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7. 핑계 없는 무덤이 있으랴 (7/12)

7. 핑계 없는 무덤이 있으랴

트랙 스무 바퀴를 뛰었을 때보다 훨씬 더 몸이 무겁고 피곤하다.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마린케이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서 몸을 일으켰다. 본능적인 감각에 의존해 음식 냄새가 나는 주방으로 향하자, 앞치마를 맨 황태자가 식칼을 들고서 마린케이에게 인사했다.

도마 위에 있는 뭔지 모를 식재료들이 전부 산산조각 나 있는 걸 보니 아마 요리를 하겠답시고 설쳐댄 게 틀림없는 것 같았다. 마린케이로서는 바란 적 없는 호사였다. 샤를이 물었다.

“생각보다 멀쩡하네.”

“그럼 안 됩니까?”

까칠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깨를 으쓱인 샤를은 의연히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냥 손으로 가리킬 것이지, 저런 데서도 하필이면 식칼을 사용하는 것이 타고난 용병 새끼다웠다. 밤새도록 그의 개수작에 시달렸던 마린케이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창 살을 부대끼던 와중 황태자가 자연스럽게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으려 들었기 때문이었다.

「뭐 하십니까?」

「시도.」

「그러니까, 뭘요?」

「적나라하게 말해줘?」

마린케이는 성에 어두운 까막눈이 아니었다. 대답 없이 부루퉁한 얼굴을 하는 마린케이에게, 황태자는 깃털처럼 가벼운 키스를 퍼부으며 애교를 부렸다. 아이를 어르는 듯 부드러운 몸짓이었다. 그러나 무표정이 거듭되자 그는 순순히 시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마린케이의 머리칼 위로 얼굴을 비비며 물었다.

「가지고 싶은 거 있어?」

어지간한 해협보다 더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남자는 반드시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듯 귀찮게 달려들었고, 마린케이는 그런 그를 무시하며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온몸에 힘이 없었다.

***

마린케이는 숫제 접시까지 씹어 먹을 듯한 기세로 포크질을 하고 있었는데, 완성된 요리를 보고서도 심드렁하기만 하던 조금 전의 얼굴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접시에 코 박고 먹는다는 소리가 저런 걸 보고 하는 거였구나. 샤를은 마린케이를 신기한 듯 구경하며 지금이라도 1인분을 더 만들어놓는 것이 좋지 않을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노골적인 시선을 이기지 못한 마린케이가 음식을 먹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가에 묻어 있던 스크램블 에그를 스스럼없이 손으로 닦아낸 샤를이 제 입가로 그 손을 가져다 댔다. 눈으로 봐도 믿기 힘든 그의 기행에 마린케이는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걸 왜 전하께서 드십니까?”

“맛있어 보이길래.”

대답을 포기한 마린케이는 표정을 구긴 채 마저 포크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입가에 묻히지 않으려 조심스레 움직이는 것이 답지 않게 퍽 귀여워 보인다. 한가득 채워져 있던 요리들을 모두 깔끔히 해치운 마린케이는 동난 접시를 보며 아쉬운 얼굴을 했다.

처음 도마 위에 널브러져 있던 식재료들을 봤을 땐 영 미심쩍었지만, 막상 먹어보니 황태자의 요리 실력은 꽤 괜찮은 축에 속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에단 스튜퍼의 소고기 스튜 레시피는 피에르 셀번이 아닌 샤를 소피아 엔스가 가져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대충 정했지?”

“예?”

“가지고 싶은 거, 말하라고 했잖아.”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어제부터 이어졌던 그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의 연속이었다. 가지고 싶은 거라면 많고 많았지만, 전부 다 그가 이뤄줄 수 없는 것들에 속했다. 예를 들면 서약 파기라든가, 왕립학교 퇴학이라든가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덤으로 3천 몬트를 사기 친 그 새끼도 좀 잡아 족칠 수 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가장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흔히 오지 않을 기회야.”

“압니다.”

마린케이의 올곧은 시선이 황태자를 향했다. 어떤 귀족에게도 기죽지 않고, 어떤 약자에게도 흉포해지지 않는 그런 눈빛이었다. 마린케이는 덤덤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허투루 쓰기 싫습니다.”

“괜찮아. 뭐든 말만 해.”

“…….”

“전부 다 들어줄 테니까.”

마린케이는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이 공수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새파란 눈이 의중을 가늠하듯 마린케이를 들여다보았다. 그 눈을 마주할 때마다, 마린케이의 심장은 주인의 의사는 들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미친 듯이 뛰어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온몸의 열감은 도저히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허나 아무리 혀를 섞고, 몸을 맞댔다고 할지라도 황태자는 여전히 먼 곳에 있는 사람처럼만 느껴졌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신기루 속 오아시스 같은 존재 말이다.

그 순간 울컥, 차마 감추지 못한 감정의 파편이 튀어 올랐다. 손이 닿지 않으면 어떤가. 그럼 식칼을 던져서라도 이쪽을 돌아보게 만들면 될 텐데. 마린케이는 세상의 복잡함에 납득되어 가고 싶지 않았다. 고로, 그는 황태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서 솔직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요.”

“…….”

“당신이 가지고 싶습니다.”

황태자는 아직도 제 감정에 대한 답변을 유보한 상태였다. 그런 그에게 화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온갖 스캔들로 가십지를 수놓고 다니던 셀럽이기 이전에, 그는 그 자체로 제국을 상징하는 가쉰의 황태자였으니까.

따라서 마린케이는 그의 대답을 기대하지도, 기다리지도 않았다. 언젠가 삭아 없어질 마음이라면 이대로 쭉 공존하는 것도 해볼 만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따라오는 황태자의 목소리에, 돌처럼 무심한 그의 표정에도 서서히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안 돼.”

생각보다 훨씬 이르게 돌아온 대답이었으나 마냥 반가운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니다.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었음에도 그랬다. 목 뒤로 감정의 잔재를 삼킨 마린케이가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였다.

“이미 가진 걸 또 내어줄 수는 없잖아.”

장난스럽게 웃은 황태자는 몸을 일으켜 마린케이에게로 걸어왔다.

“설마 아무리 가져도 모자란 거야?”

“미치셨습니까?”

믿을 수 없는 전개였다. 샤를은 굳어 있는 마린케이의 얼굴 위로 손을 올렸다. 무인의 손임을 증명하듯, 크고 작은 흉터들로 인해 무척 단단하고 까슬하게 느껴지는 손바닥이었다.

마린케이의 볼 위로 살짝 입술을 맞댄 황태자가 그의 너른 어깨 위로 고개를 파묻었다. 저와 엇비슷하지만 조금 더 작은 몸을 끌어안은 샤를이 조금씩 진심을 전한다.

“나랑 엮인 걸 후회하게 될 수도 있어.”

그러자 마린케이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원래도 후회하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지금보다 더 위험해질 수도 있고.”

“전하만 하겠습니까?”

마린케이가 살아온 인생 속, 가장 큰 소용돌이는 바로 황태자라는 존재 자체였다. 따라서 어떤 위험이 닥쳐오더라도 그보단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를 바라보면서 심장의 고통을 느끼고, 새벽에 떠오르는 얼굴을 잊으려 러닝머신을 달리고, 어딘가를 바라볼 때마다 그 향기를 생각하는 그런 지독한 기분 따위 한 번도 원한 적 없었으니까.

“내가 널 지키지 못하게 된다면? 그때도 이 순간을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그제야 마린케이는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린 것을 보며 미소 짓고, 약한 것을 위해 뛰어드는 성품과 용기를 가진 남자가 저를 보며 흐리게 웃는다. 마린케이는 그가 만들어갈 세상을 위해 기사로서의 삶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어렵사리 받아들인 주군을 사랑하게 될 줄이야. 기사 서약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컸다. 그와 연인이 되는 순간부터 마린케이 이스턴은 군신 관계를 저버린 무뢰배로 전락하게 될 터였다. 그리고 그건 황태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사도를 숭상하는 가쉰 제국의 황태자가 제 기사와 연심을 나누게 되다니. 그러나 두려워할 것이었다면 애당초 시작도 하지 않았을 감정이었다.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마린케이는 황태자의 멱살을 잡아끌며 그 입술 위를 아프게 깨물었다.

“제가 전하를 지켜드리는 거지, 전하께서 저를 지키시는 게 아닙니다.”

“…….”

“어느 주군이 기사를 지킵니까?”

그제야 샤를은 천천히 미소 지었다. 함께 있으면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 사람. 언젠가 호즈는 꼭 그런 사람을 만나야 한다며 샤를에게 조언해 주곤 했었다. 호즈, 너한테 말해주고 싶은 게 늘었어. 내게도 아주 특별한 사람이 생겼거든. 샤를은 사랑스러운 기사의 몸을 끌어당겨 제 품 안에 안을 수밖에 없었다.

“지켜드리겠습니다. 목숨까지는 안 걸겠지만.”

마지막에 덧붙인 말은 오기 비슷한 것이었다. 마린케이는 단내가 풍기는 황태자의 몸을 하나하나 씹어 삼키고 싶다는 격렬한 충동을 느꼈다. 당신을 위해 죽고 싶은 것과는 별개로, 당신을 두고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틀림없이 전자를 고를 것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당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게 된 것만 같았으니까.

***

점차 깊어지기 시작하는 키스를 가로막은 것은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휴대폰 벨 소리였다. 입술을 떼어낸 마린케이가 소파 위를 눈짓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긴 황태자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마린케이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그가 다시금 입술을 겹치려 들 때였다.

전화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계속되는 벨 소리에 마린케이는 자꾸만 무게를 실어오는 황태자의 몸을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 놈의 벨 소리는 딱 본인처럼 화려하고 난잡한 헤비메탈 사운드였다. 거리에서 만난 소녀도 그렇고, 이 자식도 그렇고, 왜들 그리 시끄러운 소리에 집착하는 건지 모를 일이다.

결국 스스로 몸을 움직인 마린케이가 황태자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불퉁한 얼굴로 벽에 기대 서 있던 샤를이 “그냥 전원 꺼버려.” 하고서 태클을 걸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휴대폰을 손에 쥔 마린케이는 예상치 못한 난관과 맞닥뜨리고서 물었다.

“비밀번호가 뭡니까?”

“내 지문.”

그러자 마린케이는 들고 있던 휴대폰을 단박에 황태자에게로 집어 던졌다. 휴대폰이 정확한 포물선을 그리며 황태자의 품 안으로 안착했다. 쓰레기통에 자신의 휴대폰을 던져 넣던 솜씨 그대로였다. 샤를이 인상을 구기며 잠금장치를 풀었다.

때마침 벨 소리가 새로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굉음에 가까운 소리를 벨 소리로 설정해놓은 황태자의 정신머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역시 끄는 게 낫겠다.”

“누구한테서 온 건데요?”

“세상에서 제일 재수 없는 새끼.”

재수 없는 새끼가 어디 한둘인가. 일단은 눈앞의 이도 그중 한 명에 속했다. 고민하던 마린케이는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명의 이름에 다급히 황태자를 불렀다.

“잠시만요.”

황태자는 의아하다는 듯 선명한 벽안을 들어 마린케이를 바라보았다.

“혹시, 그거 레온하르트 씨입니까?”

그 순간 황태자가 불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레온하르트 씨?”

피에르 셀번이 ‘우리 전하가 이렇게 양아치일 리 없어’를 시전할 수 있을 정도의 삐딱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예. 전하의…, 이복형제라고 했었던.”

“뭐 하러 그 새끼한테 존칭을 써?”

핀트가 좀 엇나가 있는 것 같긴 했지만, 딱히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니었다. 피드백을 반영한 마린케이가 황태자의 취향대로 질문을 바꿨다.

“레몬타르트인지 뭔지 하는 그 새끼 맞죠?”

“정확해.”

“그럼 받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

“제가 부탁드린 게 있거든요. 그 사람, 아니. 그 새끼한테.”

사실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었지만, 어쨌든 부탁이라고 치자.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로 마린케이를 응시하고 있던 황태자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뭐, 그래.”

그러나 전화를 주고받을 만큼 돈독한 형제 사이였다면 저렇게 표정이 구겨져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황태자의 얼굴은 벌레라도 씹은 사람처럼 맛이 가 있는 상태였다.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댄 그가 다짜고짜 물었다.

“내 번호 누가 알려줬어?”

-카밀라가.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카밀라? 네가 카밀라랑 연락이 된다고?”

-당연하지. 너랑만 안 되는 거야.

“…재수 없는 새끼.”

-부디 인내심 좀 기르지 그래? 이제 그럴 때도 된 것 같은데.

역시나 아무런 소득도 없는 대화였다. 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리려던 샤를에게, 레온하르트는 태연한 목소리로 요구했다.

-이따 회 도시락 좀 사 가지고 와. 특대로. 아, 녹차도 같이.

“돈도 많으면서 왜 애먼 사람을 시켜? 배달이나 불러.”

-여기까지 배달이 안 되니까 그렇지.

“그럼 퀵이라도 쓰든가.”

-이스턴도 같이 데리고 와. 오기 싫음 걔한테 도시락만 들려 보내고.

레온하르트는애초에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던 사람처럼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뚝. 자동 응답기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황태자가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마린보이.”

그는 정말 어이가 없다는 투로 물었다.

“네가 부탁했다는 게 회 도시락이었어?”

***

“혼자 올 거 알았어.”

“도시락은 사 왔습니다.”

레온하르트는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마린케이를 반기듯 손을 들어 올렸다.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던 건지, 반대쪽 손은 여전히 화면을 두드리고 있는 채였다. 눈앞의 이가 베사플레사를 소유한 오너라는 사실은 아무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모습이자, 누군가는 보고서도 차마 믿지 못할 꼴사나운 풍경임이 분명했다.

물론 마린케이의 표정엔 아무런 흥미도, 미동도 없었다. 관심도 없을뿐더러, 관심을 가져주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마린케이의 눈에 비친 레온하르트라는 사람은 충분히 그럴 만한 인간이 맞았다. 휴대폰 게임에 정신이 나간 그의 앞에 도시락을 내려놓은 마린케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뿅뿅거리는 요란한 게임 소리는 최대한 무시하기 위해 노력했다.

“부탁했던 건 어떻게 됐습니까?”

“아, 그거.”

그제야 레온하르트는 게임을 끝내며 몸을 풀었다. 목숨값을 갚겠노라 약조하긴 했어도, 그것이 해결 가능한 범주에 속해 있지 않은 경우라면 제아무리 그가 베사플레사의 오너라고 한들 마땅한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실은 방법이야 있긴 하다. 그걸 선택하는 것이 누군가에겐 끔찍한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으니 문제였지.

“다짜고짜 본체를 잡아내라고 해 봤자, 미끼가 있지 않는 이상 내가 끼어들 틈은 없어.”

심드렁한 대답에 마린케이는 미간을 구겼다. 미끼. 그 단어가 이상하게 짜증을 유발했다. 탐탁지 않은 표정을 확인한 레온하르트가 도시락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경고하듯 말했다. 젓가락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별스럽게 진지했다.

“참고로 넌 안 돼. 미끼치고 너무 크거든.”

“그럼 그쪽도 안 되겠네요.”

