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부 : 여래 (4) (4/23)

1부 : 여래 (4)

짜악-! 

삼키지 말고 뱉어.

준혁에게 가르쳐줄 때는 언제고 여래는 입 안에 고인 찝찌름한 피 맛을 그대로 삼켜버리고 만다. 아는 거랑 할 수 있는 거랑은 다른가 보다. 준혁을 향하던 원감의 앞에 여래가 끼어들자 만만하고 손에 익은 상대를 만난 원감은 옳다구나 하고 여래를 붙들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러운 수순인 듯 손이 날아갔다. 지금까지 총 여섯 대째였다.

“넌 또 뭐야! 아니다. 니가 시켰지. 나 엿 먹이려고 니가 그런 거지! 주여래. 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돌아가 다시 원래의 자리를 찾은 여래의 얼굴이 뜨끈했다. 맞은 뺨이 홧홧해 어깨로 식히던 여래는 티셔츠에 묻어나온 피에 그대로 코를 쥐었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손 사이로는 코피가 새어 나왔다. 준혁의 손에서 연지 곤지를 찍은 신랑과 신부가 굴러떨어졌다. 피가 나니까 머리가 멍해서 여래는 뒷걸음질을 쳤다. 늙어서 기운 다 빠진 줄 알았는데. 원감이 이렇게 화를 내는 건 또 오랜만이었다. 눈알이 빠질 것 같아 여래는 후드드 머리를 털었다.

준혁의 눈을 깜빡거리는 것조차 잊고 그 광경을 하나하나 지켜보았다.

“은혜를 모르는 것들.”

주여래, 최준혁. 둘 다 꼴같잖았으므로 누굴 두들겨 패도 상관은 없었다. 한 새끼는 오메가, 한 새끼는 덜떨어진 놈. 아무나 걸려도 똑같았다. 순서만 다를 뿐이었다. 늬들은 오늘 둘 다 나한테 죽는 거야. 원감이 뿜어내는 열기가 지저분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준혁의 멱살을 잡으려던 원감의 손은 그대로 허공을 구겨 쥐었다. 손 안에 붙들린 건 없었다. 의자를 딛고 일어난 준혁이 머리로 원감을 들이받았기 때문이었다.

 “…악!”

원감이 잠깐 찌푸린 틈을 타 등에 올라탄 준혁은 거미 같았다. 비대한 원감에게 가려 가는 팔다리만이 언뜻언뜻 엿보였다. 원감은 등에 달라붙은 준혁을 떼어내기 위해 뒤뚱거렸다. 등을 긁을 때도 닿지 않던 손이 이런 상황에서 마음껏 뻗어질 리 없었다.

“이 개새끼들이!”

살찐 목청에서는 돼지 멱을 따는 소리가 났다. 여래는 잔뜩 막힌 콧소리로 준혁을 불렀다.

“그, 그만해. 최준혁. 준혁아!”

“악!”

“최준혁!”

신랑 신부의 나무 인형을 밟고 앞으로 넘어진 원감의 머리를 준혁이 걷어찼다. 준혁이 발길질을 할 때마다 이미 의식을 잃은 원감은 거대한 햄처럼 비둔하게 옆으로 조금씩 자리를 비켰다. 준혁의 눈은 새카맣다. 어둠 그 자체다. 덜미를 잡히면 빠져나올 수 없을 어둠. 아직 여래에게 준혁은 불 꺼진 화장실과 복도를 무서워하던 아이인데 지금의 그는…

“최준혁….”

…그는 어느새 그가 두려워하던 것을 닮아 있었다.

“아아악!”

원감이 길게 비명을 질렀다.

침체되었으나 익숙했던 세계는 그렇게 붕괴한다.

* * *

독방, 이라는 이름의 창고에 준혁은 갇힌다.

원감실로 불려온 여래가 주춤거리며 앉자 원감은 테이블 위에 서류 뭉치를 던졌다.

“짐 싸.”

여래는 모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이차전이 시작되는가 싶어 맞을 준비를 하며 움츠렸던 어깨가 서서히 펴졌다. 무슨 소린지 통 모르겠다.

“어차피 넝마뿐이니 다 버리고 가도 상관없겠지만.”

말을 하려 입을 벌릴 때마다 귀에 붙은 거즈와 밴드가 성가신 원감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여래는 갑작스러운 이야기가 선뜻 이해가 되질 않아 던져진 서류의 제목만을 몇 번이고 거듭 눈으로 읽었다. 서류의 제목은 퇴소 사유의 서, 였다.

“…네?”

“한 말 또 하는 거 내가 싫어하는 거 몰라!”

아까 얻어맞아 부은 볼이 아직 꺼지지도 않았다. 움츠러든 여래는 구긴 종이 같다. 두 번 연달아 혼나는 건 무슨 결심이 있지 않고서야 안 될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알고 있는 그대로였다.

여래는 원감이 입을 열길 기다렸다. 틱, 틱. 라이터를 튀겨 불을 붙인 원감이 길게 담배 연기를 뿜었다.

“뭘 그렇게 쳐다를 봐! 기분 잡치게. 일자리 알아봐다 놨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데야. 좀 먼데… 앗싸리 먼 데가 너도 낫지?”

“…네?”

하지만 금계禁戒도 깨어질 때는 있다. 바로 지금 같은 순간이었다. 여래는 원감이 노려보거나 말거나 다시 묻고 말았다.

“네? 뭐라고….”

“나가라고!”

“…제가… 왜요? 왜 제가 나가요. 어디를 나가요.”

반항을 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어서인데 원감의 눈썹이 심상치 않은 각도로 들어 올려진다. 두 번은 위험한데도 여래는 멈출 수가 없다.

“저는… 저는 여기서 계속 살았는데요. 준혁이보다 먼저요. 태어나자마자 여기서 살았는데요. 다른 데를 어떻게 가요. 전… 말도 잘 들었어요. 시키는 건 다 했어요. 은애원 일 다요… 은애원 일도 잘 알아요. 그런데 왜 제가 나가요? 저는… 갈 데가 없는데….”

아무도 모르는데.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는데.

차마 그 말은 할 수 없어 삼킨 여래의 목이 붉게 달아올랐다.

“주여래, 너 억울하냐?”

안 운다. 원감 앞에서는 죽어도 안 운다! 눈물을 참느라 일그러진 여래의 얼굴을 보며 원감은 픽 김을 뺐다.

“니가 그동안 말이라도 잘 들었으니까 이마만큼이나 데리고 있은 거야, 새끼야. 어?”

하지만 원감은 준혁이 귀를 물어뜯었어도 봐주고 있질 않은가. 준혁이 단지 알파이기 때문에. 다른 어딘가에 효용가치를 기다리며 성질을 억누르고 있질 않은가. 문제라면 여래가 오메가라는 것뿐.

잔뜩 젖은 눈을 홉뜬 여래에 원감은 언짢은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그는 선택의 기회를 주기 위해 여래를 부른 건 아니었다.

