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593년의 흔적을 따라가며.
지난 5년은 격동의 시기였다고도 할 수 있었다. 드윈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마리아 로즈 엔스를 중심으로 가쉰의 군주제를 철폐하고자 하는 움직이기 생겨나기 시작했고, 때때로 무정부주의자들의 비폭력 시위가 일어나기도 하며 갈등이 심해졌다.
초대 황제가 가쉰을 건국하고 그 문명이 팽창하여 지금의 가쉰을 만들어내기까지 족히 15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으나, 그 길고 긴 시간 동안 제국민의 삶에 항상 자리해 온 ‘황실’이라는 존재가 사라지기까지는 단 5년의 세월밖에 요구되지 않았다.
샤를 소피아 엔스의 통치 기간은 역대 그 어느 황제들보다도 짧은 축에 속했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낸 변화들은 철학자 파르헬리에 의해 『최후의 황제』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기도 하며 세계인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의 즉위 기간 동안 귀족 사회의 멸망과 새로운 국가의 시작을 충분히 전망해볼 수 있었다는 것이 책의 요지 중 하나였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파르헬리는 살아생전 그의 마지막 출간물이 된 이 책의 서문에 ‘그 아이는 내가 가르친 제자들 중 가장 어리석었다. 너무도 어리석은 나머지, 제가 가진 것들을 이용해 세상을 집어삼키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그런 아이였다.’라고 저술함으로써 샤를 황제를 처음 만났던 어느 겨울날의 기억을 회고했다.
물론, 마린케이는 그 책을 읽지 않았다. 이미 그 안의 모든 내용이 그의 신체와 기억 속에 낱낱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양아치같이 건들거리며 사람을 골려대던 스물한 살 무렵의 샤를 소피아 엔스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 자그마치 9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마린케이는 망나니 황태자를 저주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는 했었다. 삼류 일간지에서 터뜨린 열애설로 인해 제 인생이 바닥까지 내려앉았던 것을 떠올리면 지금까지도 어이가 없었다.
신분제는 공식적으로 철폐되었으나, 은연중 가문을 따지는 풍습은 여전히 잔재해 있었다. 그럼에도 가쉰의 모두가 신분 해방을 부르짖었던 그날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을 터였다.
공작 가문이 가장 먼저 작위를 반납했고, 그 뒤를 이어 후작, 남작 가문 등이 자발적으로 작위를 반납하며 또 다른 의미에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했다.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온 이들에게는 제국민의 비호가 쏟아졌고,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심판이 뒤따랐다. 그것들 모두가 샤를 황제의 즉위 기간 동안 발생한 일이었다.
그 모든 순간을 과거의 한편으로 제쳐둔 마린케이는 어느덧 왕립학교 졸업을 앞둔 아이들이 저에게 보내온 편지를 꺼내 읽으며 간만의 한가로움을 즐겼다. 기사 출신의 황제에 의해 건국되고, 기사도를 숭상한 황제에 의해 역사의 종장을 맺은 국가답게 가쉰 민주공화국은 여전히 기사단 문화를 유지하며 독자적인 체제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기사단의 이름은 ‘패러렐(Parallel)’. 끝과 시작은 평행한 것이니,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 말라고 말했던 가쉰 엔스의 유언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강제로 단장직을 떠맡게 되어 하루하루를 중노동 속에 보내고 있던 전대 중령, 마린케이 이스턴은 무려 2년 만에 얻어낸 휴가에 감읍해하며 일정 하나 없는 자투리 시간을 즐겼다.
자신은 이미 군부대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칼릭스 커티스가 제1대 기사단장이 될 것이라 믿어 마지않던 마린케이는 제게 내려온 대통령 각하의 임명장에 반강제로 단장직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쥐 죽은 듯이, 없는 듯이 살고 싶었는데.’
9년간 내리 읊어왔던 하나뿐인 신념이기는 했으나, 단 한 번도 그 신념처럼 살아본 적은 없었다. 마린케이는 그 원흉이 된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있는 역사라고도 불리는 푸른 눈의 미남자가 어딘가에서 저를 돌아보며 비웃고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설상가상으로 TV를 틀자 그 남자의 얼굴부터 튀어나왔다.
