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서쪽에서 뜨는 해 (6/12)

6. 서쪽에서 뜨는 해

「그거 내 책 아닌데.」

침대 옆 서랍 위에 올려두었던 책을 읽고 있던 중이었는지, 하녀는 화들짝 놀라며 책을 덮었다. 주근깨 몇 개가 박혀 있는 콧잔등이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어리숙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던 그녀는 이내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사죄하기 시작했다. 용서해 주세요! 심금을 울릴 정도의 간절한 목소리였으나, 샤를 소피아 엔스가 누군가. 싹수 노란 애새끼로 유명한 가쉰의 황태자 아니던가?

소년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할 뿐이었다. 책이야 뭐, 사람 손을 타면 탈수록 가치가 귀해지는 것이라고들 하니 몇백 번이고 더 읽어도 괜찮았다. 그게 저렇게까지 유난 떨 일인가. 되바라진 꼬맹이는 바닥에 엎드려 있는 그녀를 지나치며 내뱉었다.

「사과할 필요는 없고.」

「예, 전하…. 네?」

황태자의 성격이 그동안의 황실 사람들과 전혀 다른, 일부의 표현에 따르면 ‘싸가지를 밥 말아 먹은 애새끼’라고까지 불리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학문과 무예 모두에 남다른 재능이 있다던 황태자는 신이 내린 황제감이라는 소리를 듣는 기대주였다. 그렇게 대단한 핏줄을 쥐고 태어났으니 싸가지를 밥 말아 먹고 다니는 거 아니겠냐며 몇몇 귀족들이 혀를 내두르던 소리를 엿들은 적 있는 그녀였다.

되바라지긴 정말 되바라졌지만, 악담을 퍼부을 정도로 모난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 위로 제 남동생을 겹쳐보며 황태자의 분위기를 살폈다.

「전하?」

어느새 책장까지 걸어간 소년이 몇 권의 책을 더 들고서는 도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법도대로라면 감히 황태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의 샤를 소피아 엔스는 정말 천사가 따로 없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 얼굴을 외면하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공짜 몬트를 외면하는 것보다도 훨씬 어려운 일임이 마땅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끝내 소년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안 받아?」

소년은 어여쁜 얼굴을 기울이며 물었다. 그 태도가 너무 시건방지기 그지없었던 까닭에 호즈는 잠시 이걸 받는 것이 정말 법도에 맞는 것은 아닐까, 하고 고민할 뻔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상대는 황태자였다. 황제가 그토록 귀히 여겨 세상의 온갖 것들을 손에 넣어주려 한다던 가쉰의 후계자 말이다. 역사책에서나 보던 초대 황제의 것과 똑 닮은 진한 금발이며, 투명한 벽안이며 하는 것들은 보는 이마다 감탄을 토해내게 할 만큼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호즈는 다시 한번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대답했다.

「감히 저 같은 게 어찌…….」

덜덜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샤를은 어깨를 내렸다.

「그래, 그럼.」

그 두꺼운 책 여러 권을 전부 한 손 위에 올린 소년은 망설이지 않고서 쓰레기통을 향해 걸어갔다. 이 순간만큼은 황태자의 방이 성인 남녀가 뛰어놀아도 될 정도로 널찍하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호즈가 경악에 차 소리쳤다.

「전하, 안 돼요!」

「왜?」

그러자 슬쩍 고개를 돌린 황태자는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아, 이제야 알겠다. 어째서 사람들이 저 천사 같은 소년을 되바라진 애새끼라고 불러대는지. 천사 같은 외양이었으나 그 속내는 악마로 가득 차 있을 것만 같은 맹랑한 꼬맹이가 바로 황태자, 샤를 소피아 엔스였다.

호즈는 어수룩한 얼굴로 그가 제게 건네주는 책들을 받아 들었다. 으윽. 그녀가 책 무게로 인해 휘청거리자 도로 몇 권을 가져간 황태자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거 전부 다 누이 책이니까, 다 읽으면 누이한테 좀 가져다줄래?」

「누이라면…….」

「마리아. 내가 가지고 가면 왜 이렇게 늦게 돌려줬냐고 후드려 팰 것 같아.」

후드려 패다니. 감히 황태자에게 손찌검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

물론 훗날, 그 ‘후드려 팬다’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남발해대는 간 큰 평민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어불성설인 일이었다. 그러나 호즈는 저를 골똘히 바라보는 황태자에 의해서라도 저 역시 심각하게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꼭 가져다드릴게요! 」

「아. 다 읽고 나서 가져다줘.」

샤를이 책을 눈짓하며 말했다. 소피아 황후를 가장 많이 닮은 황자라더니, 그 아름다운 얼굴은 초록으로 가득한 봄 길보다도 더 싱그러워 보였다. 신이 공들여 창조한 것이 분명한 피조물이 바로 제 눈앞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나도 안 읽은 거 티 나면 날 죽이려 들걸?」

순 거짓말이었다. 저 책들은 모두 빌려온 날 완독했다. 그러나 겁에 질린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읽고 싶어도 손 하나 대지 않을 모습마저 내다보이는 듯해서, 샤를은 대수롭지 않은 거짓말을 입에 올리며 수려하게 웃었다. 이게 뭐 별거라고.

그러나 별게 맞았다. 호즈는 황실에서 일했던 근 몇 년 동안 단 한 번도 황족 사람들과 “필요하신 것이 있으실까요?”를 제외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다른 황족들과는 전혀 다른 타입이라더니, 이런 걸 말하는 거였구나. 황태자는 그간 그녀가 만나온 황족들과 정말 많이 다른 성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소년의 명령대로 밤새워 책을 다 읽은 호즈는 마지막 책을 완전히 독서하고 나서야 그가 이 책들을 이미 다 읽은 상태였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책 마지막 페이지에 모든 책의 논리와 주장을 비교해 놓은 짤막한 에세이가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완벽한 책을 두고서 개소리와 헛소리의 교묘한 콜라보라는 글귀를 들먹일 만한 사람은 맹세컨대, 이 황궁에 샤를 황태자밖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호즈는 그날 이후로 제가 모시는 황태자를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했다. 마리아 황녀님께서 절대 의심하지 못하시도록, 독서를 정말 열심히 하고 계시다고 말씀드려야지. 그렇게 누구도 믿지 않을 거짓말을 연습하며 황태자에 대한 충심을 다짐했건만, 그 원대한 꿈은 귀신같은 통찰력을 가진 마리아 황녀에 의해 산산조각 나버리고 말았다.

***

「샤를 소피아 엔스.」

샤를이 모후 다음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마리아 황녀였다. 클레멘타인 황비를 빼다 박은 듯한 엄격한 눈매는 그 따가운 눈총만으로도 샤를을 긴장시키는 힘이 있었다.

소년은 마리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척 딴청을 피우며 씨앗 위로 흙을 덮었다. 이번에 심는 씨앗의 이름은 라벤더였는데, 막내 황녀가 세상에 존재하는 허브들 중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 라벤더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샤를은 그녀의 눈총을 이기지 못하고서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마리아가 팔짱을 낀 채 샤를을 내려다보았다.

「이야, 오랜만이네. 누이.」

「그런 시정잡배 같은 말버릇은 누구한테 배웠어?」

전적으로 소년이 가진 천성에 불과했지만, 마땅히 설명해 줄 방법은 없었다.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서 한숨을 내쉰 마리아는 열려 있는 새장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건 또 뭐 하러 열어둔 거야?」

「답답해 보이길래.」

「오웬 교수 수업에는 왜 안 들어가는 거고.」

「배울 게 없으니까 그랬겠…….」

그때마다 이상하게 머리가 아팠다는 그럴싸한 변명을 생각해두고 있었는데, 마리아의 화술에 그대로 당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샤를의 머리 위에서 뛰어노는 몇 안 되는 사람에 속했다.

「…너무 쉽게 들켰네.」

그래서인지 샤를은 흙 묻은 손으로 제 머리를 헝클이며 짜증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새장 문에 시선을 고정한 마리아가 날카로운 투로 응수했다.

「그걸 왜 네가 판단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한낱 변명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맹세컨대, 그것은 그저 그런 변명 따위가 아니었다. 샤를은 가끔 오웬 교수의 수업을 들을 때마다 당장에라도 구토할 것만 같은 역겨움을 느꼈다. 그 인간의 발언에 동조하고 있는 머저리 새끼들을 볼 때면 그 감각이 더욱 맹렬해졌다.

그따위 멍청한 짓에 함께하고 있는 것보다야 차라리 밖으로 나가 검이라도 몇 번 더 휘두르는 편이 나을 텐데. 들고 있던 모종삽을 흙 위로 내던지며, 샤를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판단하지 않기에 행동하지 않는다. 행동하지 않기에 소리 내지 않는다. 소리 내지 않는 침묵은 그저, 약자에 대한 외면으로 기능할 뿐이다.」

「…….」

「이런 책을 쓴 사람이 평민은 개나 다름없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는데, 그걸 나보고 듣고만 있으라는 거야?」

샤를은 가끔 이 세상이 저를 시험하는 것만 같다는 기분을 느끼고는 했다. 분명 오웬 교수의 책에 감명받아 강의를 신청한 것인데, 막상 그 수업에서 가르치는 내용들은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책들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단 오웬 교수뿐만이 아니었다. 교수진들에게 실망하면 할수록, 가쉰의 중심부가 썩어 들어갔다는 반문화적 학자들의 주장이 더욱 일리 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표정을 구기고 있던 샤를은 넌지시 들려오는 마리아의 목소리에 시선을 들어 올렸다.

「회피하는 게 방법이 될 수는 없어. 넌 도망쳤을 뿐이잖니.」

「그 모순을 지적해 봤자 돌아왔던 건 이상과 현실을 중추로 한 궤변일 뿐이었어.」

이미 몇십 번이나 비판해 봤던 문제다. 수업 때마다 손을 들고서 제 논리의 모순을 지적하는 샤를에게, 오웬 교수는 “서쪽에서 뜨는 해”와 같은 사람이라며 은근한 면박을 주고는 했었다.

마리아는 샤를의 머리칼 위에 묻어 있는 흙먼지들을 털어준 뒤 저 역시 소매를 걷고서 텃밭 안으로 들어갔다. 화원 한 켠에 마련되어 있는 텃밭은 본래 소피아 황후가 자주 사용하곤 하던 곳이었으나, 그녀의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하면서 관리가 소홀해지고 있는 중이었다.

샤를은 메마른 풀잎들을 볼 때마다 모후와의 추억이 자신을 떠나가는 듯한 짙은 외로움을 느꼈다. 마리아가 샤를이 덮고 있던 흙 위를 마저 두드리며 말했다.

「오웬 교수는 평민 출신 입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인물로도 유명해.」

「추잡한 쇼맨십일 뿐이겠지.」

「샤를. 누구에게나 모순점은 존재하지 않겠니?」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샤를은 그만 귀를 틀어막고 싶어졌다. 모순점이야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왜 그걸 내가 이해해 줘야 하냐고.

마리아는 부루퉁해진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그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느냐에 관한 거지.」

「모순 없이 사는 법을 가르쳐주는 교수는 없어?」

샤를이 텃밭 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마리아를 돌아보았다. 흙냄새가 가득 배어 있는 화원은 누이와 어울리지 않는 듯, 무척 잘 어울리기도 하는 청량한 공간이었다.

바깥 정원에 사과나무를 심겠다며 설쳐댔던 어린 시절, 사과나무 묘목을 들고 돌아다녔던 제게 식물을 다루는 법을 알려주었던 사람이 바로 마리아였다. 어떤 씨앗도 피어나기 전까지는 그 결실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듯, 응당 사람에게도 그래야 한다며 일러주던 마리아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그때와 같은 따뜻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 파르헬리 선생은 제삼국으로 건너가 전쟁고아들을 가르치고 계시다던데.」

「그럼 어떻게든 모셔와야겠네.」

「봐, 샤를.」

총명함으로 가득한 마리아의 푸른 눈을 볼 때마다, 샤를은 그것이 마치 지혜의 요람이라고 불리는 동방 어딘가의 해변을 닮아 있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 열악한 환경에서 몸소 뛰어다니는 교육자를 네 사심을 위해 빼앗아 오겠다고 생각하잖니?」

「제기랄. 할 말이 없어.」

「모순은 누구에게나 존재해. 그 간극을 메꾸려 노력하는 이들이 돋보이는 것일 뿐이지.」

둘 사이에 정적이 일었다. 말없이 흙만 매만지던 샤를은 결국 허탈하게 웃었다.

「나도 누이처럼 현명해지고 싶어.」

그러나 그건 마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저 역시 텃밭 위에 걸터앉으며 샤를 쪽으로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난 너처럼 용기 있고 싶구나. 행동하는 용기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병 주고 약 주는 거, 그게 누이 특기인 건 알지?」

매번 이런 식이었다. 마리아는 늘 생각지 못한 말로 샤를을 놀래켰고, 샤를은 그녀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흡수하며 지식의 근간을 마련했다.

그러니 신이 내린 황제감이든, 되바라진 애새끼든, 서쪽에서 뜨는 해든 간에 마리아에게 있어 샤를 소피아 엔스는 그저 좀 철이 없고, 불량하고,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 어린 남동생일 뿐이었다. 샤를은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아카데미의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한 오누이가 되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문득,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진 한 권의 책을 발견한 샤를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건 뭐야?」

「그게,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어쩐지 평소보다 더 밝아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걸친 마리아는 조금은 부끄러운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리아도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샤를은 웃고 있는 그녀가 마치 만개한 팬지 꽃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것 좀 호즈에게 전해주겠니?」

「호즈?」

그렇게 되묻는 샤를에게, 그녀는 비밀 이야기라도 일러주는 듯 조심스레 속삭였다.

「네가 내게 보냈던 그 아이 말이야.」

***

「이럴 줄 알았으면 몰래 팰걸.」

지금 와서 후회해 봤자 늦은 일이다. 사실 후회할 만한 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샤를은 화원 곳곳을 청소하라는 모후의 명령을 너무도 당당하게 받아들였다. 그거야, 애당초 잘못한 일이 없다고 믿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단지 저보다 좋은 성적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본인의 동생을 괴롭히고 있던 공작가 장남은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그는 황태자가 제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분위기를 바꾸며 동생의 어깨 위로 팔을 걸쳤다. 지성으로 유명한 셀번 가문이라더니, 순 사기꾼 새끼나 다름없는 모양새였다. 그들을 지나쳐 자판기까지 걸어간 샤를은 동전 몇 개를 집어넣고서 탄산음료를 꺼내 들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하. 저는…….」

그에 공작가의 장남은 안심하며 표정을 풀었다. 이내 그가 공손한 어투로 인사를 전하려던 때였다. 캔 뚜껑을 열자마자 곧바로 음료를 그에게 쏟아부은 황태자는 ‘수치도 모르는 게 어디서 귀족이라고 나불대?’라는 뜻깊은 한마디를 전한 후 빈 깡통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러니 셀번 공작이 대노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애지중지 싸고돌던 장남이라는데, 그 얼굴에 음료를 뿌리고 막말을 퍼부었으니 화가 날 만도 했겠지.

그 정도로 자식을 아끼는 인간이 동생을 그따위로 대하도록 내버려 둔다니, 그것 역시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체 귀족 새끼들은 왜 그렇게 생겨 먹은 거야?

짜증이 치밀어 오를 때마다 샤를은 그 간극을 메우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하던 마리아의 목소리를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황녀님께서는 누구보다 강하고 아름다우세요.」

그렇게 화원의 문을 반쯤 열고 발을 들여놓으려던 순간이었다. 작고 힘 있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에, 샤를은 곤란한 얼굴로 다급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어떡하지. 청소를 제대로 했는지 사람을 보내 불시 검문을 한다고 하셨는데.

결국, 기척 없이 문을 닫고 나온 샤를은 화원 입구까지 걸어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서로를 마주 본 채 입 맞추고 있는 두 사람을 다른 이가 목격하게 된다면, 그들에게 좋지 못한 일들이 생길 것이 분명했으니까. 영민하고 영악한 어린아이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선 제가 가진 권위가 때때로 많은 도움이 되고는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화원에 들어가려는 모든 하인들을 차갑게 물린 황태자는 턱을 괸 채 조금씩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까지 에세이를 써오지 않으면 대강당 청소를 시키겠다고 하던 한스 선생의 말을 기억하고는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두 눈이 너무나 무거웠던 탓이다. 샤를은 결국 졸음에 굴복하고서 눈꺼풀을 내렸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이 밀회를 끝내고서 화원 밖으로 나왔을 때는 청소 도구를 베개 삼아 잠을 청하고 있던 샤를이 빗자루 괴물에게 쫓겨 다니는 악몽을 꾸고 있던 즈음이었다.

그 후로도 샤를은 계속 화원 앞을 지키는 문지기처럼 행동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의도치는 않았으나 화원에 방문하는 시기가 겹쳐 그들의 만남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딱히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오히려 뿌듯하기까지 했다.

