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2 개 목걸이 (13/15)

외전2 개 목걸이

12월 29일, 새벽 1시.

이수는 팔짱을 낀 채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노려봤다. 잔뜩 찡그려진 미간은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고, 슬리퍼를 신은 발끝이 바닥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그 몸짓은 시간이 지날수록 거칠어졌다.

짜증이 가득 담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수의 허벅지에 등을 댄 채 앉아 있던 레오가 진정하라는 듯 이옹, 하고 울었다. 머리를 쓸어 올린 이수는 휴대폰을 주워 들었다. 메신저를 켜고 차재희와의 대화 창을 눌렀다.

23:50

어디야.

23:51

?

23:55

주차 중?

23:59

??안 와?

00:00

정신 나갔냐?

00:01

00:03

전화 안 받아?

00:13

장난치세요?

00:20

납골당 or 공동묘지 택1

00:29

30분 전에 들어오면 봐줌.

00:40

오동나무 관 or 합판 택1

00:49

차재희. 전화 안 받지.

00:51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00:59

1시까지 봐줌.

인내는 거기까지였다. 기나긴 협박 메시지에 한 줄이 더 추가됐다.

01:00

니 인생에서 가장 후회할 날을 오늘로 만들어 줄게.

메신저를 나온 이수는 연락처를 열고 서이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벽 1시였지만 이 시간에 자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얼마 가지 않아 서이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수야? 무슨 일 있어?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형. 위치 추적할 수 있지?”

─ 뭐……. 원한다면 할 수는 있는데 이 시간엔 좀……. 왜. 급한 일이야? 뭔데?

“차재희 이 씨발놈이 술 처마시러 나가서 연락이 안 되네?”

─ ……이수야. 연말인데 그럴 수도 있지…….

당황한, 그러나 웃음을 참는 것 같기도 한 서이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웃겨? 이게? 지금? 이수가 짜증스럽게 되물었다.

“해 줄 거야, 말 거야.”

─ 알았어, 기다려 봐.

서이준과 전화를 끊고 옷을 갈아입으며 연락을 기다렸다. 그러나 10분, 20분이 흘러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동안 이수는 119에 신고를 하려다가 일을 키우고 싶진 않아서 참았다.

사고가 났나, 1분 정도 걱정하긴 했지만 그건 절대 아닌 것 같았다. 통금을 어겨서라기보다, 사실 열받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후 11시쯤 전화했을 때 차재희의 목소리는 아주 유쾌했고, 강주연인지 뭔지 하는 친구와의 만남에 굉장히 들뜬 상태였다.

얼마나 재밌으면 통금도 잊고, 연락하는 것도 잊고 이렇게 사람을 기다리게 만들지? 솔직히 말하자면 질투에서 기인한 짜증이었다. 이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휴대폰만 노려봤다.

그리고 새벽 2시, 짧은 진동과 함께 문자가 도착했다. 기다리던 서이준의 연락은 아니었으나 차재희를 추적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단서가 될 내용이었다.

[Web발신][신용승인] 서*수(0516) 12/29 01:57 1,780,000원 사천호텔남산점

그 길로 통화를 시도했지만 차재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 씨발 새끼가……. 지금 사람 놀려?

자리에서 일어난 이수는 그 길로 차 키를 들고 나왔다. 군청색 테슬라가 연말 새벽의 도로를 무섭게 질주했다. 평소 도착 시간의 절반 만에 차가 멈춰 섰다. 로비 앞에서 직원에게 팁을 주고 들어가려는데,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롤스로이스 고스트가 보였다. 재희가 끌고 나간 차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내부엔 아무도 없었다. 계산했으면 재깍재깍 나오지, 아직까지 술을 처마시고 있단 말인가? 욕을 씹어 삼키며 라운지 바로 올라갔다. 주정뱅이가 술을 저렇게 처마실 만한 곳은 라운지밖에 없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이수를 맞이한 것은 불 꺼진 내부와 금줄이 쳐진 채 출입을 막아 놓은 영업 종료 표지판이었다.