쌀쌀맞은 대답이었지만 정작 듣는 이는 어떠한 타격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금발을 가진 새끼들은 도대체 왜 저리 수수께끼 같은 말들을 자주 사용하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냥 좀 제대로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황태자와 똑같은 짓거리를 하는 중인 레온하르트를 바라보며, 마린케이는 못마땅한 얼굴로 옆에 있던 간의 의자에 털썩 내려앉았다. 최대한 공손하게 질문하려 했으나 아쉽게도 실패하고 말았다. 노력의 양이 현저히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쟤는 어떻게 존댓말을 써도 시건방져 보일 수 있는 걸까. 황태자와 닮은 듯, 닮지 않은 푸른 눈동자가 그런 마린케이를 바라보며 반달처럼 기울었다. 흥미로운 것을 발견할 때마다 튀어나오곤 하는 장난스러운 표정이었다.

“지하실로 끌려간 댄 미헤르가 본체가 아니라면, 찾아낼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웃음기가 스며들어 있는 목소리였으나, 전혀 유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예민한 인상의 사내는 얼굴 위로 거짓 미소를 걸며 말을 이었다. 그는 누군가 저로 인해 세상의 그늘을 깨닫고 절망하게 되는 장면을 유난스럽게 좋아했다.

“직접 끼어들어 주는 거지. 그 새끼들 소꿉놀이에.”

댄 미헤르의 범죄 행각을 소꿉놀이라는 귀여운 용어로 지칭할 수 있는 자도 오직 레온하르트뿐일 것이다. 소꿉놀이. 마린케이는 문득, 귀족들의 유흥 행위를 녹화하며 테이프를 만들어놓던 레온하르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이 녹화본들이 어떻게 쓰일지는 사용하는 사람 마음에 달려 있겠지. 애석하게도 내가 관심 있는 건 비즈니스뿐이지만.」

“청렴하고 무결하신 우리 벌린 경께서, 왜 하필 댄 미헤르 같은 쓰레기 새끼와 놀아났던 걸까?”

하지만 도덕과는 전혀 연결 고리가 없어 보이는 레온하르트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귀족들의 무자비한 행태를 녹화해두는 상황은 더욱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목표 이외의 것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마린케이가 가진 단순한 사고방식이었다.

그즈음 레온하르트 또한 마저 입을 열었다.

“우리 지엄하신 벌린 경도 무결하지 않으시단 뜻이거든. 알고 있지?”

길어지는 그의 말에 집중력을 잃은 마린케이는 어느덧 전당포를 털었을 때 들었던 말들을 헤아려 보고 있는 중이었다. 쳐 죽여도 시원찮을 새끼들 중 한 명이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성별은 상관없으니, 어린아이들을 잡아 오기만 하면 됐다고. 레온하르트 역시 노골적인 단어를 입에 올리며 마린케이의 추측을 현실로 확인시켜 주었다.

“열다섯보다 어린 나이여야 돼. 여자애면 좋겠지만, 남자애라도 상관없어. 성별은 안 가리는 것 같더라고.”

그 말에 분노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어떻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붉은 머리칼을 가진 어린 소년의 목에 걸려 있던 쇠사슬. 댄 미헤르의 꼭두각시는 그런 소년을 상품이라 말하며 황태자의 앞에 소개했었다. 소년은 체념 어린, 구원을 바라지도 않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선 사람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버려진 아이들이 난무한 뒷골목에서, 생명이 휴지 한 조각보다 못한 용도로 사용되는 광경을 목격하며 살아온 마린케이였다. 익숙할 정도로 많은 희생들이 그의 삶 곳곳에 존재해 있었다. 그야말로 누구도 손 내밀지 않는 무형의 감옥.

“어린애를 이 일에 끌어들이자는 겁니까?”

그러나 누구도 손 내밀지 않는다고 해서, 그 아이들을 멋대로 짓밟고 유린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고고하신 귀족 나으리들이 어떤 식으로 인간의 존엄을 말살해 왔는지, 마린케이는 가장 비참한 하루하루를 버텨야만 했던 그 시절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아오고 있었다.

“노예 경매에 참여하려면 직접 노예를 넘기는 수밖에 없어. 댄 미헤르, 그 새끼가 어째서 지금까지 폴리스한테 잡혀가지 않은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완고했다. 매섭게 눈빛을 굳힌 그는 어느새 제 멱살을 틀어쥐고 있는 마린케이의 손을 거칠게 떨어뜨렸다. 그가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어째서 내부 고발자가 한 명도 없었던 건지, 정말 이해 못 하겠냐고. 이스턴.”

레온하르트가 차갑게 일갈했다.

“샤를처럼 굴지 마.”

그 말에 마린케이는 포기하듯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샤를 소피아 엔스. 자신이 아는 중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당신이었다면 어떻게 말했을까. 실은, 마린케이는 자신이 레온하르트의 주장에 설득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뒷골목을 구르며 살아남은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도덕이나, 의로움 같은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들인지도.

하물며 이는 극악무도한 범죄와 관련된 일이었다. 사소한 도덕쯤이야 양심 뒤편에 미뤄둘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는 뜻이다. 황태자를 만나기 이전의 마린케이였다면 분명 레온하르트의 주장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 뻔했다.

마린케이의 침묵을 웃으며 받아들인 레온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쓰레기 소굴에 들어가야 쓰레기를 잡을 수 있어.”

“…….”

“그렇게 들어간 새끼들이 죄다 같은 쓰레기였다는 게 문제지만.”

황태자가 모든 일 앞에 용기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불합리에도 구애받지 않고 약자의 편에 설 수 있는 사람.

그가 황태자로서 여린 것을 위해 손 내밀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면, 마린케이는 그와는 매우 동떨어진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손을 내밀기는커녕 내밀어진 손 또한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 뒷골목의 부랑아가 바로 그였다. 레온하르트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샤를 새끼는 알고 있어?”

“아직 말 안 했습니다.”

“약점이라도 잡혔나 보네.”

황가의 선택을 받지 못했으나, 어떤 황족들보다도 더 비정하고 치열한 인생을 살아가야 했던 사내는 제 목숨을 구해준 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조언 하나 해줄까.”

그는 제 머리 위에 와이셔츠를 뒤집어씌우던 간 큰 평민의 모습을 회고했다. 식도가 타들어 가는 것 같던 고통 속에서, 자꾸만 저를 일깨우던 사나운 목소리가 존재했다. 레온하르트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저를 바라보며 짓던 표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새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진 게 많아.”

그래서 그는 답지 않게 조금의 친절을 베풀기로 결심했다. 알량한 도덕심과 의로움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자신이 내뱉은 말들에 체할 정도의 역겨움을 느꼈을 것이 훤했다.

“네가 잡힌 약점 같은 건 그 새끼 손짓 한 번이면 없어질 거야. 장담해.”

어쩌면 위로 비슷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조언 감사합니다.”

“뭘. 열받으라고 한 소리니까 괜찮아.”

그러나 마린케이의 표정은 여전히 차갑게 굳어진 그대로였다. 자기혐오. 그는 이 순간,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린 저 자신이 끔찍해 입술을 짓씹을 수밖에 없었다.

벙거지 모자를 쓴 소녀가 구김살 없이 웃던 모습이 머릿속을 잠식한다. 열다섯 살이 채 되지 않은, 다이애나 또래의 소녀. 마린케이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 소녀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소녀의 얼굴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지만.

***

폐수련장에선 낡은 고철 냄새와 먼지 냄새가 뒤섞인 비릿한 향취가 풍겼다.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면서도 자신에 대한 회의를 저버릴 수 없었던 마린케이는, 잡고 있던 목검을 바닥에 집어 던지고 나서야 상념을 떨쳐낼 수 있었다.

알고 있다. 댄 미헤르를 잡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그 쓰레기 소굴로 들여보낼 수는 없는 일이란 것을.

그러나 머리는 여전히 무겁게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먼지 쌓인 바닥에 앉아 아무리 숨을 골라봐도 그 답답함은 계속해서 가슴 한편에 남아있었다.

마린케이는 굳게 닫혀있던 폐수련장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을 바라보며 고개를 들었다. 문틈 새로 들어온 환한 빛이 눈을 따갑게 만든다. 회색 트레이닝복 차림의 황태자가 한 손으로 문을 밀어 닫으며 마린케이를 향해 인사했다.

“여기서 보는 건 오랜만이네. 그치?”

달갑지 않은 만남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매우 형편없는 수준이기까지 했다. 마린케이는 바닥에 떨어진 목검을 다시금 손에 쥐며 삐딱하게 목을 숙여 인사했다.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법한 종류의 몸짓이었다. 불량한 목소리 또한 함께 이어졌다.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우연이야.”

그러나 황태자는 마린케이의 날 선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얼굴 위에 미소를 띠었다. 그가 뜀틀 위에 가볍게 걸터앉으며 이온 음료를 건넸다. 어쩐지 그 파란 눈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에, 마린케이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버리고 말았다. 그에 황태자는 음료수를 뜀틀 위에 세워두며 상냥하게 말했다.

“믿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긴 한데.”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의 다정한 목소리였다. 이건 그에게 연심을 품게 된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마린케이는 다시 한번 그와 자신의 사이를 가로막고 선 수평선의 존재를 느꼈다. 절대 맞물릴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수평선 말이다.

“세상엔 믿기 힘든 우연도 많아.”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없습니다.”

마린케이는 단호하게 그의 말을 부정하며 몸을 일으켰다.

“우연 같은 거.”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저히 우연일 수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저 정해진 순리일 뿐이다. 빌어먹을 정도로 정의로운 한 남자가 소년을 위해 손 내밀고, 자신이 레온하르트의 얘기를 들으며 그 소녀의 얼굴을 떠올리게 된 것은 말이다. 그건 절대 우연이 될 수 없었다.

심지어 마린케이는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던 그 소녀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니 그 연약한 얼굴을 떠올린 순간 스스로에 대한 역겨움이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정의라는 글자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그였다. 뒷골목 한복판에서 날치기나 하며 시답잖은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그가 배웠던 것은, 정의란 있는 자들의 구경거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때였다. 황태자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마린보이. 속상하구나.”

제기랄. 무슨 헛소리야. 그런 유아적인 말로 설명할 수 있을 만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황태자는 다시 한번 따스한 목소리로 권했다. 어서 빨리 안기라는 듯, 두 팔을 밖으로 넓게 벌리면서. 마린케이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한 걸음 뒤로 몸을 물리게 되고 말았다.

“이리 와.”

“됐습니다.”

“거짓말은.”

“거짓말 아닙니다.”

“맞을걸.”

“아니라니……”.

그러자 문득 목이 막혔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답했을까. 어떤 생각을 했을까. 개구지게 웃던 황태자는 마린케이가 입술을 짓씹는 장면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너…….”

그 순간이었다. 닫혀 있던 수련장의 문이 환하게 열리며 누군가가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벅찬 호흡과 가냘픈 숨소리가 들려온다. 들이닥친 빛 속에서 보인 것은 황태자의 것과 똑같은 금빛 머리칼이었다. 청명하도록 푸른 눈동자가 빨갛게 젖어 있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뛰어 들어온 4황자, 섀넌 프리지아 엔스가 황태자를 바라보며 숨을 들이켰다. 애처롭게 떨려 오는 목소리가 제 형을 부르짖는다. 하얀 얼굴이 눈물을 쏟았다.

“형, 형….”

“섀넌?”

섀넌이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을 고하는 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흐윽, 비통한 울음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법한 상황이었지만, 마린케이에게는 달랐다. 그는 제 주군을 돌아보며 아연하게 표정을 굳혔다. 빌어먹을.

“폐하께서.”

언제나 절망은 한꺼번에 닥쳐온다. 섀넌이 떨리는 목소리로 고했다.

“폐하께서, 승하하셨대….”

언제나 장난스럽게 접혀 있던 황태자의 가녀린 눈매 위로 헤아릴 수조차 없을 것만 같은 깊은 감정이 도래했다. 망연자실한 얼굴도, 충격을 받은 얼굴도 아니었다.

차가운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그는 그저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마린케이에게는 그 고요한 얼굴이 마치 세상에게서 버림받은 자의 얼굴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푸른 눈을 드러낸 그가 망설임 없이 4황자를 향해 걸어갔다. 무거운 걸음을 내딛는 내내 그는 단 한 번도 마린케이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린케이는 그것이 주군의 뜻임을 깨닫고서 작게 묵례할 뿐이었다. 그의 슬픔을 구경거리 삼고 싶지는 않았다.

새삼스레 그가 가쉰의 선택을 받은 황태자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 마린케이는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바닥에 나뒹구는 자신의 목검을 내려다보았다. 정적 속에 홀로 남겨진 기분은 여느 때처럼 익숙하기만 했으나 그다지 유쾌하지는 못했다.

***

거리의 풍경은 평상시와 같았지만, 그 분위기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시계탑 가운데 모여든 인파들은 저마다 가슴팍 위로 하얀 국화꽃을 달고 있었다. 수업까지 뒤로한 채 거리로 나온 마린케이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하며 그들 사이로 섞여들었다.

때로는 침음성이 들려오고, 때로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방식이야 달랐지만, 그들 모두가 황제를 추모하고 있단 사실만큼은 변함없었다.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에 모두가 시름 섞인 얼굴로 깊이 고개 숙였다. 침묵이 흘렀다.

그 순간 마린케이는 시계탑 위를 넌지시 올려다보았다. 초대 황제가 가쉰을 건국하고서 도시 건설을 계획했을 때, 가장 먼저 명령한 일이 바로 저 시계탑을 건설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나, 가쉰이 그들을 비호하고 있다고.」

헤까닥한 정신머리와는 달리 그는 제국민을 무척이나 사랑한 황제였던 모양이다. 그들이 하루하루를 인식하며 살아갈 수 있게끔, 그리고 살아가는 것을 잊지 않을 수 있게끔 방편을 마련해 두려 했던 것을 보면. 평소의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황량한 정적 속에서 마린케이는 그렇게 오래도록 시계탑을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불행은 시기를 기다려주지 않는다지만, 과연 이것을 불행이라 부를 수나 있을까. 황제의 죽음은 곧 황태자의 비상이자 기회를 뜻했다. 비어있는 황좌를 차지하게 될 사람은 의심의 여지 없이 샤를 소피아 엔스가 맞았다. 총명함으로 번뜩이는 새파란 눈을 가진 그가 황위에 오르게 된다면 세상은 또 어떻게 뒤바뀌게 될는지.

“국화꽃 안 달았네?”

상념에 너무도 깊이 빠져들었기 때문일까, 마린케이는 점차 제게로 가까워지는 걸음 소리를 눈치챘으면서도 고개 한 번을 돌리지 않았다. 금세 가까이 다가온 소녀가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쓰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제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에 심술이 났던 건지, 소녀는 더욱 가까이 몸을 붙이며 크게 소리쳤다.

“그럼 못써.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셨잖아.”

그제야 마린케이는 시선을 틀었다. 얼마간 굳은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던 그는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넌 왜 안 달았는데?”

정확한 지적이었지만, 소녀는 단 1초도 당황한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뾰로통한 얼굴의 소녀가 자신의 벙거지 모자 위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달았거든? 여기.”

국화꽃 모양의 흰색 브로치가 벙거지 모자 위에 꽂혀 있었다. 마린케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을 표했다. 꽃 모양의 브로치는 소녀의 귀염성 있는 얼굴과 제법 잘 어울렸다.

