서 계약 파기를 요구한다고……. 재하가 아파서? 그럼 그냥 파기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귀책사유는 재하지만 그쪽에서 파기를 원하니 위약금을 물 필요가 없는 건데. 내가 왜 재하의 역할을 대신해야 하지?

눈을 찡그린 채 성미희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려 애쓰던 재희는 이내 탄식을 터트렸다. 복잡하게 사고하던 머리가 빠르게 얼어붙었다.

위약금, 로열티 그리고 결혼.

위약금은 서일 측에서 섣불리 계약을 파기하지 못하도록 세워 둔 경고판일 뿐이었고, 로열티는 씨엔이 얻을 수 있는 부가적인 수입원에 불과했다. 차대범과 성미희가 정말로 원하는 건… 결혼이었다.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부모들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들이 사는 세상에 편입하고 싶은 것이다. 설령 자식을 팔아야 할지라도…….

“계약서에 혼인 당사자가 재하라는 언급은 없으니 다행이지. 그쪽에 너를 보여 준다고 말했더니, 그럼 주말에 만나서 계약서를 토대로 다시 이야기를 나눠 보자고 하더구나.”

말하는 것마저도 거래할 물건을 선보이겠다는 어조였다. 재희는 황망하여 말을 잇지 못한 채 제 모친만 바라봤다.

대체 어떻게 참았을까? 저렇게 자식을 물건 취급하지 못해서 안달인 사람들인데. 스무 해 동안 팔아먹지 않고 남겨 둔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할 판이었다.

“알아들었니? 선견에서 거절해 줘서 잘된 일이지……. 오늘 저녁에 퇴원하고 바로 한국으로 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두고. 표가 없어서 나는 먼저 가 있을 테니, 동생 잘 챙겨서 오렴.”

성미희는 재희의 의사는 중요치 않다는 듯, 통보 아닌 통보를 남겨 둔 채 몸을 돌렸다. 휴게실에 덩그러니 선 재희가 상황을 곱씹었다.

지금 나보고 서이수를 놔두고 그 여동생이랑 결혼하라고?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선배, 미안한데 우리 부모님이 나보고 선배 여동생이랑 결혼하라고 하는데 어떡할까요? 그렇게 말하면 서이수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화를 낼까? 무슨 개씹소리를 하고 있느냐고 욕을 하겠지?

수가 저를 위해 열을 내는 상황을 떠올리던 재희가 실소했다. 이토록 현실감 없는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이 자신이 될 줄 몰랐다.

사랑하는 이의 여동생과 어쩔 수 없이 결혼해야만 했던 남자? 그렇게 될 수는 없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계획을 실행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방법은 간단했다. 모든 연락을 끊고 잠적하는 일이었다.

재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병실로 돌아갔다. 침대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차재하가 고개를 돌린다. 복잡해 보이는 재희의 낯을 빤히 쳐다보더니, 어머니는? 하고 물었다.

“호텔로 가셨어. 그리고… 오늘 저녁에 퇴원하고 같이 한국으로 들어간대.”

“이렇게 갑자기? 왜?”

“…….”

재희가 동생을 바라봤다. 차재하는 어릴 적부터 재희를 잘 따랐다. 종종 떼를 쓰고 억지를 부려 그를 난감하게 할 때도 있었지만, 생각해 보면 언제나 사랑스러운 동생이었다. 성미희와 차대범은 차재우와 차재하, 범인들보다 뛰어난 그 둘을 애지중지 키웠다.

그 중간에 낀 차재희라는 아이는 두 사람에게 있어 비교적 못난 아이였다. 각각 11, 12개월에 걷기 시작한 형제들과 달리 재희가 걸음마를 뗀 것은 21개월령이었으며 문장으로 된 말을 제대로 구사한 것도 36개월이 조금 지나서였다.

다행히도 차재우는 어릴 적부터 유학을 떠났지만, 차재하는 열두 살에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재희와 함께 있었다. 그들은 재희를 모자란 아이 취급했지만, 다행히도 재희는 동생 차재하를 사랑했기에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자존감을 갉아먹혔을 뿐이다.

재하는 정말 똑똑하니까, 나랑 비교하면 내가 못난 건 당연하잖아. 나도 못 하는 영어를 저렇게나 잘하는데, 나랑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재하한테는 기분 나쁜 일일 수도 있어.

재희는 남들보다 더 노력했다. 사랑하는 동생이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부모에게 그래도 열심히 하는구나, 라는 칭찬을 받기 위해.

그러나 이제는 아무것도 상관이 없었다. 부모에게 칭찬을 받고 싶지도 않았고, 동생에게 자신이 어떤 의미일지라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한 사람만 있으면 되었다. 단 한 사람, 나를 원하는 한 사람만…….

마음을 정리한 재희가 입을 열었다.

“나보고 너 대신 결혼하래. 재하야, 나는…….”

“아, 씨발!”

도망갈 거야, 그렇게 말하려던 재희가 깜짝 놀라 차재하를 바라봤다. 차재하는 숨을 헐떡이며 침대를 내리쳤다. 쿵, 쿵, 온 힘이 실린 주먹질에 침대가 들썩거렸다.

또 발작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트라우마를 접한 것처럼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 재희가 간호사를 부르기 위해 호출 버튼을 누르려 했다. 그런 그를 차재하가 막아섰다.

“부르지 마! 나 멀쩡하니까.”

핏발이 선 눈으로 그렇게 말하는 차재하는 전혀 멀쩡해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없던 폭력성까지 드러났다. 병세가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다. 재희는 일단 그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래, 재하야. 너 멀쩡해. 근데 잠깐 진정 좀 하자.”

“아니, 씨발. 형! 나 멀쩡하다고! 안 아프다고!”

가슴을 내리치며 하는 말에 답답함이 서려 있었다. 멀쩡하다고 믿고 싶을 것이다. 12개 국어를 원어민처럼 하고 남들과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다가, 이렇게 병동에 갇혀 오줌이나 지리는 신세가 되었으니 그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터였다.

재희는 안쓰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차재하를 토닥였다. 그래, 괜찮아. 괜찮아. 나직한 중얼거림에 차재하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아, 답답해! 나, 장애 같은 거 없다고! 다 쇼한 거란 말이야!”

“……뭐?”

눈을 깜빡인 재희가 동생을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오늘따라 다들 이해하기 힘든 말만 내뱉었다. 병원에 처박혀 있어서 얼마 되지도 않는 이해력이 떨어지기라도 했나 보다.

장애가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쇼를 했다고……? 가만히 그의 말을 곱씹고 있으니 차재하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덧붙였다.

“충동 조절 장애, 유아 퇴행 그딴 거 없어! 서이나랑 결혼하기 싫어서 연기한 거야. 근데 설마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어……. 형한테 결혼하라니, 그게 무슨, 씨발!”

거짓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연기, 라고? 너… 바지에다가 대소변…….”

“아, 조용히 해!”

“로비에서… 옷까지 벗고…….”

“아, 좀! 형!”

차재하가 민망하다는 듯이 재희의 입을 틀어막았다. 평소와 다르게 초점이 또렷한 눈이 보였다.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어딘가 핀트가 나가 있었던 차재하가 지금은 완전히 제정신으로 보였다. 마치 사고가 나기 전처럼 말이다.

얼굴을 붉힌 채 진심으로 부끄러워하는 차재하를 재희는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다.

눈앞에 지난 석 달간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픈 동생을 보며 괴로워했던 날들. 답답함에 잠 못 이루었던 밤들. 이수와 떨어진 채 그에게 외로움만 주고, 그를 의심하고 또 상처 줄 뻔했던 시간들. 그런데, 그게, 다…….

천천히 차오르던 감정은 이내 폭발하듯 솟구치고, 재희는 여덟 살 이후 처음으로 제 동생을 때렸다. 찰싹, 뺨과 턱 언저리를 매섭게 후려친 손이 차재하의 멱살을 잡았다.

“너, 이, 미친, 개새끼야!”

“악! 화내지 마, 어쩔 수 없었어! 정말로…….”

“화가 안 나게 생겼어? 차재하! 결혼하기 싫다고 어떻게 이런 짓을 해!”

억울하고 열받아서 미칠 것 같았다. 이런 새끼를 동생이라고 걱정했다. 쭈그리고 자는 뒷모습을 보고 안쓰러워서 눈물을 삼킨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는데, 그 수분이 아까워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재희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차재하에게 욕을 퍼부었다. 서이수에게 배운 것들이 대다수였다.

“해마 새끼도 너보다는 똑똑할 거야, 이 미친 새끼야.”

“미안해, 형. 어쩔 수 없었어, 진짜.”

“뭐가 어쩔 수 없어! 부모님 때문에 그런 거면 나한테는 말을 해 줬어야 할 거 아니야!”

“형은 거짓말을 못 하잖아!”

빽 소리를 지른 차재하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했다. 적반하장에 어이가 없어진 재희는 그를 노려보다가, 몇 마디 더 자신이 아는 욕을 지껄여 주었다. 이수가 살벌하게 내뱉었던 말들은 차재희의 입을 통해 조금 순화되어 튀어나왔다. 차재하는 툴툴거리면서도 미안한지 계속 재희의 눈치를 보았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든 생각은 정말로 다행이라는 것이었다. 동생이 장애를 얻지 않아서, 아프지 않아서, 저 뻔뻔한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재희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빠르게 뛰던 심장이 진정되어 갔다. 심호흡을 몇 번 하다가 차재하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거짓말한 건데.”

“사고도 일부러 낸 거야.”

그 말에 다시 꼭지가 돌지 않을 수 없었다. 차재하의 차는 폐차되었고, 두부에 가해진 충격이 극심했다. 구급차가 1분이라도 늦었다면 뇌의 모든 혈관이 터져 죽었을 것이었다. 재하에게 두루마리 휴지를 집어 던진 재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진짜 돌았어? 큰일 날 뻔했잖아!”

“연습도 했어! 중고차 사다가 두 번이나! 근데 에어백이 안 터지는 건 내 계산에 없었다고! 그 씨발 새끼들! 찻값이 몇억인데, 사기꾼 같은 새끼들…….”

차재하는 씩씩거리며 독일의 자동차 브랜드를 상대로 저주를 퍼부었다. 어떻게 목숨을 걸고 그딴 짓을 할 생각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재희는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돌연 웃음이 터졌다.

로비에서 옷을 벗었던 다음 날, 차재하는 며칠 동안 기운이 없었다. 새벽에 깨어나서 우는 걸 본 적도 있었다. 그때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가 비참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쪽팔리고 수치스러워서 그랬던 거였다.

그리고 종내에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비록 진심이 아니었을지언정 차재하는 모친에게 목숨을 끊겠다는 말까지 했었다. 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성미희와 차대범은 차재하를 귀중한 자원처럼 다뤘다. 그 사실에서 차재하는 돌파구를 찾았다. 더 이상 그들에게 필요한 자원이 되지 않도록, 자신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차재하의 결혼 자체는 무산되었을지 몰라도 그들의 부모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화살은 재희를 향했고, 재희는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동안 침묵하던 재희가 차재하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언제까지 아픈 척할 건데.”

“부모님이 나 내다 버린 자식 취급할 때까지. 걱정 마. 형이 결혼하게 두지도 않을 거니까. 내 셀폰 어딨지? 재우 형한테 전화해야 하는데.”

“……설마 형도 이거 알아?”

“그때 사고 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왔었잖아. 보자마자 알던데? 아씨, 재우 형은 못 속이겠어.”

“…….”

재희가 헛웃음을 지었다. 두 형제가 자신을 감쪽같이 속였다. 서운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거짓말을 잘 못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재희는 차재하의 휴대폰을 찾아 차재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인지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재하를 바꿔 주자 두 사람이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맥이 풀린 재희는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피라도 뽑은 듯 기운이 빠져나갔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메신저를 뒤적거렸다.

한국으로 들어가면 서일 총수 일가를 만나게 될 것이다. 서이수도 그 자리에 올까? 알 수가 없었다.

재희는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난 너를 잘 몰라. 재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수를 잘 몰랐다. 그래서 그가 형제들과 얼마나 친한지, 내일 상견례 자리에 동석할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가족이니까 당연히 와야 할 것 같은데, 그의 무심한 성격을 생각하면 그런 자리에 가는 것 자체가 이상해 보였다.

그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차재하가 전화를 끊고 말을 걸어왔다.

“형.”

“……응.”

재희가 더는 화를 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차재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리 한 번 지른 적 없던 형에게 뺨을 얻어맞았다는 사실은 꽤 큰 충격이었다. 흠흠, 목을 가다듬은 차재하가 재희에게 설명했다.

“서이나네 가족들이랑 만난 자리에서도 난 계속 아픈 척할 거야. 거기서 절대 아닌 거 티 내면 안 돼……. 알았지?”

재희는 차재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말을 덧붙이기 전에 입을 열었다.

“재하야. 부모님은 이미 나를 네 대타로 밀어 넣었잖아. 아까 이 말 하려다가 못 했는데, 네가 무슨 계획인지는 몰라도 나는 상견례 이후로 집 나갈 거야.”

“……뭐?”

“연락 끊을 거야, 부모님하고.”

차재하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부모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둘째 형에게서 들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던 말이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제 형이 맞는지 의심되기까지 했다. 그런 그에게 대고, 재희는 다시 한번 못 박았다.

“마음 정했어. 나는…….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살지 못해. 그렇게 살 수는 없어. 절연할 거야.”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단호한 말투였다. 몇 달 전 식사 자리에서 정략혼은 하기 싫다고 말하던 형이 떠올랐다. 그리 똑 부러지는 차재희는 그때 이후로 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차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재우와 차재하는 지나치게 똑똑했다. 자신들을 물건 취급하는 부모에게 부당함을 느끼고 스스로를 위할 줄 알았다. 차대범을 닮아 독한 기질이 있는 차재우는 비밀리에 강제적인 경영권 승계를 준비 중이었고, 차재하도 미국 이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도 재희의 탈출을 바라던 바였다.

그렇게 차재희의 간병인 생활은 막을 내렸다.

그날 밤, 재희와 차재하는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성미희는 비즈니스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들보다 먼저 한국으로 떠났다. 덕분에 차재하는 비행기에서 성인용 기저귀를 차지 않아도 되었다.

코네티컷주를 벗어나며 이수에게 대충이라도 소식을 전하려 했지만 연락이 닿질 않았다. 비행기를 타기 전, 재희는 이수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오늘은 전화를 못 할 것 같아요, 선배. 이따가 일 끝나고 연락할게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와 통화해야 할 시간에 하늘을 날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이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깜빡거리는 배터리 때문에 제대로 된 설명도 하지 못하고 상견례에 오지 않는다는 것만 확인했다.