화원 너머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멎지 않도록 소년은 그곳을 방문하려는 모든 이들을 물리며 한가로움을 즐겼다. 그러다 화원 안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이제 막 도착한 척 인사를 건네면, 호즈는 놀라 동그래진 눈을 하고서 마주 인사하기 바빴다. 마리아는 그녀의 뒤에 서서 고맙다는 얼굴로 눈인사를 해올 뿐이었다.

한 쌍의 연인을 위해 열심히 일하던 샤를은 어쩌면 보디가드가 적성에 맞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진로에 대한 적극적인 고민 역시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 계절이 지나갔다.

「호즈.」

휴가를 다녀왔다고 했었나. 오랜만에 보는 호즈의 모습에 샤를은 반가운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쭈뼛거리면서도 제게 무언가를 건네는 호즈를 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따뜻함 비슷한 것이 피어올랐다. 샤를은 페르시안 고양이를 본떠 만든 듯한 작은 인형을 받아들며 웃음을 흘렸다.

「직접 만든 거야?」

「아뇨. 제 아버지께서 만드셨어요. 전하를 보면 흰색 페르시안 고양이가 생각나신다고.」

그게 무슨 뜻인 건가 싶었으나, 보기 나쁜 것은 아니었으니 딴죽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고마워.」

짤막하게 감사 인사를 전한 샤를이 인형을 제 셔츠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솜씨가 좋으시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내려 호즈의 손에 들려 있던 또 다른 인형 하나에 시선을 던졌다. 호즈가 급히 등 뒤로 손을 숨기기는 했지만,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뒤따라오는 것이 먼저였다.

「그건 누이한테 줄 거지?」

샤를은 호즈의 뒤를 내다보는 척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개구진 표정과 천진난만한 목소리에는 한여름을 닮은 청량함이 잔뜩 실려 있었다.

「으앗, 그게…….」

「예쁘다. 이름이랑 잘 어울리는 인형이야.」

마리아의 미들 네임이 로즈였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장미꽃을 물고 있는 사자 인형은 누가 봐도 딱 마리아 같았다. 하하. 샤를은 유쾌한 듯 웃으며 그 인형을 받아 든 마리아의 모습을 상상했다. 확실히 닮은 동물을 고르라면 사자 쪽이기는 해. 소년이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둘 다 고양잇과 동물이라는 것이 그들이 오누이임을 증명해 주는 것 같았지만, 호즈는 그저 미소 지으며 샤를의 말간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휴가를 맞아 오랜만에 만났던 남동생보다도 더 친근함이 느껴지는 사람이 바로 제국의 황태자라면, 그건 아마 누구에게도 신빙성을 얻지 못할 그녀만의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호즈는 작은 목소리로 운을 뗐다.

「전하께서는 참 남다르세요.」

또한 호즈는 소년이 남다른 것을 넘어 무척 특별하기까지 하다고 믿었다. 황태자로서의 자질을 타고났으나, 그것은 모두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황태자다움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실은 호즈의 눈에 샤를의 모습은 그다지 황태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나이대의 평범한 동생들처럼 보였지. 물론 아주 재능이 많고 총명한 데다가, 찬사가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그런 범상치 않은 동생 말이다.

「그런 말 많이 들어.」

그러자 샤를은 삐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이유는 이어진 말에 따라 충분히 추측이 가능했다. 소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뱉었다.

「싹수 노랗다는 걸 돌려 말하는 거잖아.」

「절대 아니에요!」

화들짝 놀란 호즈는 손사래까지 쳐가며 부정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던데.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저렇게까지 아니라고 하니 구태여 더 파고들지는 않았다. 황태자의 눈치를 살피던 호즈가 결심한 듯 손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누가 그런 말을 하거든, 선민의식에 찌든 얼간이 주제에 어디서 큰 소리냐고 혼쭐을 내주세요.」

긴장으로 가득한 눈이 그녀가 진심이라는 사실을 대신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진작 더 심한 막말로 응수하고는 있었으나, 산통을 깨고 싶지 않았던 샤를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럴게.」

소년이 덤덤하게 대답하자 호즈는 긴장으로 굳어 있던 몸에 힘을 풀며 강조했다.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를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냥 얼간이 말고 바보 얼간이라고 해주셔야 돼요. 아셨죠?」

처음 마주쳤을 때보다 훨씬 편하고 자연스러워진 그 모습에 황태자는 그녀가 점점 제게 마음을 열어주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작게 웃음 지었다. 누군가에게 신뢰를 받는 것만큼 벅찬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꼭 누이 한 명이 더 생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저 같은 평민에게도 무시 하나 없이 이렇게 살갑게 대해주시는 걸 보면, 전하께서는 정말 좋은 황제가 되실 것 같아요.」

그러나 이번에는 성급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좋은 황제라. 글쎄. 샤를은 제게 황제감이라 칭송하는 여러 작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사실 불신보다는 불편함에 더 가까웠는데, 감히 지금의 황제 폐하보다 더 좋은 황제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현 황제는 공공선의 발전을 위해 힘쓰는 동시에 친서민적인 정책을 펼치는 것으로 제국민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성군이었다. 내가 과연 아버지보다 더 좋은 황제가 될 수 있을까. 그 이유를 떠나서도, 샤를은 자신이 황제감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호즈. 폐하께서 살아계실 때 그런 말을 하면 황실 모독죄로 벌금 물걸.」

내가 왜 황좌 따위에 묶여 있어야 하는데? 소년은 오히려 자유로운 방랑 기사가 되고 싶었다. 초대 황제 역시 방랑 기사 출신이라 했지 않나. 주군을 섬기며 살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언젠가 꼭 황궁을 떠나 그처럼 자유롭게 바다를 건너 사라지고 싶다는 꿈은 있었다.

황태자고 나발이고, 온갖 부조리와 불평등을 눈감아야 하는 높으신 분들의 책임과 직무 따위에도 일절 관심이 없었다. 누군가는 그런 소망과 신념을 배가 부른 것일 뿐이라 폄하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환상에 빠진 싹수 노란 꼬맹이라며 조롱하기 바빴다.

그들의 목소리를 떠올리고 있던 샤를은 제 한마디에 화들짝 놀라 기함하는 호즈의 모습을 유쾌하게 바라보았다. 황실 모독죄라는 단어에 어지간히 당황한 모양인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그런 것이 아니라며 설명하는 모습이 참 올곧게 재미있었다. 어차피 듣는 사람도 자신밖에 없는데 뭘 저렇게 걱정하는 건지 모를 일이다.

내 또 다른 누이는 정말 한결같은 사람이야. 샤를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가 준 인형을 손에 쥐었다. 어쩐지 인형에게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던, 화창한 햇살 밑의 오후였다.

***

저 새끼만 아니었더라도 완벽한 하루가 됐을 텐데. 샤를은 애지중지 기른 사과나무를 발로 걷어차 사과 몇 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불청객을 바라보며 익숙한 듯 표정을 구겼다.

「레온하르트?」

머리색이 달라져 못 알아볼 뻔하긴 했지만, 역시나 그가 맞았다. 발밑으로 굴러 떨어진 사과 하나를 집어 든 레온하르트는 대충 소매에 사과를 문지른 후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입가를 타고서 과즙이 흘러내렸다.

「양심 없는 새끼.」

그에 샤를이 욕설을 중얼거렸다. 저 새끼는 뭔데 내 사과를 훔쳐 먹는 거야? 얼굴 위로 못마땅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배다른 동생을 구경하던 레온하르트가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잘 익었네.」

아무래도 저 새끼는 태어날 때부터 양심이란 코드를 빼놓고 살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샤를은 첫 묘목을 심어 놓았던 그날, 오밤중의 불청객이 난입해 그 위에 납을 뿌려 놓았던 사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정황상의 증거로 보았을 때 그건 레온하르트의 짓이 확실했다. 그러나 아무도 제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억울함에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열심히 길렀나 봐?」

레온하르트의 물음에 샤를은 귀를 후비며 딴청을 피웠다. 웬 양아치 같은 태도를 바라보던 레온하르트가 헛웃음을 뱉었다. 샤를이 어서 꺼져버리라는 듯한 경멸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여긴 뭐 하러 왔어?」

늘 입게 달고 사는 축객령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여상히 답했다.

「너 보러 온 건 아니니까 기대하지는 말고.」

「애플 허니가 그러는데, 당장 눈앞에서 꺼지래.」

「애플 허니?」

설마 저 사과나무 이름은 아니겠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린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소년의 당당한 얼굴을 보니 아마 제 추측이 맞는 것 같아서였다.

기행을 일삼는 제국의 황태자에게는 어딘가 독특한 구석이 잔뜩 있었는데, 레온하르트는 그것이 썩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봤자 황실이라는 온실 속에서 자란 고분고분한 도련님이 아니신가. 그러니 저렇게 온갖 곳을 뒤집어 놓고 다녀도 무사할 수 있는 것이겠지.

「결국 다 자랐구나. 저 나무.」

레온하르트가 나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화의 주제를 틀었다. 높게 뻗은 사과나무는 지금보다 더 어린 나이였던 샤를이 하늘로 가는 사다리 대신 키워 보겠다며 구해왔던 그 나무가 맞았다. 샤를은 레온하르트가 한 입 베어 물었던 사과를 도로 뺏어가며 울분에 차 말했다.

「네가 납 뿌려 놓는 바람에 퍼스트 애플 허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어.」

「무슨 소리야? 아직도 그날만 상상하면 마음이 찢어지는데.」

「가증스러운 새끼.」

가면 갈수록 말버릇이 나빠지고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황실은 황태자 교육을 어떻게 시키고 있는 건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예의 없는 동생의 머리통을 잡아 누르며 두피를 지압했다. 아악! 억센 손아귀에 붙잡힌 샤를이 소리를 질러댔지만, 그는 한순간도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머리통 안을 좀 깨끗이 비워주어야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깨우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한참을 시달리고 나서야 자유를 되찾은 샤를이 눈물 고인 눈으로 레온하르트를 노려보았다. 사실 머리가 엄청 시원해지긴 했는데, 그건 곧 죽어도 말하지 않을 진실 중 하나에 해당했다.

「황후 폐하께 인사만 드리고 갈 거야.」

저를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샤를을 단번에 무시한 레온하르트가 일상적인 안부를 전하듯 설명했다. 그러자 샤를은 의아한 듯 눈을 치켜떴다.

「황후 폐하를?」

「입학할 수 있게끔 성씨를 빌려주셨으니, 감사 인사 정도는 드리고 가야 마땅하지.」

사생아로서 성씨를 가지지 못한 레온하르트는 본래 신분이란 것도, 신원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를 가엾이 여긴 소피아 황후가 제 본적인 셀린느(Salleanne)가의 성씨를 빌려주지 않았더라면 입학은 고사하고 입학시험조차 치르지 못했을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샤를이 관심 있는 것은 제 어머니가 그에게 성씨를 빌려주었다는 믿기 힘든 사실 쪽이 아닌 모양이었다. 잠시 말을 멈춘 것이 분명 꿍꿍이가 있어 보인다. 레온하르트의 예상대로, 샤를은 의도가 한껏 담긴 작은 목소리를 꺼내놓았다.

「나도 가도 돼?」

「어디를.」

「왕립학교 입학식.」

그러고 보니 쟤는 그런 쪽에 미쳐 있었지. 그는 어디선가 삼류 소년만화를 구해와 제게 자랑질을 해대고는 하던 샤를의 모습을 떠올렸다. 입학식이 뭐 별거라고.

그러나 그 별거 아닌 자리에 황태자를 초대했다간 분명 별거 있는 자리가 될 것이 훤했으니, 레온하르트는 알아서 제 동생의 소망을 짓밟는 편을 택했다.

「하하. 말이라고 해?」

「진짜?」

「응. 당연히 싫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샤를은 공격적으로 되받아쳤다.

「넌 내 입학식에 와서 사진까지 찍어갔잖아?」

「그때는 네가 지금보다 훨씬 작고 귀여웠으니까. 이런 양아치 새끼로 클 줄은 몰랐거든.」

「사기꾼 주제에 누가 누구보고 양아치라는….」

진짜 양아치는 사과나무에 납을 잔뜩 뿌려 놓고 도망간 저 새끼였다. 샤를이 억하심정을 담아 논리정연한 반론을 펼치려던 와중이었다.

뒤편에서부터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음에 소년은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시름 실린 한숨을 내쉰 레온하르트가 샤를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그는 하필이면 이런 상황 속에서 황태자와 한자리에 있게 된 자신의 처지를 가엾이 여기며 말했다.

「무시해.」

「……놔.」

샤를은 제 앞에 펼쳐진 광경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그를 밀어냈다. 물론 레온하르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전하! 전하,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끌려가던 여인이 황태자를 발견하자마자 크게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괴로운 비명 소리에 듣는 이의 마음마저 고통스러워지는 듯했으나 그건 지금의 상황과는 별개의 문제에 해당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끼어들어선 안 되는 분위기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여인의 팔을 잡고 있는 이들이 황제의 친위대라고도 불리는 황실 기사단의 사람들이었으니까.

레온하르트는 제 손을 뿌리치려는 황태자를 향해 나지막이 읊조렸다.

「저 하녀, 네가 책임질 자신 있어?」

그럴 리가 있나. 레온하르트는 대답하지 못하는 샤를을 보며 비웃음을 삼켰다. 누구도 황제를 거역할 수는 없다. 그것이 설령 그 뒤를 이어 제국을 차지하게 될 황태자라고 해도 말이다. 애당초 황실에서 누군가를 지킨다는 생각은 미련하기 그지없는 소망일 뿐이었다.

지키려 했다면 이딴 지긋지긋한 새장 안에 가둬놓아서는 안 됐지. 그러나 레온하르트의 상념을 깨부수듯, 샤를이 그 손을 떨쳐내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호즈야.」

「……뭐?」

「하녀가 아니라, 호즈라고.」

처음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저를 밀어내고서 여인을 향해 달려가는 시작하는 황태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레온하르트는 넋을 놓듯 그 뒷모습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 느낀 것은 절망적일 정도로 속이 쓰린 패배감이었다.

그는 헛웃음을 뱉으며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치기 어린 황태자는 결국 저를 부르는 하녀를 향해 숨이 차도록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빌어먹을. 책임질 자신도 없는 주제에.

이제는 인정해야만 했다. 레온하르트는 제 싹수 노란 이복동생이 누군가에겐 귀감이 될 만한 성정을 타고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년의 청아함은 언제나 올곧을 정도로 푸르렀다. 황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기에, 역설적으로 더더욱 황좌에 어울리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발을 들어 올려 떨어진 사과를 짓밟아 뭉갰다. 어머니를 무력하게 잃어야만 했던 그 시절의 자신처럼, 힘 없이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높게 자란 나무가 그를 위로하듯 나뭇잎을 떨어뜨렸으나 그 무엇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저 자신에게 구역질이 나 미칠 것 같았다.

샤를 소피아 엔스는 언제나 그를 그늘 밑에 밀어 넣었다. 두려움 한번 내비치지 않고서 태양을 향해 달려가는 그 모습을 볼 때면, 레온하르트는 어떻게든 제 동생을 미워하기 위해 노력을 거듭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그는 눈이 부셔도 절대 눈꺼풀을 내리지 않았다. 캄캄하게 찾아든 암흑 속에서, 소년이 누구보다 환하게 빛나고 있으리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가쉰 어디에도 황제의 눈을 피해 갈 수 있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제아무리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비밀스러운 만남이었다고 해도 그랬다.

그러니 예정되어 있던 결과였을지도 모르지만, 그 당연한 것을 그저 당연한 것으로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하는 황실의 이단아가 바로 가쉰의 황태자였다.

질주하는 심장이 상황에 대한 불안함을 토해낸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불길함에 더 가까운 감정이었다. 소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기사들의 손에 붙잡혀 있던 호즈가 그런 샤를을 보며 애타게 소리쳤다.

「전하, 전하!」

어째서 저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건데, 쟤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샤를은 기사들을 헤치고 나아가며 호즈에게로 다가섰다. 잠시 시선을 교환하던 그들이 그녀의 여린 몸을 더욱 강하게 옭아매며 샤를의 시야를 가렸다.

아무리 황태자가 무예에 소질을 보인다고는 해도, 아직 열넷밖에 되지 않은 어린 무인이 황실 기사단을 상대로 일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황제를 닮은 새파란 눈이 노기를 띠며 그들에게 명령했다. 그 눈에 두려움이나, 망설임 따위는 엿보이지 않았다.

