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3 신혼집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은 3월 말, 얇은 롱 패딩에 모자를 깊이 눌러쓴 재희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수업이 끝난 후 공대 도서관에서 이수를 데리고 와 식사를 마친 참이었다.
이수는 요즘 게임 개발에 대해서 공부하는 중이었다. 재희와 졸업 시기를 맞추기 위해 휴학을 했음에도 학교에 꾸준히 나오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사실은 차재희를 관리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
어쨌든 이수는 매일 공도에서 문율과 만나느라 바빴는데, 정확히는 몰라도 그가 구상한 연역적 알고리즘 기반의 AI 프로그램이 구체화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실존 인물의 행동 양식을 적용해 다양한 유형의 AI를 만들어 낸다던가. 덕분에 얼마 전에는 문항이 천 개나 되는 질문지를 주며 답변을 하라기에 사흘간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요즘 재희의 일과는 이러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고 이수에게 식사를 챙겨 주고, 같이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온다. 재희는 수업을 듣고 이수는 공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거나 프로젝트 세부 기획을 작업하고, 같이 점심을 먹고 오전의 일과를 반복하다가 집으로 간다.
작년과 다르게 재희는 여태껏 개총이나 신입생 오티, 엠티 등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수가 술자리를 싫어하기도 했고, 그런 곳에서 떠들고 있을 시간에 서이수랑 집에서 영화를 한 편 더 보는 것이 나았다. 이래도 되는 걸까, 두려울 정도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 됐으니까 끊어요.”
연초가 절반쯤 타들어 갔을 무렵, 이수가 통화를 끝내며 돌아왔다.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더니 재희의 모자를 제대로 씌워 준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롱 패딩의 지퍼를 목 끝까지 끌어 올렸다.
마치 조선 시대 사대부 양반들처럼 이수는 재희의 옷차림 단속에 열심이었다. 데이트할 때가 아니면 코트, 셔츠나 슬랙스, 진 같은 건 손끝 하나 댈 수조차 없었다. 처음엔 영 어색하고 이상했지만, 사실 재희도 슬슬 편안함에 익숙해지는 중이었다.
“어머님이 뭐래요?”
“뭐라긴, 해 준다고 하지.”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그 돈으로 기부나 하라고 했어.”
재희가 작게 웃음을 머금었다. 제 담배를 꺼내 문 이수가 빤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재희는 그와 담배 끝을 맞대 불길을 옮겨 주었다. 흰 연기가 허공에 흩어진다. 재희 옆에 나란히 선 이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미국에 한번 갔다 와야겠어.”
“먼저 사 버리게요?”
“어.”
이수는 요즘 신혼집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천수인과 서훈이 집을 마련해 주겠다는 걸 거절했는데, 그래도 서일의 개혼이니 이 정도는 해야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부모와 한 달째 대치 중이었다.
비서 편으로 괜찮은 저택 리스트를 정리해 보냈으니 확인해 보라길 몇 차례, 거절했음에도 자꾸만 또 다른 파일이 도착하자 열이 받은 이수는 한국에 있는 요양원 목록을 뽑아 제 부모에게 보내 버렸다. 싫다고 말했는데 왜 자꾸 그러느냐고,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그 후로 일주일간 잠잠하기에 포기한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보다.
오늘은 전화가 와서 지역만 고르면 알아서 준비하겠다는 말이 되돌아왔다. 이수는 짜증을 내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대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갈 예정이라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회사 설립 문제로 미국에 한번 들러야 하긴 했다. 서이준에게 소개받은 아트 디렉터와 율이 프로그래밍 대회에서 만났다던 게임 개발자를 만나 이야기도 나눠야 했고, 집을 지을 곳과 사무실의 위치도 정해야 했다.
문율이 만든 알고리즘은 아직 구동 초기 단계였지만, 실력 있는 프로그래머들이 붙는다면 완성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듯했다. 인력 충당이 제일 중요했다. 그래서 헤드헌팅 업체와 계약서를 써야 하기도 했다.
할 일이 많았지만 여태 들어가지 않았던 이유는 차재희를 한국에 홀로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아서였고, 그를 두고 혼자 떠나고 싶지 않아서였다. 여름 방학 때 같이 가려고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겨울에 다녀올걸. 이수는 욕을 씹으며 휴대폰을 켰다. 망설이지 않고 주말 비행기를 예약했다.
