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무너지지 않는 탑
상황 돌아가는 꼴이 대단히 수상쩍었다. 황궁 안에 입성하는 것까지는 무탈히 이루어졌으나, 막상 차에서 내리고 보니 웬 가드들이 전부 그들을 에워싸 방문 목적을 묻는 것이 아닌가.
가장 당황한 것은 당연지사 거창한 대의 없이 동행했던 칼릭스였다. 그는 머뭇거리며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았다. 지금이라도 다시 왕립학교로 돌아가는 게 어떨까 싶었지만, 오만하게 콧대를 세운 피에르는 그런 커티스를 얼간이 취급하며 제멋대로 입을 열었다.
“전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왔다는데, 대체 왜 돌아가라고 패악질을 하는 거지?”
아니다. 아니라고! 패악질은 가드가 아니라 네가 하고 있는 거야,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아!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칼릭스뿐인 건지, 나머지 오합지졸들은 동의하는 얼굴로 거세게 고개를 끄덕이는 데 열중이었다. 그 사이에 린저 아일랜드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한탄스러울 지경이었다. 가드가 당황하며 반복적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방문이 불가한…….”
“전하께 이미 허락을 받은 상태라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전부 다 새빨간 거짓말이었으나 누구도 양심이 찔리는 얼굴이 아니었다. 얘들이 대체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걸까. 칼릭스는 마지막 남은 양심을 사수하려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곧 우두커니 서 있던 누군가와 부딪혀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까부터 진정하지 못한 채 몸을 떨고 있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등 뒤로 손을 감춘다. 애당초 숨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지도 않았건만, 저렇게 방어 태세를 취하니 오히려 더 의심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여전히 자신과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남자를 바라보며, 칼릭스는 점잖게 물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전하를 봬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존칭은 그에게 남아있는 기사도의 파편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남자가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않자, 칼릭스는 참았던 한숨을 내쉬며 비난조의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 하나 때문에 지금 몇 사람이…….”
“감히 셀번 가를 상대로 협박을 하려 해?”
그러나 말을 잇던 도중 들려오는 충격적인 발언에 그만 입을 다물게 되고 말았다.
가드를 당장에라도 쥐어팰 것처럼 가까이 몸을 붙인 피에르는 흉흉한 눈빛을 무기처럼 들이밀며 생난리를 피웠다.
“협, 협박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정말 오해이십니다.”
“진위 여부 판별을 위해 고문 변호사를 만나고 싶지 않거든 돌아가길 바란다고, 방금 당신 입으로 그러지 않았나?”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그 자체를 협박이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많았다. 하지만 ‘셀번’이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 때문일까, 가드는 그의 물음에 답하지 못하며 안절부절 주위를 살폈다.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칼릭스는 신분 확인도 되지 않은 남자를 위해 저렇게까지 뛰어드는 피에르 셀번의 정의감에 도통 공감하지 못했다.
사실 피에르의 목적은 따로 존재했던지라 그 속셈을 알지 못하는 이라면 누구든 그의 기행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피에르가 원하는 것은 오직 황태자를 만나 어디 수척해진 구석은 없는지 그 꽃 같은 얼굴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착실히 연기력을 쌓아온 피에르가 감히 황태자와의 약속을 거짓 취급하는 것이냐며 쐐기를 박던 때였다. 누군가의 품위 있는 목소리가 상황을 중재하듯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약속인지, 나도 좀 들어볼 수 있을까요?”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는 왕립학교 학생들은 전부 다 사색이 되어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들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션과 테헤란 역시 분위기를 따라 주춤거리며 자세를 낮췄다. 그녀의 결 좋은 금발을 멍하니 바라본 한 남자만이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뒷걸음질 칠 뿐이었다. 맑은 색감을 지닌 푸른 눈이 하늘 아래 드러났다.
“다들 일어나세요.”
검은 정장을 입고 서 있는 마리아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엄격한 무게가 실려 있었기에, 그들은 몸을 일으키면서도 숙였던 고개를 들지는 못했다.
“피에르.”
무려 1황녀, 마리아 로즈 엔스와의 대면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불린 피에르가 그전까지의 야수 같은 얼굴을 지우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녀님.”
“전하와 나누었다던 약속이 뭐죠?”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약속은커녕 황제의 승하 이후 제대로 된 대화 한번 나눠볼 기회가 없었던 그와 황태자였다. 린저가 상황 수습을 위해 걸음을 내디디려던 찰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 뒤에 숨어 가쁜 숨을 고르고 있던 남자가 빠른 속도로 튀어나왔다. 마리아의 앞에 완전히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그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겠는 듯, 계속해서 어깨를 들썩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만큼은 무척이나 또렷하고 명쾌하게 흘러나왔다.
“황녀님! 저, 저는 벤 해리스라고 합니다. 얼마 전까지 벌린 경 수하에서 일했고, 전하께 개인적으로 명령받았던 일이 있어 결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황궁까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부디, 부디 전하를 만나 뵙게 해주십시오! 긴급히 말씀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그 처절한 모습에 당혹감을 느낀 것은 비단 마리아뿐만이 아니었다. 린저 역시 갈피 잃은 시선으로 남자와 마리아를 번갈아 볼 수밖에 없었다.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향해 소리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를 그토록 절망스럽게 만든 원인은 따로 있었다.
마리아의 옆에 서 있던 장신의 사내가 그녀보다 앞으로 나서며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그는 조금은 지친 듯한 어투로 남자를 향해 말했다.
“어디로 증발한 건가 싶었는데, 여기 있었군.”
실핏줄이 잔뜩 터진 눈으로 사내를 노려보던 벤이 짓씹듯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세바스찬.”
“자네도 이 사건에 엮여 들어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말이야.”
이상한 말이었다. 사내의 목소리에 마리아는 차갑게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돌렸다.
“열다섯도 되지 않은 어린애들을 상대로, 전하께서는 대체 무슨 일들을 벌이고 다녔던 거지?”
“거짓말! 거짓말입니다!”
당당하게 터져 나온 세바스찬의 목소리에 벤은 분노가 깃든 숨소리를 잇새로 뱉어냈다. 세바스찬이 입에 올린 말들은 전부 다 거짓말이었다.
자신이 쥐고 있는 USB에 들어있는 모든 사진과 동영상들이 전부 그의 데스크톱에서 발견된 것들인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그러나 세바스찬은 연신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벤이 세바스찬을 거세게 밀어낸 후 마리아에게로 뛰어갔다. 땀에 젖은 USB를 서둘러 옷소매에 문질러 닦은 그가 볼품없이 떨리는 손을 들어 그것을 건넸다.
“꼭, 꼭 전하께 전해주십시오. 황녀님께서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 아이들이, 아이들이 벌린 경에게…….”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바스찬이 경고하듯 말했다.
“백작 각하께선 아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직접 경매장으로 가셨네.”
“닥쳐! 분명 당신 컴퓨터에 들어있던 것들이잖아, 세바스찬!”
“그거야 물론 각하의 분부대로 증거를 모으고 있던 중이었으니까.”
그에 벤이 울분을 토해내며 세바스찬에게로 달려들려 할 때였다. 그런 그를 제지한 것은 다름 아닌 피에르 셀번이었다.
“황녀님 앞에서 무슨 추태를 보이는 거야. 예의를 지켜.”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럴 수는 없다구요!”
벤은 파일 속에서 보았던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들의 모습 또한 그의 머릿속을 아스라이 스쳐 지났다.
아무리 울고 비명을 질러대도 그들의 악행은 멈추지 않았다. 잔인한 폭력이 행해질 때마다 그는 구역질을 하며 눈을 내리감았고,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것에는 가까스로 귀를 틀어막았다.
“해리스라고 했나요?”
그때, 요란한 상황 속에서도 쉽게 이성을 잃지 않는 단단한 목소리가 벤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가 비통함으로 인해 눈물범벅이 되어버리고 만 얼굴을 들어 올리며 마리아에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제가 직접, 직접 확인한 것들이에요. 전하께서 부탁하신 대로 사진을 찾으려다가…….”
“무슨 사진을 말하는 건지, 내게 알려줄 수 있어요?”
그러나 벤은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황태자가 그에게 찾아오라 명령했던 것은 평민과의 키스 사진이 담겨 있는 파일이었으니까. 떨리는 손을 들어 눈물을 닦은 그는 간신히 꼴사나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건,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맹세컨대 절대로….”
“더는 이 작자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당장 출발하지 않으면 또 얼마나 많은 아이의 인권이 희생될지 모르는 상황 아닙니까.”
세바스찬이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마리아를 재촉했다. 잠시 벤을 응시하던 마리아는 절망한 그의 얼굴을 뒤로하고서 천천히 한숨을 뱉었다. 호기로운 표정을 짓던 세바스찬이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새되게 소리쳤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동행해 주세요.”
“마리아 황녀님!”
감히 누구 앞에서 언성을 높인단 말인가! 곧바로 품에서 단검을 빼낸 린저는 칼끝으로 세바스찬의 목을 겨눴다. 마리아가 냉정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그럼 참고인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여기다 내버려 두고 갈까요? 진실을 은폐하려 하는 누군가가 그들을 매수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어떻게 하고요? 세바스찬, 만약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황태자가 어린아이들을 유린하고 학대한 것이라면, 나는 이 손으로 직접 그를 법정에 세울 생각입니다.”
마리아 로즈 엔스는 법학자였다. 세상의 법도를 판가름하는 직업군을 가진 여인이 엄한 얼굴로 좌중을 훑었다.
“이제 왕립학교 수련생들에게 묻겠습니다. 만일 그대들의 주군이 부패한다면, 그대들은 어떤 선택으로 말미암아 기사도를 실현해야 합니까?”
그 누구도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결심한 듯, 린저가 사내의 목젖을 겨눴던 단검을 내리며 강인한 목소리로 답했다. 퍼스트 클래스의 수련생들은 모두 주군의 뜻에 따라 움직이길 교육받은 체스 말이었다.
“진실로 경애한다면 그를 처단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라 배웠습니다. 그것이 기사도의 길이니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군의 변심마저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교육받지는 않았다.
“좋습니다.”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마리아가 정장 재킷의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
“이제, 그대들의 정의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보죠.”
***
이쯤에서 마린케이 이스턴은 자신이 품고 살아왔던 소박한 신념을 재차 떠올려 볼 수밖에 없었다. 쥐 죽은 듯이, 없는 듯이 살자. 누구의 눈에도 띄지 말고 무탈하게. 시계태엽처럼 반복되는 인생사를 벗어나려 하지도 말고, 무언가를 욕심내지도 말고. 그것이야말로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소망이 아니었을까?
빌어먹을. 다 필요 없다. 마린케이는 댄 미헤르의 요구에 대답하지 않은 채 총을 그에게로 던졌다. 제 앞으로 떨어진 글록을 웃으며 바라본 미헤르가 칭찬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포기가 빠르시네요.”
“납득이 빠른 겁니다.”
말을 해도 꼭 지 같은 말들만 골라서 하는 노예상 새끼의 얼굴은 역겹기 짝이 없었다. 글록에서 탄창을 꺼낸 미헤르가 빈 총을 바닥에 내던지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여인의 머리채를 부여잡고 있던 가드 역시 손에서 힘을 풀었다. 반동에 의해 잠시 몸을 휘청인 그녀가 이를 악무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마린케이의 손등 위로 또다시 푸른 핏줄이 올라섰다. 저절로 감정을 억누르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앞이라도 보이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미헤르는 가증스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저분 말씀이신가요?”
“똑바로 보고 걸을 수는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음. 그건 힘들 것 같아요, 기사님.”
가냘프게 미소 짓는 미헤르의 얼굴에, 마린케이는 차마 뱉어내지 못한 욕설들을 모두 집어삼켰다. 생글거리는 얼굴을 과녁 삼아 총질을 해대고 싶었다. 이 쳐 죽일 새끼.
“절 보란 듯이 노려보는데, 자칫하다 제가 저분 눈알이라도 뽑아버리고 싶어지면 큰일이잖아요?”
마린케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서 표정을 구겼다. 그를 지켜보던 미헤르는 무엇이 그리 유쾌한 것인지, 스스럼없이 미소를 드러내 보이며 마린케이에게 속닥거렸다.
“장난이에요.”
그 순간 마린케이는 테이블 위에 남아있던 날카로운 식기들을 모조리 벽 쪽으로 집어 던졌다. 미헤르가 앉아 있는 곳의 바로 뒤쪽 벽이었다. 조금만 더 거리를 비틀었다면 포크와 나이프 전부가 미헤르의 얼굴 위로 떨어졌을 것이 분명한 위치였다. 가드가 분노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마린케이는 당당히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이것도 장난으로 쳐주시죠.”
이윽고, 미헤르는 흐르는 정적을 이기지 못한 채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가 눈물을 닦으며 여인에게 손짓했다. 그녀의 눈을 가린 안대를 풀어주라는 명령이 뒤따르자 가드는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곧바로 안대를 풀어 내렸다. 그제야 마린케이는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따가운 조명 아래서 눈가를 찌푸리고 있던 그녀가 서서히 눈을 떴다. 역시나, 콧등 위에 주근깨를 지녔던 그 여인이 맞았다. 미헤르가 유쾌한 투로 말을 걸었다.
“인정할게요. 당신 되게 재미있어요.”
너 같은 새끼한테 재미있어 봤자 뭐 하겠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아 입을 다물 뿐이었다. 침묵의 의미를 멋대로 받아들인 미헤르가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의미 없는 칭찬을 중얼거렸다.
“당신이랑 있으면 내가 꼭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이 천인공노할 새끼가. 만약 댄 미헤르와 비슷한 류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만화책이 존재했다면 마린케이는 망설이지 않고서 그 책을 갈기갈기 찢어버렸을 터였다. 그걸로도 모자라 아예 세상에서 흔적을 지워버릴 수 있도록 활활 소각시켜줄 의향도 있었다. 더 나아가선 작가를 찾아가 두드려 팰 생각도 있었고.
“평생 엔스한테 쫓겨 다니면서 살 계획은 없었으니, 잘된 일이겠죠.”
