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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1부 : 여래 (1) (1/23)

1부 : 여래 (1)

아침부터 구름이 무겁다 싶더라니,

토독, 토도독

비였다.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가 들리도록 가까이 서서 걷는데도 반장은 같이 쓰자는 한 마디가 없다. 사람 무안하게 만드는 데는 참 재주가 있다. 빨개졌을 귓불을 문지르며 고개를 들자 눈 옆으로 내리는 빗방울이 아슬하게 스쳤다. 찌를 듯이 날카롭지도 아플 만큼 둔탁하지도 않지만 부위가 눈이라서 흠칫한다. 저도 모르게 찌푸려지는 눈살을 얼른 편 여래는 웃는 낯을 만들며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방학이네!”

방금 방학식을 마치고 하교하는 길이니 당연한 소리다. 거들떠보지도 않는 반장의 뒤로 여래는 뒤통수를 긁었다.

“그런데 숙제 너어무 많다.”

손으로 그리는 경계가 숙제의 양이라도 되는 듯 팔을 높이 들어 휘두르는 여래를 두고 반장은 반 발 앞서던 차이를 속력을 내 한 발로 만들었다. 손짓을 관둔 여래는 허겁지겁 한 발 차이를 반 발 차이 나게 따라붙었다.

“숙제가… 하아… 많다구….”

앞을 보느라 여래에게는 갸름한 뺨만을 허락하는, 반장의 옆얼굴은 초승달을 닮았다. 반장, 이라고 하면 여래에게 떠오르는 모습이란 눈이나 입의 생김이 아니라 저 얄미울 정도로 가느스름한 얼굴의 테두리다. 사학년이 되어 한 학기 동안 내리 짝이 되어 옆자리에 앉은 반장과 여래지만, 누가 반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묻는다면 여래는 이렇다저렇다 꼭 집어 대답을 해줄 자신이 없었다. 왼쪽에 앉은 여래에게서 늘 살짝 몸을 틀고 앉은 반장은 그마저도 호락호락하게 보여 줄 순 없다는 듯, 더욱더 철저하게 손으로 턱을 괴고 아예 고개를 돌려 다른 데를 볼 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여래는 가방끈을 당겨 가방을 등에 찰싹 붙였다. 허리가 바로 펴지자 가슴이 활짝 열렸다. 자신감, 자신감을 가져야 했다. 여래는 주머니에 든 게 아무것도 없는 애였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런 티는 내지 말아야 했다. 여래가 아무것도, 부모도 형제도 없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은 여래가 자신에게서 꼭 뭐를 훔쳐가기라도 할 듯 가슴에 손을 모으며 애매한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여래는 그게 싫었다.

당당하게, 씩씩하게, 밝게.

여래는 지금까지의 무시가 없던 일인 듯 반장의 뒤꽁무니에 대고 말을 건넸다.

“다 하면 놀 시간도 없겠다! 그치?”

토독, 토도독.

빗소리가 대꾸를 대신한다.

맞장구치는 게 그래 힘드나?

혼자서 떠드는 건 자주 하는 짓이었지만 남이 버젓이 있는 데서 이러자니 쑥스럽다. 그래도 여래는 힘주어 손을 꼽았다.

“일기 스무 개에 독후감 두 편, 오재미 만들기, 자유주제 여름 탐구 활동. 으아아.”

그건 엄살만은 아니었다. 방학식에 앞서 선생님의 판서가 끝나자마자 숙제를 본 아이들은 볼멘소리를 동시에 우우거렸다. 물론 반장이 거기에 끼어 같이 입소리를 내는 일은 없었다. 대신 반장은 얌전한 글씨로 칠판에 쓰인 숙제를 방학생활 앞 페이지에 옮겨 적었다. 딱히 숙제가 많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여래는 반장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 뒤에 줄에 앉은 승준이가 반장에게 수학 숙제를 보여 달라고 하던 저번 날 반장은 조금 어려워야 공부가 되지, 그래야 실력이 느는 거야, 라고 하며 공책을 꺼냈었다. 그런 반장이라면 선생님이 적어 놓은 숙제들을 많다고 불평하는 일은 결코 없을 터였다.

조금 어려워야 실력이 느는 거야.

그건 퍽 멋있는 말이었다. 왁자한 승준이와 반장을 등지고 여래는 훔쳐 들은 그 말을 입내로 따라 했었다. 그러고 나니 기억에 남았다. 그 후엔 그게 마치 무슨 진리인 양 여겨졌었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반장이 조금 더 좋아졌었더랬다.

“하긴, 조금 어려워야 실력이 느는 거니까. 그치?”

그러나 반장은 떠드는 여래를 빗방울처럼 흘린다.

잡풀처럼 시시한 이야기를 주워섬기는 여래와 대꾸 한마디 없는 반장은 그렇게 같이 하교하는 듯 아닌 듯 구름다리를 지난다. 모래사장 옆 등나무 교실을 지나면 정문이었다. 정문을 나서자마자 나오는 갈림길에서 여래는 논을 지나 산 밑 은애원으로 가는 길로 반장은 시내 주택가로 가는 길로 곧바로 헤어져야만 했다. 지금도 딱히 함께 있다고는 볼 수 없었지만 갈림길에서는 정말로 끝이었다.

아직 하려는 말을 다 못 했는데… 여래는 한 번 더 가방끈을 당겼다. 자신감, 자신감이 필요했다.

“자유주제는 나는… 나는 곤충채집 하려구. 두 개 해오면 상 주신대서 광물 표본 만들기도 할까 했는데 아무래도 두 개는 못 하겠어.”

두 개 이상을 해 온 학생에게는 선생님이 특별한 선물을 줄 거예요.

