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부 : 여래 (6) (6/23)

1부 : 여래 (6)

여래가 은애원을 나간 뒤 일 년 후, 준혁은 정부기관에 재입양 되었다. 알파의 경우 피시험자로 지원하는 개체가 적었던 것이 그 전 파양의 면책이 되어 기관의 입소가 쉬웠다. 기관에서는 준혁의 법률적이고 재정적인 후견인이 되어줌과 동시에 신체 일부에 대한 실험권을 획득했다.

그렇다면 정확하게는 입양이 아니라 입사가 되려나, 라고 준혁은 고쳐 말했다.

규정상 지급되도록 되어있는 생명수당과 위험수당, 그리고 밤 시간의 수면 패턴 관찰에 속한 야근수당까지 포함한 급여명세서가 한 달에 한 번 메일로 도착했다. 뇌파와 혈액의 샘플을 주기적으로 제공한 대가치고는 나쁘지 않은 보수였다. 그리고 실험이 있었다. 뇌의 신호를 전자화할 수 있다면 역으로 전자화 한 정보를 뇌에 업로드하는 기술의 가능 여부에 대한 실험에서 준혁은 가장 탁월한 실험 대상이었다.

…고 한다.

전두엽의 비정상적인 활성화와는 반대로 감정과 관련된 호르몬을 주관하는 뇌하수체의 작용은 현저히 떨어지는 준혁에 대한 독립적인 연구는 아직 진행 중이었다. 체대에 입학한 이유 역시 기억력과 집중력에 있어서는 발군으로 두드러졌지만 신체적인 능력에 있어서는 그 한계를 실험해 본 적 없었던 준혁에 대한 조사의 일환이었다.

…고도 했다.

보호시설과 같은 학대는 없었다. 하지만 그 이상 적극적으로 양육을 도맡는 직원도 없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바닥을 보이며 길길이 날뛰던 원감은 오히려 인간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인간적이라는 말이 선하다는 말과의 동의어는 아니었지만.

…라는 말도 했다.

여하튼, 기관에서 준혁은 철저한 객체로서 관찰되었다. 유리접시 위의 미생물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취급이었다. 곰팡이와 다른 점이라면 그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준혁은 자신을 실험 재료라고 불렀다.

“나는 유전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무슨 유전?”

“내 아이도 나와 같은 괴물일 확률이 높다는 뜻이라고 설명해 줬어. 태어나면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다고. 아이를 가지지 말라고도 했지. 맞는 말이었어.”

여래는 리모컨을 돌리던 손을 멈췄다.

“그건 내가 아버지를 닮아 누군가를 때리거나 못살게 굴 확률이 높다는 뜻이라고도 했지. 아버지란 학대에 의한 두부 손상, 이라고 내 생활기록을 남긴 남자를 말해.”

“아? 어….”

“범죄자인 부계 쪽은 사회보장시스템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라고 닥터가 말하더군.”

“닥터?”

“담당 직원이야. 의사 면허가 있어. 사년 전에 처음 만나서 계속 내 매니징을 해주고 있다.”

“이름은?”

“몰라.”

“모른다고?”

“물어보지 않아서 몰라. 알아야 해?”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생각은 못 해봤어. 닥터는 닥터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를 수 있어. 다들 그렇게만 불러.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아. 이름은 필요 없다.”

“….”

“그런 걸 궁금해 하다니 여래는 특이해.”

“…누가 할 소릴.”

대학을 다닐 마음은 없었지만 별달리 하고 싶은 일도 없었기에 기관의 요청대로 원서를 내고 합격을 했다, 고 준혁은 기사를 읽어 내리듯 담담하게 고백했다. 수능 시험에는 마인드 업로딩을 통해 입력 받은 고교 과정의 지식이 상당 부분 도움이 되었다고도. 입학과 동시에 현저히 낮은 사회성의 복구에 대한 프로젝트가 올 일월부터 시작되었지만 여태까지 큰 성과는 없었다고 준혁은 여래에게 보고하듯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는 준혁은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늘상 짓는 무미건조한 표정이지만 여래는 알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그랬다.

준혁 속에 갇혀 있는 감정들이 여래에게는 보였다. 아마도 그건 준혁을 아주 예전부터 봐왔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래는 연구원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었다. 준혁이 말하는 센터의 이야기 같은 건 거의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 사람들이 밝혀내지 못한 걸 여래가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야 말이 됐다.

“보다 신뢰성 있는 데이터 확보를 위해서, 라며 다음에는 엄마를 찾아줬어.”

“어, 어… 좋았겠다.”

“아쉽게도 죽어있었어. 만나지 못했어.”

텔레비전은 아직 켜진 채였다. 준혁은 그 화면을 보며 그곳에서 불러주는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야 한다는 듯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여래가 리모컨으로 볼륨을 낮추자 정적이 찾아왔다.

차분한 침묵을 깨뜨리지 않도록 여래는 조용하게 덧붙였다.

“돌아가셨다고 하는 거야.”

“돌아가셨어. 돌아가셔 있었어. 이것도 진행형이 될 수 있을까?”

“난… 잘 몰라.”

여래는 진땀이 나는 이마를 쓸어내렸다.

“무엇을? 시제를?”

“아니. 그게 아니라….”

잘 찾아지지 않는 말들을 헤매며 여래는 더듬거린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다는 게 뭔지 난 잘 몰라. 나한테는 원래부터 없었으니까. 어떤 느낌일지 상상이 안 돼. 더 좋은지 나쁜지. 아무튼 간에 미안해.”

“여래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그래도… 생각나게 했으니까.”

“….”

“미안해.”

무안해져 뒷목을 긁는 여래를 준혁은 종잡을 수 없었다. 우유와 버터의, 이젠 그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던 과자의 달콤한 냄새가 나는 이 귀여운 남자는 가끔 준혁을 깜짝 놀라게 할 때가 있었다. 여래는 자신의 기분을 궁금해하고 또 미안해한다. 어째서일까. 아무도 곰팡이의 기분 따위는 묻지 않는데. 센터의 누구도 그런 것은 연구하지 않았었는데.

준혁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여래가 덧붙였다.

“이것저것 생각이 들었지? 엄마 소식 들었을 때.”

준혁이 쥔 종이컵이 우그러들었다. 손등 위로 새파랗게 질린 핏줄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에 비해 목소리는 담담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직계존속의 죽음을 다행이라고 말하는 준혁은 끔찍한 걸까? 아니. 여래는 준혁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결핍은 슬픔이었다. 부재는 분노였다.

“적어도 살아있는데 만나러 오지 않은 게 아니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엄마를 만났다면 나는 발을 굴렀을 거야. 소리를 질렀을 거야. 나는 은애원이 싫었어. 그래서 거기에 두고 간 엄마가 미웠다.”

