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 백로 노는 곳에 까마귀 가지 마라 (1/12)

1. 백로 노는 곳에 까마귀 가지 마라

샤를 소피아 엔스. 금빛 물결이 일어나는 저 아름다운 머리칼과, 사파이어 원석이라도 박은 듯 총명하게 빛나는 두 눈을 두고 어느 누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때는 제1 왕립학교의 입학식 날이었다. 샤를 황태자를 보기 위해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검은 세단에서 내리는 금발의 황족들을 보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몇몇 극성팬들은 한 번이라도 그 몸에 닿아 보기 위해 경호원들을 가로질러 황족들을 향해 달려들기도 했다. 축제조차도 아카데믹한 분위기에서 치러진다는 왕립학교로서는 매번 입학식 날마다 때아닌 곤욕을 겪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기, 입학식 날의 엄청난 열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가난뱅이 청년이 한 명 있다. 아버지는 도축업에 종사하시고 어머니께서는 수산물 시장에서 회를 뜨신다. 그야말로 평민 중의 평민. 백 년 전이었다면 도축자라는 이름 아래 천민 취급을 당했을 그는 왕립학교의 기사 수련생으로서 정정당당히 입학에 성공했다. 뒷골목에서 지갑이나 훔치던 날치기범치고는 대단한 성공을 이룬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마린케이 이스턴은 가장 구석진 곳에 앉아 어서 입학식이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기사 수련생은 응당 황실을 위한 나이트로서 그 신분을 보장하는, 그리고 보장받는 서약을 맺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뭔 놈의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하지만 회의감이 드는 것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처음 제게 검을 쥐여 줬던 그 적갈색 머리의 남자만 아니었더라도 여기까지 오게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다.

네가 수련생이 된다고? 검술 스승 한번 만나보지 못했던 가엾은 아들이 왕립학교 입학 허가서를 받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울듯이 웃으며 그를 끌어안아 주셨다. 그것은 한없이 마음이 여린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얼마 되지 않는 짐 보따리를 싸고서 내일을 기다리던 어제, 아버지께서는 조심스럽게 방에 들어와 그의 어릴 적 꿈이나 마찬가지였던 작은 단검 하나를 손에 쥐여 주셨더란다.

그 단검을 손안에서 굴리며 마린케이는 벌써 두 시간째 시작이 지연되고 있는 입학식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귀족 출신 수련생들은 모두 카페에 들어가 비싼 찻물이나 홀짝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돈 몇 푼밖에 들고 오지 않은 마린케이에게 있어 카페에서의 티타임이란 사치 그 자체에 해당했다.

결국, 함박눈이 그의 어깨 위에 소복이 쌓일 즈음이 되어서야 굳게 닫혀 있던 왕립학교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서약을 내릴 황족들의 준비가 모두 끝났다는 뜻이었다.

***

쥐 죽은 듯이, 없는 듯이 살자. 일생일대의 목표이자 하나뿐인 신념이었다. 마린케이 이스턴은 입학 이후 단 한 번도 눈에 띈 적 없던 조용한 학생이었다.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용모를 타고난 탓도 있고, 원체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의 성향 탓도 있다.

이실직고하자면 내로라하는 귀족 나리들이 모여 있는 이곳에서 괜히 책잡힐 만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더 컸다. 보통의 평민들이 왕립학교 입학을 희망하는 이유는 오직 출세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칫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갈지도 모르는 왕립학교, 그것도 가장 텃세가 심하다는 제국기사학부에 지원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마린케이는 출세를 원하지 않았다. 명예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다고. 그는 그저 아버지의 도축업이나 어머니의 수산업을 물려받아 제 한 몸만 무사히 건사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적갈색 머리의 그 기사만 아니었더라면 이따위 학교에 입학하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제멋대로 왕립학교 추천서를 보내 놓고 튀어버린 이름 모를 그 기사를 향해 마린케이는 오늘도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언젠가 꼭 그 자식을 찾아내 내 손으로 죽여버리고 말겠다.

일단 허가서를 받은 이후에는 절대 입학을 철회할 수 없는 것이 왕립학교의 규정이었기에, 마린케이는 울며 겨자 먹기로 입학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추천으로 입학한 수련생들은 자퇴도 불가능했다. 그렇게 마린케이는 오늘도 몸이 부서질 듯한 강행군에 시달린 후 쓰러지듯 기숙사에 도착했다.

“이 거지새끼가. 안 씻냐? 위생 관념이라고는 한 톨도 없지.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

맘 놓고 쉬지도 못하는 엿 같은 인생. 왕립학교는 평민과 귀족 사이의 출신 차별을 없애겠다는 오만한 비전 아래 모든 인원이 무작위로 기숙사 방을 배정받았다. 덕분에 마린케이는 성격도 거지 같고 말본새도 거지 같은 웬 양아치 하나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대답 안 해? 거렁뱅이 새끼야.”

다시 한번 울려 퍼지는 시끄러운 목소리에 그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공동 샤워실을 향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모든 클래스를 마친 후 이미 한 번 샤워를 하고 돌아온 그였지만, 제 룸메이트가 저에게 창피를 주기 위해 일부러 더 냄새 타령을 해댄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상종하지 말자. 상종하지 말자. 그렇게 곱씹으며 마린케이는 이 시간쯤이면 아무도 찾지 않을 오래된 공동 샤워실로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녹슨 냄새가 가득했으나 그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따뜻한 물이 나오기만 한다면 그곳이 어디든 간에 옷을 벗어 던지고 뛰어들 수 있었다. 아까운 샴푸를 한 번 더 낭비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뭐. 그럼 대충 물만 적시고 갈까? 저 혼자만의 타협에 성공한 마린케이는 짧은 고민을 마치고서 샤워 레버를 돌렸다.

“아. 좋다.”

이대로 물만 맞고 서 있고 싶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계속. 젖은 머리를 털어내면서도 마린케이는 아쉬운 눈길로 샤워실을 돌아봤다. 출입구가 폐쇄된 옛 기사 수련장에 위치한 공동 샤워실은 그가 찾아낸 마법 같은 장소였다. 일단 재수 없는 귀족 새끼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돼서 좋고, 따뜻한 물에 보일러까지 돌아가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여기서 평생 살아야 한다고 해도 기분 좋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벽 두 시면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 따위는 마린케이 이스턴에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설령 살인마나 변태가 나온다는 소문이 돌았어도 그는 꿋꿋이 공동 샤워장을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입학 이후 처음으로, 마린케이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저건 또 뭐야.”

샤워장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믿기지 않는 광경에 그는 욕설을 내뱉고서 옷소매에 숨겨두었던 단검을 고쳐 잡았다. 축축한 머리칼에 칼 같은 바람이 스쳐 지나가니 오한이 돋는다. 하지만 굴하지 않고서 걸음을 옮겼다.

「제국의 기사는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검을 들지 않아. 그들은 그저 기사로서의 고뇌와 절개를 지키기 위해 수련하지. 검을 잡으려거든 그 살기를 먼저 내려놓아야 해. 기세를 죽이고, 왕도를 배우거라. 훌륭한 기사가 되겠구나.」

근데 아저씨. 저런 폐기물 새끼도 살려줘야 해? 난 아직도 모르겠는데. 가쉰은 기사도를 숭상하는 나라로서, 현대 문물이 경이로운 발전을 선보인 지금까지도 기사를 배출해내며 그 낭만과 염원을 실현하고 있는 나라였다. 게다가 왕립학교는 기사도를 천명으로 내건 인재 양성소이기까지 하지 않나. 이런 곳에서 저딴 새끼가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사내를 깔아뭉개고서 헉헉대고 있는 기사 수련생을 조준해, 마린케이는 거침없이 발을 내질렀다. 듣기만 해도 속이 거북해지는 비명 소리와 함께 보라색 스카프를 두른 기사 수련생이 데굴데굴 잔디밭을 굴렀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잡으려 손을 버둥대길래 망설임 없이 그 손등 위로 검을 꽂았다. 힘줄을 베인 기사는 다신 검을 잡을 수 없다. 두르고 있는 스카프가 보라색이라는 건 3학년 수련생이라는 소리인데,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 놓고서 이따위 망나니짓을 해대는 것이 매우 아니꼬웠다.

어쩌면 오밤중에 샤워를 하러 이 먼 곳까지 걸어와야 했던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단검이 꽂혀 들어간 손등을 자근자근 밟아 누른 마린케이가 아직도 멍하니 잔디밭에 누워 있는 청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제 밑에서 들려오는 괴로운 신음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한 무심한 태도였다. 발에 힘을 줄수록 덩치가 더욱 버둥거리며 날뛰어 댔다.

“거참 시끄럽네.”

단검을 쥔 주먹으로 덩치의 뒤통수를 후려친 마린케이는 드디어 상대가 기절했음을 깨닫고 천천히 발을 뗐다. 내밀었던 손은 싱겁게도 다시 제게로 돌아왔다. 하기야, 평민 따위가 손을 내민다고 해서 잡아주실 귀족 나리가 몇이나 되겠어. 딱히 화가 나지도 않았고 속이 상하지도 않았다. 그저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마린케이는 기절한 덩치를 나무 밑까지 굴려놓은 후, 넋 나간 얼굴로 반쯤 누워 있는 도련님을 보며 제 손가락을 튕겼다.

“그냥 갈까요, 기숙사까지 데려다드릴까요?”

대답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냥 가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상황이 조금 난처해질 것도 같았다. 윗옷이 거의 벗겨진 채 누워 있는 금발 청년과 쓰러져 있는 덩치, 그리고……. 응?

잠깐만.

“가, 감사합니다!”

금발?

***

“쟤야? 4황자 똥꼬 빨아서 세 단계 건너뛰었다는 새끼가.”

빨긴 뭘 빨아. 그래도 귀족이라는 새끼들이 말하는 꼬라지하고는.

“생긴 건 별로인데? 난 또 절세미인이라도 되는 줄 알았지.”

열렬하게 죽이고 싶다. 마린케이는 제 안의 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검을 휘둘렀다. 양 손바닥에 가득했던 물집이 터지고 새로운 물집이 생길 때까지 그는 오로지 연습에만 몰두했다. 저를 향하는 수많은 경멸 섞인 목소리들이 몸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그는 저를 이 시궁창으로 밀어 넣었던 기사의 목소리를 떠올리려고 애썼다.

「너는 내가 본 중 가장 진심으로 검을 다루는 아이야.」

그 진심이 대체 무엇이었을까. 출세도, 부도, 명예도, 그 무엇도 필요치 않았다. 그저 주어진 대로 삶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단 말이다.

화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쥐 죽은 듯이 살고자 한다고 진짜 쥐새끼가 될 수는 없는 것처럼. 그렇게 곤두박질치는 심장을 끌어당겨 다시 한번 연습에 몰두했다. 지난밤 마린케이 이스턴은 겁탈당할 위기에 처해 있던 4황자를 구해낸 공로를 인정받아 제국기사학부의 상위 3%의 학부생들만 수련할 수 있다는 제1 기사학부에 배정받았다.

그 학부의 다른 이름은 황실 전속 기사단을 양성하기 위해 꾸려진 퍼스트 클래스였다. 정계로의 진출 역시 한결 수월했기에 출세 등용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기사도를 숭상하는 가쉰 제국은, 그만큼 기사도를 수련하는 학생들에게 막대한 투자와 거대한 기회를 교차해가며 부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명문가의 자제들로만 이루어진 엘리트 팀 속에서, 마린케이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백로들 사이에 구겨 넣어져 있는 볼품없는 까마귀 같다고 생각했다.

금발인 걸 알았을 때 도망쳤어야 했는데. 황태자와 같은 어머니를 둔 손아래 동생인 4황자는, 비록 황위 계승 서열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을지 몰라도 실질적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제법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였다.

그렇다 해도 설마 평민 출신 기사 수련생을 퍼스트 클래스의 일원으로 만들어 놓을 줄이야. 처음 클래스 변경을 명령받았을 때, 마린케이는 다시 한번 이 망할 놈의 왕립학교를 불태우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것뿐일까? 이런 말도 안 되는 곳에 자신을 밀어 넣은 4황자를 향해 온갖 비속어를 퍼붓고 싶기도 했다.

