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589년 4월, 비로소 봄
“부단장님! 정말 이러실 겁니까?”
“가짜로 이럴 생각은 없는데요.”
아무래도 황실기사단의 부단장은 자신이 낙하산이라는 그릇된 소문을 바로잡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그냥 없기만 하면 다행일 텐데, 오히려 그 소문을 더 키워 보겠다는 듯 깡패나 다름없는 꼴로 돌아다니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니에타 부르크의 속에서는 열불이 다 났다. 설마 왕립학교 퍼스트 클래스를 차석으로 졸업한 수재라는 소문도 유언비어였던 것은 아니겠지. 이래서 평민 출신들은 안 되는 거야. 니에타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린케이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왜 자꾸 평민들 일에 끼어드십니까, 뭐 좋을 게 있다고요!”
부단장의 앞에서 감히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자신감도 은연중에 깔려 있는 신분 의식 때문일 것이다. 심드렁한 얼굴로 저에 대해 쓰인 특집 기사를 넘겨 보고 있던 마린케이는 그 말에 들고 있던 잡지를 소파 위로 집어 던졌다.
훈련이라도 좀 하면서 몸을 풀고 싶지만, 지금은 나머지 단원들이 수련장을 차지하고 있어 꼼짝없이 이곳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신세였다.
그렇다고 외출을 시도하려고 들면 얼마 전 직속 기수로 배치받은 니에타 부르크가 부리나케 달려와 쫑알쫑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래서 마린케이는 어느덧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 편이 정신 건강에 훨씬 더 이로울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 니에타가 따져 묻고 있는 사안은 얼마 전 있었던 패싸움 사건이 분명했다. 마린케이는 변명할 만한 말을 찾지 못한 채로 먼 산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실은 그걸 패싸움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니에타는 굉장히 분노한 상태였고, 그래서인지 말끝마다 울화가 가득 스며든 목소리로 마린케이를 구박하고 있었다.
그날, 여느 때처럼 퇴근길을 거닐던 마린케이는 골목 사이에 위치한 작은 점포로 들이닥쳐 시비를 걸어대던 웬 폭력배 무리를 발견했다. 제발 더 이상은 평민들 사이의 일에 끼어들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던 니에타의 목소리가 떠오르긴 했으나, 외려 그 목소리 때문에라도 더 잔혹하게 그들을 응징할 수밖에 없었다. 평민으로 태어나 평민으로 자란 이에게 ‘평민들 일에는 끼어들지 말라’고 충고해 봤자 그것이 실효성을 가질 수 있을 리 없었다.
뒷골목의 관리 권한은 자신들에게 있다며 떵떵거리던 얼간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니 급속도로 속이 거북해졌다. 니에타의 잔소리를 말없이 듣고 있던 마린케이가 은근한 축객령을 던졌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겁니까?”
지금 펼쳐진 상황만 보더라도 니에타 부르크와 마린케이 이스턴은 무척이나 상성이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니에타는 오후 4시면 단원들을 감시하러 수련장에 가야 한다는 자신의 일정을 스킵한 채 마린케이의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니에타의 날카롭고 끈질긴 시선은 마린케이의 일거수일투족을 CCTV처럼 따라다녔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렇다. 니에타는 마린케이가 감자칩을 꺼내 들기라도 하면 곧장 부스러기를 치우기 위해 무선 청소기를 들고 왔다. 그뿐 아니라, 탄산음료를 꺼내 목이라도 축이려 들거든 혈당 수치가 걱정되지 않냐 소리치며 미리 끓여 왔던 히비스커스 차를 강권했다. 로건과의 룸메이트 시절을 통해 인내심을 다져온 마린케이조차도 미미한 짜증을 느끼게 될 정도의 참견질이었다.
대체 어떤 식으로 살아왔으면 남의 인생사에 이렇게까지 관심이 많을 수가 있는 걸까. 마린케이가 표정을 굳히자, 니에타는 귀신같이 사인이 필요한 서류들을 찾아와 그의 앞에 쌓아두었다. 빌어먹을 부르크 새끼. 이럴 때마다 마린케이는 사인 기계라도 된 심정으로 서류 위에 악필을 휘갈길 수밖에 없었다.
직속 기수를 배치하는 권한은 단장에게 있다고 들었으니, 아마 단장 새끼를 족쳐버리면 알아서 떨어져 나가주긴 할 터였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냥 사직서를 내고도 싶었으나, 무려 황제의 낙하산으로 기사단에 들어온 입장이었던지라 그것만큼은 마음대로 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어쩌면 해고를 당하는 편이 더 빠를 수도 있었다.
그런 마린케이를 여전히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니에타가, 이번엔 또 무슨 일을 꾸미는 거냐는 질문을 던진 후 따박따박 탐문 수사를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시길래 절 이렇게 내쫓으려 하시는 거냐고요.”
빌어먹을. 차라리 계속 있을 거냐고 물어보지 말 걸 그랬다. 그 질문을 들었기 때문에라도 저 새끼는 족히 몇 시간이나 더 이곳에 처박혀 있을 것이 확실했다.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던 마린케이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벗어두었던 단복 외투를 자신의 어깨 위로 둘렀다.
도망쳐 봤자 상대가 미쳐버린 감시견처럼 따라올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계속 이렇게 좁은 공간 속에 둘만 갇혀 있다간 뇌가 펑 터져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바깥 공기라도 쐬고 들어와야 이 지루한 일상에서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실은 겸사겸사 훈련장에 찾아가 발도장이나 찍어볼까, 하는 불순한 의도도 담겨 있었다.
「형님, 졸업하지 마세요!」
「형님 없으면 저희는 어떡하라고…!」
어쩌면 왕립학교에 남아 있는 편이 더 나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외출 준비를 마친 마린케이는, 불현듯 떠오르는 졸업식에서의 기억에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기사학부에 횡행하던 신고식 문화를 없애버린 당사자가 무려 평민 출신 입학생이라는 소문이 크게 돌고 난 후, 그는 의도치 않게 영웅이 된 채 심각한 수준의 추앙을 받으며 지냈다.
특히 바로 한 학년 후배들이 그를 정신적 지주로 떠받들며 거의 종교 단체급의 팬클럽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가는 길목마다 따라다니며 진짜 심부름센터에서 일을 했던 것이냐고 물어보지를 않나, 경호업체 출신이라는 소문이 사실이냐며 떠들어대지를 않나.
아무튼 사람을 귀찮게 들볶아대는 데 일가견이 있던 새끼들이 죄다 그곳에 모여 있었다. 이게 진짜 팬클럽인지, 팬클럽을 가장한 안티 팬클럽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러니 확실하게도, 왕립학교 시절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이렇듯 하관의 잔소리에 시달리며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편이 더 낫긴 했다. 몸을 쓸 기회가 많이 없다는 것이 애석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라의 녹봉을 받으며 살아가는 주제에 이 정도 업무량은 호사라 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마린케이는 삶 자체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있지 않았다. 다만 사육당할 처지에 놓인 쥐새끼가 된 기분을 느꼈을 뿐이다.
“13시에는 세미나에 참석하셔야 하고, 그 후 14시에 훈련이 있습니다. 15시 30분에는 단장님과 알현실에 방문하여…, 부단장님, 제발요. 하루라도 좀 상사다워지시면 안 됩니까?”