솔직히 불안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가 그 자리에 온다고 하면 여태까지의 일을 설명해야 했는데, 모든 이야길 듣고 마주한 차재하를 이수가 때리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안 온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재희는 일이 끝나고 나서 이수의 집으로 가 모든 것을 설명할 생각을 했다.

저녁에 만나면 정말 기뻐하겠지? 자신을 보고 환히 웃어 주는 얼굴을 빨리 보고 싶었다.

“…….”

분명히 안 온다고 했었는데……. 큰일 났다. 재희는 긴장한 채로 이수의 서슬 퍼런 눈빛을 마주했다. 화를 풀길 바라며 최대한 예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데 자꾸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본 얼굴에서 빛이 나서, 더블브레스트 슈트가 정말 말도 안 되게 섹시해서 쳐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하, 괜찮습니다. 그때 이수 군이랑 미국에서 한 번 본 적 있죠? 병원에서 우연히요.”

“아… 그랬죠, 참. 너 다시 입원했을 때 잠깐 들르셨었는데. 그때 정신이 없어서 기억 못 할 수도 있겠구나. ……그때, 금방 돌아가셨으니까 아마 인사를 제대로 못 했을 거야.”

그리고 차대범과 천수인의 대화를 듣던 재희는 깜짝 놀랐다. 재희는 중학생 때 이수를 만난 적이 있었다.

물론 차대범이 말하는 것처럼 우연은 절대 아니었다. 그때 차대범은 서일에 연줄을 대기 위해 안달복달하고 있었다. 사석에서 회장 부부를 만나기 위해 뒤를 캐다가 서일의 둘째가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어느 날 그들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뉴욕으로 날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따라간 것이었다.

서훈, 천수인 부부가 얼굴도 잘 몰랐던 하청 업체 대표를 만나 인사하고 있을 무렵, 재희는 등을 떠밀려 이수의 병실에 갔었다.

너무 가냘파서 소녀로 착각했던 사람이 서이수였다는 말에 재희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어쩌면 나는 선배를 만나게 될 운명이었던 거 아닐까. 그럴지도 몰라.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수는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차재하가 남들 앞에서 옷을 벗었다거나 바지에 대소변을 일부러 지렸다는 등의, 그의 인권을 해칠 수 있는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재희가 세 줄 요약한 그간의 상황은 이러했다.

1. 차재하가 사고가 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아프지는 않다. (여기서 이수는 미친 또라이 새끼 아니냐고 욕을 했다.)

2. 그럼에도 부모님이 결혼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대타로 밀어 넣었다. (쌍시옷으로 시작하는 욕설이 묵음 처리되어 나왔다.)

3. 그러나 차재하에게도 자신에게도 계획이 있으니 조금만 참고 기다려 달라. (코웃음을 쳤다.)

설명이 끝나자 이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머리를 쓸어 올렸다. 차재희가 자신을 두고 서이나로 갈아타려 했다는 황당한 오해는 풀렸지만 여전히 짜증은 났다.

“그래서, 나보고 지금 너를 두고 서이나랑 결혼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으란 소리야?”

“재하도 다 생각이 있어요.”

“생각이란 게 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

차대범과 성미희를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재희는 이수에게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그런 사람들을 부모로 두고 있다고 말하기 싫었다.

재희가 바닥을 내려다보며 눈썹을 휘었다. 얼핏 시무룩해진 그 얼굴을 보고 이수는 작은 오해를 했다.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정 안 되면 내가 해결할게.”

“……선배가 파혼을 시키겠다는 말이에요? 어떻게요?”

“내 부모님은.”

잠깐 입을 다물었던 이수는 이내 확신의 눈빛을 띤 채로 재희를 올려다봤다.

“그 사람들은 나 못 이겨.”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계약서도 작성했어요. 아까 봤잖아요. 선배 쪽에서 파기하려면 위약금이라도 받아 내려고 할 거예요. 한두 푼도 아닐 텐데.”

“……나랑 약속한 게 있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이수는 단호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너무나도 선명하고 또렷해서, 재희는 의심의 여지 없이 이수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든든했다.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실감 나서, 재희는 그의 귓가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귀 끝이 붉어진 이수가 물었다.

“근데 너, 왜 니 동생이 서이나랑 결혼할 사이라고 말 안 했어. 알고 있었잖아.”

“아……. 그게.”

선배가 혹시라도 나를 버릴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고, 우물거리며 설명하려는데 메시지가 도착했다. 성미희가 재희를 찾고 있었다. 그것을 같이 확인한 이수가 짤막한 한숨을 쉬었다.

“이따가 말해. 내려가자.”

“선배. 잠깐만.”

고개를 끄덕인 재희는 이수에게 짧게 키스한 후에 방을 나왔다. 이 말도 안 되는 상견례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당장 집을 나와 고시원에 들어가도 좋으니, 24시간 아르바이트를 해도 좋으니, 부모든 누구든 상관하지 않고 그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데 응접실에 가까워질수록 소란한 기척이 느껴졌다. 얼굴을 굳힌 재희가 걸음을 빨리했다. 그리고 마침내 응접실의 아치형 문 아래에 다다랐다.

“재하야, 그만해!”

“내가 싫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형한테까지!”

쿵, 쿵, 벽에 머리를 박는 소리가 서글픈 절규처럼 들렸다. 차재우가 차재하의 양팔을 옭아맸지만, 그것으로는 소용이 없었다. 차재하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머리를 갖다 박았다.

이마가 찢어져서 피가 흘렀다. 흰 벽이 무정한 제 부모라도 되는 양, 차재하는 벽지를 붉게 물들이며 그들에게 자신이 이렇게나 아프다는 것을 직접 보여 주었다.

차대범은 화를 참듯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고, 성미희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서훈과 천수인 그리고 서이준과 서이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문가에 서서 그 꼴을 지켜보던 이수가 나지막이 물었다.

“이것도 계획의 일부야?”

“이건……. 모르겠어요…….”

흐려지는 말꼬리가 재희의 마음을 대변했다. 정말 모르겠다.

저렇게까지 아파하는 아들을 보면서도 만약 그들이 뜻을 굽히지 않는다면 그때는 정말 끝이었다. 그런 부모라면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고 싶어질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이어진 차대범의 말에 재희는 실소했다.

“차재우, 재하 데리고 집으로 가 있거라.”

씩씩거리며 진정하지 못하고 있던 차재하가 제 아비를 노려봤다. 결국엔 일을 무를 생각이 없는 것이다. 기어코 그들의 세계에 편입하고 말겠다는 것이다.

차재우와 눈빛을 주고받은 차재하는 이마에 손수건을 댄 채로 응접실을 벗어났다. 침묵이 짙었다. 이수와 재희는 조용히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무거운 공기를 흩트리듯 서훈이 입을 열었다.

“선후배끼리 할 말이 많았나 보구나.”

“네, 오랜만에 봐서 좀.”

이수는 무심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분위기는 아까와 사뭇 달랐다. 약간의 정적이 흐르고 서이준이 서훈을 대변하듯 말을 꺼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재하 군 상태가 워낙 안 좋으니 이런 일에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씨엔 인더스트리와의 협약은 서일 전자에도 득이 되는 일이고 혼약을 진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특허권 사용 계약을 파기할 생각도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희 쪽에서 계약 파기를 원한다고 해서 씨엔이 손해 볼 건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혼인 계약이 없어도 우리는 앞으로도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겁니다, 회장님.”

서일은 씨엔의 제의를 에둘러 거절하고 있었다. 그쪽 아들이 상태가 좋지 않으니 이건 없었던 일로 하자. 다만 거래 관계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서이나의 입술이 비죽 나왔다. 파혼한다는 소리에 제일 강경하게 반대한 사람이 그녀였다.

차대범의 태도는 완강했다.

“아니, 이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계약서에 당사자가 명시된 것이 아니니 재하의 병세는 계약 파기와 무관합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재희가 재하를 대신할 겁니다. 그래도 계약 파기를 원하신다면… 마지막 장을 읽어 보시는 게 좋겠군요.”

“회장님, 진심이십니까?”

서이준이 빙긋 웃었다. 그들이 원하는 바를 서일 또한 모르지 않았다. 서이나가 떼를 썼다곤 하지만 기본적으로 씨엔 인더스트리는 나쁘지 않은 사업 파트너였다. 서일 전자에서 관심을 둔 특허도 많았다.

그러니 서일 측은 당사자인 서이나가 괜찮다고 하는 상황에서까지 계약을 파기해 위약금을 물 생각은 없었다. 물론 차재희가 차재하와 비교해 학력이 뒤떨어진다고는 하지만, 사위 덕을 볼 필요가 없는 위치에 있으니 상관없는 일이다.

“씨엔이 원하는 바는 확고합니다. 계약의 이행입니다.”

“그렇다면…….”

서이준이 서훈을 돌아봤다. 희미하게 웃는 낯으로 앉아 있던 서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인내심이 바닥난 이수가 입을 열었다.

“저도 계약서 좀 볼게요.”

응접실에 남은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그중에서도 차재희의 눈길이 가장 뜨거웠다.

뭐 해요? 아니, 뭔지는 몰라도 참아요. 제발.

하지만 이수는 그 눈빛을 깨끗이 무시했다. 그가 보기에 차재하의 계획은 영 엉성했고,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어렵게 끌고 가는 것처럼 보였다.

애새끼들 싸움에 대체 왜 차재희가 피해를 봐야 해? 애초에 이 말도 안 되는 정략결혼도 차재하와 서이나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자기 일일 때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주제에 남의 손으로 넘어간 일을 뭐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 서이준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이수가 그의 손에 들린 태블릿을 들고 갔다.

“하하, 둘째 아드님 성격이 대쪽 같군요.”

그게 꼭 자리도 모르고 나댄다는 소리로 들렸기에, 이수는 차대범을 흘끗 바라보고는 빠르게 계약서를 훑어 내렸다. 서이준의 말대로 빼곡히 채워진 스무 장의 계약서에 서이나와 차재하 그리고 차재희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말이 쉬웠다.

탁, 태블릿 PC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이수가 고개를 들어 차재희를 바라봤다. 새까만 두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려 왔다.

가장 쉽고 간단한 해결 방법을 두고 돌아가는 꼴은 볼 수가 없었다. 사실은 차재희의 이름 옆에 서이나라는 이름이 붙은 순간부터 기분이 더럽고 배알이 뒤틀려 참을 수가 없었다.

가볍게 웃고 고개를 돌린 이수가 서훈을 응시했다. 서훈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이내 그가 올곧은 목소리로 폭탄을 던졌다.

“제가 할게요, 그 결혼.”

응접실에 당황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빈말을 하지 않는 이수의 성격을 아는 서훈과 천수인은 충격받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고, 서이준은 재미있다는 듯 재희를 흘끔거렸다. 차대범과 성미희 그리고 서이나는 아주 재미없는 농담을 들은 얼굴이었다.

“아하하. 오빠가 남의 말을 좀 안 들어요. 이수 오빠, 아까 얘기하는 거 못 들었어?”

“그래요. 이수 군, 아쉽지만 우리 집에는 아들만 셋이라서요.”

성미희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걸 누가 모르나. 이수도 그녀를 마주 보며 웃었다. 진심으로 기껍다는 듯이.

“알아요. 차재희랑 결혼하겠다는 말입니다.”

“선배!”

재희가 고개를 저었다. 뭐 하는 거예요? 소리 없이 던지는 질문에 경악이 묻어났다. 그와 달리 이수는 동요를 내비치지 않는 고요한 시선으로 재희를 마주 봤다. 자신은 그를 갖기로 했고, 재희는 자신을 내어주기로 했으니 약속을 지켜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차씨 형제들은 서일을 얕잡아 보고 있었다. 이대로 서일이 차재희와 서이나의 결혼에 동의하게 된다면, 그 후로 이 불결한 결혼 계약을 빠져나가는 일은 매우 힘들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이수는 아주 단호하고 확실하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집은 있으니 혼수만 해 오시면 되겠네요.”

“그게……. 무슨…….”

“형편이 안 되시면 몸만 보내시든가요.”

당황한 성미희와 차대범이 재희를 바라봤다. 귀 끝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재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기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쏟아지는 시선에도 이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차재희를 좋아한다고 깨달은 순간부터, 아니 사실은 그와의 관계를 고민하던 때부터 생각해 왔던 일이었다. 두루뭉술했던 계획은 못마땅한 그의 부모를 봤을 때, 차재희가 매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이 어이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순식간에 실체화되었다.

이수는 동성 결혼이 합법화된 뉴욕주에서 태어난 미국 시민이었다. 이수가 재희와 결혼하고, 그에게 시민권을 안겨 주는 것은 밥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또한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계약은 누구도 손해 보지 않는 장사가 될 것이다.

“하하……. 서 회장님.”

차대범이 서훈을 바라봤다. 당신 아들의 망언을 해결해 달라는 듯이. 그러나 서훈은 복잡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려 차대범의 말을 막았다. 차대범의 인상이 구겨지든 말든 서훈이 이수에게 물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내가 언제 농담하는 거 봤어요?”

무심한 대꾸에 천수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답지 않게 포커페이스가 깨진 얼굴로, 환장하겠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더니 이내 평정을 되찾고 성미희와 차대범에게 웃으며 말했다.

“잠깐, 아들이랑 대화를 좀 하고 올 테니 쉬고 계세요. 여사님, 차 회장님이랑 사모님 좀 챙겨 드려요.”

자리에서 일어난 천수인은 서씨들을 데리고 본관으로 돌아갔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이수에게 미쳤냐고 소리를 지르는 서이나를 제 방으로 들여보내고는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했다.

남은 네 사람은 2층으로 향했다. 서훈의 서재로 들어간 이수는 곧바로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그의 태도에 속이 탄 사람은 천수인이었다.

보통 이런 가족 내 대소사의 결정권은 그녀에게 있었다. 사업적으로 얽혀 있으니 서훈의 입김도 들어갔지만, 혼인에 대해서만큼은 천수인의 권한이 절대적이었다. 이수의 맞은편에 앉은 천수인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수야, 무슨 생각이니? 정말 그 아이랑 결혼하겠다고?”

“몇 번을 더 말해야 해요?”

“갑자기 왜? 믿기지가 않아서 하는 말이야. 그 아이가 너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천수인의 말에 이수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누굴 서이나로 아나.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아도 누구든 당황스러울 만한 일이었기에 이수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아뇨. 원래부터 그러려고 했어요.”

그 말에 서이준이 낮게 웃었다. 꼭두새벽에 전화를 걸어와 좌석을 업그레이드하라고 하기에 차재희와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런데 이런 속사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천수인은 서이준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원래라는 말이, 그게 무슨 뜻이지? 그 아이랑 사귀기라도 했단 말이니?”

