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몰래 온 가랑비 옷깃을 적신다 (2/12)

2. 몰래 온 가랑비 옷깃을 적신다

그러나 코앞까지 다가온 주먹에도 황태자는 그 예쁜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진짜, 딱 한 대만 때리면 안 되려나. 얌전히 기절시켜 놓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일생일대의 고뇌에 시달리던 마린케이는 결국 허탈하게 주먹을 내려놓았다.

대신 으름장을 놓듯 황태자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핏발 선 두 눈에 분노가 가득했다. 작게 한숨을 내쉰 황태자는 그의 손등을 느슨히 겹쳐 잡으며 속삭였다.

“여기 감시 카메라 없어.”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마린케이가 되물었다.

“그래서요?”

“때릴 거면 지금 때리라는 얘기야.”

웃음기 하나 없는 고요한 시선이 마린케이에게 향했다. 황태자의 말이 옳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각지대를 확인하자,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대충 걸려 있기만 한 CCTV 잔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게다가 조명 또한 박살 나 있어, 이번이 정말 태어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황태자를 구타할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그의 태도를 보아하니 오늘 이 자리에서 두들겨 맞게 된다고 해도 절대 발설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린케이는 제 분수를 잘 알았다. 자고로 주제를 아는 자는 그릇된 선택을 하지 않기 마련이다. 가까스로 손에서 힘을 풀어낸 마린케이가 엉겨 붙어 있던 황태자를 거칠게 밀어냈다. 황태자의 시선을 정면으로 맞받아친 그는 사나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감히 황태자 전하의 멱살을 잡았으니 퇴학시켜 주십시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번만큼은 진심이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황태자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뜀틀 위에 걸터앉았다. 말없이 마린케이를 바라보던 그가 단번에 “기각.” 하고 내뱉는다.

그 약삭빠른 행동에 겨우겨우 진정시켰던 마음이 다시금 날뛰어 대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며 목소리를 내뱉자, 저절로 위협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왜요? 미안하지도 않으십니까?”

지금껏 살아왔던 모든 인생과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다. 단언컨대, 태어나 한 번도 샤를 소피아 엔스의 스캔들 상대가 되고 싶었던 적 없었다. 물론 혹자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그와의 달콤한 연애 라이프를 꿈꿔보았을 것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마린케이만큼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지나가는 상상으로라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시발, 엮이고 싶지도 않았다.

예쁜 입술을 들썩이던 황태자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얼굴이 몹시나 처연해 보였다.

“못 믿겠지만, 굉장히 미안해하고 있어. 어떻게 만회하면 좋을지 고민 중이고.”

하지만 마린케이의 눈에 비친 황태자는 그저 이 모든 상황을 발생케 한 원흉에 불과했다. 원통함을 가득 담은 마린케이의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요구했다.

“퇴학시켜 달라니까요.”

상황 하나하나를 이성적으로 따져 보자면, 황태자의 잘못으로 인해 발생한 스캔들은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오히려 피해자 쪽에 가까웠다. 그러니 죄를 묻는다면 파파라치들에게 물어야 했지, 애꿎은 황태자를 비난해서는 안 됐다. 그는 결백했고, 게다가 진심을 다해 사과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마린케이는 언론을 향한 분노를 표출할 길 없는 소시민이었다. 작은 상권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평민이기까지 했으니 언론사를 고소할 여력조차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느 누가 스캔들 상대를 눈앞에 둔 채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황태자를 비난하지 않고서야 도저히 이 분노를 삭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황태자는 결정한 듯 뜀틀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는 평범한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적어도 이 모습만큼은 일간지를 수놓던 화려한 미남자와 거리가 멀어 보였다. 반반하기 짝이 없는 낯짝은 그대로였지만, 적어도 사람을 둘러싼 분위기는 그러했다. 황태자에게서 풍기는 낯선 분위기를 감지한 마린케이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는 곧바로 반박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마린보이야.”

“마린케이입니다.”

“그래. 마린보이.”

이 상황에서도 말장난이나 치고 있는 황태자 새끼는 진정 정신이 나가버린 새끼인 게 틀림없었다. 이런 새끼한테는 황태자라는 칭호를 붙여 주기도 아까웠다. 황태자는 트레이닝복 저지를 벗어 마린케이의 어깨 위로 둘러주며 말했다.

“일단 이것부터 입어. 너 반팔 차림인 건 알아?”

“건강해서 필요 없습니다.”

그 호의를 단박에 내치는 것은 전적으로 마린케이의 몫이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샤를이 어깨를 으쓱이며 저지를 가져가 자신의 팔을 꿰어 넣었다. 잠깐 발휘되려던 기사도는 물 맞은 성냥개비처럼 빠르게 식어 내렸다. 절로 실소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아직 마저 할 얘기가 남아 있었다. 마린케이는 다시 한번 퇴학을 종용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퇴학시켜 주시죠. 간단한 문장이었지만 예상했던 것처럼 성과는 없었다.

“기각.”

태어나 두 번째로 들어 보는 기각 소리에 마린케이의 평정심이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이 얼어 뒈질 또라이 새끼. 이 순간 마린케이가 가장 궁금한 것은 황태자의 정신 상태였다. 도대체 나사 몇 개가 빠져야 저 지경까지 될 수 있는 건데? 심지어 눈앞의 금발은 애초부터 나사가 없이 태어난 인간처럼 굴었다. 마린케이의 표정이 불손해지자 샤를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일간지는 고소했고, 지금쯤이면 반박 기사가 나갔을 거야. 네 이름도 검색어에서 내려갔을 테고. 악플러들도 대신 고소해줄게. 선처는 네 결정이긴 한데 웬만하면 합의금은 받아내. 최대한 많이. 그래야 다신 허튼짓 못 하거든.”

깔끔한 정리였다. 그래서인지 마린케이는 순간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있어 이번 사건은 인생 최초의 스캔들, 그리고 아마 앞으로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거대한 스캔들에 해당했으나, 샤를에게는 일상이나 다름없는 흐름에 속했다.

실제로 그는 교제 중이었던 연인까지도 친구 사이라는 말로 일축하며 고소를 진행한 적 있는 셀럽이었다. 그 이전에 막강한 권력을 가진 가쉰의 황태자이기도 했지만.

‘샤를 소피아 엔스를 가지려면 제국을 가져야 할 것이다.’

국민 연예 프로그램의 MC가 우스갯소리로 내뱉었던 말의 70% 정도는 진담일 것이다. 졸지에 제국을 손에 넣은 남자로 이름을 떨치게 생긴 마린케이가 멍청히 표정을 구겼다.

“그런다고 있던 일이 없던 일이 됩니까?”

“애초부터 없던 일이었어. 아님 우리 마린보이가 정말 그 야성적인 매력으로 날 홀리기라도 했나?”

악질적인 기사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 읊은 샤를이 짓궂게 웃었다. 보조개가 깊이 파인 얼굴형은 오늘도 완벽한 대칭을 자랑했다. 누구나 절로 넋을 놓게 되는 외모였건만, 마린케이는 여전히 해탈의 경지에 이른 돌부처처럼 행동했다.

“농담할 여유가 있으셔서 좋겠네요.”

황태자의 여유는 오직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어느 간 큰 새끼가 제국의 황태자를 향해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마린케이는 자신의 처지가 결국 황태자의 인간 방패로서 전락하게 될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황태자에게서 느껴지는 특권층 특유의 여유로움에 생리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트레이닝복 저지를 목 끝까지 채워 올린 샤를이 마린케이를 향해 다가왔다. 신장 차이 덕에 그를 바라보고 있던 시선이 조금 올라간다. 그에 못내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자 하얗고 곧은 손가락이 올라와 마린케이의 미간 사이를 꾹꾹 마사지했다.

다정다감한 동작이었지만, 멜로적인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다. 솜사탕 같은 목소리가 마린케이의 귓가를 적시려다, 말았다.

“정말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긴 한데.”

또 무슨 개 같은 소리를 지껄이려고? 마린케이의 눈은 이미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마린케이를 짓궂게 응시하던 황태자가 미끼를 던졌다.

“한번 해봐?”

***

안녕. 내 이름은 마린케이 이스턴. 제국의 건아답게 날렵한 몸매와 매끈한 턱선을 가지고 있지. 아, 위기에 처했던 4황자를 구해준 사람이 나 아니냐고? 하하. 이것 봐, 꼬마 친구들! 굳이 밝히고 싶진 않았지만, 먼저 물어봤으니 대답해줄게. 맞아. 나야. 멋지지? 게다가 난 그 공로를 인정받아 황태자 전하의 나이트가 되기도 했단다. 남은 생을 모두 바쳐 일하며 충성스러운 신하가 될 거야. 주군께서 나의 연정을 알아주시면 좋을 텐데!

따위의 소년만화식 전개는 마린케이의 인생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도대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여기에 입학했을까.’

입학식 날 당시와 똑같은 고민을 머리 위에 매단 마린케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두 칸 위의 단상에 앉아 있던 황태자가 고아한 몸짓으로 손을 내민다. 지루해 보이는 낯짝이었다.

사제가 일러주는 차례에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마린케이는 자신이 처한 상황 자체를 제대로 직면할 수 없었다. 굳은살이 잔뜩 박인 하얀 손 위에 입을 맞추는 그 순간까지도 같은 생각을 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태자의 개수작에 속아 넘어간 게 틀림없다고.

우직한 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온 황실 기사단장이 검을 꺼내 마린케이의 어깨며 무릎 같은 곳을 살짝씩 건드렸다.

“오늘부로 마린케이 이스턴은 오로지 주군만을 위한 영원한 검이 될 것을 맹세합니다. 경애하는 주군이시여, 나이트를 밟고 올라 밤에 불을 지피시고, 언제나 제국을 비추는 태양이 되십시오. 해질녘의 권능을 빌려 주군을 지키겠습니다.”

서약문을 읊으면서도 마린케이는 계속해서 도망칠 궁리만을 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냅다 튀어버릴까. 분명 반역자가 될 테지. 하지만 황태자를 엿 먹일 수만 있다면 반역자가 돼도 크게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마린케이는 뱀처럼 저를 꾀던 황태자 놈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서약서를 다시 쓰는 거야. 잘 생각해 봐. 감히 군신 관계에 대해 스캔들이라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 댈 멍청이들이 있을까? 마린보이야. 게다가 서약서 갱신 기간은 4년부터야. 네 졸업 시기랑도 겹치지.’

‘제가 얼간이로 보이십니까?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그딴 불공정 계약에 속아 넘어가요?’

하지만 승부사는 포기하지 않는다. 샤를이 마지막 수를 던졌다.

‘정확히 4년 후에 계약을 파기해 줄게. 넌 학부생 시절만 내 이름 아래서 온갖 특권을 다 누리며 살아가면 되는 거야. 당장은 기숙사부터 바뀌겠지. 1인실 사용해 보고 싶지 않아? 샤워실도 개인용인데, 심지어 화장실에는 비데까지 있어.’

그 얼간이가 나였다니. 서약식을 모두 마치고 나온 후에도 마린케이는 쉽사리 자괴감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박스 두 개 정도의 짐을 정리하는 것으로 기숙사 이전 준비를 모두 마친 그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 마린케이를 향해 로건이 선심 쓰듯 손을 내밀었다.

“축하한다. 평민 주제에 대단한 출세를 했네. 너희 동네에 플래카드도 걸렸겠다?”

특유의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가 괜스레 짜증을 북돋웠다. 물끄러미 로건의 손을 바라보던 마린케이는 나직한 한숨을 뱉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왜 사람 면전에 대고 한숨이야?”

앙칼진 목소리가 뒤따랐지만, 그마저도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치 제삼자가 되어 소설 속을 관람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태평함과 불안함 사이의 어느 경계를 위태로이 걷고 있던 마린케이는 “야, 평민!” 하는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

“뭘 그렇게 놀라?”

“예?”

“이것도 챙겨 가라고. 대체 사람 말을 어디로 듣는 거냐? 입 아프게 내가 똑같은 소리를 다섯 번이나 반복해야겠어?”

이 인간은 지 성질을 지가 못 이겨서 머리색이 빨갛게 변한 건 아닐까. 마린케이의 부진한 상상력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결론이었다. 로건이 한 아름 안겨준 옷들을 확인한 마린케이는 차마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며 대답했다.

“와, 정말 감사합니다.”

처참한 반응이었건만, 로건은 콧노래까지 부르며 마린케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가 파파라치 컷에서 입고 있었던 레더 재킷이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거든. S관 702호로 옮겨가는 거 맞지? 앞으로도 종종 보내줄 테니까 입고 다녀라. 이야, 평민한테 이 정도 적선이면 거의 봉사 활동 수준인데. 이건 인정 안 되려나?”

이왕 나가는 김에 한 대만 후려쳐 보고 나갈까. 상처 없이 잘 기절시켜서 침대에 눕혀 놓으면 완전 범죄일 것 같은데. 마린케이는 절대 실행으로 옮기지 못할 계획을 상상해 보며 홀로 답답함을 삼켰다. 그는 지친 기색으로 품 안의 옷가지들을 내려다보았다. 너덜너덜한 천 조각들이 도대체 옷인지 쓰레기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이딴 것도 공짜라는 정신 승리를 하며 입고 다닐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니 속이 다 메스꺼웠다. 흥흥거리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던 로건이 또다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감동에 젖어서 할 말을 잃었냐? 왜 대답이 없어?”

“진짜 할 말을 잃어서요. 말 좀 찾으면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꽃밭에서 오냐오냐 자란 도련님이라서 그런가, 로건은 마린케이의 비꼼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다. 네가 그럼 그렇지, 하며 코웃음을 친 그가 이제 그만 나가 보라며 손짓했다.

박스 두 개를 한 번에 겹쳐 들어 올린 마린케이가 꾸벅 인사한 후 방을 빠져나갔다. 근 6개월가량의 시간을 함께 보낸 룸메이트였지만, 아쉬움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드디어 저 엿 같은 성질머리에서 해방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오히려 기분이 나아지기까지 했다.

귀족 가문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가문들만이 배정권을 가져간다는 S관 기숙사 앞, 마린케이는 남은 3년을 살아가게 될 비범한 건물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이 살던 C관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아우라를 가진 건물이었다.

그래도 살아남아 보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조용하게. 까마귀의 다짐은 구름의 결을 따라 조용히 흩어져 갔다.

***

“전하. 진짜 이러시기예요?”

“나 바빠.”

“평민만은 싫다고, 그것만큼은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습니까!”

“그 평민도 너 싫어할 거라니까.”

샤를이 러닝머신의 속도를 높이며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더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실한 의사 표현에 날카로운 인상의 청년은 푹 고개를 숙였다. 식상하다, 식상해. 샤를은 또다시 삐진 척을 시전 중인 충직한 신하를 완벽히 무시하며 마저 운동에 집중했다.

“너무하십니다.”

공작 가의 차남, 피에르 셀번이 울상을 지었다. 그는 평민에 대해 불신과 거부감을 모두 지니고 있는 인물로, 마린케이와 함께 7층을 사용하게 된 입사자였다.

한 층에 두 개의 호실밖에 마련되어 있지 않은 초호화 기숙사에서 평민과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야 한다니. 아무리 다른 호실이라고 할지라도 외출에 나설 때마다 빈번히 마주치게 될 텐데, 그것만큼은 죽어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완강하게 제 의사를 피력했다.

“비어있기는 5층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압니다. 왜 하필이면 7층인데요?”

“네 그 머저리 같은 생각들 좀 뜯어고쳤으면 해서.”

참다못한 샤를이 러닝머신을 중지시키며 대답했다. 짜증스럽게 굳어진 표정이었으나 그 또한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였다. 넋을 놓을 뻔했던 피에르가 필사적으로 받아쳤다.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제발 인정해. 인정을 안 하니까 그렇게 구제 불능인 거 아냐?”