담임선생님은 방학 생활의 마지막 페이지를 펴며 여기에 나온 여름의 꽃과 벌레에 대한 내용을 참고하면 좋겠어요, 라고 말씀하셨다. 아니면 일 학기에 배운 교과를 연구해 와도 좋을 것이라고도.

여래의 숙제 계획을 듣고도 반장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서둘러야 했다. 곧 정문이었다. 여래는 나오는 대로 닥치는 대로 주절거렸다.

“있잖아. 길산에는 있잖아. 그런 거 되게 되게 많다? 그래서 하루도 안 걸릴 거야. 곤충 채집.”

길산, 그 단어에 우산이 후드득 물기를 떨궜다. 우산대를 어깨에 건 반장이 움찔한 때문이었다. 드디어 여래를 무시하기를 잊은 반장이 걸음을 늦췄다. 어라라.

이거다!

여래는 뛰어가 반장 앞을 막아섰다.

“너 길산 알어? 은애원 뒷산 말이야.”

철조망으로 울타리 처진 은애원의 뒷산의 정식 이름은 길산이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길산은 원감의 사유지-어려운 단어지만 여래는 원감으로부터 귀에 딱지가 앉게 들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사유지란 내 땅이란 말이다. 그리고 고약스럽게도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한단 뜻이다. 그건 반장이 책상에 그어놓은 금과 똑같았다. 여래라면, 아니 여래의 것이라면 무엇이든 전부 반장의 사유지인 그의 책상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수업 시간에 서서히 밀린 여래의 지우개가 얼결에 금을 넘기라도 하면 지우개는 꼭 얻어맞기라도 한 듯 튕겨 다시 여래의 책상으로 되돌아오곤 했었다.-였다. 사유지란 말을 혹시라도 모른다면 이번 기회에 배우란 듯 길산의 둘레에는 철선이 쳐져 있었다. 네것 내것이 느슨한 동리에서 그 유난은 질리지 않는 안주였다.

일제 강점기 때 수탈을 피해 도망가던 지역 유지가 산 어디에 금괴를 묻었고 그걸 뒤지느라 원감이 저렇게 꽁꽁 싸매고 있는 거라는 보물섬 같은 뜬소문에서부터 아니라니카이, 가까이만 가도 으스스하고 음침한기리 문둥이 소굴이라서 나다니지 못하게 철조망을 두른 거라니께, 란 오싹한 괴담에까지 내용은 다양했다. 하나같이 실없는 아저씨들의 입방아를 떠올리는 여래는 반장을 앞에 두고도 저도 모르게 혼자 끼득거리고 말았다.

땅을 나눠 산 사촌들과 대판 싸워 팔아버리려는 걸 복잡하게 얽힌 명의-허준 같은 게 아니라 다른 명의가 있단다.-때문에 나가리가 된 후 다들 모여 멱살잡이를 하더니 결국은 원감마저도 들어갈 수 없게 철조망을 치고 말았던 것뿐이라는 속사정을 아는 여래로서는 길산 소리만 나와도 호들갑을 떠는 아이들이나 어른들이 우습기만 한 것이었다.

“길산 암것도 아니다. 문둥이도 없고 일본군도 없다. 그냥 야산이다.”

반장이 이런 데에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던 게 아쉽다. 얌전하고 비위가 약한 데에다 어딘지 새침해서 애들이 찧고 까부는 소문들에는 영 맹숭한 줄로만 알았더니… 진작에 얘길 꺼내 볼 걸 그랬다 싶다. 그럼 훨씬 빨리 반장하고 말을 트는 거였는데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흥이 붙은 여래는 대범해진다.

“내가 데려가 줄 수도 있다?”

멈춰 선 반장이 고개를 돌렸다. 우산 아래의 그늘진 단정한 얼굴에 가슴이 뛰었다.

반장은 저렇게 생겼었구나.

그 서늘한 얼굴은 꼭 개기일식 날 구멍 난 검은 종이로 비치던 해 그림자 같다. 아주 특별한 조건에서만 잠시 자신을 허락하는 희귀한 자연현상. 여래는 조급증이 돋는다.

빨리, 빨리 얘기를 하고 싶다. 빨리 길산 얘기를 하자.

우쭐거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데도 여래의 어깨는 끓는 밥냄비처럼 자꾸만 위를 넘었다.

“개구멍 내가 알거든. 녹슨 데를 막 흔들었더니 뚫어졌다? 거기루 들어가면 돼. 들어만 가면 장수풍뎅이도 수놈이 나무 밑에 죽어있다? 뿔 있는 거루! 그런 게 지천이다. 깔렸다니까. 진짜로! 줍기만 하면 장땡이야. 그니까 곤충채집 같은 건 누워서 떡 먹기다. 그, 그리고 다른 것도 많아! 나 저번에는 라이터도 주웠다. 뚜껑도 있어. 외국 라이터 같은 거야. 불은 안 붙지만 멋있다. 히히. 아, 그리고 맞다! 플라스틱 공장도 가도 돼. 공장 문 닫을 때 버리고 간 것도 되게 많거든. 목걸이 같은 거, 액세서리 같은 거 말이야. 나도 첨엔 보석인 줄 알았는데 있지….”

안경 너머 반장의 눈이 가느스름했다. 그것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이었다. 그래, 지금껏 데면데면해 놓고 대번에 가고 싶단 말을 꺼내기엔 조금 멋쩍을 수도 있겠다. 나 같아도 그러겠다. 하지만 그건 반장이 나빠서는 아니다. 다른 애들도 다 여래를 그렇게 대한다, 마치 없는 듯이, 아니 거기 있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나는 그런 거 신경 안 쓴다고 말해줄까? 무시당하는 거 아무렇지도 않다고….

