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585년 11월, 초겨울
퍼스트 클래스 수련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이상 그 토론의 결과가 좋은 쪽으로 흘러갈 리 없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자꾸만 송별회를 주장하는 칼릭스 커티스부터 시작해, 폐하라면 더 럭셔리한 방법으로 배웅해드려야 한다느니, 세상에서 제일 값비싼 검을 세공해 드리자느니 하는 얼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곧 머리가 터져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인내심이 바닥났다는 것을 느낀 마린케이는 주저 없이 몸을 일으켰다. 언젠가부터 회의장으로 쓰이기 시작한 넓은 탈의실을 벗어난 그는, “이스턴 씨!” 하며 저를 붙잡는 린저 아일랜드의 목소리도 무시한 채 기숙사로 향했다. 이유는 단순하고도 명확했다.
사태의 장본인인 샤를 소피아 엔스, 그러니까 가쉰의 주인 되는 사람께서 친히 제 기숙사 침대에 드러누워 편하게 만화책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샤를은 입에 물고 있던 막대사탕을 빼며 해맑게 인사했다.
“생각보다 늦게 왔네?”
즉위식이 끝나면 얼굴도 잘 보지 못할 정도로 바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마린케이의 예상과 달리, 그는 밀린 업무가 끝난 날이면 언제고 S관 702호를 찾아와 저와 느긋이 시간을 보내다 가고는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피에르 셀번은 저녁마다 저녁거리를 사 와 요리를 하겠다며 주방에서 난동을 피워대기까지 했다. 인생에 회의감을 느낀 마린케이가 쌀쌀맞게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생각보다 한가로워 보이십니다.”
“그 소리도 참 오랜만에 들어본다.”
웃으며 상체를 세운 샤를이 마린케이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어리광을 부렸다.
“일단 좀 안고 나서 얘기할까?”
마린케이는 썩 내키지 않는다는 듯 까칠하게 표정을 구겼지만,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어여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또 기분이 곰살맞아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주군의 앞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샤를이 헤죽헤죽 웃으며 마린케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됐습니까?”
침대에 앉아 있었던 터라 마린케이의 품에 폭 안기는 모양새가 된 샤를은 불량한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잘빠진 허리 위에 손을 둘렀다. 순식간에 침대 위로 풀썩, 엎어지게 된 마린케이가 어느새 제 몸 위에 올라타 있는 샤를을 보며 신경질을 냈다.
“오늘은 안 됩니다.”
“뭘?”
그러나 천진한 척,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그에 의해 절로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이 새끼가 또 시작이네. 마린케이는 힘줄이 우뚝 선 손을 들어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그럼에도 샤를은 이것 보라는 듯, 더욱 밝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스턴 경. 아닌 척하면서 기대하고 있었나 봐?”
황제로 즉위하기 전이든 후든, 성격이 틀려먹은 것은 황실 의료진들의 힘의 빌려서도 절대 고쳐지지 않는 희한한 질병인 게 틀림없었다. 멱살을 쥔 그대로 샤를을 옆으로 던지다시피 한 마린케이는 흉흉하게 솟아올라 있는 그의 성기를 무릎으로 꾹 찍어 누르며 말했다.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리인데요.”
“내가 언제 아닌 척을 했다고 그래, 마린보이.”
샤를이 마린케이의 상의 안에 손을 집어넣으며 곱게 눈웃음쳤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 위에도 미처 가리지 못한 피곤함이 잔뜩 묻어 있었기 때문에, 마린케이는 작게 한숨을 뱉고는 그를 도로 품 안에 밀어 넣었다. 근육이 보기 좋게 잡혀 있는 가슴팍이 샤를을 옴짝달싹 못 하게끔 꽉 눌렀다. 그러자 그는 기분 좋다는 듯, 마린케이의 가슴에 대고 마냥 얼굴을 비볐다. 마린케이가 그런 샤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허튼짓 말고, 이대로 눈이나 붙이시죠.”
“…자버리면 얼굴 못 보잖아. 너 보려고 온 건데.”
“재워드리겠습니다.”
마린케이는 금색 머리칼 위로 손을 올렸다. 정말이지, 언제 보아도 곱고 아름다운 머리칼이라고 생각하면서. 황홀한 금빛을 머금은 머리카락들은 흉터 가득한 손안에서 너무도 연약한 모습으로 흐드러졌다. 사실 마린케이 역시 그가 저를 보기 위해 일부러 S관 기숙사까지 찾아오곤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기사와 사적인 만남을 가진다는 이유로 저급한 스캔들을 터뜨릴 일간지 따위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한때 언론의 희생양이 되었던 마린케이를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샤를의 마음 씀씀이에서부터 비롯된 상황이었다.
마린케이의 품속에서 눈을 깜빡이던 그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서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방 안 곳곳으로 고르게 퍼져가는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마린케이는 선연히 드러난 새하얀 이마 위로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샤를이 보이지 않게끔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레온하르트의 비디오 덕분에 암암리에 노예 경매를 자행하던 귀족들을 모두 법정 앞에 세울 수 있었다. 그들 모두의 직위를 해제하고 재산을 몰수하라는 제국민들의 분노한 목소리가 하루도 쉬지 않고서 광장 한복판에 울려 퍼지고 있는 혼돈의 시기였다. 미저리 군단이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고 들었던 것 같기는 하나, 한 번도 찾아가 본 적은 없었기에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마린케이는 악몽을 꾸듯 뒤척이는 샤를의 몸을 침대 위에 편하게 눕혀주며, 다시 한번 천천히 그의 얼굴을 음미했다. 길게 뻗은 속눈썹과 눈 밑에 찍혀 있는 작은 점. 예쁘게 솟은 코와 그 아래의 선홍색 입술까지. 명화에서 갓 튀어나온 것만 같은 아름다운 미남자가 슬며시 푸른 눈을 들어 보였다. 하늘보다 청명한 그의 눈동자가 비 개인 하늘처럼 마린케이를 담았다.
“안 자고 뭐 하십니까?”
졸지에 속은 기분을 느끼게 된 마린케이가 불손히 되묻자, 샤를은 개구쟁이처럼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그의 몸을 제 옆으로 끌어들였다. 상반신을 세우고 앉아 있던 마린케이는 그 단단한 손에 이끌려 침대 위에 눕혀질 수밖에 없었다. 얼굴 바로 밑까지 이불을 올려주는 다정한 손길을 느낀 마린케이가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샤를이 선수를 치며 말했다.
“네 얼굴이라도 보면서 자야겠어.”
“말로 할 때 그냥 주무시죠.”
“너 하나 보겠다고 삼시 세끼 전부 거르면서 일만 하다 왔는데, 그렇게 매몰차게 굴 거야?”
인생을 살아가며 한 번도 끼니를 걸러본 적이 없던, 만약 굶을 것 같으면 날치기를 해서라도 밥값을 벌었던 마린케이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어떻게 살아계십니까?”
“…하루쯤 굶었다고 해서 바로 기절하고, 죽고 막 그러는 건 아냐.”
“아.”
“왜 아쉬워 보이는데?”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차곡차곡 쌓여온 습관이었던지라 어쩔 수 없었다. 멋쩍은 듯 볼을 긁적인 마린케이는 저를 무슨 갓난아기처럼 싸매 놓은 이불을 풀어 헤치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하루 종일 먹은 음식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니,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털어서라도 무언가를 만들어줘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샤를이 만류하듯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에 마린케이는 경멸 어린 표정과 함께 짜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이니까.”
