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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까마귀 겉 검다고 (8/12)

8. 까마귀 겉 검다고

배수관을 단단히 부여잡은 손에서 점점 힘이 빠져갈 무렵이었다. 드디어 마지막 층 창문이 있는 곳까지 도달한 마린케이는 망설임 없이 한쪽 손을 빼내 난간 끝을 부여잡았다. 동시에 나머지 한쪽 손으로만 미끄러운 배수관을 부여잡고 있는 꼴이 됐지만, 근력이야 차고 넘쳤으니 상관없었다. 오른팔에 힘을 줘 난간 위로 올라탄 그는 무사히 발코니로 착지했다.

다리가 후들거릴 줄 알았으나 손만 좀 얼얼할 뿐 생각보다는 견딜 만하다. 그러나 정확히 20초 뒤, 마린케이는 자신의 멍청한 뇌세포를 향해 온갖 저주를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

“왜 안 열려?”

당연하게도 발코니에서 방으로 이어지는 문은 잠겨 있었다. 아무리 황태자궁이 다른 궁들에 비해 경비가 덜 삼엄한 편이라고는 하나, 기본적인 관리 체계는 전부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이었다. 이용자가 부재하는 방에는 그 누구도 함부로 들어설 수 없다.

어차피 유리문이었으니 부수고 들어가도 괜찮았지만, 그랬다간 경보음이 울려 모든 가드들이 이곳으로 출동할 것이 분명했다. 그 상황이 닥치거든 마린케이는 또다시 저 빌어먹을 배수관을 타고서 아래로 내려가는 황태자의 전철을 밟아야만 했다.

제기랄, 어쩌지. 실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해결책은 하나였다. 개 같은 유리문을 부숴버리고 들어가는 것. 가드들이 오건 말건 뒤지게 달려서 황태자를 찾고, 만약 찾지 못할 시에는…. 아니다. 일단 지금은 그런 가정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할 성싶었다.

숨을 한번 고른 마린케이는 네다섯 걸음 정도 뒤로 물러섰다. 강화 유리라면 부수기가 까다로울 테지만, 품속에 단도도 넣어 둔 상태인 만큼 한 번 정도는 시도해 볼 가치가 있었다.

황태자 놈을 만나게 되면 꼭 이마 한 대는 때려주고야 말겠다. 그 염원을 이룰 수 있게끔, 마린케이는 부디 그가 얼굴을 드러내 주길 간절히 소망했다. 그가 유리창을 향해 뛰어들려던 때였다. 불현듯 뒤쪽에서부터 느껴져 오는 인기척에 그는 황급히 몸을 돌려세웠다.

체중이 앞으로 쏟아져 있던 탓에 몸이 조금 휘청였지만, 커다란 손바닥이 나타나 그의 허리를 잡아채는 것이 더 빨랐다. 졸지에 누군가의 품에 폭 안기는 모양새가 된 마린케이는 울화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왜 거기서 기어 나오십니까!”

그러자 요요한 미인이 눈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사람 속을 천부적으로 뒤집는 재주가 있는 얼굴이었다.

“재밌어 보이길래 따라왔어.”

“언제부터요?”

“글쎄. 몇 분 전? 넌 언제부터 배수관 타는 취미가 생겼는데?”

“그걸 묻는 게 아니잖습니까.”

허무맹랑한 말장난에 짜증이 참아지지가 않았다. 이럴 거면 왜 배수관을 타고 올라온 것이며, 친위대에 잡혀가도 별수 없으니 창문을 부숴버리자는 생각은 왜 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러나 저를 보며 싱글벙글 웃는 황태자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기이하게도 점차 분노가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황태자는 사람 속을 뒤집는 만큼 진정시키기에도 아주 능한 해사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소유하고 있었다. 아마 그게 저 새끼가 타고난 재능일 것이다.

“내가 많이 보고 싶었나 봐.”

희디흰 손가락이 마린케이의 귓가를 부드럽게 스쳐 지났다. 귓불을 지분거리기 시작하는 손가락을 힐끔, 쳐다본 마린케이는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으며 한숨을 뱉었다. 황태자는 여전히 만면 가득 예쁘게 웃음 짓고 있는 채였다.

계획했던 상황은 아니지만, 황태자 놈을 만나게 됐으니 한시라도 빨리 베사플레사로 데려가야만 했다. 마린케이가 그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려던 때였다.

마린케이의 몸을 끌어당긴 황태자는 드러난 목선 위로 입술을 묻으며 말했다.

“새장 속에서 꺼내주러 온 거야?”

맥박이 뛰는 부근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에 마린케이는 조금 숨을 삼켰다.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어린아이처럼 그의 몸을 꽉 끌어안고 있던 황태자가 아프지 않게 목을 물었다. 붉은 자욱이 생긴 피부 위를 확인한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를?”

새파란 눈동자가 비 갠 뒤의 맑은 하늘처럼 마린케이를 환하게 비추었다. 그런 황태자의 몸을 떼어내며, 마린케이는 억울하다는 듯 대답했다.

“꺼내드리진 못할 것 같습니다.”

“…….”

“저도 갇혀버려서.”

한 발을 물려 그의 품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마린케이가 강화 유리를 가리키며 요구했다.

“문 좀 열어주십시오.”

그제야 황태자는 상황을 깨달은 듯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네. 생각해 보니 5층은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장소인지라 모든 출입구가 전부 잠겨 있는 것이 당연했다. 덤덤하게 마린케이의 주장을 수용한 황태자는 푼수처럼 웃으며 실용성 없는 방안을 내놓았다.

“부수자.”

목소리만 그럴듯했지, 내용은 조금 전 마린케이가 했던 생각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에 마린케이는 한심한 눈초리를 숨기지 못하며 물었다.

“그럼 가드들이 몰려오잖습니까?”

“걔네도 같이 부수면 되지 않을까?”

아무래도 황태자는 사태를 더 악화시키고 싶은 게 틀림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에게 비난을 퍼붓고 싶었으나, 자신 또한 비슷한 방법밖에 생각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할 말이 없어졌다.

마린케이는 황태자를 위해 조용히 몸을 물렸다. 길을 열어주는 듯한 그 태도에 황태자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마린케이는 갑작스러운 그의 조증을 마주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농담이야. 그랬다간 누이가 날 유폐시킬걸.”

무서운 말을 잘도 입에 올린 황태자는 배수관 쪽을 눈짓하며 손을 풀었다. 의도를 읽어낸 마린케이가 거부의 의사를 담아 고개를 저었으나, 황태자는 그저 어깨를 으쓱여 보일 뿐이었다.

“괜히 가드들 눈에 띄는 것보다는 낫잖아.”

“저걸 또 어떻게 내려가요?”

“괜찮아. 떨어져도 안 죽어.”

“경험담은 아니실 거 아닙니까.”

“당연한 말씀을.”

그럴 줄 알았다. 불퉁히 구겨진 마린케이의 얼굴을 들어 올린 황태자는 가볍게 입을 맞췄다. 마린케이가 급히 주위를 살폈지만, 황태자는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이곳은 황태자궁이다. 다시 말해, 모든 구역이 샤를 소피아 엔스의 영역이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소리였다. 이 정도 애정 행각쯤이야 몇백 번이고 더 반복할 수 있을 터였다.

“던져버리기 전에 비키시죠.”

그러나 황태자의 명화 같은 얼굴을 감상하던 마린케이는 그를 거세게 밀어내며 먼저 난간을 뛰어넘었다. 베사플레사로 향하는 길은 정말이지 멀고도 험했으며, 험하고도 유별났다.

***

“이제 상황 설명 좀 해볼래?”

마린케이의 손에 있던 차 키를 뺏어 운전석에 올라탄 황태자는 안전벨트를 채워주며 물었다. 자연스러운 에스코트였다. 그 순간 마린케이는 그가 한때 가십란을 뜨겁게 달구던 유명 인사였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괜한 짜증을 느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안전벨트를 채워주며 다녔을지 헤아려 보니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베사플레사로 가야 합니다.”

짧은 한마디에도 상황의 심각성을 짐작한 듯, 황태자는 빠르게 시동을 걸고서 핸들을 잡았다. 미로 같은 황궁을 빠져나가는 솜씨가 유려하기만 했다. 미친 듯이 차를 몰아 난폭하게 들이받던 지난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점잖은 운전 실력이었다.

마지막 교차로를 지나쳐 나온 그는 답답했다는 듯, 돌연 액셀을 밟으며 거칠게 핸들을 꺾었다. 물 만난 고기처럼 도로를 질주해대는 황태자의 모습은 마치 미쳐버린 레이서 같았다.

더 구체적인 설명을 전하기 위해 고민하던 마린케이는 막막함을 느꼈다. 레온하르트가 경매 장소를 찾기 위해 출품을 신청한 것으로도 모자라 길거리에서 자주 부딪혔던 소녀가 댄 미헤르 새끼에게 납치를 당한 것 같다는 사실을 어떻게 전하면 좋을지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정공법이었다.

“아이가 납치당했습니다.”

“……뭐?”

“노예상 새끼한테요.”

황태자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다행히 신호등이 초록 불에서 빨간 불로 바뀌던 순간이었지만, 뒤 차량이 크게 놀란 것인지 연신 경적 소리를 울려댔다. 황태자는 차갑게 표정을 굳혔다.

“얼마나 됐는데.”

“아마 하루쯤 지났을 겁니다.”

“…….”

“죄송합니다, 전하.”

“레온하르트도 알고 있어?”

신호가 바뀌며 다시금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린케이가 대답을 고르는 동안, 황태자는 조금 전과 달리 침착하게 운전하며 매끄럽게 차를 몰았다. 아무래도 잡념이 생겨 그전처럼 막무가내로 운전에 임할 수 없는 것 같았다. 황태자는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 새끼가 경매장으로 가겠대?”

“…….”

“죽게 생겼군.”

“죽을 사람처럼은 안 보였습니다.”

“경매장에 나타난 처음 보는 얼굴을, 백작 새끼가 가만 놔둘 것 같아?”

운전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마린케이는 황태자가 답지 않게 초조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하도 깨물어댄 탓인지, 그의 고운 입술 위로 조금씩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마린케이는 그의 입술을 편하게 풀어주며 말했다.

“아직 베사플레사에 계실…….”

“다시 만져줘.”

황태자의 혀가 마린케이의 손가락을 살짝 핥고 지났다. 대번에 얼굴을 구긴 마린케이는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양 손을 바지춤에 닦았다. 황태자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다.

이쯤 되니 그가 정말 광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마저 들었다. 마린케이는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방금까지 걱정하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뭘?”

“……레온하르트 씨요.”

“또 그렇게 부르네.”

마린케이는 문득 황태자의 하얀 이마 위로 딱밤을 휘갈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지금이라면 운전으로 인해 반항도 제대로 못 할 테니 오히려 적기일 수 있었다.

「죽게 생겼군.」

“그 새끼가 먼저 선수 칠 거라고 생각하니 골이 좀 아팠던 것뿐이야.”

그러니까, 아무래도 그건 레온하르트가 아니라 백작을 겨냥한 말인 듯했다.

마린케이는 황태자의 사고방식이 매우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속력을 높인 그가 마린케이에게 애교를 부렸다.

“입술 만져줘.”

“운전이나 하십시오.”

“손가락 빨아줄게. 응?”

황태자의 저급한 도발에도 마린케이는 묵묵히 정면만을 바라보았다. 2차 성징이 막 시작됐을 무렵, 장난기 많은 동네 누님들이 저를 두고서 첫 키스 내기를 벌였을 때도 이렇듯 무시로 일관했었다. 재미를 잃은 황태자가 ‘우리 마린보이는 수줍음이 많다’ 따위의 개소리를 지껄이던 무렵, 마린케이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이 진동음을 내며 울려대기 시작했다.

“웬 휴대폰?”

“빌려왔습니다.”

사실 빌려 온 게 아니라 강탈해 온 것이었지만,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개통되지 않은 휴대폰을 대신 쥐여 주고서 칼릭스의 휴대폰을 뺏어 온 마린케이는 예의상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

-받았다! 이스턴, 내가 진짜 칼릭스 맞…….

그리고선 바로 끊었다. 황태자가 의아한 듯 그를 돌아봤음에도 마린케이는 덤덤히 수신 거부를 눌렀다. 만약 정말 필요한 일이 생기거든 린저 아일랜드 쪽에서 연락을 취해올 것이다.

항상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그곳에 방문하게 되었기 때문인지, 베사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와 같이 정적만이 가득했다. 마린케이는 말 한마디 없이 운전을 이어가는 황태자의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그와 함께 베사플레사에 찾아갔던 날을 떠올렸다.

검은색 가발을 뒤집어쓴 황태자는 카지노를 뒤져 노예 창고를 찾아냈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구출한 뒤 거액의 지원금을 하달했다. 한동안 매스컴의 주목을 끌었던 해방 노예의 익명 후원자는 다름 아닌 제 주군이었다. 원하는 이들은 고국으로 돌아갔고, 다른 이들은 가쉰에 남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붉은 머리칼을 가졌던 그 아이를 제외하고서 말이다. 마린케이는 황태자의 단검에 묶여 있는 검푸른 빛깔의 머리끈을 떠올렸다. 소년에게 건네주었던 황가의 증표는 주인을 잃은 채 다시 그에게 되돌아왔다. 하지만 마린케이는 어설피 주군을 위로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시작에 해당할 뿐이었지, 마지막이 될 수는 없었으니까.

황태자가 누군가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모두를 구할 수도, 굽어살필 수도 없었다. 아마 황태자는 또다시 누군가를 잃게 될 테고, 구하지 못하게 될 터였다. 그리고 항상 그래왔듯 자기 자신을 탓하며 살아갈 것이 뻔했다.

“마린.”

황태자의 차분한 목소리가 정적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차창에서 머리를 떼어낸 마린케이는 황태자 쪽을 돌아보았다. 반듯한 옆모습이 훤히 내다보였다.

“아이는 반드시 구해올 거야.”

“…….”

“걱정하지 마.”

마린케이는 그것이 주군의 진짜 얼굴이라는 것을 알았다. 조금 전처럼 저속한 농담을 던지며 보조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 늘상 올곧고 강인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저 얼굴이.

그는 언제나 머리끈이 묶여 있는 단검을 품에 지니고 다녔다. 아마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 얼마나 많은 목숨이 그의 어깨 위에 놓이게 될지, 품 안에 맺히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만큼은 확실했다.

“알고 있습니다.”

“…….”

“그래서 전하를 찾아온 거니까요.”

아마 가쉰의 모두가 당신이 있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어 하지 않을까. 이처럼 찬란한 태양을 외면한 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제국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문득, 언젠가 황태자가 내뱉었던 한마디가 허공을 스쳐 지났다. 자신이 변하게 되면 죽여달라고 했었지. 아니. 맹세컨대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황태자는 간절히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그 애한테 가볼 수 있을까?”

그는 백작에게 죽임당한 소년의 시체를 찾아 사유지 중 가장 아름다운 산과 호수가 있는 곳에 묻어주었다. 소년의 진명을 알 수 없어 묘비 위에는 어떤 글자도 적지 못했다. 죽어서까지 노예로 살아가며 써오던 이름을 듣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람을 시켜 무덤가를 관리하게만 할 뿐, 황태자는 처음 소년을 묻어주었던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그곳에 방문하지 않았다. 매번 단검을 품에 지니고 다니면서도 소년의 무덤을 찾아가지 않는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내가 용서를 구해도 되는 걸까?”