“예쁘네.”

“그치? 션이 만들어 준 거야.”

그러나 그 햇살 같은 웃음을 바라보면서도 마주 미소 지을 수는 없었다. 어째서 거리에 나왔냐고? 그걸 꼭 말로 해야 설명할 수 있을까. 마린케이는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내내 제 마음속 한구석이 화하게 욱신거리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의 시선을 느낀 소녀가 의심스러운 듯 눈을 치켜떴다.

“왜 그렇게 봐?”

뒷골목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빼어난 눈치를 토대로 생존을 배운다.

마린케이는 소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가 말을 고르던 찰나, 소녀가 정곡을 찌르는 물음을 던져왔다.

“나한테 죄지은 거 있어?”

도망칠 자격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순간에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건지, 빌어먹을 왕립학교는 엄중한 기사도에 대해 논하기만 할 뿐 그 무엇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마린케이는 태어나 단 한 번도 누군가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가출을 끝내고 돌아와 어머니의 무시무시한 얼굴을 마주하게 됐을 때는 그와 비슷한 충동을 느껴본 적 있긴 했으나, 그때도 무언가를 피해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해본 적이 없었다.

“아무 데나 한 대 때려줄래?”

그러니 그 순간 마린케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은, 소녀가 기대하고 있던 것과는 무척 결이 다른 종류일 수밖에 없었다. 레온하르트의 말이 맞았다. 쓰레기를 잡기 위해선 그 쓰레기장 안으로 발을 들여야만 한다.

문득, 그가 황태자를 비난하던 목소리가 이번엔 꼭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것만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쓰레기장이 두려워 도망친 겁쟁이라고 했었지. 주군. 당신은 언제나 이런 기분을 느끼며 살아왔던 거야? 나 자신이 추접한 쓰레기가 되는 것만 같은 이런 개 같은 기분을.

“아저씨를?”

이미 한계치까지 눌러쓴 모자를 한 번 더 손으로 눌러쓴 소녀가 헛웃음을 내뱉으며 되물었다. 고즈넉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만담 같은 대화였지만, 두 사람의 얼굴은 사뭇 진지하기만 했다.

“응.”

“어떻게?”

“최대한 세게. 돌로 쳐도 돼.”

뭐래. 미친놈인가? 지금까지의 행보를 따져 보자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 쉽게 판단 내린 소녀는 스스럼없이 제 생각을 밝혔다. 일순간 작은 의심이 피어올랐기 때문이었다.

“싫어.”

“…….”

“합의금 뜯어내려는 속셈 아냐?”

이것도 과연 손익 계산이 빠른 편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어딘가 허술한 구석이 있는 의심이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마린케이는 제 덩치의 절반도 되지 못할 소녀에게 합의금을 뜯어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도무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 상황을 추측해 볼 여력조차 생기지 않았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소녀는 큼,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돌렸다.

“그때, 그 잘생긴 오빠랑은 어떻게 됐어?”

가라앉아 있던 갈색 눈 위로 살기가 스며든 것도 그와 동시였다. 어쩐지 뒤통수가 아픈 것도 같은 기분에 마린케이는 매섭게 표정을 굳혔다. 그 새끼, 잡히면 반드시 죽여버릴 것이다. 그가 이를 갈며 물었다.

“그 이후로 만나본 적 있어?”

“응. 내가 일방적으로 본 거긴 하지만.”

“어디서 봤는데?”

“그거까진 기억 안 나지. 근데 옆에 매번 다른 사람이 있었던 건 기억나. 카사노바 타입으로는 안 보였는데, 하여간 사람 속 참 알 길이 없어. 그치?”

소녀의 천진한 목소리엔 인간에 대한 회의가 실려 있었다. 마린케이가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몇 살처럼 보였는데?”

“몰라. 나보단 늙어 보이긴 했어. 성별은 맨날 달랐고. 헐. 설마 너 차인 거 아니지?”

“차일 일도 없었어.”

“그럼 왜 꼬치꼬치 캐물어?”

“…….”

마린케이는 소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서 함묵했다. 그에 더욱 의심스럽다는 듯, 게슴츠레 눈을 접은 소녀가 마린케이의 팔을 아프지 않게 내려치며 말했다. 대단한 눈치였다.

“나한테 부탁할 거 있구나.”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으려 입을 꽉 다무는 마린케이에게, 소녀는 제 머리통을 들이밀며 말을 이었다. 기세등등한 목소리였다. 마린케이는 참담함을 느끼며 고개를 떨구었다.

“딱 보면 알거든? 션도 나한테 처음 소매치기 짓 시킬 때 그랬어. 얼마나 바보 같았는데.”

무언가를 회상하듯 작게 미소 짓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는 차마 표정을 풀지 못했다. 뒷골목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빠른 눈치를 담보로 생존을 배운다.

그리고 너무도 연약하게 위험 속으로 뛰어들었다.

“말이나 해봐. 듣고 나서 결정하게.”

“그럴 필요 없어.”

“야.”

소녀는 깍지 낀 두 손을 머리 뒤로 두르며 밝게 웃었다. 소녀의 시선은 어느새 마린케이가 바라보고 있던 시계탑 위로 향해 있었다.

“네가 저번에 벌어다 준 돈으로 나 밥도 맛있는 거 사 먹고, 책도 사고, 옷도 사고. 또 뭐 했더라? 맞아. 친구도 되게 많이 사귀었다? 나 인기 대박 짱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벌어다 준 돈이 아니라 뜯어다 준 돈이었고, 마지막으로 덧붙인 친구에 관한 항목은 싹 다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

“…….”

“그러니까 빨리 좀 말하지? 듣고 나서 결정하면 되잖아.”

마린케이는 세상이 참으로 지독하고, 악질적인 곳이라 생각했다. 소녀의 웃음 가득한 얼굴을 볼수록 그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버티고 버티다 보면, 언젠가 그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아니, 틀렸다.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울 수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절대 검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린케이는 검을 잡았다. 그것만이 시궁창 같던 삶 속, 유일하게 찾아온 구원이었다.

***

“샤를.”

“늦어서 죄송해요.”

“아냐, 아냐. 아가.”

클레멘타인 황비의 손이 샤를의 어깨 위로 향했다. 그녀는 짧은 기도문을 읊조리며 샤를을 어깨를 끌어안았다. 샤를은 제 어깻죽지가 눈물로 젖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그녀의 마른 몸을 다독여 주었다. 일리아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상태로 웅크려 앉아 있었다. 샤를과 함께 들어온 4황자, 섀넌이 황급히 일리아스에게로 달려갔다.

일리아스 칸 엔스와 섀넌 프리지아 엔스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일리아스는 섀넌의 유약함과 아이 같음을 싫어했고, 섀넌은 저만 보면 눈꼬리를 매섭게 올리는 일리아스를 기피하며 도망 다녔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그들 또한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 슬픔을 공유하고 있었다. 황제의 죽음. 그 비통함 속에서 모두가 말이 없었다.

“샤를. 우리 아가…….”

클레멘타인 황비가 가까스로 몸을 떼어내며 목소리를 냈다. 갈라진 목소리 끝에는 여전히 울음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소피아 황후가 세상을 떠난 언젠가의 새벽, 그녀는 처절하게 오열하는 황태자의 몸을 끌어안으며 그 슬픔을 함께했었다.

그때는 샤를이 그녀의 몸에 충분히 안길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면, 이제는 그가 그녀를 안아주어야 할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는 것이 한 가지 다른 점이었다. 그런 황태자를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들어가 보세요. 폐하께서도…, 전하를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나서는 안 됐다.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아직 물어야 할 게 한참이나 남아있는데. 아버지. 샤를은 열 살 이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그 단어를 입에 올리며 울음을 참았다. 죽음이 도래한 사람의 얼굴을 한 황제의 모습이 그 자리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샤를은 곧바로 침대 밑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폐하.”

그는 황제와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리며 침대보를 그러쥐었다.

「그 객기가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 두고 보자꾸나.」

「언제까지나 똑같을 겁니다. 기대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할수록 더욱 기대하게 된다는 걸 너만 모르는 게야. 고얀 녀석.」

황제는 차갑고, 무정하고, 비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정했고, 사려 깊었으며, 제국을 사랑했다. 그 모순적인 위치들 사이에서 한없이 갈등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봐 왔던 것이 그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인 황태자였다.

소피아 황후가 레온하르트를 돌보는 것을 함묵했던 것도 황제였고, 그가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도록 신분을 빼앗은 것도 황제였다.

마리아의 연인을 빼앗고 약혼을 종용했던 것도 황제였으며, 그 약혼을 파기시키고 자유를 주었던 것 역시 황제였다.

감히 황제의 자리를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라 말했던 것도, 기사가 되고 싶다는 어린 날의 소망에 사파이어를 박은 단검을 선물해 주었던 것도. 전부 다 황제였다.

그런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 샤를은 차마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차갑게 식은 제 아버지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은 겁쟁이였다. 모든 소중한 것을 잃고서 혼자가 되어가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당신은 지나간 삶을 후회하지 않고 떠나갔을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이제는 모두 물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샤를이 영안실을 나선 것은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영안실에는 들어오지 않은 채, 바깥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를 발견한 샤를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누이.”

오랜만에 마주하는 얼굴이었다. 샤를은 어린 시절, 저와 가장 가까운 날들을 보내고는 했던 혈육의 얼굴을 돌아보며 애틋하게 미소 지었다. 결 좋은 금색 머리칼과 청초하게 반짝이는 푸른 눈. 그 눈매에는 세상의 질서와 가치를 판단하고자 하는 직업군 특유의 엄격함이 실려 있었고, 목소리 역시 단아하면서도 단호한 힘이 있었다.

약혼 파기 이후, 황제의 명령에 따라 황궁을 떠난 마리아 로즈 엔스가 많은 시간이 흘러 다시 황궁으로 돌아오게 된 순간이었다. 지금껏 황족의 공식적인 일정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마리아였기에, 샤를 역시 그녀와 독대하는 것은 무척 오랜만에 갖는 일이었다.

“안 본 새 많이 컸네.”

클레멘타인 황비를 빼다 박은 얼굴의 마리아가 황태자의 앞에 멈춰 서며 말했다. 샤를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불현듯 자유의 향기를 느꼈다.

황궁을 떠나 사는 사람들에게서는 낯선 바람 냄새가 풍긴다. 레온하르트도 그랬고, 마리아도 그랬다. 샤를은 그 향기를 맡으며 작게 미소 지었다.

황궁 안에 따로 마련된 영안실 앞에 선 마리아는 어쩐지 회한에 젖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브리프 케이스를 손에 든 그녀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난 안 들어가 볼 거야.”

샤를은 그런 그녀를 저지하고 싶지 않았다. 제게는 그럴 자격이 없을뿐더러, 그녀의 선택은 오로지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따라서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마리아에 대한 존중을 나타내 보이고자 했다.

그러나 꿋꿋한 얼굴로 들어가 보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그녀는 여전히 영안실 앞에 머물러 있었다. 흩어지는 듯 가냘프게 사라지는 공허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봐서 뭐 하겠어? 내가 그리 원망하던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원망. 그 두 글자에 샤를은 제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제게 살려달라 청하던 간절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난다. 지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기억 속을 떠난 적 없던 그 얼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페르시안 고양이를 본떠 만든 인형을 선물해주었던 유순한 여인은 고작 책 몇 권에 세상을 가진 것처럼 미소 지었었다.

“샤를.”

그러나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같은 실수는 매번, 무수히 많이 반복되었다. 홍옥처럼 붉은 머리칼을 가졌던 그 소년은 황가의 각인이 새겨진 머리끈을 가졌다는 이유로 백작의 눈에 띄었고, 억울하게 죽임당한 뒤에도 변변찮은 무덤 하나 가지지 못했다.

간신히 시신을 찾아내 자리를 마련해 주었지만, 그것까지가 한계였다. 이미 목숨을 잃은 아이는 어떤 원통함 속에서도 살아 돌아올 수 없었다. 세상은 본래 그런 곳이었다.

그 순간 마리아는 자신에게 되뇌듯, 샤를을 향해 말했다.

“괜찮아, 샤를. 넌 괜찮을 거야.”

“누이.”

그 말이 꼭 괜찮아야 한다는 말처럼 들려와서, 그는 이번에도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며 눈물을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미소 지은 황태자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미 잔뜩 울어 부은 얼굴을 하고 있는 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그는 힘주어 대답했다.

“응. 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황제의 죽음은 황태자의 기회이자 비상이다. 그러나 샤를 소피아 엔스에게는 아니었다. 날개를 비틀린 새처럼, 그는 체념하듯 조금씩 숨을 죽였다.

***

“안 돼.”

몇십 번의 거절에도 소녀는 굴하지 않고서 달려들었다. 떽떽거리며 제 귓가를 아프게 하는 소녀를 치워낸 마린케이는 아이스크림 가게 안에 들어서며 또다시 거절 의사를 밝혔다.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다 보니 자동 응답기라도 되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안 된다니까.”

“왜? 나한테 말할 거 있잖아. 그런데 왜 숨겨?”

“네가 알 필요 없는 일이니까.”

“나한테 말할 게 있는데 왜 그게 알 필요 없는 일이야?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정정할게. 모르는 상태로 살아도 되는 일이라서 그래.”

확실히 그랬다. 굳이 세상의 추악한 면을 확인시켜 주지 않아도 이 아이는 알아서 그 역겨움을 마주하며 살아왔을 터였다.

마린케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소녀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했다. 더 호기심을 자극해 봤자 괜히 일을 키우기만 할 뿐, 도움이 될 게 하나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럴 거면 할 말 있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지나 말든가? 소녀는 그가 건네준 블루베리 아이스크림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소리를 질렀다.

“이거 진짜 양아치 새끼 아냐! 왜 그렇게 살아?”

“…….”

“무시하지 말고 얼른 대답하지?”

일단 질문에 대한 답을 하자면 이렇다. 첫째로, 마린케이 이스턴은 양아치가 맞았다. 그것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양아치 새끼에 해당했다. 그러나 자신 역시 이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은 아니었으니,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안타깝게도 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블루베리 아이스크림 대신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바꿔 내민 마린케이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양아치는 너 따라다니는 쟤들이고.”

“그건 또 무슨….”

역시 블루베리가 아니라 바닐라였구나. 아이스크림을 바꿔주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받아 든 소녀가 마린케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다. 곧이어 소녀의 얼굴이 창피함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짜증스레 눈가를 찌푸린 소녀는 휘휘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나 쟤들 몰라. 모르는 사람이야.”

“아는 것 같은데.”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기로 온다.”

“아오, 션 이 새끼를 진짜!”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뒤를 돌아보았던 소녀가 당했다는 듯, 불끈 쥔 주먹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세상살이를 모두 다 담은 듯한 그 무거운 한숨에 마린케이는 잠시나마 소녀의 나이를 가늠해 보려 노력했다. 알고 보면 나보다 더 연상이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액면가로는 절대 그럴 리 없어 보였지만, 세상에는 믿지 못할 일들이 너무도 쉽게 일어나곤 했으니 영 가능성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소녀는 재차 그를 졸랐다.

“빨리 말해줘. 나 잘할 수 있다고. 날치기도 내가 제일 잘해.”