“정확해요.”

“…….”

무덤덤한 대꾸에 천수인은 말문이 막혔다.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도 놀라운데 저 매정한 애가 상대방과 결혼까지 생각했고, 또 그 상대방이 다른 누구도 아닌 차재희라는 것은 정말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었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자 옆에 앉은 서훈이 손을 뻗어 그녀의 뒷목을 마사지해 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이는 참 좋았다. 이수는 무표정하게 그 꼴을 바라보았다.

“언제, 언제부터? 결혼은…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만난 지 얼마나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수야. 나는.”

천수인의 말에 이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유쾌하지 않았다. 잔뜩 날이 선 비소였다. 이수는 이내 인상을 찡그리며 모친의 모순점을 지적했다.

“서이나의 말 같지도 않은 고집을 들어준 분이, 결혼이 가볍지 않다고 말하면 안 되지 않아요? 서이나가 생각하는 결혼은 입김만 불어도 날아갈 것처럼 가벼운 관계던데.”

“이수야.”

그를 설득하려고 드는 천수인을 이수는 한마디로 멈춰 세웠다.

“약속했잖아요?”

천수인의 눈빛이 거칠게 흔들린다. 이수는 그 동요를 놓치지 않았다.

6년 전, 죽음의 경계에 서 있던 이수는 가족들에게 어떠한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뛰어내려서는 안 될 이유에 그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아마 평생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어째서 이수가 자신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는지 말이다.

이수는 가족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차재희가 아니면 안 돼요. 차재희가 나 아닌 다른 사람하고 결혼하는 꼴도 못 봐요.”

“이수야…….”

“당신들이 못한 걸 재희가 해 줬어요.”

그리고 그들은 앞으로 이수를 이해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것이었다. 그 모든 기회와 미래를 차재희가 차지해 버렸으니까.

앞으로 자신이 딛고 설 땅이었고, 의지할 기둥이었으며, 힘들 때 떠올릴 기억이었고, 생의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이었다. 차재희로 인해서 채워질 삶은, 그로 인해 채워질 시간은 이수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양보는 없었다. 이수는 재희를 오롯이 소유하고 싶었다.

“난 결혼해요, 차재희랑.”

* * *

서일 일가가 자리를 비우고 성미희와 차대범, 차재희는 적막 속에 남겨졌다. 차대범은 이수를 두고 병원에 오래 있더니 정신이 나간 것 아니냐고 화를 냈고, 성미희는 김영숙에게 들은 말을 떠올리며 설마 하는 얼굴로 재희를 돌아봤다.

이수가 던져 놓은 폭탄을 든 재희는 의외로 차분히 가라앉은 표정이었다. 처음엔 확실히 당황했다. 물론 그와 결혼할 생각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 수류탄 투척 수준으로 던져질 화제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탓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대로만 일이 진행된다면 큰 소란 없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차재하의 어설픈 계획은 물론이고, 서이수의 남편이 되고 싶다는 희망 사항이 그저 망상으로 머물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 외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선배가 한 말을 믿어도 될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가슴 언저리를 맴돈다. 재희는 긴장을 놓지 않은 채로 이수의 생각에 골몰했다.

그러는 동안 이 상황을 미쳐 버린 서일 둘째 놈의 장난질로 여긴 차대범은 머리를 식히고 오겠다며 응접실을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성미희가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차재희, 설마 너. 일전에 학교에서 그 더러운 소문 났던 사람이 저 애니? 서이수?”

재희가 고개를 돌렸다. 성미희를 응시하는 새까만 눈동자는 그녀의 것과 별다를 바 없었다. 만지고 싶지 않은 것을 바라보는 눈빛. 상대방의 존재를 믿고 싶지 않은, 성미희가 자신을 낳아 준 친모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아들의 얼굴이었다.

성미희는 차재희의 변화를 단숨에 알아차렸다. 얌전한 아들이 반항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이던가, 그것을 셈해 보던 그녀는 이내 일을 망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윽박질렀다.

“대답 안 하니?”

재희는 기죽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쩌실 거예요?”

“뭐……?”

“만약… 그게 소문이 아니라면요?”

소문이 아니라고? 성미희는 김영숙에게서 들은 말을 떠올렸다.

‘재희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도는가 보더라, 물론 루머겠지만 선배인지 뭔지 거기 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한 사람하고 자꾸 이름이 언급되어서 곤욕을 치른 모양이야.’

김영숙은 진심으로 걱정해서 한 말이었으나 성미희에게는 그것이 자식 교육을 잘못시킨 자신의 흠을 꼬집는 말로 들렸다.

그런데, 그게, 소문이 아니라고? 충격에 휩싸인 성미희를 보며 재희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제가 이수 선배 많이 좋아해요. 그리고 저는… 두 분이 추진하시는 결혼에 장단 맞출 생각도, 선배랑 헤어질 생각도 없어요.”

외국어도 아니었는데 헤어질 생각이라는 말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아 성미희는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뜻을 알아차린 그녀가 희게 질린 얼굴로 떠듬거렸다.

“너, 너……. 지, 지금 그게 무슨…….”

“말 그대로예요. 선배랑 사귀고 있었어요.”

갑작스러운 커밍아웃에 눈앞이 노래졌다. 점점 사나워지는 표정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했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성미희는 아들을 향한 분노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빠드득, 가녀린 손을 쥐었다가 펴는 소리가 선득하게 울린다.

재희는 가만히 성미희를 바라보기만 했다.

“정신 병원이라도… 가 봐야겠구나. 제정신이 아니야!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왜 말이 안 돼요?”

재희가 성미희의 말을 끊었다. 모친을 거역하는 것은 여전히 무서웠고 망설여졌다. 그러나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는 목소리를 떠올리면 심장 깊숙한 곳에서 용기가 솟구쳤다. 그를 위해서라면 재희도 이 정도쯤은 할 수 있었다. 아니, 해야만 했다.

‘내가 생각하는 너는, 네가 나한테 보여 주는 모습들로 만들어지는 거야.’

이수는 그렇게 말했다. 재희는 부모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그들에게 주눅 들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제 할 말도 못 하는 한심한 차재희는 싫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자신을 압박하는 것들에서 벗어나야 했다. 성미희가 만든 틀을 깨부숴야 했다. 재희에게서 단단한 목소리가 흘렀다.

“자식을 내놓은 물건 취급하는 부모도 있는 마당에, 나를 아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한테 마음을 주는 게 왜 말이 안 돼요?”

“차재희!”

“뭐가 그렇게 불만이세요?”

“뭐, 뭐라고 했니, 지금?”

몸을 돌린 재희가 성미희를 똑바로 노려봤다.

“어머니 아버지가 원하시던 일이잖아요. 그 대단하신 서일 그룹에 자식 팔아넘기고 남들한테 부러운 시선 받으면서 사모님 회장님 소리 듣는 거, 서일 그룹 사돈이라는 명패 달고 그 사람들 따라 하는 뱁새 되는 거. 그걸 원하셨잖아요.”

그렇게 원하는 걸 주겠다는데, 뭐가 문제예요? 재희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다. 결혼 상대가 서이수로 바뀌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성미희와 차대범이 원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단순히 자신들에게 덧씌워질 추문이 두려워서? 아들이 동성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 밖에 알려질까 봐서, 그들이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는 게 싫어서?

야차 같은 얼굴의 성미희 앞에서 재희는 긴장감을 억눌렀다.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소문이 두려우세요?”

“그럼 아니겠니? 이건, 나는, 너를 동성애자로 키운 적이 없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겠는데 그 아이와 네가 결혼을 해? 절대 안 돼!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약속한 대로 서일은 딸을 내놓아야 할 거야! 그쪽에서 먼저 원한 일이니까!”

성미희는 이성적 판단력을 상실한 듯 보였다. 모순된 말을 내뱉는 모친을 보며 재희가 입매를 굳혔다.

“어머니가 저를 어떻게 키우셨는데요.”

“몰라서 묻니! 남 부끄럽지 않게 키웠어! 모자란 것 하나 없이 다 해 줬는데 어떻게 이런, 낯부끄러운…….”

단정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재희의 마음이 잔뜩 화가 난 채로 아우성쳤다. 성미희는 자신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주었다. 전혀 필요치 않았던 것들까지도 전부 다 떠안겨 주었다. 재희는 그게 자신이 바라 마지않던 애정인 줄 알았다. 그래서 그것들을 놓치지 않으려 애써 왔다.

하지만 뭣 모른 채 끌어안고 있던 것들은 재희의 속을 갉아먹고, 흠집 내고, 상처 입혔다. 그 사실을 성미희는 모르고 있었다. 겉이 그럴싸하다고 해서 속도 멀쩡하리란 법은 없다는 걸, 그녀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재희는 가만히 호흡을 골랐다. 이제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았다. 성미희와 차대범이 준 것들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두 내려놓고 싶었다.

“어머니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지 알려 드릴까요.”

“뭐……?”

“저는, 저는……. 어머니가 제 위로 덧그려 놓은 테두리 안에 갇혀 살았어요. 화를 내지 않는다는 건 성숙한 거야. 남들에게 다정하게 군다는 건 내가 가진 최대의 장점이야.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일이야말로 내가 성장했다는 증거야. 그렇게요.”

나직한 목소리가 떨려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요, 그런데… 선배를 만나고 나서야 제가 화를 안 내는 게 아니라 못 내고 있었다는 걸 알았어요. 어머니가 늘 말씀하신, 항상 사람들에게 웃는 낯만 보여 주고 상냥하게 대하라는 말이 내 목을 올가미처럼 죄는 줄도 몰랐어요. 감정을 속으로 삭이는 동안 제 안은 바싹 타들어 갔고, 병들어 갔는데. 그걸 몰랐어요.”

재희가 고개를 숙였다. 과거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다. 사랑받기 위해, 어미에게 따스한 포옹을 한 번이라도 더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달았던 날을 떠올렸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저는 아직도 촛불을 끄겠다고 떼를 쓰는 재하를 밀치던, 유치하고 이기적인 어린아이에 불과해요. 하나도 자라지 않았어요. 그 상태로 어머니가 바라던 그 어른스러운 태도를 위해서 나를 늘리고, 또 늘리느라 아프고 또 아팠는데……. 그걸, 몰랐어요.”

이수의 앞에서만큼은 여덟 살의 차재희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재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설레고, 아프고, 행복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깨달았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도 알게 되었다. 재희는 그렇게 자라났다.

“선배는 제가 화를 내도, 짜증을 내도, 나라는 사람을 부정하지 않아요.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모습을 바라지도 않아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저를 낳아 주셨지만, 저를 키워 주진 않으셨어요. 그러니까… 자식을 잘 키웠다,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자신을 보호하듯 성벽처럼 단단한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

성미희는 완전히 달라진 아들을 바라봤다. 언제나 온순하고 순종적이었던 차재희가 뒤늦게 반항기를 겪는 것이다. 차재우가, 차재하가 한때 그러했듯 차재희 또한 자신의 손에 쥐어질 황금을 의심하는 것이다. 그런 게 분명했다.

동성애자, 사랑, 무엇 하나 납득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일을 그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노기를 억누른 성미희가 재희를 회유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네가 무슨 생각인지는 알겠지만, 차재희. 재희야.”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네요.”

성미희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순진한 아들을 타락시킨 뻔뻔한 낯짝의 서이수가 응접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 천수인과 서이준 그리고 심각한 표정의 차대범과 서훈이 들어섰다. 이수는 성미희에게 묵례하고 재희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다시 한번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서일 측은 응접실을 떠날 때와 완전히 달라진 태도를 보여 주었다.

“재희 군과 이수가 결혼하는 걸로, 진행합시다.”

서훈의 말에 성미희는 탄식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이야기가 오간 건지 모르겠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수를 향하는 성미희의 시선이 칼날처럼 뾰족해졌다.

낯빛을 굳힌 차대범은 그게 무슨 소리냐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서훈은 평정을 잃지 않았다. 그는 아들의 고집을 알았다. 이수가 결혼 이야기를 꺼낸 순간부터 일이 이렇게 되리란 것을 짐작했다.

“계약서상으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니 정 원치 않으시거든, 위약금을 처리할 변호사를 알아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서훈은 차재하의 자리에 재희를 밀어 넣으며 씨엔에서 한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서일의 계약 파기를 견제하기 위해 집어넣은 위약금 항목이 되레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차대범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이수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재희만을 바라보았다. 아까 눈빛으로 만류하던 때와 다르게 재희의 표정은 한결 편해진 듯 보였다. 그래서 안심했다.

“절대 용납 못 합니다. 재하는 아픈 거고, 이건 말이 다르지 않습니까!”

예상 못 한 막장극에 흥분이 도가 지나친 차대범이 테이블을 내리치며 그렇게 말했다. 서훈은 비서에게 손짓해 계약서에 문제가 없음을 짚어 주었다. 지지부진한 대화가 이어졌다.

10분, 20분, 의미 없는 시간이 흘렀다. 절대 안 된다, 그러면 계약을 파기해라, 그것도 안 된다, 그러면 결혼을 진행해라, 내 아들을 남자한테 내어줄 수는 없다, 그러면 계약을 파기하자.

도통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재희는 눈을 내리깐 채로 테이블만 내려다보고, 이수는 지루한 표정으로 꽉 막힌 차대범을 바라봤다. 한 시간 후, 참다못한 이수가 입을 열었다.

“그냥 서로 변호사 불러서 이야기하시죠. 기다리는 동안 혼인 신고 세 번은 했겠어요.”

“무슨!”

차대범이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이수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서이나랑 차재희? 결혼식이랑 장례식을 같은 날에 치르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이수야!”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에 천수인이 주의를 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이수는 테이블을 돌아서 재희에게 다가갔다.

결심이 서린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성미희가 옆에서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이수는 재희의 뜨거운 손을 맞잡은 채로 그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먼저 들어가 볼게요. 혼수는 알아서 상의하세요.”

“차재희! 거기 서지 못해!”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상대를 한눈에 알아보았는지, 차대범이 이수를 무시하며 호통을 쳐서 재희를 불렀다. 멈칫, 응접실을 벗어나려던 발이 제자리에 멈춰 선다. 그러나 재희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수와 눈을 맞추며 천천히 걸음을 뗐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간다. 재희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질척하게 엉겨 붙은 인연의 끈이 끊어져 버릴 때까지.

“집에 가자.”

대문을 나선 이수는 재희를 조수석에 밀어 넣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며 보니 꽤 지친 기색이었다. 날카로운 턱 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해쓱한 얼굴을 보자 마음이 아파 왔다.