자신의 자존심을 짓밟는 황태자의 독설에도 절대 아랑곳하지 않았다. 피에르 셀번은 출중한 무예 능력과 우수한 성적으로 정치계의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엘리트였지만, 그 사상이 매우 불손하고 썩어빠진-샤를의 생각에-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제국의 남녀 차별을 비판하는 인터뷰를 하면서도 신분 차별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사람이었다. 기사도에 관한 리포트를 제출해 A+를 가져가면서도 평민의 앞에서만큼은 절대 그 올바름을 보여주지 않는다.

“전하께서는 왜 저만 미워하십니까?”

“너는 왜 평민만 미워하는데?”

할 말을 잃은 피에르가 눈을 도륵도륵 굴렸다. 샤를은 그 모습을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왜 하필 평민에게만 그렇게 모질게 구는 거냐고.”

“그거야, 그러니까, 아씨. 그건 전하께서 평민들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다! 그들은 아주 무식하고 포악해요. 공부를 해서 발전할 생각은 안 하고 자신의 환경을 탓하기만 하죠. 노력할 생각도 안 하는 주제에 어째서 보상을 바라기만 하냐구요. 말이 안 통하는 작자들입니다. 열등감에 눈이 먼 사람을 상대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은 없고요.”

대부분의 귀족들은 피에르와 같은 궤변에 힘입어 평민들을 내려다보았다. 대답하지 못하는 샤를을 보며 피에르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러닝머신 위에서 숨을 고르던 샤를이 의문에 가득 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 환경을 만든 게 누구라고 생각해?”

“예?”

“왜 그들이 노력할 생각을, 도전할 생각을 못 하는 건지에 대해서는 고민해 봤어?”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도전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사파이어 원석을 박아 놓은 듯한 푸른 눈동자가 그 이면을 꿰뚫어 보듯 단호하게 피에르를 응시했다. 입술을 달싹거리면서도 차마 마땅한 대답을 골라내지 못하는 피에르의 모습에, 샤를은 재차 물었다.

“어째서 열등감을 가지게 됐는지는?”

“……”

“무엇이 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는지는?”

질문이 계속될수록 피에르의 귓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모두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들이었다. 굳이 의심을 품으려 하지도 않았고, 의문을 가지려 하지도 않았다.

공작 가의 차남으로 태어나 세상의 특혜를 한 아름씩 끌어안고 살아왔던 피에르는 본능적으로 평민을 무시하고 하대하며 지내왔었다. 그는 제 존재의 디폴트 값 자체가 평민들과 다르게 설정되었다고 믿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이 열등해 보였다.

“피에르.”

제 무지함을 깨달은 피에르가 한쪽 무릎을 꿇어 앉으며 주군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황태자의 말을 완전히 납득할 수는 없었다.

정계의 의원들 전부가 황태자를 기가 막힌 이상주의자라 칭한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를 일컬어 현실을 모르는 꼬맹이라며 몇 번이고 비난하던 모습을 지켜본 적 있는 피에르였다. 하지만 자신은 그렇기에 황태자의 편에 서기를 택하지 않았던가. 형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제 능력을 인정해 주고 알아봐 주던 그였으니까.

“누누이 말했잖아. 신분을 보지 말고 사람을 마주해 보라고. 마린보이는 무예 능력이 출중하니까, 어쩌면 너의 대련 상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전하…….”

피에르가 감동한 표정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을 때였다.

“그리고 이건 내 생각인데.”

평소의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온 샤를이 악센트를 주며 말했다.

“너 걔한테 처맞을 것 같아.”

***

이렇게 호화로운 건물에서 살아보게 될 줄이야. 사람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른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마린케이는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최신식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며 고뇌에 빠졌다. 엘리베이터 주제에 왜 카펫이 깔려 있는 걸까. 흙먼지 가득한 제 운동화 코를 바라보던 마린케이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하여간 돈지랄을 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이럴 돈 있으면 차라리 장학금이나 주는 편이 사회 발전에 더 이바지할 수 있을 텐데. 별 뜻 없이 중얼거리면서도, 마음속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문득, 거울 속에 비친 무난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봐도 볼품없는 까마귀 같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화려한 엘리베이터 조명과는 심각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다.

마린케이는 그저 주어진 대로만 살고 싶었다. 무사히 졸업을 하고, 어렵게 따낸 졸업장을 적극 활용해 전국구 입시 학원의 강사가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고향에 있는 가족들도 끼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만약 정말로 이 소박한 꿈을 이룰 수 있게 된다면, 보증금을 담보로 한 꽤 괜찮은 월세방도 이제는 꿈이 아닌 현실로서 다가올 차례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소탈한 인생 계획을 벌써 수십 번이 넘도록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반복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도 좋으니, 이제는 그저 요동치는 귀족 사회에서 이 한 몸 건사해 살아남고만 싶었다. 제게 주어진 대로만, 평범하게.

‘도착했습니다.’

7층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마찬가지로 번쩍번쩍하게 빛나는 702호실 앞에서, 그는 또다시 입을 크게 벌리게 되고 말았다.

이게 호텔이 아니라 기숙사라고? 내가 아는 그 기숙사?

심지어 내부를 확인하고 나서는 황태자에 대한 악감정이 미세하게 사그라질 정도로 만족감을 느꼈다. 침대의 질감부터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는 본래 누울 곳만 있다면 그게 흙바닥이든 시멘트 바닥이든 간에 달콤한 숙면을 취할 수 있었지만, 가벼운 솜이 풍성하게 들어있는 빵빵한 베개와 극세사 이불은 죽어도 손에서 놓기 싫었다.

마린케이는 우연처럼 제게 찾아온 호사에 도통 적응하지 못하며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다.

“안 되겠다.”

몸이라도 좀 풀다 오자. 버릇처럼 얇은 후드 집업 하나만을 걸쳐 입고 일어난 그는 또다시 돈 냄새 나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처음엔 학내 운동장에 갈 생각이었지만, 생각을 바꿨다. 돌이켜 보니 지하 1층에 피트니스 센터가 마련되어 있다던 안내문을 본 것 같기도 했다.

마린케이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신문물을 전부 즐겨 보자는 마음으로 지하 1층으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피트니스 센터는커녕 잔디 깔린 운동장 한번 이용하기 힘들던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호사였다. 물론, 그것 역시도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해야 했지만 말이다.

“마린보이잖아?”

제기랄, 호사가 아니라 초상 치르게 생겼네. 어째 가면 갈수록 후회 마일리지만 차곡차곡 쌓여가는 기분이 들어 괜히 마음이 착잡해지는 순간이었다. 마린케이는 오랜만에 보는 뽀얀 얼굴 앞에서 미간을 구기며 꾸벅, 목을 숙였다. 새벽 4시라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사이코처럼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있던 황태자가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

러닝머신을 정지시킨 그가 나른하게 웃으며 마린케이에게 걸어왔다. 흰색 티셔츠 한 장에 남색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은 간단한 차림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화보집을 뚫고 나온 것만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청량감이 넘쳤다.

그러나 마린케이는 그 눈부신 모습을 마주 보면서도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을 유지했다.

“어제도 보고 그제도 봤는데요.”

싸늘하기까지 한 그의 목소리를 음미하고 있던 샤를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냥 인사치레였는데.”

하여간 사람 속 긁는 데 천부적인 재주가 있는 새끼였다.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한-물론 마음속으로만-마린케이는 미련 없이 가장 구석진 곳을 향해 걸어갔다. 어찌나 구석에 틀어박혀 있었는지 러닝머신 위로 먼지가 한가득이었다.

그럼에도 그 웅장한 자태는 가려지지 않았기에, 마린케이는 또다시 자본의 위대함에 대해 고찰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역시 비싼 건 그만한 돈값을 했다.

몇 시간이고 달려대다 보면 언젠가는 잠이 오겠지. 어차피 주말이었으니 늦잠을 자도 상관없었다. 이왕 얻게 된 훌륭한 침대인 만큼 그 본분에 맞게 사용해주는 것이 도리일 터.

그런 마린케이의 옆으로 기척 없이 다가온 샤를이 저 또한 가뿐히 러닝머신 위로 뛰어올랐다. 낌새를 눈치챈 마린케이가 대놓고 비난을 가했다.

“뭐 하십니까?”

“내기할래?”

대답 대신 질문을 던진 그가 해맑게 웃으며 제안했다. 대답은 초를 치듯 곧바로 이어졌다.

“싫습니다.”

성격만큼이나 시원시원하고 단호한 거절이었다. 민망함이 없는 건지 넉살이 좋은 건지, 황태자는 그럴 줄 알았다며 개구지게 웃었다. 보조개가 활짝 드러난 어여쁜 웃음이었지만 마린케이는 여전히, 정말 적극적으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실은 슬슬 짜증이 이는 것도 같다.

작동 버튼을 누르려는 마린케이의 손등 위로 샤를이 제 손을 겹쳐 올렸다. 감히 황태자의 신체에 비루한 평민의 몸이 맞닿다니, 마린케이는 화들짝 놀라며 튀어 올랐다.

필사적으로 손을 떼어내려 발버둥 쳤지만, 그의 손은 돌이라도 된 양 굳건하기 그지없었다. 이러다 액 옮으면 어쩌지? 불손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하고 있던 마린케이가 황태자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샤를이 거짓되게 슬퍼하며 은근히 물었다.

“너무 티 나게 싫어하는 거 아냐?”

“스캔들이 전혀 두렵지 않으신가 봅니다.”

뼈가 박힌 말이다. 황태자는 답지 않게 죄책감을 느꼈다. 헛소문을 터뜨렸던 3군 일간지는 거액의 합의금을 조건으로 정정 기사를 보도했고, 마린케이에게 쏟아지는 악플들은 몇 차례 선처 없는 고소를 진행하자 게 눈 감추듯 모습을 감추었다.

이제 황태자의 스캔들 상대를 기억하는 사람은 있어도 마린케이 이스턴을 기억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빠르고 신속한 대처였지만, 마린케이의 마음속에는 앙금이 남은 상태였다.

하지만 상처는 없었다. 그저 누군가의 입에 제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이, 바라 마지않던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에서 계속해서 밀려나고 있다는 사실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마린케이는 여전히 황태자가 탐탁지 않았다. 저 자식만 아니었어도 신념대로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황태자는 태어나 처음 가져본 꿈과 신념을 와장창 부숴버린 장본인이었다.

마린케이의 표정이 목석처럼 굳어지는 것을 확인한 샤를이 단호하게 약속했다. 뒤따라 붙은 말이 몹시 약아빠져 다시금 눈총을 살 수밖에 없었지만.

“다신 그런 일 없을 거야. 실제가 되면 모를까.”

예고한 대로, 마린케이의 살벌한 눈빛이 샤를을 향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만큼 주의하겠다고.”

둘 사이에 흐르는 정적을 인지한 샤를이 은근슬쩍 되물었다.

“황태자와 계급장 떼고 내기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되겠어?”

“……”

“그것도 소원 내기를. 내가 꼴 보기 싫으면, 내기에서 이겨서 제발 좀 꺼져달라고 하면 되는 거야. 마린보이.”

태어날 때부터 호전적인 성향을 타고난 마린케이는 황태자의 달콤한 제안을 절대 거절할 수 없었다. 철이 들고 성숙해진 후에는 도박이나 복권 같은 것에 손대지 않았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내기에 흥미를 느끼는 타입이었다. 동네 누님들의 가르침이 아니었더라면 카지노 이곳저곳을 무법자처럼 활보하고 지냈을지도 몰랐다. 마린케이가 비딱하게 물었다.

“내기 종목은 뭡니까?”

“간단해. 이 러닝머신 위에서 먼저 내려오면 지는 거야. 우리 이스턴 경, 자신 있지?”

샤를은 부러 마린케이를 자극하듯 여유 넘치는 목소리로 화답했다. 벌써부터 제 승리를 확신하는 듯한 그 얼굴에 마린케이의 기분은 더욱 바닥을 쳤다.

“시작하죠.”

기필코 이겨 보이고야 말겠다. 마린케이의 소원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다시는 제게 말을 붙이지도 말고, 쳐다보지도 말고, 말 그대로 인생에서 연기처럼 사라져줄 것.

누가 보면 스토커라도 떨쳐내려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마린케이에게 있어서는 제국의 황태자를 차단하고자 하는 필사적인 몸부림에 해당했다. 실제 의사가 200퍼센트 넘게 투영된 진실한 소원이기도 하고. 하루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두 동강 내 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마린케이는 러닝머신의 버튼을 누르며 투지로 눈을 불태웠다. 어떻게든 승리를 거머쥐리라. 저 재앙 같은 새끼를 인생에서 없애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의지가 다져졌다. 뒷골목의 승부사는 걸어온 내기를 피하지도, 외면하지도 않았다.

이를 악물며 뇌까렸을 뿐이다.

‘질 것 같으면 저 새끼 러닝머신부터 부숴버려야지.’

***

“저러다 누구 한 명 쓰러지면 어떡해?”

“낸들 알아? 네가 한번 말려보든가.”

그 상황이 벌써 다섯 시간째였다. 어느덧 날이 밝고, 식사 시간이 끝나 하나둘씩 학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소문을 듣고서 일찌감치 피트니스 센터에 도착해 있던 무리들은 이미 러닝머신 주위를 둘러싸 커다란 반원을 만들어 놓은 형태였다. 설상가상으로 황태자와 평민을 저울에 올려놓은 겁대가리 없는 내기까지 진행하고 있었다.

“먼저 내려오는 사람이 지는 거라던데, 내려온다는 게 제 발로 내려오는 게 아니라 실려 가는 거면 어떡하냐?”

누군가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지만, 아무도 대답을 내어놓지는 않았다. 러닝머신이 부서져라 달려대고 있는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자니 저러다 사이좋게 구급차에 실려 가는, 다시 말해 말이 씨가 되는 상황이 펼쳐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기나긴 싸움 끝에 마린케이가 먼저 땀에 젖은 윗옷을 벗어 던졌다. 그의 갑작스러운 상의 탈의에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노출증이라도 걸린 거 아냐? 처음엔 날카로운 힐난이 쏟아졌지만, 그 군살 없는 몸을 확인한 순간부터는 침 삼키는 소리들이 일제히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매끈한 피부 결 위로 수놓아져 있는 잔근육들이 등줄기를 타고 이어진다. 가지런한 날갯죽지 아래의 날렵한 허리선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트레이닝복 바지 위로 슬쩍 내보이는 장골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순간에는 여기저기서 탄성 같은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벌써부터 페널티야?”

샤를이 이를 갈며 속삭였다. 그는 황태자라는 신분으로 인해 절대 남들의 앞에서 옷을 벗을 수 없는 처지였다. 황실 법규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할 마린케이가 의도를 담아 그런 것일 리는 없지만, 어쨌든 편법은 편법이었다. 반칙을 선호하는 갈색 머리가 사납게 응수했다.

“더운 걸 어떡합니까.”

“페어플레이 정신은 엿 바꿔 먹었나 봐.”

“억울하면 벗으시든가.”

중얼거림처럼 이어지는 말에 샤를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진심이야?”

그러면서도 목소리에는 미약한 웃음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마린케이는 대답하지 않고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옷을 벗어 던질 만큼 몸에 열이 올랐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몇 분 전부터 슬슬 호흡이 가빠지고 있다는 것에서 이미 패배의 조짐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황태자는 진짜, 제대로 미친 새끼였다.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페이스를 유지하며 러닝머신 위를 달렸다. 다섯 시간째에 접어든 지금은 꽤 힘에 겨워하는 것도 같지만, 그럼에도 호흡법에 흐트러짐 한번 없다는 것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대체 어떤 식으로 훈련을 받고 살아왔으면 저런 미친 몸뚱이가 될 수 있는 건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황실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분명 용병이 되었을 인간이다. 걸어 다니는 탱크가 되어 전장을 박살 내고 다녔겠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피에르 셀번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군도 주군이었지만, 저 평민도 참 지독한 승부사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적당히 달리다 져주면 될 것을 뭐 저리 기를 쓰고 달려드는지. 그로서는 절대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생각이었다. 피에르는 주군에 대해서만큼은 무조건적인 경의와 경외를 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애당초 마린케이에게 있어 황태자는 경애의 대상이 될 수가 없었다.