“어. 재능 있더라.”

“……그렇게 쉽게 인정하면 내가 뭐가 되는데?”

“쟤가 그 머저리 군단이야?”

머저리? 의아한 듯 눈을 굴린 소녀는 이윽고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조심스레 되물었다.

“설마 미저리 말하는 건 아니겠지?”

“비슷했던 것 같긴 하네.”

“야. 무슨 미저리랑 머저리가 같아?”

천지 차이였으나 마린케이의 눈에는 전부 엇비슷해 보였다. 이내 블루베리 아이스크림을 퍼먹기 시작하는 마린케이를 보며, 소녀 역시 스푼으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떠넘겼다. 그야말로 남매지간이 따로 없는 모습이었지만, 두 사람 다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소녀는 포기하지 않고서 끈질기게 입을 열었다.

“그거 다 먹으면 말해줘.”

“그래. 네가 나보다 빨리 먹으면.”

“넌 벌써 다 먹었잖아?”

“싫다는 소리지.”

진짜 후려치고 싶다. 소녀가 이를 갈며 저를 노려보든 뭘 하든, 이미 아이스크림 한 통을 비운 마린케이는 시계를 바라보며 왕립학교로 돌아갈 타이밍을 재고 있는 중이었다. 오전 수업을 전부 땡땡이쳤으니 아마 벌점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등 떠밀려 나온 린, 린 뭐였더라. 린저였나 린지였나. 아무튼 그 불쌍한 수련생이 덜덜 떨며 벌점 사실을 말해줄 장면 역시 안 봐도 비디오였다.

“그럼 이름이라도 알려주든가.”

시계를 눈짓하는 마린케이의 모습 속에서, 소녀는 그가 이곳을 떠나려 한다는 것을 빠르게 알아차리며 물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 위로 사납게 스푼을 꽂아 넣은 소녀의 시선이 마린케이에게 꽂혔다. 벙거지 모자 아래로 보이는 검은 눈. 마린케이는 그 새카만 눈이 꼭 어릴 적 제가 알던 누군가를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통성명 정도는 해야 할 거 아냐. 안면도 꽤 되는데.”

그러자 마린케이는 의중을 가늠하듯 소녀를 들여다보았다. 제대로 알려주면 외상 빚을 잔뜩 만들고 다닐 것이 확실하다. 그가 선심이라도 쓴다는 양 당당하게 대답했다.

“칼릭스 커티스.”

***

입학식 당일이었나. 이 교문 앞에 쭈그려 앉은 채 황족들을 기다리던 순간이.

그것도 벌써 두 계절 전의 이야기였다. 마린케이는 볼을 스치는 서늘한 가을바람을 느끼며 다시금 교문 앞에 섰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나 뛰어넘기는 그닥 어렵지 않았다. 가볍게 지상으로 착지한 그는 손을 털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로마네스크 시대 건축 양식과 고딕풍의 건축 양식이 뒤섞인 왕립학교의 모습은 그 자태만으로도 누군가를 압도할 수 있을 만큼의 거대한 숭고미가 존재했다. 분명 누군가의 꿈이었을 테고, 소망이었을 테지. 그러나 마린케이에게만큼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왕립학교 입학을 받아들였을 때 소망했던 것은 딱 두 가지뿐이었다. 무사히 졸업을 마친 후 적당한 입시 학원에 취직해 강사가 될 수 있는 것. 그럼 입에 풀칠하며 먹고살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무척 허황된 소원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은 이미 황태자와의 기사 서약에 4년을 저당 잡힌 채였고, 심지어 그 양아치 새끼한테 연정을 느끼고 있기까지 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되는 일이 없네.”

말 그대로 되는 일이 없는 하루하루였다. 좀 잠잠해진 것 같다 싶으면 일이 발생하고, 그 일을 어떻게든 마무리 지어 놓으면 또 다른 곳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이쯤 되면 운명의 신이 저와 황태자를 놓고 저울질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그래서인지, 수련장으로 돌아온 마린케이는 운명에 대한 분노를 잔뜩 눌러 담아 샌드백을 무자비하게 후려칠 수밖에 없었다. 잔혹하게 울려 퍼지는 샌드백 소리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것은 나머지 퍼스트 클래스 일원들의 몫이었다.

칼릭스는 슬금슬금 린저의 옆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쟤는 대체 왜 저러는 거야?’

‘많이 상심하셨나 봐요. 마음 아파서 어쩌지.’

‘상심이 아니라 살심 아닐까. 얼굴이 딱 그런데.’

‘글쎄요. 근데 샌드백 후려치는 이스턴 씨, 너무 멋있지 않아요?’

‘……멋있다고?’

속닥거리며 귓속말을 하던 칼릭스는 광신도라도 된 듯 눈을 빛내고 있는 린저를 눈치채고서 원인 모를 오한을 느꼈다. 게다가 지금은 자유 훈련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는 가볍게 트랙을 뛰러 나가거나, 정말 말 그대로 가볍게 검을 부딪치고 대련을 나누는 것이 기사 학부에 존재하는 상도덕이었다. 그러나 저 평민에게 상도덕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당치도 않은 생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샌드백의 실밥이 다 터지고 나서야 흐르는 땀을 닦아내는 마린케이의 모습에, 칼릭스는 연신 그다음 차례가 샌드백이 아닌 저 자신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공포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심지어 나름의 확신도 있었다. 그는 복도에서 마린케이를 마주칠 때마다 살벌한 눈초리에 시달리며 온종일 꽁무니를 빼야 했었다.

제대로 정신이 나간 누군가가 보게 된다면-전적으로 린저 아일랜드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 박력 있는 모습에 헤까닥할지도 모르겠지만, 직접 대련을 나눈 적 있는 그로서는 그저 맹수 앞에 선 달팽이가 된 기분으로 발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그럼 클레멘타인 황비께서 수렴청정을 하시는 건가?”

간도 크게 황족을 대상으로 뒷담화를 시작하는 목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에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황실 웃어른이라고는 그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잖아. 소피아 황후가 살아계셨다면 또 모를까.”

“하긴. 전하께서 지금 당장 즉위하시기엔, 솔직히 경험도 그렇고 부족한 면이 많긴 하시지.”

“누가 귀띔이나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치?”

저 글러 먹은 새끼들이! 칼릭스는 가히 졸도할 것 같은 얼굴이 되어 부리나케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의 사달을 겪고도 저 새끼들은 학습 능력이 생긴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고로, 그는 괜한 미련을 두지 않고서 린저에게 속삭였다. 발 빠르게 도망치려는 속셈이었다.

‘튀자.’

‘네?’

‘아직 안 늦었으니까 지금이라도 튀자고. 괜히 여기 있다가 불똥이라도…….’

퍼억, 퍽! 콰앙! 퍽. 퍽. 퍽.

아무래도 이미 튄 것 같다. 불똥. 칼릭스는 겸허히 눈을 내리감으며 린저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중간에 섞여 들려왔던 굉음은 샌드백이 바닥으로 나뒹굴며 났던 타격음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것인지, 살려달라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수련생들에게 칼릭스는 공손히 두 손을 모아 애도를 표했다. 그러게 사람은 눈치를 잘 살펴야 하는 법이다.

퍽, 퍼억! 퍽! 퍽!

그러나 타격음이 들려오면 들려올수록, 그에게도 차마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두려움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바닥으로 떨어진 샌드백 위로 마치 사람을 패듯 발길질을 하고 있는 갈색 머리 평민의 모습은 그야말로 그로테스크의 표본 같았다. 가엾은 린저 역시 이제야 무언가를 눈치챈 듯 칼릭스를 돌아보며 의구심 섞인 질문을 던졌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터프하실까요?”

아서라. 이 새끼는 확실히 정신이 나갔다. 하기야, 저 유약하고 연약한 성정으로 퍼스트 클래스를 버티고 있다는 것만 봐도 어딘가 나사 빠진 데가 확연히 존재한다는 소리였다.

해탈한 표정의 칼릭스는 낙담하듯 미간을 구겼다. 전하. 대체 언제 돌아오실 예정이세요? 고운 우리 전하가 너무나 보고 싶은 하루였다. 그는 최대한 몸을 접으며 마린케이의 시선을 피했다.

샌드백을 후려 패다 못해 짓이기고 터뜨리기까지 한 평민, 마린케이 이스턴은 그제야 땀에 젖은 얼굴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평범하다고만 생각했던 갈색 눈이 사납게 번들거린다. 턱 끝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낸 그는 명확한 초점이 깃든 눈으로 수련장 내부를 둘러보았다. 불현듯 한곳에 시선을 집중한 그가 싸늘하게 경고했다.

“훈련이나 하시죠.”

“…….”

“누구 이의 있습니까?”

예상했듯, 방금 전 실컷 황실 사정을 떠들어대던 그 무리를 향해서였다. 그렇게 말하면 누가 있다고 하겠니? 모쪼록 전하께서 빨리 돌아오셨으면 좋겠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침묵하고 있는 이 순간, 예비 졸업생 칼릭스 커티스의 소원은 그것 한 가지뿐이었다.

***

외줄 타기 같은 상황은 며칠 내내 지겹도록 이어졌다. 덕분에 칼릭스를 포함한 퍼스트 클래스의 수련생들은 당장에라도 기절할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으로 트랙을 뛰어다닐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 역시 트랙 스무 바퀴를 뛰며 그들을 압박하기는 했으나,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는 수련생들에게 페이스를 맞춰주고자 종종 속도를 늦추기도 했던 훌륭한 주군이었으니까.

그에 비해 마린케이 이스턴은 누군가 나가떨어질 때마다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를 흘겨보기 바빴다. 해진 수련복이 바람에 치여 시원하게 흩날린다. 호흡 한번 흐트러지지 않고 뜀박질을 계속하는 그의 모습은 스태미나로 만들어진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나머지 수련생들은 강철 인간 같은 평민의 모습에 더욱 두려움을 느끼며 황태자를 부르짖었다.

‘전하께서는 대체 언제 돌아오시는 걸까?’

‘흐윽…, 전하가 보고 싶어.’

‘지금이라도 자퇴를…….’

그 상황 속에서도 마린케이는 자신의 신체를 극한까지 몰아붙이며 쓸데없는 상념을 지워버리고자 애썼다. 황태자가 자리를 비운 일주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 한 사람의 얼굴만을 반복적으로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자꾸만 그 사람이 보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마린케이는 트랙의 잔디를 보면서도 하염없이 샤를 소피아 엔스를 떠올렸다.

***

“나와 같이 황궁에 가볼 텐가?”

피에르 셀번은 펑펑 울어 잔뜩 부어오른 눈을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였다. 그는 훈련장에서 나오던 마린케이의 앞에 불쑥 얼굴을 드러내며 말했다.

곧장 샤워실로 들어가려던 마린케이는 그런 그를 하찮은 벌레 보듯 바라보았다. 그러자 억울함을 느낀 피에르는 무언가를 해명하려는 듯, 안고 있던 아이스박스를 당당하게 들어 올렸다.

“전하께 소고기 스튜를 만들어드리려 한다.”

“스튜요?”

“그래. 분명 기력이 없으실 테니까.”

스튜를 만들어 주러 왔다고 하면 더 기력 없어 할 것이 눈에 훤했지만, 마린케이는 귀찮음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함께 황궁에 가자는 그의 제안은 단박에 무시해버린 뒤였다. 옆집 얼간이를 무시한 채 샤워실로 들어가려던 마린케이의 팔 위로 커다란 손바닥이 와 닿았다. 간절히 그의 팔목을 붙든 피에르가 다시 한번 요구, 아니. 부탁했다.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전 거기 못 들어갑니다.”

“……못 들어가다니?”

“잊으셨나 보네요.”

평범하다고만 생각했던 갈색 눈. 그러나 피에르는 거리를 오고 가며 수십 번은 보았을 법한 그 흔한 색 눈동자 앞에서도 쉽게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평민이 어떻게 황궁에 들어갑니까.”

어째서 존경하는 황태자 전하와 기사 서약을 맺은 수련생이 저따위 기고만장한 평민이었어야만 했는지, 며칠 밤을 새우며 고민했던 적도 있는 피에르였다.

“뭐?”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피에르는 지금까지 자신이 펼쳐 왔던 각종 만행도 잊어버린 채 얼굴을 찌푸리기 바빴다. 아이스박스를 털썩, 근처에 내려놓은 그가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솔직히 말해 이 오만한 평민이 아니꼽다고 생각했던 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내세울 것도 없는 주제에 감히 전하를 날름 낚아가다니! 헐벗은 채 마주 보고 있던 두 사람을 떠올리면 아주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맞장구칠 줄 알았겠지?”

알았겠지가 아니라 실제로 그래왔다, 이 새끼야. 마린케이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선글라스로 중무장을 한 피에르 셀번은 마린케이가 사라졌던 그날, 미친 듯이 차를 몰아붙여 베사플레사로 향하던 황태자의 모습을 떠올려 보고 있는 중이었다.

“전하께서는 네가 위험해졌을 때….”

“…….”

“매우 정신이 나가셨었다.”

“그 인간은 원래 제정신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때는 더 심했어.”

심지어 제게는 절대 몰입되지 않는 이상한 역할을 부여하고서 홀랑 떠나버리지 않았던가. 그 모든 것이 전부 다 눈앞의 이를 위한 계획이었다. 게다가 황태자와의 서약이 어디 흔한 약속인가? 적어도 그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주 안에서라면 이 평민은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고, 원하는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원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비장미 넘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난 귀족이지.”

그게 갑자기 무슨 상관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피에르가 훨씬 더 빨랐다. 그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제 선글라스를 추켜올렸다. 오만방자한 태도였지만 그저 그게 본능인 사람처럼 보였다.

“시종 한 명 정도는 데리고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야.”

틀림없는 개수작이었으나 하도 뻔뻔한 얼굴이라 그런지 하마터면 시종 역할로 따라오라는 그 쉬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할 뻔했다. 피에르는 칭찬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발랄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나와 황궁에 가자. 마린케이.”

마린케이는 어이가 죄다 사라져 적당한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그것을 허락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피에르는 미친 듯이 그를 닦달해 샤워실 안으로 집어넣었다.

샴푸 거품을 내면서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마린케이는, 온몸에 차가운 물을 끼얹고 나서야 간신히 이성을 되찾으며 샴푸 통을 구겼다. 샤워실 밖으로 나온 뒤에는 후회심이 더 크게 밀려들었다.

그때였다. 옷을 다 갖추어 입은 상태로 탈의실에 서 있던 누군가가 마린케이를 발견하고서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에 대강 드로즈만을 걸친 채 샤워실을 나섰던 마린케이는 떨떠름한 듯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의 날렵한 턱선을 타고서 한 줄기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저한테 할 말 있으십니까?”

연신 얼굴을 붉히고 있는 린저 아일랜드의 모습에 마린케이는 미약한 의심을 담아 물었다. 캐비닛 뒤에 숨어 상황을 염탐하고 있던 칼릭스는 찾아오는 안타까움을 이기지 못한 채 손가락을 깨물었다. 분명 처맞을 것이다. 아주 제대로 처맞을 거라고.

그러나 그의 끔찍한 예상과는 달리, 마린케이는 그저 수건으로 머리칼을 털던 것을 멈춘 채 린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얌전한 얼굴로.

