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까마귀 날자 떨어지는 배
도시, 베사를 빠져나가는 길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조용하기만 했다. 차창에 이마를 기댄 황태자는 정적을 독려하듯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고, 소원대로 직접 운전대를 잡게 된 피에르는 그런 황태자를 힐긋거리며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마린케이는 그저, 황태자가 간절하게 손에 쥔 머리끈을 실마리 삼아 어느 정도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에 대해서 황태자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책임지지 못할 존재를 향해 손을 내미는 실수는 대부분의 선량한 작자들이 내보이는 허영심이 맞았다. 그러나 그 위로 잘못이라는 이름을 덧씌울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쉽게 단언할 수 없었다.
문득, 마린케이는 과거에 대한 향수에 스며들어가기 시작했다. 뒷골목을 떠도는 아이들에게는 그 누구도 손 내밀어주지 않았다. 그는 늘 거리 이곳저곳을 배회하며 가쉰의 그림자를 목격했다. 차 안의 귀족들은 높은 콧대를 세우고서 요란히 행차했고, 매연을 따라 달려드는 어린아이들은 클랙슨 소리를 희망 삼아 몬트를 던져달라며 소리치기 바빴다.
그 지겹고도 무료한 날들 속에서, 마린케이가 부서진 목검을 발견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에 가까운 일이었다.
“전하, 도착했습니다.”
장담하던 것만큼이나 깔끔한 실력으로 몇 시간의 장거리 운전을 끝낸 피에르는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황태자는 그제야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살며시 드러난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영롱한 빛을 띠며 아름다웠다. 평소의 오만함은 찾아볼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에, 피에르는 오히려 더욱 안절부절못하며 걱정을 키웠다.
“전하?”
“운전도 꼭 너처럼 한다, 피에르.”
그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마린케이는 처음 자신이 헐거워진 목검을 손안에 쥐었을 때의 감각을 헤아려 보려 노력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의 이름은 분명 황홀함이었다. 저 역시 강해질 수 있다는 기분은 보란 듯 부풀어 올라 소년을 골목 바깥으로 걸어 나가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마린케이는 어느 무엇 하나 지킬 수 없던 자신의 추레함과 초라함에 대해서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흰색 제복을 입은 가쉰의 기사들은 소년만화 속에서 보던 영웅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현실은 결코 이상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그래. 세 시간 거리를 여섯 시간 동안 돌아오는 것도 재주야.”
“운전은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입니다. 막 질주하시면 큰일 납니다.”
그러나 황태자는 그 기억마저도 착각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신기한 인간이었다. 그는 언제나 다른 귀족 집단과는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어린 마린케이의 꿈은 주군을 따라 헐거워진 세상을 부수고, 그 땅 위에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소년만화에 푹 빠진 청소년다운 꿈이었지만, 그렇기에 꿈은 꿈으로밖에 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평민으로 태어나 평민으로 살아갈 마린케이 이스턴은 그저 쥐 죽은 듯 고요하게 왕립학교를 졸업하고, 그것을 방패 삼아 평탄한 삶을 살아가고만 싶었으니까.
“레온하르트가 허튼짓은 안 했지?”
피에르와의 의미 없는 대화를 마친 황태자는 알아서 차 문을 열고 내리며 물었다. 총으로 몇 대 얻어맞긴 했으나 그 정도로는 끄떡없는 맷집이다. 마린케이는 괜찮다는 의미로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인 후 시선을 돌렸다. 그는 한순간도 귀족 나부랭이를 믿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황태자는 귀족을 넘어, 장차 그들을 진두지휘할 가쉰의 황제가 될 사람이기까지 했다.
“잊는 게 편하실 겁니다.”
그러나 결국 서툰 위로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 개입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 황태자가 겪고 있을 절망과 죄책감은 언제나 자신을 괴롭혀오던 감정과 닮아 있었다.
목도리를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갔던 어린아이의 모습이 또다시 머릿속을 스쳐 지난다. 매번 거닐던 한적한 거리에서 그 시신을 발견했을 때, 마린케이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넘어서는 거대한 무력감을 느꼈다. 그러나 소년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책임질 수 없는 것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내민 대가는 참혹했다.
“잊으라고?”
황태자가 덤덤히 반문했다. 날 선 표정이었지만, 그 뒤로 엿보이는 연약함이 자꾸만 사람을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답답한 기분을 느낀 마린케이는 약간의 초조함을 담아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자꾸만 마음 한구석을 북받치도록 이끌었다. 내가 과연 이럴 주제가 되는 걸까. 심지어 상대는 제국을 손에 얹은 황태자였다. 마린케이는 겨우 목소리를 냈다.
“그것밖엔 방법이 없으니까요.”
“레온하르트 같은 소리를 하네.”
그런데 왜 나는 자꾸만 당신을 따라 달려가고 싶어지는 것인지.
멋없는 소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헛된 꿈으로 끝나버리고 말 것이다. 어릴 적 즐겨 읽던 소년만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전개를 제국의 황태자에게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황태자는 머리끈을 제 손목에 묶으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너희가 틀렸어. 잊지 않는 게 먼저야.”
마린케이는 낭만과 정의를 꿈꾸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꿈꾸고 싶지 않다는 편이 더 맞았다. 그런 사치를 부리기에는 자기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다. 목적을 알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을 고스란히 가슴에 품으면서, 마린케이가 물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잊는다고 해서 있던 일이 사라지게 되는 건 아냐, 마린케이.”
“잊지 않는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마린케이는 자신이 무엇에 대해 화를 내고 싶은 건지도 쉽사리 깨닫지 못했다. 어쩌면 당신이 정말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 당신만 다를 수 있는 건데? 그게 가능했다면 세상이 이렇게 악랄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
“내가 틀렸을지도 몰라.”
샤를은 쥐고 있던 머리끈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간절히 달려왔던 그 아이를 그냥 모르는 척, 못 본 척 외면하면 됐던 걸까. 어쩌면 그게 더 그 아이를 위한 길이었을까. 차선을 택했다고 여겼다. 증표를 가지고 폴리스에게로 돌아갔던 그 아이를 다시 찾게 될 수 있을 거라고, 어쩌면 아이가 가고 싶어 하는 학교에 추천장을 써주게 될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백작이 아이에게서 머리끈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는 가늠하지 못했다.
빌어먹을. 무력한 죄책감이 그의 목을 휘감아 잡아당겼다. 어째서 그따위 선택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인지, 그는 저 자신을 겨냥한 저주를 퍼부으며 하염없이 입술을 짓씹었다.
“그렇다고 나를 탓하지 않을 수는 없잖아.”
그럼에도 인정은 빨랐다. 청정하다고 느껴질 만큼 투명한 벽안이 마린케이를 사로잡았다. 불꽃놀이 앞, 무뎌진 심장을 뛰게 했던 그 연약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흐리게 웃었다.
베사플레사의 주인은 황태자를 일컬어 도망칠 줄밖에 모르는 겁쟁이라고 말했지만, 마린케이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내보인 선의 자체를 매도하며 비난할 수 있는 자는 가쉰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세상이 진흙탕보다 못하다고 하여 모두가 진창 속을 살아갈 필요는 없는 것처럼. 누군가는 썩어빠진 세상 속에서도 정의를 부르짖을 것이었고, 낭만을 꿈꿔갈 것이었다.
“탓하지 마십시오.”
여전히 기사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정말로 즉위하게 된다면, 가쉰의 황제가 된다면, 그가 만들어갈 제국의 앞날에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다.
“……뭐?”
나지막하게 이어진 황태자의 목소리에 마린케이는 곧바로 대답했다.
“틀리고 말고 할 게 없습니다. 그렇다고 거기서 그 아이를 데리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어찌 됐든 결국, 똑같은 결말이었을 겁니다.”
주군에 대한 경애라고는 조금도 깃들어 있지 않은 신랄한 어투였으나 샤를 소피아 엔스라는 사람에 대한 감정은 확연히 달라져 있다는 것이 목소리 너머 선연하게 드러났다.
“마린보이, 혹시 자아가 여러 개인 편이야?”
“화살을 전하께 돌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족쳐야 하는 인간은 따로 있을 텐데, 괜히 자책하지 마십시오.”
“백작 새끼는.”
그 냉정한 대답에 샤를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내 손으로 잡아 족칠 거야.”
“뭐, 응원하겠습니다.”
“너랑 같이.”
“예?”
잠시나마 진지했던 분위기에 다시 맹수들의 근접전과도 같은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미리 운전석에서 문을 잠근 채 백미러를 살피고 있던 피에르는 안심하며 가슴을 쓸었다.
치정극을 벌이셨다더니, 역시나 숨겨둔 다른 상대가 있으셨던 게 확실하다. 사랑싸움에 끼어드는 것만큼 애석한 일도 없지. 피에르는 차에서 내리지 않은 스스로의 선택을 칭찬하며 시동을 껐다. 빨리 집 가서 음식물 쓰레기 버려야지! 머릿속엔 오직 그 생각뿐인 청결 전도사였다.
***
4황자의 친절한 선물 덕분에 이제는 교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트집을 잡히는 일도 없어졌다. 언제나처럼 쓰레기통과 가까운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마린케이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설마 넥타이를 안 맸다고 저러는 건 아니겠지. 굳이 의심을 숨기지 않고서 시건방지게 눈을 치켜뜨자, 정치학 강좌를 맡은 노교수는 비뚜름하게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뭘 어떻게 생각하냐는 거야, 들은 것도 없는데. 앞서 무언가를 가르치긴 했을 테지만, 도서관에서 빌려온 무협지를 읽고 있었던 탓에 기억나는 내용이 전혀 없었다.
머리에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축지법을 써서 상대에게 혼란을 주던 은둔 도사의 퍼포먼스뿐이다. 고민하는 척을 하던 마린케이는 자못 당당하게 답변했다.
“지극히 동의합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한 빛을 띠던 노교수의 얼굴이 빙하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당연하다는 듯 튀어나온 간단한 대답에 미처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했는지, 침음성을 흘린 그는 다시 한번 최선을 다해 공격을 던졌다.
“이유는?”
평민에게 주도권을 뺏겼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노교수의 구질구질한 질문에 마린케이는 앞으로 수업을 나오지 말아버릴까, 하는 실현 가능성 없는 생각을 품었다. 그러나 마땅히 퇴학당할 구실도 없는 마당에 이 학교를 가장 빨리 탈출할 수 있는 방안은 정석대로 졸업 코스를 밟는 것뿐이었다. 괜히 밉보여 좋을 것이 없으니, 마린케이는 인내심을 발휘해 교수의 수업에 대한 칭찬을 돌려주기로 결심했다.
“방금 전에 말씀하신 게 무척 인상 깊어서요.”
물 흐르듯 이어진 대답 끝에 회생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없을 정적이 흘렀다. 그야말로 까마귀 지나가는 소리라도 들려와야 어울릴 것 같을 지경이었다.
읽고 있던 무협지를 은근슬쩍 서랍으로 집어넣은 마린케이는 총명한 척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봤자 누군가를 조롱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머지 시간은 자습으로 진행하지.”
벌레 씹은 표정으로 수업을 마친 노교수는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까지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마린케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남은 시간 동안 교수의 감시 행각에 시달려야만 했던 마린케이는 빌려 온 무협지를 반도 채 읽지 못하고서 다시 도서관에 반납할 수밖에 없었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구박을 받으니, 이거야 원 천덕꾸러기 신세나 다름없었다.
수업이 끝난 후 교정 한가운데 위치한 분수대 앞을 지나던 그는 제 앞을 가로막는 누군가에 의해 사뿐히 발걸음을 물렸다. 혹시 길이 겹친 건가 싶어 오른쪽으로도 이동해 보고, 왼쪽으로도 몸을 비켜 봤지만, 상대는 여전히 자신과 같은 방향으로 발을 움직일 뿐이었다. 귀찮음을 가득 담아 시선을 돌리자, 탐스럽게 찰랑이는 붉은 머리칼을 가진 남자가 보였다.
“야, 거지새끼. 너 출세했더라?”
그는 S관 기숙사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함께 방을 썼던 로건 콜린스였다. 의류 사업 가문의 자제답게 휘황찬란한 옷가지로 잔뜩 치장한 모습이 주변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저는 교복이 아닌 수련복을 입었다고 이리 채이고 저리 채였던 마당에, 저딴 옷차림을 하고서도 당당하게 교정을 거닐 수 있는 도련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허무함이 밀려들었다.
“교복은 안 입으십니까?”
“그딴 구린 걸 누가 입어?”
너 빼고 다 입어, 관심종자 새끼야. 마린케이는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목 뒤로 삼키며 억지스럽게 미소 지었다. 교정을 지나는 모두가 자신에게 시선을 주고 있다는 것이 뿌듯했는지, 의기양양하게 웃은 로건은 가지고 왔던 한 무더기 짐을 모두 마린케이에게 떠맡기며 말했다.
“외부 수련회 파파라치 컷에서 보니까 아주 스타일이 후지던데. 누가 그렇게 입고 다니래? 내가 분명 준 대로 입고 다니랬지?”
그러기엔 계절이 변했는데 뭘 어떡하란 말인가. 여름이 다 된 날씨에 두꺼운 터틀넥을 입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불만을 담아 미간을 찌푸렸음에도 불구하고, 눈치 없는 로건은 그저 제 할 말을 마치기에 급급했다. 그가 콧노래를 흥흥거리며 이어 말했다.
“이번 여름 컬렉션이 꽤 괜찮게 나왔단 말이지. 넌 잘생기려다 말았으니까, 옷을 좀 쌔끈하게 입어줘야 돼. 그래야 인물이 산다고.”
“아. 그래서 그렇게 입으시는 거였구나.”
“그래, 옷이라도 화려……, 너 이 새끼. 무슨 뜻이야?”
“패션 감각이 탁월하시길래 드린 말씀입니다.”
마린케이는 아무렇지 않게 제 불손한 어투를 변호했다. 눈을 가늘게 떠서 진의를 살피던 로건은 됐다는 듯 대강 손을 털며 흰 볼 캡을 눌러 썼다.
“아무튼, 이왕 적선한 거 제대로 입고 다녀. 구질구질하게 다니는 거 못 봐주겠으니까.”
“아무렴요.”
원하는 대답을 다 얻어낸 그가 영화 속 주인공처럼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뒤돌아설 때였다. 드디어 꺼져주는 건가 싶어 해방감을 느끼던 마린케이는, 다시 저를 쳐다보며 말을 건네는 그를 향해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크기의 욕설을 뱉었다. 저 새끼 죽이고 천국 가고 싶다.
“그러고 보니까 너, 귀족들이랑 연줄이 꽤 깊더라?”
내가? 귀족 새끼들이랑? 더 해보라는 듯 고개를 기울이자, 로건은 부럽다는 듯 목소리를 냈다. 마린케이로서는 당연히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백작 각하가 널 되게 궁금해하던데. 기왕지사 연줄 한번 잘 잡아 봐. 그만큼 괜찮은 귀족도 얼마 없다?”
***
‘백작. 백작. 백작….’
그 이후 마린케이는 하루 종일 똑같은 단어를 곱씹었다. 수업을 듣는 와중에도, 사격판을 겨누는 와중에도, 심지어 기숙사에 돌아와 침대 위에 드러누워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어떻게 하면 그 쳐 죽여도 시원찮을 새끼를 세상에서 가장 신박한 방법으로 쳐 죽일 수 있을지에 대해서였다.