병원에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에, 이수는 의미 없는 병간호를 석 달이나 시킨 재희의 동생을 몇 대 쳐 주고 싶었다. 다음에 만나면 정말 손이 나갈지도 모르겠다.

씨발놈이 감히 누구한테……. 분노를 집어삼키며 액셀을 밟았다. 흠집 하나 없는 군청색 테슬라가 소리 없이 나아가기 시작했다.

차재희는 말이 없었다. 두 손을 꽉 맞잡은 채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붉은 신호가 점멸할 때마다 이수는 고개를 돌려 재희를 바라봤다.

서훈과 천수인, 서이준이 서재에 남아 논의를 하는 동안 이수는 그들보다 먼저 별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응접실로 이어지는 개방된 아치형 문 앞에서 재희가 하는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속이 바싹 타들어 갔다고, 병들었다고 고백하는 음성은 이수의 안에 묵직하게 남았다.

가족에 대한 상처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부모에게 자신을 키웠다고 말하지 말라고 할 만큼 아팠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가 자신에게 그토록 매달렸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며 이수는 안타까움을 느꼈고, 또 재희에게 미안했다. 너의 아픔을 알아주지 못해서, 너를 더 일찍 만나지 못해서, 네게 먼저 다가가지 못해서 미안해. 이수는 재희에게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재희야.”

“……네.”

브레이크를 밟은 이수가 재희를 돌아봤다. 희미한 미소를 띤 단정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서 그의 표정 곳곳에 남은 후련함과 긴장, 기대 그리고 설렘 같은 것을 보았을 때 이수는 굳이 과거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희에게 사과하는 대신 이수는 몸을 기울여 그에게 키스했다. 너를 좋아해. 진심이 담긴 입맞춤은 뒤차의 운전자가 유리창을 두드릴 때까지 계속됐다. 쪽, 마지막으로 짧게 입술을 맞댄 후에 다시 액셀을 밟았다.

“어떻게, 될까요?”

문득 재희가 그렇게 물어 왔다. 이수는 정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부모님은, 집착이 심하셔서……. 무슨 수를 써서든 빠져나가려고 할 거예요.”

이수는 그런 상황이 오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씨엔에서 일을 무르려 한다면 서일은 법무팀을 내세우게 될 텐데, 법정 싸움으로 가면 승자는 정해져 있었다.

위자료 150억에 플러스알파, 혹은 아들을 좋은 집안에 장가보내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후자였다. 짧은 만남에도 알 수 있었던 차대범과 성미희의 성정을 보건대 아마 오늘 중으로 꼬리를 내릴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든 그들은 앞으로 차재희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없을 것이다. 이수가 그걸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어쨌든 이수는 불안해하는 재희를 안심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핸들을 툭툭, 두드리다가 입을 열었다.

“나, 심장 수술했다고 했잖아. 그것만 있었던 건 아니야. 18살 때, 백혈병에 걸렸었어.”

흠칫 놀란 재희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왜 그렇게 아파야만 했을까. 선배가,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차라리 자신이 대신 아팠다면, 아니, 그것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아플 때 곁에 있었다면, 선배를 좀 더 빨리 만났다면……. 재희는 속상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나는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어. 치료든, 뭐든, 그냥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어.”

지나간 일은 꺼내고 싶지 않지만, 재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수는 브레이크를 밟으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말을 이었다.

“심장 이식 수술이 끝나고 겨우 퇴원했던 거였거든. 이제 끝났다고… 병원 생활은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거기에 끌려 들어가게 되니 이번에는 정말 살아서 나올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죽을 게 뻔한데 추하게 발버둥 치고 싶지 않았어.”

이수는 언제나 담담했다. 꼭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털어놓았다. 그럴 때마다 재희는 이수가 참 단단하다고 느껴졌다. 몸을 내맡겨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받쳐 줄 기둥 같았다.

“그래서 옥상으로 향했지. 난간에 올라섰어. 그리고 내가 한 번도 속해 본 적 없다고 생각한 도시를 내려다보던 순간에… 바람이 불면서 몸이 휘청거리는데, 아찔한 거야.”

적신호가 떠올랐다. 브레이크를 밟은 이수가 핸들을 놓고 좌석에 몸을 맡겼다. 전면 창 너머로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주 평범한 삶의 광경이었다.

“난 그때까지 내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고, 저항하고 있다고,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거지. 난 계속 싸웠고, 죽음과 경쟁했고, 결국엔 모든 상황이 나를 승리자로 만들었어. 그래서 내가 살아 있었던 거야.”

엑셀로 발을 옮겨 놓고 천천히 밟았다. 차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수는 핸들을 잡지 않은 손으로 차재희의 손을 꽉 맞잡았다.

“그걸 깨달은 순간, 죽기 싫었어. 지기 싫었어. 어떤 상황에서든 이기고 싶어졌어. 항암 치료를 포기하는 건 내 손으로 백기를 드는 꼴이었으니까 치료를 받기로 했지. 그런데 또, 유치하지만. 거기서 바로 치료하겠다고 말을 바꾸면 부모님한테 지는 느낌이 드는 거야. 그래서 그 사람들하고 내기를 했어. 내가 만약 병원에서 살아 나간다면, 앞으로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관여하지 않기로.”

재희는 이제야 이수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어째서 그토록 승부에 집착했는지, 어째서 늘 자신에게 이길 수밖에 없었는지…….

이수에게 있어서 패배란 죽음과도 같은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니 무슨 짓을 해서든 이겨야만 했다.

서이수에게 승리는 삶이었다. 생존이었다. 그러니까. 재희는 결코 이수를 이길 수 없었다. 앞으로도 쭉, 그런 날은 오지 않을 터였다.

“부모님은 약속 지킬 거야. 내 목숨 걸고 한 약속이니까 지켜야지. 내일 연락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재희는 섣부른 위로도, 함께하지 못했던 아픈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도 토로하지 못한 채 그저 이수의 손바닥에 입술을 파묻었다. 살아 줘서 고맙다고, 버텨 줘서 고맙다고, 그렇게 나를 만나 줘서 고맙다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쉬지 않고 입을 맞췄다.

집으로 가는 길이 길고 또 길었다.

세 시간 같은 30분이 흐르고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둔 두 사람은 프라이빗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CCTV가 있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오랫동안 새어 나왔다. 열기 가득한 두 뺨이 상기된 채로 승강기에서 내렸다.

그리고 잔뜩 흥분한 채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둘을 맞이한 건 리키도 아니고, 레오도 아닌 문율이었다. 산책을 끝내고 막 집으로 돌아가려던 율이 두 사람을 보고 반색했다.

“형, 오셨어요? 재희야! 안… 녕.”

데구루루 굴러가는 눈알이 어색함을 표현했다. 재희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안녕, 하고 작게 인사했다. 흘낏 그를 올려다본 이수는 재희의 얼굴에서 희미한 심통을 발견해 냈다. 짧게 웃은 이수가 율에게 말했다.

“율아, 오늘 리키 데리고 자. 오늘 저녁엔 접속 못 하니까 파티에 알려 주고.”

“앗, 네! 그럴게요!”

어쩐지 붉어진 얼굴의 문율은 다시 집으로 들어가 리키를 데리고 나갔다. 그에게 푹 빠진 리키는 재희를 보고 콧방귀를 끼더니 신이 나서 율의 뒤를 따랐다. 율과 리키가 사라지고 이수는 현관으로 나가 강제 잠금을 걸어 버렸다. 오늘은 아주 긴 밤이 될 거니까.

그러고 나서 리빙 룸으로 돌아갔을 때, 재희는 레오와 회포를 풀고 있었다. 이옹, 여전히 새끼 고양이 같은 목소리의 레오는 쉴 새 없이 재희에게 몸을 비볐다. 정장 위로 털이 덕지덕지 묻어났지만 재희 또한 차레오와의 재회를 온몸으로 즐겼다.

그에게 듣기로는 저 털 뭉치를 자신이 맡겼다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고양이를 주운 적이 있긴 했는데, 그걸 맡았던 인간이 차재희였는지는 몰랐다. 어쨌든 저렇게 알콩달콩한 꼴을 보고 있자니 괜히 주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쟤한테 맡기지도 말걸. 짜증이 나려 했다.

한참 후, 장난치던 레오가 우다다 달려가 버리고 나서야 재희가 정신을 차렸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마치 이수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민망한 표정으로 눈치를 봤다. 이수는 재킷을 벗어 놓고 소파로 다가갔다. 저도 모르게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레오 보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냐.”

“……선배가 더 보고 싶었어요.”

“그러시겠죠.”

“사진도 한 장 안 보내 줬잖아요…….”

그렇게 말한 재희는 입매를 잔뜩 늘리며 시선을 떨어트렸다. 바닥에 뭐라도 있는 것처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다. 그 모습을 보며 이수는 재희의 처절한 고백을 떠올렸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삼키게 되기까지 속상한 일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손바닥이 몇 번이나 파였을지, 거짓으로 웃은 적이 몇 번이나 될지……. 생각만 해도 장기가 녹아내릴 것처럼 분노가 들끓었다.

다시는 그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재희가 무슨 말을 하든, 심통을 부리든 어쩌든 간에 이수는 재희의 모든 어리광을 받아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차재희가 어떤 사람이 된다 한들 상관없었다. 하다못해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된다고 해도 받아들일 자신이 있었다.

이수는 재촉하지 않았다. 재희가 먼저 입을 열길 기다리며 분노로부터 관심을 돌리려고 일부러 다른 곳에 정신을 집중했다. 차재희는 마침 슈트 차림이었다. 그런데 살이 빠져서 그런지 핏이 예전 같지 않았다.

아니, 잠깐. 이거 설마 4층 집에 있던 옷인가. 이 새끼가 설마 여기까지 왔다 갔나? 의심이 고개를 쳐들 무렵 재희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선배,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요.”

“말해.”

재희는 곧바로 질문을 던지는 대신 옆에 앉은 이수에게 몸을 기댔다. 마치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그의 어깨에 뺨을 댄 채로 허리를 끌어안는다. 대체 무슨 이야길 하려고. 이수는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돌려 재희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었다. 쪽, 쪽, 내려앉는 애정에 용기를 얻은 듯 그가 물어 왔다.

“그동안…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안 궁금했어요?”

지난 3개월간의 병원 생활에서 재희가 얻은 것이 있다면 차재하는 상상 이상의 또라이라는 사실과, 이수가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의심과, 그 의심을 키우지 못해 안달하게 만드는 경도의 우울증이었다.

대부분의 날들엔 괜찮았다. 하지만 일과 중 무엇 하나라도 어긋나는 순간부터 재희는 끝도 없는 좌절에 사로잡혔다.

대화를 이어 나가려 애쓰는 자신의 메시지를 볼 때마다, 언제나 무덤덤한 이수의 답장을 볼 때마다,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려 들지 않고 재희의 하루를 궁금해하지도 않는 이수를 볼 때마다 재희의 기분은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보고 싶다고 속삭이는 남자의 목소리가 상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스피커 너머로 흘러나오는 맑은 웃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재희의 기분은 또 하늘을 거닐고는 했다.

혼자서 조울증 환자처럼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이제는 메시지 한 통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망상과 고통을 끊어 내고 싶었다.

“왜 나한테는 아무것도 안 물어봤어요?”

입을 열자마자 둑이라도 터진 양 서운했던 일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까 나 봤을 때 안 반가웠어요? 화만 내고 인사도 안 해 줬잖아요. 그리고 문율이랑 수업 같이 듣는 건 왜 말 안 해 줬어요? 걔한테 왜… 예쁘다고 칭찬을 했어요? SNS에 내 사진은 하나도 안 올리면서, 문율이랑 찍은 사진은 세 장이나 올리고…….”

인자한 표정으로 재희의 말을 듣던 이수는, 그의 말이 길어질수록 인상을 찌푸렸다.

“유진 누나랑은 팔로우했으면서 내 건 안 받아 주고……. 내 DM도 씹고…….”

“팔로우? SNS 말하는 거야?”

슬쩍 날카로워진 목소리에 재희가 어깨를 움찔했다. 몸이 붙어 있던 덕분에 그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수는 손을 들어 자신의 허리를 감싼 팔을 어루만졌다. 많이 지쳐 있는 것 같았다. 어리광을 받아 줄 시간이었다. 이수는 재희의 말을 거꾸로 짚어 올라가며 설명했다.

“SNS 계정은 내가 관리하는 거 아니야. 신유진이 나중에 쇼핑몰 한다고 내 이름이랑 사진만 갖다가 쓰는 거야. 난 가끔 걔가 옷 같은 거 사다 주면 사진 찍어서 보내 주는 것만 해. 그리고 팔로운지 뭔지, 하여튼 신유진이 자기 거 말고는 아무도 받아 준 사람 없을걸? 근데 네가 신청한 거 봤으면 받아 줬을 텐데, 아마 DM도 팔로우도 알림 다 꺼 놨을 거야. 그래서 몰랐을걸.”

“…….”

재희는 대답이 없었다. 힐끗 내려다보니 촘촘한 속눈썹이 팔락이고 있었다. 어쩐지 심통 난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아서, 이수는 그의 머리칼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율이 사진 올린 것도 그래. 카페에서 둘이 프로젝트 얘기 중이었는데, 유진이랑 우연히 만났어. 그때 걔가 사진 찍은 거 지 맘대로 올린 거야.”

“……칭찬은요.”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런 말을 언제 했는지 잘 모르겠는데…….”

어깨에 기댄 머리통이 흔들렸다. 재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선배다워요,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조금은 풀려 있었다. 그 대답만으로도 만족스러웠는지 재희는 더 이상 문율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사실 기억이 날락 말락 했다. 수업 도중이었나. 칭찬을 언제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문율에 대해서 평소 갖고 있는 생각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리키처럼 귀엽고, 리키처럼 말을 잘 듣고, 리키처럼 착하다. 율이 들으면 황당한 얼굴로 웃을지도 모르는 뭐 그런…….

재희가 질투를 하는 건 이해하겠지만, 실상 차재희와 문율에게 느끼는 감정은 완전히 결이 달랐다. 이수도 재희에게 머리를 기댔다. 그 상태로 물었다.

“그것 때문에 서운해서 질투 났어?”

“……아주 많이요.”

문득 궁금했다.

“넌 어때.”

“뭐가요.”

이수가 손을 내밀었다. 재희는 허리를 안았던 팔을 풀어 그 위에 제 손을 올려놓았다. 그것을 뒤집어 손바닥 위의 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매만진 이수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난 질투가 나면, 네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 다 치워 버리고 싶어. 죽이든, 없애든, 어떻게든 해 버리고 싶어서 속이 부글부글 끓어. 너도 그래?”