샤를 황제의 일생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은 쟁쟁한 드라마와 예능을 제치고서 동시간대 1위를 차지했을 만큼 인기가 좋았다. 심지어 몇 년 전 그가 마약 추문 인터뷰 당시 발언했던 ‘금발은 황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라는 문구는 아직도 염색약 광고에 사용되고 있었다. 마린케이는 짜증을 감추지 못하며 TV 화면을 껐다.
일어나 샤워를 하고, 식사를 마친 후 편지 몇 장을 좀 읽어봤을 뿐이었는데도 벌써 시간은 오후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마 이제 곧 품 안에 선물 더미를 한 아름 안아 든 벚꽃 같은 인상의 미남자가 지친 얼굴로 집에 돌아올 것이었다. 밖에 나갈 때마다 그는 여기저기서 꽃다발이며, 곰 인형이며 하는 것들을 받아왔다.
제1대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된 마리아 로즈 엔스는 전대 황제를 거의 무상으로 부려 먹으며 온갖 업무들을 떠맡기고 있었다. 마린케이의 예상대로 7시 반이 되자마자 집에 돌아온 샤를이 현관에 다다름과 동시에 들고 있던 선물 상자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오늘은 커다란 흰색 테디 베어가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목을 갑갑하게 조이고 있던 검은색 넥타이를 풀어낸 그가 비척거리며 마린에이에게 걸어왔다. 마린케이는 제 어깨 위에 얼굴을 기대는 그의 머리칼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멀쩡해 보이십니다.”
“…장난해? 사인만 오백 번이 넘도록 하고 온 것 같은데.”
황실이 사라지고, 신분제가 철폐되기는 했으나 아직 많은 악습이 남아 가쉰의 그림자를 자처하고 있었다. 실은 공화국을 선포했던 마지막 황제가 여전히 귀빈실을 들락거리며 업무를 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처음 샤를이 꿈꾸었던 사회의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그는 마린케이의 등을 끌어안으며 투정을 부렸다.
“나 안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다는 말을 듣고 싶으신 거면, 제발 사진 좀 적당히 찍어서 보내세요.”
샤를은 그 많은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와중에도 꼬박꼬박 마린케이에게 자신의 사진을 찍어 보냈다. 밀린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 모습부터 시작해 각국의 대사관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까지, 국가기밀은 아닌 걸까 싶은 사진들까지도 빠짐없이 전송하며 일과를 알릴 정도였다.
마린케이는 렌즈 안에 그의 얼굴이 가득 담긴 셀카를 제외하고서는 관심도 없다는 듯 일괄 삭제를 선택하고는 했다. 대사관들의 얼굴이 나온 사진은 클릭해 보지도 않은 채 지워버렸다.
“휴대폰 용량도 벌써 다 찼습니다.”
“하나 더 사줄 테니까 좀 봐줘.”
샤를은 그런 마린케이의 볼에 입술 도장을 찍으며 애교를 부렸다. 까만 염색물이 든 고운 머리카락이 마린케이의 목 부근을 조금씩 간지럽혔다.
「나도 한 번쯤은 이 지긋지긋한 금발에서 벗어나 봐야 할 거 아냐.」
그렇게 말한 샤를은 어느 날 갑자기 마린케이 몰래 염색을 하고서 나타났다. 태양빛을 닮았노라 칭송받던 찬란한 금발이 사라지고, 건너편의 어둠을 모두 간직한 것만 같은 검은 머리칼만이 남았다. 세상의 처연함을 모두 끌어안은 것만 같은 미남자의 얼굴은 흔들리는 벚꽃을 닮아 있었다. 베사플레사에 잠입해 난리를 치고 올 때마다 보곤 했던 그 모습이었다.
「예쁘시네요.」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틀렸다. 머리색이 어떻든 간 마린케이는 변함없이 자신의 주군을 경애하고, 자신의 연인을 연모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굳이 부정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었다.
