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3/12)

3.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미쳐버리겠네.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지만, 마냥 부정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마린케이는 먼발치에서부터 들려오는 경탄 섞인 수군거림에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리쬐는 햇볕만큼이나 찬란한 외모를 가진 누군가가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수척해 보이는 인상이다. 수심 가득한 얼굴이었음에도 타고난 외모 덕분에 그저 처연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마린케이는 황태자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부러 방향을 틀었다. 이로써 벌써 세 번째였다. 그러니까, 그와의 대면을 피해 선로를 수정한 것은. 이 헛짓거리를 도저히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게 낭패라면 낭패였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빌어먹을.”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도는 지난 외부 수련회에서의 기억들이 차곡차곡 심증들을 쌓아갔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신중하게, 그리고 이성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섣불리 판단했다가 인생이 또 어떻게 꼬여갈지 모를 일이니까.

일단은 황태자의 외모가 출중하다 못해 비범하다는 것부터 인정하자. 따라서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불꽃놀이보다 더 어여뻤던 황태자의 겉가죽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넘어가 보려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자꾸만 핀트가 엇나갔다.

노예 소년의 손을 맞잡던 상냥한 손길과 다정한 목소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서 귓가를 맴돈다. 네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노라 맹세하던 그 모습까지도.

“설마.”

마린케이는 스스로에게 경고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안 돼. 안 된다고. 푸석푸석한 갈색 머리칼이 양손 가득 들어찼다. 이 정도로 깊이 고뇌하는 것은 태어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마린케이는 끊임없이 혼란을 느꼈다. 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걸까. 기사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정말, 절대로. 그런데 왜 자꾸 황태자를 지켜주고 싶은 거지? 그 새낀 애초에 내 보호가 필요치도 않은 용병 놈이잖아. 설마 이게 연군, 연군, 뭐였더라. 아무튼 그거인가?

결국 그 상태가 오후까지 이르러, 마린케이의 컨디션은 그야말로 최악으로 치닫고야 말았다. 며칠 동안 밤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더니 눈 밑이 퀭하게 물들어 있었다.

살벌한 눈빛에서는 언뜻 살기까지 풍겨오는 듯했기에, 마린케이와 함께 트랙을 달리는 퍼스트 클래스의 일원들은 어떻게든 그와 부딪히지 않도록 노력하며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서 뛰었다. 흡사 귀족네들끼리 평민 한 명을 따돌리는 듯한 멋없는 모양새가 연출되었지만, 그보다는 본능적인 위기감이 먼저였다. 그들은 피에르 셀번처럼 무자비하게 굴려지고 싶지 않았다.

몸풀기를 끝낸 후에는 본격적으로 수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주특기인 검술이나 사격이 아닌 양궁 수업이었기에 흥미조차 생기지 않았다. 대체 왜 과학이 발전한 시대에 이런 과목들을 수강하고 있나 싶겠지만, 기사도를 숭상하며 장려하고 있는 가쉰 제국이 황실의 이름으로 막대한 투자를 진행하고 있는 교육 과목들이었다.

그래서인지 퍼스트 클래스의 수련생들은 모두 무예 관련 수업 과목들에 대해서 편집증적인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딱 한 명, 기사도를 맹렬히 거부하는 평민만을 제외하고서.

활시위를 비틀며, 마린케이는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팽팽히 당겨진 팔 근육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호소한다. 쌀 포대 두 개보다 더 무거운 활을 집어 든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서 활시위를 당겼다. 그 자체만으로도 가히 짐승 같은 집중력이었다.

“9점!”

명중은 아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다섯 화살의 행방에 모두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완벽히 똑같은 위치에, 그것도 똑같은 방향으로 화살이 스쳐 지난다. 다시 말해 그 자리만 노리고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여과 없이 들게 하는 위협적인 궁술이었다.

만약 그 느낌이 사실이라면 저 평민은 당장에라도 기사 작위를 받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칼릭스 커티스는 부르르, 몸을 떨며 상상 불가한 평민의 미래를 두려워했다.

남은 네 개의 화살은 모두 표적의 바로 위쪽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났다. 언뜻 봤을 때는 마치 형편없는 궁술처럼 보여지도록 말이다. 그를 곁눈질하던 몇몇 수련생들이 꿀꺽, 침을 삼켰다.

“끝냈습니다.”

마지막 4개의 화살을 허망하게 날린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덤덤해 보이는 얼굴의 마린케이가 심판을 향해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호승심을 자극당한 후발 주자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몸을 풀기 시작했다. 과녁판의 점수를 세고 있던 유순한 얼굴의 청년이 벌벌 떨며 대답했다.

“그, 그게…….”

자세히 보니 피에르 셀번과 대련을 나눌 때도 심판을 맡았었던 그 청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터처럼 떨리는 목소리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0점이 3번 이상이면, 처음부터 다시 하셔야….”

“안 하면 어떻게 됩니까?”

심판, 린저 아일랜드는 신고식 때 스스로의 뺨을 내리치면서도 표정 한번 변하지 않던 마린케이의 모습을 회상하며 침을 삼켰다.

혹여라도 내가 정말 심기에 거슬린 건 아닐까, 그래서 애꿎은 나한테 화풀이를 하면 어쩌지? 난 아직 젊은데, 따위의 내용들을 생각하고 있던 그는 졸도할 것 같은 얼굴로 답변했다.

“그, 그럼 좀 곤란해지지 않을까요? 정해져 있는 규칙이어서.”

마치 새끼 토끼가 포식자의 눈치를 보는 듯한 가여운 모습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예상외로 깔끔하게 납득하는 마린케이의 모습에 린저는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멀끔하게 생긴 얼굴이다. 가쉰 인구의 6-70%를 차지하는 갈색 계열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을 뿐이지, 엄청난 미남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눈이 편한 느낌을 주는 말쑥한 생김새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마린케이는 린저를 무시하고서 다시 활을 잡았다. 분명 한 번에 다섯 개 화살을 모두 다 잡아 표적을 향해 날린 것 같은데, 그 화살들이 전부 표적의 가운데 부근을 수놓고 있었다. 9점 3개에 10점 2개. 총 47점이었다. 마린케이가 덤덤히 물었다.

“이제 통과입니까?”

“네? 헉, 네! 통과, 통과!”

린저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린케이를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눈이 너무 무서워. 그리고 저 말투도……. 그는 저런 사람을 곁에 두고도 한때, 가쉰에서 가장 강인한 기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웠던 저 자신이 바보 같다고 느꼈다.

이내 린저는 마린케이의 바로 다음 주자에게 화살을 주며 허허, 멋쩍게 웃었다. 화살을 받는 쪽도 멋쩍은지 그를 따라 웃었다. 이 상황만 봐도 마린케이 이스턴은 그가 본 중 가장 독특한 성질을 지닌 인간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존중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그 신기한 경어체처럼.

***

적을 알고 나를 알자. 그렇게 생각하며 마린케이는 정보 검색실로 향했다. 귀족 가 도련님들께서는 개인용 데스크톱과 노트북 한 대씩을 꼭 지참하고 입학해서인지, 평민 출신 입학생들만 가끔 출입할 정도로 인적이 드문 장소가 바로 정보 검색실이었다.

마린케이는 그중 가장 모니터가 커다란 컴퓨터 앞에 가서 앉았다.

‘황태자’, ‘샤를 소피아 엔스’, ‘황태자 여친’, ‘황태자 스캔들’, ‘황태자 평민’, ‘황태자 비리’, ‘황태자 과거’, ‘황태자 생일’.

하나하나 다 눌러 보기에도 벅찰 만큼 많은 연관 검색어가 우르르 쏟아졌다. 검색창에 입력한 것이라고는 고작 황, 한 글자밖에 없었는데도 말이다.

괜히 아니꼬워지기 시작하는 마음에 마린케이는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검색어인 ‘황태자 비리’를 꾹 눌러 페이지를 이동시켰다. 그다음으로 확인해 볼 것은 황태자의 과거에 관한 항목이었다. 수천 개의 포스팅들이 각기 다른 현란한 제목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쉰 황태자는 어떤 사람일까?/황태자비리/황태자과거/황태자스캔들/황태자일화]

단연 돋보이는 것은 독보적인 조회수를 자랑하는 첫 번째 게시물이었다. 심지어 연관 검색어에 떠있었던 키워드들을 총집합해 놓은 모양새였다. 마린케이는 스스럼없이 마우스 위의 손에 힘을 줬다. 포스팅된 페이지가 빠르게 눈앞에 나타난다. 이게 뭐야? 처음부터 대문짝만하게 나와 있는 황태자의 근접 사진에 욕설을 삼키며 스크롤을 내렸다.

『가쉰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마음에 품어본다던 완벽한 샤를 황태자! 0-0 다들 황태자에 관한 가십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고 하더라구요. 후후… 저는 언제 실물을 볼 수 있을까요ㅠㅠ』

『다들 궁금하시지 않나요~~? 황태자비리/황태자과거/황태자스캔들/황태자일화』

『제가 모은 일화들이랑 교환하실 분 구합니다!ㅎㅎㅎㅎㅎ』

제목과는 다른 쓸데없는 내용들에 마린케이는 짜증스레 페이지를 나갔다. 다른 포스팅들 역시 끈기를 가지고 열람해 봤지만 다 저런 식이었다. 그나마 황태자의 구 연인들에 관한 정보는 더 확실한 추측을 기반으로 인터넷을 떠돌아다녔지만, 그쪽으로는 관심이 생기지 않아 눌러보지도 않았다. 성과 없는 웹 서핑에 슬슬 의욕을 잃어갈 때였다.

[황태자실물봤는데연예인병걸린듯]

띄어쓰기 하나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제목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의 흥미를 유발하기엔 충분했다. 마린케이는 다시금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가슴을 느끼며 게시물을 클릭했다. 불현듯 누군가의 얄궂은 목소리가 즐거운 정보화 시간에 끼어들었다.

“왜 인터넷한테 물어봐?”

“…….”

“본인을 옆에 두고.”

대체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건지, 기척도 없이 다가와 옆자리에 앉아 있던 황태자가 턱을 괴며 물었다. 정보 검색실은 불을 몇 개밖에 켜두지 않았던 탓에 어두침침하기만 했다. 그래서일까, 황태자의 푸른 눈이 오늘따라 더욱 영롱하게 빛났다.

“언제부터 계셨습니까?”

마린케이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며 물었다. 평소답지 않게 흐트러진 표정을 짓는 것이 꽤 봐줄 만하다. 샤를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묘하게 기운이 없어 보이는 몸짓이었다.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창문으로 보이던데? 너 여기 있는 거.”

마린케이는 뻥 뚫린 창문을 가지고 있는 정보 검색실의 풍경을 확인한 후 눈가를 찌푸렸다. 하얀 손가락이 그의 주름진 미간 사이를 꾹꾹 눌렀다. 이제 막 샤워를 하고 온 것인지 황태자에게서 풍기는 바디 워시 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그와 몹시 잘 어울리는 달달한 향기였다.

주책없이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빠르게 진정시킨 마린케이가, 황태자를 모르는 척하며 마지막 게시글을 눌렀다. 황태자는 가짜 뉴스에 빠진 마린케이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마린보이, 내 약점을 잡고 싶은 거면.”

“읽는 중에 방해하지 마십시오.”

황태자가 마린케이의 의자를 빙그르르 돌려세우며 끊어진 문장을 이었다.

“차라리 나를 공략해. 인터넷 말고.”

졸지에 그와 마주 보게 된 마린케이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뒤로 뺐다. 제기랄. 예쁜 얼굴이라는 걸 인지한 상태가 되니 반사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하게 된다.

겉가죽에 홀리지 말자. 홀리지 말자고. 굳이 그렇게 다짐하지 않아도 절대 겉가죽에 홀릴 수 없는 것이 본인의 남다른 성격이었으나, 당사자인 마린케이 이스턴만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냥 심심해서 보는 겁니다. 비키시죠?”

“나도 심심해서 보는 건데?”

뚫어져라 마린케이를 쳐다보던 황태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얼굴을 손짓했다.

“왜 안 봐?”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말투였다. 마린케이는 결 좋은 금발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어렵사리 운을 뗐다. 캔 옥수수보다 더 담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 취향 아닙니다.”

예상치도 못했을뿐더러, 태어나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냉혹한 평가에 샤를은 억지로 미소 지었다. 안 그래도 형형한 파란 눈이 더욱 광채를 띠며 번들거린다.

그가 마린케이의 의자를 붙잡아 제 쪽으로 확 끌어당기며 물었다.

“어디가?”

그제야 눈을 굴려 황태자의 얼굴을 확인한 마린케이는 이번에도 무심히 답했다.

“뭐…, 전반적으로?”

“전반적?”

황태자가 낮아진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유들유들한 웃음을 언제나 입가에 걸고 있던 얼굴이 표정을 굳혔다. 마린케이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며 황태자의 눈치를 살폈다.

“그럼 우리 마린보이는 대체 어떤 취향을 가지셨을까?”

자존심에 타격을 입은 아름다운 남자가 물었다. 형식은 분명 의문문이었지만, 내용은 살벌한 경고 그 자체였다. 당황스러운 질문에 마린케이 역시 그를 따라 얼굴을 굳혔다.

취향이라. 그것에 대해서는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다. 하지만 투지로 번뜩이는 황태자의 눈을 보고 있으려니, 일단은 아무런 말이라도 내뱉어야 할 것 같은 이상한 압박감이 들었다.

그가 유독 머뭇거리자, 황태자는 어서 대답하는 게 나을 것이라며 진심을 담아 협박하기 시작했다.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그 행태에 마린케이는 머리를 쥐어짜 내 대답했다.

“일단 전하는 아닙니다.”

그러나 과연 샤를 소피아 엔스가 취향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가쉰에 존재하기나 할까? 그는 황실을 상징하는 벌꿀 같은 금발의 소유자였고, 그 눈동자는 푸른 바다보다도 더 영롱한 벽안이었으며, 심지어 벚꽃같이 유려한 생김새와 호수처럼 깊은 보조개를 가진 보기 드문 미인이기까지 했다. 모친인 소피아 황후를 빼다 박은 가녀린 눈초리는 성별을 막론하고 누구든 사랑에 빠뜨릴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마린케이의 단호한 대답에 샤를은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품위 없이 귀를 후볐다. 피에르 셀번이 보게 된다면 뒷목을 붙잡고서 쓰러질 흉악한 모습이었다.

“마린보이.”

“…….”

“나 오늘 기분 별로야.”