“어이. 평민!”

평민. 저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마린케이는 검을 떨어뜨리며 천천히 뒤돌아섰다. 갈색 머리칼이 이마에 달라붙어 시야를 가린다. 가파른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땀에 젖은 기사복을 한 번 펄럭인 후 앞머리를 쓸어 올린 그가 시선을 들었다. 저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있던 귀족 무리는 마린케이를 가리키며 손을 까딱거렸다.

“씁, 평민 새끼가. 불렀으면 빨리 튀어오기나 할 것이지.”

더럽게 재수 없는 목소리였다. 특히나 씁, 하는 소리가 가장 귀에 거슬렸다. 검을 쥔 손에 조금씩 힘이 더해진다. 뒷골목을 주름잡던 날치기범의 선량하지 못한 양심이 폭력에 대한 부추김을 시작했다. 가서 쳐. 그냥 베어버려. 저런 새끼들은 죽어도 싸. 너도 알잖아.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철없던 열셋의 부랑자가 아니었다. 한 세대만 더 일찍 태어났더라도 벌써 자식 셋은 낳아 오손도손 살고 있었을 열아홉 아닌가. 마린케이에게는 자신의 인생을 책임질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잡고 있던 목검을 던지듯 내려놓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불러서 왔는데요.”

“뭐?”

성큼성큼 다가와 제 앞에 서는 평민의 모습에 당황한 듯, 귀족 도련님 하나가 주춤거렸다. 마린케이는 그가 보인 빈틈을 놓치지 않고서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불러서 왔다고요. 안 부르셨습니까?”

1학년을 상징하는 녹색 스카프, 그리고 평민이라는 열등한 지위. 권위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하찮디하찮은 배경이었지만, 그 거만한 시선에서 이유 모를 자신감이 느껴진다.

마린케이는 요란스레 저를 불러 놓고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멀뚱히 서 있는 작자들을 보며 비웃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속으로 웃었다. 티 냈다가 암살이라도 당하면 큰일이니까. 도축업에 종사하시는 아버지와 조그마한 횟집을 운영하시는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마린케이는 아직 살아야 했다.

하지만 몇 분이고 정적이 이어지자, 제아무리 철든 부랑아라 할지라도 조금씩 신경질이 나기 시작하고 마는 것이다. 마린케이는 목검을 던져두고 온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평민의 기세에 눌린 자신들의 모습이 수치스러웠던 건지, 붉은색 스카프를 두른 2학년생 하나가 마린케이의 이마 위로 겁 없이 검지를 놀렸다.

“이 평민 새끼가 뒈지고 싶나.”

“……아.”

기분이 나쁘다 못해 더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차라리 뺨을 때리지. 그랬다면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디서 건방지게 두 다리로 서서 와? 너같이 기고만장한 평민 새끼들은 한번 혼 좀 나야 돼. 이 새끼들이 나라에서 오냐오냐해주니까 윗물 무서운 줄도 모르고.”

그때부터였다. 성격 나쁜 귀족들이 불쌍하고 가엾은 평민 수련생을 괴롭히는 모습이었던 수련장의 상황이 기괴한 형태로 뒤바뀌기 시작한 것은.

“뭐, 뭐야!”

마린케이는 귀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그 다리 밑을 기었다. 불쑥 치고 들어오는 모습에 그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지만, 그건 이미 상황이 변질되고 난 후의 일이었다. 단숨에 기어서 다리 사이를 통과한 마린케이가 먼지 묻은 소매를 털어내며 말했다.

“실수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전혀 용서해달라는 표정이 아니다. 이번엔 정적 수준이 아닌 적막이 이어졌다. 신경 쓰지 않고서 제 할 일을 하고 있던 수련생들조차도 입을 벌리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수군거리는 말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적막 속에서, 오직 마린케이만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주변을 흘겨보고 있었다.

“야. 쟤 좀…, 또라이 새끼 같은데?”

처음 마린케이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던 검은 머리 수련생이 질겁하며 속삭였다. 주근깨가 점점이 박혀 있는 하얀 콧잔등을 내려다보던 마린케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죄송해요.”

절대 죄송한 표정이 아니다. 저건 진짜 절대 죄송한 표정일 수 없었다. 순간 귀족 무리는 고민에 휩싸였다. 쟤가 지금 4황자를 믿고 저러는 걸까? 아냐. 4황자의 정부라더니, 저건 너무 평범하잖아.

그러거나 말거나, 나무토막처럼 우뚝 서서 그들의 말을 기다리던 마린케이는 다시금 엉겨 붙기 시작하는 머리칼을 거세게 털어냈다. 머리칼이 다 쥐어 뜯겨 나갈 정도로. 그로서는 당장에라도 눈앞의 머저리들을 후려 패고 싶은 충동심을 참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평민이 폭주하고 있는 것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로도 비슷하긴 했다.

「케이. 잘 들어. 곤란한 상황에는 미친 척을 해. 귀족들이란 게 그렇거든. 아픈 사람들은 건드려도 미친 사람들은 건드리지 않아. 괜히 얽혀서 곤란해지기 싫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맞서지 말고, 차라리 똥 묻은 개가 되라는 거야.」

가쉰 제국의 비수도 지역 상권에서는 암묵적인 성차별이 심각하게 내려앉아 있다. 그 안에서 쌈짓돈 몇 푼으로 한 칸짜리 횟집을 개업한 마린케이의 어머니께서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픈 사람 말고, 미친 사람이 되라고. 그녀는 글 한번 배운 적 없는 까막눈이었지만, 삶의 이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린케이는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곤 했던 어머니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마지막으로 머리를 털었다. 그리고 말했다.

“시키실 거 더 안 남았으면, 가서 연습해도 되죠?”

어벙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귀족들에게 기괴한 미소를 지어준 마린케이는 유유히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명문 귀족 가의 자제들만 모여 있는 퍼스트 클래스라더니, 순 머저리들뿐이다. 물론 검술이나 사격 실력은 저들이 뛰어날지 몰라도, 기백과 담대함에 있어서만큼은 평민만큼도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건 뒷골목을 더럽게 굴러본 적 있는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삶의 태도이자 지혜다. 잃을 것이 없는 인생은 고로, 지킬 것도 존재하지 않는 법이니까. 그러나 마린케이가 자신의 목검을 다시 손에 쥐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흘러야만 했다.

“너지?”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한 금발에 푸른 눈. 메르헨 해양처럼 빛나는 두 눈에 압도당한 듯 한 발자국도 더 움직일 수 없었다. 그것은 비단 마린케이에게만 해당하는 사항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대치 상황에 놓여 있던 귀족들조차도 소리 없는 비명을 삼키며 마린케이의 목검을 집어 들고 있는 미남자를 바라보았다.

신이 얼마나 사랑하셨기에 저런 생김새를 가질 수 있는 걸까. 마린케이는 신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가 신이 온갖 노력을 기울여 만든 최고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목 뒤로 침을 넘긴 마린케이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뭔진 모르겠는데 나 아냐. 얽혀서는 좋을 것 하나 없는 남자다. 왜냐고? 그거야 저 새끼가 금발이니까! 벌꿀 색에 가까운 화려한 금발과 형형한 푸른 눈은 황실의 상징이다. 거기다 저 반듯하게 잘 깎인 이목구비와 분위기까지.

본의 아니게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었던 4황자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찬란한 푸른 눈에, 마린케이는 제 운명이 기구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샤를 소피아 엔스. 엔스 황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황태자로 불리고 있는 남자.

“너 맞잖아. 갈색 머리 갈색 눈. 언뜻 보면 잘생겨 보이고 또 언뜻 보면 별로인 것 같은 애.”

아름다운 황태자는 아름답지 못하게 웃으며 또박또박 내뱉었다.

“섀넌이 너 보고 싶다고 징징대는 거 참아주다 미칠 뻔했어.”

“…….”

“검 안 들고 뭐 해?”

섀넌이라면 분명 4황자의 이름이 맞을 것이다. 황족의 퍼스트 네임은 오직 같은 황족들만이 부를 수 있지 않나. 순간 마린케이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황태자가 빙글빙글 검을 돌리며 볼우물이 패이도록 깊게 웃는다. 수려한 얼굴에 보조개까지 더해지자 개안이라도 한 듯 청량감이 일었다.

“너 때문에 사흘을 기분 잡쳤으니까, 대련으로 보상해야지.”

그래. 청량감만 일었다. 청량감만 말이다. 마린케이는 기분이 몹시 짜게 식어간다는 신조어의 참된 의미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보상은 무슨 보상이야. 어떤 미친 새끼가 대련을 보상으로 내걸어.’

엔스 황가의 특이점이라면 황태자가 직접 황실 기사단을 꾸려갈 재목들과 함께 수련에 임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샤를 황태자 역시 선례를 따라 제1 왕립학교 제국기사학부의 입학생이 되었고, 절차에 맞는 수련을 이어 나갔다.

차이점이자 특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언제 어디서 발발할지 모를 암살 시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따로 기숙사를 배정받는다는 점 정도다. 물론, 그 안에 황태자는 따로 식사를 할 수 있다든가, 몸이 좋지 않은 날에는 훈련을 피해 갈 수 있다든가 하는 불공평한 눈속임들 역시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샤를 소피아 엔스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황태자로서의 특혜를 누리려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기숙사조차 일반 수련생들과 함께 사용하길 원했으며, 언제나 수련생들의 틈에 끼어서 식사했다.

처음엔 그런 황태자의 모습을 보며 그야말로 최고의 황제가 될 것이라 칭송했던 무리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예비 황실 기사단원들만은 달랐다. 황태자는 훈련조차도 황태자답게 했다.

풀어 설명하자면, 앞전의 모든 행동들은 단지 그가 퍼스트 클래스에 가할 직간접적인 피해들을 상쇄하기 위한 계획이었을 뿐이다. 그는 정말 한 치의 차별도 없게끔 훈련했다. 수련생들 사이에 전통처럼 퍼져 있는 망할 대련 문화 역시 그 일종이었다.

‘황태자가 대련하자는데 무슨 수로 퇴짜를 놔?’

초조했다. 목검이 아닌 진검으로 승부하는 대련도 처음 있는 일인데, 하물며 그 상대가 황태자라니. 그것도 제국민이 사랑한다는 그 남자, 샤를 소피아 엔스라니!

마린케이는 눈앞의 황태자 놈이 정말 저를 피 말려 죽일 생각인 건 아닌지 무척 의심스러웠다. 평민 출신 수련생이 들어왔다며 괴팍하게 굴었던 위 학년 귀족 수련생들조차 이번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는 일찍이 다섯 살 때부터 검과 총을 잡았던 것으로 유명한 무인 중의 무인이다. 신이 세상의 모든 은총을 황태자에게 때려 붓기라도 한 것인지, 그는 무예에 대한 열정과 재능마저도 남달랐다. 차라리 특혜를 이용해 제발 훈련을 좀 쉬어달라 간청하고 싶을 정도로 무자비하게 훈련에 임하던 것이 샤를 황태자 아니던가.

제국의 황태자가 수련원 열 바퀴를 뛰어대는데, 장차 그를 지키게 될 수련생들이라면 응당 열두 바퀴는 더 뛸 수 있어야 함에 마땅했다.

대련 역시 마찬가지다. 황태자를 지켜야 할 예비 기사단원이 그와의 대련에서 무너져 내린다면 그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또 없었다. 하지만 지금껏 황태자와의 대련에서 승리를 거머쥔 수련생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수련생들이 아무리 악착같이 달려들어도 기깔나게 승리를 가져가 버리는 약삭빠른 황태자였다. 대련을 마친 훈련생들은 다시는 황태자의 아름다운 겉껍데기에 속지 않겠노라 결심하며 잠에 들기 일쑤였다.

“단판으로 가시는 겁니까?”