그러면서도 당장 황태자에게 달려가지 않은 것은 생각보다 훨씬 간단한 이유 때문이었는데, 그 이유를 헤아려 보던 마린케이는 결심을 마친 채 침대 위에서 상반신을 세웠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로서는 황태자에게 연락할 방도가 존재하지 않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게 무슨 어불성설인가 싶겠으나, 과장 하나 없는 사실이었다.
마린케이는 자신의 구식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혹시나 해서 다시 찾아보기도 했지만, 역시나 황태자의 전화번호는 어디에도 없었다. 실은 물어본 적조차 없었다. 알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서였다. 마린케이는 깔끔히 그 사실을 인정했다.
하기야, 황태자씩이나 되는 인간의 전화번호를 평민 나부랭이가 가지고 있는 게 더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사실은 알고 싶지 않아 입에도 올리지 않은 것뿐이었지만, 사심을 가득 담아 합리화를 마친 마린케이는 망설임 없이 옆집으로 향했다.
뭐, 직접 연락을 취하는 방향이 아니더라도 방법은 많았다.
쾅, 콰앙! 701호 앞에 선 마린케이는 대차게 문을 걷어찼다. 초인종은 제쳐두고, 일단은 문부터 걷어차는 심보 자체가 그의 인내심이 그닥 좋지 못하다는 방증이었다. 대답 없는 집주인을 위해 그가 몇 번 더 수고스럽게 발을 움직일 때였다. 쾅, 쾅, 쾅!
“…대체 초인종의 존재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역시나 방식이 과격할수록 더 효과적이었다. 한창 방 안에서 밀린 서적들을 독파하고 있던 피에르 셀번은, 난데없는 옆집 놈의 방문에 온몸 가득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무려 파르헬리 선생의 신간을 읽고 있던 참이었다.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첫 장을 펼치던 와중, 누군가 현관문을 세게 걷어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실수겠거니 싶어 무시하고자 했으나 계속되는 시끄러운 소음에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마린케이를 바라본 피에르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를 잔뜩 끄집어내 비판을 가했다.
“파르헬리 선생이 알면 교양인의 지적인 시간을 방해한 널 응징해야 한다고 말씀하실 거다!”
“파르헬리인지 헬리콥터인지는 모르겠고, 뭐 하나만 부탁드려도 됩니까?”
어떻게 하면 파르헬리에서 헬리콥터가 나올 수 있는 건지 이해도 되지 않는 연상법이었다. 지금껏 가지고 살아온 지식과 신념이 통째로 부정당한 느낌에 피에르는 멍청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표정을 다잡은 그가 현관문을 닫아버리려 손잡이를 잡아끌던 순간이었다.
“부탁 좀 드리겠다니까요?”
반대편에서 문고리를 잡고 있던 마린케이는 확, 강한 힘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현관문이 벽면과 부딪히는 탓에 생긴 우악스러운 마찰음이 난잡하게 울려 퍼졌다.
관성으로 인해 그 상태로 그대로 현관 밖까지 끌려 나온 피에르가, 잘생긴 얼굴을 한가득 찌푸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들어보고 결정하지.”
아무렇지 않은 척 허리를 꼿꼿이 펴고서 마린케이를 내려다보는 시선 역시 한결같았다.
“전하께 말 좀 전해주세요.”
“직접 하면 되잖아?”
그게 싫으니까 너한테 부탁하는 거잖아, 눈치라고는 믹서기에 갈아버렸나.
그의 말마따나 황태자에게 연락할 방도를 찾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첫째로, 자신이 직접 황태자 새끼를 만나러 가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건 마린케이에게 있어 곧 죽어도 하기 싫은 일들 중 하나였다. 두 번째 문제점은 휴대폰을 통해 연락을 취하게 될 시, 자신의 전화번호마저 그에게 까발려지게 된다는 점이었다.
그 양아치 새끼에게 전화로까지 들볶일 걸 생각하면 벌써 관자놀이가 다 아팠다. 마린케이는 마치 예행연습을 하듯 자신의 눈꼬리 옆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그대로 전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뭘?”
“어떤 쳐 죽일 새끼가 껄떡거리는 것 같다고요.”
“음…….”
턱을 쓸며 고심하던 피에르가 살짝 그의 눈치를 보며 되물었다.
“그 말은 즉, 네 얘기를 전달하면 된다는 거겠지?”
쳐 죽일 새끼는 너고, 지금 네가 하는 짓이 껄떡거리는 게 아니라면 무엇이냐는 뜻이었다. 대답에 담긴 불순한 의도를 빠르게 읽어낸 마린케이는 관대하게 미소 지었다.
“시력도 엉망진창이시더니. 청력도 망가지고 싶으십니까?”
또다시 협박이었다. 피에르 셀번은 양쪽 모두 시력 1.5를 자랑하는 건강한 안구의 소유자였지만, 어쩐지 시야가 아득해지는 기분에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린케이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전 주말 동안 본가에 내려가 있을 거니까 알아서 하시라고, 건승하시길 빌겠다고도 전해주십시오.”
백작이고 자시고, 그는 지금 모처럼 만에 찾아온 휴일을 기대하고 있는 중이었다. 빨리 이 하수구 같은 왕립학교를 뛰쳐나가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마린. 에단이 네가 보고 싶다고 상사병에 걸려 앓아누울 것 같은데, 이쯤 되면 한번 내려오지 그러니? 쥐도 쫓아낼 때가 됐어.』
어젯밤, 휴대폰에 도착해 있던 문자를 읽던 마린케이는 자신이 입학 이후 한 번도 집에 찾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식 바보로 유명했던 에단 스튜퍼가 상사병에 걸린 사람처럼 시름시름 앓아가는 동안, 그는 온갖 미치광이들과 뒤얽혀 하루하루를 버텨내기 바빴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갈 때도 됐지. 집에 가는 사람치고 참 단출해 보이는 옷차림이었지만, 어쨌든 집에 가는 것이 맞았다. 본의 아니게 마린케이를 배웅하게 된 피에르가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마린케이를 향해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당연하게도 마린케이는 그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피에르는 부디 엘리베이터가 빨리 닫혀버리길 고대하며, 위대한 철학자인 파르헬리 선생의 저서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서 소소한 위로를 받고자 했다.
***
보이는 것이라고는 왕립학교 특유의 건축물밖에 없었던 교내와는 달리, 오랜만에 나와 마주한 바깥세상의 모습은 생각 이상으로 다채로웠다. 압박감을 주곤 하던 고층 건물들은 역시나 하늘을 시기하듯 높게 솟아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자연적인 느낌을 더하듯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심겨 있었다. 녹색 나뭇잎들은 청정한 여름 햇볕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더불어 종합형 백화점이 세워진 거리답게 감히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엄청난 규모의 인파 역시 넘실거렸다. 그러나 마린케이는 여러 사람에게 부딪히면서도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 정도 부딪힘 따위에는 고통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맷집을 단련해왔기 때문이었다.
“내놔.”
하지만 평화로운 순간들도 딱 거기까지였다. 거부하는 자신을 질질 끌고 집으로 데려갔던 동방 기사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물론 마린케이는 그 동방 기사처럼 날치기범을 위한 따뜻한 말을 건네줄 정도의 선인이 아니라는 것이 그때와의 차이점이었다.
마린케이는 자신에게 달려와 부딪친 뒤, 은근슬쩍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던 담대한 꼬맹이의 팔목을 붙잡아 제게 끌어당겼다. 으으! 어떻게든 도망치기 위해 몸을 발버둥 치던 소녀가 이번엔 전략을 바꿔 처량한 눈망울을 들어 올렸다.
“너무 배고파서 그랬어요!”
이게 대체 언제적 잡기술인가. 그 정도로는 누군가의 주머니를 털기는커녕 손 한 번도 제대로 못 써 보고 뒷덜미를 잡혀 유치장에 들어갈 것이 훤했다. 이 순간 마린케이가 관심 있는 것은 소녀의 아련하고 애틋한 변명 쪽이 아니었다. 그는 소매치기당할 뻔했던 제 지갑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소녀가 아쉬운 듯 그의 손을 힐긋거렸다.
“이왕이면 지갑 말고 휴대폰을 훔쳐.”
“……네?”
“소매치기나 해 봤자 폴리스한테 걸리면 끝장나는 건데, 휴대폰 정도면 주워준 답례인 척 사례금이라도 챙길 수 있잖아. 한 500몬트 정도.”
“하. 그거 가지고 언제 돈을 모아요?”
“티끌 모아 태산. 몰라?”
마린케이가 들은 속담들 중 거의 유일하게 뜻을 바로 알고 있는 문장이었다. 누가 보면 참 좋은 걸 가르치는구나, 싶은 어이없는 상황이었으나, 두 사람은 한층 더 진지한 자세로 토론에 임했다. 소녀는 쓰고 있던 벙거지 모자를 구기며 당차게 대꾸했다.
“티끌 모아 태산은 개뿔. 태산을 부숴서 티끌이 되는 거지, 티끌을 모아서 어떻게 태산이 돼요?”
맞는 말인 것 같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한 마린케이가 겨우 반박했다.
“해보면 알아. 안 해봤잖아?”
“안 해봐도 알 수 있는 거, 세상에 많거든요!”
지지 않고 맞서는 모습이 꼭 곱슬머리 다이애나를 닮았다. 저도 모르게 다정한 웃음을 터뜨린 마린케이는 소녀의 짧은 머리칼을 흐트러뜨리며 말했다.
“네 말이 맞긴 한데, 그래도 날치기는 하지 마. 그러다 재수 없는 새끼한테 걸리면 감옥 같은 곳에 유배 보내지거든. 그거 되게 최악이야. 온갖 양아치 새끼들이랑 어울려야 된다고.”
감옥은 왕립학교고, 재수 없는 새끼는 그 동방 기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차갑고 건조해 보였던 인상이 미소를 머금자, 소녀는 홀린 듯이 멍한 얼굴을 하며 눈을 깜빡였다. 온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게 생긴 사람이었음에도 곰살맞은 미소가 합쳐지니 분위기가 몹시 달라졌다.
마린케이의 표정을 살핀 소녀가 선심 쓴다는 투로 입을 열려던 때였다.
“그래도 얼굴은 봐줄 만….”
“못 찾으려나 싶었는데, 여기 있었네요.”
누군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둘 사이를 비집고 끼어들었다. 말투에서부터 온화한 성정이 느껴지는 듯한 차분한 목소리였으나, 그다지 친절하게 들리지는 않는다는 것이 제법 신기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마린케이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지갑이 없어져서 꽤 당황했거든요.”
연한 갈색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껴 살랑거린다. 자신과 같은 갈색 계열이었으나 색감 자체에 확연한 차이가 있는 머리칼이었다. 흰 셔츠 하나만을 입고 있었는데도 훌륭한 체형 덕분인지 모델 같은 태가 났다. 황태자에게서 엿보이는 화려한 미색이 만개한 벚꽃처럼 어여쁘게 느껴지는 종류였다면, 그는 길거리에 핀 이름 없는 꽃처럼 유약한 아름다움을 가진 청년이었다.
남자는 내려간 눈꼬리를 반달처럼 휘며 물었다.
“현금은 다 가져도 되니까 지갑은 돌려줄래요?”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 발언에 마린케이는 떨떠름한 얼굴로 말을 골랐다. 그걸 왜 나한테 요구하는 거지? 설마 하는 심정을 담아 묻자, 빠른 대답이 이어졌다.
“저보고 한 말씀입니까?”
“네. 조금 전까지 같이 있던 어린이가 제 지갑도 털어간 것 같아서.”
그 순간 마린케이는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텅 비어있는 옆자리를 확인한 그가 짤막한 한숨을 뱉었다. 예상대로 점퍼를 뒤적이니 지갑은커녕 휴대폰까지도 전부 사라져 있었다. 이 정도 손기술이면 뒷골목 하나는 손쉽게 접수했을 터이니 자신의 조언 같은 건 필요 없었을 터였다. 허탈하게 웃는 마린케이를 앞에 두고 선 남자는 의심스럽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마린케이가 남자를 돌아보며 완곡하게 말했다.
“죄송한데, 저도 당한 입장입니다.”
그러자 남자는 왼쪽 뺨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러기엔 너무 오누이 같던걸요.”
나긋나긋한 어조는 화창한 날씨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마치 화창함이라는 글씨 자체를 의인화해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이미 황태자 덕분에 어떤 아름다운 얼굴에도 놀라지 않게 된 마린케이는 까칠하게 답변할 뿐이었다.
“제 여동생이 들으면 섭섭해할 소리네요.”
“아, 여동생이 있으세요?”
“아뇨.”
“…….”
“없습니다.”
남자가 당황에 차 눈을 굴리는 것이 보였다. 마린케이는 점퍼의 지퍼를 채워 올리며 말했다.
“십 분만 기다리시죠. 멀리 못 갔을 테니까.”
한때 뒷골목을 주름잡았던 날치기범을 건드린 대가였다. 애초에 마린케이는 한시라도 빨리 고속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야 하는 신세였다. 더군다나 지갑에 있는 현금 말고는 땡전 한 푼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대로 버스를 놓치게 된다면 다시 왕립학교로 돌아갈 방법조차 없었다. 그런 마린케이를 지켜보던 연약한 인상의 남자는 흥미로움을 담아 물었다.
“십 분을 넘기면 어떡하시려구요?”
“그럴 일 없습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그럼 모르고 계시든가.”
마린케이가 몸을 풀며 짜증스레 덧붙였다. 날치기범들이 수확물을 들고 사라지는 곳이야 안 봐도 비디오였다. 그가 살짝 풀려 있는 운동화 끈을 묶으려 몸을 숙이려 할 때였다.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마린케이의 운동화 끈을 매듭지은 남자는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생각보다 재밌네요.”
이유 모를 친절에 위화감을 느끼며 다리를 빼자, 남자는 제 무릎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목소리를 이었다. 한여름의 산들바람 같은 여린 미소가 뒤따랐다.
“그럼 제 지갑도 좀 부탁드릴게요. 기사님.”
***
“모든 문장에서 상스러운 표현이 들어가, 차마 제 입으로 말씀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파르헬리 선생의 신간을 포기하고서 황태자를 찾아온 피에르가 억울함을 담아 말했다. 이를 바득바득 가는 소리도 들려온 것 같은데, 관심도 없을뿐더러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온 음료와 탄산음료 중 무엇을 선택할지 깊이 고민하고 있던 샤를은 전자에 집착하던 마린케이를 떠올리며 자판기의 오른쪽 버튼을 눌렀다. 가져다줘야지. 표정은 사람을 죽일 듯 쳐다보면서도 음료수는 또 냉큼 잘 받아먹던 마린케이의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뿌듯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자판기 밑에서 음료수를 꺼내 든 샤를이 대충 대꾸했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말해. 나 바빠.”
“제 입으로 꺼내기 상스럽습니다.”
“괜찮아. 너 원래 상스러운 말들 많이 해.”
무슨 소리지? 수준 높고 품격 있는, 그야말로 우아함의 극치인 자신의 말투를 되짚어보던 피에르는 결국 한숨과 함께 마린케이의 말을 전달했다. 이 단어를 제 입으로 내뱉어야 한다는 사실이 매우 수치스러웠지만, 피에르 셀번은 황태자를 위해서라면 못 할 것이 없는 대단한 충신이었다.
“웬 쳐 죽일 새끼가 자기한테 껄떡거린다네요.”
분명 ‘아’ 다르고 ‘어’ 다른 말이었지만, 피에르는 당당하게 왜곡된 정보를 전달했다. 충격을 받은 황태자가 손에서 이온 음료를 떨어뜨리며 되물었다. 미적으로 완벽한 얼굴이 야차같이 변하던 순간이었다. 푸른 눈에 노기가 스며들었다.