“세상에나!”

그 순간이었다. 마린케이의 호흡이 엉키는 동시에 누군가가 진심 어린 안타까움을 담아 소리쳤다. 순식간에 페이스를 잃은 마린케이가 러닝머신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거의 동시에 러닝머신 위에서 내려온 샤를이 재빨리 그를 부축했다.

“괜찮아?”

“……축하드립니다. 이기셨네요.”

무려 새벽 4시부터 시작된 내기다. 이쯤 되면 두 사람 모두 체력적으로 무척 지쳐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를 증명하듯, 승리를 거머쥔 황태자 역시 마린케이와 마찬가지로 핼쑥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지켜보고 있던 관람객들이 존경을 담아 그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자신들을 둘러싼 인파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두 사람이 똑같이 살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등신 같은 새끼들은 또 뭐야?

“그래서, 소원이 뭡니까?”

샤워 후 이온 음료로 갈증을 해소 중이던 마린케이가 덤덤히 물었다. 그러자 벽에 기대 서 있던 황태자는 자신의 초코 우유를 가리키며 기다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어울리지도 않는 깜찍한 음료수에 샛노란 빨대까지 물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가증스러웠다. 저 새하얀 이마 위로 딱밤 한 대만 놓을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텐데.

“불꽃놀이 좋아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마린케이는 먼 곳을 내다보며 대답했다.

“아뇨.”

“캠프파이어는?”

“안 좋아합니다.”

호불호를 따질 수조차 없는 요소들이었으나 일단 전부 불호라고 답했다. 불꽃놀이는 가끔 동네잔치가 있을 때 몇 번 본 게 전부고, 캠프파이어는 태어나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남들 다 가는 수련회와 수학여행도 넉넉지 않은 집안 사정 탓에 스스로 포기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 돈으로 차라리 집안 빚이나 갚고 말지.

그 결정에 대해 미련이 남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 빙 둘러앉아 불꽃에 대고 노래를 부르는 것만큼 의미 없는 일이 또 있을까. 그 순간 샤를이 중얼거렸다.

“안타깝게 됐네.”

“예?”

“그래도 이제부터는 좋아하려고 노력해 봐. 다음 주에 외부 수련회도 참석해야 하니까.”

듣도 보도 못한 개소리에 마린케이의 표정이 무참히 구겨졌다. ‘내가 그걸 왜?’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황태자는 쥐뿔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마린케이의 의사 표현을 철저히 무시하며 말했다.

“그게 내 소원이거든. 나랑 너랑 사이좋은 짝꿍으로 외부 수련회 가는 거.”

짝꿍이라는 단어조차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일부러 속을 메스껍게 하려는 전략인 건지, 사이코 황태자는 부러 윙크까지 해 보이는 정성을 보였다.

“싫습니다.”

마린케이가 망설임 없이 거부를 표했다. 그답지 않은 열띤 반응에 황태자는 눈을 접어 웃었다. 벽에서 몸을 떼어낸 그가 휴지통 안으로 우유갑을 집어 던지며 심드렁하게 응수했다.

“그럼 이겼어야지, 뭐 어쩌겠어.”

“다른 소원 없습니까?”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인간들만큼 양아치 같은 새끼들도 없던데.”

양아치는 너잖아, 사기꾼 같은 새끼야. 하고 싶은 말이 수두룩했지만, 눈앞의 양아치는 무려 제국 황태자라는 지위를 가진 양아치였다. 양아치인 데다가 사기꾼이기까지 한 새끼는 그 벌꿀 같은 머리칼을 손으로 빙빙 돌려대며 웃었다.

마린케이는 가히 졸도할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변명을 뱉어냈다. 스스로 생각해도 꽤나 설득력 있는 변명이었다.

“저도 참가하고 싶지만, 사정상 수련회 비용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지원을 해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지원해줄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부정 청탁이라고 뒤에서 말 나와요.”

“내 기사에게, 내가 후원을 해주겠다는데 무슨 부정 청탁?”

“그럼 스캔들은요? 스캔들은 어쩌실 겁니까.”

“연군지정도 못 들어봤어?”

그야말로 쥐덫에 갇힌 가련한 새끼 쥐 꼴이었다.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하는 마린케이에게, 샤를은 쐐기를 박았다.

“억울하면 다음엔 꼭 네가 이겨.”

“……”

“캠프파이어 되게 기대된다. 그치?”

이렇게 된 거, 그냥 캠프파이어장을 미리 다 부숴버리자. 그럼 저 새끼도 알아서 입을 다물겠지. 마린케이는 쉽게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예. 정말 기대되네요.”

외부 수련회 일주일 전의 상황이었다.

***

피에르 셀번은 아침부터 운수가 좋지 않았다. 토스트기에 넣어 두었던 식빵은 전부 다 타버렸고, 반숙 프라이를 하려고 했던 달걀은 시간 조절에 실패해 완숙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입고 싶었던 옷은 소매가 아직 마르지 않아 축축하게 젖어 있기까지 했다.

울컥, 짜증이 피어오를 때마다 피에르는 기사도를 떠올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럼에도 새카매진 식빵 테두리를 떼어내는 손가락은 신경질적으로 움직였다. 이게 다 건너편의 평민 때문일 것이다. 근거 없는 책임 전가였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듯했다.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피에르는 유광 블랙 캐리어를 챙겨 들었다.

그 시각, 마린케이는 눈을 뜨며 생각했다. 왜 이렇게 소름이 돋지? 동물적인 직감이 그를 향해 경고했다. 푹신푹신한 침대 위에 계속 붙어 있을까 하던 그가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황태자와의 내기 이후 벌써 며칠째 온몸 이곳저곳이 뻐근했다. 욕설이라도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아침부터 괜히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하릴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마린케이가 불현듯 깜짝 놀라며 침대 위에서 내려왔다. 생각해 보니 오늘은 제국력 5월 1일. 황태자가 강요했던 예의 그 외부 수련회가 있는 날이었다.

“어, 안녕하십니까.”

나가는 김에 음식물 쓰레기와 갖가지 분리수거용 쓰레기들을 전부 다 챙겨 든 마린케이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서 있던 냉랭한 인상의 미남이 티 나게 인상을 구겼다. 인사를 무시당해 무안할 만도 하건만 마린케이는 아무렇지 않게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하지만 엘리베이터 앞에 떡하니 놓인 유광 캐리어에 시선이 쏠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설마 이걸 다 가져가는 건가? 심지어 캐리어는 무려 두 개였다.

마린케이의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가 다급하게 캐리어를 끌어와 제 옆으로 숨겼다. 마린케이의 등에 걸쳐진 볼품없는 배낭을 바라보는 은근한 눈빛 역시 함께였다. 그가 캐리어를 몇 개 지고 가든지 간에 알 바 아니었지만, 같은 공간에 서 있으면서도 참으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 코미디 같아 헛웃음이 나왔다.

그나저나 이 인간도 퍼스트 클래스 사람인가?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퍼스트 클래스에 황태자를 제외하고 저 정도의 미남이 있었다면 분명 기억에 남았을 터였다. 이것도 알 바 아니긴 하지. 그렇게 생각한 마린케이는 천천히 배낭을 고쳐 들었다.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면, 두 사람 모두가 외부 수련에 향하는 제1 왕립학교 학부생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차곡차곡 분리수거를 마치고 등굣길에 나선 마린케이는 귀족에 대한 불경함이 깃든 짜증을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왜 매번 저런 개 같은 새끼들이 꼬여드는 거지?

마치 스토킹이라도 당하는 사람처럼 자꾸만 걸음을 멈추고 뒤를 쳐다보는, 심지어 경멸이 가득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에 의해 기분이 바닥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그를 추월해 보고자 걸음을 빨리하려고도 해봤지만, 그것이 남자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의 걸음은 너무나도 느렸다. 저 검은 캐리어 두 개를 혼자서 이고 가려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만큼 그는 누가 봐도 불편해 보이는 모습으로 캐리어를 이끌며 천천히 걸음하고 있었다. 체력을 보아선 기사학부 수련생이 아닌 것 같은데, 다른 학부와 연합으로 가야 하는 수련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갈 마음이 사라졌다.

말없이 수련회에 불참하는 상상을 해보던 마린케이는 길길이 날뛸 황태자를 생각하며 고이 마음을 접었다. 망할 양아치는 하필이면 제국 황태자였고, 마린케이는 권력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소시민에 불과했다.

결국, 혹여라도 남자를 추월하지 않기 위해 느긋이 걸음을 옮기던 마린케이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수련장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시나 타 학부 수련생이 맞았던 건지, 남자는 건너편 건물을 향해 여전히 힘에 부친 걸음을 떼고 있었다.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마린케이는 답지 않게 옹기종기 모여 있는 기사학부 수련생들 틈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나와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렸다. 부디 이 얼간이 소굴에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해주세요. 뼛속까지 무신론자인 마린케이가 빌기에는 제법 거대한 소원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사실 하나 걸리는 점이 있긴 했다. 귀족만 살피기에도 바쁜 신들이 고작 평민인 자신의 소원 따위를 들어줄 리 없었으니까.

그렇다. 마린케이 이스턴은 평민이다. 그냥 평민이기만 할까? 아버지는 도축업에 종사하시고, 어머니는 작디작은 횟집을 운영하시며 대물림된 빚을 갚는 평민 중의 평민일 뿐이었다. 그래도 마린케이는 두렵지 않았다.

감성적이고 연약한 아버지와 올바르고 강인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원치 않게도 퍼스트 클래스에 입학한 몇 안 되는 평민 출신 수련생이 되어 있었다. 무협지와 소년만화에서만 보던 검술을 흉내 내던 그에게 검법과 자세를 알려준 것은 모래 같은 피부색과 적빛 머리칼을 가진 아름다운 남자였다. 그 망할 놈의 자식이 추천서만 쓰지 않았더라도 저 얼어 죽을 황태자 새끼와 만나게 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러나 땅을 치고 후회해 봤자 늦은 일이다. 마린케이는 진심으로, 붉은 머리칼을 가진 그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친히 그 죗값을 물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린케이가 혼자 고찰하고 있던 찰나, 마린케이를 발견한 황태자는 느긋한 걸음을 옮겨 그에게로 다가왔다.

‘저 새끼가 어딜 봐서 황태자라는 거야.’

샤를 소피아 엔스가 웃으면 꽃들이 놀라고 세상이 요동친다고들 하는 말이 있다. 고요했던 심장에 파문을 일으키는 남자, 인간 설탕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그 남자가 바로 제국의 황태자 아니던가?

그러나 마린케이에게는 달랐다. 그는 황태자의 고운 얼굴을 보면서도 불손히 미간을 구겼다.

“짐이 그것밖에 없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린케이는 전부터 자꾸만 저를 조롱하려 드는 황태자를 향해 역으로 일갈했다. 사각형 얼음이 잔뜩 떨어질 듯한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걸 다 가져가실 겁니까?”

마린케이의 갈색 눈이 샤를이 가져온 검은 캐리어를 한심하다는 듯 훑었다. 심하게 반짝거리는 흑색의 유광 캐리어가 세 개 정도 마린케이의 앞에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귀족 놈들의 취향은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았다. 아까 봤던 그 남자도 딱 이렇게 생긴 캐리어를 두 개 들고 왔었던 것을 보면. 실은 황태자 쪽이 더 심했다.

샤를이 사이좋게 모여 있는 캐리어들을 눈짓하며 요구했다.

“힘들어 보이면 좀 도와줄래?”

마린케이는 그 순간 자신이라도 세간의 평가를 정정해주어야 한다는 강력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황태자는 인간 설탕이 아니라 독약이었다. 달콤한 게 아니라 악독한 거였고.

“도와줄 사람, 저 말고도 많은 것 같습니다만.”

그렇지 않아도 시기 어린 눈빛으로 저를 힐끔거리는 수련생들로 인해 뒤통수가 따가웠던 참이다.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질러 닦은 마린케이가 미련 없이 샤를의 곁을 지나쳤다. 짝꿍이든 짬뽕이든 그 끔찍한 단어에 어울려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또 비아냥거리진 않을까 했던 예상과는 달리, 황태자는 그런 마린케이를 붙잡지 않았다.

귀족 도련님들답게 다들 자가용을 준비해오셨지만, 마린케이 만큼은 소집 후 다시 왕립학교 밖으로 나가 버스를 갈아타야만 했다. 평범한 학교에나 있을 법한 수련회용 버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럴 거면 대체 왜 수련장 앞으로 모이라고 한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하던 마린케이는, 버스 정류장 앞에 세워진 검은 세단을 발견하고서 깊은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비즈니스 차원에서 애써 웃으며 배웅해 보려고도 했지만, 황태자의 목소리는 쓸데없이 단호하고 난리였다.

“곧 신호 바뀔 것 같으니까 빨리 타.”

“알아서 가겠습니다.”

“타라니까.”

“알아서 가겠다고요.”

“이러다 길 막히면, 우리 마린보이가 책임질 거야?”

더 이상의 선택지가 없었다. 그냥 죽었다 생각하고 저 새끼 말대로 하자. ‘쥐 죽은 듯이 살자’라는 제 인생의 모토와 뭔가 닮은 듯, 다른 생각이었지만 감히 황태자의 명령에 불복종할 수 있는 사람은 가쉰 땅 위에 존재하지 않았다.

졸지에 제국민의 사랑을 받는 황태자의 세단을 얻어 탄 오만방자한 평민이 된 기분이었지만, 지속적인 마인드 컨트롤을 통해 무감해지려 노력했다.

승용차라는 걸 타본 적이 없는 마린케이는 고급 세단의 내부를 생경한 듯 바라보았다. 등을 포근히 감싸오는 온열 시트와 머리 위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송풍, 매캐하지 않고 향기롭기만 한 실내 향기까지. 그 향이 제 옆에 앉은 불한당에게서 풍겨오는 향이라는 걸 몰랐다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다. 마린케이는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며 황태자를 무시했다.

그러나 그 모습을 가만히 앉아 구경할 사람이었다면 제 세단으로 마린케이를 실어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샤를의 구부러진 눈이 마린케이의 멀끔한 듯, 무난한 얼굴을 훑어 내렸다.

꿈에 그리던 재목을 만난 군주의 모습으로서는 부적격했지만, 그가 마린케이를 제법 아끼고 있다는 것쯤은 누구나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다정한 시선이었다. 정작 그 시선을 받는 당사자는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고 해도 표면상으로는 그랬다. 샤를이 슬그머니 운을 뗐다.

“도착까지 1시간은 걸릴 텐데, 나랑 수수께끼 할래?”

“자는 중인데요.”

“자는데 어떻게 말을 해?”

마린케이는 결국 부스스한 머리칼을 흩뜨리며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얌체 같아 보이는 황태자의 얼굴에 저절로 심기가 불편해졌다.

“뭡니까.”

어쩔 수 없이 목소리는 껄끄럽게 튀어나왔다. 그에 샤를이 주머니에 있던 초콜릿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자연스레 초콜릿을 받아 든 마린케이는 자연스럽게 껍질을 벗겨낸 뒤 다시 초콜릿을 건넸다. 그 순간 샤를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마린보이. 이걸 왜 나한테 줘?”

“까달라고 한 거 아니었습니까?”

“…세상에 초콜릿 못 까는 사람이 어디 있어?”

망할 놈의 노예근성. 이것도 전부 평민으로 자라 평민으로 키워졌기 때문이려나. 황태자가 내밀어진 초콜릿을 도로 마린케이에게 건넸다. 수치심으로 인해 얼굴이 더욱 괴이하게 구겨진 마린케이가 초콜릿을 자신의 입으로 우악스레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도 괴랄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것이, 어떤 호러 영화보다도 그로테스크해 보였다. 샤를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지금 애교 부린 건가?”

“수수께끼 수준이 형편없네요.”

“네 언행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누가 이게 수수께끼래?”

“헷갈릴 만했습니다.”