당신은 아마, 그 미련한 죄책감 때문에라도 무너지지 않으려 발버둥 칠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제 손으로 주군의 목을 겨누게 될 일은 한평생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마린케이는 황태자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치며 말했다. 단단한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됩니다.”

“…….”

“이미 용서하고도 남았겠지만, 어쨌든 가보죠. 뭐.”

샤를 소피아 엔스. 황태자로 태어나, 황제로 즉위하게 될 가쉰의 주인. 마린케이는 그 고귀한 이의 손을 맞잡으며 온기를 실었다. 적어도 그는 제가 본 중 가장 새하얀 사람이었다.

***

“멀쩡히 잘 끌고 왔네. 다리 하나는 분질러서 데리고 올 줄 알았더니.”

당치도 않다. 만약 그의 말대로 황태자의 다리를 부러뜨려 끌고 왔더라면, 황족 시해죄를 뒤집어써 지하 구금실에 끌려 들어가야 했을 터였다.

검은 의자 위에 앉아 수많은 CCTV 화면들을 지켜보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황태자를 향하는 눈빛에는 피 튀기는 스파크가 가득했다.

갈색 물이 들어있는 레온하르트의 머리칼을 힐끗, 쳐다본 황태자는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셀린느의 성씨를 받아 왕립학교에 입학하기 전, 모후를 찾아왔던 그의 머리칼이 딱 저 색이었다. 찰나의 시간 동안 침묵하던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경매장을 찾은 거야?”

“그게 가능했으면 이런 멍청한 짓을 벌이지는 않았겠지.”

레온하르트는 제 머리칼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그는 여느 귀공자나 다름없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베사플레사에서 보았던 한량 황태자와 유난히 닮은 듯이 느껴졌다.

그에게서 관심을 거둔 마린케이는 뒤편에 있던 CCTV 녹화본들을 불쾌하게 바라보았다. 온갖 불법적인 일들을 자행하는 귀족들의 모습이 화면 속에 비추어진다. 일말의 죄책감도, 후회심도 느껴지지 않는 낯짝들을 보고 있자니 인간에 대한 회의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마린케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레온하르트가 겉옷을 챙겨 들며 말했다.

“아이는 내가 직접 데리고 들어갈 거야. 나한테 추적기를 붙여 놨으니까 알아서들 잘 따라와 보시고.”

그러자 황태자는 그의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장소도 모른다면서 무슨 수로?”

“전용기까지 보내 주시겠다는데, 내가 직접 찾아가야 할 필요가 있어?”

레온하르트가 비틀린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댄 미헤르는 출품인과 출품물을 확인한 이후 곧바로 시기에 맞춰 전용기를 보내왔다. 고작 노예 경매 따위를 유치하기 위해 그런 거금을 들여 기밀성을 확보한다니.

그것 자체가 추악하기 그지없는 일면 중 하나였지만, 아마 그렇기에 더더욱 귀족들의 허영심을 자극하기 용이했을 것이다.

세 사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 싸늘한 적막이 감돌았다. 마린케이가 물었다.

“전용기를 보냈다는 건, 경매장이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다는 소립니까?”

“눈치가 좋네. 섬이 아니란 걸 다행으로 여겨.”

만약 그랬다면 철저히 고립된 상태로 노예 경매를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가쉰은 개인 명의로 섬을 소유하는 것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국가였다. 따라서 경매장은 항구 도시에 위치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전용기를 띄우려면 그만한 공간과 항로를 확보할 수 있어야 했고, 폴리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선 수도와 가장 먼 지역을 선택해야 했을 테니 말이다.

마린케이는 백작의 초대를 받아 방문하게 되었던 더러운 선상 파티를 떠올리며 낯을 찌푸렸다. 외투 주머니에서 금속성의 뭔가를 꺼내든 레온하르트가 그것을 마린케이에게 던졌다. 추적기와 연결된 유심 칩이었다.

“폴리스 같은 다른 인력을 끌어들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어깨를 으쓱인 그는 황태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발각당하는 순간 거기 잡혀 있는 목숨들이 어떤 꼴이 될지는, 알고 있을 거라 믿어.”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유심 칩을 손에 쥔 마린케이는 황태자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이자벨라가 납치된 이후 벌써 하루가 넘는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두 사람이 들어왔던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긴 레온하르트는 불현듯 몸을 멈춰 세웠다. 갈색 렌즈를 낀 그의 눈동자가 저와는 확연히 다른 색감을 가지고 있는 황태자의 눈을 들여다보며 충고했다.

“되도록이면 네 얼굴도 드러내지 말고. 괜히 발목 잡히고 싶은 건 아니잖아?”

두 사람은 형제였으나 형제가 아니었다. 샤를은 유난히 황제를 빼닮은 레온하르트의 얼굴과 마주하며 표정을 굳혔다. 언젠가 왕립학교 졸업을 앞둔 그가 마지막으로 소피아 황후를 찾아왔던 적이 있다. 화원에서 그녀와 대화를 나눈 레온하르트는, 늘 그렇듯 사과나무에 올라타 그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던 황태자에게로 다가왔다.

입고 있던 기사복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린 그가 말했다.

「던질 테니까 받아.」

「제기랄. 나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러다 얼굴 맞아도 모른다.」

그의 경고대로 샤를의 얼굴 위에는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황실 기사단의 증표가 새겨진 기사복 상의가 떨어졌다. 벙쪄 있는 금발 소년에게, 갈색 물이 빠진 머리칼을 휘날리고 서 있던 냉소적인 인상의 청년이 말했다. 그 목소리에서는 낙엽을 닮은 듯한 쓸쓸함이 느껴졌다.

「난 어차피 못 들어가니까 네가 가져.」

그에 소년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필요 없어. 나도 어차피 못 들어…….」

「그럼 다시 내놓든가.」

하지만 어린 황태자는 차마 저의 품에 들어온 기사복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이복동생의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샤를.」

“샤를.”

그가 그때와 똑같은 목소리로 황태자를 불렀다. 그 목소리 위에는 탁한 감정들이 방향을 잃고서 뒤섞여 있었다. 마치 언젠가의 마리아처럼. 샤를이 입술을 짓씹었다.

“백작과 댄 미헤르 새끼만 생각해. 괜히 다른 목숨까지 구해 보겠다는 거창한 꿈은 꾸지 말고.”

“…….”

“그랬다가 네 존재라도 들키게 되면, 그땐 결말이 어떻게 될지 너무 훤히 내다보이잖아.”

분명 독 안에 든 쥐 꼴이 될 것이다. 그 자리의 모두가 황태자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될 테고, 그 목숨을 손에 넣어 자신들의 안위를 경매하려 들 터였다. 레온하르트는 그를 스쳐 지나가며 추적기의 전원을 켰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걸로 황후께 진 빚은 전부 갚은 겁니다. 전하.”

***

“정말 안 먹을 거야?”

“꺼져. 생각 중이니까.”

“먹고 나서 해도 안 늦을 텐데.”

소년이 쯧, 혀를 차며 들고 있던 빵을 도로 가져갔다. 이자벨라는 무릎을 끌어안고 앉은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 중이었는데, 소년은 그것이 그저 허황된 소망으로 남게 될 뿐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상기시켜 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조금 전 소년과 나누었던 대화로 인해 얼어붙었던 이자벨라는 그러면서도 계속 이곳에서 도망칠 수 있는 방편을 생각해 보기 바빴다. 아직 자신은 사슬에 묶이지 않은 상태였으니 몇몇 감시인들의 눈만 따돌릴 수 있다면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적당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 크나큰 문제였다. 소년은 꿋꿋하게 빵 한 조각을 내밀며 말했다.

“나중에 배고프다고 울지 말고, 줄 때 얼른 먹어.”

“필요 없다니까!”

소년이 들고 있던 빵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자벨라가 당황스레 표정을 굳혔다.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빵을 도로 주워 들고선 한입 깨물었다.

벽에 기대앉은 소년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이자벨라는 제 머리칼을 거칠게 휘저으며 입을 열었다.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이 듬뿍 담겨 있는 작은 목소리였다.

“그 빵에 수면제라도 들어있으면 어떡해. 그래서 안 먹은 거야. 네가 싫어서가 아니라.”

“그런 것 같더라.”

스스럼없이 빵을 삼킨 소년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가 잠들지 않으면 먹어도 되는 거잖아. 그치?”

“……야. 너 왜 갑자기 나한테 잘해줘?”

이상한 일이었다. 도망치겠다는 계획을 들을 때는 코웃음을 치면서 비난하더니, 이제 와 이렇게 호의를 내비치는 모습이 아주 미심쩍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비난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자벨라는 우회적인 질문을 던져 보기로 결심했다.

“왜 갑자기 잘해주는 거냐고. 아까랑 태도가 다르잖아.”

그러자 소년은 구석진 곳에 몰려 앉아 있는 다른 아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미안한데, 난 쟤들한테도 잘해줬어.”

무슨 의미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던 이자벨라는 소년을 따라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그게 지금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이유 같은 건 딱히 없다는 뜻이잖아.”

“……그렇게 말하니까 더 의심스럽거든?”

“있지, 열다섯이 넘으면 여기서 나갈 수 있대.”

이자벨라의 말을 끊어낸 소년이 살며시 고개를 기울였다. 창백한 얼굴과 몇 센티도 되지 않은 거리에서 마주 보게 된 이자벨라는 순간 도망치듯 몸을 물렸다.

“죽어서인지 살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쯤 되면 각하께서 흥미가 떨어지시는 것 같거든.”

소년의 눈동자는 늪처럼 음울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녹색이었다. 이자벨라가 성질을 냈다.

“그놈의 각하가 대체 누구야? 그 변태 새끼가 대체 누구길래 사람을 잡아다 이딴 식으로…….”

“걱정하지 마. 직접 보면 알게 될 거야.”

소년의 말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끼긱거리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있던 철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소년이 이자벨라를 위로하듯, 자신의 흑색 머리칼을 꼬며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맷집에 자신 있는 게 아니라면 많이 반항하지는 말고. 알겠지?”

***

“이 버러지 같은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와! 썅, 재수가 없어도 적당히 없어야지.”

누군가의 목덜미를 잡고 패대기치는 걸로도 모자라, 사정없이 발길질까지 하는 가드의 모습에 호텔에 발을 들이던 사람들 모두 얼어붙은 듯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검은 양복을 껄렁하게 차려입은 가드는 살벌한 얼굴로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바닥에 엎어진 채 얻어맞고 있던 사내는 남사스럽게도 팬티 한 장만을 입은 상태였는데, 지나가던 걸인이 호텔에 들어오려다 발각당한 게 틀림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어이! 거기 무슨 일이야?”

입구 앞에 서서 입장 인원들의 소지품을 검사하고 있던 다른 가드 한 명이 소리치자, 남자는 별거 아니라는 듯 한쪽 손을 들어 올려 휘저었다.

나머지 손으로는 담배를 찾는 듯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그게 딱 영락없는 조직폭력배의 모습이었다. 그가 가면을 쓴 채 들어오는 귀족들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어떤 거지새끼가 들여보내 달라며 지랄을 떨잖아. 하여간 이런 오물 같은 새끼들이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어. 안 그래?”

“적당히 하고 돌려보내. 소란 피우는 거 안 좋아하시는 거 몰라?”

“난들 몰라서 이랬겠어? 알아서 잘할 테니까 신경 끄고 하던 일이나 마저 해. 입맛도 적당히 떨어뜨려야…, 아이고! 도련님.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어서 들어오시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난폭하게 사람을 후려 패던 인간이 비굴한 얼굴을 만들며 공손히 인사했다. 가드는 그런 남자의 모습을 보며 의아한 듯 눈을 치떴으나, 이것 이상으로 손님들을 기다리게 할 수 없어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건달 같은 남자가 굽신거리며 인사한 공작새 가면의 청년은 커다란 키에 잘 빠진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의도치 않게 여러 사람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아마 내로라하는 귀족 가문의 자제일 것이 분명하다. 그 부내 나는 손님을 입구 쪽으로 직접 안내한 남자가 저 역시 그를 따라 걸음을 들이던 순간이었다. 다른 가드가 남자를 향해 왈칵, 소리쳤다.

“야! 넌 또 어디 가?”

“좆같은 새끼야, 나한테 묻은 피 안 보여? 이 꼴로 귀족 나리들을 어떻게 대접하라고?”

그러나 더 큰 소리로 이어지는 남자의 짜증스러운 외침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피 묻은 와이셔츠를 걷어 올린 남자는 화장실을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왜 하필이면 저런 새끼가 파트너여서는. 불평을 늘어놓던 가드는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난 듯 멍청한 얼굴을 했다.

잠깐만. 그런데 팩스턴 이 자식이 갈색 머리였나?

“미친……!”

욕설을 내뱉은 그가 다급히 팬티 바람의 사내에게로 뛰어갔다. 쓰러져 있던 사내를 일으켜 세운 그는 아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팩스턴? 실성한 얼굴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이라는 문장을 반복하고 있던 사내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살려주세요! 전 팩스턴 아니에요! 아닙니다!”

“팩스턴! 제기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무전 버튼을 누른 그가 CCTV 확인을 요청했으나, 입구 쪽 카메라들이 전부 부서져 있어 불가능하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는 귀에 꽂아뒀던 이어폰을 집어 던지며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A2 구역 외부인 침입. 손님 한 명과 같이 입장한 것 같…….”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무전을 치던 그가 이윽고 새되게 소리쳤다. 생각해 보니 함께 있었던 그 귀족은 출품 노예조차도 데리고 있지 않았다.

“빌어먹을. 공작새 가면 쓴 새끼도 한패일 테니까 전부 다 사살해!”

***

“이 방법이 통할 줄은 몰랐는데.”

“잘 먹힌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전략은 한마디로 말해 방귀 뀐 놈이 성내기였다. 먼저 소동을 만들고, 요란을 피운다는 이 간단한 전략은 쓸데없는 의심을 피해 가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1층에 남아있던 마지막 감시 카메라마저 부숴버린 샤를이 헛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아픈 곳만 골라서 잘 때리더라고.”

“그런 새끼들은 맞아도 쌉니다.”

그들이 타깃으로 선정한 인간은 귀족의 손에 이끌려 걸어오던 소녀를 보며 입맛을 다시던 쓰레기 새끼 중 하나였다. 소지품 검사를 하겠다는 이유로 소녀의 온몸을 더듬거리는 모습이 어지간한 해충보다 더 해충 같아 보였다.

그런 사내의 시선을 받고 있던 소녀는 무표정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건 귀족들의 옆에 붙어서 걸어오는 모든 아이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마린케이는 화가 풀리지 않는다는 듯 재킷을 벗어 던지며 말했다.

“추적기는 1층에서 끊겼습니다.”

“이제 손 뗀다는 거겠지.”

레온하르트는 길을 열어주겠다고 했을 뿐, 일을 무사히 끝낼 수 있게끔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다. 그 증거로 추적기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마린케이는 추적기를 따라 도착한 해안 도시 바르텔(Bartel)을 보며 썩어 들어가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바르텔은 지형이 험하고 면적이 좁아 관광지로도, 산업지로도 발달하지 못한 외곽 도시 중 하나다. 적적한 분위기가 풍기는 마을을 지나쳐 왕래가 끊긴 옛 항구 쪽을 넘어서자, 마치 일부러 길을 막아 놓은 듯한 형태의 폐선 하나가 길목을 끊어놓고 있었다.

간신히 보트 하나를 구해 경로를 돌아간 그들 앞으로 마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의 고층 호텔이 모습을 드러냈다. 추적기가 가리키고 있는 장소였다. 샤를이 말했다.