심판을 맡은 검은 머리 귀족이 벌벌 떨며 물었다. 마린케이를 고깝게 흘겨보았던 두 눈에는 이제 동정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마린케이는 한숨을 내쉬며 검을 손에 쥐었다. 대충 몇 번 검만 맞부딪히다 그냥 항복을 외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목검도 아닌 진검인데, 손을 잘못 놀렸다가 저 아름다운 얼굴에 생채기라도 입히면 더도 덜도 할 것 없이 사형. 딱 사형이었다.

“좋습……”.

“삼세판.”

이 새끼가 미쳤나. 순간 아랫입술이 떨려왔을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세 판이나 하자고? 망할 대련을? 이쯤 되니 황태자의 심보가 대단히 궁금해질 뿐이다.

평민 하나를 아예 잡아다 족칠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겉가죽이 아무리 아름다워 봤자 그 속에 마귀가 들어 있으면 아름답지 않은 것만 못하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옳았다. 마린케이는 오늘따라 유난히 그리워지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대련장에 발을 들였다.

이윽고 휘파람 소리와 함께 대련이 시작되었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순간, 마린케이의 두뇌는 지구 반 바퀴를 돌 정도로 쉴 새 없이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더 참신하게, 그리고 편안하게 대련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 잠시 딴생각을 하자마자 무시무시한 속도로 저에게 내려쳐 오는 검을 피하며, 마린케이는 짧은 호흡을 내뱉었다.

“섀넌 새끼 때문에 돌아버리는 줄 알았어.”

두 개의 검이 첨예하게 부딪치며 커다란 마찰음을 일으켰다. 가까이 몸을 붙인 황태자 덕분에 마린케이는 이를 악물며 그 무게를 버텨내야만 했다. 미청년의 목소리는 꿀이라도 떨어지는 듯 달콤했지만, 그 내용만큼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냥 기절시켜 버릴까 진심으로 고민했으니까.”

황태자의 형형한 눈빛을 마주하며, 마린케이는 이대로 누구 하나가 기절해 버렸으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소원을 빌었다. 검이 튕겨 나가며 왼쪽 허벅지로 무게 중심이 쏠렸다. 황태자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서 다시금 허리 쪽을 겨냥해 왔다.

제기랄. 이 새끼는 진심으로 저와 대련을 벌일 작정이었다. 생각하는 것을 포기한 마린케이는 묵직한 힘을 실어 그의 검을 허공으로 튕겨냈다. 그리고 깨달았다. 황태자는 그저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안타깝게도 그 대상이 자신이 되었을 뿐이고. 화풀이는 또 제 주특기였던지라, 그를 비난할 마땅한 논리를 찾아내지 못한 마린케이는 이를 악물며 대련에 임했다. 그 격정적인 광경에 수련생들조차 긴장된 기색으로 대련장 안의 상황을 주시했다.

황태자의 검술은 그야말로 정석적이었다. 그의 동작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으며, 그 속도나 세기는 무서우리만치 일정했다. 호흡에서조차 일정함을 유지하고 있는 경악스러운 모습에 수련생들은 진심으로 감탄을 토해냈다.

그에 비하면 상대 쪽의 검술은 그야말로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잡다한 동작은 제국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검술과는 매우 거리가 멀어 보였다. 황태자의 검술이 무척이나 세련된 축에 속했다면, 마린케이의 검술은 속된 말로 무척이나 야비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승부의 추는 아직까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발목 한 대 후려 찼으면 내가 이기는 건데.’

마린케이는 눈앞의 상대가 황태자라는 피치 못할 사실에 극도의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는 세상에서 기사도라는 문화를 가장 경멸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적군에게조차 예의를 갖추고 존중을 보이라는 왕립학교의 가르침은 마린케이에게 어떠한 울림도 주지 못했다.

살아남고자 한다면 예의와 존중 따위는 내다 버려야 함이 마땅하다. 예닐곱 먹은 어린아이들조차 사소한 연유로 목숨을 잃고 마는 것이 마린케이가 살아왔던, 동시에 살아갈 세상이었으니까. 백 년 전 가쉰, 드윈, 화언국의 삼정(三正)회의 이후 전쟁 종식 선언이 체결되었다지만, 마린케이의 삶은 이름만 인생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는 전쟁터 한복판이나 다름없었다.

「아직도 화가 가득한 검이구나.」

마린케이는 제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검술에 대한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늘어놓던 적갈색 머리 사내를 떠올렸다. 그 검이 누군가를 향하는 순간 패배자는 네 자신이 될 것이다, 하던 다정한 목소리까지도. 태어나 하나뿐이었던, 그렇기에 결코 잊을 수 없던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긴 마린케이는 순간 황태자의 빈틈을 향해 검을 세워 들었다. 오른쪽 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쥐고, 왼쪽 손으로는 가까운 날붙이를 붙잡은 과격한 움직임이었다. 그는 황태자가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며 드러난 목덜미 쪽으로 검을 내리꽂았다.

그렇게, 검을 내던졌다.

날카로운 금속성의 마찰음과 함께 마린케이의 검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황태자가 마린케이의 가슴을 겨냥한 것 역시 그와 동시였다. 두 손을 높이 들어 올린 마린케이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제 패배를 알렸다. 황태자의 검은 여전히 마린케이를 향한 채였다.

“졌습니다.”

마린케이가 허탈하게 웃으며 심판을 돌아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심판이 화들짝 놀라며 황태자의 승리를 외쳤다. 황태자가 검을 물리자, 기다렸다는 듯 수련장 여기저기서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수련생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놀라운 대련이었다. 저 평민, 꽤 쓸 만하잖아? 누군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속삭였던 것도 같다.

“굳이 삼세판까지 갈 필요 없겠네요.”

검을 잃은 기사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다. 그걸 알기에 마린케이는 일부러 대련장 밖으로 검을 내던졌다. 황태자는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그런 마린케이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따가운 눈총에, 마린케이는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

빌어먹을. 차라리 발목 좀 후려 차고 이겼어야 했는데. 마린케이 이스턴은 또다시 지나간 결정에 대한 후회를 품기 시작했다. 벌써 몇 번씩이나 황태자를 피해 길목을 옮겨 다니던 와중, 이제는 정말 건물에 불이라도 질러 퇴학당해 버릴까, 하는 무서운 생각까지 품게 되었던 탓이다. 그만큼이나 황태자 새끼는 집요했다. 집요하기만 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것이다.

“평민 주제에!”

질릴 정도로 이어지는 시기 어린 목소리들을 들으며, 마린케이는 신경질적으로 배식판의 소시지를 집어 먹었다. 안 들리는 척 묵묵히 식사를 하려다가도 조금만 시선을 들면 그 어여쁜 눈을 샐쭉 접어 웃어 보이는 황태자 때문에 졸도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 새끼는 진짜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울어서 나아질 상황이었다면 진작 아이처럼 엉엉 울었을 것이다.

망할 대련 이후, 황태자는 작정한 듯 마린케이를 쫓아다니며 혼자만의 친목 다지기를 시작했다. 높고 고귀한 신분의 그가 어째서 제 앞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건지, 마린케이는 아직까지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실은 딱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으며, 그럴 만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는 편이 더 적합하다.

그러나 마린케이가 무슨 불손한 생각을 품고 있든 간, 황태자는 고아한 몸짓으로 포크질을 이어갈 뿐이었다. 그 모습에 마린케이는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양아치 새끼.”

“응?”

하마터면 황족 능멸죄로 지하 감옥에 끌려갈 뻔했다. 아니지. 요새는 감옥 밥도 잘 나온다던데, 차라리 자진해서 들어가 보는 편이 더 현명한 판단일 수 있었다. 마린케이는 자신의 스푼 위에 얹어진 소시지 조각을 바라보며 침음을 삼켰다.

“제가 또 소시지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아시고. 하하. 감사합니다, 저하.”

“전하.”

“……”

“저하가 아니라 전하라고. 난 황태자니까.”

할 말이 없었다. 최선의 대답을 도출하기 위해 멍청한 머리를 아등바등 굴려도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해버리고 말았다. 마린케이가 아연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자, 황태자는 재촉하듯 고개를 기울여 왔다. 저하인지 전하인지 내가 알 게 뭐야. 난 그냥 못 배워먹은 평민인데! 하지만 그렇게 대답했다간 또 무슨 사달이 날지 몰라, 마린케이는 고분고분 대답을 내어놓았다.

“예, 전하. 감사합니다.”

“딱딱해. 샤를이라고 불러.”

아무래도 황태자는 제 피를 말려 죽이겠다는 극악무도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제멋대로 납득한 마린케이가 거칠게 소시지를 찍어 먹었다. 그러자 황태자는 예의 그 청량한 웃음을 머금어 보이며 붉디붉은 입술 사이를 벌렸다. 장미 꽃잎이 움직이는 듯한 관능적인 모습이었다. 물론 관능의 ‘관’자에도 관심이 없는 마린케이는 그저 식판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같은 수련생 사이에 전하는 좀 그렇잖아? 선민의식 부리는 것도 아니고.”

“아…, 예.”

“말도 편하게 해. 이름이 뭐야?”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너한테 말 놓았다가 새벽에 납치라도 당할 일 있냐? 대답을 대신하기 위해 최대한 미소 지어 보았으나, 막상 보는 이에게는 괴상망측한 표정으로밖에 비추어지지 않았다.

“이름?”

황태자의 재촉에, 마린케이는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자신의 풀 네임을 읊을 수밖에 없었다.

“마린케이 이스턴입니다.”

“마린케이? 특이한 이름이네.”

확실히 쉽게 들을 수 없는 이름이기는 했다. 하지만 뜻은 제법 사랑스러웠다. 마린케이의 ‘마린’은 어머니의 퍼스트 네임이었고, ‘케이’는 어머니의 세컨드 네임이었다. 아버지는 자식의 성까지 부인의 성을 따르게 했을 정도로 배우자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분이셨다. 제국법으로 인해 자신의 성을 아내의 성으로 바꿀 수 없는 처지를 한평생 슬퍼하고 계실 정도로 말이다. 황태자는 나른하게 웃으며 마린케이라는 이름을 혀에 굴려 보았다.

“그래. 마린보이야.”

학비가 아까워 꾸역꾸역 스튜를 밀어 넣고 있던 마린케이는 급하게 쿨럭이며 입안의 음식물들을 쏟아냈다. 일반인이라면 충분히 질겁할 만한 광경이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친절히 근처의 티슈를 뽑아 건넨 황태자가 다시 한번 속삭였다.

“너 나 죽이려 했지?”

“……”

“그래서 검 갖다 버린 거잖아. 네가 내 인생 종 치게 할까 봐.”

마린케이는 표정에 당황함이 묻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황태자를 죽이려 했다고?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야. 그건 뇌가 아니라 몸이 시킨 짓이었다. 대련 당시, 진심으로 살기를 느꼈던 마린케이는 마지막 인내심을 짜내 검을 바닥으로 내던졌었다. 황태자가 그 몇 초 사이의 고뇌를 알아차렸을 리 없었다.

마린케이는 당치도 않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황태자의 낮은 목소리는 이미 마린케이의 황태자 시해 시도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안 죽여줘서 정말 고마워. 상이라도 줘야 하나.”

“부디, 조용히 좀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쉽겠다. 절호의 기회였을 거 아냐. 그치?”

매스컴에서 보아왔던 샤를 황태자의 모습은 젠틀하고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주고, 아이가 울지 않도록 솜사탕을 사주며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이 한동안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이미 유명한 일화였다.

하지만 눈앞의 진짜 황태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린케이는 왕립학교에 입학하고서야 이미지 메이킹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매스컴이 가진 파급력과 강력함까지도.

“검은 어디서 배웠어? 제국 검술은 아닌 것 같았는데.”

글쎄. 과연 그걸 검술이라고 부를 수나 있을까. 그런 있어 보이는 말로 치환되기에는 너무도 볼품없고 값어치 없는 동작들일 뿐이었다. 한 가지 차별점이 있다면, 어린 날의 스승 같지 않던 스승이 몇 번 호되게 야단을 치며 자세를 바로잡아 주었다는 것 정도다. 하지만 그 잠깐의 교육이 평민의 못 배운 검술 실력에 영향을 미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누구한테 배웠길래 그런 검술을 써?”