마린케이를 따라 집무실을 빠져나온 니에타는 느긋하게 화원을 거닐고 있는 그의 뒤에다 대고서 오늘치 업무를 줄줄 읊었다. 자신은 하관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심이 없어 보이는 마린케이의 모습에, 그가 혈압이 올랐는지 윽박을 질렀다.
순간 아차, 싶은 생각이 들긴 했으나 그래도 니에타는 떳떳함을 가졌다. 눈도 부엉이처럼 무시무시하게 부라렸다. 부단장이 어떤 대답을 하든 간에 되받아쳐 줄 것이다. 하지만 니에타가 간과하고 있는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아무리 살심 잃은 맹수처럼 늘어져 있는 마린케이라고 할지라도, 단원들을 훈련시킬 때만큼은 그 엇나간 재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왕립학교 출신의 유능한 기사라는 것을 말이다.
특히 그가 처음 부단장직을 임명받았을 때, 퍼스트 클래스 사이에서는 이번 대에 최연소 기사단장이 나오는 것 아니었냐며 의아한 풍문이 돌 정도였다.
사락사락, 풀 밟히는 소리를 경청하고 있던 마린케이는 니에타의 말이 끝난 것과 동시에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제국에서 가장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갈색 눈이 니에타를 향했다. 누구 하나를 찢어 죽일 듯한 괴기한 박력 앞에서, 니에타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마린케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바람결 사이를 스쳤다.
“저도 제안할 게 하나 있는데.”
그가 싸늘하게 말했다.
“하관답게 입을 좀 닥쳐보는 건 어떻습니까?”
“…….”
“농담입니다.”
“…….”
“계속 브리핑 하세요.”
양손을 꽉 쥐고 있던 니에타는 그제야 긴장을 풀며 굳어 있던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전처럼 함부로 언성을 높일 수는 없었다. 이실직고하자면, 아직도 몸에 잔떨림이 남아 있어 불가능했다.
이제는 단장보다 부단장이 더 무서워지기 시작했다며, 제발 그 악마 같은 인간을 어떻게 좀 해달라는 단원들의 고발이 빗발칠 때마저도 전혀 수긍할 수 없던 니에타였다. 하지만 직접 부단장의 위력을 경험하게 되니 그들의 요구가 합당하기 그지없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 그럼 브리핑 계속하겠습니다.”
니에타 부르크는 황실기사단에 입단하기 위해 화언에서만 무려 7년의 유학 생활을 보내고 돌아온 인재였다. 퍼스트 클래스에 입학할 정도의 실력은 되지 않았으므로 유학 경험이라도 최대한 살려 입단에 성공해 보고자 했던 전략적인 의도에서였다.
그로 인해 니에타는 이방인에 대한 차별이 가장 심하다는 화언의 해안가 쪽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그는 언젠가 이 궂은 날들을 이기고서 황실기사단에 입단해 영광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게 다 무언가.
왕립학교에서도 유명세를 날렸다던 부단장은 알고 보니 시정잡배 기질이 다분한 양아치 새끼에 불과했다. 그가 고위 공직자의 비호를 받아 입단한 낙하산이라는 소문이 돌았을 때, 니에타는 코웃음을 치며 그것을 무시하기 바빴다. 낙하산이 되기 위해선 뒷배를 가질 수 있을 만큼의 재산을 보유했거나, 그에 뒤지지 않는 가문을 가졌어야 했지만, 부단장은 아니었다.
그는 겨우 평민 출신에 불과한, 권력 없고 재산 없는 가엾은 인물에 속했다. 그러니 정말 출중한 능력이 있어 입단한 것이라면 모를까 낙하산이라는 소문은 터무니없는 것을 넘어 신빙성이 0에 수렴하기까지 하다, 그리 생각했었는데.
막상 대면하게 된 부단장이란 인간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어떤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돌멩이 같은 인물일 뿐이었다. 그래서 니에타는 가슴 깊이 실망감을 느꼈다.
부단장이 가진 뛰어난 재능은 오직 단원들을 훈련시킬 때만 빛을 발하는 듯했고, 심지어 그가 사용하는 화언 검술에 놀라 대련을 부탁했을 때조차도 ‘단장 새끼한테나 가서 놀아달라고 하세요.’라는 따가운 말로 거절을 던져대기나 했다.
하물며 문서 작업을 부탁할 때라든가, 기사단과 관련한 안건을 올릴 때면 홀연히 사라져 있어 업무의 대부분을 제가 다 떠맡게 되고는 했다. 몇 개월간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더듬어 보며 분노를 금치 못하던 니에타가 작지 않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발을 구르는 소리를 사용해 숨겨 보려고는 했지만 역시나 실패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나한테 부단장직을 주지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으아아악!”
어느새 마린케이는 니에타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에 니에타가 까무러칠 듯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끔찍한 몬스터라도 마주친 것 같은 모양새였다.
마린케이는 덤덤한 얼굴로 그런 니에타의 쇼맨십을 지켜보았다. 큼, 헛기침을 한 니에타가 슬쩍 시선을 들어 그의 분위기를 살폈다. 내용을 들었으면 분명 화를 내거나 기분을 상해할 만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한 치의 동요조차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마린케이는 부단장직에 대해 전혀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샤를 소피아 엔스, 그 개자식의 협박만 아니었더라도 그는 유명 입시 학원의 강사가 되어 제법 괜찮은 연봉을 받는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예정이었다. 실제로 컨택을 해온 학원도 몇 곳 있었으니 영 가능성 없는 소망은 아니었다.
서약 기간도 졸업을 기점으로 끝이 나겠다, 입학 때부터 염원해 왔던 바를 드디어 이룰 수 있을 것 같아 흡족해하던 마린케이에게, 약아빠진 샤를은 이번에도 먼저 낚싯대를 던졌다.
졸업식 하루 전날이었다. 불안한 예감은 언제나 틀린 적이 없듯, 여느 때보다 일찍 퇴근을 마친 샤를이 마린케이를 이끌고서 다시 황궁으로 향했다. 어째선지 왕립학교 시절의 수련복을 멀끔히 차려입고 있던 그가 기사단을 구경시켜주며 간단한 소감을 물었다. 마린케이는 왕립학교보다도 더 화려하게 조성되어있는 황실 훈련장을 구경하며 무심히 답했다.
「국고를 다 여기에 턴 것 같은 돈지랄이네요. 대단합니다.」
「그거야 뭐, 가쉰 엔스 하면 떠오르는 단어 중 하나잖아?」
초대 황제의 낭비벽은 교과서에 실려 있을 정도로 유명한 비화였다. 그것 말고도 전쟁광, 학살광 등의 많은 단어가 존재했지만, 매번 졸기만 하던 역사 시간을 떠올리자니 역시나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마린케이는 샤를이 입고 있던 수련복을 불쑥 잡아당기며 물었다.
「이 옷은 왜 꺼내 입으셨습니까?」
하마터면 기면증처럼 쓰러질까 봐 말을 돌렸던 것이었지만, 샤를은 그 수작이 마음에 들었는지 마린케이의 손을 다정하게 겹쳐 잡으며 아스라이 눈매를 구부렸다.
수련복을 입고 서 있는 그를 보니 함께 왕립학교를 다녔던 그 시절-비록 반년밖에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로 돌아간 것만 같았던 마린케이 역시 조금 표정이 허물어지고 있을 때였다.