「봐줄 만합니다.」
두 사람은 영원을 맹세한 군신이자 연인으로서 지금까지의 나날 동안 함께 성장해왔다. 그렇게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을 함께 살아가고 있음에도 마린케이는 그 불손한 경어체를 내려놓지 않았다. 예의를 지키고 싶어서 사용하는 것인지, 사람을 조롱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인지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어느 쪽이든 귀여운 것은 마찬가지라 생각한 샤를이 마린케이를 그 넓은 품 가득 끌어안았다. 마린케이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었지만, 살짝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마린.”
샤워를 마치고 나온 샤를이 마린케이의 옆자리를 비집고 들어가며 듣기 좋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제 막 이자벨라의 편지를 뜯어 읽고 있던 마린케이는 그의 존재를 눈치채고서 손을 내렸다.
“방해 안 할 테니까 계속 읽어.”
샤를은 그런 마린케이에게 속삭이며 눈을 접었다. 말은 그렇게 해봤자 절대 가만히 있지 못할 것이란 걸 알았다. 그럴 거면 차라리 제대로 날을 잡아 함께 편지를 읽는 시간을 가지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그는 제 앞으로 온 편지는 그날 바로 읽어버려야 하는 활자 중독이었다. 또 다른 활자 중독자로 유명한 피에르 셀번도 그 집착에 박수를 보낼 수준이었다. 편지지 위에 쓰여 있는 ‘이자벨라 헝크스’라는 이름을 읽은 샤를이 반가운 듯 물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대?”
“한 과목에서 최하점을 받은 탓에 수석은 어려울 것 같다는데, 그래도 차석으로는 졸업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합니다.”
“최하점이라니?”
“오웬 교수와 싸움이 붙었다는데요.”
그 이름은 샤를과도 지독한 악연이 있는 이름이었다. 정치학과 역사학 수업을 들을 때마다 빈번히 오웬 교수와 부딪혔던 것을 떠올린 샤를은 얼굴을 구기며 대답했다.
“잘했다고 전해줘. 그 새끼 수업에서 최고점을 받은 수석보다는 최하점을 받은 차석이 훨씬 더 값어치 있는 자리라고.”
“책을 집어 던지고 나왔다는데, 낙제가 아니라 다행입니다.”
“뭘 집어 던져?”
그에 샤를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얼떨떨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무리 오웬 교수가 모순투성이에, 쓰레기 같은 발언을 일삼는 작자라고 할지언정 학구적인 분위기의 왕립학교에서 교수를 향해 책을 집어 던진다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편지를 마저 읽어 내린 마린케이는 건조하게 대꾸했다.
“노아도 마찬가지라고 쓰여 있던데, 못 들으셨습니까?”
그 사건이 있던 지도 벌써 9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아이들은 저마다 치료를 끝내고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더는 그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며 새로운 신분을 마련해 살아가는 이도 있었고, 마지막 편지를 남긴 채 가쉰을 떠난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연락이 닿고 있는 아이들은 몇 되지 않았다. 모두 각자의 삶에 바쁘게 치이고 있을 터이니, 서운함을 느낄 만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자벨라와 노아는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내는 아이들에 속했다. 마린케이의 협박을 통해 피에르의 추천장을 받을 수 있었던 이자벨라는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일념하에 션 헝크스의 눈물 어린 배웅을 받으며 왕립학교로 떠났다.
그즈음 이자벨라는 션의 호적에 올라 완전히 가족이 된 상태였는데, 입학식에서 마린케이를 만난 션은 눈물 콧물을 빼며 딸을 잘 부탁하겠노라 부탁에 부탁을 거듭했다.
왕립학교에 대해 어떤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은 마린케이는 그 말을 특별 교수직에 있는 피에르에게 대신 전했다. 물론, 약간의 협박을 곁들어가면서 말이다.