“내일까지다. 나는 내 할 도린 다했다.”

다른 도시의 주소가 적힌 목업소의 명함 한 장을 두고 생색내기가 스스로도 멋쩍었는지 원감은 먼저 원감실을 나갔다.

널려진 서류를 그러모으는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허튼 손짓으로 버둥거리던 여래는 무릎을 껴안으며 탁자 앞에 웅크렸다. 여름인데도 겨울 같이 여래는 떨고 있었다. 여래는 아기가 된 것 같다. 십오 년 전에 버려졌던 그 아기가.

“흐윽….”

여래는 무릎을 쥐어뜯었다. 그러쥘 살점 없는 무릎은 몇 번이고 손안에서 도망가며 붉은 자국만을 올렸다.

왜 나만 버림받아야 해? 왜 나만… 쫓겨나야 해? 왜 나만!

여래는 이를 악다물었다.

이건 최준혁, 다 최준혁 때문이었다. 최준혁에게 상처를 주고 싶다. 여래가 받은 만큼, 그 이상으로.

* * *

독방은 가장 꼭대기 층의 창고시설을 부르는 별명이다. 집기와 쓰레기로 난잡한 옥탑방으로 오르는 철제 계단은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안에서 열지 못하도록 가로질러진 각목을 치우고 손잡이를 비틀자 문은 쉽게 열렸다. 아직도 어두운 걸 무서워하는 준혁은 창에 바싹 붙어 앉아 흘러들어오는 햇볕 한 줌을 쪼이는 중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졌던 눈은 여래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쉿.” 

여래는 달려오는 준혁에게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붙여 보였다. 밀어내는 손에 준혁이 반항하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뭐 좀 먹었니?”

“아니.”

여래는 주머니에서 랩으로 싼 주먹밥을 꺼냈다.

“물 없으니까 천천히 씹어.”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준혁은 랩을 찢어 주먹밥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먹고 있는 건 준혁인데 이상하게도 여래의 목이 멨다. 혀뿌리까지 치민 다정한 말을 누르느라 여래는 침을 삼킨다.

“아픈 데는.”

“없어.”

원감이 발광할 때 벽에 부딪힌 이마빼기가 파란 멍을 달고 있는데도 준혁은 그런 것쯤은 대수롭지 않다는 투였다. 준혁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데에는 재능이 없었다. 푸르스름하게 내려온 멍을 눈꺼풀에 칠하고 있는 걸 보지 않으려 부러 고개를 돌리고 여래는 입을 열었다.

“잘 들어.”

준혁은 아직도 주먹밥을 우물거리는 중이었다.

“앞으로는 원감 말에 무조건 그러겠다고 해. 그게 뭐든지.”

여래는 준혁의 입가에 붙은 밥풀을 떼어내며 말한다. 타이르는 어조에 준혁은 두 볼에 잔뜩 머금은 밥알을 씹을 생각도 않고 물끄러미 여래를 보았다.

“오늘부터… 혼자서 씻는 거야. 항상 깨끗하게 씻어야 해. 귀 뒤랑 배꼽, 겨드랑이랑 사타구니. 알겠지? 냄새가 나면 사람들이 싫어해. 그럼 안 좋아. 손톱은 일주일에 한 번씩 잘라. 속옷은 매일매일 갈아입어. 머리카락은 눈 가리지 않게 하고 다니고. 말은 또박또박하게 해. 모르겠으면 물어봐. 그리고 사람 말 따라 하지 마. 화내니까.”

“…왜.”

“다른 애들이 얕보게 놔두지 마. 싫으면 싫다고 해. 하지만 때리는 건 안 돼. 누가 잘못했건 먼저 때린 사람이 더 혼나니까.”

“여래야.”

“착하게 있어야 해.”

이차 성징이 오지 않은 목울대가 밋밋하게 꿀럭였다. 준혁의 눈에서 빛이 탁, 하고 꺼지자 여래는 조급해졌다. 

“준혁아, 내 얘기 듣고 있어?”

“엄마가.”

허공을 디디는 듯 망설이며 준혁은 여래에게 다가왔다. 늘어진 여래의 팔을 잡는 악력이 아팠다. 놓친 주먹밥은 이미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여기 오기 전에 엄마가 그런 얘길 했었어. 착하게 있어야 한다고.”

“나한테 엄마 얘기 하지 마. 난 그런 거 몰라.”

“여래가 엄마가 했던 얘기랑 똑같은 말만 해서….”

“….”

“이상하게 그 날 생각이 나.”

아프다. 아픈 게 잡힌 팔인지 가슴인지 모르겠다.

“기분이 나빠져. 엄마랑 너는 좋은 건데.”

“그만.”

“우리 헤어지는 거야?”

“….”

“헤어지기 싫어. 싫어. 가지마, 여래야. 가지마.”

여래가 밥풀이 끈끈이 묻어난 준혁의 손을 뿌리치자 준혁은 구멍이라도 뚫으려는 듯 여래를 곧장 쳐다봤다. 좌절당했으면서도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않는 눈이었다. 이별의 절차가 성가시다. 상처받은 준혁을 구경하려 굳이 독방을 찾아왔지만 여래의 상상만큼 이 장면은 재미있지가 않다. 시선을 피한 여래는 떠오르는 말을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이 상황을 모면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헤어지는 거 아니야.”

“거짓말.”

“정말이야.”

믿지 못하는 눈치인 준혁에 여래는 거듭 목소리를 높였다.

“길게. 조금 길게! 꼭꼭 숨어라를 하는 거야. 술래는 너야. 내가 먼저 숨을게. 나 은애원이 아니라 더 밖으로 숨을 거야. 은애원을 나와서 네가 찾는 거야.”

“싫어. 술래잡기하기 싫어. 나는 밖에를 몰라. 여래 못 찾아. 길만 잃어버려. 그리고….”

“어쩔 수 없어. 아님 영영 못 보게 돼.”

“그런 게 어딨어. 안 돼. 싫어.”

초조감이 목소리를 부채질한다.

“그러니까 내 말 들어! 안 그럼 우리 다 원감 손에 맞아 죽어!”

준혁에게 소리치는 여래는 코앞까지 와 있었다.

맞는다. 죽는다.

익숙한 공포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맞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 죽는 것도 일은 아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여래는 자신에게 아프지도 죽지도 말라고 했다. 그래서 살았다. 여름 날 병원의 주차장에서였다. 그 날로부터 준혁의 생生이 다시 시작되었다.

살아있으라 한 여래가 다시 한 번 준혁에게 부탁한다. 따르는 수밖에는 없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준혁이 겨우 입을 열었다.

“…알겠어. 할게.”

“….”

“여래를 금방 찾을 거야. 그다음엔 내가 숨을 거야.”

“그래.”

“너무 멀리 가지 마, 여래야. 그럼 나 못 찾아. 나… 잘 몰라.”

