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 쥐 잡듯이 전당포를 털고 나온 마린케이는 소녀가 있을 광장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어갔다. 들고 갔던 옷을 그대로 가지고 나오게 된 저에게 쏟아질 원망이 벌써부터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딱히 이렇다 할 설명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인신매매를 일삼고 다니는 노예상의 본체가 사실 따로 있었고, 그 쓰레기 새끼가 지금도 가쉰을 기웃거리며 어린애들을 긁어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무슨 수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또 보네요. 기사님.”
숨을 몰아쉬며 광장에 도착한 마린케이는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서 황급히 몸을 바로 세웠다. 얼마 전 자신이 지갑을 떠맡겼던 연갈색 머리의 남자가 소녀의 옆에 앉아 있었다. 혹여 무슨 개 같은 짓을 벌인 건 아닌가 싶어 소녀를 긴밀히 살펴봤지만, 5색 아이스크림 세트에 넋이 나간 아이는 저를 거들떠보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전당포에서의 사건으로 인해 이미 성질이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져 있는 마린케이에게 두 사람 사이의 화기애애한 분위기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당신, 나 따라다녀?”
자신을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공격적으로 떨어지는 마린케이의 목소리에 남자는 하하, 부드럽게 웃었다. 그는 곱상한 얼굴만큼이나 연약하고 산뜻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오해는 또 처음 받아보네요.”
그러나 마린케이의 얼굴은 여전히 시큰둥하기만 했다.
“오해받을 짓을 왜 자꾸 하는데?”
시비라도 거는 듯한 불량한 태도였으나 남자는 여전히 다감한 미소를 유지한 채였다. 밝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침침해진다. 아이스크림에 코를 박고 있던 소녀가 스푼을 입에 물며 끼어들었다. 무해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내뱉는 말은 그것과 전혀 다른 축에 속했다.
“내가 지갑 털다 걸린 거야.”
그러자 마린케이는 허탈하게 되물었다.
“…지갑을 털었다고?”
“그거지. 은퇴식.”
그들 사이로 빙하를 닮은 침묵이 흘렀다. 논리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대답에 마린케이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슬쩍 남자 쪽을 돌아보니, 아직도 사람 좋게 웃고 있어 더 깊은 한숨이 나왔다. 멋쩍게 볼을 긁적인 마린케이가 미적지근한 사과를 건넸다.
“오해했습니다.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다행스럽게도 남자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오히려 살가운 시선으로 마린케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기까지 했다.
노골적인 관심 때문일까, 마린케이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왜 또 오해받을 짓을 하고 그러십니까?”
“그 옷, 어떻게 도로 찾아오셨나 싶어서요.”
남자가 마린케이의 어깨 위에 걸쳐져 있는 옷을 눈짓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 또한 구하려다 실패한 옷이라며 수작을 부렸던 것도 같았다. 마린케이는 본능적으로 그에게서 위화감을 느끼며 분위기를 살폈다. 능숙하고 자연스러운 말솜씨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면이 있었다. 그 순간 아이스크림을 퍼먹던 소녀가 빠르게 고개를 들며 소리쳤다.
“뭐야, 그걸 왜 가지고 나와? 이 거짓말쟁이!”
“사정이 있었어.”
“완전 사기꾼이잖아!”
예상했던 대로 저를 향한 날 선 비난들이 무더기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구구절절 설명하려니 솔직히 귀찮은 게 더 컸다. 반론의 의지를 느끼지 못한 마린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녀의 비난에 맞장구쳤다.
“허세 부린 거지?”
“좀 그런 편인가 봐.”
상대의 말문을 막아버리는 기막힌 화법에 소녀는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을 입에 밀어 넣으며 가까스로 분을 삭였다. 오누이가 아니라는 게 더 이상해 보이는 광경일 것이다. 남자가 살벌한 분위기를 밝히듯 화사하게 끼어들었다.
“나한테 팔래요?”
‘…괜찮은데?’
그 순간 소녀와 마린케이는 같은 생각을 한 듯 서로를 돌아보며 진지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윽고 마린케이가 어깨에 둘렀던 옷을 남자에게 던지며 말했다. 옷은 정확히 그의 품 안으로 안착했다.
“원가 세 배로.”
와, 완전 양아치. 저도 모르게 내뱉을 뻔한 소녀는 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남자의 눈치를 봤다. 저걸 누가 받아들이겠냐고 속으로 한탄을 뱉던 와중, 제 앞에 선 마린케이를 여유롭게 올려다보던 남자가 별것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네 배 드릴게요.”
“…….”
“대신 번호 좀 줄래요?”
미친, 이쪽도 수준급인데? 혀를 내두를 만한 남자의 개수작에 소녀는 한 번 더 탄성을 토해내고 말았다. 싫다고 하면 가만 안 두겠다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소녀의 시선을 느끼며, 마린케이는 마지못해 그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알려준 번호에 전화까지 걸어보는 치밀함을 보여준 남자는 여전히 강아지풀처럼 산들거리는 모습이었고, 소녀는 그에게서 쌈짓돈을 챙겨 들고서는 주변을 방방 뛰어다니기 바빴다. 둘 사이에 끼어 있던 마린케이는 간단히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휴대폰을 없애버리자. 극단적인 결정이었으나 그만큼 효과는 확실할 것 같았다.
착잡한 심정으로 왕립학교에 돌아온 그가 S관으로 향하던 와중이었다. 그는 하필이면 또 여기서 귀찮은 새끼 하나를 마주치게 되었다는 사실에 시름 섞인 탄식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부터 화려한 옷차림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로건 콜린스가 마린케이를 향해 뛰듯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에 마린케이는 망설이지 않고서 경로를 틀었다. 저와 눈이 마주쳤는데도 불구하고 반대쪽 길로 걸어가기 시작하는 마린케이를 향해 로건은 쩌렁쩌렁 소리를 내질렀다.
“야! 너 거기 안 서?”
그렇게 말하면 대체 어느 누가 예, 하며 멈추어 서겠느냐는 말이다. 마린케이는 흔들리지 않는 얼굴로 마저 가던 길을 갔다. 로건은 뛰고 있었고, 마린케이는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체력이 다해 길 한복판에 멈춰선 로건은 티셔츠 자락을 펄럭이며 짜증을 뱉었다. 기사학부 새끼들은 무슨 축지법이라도 배우고 다니는 거야?
“지들이 무협지에 나오는 은둔 도사도 아니고!”
그가 연신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였다.
“왜 부르셨습니까.”
어느새 제 앞까지 다가와 있는 평민을 보며, 로건은 적어도 이 자식만큼은 축지법을 배워온 게 틀림없다고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간신히 대답을 꺼냈다.
“너 이 새끼, 헉, 왜 도망가?”
“못 들었습니다.”
거짓말이다. 분명 거짓말인 게 확실했다. 그러나 하나도 양심에 찔릴 것이 없다는 듯 뻔뻔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로건의 얼굴이 그 머리칼만큼이나 붉게 물들었다. 그가 언성을 높였다.
“바른대로 말 안 해? 들었잖아, 이 새끼야!”
“착각이십니다.”
마린케이가 구사하는 특유의 화법은 듣는 이의 의지를 꺾어버리는 기이한 특징이 있었다. 유일하게 그 장단을 맞춰줄 수 있는 황태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말문이 막혀 쩔쩔매게 만드는 신박한 경어체이기도 했다. 한참을 더 숨을 몰아쉬고 나서야 가까스로 허리를 세울 수 있었던 로건은 마린케이의 키가 저보다 한참은 더 위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왈칵 얼굴을 구겼다. 제아무리 평민, 평민하며 낮잡아보던 마린케이 이스턴이었으나, 그 또한 기사학부의 내로라하는 수련생이었다.
“글 내려갔더라?”
비아냥거리는 듯한 로건의 목소리에 마린케이는 건성으로 답변했다.
“원하신 대로 됐네요. 축하드립니다.”
축하받았는데 왜 기분이 나쁠까?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기분에 시달리던 로건은 큼, 헛기침을 뱉으며 들고 있던 쇼핑백을 그에게 건넸다. 거의 던져주다시피 하는 호전적인 동작에 마린케이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로건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됐으니까 그건 가져다 버리고, 이거나 입어.”
“이걸 제가 왜요?”
“남이 입던 걸 찝찝해서 어떻게 입냐?”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내가 누구 때문에 전당포까지 다녀왔는데! 간신히 표정 관리에 성공한 마린케이가 분노를 감추며 입을 열었다.
“감사하지만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사양은 나중에 해. 그리고 하나도 안 정중하거든?”
정확한 지적이었음에도 마린케이는 계속해서 불손히 표정을 구겼다. 돈도 많은 새끼가 왜 저렇게 심보를 고약하게 쓰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거부를 완벽히 무시해버린 로건은 까칠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별 거지 같은 옷들만 입고 다니면서 말이야.”
“거지 같은 옷들이 더 어울리는 편이라서요.”
“그건 또 무슨 뇌내망상이야?”
뇌내망상?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저 새끼의 얼굴을 보니 좋지 않은 뜻인 것만은 분명했다. 마린케이의 추측에 더욱 힘을 실어주듯 로건이 위아래로 눈을 흘기며 말했다.
“사람이 옷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옷이 사람을 결정하는 거야. 제대로 입고 다니라고. 괜히 만만하게 보이고 싶지 않으면.”
“역시 그 옷차림엔 다 이유가 있으셨군요.”
“당연하지!”
머리가 꽃밭인 인간답게 저를 비꼬는 말인 줄도 모르고서 콧대를 높인다. 이 망할 귀족 새끼가 이보다 더 시간을 끌기 전에 자리를 뜨고 싶었으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어떤 생각 하나에 마린케이는 눈을 번뜩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황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백작 새, 아니. 백작 각하께서 절 궁금해하신다고 하셨죠?”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당황한 쪽은 오히려 로건이었다. 그가 어벙하게 답했다.
“어? 어, 뭐 그랬었지. 저번 론칭 쇼에서.”
“연결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 즉시 마린케이의 눈이 사냥감을 포착한 포식자처럼 무분별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댄 미헤르고 뭐고, 백작 새끼 먼저 잡아 족치면 뭔가를 좀 알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린케이가 어울리지도 않는 가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로건에게 부탁했다.
“제가 백작 각하께 관심이 많습니다.”
“…….”
“정중하게 부탁 좀 할게요?”
이 새끼는 부탁의 개념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로건은 잠시 생각했다.
***
S관 기숙사에 도착한 마린케이가 향한 곳은 자신의 방이 있는 7층이 아닌 11층이었다. 입사자들은 9층까지만을 사용할 수 있고, 10층부터 11층까지는 모두 황태자의 구역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랬다. 그러나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대도 황태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자 마린케이는 곧 피에르에게 하던 방식대로 현관문을 세게 걷어차기 시작했다.
역시나 기계음보다는 시끄러운 마찰음이 더 효과가 있는 법이다. 초인종 소리에는 전혀 응답하지 않던 황태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얼굴로 문을 열어젖혔다.
“어떤 새끼야?”
동작 하나하나에 전부 짜증이 깃들어 있었으나, 바로 앞에 서 있던 마린케이를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표정을 푸는 황태자였다. 안 그래도 새하얀 얼굴이 백지장처럼 보일 정도로 파리하게 질려 있는 것을 목격한 마린케이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상태가 왜 이래.
그때, 샤를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놀랄 일이네. 마린보이가 먼저 날 찾아오고.”
늦기 전에 백작 놈에 관한 얘기를 꺼내려 했더니, 이건 반칙 아닌가. 문 옆으로 느슨히 몸을 기대고 선 샤를은 물끄러미 마린케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영롱한 푸른 눈 속에는 평소의 반짝거림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당혹감을 느낀 마린케이가 물었다.
“어디 아프십니까?”
저 용병 새끼가 아프다고? 말도 안 된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납득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너무도 유약해 보이는 그의 모습 때문인지, 그 추측에 점차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샤를은 아직까지도 지끈거리는 이마 위를 부여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속이 안 좋아. 지긋지긋한 일리아스 새끼.”
그는 드윈에서의 유학을 끝내고 돌아온 일리아스 칸 엔스가 제게 계속해서 환영주를 권하던 것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용병보다 더한 신체 구조를 가진 샤를 소피아 엔스에게 딱 한 가지 약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음주·가무였다.
운전기사인 조쉬가 사다 준 숙취 방지약을 다섯 개나 먹고 황궁으로 향했음에도 그는 연신 구토감에 시달리며 앓아누웠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마린케이는 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나중에 오겠습니다.”
문을 닫으려고 하자, 샤를이 몸에 더욱 힘을 주며 그를 가로막았다.
“그럴 필요까지야.”
“들으면 더 속이 뒤집히실 얘기일 것 같은데요.”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이 사실인지, 황태자는 동공에 초점이 없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마 위로는 식은땀이 가득한 상태였다. 샤를은 옷소매로 자신의 목덜미를 닦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하면 못 보내겠잖아.”