“지상층은 대기실일 거고, 경매장은 지하에 있을 가능성이 커.”

“제가 지하로 가겠습니다.”

노예상 새끼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자신뿐이었으니 당연한 결정이었다.

“이것도 놓고 가야지.”

망설임 없이 뒤돌아서려던 마린케이의 몸을 잡아당긴 황태자는 그의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불신으로 가득 찬 마린케이의 얼굴을 확인한 그가 휘파람을 불었다.

“앞에서 휴대폰이고 뭐고 다 걷어가는 거 못 봤어?”

“……안 뺏겼으니 된 거 아닙니까?”

“IP 들고 다니면서 나 여기 있어요, 할 바엔 그냥 지금 잡혀가는 게 나을 거야.”

황태자는 휴대폰의 전원을 끈 즉시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다. 그가 마린케이의 셔츠 깃을 끌어당겨 눈을 맞췄다. 알 수 없는 눈으로 마린케이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는 단호히 명령했다.

“다치지 마. 이스턴 경.”

“그게 말처럼 쉽습니까.”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한 마린케이는 베사플레사에서처럼 검은 가발을 쓰고 있는 황태자의 머리칼을 세게 그러쥐며 말했다.

“이거나 들키지 마십시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으니 두려움을 느낄 시간 따위 없었다. 베사플레사에서 챙겨온 글록을 꺼내 장전을 확인한 마린케이는 총구를 들어 황태자의 어깨를 밀어냈다.

“어디 뚫려 오지도 마시고요.”

“그렇게 되면 꼭 구하러 와줘야 해?”

변함없이 공경을 모르는 그 모습에, 샤를은 청명하게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실실 웃고 있는 황태자의 낯짝을 길게 응시하던 마린케이는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초 치는 것도 좀 그만하시면 안 됩니까?”

***

글록을 손에 쥔 채 가슴 쪽으로 끌어당긴 마린케이는 기둥 뒤의 벽면에 기대며 가드들의 수를 헤아렸다. 어림잡아도 네다섯은 되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저놈들을 죄다 쏴 갈길 수는 없었으니 최대한 들키지 않게끔 조용히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 봤자 감시 카메라에 얼굴을 드러내는 꼴만 될 테고, 아무래도 가드들이 다니는 길목을 알아내 접근하는 방법이 최선일 듯싶었다.

저마다 리볼버를 하나씩 손에 든 가드들이 살벌한 기색으로 구석구석을 뒤졌다. 그 꼴을 보아하니 이대로 들키면 정말 사살당하고도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을 죽이고 있던 마린케이는 제 앞을 지나치는 가드 한 명을 붙잡아 손을 꺾었다. 아악! 단말마의 비명 소리와 함께 남자가 총을 떨어뜨렸다. 그가 더 큰 비명을 내지르기 전에, 그의 벌어진 입안으로 총구를 밀어 넣은 마린케이는 정중히 부탁했다.

“입 다물어.”

“…….”

“손에 피 묻히기 싫으니까.”

역시 매너가 먹혀들어간 모양인지, 남자는 다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마린케이가 떨어진 리볼버를 발로 지르밟으며 주위를 훑었다. 다행히 가드들은 제각각 뿔뿔이 흩어져 있었던 덕택에 한층 쉽게 일을 시작할 수 있을 듯 보였다.

“지하로 가는 길이 어디야?”

마린케이는 무전기 쪽으로 손을 움직이려던 남자의 어깨를 인정사정없이 비틀어버리며 물었다. 비명을 지르지 못하도록 목을 내리누르는 동작 역시 뒤따랐다.

성격대로라면 몇 대 후려친 후에 순순히 실토하라고 협박을 해댔겠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에 쫓겨 다니는 지금의 상황상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서 활용해야만 했다. 마린케이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남자의 얼굴을 음산하게 바라보았다. 계속 대답하지 않을 시에는 그냥 기절시켜놓고 다른 가드 새끼를 잡아 족칠 생각이었다.

“으어……, 아…….”

주섬주섬 남자를 기절시킬 준비를 하고 있던 마린케이는 들려오는 간절한 울부짖음에 건성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 맞다.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상황을 납득했다.

그러고 보니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끔 아까부터 남자의 입안에 총구를 밀어 넣고 있던 채였다. 아마 대답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된 처지였을 것이다. 마린케이는 떨어져 있던 리볼버를 발로 차올려 나머지 손으로 받아 들었다.

곧바로 남자의 관자놀이 옆에 또 다른 총구를 들이민 마린케이가 무던한 투로 경고했다.

“참고로 내가 오른손을 주로 써서, 왼손은 어떻게 움직일지 몰라.”

허튼짓이라도 했다간 그대로 쏴버리겠다는 의지가 듬뿍 담겨 있는 한마디였다. 마린케이는 남자의 입에 넣어뒀던 총구를 꺼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답지 않게 인내심을 발휘하려니 괜히 착잡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늘어져 있던 남자의 두 손이 슬금슬금 무전기 쪽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한 마린케이는 또다시 한숨 같은 목소리를 뱉을 수밖에 없었다.

“왼손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니까.”

가드의 머리를 후려갈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남자를 위해 마지막 기회를 부여했다. 스스로가 생각했을 때도 대단하기 짝이 없는 인내심이었다. 말귀 하나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새끼한테 몇 번씩이나 기회를 주다니. 배알이 꼴릴 지경이었지만, 다행히 아직까지는 버틸 만했다.

“지하로 안내해.”

싸늘한 목소리가 남자를 향해 명령했다. 가드로서의 지위와 자존심을 모두 내팽개친 남자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얻어맞은 자신의 뒤통수를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마린케이는 리볼버를 주머니 안에 집어넣으며 혀를 찼다. 그러게 처음부터 말을 들어 먹었으면 신사다운 선에서 끝낼 수 있었을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 그는 품속의 단검을 빼내 들었다. 부탁보다 협박이 더 잘 먹히는 상대에겐 예로부터 총보단 칼이 훨씬 더 적합한 협박 수단이었다.

역시나, 목 끝에 와 닿은 날붙이의 감각을 느낀 남자는 경기를 일으키며 신음을 흘렸다. 한쪽 손에는 글록을, 반대편 손에는 단검을 든 마린케이가 지금쯤이면 호텔 방을 전부 다 뒤져대고 있을 황태자의 모습을 상상하며 짓씹듯 말했다.

“입 열면 네 대가리부터 날아갈 거야.”

“…….”

“안내해.”

***

실크 소재의 연미복을 차려입은 소년은 누가 봐도 불편해 보이는 얼굴로 방 가장 구석진 곳에 달려가 섰다. 레온하르트가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자, 소년이 불끈 주먹을 쥐며 입을 다무는 시늉을 했다. 도대체 마르코 자식은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해놨길래 저런 몸동작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올 수 있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레온하르트는 아이를 향해 의문 섞인 시선을 던졌다. 가장 입이 무겁고 눈치가 빠른 아이로 보내 달라고 했더니, 지금 보이는 모습은 눈치가 빠른 게 아니라 그저 눈치를 많이 보는 것뿐이었다. 괜스레 불편함을 느낀 레온하르트는 침대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눈 좀 붙여둬. 오는 내내 계속 졸고 있던데.”

“흡……!”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낼 뻔한 소년은 입을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에 레온하르트는 미간을 짚었다. 소년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그를 힐긋거린다. 애들 놀려 먹길 좋아하는 마르코의 짓궂음을 떠올린 레온하르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부드러운 말투를 꾸며내며 말했다.

“목소리 내도 돼. 편하게 있어.”

“…….”

지겹기까지 한 침묵 속, 레온하르트의 질문은 합당하디합당한 것이었다.

“마르코 새끼가 대체 뭐라고 협박한 거야?”

“혀, 협박 같은 거 안 하셨어요!”

고아원의 의식주를 전부 관장하고 있는 존경스러운 사제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뱉은 것이 당혹스러웠던 건지, 소년은 다급하게 레온하르트의 불순한 목소리를 가로막았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이미 그가 ‘입을 열면 세상에서 제일 못된 인간이 널 향해 으름장을 놓을 거다’, ‘목숨을 건 결투를 피해 갈 수 없을걸!’ 따위의 수준 낮은 농담들을 소년에게 주입한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방법이야 무엇이 됐든, 이제 입을 열게 되었으니 조금 전처럼 답답함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레온하르트의 속셈에 낚여 목소리를 내게 된 소년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레온하르트는 마르코가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믿었다.

사실 소년은 말하지 않고서 세 시간만 버텨내면 저를 데리러 온 키 큰 사내가 초콜릿 더미를 선물로 줄 것이라는 마르코의 말도 안 되는 장난을 지금까지도 진실로 믿고 있었다. 그 배후를 알 리 없는 레온하르트는 마르코의 인격을 헐뜯으며 소년을 가엾이 바라보았다.

기사학부를 그만두며 사제가 되겠노라 선언했던 마르코 아르비치는 염원했던 퇴학 사실을 동급생들에게 알릴 때조차도 농담처럼 낄낄거리다가 순식간에 종적을 감춰버린 광인이었다.

“금방 돌려보내 줄게.”

“네엡.”

어쩐지 처량하게 들려오는 소년의 음색에, 위로라도 해줘야 하는 건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린 종업원이 친절하게 룸서비스의 도착을 알렸다.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던 소년에게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한 레온하르트가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던 중 그는 불현듯 걸음을 멈췄다. 룸서비스?

“제기랄.”

레온하르트는 황급히 방 안을 훑어보며 감시 카메라를 찾았다. 다행히 귀빈실이라 그런지 CCTV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시키지 않은 룸서비스가 도착했다는 것부터 일이 상당히 꼬여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증거였다. 레온하르트가 손을 들어 옷장을 가리켰다.

‘들어가.’

용케도 그의 입 모양을 읽어낸 소년은 명령대로 조심스럽게 옷장 안에 몸을 숨겼다.

“…초장부터 글러 먹었군.”

크루즈 파티에서 독살 시도를 당했던 그날도 이렇게 시키지 않은 룸서비스가 찾아왔었다. 평소 같았으면 주최 측의 친절이라 여기고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열었을 테지만, 그 룸서비스에서 제공했던 생수를 마신 후 목이 녹아내리는 듯한 고통에 시달렸던 것을 생각하면 저절로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입장하면서부터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은 모두 빼앗겼던 탓에, 원초적인 무력으로 승부를 봐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손목의 힘을 풀었다.

무기 하나 없는 몸으로 적에게 달려들 때 가장 신경 써야 할 것은 공격의 타이밍이었다. 문고리를 움켜잡은 그는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세게 밀어 닫아 카트를 잡고 있던 종업원의 몸을 휘청이게 만들었다. 비틀거리는 그의 머리채를 잡아 방 안으로 끌고 들어온 레온하르트가 총을 찾는 손을 세게 내리밟으며 다리에 힘을 실었다.

“가, 갑자기 무슨…! 으아, 으아아악!”

“가드가 서빙을 하는 호텔도 다 있어?”

떨어진 총을 멀리로 밀어낸 레온하르트는 끝까지 모르쇠를 떠는 종업원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한 층 전체가 귀족 한 명의 몫으로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인지, 타인의 방해 없이 종업원을 두드려 팰 수 있었던 그는 마침내 솔직해질 준비가 된 것 같은 남자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누가 보냈어?”

망설이던 남자가 다시금 들어 올려지는 레온하르트의 발을 보며 공포스럽게 외쳤다.

“그냥 확인만, 확인만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라파엘 셀린느는 7년 전 드윈으로 귀화했는데, 왜 갑자기 가쉰에 돌아온 건지요!”

유혈 사태의 효과가 있었던 모양인지 그는 무척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라파엘 셀린느. 그 이름에 레온하르트는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소피아 황후가 직접 지어주었던 그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는 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의 얼굴은 잔뜩 멍이 들고 피딱지가 앉아 있어 매우 처량해 보였지만, 레온하르트는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며 한 번 더 발을 휘둘렀다.

“끄으윽……!”

남자는 고통 속에서 발버둥 치다 입에 거품을 문 채 기절했다. 그런 그를 차갑게 내려다보던 레온하르트가 떨어진 총을 주워들고서 탄창을 확인했다. 장전은 제대로 된 상태고, 소음기도 제법 값비싼 놈으로 장착되어 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누군가를 암살할 때 딱 적합해 보이는 모양새였다. 무기상 헬바르트나 기꺼워할 것 같은 저급한 총기이기도 했다.

레온하르트는 쓰러져 있는 남자를 향해 총을 들어 올렸다. 방아쇠를 당기려던 그가 제 몸을 잡아당기는 강한 손길에 의해 조준점을 잃고서 시선을 돌렸다.

“아, 안 돼요.”

옷장 안에서 급하게 뛰쳐나온 것인지, 소년이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작은 두 손으로 레온하르트의 팔을 저지하고 있던 소년은 떨림을 감추지 못한 채 목소리를 냈다.

“사람을 죽이면 안 돼요. 죽이지 마세요. 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눈빛으로 소년의 얼굴을 응시하던 레온하르트는 점차 몸에서 힘을 풀었다. 안도감을 느낀 소년이 긴장을 거두려던 찰나, 소년의 눈가를 한 손으로 가로막은 그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소음기로 인해 발화음을 가로막힌 총성이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죽이지 않을 방법이라. 그런 방법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이대로 살려뒀다면 분명 빌어먹을 호텔 안에 갇혀 목숨을 위협당하는 처지가 됐을 터였다. 더군다나 백작 새끼가 냄새를 맡은 것이 확실해 보였으니, 궁지에 몰린 쥐새끼 꼴이 되기 전에 어서 이곳을 탈출해야만 했다.

레온하르트는 소년의 눈을 가린 상태 그대로 탁자 위에 올려뒀던 가면을 찾았다. 소년이 있는 힘껏 버둥거렸지만, 단단한 몸에 의해 움직임이 가로막힐 뿐이었다.

재킷 속으로 총을 집어넣은 레온하르트가 소년의 눈가를 가렸던 손을 풀어주며 천천히 말했다. 남자에게서 흘러나온 핏물이 그의 신발 끝을 적셨다. 익숙한 쇠 냄새.

“역겨워도 조금만 버텨. 마르코한테 돌아가고 싶다면.”

그리고 익숙한 경멸. 그래서였을까, 그는 소년에게 섣불리 손을 내밀지 못했다.

***

“처음이면 실수할 수도 있죠. 이래서 노예들은 목줄을 채워놓아야 해요. 아님 인장이라도 찍어 놓든가. 아, 그런데 이것도 또 문제인 게, 인장을 찍을 때는 여러모로 고민이 많아지더라고요. 보이는 곳에 찍으면 값이 떨어지고 그러니 원. 그렇다고 안 보이는 데 찍어 놓으면 또 도망을 치겠답시고 난리들을…….”

“이 근처에서 잃어버렸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네요.”

듣기만 해도 뇌가 더러워지는 것 같은 일장 연설을 아무렇지도 않게 경청하고 있는 것으로 모자라,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여주기까지 하던 훤칠한 키의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얘기할 맛이 나는 리액션을 보며 목소리에 힘을 싣고 있던 사내는 멋쩍은 듯 혀를 차며 대답했다.

“이런. 1층부터 7층을 다 뒤졌는데도 없는 걸 보니 골치 꽤나 썩이겠는데요? 그냥 가드들한테 연락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다 진짜 도망이라도 가면 괜히 곤란해지거든요.”

