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 집착 (12/15)

외전1 집착

성미희와 차대범은 잠잠했다. 포기인지, 체념인지는 몰라도 부모는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꾀에 빠져 아들을 동성 결혼시키게 된 심정이 어떠할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재희도 굳이 전화해서 좋은 소리 듣지 못할 걸 알고 있었기에 신경을 끄기로 했다. 일의 전황은 서이준이 이수에게 설명해 주었으므로 부연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다만 소식을 듣게 된 차재하가 미친 듯이 전화를 걸어 댔다. 어젯밤에 결론이 났던 것인지 새벽 내도록 이어진 부재중 전화는 수십 통이 쌓여 있었다. 아침에 일어난 재희는 이수에게 과분한 생일 선물을 받고, 식사를 차려 그를 든든히 먹인 이후에나 차재하에게 전화할 생각을 했다.

소파에 앉아 레오를 쓰다듬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제대로 가기 전에 차재하가 소리를 질렀다.

─ 형!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재하야, 진정해.”

─ 어떻게 진정을 해! 형이 남자한테 팔려 가게 생겼는데!!

팔려 가긴 누가 팔려 가. 그렇게 대꾸하려던 재희가 전공 책을 들고 걸어오는 이수를 보고 조용히 대답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러나 차재하는 재희가 여느 때처럼 모든 것을 참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미친놈! 얼굴 봤을 때부터 내가 다 알아봤어! 걔가 형 따먹으려는 거잖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 미치겠네! 형 보는 눈길이 심상치가 않았다니까? 어? 막, 막 변태처럼 쳐다보는 게, 막. 하! 됐어! 내가 그냥 말씀드릴게! 아니, 그 전에 서이나한테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 볼게. 이런 말도 안 되는 결혼 받아들일 필요 없어!

아무래도 성미희가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랬겠지. 네 형이 그 집 둘째 아들이랑 사귀는 사이라서 결혼하기로 합의했단다, 그런 설명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보수적인 그들에게 동성애는 극도로 혐오스러운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수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받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재희가 손으로 휴대폰을 가리고 속삭였다.

“내가 좋아서 쫓아다녔어, 선배를. 우리 원래 아는 사이였고, 사귀는 중이었어. 그러니까 그 소린 이제 그만해.”

─ ……그게 무슨 소리야?

“선배랑 원래 사귀고 있었다고. 그리고, 그때 병원에서 말했잖아……. 나, 연 끊고 나와서 선배랑 계속 만날 생각이었어.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잘된 거니까 걱정하지 마.”

─ 뭐라고……?

휴대폰 너머가 잠잠했다. 차재하는 재희의 말을 한참 동안 곱씹었다. 동생의 대꾸를 기다리는 동안 이수는 재희의 옆자리에 앉았다. 필기가 가득한 전공 책을 노려보며 종종 재희를 응시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재하가 물었다.

─ 형… 협박당했어? 혹시 옆에서 듣고 있어? 스피커폰은 아니지? 만약 그런 거면 나한테 편식하지 말고 당근 잘 챙겨 먹으라고 해 봐. 내가 재우 형한테 말해서 도와줄게.

“자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니야, 재하야.”

─ ……진짜야?

“응, 아니야.”

그러나 차재하는 쉽게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 형은 거절을 잘 못 하잖아. 싫다고 하면 나나 회사에 피해 갈까 봐 참는 거 아니야? 맞아, 형 전에 여친도 있었잖아!

순간 언성을 높이는 차재하 때문에 재희는 등골이 서늘했다. 물론 자신이 만났던 사람이 있었다는 건 어렵지 않게 추측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걸 이수가 직접 듣게 하는 건……. 힐끗 옆을 보는데 탁, 하고 거친 소리를 내며 전공 책이 덮였다. 테이블에 던지듯 책을 내려놓은 이수는 팔짱을 낀 채 재희를 쏘아봤다. 무서웠다. 재희는 전화를 끊기 위해 서둘렀다.

“하여튼 아니야. 나 지금 바쁘니까 전화 끊어.”

“동생이야?”

─ 뭐야, 옆에 있어? 나 좀 바꿔 주면 안 돼?

서늘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저었다. 차재하랑 서이수를 붙여 놔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둘이 정말 안 맞을 게 분명했다.

잠깐만요, 입 모양으로 그렇게 말한 재희가 휴대폰을 반대쪽으로 옮기는 순간이었다. 불행하게도 스피커 버튼이 눌리면서 차재하의 목소리가 크게 터져 나왔다.

─ 집이야? 내가 형네 집으로 갈까? 소개 좀 해 줘. 형 말대로라면 형수님 되실 분인데 인사는 해야지!

형수님? 이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재희가 긴장한 표정으로 손을 움직였다. 뚝,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는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애가 아직 철이 없어요, 부모처럼 중얼거리는 말에 이수가 그를 쏘아봤다.

“처남보고 집에 들르라고 해.”

“처남… 이요?”

“맞을 준비 하고 오라고 꼭 전해.”

“…….”

재희는 얼어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만나게 해서는 안 된다. 절대로……. 굳센 다짐을 하고 있으니 이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부할 거야. 냉랭하게 말하고 서재로 향하는 걸 붙잡지 못하고 재희는 주방으로 달려갔다. 간식이라도 만들어 주기 위해서 냉장고를 뒤졌으나 마땅한 게 없었다.

밀가루와 시나몬 파우더 따위를 두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 재희는 휴대폰에 레시피를 띄워 둔 채 요리를 시작했다. 수정과나 식혜, 정과 같은 건 만들어 봤지만 서양식 디저트는 처음이었다. 조금 헤맨 끝에 두 시간 만에 추러스를 만들어 냈다. 달콤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 추러스와 디카페인 커피를 들고 서재로 향했다.