기다리는 여래의 마음이 바싹 졸아들었다. 다시 가방끈을 잡은 여래가 용기를 내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해야겠다는 결심한 그 때였다. 반장이 입을 열었다.

“내가 거길 왜 가, 이 거지새끼야.”

후두두두.

굵어진 빗소리가 새삼스럽다. 떠드는데 함빡 빠져서 몰랐나보다. 떨어진 빗방울이 피부 위에서 함부로 으깨졌다. 그것이 간지러워 팔을 긁는 여래에 반장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나보고 거기 가서 쓰레기를 뒤지라고?”

굵은 빗발에 젖은 머리카락이 자꾸만 달라붙어서 성가시다. 우산 아래의 반장은 아마 모를 것이다. 빗속의 여래가 얼마나 축축한지, 또 찝찝한지. 어서 달려가 마른 처마 밑을 찾지 않고 견디는 건 단지 반장과 이야기하고 싶어서일 뿐인 것도 모를 것이다. 반장은 똑똑했지만 여래에 대해서는 통 젬병이었다.

“아, 아니이….”

지금까지 애쓴 활기가 아깝게시리 여래는 빠끔거리는 게 고작이다. 원감이 가슴을 발로 찼을 때만큼이나 숨쉬기가 힘이 들어 입만 달싹거리는 여래를 두고 반장은 빠르게 쏘아붙였다.

“내내 집적거리는 걸 봐줬더니만!”

반장은 코를 틀어쥐었다.

“너 냄새나!”

그 말이 한 번 더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말은 힘도 모양도 없는데 이상했다. 얼이 빠진 여래가 앞에서 비켜나자 반장은 다짐을 하듯 어금니를 꽉 물고 이죽거렸다.

“다음 학기 땐 절대 안 봐줘. 선생님이 하도 그러셔서… 엄마도 부탁하니까! 누가 좋아서 같이 앉은 줄 아나봐.”

반장의 엄마는 어머니회 상희 아주머니와 친한 친구였다. 상희 아주머니가 반장 엄마를 졸랐을 것이다. 상희 아주머니와 반장 엄마, 그리고 반장의 연결고리를 다 알면서도 혹시나 반장이 저를 참을 만해서 이때까지 앉아준 건 아닐까 하는 일말의 기대가 꺾이자 여래의 고개가 푹 떨궈졌다. 땅에 닿을 것처럼 아주 깊이였다.

“비켜! 다음부터 실실거리는 낯짝 들이밀기만 해!”

우산 끝을 무기처럼 휘두르는 반장에 주춤거리며 물러선 여래는 더 이상 길을 막지 못했다. 빙글 도는 우산 아래로 반장의 마지막 말이 떨어졌다.

“재수 없는 새끼.”

주여래도 이만하면 알아들었겠지.

속이 후련해져서인지 발걸음도 가볍게 반장은 교문을 향해 뛰듯 걷는다. 원래부터 이렇게 딱 잘라 말했어야 했다. 책상에 삼팔선을 갈라 들어오지 못하게 해도, 어쩌고저쩌고하는 실없는 짓거리에 대꾸 한마디 안 해도, 아니 아예 돌아앉아 버려도 주여래는 히죽거리기만 했다.

꼭 내가 나쁜 것처럼!

반장은 그런 순간들이 너무나 싫었다. 눈치를 보며 웃는 주여래가 조금이라도 불쌍하게 여겨질 때면 반장은 그 마음을 밟아 싹을 짓이겼다. 그래 봤자였다. 어차피 걔는….

“알겠어, 반장!”

정문에 거의 다다른 반장을 붙드는 건 거의 신이 난 듯 높은 여래의 외침이었다.

“잘 가!”

기가 막힌다. 지금까지 뭘 들은 거야? 왜 웃는 거야? 배알도 없나 저 자식은? 주여래가 머리가 나쁘든지, 아니면 내가 한 말을 깡그리 무시하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반장은 다시는 얼씬거리지 말라던 자기 말을 스스로 어기고 여래를 향해 홱 몸을 돌렸다.

“그럼 개학하고 봐!”

그러나 반장이 보는 건 수그리고 있는 여래다. 빗속에서 머리꼭지만을 내보이며 오른손을 흔드는 여래는 반장이 선 자리를 몰라 정문의 어드메를 향해 인사를 하는 중이었다. 눈이 먼 듯 영 엉뚱한 자리를 향한 인사에 반장은 더더욱 기분이 상해버렸다.

“방학… 잘 보내!”

쏟아지는 빗줄기를 이기려 여래는 거의 외치고 있었다. 낯짝을 들이밀지 말라고 했지 인사까지 하지 말라고는 안 했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다고 중얼거리는 입 안으로 자꾸만 빗물이 흘러들었다. 찝찔한 맛이 희한했다. 공해랑 매연이 심하다더니 비도 미쳤나보다.

“안녕!”

숙인 아래로 보인 고인 물은 회색 거울이 되어 여래를 비췄다. 내리는 비는 웃고 있는 여래의 얼굴에 너울거리는 동심원을 그렸다. 작고 빠르게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수한 원들 안에서 여래는 꼭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여래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웃고 있는데 왜 비친 얼굴은 자꾸만 깨어질까. 울고 있을까.

모두 비의 탓이었다. 비가 문제였다. 비가 자꾸만 웃는 여래를 찡그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럼 안 되는데, 사람들이 싫어하는데, 나는 원체 미움받으니까 안 그런 애들보다 몇 배는 더 열심히 웃어야 하는데. 그래야 겨우 다른 애들하고 같아질까 말까인데.