“엄마에게 화가 났어.”

앞머리를 가로지르는 가늘고 긴 흉터가 칼날처럼 번뜩였다. 준혁이 머리를 다친 상처였다.

“그런데 있잖아…. 지금은 만날 수 없어서 화가 나.”

의자와 가슴 사이에 여래를 가둔 준혁이 그림자를 만들며 위로부터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몸의 모양대로 그려진 그늘이 덮어 여래는 어두워졌다. 화면에서는 매의 비행에 들쥐가 숨고 있었다. 사냥 직전의 신중한 포식자의 모습이 긴 테이크로 화면을 가로질렀다.

“너도 죽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나를 찾으러 오지 않는 거라고. 그래야 말이 된다고.”

“그래서 화를 냈니? 도서관 앞에서.”

“조금.”

하지만 여래의 뺨을 쓰다듬는 손에는 분노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만날 수 있는 편이 좋아. 거짓말을 했어도 살아있는 편이 좋아.”

“있잖아… 최준혁.”

“없어지지 마.”

안아줄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남자가 무리해서 가슴 안으로 파고들었다. 어깨를 감싸자 등이 떨리기 시작했다. 우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쉬고 들이쉬는 숨의 습기에 셔츠가 조금 축축해졌을 뿐이었다.

“없어지면 안 돼.”

준혁은 달콤한 냄새를 들이켰다. 우유에 녹아내리는 카스텔라의 냄새가 났다. 준혁은 여래에게 코를 세게 비볐다.

나를 인간이게 하는 유일한 너. 배양지에서 번식하는 포자나 다름없는 나를 궁금해하는 이상한 너. 이런 말을 하면 너는 또 도망을 갈까….

준혁은 입을 다물었다. 날뛰는 소유욕은 고삐를 놓쳐버리기 일쑤였다. 준혁은 여래를 겁주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여래와 헤어지던 날의 공포가 선명했다. 다시 겪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다룰 재간 없는 준혁으로서는 그저 거칠게 안아서 멈추게 하는 게 전부일 뿐이었다.

조급해하면 안 된다. 천천히. 천천히 해야 했다.

여래를 다시 잃고 싶지 않았다.

* * *

천장의 둘레에는 연통이 매달려 있었다. 연통의 종착지와 행선지는 사무실 제일 구석의 난로와 바깥으로 나 있는 환기구였다. 가습과 보온을 위해서 여섯 시에 한 번, 열두 시에 한 번 연탄을 갈고 주전자에 물을 채우고 나면 잘 시간이었다. 계절은 사월이었지만 아직은 밤이 추웠다.

도화지만 한 거울이 붙은 세면대에 번갈아가며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나면 먼저 씻은 사람이 잠자리를 준비한다. 여래가 하는 양을 두어 번 지켜본 준혁은 곧잘 흉내를 내 이불을 펴고 귀를 각 모서리에 맞춰놓았다.

모로 누운 준혁이 팔을 감아 오는 게 어색한 순간도 있었다. 늘 혼자 자는 습관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둬내도 그때뿐으로 다시 허리며 어깨에 걸쳐지는 팔이 끈질겨 여래는 포기하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나면 거대한 덫이 뒤에서부터 덮쳐왔다.

불편한 자세에 몸을 틀어 바로잡으려고 하면 죄어드는 팔이 갈비뼈를 으스러트릴 듯 옭아매졌다. 애정보다는 원망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그동안 혼자였던 밤을 탓하는 마음이 실려 있어 여래는 준혁에게 그만하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목덜미며 귓불에 입 맞출 때는 나부끼는 꽃잎이 내려앉듯 조심스럽다. 마치 자신이 소중한 무언가라도 되는 듯한 그 입술이 오히려 여래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만, 그만 좀 해!”

“기분 좋게 해줘.”

“왜 나만…!”

“그럼 나도 할게.”

“…뭐?”

“나도 해 줄게.”

억울해서 화를 내도 막무가내인 요구는 멈추지 않았다. 엉덩이에 비벼지는 남성의 중심이 거북스러워질 때면 손을 뒤로 돌려 바지 안에 넣어 찾았다. 뭍으로 올라온 물고기처럼 헐떡이는 뜨거운 살덩어리를 쓰다듬고 문질러서 해방시켜주면 긴 한숨이 귓가로 뱉어졌다. 답례로 여래의 앞을 주물러오는 손가락은 길고 아름다운 모양을 한 주제에 형편없이 서툴러서 아프게 쥐는 게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손과는 다른 감촉과 온도에, 그리고 자신의 것보다 훨씬 짙은 욕정에는 그만 사정에 도달해버리고 만다. 쪽팔린단 생각이 들었지만 여래는 여운을 쫓으며 준혁의 손에 자신의 것을 비비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마주 보게끔 여래를 돌린 준혁은 아예 서로의 것을 겹쳐 잡았다.

“힉….”

짧게 숨을 들이켜며 도리질하던 여래는 곧 서로의 것을 겹쳐 바투 쥐어 잡은 준혁이 움직이는 데에 반항을 멈췄다. 자연스럽게 허리가 흔들렸다. 준혁의 중심이, 손바닥이 뜨거웠다. 녹아 떨어질 것 같다.

밤의 이슬처럼 여래에게 스며든 준혁은 아침의 햇볕을 피하며 학교로 돌아갔다.

물론 그것만이 밤의 전부는 아니었다.

공장 뒤편, 그늘 한 켠에는 그물이 없는 농구대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한때는 빨간색이었으리라고 추정되는 링은 페인트가 벗겨져 회색과 검붉은 색의 중간 정도로 흉물스러웠다. 농구대의 기둥 주변에는 그와 훌륭한 쌍을 이루는 벗겨진 가죽이 듬성듬성 남은 낡은 농구공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여래는 종종 산 너머의 하늘이 짙은 파랑에서 어둠으로 넘어가는 초저녁에 소화를 시킬 겸 공장 주변을 어슬렁거리곤 했다. 경리부의 사무실에 있는 텔레비전은 제조사가 사명을 변경하고도 십오 년이 지났을 만큼 오래된 모델이었다. 검은 비가 내리는 화면은 보고 있으면 멀미가 나서 싫었으므로 여래는 자주 밖을 나돌았다.

놀이랄 것 없이 빈곤한 여가 시간에는 주로 비닐봉지를 줍거나 나무 조각을 치우며 잡일을 했다. 그런 자유시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공을 들어 골대를 향해 쏘는 슛이다. 오래 해왔던 만큼 이것만큼은 자신이 있는 여래는 뒤를 따르던 준혁을 향해 시연하듯 공을 골대에 넣고 뿌듯하게 뒤를 돌았다.