치료 당시에도 가장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던 노아는 당당하게 재활에 성공해 기사학부 졸업을 앞두고 있는 상태였다. 마린케이는 처음, 자신을 찾아와 성씨를 빌려 달라 말하던 노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괜히 가슴 부근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제 허리를 겨우 넘어섰던 작은 아이가 어엿한 청년이 되어 앞에 서 있는 모습에 감회가 퍽 남달랐다. 비록 실제 나이 차이는 5살밖에 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랬다.
언젠가의 레온하르트가 그러했던 것처럼, 다른 이의 성씨를 빌려 기사학부에 입학한 노아 이스턴의 꿈은 제 앞을 막아섰던 찬란한 사람처럼 다른 이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사격에 있어서는 퍼스트 클래스보다도 더 완벽한 실력을 자랑하던 노아는 정작 성씨를 빌려준 마린케이에게는 한 해에 한두 번밖에 편지를 쓰지 않았다.
그러나 저를 구해준 샤를에게는 달에 두어 번씩도 편지를 보내고는 했다.
노아에게 아무런 얘기도 전해 듣지 못했던 샤를이 헛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는 노아가 그럴 리 없어, 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 분명했다. 마린케이는 오히려 그런 그의 반응을 의심스러워하며 이자벨라의 편지를 건넸다.
“읽어보시겠습니까?”
“내가 봐도 되는 거야?”
쓸데없이 세심한 성격은 이럴 때일수록 더욱 빛을 발했다. 마린케이가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곧장 편지지를 받아 든 샤를은 한 글자 한 글자를 탐독하듯 읽어 내렸다.
펜을 손으로 잡고 쓴 건지, 입으로 물고 쓴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휘갈겨져 있는 필체는 자유분방한 이자벨라의 성격을 쏙 빼닮아 있는 듯했다.
『노아 그 자식, 다이애나한테 잘 보이려고 그 지랄을 한 게 틀림없어. 분명하다니까? 내가 책 던진 걸 보면서 다이애나가 오웬 새끼 몰래 박수를 쳤는데, 그걸 보자마자 자기도 냅다 책을 집어 던지잖아. 속이 뻔히 다 보이는데 어떻게 못 본 척을 해? 그래서 내가….』
거기까지 감상을 마친 샤를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받은 노아의 편지 속에는 늘 이자벨라에 대한 이야기만 적혀 있던 까닭에, 당연히 그 아이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상대는 이자벨라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편지의 내용을 정확히 더듬어 보자면 ‘이자벨라가 오늘도 시비를 걸었다’, ‘걔는 무슨 자기가 정의의 사도라도 된 줄 알고 설치고 다닌다’ 등의 내용뿐이긴 했지만 말이다.
“다들 너랑 똑같이 자랐네.”
편지를 원상태로 접어 마린케이에게 건넨 샤를이 웃으며 말했다. 덕담과 악담 사이를 오고 가는 그의 애매모호한 말버릇은 시간이 지나도 제자리걸음이었다. 이제는 그 수수께끼 같은 발언들에도 아무렇지 않게 대응할 수 있게 된 마린케이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전 모범생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사실이었다. 여름이면 에어컨이 나오고, 겨울이면 히터가 나오는 그 좋은 곳에서 뭐 하러 책잡힐 만한 일을 벌이고 다니겠는가. 마린케이는 지각과 결석이라고는 꿈 한번 꿔본 적 없는 모범적인 학생에 속했다.
생긴 것만 놓고 보면 누구보다 출석 횟수가 적을 인사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그를 회상하는 교사들 또한 ‘겉만 봐서는 그 됨됨이를 알아보기 힘든 아이’라고 표현했던 것을 보면 제법 일리 있는 주장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샤를은 자신의 의사를 굽히지 않고서 질문을 던졌다.
“어떤 식으로 모범생이었는데?”
“성실했습니다.”
“어떤 식으로?”
“열정적으로요.”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
“나이를 거꾸로 처드셨나. 왜 이러세요?”
잘 벼려진 칼날처럼 돌아오는 날카로운 반박에 그는 눈가를 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럴 때면 마린케이는 자신이 그의 유머 코드를 평생 이해하지 못한 채로 사망할 수도 있겠다는 유쾌하지 못한 기분에 시달리고는 했다.