뒷골이 당겼다. 이수는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휴대폰을 꺼내 다시 전화를 걸었다. 지잉, 지잉, 진동이 가까운 곳에서 울렸다. 설마 싶어 라운지의 카운터로 다가가니 안쪽에 놓인 차재희의 휴대폰이 외로이 울고 있었다.

이 새끼가 진짜……. 이쯤 되니 걱정이 됐다. 그 꼼꼼한 차재희가 소지품도 못 챙길 정도로 술을 처마시고 대체 어딜 갔을까? 술이 그렇게 센데, 대체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 이렇게까지 달렸단 말인가?

당장 멱살을 잡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일단 찾아야 멱살을 잡든 때리든 할 일이었다. 이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루프 탑에 아침까지 운영하는 바가 하나 더 있었다.

설마 거기서 2차를 달리고 있을까? 술에 취해 어디서 나자빠져 있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았다. 설마 그 친구와 호텔 방에 쓰러져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거라면 강주연인지 강주원인지의 부모는 내일 장례 준비를 해야 했다.

59층으로 올라가는 길에 서이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1분 전까지 이 호텔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하니 다행히 길이 엇갈린 건 아닌 듯했다.

“어서 오십시오.”

롱 패딩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루프 탑 바로 들어섰다. 자리를 안내하려는 직원을 만류하고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창가로 향했다. 익숙한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모자는 어디다 내팽개쳤는지 단정한 머리칼이 바의 조명에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재희와 어깨를 딱 붙인 채 앉아 있는 남자는 그보다 머리통이 하나는 작았고, 술에 취한 듯 고개를 끄떡거리며 재희에게 귀를 들이밀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기업 비밀인지, 아니면 씨발 사랑이라도 속삭이는 건지, 가까이 붙어서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손에 들린 차재희의 휴대폰을 그들이 앉은 테이블 위로 집어 던지듯 내려놓았다. 액정을 아래로 한 휴대폰이 요란한 파열음을 내고 미끄러지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순간 몸을 떨며 뒤를 돌아본 두 사람이 이수를 발견했다. 그러니까… 아주 살벌한 표정을 짓고 선 서이수를.

“씨발, 아주 재미 좋지?”

“……선배?”

술에 취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색기 어린 창백한 낯이 허물어졌다. 재희는 귀 끝을 빨갛게 물들인 채로 이수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꼬리와 깊이 패는 보조개. 사람을 걱정시켜 놓고 어지간히 사랑스러운 얼굴에 어이가 없었다. 그 자리에 서서 노려보고 있으니 재희가 손을 뻗어 끌어당긴다. 뜨거운 체온이 전해지니 맥이 탁, 풀렸다.

차재희는 이수의 차가운 손을 끌고 가 제 뺨에 비볐다. 고개를 파묻고, 입을 맞추고, 시원하다고 중얼거리는 소리에 옆에 앉은 남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이수를 바라봤다. 그쪽도 적잖이 취한 듯했다.

“강주… 원?”

“네, 네? 네! 강주현입니다! 아, 아, 안녕하세요.”

“내가 지금 안녕한 것 같아?”

말 같지도 않은 인사에 짜증이 치솟았다. 강주현이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 재희, 데리러, 오신… 거구나? 하하하!”

“씨발, 애한테 술을 얼마나 처먹였길래 정신을 못 차려?”

처먹인 게 아니라, 지가 처마신 건데……. 강주현은 웅얼거리며 서이수의 눈치를 봤다.

30초 전까지 차재희가 신이 나서 떠들어 대던 남자가 바로 이 남자인가? 그러니까, 상냥하고 다정하고……? 예쁘고, 귀엽다던… 그 예비 남편? 아닌가? 아니겠지? 아닌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예쁘다는 것 말고는 맞는 말이 없었다. 상냥하긴커녕 사나웠고, 다정하긴커녕 매정해 보였다. 귀엽다는 말은 정말 꿈에라도 갖다 붙일 수 없었고 말이다. 그럼 이 남자는 누구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차재희가 힘을 주어 이수를 잡아당겼다. 털썩, 키 큰 남자를 제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질색팔색하는 남자의 목덜미에 입을 맞춘다. 강주현은 소리 없이 경악했다.