여래는 조심스레 고개를 든다. 혹시라도 다시 눈을 마주칠까봐 떨렸고 그것에 기함할 반장이 무섭지만 궁금증이 돋는 걸 참을 수가 없다. 반장이 여랠 보고 있을까? 혹시 마음이 바뀌지는 않았나? 심한 말을 했다고 사과하진 않을까? 선생님에게 이르지 말라고는?

혹시와 설마가 교차하며 진동해서 여래는 떨린다.

“아….”

하지만 반장은 이미 정문 밖을 걸어나가고 없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벌리자 빗물은 금방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반장에게 하지 못한 나머지의 말들이 목구멍에 고인 빗물과 함께 와글거렸다.

집에 같이 갈래?

길산에 같이 갈래?

방학 지나고도 쭉, 같이 앉아 줄래?

같이… 같이….

“퉤!”

입 안의 말들을 운동장에 쏟아버린 여래는 천천히 걷는다. 학교에서 은애원까지 이르는 길은 하나였고 이년도 넘게 거길 오간 여래가 가는 길을 모를 리도 없었건만 발걸음은 헤매며 느릿했다. 빨리 가야 하는데, 가방 안에 방학 생활 책이 다 젖을 텐데. 책이 젖으면 책장들이 앞뒤로 붙어서 못 쓰게 된다. 그러면 숙제를 할 수 없다.

남다른 것은 못 해도 남이 다 하는 것도 안 해가면 반장은 또 얼마나 질색하는 눈으로 여래를 볼까.

여래를 싫어할까.

쏴아아.

비가 거셌다.

* * *

“다 커서 저지레야!”

원감이 내려친 등에서 철썩 물이 튀었다. 갈긴 등에서 철썩 물이 튀자 원감은 질색을 하며 손을 털었다.

“우산 없어 가지구… 히히. 갑자기 비 왔잖아요.”

“웃어?”

그 덕에 한 대 더 얻어맞으면서도 여래는 또 웃었다. 애답지 않게 너불대는 여래에 묘하게 짜증이 인 원감은 검지의 관절로 여래의 정수리를 찍어 눌렀다.

“아그… 악. 아퍼요. 원감님!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데…!”

짜부라드는 여래를 보고서야 원감은 아귀힘을 풀었다.

“미운 놈 미운 짓만 한다는 얘기도 있어!”

그건 방금 지어낸 속담 같다. 여래는 그게 또 우스워서 히죽 웃었다.

쫄딱 젖은 꼴이 비를 맞았다기보다는 흡사 어디에 빠졌다 나온 듯한 여래 발치에는 웅덩이가 다 생겼다. 원감은 혀를 찼다.

쯔쯔, 웬수 같은 종자. 보고 있자니 두통이다. 빨리 치워버려야지. 쯔쯔.

원감은 손가락을 들어 복도를 가리킨다.

“올라가!”

느낌표 없인 말을 못하나. 치. 여래는 입술을 내밀었다.

“아, 그리고!”

고무신을 꺼내며 궁싯거리던 여래는 원감의 부름에 쭈뼛 어깨를 세웠다. 제 구시렁을 들었나 싶은 거였다. 그러나 원감은 그런 여래는 안중에도 없는 듯 손을 커튼에 문질러 닦았다.

“가방 던져놓고 다시 내려와! 청소나 해라. 흙탕물 구정물, 징그럽다! 아이구, 못 살아!”

“네, 네에!”

얼른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발걸음은 일층을 넘자 서서히 잦아든다. 여래는 난간 사이로 맹숭한 원감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며 혀를 내밀었다. 어차피 청소할 거 미리 힘 뺄 필요는 없었다. 서두른다고 서둘러 봤자 끝나면 잘했다고 칭찬은커녕 남는 시간에 다른 걸 또 시킬 텐데 뭐. 빨리 가 봤자다. 일만 두 배다. 흥.

은애원 최장기 입소자로서 그 정도 눈치는 있는 여래는 느릿느릿 계단을 올랐다. 울러 매고 있는 가방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그 뒤를 따랐다.

가방에서 방학 생활을 꺼내 놔야겠다. 퉁퉁 불어 찢어지기 직전일 책이 걱정이다. 일기장으로 쓸 만한 새 공책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공책을 떠올리자 갑자기 막막하다. 사십 여일의 빈 페이지로 남은 방학 동안 여래는 그것을 함께 채워 넣을 누군가가 없었다.

냄새나, 이 거지새끼야!

여래는 가슴을 문질렀다. 얹힌 것 같은데 그거보다 심하다. 거의 아플 지경이다. 원감이 시원하게 두드려주었는데도 내려가질 않았나 보다. 팔에서 미끄러진 가방이 아래로 떨어졌다.

냄새나!

팔을 들어 코에 가져가자 옷과 피부에 배인 물큰한 땀내가 요란하게 피어올랐다. 제 코로도 제 냄새가 느껴질 지경이니 옆에 앉은 반장은 꽤나 곤욕이었을 것이다. 층계참에 떨어진 가방을 주우려 허리를 굽히던 여래는 그대로 무릎을 끌어안으며 웅크렸다.

맞는 말이었다. 여래는 냄새나는 거지새끼고 주는 것 없이 미운 놈이었다. 벌써 일주일도 넘게 씻질 못했다.