어떻게 저게 황제를 향한 기사의 눈빛일 수 있냐고 묻는 이들이 여럿일 테지만, 하도 그런 눈빛에 시달려서인지 샤를은 오히려 그것을 더욱 기꺼워하며 침대 위를 굴러다녔다. 어쩌면 저 얼굴이 보고 싶어서 더 장난을 치며 그의 짧은 인내심을 건드려대는 것일지도 몰랐다.
마린케이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샤를의 얼굴 위로 옆에 놓여 있던 베개를 집어 던졌다. 강한 위력으로 콧등에 부딪힌 베개가 나풀거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조심스럽게 이불을 끌어안은 샤를은 서글프다는 듯,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말했다.
“우리 마린보이 졸업할 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려나 몰라.”
“안 기다리셔도 됩니다.”
싸늘한 답변만이 돌아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얼른 졸업부터 해야 부모님께 결혼 허락도 받을 수 있을 거 아냐.”
그의 목소리를 아닌 척하면서도 내심 귀 기울여 듣고 있던 마린케이는 예상치 못한 단어와 마주하고서 얼떨떨한 목소리를 냈다.
“결…, 뭐요?”
샤를이 뭘 그런 걸 묻냐는 양 새침하게 눈을 치뜨며 대답했다.
“샤를 소피아 이스턴. 어감이 꽤 괜찮지 않아?”
“갑자기 무슨 소리, 아니. 그보다 제가 어떻게 전하랑 결…….”
차마 입으로 내뱉을 수도 없는 말도 안 되는 단어였다. 게다가 뭐? 샤를 소피아 이스턴? 제 호적에 올라오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뭔가. 설령 그러겠다는 말이라 해도 대체 무슨 수로 제국의 황제가 저 같은 평민의 호적에 올라올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순간까지도 저를 꼬박꼬박 폐하가 아닌 전하라 칭하는 중저음의 목소리를 들으며, 샤를은 설마 하는 심정을 담아 물었다.
“마린보이…. 너 설마, 날 가지고 놀려던 건 아니지?”
마린케이가 짜증스레 답했다.
“그건 또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입니까.”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 진심을 종잇장처럼 취급하는 편이었구나.”
이번엔 더 복장이 터질 만한 말들을 내뱉고 있는 황태자, 아니, 가쉰의 황제 새끼였다. 안고 있던 이불을 침대 구석으로 내팽개친 샤를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장난이었어.”
하지만 그의 얼굴은 전혀 장난 같아 보이지 않았다. 마린케이는 본능적으로 황제가 오직 진심만을 다해 결혼을 제안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말에 온전히 동의를 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유는 태산보다 높이 쌓여 있었다.
첫째로, 제 호적에 올라 성씨를 받아 쓰겠다는 황제의 생각은 그 가능성이 0에 수렴할 정도의 무근본 개소리에 해당했다. 일단 황족은 어떠한 경우에서도 성씨를 바꿀 수 없었다. 심지어 귀족과 결혼한 황녀들조차 엔스의 성을 지키며 살아갔다.
둘째로, 마린케이는 아직도 그와 저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지 못한 상태였다. 어릴 적에 몇 번 여자 친구를 사귀어본 적은 있으나, 모두 소꿉놀이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별거 없는 연애 경험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연애는 해보지 못했다는 설명이 더 옳았다.
즉슨, 눈앞의 이가 저와 진지한 감정 교류를 나누고 있는 첫 사람이자 첫사랑이라는 소리였다. 반복된 미디어 노출의 결과 덕분인지, 마린케이는 사귀는 사이가 되면 ‘오늘부터 1일’이라든가, ‘우리 사귀는 사이다?’라든가 하는 여러 닭살 돋는 멘트들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말을 제 입으로 뱉을 생각도, 황제의 입에서 들을 생각도 없긴 했지만, 어쨌든 그랬다.
고로 마린케이는 그와 혀를 섞고 살을 섞게 된 지금까지도 그들의 관계를 제대로 정의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무려 가쉰의 황제 되는 사람이었으니, 제멋대로 결론을 낼 수조차 없었다. 깊은 고민 끝에 마린케이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서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껄끄럽긴 한데, 어디 한번 해봐.”
“혹시 저랑…, 사귀고 계셨어요?”
물론, 고민의 결과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잠시 멍한 눈으로 마린케이를 응시하던 샤를이 헛웃음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고아하게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동작 또한 함께였다. 가녀린 눈매가 맹수처럼 번뜩이기 시작하는 것에, 마린케이는 솔직히 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조금 전에 벌였던 드잡이질 탓에 약간씩 비뚤어져 있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샤를은 마린케이를 향해 서슬 퍼런 눈빛을 던졌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사람처럼 행동하는 불량 기사는, 이따금 그의 속을 뒤집어 놓으려 환장하기라도 한 양 혈압을 자극해대고는 했다.
“마린보이야.”
마린케이의 앞까지 걸어온 샤를이 부드럽지만 단호한 손길로 그의 턱을 치켜들었다. 당장에라도 키스할 듯, 가까이 얼굴을 붙인 그가 불과 몇 센티밖에 되지 않는 거리만을 남겨두고서 입술을 움직였다.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날 가지고 싶다며.”
“…….”
“사랑한다며?”
“…….”
“가지게 된 지가 언제인데, 이제 와서 모르쇠를 하시겠다?”
이쯤 되니 비약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지경에 이른 것 같다고 생각한 마린케이가 반박을 던지려 하자, 샤를은 그가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입술 위로 가볍게 키스했다.
“날 가지고 노는 사람이랑은 겸상 안 해.”
그렇게 입술을 떼어낸 샤를은 차 키와 겉옷을 챙겨 들고서 빠르게 방 안을 빠져나갔다.
이해할 수 없는 말싸움 끝에 홀로 남겨진 마린케이는 여전히 그의 심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 그대로 입을 벌렸다. 물론, 뒤늦게 저녁 장을 봐온 피에르가 상황 설명을 들은 뒤 내뱉은 ‘넌 정말 쓰레기군.’이라는 한마디 때문에라도 흉흉한 눈빛을 한 채 정보 검색실로 뛰어가기는 했다. 옆집 청소 중독자 새끼의 발언은 그다지 신빙성이 없는 것 같으니 직접 정상인들의 의견을 들어봐야겠다고 판단해서였다.
그러나 인터넷에 글을 올리자마자 쏟아지는 답변들로 인해 한숨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사귀는 걸 모름? 먼저 고백했으면서?’, ‘눈새네ㅋㅋㅋㅋㅋㅋ ㄹㅇ뭐하는 새끼냐 헷갈리면 중간에 물어보기라도 하든가ㅋㅋㅋㅋ’, ‘백퍼 상대는 혼자 도키도키 하면서 기념일 세고 있었을 듯? 헤힣ㅎ헿ㅎ 오늘 50일이네 이러면서~ 넘 불쌍쓰’ 등의 조롱 섞인 답변들이 마린케이를 계속해서 낭떠러지로 밀어 넣었다.
그의 편을 들어주는 답글들은 정말 몇 개 되지 않았다.
『아니 모를 수도 있는 거 아님? 말하는 거 존나 무례하네들 / 하이에나1 / 19:34』
『서운할 수는 있는데 이렇게까지 나올 일은 아니지;;; 걍 대화를 해보셈 왜 그러냐고 / 하이에나1 / 19:35』
그중 하나를 읽어보던 마린케이는 그 닉네임이 유난히 눈에 익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는 망설임 없이 창을 닫았다. 대다수의 의견이 그렇다고 하니, 직접 찾아가 사과를 전하는 편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거니 싶어서였다. 그러나 떠오르는 의문에 도로 의자 위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대체 뭐라고 사과해야 하는가?