“서이수우, 으음. 어떻게 알고 왔지……?”

“이 새끼가 또 기어오르네.”

“좋은 냄새 나……. 빨아도 돼요?”

“야, 정신 못 차리지?”

신경질을 내며 차재희의 머리통을 밀어낸 이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히 이름은 맞는데, 아무리 봐도 차재희가 설명한 사람이 아니었다. 강주현은 새삼 사랑이라는 감정이 인간을 얼마나 비이성적으로 만드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며 두 사람이 하는 양을 지켜봤다.

이수는 먼저 바닥에 떨어져 박살 난 휴대폰을 챙겼다. 그러고는 재희에게 볼 캡을 깊이 눌러 씌워 주고, 패딩을 입혔다. 얼어 죽을 것 같은 날에도 코트를 입고 다니던 놈이 왜 모자를 쓰고 롱 패딩을 입고 다니나 했더니, 저 남자의 옷 단속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차재희는 이수에게 집적거렸다. 선배, 이수야아, 하고 애교를 떠는 목소리에 소름이 돋은 강주현은 자신도 돌아갈 준비를 했다.

강주현 또한 5분 전까지 자신이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를 정도로 취해 있었으나, 서이수의 냉랭한 목소리에 얼음물을 맞은 듯 정신이 든 상태였다.

이수는 먼저 자리를 뜨려는 강주현에게 정말 놀랍게도 집에 한번 놀러 오라는 말을 했다. 차재희의 친구니까, 재희에게도 종종 숨통이 트일 날이 있어야 하니까 하는 마음이 한 1%, 나머지는 빈말이었다. 눈치 빠른 강주현도 그것을 느꼈기에 아 네, 들어가세요, 하고 인사만 하고 사라졌다.

이수는 비틀거리는 재희를 부축해 나가며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머리채 잡아서 끌고 가기 전에 다리에 힘줘라.”

“선배……. 나 오늘 기분 너무 좋아.”

“난 안 좋아.”

“왜?”

“모르면 닥치고 있어.”

살기가 담긴 목소리에 재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이수의 등에 무겁게 매달린 채 그의 귀를 빨고, 머리카락을 물고 핥았다.

술을 마시면 치대는 건 알고 있었지만 원래 이 정도로 심하진 않았다. 뭔지는 몰라도 정말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러나 뭐가 어찌 되었든 이수는 오늘의 일을 그냥 넘길 마음이 없었다.

그래도 정신 차리고 잘못을 시인했으면 어렵지 않게 풀었을지도 모르는데……. 차재희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은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더 강하게 굳어졌다.

“야, 안 일어나?”

어깨를 흔들어도.

“아니, 씨발! 차에서 잘 거냐고!”

살짝 뺨을 때려 봐도.

“주정뱅이 새끼야!”

소리를 질러도 깊은 잠에 빠진 차재희는 깨어나지 않았다.

이수는 결국 차에 시동을 켜 둔 채 히터를 약하게 틀어 놓고 집으로 올라왔다. 뜨거운 물로 씻고 텅 빈 침대에 누운 순간, 예쁜 미소를 보고 조금 풀어졌던 화는 곱절로 부풀어 이수를 덮쳤다.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질 않았다. 바닥이 절절 끓을 정도로 난방을 세게 틀었는데도 냉기가 가득한 것 같았다. 결국 이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새벽 6시가 되기 전에 집에서 나왔다.

차재희는 안드로이드 같은 놈이라 5시 59분쯤이면 알람 없이 일어났다. 아주 피곤할 때는 늦잠을 자기도 했지만, 오늘은 어쩐지 정시에 깨어날 것 같은 직감에 먼저 자리를 피했다. 얼굴을 마주 보면 이 결심이 흐트러질 것 같아서였다.

이수가 차를 끌고 향한 곳은 서울 도심의 한 핸드 메이드 숍 앞이었다. 최고급 가죽과 보석으로 치장된 개 목걸이와 반려동물용 의류를 파는 그 가게는, 레오와 리키의 목줄을 주기적으로 구매하는 곳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아침 6시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재희가 전화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일부러 받지 않았다. 이수는 가게 앞에 차를 세우고 9시까지 기다리다가 첫 번째 손님으로 들어갔다.