“……아니요.”

재희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솔직해져야 했다.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으면 이 우울을 떨쳐 낼 수도 없었다. 이수와 손을 꽉 맞잡은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잠깐 화가 났다가도……. 내가 못나서 그런 거라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돼요. 선배가 나를 싫어할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그런 거라고. 선배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할지도 모르는 이유를 내게서 찾게 돼요.”

자신감 없는 목소리를 들으며 이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차재희는 부족한 것 없이 완벽했다. 가끔 핀트가 엇나가 사람을 분통 터지게 하긴 했지만, 자신 또한 말로 사람을 열받게 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으니 공통점이라는 생각이 들어 좋았다.

그런 그가 자신을 못났다고 표현하는 데에는 차대범과 성미희 부부가 공헌한 바가 클 것이었다. 이수가 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첫째보다, 논리적 사고가 결여되어 생각이란 걸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막내보다도 차재희가 훨씬 나았다.

그 집안에서 멀쩡한 사람은 재희뿐이었다. 당장이라도 그 집안 호적을 가져다 재희의 이름이 새겨진 부분을 도려내고 싶어졌다.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자신은 몰라도 재희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기에 이수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저 손을 돌려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그런 생각 하지 마. 잘 기억해 놔, 재희야. 만약 내가 너를 두고 바람을 피우면… 그건 뭔가 잘못된 거야. 내가 최면에 걸렸거나 세뇌를 당했거나 협박을 받고 있는 거라고. 그러니까 그때는, 네가 못났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상대방을 없애 버려. 그러면 모두 괜찮아질 거야.”

“…….”

“변호사는 내가 구해 줄게.”

살벌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러나 재희는 그것이 좋았다. 이수가 하는 말이 모두 진심은 아니겠지만,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불법을 입에 담는 남자가 좋았다. 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만족스러운 대답에 이수가 웃었다.

기억을 더듬어 남아 있는 질문들을 떠올렸다. 아까 보았을 때 안 반가웠느냐, 왜 아무것도 묻지 않았느냐, 두 가지가 남아 있었다. 솔직히 후자는 무슨 말인지 잘 알 수 없어서 일단 아는 것부터 답변했다.

“그리고 아까 너 봤을 때 당연히 반가웠지. 내가 화를 낸 게 아니라, 아니 화를 낸 건 맞는데. 너한테 화를 낸 건 아니고……. 아니 너한테 화를 낸 것도 맞기는 한데……. 아니, 씨발.”

햄스터 허들은 차재희에 한해서만큼은 강아지 허들만 해졌지만 여전히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이수의 인내심이 빠르게 닳아 없어졌다.

“생각해 보니까 웃기네. 저녁에 온다는 놈이 갑자기 내 부모님 집에 나타났는데 그럼 내가 화를 안 내게 생겼어? 넌 안 처맞은 걸 다행으로 여겨.”

애초에 설명을 제대로 안 한 게 잘못 아닌가? 이수가 짜증을 내자 재희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러시겠죠.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자 보지 않아도 그가 샐쭉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치고 있으니 재희가 화내지 말라는 듯 이수의 손을 끌어당겼다. 손등 위로 내려앉는 입맞춤에 맥이 풀렸다. 그 상태로 재희는 다시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왜 나한테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요?”

“그거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 뭘 안 물어? 네 동생 일을 얘기하는 거라면, 니가 말하기 싫어했잖아. 그래서 안 물어봤어. 가족들 이야기도 그렇고.”

오늘 두 눈으로 보고 나서야 이해한 부분이었다. 그가 왜 모든 것들을 숨기려고 했는지, 차마 말하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걸 말하는 게 아니었나 보다. 재희가 고개를 저었다. 이수의 어깨에 마른 뺨이 비벼졌다.

“그거 말고요. 선배가 무심한 건 알지만……. 그래도 나한테 오늘 뭐 했냐고, 무슨 일 있었냐고 한 번도 안 물어볼 줄은 몰랐어요. ……혹시 일부러 그랬어요?”

개미 기어가듯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땅을 파고 들어갈 기세였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굉장히 우울하지만, 혹시 이수가 정말로 관심이 없어서 일부러 그런 거라면 그저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태도가 느껴졌다. 이수는 당황스러웠다. 이런 점이 재희의 심리에 영향을 끼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잠깐 고민하다 대답했다.

“대답은 니가 이미 했네. 나 무심한 거 맞아. 그래서 그랬어.”

재희는 무척 실망한 기색이었다. 이수는 그가 자신에게만큼은 사소한 것들을 물어봐 주길, 하고 특별 대우를 바랐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앞으로도 안 물어볼 거예요?”

“니가 원한다면 노력해야지. 근데 내가 여태 살아왔던 삶이 그랬어.”

그렇게 말한 이수는 지나간 시간을 떠올렸다. 18년간 병실 안에서, 이수는 그저 보이는 대로 주어지는 정보만 받아들이며 살았다.

창 너머로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보며 가을이 온 걸 깨닫지만, 그 마른 나뭇잎이 어떤 냄새를 풍기는지, 어떤 느낌으로 바스러지는지, 이수는 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단 한 번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기에 시도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에 익숙해. 병실 밖에서 뭔가를 경험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네가 말해 주는 이야기만 듣고 그걸로 판단했어. 너한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야.”

그렇게 말한 이수는, 문득 그의 이름을 불렀다.

“차재희. 내가 너를 왜 좋아하는지 알아?”

“모르겠어요. 나 같은 애를 왜 좋아하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자꾸만 무서워져요.”

그 말에 이수가 짧게 웃었다. 재희의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하며 되물었다. 무서웠어? 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는 겁먹은 후배의 손을 꽉 붙잡은 채로 고백했다.

“지루하고 허무하다고 생각했던 인생이었는데, 네가 나타났어. 너는 나한테 많은 순간을 줬어. 즐겁다는 게 뭔지, 설렌다는 게 뭔지, 좋아한다는 게 뭔지, 마음이 아프다는 게 무슨 뜻인지 너를 통해서 처음으로 경험했어.”

이수는 붙잡은 손을 들어 올렸다. 굽혀진 손가락을 펴고, 상처가 남은 손바닥에 여러 번 입을 맞췄다. 이수는 아픔을 견디는 재희를 보며 인내를 배웠고, 눈물을 쏟으며 고백하는 그에게서 사랑을 배웠다.

“내가 몰랐던 걸 네가 그렇게 많이 가르쳐 줬는데, 내가 어떻게 너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선배…….”

“네가 내 수많은 처음이야. 차재희, 난 지금까지의 경험만으로도 너를 좋아하게 됐잖아. 앞으로 더 많은 첫 순간들이 쌓일 텐데 이 마음이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 수는 없어. 그러니까 그딴 걸로 무서워하지 마.”

그 말을 들으며 구원받는 느낌이었다. 자신을 처음으로 알아봐 준 사람 그리고 자신과 수많은 처음을 경험할 사람. 재희는 이제 이수를 이보다 더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재희는 몇 년 전에 보았던 이수를 떠올렸다. 서이수일 거라고는 의심조차 하지 못했던, 텅 빈 눈빛을 가지고 있었던 소년에 대해서 생각했다. 잠시 망설이던 재희가 입을 열었다.

“전에, 선배를 본 적 있어요. 열다섯 살 때.”

“……나를?”

이수가 머리를 기울였다. 재희가 열다섯 살 때라면 이수는 열여덟 살이다. 천국과 지옥을 오갔던 해, 자유와 죽음을 갈망했던 해, 그때 차재희가 나를 봤다고? 어쩌면 아까 천수인이 말했던 날, 차재희도 그 자리에 있었을지 몰랐다. 재희가 소곤거렸다.

“그때 재우 형한테 좋은 일이 생겨서 부모님이랑 저랑 미국에 잠깐 갔었던 적이 있어요. 근데 그때 아버지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회장님 부부가 뉴욕의 어떤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만나러 달려갔었어요. 난 시차 적응이 안 돼서 조느라고 누가 누군지도 얘기를 제대로 못 들었고요.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알겠어요.”

재희가 꼼지락거렸다.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는다. 따듯한 숨결이 피부밑으로 흐르는 혈액을 데웠다. 몸에 금세 열기가 피었다.

“부모님은 회장님 부부를 만나서 대화 나누시고, 나보고 인사하고 오라기에 가장 끝에 있는 병실로 갔었거든요. 근데 선배가 창가에 서 있었어요. 분명하게 기억나요. 원피스같이 새하얀 환자복 입고, 머리가 조금 길었잖아요. 맞죠?”

“……아마도.”

거의 단발에 가까운 머리였다. 열여덟 살의 이수는 작은 키에 창백한 얼굴, 가느다란 몸을 가진 소년이었다. 재희가 여자로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창문 너머로 그림자가 깔린 센트럴 파크와 잠들지 않는 도시가 내려다보였다. 불야성의 광채에 힘을 잃은 달빛은 희미하게 병실을 비췄고, 그 앞에 선 이수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표정으로 재희를 바라봤다.

소년의 텅 빈 눈빛이 어스름하게 깔린 어둠을 갈랐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재희는 이수를 둘러싼 공허에 압도되었다. 쓰러지면 깨져 버릴 것처럼, 그 자리에서 증발해 버릴 것처럼 그 어떤 것에도 매여 있지 않았던 소년.

그날의 기억은 재희에게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재희는 오랫동안 그를 떠올렸다. 왜 그런 표정을 지었을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소중한 것을 잃었던 걸까? 많은 밤을 의문으로 지새웠지만 어느 것 하나 해결하지 못했다.

그때의 궁금증이 이제야 풀렸다.

“그날 내가 본 선배는 무척이나 희미해서, 그대로 사라져 버릴 사람처럼 보였어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어요.”

이수가 가진 건 오로지 목숨뿐이었는데, 그것마저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러니 그렇게 세상에서 지워지고 싶은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재희는 과거의 그날로 돌아갔다. 지금의 저보다 어린 이수를 떠올렸다.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소년의 앞에 섰다.

“만약 내가 그때, 그곳으로 되돌아간다면……. 선배를 꽉 안아 줄 거예요. 이마에 입을 맞추고, 허리를 끌어안고, 이렇게 속삭일래요.”

언제나 차가운 몸이 가냘팠다. 재희는 그를 품어 주었다. 두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했다. 아름다운 호박색 눈동자는 이제 비어 있지 않다. 그 안에 가득 들어찬 자신을 바라보며, 재희가 속삭였다.

“내가……. 너를 채워 줄게.”

눈으로만 보았던 것들을 느끼게 해 줄게. 더는 그런 표정은 짓지 않게 만들 거야. 기다림이 즐거워지도록 반드시 돌아올게, 네 곁으로.

재희는 그렇게 열여덟 살의 이수를 허무로부터 구원하고 싶었다. 그의 진심은 지금의 이수에게도 닿았다. 이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충만했다. 꽉 차고 넘쳐서, 더는 바랄 것이 없을 만큼 황홀했다.

그 오랜 시간을 혼자였던 이유가 있었다. 이수는 자신의 삶이 차재희를 위해서 비어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를 만나고, 차오르고, 사랑하기 위해서였다. 남은 삶을 그와의 찬란한 기억들로 채우기 위해서였다.

이수는 이제 외롭지 않았다.

* * *

한참을 끌어안고 있다가 이수가 재희를 밀어냈다. 풀리지 않은 의문이 남아 있었다.

“차재희, 우리 사돈 될지도 모른다는 거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아까 말해 준다고 했잖아.”

“아. 그, 서일 창립 기념일 행사 때 알았어요…….”

재희가 힐끗, 이수의 눈치를 봤다. 창립 기념일 행사라면 역시 첫 섹스를 하던 날 던졌던 질문이 그런 뜻이었다는 말이었다. 혀를 찬 이수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근데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어?”

“…….”

“까지 말고 솔직히 말해 봐.”

재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중얼거렸다.

“선배가 그거 알면 나한테 헤어지자고 할까 봐……. 최대한 늦게 말하고 싶었어요. 그동안 몸정이든 마음정이든 쌓아서, 선배가 나 버리지 못하게 하려고…….”

별 황당한 계획이었다. 어떤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저런 하찮고 귀여운 이유일 줄은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한 이수는 고개를 기울여 재희에게 입을 맞췄다. 부드럽지만 가끔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들기도 하는, 그러나 언제고 다시 듣고 싶을 만큼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입술을 입 안 가득 머금었다.

마음정이든 몸정이든 이미 쌓일 만큼 쌓인 것 같았다. 이 사랑스러운 남자와 키스하고 뒹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하아, 같이… 씻어도 돼요?”

숨을 몰아쉰 재희가 몽롱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첫 관계 후 석 달 만에 자신의 차례가 돌아왔다. 빠르게 차오르는 흥분감에 아래가 빠듯했다. 마른침을 삼킨 이수는 재희를 데리고 침실로 들어갔다. 리빙 룸에 붙은 욕실은 둘이서 씻기엔 살짝 답답한 감이 있었다.

이수가 준비물을 꺼내 두러 간 사이, 재희는 욕실 앞의 드레스 룸에서 옷을 벗었다. 흥분과 민망함이 몰아쳐 귀 끝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몇 달간 상상에 그쳤던 일이 현실이 된다는 생각에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재희가 벗어 놓은 정장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있을 때 이수가 돌아왔다.

소매 단추를 끄르며 들어오다가 드로어즈만 입고 선 재희를 보고 흠칫, 몸을 굳힌다. 위아래로 쳐다보는 이수의 눈길이 심상치 않았다. 그를 감지한 재희가 작게 웃었다.

“도와줄게요.”

“어…….”

키스는 잘만 하면서, 이런 상황에 돌입하면 로봇처럼 뚝딱거리는 이수가 참을 수 없이 귀여웠다. 시선을 피하는 것도 사랑스러워 일부러 코끝을 비볐다.

재희는 이수의 귓가에 살짝 입을 맞추며 손을 내렸다. 버클을 풀고, 손에 착 감기는 가죽 벨트를 서랍장 위에 올려 두고, 지퍼를 내려 바지를 벗겼다. 사륵, 아래로 떨어져 내린 옷을 치우기 위해 고개를 숙인 순간이었다. 재희가 탄성을 삼켰다. 위아래로 거칠게 움직이는 목울대가 당황스러움을 표현해 냈다.

“이거, 뭐예요……?”

새하얀 허벅지를 가로지르는 검은 선이 보였다. 총을 꽂아 두는 홀스터처럼 대퇴부 중앙에 매인 탄력 있는 끈은 위쪽으로 뻗어 나가 셔츠를 꽉 물고 있었다. 흘낏, 아래를 내려다본 이수가 중요한 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셔츠 가터.”