“아프면 좀 쉬든가 하시죠.”
“뭘, 이 정도 가지고.”
그 말마저도 곧 쓰러질 듯한 목소리로 내뱉는 샤를에게, 마린케이는 진심을 담아 충고했다.
“용병들도 휴가를 받습니다.”
“…….”
“여름 휴가에 겨울 휴가까지 다 받는다던데요.”
저거 지금 내가 용병이라는 소리지? 그에 샤를은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제국의 황태자를 용병에 빗대어 표현하는 그 담대함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 직후 샤를이 내뱉은 말에는 오히려 마린케이 쪽이 헛웃음을 터뜨리게 되고 말았다.
“휴가까지 필요로 하는 용병을 누가 고용해?”
레온하르트인지, 레몬타르트인지 뭔지 하는 놈과 비슷한 소리를 한다. 역시나 형제지간이 확실했지만, 두 사람이 그런 마린케이의 생각을 알게 된다면 총을 들고서 서로의 머리를 겨눌 것이 분명했다. 마린케이가 다시 한번 그에게 휴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던 때였다.
“쉬십시오. 용병들도 휴가를 받아야 더 효율이 높아진다고 하잖습니까.”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데, 배려는 필요 없….”
황태자가 불현듯 입을 틀어막으며 화장실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뭐야?”
괜히 나쁜 놈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을 넘어, 방 너머에서부터 고통스러운 구토 소리까지 들려오기 시작해 어이가 없어졌다. 이대로 그를 무시하고서 방으로 돌아가 버리기라도 하면 졸지에 대역죄인 취급을 당하게 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고민하던 마린케이는 짜증스레 신발을 벗으며 황태자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방은 얼핏 보면 정신 병동처럼 느껴질 수 있을 정도로 하얀색투성이였다. 커튼도, 테이블도, 소파도, 전부 다 하얀색이었다. 확실히 저 자식이 정신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
병명은 아마 광증일 것이다. 유일하게 색깔이 있는 원목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마린케이가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때였다.
줄곧 화장실에 틀어박혀 있던 황태자는 온몸을 휘청거리며 거실로 나왔다. 창백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걸어온 그가 흔들의자 옆에 있는 흰색 소파에 걸터앉으며 입을 열었다.
“보통 이럴 때면 와서 등이라도 두드려주지 않아?”
보통의 경우야 마땅히 그러하겠지만, 마린케이는 애당초 그 보통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그는 황태자가 자신의 옆에 앉는 즉시 몸을 일으켜 자리를 옮겼다. 벌레라도 피하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누구도 개의치 않아 하는 것이, 어느덧 두 사람 다 그 상황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마린케이는 저릿한 손바닥을 쥐었다 펴며 말했다.
“힘 조절이 안 될 것 같아서요.”
“되게 설득력 있는 답변이네.”
“그래도 원하신다면 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황태자의 표정을 보니 썩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선심 쓴다는 듯 자비롭게 대답한 마린케이가 시선을 들어 황태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하얀 얼굴은 물기에 잔뜩 젖어 있었는데, 이마 위로 붙어 있는 금색의 머리칼들이 무척이나 처연해 보였다. 소파에 거의 달라붙어 있다시피 하던 황태자는 작게 목소리를 냈다.
“사양할게.”
제아무리 용병 취급을 받는 샤를이라고 해도 신체적인 특성상 숙취를 이길 수는 없었다. 마린케이는 의아함을 담아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대체 무슨 병이길래 저 새끼가 맥도 못 추리고 쓰러져 있는 건가 싶어서였다. 마린케이가 그동안 봐온 황태자는 세상의 모든 질병을 이겨낼 듯한 괴물 같은 신체의 소유자였다. 인간보다는 차라리 인외 존재라고 설명하는 편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샤를이 가볍게 물었다.
“마린보이. 술 잘 마셔?”
술? 그제야 마린케이는 황태자를 쓰러뜨린 병명이 다름 아닌 숙취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빌어먹을, 그건 질병도 아니잖아. 어째선지 속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말이 좋게 나오지 않았다. 불퉁한 얼굴의 마린케이가 짤막하게 답했다.
“싫어합니다.”
못 마신다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기사도를 숭상하는 가쉰 제국에는 대체적으로 음주를 기피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는데, 특히 기사학부의 수련생들은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마린케이는 돈이 아까워서 마시지 않는 편에 더 가까웠지만. 요새는 술값이 금값이다. 어쨌든 황태자 새끼는 그 관습을 어기고서 몰래 음주를 하고 온 것이 분명했다. 절대 황태자,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마린케이 혼자서만 평생 모르고 있을 터였다.
“구급차라도 불러 드릴까요?”
그런데도 황태자의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숙취라고는 태어나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마린케이였기에, 고작 술 하나 때문에 저 정도로 사람이 무력해질 수 있는지도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저 인간은 샤를 소피아 엔스 아니던가. 트랙을 수십 바퀴씩 도는 괴물 같은 새끼가 술 따위에 무너진다고?
그렇다. 고작 술 하나에 무너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연약한 몸뚱이였다. 하지만 그를 인외 존재로 취급하고 있던 마린케이는 그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계속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구급차에 실려 가는 제 모습을 잠시 상상해 본 샤를은 떫은 감처럼 대답했다.
“그것참 재밌어지겠다.”
“…….”
“내가 마약에 미쳐 있다는 헛소문이 사실이 될 테니까.”
둘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마약이라. 코에 별의별 가루를 다 들이대며 뒷골목을 굴러다니던 놈팡이들이 가끔 존재하긴 했으나, 마린케이는 마약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건실한 청년이었다. 헐떡거리며 바닥을 굴러다니는 마약 중독자들은 역겨움이라는 단어를 의인화한 것만 같았다. 그들 모두가 이지를 잃은 눈으로 길거리를 배회하며 살아갔다. 망할 동방 기사 역시 그렇게 강조하지 않았던가.
「기사는 어떤 유혹에도 영혼을 팔아선 안 돼.」
마린케이가 슬그머니 물었다.
“마약도 해보셨습니까?”
“……너 내 말 제대로 안 들었지?”
“좀 누워 계십시오.”
들켰네. 회상에 젖어 아무 말이나 내뱉고 있던 것을 추궁당한 마린케이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척 방 안을 가리키며 제안했다. 말을 돌리는 게 명백해 보이는 그 모습에 황태자의 아리따운 입꼬리 위로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그럼 토할 것 같아.”
“서 계시는 건요?”
“메스꺼워.”
“앉아 계시는 건.”
“눈앞이 빙빙 돌아. 어떡하지?”
“…기절시켜 드릴까요?”
전부 퇴짜를 놓으니 이 방법밖에는 없겠다. 마린케이는 미리 손을 꺾으며 물었다. 잠깐 기절해 있다가 깨어나면 숙취란 숙취는 전부 다 날아가 있을 테니 괜찮은 조건일 것이다.
“나한테 할 말 있다고 했었지?”
천천히 몸을 일으킨 황태자가 주제를 틀었으나, 마린케이는 포기하지 않고 제안했다. 원하기만 한다면 깔끔하게 기절시켜줄 자신이 있었다.
“기절시켜 드리겠습니다.”
“이때다 싶어서 사심 채우지 말고.”
또 들켰네. 마린케이는 결국 모처럼 찾아온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좀 더 티 안 나게 제안해 볼걸. 뒤늦게 후회해 보지만, 그것 자체가 황실 모독임을 여전히 모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마린케이의 앞까지 걸어온 황태자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할 말이나 하시지?”
코앞까지 다가온 반반한 얼굴에 마린케이는 난색을 표하며 허리를 젖혔다.
“좀 괜찮아지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루는 걸려.”
“되도록이면 빨리 괜찮아지시길 바라죠.”
그러나 마린케이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 황태자가 다시 한 발자국을 내디뎌 멀어진 거리를 좁혔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마린케이가 짜증스레 미간을 구기자, 그는 하얀 손을 들어 올려 그 사이를 꾹꾹 눌렀다. 이상했다. 숙취에 절은 사람치고는 술 냄새가 풍기지 않는다. 오히려 예의 그 솜사탕처럼 달큰한 향기만이 풍길 뿐이었다.
어느덧 벽면에 등을 기대게 된 마린케이는 불만 가득한 눈으로 황태자의 얼굴을 흘겼다. 황태자가 다정한 목소리로 마린케이를 불렀다.
“마린보이야.”
“…….”
“백작 새끼가, 우리 마린보이 뒤라도 캐고 다닌대?”
표정을 굳힌 마린케이가 저보다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한 황태자의 푸른 눈에 시선을 맞추었다. 낮고, 경직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알고 계셨습니까?”
황태자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는 채였지만, 그 눈빛만큼은 살벌할 정도로 차갑기 그지없었다. 백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을 때부터 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가라앉았다는 것은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하얗고 가지런한 손가락이 미간을 지나 마린케이의 갈색 머리칼 위로 와 닿았다. 아이를 달래는 듯한 상냥한 목소리가 드러난 귓가에 쏟아졌다.
“짐작 정도. 걱정하지 마. 그 새끼는 네 손끝 하나 못 건드려.”
감히 황태자와 기사 서약을 맺은 군신을 건드릴 수는 없는 일이니 당연했다. 서약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었다. 특히 그것이 황태자와의 서약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심지어 샤를 소피아 엔스는 지금껏 그 누구와도 서약을 맺은 적이 없는 유일한 황족이었다.
제국민의 사랑을 받는 황위 계승자가 선택한 서약자는 오직 마린케이 이스턴뿐이다. 그러니 마린케이의 삶은 황태자의 비호 아래 위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그 비호가 향하는 한은, 그 누구도 마린케이를 궁지로 몰아넣을 수 없었다.
“그래서 파기 안 해주셨던 겁니까?”
그 질문에 황태자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마린케이를 지키기 위한 용도로 지금껏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기사 서약을 맺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보장한 것은 마린케이의 안위뿐만이 아니었다. 평민이라는 신분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을 출세와 성공, 그리고 변화.
“샤를 소피아 엔스가 널 곁에 두겠다는데, 누가 감히 내 기사를 건드려?”
그는 마린케이 이스턴의 살아갈 삶과 그 미래를 보장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파격적인 계약이었으나, 어째서인지 당사자인 마린케이는 전혀 고마워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의 손을 단호하게 밀어낸 마린케이가 덤덤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4년 후에는요?”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황태자가 제게 강한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바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한순간의 흥미에 불과할 터였다. 헛된 기대에 인생을 거는 멍청한 짓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기사가 될 생각 또한 없었다. 그건 그가 만들어갈 가쉰을 지지하는 것과는 다른 맥락이었다. 황태자는 서늘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그땐 그 새끼들 전부 지하 감옥에 처박혀 있을 테니까 상관없어.”
“…….”
“곱게 죽여줄 생각 같은 거 없거든.”
그리고 그때쯤이면, 이 당돌한 평민이 이미 제국 역사를 뒤흔들 만한 인재가 되어 있을 것이 자명했다. 누구 하나 먼저 시선을 물리지 않는 긴장감이 이어졌다.
바다보다 깊은 눈동자에 서려 있는 자신감, 그리고 기대감과 마주한 마린케이가 가려두었던 진심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세상은 썩어 빠졌습니다.”
당신 같은 인간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황제가 되고 싶지 않다고?
“변하지 않을 자신, 있으십니까?”
그렇지 않다. 만약 누군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면, 그리하여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반드시 당신이 되어야만 했다. 기사가 될 생각은 없었으나, 검은 날개를 가진 까마귀는 푸른 창공을 만들 것이라 약속하는 백로의 목소리를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
「제국의 기사는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검을 들지 않아. 그들은 그저 기사로서의 고뇌와 절개를 지키기 위해 수련하지. 검을 잡으려거든 그 살기를 먼저 내려놓아야 해. 기세를 죽이고, 왕도를 배우거라. 훌륭한 기사가 되겠구나.」
「누가 기사 같은 거 되고 싶대요? 절대 안 그럴 거니까 상관없어요.」
「네가 평생을 바쳐 함께하고픈 주군을 만나게 된다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방랑 기사는 심장을 뛰게 하는 찬란한 태양을 갈망하는 법이거든.」
그 순간 황태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되면 네가 날 죽여.”
덤덤한 목소리였다. 그는 창공의 태양이 아니다.
“그게 내 기사에게 주는 가장 큰 권한일 테니까.”
푸른 하늘을 자유로이 헤엄치는 아름다운 새였지. 마린케이는 마침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결국 제 인생을 뒤흔들어 놓고 말았음을.
“……주군이라고 봐드리지 않습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샤를은 환하게 웃음 지었다. 문득 마린케이의 가슴 한 켠이 아릿해졌다. 스승님. 그런데 이젠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나는 이렇게도….
“바라던 바야.”
