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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 여래 (7) (7/23)

1부 : 여래 (7)

작업 기간이 짧아진 여름을 기점으로 인부들은 하나 둘 떠났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더위보다는 벌이가 중요한 사람들의 순서로 공장에서 얼굴이 사라졌다. 후덥지근한 바람을 뿜으며 목재를 붙이는 본드를 말리던 대형 선풍기는 더 이상 돌아가지 않았다.

목재소는 폐업에 가까운 휴업 상태를 유지했다. 나무 가공 공장이 붙은 산이 오랜 경매 끝에 팔리게 되면서 작은 사장이 아예 사업을 정리할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퍼졌다.

길산이었구나, 여기도. 여래는 중얼거렸다. 그럼 실업인가.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멍했지만 한편으로는 차분해졌다. 먹고 사는 걱정은 늘 하고 있어서 위기감은 딱히 들지 않았다. 대학생에 불과한 석진에게 이야기해봤자 보탬 없는 걱정만 늘 것이었다. 다시 새로운 직장을 구할 때까지 말하지 않는 게 낫겠지 싶다.

그리고 또 있다. 말하지 말아야 할 사람은 하나 더 있었다. 전지훈련으로 일주일간 경북 어느 소도시에 내려간 준혁이다. 돌봐준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하긴 했지만 준혁은 여래보다 어렸고, 여래보다 더 물정에 어두웠다. 적어도 여래의 눈에는 그랬다. 젖 냄새를 찾아 얼굴을 비비는 강아지같이 늘 가슴께를 빨아오는 준혁은 전혀 의지가 되지 않았다.

하계 훈련만 해도 그랬다. 간만에 싫은 표정을 역력히 띠고 퉁명스럽게 이야기를 꺼낸다 했더니 고작 일주일간의 합숙을 불평하는 게 아닌가.

“가기 싫지만, 안 가면 안 된대. 여름과 겨울 두 번은 필수거든. 다음 주야.”

“잘 다녀와.”

“….”

“왜 그래.”

“가기 싫어. 떨어져 있기 싫어.”

솔직하다 못해 자기 자신을 전부 털어 그 감정의 밑바닥까지 죄 내보이는 준혁에 여래는 피식 웃음이 터지려는 걸 겨우 참았다. 조금 놀려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팔다리 쭉 펴고 자겠네에. 잘됐다. 빨리 가버려.”

“난 좁아도 너랑 자는 게 좋아.”

여래가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리자 준혁은 물었다.

“여래는 왜 나랑 반대로 말하는 거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조금은 좋아하기 때문에 일부러 더 나쁘게 구는 복잡한 계산을 모르는 순진함이 사랑스러웠다. 거짓말을 하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는 뒤로 준혁이 우울하게 덧붙였다.

“휴대폰도 다 뺏어 간다고 했어. 전화도 못 해.”

“그럼 일주일 동안 난 자유다. 야호!”

주먹을 쥐고 환호하는 시늉을 하는 여래를 노려보는 준혁의 눈이 매서웠다.

“너… 어디 갈 거야. 뭐를 할 거야.”

“모르지, 지금부터 생각해보지 뭐. 아, 생각해보니 치과 예약이 있다.”

“뭐?”

“거기에나 가 볼까?”

“나를 빼고는 못 가. 예약해주지 않을 거야. 안 돼. 절대 안 돼. 넌 또, 거기에 가서…!”

불안에 못 이긴 준혁이 타닥, 바닥에 발을 굴렀다. 하나, 하나둘, 하나둘셋. 빠르고 초조한 리듬이었다. 이러다가 애 울리겠네. 여래는 재빨리 항복해버리고 말았다.

“농담이야. 가긴 어딜 가.”

“…재미없어.”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알잖아. 갈 데도 없는걸.”

“일주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

하지만 아마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다. 지루한 시간은 더욱 천천히 흐르는 법이니까. 그러나 여래는 굳이 그 말을 덧붙이지는 않는다. 준혁은 이미 충분히 가기 싫어하고 있었으므로.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없는 밤이었다. 하릴없이 문제집을 넘기던 여래는 손을 멈추고 옆에 놓인 휴대폰을 쳐다보았다.

“정말이네….”

정신무장과 단합을 위해서 휴대폰을 압수한다는 그 말이 엄포만은 아니었는지 준혁에게서는 이틀째 연락이 없었다. 여래는 다시 문제집을 노려보았다.

십 대의 마지막과 이십 대의 전부를 보낸 목재소에서의 밤이 외롭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밤하늘의 별처럼 언제나 자신은 먼 거리에서 혼자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이 쓸쓸하게 여겨지는 건 왜일까.