마린케이는 사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아니꼬웠다. 황태자와 나란히 앉아 의미 없는 설전을 벌이고 있던 도중, 목적지까지 30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내비게이션의 목소리가 그들 사이를 뚫고서 울려 퍼졌다. 그에 맞춰 운전사가 부드럽게 핸들을 돌렸다.

“저 좀 자겠습니다.”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던 마린케이는 몸을 뒤로 젖히며 눈을 감았다.

“갑자기 유치원생 같은 외부 수련회는 왜 가는 것 같아?”

의미심장한 물음이었지만, 마침 저 역시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던 참이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마린케이가 게슴츠레 눈을 뜨고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너무 급조한 티가 나지 않아? 이름부터.”

그러게. 생각해 보니 그랬다. 마린케이는 잘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굴려 보며 황태자의 뜻을 유추하기 위해 노력했다. 몇 초간의 짧은 시간이 흐른 후, 그가 명쾌하게 대답했다.

“수준이 딱 유치원생이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

“전하께서도 뭐. 짐짝을 무슨 세 개씩이나 챙겨 오셨던데.”

일주일을 떠나 있는데 낡아빠진 가방 하나만을 들고 온 네가 이상한 거 아니냐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황태자는 가까스로 미소를 되찾았다.

“뉴런이 있으면 좀 사용하는 게 어때?”

“…뉴런은 또 뭡니까?”

차라리 유치원생이랑 대화를 하는 편이 이것보다 더 건설적일 것 같았다. 황태자의 생각을 읽은 건지, 마린케이가 안 그래도 불량한 얼굴을 더욱 불량하게 구기며 읊조렸다.

“평민 기죽이지 마시죠.”

***

이렇게 살다간 언젠가 수명이 반 토막 나고 말 것이다. 저를 향해 쏟아지는 숱한 시선들을 느끼며, 마린케이는 황태자와의 인연이 부디 여기서 끝나주기를 바랐다.

이미 서약서까지 쓴 마당에, 이 망할 학교를 졸업하지 않고서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심으로 그렇게 빌었다. 그 순간까지도 황태자는 마린케이의 어깨 위로 팔을 두르며 구렁이처럼 속삭였다.

“표정 풀어. 내일 아침이면 대서특필 될 테니까.”

온화한 얼굴로 파파라치들에게 웃어주는 모습이 명실상부 가쉰 최고의 셀럽다웠다.

“알면서도 저를 차에 태우신 겁니까?”

“비밀 데이트라고 기사화되는 것보다는 돈독한 군신 관계가 낫지 않겠어?”

말은 참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왔다. 마린케이는 자신의 썩어들어가는 표정이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을 잡지 표지를 상상하며 미리 챙겨왔던 마스크를 얼굴 위로 둘렀다.

“…뭐 하는 거야?”

황태자가 어이없다는 듯 물어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 말도 안 되는 추문을 확인하게 될 심약한 아버지가 매우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지난 스캔들 당시, 출근한 이래 단 한 번도 쉰 적 없던 정육점에 잠시 휴가를 냈을 정도로 상당한 충격을 받으셨다고 들었다.

“전하! 집합 시간이 다 되도록 도착하지 않으셔서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외출복 차림의 칼릭스가 재빠르게 뛰어와 황태자의 옆자리를 선점했다. 덕분에 뒤로 밀려나게 된 마린케이가 흡족해하며 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절로 콧노래가 나오던 상황 속에서, 황태자는 귀신같이 마린케이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갈색 머리칼을 헤집는 손길이 매우 억척스러웠다. 그가 경고하듯 물었다.

“내 기사가 나를 두고 어디로 가려던 참일까?”

“이제 곧 집합이라지 않습니까.”

주군에 대한 존중과 예의라고는 전혀, 단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은 목소리에 칼릭스는 상당히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간 쌓아온 경험적 데이터 덕분인지, 그는 이런 순간이면 조용히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 상책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을 수 있었다. 졸업 학년다운 대처였다.

그렇게 칼릭스는 황태자와의 대화 기회를 포기한 채 조용히 둘 사이에서 물러나는 쪽을 택했다.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린케이는 저 뚝심 없는 새끼, 하고 이를 갈았다.

황태자가 마린케이의 머리통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당하는 이의 기분은 썩 좋지 못했지만, 인내심을 되살린 마린케이는 한숨과 함께 몸에서 힘을 풀었다. 황태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리 이스턴 경께서는 나랑은 같이 집합 못 하는 병이라도 걸렸나 봐.”

“예. 전염병이라니까 알아서 좀 피해 주시죠.”

“그런 거 신경 썼으면 밖에 나돌아 다니지를 말든가.”

황태자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자신의 검은 캐리어들을 발로 살짝 밀었다.

“팔이 아파서. 좀 들어줄 수 있지?”

이 시정잡배 같은 새끼. 그러게 캐리어를 세 개씩이나 가지고 올 때부터 알아봤다. 대체 가방 속에는 뭐가 들어있는 건데?

돌덩이라도 넣은 듯 무겁게 느껴지는 캐리어를 세 개나 손에 끌며, 마린케이는 집합 장소를 향해 거칠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가는 황태자의 만면엔 유쾌해 죽겠다는 듯한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마린케이는 집합 장소까지 이를 부득부득 갈며 황태자의 짐을 옮겼다.

짧았던 집합 시간 이후, 숙소로 가서 짐을 풀고 자유로이 수련을 준비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외부 수련회라는 이름치고 심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모양새였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오랜만의 나들이에 들뜬 것인지, 대련 때면 야차같이 돌변해 검을 휘둘러 대기 바쁘던 덩치들이 병아리처럼 삐약거리며 돌아다녔다.

황급히 숙소로 향하려던 마린케이는, 마찬가지로 저를 병아리처럼 쫓아오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서 망연자실하게 걸음을 멈췄다. 그가 인생에 대한 회의를 느끼며 물었다.

“이건 또 무슨 경우 없는 짓입니까.”

예상대로 샤를 소피아 엔스가 그 아름다운 얼굴 위로 꽃 같은 미소를 쌓아 올리며 미인계를 시도하려 들었다.

“왜 또 시비야?”

“시비는 전하께서 걸고 계시잖아요.”

“시비가 아니라 애정이라는 생각은 안 들고?”

결과는 당연지사 실패였다.

“안 듭니다.”

“내 기사와 떨어져 있으려니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아.”

“본론이나 꺼내시죠. 저를 여기 데려오신 모종의 이유가 있습니까?”

몸에 익힌 검술에 비해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눈치는 어느 정도 있는 편인 것 같았다. 황태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마린케이는 여전히 눈을 부라리며 그를 겁박했다.

쥐 죽은 듯, 그저 조용히만 살고 싶었던 인생 속에 소용돌이처럼 찾아온 양아치 새끼가 바로 당신이다. 문제라면 그 양아치 새끼가 제국의 황족이고, 심지어 샤를 소피아 엔스이기까지 하다는 것. 더 늦기 전에 일을 바로잡고 싶었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처사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뒤였다. 마린케이는 이를 악물며 황태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

한여름의 파도 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푸른 눈동자가 가감 없이 마린케이를 비추었다.

“하지만 혼자서는 안 돼.”

“어째서요?”

“괜한 의심을 사서 좋을 게 없으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 순간 그것은 논외의 문제라는 것을 잘 알았다. 무려 황태자씩이나 되는 사람께서 결정하신 일이다. 대답 없이 황태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마린케이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하며 손짓했다.

“캐리어 다시 주십시오.”

언제나처럼 건방지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지만, 그전만큼의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장족의 발전이었다.

“네 짐이나 잘 챙겨.”

샤를이 다정히 대답하며 그런 마린케이를 스쳐 지났다. 그 모습이 도저히 군신 관계처럼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당사자인 두 사람만 모르고 있는 듯했다.

***

어쩐지 꿈자리가 뒤숭숭하다 싶었다. 동물적인 육감의 소유자답게, 마린케이는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침입자의 동태를 살폈다. 분명 다른 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황태자는 어느새 제 방까지 쳐들어와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불이 꺼져 있어 거뭇하게만 보이는 황태자의 형상을 향해, 마린케이가 갈라진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

“악몽이라도 꾸셨습니까?”

그게 아니고서야 네가 지금 왜 여기 있는 것이냐는 뜻이었다. 찻잔을 내려놓는 가벼운 소음이 먼저 들려왔고, 곧바로 의자 끄는 소리 또한 이어졌다. 황태자가 느린 걸음으로 침대 가로 다가왔다. 주군께서 친히 행차하시는데 가만히 누워만 있을 수 있는 기사는 제국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린케이는 반강제적으로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황태자가 스위치를 눌러 방 안의 조명을 환하게 밝혔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마린케이는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서 멍하니 입을 벌렸다.

“왜 그렇게 봐?”

황태자가 해맑은 어투로 물었다. 벌꿀같이 화사하던 그의 금발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새카만 머리칼을 느슨하게 묶은 황태자가 제 머리칼을 손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심지어 눈도 까맣디까맸다. 사파이어 원석처럼 반짝거리곤 하던 그 영롱한 푸른 눈이 아니었다.

“너무 놀라지 마. 가발이랑 렌즈니까.”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황족의 증거를 내다 버린 황태자의 얼굴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어여뻤다. 황가 특유의 금발이 아님에도 고귀한 분위기가 여과 없이 흘러내렸다.

상투적인 표현을 빌려오자면 이랬다. 안개처럼 처연한 얼굴 위로 밤하늘 같은 머리칼이 떨어지니 그 자체가 우주요, 은하수인 것만 같이 다가오는 절세부동의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황태자의 외양은 중력보다 무겁고 근사한 것이었다.

그래. 인간은 본래 겉가죽으로 이루어진 동물인 법이다. 하지만 겉가죽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빠르게 원래의 무표정을 되찾아 온 마린케이가 매몰찬 대답을 꺼냈다.

“가발 자랑이나 하러 오신 건 아닐 테고.”

그러나 철면피 황태자는 마린케이의 무심한 반응에도 전혀 민망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자세히 보니 복장도 조금 전과 달랐는데, 아이보리색 실크 셔츠에 밤색 슬랙스를 입은 모습이 뭐랄까, 딱 그 나이대의 한량 같았다. 요새 귀족 가 자제들 사이에 유행하기 시작한다는 르네상스풍 차림새였지만, 마린케이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황태자가 마린케이를 채근했다.

“눈치챘으면 얼른 일어나서 준비해.”

“엮이기 싫다고 하면…, 명령 불복종입니까?”

“알면서 묻는 심보가 제일 고약한 거 알지?”

“여기서 제일 심보 고약한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요.”

“준비하세요. 이스턴 경.”

온갖 욕을 속으로 씹어 삼키던 마린케이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황태자를 스쳐 지났다. 순간 독한 장미 향 비슷한 것이 풍겨오자, 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며 기침을 뱉었다. 샤를이 그런 마린케이를 구경하며 감수하라는 듯 말했다.

“버텨. 이 정도쯤은 해줘야 베사플레사의 노름꾼이지.”

“베사플레사요?”

베사플레사라니. 이번엔 미처 당혹감을 숨길 수조차 없었다. 외부 수련회랍시고 불러 모아둔 주제에 숙소를 유흥 도시 베사(Vechsa)로 잡았을 때부터 미심쩍긴 했지만, 설마 베사플레사에 가기 위한 눈속임이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온갖 약쟁이와 도박쟁이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파리지옥에 대체 무슨 연유로 볼일이 있다는 것인지. 이제 와 다시 보니 저 꼬락서니도 전형적인 노름꾼의 복장이었다.

“꼭 동행해야 합니까?”

마린케이가 찝찝해하며 물었다. 사실 더 직설적으로 묻고 싶었으나, 그 나름대로는 최대한의 예의를 차린 것이었다. 댁이야 도박판을 가든 유치장을 가든 아무도 신경 안 쓰겠지만, 나는 아니라고. 마린케이의 불안감이 엿보인 것인지, 샤를은 상냥하게 웃으며 그를 다독였다.

“걱정 마. 설마 연행되기까지야 하겠어.”

그러니까 댁은 어차피 안 당한다니까? 의견을 묵살당한 마린케이는 지워지지 않는 찝찝함을 마음에 품은 채 샤워실로 들어갔다.

베사플레사. 그곳은 유흥 도시로 유명한 베사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카지노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 출신과 기원을 알 수 없는 매력적인 딜러들을 무기 삼아 전광판 광고를 때려대는 것에 신물이 날 정도였다. 그렇다고 저 용병 같은 새끼가 도박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닐 터인데. 어쨌거나, 마린케이는 부디 유치장행만 피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샤워에 정진했다.

***

가지각색의 화려한 조명과 코를 마비시키는 것만 같은 지독한 향수 냄새, 그리고 머리를 가득 울리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팽배한 공간이 바로 베사플레사였다.

뾰족하고 높은 빌딩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베사플레사는 1층과 2층만이 존재하는 간결한 건물 양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규모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방대한 넓이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 딱 소문의 그 카지노다웠다.

흡사 벽을 난타하는 것과도 같은 강렬한 비트에 눈살을 찌푸리며, 마린케이는 슬쩍 황태자를 곁눈질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선 대기 줄을 가로질러 가는 황태자의 뒷모습이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순간 이대로 길을 잃은 척 내빼면 은근슬쩍 넘어가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파에 섞여들었다고 하면 변명하기도 쉬울 것 같았다.

“제대로 따라와. 길 잃지 말고.”

그 속셈을 눈치챈 건지, 황태자는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경고했다. 사실 말만 경고였지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마린케이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이렇게 막 가도 되는 겁니까?”

나오기 직전까지 셔츠 단추를 몇 개 풀어헤칠 것인가에 대해 갑론을박하고 있었던지라, 그의 모든 결정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결국, 황태자 놈의 요구대로 단추를 두 개나 풀어 젖히게 된 마린케이는 익숙하지 않은 걸음을 옮겨 카지노 입구에 다다랐다.

이 많은 사람들을 제치고서 당당히 새치기를 한 샤를 소피아 엔스, 제국 황태자씩이나 되는 남자가 당당한 얼굴로 가드의 앞에 섰다.

당연히 다시 뒤로 돌려보낼 줄 알았지만, 가드는 뜻밖의 태도를 보였다. 갑작스런 미인의 등장에 당황하던 탈색 머리 사내가 얼굴을 붉히며 자리를 내어준다. 황태자는 예상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회전문을 통과하며 마린케이에게 손짓했다.

“마린?”

마린이래. 예상치 못한 애칭 공격에 당황한 마린케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로봇 같은 걸음으로 황태자에게 다가가자, 그가 냉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똑바로 해. 그에 마린케이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카지노에 들어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양아치와 동행하기로 결정한 것을 수백 번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카지노 안의 온갖 음험하고 강렬한 시선들이 황태자를 향해 쏟아진다. 수많은 미인들이 즐비하기로 유명한 베사플레사였지만, 실크 소재 셔츠를 입은 벚꽃 같은 인상의 미남이 입장하자 잠시간 그 소음이 줄어들 정도였다.

음악 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침묵을 뒤로한 채, 테이블 위로 칩을 굴리던 은발의 미녀가 노골적인 의도를 담아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나 황태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서 인파를 헤쳐 지났다.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다 싶더니, 그냥 딱 동물원에 걸어 들어간 공작새 느낌이었다.

가지각색의 추파를 받으면서도 미동 없이 앞만 보고 걸어가는 황태자에게 처음으로 존경심이 들던 순간이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와 황태자를 향해 손을 뻗으려던 누군가가 마린케이에게 붙잡혀 바닥으로 처박혔다.

“으아아악!”

마린케이가 사내의 뒷덜미를 잡았던 손을 휘휘 흔들며 물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발이 빠르네. 한 2m는 떨어져서 걸어오고 있는 줄 알았는데.”

생글생글 웃으며 비꼬는 것을 보니 멀쩡한 모양이었다. 마린케이가 저도 모르게 변명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점점 그에게 길들여지고 있는 듯한 빠른 반응 속도였다.