사귀는 걸 모르고 있었다는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은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할 터였다. 머리칼을 쥐어뜯던 마린케이는 신속히 포기 선언을 하며 재차 질문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고백하는 법’이라는 제목을 달아두었던 그는 어느새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이마를 손으로 감싸며 조금 더 간절한 형식의 제목을 달았다. ‘절대 차이지 않게 고백하는 법’.
답글은 불과 몇 분 사이에 폭주하듯 쏟아지기 시작했고, 마린케이는 그것들 전부를 하나하나 읽어나가며 누구보다 철저히 고백 계획을 세웠다.
***
지난번에 있었던 길고 긴 토론 끝에 채택된 사항은 졸업 예정자인 칼릭스가 낸 의견이었다. 황제가 명예 졸업장을 받으러 오는 그날 밤, 퍼스트 클래스 일원들은 모두 거창한 송별회를 열어 그를 배웅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째서인지 이 자리에 피에르 또한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 기이해 보이긴 했으나, 친형이 감옥에 잡혀 들어간 이후 차기 공작으로 거론되고 있던 그였던지라 아무도 부정적인 뉘앙스를 내보일 수 없었다.
때마침 황제 역시 마지막 수업만큼은 성실히 참여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밝히고 있던 참이었다. 수련생들은 모두 해당 수업에서만이라도 그들의 주군에게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드리겠다는 일념하에 수련장을 뜨거운 열기로 물들였다. 그에 못지않은 시큼한 땀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하자 피에르는 한쪽 손으로 코를 그러쥔 채 간신히 수련에 임하는 중이었다.
저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알아서들 그와 스무 바퀴씩 트랙을 뛰며 경애심을 잃어버리게 될 텐데, 왜 벌써부터 본인의 몸을 혹사하려 드는 건지 마린케이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심한 얼굴로 그들을 구경하던 그는 저를 톡톡, 건드리는 미약한 손길을 느끼고서 시선을 돌렸다.
“저, 이스턴 씨…! 이거요.”
조금 쑥스러운 듯한 얼굴을 한 린저 아일랜드가 불쑥 무언가를 내밀며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그러나 휴대폰부터 시작해 차 키까지, 지금까지만 해도 엄청난 물량 공세에 시달려 왔던 마린케이는 단호하게 그의 적선을 거절했다.
“필요 없습니다.”
그러자 린저는 황급히 목소리를 높이며 저 자신을 변명했다.
“이건, 이건 절대 제 욕망이 투영된 물건들이 아니에요! 아이들이 이스턴 씨께 전해달라고 부탁한 것들이라 가져온 것뿐인걸요.”
그제야 비로소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을 한 마린케이는 그에게 조금 미안해하며 파란색 상자를 받아들었다. 린저가 앞말로 던졌던 욕망 어쩌고 하는 것들은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린 것이 분명한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편지더미를 확인하고 나자 그 벽이 조금 허물어졌다.
몇 번씩 샤를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사서 아이들의 치료 센터를 찾아가곤 했던 마린케이는, 심각한 트라우마를 얻은 아이들이 그들을 보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이후부터는 그곳에 일절 방문하지 않았다. 대신 아이들과 꾸준히 편지나 이메일을 주고받았고, 가끔 그들이 보내준 유쾌한 사진들을 보며 혼자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저도 모르게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던 마린케이는 어느새 저를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린저의 존재를 눈치채고서 늦은 인사를 건넸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이거, 전해주셔서 감사하고요.”
“아니에요! 확실히 오해하실 만했던 걸요. 그동안 제가 사다 바친 게 얼마인데, 어떻게 오해를 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하하.”
“…….”
“으, 으악! 절대 생색내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정말이에요. 이스턴 씨한테는 제 집문서도 가져다드릴 수 있…!”
정도를 넘어서기 시작하는 린저의 뒷덜미를 확 잡아당긴 것은 다름 아닌 칼릭스 커티스였다. 안타깝다는 얼굴로 혀를 찬 그가 린저를 대신해 물었다.
“널 보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굉장히 많은 건 알고 있겠지?”
샤를과 마린케이가 치료센터 방문을 그만두게 된 이후부터, 칼릭스와 린저는 그들을 대신해 더욱 자주 아이들을 찾아가며 갖가지 선물과 간식들을 전달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똘망똘망하기 그지없는 아이들은 물질적인 품목들보다 그들이 들려주는 샤를과 마린케이에 관한 이야기들을 더 좋아했는데, 마치 엄청난 영웅담을 듣는 것처럼 눈을 반짝이고 있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칼릭스는 저도 모르게 각종 MSG를 덧붙일 수밖에 없었다.
가령, 마린케이가 오만한 귀족 한 명의 콧대를 박살 내 병동에 실려 가게 만들었다는 내용 같은 것들이 그 예시 중 하나였다. 칼릭스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헛기침을 했다.
그런 그를 무시한 채 상자의 뚜껑을 제대로 열어본 마린케이는 그 안에 들어있는 여러 종류의 쿠키 및 편지들, 그리고 인형 몇 개를 발견한 뒤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틈을 노리고 있던 린저가 토끼처럼 깡총 끼어들었다.
“치료 목적으로 하는 수업이라던데, 잘 만들어진 것들은 이스턴 씨나 폐하께 가져다 달라고 차곡차곡 모아뒀더라구요.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에요. 그렇죠?”
마린케이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린저는 자신이 칭찬을 받은 것처럼 얼굴을 붉히며 헤헤 웃었다. 칼릭스는 그런 린저를 안타까움이 담긴 눈빛으로 쳐다보며 혀를 찼다. 아이들의 선물꾸러미를 흥미롭게 구경하던 마린케이가 아까보다 몇 배는 더 살가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노아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연락이 한 번도 닿지 않았던 것은 오직 검은 머리칼과 녹색 눈동자를 가진 그 소년뿐이었다. 다리를 심하게 다친 상태인지라 오랜 재활 치료가 필요할 것이라 듣기는 했으나, 그 후로부터는 들려온 소식이 없어 걱정이 커지던 시점이었다. 린저가 쓴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치료 과정이 많이 힘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잘 버텨주고 있대요. 실제로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회복 속도가 빠르기도 하고요. 저도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지만요.”
그의 목소리는 방방 날뛰어대던 방금 전보다 훨씬 작아져 있었다.
다른 아이들을 대신해 백작의 손아귀에 걸어 들어갔던 노아를 떠올리면 마린케이는 언제나 온몸의 피가 차가워지고,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는 듯한 끔찍한 기분을 느끼게 되고는 했다. 표정을 굳힌 채 린저의 말을 듣고 있던 그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상자의 뚜껑을 덮었다.
“그래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가지 더 있어.”
그들 사이의 대화에 섞여든 것은 예상대로 칼릭스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애석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는 기계적으로 헛기침을 한 뒤 물었다.
“아이들이 그러니까, 흠. 전하와 네 관계를 무척 궁금히 여기던데.”
“뭐요?”
“…아니, 내가 아니라 아이들이 궁금해한다고. 어? 아이들이!”
마린케이가 목검에 손을 가져다 대는 것을 발견한 칼릭스는 자신의 발언을 부정하듯 거세게 팔을 휘저었다. 덕분에 마린케이는 잠시나마 잊고 있을 수 있던 징그러운 고백 대작전에 대해 떠올려 버리고 말았다. 답변자들의 조언에 따라 성심성의껏 계획을 세워보기는 했으나, 그게 먹힐지 먹히지 않을지는 계획을 짠 스스로조차 함부로 확신하기 어려웠다.