마린케이는 그가 제 목숨을 살려두는 이유를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제아무리 가쉰을 떠나 도망친다고 한들, 제국을 손에 쥔 엔스 황가의 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어쩌면 평생을 도망자 신세가 되어 쫓겨 다니게 될지도 몰랐다. 사는 게 죽느니만 못한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 당연했고 말이다. 그러니 보험을 들어둬야 했겠지.
장차 가쉰의 황제로 즉위하게 될 이가 소중히 여기는 무언가를 빼앗아 도망치는 것보다 더 탁월한 방법이 존재하긴 할까. 미헤르는 싱그럽게 눈을 접으며 마린케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슬슬 출발해야겠어. 일어나세요, 기사님.”
그의 말에 따라 몸을 일으킨 마린케이는 제게 건네진 손을 무시하고서 걸어 나갔다. 스치듯 보았던 연갈색 눈이 짙은 흥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는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억누른 채 철문을 발로 걷어찼다.
미헤르가 간과한 점이 있다면 단지 그것뿐이었다. 마린케이 이스턴은 누군가의 협박을 곧이곧대로 들어주고 있을 만한 위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 품속에 숨겨두었던 나머지 리볼버 하나를 손에 쥔 마린케이는 사냥을 기다리는 하이에나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만약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기사도를 등지려거든.」
일생, 단 하나뿐이었던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리면서.
「망설이지 말거라.」
타앙! 일격의 총성이 울려 퍼지며 가드의 손에 쥐어져 있던 리볼버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팔에 부상을 입은 가드가 중심을 잃자, 여인은 단숨에 그를 밀쳐내며 떨어진 리볼버를 철문 밖으로 걷어찼다. 당황한 미헤르의 목줄기를 잡아 벽면으로 밀어붙인 마린케이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내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늘하게 말했다.
“사리 분별 못 하는 개새끼는 댁인 것 같은데.”
“……윽, 쿨럭!”
“어떻게 생각해?”
숨통이 조여 기침을 내뱉으면서도 미헤르는 미치광이처럼 번뜩이는 두 눈을 거두지 않았다. 어쩌면 그전보다 더욱 기묘한 열기에 휩싸여 있는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팔에 총상을 입은 가드가 시끄럽게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기었다. 누구 하나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없는 번잡한 상황 속에서도 마린케이는 고요히 미헤르를 내리눌렀다.
“커헉……!”
그의 갈색 눈에 담긴 살의가 스산하게 흩어져 내린다. 마음만 먹으면 남자의 연약한 목줄기를 비틀어버릴 수 있었다. 아마 무척 쉬운 일일 것이다. 손만 더럽히면 그만일 터였다.
일순간, 미헤르가 눈을 부릅뜨며 마린케이의 얼굴 위로 침을 뱉었다. 오랫동안 호흡하지 못한 탓인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의 그는 꼴좋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마린케이는 여전히 지독한 무표정을 유지한 채였다.
바꾸는 것보다는 망가뜨리는 게 더 낫다고 했었지. 틀린 말은 아니다. 당신 같은 쓰레기들은 전부 다 죽어 나자빠져야 세상이 좀 살 만해질 테니까. 그러나 제 사심을 채우려는 이유로 어딘가에 갇혀 있을 또 다른 아이들을 외면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린케이가 손에서 힘을 풀었다. 약간의 숨통을 풀어주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미헤르는 연거푸 못다 한 숨을 토해내며 마린케이를 올려다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비뚤게 미소 지은 그가 갈라진 목소리를 내뱉을 때였다.
“후회할…….”
“너 같은 새끼한테 줄 발언권은 없어.”
그 같잖은 수작질에 놀아나고 있을 생각은 없다. 마린케이는 확고하게 대답하며 그의 아래턱을 세게 붙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혀를 짓씹고 있었던 건지, 억지로 벌려진 입 사이에서 굵직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묽은 액체가 마린케이의 손바닥을 적셨다.
“놔!”
뒷골목을 닮은 비릿하고도 진득한 쇠향이 풍긴다. 마린케이는 자조적으로 입을 열었다.
“죽을 권리도 없고.”
미헤르의 명치를 가격해 한 번에 기절시킨 그는 쓰러지는 몸을 오물 다루듯 받아내며 여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안대에서 벗어나게 되긴 했어도 그녀는 여전히 입을 틀어막힌 상태였다. 심지어 손까지 꽁꽁 묶여 있어 여간 불편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미헤르의 눈꺼풀을 뒤집어 기절 상태를 거듭 확인한 마린케이가 그녀에게 손짓했다.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순간 여인은 고개를 틀어 어떻게든 구석진 곳으로 기어가고 있는 가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안타까워하는 표정은 아니었으나, 마음에 걸려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얼굴이었다.
저 새끼는 그냥 죽여도 상관없을 텐데. 마린케이가 무심히 고민하던 찰나, 그녀는 드디어 가드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걸음을 옮겼다.
혹시 몰라 한 번 더 미헤르의 명치를 후려친 마린케이는 그의 몸을 던지다시피 내려놓으며 옷 위로 손을 닦았다. 그런다고 핏자국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인의 밧줄을 풀어주기 이전에 어느 정도는 피를 닦아내야 할 것 같았다.
“으읍…!”
여인이 괜찮다는 듯 억눌린 목소리를 내며 그를 저지했다. 그녀의 뜻대로 행동을 멈춘 마린케이는 밧줄 좀 풀어봤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매듭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는 손목 위로 손을 올렸다. 세게 힘이라도 주면 부러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염려스러워서인지, 그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럼에도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 이제야 좀 살 것 같네요.”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던 천을 벗어 던진 그녀가 경쾌한 목소리를 냈다. 땀에 전 머리칼을 다시 동여 묶은 뒤에는 쓰러져 있는 미헤르의 몸을 한번 걷어차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더 세게 때려도 안 깰 겁니다.”
들려오는 짤막한 조언에 그녀는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래서 뭐 하겠어요.”
어느새 그녀의 시선은 미헤르가 아닌 가드 쪽을 향해 있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서 기절한 것인지 남자는 바닥 위로 푹 늘어져 있었다. 여인은 그 모습을 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마린케이는 그녀에게서 밧줄을 슬쩍 가져가며 말했다.
“밧줄 좀 빌리겠습니다.”
그는 조금 전까지 그녀의 손을 동여매고 있었던 밧줄로 미헤르의 손목이며, 발목이며 하는 곳들을 칭칭 끌어 묶었다. 마린케이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는 제게 묶여진 밧줄을 푸는 일이었지만, 절대 풀어지지 않을 만큼 투박하고 확실한 매듭을 만들어내는 것에도 꽤나 소질이 있었다.
무릎과 손, 발목이 전부 다 동시에 고정된 미헤르가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모습으로 철퍽, 엎어졌다. 저도 모르게 발을 뻗어 바닥에 부딪히려는 그의 머리를 받쳐준 여인은 스스로의 선택에 어이없어하며 다리를 뺐다.
미헤르에게서 회수한 탄창을 리볼버에 다시 끼워 넣은 마린케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총, 다뤄본 적 있으십니까?”
여인이 뭘 그런 걸 묻냐는 투로 입을 열었다.
“없다고 하면 여기 계실 건가요?”
“아뇨. 가르쳐드릴 생각입니다.”
“됐어요. 나도 사격은 꽤 해요.”
잽싸게 총을 받아 든 그녀는 자신의 고동색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힘차게 말했다.
“각자 어떤 사정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는, 나중에 얘기하도록 할까요?”
그에 마린케이는 놀라움을 담아 대답했다.
“이성적이시네요.”
비꼬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뱉은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마린케이는 그녀가 보여주는 이성적인 판단에 적지 않게 감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지 못하던 여인이 이내 멋쩍은 듯 목덜미를 긁적이며 말했다.
“기자로 살려면 이 정도쯤은 감내해야죠. 사격도 회사에서 배웠어요.”
그러자 기자란 직업군에게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마린케이는 슬쩍 헛기침을 했다. 입학 초기,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황태자와의 그 엿 같은 스캔들이 떠올라서였다.
“어서 가 봐요. 이 사람들은 내가 감시하고 있을 테니까.”
그녀는 작별 인사를 하듯 높이 총을 흔들었다. 작게 고개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마린케이가 지체 없이 객실 안을 빠져나가던 때였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든 여인이 마린케이를 향해 그것을 던졌다.
“녹음기니까 받아요!”
얼떨결에 녹음기를 받아 든 마린케이는 더 뒤돌아보지 않고서 마저 뜀박질을 했다.
“백작, 절대 놔주면 안 돼요.”
오랫동안 묶여 있던 탓일까, 밧줄 자국이 흉터처럼 남아있는 제 손목을 내려다본 그녀는 나지막하게 내뱉으며 총을 고쳐 잡았다. 외신 기자라는 명목하에 가쉰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기까지도 무려 5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신분과 가족,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을 전부 다 잃어버린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오직 그 사실을 잊기 위한 도피처로서의 정의감일 뿐이었다.
「호즈. 네 이름이 내 세컨드 네임과 같은 뜻인 건 알고 있니?」
어쩌면 당신을 내게서 지워버린 복수일지도 모르겠고.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강인하고 아름다웠던 누군가의 모습을 회상하며 눈을 내리감았다.
실은 전부 다 핑계에 불과하겠지. 마리아. 나의 장미.
나는 그저 당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 신이 우릴 구원하사,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게 된다면, 그땐 나도 당신 앞에서 당당히 고개를 들 수 있도록 말이야. 그것이 가쉰의 추방자가 세상의 그림자를 고발하기 시작한 이유였다.
***
마린케이는 엘리베이터를 찾아 헤매면서도 왔던 길을 통해 다시 돌아가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문은 밖에서만 열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으므로 돌아가 봤자 얻게 될 것이라고는 허무함과 착잡함밖에 없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었다.
코너를 내리 돌아온 마린케이는 복도 끝에 위치한 엘리베이터를 발견하고서 빠르게 발을 뻗었다. 학급 대표로 계주에 참가했을 때도 이렇게까지 열심히 뛰어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태어나 가장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상황이기도 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마린케이가 주먹으로 버튼을 내리쳤다. 꼭 이런 난폭한 움직임을 선보일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끌어 오르는 분노가 도저히 중화될 것 같지 않아서였다. 노예상과 나누었던 일련의 대화들이 자꾸만 그의 가슴을 추잡하게 들쑤셔 놓았다.
“……이건 또 무슨.”
안내음 하나 없이 매끄럽게 열리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마린케이는 신경질적으로 눈을 치떴다. 존재하는 버튼이라고는 18층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모르겠다. 될 대로 되든지. 그는 결국 포기한 얼굴로 18층을 눌렀다. 이렇게 된 이상, 도착지에 무엇이 존재하든 간에 바로 총으로 쏴 갈겨 버릴 예정이었다.
그 새끼는 무사하겠지? 마린케이는 떠나는 순간까지도 여우처럼 눈웃음치던 황태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머리를 털었다. 호텔을 전부 다 뒤집어엎다 보면 알아서 만나게 될 테니, 일단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치기라도 했으면 제 손으로 더 다치게 만들어 줄 용의가 있었고.
생각보다 훨씬 더 길게 올라가는 것 같던 엘리베이터가 드디어 움직임을 멈췄다. 문이 열리자, 다른 층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엄숙한 분위기의 객실 로비가 시야에 들어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않은 채 주변을 살펴보던 마린케이는 글록을 고쳐 잡으며 걸음을 떼었다. 이상한 일이다. 쥐새끼 한 마리 돌아다니지 않는 것처럼 고요한 로비에는 감시 카메라마저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어쩐지 분위기가 좋지 않다. 심지어 이 넓은 공간 속에 존재하는 객실이라고는 단 하나뿐이었다.
굳게 닫힌 객실 앞에 선 마린케이가 호흡을 골랐다. 누군가를 지키려거든 망설이지 말라 가르쳤던 스승의 목소리가 그의 날 선 감정을 가로막으려 들었다. 하지만 스승님. 당신은 그렇게 가르쳤다고 해도, 아직도 완전히 이해가 가는 건 아냐. 난 대체 무엇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서 있는 거지? 애당초 지킨다는 말이 가당키나 한 거냐고.
가진 게 없으니 지킬 것도 없는 것이라, 지킬 게 없으니 썩어빠진 세상사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라, 그리 생각하며 간신히 버텨내던 삶이었는데.
“제기랄!”
그는 열리지 않는 문고리를 총으로 내려치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렇게 살아갈 수 없었다. 가진 것은 없었으나, 가지고 싶은 이는 있었다. 그이는 누군가를 지키려 위험 속에 뛰어드는 불나방이었고, 어둠 속에 갇힌 이들을 위해 손을 뻗는 등불 같은 사람이었다.
마린케이는 새파란 빛을 가진 누군가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있는 힘껏 문을 열었다.
***
역시나 16층에서 다음 층으로 향하는 비상구는 단단히 막혀 있었다. 이자벨라를 뒤로 물린 샤를이 손잡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타앙, 탕! 시끄러운 타격음과 함께 비상구 손잡이가 그의 발치로 굴러 떨어졌다. 무심결에 손뼉을 칠 뻔한 이자벨라는 목을 큼큼거렸다.
긴장을 놓지 않은 채 비상구 문을 열어젖힌 샤를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이자벨라를 불렀다. 올라가자. 들러붙은 머리칼을 떼어낸 그가 먼저 비상구 안으로 몸을 들였다.
“업어줄까?”
와. 이 사람은 얼굴도 예쁜데, 매너까지 좋네. 샤를을 뒤따라가던 이자벨라는 가까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가면 뒤에 가려져 있긴 했어도 그가 저를 보며 무척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면 업어줄 수 있어.”
한 번 더 이어지는 다정다감한 목소리에 이자벨라는 잔뜩 부루퉁해진 얼굴로 쯧, 혀를 찼다. 아무리 성격이 좋아도 사람이 그렇게 호구 같으면 못쓴다.