마린케이의 의자를 붙잡아 도로 원상 복구해 놓은 황태자가 구겨진 미간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본인이 설명한 것처럼 황태자의 심보는 오늘따라 더욱 비뚤어져 있었다.

마린케이의 무감한 표정을 확인한 샤를이 자신의 금색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한숨을 뱉었다. 세상 근심을 한껏 끌어안은 듯한 자의 서글프고도 서러운 표정이었다.

“왜인지는 안 물어봐?”

“물어보면, 더 기분 나빠지실 거 아닙니까?”

마린케이는 덤덤히 답했다.

“가만 보면 너 진짜 고단수라니까.”

실은 마린케이의 말이 옳았다. 샤를의 기분은 오늘 아침, 댄 미헤르의 자백이 실린 특집 기사에서 백작에 대한 정보만 쏙 빠져 있었다는 것을 확인한 시점부터 쭉 가파른 하향세를 달려오기 시작했다. 계속 떠올려 봤자 인생에 도움 될 것 하나 없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지만, 그저 갑갑한 마음으로 인해 애먼 사람을 붙잡고 있는 것뿐이었다.

심지어 폴리스 쪽에 연락을 취했을 때는 붉은 머리 소년의 행방을 찾을 수 없다는 불길한 답변이 돌아오기까지 했다. 찾으러 가겠다고 약속했는데. 감시 카메라마저도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날벼락이 찾아오자 그는 참지 못하고서 분통을 터뜨렸다.

“마린.”

마린케이는 그런 황태자를 뒤로하고서 다시금 찾고 있던 정보 속으로 뛰어들었다. 제국의 황태자가 손에 넣지 못한 것은 싸가지, 그것 단 하나임이 분명하다는 고발글을 읽어내리고 있던 그에게, 황태자는 불쑥 아름다운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진짜 나 안 볼 거야?”

간절하게 들리기까지 하는 연약한 목소리였다.

“응?”

그러자 외부 수련회에서 보았던 황태자의 모습이 연거푸 머릿속을 잠식해갔다. 노예 소년의 손을 거리낌 없이 맞잡으며, 너를 위한 세상을 만들겠노라 약조하던 그 눈부신 모습이 가슴 한구석을 아릿하게 파고든다. 그래서인지 마린케이는 저도 모르게 대답하고 말았다.

“듣고 있습니다.”

샤를의 투명한 눈동자가 면밀히 마린케이의 얼굴을 담았다. 그 유난스러운 시선에 마린케이는 한층 더 뒤로 자신의 얼굴을 떨어뜨렸다. 그가 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무슨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보시네요.”

계속 쳐다보니 민망하다는 수줍은 말을 이딴 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그가 가진 재능이었다. 태어나서 동물원이라곤 한 번도 가본 적 없었지만, 이러한 표현이 사용되는 맥락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도심에 나간 몇몇 동네 누님들이 ‘수도 새끼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동물원 원숭이 보듯 쳐다본다’라며 경고하고는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없이 웃은 황태자가 평소와 같은 듯, 같지 않은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세상은 왜 항상 이 모양일까?”

그가 던지는 철학적인 질문에도, 마린케이는 단순하게 대답하며 황태자의 고민을 끝냈다.

“뭐, 인간이 다 그 모양 그 꼴이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

그래. 인간은 결국 그 모양 그 꼴이기 마련이었다. 나아가 세상만사가 다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 또한 들었다. 잔디밭에 꿇어앉은 마린케이는 얼굴을 표정을 풀며 눈치껏 기합을 받았다. 퍼스트 클래스의 일원들에 의해서는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마린케이에게 학을 뗀 지 오래라, 오히려 그와 절대 엮일 일이 없기를 염원하는 축에 가까웠으니까.

지금 마린케이에게 기합을 주며 낄낄대고 있는 것은 퍼스트 클래스로 이동하기 전까지 함께 수업을 들었던 일반 기사학부의 3학년 무리들이었다. 마린케이는 그들 목에 걸린 보라색 스카프로 울대를 졸라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다. 엄연한 범죄 행각이었으니 참을 수밖에 없었지만, 인내심이 어디까지 버텨줄지는 해봐야 아는 일이었다.

“나도 라인 잘 타서 퍼스트 클래스에 발 도장이나 한번 찍어봤음 좋겠다. 거기 애들은 얼굴도 곱상하게 생겨서는 수련장을 대여섯 바퀴씩 돈다며?”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정도만 뛰다 그만뒀다면 온종일 황태자의 살벌한 눈총에 쫓겨 다녀야 할 것 틀림없었다. 그래서 퍼스트 클래스의 수련생들은 알아서 열심히 수련장 열댓 바퀴씩을 뛰어다녔다. 심지어 황태자는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괴물 같은 체력의 소유자였다.

묵묵히 오리걸음으로 잔디밭을 돌던 마린케이는 이어지는 신랄한 비난에 한숨을 내쉬었다.

“저 새끼랑 황태자가 구멍 동서라는 소리도 있던데.”

추문은 추문일 뿐이라, 그렇게 여기며 넘어가려 했건만. 마린케이는 하다 하다 이제는 황태자를 끌어내려 얼토당토않은 소문으로 더럽히기 시작하는 그들의 수군거림에 가까스로 분노를 삭였다. 주군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하여 그에 대한 원색적인 소문들과 악의 어린 추문들까지 외면하고 싶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더불어 마린케이는, 적어도 자신이 봐온 샤를 소피아 엔스가 그런 소리를 들을 정도로 악질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인간은 그저 나사 하나가 빠진 불우 이웃일 뿐이다. 그건 불쌍하다면 불쌍한 거였지, 저렇게 조롱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묘하게 핀트가 어긋난 분노였지만, 마린케이는 그들의 비웃음이 커지는 것을 묵인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용히 기합을 받던 평민의 태도가 돌변하자 그들은 의문 섞인 눈초리로 서로를 돌아보며 시선을 주고받았다.

마린케이는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서 그들에게로 걸어갔다. 그가 몸을 꺾을 때마다 모든 관절에서 뼈 꺾이는 소리가 괴기하게 울려 퍼졌다.

“뭐, 뭐냐!”

그나마 가장 용기 있는, 사실 이것을 용기로 봐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중 가장 목소리 큰 누군가가 뛰쳐나와 마린케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평민 앞에서 말을 더듬게 된 상황에 짜증을 느낀 듯, 왁스로 앞머리를 넘긴 얼굴 전체가 완벽하게 구겨져 있었다.

마린케이는 저보다 몇 센티는 더 낮은 곳에 있는 허접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세상은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을 취하며 그를 짜증 속에 밀어 넣었다.

“누가 누구랑 구멍 동서라고요?”

분명 존칭은 맞는데, 분위기가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이게 진짜 존댓말 맞아? 마린케이는 그들 사이의 술렁거림에 익숙한 무료함을 느끼며 다시 한번 난폭하게 물었다.

“누가 누구랑 구멍 동서냐니까?”

참 천박하기도 한 단어였다. 귀족 가 자제씩이나 되어 저딴 말로 사람을 음해하려 들고 싶을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엉망인 새끼들이 기어 나와 유쾌하지 못한 희극을 보여주니 그것 자체로 한 편의 싸구려 코미디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마린케이는 문득, 자신이 이런 망나니 같은 새끼들을 참아주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별스러운 짜증을 느꼈다. 내가 왜 참아주고 있던 거지? 당연히, 그가 평민이라서였다.

“평민 새끼가 어느 안전이라고 입을 함부로 놀려대?”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궁리하던 남자가 참지 못하고서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그 알 박힌 목소리만 들어도 마린케이는 그가 신분에 대해 얼마나 경멸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냥 쥐 죽은 듯이, 없는 듯이 살아갈 수 있다면 행복했을 텐데.

마린케이는 무모함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쯤에서 하나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세상은 평민의 그런 소박한 꿈을 들어줄 정도로 자비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남자를 보며 쯧, 혀를 찼다. 본의 아니게 난장판에 끼어든 것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리고 처하게 된 것이 지금 이 상황이었다.

“정말 진술 안 하실 겁니까? 빨리 둘 중 한 분이라도 진술하세요.”

주변 학생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교내 폴리스 두 명이 피곤한 얼굴을 하고서 난장판 속에 끼어들었다. 그들이 재차 상황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저 새끼가 먼저 쳤다니까!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정말입니까?”

마린케이는 대답 없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이었다.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제게 달려들던 남자가 혼자 넘어질 수 있게끔 몸을 피해준 것뿐인데, 그게 어떻게 쌍방 폭행이 될 수 있는 건지 모를 일이다. 피해준 김에 뺨을 몇 대 후려치긴 했지만, 그건 별것도 아니었다.

폴리스는 좀처럼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 대화에 피곤함을 느끼며 그들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다들 폴리스 라인 뒤로 물러나세요! 거기 아저씨, 여기로 지나가지 마시고.”

답답하다는 듯 제복을 펄럭인 그가 다시 한번 인내심을 담아 물었다.

“친구들끼리 시비가 붙은 것 같은데, 맞습니까?”

“미쳤어? 누가 평민 따위랑 친구를 한다고 그래?”

아무래도 저 새끼는 몇 대 더 처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조금 전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면 이렇다. 마린케이가 몸을 피한 후, 남자는 혼자 어리바리 잔디밭을 구르며 난동을 부렸다. 창피함을 느낀 그가 괴성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고, 이를 악문 채 마린케이에게 주먹을 날렸다. 꼴에 기사학부 수련생이라고 자세는 그럴듯해 보였지만, 마린케이는 그것보다 훨씬 매서운 매질들을 버티면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손쉽게 주먹을 피한 마린케이가 무릎을 들어 남자의 복부를 걷어찼다. 그리고 아까 언급했던 것처럼 뺨을 다섯 대 정도 후려쳤다. 고막은 터지지 않게끔 알아서 잘 조절했다.

“더러운 평민 새끼. 배워먹은 것도 없는 천애 고아 새끼가 운 좋게 낙하산이나 타게 된 것 가지고 자랑질할 때부터 알아봤다.”

일단 첫째로, 마린케이는 천애 고아가 아니었다. 이스턴 내외는 여전히 건강하게 살아 있었다. 더불어 둘째로, 마린케이는 운 좋게 낙하산을 타게 된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불행이라든가, 재앙 같은 것들로 표현해 주었으면 고마웠을 텐데. 못 배워 먹었다는 건 정확한 지적이었으니 넘어가도록 하겠다.

그러나 이 모든 걸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았다. 마린케이는 온갖 헛소리를 지껄이는 귀족 자제를 한심스러운 눈으로 훑어본 뒤 고개를 돌려 주위를 확인했다. 어느덧 인파가 몰려 시끌시끌해진 주변 사이로, 익숙한 색감의 누군가가 눈에 띄었다. 아.

‘뭐 해?’

살랑이는 바람에 금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황태자가 사랑스러운 입술을 움직여 조금씩 글자를 만들어냈다. 봄바람에 나부껴 떨어지는 벚꽃 잎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마린케이는, 떡하니 폴리스에게 붙잡혀 수갑까지 채워진 저를 보면서도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는 황태자를 향해 미약한 짜증을 느꼈다.

저 새끼는 뭘 저렇게 실실대는 거야. 바나나 우유에 흰 빨대를 꽂아 마시고 있던 샤를이 손가락을 들어 마린케이를 가리켰다. 조사 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홀린 듯 황태자를 바라보던 마린케이는 이어지는 황태자의 행동에 욕설을 뱉었다.

“사이코 새끼가!”

황태자는 이제 본인의 관자놀이 옆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서 빙빙 돌려대는 중이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마린케이가 보란 듯 입을 열었다.

“전하.”

그 당당한 모습에 황태자가 만족스럽다는 듯 빙긋, 웃음 짓던 순간이었다.

“저랑 언제부터 구멍 동서가 되셨습니까?”

떠들썩했던 광장의 소란이 한순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 사태의 원흉인 마린케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폴리스의 옆에 서서 자신의 무고함을 떠들어대던 귀족 자제의 얼굴이 안쓰러울 정도로 파랗게 질려갔다.

“쟤가 그러길래요.”

명백한 고자질이었다. 마린케이는 만족감과 함께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대책 없는 고자질이었으나 효과 하나만큼은 장담할 수 있었다. 조금 전과는 다른 느낌의 미소를 입가에 걸친 황태자가 마시고 있던 바나나 우유를 쓰레기통에 처박으며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느릿한 걸음으로 마린케이의 앞에 선 그가 다감하게 물었다.

“왜 그런 단어를 입에 담아?”

가쉰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 햇살처럼 웃으며 귀족 자제를 바라보았다.

“그런 건 뇌세포 딸리는 짐승 새끼들이나 쓰는 거야.”

“…….”

“그런 애들이 원래 겁도 없잖아. 주제도 모르고.”

마린케이의 손목에 감긴 수갑을 쓸어 만지며, 황태자가 폴리스를 향해 눈짓했다. 다급히 달려온 폴리스가 잠금장치를 풀어내며 연신 사과했다.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내저은 마린케이는 자유로워진 팔을 굽혔다 펴며 뻐근한 몸을 사방으로 풀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그의 간단한 인사말에 황태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덧붙였다.

“아냐. 구멍 동서씩이나 되는데 이 정도도 못 해줄까.”

또다시 침묵이 일었다. 황태자의 살기 어린 눈빛이 폴리스의 뒤에 숨어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귀족 가 자제에게로 꽂혔다. 가쉰은 본래 표현의 자유가 허락된 곳이지만, 경솔한 발언에 대한 책임까지도 흐지부지되는 국가는 아니었다. 마린케이의 어깨 위로 떨어진 나뭇잎을 들어 올려 으스러뜨린 황태자는 청량하게 웃으며 내뱉었다.

“나도 모르던 사실을 알게 돼서 정말 기뻐.”

마린케이가 하나 간과한 것이 있다면, 눈앞의 이가 명실상부 가쉰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임이 틀림없으며, 제국의 황태자라는 막대한 지위를 가진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명분을 갖는 사람이었다.

“전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다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게 끝없이 날을 세우던 이가 절망스러운 얼굴로 황태자에게 사죄하는 것을 보며, 마린케이는 고양되었던 기분이 조금씩 가라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확실히, 황태자를 이용해 분을 푸는 방식은 재미있었다. 태어나 든든한 뒷배라고는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던 처지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 비호는 놀라울 만큼 사치스럽고 달았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제 인생에 허용되기나 하는 것일까?