“노숙자요.”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마린케이는 그것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았다. 변변찮은 숙소 없이 밤거리를 헤매고 있던 그 작자의 주머니를 털다 목덜미를 붙잡혀 집까지 끌려들어 갔으니까. 그때가 딱 세 번째 가출 5개월째였던가, 아무튼 그랬다.

생각해 보면 언제나 강인함만을 보여주시고 가르치셨던 어머니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눈물을 보이셨던 날이기도 했다. 잠시 회상에 빠져 있던 마린케이는 제게 쏟아지는 집요한 시선을 눈치채고선 서둘러 대답했다.

“노숙자한테 배웠습니다.”

“어느 동네 노숙자분? 궁금하다. 나도 가서 배울래.”

하지만 황태자와는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았다. 마린케이는 결국 입씨름하는 것을 포기한 채 다시금 스튜를 입에 밀어 넣었다. 이깟 일로 식사를 포기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한 끼에 피 같은 돈 얼마가 들어가는데. 식당의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린케이는 묵묵히 뱃속에 스튜를 저장하기 위해 노력했다.

“동쪽에서 온 노숙자분이셨나 봐.”

그런 마린케이를 잠자코 지켜보던 황태자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순식간에 식판을 비운 마린케이는 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서 멍청하게 반문했다. 네?

“네 자세. 동방 검술이잖아. 몰랐어?”

“동방 검술이라고요?”

동방 검술이라면 분명 남동쪽에 자리 잡은 화언국의 검술을 뜻할 터였다. 그 호흡법과 자세를 익히기가 여간 난해한 게 아닌지라, 제대로 된 화언의 검사가 아니고서야 가르칠 수조차 없다고 알려진 유명한 검법이기도 했다.

화언은 제국의 명칭만 사용하지 않을 뿐, 그 위상이나 규모로 보자면 가쉰 제국과 맞먹을 정도의 강한 국력을 가진 국가다. 때문에 가쉰에서도 몇 번이고 교류단을 보내 그 검술을 카피하려 시도했지만, 한 번도 완벽히 성공한 적은 없었다. 그런 검술을 내가 사용하고 있다고?

마린케이는 처음으로 황태자의 말에 반박을 던졌다.

“평범한 노숙자였습니다. 그냥 좀.”

“그냥 좀?”

특이한 사람이었다. 적갈색 머리칼은 은근히 흔하다 할 수 있지만, 그 모래 같은 피부색만큼은 쉽사리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건강하게 빛나는 피부 결 위로 햇살이 쏟아질 때면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듯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 같다.

황태자 새끼와는 다른 느낌으로 아름다운 사람이었지. 마린케이는 말을 멈추고서 잠시 입술을 씹었다. 그런 마린케이를 지켜보고 있던 황태자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내 옛 스승이 동방에 다녀온 적 있는 사람이었어. 동방 검술의 육 할을 배워왔다며 자랑질을 해댔지.”

“……”

“실력은 출중한 자였으니 믿긴 했는데, 그 검법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그것도 평민한테서? 그의 물음 어디에서도 조롱의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는 듯 보였다. 마린케이는 자신이 일생일대의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손에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상태로 생각 없이 내뱉었다.

“착각이었을 겁니다.”

“착각?”

그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는 것 또한, 그는 평생토록 깨닫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황태자는 그제야 포크를 들어 식판 위에 있던 오믈렛을 헤집었다. 한참이나 같은 행동을 반복하던 그가 한 스푼을 가볍게 떠서 마린케이의 입 가까이에 들이밀었다. 마린케이가 반사적으로 입을 벌려 오믈렛을 받아먹자, 황태자는 소리 내 웃으며 물었다. 새하얀 뺨에 박힌 보조개가 마린케이의 시야에 유난히 깊이 박혀 들었다.

“그럼 확인하게 대련 한 번 더 할까?”

***

그 이후 행해진 황태자의 지나친 관심은 마린케이의 평범했던 지난날을 평범하지 않은 오늘로 뒤바꿔 놓았다. 복도를 거닐 때마다 느껴지는 끈질긴 시선들에 마린케이는 매번 의식적으로 제 뒷머리를 쓸어내려 보았다. 뒤통수에 구멍이 나지는 않았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지금은 무탈한 것 같긴 하다만, 이게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는 알 길이 없었다. 인생의 덧없음을 느낀 그는 수련복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터덜터덜 인문학 강의실로 향했다.

그러나 오늘따라 소란스러움이 가득한 강의실을 확인하고 나서는 저절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문 바로 앞에서 서성이던 마린케이는 누군가의 혼잣말을 들으며 불길함을 느꼈다.

“어쩌면 저렇게 동작 하나하나가 우아하실까….”

우아? 대체 어떤 새끼이길래 예법을 목숨처럼 지키며 살아왔을 귀족들에게 우아하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태여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미친 황태자 새끼. 그 새끼가 바로 여기 있는 게 틀림없었으니까. 마린케이는 자꾸만 상스러운 욕설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 하는 것에 스스로 당황하고야 말았다. 이게 다 업보겠거니 생각하며 재빨리 경로를 바꾸면서도 괜히 짜증이 솟구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강의쯤이야 인문학 말고 정치학 수업 먼저 들으면 되는 것이니 상관없었지만, 황태자 하나 때문에 안 그래도 바닥이었던 인생이 더욱 나락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아 신경질이 났다. 이 정도면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곧바로 패악을 부릴 수 있을 수준이었다.

샤를 소피아 엔스는 장차 왕립학교 학생들의 주군이 될 사람이자 가쉰의 황제가 될 사람이었다. 그러니 왕립학교로서는 그의 편의를 맞춰주기 위해 간과 쓸개를 다 빼줄 수밖에 없었기에, 황태자는 기사 수련을 제외한 모든 강의를 이수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런 그가 굳이 수업을 듣겠다고 나선다면 최대한 마주치지 않는 쪽이 좋았다. 방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왜 저 새끼가 정치학 강의실로 들어오는 거지? 인문학 강의실에 있던 거 아니었어?

“마린케이?”

이 순간 마린케이가 하나 간과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왕립학교의 본질적인 요소에 관한 것이었다. 표면적으로는 평등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가장 차별이 난무하는 공간이 바로 제1 왕립학교였다. 내로라하는 집안의 자제들이 모인 곳이니만큼 학생들 사이의 기 싸움도 치열했고, 신분 높은 자에게 주어지는 특혜들도 대단했다.

마음대로 강의실을 옮겨 다닐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어느 수련생이 어느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지까지 손쉽게 알아낼 수 있는 것이 바로 가진 자의 권리다.

그런 곳에 입학한 까마귀는 결코 백로들의 새하얀 깃털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었다. 마린케이는 제 검은 깃털이 하얗고 고결한 백로의 그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 그러니 더욱 주어진 대로 충실하게, 성실하게 졸업만 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되면 졸업 후 적어도 입시 학원의 강사쯤은 할 수 있게 될 테니까.

이래서는 졸업이나 무사히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마린케이는 제 이름을 부르는 낯익은 목소리에 들으라는 듯 크게 한숨을 뱉었다. 그가 자리를 잡은 곳은 정치학 강의실 중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인 쓰레기통 옆자리였다. 역겹고 정겨운 패스트푸드 냄새가 솔솔 풍겨오는 명당에서 마린케이는 오늘도 소년만화를 읽을 생각이었다.

적어도 이 양아치 새끼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고 할 수 있겠다. 벌꿀 같은 금발이 이마 위로 잔뜩 흐트러져 있는 황태자가 마린케이를 보며 인사를 건넸다.

“이것 참 기가 막힌 우연이네.”

그러면서 슬쩍 의자를 끌어 앉는 폼이 하나도 우연 같지 않았다. 마린케이는 그의 인사에 딱딱하게 대답했다.

“안녕하십니까.”

“말 놔.”

지난번에 있었던 추가적인 대련 신청을 거절한 후, 마린케이는 줄곧 눈에 띄게 황태자를 피해 다녔다. 저 반짝이는 금발과 한 번이라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얼마나 사력을 다했는지 모른다.

“이번 주 일요일에 시간 돼?”

모두의 시선이 아닌 척 두 사람을 향해 꽂혀 들었다. 쓰레기통 옆자리에 앉아 생글생글 웃고 있는 황태자라니. 샤를 소피아 엔스라니? 마린케이는 현실을 부정하며 가까스로 목소리를 내었다.

“훈련 있습니다.”

간결하고도 명료한 거절에 황태자는 하하, 소리 내 웃었다.

“무지 변명 같다.”

“……”

“절대 아니겠지만.”

이 새끼가 무슨 프린스 챠밍이야. 마린케이는 황태자가 지나갈 때마다 프린스 챠밍을 외치는 몇몇 무리들의 모습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쩜 저렇게 아름다우실까, 하며 넋을 놓던 그 황송한 얼굴들을. 그러나 말하는 본새만 봐도 황태자는 전형적인 양아치 새끼가 맞았다. 저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마린케이가 기계처럼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뭘 또 죄송까지 해? 훈련 끝나고 대련하면 되는데.”

“…새벽 훈련이라.”

“그럼 한숨 자고 보면 되겠다.”

마린케이의 핏줄 선 손 밑에서 만화책이 파삭 구겨졌다. 황태자가 그런 마린케이를 보며 순수한 척 눈을 치켜떴다. 부드러운 이름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달콤하고 잘생긴 외모였다. 마린케이는 그런 황태자가 역겹고 가증스럽다고 생각했다.

“전하, 죄송하지만 제가.”

“농담이야. 한 번 대련한 상대랑은 더 안 해.”

“역시 대인배시네요. 황송합니다.”

“일요일에 보자는 건 섀넌 새끼 때문에.”

“……”

“걔 징징대는 걸 듣고만 있으라는 소린 안 할 거지? 그리고 황송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냐.”

하마터면 무려 700몬트나 지불하고 빌려 온 만화책을 찢어발길 뻔했다. 마린케이는 하하, 글자 그대로 웃으며 만화책을 꾹꾹 눌러 폈다. 누가 봐도 억지스러운 미소였건만 황태자는 구태여 지적하지 않았다. 교복 차림의 그가 소매 단추를 한 개 풀어 내리며 속삭였다.

“이번에도 죽이고 싶었어?”

그 목소리에 앞자리 학생의 귓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제게 한 말도 아니건만 작은 머릿속에는 이미 제국 황태자와의 파란만장한 러브 스토리가 펼쳐지고 있는 듯했다.

내용을 제대로 못 들었으니까 저따위 반응이 가능한 거겠지. 사람을 녹일 듯 이어지는 달콤한 목소리와 달리, 마린케이가 경험하고 있는 장르는 로맨스가 아닌 스릴러 쪽에 가까웠다. 제발 이 상황이 호러까지는 치닫지 않길 바라며 마린케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전하를 위한 검입니다. 주인을 베는 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왕립학교 입학 전 필수적으로 작성해야 하는 서약서 내용의 일부였다. 마린케이는 우웩, 토하는 시늉을 하며 사인했던 그 서약서의 내용을 직접 읊기까지 하며 황태자의 눈치를 살폈다. 죽이고 싶지 않냐고? 솔직히 약간 그런 마음이 들긴 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내뱉기에는 목숨이 너무나도 중하지 않나. 물론, 마린케이 본인의 목숨이 말이다.

“너 소년만화 너무 많이 봤다.”

그러자 황태자는 마린케이의 만화책을 제 쪽으로 뺏어가며 중얼거렸다.

“정치학 공부 열심히 하게나. 이스턴 경.”

그 순간, 마린케이 이스턴은 진심으로 황태자 암살 사건의 당사자가 되고 싶었다.

***

어이, 평민! 지겹도록 저를 부르는 말이었다. 왕립학교에 평민은 몇 되지 않았기에, 마린케이는 그 단어가 들릴 때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루 종일 빌어먹을 황태자 새끼한테 시달린 탓인지 기분이 몹시 저조해진 상태였다.

푸른색 스카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졸업 학년일 것이다. 신경질적인 얼굴로 마린케이의 앞에 선 기사 수련생이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소리가 제법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살짝 시선을 돌려 건너편을 바라보니, 저들끼리 또 옹기종기 모여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무리들이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월말고사 준비를 해야 해서요.”