주군을 바라보면 키스하고 싶어지는데. 황태자의 대답에 마린케이는 어설픈 몸짓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대로 바라보고 있다간 지난 새벽처럼 또다시, 그에게 키스하게 될 것만 같아서였다. 마린케이는 그의 시선을 피한 상태 그대로 초대 황제에 관한 건국 설화를 배웠었던 몇 년 전의 역사 시간을 떠올렸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
가쉰 엔스는 그 출신과 기원에 대해 누구도 알지 못하는 방랑 기사였다. 가장 강인한 기사를 찾아 세계를 떠돌던 그는, 결국 누구에게도 만족하지 못한 채 서 대륙의 드넓은 땅 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서 대륙의 모든 기사들이 그와 대련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아름다운 용모와 출중한 실력을 가진 방랑 기사의 등장은 그들의 심장을 뛰게 만들기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는 벌떼처럼 모여든 기사들의 존경을 받아 서대륙 땅 한복판에 기사단을 창립하기까지 이르렀다. 감히 그 누구도 가쉰 엔스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는 절벽 위에 핀 꽃이자, 높은 파도로 가득한 새파란 해양이었으니까. 훗날 그의 서기관이 회고하길.
「가쉰 엔스는 내가 지금껏 보았던 사내들 중 가장 강인하고 아름다웠으며, 또한 찬란했음이라. 그에게 연심을 품지 않은 자는 없었다.」
그러나 방랑 기사 출신의 젊은 단장은 자신보다 더 강한 자를 찾아내고 싶다는 비틀린 집념을 이기지 못한 채 정복 전쟁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는 언제나 선봉에 서서 군사를 지휘했다. 그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는 죽음을 갈망하는 사람처럼 전장에 뛰어들었다. 기사들은 그 찬란한 뒷모습을 따라 목숨을 걸고 검을 휘둘렀다.
끝나지 않을 것만 광포한 전쟁의 끝에서, 가쉰 엔스는 적장의 목을 베어 올리는 것으로 제국의 탄생을 알렸다.
「만일, 단 한 사람이라도 내 목에 검을 겨눌 수 있는 자가 존재했다면.」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그가 내뱉었던 그 한마디가 바로 제국을 이루는 근간이자 뿌리라고도 할 수 있는, 기사도의 시작이었다.
「나는 그이를 주군으로 삼아 원하는 모든 것을 손안에 쥐여 주었을 것이다.」
“훈련 때 봐. 마린케이.”
그 믿기 힘든 이야기를 읽으며, 어린 마린케이는 그가 참 형편없는 얼간이었을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고작 저보다 더 강한 자를 찾고 싶어 정복 전쟁을 일으키다니, 그거야말로 나사 빠진 또라이 새끼가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지금도 그의 모든 기행이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 미치광이가 어째서 그토록 주군을 찾아 헤매었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방랑 기사는 찬란한 태양을 갈망하게 되는 법이라던 스승의 목소리가 강렬한 색감으로 마음 이곳저곳을 수놓는다.
허나 이 감정은 연군인가, 연정인가? 만일 그것을 구별할 수 없다면 나는 정말로 당신을 주군으로 섬기고자 하는 것이 맞을까. 어쩌면 그저 당신에게 눈이 멀어버린 것일까 봐 겁이 났다. 확실히 할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으나, 한 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저 당신이 걸어갈 그 길 위에 함께이고 싶다. 이렇게 보니 더 이상 가쉰 엔스를 얼간이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을 만한 처지가 되지 못했다. 마린케이는 그렇게 샤를 소피아 엔스를 위한 검이 되기로 맹세했다. 고서 속의 가쉰 황제를 닮은, 단 한 명의 엔스를 위해서.
***
『내 번호 저장 안 했죠?』
당연하지. 곧 버릴 거니까. 마린케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광장에서 마주쳤던 유약한 인상의 남자가 보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문자 메시지를 단숨에 삭제해버렸다. 그런 사소한 문제에 뇌세포를 낭비하는 것은 참 성가신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차피 얻어낼 건 다 얻어낸 마당에 무시해 봤자 어쩔 거야, 라는 무뢰배 같은 심보 또한 섞여 있었다.
『괜히 서운하네.』
그래 봤자 미안함이라고는 들지 않았다. 서운할 게 뭐 있어? 거래 조건은 ‘번호를 준다’였지, ‘연락을 나눈다’가 아니었다. 번호를 주고받는 행위 속에 내재된 미묘한 뉘앙스는 모두 무시해버리는 단순한 발상이었다.
한 손에 검을 든 채 휴대폰을 확인하고 있는 마린케이를 향해 나머지 수련생들은 이를 악물며 서로를 눈짓했다. 신성한 수련 시간에 저따위 농땡이를 피우는 기고만장한 평민이라니!
저 오만방자한 평민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줄 희생양은 이번에도 무언의 기 싸움 끝에 정해질 예정이었다. 물론, 칼릭스는 저를 힐끔거리는 시선들을 죄다 무시한 채로 콧노래를 불렀다. 저는 이미 한 번 선정된 적이 있었으므로, 암묵적인 규칙에 따라 다시는 선출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몇몇 양심 없는 수련생들은 그를 바라보며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후, 훈련 때 휴대폰 사용은 자제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희생양으로 낙점된 것은 가엾은 1학년 수련생, 린저 아일랜드였다. 육식 동물들이 난무하는 퍼스트 클래스 속에서 가녀린 아기 토끼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그는, 그 연약한 성정만큼이나 기 싸움에도 매우 재주가 없었다. 저를 향해 쏟아지는 악랄한 시선들 속에서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꼭 잡아먹히기 직전의 초식 동물 같았다.
맹수 앞에 선 토끼가 된 심정으로, 린저는 간신히 정신 줄을 부여잡고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그러나 그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면, 마린케이가 관심을 가지는 쪽은 저 같은 초식 동물 과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마린케이는 토끼 같은 연약한 생물체를 사냥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육식 동물들이 대개 그의 사냥감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저를 무슨 귀신 보듯 바라보며 두려워하고 있는 수련생을 핍박할 정도로 인성에 하자가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네, 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유순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린저는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본래 예상치 못한 전개일수록 사람을 더욱 쉽게 당황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무심한 얼굴의 마린케이는 근처 쓰레기통 안으로 자신의 낡은 휴대폰을 던져 넣었다.
실은 말이 근처였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쓰레기통 안으로 저리 작은 물체를 골인시킨다는 것 자체가 초인적인 집중력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능력을 왜 하필 쓰레기 버리는 데 쓰고 있는 걸까? 잠시 쓸데없는 의문을 가지던 린저는 그가 버린 것이 다름 아닌 휴대폰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경악에 휩싸였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으신걸요!”
마린케이의 결정은 누가 봐도 극단적이었다. 아기 토끼는 혹여 눈앞의 맹수가 그것을 계기로 저를 잡아먹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그에 마린케이는 절로 해명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무서워하니 뭐라도 변명해야 할 것 같았다 .
“그냥 버린 겁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 그래도, 너무 아까운데.”
“진짜 괜찮습니다. 오래 써서 배터리 충전도 잘 안 되던 거라.”
아무에게나 들려주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특유의 불량하고 날카로운 분위기는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다정한 목소리에 린저의 몸에서 점점 긴장이 풀렸다. 살기 넘친다고 생각했던 마린케이의 두 눈은 가까이서 보니 제법 유순했고, 살벌하다고 생각했던 표정은 그저 무념무상에 가까워 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린저는 꽤나 예전부터 눈앞의 평민에게 상당 수준의 동경심을 품고 있었다. 같은 1학년이기에 더더욱 그가 가진 재능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 비범한 신체 능력과 말도 안 되는 박력이란! 그것만 봐도 마린케이 이스턴은 퍼스트 클래스 내의 어느 누구보다 강인한 기사가 될 수 있을 만한 재목처럼 보였다. 마치 어릴 적부터 품어온 제 꿈처럼 말이다. 마린케이를 조심스레 곁눈질하던 린저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혹시 제 이름 아시나요?”
도대체가, 풀 죽은 모습으로 그렇게 물어보는데 누가 모른다고 대답할 수 있겠냐고. 그러나 몰랐다. 심지어 어떤 정보도 기억나는 것이 없어 추측조차 불가능했다.
이는 비단 린저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퍼스트 클래스에 있는 모든 수련생들에게 해당되는 얘기였다. 마린케이는 귀족 새끼들 이름이나 외우고 다니는 취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실 그는 황태자 새끼를 제외한 그 누구의 이름도 알지 못했다.
“하하. 괜찮아요. 다들 모르더라구요.”
“…….”
“정말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
“앗, 진짜 괜찮은데…….”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누군가의 자존감을 한층 더 깎아내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매우 심기가 좋지 못했다. 특히 저 실망한 얼굴이 눈에 거슬렸다. 무어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말을 고르고 있던 찰나,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서 린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제가 좀 여기랑 안 어울리잖아요.”
어쩌면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절대적인 사실이었다. 린저는 어릴 적 황실 기사단에 체험 학습을 갔던 후로 쭉 기사가 되는 것을 꿈꿔왔다. 그럴 만한 재능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조금은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적당한 신체 조건과 적당한 재능, 그리고 적당한 걸 넘어서는 집안의 삼박자가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일까, 그는 치열한 입시 전쟁 끝에 퍼스트 클래스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걸림돌은 분명히 존재했다. 예를 들면 그 타고난 성정 같은 것 말이다. 맹수들 사이에 끼어있는 초식 동물은 언제나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서 약육강식의 세계 속을 배회했다. 씁쓸한 한계였다. 옛 기억을 더듬어보던 린저는 본의 아니게 눈을 내리깔며 마린케이의 시선을 피했다. 저 올곧은 시선을 보고 있으려니 나 같은 게 대체 어떻게 퍼스트 클래스에 올 수 있었던 거지, 하고서 자괴감이 뻗쳐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마린케이가 고민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상대의 이름을 떠올릴 수 없다. 성이라도 기억나면 좋을 텐데, 그마저도 짚이는 게 없었다. 이름 모를 수련생에게 약간의 죄책감을 느낀 마린케이는 들고 있던 검을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검을 꽤 잘 다룬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실은 모른다. 마린케이에게는 남의 수련 과정을 훔쳐보는 취미 또한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능력이 되고, 신분이 받쳐주니 퍼스트 클래스에 입학할 수 있었을 거 아닌가. 되는대로 내뱉긴 했으나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마린케이는 더욱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사격 실력도 상당하던데요.”
눈 한번 깜빡이지 않는 모습이 웬만한 사기꾼 저리 가라였다.
“네?”
“그러니 적어도 저 새끼들보단, 훨씬 잘 어울릴 겁니다.”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조금 전, 자기 비하적으로 이어졌던 하소연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린저가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눈시울을 붉혔다. 퍼스트 클래스에 들어와 처음 받아보는 따뜻한 격려와 응원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입학하자마자 신고식 문화를 없애버린 놀라운 평민이 건네주는 그 말 한마디에, 지금껏 겪어왔던 차별과 무시가 눈 녹듯이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엉겁결에 받아 든 목검에는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었다.
그 후 마린케이는 무념에 가까운 얼굴로 검술 훈련을 마무리 지은 채 사격장으로 돌아갔다. 린저는 그의 뒷모습을 아연한 듯 바라보며 넋을 놓은 채였다. 오만하다고 비난받는 저 평민, 마린케이 이스턴은 생각보다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이 아닐까? 어쩌면 그의 매섭고 패기 넘치는 이미지 또한 남들이 멋대로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 불과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슬금슬금 린저에게 다가온 칼릭스가 다 알고 있다는 듯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린저. 쟤가 괴롭혔지? 분명 아주 심하게 괴롭혔을 거야.”
같은 상황을 겪어본 이로서, 린저가 얼마나 평민의 협박을 두려워하고 있을지에 대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가 린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수에 찬 늑대, 마린케이 이스턴을 상상하고 있던 린저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누가 보면 협박이라도 당한 줄 알 정도로 날쌔고 긴박한 변명이었다.
“아뇨, 절대 아니요! 오히려 되게…….”
“이런, 입막음까지 당하다니. 가엾은 린저 아일랜드.”
절대 아니다. 오히려 되게 다정했었는걸.
“불쌍한 린저. 오늘은 형이 밥이나 사줄게.”
그러나 칼릭스는 그의 모든 말을 무시하고선 눈물을 훔쳤다. 후배놈들에게 들볶여 평민에게 향했다가 된통 야단을 맞고, 길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 무시무시한 눈빛에 시달려야 했던 칼릭스는 동지가 생겼다는 것에 슬퍼하는 한편 쓸데없이 위로받는 기분을 느꼈다. 린저는 그저 수업이 끝나면 휴대폰을 하나 사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칼릭스의 말을 무시했다.