뒷골목을 구르며 가장 먼저 배운 세상의 이치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스스로에게 걸맞는 주제와 분수가 있다는 것이다. 마린케이는 눈치 없이 백로 사이에 끼어들어 그 하얀 깃에 뺨을 맞고 쫓겨나는 멍청한 까마귀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황태자를 만난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4황자를 구출했던 그 순간부터 마린케이의 날갯짓은 이전과는 다른 곡선을 그려가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트랙이나 뛰러 가게 따라와.”

제게 고갯짓하는 황태자를 바라보며, 마린케이는 길게 눈을 감았다, 떴다. 안구 건조증이 생겼는지 뻑뻑한 눈이 굴러떨어질 것처럼 쓰라렸다. 샤를은 저를 향해 눈을 치켜뜬 채 단 한 번도 감지 않는 마린케이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하얀 볼 위를 긁적였다. 마린케이가 선언했다.

“안 따라갈 겁니다.”

까마귀면 어떻고, 백로면 어떤가. 하물며 마린케이는 애초에 백조 무리와 어울릴 생각 자체가 없는 소시민이었다. 황태자의 기행은 그저 꽃밭에서 자란 도련님이 선보이는 적선 비슷한 것일 뿐이다. 마린케이는 기사가 될 생각도, 주군을 섬길 생각도, 그를 통해 신분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도 일절 하지 않았다. 꿈도 분수껏 꿔야 하지 않겠나.

“먼저 갈 겁니다.”

순식간에 자신을 앞질러 달려가기 시작하는 마린케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어버린 황태자는 이윽고 유쾌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헛웃음에 가까운 모습이기는 했지만, 그 얼굴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하고 즐거워 보였다.

그래, 저 정도는 해줘야 내 기사답지!

한껏 들뜬 기분으로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푼 샤를은 이를 악물며 뒤꿈치에 박차를 가했다. 어쨌든 군신은 군신이고, 게임은 게임인 법. 걸려 온 내기는 피하지 않는다. 마린케이는 제 뒤를 마치 산짐승처럼 추격해오는 황태자의 맹렬한 기세를 느끼며 생각했다. 모두를 위해서라도 저 새끼는 진짜, 그냥 용병 학원에 입학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결국, 트랙에 먼저 도착한 것은 마린케이였다. 간발의 차로 늦게 도착한 황태자는 불퉁히 인상을 쓰며 마린케이에게 시선을 던졌다. 가녀린 눈초리가 샐쭉 올라가며 단숨에 고양이 같은 얼굴로 변한다. 그런 황태자를 무심히 바라보던 마린케이가 짧은 한마디를 뱉었다.

“늦으셨네요.”

비록 마린케이가 먼저 출발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달리던 와중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본의 아니게 패널티를 갖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계단 위를 구르면서도 어떻게 하면 도움닫기 식으로 착지해 더 빨리 뛰어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찰나, 때마침 도착한 황태자는 그런 마린케이를 비웃으며 바로 옆을 스쳐 지났다. 그건 정말이지, 예쁜 눈코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짜증 나게 얄미운 표정이었다.

덕분에 곧바로 일어설 원동력을 얻은 마린케이가 미친 듯이 질주하자, 황태자는 허벅지에 더욱 힘을 주며 따라 잡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황태자는 트랙 앞 계단에서 곧바로 굴러떨어지고야 말았다. 왕립학교에는 하등 쓸모없는 계단들이 많았다. 전부 에스컬레이터로 교체할 수 있을 텐데도 일상 속의 건강을 실천하기 위해 계단을 고집한다는 것이 학교의 지론이자 합리화였다. 실상은 그냥 돈을 쓰기 싫은 것뿐이겠지만.

“내기 하나 하시겠습니까?”

죄 없는 인조 잔디를 꾹꾹 눌러 밟으며 패배의 쓴맛을 견디던 황태자가 흥미로 번뜩이는 눈을 들어 올렸다. 이렇게 보면 참 단순한 인간상이었다. 샤를은 마린케이의 의도를 짐작하기 위해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얘가 왜 이럴까, 싶은 의아한 얼굴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마린케이에게는 별다른 생각이란 것이 없었다. 하지만 소기의 목적은 있었다. 조금 전의 질주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 때문인지, 아무튼 쉽게 진정되지 않을 정도로 마냥 뜀박질하는 심장을 가라앉힌 마린케이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싫으시면 됐습니다.”

“조건은?”

그러자 황태자가 느슨하게 물었다. 마린케이를 바라보는 새파란 시선에는 모종의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눈앞의 기이한 평민이 어떤 상상치 못한 조건을 내걸지 매우 흥미가 어렸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마린케이는 이번에도 그의 예상을 훨씬 빗겨 나가는 답변을 내어놓았다.

“조건은 딱히 없고, 서약 파기면 됩니다.”

쟤는 조건의 개념을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샤를은 대놓고 서약을 파기해달라고 말하면서도 조건 없음 따위를 운운하는 마린케이에게 잠시 당혹감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기분이 제법 맑아지는 듯한 감각 역시 일었다. 무려 제국 황태자와 기사 서약을 맺은 주제에 당당히 서약 파기를 말할 수 있는 저 자신감이 그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여러모로 탐이 나는 인재라는 것은 몇 번을 설명해도 달라지지 않을 테니, 황태자는 그 재목을 손에 넣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쪽을 택했다.

균형 잡힌 얼굴 위로 그림 같은 미소가 떠오른다. 슬슬 미인계에 시동이 걸렸다.

“왜 파기하고 싶은 건데?”

하지만 일단은 질문이 먼저였다. 무슨 대답이 돌아와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란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황태자는 당차게 자신을 거절하는 마린케이의 속내를 알고 싶었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던 만큼, 마린케이는 트집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간략히 대답했다. 글자 하나하나에 귀찮음이 뚝뚝 묻어나왔다.

“글쎄요. 이제 스캔들도 얼추 가라앉았으니까?”

황태자를 상대로 내뱉기에는 매우 경악스러운 답변이었지만, 뱉는 이나 듣는 이나 표정 한번 바뀌지 않는 정확한 답변이기도 했다. 가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황태자가 전혀 이해하지 못한 투로 되물었다.

“그럼 한 번 더 낼까? 스캔들.”

마린케이가 짜증스레 얼굴을 구겼다. 그 모습을 골똘히 바라보던 황태자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단내를 풍기는 손가락이 길게 자란 앞머리 위를 건드렸다. 뒤쪽으로 고개를 물린 마린케이는 굳은 표정으로 눈을 치켜떴다.

마린케이의 앞머리를 들어 올린 황태자가 시원하게 드러난 눈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평소보다 훨씬 침착하게 들리는 어투였다.

“꽤 쉬워. 사람들은 별거 아닌 거에도 쉽게 흥분하거든.”

“그런 별거 아닌 거에 집착하지 않아 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황태자는 자신이 사용한 단어를 통째로 옮겨 읊는 마린케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삐딱하게 웃었다. 조소로 물든 얼굴마저도 금기를 부순 몽마처럼 느껴지게 하는 미인이 입을 열었다.

“네가 별거 아니라고 말한 적은 없어. 마린케이.”

“저도 제가 별거 아니라고 한 적은 없는데요.”

팽팽한 접전이었다. 누구 하나 먼저 시선을 돌리지 않을 것만 같던 기 싸움을 깨뜨린 것은, 조금씩 그들 귀에 들려오기 시작한 시끄러운 소음이었다.

“뭐야?”

마린케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트랙 주변 벤치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두 사람의 피 튀기는 접전을 구경하고 있던 퍼스트 클래스의 일원들이 히익, 숨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각기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생각해 보니 곧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었다.

무슨 서부극 하나를 찍게 된 것만 같은 창피함을 만끽하며, 마린케이는 황태자를 비난했다.

“전하 때문에 꼴이 이게 뭡니까.”

그러자 황태자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누가 나한테 퇴짜 놓으래?”

***

결국, 마린케이의 첫 번째 서약 파기 시도는 이렇다 할 결과 없이 어영부영 끝나버리고 말았다.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더 가혹한 커리큘럼으로 진행됐던 앞선 수업 이후, 마린케이는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서 겨우 기숙사에 도착했다.

오늘따라 맨 위층에 올라가 있는 엘리베이터가 괜스레 짜증스러웠다. 꼭 이럴 때만 맨 위층에 가서 멈춰 있는 것이 얄미운 황태자 새끼보다 더 재수 없을 지경이었다.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거울에 머리를 박으려던 마린케이의 이마 위로, 누군가의 매끄러우면서도 차가운 손바닥이 둔탁하게 맞닿았다. 딱히 달갑지 않은 친절이었다.

“그러다 다쳐.”

마찬가지로 전혀 달갑지 않은 걱정이었고. 힘 조절은 알아서 잘한다. 마린케이는 손바닥의 주인을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어울리지 않는 선의를 내보인 남자가 깔끔하게 반박했다.

“아니. 너 말고, 거울이.”

하여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하나같이 다 미친 새끼들인 건 확실하다. 제 이마를 막은 손바닥이 미끄럽게 느껴졌던 이유는 남자가 비닐장갑을 착용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 손에서 미약하게 음식물 냄새가 풍겨오는 것을 느낀 마린케이는, 그가 조금 전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왔음을 간단히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평민 몸에 무려 손까지 대줄 수 있던 거였군. 이유 있는 선의에 짜증이 치밀었지만, 그는 이 미친놈을 상대하지 않는 쪽에 주력하기로 결심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피에르 셀번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행태였다.

“주군과 너의 관계를 발설할 생각은 없다.”

이건 또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야. 잠자코 엘리베이터에 오르나 싶더니만, 열림 버튼을 누른 채로 멀뚱히 앞에 서 있던 피에르는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마린케이가 미친 듯이 닫힘 버튼을 눌러보았으나 무용지물이었다. 그냥 걷어차 버릴까. 마린케이는 순간 충동을 느꼈다.

셀번 공작 가문은 예로부터 황실 감시견이라 불러왔을 정도로 반대파로서의 입지가 두터웠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황태자를 향한 피에르 셀번의 경애는 유독 남달랐다.

주군에 대한 연정과 연인에 대한 은애는 한 끗 차이라고 했던가. 피에르는 황태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재능과 열정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샤를 소피아 엔스는 황제가 되어야만 할, 어쩌면 초대 황제보다도 더 가쉰을 찬란히 빛낼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으니까. 조금 오만하고 건들거린다는 것만, 음. 가끔 좀 시정잡배 같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그래도 바깥의 시선을 염두에 두어줬으면 하는군. 전하께 평민, 그것도 남자 애인이 있다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기라도 했다간 황태자 지위를 박탈당하실 수도 있을 테니.”

“대체 누가 누구 애인이라는 겁니까?”

망상도 정도껏 해야지. 마린케이가 엘리베이터 위에서 내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자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우수 어린 모습을 바라보며 한껏 비통함에 도취되어 있던 피에르는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아직 대련에서 얻어맞았던 여파가 남아 있는 것인지, 평민과 제대로 마주하게 되자 왼쪽 무릎이 지끈지끈 아파왔다. 피에르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외부 수련회 때…, 전하와 애정 행각을 나누고 있었지 않나?”

마린케이는 황태자와 몸싸움을 나누던 와중 흘러 내려버린 몹쓸 샤워 가운을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생각해 보니 그때 이 귀족 도련님께서 문을 열고 들어와 장면을 목격했었다.

“누가 누구랑요?”

있던 일을 없던 일로 만드는 방법은 생각보다 쉽다. 갈색 머리칼을 짜증스레 쓸어 넘기며, 마린케이가 억지로 미소 지었다. 석상처럼 굳어 있던 피에르는 스산함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분명 네가, 전…….”

“전, 뭐요?”

‘뭐요?’에서 느껴지는 어감이 굉장히 무례하다. 피에르는 엘리베이터 근처에 있을 감시 카메라를 곁눈질하며 침을 삼켰다. 여기서 얻어맞기라도 하면 바로 고소해버릴 작정이었지만, 그러기 위해선 일단 폭행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달갑지 않았다. 피에르는 어떻게 도망쳐야 잡히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보았다.

“대답이 늦으시네요.”

아무래도 힘들 것 같군. 깔끔하게 상황 파악을 마친 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시 가늠해 보니 아무것도 못 본 것 같은데.”

“시력이 안 좋으시댔죠?”

“양쪽 눈 1.5….”

“뭐요?”

“가 되고 싶은 -10이라고 들었다.”

“좋습니다. 그럼 올라가시죠.”

친히 엘리베이터 문을 열어준 마린케이는 마치 밤거리의 웨이터처럼 피에르를 안내했다. 협박은 성공리에 끝났으니, 남은 건 이제 그 협박을 기정사실로 만드는 일뿐이다.

마린케이는 떠올릴수록 기분이 더러워지는 기사 서약을 꼭 파기시키고야 말겠다고 다시 한번 굳게 다짐했다.

***

육감이라거나, 직감이라거나 하는 것들은 대체적으로 옳다. 순간의 상황을 판단함에 있어 가장 도움이 되는 것들이 바로 그러한 감각들이었다.

마린케이는 스스로의 성향을 잘 알았다. 근거를 세워서 무언가를 차곡차곡 쌓아가기보다는, 어렴풋이 찾아오는 한 가지 감각에 의존해 일을 해결하는 쪽이 더 편했다.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을 잇는 이유는 지금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다. 마린케이는 누군가의 흔적이 남은 현관 곳곳을 둘러보며 본능에 충실히 행동했다. 지금 이곳에, 분명 누군가가 있었다.

우선, 침입자를 도망치지 못하게끔 붙들어 두는 것이 중요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서 도망칠 틈을 줬다가는 영영 범인을 찾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침대를 걷어차는 것으로 추적의 시작을 알린 마린케이가 넓은 방 안을 둘러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원래 살던 기숙사였다면 대충 시선을 한 번 주는 것으로도 찾아낼 수 있었을 텐데, 귀족 나으리들이 사시는 고급형 기숙사답게 귀찮을 만큼 수색 범위가 넓었다.

쥐새끼는 존재를 들킬 위기에 처하면 소리를 내지 않는다. 마린케이는 새벽마다 천장을 달려대던 회색 쥐들이, 그들을 찾아 몰아내려 할 때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지던 하루하루를 기억하고 있었다. 습기 찬 방 안과 꿉꿉한 냄새 속에서도 길고 긴 침묵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그러나 쥐잡기를 포기하고서 방 안에 누우면 사람을 놀리듯 도로 뜀박질이 시작되고는 했다. 쾅! 욕실 문을 세게 걷어차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게 울려 퍼졌다. 도망갈 의지조차 느끼지 못하게끔 겁을 주려는 의도였다.

욕실이 비어있는 것을 확인한 마린케이가 옷장으로 향하려던 때였다.