매서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던 마린케이는 이내 눈에서 힘을 풀며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받은 맹수를 보며 느낄 법한 보호 본능을 경험하고 있던 린저가 주먹을 쥐며 물었다.
“이스턴 씨,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있다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에게 조언을 구해봤자 별달리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마린케이는 간결히 대답하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연애 관련 고민이라, 딱히 두 분한테 도움받을 부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전혀 간결한 대답이 아니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마린케이는 하필 이럴 때만 열심히 대화를 마무리 짓는 기묘한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특유의 건방진 경어체까지 합세하니, 칼릭스와 린저가 입게 된 자존심의 상처는 더할 나위 없이 컸다.
뒤돌아서려는 마린케이의 어깨를 겁도 없이 잡아챈 칼릭스는 오랜만에 연장자다운 무거운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어쩐지 심오해져 있는 표정의 린저 또한 분위기를 거들었다.
“난 지금껏 살면서 연애 문제로 고민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
마린케이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 그렇습니까.”
“항상 성공리에 끝났으니까.”
썩 신뢰가 가는 발언은 아니었지만, 칼릭스의 표정은 너무나도 당당해 보였다. 마린케이는 어서 상자를 안전한 곳에 가져다 놓은 후 샌드백을 후려쳐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도 성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래서, 고민이 대체 뭔데?”
하지만 칼릭스는 정신머리가 나가버린 건지, 점차 표정을 굳히고 있는 마린케이를 확인했으면서도 바퀴벌레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고민이 뭐냐니까?”
“별로 알려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이봐, 이스턴. 난 이래 보여도 연애계의 은둔 고수라 불려. 어리숙해 보이는 우리 린저는 심지어 연상 킬러로도 유명하지.”
게다가 언제부터인가 나머지 퍼스트 클래스 수련생들도 힐끔거리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린케이는 자신의 인생이 다시 한번 꼬여가고 있음을 느끼며 짜증 섞인 목소리를 뱉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퍼스트 클래스 안에 더욱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고백을 잘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그 순간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칼릭스와 린저가 마린케이를 끌고서 탈의실로 향했다. 하마터면 두 사람을 바닥에 내동댕이칠 뻔한 마린케이는 가까스로 살의를 억눌렀다.
그럴 줄 알았다는 의견부터 시작해, 자신은 진작 관상부터 알아보았다는 종류의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이 난무하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주축에 있던 것은 역시나 칼릭스와 린저였는데, 마린케이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며 양반 자세를 하고 앉아 있었다.
연애 경험이 세 번 이상인 수련생들은 총 여섯 명도 되지 않았던 까닭으로 그들 모두 탈의실을 넓게 이용하며 토론을 나눌 수 있었다. 인생이 곤두박질치기 직전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달은 마린케이는 호시탐탐 달아날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문지기 역할로 서 있던 린저로 인해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수련생들 중 한 명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 정도면 완벽하지 않나?”
“확실히, 더 이상 손볼 구석이 없군.”
“난 시험 문제 풀 때보다 열심히 한 것 같아. 너희는?”
지들끼리 열심히 맞장구를 치거나 말거나, 캐비닛에 기댄 채 저 새끼들을 다 기절시켜 버릴까 고민하고 있던 마린케이는 그들이 종이 한 장을 건네는 것에 드디어 비뚤어져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러나 대문짝만하게 써진 ‘Love is your everything’이라는 첫 문구를 보자마자 곧바로 표정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촌철살인 같은 감상평을 내뱉었다.
“이건 제가 봐도 상당히 후져 보이는 문장인데요.”
“…….”
“다들 정말 연애 경험이 있는 게 맞긴 합니까?”
“…….”
“착각한 건 아닌지,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신랄한 비난이 간격을 두지 않고서 이어지자, 그들은 상처받은 얼굴로 입을 모아 소리쳤다.
“기사도만 팔아먹은 줄 알았더니, 낭만도 엿 바꿔 먹었다니!”
그럴 거면 다시 내놓으라는 흉포한 원성에 마린케이는 고민하듯 두어 번 종이를 팔랑거렸다. 이내 그는 저를 향해 달려드는 팔들을 모두 뿌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얇은 종이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어쨌든,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세련된 운율의 세레나데를 부른 후 하늘 위로 불꽃놀이가 펼쳐지도록 이벤트를 짜라는 헛소리들은 싹 다 무시할 예정이었긴 했지만 말이다. 처음으로 그들 앞에서 미소 짓는 마린케이의 모습에, 남아 있던 모두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기 바빴다.
사랑을 하면 사람이 달라진다더니, 그게 마린케이 이스턴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었다고?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절대 믿을 수 없을 광경임이 틀림없었다. 실제로 이 소식을 뒤늦게 접하게 된 나머지 인원들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며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기도 했다.
이게 과연 먹히기는 할까. 종이 위에 써진 순번들을 하나하나 읽어보던 마린케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잘 모르겠으니 나중에 생각해야겠다, 대충 결론지으면서.
***
오랜만에 주군과 훈련을 받게 된 퍼스트 클래스 일원들은 용병단 하나 정도는 통째로 씹어 먹을 만큼 기합이 들어간 채 훈련을 이어 나갔다. 이번엔 정말 작정을 했는지, 트랙을 열여덟 바퀴째 뛰고 있으면서도 낙오된 사람 한 명 없는 것이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선두에 선 젊은 황제는 청량한 얼굴로 트랙을 질주하고 있었다. 심지어 제 곁에 선 장정 여럿을 쥐 잡듯이 잡아대기까지 했다. 단지 졸업 예정이라는 이유 하나로 황제의 옆에서 달리게 된 칼릭스는 곧 쓰러질 듯한 몰골로 가쁜 숨을 내뱉었다. 정작 황제의 서약자, 마린케이 이스턴은 맨 뒤에 서서 그들의 바보짓을 관조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도 오늘로 마지막일 것이다. 절대 간단하지 않은, 어쩌면 죽었다 깨어나도 간단하다고는 볼 수 없을 몸풀기를 끝낸 수련생들이 약속한 듯 숨을 헉헉거리며 대련장으로 향했다.
황태자였던 샤를 소피아 엔스가 황제로 즉위하게 된 이상, 그와 대련을 나눌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가쉰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모두 대련장 안에 들어와 지난 훈련에서의 추억들을 되새기는 편을 택했다.
아름다운 황태자는 언제나 다른 수련생들과 한 치의 차별도 없이 훈련했고, 오히려 누구보다 더 강한 투지를 불태우며 훈련에 앞장서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수련생들의 사기를 북돋기에는 충분했다. 감히 황태자와 대련을 나누어볼 수 있었던 수련생들은 이 시기의 퍼스트 클래스 일원들이 유일할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대련장에 놓여 있던 갖가지 선물 상자들이 그들을 반기듯 위용 있는 자태를 자랑했다. 멀뚱거리며 선물 더미를 바라보고 서 있는 수련생들에게, 샤를은 상냥한 목소리를 꺼내 들었다.
“가끔 짜증 날 정도로 꼴통 같고, 보기 싫을 정도로 얼간이 같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너희는 꽤 괜찮은 편에 속하는 머저리들이야.”