검은 고어텍스 윈드 브레이커를 입고 팔짱을 낀 준혁은 벽에 기대어 공을 가지고 노는 여래를 보고 있었다. 차가운 물로 손을 씻으면 아직은 따뜻한 물이 그리워지는 추운 밤에 여래의 뺨은 조금 얼어있었다.

“어때, 멋지지.”

“음.”

“야, 아니라고는 하지 마라. 솔직히 어? 형님의 실력이 어떠냐. 흐흐.”

“글쎄.”

준혁은 말 대신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단정하게 개켜 골대 옆에 두고 몸을 풀었다. 가죽이 벗겨져 실밥이 드러난 농구공을 마당에 튀겨 먼지를 일으키는 여래의 뒤로 준혁이 공을 가로챘다.

한 손으로는 여래를 가드하며 나머지 한 손으로는 드리블을 유지한다. 그리고 슛. 호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공이 링의 한가운데로 정확히 명중했다. 폼의 완성도가 다른 훌륭한 삼 점 슛이었다. 다니고 있는 대학의 이름만이 체대인 것은 아니었다.

링 아래로 떨어진 공을 다시 드리블하며 견제하는 준혁에게 여래가 태클을 걸며 엉겨 붙었다. 막무가내인 몸싸움에 준혁이 두 손으로 공을 잡은 채 머리 훌쩍 위로 들어 올리자 밑에서 여래가 팔을 올려 깡충거리며 제자리에서 뛰었다.

키로 승패가 갈린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게 콤플렉스인 여래는 약이 올라 철썩철썩 몸을 준혁에게 부딪쳤다. 내려다보던 준혁은 여래의 말을 되풀이했다.

“어때, 멋지지.”

“이게… 야! 뭐야! 너 반칙이야. 계속 공 들고 있는 거. 농구 룰도 모르나.”

“아니라고는 하지 마라. 솔직히.”

“풋, 푸하하. 이 따라쟁이가.”

준혁의 옷을 잡아당긴 채로 여래는 웃음을 터트렸다. 힘을 실컷 실어서 뒤로 넘어질 듯 젖혀지는 여래를 따라 면으로 된 티셔츠는 탄성을 잃고 늘어났다. 자신을 올려다보며 웃는 여래를 준혁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땅값이 싼 산의 입구에 지어진 공장은 중턱부터 정상까지 심어진 아카시아의 향기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드문드문 세워진 방범등에 반사된 하얀 꽃잎들이 설탕 가루처럼 반짝거렸다.

풍선껌의 향을 닮은 공기가 밤을 채운다. 가벼운 달콤함이 가슴 한가득 부풀어 올라서 준혁은 다시 말을 잃었다. 풍경소리처럼 딸랑거리는 맑은 웃음은 그쳐도 여래는 아직 눈가를 접고 준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공을 아래로 놓치자 튀어 오르는 소리 몇 번과 함께 공은 바닥을 굴렀다. 그사이 내려진 팔이 여래의 등을 감쌌다.

입술과 입술이 닿은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중력의 작용을 이기지 못한 준혁의 입술이 여래의 입술로 내려앉은, 그런 느낌의 키스였다.

“아….”

봄의 밤은 닿은 입술의 온기가 상냥하다고 느낄 만큼 추웠다. 손장난이라면 거의 매일 밤 하고 있었지만 키스는 달랐다. 처음이었다. 어른의 장난인 그쪽보다 어린아이의 뽀뽀를 닮은 이쪽이 은밀하고 애달프게 여겨지는 이유를 여래는 모르겠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피하지 못했다.

채 눈을 감지도 못한 여래가 그대로 굳어있는 사이 용도와 기능을 시험해보는 듯 약간씩 각도를 달리하던 준혁이 조심스럽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십여 센티의 거리를 두고 숨소리가 닿을 만큼 가까이 보는 눈이 갈망으로 젖어있었다.

어쩐지 입술을 붙이고 있을 때보다 가깝게 마주 보고 있는 지금이 좀 더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 여래는 일부러 새된 소리를 냈다.

“뭐 하는 거야!”

“하면 안 되는 거야?”

당연하다. 안 된다. 하지만 왜인지 그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는다.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던 준혁의 눈이 깊어질 때마다 여래는 어려웠다. 알고 있는 것들이, 당연한 사실들이 전부 흔들린다.

“가르쳐 줘.”

“아, 어. 그렇잖아….”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줘.”

입술을 짓씹던 여래는 준혁을 향해 눈을 치떴다.

“하지 말라고 하면 이제 안 할 거야?”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며 사각거렸다. 준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준혁은 여래의 말에 무작정 고개를 끄덕이진 않는다.

“아니.”

손으로 눈꺼풀을 쓸어내려 감기자 벌어진 입술이 맞물리며 겹쳐졌다. 더 이상 아까의 천진한 느낌은 없었다.

사람의 혀란 건 부드럽구나…. 준혁의 목덜미에 매달리며 여래는 입 속에 맴돈 말을 중얼거렸다. 준혁은 더 이상 여래의 뒤를 따라다니며 무언가를 해주기를 바라던 어린애가 아니었다. 이것만큼은 알려줄 필요가 없다는 듯 여래가 모르는 방식으로 어깨를 안은 팔에 힘을 줘 끌어안는다.

갑작스러운 순간 그가 낯설어졌고, 그게 이상하리만치 자극적이었다. 더듬거리지도 망설이지도 않는다. 이 남자는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럴까 저럴까 헤매는 여래와는 달랐다. 마음의 나침반은 극점에서 빙글빙글 방향을 잃었다.

준혁은 자신의 뭐가 이토록 좋은 걸까. 왜 이렇게 사랑스럽다는 듯이 만지는 걸까. 여래는 준혁의 눈에 비친 자신을 마주 보았다.

“나랑 자자.”

그것이 단순히 손을 잡고 잠이 든다는 의미만이 아닌 걸 알면서도 거절해야 할 명분은 없었다.

“여래야, 나랑 자자.”

봄의 밤, 고양이가 길게 울었다. 히트 사이클이었다.

엉덩이가 높게 솟아오르는 야릇한 감각에 여래가 준혁을 밀쳐버려도 그것은 무력한 시위에 불과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반항을 달래듯 목과 허리를 받친 손 안에서 여래는 무너져 내렸다. 달이 바다의 물을 끌어올리듯 그의 인력이 자신의 호르몬에 개입하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운 방식으로.

번식을 위한 구애의 최상층에 서 있는 우성알파는 우아하고 세련되게 낡은 후드 티셔츠를 여래에게서 벗겨냈다. 컨테이너 박스 안이 더운 숨소리로 가득 찼다. 자꾸만 침범해오는 남자애가 미우면서도 매달릴 수 있는 구원 역시 그밖에는 없었다. 흔들리는 침대 위에서 신부의 인형이 넘어져 바닥에 굴렀다.