***
그 귀찮던 걸 드디어 가져다 버렸다. 물론 연락이 오는 사람이라곤 부모님과 그 해사한 남자뿐이었지만, 그것마저도 벅찰 정도였던 탓에 나름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수도로 떠나기 전날, 그동안 모은 쌈짓돈으로 마린케이에게 중고 휴대폰 하나를 선물해 주었던 렉스 허니비가 알게 된다면 사흘 밤낮을 통곡하게 될 사실이었다.
오늘 치 훈련을 모두 끝낸 마린케이가 샤워까지 마친 깔끔한 상태로 S관 기숙사를 향해 걸어가던 때였다. 건물의 외관이 눈에 들어올 때쯤, 현실이라고는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덜떨어진 목소리들이 마린케이의 귓가로 시끄럽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결론을 내보도록 하자.
“여긴 S관 입사자들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일 텐데?”
“내가 기다리겠다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당연히 상관있지 않나? 내가 바로 이곳의 입사자니까.”
“허! 이 건물 댁 혼자 다 쓰쇼?”
청소에 미쳐 있는 옆집 귀족 새끼와 틈만 나면 쓰레기 더미를 들고 와서 가져다 버리는 빨간 머리 새끼가 서로를 알고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되는 거지?
아무래도 별로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즉시 발걸음을 멈춘 마린케이는 다시 뒤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피곤한 인생에, 피곤함을 의인화한 것 같은 저 새끼들을 마주쳐 봤자 하등 좋을 것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로건 콜린스가 빨랐다.
“야, 이스턴!”
“…….”
“너 이 새끼, 거기 안 서?”
쟤들은 진짜 할 일도 없는 걸까. 사력을 다해 달려온 로건이 마린케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사람이 부르면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냐! 내가 준 옷은 또 어디다 팔아먹고 그딴 거지 같은 옷들만 주워 입고 있어?”
대체 왜 이 망할 새끼들 틈에 끼여서 곤욕을 치러야 하는 건지. 이쯤 되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허심탄회하게 되돌아볼 필요성이 있었다. 업보를 그다지 많이 쌓으며 살아온 것 같지는 않으나, 길길이 날뛰어 대는 미친놈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꼭 그렇지만도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게 다 분수에 맞지 않는 귀족 놈들의 소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추천장을 받은 이상 절대 입학을 철회할 수 없는 것이 왕립학교의 규정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사태의 원인은 그 적갈색 머리 사내에게 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마린케이의 앞에 서 있던 피에르와 로건이 살벌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말버릇이 고약한 걸 보니 귀족은 아니군.”
“예, 예. 가진 거라곤 완장밖에 없는 거지새끼들이랑은 관련 없는 몸입니다요.”
마린케이가 사용하는 화법이 은근슬쩍 상대를 비꼬는 방식이라면, 로건은 그냥 제멋대로 비아냥거리면서 그들을 조롱하는 축에 속했다. 내로라하는 의류 사업 가문의 자제였으나 작위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S관에 입사하지 못했던 그다. 그럼에도 그는 귀족 가 자제들의 앞에서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거야 당연히, 내가 쟤들보다 훨씬 더 돈이 많으니까!
로건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며 물질 만능주의의 월등함을 표방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가벼운 코웃음 한 번으로 피에르를 무시한 그가 대뜸 마린케이 쪽을 향해 소리쳤다.
“너 기다리다가 웬 재수 없는 새끼한테 시비 트였잖아. 책임질 거야?”
“제 상황이랑 똑같네요.”
마린케이는 안타까워하며 대답했다. 저 역시 그와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재수 없는 새끼한테 시비가 트였다는 로건은 이제 자신을 앞에 두고서 직접 시비를 트고 있는 중이었다. 마린케이가 저를 비꼬고 있다는 것을 드디어 깨달았는지, 로건은 눈을 치뜨며 물었다.
“뭐? 그게 무슨 뜻이야?”
“아닙니다.”
이실직고했다가는 또 왈왈거리며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마린케이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상황을 무마하는 편을 택했다. 같은 기숙사를 사용해 본 적 있기에 저 불같은 성질머리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였다. 엮이고 싶지 않다면 건드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마저도 탐탁지 않은 것인지, 로건은 눈을 계속 게슴츠레 뜨며 마린케이를 들여다보았다. 건수를 잡아내고 싶어 하는 듯한 행동이었으나, 뻔뻔함으로 무장한 마린케이는 틈 한 번 내어주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든 로건과의 대화를 마무리 짓기 위해 건조한 질문을 던졌다.
“또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자 미리 성낼 준비를 하고 있던 로건이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했다.
“건망증이라도 걸렸냐? 네가 백작 각하랑 연결해달라고 부탁했던 거 기억 안 나?”
그러니까, 대체 그걸 왜 여기까지 와서 전하는 건지 묻고 싶다는 뜻이다. 마린케이의 얼굴이 조금씩 구겨지기 시작하자 피에르의 얼굴 또한 덩달아 새파란 색깔로 변해갔다. 그는 평민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항상 신변의 위협이 생기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은 꼭 날파리 떼의 원인을 밝히려 평민의 집을 탐색할 계획이었지만, 누가 봐도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이었다. 깔끔히 참전을 포기한 피에르가 주방 청소를 마저 끝내기 위해 엘리베이터로 향하려던 때였다. 로건은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야, 너 번호 좀 내놔.”
말 같지도 않은 요구에 결국 마린케이는 완전히 표정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반항적으로 되물었다.
“왜요?”
그러나 로건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투로 대답했다.
“매번 이렇게 찾으러 다니는 거 되게 힘들고 피곤하거든?”
“앞으로는 찾아올 일 없으실 테니 괜찮습니다.”
“그건 내가 결정하는 거니까 내놔.”
“정중히 사양하고 싶은데요.”
계속되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척이나 끈질겼다. 까만 티셔츠 위로 은색 십자가 목걸이를 치렁치렁 올린 로건은 복장만큼이나 저돌적인 목소리로 반박했다.
“이 새끼가. 하나도 안 정중한 거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거지?”
점점 귀찮아지기 시작하는 대화에 마린케이는 눈앞의 빨간 머리를 그냥 기절시켜 버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 없는 상상을 했다. 아니다. 생각해 보니 꽤 괜찮은 방법일 수도 있었다. 때마침 로건이 한 번 더 마린케이를 향해 공격을 던졌다.
“너 지금 번호 주기 싫어서 튕기는 거냐?”
“아뇨.”
“맞잖아?”
설명을 요구하듯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마린케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진짜 아닙니다.”
휴대폰이라면 아까 전에 내다 버렸으니까. 그러니 이젠 주고 싶어도 못 준다. 사실 있어도 절대 주지 않았겠지만,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구구절절 설명할 정도로 다정한 성미를 가지지 못한 마린케이가 간단한 대답으로 대화의 종지부를 찍으려던 때였다. 잠자코 물러서 있던 피에르는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로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마린케이는 아무에게나 번호를 주지 않아.”
마치 저는 가지고 있다는 듯한 오만한 말투였다.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니 정말로 그리 생각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마린케이로서는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로건은 역시나 그를 대수롭지 않게 무시하며 폭언을 퍼부었다.
“그럼 댁은 평생 못 받으시겠네. 누가 얼간이 귀족 새끼한테 번호를 줘?”
공작 가문의 자제를 향해 저따위 막말을 지껄일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일 것이다. 마린케이와의 친분을 무시당한 피에르가 혀를 차며 반론을 던졌다.
“뭘 모르는군. 난 무려 마린케이의 부친께 스튜 레시피까지 하사받은…….”
귀족의식이 짙게 깔려있는 냉담한 인상의 얼굴은 로건의 말대로 얼간이처럼 보였다.
“어휴, 어디서 개가 짖나.”
“네 더러운 말버릇 때문에 구역질까지 날 지경이다!”
미친 새끼들. 마린케이는 자신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멍청이 새끼들에게 둘러싸여 학창 시절을 낭비해야만 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그런 것이라면 다음 생에 마저 벌을 받게 해달라고 신을 협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거야 원, 잠버릇을 핑계 삼아 한 대씩 후려갈길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안타깝게 되었다. 기면증을 앓고 있다고 수작을 부려볼까도 했지만, 영 현실성이 없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가보겠습니다.”
저런 덜떨어진 대화에 귀 기울이는 것보다야 까마귀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백배 더 나을 터였다. 은근슬쩍 두 사람 사이를 지나치려던 마린케이는, 제 옷자락을 끌어당기는 고약한 손길에 의해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마터면 상대의 손목을 끊어버릴 뻔했다.
“뭡니까.”
“네가 부탁했거든?”
“그래서 묻잖아요. 뭐냐고.”
그 순간 마린케이는 저도 모르게 뒷골목의 시정잡배가 된 것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정중함이라든가, 신사도라든가 하는 것들은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조금 전엔 그나마 예의를 차리고 있었다면, 이제는 상대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 험상궂은 표정이 얼굴 위에 한가득 자리 잡은 후였다. 그 모습에 로건의 옆에 서 있던 피에르는 황급히 눈알을 굴렸다.
그러나 당당함을 무기 삼아 살아가는 콜린스 가문의 차남은 그 반들반들한 얼굴보다 더 당당한 몸짓으로 흰색 크로스백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거야.”
말투에 담겨 있는 은근한 자신감에 마린케이의 표정은 더더욱 썩어 들어갔다.
“내가 아니었으면 네가 이런 파티에는 또 언제 초대받아 보겠어?”
파티는 무슨 얼어 죽을 파티야. 태어나 참석해 본 파티라고는 억지로 끌려갔었던 다이애나의 생일 파티밖에 없었다.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참석한 소녀의 생일 파티에서, 그는 주최자인 다이애나와 함께 촛불을 끄고, 머리 위에 토끼 머리띠까지 쓴 채 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그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자 심각할 정도로 기분이 나빠졌다.
비록 다이애나는 아직까지도 그 사진을 소중히 여겨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지만, 마린케이에게 있어 그 사진은 때가 되면 몰래 훔쳐다 불에 태워버리고 싶은 좋지 못한 기억들 중 하나였다. 다만 다이애나에게 하루 종일 들볶이게 될 것이 두려워 굳이 시도하지 않는 것뿐이다.
로건은 받지 않고 뭐 하냐는 듯 스크래치가 난 눈썹을 들어 올리며 초대장을 흔들었다. 누가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디자인의 카드였지만, 마린케이의 눈엔 바닥을 굴러다니는 쓰레기만도 못해 보였다. 마린케이는 시큰둥한 얼굴로 초대장을 받아 들었다.
“야, 야! 그걸 여기서…….”
초대장을 받자마자 단숨에 카드를 열어보는 그의 무식한 행동에 로건은 새되게 소리쳤다. 초대장과 함께 들어있던 웬 사진 한 장을 발견한 마린케이가 급속도로 표정을 굳혔다.
냉기가 느껴지는 듯한 그의 얼굴에 피에르는 심상치 않은 상황이 펼쳐지려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럴 때면 꼭 괜한 불똥이 저에게로 튀곤 했다. 피에르가 익숙하다는 듯 살금살금 뒷걸음질 쳤다. 어서 화장실 청소를 통해 불안감을 식히고 싶었다.
“라이터 있습니까?”
밀림 속 맹수의 경고처럼 느껴지는 낮고 섬뜩한 목소리에, 피에르는 뒷걸음질 치던 것을 멈추고서 헛숨을 들이켰다. 마린케이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라이터 있냐고.”
당연한 듯 이어진 반말이었지만, 누구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운 분위기이기도 했다. 눈치를 보던 피에르는 꿀꺽,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기, 기사라면 시가렛을 멀리해야 한다.”
그러자 마린케이가 무슨 생뚱맞은 이야기를 하냐는 눈초리로 그를 훑어 내렸다. 라이터의 유무를 묻는 행동이 자연스레 시가렛과 연결 지어질 수 있다는 것을 온통 부정하는 듯한 삐딱한 얼굴이었다. 피에르는 그냥 입을 다물고서 “실언했다.”라는 구차한 변명을 던졌다.
뭐야, 이거.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그 무렵 로건은 처음 보는 평민의 모습에 당황하며 크로스백 안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같이 살면서 시가렛을 피우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긴 했으나, 일단 내놓으라니 어서 대령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라이터를 찾아낸 그가 얼떨떨한 얼굴로 제 손을 내려다보던 때였다.
“던지세요.”
하다 하다 이젠 명령을? 그러나 로건은 제 손이 기계적으로 라이터를 던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며 입을 벌렸다. 한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든 마린케이가 속전속결로 초대장 위에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재로 변하기 시작하는 종잇조각을 보며, 로건과 피에르는 석고상처럼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불? 초대장?
그러니까, 쟤가 지금 백작 각하께서 보내신 초대장을…….
“전해주십시오.”
불태운 거 맞지?
“할 말이 있으면, 직접 찾아오시라고.”