악담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들이 이어졌다. 마린케이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눈시울을 붉히며 감동하고 있는 수련생들의 모습이 그의 말마따나 정말 얼간이 같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다. 샤를이 선물 상자를 한 명 한 명에게 하사하며 마지막 인사를 시작했다.
“넌 제발 귀족의식을 버려.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 할 거 아냐? 이건 파르헬리 선생의 신간이니, 읽고 깨닫는 게 좀 있기를 바라.”
마찬가지로 분명 악담에 해당하는 소리였지만, 수련생은 감동에 젖은 얼굴로 ‘존명!’을 외쳤다. 상자를 품에 안아 든 모습이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검을 잡을 때는 왼팔에 힘을 빼고, 되도록 무릎에 힘을 싣지 말고 휘둘러. 그러다 몸이라도 망가지면 기사로서의 삶은 완전히 끝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훈련하는 모습을 하나하나 지켜보지 않았더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친절한 조언을 해주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일제히 울려 퍼지는 ‘존명!’ 소리에, 마린케이는 저에게도 무릎을 꿇으며 존명을 외쳐야 하는 순서가 오고 마는 것은 아닌지 진심으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다음, 린저 아일랜드.”
이번엔 린저의 차례였다. 긴장한 표정으로 악담을 기다리고 있던 린저는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을 들어 상자를 받아 들었다. 린저를 바라보며 슬쩍 미소 지은 샤를이 입을 열었다.
“린저, 넌 네 생각보다 재능이 출중해.”
“……네, 네?”
“앞으로는 그 재능을 믿고 받아들이길 바라. 스스로를 흠집 내지 말고.”
입술을 달싹이던 린저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어깨를 들썩이는 듯싶더니, 이내 눈물 가득한 얼굴을 들어 올린 그는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존명! 폐하께, 폐하께 영원히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건 보류.”
샤를은 썩 달갑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하지만 린저는 자신이 거절을 들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로 더욱 힘차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거기까지 인사를 마친 샤를이 뻐근한 목을 꺾으며 걸음을 옮겼다. 퍼스트 클래스가 아니었던 탓에 작별 인사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있던 피에르가, 저를 부르는 황제의 손짓에 화들짝 놀라며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폐하!”
“피에르.”
황제의 강인한 목소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누군가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힘이 있었다. 그러니 한 번이라도 기사도를 염원한 적 있는 사람이라면, 장담하건대 그 누구도 샤를 소피아 엔스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피에르는 자신이 기사학부가 아닌 정치학부를 선택했던 이유를 떠올리며 미리 존명을 외칠 자세를 취했다. 프리드리히 학원에서 처음 황태자와 마주했던 그날처럼, 단단한 목소리가 피에르의 심장을 울렸다.
“나랑 약속했던 거 기억나?”
“…….”
“다음부터는 신분이 아닌, 그 사람을 마주 봐 보겠다고 했잖아.”
파르헬리 선생께서 말하길, 제게 주어진 권한을 내던지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누군가의 앞을 지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 왕도의 길을 거닐게 될 때, 비로소 세상이 변화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하셨다. 피에르는 그것이 제 눈앞에 있는 젊은 황제를 가리키는 말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가 경애하는 마음을 담아 대답했다.
“신분과 가문 이전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맹세컨대 이 남은 생을 그들에게 바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폐하! 오, 나의 로….”
“거기까지 해. 다음.”
마지막 순서가 다가오자 아닌 척하면서도 모두의 시선이 마린케이에게로 쏟아졌다. 심드렁한 얼굴로 서 있던 마린케이는 저에게 쏟아지는 시선들을 느끼며 얼굴을 구겼다. ‘뒈지고 싶어?’라고 말하는 듯한 그 살벌한 얼굴에, 몇몇이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샤를은 그런 마린케이를 구경하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마린케이 이스턴.”
그들은 서로에게 영원을 맹세한 군신이었다. 마린케이는 오직 황제를 위한 나이트로서 남은 생을 살아갈 것을 맹세했고, 황제는 기사의 충정을 발판 삼아 굳건한 태양이 되겠노라 맹세했다. 마린케이는 황제의 새파란 눈을 들여다보며 가쉰의 창공을 떠올렸다.
썩어빠진 세상 속에서도 낭만을 찾으려 드는 황태자는, 한때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라 비꼼당하며 황실의 이단아라 불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성군의 재목이라 불리었고, 가쉰의 새로운 태양이자 희망이 될 것이라 점쳐졌다. 아마 그 모든 것이 그에겐 족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엔스 같지 않은 엔스. 당신이 결국 황제가 되었다니.
본래 마린케이는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예, 폐하.”
그들 앞에 서면 언제고 주제 파악을 해야 할 것만 같은 불쾌한 기분에 시달리고는 했으니까. 드디어 마린케이가 ‘폐하’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눈앞의 남자를 결코 황제로 대우하고 싶지 않던 마린케이였기에, 그 순간 느껴지던 씁쓸함은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낭만을 부르짖던 철없는 몽상가는 결코 황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고는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마치 푸른 하늘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하이얀 새를 닮았다.
수련장 안에 있는 모두는 아닌 척하면서도 두 사람을 힐끔거리며 황제가 내뱉을 단어만을 기다렸다. 과연 악담일까, 덕담일까. 예전부터 내기에 미쳐 있던 무리들은 벌써부터 입 모양을 벙긋거리며 성급히 몬트를 내걸었다. 그때였다. 황제가 마지막 남은 상자 한 개를 그의 유일한 서약자에게 건네며 말했다. 푸웁,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넌 소년만화 좀 끊어.”
표정 관리에 실패한 마린케이는 대번에 얼굴을 구겼다. 악담에 몬트를 걸었던 수련생들이 작게 환호성을 내지르며 승리를 기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가자마자 상자를 불태워 버리고 말 것이라 다짐한 마린케이는 솟구치는 살기를 눌러 참으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마친 황제가 해산을 명하려던 때였다. 겨우 눈물을 참고 있던 수련생들이 그들 가슴 안에 남아 있는 모든 기사도를 발산하듯, 단체로 그에게 달려들며 소리쳤다.
“폐하, 가지 마세요! 떠나지 마십시오!”
“영원히 폐하를 위해 살아가겠습니다, 오, 캡틴! 나의 캡틴!”
“멍청한 새끼야, 캡틴이 아니라 로드잖아! 오, 로드! 나의 로드!”
“로드! 마이 선샤인 로드!”
한 수련생이 오른쪽 손을 들어 올리며 외치자, 그것에 감명을 받은 게 분명한 멍청이들이 차례로 로드를 부르짖으며 구슬픈 눈물을 쏟아냈다. 벅찬 마음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 그들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황제를 쫓아다녔다. 마린케이는 그에 께름칙한 눈빛을 감추지 못하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괜히 같은 무리로 오인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건 샤를 역시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차오르는 열기에 감화되기는커녕, 제발 그만두라는 듯한 표정을 지은 그가 흉흉한 눈빛을 들어 올려 칼릭스에게 무언의 협박을 전했다.
눈치 하나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칼릭스는 울며 겨자 먹기로 오합지졸 무리의 시선을 끌며 황제와 그의 기사가 도망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마린케이를 사무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린저 또한 결심한 듯 칼릭스를 도왔다. 마치 연극을 올리듯 복식 호흡을 사용해 ‘나의 주군! 나의 로드!’를 외치고 있던 무리들이 볼썽사나운 몸싸움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인기가 많으십니다.”
두 사람의 도움 덕분에 수월하게 수련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마린케이가 샤를을 돌아보며 말했다. 누가 봐도 재수 없는 얼굴을 만들어 보인 샤를이 마린케이의 어깨 위로 턱을 기대며 답했다.