“어머,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목걸이 좀 보려는데.”

“아아! 리키요? 레오요?”

사장이 살갑게 물어 왔다. 이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집에 개가 한 마리 늘어서요. 리키보다 한 단계 작은 사이즈면 될 것 같은데.”

“그러면… 잠시만요.”

진열장을 뒤적이던 사장이 여러 컬러의 목걸이와 리드 줄을 꺼내 놓았다. 살이 배기지 않게끔 부드럽게 무두질된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목걸이는 색상이 다양했다. 빨간색, 민트색, 남색, 휘황찬란한 색채 속에서 이수는 새까만 가죽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이니셜을 새기는 동그란 은판 옆에 런던 블루 컬러의 토파즈가 달려 있어서 아주 고급스러워 보였다.

잠금을 풀어 자신의 목에 사이즈를 대 본 이수는─이때 사장은 0.1초 정도 가자미눈을 했다─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이걸로 주세요.”

“리드 줄은 같은 색으로 드릴까요?”

“줄은…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아직은.”

“아, 그럼 애기 이름은요? 이니셜 새겨 드릴게요.”

이수는 가만히 고민하다가 메모지에 알파벳을 적어 넣었다. 고개를 갸웃한 사장은 다시 가자미눈을 했다가 목걸이를 들고 공방으로 사라졌다.

이수가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들고 나왔을 때, 시간은 10시가 넘어 있었다. 차에 두고 내린 휴대폰에 차재희의 부재중 전화가 130통 정도 찍힌 것을 본 이수가 코웃음을 쳤다. 메신저에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등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지만 늦어도 한참 늦었다.

이수는 재희에게 연락하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올라갔을 때, 현관문을 열자마자 차재희가 달려들었다. 허리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는다. 그에게서는 맡는 사람도 취할 정도로 진한 술 냄새가 났다.

“잘못했어요, 선배…….”

미안함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힘 있는 손길로 재희를 밀어내고,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그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침묵이 흘렀다. 재희는 상자와 이수를 번갈아 보며, 화가 풀린 건가? 아니면 화가 안 났나? 아니, 그럴 리가 없으니 이건 독약인가? 알아서 죽으라는 건가? 이런 생각을 했다.

지익, 마른침을 삼키며 포장을 뜯은 재희는 상자의 뚜껑을 열고 굳어 버렸다. 이내 아연실색해 입을 벌렸다. 아주 예쁜 개 목걸이에 필기체로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다만, 조금 이상했다.

재희와 수, 일까? 재희는 이수가 어릴 적에 수라고 불리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과 나란히 적힌 이수의 이니셜이 마음에 들었지만, 하필 왜 개 목걸이에 새겨져 있는지는 모르겠다… 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이수가 손을 뻗어 목걸이를 꺼냈다. 그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재희의 목에 걸고 버클을 채웠다. 차가운 손끝이 살결을 스친다. 흠칫 놀란 재희가 이수에게 의문을 표했다.

“이거… 뭐예요?”

그러나 이수는 이번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으로 톡, 은판을 때렸다. 차게 식은 은판은 옆에 달린 런던 블루 토파즈와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멍하니 선 재희는 저를 스쳐 지나가는 이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텅 빈 현관에서,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좆됐다.

“선배, 선배. 화 많이 났어요?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선배애.”

“이제 술 안 마실게요. 응?”

“진짜 많이 잘못했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

“선배, 욕이라도 한마디 해 주면 안 돼요……?”

“밥 안 먹을 거예요?”

“선배가 좋아하는 거 했는데…….”

“제발요, 다신 안 그럴 거란 말이에요…….”

울상이 된 재희는 하루 종일 이수를 따라다니며 말을 걸었다. 그러나 이수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가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차재희를 무시했다.

옆에서 치대며 뽀뽀를 하면 가만히 앉아서 받아 주다가도, 그 이상을 하려고 하면 발길질을 하며 재희를 밀어냈다.