“시야 확보 때문에 그랬습니다.”

“어련하시겠어.”

“팔짱이라도 끼고 다니실 건 아니잖아요.”

“못 할 건 없지?”

마린케이가 대답하지 않자 샤를 역시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고막에 테러를 가하는 듯한 시끄러운 음악 소리 사이에서, 황태자의 잘난 얼굴은 더욱 화려하게 빛을 발했다.

그러나 마린케이는 저 아름다운 남자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양아치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었다. 장미처럼 만개한 얼굴 뒤에는 독을 한가득 바른 무시무시한 가시가 감춰져 있었다. 그러니 그 가시에 손을 찔리고 싶지 않거든 알아서 거리를 두는 게 마땅했다.

“못 보던 오라버니네.”

구릿빛 피부에 깃털같이 하얀 머리칼을 가진 미녀가 은근슬쩍 말을 붙여왔다. 란제리 룩을 입은 모습과 대비되게 그 얼굴은 묘하게 새침해 보였다.

마린케이는 미녀의 은발을 바라보며, 머리색이 저 정도까지 되려면 대체 무슨 짓을 해야 하는 걸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탈색을 네 번 정도 거쳐야만 얻을 수 있는 머리칼이라는 사실은 평생 알지 못할 예정이었다. 샤를이 미녀에게 눈웃음을 치며 물었다.

“더 참신한 수작은 없어?”

그러자 미녀가 자연스럽게 황태자의 허리에 팔을 두른다.

“처음 왔으면 내가 구경시켜줄까?”

교태로운 몸짓에 샤를이 웃으며 그녀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도대체 무슨 말재간을 부린 건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미녀가 고개를 끄덕인 후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알아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마린케이는 그제야 황태자의 곁으로 한 발자국 다가서며 말했다.

“능력 좋으시네요.”

부러움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목소리였다. 황태자가 무심히 대답했다.

“얼굴값은 해야지.”

“연애를 하실 거면 경호원은 좀 떼어 놓는 게 어떠십니까?”

그 순간 샤를이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연애라니. 유흥으로 가득 찬 베사플레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그가 슬슬 다시 거리를 벌리기 시작하는 마린케이의 어깨를 세게 잡아당겼다. 독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찌른다. 마린케이는 후각이 마비되는 듯한 기분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의 콧잔등 위를 검지로 살짝 건드리며, 샤를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베사플레사까지 와서 연애를 하는 양아치가 어디 있어?”

***

너잖아, 이 양아치 새끼야. 마린케이 이스턴은 현명했다. 그래서 굳이 지금 느끼는 기분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선 말을 삼킬 수 있었다. 이로써 벌써 세 번째 게임이다. 마지막 칩을 집어 던진 마린케이가 테이블 위의 돈을 쓸어 담았다.

황태자는 게임에는 관심도 주지 않고서 딜러와 잡담을 나누기 바빴는데, 그 분위기는 누가 봐도 서로에게 추파를 던지는 남녀 그 자체였다.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냐?”

코 밑으로 수염을 덕지덕지 기른 남자는 시가를 잘근잘근 깨물며 물었다. 연속해서 게임에 패한 탓에 어지간히 부아가 치민 듯해 보였다. 마린케이가 수중에 들어온 돈을 죄다 판돈으로 내걸며 대답했다.

“생각보다 판이 작네요. 기대했더니.”

질문과는 동떨어진 대답이었으나, 테이블의 인원들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그 당돌한 발언에 황태자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딜러마저도 마린케이를 돌아볼 정도였다. 자존심을 공격당한 사내가 물고 있던 시가를 바닥에 뱉으며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다.

“저 얼굴만 예쁜 형씨도 그렇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들인데 말이지. 대체 어디서 굴러먹던 새끼들이냐니까?”

“게임 계속 안 할 겁니까?”

그러나 겨우 그 정도에 겁을 먹을 배포였다면 정글이나 다름없는 뒷골목에서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린케이는 골목에서 마주치는 날마다 도박 기술 하나씩을 가르쳐 주었던 더티 블론드의 청년을 떠올렸다. 이름이 렉사였던가, 알렉스였던가. 기억은 잘 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칩을 돌리는 현란한 손놀림만큼은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그건 도박이 아니라 예술이었지. 칩을 티 나지 않게 떨어뜨려 신발 밑에 숨기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아닌 척하며 옷소매에 카드를 집어넣는 것까지 포함해 배우지 않은 기술이 없었다. 그 철없던 청년이 베사플레사의 넘버원 딜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조금 더 후의 일이다. 마린케이는 그저 주머니가 두툼해 보이는 사내를 끊임없이 도발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조금 재미있기도 했다. 조롱을 견디다 못한 사내가 테이블을 내려치던 순간이었다. 샤를이 주머니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로 던졌다. 원석에 무지한 사람이 보아도 그 값어치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진귀해 보이는 화음석 반지였다.

“배팅해. 자꾸 지루하게 하지 말고.”

영락없이 한량 노름꾼 같은 그 꼬락서니에 마린케이는 한심함이 담긴 눈초리로 황태자를 훑었다. 어쩐지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었으나, 샤를은 개의치 않고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배팅하지 않은 것은 이제 사내 한 사람뿐이었다. 황태자가 경멸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이 정도 수준도 안 되는 거야?”

도대체 사람을 어디까지 몰아붙일 작정인 건지. 마린케이는 조금 전까지 그 짓을 제가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로 혀를 찼다.

침묵하던 사내가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현물이 아니라면?”

“여긴 베사플레사야. 규칙이 있을 리 없잖아.”

입가에 미소를 내건 황태자가 기특하다는 듯 대답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지만, 화려한 얼굴이 보는 이들의 시선을 빼앗고 있었기 때문인지 마린케이를 제외한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사내가 딜러를 불러 열쇠 하나를 내밀었다. 그에게서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제일 귀한 상품으로 데려와.”

사람이구나. 마린케이는 곧바로 사내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저절로 품 안의 단도에 손이 들어가려던 찰나, 황태자가 테이블 밑으로 그런 마린케이의 발등을 지르밟았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

뒷골목을 구르며 자라온 아이는 연약한 목숨을 담보로 눈치를 배운다. 그래서인지 마린케이는 스스럼없이 그의 명령을 따르며 몸에서 힘을 풀었다. 비로소 그가 이 허접한 외부 수련회를 통해 의도했던 것이 무엇인지 눈치채게 된 시점이었다.

사람을 마치 금품처럼 거래하는 말도 안 되는 매매 현장 속에서도 황태자는 비위 좋게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태양처럼 붉은 화음석 반지를 가리키며, 사내가 교활하게 말했다.

“화언국에서 온 노예들은 이 보석보다도 더 새빨간 머리칼을 가졌더군.”

세상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억지스러웠다. 마린케이가 분노를 참으며 숨을 고르던 순간이었다. 사내의 말마따나 붉은 머리칼을 가진 노예 한 명이 목에 사슬을 단 채로 도박장 안에 들어섰다. 빌어먹을. 세상은 언제나 억지스럽다. 익히 경험해 알고 있던 바 아니었는가.

그러나 마린케이는 분노했다. 노예의 목에 감긴 두꺼운 쇠사슬이 그의 인내심을 바닥냈다. 가까이 다가온 소녀, 아니. 이제 막 변성기가 오기 전인 듯한 목소리를 들으니 틀림없이 소년이었다. 홍옥보다도 붉은 머리칼을 가진 소년이 사내의 앞에 다다라 공손히 인사했다. 탐욕스럽게 웃은 사내가 칭찬하듯 소년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정도면 배팅할 가치가 있나?”

그 역겨운 오기에, 황태자는 조소 지으며 답했다.

“자신 있으면.”

“시작하지.”

사내가 곧장 칩을 던졌다. 눈치를 보던 딜러 역시 카드를 섞은 후 나눠 주기 시작했다. 가장 적은 칩을 소유한 사람이 승리하는 게임이었다. 모든 속임수는 칩에서부터 출발한다. 칩을 손안에 쥐고 굴리던 마린케이는 시선을 틀어 굳어 있는 소년 쪽을 바라보았다.

곱슬머리 다이애나보다도 어려 보이는 얼굴이었다. 마린케이는 저를 따라다니며 청혼을 졸라 대던 옆 동네 소녀를 떠올렸다. ‘마린케이랑 결혼할래. 다른 남자들은 재미없어.’ 소녀의 새침한 목소리가 귓가를 윙윙 울렸다. 그 아이도 어렸다. 너무도 어려서 모든 것이 전부 아득해 보일 만큼. 과거보다 미래가 더 많은 그런 나이였다. 아마 저 소년도 그럴 것이다.

“Knight in the moon.”

마린케이가 카드와 함께 칩을 던졌다. 초승달 위에 기대 있는 기사 그림의 카드였다. 동시에 나머지 카드를 쥔 왼손을 칩 위로 덮었다. 그는 그 즉시 손목 아랫면으로 칩을 가린 채 발등 위로 떨어뜨렸다. 떨어진 칩을 신발 밑에 숨기는 것 역시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샤를이 눈을 접어 웃었다. 천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Full moon.”

선명한 보름달 카드가 테이블 위로 던져졌다. 황태자의 다음 순서였던 사내는 험악한 욕설을 뱉으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딜러가 그런 사내의 앞으로 칩 다섯 개를 더 정렬했다. 그녀는 카드를 섞으면서도 연신 황태자의 눈치를 살폈다. 샤를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칩을 굴렸다.

마린케이가 가장 먼저 남은 칩을 던지며 게임을 끝냈다. 사내 역시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마지막 칩을 던지려 했으나, 그 전에 황태자가 먼저 백지 카드를 던져 게임을 끝내버렸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 카드는 순서에 상관없이 자신의 칩을 모두 던질 수 있는 카드였다.

“제기랄, 이름도 모르는 새끼들한테 내가…!”

그 즉시 사내는 사방팔방으로 고함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사플레사는 패자에게 냉혹한 세계였다. 딜러가 테이블 한가운데의 종을 누르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가드들의 시선이 일제히 사내를 향했다. 무언으로 이루어진 협박이었다.

사내는 그들이 주는 위압감을 이기지 못하고서 테이블 위에 열쇠를 올렸다. 아쉽다는 듯 몸을 들썩거리며, 그가 고까운 눈초리로 샤를을 바라보았다. 게임 한 판으로 주인이 뒤바뀌는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도 사내의 옆에 선 소년의 표정에는 미동이 없었다.

“직접 고르지.”

그 순간, 샤를이 차가운 목소리로 사내에게 말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열쇠를 응시하는 그의 시선에는 경멸이 진득하게 깔려 있었다. 사내가 눈썹을 치켜들며 되물었다.

“직접?”

황태자는 대답 없이 몸을 일으켰다. 이번엔 소년 역시 놀란 것인지 황금빛에 가까운 눈동자가 크게 뜨여 있었다. 소년과 눈이 마주친 그가 순식간에 표정을 지우며 화사하게 웃었다.

“내가 좀 까다로워서.”

일단은 아끼던 물건을 뺏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심한 모양인지 사내는 연신 웃는 얼굴로 황태자의 비위를 맞췄다. 그런 사내를 뒤따라 걸어가던 소년이 불안한 듯 눈을 굴린다. 마린케이는 소년의 옆모습을 계속해서 곁눈질하며 주변의 동태를 살폈다.

엘리베이터에는 1층과 2층만이 존재했지만, 놀랍게도 그 가운데 숨겨진 층이 존재하고 있는 듯했다. 어두운 입구로 향하는 길목 앞에서 멈춰 선 사내가 자신의 눈을 천천히 감지 센서로 가져다 댔다. 그러자 소음 하나 없이 매끄럽게 문이 열렸다. 사내가 황태자를 향해 눈짓했다.

마린케이는 두 사람을 따라 그곳으로 들어갔다. 이어 그는 자신의 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지 못하며 입을 다물었다. 이건 도무지 억지라고 볼 수 없었다. 세상 그 자체였을 뿐이지. 세상이라는 곳은 여전히 불쾌하고, 불능했으며, 무정했다. 마치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 고대 서커스의 전시장을 흉내 낸 것일까, 창살로 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제기랄. 사람이었다. 똑같이 존엄한 생명을 지닌.

“취향껏 골라 보라고. 실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사내의 이름은 댄 미헤르. 동녘과 서녘을 오가며 귀품을 긁어모은다는 소문의 노예상이었다. 마린케이는 자꾸만 멋대로 움직이려 드는 몸을 간신히 억눌렀다. 우리 안에 갇힌 사람들이 보내는 애처로운 시선이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나이도, 성별도, 생김새도, 모두 다 달랐다. 마치 인간 전시장을 보는 것만 같은 끔찍하고도 기괴한 기분에 마린케이는 진심으로 사내의 멱을 따버리고만 싶었다.

검의 목적이 살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릴 적, 스승을 표방했던 그 남자가 강조했던 가르침이었다. 누군가를 벌하려 드는 검은 스스로를 상처 낼 뿐이라, 그리 가르쳤으면서. 그러나 마린케이는 기사의 도덕적 의무를 믿지 않았다. 도의라거나, 존중이라거나 하는 것들은 뒷골목의 이치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죽음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그가 사내를 향해 한 발자국을 내딛던 순간, 기척 없이 다가온 누군가가 그의 뒷목을 내리치며 젖은 수건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황태자에게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이가 불안해했던 이유가 설마 이것 때문이었을까. 까맣게 물들어가는 시야 속에서 확인한 황태자의 얼굴은 제법 단호했다. 붉은 입술이 조금씩 달싹거린다.

‘가만히 있어.’

뭘 가만히 있어, 이 망할 황태자 새끼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린케이는 명령대로 반항을 포기하며 몸에서 힘을 거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좀 더 편안히 기절하기 위함이었다.

***

정정하자. 기절할 뻔했다. 때릴 거면 좀 제대로 내려치든가, 아님 약을 더 많이 써보든가. 하여간 실력 없는 새끼들. 괜히 목만 아프고 기절도 하지 못한 채 끌려왔다.

덕분에 마린케이의 심기는 영 좋지 않았다. 심지어 황태자는 고이 침대 위에 눕혀 놓더니, 저는 그와 멀리 떨어진 의자에 앉혀 놓고 밧줄로 싸매 놓는 것이 아닌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처사였다.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 휴식을 즐기고 있던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네가 어떻게 좀 해봐.”

마린케이의 얼굴이 불퉁하게 구겨졌다. 방금 전까지 침대 위를 굴러다니던 새끼가 누구더라?

“제가 왜요?”

노골적인 거부였으나, 황태자는 포기하지 않고서 덧붙였다. 그 논리는 매우 빈약했다.

“넌 기사잖아.”

“머리에 돌이라도 맞으셨나. 전하께서도 기사학부세요.”

아무리 참아보려고 해도 말이 예쁘게 나오지 않는다. 평소에도 예쁜 말을 쓰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번엔 더욱 그랬다. 샤를이 밧줄로 묶인 제 손목과 발목을 보여주며 아련하게 말했다.

“난 지금 납치당한 가련한 황태자고.”

그럴 거면 아침 훈련이나 황태자답게 하시든가, 이럴 때만 황태자래. 무슨 전지훈련이라도 온 용병처럼 운동장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선연했다. 그 괴물 같은 체력에 밀리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황태자의 안전’ 따위를 운운해대는 탓에, 수련생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새벽마다 트랙을 질주해야만 했다.

“자는 척하는 것도 봐줬잖아.”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이기적인 새끼야. 방금까지 잠든 척 눈을 감고 있던 것은 두 사람 다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마린케이는 황태자의 말을 무시하고서 다시 눈을 감았다.

이까짓 밧줄쯤이야 조금 힘을 주는 정도로도 충분히 끊어낼 수 있었으나, 그 뒤가 귀찮아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사람 기절시키는 것도 제대로 못 하는 머저리 새끼들이 찾아올 테고, 그래봤자 황태자 나으리께서는 구경만 하실 것이 뻔하니 뒤처리는 전부 제 몫이 될 터였다.