“아, 윽….”

이어진 채로 흔들리자 가장 안쪽 깊숙한 부분에서부터 저릿한 통증과 쾌감이 동시에 번진다. 딱딱한 끝이 거침없이 문질러댄 내벽이 그 부분을 조이듯 수축하자 준혁의 콧등에도 짧은 주름이 잡혔다. 지금까지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벗어던진 준혁은 여래의 애원에도 허리를 멈추지 않았다.

“아파. 아파….”

아프다는 말에도 준혁은 여래의 허벅지를 붙들어 바깥으로 벌렸다. 벌어진 사이로 더욱 깊이 틈입하는 준혁이 너무나 열중해있어서 여래는 제 말이 들린 건가 싶다.

“아프다구, 흐윽.”

생전 처음인 쾌락이 두렵다. 아프다는 자기 말에 까딱없는 준혁도 낯설었다. 발기한 준혁의 것을 감쳐 문 내벽이 찰박거리는 물소리를 냈다. 허리 짓은 짧은 리듬을 울리며 빨라졌다. 준혁에게 밀린 여래의 머리가 침대를 놓은 벽의 코너에 부딪히기 직전 준혁은 여래의 등을 안아 끌어내렸다. 우는 여래의 뺨과 눈가에 내리는 입맞춤은 물기를 거둬간다. 준혁은 귀 안을 범하듯 속살거렸다.

“그런데 여래야.”

“아읏. 으. 왜….”

“여기 고무신 소리나.”

“…!”

비 오는 날의 은애원, 실내화 안에 고인 빗물이 발에서 미끄러지는 소리가 복도를 울리던 어린 시절. 애액과 정액으로 찔걱거리는 아래를 깊이 휘젓는 남자의 천진한 감상에 여래는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 * *

딱!

석진이 검지와 엄지를 부딪쳐 소리를 내자 턱을 괴고 졸고 있던 여래가 벌떡 일어났다.

“봄이라 그런가 춘곤증?”

“아니….”

“일이 많냐? 다 망해가는 목재소가?”

“그런 말 말어라, 그래 봬두 거기에 달린 입이 꽤 있다.”

물론 여래를 포함해서 말이다. 석진은 손 안에서 펜을 돌렸다.

“집중해. 공부해.”

“그래야지.”

일주일에 한 번씩 석진에게 받고 있는 수리영역 과외에마저 끄덕끄덕 고개가 떨어질 만큼 요 근래는 피곤했다. 등나무 벤치에 앉아 쏟아지는 잠을 애써 참아내며 문제를 보고 있는 뒤로 준혁이 다가왔다. 청남방에 아래에 흰색 티셔츠를 받쳐 입었고, 짙은 베이지색 면바지 밑으로는 마른 발목이 두드러졌다. 어젯밤, 밤새도록 울리고 울려서 마침 내는 목이 쉬어버린 여래가 잔뜩 부은 채로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말끔하고 단정했다. 열 받는다, 진짜.

준혁은 여래를 뚫어져라 보며 무언가를 묻고 싶은 눈치였다. 무슨 소릴 할지 모르는 준혁이 입을 전에 여래는 일어났다. 어제 준혁이 마음껏 박아대 아직도 징징 울리는 아랫도리에 격통이 일었다.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져 험악해진 여래를 준혁은 무서워하는 기색 없이 그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여긴 왜!”

“공강이야.”

“나 지금 공부하는 거 안 보여?”

“방해하지 않았어.”

“지금부터 할 거잖아. 가.”

“안 해. 있을래.”

“가라니깐.”

보다 못해 나선 건 석진이었다.

“야, 전세 냈냐? 아무 데나 앉아요. 여기 신경 쓰지 말고.”

두어 번 여래 옆에 있는 서로를 보고 난 후, 준혁과 석진은 지나가다 목례 정도는 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곁을 허락해주지 않는 것에 대한 시위인 건지, 꼼짝하지 않고 노려보다가 곧 풀이 죽어선 엎드리고 잠이 들어버린 준혁에 여래는 혀를 찼다.

따가운 봄볕에 방치된 준혁의 얼굴이 타고 있었다. 잎사귀를 스치는 햇빛을 여래는 연습장으로 가렸다. 움찔거리던 눈가가 잠잠해졌다. 보고 있던 석진은 펜을 갈피 삼아 책 사이에 끼우며 덮었다.

“오늘은 그만하자. 내일이나 언제나, 시간 잡지 뭐. 일 때문에 안 되려나?”

“왜?”

“어째 끼어 있는 게 쑥스럽기도 하고. 그래가지고.”

“그런 거 아니야.”

“뭐가 아니야.”

“네가 상상… 하는 그런 거.”

알파와 오메가의 그렇고 그런 사정들. 주기니 히트싸이클이니 하는 것들. 페로몬이니 섹스니 하는 것들. 부정하면서도 뺨에는 홍조가 오른다.

여래는 불편하게 자세를 비틀었다. 마구 박아오는 준혁을 견디느라 엉덩이에는 멍이 다 생겼다. 섹스를 할 때 준혁은 새신랑 같은 독점욕으로 여래에게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려 들었다.

어렴풋이 두 사람을 눈치 챈 석진이 이런 데까지 상상력을 부풀리진 않겠지만 제 발이 저린다. 손가락으로 꼽으면 열 손가락의 개수가 남는, 몇 없는 친구에게 경멸당할까 두려워서 서두른 변명에 돌아온 석진의 반응은 예상외로 냉담했다.

“내가 생각하는 게 뭔데.”

“아무튼 아니야. 아니라고.”

“더 꼴불견이야, 안 그런 척하는 거.”

“내가 뭘!”

발끈한 여래가 쳐다보자 석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보기엔 너도 꽤 빠져있어.”

“별소릴 다 듣겠네. 아니라는 데 왜 너는…!”

“그럼 저 사람 비참하게 하지 말고 분명히 하든가. 너 좀 보기 싫다. 다른 데는 다 야무지면서 왜 질질 끄는 거야?”

“하도 귀찮게 해서…. 그래서.”

“아, 나… 점점 못 들어주겠네.”

석진은 마음의 기저에 깔린, 준혁을 얕잡아보는 교만을 정통으로 꼬집었다. 가방을 챙긴 석진은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보자. 연락해.”

똑똑한 놈들은 저런 점이 싫다. 다 알고 있는 척을 해댄다. 하지만 여래는 애먼 준혁의 코를 잡아 비틀었다. 준혁은 어리둥절해 눈을 떴다. 여래는 준혁을 노려보았다.

이 애를 좋아하냐구?

무슨 일인지 몰라 부스스 일어났던 준혁은 다시 웅크리며 여래 곁으로 붙었다.