차재희는 후회가 가득한 표정으로 이수에게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이수는 정말 냉정했고, 침대에 올라오는 차재희를 쫓아내기까지 했다. 나가라며 말없이 방문을 가리키는 서이수를 보며 재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게스트 룸으로 쫓겨나야 했다.

다음 날, 재희는 아침 일찍 일어나 이수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한 상 가득 식사를 차려 놓았다. 내일이면 해의 마지막 날인데……. 설마 내일까지는 안 그러겠지, 화가 좀 풀렸겠지, 그렇게 기대했으나 정오 즈음 느지막이 일어난 이수는 그의 기대를 산산이 깨부쉈다.

“진짜 안 먹어요……? 한 입만 먹지.”

무심한 얼굴로 테이블을 슥 내려다본 이수는, 말없이 냉장고에서 물 한 병을 꺼내 컴퓨터 앞으로 갔다. 재희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던 사람이 헤드셋을 쓴 채로 여러 사람과 대화하며 욕을 쏟아 냈다. 무표정한 얼굴이 짜증과 분노, 간간이 즐거움으로 물드는 것을 보며 재희는 절망감을 느꼈다.

정말로 화가 많이 났구나.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우울해진 재희는 잔뜩 차려 놓은 음식을 죄다 버려 버리고 소파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었다.

이수를 보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목에 걸린 개 목걸이에서 달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함부로 뺐다간 죽음을 면치 못할 것 같아서 그냥 뒀는데,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사실 씻을 때 몰래 빼 두었다가 물기를 닦고 나서 다시 찼는데, 스스로 버클을 채우며 얼마나 자괴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수가 어떤 의도로 이런 짓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술 마시고 개가 되어 버린 자신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훈육의 효과는 아주 강력했고 재희는 절대 다시는 통금 시간을 어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변명을 하자면, 그날은 재희의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요즘 그는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표현하는 습관을 들이는 중이었다. 그날 저녁, 오랜만에 만난 강주현 앞에서 재희는 이수의 앞에서 하는 것처럼 이건 싫다, 저건 별로다,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유일하게 남은 고등학교 친구인 강주현은 재희가 형제들만큼이나 편하게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와 말을 나누면서도 재희는 혹시라도 주현이가 나한테 실망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나 강주현은 그런 재희를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이 재밌어졌다며 웃기만 했다. 덕분에 차재희는 자신감을 얻었고, 안심한 나머지 술을 물처럼 마시기 시작했다.

꼬냑 3병을 비운 두 사람은 슬슬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차재희는 휴대폰이 사라진 줄도 모르고 몇 시냐는 자신의 질문에 ‘한 한 시간 지났을걸?’ 하고 답하는 강주현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새벽 1시였다─물론 그 시점에 강주현은 자신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잘 몰랐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라운지 바가 닫는다는 소리에 자리를 정리하고 루프 탑 바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를 탄 재희는 라운지 바가 왜 이렇게 문을 일찍 닫는지 골똘히 생각하기만 했다.

루프 탑 바에 가서는 칵테일을 시켜 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재희는 신이 난 나머지 강주현에게 이수에 대해서 털어놓았고, 강주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자신이 바이 섹슈얼이라고 맞고백했다.

한층 더 가까워진 친구에게 재희는 이수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가 얼마나 예쁘고 다정하고 상냥하고 귀여운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때 때마침 자신을 데리러 나타난 이수를 본 순간, 재희는 완전히 흥분한 채로 그에게 집적거렸던 것이다.

소파에 쭈그리고 앉아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본 재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모조리 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서이수는 자신이 한 말을 제대로 지켰다. 12월 29일은 재희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날이 됐다.

자기 성찰을 하며 돌아본 이수는 헤드셋을 쓴 채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가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하게 아파 왔다. 축 늘어진 눈꼬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그리고 그날 밤에도 재희는 침대에 오르지 못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문을 가리키는 이수를 보며, 서운하고 속상한 나머지 오기를 부렸다.

재희는 게스트 룸에 가서 이불을 가지고 와 침대 밑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주인의 발치를 지키는 강아지처럼 이수의 발밑에서 잠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31일.