“하여간 쟤들은 중간을 몰라.”
“아주 뿌듯해 보이시던데요.”
“그렇게 열광해주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어?”
여기 있다. 하지만 마린케이는 괜히 반박하지 않고서 대화의 주제를 틀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뭇 심각하게 들려오기까지 하는 목소리였다.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은 샤를이 마린케이의 어깨 위에 얹었던 고개를 떼어내며 물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얘기야?”
“아뇨. 자리를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마린케이가 먼저 앞장섰고, 그 뒷모습을 따라 걸어가던 샤를은 어느덧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익숙한 건물 외관에 소리 없이 웃었다. 비장한 목소리로 말하길래 폐수련장에라도 데려가는 줄 알았는데, 막상 도착한 곳은 항상 오고 가던 기숙사 앞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말이 없던 마린케이는 어째선지 답지 않게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샤를의 팔을 잡아챘다. 의미심장한 빛이 가득한 갈색 눈이 샤를을 올곧게 마주 보았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
“중간에 웃으면 그만둘 겁니다.”
대체 무슨 기가 막힌 상황을 꾸며 놓은 건지, 이 정도면 궁금해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샤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린케이의 볼을 살짝 건드렸다. 그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널 보고 있으면 자꾸 웃음이 나오긴 하지만, 뭐. 노력해 볼게.”
하지만 그 얄팍한 다짐도 기숙사 문이 열림과 동시에 펼쳐지는 광경으로 인해 우주 저편으로 보내버릴 수밖에 없었다. 살짝만 봐도 백 개는 족히 넘어 보일 듯한 양초 전부에 불이 켜져 있었고, 장미꽃으로 만들어 놓은 길이 침실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
실실 웃고 있는 샤를의 얼굴을 확인한 마린케이는 역시 퍼스트 클래스 새끼들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며 스스로를 힐난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그냥 나가….”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마린케이가 샤를을 밖으로 내보내려던 때였다. 눈을 죄다 구부리며 환하게 미소 지은 샤를이 마린케이를 지나쳐 침실로 직행했다.
“기다리십시오!”
문을 열어젖힌 그는 침대 위에 놓여 있던 커다란 꽃다발과, 화려한 포장지에 감겨 있는 선물 상자를 발견하고선 결국 허리를 꺾으며 웃어댔다. 누구 머릿속에서 나온 아이디어인지 물어보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불퉁한 얼굴의 마린케이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방금 보고 온 얼간이 새끼들이지 누구겠습니까.”
이번엔 그 얼간이들 틈에 저 역시 섞여 있다는 사실이 저주스러울 정도였다. 마린케이가 머리를 헤집으며 본인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을 즈음, 꽃다발을 집어 든 샤를이 장미꽃 위로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향긋한 꽃 내음이 풍겼다.
“…사람 미치게 하려고 작정을 한 건지.”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마린케이가 ‘뭐요?’ 하며 되물었지만, 그는 꽃보다 더 화사한 웃음을 피어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마린케이는 그 얼굴을 보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4황자의 궁에 방문했을 때,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프리지아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사람이 바로 자신의 주군, 샤를 소피아 엔스였다. 이제 보니 세상의 어떤 꽃을 가져다 놓더라도 저 사람과 견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겨우 목소리를 낸 마린케이는 넓은 보폭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장미꽃 백 송이를 품에 안은 샤를이 무어라 대답을 내놓기도 전에, 그가 먼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반지를 꺼내 들었다. 콜린스사의 한정판 옷가지들을 전부 다 중고지옥에 팔아 마련한 작은 다이아 반지였다.
아마 로건 콜린스가 알게 된다면 분노로 인해 마린케이의 머리칼을 쥐어 뜯어버릴 것이 확실했지만, 이것 말고는 자금을 마련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고로 마린케이는 한 치의 죄책감도 가지지 않고서 저의 연인에게 반지를 내밀었다.
이로써 리스트에 적힌 4번까지 모두 클리어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1번은 양초 200개에 하트 모양으로 불을 붙여 놓는 것이었고, 2번은 장미꽃 잎을 뿌려 길을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다음 3번은 침대 위에 백 송이짜리 꽃다발을 놓아두는 것이고, 4번은…, 음. 미리 준비해 두었던 반지를 꺼내 드는 것이라고 적혀 있던 것 같긴 한데, 그 문구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에 생생히 자리하고 있는 5번만큼은 차마 실행에 옮길 수가 없을 정도로 악질적이었다.
『홀린 듯한 얼굴로 그대를 위해 심장을 바치겠다고 맹세하기.』
홀린 듯한 얼굴이 뭔지도 모르겠을 뿐더러, 심장을 바치겠다는 말은 또 무슨 구닥다리 같은 고백법인지 알 길이 없었다. 마린케이는 기사학부 멍청이들의 조언을 싸그리 무시하며 제멋대로 입을 열었다.
“전하를 사랑하는 것도 맞고, 가지고 싶다는 것도 맞습니다.”
이 순간까지도 폐하가 아닌 전하를 고집하는 것이 딱 그다웠다. 샤를은 일렁이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며 마린케이의 얼굴 위로 손을 뻗었다.
“경애하는 것도 맞고, 지켜드리고 싶은 것도…, 맞습니다.”
밤을 새워가며 준비해 두었던 단어들이 막상 입을 열게 되자 뒤죽박죽 뒤엉켰다. 이렇게 된 이상 무슨 말을 뱉으면 좋을지 함부로 판단할 수도 없겠다. 그래서인지 마린케이는 머리가 아닌 가슴이 시키는 대로, 그의 얼굴을 보며 마구잡이로 문장들을 끼워 맞췄다.
“심지어 전하가 웃고 계시는 걸 보면, 세상이 조금 살 만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 형편없는 한 마디 한 마디에 목이 메어오는 것일까.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은 마린케이가 종지부를 찍듯, 시선을 들어 올렸다.
“저도 제가 미친 것 같습니다만, 이제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서요.”
“…….”
“정식으로 고백하겠습니다. 전하, 저와…….”
“마린케이.”
감정을 내리누르지 못한 샤를이 마린케이를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장미꽃을 한 무더기 안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를 닮은 것만 같은 화려한 장미 향기가 마린케이를 깊게 적셨다. 샤를은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너한테 내 목숨을 쥐여 주고 싶기까지 해.”
“그렇게까지는 필요 없는데요.”
“…그냥 좀 듣지 그래?”
그가 마린케이의 머리칼을 헝클어트리며 충고했다. 제 기사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느껴지는 간지러운 사랑이 자꾸만 그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세상 가장 귀한 것들을 선물해주고 싶고, 세상 가장 향기롭고 아름다운 것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게 만들어주고 싶다. 샤를은 그 마음을 듬뿍 담아 전했다.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제국을 그 손안에 쥐게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그것도 딱히…….”
“사랑에 빠진 얼간이들이나 할 짓 따위를, 내가 계속 욕심내게 된다고. 알아들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거야 당연했다. 마린케이 또한 같은 기분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달아오른 마음을 이기지 못한 샤를이 마린케이의 귓가 위로 입을 맞추었다.
“세상이 바뀌고 나면, 내 남은 생을 너에게 바치게 해줄래?”
“…….”
“그땐 내가 너를 위한 기사로 살아갈게. 평생 너를 위한 나이트가 될 거야.”