그만큼 이자벨라의 눈에 비친 샤를 소피아 엔스라는 사람은 인간성이 좋아도 너무 좋아서 탈인 호구 한 명에 불과했다. 저런 인간들이 꼭 빚보증 섰다가 집 날려 먹더라.
한결같이 사람 보는 눈이 부족한 이자벨라가 당당하게 허리를 펴며 대꾸했다.
“고작 이 정도로 힘들어할 거였으면 날치기 짓 못 해요.”
아뿔싸. 내뱉자마자 후회하게 된 말이었지만, 소녀의 걱정과 달리 샤를은 오히려 유쾌한 듯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마저 계단을 오르며 흘리듯 목소리를 던졌다.
“내 동생이랑 닮은 것 같아.”
“제가요?”
“응. 걔도 너처럼 귀엽거든.”
뭔데, 이거? 예상치 못한 일격에 당황한 이자벨라는 화르르 타오르는 얼굴을 식히듯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그런 이자벨라의 모습을 바라보던 샤를이 한 번 더 그림처럼 웃었다.
저 얼굴로 이러면 진짜 반칙이지! 하고 싶은 말이 태산같이 쌓여갔지만, 이자벨라는 17층을 지나 18층까지 도착하게 된 이후로부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심장이 다시금 무섭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헛구역질을 할 것만 같은 기분에 가슴팍을 쥐어 잡아 봤지만, 그것 또한 무용지물이었다. 거의 주저앉듯 몸을 휘청이는 이자벨라를 단숨에 품에 안아 든 샤를이 쉬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부드럽게 속삭였다.
“잠시만 눈 감고 있어. 금방 끝날 거야.”
그가 제 어깨 위로 소녀의 얼굴을 숨겼다. 한 손만을 사용해 이자벨라를 안아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짐 한번 없이 문을 열어붙인 그는 인기척을 눈치채고서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그러나 총성은 그의 것뿐만이 아니었다. 탕, 타앙!
샤를의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총탄들이 엘리베이터 근처에 설치되어 있던 소화전에 구멍을 뚫었다. 객실 문 뒤로 아이들을 숨겨놓은 상태였던 마린케이가 사납게 소리쳤다.
“빌어먹을, 맞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내가, 아니면 네가?”
조금만 반응 속도가 느렸어도 분명 다리를 맞았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조우에 상당히 당혹스러움을 느낀 샤를은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글록을 벽면에 대충 문지르며 마린케이에게로 걸어갔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소녀의 인영을 확인한 마린케이는 의아한 듯 목소리를 냈다.
“이자벨라?”
“……칼릭스?”
그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들어 올린 이자벨라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칼릭스!”
졸지에 두 사람의 상봉을 가로막은 기분을 느끼게 된 샤를은 품에서 벗어나려 바둥거리는 이자벨라의 몸을 점잖게 바닥 위로 내려주었다. 발이 닿기도 전부터 마린케이에게로 달려가려 몸을 일으킨 이자벨라는 간신히 넘어짐을 면한 채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나저나 쟤가 왜 칼릭스라는 거지. 샤를이 홀로 의구심을 느끼던 때였다.
“넌 왜 납치범 새끼랑 사귀고 난리야!”
설마 껴안아 주어야 하는 건가 싶어 어물쩍거리며 팔을 벌리던 마린케이는 정강이를 세게 걷어차이고선 짧은 신음을 뱉었다. 누가 누구랑 사귄다고?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샤를은 숫제 외도를 저지른 연인을 바라보듯 마린케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전히 댄 미헤르를 마린케이의 애인으로 착각하고 있던 이자벨라가 말 안 듣는 아이를 꾸중하듯 허리 위로 손을 올렸다. 한 템포 빠른 비난이 그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얼굴만 보고 사람 사귀는 거 아니라고, 어릴 때 못 배웠어?”
“…방금 배운 것 같아.”
“앞으로는 얼굴보단 내면의 선량함을…….”
“내가 네 친구들 데려왔는데, 가볼래?”
상황을 어떻게 무마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기에, 에둘러 대화의 방향을 비튼 마린케이는 객실 문 뒤의 아이들을 불러 모으며 비상구 쪽을 눈짓했다. 그가 샤를에게 말했다.
“언제 가드들이 몰려올지 모르니까, 어서 나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CCTV는?”
“없던데요.”
“기가 막힌 새끼들이네.”
마린케이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 전체를 장식하고 있던 감시 카메라는 영악하게도 노예들이 존재하는 곳들만 피해 설치되어 있었다.
“다 밟아 죽여버리든가 해야지.”
저에게는 천사 같은 목소리밖에 내지 않던 남자가 불량한 어투로 중얼거리자, 이자벨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일단 애들부터 피신시키도록 해.”
“알겠습니다.”
“잠깐, 잠깐만요!”
주군의 명령에 곧바로 아이들을 불러 모으던 마린케이는 그들 사이로 끼어든 이자벨라를 보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이야? 그가 넌지시 묻자, 검은 머리칼을 조급한 듯 매만지던 이자벨라는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행동을 멈추고서 말을 이었다.
“한 명이 없어. 머리색은 나랑 똑같고, 눈은 녹색인 남자애인데, 걔가 제일 몸에 상처가 많았단 말이야…….”
“노아라면 이미 각하께서 데려가셨어.”
그 순간 가장 구석진 곳에 숨어있던 소년 한 명이 작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이자벨라가 그런 소년의 코앞까지 달려가 멱살을 잡아당겼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노아가, 노아가 원해서….”
“뭐라고 했냐고!”
“노아가 원해서 간 거야!”
그거야말로 더더욱 납득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소년이 어떻게든 이자벨라의 손을 떼어내려 몸부림쳤다. 하지만 이자벨라가 손에서 힘을 풀지 않자, 소년은 두려움에 찬 목소리를 냈다.
“원래는 각하께서 우리를 다 죽이겠다고 하셨는데, 노아가 각하를 위로해드리고 싶다고 했어. 그러니까 제발, 제발 데려가 달라고.”
“…….”
“늘 그 애를 편애하셨단 말이야. 얼, 얼굴도 예쁘고, 입이랑 손도 제일….”
충격을 이기지 못한 이자벨라는 소년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떨어뜨리며 뒤로 물러섰다. 마린케이는 새하얗게 질려 있는 소녀의 얼굴을 안타까이 바라보며 그 몸을 끌어당겼다.
그들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 샤를이 얼굴을 가린 채 주저앉아 있는 소년의 머리칼을 다감하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어디로 갔는지 말해주지 않을래?”
“…….”
그러나 소년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샤를은 착잡한 표정을 머금으며 작게 속삭였다.
“괜찮아. 절대 네가 다치게 될 일은 없어.”
그러자 소년이 불현듯 고개를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거짓말! 저희도 알아요. 노아가, 노아가 모두를 대신해 희생한 거잖아요. 지금 걔를 찾으러 가면 저희는 어떻게 되는 건데요? 노아는, 그 애는 정말 자기가 원해서 간 거예요. 아무도 걔한테 그런 부탁 안 했다고요.”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마린케이에게 몸을 가로막혀 있던 이자벨라가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크게 고함을 질렀다.
“야, 이 이기적인 새끼야!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무슨 이런 쓰레기 같은 게 다 있어!”
“……흐윽.”
소년은 저를 향한 폭언을 이기지 못하고서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더니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은 채 잔뜩 몸을 움츠렸다. 샤를은 포기하지 않고서 소년의 차가워진 피부 위로 손을 올렸다. 식은땀이 잔뜩 배어 있는 작은 몸이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졌던 까닭이었다.
“혼자서 많이 무서워하고 있을 거야.”
어린아이들은 연약하다. 그리고 무력했다. 마치 언젠가의 자신처럼.
그래서 그는 그들이 느낄 두려움을 차마 비난하지 못했다. 아니, 비난할 수 없었다.
“어쩌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
“약속할게. 너희 모두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노아는 돌아갈 집이 없댔어요. 그러니까 상관없다고 했다구요…….”
악에 받친 듯 비수 같은 말들을 쏟아내던 소년은 결국 울음을 내뱉으며 그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토해내는 아이의 몸을 다독이던 샤를이 저에게만 들려오는 목소리에 입술을 짓씹었다.
“옥상 말고 한 층이 더 있어요. 저도 끌려가 봐서 알아요. 각하께서 혼자 사용하시는 층인데, 흐윽. 아마 거기로 갔을 거예요. 죄송해요. 빨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사과하지 마.”
아이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으며, 그는 어느 때보다도 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사과할 일이 아냐.”
“…….”
“절대로.”
***
아이들은 총 여섯이었다. 많아 봤자 십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가 공허하고 애처로운 표정으로 마린케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족쇄를 끊어줄 때조차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한 얼굴을 하던 그들의 모습을 마주하니 마음 한구석이 대단히 무거워졌다. 그건 마치 커다란 바위 하나가 명치께를 짓누르고 있는 기분 같기도 했다. 소년의 등을 계속해서 다독여 주고 있던 샤를이 덤덤히 입을 열었다.
“먼저 내려가 있어.”
마린케이는 대답 없이 자신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제기랄,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그가 아는 샤를 소피아 엔스는 그런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주군의 결정에 토를 달고 싶은 것은 아니었으나, 현실적인 이유들이 자꾸만 마린케이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차라리 제가 가겠습니다.”
마린케이는 한 치 앞을 예견할 수 없는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평민 하나가 잘못되어 봤자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황태자는 아니었다. 그는 장차 승하한 황제를 대신해 가쉰을 끌어갈 이였고, 이 빌어먹을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 유일무이한 사람이었다.
마린케이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양가감정에 시달려야만 했다. 뭇 사람들의 말대로, 당신은 헛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곧 따라갈게. 마린.”
빌어먹을. 그런데 어느 누가 당신과 함께하는 미래를 욕심내지 않을 수 있겠어? 설령 이룰 수 없는 꿈이라도 해도 괜찮았다. 황태자의 모습은 언제나 고아하고 눈부셔서, 시궁창 속에서도 한 떨기 아름다운 꽃이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만 같았으니까.
“전하.”
“넌 안 돼.”
그의 엄격한 목소리에 마린케이는 불손히 미간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보는 그 삐딱한 얼굴에 샤를은 자연스레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다치면 안 된다고. 그러다 내 마음이 찢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해?”
어떤 추파를 날려대든 절대 귀 기울여 듣지 않는 성정의 마린케이는 무뚝뚝하게 답했다.
“전 안 그러겠습니까?”
“…….”
“난 아닐 것 같냐고요. 이 망할 새끼야.”
그 순간 샤를은 좀처럼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며 입을 다물었다. 이내 주섬주섬 심장 쪽 옷깃을 부여잡은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려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이해할 가치조차 없는 그의 해괴한 행동들을 대놓고 무시한 마린케이가 마저 목소리를 냈다. 낙오된 아이를 황태자가 아닌 자신이 구하러 가야 하는 이유를 관철하기 위함이었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겁니다.”
천고의 노력을 통해 굳어 있던 표정을 되돌릴 수 있었던 샤를이 제 옆에 달라붙은 소년의 머리칼을 쓸어주며 대답했다.
“안다고 생각하고 덤벼 봐야지.”
“그러다 실패하면요?”
공격적인 질문이었다. 실패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아마 황태자 또한 모르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이자벨라는 아직까지도 샤를의 곁에 꼭 붙어 있는 소년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칼릭스는 나한테 진짜 고마워해야 돼. 남의 연애 사업 도와주기가 어디 쉬운 줄 알아? 그렇게 생각한 이자벨라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만들어 보일 즈음이었다.
“마린보이, 너.”
“…….”
“나한테 푹 빠졌구나.”
황태자의 한마디에 마린케이의 얼굴이 완벽하게 구겨졌다. 이 새끼가 애들 앞에서 처맞고 싶기라도 한 걸까. 아무래도 황태자는 결정을 철회할 생각이 쥐뿔도 없는 것 같으니, 그의 말마따나 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우선인 듯싶었다.
생각을 마친 마린케이가 주군의 뜻을 헤아리며 인사를 전했다.
“그냥 꺼지십시오.”
샤를은 언제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불량한 말씨에 웃으며 되물었다.
“아니야?”
그 곱디고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당장 가면을 벗겨낸 후 키스를 퍼부어주고 싶다는, 매우 인정하고 싶지 않은 충동이 든 것이 사실이었다. 마린케이는 피치 못할 감정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부단히 용을 썼다. 하지만 여우 같은 황태자가 먼저 달콤하게 말을 이었다.
“난 맞는 것 같아.”
“…….”
“지금도 너한테 키스해 주고 싶어서 죽겠거든.”
곧바로 마린케이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는 황급히 황태자 쪽에서 고개를 돌렸다. 반달처럼 웃고 있던 샤를이 저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아이들을 한곳으로 불러 모으고 있는 마린케이를 향해 덧붙였다.
“금방 갈게.”
“늦으면, 진짜 가만 안 둘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잠시간 서로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내막을 모르는 누군가가 본다면 기 싸움이라도 하고 있는 듯 날카로운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그럼에도 적의나 살의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참 신기한 광경이기도 했다.
떨려서 그런가, 이젠 눈도 못 쳐다보겠네. 먼저 시선을 돌린 샤를은 그들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 주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마린케이는 흔히 하곤 했던 고루한 생각을 다시 한번 품어볼 뿐이었다. 지금이라도 저 인간을 기절시켜 놓고 내가 다녀오는 건 어떨까.
그러나 그는 이자벨라를 중심으로 아이들을 짝지어 모으며 황태자를 떠나보냈다. 마린케이가 아이들의 얼굴을 한 명씩 눈에 새기며 말했다.
“대열 이탈 금지. 내 뒤에서 벗어나지 말고, 서로 잡은 손도 절대 놓지 마.”
“…….”
“우린 지금부터 한 명도 다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갈 거니까.”
이자벨라는 칼릭스가 답지 않게 멋있는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코끝이 뭉클해져 괜히 표정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션 보고 싶다. 테헤란도. 마린케이가 가지고 왔던 밤색 벙거지 모자를 이전처럼 푹 눌러쓴 소녀는 애써 빨개진 눈가를 감췄다.