음흉함 넘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내는 제 옆에 선 남자를 힐끔거리며 꿀꺽, 목 뒤로 침을 삼켰다. 묘하게 선정적인 느낌을 주는 남자의 붉은 입술이 가면 밑에서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사내의 노골적인 시선을 눈치챈 그가 나른한 듯 낮은 목소리를 냈다.

“아니에요. 소란 피웠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그땐 정말 이 좋은 기회에 함께할 자격이 사라지지 않겠어요?”

복도를 거니는 걸음마저도 우아하기 그지없었기에 남자를 바라보는 사내의 눈빛이 더욱 음침하게 드리워졌다. 사내가 자신을 뽐내려는 듯, 뒷짐을 지며 고개를 높이 들어 올렸다.

“노예 경매야 물건만 구하면 언제나 참여할 수 있는걸요. 뭘.”

자신감과 당당함을 상징하는 자세였으나 그만한 패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남자는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사내는 제 대답이 그의 호기심을 샀다는 것을 깨닫고서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펼쳤다. 남자가 순진한 어투로 물었다.

“이쪽 말고 다른 경매장이 또 존재하는 건가요?”

그러자 사내는 냉큼 대답했다.

“아, 그럴 리가요! 요새 만민평등이니 뭐니 해서 얼마나 시끄러운데, 댄 미헤르가 아니고서야 누가 노예장사에 손을 대겠습니까? 여기도 고위 참관들 몇몇이 엮여있는 거 아니었으면 진작 몰수당했을 거예요.”

요새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댄 미헤르 얘기를 꺼냈으니 이쯤에서 반응을 보여야 하건만, 남자는 시큰둥한 걸 넘어 무관심하기까지 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중이었다. 사내가 저를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예쁘게 웃으며 대답을 돌려주었다.

“알기 힘든 정보들을 정말 많이 가지고 계시네요.”

다행스럽게도 사내는 푸른 힘줄이 굵게 올라와 있는 남자의 손등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가 기쁜 듯 촐랑거렸다.

“큼. 제가 사실 여기 오려고 정말 엄청 애를 썼거든요. 아시다시피 어리고 예쁜 노예를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지가 귀족의 자존심이나 다름없…….”

자신이 꾸린 완벽한 하렘에 대해 설명하려던 사내는 언제부터인지 저를 빗겨나가 있는 남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시끄럽고 요란한 목소리가 바로 근처에서부터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상황을 파악한 사내가 와장창 표정을 구겼다.

비상구의 문이 둔탁하게 열어 젖혀지며, 가드 몇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기랄, 다 뒤져도 없는데 대체 무슨 수로 찾아내라는 거야!”

“무슨 일이지?”

사내는 남자를 상대할 때와는 명확히 달라진 목소리로 가드를 불렀다. 가장 말단 격으로 보이는 가드가 허겁지겁 달려와 그런 사내 앞에 섰다. 이런 곳에서 가드 일을 하고 있기에는 지나치게 유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꾸벅 고개를 숙인 가드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할 때였다.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외부인이 침입해 손님분들의 안전에 위협이 생길까…….”

“일 처리를 이딴 식으로밖에 못해?”

사내는 가드의 머리를 강하게 후려치며 윽박을 질렀다. 나머지 가드들은 구역을 나눠 객실을 확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 보이는 가드 혼자서 사내의 패악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말귀를, 알아처먹질, 못하니, 이게 짐승이랑, 다를 바가 있나!”

말이 끊기는 지점마다 가드의 머리며, 뺨이며 하는 곳들을 내려친 사내가 씩씩거리며 다시 손을 쳐들던 시점이었다. 제 팔을 휘어잡는 강한 악력을 느낀 그는 당황하며 말을 멈췄다.

“잠시만요.”

남자는 아이를 어르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내에게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팔목을 잡은 손에선 힘을 풀지 않은 채였다. 사내가 어떻게든 팔을 풀어보려 했지만, 상대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였다. 인대를 끊어버리기라도 할 것 같은 무자비한 악력이었다.

“너무 힘쓰지 마세요.”

분명 상냥한 어조였으나 가면 너머 드러난 검은 눈은 은연중에 살기마저 엿보일 정도로 날카로웠다. 사내는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하. 평민들은 이렇게 초장에 기를 잡아놔야 기어오르지를 않습니다. 그쪽이 너무 물러 보여서 특별히 조언해 드리는 건데, 괜히 사람처럼 대해주다가는…….”

“남이사 무르든 말든.”

그러자 남자는 사내의 말을 끊으며 입술 끝을 들어 올렸다. 가면 아래 드러난 얼굴만으로도 사람을 매혹시킬 수 있을 정도의 미색을 가진 이였지만, 어째선지 이전처럼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았다. 남자가 사내에게 한 걸음 더 내디디며 반복했다.

“너무 힘쓰지 마시라니까.”

그때까지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폭력을 인내하고 있던 가드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험악해지려는 분위기를 가로막았다.

“정말 죄송하지만, 말씀드렸던 것처럼 외부인이 섞여 있을지도 몰라 두 분 모두 소지품 검사를 다시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간단히 외투 안주머니 정도만 확인해 볼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고…….”

사내는 또다시 인상을 찌푸리며 가드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가 진짜, 귀족 알기를 뭘로 알고 이딴……!”

“그러세요.”

사내의 팔을 던지듯 내려놓은 남자가 순순히 몸을 돌려세웠다. 슬슬 사내의 얼굴에도 남자를 향한 노기가 드리워졌지만, 그는 여전히 친절한 미소를 내걸어 보이며 가드에게 말했다.

“금방 끝나는 거겠죠?”

“……예. 잠시면 됩니다.”

그러나 그 찰나마저도 참아줄 수 없었던 건지, 사내는 다시금 호통을 치며 고요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대체 뭘 찾겠다고 이 난리법석을 피우는 거야! 어?”

진짜 난동을 피우고 있는 게 누구인지 모르는 것 같은 한심한 꼬락서니였다. 그때, 손님이 있는 마지막 객실만을 남겨놓고서 조사를 끝낸 가드들이 일제히 뛰어나와 사내 앞에 섰다.

“침입자가 공작새 가면을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죄송스럽지만 두 분께서 혹시 다른 가면을 가지고 계신 건 아닌지 확인을 해봐야겠습니다.”

방금 전까지 상대하고 있던 가드와는 달리, 얼굴 곳곳에 흉터를 매단 흉악한 인상의 덩치들이 튀어나와 사건을 설명하자 사내는 얇은 입술을 씰룩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사내와 남자 모두 문양이 화려하지 않은 원색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인지 가드들의 검문은 의심이라기보다 매뉴얼적인 행동에 더 가까워 보였다.

“넌 그분을 확인해드려.”

상사의 명령에, 사내의 성질머리를 상대하고 있었던 가드는 미색을 가진 남자 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남자는 친절히 양팔을 들어 올려 가드를 도왔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외투를 만져보던 가드가 손에 걸리는 무언가에 얼음처럼 몸을 굳혔다. 힐끔, 시선을 들어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떨리는 눈빛을 감추지 못하며 외투를 뒤지던 손을 거뒀다.

“끝난 건가요?”

남자의 질문에 가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내 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혹시 품 안에 있는 물건을 확인해 봐도 괜찮겠습니까?”

“그러세요.”

남자는 별다른 거부 반응 없이 외투를 벗어 가드에게 건넸다. 입꼬리 또한 여전히 미소 짓고 있는 채였다. 손을 집어넣어 걸리적거리던 물체를 꺼내 든 가드는 그것이 무늬 없는 일반 가면인 것을 확인하고서 물었다.

“왜 가면을 두 개씩 가지고 다니시는 건지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누가 제 가면을 뺏어가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싶어서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옆 사내를 검문하고 있던 가드 또한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어진 당당한 발언에는 그들 모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좀 예쁘잖아요?”

반박하고 싶어도 반박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확실히, 가면 아래로 드러난 얼굴만 보더라도 그가 비현실적인 수준의 외모를 가지고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던 가드는 마침내 외투와 가면을 그에게 돌려주며 입을 열었다.

“예. 협조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혹시 억지로 가면을 뺏어가거나 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즉시 연락해 주십시오.”

때마침 사내 역시 모든 검문을 마친 후 짜증스럽게 소리 질렀다.

“생사람을 잡고 있어, 이것들이!”

덩치 중 한 명이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시간이 없는지 한숨을 내쉬며 다음 층을 확인하러 떠났다. 또다시 복도엔 두 사람만 남게 되었으나 검문 전의 가벼웠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후였다.

사내는 제 팔목을 부러뜨릴 듯 움켜쥐던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가 사과하기를 기다렸다. 가드 앞에서 그런 개망신을 주다니!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원하던 말이 돌아오지 않자, 그는 기계적으로 헛기침을 하며 남자의 주의를 끌었다.

“큼, 큼.”

“수색이 형편없네요.”

공작새 무늬를 본뜬 깃털은 전부 다 뽑아내 화장실 변기에 내려보낸 지 오래다. 가면 자체를 내다 버리지 않은 이유는 괜한 의심을 자아내 추적 범위를 좁혀주고 싶지 않던 까닭이었다.

진심을 담은 대답이었으나, 사내는 영 마음에 와닿지 않았던 건지 연신 헛기침을 하며 다른 대답을 유도하려 들었다. 저러다 목이 망가지진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큼, 그건 그렇고. 아까 전 일 말인데, 아니. 사람을 그렇게 막…….”

그러나 이번에도 사내의 목소리는 전부 다 이어지지 못한 채 끊어지고 말았다. 객실 너머로 들려오는 울음 섞인 목소리에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사건에 대한 반응이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라지만, 그들이 보이는 반응은 극과 극에 위치해 있기까지 했다.

“무시하고 저희도 얼른 돌아갑시다.”

그러나 남자는 사내의 말을 일방적으로 외면하고서 객실 손잡이를 끌어당겼다. 하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사내가 화들짝 놀라며 그런 남자를 저지했다.

“무슨 짓이에요, 이게!”

“여자아이 울음소리였어요.”

“그게 뭐 어쨌다는 겁니까? 한창 재미 보려는 와중에 흥이라도 깼든가 했나 보죠. 그러지 말고 얼른 돌아…….”

그러나 사내는 말을 다 잇지도 못한 상태로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쾅, 콰앙! 열리지 않는 문고리를 발로 차서 부숴버린 남자는 지체 없이 문을 열며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 난폭한 움직임에 사내는 하려던 말도 전부 잊어버리고서 남자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살려, 살려 주세요……!”

침대 위에 올라오려는 청년을 향해 발길질을 하던 소녀가 갑작스레 등장한 누군가를 보며 간절히 소리쳤다. 그러자 소녀의 앞에 서 있던 오만한 인상의 청년이 주춤거리며 몸을 물렸다.

“다, 당신 뭐야.”

남자 또한 익히 알고 있던 얼굴이었다.

“넌 원래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나지막이 읊조린 남자가 곧바로 주먹을 휘둘러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아아악! 이 새끼가 미쳤나! 그러나 그 새된 비명소리는 남자의 거친 발길질에 의해 가로막히고 말았다.

“한심한 새끼.”

친동생을 시기하며 동년배들과 함께 괴롭혀대던 기름기 가득한 얼굴을 떠올리자 속이 거북해진다. 이딴 새끼를 후계자랍시고 데리고 있는 셀번 가를 멸문시켜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샤를은 리처드 셀번의 얼굴 위로 음료수 캔을 쏟아부었던 그날처럼 무자비하게 발을 놀렸다. 헐레벌떡 뒤따라 들어왔던 사내는 뇌가 망가진 사람처럼 멍하니 얼어붙었다. 떨고 있는 소녀의 몸 위로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덮어준 샤를이 사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기어오르면 초장에 기를 잡아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볼에 튀긴 피를 닦아 내리는 동작마저도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기억하지?”

기억이 나지 않아도 기억난다고 해야 할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사내는 아무런 대답도 내어놓지 못한 채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간신히 바닥에 붙여 놓았다. 신이 아름다움이라는 글자를 의인화해서 만들어 놓은 것만 같던 저 남자가 어느 순간부터 지옥을 관장하는 악마에 더 가까워 보이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사내가 도망갈 자세를 취하자, 쓰러져 있는 청년의 몸을 일으켜 세운 샤를은 그를 질질 끌어오며 말했다.

“어딜 가려고.”

한 자 한 자 내뱉는 발음이 부드럽고 나긋하기만 했다. 그러나 사내는 좀처럼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기 바빴다. 냅다 도망쳐버리고도 싶었으나, 그랬다간 이 악마 같은 자가 저를 쫓아와 야차같이 심판할 것 같아 무척이나 공포스러웠다.

뒷덜미를 잡혀 끌려온 청년은 꾸웩거리는 소리를 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얼굴 위의 모든 부위에 울긋불긋한 멍이 들어 있었다. 그를 내려다보던 샤를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왜 이렇게까지 사람을 때리셨어요.”

뭐? 고운 입술에서 튀어나온 그 한마디가 사내의 넋을 잔뜩 흔들어 놓았다. 어버버하며 입술을 달싹거리던 사내는 과장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실은 보는 사람 눈에나 과장이었지, 스스로에게는 목숨을 온전히 지켜내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에 더 가까워 보였다.

“지, 지금 뭐라는…….”

“아프겠다.”

사내는 도대체 남자가 무슨 막말을 뱉어대고 있는 건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위협감을 느낀 그가 반론을 꺼내려 했지만, 샤를이 그의 앞으로 청년의 몸뚱이를 내동댕이치는 것이 먼저였다. 청년의 몸을 툭툭 걷어찬 샤를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가 때렸잖아요.”

가면 너머의 검고 깊은 눈이 사내를 향했다. 사내가 다급하게 항변했다.

“내가! 내가 언제 그랬다는 거야. 당신이 다짜고짜 들어가서 마구잡이로 두들겨 팬 거잖아!”

머리채를 잡아서 주먹질을 하고, 발로 진탕 밟아대기까지 했던 것이 누군데 이제 와서 모함이란 말인가! 그러나 사내의 억울함은 그에게 아무런 감정적 동요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오히려 입만 살아 투덜대는 것이 머리가 참 나쁜 편이 아닐까, 하고 단정 짓게 되는 것이다.

소녀가 옷매무새를 바르게 한 것을 확인한 샤를은 됐다는 듯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그 새끼 데리고 저기에나 들어가 있어.”

그가 가리킨 곳은 객실 왼쪽 끝에 마련된 화장실이었다. 사내는 말의 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샤를은 가지고 있던 나머지 가면 하나를 소녀에게 건네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저를 완벽히 배제하고 있는 것 같은 그 무심한 태도에 사내가 꽥 소리를 질렀다.

“나는 당신이랑 엮일 생각 같은 거 추호도 없으니, 이쯤에서 안녕하고 서로 갈 길 갑시다. 계집애 하나 때문에 귀족에게 손찌검을 하다니, 당신이 정말 제정신이오?”

어떻게 살아왔으면 저 정도로 머리가 나쁠 수 있는 걸까. 심지어 겁대가리까지 상실한 대단한 인간이었다. 기억 속에 없는 얼굴인 것으로 보아 권세가의 사람도 아닌 모양이었는데, 신분에 대한 프라이드는 피에르 셀번 저리 가라인 것이 매우 상스럽게 느껴졌다.

하늘을 찌르는 듯한 그 오만함에 얼굴을 찌푸린 샤를은 소녀에게 눈을 감으란 제스처를 취했다. 다행히도 소녀는 그의 말뜻을 척척 알아듣고 스스로 눈을 가렸다.

“제정신이냐고?”