가슴이 아팠다. 그럴 자격도 없으면서. 여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

“응.”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미안해. 준혁아.”

서투른 변명마저 무턱대고 믿어 버릴 만큼 절박한 너를 두고 가서 미안해. 

“나를 찾아.”

북받친 준혁이 이마를 어깨에 찧어대며 투정을 부리는 것이 시설에서의 둘의 마지막이었다. 

“나를 찾아줘.”

여래의 꺼질 듯한 부탁에 준혁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목재소는 항구를 낀 해안 도시에 면해있었다. 수입되어온 목재는 컨테이너째 전국에 뿌려지기 전 잠시 항구에 들렀다. 바다를 처음 본 여래는 창가에 코를 비볐다. 반짝거리는 빛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며 파도는 닥쳐왔다 물러가기를 반복했다. 아름다웠다.

지금까지 여래를 가두던 무언가가 탁, 깨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흘러나온 작은 신음이 입술 사이로 샜다.

“와아….”

바다에는 경계가 없었다. 구획 지어진 철책 안의 은애원만이 세상의 전부였던 여래에게 멀리 화물선이 떠가는 바다는 압도적일 정도로 광막했다.

넓다.

입 속 중얼거림을 삼키며 여래는 더욱더 유리창에 달라붙었다. 속이 메슥거려 여래는 주머니에서 사환이 준 껌을 꺼냈다. 가방을 들고 나온 여래를 보고 사환은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가는구나, 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녀에게 이별이란 저 파도처럼 달려들었다 물러가는 여일한 일상이었다. 아이들은 커야 하고 은애원을 떠나야 한다. 하지만 여래가 그럴 줄은 몰랐던 사환은 그 누구에게 주었던 것보다 조잡한 이별 선물을 건넸다. 그녀는 화가 난 듯했다.

가면서 씹어. 멀미날라.

그게 마지막이었다. 여래는 싱긋 웃었다. 고맙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사환은 마주 웃어주지 않았다.

은박지로 싸인 껌 종이를 벗기자 인공적인 과일의 냄새가 퍼졌다. 여래는 접은 껌을 입에 넣었다.

최준혁. 봐봐.

차창에 밀어붙인 이마에서는 찬김이 올랐다. 이때까지 최준혁 말고 말을 붙여본 누군가가 없던 여래는 최준혁을 향해 다시 말을 거는 것으로 생각을 시작하는 것 외엔 방법을 모른다.

봤어?

옆에서는 졸고 있는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다 제풀에 놀라 다시 빳빳이 목을 세웠다.

최준혁. 저게 바다야. 책에서 본 바다는 페이지의 끝에서 같이 끝이 났는데 진짜 바다는 눈을 옆으로, 옆으로 돌려도 계속 나타난다. 신기하지. 저렇게 큰 걸 어떻게 지금까지 모르고 살 수 있었을까? 난 바다가 좋아졌어. 끝도 없이 크니까. 난 앞으로 여기서 살거야.

풍경을 뒤로 제치며 고속버스는 빠르게 달렸다.

최준혁, 이 바보야. 이게 진짜 세상이야. 은애원 따위가 뭐가 좋다고 돌아와. 왜 돌아와. 내가 뭐라고….

여래는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손 안에 구겨진 껌 종이가 초라했다. 이걸 모았던 때가 있었다. 적막을 이기려고, 혼자인 걸 잊으려고 반짝거리던 것들을 모았던 유년시절을 떠올리는 여래의 입맛이 쓰다. 껌에서 단물이 다 빠졌는가보다. 여래는 풍선을 불어 본다.

운동화 상자 가득 은박지를 모아도 저 수평선만큼 빛나지는 않아. 최준혁.

풍선껌은 금방 터진다. 장거리에 지친 승객들 중에서 틀어진 뉴스 방송을 듣는 사람은 여래를 빼곤 없다.

-남해안 먼 해상에서 시작된 파도는 일 미터에서 이 미터 사이의 너울을 그리며….

앞으로 일기예보를 들을 때면 여래의 눈 안에는 이 바다가 떠오를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스쳐 지나가는 파도 하나하나가 아쉬워 여래는 눈꺼풀을 깜빡거리지 못했다.

대중교통의 환승 통로와 연결된 터미널의 입구에서는 사람들이 계속 토해져 나왔다. 인파 속에서 출렁거리던 여래는 가방끈을 당겨 등에 붙였다.

“저기… 앉으세요.”

주저하며 자리를 양보해 일어난 여래에게 아이를 안은 엄마는 손 싸개를 한 아이의 손을 들어 대신 인사했다.

“착한 형이지요? 감사합니다. 해야지. 감사합니다아.”

아기 말을 하는 여자의 옆에서 여래는 코를 훔쳤다. 흔한 친절과 그것보다 더욱 흔한 인사가 자연스러웠다.

“학생. 가방 들어줄까요?”

“아, 아니에요. 안 무거워요.”

“그래두.”

“진짜예요. 금방 내려요.”

“나도 다다음에 내리는데.”

“저두요. 정말 괜찮아요.”

여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은 아니었는지 다음다음 정거장에서 아기 엄마는 일어나며 눈짓으로 앉았던 자리를 가리켜 여래에게 반납했다. 손 싸개에 싸인 아기의 손이 또 한 번 까딱거렸다. 속이 울렁거렸다. 멀미는 아니었다. 공격적이지 않은 위화감의 정체를 살피려 여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상했다. 아무도 여래를 신경 쓰거나 주의 깊게 보지 않는다. 비웃고 경멸하려 벼르고 있지 않았다. 여래는 평범하다. 아무도 여래가 오메가인 걸 모른다. 그게 낯설었던 거다.

당연한 일이었다. 고인 물 같은 좁은 시골동네가 아니고서야 소문과 그것으로 평생을 낙인찍혀 살 일은 없다. 겉으로만은 다른 사람들과 여래를 구분해 낼 방법은 없었다. 바다에 이는 물결의 모양 중에서 그 전부의 높이와 부서짐을 발라내 파도 하나를 고를 수 없는 것처럼.

그러니까 나 같은 것 하나쯤은 티가 나지도 않을 거야. 아무도 나한테 뭐라고 하지 않을 거야. 그럼 난… 여기에 있어도 되는지도 몰라. 여긴 넓으니까. 끝도 없으니까.

갈아탄 버스에서 내린 여래의 이마에는 동그랗고 빨간 유리창 자국이 남아있었다.

* * *

“니.”

“…저요?”

“니 말고 여기 누 있는데!”

“네에.”

“니 버석버석 말라가꼬 잘할 수 있나!”

“네!”

또릿또릿한 대답이 그럭저럭 합격점이었는지 사장은 고개를 끄덕하곤 턱으로 안을 가리켰다. 그것이 면접의 전부였다.