아이의 맹목은 어른이 되면 사라진다. 그것이 다른 종류의 감정으로 성숙되어 바뀐 것뿐이라고 해도 처음과 같은 질감과 결은 띄는 법은 없다. 준혁은 어떨까. 그는 자신의 가장 마지막에 숨겨진 부분까지 탐닉했으므로 곧 흥미를 잃을지도 몰랐다. 자기 비하 같은 게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이 그랬다. 불친절하고 이를 세워서 쫓아내기 바쁜 여래는 그저 스러져가는 목재소의 경리 직원이자 잡역부일 뿐이었다. 도대체 어떤 점에 그토록 자신에게 매료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준혁이 바치는 숭배에도 불구하고 여래에게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흠결이 있었다.

예전에 가졌던 형으로서의 나았던 점들은 모두 뒤처지고 없어졌다. 지금 자신은 많이 공부해 똑똑한 것도, 주어진 기회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여래가 준혁에게 이제 가르쳐 줄 수 있는 지식이라고는 나무의 수령과 목재의 용도별 구분법 정도일까.

어느새 준혁은 훌쩍 자라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제는 높은 선반 위의 물건을 향해 까치발을 한 여래의 뒤로 손을 뻗어 대신 꺼내주려 들지를 않나 괘씸하기 그지없다. 유전적인 디자인에 있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열성 오메가이기 때문에 페로몬이 약하며 남자이기 때문에 생식이나 발정에 또한 뒤진다. 시설에 있었을 때야 더 넓은 세상을 몰랐으니, 아니 준혁의 무릎을 핥아준 사람이 자신밖에 없었으니 여래를 대단한 무엇으로 여겨왔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무뚝뚝하고 냉정해 보여도 그것을 상회하는 매력으로 준혁은 제법 쓸만한 남자가 되어있었다. 지나가던 여자애들이 등나무 책상 위에 엎드려 잠든 준혁의 옆에서 눈에 띄게 걷는 속도를 늦췄다가 아쉬운 듯 천천히 앞으로 향했다.

“…헉!”

여래는 자고 있는 준혁의 코를 한 번 더 힘껏 잡아 비틀었다. 깜짝 놀라 일어난 뺨에는 기대어 자던 나무 등걸의 자국이 달려 있었다. 찬바람이 일게 자리를 뜨는 여래가 왜 그런지 단서를 찾으려는 준혁이 반 발자국 뒤에서 눈치를 살피며 걸었다.

재게 걷는 여래를 따라 걷는 준혁이 부지런했다. 여래는 따라오는 준혁이 안심되면서도 싫다.

가버렸으면. 이 혼란을 가지고 준혁이 가버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보도블록의 발걸음 소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준혁을 알면 알수록, 그와 비교되는 자신이 초라하게 여겨졌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괜찮다고 애써 만족한 현실을 일깨우는 준혁이 밉다. 미워진다.

정말 그것 뿐?

신호등의 불이 빨간색을 가리키고 있었다. 틀린 답을 낸 퀴즈 문제에서처럼 오답의 사인이 깜빡였다. 아니, 아니. 사실은… 싫은 건 그게 아니다. 이 차이를 의식하는 자신이 싫다.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생의 조건들을 깨닫는 자신이 싫었다. 커다랗기만 한 이 어린애를 신경 쓰는 마음이 싫었다.

어린애의 마음은 변덕스러우니까…. 그게 당연한 거니까…. 언제건 준혁은 여래를 싫어할 자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너로 인해 혼란스러워진 나는?

신호등에서 멈추게 되어 옆으로 나란히 선 준혁이 우물쭈물 어깨에 팔을 걸쳐왔다. 걷어내려는 손을 되레 꽉 잡으며 준혁은 비키지 않았다. 그것이 의문에 대한 어떤 답도 아님을 알면서도 안심하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

* * *

그 날이 되면 핑크색으로 이 센티에서 삼 센티가량 부풀어 오른 비부를 검사하며 핥는 혀가 음란했다. 준혁은 여래가 제대로 발정하고 있는지를 확인해보는 것이다. 고양이처럼. 부끄러워 엉덩이를 내민 채 얼굴을 베개에 묻으면 달래듯이 뒤로부터 안아 부드럽게 삽입한다.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소리가 그와 동시에 뱉어지고 이어지는 허리 짓에 머릿속이 하얗게 번져갔다.

아기가 생길까? 기대와 두려움이 범벅되어 마지막 순간에는 항상 그를 밀어냈다. 뿌려진 정액이 엉덩이를 따라 방울지어 흘러내렸다. 그것이 야하게 느껴지는지 마지막 남은 열기를 쥐어짜 준혁은 아직 일어나 서 있는 제 것을 허벅지며 사타구니에 비벼 냄새를 배이게 했다.

안에다 싸지 못해 심술이 난 모양이었다.

“하지 마….”

“가만있어.”

준혁은 낮게 으르렁대며 여래의 등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던 아침의 그는 없었다.

늘 준혁의 주변을 투명하게 감싸고 있던 소년과 청년의 경계는 단번에 뒤집혀 그는 이제 그저 남자가 된다. 검고 깊은 눈동자는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 힘이 풀려 앞으로 엎어지려는 여래를 팔로 안아 받치며 준혁은 몸을 겹쳤다.

“안에서 하지 않을게.”

“응… 거기… 싫어.”

“아기는 만들지 않을게. 여래야.”

“….”

“그건 좋지 않은 일이니까.”

여래는 몸을 굳혔다. 바보 같으리만치 자신을 원하고 또 원하는 욕망에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지만, 자신은 어딘지 고장 나 있으며 그래서 아이는 만들지 않는 게 좋다고 말하던 때의 준혁을 여래는 아직 잊지 않았다. 의견 따위는 내세우지 않는 무감각한 아이도 주장하고 싶은 소절 한 구절쯤은 있었던 거다.

그것은 준혁의 진심이었다.

준혁은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래는 다르다. 은애원에서부터 꿈꿨었다. 집이라든지 가정이라든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래부터 가지고 태어난 것을 희망했었다. 그러니까 준혁과 끝까지 갈 수는 없다. 준혁과의 관계에는 여래가 꿈꾸는 미래가 없었다.

가정을 만들고 싶다. 아이가 가지고 싶다. 하지만 이 바람에 싫다, 고 준혁이 답한다면 지금까지 지켜온 사소하지만 전부인 모든 것들이 걷어차이고 짓밟혀지겠지. 아마도 자존심이라는 이름의 보호막이.

“아, 좋ㅇ… 좋아. 좋아. 준혁아.”

목에 매달리는 여래에 준혁은 아래를 더욱 깊숙이 박아 넣었다.

“흐으….”