「손 떼.」

기사단은 황제의 것이다. 그들이 주군으로 삼아 따르고자 하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로 황제였다. 그러나 황제보다도 더 찬란한 금발과 벽안을 가진 황태자를 보고 있으면, 마치 그것이 어떤 명령이든 따라야 할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당장 그 손 치우라고.」

샤를이 한 번 더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고양된 감정이 잔뜩 묻어져 나오는 목소리였지만, 그 상황 속에서도 침착함을 지키려 하는 것이 과연 세간의 평가대로 황제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러나 기사들은 그가 아닌 황제의 명을 따르기 위해 앞을 막아설 뿐이었다.

그들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폐하의 명이십니다.」

폐하? 샤를은 제국의 황제이기 이전에 제 아버지인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성적이고 냉소적인 사람이었지만, 죄 없는 이를 문책하고 벌을 줄 정도로 자비롭지 못한 사람은 아니었다. 죄를 지은 후 그 책임을 무고한 평민에게 떠넘기곤 했던 귀족들의 만행을 알게 된 후부터는 국가 단위에서 변호인을 지원해 줄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도 하지 않았는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황제의 업적을 대라면 하루 반나절을 소비해야만 그 끝을 볼 수 있을 것이 자명했다. 황제라는 지위에 얽매어 자유를 잃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과는 별개로, 샤를은 제 아버지이자 가쉰의 군주인 현 황제를 언제나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었다.

「전하!」

그때, 기사들의 손에서 빠져나온 호즈가 간절히 황태자의 다리를 부여잡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기사 한 명이 혀를 차며 여인을 도로 데려가려 했으나, 샤를이 곧바로 호즈의 위에 제 겉옷을 둘러주며 그 손을 저지했다. 누구도 황태자의 소지품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분노가 담긴 형형한 눈빛이 그들을 향했다.

「살려달라는 부탁은 드리지 않을게요. 그러니, 그러니 황녀님께 이것만이라도 전해주세요. 이것만 전해주시면 돼요. 그리고 저한테 미안해하지 말라고, 죄책감 느끼지 말라고도 전해주세요.」

호즈가 눈물 젖은 얼굴로 말했다. 울음을 참아내려 하는 그 목소리는 너무도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무수히 연습해왔던 말인 것처럼, 그녀는 끊김 하나 없이 연속적으로 말을 이었다. 간헐적으로 떨려 오는 어깨가 너무도 처량하게 느껴졌다.

「호즈는 두려워하지 않았으니까, 황녀님도 두려워하지 마시라고…, 흐윽. 사랑, 사랑한다고. 언제나 사랑한다고.」

「호즈, 호즈! 진정해. 응? 살려달라는 게 무슨 소리야. 네가 왜 죽어. 뭘 잘못했다고.」

이런 상황이 당도하게 될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말은 부적절했다. 두 사람이 동화책의 행복한 결말과도 같은 끝을 보게 될 것이라고는 소년 역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끝이 있는 관계라고 해서, 누군가 낭떠러지 끝을 향해 달려갈 필요는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허락되지 않을지언정 그 감정과 기원마저 말살하려 들 줄은 몰랐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샤를은 그간 스승들에게 배워왔던 왕도의 정의에 대해서 떠올렸다.

무릇 군주 된 사람이란 민(民)을 위해 생각하고, 그들의 처지를 고려하며 또한 고민하라고 떠들어대지 않았나. 황제의 자리는 그저 그들을 대신할 뿐, 무엇도 대표할 수 없는 자리라고 떠들어댔던 것도, 기사도에 따라 연약한 자의 목소리를 대신할 수 있도록 힘을 길러야 한다고 했던 것도! 그게 제국을 위한 가르침이라고 했잖아. 그런 황제가 되어야만 한다고!

「다음 생에는 꼭, 해가 서쪽에서 떴으면 좋겠어요.」

간신히 눈물을 그친 호즈는 황태자의 손에 인형 하나를 쥐여 주며 속삭였다. 누이를 닮았다고 생각했던 그 사자 인형이었다. 몇 번이고 짓밟힌 자국이 있는 작은 인형을 바라보며, 호즈가 힘없이 웃었다. 그녀는 눈물 흘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샤를은 그녀가 무고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준 샤를이 목멘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부탁했다. 비통한 목소리였다.

「안 돼. 안 돼…, 호즈.」

「그런 세상이 오면 저도 황녀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겠죠?」

지금도 그럴 수 있다. 지금도 그럴 수 있어야만 한다. 너는 누이와 함께 살아갈 수 있어. 목줄기를 틀어쥐는 듯한 고통스러운 감각에 시야가 흐리게 번졌다. 어째서? 어째서 그녀가 고초를 겪어야만 하는가? 어째서 죄 없는 이가 고통을 느껴야만 하는데?

그 무엇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 순간 샤를은 그녀와 함께 웃고 있던 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제가 본 그 어떤 모습보다 행복해 보였던 누이의 얼굴을.

이윽고 호즈가 미련을 버렸다는 듯,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좋은 황제가 되어주세요. 전하.」

아니. 황제 따위 되고 싶지 않았다. 너 하나 구하지 못하는 내가 무슨 자격으로 황제가 될 수 있겠어. 샤를은 기사들을 물리며 그녀의 몸을 잡아끌었다.

「호즈, 아냐. 그렇게 말하지 마. 넌 아무 잘못도 없어. 아무 잘못도 없다고.」

그러나 무전을 통해 연락을 확인한 기사는 빠르게 다가와 그녀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예정대로 집행하라는 명이십니다.」

샤를이 어떻게든 그 손을 가로막으려 달려들었지만, 그 옆으로 다가온 다른 기사들에 의해 양팔을 붙잡힐 수밖에 없었다. 호즈는 끌려가면서도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마 소년이 저로 인해 죄책감을 가지지 않기를 바라는 선량한 동기로부터 나온 행동일 것이다.

그럼에도 샤를은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목이 쉴 때까지 소리쳤다. 호즈, 호즈! 풀 위를 신발 하나 신지 않고서 걸어가는 그녀의 맨발을 바라보며, 소년이 애원조로 명령했다.

「놔, 놓으라고! 걔 몸에 손대지 마. 손대지 말라니까!」

「전하. 이제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어린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그 몸을 가로막은 채 서 있던 기사 한 명이 상황을 안타까이 여겨 침음성을 삼킬 뿐이었다. 저 여인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황제의 명에 불복할 수 있는 자는 가쉰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소리쳐 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황태자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칠 때마다 그들은 난처해하며 안색을 굳히기 바빴다.

「황태자의 명이다! 그 여인한테 손대는 새끼는 내가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 놔!」

「전하. 폐하의…….」

「놓으라고!」

이딴 게 황제의 명령이라면 그런 황좌 따위 욕심내지도 않을 것이다. 힘없는 자를 지켜주기는커녕 그를 외면하고 핍박하는 자리가 황제의 자리라면, 제게 주어진 책임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부정해 줄 용의가 있었다. 그들의 손을 뿌리쳐 낸 샤를이 호즈가 사라진 길목을 따라 달려가려던 순간이었다. 검등을 들어 소년의 목 뒤를 내려친 남자는 쓰러지는 몸을 받아 들며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쓸데없는 꿈을 꾸시는군.」

***

그대로 근신에 처해져 방에 갇히게 된 것이 벌써 며칠째였다. 그동안 샤를은 어떤 음식도 입에 대지 않고, 그저 물로 목을 축이며 버텨낼 뿐이었다. 끌려간 호즈를 생각하면 제대로 잠을 이룰 수조차 없었다. 한밤중의 달빛은 자꾸만 그 상황을 떠올리도록 만들었다. 무엇도 지키지 못했던, 그래서 너무나도 끔찍했던 그 상황을.

처음 보는 얼굴의 하인이 음식을 권했지만, 소년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무시한 채 맹물을 들이켰다. 배고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분노만이 마음속 한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수업과 수련 모두가 중지되었다. 근신 명령으로 인해 방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는 초라한 꼴이 되어버렸지만, 샤를은 아직까지도 황제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 명령 또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근신 명령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방 안에 갇혀 있기에는, 샤를 소피아 엔스가 타고난 그 성정부터가 반골적이기 그지없었다는 뜻이다. 누가 뜻대로 얌전히 굴어주겠대? 그렇게 생각한 샤를은 이 망할 쇠창살 안을 부수고 걸어 나갈 계획을 세웠다.

만약 누군가 미리 계획을 엿들었다면 절대 안 될 일이라 두 손 두 발을 들고 말려댔을 테지만, 근신 명령이 떨어진 방 안에는 생필품을 전달할 하인을 제외하고서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었다. 실은 누군가 곁에 존재했다고 해도 일러주지 않았을 계획이긴 했다.

어서 빨리 누이를 만나야 한다. 방 안에 있는 물건이란 물건들은 전부 다 밖으로 끌어내진 탓에 그저 침대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더욱 티가 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베개를 들어 이불 안에 집어넣은 샤를이 입꼬리를 올리며 몸을 풀었다.

창문으로 걸어간 소년은 끔찍하게 높은 아래를 내려다보면서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쉽겠네.」

망설임 없이 창문 위를 넘어간 샤를이 발끝에 힘을 주며 호흡을 골랐다. 머릿속에는 오직 누이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겉옷 주머니에 넣어둔 인형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샤를은 누구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모한 탈출을 시도하기까지 이르렀다. 여기서 떨어져 죽는다고 해도 후회는 없다. 선택을 했다면 응당 대가를 치러야 함이 마땅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제 선택이 틀리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발끝에 잔디가 닿은 시점에서는 칼날 같은 바람에 의해 여린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샤를은 무사히 땅에 착지한 것을 기념하며 가볍게 손을 털었다.

지금쯤이면 아마 식사를 가져온 하인이 제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서 야단법석을 떨어대고 있을 터이니, 한시라도 빨리 누이를 만나러 가야만 했다. 당연하다는 듯 마리아의 침실로 향하던 샤를은 문득 몸을 멈추고선 방향을 틀었다.

「누이.」

역시나. 화원 앞에 다다른 샤를이 가파른 호흡을 내쉬며 마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호즈와 함께 있을 때의 마리아는 언제나 편한 옷차림이었으나, 오늘은 그녀를 기리듯 무릎까지 오는 검은 원피스를 입은 채였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주렴.」

무언가를 내려다보고 있던 마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목소리를 냈다. 그녀의 손에는 몸을 늘어뜨린 채 죽어 있는 작은 새가 안겨 있었다.

「……누이.」

「아무것도, 내게 전하지 말아 줘.」

사자 인형을 꺼내려던 손을 다시금 집어넣은 샤를은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샤를의 눈에는 그녀가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평소처럼 덤덤한 얼굴이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목이 메는 듯, 마리아는 자꾸만 말 중간중간 호흡을 멈추었다.

가련한 새를 바라보고 있던 마리아가 제게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며 서늘한 시선을 던졌다. 그에 샤를은 걸음을 멈춘 채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리아는 저조차도 감정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지 말아야 할 걸 알면서도, 널 미워하게 될 것만 같아.」

그 순간 샤를이 느꼈던 것은 그녀에 대한 실망도, 안타까움도 아닌,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분노였다. 호즈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무력감은 소년을 조금씩 좀먹어 들어갔다. 떨리는 손끝을 잡아 누르며 감정을 억제하려 했으나 참아지지 않았다.

차라리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된 그 순간부터 바로잡는 것이 나았을까? 그러나 그 순간 두 사람이 느꼈을 따스한 행복을 빼앗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떤 선택을 했어야만 하는 것인지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었기에, 샤를은 결국 두 눈을 내리감으며 자신을 책망하는 편을 택했다.

「날개 꺾인 새는 새장 문을 열어두어도 멀리 날아가지 못해.」

열려 있는 새장 문을 응시하던 마리아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지난번 샤를이 열어두었던 그 새장이었다. 그러나 새는 날아가지 않았다. 더는 날갯짓을 하지 못하도록,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날개가 꺾여버린 가련한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황실에 오는 모든 동물들은 그랬다. 새는 날개를 꺾였고, 네발 동물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뽑혔다.

「소리 없이 퍼덕이고 퍼덕이다가, 결국 이렇게 서서히 목숨이 끊어질 뿐이지.」

허나 너는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이지 않니. 마리아는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제 동생을 돌아보며 쓸쓸히 미소 지었다. 소년은 장차 이 황궁의 주인이 될 사람이었다. 그녀는 한때, 저와 시선을 맞추지도 못하는 어린 동생이 제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고 느꼈던 적도 있었다.

내가 여인이 아닌 사내였더라면, 황비가 아닌 황후의 품에서 태어났더라면, 아니.

「샤를. 내가 너였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내가 너였더라면.

「그 아이를 지킬 수 있었을까?」

무어라 대답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고통스러울 정도로 목이 멘다는 느낌만 가득했다. 황궁에서 죽어간 새를 황궁 안의 화원에 묻어준다는 것 역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고작 새 하나를 묻어주러 황궁 밖을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기야, 그저 쓰레기장에 버려질 운명이 되는 것보다는 흙 안에 묻혀 태초의 넋으로 돌아가는 편이 훨씬 더 나은 결말일 테니. 마리아는 날개 한번 펼치지 못하고 죽어간 새를 위해 짧게 기도했다. 침묵을 끝낸 그녀가 새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뒤돌아섰다.

「황제라면 모를까. 다 쓸모없는 망상이겠지.」

그 말에 간신히 고개를 든 샤를은 입술을 짓씹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누이가 그런 얼굴을 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괴로워하지 마. 네 탓이 아냐.」

마리아의 목소리는 전과 같이 따스했다. 그러나 그녀의 푸른 눈은 아니었다. 샤를은 온갖 감정이 요동치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피해갈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모든 것이 그저 저의 책임인 것만 같았다. 마리아는 애써 미소 지으며 샤를을 향해 걸어왔다.

「내가 황궁을 떠나면, 방 안의 책들은 전부 네가 가지고 가줘.」

저보다 훨씬 더 지옥 같은 고통을 겪고 있을 터인데, 그 감정 한번 토해내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샤를은 끊임없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만약 훗날에라도 그 아이를 만날 수 있게 된다면……, 그 책들을 전해주겠니?」

「싫어. 누이가 직접 전해.」

「샤를.」

「곧 떠날 사람처럼 그렇게 말하지 마. 누이.」

샤를 소피아 엔스는 가쉰을 건국한 초대 황제처럼 방랑 기사가 되고 싶었다. 그곳이 어디든 간에 자유롭게 떠돌며 많은 경험들과 부딪힐 수 있는, 그런 기사가 말이다. 황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러나 영민한 소년은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

「졸업을 마친 황녀와 황자들은 황궁에 남아있을 수 없다는 거 알고 있잖니.」

「제발…….」

「예정된 일이었을 뿐이야.」

책봉식 당일, 저를 바라보던 마리아의 눈은 한없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이 착각이 아니란 것쯤은 바보가 아니고서야 누구나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제게 미소 지었다. 마치 두려워하지 말라는 듯이. 소년의 하얀 볼을 타고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샤를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마리아에게 떨리는 목소리를 건넸다.

「울지 마, 누이.」

「울고 있는 건 너인걸. 샤를.」

고운 얼굴 위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속에는 너저분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지 못하겠는 듯, 마리아는 표정을 감추려 고개를 돌렸다. 샤를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누이가 우는 걸 보니까 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아.」

그래. 그랬었지. 신의 농간이라고 생각했던 네 탄생에는 그만한 이유가 존재했더랬다. 모두가 소년을 보며 위대한 군주가 될 것이라 칭송했다. 주변을 개의치 않는 당돌한 행동이나 태도를 떠나, 황태자를 가르쳐 본 적 있는 스승이라면 누구나 입이 마르도록 그 재능과 성정을 칭찬하기 바빴다. 그들 모두가 소년을 성군의 재목이라 불렀다.

지금 이 순간마저도 제 아픔을 대신해 눈물 흘리고 있는 동생을 바라보며, 마리아는 그 얼굴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따뜻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샤를. 샤를 소피아 엔스.

「넌 좋은 황제가 될 거야.」

하지만 누이. 난 빌어먹을 황제 따위 되고 싶지 않단 말이야. 샤를은 저를 지나쳐 걸어가는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저 메이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눈물을 떨구는 것만이 소년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약혼식은 숨이 가쁠 정도만큼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고요했던 황궁에는 오랜만에 생기가 흘러넘쳤다. 황궁의 모두가 하루 앞으로 다가온 약혼식을 위해 분주히 뛰어다녔다.

가쉰의 1황녀인 마리아 로즈 엔스의 약혼 상대는 화언의 왕자였다. 역사 속의 순간들을 잊지 않겠다는 이유로 칭제 건원을 하지 않은 화언국이었으나, 그 위상만큼은 이미 여느 제국들만큼이나 거대하기 그지없었다. 보통의 황녀들이 제국 내의 귀족들과 혼인을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례적일 정도로 파격적인 약혼임이 틀림없었다. 혼인이 성사되기만 한다면 마리아 황녀는 곧 왕자의 아내, 즉 왕자비로 즉위하게 되는 것이었으니까.