그가 걸음을 내디디며 간단히 물었다.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었기 때문일까, 기대감이라고는 전혀 엿보이지 않는 옥 같은 얼굴이 무거운 공포감을 조성했다.

사내는 연신 목 뒤로 침을 넘기며 기민히 주위를 살폈다. 이렇게 궁지에 몰려 목숨을 위협당하는 기분을 느끼게 된 것은 귀족 인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드들에게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라도 침대 옆의 인터폰을 사수해야 했건만, 점차 제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는 악마 새끼를 보고 있자니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실패해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내가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샤를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가련하게 온몸을 떨고 있던 사내가 자리를 뜨려 몸을 돌렸으나, 예상대로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샤를이 사내의 멱살을 잡아 화장실 쪽으로 끌고 갔다.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소리를 질러봐도 벗어날 수 없는 강한 악력이었다.

“놔! 놓으라고!”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비명 소리가 방 안을 수놓는다. 들어가지 않으려 용을 쓰는 사내의 몸을 발로 잘근잘근 밟아 화장실로 집어넣은 샤를은 빙긋, 웃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생각이 바뀌었어.”

얻어맞은 꼬리뼈가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는 탓에 엉거주춤 세면대에 기대설 수밖에 없었던 사내는 처절하게 팔을 뻗었다. 자, 잠깐! 그러나 문은 조금의 여지도 없이 차갑게 닫혀버리고 말았다. 천진한 목소리가 사내를 위로하듯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쓰레기는 종류별로 버려야겠다.”

***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처자식도 있는 데다가 조부모님께서도 제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십니다……. 저 죽으면 진짜 집안이 풍비박산 날지도 몰라요. 아뇨, 틀림없이 그럴 겁니다. 애들도 다 쫄쫄 굶다가 길거리에 나앉게…….”

“원래 그렇게 말이 많아?”

대체 어느 시점에서 살해 위기를 느꼈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조금 전 자신이 정중히 요구했던 바는 지하로 가는 길을 안내해달라는 것이었지, 네놈의 멱을 따버리겠다거나 하는 폭력적인 사항들이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마린케이에게 붙잡힌 가드는 마치 그가 자신을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입이 닳도록 본인의 인생사를 늘어놓고 있었다. 물론, 별별 꼴을 다 보고 살아온 마린케이는 그런 어중간한 스토리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야?”

“곧 도착합니다.”

세 번째 시도 역시 무참히 가위질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가드는 체념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얌전히 길만 잘 터줬으면 무사히 돌려보내 주었을 것을, 울상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갈 때 가더라도 꼭 기절은 시켜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의 지하층으로 내려가는 길은 베사플레사와 견줄 수 있을 정도의 미궁 같은 경로를 자랑했다. 이래서야 지상으로 돌아가는 길을 기억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이걸 어떻게 다 외워? 마린케이는 새삼스레 가드에 대한 존경심을 느끼며 말했다.

“수작 부리지 말고 입구나 찾아내.”

일부러 비슷한 길목을 빙빙 돌아다니는 개수작을 부리고 있던 가드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웅크렸다. 그에 마린케이는 가드의 뒤통수에 겨누어뒀던 총구를 더욱 깊이 내리누르며 한숨을 뱉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시간 절약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목숨만 살려주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

방아쇠를 약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가드는 꿀꺽, 침을 삼켰다.

“알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나오고.”

진심이다. 그저 그런 협박이 아니라, 이건 정말 진심이었다. 속내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마린케이의 사나운 눈초리에 가드는 결국 주변을 배회하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가 일직선으로 걸어가며 마린케이를 드문드문 곁눈질했다.

마린케이의 갈색 눈에는 이제 귀찮음이 잔뜩 묻어져 있었다. 언제까지 이 지겨운 짓거리를 반복하고 있어야 하는 건가 싶어 짜증이 치밀었다.

가드를 따라 도착한 곳은 1층, 가장 구석진 장소에 위치한 보안실 앞이었다. 그는 마린케이의 눈치를 보며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마린케이는 혹시나 안에 다른 사람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아까 전 가드에게서 압수했던 리볼버 한 자루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텅 비어있는 보안실 안을 확인한 그는 가드를 밀어 넣은 후 저 역시 따라 들어갔다. 보안실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방 안의 풍경은 제대로 된 가구 하나 없이 황량했다.

“저 책장 뒤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네가 열어.”

가드가 그의 명령대로 네 번째 줄, 다섯 번째 칸막이에 꽂혀 있던 책을 뽑아내려 들 때였다. 총을 거둔 뒤 가드의 손을 제지한 마린케이는 책장을 턱짓하며 말했다.

“네가 직접, 열라고.”

“제가 직접요?”

당연한 결정이었다. 자동 시스템을 사용했다간 분명 위치가 발각당할 테니, 최대한 시간을 벌 수 있는 방법을 택해야 했다. 울상이 된 가드가 있는 힘껏 책장을 밀었다. 거세게 밀려 나간 책장 뒤로 거대한 철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첩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구조물이었다. 하여간 귀족 새끼들은 영화와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는 병이라도 걸린 게 틀림없었다.

“호, 혹시 저도 같이 가야 하는 겁니까?”

대답할 필요도 없는 질문에 마린케이는 말없이 철문을 눈짓했다. 가드가 불안한 듯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지만, 그는 여전히 짜증 가득한 시선으로 가드를 바라보기만 했다. 체념한 가드는 주머니에서 카드 키를 꺼내 철문을 열었다. 스리슬쩍 두 손을 들어 올리면서.

“직진하다 왼쪽으로 꺾으시면 입구가 하나 더 나올 텐데, 거긴 잠겨 있지 않아서 바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제 길잡이 역할은 다 끝난 것 아니냐는 완강한 의지가 담긴 목소리였다. 뒤통수에 겨누어져 있던 총구가 드디어 아래로 내려가자, 가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럼 건승을 빕…….”

“카드 내놔.”

“네!”

이 잔악무도한 남자한테서 벗어날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내다 팔 수도 있을 것이다. 가드는 빠릿빠릿하게 카드를 건네며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마린케이의 얼굴엔 싸늘한 기색만이 역력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마린케이는 남자를 먼저 집어 던지듯 입구 안으로 밀어 넣었다. 가드가 애원조로 말했다.

“저, 절대 밀고할 생각 없습니다. 정말 얌전히 있을게요. 예?”

그럼에도 마린케이는 가차 없이 철문을 닫았다. 그가 다시금 글록을 들어 올렸다. 한번 닫힌 문을 안에서 열 수 있는 방법은 전무했기 때문에, 가드는 또다시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밀고하지 않겠다는 개소리를 이제 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절대 밀고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마린케이는 냉혹하게 명령했다.

“옷 벗어.”

그러자 가드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물론, 물러서 봤자 도망칠 곳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옷을 벗으라니! 그것도 여기에서!

“안 벗어?”

그래…. 별수 없지. 빠르게 판단을 마친 가드는 신속히 탈의를 끝냈다. 다행히 협박의 주체 역시도 속옷까지 벗는 것은 원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자신의 옷을 잘근잘근 밟고 있을 뿐 다른 요구는 하지 않았다.

그의 옷가지 속에 무전기와 휴대폰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마린케이가 총을 거두며 말했다.

“여기서 명상이라도 하고 계십시오.”

원하는 목적을 이뤘으니 입에 익은 경어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었지만, 가드는 그 믿지 못할 변화에 더더욱 공포심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마린케이가 뒤돌아서자 그는 눈물을 훔치며 주섬주섬 벗어둔 옷들을 모았다.

지하 특유의 습기 찬 냄새가 코를 가득 찔러온다. 마린케이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댄 미헤르의 얼굴을 떠올리며 총을 세게 쥐었다. 그 개새끼, 분명 다음에 또 만나자고 했었겠다.

왔다, 이 개새끼야.

***

“사진, 사진.”

콧노래에 휘파람까지, 기분이 좋다 못해 날아갈 정도가 된 벤 해리스는 드디어 꼴 보기 싫은 루이스의 얼굴에 한 방 먹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집무실을 찾았다.

비서실장 세바스찬이 혼자 사용한다고 알려진 7층 집무실은 보안이 철저한 곳으로도 유명했으나, 그의 지갑을 훔쳐 카드 키를 빼돌리자 매우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들켜서 잘리면 뭐 어때. 무려 황태자 전하께서 날 거둬 주시겠다는데! 아니지. 이젠 황제로 즉위하시게 될 테니, 어쩌면 더 파란만장한 승진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벤은 그저 황홀한 심정으로 도둑고양이 같은 걸음을 옮겼다. 가져온 카드 키를 사용해 조용히 잠금장치를 푼 그가 느리게 문을 열어 내부의 정경을 확인했다.

매일 변동이 생기는 CCTV 점검 시간을 알아내기 위해 루이스, 그 재수 없는 새끼한테 무려 채끝살 스테이크를 풀코스로 대접하기까지 했다. 정보를 캐내느라 진이 다 빠졌던 어제를 떠올리니 또다시 열이 받는다. 벤은 집무실 안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나머지 한 발을 밀어 넣었다.

“이러다 간이 다 떨어지겠네.”

휴대폰 플래시를 비춰본 그는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는 집무실의 풍경에 눈을 크게 떴다. 비서실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용하는 곳이니, 아주 세련되고 모던한 인테리어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집무실 안에는 쇠로 된 책상과 그 위에 올려진 데스크톱만이 전부였다. 심지어 사무실이라면 으레 있을 법한 시계나 화분 같은 것들도 보이지 않았다.

어째선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던지라 벤은 용기를 내어 데스크톱까지 걸어갔다. 해킹이라면 전문 분야이니 자신 있었다. 애초에 백작 밑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경위 역시 그가 정보기술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기 때문이었다.

데스크톱의 전원을 켜기 전, 미리 준비해왔던 해킹용 USB를 꽂아 넣은 벤은 저절로 켜지기 시작하는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황태자의 키스 사진이라는 대어를 비서실 컴퓨터에 보관하고 있을 리는 없을 테니 위험을 무릅쓰고서 세바스찬의 개인용 사무실을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생각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방화벽 시스템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이 정도 방화벽을 구축하려면 황실 소속 해커 정도는 데려와야 할 텐데, 고작 비서실장의 사무실을 위해 그들을 고용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인식하자 점점 불길한 기운이 벤을 덮쳐오기 시작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첫 번째 방화벽을 해제한 벤이 안도의 한숨을 뱉으며 USB를 뽑았다. 다음 USB를 꽂아 넣던 그는 파랗게 전환되기 시작하는 화면을 보고서 다급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블루 스크린? 어째서? 분명 제대로 해제했는데! 해킹 중 블루 스크린이 뜨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작업 과정 중 어떤 실수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혼란스러움이 더욱 컸다.

간신히 화면을 본래 상태로 되돌린 벤은 2차 방화벽 해제에 들어가며 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예감이 좋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그만두면 이도 저도 아닌 천덕꾸러기 신세가 될 것이 명백했다. 어쩌면 기밀 유출을 명분 삼아 감옥에 보내질 수도 있었다.

평안한 인생을 사수하기 위해서라도 벤은 사력을 다해 방화벽을 해제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절차에 이르러 억지로 코드를 입력했기 때문인지, 이상 징후를 감지한 데스크톱에서 자동 경보 시스템을 발동시키려 하는 낌새가 엿보였다.

두 번째 USB를 뽑아낸 벤은 드디어 일반 USB를 꽂아 넣으며 신께 기도를 올렸다. 제발 무사히 끝낼 수 있게 해주세요. 파일 전부가 암호화되어 있었으나 이 정도쯤은 식은 죽 먹기로 처리할 수 있었다. 여러 개의 폴더 중 사진 및 동영상 파일이 가득 담겨 있는 비밀 폴더를 찾아낸 벤이 마우스를 움직일 때였다. 그는 순간 마우스를 멈추고서 입을 벌렸다.

“미친, 이게 다 뭐야…….”

폴더 속 파일들을 확인한 그는 하마터면 고함을 내지를 뻔한 자신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손을 떨며 동영상을 재생하자, 충격적인 광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

기사학부 수련생들은 필수적으로 생존 관련 교과목들을 수강해야만 한다. 그중에서도 샤를이 가장 선호했던 과목은 「고급생존기술」이었다. 말만 생존 기술이지, 더 구체적으로 파고들어 보자면 타인의 생존을 위협하기 위한 기술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침대 시트를 반으로 찢어 셀번 가 장남의 팔다리를 구속한 샤를은 완벽하게 묶인 매듭을 바라보며 내심 흡족해했다. 아무리 용을 써 봤자 풀어지지 않을 테니, 몸부림을 치든 말든 저와는 상관없었다. 그 전에, 시트를 맨손으로 찢어버리는 기행 자체가 청년에게 남아있던 한 줌의 의욕마저도 전부 꺾어버린 상태이기는 했다.

그러나 입을 막을 만한 물건까지는 찾지 못한 샤를이 약간의 안타까움과 함께 손을 풀었다. 어차피 샤워실에 던져 넣을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남아 있었다. 거부하는 청년을 몇 대 더 후려쳐 샤워실 안에 넣은 그는 무거운 옷장을 옮겨와 그 앞에 세웠다.

팔다리도 제대로 묶어 놓았고, 문도 굳게 틀어막아 놓았으니 할 일은 대충 끝난 것 같았다.

“무섭게 해서 미안.”

샤를은 여전히 눈을 가린 채 침대에 앉아 있던 소녀에게 말했다. 조심스럽게 소녀에게 걸어가던 그는 알고 보니 눈을 가린 것이 아니라 대충 가리는 척만 하고 있었던 소녀의 모습을 확인하고서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손가락 사이로 엿보이는 검은색 눈동자가 정확히 그를 향해 있었다. 눈물 자국을 쓱쓱 비벼 닦은 소녀는 침대 위에서 내려오며 그의 재킷을 던졌다.

“괜찮아요. 더 무서운 사람도 많이 봤어요.”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한 소녀가 떨리는 손을 감추려 주먹을 움켜쥐었다.

“당신…, 나쁜 사람 아니죠?”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도 미처 숨기지 못한 물기가 어려 있었기에, 샤를은 소녀가 부디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라며 살짝 미소 지었다.

“아니고 싶어서 노력 중이야.”

“그럼 됐어요.”

소녀는 그를 더 추궁하지 않고서 눈물 줄기를 닦았다. 조금 전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을 때, 소녀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온몸을 구속당해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문을 열고 자신을 구해주길. 제발, 제발.

유흥거리라도 마주한 듯 연신 킬킬대던 남자가 손을 뻗을 때였다. 문이 부서지는 난폭한 소리와 함께 그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순간 소녀는 샹들리에 아래 나타난 누군가를 발견하고서 숨을 참았다.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자신을 괴롭혔던 상황이 뿌리 뽑혀 사라지고 말았다.

백색 가면을 쓴 남자는 소녀에게 도로 재킷을 건네며 말했다.

“밖에 나가면 쌀쌀할 거야. 걸치고 있어.”

“처음엔, 처음엔 백작이라고 했어요.”

“…….”

“끌려가던 중에 저 새끼 눈에 띄어서 빼돌려진 거예요.”

백작. 소녀는 그 단어를 힘겹게 내뱉으며 남자의 앞까지 달려왔다.

“백작이면 귀족이란 소리잖아요. 당신, 그 인간보다 더 높은 사람이에요?”