***
침묵을 유지하는 일이 무척이나 익숙한 건지, 적막처럼 느껴질 정도의 고요함을 만들어내며 걸어가는 아이들 틈 속에서 오직 이자벨라만이 조잘조잘 이야기를 속달거렸다. 미저리 무리를 그리워하며 애상에 젖어 있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변화였다.
“너 은근 인기 좋나 보다.”
처음엔 무시하려 해봤으나 자꾸만 무시할 수 없을 만한 말을 던져대는 통에 그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이자벨라의 벙거지 모자를 가볍게 건드린 마린케이가 처음으로 대답했다.
“목소리 낮춰.”
“…은근 인기 좋나 보다?”
“잘했어.”
단숨에 시정 명령을 흡수한 이자벨라가 또다시 그를 놀리려고 들 때였다.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해 보인 마린케이는 이자벨라를 제 뒤로 숨기며 앞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가 아이들 쪽을 돌아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가 한 층씩 먼저 내려가서 안전한지 확인해 볼 테니까, 너흰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속으로 열까지 세고 내려와.”
어떤 일이 발생하든 열을 세기 이전에 해결할 자신이 있다는 투의 목소리였다. 그에 의심하듯 눈을 흘긴 이자벨라가 구성원을 대표해 물었다.
“진짜 열까지만 세도 괜찮은 거야?”
마린케이는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걱정되면 백까지 세도 상관없어.”
곧이어 그는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손길로 비상구 문을 열어젖혔다. 문 뒤로 어떤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안전이 걸려 있는 만큼 최대한 진중하게 접근하는 편이 나아서였다.
그러나 비상구 너머로 펼쳐진 복도의 풍경은 그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그림이 달랐다. 복도에 널브러져 있는 가드들의 모습은 둘째 치고, 객실에서 덩치 한 명을 끌고 나오는 누군가의 모습이 매우 눈에 익었던 탓이다.
형제가 쌍으로 똑같다고 생각한 마린케이는 말없이 총을 집어넣었다.
으아아악! 레온하르트는 비명을 내지르는 사내를 자비 없이 발로 밟았다. 그의 광포한 몸놀림을 구경하고 있던 마린케이가 뻐근한 팔을 내리며 물었다.
“뭡니까?”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당돌한 말투에, 레온하르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넌 매번 그 소리밖에 안 하더라.”
그의 발밑에 깔려 있던 덩치는 아직도 기절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비명을 질러댔다. 탄창이 다 떨어진 리볼버를 손에 쥔 레온하르트가 사내의 머리를 후려쳐 한 번에 기절시켰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 같다는 마린케이의 감상평은 딱히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쓰러져 있는 가드들의 몸을 발로 뒤적거리며 물었다.
“샤를 새끼는?”
“누구 좀 찾으러 가셨습니다.”
“……아직도 살아있나 보네.”
냉소적인 말투였으나, 어쩐지 안도감을 느끼는 듯한 표정이기도 했다. 가드의 품속에서 리볼버 하나를 찾아 든 레온하르트가 역시나 얼마 남지 않은 탄창을 확인하고선 물었다.
“총 남은 거 있어?”
“아뇨.”
그건 이미 필요한 누군가에게 주고 나온 후였다.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었는지, 레온하르트는 그다지 실망한 눈치가 아니었다.
만약 그가 1층부터 여기까지 올라오는 길을 모두 정리해놓은 상태라면 굳이 자신까지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낙관적인 전망이 그렇다는 소리지, 그걸 바라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세상사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벽에 부딪히기라도 한 듯 이마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여상히 쳐다본 마린케이는 자신의 총을 그에게로 던졌다. 레온하르트가 실소를 터뜨리며 물었다.
“적선이라도 할 셈이야?”
“꼬인 걸로는 그쪽이 가쉰 최강일 겁니다.”
짜증스러운 대답이 이어졌다. 품속에서 단도를 꺼내든 마린케이는 익숙한 듯 어깨를 풀었다.
“전 이쪽이 편해서요. 가드는 어느 정도 남았습니까?”
“글쎄. 너 혼자 상대할 정도는 될 것 같긴 해.”
“…그럼 그냥 아래 계시지 여긴 왜 올라오셨어요?”
마린케이의 물음에 그는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듯 허탈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러게. 내가 왜 여기까지 왔을까. 언젠가 저 겁 없는 평민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는 샤를 소피아 엔스를 대단히 싫어하는 축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당장 올라가서 애새끼들 다 죽여버려. 뭐? 그럼 거기 올라간 새끼도 같이 죽여버리면 되잖아! 귀족이든 뭐든 알 게 뭐야, 당장 내 생사가 달렸는데. 그 새끼가 거기까지 가는 동안 너희는 대체 뭘 하고…….」
하지만 그 멍청한 새끼가 다른 이의 손에 죽어 나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죽이려거든 진작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황제고 뭐고, 함께 죽을 각오를 하고서 덤벼들면 못할 것도 없었으니까. 허나 레온하르트는 그저 제 존재가 지워진 채 억눌려 살아가는 편을 택했다.
이유는 자신조차 납득하기 어려웠을 정도로 허접하기만 했다. 황후 폐하.
“애들은 데리고 나왔어?”
“이제 슬슬 오겠네요.”
그 애는 지독히도 당신을 닮았습니다.
정말 백까지 세었다가 들어오려는 모양인지, 훨씬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들려오기 시작하는 비상구 근처의 소란스러움에 마린케이는 레온하르트를 돌아보며 물었다.
“엄호해 주시겠습니까?”
***
새벽녘이면 언제나 그 소년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화음석처럼 붉었던 머리칼과 하얀 목을 휘감은 두터운 쇠사슬. 여린 눈꺼풀을 들어 저를 바라보던 호박색 시선까지도.
최선의 선택이란 결국 부재하는 것이었다. 오직 차악만이 존재할 뿐이지.
그 순간 샤를은 이름 하나 새겨 넣지 못한 무덤가의 검은 비석을 떠올렸다. 흔히들 사용하곤 하는 안식과 관련된 짧은 문장조차도 적어 넣을 수 없었다.
그저 공백만이 가득한 비석을 바라보며, 그는 필연적으로 자신이 이곳에 다시 걸음 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말았다. 단검 위에 묶여 있는 머리끈은 소년을 잊지 않고자 하는 나름대로의 속죄에 해당한다. 그는 손안의 단검을 고쳐 잡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평생 잊지 않으며 살아갈 것이다. 다시는 그때처럼 어린 목숨을 쉽게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으나, 모두를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것 또한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자신은 누군가의 구원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 싫어요. 싫어요……. 싫어! 싫단 말이야!”
샤를 소피아 엔스는 저로 인해 많은 것을 빼앗긴 채 살아가야 했던 이들을 보며 자라왔다. 그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주어졌던 모든 것들이 그들의 괴로움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미움받는 것도, 외면받는 것도 두렵지 않았으나, 원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허면 한 번도 원한 적 없던 것들에 파묻혀 살아가야만 했던 소년은 누구를 원망할 수 있었을까.
“싫다잖아. 말귀 못 알아들어?”
존재하기나 했을까? 그저 자기 자신을 탓하는 수밖에 없었다. 천성이라 일컬어지는 그 용기와 정의감은 모든 것을 가졌기에, 빼앗았기에, 그리고 원망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도망을 시도하려는 소년을 힘주어 내리누른 백작이 작은 몸을 옆으로 집어 던졌다. 양심의 가책이라고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하릴없이 웃어대던 그가 눈을 나른하게 내리깔았다.
“결국 선을 넘으셨군요. 전하.”
“전하라고 부르지도 마. 토할 것 같으니까.”
저렇게 대놓고 약에 찌들어 있는 새끼가 버젓이 살아있는데, 왜 무고한 내가 약쟁이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지. 신빙성도 없는 마약 추문에 휩싸여 기자들에게 물어 뜯겼던 순간이 떠올라 더욱 짜증이 치솟았다.
마약으로 인해 혼탁해진 동공은 경멸스러운 것을 넘어 끔찍하기까지 하다. 백작이 무슨 헛짓거리라도 벌이기 전에 상황을 정리해야겠다고 판단한 샤를이 글록을 들어 올리던 시점이었다.
“……그냥, 그냥 쏴요!”
심한 폭행을 당한 것인지,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엎어져 있는 소년에게 백작 또한 총구를 들이밀었다. 팔꿈치로 바닥을 짚어 간신히 몸을 일으킨 아이가 피 묻은 입술을 고통스럽게 움직이며 소리쳤다. 간절한 울부짖음이었으나, 그마저도 곧 백작에 의해 묵살당하고 말았다.
“전 상관없으니까, 그냥…!”
“닥쳐! 더러운 노예 새끼 주제에 감히 어딜 끼어들려 해?”
총으로 소년의 뺨을 내려친 백작이 광인처럼 날뛰며 비난을 쏟아냈다. 탕!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샤를이 방아쇠를 당겨 그의 뒤편에 걸려있는 액자를 떨어뜨렸다. 둔탁한 소음과 함께 떨어져 내린 액자가 볼품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내가 널 못 죽이는 것 같아?”
샤를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백작은 소년의 볼 위로 총구를 내리꽂으며 낄낄거릴 뿐이었다. 유약한 황태자는 절대 저를 향해 총구를 겨눌 수 없을 터였다. 주머니에 있던 봉지를 꺼내 한 번 더 마약을 들이마신 그는 부르르 몸을 떨며 부푼 고양감을 즐겼다.
백작이 코밑에 남아있는 하얀 가루를 닦아내며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쏠 테면 쏴 보십시오.”
“…….”
“혼자 죽을 생각은 없으니, 현명히 선택하셔야겠지만 말입니다.”
“알아. 벌레 같은 새끼야.”
백작은 태어나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원색적인 욕설에 미간을 찌푸렸다.
“네 목적은 나잖아.”
“…….”
“그러니까 죄 없는 어린애 데리고 이따위 수준 낮은 인질극이나 벌이고 있는 거겠지.”
“알면, 순순히 투항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백작이 그가 들고 서 있는 글록을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기사단원들의 긍지를 드높이고 사기를 북돋았던 청렴결백한 기사단장의 모습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댄 미헤르와 결탁한 황족이 거리의 아이들을 납치하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의 발치에 붙잡혀 있던 소년이 마지막 힘을 짜내 온몸을 버둥거리던 때였다. 백작은 그런 소년을 가차 없이 바닥에 처박았다.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의 분노를 느낀 샤를은 섣불리 행동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세게 입술을 씹었다.
“이 아이도 그리 말하던데요, 그렇지?”
“크윽……!”
“교육받은 건 그새 잊어버렸나 보구나.”
이성을 잃은 눈으로 소년을 내려다보던 백작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벌린 경.”
총을 내다 던진 샤를이 그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아주 어릴 적의 일이다. 그에게 푸른 사파이어가 박힌 단검을 선물해 주었던 선황이 칭송받는 젊은 무인을 황태자의 스승으로 소개했던 적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리암 드 벌린.
“한때, 경을 바라보며 기사를 꿈꿨던 적이 있었어.”
“…….”
“그대가 내게 말했었잖아?”
소매에 숨겨두었던 단검을 밑으로 내린 샤를은 차가운 날붙이의 감촉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누구도 구해내지 못하는 오만보다는, 작은 것이라도 보호할 수 있는 겸양이 낫다고.”
“그뿐만이 아닙니다.”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 것이라 큰소리쳤던 것이 무색해질 만큼 현실은 다분히 악질적이었다. 그가 지킬 수 없는 것들은 많고 많았다. 구할 수 없는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잠시 눈을 감고, 세상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했었죠. 전하. 그것이 겸양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핍박받는 이를 외면할 근거가 될 수는 없었다. 단검을 손에 잡은 샤를은 망설이지 않고서 제 배 위로 칼날을 욱여넣었다. 그 순간 약 기운으로 인해 흐리멍덩해져 있던 백작의 눈이 잠시나마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전하!”
커다란 고함 소리와 함께, 샤를이 가발을 벗어 던지며 처연히 빛나는 금색 머리칼을 드러냈다. 단검에 묶여 있던 머리끈이 검붉은 핏빛으로 젖어간다. 백옥 같던 얼굴이 더더욱 창백하게 물들었다. 백작은 그에게 다가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한 자세로 경악스러운 듯 입을 벌렸다.
샤를이 나직하게 목소리를 꺼냈다.
“황족 시해 시도는, 판결 없이 사형인 거 알지?”
“……무슨!”
“경이 날 찔렀다고 증언할 생각이거든.”
백작은 한평생 황실의 충견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따라서 눈앞에서 펼쳐지는 믿기지 않는 광경에 정지하듯 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잠시간의 시간을 벌게 된 셈이나 마찬가지다. 샤를은 곧바로 떨어져 있던 총을 집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허리를 굽히느라 칼날이 더욱 환부 안에 밀려 들어가긴 했지만, 이쯤이야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었다. 총알은 정확하게 백작의 손등을 관통했다. 아아아악! 들고 있던 총을 소년의 몸 위로 떨어뜨린 그가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내지르며 피가 솟아오르는 손을 부여잡았다.
“……넌 내 손에 뒤진다고 했잖아, 벌레 같은 새끼야.”
그의 반대쪽 손 위로 한 번 더 방아쇠를 당긴 샤를은 간신히 살의를 억누르며 총을 거뒀다. 양손을 모두 잃게 된 백작이 끊임없이 괴성을 토해내며 몸을 버둥거렸다. 시끄러운데 그냥 여기서 죽여버릴까. 그러나 죽음이란 그에게 너무도 과분한 형벌임이 틀림없었다.
미련 없이 고개를 돌린 샤를은 비틀거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소년에게로 걸어갔다. 아이의 얼굴은 이미 멍투성이였다. 심지어 도망치지 못하도록 두 다리마저 꺾여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수도, 벗어날 수도 없었다. 소년이 드문드문 입을 열었다.
“저는 그냥, 두고 가세요. 어차피 돌아갈 곳도…….”