이 관계에서 약자이고 싶지 않았다. 좋아, 라고 내뱉는 한숨 같은 건 이어져 있는 아래에 대한 흥분으로 착각하게 하면 족했다. 이제 겨우 준혁을 좋아할 준비가 되어있던 이때 그와 가장 멀어진 기분이 들게 된다니. 씁쓸한 일이었다.

여래는 준혁을 끌어안았다. 품을 파고드는 연인이 사랑스러워 준혁은 서둘러 입술을 찾았다.

이래서 처음부터 가라고 했던 거였는데.

하지만 입술로 넘겨져 준혁에게 삼켜진 그 말이 다시 꺼내어지는 법은 없었다.

짧은 봄은 덧없이 끝났다. 마치 책장을 넘기듯 여름이 곧바로 닥쳐왔다. 짙고 무성해진 녹음이 목재소에 그늘을 드리우면 여래는 그 아래에서 잠이 들곤 했다. 칠월과 팔월의 낮 최고 기온은 육체 노동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일의 능률을 이유로 여름의 두 달간은 오후 한 시부터 네 시까지의 작업시간을 소금 한 조각을 먹어 나트륨을 섭취한 후 낮잠을 자는 걸로 대체했다. 날씨를 감안한다손 치더라도 이상하리만큼 일이 없는 요즘이긴 했지만 의외로 작은 사장의 기분은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

산 중턱 시원한 그늘에 자리를 잡고 졸고 있는 여래의 옆으로 준혁이 다가와 앉았다. 아이스크림과 포장 용기에 담긴 냉모밀은 서서히 더워지다 완전히 녹아버렸다. 여름 방학 훈련은 오전의 세 시간이 전부였으므로 준혁은 한가했다. 방학 끝 즈음의 전지훈련을 제외한다면 학기 중에 비해 시간은 남아돌았다. 덕분에 준혁은 눈 앞머리가 길게 닫힌 잠이 든 여래의 얼굴을 실컷 볼 수 있었다. 땀 냄새를 맡고 찾아온 커다란 산모기를 부채질해서 쫓는 동안에도 여래는 새근거리는 숨의 리듬을 깨지 않았다. 깊이 잠들었나 보다. 어쩌면 밤마다 괴롭히는 자신 때문일지도 모른다. 섹스는 체력을 요했다. 작은 여래에겐 벅찬 일일지도 몰랐다.

준혁은 주변을 돌아본 후 망설이다 짧게 입을 맞췄다. 잠에 취한 채로 입술이 응해왔다. 깊어지려는 자세에 체온을 더한 열기가 물큰해져 준혁은 몸을 비켰다.

누가 집어서 훔쳐가지 않을까?

귀여운 사람의 무방비한 모습에 괴로운 상상이 이어졌다. 여래가 없어지면 어쩌지. 생각만으로도 심장에는 칼이 담가졌다. 아파졌다. 꼭 꿈같은 나날이었지만 그래서 괴로운 시간들이었다. 준혁은 여래를 끝없이 바라보았다.

여래가 만질 수 있게 해주고 곁에 있을 수 있게 해주다니 너무나 좋다. 여래는 세상에 단 하나였다. 그러므로 오로지 유일한 여래를 만나 여래와 밥을 먹고, 섹스를 할 수 있단 것은 행운이었다. 지구에는 여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준혁은 그런 비참하고, 불우한 사람 중의 하나가 될 수도 있었다. 아주 많은 경우의 수로.

준혁은 녹은 얼음을 손으로 훑었다. 지금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현재는 서서히 형체를 무너뜨리며 사라지고 있다. 얼음처럼.

그러니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쁜 일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시설에서처럼 여래는 등을 돌려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그의 마음은 나부끼는 셀로판지처럼 불투명해서 뻗친 손을 향해 떨어지다가도 변덕스럽게 휙, 방향을 바꿨다. 늘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는 준혁과는 반대로 여래가 어떤 말로도 마음을 표현하는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바보라고, 멍청이라고 핀잔이나 주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다른 사람과 같은 적의나 경멸은 없었다. 그래서 준혁은 여래의 마음이 더욱 어렵게 느껴졌다. 그 말을 할 때의 여래는 마치 그것이 서로 간의 특수한 애칭으로 느껴지리만치 아주 다정했다.

“이 바보야.”

그 말을 하는 여래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래서 준혁은 여래가 자신을 어리숙하게 취급할 때가 좋았다. 다정한 무엇이 된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냈다간 여래는 싫어하는 걸 넘어 두 번 다시 자신을 무엇으로도 부르지 않을 듯한 기분이 들었으므로 준혁이 이런 속내를 여래에게 털어놓는 일은 없었다.

“으아아, 죽겠다.”

여래가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마저 남은 작업을 마치러 공장으로 내려갔어도 준혁은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엄마와 여래를 평생 기다려 온 준혁은 기다림이 익숙했다. 기다리는 동안 누군가를 찾고 그리워하는 감정은 입고 있는 옷이 되었고 준혁은 그 모양대로 자랐다. 그러므로 그것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일은 없다. 기다림은 이미 준혁의 일부였다.

여래가 한 말을 생각하거나 웃는 얼굴을 떠올리고 있으면 시간은 조밀한 비늘의 파편을 흩트리며 흘러가곤 했다. 반짝반짝, 무척 예뻤다.

은박지처럼. 석영처럼. 여래의 운동화 상자에 가득했던 보물들처럼.

준혁은 눈을 감았다. 잠이 쏟아졌다. 섹스에 체력이 필요한 건 여래만이 아니었다.

반짝반짝.

그러나 또다시 빛이다. 억지로 잡아 흔들어 깨우는 듯한 강한 빛에 준혁은 눈을 찌푸렸다. 장난스러울 정도로 금방 왔다 사라지는 빛이 시작된 곳을 찾는 건 쉬웠다. 여래는 한 움큼의 빛을 움켜쥐고 산기슭 즈음에서 웃고 있었다.

“올라가기 귀찮아서!”

섬광이 턱과 뺨을 쓰다듬었다. 준혁은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이제 일어나아, 이 바보야. 저녁 시간이잖어! 밥 먹게 내려와!”

또다시, 찌를 듯한 반사광이 덮쳐와 준혁은 항복의 의미로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겅중거리는 걸음으로 두 번을 한 번으로 줄여가며 내려오자 여래는 동그란 원반을 검지에 끼우고 돌리며 준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금 전 눈을 부시게 했던 빛을 기억하는 준혁의 눈이 무심결에 찌푸려졌다.

“뭐지? 그건?”

“시디.”

“시디.”

말을 받아 확인하듯 다시 거듭하는 준혁을 향해 여래는 들고 있던 시디를 보여주려 손을 내밀었다.