“누가?”
“집에 가 있을 테니, 알아서 해결해 보시랍니다.”
“그러니까, 어떤 새끼냐고?”
감히 어떤 쳐 죽일 새끼가 내 기사한테 껄떡댄다는 거야? 피에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황태자의 심장을 정확히 맞추고서 떨어지던 순간이었다. 그는 방금 전에 집어 든 이온 음료를 피에르에게 휙, 던진 후 자판기를 한 번 걷어찼다. 당황한 피에르가 ‘전하!’ 하고 외치자, 그는 여상하게 웃으며 형광등을 가리켰다. 피에르가 그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젖혔다.
“네 얼굴이 너무 잘 보여서 짜증 나.”
마음에 상처를 입은 피에르는 고개를 도로 내리지도 못하고서 울먹거렸다.
“전하…, 제가 앞으로 팩을 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피에르. 네가 보기에도 마린케이가 귀여워 보여?”
의미심장한 물음에 그는 가엾게도 고개를 젖힌 상태에서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마, 마린케이라면…….”
“…….”
“설마 그럴 리가….”
아무리 동의해 보려고 해도 사람을 패 죽이기라도 할 듯 눈을 부라리는 모습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황태자는 대답을 바라던 것이 아니었는지, 스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떤 새끼가 귀엽지도 않은 애한테 껄떡거리는 거야. 목숨이 두 개인 것도 아니고.”
***
구불구불한 골목 안을 뒷마당 노닐듯 자연스럽게 거닐던 마린케이는 어째서인지 코와 귀가 간질거리는 느낌에 재채기를 내뱉게 되고 말았다. 더불어 그 재채기 덕분인지, 그는 자신이 무엇에 대해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럼 제 지갑도 좀 부탁드릴게요. 기사님.」
스스럼없이 저를 기사라 칭하던 남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윙윙 머리를 울렸다. 혹시 저도 모르게 교복이나 수련복을 입고 나온 건 아닌지 옷차림도 살폈지만, 그것과는 하등 관계없는 평범한 점퍼 차림이기만 했다. 심지어 로건 콜린스가 던지고 간 옷들 중에서 그나마 제일 눈에 띄지 않는 옷을 걸치고 왔던 마린케이는 답답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누가 제 얼굴에 마커로 기사 수련생이라는 글씨를 써둔 것도 아닐 텐데, 거참 이상한 일이다. 만약 인상만 봐도 기사 나부랭이같이 보였다는 거면 더 기분이 별로일 것 같았다.
“여기네.”
널빤지 몇 개로 골목길 입구를 막아두는 것은 뒷골목 승냥이들의 영역 표시와도 비슷하다. 마린케이는 허름한 널빤지를 밀고 들어가 그 안의 풍경을 살폈다. 얼핏 보면 다른 골목길들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전문가의 눈에는 달랐다.
담벼락 곳곳 화려한 색깔의 스프레이로 난잡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걸 보면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을 터였다. 사방팔방 암호처럼 쓰여 있는 ‘MISERY’라는 글씨를 바라보던 마린케이는 비웃음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요새 애들은 저런 형편없는 단어가 멋있어 보이나. 본인 때는 더 참혹할 정도로 유치찬란한 문구였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골목길 사이를 조금 더 깊게 들어가자 역시나 작은 상가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간판만 보면 타투샵 같기도 하고, 쓰인 설명을 보면 또 타로 카드 가게인 것 같기도 했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기에 신경 쓰지 않고서 문을 열어젖혔다. 드르륵, 문 끌리는 소리와 함께 가게 안에 들어선 마린케이는 곧바로 귀를 틀어막았다. 난잡한 음악이 그의 고막에 테러를 가했다.
귀를 찢어발길 것만 같은 헤비메탈이 난폭하게 울려퍼졌다. 그 음악 사이에 앉아 회수한 지갑들을 털어보고 있던 소녀는 경악하듯 입을 벌리며 마린케이를 바라보았다. 소녀가 마린케이를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그 모습만 봐도 몹시 당황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뭐, 뭐야! 어떻게 알고 왔어? 설마 미행했어?”
“됐고. 네가 들고 있는 거나 이리로 던져.”
소녀는 선심 쓰듯 튀어나오는 그의 목소리에 벙거지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쓴 채 시선을 피했다. 대화 자체를 거부하기 위한 행동이었음에도 상황을 타개할 만한 효과는 전무하다고 할 수 있었다. 헤비메탈 음악을 배경음 삼아, 소녀는 모자를 슬쩍 들어 올리며 천진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난데없이 침입해서는.”
“내 지갑.”
이번엔 친히 손가락까지 들어 지갑을 가리킨 마린케이가 ‘이 정도면 됐지?’ 하는 얼굴로 소녀에게 시선을 건넸다. 그에 소녀는 표정을 구기며 들고 있던 지갑을 자신의 품속으로 끌어안았다. 혀를 내밀어 조롱하는 모습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모자 밑으로 선연히 드러난 얼굴을 보니 티끌과 태산에 관해 열변을 토하던 그 아이가 확실했다. 소녀는 으름장을 놓으며 거세게 발을 굴렸다.
“입고 있는 점퍼랑 맞바꿀 거 아니면, 절대 못 주지. 허탕 치면 오늘 밥도 못 먹는다고!”
“이거?”
더 지체했다간 꼼짝없이 고속버스를 놓치게 될 판이다. 그렇다고 다이애나를 닮은 아이를 데리고 이렇다 할 수를 쓰기도 무척 곤란한 상황인지라, 마린케이는 제게 있어 어떠한 가치도 가지지 못하는 로건 콜린스의 옷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말하는 거 맞지?”
그러자 조금 당황하는 듯싶던 소녀는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서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마린케이가 스스럼없이 점퍼를 벗어 스피커 위에 걸었다. 신속하게 이루어진 동작이었다.
“이제 그 지갑 이리로 던져.”
헤비메탈과 그림처럼 어우러지는 터프한 모습이었다. 소녀는 눈을 반짝이며 소리쳤다.
“진짜 나 주는 거야?”
“대신 지갑은 돌려줘. 급해.”
“진짜지?”
“빨리.”
“너무 쿨해!”
세상을 가진 것처럼 환하게 웃는 아이의 앳된 얼굴이 마치 마린케이를 한겨울의 산타클로스가 된 것만 같이 만들었다. 날치기범한테 옷을 적선하는 뒷골목의 산타클로스라. 선물을 준비 중인 진짜 산타클로스가 들으면 당장에라도 저를 고소하러 달려올 성싶었다.
“너 다 가져가! 야호!”
소녀는 가지고 있던 지갑들을 마린케이의 앞으로 전부 내던졌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마린케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의도치 않았으나 더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된 것 같기도 하다고. 지갑이 쌓여가는 모습을 보니 확신마저 들었다.
“나머지는 필요 없는데.”
세상에서 귀찮아지는 걸 제일 싫어하는 사람다운 반응이었다. 이쯤 되니 과연 오늘 안에 집에 갈 수 있을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마린케이의 심정과는 관계없이, 점퍼를 집어 간 소녀는 그를 가게 밖으로 훠이훠이 내쫓으며 소리쳤다.
“이제 꺼져!”
결국, 마린케이는 원치 않던 지갑들을 한 아름 안아 들고서 가게를 나설 수밖에 없었다. 되는 일이 없다. 빌어먹을 황태자 새끼. 이유 없이 황태자를 욕하니 조금 기분이 풀리는 듯했다. 그는 설렁설렁 걸으며 쓰레기통을 찾아 배회했다. 하지만 골목 어귀에 CCTV인지, 모형인지 모를 물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고이 마음을 접었다.
아, 진짜 되는 일이 없다. 천인공노할 황태자 새끼.
***
“그래서, 이걸 그냥 받아 왔다구요?”
마린케이의 품에 안겨 있는 지갑 더미를 유심히 살펴보던 남자는 자신의 베이지색 지갑을 꺼내 가져가며 물었다. 그의 연갈색 머리칼은 유독 바람에 잘 나부꼈는데, 찰랑거리는 머릿결을 보고 있자니 꼭 강아지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 보면 생김새도 좀 비슷했다.
아무튼 간에, 마린케이는 주변 폴리스를 찾아 쉴 새 없이 눈을 굴리며 대충 대꾸했다. 상대방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여실히 알려주는 듯한 딱딱한 목소리였다.
“네.”
그러자 남자는 그를 신기해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셨군요.”
바른대로 말하면 그냥 받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시끄러운 헤비메탈 음악이 흘러나오는 스피커 위에 점퍼를 기증한 대가로 이 지갑들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 보는 작자와 마주 앉아 미주알고주알 떠들며 시간을 축내기에는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옷차림에 규칙은 없다지만, 목이 늘어난 반팔 티 하나만을 입고 서 있는 마린케이의 몸을 유심히 훑어보던 남자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그래도 좀 아쉽네요. 입고 있던 그거, 콜린스사 SS 시즌 컬렉션으로 나온 한정판 아이템이었는데. 저도 저번에 구하려다 실패했거든요.”
“아, 예.”
어떤 말을 해도 관심이 생기지 않는 게 분명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물며 마린케이는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도 못한 처지였다. 외계어도 아니고 왜 말을 저딴 식으로 해. SS는 또 뭐고? 마린케이는 들고 있던 지갑 더미들을 내려다보며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제가 많이 급해서 그러는데, 혹시 이것들 좀 폴리스한테 전해주실 수 있습니까?”
이러다 정말 차를 놓치게 생겨먹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말은 전혀 듣지도,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은 마린케이의 모습에 남자는 하늘하늘한 미소를 입에 걸며 대답했다.
“대가 없는 부탁은 안 들어주는 편이라서.”
확실한 거절이었으나 효력은 없다시피 했다. 마린케이는 은근하게 남자를 협박했다.
“지금 들고 계신 지갑, 제가 찾아다 드린 겁니다.”
“……아.”
“10분 만에요.”
정확히 말하면 12분 만이지만, 얼추 비슷했으니 괜찮으리라 믿었다.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남자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건네지는 지갑 더미들을 바라보던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굴렸다. 태어나 한 번도 이런 부탁을 받은 적 없는 사람 같은 서투른 몸짓이었다.
손이 모자라 볼을 긁적일 수도 없었던 그가 촉박한 시간 탓에 점점 더 인상이 험악해지기 시작하는 마린케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번호 좀 알려주세요. 이따 연락할게요.”
“연락은 됐습니다.”
“갑자기 이 많은 걸 들고 오면 의심받을 텐데, 증인은 있어야죠.”
일리 있는 발언이었음에도 마린케이는 거부 의사를 피력해 고개를 저었다. 전화번호에 의미를 두는 편은 아니었으나, 요새 들어 걱정되는 것이 많았다. 특히나 처음 만난 사람에게 신상 정보를 넘겨줬다가 또 어떤 성가신 일에 휘말리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 가장 신경 쓰였다.
그래도 그간의 사건을 통해 배운 것은 있는 모양인지, 마린케이는 전보다 더욱 약삭빠르게 행동하며 거절에 거절을 거듭했다. 아무리 번호를 요청한 당사자가 선량한 분위기를 가진 청년이더라도 그랬다. 경험을 통해 축적된 데이터는 연신 낯선 이를 경계하라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 감각에 순응하듯 절로 단호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싫습니다.”
다시 한번 거절 의사를 확인받은 남자는 짐짓 애석한 투로 말했다.
“거절당한 것도 오늘이 처음이네요.”
그러자 마린케이는 기다렸다는 듯 품에 안고 있던 지갑 더미를 마저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이대로 갔다간 정말 차를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 마린케이 이스턴의 머릿속에는 그저 고속버스 시간표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허벅지 근육이 절로 긴장하며 꿈틀거렸다.
그렇게 마지막 버스를 타기 위해서라도 있는 힘껏 뛰어가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품에 안은 지갑을 떨떠름하게 내려다보던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신박하긴 하네.
“교육이 덜 돼서 그런가.”
***
시장 상권이 주를 이룬 동네에서는 늘 원인을 알 수 없는 비린내 비슷한 것이 풍겼다. 마린케이에게 이 악취는 매우 친근한 축에 속했는데, 모친이 운영하는 작은 횟집에서도 언제나 생선 특유의 비릿한 향기가 코를 찔렀기 때문이었다. 시장에서 가장 구석진 골목권, 빚을 내서 마련한 한 칸짜리 횟집은 존경하는 모친의 인생이 전부 담겨 있는 소중한 장소였다.
마린케이는 열일곱이 되기 전까지 좁디좁은 방에서 부친, 에단 스튜퍼와 함께 뜨개질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는 했던 것을 회상했다. 빚을 거의 갚고, 근처 골목 정육점에 일자리를 얻기 전까지 에단은 그의 아들과 함께 가지각색의 코인형을 만들며 생활비를 벌었다.
왕립학교의 화려한 외관에 익숙해져 있던 탓일까, 돌아온 고향의 모습은 기억보다 훨씬 소박하고 초라해 보였다. 그러나 마린케이는 이곳에도 나름대로의 운치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상종하고 싶지 않은 백로들로 가득한 왕립학교에서 기력이 쇠할 바에야 차라리 익숙한 까마귀 떼와 함께 살아가는 편이 더 낫다. 적어도 이곳에서의 마린케이 이스턴은 이단아라거나, 불청객이라거나 하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늦었네?”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서 집 안에 발을 들인 마린케이는, 현관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번지르르한 얼굴에 충격을 금치 못하고서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우리 케이가 왔구나! 드디어 케이가 왔어!”
“에단, 조용히 좀…. 왔으면 신발 벗고 들어오렴. 케이.”
좁은 거실에 탁자를 펴놓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던 사람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마린케이를 환영하며 인사했다. 물론, 그중에서는 전혀 환영하는 것 같지 않은 표정으로 눈을 부라리는 사람 역시 존재했다. 믿고 싶지 않지만 옆집 사는 피에르 셀번이 맞았다.
캐리어도 못 드는 머저리 새끼가 왜 여기 있는 건지 좀처럼 짐작할 수가 없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려 했으나 도저히 머리가 따라주지를 않는다. 피에르의 옆에 앉아 있던 황태자는 마린케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늘따라 더 작정을 하고 단장한 듯, 얼굴이 심각할 정도로 반짝거렸다.
“어디 들렀다 왔나 봐?”
눈꼬리를 샐쭉 접어 웃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저 새끼가 지금 수명을 줄여달라는 부탁을 돌려서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협소한 공간에 내로라하는 덩치들까지 끼어든 탓에 집 안의 공기 자체가 한층 더 더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정쩡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마린케이의 모친, 마린느 케이틀린 이스턴은 제발 좀 어떻게 해 보라는 심정을 가득 담아 아들을 향해 눈을 흘겼다. 그녀의 남편인 에단 스튜퍼는 그저 자식을 보게 되었다는 기쁨을 만끽하며 눈시울을 닦고 있을 뿐이었다.
“흐억!”
그때, 황태자는 은근슬쩍 손을 들어 올려 묵묵히 앉아 있는 피에르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비명 비슷한 소리를 내지른 피에르가 그 표정만큼이나 전혀 달갑지 않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무려.
“기다렸다. 마, 마, 마, 마, 마린케이.”
제 이름까지 들먹이면서. 이 한심한 새끼들은 진짜, 인간임을 증명하는 사고 회로 자체가 망가져 버린 게 틀림없었다. 마린케이는 구석진 곳에 잔뜩 쌓여 있는 선물더미를 바라보며 단박에 낯을 구겼다. 문득, 조금 전 담벼락에서 보고 왔던 한 단어가 눈앞을 스쳐 지났다.