초대장에 들어있던 사진은 분명 황태자와 제 모습이 맞았다. 하지만 무슨 수로? 빌어먹을. 뒷골목 한편의 어딘가, CCTV도,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그 좁다란 골목에서 이루어진 짧은 입맞춤을 어떻게 사진으로 찍어 남겨놓을 수 있었는지 추측이 되지 않았다. 파파라치 새끼들의 인기척이 조금이라도 느껴졌다면 그따위 상황이 벌어지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진 속에서 눈을 감은 채 키스에 응하고 있던 인물은 분명 샤를 소피아 엔스, 가쉰의 황태자가 맞았다. 제기랄, 생각해 보니 취객 한 명이 있었던 것도 같다. 그 새끼가 취객이 아니라 파파라치였다는 소리야? 상종하고 싶지도 않은 직업정신이었다.
마린케이는 재로 변해버린 초대장을 즈려밟으며 묵묵히 살의를 불태웠다. 상대의 협박에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없다. 어차피 사진을 가지고 있는 작자라면, 그것을 빌미로 더 심각한 요구를 해올 것이 뻔했으니까. 그는 협박과 노략질로 가득한 뒷골목에서 세상살이를 배워왔다. 도 넘은 협박은 질 나쁜 도발로 맞받아친다. 그것이 그가 배운 첫 번째 이치였다.
***
두 번째 이치는 굳이 미련하게 뇌세포를 낭비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무언가를 재고 따지는 행위는 애초에 별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쉽게 판단하고, 쉽게 결정하라는 소리는 아니었으나, 적어도 머리를 동여맨 채 굴러다니며 이것저것을 셈하는 것보다는 모든 것을 내던지고 뛰어드는 편이 나았다. 가진 게 없는 인생은 그렇기에 잃을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들 하지 않나. 마린케이는 그 무엇도 잃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고로 그는 이번에도 직감에 따라 행동했다. 그러나 뒷골목의 생태에 익숙해진 마린케이가 한 가지 깨닫고 있지 못한 것이 있었다. 어째서 자신이 황태자에게 언질도 하지 않은 채 날이 밝자마자 크루즈로 향했는지 말이다. 잃을 것은 없었으나, 지키고 싶은 것은 있었다. 비록 그것이 한 번도 가진 적 없는 사람이었다고는 해도.
초대장에 적혀 있던 장소는 수도 외곽에 위치한 크루즈 선착장이었다. 도심에서 조금 빗겨가 있는 이 아름다운 해변은 특히나 귀족들의 휴양지로 인기가 있었다. 지리적으로 수도와 가깝다는 이점이 있고, 귀족들을 겨냥한 여러 유흥 시설 역시 갖추어져 있어서였다.
높다란 나무들이 울창하게 어우러지고, 자연의 아름다움이 살아 숨 쉬는 청미한 멋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바다 특유의 짠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며 스쳐 지났다. 어둠으로 물든 검푸른 해변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는 마치 무거운 심장 소리처럼 들려왔다. 오밤중의 사교 파티에 동원된다는 것이 가련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장소였다.
마린케이는 검은 볼 캡을 꾹 눌러쓰며 천천히 선착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크루즈에 오르는 귀족들은 모두 가지각색의 화려한 연미복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수하고 무던한 옷차림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가드들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선착장 앞을 지키던 가드들은 귀찮은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초대장 좀 보여 주셔야겠습니다.”
공손한 어투로 말을 전하고는 있으나, 너 같은 게 감히 이런 곳에 기어들어 올 생각을 하냐는 류의 경멸 가득한 시선이 쏟아져 내렸다. 이 정도 천대에는 익숙한 걸 넘어 지겨움까지 느껴진다. 가드들의 묵직한 요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 마린케이는 짜증스레 대꾸했다.
“나 잘리면, 형씨가 책임질 거야?”
볼 캡을 벗어 던지며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폼이 시간의 촉박함에 쫓기는 듯, 무척이나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마린케이는 제 손목을 한 번 내려다본 뒤 모나게 눈을 찌푸렸다. 그 신경질 가득한 얼굴을 확인한 가드 한 명이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으며 물었다.
“여기 직원분이십니까?”
“이봐. 늦으면 늦는 대로 깎이는 게 내 일급인데, 형씨가 책임져 주실 거냐고. 데리고 살아줄 거야?”
다시 한번 손목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는 게 영락없는 파트타이머의 모습이었다. 성격이 다소 나빠 보인다는 게, 아니. 좀 많이 나빠 보인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나오는 걸 보면 정말 시간에 쫓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명단에서 본 적 있는 얼굴이야.”
“그래?”
가드 한 명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마린케이가 가진 갈색 머리칼과 갈색 눈은 이럴 때일수록 더욱 요긴하게 쓰였다. 저도 모르게 비웃음을 흘릴 뻔했던 마린케이는 간신히 조소를 눌러 참았다. 그가 마지막 쐐기를 박으려던 순간이었다.
“어이! 직원들은 뒤쪽에서 출퇴근하는 거 잊었어?”
“…….”
“어휴, 죄송합니다. 제가 신입 교육을 잘못 시켰네요.”
웨이터 복장을 입은 남자가 급하게 뛰어와 가드들 앞을 막아섰다. 신속하고 정확한 어조로 비굴한 해명을 시작한 그는 마린케이의 머리통을 같이 잡아 누르며 연신 사과를 전했다. 그러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가드들이 들어가 보라며 대충 손짓했다.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감사 인사를 올린 후 멀뚱히 서 있는 마린케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이고, 이래서 신입들 군기를 제대로 잡아야 한다니까. 너 몇 기수야? 귀족들이랑 같은 길목으로 다니면 안 된다는 거 못 배웠어?”
몇 기수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걸 배운 적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마린케이는 고개를 까딱이며 대답을 회피했다. 성의 하나 느껴지지 않는 그 동작에 남자는 푹푹 한숨을 뱉었다.
“어휴……. 이번 신입 중에 꼴통 하나 들어왔다더니, 내 인생 좀 봐.”
따분함에 지쳐 가던 마린케이가 그제야 흥미를 느끼며 질문을 던졌다.
“꼴통이요?”
“그래, 꼴통! OT 때 상세히 알려줬던 걸 날름 다 까먹고서는 가드들한테 떼를 쓰는 게 꼴통이 아니면 대체 뭐야?”
그 꼴통 씨 얼굴은 제대로 봐본 적 있으시냐고 묻고 싶었으나, 저에게는 잘된 일이었으니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거듭 강조하지만, 가쉰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갈색 머리와 갈색 눈은 이럴 때면 항상 유용하게 쓰였다. 크루즈의 뒤편으로 돌아 걸어간 남자는 직원용 입구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앞으로는 저기로 다녀. 알겠어? 컴플레인 받고 싶어서 환장한 것도 아니고.”
“그러겠습니다.”
원하는 대답을 받아냈으나 영 마음에 차지 않았던 건지, 그가 눈을 부릅뜨며 성을 냈다.
“유니폼은 어디다 팔아먹고 이 꼴로 왔어?”
“아직 안 받은 것 같은데요.”
“안 받았다고?”
당당함이 넘쳐흐르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니 무어라 더 돌려줄 말이 없었다. 남자는 깊이 시름하며 자신의 이마 위를 짚었다. 하필이면 이런 꼴통이 자신의 크루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워서였다. 남자가 자신의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며 마린케이를 노려보았다.
“웬 꼴통이 들어와가지고!”
“유니폼 없으십니까?”
그러나 마린케이는 오히려 자신이 그에게 실망했다는 양 거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은 넓고, 꼴통들은 많다고들 하더니 하필이면 뼈를 묻을 직장에서 이런 놈과 마주하게 될 줄이야. 계단을 오르면서도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며 이것저것을 설교하던 남자는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난 듯 마린케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네 이름이 뭐였지?”
글쎄. 알 리가 있나. 그걸 이제야 묻는다는 것이 코미디 같은 상황이었으나, 누구 하나 유쾌하게 미소 짓지 않았다. 걸음을 멈춘 마린케이는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상사가 돼서 직원 이름도 모르십니까?”
그가 굳어 있는 남자의 곁을 지나치며 의미 없이 중얼거렸다.
“열심히도 일하시네.”
무척 의미가 있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뼈가 박힌 한마디에 남자는 온몸을 휘청였다.
***
「어떻게 그런 몰상식한 패션으로 출근을 할 수가 있어?」
어째서 세상엔 몰상식한 새끼들이 널리고 깔렸을까. 마린케이는 저를 꼴통 취급하며 왈왈 짖어대는 상사를 피해 탈의실로 도망쳤다.
물론 그가 품에 안겨준 유니폼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 이 와중에 진짜 꼴통 씨는 체구가 그다지 크지 않은 편이었는지, 갈아입은 와이셔츠 위로 등 근육이 팽팽히 당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황태자 새끼가 입히려 들었던 그 옷차림보다는 나았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다만 한 가지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넥타이에 관한 미스터리였다. 마린케이는 태어나 한 번도 넥타이를 목에 둘러본 적이 없었다. 하기야, 뒷골목에서 날치기나 일삼으며 살아가던 청년에게 넥타이를 둘러볼 만한 상황이 존재할 리 없기는 했다.
“이건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거야?”
매듭과 씨름하던 마린케이는 빠르게 포기 선언을 하며 캐비닛 안으로 넥타이를 던져 넣었다.
검은 슬랙스와 흰색 와이셔츠. 반질반질한 구두와 건달 같은 얼굴이 합쳐지니 암흑가 보스 밑에서 일하는 사냥개 꼴이 따로 없었다. 명찰 위에 쓰인 닉네임은 짜증스럽게도 블랙독이기까지 했다. 당연하게도 그는 셔츠 위의 명찰 또한 거칠게 떼어내 캐비닛 안으로 처박았다.
마린케이는 마침내 길었던 환복을 끝마치고서 탈의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는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꺾으며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백작 새끼에 대해 생각했다.
그 새끼가 지금 여기, 이 안에 버젓이 버티고 있다는 소리지. 당장에라도 크루즈 안을 뒤집어엎고 싶었으나, 그것은 철없던 부랑자 시절에나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귀족 나리들로 가득 찬 이곳에서 굳이 눈에 띄어 봐야 이득 볼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니 마린케이는 잠시 숨을 죽이고서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너…….”
파티장으로 내려온 마린케이를 발견한 남자가 허겁지겁 달려와 위아래로 그를 훑어 내렸다. 그의 끈적한 시선에 마린케이는 얼굴을 구겼다. 어벙한 표정으로 마린케이를 살펴보던 남자가 표정만큼이나 당황스러워 보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운동했어?”
“예?”
“꽤 야성적인데?”
그 순간 마린케이는 떫은 감이라도 씹어 먹은 사람처럼 표정을 구기며 그의 말을 무시했다. 그대로 저를 지나쳐 걸어가는 마린케이를 따라 황급히 뛰어온 남자는 유리 트레이를 그에게 건네주며 속사포처럼 경고했다. 어지간한 화려한 래핑보다 더 빠를 것 같은 속도였다.
“가서 빈 와인 잔만 수거하러 다니면 돼. 받을 때마다 항상 감사합니다, 인사 꼭 해야 하는 건 알지? 기본적인 지시 사항들 정도는 숙지하고 있을 거라 믿는다.”
“예, 뭐.”
“정말 아는 거 맞아? 귀족들이랑 눈도 마주치지 말고, 입은 더더욱 마주치면 안 되고.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냥 개처럼 기어야 한다는 거.”
기본만 하면 된다는 뜻이겠거니, 하며 대충 고개를 끄덕이던 마린케이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절로 헛웃음이 나오는 요구였지만, 콧대 높은 귀족 나리들께선 평민 알기를 짐승 알기로 하는 분들이니 충분히 가능한 요구인 듯싶었다. 그는 마저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의 결림을 풀었다.
제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마린케이의 태도에, 남자가 잠시 불안한 듯 콧소리를 흘렸다. 그러나 마린케이는 그마저도 무시로 일관했다.
“아냐. 아니다.”
그때였다. 어느 정도 대화가 마무리된 것 같아 파티장으로 향하려던 마린케이의 팔목을 잡아챈 남자는 결심했다는 듯 굳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두 눈이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넌 2층으로 가. 원래는 쌔끈한 애들만 보내는데, 한 명이 아파서 못 왔다고 하니까 네가 가서 좀 도와줘야겠어.”
***
그 자식 눈깔이 맛이 가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난잡하게 놀아나는 걸 보고 있으려니 제국의 미래가 매우 불투명하게 느껴졌다.
“약 더 내놔아…. 주사기 어디 있어?”