“올 때 뭐 사다 줄까?”
같이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재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빨리 돌아와요, 속삭이는 말에 이수가 눈을 들어 올렸다. 마주 보며 웃는 소리가 나직하게 퍼졌다.
* * *
“아, 제발요, 선배!”
“입 좀 다물어. 정신 사나워.”
“죽는다고!”
“닥치라는 말 안 들려?”
버럭 짜증을 낸 이수가 보란 듯 속도를 높였다. 180을 넘어 200을 가리키는 바늘을 보며 재희가 눈을 감았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는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는 날이 오늘이었다. 일주일, 혹은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르는 이별이 아쉬워 재희는 어제 대낮부터 이수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온몸을 물고 빨고, 좆에 감각이 없다시피 할 때까지 박아 댔다.
덕분에 이수는 기진맥진한 채로 잠들었고, 새벽 비행기를 타러 가야 한다는 걸 망각한 상태로 오랫동안 기절해 있었다. 열 번째로 반복된 알람에 깨어났을 땐 이미 출발까지 두 시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일정이 틀어지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서이수는 어기적거리며 일어나 차재희를 걷어찼고, 그때부터 시작된 짜증은 지금 이 시각, 텅 빈 새벽 도로를 분노의 질주로 가로지르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속도위반, 신호 위반이라고는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준법 시민 차재희는 혼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KTX도 아니고 시속 200km로 달리는 자동차에 앉아 있으니 그야말로 황천길로 직행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안전벨트를 꽉 잡은 채 떨고 있으니 이수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실 그 목소리가 더 무서웠다.
“그러니까, 씨발, 내가 그만하라고 했지.”
“맨날 그러면서 진짜로 그만하면 싫어하잖아요…….”
“차재희, 분위기 파악 못 해? 지금 이게 따박따박 말대답할 사안이야?”
“언제는 하고 싶은 말 참지 말라고 했으면서.”
“이게 진짜!”
그제야 재희가 입을 다물었다. 불퉁한 시선이 창밖을 향한다. 사실 시간은 충분했다. 아니, 그걸 넘어서 항공사 측에선 이수가 늦게 도착하더라도 게이트를 열고 기다려 줄 게 분명했다. 마땅히 그래야 할 집안의 자식이었으니까. 그러나 괜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서둘렀는데… 저렇게 겁을 먹을 줄이야.
짤막한 한숨을 내쉰 이수는 결국 1차선에서 벗어나 속도를 천천히 낮췄다. 절반으로 줄어든 속도는 체감상 거북이가 기어가는 것과 비슷했다. 스멀스멀 짜증이 나서 그냥 자율 주행 버튼을 눌러 버렸다.
핸들을 놓으며 옆을 보니 차재희가 눈치를 보고 있었다. 팔자로 휘어진 눈썹이 퍽 귀여웠다. 지난밤과의 극심한 격차를 느끼며 몸을 기울여 키스했다. 재희는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부드럽게 맞아 주었다.
“집 잘 지키고 있어.”
“늦으면 안 돼요.”
“늦으면 니가 어쩔 건데.”
“……집 나갈 거예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급하게 나오느라 제대로 정돈하지 못한 재희의 머리칼이 보였다. 이수는 손가락으로 그 머리를 쓸어 넘기다가 돌연 콱, 그러쥐었다. 아! 재희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기만 해. 개 목걸이, 아직 잘 맞는지 확인하고 싶지?”
“…….”
새까만 눈동자가 흔들렸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것만은 절대 싫었다. 작년 연말을 떠올리기만 해도 재희는 서러운 눈물을 뽑아낼 수 있었다.
차재희가 이수를 바라보다가 애교를 부리듯 그에게 뽀뽀했다. 이마부터 눈썹, 뺨, 코끝, 입술까지 내려와서 윗입술을 빨아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애써 웃었다.
“아직도 안 잊어버렸어요? 빨리 지워 버려요, 그 일.”
“글쎄. 니 친구는 왜 안 와? 집에 놀러 오라고 했는데.”
재희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강주현이 그런 질문을 하기는 했다. 야, 그때 그분이 나한테 놀러 오라고 했는데 어떻게 할까? 빈말 같기는 한데 혹시 진심이면 화내시는 거 아니야? 하고.