Misery. 미저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린케이는 황태자라는 존재가 자신의 인생을 더더욱 꼬아가고 있음을 실감하며 말했다.
“무단 침입으로 신고하겠습니다.”
제아무리 인간의 겉가죽을 믿지 않는 마린케이라지만, 평소엔 날티 나는 본새로 왕립학교를 휘두르고 다니던 그가 멀쩡한 인간인 척 앉아 있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저도 모르게 폭언을 퍼부을 뻔했다. 명상을 통해 평소의 페이스를 되찾아온 그는 인내심을 곁들여 경고했다.
“당장 안 나가시면, 정말 폴리스를 부를 겁니다.”
“치, 치, 친우한테 너무 야박한 거 아닌가?”
미안한데 전혀 친우처럼 보이지 않았다. 마린케이는 겨우 ‘친우’라는 간단한 단어를 뱉기 위해 말을 더듬기까지 하는 피에르를 경멸 섞인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정신 나간 귀공자 역할을 맡았을 때는 과할 정도로 몰입감이 뛰어나더니, 마린케이의 친구 역할을 받은 이후부터는 자꾸만 뚝딱거리는 게 꼭 실밥 터진 봉제 인형 같았다. 상황과는 관계없이,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당찬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 에단은 살벌한 현장을 중재하고자 소리쳤다.
“안 본 새 많이 컸구나, 케이!”
장담하는데 1cm도 자라지 않았을 것이다. 마린케이의 키는 열일곱 이후 그대로였다.
그러나 행복해하며 말씀하시는 아버지에게 ‘저는 단 1cm도 자라지 않았습니다.’라고 반박하는 것도 자식 된 도리상 참 어려운 일 아닌가.
“현장 학습이라도 나오셨습니까?”
마린케이는 대신 황태자 새끼와 그에게 세뇌당한 듯한 광신도 쪽으로 방향을 돌려 조롱하듯 물었다. 이번엔 자신의 소중한 보금자리까지 침입하려 드는 귀족 새끼들 때문에 속이 다 뒤틀렸다. 눈치를 보던 피에르는 사력을 다해 목소리를 꺼냈다.
“치, 치, 친우…….”
“댁 말고 거기, 금발 씨가 좀 대답해 보시죠.”
그마저도 처참하게 실패해버리고 말았지만. 그런 마린케이의 모습을 뿌듯하게 쳐다보고 있던 에단은 순간적으로 사색이 되어 표정을 굳혔다. 금발? 금발이라니…? 천천히 생각해 보자. 가쉰 땅 위에 금발은 흔하지 않았다. 제국에서 금발을 가지고 있을 만한 사람이라면….
아들의 방문에 기뻐하느라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던 그가 상황 파악을 마치고선 눈을 굴렸다. 잊고 있었다. 제 옆에 앉아 있는 이가 무려 가쉰의 황태자라는, 그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말이다. 마린느는 그걸 이제 알았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기만 했다.
에단이 도움을 구하듯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마린케이와 똑같은 표정을 한 채 얼굴을 구기고 있는 아내를 발견하고서는 고이 마음을 접었다.
참, 하마터면 이것도 잊어버릴 뻔했다. 그는 자신의 유전자라고는 오직 갈색 머리칼밖에 받지 않은 것 같던 마린케이의 성장 과정을 떠올리며 혼자만의 납득 과정을 끝냈다.
“대답도 못 할 거면서 왜 멋대로 현장 학습을 다니십니까?”
겁도 없이 황태자에게 막말을 던진 마린케이는 석고상처럼 굳어버린 아버지를 확인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심약한 그를 위해 선글라스까지 챙겨 다니며 기자들의 접근을 피해 다녔던 마린케이로서는, 이렇게 당당히 제집에 등장한 황태자의 존재가 무척 아니꼽기 그지없었다.
그러자 샤를은 기다란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말했다.
“해결해달라고 부탁했잖아. 달갑지 않은 사람이 추근거린다고.”
“뭐라고요?”
“난 또 소중한 마린케이한테 스토커라도 붙은 줄 알고 걱정했지.”
스토커라는 믿기지 않는 단어에 마린느가 마린케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새끼는 대체 전달을 어떤 식으로 했길래 말이 저따위로 왜곡된 거야? 마린케이는 유력한 용의자인 피에르 셀번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엄청난 왜곡의 근원지에서 당당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은 대로 전달했다. 그것 때문에 집에 가 있을 테니 해결해 달라고 했잖아?”
“제가 언제 그것 때문에 집에 간다고 했습니까?”
흥. 피에르는 적반하장격으로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내 기억력은 정확해. 무려 파르헬리 선생의 신간을 포기하면서까지 들은…….”
“그놈의 헬리콥터 새끼.”
“헬리콥터가 아니라, 파르헬리라니까! 호세 파르헬리!”
가장 존경하는 위대한 철학자이자 예술가인 파르헬리 선생을 욕보이는 말에 피에르가 공격적으로 반박했다. 저 빌어먹을 단어 때문에 고대하던 독서조차도 포기해야 했던 상황이 생각나서였다. 화장실 청소를 끝내고 와서도 헬리콥터라는 단어는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설마 교과서에도 빈번히 등장하는 이름을 모른다고 할 속셈은 아니겠지?”
당연히 모른다. 마린케이는 머리칼을 털어내며 대답했다.
“지금 들으니까 파리 새끼로도 들리네요.”
“정말이지, 너같이 무식한 평민 따위, …악!”
따박따박 말을 이으려던 피에르가 황태자에게 가격당한 정강이를 부여잡으며 신음을 흘렸다. 기민하게 상황을 살피던 샤를은 대화 중에 끼어들며 살그머니 덧붙였다.
“마린케이와 같은 학부에 재학 중인 샤를이라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양해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그가 노린 상대는 제 당돌한 기사와 똑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앉아 있는 어머니 쪽이었다. 무려 일리아스 칸 엔스가 애용하는 샵까지 들러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온 미청년이 화사하게 웃으며 정식으로 인사했다.
심지어 그는 황실을 떠올리게 하는 제 성씨는 일부러 언급하지 않은 채 죄송스럽다는 듯, 가지런한 눈썹을 저 아래로 떨어뜨렸다. 황태자와의 로맨스를 꿈꾸는 누군가가 들으면 눈사람처럼 녹아내리기라도 할 듯한 달콤한 목소리였다. 언젠가 잡지사 「리버티」에서 조사한 설문 중 하나인 ‘밤새도록 통화하고 싶은 남자 컬렉션’에서 1위로 선정된 적 있는 셀럽다웠다.
마린케이의 모친은 아들과 똑같은 성정의 소유자였지만, 데칼코마니처럼 행동하는 그의 아들과 딱 한 가지 다른 점을 가지고 있었다.
“수산업에 종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바로 그 거대한 장벽을 허무는 일이 마린케이보다 훨씬 더 용이하다는 것. 게다가 도전자는 가쉰에서 가장 사랑받는다는 그 남자, 샤를 소피아 엔스였다.
그러니 게임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뭐……. 괜찮아요.”
마린느가 간결히 대꾸하자 그는 뒤편에 쌓아둔 짐꾸러미-그녀의 눈에는 정말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다-를 눈짓하며 말했다.
“요새 제일 잘 팔린다는 걸로 골라왔는데,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네요.”
기사학부 수련생들과의 진지한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결정한 선물은 잘나가는 수산업자라면 모두 하나씩 가지고 있다던 히아신스 사의 최신형 칼이었다. 원래는 신상품으로 나온 18종의 칼을 모두 준비해올 생각이었지만, 모두의 만류 때문에라도 계획을 시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하,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대련 신청인 줄 알지 않을까요?」
그중 칼릭스가 가장 열심히 그의 선택을 비판했다.
“이것들 다…, 구하기 어려운 제품들 아닌가?”
선물을 확인한 마린느가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비록 그 목소리는 시원찮았지만, 샤를은 그녀의 눈이 조금 전에 비해 훨씬 생동감 넘치게 반짝거린다는 것을 확인하고선 어여쁘게 웃었다. 승리의 여신은 이번에도 샤를 소피아 엔스의 편이었다.
그 믿지 못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마린케이는 눈에 흙이 들어간 심정으로 욕설을 읊조렸다. 저 영악해 빠진 새끼. 여우 같은 새끼. 쳐 죽일 새끼는 바로 여기, 이곳에 있었다.
“늦었으니까 내일 천천히 가요. 위험할 텐데.”
“아니, 괜찮…….”
거절하려는 피에르의 정강이를 또다시 세게 걷어찬 황태자는 보조개가 깊이 파이도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 인사를 전하는 그의 사탕 같은 목소리를 들으며, 마린케이는 그냥 이대로 걸어서 왕립학교에 돌아가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잠시 고민했다.
진지하게 따져 보니 오히려 그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저 얼굴을 더 보고 있다간 분명 참지 못하고 후려치거나 할 것이 뻔했고, 그렇게 되면 지하 감옥에 처박혀 한평생을 살아가게 될 터였다. 그러나 마린케이의 의사는 중요치 않았다. 마린느는 이미 결정을 마친 듯해 보였다.
“어디서 주무시게 해야 하려나.”
문제는 방이 하나뿐이라는 것이었다. 보통의 경우에는 안방에서 이스턴 내외가 취침하고, 마린케이는 거실에서 잠을 자곤 했었다. 그러나 제국의 황태자께서 행차하신 마당에 그를 거실에서 재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계속된 거절에도 불구하고 에단은 부디 안방에 들어가 주무시라며 가장 두꺼운 솜이불을 꺼내 와 샤를에게 건넸다.
“제가 더위를 많이 타서, 이불은 괜찮습니다.”
“그래도 보일러가 잘 안 되는 편이라 많이 추우실 텐데…….”
“정말 괜찮아요. 안방까지 내어주셨는데, 이렇게까지 신세 질 수는 없죠.”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는 더위도, 추위도 잘 타지 않았다. 여름은 따뜻해서 좋고 겨울은 시원해서 좋다. 그야말로 용병이 되기 위해 최적화된 신체 조건이었으니, 오히려 황태자로 태어난 게 신의 농간임이 분명해 보일 정도였다. 감동한 얼굴의 에단이 참 잘 크셨다며, 어떻게 그리 배려심이 깊을 수 있냐고 찬사를 퍼붓던 와중이었다.
“잘 큰 건 마린케이죠. 항상 많이 배우고 있어요.”
말끔한 걸 넘어 아름답기까지 한 생김새의 청년이 천사 같은 얼굴로 그리 말하는데, 대체 어느 부모가 그걸 칭송하지 않을 수 있을까. 거리를 굴러다니는 조약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넋이 나가버린 에단의 뒷덜미를 잡아당긴 마린느는 남편을 대신해 말을 이었다.
“거실은 절대 안 돼요. 빨리 들어가서 주무세요.”
이스턴 가족과 함께 거실에서 잘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황태자의 옆에서 잘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고민하던 피에르는 아무도 묻지 않았으나 베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가 문지기를 하겠습니다. 전하.”
“무슨 소리야?”
“전하를 지켜드리는 역할을 제 몫입니다. 침입자가 생기지 않도록 감시하겠습니다.”
그러자 황태자가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이스턴 내외에게는 보이지 않게끔 건달 같은 얼굴을 만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역시나 이쪽이 훨씬 더 사실감 넘쳤다.
“그게 더 불안하니까, 그냥 들어와서 같이 자.”
자신을 평가 절하하는 말이었음에도 피에르는 굴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이건 신하 된 도리이자, 임무입니다.”
“위험해. 기각.”
“저, 전하. 정말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감히 저 같은 게 어떻게….”
“마린보이, 너도.”
황태자의 마음 씀씀이에 눈물을 훔칠 뻔한 피에르는, 그 순간 돌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저 평민도라니? 황급히 마린케이를 돌아본 그는 역겨운 무언가를 목격한 사람처럼 얼굴을 구기고 서 있던 마린케이를 발견한 후 괜스레 서운한 기분을 느꼈다.
“전 여기서 잘 건데요.”
마린케이가 단호한 목소리로 황태자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러다 누가 무슨 말만 하면 습관적으로 싫다는 말을 내뱉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황태자는 그런 마린케이를 또 거절했다.
“두 분 불편하실 텐데, 그냥 들어와서 자.”
“아뇨. 제가 불편합니다.”
“거실에서 셋이 자면 좁잖아.”
“안 좁습니다.”
“좁을걸?”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창과 방패의 대결 같은 세기의 언쟁이었다. 어느새 그 사이에서 쏙 빠지게 된 피에르는 결심한 듯 베개를 들어 올렸다. 뭔진 모르겠는데, 저렇게 싫어하는 걸 보니 괜히 오기가 생겨서 같이 자고 싶었다. 기사학부에서는 전쟁 시뮬레이션 수업의 일환으로 깊은 산속에서 함께 야영을 한다고들 하지 않나. 이 정도면 아주 편하고 좋은 조건의 훈련이라고 볼 수 있었다.
“빨리 주무십시오. 동트자마자 나가셔야 할 테니까.”
계속되는 거절에 손을 들고 포기한 쪽은 황태자였다. 방에 들어서는 그를 바라보며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던 마린케이는 문득, 뒤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시선에 착잡한 심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기랄. 예상하지 못한 반격이 있었다.
“껴 죽을 일 있니?”
마린느가 당연하다는 듯 황태자가 들어간 방을 눈짓했다. 아직까지도 베개를 안고 서 있던 피에르는 모자가 내비치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꿀꺽, 침을 삼켰다. 표정도 똑같고 분위기도 똑같아서 그냥 마린케이 이스턴 두 명이 서 있는 줄 알았다.
에단은 그 상황 속에서도 익숙한 얼굴로 이불을 깔았다. 심지어 오랜만에 보게 된 모자의 대치 상황에 기분이 좋아진 건지 콧노래마저 흥얼거렸다.
“빨리 들어가렴. 불 끄게.”
“저 인간이랑 있기 싫….”
“불.”
“……좋은 꿈 꾸세요.”
미리 이불을 펴놓고 있던 황태자는 종잇장처럼 구겨진 표정으로 방에 들어온 마린케이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그 해사한 얼굴 앞에서 마린케이는 딱딱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1m 이상 간격 유지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옆 사람을 두들겨 패는 잠버릇이 있어서요.”
1m 이상 가까이 다가오면 정말 죽이기라도 할 것 같은 그 살벌함에, 피에르는 잠시 말문이 막혀 베개를 끌어안았다. 사실 마린케이의 요구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봐도 무방했다.
왕립학교에서 내로라하는 덩치들을 가진 남정네 셋이서 부대끼며 자야 하는데, 어떻게 1m의 간격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겠는가. 미친 듯이 노력해 봤자 고작 30cm 정도가 전부일 것 같았다. 피에르가 사라져가는 용기를 붙들고서 강하게 주장했다.
“전하께서는 가장 안쪽에서 주무셔야 한다.”
“…….”
“전하께서는!”
그러나 마린케이는 흥미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피에르의 말을 무시했다. 혹여 제 목소리가 작았나 싶어 데시벨을 높이던 피에르는 샤를이 집어 던진 베개에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피에르, 옷장 안에서 자고 싶은 거면 그냥 얌전히 요구하지?”
황태자가 경고할 때, 마린케이 또한 살기등등한 얼굴을 거두지 않으며 강조했다.
“1m 안으로 접근하면 후드려 팰 겁니다. 잠버릇이니 모두 이해 부탁드립니다.”