은애원의 시간표에는 저녁을 먹은 후 매일 일곱 시 반이 정해진 목욕시간이었지만 요사이 여래는 그 시간에 제대로 씻어본 적이 없다. 들어올 수 없게 돌아가며 문을 막던 아이들은 여래가 어찌어찌 발 하나 집어넣어 볼라치면 슬슬 자리를 피하며 도망을 가곤 해서 여래가 샤워기를 틀었을 즈음에는 휑뎅그렁한 샤워실에 여래 혼자였다. 스무 대의 샤워기가 세워진 샤워실은 컸다. 불을 다 켜도 한쪽 구석은 늘 침침했다. 구석에 고인 어둠은 여래가 등을 돌리거나 눈을 감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혼자인 걸 이기려 여래는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타일이 발린 벽과 바닥은 여래가 내는 소리들을 득달같이 따라 해서 그것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장난인 것 같아 더욱 무서웠다. 샤워장의 불을 다 켜놓았어도 소용없었다. 눈을 감는 순간 캄캄한 어둠은 달려와 덮치려고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눈을 홉떠도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에 결국 여래는 아이들이 함부로 쌓아놓은 바가지를 죄 무너뜨리며 뛰어나오곤 했었다.

냄새나!

냄새는 지금도 여래의 온몸에서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아까 빗물에 헹궜으니 씻은 거나 다름없지 않을까 싶었던 기대는 그저 기대일 뿐이었다.

반장은 영원히 여래를 싫어할 것이다. 샤워실은 계속 샤워실이고 여래는 계속 여래이므로, 샤워실은 늘 무서울 것이고 여래는 벗은 발로 거기에서 도망 나오는 수밖에 없다. 여래는 다음 학기에도 냄새날 것이다. 비척거리며 일어난 여래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묻어나온 물기를 슥슥 바지에 문질러 닦는 여래를 향해 원감이 쩌렁하게 외쳤다.

“주여래!”

“네, 네에!”

아, 씨이… 안 가고 염탐하고 있었나 보다!

여래는 가방을 움켜쥐고 계단을 뛰어올랐다. 바닥에 끌린 가방이 계단 턱마다 부딪치며 튀어 올랐다. 흘끗 내려다본 난간의 사이로는 위를 살피는 원감의 얼굴이 조그맣고 시뻘겋게 조각나 있었다.

“이 써글놈의 새끼가 어딜 자빠져서! 빨랑빨랑 안 움직여! 가방 놓고 내려와 로비 청소하라니까!”

“네에! 히히.”

다시 여래는 웃고 있었다. 웃는 얼굴에선 아까의 물기가 마르고 없다.

“에이, 게을러 빠져가지고선. 드러운 놈의 종자!”

드러운 종자. 맞다. 여래는 드러웠다. 이모저모로 다.

* * *

“이리 줘봐.”

젖은 방학 생활을 냉동실에 넣은 건 사환이었다. 십오 년 전에 사환으로 은애원에 들어와 작년에 총무부장이 되었지만, 입버릇이 붙은 대로 원감이 아직도 사환, 이라고 불러 다른 호칭을 찾지 못한 서른여덟의 여자는 오 년 전에 결혼했는데도 아직 아이가 없다. 생기지 않는 체질이라고 배식하는 아줌마들이 사환의 뒤에서 수군거렸다. 여서 하나 델꼬 가면 되겠고만. 그렇게 말하며 아줌마들은 여래를 부추겼다. 너, 사환 따라가서 안 살래? 그렇게 띄워놓곤 곧바로 둘은 눈빛을 손바닥처럼 마주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쟈가 그거람시. 그거.

하긴. 멀쩡한 아아들이 천지삐까린데 그렇쟈?

인물이 아깝구로.

하이고마, 말이라고. 근디 알고 보믄 여시새끼 같아서.

하관 가파른 거 보소.

쪽빠져가지고.

그거라서 그려.

그거.

얼렁뚱땅 부르는 말에도 여래는 그게 뭔지 다 알았다. 그거란 수족구나 독감 같은 거다. 문지방을 밟거나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는 거다. 재수 없고 불길한, 그래서 그 이름조차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그런 거다. 여래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 타고난 것이라 어떻게 고칠 수가 없다는데 자기가 그걸 속에 꼭꼭 품고 있으니 사람들은 여래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수두에 걸린 은아는 올라앉은 딱지가 떨어질 때까지 삼 주간 학교를 쉬며 방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그렇담 여래는 도무지 얼마나 혼자 있어야 다 낫는 걸까? 그건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맞은 데는 괜찮니?”

“안 아파요.”

“속상하다.”

아이가 없는 사환. 파마 기 없이 긴 머리를 늘어뜨려서 아줌마들이 애가 없으니 한갓져서 저걸 다 감고 다닌다는 뒷소리를 듣는 사환. 그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는지 남아도는 시간을 어쩌지 못해서 가끔은 은애원의 커튼을 가져다 빠는 사환. 그래서 원감이 손수건처럼 커튼에 손을 닦아도 먼지 한 점 묻어나지 않게 하는 사환. 한 명만 티 나게 싸고돌면 분위기를 망친다고 원감한테 혼이 난 후 여래를 씻겨주지는 못하게 된 사환. 그래서 사학년이 된 이후로 여래는 씻지를 못했고 반장의 핀잔을 사고야 말았다. 그래도 선물로 들어온 과자가 들어올 때마다 사환은 잊지 않고 여래를 몰래 손짓해 불렀다. 아기처럼 입만을 벌려 받으면 혀 위로 달고 느끼한 과자의 맛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면 여래는 입 안에 맴도는 말을 으스러진 과자와 함께 꿀꺽 삼켰다.

엄마 같아.

엄마.

사환은 냉동실 문을 닫으며 웃는다.

“책은 내일이면 마를 거야. 꺼내서 눌러 놔. 무거운 걸루.”

“네.”

“그럼 다시 예쁘게 펴질 거야. 숙제 열심히 해야 한다.”

한 번 망가진 게 원래처럼 고와지는 법은 없으므로 냉동실을 나온 책은 물기를 날리고도 비 맞은 티를 내며 울퉁불퉁하고 쭈글쭈글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사환에게 반항은커녕 말대답도 할 수 없는 여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장마가 오려나.”