“진짜, 한 번을 안 봐주네.”

옷장 문을 열어젖힘과 동시에 창가에서 튀어나온 누군가가 강한 힘으로 달려들었다. 테라스에 매달려서 시선을 피하고 있던 중, 체력적으로 한계가 오자 정면 돌파를 선택한 모양이었다. 간결하고 단순한 동작만으로 이루어진 공격이었지만, 상대가 뛰어난 실력을 갖춘 무예가라는 사실은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왕립학교에서 강조하는 기사도 따위를 익힌 동작이면서도, 그 위력과 위압감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빌어먹을 기사도 같으니라고. 마린케이는 그 신념을 언제나 부정하고 싶었다. 그는 품었던 마음을 한껏 실현하기 위해 근처에 비치되어 있던 유리 화병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상대를 내려치려던 찰나, 남자가 한발 빠르게 움직여 마린케이의 몸을 잡아 눌렀다.

화근은 마린케이가 신고 있는 실내용 슬리퍼였다. 미끄러운 바닥에 쓸려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한 것이 승패의 요인이 되고 말았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굴러떨어질 때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뒤로 곤두박질친 마린케이가 입술을 짓씹으며 상대를 올려다봤다.

오늘은 일진이 심하게 좋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던 귀족 도련님은 둘째 치고, 대체 저 같은 평민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 무단 침입까지 시도한 것인지 모를 낯선 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린케이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비아냥대는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하, 좀 봐주지 그랬어. 오늘은 염탐만 하고 갈 생각이었는데.”

“죽이고 싶은 거 참고 있는 중이니까 닥쳐.”

사실 그대로였다. 지금 당장에라도 뒷주머니에 있는 단검을 꺼내 목을 겨눌 수 있었으나, 굳이 그편을 선택하지 않은 것뿐이다. 이상하게도 살의로 인한 검은 최대한 들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이름 모를 기사가 남긴 마지막 가르침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를 스승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가르침은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 머물러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마린케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남자는 그를 업신여기는 투로 말했다.

“생각보다 천박해서 신기하다. 그사이에 샤를 취향이 바뀌었을 리는 없는데.”

샤를? 황태자의 이름을 동네 친구인 양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리는 모습에 마린케이의 얼굴이 와장창 구겨졌다. 그 변화를 눈치챈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뭐야. 설마 네가 정말 샤를 새끼의 정부야?”

하다 하다 이젠 황태자의 정부라니. 4황자의 정부라는 헛소문에 이어, 한 번 더 삶의 의지를 꺾어 내리는 몰상식한 발언이었다. 마린케이는 어째서 자신이 금발의 엔스들과 엮여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봐주려는 것도 한계가 있다. 죽어도 황태자의 정부가 되고 싶지 않았던 마린케이는 단검을 꺼내 남자의 목을 겨누었다. 그가 내뱉었다.

“인생 하직하고 싶어?”

목 옆이 아닌, 울대 자체를 노리는 손놀림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남자가 흥미로 번뜩이는 눈빛을 간신히 억누르며 마린케이의 손을 주시했다. 충돌로 인해 그의 얼굴을 통째로 가리고 있던 손수건과 후드가 떨어져 나갔다. 믿지 못할 광경에 마린케이의 움직임이 멎었다.

“이런, 들켜버렸네.”

형형한 푸른 눈이 웃음기를 머금으며 반달처럼 휘었다. 그 머리칼 역시 진한 금색이었다.

비록 태양빛처럼 선명한 황태자의 것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는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황족인가? 허나 그렇다기엔 왕립학교 입학 서약식 때도 본 적 없는 낯선 얼굴이었다. 마린케이의 눈이 의아함으로 물드는 것보다 더 빨리, 남자가 민첩하게 그의 명치를 가격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빠르고도 확실한 몸놀림이었다.

“미안. 난 내 얼굴 본 사람은 그냥 안 둬서.”

기절하기 직전, 마린케이는 이를 악물며 경고했다.

“눈 뜨면, 죽여버릴 거야.”

“알다시피 좀 창피한 얼굴이잖아?”

다른 사람에게 공격당해 기절하게 된 것은 열세 살 당시, 좀도둑이라는 오해를 받아 죽도록 두들겨 맞았던 때를 제외하고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마린케이는 신박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다짐하건대, 이대로 영영 눈을 뜨게 되지 못하게 된다면 귀신이 되어서라도 황가 놈들을 저주하며 살아갈 것이다.

빌어먹을 금발 새끼들. 인생에 도움이 못 되는 건 당연하다 치더라도, 민폐는 끼치지 말아야 할 거 아닌가?

***

생각해 보니 그렇게까지 민폐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호화스러운 침대 위에서 눈을 뜬 마린케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다는 것은 확실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심하게 불쾌한 것도 아니었던지라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의자에 앉아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던 남자가 깨어난 마린케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배달시킬 건데 뭐 시킬까? 회 도시락?”

뿅뿅거리는 귀여운 효과음이 연속해서 들려왔다. 친한 친구한테 던지는 물음처럼 친근하기만 한 질문에 마린케이 또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특으로 시키죠.”

남자가 찌뿌둥한 어깨를 활짝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절하기 직전까지 냅다 몸을 들이받으며 싸우고 있던 관계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분위기와 달리 마린케이의 팔과 다리는 이미 밧줄로 꽁꽁 묶여 있는 상태였다. 이쯤 되면 수갑이 아닌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하려나. 베사플레사에서부터 시작해, 태어나 당할 납치란 납치는 전부 다 당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애초에 평범한 민간인이 왜 납치 따위를 당해야 하는 건데? 소시민 마린케이는 억울함을 느끼며 물었다.

“혹시 이거 그겁니까? 드라마에 나오는 치정극이라던가.”

“갑자기 일어나서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정부는 내가 아니라 당신 쪽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확실히 의심할 만했다. 처음 봤을 땐 엔스 황가의 것처럼 느껴졌던 블론드와 벽안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그 외양이나 색감이 무척이나 달랐다. 황가의 블론드가 다른 색은 티끌 하나 섞이지 않은 진한 황금색이라면, 남자의 것은 그보다 더 어둡고 짙은 금발이었다. 새파란 눈 역시 청정 바다보다는 버려진 섬에서나 볼 법한 심해에 가까웠다.

황족과 닮은 듯, 다른 그의 모습에 마린케이는 한 번 더 확신했다. 이쪽이 진짜 정부구나. 생각해 보면 황태자는 나르시시스트적인 면모가 많았다. 그러니 자신과 닮은 사람에게 매력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 어이없는 망상을 읽어낸 것인지, 남자가 휴대폰을 내려놓고서 마린케이에게 걸어왔다.

“너 말이야, 대체 뭐 하는 놈인지 설명해줄 수 있어?”

“무단 침입에, 납치까지 해놓고 그걸 모릅니까.”

마린케이는 척 봐도 돈 냄새를 풍기는 그에게 자연스레 경어체를 사용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는 곧 권력이나 마찬가지다. 권력이 없으면 부를 얻을 수 없고, 부가 없으면 권력을 얻을 수 없었다. 뼈가 박힌 대답에 남자의 입매는 호선을 그렸다. 그가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CCTV를 봤는데 있지, 그게 꼭 샤를 새끼 얼굴이랑 똑같더라고.”

‘샤를’이라는 이름에 눈빛을 형형히 빛내는 남자와 달리, 마린케이는 흥미라고는 바닥에 뚝 내팽개친 듯한 사람처럼 귀를 후볐다. 그러나 남자는 마린케이의 무미건조한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서 말을 이었다. 어두운 금발을 털어내는 손이 흉터투성이다. 마린케이의 시선이 남자의 손 쪽으로 향했다. 퍼스트 클래스의 수련생들은 전부 저런 손을 가지고 있었다.

“누가 내 사업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가면, 아무리 인자한 주인장이라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잖아. 그치?”

“그렇습니까.”

말하는 이의 의욕이 꺾이고도 남을 힘없는 추임새였지만, 남자는 그런 마린케이를 보며 오히려 더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마린케이는 심심풀이용 문답 어플이 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공지능이 명령어를 입력하는 듯한 딱딱하고 기계적인 움직임이었다.

“일단 직원부터 갈아엎었어. 누가 봐도 황태자 얼굴인데 그걸 못 알아봤다는 게 말이 돼?”

“머리도 바꿨고, 눈도 바꿨는데 어떻게 알아봅니까?”

마린케이가 꺼낸 첫 질문이었다. 그때의 황태자는 검은 가발을 착용한 상태였고, 새파란 눈도 렌즈를 이용해 가려 놓은 상태였다. 엔스를 증명하는 금발과 벽안이 사라졌는데, 어떻게 그 작자를 황태자라고 의심할 수 있을까. 그건 애당초 황가에 대한 모욕이었기에 불가능했다.

“그 정도는 알아보라고 돈을 주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내가 자선사업가인 거지.”

돈을 주는 입장이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관심 없는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있던 마린케이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양손이 뒤로 꺾인 채 묶여 있어서 조금 힘들었지만, 그럭저럭 중심을 잡을 만큼은 되었다. 남자가 그런 마린케이의 어깨를 뒤로 밀어 넘기며 꾸짖었다.

“그러게 누가 남의 사업을 망치랬나.”

드물게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던 마린케이는 비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

“그쪽이 진짜 댄 미헤르?”

얘는 지능이 좀 딸리는 쪽이구나. 혼자 이해를 마친 남자가 자비를 베풀어 설명했다.

“그 얼간이는 이미 기소됐잖아. 지금쯤 지하실에서 정신을 난도질당하고 있을 텐데.”

“그럼 뭡니까.”

떳떳한 얼굴로 자신을 추궁하고 있는 마린케이를 바라보며, 남자는 전과 다르게 바뀐 샤를 소피아 엔스의 취향이 자신과 꽤나 비슷해졌다고 생각했다.

댄 미헤르를 습격한 미청년과 용병 한 명을 찾아달라던 백작에게는 미안하게 됐으나 요구대로 선뜻 넘겨주기에는 아까운 마음이 드는 인물이었다. 몸을 쓰는 것도 제법이었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두려움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저 긍지 높은 당당함과 자신감이었다. 저런 박력은 아무에게서나 찾아볼 수 없었다. 남자가 호기심을 담아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돼?”

그에 마린케이는 잔뜩 낯을 찌푸린 채 대답했다.

“알려드리기 싫습니다.”

곧바로 남자가 됐다는 듯 손을 저었다. 이윽고 마린케이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발언들이 장맛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알고 있어. 마린케이 이스턴이잖아.”

“그럼 왜 물어봤습니까?”

“관성인 거지. 요새는 왕립학교에서 대화 심리학 같은 거 안 가르쳐?”

모른다. 기사학부 수업을 제외한 다른 모든 수업에서 엎드려 잠을 잤기 때문이었다. 수면 시간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온통 어려운 외래어로 가득한 수업을 따라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뭔가를 배워가고 싶다는 의지마저 빈약하니 수업 시간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그 순간 남자가 배달 음식 잡지를 찾아와 침대 위로 내던지며 말했다.

“백작이 널 찾아내라며 광산 하나를 내놨거든. 정확히 말하면 너랑 샤를 새끼지만.”

“전하를 아십니까?”

듣다 보니 뭔가 걸리는 점들이 많았다. 일단, 황태자의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부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남자의 신분을 짐작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황가 사람은 확실히 아니었으나 귀족 가 자제들 같은 시건방짐과 오만함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본주의 냄새를 풍겨대고 있는 만큼 평민일 가능성 또한 적을 것이었다.

마린케이는 자신의 코앞까지 던져진 배달 잡지를 걷어차며 짜증을 부렸다.

“손을 묶어 놨는데 이걸 어떻게 봐요?”

“아차. 깜빡했네.”

남자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고르라고 해놓고선 아까 말했던 회 도시락을 시키는 꼬락서니를 보니 메뉴는 이미 정해져 있던 것 같았다. 빠르게 주문을 끝낸 남자는 노크하듯 책상을 두드려 마린케이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베사플레사에 다시 오게 된 걸 환영해, 이스턴.”

가쉰에서 가장 거대한 카지노를 소유한 베사플레사의 주인은 단 한 번도 자신의 모습을 세간에 드러낸 적이 없다. 신비주의를 표방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현실은 강요와 억압에 대응하기 위한 그만의 생존 전략이었다. 결코 엔스가 될 수 없을 어두운 금발과 심연 같은 빛깔의 파란 눈은 인정받지 못한 혈통에 대한 증거다.

베사플레사의 주인이 황제의 사생아, 게다가 장자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과연 누가 먼저 피해를 입게 될까. 황제는 장차 자신의 뒤를 이어 가쉰을 책임지게 될 황태자의 앞길에 어떠한 장벽도 만들고 싶지 않아 했다. 그래서 태생에 대해 침묵할 것을 받아들이는 대신, 베사플레사는 카지노 중 단독적으로 그 지위와 명분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세간의 눈을 피해 살아야 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천박한 황실에도 관심 없었다. 다만,

“샤를이 내 얘기 안 해줬어?”

내 사업을 건드리는 건 안 되지.

베사플레사의 주인, 황제의 사생아 레온하르트는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

“좀 이상해 보이긴 했습니다. 거울에 머리를 박고 있었거든요.”

“그게 언제였다고?”

“얼마 안 됐습니다. 네 시간 전쯤이니까요.”

모든 층의 CCTV가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피에르는 식사 후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던 와중, 활짝 열려 있는 앞집 문을 바라보며 평민들은 다들 저렇게 경각심 없이 살아가는 것인지에 대해 의심을 가졌다. 그러나 옆집의 현관문은 그가 쓰레기를 버리고 오는 와중에도 열려 있었고, 몇 시간 후 피트니스 센터에 가는 와중에도 활짝 열려 있었다.

아무리 내로라하는 가문 자제들만 모여 있는 기숙사라고는 하나, 그렇기에 더더욱 이런 식으로 현관문을 열어두고 다니는 습관은 예의에 어긋난 일이자 위험한 행동이었다. 단단히 한마디 해주기 위해서라도 평민의 기숙사 안으로 원치 않는 걸음을 옮길 때였다.

헌데 아무리 찾아봐도 평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난투극이 벌어졌음을 증명하는 부서진 문짝이라든가, 깨진 화병 같은 것들만 애처로이 나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공포심을 느낀 피에르가 재빨리 폴리스에 신고했음에도 현재까지 별다른 소득이 없는 상태였다.

“전하, 차라리 실종 신고를 하는 게 어떨까요? 그럼 더 효과적으로 수사할 수 있을 겁니다.”