“선배, 바빠요?”

노트를 들여다보며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이수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짜증이 묻어 있던 얼굴이 희미하게 풀어진다. 이수는 펜을 내려놓으며 재희에게 가까이 다가오라고 턱짓했다.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 이수의 옷을 딱 맞게 입고 앞치마를 멘 차재희의 모습은 굉장히 보기 좋았다. 트레이를 내려놓을 때 가까워진 목덜미에서 달달한 시나몬 슈가의 향기가 풍겼다. 재희는 간이 의자를 끌어다 이수의 옆에 앉았다. 반짝반짝한 눈동자로 이수를 바라본다.

“먹어 봐요.”

이수는 포크를 들어 한 입 크기로 튀겨진 추러스를 입에 넣었다. 달짝지근하게 녹아나는 설탕과 바삭하게 부서지는 빵. 안쪽은 촉촉하고 밀가루 냄새 하나 없었다. 천천히 씹어 넘기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니 재희가 턱을 괴며 가까이 다가왔다.

어때요, 속삭이는 목소리가 꼭 칭찬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았다. 말없이 고개를 기울여 재희에게 입을 맞춘다. 뜬금없는 버드 키스에 재희의 귀 끝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도 느꼈지만, 이수의 까칠하고 예민한 태도는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고 난 후에도 달라진 게 없었다. 다만 갑작스러운 타이밍에 입을 맞춘다거나, 웃음을 짓는 일이 더 늘어났을 뿐이다. 그 부가적인 변화는 언제나 재희를 당황시켰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으니 이수가 짧게 웃었다.

“두 시간 동안 쿵쾅거리더니 이거 한 거야?”

“안 쿵쾅거렸거든요.”

“존나 시끄러웠는데.”

심통 난 표정을 짓는 그를 두고 이수가 추러스를 몇 개 더 집어 먹었다. 식사보다는 달콤한 간식을 더 많이 먹는 편이라 이 새참이 나쁘지 않았다.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를 음미하며 재희를 훑어봤다.

단정하고 수려한 게, 꼭 한국 사극 영화에 나오는 대갓집 맏며느리처럼 생기지 않았나. 청소도 잘하고, 꼼꼼하게 정리도 잘하고, 음식도 잘하고, 부족한 게 뭐가 있지?

왜 이런 아들을 그렇게 괴롭혔을까? 문득 공부를 하다 말고 장인 장모 될 인간들이 떠오르면 기분이 한없이 불쾌해졌다. 그래서 여태 진도도 제대로 못 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이수는 내친김에 재희에게 물어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재희야. 니가 아까 부모님이랑 절연할 생각 있다고 했잖아.”

“네……. 왜요?”

“그래서 묻는 건데, 너. 네 부모님하고 거리를 두고 싶어?”

이수는 어제 그와 성미희의 대화를 들었다는 말을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예민한 부분이기도 했고, 언젠가는 차재희에게서 직접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재희는 예상치 못한 질문을 들은 듯 잠시간 이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시름에 잠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만 있다면요…….”

“그래. 그러자, 그럼.”

“네?”

“지갑 가져와 봐.”

어리둥절한 재희를 일으켜 방 밖으로 내보냈다.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이수는 책상 서랍을 뒤져서 필요한 걸 꺼냈다.

잠시 후 건네받은 재희의 지갑을 열어 안에 있던 신용 카드를 끄집어냈다. 그러고는 손에 든 가위로 카드를 쓱싹, 잘랐다.

“뭐… 하는 거예요?”

새까만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자립의 기본은 경제적인 독립부터였다. 이수는 한국으로 오자마자 서훈과 천수인에게 재산을 증여받고, 모든 일을 자신의 명의로 처리했다. 재희 또한 그래야 했다. 다만, 씨엔 쪽의 증여는 사절이다. 천 원짜리 한 장도 그쪽에서 받고 싶지는 않았다. 어제도 별채에서 혼수 운운하긴 했지만 그것도 정말 받을 생각은 없었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자립이 아니었다. 이수는 재희를 자신에게 기대게 만들고 싶었다. 자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물론 차재희 본인 스스로는 그 사실을 모르도록 말이다.

이수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제 내 카드 쓰고, 이삿짐센터 연락해서 4층 집 비워. 내 집으로 들어오고 차도 반납해.”

“…….”

“차 필요하면 내 거 쓰고, 마음에 안 들면 뽑아 줄 테니까 골라 놓고. 카드 한도 없으니까 너 사고 싶은 거, 필요한 거 아무거나 사서 써.”

그렇게 말하고 트레이를 밀어내는데 대답이 없었다. 힐끗 고개를 돌려 보니 재희는 입을 꾹 다문 채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속상해 보이는 표정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수는 재희가 먼저 입을 열길 기다리며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해 보았다. 너무 마음대로 결정해서 기분이 나빴나? 그러나 이수는 꼭 그렇게 하고 싶었다.

차재희를 물건 취급하는 인간들이 그의 부모 노릇을 하며 그에게 무언가를 얻어 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받는 것 또한 없어야 했다.

그러니까, 부모하고 멀어지기 위해서는 당연히 필요한 일인데. 왜 속상하지? 그래도 부모라서 정이 남았나? 멀어지고 싶었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닌 건가? 팔짱을 낀 채 고심하고 있으니 재희가 입을 열었다.

“선배가 이러면……. 내가 너무 한심해요.”

“뭐?”

“나는 아무 능력도 없고, 선배한테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으니까…….”