대수롭지 않은 광경이었다. 마린케이는 최대한 덤덤히 대답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귀족들 중에는 평민이 자신과 눈을 똑바로 마주쳐 오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는 작자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수련생은 그것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마린케이의 머리를 냅다 후려갈겼다.

“어디서 건방지게.”

왜 망할 놈의 왕립학교 새끼들은 뺨만 피해서 때리는 거지? 그걸로도 모자라 정강이까지 걷어차 주시는 덕분에 단발적인 소리를 뱉으며 걸음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네가 뭐라고 여기 껴서 연습을 하냐고.”

마린케이가 퍼스트 클래스로 배정받은 지도 벌써 2주가 다 되어갔다. 그동안 정기 훈련을 몇 번이나 같이 했는데, 벌써 얼굴을 잊어버렸을 리도 없었다. 종합해 보면 이 망할 놈의 귀족 나으리께서 저를 샌드백 삼아 분풀이를 하고 싶으신 모양이었다.

“야, 이 새끼야. 대답 안 해? 어?”

안타까운 것은 퍼스트 클래스로 승격되며 일반 훈련관 출입을 제한당한 탓에, 오고 싶지 않아도 올 곳이 여기밖에 남지 않은 마린케이의 불운한 상황이었다. 백로들은 불쑥 나타난 새카만 까마귀의 모습이 영 달갑지 않은 듯 자꾸만 퍼덕이는 날갯짓을 해댔다.

“미처 생각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성격대로면 다신 날갯짓을 하지 못하도록 어깻죽지를 끊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왕립학교였고, 마린케이는 더 이상 철없던 열다섯이 아니었다. 그는 빠르게 사과하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무릎을 꿇으라 했다면 꿇었을 테지만, 귀족은 코웃음을 치며 그런 마린케이의 머리 쪽으로 한 번 더 손을 날렸다.

“생각을 못 하긴 뭘 못 해? 뇌는 장식으로 달고 다녀?”

“…죄송합니다.”

이번 건 꽤 아팠다. 마린케이는 순간 귀에 자그마한 이명이 울리는 것을 느끼며 입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오랜 훈련을 거친 두터운 손바닥이 사정을 봐주지 않고 손찌검을 하자, 맷집과는 상관없는 적나라한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당연한 대우라고 생각했다. 힘없고 빽 없는 평민 나부랭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들어 봤자 더 상황만 악화시킬 뿐이다. 그래서 마린케이는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헉!’

어디선가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린케이가 스스로 제 뺨을 내리치던 시점이었다. 한 대, 두 대, 세 대. 수가 늘어갈수록 눈앞 귀족의 표정이 괴상하게 무너져 갔다. 손속을 두지 않고 때려대는 통에 벌써 입안의 살이 터져 피가 고였다. 퉤. 검붉은 액체 덩어리를 뱉어내며 마린케이가 무심한 얼굴로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힉!’

또다시 숨 들이켜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다른 방식으로 숨을 들이켜는 걸 보니 똑같은 사람은 아닌 듯싶었다. 마지막 한 대까지 내려치자 얼굴이 영락없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누가 보면 집단 구타라도 당한 줄 알 법한 초라한 몰골이었다. 갈색 머리칼이 피딱지에 달라붙는 통에 더욱 불쌍한 모양새로 변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는 훈련장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희게 질려 있는 상대의 얼굴을 마주하며, 마린케이는 드디어 이 길고 지루한 시간이 끝이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눈앞 귀족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뒤를 향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마린케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얀 케이크를 들고 서 있던 수련생이 덜덜 손을 떨며 촛대 위로 불을 붙였다.

“시, 신입 축하합니다…….”

빌어먹을 기사단 문화. 이래서 왕립학교 기사학부가 몰상식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 신고식을 왜 이제 와서 하냐고! 마린케이는 여기 있는 모두가 어정쩡한 포즈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선 깊은 불쾌감에 시달렸다. 그를 두들겨 패려 했던 기사 수련생이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른다. 사실과는 달리 흡사 마린케이 이스턴이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두들겨 패기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침울한 목소리의 축하 노래가 멎어 들고서, 마린케이는 핏물 묻은 입술로 바람을 불어 촛불을 껐다. 하루빨리 자퇴하고 싶다는 자괴감 역시 함께였다. 모두 함께 숨죽여 경직된 박수를 보냈다.

신고식 이후에는 당연히 축하 파티가 존재했다. 마린케이는 평상복을 꺼내 입고서 오랜만의 외출에 나섰다. 피딱지가 가득 져 있는 얼굴을 보고 룸메이트는 마시던 오렌지 주스를 도로 뱉어내기까지 했다. 시선만 마주쳐도 시비를 걸어대던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한 마디 기분 더러운 말도 건네지 않았다. 마린케이는 얼굴에 아무렇게나 연고를 발라둔 채 분노가 가득 실린 발걸음을 옮겼다. 퍼스트 클래스라는 명성답게 축하 파티 장소 역시 교외 지역이었다.

철저한 기사도로 인해 음주는 즐기지 못하고, 각자 컵 안에 원하는 종류의 음료수를 따라 놓은 채로 건배를 외친다. 갖가지 진미들로 요리된 음식들은 무척 먹음직스러워 보였으나 입안이 죄다 터져 있는 탓에 음식을 제대로 씹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마린케이는 칠면조 요리를 잘라 꾸역꾸역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살아가며 다시는 먹지 못할 음식들인데 맛이라도 느껴봐야겠거니 싶어서였다. 비록 쇠를 닮은 피 맛이 절반이었지만, 그래도 먹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자 했다.

“다들 드시죠.”

확실히 무언가 잔뜩 뒤바뀌어 있는 모습이었다. 마린케이의 한마디에 모두가 화들짝 놀라며 접시에 코를 박았다. 갈색 머리에 갈색 눈. 밋밋하다면 밋밋한 얼굴이라고도 볼 수 있을 텐데, 이상하게도 그 서슬 퍼란 안광에 저절로 기가 죽었다.

신고식을 가장 열심히 기획했던 칼릭스 커티스는 힐끔힐끔 마린케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밋밋하게 생긴 것 같지도 않다. 생각보다 훤칠하게 생겨 먹은 얼굴이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야차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허억!

‘저 새끼였구나.’

마린케이는 첫 번째로 이어졌던 ‘헉!’ 하는 비명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하고서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놀랄 거면서 왜 안 말린 거야? 마린케이는 자신의 반응이 정상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큼, 크음…. 저번 대련은 잘 봤다.”

나름의 부채 의식을 느낀 칼릭스가 어물쩍거리며 말을 걸었다. 이제 막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구겨 넣던 마린케이가 피딱지의 영향으로 새빨개진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꿀꺽, 남은 음식물을 삼켜낸 그는 정중히 대답했다.

“예.”

말 그대로 정중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문제는 정말 정중하기만 하다는 거였는데, 아무도 그걸 지적할 수가 없어서 더 문제였다.

단절된 대화에 칼릭스는 왕립학교 입학 이후 처음으로 자퇴를 고민했다. 아무리 졸업 학년이라고는 하나, 그 역시 아직 스물둘에 불과한 어린 새싹이었다. 그러니 이런 상황을 대체 어떻게 무마하면 좋을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분위기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때문에 마린케이는 묵묵히 피 맛이 절반인 음식을 씹으며 어서 이 악몽 같은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가 색깔이 맑은 사과 주스를 한 모금 밀어 넘기며 목을 축였다. 자꾸만 목이 타는데, 배부를까 봐 음료를 많이 마실 수도 없었다.

“제, 제 것도 드세요!”

덜덜 수준이 아니라 덜덜덜덜덜 수준으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마린케이는 습관적으로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히익!”

이로써 두 번째 비명소리의 주인공까지 모두 찾아냈다. 자세히 보니 아까 케이크를 들고 서 있었던 수련생이었다. 제 스테이크 접시를 밀어주던 모습 그대로 얼음처럼 굳어 버린 수련생에게, 마린케이가 마치 ‘얼음 땡!’을 하듯 살짝 눈을 접어 웃었다.

“됐습니다.”

무난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웃음기를 머금자 제법 화사해졌지만, 그걸 깨닫기엔 눈초리부터가 너무 살벌했다. 미리 평민의 억센 기세에 당해 본 적이 있던 초창기 양아치 무리들은 벌써 테이블 멀찍한 곳에 자리 잡은 후였다.

그야말로 파국인 분위기 속에서, 오직 마린케이 이스턴 혼자만이 고독한 식사를 계속했다. 벌써 세 사람 분량의 음식을 먹어 치웠으면서도 그는 열정적으로 치아를 움직였다. 퍽퍽할 텐데 부러 음료도 마시지 않는 것이 무척이나 철두철미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자리를 끝내고 싶다고 느꼈지만, 식사를 저지당한 평민이 무슨 사이코 짓을 벌일지 몰라 아무도 선뜻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신고식 하자고 한 새끼 나와.’

누군가 마린케이 몰래 속삭였다. 계속해서 전달된 목소리는 칼릭스에게까지 이어졌다. 그는 다시 한번 자퇴를 고심했고, 어머니에게 카드를 빼앗길 자신의 미래를 상상했다.

“저 사람 태자 전하 아냐? 태, 태자 전하!”

대체 수단으로서의 휴학을 고민하던 그가, 동아줄이라도 만난 듯 크게 소리쳤다. 레스토랑 문을 열고 등장하는 화려한 미인의 모습에 모두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전하!”

“태자 전하, 보고 싶었어요!”

“흑. 드디어 전하가…!”

원래 황태자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퍼스트 클래스이긴 했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열렬한 반응에 황태자 역시 테이블로 걸어오던 발걸음을 자동 반사적으로 멈추었다. 저 새끼들이 왜 저래. 그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은 가운데에 앉아 접시에 코를 박고 앉아 있는 마린케이를 확인한 후 의심으로 바뀌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노숙자에게 동방 검술을 배워왔다던 독특한 이력의 평민이 사고를 친 것 같았다.

“여기 앉으십시오!”

황태자가 도착하자 마린케이의 앞에 앉아 있던 칼릭스는 단숨에 몸을 일으켜 자리를 비웠다. 최대한 멀리 도망가자. 카드를 뺏기는 것보다야 남은 학기를 왕따처럼 숨어 지내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가져온 현명한 결정이었다. 역시 졸업 학년인 이유가 있었다.

의자 끄는 소리와 식기 바꾸는 소리. 심지어 자신의 접시를 제외한 모든 테이블의 음식이 다시 세팅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마린케이는 오로지 킹크랩 요리를 끝장내는 것에만 집중했다. 껍질까지 모두 씹어 먹을 듯 박살 내고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나이프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턱을 받친 상태로 마린케이를 지켜보고 있던 황태자는 사뿐히 손을 들어 올려 점원을 불렀다. 조명 아래 뚜렷이 드러난 마린케이의 얼굴을 확인한 그가 순식간에 표정을 굳혔다.

“맞았어?”

이번엔 동시다발적으로 소음이 멎었다. 싸늘해진 목소리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대답해. 맞았냐니까?”

칼릭스가 새 나이프를 들고 걸어오던 점원을 향해 돌아가라며 다급하게 손짓했다. 황태자는 마린케이가 얼굴을 뒤로 빼기도 전에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가 굳어 있는 마린케이의 턱을 붙잡고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시선이 가까운 거리에서 맞닿았다.

“어떤 새끼가 애 얼굴을 이렇게 짓이겨 놨어?”

정적이 흘렀다. 아무래도 조금 전에 박살 냈던 킹크랩이 다시 몸을 조합하여 역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순간 마린케이는 자신의 인생이 킹크랩을 대신하여 박살 나고 있는 것 같다고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턱을 꽉 쥐고 있는 하얀 손조차도 매우 짜증스러웠다.

심지어 황태자는 그 반반한 낯짝을 들이밀며 제 얼굴을 요목조목 뜯어보기까지 했다. 그게 꼭 평범한 얼굴이 더 평범해지진 않았나, 가늠하고 있는 사람 같아서 괜히 더 아니꼬웠다.