“또 매스컴을 타게 했다간, 마린케이가 날 먼저 죽일 거야.”

샤를은 어떻게든 서약을 파기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던 마린케이의 모습을 회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와 달랐던 점을 떠올리려 해봤지만, 특별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때마침 CCTV 복구를 시도하던 폴리스 팀 쪽에서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작업의 실패를 알렸다.

“내장 메모리까지 완전히 부서져 있어서…. 회생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단번에 낯을 굳힌 황태자는 너무도 서늘한 목소리로 그들을 향해 물었다.

“현장 감식반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게, 그쪽에서도 남은 흔적이 하나도 없다는 연락이 와서 지금은 경로 추적 중에 있습니다. 정문, 후문에 설치된 CCTV들도 확인 중이나 아직 마땅한 결과가 나오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라도 발견하는 즉시 바로 연락 주세요.”

장정 한 명, 그것도 퍼스트 클래스의 일원이기까지 한 수련생을 납치하는데 아무런 흔적 하나 남기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샤를은 입술 끝을 비틀어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불가능이라. 겉옷을 마저 챙겨 입으며, 그가 피에르에게 말했다.

“차 좀 준비시켜줘. 베사로 가야겠으니까.”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이 되레 증거가 될 수 있었다. 그쯤 되는 불가능한 일을 현실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는 가쉰에 딱 두 사람뿐이었으니까. 황제, 그리고.

“직접 가시는 건 위험할 것 같습니다, 전하.”

“마린보이는 지금 그냥 위험한 상태일걸.”

레온하르트. 그가 가진 것은 베사플레사뿐만이 아니다. 레온하르트는 가쉰과 연결되는 모든 지하 사업들을 손안에 쥐고 있는 남자였다. 설마 마린케이를 건드릴 줄은 몰랐지만, 만약 정말 그가 저지른 일이 맞는다면 쉽지 않은 거래가 될 것이 분명했다.

자본주의에 반응하는 천부적인 사업가는 틈을 내주지 않고서 사람을 잡아먹는다. 그게 샤를이 아는 레온하르트였다. 울상이 된 피에르를 무시한 그는 부디 마린케이가 무탈하기만을 빌었다.

***

“어릴 때는 진짜 천사 같았지?”

“뭐, 지금이랑 비슷하네요.”

지금도 외양만 봤을 땐 충분히 천사 같다는 뜻이었다. 침대 위에 사진첩을 펼쳐 놓고 하나하나 설명을 듣고 있으려니, 마린케이는 황태자의 어린 날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었다.

흙먼지를 잔뜩 묻힌 채 사과나무 씨앗을 심는 모습, 저보다 손바닥 하나는 더 큰 3황자를 걷어차는 모습, 창문에 걸터앉아 모두를 겁에 질리게 하는 모습 등은 전형적인 철딱서니 없는 꼬맹이의 하루하루였다. 사진에 함께 나온 모두가 소년을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그래도 이때는 제법 날 잘 따랐어. 정이 좀 많은 타입이잖아, 그 새끼가.”

도통 친근함을 느끼는 건지, 악감정을 느끼는 건지 알 수 없는 묘한 화법이었다. 배달이 도착하기 전까지 사진첩이나 보고 있자고 먼저 제안한 주제에, 어째서인지 남자는 아까보다 훨씬 기분이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황태자와 무슨 원수라도 진 게 분명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물론, 마린케이의 가장 큰 장점은 주제 파악에 특화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약삭빠르다고도 표현할 수 있었다. 그만큼 그가 가진 눈칫밥의 효과는 대단했다. 마린케이는 남자의 상태를 확인하며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역시 스캔들 쪽이 가짜였나 보네. 난 당연히 기사 서약 쪽이 가짜일 줄 알았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남자는 두 눈에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 모습에 괜히 오싹한 기분을 느낀 마린케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둘 다입니다.”

“무슨 소리야?”

“둘 다 가짜라구요.”

그러자 레온하르트는 흐음, 길게 콧소리를 뱉으며 마린케이의 얼굴을 면밀히 뜯어보았다. 평범한 갈색 머리칼에 고동색 눈. 눈매는 서글서글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가도, 언뜻 비치는 표정 자체가 굉장히 퉁명스러운 것 때문인지 인상 자체가 제법 날카로워 보였다.

확실히 지금까지 공개되었던 샤를 소피아 엔스의 상대들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어 보이는 생김새다. 그러나 어쩌면 그렇기에 더더욱 신빙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걔는 공작새 같은 사람들을 좋아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이 순간 속에서도 마린케이의 머릿속을 차지하는 대부분의 생각들은 도대체 망할 놈의 도시락이 언제쯤 도착하려나, 같은 것들에 불과했지만, 레온하르트는 상대의 관심사를 제게로 끌어오는 법을 잘 알고 있는 사업가였다. 그가 무심한 어투로 조언했다.

“화려하고 화려해서, 자기한테 뒤지지 않을 존재감을 가진 그런 사람들 있잖아. 전부 그런 사람들만 만나더라고. 자기애가 강해서 그런가.”

“끼리끼리 만나는 거겠죠.”

“응?”

“사람 사이에는 급이 있다, 이 말이 하고 싶으셨던 거 아닙니까?”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레온하르트는 허를 찔린 듯 표정을 굳혔다. 작위적으로 꾸며냈던 무심함이 조금 흔들렸을 정도의 강타였다. 마린케이 이스턴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눈치가 좋았다. 단지 그 좋은 눈치조차도 사용하고 싶지 않아 할 정도로 욕심이 없었던 것뿐이지. 누군가의 흥미를 유발하는 저 긍지와 자신감은 괜한 치기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었다.

“황태자한테는 딱히 관심 없습니다.”

“…….”

“기사가 될 생각도 없…….”

“너. 내 밑에서 일하지 않을래?”

사업은 어떤 체스 말을 쥐고 있는가에서부터 승패가 달라지는 게임과도 같다. 레온하르트는 눈앞의 평민이 굉장히 써먹기 좋은 체스 말이 될 수 있음을 알아차리고서 제안했다. 다만 이 감정을 샤를 그 새끼도 똑같이 느꼈을 거라는 게 분할 뿐이다. 문득, 졸업을 질질 끌며 더 오래 왕립학교에 다녔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싫습니다.”

그러나 마린케이의 답변은 빠르게 이어졌다. 거절당할 것을 짐작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호전적일 줄은 몰랐다. 타고난 사업가는 이유를 캐는 것에서 우회하여 상대가 원하는 조건부터 물었다.

“어떻게 하면 끌릴 것 같은데?”

“다시 태어나는 게 빠를 것 같은데요.”

즉슨, 인생을 다시 살아야 한다는 말과도 같았다. 마린케이는 지금껏 주어진 삶에 그럭저럭 잘 적응해왔다. 뒷골목의 생태는 어린 새싹들의 모든 꿈과 희망을 짓밟을 정도로 가혹했다. 꿈은 사치고, 희망은 족쇄다. 언젠가 기적처럼 찾아올 성공을 기다리며 배회하기보단 어떻게든 밥벌이를 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이, 그들이 꿈꿀 수 있는 유일한 삶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살아온 마린케이에게 왕립학교 입학이란 한편으로 천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꾸만 불쾌감에 시달리게끔 만드는 후회스러운 호사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저 한여름 밤의 꿈처럼 남을 수 있는 정도면 족했다. 그때, 레온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난 샤를, 그 애랑 달라. 내가 사업가라면 걘 사기꾼이지.”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레온하르트는 장사치고 황태자는 사기꾼 쪽이라는 게 더 맞았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천재적인 달변가였다. 샤를에게 왼쪽 눈 밑에 점이 있는 것과 달리, 레온하르트는 오른쪽 눈 밑에 작은 점이 있었다. 그는 눈을 잔뜩 구부리며 말했다.

“세상을 바꾸겠다며 치기를 부리는 주제에 정작 하는 거라곤 판을 벌이는 일밖에 없잖아. 해결도, 뒷감당도 못 해. 그럴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이 시작한 일일 테니까.”

누군가의 선의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객기처럼, 또는 오만처럼 들려오기도 한다. 마린케이는 낮아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황제가 될 생각이 없다며 떠들어대지? 옛날부터 그랬어. 자긴 다른 엔스들과 퍽 다른 것처럼, 별난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스스로를 선 밖에 위치시키면서.”

이번엔 도무지 흘려들을 수 없는 발언들뿐이었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 떨어져 내렸다.

“내가 뭐 하나 구경시켜줄까?”

***

아슬아슬하게 신호를 맞춰 들어갔지만, 레이싱 게임이라도 하듯 도로를 질주하는 황태자 덕분인지 피에르는 거의 구토하기 직전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태어나 본 것 중 가장 난폭한 운전이다. 여기서 사고가 나느니 차라리 비명횡사하는 편이 나았다. 황태자가 이따위로 운전을 하며 베사로 향하던 것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정계 진출은 물론이고 왕립학교 퇴학 또한 따놓은 당상일 터였다.

피에르는 절박하게 소리쳤다.

“전하, 전하! 제가 운전하면 안 될까요? 저 운전 잘합니다.”

“거의 다 왔어.”

거짓말! 장담하건데, 절대로 거의 다 오지 않았다. 베사가 무슨 옆 동네 이름도 아니고, 아무리 지리에 어두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도착까지 몇 시간이 더 남아있음을 모를 수가 없었다. 얼추 계산해 보면 두 시간 정도가 더 소요될 것이 분명했다. 그때까지 이 차 안에서 생사를 위협 받고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직접 안전하게 운전을 하면서 가는 편이 더 나았다.

게다가 이제는 멀미로 인해 속까지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주군에 대한 연정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며, 피에르는 경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토할 것 같으면 알아서 뛰어내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네가 토하기 직전에 도착할 거니까.”

이번에도 역시 황태자의 말이 옳았다. 두 시간은 더 가야 했을 거리였으나 한 시간이 채 넘지도 않은 시각에 도착했다는 건 정말이지 기적 같은 일이었다. 피에르는 차 문을 열고 내리자마자 근처 전봇대를 부여잡고 구역질을 했다. 다행히 먹은 것이 없어 무언가를 쏟아내는 일은 없었지만, 피에르는 손수건을 사용해 식은땀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바로 들어가실 거면 가서 미리 말해 놓겠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수도로 돌아가고 싶어?”

“위장도 불가능할 겁니다. 댄 미헤르가 체포된 이후로 감시 체계를 강화했다고 들었어요.”

“그러니까 널 데려온 거지.”

그게 아니라면 대체 널 여기까지 왜 끼고 왔겠냐는 투였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충분히 상처받을 법했지만, 피에르는 그저 자신이 효용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기분에 마음이 들뜰 뿐이었다. 내가 전하께 도움이 된다니! 그것만으로도 그에게는 충분히 동기 부여가 될 수 있었다.

“내가 저 안에 들어갈 때까지 시간 좀 끌어줄래?”

“최대한 한번 해보겠습니다.”

“컨셉은 맛 간 귀족 도령이야. 뭔 줄 알지?”

“네. 전하처럼 말이죠?”

“뭐?”

말이 잘못 나왔다. 피에르는 급히 문장을 정정했다.

“아뇨, 그러니까, 그 평민처럼요.”

“걔는 좀 맛이 가긴 했지.”

“아무래도 그렇긴 하죠?”

“응. 근데 좋은 쪽으로. 넌 달라. 나쁜 쪽으로 맛이 가야 해.”

황태자는 마치 명배우에게 연기를 시키듯 이것저것을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그의 판단은 무척 탁월했다고 할 수 있었다. 피에르는 과제에 대한 설명과 주안점을 충분히 숙지했을 때 가장 뛰어난 결과물을 가져오는 학생이었다.

그가 모든 내용을 이해한 것 같자 샤를은 지체 없이 차에 올라탔다. 가장 먼저, 그는 차를 주차하는 척하며 베사플레사 입구까지 가까워져야 했다. 그때 피에르가 시간을 벌어준다면 단숨에 차에서 내려 1층 게이트를 뚫고 달려갈 생각이었다.

검은색 캡 모자를 푹 눌러쓴 후 마스크까지 착용한 샤를은 숨을 죽이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뚜벅뚜벅 가드들 앞으로 걸어간 피에르가 조금 전 시뮬레이션했던 것처럼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엔 살짝 투닥거리는 것 같더니 정도를 넘는 발언들을 툭툭 던져대자 순식간에 상황이 심각한 수준으로 치달았다.

가드 한 명이 그를 막아보려 했지만, 정치학부 장학생이기 이전에 퍼스트 클래스 전형을 통과한 수재를 일개 가드 정도로 막아설 수 있을 리 없었다.

“버러지보다 못한 놈들이, 내가 누군지 알고 함부로 이 몸에 손을 대?”

저건 역할에 너무 과하게 몰입한 게 아닌가 싶어 흠칫했으나, 일단 1층 로비로 넘어가는 일이 먼저였다. 가드들의 시선이 불현듯 나타난 싸가지 귀공자에게 쏠릴 때였다.

기척을 죽이는 방법은 이미 강심장인 막내 황녀를 어떻게든 놀라게 해보고 싶어 끊임없이 갈고 닦았던 바다. 피에르의 신들린 연기 덕분에 샤를은 무사히 1층 게이트를 넘어 로비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영업이 시작되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베사플레사에는 그전처럼 사람이 많이 들어차 있지 않았다. 고작해야 카드를 세팅하는 딜러들과 약에 잔뜩 취한 채 널브러진 놈팡이 몇몇이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레온하르트 새끼가 마린케이를 과연 어디로 데려갔을까. 걱정이 하늘을 뚫고 솟아났다. 레온하르트는 엔스의 성을 가지지 못했음에도 언제나 그 영향력을 실감하게 하는 사냥꾼이었으니까. 샤를은 제 기사가 궁지에 몰린 사냥감 꼴이 되지 않았기를 바라며 초조함을 느꼈다.

***

세상이 썩어빠졌다는 것을 다시금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 단순한 진리를 부정하고 싶던 적도, 의심하고 싶던 적도 없었지만, 이렇게 실감하게 되는 것은 한층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마린케이는 분노로 점철된 감정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자고로 백 번 듣는 것보다야 한 번 눈으로 보게 하는 편이 목표물을 자극하는 데 훨씬 효과적인 법이다. 레온하르트는 스크린에 비친 적나라한 풍경을 확대하며 덧붙였다. 지하에 마련된 귀빈실을 실시간으로 녹화 중인 화면이었다.

“댄 미헤르를 잡으면 끝날 거라고 생각했겠지. 가쉰에서 가장 손이 큰 노예상이었으니까. 샤를이 하나 간과한 게 있다면 바로 그거야.”