여래는 취직을 했다. 목재소는 많은 부분에서 열악했지만 오후 세 시 이후에는 발주가 없었으므로 네 시까지 전표를 정리하고 나면 무엇을 해도 좋다는 조건이 매력적이었다.

갑자기 세상에 던져진 여래가 배워야 할 규칙은 너무나도 많았다. 가장 먼저 배운 건 조심하는 일이었다. 여래는 목재를 두부처럼 가르는 기계의 날들이 무서웠다. 벼려진 날들은 금방이라도 누군가를 다치게 하기 위해 잠복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시간은 무섭도록 흘렀고 여래는 곧 무뎌져 점심 주문을 받으러 그사이를 뛰어다니게 되었다.

* * *

탁! 랩을 씌웠는데도 물큰한 열기를 피워 올리는 플라스틱 그릇을 던져 내려놓으며 여래는 외쳤다.

“제육이요!”

점심시간이었다. 철가방 안을 손으로 더듬던 여래는 콧등을 찌푸렸다. 냉면 그릇을 잘못 건드렸다. 초봄인데 냉면을 시켰을 리는 없고 이건 분명 국물류다. 열이 금방 통하는 이런 그릇은 너무 뜨겁다. 여래는 더욱 세게 책상 위로 그릇을 던지며 소리를 쳤다.

“콩나물 황태요! 어제 술 드셨어요?”

트림을 올리며 배를 문지르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잔했지. 월급날인데. 니도 끼지.”

“싫어요.”

철가방 안에서 꺼낸 수저를 함께 던진 여래는 미련 없이 다음 테이블로 떠난다.

“그라게. 멀 물어봐. 젊은 사람이 먼 재미로 오요? 아저씨들 술판이 머가 재밌다고.”

“만날 여서 죽치는 것보담은 낫지?”

“공부한다잖여.”

“공부가 밥 먹여줘? 술 사줘? 아, 대충 살어. 골 아프게….”

탁! 씨부렁거리는 말을 자르기라도 하듯 다음 그릇을 내려놓는 소리가 거침없다.

“꽁치김치찌개요. 아, 비린내 나게!”

여래의 신경질을 가소롭게 받아넘기며 늙수그레한 남자가 수저를 들었다.

“아, 왜! 먹고 싶은 거 시키지도 못하냐?”

“아저씨는 먹고 나가면 그만이라두 나는 계속 여기 있어야 되니까 그렇죠!”

“환기시킴 될 거 아냐.”

“차 뺄 때 먼지 나잖아요! 그 먼지는 안 들어와요? 비린내 뺀다고 먼지 먹어요? 다음부터 시키지 마요. 주문 안 받을 거예요.”

여래는 아예 쐐기를 박아야겠다 싶다.

“그리고 작은 사장님도 싫어한단 말이에요.”

꽁치김치찌개 아저씨가 귀를 후비적거리던 손을 멈췄다. 작은 사장. 그는 목재소 사장의 둘째 아들이었다. 목재소의 영업에 크게 관심이 없는 그는 한 달에 서너 번 들러 꼬투리 잡을 거리를 찾은 뒤 만만한 여래에게 그걸 퍼붓고는 왔을 때처럼 느닷없이 가버리곤 했다. 장부 한 번 펼쳐보는 법 없고 나왕과 마호가니도 구별 못 하는 작은 사장이 나타나면 아저씨들은 약불처럼 은근하게 자리를 피했다. 그래도 여기 없는 사장보다야 여래를 탓하는 게 더 재밌으니까 꽁치의 몸통을 수저로 가른 남자는 괜스럽게 목청을 높였다.

“으이구, 저 성질머리.”

“깍쟁이라니까.”

입씨름을 하면서도 부지런히 음식을 나르던 여래가 자리에 앉는 건 제 몫의 뚝배기를 꺼내고 나서였다.

“잘 먹겠습니다.”

틀어진 텔레비전에서는 정오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의 멘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질한 반찬들을 타박하며 음식을 입 안에 쓸어 넣는 남자들에 질세라 밥을 욱여넣고 있던 여래는 갑자기 손을 멈췄다.

-00시장 선거에서 보수 후보들의 단일화로 xx당 후보가 우세한 선거구도를 흔들지 관심이 쏠리고 있는 가운데 최준혁 후보 캠프에서는…-

최준혁.

“안 묵나.”

“…먹어요.”

“빨리 묵고 치라.”

“네.”

여래는 서둘러 달걀찜에 수저를 찔러 넣었다. 얹힐 리도 없는 달걀찜이 도무지 내려가지 않았다.

뭐지.

버리는 걸 잊은 이유로 간이침대의 머리맡에 세워둔 신부 인형이 아니었더라면 이제는 은애원도 그런 일이 있나 싶다. 올올히 풀어진 치마저고리를 입은 신부의 인형은 준혁이 사온 것이었다. 짐을 싸며 섞여 든 인형을 버리기도 멋쩍어서 그대로 둔 게 벌써 육 년째였다.

옹색한 은애원을 벗어나자 여래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래는 제법 수다쟁이다. 여래는 술도 잘 마신다. 담배를 배우지 않는 건 목재소에서 일하기 때문이었다. 불이 나면 큰일이다. 일이 끝나고 난 오후 네 시부터는 검정고시 공부를 했다. 고등학교 졸업장은 그걸로 땄다. 여래는 월급도 받는다. 여래는 옷을 사고 운동화도 산다. 여래는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산다. 그리고 주소록을 채울 번호와 그 번호의 주인들을 알게 된다.

여래는 자주 웃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일 년에 한 번이나 두 번쯤 지방도시 행정소식과 함께 시장의 이름이 언급되는 때 여래는 문득 손을 멈추고 화면을 바라보았지만 거기에는 연녹색의 점퍼를 입은 남자가 가면 같은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여래는 어깨를 으쓱하며 당장의 일로 돌아갔다.

나비의 유충도, 사루비아와 플라스틱 목걸이도, 여래가 빼주었던 앞니들과 매일 밤 누워 손잡은 체온을 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기억들은 박제된 채 먼지를 올리며 서서히 퇴색되어 갔다. 과거란 현재에 어떠한 감정이나 행동을 불러일으킬 수 없는 유물이었다.

그래서 여래는 거의 준혁을 잊는 데 성공한다.

아니, 거의 성공할 뻔 한다.

* * *

어느 봄, 스물두 살의 여래는 봄의 캠퍼스에 서 있었다. 학생의 자격으로서는 아니었다.

도서관 건물에 우두커니 선 자그마한 남자의 잠바와 워커를 흘끔거리며 학생들이 지나갔다. 새싹이 힘껏 기지개를 켜듯 싱그러운 한 무리의 학생들을 따르던 여래는 그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수그렸다. 여래는 석진을 만나러 온 길이었다.

“아씨, 갈아입고 올걸.”