“그, 그게. 저번 일이 너무 신경 쓰여서….”

저번 일? 사력을 다해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마린케이의 뇌는 불순물 하나 없는 백지와 같은 상태일 뿐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는 뜻이다. 마린케이는 그 사실을 최대한 티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뻔뻔하기가 피에르 셀번 저리가라였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제 마음이 편하질 않더라구요.”

“정말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린저는 덜덜 떨리는 손 위로 붉은색 상자 하나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마린케이로서는 어떤 상황도 지레짐작할 수가 없어 답답함을 느낄 뿐이었다. 밑에서 기다리고 있을 귀족 새끼가 왜 이렇게 늦게 나왔냐며 길길이 날뛸 것도 짜증이 났지만,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면서 드로즈밖에 입지 못한 상태라는 사실이 생각보다 많이 신경 쓰였다.

“혹시 옷 좀 입고 와도…….”

“어울리는 걸로 골라오긴 했어요!”

결심했다는 듯, 두 눈을 꽉 감은 린저가 재빨리 상자를 건넸다. 엉겁결에 선물을 받아 든 마린케이는 멍청한 얼굴로 물었다.

“저한테 주시는 겁니까?”

물기에 촉촉이 젖어 있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린저는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사님!”

기사? 아직 기사는커녕 학교 졸업도 끝마치지 못한 수련생에게 기사님이라는 호칭을 들먹이다니. 헤헤거리며 저를 눈짓하는 귀족 청년의 모습은 어째서인지 나사 하나가 거하게 빠져 보였다. 다수가 인정한 나사 빠진 새끼, 린저 아일랜드는 달아오른 얼굴로 말을 이었다.

“개통은 직접 가서 하셔야 되긴 해요.”

“사양하겠습니다.”

“네?”

그러나 상자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마린케이는 단호하게 선물을 거절했다. 색깔별로 담긴 최신 기종의 휴대폰은 보고만 있어도 비싼 티가 나는 제품들이었지만, 마린케이에게 있어서는 그저 인생이 더 피곤해지기만 하는 골칫덩이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 가지 예상치 못한 결과도 있었다. 그 상황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칼릭스는 마린케이가 가진 의외의 청렴함에 감동하며 표정을 풀었다.

과연 그걸 청렴함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마린케이는 무소유의 가치를 주장하는 듯한 겸손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필요 없습니다.”

‘필요 없다’라는 그 충격적인 단어에 린저의 창백한 얼굴은 더더욱 창백하게 질려갔다. 필요 없대. 린저 아일랜드, 이 멍청한 새끼. 필요 없는 선물을 사다 드리다니!

얼마나 곤란하셨으면 이렇게 매몰차게 거절하시는 걸까. 흡사 울 것 같은 얼굴이 된 린저가 숙연한 얼굴로 고개를 숙일 때였다.

“거기서 뭐 하는 거지?”

빌어먹을. 결국 우려했던 상황이 펼쳐지고야 말았다. 기다리다 못해 샤워장까지 올라오게 된 피에르는 드로즈 하나만 걸친 채 누군가와 대치 중인 마린케이를 발견하고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게다가 평민 앞의 저 남자는 사람 좋기로 유명한 남작 가문의 막내아들이기까지 했다.

뭐야? 얼굴까지 붉히고 있잖아? 피에르의 오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이스턴 너, 설마 전하를 두고…….”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으나 더 이상 듣고 있기가 거북할 정도였다. 머리 위에 있던 축축한 수건을 피에르의 얼굴에 거칠게 집어 던진 마린케이가 으르렁거렸다.

“경고하는데.”

“…….”

“개소리하지 마십시오.”

경고가 아니라 협박임이 확실했지만, 예상했듯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

결벽증 수준으로 청결에 집착하는 타입인 피에르는 열다섯 번째 세안을 마무리 짓고서야 샤워장을 나섰다.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린저의 선물을 받아 든 마린케이는 로즈골드 색으로 빛나는 휴대폰을 무감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중고 지옥에 팔면 얼마나 받으려나. 일단 받고 나니 한탕 쏠쏠하게 챙길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심기가 좀 누그러지던 때였다.

아이스박스를 소중히 품에 안고 있던 피에르는 그런 마린케이를 자꾸만 곁눈질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당연하게도 들어줄 마음 따위가 존재할 리 없었다. 마린케이는 노골적으로 그를 무시하며 쏜살같이 사라지는 차창 밖의 풍경을 구경했다.

황궁이라. 텔레비전에서나 보았던 그 고풍스러운 장소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깨닫고 보니 속까지 조금 울렁거리는 듯했다.

실은 메스꺼움을 유발하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긴 했다. 황제의 장례는 한 달 동안 치러지기에, 황태자 역시 그 시기가 모두 끝난 후에야 왕립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신하 된 도리로서 주군이 슬픔을 추스르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건만, 마린케이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확고한 믿음 한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샤를 소피아 엔스는 분명 알아서 잘 일어서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가능성 때문에 새벽 무렵마다 곤란한 기분이 찾아왔었다.

그 무결한 얼굴이 눈물짓고 있는 것을 상상하던 마린케이는 문득 불쾌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청결 귀신이 형형한 눈빛으로 마린케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인간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안 키우는 건가? 파르헬리 선생께서 알면…….”

“그놈의 파리 새끼.”

“동시대 가장 위대한 철학자를 그렇게 능욕할 순 없어!”

시끄러운 고함 소리에도 마린케이는 귀를 후비며 그의 외침을 묵살했다. 마침내 황궁 근처에 당도한 것인지, 운전기사가 핸들을 꺾으며 그들 사이로 말을 꺼냈다.

“5분 후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제야 주절대던 것을 멈춘 피에르는 벗어두었던 선글라스를 다시 착용하며 대답했다.

“게이트 앞에서 내려….”

“여기서 세워주십시오.”

두 사람의 서로 다른 대답에 기사는 당황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네? 그 순간 마린케이는 당장에라도 뛰어내릴 듯 손잡이를 움켜잡으며 경고했다.

“10초 후에 내리겠습니다.”

“자, 잠시만요!”

끼이이익! 급정거를 알리는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마린케이가 차 밖으로 튕겨지듯 뛰쳐나왔다. 피에르의 목소리를 뒤로한 그는 곧 어딘가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분명히 그 인간이다. 후드를 뒤집어썼고, 커다랗고 동그란 안경을 쓴 데다가, 검은 마스크까지 하고 있어 얼굴을 식별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황궁 견학을 온 어린아이들을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만 봐도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빌어먹을, 그거야 내가 사랑하는 인간이었으니까!

가쁜 호흡을 내쉬며 뛰어가던 마린케이는 황궁 안에도 신호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선 급히 뜀박질을 멈췄다. 하필이면 제 앞에서 빨간 불로 바뀌어버린 신호등이 애석하기 짝이 없었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짜증스럽게 바라보던 그가 굽혔던 허리를 펴며 숨을 들이켰다.

소리를 질러서 이목을 끌어야 할 것 같긴 한데, 무슨 단어를 내뱉어야 저 새끼가 돌아봐 줄지 쉽사리 확신이 서지 않았다. 공통사가 뭐지? 둘만의 추억-이랄 것도 없는 기억들-을 되짚어보던 마린케이는 빠른 판단을 끝내고서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마땅한 공통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역으로 가장 싫어할 만한 단어를 입에 담는 것.

“시발…, 이 약쟁이 새끼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진 누군가는 그 단어에 주문이라도 걸린 듯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예상대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망할 신호등이 아직 빨간 불 상태에 멈춰 있다는 것 정도였지. 범법 행위를 고민하던 마린케이는 속으로 카운트다운을 하기 시작했다. 10초 안에 바뀌지 않으면 범법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10, 9, 8.

석상처럼 걸음을 멈춘 남자가 서서히 뒤돌아본다. 커다란 안경에 얼굴이 죄다 가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여쁘고 새초롬하기만 한 눈동자가 조금씩 세상에 드러났다.

7, 6, 5.

마린케이와 마주 선 남자는 한쪽 손을 들어 올리더니, 이내 자신의 관자놀이 옆으로 검지를 빙빙 돌려대기 시작했다. 그게 딱 제가 아는 양아치 새끼가 할 법한 짓이 맞았기에, 마린케이는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는 것을 확인한 그는 목표물을 향해 빠른 속도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부딪히면 둘 다 바닥에 나뒹굴게 될 테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그저 경애하는 주군, 샤를 소피아 엔스가 제 눈앞에 있다는 사실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마린케이는 바위에 부딪히는 날계란이 된 심정으로 그를 끌어안았다. 심장이 풍선처럼 부푼다. 아마도 자신은 정말 주군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는, 그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받아들인 마린케이가 한가득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자 달콤한 향기가 폐부를 가득 찔렀다.

***

“어떻게 여기 계십니까?”

가장 궁금한 것은 대체 무슨 수로 이 상황 속에서 밖을 나돌아 다닐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의심으로 범벅된 마린케이의 불손한 눈초리를 마주 본 황태자는 천진한 척 한쪽 볼을 긁적였다. 설명해 줄 말이 충분하진 않았지만, 궁금해한다면 그럭저럭 대답해 줄 수 있었다.

“배수관 타고 내려왔어.”

사실에 해당하는 정보만을 간추려 대답했으나, 마린케이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그의 말을 무시했다. 확실히, 제국의 황태자가 얼굴을 꽁꽁 감춘 채 배수관을 타고 내려왔다는 소리는 영 신빙성이 없는 축에 속하긴 했다. 그래서인지 황태자 또한 구태여 마린케이를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

그의 손에 이끌려 걸어가고 있던 마린케이는 혹시나 하는 불안감을 느끼며 발을 멈췄다. 황태자 놈은 전부터 별의별 기행을 즐기는 미친놈이었으니 한시도 안심할 수 없었다.

“지금 어디 가는 건데요?”

그러나 묻는다고 대답해 줄 것이었으면 처음부터 행선지를 알려주고 말았을 것이다. 어깨를 으쓱여 보인 샤를은 여리게 눈웃음치며 마린케이의 질문을 무시했다. 그게 딱 얼굴만 예쁜 양아치 새끼들이 사용할 법한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문제는 제 자신이 그 허튼수작에 머저리같이 놀아나고 있다는 것뿐. 황태자는 여우 같은 구석이 심각하게 많았고, 마린케이는 그 여우 짓에 놀아나는 굶주린 늑대처럼 행동했다.

황궁을 거닐면 거닐수록 생전 처음 느껴보는 거대한 위압감이 마린케이를 덮쳐 왔다. 하늘을 향해 치달은 건물들과 황실 전용 도로를 누비는 수많은 외제차들. 중간중간 보이는 견학생들마저도 부잣집 아이들인 티가 났다. 견학이라고는 동네 공터밖에 가보지 못했던 마린케이는 새삼스레 그들과의 차이를 실감하며 혀를 찼다. 그때, 황태자가 물었다.

“여긴 뭐 하러 온 거야?”

마린케이는 여상히 대답했다.

“끌려왔습니다.”

“네가?”

황태자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의 의심은 매우 보편타당한 축에 속했다. 감히 마린케이 이스턴을 끌고 다닐 수 있는 작자가 세상에 존재하긴 할까. 그러는 본인이 마린케이를 이끌고서 이곳저곳을 쏘아 다니는 중이라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치자.”

대충 대화를 마무리 지은 샤를이 정원 앞에 다다라 마린케이를 돌아보았다.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

“이게 사람입니까?”

커다란 사과나무 앞에 선 마린케이는 제 주군의 정신 상태를 진심으로 의심하며 물었다. 사과나무가 만들어 준 그늘 밑으로 들어간 황태자가 지긋지긋한 마스크를 벗어 던졌다. 동그란 안경을 코끝에 걸친 그는 싱그럽게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배부른 고양이 같은 모습이었다.

“너보다 열 살 넘게 어려.”

“키는 훨씬 크네요.”

“내가 열심히 돌봤거든.”

비록 퍼스트 애플 허니는 레온하르트 새끼의 농간으로 인해 일찍 세상을 떠나버렸지만 말이다. 어린 황태자는 세컨드 애플 허니라도 살려내기 위해 밤낮으로 영양제를 뿌리고 해충을 쫓았다. 하늘의 별을 따다 달라던 카밀라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한 용도로 심었었던 나무였지만, 새순이 돋고 푸릇한 잎사귀를 펼치면 펼칠수록 정말 그에게 가족 같은 존재가 되어 갔다.

마린케이는 황태자의 옆에 주저앉으며 흙냄새를 들이마셨다. 운치가 좋긴 한데, 황태자씩이나 되어 사과나무를 심고 있었다는 사실이 묘하게 매치가 되지 않았다.

“생각보다 할 일이 없으셨나 봅니다.”

“그것도 맞는 말이지.”

“……괜찮으십니까?”

짤막하게 덧붙인 물음이 본론이었다. 그 목소리에 샤를은 잠시 눈을 내리감았다. 맘 놓고 울어보지도 못한 그을린 슬픔 위로 여러 겹의 장막이 갖추어진 듯한 기분이 찾아들었다.

목 놓아 우는 섀넌을 다독여 주면서도 제 감정을 추스를 시간은 갖지 못한 그였다. 그는 덤덤히 물었다.

“괜찮지 않으면?”

항상 의구심을 가져왔으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해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의 시선이 하늘 위를 향해 있었기에, 마린케이 역시 제 주군을 따라 고개를 들어 올리며 순순히 대답했다.

“괜찮지 않아도 뭔가를 해야 합니까?”

수수께끼는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마린케이의 답변은 언제나 투명했고, 또한 솔직했다.

“안 그래도 되는 거면, 그냥 편히 계십시오.”

그게 진심이었다. 마린케이는 황태자가 살아온 삶을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아마 구구절절 설명해준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뒷골목에서나 찾아볼 수 있던 굶주림과 피비린내에 익숙해진 마린케이에게, 황태자의 다정함과 정의로움은 너무도 낯설고 어려운 것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당신이 만들어갈 세상이 궁금했다.

“그래도 됩니다.”

무뚝뚝하게 읊조린 마지막 문장은 막연한 위로에 해당할 것이다. 서툴고도 사랑스러운 위로에, 샤를은 저도 모르게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만 꼬셔.”

마린케이는 그 괴상망측한 발언에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뭐요?”

“이미 충분히 넘어갔단 말이야.”

허나 만개한 벚꽃처럼 어여쁜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저절로 입을 다물게 되고 말았다. 그늘 아래서 바람을 느끼고 있는 황태자의 모습은 마치 한편의 명화처럼 아름다웠다. 겉가죽에 홀리지 말자. 제기랄. 홀리지 말자고. 마린케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황태자의 새파란 웃음소리가 바람결에 섞여 사라진다. 그가 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마린보이.”

“예.”

“폐하를 뵌 적이 있어?”

“아뇨.”

그럴 리가 있나. 일개 평민 따위가 황제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는 드물다 못해 아예 없는 축에 가까웠다. 가쉰을 공포로 밀어 넣는 무자비한 범죄자가 되었으면 모를까. 그쪽은 좀 가능성 있는 경로이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마린케이는 극악무도한 범죄에 별 흥미가 없었다. 한때 뒷골목을 주름잡는 날치기꾼이었다는 사실은 벌써 다 잊어버린 것 같았다.