마린케이의 가상 시나리오는 매우 정확한 축에 속했다. 그러니 그 귀찮음을 무릅쓰고자 한다면, 일을 벌인 당사자의 속내부터 제대로 알아야 했다. 도대체 무슨 개수작을 부리려고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 왔는지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마린케이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삶이 너무 지루하십니까?”

평소의 바다 빛깔 눈동자가 아닌, 까만 렌즈를 덮은 고요한 눈이 마린케이를 향했다. 그러나 그 얼굴만큼은 여전히 만개한 벚꽃처럼 연약하고 아름다웠다.

“어떨 것 같아?”

황태자가 반문했다. 그는 단 한 순간도 마린케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린케이.”

그가 소리 내 제 기사의 이름을 부른다. 다감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만큼의 무게가 실려 있기도 해서일까, 들었던 것 중 가장 묘하게 다가오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그 순간 마린케이는 분주히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대답해야 당신이 내정한 답에서 가장 멀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는 더 이상 황태자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왕관을 머리에 쓴 채 살아온 그와는 맞물릴 틈이 없는 삶을 살아왔으니까.

언제나 생존이 우선이었던 삶이다. 성공이니, 신분이니 하는 것들은 전혀 중요치 않았다. 그저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을 정도만, 적당히 살아가다 적당히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정도의 인생만을 바라왔다. 극단적으로 말해, 누군가에겐 볼품없는 삶이라고 해도 분에 겨웠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소박했던 꿈은 황태자를 만난 이후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어딘가 단단히 비틀려 있는 사람이었다. 전혀 황태자답지 않았고, 귀족의 체면이나 지위 같은 것들은 절벽 아래 떨어뜨려 놓은 사람인 양 행동했다. 누군가에겐 귀감이 될 모습이 확실했지만, 마린케이에게는 달랐다.

“누군가를 구하려고 오신 겁니까, 아니면.”

처음 검을 잡은 이유를 묻는다면 스스럼없이 대답할 것이다. 그저 살아남기 위함이었다고. 뒷골목의 생태에 따른 접근이었을 뿐이지 대의를 위해 행한 것이 아니었다.

“바꾸려고 오신 겁니까?”

주어도, 목적어도 필요치 않은 문장이었다. 단 한 순간도 기사가 되고 싶었던 적 없다. 그러나 누군가 세상을 바꾼다면, 바꾸고자 한다면,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원했으니까. 그저 주어진 것에 만족해도 좋으니, 살아가기 위해선 선택해야 했다.

“나는 황제가 될 생각이 없어.”

그것이 어린 마린케이 이스턴이 스스럼없이 검을 잡았던 이유였다.

“머릿속엔 온통 도망칠 생각뿐이지.”

샤를이 무언가를 회상하듯 눈을 내리감았다. 조금은 쓸쓸하게 들리는 목소리였지만, 그 위에는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한 의지와 신뢰가 담겨 있었다.

“가쉰의 황제는, 모든 것을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거야.”

“…….”

“그래야 바꿀 수 있거든.”

선택은 끝났다. 마린케이는 빠르게 밧줄을 끊어내고서 몸을 일으켰다. 지긋지긋한 의자를 걷어차 버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어 그가 벽면에 붙은 CCTV를 향해 단도를 던졌다. 산산조각 난 카메라 렌즈와 더불어 작은 단도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마린케이는 그것을 집어 들어 황태자에게로 던졌다. 그가 채근하듯 내뱉었다.

“밧줄은 알아서 푸십시오.”

황제가 될 생각이 없다고? 어쩌면 한순간의 치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린케이는 몇 안 되는 가능성에 몸을 실을 정도로 생각이 짧지 않았다. 더군다나 상대는 제국을 집어삼킨 황태자 아닌가. 벌꿀 같은 금발과 보석처럼 빛나는 벽안을 가진, 고서 속의 가쉰 황제를 닮은 그 남자. 가쉰은 초대 황제의 이름을 국명으로 삼을 만큼 황가의 전통이 깊게 뿌리내린 국가다.

“친절도 하셔라.”

역사상 가장 눈부신 외모를 가진 가쉰의 핏줄이 곱게 눈웃음치며 말했다. 마린케이는 결국 몇 안 되는 가능성에 몸을 싣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답을 알게 될 테니 상관없었다. 누가 틀렸는지, 그리고 옳았는지 말이다. 배팅은 끝났으니 이제 실행할 일만 남았다.

마린케이가 태연히 문고리를 걷어차 손잡이를 뜯어냈다. 어느새 밧줄을 전부 다 끊어내고서 몸을 일으킨 황태자는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터프한데? 물론, 마린케이는 그따위의 개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황태자를 무시한 마린케이가 마지막으로 문짝을 걷어찼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속절없이 입을 벌렸다.

샤를은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마린보이는 역시 소년만화를 너무 많이 읽은 것이 분명하다고. 그러면서도 환하게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진짜, 완전히 내 취향이잖아?

***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기사도 따위 밥 말아 먹은 뒷골목 출신의 무뢰배가 왕립학교에 입학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제국의 명성에 흠이 가는 일이라고.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마린케이는 왕립학교의 가르침을 믿지 않았다. 무언가를 배우려고 입학한 것도 아니었으니, 베움에 대한 의지조차 미약했다. 상대를 존중하고, 비도덕적인 공격은 행하지 않으며, 언제나 도의적인 절차로 움직여야만 한다는 기사의 의무는 마린케이가 살아온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거듭하지만, 오직 살아남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였던 부랑자들의 거리가 바로 마린케이 이스턴이 배워온 세상이란 놈 아니었던가? 예의와 충절은 생존을 약속해주는 요소들이 아니었다. 고로 마린케이는 언제나 왕립학교의 가르침이 꼴불견이라고 생각했다.

“크흑, 허억!”

듣기 싫은 비명소리는 한 번으로 족했기에, 그는 오직 덩치의 뒷덜미를 내려치는 간결한 동작 하나만을 사용했다. 쓰러진 몸뚱이는 대강 바닥에 굴려 치웠다. 그 와중에도 둔탁한 소리가 나지 않게끔 발로 흉부 부근을 덧대어 주는 센스 역시 탁월했다. 그야말로 상대에 대한 존중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약아빠진 동작이었다. 이유는 보다 명확했는데, 실제로 그가 이 덩치 큰 사내를 존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기사도는 개뿔.

마린케이는 누구보다 과감하고, 비겁한 방식으로 그들을 응징하고자 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흡족함이었다. 왕립학교는 언제나 절제를 기반으로 한 동작들을 가르쳤다. 그래서인지 내키는 대로 마음껏 손을 휘두를 수 있는 기회가 전무할 정도로 없었다. 마린케이는 때를 놓치지 않고서 열심히 손과 발을 휘둘렀다. 마음까지 다 청량해지는 기분이었다.

“적당히 해, 적당히.”

말리는 시누이가 더 약 오른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사방팔방 날뛰어 다니는 마린케이의 뒤에 서 있던 황태자는 콧노래를 부르며 말했다. 그 모습이 마치 뒷골목 양아치를 거느린 건달 두목같이 보였는데, 전혀 말리는 투가 아닌 목소리로 ‘적당히 해’, ‘천천히 해’ 등의 단어를 곱씹는 모습이 마치 성악설의 현신인 듯싶었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황태자의 저 옥 같은 몸에 상처 하나라도 생긴다고 가정해 보자. 아무리 변명해 봐도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 훤했다. 죄목이 무엇일지도 기꺼이 유추해 볼 수 있었다. 황태자를 지키지 못한 것 또한 그를 사지로 내몬 것이나 다름없다며, 황족 시해죄를 남발해대겠지. 그럴 바에는 차라리 망명을 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을 끝낸 마린케이는 썩 괜찮지 않은 기분으로 황태자를 제 뒤에 숨겼다. 그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정한 간격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그 정도로 가까운 거리감이었다.

“근데, 왜 계속 앞으로 가는 겁니까?”

정곡을 찌른 질문이었다.

“무슨 소리야. 도망치기라도 하게?”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빛을 발하는 것이 황태자의 철면피였다. 제국민의 사랑을 받는 어여쁜 황태자가 너무하다는 듯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물었다.

“설마 도망치고 싶은 건 아니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하는 가련한 표정이었으나, 마린케이에게는 달랐다. 그는 낯을 찡그리며 역겨워하기 급급했다.

빌어먹을, 그럼 뭐 어쩌게. 애초에 선택지조차 적은 게임이다. 맨몸으로 납치돼 여기까지 탈출한 것만 해도 기적인데, 제대로 된 설명하나 없이 계속 앞으로 전진하라고 명령해대는 미치광이 새끼는 싹수가 노란 걸 넘어 아주 뿌리까지 썩어 문드러진 게 틀림없었다.

짜증을 한껏 입에 문 겁 없는 평민이 열과 성을 다해 반박했다.

“이럴 거면 그냥 거기 그대로 갇혀 있으시던가. 왜 굳이 나와서 일을 키우십니까?”

혼자 침대에 드러누워 휴식을 즐기던 상판대기가 아직까지 눈에 선하다. 둘 다 기절한 척 시간을 축내고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인데, 꼭 저만 꼼수를 부린 듯 몰아가던 목소리도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에 샤를은 그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준비라도 한 듯 매끄러운 동작이었다.

“언제 올 줄 알고 기다려. 넌 시간이 남아돌아?”

남아돈다, 이 새끼야. 그러니까 이 개 같은 수련회나 끌려와서 발닦개 노릇을 하고 있지! 마린케이는 뒷골목 누님들에게 온갖 놀림을 당해가며 배웠던 인내심을 십분 발휘하여 황태자의 뻔뻔함을 견뎌냈다. 이 정도도 장족의 발전이었기에 스스로를 칭찬해줄 만했다.

그는 계속해서 짧게 명상하며 황태자를 무시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은 체력으로 퍼스트 클래스를 장악한 용병 황태자와, 그런 황태자에 지지 않는 악착같은 평민 수련생이 만들어 낸 회심의 역작으로 생각하면 될까?

“낸들 마취총을 쏠 걸 알았겠냐고.”

그럴 리가 없지. 다시 한번 밧줄에 묶이게 된 마린케이가 태연자약하게 중얼거렸다. 이번엔 시멘트 기둥에 묶여 있는 마린케이를 바라보며, 트윈 사이즈 침대 위에 누워있던 샤를이 한심하다는 듯 말을 걸었다.

“그러게 한 대 맞았을 때 기절한 척했어야지. 그게 특기 아니었어?”

“글쎄, 쏘고 있는 걸 몰랐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곰이나 사자도 마취 총 세 대면 잠이 들 법한데, 마린케이는 심지어 마취 총을 여섯 대 맞고서야 간신히 졸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지막 일곱 번째 마취 총을 맞았을 때 비로소 바닥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정신을 잃은 척 덩치에게 업혀 있던 샤를은 차마 그걸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어이없는 웃음을 삼켜내기에 바빴다.

또 똑같은 상황의 반복이었다. 황태자는 이번엔 수갑이 채워진 상태로 커다란 침대 위에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마찬가지로 마린케이 역시 밧줄에 묶인 채였는데, 이번엔 앉혀 놓지도 않은 것이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 처사였다. 밧줄을 또 얼마나 꽉 묶어 놨는지 손목에 흠이 패일 지경이었다. 피라도 통하면 다행이겠다. 하지만 마린케이는 한가롭기 짝이 없었다.

“어떡하실 겁니까?”

실은 오랜만에 몸을 쓰고 난 직후 갖게 된 휴식이라 그런지 좀 달갑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금색 이불에 둘러싸인 황태자가 스프링에 반동을 일으켜 상반신을 세웠다.

“알아서 찾아와 줬으니 기다려야지.”

“혼자 기다리셔도 됩니다.”

확실히, 황태자를 버리고 행동할 수 있으면 탈출도 간편하고 쉬울 것 같았다. 자신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무난한 생김새이니 섞이기도 쉬울 테고, 심지어 제국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는 갈색 머리기에 누가 누구인지 구분하지도 못할 것이 당연했다.

마린케이는 내심 기대를 담아 제안했다.

“제가 먼저 나가서 소식을 전하는 건 어떻습니까?”

잘 생각해 보면 괜찮은 계획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전적으로 마린케이의 관점에서만 괜찮은 계획이었다. 황태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각.”

벌써 몇 번째 들어보는 기각 소리인지 모르겠다. 마린케이가 티 나게 얼굴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양심 없는 새끼.”

방 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황태자가 누운 커다란 침대와 창살로 막힌 창문이 다였다. 누가 봐도 성가신 구조였지만, 정작 납치되어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문제는 슬슬 팔이 저리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이대로 몇 번 힘을 줘서 밧줄을 끊어버리거나 하면 됐지만, 황태자부터가 탈출할 생각이 없는 듯싶으니 마린케이 또한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시멘트에 기대 서 있던 마린케이가 지루함에 몸부림치던 찰나였다.

“이거야 원, 제 발로 따라와줘서 얼마나 고마운 줄 몰라.”

게임에 패배하고서 재산을 탕진했던 사내가 수행원으로 보이는 가드 세 명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철문이 젖혀지며 끼긱거리는 소리를 낸다. 그때까지만 해도 느슨하게 침대에 누워 있던 황태자는 표정을 굳히며 몸을 일으켰다.

사내가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리며 침대 끝,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느 집안 도련님이길래 이리 곱상하실까?”

황실에서 오신 도련님이다, 멍청한 새끼야. 대신 대답해줄까 하다가 굳이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마린케이는 속으로 사내의 명복을 빌며 빠르게 매듭을 풀어 내렸다. 밧줄 스치는 소리 하나 없이 신들린 듯한 손놀림이었다.

그는 심심하면 저를 데리고 밧줄 묶기를 하던 동네 꼬마들을 떠올렸다. 뒷골목에 있는 장난감이라곤 밧줄 같은 것들뿐이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퍽 가엾은 일이다. 물론, 덕분에 유용한 기술을 하나 더 익히게 되었다는 것에는 감사했다. 양손이 자유로워졌으나 황태자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로서도 정자세로 가만히 버티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집안이 중요해?”

황실에서 나고 자란 성질 더러운 양아치가 응수했다. 사내가 흥미롭다는 듯 황태자를 살폈다. 곱상한 것을 넘어, 신이 빚은 것만 같은 그 매혹적인 외양에 사내의 만면 가득 커다란 웃음이 퍼졌다. 간만에 제대로 된 상품을 하나 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전에, 이런 성질 나쁜 상품들은 대개 먼저 길을 잘 들여놓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사내는 황태자가 덮고 있던 금색 이불을 끌어 내리며 낄낄댔다.

“중요치 않지. 넌 오늘부로 없는 사람이 될 테니까.”

저 인간은 과연 무슨 형을 살다 인생을 마감하게 되려나. 종신형이면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마린케이는 눈앞의 쓰레기가 제 미래를 스스로 망치고 있는 현장을 흥미롭게 구경했다.

“자신 있나 보네.”

샤를이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두려움이라고는 한 톨도 깃들어 있지 않은 것 같은 비웃음이었다. 이내 그가 마린케이를 눈짓하며 말했다.

“쟤가 어떤 물건인 줄 알아?”

‘이건 또 뭐야.’

마린케이는 갑작스러운 배역 추가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난 관람객 역할 아니었어? 그가 억울한 심정을 가득 담아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사람 후려 패는 개새끼 역할이 아니고서야 연기에는 어릴 적부터 원체 소질이 없었다.

“내 형님께서 성인식 때 선물해주신 제국 최고의 기사야.”

저 새끼가 진짜 돌았나…! 황태자의 말을 끝으로, 수행원 셋을 포함한 다섯 명의 시선이 일제히 마린케이에게 쏟아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가쉰 제1검이다.”

가까스로 입을 열어 답했지만, 황태자의 표정이 뭉개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실패한 모양이었다. 마린케이는 연기에 재주가 없을 뿐만 아니라 대사를 지어내는 것에도 재능이 없었다.