“널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피 묻은 손을 닦아낼 여력도 없이 소년을 품에 안아 든 그가 고통을 참듯 입술을 깨물었다. 제기랄, 좀 얕게 찌를걸. 백작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릴 만한 최적의 수였다고는 하나, 이것 또한 결국엔 차악이나 다름없었다. 소년이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입가에 미소를 내건 샤를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구할 수 없는 사람은 많았다.
“같이 돌아가자.”
그러나 그것이 구하지 않을 이유가 될 수는 없을 것이라, 그렇게 단언하면서.
***
양친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일까, 마린케이는 칼질에 상당히 재능이 있는 편이었다. 거기다 소정의 노력까지 기울여지니 감히 그의 손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엘리베이터 쪽을 엄호하며 다가오는 가드들의 팔과 다리를 정확히 명중시켰고, 근접전을 맡은 마린케이는 달려드는 가드들을 향해 내키는 대로 손을 휘둘렀다.
생각보다 합이 잘 들어맞는 듯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방금 일부러 나한테 보냈어?”
레온하르트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정곡을 찔린 마린케이는 아닌 척하며 시선을 돌렸다. 중구난방으로 쳐들어오는 놈들을 상대하고 있으려니 스멀스멀 불쾌감이 피어올랐던지라, 대충 한 명을 저기로 내동댕이쳐 버린 것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눈에 보이는 가드들은 다 처리한 듯 보였으니 이제 아이들이 내려오는 것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18층에서부터 시작해 6층까지, 그들은 한 층 한 층을 직접 밟고 내려오며 남아있던 가드들을 모두 쓰러뜨렸다.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위층에 머물러 있던 아이들은 그들이 엘리베이터를 올려 보내준 후에야 겨우 내려올 수 있었다.
그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긴 했으나, 사실상 가장 원초적인 체력을 요구하는 방법이라는 것도 맞았다. 더군다나 근접전을 담당한 마린케이는 이미 피곤함이 상당 수준에 달한 상태였다.
하마터면 어릴 적 이후로는 한 번도 입에 담지 않던 더러운 쌍욕을 내뱉을 뻔한 마린케이는 엘리베이터에서 뛰쳐나오는 아이들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야, 칼릭스!”
“칼릭스 형!”
오해는 아직도 바로잡지 못했고, 바로잡을 생각도 없었다. 어쩐지 멀리서나마 진짜 칼릭스 의 따가운 눈총이 느껴지는 듯해 찝찝한 기분이 들 때였다. 레온하르트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훔쳐 쓰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마린케이를 보며 칭찬했다.
“뻔뻔한 게 거의 샤를 새끼 수준이네.”
황태자가 분통을 터뜨렸던 특유의 가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순수한 척 부러 동그랗게 눈을 뜨는 모습이 무슨 저질 코미디 프로그램의 한 장면 같았다. 마린케이는 피 묻은 칼을 소매 위로 닦아내며 짜증에 차 대답했다.
“얼마 안 남았으니까, 닥치고 힘내 주십시오.”
“그럴 거면 그냥 닥치라는 말을 빼는 게 낫지 않아?”
저렇게 나불거리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차라리 무시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마린케이는 그를 피해 발걸음을 돌렸다. 저를 무시하듯 다음 층을 향해 걸어가는 그 뒷모습을 보며, 레온하르트는 은연중에 웃음을 터뜨렸다.
“사, 살려……!”
“이제 와서 무슨 개소리야.”
마린케이에게 멱살이 붙잡혀 몇 번이나 비상구 문에 처박아진 가드는 내려앉은 코뼈를 부여잡으며 눈물 콧물을 뺐다. 그럴 거면 달려들지나 말든가. 먼저 칼이란 칼은 다 휘둘러 놓고, 대체 어쩌라는 건지 모를 행동이었다. 살려달라며 기어코 떼를 쓰는 가드의 모습에 마린케이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 역시도 누군가를 섣불리 죽일 생각은 없었다.
“엄살은.”
다신 함부로 못 설치도록 약간만 교육해 주려는 것뿐이었지. 조금만 더 처리하면 1층에 도착할 수 있었기에, 마린케이의 기분은 위층에서보다 훨씬 더 산뜻해져 있는 상태였다.
“우리 이제 한 층만 더 내려가면 되는 거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와르르 쏟아져 내린 아이들 틈에서, 재빨리 마린케이에게로 달려온 이자벨라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호텔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게 분명한 모습이었다. 마린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서 이번엔 다 같이 계단으로 갈 거야. 엘리베이터에서 포위라도 당하면 곤란해질 테니까.”
“들었지? 우리 이제 집에 갈 수 있대!”
처음 그가 지시했던 사항대로 서로의 손을 꽉 쥐고 있던 아이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표정을 지어 보이며 환호성을 토해냈다. 한 아이는 참지 못하고서 울음을 터뜨렸고, 또 다른 아이는 생기 없던 얼굴 위로 어렴풋이 말간 웃음을 지었다.
선두에 서 있던 마린케이가 그들의 기대에 화답하듯 마지막 비상구 문을 세게 열어젖혔다. 새장 밖으로 나아가는 이들의 발걸음 속에서 뒤섞이는 무수한 감정이 서로를 눈짓하며 여린 희망을 피워 올리던 순간이었다.
***
제아무리 확실히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지만, 그래도 이건 좀 경우가 아니지 않나 싶었다. 엄습하기 시작하는 불길한 기운에 칼릭스는 계속 곁눈질을 하며 상황을 파악했다.
해안 도시 바르텔로 향하던 때까지는 괜찮았으나, 막상 도착해 보니 폐선 하나가 길 한복판을 가로막고 있는 것부터가 매우 수상해 보였다.
석연치 않은 얼굴로 일행을 뒤따라가던 그는 아까부터 자꾸만 기이한 분위기를 풍겨대는 벤과 세바스찬 사이로 끼어들었다. 원래도 벌어져 있던 거리이긴 했지만, 커다란 덩치가 아예 작정을 하고 끼어드니 벤이 완전히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비록 기사의 도를 실천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할지라도, 세간에는 마음 한 켠에 다들 소소한 기사도 하나씩은 품고 살아간다는 우스꽝스러운 속설이 존재했다.
칼릭스는 그 사례에 정확히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보트에서까지 떡하니 벤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는 피에르마저 끌어당겨 제 근처에 앉혔다. 이 새끼가 뭐 하는 짓이지, 하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던 피에르가 야박한 목소리를 냈다.
“난 황녀님을 에스코트해야 해.”
물론, 칼릭스는 타격을 입지 않았다. 이미 마린케이의 매서운 눈빛에 굴려진 전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린저로 충분할 테니까 걱정 마.”
“하. 뭘 모르나 본데, 나도 퍼스트 클래스에 합격….”
“…그쪽은 여기로 오시죠!”
이번에 그의 손에 붙잡힌 것은 다름 아닌 세바스찬이었다. 졸지에 칼릭스와 피에르 사이에 끼어 앉게 된 그가 난처한 얼굴을 하며 바지춤에 손을 문질러 닦았다.
“앞에 빈자리가 많은 것 같습니다만.”
암만 봐도 미심쩍다. 인간의 촉은 무시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걸 대놓고 알려주고 있는 듯한 떨떠름한 목소리에, 칼릭스는 깊게 한숨을 뱉으며 그의 어깨를 짚었다.
기사학부의 자존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악력 측정 시간이라도 된 것처럼 손바닥 위로 힘을 실은 칼릭스가 재차 요구했다.
“옹기종기 모여서 가는 게 좋잖아요.”
덕분에 무려 1황녀의 옆에서 보트를 타게 된 션과 테헤란은 숨 쉬는 법도 잊어버린 사람들처럼 주행 내내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황족의 몸에 옷깃이라도 한번 스쳤다가는 능멸죄를 뒤집어써 지하 감옥에 갇힐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보트에서 내릴 때조차도 칼릭스는 벤을 가장 마지막에 내려오게끔 했다. 절대 그와 세반스찬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지 못하도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그는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 호텔의 풍경을 보며 입을 벌렸다.
“…저게 경매장이라고?”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던 것인지, 피에르 역시 놀란 듯 내뱉었다.
“내 심미안에 썩 부합할 정도는 아니군.”
내용상의 초점은 또 본인의 자랑질에 맞추어져 있었지만 말이다. 굳어진 얼굴의 마리아가 가장 먼저 호텔을 향해 걸어 나갔고, 그녀가 불쾌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 서 있던 린저는 엄숙하게 그 주위를 엄호했다.
호텔 부근에 다다르는 그 순간까지도 쉽사리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던 린저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뭔가…….”
“잘못된 것 같네요. 그렇죠?”
호텔 앞을 삼엄하게 둘러싸고 있는 경비 인력들의 정체를 확인한 마리아가 헛웃음을 지었다. 황족의 허락 없이 황실 기사단의 인력을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기사 단장의 직위와 백작의 작위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리암 드 벌린뿐이었다.
“세바스찬.”
한기 어린 목소리가 고압적으로 흘러나왔다.
“황실 기사단은 벌린 가의 사병이 아니었을 텐데, 아닌가요?”
“……대의를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황녀님.”
그 말에 그녀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대의라. 참으로 오만한 발언이군요.”
“하지만, 고작 폴리스 정도로는 댄 미헤르와 황태자를 검거할 수가…!”
“누구 앞에서 감히!”
두 눈 안에 완연한 노기를 띤 그녀가 분노를 눌러 참으며 말을 맺었다.
“황족을 능멸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면, 세바스찬.”
“…….”
“어떠한 사실 확인도 없이 그를 죄인 취급해서는 안 될 겁니다.”
그 순간이었다. 사내가 비틀린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빠르게 달려온 린저가 단검을 들어 그의 목을 겨눴지만, 불손한 눈빛은 여전히 거두어지지 않은 채였다. 그는 사납게 소리쳤다.
“제국법을 공부하신다는 분이 이리 편파적이어서야 쓰겠습니까?”
“…….”
“당장 저치를 검거해야 한다!”
그가 가리킨 것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벤 해리스였다. 그의 명령에 몇몇 기사단원들이 발을 뻗었다. 눈치라면 귀족 나리들보다 훨씬 더 앞서 있는 션과 테헤란이 곧바로 떨고 있는 남자를 그들 뒤로 숨겼다.
“저에게, 저에게 증거가 있습니다!”
하지만 벤이 먼저 불시에 인파 사이를 헤쳐 나오며 마리아가 들을 수 있도록 외쳤다.
그가 간절히 쥐고 있던 USB를 그녀에게 건네려 다급히 몸을 움직이자, 칼릭스는 그의 뒷덜미를 거칠게 끌어당기며 짜증을 뱉었다.
“정신 나갔습니까? 그냥 여기 얌전히….”
하지만 벤은 칼릭스의 손마저도 밀어내고서 마리아의 앞으로 달려갔다.
“이 파일들은 모두 벌린 백작의 집무실에서 찾았습니다. 만약 진실로 태자 전하의 소행이라면, 그렇다면 결국 백작 역시 혐의를 피해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야, 잡아들이라니까!”
황녀의 눈치를 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나머지 단원들을 짜증스럽게 바라보던 세바스찬이 결국 직접 총을 뺏어 들었다. 그가 번들거리는 눈을 빛내며 벤을 향해 총구를 치켜들던 때였다. 뒤쪽에서 튀어나온 누군가가 세바스찬의 허리를 걷어차 볼품없이 쓰러뜨렸다.
자연히 총을 내던진 채 바닥을 구르게 된 그가 당황스레 고개를 들었지만, 높게 들어 올려진 구두 굽이 그의 몸뚱이를 후드려 패는 것이 빨랐다.
“이, 사회악 같은, 새끼들이.”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사내를 폭행하고 있는 마린케이의 모습은 어지간한 호러 영화의 한 장면보다 더 끔찍해 보였다. 한 템포 늦게 나타난 레온하르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굳어 있는 단원들 사이를 뻔뻔하게 지나쳐 걸었다.
그의 등 뒤로 따라오는 아이들의 모습이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 속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레온하르트 역시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으나, 머리가 깨진 채로 난동을 피우고 있는 마린케이보다는 훨씬 정상처럼 보였다. 그는 마리아의 앞에 멈춰 서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황녀님.”
“……라파엘.”
“괜찮으니 본명으로 불러주세요.”
“…그래요, 레온하르트. 전하께서는 어디 계시죠?”
벙거지 모자를 집어 던진 이자벨라가 션과 테헤란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묘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그는 마리아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걱정할 거 없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는 시선에는 언제나 그랬듯 연민이나 동정 따위가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함께 내쳐진 존재에 불과했다. 어쩌면 그렇기에 더더욱 다른 이들보다 많은 감정들을 공유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션은 이자벨라를 끌어안고서 오열했고, 테헤란은 꺽꺽거리며 서러운 눈물을 닦았다. 아이를 공격하려는 가드 하나를 막아내느라 쇠파이프에 이마를 맞았던 당돌한 평민은 그 짜증이 여전히 가시지 않은 건지 화풀이를 하고 있는 중이었고 말이다.
남은 것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피에르 셀번이 새된 목소리로 “전하!” 하고 부르짖는 것을 눈에 담은 레온하르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애는 운이 좋잖습니까.”
그의 시선 끝에 펼쳐진 모습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당당히 호텔 안에서 걸어 나오는 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복부부터 시작해 하반신 전체가 전부 피로 물들어 있는 황태자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뎠다.
레온하르트의 말이 맞았다. 그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황급히 달려 나온 피에르가 황태자에게서 아이를 받아 들었다. 창백해진 얼굴의 황태자가 몸을 휘청였다. 그즈음, 드디어 사내를 후려 패던 것을 멈춘 마린케이가 몸을 돌려 그에게 뛰어갔다.
“……찔린 거 아냐.”
“미친 새끼!”
내가 찌른 거야. 이어진 황태자의 목소리에, 마린케이는 쓰러지는 그의 몸을 단단히 받아내며 욕설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어찌 됐든 구멍 뚫려서 온 거 맞잖아? 하지만 번져가는 시야 속에서도 샤를은 작게 미소 지었다. 자신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백작 새끼, 총으로….”
“닥치세요. 진짜 뒤지기 싫으면.”