한 명은 말만 부드럽게 하는 미친놈이었고, 다른 한쪽은 말도 얼굴처럼 하는 미친놈이었다. 협박이라고는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두 사람 사이에 끼게 된 피에르는 한껏 억울해하며 이불을 펼쳤다. 왜 이불 정리까지 내가 하게 된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모든 단면의 각을 맞춰 이불을 까는 손놀림이 예술이나 다름없었다.
***
잠을 자고 싶어도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는, 창틈으로 번져오는 창백한 낯의 달빛이 유독 시선을 사로잡는 그런 밤이었다.
마린케이는 제 옆에서 정자세로 잠을 자고 있는 피에르의 고른 숨소리에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저라고 황태자의 옆에서 잠을 청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눈에 불을 켜고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려 들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어이가 없어서 잠이 다 달아났다.
한참을 뒤척거리던 마린케이는 고향에서의 단비 같은 숙면을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목을 이리 꺾고, 저리 꺾으며 몸을 풀던 그가 조용히 이불을 치우려던 때였다.
불안한 기분이 들어 돌아본 피에르의 옆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마린케이는 그 순간 제 심장이 덜컹거리는 것 같은 초조함을 느꼈다. 이 미친 황태자 새끼가 어딜 기어나간 거야? 여긴 그 자식이 살아왔던 안락하고 윤택 있는 도시의 밤거리가 아니었다.
급히 의자 위의 외투를 챙겨 든 마린케이가 빠른 걸음으로 집 밖을 향했다. 어두운 밤. 뒷골목의 분위기는 싸늘할 정도로 고요하고 황량했다.
“이 밤중에 마실이라도 나가실 셈입니까?”
집과 조금 떨어진 거리의 담벼락 앞에 기대앉아 있던 황태자를 발견한 마린케이는 안도하며 내뱉었다. 그 목소리에는 짜증과 더불어 알 수 없는 감정 몇 푼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저를 향한 타박에도 황태자는 그저 작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가 대답했다.
“낮엔 함부로 못 돌아다니니까.”
“잘만 돌아다니시던데요.”
“그건 수도잖아. 수도가 아닌 곳을 자유롭게 다녀본 적은 없어.”
아무리 수도라고 할지언정 경호원도 없이 번화가를 돌아다니는 황태자가 미친 새끼였다. 처음에는 그를 몰래 따라다니는 경호원들이 따로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황태자는 정말 아무도 없이 혼자 싸돌아다니는 게 맞았다. 저 새끼는 겁이 없는 걸까, 개념이 없는 걸까. 마린케이는 당연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여기,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곳입니다.”
“소년만화 주인공이 옆에 있는데도?”
그놈의 소년만화 타령. 하지만 어릴 적 읽은 책이라고는 무협지와 소년만화밖에 없는 것이 맞았기 때문인지 마린케이는 반박하지 못하고서 에둘러 말을 돌렸다.
“주인공보단 악역들이 훨씬 많은 동네라서요.”
여전히 담벼락 밑에 앉아 있던 황태자는 그런 마린케이를 올려다보며 예쁘게 웃었다. 가쉰에서 가장 반반하기로 유명한 얼굴은 어두운 시야 속에서도 빛을 발했다. 불꽃놀이 때와 똑같은 기분에 시달리게 될 것이 두려웠던 마린케이가 일부러 그를 피해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황태자는 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를 가까이 좁히며 속살거렸다.
“하여간, 만화를 너무 많이 봤다니까. 마린보이.”
마린케이는 가지고 나온 후드 집업을 황태자의 품에 집어 던지며 건성으로 답했다.
“그거나 입으시죠.”
“됐으니까 너 많이 입어.”
“여긴 황금이라면 게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동네라, 머리라도 가리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황태자의 찬란한 금발은 이렇다 할 조명 없이도 유독 눈에 띄었다. 그러니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모두 가려버리든가, 밀 수 있다면 아예 다 밀어버리는 쪽이 나을 것이다. 저 아름다운 머리칼이 사라진다는 건 아쉽긴 할 테지만,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세간의 눈을 피해가야 하는 것이 먼저였다. 황태자가 마린케이의 콧잔등을 가볍게 건드리며 동의했다.
“지긋지긋했는데 잘됐네.”
“저 머리 안 좋습니다.”
가끔씩 황태자의 발언은 퍽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었고, 마린케이는 이번에도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하얀 손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이내 그가 건방진 질문을 던졌다.
“좀 편하게 사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황태자 새끼가 대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쉽게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또 무슨 기행을 꾸미고 있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볼품없는 뒷골목의 풍경과 고아한 황태자의 모습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사시사철 프리지아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기로 유명한 황궁 정원이 훨씬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충분히 그랬어.”
그 순간 황태자에게서 무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소가 사라진 얼굴이었지만, 그 나름대로의 처연한 아름다움이 여전히 남아있는 얼굴이기도 했다.
밤은 몽마의 시간이다. 마린케이는 자신이 몽마에라도 홀린 사람처럼 황태자의 얼굴을 구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불안함을 느꼈다. 몽마가 어디 따로 있을까. 적어도 지금만큼은 제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꿈과 낭만을 집어삼키는 몽마, 그 자체였다. 마린케이가 말했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사십시오.”
“글쎄. 얼마나 더?”
“적어도 즉위 직전까진 가능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럼 난 평생 편하게 살 수 있겠다. 즉위할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으니까.”
눈을 깜빡일 때마다 여름 하늘보다 새파랗고 투명한 눈동자가 사라졌다, 도로 나타났다. 경국지색으로 유명한 남자를 앞에 둔 사람치고는 꽤 덤덤한 모습이었지만, 마린케이는 이 빌어먹을 감정이 부디 연군지정만이 아니기를 바라며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던 와중, 결국 마린케이가 먼저 낮아진 목소리를 냈다.
“어떻게 단언하십니까?”
장담하건대, 제국 어디에도 황태자의 심리를 완벽하게 추측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왕관을 품에 안고 태어난 주제에, 그것에서 달아나기 위해 용을 쓰는 황태자라니. 소년만화가 아니라면 절대 등장할 일이 없는 인물상이었다.
역시 자신보다는 황태자 쪽이 소년만화에 도취되어 있는 것이 맞다고 판단한 마린케이가 억지로라도 그에게 후드를 뒤집어씌우려던 때였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인기척을 눈치챈 마린케이는 황태자의 몸을 잡아당겨 골목길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가 손을 들어 황태자의 입을 거칠게 틀어막았다.
“조용히 하십시오.”
갈색 눈이 골목 밖을 곁눈질했다. CCTV 하나 없는 뒷골목에서 황태자를 시정잡배들과 대면하게 할 수는 없었다. 술에 진탕 취한 취객의 혀 꼬인 목소리와 성난 발걸음 소리가 그들이 숨어 있던 골목길 틈새를 지나쳐 갔다. 엉겁결에 그를 제 품 안에 가두게 된 마린케이가 몸의 긴장을 풀려던 순간이었다. 그는 숨을 들이켜며 동작을 멈췄다. 아, 빌어먹을.
연군지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나 응어리진 마음은 그대로였다. 상쾌함보다는 오히려 불쾌감이 먼저 찾아들었다. 마린케이는 이 영문 모를 속앓이에 탄성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실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불꽃놀이보다 더 아름다웠던 황태자의 모습. 태어나 본 것들 중 가장 아름다웠던 그 장면이 뇌리에 남아 잊히지 않았다. 떠나가지 않았다.
어쩌면 그동안의 사건을 통해 쌓아온 유대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퍼스트 클래스 새끼들이 그토록 부르짖어대던 경애감이란 것일 수도 있고.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 중요치 않았다.
선명한 벽안 속에 갇혀버린 듯, 온몸을 굳힌 채 황태자와 마주하고 있던 마린케이는 그의 입술을 틀어막던 손을 떼어내고서 걸음을 물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황태자의 기다란 속눈썹이 모두 들여다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감이었다.
“……웃지 마십시오.”
언젠가의 황태자처럼, 마린케이는 낮게 경고하며 표정을 굳혔다. 그러나 마린케이를 마주하고 선 이 남자는 제국민 모두가 사랑하는 가쉰의 후계자였다.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주고, 솜사탕을 사주며 부드러이 어르던 그 남자. 퍼스트 클래스의 모두가 경애하며 믿고 따르는 유일무이한 주군이 바로 샤를 소피아 엔스였다.
그는 누군가의 경고에 따라 움직일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 더 웃고 싶어지는데.”
황태자가 그렇게 말하며 나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어 그는 담벼락에서 고개를 떼어내며 마린케이를 바라보았다. 끈질긴 시선이 마린케이를 따라붙었다. 이 여우 같은 새끼가….
“전 미리 경고했습니다.”
마린케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서 그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뜨겁게 부딪힌 입술로 인해 잠시 당황한 듯싶던 황태자가 옅은 웃음소리와 함께 숨결을 흘려보냈다.
마린케이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볼 위에 올린 그는 그 상태로 손을 겹쳐 올린 채 더욱 깊이 혀를 얽었다. 부드러운 살덩이가 마린케이의 입천장 곳곳을 느리게 문질렀다. 몸을 물들이는 따뜻한 온기에 마린케이가 한숨을 늘어뜨렸다.
“하아…….”
빌어먹을. 샤를 소피아 엔스는 늘 따뜻했다. 그 시건방진 행태와 말투 속에서도 모두가 그를 주군이라 부르며 따르고자 했던 것은 그러한 연유에서였을 것이다.
마린케이는 황태자의 입술이 벚꽃잎처럼 부드럽다고 생각하며 감았던 눈을 들어 올렸다. 청정하기 그지없는 푸른 눈동자가 여전히 제 모습을 허물없이 담아내고 있었다. 그 순간, 황태자의 황금빛 머리칼이 마린케이의 얼굴 위로 한가득 쏟아져 내렸다. 지금 자신이 황태자에 대해 느끼고 있는 감정을 함부로 설명하고 싶진 않았으나, 한 가지만큼은 단언할 수 있었다.
만약 누군가 세상을 바꾸게 된다면, 그것은 당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그렇게 설명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넘실대는 감정은 두려운 것을 넘어 악독하기까지 했으니까. 입술을 깨무는 것으로 짧은 키스를 끝낸 황태자는 잡고 있던 마린케이의 손등 위에도 짙게 입맞춤하며 속삭였다. 그는 몽마였다. 밤처럼 고요하고, 태양처럼 찬란한.
“잠버릇이 애틋하네.”
그 목소리에 마린케이는 다시 한번 황태자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턱 밑까지 다크서클이 내려온 듯한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바라보며, 마린케이는 힘을 실어 본인의 뺨을 내리쳤다. 정신이 들 때까지 두어 번 더 강하게 내리치자 이제야 좀 이성이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부족했기에 마린케이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음을 배경 삼아 한 번 더 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신의 장난질이 아니고서야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제기랄…, 부디 꿈이기를. 그러나 새벽에 있었던 그 믿기지 않는 사건이 절대 꿈일 리가 없다는 것은, 잔뜩 부르튼 입술을 보면서도 계속 깨닫게 될 수 있었다. 본래 인간은 분위기의 동물이라고들 하지 않나.
마린케이는 차라리 그 분위기 속에서 질식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거울 위로 머리를 박았다. 방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저를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에단은 화장실 청소를 끝내고 나온 피에르를 띄워주고 있었다.
“케이! 이 친구가 참 대단한 청년이야. 락스 청소도 할 줄 알고.”
“이 정도는 교양인으로서 갖춰야 하는 기본적인 덕목이죠.”
“나를 잇는 살림꾼이 되겠구먼. 아주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일세.”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웃은 피에르는 이번엔 냉장고 정리를 해보겠다며 콧대를 높였다. 굴뚝 청소에 이어 화장실 청소까지 끝낸 주제에, 이번엔 또 냉장고 청소를 하겠다며 자진해서 설치고 있는 피에르를 구경 중이던 황태자가 예쁘게 깎은 사과를 내려놓으며 마린케이를 돌아보았다.
“잘 잤어?”
마린케이는 사실 저와는 달리 산뜻한 얼굴로 묻는 황태자에게 악다구니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숨도 못 잔 거 알잖아, 이 양아치 새끼야!
하지만 고무장갑을 끼고 있는 피에르 셀번과 그런 그에게 쓰레기봉투를 쥐여 주는 아버지를 보고 있자니 차마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찍 출근한 어머니가 자신의 불안정한 상태를 목격하지 못했다는 점 하나였다.
냉장고 청소를 계획하던 에단은 슬며시 다가와 아들의 얼굴을 살폈다. 데리고 온 친구들 때문인지, 평소엔 멀끔하니 잘생긴 것처럼 느껴졌던 아들의 얼굴이 조금, 아주 조금 밋밋해 보였다. 저를 유심히 살피는 아버지의 시선을 눈치챈 마린케이가 고장 난 로봇처럼 물었다.
“이 새끼들, 아니. 이 자식들이 왜 아직도 여기 있어요?”
때마침 냉장고 탐색을 끝낸 피에르는 전기 효율을 아끼기 위해서라도 그 문을 미리 닫아 놓으며 말했다.
“아버님께서 소고기 스튜를 해주신다고 하셨다.”
저 새끼가 지금 누가 누구 아버님이라는 거야. 마린케이의 섬뜩한 눈빛에 피에르는 모르는 척 시선을 피했다. 에단을 지나쳐 황태자에게로 걸어간 마린케이가 볼품없이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에단은 그들의 돈독한 군신 관계를 바라보며 자랑스러움에 눈시울을 붉힐 뿐이었다. 역시 내 아들이야. 전혀 닮지 않은 부자지간이라는 사실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아까 있었던 일은 없던 걸로 하시죠.”
사과 한 조각을 마린케이에게 건네던 황태자는 간단히 대답했다.
“싫어.”
“…….”
“어디서 발뺌이야?”
그가 죄다 물어 뜯겨 있는 자신의 입술을 가리켜 보였다. 마린케이는 그에게 대답하지 않은 채 도망치듯 주방으로 향했다. 뒤에서 재수 없는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마저도 무척이나 엿 같았지만,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 대응해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 그의 얼굴을 봤다가는 온갖 쌍욕을 다 늘어놓으며 광분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어쩌면 옆에 있는 낡은 서랍을 던져버릴 수도 있었다.
정말 저 혼자 난리인 건가 싶던 마린케이는 그 후로도 계속 태연자약하게 행동하는 황태자의 모습에 밀려드는 안도감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영문 모를 씁쓸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샤를 소피아 엔스에게 있어 새벽녘의 일은 그저 잠깐의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서 벌어진 단순한 해프닝이었을 뿐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을 터였다.
식사 시간 동안 소고기 스튜를 다섯 접시나 먹어 치운 피에르는 떠나기 직전까지 에단에게 레시피를 알려달라며 폭풍 같은 질문을 쏟아냈다. 그동안 마린케이는 어젯밤 자신이 던져준 후드 집업을 뒤집어쓴 채 대문 앞에 기대 있는 황태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황태자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후드 밑으로 삐져나온 금빛 머리칼들 사이로 청명한 색감의 푸른 눈동자가 살짝씩 모습을 드러냈다. 한 가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저 반반한 낯짝과 마주하고 있어도 전혀 가슴이 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훨씬 더 침착한 것 같기도 했다. 빌어먹을. 그런데 대체 왜.
“마린보이, 할 말 있어?”
“…….”
“그러다 내 얼굴 뚫릴 것 같은데.”