“원래 몸이 좋지 않으셨어.”

“그렇습니까.”

“가끔 과호흡이 오셨거든.”

선선한 바람이 둘 사이를 나부끼며 존재감을 알렸다.

“아마 살아계셨다면 널 마음에 들어 하셨을 거야. 취향이 꽤 남다르셨어서.”

“신기하네요.”

그러나 마린케이는 별반 관심이 없다는 투였다. 샤를은 제가 손수 골라왔던 결 좋은 토양을 한 손에 그러쥐며 오랜만의 한가로움을 즐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린케이는 문득, 머릿속을 스쳐 가는 한 가지 궁금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즉위하시는…, 겁니까?”

“하루아침에 뚝딱 될 수 있는 자리가 아냐.”

눈앞의 이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던 이단아였다. 그러나 황위가 비어 있는 이상, 자격을 갖춘 누군가는 결국 그 자리를 이어받아 가쉰을 통치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마린케이는 황좌의 주인이 자신의 주군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해?”

여상한 물음이었다.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마린케이가 눈썹을 들어 올리자,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잎사귀를 조심스럽게 손에 쥔 황태자는 아릿하게 웃었다.

“가쉰의 황제는, 모든 것을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그는 마린케이와 눈을 맞추며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기 직전의 거리에서, 낮은 목소리가 창공을 수놓는 작은 햇살처럼 조용히 울려 퍼졌다.

“난 황제가 될 생각이 없어.”

“…….”

“그래도 데리고 살아줄 거야?”

그 한마디에 마린케이는 홀린 듯 그의 멱살을 잡아챌 수밖에 없었다. 데리고 살아주겠냐고? 대답할 필요조차 없는 질문이다. 마린케이가 꿈꾸는 미래 속에, 샤를 소피아 엔스가 없는 하루하루는 존재하지 않았다. 난 이제 당신이 없으면 제대로 살아가지도 못하게 된 것 같은데, 대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마린케이는 벌을 주듯 샤를의 입술을 물어뜯었다.

***

“어딜 다녀온 거니?”

마리아는 보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괜히 배수관으로 올라왔네. 창틀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온 샤를은 그녀의 따가운 눈총 아래서 멋쩍게 웃었다.

“언제부터 있었어?”

그가 구렁이처럼 물었다.

“줄곧 기다렸지. 네가 도망친 후부터.”

“도망은 아냐. 그냥 바람 좀 쐬고 왔는걸.”

“내 방에 침입했던 그날처럼 말이니?”

그 말에 그는 책장으로 향하려던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리아가 작은 보폭으로 샤를에게 다가왔다. 그녀에게는 황궁을 벗어난 후부터 후회해오던 한 가지가 있었다. 아직 세상의 무게를 배우지도 못했을 나이부터 소중한 것을 잃고, 책임져야만 했던 연약한 제 동생을 위한 한 가지가. 오랜 시간이 지나 황태자의 앞에 마주 선 그녀는 쓰라린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난 널 미워한 적이 없어. 샤를.”

“…….”

“너무 늦게 말해줘서 미안하구나.”

마리아가 들고 있던 책은 언젠가 호즈가 즐겨 보곤 하던 드윈의 예술서였다. 이제는 여러 사람의 손때가 묻은 낡은 서적이었지만, 샤를은 제 친누이나 다름없던 호즈가 즐겨 읽었던 모든 책들을 책장에 보관해두고 있었다. 마치 언젠가 그 유순한 사람이 다시 돌아오게 될 수도 있을 것처럼. 침묵이 흘렀다. 마리아가 다시금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미워했다고 해도 괜찮아.”

“…….”

“그래도 괜찮아. 누이.”

그녀는 그 목소리에 제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아마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이다. 첫째로 태어났음에도 승계권을 갖지 못했던 이유는 자신이 황비의 품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었고, 또한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쉰은 단 한 번도 여황이 즉위한 적 없는 국가였으니까.

그래서인지 마리아는 찬란한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소년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열등감에 시달리고는 했다. 소년과 함께 씨앗을 심고 흙을 덮으면서도 그 운명을 시기했다. 그건 화언국의 왕자가 푸른 드레스와 하이힐을 선물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저를 옥죄는 듯한 선물더미 속에서, 그녀는 샤를 소피아 엔스의 모든 것을 욕심내고 원망했다.

내가 너였다면 무언가 달랐을까. 내가 너였더라면.

“아니, 샤를.”

그러나 소년은 그녀의 드레스를 찢고 하이힐을 산산조각 냈으며, 자유로이 황궁을 나설 수 있게끔 제 기회를 포기하기까지 했다. 마리아는 자신이 다른 귀족과의 혼인 없이도 황궁을 나올 수 있었던 배경 뒤에 소년의 희생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괜찮지 않은 걸 괜찮다고 말하지 마.”

그녀가 황궁에서 벗어난 뒤에도 황태자는 황제의 명령에 의해 근신을 계속해야만 했다. 일방적인 약혼 파기를 사과하기 위해 화언국으로 보내지기도 했으며, 단절될 가능성이 높은 외교를 무마하기 위한 정치적인 도구로서 이용되기도 했다. 소년이 다시 가쉰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화언에 보내진 후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누이.”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황태자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흙냄새가 풍긴다. 그 순간 마리아는 사과나무를 심으며 하늘의 별을 따올 것이라 큰소리치던 어린 샤를의 모습을 떠올렸다. 터무니없는 소망까지도 진심을 담아 말하던 그 사랑스러운 아이를.

“나와 제국법을 어겨 보지 않을래?”

“……네 헛짓거리에 어울려줄 생각은 없어. 샤를.”

“황위를 줄게.”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초대 황제를 빼다 박은 아름다운 얼굴이 미소 짓는다. 원망도, 질책도 담겨 있지 않은 미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지고 싶어 했잖아.”

모를 리가 없었다. 황태자는 현명한 자신의 누이가 이따금 저를 매우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탓하는 것은 그의 성미와 매우 거리가 먼 일이었으니까. 초대 황제의 현신이라고도 불리는 아름다운 남자가 내뱉은 그 말은 제국을 통째로 뒤흔들 만한 소지가 충분한 말이었다.

대답하지 않고서 황태자를 응시하던 마리아가 입을 열었다.

“대가는?”

“내게 자유를 줘.”

자유. 그가 그토록 바라왔던 것을 말이다. 그러나 그런 황태자와 달리, 마리아 로즈 엔스에게는 가지지 못한 자리에 대한 미련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엔스를 버리겠다는 말이구나.”

“그게 가쉰을 버리는 것보다는 낫잖아?”

어릴 적의 그 시절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선 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낯선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쩌면 절대 성공하지 못할 계획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입에 담은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가쉰의 황태자 본인이라는 것이었다. 마리아가 샤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샤를이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황위 따위에는 이제 관심 없어.”

샤를의 어깨 위에 묻어 있던 흙먼지를 털어준 그녀는 어린 날의 그때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하지만 제국법을 어겨 보자는 소리는, 꽤 구미가 당기는구나.”

***

뾰로통한 얼굴로 마린케이를 노려보던 피에르는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비난을 퍼부었다. 네가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미아 센터에 연락을 할 뻔했다든가, 실제로 그 앞까지 가보긴 했으나 너의 보복이 두려워 차마 들어갈 수 없었다는 등의 쓸모없는 정보를 알게 된 마린케이는 0.001%의 미안함을 담아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로서는 시끄러운 목소리를 제지하지 않고 들어주고 있는 것만 해도 꽤 많은 친절을 보이고 있는 셈이니, 부디 이 정도로 만족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각설하고, 당연하게도 피에르 셀번은 황궁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황제의 장례 동안엔 그 누구도 황궁을 빠져나갈 수 없고, 발을 들일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사자는 어떻게든 가능할 줄 알았던 모양인지, 한껏 의기소침해진 얼굴로 아이스박스를 끌어안은 채였다. 소고기 스튜 재료들은 벌써 다 상해 있을 것 같았다.

“전하께서는 어때 보이셨지?”

왕립학교로 돌아와 차에서 내릴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보던 피에르가 조심스레 물었다. S관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던 마린케이는 점쟁이라도 마주친 사람처럼 표정을 굳혔다. 그러자 곧바로 피에르 특유의 오만한 코웃음 소리가 이어졌다.

“모를 거라 생각했다면 크나큰 오산이야.”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줘야 해?”

무시무시한 눈빛이 마린케이의 입술 쪽으로 때려 박혔다. 샤워장에서도 무척이나 남사스러운 몰골로 서 있더니, 이번엔 입술이 전부 불어 터져서 돌아온 평민의 모습에 피에르는 저도 모르게 자꾸만 심통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거울이나 봐라. 무뚝뚝하게 일침을 놓은 그가 마린케이를 대신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립니다.』

공손한 안내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커다란 거울 너머로 제 얼굴을 확인한 마린케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잘게 물어 뜯겼던 아랫입술이 눈에 띌 만큼 부어 있었다.

「무슨…. 아, 잠시만요.」

「적당히 끝낼게.」

그늘 밑에 숨어 여우처럼 웃던 황태자의 모습을 떠올린 마린케이는 수치심에 거울 위로 머리를 박았다. 피에르는 그런 마린케이의 모습을 공포스럽게 힐끔거리며 소중한 아이스박스를 엘리베이터 위로 올렸다. 설마 이 정도 발언으로 화가 난 건 아니겠지. 그런 거면 정말 분노 조절 능력에 문제가 있는 걸 수도 있으니 본인 대신 병원에 신고를 넣을 생각이었다.

평민의 화풀이가 몹시 두려웠던 피에르는 7층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후다닥 집 안으로 대피했다. 칼질 한번 해보지 못하고 돌아온 것은 아쉽긴 했으나, 일단은 저 칼날 같은 눈총을 피해 달아나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이었다.

그를 한심스럽게 쳐다본 마린케이가 저 역시 집 안으로 발을 들이려던 찰나였다. 이건 또 뭐야. 분명 닫혀 있어야 할 현관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마린케이는 익숙한 불길함을 느끼며 문고리를 당겼다. 본가보다 훨씬 더 넓은 규모의 현관을 지나 거실로 들어서자, 예상했듯 벌써 두 번째 무단 침입을 시도한 금발 새끼가 떡하니 앉…, 잠깐.

금발이 아니잖아?

“꼴이 왜 그래?”

금발이 아닌 레온하르트가 멍하니 서 있는 마린케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의 시선 또한 잔뜩 부르튼 마린케이의 입술 위로 꽂혀 있었다.

“그건 제가 묻고 싶습니다만.”

혼란스러움을 느낀 마린케이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탁한 금색이었던 레온하르트의 머리칼 위로 고동색의 염색물이 들어 있었다. 머리색 하나로 사람 인상이 저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예민하기 그지없어 보였던 인상의 사내가 조금은 부드러워진 얼굴로 화답했다.

“평생 금발 머리로 살아갈 순 없잖아.”

“그렇긴 하겠죠.”

“생각보다 잘 어울리기도 하고.”

확실히 그랬다. 고로 저 새끼가 당당히 앉아 회 도시락을 먹고 있는 공간이 제 기숙사만 아니었더라면, 어느 정도 납득하며 맞장구를 쳐주었을 거란 얘기다. 이쯤 되면 기숙사의 보안 체계 자체를 의심해 봐도 좋을 것 같았다. CCTV는 장식용으로 달아놓은 건지 궁금했다.

“어떻게 들어오신 겁니까?”

“다 방법이 있어.”

“그러니까, 어떻게요?”

“넌 정말 호기심이 많구나.”

누가 봐도 비꼬는 듯한 목소리였으나, 정작 그 말을 입에 담는 이의 얼굴은 너무도 태연해 보여 열불이 났다. 인내심 짧은 마린케이는 결국 질문하기를 포기하고서 신발을 벗었다. 현관문부터 풍겨오는 레온하르트 특유의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는 마린케이의 몫으로 사다 두었던 나머지 도시락 하나를 눈짓하며 물었다.

“생각은 끝냈겠지?”

“예.”

생각보다 양심이 있는 인간이었다는 평가를 내리며, 단순무식한 마린케이 이스턴은 회 도시락 하나에 홀랑 넘어가 그의 무단 침입을 방조했다. 심지어 센스 있게 특대 사이즈로 준비해온 것을 확인한 마린케이는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최대한 제 선에서 끝내고 싶습니다.”

“그렇게 안 보였는데, 아직 동심이 남아있는 편인가 봐.”

“그렇다고 관계없는 사람을 끌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먼저 식사를 마친 레온하르트가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미 네 선에서 끝낼 수 없는 일인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정당한 지적이었다. 백작과 댄 미헤르의 결탁은 고작 평민 한 명이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레온하르트는 낯선 색으로 물든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마린케이와 시선을 맞추던 그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네가 찾아올 생각이 없는 것 같길래, 데리고 들어갈 아이는 알아서 구했어.”

“……무슨 소립니까?”

이해하지 못할 그의 발언에 마린케이는 얼굴 가득 인상을 찌푸렸다. 금발과 푸른 눈을 가졌다는 죄로 평생을 숨어 살아야 했던 레온하르트가 염색물을 들이고, 다른 색깔의 렌즈를 착용했던 것은 오직 왕립학교에 입학하길 소망했을 때뿐이었다. 그 정도로 중요한 사안이 아니고서야 굳이 불쌍한 머리털을 건드릴 리 없다는 뜻이다.

마린케이의 바로 앞까지 걸어온 레온하르트는 차가운 눈을 내려 그를 응시했다. 정의 따위의 편협한 수에 이끌려 멍청한 짓거리에 어울려주고 싶지는 않았으나, 이상한 일이지.

그는 절대 시선을 굽히지 않는 평민의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내가 직접 들어가겠다는 소리야. 노예 경매장에.”

“…….”

“출품하기 전까진 나와 함께 있을 수 있으니, 아이는 안전할 거야. 물론 그것도 전부 제시간 안에 계획을 다 끝낼 수 있을 때 가능한 얘기겠지만. 여차하면 사람을 사서라도 도망 나올 테니 괜한 걱정은 하지 말고.”

그의 손가락이 마린케이의 머리칼 위를 건드렸다. 가쉰 인구의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갈색 머리와 갈색 눈. 평범하다고만 생각했던 그 얼굴은 이제 보니 제법 뜯어보는 맛이 있었다. 그의 손을 짜증스럽게 쳐낸 마린케이는 다시 한번 물었다.

“대답이나 하시죠.”

질문보다는 경고에 가까운 어조였다. 레온하르트가 한숨을 뱉었다.

“아이는 어떻게 구한 거냐고.”

“날 의심하는 건가?”

어지간해서는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린케이는 귀족들의 만행을 직접 녹화하면서도 그들의 일을 방관한 채 내버려 두던 레온하르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랬던 그가 한순간에 마음을 바꿔 정의의 사도인 양 행동한다는 것은 쉬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황태자와 닮은 듯, 닮지 않은 유려한 인상의 사내가 애달프게 웃었다. 일순간 마린케이는 그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회상에 잠겨 있던 레온하르트는 정신을 차린 듯 낮은 목소리를 냈다.

“세상이 생각대로만 예쁘게 돌아가 줬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치?”

“…….”