안타까운 것은 그날 이후로 샤를과 마리아 사이의 대화가 전무할 정도로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두 사람 중 누구도 먼저 말을 건네지 않아서였는데, 한쪽이 죄책감으로 인한 도피에 가까웠다면 다른 한쪽은 책망하게 될 것이 두려워 의도적으로 만남을 기피하는 것이 분명했다.

화언국의 왕자가 푸른 드레스를 선물했다는 소식으로 인해 황궁 안이 떠들썩해졌을 무렵이었다. 수련이 끝난 후 검을 닦고 있던 샤를은, 지금까지도 전해주지 못한 호즈의 인형을 떠올리며 검을 내려놓았다. 인형은 줄곧 서랍 안에 넣어 두었다. 감히 꺼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화원 안에 가득한 허브 향기에 소년은 잠시 눈을 내리감았다.

관리사들이 새로 들여온 작은 새는 지난번에 죽은 새와 마찬가지로 날개가 비틀려 있었다. 새장 문을 열어두어도 날아가지 못하는 작은 새를 바라보며, 샤를은 드레스 얘기에 조용히 미소 짓던 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리아. 정말 괜찮아?

그러나 그녀가 괜찮지 않다는 것쯤이야 대답을 듣지 않아도 당연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화원 밖을 바라본 샤를은 또다시 새장을 향해 걸어갔다. 까만 눈을 가진 어린 새가 가련하게 날개를 퍼덕인다. 날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소년은 주저하지 않고 새장 문을 열어두었다. 부디 가냘픈 몸짓이 높다란 하늘로 날아갈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소년에게는 모든 이에게 바보 같다 손가락질 받는 그 소망 하나가 너무나도 간절하고 애틋했다. 그래서 왕자비 탄생에 대한 기대로 물들어가는 황궁 안에서도 저 혼자 서러운 표정을 지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이다. 마리아는 웃었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웃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래요?」

「난들 아나! 벌써 왕자 저하께서 도착하셨다는데, 방법이 있어야지 원.」

소란스러움으로 가득한 복도를 지나치던 마리아는 의문스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방 안에 모여 곡소리를 내고 있던 시녀들이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물렸다. 다들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살피는 것이 무슨 일이 터져도 단단히 터진 것 같았다.

마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

그러나 서로에게 대답을 미루기만 할 뿐, 아무도 당당하게 대답을 하지는 못했다. 결국, 그녀 스스로 자리를 옮겨 상황을 확인하려던 때였다. 바닥에 흩뿌려져 있는 천 조각 비슷한 것들을 발견한 마리아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게 무슨.」

화언국 왕자가 보낸 푸른 드레스가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그것뿐일까? 그가 보낸 하이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리아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시녀 한 명을 바라보자, 그녀는 깊이 고개를 숙이며 송구하다는 듯 대답했다.

「감시 카메라가 부서져 있어서 범인 색출이 어려울 것 같다고 합니다.」

그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못했다. 급히 고개를 끄덕인 마리아는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찢어진 드레스와 부서진 하이힐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불현듯 웃음을 터뜨리며 허리를 꺾었다. 하하! 커다란 웃음소리에 시녀들은 저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마리아 로즈 엔스의 안색을 살폈다. 혹시 실성을 해버린 건 아닌지 걱정스러워서였을 것이다.

그녀들의 의문과는 달리, 마리아는 그저 진심으로 유쾌함을 느끼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감시 카메라를 부순 채 드레스를 찢어 놓을 정도의 인간은 황궁 안에 딱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찢어진 드레스 위에 올려져 있는 작은 인형을 집어 들며 쓰리게 웃었다.

푸른 눈이 아릿한 그리움으로 물들어간다. 나의 호즈. 그 인형 위에 입 맞추며, 마리아는 저를 대신해 눈물 흘리던 가련한 소년의 모습을 떠올렸다. 샤를 소피아 엔스, 너는.

열려 있는 창 틈새로 푸릇한 여름의 산들바람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너는 좋은 황제가 될 거야.

두 사람의 계절은 그렇게 끝이 났다. 모종의 이유로 인해 황태자의 근신 명령이 더해지고, 화언국과의 약혼이 파기된 것은 그로부터 바로 하루 뒤의 일이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화원 안의 작은 새가 사라졌다는 소식 역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그런 계절이었다.

***

카메라 안에 틀어박힌다고 해서 저 고운 얼굴이 어디 갈 리 없지. 마린케이는 화면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황태자의 곱상한 낯짝을 바라보며 도시락을 열었다.

레온하르트의 요구대로 군것질거리를 한 아름 사 들고 오기는 했지만, 어째서 자신이 병 수발을 들고 있게 된 것인지는 아직까지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체 왜 보호자로 낙점된 건지도 모르겠고. 그러나 문병을 올 때마다 특대 사이즈의 회 도시락을 시켜주겠다는 그의 달콤한 제안을 거절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레온하르트는 풍선껌 세 개를 입에 집어넣은 채 커다란 풍선을 불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실시간 속보로 튀어나오는 황태자의 얼굴을 보며 기분이 나빠지기라도 했는지, 심통 난 아이처럼 표정을 굳히며 풍선을 터뜨려버렸다.

『재밌네요.』

마약 굴에서 정신을 잃고 업혀 나왔다는 소문이 차츰차츰 몸집을 불려가자, 황태자는 세간의 눈을 이기지 못하고 자진해 마약 검사를 하러 나섰다. 필사적으로 자신의 금발을 감추려 하던 레온하르트였으나 막상 추문에 휩싸이게 된 동생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그는 황태자가 기자에게 공격성 질문을 받을 때마다 휴대폰을 들어 그 광경을 촬영했다.

감식반 앞으로 몰려든 기자 떼 앞, 꽃처럼 화사하게 웃은 샤를이 천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답하는 것도 귀찮다는 듯한 투였다.

『제가 불법적인 일에 손을 댈 이유가 있나요?』

『모든 추문을 부인하시는 겁니까?』

『그냥……, 이해가 안 가서요.』

중얼거리듯 뒤따라온 한마디에 기자들 사이에선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거 생방송 아니었나. 마린케이는 역시나 이해할 수 없는 황태자의 행동에 고개를 저으며 초밥을 입에 넣었다. 아마 당분간은 황태자의 풀 네임이 검색어 순위를 장악하고 있을 터였다.

『합법으로 만들면 그만인 일인데, 내가 왜?』

그 즉시 레온하르트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또라이 새끼.”

욕설을 내뱉은 그는 휴대폰을 내동댕이치며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지극히 동의하는 바다. 마린케이 또한 연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깊은 공감을 표했다.

마약 검사를 받으러 간 것도 모자라, 기자들 앞에서 저따위 막말이나 지껄여대는 황태자의 모습은 간단히 말해, 관심에 미친 셀럽의 일상을 촬영해둔 다큐멘터리 같았다. 길고 긴 정적을 어렵사리 이겨낸 기자 한 명이 다시금 호전적인 질문을 꺼냈다.

『그럼 본인이 아닌 다른 황족의 소행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시도는 좋았지만, 이번에도 황태자의 한마디로 인해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글쎄요. 금발은 황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 누구보다 샛노란 금발을 가진 남자가 좌중을 돌아보며 쓰게 웃었다.

『그렇게 믿고 있을 뿐이죠.』

***

마약 검사를 끝낸 후 왕립학교로 돌아온 황태자는 후련해 보이는 걸 넘어 지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 내가 저 새끼한테 뭘 바라겠어. 마린케이는 교실 앞문을 열어젖히고서 제게 걸어오는 황태자를 보며 인생에 대한 회의를 느끼는 중이었다. 그가 가까워질 때마다 타 수련생들의 시선이 저를 난도질할 것처럼 따라붙었다.

본래 전쟁학 수업에서는 한 학기가 다 끝나갈 무렵이 되어서도 황태자의 머리칼 한 올 찾아볼 수 없었다. 덕분에 퍽퍽한 학교생활 속에서 유일하게 이 수업을 해방처로 삼을 수 있었는데, 그것 역시도 이제 끝을 맞게 된 것 같았다. 망할 금발을 여기서도 만나게 되다니.

억울함이 들었지만, 처세술을 익힌 마린케이는 마음과는 전혀 다른 간사한 목소리로 황태자의 안부를 물었다.

“잘 다녀오셨나 봅니다.”

“그러지 않기를 바란 것 같은 말투네.”

황태자는 들고 온 전쟁학 교재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짜증에 찬 한숨을 뱉었다. 야박한 연인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 마린케이를 향했다. 그가 타박하듯 물었다.

“왜 하필 오웬 교수 수업을 들어?”

“오웬이요?”

“…….”

“아아, 오웬.”

당연하게도 마린케이는 오웬이라는 이름을 가진 교수가 지금 이 수업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귀찮음을 무릅쓰고서 간단히 대답했다.

“필수 과목이라서 듣는 겁니다.”

어서 내쫓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였다. 안 그래도 황태자 새끼가 들어온 순간부터 줄곧 매서운 시선들이 저를 향해 불타오르고 있었다. 제발 알은척 좀 안 하고 꺼져주면 안 되려나. 그러나 황태자는 희한할 정도로 눈치가 빨랐다.

“마린보이, 오웬이 누군 줄 모르는구나.”

그는 실소를 터뜨리며 마린케이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고운 얼굴이 드러나게끔 머리를 쓸어 넘긴 미남자가 백지장이라도 씹어먹은 듯한 하얗고 청초한 겉가죽을 무기 삼아 마린케이를 바라보았다. 무결하기 그지없는 완벽한 외모였다.

누군가 탄성을 내뱉는 소리가 그들의 주변부를 중심으로 아득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마린케이는 어느덧 익숙해지기 시작하는 그의 천사 같은 외양에 속지 않으며 대답했다.

“저도 눈치는 있습니다. 이 수업 교수잖아요.”

그걸 한 학기가 다 끝나가는 이제 알았다는 게 문제의 요체였지만, 본인이 너무도 당당하니 무어라 해줄 말이 없었다. 황태자는 햇살처럼 눈을 접어 웃으며 마린케이에게 얼굴을 기울였다. 가까워진 거리감에 심장이 덜컹거린다. 그 말 못 할 감각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마린케이는 황태자의 벽안을 보란 듯 마주하기 위해서라도 있는 힘껏 눈에 힘을 줬다.

“역시 대단한 눈치야. 이스턴 경.”

“…….”

“얼마나 눈치가 좋으면 교수 이름도 눈치로 알까?”

미인계를 동반해 중얼거린 말치고는 상당히 영양가 없는 편에 속했음에도 황태자는 여전히 기특하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제는 저를 놀리는 게 틀림없는 그 장난질에도 심장이 쿵쿵 뛰어댔다. 빌어먹을. 짜증의 방향을 황태자에게로 돌린 마린케이가 사납게 물었다.

“갑자기 이 수업에는 왜 들어오신 겁니까?”

그러자 황태자는 마린케이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귓바퀴에서 느껴지는 간지러운 숨결에 허리 부근이 짜릿하게 튀어 올랐다.

“너랑 같이 들으면 좀 나을까 하고.”

“…뭐요?”

“어떤 개소리들이 오고 가도 네가 옆에 있으니 참을 만할 거 아냐.”

젠장. 차라리 이대로 심장 마비가 오게끔 가슴 위에 주먹질을 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면 당장 책상에 머리를 박아버려도 괜찮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마린케이의 머릿속을 독차지할 즈음, 앞문 쪽을 바라보는 황태자의 청명한 눈동자 속에 불쾌감이 깃들었다.

“오늘은 귀한 얼굴이 계시군요.”

인자한 미소를 만면에 띤 채 여러 권의 책을 들고 걸어온 중년의 교수는 황태자를 보며 외알 안경을 추켜올렸다. 자연스레 들고 있던 책들 전부가 바닥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그 당연한 광경을 멋쩍게 내려다보던 그는 허허, 사람 좋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귀한 분을 보니 손이 떨려서 원.”

말 한마디 한마디에 조롱이 듬뿍 담겨 있어서인지, 마린케이는 황태자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면서도 의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교수는 그렇게 교탁 앞에 서서도 황태자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황태자 역시 똑같았다. 사제 간의 팽팽한 기 싸움이 시작될 것을 알리는 전초전이었다.

‘그냥 튀었어야 했는데.’

그들의 공방전은 수업 내내 지겹도록 이어졌다. 마린케이는 하다못해 종종 저를 향해서도 “그렇지 않나요?”라며 공감을 종용하는 오웬 교수의 화법에 버티기 힘들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았다. 가쉰의 역사에 대한 성찰을 시작하자며 칠판 위에 ‘피의 역사’를 적어 놓은 그는 1분에 한 번꼴로 황태자를 도발하기 바빴다. 어째서 그간 황태자가 이 수업에 참여하지 않았는지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던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수업 이후, 모든 기력이 빨린 상태로 수련장에 향하던 마린케이는 제 시야를 가린 커다란 그림자를 눈치채고서 걸음을 멈추었다. 또 어떤 개새끼야.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여기서 더 귀찮아지기까지 하면 정말 누구 한 명이라도 객사시킬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 상태를 알 리 없는 건너편의 남자는 명령받은 대로 착실히 임무를 이행했다.

“마린케이 이스턴 씨 되십니까?”

세련된 정장을 차려입은 서늘한 인상의 남자가 딱딱한 말투로 묻는다. 마린케이는 아무 말 없이 외딴곳을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 왜 자신의 이름을 묻는 건지도 모르겠고, 만약 정말 볼일이 있는 것이라고 해도 부디 쉽고 간결하게 설명한 뒤 꺼져줬으면 좋겠다.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있는 마린케이에게 남자는 다시 한번 기계처럼 입을 열었다.

“모시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모시고 와? 마린케이는 자신의 볼을 긁적이며 답했다.

“직접 오라고 전했던 것 같은데요.”

“소란이 벌어지길 원치 않으십니다.”

“그런 분께서 잘도 세단을 보내셨군요.”

마린케이는 남자의 뒤에 번쩍번쩍하게 자리하고 있는 세단을 바라보며 한숨을 뱉었다. 하여간 귀족 새끼들은 지 꼴릴 대로 단어를 사용하는 게 특징인 것 같았다.

“거부하시면, 소란을 벌여서라도 모시고 오라고 하셨었죠.”

소란이고 나발이고 알 바 아니었으나,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존중해 줄 의향은 있었다. 화풀이를 할 곳이 필요했던지라 오히려 잘됐거니 싶기도 하다.

남자를 지나쳐 세단까지 걸어간 마린케이는 운전석 문을 우악스레 열어젖혔다. 조수석에 앉아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던 또 다른 사내가 허억, 귀신이라도 본 듯 숨을 들이켜며 다급히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마린케이는 그를 무시하며 비어 있는 운전석에 올라탔다.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그가 차창을 내렸다. 이내 시트에 몸을 기대고서는 불량한 어투로 묻는다.

“운전도 소란에 속합니까?”

허겁지겁 마린케이를 따라 달려온 서늘한 인상의 남자는 당황한 듯 표정을 굳혔다. 입 다물고 있는 걸 보면 멋대로 굴어도 된다는 뜻인 것 같았다. 마저 안전벨트를 착용한 마린케이가 백미러를 확인하며 운전대를 잡았다. 분부받은 대로 미리 눈가리개를 준비해 놓았던 조수석의 남자는 안절부절못하며 상황을 살폈다. 마린케이가 시동을 걸며 경고했다.

“지금이라도 안전벨트를 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무, 무슨.”

“운전을 좀 거칠게 하는 편이라서.”

입학 직전, 왕립학교 학생들은 운전면허 학원 등록이 무료라는 말에 마린케이의 모친은 귀찮아하는 그를 협박해서라도 학원으로 밀어 넣었다. 차를 살 생각도 없고, 그럴 만한 형편도 되지 않는데 이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던 그는 운전대를 잡아본 후 곧바로 생각을 바꿨다.

이게 또 스트레스 풀이에 제격이거든. 현란하게 꺾어지는 운전대와 미친 듯이 밟아대는 액셀, 그리고 예고 없는 브레이크는 안전벨트를 하고 있어도 생명의 위협이 느껴질 정도로 치가 떨리는 운전 방식이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사내는 해탈의 지경에 이르러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조용한 기도문이 그의 입에서 간절하게 흘러나왔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제발 살아서 나갈 수 있게 해주세요. 살려만 주시면 착하게 살겠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염불을 외든지 기도를 하든지 상관은 없었으나, 백미러에 비치는 흰색 차량을 확인한 마린케이의 눈매는 더더욱 사나워질 수밖에 없었다.

“아까부터 누가 뒤에 따라붙는데, 혹시 일행입니까?”

“…….”

“일행이냐고요.”

그러자 뒷좌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그의 눈총을 견디다 못해 간신히 대답했다. 두 손은 안전벨트를 동아줄처럼 붙들고 있는 상태였다.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럼 저건 뭔데?”