풉. 소년만화에서나 튀어나올 법한 대사에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 마린케이가 이를 갈며 눈을 부라렸다. 합리적 의심으로는 황태자 놈이었다. 그리고 마린케이의 예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중했다.

“하하. 형님이란 놈팽이가 겨우 저딴 놈을 선물해줬다고?”

사내가 자신을 비웃든지 말든지 간에 황태자는 그냥 웃음을 참기에 바빴다. 표정은 차가웠지만, 얼굴 한쪽에는 어김없이 사랑스러운 보조개가 피어올라 있었다. 그 꼴을 바라보던 마린케이는 차라리 여기서 혀를 깨물고 죽어버릴까, 진심으로 고민했다.

황태자는 겨우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며 역할로 돌아갔다.

“그래. 백작 각하께서 고르고 골라 선물해준…….”

“……백작?”

사내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네가 백작의 동생이라고?”

이윽고 그가 미친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황태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음흉한 걸 넘어 흉악하기까지 하다. 마린케이가 황태자의 눈치를 살폈다. 작은 신호라도 있으면 당장 수행원 셋부터 처리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황태자는 싸늘한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내가 황태자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치며 고압적인 목소리를 냈다.

“백작 나으리라면 지금쯤 진탕 취해 2층을 굴러다니고 있을 텐데, 가서 한번 물어보련?”

마린케이는 서약식 때 보았던 백작의 모습을 떠올렸다. 절차에 따라 자신이 두르고 있던 망토를 서약자에게 넘겨주며 검을 맞부딪히는 모습이 인상적이던 남자다. 청렴하기로 유명한 그 백작 각하의 이름을 베사플레사의 노름꾼이 운운하고 있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그 순간, 무표정하던 황태자의 얼굴에 그야말로 물망초처럼 어여쁜 미소가 퍼져가기 시작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은데. 마린케이의 육감이 위험을 경고했다.

“그 새끼였구나?”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

“너희 뒤 봐주던 게.”

이 망할 외부 수련회의 진의를 알게 된 마린케이가 허, 하며 바람 빠지게 웃었다. 황태자의 농간에 저까지 놀아난 꼴이었지만, 오히려 유쾌한 기분이 드는 것에 기묘함을 느꼈다.

뒤바뀐 분위기를 눈치챈 사내가 수행원들을 향해 손짓했으나, 그는 이미 한발 늦었다. 기척 없이 다가온 마린케이가 뒷목을 후려쳐 차례로 그들을 기절시켰다.

“기절은 이렇게 시키는 거야, 씹새끼들아.”

사심을 담아 한 번씩 더 뒤통수를 내려쳐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것 모두가 미처 반항할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게 묶여 있었던 밧줄을 들고 온 마린케이는 사내의 뒤편에 서서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수갑을 침대 모서리에 내려쳐 박살 낸 황태자가 그제야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가발을 벗어 던졌다. 초대 황제를 빼다 박은 찬란한 금발이 흩어져 내렸다. 티끌 하나 섞이지 않은 저 벌꿀 같은 머리칼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황태자는 가벼운 목소리로 답했다.

“좋을 대로 하라고 해.”

“…….”

“황족 시해 미수 건으로 지하실에 끌려갈지.”

“…….”

“순순히 다 불고 구금형으로 끝낼지.”

마린케이가 하는 수 없다는 듯, 사내에게 밧줄을 휘감아 질질 끌고 갔다. 뒤끝을 잔뜩 담은 화풀이라는 걸 애써 부정하지는 않겠다. 시멘트 기둥에 묶이기 직전까지 완강히 반항하려 드는 사내에게, 마린케이는 진심을 담아 경고했다.

“시멘트에 파묻혀 뒈지는 게 꿈이야?”

저속하고 악랄한 발언이었음에도 전혀 객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뼈를 도려낼 듯한 살벌한 눈빛에 사내가 비틀거리며 밧줄에 묶였다. 작업을 끝낸 마린케이는 흐뭇한 얼굴로 황태자를 돌아보았다. 이제 거의 끝냈으니까…….

“밥 좀 먹으면 안 됩니까?”

어느덧 창틀 너머로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애절한 목소리에 황태자가 침대 위를 구르며 폭소했다. 억지로 눌러 참았던 유쾌함을 이제야 다 토해내는 듯한 모습을 보며, 마린케이는 그의 정신 상태를 또다시 진지하게 의심해야만 했다. 하여간 기분 나쁜 새끼. 왜 저래?

***

연애질이 아니라 틈새 공략을 하고 있었던 건가. 어느 순간부터 노름판에서 황태자와 의미심장한 눈짓을 주고받던 여인들이 폴리스 군단을 대동하고서 나타났다.

황태자는 예의 그 검은 머리 가발을 다시 쓰고 있었는데, 그걸로도 모자라 마린케이의 마스크를 빼앗아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기까지 했다. 만약 그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세간에 밝혀지기라도 했다간 또 말도 안 되는 추문에 시달리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평민과의 스캔들은 소소한 가십거리로 만들어버릴 ‘샤를 소피아 엔스, 알고 보니 노예 경매의 주최자?’ 따위의 자극적인 기사 제목이 벌써부터 포털을 오르내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에게 마스크를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지 않는 용모 덕분인지 마린케이는 어떠한 검문도 받지 않고서 미로 같은 베사플레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마린보이, 위장술에도 재능이 있었네.”

황태자의 조롱에 시달리던 그가 폴리스에 의해 구조되고 있던 노예들을 바라보며 해방감을 느끼던 때였다. 홍옥처럼 붉은 머리칼을 가진 소년이 고개를 돌리는 것이 시야에 담겼다.

쟤가 허튼소리라도 하면 안 되는데. 의도치는 않았으나 노름에 가담했던 것은 사실이기에, 마린케이는 영 석연치 못한 기분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 순간 소년이 저에게 담요를 덮어주는 폴리스들을 강하게 밀어내고서 두 사람 쪽을 향해 달려왔다.

“저도, 저도 데려가요!”

이제 막 변성기가 온 것 같은 어린 목소리가 다급하게 쏟아져 내렸다. 화언국 사람들 중에서도 붉은 머리칼과 금색 눈을 가진 이들은 탄압당한 약소민족 출신이라고 한다. 만약 운이 좋아 고국으로 돌려 보내진다고 해도, 이미 한 번 노예로 가쉰에 팔려 왔던 소년의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소년을 도울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순간 마린케이는 거리에 주저앉아 구걸부터 배우기 시작하던 뒷골목의 아이들을 떠올렸다. 누구도 그 아이들에게 손 내밀어주지 않았다. 이해한다. 그저 자신의 인생을 감당하기에도 벅차기만 한 것이 뒷골목의 생태였으니까. 불행은 전염된다. 그러니 인생을 낙하시킬 그 어떤 가능성의 개입도 허락지 않아야만, 조금이라도 더 길게 삶을 버텨낼 수 있었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제발요. 저 할 수 있는 것도 되게 많아요. 다 열심히 할게요. 네?”

먼저 소년을 등진 것은 마린케이 쪽이었다. 그가 소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황태자에게 물었다.

“책임질 자신 있으십니까?”

전쟁터 같은 삶에서 어린 생명의 손을 맞잡는 것은 그 존재 자체를 제 품 안에 떠맡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설상가상으로 눈앞의 이는 황태자였다. 손에 올려본 것이라고는 각종 진귀한 금은보화들밖에 없을, 그토록 찬란한 금발의 주인.

“…전하.”

그러나 황태자는 마린케이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그가 소년의 앞까지 걸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서는 흘러내린 담요를 다시 끌어 올려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로 가고 싶은데?”

작은 미소 역시 함께였다. 마린케이는 그런 황태자의 모습을 보며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거리에 주저앉은 아이들에겐 그 누구도 손 내밀어주지 않았다. 그건 마린케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당신은 황태자잖아. 제국을 손에 쥐고 살아갈 수 있는.

“아무 데나 상관없어요. 지옥 같은 화언국만 아니면 돼요. 차라리 여기서 노예로 있는 편이 나아요.”

“노예로 살아가는 게 어울리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

위화감에서 시작된 원인 불명의 심장 박동이 그의 피부를 타고 고스란히 와닿았다. 황태자는 소년의 붉은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어 넘겼다. 그 모습이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느리게 펼쳐졌다. 책임질 자신이 없으면 어떠한 희망도, 바람도 심어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황태자는 얼간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원하지 않는 이들은 본국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거야. 가쉰에 계속 남아있어도 돼.”

“거짓말…. 거짓말이잖아요.”

소년이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눈물방울들이 작은 얼굴을 적신다. 보다 못한 마린케이가 황태자를 저지하려던 때였다. 그가 자신의 머리끈을 풀어 소년에게 쥐여 주며 속삭였다.

“엔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난 네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 거야.”

걸음이 멎었다. 호흡 역시 멈추었다. 자신을 둘러싼 시간이 모두 멈춰버린 듯한 아연한 기분에 마린케이는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가 소년의 눈물을 닦아주며 미소 짓는다. 소중한 것을 바라보는 듯한 따스한 얼굴이었다. 어떤 귀족도 마린케이에게 저런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내 황태자가 당부하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은 힘들지만, 이걸 지니고 있으면 내가 꼭 널 찾으러 갈게.”

“……정말 황족이에요? 엔스?”

“그래. 대신 다른 사람 눈에 띄지 말고, 너만 가지고 있어야 해. 할 수 있겠니?”

“네! 할 수 있어요. 기다릴 수 있어요. 착하게 기다릴게요.”

“착할 필요는 없으니, 누가 네게 물어봐도 황족을 만났다고 하지는 마.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최대한 빨리 찾으러 갈게.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줘.”

행동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비록 한순간의 선택에 불과할지라도, 그 행동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할 운명에 다다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태자는 행동했다. 작은 손을 맞잡고, 그 눈물을 닦아주며. 가쉰의 황태자가 어린 노예의 앞에 무릎 꿇은 채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그 순간 마린케이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숨을 죽였다. 좀처럼 고정된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아버지가 연신 뜨개질을 하시고, 어머니는 그러다 남은 실 뭉텅이를 가져다 볼품없는 목도리를 만들어주셨다. 허나 그 목도리조차도 가지지 못하는 부랑자들이 존재했다.

여느 때처럼 거리에 나간 마린케이는, 헐벗은 채로 골목에 앉아 있던 작은 아이에게 제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날이 곧 추워질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그 아이는 맞아 죽었다. 단지 그 초라한 목도리 하나 때문에. 그것조차 가지지 못한 자들이 아이에게서 목도리를 빼앗는 방법은 아주 쉬웠다. 어린 생명은 손쉬운 폭력 하나에도 무방비하게 목숨을 잃는다. 그날 이후로 마린케이는 그 어떤 부랑자에게도 시선을 건네지 않았다. 책임지지 못할 것이라면.

“……이제 가셔야 합니다.”

책임지려 하지 말아야 하는 게 마땅하잖아. 마린케이가 낮은 목소리로 황태자를 불렀다. 그러나 황태자는 소년이 눈물을 멈추고, 스스로 폴리스에게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그 작은 손을 놓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마린케이는 눈을 내리감았다. 샤를 소피아 엔스. 장차 가쉰을 손에 넣을 제국의 황태자.

모든 것을 가진 그 남자가 몸을 일으키며 투덜댔다.

“담요가 저게 뭐야? 수건보다도 더 얇은 것 같은데.”

들려오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양아치 새끼의 목소리가 맞았지만, 이상하게도 자꾸만 그를 멍하니 바라보게 되었다. 마린케이의 시선을 눈치챈 황태자가 제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왜.

“새삼스레 예뻐?”

“…빌어먹을.”

다급히 정신을 차린 마린케이는 스스로를 저주하며 이를 갈았다. 한순간이라도 황태자 새끼를 진짜 주군 대하듯 바라본 자신이 무척 수치스러웠다.

“예쁘구나?”

“먼저 갑니다.”

불만이 가득 찬 마린케이의 목소리에 샤를이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부끄럽나 보네. 그가 둥그런 귓가 바로 앞에 대고 속삭였다. 그에 마린케이는 또다시 광분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누가 그럽니까!”

“눈만 봐도 알아.”

“하루라도 개소리를 안 하면 입에 가시가 돋으세요?”

“음……. 왈왈?”

***

그렇게 두 사람은 날이 밝은 걸로도 모자라, 오후 시간이 다 되어서야 간신히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때아닌 황태자의 실종에 온 체제가 마비 상태였던 수련생들이 일제히 ‘전하!’를 외치며 달려들었다. 한 덩치 한다는 인간들이 모두 달려들어 눈물 콧물을 빼는 장관 속에서, 마린케이는 슬그머니 뒤로 빠져 제 방으로 향했다.

설마 눈치가 있다면 따라오진 않겠지. 아무리 제국에서 제일가는 양아치 새끼라고 해도 그 정도 눈치는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이 황태자 새끼를 과소평가했음을 깨달아야만 했다.

“뭘 봐?”

새침하기만 한 목소리에 마린케이는 자신이 샤워 가운 하나만을 입은 상태라는 것도 잊고서 짜증 섞인 힐난을 던졌다.

“그렇게 할 일이 없으십니까?”

“무슨 소리야? 여긴 내 방인데.”

예상치 못한 대답에 마린케이가 당황하며 되물었다. 네? 물기를 닦으려고 얹어 둔 머리 위의 수건이 발치로 미끄러진다. 황태자는 가뿐히 몸을 일으켜 마린케이에게 걸어왔다. 떨어진 수건을 다시 집어 머리 위로 얹어주는 동작조차 완벽했다.

“우리 이스턴 경은 남의 방에서 샤워하는 취미라도 있나?”

말도 안 돼. 마린케이가 서둘러 방 안을 확인했다. 침대보 색깔부터 창틀 옆에 걸려 있는 액자나 조명까지 모든 것이……, 아. 다르구나. 제기랄. 다르네.

“네 방은 6층이야. 7층이 아니고.”

훈련이 끝나고 기숙사로 향할 때마다 언제나 7층 버튼을 눌렀기에, 이번에도 습관처럼 7층으로 향한 모양이다. 마린케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구경하던 샤를은 괜찮다며 가식적인 위로를 건넸다. 그보다, 저 자식은 왜 방문도 안 잠그고 다니는 건데? 마린케이의 혼잣말에 친절히 답변해주는 것 역시 그의 몫이었다.

“누가 감히 내 방에 들어올 생각을 하겠어?”

완벽한 논리였다. 마린케이는 눈을 굴리며 호시탐탐 도망칠 기회를 엿봤다. 일단 수건을 얼굴에 던져서 시야를 막자. 그 틈을 타서 도망가는 거고.

전혀 그럴듯하지 않은 계획이었지만 실행은 재빨랐다. 물에 젖은 수건을 황태자에게 냅다 집어 던진 마린케이가 약삭빠르게 팔을 빼던 찰나였다.

귀신같은 순발력을 가진 황태자는 마린케이의 발을 걷어차 제 쪽으로 넘어뜨렸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몸을 붙잡아 품 안으로 끌어당긴 샤를이 자신의 승리를 예감하던 때였다.

제대로 묶지 않았던 샤워 가운의 끈이 힘없이 풀어지며, 샴푸 향기가 가득 밴 상반신이 전부 노출되었다. 눈 뜨고도 믿지 못할 충격적인 전개에 두 사람 다 할 말을 잃은 시점이었다. 똑똑. 다급한 노크 소리가 또 다른 스캔들의 서막을 알렸다.

“전하, 괜찮으십…….”

황태자가 실종됐다는 소식에 곧바로 전용기를 타고 베사까지 날아온 피에르 셀번이 근심 걱정을 가득 담은 채로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

쾅!

마린케이는 안 그래도 실타래처럼 꼬여 있던 인생이 더 답 없이 틀어졌다는 걸 느끼며 황태자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이 엿 같은 수련회가 끝나면 꼭 퇴학당해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퇴학당하고야 말겠다. 그렇게 수백 번은 더 다짐하면서.