자괴에 물드는 낯을 보며, 이수는 저도 모르게 대답할 뻔했다. 나는 그게 좋아. 하지만 이수는 말을 아꼈다.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솔직히 말할까? 재희야, 나는 너한테 나밖에 없었으면 좋겠어. 내가 아니면 기댈 사람이 없어서, 언젠가 내가 싫어져도 나한테 돌아올 수밖에 없도록, 네 바다에 남은 마지막 땅 하나가 나였으면 좋겠어. 왜 이런 정신 나간 생각이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

너는 어떤지 몰라도 내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함께할 사람은 너뿐이고, 돌아갈 사람도 너뿐이고, 그래서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 사람들이든, 네 동생이든 형이든, 니가 집을 나가도 받아 줄 사람 하나 없어서 울면서 돌아와도 좋으니까, 네가 나를 떠날 수 없도록 나를 완전히 의지하고 기댈 수 있으면 좋겠어.

그러나 그러한 고백은 지금 재희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은연중 드러나는 태도를 통해서 이수는 재희의 자존감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런 말을 해 봤자, 당장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그의 자아를 좀먹는 일이 될지도 몰랐다. 기만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지만, 지금 당장은 저 적나라한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서이수와 차재희, 둘 다를 위해서.

“차재희, 너 겨우 스물하나야.”

“그래도…….”

“뭐가 그래도야. 너라고 한심한 것도 아니고, 나라고 능력 있는 것도 아니야. 너랑 나랑 별로 다른 것도 없어. 내가 너보다 형이고, 운 좋게 돈 많은 부모 만나서 가진 게 좀 있을 뿐이지.”

재희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수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서른한 살까지 능력 없으면 그때 가서 니가 한심한지 아닌지 다시 생각해 볼 테니까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내 말대로 해. 나는 솔직히… 네 부모님한테 너한테 들어가는 돈 10원짜리 한 장이라도 책임지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 싫어.”

몇십억이 들어도 좋으니까 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 돈으로 처바르고 싶어. 그 말은 꾹꾹 집어삼키며 이수는 재희의 손을 끌어당겼다.

자연스레 의자에서 미끄러진 재희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수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기대고, 그의 허리에 팔을 감은 채로 재희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틀 동안 아주 많은 일이 있었지만 생각보다 평온했다. 재희는 긴장했던 마음이 슬슬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성미희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이수가 너무나도 든든하게 뒤를 받쳐 주었기에 더는 걱정할 것이 없어 보였다.

물론 하나하나 따지고 고민하다 보면 끝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입 밖에 내는 순간 이수가 말 한마디로 해결해 줄 것을 알았기에 재희는 이수에게 마음 편히 기댈 수 있었다. 이보다 더 완벽한 보호는 없었다.

* * *

다음 날 저녁, 재희가 4층에서 43층으로 먼저 중요한 짐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초인종이 울리더니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 야! 문 열어!

인터폰에 얼굴 대신 맥주 한 박스를 들이대는 여자는 바로 신유진이었다. 캐나다에 있는 줄 알았는데, 언제 돌아온 걸까. 문을 열어 줘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어 재희가 서재에 있던 이수를 불렀다. 이수는 인상을 찡그리더니 말없이 승인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백화점에서 이수에게 가 보라고 등을 떠밀고, 한주연과 시간을 보내 준 게 신유진 아니었던가. 혹시 우리가 만난다는 걸 알고 있나? 선배가 말했을까? 그렇게 물으려 고개를 돌렸는데 이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난 아무 말 안 했어. 쟤 눈치 빨라.”

“아…….”

신유진이 없었다면 이수와는 이어지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녀가 이수는 화를 잘 안 내고, 자극적인 걸 좋아한다고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문득 고마움이 차오른 재희는 주방으로 달려갔다.

신유진은 술을 잘 마실 테니 술안주를 대접하고 싶었다. 43층 안주인처럼 구는 꼴이 우스울지도 모르겠지만 이젠 틀린 말도 아니지 않나. 자신은 서이수의 남편… 될 사람이니까. 불현듯 깨달음에 귓가가 화끈거렸다.

“어떻게 이런 좋은 소식을 두고 연락을 안 해?”

현관으로 들어선 신유진은 불쑥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주방에 선 재희에게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얼른 손을 씻고 마중을 나갔다.

빈손으로 들어오는 서이수와, 낑낑거리며 맥주 열두 캔을 들고 오는 신유진. 재희는 집주인으로서의 매너가 조금 부족해 보이는 이수를 힐끔거리고는 맥주를 받아 들었다.

“재희야, 축하해!”

“아……. 감사합니다.”

어깨를 팡팡 두드리는 신유진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다. 이수는 아일랜드 바에 기댄 채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뭘 축하해? 좋은 소식이 뭘 말하는 건데?”

이수는 참고로 신유진에게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뭘 축하한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유진은 씩 웃으며 친구의 결혼 소식을 전했다.

“너희 결혼한다며.”

“……야. 너 대체 어디서 들었냐?”

유진은 강원도에 위치한 회원제 클럽에서 종종 서이준과 골프를 치고, 식사를 같이했다. 그러면서 그를 따라다니던 서이나와도 친해져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변죽이 좋아서 변덕을 잘 받아 주는 성격인지라, 심지어는 서이나와 서이수의 친밀도보다 서이나와 신유진의 친밀도가 더 높았다.

그러나 서이수가 서이나를 질색하는 것을 알기에 또한 자신이 누구와 친분을 쌓든 그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유진은 이수에게 서이나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유진이 음흉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다 아는 수가 있지.”

“아니, 정말로. 기업 스파이라도 심었어? 극비인데 네가 대체 어떻게 아냐고.”

“몰라도 돼. 이야, 설마설마했지만 정말로 여동생 남편 될 사람을 뺏을 줄은 몰랐는데?”

“누가 씨발, 여동생 남편 될 사람이야. 지랄 마.”