“저번에는…… 없었, 잖아요?”

“그때는 옷을 신유진이 준비해서 챙기는 걸 깜빡했어. 오늘은 형이 준비해 뒀더라.”

이런 건 대체 누가 발명했을까. 누굴 죽이려고. 재희의 눈동자가 사시나무처럼 떨려 왔다.

끈을 따라 움직이는 손끝이 살갗을 스쳤다. 흰 허벅지 안쪽을 주물럭거리자 이수가 열띤 숨을 터트렸다. 손안에 감기는 살결이 털 하나 없이 매끈했다. 재희가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내 목덜미부터 단추를 풀어 내리던 손을 붙잡았다. 의도가 분명한 손길이었다.

“왜?”

“셔츠… 입고 있으면 안 돼요? 이거 너무 예쁜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이수의 뺨이 더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몇 달 전, 정장을 벗지 말라고 했을 때 차재희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셔츠 가터를 어루만지는 손길과 고막을 파고든 목소리가 전신을 순회하며 열을 올렸다. 이수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이거 안 빼면 속옷을 못 벗는데, 그거까지 입고 있으라고?”

“아…….”

재희의 시선이 다시 아래를 향했다. 드로어즈가 상당히 거슬렸다. 흰 셔츠와 검은 셔츠 가터 사이로 말랑하고 매끈한 페니스와 고환이 보이고, 엎드렸을 때는 쫀득한 엉덩이를 끈이 가로지르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그러면…….”

불쑥, 키를 낮춘 머리통이 이수의 다리 사이에 들이밀어졌다. 흠칫 놀라서 뒷걸음질 쳤으나 등에 닿는 건 차게 식은 서랍장의 표면뿐이었다.

왜 이래, 미친놈이……. 쪼그라든 심장을 부여잡고 있으니 재희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이수와 눈을 맞추며, 드로어즈 아래로 손을 집어넣는다. 고환을 스치고 위로 올라온 손가락이 속옷을 피부로부터 떼어 냈다. 그리고, 차재희는 광견병 걸린 개새끼처럼 그 천을 이로 찢어발겼다.

“야! 이게, 무슨!”

지익, 지익 넝마가 된 드로어즈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휑하니 드러난 하반신에 뜨거운 입김이 닿았다.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에 이수가 신음을 삼켰다. 재희는 셔츠 아래로 모습을 보인 분홍빛 페니스를 보며 환히 웃었다. 어찌나 좋아하는지 따지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재희가 몸을 일으키고, 엄습하는 수치심에 이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무슨 꼴이야……. 속으로 욕을 씹는 동안 재희도 속옷을 벗었다. 단단히 선 채 퉁, 튕겨 나온 페니스 끝이 살벌하게 번들거렸다. 음모 사이로 드러난 검붉은 것은 여전히 흉기나 다름없이 컸다.

그게 자신의 안을 들락거렸던 날을 떠올리자 찌릿하게 전기가 오르는 기분이었다. 이수가 열 오른 뺨을 감추며 도망치듯 욕실로 향했다. 샤워 부스로 가려는 그를 재희가 욕조로 이끌었다. 두 사람이 눕고도 남을 커다란 욕조는 창문 옆에 있어서 이수가 잘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여기 싫은데.”

“왜요?”

“밖에서 보일 것 같아서.”

“안 보여요.”

43층이 아니라 3층이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유리다. 그러나 이수는 괜히 찝찝해서 싫었다.

“……그럼 넌 여기서 씻어.”

그러고는 몸을 돌리려는 이수를 재희가 잡아챘다. 손목에 가해지는 힘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재희는 한껏 애처로운 얼굴이었다. 입매를 일자로 늘린 채, 그렇게 싫어요? 하고 쳐다보는 시선에 맥이 풀렸다. 결국은 욕조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재희는 이수를 창가에 앉혀 놓고 샤워기를 꺼내 물의 온도를 맞췄다. 자신에겐 너무 뜨겁지 않게, 이수에게는 너무 차갑지 않게. 그러나 두 사람이 원하는 온도는 격차가 컸기에 재희는 결국 김이 피어오르는 물을 맞아야만 했다.

“내가 선배 씻겨 줘도 돼요?”

“왜?”

하얗게 흩어지는 수증기 사이로 이수가 보였다. 싫다더니, 창에 기대고 앉은 그의 시선은 황혼이 물러가기 시작하는 도시에 못 박혀 떨어질 줄 몰랐다.

재희는 대답하지 않고 이수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섰다. 어차피 허락해 줄 것 같았으니까.

샤워기 헤드를 조준해 발끝부터 그를 적셨다. 물기에 젖어 드는 피부가 말도 못 하게 야했다. 창백한 피부에 복숭앗빛으로 혈기가 돌고, 발가락 끝이 분홍으로 물들었다. 재희는 그의 무릎에 입을 맞추며 물줄기를 위로 쏘았다.

이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내 물방울이 점점이 튄 뺨에 흐릿한 미소가 걸쳐졌다. 단추가 두어 개쯤 풀린 셔츠 깃 사이로 물길이 트였다.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물이 옷을 적시며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의 허벅지를 만지작거리는 재희는 상기된 낯으로 이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는 듯 기대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열렬한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로 웃었다. 그 미소에 이수가 고개를 기울여 키스했다. 입술을 물고 핥아 주니 재희가 굶주린 개처럼 달려들었다. 탁, 욕조에 내던져진 샤워기가 둘을 향해 비를 뿌린다.

“읏!”

이수가 허리를 뒤틀며 물러나려 했지만, 그 뒤는 유리로 경계가 그어진 낭떠러지였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커다란 손이 허벅지 안쪽을 움켜쥔다. 떡 주무르듯 거침없는 손길에 입술이 덜덜 떨렸다. 딱 한 번 맛보았던 감각은 몇 달이 지나도 생생했다. 이수는 입술을 꾹 깨물며 눈을 감았다.

재희는 이수에게 몇 번이나 입을 맞추고 아래로 향했다. 목덜미를 빨아 흔적을 남기고, 쇄골을 연신 핥다가 문득 탄식하며 얼굴을 떼어 냈다. 젖은 셔츠 위로 분홍색 돌기가 솟아 있었다. 꼿꼿이 선 유두가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망설이지 않고 입술을 처박았다.

목이 마른 사람처럼 츱츱거리며 셔츠를 빠는 힘은 이수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차재희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가슴이 아릿하게 아팠다. 생생하게 피어나는 쾌감이 전신을 녹여 낸다. 이수는 손을 뻗어 재희의 머리통을 붙잡아 짓눌렀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그가 젖꼭지를 잘근잘근 씹어 줄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통증은 곧 쾌락이었다.

“아윽!”

재희의 손가락이 이수의 사타구니를 더듬었다. 셔츠에 절반쯤 드러난 것을 외려 그 천 아래로 감추어 버리고, 감질나도록 간접적인 접촉만을 선사한다. 위아래로 느껴지는 감각이 어딘가 모자랐다.

셔츠를 벗고 싶었다. 맨살로 차재희와 부대끼고 싶었다. 좆을 비비고, 온몸을 맞대어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싶었다. 긴장으로 떨리는 손이 풀리다 만 단추에 가 닿았다.

“뭐 해요?”

톡, 하나를 풀어내려는 찰나 재희가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쿵, 유리 위로 결박하듯 두 손을 잡아 올린 남자가 상체를 세웠다. 가슴팍에서 떨어져 나가는 온기에 아쉬움이 물씬 차오른다. 이수가 가물가물한 눈으로 재희를 바라봤다.

이성을 잃은 동공이 진득하게 풀린 채였다.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새까만 눈동자가 이수를 스쳐 지났다. 재희가 이수의 귓불을 아프도록 씹었다. 이를 세워 잘근거리며 빨아 대니 두툼한 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흣! 왜…….”

“입고 있으라고 했잖아요.”

씨근거리는 숨과 함께 음습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곧 입술이 귓가를 타고 내려왔다. 색욕에 몰두한 차재희는 공격적이고 또 사나웠다. 목덜미의 여린 살을 흡입해 붉은 자국을 새기고, 팔딱거리는 맥을 물어뜯을 것처럼 취한다. 당장이라도 혈관이 찢어질 듯한 공포와 함께 밑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밀어내는 힘에 등을 받치는 유리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허공을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잠깐이라도 긴장을 놓는 순간 추락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지만, 재희의 몸짓 하나에 이수는 또 하늘을 날았다. 기저에 두려움이 깔린 쾌락은 그저 황홀했다.

“아, 읏, 오늘은…….”

엉덩이를 움켜쥐는 손길에 이수가 다급히 목소리를 키웠다.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박을 권리를 주장하겠지. 예상했던 바였다.

그러나 재희는 이수의 말을 절대 들어줄 수가 없었다. 죽어도 안 될 일이었다. 탄탄한 살을 아프도록 쥐어짠 재희가 입술을 열었다. 방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선배, 나 생일 선물 줘야죠.”

“3개월이나, 지난… 윽!”

불만에 찬 눈매가 찡그려졌다. 귀두를 살살 쓸어 주는 손길이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감미로웠다. 몇 달간 메말라 있던 구멍이 적셔지며 선액이 흘렀다. 그와 동시에 뒤를 쑤셔 주던 느낌이 떠올라, 이수는 이를 악문 채로 차재희를 바라봤다.

“생각해 보라고 했잖아.”

“아! 아니, 그건…….”

“오늘은 내 마음대로 할래……. 응?”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눈매가 부드럽게 접히고 녹아내릴 듯 예쁜 미소가 떠올랐다. 저러고 있으면 뭐든지 꼭 들어줘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이수는 결국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쯤은 더, 내어줘도 되겠지……. 생일이니까……. 박히는 것도 나쁘지 않았으니까, 아니 사실 미치게 좋았으니까. 한 번쯤은 더…….

그렇게 생각하며 몸에 힘을 풀었다. 말랑말랑해진 엉덩이를 재희는 야만인처럼 주물렀다. 이수는 숨을 헐떡이며 잡힌 손을 꿈질거렸다. 빨리, 이거 그만해. 삽입당하고 싶은 욕구가 물안개처럼 피어올라 시야를 가렸다. 이수가 허리를 들썩였다. 좁은 구멍을 찢고 들어와 속을 가득 채우고야 마는 행위를 갈망했다. 낮은 웃음소리가 욕실을 메웠다.

“왜 이렇게 급해.”

손목에서 떨어져 나가는 힘을 느끼고 이수는 팔을 내렸다. 차재희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뜨거운 물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보였다. 단정한 이면에 숨은 음란함을 발견할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숨을 고른 이수가 창가에서 내려왔다. 재희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았다. 자신과 달리 통나무같이 단단한 그의 대퇴근은 피부가 스칠 때마다 뱀처럼 꿈틀거렸다. 일자로 뻗은 빗장뼈와 아름다운 굴곡의 상박. 힘줄이 돋은 전완근 그리고 푸른 핏줄이 존재감을 과시하는 손등. 재희의 몸은 전보다 말랐지만 여전히 완벽했다.

이수는 재희를 어루만지며 시선을 맞췄다. 새까만 눈동자는 이성이 아득해 보였다. 당장이라도 잡아먹고 싶은 것을 참는 사람처럼, 재희는 이를 악문 채로 이수의 손길을 느꼈다. 그러나 점점 거칠어지는 숨결은 감출 수 없었다.

꼿꼿이 선 두 페니스가 꺼덕거리며 부딪힐 때마다 숨이 넘어갈 듯 흥분이 더해졌다. 긴장감으로 빼곡한 침묵을 재희가 흩트렸다.

“그거, 어디 있어요?”

“침대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수를 욕조에 내려놓은 재희가 빠른 걸음으로 욕실을 나갔다. 아무래도 여기서 일을 치를 생각인 듯했다. 이수의 흔들리는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가 다시 욕조로 되돌아왔다.

둘이서 뒹굴기에 충분한 넓이였지만,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작은 신음도 메아리치며 울리는 곳이었다. 게다가 남들에게 과시하듯 창을 옆에 두고 섹스한다는 건 이수에게 색다른 충격으로 다가왔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기다리니 몇 초 지나지 않아 재희가 돌아왔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성기가 가까워진다. 이수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올려다봤다.

재희는 이수에게 젤을 쥐여 주고, 수전을 돌려 물을 잠근 후에 이수의 건너편에 앉았다. 물에 젖은 머리칼을 대충 쓸어 넘기더니 이수를 보며 웃는다. 순진해 보이는 웃음과 달리 입에서는 믿지 못할 소리가 흘러나왔다.

“선배가 풀어 봐요.”

“……뭐?”

“다리 벌리고, 혼자서 뒤에 풀어 봐.”

이수의 두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두 눈을 깜빡이며 말뜻을 되새기던 그가 이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돌았냐? 관자놀이에서 빙글 돌아가는 움직임에 재희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도와줄게요.”

“아니, 뭐라는 거야.”

거절하든 말든 가까이 다가온 재희는 이수의 다리를 잡아 벌렸다. 두 발목이 욕조 양 끝에 걸쳐지고 훤히 드러난 하반신에 축축한 공기가 닿았다. 이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 싫어…….”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다리를 오므리려 했지만 재희는 물러서지 않았다. 몸을 기울여 이수에게 키스한다. 동시에 맞닿은 하체에 페니스가 비벼졌다. 풀리지 않은 구멍을 찢을 듯 격한 움직임에 통증이 거셌다.

이수는 아랫입술을 그에게 내어준 채로 신음을 터트렸다. 아픈 건 아픈 거고, 차재희가 빨리 박아 줬으면 하는 음탕한 욕망은 점점 커지기만 했다.

“생일 선물이잖아요.”

“그냥… 그냥 니가 해.”

“보고 싶단 말이야… 응?”

생일 선물로 이딴 짓을 해 준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말하는 태도가 지나치게 뻔뻔했다. 이수가 어이가 없거나 말거나 차재희는 보기 좋게 웃으며 입을 맞췄다.

뺨에 남은 물방울을 간지럽게 핥아 내고, 입술을 빨아들인다. 이윽고 삽입이라도 하듯 입 안을 들락거리는 혀는 성기처럼 꼿꼿이 선 채로 이수의 또 다른 구멍을 범했다.

목구멍을 찌르듯 들어오는 살덩이에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그냥 이렇게, 세게 박아 줘……. 입 안에서만 맴도는 애원은 자존심 끄트머리에 걸쳐져 실체화되지 못했다. 이수는 떨어져 나가는 재희를 아쉬운 눈길로 바라봤다. 욕조의 물기는 서서히 식어 가고 있었다.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냉기에 흠칫 몸이 떨렸다. 재희는 옆으로 비켜서 욕조 턱에 걸터앉았다.