“…….”

“공급을 없앤다고 해서 수요가 사라지는 건 아니거든. 사실 제일 질 떨어지는 건 이 새끼들일 텐데. 그러니 족칠 거면 이쪽을 먼저 털었어야지. 댄 미헤르가 아니라.”

화면 안의 풍경은 끔찍한 것을 떠나 역겹기까지 했다. 거의 헐벗다시피 한 노예들은 저마다 하나씩 유리잔을 들어 머리 위에 올린 후 아슬아슬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유리잔을 떨어뜨리면 진행자가 들고 있던 두꺼운 채찍을 휘둘러 마른 몸 위를 내려쳤다.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 후엔 가드들이 몰려와 노예의 옷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겨갔다. 그럼에도 노예는 절뚝거리며 다른 유리잔을 머리 위에 올렸다.

하지만 그 노예가 한 번 더 잔을 떨어뜨리게 되자 곧바로 집단적인 유린이 시작되었다.

“수요가 끊기면 공급은 알아서 줄어들기 마련이야. 하지만 수요가 사라지지 않는 한, 아무리 공급을 줄이고 제한해 봤자 판은 더 은밀한 방식으로 커지기 마련이지.”

“저걸 알면서도 보고만 있는 겁니까, 당신은?”

“내 역할은 공간을 제공하는 거야. 거기서 어떤 일이 발생하든 권한 밖일 수밖에.”

방관한다는 개소리를 거창하게도 지껄이는 새끼였다. 몸을 일으키려는 마린케이를 억지로 다시 끌어다 앉힌 레온하르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마린케이는 강하게 그의 손을 쳐냈다.

“이 녹화본들이 어떻게 쓰일지는 사용하는 사람 마음에 달려 있지 않을까? 애석하게도 내가 관심 있는 건 비즈니스뿐이지만.”

“개수작 같은 거 안 통하니까, 더러운 손 치우고 꺼져.”

레온하르트는 사업가였다. 그는 어떻게 하면 기회를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쪽으로 가져올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한평생을 살아왔다. 그것이 그가 선택한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밑바닥까지도 떨어질 수 있다. 귀족들의 만행을 낱낱이 카메라로 찍어 남기면서도 묵인할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였다. 일단은 살아남아야 한다. 제게는 무언가를 바꿀 자격도, 권한도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샤를은 저걸 알면서 침묵하는 걸까, 상상조차 못 하고 있는 걸까?”

마린케이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답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간에 황태자의 꼴이 우스워지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현명하네.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소했다. 비수 같은 말들이 황태자를 겨냥하며 쏟아져 내렸다.

“손을 댈 수가 없으니 외면하는 거겠지. 그럼 모든 균형이 무너질 테니까.”

노예가 고통스레 몸을 접고 우는데도 누구 하나 말리는 이가 없었다. 드레스와 턱시도를 차려입은 귀족들은 부채로 연신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마린케이는 그들이 쓴 지독한 가면을 벗겨내 그 더러운 민낯을 확인하고만 싶었다. 저런 시발 새끼들부터 죄다 죽여버려야 하는데.

“이제 그 새끼가 왜 황제가 될 생각이 없다며 떠들고 다니는지 감이 오지?”

레온하르트는 어려서부터 알게 된 만고불변의 진리를 떠올렸다. 신뢰는 종이 한 장보다도 더 얄팍한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거래 시 필요한 일 순위 조건이었다.

“감당할 자신 따위 없어서 꽁무니나 내빼는 주제에 이단아인 척 구는 거, 아주 별로라고.”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마린케이는 그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화면 속을 바라볼 뿐이었다. 색감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분노였다.

뒷골목에서 세상의 이치를 배운 어린아이들은 사람을 믿지 않는다. 배신과 약탈은 너무도 당연한 흐름이었다. 왕립학교에서 강조하는 신의라든가, 상호 존중이라든가 하는 가치들은 전부 가진 자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 같은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 왕립학교 입학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천운이 따른 일이 확실했지만, 주관적으로 보자면 마린케이가 가지고 살아온 삶에 대한 회의만 드높일 뿐이었다. 귀족에 대한 불경한 마음은 그들과 함께 대련을 나누고 수련을 할수록 점점 더 견고한 성벽을 쌓아갔다.

그러나 달리 볼 만한 귀족도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예를 들어 황태자 같은. 신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만 같은 그 아름다운 남자는 무언가 달랐다.

마린케이는 베사플레사에 잠입해 갇혀 있던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종국에는 씁쓸한 미소를 거두지 못하던 황태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제 와 강조하지만, 태어나 기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린케이가 천천히 운을 뗐다.

“전 눈으로 본 것만 믿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말 세상을 바꾸겠다면, 거리낌 없이 그와 함께하고 싶었을 뿐이다. 언젠가 보았던 소년만화의 주인공처럼. 마린케이는 레온하르트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당신이 백번을 말해도 안 믿어요.”

“…….”

“내가 본 황태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 새끼는 무엇에도 도망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맞서기에 급급했으면 모를까. 주군에 대한 충정은 아니다. 왕립학교에서 떠들어대는 신의도, 예의도 아니었다. 마린케이는 조금 더 원초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샤를 소피아 엔스라는 인간에 대한 알 수 없는 믿음에 가까운 심정일지도 몰랐다.

황제가 될 생각이 없다며 고백하던 그 남자가 즉위한다면, 평생을 거부했던 그 기사 놀음도 한 번 시도해 볼 만한 가치를 가질지도 모르겠다는.

그 말에 레온하르트는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은 다 일리가 있었다. 이 평민은 보면 볼수록 탐이 나는 인재였다. 그러니 영악한 샤를 새끼가 선수를 친 거겠지. 그가 지금까지의 가식적인 미소를 거두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사람이면 어떡하려고?”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됩니다.”

아직은 사서 걱정할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무심한 답변에 레온하르트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빠른 속도로 블레이저 안에서 리볼버를 꺼내든 그가 안타까움을 담아 말했다. 이대로 죽이기엔 아까운 인물이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부터 싹을 잘라버려야만 했다.

“내가 놓쳐서 곤란해질 것 같은 인간상이면 그냥 죽이는 게 편하더라고.”

이익을 내지 못할 것 같으면, 이익을 낼 수 있을 만한 가능성을 가진 모든 조건들을 밟아 없애버리는 게 낫지 않나.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업가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니 그가 이처럼 두 번째 기회를 주는 것은, 한평생 존재하지 않던 일이나 다름없었다. 마린케이의 이마 위로 총구를 겨눈 레온하르트가 나른한 어조로 물었다.

“후배님. 이제 좀 생각이 바뀌는 것 같아?”

***

피에르의 명연기 덕분에 무사히 베사플레사로 들어올 수 있었던 샤를은 기민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녔다간 가드들에게 들켜 일을 그르칠 것이 뻔하다.

사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얼굴을 가린 볼 캡과 마스크부터 벗어 던져야 했지만, 그랬다간 바로잡을 틈도 없이 소란에 휘말리게 될 것을 알았다. 하지만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중증 신경 쇠약을 앓고 있는 레온하르트는 언제나 극단적으로 행동했다.

때마침 2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는 1층 앞에 멈춰 있었다. 가드 두 명이 그 주위를 지키고 서 있는 것을 본 샤를은 기척을 죽이며 고민했다. 만약 그가 댄 미헤르의 체포 이후 접근 금지 명령이 떨어진 베사플레사에 다녀갔다는 것을 기자들이 알게 된다면, 다음 날 포털의 인기 검색어에는 ‘샤를 소피아 마약 중독’ 따위의 자극적인 문구들이 떠 있을 것이 확실했다.

그렇다고 해서 몸을 사리기에는 마린케이의 안위가 확실하지 않았다. 막다른 길에 봉착했다면…, 그 길을 부숴버리는 편이 훨씬 더 쉽고 간편할 테지.

결정을 마친 샤를이 마스크를 고쳐 쓰며 가드들에게 다가가려던 때였다. 쿠당거리는 소음과 함께 허겁지겁 달려온 누군가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물론, 수많은 대련으로 단련된 반사 신경은 그렇게 두도록 허락하지 않았지만. 되레 샤를에게 멱살이 잡힌 누군가가 연약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공포심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모양새였다.

“케이, 케이를 찾으러 온 거 맞죠…?”

염색물이 빠져 지저분하게 변한 머리 꽁지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갈색과 금색이 뒤섞인 더티 블론드를 하나로 묶은 청년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다, 당신을 보면 게임을 걸어서 붙잡아두라고 했어요. 눈에 띄게 생겼으니까 찾기 어렵지는 않을 거라고. 그런데 빌어먹을, 그 새끼 부하들이 끌고 왔던 게 하필이면 내 귀염둥이 케이라니! 못 본 지 오래됐는데도 얼굴 하나 변한 게 없더라고요. 그 착한 애가 대체 무슨 잘못이 있다고.”

황태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런 청년의 모습을 살폈다. 말하는 걸 들어보면 마린케이와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기엔 샤를 역시 그가 누구인지 아주 잘 알고 있어서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반쯤 벗겨진 마스크를 다시금 귀에 건 황태자는 계속하라는 듯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에 눈치 없이 말을 내뱉고 있던 청년이 아차, 싶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어깨까지 기른 더티 블론드와 눈썹 위를 장식한 별 모양의 피어싱. 여우 같은 인상의 생김새를 가진 그는 종종 매스컴에 등장할 정도로 거대한 유명세를 가진 이였다.

“제가 2층으로 데려다드릴게요.”

카지노 베사플레사의 넘버원 딜러, 렉스 허니비가 굳게 주먹을 쥐며 소리쳤다.

“우리 케이 건드리는 새끼들, 내가 전부 가만 안 둘 거야!”

***

레온하르트는 여전히도 여유롭기만 한 시선으로 마린케이를 내려다보았다. 누구 하나 먼저 시선을 돌리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이 이어졌다. 이쯤 되니 이마에 총구가 겨눠진 채로도 흐트러지지 않는 평민의 담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린 레온하르트가 손에 힘을 주며 방아쇠를 움직이려던 때였다. 마린케이는 약삭빠르게 답했다.

“하겠습니다. 일.”

“생각보다 포기가 빠른 편이구나?”

“자존심보단 목숨이 먼저 아닙니까?”

객기든, 자존심이든 간에 살아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마린케이의 얼굴 위에 떠올라 있던 적의가 사라졌으나, 그럼에도 레온하르트는 굴하지 않고서 총구를 밀어붙였다. 그로서는 믿기 어려운 결정이었으니 당연했다. 주군을 쉽게 배신할 수 있는 기사는 가쉰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제아무리 기사가 될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랬다.

주군을 위해 목숨을 내팽개치는 관습은 오랜 시간 다져진 세뇌 비슷한 것이다.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었더라면 지금의 가쉰도 존재하지 못했다. 레온하르트가 혀를 차며 말했다.

“시간 끌어보려는 수작은 안 통해.”

그러나 그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면, 마린케이에게 있어 샤를 소피아 엔스는 절대 목숨 바쳐 지키고 싶은 주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그는 황태자를 주군으로 섬긴 적도, 인정한 적도 없었다. 비록 베사플레사에서의 사건 이후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좀 더 유해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으나 그게 충절로까지 이어질 만한 것은 아니었다.

마린케이는 보란 듯 한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그럼 빨리 죽이시든가.”

“…….”

“시간은 당신이 끌고 있는 거 같은데요.”

그 모습만 보더라도 믿기 힘들 정도로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평민이었다. 레온하르트는 헛웃음과 함께 리볼버를 내렸다. 그가 차가운 쇠붙이로 마린케이의 볼 위를 쓸며 속삭였다.

“너, 왕립학교에는 어떻게 입학한 거야?”

황태자와는 전혀 닮지 않은 얼굴이었으나, 어째서인지 풍기는 분위기가 오묘하게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뭔지 모를 그 연약함마저도 비슷했다. 차이가 있다면, 황태자 쪽이 훨씬 더 오만방자한 분위기를 가졌다는 점뿐. 그에 비해 남자는 인텔리적인 면모가 강했다.

레온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린케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평민에게서는 분명 뒷골목의 냄새가 풍겼다. 죽음을 겁내지 않는 저 배포와 담력을 가지기 위해선 먼저 죽음에 무뎌져야만 했으니까. 항상 예민하게 오감을 곤두세우고 살아오던 그에게, 이 저돌적인 평민의 등장은 모든 스트레스를 잊게 해줄 정도로 새롭고 강렬한 것이었다.

입학. 자신의 트리거를 저격당한 마린케이는 불쾌한 듯 표정을 구겼다. 쌈박질이나 하고 다니던 뒷골목 출신의 양아치가 왕립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다, 그 빌어먹을 동방 기사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탕아처럼 표정을 바꾼 마린케이가 얼굴보다 더 불량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총구를 붙잡아 다시 제 머리 위로 올리는 동작 역시 잇따랐다.

“그런 것도 모르고 납치했습니까?”

“이야, 기가 막히는 박력이네.”

“죽일 생각 같은 거 없으시죠?”

확신한다. 남자가 거래를 하고 싶은 쪽은 분명 제가 아닐 터였다. 그는 계속해서 누군가를 기다리듯 시간을 끌었다. 본심을 들킨 레온하르트는 마지못해 리볼버를 치우며 대답했다.

“눈치챘으면 얌전히 있어 줘. 내가 좀 변덕스러운 편이라 어떻게 될지 모르거든.”

기사학부 출신이었을 것이 뻔한 깔끔하고 명확한 동작들은 빈틈 하나 없이 철저했다. 그러나 마린케이는 정석대로 몸을 쓰지 않았다. 레온하르트가 블레이저 안주머니를 들추는 순간, 기척 없이 일어선 마린케이는 의자를 들어 그의 머리를 내려쳤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비틀거린 레온하르트가 제기랄, 욕설을 내뱉었다. 마린케이는 그런 레온하르트를 몸으로 짓눌러 리볼버를 뺏어 들었다.

달칵.

방아쇠를 당기는 손끝에는 그 어떤 불안함도, 긴장감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짐승처럼 행동하는 것이 다였다. 자신의 이마 위에 겨눠진 서늘한 총구를 느끼며,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너 진짜 당차다.”

그렇게 말하는 레온하르트에게, 마린케이가 저릿한 목을 꺾으며 답했다.

“제가 좀 변덕스러운 편이라서요.”