짜증스럽게 대꾸한 이수는 순간 이상함을 느꼈다. 아무리 신유진이라고 해도 자신과 차재희의 결혼 그리고 차재희가─사실은 차재하─원래는 서이나와 결혼할 사이였다는 건 놀랄 수밖에 없는 이야기일 텐데……. 저 덤덤한 태도는 뭐란 말인가. 이수는 미심쩍은 얼굴로 그녀를 훑었다. 심하게 수상했다.

“야. 너 재희 동생이랑 서이나랑 결혼할 사이였다는 거 알고 있었어?”

혹시나, 하고 물은 말에 어이없는 답이 돌아왔다. 눈을 동그랗게 뜬 유진이 하루가 지나 차게 식은 추러스를 씹으며 반문했다.

“그럼 넌 몰랐냐?”

“……뭐?”

“뭐긴 뭐가 뭐야……. 엥? 진짜 몰랐어?”

짧은 침묵이 흘렀다. 유진은 재희와 이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기어가듯 스툴에 앉아 아일랜드 테이블을 내려친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 걸까. 이수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유진이 말했다.

“야… 그때, 너희 할아버지 장례식에 내가 재희도 왔다고 말하려고 했더니 니가 말 못 하게 막았잖아. 그리고 1학기 축제 때. 내가 너희 둘이 사귀면 너무 막장 드라마 아니냐고 물어봤었잖아. 기억 안 나?”

기억날 리가 없었다. 그런 말을 했었던가? 고개를 젓자 유진이 말을 이었다.

“그때, 울 아빠 칠순 때도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봤잖아! 창립 기념일에도 만났냐고 물어봤고! 그럼 넌 내 질문을 뭐라고 생각했는데?”

희미한 기억을 뒤적이던 이수가 이내 그날을 떠올렸다. 차재희에 대한 마음을 자각했던 날, 너무나도 중요한 날이었기 때문인지 희미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었다. 이수가 헛숨을 흘렸다.

“너 술 마셔서 개소리하는 줄 알았지. 아니, 씨발. 그럼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데? 왜 입을 싹 닫고 있었어?”

“나는 니가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했지……. 혹시 몰랐더라도 둘이 그렇게, 좀 친해지고 난 다음에는 당연히 얘기했을 줄 알았어. 웃기네, 이거. 그럼 넌 재희가 누군지도 몰랐어? 설마 상견례 자리에서 알았냐? 나, 이거 라디오에 사연 제보해도 돼?”

“어이가 없네. 그래서 어떻게 알았냐니까? 너 진짜 스파이 심어 놨어? 형한테 말한다?”

이수가 협박하자 유진이 코웃음을 쳤다.

“이나가 말해 준 거거든? 낮에 궁금한 거 있어서 전화했다가 들었어. 장난 아니게 화났던데?”

듣기 싫은 이름에 이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서이나랑은 언제 또 친해졌는지 모르겠다. 신유진의 친화력은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수가 입을 다물자 유진도 서이나에 대해서 말을 아꼈다. 대신 음흉하게 웃으며 재희에게 이수의 어디가 그렇게 좋으냐는 물음을 던졌다. 차재희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대답을 피했다.

“유진 누나?”

잠시 뒤, 산책을 끝마친 문율이 리키를 데리고 들어왔다. 율이 신유진을 누나라고 부르는 걸 보고 이수는 또다시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유진이 캐나다에 가기 전, 식당에서 만나 밥을 한 번 같이 먹은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분명 선배님이었는데 얘랑은 언제 또 친해졌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어? 율! 뭐야, 뭐야? 여기서 뭐 해? 이수랑 친하다더니, 집까지 놀러 오는 사이야? 리키를 왜 데리고 있어?”

“아, 아니요. 펫 시터 알바 하고 있어서요. 누나는 어쩐 일이세요? 놀러 오셨어요?”

그렇게 시작한 대화는 술자리로 이어졌다. 분위기가 꽤 시끌벅적했다. 이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동안 재희가 만들어 낸 요리가 식탁 위에 주르륵 놓였다. 신유진과 문율 입에 들어가는 게 아까웠지만 이수는 재희가 타인에게 요리를 대접하는 것을 즐기는 듯해 짜증을 참았다.

신유진은 맥주로도 모자라 이수가 평창동에서 가져다 놓은 와인을 세 병이나 꺼냈고, 재희는 그 옆에서 그녀가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술이라고는 입에도 못 댈 것같이 생긴 문율도 의외로 선방했다. 컴공과에서 사랑을 받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술에 취한 율은 굉장히 귀여웠다.

잔뜩 취한 문율이 새빨개진 얼굴로 내려가고, 새벽 1시가 되어서야 자리가 파했다. 자고 가겠다고 진상을 피우는 신유진 때문에 이수는 근처에 사는 신교연을 호출해 그녀를 인계한 뒤에야 집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주방으로 다가가니 달그락거리며 식탁을 치우는 소리가 났다. 재희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이수를 보며 웃었다. 평소보다 웃음이 헤픈 차재희 때문에 배알이 꼴렸다. 이수는 짜증스러운 손길로 재희의 입꼬리를 아래로 끌어 내리고는 리빙 룸의 욕실로 향했다.

샤워 부스에서 간단히 씻고, 뜨거운 물을 틀어 놓은 채 욕조에 앉아 있으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열린 문틈으로 재희가 고개를 내민다.

“같이 씻어도 돼요?”

“……이리 와.”