문득 마린케이는 ‘너처럼 운전하는 새끼를 만나면 꼭 돌아 돌아 피해 가는 게 나을 거다’라며 충고하던 실기 담당자의 악담을 떠올렸다. 제기랄. 핸들을 꺾은 그가 외마디 욕설과 함께 백미러를 확인했다. 통과하자마자 빨간 불로 변할 줄 알았던 신호등은 뒤 차량이 거의 따라붙은 후에야 아슬아슬하게 색깔을 바꾸었다.

액셀을 밟으면 똑같이 액셀을 밟고, 브레이크를 밟으면 똑같이 브레이크를 밟는 모방 운전에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마린케이는 백미러를 노려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어떤 개 같은 새끼가 운전 가지고 장난질이야.”

안타깝게도, 그는 식견 넓은 실기 담당자의 말을 더 자세히 새겨들었어야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콰앙! 난폭한 타격음이 들려온 순간 안전벨트를 하고 있던 몸뚱이들이 일시에 앞으로 쏟아졌다.

“으아아아악!”

두 손을 부여잡고서 기도 중이던 사내가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추돌 사고 때문이 아니라 저 비명 소리로 인해 고막이 찢겨 나갈 것만 같다. 그러나 사내의 비명은 굳게 닫혀있던 차 문이 환하게 열리는 것과 동시에 저 멀리로 내던져지게 되고 말았다.

“내려.”

볼우물이 깊게 패일 정도로 예쁘게 웃고 있는 황태자가 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황, 황, 황, 황태…….”

“내가 직접 내리게 해줘?”

“…….”

“그럼 멀쩡히 못 내릴 텐데.”

질 나쁜 협박에 사내는 황급히 안전벨트를 풀고서 도망치듯 차 안에서 빠져나갔다. 뒷좌석의 남자는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굳어 있었는데, 서늘하다고 생각했던 인상은 이미 해괴망측하게 풀어져 오히려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마린케이는 최대한의 공손을 담아 물었다.

“뭐 하는 짓거립니까?”

그러나 그것마저도 공손함의 개념을 오인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샤를은 뒷좌석의 남자를 돌아보며 싱긋, 미소 짓기만 했다. 허튼수작이라도 벌이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남자의 얼굴이 산소가 부족한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샤를은 조수석에 탑승하며 말했다.

“네가 차를 훔쳤다는데,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제가, 뭐요?”

“나인 거 알았으면 좀 세워주지 그랬어.”

너인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 미친 새끼야. 그렇게 흉포하게 운전을 하는 새끼가 황태자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도망치니까 박고 싶어지잖아. 응?”

그 와중에도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뒷좌석의 주인공, 벤 해리스는 충격에 찬 표정을 가리기 위해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진짜였어. 그 키스 사진이 진짜였어! 합성이 아니라 진짜였다고.’

“출발하지. 이스턴 경.”

그러나 벤의 오해를 알 리 없는 두 사람은 너무도 말끔한 얼굴로 주행을 계속할 뿐이었다. 뒷좌석에 앉아 있는 벤만 죽어나가는 듯한 살벌한 고요함이 이어졌다.

지금 이 시각, 그가 원망을 퍼붓고 싶은 대상은 겨우 말단 직원에 불과한 저를 이곳으로 보낸 총책임자 세바스찬이었다. 백작 각하 명령에 대체 왜 말단 직원을 보내나 싶었는데, 분명 이런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비열한 세바스찬!

벤은 이번에야말로 사직서를 그 얼굴에 내던지고 말 것이라고 다짐하며 소리 없이 울었다. 마린케이의 운전은 여전히 폭풍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

그들이 내비게이션을 따라 도착한 곳은 옛 동녘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건물 앞이었다. 먼저 차에서 내린 마린케이는 저에게 협박을 전하던 사내가 비틀거리며 차에서 뛰쳐나오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황태자는 느긋하게 걸어와 그런 마린케이의 옆에 섰다.

“……하아.”

마린케이는 가까워진 그의 온기를 느끼며 나지막한 한숨을 뱉었다. 미치광이 황태자가 이번엔 또 어떤 괴상한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 걱정이 되었던 탓이다. ‘눈빛만 봐도 통한다’라는 옛말을 믿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저 새파란 눈동자만 보고 있어도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뭐가 됐든 간 황태자 새끼는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저런 새끼가 제국의 황태자라는 유난스러운 권력까지 손에 쥐고 있으니 세상이 멀쩡히 돌아갈 리 없지. 가쉰의 비호를 받는 금발의 미치광이가 입을 열었다.

“마린보이, 겁나면 말해.”

“그럴 일 없습니다.”

“응. 나도 말이나 하라는 소리였어.”

“……또라이 새끼가.”

“뭐라고?”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다고요.”

간신배의 탈을 쓴 마린케이가 인내심을 담아 대답했다. 황태자는 그럴 줄 알았다며 마린케이의 어깨 위로 손을 둘렀다. 그러자 마린케이는 곧바로 그 손을 떼어냈다. 차가운 반응에도 넉살 좋게 웃던 황태자는 입에 솜사탕이라도 물고 있는 듯한 달짝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말 한마디면 이 건물 하나쯤은 통째로 무너뜨려 줄 수 있어.”

괜찮은 제안이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었다. 마린케이는 화풀이 상대를 찾아 시선을 돌렸다. 창백해진 안색으로 두 사람 쪽을 힐끔거리고 있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인다. 저런 새끼를 자신의 납치 담당으로 보냈다는 것에 숫제 자존심이 상할 지경이었다. 마린케이가 미약한 짜증을 느끼고 있을 무렵, 황태자는 손가락을 튕겨 남자를 불렀다.

“거기, 이쪽으로 좀 와 봐.”

벤은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척, 자신의 땀 묻은 손을 주머니에 쉴 새 없이 문질렀다. 탐탁지 않다는 듯 표정을 구긴 샤를이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풀며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와 보라니까?”

주군의 폭압을 생각 없이 지켜보고 있던 마린케이는 불현듯 느껴지는 억울한 감정에 옆에 있던 차를 된통 걷어찼다. 저런 머저리 새끼를 왜 내 담당으로 보낸 거야? 그의 거친 발길질에 차의 모퉁이가 못나게 찌그러졌다. 그래도 짜증이 풀리지 않는지 이번에는 백미러를 부숴버렸다.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벤은 굼뜨게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사대 보험에 육아 휴직, 휴가 수당까지 두둑이 챙겨준다고 해서 높은 경쟁률을 뚫고 겨우겨우 들어온 일자리인데, 이런 복병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안내해야지.”

황태자가 그의 어깨를 아프게 내리누르며 말했다. 마린케이는 차를 거의 박살 내놓고 나서야 만족감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제야 평소 같은 무심한 얼굴로 돌아와 힐난했다.

“초대는 그쪽이 해놓고, 이게 무슨 경우 없는 짓입니까?”

그러자 지레 겁을 집어먹은 벤은 정말 이곳이 자신의 무덤이 아닌지 걱정하며 대답했다.

“전, 전하께서는 여기서 기다려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이곳은 동반 1인까지만 입장이 가능한…….”

그 순간 황태자가 풀어 놓았던 손목시계를 움켜쥐며 입술을 움직였다.

“그래서?”

“그렇다고 듣긴 했습니다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제, 제 의견도 아니구요. 정말입니다.”

그의 서슬 퍼런 안광에 벤은 기절할 것만 같은 심정으로 지문을 찍었다. 자동문 앞에 선 황태자가 싱긋 웃는다. 그것만큼은 매스컴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미소가 맞았다.

“생각해 보니 안내는 필요 없을 것 같은데, 그치?”

“…….”

“생긴 것처럼 가만히 찌그러져 있어줘.”

일순간 벤이 도움을 구하는 표정으로 뒤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있는 것이라고는 단검을 손에 굴리고 있는 마린케이 이스턴밖에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직접 사직서를 내기도 전에 권고사직 당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벤이 가장 끝 쪽에 있는 방을 가리켰다.

“각하께서는 연꽃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너희는 어떻게 네이밍 센스까지 그따위일 수가 있어?”

“제가 짓지 않았…….”

황태자의 비난에 벤은 정말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반복되는 상황에 지루함을 느낀 마린케이는 황태자를 재촉했다.

“빨리 가시죠. 슬슬 기다리기 짜증 나는데.”

“우리 마린보이는 인내심도 짧지.”

“피차일반 아닙니까?”

그렇게 자동문이 닫혔다. 단검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마린케이는 여전히 황태자의 뒤쪽을 지킨 채 서 있었다. 타인의 시선에는 꽤 돈독한 군신지간처럼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실은 언제든 뒤통수를 칠 수 있게끔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말없이 앞을 향해 걸어가던 황태자는 갑작스레 걸음을 멈췄다. 덕분에 장식품들로 가득한 로비를 구경하며 걷고 있던 마린케이 역시 덩달아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하마터면 황태자의 등에 코를 부딪힐 뻔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저절로 타박하는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화장실이라도 급하십니까?”

“여기 어딘가에, 쳐 죽여도 시원찮을 쥐새끼 한 마리가 있을 거야.”

저급한 어휘를 잔뜩 입에 올린 샤를이 고결한 황태자처럼 보이는 얼굴로 명령했다.

“다 뒤져서라도 끌고 와. 백작 새끼는 내가 잡아둘 테니까.”

“…….”

“너무 늦으면 나 토할 수도 있어?”

그에 마린케이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털었다. 농담처럼 이어진 주군의 명령에, 그는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이면 미친 듯이 천장을 뛰어다니던 쥐새끼들에 대해 상념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덫을 놓아도 잡히지 않던 회색 쥐는 먹잇감을 던져준 후에야 간신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 상황에선 내가 먹잇감이란 소리겠지.’

마린케이는 백작이 보냈던 도촬 사진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틀었다. 사진을 찍어 협박할 정도라면 그 역시 분명 궁지에 몰려 있다는 소리였다. 아마 황태자가 베사플레사를 밟아 놓은 건이 컸을 것이다. 백작 정도의 위치가 직접 움직였다는 것은 그 배후에 더 악랄하거나, 더 권위 있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바를 뜻했고 말이다. 그럴싸한 끄나풀 한 마리쯤은 대동하고 등장하셨을 테니, 누가 되었든 간 그 한 마리만 찾아낸다면 배후 역시 알아낼 기회가 있었다.

“……머리야.”

오랜만에 생각이란 걸 좀 했더니 관자놀이가 다 아프다. 마린케이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르며 추측을 멈췄다. 이런 건 원래 윗선에서 다 계산해주는 줄 알았으나, 망할 황태자 새끼는 안타깝게도 설명을 길게 해주는 친절한 타입이 되지 못했다.

그는 오히려 ‘그걸 왜 몰라?’라는 표정으로 재수 없게 쳐다보는 편에 가까웠다. 그럴 때면 그를 후려쳐 기절시키고 싶은 충동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쥐새끼는 또 어떻게 찾아내야 하려나. 누군가는 덫을 놓아 쥐를 잡고, 또 다른 누군가는 먹잇감을 들여놓아 쥐들을 잡는다지만, 어린 마린케이가 쥐를 사냥하는 방법은 달랐다.

인내심 짧은 소년은 쥐들이 발을 구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천장을 전부 뜯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바닥으로 떨어진 쥐들이 난동을 부려대면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밤새 구경할 만한 재미가 있었다. 마린케이는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무심한 얼굴로 매화실의 문지방을 넘었다. 도란도란 술잔을 나누고 있던 남녀가 갑작스런 불청객의 등장에 놀라 잔을 떨어뜨린다. 그들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날카로운 인상의 불청객이 선수를 쳤다.

“죄송한데, 여기서 제일 비싼 방이 어딥니까?”

***

“막상 보게 되니 할 말이 없나 봐.”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할 말도 못 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건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황태자는 빈 술잔 위로 밀빛 술을 넘치도록 따르며 테이블을 두드렸다.

“보고 싶어 하는 것 같길래 직접 와준 건데.”

호화스러운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으나 그 누구도 입에 대는 이가 없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도 황태자는 얼굴 위에 잘만 미소를 덧씌웠다.

황제의 후계가 되어 가장 먼저 배우는 일은 감정을 죽이고 신념을 굽히는 것이다. 오직 제국을 위한 체스 말이 되는 것. 샤를 소피아 엔스에게 주어진 황태자라는 자리는 그런 곳이었다. 소년은 자신을 헐뜯는 이들 앞에서도 연신 그린 듯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법을 익혀야만 했다. 그러자 드디어 눈앞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그는 중립을 자처한 가문의 주인이자 황제의 충실한 심복으로 살아온 이였다. 그로 인해 누군가의 적이 되기도, 편이 되기도 하던 벌린(Berlyne)가의 가주, 리암 드 벌린이 꽉 채워진 술잔을 제 입가로 가져다 대며 말했다.

“제가 전하께 술잔을 받게 되다니…. 시간이 빠르기는 한가 봅니다.”

입가를 타고 흐르는 술을 닦아낸 그가 여유롭게 웃었다. 황실 기사단의 단장직을 차지한 사내답게, 백작은 불혹이 넘은 나이에도 강건함이 넘치는 육체를 자랑했다. 한때 그는 황태자의 스승으로서 무예와 기사도를 가르치기도 했었다. 그러나 옛 제자는 그의 앞에서도 전혀 주저하는 기색이 없었다. 샤를이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무슨 소리야?”

“…….”

“졸졸 쫓아다니면서 관음하고 있었던 주제에.”

샤를 소피아 엔스. 그것은 권력의 또 다른 이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이름이 가지는 무게만으로도 백작은 모든 자세를 낮추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후계로 태어나 황제로 바로 설 수 있게끔 키워진 사람답게, 샤를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할 줄 알았다. 손안에 쥔 권력을 내던진 채 도망치고만 싶던 어린 시절과는 달랐다. 세상의 모습은 그가 생각하던 것만큼 호락호락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귀족들은 그를 기막힌 이상주의자라 부르며 그 신념과 비전을 비참히 짓밟으려 들었다.

황태자는 텅 빈 술잔 위로 한 번 더 술을 채웠다.

“서약까지 마친 기사 수련생을 궁금해하는 저의가 뭐야?”

약자를 위하며, 그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성정은 오로지 황제의 적자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던 천성이다. 제국민의 존경을 받는 황후의 품에서 태어나, 초대 황제를 닮은 아름다운 얼굴로 세상을 살아왔던 유일한 소년.

그렇기에 어떤 부조리에도 굴복할 필요가 없었고, 어떤 추악함과도 맞닿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소년은 그 모든 것을 향해 스스로 손을 내밀었다. 비록 완벽한 황태자라고는 할 수 없을 테지만, 모두가 칭송하는 황제감은 맞았다. 황제는 그런 자신의 후계를 날카롭게 비호했다.

샤를은 술잔을 자신의 입가에 가져다 대며 백작을 주시했다. 저를 데려가 달라 청하던 화언국의 소년을 죽인 이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 잔상이 비릿한 혈향을 풍기며 허공을 맴돌았다. 살의가 치밀어 올랐지만, 간신히 견뎌낼 수 있었다. 백작이 묵묵히 말했다.

“듣던 대로 기세가 좋은 아이더군요.”

“아이는 무슨.”

“…….”

“언제 봤다고 애 취급이야?”

혀에 퍼지는 알코올의 쓴맛은 여전히 취향이 아니었다. 그러나 샤를은 밀려오는 구토감을 참으며 끝까지 잔을 들이켰다. 뒤따라온 그의 목소리에 백작은 왈칵 표정을 굳혔다.

“내가 아끼는 애니까 눈치껏 굴어.”

그가 백작과 술을 주고받은 이유는 단 한 가지 때문이었다. 만약 이곳에 준비되어 있던 술이 독주였다면, 저 몰래 이곳에 걸음 하려 했던 마린케이는 행방불명으로 처리된 채 영영 세상에 돌아오지 못했을 테니까. 독에 대한 내성을 길러온 황족들과는 달랐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술에 허튼짓을 하지는 않았던 건지, 백작과 자신 모두 멀쩡히 앉아 있었다.

“글쎄요. 뭔가 잘못 짚으신 것 같습니다, 전하.”

잠자코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백작이 삽시간에 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황태자는 아무런 미동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백작은 술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취향이 많이 달라지신 것 같아 궁금히 여겼을 뿐.”

“…….”

“그간 어울렸던 여인들과는 전혀 다른 타입이 아닙니까.”

황태자 쪽에서 침묵을 유지하자, 백작은 제 승리를 직감한 사람처럼 여유롭게 음식을 덜었다. 동작 하나하나에 기품이 어려 있었다.

“때로는 처세술에 관해 고민해 보시는 것도 도움이 될 겁니다.”

“…….”

“하룻강아지가 어째서 범을 두려워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요.”