저런 새끼들은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릴 텐데 말이다. 백지장도 맞으면 낫다였나, 아무튼 그런 속담도 있는 것처럼. 뭔가 어감이 이상했으나 딱히 정정할 만한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코에 무언가를 가져다 댄 채 침대식 소파에 무너지듯 앉아 있는 귀족 나부랭이는 늑대 모양 가면을 얼굴 위에 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구경하던 마린케이는 뒷골목에서 목격했던 마약쟁이들의 처참한 몰골과 말로에 대해 회상했다.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오물 묻은 거리를 굴러다니던 그들은 폴리스들인지 모를 사람들에게 연행되면서도 기괴한 웃음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훗날 만나게 되었던 적갈색 머리 스승은 기사란 어떤 유혹에도 굴해선 안 되는 존재라며 강조하곤 했다. 그러나 마린케이는 그것이 비단 기사에게만 해당되는 소리가 아닐 것이라 여겼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래야만 했으니까. 저따위 허접한 쓰레기들에 넘어가 더러운 침을 질질 흘릴 바에야, 차라리 스스로가 인간이란 사실을 포기하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간이 되는 것보다 짐승으로 바닥을 기어 다니는 편이 더 유리하다는 사실마저 부인할 수는 없었다. 마린케이가 그 진리를 깨닫게 된 것은 열셋, 그러니까, 렉스가 구제불능 새끼들에게 붙잡혀 억지로 약을 들이마시는 것을 목격하게 된 그날부터였다.
예쁘장한 얼굴의 그는 언제나 구석진 곳에 끌려 들어가 얻어맞곤 했는데, 순순히 입에 약을 가져다 대는 편이 신상에 더욱 이롭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는 계속되던 반항을 멈추고 말았다. 번번이 그 장면을 목격하던 마린케이는 생존을 위해선 존엄 또한 기꺼이 버릴 수 있는 것이 인간이란 동물임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를 도와주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손길 한 번이 의도치 않게 누군가를 지옥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였다. 마치 목도리를 둘러주었던 그 소년처럼.
만약 렉스가 제게 약을 물리려는 손을 뿌리치고서 도망치려 몸을 버둥대지 않았더라면, 마린케이는 절대 그 진흙탕 속으로 발을 들여놓지 않았을 것이다. 열셋 무렵의 그는 그런 멍청한 짓 따위에 거리낌 없이 뛰어들 만큼 정의로운 꼬마가 아니었다.
거리에서 주운 부서진 목검을 손에 든 마린케이는 주저하지 않고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한 명 한 명의 뒤통수를 내리치는 손속에 사정을 두지도 않았다. 저런 쓰레기 새끼들이야 죽어 없어지는 편이 훨씬 더 세상을 이롭게 만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 모습을 스승이 보았다면, 누군가를 심판하려는 그 살기부터 내려놓으라며 한참을 꾸중했을 것이 분명한 처사였다.
「고, 고마워. 정말 고마워. 고마워…….」
제게 끊임없이 약을 강권하던 버러지들이 하나하나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렉스는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떨구었다. 제 앞에 선 구원자의 발이 생각보다 작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누군가 제게 손 내밀어 준 믿지 못할 상황 속에서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되지 못했다.
그는 환각에 시달리면서도 계속 몸을 일으키려 애썼고, 그 비틀거리는 몸을 붙잡아준 것 역시 마린케이였다. 사정을 봐주지 않고서 뺨을 내리치는 손길 역시 빠지지 않았다.
「정신 차려. 침 흘리는 거 더러우니까.」
「으, 으윽. 아파. 아파.」
「정신 차리라고.」
확실히 정신을 차린 것 같은데도 두어 대를 더 얻어맞은 렉스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정신 차렸어! 진짜야, 진짜!’하고 외쳐댔다. 환각이고 뭐고, 이대로 가다간 뺨이 통증에 녹아내릴 것만 같아 그는 저도 모르게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러나 그 시절의 마린케이는 성인의 눈물을 보면서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는 무자비한 어린애였다.
「다음엔 안 도와줄 거니까, 약쟁이처럼 살지 마.」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렉스는 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는 그들의 협박에 넘어가지 않겠노라 약속했다. 도움을 받았으니 사례를 하겠다고도 했지만, 단박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딴 건 필요 없어.」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그의 지갑은 마린케이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렉스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천사인지, 악마인지 구별하지 못하며 감동의 눈물을 쏟았다. 어린 마린케이는 지금보다 훨씬 더 철부지였고, 성격이 나빴으며, 호전적이었지만, 어쩌면 그만큼 더 귀여운 구석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
“여기서 뭐 해?”
“케, 케, 케, 케, 케이. 케이, 케이야? 진짜 케이? 케이랑 똑같이 생겼어!”
“도저히 모르겠네. 그렇게 맞고도 약을 하고 싶어?”
한심함이 듬뿍 담겨 있는 사나운 시선이 렉스 허니비를 향해 쏟아졌다. 분명 흰색 고양이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나인 걸 안 거지! 렉스가 당황하며 변명을 하려 했지만, 흉흉한 눈빛을 곧이곧대로 받고 있으려니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하나로 틀어 묶은 머리가 땀에 젖어가는 기분이었다. 렉스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 아냐. 진짜 아냐! 그냥 고객 관리 차원에서 나온 거야. 나 딜러인 거 알잖아. 케이. 이런 곳에도 얼굴을 내밀어줘야 지명도가 높아진다고.”
모른다. 딜러면 이따위 파티에 나와 약을 빨아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하필이면 그따위 같잖은 고양이 가면을 쓰고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뜻이다.
마린케이는 불신 가득한 눈빛으로 그의 몰골을 훑었다. 본인의 주장대로 약에 손을 대지는 않은 것 같긴 했으나,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보장은 없었다.
명령대로 2층으로 올라온 마린케이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동물들로 가득한 쥬라X 공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쥬라X 공원에는 동물이 아니라 공룡들이 가득했지만, 어쨌든 둘 다 인간은 아니었으니 비슷한 비유라고 할 수 있었다.
웨이터들은 바닥과 소파 위를 짐승처럼 기어 다니는 귀족들을 못 본 척하며 다 쓴 주사기와 콘돔들을 수거하러 다녔다. 개중 몇몇은 가면이 거의 벗겨진 채 눈을 뒤집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서 입학식 때 보았던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 마린케이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던 중 마주치게 된 사람이 바로 렉스 허니비였다.
금발이 되고 싶어 얼룩덜룩 염색물을 들인 머리 꽁지와 베사플레사에서나 맡을 수 있을 법한 그 독한 꽃향기 때문에라도 바로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근데 있지. 케이가 왜 여기 있어? 혹시 초대받은 거야? 으헉, 케이도 사교계 데뷔?”
그러나 본인이 먼저 멍청하게 입을 벌리며 저를 쳐다보지만 않았더라도, 지나가던 그를 붙잡아 패악을 부려대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렉스는 마린케이를 발견하자마자 무슨 괴물이라도 목격한 사람처럼 입을 벌리며 뒷걸음질 쳤다.
마린케이는 자신의 옷차림을 가리키며 답했다.
“보면 몰라?”
안 그래도 가슴 쪽이 조여와 당장에라도 벗어 던지고 싶은 것을 간신히 눌러 참고 있는 중이었다. 렉스가 깨달았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초대받은 거구나. 확실히 케이 정도면 신박해서 잘 먹힐 것 같아.”
잠시 말문을 잃은 마린케이는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아르바이트 중이야. 형은 왜 여기 있는데?”
“말했잖아! 나 꽤 잘나가는 딜러라니까. 고객 유치하려면 이런 곳에도 꼭 와야 한단 말이야. 약은 절대 손 안 댔다고 맹세할 수 있어!”
또랑또랑한 눈망울을 보니 아직까지는 거짓말이 섞이지 않은 것 같았다. 마린케이는 트레이에 쌓여 있던 불순물들을 쓰레기통에 밀어 넣으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렉스가 불안한 눈빛으로 그런 마린케이를 바라보았다. 그가 하고 있는 생각은 단순하고도 명쾌했다.
케이가 나 때리면 어떡하지…? 지금껏 마린케이에게 제대로 맞아본 적은 없었지만, 얻어맞는 사람들을 목격한 경험에 비추어보면 진짜, 무지 아플 것 같아서 걱정이 됐다. 심지어 그에게는 어린 마린케이한테 뺨을 얻어맞았던 기억이 여전히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마린케이는 얼어 붙은 렉스를 무시하고서 궁금한 바를 물었다.
“그 새끼도 여기 있어?”
“응?”
“레몬타르트인지 뭔지 하는 그 새끼 말이야.”
“아! 레온하르트 님?”
그런 새끼한테 굳이 ‘님’까지 붙여주며 존대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마린케이의 눈총을 받던 렉스는 헤헤, 웃으며 자신의 옷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잘 모르겠는데…. 개인적인 연락을 하는 사이는 아니어서. 그래도 아마 안 계실 것 같아! 눈에 띄는 거 되게 싫어하시는 분이거든.”
황태자 놈의 말에 따르면 황실의 사생아라고 했으니, 그 또한 영 설득력 없는 말은 아닐 터였다. 다만 전달자가 렉스 허니비라는 것에서 상당히 신빙성이 떨어졌을 뿐이지. 답답함에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 풀어 내린 마린케이가 무언가 말을 건네려던 때였다.
“허니. 왜 상대할 가치도 없는 사람을 상대해주고 있어요?”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와 함께 나타난 한 남자가 술 냄새를 풍기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와인잔을 빙글빙글 돌리던 그는 제 앞을 다급히 가로막는 렉스를 밀어내며 말했다.
“종업원 주제에, 어디서 눈을 함부로 치켜떠.”
트레이로 한 대 치면 안 되려나. 아무래도 안 되겠지. 마린케이는 묵묵히 이다음에 펼쳐질 상황을 받아들였다.
“케, 케이!”
하얀 와이셔츠 위로 붉은 술 자국이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어차피 제 옷도 아니었으니 더러워지는 것쯤이야 상관없었지만, 기분이 매우 썩어 들어간다는 것이 문제였다.
마린케이는 이마 위로 미끄러져 내리는 와인을 닦아내며 눈을 감았다. 마린케이가 들고 있던 트레이 위로 빈 잔을 올린 남자는 비뚜름하게 웃으며 렉스에게 팔을 둘렀다.
“본 것도 못 본 것처럼, 들어도 못 들은 것처럼 똑똑하게 구는 게 여기 규칙이었을 텐데?”
귀족이란 원래 이런 새끼들이었다. 모두가 황태자 놈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지는 않았다. 특권을 가지고 태어난 자들은 그 특권을 용인하려 하지 않는 누군가를 만나게 되었을 때 더더욱 분노하며 이빨을 드러내곤 한다. 손등에 묻은 와인을 마저 슬랙스에 닦아낸 마린케이는 묵묵히 고개를 들었다. 그에 렉스는 불안한 듯 입을 벌리며 제 옆에 선 귀족의 명복을 빌었다.
아무리 멍청해도 그렇지, 어떻게 우리 케이를 건드릴 수가 있어.
“형은 못 본 척해.”
쟤는 진짜 미친놈이란 말이야. 베사플레사에서 제일가는 딜러에게 미친놈으로 인정을 받은 마린케이가 남자 쪽으로 걸어가며 경고했다.
“그게 여기 규칙이라고 하니까.”
백지장도 맞으면 낫다지 않나. 일단 저 새끼는 호되게 당해봐야 정신을 좀 차릴 것 같았다. 세상이 제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마린케이에게 있어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덤덤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눈앞의 귀족 양반을 바라볼 수 있었다.
개처럼 기어야 한다고 했던가. 똑똑하게 굴라고. 그거야 언제나 자신 있는 일이었다. 무릎 한번 꿇는 일과 머리 한번 조아리는 일은 더 이상 마음에 생채기를 내지도 않았다.
그런 손쉬운 방법으로 위기를 지나칠 수 있다면 백 번도 더 넘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릴 수 있을 것이다. 본래 세상은 그런 곳이지 않나.
아무리 익숙해지려 해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당연했지만, 익숙해진 척 받아들이는 것쯤이야 쉬운 걸 넘어 간단하기까지 했다.
부랑자들로 가득한 무법지대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마린케이는 그들의 악행과 기행을 일상처럼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단지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것에 대해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버러지 같은 새끼들 같으니라고.
마린케이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와인 잔을 쏟았던 귀족 나리는 고개를 높이 들어 올렸다. 아무리 비루먹은 평민이라고는 하나, 기사학부에 입학해 퍼스트 클래스까지 진급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신체 조건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바였다.
얼핏 보면 마른 것같이 느껴지는 체형이지만, 가까이서 본다면 그가 얼마나 큰 키와 너른 골격을 가지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린케이는 와인에 젖은 머리칼을 털어내며 물었다.
“그거 아십니까?”
살기등등한 눈빛이 남자에게 쏟아졌다. 마린케이는 이럴 때면 항상 제게 인간에 대한 살의를 버리라 가르친 스승의 가르침이 의뭉스러워졌다. 왕립학교에서 운운하는 빌어먹을 기사도 따위도 그랬다. 상호 간의 존중과 예의는 전부 헛소리에 불과하다.
와인을 머리에 쏟아붓는 귀족 새끼한테 차려줄 예의 같은 것은 없었다. 그가 남자의 멱살을 붙잡아 거칠게 잡아당겼다.