재희도 샤워 부스에서 씻고 난 후에 욕조로 들어왔다. 침실에 딸린 욕실과 달리 이곳의 욕조는 둘이 앉기엔 조금 작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래서 다리를 벌린 채 앞에 앉으라고 했더니 재희는 어색하게 웃으며 요리를 하느라 허리가 아프다고 말했다. 다음에 손님이 오면 배달 음식이나 시켜 줘야겠다. 이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재희를 뒤에 앉혀 두고 그의 가슴팍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출렁거리는 물줄기가 피부를 간질인다. 허리를 감싸 안은 손을 만지작거리며 앞으로의 일을 떠올렸다.

차재희는 아는 사람이 많다. 지금은 휴학 중이고, 미국에서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친구에게 연락이라도 하는 순간, 차재희를 불러내려는 인간들이 줄을 설 게 분명했다. 일전에 신유진이 그러지 않았던가. 차재희는 술자리를 결코 마다하는 법이 없다고…….

그러나 이수는 절대 그 꼬라지를 두고 볼 수 없었다. 가뜩이나 자주 웃는 놈이 술이 들어가면 실성한 것처럼 쪼갠다. 그런 모습은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차재희는 휴학 중이고, 이수는 엄연히 학기 중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게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그동안 혼자 뭘 하고 다닐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미국에 있을 때야 병원에만 있었으니 안심했지만, 사국대에는 차재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도 아주 무척이나 많다. 그 인간들을 다 치워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걸 가둬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 잠깐만. 전에 가둬 달라고 하지 않았나? 잠깐 불법적인 생각을 해 보았던 이수는 그러나 재희를 병들게 하고 싶지 않아 방금 떠오른 장면을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 버렸다.

뭐든지 다 싫었다. 다른 사람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까지는 상관없는데, 그럴 때 튀어나오는 다정한 어조라거나, 웃음소리, 휘어지는 눈매, 그런 것들을 보는 순간 배알이 뒤틀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목소리와 표정을 압수한 뒤 하고 싶은 말을 전광판으로 송출하게 만들고 싶었다.

또 차재희가 공들여 만든 음식을 다른 인간들에게 대접하는 것도 싫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레오에게 손수 생식을 만들어 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물에게 질투하는 모습이 꼴사나워 보여서 티는 안 내고 있지만 여하튼 그랬다.

“선배, 무슨 생각 해요?”

배꼽을 간질여도 가만있는 이수에게 재희가 속삭였다. 이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살짝 허리를 틀었다. 자신을 감싸 안은 재희를 돌아보며 물었다. 사람은 머리를 써야 한다.

“차재희, 너 이번 학기에 하려고 생각해 둔 거 있어? 난 계속 학교 다녀야 하는데.”

“글쎄요. 딱히 생각해 보진 않았는데.”

“그럼 요리 배워. 셰프 붙여 줄게.”

“요리? 갑자기 왜……. 내가 한 거 맛없어요?”

시무룩해진 재희가 눈썹을 늘어트렸다. 이수는 그의 뺨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살짝 핥아 내곤 고개를 저었다. 다시 몸을 돌려 수면 위로 튀어나온 무릎을 응시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부담스러울 수도 있으니까 일단 다른 이유를 먼저 댔다.

“아니. 난 솔직히 서양식 좋아하는데, 네가 배워서 해 주면 좋을 것 같아서. 싫어?”

“싫은 건 아닌데.”

재희는 서양식을 즐기지 않는다. 이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연습할 수 있지만, 본격적인 것도 아닌데 사람까지 불러서 배우기는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이수가 이어서 뱉은 말에, 거절은 입 안에서 흔적도 없이 흩어져 버렸다.

“사실은… 너를 집에 처박아 놓고 싶어. 내가 없을 때 너 혼자 밖에 나돌아다니는 꼴을 보느니 집에 가둬 놓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래서 핑계 대는 거야, 지금.”

타르처럼 끈적거리는 목소리였다. 쉽게 지워지지 않을, 절대 떨어지지 않을, 생의 첫 사랑을 향한 순수한 집착.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이는 그 집착이 아주 기꺼웠다.

“……선배가 그렇게 말하는데, 내가 어떻게 싫다고 하겠어요. 그럴게요.”

재희가 작게 웃으며 이수의 목덜미를 물었다. 물에 젖어 촉촉해진 살결을 고양이처럼 깨물고, 핥아 준다. 욕실을 메운 수증기만큼이나 뜨거운 열기가 퍼져 나갔다.

곧 시험 기간이지만, 굳이 참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마음의 준비도 끝났다. 이수는 등을 찌르는 페니스를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발갛게 달아오른 재희의 뺨을 붙들고 눈을 맞췄다. 흥분이 감도는 눈동자가 서로를 응시한다. 그에게 속삭였다.

“침실로 가자.”

“좋아요…….”

“안 아프게 박아 줄게.”

“…….”

재희가 입을 딱 다물었다.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긴장한 것 같았다. 그렇겠지. 자신이 처음에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 댔으니, 그 고통이 상상되어 무서울 것이다. 그러나 이수는 재희를 안 아프게 할 자신이 있었다. 인내심을 갖고 천천히 진행하면 된다. 어려울 것 없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지는데 재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마나 겁먹었는지 순식간에 풀이 죽은 성기가 눈앞에서 길게 늘어졌다.

“먼, 먼저, 먼저… 나가 있을게요.”

재희는 말을 더듬더니 가운을 입고 사라졌다. 그래, 많이 무섭겠지. 누구나 처음은 아픈 법이다. 이수는 그에게 충분히 각오할 시간을 주기 위해 느긋하게 몸을 닦고 나갔다.

머리를 털어 내며 침실로 들어갔을 때, 재희는 침대에 걸터앉아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기척을 내자 흠칫, 몸을 떨며 올려다본다. 잔뜩 깨물린 입술이 붉게 부풀었다. 이수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뻗었다. 불긋한 뺨이 뜨거웠다.

“그렇게 무서워?”