그가 말을 건네는 순간이면, 이렇듯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쾌한 기분이 넘실거릴까. 마린케이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황태자의 물음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
「걔는 공작새 같은 사람들을 좋아해.」
그렇게 말하던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아까부터 짜증스럽게 귓가를 돌아다녔다. 마린케이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애당초 눈부신 깃털을 가진 백로 옆에는 초라한 날개를 가진 까마귀보다 화려한 문양을 가진 공작새가 훨씬 더 잘 어울리는 법이었다.
어차피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야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다 보면 알아서 사라지고 말 종류일 테니, 마린케이는 그것에 대한 상념을 지워버리려 애쓰며 과녁을 조준했다.
탕, 탕, 탕. 빠른 속도였으나 총알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중앙을 꿰뚫었다. 또다시 총알을 장전하며, 그는 자신에 비해 전혀 동요하지 않은 것만 같던 황태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집을 나선 후 다시 왕립학교로 향할 때까지도 황태자는 완벽하게 무탈한 모습으로 행동했다. 이상한 것은 오직 저뿐인 것 같은 모습이었다.
마지막 총알이 과녁을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명중이다. 흔들림 하나 없는 완벽한 자세로 사격을 마무리한 마린케이는 빠르게 귀마개를 빼내며 뒤돌아섰다. 넋이 나간 채 그를 구경하고 있던 칼릭스 커티스가 기계처럼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요새 무슨 일 있어?”
의도를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마린케이는 짜증스레 대답했다.
“없습니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갈 여지를 주지 않는 단호한 말투였지만, 칼릭스는 포기를 모르는 남자처럼 큼큼, 헛기침 소리를 내며 마린케이에게 걸어왔다. 종아리에 깁스를 한 채 돌아다녀야 했던 지난날의 상황은 벌써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것만 같은 겁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의 걸음은 무척 느리고 더뎌서, 짧은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마린케이의 앞까지 도달하기에는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뭡니까.”
퍼스트 클래스의 졸업 학년인 칼릭스는 벌써 몇 시간째 홀로 사격장을 독차지하며 연달아 총질을 해대는 마린케이로 인해 나머지 수련생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뭐 어쩌겠는가. 연신 ‘저 평민 좀 말려주시면 안 됩니까? 간 떨어집니다!’라며 소리치는 수련생들의 요구들을 들어줘 봤자, 그 서슬 퍼런 안광에 죽어 나가게 될 것은 다름 아닌 저였다. 지들이 직접 할 용기는 없으니 나한테 떠맡기는 거잖아, 이 나쁜 새끼들! 완강히 거부하던 칼릭스는 끊임없는 요구에 혀를 내두르고서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큼, 그러니까…….”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있으면 가만두지 않을 것만 같은 음산한 분위기였다. 나지막한 경고를 읽어낸 칼릭스가 말꼬리를 늘이며 마린케이의 눈치를 살폈다. 무심한 얼굴이 마치 한심한 작자를 바라보듯 저를 내려다보는 것에 괜히 울컥하는 심정이 들었다. 칼릭스는 마지못해 의뢰받은 질문을 꺼냈다.
“그냥, 뭐. 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아 보이길래. 누가 보면 실연이라도 당한 줄 알 정도라니까? 하하.”
마지막 말은 억지로라도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어보기 위한 그 나름의 노력이었으나 장렬히 실패하고 말았다. 가볍게 꺼낸 농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린케이의 표정은 이제 살벌한 것을 넘어 누군가를 반으로 갈라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참담하게 구겨져 있었다. 그간의 경험을 놓고 봤을 때 저건 평민이 누군가를 협박하기 전에 짓곤 하던 표정이 맞았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은 칼릭스는 연신 달아날 궁리를 하며 주변을 살폈다. 망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어딘가 뇌관을 건드려버린 게 확실했다.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해 보고자 연속해서 꺼낸 말들이 더 최악이었다.
“물론 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세상천지에 퍼스트 클래스를 거절할 위인이 어디 있어? 황태자 전하가 아니시고야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 암.”
그러나 말을 하면 할수록 분위기만 더 살벌하게 가라앉을 뿐이었다. 그제야 칼릭스는 의지박약처럼 입을 다물었다. 잃어버린 눈치를 좀 되찾아온 듯한 모양이었다. 일순간 마린케이는 이를 갈며 생각했다. 따지고 보자면 실연당한 것은 아니다. 그건 그냥, 달밤의 분위기에 취해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칼릭스의 경솔한 발언에 의해 마린케이는 자신이 어쩌면 정말 실연당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쾌하고도 짜증스러운 추측에 가능성을 싣게 되고 말았다. 만약 정말로 황태자가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눈치채고서 미리 차단한 것에 불과하다면?
그러나 스스로조차도 어렵게 알아차릴 수 있었던 이 작디작은 감정을 황태자, 그 새끼가 먼저 눈치채고 있었을 리 없었다. 그때, 분위기에 취해 있었던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황태자의 눈빛 역시 맛이 가 있긴 마찬가지였다.
따지고 보면 그 새끼는 누군가를 약 올리고 조롱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인간이었으니, 그것을 명분 삼아 저를 데리고 기사 놀이를 하려 했다는 추측이 훨씬 설득력 있었다. 일단 둘 사이에는 지금껏 그런 감정이 오고 가지도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이를 알게 된다면 믿기는커녕 서로 의심부터 하게 될 것이 뻔할 정도의 관계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사자인 마린케이부터가 자신이 황태자에게 이런 류의 감정을 품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렇게 그는 이유조차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시달리며 온종일 황태자에 대한 잡념에 매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떳떳해져도 괜찮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은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의 남다른 이상과 비전에 매료된 것은 맞았으니, 군신으로서 느껴야 할 감정을 착각한 것뿐이라고 결론 내리면 될 것 같았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도 제국의 황태자와 엮여 봉변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방심하게 된 순간, 그 존재가 서서히 가슴 한구석을 비집고 들어와 결국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말았음을 억지로 부정할 수는 없었다.
마린케이를 불안한 눈초리로 훑어보던 칼릭스가 더듬거리며 목소리를 던졌다.
“이, 이스턴?”
“시간이 남아도시나 본데.”
“아냐! 절대 아냐.”
“저랑 대련 한 판 하시겠습니까?”
마린케이는 나머지 귀마개 하나를 빼내며 물었다. 시시각각 부정적인 쪽으로 변화하는 마린케이의 표정을 긴밀히 살피던 칼릭스 커티스의 얼굴빛이 새하얗게 질려갈 때였다. 마린케이가 건성으로 내뱉었다.
“됐습니다.”
곧바로 안심한 표정이 된 칼릭스는 다급히 변명을 꺼내놓으려 했지만,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완전히 그를 지나친 마린케이가 먼저 총을 내려놓고서 사격장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수련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칼릭스에게로 향했다. 마왕과의 전투에서 무사히 되돌아온 용사를 대하듯 반짝거리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가쉰의 건아, 칼릭스 커티스는 그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이 양심 없는 새끼들아, 졸업 앞두고 자퇴할 뻔했는데 박수가 나오냐?”
***
트랙을 뛰어도 분이 풀리지 않고, 러닝머신 위를 달려대도 분이 풀리질 않는다. 무엇에 골이 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자신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고, 또 확실했다.
혹여라도 황태자가 골목길에서의 기습 키스 사건을 물고 넘어지려 든다면 저번 내기에서의 소원을 가감 없이 사용할 생각이었건만, 오히려 그는 너무나도 깔끔하고 태연한 모습으로 마린케이를 상대하기만 했다. 그 반응에 당혹감을 느낀 쪽은 마린케이였다.
그는 결국 지난번 백작 새끼에 관한 얘기를 꺼내려던 것도 잊어버린 채 기숙사에 돌아오게 되고야 말았다. 물론, 방에 들어가기도 전에 경로를 틀어막히고 만 것은 무척 아쉬운 일이었다.
험악한 얼굴로 S관 기숙사 앞에 앉아 있던 로건 콜린스는 기다렸다는 듯, 마린케이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가 휴대폰 화면을 마린케이의 얼굴 앞에 들이밀며 따져 물었다.
“입이 있다면 말이라도 해보시지?”
『※콜린스 한정판 실착 1회 레어템※ / 하이에나1 / 18:45 /
전 남친이 사다 줬는데 필요 없어서 여기다 올려여
쿨거래 시 에눌 ㄱㄴ 』
글 자체도 가관이었지만, 그 밑으로 달린 댓글들이 더 가관이었다.
『뿅알뿅알 / 18:49 / 엥 이게 왜 중고지옥에 올라옴?』
『기리니 / 18:50 / ㅋㅋㅋㅋㅋ백퍼 박스에 벽돌 넣어서 보낸다ㅋㅋㅋㅋ낚시ㄴㄴ』
└ 『ㅁ러ㅏㅇㄷ / 18:52 / 그러기엔 인증샷 때문에 ㄹㅇ인 듯』
└ 『기리니 / 18:52 / 뭐래 어떤 미친놈이 미쳤다고 저걸 파냐?ㅋㅋㅋㅋㅋ』
└ 『ㅁ러ㅏㅇㄷ / 18:53 / 동어반복 ㄴㄴ 미친놈이 어떻게 또 미침?』
└ 『기리니 / 18:54 / ???? 너 글쓴이임? 왜 갑자기 나한테 시비야 사회성 팔아먹음?』
“제가 안 올렸습니다.”
그러나 마린케이는 단호히 장담할 수 있었다. 글쓴이는 자신이 아니다. 그 옷은 이미 뒷골목 날치기 소녀한테 가 있었으니까. 팔려면 조용히 가져다 팔 것이지.
마린케이는 옷을 보며 천진하게 좋아하던 소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다 팔 만한 물건을 건져서 그렇게 웃던 거였구나. 자신이 준 선물을 중고지옥에 올린 아이들을 알게 되면 산타클로스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다지 좋은 표정일 것 같진 않았다. 지금의 마린케이는 어린 날 오락실 형들의 시계를 가져다 전당포에 팔아넘겼던 일련의 사건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로건은 그런 마린케이를 향해 기가 차다는 듯 반박했다.
“당연히 네가 안 올렸겠지. 넌 그냥 직접 사다 준 거라고 거짓말한 거잖아. 그것도 헤어진 애인한테.”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그러니까, 로건 콜린스는 게시물에 적혀 있는 내용 그대로를 곧이곧대로 믿고 있는 듯했다. 말이 돼? 그 멍청함에 마린케이는 반론할 의욕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건은 휴대폰 화면을 확대하며 신경질을 부렸다.
“여기, 전 남친이 사다 줬다는 말 안 보여?”
“그걸 믿으십니까?”
“원래 익명의 공간일수록 더 솔직해지는 법이야.”
“반대인 거 같은데요.”
“오, 그렇게 당당하면 다시 가져올 수 있겠네.”
마린케이가 아차 싶은 얼굴로 표정을 굳혔다. 간신히 생각해낸 반론이 이어졌다.
“이미 팔렸을 겁니다.”
“그렇게 쉽게 팔릴 가격이 아냐.”
“구하기 힘든 옷이라면서요?”
“아씨. 그러게 왜 헤어질 애인한테 옷을 가져다주고 그래? 그거 가쉰에 세 벌밖에 안 나온 한정판인 것도 모르고 가져다준 거지?”
이마가 지끈거릴수록 마린케이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해갔다. 애초에 쓰레기 던지듯 버리고 간 옷들이면 그 옷의 처분권은 제게 있는 것이 아니냐 얘기해 볼까 싶다가도, 괜히 이 끈질긴 새끼한테 걸려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아까우시면 한번 찾으러 가보기는 하겠다고, 실행력 없는 약속을 내걸며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던 때였다.
“헤어진 애인?”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로건은 화들짝 놀라며 캡 모자를 벗었다. 생각해 보니 여긴 S관 앞이었다. 내로라하는 귀족 가의 자제들만 모아 놓았다는 그 S관 말이다. 로건은 저보다 출세한 평민이 S관에 진출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서 길목을 막고 있던 참이었다.
수련장에서 샤워까지 마치고 나온 것인지, 수건을 머리 위에 얹어둔 상태의 황태자는 마치 물기에 젖은 가련한 물망초 같았다. 그 남사스러운 모습에 마린케이는 절로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황태자의 관심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그가 나지막이 물었다.
“누구 애인?”
“저, 전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건 콜린스입니다!”
“알고 있어. 로건.”
태어나 처음 황족에게 이름을 불린 로건은 벅참을 숨기지 못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적절한 순간에 등장해준 황태자 덕분에 시간을 벌게 되었으니, 이 틈을 타 방으로 올라가 버리려던 순간이었다. 마린케이의 어깨 위로 도망가지 못하게끔 손을 올려놓은 황태자가 다시 한번 삐딱하게 물었다.
“내 기사한테, 나도 모르는 애인이 있었어?”
황태자에게서 풍기는 달달한 바디 워시 향기가 마린케이의 코끝에서 살랑거렸다. 로건은 두 사람 사이의 범상치 않은 기류를 눈치채고선 말을 골랐다. 저를 쳐다보는 평민의 눈빛이 꼭 사냥감을 앞에 둔 포식동물처럼 느껴졌다. 황태자는 마린케이의 귀에다 대고 속살거렸다.
“마린보이. 언제 나 몰래 애인을 만들었어?”
“찾아다 주겠습니다. 그 옷.”
마린케이가 황태자의 손을 떨어뜨리며 로건에게 말했다. 뭔가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눈치챈 로건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며 황급히 손을 내저었으나, 마린케이는 결정을 굽히지 않고서 이를 악물었다. 헤어진 애인이고 뭐고, 그냥 찾아다 주면 될 거 아냐.
기숙사 안으로 들어가 버린 마린케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로건은 어느새 황태자 또한 제 앞에서 사라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선 아쉬움이 담긴 탄성을 내질렀다. 좀 더 시간이 있었으면 전하께 잘 어울리는 블레이저를 선물해드릴 수 있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까웠다.
***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내내 저를 빤히 쳐다보는 황태자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금색 머리칼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기들이 몹시 거슬리기도 했지만, 그것 또한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마린케이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까지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외출 준비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빨강 머리 귀족이 제게 짐짝처럼 떠맡겼던 옷들 중 가장 멀쩡해 보이는 옷들을 골라 입고서 망설임 없이 기숙사를 빠져나왔다.
“……전하?”
“빨리 나왔네.”
그러나 황태자가 한발 빨리 1층으로 내려와 마린케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마린케이의 얼굴이 불손한 표정을 머금자 그는 앞에 세워둔 차를 눈짓하며 말했다.
“데려다줄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밖에 나가려던 거 아냐?”
맞는데 어쩐지 맞다고 하기 싫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대답하면 꼼짝없이 황태자와 함께 거리에 나가야 할 것 같아서였다. 심지어 마린케이는 운전면허를 장롱 속에 처박아둔 상태였다. 그러니 분명 운전은 황태자가 해야 할 텐데, 가쉰에서 가장 고귀한 이를 운전석에 앉혀둔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때, 황태자가 차 키를 누르며 입을 열었다.
“지금쯤이면 버스도 끊겼을걸.”
“많던데요.”
“그럼 끊으라고 좀 해야겠다.”
사근사근한 어투였으나 전혀 부드럽게 들리지 않았다. 마린케이는 망할 황태자 새끼가 오늘은 또 뭘 잘못 처먹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수작을 부리나 싶어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아프십니까?”
“전혀. 아파 보여?”
정신이 좀 아파 보이기는 했지만, 괜히 대답했다가 황실 모욕죄로 지하 감옥에 끌려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황태자의 질문을 무시한 마린케이는 제 의사를 보다 강하게 피력했다.
“저 운전 못 합니다.”