“당신은 내 스승에게 고마워해야 할 거야.”
마린케이는 그대로 옆에 위치한 여객실 문을 열어 남자를 집어 던지듯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팽개쳐진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둔탁한 소음과 함께 문이 닫히는 것이 훨씬 빨랐다. 커다란 장식장을 문 앞에 한 손으로 끌어다 놓은 마린케이는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째질 듯한 목소리를 무시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문 열어! 당장 이 문 열라고, 너 같은 새끼가 감히 나한테!”
그렇게 고함을 쳐 봤자 도움을 줄 사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 본인이 뿌린 씨앗이었으니 달갑게 받아들이길 바라며, 마린케이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렉스는 꿀꺽, 침을 삼키며 그런 그를 지켜보고 있던 참이었다. 나이를 먹은 마린케이는 옛날보다 훨씬 더 유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니라 성격이 비약적으로 나빠진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마린케이는 그대로 방향을 돌려 렉스를 응시했다. 한 마리 짐승처럼 느껴지는 그 매서운 눈빛에, 렉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뒤쪽으로 미뤄두었던 사실을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레온하르트 씨는 아마, 3층 여객실 어딘가에 계실 거야.”
그에 마린케이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의문을 표했다. 조금 전에 들었던 것과는 다른 얘기가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렉스가 주절주절 덧붙였다.
“사람들 눈에 띄는 걸 싫어하셔서 항상 그런 곳에 숨어 계시거든.”
“그 새끼가 왜 여기 있는데?”
“그거야, 이 크루즈가 레온하르트 씨 소유니까 당연한 거 아닐까…? 자기 크루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은데……. 으응. 그냥 내 생각이야.”
말을 마친 렉스는 마린케이의 눈치를 살피며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그제야 마린케이는 작은 탄성을 내뱉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기억 속의 렉스 허니비는 조금 더 둔하고, 어딘가 모자란 경향이 없지 않아 있는 백치 같은 성정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처음 수도에 올라와 보게 되었던 그의 모습은 더 이상 팔푼이 같던 뒷골목의 도박꾼이 아니었다. 새침한 외양을 무기 삼아 전광판을 장식하는 베사플레사 최고의 딜러가 바로 렉스 허니비였다.
“형.”
렉스는 마린케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질끈, 눈을 감았다.
“얼굴만 피해서 때려줘…! 얼굴만!”
죽을 만큼 아프겠지? 항상 마린케이에게 구해지기만 했지, 직접 맞아본 적은 없어서 그런가 그 위력을 감히 상상해 볼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렉스의 물 빠진 염색 머리를 내려다보던 마린케이는 손을 들어 올려 천천히 그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릴 뿐이었다. 가벼운 웃음소리 역시 뒤따랐다.
렉스가 얼빵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거짓말이 되게 늘었나 보네.”
놀랍게도 마린케이는 화가 난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렉스가 눈을 깜빡이며 당혹감을 드러냈다. 툭하면 골목으로 끌려 들어가 이곳저곳을 얻어맞아 오곤 했던 그는, 동네 건달들의 비위에 맞춰 거짓말 하나 할 줄도 모르는 푼수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상황과 환경에 맞춰 모습을 달리하기 마련이었다.
비록 겉모습은 제가 알던 렉스 허니비가 맞을지언정, 그 속내는 더 이상 과거에 머물러 있는 해맑은 청년이라고 볼 수 없었다.
「잘 모르겠는데…. 개인적인 연락을 하는 사이는 아니어서. 그래도 아마 안 계실 것 같아! 눈에 띄는 거 되게 싫어하시는 분이거든.」
흔들림 하나 없던 말간 눈빛을 기억해낸 마린케이는 멍해 보이는 렉스를 지나치며 다시금 트레이를 집어 들었다. 굳게 닫힌 여객실에서는 계속해서 귀족 나리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지만, 두 사람 모두 신경 쓰지 않았다. 불현듯 정신을 차린 렉스가 저를 지나치려는 마린케이에게 다급히 소리쳤다.
“케이!”
비록 자신보다 훨씬 더 어린 나이였고, 훨씬 더 작은 키를 가진 소년이었으나, 그 시절의 마린케이는 제게 구원자 역할을 자처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다만 아주 조금 심보가 고약하고, 불량하고, 매몰차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렉스는 부서진 목검을 들고 다니던 껄렁한 소년이 언젠가 기사복을 입은 채 수도를 걸어 다니게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면 가슴 깊이 뿌듯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한테 실망했어?”
“왜?”
그러자 마린케이는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하고서 고개를 기울였다. 렉스 허니비와 실망이라는 두 글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불안함 가득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렉스에게, 마린케이는 무겁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형한테 별로 기대 안 해서 실망할 것도 없어. 걱정하지 마.”
분위기를 푸는 방법도 꼭 마린케이다웠기 때문일까, 렉스는 안도감을 느끼며 백치 같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역시 우리 케이는 미친놈이 확실한 것 같다고.
***
1층이 대외적인 파티장의 구실을 하고 있고, 2층이 망할 귀족 새끼들의 마약 놀음으로 가득한 놀이터였다면, 3층은 그보다 훨씬 더 조용하고 고요한 분위기의 평범한 여객실처럼 보였다. 마린케이는 제게 끊임없이 몸을 치대는 귀족들을 짜증스레 떼어내며 3층으로 올라왔다.
심지어 어떤 놈은 자꾸만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려 들어 하마터면 창문 밖으로 던져버릴 뻔했다. 일렬로 늘어서 있는 많은 여객실 중 어느 방에 레온하르트 새끼가 있을지 선택지를 좁히던 그는, 겨우 몇 초 정도에 불과한 짧은 고민을 끝내고서 걸음을 옮겼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으니 하나하나 다 확인해 봐야겠다. 마린케이는 망설이지 않고서 첫 번째 여객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캄캄한 방 안의 불을 켜 보니 빈방이 확실해 보였다.
긴장감까지 느껴지는 서늘한 침묵 속에서도 그는 무심하게 여객실들을 살폈다. 어딘가에는 사람이 들어가 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소음 하나 들려오지 않는 것이, 꼭 인간이라고는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인형의 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도 한가운데 선 마린케이는 주변의 풍경을 훑어보며 답지 않게 고민에 잠겼다. 백작 새끼가 직접 보낸 초대장이었기는 하나, 로건 콜린스를 통해 도발을 전한 이유는 그가 이 파티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소와 시간만이 적혀 있는 초대장의 내용은 전형적인 유흥 파티의 그것이었다. 그 자리에 저를 초대하며 사진을 꽂아 보낸 것만 봐도 백작이 얼마나 약아빠진 인간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각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트레이를 팔 한쪽에 꽂은 마린케이는 마저 발걸음을 떼며 여객실 끝을 향해 걸어갔다. 하나씩 열어보기는 귀찮았으니, 소음이 들려오는 쪽만 대충 확인을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느긋하게 걸음을 쌓던 마린케이는 요란스러운 파격음이 들려오는 여객실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 댄 그는 다시 한번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음에 지체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선 욕설을 뱉었다.
백작, 이 쳐 죽일 새끼. 언젠가 꼭 이 손으로 찢어 죽이고야 말 것이다.
바닥에 쓰러져 피를 토하고 있던 레온하르트가 창백한 얼굴을 간신히 들어 올리며 마린케이를 바라보았다. 유리잔이 깨져 있는 걸 보면 분명 뭔가를 들이켰다 저 사달이 난 것 같은데, 그 원인을 추측하기에는 상황이 촉박했다. 바닥에 나뒹구는 생수통을 걷어찬 마린케이는 다급히 레온하르트에게로 달려가 그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크흑…. 쿨럭, 큭.”
그가 검붉은 피를 토해내며 몸을 휘청였다. 그 덩치를 품으로 받아낸 마린케이는 핏기 없는 얼굴을 제 쪽으로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뭡니까. 이 상황.”
그렇게 묻는다고 한들 누가 제대로 대답이나 할 수 있을까. 그저 더 이상 피를 토하지 않게끔 입을 틀어막고 있는 것만이 전부였다. 레온하르트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희미한 한숨 소리와 함께, 마린케이가 사나운 동작으로 그의 팔을 저에게 둘렀다.
“죽기 싫으면 정신 똑바로 차리십시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해결이 곤란한 상황이라는 것쯤은 느끼고 있었다. 크루즈는 이미 선착장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심지어 이곳은 3층이었고, 자신은 밖으로 연락을 취할 만한 어떤 방편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를 등에 업은 그는 빠르게 복도를 달려 계단으로 향했다. 누구라도 좋으니 일단 사람을 찾아야만 했다.
“……제기랄.”
단숨에 2층으로 내려온 그는, 마약을 흡입한 채 뒤엉켜 있는 귀족들을 발견하고서 욕설을 읊조릴 수밖에 없었다. 정정하자. 사람을 찾는 것이 먼저가 아니다. 정신이 멀쩡한 새끼를 찾아내는 것이 우선이었지. 그는 자신이 업고 있는 이의 머리칼이 황실을 상징하는 금발이라는 것을 깨닫고서 불안한 듯 주위를 살폈다. 몇몇 귀족들의 혼탁한 눈동자가 레온하르트를 향해 번들거렸다. 베사플레사의 주인이자, 성씨 하나 없이 살아가던 황제의 사생아가 매스컴에 알려지게 된다면 그 파장은 누구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죽어가는 인간을 바닥에 던져두고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마린케이는 망설임 없이 1층을 향해 달려 내려갔다. 어느 순간, 등 뒤에 업혀 있던 레온하르트는 다급히 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가 억눌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차라리…….”
“차라리 죽게 놔두라는 개소리는 하지 마시죠. 그럴 거면 눈에 띄지를 마시던가.”
내가 눈에 띈 게 아니라 네 발로 직접 찾아온 것이지 않냐는 반론을 던져주고 싶었으나, 마음처럼 말을 던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제 어깨를 잡은 손 위에 점점 힘이 더해진다는 것을 눈치챈 마린케이는 계단 한쪽에 그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당신 같은 쓰레기 새끼를 구해주는 이유를 잘 기억해 두셨으면 합니다.”
그는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며 말을 이었다. 와인이 흩뿌려진 탓에 독한 술 냄새가 진동하기는 했지만, 그건 알 바가 아니었다. 이걸로라도 가려주는 걸 감사하게 여겨야지.
레온하르트가 연신 식은땀을 흘리며 마린케이를 올려다보았다. 거친 호흡 속에서도 의문 가득한 시선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기에, 마린케이는 친절히 본론을 꺼냈다.
“그 노예상 새끼를 당신이 좀 찾아내 줘야겠으니까.”
“…….”
“벌 받는다 생각하십시오.”
동시에 하얀 와이셔츠가 레온하르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다시 그를 등에 업은 마린케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1층을 향해 달려갔다.
저마다 화려한 문양의 가면을 쓴 채 잔을 기울이고 있던 귀족들은 갑작스레 나타난 마린케이를 보고서 비명을 내질렀다. 상반신을 탈의한 채 피를 토해내는 누군가를 들쳐 업은 웨이터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상황이었으니 이 정도 소란쯤은 당연히 예상할 수 있었다.
쨍그랑! 들고 있던 유리 트레이를 떨어뜨린 마린케이, 아니, 꼴통 씨의 상사가 사경을 헤매는 듯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마린케이는 짜증스레 소리쳤다.
“배 돌리라고 무전 안 넣습니까?”
날카로운 목소리 덕분에 간신히 현실로 되돌아올 수 있었던 남자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어, 어? 무전?”
“이 인간 죽으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그게.”
“당장 배 돌리라고!”
그 순간 그는 허둥지둥 달려와 마린케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 그냥 내려가면 돼. 원래 파티용 크루즈는 계속 선착장에 세워져 있단 말이야.”
잠시 크루즈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으나 뭐라고 더 할 말은 없었다. 빌어먹을. 얼굴을 구긴 마린케이는 감사합니다, 작게 인사를 전하고서는 다시 뜀박질을 시작했다. 그 모습마저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던 남자는 정신을 다잡으려는 듯, 스스로의 뺨을 내리쳤다. 그럼에도 머릿속을 크게 장식한 방금 전의 장면은 잊히지가 않았다.
뭐, 뭐지. 내가 방금 뭘 본 거지. 남자가 꿀꺽 침을 삼켰다.
“분명 금발이었는데…….”
***
누군가를 살리고 싶다는 거창한 이유라기보다는, 그저 댄 미헤르 그 빌어먹을 새끼를 잡아내기 위한 노력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린케이는 자꾸만 제 가슴속을 홧홧하게 적시는 붉디붉은 분노와 마주하며 당혹감을 느꼈다.
성씨가 없는 사람은 응급실을 이용할 수 없다고? 그럴 수는 없는 법이었다. 마린케이는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와이셔츠를 뒤집어쓴 채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병원 관계자들과의 설전을 끝내고 돌아온 그는 그들을 배웅하는 담당자 무리를 돌아보며 욕설을 삼켰다. 언제나 그렇듯 세상은 시궁창보다도 더한 악취를 풍겼다.