그 순간 그가 떠올리고 있는 것은 지키지 못했던, 그래서 하염없이 아릿했던 한 소년의 얼굴이었다. 피에 젖은 머리끈을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꽉 손에 쥔 샤를이 마린케이의 품 안에서 정신을 잃었다. 이윽고 검붉은 핏물이 마린케이의 옷깃을 가득히 적셨다.
***
“절대, 절대 무리해서 움직이시면 안 돼요!”
몇 번씩이나 반복되는 당부에 마린케이 또한 덩달아 몇 번씩이나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나 저번에도 같은 경고 사항을 전하고서 뒤통수를 맞았던 경험 때문인지, 간호사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다시 한번 경고했다.
“지난번처럼 러닝머신 뛰고 그러시면 진짜 큰일 나요.”
“예. 알겠습니다.”
벌써 병원에 입원한 지도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무려 헬기까지 이용해 프리드리히 병원에 도착한 마린케이는 제 머리에서 흐르는 피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연신 황태자의 안위를 살폈다. 그의 손에는 더 이상 온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언제나 누군가에게 힘주어 온기를 실어주던, 그 따뜻했던 손이 말이다. 그게 자꾸만 그의 가슴을 내려앉게 만들었다.
다행스럽게도 프리드리히 병원의 의료진들은 성심성의껏 환자를 치료했다.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벌써 상처가 다 아물어 대단히 멀쩡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는 마린케이 이스턴조차 아이 취급하기 바쁜 분위기였다고도 할 수 있다.
마린케이는 영양식이라는 명목하에 나온 짜 먹는 비타민C를 아니꼬운 눈으로 흘겨보았다. 놀랍게도 맛은 아주 괜찮은 편이었지만, 포장지 위로 커다랗게 적혀 있는 ‘유아용 비타민’이라는 글씨가 영 탐탁지 않아서였다.
오랜만에 쉬게 되니 몸은 무척 기뻐했지만, 정서는 그렇지 않았다. 마린케이는 답지 않게 자신이 초조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짜증스레 비타민 포장지를 찢었다.
한입 가득 새콤한 사과향이 밀려 들어오고서야 그는 조금 누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단 게 들어가니 아무래도 머리가 좀 더 빠르게 굴러가는 것 같았다.
백작이 노예상과 손을 잡고서 아이들을 착취했던 유례없는 범죄 사건은 하루가 멀다 하고 매스컴을 통해 오르내렸다. 분노한 제국민들은 백작 가의 저택을 불태우기까지 했고, 구출된 아이들을 위한 자발적인 모금 운동까지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피에 젖은 채 어린아이를 품에 안아 들고 있는 황태자의 사진은 마약 추문 인터뷰 건에 이어 두 번째로 전 세계적인 히트를 쳤다. 그 자리에 있던 기사단원들 중 한 명이 증거를 남기겠다는 명목으로 촬영한 그 사진은 내로라하는 고급 잡지의 커버를 장식하기도 했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세를 탄 것은 직접 잠입 취재까지 감행해 그들의 악행을 밝혀내고자 했던 어느 익명 기자의 정의감이었다. 마린케이 역시 일부 보탬이 될 수 있었겠으나, 안타깝게도 그가 가져갔던 녹음기는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다치면 안 된다고. 그러다 내 마음이 찢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해?」
「전 안 그러겠습니까?」
백작과 관련된 내용은커녕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법한 사적인 대화들이 가득한 녹음기는 그저 둘 사이의 어색함만을 자아낼 뿐이었다.
「그럼 몸조리 잘하세요. 고마웠어요.」
그렇게 익명의 기자, 호즈는 병문안을 온 지 10분 만에 자리를 떠났다.
제기랄. 단 걸 먹으니까 또 보고 싶어졌잖아. 황태자 또한 병원 어딘가에 격리되어 있기는 할 테지만, 그는 입원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세간에는 벌써 그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였다.
하지만 마린케이는 이미 그의 회복을 확신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 용병 같은 인간이 배에 구멍 한번 뚫렸다고 골골대고 있을 리 없다.
몸을 일으킨 마린케이가 병실 창문을 열어젖혔다. 현재 시각은 12시 40분. 점심시간이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바로 이 시점이 병실을 탈출하기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이제는 긴장감 없이도 배수관을 타고 내려올 수 있게 된 마린케이는 무사히 착지하며 몸을 풀었다. 황태자를 직접 찾아가기로 결심한 이상 미적대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제가 4호로 환자 올려 보낼게요! 히스토리 테이킹 좀 부탁드려요!”
문제는 딱 하나.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다시 병원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빠 보이는 의료진들 틈에서 담당 간호사라도 마주치게 되면 큰일이다. 분명 멱살이 붙잡혀 끌려갈 터였다. 자동 회전문 앞에 서서 병원 내부를 살펴보던 마린케이는 때마침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며 자연스럽게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워낙 체격 조건이 남달랐던 탓인지, 그들 사이에서도 묘한 위화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힐끔거리는 시선들을 눈치챈 마린케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대로 섞여 들어가 보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이 방법은 실패할 가능성이 커 보였다. 그는 방향을 바꿔 오른쪽으로 향했다. 마침 의사 한 명이 휴게실 안에서 기지개를 켜며 걸어 나왔다. 닫히려는 휴게실 문을 잽싸게 낚아챈 마린케이는 그곳 안으로 소리 없이 몸을 들였다.
대부분의 캐비닛이 잠겨 있긴 했지만, 딱 하나 열려 있는 칸이 있었다. 아무렇게나 구겨 넣어져 있던 가운을 꺼내 든 그가 사이즈를 확인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맞으려나. 모르겠다, 그냥 입어봐야지.
빠르게 환복을 마치고서 휴게실을 빠져나온 마린케이는 어색한 듯 목깃을 만지작거렸다. 파란 의료복 위로 흰 가운을 두른 모습이 마치 훤칠한 의사처럼 보였으나, 무척 건방져 보이는 표정 때문인지 꼭 그렇게 느껴지지만도 않았다.
주변의 간호사들이 저를 연신 쳐다보자, 마린케이는 큼큼 헛기침을 뱉었다. 이제 빨리 황태자만 찾아가면…….
“……마린보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굳이 그럴 필요도 없어 보인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누가 봐도 타이트해 보이는 간호사복을 입은 황태자는 검은색 캡 모자를 쓰고, 심지어 마스크까지 착용한 상태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마린케이는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탕비실에서 튀어나온 손이 저를 끌어당겼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 지금 환자야, 마린.”
그제야 마린케이는 상대의 목을 쥐고 있던 손을 내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가 보고 싶어 배수관까지 타고 도망쳐 나온 주제에 참 대단한 수준의 포커페이스였다.
“…간호사 쪽 아닙니까?”
“아니, 본질은 환자라고. 배 찢어진 거 이제야 좀 나았어.”
며칠이면 회복할 줄 알았는데, 그건 확실히 의외의 말이었다. 마린케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자, 그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듯 간호복 상의를 걷어 올렸다.
“상처만 대충 아물었지, 아직 잔고통은 남았…….”
툭, 투둑.
“…….”
순간 둘 사이로 어정쩡한 침묵이 맴돌았다. 전부터 자꾸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에 의문마저 들 정도였다. 단추가 뜯겨나감으로 인해 황태자의 단단한 가슴팍이 마린케이의 눈앞에 전부 다 드러났다.
새하얀 살결에 직면하게 된 마린케이의 시선이 조금 흔들리자, 불현듯 황태자의 푸른 눈 너머로 이채가 스쳐 지났다.
“잔고통은 남아 있긴 한데, 만져볼래?”
쓰고 있던 모자와 마스크를 전부 벗어 던진 샤를이 마린케이의 손을 붙잡아 제 상의 안으로 집어넣었다. 당황스레 몸을 물리는 마린케이를 강한 힘으로 끌어당긴 그가 동그란 귓바퀴 위에 입을 맞추었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딱딱하면서도 부드러운 근육의 감촉에, 마린케이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그의 가슴을 그러쥐었다. 그러자 황태자는 여우처럼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안 아프게 만져주세요. 선생님.”
청정한 바다를 닮은 듯한 황태자의 눈은 늘 그러했듯 마린케이를 파도처럼 들쑤셔 놓았다. 마린케이가 나머지 손을 내려 그의 성기 부근을 느리게 문질렀다.
황태자는 칭찬하듯 그의 귓가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동시에 허리선을 타고 올라온 그의 손바닥이 마린케이의 가슴께를 향했다. 한 번도 성애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예민한 부위가 문질러지자, 마린케이는 급하게 숨을 참으며 샤를의 입술 위로 달려들었다.
“하아…….”
거친 키스 틈새로 뜨거운 호흡이 거미줄처럼 얽혀들었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성기를 서툴게 애무하던 마린케이는 제 가운을 끌어 내리는 황태자를 보며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예뻐도 너무 예쁘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예뻐도 되는 거야? 가운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황태자가 마린케이의 드로즈 속으로 반대쪽 손을 밀어 넣었다.
“전하, 전 됐습….”
“정말?”
막상 차가운 손이 기둥을 쓸어내리자 마린케이는 달짝지근한 한숨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가 느슨하게 손을 움직이며 허리를 쳐올렸다. 가만히 손을 멈추고 있던 마린케이는 그제야 서서히 위아래로 그의 성기를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지에 가로막혀 제대로 애무를 할 수 없었다. 마린케이가 황태자의 하얀 목덜미 위로 얼굴을 비비며 그의 바지를 내렸다. 허리를 들어 그 움직임을 도와준 황태자는 마린케이의 성기를 확 잡아챘다.
“흐으….”
부드러이 성기 끝을 눌러대는 손길에 마린케이는 연신 도리질 치면서도 더욱 가까이 몸을 붙였다. 해달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낮게 가라앉은 황태자의 목소리가 그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마린케이는 제대로 대답할 수 있을 정도의 이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쾌감에 꽤나 약한 타입이라고 생각하며, 황태자는 손에 더욱 힘을 실었다.
탁, 타앗, 탁.
“아, 전하, 전하…….”
“…손 계속 움직여.”
황태자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린케이는 쓰러지듯 몸을 기대며 스스로 허리를 흔들었다. 소중한 기사가 저를 보채듯 신음을 내뱉는 것에 황태자는 불현듯 손을 멈췄다.
“왜 멈춰…….”
“마린.”
해소되지 않은 열감 때문일까, 마린케이의 얼굴은 여전히 발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어여쁘게 웃은 황태자가 드러난 이마 위로 입술을 묻으며 속살거렸다.
“싸기만 하고 끝낼 거야?”
“…….”
“넣고 흔들어야 섹스지.”
빌어먹을, 뭘 넣고 흔든다는 거야. 마린케이는 그의 말에 쉽사리 동조할 수 없었다. 저를 뼈까지 발라 먹을 듯한 흉흉한 눈빛을 보니 이다음에 전개될 상황을 자연스레 추측할 수 있어서였다. 조금 기세가 죽은 마린케이의 성기를 툭, 손끝으로 건든 황태자는 먼저 상의를 벗어 던졌다. 당황한 마린케이가 몸을 굳혔으나, 이미 혼자만의 결론을 내린 그는 마린케이의 옷마저도 한 꺼풀씩 벗겨내며 말했다.
“너랑 여기서 섹스할 거야.”
섹스라는 그 적나라한 두 글자에 이미 마린케이의 머릿속은 펑, 하고 터져버린 것만 같았다. 상의가 벗겨진 걸로도 모자라 하의까지 끌어 내려진 그는 자신의 검은색 드로즈 위를 문지르는 황태자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성기의 윤곽을 덧그리던 하얀 손가락이 사타구니를 지나 배꼽까지, 배꼽을 지나 근육이 올라붙은 가슴께까지 올라왔다.
두 사람 모두 근육으로 뒤덮인 몸을 소유한 무인 중의 무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언제나 무방비한 부분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작은 유두를 꾹 짓누른 황태자가 곧바로 손가락을 움직여 조심스럽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마린케이는 당혹스러운 듯 얼굴을 구겼다.
“읏, 거길 왜.”
“쉿.”
“아…….”
그는 연신 허리를 뒤로 물리려 했지만, 끈질기게 따라붙는 손가락에 의해 결국 달큰한 신음을 흘려보내고 말았다. 황태자가 다정한 목소리를 꾸며내며 말했다.
“너 되게 잘 느끼는 거 알아?”
“…흣, 아아.”
“가슴에 피어싱 박아보자. 예쁠 것 같은데.”
“…변태 새끼, 하읏!”
황태자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더러운 말들을 뱉어내며 마린케이의 유두를 잡아당겼다. 그는 제게 쏟아져 내리는 몸을 가뿐하게 받아들며 귀와 이어지는 목덜미 사이를 꽉 깨물었다.
단단한 손가락이 마린케이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며 꼬리뼈를 매만졌다. 살짝 벌어져 있는 구멍 위를 느리게 문지른 황태자가 목덜미 곳곳에 키스마크를 남기며 말했다.
“여기도 좋아할 거야.”
그 순간 마린케이는 어떤 대답도 내놓지 못한 채 몸을 굳혔다.
“벌써 질질 흘리고 있잖아. 그치?”
***
캐비닛을 부여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엉덩이가 쭉 잡아당겨진 것만 해도 무척이나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나, 성기를 세운 채 회음부를 만져지는 것은 더더욱 마린케이를 수치심에 잠기게 했다. 그의 뒤에 붙어 뒷덜미며, 허리며 하는 곳들에 연신 키스를 퍼붓고 있던 황태자가 성기 끝에서 흘러내린 쿠퍼액을 구멍 위에 넓게 문질러 발랐다.
“읏, 전하….”
아무리 자신이 흘린 좆물이라고는 해도, 이것 또한 매우 창피스러운 동작이라는 것은 부정할 여지가 없었다. 키스마크로 뒤덮여 있는 마린케이의 상체를 만족스럽게 눈에 담은 황태자는 성기를 괴롭히던 손을 멈추고서 그의 다리를 벌렸다. 마린케이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잠, 잠깐만요!”