연말이니까, ‘우리’가 된 해의 마지막 날이니까, 나 진짜 많이 반성했으니까, 오늘은 화가 풀리겠지.

그렇게 생각했던 재희는 어제와 똑같이 냉랭한 표정의 서이수를 보고 좌절하고 말았다. 울컥, 속에서 서러움이 치밀어 그날은 종일 밥도 먹지 않고 게스트 룸에 틀어박혀 있었다. 매정한 서이수는 한 번도 문을 열어 보지 않았다. 그래서 재희는 더 골이 났다.

그러면서도 이수는 뭘 좀 먹었을까, 밥이라도 해 둘까, 아니야, 안 먹는데 뭐 하러 해, 아니지, 그래도 샌드위치라도 만들어 두면 먹을 수도 있잖아, 내가 잘못한 거 맞는데 이러면 안 되지……. 계속 고민을 하다가 게스트 룸에서 나온 게 오후 11시였다.

저조도의 조명이 켜진 거실에서 이수는 홀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전원이 꺼진 새까만 TV 화면을 바라보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재희는 그에게 달려가 매달릴 뻔했다.

아직도 화났느냐고, 이제 그만 풀어 달라고, 죽을 만큼 서럽다고, 응석을 부리고 싶었다. 한마디만, 이름을 한 번 불러 주면 무릎을 꿇고 빌 수도 있는데… 이수는 그러지 않았다. 다만, 재희를 빤히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이리 와.”

그 순간 목에 걸린 개 목걸이가 얼마나 무겁게 느껴졌는지. 재희는 고개를 빳빳이 쳐든 채 이수를 노려봤다. 말로 하면 되지, 사람을 피 말려 죽일 기세로 화를 내는 서이수가 재희는 무섭고 또 원망스러웠다. 움직이지 않고 쳐다만 보고 있으니 이수는 입을 열어 한마디를 더 했다.

“이리 안 와?”

서슬 퍼런 목소리에 재희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자기 합리화를 하며 이수에게 달려갔다. 얌전히 다가가 옆에 앉으니 이수가 손을 뻗어 두 뺨을 감싸 왔다. 차가운 손바닥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사흘 동안 한 번도 먼저 만져 주지 않았기에, 재희는 울컥하며 그의 손아귀에 얼굴을 비볐다.

“잘못했어, 안 했어.”

“했어요…….”

눈치를 보며 대답하는 얼굴이 말도 못 하게 사랑스러웠다. 이수는 그제야 표정을 풀며 재희에게 깊이 입 맞췄다. 아무리 버릇을 들이기 위해서라지만 이수에게도 힘든 날들이었다.

첫날에 끝도 없이 입술을 갖다 댈 때는 발기하는 것을 참느라 입 안쪽 살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었고, 둘째 날에 발치에서 잠든 차재희를 발견했을 때는 안쓰러워서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저도 모르게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가 놀라서 떨어졌지만, 잠들면 잘 깨지 않는 차재희는 그것도 모른 채 색색거렸다.

오늘은 종일 방에 틀어박혀서 울고 있는 건 아닌가, 아니면 이를 갈고 있는 건 아닌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방문에 귀를 대고 염탐을 서른 번 정도 한 것 같다. 이제는 한계였다. 충분히 반성했을 테니 여기까지 해도 될 것 같았다.

재희는 숨을 헐떡이며 이수를 잡아먹을 기세로 달려들었다. 입술을 씹어 먹을 듯이 깨물고, 아릿하게 빨아들이며 덤비더니 어느 순간 모래성처럼 허물어진다. 이수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 재희가 물었다. 목소리에 울음기가 배어났다.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때는 나 쫓아낼 거예요?”

나 싫어할 거예요? 달갑지 않은 물음이었다. 자신이 그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 아니라, 재희가 자신에게서 어떤 식으로든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게 싫었다. 이수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때는 리드 줄까지 세트로 사 올 거야.”

재희는 안심하며 눈을 감았다. 언젠가 이수가 저한테 질리려 하면 그때는 미리 사고를 쳐서 목줄을 걸고 집에 감금되어야지, 하고 마음속 깊이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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