석진은 지난해 수강 과목의 현장실습을 위해 목재소를 찾은 이 대학의 학부생이었다. 연령대가 중년에 맞춰진 공장에서 유일하게 동갑내기였던 석진과 여래는 금방 말을 트게 되었다. 대입 시기를 놓치기는 했지만 막연하게나마 이과 계열의 진학을 꿈꾸고 있었던 여래에게 석진은 이것저것 도움을 주었다. 간간이 대입 공부를 위한 과외를 받는다거나, 시시콜콜하게 사는 얘기를 나누며 인연은 이어졌다. 자신이 다니는 대학 도서관의 회원증을 만들도록 여래에게 권한 것 역시 석진이었다. 공부라던가 자기계발에 좀 더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까 하는 그의 배려의 발로였다.

둘이 만나기로 한 날의 약속의 장소는 항상 석진이 다니고 있는 대학의 도서관 앞이었다. 여래는 자신이 소속되지 못한 장소에 어색함을 느끼면서도 제가 먹고 자는 축축한 나무 냄새가 짙은 방이 아닌 밝고 가벼운 세계를 구경하는 게 좋아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하는 험난함에도 불구하고 굳이 대학까지 오곤 했다.

“예쁘다.”

똑같이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서너 명의 여자애들이 그 옷자락만큼이나 즐겁고 화사하게 웃으며 지나간다. 자길 보고 웃은 것도 아닌데 여래는 떨군 고개를 더욱 깊이 떨궜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도록 대학이 지역사회에도 개방이 되어있긴 했지만 초대받지 않은 파티에 온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초라해지는 마음에 여래는 서둘러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도착한 문자에서 석진은 수업이 늦게 끝났다며 곧 가겠다고 절규하고 있었다.

더 그러고 서 있기도 멋쩍어진 여래는 도서관 입구까지 벽을 따라 놓여 있는 벤치 중 하나에 앉는다. 사람 구경이나 실컷 해야겠다 싶다. 그러나 학생이라기엔 차림이 험하고 인부라기엔 해맑은 여래를 도리어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구경하고 지나가는 건 사람들이었다.

그래, 봐라 봐,

약간의 자격지심도 더해져 여래는 궁싯거렸다. 이럴 때는 휴대폰이 제일이다. 화면을 긁어내리며 여래는 다음에는 꼭 옷을 갈아입고 오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하루 묵어가는 거리를 당일치기로 갔다 오겠다며 오전 여섯 시부터 들이닥친 기사의 용달에 전원주택용 데크를 실어주느라 아침을 정신없이 보낸 게 화근이었다. 그걸 돕느라 시간이 지체됐다. 약속에 늦을까봐 헐레벌떡 뛰어나온다는 게 입고 있던 항공잠바에 카고 바지인 작업복 그대로였다. 여래는 석진과의 약속에 늦는 게 싫었다. 석진은 여래가 이 도시에서 오메가인 걸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여래가 오메가인 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준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모자라고 태만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른바 오메가처럼 말이다.

그래서 조바심치며 겨우 시간을 맞춰 나왔더니만 정작 늦는 게 석진이라니. 세상일은 모르는 거다.

아이, 씨….

또다시 누군가가 빤히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에 얼굴이 간질거린다. 시선이 날아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아도 딱히 눈에 띄는 대상은 없었다. 여래는 시선의 방향을 찾는 걸 관두고 다시 휴대폰으로 얼굴을 떨어뜨렸다. 지나치게 의식하는 게 더 의식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하는 여래는 딱히 새로운 포즈로 자신을 방어하지 않았다.

내가 오메가인 건 아무도 모른다. 알 수도 없다.

하지만 여래는 초조하다. 익숙해졌을 법도 하건만 때때로 여래는 무심코 머무르는 시선에도 슬며시 자격지심이 일었고 그래서 그것이 지닌 호의와 적의를 분별하기 전에 미리 자리를 피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었다. 등을 한껏 구부리고 있는 여래의 앞으로 지나는 사람은 많았다. 화강암으로 된 도서관 입구의 바닥을 보던 여래의 시야로 눈이 부시리만큼 흰 운동화가 멈췄다.

“…석진…!”

드디어 왔구만! 여래는 급하게 고갤 들었다. 석진이 신은 신발이 낯설었다. 새 신발 샀나? 어디 거 인지 물어봐야겠다. 여래도 사고 싶었다. 대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래의 시선은 위로 향해갈수록 점점 느려지며 아리송해졌다. 이 만치에서 진작 끝이 났어야 할 석진의 얼굴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석진이 아니었다. 시선은 하염없이 위로 올라갔다. 아니 성장기도 아닌 놈이 그사이 컸을 리도 없는데 도대체….

“…누구?”

햇살을 등진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굳이 볼 것도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여래가 갸웃하는 사이 남자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옆에 앉았다. 전세 낸 것도 아니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여래는 엉덩이를 물리며 벤치의 끝으로 슬금슬금 자리를 비켰다.

뭐야.

도서관 앞을 줄 선 벤치 중에 비어있는 곳은 많았다. 앳된 피부로 보아 기껏해야 새내기일 남자애의 머리는 스포츠에서 조금 긴 정도였다. 상쾌하고 깔끔한 컷이었다. 흘끔거리며 곁눈질로 보는 여래와 달리 남자애는 바로 앉지 않고 아예 여래 쪽을 향해 몸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저….”

뚫어지게 보는 시선을 못 견딘 건 여래였다. 자의식 과잉으로 보이면 어쩌지, 걱정하면서도 여래는 입을 열었다.

“저기요, 왜 그렇게.”

그러나 묻는 말은 남자애에 가로막혀 버린다. 무뚝뚝한 어조는 거의 화난 듯 들렸다.

“어떻게, 여기에.”

“네?”

“어쩌다가, 여기에.”

여래는 자기가 입은 옷을 내려다보곤 멋쩍게 웃었다. 차림을 보고 하는 시비인가 싶어서였다.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변명조가 된 여래를 남자는 고집 센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이 학교 학생은 아닌데, 저 친구 만나기로 했거든요. 급하게 나오느라….”

“친구?”

“저기. 저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학생.”

“학생?”

이 사람 말투가 왜 이러지. 여래는 점점 곤란해졌다. 친구니 학생이니 하는 말을 생전 처음 듣는 것처럼 되묻는 남자애가 희한하다. 결절이 불거지는 매듭 있는 말투였다.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을.

아, 이거 뭔가의 가입 권유인가? 하지만 무언가의 전도나 영업이라기에는 남자애의 화법은 투박하기 그지없다.

아님, 조금… 저기… 특이한 사람인가? 저번에도 도서관에서 중얼거리는 사람 봤는데.