이쯤 되면 치기 어린 대답이 돌아올 만도 하건만, 어째서인지 건너편은 쥐 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천천히 고개를 든 백작이 마주하게 된 것은 마치 폭소를 참고 있듯, 괴상하게 구겨져 있는 황태자의 얼굴이었다. 푸른 눈에 이채가 도는 것에 백작은 저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역시 네 짓이구나?”

당혹스러움을 느낀 백작이 느리게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떤 새끼가 이런 저급한 수로 사람을 건드리나 궁금했거든.”

“…….”

“네가 벌인 일 맞지?”

“한낱 사진 따위에 신경을 쏟을 정도로…….”

“사진이었군.”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술을 마시지 않고서도 취한 기분이 들게 하던 그 새벽녘의 일을 누군가 촬영한 모양이었다. 제 심지 곧은 기사가 어째서 고분고분 백작의 부름에 달려가려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샤를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여간 꼬장꼬장한 새끼들은 하는 짓도 똑같다니까.”

백작은 모멸감으로 인해 떨려오는 손을 짓누르며 위협적인 목소리를 냈다.

“관련되지도 않은 일에, 절 관련시키고 싶으신 겁니까? 공정을 대단한 가치로 알고 살아가시던 어릴 적과는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전하.”

“나도 그렇게 생각해.”

“…….”

“원래 그렇게 변명이 많은 타입이었어?”

정말로 궁금하다는 투였다. 황실 기사단의 단장직을 역임 중인 벌린 백작은 오직 기사도만을 위해 태어난 사내라는 찬사를 듣는 무인이었다. 가쉰의 기사들 모두가 그를 존경하며 따랐다.

“내 취향엔 왜들 그리 관심이 많은지.”

금발 사이로 드러난 새파란 눈. 가쉰의 모든 것이 그에게 속해 있음을 알려주는 증거 앞에서 백작은 더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잇새로 내뱉었다.

“전하, 지금 저를…….”

“혹시 감으로도 알 수 있다, 뭐 그런 건가?”

“스캔들을 까맣게 잊으셨나 봅니다.”

저급한 발악이었다. 샤를은 자신이 한때 우상으로 삼았던 적도 있는 그 청렴한 사내가 이토록 시원찮은 쓰레기가 되었다는 것에 경멸감을 느꼈다. 당장에라도 지하 감옥에 처박혀 고문을 받아야 할 새끼가 이리도 뻔뻔하게 낯짝을 들이밀고 다닌다니, 세상은 역시나 썩어빠졌다.

“감히 서약을 맺은 내 기사에게, 그딴 스캔들 하나로 오명을 씌우겠다?”

“전하를 위협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국의 어떤 누구도 기사 서약을 맺은 군신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는 없었다. 황실 기사단에 속해 있는 이라면 더더욱 잘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위협이라…….”

샤를은 언제나 황제가 제게 선물해 준 단검을 지니고 다녔다. 그 단검 위에는 아직도 화언국의 소년에게 주었던 머리끈이 묶여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단 하나뿐이다.

“본 적도, 보낸 적도 없다는 리암 경에게 말해주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이 자리에서 너 같은 새끼를 잡아 죽이지 못한다는 것. 그가 단검을 위로하듯 천천히 쓸어내렸다.

“경은 협박엔 소질이 없어.”

“…….”

“협박이 될 만한 걸로 협박을 해야지. 안 그래?”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백작이 노기 어린 어조로 물었다. 아무리 황태자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공작 가문과 함께 국무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는 벌린 가와 악연을 만들어 봤자 어떤 이득도 돌아올 것이 없었다. 어쩌면 내란에 휘말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샤를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렇게 바짝 털을 세우시면, 건드려야 할 게 무엇인지 더더욱 잘 알려주는 꼴이 될 텐데 말입니다.”

“…….”

“이제 조금은 성숙해지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이득이고 뭐고, 그에겐 그 무엇도 필요치 않았으니까. 그러니 옳지 않은 선택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건드려 봐.”

“…….”

“경도 알다시피, 내 취향이 꽤 바뀌었거든.”

결국 그게 옳은 길이 될 테니까. 처절한 왕관을 머리 위에 얹은 황태자는 기가 막힌 이상주의자라 불렸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몽상에 빠진 철없는 혁명가.

“후회하실 겁니다.”

“그게 다야?”

그렇게 살아온 소년이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못할 리 없었다.

“넌 내 손에 뒈질 텐데.”

***

똑같은 행위가 이걸로 벌써 여섯 번째 반복되었다. 여긴 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비싼 방이 이렇게나 많은 건지 도저히 모를 일이었다. 마린케이는 어느덧 피곤해진 심정으로 문을 열었다. 역시나, 어여쁜 여인을 앉혀두고 술을 따라주고 있던 노인이 놀라 술병을 떨어뜨린다. 저 장면 또한 앞서 몇 번 목격한 적 있기 때문인지 별 흥미가 일지 않았다.

“여기가 제일 비싼 방입니까?”

아까부터 뱉어대고 있는 짤막한 문장이었다. 그 문장을 그대로 읊으면서, 마린케이는 방 안의 풍경을 유심히 둘러보았다. 확실히 비싸 보이기는 하지만, 정확히 잘 찾아온 건지는 잘 감이 잡히지 않는다. 허둥대던 노인이 안경을 추켜올렸다. 노인에게 붙들려 있던 여인은 도움을 구하듯 마린케이에게 시선을 던졌다. 마린케이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

주군의 명령은 쥐새끼를 찾아내라는 것이었다. 그 쥐새끼라 하면 당연히 백작과 관련된 놈을 일컫는 것일 테고. 그러나 세상은 드넓었고, 그 안을 기어 다니는 쥐새끼는 많고 많았다.

“같이 가실 겁니까, 여기 계실 겁니까?”

마린케이는 마치 4황자를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여인을 향해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물론 결정은 전적으로 그녀에게 주어진 몫이었다. 그는 누군가의 결정을 대신 해줄 정도로 친절하지도, 다정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여인이 노인의 손을 밀어내자, 그녀보다 더 빨리 노인을 걷어차 주기는 했다.

그렇게 마주하게 된 것이 지금의 상황이었다. 졸지에 술집의 모든 가드들에게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됐지만, 여인을 데리고 나온 것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미안해요. 저 때문에 괜히…….”

“아닙니다.”

여인이 재차 사과를 건네왔으나 마린케이는 이번에도 딱 잘라 대답했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게 누구였든 간에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귀찮아지는 것은 딱 질색이었지만, 그녀에게 주름진 손을 내밀던 노인의 얼굴이 매우 눈에 익었던 관계로 빠르게 고민을 마칠 수 있었다.

「죄송만 할 줄 아는 건 예로부터 평민들이 가진 특권이었지. 그렇지 않나들?」

그 개새끼는 관상부터 알아봤었다. 눈깔이 별로인 인간들은 하나같이 다 구린 면이 많았다.

“종업원한테 술을 따라주는 인간은 또 처음 봤어요. 싫다고 하는데 되지도 않는 말로 협박까지 하니까, 도저히 뛰쳐나올 수가 없더라고요.”

“본인의 특권이라 생각했던 거겠죠.”

마린케이는 제 교복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던 노교수의 얼굴을 곱씹어 보았다. 처자식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옆에 젊은 여자를 앉혀두고 추근대던 모습이 무척 볼썽사납고 끔찍하게 느껴졌다. 마린케이의 곁에 붙어 기척을 죽이고 있던 여인이 막다른 복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으로 가면 돼요.”

“막힌 길 아닙니까?”

“그렇게 보이라고 만들어 놓은 거니까요.”

이렇게 보니 여인을 구한 일은 의도가 어찌 됐든 간에 잘한 선택인 것 같았다.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한 그녀가 벽면을 더듬거렸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에도 마린케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영화면 어떻고, 현실이면 어떤가. 그렇게 따지면 웬 지위 높은 양아치 새끼 하나를 만나 인생 조지게 생긴 평민의 기구한 이야기가 더욱 영화 같을 터였다.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조금씩 벽면이 열렸다. 그러자 낑낑거리는 여인의 옆에 선 마린케이는 한 손으로 벽면을 밀어버렸다. 손쉽게 열린 벽면을 허무한 듯 바라보던 그녀가 이내 표정을 다잡으며 그 안으로 몸을 들였다. 그제야 안심한 얼굴을 한 여인이 서둘러 손짓했다.

“빨리 들어오세요!”

“아, 저는 괜찮습니다.”

“……네?”

“끝내야 할 일이 있어서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여인이 문을 닫을 수 있게끔 걸음을 물렸다. 가드들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긴 나중에 이용하겠습니다.”

그녀가 당황한 듯 멍하니 서 있자, 그는 자신이 직접 벽면을 닫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여인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마린케이를 향해 물었다.

“이 은혜는 나중에라도 꼭 갚을게요. 그쪽 이름이 어떻게 돼요?”

“…….”

그러나 마린케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괜히 신상이 나돌았다가 또 괴상망측한 추문에라도 휩싸이게 된다면 그것만큼 골치를 썩이는 일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기요?”

그의 일관적인 태도에도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 내 이름이라도 기억해 줘요!”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작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린케이는 소매 속의 단검을 꺼내 들었다.

“난 호즈예요.”

***

누군가는 분명 백작 새끼를 보며 왕립학교에 입학하고 싶다는 꿈을 키웠을 것이다. 그것은 추측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저 역시 스승으로 두었던 인물들 중 벌린 백작을 가장 믿고 따랐던 시절이 존재하니까. 리암 드 벌린은 기사의 도(度)를 강조하며 어린 황태자를 무인의 길로 이끈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아무나 황자의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황제의 총애를 받는 그 황태자라면 더더욱 그랬다. 장차 가쉰을 이끌어 갈 황태자의 스승이 될 이들은 매우 까다롭고 엄격한 절차를 거쳐 선정되었다. 샤를은 청렴결백한 무인으로 손꼽히던 백작의 지난날을 곱씹었다.

어쩌면 그 시절에도 이딴 쓰레기 새끼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에게 기사도를 배우던 모든 순간을 인생에서 도려내 버리고 싶어졌다. 백작이 끈질기게 입을 열었다.

“언어는 인간의 거울입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어떻게든 황태자를 욕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경거망동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전하.”

“경은 추태를 좀 조심하고.”

“저를 적으로 돌리시겠다는 겁니까?”

“……적?”

샤를의 입가에 비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적이라. 공작 가문이 황실의 대척점에 서 있는 국정에서, 중립을 지키던 백작마저 등을 돌리게 된다면 내정은 더욱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백작이 경고하는 것은 단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샤를의 푸른 눈에 분노가 스미기 시작했다. 목에 쇠사슬이 걸린 채 걸어오던 어린아이, 그리고 댄 미헤르.

“뭔가 이상하지 않아?”

“그런 일이야 수백 번도 더 일어나는 게 세상이란 곳입니다.”

생뚱맞은 물음에 백작 또한 날 선 반박을 던졌다. 댄 미헤르는 검찰에 의해 기소되었다. 노예상은 퍼즐 조각을 맞추듯 저와 관계된 이름을 읊었고, 그 속에는 평소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로 유명했던 귀족들 역시 대거 포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이름들이 짜기라도 한 듯 백작 가를 빗겨나가 있다는 것이 의아했다. 한 가지 더.

“댄 미헤르는 왜 항소하지 않는 거지?”

구태여 지적할 필요도 없었다.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본체를 따로 두었다는 소리겠지. 항소하지 않고 형을 받으면 모든 사건이 거기서 일단락될 수 있었다. 하기야, 애초에 그리 쉽게 좌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지 못할 일들 중 하나였다.

백작이 폭소하기 시작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는 어린아이의 상상력에 감탄하는 사람처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샤를은 여전히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백작이 질문을 던지던 때였다.

“기억하십니까?”

그는 단박에 백작의 말을 끊었다.

“안 나.”

“…….”

“다음.”

신념과 기개를 전부 내던진 채 황제로서의 삶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했다면, 그것을 기반으로 삼아 모든 이의 머리 위에 군림할 수 있는 법 또한 배워야만 했다. 샤를 소피아 엔스는 그렇게 자라왔다. 불쾌감에 표정을 굳힌 백작이 아득히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왜 하필이면,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말했잖아.”

“…….”

“보고 싶어 하는 것 같길래 왔다고.”

“전하, 설마…….”

백작이 마린케이 이스턴에게 접근했던 이유는 하나였을 것이다. 베사플레사를 쥐 잡듯이 털어간 그 배후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을 테지. 황태자는 부러 천진하게 웃었다.

“경은 참 발전이 없어.”

그가 품 안에 있던 단검을 테이블 위로 던지며 말했다. 단검 위에 묶여 있는 머리끈을 확인한 백작이 입술을 짓씹었다. 머리끈에는 황가의 각인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백작이 처음 소년에게서 황족의 머리끈을 발견했을 때, 그는 소년을 직접 문초해서라도 머리끈의 주인을 알아내고자 애썼다. 그러나 소년은 고통에 발버둥을 칠지언정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무슨 신을 보호하는 고결한 사도라도 되는 듯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백작의 눈이 강한 살의로 물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태연한 얼굴을 가장하며 물었다.

“이게 무슨 물건인지요.”

“모르면 됐어.”

무의미한 대화는 이쯤에서 끝낼 생각이었다. 부디 제 기사가 쥐 사냥에 성공했기를 바라며, 샤를은 백작에게 허무한 답변만을 돌려주었다.

“차차 알게 될 테니까.”

이 정도면 꽤 시간을 벌어준 것일 테니 굳이 미련을 남길 필요가 없었다. 실은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이 이상으로 백작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다간 정말 토악질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백작의 섬뜩한 시선이 황태자를 향했다. 그가 음산하게 속삭였다.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넌 죽여달라 빌게 될 거고.”

샤를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단검을 집어 들었다.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던 약속. 그 약속을 지키기도 전에 아이는 세상을 떠났다. 후회는 그것에서부터 비롯될 뿐이다.

그는 그대로 백작을 돌아보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뭇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푸른 눈은 언제부터인가,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 끝의 공간처럼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

“누, 누가 보낸 새끼냐!”

“…….”

“어흑, 아학!”

신음 소리가 뭔가 많이 이상했지만, 마린케이로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가드들을 하나하나 두들겨 패다 보니 이젠 레퍼토리까지 손에 익었다.

누군가 “으아아악!” 하는 괴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와 함께 달려오면 대충 고간을 걷어차 쓰러뜨리는 방법이 제일이었다. 같은 남자로서 딱히 쓰고 싶지 않은 방법이긴 했으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마린케이는 그렇게 가장 간결하고, 가장 손쉬운 방법을 선택해 그동안 쌓여온 스트레스를 풀었다. 아무리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가드들이라 한들 상대는 무려 퍼스트 클래스의 수련생이었다. 이런 졸개들쯤이야 수백 명이 와도 그의 손끝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마린케이는 고간을 부여잡은 채 엎어져 있는 사내의 뒷덜미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으악, 으악! 악, 악!”

“아직 안 때렸습니다.”

본인의 말마따나, 그는 그저 무감한 눈초리로 사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제야 사내는 자신의 고간을 가린 손을 치우며 말했다.

“곧, 곧 지원팀이 올…, 아악!”

이 순간에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서 지원 팀 운운하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한심해서 저절로 손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내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많던 인원이 겨우 침입자 한 명에게 전멸당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딱 한 번만 묻겠습니다.”

진짜 지겨워 죽겠다. 마린케이는 사내를 대롱대롱 들어 올리고서 일곱 번째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 제일 비싼 방이 어딥니까?”

***

진작 가드부터 족칠걸. 가드의 존재 이유 자체가 높으신 분들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으니, 처음부터 저놈들을 상대했으면 쉽게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몸을 풀게 된 것은 상당한 소득이었지만, 시간 낭비를 했다는 사실로 인해 기분이 가라앉았다.

“돈지랄을 제대로 해놨네.”

조금 전에 걷던 로비와는 전혀 다른 수준의 장식품들로 꾸며진 고급스러운 느낌의 복도가 나타났다. 마린케이는 제 걸음 소리마저 우아하게 울려 퍼지는 듯한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말없이 눈을 빛냈다. 그는 돈을 녹여 기름칠을 해놓은 것만 같은 내부의 풍경에 절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몇 개 훔쳐다 팔면 돈이 꽤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게 쓰레기 소굴의 단면이란 거겠지. 마린케이의 추측은 어찌 보면 정확하다고 할 수 있었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고서 비밀리에 운영되는 클럽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는 방 앞에 멈춰 선 마린케이는 쥐고 있던 단검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검에게 이지를 빼앗기지 말거라. 살의에 잡아먹힌 기사는 그저 검의 노예가 될 뿐이야.」

스승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예컨대, 만약 이 문 뒤로 절대 용서하지 못할 끔찍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라든가.