달콤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누군가의 밤과 마음을 독차지한 요사스러운 몽마는 애정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샤를 소피아 엔스는 그의 어릴 적의 소망과 달리, 절대 기사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기사도만큼은 가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오직 한 사람에게 심장을 바치며 살아가는 것. 그이를 위해 평생을 바치고, 영원을 맹세하는 것.
물끄러미 샤를을 바라보던 마린케이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무심한 얼굴 위쪽과는 달리, 그 입매는 호선을 그리며 높이 올라가 있었다.
“기사도에 단단히 미쳐 계시네요.”
샤를은 마린케이가 저에게 마주 웃어줄 때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한 기분에 시달리고는 했다. 자주 웃어줬으면 좋겠다가도, 이런 얼굴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다닐 것을 생각하면 심기가 매우 뒤틀렸다. 그래서인지 그는 종종 마린케이에게 웃지 말라며 경고했지만, 또 어느 때는 웃어달라고 부탁하며 백발백중의 확률을 자랑하는 요망한 애교를 부려대기도 했다.
내용만 놓고 보자면 순 까칠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음에도 그는 그저 마린케이의 웃는 얼굴을 몇 초라도 더 길게 담아두고 싶은지, 눈을 깜빡이지도 않은 채 시선을 고정했다. 그가 붉어진 눈으로 저를 바라보자 마린케이는 그의 얼굴 옆으로 손가락을 튕겨 주의를 환기했다.
“아마 저는, 그래서 당신이 좋은 것 같습니다.”
샤를은 곧바로 마린케이의 양쪽 뺨 위로 손을 올리고서 거칠게 혀를 얽었다. 반사적으로 허리를 물리던 마린케이는 이내 몸에서 힘을 풀며 입을 벌렸다. 섞여들기 시작한 그의 혀가 입천장 곳곳을 문지르고, 간혹 치열을 쓸어내리기도 하며 성감을 익숙하게 자극했다.
발밑에 밟히는 장미 꽃잎들 사이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샤를을 힘주어 침대 쪽으로 밀어낸 마린케이는 그를 넘어뜨리며 허리띠를 풀었다. 팔꿈치로 상반신을 세운 채 그런 마린케이를 바라보고 있던 샤를이 초승달처럼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흩뿌려져 있는 꽃들 가운데 누워있는 황제의 모습은 치명적인 것을 넘어 심장에 해로운 독약을 들이켜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린케이는 수련복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에 발맞추듯 샤를 또한 입고 있던 셔츠를 느리게 벗어 던졌다.
한쪽 무릎을 침대에 올리는 순간, 그가 손을 뻗어 마린케이의 뒷목을 잡아챘다. 다시금 시작된 짐승 같은 키스와 동시에 마린케이는 그의 바지춤 안으로 우악스레 손을 집어넣었다. 벌써부터 빠듯하게 발기해 있는 성기는 손안에 다 쥐어지지도 않을 만큼 흉포한 윤곽을 자랑했다. 샤를이 마린케이의 쇄골을 지분거리며 입을 열었다.
“바지 내려. 빨아줄 테니까.”
“잠시만요, 샤워부터 하고 오겠습니다.”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오늘부터 신경 쓰려던 참인데요.”
“기각. 내일부터 해.”
그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린케이를 마저 침대 위로 눕힌 샤를은 드러난 허리선에 얼굴을 묻으며 반쯤 내려가 있던 바지를 전부 벗겨 내렸다. 코끝에 번져오는 살 내음이 자꾸만 성급한 갈증을 일으킨다. 이 탐스러운 몸을 통째로 입안에 집어삼켜, 그 향내를 오롯하게 음미할 수 있게 된다면 좋을 텐데.
그는 마린케이의 곧추선 성기 위로 붉은 혀를 내밀어 핥았다. 정신적인 독약이나 마찬가지라고도 할 수 있는 환한 얼굴을 위에서 내려다보던 마린케이가 눈가를 찌푸렸다.
그 순간 샤를이 쪽, 귀두를 빨아 당기며 침을 적셨다. 나지막한 경고가 여우 같은 황제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사람 자극하는 거, 그게 그렇게 재밌습니까?”
그러나 축축한 입안으로 성기가 빨려 들어가자 곧바로 읏,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치켜들 수밖에 없었다. 부드러운 혀가 뭉근히 기둥을 감싸 안는다. 입에 힘을 줘 빨아올리다가도, 이따금 여린 살 곳곳을 느슨히 쓸어 올리는 움직임에 마린케이는 미약한 한숨을 뱉었다. 발끝이 절로 저릿하게 물들었다. 몸이 열감으로 인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하아…….”
“거의 녹아내릴 것 같은 얼굴이네.”
성기 끝을 타고 흐르는 점액질을 질척하게 핥아 내린 샤를이 입술을 떼며 말했다. 마린케이가 아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혀끝을 사용해 귀두의 갈라진 부분을 꾹 눌렀다.
“흐읏…!”
터져 나오는 신음에 샤를은 성기를 완전히 입안에 밀어 넣으며 쪽쪽 빨아 당겼다. 기둥을 질척하게 핥고, 감싸 올리는 교태로운 소리가 고막에 애무를 가하듯 울려 퍼진다.
황제의 금색 머리칼이 제 손안에 가득 나부끼고 있다는 사실에 충동적인 가학심을 느낀 마린케이가 그의 머리칼을 쥔 채 고개를 젖혔다. 그러자 샤를이 유쾌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하하. 오늘따라 난잡하게 놀고 싶어?”
그는 꺼떡이는 성기를 툭 한 번 더 깊게 빨아올린 뒤 말했다.
“젠장, 그건 또 무슨, 읏….”
“그래. 나도 좋아.”
“아, 잠깐…….”
“더럽게 놀아야 섹스지.”
이내 샤를이 살짝 이를 세워 마린케이의 성기 위를 오물거렸다. 마린케이는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찌릿한 성감을 참지 못하고서 그의 입술을 물어뜯듯 달려들었다. 키스를 받아준 샤를은 벌어진 상의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가 뾰족하게 솟아 있는 작은 유두 위를 뭉근히 내리눌렀다. 원을 덧그리듯 천천히 문지르자, 마린케이는 맞물린 입술 사이로 신음을 토해냈다.
“흣……!”
불시에 유두를 앞으로 잡아당기자 쾌락을 이기지 못한 마린케이의 상반신이 속절없이 샤를에게 무너져 내렸다. 제 머리칼에 얼굴을 비비는 마린케이를 지그시 응시하던 샤를이 나머지 한 손 또한 그의 옷 안으로 집어넣으며 도톰한 귓불을 깨물었다. 그의 양손이 제 가슴을 뭉개고 유두를 지분거리며 손장난을 치자, 마린케이는 괴롭다는 듯 달짝지근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더, 더 세게요…….”
“보채지 마.”
그렇게 말하면서도 샤를은 더욱 강하게 그의 유두를 꼬집으며 요구에 행동으로 응해주었다. 그간 계속해서 괴롭힘을 당하며 개발되었던 부분인지라, 마린케이는 그 얄궂은 고통에도 성기를 빳빳이 세우며 그의 단단한 몸에 달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에게서 풍기는 장미 냄새로 인해 가슴속 깊은 곳까지 충만함이 한가득 차올랐다.
샤를은 제 허리에 성기를 비비는 마린케이를 칭찬하듯 툭, 손톱으로 유두를 찍어 눌렀다. 그러자 마린케이가 고개를 뒤로 꺾으며 허리를 튕겼다.
“아, 아아…! 전하….”