“그런 표정 지어도 소용없어요.”

“씨발…….”

“밤샐 거야?”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목덜미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이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옆에 떨어진 젤을 주워 들었다. 차재희를 아프지 않게 하려고 샀던 것인데, 결국은 제가 먼저 쓰게 생겼다. 눈을 딱 감고 뚜껑을 열었다.

수치도 모르고 벌어진 다리 사이로 젤이 쏟아졌다. 차가운 느낌에 움찔 몸을 떨었다가, 욕실을 울리는 웃음소리에 오기가 생겼다. 연습한다고 생각하자. 나중에 차재희한테 똑같이 해 줘야지……. 이를 악문 채 손가락에도 젤을 묻혔다.

이수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제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재희는 입술을 핥으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윽…….”

기다란 손가락이 빽빽한 구멍을 열고 들어간다. 순간 숨을 멈출 만큼 선정적인 장면이었다.

늘 짜증스럽게 치솟아 있던 눈썹 끝이 아래를 향했다. 날카로운 눈매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애처로웠다. 셔츠 깃 사이로 자신이 남겨 둔 흔적이 보였다. 붉은 자국이 그에게 찍어 둔 인장처럼 느껴졌다.

야트막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 젖은 셔츠 위로는 꼿꼿이 선 유두가 불거졌다. 판판한 아랫배를 지나 갈라진 셔츠 자락은 조금 풀이 죽은 페니스를 몰래 감춰 두었고, 셔츠 끝에서 이어지는 검은 끈이 이수의 흰 허벅지를 감쌌다. 색의 대비가 강렬했다. 그러나 시선을 잡아끄는 건 따로 있었다.

열기에 의해 붉게 달아오른 애널 사이로 흰 손가락이 왕복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구멍을 늘리는 일에 집중했다. 젤이 녹아나며 질걱거리는 소리가 음란했다. 재희는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고장이라도 날 것처럼 고통을 호소하는 제 좆을 움켜쥐었다.

“아, 느낌… 이상해.”

“하아. 더, 해 봐요, 하나 더 넣어.”

두 번째 손가락이 구멍을 파고들었다. 빠듯하게 늘어난 주름 사이로 녹아내린 젤이 눈물처럼 흘렀다.

자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기나 할까. 재희는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이수의 전신을 뜯어보았다. 한 손으로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한 손으로는 애널을 성실하게 쑤셔 댄다. 이수가 저도 모르게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욕조와 살결이 마찰되는 소리가 났다.

“흐, 윽!”

어느새 꼿꼿이 선 페니스가 셔츠 자락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선단이 흠뻑 젖은 것을 보는 순간 재희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구멍을 파고드는 이수의 손가락에 질투를 느낄 정도로, 정욕에 잠식된 남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재희는 다급히 내려가 그의 손가락을 빼냈다.

읏! 갑작스럽게 비워진 구멍이 주인을 부르듯 벌름거린다. 망연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이수의 손을 재희가 잡아챘다. 그의 손목을 감싸 쥐고, 방금까지 음란한 짓도 마다하지 않던 손가락을 샅샅이 핥았다. 젖은 피부에선 약한 단맛이 났다. 뼈까지 씹어 먹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뭐, 하는! 아!”

동시에 엉덩이 아래로 흘러내린 젤을 끌어모아 제 손가락에 묻혔다. 그러고는 뻐끔거리는 구멍을 열고 들어갔다. 온몸에 힘이 풀린 이수가 상체를 늘어트렸다. 자신의 손으로 하는 것과는 달랐다. 똑같은 손인데 차재희의 것이 들어오니 그에게 삽입당하는 느낌이었다. 이수는 신음을 삼키며 눈을 꽉 감았다.

내벽을 헤집는 느낌에 숨이 막혀 왔다. 손가락을 벌려 쑤셔지는데 싫지 않았다. 더, 세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잡아챘다. 재희는 여전히 손가락을 핥고 있었다. 뼈를 끊어 먹을 것처럼 씹어 대는 탓에 미미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수는 숨을 헐떡이며 재희의 입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빨아 줘…….”

작게 웃은 재희가 오럴하듯 이수의 손가락을 빨았다. 강한 압력과 함께 피부를 휘감는 혓바닥의 돌기 하나하나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래서 재희가 손가락을 늘리며 아래를 쳐올렸을 때, 이수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야릇한 교성을 터트렸다. 으흣, 습기로 가득 찬 욕실에 울리는 목소리는 자신의 것 같지 않았다. 몽롱한 눈길이 앞에 있는 남자를 향했다.

재희는 페니스를 삽입하듯 애널에 손을 박아 넣었다. 퍽, 퍽, 젤이 튀며 뭉근한 쾌감이 피었다. 이수가 참지 못하고 재희를 끌어당겼다. 키스해. 뜨끈한 입 안에서 빠져나온 손이 머리채를 움켜쥔다. 그러나 재희는 고개를 돌려 이수의 손을 떨쳐 냈다.

“윽!”

“이거, 하아, 아주 나쁜 버릇이야.”

외려 재희의 손이 이수의 젖은 머리칼을 얽어 잡았다. 두피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과 함께 고개가 뒤로 꺾였다. 재희는 구멍에 들어간 손가락을 휘저으며 이수의 목울대를 깨물었다.

신음이 튀는 것과 동시에 전신에 짜릿한 쾌감이 퍼졌다. 아주 깊숙이 들어온 손가락이 어딘가를 더듬었다. 전기의자에 앉기라도 한 듯 손발이 저려 왔다. 뭐라도 싸야 할 것처럼 간질간질, 고통스럽게 퍼져 나가는 사정감에 이수가 눈물을 흘렸다.

“거기, 흐, 이상해…….”

“이상한 거야, 좋은 거야. 아직도 모르겠어?”

“으흑, 잠깐, 잠깐만…….”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것을 재희가 멈추게 했다. 이수가 어떠한 부정의 말도 꺼내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는다.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혀가 모든 거부를 씹어 삼켰다. 주는 대로 받아먹어야지. 낮은 천둥처럼 울리는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이수가 재희의 타액에 범벅이 된 채로 헐떡였다. 입만 열면 입술을 씹어 대는 통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구멍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온 손끝에서 둑이 터지듯 절정을 맞이했다.

극점을 자극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분홍색 귀두가 새하얀 정액을 쏘아 냈다. 셔츠 위로 엉망으로 튄 체액에서 비릿한 내음이 진동했다. 재희는 그제야 이수의 머리채를 놓아주고 몸을 일으켰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아, 잠깐… 잠깐만, 차재희…….”

온몸에 힘이 없었다. 오랜만에 느껴 본 쾌락은 이수의 모든 기운을 앗아갔다. 그러나 재희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방금이 여태까지 살면서 가장 큰 인내심을 발휘한 순간이었다. 더는 무리였다.

이수의 몸이 휙 돌아갔다. 창문에 닿은 뺨에 한기가 느껴진다. 반짝이는 도시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짐승의 눈빛처럼 섬뜩했다.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주시감을 느끼며 어떠한 신호도 없이 뒤가 꿰뚫렸다.

“아윽!”

“아… 씨발.”

느른하게 욕을 씹은 재희가 이수의 등에 상체를 밀착했다. 차게 식어 가던 셔츠가 그의 온기로 데워진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페니스에 아래가 찢어질 듯 아팠다.

아무리 풀어도 눅진해지는 건 입구뿐이라, 깊숙이 파고든 좆은 어느 순간부터 생살을 가르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흐느끼듯 신음을 터트린 이수가 숨을 헐떡였다.

“아파…….”

“아파?”

“흣!”

반문한 재희는 그러나 거침없이 허리를 쳐올렸다. 전립선을 스치고 지나간 귀두가 내벽 깊숙한 곳과 맞물린다. 고통과 쾌감, 양립되는 감각은 이수에게 그저 희열이었다.

아픈 것마저도 좋았다. 재희가 움직일 때마다 이수는 눈물과 신음을 동시에 흘렸다. 그것을 모르지 않기에, 재희는 망설이지 않고 이수가 바라는 대로 좆을 밀어 넣었다.

“이런 거 좋아하잖아…….”

“아! 흐윽!”

“아니야?”

재희가 이수의 손을 끌고 와 그의 아랫배에 갖다 댔다. 치골 위로 판판한 아랫배는 재희가 페니스를 쑤실 때마다 볼록하게 솟아오르길 반복했다. 그 미동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이수는 형편없이 떨려 오는 시선으로 그곳을 내려다봤다. 이러다 꼭 피부가 뚫려 버릴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러나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두려움은 극점에서 밀려오는 쾌락에 금세 잠식당했다.

퍽, 퍽, 둔부가 부딪히며 축축한 내벽이 갈라질 때마다 벼랑 끝을 거닐듯 아슬아슬한 쾌감이 느껴졌다. 죽을지도 몰라, 그렇게 속삭이던 이수는 이내 죽어도 좋아, 하고 자신에게 닥쳐온 감각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하아, 선배…….”

재희가 허리를 돌리며 이수를 꽉 끌어안았다. 뜨거운 손이 옷자락을 거칠게 파고들었다. 툭, 툭, 헐거워진 셔츠 가터의 결합부가 분리됐다. 젖은 셔츠가 위로 밀려 올라간다. 얇은 허리와 피부 밑으로 느껴지는 마른 근육들, 피부에서 샘솟는 서이수만의 체취와 좆을 끊어 먹을 듯 조여 오는 애널. 모든 것이 그저 황홀했다.

나를 가진 남자, 나의 정신과 몸과 마음을 모두 소유한 남자. 그가 품 안에서 바르작거릴 때마다 재희는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붙들어 맸다. 페니스로 안을 들쑤시면 빠듯하게 조여 오며 신음하고, 뒤로 빠질 때마다 가지 말라고 애원하듯 따라 나오는 둔부가 앙큼하기 그지없었다.

손가락을 비틀어 유두를 꼬집자 이수가 인상을 찡그렸다. 휘어진 눈썹 아래, 아래로 끌려 내려간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서이수가 울면 약이라도 빤 것처럼 정신이 나갔다. 재희는 혀를 내어 그것을 핥으며 이수의 내부를 쑤셔 댔다. 살이 철썩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신 신음이 터졌다.

“하아. 조용히, 해요.”

“아니, 윽!”

순간 머리채를 휘어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유리창에 뺨을 짓눌린 이수는 가쁜 숨을 내쉬며 입술을 깨물었다. 몇 달간의 동면에서 깨어난 세포들은 더 큰 자극을 갈망했다. 더, 더, 세게……. 재희를 부추기듯 허리를 흔들어 댄다.

그 몸짓에 한층 크기를 부풀린 것이 벌름거리는 구멍을 찢어발길 듯했다. 좆이 옴쭉거리는 내벽을 쑤시고 들어올 때마다 그곳으로부터 희열이 폭발했다.

날카로운 쾌감이 이성을 절단 내고 본능을 할퀴었다. 깨어난 욕망은 발악하며 격렬한 쾌락을 부르짖었다. 폭력 같은 섹스에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그에 자극당한 재희는 더 거칠게 휘몰아쳤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유리창을 짚은 이수가 환희의 교성을 터트렸다.

“읏……!”

“조용히 하라니까……. 왜 말을 안 들어.”

그렇게 씹어뱉은 재희가 이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뼈가 부러질 듯한 압박감 속에서 두 손가락이 유두를 긁어내렸다. 꼬집고 괴롭히는 것과 동시에 부드럽게 돌아간 허리는 한 곳을 집요하게 찔러 댔다.

순식간에 차오르는 사정감에 이수가 숨을 멈췄다. 그리고 폭발하기 직전, 아래로 향한 손가락이 분홍색 성기를 꽉 움켜쥐었다. 구멍을 틀어막은 손끝에 눈동자가 충격으로 흔들렸다.

“아니, 안 돼, 하지, 흣, 하지 마!”

도리질을 쳤지만 요도를 쑤시는 손톱에 힘만 더해질 뿐, 기둥 중간을 묶어 놓은 듯한 느낌은 가시질 않았다. 이수가 괴로워하며 발버둥 쳤다. 한계치를 넘은 사정감은 온몸을 두드리는 통증이 되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배출되어야 할 정액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 같기도 했다. 모든 살이 아릴 정도로 고통스러웠고, 재희가 속도를 높여 좆을 박아 넣었을 때는 딱 죽고 싶었다.

“아, 제발, 흑, 손, 놔, 씨발!”

“하아, 안 되겠네.”

커다란 손이 입을 틀어막았다. 숨이 막혔다. 손바닥을 깨물고 핥아도 떨어져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뒤를 꿰뚫리는 감각만은 선연했다. 극치를 넘어선 쾌락이 머리를 깨부술 것 같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는 곳에 짐승처럼 헐떡이며 흘레붙는 소리만 남았다.

정신이 끊어질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수는 숨도 쉬지 못한 채로 재희가 선사한 쾌락에 지배당했다. 전신에 힘이 빠지며 기절할 것처럼 맥이 풀렸다. 마침내 움직임을 멈춘 차재희가 손을 뗐을 때, 이수는 몸을 무너트리며 여러 차례 정액을 쏟아 냈다.

동시에 구멍 깊숙한 곳, 퉁퉁 부어오른 지점에 토정한 재희가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제 좆물을 펴 바르듯 허리를 느릿하게 움직이는 느낌에 이수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여운이 가시지 않은 몸이 부르르 떨렸다.

빨갛게 부어오른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씨발, 개새끼야, 살벌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도 젖어 있었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재희가 그제야 이수를 돌려 앉혔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없이 웃는다. 손가락이 흠뻑 젖은 뺨을 쓸었다.

“그러니까… 말을, 잘 듣지 그랬어요.”

어처구니가 없었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린다. 이수는 날카로운 눈매로 재희를 노려봤다. 배출을 강제로 막아 내는 느낌은… 정말, 최악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 사정할 때 밀려온 쾌감은 전에 겪었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이 강렬했기에, 이수는 더 이상 불만을 토해 낼 수가 없었다.

차재희는 무릎을 꿇은 채 이수를 올려다봤다. 새까만 눈동자에 열기가 남아 있었다. 머리칼을 적신 게 땀인지 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대하는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게 꼭 충성스러운 강아지 같았다.

이수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가 앉았다. 아직 힘을 잃지 않은 그의 좆이 윗배를 찔러 왔다. 은근한 손길로 어루만지며 그에게 속삭였다. 침대로 가. 그리고 망설이다 덧붙였다. 이번엔 더 아프게 해 줘. 재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 * *

시차 때문인지, 겹겹이 쌓인 피로 때문인지, 마음이 한결 편해진 덕분인지는 몰라도 재희는 다음 날 자신의 기준으로 아주 늦게까지 잤다. 방 안으로 쏟아지는 햇빛에 눈을 뜬 그는 휴대폰의 시계를 보고 기겁했다. 오전 9시, 세 시간이나 늦잠을 자다니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눈을 크게 뜬 재희가 상체를 일으켰다.