여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선으로 타들어 가는 모기향에 부채로 풀무질을 하던 구부정한 어깨. 녹슨 펌프에서 길어 올린 지하수로 등목을 시켜주면 도망가던 피부의 열기와 돋아나던 소름. 손을 펴 서로의 손금을 서로의 손금에 겹쳐보며 관찰하던 풋풋한 시선. 포도를 먹다가 침대를 짚어서 으깨진 껍질이 부주의하게 이불 위에 자국을 남겼던 그 때.

여래는 눈을 세게 비볐다.

그 애의 모든 것이 그리웠다. 그리움에는 무게가 있었다. 가슴이 점점 버거워지다 마침내 하중을 견딜 수 없게 되면 여래는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러나 여기에마저도 이불은 준혁의 모양으로 움푹 패 있었다.

이래서 알고 싶지 않았다. 진짜 마음 같은 건… 여래는 체취가 남은 이불에 뺨을 기댔다.

깨달은 외로움은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야속하게 바라보다 들려오는 사무실의 전화기 소리에 일어난 여래는 수화기를 들었다. 아마도 사장일 터였다. 사장은 원감과 비슷해서 가끔 불을 끄고 문을 단속했는지를, 여래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를 전화로 묻곤 했다. 자긴 어쩌면 이런 사람들만 만나는지 모르겠다. 팔자가 그런가 봐. 귀찮아서 심드렁하게 인사가 나갔다.

“여보세요.”

밖으로 싸돌아다니지 않고 잘 지키고 있습니다요, 라고 여래가 속으로 빈정거리던 때였다.

-나.

의외의 목소리였다. 여래는 침을 삼켰다. 잠깐의 마가 뜬 사이에도 공중전화의 동전이 짤그랑거리며 넘어갔다. 준혁이었다.

-나야. 최준혁.

여래도 알았다. 지금까지 계속, 보고 싶어하는 중이었으니까 더더욱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나오는 말은 얼뜨기만 했다. 꼭 준혁처럼.

“어떻게… 준혁아?”

-구멍가게에서 만원은 다 바꿔주질 않았어. 공중전화기에 오백 원이 들어가면 그냥 넘어갔어. 천원은 넣는 데가 없었다.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백 원을 나눠서 바꾸느라고 오래 걸렸어. 어제 전화하고 싶었는데.

“전화번호는?”

-책상에 붙은 스티커를 외웠어. XX목업사. 031-000-0000, 자원재생업체도 겸함.

“기억력 좋네.”

-나는 잊어버리지 않아. 휴대폰보다는 일반전화가 더 싸니까 오래 통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저번에 외웠어. 열자리 숫자 정도는 쉬워.

“그래.”

-뭘 하고 있었어?

딸깍, 공중전화기가 동전을 먹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를 보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해버릴까 봐 여래는 수화기를 가슴에 묻은 채 숨을 내쉬었다. 하지 않은 말이 흩어져 없어지길 바랐다. 다시 수화기를 얼굴에 가져다 댄 여래는 침착하려 애썼다.

“먹고 씻고 잘 준비.”

-나도 그래.

동전이 두 개 더 넘어갔다. 이백 원이 아쉬워서 여래는 서둘러 물었다.

“어디에 있니?”

-경북 김천시 대항면….

“아니 아니, 지금 너 말이야. 공중전화지?”

-응.

“뭐가 보이는지 얘기해줘. 나는 모르니까.”

알고 싶었다. 준혁이 어디에 있는지, 그는 무얼 보고 있으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

-합숙소야. 복도는 어두워. 형광등이 어쩌다 한 개씩만 켜져 있거든. 중앙 현관에는 휴게실이 있어. 나는 거기에 있고.

“더 얘기해 봐.”

-행운목이 네 그루 있어. 그런데 곧 죽을 거 같아. 거의 다 말랐어. 누래. 그런 게 세 그루야. 칠십오 퍼센트지. 유리창은 크고 넓은데 굉장히 더러워. 더러워서 싫어.

“좀 더….”

동전이 넘어가는 소리가 우물에 떨어진 조약돌처럼 맑게 떨어졌다. 길게 이어질 통화에 여래는 사무용 철제 책상에 수화기를 잡고 엎드렸다. 서늘한 쇠 냄새에 눈을 감자 잠의 베일이 드리워졌다.

-산 한가운데 있는 연수원이라 벌레가 많아. 지금도 손을 흔들어서 쫓고 있어. 하지만 물가에는 반딧불이 있었어. 아주 신기했어.

“응.”

-너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

-여래가 보고 싶어.

“….”

-여래를 만지고 싶어.

여래는 입술을 열었다.

“…나도.”

뚜,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고백은 사라지고 말았다. 동전을 넣는 게 늦은 준혁이 서둘러 주머니를 뒤지는 사이였다.