본 게임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착실히 허리 짓을 하는 마린케이의 모습에, 샤를은 가슴을 괴롭히던 손을 멈추고서 그의 상의를 온전히 벗겨냈다. 나신이 된 마린케이는 흉부를 들썩이며 밭은 호흡을 내뱉었다. 혹사당한 양쪽 젖꼭지가 발갛게 부풀어 있었다. 샤를이 혀를 내밀어 그 위를 쓰다듬었다. 마린케이가 흐으, 하며 그의 머리를 밀어냈지만 소용없었다.
이내 마린케이의 다리를 양쪽으로 넓게 벌린 샤를이 조그맣게 드러난 구멍을 시야에 담았다. 살짝 벌어져 있는 게 딱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이어진 그의 목소리가 마린케이를 짜증에 차도록 만들었다.
“지금 박으면 찢어지려나.”
“시발, 그럴 거면 네 구멍에나….”
“섹스 중에는 예쁜 말만 쓰라고 했잖아.”
너는, 이 새끼야! 마린케이가 욕설을 채 내뱉기도 전에 황제는 먼저 보란 듯이 그의 구멍 안으로 손가락 한 개를 집어넣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좁은 구멍 안을 찌걱거리며 넘나들었다.
“아, 전하, 잠깐…!”
몸은 진작 쾌락으로 인해 달구어져 있었음에도 약간의 고통을 느낀 마린케이가 침대 옆 서랍 쪽에 더듬거리며 손을 뻗던 때였다. 샤를이 불그스름한 색이 스며든 구멍 안에 손가락을 하나 더 집어넣으며 양옆으로 벌렸다. 구멍이 진득하게 벌어지는 느낌에 마린케이는 도리질 쳤다.
“흐, 으읏, 전하, 아프…….”
“왜 자꾸 젤을 찾아.”
샤를이 조금 숨이 죽은 마린케이의 성기 위로 침을 뱉었다. 그는 귀두 위를 제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세게 압박했다. 쓰라림이 느껴질 정도로 요도 입구를 지분거리는 손길에 성기가 다시금 배 쪽으로 올라붙었다. 마린케이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그의 어깨 위로 이마를 기댔다. 구멍에 박아두었던 손가락을 바깥으로 끄집어낸 샤를이 그의 귓가를 깨물며 말했다.
“젤 말고 다른 좋은 거 많잖아.”
그가 혀를 내밀어 마린케이의 턱선을 따라 핥았다. 질척한 소리가 청각을 자극하자, 마린케이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흔들며 그의 손에 자신의 성기를 비볐다. 샤를이 칭찬하듯 손바닥에 힘을 주며 기둥을 꽉 내리눌렀다.
“흐읏, 전하, 전하…!”
흐느끼듯 샤를을 부르짖던 마린케이가 허리를 휘며 입을 벌렸다. 흩뿌려지듯 쏟아진 하얀 정액들이 샤를의 손바닥을 질척하게 적셨다. 마린케이는 몸을 떨며 손톱으로 그의 등을 긁었다.
샤를은 그런 마린케이를 침대 위에 눕힌 채 넓게 다리를 벌렸다. 그가 정액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손을 마린케이의 구멍 위에 치대며 다시 손가락 두 개를 밀어 넣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액체가 섞여 있기 때문인지, 마린케이는 연신 고개를 저으면서도 그의 허리 위로 허벅지를 감았다. 샤를이 그런 마린케이의 목 위에 깊게 이를 세우며 진한 키스마크를 남겼다.
“네가 지난번에 나한테 만든 자국들, 아직도 안 사라졌어.”
나지막하게 읊조린 그는 예쁜 밀빛으로 그을린 마린케이의 살결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조명 아래 비친 샤를의 하얀 몸 위에도 마린케이가 이제 막 이갈이를 시작하는 맹수처럼 만들어 놓았던 키스마크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언뜻 보면 흉터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법한 매서운 자욱들이었으나, 마린케이는 그 흔적들을 더듬으면서도 이보다 더 많이 물어뜯어 놓지 못한 것을 아쉬워할 뿐이었다. 차라리 흉터를 남겨둘 걸 그랬다. 그럼 거울을 볼 때마다 저를 떠올리게 되었을 텐데.
샤를이 쉬지 않고 마린케이의 구멍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손가락을 네 개나 머금고 있던 구멍이 움찔거리는 순간, 그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목울림 소리를 내며 두터운 성기를 꺼냈다. 입구 쪽에 비벼지는 질척한 감촉에 마린케이는 손을 들어 샤를의 어깨를 밀어냈다.
“안 찢어지게 잘 벌려 봐.”
“으윽, 아……!”
손가락이 빠져나간 뒷구멍 안으로, 딱딱하게 곧추선 성기가 사정을 봐주지 않고서 밀려들었다. 구멍이 빠듯하게 벌어지는 감각은 언제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성기를 통해 몇 번씩이나 지고의 쾌락을 경험한 적 있던 구멍 쪽은 오히려 그것을 반기듯 잘근잘근 개폐하며 기대감을 토로하고 있을 뿐이었다. 샤를이 허리를 퍽, 강하게 처박았다.
“아, 하윽!”
“제대로 벌리라니까….”
마린케이의 허벅지를 세게 움켜쥔 샤를이 팽팽히 당겨져 있는 구멍이 전부 드러나게끔 그의 다리를 제 어깨 위로 올렸다. 덕분에 입구가 벌어지며 성기가 한층 더 뱃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마린케이는 신음조차 내뱉지 못하며 동그란 엉덩이를 조였다.
그러자 샤를은 나직한 한숨을 뱉으며 연속해서 추삽질을 했다. 부드러운 속살이 오물오물 그의 성기를 씹어 먹었다. 그는 뒷구멍이 벌어진 채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마린케이의 모습을 보며 저열한 쾌락을 느꼈다.
“흐, 흐읏, 아! 아아…!”
성기가 무자비하게 구멍 안에 틀어박히자 마린케이는 손을 떨어뜨리며 침대보를 그러쥐었다. 아무리 엉덩이를 뒤틀어 봐도 이미 구멍 안을 채운 성기는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샤를은 구멍 근처에 그의 음모가 전부 와 닿을 정도로 세게 성기를 비볐다. 열에 달뜬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하아…….”
그 순간 마린케이는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샤를의 얼굴을 시야에 담았다. 푸른 눈이 맛이 가 있는 건 별개로 치고, 발긋한 홍조가 떠올라 있는 아름다운 얼굴이 그의 가슴을 난잡하게 들쑤셨다. 침대 위에 깔린 장미 꽃잎들이 마린케이의 머리칼과 부딪혀 짙은 향기를 자아냈다. 그 꽃잎들을 손에 모아 마린케이의 사타구니 위로 올린 샤를이 단물이 뚝뚝 흘러내릴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더할 나위 없이 애틋한 사랑 고백이었다.
“네가 꽃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면, 정말 내가 미쳐버린 걸까? 마린케이.”
그러나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음담패설 또한 얄궂게 찾아들었다.
“안에다 쌀 거니까 잘 받아 마셔. 흘리면 계속 먹일 거야.”
마린케이는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깨닫고서 순간적으로 세게 구멍을 조였다. 그 순간 샤를이 윽, 하는 소리를 내며 마린케이의 허리를 붙잡았다. 마린케이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많이 싸주셔야 받아먹겠죠.”
“…….”
“넘쳐흐를 정도로 싸주시든가요.”
무감한 얼굴과는 달리 그 눈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샤를이 웃으며 화답했다.
“그렇게 보채다 찢어져도 난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