그때도 당신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검의 기세를 죽이고 그 뜻을 헤아려야 한다고 가르쳤을까. 그러나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들에 관해서 만큼은 결코 혼자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뒷골목의 날치기범으로 살아가며 배워야 했던 두 번째 이치는 보다 본질적이었다. 삶은 똑같이 시궁창이고, 인간은 누구나 그 시궁창 속에서 버둥대는 존재다. 그러니 근사한 대의는 필요치 않았다. 살아남기 위함이었다는 한 가지 명분만으로도 충분히 이유가 될 수 있었으니까.

고로 어떤 정경이 펼쳐지든 간 마린케이의 선택은 일관될 것이었다. 그는 느긋이 방문을 열었다.

“당신, 누구……!”

컵을 든 중년의 여인과 물을 한 바가지 맞은 듯한 남자의 모습. 조금 전에 했던 다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인지, 마린케이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여인은 동작을 멈춘 채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누구냐니까!”

소매로 얼굴을 닦는 중이던 남자는 그제야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마린케이 또한 몹시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강아지풀을 닮은 유약한 인상에 나부끼듯 흔들리는 연갈색 머리카락.

“…기사님?”

휴대폰을 가져다 버리게 만들었던 원흉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힐끗, 여인 쪽을 돌아보던 그가 불현듯 짙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엔…….”

예의 그 하늘하늘한 웃음이었다.

“왕자님처럼 등장하시네요?”

얼떨결에 왕자님으로 신분이 승격된 마린케이는 애매한 표정으로 얼굴을 구겼다. 물세례를 뒤집어쓴 남자가 헤실거리든 말든 그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주군이 언급한 쥐새끼를 찾아내 돌아가는 것. 하지만 그 계획을 실행하기 전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서, 도대체 쥐새끼가 어느 쪽이야?

마린케이는 시선을 돌려 여인 쪽을 바라보았다. 틀어 올린 머리와 진줏빛 원피스. 그 고풍스러운 차림새만 봐도 그녀가 귀족이라는 사실을 대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마린케이의 시선을 느낀 여인이 가방을 들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적대적인 눈빛이 마린케이에게 쏟아졌다.

저런 얼굴이라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이 마주해 본 적 있었다. 숱한 귀족들이 몬트를 한 장이라도 더 받기 위해 자동차를 따라다니던 꾀죄죄한 아이들을 구경하며 저런 얼굴을 내다보이고는 했다. 여인의 냉랭한 목소리가 마린케이의 상념 속에 끼어들었다.

“이게 무슨 결례인지 모르겠네요.”

어쩌면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의도치는 않았으나 삐딱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결례에도 종류가 있는지는 몰랐어서요.”

“뭐라고요?”

“무슨 결례냐고 묻지 않으셨습니까?”

여인의 까만 눈동자가 마린케이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다시금 걸음을 내디디려던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마린케이가 문 앞을 가로막은 상태였기 때문에, 방 안의 누구도 마음대로 그곳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황태자는 쥐새끼를 찾아내라고만 했지, 그 방법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마음대로 헤집고 다녀도 상관없다는 뜻일 것이다. 실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냥 암묵적인 허락이라 여길 작정이었다. 여인의 정체를 고심하던 마린케이가 깨달음을 얻은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본인 역시 ‘진짜?’ 싶은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면서.

“설마…, 백작 부인?”

정적이 내려앉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마린케이는 이번에도 제 판단이 완전히 엇나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참혹한 정답률이었다.

왜 매번 이딴 식으로 끝나는 거지? 마린케이는 베사플레사에서 황태자와 레온하르트의 관계를 유추했을 때, 그들이 저에게 보내던 한심함 섞인 눈빛들을 떠올리며 아쉬움을 느꼈다.

그 순간 남자의 밝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비가 나풀거리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도 함께였다. 경험상 이런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유독 무해한 사람들이 많았다.

“벌린 경께서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으셨어요.”

궁금해하지 않았던 정보였기 때문인지, 마린케이는 유독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럼 아닌 거네요.”

“네. 이분은 공작부인이시거든요.”

그러자 여인은 당장에라도 고함을 내지를 듯 완연하게 표정을 구겼다. 화를 눌러 참고 있다는 것이 제삼자에게도 느껴지는 분통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서 부지기수로 공격을 던졌다.

“감사하게도, 한때 저를 사랑해 주셨던 분이죠.”

“집어치워! 사랑? 하, 네가 그걸 논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

“자격은 누구에게나 있어요. 부인.”

제기랄, 불륜 현장이었어? 마린케이는 이제야 그들이 가장 값비싸고 은밀한 곳에 숨어 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쪽이 공작부인이고, 저쪽은 공작부인의 정부다, 이 소리지. 그러나 그는 천성부터가 가십에는 상당히 관심이 없는 사람에 해당했다. 알고 싶지 않던 정보를 알게 되는 것만큼 곤란한 상황은 또 없었다.

“날 사랑하기는 했어?”

어느새 마린케이를 저 뒷전에 미뤄둔 공작부인이 남자를 향해 날을 세웠다. 그 속에서도 남자의 시선은 줄곧 그녀를 빗겨나가 있었다.

“대답해! 정말 날 이용할 속셈이었냐고.”

아무래도 공작부인께선 저를 무슨 돌멩이쯤으로 생각하고 계시는 것이 틀림없었다. 사랑싸움, 게다가 그게 불륜이기까지 하다면 더더욱 끼고 싶지 않았던 마린케이가 그녀의 뜻을 받아들여 뒤돌아서려던 때였다. 마린케이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던 남자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2천 몬트 드릴게요.”

그에 마린케이는 불쑥 걸음을 멈추었다. 2천 몬트라…. 자고로 판돈은 클수록 구미를 당겼다.

“3천 몬트.”

“좋아요, 기사님.”

그 돈이면 낡아빠진 수련복을 새로 준비해 놓고도 남았다. 수전노 마린케이는 자본주의와 충실히 발맞춰 행동했다. 유쾌해 보이는 몸짓은 어느 때보다 가볍기 그지없었다. 당황한 여인에게 “결례 좀 하겠습니다.”를 짤막하게 읊은 그가 방 안의 불을 껐다. 태초의 우주처럼 어둠이 내리 앉은 방 속에서 그녀는 비명을 내질렀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지만.

여인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두 사람은 온데간데없이 증발해버린 뒤였다.

***

“응, 응…. 아냐, 밀라. 나 정말 괜찮아. 어? 황태자? 응. 진짜 봤다니까. 실물? 실물이고 뭐고 인성이 무슨 사이코패스 수준이라 얼굴은 하나도 눈에 안 들어와. 거짓말하지 말라고? 밀라! 말했잖아. 날 차로 박은 새끼라니까? 근데 어떻게 살아있냐니? 자기 정말 이럴 거야? 그 자식은 완전 인간 말종이라고. 게다가 취향은…! 으아아아악!”

벤은 거의 건물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벤? 뭐야? 여보, 무슨 일 있…….’ 떨어진 휴대폰을 웃으며 주워 든 샤를이 전화를 끊었다. 석고상 수준으로 굳어져 있는 벤을 향해 그가 휴대폰을 던졌다. 그 순간 벤의 머릿속 안으로 황실 모독죄에 따른 어마어마한 벌금형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 전하. 전하! 이게 절대 전하 얘기가 아니고, 그게 그러니까요.”

가까스로 휴대폰을 받아 든 벤은 생사가 걸린 구차한 변명을 이어 나갔다. 사실 ‘황태자’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가 있다, 이름이 몹시 낯설겠지만, 전하의 인기가 상당하셔서 정말 존재한다, 그 친구와 개인적으로 원한이 있는데, 놀랍게도 나를 차로…….

거기까지 내뱉던 중, 진짜 황태자가 의연하게 질문을 던졌다.

“널 보낸 게 백작 새끼 맞아?”

사람 눈이 저렇게 새파랄 수 있구나. 기구한 인생을 저주하던 것을 멈춘 벤이 정신을 다잡으며 대답했다. 사람을 홀리는 천사 같은 외모라더니, 그는 황태자가 아니라 배우나 모델을 했어도 대성할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그 새끼가 직접?”

“아뇨. 실장님께서 보내셨…….”

“잘됐다.”

그러나 그 생각은 1분도 채 가지 못하고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취소. 전부 다 취소다. 연예인이 됐으면 백 퍼센트의 확률로 인성 논란에 시달려야 했을 새끼다. 벤은 말도 안 되는 부탁, 아니.

“거기서 사진 좀 훔쳐 와.”

명령을 하고 있는 황태자를 향해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경이었다. 정말 저에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것인지 말이다. 그 키스 사진을 어떻게 훔쳐 오란 것인지 짐작도 하고 싶지 않았다. 세바스찬 실장의 책상에 손이라도 댔다간 무슨 참혹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품속의 사직서를 내던지기도 전에 해고당할 수도 있다고. 그럼 사랑하는 밀라가 날 죽이려 들겠지.

“어, 어떤 사진을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모르쇠를 택한 벤은 누가 봐도 어색한 몸짓으로 대화를 피했다. 다행스럽게도 황태자는 순순히 납득하는 눈치였다.

“그럼 어쩔 수 없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연달아 손을 꺾고, 목을 꺾었다. 그 모습에 벤은 진심으로 유체이탈을 꿈꾸게 되고 말았다. 서 있는 상태로 영혼만 빠져나갈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텐데.

“기억날 때까지 기다릴게.”

싸이코 새끼…. 벤은 자신의 불안정한 안위를 걱정하며 물었다.

“사진만, 사진만 가져오면 되는 걸까요?”

목소리가 어찌나 가련하게 떨려오는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미 쥐어 터지기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원본까지.”

그러나 황태자는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사용할 줄 아는 타고난 전략가였다. 미소 짓던 그가 툭, 하고서 미끼를 던졌다. 낚싯대가 성큼 움직였다.

“성공하면 취직시켜줄게.”

“……네?”

벤이 멍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취, 취직? 그게 정말이라면 자신은 백작이 아닌 황태자의 밑에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조금 전까지 제 인생을 원망하던 것을 다급하게 때려치운 채 천지신명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냉철해 보이던 인상의 남자가 감동 받은 얼굴로 연신 감사 인사를 하자, 샤를은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아닙니다, 전하!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름은?”

“벤 해리스입니다. 루이스 아니고 해리스요.”

벤은 같은 시기에 입사했으면서도 저보다 훨씬 많은 연봉을 받아 가던 경호 부서의 루이스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이름도 같아서 화딱지가 났는데, 이제야 좀 당당하게 마주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황태자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래. 해리스.”

벤은 붉은 입술에서 튀어나오는 섬뜩한 경고에 휴대폰을 다시 바닥으로 떨어뜨려 버리고 말았다.

“실패하면 가쉰을 떠야 할 거야.”

***

“이런 데서 뵐 줄은 몰랐어요.”

동의한다. 나도 몰랐으니까. 그래서 마린케이는 순한 양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만 해도 그 다감한 성정이 느껴지는 듯한 생김새의 남자가 그와 함께 골목길을 거닐고 있었다.

한여름의 끝을 알려주는 듯한 칼칼한 바람이 그들 사이로 스쳐 지났다. 벌써 두 계절이 끝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때마침 남자가 마린케이를 향해 속삭였다.

“문자는 한 번도 답장을 안 하시더라구요.”

“바빴습니다.”

“전화도 안 받으시던데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휴대폰이라면 지금쯤 쓰레기 소각장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을 테니까. 마린케이는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많이 바빴습니다.”

“와. 거짓말쟁이.”

“…….”

“전화한 적 없는데.”

이 새끼가 장난치나….

“장난 한번 쳐봤어요.”

장난친 거 맞구나. 그에 미간을 구기려던 마린케이는 곧바로 표정을 풀었다. 납득이 반박보다 빠른 사람다운 행동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 그대로 보이는 길을 따라 걸었다. 도착지는 마땅히 정해져 있지 않은 듯한 낌새였다.

뒷골목 출신답게, 마린케이는 구불구불한 길 속에서도 잘만 걸음을 내디뎠다. 묘하게 냉기가 느껴지는 그의 태도에 남자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혹시 저…, 지금 꼴사납나요?”

“무슨 뜻입니까?”

“그냥,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나비의 움직임처럼 온화하고 나풀거리는 목소리.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가녀린 풀잎 위에 앉은 나비를 연상시키는 듯한 그런 목소리였다.

어느새 두 사람은 어두컴컴한 골목 앞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남자가 먼저 그 안으로 걸음을 들였다. 그가 뒤를 돌아보자 마린케이는 되레 걸음을 멈추었다.

“솔직히 말씀드려도 됩니까?”

골목길의 향취는 대충 다 똑같았다. 비릿하고, 싸늘하고, 불결한. 불현듯 기이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눈치챈 남자의 표정이 굳어갔다. 마린케이가 마저 말을 꺼냈다.

“별생각 없습니다.”

“하하. 진짜…….”

그러나 남자의 화사한 웃음소리는 미처 이어지지 못했다. 저런 인간들은 하나같이 다 유순하고 무해한 인간들이 많았으나, 마린케이는 그동안 겪어왔던 일련의 경험들을 믿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간에 쓰레기라는 건 변함없으니까.”

“…….”

“백작 새끼랑 무슨 관계입니까?”

자신이 가진 직감을 믿었지. 남자가 입꼬리를 올린 순간, 마린케이는 이번에도 제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여실히 깨달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

빌어먹을, 기절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음에 또 봐요’였나. 만약 이 기억이 맞다면, 다시 만나게 되는 즉시 그 자식을 죽여버리고 말 것이다.

마린케이는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느껴지는 자신의 뒤통수를 살살 만지작거렸다. 이 정도면 그냥 프라이팬으로 쳤다고 해도 믿을 것 같은데, 그 말은 공격 무기가 최소 프라이팬 이상이었다는 소리였다. 어쩌면 진짜 망치였을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니 더더욱 적의가 불타올랐다.

그러나 걱정거리는 이것 말고도 충분했다. 마린케이는 운전석에 앉아 느긋하게 핸들을 돌리고 있는 미남자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어둑한 밤이 드리워진 시점이었다. 섬세하게 떨어지는 유려한 곡선의 콧대, 그 밑으로 보이는 매끄러운 입술이 반달처럼 미소 지었다.

“쥐새끼를 잡아 오라고 했지, 직접 되라고 한 적은 없었는데.”

얼얼한 뒤통수를 계속해서 어루만지던 마린케이는 짤막한 사과를 전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괜찮아. 너 생쥐도 잘 어울려.”

“잘 어울린다고요?”

말 그대로 같이 있는 게 잘 어울린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얼굴이 닮았다는 소리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마린케이의 의뭉스러운 표정을 읽어낸 황태자가 작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마저 자라는 뜻이야.”

하여간 귀신같은 새끼. 연신 비아냥거리면서도 마린케이는 착실히 차 시트에 몸을 기댔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황태자의 시선이 저를 향해 있는 듯했으나, 일단은 졸음이 우선이었다. 그는 나른한 분위기를 자장가 삼아 조금씩 편안한 수면에 빠져들었다. 황태자는 그저 차의 속력을 늦출 뿐 더 이상 마린케이를 건드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깊은 단잠에 들어서인지, 마린케이는 개운한 몸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는 본래 어릴 적부터 꿈을 많이 꾸는 타입이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꿈결 같은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아직 잠이 덜 깬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옥과 같은 얼굴이라는 고아한 표현은 괜히 존재하지 않았다. 보석 같은 눈동자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 모든 단어들이 오직 샤를 소피아 엔스를 위해 만들어진 것만 같았다.

“골목엔 왜 쓰러져 있었어?”

침대에 누워있던 마린케이는 반쯤 잠에 취해 있는 상태로 황태자의 말을 되짚어보기 위해 노력했다. 골목? 쓰러져? 잠시 고민하던 그는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고선 표정을 구겼다. 누가 뒤에서 냅다 후려쳤다는 건 알겠는데, 그게 정확히 누구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이라곤 고작해야 제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던 모습뿐이다. 마린케이는 그 당시의 상황을 매우 불친절하게 요약하여 설명했다.

“후려 맞아서 기절한 것 같은데요.”

“아팠겠네.”

공감 같지 않은 공감을 전한 황태자가 몸을 일으키려던 마린케이의 어깨를 꾹 잡아 눌렀다. 어쩔 수 없이 매트리스 위에 눕게 된 마린케이는 눈을 치뜨며 말했다.

“이제 괜찮아져서요.”

“더 누워있어.”

“아뇨. 그만 가보겠습니다.”

“왜?”

“기분, 별로이신 것 같아서.”

황태자는 표정이 아닌 눈으로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낯을 굳히고 있어도 눈이 반짝거릴 때가 있는 한편, 웃고 있어도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을 때가 있었다. 아마 지금은 후자일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의 대답은 달랐다.

“아냐.”

“그럼 좋으신 것 같으니 가보겠습니다.”