* * *

여름의 끝에서 준혁과 여래는 각자의 수화기를 붙잡고 서 있었다. 사소한 안부들 속에서 어렴풋이 서로가 이어지기를 바라면서도 둘 중의 아무도 섣불리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는 법은 없었다. 더 이상 다가서면 신기루 같은 지금이 휘발되어 날아가 버릴까 두려웠다.

설핏 스쳤던 긍정의 대답을 반신반의하면서도 준혁이 구태여 재차 물어보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저 오늘 먹었던 메뉴라든가 운동장을 달린 횟수 등을 말하면 듣고 있는 여래가 나지막하게 숨을 불어넣는 대화가 이어졌다. 그것만으로도 가슴께가 뻐근해지는 통증에 준혁은 붙이는 파스의 패치를 들고 심각하게 사용례를 읽어야만 했다. 빠른 진정효과, 라는 문구가 매혹적이어서 붙여본 파스는 차가웠다. 단지 그뿐이었다.

광고 문구와는 달리 시원하게, 빠르게, 간편하게 마음의 고통은 사라지지가 않았다. 파스를 뜯어낸 자국 아래로 피부가 화끈거렸다. 멍하니 가슴 부근을 누르고 있는 준혁을 두고 갈아입을 옷을 챙긴 선배가 욕을 지껄이며 밖으로 나갔다. 두 명이서 한 조로 배정받은 방의 메이트인 일 년 위의 선배는 다른 방으로 놀러 가 버리는 일이 잦았다. 지나치게 세게 방문을 닫는다든지, 일부러 방을 어지럽힌다든지 하는 유치한 괴롭힘도 있었다.

그것은 1학년의 꼴통으로 불리고 있는 준혁에 대한 일방적인 불쾌감 때문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준혁에게는 이 익숙한 패턴의 수동적 공격이 차라리 편하게 느껴졌다. 이런 일은 흔했다. 다루기 어렵지 않았다. 그저 죄송하게 있으면 된다. 자신이 끼친 불편에 대해 미안해하며 반성하면 된다.

선배가 나가버리고 나면 준혁은 혼자 방에서 에어컨을 켜고 팔을 베개 삼아 드러누웠다. 여래의 윤곽이 닫힌 눈의 어둠 속에서 서서히 부상했다.

고즈넉하게 웃는 그 얼굴, 키스를 할 때 긴장으로 떨던 목, 조심스럽게 어깨를 잡던 손가락. 포개져 오던 가슴. 하얀 피부와 가느다란 손, 계란과 우유와 설탕의 냄새가 나던 그의 구석구석들. 보고 있지 않아도 그를 그릴 수 있다.

머릿속에서 여래를 재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가 보고 싶을 때면 늘 해왔던 일이었다. 사진이 없었기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서툴고 거친 선으로 완성된 여래는 언제나 웃고 있었다. 준혁이 가장 사랑하는 표정이었다.

준혁은 아차 싶었다. 그래, 사진.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이제 준혁은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으니 찍어두면 언제건 다시 볼 수 있는데. 다음에 만나게 되면 꼭 사진을 찍어야겠다. 가지고 싶은 게 하나 더 늘었다. 곤란했다.

어떡하지.

준혁은 초조하게 손톱 끝을 깨물었다. 착한 사람은 상을 받는다. 욕심쟁이는 벌을 받는다. 도깨비 방망이로 얻어맞는 혹부리 영감의 삽화는 무섭고 교훈적이었다. 준혁은 꼭 자신이 그 두 번째 혹부리 영감이 된 것 같았다. 계속 계속 뭔가를 바라던, 탐욕을 멈출 수 없어 벌을 받던 그 사람이.

다시 여래를 만났을 때는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충분했다. 오후 3시의 빵 가게처럼 어딘지 설레게 하는 냄새가 가득한 곁만으로도 준혁은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행복해졌으니까. 하지만 그다음에는 입을 맞추었고 그다음에는 섹스를 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황홀한 감촉이었다. 그러자 곧 불안해졌다.

이렇게 완벽하게 충만한 행복감을 정말로 내가 가져도 되는 걸까.

여래…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유일한 나의 여래.

여래와 함께 있으면… 따뜻한 그의 안으로 들어가고… 나에 맞추어 그가 흔들리며 나는 그의 일부가 된다. 그런 대단한 행운을 정말로 내 것일까? 은애원 원감이 언제라도 문을 열고 들이닥칠 것만 같다. 멈추지 않는 불안은 부피를 늘려가며 준혁을 좀먹고 있었다.

더 많은 것을 원해. 네 웃음이 나만의 것이 되기를 원해. 더, 더, 더.