하지만 서이수와 강주현은 만나지 않는 게 좋았다. 선배한테 반하면 어떡해? 마음이라는 게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강주현과는 단란한 자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또한 강주현은 재미있고 유쾌한 녀석이었다. 이수도 혹시 그를 마음에 들어 할지도 모르니 절대 안 된다. 결혼식 때나 한번 보면 그만이었다.
“강주현은… 바쁘대요. 나중에, 데려올게요.”
“그러든지.”
다행히도 이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커밍아웃할 정도로 차재희와 친하다니까 한번 말을 꺼내 본 것뿐이다. 어깨를 으쓱한 그가 재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가락에 와 감기는 머리칼이 매끈하고 부드러웠다.
그러는 동안 저 멀리 인천 공항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수는 자율 주행을 해제하고 속도를 높였다. 주차장에 갔다가 같이 들어갈 시간까지는 없었다. 이제 겨우 출발까지 30분이 남았다.
도로 한편에 차를 세운 후 비상등을 켰다. 조수석에서 튀어 나간 재희가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꺼내 세워 두었다. 이수는 주머니 속의 여권을 확인하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총기 강도 조심해요…….”
“……뭐?”
“납치당하지 않게 조심하고.”
“뭐라는 거야.”
“모르는 사람이 주는 음식은 먹지 말고.”
비현실적인 걱정을 들은 이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먼저 들어가라고 버티는 재희를 운전석에 태워 놓고, 창문을 내리게 했다. 소리 없이 내려가는 창 틈새로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입술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이수는 재희의 윗입술을 가볍게 물고 빨며, 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아쉬운 듯 떨어져 나갔다가 참지 못하고 다시 깊숙이 혀를 밀어 넣는다.
결국 이수는 출발 시간을 5분 남겨 두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뭘 먹을 기운도 없이 좌석을 젖혀 누웠다. 안대를 쓰기 전, 휴대폰을 확인하니 차재희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My Puppy
벌써 보고 싶어요
5:31
이수는 목소리가 들리는 문장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다 답장을 보냈다.
5:46
나도 보고 싶어
* * *
4월의 캘리포니아는 한국보다 아주 조금 더 따뜻했다. 이수는 언제나처럼 트레이닝 바지에 운동화, 그 위에 스웨트 셔츠를 입고 후드 짚업을 걸친 채 방을 나섰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1층으로 내려가니 이수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서일 전자 캘리포니아 지부의 책임자인 한국계 미국인 제이슨이었다.
「미스터 서? 이쪽입니다. 반갑습니다. 제이슨 브라운입니다. 제이슨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제이슨, 반가워요. 서이수예요. 이수라고 불러요. 말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이수는 제이슨과 악수하고 그의 차에 올라탔다. 제이슨은 30대 후반이었지만 유쾌하고 젊은 느낌이 나는 사람이었다. 클래식 한 포드 머스탱은 연식이 오래되었음에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제이슨이 이수에게 물었다.
「자아. 듣기론, 결혼할 분과 함께 살 집을 지을 거라고요?」
「형이 그런 것까지 얘기하나요?」
서이준이 말이 많다고 생각했던 게 마냥 착각은 아닌 모양이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계열사 직원에게 저런 말까지 할 줄은 몰랐다. 떨떠름하게 되묻자 제이슨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이준하고 알고 지낸 지 꽤 됐죠. 어렵지 않게 이야기해 주던데요.」
「꽤 친한 모양이네요.」
이수가 심드렁하게 대꾸했으나 제이슨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어떤 분인지 말씀해 주세요. 궁금해요. 이 말은 이준에겐 비밀이지만, 이준이 종종 저한테 남동생이랑 대체 어떻게 친해져야 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저도 여덟 살 차이 남동생이 있거든요. 여튼, 이준의 말만 들었을 땐 당신이 꽤 냉정하고 쌀쌀맞은 사람인 줄 알았어요.」
「아닌 것 같아요?」
제이슨은 짓궂은 미소를 머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직접 땅을 알아보고 집을 짓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로맨틱한걸요. 생각보다 말랑말랑하고. 상대방은 어떤 사람이에요? 너무 프라이빗한 질문인가? 내가 이런 일에 관심이 좀 많거든요. 불편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이슨 브라운은 서이준처럼 말이 더럽게 많았다. 로맨틱, 말랑말랑? 이수는 눈살을 찌푸린 채 제이슨의 말을 되뇌었다. 최근에 그런 말을 듣기는 했다. 사람이 좀 부드러워졌다던가? 그렇게 평가하던 박지혜는 어디 아프냐는 물음을 덧붙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제이슨이 저런 평가를 내리는 이유에는 이수가 현재 영어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 큰 지분을 차지했다. 신유진의 가르침을 받고 게임을 하며 2차로 진화한 거칠고 무뚝뚝한 말씨의 한국어와 달리, 이수의 영어는 꽤 나긋나긋했다.