다음으로 떠올린 건 도서관 토박이로 햇볕이 쨍쨍한 날에도 우산을 들고 다니며 쉼 없이 혼잣말을 하는 여자다. 박사과정이었단 소문도 있고 애인하고 헤어진 후 저렇게 된 거란 소문도 있는 여자는 도서관 주변을 자신의 영역으로 여기며 열람실을 돌아다녔다. 발목까지 오는 긴 검은 드레스가 트레이드 마크인 그녀는 한여름에도 그 옷차림을 고수하고 있었다. 흔히들 미쳤다고 부르는 사람의 전형이었다. 그래서 여래는 남자애도 혹시 그런 과 인가 싶다. 그러니까 미친 사람.

여래를 재빠르게 남자애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나 여래의 가정을 비웃듯 남자애가 입고 있는 연하게 물이 빠진 청바지와 회색 티셔츠는 상쾌한 느낌만을 주었다. 방금 세수를 마친 듯 말끔한 안색도 그렇고 머리는 적어도 삼 주에 한 번은 미용실에 가서 자르는 듯 깔끔했다. 사실 차림 만으로라면 여래 쪽이 훨씬 더 수상하다.

“저기요.”

남자애는 여래의 반응 따위는 아랑곳없이 직진하며 자리를 바싹 붙였다. 이건 좀 너무 가깝다. 그를 피해 끝까지 밀려난 여래가 벤치에서 굴러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남자애가 팔을 붙들었다.

유보시킨 단정을 내릴 때였다.

이 새끼, 이상한 놈이다! 으으!

“정말로… 너야?”

더더욱 모를 말에 여래는 확신에 확신을 더했다. 손으로 힘껏 밀쳐보지만 까딱도 하지 않는 남자애의 가슴이 단단하다. 전혀 밀릴 기색 없는 남자애에 여래의 반항은 앙탈같이 되어버렸다.

“비, 비켜. 비키세요. 이것 봐요! 야, 안 놔? 으악!”

“정말로, 여래 너야?”

비켜 이 미친… 까지 했을 때였다. 남자애의 말에 여래의 손이 멈췄다.

“주여래. 너야?”

분명 자신의 이름이었다.

내 이름을 안다. 내 이름을 안다?

벗어나려고 바둥거리는 걸 멈춘 여래는 그제야 옆의 남자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여래의 이름을 말하고 다시 다물린 입술을 실룩거리는 남자는 어딘지 화난 듯한 기색에 비해 표정은 많지 않았다. 냉정하다기보다는 여러 가지 들끓는 감정들을 어떻게 분출해야 좋을지 몰라 억눌린 듯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묘한 기시감이 들어 여래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것은 예전에 살던 동네를 오랜만에 방문하는 느낌과도 비슷했다. 무엇이 사라졌고, 무엇이 생겨났는지 바뀐 건물들의 윤곽으로나 겨우 알아보면서도 눈길이 닿는 곳마다 그리움이 서려서 낯선, 그런 느낌.

“주여래. 여래. 여래.”

남자는 기도문처럼 여래의 이름을 되풀이했다. 그것은 여래가 여래이길 바라는 간절한 기도의 서書였다.

내 이름을 안다. 나도 그를 알아야 한다. 여래는 남자애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색이 짙은 눈동자에 여래가 비쳤다. 거울 같은 눈동자에 비친 자신과 마주하자 빙그르르 기억의 축이 회전했다. 회전을 마친 나사에서는 잊고 있었던 이름이 튀어 올랐다.

“최준혁….”

그것을 방아쇠로 남자는, 아니 최준혁은 여래를 당겨 안았다.

“여래.”

“최준혁? 어떻게 여길….”

“여래야.”

“아, 아파! 최준혁! 놔 줘!”

외마디 비명과 함께 여래는 준혁의 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프다고!”

준혁은 여래의 말을 무시하며 두른 팔을 풀지 않았다. 강하게 잡힌 등허리에 여래는 헉 소리를 내며 위를 쳐다보는 자세로 안기는 수밖에 없었다. 여래의 뺨이며 귀에 준혁의 뺨과 귀가 엉망으로 문질러졌다. 마치 감촉으로 여래를 확인하려는 듯 준혁은 쉼 없이 얼굴로 얼굴을 더듬었다.

“여래. 여래. 여래.”

“아니이, 야! 이것 좀 일단 놓고 차근히 이야기를….”

“거짓말.”

“놓고 하자니까, 거차암!”

“거짓말.”

완강하게 끌어당긴 팔은 더욱 옥죄어 오기만 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라고 하고 싶은 건 나거든!

“야, 너 뭐하냐….”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도착한 석진이 어깨에서 흘러내리려는 가방을 추켜올리며 남자와 끌어안고 있는 여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저분 왜 저러시냐.”

“몰라.”

“옛날에 알던 사이라며. 합석이라도 하자고 해.”

“모른다구….”

석진은 앉은 테이블 바로 옆자리로 혼자 덩그러니 앉은 준혁을 계속 흘끔거렸다. 석진과 여래의 테이블을 가리키며 그들이 주문한 것과 같은 메뉴를 고른 준혁은 잔을 들어 살짝 소주를 맛보더니 그 쓴맛에 질겁을 해 잔을 패대기치듯 내려놓은 이후로 제 앞에서 타고 있는 숯불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보다 못한 홀 담당의 아주머니가 고기를 얹어줄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그 모습을 곁눈질하던 여래는 고개를 든 준혁이 눈을 마주치기 전에 얼른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합석은 무슨… 됐어. 아까 봤잖아.”

“아. 그거.”

석진은 아까의 소동을 떠올리며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렸다. 여래가 얕게 찌푸리자 실소는 박장대소가 되며 커지기만 했다. 그거 꽤나 볼만한 구경거리였었다. 완력으로는 상대가 되질 않아서 석진까지 달려들어 말려도 꿈쩍 않던 남자애는 여래가 빼액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겨우 팔을 풀었다. 그것도 불만이 가득한 눈치로였다.

석진은 고기를 뒤집으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저분은 왜 저러는 겨.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너 뭐 떼먹고 날랐냐? 죄 지었지?”

“…아니거든.”

“그럼 왜 계속 따라오는 건데. 도망이라도 갈까봐 저러는 거 아니야?”

도망이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은애원에서의 마지막을 떠올리며 여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구구절절한 사연을 설명할 계제는 아니었다. 여래는 뾰로통하게 쏘아붙였다.

“난들… 혼자서 저러고 있으라고 해. 난 몰라. 왜 나한테 그래?”

“아이구. 너야말로 왜 나한테 신경질이야.”

“내가 뭘. 치!”

“치치거리지 마. 애들도 아니고.”

여래는 앞니로 문 젓가락 끝을 잘근거렸다.

“잘 안 고쳐지는 걸 어떡해.”

석진에게 지적을 당할 때면 여래는 그게 자신의 탓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끼고 가르쳐준 어른이 곁에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단 걸 주장하고 싶었지만, 석진은 스무 살 이후의 인생은 자기가 만들어가는 거라며 냉정하게 여래의 변명을 무시해버리곤 했다. 여래는 준혁을 쏘아보았다. 옛날 버릇이 나온 건 다 최준혁 때문이었다. 최준혁이 은애원과 그 시절을 몰고 와서였다.