여래를 향한 마음의 관성이 무한의 동력으로 전진했다. 발을 멈추면 달리던 몸은 가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고꾸라져 버릴 테지.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벌이다.

여래를 안고 싶다. 갈라진 부드러운 틈으로 침입하고 싶다.

“아… 으….”

부풀어 오른 성기를 이불에 비비다가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되면 준혁은 입 안에 들어간 모래를 뱉으며 한낮의 태양 아래를 뛰었다. 고되게 몸을 혹사시키고 나면 잠깐 여래를 잊는 순간이 찾아왔다. 오직 그걸 바라며 준혁은 뛰고 또 뛰었다. 뛰고 나면 수돗가에서 물을 틀어 달아오른 머리 가죽의 열기를 식힌다. 고개를 흔들자 조심성 없는 물줄기가 티셔츠 위로 짙은 궤적을 남겼다. 준혁은 이미 젖은 티셔츠를 당겨 얼굴을 문질렀다.

이 그리움이 곧 끝날 수 있도록 시간이 확실하게 일을 하기를 부탁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어서 돌아가고 싶다. 여래 곁에 있고 싶다.

* * *

매미가 퇴장한 어느 밤, 슬며시 시원한 바람이 한 줄기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 어딘지 들떠있는 준혁에 그 날 저녁 메뉴로 고기가 나왔음을 여래는 눈치챈다. 여래는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

“너, 혼자 맛있는 거 먹었지. 뭐 먹었냐?”

“갈비랑 잡채.”

“누구 생일이야?”

“응. 코치가. 그래서 아기랑 사모님이 왔어. 케이크를 들고. 반찬이랑.”

“오, 대박. 생일축하 노래도 불렀어?”

“응.”

“너도?”

“아니.”

“왜, 같이 축하해 주는 거야.”

“내가 아기를 만지고 싶지 않다고 했거든. 그러니까 사모님이 음… 얼굴을 찡그렸어.”

여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니까 사모님이랑 코치가 나는 저쪽에 떨어져 앉는 게 좋겠다고 했어. 내가 불러도 별로 잘 들릴 거 같지 않아서 부르지 않았지.”

“그랬구나.”

“사모님이 계속 나를 흘끔거렸어. 그 표정이 뭔지 나는 알아. 걱정하고 싫어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밖으로 나왔어.”

“…괜찮니?”

“괜찮아. 그 전에 이미 고기는 많이 먹어두었거든.”

“그게 아니라.”

여래는 말을 삼켰다. 아마도 사모는 이 남자가 정상과는 다른 범주에 발을 담그고 있음을 알아차린 게 틀림없었다. 아이에게서 준혁을 격리시킨 그녀는 비이성적이었지만 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멀찌감치 떨어진 식탁에 앉아 불을 밝힌 케이크를 보고 있었을 준혁의 모습이 서글퍼지지 않는 것 또한 아니었다. 축하의 자리, 다정한 말을 건네는 자리, 행복한 자리에서 떨어진 그는 벽 앞에 붙어서 촛불의 어룽거리는 그림자만을 겨우 보고 있었다.

준혁은 그런 여래를 모르는 듯 말을 이었다.

“나중에 방으로 돌아왔는데, 같은 방을 쓰는 선배가 어떻게 아기를 싫어할 수가 있냐고 말했어. 그 선배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이번에는 특히나 화를 내는 것 같았어. 내가 뭔가 잘못한 거야?”

“…아니야. 넌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야. 그렇지?”

“맞아, 아니야. 나는 싫어해서 그런 게 아니야.”

“그럼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지.”

“어떻게 할지를 몰라서… 뜨거운 반죽 같았어. 아기는. 물렁물렁하고 약하고 축 늘어져 있고.”

“그랬구나.”

“사실은.”

“응?”

“너처럼 좋은 냄새가 날 것 같아서 나도 만져보고 싶었어. 하지만 아기가 부드럽고 물렁물렁해서… 나는 힘이 세니까 꽉 쥐면 망가뜨릴지도 몰라.”

“….”

“그래서 무서웠어. 아기를 다치게 하면 어쩌지? 라고 생각하니까 머릿속이 어지러워졌어. 제대로 안아주지 못하면 떨어뜨릴 수도 있어. 그러면 다칠 거야. 울지도 몰라.”

“응. 그래….”

“나처럼 고장이 나면 안 돼. 아기는 예쁜 거니까. 중요한 거니까.”

마음이 아프다.

“그렇지?”

너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아기였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입술이 떨려서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울고 싶은 압력에 반항하기 위해서는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치켜들어야 했다.