“내가 잘하니까 괜찮아.”
“대체 무슨 수작이십니까?”
“수작은 네가 부린 거고. 마린보이.”
황태자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는 듯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머리도 다 말리고 나오지 않은 것인지 벌꿀 같은 머리칼 끝이 아직도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황태자의 새초롬한 눈초리는 마치 마린케이를 뿌리 깊게 힐난하고 있는 듯했다. 마린케이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뭘?”
“……그날, 골목에서요.”
묵묵히 사과를 전하는 마린케이의 모습에, 샤를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럴 수 있지. 원래 애인이랑 헤어진 후에 느끼는 공허감이 제일 크다잖아.”
“……예?”
“외로워서 한 키스쯤이야 소중한 기사를 위해 얼마든 눈감아줄 수 있어.”
전혀 눈감아주고 있는 것 같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본인이 그렇다고 강조하니 마린케이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애인이라는 게 로건 콜린스가 멋대로 믿어버린 악성 루머라는 것을 솔직히 말해 봤자, 그럼 새벽엔 왜 키스를 한 것이냐고 되물을 것이 눈에 훤해 입을 다문 것이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오해를 사는 편이 나았다. 마린케이는 황태자의 아량 넓은 처사에 황송해하며 대답했다.
“소중한 기사를 위해 못 할 짓이 없으시네요.”
마찬가지로, 전혀 감사하지 않은 것 같은 말투와 내용이었지만. 스파크가 튀기는 듯한 매서운 기 싸움에 쓰레기를 버리러 외출했던 피에르 셀번은 다시 뒤를 돌아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저기에 엮였다가 또 피를 보고 싶지는 않다. 그 소고기 스튜를 다시 먹게 해준다면 함께할 용의가 조금 생기긴 할 테지만, 그는 자신이 네 접시를 막 먹어 치웠을 때부터 저를 무슨 무뢰배 보듯 노려보기 시작하던 평민의 시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날파리가 생기는 거지? 싱크대며, 화장실 곳곳을 락스로 깨끗하게 청소했음에도 기승을 부리는 날파리 떼로 인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혹시 옆집 사는 평민의 집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품고 있던 피에르는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잽싸게 닫힘 버튼을 눌렀다. 저 두 사람의 화풀이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날파리 떼와 하루를 보내는 편이 더 즐겁고 좋을 것 같아서였다.
***
이제부터라도 꼭 면허증을 챙겨 다녀야겠다. 마린케이는 왕립학교 입학생은 시험이 무료라는 말에 따두었던 면허증을 생각하며 욕지기를 삼켰다. 그걸 왜 장롱에 처박아 둔 걸까. 황태자 새끼는 무슨 본인이 레이싱 선수라도 된 것처럼 짐승같이 운전했다. 다행히 교통법을 위반한 사항은 없었으나, 그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만 액셀을 밟아대는 것이 딱 황태자 새끼다웠다.
“좀 천천히 가면 안 됩니까?”
“스릴을 즐겨야지. 그래서 키스한 거 아냐?”
그놈의 키스 타령! 마린케이는 벌써 다섯 번째 모든 말을 키스로 마무리 짓는 황태자의 화법에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럴 거였으면 로건 콜린스의 개소리라도 바로잡았어야 했던 건데. 빨간 불에 걸려 질주를 멈춘 황태자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물었다.
“애인은 또 언제 사귀었어?”
“전하께서는요?”
일리 있는 반문이었다. 황태자는 주기에 한 번씩 열애설을 터뜨리는 것으로 유명한 셀럽이었는데, 심지어는 왕립학교 입학 이후에도 몇 번의 스캔들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마린케이는 그의 마지막 상대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참이었다. 황태자가 여상하게 대답했다.
“너랑 스캔들 났던 게 마지막일걸.”
기억하고 싶지 않던 기억을 떠올리게 된 마린케이는 짓씹듯 대답했다.
“굳이 되짚어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그치? 그때 네가 나 찾아와서 집어 던지려던 것도 기억나.”
“제가 언제 집어 던졌다고 그러십니까?”
“본인이 했던 일도 기억 못 하고, 진짜 양아치네. 마린보이.”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리인데요.”
집어 던지려 하지만 않았지, 그와 유사한 행각을 벌이려 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마린케이였다. 두 사람 다 거기서 거기였지만, 서로를 향해 양아치 같다며 빈정거리고 있는 모습이 그야말로 최고의 군신지간이었다. 몇 번의 설전이 오간 끝에 도착한 광장 앞에서, 황태자는 몸을 기울여 마린케이의 안전벨트를 잡아챘다. 한시라도 빨리 차에서 탈출할 심산이었던 마린케이가 몸을 굳혔다. 황태자의 속눈썹이 한눈에 다 들여다보였다.
“왜 키스한 거야?”
밤을 집어삼켰던 그 몽마가 다시 한번 바다 같은 눈을 빛내며 마린케이를 응시했다. 이쯤 되니 그가 자신의 감정을 알고 있는 것인지, 모르고 있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도 않았다. 황태자와 시선을 마주한 상태로 숨을 참던 마린케이는 역으로 물었다.
“왜 받아주셨습니까?”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서 벌였던 행동이 한심스럽기는 했으나, 당신을 향한 감정마저 후회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저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지. 타고난 성향 자체가 후회나 미련이라는 감정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마린케이였다. 그러나 걸리는 점은 있었다.
원한다면 거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밀어내지 않았어?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였다기엔 너무 리스크가 컸다. 군신은 절대 연인이 될 수 없으니까. 어떻게든 기사가 되게 만들기 위해 저를 구워삶으려던 인간이 갑작스레 생각을 바꿨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황태자는 마린케이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서 그를 애달프게 바라보기만 했다. 한숨 같은 웃음소리를 흘린 그가 붙잡고 있던 마린케이의 안전벨트를 풀어주며 속삭였다.
“최선을 다해 고민해 볼게.”
그 말에는 무수히 많은 뜻이 담겨 있어서, 마린케이는 순간 제 표정이 흔들렸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있는 힘껏 명상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데려다주기만 하는 것이 목적이었는지, 황태자는 마린케이를 따라 내리지 않은 채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오늘은 일리아스 새끼 때문에 황궁에 가봐야 해. 그래도 나 없다고 울지 마?”
“설명 안 해주셔도 괜찮습니다.”
간단한 대답을 끝으로 제 갈 길을 찾아 나서는 모습만 보더라도 마린케이는 참으로 시건방진 평민이 맞았다. 샤를은 제국의 황태자 앞에서도 절대 기죽지 않는 그의 자신감과 담대함에 걷잡을 수 없이 매료되어 가고 있었다.
적당히 세상을 알고, 낭만을 알며,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재능과 실력을 겸비한 자.
그는 자신이 찾아 헤매던 그 인재가 바로 눈앞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그럴듯한 대책을 내놓을 수 없는 상황에 답답함을 느꼈다. 저돌적으로 키스하던 마린케이의 모습이 자꾸만 시야 한편에 아른거린다. 차창에 머리를 기댄 그는 조금 전과 달리 느리게 액셀을 밟으며 운전했다.
마린케이 이스턴은 분명 기사가 될 그릇이었다. 비단 기사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마린케이, 본인이 원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샤를은 어느 상황에서도 쉽게 기죽지 않는 마린케이의 무심한 얼굴을 떠올리며 재차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자신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선에서였다.
***
날치기 소녀를 다시 찾아내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강렬한 헤비메탈 사운드를 틀어 놓은 채 미친 듯이 머리칼을 흔들고 있던 소녀는 때아닌 불청객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세웠다. 침입자를 발견한 얼굴이 불손하게 구겨진다. 표정과 잘 어우러지는 까칠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뭐야, 또?”
“팔 거면 전당포에 가져다 팔았어야지. 왜 글을 올리고 그래?”
“허. 요즘 같은 시대에 무슨 전당포?”
그런가. 어쨌거나, 일단 그 글로 인해 제가 곤란해진 것은 사실이었으니 마린케이는 굴하지 않고서 요구했다. 헤비메탈 음악이 짙게 깔려 있어 목소리를 내기도 쉽지 않았다.
“글 내려줘. 간곡히 부탁할게.”
소녀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음악을 끄며 말했다.
“그거 지갑이랑 바꾼 거잖아. 그럼 소유권은 나한테 있는 거 아냐?”
맞는 말이다. 고로 마린케이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서 감정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내 상황이 곤란해졌어. 그 옷 원래 주인이 글 때문에 미쳐 날뛰는 중이야.”
연민을 가져달라는 사람치고 너무도 심드렁해 보이는 얼굴이었다는 것이 탈이었지만. 그러자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 옷 당신 거 아니었어?”
“그럴 리가.”
그런 값비싼 천 쪼가리를 두르고 다니려면 집을 통째로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 한 칸짜리 횟집도 마찬가지였다. 고민하듯 미간을 찌푸린 소녀가 스피커 위에 올려두었던 벙거지 모자를 찾아 쓰며 말했다.
“전당포 같은 곳에 가져가면 뺏겨.”
“…….”
“그냥 뺏긴다고. 특히 난 더 무시당해.”
잠시 잊고 있었다. 뒷골목의 생태가 어떠했는지를 말이다. 왕립학교에서의 삶은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지 않을 정도로 윤택하고 여유로웠기에, 그곳에서 평생을 보내왔던 마린케이조차도 뒷골목이란 존재 자체를 서서히 잊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제야 소녀가 벙거지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침묵이 찾아들었다.
예쁘장하게 생긴 어린아이가 뒷골목에서 어떤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지도, 자칫 그 목숨마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한심함을 느낀 마린케이는 자신의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러자 소녀가 그를 경계하며 걸음을 물렸다. 마린케이는 소녀를 다독이듯,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꺼냈다.
“그런 거 아냐.”
“…….”
“겁줄 생각 없으니까, 무서워하지 마.”
그런 사람치고는 제 머리칼을 쥐어뜯는 꼴이 무척 그로테스크해 보였지만, 처음엔 차갑고 무서워 보이기만 했던 사람이 그렇게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자 조금 우스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마린케이는 소녀에게서 새어 나오는 작은 웃음소리에 안도감을 느끼며 손을 내렸다.
“옷 어디 있어?”
“꺼져. 그래도 그건 안 줄 거야.”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아니, 같이 가자고. 전당포.”
“뭐?”
어쨌든 글만 지우면 로건 콜린스는 제가 옷을 찾아온 줄 알 테니, 그 후에는 저 옷을 가져다 팔아버리든, 가위로 찢어버리든 상관없었다. 마린케이는 문을 열어젖히며 마저 말을 이었다.
“내가 큰돈 벌어다 줄게.”
한때 뒷골목을 주름잡던 날치기범의 공신력 있는 약속이었으나, 그를 귀족 한량쯤으로 알고 있던 소녀로서는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큰돈? 네가 어떻게?”
소녀는 자꾸만 의문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전당포는 거래하기 쉬우니까 걱정하지 마.”
“그러니까, 무슨 수로?”
그거야 뭐 간단했다. 마린케이는 소녀와 만난 중 처음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줄 때까지 족쳐버리면 돼.”
***
누군가는 흥정을 하고, 누군가는 담보를 잡고, 누군가는 고민 끝에 계산을 마친다. 규모가 크든 작든 간에 전당포의 풍경은 언제나 똑같았다.
기원을 알 수 없는 험악한 욕설들이 느닷없이 들려오고, 의자를 끄는 소리와 더불어 무언가를 내던지는 폭력적인 소음이 일정하게 울려 퍼지는 곳.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 동요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상황에 익숙해지려는 노력뿐이었다.
담배 연기가 매캐하게 흘러드는 그 옛날의 전당포는 마린케이가 뒷골목 쓰레기들의 지갑을 훔쳐 와 팔아넘기곤 했던 곳이었다. 그때마다 전당포의 젊은 주인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 녀석아. 세상이 아무리 썩어 빠졌어도, 성공해서 탈출할 생각부터 하는 게 먼저 아니겠냐? 손기술만 좋아가지고는. 그 실력으로 연필을 한번 잡아 봐.」
매번 잔소리를 퍼부으면서도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그의 손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그 손길이 고파 일부러 전당포를 찾았던 적도 있다.
그러나 물고 있던 담배를 끄며 자신을 반겨주던 그는, 아내가 첫 아이를 출산하던 겨울날 뒷골목 인근에서 칼에 찔려 즉사했다. 수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마무리된 사건이었다. 뒷골목에서는 흔하디흔한 풍경이기도 했다. 남편의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한 채 구급차에 실려 가던 여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연하게 남아 있었다. 뒷골목은 그런 곳이다. 생과 사가 넘나드는, 지옥이라 하지 않고서는 표현할 길이 없는 무형의 감옥.
전당포 근처에 위치한 골목 앞에 도착하고 난 뒤에야 소녀는 시즌 한정인지 뭔지 하는 그 망할 점퍼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모든 사태의 원흉이 된 물건을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받아 든 마린케이가 지갑에서 몬트 몇 장을 꺼내 소녀에게 내밀었다.
“다녀올 테니까 근처에서 뭐라도 사 먹고 있어.”
“뭐야. 멋있는 척은 혼자 다 하는 사람이네.”
투덜거리는 척 그렇게 말하면서도, 몇 장 안 되는 몬트를 받아드는 순간 화사하게 웃는 얼굴이 딱 그 나이 때의 천진한 어린아이다웠다. 고작해야 아이스크림 한두 개 정도 사 먹을 수 있을 만한 적은 돈을 소중히 주머니 속에 넣어 두는 소녀를 바라보며, 마린케이는 비로소 작게나마 미소 지었다. 겉옷 주머니를 단단히 확인한 소녀가 벙거지 모자를 추켜올리며 물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지?”
“두고 보면 알겠지.”
마린케이는 능숙히 몸을 풀며 대답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흉악한 관절 꺾기 소리에 소녀가 신기한 듯 입을 벌렸다. 처음 들으면 공포감이 느껴질 정도의 충격적인 장면이었음에도 정작 몸을 푸는 당사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장식용으로 부풀린 거대한 몸집들과는 차이가 있었으나 마린케이 역시 어지간해선 뒤지지 않을 만큼 탄탄한 골격을 소유하고 있었다. 일직선으로 뻗은 너른 어깨 위로 점퍼를 걸친 그가 소녀의 벙거지 모자를 살짝 튕겨 올리며 말했다.
“걱정 고맙다.”
“그런 적 없거든요!”
까탈쟁이 다이애나의 마음을 빼앗았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말을 끝으로, 마린케이는 스스럼없이 어두컴컴한 골목 안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견한 열악한 환경의 건물을 쳐다보던 그는 다시금 회상에 젖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전당포 근처에서는 언제나 세상의 무도함을 간직한 듯한 퀴퀴한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흉악범같이 생긴 아저씨들이 알려주곤 했던 ‘천연덕스럽게 외상 빚 내는 법’ 따위를 떠올려 보고 있던 그가 전당포의 문을 발로 밀어젖혔다. 누군가 무거운 철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더벅머리 사내는 피우고 있던 담배를 테이블 위에 눌러 끄며 신문을 덮었다.
나머지 작자들은 모두 저마다 한 자리씩을 차지한 채 포커 게임 중이었는데, 다들 갑작스레 등장한 이방인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통 왕립학교 안에만 갇혀 있던 탓인지 오랜만에 마주하는 험상궂은 생김새들에 솔직히 좀 당황한 것은 사실이다. 콧대 높은 귀족 가 자제들은 피부 관리며 머리털 관리며 하는 것들에 무척 노력을 기울였으나, 뒷골목의 부랑자들이 신경 쓰는 쪽은 오직 어떻게 하면 누군가에게 더 겁을 줄 수 있을 만한 생김새를 만들 수 있는가에 관한 것뿐이었다.