그러나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황태자는 곧바로 구멍 위에 입술을 묻었다. 마린케이가 반항하듯 몸을 뒤틀었지만, 그는 다시금 성기를 세게 쥐는 것으로 애처로운 반항을 무마시켰다. 뜨거운 혀가 질척하게 구멍 사이를 빨고, 침을 묻힌다.
마린케이는 허리를 떨며 무너져 내렸다. 심지어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두 팔로 그의 허리를 단단히 부여잡은 황태자는 구멍 안으로 혀를 집어넣기까지 했다. 그 일련의 동작들에 마린케이는 숨도 쉬지 못한 채 캐비닛에 얼굴을 박았다.
살결이 침에 젖어 찌꺽거리는 소리가 음탕하게 울려 퍼졌다. 누군가 탕비실 문을 열고 들어오기라도 하면 매스컴에 얼굴이 팔리는 것을 넘어, 평생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의 추문에 시달리게 될 것이 뻔했다.
그러나 마린케이는 좀처럼 황태자를 밀어낼 수 없었다. 하아, 아. 마린케이가 뒤꿈치를 들어 올리며 캐비닛 위로 얼굴을 문댔다. 차가운 표면에 얼굴을 식히기 위한 행동이었으나, 구멍 사이를 헤집어 놓고 있던 황태자가 느끼기에는 그저 재촉하는 움직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쪽, 쪽.
한 번 더 구멍을 빨아들이는 것으로 행위를 마친 그가 흠칫거리는 엉덩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는 이어 손바닥 자국이 불그스름하게 남아 있는 엉덩이 위를 핥아 올리며 말했다.
“많이 빨아놨으니까 아프진 않을 거야.”
“싫, 아니. 잠깐…….”
“방금 전까지 개처럼 흔들어 놓고 싫긴 뭐가 싫어.”
“흐, 흐읏!”
여린 구멍 사이를 파고드는 기다란 손가락에 마린케이는 파르르 떨며 고개를 내렸다. 황태자는 그런 마린케이의 턱을 붙잡아 다시 치켜들었다. 고여 있던 눈물이 마린케이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필이면 뒷구멍으로 손가락을 씹어 먹는 순간에 맞춰 떨어지는 눈물이었다.
최대한 신사처럼 진득한 애무를 시도하고 있던 샤를은 구멍 안으로 거칠게 손가락을 쑤셔 넣을 수밖에 없었다. 고개가 꺾여 입이 잔뜩 벌려진 마린케이가 속절없이 신음을 토해냈다.
“으, 하아, 전하, 전하, 아프…….”
박히면서까지 상대를 울부짖는 모습이 사내의 음심을 더욱 자극하는 꼴이라는 것을 혼자서만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손가락 피스톤질로 인해 붉게 달아오른 구멍을 내려다본 황태자가 제 바지춤을 내려 묵직한 성기를 꺼냈다. 온몸이 발가벗겨진 채 캐비닛을 부여잡고서 하반신만 빼어놓고 있는 마린케이와 달리,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멀쩡해 보였다.
“금방 박아줄 테니까, 보채지 마.”
“아, 흐윽…….”
“나 병 없으니까 걱정하지도 말고. 응?”
그게 무슨 소리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황태자는 자신의 성기를 천천히 마린케이의 구멍 위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딱딱하고 뜨거운 성기가 가까이 붙어오자, 마린케이는 화들짝 놀라며 캐비닛에서 몸을 떼려 들었다. 그러나 황태자가 먼저 두 손으로 마린케이의 허리를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끔 고정했다. 그는 곧바로 꾹, 선단을 눌러 삽입을 시도했다.
“아, 전하, 하윽……!”
“……하아.”
손으로도 다 쥐어지지 않던 거대한 양물이 연약한 내부를 파고들기 시작하자 마린케이는 끙끙거리며 허리를 뒤틀었다. 제 딴에는 삽입을 가로막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의 눈에는 여전히 엉덩이를 흔들며 유혹하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허리를 잡은 두 손에 더욱 힘을 실은 황태자는 아직 선단밖에 들어가지 않은 성기를 좀 더 깊이 밀어 넣었다. 투둑. 속살이 무참히 벌어지며, 마린케이의 허리가 경련하듯 떨려왔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이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아팠다. 죽을 만큼 아팠다. 태어나 처음 느껴본 종류의 고통이었다. 그래서인지 마린케이는 연신 황태자를 부르짖었다.
“아, 아아, 전하, 전하…!”
“전하 말고…, 이름.”
“흐윽, 전, 전하…….”
“이름, 불러 달라니까.”
그 순간 성기가 뿌리 끝까지 처박혔다. 허리를 높이 튕긴 마린케이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죽어버린 마린케이의 성기에 손바닥을 휘감은 황태자가 그와 동시에 천천히 허리 짓을 하기 시작했다. 흐, 흐윽! 신음이 커져가자 마린케이는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태자는 자신의 음모가 마린케이의 엉덩이 살에 문질러질 정도로 깊게 성기를 내리눌렀다. 그가 도망치려는 마린케이의 허리를 붙잡아 확 끌어당겼다.
퍽퍽, 하는 소리와 함께 구멍이 벌어지며 성기가 거칠게 추삽질을 했다. 쿠퍼액으로 인해 미끈한 물을 품은 두터운 성기는 사정없이 내부의 연약한 살을 때렸다.
마린케이는 숨도 쉬지 못한 채 울었다.
“소리 내도 돼.”
“……흐읍!”
제기랄, 그럴 수는 없었다. 마린케이는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비록 로비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한 탕비실이라고는 하나, 소리를 들은 누군가가 문고리를 잡아 돌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문을 잠가 놓았다고 해도 자꾸만 불안함이 치솟았다. 익숙하지 않은 고통에 그가 몸에 강하게 힘을 주자, 황태자는 성기를 뭉근하게 문지르며 속삭였다.
“네가 예쁘게 울어야 좆 먹여줄 맛이 나지.”
“하윽!”
불현듯 마린케이가 허리를 튕기며 입을 벌렸다. 황태자는 짙게 눈웃음치며 마린케이의 허리를 잡아 눌렀다. 퍽! 급하게 파고들어 오는 성기의 감각에 마린케이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배, 배까지….”
“거기까지 어떻게 들어가.”
“흑, 으읏, 아……!”
흉포하게 덤벼드는 황태자의 허리 짓에 캐비닛이 부서질 듯 흔들렸다. 커다란 성기는 지독할 정도로 한 부위만을 때려 박았다.
“아, 앗, 흐으…!”
“좆물도, 먹어볼래?”
“으읏, 흐…….”
“배까지, 하아…. 넣어달라며.”
“그, 그 말이 아…, 앗, 흐윽….”
마린케이가 다급히 캐비닛을 부여잡았다. 빌어먹을. 좋아서 죽어버릴 것 같다. 아픈 것은 둘째 치고, 부딪히는 곳곳에서 와 닿는 뜨거운 열감이 그의 머리를 새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제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흔들기까지 하는 마린케이의 모습에 샤를은 가벼운 한숨을 흘렸다. 부드러운 내벽이 쫀득하게 성기를 빨아 먹었다. 마음 같아선 찢어질 정도로 구멍을 벌려버리고 싶었다. 성기 옆으로 손가락을 네 개 정도 더 먹여주면 더 예쁘게 울 것 같았다.
마린케이의 상반신을 전부 일으켜 세운 황태자가 허리를 더 깊이 들이밀었다. 콰앙! 중심을 잃은 마린케이는 곧바로 캐비닛에 몸을 부딪히며 신음을 뱉었다. 그의 유두를 양손으로 꼬집어 잡아당긴 황태자가 스퍼트를 올려 추삽질을 했다.
“읏, 으윽, 하, 하앗, 아……!”
쾅, 콰앙! 마린케이는 연속해서 캐비닛에 처박히며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꿈틀거리는 성기의 움직임이 엉덩이 사이로 적나라하게 와닿았다. 물기 어린 성기가 구멍을 죄다 짓이겨 놓는다.
마린케이는 제 유두를 헤집듯 더듬는 황태자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올리며 허리를 뒤로 뺐다. 계속되는 쾌락에 머리가 터져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는 성적인 감각에 영 내성이 없는 사람이었다. 마린케이가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애처로운 목소리를 냈다.
“흐읏, 그냥, 응, 빨리…, 싸주세요….”
우습게도 황태자는 그 순간 마린케이의 안에 토정해 버리고 말았다. 그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반쯤 구겨져 있던 마린케이의 몸을 잡아 세웠다. 질척하게 젖어 든 구멍 사이로 하얀 정액이 길게 떨어져 내린다. 고작 한 번 가지고 만족할 수는 없었지만, 저를 무슨 불한당 취급하듯 노려보는 마린케이의 시선을 받고 있으려니 결국 몸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하윽…….”
성기가 빠져나가는 선득한 감각에 마린케이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 얼굴 위로 쉴 새 없이 키스를 퍼부은 황태자가 제게 기대오는 몸을 소중하게 쓸어내리며 얼굴을 비볐다.
“네가 너무 예뻐서 미칠 것 같아….”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칭송을 받는 이가 그리 애틋하게 말해오는데, 그를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기나 할까.
“……일단, 시발. 좀 비키시죠.”
아무래도 있는 것 같다. 혼자서만 제대로 몸을 바로 세우고 선 황태자의 모습을 짜증스레 바라본 마린케이가, 제게 들러붙어 있는 그를 밀어내며 다 쉬어버린 목소리를 꺼냈다. 그럼에도 황태자는 마린케이의 얼굴에 키스하기를 멈추지 않았고, 마린케이는 오래전부터 염원하던 대로 손을 들어 올려 그 새하얀 이마 위에 딱밤을 때렸다.
***
간신히 아물었던 상처가 전부 도로 터지는 것은 이미 예견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간호복에 배어 있는 진득한 핏물을 확인한 마린케이는 욕설을 뱉으며 황태자의 환부를 지혈했다. 물론 그 순간 속에서도 황태자의 얼굴은 천국을 맛본 사람처럼 기뻐 보이기만 했다.
거의 반파되어 있는 캐비닛의 모습을 응시하던 샤를은 기념 삼아 저걸 황궁에 옮겨 놓아야겠다고 다짐하며 마린케이의 몸을 끌어안았다. 마린케이는 차라리 이대로 같이 기절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산성 없는 생각을 하며 병실로 복귀할 준비를 마쳤다.
“대체, 이스턴 씨는 왜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시는 걸까요!”
“…….”
“제가 부디 퇴원할 때까지만 좀 자제해 달라고, 그렇게나 양해를 구했는데!”
입이 열 개, 아니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배수관을 탈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꾸역꾸역 창문으로 기어 올라온 마린케이는 분노한 얼굴로 저를 기다리고 있던 간호사와 마주하고서 고개를 숙였다.
“왜 창문에서 나오시는 걸까요! 대체 왜!”
간호사는 답답한 듯 명치를 두드리며 포효했다. 지난번, 몰래 병실을 빠져나간 마린케이가 병원 내 피트니스 센터에서 뇌진탕을 겪은 후 쓰러졌을 때보다도 더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휴게실 아무 데나 처박아두었던 꼬질꼬질한 환자복을 어떻게든 갈아입고 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린케이는 어색하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간호사가 한 번 더 꾸짖을 때였다.
“지금은 경증으로 보인다고 해도, 후유증이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창틀 위에 어정쩡히 기대앉아 있던 마린케이가 가볍게 뛰어내렸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가 제게로 다가와 시선을 내리자, 간호사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물리며 꿀꺽 침을 삼켰다.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다신 안 나갈게요.”
사실 거짓말이다. 심지어 마린케이는 돌아오는 길에 뭔가 대단히 맛있어 보이는 횟집 하나를 발견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회 도시락을 사 오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더 배수관을 타줄 의향이 있었다. 퇴원까지 아직 한참이나 남아있는데, 그것마저 없으면 인생이 너무도 지루해질 터였다.
불과 3일 뒤 퇴원이 예정되어 있다고는 해도 마린케이, 본인이 느끼기엔 그랬다. 그 긴 시간을 뭐 하면서 버티라고? 그러나 간호사가 병실을 빠져나간 이후로도 마린케이는 또다시 원하지 않았던 불청객과 얼굴을 마주해야만 했다.
그의 문병을 왔던 사람은 생각보다 많았다. 이스턴 내외는 물론이고 미저리 집단, 이름도 모르는 퍼스트 클래스 수련생들을 포함해 무려 피에르 셀번과 로건 콜린스까지 찾아왔었으니 말이다. 마지막 두 사람은 하필이면 방문 시간이 겹치기까지 해 환자 앞에서 왁왁거리며 난동을 부려댔었다. 마린케이가 그 사이로 메론을 집어던지고 나서야 잠잠해진 개싸움이었다.
“마실이라도 다녀왔나 보네.”
침대에 기대앉아 있던 마린케이는 레온하르트의 손에 들려있는 회 도시락을 발견하고서 눈을 빛냈다. 흡사 애완견의 식사를 챙겨주는 주인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지만, 그게 꼭 불쾌하지만은 않았던 터라 레온하르트 역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마린케이가 물었다.
“이거, 진짜 저 주시는 겁니까?”
“그럼 환자 앞에서 내가 먹고 있을까 봐?”
도시락을 받아 든 마린케이가 고개를 꾸벅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본능만으로 살아가는 타입일 것이라 생각하긴 했으나, 이제 보니 예상보다 훨씬 더 기초 욕구에 충실한 타입인 모양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마린케이가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끈질긴 시선을 무릅쓰고서 식사를 시작한 마린케이는 참다못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왜 아직까지 계십니까.”
이제 그만 나가 보라는 축객령이었지만, 레온하르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화두를 피했다.
“곧 나갈 거니까 좀 참아.”