무리해서 그를… 슬프게 해석할 필요는 없었다. 제법 터프하게 살아온 이 남자는 그런 동정을 구하기 위해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었다. 만약 운다면 왜 그러냐며 준혁은 난감해하겠지. 여래를 이해할 수 없으므로.

그렇다면 여래는 말해야만 한다.

그건 있잖아… 아마 내가 너를 좋아하기 때문일 거야. 그래서 네 아이를 가지고 싶지만 너에게 절대로 그걸 강요할 수는 없단 걸 깨달아서일 거야.

차오른 눈물에 코끝이 맹해졌다. 흘리는 비음을 듣고 준혁은 감기를 조심하라는 인사로 전화를 끊었다.

* * *

일주일만, 이라던 말은 꼬리를 달고 이어져 훈련 후에는 대회 참가의 스케줄이 계속됐다. 틈틈이 정부기관에서 진행하는 학회의 일정에 맞춰 연구에 협조하기 위해 불려다니는 일도 잦았다. 그간의 한가함을 보복이라도 하듯 여기에서 저기로 한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비행기를 타고 이동을 해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개학 후에도 준혁의 휴대폰은 압수된 채 그대로였다.

한숨이 가볍게 흩날렸다.

언제 닥칠지 모를 실업을 대비하여 당분간은 통신요금조차 부담스러워진 여래가 자신의 휴대폰을 휴면으로 돌려놓은 까닭에 목재소의 다이얼식 전화가 둘의 유일한 연락 수단이 되었다. 목재소로 걸려 오는 밤의 전화에는 좀처럼 나지 않는 시간 때문에 준혁이 점점 초조해하고 있다는 게 아날로그로 디지털로 다시 아날로그 신호로 전환되어 전달됐다.

준혁은 백 원짜리 탑을 공중전화의 받침대에 위에 쌓아두었다고 했다. 조금의 끊어짐도 없도록, 계속해서 이어져 있을 수 있도록. 공중전화가 먹어치우는 동전이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사라지는데도 보고 싶은 마음만은 그대로여서 여래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전화기를 노려보았다.

종래는 그 짧은 통화마저 용이하지 않은 듯 이삼일 정도 띄엄띄엄해진 준혁의 전화에 여래는 멍하니 책상 앞을 지키다 밤을 꼬박 센 적도 있었다. 밝아지는 잉크 빛의 새벽이 점점 느리게 찾아왔다. 계절이 가을로 넘어가고 있었다.

위험한데, 라고 중얼거리는 말이 이른 낙엽과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누군가의 생각만으로 가득 차서 밥 수저를 들고 반찬을 먹어야 할 차례인지 밥을 먹어야 할 차례인지, 그 순서를 잊어버리는 여유가 사치스러웠다. 전신주처럼 긴 자국을 늘어뜨리는 연락은 드문드문 이어지던 무렵 목재소는 청산 절차를 끝냈다.

재고를 처분하고 집기를 중고 매입상에 팔고 나자 정리랄 것도 없이 끝이 나버렸다. 바닥에 남겨진 말끔한 부분만이 그곳에 그라인더며 선반이 놓여 있던 자리라고 어림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었다.

* * *

준혁으로부터 일주일째 소식이 없었다. 여래는 한숨을 삼켰다.

열다섯에 이곳에 서 있었을 때에는 막막할 정도로 커 보였던 공장의 맨얼굴은 작고 초라했다 투다이얼의 일제 금고를 작은 사장에게 넘기고 나자 정말로 끝이었다. 오늘부터는 여래는 계약한 고시원에서 자야 했다. 준혁에게 그 사실을 미처 말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사무실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마지막 통화에서 이번 주의 말에나 이 도시에 도착한다고 준혁은 말했었다.

지금은 목요일. 피시방에 가서 구인사이트를 보다가 무료제공 문자라도 보내 놓아야지, 라고 생각하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열두 자리의 준혁의 번호 정도는 여래도 기억해 두었던 터다. 아니,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외우곤 했던 숫자의 행렬이 그저 몸에 배어버렸는지도 몰랐다.

비닐 한 무더기와 폐품을 쌓아 올린 구석에서 사장과 이씨가 손을 들어 여래를 불렀다. 9월로 넘어간 계절은 아직 여름을 잊지 못하는 듯 남은 더위를 과시했다. 이씨는 목에 걸친 수건으로 이마를 훔치며 담배를 당겼다.

“불붙일 거니까 신문지 좀 어디 없나 찾아보기라.”

“그냥 수거 업체 부르시지 그러세요.”

“먹고 죽을 돈도 없음메. 넝마 치우는 데 줄 돈이 어디 있음둥.”

“어휴. 그래도 그렇지. 이거 불법이에요, 라디오에서 임의 소각하지 말라구 막 나온다구요.”