「황궁이 사라지면, 이 기사단은 어떻게 될 것 같아?」
오랜만에 듣게 된 예의 그 수수께끼 같은 질문 놀음이었다. 마린케이는 그가 이런 식으로 질문할 때마다 좋지 못한 결과가 닥쳐오곤 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위험한 순간에 맞추어 센서 역할을 해주던 그의 직감 또한 머릿속에 적색 신호를 띄웠다. 샤를의 수려한 얼굴을 노려보다시피 하던 마린케이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건 제가 아니라 폐하께서 고민하실 문제 같습니다.」
어쩌면 조심하는 말투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린케이다운 답변에 황제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그가 작위적으로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다.
「퀴즈 낸 거 아니니까, 자네 생각을 말해 보도록 해. 이스턴 경.」
「저야 당연히 별생각 없습니다.」
「이제는 있어야 할걸?」
「……뭐 하자는 건데요?」
기사 서약이 끝나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째선지 마린케이는 샤를 소피아 엔스라는 수렁 속으로 더욱 깊이 빠져들어 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게 유쾌하기나 했으면 이렇게 억울함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훈련장에 설치된 거울로 된 벽면 위로 황제의 뒷모습이 비쳤다. 마린케이는 그것만을 가만히 쳐다보며 묵비권을 행사했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들 하잖아.」
「…….」
「그런데 여긴 윗물부터 아랫물까지 전부 썩어빠져 있는 게, 꼭 시궁창을 보는 것 같아.」
백작 역시 단장직을 겸하고 있었고, 댄 미헤르 사건으로 끌려간 귀족들 틈에서도 기사단 출신의 공직자들이 유독 많이 섞여 있었다. 기사도를 근간으로 삼는 이들이 인권을 욕보이고 능멸하려 했다는 사실에 제국민의 분노는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기사도를 강조하고, 또 우월시하는 분위기 또한 생겨났다는 것이 믿지 못할 일이었다.
「마린보이야. 윗물 쪽에는 관심 없어?」
샤를이 맑은 미소와 함께 개수작을 걸었고, 마린케이는 이번엔 절대 그 개수작에 넘어가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추호도 맑지 않은 목소리를 꺼내 보였다.
「아랫물 쪽에도 관심 없습니다.」
「아랫입은 잘 쓰면서 왜 그럴까.」
이 새끼가 뒈지고 싶나. 마린케이의 눈빛이 흉흉해지는 것을 발견한 샤를은 연약한 척 머리칼을 배배 꼬았다. 희롱조의 발언을 던질 때마다 등장하곤 하는 특유의 가련한 얼굴이었다. 하필이면 그게 또 생김새와 무지막지하게 잘 어울렸던지라, 마린케이는 저 영악한 새끼가 겉가죽을 이용해 사람을 홀리려 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좋으시면 폐하께서도 써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
「아랫입이요. 재능 있으실 것 같은데.」
살기등등한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귀에 때려 박히는 맛이 일품이었다. 협박이 아닌 것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려나. 샤를이 새침하게 답했다.
「괜찮아. 너한테 양보할게.」
「필요 없습니다.」
「침대에서 만나는 마린보이는 다르게 말하던데, 밖에서도 좀 솔직해져 봐.」
「어디서 진짜 머리라도 맞고 오셨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친히 뒤통수를 후려쳐 줄 자신도 있었다. 포악해져 가는 마린케이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은 샤를이 굳게 다물린 그의 입술 위로 버드키스를 퍼부었다.
연약한 새에게 모이를 물려주듯 가볍게 내려앉는 입맞춤에 마린케이는 말을 멈추고서 욕설을 뱉었다. 제기랄. 약삭빠른 황제 새끼는 늘 이런 식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들었고, 인정하기 싫지만 그건 꽤나 성공률이 높은 방법 중 하나였다.
입술을 떼낸 샤를이 사뭇 진지해진 투로 말했다.
「신분이 사라지고, 귀천이 사라진 세상에서도 과연 기사도가 남아 있을까?」
「…….」
「그럴 거야. 신분과 귀천이 기사도를 만들어내는 건 아닐 테니까.」
그는 진심을 다해 기사도를 보위하고, 실현해온 사람이었다. 어쩌면 제국이 자랑하는 기사도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약자를 향해 몸을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고, 세상조차 믿지 않는 도덕의 가치를 비호하며, 언제나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 그런 그는 절대 기사가 될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마린케이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국어에는 영 재능이 없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역사랑 수학도 그랬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게끔 본론만 얘기하십시오.」
어딜 가나 썩은 내가 풍겨오지 않는 곳이 없었다. 뒷골목이라는 시궁창 속을 견디며 살아남은 마린케이에게조차 그랬는데, 하물며 핏줄이 쌓아 올린 화원 안에서 살아온 샤를에게는 더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외면하지 않고 살아가려거든 응당 그 더러움 안에서 서로를 마주 봐야만 했다. 황제는 제국민의 계몽을 바라지도, 귀족의 타도를 바라지도 않았다.
「기사도를 수호하지 못하는 기사단은 남아 있을 가치가 없어.」
그저 옳음을 지향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모두가 그를 몽상가라고 불렀다. 이루어지지 못할 이상 속에 갇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철없는 혁명가라 조롱하면서.
그러나 그 이상과 욕심에 도취된 이들도 더러 있었다. 누구도 믿지 않는 세상을 갈망하고,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단언하는 그 청명함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당신은 케케묵은 시궁창 속에서도 푸른 하늘을 떠올리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마린케이가 대답하지 않자, 샤를은 그의 턱 끝을 들어 올리며 눈을 맞추었다.
「가서 어떤 쳐 죽일 새끼들이 물을 흐리고 있는 건지 찾아봐.」
「…….」
「지금쯤이면 다 갈려 나갔겠지만…,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진 않잖아?」
「찾아내서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요.」
「세상은 누구에게나 그런 곳이라는 걸 보여줘야지.」
연인으로서의 샤를 소피아 엔스가 티끌 하나 없이 다정하고 천진했다면, 주군으로서의 샤를 소피아 엔스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지나간 계절처럼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는 여름의 태양처럼 뜨겁게 타오르기도 했다.
「전도유망하고 불경한 평민 출신 기사가, 머릿속에 든 거라고는 신분과 탐욕밖에 없는 멍청한 새끼들 전부를 갉아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인지시켜주기만 하면 돼.」
「…….」
「가지가 잘려나가고 있으니, 슬슬 뿌리도 느끼는 바가 있지 않겠어?」
제국 역사상 가장 눈부신 황제의 기사로서 살아가게 될 것을 부정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기사도와 서약은 별개의 문제라고 여겼을 뿐이지. 마린케이는 입시 학원에서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충분히 그를 위해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입학 때부터 품어왔던 작은 소망을 고이 접어놓으며 황제를 위한 서약문을 다시 읊게 될 수밖에 없었다.
「오늘부로 마린케이 이스턴은 오로지 주군만을 위한 영원한 검이 될 것을 맹세합니다. 경애하는 주군이시여, 나이트를 밟고 올라 밤에 불을 지피시고, 언제나 제국을 비추는 태양이 되십시오. 해질녘의 권능을 빌려 주군을 지키겠습니다.」
입단식과 임명식은 동시에 치러졌다. 마린케이는 4년 전, 처음으로 서약문을 읊었던 그날을 회고하며 주군에게 손을 내밀었다. 백옥 같은 낯짝은 여전히 그때처럼 지루한 듯 청중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린케이는 그 손 위에 입 맞추며 된통 꼬여버린 자신의 인생에 대해 고찰했다. 어쩌다 인생이 이 지경까지 흘러왔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하나였다.