“무서운 게 아니라…….”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다. 예쁜 콧날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수는 이 겁먹은 짐승을 달래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의 턱을 붙잡아 올렸다. 재희가 호소하는 눈동자로 이수를 바라봤다.

“그냥, 하던 대로 하면 안 돼요……? 응? 선배애.”

“아픈 건 잠깐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요…….”

한숨을 쉰 재희가 입을 우물거렸다. 190cm에 가까운 덩치 주제에 무섭다고 제 입으로 말하는 게 얼마나 쪽팔린 일일까 생각해 봤다. 충분히 이해가 갔다. 이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 천천히 해야 할 것 같았다. 나쁜 기억으로 남으면 안 되니까.

물에 불어 쪼글쪼글해진 손이 가운을 파고든다. 이수는 단단한 등을 어루만지며 침대 위로 재희의 몸을 쓰러트렸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입술을 내리누르며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애썼다. 탄탄한 허리를 만지며 재희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차재희가 이수를 밀쳤다.

“아!”

침대 헤드에 머리를 세게 박은 이수가 비명을 지르며 뒤통수를 움켜쥐었다. 헛숨을 들이킨 재희는 괜찮, 괜, 괜찮아요? 하고 형편없이 말을 더듬다가 고개를 든 서이수의 서슬 퍼런 눈빛에 입을 딱 다물었다. 이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프잖아! 맞아 볼래, 진짜?”

“아니, 그러니까, 미안해요, 미안한데, 안 된다니까요…….”

재희는 손을 내저으며 사과를 하면서도, 슬금슬금 몸을 뒤로 물렸다. 통증이 가시도록 부딪힌 부분을 매만지던 이수는 그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뭐지, 지금 이 상황은? 눈썹을 치켜올린 그가 서늘한 목소리로 으름장을 놨다.

“너 이, 씨발, 이리 안 와?”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보던 차재희가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출입문을 향해 뒷걸음질 친다. 저 야비한 새끼. 내 건 지 좆대로 따먹어 놓고 이제 와서 자기 건 소중하다 이거야? 이수는 비열한 기회주의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사로잡기 위해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차재희가 방을 뛰쳐나갔다.

“야 이, 개새끼야! 약속은 지켜야지!”

“내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어요!”

“공평하게 번갈아서 해!”

“사람들이 싫어한단 말이에요!”

“무슨 개소리야!”

때아닌 광란의 질주가 벌어졌다. 재희는 이수를 피해 리빙 룸으로, 주방으로, 복도를 지나 서재로 도망쳤다. 이수가 그를 쫓았고, 레오와 리키도 추격전에 동참했다. 개와 고양이가 짖는 소리와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온 집 안을 울리고 고성이 난무했다. 43층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빠른 몸놀림으로 추격을 따돌리던 재희는 마침내 쉘터를 찾아 들어갔다. 테라스로 도망친 그가 문을 걸어 잠갔다. 쿵, 열받은 표정으로 유리창을 내리치는 이수의 표정은 악마와도 같았다. 씩씩거리는 이수를 두고 재희는 이 말도 안 되는 행위를 거부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파했다.

“들어 봐요, 선배. 이거는, 이런 거는 역할이 정해져 있는 거라고요! 이렇게 막 빈대떡 뒤집듯이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지랄하지 말고, 나와. 안 나오면 처맞는다, 진짜.”

“아니, 인터넷에 물어보라니까요? 리버스라고 검색해 봐요!”

“씹소리 말고 나와. 나 지금 화나려고 해.”

“제발요, 선배. 응? 한 번만요. 한 번만 찾아봐요. 네?”

재희는 눈썹을 늘어트린 채 간절하게 말했다. 그 순간 마음이 조금 진정되며 이수는 이성을 되찾았다. 차재희의 의견도 한번 들어 봐야 했다. 그래서 리버스가 씨발, 뭔데? 주방 식탁에 놓인 휴대폰을 들고 왔다. 포털에 리버스라고 적어 넣는다.

옥션 리버스, 1번가 리버스……. 뭐야. 인터넷에서 파는 건가? 눈을 찌푸리며 링크를 클릭했다. 나이를 역행하게 만들어 준다는 주름 크림 광고만 떠올랐다.

이게 아닌 것 같은데. 다시 이전 화면으로 돌아와 블로그를 들어가 봤다. 이번엔 웬 게임 소개가 떠올랐다. 이것도 아닌 것 같아서 짜증을 내며 또 뒤로 가기를 눌렀다.

리버스 뜻, 연관 검색어를 클릭해 재검색을 하니 지식인에 원하던 정보가 떠올랐다. 아마도 이게 차재희가 말하고 싶은 것으로 보였다.

중얼중얼, 공부를 하듯 읽어 내리며 그게 의미하는 바와 사람들이 싫어한다는 말을 이해해 냈다. 특정 문화 계층에서 소비하는 단어인데, 아마도 문율이 만들었던 책 추천 프로그램 때문에 차재희가 이걸 알게 된 것 같았다.

이수는 그래서 씨발, 이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스크롤을 내렸다. 지식인의 맨 밑 답변에 공교롭게도 차재희의 의사와 완전히 반하는 답변이 달려 있었다.

reverse69oUo 님 답변

리버스가 뭐가 문제임? 없어서 못먹는구만ㅠ

내 말이 그 말이야. 뭐가 문제지? 이수는 코웃음을 치며 댓글을 확인했다.

‘공은 뒤가 막혀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납땜되어있음ㅇㅇ’, ‘리버스 먹느니 굶어죽음;’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댓글들이 대다수였다.

두 눈으로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이수는 재희의 탄탄한 볼기 사이에 얼굴만큼 예쁜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휴대폰을 소파 위로 내던진 이수가 재희에게 말했다.