“괜찮습니다.”

마린케이는 매정하게 황태자의 손을 내치며 말했다. 물론 목소리만큼은 여느 간신배처럼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누가 이랬냐니까?”

그러나 황태자는 단호했다. 살벌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마린케이는 도르륵, 눈을 굴렸다. 포크를 들고 있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옆자리 수련생이 안쓰러울 정도로 몸을 떨어댄다.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이자 신고식의 주최자인 칼릭스 커티스는 구석에 찌그러지듯이 박혀 자신의 얼굴을 숨기고 있었다.

누가 이랬냐고? 사실대로 말하자니 미치광이 황태자가 도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할 수 없었다. 마린케이는 제 뺨을 내리쳤던 감각을 회상하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황태자가 아름다운 금색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사파이어 같은 새파란 눈동자에 귀찮음이 잔뜩 묻어 나왔다.

“섀넌 새끼 이거, 또 나한테 발광할 텐데.”

4황자의 이름이 왜 여기서 튀어나오는 건지 의문이었다. 마린케이는 그제야 이번 주 일요일에 시간이 있냐며 추근대던 황태자의 모습을 기억해냈다. 그게 대련 때문이 아니라, 설마 4황자를 만나러 가자는 소리였어? 순간적으로 4황자를 향한 살의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을 이 진흙탕에 처박은 장본인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땐 정말 무슨 일을 벌이게 될지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황태자는 다시금 자리에 앉으며 곰살맞게 웃었다. 마린케이에게는 그냥 사이코패스나 다름없었지만, 그 모습에 몇몇 수련생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번 주 일요일까지는 치료해 와. 기사한테 건강보다 더 중요한 건 없어.”

이 개새끼가 뭐라는 거야. 마린케이는 어이가 없는 것을 넘어 삶에 대한 의욕이 떨어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망할 놈의 황태자는 4황자가 제게 쏟아낼 비난을 피하기 위해 마린케이를 닦달하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수련생들은 주군의 훈훈한 배려에 감동하기 바빴다. 황태자는 그 예쁜 외모로 수련생들을 홀리며 식기를 들어 올렸다.

“다들 마저 식사하자고. 건강은 중요하니까.”

“예, 전하!”

“전하……! 감사합니다.”

우렁찬 대답과 함께 중단되었던 식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접시를 뚫을 듯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대던 마린케이는 더 이상 식욕이 차오르지 않는 상황에 스스로를 안타까이 여겼다.

“마린보이라 그런가, 갑각류에 미치는 것 같던데.”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이 엿 같은 식사 자리를 끝내고서 기숙사에 돌아갈 수 있게 되기만을 고대하고 있던 찰나였다. 이번에도 신은 가엾은 까마귀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황태자가 제 접시 위에 있던 커다란 새우를 집어 마린케이의 접시 위로 옮겨주며 산뜻하게 속삭였다.

“난 잘 못 까거든. 까줘.”

개 같은 새끼. 양심 없는 새끼. 욕설이 저절로 흘러나올 뻔했지만, 그와는 아주 대조되게도 마린케이의 손은 스스럼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란한 손놀림으로 새우 살을 발라낸 마린케이가 발가벗은 새우를 던지듯 건네주며 말했다.

“더 없습니까? 새우 발라내는 건 자신 있어서요. 참고로 ‘씨 발’라내는 것도 잘합니다.”

싹싹한 웃음과 그보다 더 싹싹한 목소리 덕분에 마린케이가 어떤 단어에 강조점을 뒀는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뿌듯하게 웃으며 손을 탈탈 털어냈다. 황태자 또한 해사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빠르게 다가온 점원이 공손한 어투로 물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새우 오십 마리 정도만 더 가져다주실래요?”

새파란 시선이 얼음처럼 굳어진 마린케이의 얼굴로 내리꽂혔다.

“‘씨 발’라내는 것도 되게 기대된다. 이 기회에 나도 좀 배워야겠어.”

“.......”

“그러니까 일요일까지 연습해 둬? ‘씨 발’라내는 법.”

내가 내 무덤을 팠구나. 이래서 사람은 주제를 알아야 한다. 마린케이는 제 손으로 평범함을 포기하려 들었던 몇 분 전, 아니 불과 몇 초 전의 상황을 후회했다. 아, 어머니. 아버지….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느꼈다.

***

일요일이 다가올수록 마음은 더더욱 심란해져 갔다. 더 이상 퍼스트 클래스에서 마린케이를 건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어째서인지 룸메이트 또한 조용하기만 했으나 그와는 별개로 마린케이의 기분은 몹시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마린케이 이스턴.”

“……”

“이스턴?”

마린케이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신경질적인 인상을 가진 정치학 교수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마린케이를 흘겨보고 있었다. 그가 비뚜름하게 물었다.

“자네는 왜 아직도 수련복 차림인가?”

“훈련이 끝나자마자 바로 와서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훈련을 하루 온종일 했나 보지?”

비꼬는 듯한 목소리에 강의실 여러 군데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물원 원숭이를 대하는 듯한 눈빛과 태도였지만, 마린케이는 그것에도 전혀 상처받지 않았다. 애초에 이 정도 일로 상처 입을 만한 여린 마음의 소유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랬다면 제국에서 추방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왕립학교 입학 자체를 거부했겠지.

생존에 가장 적이 되는 두 가지는 바로 불필요한 자존심과 수치심이었다. 그리고 그 둘을 모두 내던진 채 학교에 입학한 것은 마린케이가 행한 몇 안 되는 현명한 결정들 중 하나였다. 더더욱 현명해지고 싶은 마린케이는 여상히 대답했다.

“다음부터는 꼭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줄만 아는 건 예로부터 평민들이 가진 특권이었지. 그렇지 않나들?”

지극히도 귀족스럽고 역겨운 농담에 앞자리 학생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정치한다는 새끼들이 저 모양이니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 아닌가. 마린케이는 자신을 비웃는 말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표정을 유지했다. 노쇠한 교수는 마린케이를 마지막으로 훑어보며 틀릴 게 분명한 논술형의 질문을 던졌다.

“자네. 어디 한번 왕도에 대해 논해 보게.”

“죄송합니다. 아직 답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노골적으로 자신에 대한 무시를 드러내는 눈빛에도 기죽지 않고서, 마린케이는 떳떳이 자신의 무지를 밝혔다. 그로 인해 어디선가 또 한 번의 폭소가 터져 나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마린케이의 머릿속에는 오직 어떻게 교복값을 마련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는 교복을 입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련복값을 지불하느라 교복을 구매하지 못했다는 편이 더 맞았다. 그러니 항상 수련복 차림으로 배회할 수밖에.

왕립학교는 몇 안 되는 평민 학생들의 복지를 위한 방법을 고민하는 것보다 다수를 차지하는 귀족 학생들을 위한 교칙을 제정하기 바빴다.

‘아무한테나 얻어맞고 합의금이라도 불러 볼까.’

그렇게 마린케이는 말도 안 되는, 하지만 은근히 솔깃하게 들리기도 하는 생각들을 마무리 지으며 정치학 수업을 감내했다. 마지막까지도 노교수의 눈총을 받았으나 그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였다.

‘깽값으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

평민이 다니기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불친절하기만 한 학교가 가쉰 제국의 왕립학교였다. 마린케이는 그런 왕립학교에 입학한 것을 후회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 이 학교에 입학하지 않았더라면, 제 인생은 그 불평등 속에서 끊임없이 쳇바퀴를 굴려대고 있었을 터였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쳇바퀴에 깔려 죽는 것보다 그것을 부수고 걸어 나오는 편을 택했다. 그로 인한 무게와 책임이 얼마나 되었든 간에 버텨낼 자신이 있었다. 교복 안 입고 온다고 죽이기야 하겠어, 뭘 하겠어. 떽떽거리는 목소리에 한동안 시달려야 할 테지만, 뒷골목에서 듣고 살았던 고함 소리를 회상하면 그 정도쯤이야 원만히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기숙사로 향하는 그 순간까지도 그는 교복에 대한 생각을 놓지 못했다.

***

“너 설마 그 상태로 나가게?”

침대 위에 엎드려 모바일 게임을 즐기고 있던 로건 콜린스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것 같은 룸메이트의 윽박에 마린케이는 무념무상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네.”

간결하고도 명확한 대답이었지만, 로건은 방아깨비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진녹색 눈동자가 한심해 죽겠다는 듯 마린케이의 전신을 훑어 내렸다. 낡아빠진 맨투맨과 그보다 더 낡아빠진 청바지의 조화는 그야말로 평민스럽다는 단어를 형상화한 듯했다.

스캔을 마친 로건이 빨간 머리칼을 찰랑거리며 침대 위에서 내려왔다. 터벅터벅 마린케이의 앞으로 걸어온 그가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를 만나러 가는 거 아니었어?”

“맞는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러자 로건은 새침하게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그게 아니면 네가 이 시간에, 것도 외출증을 손에 쥐고서 나갈 리가 없잖아. 평민 주제에 애인을 사귀는 것도 아닐 테고. 틀려?”

“아주 정확하시네요. 대단하십니다.”

명백한 비꼬기였음에도 로건은 자신의 추리력을 자랑하듯 한껏 턱을 들어 올리며 옷장 쪽을 손짓했다. 마린케이의 얼굴이 거의 구겨지기 직전이라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기다려 봐. 입을 만한 옷 좀 골라줄 테니까.”

그에 마린케이는 의심에 찬 눈으로 로건을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유유히 옷장으로 걸어가 평민에게 기부할 세련된 옷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내로라하는 의류 사업 가문의 차남이라더니, 별의별 옷가지들이 옷장 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첫 번째 서랍조차도 겨우겨우 채울 수 있었던 마린케이의 초라한 옷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규모였다.

스타일링을 끝낸 로건이 콧노래를 부르며 마린케이에게 다가왔다.

“너는 좀 트렌디하게 입어야 멋이 살아. 얼굴이 좀 잘생기려다 말았으니까, 단정하게 입으면 오히려 더 평범해 보인다고. 안 그래도 평민인데 평범하기까지 하면 얼마나 슬프겠냐?”

“아, 예.”

“이건 선량한 내가 너한테 적선하는 거니까 입고 버리든가, 가지든가 알아서 해.”

귀로 듣나 코로 듣나 쓰레기 같은 말들뿐이었지만, 대부분 맞는 말들이기도 했다. 마린케이는 거부하지 않고서 로건이 내미는 옷가지들을 전부 받아 들었다. 공짜로 주시겠다는데 뭐 하러 거절하겠어. 그러나 그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 마음이 뒤바뀌었다.

“뭐 해? 안 갈아입고.”

입기 싫다. 죽어도 입기 싫다. 검은 래더 재킷과 다 찢어진 청바지는 누가 봐도 뒷골목 양아치의 표본인 것처럼 느껴지는 차림새였다. 로건은 마지못해 옷을 꿰어 입은 마린케이의 모습을 보며 홀로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뿌듯한 얼굴로 자신의 미적 감각에 찬사를 보냈다.

“역시 내 안목은 대단해! 전하께서도 이 센스를 알아봐 주시겠지?”

“그러시겠죠.”

“너 전하가 옷 어디서 샀냐고 물어보시면 꼭 콜린스 가문이라고 대답해야 해. 알겠어?”

“그럴게요.”

“나중에 혹시라도 전하와 연이 닿는다면 오늘 내가 도와줬었다는 걸 꼭 전달하고. 명심해라.”

이거였구나. 그제야 마린케이는 근래 들어 성격 나쁜 룸메이트가 저를 닦달해대지 않았던 이유가 황태자로부터 기인하고 있었음을 눈치챘다. 오늘의 이유 없는 적선의 원인 또한.