“드럼통에 다 집어넣어서 괜찮다카이. 같은 무식쟁이끼리 무사 이리 까탈스러운지….”

“마음대로 하세요, 그럼. 난 몰라요.”

“아조, 깍쟁이라….”

누레진 신문지에 담배꽁초를 비벼 드럼통으로 던지자 연기가 피어올랐다. 산 위로 올라가 피어오르는 회색 줄기를 구경하는 여래와는 반대로 이 씨와 사장은 드럼통 앞에서 불을 쑤석이고 있었다.

“어…!”

공장을 내려다보던 여래는 자기가 소리를 내는 줄도 몰랐다. 불이 번지는 폼이 심상치 않다 싶었다. 가까이 선 기둥에 옮겨 붙은 불에 슬레이트 지붕이 타들어 갔다. 나뭇등걸에 기대어 빈둥거리던 여래는 벌떡 자리를 일어났다. 잠시 우왕좌왕하던 사장과 이씨가 별다른 조처 없이 밖으로 나가는 것이 멀리 보였다. 수도는 끊겼지만 지하수를 퍼 올리던 펌프나 호스는 그대로 있었던 걸 둘이 모를 리가 없었다.

왜 불을 안 끄지? 무슨 꿍꿍이야, 라고 생각하는 순간 공장 뒤편으로 옮겨붙은 불똥이 산을 타고 올라왔다. 느리게 꿈틀대는 불길이 옆으로 번지며 포위하듯 기어오르고 있었다.

조금 위험한데, 라고 생각한 그 순간이었다. 불이 뿌린 씨앗에 나무들이 가을의 낙엽보다 붉게 타올랐다.

계속되는 일정으로 이미 준혁의 스트레스는 한계 상태였다. 예상되는 실험의 결괏값이 나오지 않자 험악해진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센터에서는 반나절의 오프를 허락했다. 뜻밖의 휴가 아닌 휴가에 놀라기란 준혁도 준혁의 매니저도 마찬가지였다. 준혁은 어설프게 허리를 숙였다. 어디에라도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약 칠 년여의 시간 동안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준혁의 반응에 매니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 역시도 어색하기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거 참. 별일이라고 해야 하나. 인사를 다 받고.”

매니저는 볼펜 꼭지만 눌러댔다. 하긴 준혁이 생각해도 평소의 자신 같지 않은 태도였다. 타인에게 의외성을 안기는 것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거의 웃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물론 잘되지는 않았다. 준혁은 돌려받은 휴대폰을 켜려다 손을 멈췄다. 휴대폰은 방전되어있었다. 준혁은 곧장 편의점을 찾았다.

이가 약한 여래, 그런 여래가 좋아할 만한 것은 부드러운 홍시와 푸딩이겠다. 진열장 앞에서 신중한 준혁을 두고 알바생은 하품을 했다. 여래의 간식을 고르는 동안 휴대폰은 충전을 맡겼다. 실무적이고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준혁은 미리 예매해둔 시의 외곽을 순환하는 버스에 뛰어올랐다. 좀처럼 앉아있을 수가 없어 들썩이는 준혁의 옆자리는 만석인 버스에도 비어 있었다. 다른 존재를 보는 옅은 경원과 무시가 느껴졌지만 괜찮았다. 곧 여래를 만날 것이었다. 여래가 자신을 고쳐줄 것이었다. 보통처럼, 평범하게.

준혁은 눈을 감았지만 잠을 잘 수는 없었다.

버스에서 내린 준혁은 서둘러서 걸었다. 조금이라도 아깝다. 여래와 있을 시간은 지금도 착실하게 줄어들고 있었으니까.

“어….”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신음이 흘러나온 건 산 중턱에서였다. 메고 있던 가방이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큰길에서부터 여래의 목재소까지 전봇대의 개수는 총 열두 개였다. 아직 여덟 개째였으므로 멈춰서는 안 됐다. 그러나 공장에서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보자 반대로 머리는 텅 빈 듯 깨끗해졌다. 이 부조화를 납득하지 못하겠다. 발걸음은 점점 느려지다가 다시 빨라졌다.

“안 돼.”

준혁은 더 이상 걷지 않았다. 그는 달리고 있었다. 손에 걸린 가방을 던지지도 못한 채 준혁은 뛰었다.

화염이 목재 공장을 둘러싸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종양처럼 불뚝불뚝 솟은 검은 연기가 퍼져나가는 광경은 종말처럼 압도적이었다.

불이다. 불은 빨갛고 파괴적인 것이다. 사온 닭꼬치를 데우기 위해 여래가 휴대용 버너를 만질 때에 준혁이 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던 그것이다. 여래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공장에는 나무가 많았다. 여래는 불씨 하나도 조심해야 한다고 했었다. 그게 아저씨들은 항상 불만이라고도 했었다. 길 아래까지 내려가서 담배를 피워야 하니까 번거로워 죽겠다고.