개인 교사였던 클락에게서 배운 우아하고 부드러운 발성 때문에 영어로 말할 때의 서이수는 평소보다 훨씬 물렁물렁하게 보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차재희가 이제 말다툼할 때는 영어로 하자고 했을 정도였다.
「여자가 아니라 남자예요.」
이수는 일단 사람이라는 애매한 호칭을 정정해 주었다. 제이슨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이수가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냐면… 귀여워요. 사랑스럽고. 웃으면 예쁘고.」
「이준은 동생을 짝사랑하는 것 같다고 울상이던데. 이런 얘길 들으면 질투하겠어요.」
짧게 웃은 이수가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운전석으로 돌렸다. 잠시간 제이슨을 바라보던 눈길이 계기판으로 옮겨 갔다. 제이슨과 나란히 뺨을 맞대고 선 남자의 사진이 보였다. 이수는 그제야 서이준이 제이슨을 보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또한 동성 커플이었던 것이다.
그걸 알고 나니 입을 열고 싶어졌다. 한국에는 이런 이야기를 나눌 만한 상대가 별로 없었다. 고작해야 신유진인데, 그녀와의 대화는 이제 뻔하고 지루했다. 차재희가 웃는 게 예쁘다는 말을 인정하지 못하는 신유진과 말다툼을 하는 것도 지쳤다.
「난 그를 puppy라고 불러요. 당사자는 질색하지만, 그것만큼 잘 어울리는 호칭도 없는 것 같아요. 가끔 보면 정말 강아지 같거든요. 꼬리도 없는데 흔들리는 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가끔은 발정도 나고. 이수는 무심결에 튀어나오려는 말을 입 안으로 삼켰다. 제이슨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이수는 신유진을 제외하고 동성애자 친구가 없었다. 그들의 실생활이 궁금했는데 검색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었다. 이수가 그답지 않게 먼저 질문을 던졌다. 미국 생활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제이슨, 당신은요? 결혼했나요?」
「아, 우린 결혼할 생각은 없어요. 굳이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아도 이미 부부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런데 그가 당신보다 어린가 보죠? 퍼피라니… 너무 귀여운데요? 나중에 꼭 소개해 줘요.」
「그래요, 뭐.」
이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소개는 어렵지 않았다. 그 이상의 만남은 불가능하겠지만.
좋네요. 제이슨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액셀을 밟았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예쁘다는 이수의 남자가 얼마나 조그마하고 앙증맞은 생김새를 가졌을지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이수는 홀로 집을 지키고 있을, 188cm의 키에 널따란 어깨 그리고 완벽한 근육을 갖춘 덩치 큰 강아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10:21
혼자라서 무서우면 전화해.
지금 한국은 새벽 3시, 차재희는 자고 있을 시간이었기에 당연히 답장은 없었다. 이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캘리포니아 레드우드 시티 근처의 에메랄드 힐이었다. 서쪽으로는 에지우드 보호림이, 동쪽으로는 도심이 자리한 에메랄드 힐은 멀리 바다와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동네였다. 길옆으로는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숲을 거니는 듯한 고즈넉한 분위기가 마음에 쏙 들었다.
언덕을 올라 한참을 들어간 차는 숲길 입구에서 멈춰 섰다. 부동산 표지판 근처에 차가 한 대 더 서 있었고, 부동산 중개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수는 차에서 내려 중개인과 인사하고 안쪽으로 따라 들어갔다.