귀족들의 노예 경매가 수면 위로 올라온 이상, 그가 관리하는 베사플레사 또한 조사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비록 경매 자체와는 무관하다고 해도 그가 백작에게 장소를 대여해 주었던 사실은 변치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금껏 녹화해왔던 비디오테이프들이 존재했다. 귀족들의 만행이 날것 그대로 담겨 있는 테이프들을 보며, 담당 조사관인 마리아 로즈 엔스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무리 선인과 악인이 한 끗 차이라고는 해도…, 당신은 정말 어려운 사람이네요. 레온하르트.」
게다가 레온하르트는 신분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수사나 판결 또한 직접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마리아는 레온하르트에게 제한적 집행유예 15년을 부과했다.
6개월마다 행적을 기록한 보고서를 올려 수사관 차원에서 그를 감시하기로 한 결정이었다. 레온하르트는 곧바로 베사플레사를 매각해 아이들의 치료비 및 생활 지원비로 쓰일 수 있도록 만들었고, 임의의 신분을 부여받은 채 수사에 협조하고 있었다.
스리슬쩍 도시락의 덮개를 닫은 마린케이는 나직이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용건만 말씀하십시오.”
“즉위식 전에 가쉰을 떠날 거야.”
“…….”
“그냥, 가기 전에 한 번쯤은 보고 싶더라고.”
그가 마린케이의 목덜미 위로 찍혀 있는 키스마크들을 보며 흐리게 말을 이었다.
“그 새끼 즉위하는 꼴이 뭐 예쁘다고 여기 남아있겠어.”
즉위? 그에 마린케이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누구보다 즉위를 맹렬히 거부하던 사람이 바로 가쉰의 황태자였다. 그는 주군이 흘려보내던 목소리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 순간 레온하르트가 말했다.
“샤를은 정이 너무 많아.”
“…….”
“이제 그 애가 아니고서야 누가 즉위할 수 있겠어?”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로 아이를 안아 든 황태자의 모습은 제국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황제를 부르짖게 만들기 충분한 것이었다. 세간에서는 벌써 그를 성군으로 추앙하며 즉위식을 재촉해대고 있었으니, 틀린 말은 아닐 터였다. 몸을 일으키려는 마린케이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아 누른 레온하르트가 쓰디쓴 웃음을 입가에 걸치며 말했다.
“매번 남 생각만 하는 재수 없는 새끼한테 전해줘.”
즉위, 축하한다고. 그러나 그는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
오랜만에 쥐어 보는 목검이었다. 퇴원 수속을 밟은 마린케이가 본가를 뒤로하고서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왕립학교였다. 주말이라 그런지, 교내의 분위기는 무척 고요했다. 게다가 황태자의 즉위식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다들 광장에 모여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를 즐기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마린케이는 망설임 없이 훈련장을 찾았다.
목검에서는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냉랭한 감촉은 그가 살아왔던 뒷골목의 풍경을 닮아 있었다. 벌써 왕립학교에 입학하게 된 지도 반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도 생존을 위해 인간성의 한 부분을 도려내야만 했던 그 시절의 기억들이 생생히 자리하고 있었다.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바꾸려 하지도 않겠다, 그리 생각했었는데. 소년만화의 뻔하디뻔한 레퍼토리는 그저 누군가의 환상 따위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여전히 낭만을 꿈꾸는 이가 남아 있었다. 꿈꾸기만 했을까? 심지어 그 가능성 없는 이상과 욕심을 실현해 보겠답시고 벌였던 일이 직접 제 배를 칼로 찌르는 황당무계한 짓거리였다. 문득, 마린케이의 머릿속에 지난날들이 스쳐 지났다. 노예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던 샤를 소피아 엔스, 저를 탓하지 않을 수는 없노라 속삭이던 샤를 소피아 엔스, 그리고.
“대련 한 판 하시죠.”
마린케이가 들고 있던 목검을 황태자에게로 내던졌다. 훈련장 한가운데 서 있던 샤를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검 안 들고 뭐 하십니까?”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가장 낮은 이들을 살펴보고, 그 시궁창 속으로 뛰어들면서도 빛을 잃지 않던 나의 눈부신 주군. 마린케이는 기사도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샤를 소피아 엔스라는 사람은 믿었다. 샤를이 마린케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린.”
“참고로 단판입니다. 삼세판에는 이골이 나서요.”
어쩌면 나는 그런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을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졸지에 황제의 친위대가 되게 생긴 꼬락서니마저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아닐까.
절대 기사가 되지 않겠다던 본인의 신념을 저버린 기사는, 역설적으로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 더 기사다운 사람처럼 보였다. 감히 주군에게 검을 던지고, 대련을 하자며 시비를 거는 기사가 어디 존재하겠냐마는.
따뜻한 봄기운에 피어난 유채꽃을 닮은 샛노란 머리칼이 가볍게 흔들렸다. 허리를 굽혀 검을 잡아 든 샤를은 푸른 눈을 접으며 물었다.
“이번엔 진짜 날 죽이려고?”
그는 생각보다 훨씬 더 무뎌 보이는 얼굴이었다. 엉엉 울어 잔뜩 부어 있는 모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마린케이는 꺼진 조명 탓에 황태자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가 다시 한번 이어졌다.
“복상사면 모를까. 여기서 객사하긴 싫어.”
“부디 입조심 좀…….”
그에게 걸어가던 마린케이는 끝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몇 걸음 남지 않은 거리에서 마주하게 된 황태자의 얼굴이 너무도 괴로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마린보이. 나 보고 싶었어?”
“…….”
“난 보고 싶었어. 키스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더라고.”
푸른 눈 사이로 내다보이는 억눌린 슬픔에, 마린케이는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팔을 뻗고 말았다.
“사랑합니다.”
황태자의 볼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린 마린케이가 연달아 내뱉었다.
“사랑합니다. 전하.”
그동안 받았던 어떤 고백에도 비교할 만한 수준이 못 되는 투박하고 단순한 말솜씨였지만, 샤를은 자꾸만 자신의 가슴이 북받치는 것을 느끼며 마린케이의 손에 입술을 묻었다.
「3년만 버텨, 샤를 소피아 엔스. 그 안에 드윈의 모든 걸 배워올 테니까.」
「…….」
「제국법을 어겨 보자며?」
사과나무 아래 선 마리아는 저를 끌어안으며 그렇게 말했다. 어깨 부근이 그녀의 눈물로 젖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샤를은 또다시 자신을 원망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빼앗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모든 걸 돌려주고 싶었다. 그래야만 바꿀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드윈은 제국의 권한을 가진 국가들 중 가장 먼저 기존의 질서를 철폐하고 공화정을 택한 곳이었다. 샤를은 드윈의 서적을 읽으며 가슴 뛰어 했던 어린 날들을 떠올렸다. 상념을 마친 그가 울 듯한 얼굴로 읊조렸다.
“나는 아닐 것 같아?”
그리고선 마린케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입술이 맞물리기 전, 그가 작게 속삭였다.
“사랑해. 내 나이트.”
***
본궁은 그동안 봐왔던 어떤 황궁들보다 더 화려했고, 아름다웠다. 소피아 황후도 이곳에서 황제와 혼례를 올렸다고 들었다. 거의 소규모의 도시라고 볼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엄청난 규모에, 마린케이는 새삼스레 황실의 돈지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정도 건물을 지으려면 얼마를 쏟아부었어야 했을까. 초대 황제의 과시욕이 남달랐다고는 하나, 이 정도면 확실히 과시욕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옷부터 갈아입으라니까, 아까부터 뭐 해?”
신기하다는 듯 사방팔방 힐끔거리는 마린케이에게 신경질을 뱉은 로건이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오늘은 무려 황태자의 즉위식 날이었다. 마린케이는 그와 유일하게 기사 서약을 맺은 사람이었고 말이다. 이제 그는 황제의 직속 기사로서 평생을 살아가겠다는 서약을 다시 맺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옷을 다 갈아입고 나온 마린케이를 훑어보던 로건이 손가락을 튕겼다.
“역시 애매하게 생겨서 그런가, 옷이 좀 화려해야 튀네.”
“이건 기사가 아니라 광대로 보일 것 같은데요.”
“네 낡아빠진 수련복보다는 낫거든?”
그거야 황태자보고 하나 더 구해오라고 하면 해결될 일이었지만, 로건은 부득불 자신이 기사복을 제작해 주겠다며 나섰다. 이 기회를 틈타 새로운 디자인을 홍보하고 콜린스 사의 명성을 드높이려는 속셈이 훤히 다 내다보이는 제안이었다.
“옷빨은 좀 괜찮아 보이니까 당당하게 걸어. 표정도 제발 풀고. 누구 잡아 죽이러 가냐?”
그건 실제로 널 잡아 죽이고 싶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 아닐까. 마린케이는 굳이 본심을 드러내지 않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미관에만 신경을 쓴 의복이어서 그런가, 움직임에 좀 불편함이 있긴 했으나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마린케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넌 참 감사하다는 말을 신기하게 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나도 안 감사한 것 같을 수 있지?”
“…….”
“오히려 좀 비꼬는 것 같다 해야 하나, 아무튼 그래.”
안 본 새 로건 콜린스의 눈치가 제법 늘어난 것 같았다. 묘하게 시선을 피하던 마린케이는 불현듯 구세주를 만난 사람처럼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린 로건 역시도 화들짝 놀라며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화, 황녀님!”
로건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소리쳤다. 그러자 대기실로 걸어 들어온 마리아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으니, 다들 일어나세요.”
그녀는 남색 계열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옷은 로건 콜린스가 직접 초이스해 황실에 선물로 보냈던 제품이었다. 감격해 입을 틀어막은 로건은 눈시울을 붉혔다. 이건 가문 대대로 전해내려야 할 희소식 중 하나다. 그의 심장이 막무가내로 날뛰었다.
“혹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을까요?”
“네, 네! 바로 비켜드리겠습니다. 편하게 대화하십시오!”
마린케이에게는 눈을 세모꼴로 뜬 채 구박만 늘어놓기 바쁘던 로건이 기뻐하며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제국의 황녀와 둘이서만 남아있게 된 마린케이는 어색함과 불편함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일부러 신발코만 들여다보고 있던 찰나였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곧 즉위식이 시작될 터인데, 무슨 급한 사정이 있길래 저를 찾아오기까지 한 것일까. 그녀의 손짓을 따라 몸을 일으킨 마린케이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황녀님. 말씀하십시오.”
“난 샤를을 제법 아껴요.”
“…….”
“적어도 그 애가 내 약혼식 드레스를 죄다 찢어 버린 그날부터는, 예비 황제를 위해 모든 욕심을 내려놓겠다고 다짐했었죠.”
그녀의 푸른 눈은 황태자를 닮아 있었다. 아니, 어쩌면 황태자가 그녀를 닮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린케이는 문득 황족들은 모두 다 저렇게 투명하고 새파란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느꼈다. 세간의 속설이야 그렇다고는 하지만, 사실 드넓은 제국 땅 위에 오직 그들만이 금발과 벽안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에는 무언가 대단히 어폐가 있었다.
“금발은 황실의 것만이 아니에요. 그건 이 눈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마린케이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인 양, 그녀는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금발로 태어난 아이들은 황족이 아니고서야 아주 어릴 적부터 머리색을 감추며 살아가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조금이라도 탁한 머리칼을 가지고 태어나는 황실의 아이는 독한 탈색으로 금발을 유지하며 살아가거든요. 이게 말이나 되는 세상이라고 생각해요?”
대답할 필요도 없이 바로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마린케이에게 다가온 그녀는 가지고 왔던 브로치를 그의 가슴 위로 달아주며 본론을 전했다.
“샤를은 그 악순환을 끊고 싶어 했어요. 아주 어릴 적부터 드윈의 서적을 찾아 읽었고, 내게도 종종 말하곤 했죠. 언젠가 꼭 같이 제국법을 어겨 보자고요.”
“…….”
“그러니 난 드윈에 다녀올 생각이에요. 괜히 책임을 지우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그대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네요.”
“……황녀님.”
“그 애를 잘 부탁해요, 이스턴 경. 황제란 자리는 혼자일 수밖에 없는 곳이니까.”
그가 황제로 즉위하게 된 이상, 같은 황후의 소생인 새넌 프리지아 엔스조차 제 형제를 예전처럼 대하게 될 수 없어질 것이 분명했다. 황태자의 단검에 박혀 있는 사파이어와 똑같은 색의 브로치를 선물한 그녀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인사를 전했다.
“이건 내 개인적인 답례구요.”
마린케이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내 연인을 구해줘서 고마워요. 마린케이.”
연인? 그가 의아해하기도 전에, 그녀는 먼저 몸을 돌려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로건이 마린케이를 향해 황급히 소리쳤다. 야, 빨리 나와! 즉위식의 시작을 알리는 궁중 음악이 시작된 것과 동시에 마린케이 또한 급하게 그를 따라 달려나갔다.
때마침 일렬로 대기 중이던 퍼스트 클래스 일원들이 그를 보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저 새끼들이! 물론, 마린케이가 얼굴을 구기며 노려보자 단숨에 사그라든 환호성이기는 했다.
가장 앞 열은 역시나 귀족들의 차지였다. 그러나 노예 경매와 관련된 혐의를 피하지 못한 귀족들이 대거 구속되었기 때문인지, 많은 좌석이 비어있는 상태였다.
공작을 대신해 즉위식에 참석한 피에르는 연미복이나 다름없는 하얀 기사복을 차려입은 채 등장한 마린케이를 보며 그 패션 센스를 힐난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박수는 쳤다.
즉위식에 초대받은 에단은 아예 휴지 하나를 통째로 들고 와 하염없이 눈물을 닦아냈고, 그가 어깨에 기대자 칼같이 떼어낸 마린느는 이 기쁜 순간 속에서도 돌처럼 무딘 표정을 하고 있는 아들을 향해 혀를 찼다.
이윽고 음악 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지며, 모두가 기다리고 있던 한 사람이 찬란한 대례복을 입고서 모습을 드러냈다. 마린케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가슴 깊이 벅차오르는 어떤 감정을 느꼈다.
샤를 소피아 엔스. 금빛 물결이 일어나는 저 아름다운 머리칼과, 사파이어 원석이라도 박은 듯 총명하게 빛나는 두 눈을 두고 어느 누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가쉰, 마지막 황제의 즉위식이었다.
더블 피 (Double P)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