그러자 샤를은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마린케이와 눈을 맞추었다. 여전히 옛날처럼 푸르고 싱그러운 빛을 간직한 그의 눈동자가 옅은 조명 아래서 지독하게 반짝거렸다.
“너랑 같이 학창 시절을 보냈으면…, 내 인생이 조금 더 재미있어졌을지도 몰라.”
“충분히 재미있게 잘 사신 것 같습니다.”
매번 그렇게 퍼스트 클래스 놈들을 굴려 먹고, 사람을 들개처럼 쫓아다니며 조롱해댔는데 즐겁지 않고서 배길 수 있었을까. 불쑥 튀어나온 진담에 샤를은 농담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린케이를 자극하듯 혀로 자신의 입술을 핥아 올리는 행위도 함께였다.
“쭉 같이 학교를 다녔으면 강당에서도 붙어먹고, 음악실 안에서도 붙어먹을 수 있었을 거 아냐? 지나치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서, 둘만 진득하게.”
어째서인지 나이가 들수록 도를 지나치기 시작하는 음담패설에 이제는 귀까지 썩어들어갈 지경이었다. 샤를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은 마린케이가 그대로 힘을 주어 그를 밀어 눕혔다. 얌전히 침대 위에 누운 샤를이 저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손길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마린케이는 오늘따라 그의 눈이 애처로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사이에 이루어진 평화에 익숙해지기에는 아직도 너무 많은 책임과 상처들이 두 사람의 가슴 속에 혼재해 있었다. 끔찍한 시간을 겪었던 아이들도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있었지만, 정작 누군가를 위해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던 두 사람만큼은 쉬이 그 편린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지 않은 척 아무리 애를 써 봐도, 길거리를 돌아다닐 때마다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을 마주할 때면 잠시 입을 다물게 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 끔찍한 사건으로 인한 치료가 필요했던 사람들은 비단 아이들에 국한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린케이는 손을 들어 샤를의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가 훤하게 드러난 하얀 이마 위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콧등을 지나쳐 입술까지 와 닿은 손가락이 꾸욱, 아랫입술을 장난스레 눌렀다. 샤를은 그 손길에 응답하듯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 아이도, 어쩌면 우리 후배가 될 수 있었을 거야. 그렇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으나, 그는 계속해서 응어리진 목소리를 뱉었다.
“그 붉은 머리칼을 하나로 묶고 뛰어다닐 수도 있었고, 거추장스럽다며 잘라버린 후에는 샤워하는 시간이 짧아졌다며 장난을 쳤을 수도 있겠지.”
“…….”
“영영 돌아오지 않을 그 아이의 시간을 생각하면, 마린케이. 누가 내 심장 위로 검을 꽂아 넣는 게 더 나을 것만 같이 고통스러워.”
그가 마린케이의 손을 붙잡아 제 가슴 위로 올렸다. 마린케이는 눈앞의 이가 평생 사무쳐 하며 살아갈, 영원히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갈 한 존재의 얼굴을 떠올리며 작게 물었다.
“정말, 안 가보실 겁니까?”
샤를은 황위에서 걸어 내려온 그날 이후에도 이름 하나 새기지 못한 소년의 묘비 앞에 찾아가지 못했다. 사람을 보내 묘역을 관리하고, 어린이날 같은 기념일이면 정성껏 선물을 골라 국화 한 송이를 꽂아 보내고는 했지만, 단 한 번도 직접 국화꽃을 들고서 방문한 적은 없었다. 제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 테지.
“마린케이.”
“…….”
“내 나이트…….”
너무도 애달프게 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마린케이는 살짝 고개를 비틀어 그의 입술 위로 가볍게 키스했다. 따뜻한 온기가 헤진 상처 위를 덧대고, 약을 발랐다.