본인이 그렇다는데 초를 치고 싶진 않았다. 마린케이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도로 몸을 일으키려 들자, 황태자는 한 번 더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이럴 땐 같이 있어 주겠다고 해야지.”

가녀린 눈꼬리가 어여쁘게 휘어진다. 그러나 눈동자에서 엿보이는 빛은 한없이 낮고 짙었다. 그래서인지 마린케이는 가끔 눈앞의 남자가 살아왔을 인생에 대한 쓸데없는 의구심을 느끼게 되고는 했다.

“불가능합니다.”

당신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았길래 그런 표정을 짓게 된 걸까. 가쉰 사람이라면 누구나 질투할 수밖에 없을 혈통으로 태어나, 어떤 장애물 하나 없는 삶을 살아왔을 주제에.

그러나 티끌 없이 하나 자라온 사람들에게서 엿보이고는 하던 그늘 없음이 황태자에게서는 드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따금씩 세상에 홀로 내버려진 사람처럼 행동하곤 했다. 마치 무거운 족쇄가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듯 푸른 눈을 내리깔면서.

그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은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을 정도로 깜깜하고 아득하기만 했다.

본래 마린케이가 살아왔던 삶은 황태자와 결이 다른 것을 넘어, 절대 마주치지 않을 수평선상에 놓여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당신에게 말 못 할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러나 마린케이는 감정 앞에 주저하지 않았다.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왜인지 아시잖습니까?”

황태자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지만, 차갑게 내려앉아 있던 눈동자 위로 서서히 이채가 어리기 시작했다. 마린케이는 그가 미소 짓는 모습이 좋았다. 세상 전부를 가진 듯한 고고한 남자가 여린 것을 바라볼 때 짓는 그 작은 미소가 마린케이의 가슴을 자꾸만 일렁이게 만들었다.

“마린케이.”

그는 마린케이의 어깨 위로 제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네 말이 맞아. 세상은 썩어 빠졌어.”

“…….”

“시궁창보다 더.”

“동의합니다.”

“나도 그렇게 될까?”

샤를 소피아 엔스는 황태자로 태어났고, 황제로 키워진 사람이었다. 아직 자아조차 확립하지 못한 나이부터 시작된 제왕학 교육은 타고난 천성을 갉아먹으며 그 안에 제국을 새겨 넣으려 들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가지는 법. 그 사이에서 필요한 것은 갈등이 아닌 수용이었음에도 소년은 언제나 저만의 대답을 찾아내려 애썼다.

제국의 토대를 묻는 자에게 무고한 희생을 말하고, 황제의 자질을 묻는 이에게는 유구한 희생을 답한다. 그러나 황제의 자리는 결코 무고하지 않다는 것이 소년 시절의 황태자가 내린 결론이었다. 대경 질색한 교육관들 사이로 황제는 만족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제게 주어진 운명을 부정하며 생각해낸 대답이었으나, 오히려 그것이 소년을 더욱 무결한 황태자로 만들었다. 성군의 자질. 교육관들이 어린 황태자를 향해 찬사를 퍼붓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고개를 떨어뜨린 샤를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난 새를 키웠던 적이 없어. 두려웠거든.”

속눈썹이 흔들리는 모습조차 애처로워 보인다. 마린케이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내가 배운 건 새를 가둬놓는 법이었지, 날아갈 수 있도록 돌보는 법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설명 중 한 가지 빠뜨린 것이 있었다. 소년은 날개가 비틀린 새를 바라보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언제나 새장 문을 열어두고서 화원을 빠져나오던 것이 바로 가쉰의 황태자였다. 그런 샤를에게, 마리아는 늘 슬픔이 깃든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날개 꺾인 새는 새장 문을 열어두어도 멀리 날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마린케이는 황태자의 자학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어깨 위에 얹힌 황태자의 손을 툭툭 건드리며 무던하게 말했다.

“새장 문만 열어두시면 될 것 같은데요.”

언제나 그를 미소 짓게 만들었던 그 불경한 목소리로.

“그럼 남아있든지 날아가든지, 알아서 선택할 거 아닙니까.”

숨이 멈추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답이 끝나기도 전부터 환하게 웃음 짓던 황태자가 마린케이의 고개를 있는 힘껏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말캉한 입술이 맞닿는다. 솜사탕보다도 더 달짝지근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는 순간이었다. 마린케이의 얼굴을 가볍게 쓸어주며, 그는 맞물린 입술 사이로 숨을 불어넣었다.

키스할 타이밍. 이번엔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

심장이 내동댕이쳐지는 것만 같은 격렬한 감각이 쏟아졌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진다. 부드러운 혀가 치열에 스칠 때마다 마린케이는 한숨 같은 신음을 흘렸다. 샤를이 점점 젖혀지기 시작하는 마린케이의 고개 뒤로 손을 받쳐주며 얼굴을 틀었다. 볼이며, 목덜미 같은 곳을 쓸어주는 손길 역시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고간은 진작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기에, 마린케이는 거칠게 황태자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그의 입술을 짐승처럼 물어뜯으면서.

“하아…….”

잠시 입술을 떼어내 호흡할 시간을 준 황태자가 예쁘게 눈웃음쳤다. 뒤통수를 받치고 있던 손을 물린 그는 붉게 달아오른 마린케이의 양 볼 위로 손바닥을 올렸다.

그러더니 마치 세 살배기 아기한테 뽀뽀하듯 마린케이의 얼굴 위로 짧은 키스를 연달아 퍼부었다. 마린케이는 아직도 그의 멱살을 잡고 있는 상태였다. 다정한 행위 때문인지 손끝에 저절로 힘이 실렸다. 흥분감이 가시지 않은 갈색 눈이 황태자를 보채듯 끈질기게 시선을 던져왔다.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게끔 샤를은 서서히 고개를 기울였다.

다시 한번 입술이 맞닿았다. 이번엔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그의 멱살을 쥔 마린케이의 손에 강한 악력이 실렸다. 샤를은 침대 위로 마린케이의 몸을 눕히며 약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미미한 통증은 그저 또 다른 쾌락으로 연결될 뿐이다. 혀를 얽을 때마다 뇌가 녹아내리는 듯한 지독한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마린케이의 등 뒤로 푹신한 매트리스가 닿았다.

황태자는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린.”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는 마린케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고개를 내려 질척하게 입술을 빨아올렸다. 푸른 핏줄이 흉흉히 서 있는 손이 마린케이의 티셔츠 자락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무릎이 한껏 부풀어 오른 마린케이의 성기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흐읏.”

작게 흘러나온 목소리였으나 행위의 불을 붙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충분했다. 입가에 걸쳐 있던 미소를 없앤 황태자는 거칠게 키스하며 마린케이의 버클을 풀어 내렸다.

“읏…….”

울음 같은 신음 소리가 이어졌다. 따뜻한 손이 젖어 있는 드로즈 위를 부드럽게 쓸어 만진다. 마린케이가 보채듯 허리를 들어 올리자, 황태자는 다시금 그에게 키스해 주며 마저 바지를 벗겨냈다. 맨다리 위로 와 닿는 공기는 싸늘하기만 했으나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온몸이 열감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위 속에서 물을 찾는 사람처럼, 마린케이는 황태자의 입술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혀를 얽었다. 쉬이. 그를 달래며 입술을 떼어낸 샤를이 드러난 마린케이의 성기 위로 손을 얹었다. 잔뜩 젖어 있는 살덩이 위를 쓸어내리기 시작하자 날렵한 허리가 가파르게 휘었다.

“아아…!”

마린케이는 저도 모르게 그의 손길에 맞춰 허리를 흔들었다. 성기를 거칠게 밀어 내리는 감각에 머릿속이 죄다 새하얗게 물들었다. 더. 더. 연약한 귀두를 느리게 문지른 황태자가 마린케이의 귓가에 입을 맞추며 요도를 틀어막았다.

“아윽! 무슨…, 흣.”

“지금 싸면 후회할 거야.”

더 기분 좋게 해줄 건데. 응? 그렇게 말한 샤를이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설마. 그 움직임에 마린케이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고양감을 느꼈다. 황태자가 마린케이의 티셔츠 자락을 연거푸 들어 올려 허리께에 키스했다. 마린케이는 몸을 뒤틀며 황태자의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불룩하게 솟아오른 성기 위로 뜨거운 숨결이 와 닿은 것도 그때였다.

“자, 잠시만…, 아, 전하, 으읏…….”

기둥을 난잡하게 빨아들이는 입안이 너무나도 뜨거웠다. 눈을 접은 채 입으로 성기를 주무르는 황태자의 모습은 그 자체로 살인 무기에 해당했다. 마린케이는 차마 그의 얼굴을 온전히 눈에 담지 못한 채 금빛 머리칼을 그러쥐었다. 더 처박고 싶다. 더 흔들고 싶어.

그 마음을 알아챈 요망한 황태자가 속도를 높여 성기를 빨았다. 그와 동시에 그는 빼꼼히 얼굴을 드러낸 마린케이의 회음부를 살살 어루만졌다. 사정감이 차오르는 것에 고개를 꺾은 마린케이가 드세게 허리 짓을 하려던 찰나였다.

“아, 전하…….”

매정하게 성기를 뱉어낸 황태자는 마린케이의 티셔츠를 완전히 벗겨내려 손을 뻗었다.

“더 기분 좋은 거 해야지.”

그러나 이번에는 마린케이가 먼저였다. 그는 황태자의 손이 닿기도 전에 자신의 상의를 벗어 던졌다. 떨리는 손으로 황태자의 셔츠 단추를 풀어 내린 마린케이가 짐승 같은 목울림 소리를 내며 안겨들었다. 그러자 간질거리는 웃음소리를 뱉은 샤를이 그런 마린케이의 손을 붙잡아 제 바지 버클 위로 끌어당겼다.

“단추도 제대로 못 풀면서.”

“빌어먹을. 이게 왜 안 풀리는…….”

“바지부터 벗겨줘. 마린.”

제기랄. 욕설을 내뱉지 않고서는 도저히 흥분감을 주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바지 위로 흉흉하게 서 있는 황태자의 성기를 내려다보던 마린케이가 더듬거리며 버클을 풀었다. 느긋하게 셔츠 단추를 풀던 샤를이 순식간에 표정을 굳혔다.

“뭐 하는…….”

그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마린케이는 자세를 뒤집으며 곧바로 고개를 내렸다. 그제야 의도를 눈치챈 황태자가 몸에 힘을 풀며 마린케이의 뒤통수 위로 손을 올렸다.

“힘들 것 같은데.”

“할 수……, 있습니다.”

자신만만하게 말하긴 했지만, 솔직히 겁이 나는 것이 사실이었다. 드로즈 위로 내비치는 압도적인 존재감에 마린케이는 꿀꺽, 목 뒤로 침을 넘겼다. 그러나 그 두려움 또한 드로즈를 직접 벗겨내는 순간부터 저 멀리로 증발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황태자의 거기는 얼굴만큼이나 어여뻐 보였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랬다. 연한 질감의 피부 위로 살굿빛 색채가 스며들어 있는 성기는 태어나 처음 보는 종류였다.

사내놈들의 아래를 들여다보는 취미는 없었지만, 공동 샤워실을 이용할 때마다 마주쳐야만 했던 그 흉측한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생김새이기도 했다. 심지어 음모까지 예뻤다.

크기가 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설마 입이 찢어지기라도 하겠어. 마린케이는 평균을 훨씬 넘어서는 제 성기를 잘만 빨고 애무하던 황태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을 벌렸다.

“해보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기는 입 끝까지 들어가지조차 못하고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차라리 거의 들어가기라도 했으면 다행이겠는데, 절반도 채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 쓸데없이 자존심을 긁었다.

“혀로 핥아 봐.”

비릿한 향이 풍기는 선단을 입에서 빼낸 마린케이는 그의 조언대로 혀를 내밀어 두꺼운 기둥을 핥았다. 하아.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마린케이의 성기에도 더더욱 힘이 쏠렸다.

“막 넣으려 하지 말고. 응?”

“으르스 흘 급느드….”

“그러다 입 찢어져.”

다정한 목소리와 달리 황태자의 허리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서 거세게 움직였다. 성기를 입에 문 마린케이는 힘에 부쳐하면서도 고개를 빼지 않았다. 그대로 입에 성기를 박아 놓은 채 두는 것도 제법 볼만한 장면이었지만, 선단을 목 끝까지 밀어 넣을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는 불량한 얼굴이 더욱 장관이었다.

“하아…….”

“웁, 우웁. 흐읍….”

새빨개진 얼굴의 마린케이가 입술을 떼려 하면 황태자는 더욱 강하게 허리 짓을 해 입안을 들쑤셔 놓았다. 귀두에서 흘러나오는 쿠퍼액을 삼킨 마린케이는 황태자의 허벅지를 세게 틀어쥐었다. 단단한 허벅지 근육에 손톱을 잔뜩 밀어 넣어야만 몸의 반동을 좀 무마할 수 있었다.

그는 황태자가 제 입에다 대고서 허리를 흔드는 장면을 몇십 번이고 더 눈에 새겼다.

“이리 와.”

사정감이 치솟기 직전에 성기를 빼낸 황태자가 마린케이를 안아 들어 제 허벅지 위로 올렸다. 허리를 끌어안는 다부진 손에 몸을 맡긴 마린케이는 그의 입술을 물어뜯듯 키스하며 읊조렸다.

“많이 해보셨나 봅니다.”

“뭘?”

“……방금 했던 거요.”

“자세히 말해야 알지.”

여우 같은 새끼. 삐딱하게 표정을 굳힌 마린케이가 아닙니다, 하며 고개를 빼려던 찰나였다. 황태자는 그런 마린케이를 잡아끌어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솜털처럼 가볍게 키스한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좆 빠는 거?”

천사 같은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스러운 단어였음에도 마린케이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성기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가 그의 귓바퀴를 깨물며 결정타를 날렸다.

“네가 처음이야.”

“아, 잠깐만요, 앗…. 흐읏!”

하얀 손이 단단히 곧추선 성기를 틀어쥐며 흥분감을 고취시켰다. 허리를 휜 마린케이가 도리질 쳤으나, 황태자는 되레 목덜미에 깊게 키스하며 손을 움직여댔다. 전신에 스파크가 튀는 감각에 마린케이는 그의 어깨 위로 얼굴을 묻으며 몸을 비틀었다. 성난 이가 어깨부터 시작해 팔뚝까지 이르는 모든 살결을 이곳저곳 깨물었다.

그때, 황태자의 성기가 마린케이의 회음부를 스치며 엉덩이 골 사이로 향했다. 가장 여린 곳에 닿아오는 성기의 윤곽에 마린케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전하, 잠깐만요, 전하…!”

“쉿. 끝까지 안 할 테니까.”

그 말이 끝이었다. 황태자는 마린케이의 입술을 틀어막으려 키스를 퍼부었고, 그의 허리는 그보다 더 강하게 움직이며 회음부를 애무했다.

딱딱한 성기가 스쳐 지나는 것도 미칠 것만 같은데, 앞을 틀어쥔 손이 질척한 소리를 내며 감겨드는 것에는 아예 정신이 나가버릴 지경이었다.

단단한 어깨 위로 얼굴을 묻은 채 신음을 흘리던 마린케이는 팽팽히 부풀어 오른 황태자의 근육을 느리게 어루만졌다. 팔뚝에서부터 시작해 복근, 그리고 허벅지까지.

“읏, 하윽, 흐읏…!”

침대가 끼긱거리는 소리가 부서지기라도 할 듯 흉포하게 울려 퍼졌다. 황태자가 귓불을 물어뜯자 마린케이는 그의 등 뒤로 손톱을 세우며 터져버릴 것만 같은 몸의 감각을 이전했다.

근데 왜 내가 이 역할…. 그러나 그 생각마저도 사정감이 치닫기 시작하며 던져버리게 되고 말았다. 빌어먹을, 밑이라도 상관없다. 마린케이는 발갛게 달아오른 황태자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넋을 놓았다. 그의 거친 손 위에 사정하게 되는 것 또한 동시였다. 마찬가지로 제 엉덩이께에서도 뜨겁고 진득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황태자가 싸지른 정액이었다.

“흐으…….”

못다 한 열감을 토해내며, 마린케이는 울부짖듯 그에게 매달려 얼굴을 비볐다. 손에 묻은 불투명한 액체를 한번 그러쥔 샤를이 마린케이의 허리를 다시 꼿꼿이 세우며 입 맞췄다. 풀린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보고 있던 마린케이는 이어진 그의 행동에 기함을 하며 눈을 크게 떴다.

“뭐, 뭐 하는 짓. 전하, 잠…….”

하얀 정액을 마린케이의 성기 위로 펴 바른 황태자가 다시 한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꽃 같은 보조개가 세상천지에 드러나도록 천진하게 웃었다.

“한 번이라고 한 적은 없어.”

3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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