아마 제국의 모든 것을 손에 움켜쥐고 태어나, 그 운명을 시기하는 이들 속에서도 끝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돌려주고 싶어 하는 성정의 누군가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일 것이다. 본래 한 번이라도 기사를 꿈꿔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그 가슴을 뛰게 만드는 주군에게 연심을 품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드물게 미소 지으며 황제의 손등 위에 입 맞추었다. 어쨌거나 제 인생은 이미 파탄 나기 시작한 것 같으니 될 대로 되라고 생각하면서.
“화언국에서 왔다고 들었는데.”
상념을 끝낸 마린케이는 저를 긴장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니에타를 향해 물었다. 뜻밖의 질문에 놀란 니에타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며 눈을 굴렸다. 이놈의 부단장이 또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선 이런 질문을 던져댈까, 하며 의심하고 있는 것이 뻔한 모습이었다. 고민 끝에 불신을 잠시 주머니 속에 맡겨둔 니에타가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펴며 대답했다.
“7년 동안 화언의 기숙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만…,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어떤 곳이었습니까?”
부단장과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나, 그래도 니에타는 화언에서의 유학 생활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것 자체에 매력을 느꼈다. 길고 긴 타지 생활을 마치고서 가쉰에 돌아왔을 때, 그간의 고충에 대한 진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하는 사람은 심성 착한 그의 막냇동생을 제외하고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동방 국가라서 그런가, 가쉰에서는 볼 수 없는 생경한 문화들이 많았습니다. 아름다운 명소들도 많았고요. 음, 제가 지냈던 지역은 유난히 분위기가 엄격하기로 유명했는데…, 그래서인지 타지인에게 무척 매몰찼습니다. 저만 해도 처음 말을 트기까지 두 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으니까요. 아, 권위자들에 대한 민중의 반응도 가쉰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탄력을 받았는지, 니에타는 마린케이가 지루한 듯 하품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로 구구절절 말을 이었다.
“화언에서의 왕실은 절대 불가침의 존재입니다. 황족들이 광고에 출연하고, 인터뷰도 심심치 않게 참여하며 제국민과의 심적인 거리를 좁히려 하는 가쉰과는 대조되는 모양새죠. 아마 그건 각 국가가 가진 역사적인 차이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가쉰은 그간 폭압적인 정치로 많은 비판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과거와는 대비되는 행동을 보이는 것이고, 화언은….”
“제일 힘들었던 점은요?”
역사 시간만 되면 졸기 일쑤였던 마린케이는 이번에도 수면제를 먹은 듯, 느리게 깜빡이기 시작하는 눈꺼풀을 느끼며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니에타가 곧바로 대답했다.
“굳이 따지자면 저 혼자 다른 생김새를 지녔다는 이유로 느껴야만 했던 배척감이겠죠. 화언은 대개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끔 붉은 머리칼에 호박색 눈을 가진 사람도 보이는데, 그들은 화언이 지금의 화언이기 이전에 북방에서 내려온 유목 민족 출신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에게도 아직까지 차별이 남아 있을 정도니, 저한테는 오죽했겠습니까?”
열심히 들어보려고 해봐도 말이 지나칠 정도로 길었다. 집중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마린케이는 어린 시절, 역사 수업을 들을 때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마린케이의 얼굴을 확인한 니에타가 퍽 기분이 상한 듯 물었다.
“안 들으실 거면 이런 건 대체 왜 물어보십니까?”
“…뭐, 별 이유는 없습니다.”
“그건 듣는 사람이 판단하는 겁니다.”
니에타가 이렇듯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건방진 언행을 일삼을 수 있는 이유는 마린케이 이스턴이 평민 출신이라서가 가장 컸다. 니에타는 오랜 기간 공직자로 일해 온 부르크 가문의 장남이었던 까닭에 워낙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가 높았다.
물론, 마린케이는 저를 경시하는 태도에 이질감이라든가, 거부감이라든가 하는 그런 감정들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익숙해도 너무 익숙하기까지 했다. 로건 새끼도 그랬고, 피에르 새끼도 그랬으니까.
이런 류의 사람들은 거의 그렇듯 자신이 내뱉는 한 마디에 큰 무게를 담지 않았다. 아마 그것이 절대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해서일 터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한 마디가 누군가에게는 상처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따라서 마린케이 또한 한 조각의 죄책감도 담지 않은 채, 가감 없이 답할 수 있었다.
“제 인생을 망치는 데 한몫 단단히 한 새끼가 거기 출신이거든요.”
“…….”
“화언에서 온 새끼들은 다 인성이 그 모양인 건가, 오늘따라 궁금했습니다.”
니에타의 몸이 석상처럼 굳어진 것도 그가 말을 끝낸 것과 동시였다. 마린케이의 무미건조한 시선이 무언가를 확인하듯 니에타의 전신을 훑었다. 그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사지 멀쩡해 보이는데…, 아깝지는 않습니까?”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당신, 꼭 어디 하나 망가져도 상관없다는 사람처럼 굴잖아요.”
“…….”
“아니면 됐고.”
직책이 직책인지라, 예전처럼 구체적인 신체 부위를 활용하여 협박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마린케이는 습관처럼 외투 속의 단검을 꺼내 이리저리 돌려댔다.
니에타는 헛숨을 들이켜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생각해 보니 부단장은 한량같이 생활하는 와중에도 그 무예 실력만큼은 모두의 인정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기사단장 역시 훈련 시 모범 자세를 보여야 할 때가 오면 쉬고 있던 그를 불러와 이런저런 동작들을 시켜보고는 했다.
특히나 검술 시연 때만큼은 화언에서 온갖 무예가들의 비범한 동방 검술을 보고 살아온 니에타마저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때문에 니에타는 지금까지도 입을 크게 벌린 상태 그대로 방금 들었던 말을 되짚어 보고 있었다. 어디 하나가 망가져도 상관없어 보인다는 말은, 어디 한 군데를 망가뜨리고 싶게 보인다는 말로 치환해도 괜찮은 것일까? 그렇다면 앞서 언급했던 사지가 아깝지 않냐는 말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니에타는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죽, 죽을죄를 지었…….”
“지금이 화원에 있을 시간은 아니지 않나?”
당장 머리를 박을 기세였던 니에타를 구원해준 것은 화원 뒤쪽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호기심 어린 목소리였다. 사르륵,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니에타는 이번엔 아예 온몸의 피를 도난당한 사람 같은 얼굴로 호흡을 멈췄다. 버드나무 잎을 막연히 쓸어보고 있던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짐이 모르는 사이에 황실기사단의 18계명이 바뀌기라도 한 건가.”
“…아,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폐하!”
감히 경애하는 황제의 앞에서 얼굴을 들고 서 있을 자신이 없던 니에타는 곧바로 한쪽 무릎을 굽혀 앉으며 외쳤다. 니에타가 고개를 숙이는 것을 확인한 샤를이 마린케이를 향해 윙크를 날렸다. 마린케이는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그런 샤를을 흘겨보았다.
“부르크 경.”
“예, 폐하!”
황제가 자신의 성씨를 기억해주고 있다는 사실에 니에타는 황홀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오후의 햇살보다도 눈부신 머리칼과, 메르헨 해변을 본떠 만든 것만 같다던 새파란 눈동자를 지닌 미남자가 버드나무 아래서 미소 짓고 있었다.