“진심이야? 거기서 하자고? 기다려, 금방 올게.”

비스듬히 웃고는 몸을 돌린다. 저게 무슨 소리지. 재희는 유리창 너머의 이수가 침실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의 말뜻을 모두 이해했다.

기어이 하겠다는 말이야? 여기서? 아니, 여긴… 밖인데?

재희가 주변을 둘러봤다. 43층, 주변에 가까운 건물도 없었고, 가슴 높이까지 올라오는 난간 때문에 선베드에 들어가면 누군가 훔쳐볼 걱정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래도 야외였다.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몸에 남은 물기를 빼앗아 가며 체온을 내린다. 정신을 차린 재희는 가운을 여미며 선베드 위로 올라갔다. 구석으로 기어들어 가서 담요를 덮고 이수가 보지 못하도록 숨었다. 안 보이면 밖으로 나간 줄 알지 않을까? 일단 이수의 흥분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다.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앞이 막막했지만 어쨌든.

이수가 돌아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원래의 수면 시간을 훌쩍 넘긴 데다가 술기운까지 남은 상태로 집 안을 질주한 재희는 노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았다. 고개를 떨어트리다가 마침내 깊은 잠에 빠지기 직전, 벌컥 열린 테라스 문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려왔다.

소스라치게 놀란 재희가 몸을 웅크렸다. 등줄기를 타고 전율이 흘렀다. 못 보고 나가라, 제발 돌아나가라, 속으로 빌었지만 이수는 사냥감을 놓치지 않았다.

툭, 선베드의 매트리스 위로 던져진 젤과 콘돔이 꼭 사형 선고 같았다. 마른침을 삼키기 무섭게 이수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동그란 아치형 지붕 아래로 씩 웃는 얼굴이 사이코처럼 느껴졌다. 손가락에서 짤랑거리는 열쇠 다발이 맑은 소리를 낸다.

“오래 기다렸지? 열쇠 찾느라.”

“……아, 선배. 제발요…….”

“아니, 씨발. 알았어, 안 아프게 한다니까?”

재희는 절망에 물든 표정으로 입술을 씹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수는 재희에게 다가왔다. 무릎에 눌려 자연스레 흘러내리는 가운 사이로 꼿꼿이 선 페니스가 위용을 드러냈다.

재희는 딱 죽어 버리고 싶은 심정으로 이수를 올려다봤다. 이게 아닌데, 이거 진짜 아닌데. 하지만 공정한 기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서이수는 거침없었다.

재희의 몸을 덮은 담요를 휙 걷어 내더니, 그의 발목을 잡아 끌어당긴다. 망연자실, 시체처럼 누운 재희의 위로 올라가더니 그를 내려다봤다. 흥분감에 타액에 젖은 입술이 번들거렸다.

“풀어 줄게.”

“아니요! 그냥, 차라리, 그냥, 그냥 해요……. 빨리…….”

버럭 소리친 재희는 몸을 뒤집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재희는 입고 있던 가운을 벗어서 머리에 뒤집어쓰더니, 얼굴을 꽁꽁 가린 채로 쿠션에 고개를 처박았다. 생각보다 겁이 많았다. 이수는 차재희의 몸을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짧은 손톱이 피부를 긁어내릴 때마다, 완벽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등 근육이 움찔거리며 수축했다.

둥그런 날개뼈와 그 사이로 이어지는 꼿꼿한 척추 기립근. 계곡처럼 파인 골을 쓸어내리던 손가락이 탄탄한 엉덩이에 닿았다.

제발요, 선배. 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애원이 흘러나왔다. 이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이 완벽한 신체의 주인을 굴복시키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수컷의 본능은 강렬했다. 두 번의 패배를 겪었지만 한 번의 승리를 위해서 아래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수는 재희의 매끄러운 피부를 어루만지며 남은 손으로 제 좆을 쥐었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흥분에 젤을 쓰는 것조차 잊었다. 잔뜩 긴장한 엉덩이 틈으로 귀두를 갖다 댔다.

그러나 그 순간, 벼락처럼 스치는 첫 경험의 기억이 이수를 강타했다.

아팠다. 정말로, 엄청나게 아팠다.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던 항암 치료를 견뎠는데, 그것보다 더 아프다고 느낄 정도였다. 뒤가 처음으로 열리던 순간의 격통은 그만큼 섬뜩한 것이었다.

“씨발.”

아니야. 약해지지 말자. 차재희도 이게 어떤 느낌인지 알아야지. 그렇게 마음을 다지며 좆을 갖다 대려 했지만, 분홍빛 기둥은 이미 시들시들해 가고 있었다.

이수는… 재희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손을 떼어 낸 이수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침묵이 흐르고, 차재희가 슬그머니 가운을 치운다.

땀에 축축이 젖은 머리칼 사이로 여전히 긴장감이 서린 얼굴이 드러났다. 이수는 달빛을 받아 내는 흰 낯을 바라보다가, 돌연 손을 뻗어 그를 잡아당겼다.

“왜, 왜, 왜요?”

말을 더듬는 입술이 보기 좋게 붉었다. 겁먹은 눈동자는 이수의 모순된 가학심을 자극했다. 깨달음이 스쳤다.

구멍이 밑에만 있는 건 아니잖아? 서로 만족할 방법이 있었다. 이걸 왜 이제 알았지? 이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가 입었던 가운을 바닥에 대충 던져 깔았다. 긴 손가락이 그곳을 가리킨다.

“무릎 꿇고, 입 벌려.”

“……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봐주는 거야, 지금.”

이수의 말뜻을 알아챈 재희가 선베드 아래로 내려왔다. 뒤가 아니라 오럴이라면 백 번이라도 해 줄 수 있었다. 재희는 얌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그를 올려다봤다.