“눈에 힘 좀 풀어. 내가 후원하던 고아원 아이를 잠시 데려가는 것뿐이니까.”

고아원? 그거야말로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발언이었다. 베사플레사의 오너가 고아원의 후원자라고? 어린아이에 죽고 못 사는 황태자 새끼라면 모를까, 그가 고아원에 후원금을 내고 있었다는 설명은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뭐, 본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깔끔히 정리를 마친 마린케이는 할 말을 끝냈다는 듯 미련 없이 뒤돌아서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

“관심 없으셨잖아요. 이런 일에.”

평민의 말이 맞았다. 심지어 그보다 더 심한 편에 속했다.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역겨워하기까지 했으니까. 레온하르트는 황태자가 외쳐대는 자유라든가, 정의라든가 하는 것들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단어를 들을 때면 속이 거북하고 북받치기에 바빴다.

마린케이가 아주 작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운을 떼던 찰나였다.

“제가 구해드린 것 때문이라면…….”

“황후께 빚을 졌어.”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결 좋은 갈색 머리칼과 청명한 녹안을 가졌던 어느 여인의 얼굴을 회상했다. 숲을 닮은 그녀의 녹안은 어떤 원망과 비난도 담지 않고서 저를 바라보곤 했다. 왕립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끔 성씨를 빌려줄 때도 그랬다. 셀린느의 성으로 살아가며,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남부럽지 않은 지원하에 무사히 왕립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모친이 무대 위에서 쓰러졌던 그날, 그 누구도 일개 평민을 위해 수술실을 내어주지 않았다. 끊임없이 목에서 피를 토해내던 그녀의 모습에 레온하르트는 연신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아주며 눈물을 쏟았다.

만약 그때 소피아 황후가 병원에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의 어머니는 제대로 된 수술 한번 받아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야만 했을 것이다.

“지금이 갚아야 할 적기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래서 레온하르트는 황태자를 보며 언제고 그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구원자처럼 등장해 태양처럼 반짝이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제 자신을 꽁꽁 동여매 그늘 밑 어딘가로 숨겨버리고 싶기까지 했다. 정적을 깨뜨리듯, 마린케이가 예의 그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전하께선 알고 계십니까?”

향수에 젖어 있던 레온하르트의 대답은 비교적 정중하게 흘러나왔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그는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을 꾸며내며 말했다.

“경매장까지 길을 뚫어줄 수는 있지만, 그 외의 것들은 너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가 불가능할 거야. 백작은 손쉬운 상대가 아니거든.”

자신이 할 일은 그저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었지, 거사가 성공하길 바라며 함께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금 더 자존심을 즈려밟아 보고도 싶었지만, 저 시큰둥한 얼굴을 보니 반응을 기대하기는 영 글러 먹은 것 같아 그는 생각보다 일찍 대화를 마치기로 결정했다.

“샤를한테는 네가 전해줘. 난 그 새끼랑 대화하기 싫어서.”

괜히 말이라도 섞었다가 누구 하나 코뼈가 내려앉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마린케이는 그때까지도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올곧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역시나 황태자와 미묘하게 닮은 얼굴이라 생각했으나 어딘가 훨씬 더 연약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레온하르트 씨.”

“…….”

“감사합니다.”

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레온하르트는 그에 또다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잊고 있던 사실이 있다. 그가 황태자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제법 사람 보는 눈이 명확하다는 짜증 나는 사안 때문이었다. 이미 혼자서도 모든 걸 다 가진 주제에 인재까지 찾아 헤매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얼마나 배알이 꼴렸겠는가. 그러나 눈앞의 평민은 그보다 훨씬 더 의미가 있는 존재였다.

“너.”

저를 업고 뛰어다니던 악에 받친 얼굴과 목소리. 목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그 목소리만이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레온하르트가 대답은 기대하지 않는다는 투로 물었다. 마린케이는 그 물음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 일 끝나면 나랑 가쉰을 뜨지 않을래?”

“…….”

“농담이야.”

전혀 농담인 것 같지 않은 표정과 목소리였지만, 마린케이는 이럴 때일수록 더더욱 당사자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가끔 다이애나가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곤 했을 때, 곧바로 거절의 뜻을 내비쳤던 그는 그럴 땐 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호된 가르침을 들은 전적이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가볍게 중얼거렸다.

“샤를 그 새끼는 운도 좋다니까.”

마린케이의 부르튼 입술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그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걘 공작새 같은 사람들을 좋아해.”

“알고 있습니다.”

“꼭 너 같은.”

“…….”

“계속 시선을 끌잖아?”

마린케이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됐다는 듯 손을 흔든 후 기숙사를 빠져나갔다. 그제야 굳어 있던 표정을 갈무리한 마린케이가 진심을 욱여넣어 읊조렸다.

“대체 뭔 소리야?”

직설적으로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레온하르트로서는 아쉽게 된 소리겠지만, 마린케이는 그가 가쉰을 뜨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입에 담던 순간부터 대화의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황실에서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법한 말버릇을 가르치는 문화가 있는 것 같았으니, 굳이 그것을 해석해 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가 기숙사를 떠났음을 확인한 마린케이는 들고 있던 회 도시락을 탁상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세 개 정도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아쉬워하면서.

***

어째 아침부터 일진이 더럽게 사납다고 했다. 일단 첫째로, 샤워 부스에서 비누를 잘못 밟아 미끄러지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다섯 살짜리도 그런 실수는 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려 밖으로 나왔을 때는 옆집 귀족 새끼에게 걸려 계란 껍질이 있나 없나 불시 검문을 당하기까지 했다.

오늘따라 훨씬 더 기세를 흉흉히 곤두세운 마린케이는 소란스러운 수련장 앞을 바라보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조용히 샌드백이나 치려고 했더니, 그사이 방문자가 몰려든 건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수련장 앞을 차지한 세 명, 아니 네 명의 건장한 남성들은 샌드백 때리기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한 명은 멱살이 잡힌 채 흔들리고 있었고, 한 명은 멱살을 틀어잡은 채 윽박을 질러대고 있었다. 나머지 두 명은 어떻게든 말려보려 진땀을 빼고 있는 것 같았는데, 멱살을 쥐고 흔드는 쪽이 하도 덩치가 있어서 그런지 힘에 부쳐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대체 당신들이 누구시냐고요?”

칼릭스의 억울한 목소리가 고래고래 울려 퍼졌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가련한 모습의 그는 린저를 향해 어떻게든 손을 뻗으려 들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 너랑 만나고부터 이자벨라가 사라졌는데, 이렇게까지 모르쇠를 해? 이 똥물에 튀겨 죽여도 시원찮을 새끼야! 그냥 죽어라, 죽어!”

원래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다고들 하지 않나. 퍼스트 클래스의 몇몇 수련생들이 힐끔거리며 그 개싸움을 구경하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나 마린케이의 표정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저런 사건 사고쯤이야 그가 나고 자란 뒷골목에서는 일상이나 마찬가지인 일들이었다.

그러나 덩치의 손에 쥐여진 벙거지 모자를 확인하게 된 순간부터는 그렇지 않았다.

“아니, 이자벨라가 누군지부터 설명해 줘야 할 거 아닙니까!”

“그 애가 분명 칼릭스 커티스라고 그랬어. 칼릭스 커티스! 당신이 칼릭스 커티스 맞잖아. 아냐?”

“글쎄, 맞긴 한데 설명이 필요하다니까요? 전 이자벨라가 누군지 모른다구요! 처음 듣습니다. 진짜로…!”

안타깝게도 칼릭스의 간절한 변명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문득 마린케이의 등줄기 위로 불안한 예감이 치솟았다. 빠르게 인파를 헤치고 걸어간 그는 저를 구세주 바라보듯 하는 린저 아일랜드를 지나쳐 덩치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내 딸이나 다름없는 애야! 그 애한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으면, 내가 기필코 당신 대가리를 따서 광장 한복판에 전시해놓을…….”

저보다 손바닥 두 뼘 정도 더 큰 키와 어마어마한 근육 덩이를 가진 상대였음에도 마린케이는 손쉽게 덩치의 행패를 저지했다. 행동을 방해받은 사내는 험상궂은 얼굴을 더욱 험상궂게 구기며 고개를 돌렸다.

“혹시, 이름이 션 맞습니까?”

「예쁘네.」

「그치? 션이 만들어준 거야.」

그가 쥐고 있는 벙거지 모자는 분명 소녀의 것이 확실했다. 마린케이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럴 순 없는 일이다. 제기랄, 왜 하필이면! 사내는 그의 광포한 분위기에 압도당한 듯 무어라 대답도 하지 못하고서 입을 벌렸다. 그러자 표정을 부드러이 바꾼 마린케이가 아직까지 멱살이 잡혀 있던 칼릭스를 풀어주며 선언했다.

“제가 칼릭스 커티스입니다.”

“뭐?”

그에 진짜 칼릭스 커티스는 이건 또 무슨 개소리냐는 심정으로 마린케이를 바라보았다. 어째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뒷걸음질 치려던 그는 린저의 몸에 부딪히고서 빠르게 말을 뱉었다.

“린저, 이때 빨리 도망…….”

“어쩜 저리 한결같이 멋있으실까요?”

깜빡했다. 이 새끼도 미친 새끼였지. 린저의 얼빠진 얼굴을 바라보던 칼릭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졸업이 1년만 더 늦어졌어도 그는 망설이지 않고 자퇴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전에 저 평민이 퇴학당해 준다면 정말 고맙겠지만, 상황을 보면 그건 절대로 불가능할 것 같았다.

덩치 큰 사내와 대치하고 선 마린케이는 대답을 기다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갈색빛이 도는 벙거지 모자를 아련하게 쓰다듬은 사내가 눈시울을 붉힌 채 소리쳤다.

“이자벨라를 아는 분이십니까?”

조금 전과는 차원이 다른 그의 모습에 칼릭스는 상처받은 심정으로 표정을 구겼다. 아까는 무슨, 멱살을 잡고 흔드는 것도 모자라 바닥에 패대기치기까지 하더니.

기사도만 아니었으면 진작 들고 있던 목검으로 내려쳤을 것이다. 그러나 왕립학교는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절대 민간인에게 검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기사도의 집결지였다.

엿 같은 기사도. 칼릭스는 처음으로 왕립학교의 가르침에 불신을 가지며 혀를 찼다. 상황이 해결될 때까지 도망치지 못하게끔, 린저가 그의 팔목을 세게 붙들고 있던 참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이 묶인 칼릭스는 한숨을 쉬며 두 사람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기, 정말 죄송한데.”

그래도 바로잡아야 할 건 바로잡아야 할 거 아닌가.

“제가 진짜 칼릭스 커티스입니다.”

뜬금없는 칼릭스 찾기 게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길거리에 이 모자만 떨어져 있고, 애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절대 가출하거나 그럴 애는 아닙니다. 이자벨라가 얼마나 사려 깊고 세심한 애인데.”

비상 회의에 소집된 사람은 총 네 명이었다. 벙거지 모자를 소중하게 품어 안은 션 헝크스가 제일 먼저 발언 기회를 얻었다. 린저는 그를 따라 훌쩍거렸고, 칼릭스는 이 믿지 못할 광경에 거의 해탈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션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마린케이가 물었다.

“그걸 언제 발견하신 겁니까?”

“어제요. 바로 어제 발견했습니다. 동네방네 다 뒤졌는데 머리카락 한 올도 못 찾았구요. 도련님, 제발 이자벨라 좀 찾아주십시오. 정말 가출할 만한 애가 아닙니다.”

“압니다.”

아주 잘 안다. 그 자신만만하고 똑부러지는 애가 함부로 거처를 탈출해 위험 속으로 뛰어들 가능성은 매우 미미했다. 실은 짐작 가는 부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지. 마린케이는 상황 확인을 위해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낯선 사람에 관해서 얘기한 적은 없습니까?”

“있어요!”

다음으로 발언 기회를 얻은 것은 션 헝크스를 따라 이자벨라를 찾으러 온 미저리의 회계 담당, 테헤란이었다. 그러나 테헤란은 발언 기회를 얻었음에도 어쩐지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칼릭스와 린저는 힐긋, 마린케이의 살벌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테헤란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말하기가 좀…….”

“괜찮습니다.”

안 괜찮을 것 같은데. 테헤란은 션이 제 등을 세게 내리치고 나서야 겨우 말을 시작했다.

“칼릭스 커티스, 그러니까. 그쪽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했어요.”

나? 칼릭스가 얼떨떨하게 제 얼굴을 가리키자, 테헤란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당신 말고 가짜 칼릭스 씨요.”

“통성명 좀 제대로 하면 안 됩니까?”

그에 진짜 칼릭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였다. 도대체 이 무슨 웃기지도 않은 짓거리인가. 진짜 칼릭스, 가짜 칼릭스를 혼동하는 사람들 때문에 이제 스스로조차도 자신이 정말 칼릭스 커티스가 맞는 걸까 헷갈릴 정도였다.

“저, 형…….”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린저는 칼릭스의 팔을 확 끌어당겼다.

“그냥 닥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다, 닥, 뭐라고?”

“조용히 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구요.”

아니다. 분명 닥치라고 한 것 같은데. 칼릭스는 순한 양 같던 린저가 어째서 이렇게 타락하게 된 것인지 마음 아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닥칠게. 어릴 때 가끔 교류가 있었던 아일랜드 가문 사람들은 천성이 다정하고 섬세했는데, 아무래도 그 천성은 이번 대에서 뿌리가 뽑힐 것 같았다.

“사실 이자벨라가 하도 그쪽 얘기를 많이 해서, 무슨 불순한 목적을 가진 놈팡이는 아닐까 의심을 많이 했거든요. 저도 그렇고, 션 형님도 그렇고.”

“계속하십시오.”

“네! 그런데 막상 같이 있는 걸 보니까 너무 돈독해 보이고 그래서…. 진짜 솔직히 말하자면 질투도 엄청 했어요. 이자벨라는 저한테 매일 코웃음밖에 안 쳤거든요.”

그건 마린케이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어째 얘기가 점점 옆길로 새고 있는 듯한 기분에 대답하기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댔나. 다행스럽게도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는 린저 아일랜드가 현명한 질문으로 주제를 환기했다.

“그래서, 이자벨라 양이 가짜 칼릭스 씨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했었는데요?”

그러자 테헤란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이제 보니 대화를 피한 이유가 있었다.

“싸가지는 없는데, 양심은 좀 있는 것 같다고 그랬어요.”

션 역시 열심히 거들었다.

“양아치 같긴 한데 건실한 구석이 있다고도 했고.”

“저희 반년 치 생활비도 그쪽이 벌어주셨다고 들었구요.”

“얼굴은 그리 잘생긴 편이 아니라고도….”

토론의 행방은 산으로 가는 것을 넘어 그 꼭대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칼릭스는 마치 마린케이 뒷담화 대화를 펼치고 있는 것만 같은 상황 속에서 억지로 마른 웃음을 삼켜냈다. 오합지졸 같은 대화에 한숨을 뱉은 마린케이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제가 벌어다 드린 건 아닙니다.”

그의 싸늘한 얼굴에 정신을 차린 것인지, 테헤란이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손뼉을 쳤다.

“그리고 최근에…….”

“최근에?”