일어나 창문 앞에 선 사환이 중얼거렸다.

* * *

사환의 예감과는 다르게 비는 하루를 꼬박 내리고서는 그만 그친다. 갠 하늘에 아이들이 몰려나간 은애원은 괴괴할 정도로 조용했다. 어디에도 끼이는 일이 없는 여래만이 혼자 남았다.

“치.”

여래는 괜히 돌부리를 걷어찼다. 다 똑같이 은애원에서 사는 주제에 맨날 자기만 따돌린다. 아주 나쁜 놈들이다.

어제 등짝을 얻어맞았으니 운동장 둘레에 심은 침엽수의 잎사귀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옷을 적시는 걸 조심해야겠다 생각하며 여래는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다. 무슨 대단한 각오가 없고서야 이틀 연속으로 혼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다시 현관으로 온 여래의 주머니에는 돌들이 잘각거렸다. 방학 숙제 중 자유 주제의 자료가 될 석영의 표본이었다. 여래는 돌을 쥔 오른손 말고 왼손으로 머리를 북북 긁었다. 정수리가 가려웠다.

“내일 산에나 갈까?”

누구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는 여래의 입엔 혼잣말이 붙었다.

“타파 하나 가져가야지.”

여래는 방학 자유 주제로 ‘우리 주변의 광물’과 ‘여름 곤충’, 이렇게 두 개를 해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채집통이 없어 김치통을 찾는 여래의 계획은 이랬다. 안 그래도 넘치는 방학 숙제에 자유 주제를 두 개나 해갈 만큼 부지런한 아이는 방학의 사십 일 동안 수영장도 가족 여행도 가지 않는 여래를 빼고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자유 주제를 두 개 해 가면 선생님의 부름을 받아 앞으로 나가 칭찬을 들을 수 있다. 상상이 무럭무럭 부푼다.

두 개 이상을 해 온 학생에게는 선생님이 특별한 선물을 줄 거예요.

특별한 선물은 무얼까? 준다고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이는 기대가 뻔뻔하지만 여래는 그걸 가지고 노는 게 즐겁다.

그러나 여래가 정말 궁금한 건 상보다는 반장이었다. 반장은 자유 주제를 두 개 해간 여래를 어떻게 볼까? 적어도 방학식 날의 그 싸늘한 경멸은 아닐 것 같다.

조금 어려워야 실력이 느는 거야. 중얼거리는 여래는 가려움을 잊는다.

딩동. 딩동.

즐거운 상상은 오후 우유 급식 시간을 알리는 종에 막힌다. 시간에 맞춰 들어가야 하는 여래가 뛰자 주머니 안의 돌멩이들이 덩달아 들썩이다 떨어졌다.

“아….”

석영을 주우려 구부린 여래의 다리 사이로는 지금까지 달려온 운동장이 거꾸로 뒤집어져 있었다. 운동장은 거대한 거울이 되어 여름의 태양을 난반사했다. 신기루인 듯 흔들리는 백세계白世界는 텅 비어있었다. 세상에 혼자 남은 듯한 느낌에 여래는 얼른 거기에서 등 돌려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운동장의 끝 한 점 얼룩으로 묻은 아이가 탈수 직전 발견된 것은 오후 느지막이의 일이었다.

* * *

아이는 경비실 앞에 서 있었다.

건물을 한 바퀴 돌아볼 뿐인 헐거운 오후 점검의 대부분을 정자에서 낮잠으로 때우곤 하는 경비는 그가 경비실을 나가기 전 경비 초소 앞에 누가 서 있었는지 아닌지를 기억하지 못했다. 순찰시간만을 어림잡아도 두 시간 반을 아이는 땡볕에서 버티고 있던 셈이었다. 무안한 경비는 도리어 목소리를 높였다.

“하이고야, 이 미련퉁이가.”

그 목청을 피하듯 남자애는 벌겋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훤히 내보이며 고개를 수그렸다. 교무실에 아이를 던지다시피 밀어 넣고 난 경비는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갔다. 아이 앞으로 사환은 의자를 당기며 종이를 내밀었다.

“이름.”

주먹으로 연필을 잡는 걸 보면 쓰는 법을 모르는 듯하다.

“나이.”

연필은 그대로 주먹을 관통한 채 멈춰있었다.

글자, 숫자 둘 다 모르나보네. 키로 봐선 여덟아홉 살쯤 됐나 싶은데.

아이를 저울에 달아보는 사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럴 때 사환은 아이들에게도 나이테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다. 등록증으로 증명되거나 부모로 확인 받지 않은 아이들은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아이가 없어 애를 보는 눈이 없는가 싶을 때면 사환은 가만히 입술을 즈려 물었다. 하도 주입받아 이제는 자기 생각처럼 되어버린 선입견을 스스로 되풀이하고 있는 게 싫었다. 사환은 십오 년이나 근무한 전문가였다. 판단은 경력으로 하면 되는 일이었다.

미취학일까 아님 학교를 보내지 않은 걸까.

어찌 됐건 간에 직접 쓰게 하는 건 무소용이라 연필을 받아내려는 사환이 손등을 건드리자 남자아이는 연필을 던지며 한 걸음을 물러났다. 책상을 구른 연필이 바닥에 떨어졌다. 갑자기 다가서거나 과격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반응이 컸다. 사환의 손을 피해 주춤대며 웅크린 남자애의 눈동자가 위아래로 마구 진동했다.

“흐음.”

사환은 남자애의 위아래를 빠르게 훑었다. 소매 끝은 닳아 올이 풀렸고 운동화보다 큰 발은 뒤축을 꺾어 겨우 신발을 신었다. 살이 붙지 않은 팔다리의 마디마다 툭툭 관절이 불거졌다. 은애원의 문 앞에서 서 있는 동안 흘렸던 땀이 말라 하얗게 소금기를 올린 티셔츠의 목둘레가 남루했다.