그래야만 한다. 간절한 목소리가 이어질수록, 샤를은 자신의 눈앞이 아득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그는 그 아득함 너머로 덧그려지는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마린케이. 세상은 시궁창이야. 썩어들어갈 때까지 썩어들어간 나무뿌리고, 어쩌면 영원히 되살리지 못할 말라버린 강물일지도 모르지.

내가 지켜야 할 이들은 너무나 많고 여리디여려서, 끝내 그들에게 닿지 못할 것만 같아 두려워. 정말 내가 어리석은 꿈을 꾸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걱정하지 마.”

허나 그 나무뿌리를 베어내고 말라버린 강을 태동하게 하는 것이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유일한 소년이 꿈꿔왔던 이상이자 꿈이며, 소망이자 낭만이었다.

샤를은 제 팔을 부여잡은 소녀의 작은 손을 다정하게 마주 잡았다. 그에게 주어진 왕관은 마지막 남은 자유를 구속하고 소중한 것들을 앗아가는 족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다른 이의 자유를 보호하고 힘없는 이들을 보필할 수 있는 권력이 되기도 했다.

“나보다 높은 사람은 가쉰에 없어.”

그 확고한 대답에 소녀는 강한 의지가 담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맨 위층에 저 말고도 다른 애들이 잡혀 있었어요.”

허세 가득한 자만일 수도, 겪어보지 못한 자의 오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샤를 소피아 엔스는 선택했고, 그 선택이 이상론자의 탁상공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낼 예정이었다.

눈앞의 남자가 자신의 유일한 동아줄이자 구원자라는 사실은 변함없었기에, 이자벨라는 밀실에서 보았던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저 목소리를 이었다. 가는 발목 위를 꽁꽁 둘러쌌던 쇠사슬을 떠올리자 볼썽사납게도 말을 하는 중간중간마다 목이 멨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어요. 곧 경매가 시작된대요. 노예 경매요. 제발, 제발 그 애들도 구해주세요.”

이자벨라는 가슴 쪽 옷깃을 부여잡는 것으로 그 고통을 눌러 참았다.

***

가드가 알려준 길을 따라 걸으면서도 긴장감을 놓을 수는 없었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가드들을 상상하고 있으려니 절로 손에 힘이 실린다.

왼쪽으로 이어지는 커브 길을 돌아가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축축한 습기 냄새에 코가 무뎌질 무렵, 마린케이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예의 그 두터운 철문이었다.

어째서 고급 호텔의 지하실에 저따위 흉측한 몰골의 철문이 자리하고 있는 것인지는 타인의 개입 없이도 자연스레 추측할 수 있었다. 탈출을 불가능하게 하고, 갇힌 이들에게 무력감을 심어주기 위한 용도였을 것이다. 변태 새끼들.

전부 똘추 새끼들이라 그런 건지, 어째 지들 같은 짓거리만 잘도 골라서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린케이는 한 손으로 철문을 열어젖히며 그곳으로 발을 들였다. 예상외로 지하실 내부의 풍경은 그다지 흉측하지 않았다. 오히려 돈을 제대로 처바른 어느 귀족 가의 연회장처럼 느껴졌다. 평범한 연회장과의 차이점이라면, 쇠창살로 된 우리들이 즐비해 있다는 것 정도였다.

저곳에 짐승을 가뒀든 인간을 가뒀든 간에 어느 쪽도 함부로 속단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우리 안이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인지, 그는 가슴속을 홧홧하게 적시는 분노를 간신히 내리누르며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귀족들의 오만함을 상징하는 것만 같은 와인색 벽지가 유난히 역겹게 느껴진다.

지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여러 객실이 존재했으나, 마린케이는 자신이 들어가야 할 곳이 어딘지 빠르게 알아차렸다. 그거야, 아까부터 풍겨오는 음식 냄새가 자꾸만 코를 거슬리게 했으니 당연했다. 두 번째 객실 앞에 발을 내딛고 선 마린케이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식탁 위의 만찬을 앞에 두고도 무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가 침입자의 등장에 반가운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수채화로 그려놓은 듯한 섬세한 눈가가 살포시 접혔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서는 마린케이를 보며 인사했다.

“자주 보네요. 기사님.”

“…….”

“우연인지, 인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찾아올 것을 예상하고 있던 모양이기라도 한 듯 댄 미헤르는 그다지 타격을 입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운 듯 미소 짓고 있는 상판대기에 주먹을 갈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식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꿇어 앉혀져 있는 여인을 발견한 마린케이가 차갑게 표정을 굳혔다. 글록을 쥔 그의 손이 조금씩 경련하기 시작했다.

“좀 앉으세요. 여기까지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쳐 죽여도 시원찮을 새끼. 눈이 가려진 걸로도 모자라 입까지 틀어막힌 채 구속당해 있는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린케이는 빠르게 글록을 들어 올렸다.

“총은 좀 내려주시면 좋겠고.”

미헤르는 여자 쪽을 눈짓하며 순진한 척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미 아는 분이시죠?”

“풀어주십시오.”

할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러자 여인의 뒤에 서 있던 사내가 리볼버를 난잡하게 휘두르며 여인을 위협했다. 눈이 가려져 있음에도 자신에게 총구가 겨누어졌다는 사실은 느껴지는 것인지, 여인이 크게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던 미헤르는 느슨하게 말을 꺼냈다.

“그건 안 돼요. 저분은 이미 약속을 어겼거든요.”

그는 식탁 위에 준비되어 있던 와인 잔을 마치 건배하듯 높이 들어 올렸다.

“기밀 유지가 고용 조건이라고 계약서에 지장까지 찍었는데, 기자들한테 입을 털고 다니는 게 말이나 돼요?”

“풀어주십시오.”

같은 말을 반복해 봤자 들어주지 않을 것 같긴 했으나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처음 만났을 적 보여주었던 정중한 모습은 모두 가식이었던 것인지, 신경질 가득한 투로 여자에 대한 힐난을 쏟아낸 해사한 청년이 마린케이에게 시선을 던졌다.

와인으로 입을 축인 그는 기다란 식탁 끝에 마련된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기사님.”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낮고 비정한 목소리였다.

“앉으라니까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인의 뒤에 서 있던 가드가 총을 고쳐 잡으며 탄창을 장전했다. 빌어먹을, 비어있는 총인 줄 알았다면 진작 쏴 죽여 버렸을 텐데!

마린케이의 표정을 읽어낸 미헤르는 나이프를 손에 쥐며 조소했다. 부드럽게 갈라지는 스테이크의 단면에서 탐스러워 보이는 새빨간 핏물이 흘러나왔다.

“그래요. 아직 교육을 덜 받았으면 그럴 수 있어요.”

분한 듯 여인 쪽을 응시하던 마린케이는 결국 의자를 빼내 앉았다. 남자를 향한 시선엔 살기가 담겨 있었지만, 미헤르는 그마저도 기꺼워하는 것만 같았다.

“황태자 쪽은 방임주의인 것 같지만, 전 반대거든요.”

“개소리는 집어치우고 본론이나 얘기하시죠.”

대답은 평소보다 훨씬 더 삐딱하게 튀어나왔다.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일어 어쩔 수 없었다. 잡혀 있는 여인만 아니었더라도 당장 식탁을 뒤집어엎고서 총을 난사해댔을 것이다. 이름이…, 호, 뭐였더라. 마린케이는 얼핏 귓가에 들려왔던 그녀의 이름을 곰곰이 되짚어 보며 남자의 말을 무시했다.

“그거 알아요?”

“모릅니다.”

그러자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알았어도 어차피 모른다고 했을 테지만, 노예상 새끼의 말하는 본새가 너무 재수 없던지라 겸사겸사 더 짤막하게 답했다. 저 새끼 나불거리는 모습만 봐도 충분히 소름 끼치고 역겨웠다. 마린케이의 무미건조한 얼굴에 힐긋, 시선을 준 미헤르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개는 교육을 어떻게 시키느냐에 따라 주인에 대한 충성도가 달라져요.”

개좆만도 못한 새끼가 뭐라는 거야. 마린케이는 그가 말하는 ‘개’가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서 작게 욕설을 읊었다.

어떻게 된 게 음침한 새끼들은 발상 또한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영민한 개일수록 더더욱.”

대답하지 않는 마린케이에게, 그는 고개를 괴고 웃으며 제안했다.

“1년 단위로 20만 몬트씩 드릴게요.”

“…….”

“새 신분도, 거처도, 차도 전부 마련해 줄 수 있어요. 말만 해요. 원하는 종류로 준비해 놓을 테니까.”

글자 그대로만 본다면 충분히 혹할 만한 제안이 틀림없었으나, 본질을 파고 들어가 보자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언젠가 황태자 새끼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말만 하라고 했었지. 그때 무슨 대답을 내어놓았는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가 환하게 웃음 지었던 것만큼은 뇌리 속에 박혀 떠나가질 않았다.

마린케이는 시원찮다는 듯 귀를 후비며 답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개소리하지 말라고.”

미헤르의 무감하던 얼굴에도 드디어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그가 천천히 읊조렸다.

“겁이 너무 없는 편도 좋지 않아요.”

겁대가리를 상실했다는 얘기는 또 지루할 정도로 많이 들어오던 소리인지라 이제 와 새삼 감흥이 일지도 않았다. 마린케이가 딴청을 피우자, 남자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그를 헐뜯었다.

“기사님 자존심 하나 세우자고, 죄 없는 민간인을 희생시키려고요?”

여인은 여전히 구속당해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그 뒤에는 총구가 겨누어져 생사의 기로에 놓인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허리를 세운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올곧은 자세에서는 굴복당하지 않은 자의 기개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마린케이는 그런 여인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되뇌듯 입을 열었다.

“못 죽일 거 압니다.”

남자의 시선이 저를 따라오는 것을 눈치챈 그는 식탁 위에 있던 음식들을 모조리 바닥으로 내던지며 말했다. 화풀이식 쇼맨십이었다.

“저를 협박할 유일한 수단인데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확실히, 황가의 개로 살기엔 아까운 사람이에요. 기사님은.”

이 개새끼가 아까부터 자꾸 누가 누구보고 개라는 거야. 그러나 뒤따라온 말에는 마린케이 또한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죽을 테니까 상관없나.”

그를 이해한다는 듯, 해맑게 미소 지은 남자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황태자, 여기서 죽을 거예요.”

***

“우와. 수련장이 엄청 넓네요!”

감탄하는 표정으로 수련장을 둘러보던 테헤란이 크게 소리쳤다. 무엇인지 모를 기대감이 가득 실려 있는 얼굴이었다. 이럴 때면 린저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국가가 기사도를 숭상하는 가쉰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었다.

마린케이가 소녀를 찾아오겠다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이후, 그는 처참해진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션과 테헤란을 수련장으로 데려왔다.

린저의 계획을 알게 된 칼릭스가 연신 탐탁지 않다는 듯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무시는 쉽고 간단했다. 쑥스러운 듯 볼을 붉힌 린저는 테헤란에게 말했다.

“덩치들이 다 커서, 이 정도도 막상 훈련해 보면 좁게 느껴질 때가 간혹 있어요.”

칼릭스는 린저의 표현을 더 정확히 수정해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간혹이 아니라 항상 그렇잖아. 가쉰에서 내로라하는 덩치들이 모여 함께 숨결을 뱉고 있는데,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 방법이 존재하긴 할까. 수련생들은 모두 손가락이라도 스칠 것 같으면 흉흉히 눈빛을 곤두세우기 바빴다. 하하호호 웃으며 훈련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 기 싸움에서 자주 패배하곤 했던 사람이 다름 아닌 린저 아일랜드다. 실은 패배가 아니라 출전 포기에 해당했지만, 그는 불평 한번 없이 자리를 양보하곤 했었다.

션은 그 와중에도 여전히 말이 없었고, 테헤란만이 계속해서 린저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사실 말입니다. 어릴 때는 저도 기사가 되고 싶었어요. 다들 한 번씩은 꿈꿔 보잖아요? 재능도 없고, 빽도 없는 거랑은 별개로.”

그는 수련장에 비치되어 있는 목검들을 차분하게 쓸어 만지며 말했다. 여러 수련생의 손때가 녹아 있는 목검들은 표면이 닳고 닳아 어느덧 눅눅한 갈색빛을 띠었다. 테헤란의 자조적인 한마디에, 린저는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강하게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아……. 아니에요! 그래도 재능이랑 빽밖에 없는 사람들보다는 낫죠.”

별로 안 나은 것 같은데. 칼릭스는 그런 린저의 모습을 보며 무심히 생각했다. 테헤란의 말이 옳았다. 왕립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특출난 재능과 인맥, 그리고 집안의 삼박자가 뒷받침해 주어야만 했다. 가쉰왕, 아니. 가쉰 황제가 제국의 인재를 양성하고자 세운 귀족들의 아카데미는 그렇게 한 치의 틈도 내보이지 않고서 그들만의 자리를 구축해갔다. 자연히 입학 또한 귀족이 아니고서야 불가능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칼릭스는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을 뚫고 들어온 살벌한 인상의 수련생을 떠올리고서 헛기침을 했다. 생각해 보니 가까운 곳에 한 명 있긴 했다. …마린케이 이스턴.

“허유. 이러니까 또 이자벨라 생각이 나네요.”

테헤란은 달아오른 눈가를 찍어 누르며 말했다. 그러자 션이 그를 호되게 야단쳤다.

“청승 떨지 마! 곧 다시 보게 될 거니까.”

하지만 션의 눈가 역시 빨갛게 짓물러 있었기에, 린저는 본인이 먼저 굳건한 목소리를 내며 그들에게 희망을 일깨워주고자 노력했다. 어쩌면 근거 없는 믿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기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한 수련생을 믿었다. 그는 분명 소녀와 함께 돌아올 것이었다. 린저의 신뢰는 그만큼 절대적인 구석이 있었다.

“걱정 마세요. 마린케이 씨가 꼭, 정말 꼭 따님 분을 찾아오실 거예요.”

“킁. 그 사람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입니까?”

션은 칼릭스가 건네준 손수건 위로 힘차게 코를 풀며 물었다.

“아니, 눈물 닦으라고 준 건데….”

칼릭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지만, 누구도 귀 기울여 주지는 않았다.

수련장 한가운데서 샌드백을 무참히 패대기치고 터뜨리기까지 하던 마린케이의 모습을 떠올린 린저는 자긍심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이제 신분이 허울이 되지 않는 시대가 열렸노라 말하지만, 린저가 느끼기에 그 말은 그저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사탕발림에 불과했다. 애석함에 젖은 그가 입을 열었다.

“이스턴 씨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여러모로 그렇긴 하지.”

칼릭스 역시 열심히 거들었지만, 두 사람의 생각은 결이 매우 달랐다. 테헤란은 어느 정도 그들의 말에 납득하고 있는 모양이었으나 미저리의 수장이자 배회하는 사냥개, 션 헝크스는 달랐다. 그는 여전히 의심에 찬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며 물었다.

“생긴 게 날티가 좀 풍기던데, 어디 뒷골목 양아치 과는 아닙니까?”

은근히 통찰력 있는 지적이었다.

“으음…….”

린저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고뇌하고 있던 찰나였다. 이번엔 칼릭스가 한 수 빠르게 끼어들었다.

“양아치는 맞는데, 나쁜 놈은 아닙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최상의 답변을 뱉어낸 그는 유쾌한 듯 싱글거렸다. 멋들어진 얼굴 위로 드디어 사람들의 관심 끌기에 성공했다는 뿌듯함이 실려 있었다. 그가 연이어 말했다.

“그냥 미친놈이죠.”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려던 린저는 우악스레 소리쳤다.

“맞……, 형!”

“반박하지 마. 근거도 없잖아?”