미국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아주 불규칙한 생활 패턴으로 스스로의 몸을 해치는 데에 공을 들이던 서이수였는데, 학기 중이라고 다시 부지런을 떠는 모양이었다. 옆자리도 텅 비어 있었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머리를 정돈한 뒤 방을 나갔다. 리빙 룸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차레오가 뛰어왔다. 이옹. 발목을 스치며 머리와 꼬리를 비비더니 손톱을 세워 바지를 뜯는다. 가볍게 안아 들고 이수를 찾는데 이번에는 리키가 달려왔다. 율이 들렀다 간 모양이었다.

어제는 콧방귀를 끼며 무시하더니, 오늘의 리키는 재희에게 부딪히듯 치대 왔다. 30kg의 덩치가 몸을 세워 달려드니 뒷걸음질이 쳐졌다. 재희는 간신히 두 녀석을 떼어 내고 창가로 향했다.

데스크톱 앞은 텅 비어 있었다. 테라스도 마찬가지였고, 욕실도 조용했다. 크나큰 집을 서성이던 재희는 가장 안쪽 방에서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힐끗, 서재의 열린 문 너머로 머리를 내미니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는 이수가 보였다.

손질하지 않은 머리칼은 이마를 덮고, 얇은 흰 티셔츠 아래로 둥근 어깨의 굴곡이 드러났다. 샤프를 쥔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책과 노트를 번갈아 바라보며 열심히 적고, 중얼거리듯 읽어 내리며 머릿속에 새겨 넣는다. 책상 위에서 떨어지지 않는 눈길이 아쉬웠다. 한 번만 봐 주지. 딱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수가 눈을 들어 올렸다.

“일어났어?”

그렇게 물을 때 날카로운 눈매는 부드럽게 풀어지고, 굳어 있던 입매는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재희는 격렬하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서재로 발을 들였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책장은 전공 책과 문학 소설, 사진집과 DVD로 꽉 채워졌고, 책상 위에는 노트와 필기구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책장 반대쪽 벽면에는 통한의 D 성적표가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는데, 1학년 1학기 때 이수에게 D를 선사한 조원들을 저주라도 하듯 테두리가 새빨간 색이었다. 재희는 새삼 엘리베이터를 멈췄을 때 자신의 목숨이 얼마나 위험했었는지를 실감하며 이수에게 다가갔다.

“언제 일어났어요? 밥은, 먹었어요?”

“아직. 입맛 없어서.”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다고 하면 될 걸, 꼭 저렇게 말한다. 귀엽게. 재희는 허리를 숙여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좋은 냄새가 나서 입술에도 한 번, 목덜미에도 한 번, 머리칼에도 입술을 파묻고 나니 이수가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재희는 아무렇지 않게 책상에 걸터앉았다. 이수도 잠깐 쉴 참이었기에 발을 밀어 의자를 뒤로 물렸다. 소리 없이 미끄러진 의자가 창가 앞에서 빙글, 한 바퀴 돌아간다.

이수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두드렸다. 재희는 노트에 적힌 유려한 필기체를 구경하다 말고 그를 바라봤다. 빤히 보는 표정이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왜요? 입 모양으로 물었다. 그리고 이수가 묻는 말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만약에… 합의점을 못 찾았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아…….”

노트가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재희가 손을 뻗기도 전에 이수가 먼저 주워 들었다. 성의 없이 책상 한편에 내팽개치고는 팔짱을 낀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재희를 빤히 올려다봤다.

혹시 연락을 받은 걸까. 미리 떠보는 걸까. 이수가 장담하길래 그럴 가능성은 생각하지 못했는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결국에는 한 가지뿐이었다.

절연.

입술을 우물거리던 재희가 힐끔, 이수의 눈치를 본다. 이내 개미 기어가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있잖아요, 선배…….”

“말해.”

“내가…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아요?”

서일과 합의가 되지 않는다면 재희는 지금이라도 당장 부모와 연을 끊어야 했다. 그들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이수의 곁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된다면 집도, 차도, 무엇 하나 가지고 나올 수 없었다.

정말로 그래도 괜찮을까. 선배는 내가 어떤 사람이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무능력한 건 또 다른 문제니까. 순간 우울한 낯으로 시선을 떨어트리는 재희를 보고 이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때. 한주연 누나랑 그냥 선본 게 아니라 집안끼리 혼담이 오갔던 거였어요. 그건 거절했지만……. 어제도 말했잖아요. 제 부모님은 끈질기다고. 그래서 언젠가는 또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올 게 뻔해서, 사실은 대학 졸업하고 나서 집에서 나오려고 했었어요.”

이수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재희의 부모가 못마땅해 그런 것이었지만 재희에게는 다른 의미로 들렸다. 흠칫 놀란 재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수는 자연스레 손을 뻗어 그의 입술을 빼 주었다. 하지 마, 훈련하듯 단호히 말하고 묻는다.

“그래서. 합의가 안 되면 연을 끊겠단 소리야?”

재희는 눈을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에게 받은 것을 제외하면 자신의 소유는 양말 한 짝도 없다고 솔직하게 말해야 되는데 비참하고 부끄러워서 그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최대한 덜 한심해 보이게 말을 고른 끝에 입을 열었다.

“……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근데 그러면, 집도 없어질 테고 유지비 때문에 차도 없애야 하고, 고시원에 들어가야 하고, 학비 때문에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도 해야 하고, 그러다가 군대도 가야 하고, 그러면 또…….”

“잠깐만.”

이수가 손을 들어 구질구질하게 이어지는 재희의 인생 계획 프레젠테이션을 중단시켰다. 발을 구르는 소리와 함께 의자가 책상 가까이 다가왔다. 불안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재희를 보며, 이수는 그의 말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니 말은. 아무것도 없어도 되냐는 말이, 돈이 없는 걸 말하는 거야?”

“……네.”

왜 저런 걱정을 하지? 나를 두고. 당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수는 팔짱을 낀 채로 재희를 훑어봤다. 기억보다 마른 몸에 기력 없는 태도. 해가 뜨고 자세히 살펴본 재희는 이수가 알던 것보다 훨씬 작고 어려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차재하 때문이었다. 씨발, 그 염치도 대가리도 없는 새끼 때문에 차재희가 우울증에 걸린 것 같았다.

이수는 속으로 욕을 씹어 삼켰다. 저렇게 시도 때도 없이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모습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고 욕하는 게 나았다.

또다시 고개를 푹 숙이려는 걸 보지 못하고 이수는 재희의 턱을 붙잡아 올렸다. 살짝 각도를 조절해 눈을 맞추게 했다. 우울과 자괴에 젖어 이 상황과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를 하는 재희에게 현실을 자각시켜 주었다.

“재희야.”

“네…….”

“나 돈 많아. 니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많아. 어쩌면 네 부모님보다 많을 수도 있어.”

“…….”

재희가 멍하니 이수를 바라봤다. 이수는 그까짓 걸 걱정하냐는 듯, 심각하게 굳어 있는 뺨을 쓸어 그의 표정을 풀어 주었다.

재산의 유무는 재희를 꽤나 불안하게 만들던 것이었다. 남자는 어째야 한다, 차대범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온 탓에 여태 한 푼도 모으지 못한 자신을 이수가 한심하게 생각할까 봐, 알게 모르게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차재희는 고작 스물한 살이었고, 사실 나이를 떠나서도 그의 재력은 이수에게 전혀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이수는 저런 걱정을 하는 차재희가 좀 귀엽다고 느꼈다.

그리고… 절연까지 생각했다 이거지. 의외의 수확이었다. 장인, 장모 될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슬쩍 떠봤던 건데 저런 대답이 돌아올 줄이야. 이수는 결혼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가 마지막으로 재희에게 확인차 물었다.

“혹시 내 돈은 남의 돈이라고 생각해서 그래?”

“네?”

“나랑 결혼하기 싫어?”

“아니요!”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 소스라치게 놀란다. 재희는 두 손을 내저으며 눈썹을 팔자로 휘었다. 도리질 치는 얼굴에 조급함이 묻어났다. 결코, 절대,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서이수의 남편이 될 수만 있다면 인생을 다 바쳐도 좋았다. 재희가 웅얼거리며 설명했다.

“그런 게 아니라. 어쨌든 부모님이 그, 계약대로 하려고 하지 않으면 강제성이 없는 거니까……. 선배가 직업도 변변찮은 나랑은…….”

나처럼 한심한 놈이랑은 결혼할 마음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이수는 용케 생략된 문장을 알아들었다. 짜증 난다는 듯 머리를 쓸어 올리더니, 손을 뻗어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서 고급스럽게 포장된 상자가 하나 나왔다. 혹시나 안 받겠다고 할까 봐 원래 케이스는 버린 지 오래였다. 이수는 그것을 재희에게 건네주었다.

“열어 봐.”

“……뭔데요?”

“보면 알아.”

거칠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재희가 상자를 집어 들었다. 조심스럽게 매듭을 풀고, 포장지를 벗긴다. 재희는 섬세하게 조각된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열고 나서야 선물의 정체를 깨달았다.

크게 뜨인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헤맸다. 이수와 시계를 번갈아 보던 그가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수는 당연하게도 손을 뻗어 그의 입술을 매만져 주고는, 재희의 시계를 꺼냈다. 왼손을 들어 자신과 똑같은 것임을 확인시켜 준다.

“늦었지만 생일 선물이야.”

“이건…….”

이수의 차 두 대를 합친 것보다 비싼 시계였다. 아마 새로 산 테슬라를 합치면 비슷한 가격이 나올지도 몰랐다. 그와 똑같은 시계, 그게 어떤 의미인 줄 알기에 순간 욕심이 났지만 내가 이런 걸 받아도 될까. 혼란을 겪는 재희에게 이수가 딱 잘라 말했다.

“욕먹고 싶으면 너무 과하단 소리 해.”

“…….”

정곡을 찔린 재희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수는 그 얼굴을 보며 짧게 웃었다. 사실 아침 일찍 서이준에게 연락을 받았다. 이변은 없었다. 차대범과 성미희는 서일의 법무팀 소환을 앞두고 백기를 들었다.

일이 쉽게 풀렸지만 사실 그들이 끝까지 수긍하지 않았더라도 이수는 재희를 손에 넣고야 말았을 것이었다. 정말로 무슨 짓을 해서든……. 온갖 불법적인 생각을 떨쳐 버린 이수가 재희에게 뒤늦은 소식을 전했다.

“아침에 전화받았어. 계약 진행하기로.”

“계약……. 네?”

순간 알아듣지 못하고 반문하는 재희를 이수가 올려다봤다. 재희는 눈을 깜빡이며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쉽지 않았다.

그저 시야 가득 차오른 남자만이 눈에 들어왔다. 한때는 무심하다고 느꼈던,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예쁘고 다정하다고 느꼈던 얼굴이 천천히 풀어졌다. 이수가 재희를 보며 진한 웃음을 머금었다.

“결혼반지는 네가 골라.”

너무 비현실적이라 한 번에 와닿지 않았다. 결혼반지는 내가 고르라고. 반지를 골라, 내가. 결혼반지를…….

그의 말을 되새기던 재희가 순간 얼굴을 붉혔다. 쿵, 쿵, 미친 듯이 뛰어 대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손끝이, 아니 전신이 덜덜 떨렸다.

믿을 수가 없어서, 정말 기뻐서,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재희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의식하지 못한 채로 환하게 웃었다.

보조개가 깊이 팬 얼굴이 못내 사랑스럽다. 웃음을 터트린 그가 책상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의자에 앉은 이수의 허리를 꽉 끌어안는다.

얇은 천 너머로 느껴지는 체온. 살아 있음을 알리는 심장 박동. 재희는 자신을 살게 한, 자신을 살게 할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정말, 정말로, 흐윽, 진짜… 좋아요, 선배…….”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고마워요, 선배. 좋아해요, 선배. 정말로, 정말로, 세상에서 선배가 제일 좋아요.

감미로운 목소리의 울림이 마음을 적셨다. 이수는 재희의 머리칼을 쓸며 그를 달래 주었다. 슬퍼서든, 기뻐서든, 차재희가 우는 모습은 이제 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웃는 얼굴만을 보고 싶었다.

“이리 와.”

이수는 재희의 두 뺨을 붙잡고 그에게 키스했다. 새까만 눈동자에 한 번, 예쁜 코끝에 한 번, 사랑스러운 뺨에 한 번, 달콤한 입술에 한 번.

입맞춤이 끝나고 나서야 재희는 울음을 멈췄다. 설렘으로 벅차오른 가슴이 간지러웠다. 이상하고, 겁 없고, 다정하고, 사랑하는 선배가 자신의 보호자가 된다는 사실이, 자신 또한 그의 보호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감격스러웠다.

이수와 함께하는 오늘, 함께할 내일이 기다려졌다.

“선배, 있잖아요…….”

이제는, 그래도 되지 않을까.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니까.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관계니까. 재희는 마음속에 꼭꼭 숨겨 두었던 욕심을 끄집어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

“그럼 이제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하지만 이수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왜? 왜 안 돼요? 재희가 아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마음이 아플 정도로 애처로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차재희가 선배,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언제나 다정하고 포근했다. 이수는 그가 불러 주는 선배라는 호칭이 좋았다. 아무것도 아닌 단어를 특별하게 만드는 차재희가 좋았다. 선배, 하고 다가와 아무것도 아니었던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 준 후배가 좋았다.

그러니까.

“졸업할 때까지만.”

이수가 환하게 웃었다.

“다정하게 불러 줘, 선배라고.”

누구에게나 결핍은 있다.

차재희의 결핍은 자신, 그 자체였다. 그는 스스로를 알지 못한 채로 살아왔다. 그런 재희를 이수가 먼저 알아보았다. 재희는 그렇게 껍질을 깨고 나왔다.

서이수의 결핍은 세상, 그 자체였다. 그는 자신 안에 갇힌 채로 살아왔다. 재희는 그를 둘러싼 경계를 부수고, 그의 외로운 일상에 침입했다. 이수는 그렇게 삶을 맞이했다.

자신을 태어나게 한 이를 재희는 맹목적으로 사랑할 준비를 마쳤다. 이수와 함께하며 재희는 성장하고, 그가 자라날수록 이수의 세계는 확장될 것이었다.

이제는 차재희가, 서이수의 세상 그 자체였으니까.

『다정하게 불러줘요, 선배』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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