“다른 병원으로 가야겠습니다.”
한마디를 내뱉는 것이 열 마디 화려한 어구를 건네는 것보다 어려운 일일 줄은 몰랐는데. 그에 레온하르트는 비틀거리며 무릎에 힘을 주었다. 식은땀이 그의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마린케이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쥐었다.
독이 자신의 몸을 물들이는 순간 속에서, 레온하르트는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며 유쾌한 기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독살이라. 과학과 문명이 발달한 시대에 독살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싶지만, 무대 위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가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목 끝까지 쓰디쓴 핏물이 차오른다. 그늘 밑에 숨어 온갖 더러운 작자들의 악행을 눈감아주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이쯤 되면 당할 때도 됐지. 레온하르트는 성씨 하나 가지지 못한 제 인생을 상기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신원이나, 신분 같은 것들도 없다시피 하며 살아온 인생이었으니 장례 따위를 욕심낼 생각조차 없었다.
푸르게 질린 손끝이 덜덜 떨려 오기 시작하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시야가 암흑으로 점철되며 그의 정신을 좀먹어가던 무렵이었다. 소란스러운 말소리를 뒤로한 채 달려온 누군가가 그의 앞을 지나 의료진들에게로 다가섰다. 찬란한 금발, 그리고.
“환자의 목숨에 차등을 두는 의료 기관 따위는 가쉰에 필요치 않습니다.”
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새파랗게 빛나는 아름다운 눈동자. 언제나 저를 그늘 안에 가두고 태양을 향해 걸어가던 그 아이는 끔찍할 정도로 눈이 부셨더랬다. 마치 그 옛날의 어느 오후처럼. 정말이지, 모든 것을 손에 쥐고 태어난 주제에,
“……짜증 나는, 새끼.”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조차 신의 축복인 게 분명할 거야. 샤를 소피아 엔스.
***
감히 황태자의 명을 거부할 수 있는 제국민은 이 땅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그가 가진 권위이자 권력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열등감이 느껴지는 것도, 시기나 질시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자라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것 자체로 마땅한 법칙이자 질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쳇바퀴같이 굴러가는 세상 속에서, 샤를 소피아 엔스는 그 쳇바퀴를 멈추고, 움직일 수 있는 막대한 권한을 가진 이였으니까.
급하게 나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 황태자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으며 마린케이에게 걸어왔다. 신장 차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벌어진 눈높이였지만, 그를 올려다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이치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렇듯 언제나 세상을 내려다보며 살아왔을 것이다. 애초에 올려다볼 필요가 없었을 테지. 처음부터 그 자격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지 않나.
“마린케이.”
어쩌면 그렇기에 당신이 아래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제 아래 있는 이들을 거들떠보려 하지 않는다. 그저 위를 바라보며 살아가도 벅차기만 한 것이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란 곳이었으니까.
그건 뒷골목을 구르며 살아온 자들이 결코 자신의 뒤를 돌아보려 하지 않는 생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샤를 소피아 엔스는 위를 볼 필요도, 앞을 향해 달려갈 필요도 없는 사람이었다. 마린케이의 앞에 도착한 황태자가 자신의 재킷을 둘러주며 말했다.
“기사도를 불신하는 주제에 이렇게 정의롭게 굴 줄은 몰랐는데.”
“…….”
“너도 참 은근히 낭만적인 거 알지?”
황태자는 곧잘 이런 식으로 심각한 분위기를 무마하려 들고는 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이전처럼 웃고 있지 않았다. 미려한 얼굴은 오히려 긴장과 초조함으로 가득해 보였다. 선명하게 빛나는 두 눈이 또다시 마린케이의 모습을 가감 없이 비추었다. 마린케이가 입을 열었다.
“내기하시겠습니까?”
생뚱맞은 제안이었다. 어깨에 둘러진 재킷 안으로 묵묵히 팔을 끼워 넣은 마린케이는 지퍼를 올리는 동시에 몸을 풀었다. 레온하르트 같은 덩치 큰 사내를 업고 달려오느라 잔뜩 땀에 젖은 몸이었으나, 황태자는 무엇 하나 개의치 않고서 마린케이를 향해 손을 움직였다.
“좀 쉰 후에. 너 지금 심장 엄청 뛰어.”
빌어먹을, 그건 네가 내 앞에서 있어서 그런 거고. 제 가슴 위에 올라온 그의 손을 짜증스레 밀어낸 마린케이는 뒤쪽에 위치한 엘리베이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누가 먼저 1층에 도착하는지, 한번 해보죠.”
황태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보고 그런 치사한 짓을 하라는 소리야?”
“치사하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엘리베이터가 훨씬 더 잘 어울리는 분이니까요.”
시사하고 있는 바가 명백한 말이었기에 표정은 더더욱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황태자는 뜻밖에도 유쾌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이어진 마린케이의 말에는 폭소로 인한 눈물을 닦아내기까지 했다.
“이겨 보일 테니까 너무 겁먹지는 마시죠.”
그래놓고 곧바로 계단을 향해 달려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샤를은 번번이 예측과 빗겨 가는 행동을 일삼는 마린케이의 모습에 묘한 고양감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가슴 한구석이 진동하며 원인 모를 설렘을 만들어냈다.
멀어지는 마린케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저 역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무엇을 위해 내기를 걸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원하는 바가 있겠거니 싶어서였다. 그는 마린케이를 위해서라도 천천히 엘리베이터 위에 몸을 실었다. 그나저나 쟤 이미 소원 하나 있을 텐데.
닫혀가는 문 사이로 슬쩍 들여다보이는 그의 미소 가득한 얼굴에, 뒤늦게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이들은 모두 그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의 샤를 소피아 엔스는 마치 풋사랑에 빠진 얼간이처럼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
계단 하나하나를 모두 뛰어 내려가려 했다면 애초에 내기를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상대로 마린케이는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성큼성큼 건너뛰고 있었다.
한 번에 대여섯 개씩의 계단을 내려가는 것도 모자라 반 층을 건너뛰기도 하는 그 무시무시한 모습에, 계단을 사용하던 다른 이들은 아연실색하며 길을 내어주기에 바빴다.
황태자가 타고 있는 엘리베이터가 지금 몇 층에 있는지 따위는 확인해 보지도 않았다. 마린케이는 그저 살던 대로 앞만 보고 달려갔다. 가뿐히 계단을 뛰어넘는 날렵한 몸은 절대 어딘가에 걸려 굴러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왜 이런 곳까지 와서 홀로 훈련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DNA 자체에 내기와 전투가 새겨진 종족이라면 말이 다를 것 같기는 했다.
마린케이는 죄다 검은색으로 도색되어 있어 하나하나 분간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닌 계단 모서리 뒤로 황태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머리를 고정한 나사 전부가 빠져 있는 것만 같이 행동하던 그 새끼는 확실히 제국의 황태자라는 멋들어진 칭호보다 동네 양아치 새끼라는 호칭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미친 게 아니고서야 가진 것 하나 없는 평민에게 서약을 종용하고, 그 서약을 빌미 삼아 기사로 만들어 주겠다며 헛소리를 지껄일 수는 없었다. 애초에 노예 매매를 막아보겠답시고 베사플레사에 쳐들어가 현장을 덮치려 드는 무모한 짓을 벌이지도 않았을 터였다.
스쳐 지나갈 수도 있었던 노예 소년을 위해 황가의 증표까지 내어주며, 네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노라 약조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 선택의 끝이 참혹함으로 물들었을 때마저도 그는 외면하지 않고서 모든 불행과 마주했다. 도망치지도, 묵인하지도 않았다.
「너희가 틀렸어. 잊지 않는 게 먼저야.」
「그걸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잊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냐, 마린케이.」
「잊지 않는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마린케이는 그가 가지고 다니는 단검 위에 소년의 머리끈이 매여져 있는 것을 매 순간 확인하며 기묘한 감정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제기랄.
「그럴지도 모르지.」
「…….」
「내가 틀렸을지도 몰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바로 직전, 마린케이가 1층 비상구 문을 열며 뛰쳐 들어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황태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는 마린케이의 등을 두드려주며 상냥하게 웃었다.
“제가, 하아, 이겼습니다.”
“……그러게. 절대 아닐 줄 알았는데.”
마린케이는 땀에 젖은 얼굴을 닦으며 시선을 들었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투명한 푸른 눈이 여전히 저를 물감처럼 색칠하고 있었다. 그 색에 물들어 질식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나를 탓하지 않을 수는 없잖아.」
당신이란 존재가 가끔, 세상을 다르게 보이게 할 때가 있어.
“왜 받아주셨습니까?”
“…….”
“대답하셔야 할 겁니다. 제 소원, 여기서 쓸 거라서요.”
절대 그렇지 않은 곳이란 걸 알면서도 그렇게 믿고 싶어질 때가 있다고. 그게 얼마나 엿 같은 일인지 알기나 해?
마린케이는 황태자를 향해 한 걸음씩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이번엔 황태자 쪽이 먼저였다. 마린케이의 얼굴 위로 손을 올린 샤를이 그 얼굴선을 따라 손끝을 움직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껴둬.”
그가 설탕처럼 달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런 수작 없이도, 네가 묻는 거라면 전부 대답해 줄 테니까.”
이 악마 같은 새끼. 마린케이는 저도 모르게 그를 피해 걸음을 물렸다. 심장이 화끈할 정도로 아프게 달아올랐다. 샤를 소피아 엔스를 가지기 위해서는 제국을 가져야 한다고 했던가.
“그럼 대답이나 하시죠. 수작 부리지 마시고.”
제국을 가지게 된다면 당신을 손에 넣을 수 있어? 그저 쥐 죽은 듯이, 없는 듯이 살고 싶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은 꿈도 꾸지 말자고 그렇게나 다짐했었는데.
“애틋해서였을까?”
“…….”
“마린보이야.”
황태자는 뒷걸음친 마린케이의 몸을 도로 끌어당기며 눈을 휘었다.
마린케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건 분수에 맞지 않는 짓이란 걸 알고 있었다. 상대는 제국의 황태자고, 자신은 그저 무엇 하나 가지지 못한 일개 평민 나부랭이일 뿐이었으니까.
“나로 인해 누군가의 날개가 비틀어지는 꼴 같은 거, 이제 더는 보고 싶지 않아.”
그 목소리가 무엇을 향해 있는지 모를 슬픔과 그리움에 젖어 있다는 것도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빌어먹을. 그런데도 자꾸만 당신이 욕심나. 내 찬란한 주군이 눈부시게 아름답다고. 그러나 주군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 싶은 걸 넘어, 그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지면 뭘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네가 나를 원망하게 되기라도 하면, 내 기사마저 잃어버린 나는 어떻게 해야 돼?”
그가 던진 것은 누군가의 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애석한 경고였을 뿐이지.
그러나 마린케이 이스턴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었고, 샤를 소피아 엔스는 앞을 바라볼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앞을 향해 뛰어가는 누군가와 뒤를 돌아볼 기회를 가진 누군가라면, 그러니 더더욱 맞물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거절을 왜 그딴 식으로 하는 겁니까? 헷갈리게.”
그 순간 마린케이는 저돌적으로 물었다. 황태자의 비약적인 언어가 수락이 아닌 거절임은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약아빠진 황태자 새끼 같으니라고.
“포기하지도 못하게 하려는 못된 심보인 것 같은데.”
“…….”
“그렇게 안 하셔도 이 망할 감정은 쉽게 안 사라질 것 같으니, 걱정 거두셔도 됩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짜증스러운 오기로 인해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었음에도 황태자 놈은 암흑뿐인 세상에 불이라도 밝히려는 듯 너무도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이 말 말고는 딱히 표현할 길이 없다. 그가 웃으면 정말 저렇듯 세상이 요란하게 빛을 발하는 것만 같았으니까.
황태자가 전하는 한 글자 한 글자는 모두 나풀거리는 꽃잎이 되어 마린케이의 심장을 간질였다. 저릿한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한 마린케이는 숨을 참으며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럼 내가 너를 사랑하게 만들어볼래?”
치사할 정도로 사랑스러운 목소리였다.
“네 손에 제국을 쥐여 줄지도 모르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 간신히 마음을 다잡은 마린케이는 헛소리 따위나 내뱉고 있는 황태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본인도 제국을 가질 생각이 없으면서, 너무 공수표인 거 아닙니까?”
그러나 그 불경한 대답에도 황태자는 또다시 티끌 하나 없이 웃으며 마린케이의 모습을 눈에 담을 뿐이었다. 풋사랑에 빠진 것만 같아 보이는 화사한 얼굴에 마린케이는 허탈한 듯 재킷을 벗었다. 그가 황태자의 얼굴 위로 재킷을 던지며 경고했다.
“실수할 것 같으니까 웃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