확실히 미친놈이라는 근거는 많지만, 그렇지 않다는 근거는 부족했다. 혼자 서러워하던 린저가 정말 그 정도는 아닌데, 하며 말꼬리를 늘이던 때였다. 션이 깊은 한숨과 함께 쓸데없는 논란을 종식시켰다. 사실 그는 벌써 마린케이 이스턴 양아치설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나쁜 놈은 아니라니 됐습니다. 이젠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군요.”

그의 말마따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남겨진 이들끼리 마린케이라는 인물을 분석해 봤자 돌이킬 수 있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저 기다리는 것만이 전부였지. 그러나 기다림은 늘상 고역이었기에, 션은 좀처럼 불안함을 거두지 못하며 답답한 가슴께를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린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까부터 몇 번씩 마린케이에게 연락을 시도해 봤지만, 전원이 꺼져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자동 응답기의 목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들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아무리 함께 기다리고 있다고는 해도, 자식의 생사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만큼 절망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션은 눈물을 참듯 고개를 숙였다.

“허억, 허억…….”

그때였다.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자 칼릭스는 위로를 전하듯 션의 어깨를 짚었다. 탁! 그 손을 반사적으로 쳐낸 션이 불쾌한 표정으로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어라? 분명 울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근처에서 들려오던 가쁜 호흡의 주인이 션이 아닌 다른 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칼릭스는 린저의 옆구리를 치며 물었다.

“저 사람 누구야?”

“모르죠. 저야.”

돌아오는 대답이 무척이나 따가운 걸 보니 아무래도 린저는 마린케이를 미친놈이라고 명명한 칼릭스의 망발에 잔뜩 골이 나 있는 것 같았다. 맞는 말인 걸 나더러 어떡하라고. 억울함을 느낀 칼릭스는 수련장 문을 겨우 붙잡고 선 남자를 힐긋거리며 폴리스를 호출할까 고민했다.

션 헝크스도 저런 꼴로 찾아와서는 드잡이질을 해댔던 참이다. 칼릭스가 휴대폰을 꺼내 들던 그때, 간신히 호흡을 고른 남자는 번쩍 고개를 들어 올리며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쓰고 있던 은테 안경마저도 반쯤 흘러내린 모습으로 그들 앞에 도착한 남자가 다급하게 말을 쏟았다.

“혹시, 퍼스트 클래스의 수련생들 되십니까?”

“예. 맞습니다만.”

칼릭스는 껄끄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어째 오늘은 만나게 되는 사람마다 눈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맛이 가 있었다.

그토록 찾아다니던 퍼스트 클래스 수련생들과 마주하게 된 남자가 당장에라도 기절할 셈인 양 파리하게 질린 안색으로 소리쳤다.

“전하께서는, 전하께서는 어디 계시나요!”

전하? 가쉰에서 전하라는 칭호로 불리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햇볕을 닮은 듯 황홀하게 빛나는 머리칼과 바다처럼 푸른 눈을 지닌 제국의 총아.

“지금 당장 전하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라서, 꼭 전하께만……!”

하지만 그는 원한다고 해서 아무나 함부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려면 황궁에 찾아가시는 게 빨랐을 겁니다. 장례 기간 동안은 황궁 밖으로 못 나오실 테…….”

남자는 칼릭스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순간 그는 낙담한 얼굴로 거친 혼잣말을 반복했다. 안 돼. 안 되는데. 공포 영화에서나 연출될 것 같은 해괴망측한 상황에 칼릭스는 주춤거리며 걸음을 물렸다. 설마 테러범은 아니겠지.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기 전에 어서 남자를 저지해야 했지만, 그런 칼릭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린저는 조심스레 다가와 그와의 대화를 시도하려 들었다.

“무슨 일이세요?”

구세주를 찾듯 간절한 얼굴을 한 남자가 린저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전하를 봬야 합니다. 전하를 봬야 해요.”

달려오다 한바탕 넘어지기라도 했던 것인지, 그가 쓰고 있는 안경엔 자잘한 금이 가 있는 상태였다. 값비싸 보이는 회색 정장 또한 맥없이 흐트러져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장 중요한 점은, 그가 마치 도움이 필요한 사람처럼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때, 퍼스트 클래스의 고문을 맡았던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 휴고는 세상에게서 버림받은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기사도의 출발이라 가르쳤었다. 자신의 심장을 울렸던 그의 가르침을 생각해낸 린저는 남자의 몸을 부축해주며 말했다.

“그럼, 제가 황궁으로 모셔다드릴게요.”

그러자 칼릭스는 그를 말리려 소리쳤다.

“린저!”

“얼른 모셔다드리고 올 테니까 형이 이분들이랑 함께 있어주세요.”

칼릭스는 도저히 린저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자꾸 무시해도 될 만한 일에 끼어들려 하는 것인지, 결과가 불확실한 선택 속으로 몸을 던지는 이유는 대체 무엇 때문인지.

그런다고 해서 알아줄 사람도 없지 않은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누군가의 선행이 아니라 불행이었다. 칼릭스가 린저를 저지하려 발을 내디딜 때였다.

“같이 갑시다.”

“그래요, 같이 가요!”

뒤에서 그를 밀치며 튀어나온 두 사람이 옷소매를 걷어붙이며 결연하게 외쳤다. 오합지졸이 따로 없는 모습이었지만, 린저는 무척이나 감동한 듯 입술을 꽉 깨문 채였다. 칼릭스는 거의 미치기 일보 직전인 심정으로 그들이 자아내고 있는 소년만화의 한 장면을 구경했다.

“이대로 기다리고만 있을 수도 없고, 운이 좋으면 황태자한테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 아닙니까.”

황태자를 일컬어 그냥 ‘황태자’라고 칭하는 불경함에 칼릭스가 짜증스레 정정했다.

“전하입니다. 황태자 전하.”

“황태자 정도면 우리 이자벨라도 금방 찾아내주겠죠!”

그러나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호칭 바로잡기를 포기한 칼릭스는 어딘가 이상한 냄새를 잔뜩 풍기는 남자의 모습을 주시하며 복잡한 얼굴을 했다. 쉴 새 없이 떨고 있는 것도 그렇고, 손에 무언가를 꽉 쥔 채 절대 떨어뜨리지 않으려는 듯한 모습도 괜히 의심을 부추긴다.

그런 칼릭스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인 남자가 스쳐 가듯 물었다.

“……황궁에 가면, 백작도 있는 건가요?”

“예?”

“아니에요. 아닙니다.”

금세 고개를 젓기는 했으나, 그렇기에 더더욱 칼릭스는 찝찝함을 지우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저희들끼리의 형제애 확인을 마친 오합지졸 무리가 핍박당하는 남자를 구해내기 위해 칼릭스 쪽으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칼릭스를 내던지며 목소리를 높였다.

“황궁으로 갑시다!”

***

“내가 왜 같이 가야 하는 거지?”

“가장 신분이 높으신 분이니까요. 셀번 씨가 함께해 주시면 전하를 만나 뵙기가 훨씬 더 수월할 것 같았어요.”

그렇게 말하는 주제에 이미 차에 탑승한 상태라는 것부터가 매우 모순적인 상황이었지만, 성격 좋은 린저는 그마저도 친절히 대답해주며 피에르의 심기를 맞췄다. 누가 봐도 감탄사가 터져 나올 법한 사회생활이었다. 실제로 칼릭스는 무척 탄복하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제아무리 같은 귀족이라고는 해도 그들 사이의 우열은 분명히 존재했다. 특히나 황가를 견제할 만큼의 위상을 가진 공작 가문은 권력에 대한 집착이 남달랐다. 린저가 웃으며 말했다.

“감사해요, 셀번 씨.”

칼릭스는 린저가 성씨로 사람을 부르는 것은 또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묵묵히 운전대를 잡았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테헤란은 하나같이 다 해사하고 화사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도련님들을 보며 ‘가쉰의 미래는 아주 밝구나’ 따위를 떠올리고 있었다.

“일단 내 옆 사람이 안전벨트를 좀 착용해 주었으면 하는데.”

그때, 피에르는 안전벨트를 하지 않은 션을 탐탁지 않은 듯 눈짓하며 말했다. 그가 자동차 탑승 시 가장 중요하고 생각하는 것은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었다. 한 사람이라도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있지 않으면 피치 못할 사고에 완벽히 대처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 간과한 점이 있다면, 션 헝크스는 태어나 한 번도 승용차에 타본 적이 없는 평민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타고 다니는 대중교통에는 안전벨트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착용법을 모르는 상태로 괜히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규 교육까지 모두 마친 테헤란은 눈치로나마 안전벨트를 착용할 수 있었으나, 션은 그렇지 못했다. 붉어진 귓가 전체가 션이 느끼고 있을 창피함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션이 머뭇거리며 말을 뱉을 때였다.

“이게…, 그러니까.”

불현듯 자신의 안전벨트를 풀어헤친 피에르가 기계처럼 말했다.

“생각해 보니 나도 좀 답답하군.”

그 순간 운전 중인 칼릭스를 제외한 모두는 그를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저를 향한 당혹스러운 시선 속에서도 거만하게 고개를 쳐든 피에르가 다시금 안전벨트를 손에 잡았다. 그 행동의 의도를 눈치챈 린저는 저도 모르게 살짝 미소 지었다.

“이제 다시 착용해야겠어.”

공작 가문 사람들이 어떤 귀족들보다도 오만하고, 신분 의식에 찌들어 있다는 소문은 사교계에 한 번이라도 발을 들인 적 있는 이라면 수긍할 수 있을 법한 사실이었다.

특히나 프리드리히 학원 시절에 피에르와 테니스 클럽 활동을 같이한 적 있는 칼릭스는 저 새끼가 뭘 잘못 처먹어서 저러는 거지, 하는 표정으로 백미러를 힐끔거렸다.

아주 천천히, 나무늘보라도 된 것처럼 안전벨트를 차는 피에르의 모습을 훔쳐보던 션은 마침내 저 역시 안전벨트 착용에 성공할 수 있었다.

자신보다 열 살은 더 많아 보이는 사내가 들뜬 얼굴로 안전벨트를 쥐고 있는 것을 응시하며, 피에르는 입학 초기에 황태자가 제게 말했던 ‘네 그 머저리 같은 생각들’이 무엇을 의미했던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깨달음에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는 없지.

“곧 도착할 것 같은데, 전하께서는 아직도 연락이 없으셔?”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칼릭스의 질문에 당당히 대답했다.

“휴대폰을 계속 꺼놓고 계시는데.”

“그럼 일단 들어가 보도록 할게. 운이 따르면 만날 수 있겠지.”

이쯤 되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누구도 함부로 확신할 수 없었다. 황궁으로 향하는 마지막 도로에 들어설 즈음, 린저가 맨 뒷좌석에 홀로 앉아 있는 남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그의 섬세한 마음 씀씀이에 칼릭스는 안도감을 느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남자를 안심시키려던 의도였지만, 어째선지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멍한 얼굴로 차창 너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서인지 황궁에 도착할 때까지도 린저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남자의 모습은 마치 절벽 위에 걸터앉아 있는 사람처럼 불안해 보였다.

***

“이제야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 볼 생각이 들었나 봐요.”

“…….”

“살아서 나갈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것도 황태자씩이나 되는 분이.”

비웃음이 섞인 조롱조의 말이었다. 어쩌면 묵묵히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마린케이를 도발하기 위함인 것 같기도 했다. 무엇이 됐든 기분이 더럽기는 매한가지였던지라, 마린케이는 굳이 미헤르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서 이 순간을 견뎠다. 가장 거슬리는 것은 황태자의 목숨을 제 손에 쥐고 있다고 확신하는 듯한 남자의 자신감이었다.

“알아서 여기까지 찾아와 주셨는데,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죠.”

생사의 권능을 가진 주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미헤르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침묵하던 마린케이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러기 전에 먼저 본인이 죽을 수 있다고는 생각 안 해봤습니까?”

마린케이의 시선은 한껏 끌어 올려진 남자의 입꼬리를 향해 있었다. 자신에게 겨누어진 글록을 보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은 미헤르가 살며시 여자를 눈짓했다.

달칵. 그녀의 뒤통수에도 총구가 겨누어지며 대치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것마저도 미헤르에게는 유희에 불과한 듯, 연한 색의 눈동자 위로 즐거움이 스며들어 있었다.

“목숨값을 놓고 저울질을 해보시겠다는 거군요.”

그가 짓궂게 말했으나, 어불성설이었다. 사람 목숨 가지고 수작 부리는 게 누구인데. 마린케이는 그저 그 장난질에 장단을 맞춰준 것뿐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좀이 쑤셔 죽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이 순간 마린케이가 신경 쓰고 있는 것은 댄 미헤르 쪽이 아니었다. 여인에게 총구를 들이대고 선 저 가드 새끼부터 쏴 갈기면 어떻게 되려나.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도록 손을 조준하고, 그 후에 노예상 새끼를 쏴버린다면.

“좋아요. 한번 해보세요.”

“…….”

“못 쏠 거 알아요. 기사란 것들이 다 그렇지 뭐.”

하지만 그러기엔 여인과 가드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미헤르의 말대로 마린케이는 그를 쏠 수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으나, 무고한 이를 희생시킬 수는 없다는 기사도가 그의 발목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은 섣불리 행동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존재했다.

다른 곳에 붙잡혀 있을 노예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댄 미헤르를 죽이지 않고서 생포해 가야만 했다. 하지만 저 벌레 같은 꼬락서니를 보고 있으려니 그냥 이대로 실수인 척 죽여버리고만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물론, 현실로 옮기기에는 위험 부담이 큰 계획이었다.

깔끔히 충동을 갈무리한 마린케이는 그제야 먼저 글록을 내렸다.

“원하는 게 뭡니까.”

“이제야 질문을 해주시네.”

여린 풀잎처럼 웃음 짓는 남자의 얼굴은 덧없이 유약해 보였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미심쩍어 보이기도 했다. 이래서 인간의 겉가죽이란 대단히 무용한 것이다. 산들바람처럼 살랑거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마린케이를 짜증에 차도록 만들었다. 아무래도 스스로를 심판자쯤으로 여기고 있는 모양인데, 그게 더 한심하고 역겨워 보였다.

“어릴 땐 귀족이 되고 싶었어요. 사창가에서 살면 가끔 늙은 귀족들이 어린 남자애를 찾을 때가 있거든요. 끌려가서 그 사람들을 극진히 대접해주면, 돈이며 보석이며 하는 것들이 전부 다 내 손 안에 떨어졌어요.”

심약한 누군가가 들었다면 절로 애처로운 표정을 짓게 될 만한 얘기였음에도 정작 얘기를 꺼내는 당사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활력이 넘쳐 보였다. 그러나 불행한 인생사를 가진 이들은 많았다. 그들은 저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좌절했고, 분노했으며, 세상의 간악함을 저주했다.

어린 마린케이가 자신의 인생을 기구하게 여기지 않았던 이유는 그런 사람들을 너무도 많이 마주하고 자란 탓이었다. 제국의 그림자에 발이 매여, 말 못 할 끔찍한 일들을 겪으며 살아가던 사람들. 그들이 바로 마린케이가 알던 뒷골목의 희생양들이었다.

그럼에도 확언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사연을 명분 삼아 모든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비참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해서 죄 없는 누군가의 인생을 짓밟을 권한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미헤르가 와인글라스를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귀족 놀음이 뭐 별거라고.”

“…….”