“경의 상관에게 물을 것이 있어 그러한데, 자리를 좀 비켜주지 않겠어?”
“아…….”
그래서인지 축객령을 들으면서도 니에타의 표정은 천사를 목격한 사람처럼 넋이 나가 있었다. 기다란 눈꼬리를 접어 웃는 황제의 모습은 지금껏 그가 미술관에서 보아왔던 그 어떤 명화보다도 더 유려하고 사랑스러웠다. 순간 저도 모르게 탄식을 뱉었던 니에타가 놀란 듯 제 입을 틀어막으며 ‘즌믕!’이라고 소리쳤다.
“존명 소리를 희한하게 하는 편이네.”
전광석화처럼 사라져가는 니에타의 뒷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샤를이 마린케이의 허리 위로 손을 두르며 중얼거렸다. 물론, 마린케이는 몸을 비틀어 그 손을 빠져나가는 데 무척 일가견이 있었다. 그가 저를 끌어안기 전에 재빨리 뒤로 물러선 마린케이가 경계심 어린 목소리를 냈다.
“왜 여기 계십니까?”
“너야말로 업무 시간에 웬 마실?”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종이에 사인하는 일밖에 없어서 잠깐 나왔습니다.”
“나도 비슷해. 다들 제 명 재촉하는 일을 즐기는지,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염치없는 귀족 새끼들 징징대는 소리 들어주는 것밖에 없거든.”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잇던 샤를이 피곤한 듯, 눈가를 꾹꾹 누르며 마린케이에게 다가왔다. 알현실에서 있었던 쓸모없는 논쟁 상황을 떠올리자 스트레스가 더욱 극심해졌다.
「겸직 조항을 폐지한 걸로도 모자라, 이젠 선대의 업을 이어 황실에 봉사하는 귀족의 의무마저도 악습으로 규정하고 철폐해야 한다니요! 이는 거쳐 온 역사에 대한 모독이자 횡포임이 분명합니다!」
「이미 겸직 불법화로 인해 많은 공직자가 생활고에 허덕이며 국사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폐하. 세습의 도리마저 규탄받는다면 더 이상 귀족이 설 수 있는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때, 앞에 있던 화병을 그들의 얼굴에 집어 던져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샤를은 보다 적극적으로 짜증을 눌러 참아야만 했다. 그나마 눈치를 좀 가지고 있는 남작 가문이 나서서 중재를 시도했지만, 콧대 높은 귀족들은 여전히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한 채 반기를 들었다.
「반역을 혁명으로 치장하는 역도 무리들이 황궁 밖에 성행한다는 소문은 들어보지 못하셨습니까? 이제라도 과오를 바로잡고, 가쉰의 영광스러운 나날을 되찾아가는 것이….」
「그대가 말하는 영광을, 부디 짐에게도 납득시켜 봐.」
「…….」
「그대의 영광인지, 가쉰의 영광인지, 황실의 영광인지, 제대로 논해 보라는 뜻이야.」
거기까지 떠올리니 이대로 황궁에 불을 질러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 샤를은 마린케이의 단단한 몸을 끌어안는 것을 통해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마린케이는 그가 마음대로 제 몸을 품에 안을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가 단호한 몸짓으로 황제의 손을 물리며 말했다.
“밖에서는 자제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군신끼리 껴안아 보지도 못해?”
“어느 나라 군신이 그런다는데요?”
“내 나라에서는 다들 그래.”
그렇게 말하니 또 할 말이 없어질 뻔했지만, 이번엔 황제의 여우 같은 수작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 다짐한 마린케이가 한 번 더 손을 쳐내며 그 논리의 모순을 꼬집었다.
“황제의 나라가 아닌 제국민의 나라가 될 것이라, 취임식에서는 분명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마린케이는 순차적으로 입을 열었다.
“맹세는 어디서 엿이라도 바꿔 드셨습니까?”
“요새는 엿장수 없어. 마린보이.”
“…관용어입니다만.”
“관용어? 그 단어는 또 누구한테 배웠어?”
피에르 셀번에게 배웠다. 일주일 전, 마린케이는 이자벨라의 추천서를 부탁-을 가장한 협박-하기 위해 찾아간 피에르가 저를 향해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고함을 내지르는 것에 짜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한마디를 읊었다.
「홍두깨가 뭔지 1분 안에 설명 못 하면 도장 대신 손가락을 가져가겠습니다.」
「관용어야, 관용어라고! 네가 불쑥 들이닥쳐서 엉뚱한 요구를 해대니까 그렇잖아!」
왕립학교 추천 권한은 격년마다 한 번씩밖에 쓰지 못하는 아주 귀중한 재산이었기에, 안 그래도 피에르는 이번 추천권을 최대한 현명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라도 명문가 자제들 중 가장 성적이 좋은 아이들을 추려 리스트를 만들어 놓았던 참이었다. 그 리스트가 보관되어 있는 간이 금고가 바로 마린케이가 발을 올려두고 있는 그곳이었다.
“많이 똑똑해졌네. 섭섭할 정도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어느새 황제의 입꼬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 마린케이는 그가 저를 다시 조롱하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고서 타박을 던졌다.
“폐하께서는 그만 좀 멍청해지십시오. 스캔들이….”
“스캔들 따위를 두려워했다면 널 사랑하지도 않았을 텐데, 아직도 모르겠어?”
이럴 때면 늘, 예쁜 말만 일삼는 황제의 입술을 물어 뜯어버리고 싶다는 과격한 충동이 일었다. 폭력성을 가라앉히려 짧게 명상을 한 마린케이는 황제의 머리칼 위에 떨어져 있던 버드나무 잎을 치워주며 그 귓가를 살짝 쓸어 만졌다. 샤를이 순간 표정을 굳혔다. 마린케이가 딱 듣기 좋을 정도로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지 말고, 이제는 스캔들 따위를 좀 두려워 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
“가짜가 아니라 진짜가 됐잖아요.”
마린케이의 입매가 서서히 휘어지기 시작했다. 이내 그가 완연히 눈을 접어 웃었다. 반달처럼 굽어진 그 눈에, 샤를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로 마린케이의 얼굴을 멍하니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버드나무 가지를 스치는 바람이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고, 샤를은 봄바람의 향긋한 풀 내음이 마치 지금 이 순간의 마린케이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부디 생각이란 걸 하고 살자고요, 폐하.”
그러나 이어지는 말들은 전혀 향긋하지 못했다. 행복감을 느낀 샤를이 열심히 대답했다.
“용병단에서 저격수를 빌려와서 그런가, 황궁엔 파파라치 같은 쥐새끼들이 없어.”
“…….”
“다들 목숨까지 걸면서 파파라치 짓을 하지는 않더라고?”
그게 열심히 대답할 만한 말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
니에타는 그날 이후로 황실기사단의 부단장이라는 존재를 더더욱 주의 깊은 시선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떤 비범함을 가진 인물이기에 존경해 마지않는 황상과 독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인지, 그 비밀을 캐내지 않고서는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을 것만 같아서였다. 그는 첩보 영화의 주인공이 된 심정으로 마린케이의 뒤를 따라다녔다.