***

“지금은 아니지만, 제가 어릴 땐 체구가 진짜 왜소했거든요. 심심하면 동네 양아치들이 저를 괴롭혔었는데, 어느 날은 진짜 심하게 구타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일명 딜러 렉스 허니비가 담당하는 뒷골목 동생에 관한 자랑질 시간이었다. 베사플레사의 직원들은 모두 귀가 닳도록 들었던 얘기였기에 흥미가 없었을 테지만, 황태자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마린케이의 어린 시절 무용담에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표했다. 그 정도 되는 살기를 가진 평민의 유아 시절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입가 위로 웃음이 맺혔다.

렉스 역시 그 시절의 마린케이를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뿌듯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반응이 열렬한 청자까지 있는 만큼 더욱 부푼 마음으로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뒷골목에서는 누가 맞든, 맞아 죽든, 아니면 그냥 죽든, 원래는 아무도 신경 안 쓰거든요. 자기 목숨은 알아서 챙기는 게 암묵적인 룰이었는데, 케이는 아니었어요.”

어린 마린케이는 다 부서진 목검 하나만을 들고서 그 많던 적수들을 다 때려눕혔다. 렉스의 눈에 그 모습은 마치 나비의 날갯짓처럼 보였다. 고아하고 아름답고, 강인하기까지 한 나비.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황태자는 마저 말을 붙이려는 렉스의 팔을 잡아당겨 제 앞에 세웠다. 때마침 복도를 가로질러 오던 가드들이 그를 발견하고선 우렁차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잔뜩 기합이 들어간 인사 소리가 들려오자 렉스는 어정쩡한 자세로 타박을 던졌다.

“적당히 해, 적당히. 나한텐 인사 안 해도 된다니까 자꾸 그러네.”

“네, 형님! 역시 베사플레사 최고의 인성이십니다!”

“얼굴도 최고십니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는데 오히려 소란만 키우게 된 꼴이었다. 시끄럽게 떠들어대기 시작하는 가드들을 한심하다는 듯 흘겨보며, 렉스는 황태자에게 넌지시 속삭였다.

“왼쪽으로 돌아서 세 번째 문이에요. 비밀번호는 없고 지문 인식인데, 지문 인식으로 된 도어 록이 오히려 더 부수기 쉬운 거 아시죠?”

잘 몰랐지만, 샤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부순다는 것에 있어 쉽고, 어렵다는 기준은 없었다. 그냥 부수면 다 부서졌으니까. 간단히 생각한 그는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인생사 중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황태자의 용안을 실제로 만나 뵙고 싶다며 노래를 불렀던 렉스였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황태자와 함께 인증 샷까지 남길 수 있는 원대한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답답함에 캡 모자를 벗어 던지고 머리를 턴 샤를은 그대로 마스크까지 내던지며 좌측으로 사라졌다. 금, 금발? 황태자의 머리색과 같은 톤으로 탈색까지 했던 렉스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벙찐 표정을 한 채 가드들과 부딪혔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그들이 무슨 말을 하건 말건 렉스는 방금 자신이 목격했던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떠올리며 어버버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까지 화사한 금발을 가진 이들은 엔스 황가의 사람들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벽안을 가지고 있기로 유명한 샤, 미친. 샤를 소피아 엔스? 되짚어본 기억 속의 바다 같은 눈동자는, 그토록 고대하던 샤를 황태자의 것이 맞았다.

***

상황은 이제 완전히 역전되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마린케이는 레온하르트의 뒤통수에 리볼버를 가까이 붙인 채 낮은 목소리를 내어 지시했다. 제대로 된 비상구로 안내하라는 그의 당당한 요구에 레온하르트는 못마땅해하면서도 느리게 걸음을 뗄 수밖에 없었다.

2층 1관은 오직 베사플레사의 주인, 레온하르트만의 개인적인 공간이다. 사람을 만나는 행위 자체에 극도로 거부감을 느끼는 레온하르트는 그 누구도 1관으로 들이지 않았다. 가드 하나 보이지 않는 조용한 길을 걷는 내내 두 사람의 걸음 소리만이 자박자박 울려 퍼졌다.

“검술은 누구한테 배웠어?”

그 순간 레온하르트가 정적을 깨고서 물었다. 설명해줄 가치를 느끼지 못한 마린케이는 그 질문을 무시하고선 다시 한번 총구를 위협적으로 움직였다. 본래대로라면 그냥 기절시켜놓고 혼자서 탈출할 작정이었지만, 가드가 몇 명 배치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그런 승부수를 던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평민 하나를 구하기 위해 영화 속 히어로가 등장할 것도 아니었으니,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 새끼를 이용하는 편이 나았…….

“……전하?”

마린케이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마린보이?”

시발, 그냥 기다릴 걸 그랬나. 우측에서 나타난 황태자의 모습에 마린케이가 잠시 당황하던 찰나였다. 단번에 총구를 붙잡아 천장으로 올린 레온하르트는 중심이 무너진 마린케이를 걷어차 바닥으로 무릎 꿇렸다. 한숨을 내쉬며 리볼버를 빼앗은 그가 손잡이로 마린케이의 뺨을 내려치며 경고했다. 그것은 곧 제 앞에 선 황태자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사람 변덕을 자극하면 못써.”

“아, 제기랄.”

마린케이가 짜증스레 눈가를 찌푸렸다. 그러게 왜 갑자기 나타나서는! 졸지에 마린케이의 눈총을 받게 된 샤를은 어이가 없어 실소했다. 한껏 억울함에 찬 그가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 때린 거, 내가 아니라 네 뒤에 있는 저 새끼거든?”

“다 된 밥에 왜 재를 뿌리고 그러십니까?”

“그러게 얌전히 기다릴 것이지 누가 혼자 소년만화 찍고 있으래?”

“그럴 거면 타이밍이라도 맞추시든가.”

지들끼리 물고 뜯느라 총구를 들고 선 진짜 빌런, 레온하르트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두 사람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레온하르트가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과격한 소음과 함께, 한쪽 벽면을 뚫고 들어간 총알에서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어, 레온하르트는 중증 신경 쇠약 환자다운 까칠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난의 화살은 역시나 황태자를 향했다.

“샤를. 자꾸 버르장머리 없이 굴래?”

“난 쓰레기랑은 통성명한 기억이 없는데.”

서로를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은 누가 봐도 형제지간이 맞았다. 외양이 닮았다기보다는 미묘한 분위기가 그랬다. 그러나 실제 분위기는 전쟁터에서 만난 적군의 군장들처럼 살벌하기 짝이 없었기에, 그 누구도 쉽게 그들을 형제일 것이라 판단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레온하르트는 생글생글 웃는 낯짝으로 황태자를 도발했다.

“쓰레기장이 무서워서 도망친 사람치고는 참 당당한 발언이다.”

샤를 소피아 엔스와 레온하르트의 관계는 어릴 적부터 한결같았다. 소피아 황후는 레온하르트를 마치 친아들처럼 어여삐 여겼는데, 아마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과 달리 주변의 눈치를 많이 보고 쇠약한 분위기를 풍기는 레온하르트를 동정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모를 일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어머니의 영문 모를 죽음 이후부터 소피아 황후 또한 믿지 않게 되었다. 그가 믿는 것은 오직 스스로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자주 황궁에 왕래하면서도 샤를과 레온하르트의 관계는 그다지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견원지간보다 못한 사이가 바로 그들의 관계였다.

샤를이 사과나무 씨앗을 심으면, 레온하르트는 그 위로 납을 뿌렸다. 그 사실을 눈치챈 어린 샤를이 울고불고 흙을 파내는 모습을 보며 가증스레 눈시울을 붉히던 사람이 바로 레온하르트였다. 고자질조차 할 수 없게 된 처량한 처지의 샤를은 늘상 분을 참으며 베개를 때렸다.

왕립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샤를이 기사에 대한 로망이 있단 것을 알게 된 후, 그는 일부러 이복동생을 자극하듯 기사학부에 입학했다. 그것도 퍼스트 클래스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말이다. 입학시험을 통과한 레온하르트가 허가서를 자랑할 때마다 샤를은 그의 드높은 코를 흠씬 때려 납작하게 만들어주고만 싶었다.

“어쩌다 이렇게 멍청해졌어?”

레온하르트가 정말로 안타깝다는 듯 물었다. 저의 배다른 동생이 세간의 생각보다 훨씬 더 황족답지 못하며, 낭만을 현실 삼아 날뛰어 대는 애송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던 바였지만, 설마 제 사업에까지 손을 대려 할 줄은 몰랐다. 그건 명백한 월권 행위였다. 감히 황제조차도 관여하지 않는 생태 속에 황태자 따위가 끼어들 자리 따위는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내 어머니가 너무 가엾어지잖아. 지금의 베사플레사는 그녀의 죽음이 이룩해낸 결과물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부러 황태자를 자극하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독 오른 백작께서 광산에 이어 토지까지 넘기겠다는데, 이 정도쯤이야 거뜬하지.”

그가 은근슬쩍 마린케이를 눈짓했다. 역시나 백작이 수사망을 피해갈 수 있었던 이유에는 레온하르트가 개입되어 있는 듯했다. 레온하르트는 비정하고 계산적인 인간이었지만, 도를 넘는 짓을 벌이지는 않았다.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도저히 용인할 수가 없는 정도로 치달았다. 선을 넘었다는 뜻이다.

인신매매, 그것도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노예장사를 벌인 인간말종 새끼들을 묵인하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을 돌려보내지 말아 달라며 눈물로 간청하던 노예 소년의 얼굴을 떠올린 황태자는 이를 악문 채 목소리를 냈다.

“열다섯도 안 된 나이였어.”

“여전히 감성적이네.”

“대체 왜 이렇게 망가진 거야?”

“그건 너겠지, 샤를 소피아 엔스.”

그러자 레온하르트는 황태자의 풀 네임을 읊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황태자는 엔스의 성을 가지고 태어나, 엔스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조건을 갖춘 주제에 그 현실이 두려워 도망치려 드는 겁쟁이일 뿐이었다. 아무리 낭만이라는 포장지를 들어 꽁꽁 감추어봤자 달라질 것은 없었다. 기사가 되고 싶다고 했었지. 레온하르트는 그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발언인 줄 알고 있었다. 황후의 품에서 태어난 적장자가 아니라면 누구도 가쉰의 황제가 될 수 없다. 그것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반역이 뒤따라야만 했다. 그래. 반역 말이다.

“네가 나한테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니, 샤를.”

반역을 예상한 황제가 숙청할 대상은 뻔했다. 무고한 피가 황궁을 적실 것이다. 그 첫 번째 순서는 자신이 될 것이라는 사실 역시 모르지 않았다.

일순간 레온하르트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모든 것을 무덤까지 끌고 가라 단호히 명하던 황제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렇게만 한다면 목숨은 살려주겠노라고. 그때, 그는 황제 앞에 조아린 고개를 묵묵히 끄덕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대가로 얻게 된 것이 베사플레사였다.

황태자가 벌이고 다니는 광인 같은 짓거리를 없던 일처럼 무마시키는 것도 결국 제 몫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댄 미헤르를 잡아넣은 것이 얼마나 표면적인 접근법이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 정도로는 무엇도 바뀌지 않는다. 의도가 어찌 되었든 간 그것은 그저 보여주기식 쇼맨십에 불과했다. 바꿀 거면 주어진 것들이나 제대로 받아들였어야지, 멍청한 새끼가.

레온하르트는 황태자를 향해 매정한 목소리를 던졌다.

“네 입맛대로 세상을 뜯어고치고 싶어진 거라면 적어도 가쉰의 황제쯤은 되어 줘야지. 그런데 너도 알고 있잖아. 황제가 된다고 해서 모든 걸 바꿀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란 거.”

그게 가능했다면 이렇게까지 세상이 썩어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란 원래 그랬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인간의 악의를 이용해 돈을 버는 사업가일 뿐이었고. 그는 다만 그 자체를 두고서 거래하는 편을 즐겼다. 신분을 가지지 못한 은둔자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그것밖에 없었다. 그 사실에 이제 와서 비참함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루해서 못 들어주겠네.”

그때까지만 해도 얌전히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던 마린케이는 별안간 짜증을 담아 소리쳤다. 그러니까, 서로를 향해 막말을 내뱉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게 도통 무슨 소리인지 머리가 따라가지를 못했다. 계속 얻어맞아서 그런가. 마린케이가 귀를 긁으며 물었다.

“그래서 둘이 뭐, 예전에 사귀었었다, 그거죠?”

레온하르트는 사진첩까지 보여주며 그리 설명을 했는데도 여전히 둘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덜떨어진 평민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의지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총을 내려뜨리기까지 한 그가 허탈한 웃음을 뱉을 때였다. 자신만만하게 외쳤던 마린케이는 저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감지하고서 다시 한번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레온하르트를 가리키는 동작 또한 함께였다.

“그럼 이쪽의 일방적인 짝사랑?”

“……풉.”

샤를은 애써 웃음을 참으려 고개를 돌렸다. 마린케이의 어처구니없는 사고방식은 언제나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평민의 사고력에 깊이 시름하며 이마를 짚었다. 그냥 이대로 쏴버릴까, 싶은 충동이 들었다. 반박할 의지조차 생기지 않았다.

“애정 싸움은 두 분이서 하시죠. 전 집에 가겠습니다.”

사생아로 태어나 성씨조차 가지지 못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억울한 일인데, 이제는 배다른 동생의 정부 취급까지 받게 되다니. 김이 빠지는 걸 떠나 인정하기도 싫은 그 말도 안 되는 억측에, 레온하르트는 한 번 더 마린케이에게 총구를 들이밀었다.

그러나 마린케이는 목 뒤에서 느껴지는 차디찬 감촉에도 몸을 움츠리지 않았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전 애인과 무슨 거래를 할 셈인데, 그럼 적어도 그 거래가 끝나기 전까지는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마린케이의 예상대로 레온하르트는 황태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사업에서 손 떼, 샤를.”

그의 배다른 동생은 권력을 손에 쥐고 태어나, 꾸는 꿈이라곤 기사가 되고 싶다는 헛된 망상밖에 없는 철부지 도련님이었다. 그 어릴 적 성정을 떠올리면 잠시 애틋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제 주제에 낭만까지 운운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심사가 뒤틀리고는 했다.

“당신이나 걔한테서 손 떼.”

“이거?”

레온하르트가 방아쇠 위의 손가락을 느리게 움직였다. 총이 장전되는 소리와 동시에 바다 어딘가의 극지점처럼 가라앉은 푸른 눈이 황태자를 향했다.

샤를 소피아 엔스는 언젠가 황위에 오르게 될 터였다. 그날이 오면 레온하르트는 미련을 남기지 않고 가쉰을 떠나야만 했다. 적어도 그전까지는 제 자리를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소중한 게 있으면 숨겨 놓으라고 했잖아.”