“잠깐만. 너.”

남자아이를 훑던 사환의 눈이 정수리께에서 멈췄다.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넘기자 손아래로는 긴 흉터가 드러났다. 사환이 상처를 확인하는 사이 부들거리던 남자아이는 머리를 잡은 손을 뿌리치고 나서도 한동안 떨림을 멈추지 못하더니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는 눈치였다.

상투적인 문구가 이름보다 먼저 특이사항에 적힌다.

행색이 초라함. 발육 지체. 학령기. 의무교육 수료 여부 모름. 신원을 추정할 물품 없음. 신체적인 접촉에 예민하게 반응함.

여기까지 쓴 사환은 아까의 흉터를 떠올리며 한 줄을 더 추가했다.

방치나 학대가 의심됨.

거기에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인 건 여래였다.

“뭐래, 저건 또.”

건물 층계에서 놀다 원감에게 붙들려 교무실로 끌려와 오 년이 넘어 파기 대상인 기안 문서를 정리하던 여래는 새로운 입소생이라는 남자애를 흘끔거리는 데 더 정신이 팔렸다. 긴 은애원 생활로 자의건 타의건 반 직원이 다된 여래는 팔짱을 끼고 나름의 품평마저 늘어놓기까지 한다.

아이고야, 넋이 다 나갔네. 쯔쯔. 그러나저러나 물어보시는 거엔 얼른 대답을 해야 사환 선생님 안 힘들 텐데.

멍하니 굳어 서 있는 남자애를 보며 여래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수가 없다. 은애원의 첫날은 원래 그렇다. 다들 조금 멍청해진다. 바보가 된다.

충격을 받아서 그래.

새로 들어오는 애들은 하나같이 덜떨어졌다며 견제하듯 투덜거리는 여래에게 사환은 빙긋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날도 무슨 일인지 교무실에서 사환을 돕고 있던 여래는 손을 멈추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저도 그랬었나요?

사환은 고개를 저었다.

넌 너무 아기여서 버려진 줄도 몰랐단다.

정말요?

그럼.

그럼 어땠는데요?

이미 많이 들었잖니.

그래도 해주세요. 또 해주세요.

이야기를 기대하는 여래는 사환의 책상에 달라붙었다. 되돌아갈 수 없고, 떠올릴 수 없는 옛날의 나를 누군가가 기억해주고 있다는 게 좋아서다. 그럴 때면 여래는 자신이 소중한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사진으로 남았을 인생의 몇몇 장면들이 여래에겐 없었다. 그래도 사환만은 여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럴 때의 그녀는 꼭 여래의 엄마… 엄마 같았다.

계속해서 조르는 여래에 잠시 뜸을 들인 사환은 못 이기겠단 듯 여러 번 거듭해 이제는 굳이 되새기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겨울밤이었어. 한파주의보가 내린 추운 날씨였지. 당직을 서는데 원감님이 나와 보라더라. 난 또 동파 때문에 그러는 줄 알았어. 원감님이 웬 베개 같은 걸 들고 있었거든. 그걸 덜렁 내밀기에 깜짝 놀라 받았는데… 여래야. 그게 바로 겉싸개에 꽁꽁 묶여있는 너였지. 너는 그 난리에도 자고 있더라. 참 순했어. 배냇짓으로 연신 방실거려서 다들 안아보겠다고 손을 내미는데 내가 널 숨기느라… 하하. 원래 은애원은 영아들은 잘 안 받잖니. 사람이 적어서. 그래서 더 난리들이었나봐! 아주머니들이 손 탄다고 내려놓으라는데 나는 계속 안고 있었지. 너는 일부러라도 한 번을 울질 않았거든. 그게 착하고 예뻐서 더 안아주었지. 은애원의 슈퍼스타, 주여래! 네가 말야, 얼마나 고급이었는지 몰라. 우유만 해도 그랬어. 분유 타서 먹이는 건 은숙 아줌마, 트름은 조 여사님, 기저귀는 나… 하나씩 다 담당이 있었다니까? 하하.

아마도 여래 인생에서 마지막일 짧은 영광의 순간이었다.

* * *

끝내 묵묵부답인 남자애에 사환은 원감을 돌아보았다. 원감은 자신의 엉덩이 모양에 맞춰 꺼진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는 중이었다.

“원감님, 이름 어쩌죠. 일단은 무명남이라고 올릴까요?”

“최준혁.”

“네?”

“최준혁이라고 하라고.”

심드렁한 말투에 사환은 미간 사이를 접었다. 이건 또 무슨 변덕인가 싶다. 지방선거가 한참인 지금 신문에 끼워진 후보의 명함을 뒤적거리던 원감은 그중 하나를 뽑으며 소리를 쳤다.

“최준혁, 거 이름 좋잖아!”

손바닥 남짓한 명함 안에서는 유들거리는 남자가 상생의 도시를 만들겠다며 웃고 있었다. 그의 이름이 최준혁이었다. 원감은 신문을 찢을 듯 제쳐 넘겨버렸다. 그는 이제 막 최준혁이 된 최준혁이 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가 멍텅구리스러운 게 이래저래 손가게 생겼다.

“여기가 무슨 자선단체인 줄 아나. 갖다 버리면 그만이게. 에이! 이름 대충 지어서 시스템에 올려! 지원금 받으려면 등록부터 해야 할 거 아냐.”

“…좀 가려서 하세요.”

사환은 남자애를 눈 끝으로 가리키지만 원감은 본체만체 언성을 높였다.