“차라리 황제가 되는 게 낫지 않을까 했던 적도 있어요. 그 사람 생일엔 온 나라가 축제며 파티며 하는 것들로 들썩이는데, 내 생일은 날 낳아준 사람조차도 기억을 못 한다는 게 어찌나 분하던지. 혼자 케이크를 사서 초를 불어 봐도 기분이 영 나아지지가 않더군요.”

하지만 목소리와는 달리 와인 잔을 잡은 손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린케이와 대치하듯 냉랭한 시선을 던진 그는 테이블을 내리치며 말했다.

“어린애가 사창가에 처박혀 굴러다니고 있는 동안 높으신 분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데요. 기사도를 숭상한다던 가쉰은? 가쉰의 기사도가 이딴 거였을까요?”

미헤르는 기사도를 욕보이는 것과 동시에 기사에게 굴욕을 주고 싶은 것만 같았다. 비뚤어진 원망과 분노가 향하고 있는 곳은 명백했으나, 마린케이는 그게 왜 하필이면 기사가 되고 싶다는 꿈 한번 꿔본 적 없는 자신이 되어야 하는 건지 납득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미헤르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내뱉었다.

“바꾸는 것보다는 망가뜨리는 게 나아요.”

“…….”

“더 쉽고 간단하니까.”

“망가뜨리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마린케이의 질문에 남자는 순수하게 되물었다.

“권선징악이라고 못 들어봤어요?”

“누가 악인지 잘 알고 계시나 봅니다.”

그걸 과연 순수하다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황태자라는 사람을 악으로 규정하고 있는 모양인지, 미헤르는 거듭된 마린케이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완강히 답했다.

“그거야 당연히, 전부 다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죠.”

솔직히 말하면 마린케이 역시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없지 않았다. 비단 마린케이뿐만이 아니라, 골목에서 태어나 골목에서 살아온 모든 이들이라면 동감할 법한 생각이란 것도 맞았다.

없이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해 그 무엇도 욕심내지 못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대다수 평민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삶이었다. 그러니 가진 자들은 존재 자체로 해악이다.

“그 사람이 바꿀 수 있다면요?”

그렇게 생각했던 적도 분명 있었다.

“망가뜨리지 않고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땐 어떡할 겁니까.”

막연한 이상론으로 들릴 수도 있다. 햇빛은 무성한 나무와 꽃들이 어우러진 화원으로 향할 뿐이지, 절대 시궁창 안을 비추지 않았으니까. 그 화원 속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끝내 따스한 햇볕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죽어가야만 했다. 그러나 결국 태양은 움직이기 마련이었다.

마린케이는 평민인 제게 욕심을 내보라 말하던 황태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린 노예에게 손 내밀던 그를, 자신이 변하게 되면 죽여달라 청하던 그 새하얀 성정을.

그런 자신의 주군은 금발과 벽안을 가진 황실의 상징이었다.

“그랬다면 내가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이가 시궁창 안에 발을 들이려 한다면, 온갖 비난과 비웃음을 견디며 그곳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그리하여 태양이 가장 낮은 곳을 비추게 될 것이라면.

“그러게 못 본 척, 못 들은 척 얌전히 살고 계시는 게 나았을 텐데. 치기를 정의 삼아 구석구석을 들쑤셔대니 본인 명줄을 재촉한 거죠. 안 그래요?”

미헤르의 손짓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가드가 여인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그녀의 목을 아프게 꺾은 가드는 턱 밑으로 총구를 가져다 대며 마린케이를 바라보았다.

“헛된 믿음은 버리고, 이제 선택하세요. 기사님.”

미헤르가 가볍게 명령했다.

“사리 분별도 못 하는 개는 필요 없으니까.”

***

샤를은 계속해서 이자벨라를 제 뒤로 숨긴 채 걸었다. 그의 널찍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자벨라는 조금 전에 받았던 청록색 가면을 더욱 강하게 손에 쥐었다. 소중한 것을 보듬듯 따스하게 들려왔던 목소리가 아직도 자신의 귓가를 간질이고 있는 듯했다.

어떤 사람일까. 태어나 한 번도 이런 귀족을 만나본 적은 없었다. 매캐한 연기만이 가득한 도심 속, 소녀가 마주했던 귀족의 얼굴들은 너무도 무정하고 비정할 뿐이었다. 그처럼 상냥하게 웃어주지도,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지도 않았다.

「혹시 일이 잘못될 것 같으면, 그 가면을 보여주면서 내가 네 주인을 죽였다고 말해.」

이자벨라는 가면 너머로 엿보이던 검은 눈을 떠올렸다. 저와 똑같은 색이었지만, 남자의 눈동자는 어딘지 모르게 기묘한 구석이 있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

이렇다 할 근거는 없었으나 그에게는 저보다 더욱 청명하고 화려한 색감의 눈동자가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예를 들어 하늘과 바다를 두루 닮아 있는 푸른색이라든가.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그들 사이로 잠시간 불투명한 침묵이 흘렀다.

호텔은 18층짜리 고층 건물이었고, 지금 두 사람이 위치한 층수는 겨우 7층에 불과했다. 계단을 이용한다고 해도 감시 카메라를 피해 갈 수는 없을 테니, 최대한 자연스러운 모습을 유지하며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편이 나았다.

“안 타고 뭐 해요?”

의아함에 찬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샤를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만약 이 안에서 눈치 빠른 가드를 만나게 되기라도 한다면 탈출이 매우 곤란해질 터였다. 특히나 지금은 혼자인 상태도 아니었으니 더더욱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해서 계단을 선택하기에는 대놓고 정체를 드러내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어느 귀족이 노예를 데리고 계단을 오르내리려 할까. 그것 말고도 난관은 끝도 없이 존재했다. 엘리베이터로 갈 수 있는 층이 고작해야 16층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한 번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실망한 소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아쉬움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오른편 가장자리에 위치한 CCTV를 눈에 새긴 샤를이 이자벨라에게 물었다.

“아이들 상태는 어땠어?”

이자벨라는 또다시 누군가 자신의 심장을 때리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무거운 죄책감에 하염없이 목이 졸리는 기분이기도 했다. 땀에 젖은 손바닥을 옷자락에 문질러 닦던 이자벨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들 조금씩은 다쳐 있는 것 같았어요. 사실 다쳤다기보단 상처가 많았는데, 흉터가. 특히 흉터가 많았어요…….”

“구체적으로 설명 안 해줘도 괜찮아.”

그런 이자벨라를 안타까이 들여다보던 샤를이 떨리는 목소리를 가로막으며 짧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턱 끝에서 떨어지는 단발을 보고 있으려니 카밀라 생각이 난다. 동년배인 것 같은데, 겨우 열네 살이나 됐으려나.

이렇게 어린아이들을 데리고서 인간 이하의 짓거리를 벌이려 하는 쓰레기 새끼들을 어떻게 아작 내면 좋을지, 이제는 그 방법을 생각해내는 일도 지겹기 그지없었다.

죽음이라는 형벌로도 감히 메울 수 없을 끔찍한 악행. 세상은 이렇듯 늘 그의 이상을 배반하고, 흠집을 내기 바빴다. 간신히 고통스러운 마음을 추스른 이자벨라가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당신…, 귀족인 거 맞죠?”

여전히 그의 말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제 옷자락을 동아줄 잡듯 꽉 부여잡고 있는 소녀의 손을 바라보던 샤를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시선을 옮겼다.

문득, 그는 마린케이와 함께 보았던 베사에서의 밤하늘을 떠올렸다. 갖가지 색의 폭죽으로 수놓아지던 그 깨끗한 하늘 위를. 한 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는 새카만 어둠은 누구에게나 두려움을 안겨주기 마련이었다.

“난 거짓말 잘 못해.”

허나 그곳에 비추어지는 불빛이 단 하나라도 존재한다면, 적어도 그 길목 위에 선 많은 이들이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가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이야말로 그가 하고 있는 가장 큰 거짓말에 해당했으나, 일단은 소녀를 안심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가 흘러내린 머리칼을 정돈해 주며 미소 지을 때였다.

12층에 다다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엘리베이터가 정지하며 문이 열렸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무탈하게 올라왔으니 제법 선방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샤를은 소녀를 제 등 뒤로 숨기며 글록을 고쳐 잡았다. 여차하면 그냥 쏴버린 후 감시 카메라 역시 부숴버릴 작정이었다. 위치가 들통나긴 할 테지만 그렇다고 희희낙락 잡혀주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당신이 왜.”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남자는 샤를 역시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가 샤를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얼떨떨한 시선이 점차 이자벨라에게로 향했다. 소녀가 들고 있는 청록색 가면을 확인한 그는 복잡미묘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거기 누구 있어?”

나머지 인원들은 객실을 뒤지고 있는 중인 건지, 엘리베이터 앞을 가로막고 선 남자의 등 뒤로 긴박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에 남자는 난처해하며 숨을 골랐다. 무늬 없는 청록색 가면은 그가 눈앞의 이에게서 찾아냈던 그 가면이 확실했다.

리볼버를 쥔 남자의 손 위로 힘줄이 돋았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것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 저 가면을 고작 노예 따위가 지니고 있는 것일까.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샤를의 예상과는 다른 말을 입에 담았다.

“없습니다! 이만 남은 객실로 가보겠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을 잡고 있던 그는 서서히 손에서 힘을 풀었다. 아주 작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까 전에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이 도덕을 부인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살아남는 방법으로 도덕을 택할 수는 없으니 무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뿐이지. 그러나 적절한 기회와 순간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도덕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 가진 양심이란 것이었다.

“무사히 가십시오.”

담백한 인사말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땅끝을 적시는 한 줄기 햇빛이 그곳을 비추어주기만 한다면, 시궁창 속에서도 끝내 생명은 태어나기 마련이다. 그것이 샤를 소피아 엔스가 낭만을 꿈꾸는 이유였다.

***

호텔을 빠져나오는 일은 생각보다 가뿐했다. 아마 황태자가 난동을 피워댄 덕분일 것이다. 이미 몇몇 귀족들이 돌아가겠다며 실랑이를 피워댄 후인지, 가드는 극심한 피로에 시달리는 얼굴로 레온하르트의 출품 거부를 허락했다.

“17번 출품자님께서 퇴장하십니다. 준비 부탁드립니다.”

이런 더러운 경매장에 참여한 인원이 제 앞으로 열여섯 명이나 더 있다는 소리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비릿한 조소를 머금으며 가드를 따라 걸었다.

객실에서 만났던 침입자로부터 뺏어온 리볼버는 여전히 그의 품 안에 들어 있었다. 누군가와 무전을 주고받던 가드가 싸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야, 이 새끼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거기 있는 애들이 밖에 나가서 폴리스라도 만난다고 생각해 봐. 그럼 우리 전부 다 인생 종치는 거야, 이 등신 새끼야!”

순조롭게 그를 따라 호텔을 빠져나가면서도 레온하르트는 삭막하게 굳어진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소년이 히끅거리며 입을 틀어막기 시작했다. 들어 올려진 리볼버가 어느덧 가드의 뒤통수를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올라가서 애새끼들 다 죽여버려. 뭐? 그럼 거기 올라간 새끼도 같이 죽여버리면 되잖아! 귀족이든 뭐든 알 게 뭐야, 당장 내 생사가 달렸는데. 그 새끼가 거기까지 가는 동안 너희는 대체 뭘 하고…….”

미리 준비되어 있던 보트 앞에 거의 다다른 시점이었다. 피부 위로 와 닿는 서늘한 금속의 감촉에, 가드는 하던 말을 멈추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덜컥. 방아쇠를 끌어당긴 레온하르트가 경악에 찬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한마디를 읊었다.

“그 새끼가 누구야?”

“…….”

“두 번 안 물어.”

타앙! 아무리 소음기를 달아놓았다고 해도 총성은 총성이었다. 살을 꿰뚫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가드는 총에 맞은 다리를 부여잡고서 풀숲 위로 쓰러졌다.

흘러내리는 핏물이 또 한 번 레온하르트의 구두 굽을 적셨다. 소년이 귀를 막으며 주저앉았다. 남자의 끔찍한 비명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아아아악……!”

“그 새끼가 누구냐니까.”

무전기에서 연신 무어라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자신에게서 벗어나려는 소년을 강한 힘으로 잡아챈 레온하르트는 한 번 더 총을 들어 가드를 겨눴다. 가드가 겨우 목소리를 냈지만, 레온하르트의 얼굴 위에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흐윽, 모, 몰라요……. 귀족, 처음 보는 귀족이라는 것만…….”

피에 젖은 남자의 하반신을 내려다보던 소년이 따갑게 소리 지르며 레온하르트의 팔을 때렸다.

“놔요! 놓으라고요! 살인자, 당신은 살인자야!”

사력을 다한 거센 반항이었음에도 그의 품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여전히 단단하게 소년을 끌어안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저를 향한 비난을 감내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안 돼요! 제발, 제발 쏘지 마세….”

맞다. 살인자. 그러나 지금 상대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도리어 목숨을 잃게 되는 것 역시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쩌면 이런 상황 속에서도 다른 방법을 고안해낼 누군가가 존재할지도 몰랐지만, 그 눈부신 금발을 가진 사람과 자신이 동일선상에 놓여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넋을 놓은 사람처럼 미친 듯이 소리 지르는 소년을 보트 쪽으로 끌고 가며 말했다.

“네 말이 전부 다 맞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끔 데려간다고 약속했는데, 마르코와의 약속은 이렇게 어겨버리고 말았다. 소년에게 남겨진 끔찍한 상처와 트라우마를 어떻게 보상해 주면 좋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는 처음 자신이 사람을 쏘기 위해 총을 치켜들었던 날을 떠올렸다.

신분이 없던 그가 유일무이하게 소속될 수 있었던 공간은 암암리에 존재하는 지하 사업장들뿐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선 마땅히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야만 하는 곳. 그곳에 기사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고한 목숨도, 거룩한 정의도 없었다.

“난 더러운 새끼야.”

거부하는 소년을 억지로 보트 위에 올린 레온하르트는 당혹스러워하는 운전사에게 입구에서 돌려받았던 자신의 지갑을 던졌다.

“멍청한 새끼 하나만 데려오고 죗값 치를게.”

“…….”

“미안해, 버나드.”

그가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는 것과 동시에 보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년이 당황스레 선반을 짚었지만, 시끄러운 엔진 소리와 함께 벌써 보트가 출발하고 난 후였다. 레온하르트는 핏방울이 튄 얼굴을 닦으며 뒤돌아섰다.

샤를 소피아 엔스, 이 빌어먹을 새끼가.

백작이나 댄 미헤르 하나만 잡아도 성공한 계획이었을 것을, 호텔에 갇힌 아이들을 전부 구출하겠다는 그 심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증거 인멸을 위해 그들 전부가 목숨을 잃게 될 운명이라 했을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는 꿋꿋이 호텔로 걸음을 내디뎠다.

보트의 엔진 소리가 점차 아득하게 들려온다.

「그렇다고 관계없는 사람을 끌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평민의 말이 옳았다. 죄 없는 아이를 끌어들인 대가는 참혹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서야 경매장을 찾아낼 수도, 그곳에 직접 발을 들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으로 죄의식에 무뎌지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었다. 다만 조금 애석해질 뿐이다.

난 너희처럼 정의롭게 살아갈 만한 인간이 못 돼. 하지만 샤를, 네 멍청한 욕심과 이상을 진정으로 미워할 수는 없었노라 인정하게 된다면.

「대체 왜 이렇게 망가진 거야?」

나도 한 번쯤은 사람답게 살아봐도 괜찮은 거 아닐까. 한때, 그에게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던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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