“음악 시디야. 사무실에 아저씨들이 놓고 간 거 많아. 아저씨들 배달하다 보면 심심하니까 의외로 별거 별거를 다 듣는다? 뽕짝만 듣는 게 아니라고요. 제일 웃긴 건 불경 시디였다? 히히. 잠만 더 올 거 같은 데 웃기지 진짜. 그런 걸 왜 듣고 앉았나 몰라.”

준혁은 시디가 낯설었다. 센터에서 정보 저장 매체는 주로 클라우드 기반이었다. 기껏해야 유에스비 정도가 가장 고전적인 형식의 매체였다. 그런데 시디라니. 흥미를 가지고 관찰하는 준혁에게 불쑥 심술이 인 여래는 시디를 뺏어 들었다. 데이터 면을 뒤집어 확인한 라벨에는 냇킹콜 베스트, 라는 조잡한 프린팅이 영어도 아닌 한글로 쓰여 있었다.

“흠. 이거 짝퉁인가봐.”

“짝퉁?”

“지하철 같은 데서 파는 가짜 가수 음반이잖아. 이만 원에 사십 장짜리. 야, 것도 모르냐.”

끄덕끄덕.

“넌 아는 게 뭐야, 임마.”

아는 것이라. 아주 많다. 센터의 연구원들이 임의로 선정한 주입한 지식들에는 연표와 인명, 지정학적 지식과 최신 정보 기술에 대한 내용까지가 광범위하게 들어있었다. 그러나 여래가 말하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닐 터였다. 직접 경험해야만 배울 수 있는 지식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준혁은 무지했다. 준혁의 경험치는 제로에 가까웠다. 느리게 눈을 끔뻑거리는 준혁에 여래는 메이커의 로고가 벗겨져 나간 낡은 플레이어를 가리켰다.

“틀어볼래?”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아마도 영어가 모국어는 아닐, 제삼 세계의 가수 누군가가 불렀을 매끄럽지 못한 발음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Smile, though your heart is aching

Smile, even though it's breaking

When there are clouds in the sky

You'll get by

감정 과잉의 노래는 테크닉마저 서툴렀다. 고르지 못한 음질은 갑자기 소리가 잦아들었다가 커지며 싸구려의 티를 냈다. 그러나 그 미숙한 노래가 묘하게 사랑스러워 여래는 멈춤의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노래 좋네.”

여름의 긴 해는 아직 산을 넘지 않았다. 태양이 마지막으로 흩뿌리는 빛을 받으며 여래는 녹을 듯한 미소를 지었다.

Light up your face with gladness

Hide every trace of sadness

Although a tear may be ever so near

여래가 두드리는 손가락을 따라 플레이어에 앉은 먼지는 자리를 옮겼다. 모두가 가 버린 목재소의 세상과 외따로 떨어진 듯한 정적 속에는 여래가 조그맣게 따라 부르는 느린 멜로디뿐이었다.

그것이 벼린 칼날이 되어 가슴을 얇게 저민다. 준혁은 가슴께에 손을 가져갔다.

That's the time you must keep on trying

Smile, what's the use of crying.

여래는 석양에 휩싸여 부드럽게 경계를 녹이며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여래의 얼굴에 준혁의 가슴은 격렬하게 뛰었다.

웃고 싶다. 웃고 싶다. 강렬한 소망이 치민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준혁은 고장 났다. 의학적으로 증명된 바다. 너와 함께 웃을 수 있다면, 너와 완전한 공명을 이룰 수 있다면 나는 내가 가진 무엇과 그걸 바꿔도 좋아.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준혁은 고장 났으니까.

대신 준혁은 잊지 않기로 한다. 비정상적으로 활성화된 시냅스들 사이에 여래의 미소를 가둔다.

You'll find that life is still worthwhile

If…

뒤로 다가간 준혁은 여래의 티셔츠를 끌어올렸다. 입을 맞춘다. 섬세하게 더듬는 혀가 짰다.

“저기 나… 아직 안 씻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여래의 목덜미는 지금 이 빈 컨테이너를 가득 채운 석양과는 다른 결로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준혁은 단숨에 여래의 티셔츠를 위로 벗겼다.

“상관없어. 너 냄새 나 좋아해.”

you

just

smile

* * *

여름이었으므로 체력을 보충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여래와 준혁은 머리를 맞대고 앉아 여러 가지를 먹어댔다. 손등으로 눈을 가린 채 서로의 마음을 알기 위한 술래잡기가 이어져도 이십 대 초반의 육체는 그것과는 별개로 현실적인 음식을 갈구했다.

처음 준혁이 사오던 간단한 꼬치류에 불과하던 주전부리는 많이 발전했다. 바쁠 때는 간단한 배달음식을 시키기도 했고 급여일에는 돈을 모아 제법 근사한 코스를 먹기도 했다. 그것 역시 중국집이었지만.

어떤 날에는 그저 물을 끓여 달걀을 삶기도 했다. 준혁은 책상 모서리에 두드려 삶은 달걀의 껍질을 까고 있는 여래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성스러운 존재의 강림을 목도하는 표정이었다. 여래로서는 참으로, 부담스러운 순간이었다. 존재의 한 조각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듯 보고 있는 준혁에게 여래는 껍질을 벗겨낸 달걀을 내밀었다.

“먹을 거야? 먹고 싶어서 그래?”

“아니.”

“그럼 왜 그렇게 봐. 달라는 것도 아님서.”

“나는 그렇게 껍질을 까지 않아.”

준혁은 방금 여래가 벗겨낸 껍질을 가리켰다.

“그래서?”

“너는 다르게 껍질을 깐다. 아주 예쁘게. 깨끗하게.”

한창인 성장기에 영양이 부족했던 탓인지 여래는 이가 나빴다. 딱딱하거나 질긴 음식은 잘 먹질 못했다. 고기는 잘게 잘라서, 오징어는 다져서야 겨우 먹었다. 잇몸은 약해서 자주 피가 나고 부어올랐다. 달걀의 껍질이나 생선의 가시가 닿으면 아프게 느껴져 싫었기에 주의 깊게 껍질을 깠던 게 준혁에겐 유달랐나 보았다.

“별거 아냐.”

“너는 달라.”

그냥… 치과가 대개 고액의 치료를 권했기 때문에 가볼 엄두를 내지 못한 것뿐인데. 여래는 머쓱하게 소금을 찾았다. 준혁은 소금을 곁들인 흰자를 어금니로 으깨고 있는 여래가 마치 벽에 걸린 그림이라도 되는 듯 보고 있었다. 거북하리만치 황홀한 시선에 응시당하면서 제대로 먹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입맛이 가셔 여래는 조용히 앞니의 모양으로 베어 문 자국이 남은 달걀을 내려놓았다.

“뭘 봐, 자꾸. 먹는데 불편하게. 사람 먹는데 그렇게 보는 거 아니라고 했지.”

“먹어. 먹어봐.”