덕분에 마린케이는 원한 적 없던 스토킹에 시달리게 되고 말았다. 이제는 읽다 만 만화책 속을 뒤지며 암호를 찾아대기까지 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누구라도 치를 떨 만한 강박적인 스토킹임이 틀림없었다. 마린케이는 그런 니에타를 무시하고자 노력하며 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만화책을 뒤져 암호를 찾든, 신발 속을 뒤져 압정을 찾든 어디 한번 마음껏 날뛰어 보라는 의미에서였다. 저러다 말겠지, 하는 생각도 얼핏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상황이 삼 주째 지속되고 있으니 슬슬 저 작은 머리통을 붙잡아 호수에 던져버리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마린케이는 알현을 마치고 오는 날마다 호수의 규모를 늘려야 할 것 같다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주군의 심정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부단장님, 15분 뒤에 훈련 있습니다.”
“…….”
“오늘은 전술 관련이라고 하니까, 미리 책이라도 읽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한테 궁금한 게 뭡니까?”
오늘따라 니에타의 보고를 경청하고 있던 마린케이가 갑작스레 말을 꺼냈다. 서류를 넘기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니에타는 간만에 멍청한 목소리를 내며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저 만화책들을 전부 뒤져봤자 아무것도 안 나올 겁니다.”
“…….”
“아무 생각 없이 읽는 거니까요.”
누가 들어도 맞는 말을 하고 있는 쪽은 마린케이였다. 대체 무협 만화를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니에타는 의견이 달랐던 건지, 떳떳하게 대꾸했다.
“폐하의 선택을 받은 유일한 기사가 아무 생각 없이 책을 읽을 리 없습니다.”
손에는 서류 더미를 꽉 붙들고 있는 채였다. 마린케이는 한숨처럼 답했다.
“그건 네 착각이고.”
“그럴 리 없다는 걸, 제가 기필코 밝혀내고 말 겁니다!”
“…….”
“당신은 분명 명문가의 숨겨진 사생아거나, 어릴 적 폐하의 목숨을 구해드린 적이 있다거나, 전설 속에 나오는 소드 마스터라든가, 그런 비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테니까요.”
니에타는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도 되는 사람처럼 열변을 토해냈다. 때문에 마린케이는 ‘설마 나한테 진짜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건가’ 하고서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 뻔했다. 그만큼 니에타의 주장은 호소력 있게 들려왔다. 어쩌면 기사단이 아니라 사법 기관에 들어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마린케이가 얼마 안 되는 가능성을 담아 물었다.
“혹시, 제가 서약 기사인 건 알고 있습니까?”
“……네?”
아무래도 그 몇 안 되는 가능성이 들어맞은 것 같았다. 헛웃음을 뱉은 마린케이가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대체 왜 소드 마스터니 뭐니 하는 지랄을 떨어대는 건가 했는데, 정작 중요한 사실 하나는 염두에 두지 않고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폐하와 서약을 맺었습니다.”
“…….”
“그래서 독대할 수 있는 거고요.”
“…….”
“신기하네요.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니.”
화언에서 왔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소식에 뒤처진 건가 싶기도 했다. 입을 벙긋거리며 괴상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던 니에타는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떨어뜨리며 몸을 비틀거렸다.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서약? 해질녘의 권능, 어쩌고 하는 그거?
평민 출신 기사가, 하물며 소드 마스터도 아닌 일개 기사 한 명이 지금껏 단 한 명의 기사밖에 두지 않았다는 샤를 황제의 그 서약자였다고?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니에타는 연달아 중얼거리며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그가 상상해온 황제의 서약자는 조금 더 다부진 인상에, 내로라하는 가문과 출중한 실력을 바탕으로 단원들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엄격한 성정을 가진, 그런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내 눈앞의…,
마린케이 이스턴이라고? 낙하산으로 유명한 부단장?
니에타를 완벽히 무시한 마린케이는 따분하다는 듯 하품을 하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15분 뒤에 훈련 시작이라고 했으니, 슬슬 출발해줘야 지각을 면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니에타가 따라오든 말든 알아서 갈 길을 가려고 하던 마린케이는, 총알처럼 튀어나온 그가 다급히 제 팔을 붙잡는 것에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부, 부단장님께서 정말…, 미헤르 사건 때 아이들을 구출하셨다던, 그 기사님이 맞으신 겁니까?”
니에타가 새빨개져 있는 얼굴로 물었다. 뭐야, 이거.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마린케이 이스턴의 뛰어난 직감이 에둘러 경고했다.
‘삐. 도망치시오.’
4년 전의 그날들을 떠올리자 마린케이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아무리 과거가 되었다고 할지언정, 그때 느꼈던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는 아직까지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마 그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화언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을 당시였다. 니에타는 이제 막 왕립학교에 입학한 수련생 하나가 황태자를 도와 댄 미헤르 사건을 해결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는 사흘 정도 충격에 빠져 지냈었다. 인터넷 속에 파묻혀 그 수련생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으나, 황태자와의 서약을 마친 기사라는 점을 제외하고서는 그 어떤 인적 사항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소년만화에나 등장할 법한 비밀스러운 존재 같았다.
사실 니에타는 소년만화 자체에 큰 관심이 없었다. 마린케이가 주야장천 읽고 있는 무협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오직 학술 서적뿐이었고, 가끔 내킬 때면 스릴러나 SF소설을 읽었지, 절대 무의미한 권선징악을 주제로 삼는 소년만화나 무협지 따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정의 타령을 하며 민폐만 끼치고 다니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재수 없어서였다. 그게 정말 가능했다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지는 않았겠지,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가쉰을 뒤흔들었던 노예상 사건을 접하게 된 이후부터 그의 삶에 미묘한 어긋남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 황실기사단에 들어가고 싶었던 두 가지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그 수련생이었다. 원체 탁월한 능력을 가졌으니, 졸업 후엔 분명 황실기사단을 대표하는 인재가 되어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황태자 또한 생각보다 일찍 즉위하게 되었으므로 이제 자신이 할 일이라고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가 당당히 입단 증서를 받는 것뿐이었다.
“정말, 정말 부단장님께서 그 사람이 맞…….”
마린케이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있음에도 니에타는 이미 결과를 예상하고 있는 사람처럼 계속 말을 더듬거리기만 했다. 오랜만에 듣는 노예상 새끼의 이름에 기분이 더러워져 있던 마린케이가 니에타의 손을 저에게서 떨구어내며 대답했다.
“15분 뒤에 훈련이 있다고, 당신한테서 들었는데요.”
“부단장님, 잠시만요. 잠시만 저와 대화를 나눠주십시오. 정말 잠깐이면 됩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마린케이로서는 니에타의 열렬한 반응을 이해하고 싶지도, 이해하려 노력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니에타를 뒤로하고서 단원들이 기다리고 있을 제1 훈련장으로 향했다. 니에타는 거의 도박장에서 파산한 사람이 된 심정으로 머리칼을 쥐어뜯고 있을 뿐이었다.
왜 몰랐을까, 왜.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는데, 왜 몰랐던 거냐고. 니에타 부르크, 이 멍청한 새끼! 그는 첫사랑이라도 잃은 사춘기 소년처럼 소리 없이 오열했다.
***
며칠 뒤, 마린케이는 께름칙한 기분에 놀라 재빨리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집무실 소파에 누워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시간을 확인하려 휴대폰 쪽으로 손을 뻗자 누군가의 낮은 목소리가 먼저 틈을 노려 현재 시각을 일러주었다.