벌써 9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그럼에도 샤를은 여전히 소년의 잔향 속에서 등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 어린아이가 흘려야만 했던 눈물이, 겪어야만 했을 고통이, 자꾸만 그를 변해가는 세상 앞에 떳떳해질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 순간 마린케이는 샤를의 얼굴을 제 쪽으로 잡아 돌렸다. 뒤섞이는 숨결 사이로 어쩌면 평생 그의 가슴을 수놓고 있을지도 모르는 뜨거운 감정이 넘실거렸다. 샤를이 밤하늘의 별과 달조차도 듣지 못할 만큼 흐릿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생각은 어때?”
“…….”
“그 아이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어 가는 것 같아?”
어떤 대답을 돌려주어야 당신이 낡은 머리끈을 들고서 그 아이를 찾아가, 국화꽃 한 송이를 건네고 돌아올 수 있을까. 대체 어떤 대답을 돌려주어야 당신이 그 녹슨 죄책감 속에서 벗어나, 오직 당신만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대체 어떤 대답을 돌려주어야만…, 당신의 날개를 비튼 그 잔혹한 운명이 꼬리를 내빼고 도망칠 수 있을까.
어떤 대답을 돌려주어도 불가능할 것임을 알았으나, 마린케이는 끝내 포기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요새는 통성명을 성씨가 아니라 이름으로 한다고들 하던데, 아십니까?”
“…….”
“폐하께서 그런 세상을 만드신 겁니다.”
“…….”
“그러니 적어도, 제가 알던 그 세상보다는 훨씬 아름다워 보이네요.”
그 순간 샤를은 붉어진 눈을 환하게 접어 웃으며 마린케이에게 달려들었다. 제 어깨 위를 수채화처럼 적시는 눈물이 아름다워, 마린케이는 한평생 눈앞의 이를 감싸 안은 채 말해주고만 싶었다. 당신은 푸르른 창공을 닮았으니, 나는 그 창공이 땅을 향해 무너져 내리지 않게끔 떠받들어 줄 수 있는 나무가 되고 싶다고. 마린케이는 그의 연약함과 강인함을 사랑했다.
***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잠이 든 두 사람은 난폭할 정도로 시끄러운 헤비메탈 음악이 울려 퍼지고 나서야 비척거리며 눈을 떴다. 더듬거리며 손을 뻗은 마린케이가 알람을 찾아 껐으나, 아직 새벽 6시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짜증 가득한 투로 욕설을 뱉었다. 샤를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침대 위에 다시 드러눕던 마린케이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땅 위로 발을 내리며 몸을 바로 세웠다. 창 틈새로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햇빛에 눈이 부신 탓일까, 샤를은 한쪽 눈만을 겨우 들어 올려 마린케이를 바라보았다. 마린케이가 먼저 갈라진 목소리를 꺼냈다.
“생각해 보니, 오늘이 제 휴가 마지막 날입니다.”
“…….”
“같이 가보기로 했잖습니까.”
아마 몇 시간 후면 두 사람은 나란히 국화꽃을 들고서 어느 이름 없는 비석 하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제는 낡아질 대로 낡아버린 머리끈 하나를 손에 든 샤를 소피아 엔스가 한쪽 무릎을 굽혀 앉은 채 비석 위에 입 맞출 것이고, 마린케이 이스턴이 그런 그를 바라보며 들고 왔던 국화꽃 한 무더기를 비석 밑에 내려놓을 것이었다.
분위기는 경건할 테지만, 샤를은 버릇처럼 장난스러운 몇 마디를 던져 엄숙함을 희석하려 할 것이 뻔했다. 마린케이는 불퉁하게 답변하며 그 흐름을 끊어버릴 예정이었다.
철없는 몽상가이자 자격 없는 이상주의자로 불리었던 최후의 황제가 만들어낸 역사의 종장은 그렇게 쓰여졌다. 그 옆을 지킨 뒷골목 출신의 기사를 모티프로 한 여러 소년만화가 뭇 아이들의 필독서가 되었지만, 두 사람이 누군가의 눈동자를 닮은 해양 앞에서 서로에게 사랑을 맹세하며 키스를 나누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노라 약조했던 누군가의 맹세는 그렇게 현재 진행형이 되어 흘러갔다.
더블 피 (Double P)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