즉, 로건은 출세에 근접할지도 모르는 평민에게 미래를 위한 간소한 투자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 투자였지만, 투자의 당사자는 매우 만족하고 있었으니 상관없었다. 로건의 강압적인 명령하에 터틀넥에 가죽 재킷, 찢어진 청바지로 갈아입은 마린케이는 어정쩡한 걸음으로 기숙사를 나섰다. 황량한 일요일. 황태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

『오늘 만날 수 있는 거 맞지? 좋아하시는 게 뭐래? 무난하게 고기로 준비할까?』

『스튜는 버섯으로 하려는데 괜찮겠지?』

『기사들은 인사할 때 어떻게 해? 평범하게 인사받으면 되나?』

온갖 물음표들의 향연에 머리가 다 아찔해진다. 샤를은 1분에 한 개꼴로 쏟아지는 메시지들을 확인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주말을 반납해가며 봉사하고 있는 저에 대한 고마움은 전혀 엿보이지 않는 문자들이었다.

흰 티셔츠에 검은 블레이저 하나를 걸치기만 했는데도 어쩜 저리 아름다운지. 카메라에 담기는 말도 안 되는 피사체의 모습에, 파파라치들은 본업을 망각하고서 셔터를 눌러댔다. 휴대폰을 응시하던 황태자가 이윽고 긴 손가락을 움직여 짤막한 답장 하나를 입력했다.

그 모습이 흡사 약속 시간에 늦은 사랑스러운 연인을 기다리는 모습과도 같아서, 기자들은 인생 최고의 특종을 건지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그냥 평범하게 인사하고, 스튜는 너 알아서, 음식은 갑각류로 준비할 것.』

답장을 보내는 것과 동시에 곧바로 메시지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샤를은 제 기사님을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며 잔뜩 들떠 있던 섀넌의 모습을 떠올리며 한숨을 뱉었다.

간도 크게 4황자를 겁탈하려고 했던 무뢰배는 기사로서 다시 일어설 수 없을 만큼의 중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 처리되었다. 치료가 끝나면 처벌 역시 절차대로 진행될 것이다. 감히 제국의 황자를 건드리려 하다니, 그 정도의 담대함을 수련이 아닌 희롱에 투자하고 있었다는 상황 자체가 꼴사납기 그지없었다.

더불어 그는 4황자를 구해놓고도 아무런 보상을 필요로 하지 않던 간 큰 평민의 얼굴을 덧그려 보았다. 24시간 내내 그 평민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어대던 섀넌 덕분에 ‘마린케이 이스턴’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계속해서 머릿속에 새겨 넣게 되었다.

「얼마나 신사다운 기사였는지 몰라! 기사도라는 글자를 의인화한 것 같았어. 일으켜주겠다며 손을 내미는데 너무 심장이 떨려서 맞잡을 수가 없더라고. 검술은 또 얼마나 박력 넘치는지. 난 형 말고 그렇게 검을 잘 다루는 사람은 처음 봤다니까? 아, 물론 형도 최고야. 내 달링 캐서린도 마찬가지고. 그냥 그분도 정말 멋지셨다는 얘기지.」

「네 달링은 캐서린이 아니라 레지나 아니었어?」

「사랑은 돌고 도는 법이잖아. 형도 알면서. 아무튼 그 기사분이….」

「그럼 캐서린한테 가서 말해. 귀 아프니까.」

「뭐라는 거야. 그랬다간 뺨 세 대는 거뜬히 맞을걸.」

「나한테는 안 맞을 것 같나 보네.」

「그야 형은 관대하고 아름다운 내 형님이니까. 게다가 같은 퍼스트 클래스고. 그래서 그런데 형…, 나 그분 한 번만 뵙게 해주면 안 될까? 정식으로 인사하고 싶어. 내 목숨을 구해주신 분인데.」

「퍼스트 클래스라고?」

처음엔 자신을 구해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검증 하나 되지 않은 수련생을 퍼스트 클래스로 승격시킨 섀넌의 결정이 이해되지 않았다. 제아무리 그것이 보상의 개념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퍼스트 클래스는 장차 황실 기사단에 소속될 인재들이 모인 곳이다. 샤를은 섀넌을 구했다던 수련생의 검술을 직접 확인한 후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릴 작정이었다. 물론 머리가 조금 꽃밭이라 할지언정, 제 동생이 허튼 결정을 내릴 위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았지만, 눈으로 그 수련생을 확인하는 일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평민 출신 수련생은 기사라면 누구나 혹할 법한 매력적인 검술을 구사했다. 동방 검술과 제국 검술이 묘하게 뒤섞인 호흡법과 검법은 짧은 대련만으로도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그 날카로운 검 끝이 자신의 쇄골을 향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더욱 흥미가 어렸다. 제국의 황태자를 죽이려 한 평민이라. 그 살기 어린 갈색 눈이 하루 종일 아른거렸다.

샤를 소피아 엔스는 제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황태자이기 이전에 왕립학교 수련생이었고, 기사도를 숭상하는 무인이었다. 그는 서른다섯 마리째 새우 껍질을 벗기며 이를 갈던 마린케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유려한 입술선 위로 작은 웃음이 맴돌았다.

‘황태자가 웃는다!’

그러자 주변의 모두가 황태자의 미소를 훔쳐보며 가슴앓이를 했다. 샤를 소피아 엔스는 그가 가진 모든 배경과 조건을 넘어,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남자임이 확실했다. 찬란한 금발을 바람에 흩날리며, 그는 티끌 하나 없이 새파란 눈동자를 잠시 깜빡여 보였다. 얇게 걸쳐진 블레이저가 잘 빠진 몸매 위로 살랑이듯 흔들린다.

이름만큼이나 달콤하고 아름다운 남자, 그것도 제국 황태자라는 독보적인 지위를 가진 미남자가 주위 어딘가를 돌아보며 유려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파파라치들의 시야 안으로 가죽 재킷을 걸친 탕아 한 명이 걸어 들어온 것 역시 그와 동시였다.

“왜 벌써 나와 계십니까?”

“네가 일찍 나올 것 같았거든.”

그 말에 마린케이 이스턴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 무려 한 시간이나 일찍 출발해 약속 시간보다 30분 먼저 도착했건만, 황태자는 벌써 시계탑 아래 도착해 휴대폰질을 하고 있었다.

『진짜 신사다우시겠지? 떨려 죽겠다 난 뭐 입고 있을까?ㅎㅎ』

마지막으로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한 샤를은 고개를 들어 마린케이와 눈을 맞췄다. 신사는 얼어 죽을. 웬 양아치 하나가 콧잔등을 긁적이며 그에게 인사를 전했다.

“참 대단하시네요.”

그 순간 셔터 소리가 울려 퍼지며,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카메라 안에 담겼다.

***

설마 했지만 정말 황궁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평민 주제에 엄청난 영광을 사게 되었다며 부러워하던 로건의 목소리가 귓가를 웅웅 울리는 듯하다. 하지만 마린케이는 4황자를 구한 그날 밤의 일이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는 모진 운명에 진심으로 서러움을 느꼈다.

물론, 그 선택을 후회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 해도 자신은 그 덩치를 발로 밟고 검으로 때려 반 주검 상태로 만들어 놓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렇게 소망해왔던 평범한 나날들이 제게 작별을 고한다는 것에는 서글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거품이 몇 년이나 갈까. 아니, 몇 년이 채 가기나 할까? 마린케이는 갑작스레 다가온 성공을 마냥 기뻐하고만 있을 정도로 순진한 사람이 아니었다.

“표정 펴. 가면 갑각류 천지일 테니까.”

“……”

“이러면 내가 협박이라도 해서 데려가는 것 같잖아.”

아닌 것 같냐, 이 양아치 새끼야? 마린케이는 차마 내뱉지 못한 대답을 입안에서 굴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황태자가 그런 마린케이를 내려다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무서워해야 할 건 나지. 네가 언제 날 죽이려고 날뛸지 모르는데.”

“부디 그런 말씀 좀 자제해 주시면 안 됩니까?”

이러다 정말 황실 모독 행위로 잡혀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내가. 경멸하듯 구겨진 마린케이의 표정을 확인한 황태자는 유쾌하게 웃었다. 4황자의 궁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고풍스러운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진다. 섀넌의 취향은 대중적인 가요에 더 가까웠지만, 꼴에 기사와의 만찬을 준비한답시고 취향도 아닌 음악들을 선곡해 놓은 듯했다. 평민 출신인 마린케이로서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음악이었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황태자가 들어서자, 일렬로 서 있던 가드들이 모두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저도 모르게 그들을 따라 인사하려던 마린케이는 정신을 차리고서 황태자의 뒤를 따랐다.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선망과 경외가 익숙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괜스레 반발심이 피어올랐다. 황태자가 거룩한 금발을 휘날리며 마린케이를 돌아보았다.

“하나 조언하자면, 섀넌한테 웃어주지 마.”

“예?”

“금사빠거든.”

“금, 뭐요?”

“지금은 캐서린이긴 한데 다음은 네가 될 수도 있어.”

마침내 4황자의 궁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을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시종들이 다가와 길을 안내했다. 마린케이는 조금씩 펼쳐지기 시작하는 화려한 정원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걸음을 옮겼다. 온갖 붉은색의 꽃들이 만발한 4황자의 궁은 얼핏 지상 낙원처럼 보이기도 했다.

문득 저 꽃들 사이에 황태자가 서 있으면 그림 같은 한 장면이 연출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마린케이는 한순간이라도 제가 그런 더러운 생각을 품었다는 것에 실망감을 느꼈다. 겉가죽만 아름다운 사이코패스한테 홀리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면서.

“형님! 으악, 기사님까지!”

커다란 연회장에 홀로 앉아 바이올린 소리를 즐기고 있던 4황자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섀넌 프리지아 엔스. 프리지아 필 무렵에 피어났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답게 꽃같이 섬세한 생김새를 자랑하는 4황자였다. 그가 만면 가득 웃음을 머금은 채 두 사람 쪽으로 걸어왔다. 그 온유한 아름다움조차 황태자의 옆에 서니 빛이 바래는 듯한데, 도대체 자신은 어떻게 보이고 있을 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잠시 원초적인 허무함이 찾아들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하. 마린케이 이스턴입니다.”

“네. 알고 있어요. 저를 구해주신 기사님이잖아요.”

헤헤, 철없게 웃는 모습이 강 너머 부자 동네에 살던 곱슬머리 다이애나를 닮았다. 저와 시내에서 한 번 마주쳤던 이후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관심을 표하던 소녀의 얼굴을 떠올린 마린케이는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초대해주신 게 더 감사한걸요.”

“그래도 갑작스럽게 초대한 건데 응해주셔서 감사해요. 으악, 저 지금 얼굴 안 빨갛죠?”

호들갑을 떨어대는 동생의 모습을 바라보며 황태자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생각해 보니 섀넌 역시 어릴 적부터 소년만화를 주야장천 읽어댔었다. 소년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불량배 기사의 이미지 그 자체인 마린케이에게, 섀넌이 웃으며 소리쳤다.

“허기지실 텐데 얼른 식사해요!”

그리고 다시 원점이었다. 마린케이는 속으로 세상의 모든 욕설을 집어삼키며 수박씨를 발라냈다. 섀넌은 그런 마린케이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중이었다. 오직 황태자만이 나른하게 웃으며 마린케이에게 응원을 던졌다.

「더 없습니까? 새우 발라내는 건 자신 있어서요. 참고로 ‘씨 발’라내는 것도 잘합니다.」

“‘씨 발’라내는 건 자신 있다더니 진짜였네. 너 그거 재능이야.”

저거 지금 나 조롱하는 거잖아. 정확히 핵심을 짚은 마린케이가 마지막 수박씨를 발라내고선 접시를 힘주어 내밀었다. 그러자 황태자는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섀넌을 가리켰다.

“그건 얘 거. 내 건 따로 부탁할게.”

“아냐. 난 수박 안 좋아해. 형님 드세요. 기사님도 좀 드시구요.”

몇십 분간의 사투 끝에 겨우겨우 수박 반 통을 모두 씨가 없는 상태로 만들어 놓은 마린케이는 억지로라도 미소 짓기 위해 노력하며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드십시오.”

가까스로 내뱉은 한마디에 황태자가 상큼하게 답했다.

“너 먹어. 열심히 ‘씨 발’라낸 건 넌데 내가 어떻게 먹겠어.”