“오후 18시 48분입니다. 연회 시작 시간까지는 12분가량밖에 남지 않았고요.”
한동안 숨을 죽이고 사는 것만 같던 니에타 부르크였다. 입단 초기 때보다 확연히 안쓰러워진 몰골을 한 니에타가 어느 순간부터인지 마린케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 꺼진 방 안에서 홀로 니에타의 번들거리는 시선을 감당해야 했던 마린케이는 거칠게 손을 뻗어 형광등 스위치를 눌렀다. 갑작스레 불이 켜지자 눈이 좀 시리긴 했지만, 그래도 어둠 속에서 이 정신 나간 새끼를 마주 보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꾸역꾸역 로건이 보내온 맞춤 정장을 몸에 둘렀던 마린케이는 풀어진 와이셔츠 단추를 잠그며 몸을 일으켰다. 니에타는 그런 마린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 정적 가득한 시선이 더 소름 끼쳤다.
그렇게 마린케이는 니에타를 무시하고서 연회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귀족들이 가득 차 있는 연회장에 발을 내디뎠을 때, 그의 영리한 직감은 미친 듯이 경종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피에르 셀번부터 시작해 린저 아일랜드, 그리고 칼릭스 커티스까지, 왕립학교 시절을 함께 보냈던 여러 인사의 시선이 뒤늦게 등장한 마린케이에게로 쏟아졌다.
와인 잔을 들고 있던 린저는 졸업 이후 처음으로 마린케이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에 입을 틀어막았고, 칼릭스는 죽을 때까지 다신 마주치고 싶지 않던 평민과 또다시 한자리에 있게 된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부탁을 가장한 협박 아래서 추천장을 작성해야만 했던 피에르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마린케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바로 옆에서 마린케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눈에 담고 있던 니에타와 견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하고 섬뜩한 것이었다.
기사단장의 명령이고 뭐고, 집에 돌아가 망명 신청을 할까 고민하던 마린케이는 어느덧 연회장의 조명이 어두워지는 것에 황족용 입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흰색 정장을 입은 아름다운 용모의 남자가 짜증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천천히 연회장 안에 걸어 들어왔다. 그의 옆에 서 있던 보좌관들은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온 수척한 몰골이었는데, 워낙 시선을 사로잡는 미인이 가운데 위치하고 있었던 탓인지 그들의 신체적인 고통을 알아채는 사람은 왕립학교 출신의 몇몇 인사들밖에 없었다.
선황 때까지만 해도 1년 동안 몇 번씩 연회를 벌였을 정도로 황실과 귀족 간의 신뢰 관계는 매우 두터운 축에 속했다. 그러나 샤를 소피아 엔스가 즉위하고 난 이후에는 1년에 한 번조차 연회를 치르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 변화만으로도 정국이 시끄러워졌다는 사실을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마린케이는 제 옷소매에 있는 문양과 똑같은 문양이 새겨진 정장을 입고 있는 황제의 모습을 발견하고서 빠르게 소매를 걷어 올렸다. 로건 콜린스, 이 개자식이! 그러나 이미 니에타의 질척한 시선이 마린케이의 움직임을 샅샅이 훑어보고 난 후였다. 걸어 다니는 CCTV가 마린케이의 옷소매 부분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정장까지 함께 맞춰 입을 정도의 사이셨다니…,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왜 몰랐던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대체 왜….”
“사지가 멀쩡해 보이십니다.”
“……와인 한 잔 가져다드릴까요?”
마린케이가 고개를 저으며 거절 의사를 밝혔지만, 니에타는 묵묵히 화이트 와인이 든 글라스 하나를 들고 와 그에게로 내밀었다. 결심한 듯, 굳건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의 니에타가 자신의 잔과 마린케이의 잔을 억지로 부딪치며 말했다. 마린케이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저는 아직도 부단장님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니에타는 단숨에 제 입 안으로 와인을 털어 넣었다. 그리고선 반복해 말했다.
“아직까지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단 말입니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마린케이는 와인 잔 하나를 더 들고 와 저와 잔을 부딪치고 있는 머저리 새끼가 드디어 정신이 나가버린 게 틀림없다는 생각을 했다. 마린케이와 대작을 벌이고 싶었던 모양인지, 연속해서 두 잔을 들이켠 니에타가 거만하게 말했다.
“먼저 취한 사람이…, 앞으로 모든 서류를 담당하기로 하는 건 어떻습니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기에, 마린케이는 곧바로 제안을 수락하듯 입안에 와인을 들이부었다. 화이트 와인 특유의 청량감 넘치는 맛이 혀를 가득 적신다.
독하다고 유명한 드윈의 위스키를 마셨을 때도 취하지 않던 몸인데, 고작 와인 정도로 취기를 느낄 리 없었다. 이미 승패가 결정된 싸움이었으나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니에타만이 스스로의 주량에 자부심을 느끼며 실실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니에타는 취기를 넘어 토기가 올라오기까지 하는 배를 부여잡으며 구역질을 해댔다. 그런 두 사람을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고 있던 린저가 냉큼 달려와 바닥으로 엎어지려는 니에타의 몸을 부축했다. 이번엔 절대 끼어들지 않을 것이라며 호언장담했던 칼릭스 역시 니에타의 주정을 감당하지 못하는 린저를 보며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놔…, 놓으라고! 부단장님께 여쭤볼 말이 있단 말이다, 이놈들아!”
“저기, 이분께서 계속 이스턴 씨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오랜만에 나누어 보는 마린케이와의 대화에 잔뜩 신이 난 건지, 린저는 저도 모르게 니에타를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 덕에 칼릭스는 니에타의 거구를 혼자서 감당하게 되고 말았다. 그는 속으로 욕설을 짓씹으며 다리에 세게 힘을 주었다.
기사단 새끼라 그런가, 근육이 촘촘하게 잡혀 있는 거구는 쌀가마니 열 개를 인 것처럼 온몸에 힘이 들어가게 만들었다. 칼릭스의 고통을 외면한 마린케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기절시켜 버리십시오.”
린저는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네, 네?”
“위층에 객실이 있으니, 거기다 던져두고 오면 될 겁니다.”
본인은 쏙 빠져나가겠다는 염치없는 발언이었지만, 왕립학교 재학시절부터 마린케이 이스턴의 광신도로 유명했던 린저는 그 한 마디에도 가슴 설레 하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니에타를 끌어다 옮기게 생긴 칼릭스가 분통을 터뜨렸음에도 그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마린케이는 반쯤 남아 있던 와인을 마저 마시며 젖은 입술을 닦았다.
“부단장님, 부단장님…!”
니에타는 여전히 몸을 버둥거리며 마린케이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의 몸을 제압하고 있는 이들은 체력과 악력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퍼스트 클래스 출신의 귀족들이었다.
칼릭스가 화풀이를 하듯 니에타의 팔을 꺾었다. 졸지에 또 마린케이의 시다바리 노릇을 하게 된 것에 이골이 날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원로들에게 붙잡혀 귀족 사회의 예절과 도리에 대해 한참이나 입씨름을 하고 있던 샤를이 마린케이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 또한 그즈음이었다.
황태자 시절부터 겪어오던 일이었으니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불행히도 그는 시대착오적인 발언만 떠들어대는 원로들의 생각에 여전히 익숙해지지 못한 채 걸음을 옮겼다. 온갖 종류의 실언들이 쏟아지는 상황 속에서도 웃는 낯을 유지해야만 했던 탓인지 입꼬리가 경련을 일으키며 내려오지 않았다. 게다가 억지로 술을 받아 마셨던 덕분에 속까지 좋지 않았다.