일례로,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얼굴 위로 커다란 흉터를 만든다든가, 아님 머리를 개판으로 길러 무법자처럼 보이게 한다든가 하는 방법이 있었다. 반대로 아예 다 밀어버리는 쪽도 가능했다. 실제로 뒷골목에 들어가면 이렇게 생긴 사람들을 왕왕 찾아볼 수 있었다.
마린케이의 등장에 유일하게 반응을 보인 더벅머리 사내는 덥수룩한 머리칼을 벅벅 긁으며 신문을 말았다. 그 후 겨드랑이에 꽂아 넣기까지 하는 모습이 영화 속에 등장할 법한 건달처럼 보였다. 그러나 마린케이는 그 한심스러운 쇼맨십에 혀를 찰 뿐, 별 관심을 주지 않고서 건물의 구조를 요목조목 뜯어보기만 했다. 자신이 몸을 일으켰음에도 다른 곳에 시선을 팔고 있는 마린케이를 의아한 듯 쳐다보던 사내가 먼저 운을 뗐다.
“새파랗게 어린 놈이 전당포에는 무슨 일로….”
“사장은?”
자신이 말을 채 다 잇기도 전부터 요구를 던지는 마린케이의 모습에 사내는 번들거리는 두 눈을 치켜뜨며 턱수염을 쓸었다. 흐음, 하고 길게 콧김을 뱉은 그가 포커를 두고 있던 인원들을 향해 윽박을 질렀다. 목청이 어찌나 큰지 귀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사장 찾으신다! 뭣들 하냐?”
그 모든 게 다 뒷골목의 쇼맨십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마린케이로서는 그저 우스꽝스러움을 느낄 따름이었다. 그는 극장의 유일한 관람자가 된 기분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어째서 저 클리셰는 시대가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 걸까. 이쯤 되면 창의력이 말살된 거라고 봐도 괜찮을 터였다.
허겁지겁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하는 덩치 군단 사이로, 더벅머리 사내는 느긋이 걸음을 옮기며 마린케이에게 다가왔다. 그가 킬킬거리며 입을 열었다.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대?”
마치 뛰노는 하룻강아지와 놀아주기라도 하는 듯 거만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마린케이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제 할 말만을 이어갔다. 아무리 봐도 전혀 겁을 먹은 것 같지 않은 기색이었다.
“네가 사장이야?”
실제로 마린케이의 머릿속에는 오직 어떻게 하면 사장을 만나 최대한의 돈을 뜯어낼 수 있을지에 관한 고민이 전부였다. 테이블 뒤편에 있는 저 철문 뒤로 또 하나의 방이 이어져 있는 게 확실해 보이니, 아마 그곳으로 가면 사장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아. 멋대로 들어왔으면 본인 소개부터 해야…….”
“사장.”
간단한 요구였기 때문인지, 그 밑에 깔려 있는 자신감과 자부심은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제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흘려보내는 듯한 껄렁한 모습에 사내는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어? 여기가 어디라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됐어.”
정정하자. 소리치려던 찰나였다. 사내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먼저 걸음을 옮긴 마린케이는 짜증스레 손을 휘저었다. 딱히 대답할 가치도 없고, 더 시간을 끌어 봤자 예의 그 건달 영화에나 나올 법한 우스운 상황만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라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서였다.
황태자의 요구로 가쉰 제1검을 연기했던 그날 이후, 마린케이는 누군가 연기를 하는 것 같은 모습만 보면 이상하게 서러움이 북받쳐 오르곤 했다. 자고로 인간은 언제나 청렴하고, 솔직해야 한다. 연기 같은 걸 하면 항상 무시당하기 일쑤니까. 본인의 연기력에 대한 반성이라고는 전혀 하고 있지 않던 마린케이는 무심히 더벅머리 사내를 지나쳐 걸어갔다.
“이 버릇없는 새끼가….”
허겁지겁 테이블 정리를 마치고서 사내의 뒤에 정렬해 있던 덩치 한 명이 험악하게 욕설을 뱉으며 달려들었다. 철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던 마린케이는 그대로 제 머리채를 잡아채려는 손을 붙잡아 반대로 꺾어 밀어붙였다. 전당포에서 잡일이나 보는 주제에 멋들어진 양복을 차려입고 있다니, 그 모순성에 절로 조소가 튀어 나왔다.
“으아아악!”
덩치의 팔을 앞뒤로 꺾어 벽을 향해 집어 던져버린 마린케이는 뻐근한 목을 풀며 나머지 인원들을 바라보았다. 철문에 부딪히고서 미끄러져 내린 남자가 제 팔을 부여잡으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정적이 흐르던 와중 다른 누군가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으나 그 또한 마찬가지의 결과를 낳았을 뿐이었다.
와이셔츠 깃을 붙잡힌 채 바닥으로 처박힌 또 다른 남자는 마린케이의 발길질에 호되게 얻어맞으며 비명을 질러댔다. 그 믿지 못할 상황 속에서, 오직 남자의 비명소리만이 배경음처럼 연속해서 울려 퍼졌다. 지루함을 느낀 마린케이가 불특정 다수를 향한 질문을 던졌다.
“너희 말고, 사장은 어디 있어?”
“…….”
“시발. 다 같이 혀라도 뽑혔나.”
상황을 지켜보던 나머지 인원들이 시선을 주고받고 있든 말든, 마린케이의 머릿속에는 그저 빨리 흥정을 마친 후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텁텁한 담배 연기는 여전히 기호에 맞지 않았다. 더 버티고 있다가는 자신의 폐가 담배 연기로 인해 썩어 들어갈 터였다. 마린케이의 컨디션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던 순간이었다. 덩치들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너 이 새끼, 대체 누가 보낸 놈이냐!”
댁 키의 반절 정도도 오지 못할 작은 소녀의 심부름으로 왔다고 설명해 봤자 어차피 알아먹지도 못할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마린케이는 제멋대로 대답했다.
“사장 어디 있냐니까?”
일제히 저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하는 덩치들을 바라보며, 그는 오랜만에 경험하는 건달들과의 패싸움에 기꺼움을 느꼈다. 가장 먼저 그는 옆에 있던 의자를 들어 올렸다. 원래 버릇없는 새끼들일수록 후드려 패주는 맛이 일품이다. 가장 정면에서 달려오던 사내의 명치를 걷어찬 후 의자로 내려찍은 마린케이가 고요해진 분위기를 느끼며 그의 발목 위로 다리를 올렸다.
바닥을 기어 도망치려던 사내가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흐아아아악!”
“이대로 발목 아작 나면, 평생 멀쩡히 못 걷는 거 알지?”
신체를 활용한 협박은 늘 잘 먹히는 클리셰였다. 마린케이는 마지막 인내심을 담아 물었다.
“사장 어디 있어?”
***
이래서 그렇게 시간을 끌었던 거였군. 사장은 고사하고, 강도라도 든 것처럼 탈탈 털려있는 응접실의 모습을 면밀히 살펴보던 마린케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큰돈 벌어다 주겠다며 떵떵거렸던 것이 조금 전의 일인데, 이러다 돈은커녕 거래도 채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게 생겼다. 소녀의 원색적인 비난과 조롱이 저를 난도질하려 들 것이 한눈에 보였다.
덩치 군단은 마린케이에게 각자 두어 대씩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은 후 예의 바르게 줄지어 서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마린케이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든 눈에 띄지 않으려는 속셈이었으나, 마린케이는 그 속내를 간파하듯 친절하게 정강이를 걷어차 시선의 목적지를 되찾아주었다. 뒷골목의 불한당으로 살아왔던 버릇은 기사도를 배우든 말든 변하지를 않았다. 마린케이가 누구 것인지 모를 피가 묻어 있는 손을 닦으며 물었다.
“튄 거야, 털린 거야?”
털린 것이라면 이렇게 멀쩡히 장사를 하고 있는 척, 굳이 많은 인원을 배정해 놓았을 리가 없다. 그 말인즉슨 결국 내뺐다는 거겠지. 뒷골목의 장사치들이 야반도주를 하는 건 흔한 일이었으나, 전당포의 영업 방식은 달랐다. 사채업 논리를 기반으로 흘러가는 세계답게 어지간해서는 활동지를 옮기지 않는 것이 전당포 업계의 일반적인 사업 방식이었다.
마린케이는 어깨에 둘러놨던 옷을 탈탈 털며 더벅머리 사내에게 걸어갔다. 제게 불쑥 내밀어진 카키색 점퍼를 의아히 내려다보던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이, 이걸 저한테 왜…?”
양심과 눈치를 내킬 때만 가지고 다니는 마린케이 이스턴은 고개를 기울이며 답했다.
“얼마까지 가능해?”
“아이고, 도련님. 저희 같은 쫄따구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사내의 태도가 단숨에 돌변했으나 마린케이는 신경 쓰지 않고서 준비한 말을 이었다.
“몇 푼씩은 쥐여 줬을 거 아냐.”
“…….”
“내놔.”
쓰레기 같은 새끼들은 늘 이렇게 약자의 입장이 되고서야 제 사정을 비굴하게 호소해오곤 한다. 그러나 마린케이는 그 뒤틀린 약자성을 인정해줄 만큼 멍청한 사람도, 관대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응접실 안에서 유일하게 멀쩡히 남아 있는 뻐꾸기 모양 시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싫으면 발목으로 대신할래?”
얼핏 들었을 때는 천박하게 들려올지도 모르는 경쾌한 어조였으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누구 하나 쉽게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다. 사실 저 박력에 밀려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는 편이 더 맞았다. 그러나 침묵은 더 큰 공포감만을 조성할 뿐이었다.
마린케이는 유리 조각이 산재해 있는 바닥을 신발로 툭툭 건드리며 그들의 주의를 저에게로 돌렸다. 과연 어느 놈부터 족쳐야 효과가 좋을지 즐겁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그 잔혹한 눈빛을 읽어낸 것인지, 입가에 피가 터진 채 방치되어 있던 덩치 한 명이 다급히 소리쳤다.
“저희는 진짜, 그냥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기 있는 겁니다!”
“이 미친 새끼가!”
잠자코 상황을 살피고 있던 다른 이가 배신자의 멱살을 잡아당기며 욕설을 내질렀다. 난 살고 싶어! 살고 싶다고! 그렇게 우짖는 목소리가 응접실 안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전쟁통 같은 상황 속에서도 본인만의 고요함을 만끽하고 있던 마린케이는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는 책상 위로 발을 들어 올렸다.
콰앙!
“집 지키는 개처럼 굴라는 거였겠지.”
다시금 새하얀 정적이 일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시간을 쓰게 된 것 같은 기분에, 마린케이는 짜증을 담아 한 번 더 책상을 걷어찼다. 그 공격적인 동작과 대비되게도 목소리는 아주 침착하게 흘러나왔다. 그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대체 무슨 좆같은 명령을 받았길래…….”
쾅!
“이딴 식으로 사람 성질을 건드려대, 씹새끼들아.”
마지막 발길질을 끝으로 무언가 우지끈, 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따지고 보면 명령을 받아 자리를 지키고 있던 죄밖에 없었으나, 마린케이는 절대 그 사실을 참작하여 그들에게 선처를 베풀어줄 사람이 아니었다.
“전,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의 남자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저렇게 겁이 많은 놈을 감시견으로 박아 뒀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어, 어린애들을 잡아 오라고 했습니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드문드문 이어졌다. 그와 동시에 더벅머리 사내는 참담함에 절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는 마린케이의 표정을 인지하지 못한 채 연달아 목소리를 던졌다. 시선을 마주하기가 껄끄러워 눈을 감고 있던 탓이었다.
“가끔 귀중품 같은 걸 팔러 오는 어린애들이 있는데, 그 애들을 잡아 오라고 했어요. 성별은 상관없다고도 했습니다. 그냥 잡아 오기만 하면 승진시켜주겠다고….”
“……어떤 새끼가?”
“누, 누가 시켰는지는 정말 모릅니다! 아, 아아아악!”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한 남자는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얼굴 위로 팔을 올렸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던 마린케이가 자신을 마구잡이로 팰 것 같아 본능적으로 나온 자세였다. 그러나 마린케이는 오히려 남자의 와이셔츠 깃을 제대로 세워주며 말했다.
“누구야?”
차마 대답하지 못하며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그를 위로하듯, 마린케이는 살집 있는 어깨 위로 느리게 손을 올렸다. 그가 손아귀에 조금씩 힘을 싣기 시작할 때였다.
“아, 아아, 아아악!”
쇄골 쪽을 파고드는 강한 악력에 남자는 고통스레 얼굴을 구겼다. 참혹한 광경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숙인 채 상황을 외면하고 있던 누군가가 그를 대신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더벅머리 사내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눈을 감았다.
“대, 댄 미헤르요! 댄 미헤르. 말하면 죽이겠다고 했어요. 저희 같은 쓰레기들이야 없어져도 관심 하나 안 가져줄 거라고, 살고 싶으면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협박하면서.”
“…….”
“살려주세요. 저 진짜 살고 싶어서 그랬어요. 다시는 이런 짓 안 할게요. 제발 살려주세요.”
진심을 담아 절규하는 목소리였으나 듣는 입장에서는 헛웃음이 터져 나올 뿐이었다. 살고 싶어서? 정말 그게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살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린애들을 잡아다 바치는 쓰레기 새끼에게는, 감히 그 삶을 이어갈 자격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더 우선인 것이 있었다. 마린케이는 자신이 들었던 이름을 읊조리며 걸음을 돌렸다.
“…댄 미헤르.”
동녘과 서녘을 오가며 노예를 잡아들인다던 빌어먹을 노예상은 이미 구속되어 사건에 대한 심문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댄 미헤르라. 또다시 마주하게 된 역겨운 이름을 입에 굴리며, 마린케이는 살려달라 빌어대는 남자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일단 판옵티콘에서 몇 년 썩으면서 버텨봐. 그럼 죽지는 않겠지.”
악질적인 범죄자 무리를 가둬놓기로 유명한 원형 감옥의 이름이었다. 쓰레기 새끼들은 목숨을 구걸하는 것조차 쓰레기다웠다. 적어도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살고 싶다는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들어 다른 생명을 유린할 근거를 마련해서는 안 됐다. 마린케이는 차례로 덩치들을 기절시켜 바닥에 모았다. 폴리스가 수사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예상의 본체는 뒤에 숨어 그 역겨운 짓거리를 자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억울할 정도로 화가 났다.
「백작 각하가 널 되게 궁금해하던데. 기왕지사 연줄 한번 잘 잡아봐. 그만큼 괜찮은 귀족도 얼마 없다?」
문득, 로건 콜린스가 저를 돌아보며 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백작…? 제기랄. 백작 새끼가 있었다. 아직까지도 기절하지 않은 몇 명의 명치를 인정사정없이 내려친 마린케이는 한 발로 그들을 굴려 모으며 생각했다.
백작과 댄 미헤르 사이에는 무언가 분명 더러운 냄새가 풍겼다. 베사플레사의 오너도 이것과 관련해 한 차례 경고한 적 있던 바다. 그러나 배짱 말고는 무엇 하나 가지지 못한 평민이 그들을 상대하려 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아니, 어쩌면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불현듯 누군가의 강인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엔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난 네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 거야.」
있었다. 백작을 상대할 만한 권력과 힘을 가진 자.
「난 황제가 될 생각이 없어.」
가쉰의 하나뿐인 후계자, 샤를 소피아 엔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