그런 곳에서 불이? 불이? 그럼 여래는 어디에 있을까. 갑자기 온몸의 구멍들이 죄어들었다. 털이 바짝 섰다.

휴대폰으로 계속해서 여래의 번호를 눌러도 모르는 여자의 음성이 여래와는 지금은 연결을 할 수가 없다고만 답했다. 목재소의 번호 역시 없는 번호라는 멘트만이 흘러나올 뿐 여래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 주진 않았다.

“여래.”

이런 경험은 흔했다. 준혁을 바보 취급하면서 밀어내는 거부의 경험. 그럴 때면 윗입술을 뒤집어 이를 드러내거나 어깨로 밀치며 지나가버리면 됐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 제발. 나를 바보 취급해도 좋으니 이런 식으로만은 제발.

해본 적 없는 기도가 외워졌다.

다시는 선배를 싫어하지 않겠어요. 다시는 연습을 건성으로 하지 않겠어요. 다시는, 다시는 이 이상으로 그를 가지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 욕심은 부리지 않을 테니…

뛰던 준혁의 옆으로 브레이크를 잡은 구조 사다리차와 물탱크차가 멈춰 섰다. 컨테이너 박스의 손잡이를 잡은 준혁을 보고 확성기를 든 남자가 비켜나라고 외쳤다. 뜨거운 열기에 손바닥에는 금방 물집이 올라왔다. 펑, 하는 폭발음이 터지고 방화복을 입은 사람 두엇이 준혁을 밖으로 끌어냈다. 열기로 부풀어 오른 부탄가스의 캔이 안에서부터 바깥쪽으로 찢어발겨지며 귓가를 스치고 날아가 마당에 처박혔다. 무전기로 입을 가리고 헬멧으로 그늘진 사람들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기분을 평소에도 읽기 어려워하는 준혁에게 목재소를 둘러싼 단편적인 인물의 정보들은 입력되지 않고 흩어졌다. 그러모을 수 있는 작은 단서조차 실종된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그는 미아가 되었다. 머릿속은 차분했지만 어째서인지 나오는 말이라고는 어, 와 저기, 뿐이었다.

“나오세요! 위험합니다!”

“거기 빨리 라인 밖으로 비키라고 해! 뭐하는 거야! 이 새끼야!”

“먼저 올라가야 할 거 아니야!”

자신은 여기에서 근무하는 한 남자를 찾고 있고 그는 저 안에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라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혀는 빳빳하게 굳어가기만 했다. 여래는 여기 외에는 갈 곳이 없다고 했다. 여기 있겠다고 했다. 그렇게 약속을 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여래는 정말로 갈 데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만큼 그가 거짓말을 했기를 바랐던 때가 있었을까.

여래가 공장에 있고 지금 그곳에 불이 났다면…

한동안 잊고 있었던 두려움이 저공비행을 하며 공습해 왔다.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오랜 악연처럼 준혁의 발을 걸었다.

정말로 영구히, 불가역적으로 여래를 잃는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두두두두두…

소방 헬기가 낮게 날며 산등성이를 타고 오른 불길에 포말을 뿌렸다. 익숙한 누군가를 찾아야 했다.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여래가 무사한지, 아니면 저 건물 안에 있는지를 알아내야 했지만 어디서 무엇을 물어봐야 하는지 모르는 준혁은 필사적으로 허둥거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바빠서 그런 그를 알아채줄 수가 없었다. 준혁은 부르짖었다.

“여래!”

사이렌의 비명과 무전기의 신음이 어지러웠다. 관창을 쥔 소방관의 지휘에 물줄기가 뿌려지고 길 앞까지 흙탕물이 번져나갔다. 머리카락이 그을리고 과호흡을 보이는 준혁을 구급대원 두 명이 돌봤다. 정상적인 의사소통을 보이지 않는 그를 두고 난감한 눈빛이 머리 위로 교환됐다.

* * *

“이게 다 무슨 난리야….”

바람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 산을 넘어가서 내려오는 바람에 목재소까지 다시 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여래는 어지럽다 못해 난잡한 목재소 주변에 넋을 잃었다. 가파르게 주차되어 있는 소방차와 구급차가 좁은 길에 빼곡했다. 아래 마을의 하우스 농가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마저 몰려와 수런거리는 탓에 여래는 목재소 가까이에는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이씨와 사장이 호들갑을 떨며 경찰에게 무어라 진술하는 저 편으로 다가가려는데 구급차 중 하나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선생님! 학생! 진정하세요.”

“야, 걔 좀 잡아!”