석진은 네모반듯하게 자른 고기를 숯불에 눌러 핏기를 날렸다.

“암튼 간에 잘 말해봐. 너무 쳐다봐서 고기 얹히겄어….”

“나도 잘 몰라.”

“뭘.”

“쟤. 잘 모른다구.”

몇 년의 시간을 두고 다시 만난 준혁이 어색하기란 여래 역시 석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준혁은 어렸을 때의 기억만으로는 현재의 그를 짐작할 수 없으리만치 바뀌어 있었다. 무엇보다 키가 커졌다. 항상 눈 아래에 있던 준혁이 여래보다 훌쩍 자라서 고개를 들어 쳐다봐야 한다는 게 위화감이 들었다. 예전처럼 잘난 척하며 준혁을 가르친다는 건 무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정말로는, 헤어진 마지막이 마음에 걸렸다.

헤어지는 게 아니야.

의도된 거짓말이었다.

거짓말.

준혁은 그 거짓말을 알면서도 덩굴처럼 감던 어린 손을 풀었다. 여래가 그러라고 했기 때문에 준혁은 그렇게 했다. 젓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초조한 기색인 여래에 석진은 팔꿈치를 툭 밀어 치며 준혁을 가리켰다.

“그럼 전번 주고 다음에 보자고 해. 안됐잖아. 계속 저러고 있는 거. 너만 졸졸 쫓아다니면서 저게 뭐냐.”

“줬어, 줬다구. 안 그랬겠냐?”

불판 위로 몸을 기울이며 석진에게 속삭이는 여래에 준혁의 눈썹이 맞닿기 직전까지 찌푸려졌다.

“크으….”

준혁의 시선은 짙었다. 꼿꼿하다 못해 아픈 눈길을 잊으려 자꾸 넘긴 술잔에 자리가 파할 때쯤 되자 여래는 얼큰하게 취해있었다.

* * *

타박, 타박, 타박.

따라온다.

타박, 타박, 타박.

계속 따라온다.

타박, 타박, 타박.

더는 못 참겠다. 여래는 뒤를 돌았다.

“야, 최준혁!”

주머니에 손을 꽂은 준혁이 무슨 일이냔 듯 멀거니 여래를 쳐다보았다. 그 태연한 태도가 더욱 불이 받치게 한다. 저게 이젠 아주 건방진 자세도 할 줄 안다. 다 컸다 이거야?

“그만 따라와. 자식아.”

밥과 함께 술을 겸해 팔던 식당에서 계산을 마치고 석진과 헤어진 여래는 마지막 불판을 갈 때 사라진 준혁이 드디어 가버린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준혁은 다시 만난 이후 한 번도 펴지지 않았던 미간인 채로 큰길 입구에서 서서 여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시하고 지나가자 그걸 무슨 허락으로 안 건지 준혁은 여래를 따라왔고 그게 지금의 이 미행 아닌 미행이다. 경고를 마치고 앞을 향한 여래 뒤로 잠시 멈췄던 준혁의 그림자는 약간의 차이를 벌리며 다시 따라오기 시작했다. 최준혁은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여래는 이번에는 거의 따지듯이 언성을 높였다.

“최준혀억, 너 나 씹냐?”

“….”

저게 또 모르쇠다.

“씹냐고!”

“그렇게… 하고 싶어.”

지금까지 한 마디도 없더니 이제야 대꾸를 하는 준혁에 여래는 흐응, 비음을 흘렸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준혁은 덧붙이기까지 했다.

“하게만 해준다면.”

“하하, 이게 이제 농담도 하네.”

“입에 넣고 씹고 싶어.”

“안 돼, 안 된다구. 먹을 것도 없어, 임마.”

씹는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입 안에 넣고 이로 바순다는 뜻으로 치환하는 준혁에 여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넌 어쩜 그대로냐.”

위로 올려다보게 덩치가 커져도 준혁은 준혁이었다. 여래에게 고분고분하고 여래만을 따라오는 준혁에게서는 세월의 흔적은 커진 키로만 찾아볼 수 있었다. 그것이 여래를 안심하게도 긴장하게도 했다. 여래가 곱씹는 사이 거리를 좁힌 준혁은 여래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오르막의 위에 선 여래에게 겨우 엿보이는 준혁의 정수리는 예전의 여래와 준혁의 키 차이를 상기시켰다. 예전에는 준혁이 훨씬 더 작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혼자 많이 큰 게 괘씸하다.

“이상한 자식.”

마치 예전처럼 여래는 준혁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아무리 잘나게 되었어도 최준혁은 최준혁이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 봤자 최준혁이다. 막 대해도 되는 어린 동생 말이었다.

“아….”

머리를 헝클던 손은 준혁 이마의 상처에 닿아 멈칫한다. 이마에서부터 정수리를 향해 날카롭게 뻗친 흉터는 가는 금처럼 빡빡한 머리숱을 가르며 여전했다. 엄지로 그 깨진 금 같은 얇은 맨살을 더듬어본다. 여래는 그 상처에 한풀이 꺾여버렸다.

진짜 최준혁이 맞다. 더는 뭐라고 못 하겠다.

“니 멋대로 해. 따라오든지 말든지.”

골목길을 걸어 올라가는 여래 뒤로 준혁이, 준혁 뒤로 가로등에 길어진 그림자가 나란히 이어졌다.

* * *

쌓여있는 목재들의 화재나 도난 예방을 이유로 목재소 사무실 구석에 마련된 컨테이너 박스에서 여래는 숙식을 겸하고 있었다. 허리께에 오는 자바라 문 앞에서 자물쇠를 풀기 위해 멈춰 서자 미행 아닌 미행을 하던 준혁 역시 같이 선다. 잠바 주머니 속은 영수증과 이어폰 줄로 복잡했다. 그 사이로 열쇠는 손에서 자꾸 도망갔다. 투덜거리는 여래의 뒤로 선 준혁은 단층으로 세워진 공장의 높은 지붕을 보며 물었다.

“여기서 자?”

“여기서 자냐구? 아니. 여기서 산다. 왜?”

“집이 크네.”

공장을 보고 집이라고 말하는 준혁은 농담을 의도하지 않았다.

“집이라니.”

“여래가 먹고, 자니까. 그곳이 집이야. 여래네 집.”

집이라니, 쪽팔린다. 여긴 그냥 공장이었다. 누추하고 허름한 공장.

여래는 입술을 깨물며 준혁이 입고 있는 대학 이름이 스티치된 야구 점퍼를 흘끗 훑어보았다. 낮 나절 학교에서 만난 것만으로도 준혁이 그 학교를 다닌단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여래는 부러 떠보듯 운을 띄웠다.

“너는? 넌 어디 살어?”

“기숙사.”

“00대?”

“응.”

“너 거기 다녀?”