시간을 끌 것도 없이 살짝 벌어진 입술 틈새로 매끈한 좆이 밀고 들어왔다. 죽어 있던 것이 어느새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희미한 짜증이 서려 있던 이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흥분에 젖었다.

“으…….”

신음을 흘린 이수가 재희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칭찬으로 알아들었는지 귀두를 빨고 핥는 혀에 정성이 더해졌다. 척척한 소리와 함께 이수는 천천히 허리를 밀어 넣었다. 차재희의 입 안은 아주 기분 좋았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엄청나게 포근한데 미치도록 꼴렸다.

기둥을 타고 흐르는 타액과 함께 이성도 뚝, 뚝, 떨어져 나갔다. 느릿하게 허리 짓 하던 이수는 감질나는 쾌감을 참지 못하고 재희의 머리칼을 꽉 움켜쥐었다. 읍, 하는 신음을 무시한 채 좆을 깊이 밀어 넣었다. 목구멍 끝에 닿은 귀두가 안으로 밀려들어 갈 듯했다. 그대로 사타구니를 비비자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하아, 씨발…….”

점액질에 범벅이 된 페니스를 더, 더 깊게 쑤시고 싶었다. 피스톤질에 속도가 더해진다. 말랑한 목젖이 요도구를 간질일 때마다 갈증은 격화됐다. 이수는 거친 몸짓으로 재희의 입 안을 범했다.

그러던 순간 오심을 참지 못하고 그를 밀어낸 재희가 콜록거리며 기침했다. 생리적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그 모습이 그냥, 예뻤다. 전율이 이는 것처럼 손끝이 떨렸다.

좆 끝에서부터 퍼져 나온 카타르시스가 줄기처럼 뻗어 나가 사고를 마비시켰다. 이수는 멍하니 그를 내려다보다가 허리를 숙였다. 방금까지 제 페니스가 드나들던 입술을 물어뜯듯이 씹었다.

“윽!”

그러고는 곧바로 부드럽게 할짝거리며 재희의 타액을 훔쳐 낸다.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혀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뺨이었다. 두 볼을 가득 적신 눈물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핥더니, 가볍게 입을 맞췄다. 휴식 시간은 끝났다. 아플 정도로 부푼 페니스가 사정을 재촉했다.

“입 벌려.”

“선배, 그냥, 내가… 내가 빨면 안 돼요? 가만있으면…….”

재희가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지만 이수는 단호했다. 헛소리를 하고 있어. 머리를 쓰다듬던 손가락이 뺨을 타고 내려와 입가를 지분거린다. 이수의 엄지가 재희의 입술을 벌리고 들어갔다. 그가 음습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재희야, 착각하지 마. 난 지금 빨리고 싶은 게 아니라, 박고 싶은 거야.”

심장이 쿵쾅거리며 뛴다. 차재희는 떨림을 억누르며 다시 입을 벌렸다.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고, 주는 만큼 받아 내야 하는 서이수였다. 그러니 뒤를 받고 입을 내어주려면 이 정도 괴로움은 감수해야 하는 게 당연했다.

재희는 최선을 다해 이수를 받아 냈다. 눈물이 흘렀지만 거기까진 신경도 쓰지 못할 정도로 이수의 좆질은 격렬했다. 마침내 목구멍이 퉁퉁 부어 아플 정도가 되어서야, 이수가 몸을 떨며 사정했다. 목젖 너머로 쏘아지는 비릿한 정액을 남김없이 삼켰다.

숨을 돌린 재희가 이수를 올려다봤을 때, 이수는 만족감에 차오른 표정으로 선베드에 걸터앉아 있었다. 느슨하게 풀린 얼굴이 미치게 야했다.

재희가 일전에 빨아 주었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삽입의 욕구가 충실히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이수가 다정한 손길로 그의 머리칼을 넘겨 주며 물었다.

“엄청 좁고, 뜨거워. 기분 좋았어……. 내 안쪽도 그래?”

재희는 다급히 도리질 치며 대답했다.

“아니요. 엄청 넓고 차가웠어요. 기분 하나도 안 좋았어요.”

“……지랄하네, 진짜.”

다시 뒤를 뚫겠다고 달려들까 봐 무서웠던 재희의 말에 이수가 코웃음을 쳤다. 탈력감을 이기지 못하고 선베드 위로 쓰러지듯 눕는다.

재희도 몸을 일으켰다. 가운을 깔았다지만 나무 바닥에 눌린 무릎이 아프고 쓰라렸다. 목구멍도 찢어질 것 같았고 턱은 빠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래도 서럽지는 않았다. 저렇게 좋아하는 이수를 볼 수 있다면 몇 번이라도 입을 벌릴 수 있었다. 재희가 이수의 옆에 누우며 물었다. 괜한 오기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궁금했다.

“……왜 안 했어요?”

“너 아플까 봐.”

무심한 대꾸에 마음이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재희는 이수를 끌어안으며 그의 가슴팍을 어루만졌다. 길게 난 흉터 위를 손끝으로 눌렀다. 쿵쿵거리며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오래오래 건강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를 놀리듯 중얼거렸다.

“그렇게 겁이 많아서 어떡해요. 선배가 아픈 것도 아닌데. 어쨌든 이제 이 얘긴 끝난 거예요. 맞죠?”

“그래. 얘기 끝났어. 그리고 이제 확실하게 알겠어. 난 니가 아픈 게 싫은 겁쟁이고, 넌 내가 아파도 상관없는 쓰레기라는 걸.”

“……그런 거 아니거든요!”

발끈해서 상체를 일으키는 재희를 보며 이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보기 드물게 맑은 웃음소리가 가을밤을 물들인다. 재희는 맥이 풀린 채로 그를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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