「멋지죠? 에지우드 보호림과 이어지는 땅이에요. 보호림은 개발이 불가능하지만, 그쪽을 빙 두르는 산책로는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할 겁니다. 뭐, 사실 이 동네 겨울은 별로 춥지도 않지만요. 미스터, 어디서 오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어째 만나는 사람마다 죄다 말이 많았다. 이수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미국에 있을 땐 맨해튼에 있었어요. 지금은 한국에 살고.」
중개인이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 후로 몇 마디 더 대화가 이어졌다.
뜨거운 태양 빛 아래, 넓게 펼쳐진 숲은 끝을 알 수 없게 이어졌다. 정돈되지 않은 진입로를 높이 선 나무들이 에워쌌다. 국유림과 맞닿아 있는 땅은 부지가 무척이나 넓었다. 이수는 그 숲을 둘러보며 재희와 둘이 살아갈 집을 그렸다.
저택은 지하 1층과 지상 2층, 총 3층으로 지을 것이다. 숲을 향해 세 개 층을 관통하는 통창을 내고, 창가 근처에는 모닥불 같은 둥그런 형태의 모던한 돌난로를 놓아야지. 손님이 올 수 없도록 침실은 딱 두 개만 만들고, 나머지는 게이밍 룸과 시어터 룸, 사격장 등으로 채울 생각이었다.
뒤뜰과 이어지는 온실에는 수영장을 만들어 문을 개폐할 수 있도록 하고, 앞마당으로 난 유리 온실은 다이닝 룸으로 꾸민다. 주방은 아주 크게. 화구와 오븐, 화덕 등 재희가 쓰는 모든 종류의 주방용품을 집어넣고 그릇도 예쁜 걸로 구해 줘야지.
정원은 그다지 관심이 없으니 한쪽에 승마장을 세워야겠다. 에지우드 보호림으로 차재희와 같이 말을 타고 산책을 다니면 좋을 것 같았다. 겨울에는 근처에 있다는 호수로 가도 좋고…….
「마음에 드십니까?」
「완벽해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차재희에게 비밀이었다. 재희는 이수가 그냥 아파트를 사러 간 줄 알고 있지, 저택을 지을 생각을 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차재희는 은근히 소박한 구석이 있어서, 뭐라도 하나 좋은 걸 해 주려면 줄 때 짜증을 내야 했다. 그러니 집은 완공되고 나서 보여 주는 게 나을 것이다.
이수는 부동산 중개인에게 구입 의사를 밝히고 연락처를 주고받은 뒤에 다시 차에 올라탔다.
「이제 나파로 가면 되죠?」
「네, 나파에 있는 아파트요.」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가는 길에 죽여주는 버거집이 있는데, 어때요?」
「좋아요. 내가 살게요.」
제이슨이 말한 죽여주는 버거집은 인앤아웃이었다. 뭐 숨겨진 현지인 맛집이라도 가는 줄 알았더니……. 어이가 없어 웃는 동안 제이슨은 더블 패티 버거를 입에 욱여넣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수도 작은 버거 하나를 절반이나 먹어 치웠다.
나파로 가는 길은 꽤 멀었다. 120km는 되는 거리였다.
미국으로 와서 이수가 사업을 하는 동안, 재희는 CIA에 다닐 계획을 세워 두었다. The Culinary Institute of America. 미국 명문 요리 학교의 분교가 캘리포니아의 세인트 헬레나에 있다.
재희는 작년부터 올해 초까지 서양식을 배우며 부쩍 동서양 퓨전 요리에 흥미를 들였다. 아무래도 경영 따위보다 요리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식당 차려 줘? 하고 물으면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기 일쑤였다.
이수는 며칠을 괴롭힌 끝에 그의 부모가 요리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그 영향으로 재희가 아직까지도 요리사가 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화가 나서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어쨌든 이수는 끈질긴 설득과 협박 끝에 재희가 정말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했다.
에메랄드 힐과 CIA는 거리가 있었다. 매일 150km가 넘는 길을 출퇴근시키고 싶지는 않았기에, 이수는 CIA에서 30km 정도 떨어진 나파에 고급 아파트를 한 채 사들였다.
사진을 찍어 재희에게 먼저 보내 주고,─이것마저도 너무 큰 집 아니냐는 답장이 돌아왔다─천수인에게도 보냈다.─이쪽은 너무 작지 않냐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신혼집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