되물은 것은 진짜 칼릭스 커티스였다. 어느 순간부터 칼릭스는 자신이 이 대화에 무척이나 몰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시, 실연당하신 것 같다고 듣긴 했어요.”

“…….”

“엄청 잘생긴 오빠한테 실연당한 것 같다고, 그래서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고요.”

정적이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엄청 잘생긴 오빠?

칼릭스와 린저는 그 단어에 똑같은 사람의 얼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퍼스트 클래스의 자랑, 샤를 소피아 엔스를.

‘이스턴 씨, 태자 전하가 취향이셨구나.’

본의 아니게 린저까지도 실연을 당하게 만든 테헤란이 멋쩍은 듯 눈썹 부근을 긁적거렸다. 칼릭스는 눈 높은 황태자에게 뻥하고 걷어차였을 마린케이를 상상하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 개새끼들이 진짜. 바로잡지도 못할 만한 오해가 커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마린케이가 짜증스럽게 소리치려던 찰나였다. 테헤란이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대체 누구한테 갈아탄 건지 자기가 직접 확인해 보겠다고 했어요.”

“뭐? 그걸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얘기를 듣고 있던 션은 성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테헤란이 무어라 변명을 하기도 전에 그의 멱살을 잡아챈 션이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다.

“그럼 그 놈팡이를 찾아가 봤어야 할 거 아냐! 테헤란 이놈의 자식, 오늘 한번 본때를….”

“언제 그랬습니까?”

그런 션을 가로막고 선 것은 이번에도 역시 마린케이였다. 차갑게 표정을 굳힌 그는 대답하지 않으면 참사라도 일으킬 것만 같은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한 게 언제였냐구요.”

“어, 어제인 것 같아요.”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킨 테헤란은 떨림을 감추지 못하며 대답했다. 칼릭스는 또 애꿎은 민간인이 평민의 박력에 얻어맞게 된 꼴을 지켜보며 익숙한 종류의 안타까움을 느꼈다. 마린케이가 이제 되었다는 듯, 회의실-로 발탁된 탈의실-을 박차고 나가며 선언했다.

“찾아오겠습니다. 이자벨라.”

빌어먹을. 댄 미헤르가 그 새끼였다니. 연갈색 머리칼을 흩날리며 가냘프게 미소 짓던 청년의 얼굴을 떠올린 마린케이는 욕설을 뱉었다. 이건 겉가죽에 현혹된 정도라고도 볼 수 없었다. 그의 손엔 어느새 션 헝크스가 가지고 있었던 소녀의 밤색 벙거지 모자가 쥐어져 있었다.

***

“그렇게 두드려 봤자 안 열려.”

정신을 차리자마자 미친 듯이 쇠문을 두드려대는 이자벨라에게, 곱슬거리는 흑발을 가진 소년이 말했다. 소년은 겨우 커다란 티셔츠 한 장만을 걸치고 있는 것도 모자라 하얀 발목 위로 두꺼운 쇠사슬을 달고 있기까지 했다. 그것은 비단 소년에게만 해당되는 소리가 아니었다. 이 안에 가둬진 모든 아이들이 비슷한 차림새로, 비슷한 족쇄에 구속당해 있었다. 발과 손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이자벨라뿐이었다. 이자벨라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럼 여기 가둬진 채로 감사합니다, 하고 있으라고?”

“엄한 데 힘 빼지 말라는 소리잖아. 너만 힘들어질 테니까.”

“너야말로 엄한 곳에 힘 빼지 말지? 그럴 시간에 와서 돕기라도 하든가.”

이자벨라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소년은 혀를 차며 시선을 거뒀다.

“그럼 알아서 해. 조언을 해줘도 난리네.”

내가 어쩌다 여기서 일어나게 된 거지? 이자벨라는 제 머릿속에 남아있는 단편적인 기억들을 훑어보며 상황 파악을 하고자 노력했다. 일단 잘생긴 오빠가 사다 주는 아이스크림을 의심 없이 얻어먹었고, 처음 맛본 피스타치오 맛에 감격을 했었던 것 같은데.

“뭐야, 이거. 설마 납치야?”

이자벨라는 그 기억을 마지막으로 자신이 잠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깨닫고선 사납게 소리 질렀다. 소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빨리도 눈치챘네.”

노란 조명 밑에 비친 소년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제 동년배의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자벨라는 불안함이 깃든 목소리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 어디야? 나 진짜 납치된 거야?”

“둘 중에 하나겠지. 납치됐거나, 팔려 왔거나.”

“……정말 납치라고?”

이자벨라는 자신에게 닥친 상황 자체를 믿지 못하고서 몸을 비틀거렸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던 아이들의 공허한 시선이 이자벨라를 향한다. 그 눈에서는 일말의 희망도, 가능성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산 사람의 눈을 하고 있는 것은 제게 말을 걸었던 소년뿐이었다.

“각하께서는 무자비하셔.”

소년이 앙상한 발목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얇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쇠사슬을 조금씩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날붙이의 느낌이 손안을 가득 적신다.

이자벨라는 그런 소년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침음성을 삼켰다.

“황가의 비호를 받은 아이도 죽여버리셨다는 소문이 있거든.”

“…….”

“여기 끌려온 이상 도망칠 방법은 없대. 아무도 우릴 구해줄 수 없을 거고, 너도 여길 탈출할 수 없을 거야.”

“…거짓말하지 마.”

“내가 뭐 하러 그러겠어? 그래도 넌 운이 좋은 편에 속해. 내일모레 있을 간택 때문에라도 지금 당장 얻어맞지는 않을 테니까.”

소년이 웃었다. 그 웃음이 참으로 기괴하게 느껴져서, 이자벨라는 뒷걸음질 치며 소년에게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소년의 부르튼 입술엔 하얀 각질이 잔뜩 일어나 있었고, 쇠사슬이 묶인 발목 위로는 온갖 모양의 상처들이 낙인처럼 아로새겨져 있었다. 나머지 아이들의 모습을 차례로 훑어본 이자벨라는 공포감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션. 나 어떡해?

창문 하나 트이지 않은 밀실에 가둬져 있기 때문일까, 이제는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조차 버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대로 마냥 다가올 공포를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까스로 두려움을 이겨낸 이자벨라는 소년을 향해 걸어 나갔다. 소년의 새하얀 얼굴 위에 가득했던 작위적인 미소가 조금씩 옅어져 가던 시점이었다.

“너 꼭, 내가 탈출 못 하길 바라는 사람처럼 말한다?”

“……불가능한 소원이니까.”

“가능하면 어떡할 건데?”

“곧 경매가 있다고 들었어. 개미 새끼 하나 못 빠져나가도록 감시하고 있을 텐데, 무슨 수로?”

“간택이고 경매고, 난 그딴 거 하나도 모르거든? 까짓것 그냥 누구 들어올 때 몰래 같이 나가면….”

“각하께선 여기 들어오실 때마다 꼭 아이 한 명씩을 데리고 나가셔.”

“…….”

“왜일까?”

추레한 뒷골목을 살아가야만 하는 아이들은 생존을 담보로 눈치를 배운다. 그렇기에 이자벨라는 그 한마디만으로도 소년이 무엇을 얘기하고자 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자벨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소년은 그런 이자벨라를 향해 킬킬대며 말을 이었다.

“이제 왜 간택이라 불리는지 알겠지?”

***

“차 좀 빌리죠.”

마린케이를 따라 급하게 달려 나온 칼릭스는 그 말에 경기를 일으키듯 거부 반응을 보였다. 황태자 또한 그의 차 키를 강탈해간 후 거의 고물 상태로 만들어 돌려준 전적이 있었다. 원한다면 새 차를 뽑아주겠다고도 했지만, 어떻게 일개 수련생이 황태자에게 차를 사 달라 요구할 수가 있겠는가?

“절대 안 돼. 죽어도 안 돼.”

따라서 칼릭스는 완강히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이번에 새로 뽑은 차만큼은 부디 처음 상태 그대로 보존하고 싶어서였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린저는 이때다 싶은 얼굴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차 키를 찾아낸 그가 주저 없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스턴 씨! 제 차로 가져가세요.”

“괜찮습니다.”

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차를 강제로 뺏어가려 해놓고선, 린저의 차는 소중히 지켜주려는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쩌다 내가 이런 푸대접을 받게 된 걸까. 아마 마린케이의 클래스 변동 이후 신고식을 자행했던 그날부터였을 테지만, 자신이 꾸몄던 그 최악의 신고식 날을 까맣게 잊어버린 칼릭스는 그저 본인의 처지를 안타까워하기 바빴다.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어차피 두 대는 더 있어서.”

린저는 차를 세 대씩이나 가지고 있다는 소리를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의심스러워하던 마린케이는 그의 때깔 좋은 얼굴을 확인하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시간도 촉박했던 터라, 거절을 하고 말고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기도 했다. 그는 차 키를 받아 들며 말했다.

“조심히 몰게요.”

그 목소리에 린저는 해맑게 웃으며 양손을 모았다.

“그냥 드릴 테니까 마음대로 쓰세요!”

칼릭스는 그런 두 사람을 망측하게 여기며 쯧, 혀를 찼다. 물론 속으로만 말이다. 괜히 티라도 냈다가 저 거만한 평민의 눈총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떠나기 직전, 마린케이는 린저를 돌아보며 한 번 더 강조했다.

“꼭 돌려드리겠습니다.”

“정말 부담 가지지 않으셔도…….”

그러나 그는 린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부터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주차장은 걸어서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으나, 그 속도라면 필히 5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칼릭스는 마린케이의 성난 뒷모습을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고, 상냥함이 뿌리 뽑힌 아일랜드 가문의 후계자는 어째서인지 불끈 주먹을 쥐며 걸음을 돌렸다. 칼릭스가 물었다.

“린저, 어디 가?”

“다시 그분들한테 가봐야죠.”

“그분들?”

“딸이 사라졌다는데 얼마나 속상하시겠어요.”

“…그렇기야 하지만.”

“아무래도, 제가 같이 있어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글쎄. 네가 같이 있어준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지 않을까. 하지만 마린케이의 정의감에 가슴 깊이 감동받은 린저는 결연한 표정으로 방향을 틀었다. 곤란함을 느끼던 칼릭스 역시 결국 린저를 따라 회의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졸업 전에 별 난장판을 다 겪어보겠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칼릭스는 기사로서의 심장이 꿈틀대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아, 가슴은 왜 또 설레냐. 망할 기사도 같으니라고.

“인마, 같이 가!”

칼릭스는 린저의 어깨 위로 팔을 걸며 말했다.

***

아슬아슬하게 신호를 비껴가며 차를 몬 마린케이는 주차 구역을 넘어서까지 액셀을 밟으며 돌진했다. 굉음에 놀라 달려오기 시작하는 가드들의 모습이 백미러 위로 비쳤다. 황궁 앞에 거의 다다라서야 브레이크를 밟은 마린케이는 차창 너머로 보이는 가드들의 동태를 주시했다.

본래는 바로 베사플레사로 향할 생각이었지만, 레온하르트의 말마따나 혼자만의 힘으로 경매장을 급습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폴리스를 불러 일을 그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마린케이는 그나마 가장 쓸 만하고 믿을 만한 누군가를 데려가기 위해 친히 차를 몰았다. 멈춰 선 차 주위를 둘러싼 가드들이 거칠게 차창을 두드렸다.

“죄송하지만, 여긴 주차 금지 구역입니다. 전용 주차 구역으로 가서 주차해 주시기 바랍니다.”

“…….”

“계속 대답하지 않으시면 불법 주차로 연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복합니다. 여긴 주차 금지 구역…….”

문제는 어떻게 해야 황태자 놈을 찾아갈 수 있을지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난번 방문 당시에는 황태자가 직접 황궁을 빠져나왔기 때문에 수월히 마주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몇 안 되는 가능성에 몸을 실은 채 황궁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니기에는 리스크가 컸다. 시름하던 마린케이는 흘리듯 들었던 황태자의 목소리를 떠올리고서 핸들을 잡았다.

「배수관 타고 내려왔어.」

몸소 배수관을 타고 내려왔다고 했으니 다시 올라갈 수도 있겠지. 게다가 마린케이의 직감은 한 그루 사과나무를 사람인 양 소개받았던 그 장소를 향해 곤두서 있었다.

단숨에 핸들을 꺾은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가드들을 뒤로한 채 속력을 높였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뭐가 됐든 시도해 보지 않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정원 앞에 도착한 마린케이는 운전석에서 뛰어내려 사과나무를 향해 달려갔다. 이곳에서 황태자를 곧장 만나게 된다면 그게 가장 좋은 경우의 수일 테지만, 안타깝게도 황태자 놈의 모습은 속눈썹 한 올도 내다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본 마린케이는 정원 옆에 트여 있는 샛길을 눈치채고서 걸음을 옮겼다.

“실례 좀 하겠습니다.”

마린케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길 사이로 몸을 들였다. 이윽고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는 어느 고풍스러운 건물 앞에서, 그는 이번에도 자신이 직감이 적중했음을 깨달았다.

황태자궁을 본 적이라곤 태어나 단 한 번도 없었으니 완벽히 확신하기란 불가능했지만, 저 정도의 휘황찬란한 건물이라면 분명 황족이 거주하는 공간임이 틀림없을 것 같았다.

만약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면 당장 지하실로 끌려가게 될 터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가능성을 하나하나 고려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건물 구석에 붙어 있는 배수관을 확인한 마린케이는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던졌다.

소매의 단추 몇 개를 푼 그는 심호흡을 하며 어깨를 돌렸다. 황태자가 과연 몇 층에 있을지는 모르겠으니, 일단 꼭대기까지 올라간 후 한 층씩 내려가며 확인해 볼 예정이었다.

그게 꼭 탑에 갇힌 공주를 구하러 가는 용사의 모습처럼 느껴질 법도 했지만, 이 경우엔 마왕을 구하러 가는 충직한 집사의 모습에 더 가까워 보였다. 배수관 위로 손을 맞댄 마린케이는 서늘한 감촉을 느끼며 발을 올렸다. 곧이어 그는 고소 공포증을 가진 사람이 보았다면 비명을 질러대고도 남았을 동작으로 배수관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제발 꼭대기에 있어라.’

이 층 저 층을 다 뒤지고 다니다 황실 친위대에게 끌려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매서운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난다. 손 한번 미끄러지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이였음에도 마린케이는 여전히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쟤는 아마 용병이 천직이지 않을까.’

그 모습을 구경 중이던 샤를은 헛웃음과 함께 휴대폰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배수관을 타고 오르는 마린케이의 모습이 사진으로 남았다.

영안실에 다녀온 후 습관처럼 정원으로 향했던 그는 샛길에 저 아닌 다른 사람의 발걸음이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곧바로 황태자궁 쪽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보란 듯이 건물 배수관을 타고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발견하게 된 후에는 허탈한 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왜 저러고 있는 거야?”

마린케이는 꼭대기 층을 노리는 듯 신속한 몸놀림으로 배수관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저게 취미 생활의 일부라면 모르겠는데, 한편으로는 의아함을 느꼈다. 샛길로 들어왔다면 가드들 없는 뒷문으로도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저러고 있는 거지?

하여간 이해할 수 없는 귀여운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다시 한번 마린케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번엔 30초짜리 동영상이 그의 휴대폰 안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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