“암튼 간에 최준혁이라고 하라고! 부모를 정 찾아보고 싶으면 공문 보내서 경찰서에 협조 요청 하든지 말든지. 이런 애들은 지문 등록도 안 해 놔요. 뻔한 거 아냐. 장사 하루 이틀 하나.”

꼭 저렇게 말해야 하나?

길어지는 게 싫은 여래는 정리하던 서류뭉치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타악!

“조용히 못 해, 주여래?”

원감을 등진 여래는 혀를 날름거렸다.

원감은 나빴다. 사환한테 못된 말투로 하는 것도 나쁘고 남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갖다 붙이는 것도 나쁘다. 하긴 여래 이름을 이따위로 지은 것도 원감이었다.

남을 여餘에 올 래來. 그래서 여래.

받고 싶지도 않은 애를 떠넘겼다며 노발대발하던 원감이 대충 지은 이름이었다. 중국집의 기둥 밑에 놓여 있어 성은 기둥 주柱가 되었고.

쾅!

그걸 떠올리니 다시 약이 오른 여래에 애먼 서류가 또 한 번 교무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주여래! 너 이 새끼! 다 부셔라, 부셔.”

안 불러도 그게 내 이름인지 다 안다고요, 치.

정말이지 여래는 자신의 이름이 싫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여래라고 불릴 때마다, 아니면 어딘가에 여래가 자기 자신임을 증명하기 위해 이름을 적어 내야 할 때마다 여래는 그가 환영받지 못한 아기였음을 번번이 떠올려야만 했다. 여래는 지금 막 최준혁이 된 최준혁을 흘끔 쳐다보았다.

최준혁도 자기 이름이 최준혁인 게 싫을 거다. 최준혁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저 애는 에메랄드색 점퍼를 입은 느끼한 아저씨가 생각나겠지. 너도 안됐다.

“뭐 더 남은 건 없나?”

“질병 검사해야 해서 피검 보냈습니다. 곧 나와요.”

“의무 접종 같은 걸 했겠냐고.”

“그러니까 그거 알아봐야 할 거 아니에요.”

묘하게 싸늘해진 사환에 원감은 손을 놓고 구경 중이던 여래에게 불벼락을 친다.

“야, 주여래!”

“네에. 네!”

“뭘 멀뚱히 서 있어. 최준혁이 데리고 한 바퀴 둘러 봐! 여기저기 잘 알려주고. 어? 그리고 애 좀 씻겨! 으이구, 땀 냄새야.”

원감은 대강 그렇게 준혁을 여래에게 떠맡길 심산이었다.

“그리고 네놈 새끼도 씻고!”

씻으라구?

시큰둥하게 원감을 보던 여래가 벌떡 일어선 건 그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아직 준혁은 여래가 ‘그거’인지 몰랐다. 그것은 즉, 다른 아이들처럼 여래가 더럽다고, 병 옮는다고, 자기도 저렇게 되면 어쩌냐고 오버하며 토하는 시늉을 하기 전이란 말이었다. 준혁은 여래랑 같이 샤워실에 들어가도 뭐가 나쁜지 이상한지 모를 거였다. 왜냐하면 그거는 눈에 보이는 병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기겁을 한다고 쳐도 그건 그 때의 일이고 싫어하거나 말거나 여래가 알 바는 아니었다.

나름의 계획을 세우는 머리가 팽팽 돌았다. 최준혁이 여래가 ‘그거’인 걸 알아챌 때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일주일? 이주일? 어쩌면 계속일지도 모른다. 여래는 아까 글자도 쓰지 못하던 최준혁을 떠올렸다. 최준혁은 그런 눈치는 조금 모자라 보였다. 사실은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

“주여래, 뭐해!”

머릿속으로 궁리를 하느라 대답이 늦어진 여래에 원감의 손이 날아왔다. 철썩, 등이 갈겨졌다. 떠밀리듯 앞으로 비틀거리는 건 여래였지만 놀라는 건 준혁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준혁에게 여래는 히죽 웃었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원감의 드잡이 따위야 웃어넘길 수 있는 자신을 으스대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았다. 준혁은 그 복잡한 속내가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얻어맞고도 태연한 여래를 향해 눈을 껌뻑였다.

“가자.”

그래. 준혁을 이용하면 되겠다. 최대한 모르게 만들자. 그래서 같이 샤워를 하자. 그럼 샤워실도 무섭지 않을 거다. 방학 동안에 계속 씻으면, 냄새가 안 나게 되면 반장도 여래를 달리 볼 것이었다. 숙제도 해가고 냄새도 안 나면 다음 학기에 반장은 계속 짝을 하라고 허락해 줄 수도 있겠다. 그럼 다 좋은 거다!

“데리고 갈게요!”

여래가 높게 대답하자 원감은 저게 미쳤나 싶어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고 쳐다보았다.

“가자.”

여래는 준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니까.”

준혁이 안 간다고 할까봐 애가 닳은 여래는 먼저 덥석 손을 잡았다. 이번만은 기필코 씻고 말 테다. 꽉 쥔 최준혁의 손이 물고기처럼 퍼덕거렸다.

* * *

[여름방학 일기.]

[4학년 3반 주여래.]

7월 26일 목요일. 맑음

어제는 비가 많이 내렸는데 오늘은 해가 쨍쨍 났다. 천에 물이 불어서 다른 아이들은 놀러 나갔지만 나는 꾹 참고 방학 숙제를 했다. 운동장에서 광물 표본도 줍고 다른 숙제를 할 계획도 세웠다. 그러고 나서 교무실을 치우는 일도 거들었다. 서류 정리였다. 또 새로 온 동생을 씻겨주기도 했다. 동생 이름은 최준혁이다.

오늘의 착한 일 : 오늘 전부 다!

반성할 일 :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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