무릎을 꿇린 채 두 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던 마린케이로서는 다분히 어이없는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소중은 무슨 얼어 죽을 소중이야. 황태자가 저를 소중히 여기는 것보다는, 지나가는 돌멩이를 소중히 여긴다는 말이 더 설득력 있을 것 같았다. 마린케이의 삐딱한 시선이 샤를을 향했다. 졸지에 또 불경한 얼굴과 직면하게 된 황태자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분명 뺏길 테니까.”

레온하르트가 웃으며 총을 쥔 손을 휘둘렀다. 방금 전 뒤통수를 후려 맞았던 것으로도 모자라 이번엔 뺨까지 내어주게 된 마린케이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고통을 참았다. 치정극을 벌일 거면 둘이 알아서 해결하든가, 왜 자신을 가운데 끼어 놓고 패싸움 중인 건지 모를 일이었다. 틈을 봐서 손목을 제압하려고는 했지만, 왕립학교 출신답게 남자는 영 빈틈을 내어주지 않았다.

“원하는 게 뭐야.”

그 순간 황태자에게서 여유가 사라진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레온하르트는 어떻게 하면 황태자를 자극할 수 있을지에 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거래는 상대의 몫을 뺏어오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게임이다. 사업가라면 응당 그 점을 이용할 줄 알아야만 했다. 황태자가 초조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그 굳어진 표정에서부터 충분히 드러나는 바였다. 볼만한 얼굴이네. 레온하르트는 어린아이를 대하듯 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했잖아. 내 사업에 손대지 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가쉰이 묵인한 레온하르트의 사업은 카지노였을 뿐이다. 사람을 물건처럼 다루며 유린하는 인신매매 현장에 대한 묵인까지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샤를은 한기 어린 눈을 숨기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사업에 손을 댄 게 아니라 범죄 현장을 처리한 거야. 그게 하필 당신 사업장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거고. 부끄럽지도 않아?”

“넌 정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그에 레온하르트는 비웃음을 담아 말했다. 댄 미헤르의 체포 정도로는 그 무엇도 바꾸지 못한다. 오히려 귀족들에게 유예 기간을 벌어준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지. 치기 어린 황태자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겠지만, 세상에는 더럽고 끔찍해도 바꿀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가지를 친다고 해서 나무뿌리를 없앨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그걸 바꾸고 싶다면 네가 나무가 되어야만 하거늘. 스스로 썩은 뿌리를 뽑아내 새로운 싹을 틔울 수 있게끔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황태자는 그것이 두려워 도망친 겁쟁이에 불과했다.

“맹세해. 다신 내 사업장에서 천박하게 날뛰지 않겠다고.”

모욕적인 언사였지만, 레온하르트의 총구가 마린케이를 향해 있는 이상 더 손을 쓸 방법이 없다는 것도 맞았다. 분명 팔이든, 다리든 하나를 총으로 쏴 더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릴 것이다. 기사 수련생에게는 그 자체가 죽음과도 맞닿아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할 테니까, 걔 몸에는 손대지 마.”

샤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레온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틀어 천장 구석진 곳의 어딘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샤를 소피아 엔스는 언제나 저런 놈이었다.

무엇 하나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도 되는 삶이었음에도, 그는 언제나 쉽게 자신의 것을 버릴 줄 알았다. 자존심도, 치기도, 객기도. 그런 주제에 황위를 물려받지 않겠다고 떠들고 다니니, 황제의 속이 썩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순간 마린케이는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이 표정을 구겼다. 그러니까, 대충 굴러가는 꼴을 보면 저를 위해서 황태자가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이 정도인 것 같은데.

“미치셨습니까?”

이제 보니 소년만화를 많이 읽은 쪽은 제가 아니라 황태자인 것 같았다. 마린케이 이스턴은 주군이란 존재에 얽매어 목숨까지 바치고 살아가는 기사의 인생을 재현하고 싶지 않았다.

체스 말이 되어 체스판 위를 뛰어다닐 바에야, 그 판 자체를 두 동강 내 버리고 내려오는 쪽이 훨씬 더 그의 성미에 맞았다. 그렇다고 해서 황태자 쪽이 체스 말을 움직이는 플레이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스스로 체스판 위에 올라 경기에 뛰어드는 투사에 가까웠다.

“이 정도는 알아서 합니다.”

모든 동작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머리로 레온하르트의 손목을 쳐서 총을 떨어뜨린 마린케이는 황태자의 발치로 그것을 집어 던졌다. 하도 무릎을 꿇고 있었더니 다리에 피까지 잘 안 통한다. 공격을 피하는 데 급급했던 레온하르트가 끝내 양손을 들어 올리며 허무한 듯 말했다.

“인정할게.”

그는 방금 전 자신이 보았던 군더더기 없는 동작에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안 믿었는데, 너 진짜 기사 맞구나.”

“…혀도 뽑히고 싶으십니까?”

이 염병할 새끼들은 왜 하나같이 다 기사 타령들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알고 보면 지들이 되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냐? 마린케이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막말을 뱉었다.

“댁들 사랑싸움에 저까지 포함시키지 마시죠.”

***

베사플레사를 나설 때까지 마린케이는 좀처럼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쓰레기 새끼와 마저 나눌 얘기가 있으니 먼저 내려가 있으라는 황태자의 명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해당했다. 모욕적인 단어로 불리면서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마린케이를 응시하던 레온하르트는 쏜살같이 사라지려는 왕립학교 후배를 위해 충고했다.

“조심해. 난 얘가 싫을 뿐이지만,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거든.”

“저도 그중 하나라 놀랍진 않습니다.”

그러나 마린케이는 여전히 불경하고, 여전히 당돌했다. 알아서 잘 오겠지 싶어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1층으로 내려간 그는 곧 자신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는 누군가를 보며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저 새끼가 왜 저기서 나와.

도박은 예술이라며 온갖 잡기술을 늘어놓던 렉사였나, 알렉스였나, 아무튼 뒷골목의 머저리 한 명이 눈을 번뜩이며 마린케이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마린케이는 성난 황소처럼 제게 달려드는 남자를 피해 살짝 몸을 뒤틀었다. 벽과 충돌하게 되었으면서도 만면 가득 미소를 잃지 않은 렉스가 눈물 젖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외쳤다.

“케이!”

그에 마린케이는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알렉스 형?”

“음, 비슷하긴 한데 틀렸어!”

“렉사?”

“이렇게 멍청할 수가! 기억력도 금붕어 같고 귀엽다. 역시 우리 케이야.”

누가 들어도 칭찬이 아니었지만, 정작 말하는 당사자는 세계 최고의 칭찬이라도 해준 사람처럼 뿌듯하게 웃고 있었다.

“케이. 나 기억하지? 내가 휴대폰도 사줬었잖아.”

뒷골목에서 어린 자신을 앞에 두고 카드나 팔랑이던 렉스 허니비가 지금은 카지노의 넘버원 딜러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야 했지만, 그다지 흥미로움이 생기지는 않았다.

마린케이는 제 뒤를 졸졸 따라붙으며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 그의 목소리에도 조금의 반응조차 해주지 않았다. 지금은 어서 집에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생각만이 절실했다. 재회에 대한 반가움은 후순위 중의 후순위였다.

“…빌어먹을.”

그런 마린케이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안 그래도 피곤한 몸을 더 피곤하게 만들기에 매우 적합한 부류였다. 가드들에게 둘러싸여 린치를 당하고 있는 듯한 누군가의 얼굴이 매우 눈에 익었던 탓이다. 못 본 척 하자. 렉스를 따라 유유히 베사플레사를 빠져나가려던 순간이었다.

“가쉰에서 태어나 기사도를 잊고 살아가다니, 이 무식한 평민 새끼들 같으니라고!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왕도의 중요성도 날이 갈수록 퇴색되고 있다는 걸 정말 모르겠어?”

자세히 보니 린치를 당하고 있는 게 아니라, 저 새끼가 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장정 여럿의 머리를 쥐어박는 걸로도 모자라 기사도니, 왕도니 하는 것들을 떠들어대고 있는 사람은 분명 옆집 사는 귀족 새끼가 확실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마린케이는 집에 돌아가기는커녕 더 피곤한 일들만 잔뜩 벌어지게 생겼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평민? 전하는 어디 놔두고 너 혼자 나오는 거냐!”

마린케이를 발견한 피에르는 멧돼지처럼 달려와 그의 어깨를 잡아챘다. 그러자 마린케이의 덩치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렉스가 번개처럼 튀어 올라 그런 피에르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앞코가 뾰족한 구두를 신고 있었기 때문인지 공격력이 과도하게 높았다. 피에르가 비명을 내질렀다.

“악!”

“당신이 뭔데 우리 케이 멱살을 잡아?”

정확히 말하면 멱살이 아니라 어깨를 잡은 것이었지만, 어쨌든 수정해줄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정강이를 부여잡은 채 고개 숙인 피에르의 가르마를 내려다보던 마린케이는 한숨과 함께 재차 걸음을 옮겼다. 아니, 제 손목을 잡는 하얀 손만 아니었더라도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포기를 모르는 남자, 피에르 셀번은 다시 한번 언데드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전하, 전하는…….”

그놈의 전하 타령. 마린케이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치정극 중이십니다.”

***

“백작이 어디까지 알고 있어?”

“총 좀 치우고 말하면 좋을 것 같은데.”

조금 전까지 자신이 하던 짓은 기억하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레온하르트는 애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뭇 사람들의 동정심을 자극하는 저 가련한 표정 덕택에 샤를은 어릴 적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고자질은커녕 혼자 베개를 때려야만 했다. 샤를이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말 돌리지 말고. 어디까지 팔아넘긴 거야?”

“본인이 황태자를 건드린 줄은 모르고 있지. 뭐, 곧 알게 될 수는 있겠지만.”

세간에는 청렴함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던 백작 나으리는 약에 취해 귀빈실을 뒹구는 취미를 가진 망나니 중의 망나니였다. 그것뿐일까? 원하는 약을 얻기 위해 노예상 댄 미헤르의 뒤를 봐주며 인간 경매장의 후원인이 되어주는 것도 바로 그였다.

레온하르트는 저를 찾아와 당장 두 사람을 찾아내라며 윽박지르던 백작의 모습을 떠올렸다. 목에 수갑을 찬 채 그를 따라왔던 붉은 머리 소년까지도.

“넌 정이 너무 많아. 샤를.”

온몸에 멍을 매단 노예는 CCTV 화면을 보며 그들이 맞다고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왜 노예 따위에게 황족 새끼들의 머리끈이 있는 거냐고! 대체 누가 내 뒤를 캐고 있는 건지 당장 찾아내. 보수는 원하는 대로 마련해 줄 테니까.」

노예의 붉은 머리칼에 묶인 머리끈이 황태자의 것이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황가의 낙인이 찍힌 그 머리끈을 대놓고 들고 다녔으니 백작의 눈에 띄지 않고 배길 수가 있었겠나. 챙겨두었던 머리끈을 주머니에서 꺼낸 레온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판을 벌릴 거면 흔적을 남기지 말았어야지.”

황태자 한 사람이 모두를 구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구태여 내뱉지 않고서 목 뒤로 삼켰다. 괜히 그 죄책감을 중화시켜주기 싫어서였다.

샤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애는 어떻게 됐어.”

“죽진 않았을 거야. 꽤 볼만한 생김새였으니까.”

“똑바로 말해, 레온하르트.”

죽었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울듯한 얼굴로 머리끈을 들고 선 동생에게 그 사실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증오하지는 못했다. 백작은 노예가 CCTV 화면을 확인하게 한 이후 곧바로 총을 꺼내 제 악행의 증거를 지웠다. 끔찍한 결말이었지만, 상대는 고작 노예의 신분을 가진 이방인에 불과했다. 그는 백작이었고.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죽어가던 노예를 보며, 레온하르트가 할 수 있는 전부는 그저 그 두 눈을 감겨주는 것뿐이었다.

“익숙해져. 네가 선택한 일이니까.”

“정말 살아있긴 해?”

마치 그렇게 말해달라는 듯한 애원 섞인 어조였다. 황제의 것보다도 더 청명하게 빛나는 벽안을 응시하던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망자를 위해서라도 거짓을 전하고 싶지는 않았다. 머리끈을 쥔 샤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갈라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백작 새끼야?”

백 번 듣는 것보다는, 한 번이라도 직접 보게 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그렇게까지 황태자에게 모질어질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모두 가지고 태어난 배다른 동생을 한평생 질시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소년의 때 묻지 않은 욕심과 청아한 성정을 꽤 좋아하기는 했다. 레온하르트가 진심을 담아 충고했다.

“세상 모두가 너처럼 가쉰의 가호를 받는 건 아냐, 샤를.”

“…….”

“네 손이 닿은 누군가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희생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야지.”

그는 대답하지 못하는 제 동생을 재촉하지 않았다. 손에 쥔 머리끈에서는 아직도 온기가 느껴지는 듯해, 샤를은 저를 데려가 달라고 말하던 어린아이의 모습을 머릿속에 되새기며 눈을 내리감았다. 차라리 그때 어떻게든 아이를 데리고서 도망쳤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가 폴리스의 곁에서 안전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됐다. 아니, 어쩌면 마린케이의 말대로….

「책임질 자신 있으십니까?」

제 무능함이 파편처럼 쏟아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샤를은 숨을 죽였고, 레온하르트는 말없이 그런 동생을 지켜보기만 했다. 황태자씩으로 태어나 세상의 선함을 꿈꾸려 했다는 것이 죄였다. 멍청한 새끼. 세상이라는 허물 속에는 낭만도, 정의도 존재하지 않았다. 환상 같은 가치에 취해 제게 주어진 것들조차 거부하려 드는 꼴같잖은 치기가 자꾸만 그의 가슴을 들쑤셨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샤를 소피아 엔스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았다. 세상의 가혹함을 마주하며 살아갈 자신이라고는 전혀 없었으니까. 그러니 가쉰의 황제는, 그 모든 것을 뒤엎고 돌려줄 수 있을 만큼 강인하고도 용기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그건 결코 자신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머리끈에 입술을 묻으며, 흠집 하나 없이 태어난 가쉰의 후계자가 세상을 대신해 용서를 빌었다. 다음 생에는 부디 자유로운 새로 태어나기를. 그 날갯짓이 창공을 마음껏 수놓을 수 있게끔, 샤를 소피아 엔스는 새로운 가쉰을 열어갈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바람을 타고 날갯짓할 수 있도록.

2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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