알면서도 굳이 묻는 여래를 모르고 준혁은 순순히 대답했다.

“응. 이번 해 삼월에 입학했다.”

“되게… 좋은 데 다니네.”

준혁은 그게 무슨 의미냔 듯 여래를 보았다. 여래는 그게 조금 약이 올랐다.

좋겠다. 넌 우성알파라서.

여래는 겨우 속엣말을 참았다. 울고불고 난리칠 때는 언제고, 여래 없이도 준혁은 잘 살았다. 좋은 대학도 갔고 행색도 멀끔했다. 초라한 데가 없다. 지금의 준혁은 여래의 도움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아니, 여래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멋진 인생을 사는 듯했다. 그래, 준혁은 우성 알파였다. 한 번 파양을 당하고서도 아직 입양 희망 가정이 남아 성격이 지랄 맞은 원감이 끝끝내 내보내질 않았던 우성 알파 말이었다. 준혁 대신 여래를 쫓아낸 원감의 핑계, 우성 알파.

은애원을 좋아한 것도 아니었고, 나오고 나서의 생활이 은애원보다 못할 것도 아니었는데, 심지어 준혁의 의도하거나 설계한 일도 아니었는데도 여래는 은애원과 준혁을 떠올리면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치받쳤다. 어쩌면 준혁을 버리고 간 주제에 준혁보다 잘 풀리지 못한 게 억울한지도 모르겠다. 그 마음의 염치없음을 잘 아는 여래는 차마 솔직하게 이야기하지는 못하고 괜히 성질을 부렸다.

“너, 가.”

“어디로.”

“너네 집 있을 거 아니야.”

“기숙사에 살아. 집은 없어.”

저도 거기서 먹고 잘 거면서 여긴 여래의 집으로 거긴 왜 준혁의 집이 아니라는 건지 모르겠다. 기숙사라고 하지만 여름에는 습기로, 겨울에는 냉기로 싸워야 하는 컨테이너 박스보다야 궁전일 텐다.

누구 약 올리나? 여래는 눈을 치켜떴다.

“그럼 거기로 가. 어디든지 가라구! 왜 따라오는 거야. 전화번호 줬잖아! 할 말 있으면 나중에 전화로 해.”

“가야 돼. 가야 되는데….”

준혁은 눈 움푹한 곳을 깊게 눌렀다.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고단한 모양이었다. 문에 기대섰던 여래가 지루함에 기다리지 못하고 돌아서버리자 얼결에 뒤따르는 준혁이 팔을 붙잡아왔다. 준혁의 손을 벗겨내며 여래는 불콰해진 숨을 뱉었다.

“놔라. 담에 얘기하자. 응? 나 피곤하다. 그리고 너 있을 데도 없어 여긴.”

여래의 말에 준혁은 입술을 깨문다. 무언가를 참는 듯한 인상이 퍽 어른스럽다.

이런 얼굴도 할 줄 알게 됐네, 백날 울기만 하던 꼬맹이가. 여래는 피식 한숨을 흘렸다.

“가봐야 된다며. 혼나는 거 아니야? 기숙사면 통금 있잖아.”

“무서워.”

하고 싶은 말만을 직선적으로 구사하는 아이 같은 화법은 여전했다. 키는 커졌지만 아직 애다. 무서운 걸 무섭다고 바로 말할 수 있는 애. 열등감으로 짜부라들었던 마음이 우습게도 그 말 한마디에 펴진다. 최준혁이 별다르게 변하지 않았다는 게 안심이 된다. 여래는 다시 준혁의 머리를 흩트렸다.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에 준혁의 눈이 더욱 깊게 꺼졌다.

“그래, 그래. 통금이 그렇게 무서우면 가봐야지, 준혁아.”

도리질 치는 고개의 그림자가 주황색 불빛 아래서 흔들렸다. 있는 힘껏 아니라고 하는 준혁이 의아해서 눈짓을 해 보이자 더듬거리는 말이 이어졌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그럼 뭐가 무서운데. 산 밑이라서 어두워서? 데려다줘? 저 앞까지?”

여래가 과장되게 손가락을 먼 곳으로 뻗자 준혁은 거푸 도리질을 쳤다.

“아니. 나는 네가, 네가 없어질 까봐 무서워.”

아….

여래는 숨을 삼켰다. 준혁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연기처럼 흩어질지 모르는 여래 대신 그 윤곽의 조금 위를 더듬는 손이 느렸다.

“이제 잃어버리면 다시 못 찾을까봐.”

“이번은 우연이었어. 다음은 없을지도 모른다.”

“정말… 너야?”

가슴이 저 먼 비탈길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주여래가 맞아?”

아까 돼지갈비를 너무 급하게 먹었나. 여래는 갑갑하게 치받치는 명치께를 문질렀다. 석진이 사는 거라고 그렇게 무턱대고 많이 먹는 게 아니었는데 무식한 짓을 하고 말았다.

“네가 나오는 꿈을 꿨어. 보고 싶어서 좋았는데 깨면 항상 가슴이 아팠어. 아픈 건 나쁜 거야. 그렇지?”

속이 거북했다.

“나는 아프고 싶지 않아.”

최준혁이 그만 말했으면 좋겠다.

“네가 아프지 말라고 했으니까.”

미치겠다. 진짜 체했나 보다. 마른 침은 목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목울대만이 솟았다 가라앉는다. 눈송이를 쥐듯 살그머니 잡아오는 손을 여래는 뿌리칠 수가 없었다. 최준혁이 자꾸만 서투르게 구는 게 비겁했다. 이러면 여래도 꺼지라고, 가라고 함부로 할 수가 없지 않은가.

야비하다, 이 자식. 최준혁은 여래가 약한 부분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여래야.”

안긴 품은 크지 않았다. 깊었다. 가슴을 딛고 빠져나와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발치부터 무릎까지, 무릎에서 명치까지 늪처럼 빨아들인다. 그러기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다시는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술이 이제야 오르나? 띵한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는 여래에게 준혁은 속삭였다.

“나는 이제 어른이야.”

“다시는 너랑 헤어지지 않을 거야.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어.”

“찾았다. 주여래.”

순간 다리가 풀리리만치 극적인 우성 알파의 향기가 밤의 폐부를 찢는다. 뒷목이 저렸다. 강렬한 자극이었다. 마구 날뛰는 페로몬이 유보했던 판단을 부추겼다. 최준혁은 우성 알파였다. 여래는 열성 오메가였다. 둘은 함께 있지 않았다. 섹스할 때를 빼고는.

“비켜. 최준혁.”

그런 슬픈 눈을 해도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일이었다.

“빨리 가.”

이상한 새끼.

닫힌 문 너머로 우두커니 선 준혁을 보며 여래는 중얼거렸다. 힘과 신경 전달 물질로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으면서도 말 한마디로 자신에게 제지당하는 우성 알파를 뭐라고 해석하면 좋을지 여래는 정말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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