***

그 후로 쭉 저 상태였다. 하염없이 저를 노려보는 활화산 같은 시선에 이제는 먹던 밥이 코로 뿜어져 나올 지경이었다. 황태자 광신도의 맹렬한 눈빛 공격은 도무지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 아까운 밥을 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던지라, 마린케이는 꾸역꾸역 목 뒤로 음식물을 밀어 넣었다.

황태자가 돌아온 후 본격적으로 재개된 외부 수련은 말만 외부 수련이었지, 평소 하던 훈련들을 그대로 이어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황태자의 탈을 쓴 용병 새끼는 여전히 괴물 같은 체력을 자랑하며 미리 마련되어 있던 트랙을 돌았다.

마린케이 역시 늘 하던 대로 인파에 섞여 트랙을 달렸지만,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는 광신도의 존재에 먹었던 밥이 역류할 것만 같았다.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니 캐리어 두 개도 제대로 못 끌어 낑낑대던 옆집 귀족 도련님이 맞았다. 도대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다 사실이 아니니 제발 꺼져줬으면 싶었다.

황태자에겐 추호도 관심 없으니 날 좀 내버려 두라며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게 마린케이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 억하심정을 알지도 못하는 사태의 장본인, 샤를 소피아 엔스가 너무도 말끔한 얼굴로 마린케이에게 다가왔다. 트랙을 총 열다섯 바퀴 뛰고 나서야 몸풀기를 마친 사람치고는 상당히 멀쩡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심지어 땀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은 듯한 모습이 비인간적인 것을 넘어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쟤 알아?”

황태자의 곁눈질 끝에는 아니나 다를까, 투지에 불타오르는 눈을 한 귀족 도련님께서 저를 노려보고 계셨다. 그 모습을 확인한 마린케이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옆집 사는 사람인 건 압니다.”

이러나저러나 핍박을 당할 바엔 그냥 신경을 끄는 편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빠르고도 현명한 포기였다.

“그래도 안면은 있어서 다행이네.”

지 일이 아니니까 다행이라는 거겠지. 이온 음료를 마저 다 들이켠 마린케이가 황태자를 피해 달아나려 시도했지만, 불행히도 첫 번째 시도는 미수로 그쳤다. 마린케이의 옷자락을 끌어당긴 샤를이 어깨동무를 하며 물었다. 제기랄. 건너편의 시선이 더욱 공격성을 띠기 시작한다. 지금 보니 이 망할 황태자는 그냥 저 귀족 도련님을 골려 먹고 싶은 것 같았다.

“마린보이. 요새 대련 안 한 지 꽤 되지 않았어?”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것이다. 신고식 사건 이후 누구도 마린케이와 대련하고 싶어 하지 않아서였다. 황태자가 상큼하게 웃으며 선고했다.

“쟤랑 한번 해봐. 재밌을 것 같은데.”

정말, 진심으로 딱 한 대만 때려보고 싶은데 안 되겠지? 마린케이는 웃으며 대련을 명하는 황태자의 이마에 딱밤 한 대를 놓는 상상을 철을 씹듯 곱씹었다.

“평민은 귀족 몸에 손댈 수 없다는 거, 모르십니까?”

평민과 귀족이라는 이분법적인 단어에 조금 표정을 굳힌 샤를이 어깨를 으쓱이며 응수했다.

“나랑 내기한 거 기억 안 나?”

러닝머신 위에서의 치열한 사투를 기억해낸 마린케이는 머리를 헤집으며 대꾸했다.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됩니까?”

베사플레사에서 느꼈던 주군에 대한 경애는 어디로 사라진 건지, 설득을 포기한 마린케이가 축 늘어진 몸짓으로 목검을 찾아 들었다.

“이걸로 소원은 끝입니다.”

황태자가 대답하지 않고서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간단한 손짓 한 번에 투견처럼 달려온 피에르는 갑작스러운 명령에도 불구하고 기뻐 날뛰며 대련을 수락했다.

또다시 삼삼오오 모여 내기를 시작하는 수련생들을 바라보며, 마린케이는 부디 이 대련의 결말이 몇 번 검이나 부딪히다 무사히 끝날 수 있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작디작은 소망은 이번에도 절벽 밑으로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전하는 내가 지킨다. 평민.”

미친 새끼. 대련 상대가 저를 지나치며 내뱉는 충격적인 경고에 마린케이는 그만 목검을 떨어뜨릴 뻔하고 말았다. 온몸을 타고 소름이 돋는다. 지켜? 저 새끼를? 황태자를?

누가 누굴 지킨다는 건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닭살 돋은 피부 위를 문지르던 마린케이가 찝찝한 심정으로 대련 상대에게 다가갔다.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면 대련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저 호루라기를 겨냥해서 검을 던져버리는 게 어떨까? 마린케이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집어치우려 노력하며 무덤덤하게 손안에서 검을 굴렸다. 이윽고 열렬히 불어진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그가 검을 고쳐 잡았다.

저를 향해 돌진하는 몸을 보고 있으려니 금세 생각이 바뀌었다. 어쨌든 상대는 황태자도 아니시겠다, 이왕 찾아온 기회를 활용해 찌뿌둥한 몸을 제대로 풀어볼 작정이었다.

***

고양이가 쥐를 몰아 놓고 사냥을 즐기는 모습이 딱 저 꼴 아닐까. 졸업을 앞둔 칼릭스 커티스는 저 대련장에 서 있는 것이 제가 아니라는 사실에 깊이 안도했다. 나사 하나가 빠진 것이 분명한 갈색 머리 평민은 공작 가의 차남을 정말, 말 그대로 후드려 팼다. 다른 고급스러운 어휘를 사용하고 싶었지만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원색적인 단어들밖에 없었다.

괜히 안타까움이 느껴져서인지, 그는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그 참혹한 현장을 외면하고자 했다. 그러게 왜 까불어서는. 어쨌든 간 판돈은 평민의 승리에 걸었으니 알 바 아니었다.

「너 걔한테 처맞을 것 같아.」

황태자의 유쾌한 경고 또한 이 시점에서 다시 평가받아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때때로 그는 거리의 시정잡배를 흉내 내는 것 같은 말투를 사용하곤 했는데, 사실은 그것 자체가 그의 본질에 가깝다는 것을 가엾은 피에르만 모르고 있는 듯했다.

일순간 자신의 어깨를 내려치려는 목검을 간신히 막아내며, 피에르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허벅지에 강하게 힘을 줬다.

평민이 사용하는 검술은 왕립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어떠한 맥락도, 과정도 거치지 않은 무분별한 공격에 거의 미쳐갈 지경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두 목검이 첨예하게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 마린케이는 곧바로 한 걸음을 물려 상대의 무게 중심을 흐트러뜨렸다. 봐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몸짓이었다. 그대로 목검을 당겨 잡아 제 손 바로 윗부분을 내려치는 동작에 피에르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미친 건가? 검사의 손을 공격하다니!”

예의에 어긋난 것도 맞고, 도리에 어긋난 것도 맞다. 그러나 마린케이는 별 상관없다는 듯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황태자보다 더 시정잡배 같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대련을 입으로 합니까?”

경어체를 사용하면서도 존중이라고는 전혀 담지 않은 채 말할 수 있는 것 또한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자신의 자존심을 긁어버리는 대쪽 같은 발언에 피에르가 공격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잠깐 휘청거리는 듯싶던 마린케이는 발을 들어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아악!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걷어찬 덕분인지 피에르에게서 낮은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틈을 타 다시 한번 검을 내리치려던 순간이었다.

삐익-! 결국 보다 못한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며 중재에 나섰다. 숨 한번 고르지 않고서 검을 거둔 마린케이가 아쉬움을 가득 담아 귀족 도련님의 얼굴을 살폈다. 보기보다 엄살이 심하시네. 그게 피에르 셀번에 대한 마린케이 이스턴의 유일한 평가였다. 벤치에 앉아 대련을 구경 중이던 황태자는 이온 음료를 손에 들고서 마린케이에게 다가왔다.

“야비한 걸론 네가 가쉰 최강이야. 알지?”

칭찬 같지 않은 칭찬이었다. 마린케이가 불쾌하게 얼굴을 구기며 이온 음료를 빼앗아 들었다. 대꾸조차 하지 않는 시건방진 모습에도 황태자는 즐거운 듯 웃으며 박수를 보냈다. 그런 황태자의 모습은 마린케이의 눈에 마치 조롱이 일상화된 사람처럼 비쳐졌다.

조롱쟁이 황태자를 뒤로 한 마린케이가 두 번째 대련을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수, 수련생 보호를 위해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사색이 된 얼굴로 다가온 심판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대체 어딜 봐서 저게 보호가 필요한 새끼라는 거야. 마린케이는 얼음주머니를 어깨에 댄 채 무시무시한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귀족 도련님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몸이나 풀어보는 건가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나였다.

피에르는 주변 수련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굳이 마린케이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마린케이의 앞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봐, 너!”

아주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내고 싶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 실력으로 대체 어떻게 퍼스트 클래스에 들어간 거지?”

개 같은 4황자 새끼가 밀어 넣었잖아. 낸들 오고 싶었겠냐?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황실 모독죄가 두려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피에르 셀번은 정치학부 전형과 퍼스트 클래스 전형을 동시에 통과한 몇 안 되는 수재였다. 그는 어쩌면 자신이 소속되었을지도 모를 퍼스트 클래스에 평민이, 그것도 기사도라고는 전혀 갖추지 않은 무뢰배가 입학해 있다는 사실에 큰 불쾌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여전히 대답하지 않는 마린케이에게, 그가 경멸을 가득 묻혀 내뱉었다.

“네 검에는 기사도도, 상대에 대한 존중도 담겨있지…….”

“않았겠죠.”

정적이 일었다. 하고자 했던 말을 대신해준 덕택에 할 말이 없어진 피에르는 떨떠름하게 입을 다물었다. 이온 음료 한 캔을 금세 다 마신 마린케이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악의는 없었으나, 분명한 점은 선의 역시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럼 나으리께선 옆에서 목 베이고 팔 베이는 전쟁터에서도 기사도 타령을 하실 겁니까?”

같은 왕립학교 학생을 일컬어 나으리라고 지칭하는 것부터 의도가 불순했지만, 그보단 질문의 내용이 더 문제였다. 그것은 기사학부의 모토라고도 할 수 있는 ‘기사도’에 대한 힐난이자 거부였다. 마린케이는 언제나 생각했다. 그럼 댁들 눈에는 전쟁터 같은 삶에서 살아남아 보겠노라 발버둥 치는 것도 전부 다 기사도에 어긋난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냐고.

질문에 대한 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기에, 마린케이는 그의 변명을 기다리지 않고서 뒤돌아섰다. 침대로 기어들어가 잠이나 좀 자고 싶었다. 그러나 천천히, 예상치 못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목을 베고, 팔을 베는 반인륜적 행위인 전쟁 자체가 없어져야 마땅하겠지. 삼정회의 이후로도 크고 작은 내전이 벌어진 국가들은 여전히 존재해.”

피에르 셀번은 정치학부를 수석으로 입학한 인재 중의 인재였다. 그가 서류로 낸 에세이는 무고한 피를 땅 위에 뿌렸던 제국의 정복 전쟁에 관한 것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들킨 이후, 한동안 아버지와 형에게 시달리며 지루한 정치 설교를 들어야 했음에도 후회는 없었다.

“승리에 있어 인륜이라는 단어는 필요치 않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존재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

다분히 현학적인 어투였다. 마린케이는 물끄러미 눈앞의 귀족 도련님을 바라보았다. 피에르가 대련 중 얻어맞은 왼쪽 눈과 뺨을 쓸어 만지며 으르렁거렸다.

“그래야 평민 주제에 이딴 식으로 사람을 쥐어 패지는 않을 테니까!”

그제야 마린케이는 하마터면 자신이 놀라움을 담아 그를 바라볼 뻔했다는 것을 후회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디선가 이온 음료를 하나 더 들고 나타난 샤를이 그런 마린케이의 손에 캔을 쥐여 주며 속삭였다. 이해해. 쟤 좀 이거야. 머리 옆에 빙글빙글 손가락을 돌리는 동작이 뒤따랐다. 제정신인 새끼가 하나도 없네. 마린케이가 혼자 생각하고 있을 때, 샤를이 대련에 대한 보상 겸 숨겨두었던 비밀 하나를 일러주었다.

“근데 나…, 소원 이미 다 썼던 거 알아?”

마린케이는 그에 대한 살의를 가라앉히기 위해 들고 있던 목검을 우지끈, 부서뜨렸다.

***

대련 이후의 수련회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게 흘러갔다. 마린케이는 저를 공포스러운 눈초리로 흘깃거리는 수련생들을 무시하며 고요함을 만끽했다. 이것이야말로 간만에 즐기게 된 진짜 휴식이나 다름없었다. 오로지 훈련과 식사에만 매진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감사할 일이 될 줄은 몰랐다. 본의 아니게 황태자와의 스캔들에 휘말려 겪게 되었던 삶의 굴곡들이 이제야 다시금 평탄해지는 것만 같아 괜히 기분이 벅찼다.

이제 내일이면 베사를 떠나 왕립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카지노에서 보았던 믿기지 않는 일들도 어느덧 과거가 된 시점이었다.

레스토랑의 스크린에서는 연신 노예상 댄 미헤르가 모든 혐의를 시인했다는 뉴스 속보를 내보냈다. 감금 현장을 급습했기에 도망조차 불가능한 사건이었다.

“안녕, 마린보이.”

그걸 가능케 했던 장본인이 굳게 잠가 놓았던 문고리를 따고 들어오는 것을 보며, 마린케이는 기면증인 척, 그를 향해 단검을 던져버리는 것은 어떨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문도 딸 줄 아십니까?”

황실에서 저딴 걸 가르치는 것도 아닐 텐데, 황태자는 이상하리만치 잔재주가 많았다. 그가 파란 눈을 반달처럼 접어 웃으며 대답했다.

“별거 아냐.”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을 때는 처연한 느낌이 가득한 미인이었다면, 본래의 금발과 벽안을 가진 황태자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모두 흡수한 것 같은 요사스러운 미인이었다. 그의 상냥한 미소에도 전혀 굴하지 않은 마린케이는 꾸역꾸역 불경한 눈빛을 보냈다.

“어지간히 심심하신가 봅니다.”

마찬가지로 내뱉는 말마다 불경함이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황태자는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빨리 나갈 준비나 해.”

“예?”

“캠프파이어, 불꽃놀이. 다 안 해봤다며?”

뭔 놈의 불꽃놀이야. 화약이라고는 뒷골목을 돌아다니던 밀매상이 가지고 다니는 것밖에 본 적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내심 만족하고 있던 차였다. 마린케이는 진작 캠프파이어장을 부숴 놓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말했다. 삭막한 표정만큼이나 단호한 거절이었다.

“저는 됐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

생각보다 빠르게 설득을 포기한 황태자는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 창틀 위에 걸쳐 앉은 그가 창문 두 쪽을 열어젖히며 경고했다.

“너무 예뻐도 놀라지 마.”

까만 하늘 곳곳을 수놓는 오색 빛들이 저마다의 문양을 만들어내며 빠르게 흩어지기 시작한다. 어둠은 파편처럼 사라지고, 태양을 닮은 붉은 빛깔과 별빛을 안은 노란 문양들이 하늘을 어지럽혔다. 만세에 펼쳐진 온갖 꽃봉오리들이 하늘 정원 위에 싹을 틔운 듯한 아름다움이었다. 그 장관 속에서, 황태자는 마린케이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아아. 태양보다 더 찬란하고, 별빛보다 더 애틋하다. 바람에 나부끼는 금색 머리칼과 정오의 하늘을 닮은 파란 눈이 어둠 속에서도 청명하게 빛났다. 황태자가 미려한 입술을 움직였다.

‘예쁘지?’

입 모양뿐인 세 글자였으나, 마린케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믿기지 않게도, 아니 믿을 수 없게도, 태어나 본 것들 중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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