이러다 또 내일 아침, 숙취로 인해 거실 바닥을 굴러다니게 생겼다. 마린케이의 앞까지 다다른 샤를이 저를 불경하게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기껍게 받아들이며 말했다.
“마린보이. 나 어떡하지?”
“…….”
“안 웃는 법을 잊어버렸어.”
설마 또 술을 처마신 건 아니겠지. 마린케이는 싸늘하게 답했다.
“한 대 거하게 얻어맞고 나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기각.”
“한 번에 끝낼 자신 있습니다. 진짜로.”
“기각이라니까.”
그러나 곧바로 거절당하고 말았다. 마린케이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저 표정을 되돌리고 싶었던 것이지, 안면 근육을 마비시키고 싶지는 않았던 샤를은 마린케이의 미련 가득한 얼굴을 보면서 혼자 ‘기각, 기각, 기각.’ 하고서 중얼거렸다. 마린케이는 순간 의심스럽게 눈을 좁히며 그를 바라보았다. 샤를이 마린케이의 손에 쥐여 있는 와인 잔을 바라보며 물었다.
“황실기사단은…, 금주가 원칙이지 않나?”
마린케이는 떨떠름함을 숨기지 못하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럼 네 손에 든 그건 뭐야?”
정확히 설명하자면 스물여섯 번째 와인 잔이었지만, 귀찮음을 느낀 마린케이는 짤막한 답변만을 꺼내놓았다.
“협박을 당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
“그래서 억지로 마신 거고요.”
어떤 정신 나간 놈이 널 협박해? 샤를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지만, 마린케이는 양심의 가책 하나 느끼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다행히도 제가 이겼습니다.”
마린케이는 세기말의 전투를 치르고 돌아온 사람인 양 피곤한 낯을 꾸며내며 지친 한숨을 뱉었다. 그러나 건달이나 양아치를 연기하는 게 아니고서야 참혹할 수준의 연기력을 자랑하는 그였기 때문인지, 그 모습은 그저 개발이 덜 된 인공지능 같아 보이기만 했다.
“저는 이제 가서 쉬어야겠습니다. 폐하께서도 모쪼록….”
“너, 다른 새끼가 주는 술을 함부로 받아 마시면 어떡해?”
뭔가 대단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은 것 같긴 한데, 혹시 술을 마셔서 환청을 들은 건 아닌지 헷갈렸다.
“……예?”
마린케이가 멍청히 되묻자,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찬 샤를이 그에게서 와인 잔을 뺏어 들었다. 어쩐지 얼굴이 심통 난 고양이처럼 보이는 게 예감이 좋지 않았다. 마린케이는 본능적으로 몇 걸음을 뒤로 물렸다. 샤를이 연달아 타박했다.
“저번엔 둘이서 산책이나 하고 있더니, 이번엔 대작까지 나눠?”
“지금 무슨 개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겁니까.”
마린케이가 짐짓 목소리를 낮추며 반박했지만, 샤를은 전혀 황제답지 못한 시정잡배 같은 폼으로 귀를 후비적거리기만 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피에르가 경기를 일으키며 와인 잔을 떨어뜨렸다. 다른 이들의 반응 또한 얼추 비슷했다.
제기랄. 어디서 술 냄새가 풍기는 것 같더라니, 내가 아니라 이 새끼한테서 나던 거였어? 다급히 묵례를 올린 마린케이가 상황을 무마하기 위한 유일한 수를 던질 때였다.
“전 이만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폐하. 필요한 일이 생기시면 연락…….”
“부단장님, 부다아아아아아아안장님! 당신이, 당신이 정말 그 기사님이 맞다면 제게 증표를 보여주십시오! 아아아아악, 부단장님!”
성난 괴수처럼 연회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목소리는 니에타 부르크의 것이 분명했다. 위층에다 던져 놓으라고 했을 텐데? 마린케이가 사납게 고개를 돌리자, 도저히 괴수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칼릭스와 린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거의 쓰러지기 직전인 모양새로 가냘프게 휘청이고 있었다. 구속에서 풀려난 괴수 하나가 무서운 속도로 마린케이에게 돌진했다.
앞에서는 술에 절은 미친놈 하나가 저에게 달려오고 있었고, 뒤에서는 술에 절은 양아치 새끼가 표독스럽게 눈을 치뜨며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도 저도 하지 못한 채 몸을 굳힌 마린케이는 하는 수 없이 품에 넣어두었던 단검을 고쳐 잡았다. 여기서 황제라도 나서게 됐다간 또다시 웃지 못할 추문에 시달리게 될 것이 눈에 훤했으니, 차라리 욕을 좀 먹을지언정 자신이 직접 니에타를 기절시켜버릴 심산이었다.
그러나 결과만 놓고 말하자면, 니에타 부르크는 마린케이가 아닌 다른 이의 손에 의해 벽 쪽으로 집어 던져졌다고 할 수 있겠다. 흉흉하게 달려오던 니에타의 커다란 몸을 오직 한 손만을 사용해 패대기쳐버린 샤를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먼저 찾았는데….”
그가 홱, 고개를 돌려 마린케이를 노려보았다. 눈동자는 완전히 맛이 가 있었다.
“마린보이, 너 내 거 맞지?”
아니나 다를까, 그는 확실히 술에 절어 있는 상태였다. 연회장의 구석진 곳에서부터 이곳을 향해 경보하듯 걸어오고 있는 피에르를 발견한 마린케이가 어떻게든 황제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대답했다.
“그렇다고 칩시다.”
“내 거잖아.”
“알겠다니까요?”
“네 입으로 말해줘. 내 거 맞지?”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후려칠 뻔한 마린케이는 황족 시해죄가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급하게 방법을 바꿨다.
“집에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내가 창피해?”
그에 마린케이는 어처구니없음을 느끼며 까득, 이를 깨물었다. 덕분에 잔뜩 억눌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갈색 눈 역시 사납게 곤두서 있었다.
“술을 대체 얼마나 마신 겁니까.”
“창피해하지 마. 응?”
“…주사로 피해망상도 있으셨어요?”
만약 그렇다면 당장 실수인 척 기절시켜버린 후 황실 의료진들을 죄다 집합시킬 예정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샤를은 고개를 휘저으며 마린케이의 의심을 가로막았다.
“아냐. 난 술에 잘 안 취해.”
신빙성 없는 해명이었다. 심지어 그의 정신 나간 얼굴은 벽에 머리를 부딪혀 기절한 니에타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마린케이는 그의 주의를 끌기 위해 난이도 낮은 질문을 던졌다.
“몇 잔이나 마셨는데요?”
“다섯 잔보다 두 잔 더 마셨는데, 사실 그중 세 잔은 내가 마신 게 아니야.”
확실히 취했다. 취한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설명을 저따위로 하고 있는 거겠지. 황제가 또 어떤 개소리를 입에 올릴지 걱정이 된 마린케이가 한숨을 뱉었다. 샤를은 그런 마린케이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듯 허리를 쭈그리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달려온 피에르가 폐하께 무슨 짓을 한 것이냐며 소리를 질렀고, 이러다 자신이 정말 반군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마린케이는 손으로 와인 잔을 깨부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