“아니, 먹긴 먹을 건데 네가 그렇게 보니까 먹을 수가 없다고. 구경났냐?”

“보고 싶어. 네가 먹을 땐 입을 꽉 다물고 먹어. 입술에 주름이 잡혀. 그리고 그것이 움직인다. 뜨거운 걸 먹을 때면 새빨개지고 부풀어 오르지. 맛있을 때는 웃기도 하면서.”

“야….”

“너에 대해 전부 알고 싶어. 나는 너무 단순해. 언제나 똑같아.”

“….”

“하지만 너는 달라. 너는 언제나 다르게 먹고, 언제나 다르게 웃어. 알고 있어? 그건 너무 멋져. 예뻐. 대단해. 알고 있어?”

모르겠다. 그런 기분을 알 리가 없다. 달걀의 노른자에 메였던 목이 가슴까지 답답하게 했다. 냉장고 안에서 꺼낸 보리차를 담은 유리병이 금세 땀을 흘렸다. 등에 달라붙은 척척해진 티셔츠를 펄럭이자 준혁이 다가와 앉았다. 낮의 매미를 밤의 귀뚜라미가 대신하고 있었다. 찌륵이는 울음소리에 잠시 정신을 팔자 준혁은 투정하듯 가슴을 깨물었다.

“아얏.”

“여기. 귀여워.”

“내 거야. 너무 당당하게 만지지 말아라. 어?”

“여래 젖꼭지, 귀여워.”

“…뭐래, 정말!”

음흉한 장난이 익숙해질 정도로 몸은 서로에게 무르익어 갔다. 그러나 실컷 애무 받으면서도 이것이 사랑인지,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 * *

“일어나.”

“…으음?”

“가자.”

평일의 어느 날 자고 있는 여래를 준혁이 깨웠다. 어차피 자유시간이었으므로 무얼 하든 간에 제시간에만 돌아온다면 상관은 없었다. 그러나 목재 공장 안을 벗어나기를 주저하는 여래의 등을 떠밀어 준혁은 길을 재촉했다. 누워 있다가 일어나는 바람에 뒤로 뻗친 머리를 매만질 새도 없이 얼결에 끌려간 치과는 세련된 5층짜리 건물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다.

뭔가 사전에 이야기가 되어 있던 모양인지 아이디 카드를 내민 준혁에게 접수원은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아름답다는 범주에 넣을 만한 웃음이었다. 먼지와 땀 냄새가 나는 아저씨들만이 익숙하던 시야가 갑자기 화사해졌다. 서비스 직종이 가지는 세련된 매너가 낯설어 여래는 고개를 수그려 수줍게 웃었다.

서명을 마친 준혁은 갓 난 강아지처럼 비틀대는 작은 미소를 건 여래를 들여다보다 팔을 강하게 잡았다.

“아파.”

“이쪽에서 기다리는 거야.”

“이것 좀 놔….”

“이리로 와. 접수했어. 여기서 볼일은 더 없어.”

준혁은 여래를 모카색의 인조가죽 소파의 구석으로 끌고 갔다. 여래를 구석에 박아두고 옆으로 앉은 준혁은 주변을 가로막듯이 등받이에 팔을 걸쳤다. 제가 끌고 온 주제에 준혁은 무엇에서인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무표정임에도 불구하고 읽히는 감정이 곤란할 정도로 생생했다.

뭐야 정말…. 여래는 투덜거렸다. 미리 이야기를 해 주었다면 조금 더 깔끔하게 입는 거였다. 막무가내로 끌고 오는 통에 땀 냄새가 나는 흰색 티셔츠에 검은 바지 차림 그대로인 게 신경 쓰였다. 작업용 바지에 달린 주머니의 닳은 솔기를 매만지고 있는 여래의 뒤로 준혁은 허리를 끌어안으며 어깨에 턱을 괴었다.

“미쳤어? 안 놔?”

기겁을 한 여래가 팔을 푸르려 버둥거렸지만 준혁은 끈질겼다. 떼어내면 다시 달려들고, 자리를 피하면 곧장 일어나 바싹 다가와 앉았다. 의아하다 못해 귀찮을 지경이었다. 승강이를 하며 밀어내려 하자 준혁은 이제는 떼를 쓰듯 힘으로 여래를 얽었다. 단조로운 피아노의 선율이 흐르는 라운지가 둘 때문에 소란스러워졌다.

“그만해. 밖에선! 좀!”

“왜.”

“그… 남자 둘이서 달라붙어 있고. 뭐… 이상하잖아.”

“나는 알파고 너는 오메가야.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끌어안고 있지 않으면 아무도 그걸 모를걸.”

“우리가 사이를 다른 사람들이 몰랐으면 해?”

“나 그런 거 싫어. 오메가인 거 다른 사람들 아는 거.”

준혁은 카운터를 노려보며 다시 물었다.

“저기 저… 여자도?”

“저 여자라니. 말본새 봐라. 버릇없게시리. 왜 그래 너?”

웅얼거리며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이 답답해서 다그치자 준혁은 꽥 하고 소리를 질렀다.

“네, 네가 저 여자한테 웃어줬으니까!”

까르르, 하는 숨죽인 웃음이 데스크 너머로 퍼졌다. 여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등짝이며 목을 밀어 때리는데도 준혁은 씩씩거리며 그 손을 피하지도 말리지도 않았다. 덩치이든 힘이든 상대가 아니니 이쯤은 맞아줄 수 있다는 여유가 느껴져 여래는 더욱 약이 올랐다.

“진짜, 미쳤나! 곤란하게…!”

여자를 의식해 불균일하게 번지는 여래 얼굴 위의 홍조를 준혁은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타인을 의식하는 여래가 불쾌했다. 엑스레이를 찍고 신경치료를 받는 동안 내내 준혁의 볼은 부어있었다. 마치 이에 구멍이 난 여래 대신인 듯이 퉁퉁.

치료가 끝나자 삼 주 후에 내원하라는 말과 함께 카운터의 여자는 다시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려는 여래의 손을 준혁이 잡았다. 끝까지 여자와 여래의 사이를 막아서려 드는 모습이 우스웠다.

“돈 다 냈어. 가.”

“됐어. 나도 카드 있어.”

“일 년에 두 번 바우쳐가 나와. 나는 아픈 데가 없으니까 너한테 줄 거야. 행정과에서도 허락받았어.”

“어? 어… 고마워.”

“이젠.”

“응?”

“이젠 내가 너를 돌봐줄 거야.”

한 대 맞은 듯 얼떨떨해진 여래의 팔을 잡아끌며 준혁은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이 치과는 안 되겠어. 다른 데를 알아봐야겠어.”

초조하게 말하는 준혁이 흘끔거리며 방금 나온 건물을 뒤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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