“괜찮으니 얼른 드시죠.”

“대체 얼마나 잘 발라내는지 궁금했던 거야. 많이 먹어.”

저 새끼는 분명 사이코패스가 맞을 것이다. 그렇게 결론지은 마린케이가 결국 자존심을 내다 버리고선 수박을 입안에 욱여넣었다. 맛있긴 더럽게 맛있네. 겨울의 한기가 가시지 않은 이른 봄철에 여름 과일을 먹는 호사를 누리면서도 그닥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고운 분홍빛으로 물든 수박을 씹어 삼키며 마린케이는 계속해서 황태자를 저주했다.

“전하.”

“응?”

“수박을 드시고 싶으시면 꼭 말씀하십시오. 열심히 ‘씨 발’라 드리겠습니다.”

평소보다 훨씬 더 강조점을 두어 말하자 황태자의 우아한 손등 위로 푸른 힘줄이 돋았다. 한껏 높아진 텐션 속에서, 4황자는 분위기를 풀어보겠답시고 마린케이에게 말을 걸었다.

“기사님께서는 취미 생활 같은 거 없으세요?”

“가끔 뜨개질을 합니다.”

“뜨개질이요?”

“네. 돈이 꽤 돼서.”

다시금 말이 멎었다. 마린케이는 자신이 의식의 흐름대로 대답했다는 것을 깨닫고서 4황자의 눈치를 살폈다. 안쓰러운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던 4황자가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며 물었다. 휴머니즘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라도 한 편 감상한 듯한 모양새였다.

“기사님. 뭐 가지고 싶은 건 없으세요?”

조금 뜸을 들이는 듯하던 마린케이는 여상한 투로 대답했다.

“가지고 싶은 건 없고, 필요한 건 있습니다.”

“앗, 그게 뭔데요?”

“교복이요.”

사실 섀넌 프리지아 엔스는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기사에게 보답하기 위해 얼마 전, 심혈을 기울여 단검 하나를 세공했다. 물론 직접 한 것은 아니지만, 설계며 감독까지 모두 그가 도맡아 진행한 일이었기 때문에 더욱 애착이 컸다. 그 노력을 알고 있는 샤를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마린케이를 향해 되물었다.

“정말 그거면 되겠어? 일생에 한 번뿐인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마린케이는 한층 더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거면 됩니다.”

무뚝뚝한 대답에 결국 참지 못하고서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폭소하는 황태자의 모습에 마린케이는 불퉁하게 표정을 구겼다. 이상하게 황태자와 함께 있을 때마다 빈번히 조롱을 당하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섀넌은 마린케이의 선물로 준비해왔던 루비 박힌 단검을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기사님, 그래도 정말 가지고 싶으신 건…….”

“교복이요.”

대체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하는 건지. 심지어 마린케이는 기대감이 잔뜩 실린 눈빛으로 4황자를 바라보며 쐐기를 박았다. 교복이면 충분합니다. 그러자 섀넌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님은 물욕도 없으시구나. 청렴하기 그지없는 성정이었지만, 어째선지 맘처럼 기쁘지가 않았다.

그런 섀넌의 속도 모르는 마린케이는 뜨개질을 약 2년 정도는 반복해야 마련할 수 있는 교복값을 생각하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안 그래도 교복값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드디어 한시름 놓을 수 있겠다. 거듭 말하지만, 평민의 삶에 있어 가장 독이 되는 것은 자존심과 수치심이었다. 그것은 마린케이가 직접 뒷골목을 구르고 구르며 배울 수 있었던 삶의 이치였다. 눈에 띄고 능력 있는 평민이 죽어 나가는 세상 속에서 살아온 그는, 욕심부리지 않는 것이 가장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삶의 방식이라는 가르침을 한평생 마음에 새기며 버텨왔다.

황태자의 시선이 그에게 고정돼 물끄러미 이어졌다. 안타깝게도 마린케이는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교복이라는 단어에 그렇게도 환하게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웃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황태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그것이 곧 자신에 대한 경고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섀넌의 어리둥절한 눈빛이 황태자를 향했다.

“형님?”

마린케이는 솟아오르는 오한을 느끼며 자신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왜 이렇게 소름이 돋지. 뒷골목 좀 굴러 본 경험이 있는 만큼, 그는 짐승 같은 육감을 가지고 있었다.

“마린보이야.”

황태자의 목소리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퍽이나 다정하게 들려왔다. 마린케이의 직감은 이번에도 맞아떨어졌다. 황태자는 왕립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그 어느 때보다도 유쾌함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몇 번 학교에 등교하는 척만 하더라도 곧바로 졸업장을 받을 수 있던 그였지만, 그는 자신이 원하는 인재를 찾기 위해서라도 왕립학교의 이곳저곳을 직접 뛰어다녔다.

그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인재상은 간단히 설명할 수 있었다. 적당히 처세술에 능하며, 적당히 혁신적이고, 적당히 낭만을 아는 인재. 물론 특출난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기본 전제 조건이었다. 그래서 그는 굳이 들을 필요 없는 정치학 강좌와 인문학 강좌 등을 돌아다니며 인재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찰나의 인연이 자신이 꿈에 그리던 인재를 데려와 줄 것이라고는, 천하의 샤를 소피아 엔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바였다.

저를 부르는 달큰한 목소리에 마린케이는 경계 어린 눈빛을 숨기지 못하며 고개를 들었다. 저 새끼가 또 뭘 잘못 처먹어서 저러지. 경악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황태자의 얼굴 앞에서 이런 불손한 생각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제국 땅 위, 마린케이 하나뿐일 것이다.

“마린보이야.”

“……”

“왜 대답 안 해?”

대답하면 제 인생이 더 삭막해질 것 같아서요. 이렇게 내뱉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정말 미치고 팔짝 뛰기 일보 직전이었다. 마린케이가 자신이 가장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순간, 황태자는 한발 더 빨리 움직였다. 기회의 다른 이름은 타이밍이다.

“서약서 다시 쓸래? 나랑.”

그 순간 섀넌은 테이블 밑으로 나이프를 떨어뜨렸다. 마린케이의 상황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입안에 잔뜩 물고 있던 음식물마저 쏟아낼 뻔한 마린케이가 다급하게 물을 찾았다. 그는 벌컥벌컥 찬물을 들이켠 후에야 비로소 입을 열 수 있었다.

“방금…….”

“입학식 때 누구한테 임명받았어?”

그러나 황태자는 마린케이의 대답이 궁금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서약서를 다시 쓰자는 것은 지금부터 왕립학교 내의 마린케이의 위치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입학식 당시 간소하게 치러졌던 기사 임명식을 제대로 선포하고, 무려 황태자의 이름 아래서 다시 서약서를 작성하게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 자체만으로도 제국 기사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업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마린케이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고 싶었다. 더 이상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않고, 억압받지 않으며, 평화로이 살아갈 수 있는 나날을. 정적이 길어질수록 황태자의 보조개 역시 우물처럼 깊어졌다. 마침내 마린케이가 운을 뗐다.

“전하, 저는.”

평범한 색상의 갈색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마린케이는 망설이지 않고서 내뱉었다.

“저는 기사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그 말이 전부였다. 담백하면서도 솔직하게 이어진 거절에, 황태자는 짙게 미소 지었다. 섀넌이 토끼 눈을 뜨며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왕립학교에 입학하는 순간 이미 기사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정작 본인은 기사가 될 생각이 없다니 그건 또 무슨 경우인가. 섀넌이 혼란스러움을 느끼던 순간이었다. 황태자가 말했다.

“한 번뿐인 기회일 수도 있어. 다신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

“괜찮습니다.”

조금 전과 똑같은 레퍼토리였다. 마린케이는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대답했다.

“교복이면 충분합니다.”

웃지 말라니까. 샤를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샤를 황태자의 취향은 펑키 보이…?! 비밀 데이트 포착!』

저를 향해 쏟아지는 날카로운 시선들을 무릅쓰고서 마린케이는 오직 앞만 보고 달려나갔다. 황태자를 찾아내야 한다. 4황자와의 만남 이후, 때를 기다렸다는 듯 3군 일간지에선 앞다투어 황태자에 관한 스캔들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상대는 다름 아닌 제1 왕립학교의 학생이며, 그것도 퍼스트 클래스 소속 수련생이라는 사실에 포털이 시끄러워졌다. 검색어에는 마린케이 이스턴의 이름이 계속해서 오르내렸다.

황실에서 정식으로 일간지를 고소하긴 했지만, 이미 희대의 스캔들은 SNS를 통해 급속도로 퍼져나간 뒤였다. 제국은 열린 분위기를 추구하여 개인의 성적 취향에 대해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였지만, 그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었다. 게다가 스캔들의 주인공은 무려 황태자 아닌가. 제국민 전부가 사랑하는, 매일같이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덧붙는 그 남자!

원색적인 악플들은 전부 황태자가 아닌 마린케이를 겨냥했다. 개중에는 그가 황태자에게 접근하기 위해 부러 왕립학교에 입학했다는 악질적인 루머가 뒤섞여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마린케이는 동방 기사-이것도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의 일방적인 추천장에 의해 입학 허가서를 받았고, 부모님의 기대에 못 이겨 억지로 왕립학교에 입학한 것뿐이었다. 황태자와의 스캔들은 더더욱 사실일 수 없었다. 둘은 그저 대련과 식사를 한 번씩 같이 한 적 있는 동급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다만 특이점이 있다면, 마린케이가 4황자 섀넌을 겁탈 위기에서 구해주었다는 것 정도일 뿐이다. 대노한 마린케이는 왕립학교의 거의 모든 장소를 이 잡듯이 뒤지며 다녔다. 하지만 황태자는 벌써 신기루처럼 홀연히 사라진 후였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뻔뻔한 새끼가 고작 스캔들 하나 정도로 숨어 있을 리 없었다.

비록 황태자의 평판에는 일말의 흠도 되지 못할 자극적이고 수준 낮은 스캔들에 불과했지만, 마린케이에게는 달랐다. 그는 황태자를 대신해 언론의 희생양이 되었다.

모두가 사냥꾼처럼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뒤쫓았고, 어느새 그는 사냥감이 된 것처럼 언론의 눈을 피해 달아나야만 했다.

제 안에 들끓고 있는 분노가 황태자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저를 향해 말도 안 되는 추문들을 쏟아놓는 세간을 향한 것인지 좀처럼 구별되지 않았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잠깐, 잠깐만!”

그때, 누군가의 손이 마린케이의 어깨를 낚아챘다. 순간 평정심을 잃은 마린케이는 그 손을 무자비하게 뒤로 꺾고서 상대를 바닥에 무릎 꿇렸다. 째질 듯한 비명 소리와 함께 붉은색 스카프를 목에 맨 수련생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전하…, 전하께서 보내서 왔어!”

“황태자?”

그제야 마린케이는 던지듯 그의 팔을 놓아주었다. 공포스러운 눈으로 마린케이를 바라보던 남자가 그 살기 가득한 눈빛에 몸을 떨며 대답했다.

“폐수련장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하랬…….”

그는 수련생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걸음을 돌려 폐수련장으로 향했다. 빌어먹을 황태자 새끼! 이 손으로 죽여버리고 말 것이다. 황태자 시해 사건의 장본인이 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제 인생은 이미 찢겨 나갈 대로 찢겨 나가버리고 말았으니까.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이름을 알리고 싶은 적 없었다. 애당초 이름을 알리고 싶은 욕심조차 없었다. 마린케이는 까마귀였다. 백로들투성이인 왕립학교 안에서, 그는 완벽한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했다. 괜히 제 검은 깃털이 강물에 휩쓸려 내려갔단 것만으로 거대한 날갯짓에 뺨을 얻어맞고 싶지는 않았다.

폐수련장의 고철 문을 열고 들어간 마린케이는 뜀틀 위에 앉아 있는 황태자를 발견하고 호흡을 멈추었다. 내 인생이 어쩌다 이렇게 나락으로 치달았을까. 모든 것이 다 저 새끼 때문이다. 새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는 순간, 그는 참지 못하고서 황태자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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