“아우, 힘은 왜 이렇게 세!”

차체가 들썩거릴 정도로 야단법석이다. 여래는 머리를 빼꼼히 내밀었다. 불구경을 못 하겠으면 사람 구경이라도 해야겠다. 뭐야, 왜 저런데. 많이 다쳤나?

그러나… 구급차 안에서는 차창에 머리를 찧고 있는 준혁과 그를 말리려 드는 구급대원 두 명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심장이 덜컥 발아래로 떨어졌다.

“으, 으으! 으아아!”

준혁이 자신만의 언어로 울부짖고 있었다.

주말이나 되야 온다던 준혁이 여기 어쩐 일이지? 하는 정상적인 의문이 찾아올 새도 없이 무슨 상황인지가 바늘이 천을 꿰뚫듯이 단번에 전해져왔다. 준혁은 여래가 안에 있다 오해를 했을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난동을 부리는 것이겠고. 찐득한 질감마저 손에 잡힐 듯한 준혁의 감정에 여래는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준혁은 짐승 같았다. 모든 것을 잃고 날뛰는 짐승.

빨리 다가가서 아니라고… 여기에 자신이 있다고 해야 했다. 그러면 상황은 깨끗해졌다. 그런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래는 밀고 밀리는 인파의 사이에서 주춤거렸다.

깊고 질긴 집착은 나무의 뿌리와 같아서 아무리 파 내려가도 듬성듬성 드러난 흙 아래에 발을 뻗고 있다.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 날뛰고 있는 남자의 광기와 절망이 두려웠다. 준혁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 한 줄기가 오른쪽 눈의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붉어진 눈이 희번덕거렸다.

좋아한다고 해서 그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어딘지 이상하고 대체로 끈질긴 저 남자가 너무 벅차다. 자신은 누군가의 생의 전부를 걸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여래가 준혁을 떠난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준혁은 또 얼마나 미쳐서 날뛸까. 준혁은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아주 최악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준혁이 닮기를 거부하던 그의 아버지처럼, 그의 가족력처럼.

여래는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도망가야 한다. 이게 아마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그래야 했다.

수그린 채 꺾어 신었던 운동화의 뒤축을 펴려던 여래는 엉거주춤한 그대로 멈추었다. 구조대원의 발에 짓밟힌 가방이 눈에 익었다. 가방은 준혁의 것이었다. 열린 가방에서 굴러나온 푸딩과 홍시가 진흙탕 속에서 뭉개져 있었다. 여래는 잇몸의 상처를 혀로 쓰다듬었다. 준혁이 치료를 주선해준 치과에서 진료를 받았던 잇몸에서 비릿한 쇠 냄새가 피어올랐다. 저 무르고 달콤한 것들을 고르며 여래와 여래의 작은 치아들을 생각했을 준혁이 손에 잡힐 듯 선했다. 무릎에서 힘이 빠졌다.

내가 뭐기에 저 애가 저러는지 도통 모르겠다. 깨끗한 옷차림이랑 말쑥한 손톱 같은 것 따위는 버려도 좋다는 양 머리를 찧어대는 준혁을 모르겠다. 모르는 내가 바보였다.

바보야.

늘 그렇게 준혁을 타박했었다. 아니. 틀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 나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준혁의 마음도, 내 마음도. 지금까지 외면했었다.

여래는 다시 뒤를 돌았다. 사람들은 파도처럼 그를 향해 부딪혀왔다. 그 사이를 헤치고 달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이고야….”

준혁의 양팔을 붙들고 있던 소방관들은 반항을 멈춘 그에 겨우 한시름을 놓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구급차 뒤로 달려온 여래를 보고서야 준혁은 자해를 멈췄다. 핏물 고인 준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안도와 원망이 버무려진 눈동자에 여래는 그만 눈을 피해버리고 말았다. 진땀을 빼던 구급대원들이 거즈며 반창고며를 찾으러 바삐 움직였다. 여래는 그중 한 명의 팔을 잡아끌며 준혁의 앞으로 데려가 물었다.

“아, 저기… 저기요! 저기요!”

“보호자분 되십니까?”

“아, 네. 맞아요. 보호자. 제가 보호잔데… 어디 다쳤나요?”

“보이는 것 외에 외상은 없으신데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아서요. 말씀도 어눌하시고.”

깔보는 듯한 말투에 여래는 불쑥 화가 치밀었다.

“야, 최준혁! 내가 또박또박 이야기하라고 몇 번을…!”

준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밑에서부터 차근히 더 다친 데는 없는지를 살피던 여래의 이마에 미지근한 물방울이 떨어졌다.

“최준혁.”

준혁은 울고 있었다. 턱밑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의식하지 못한 듯 닦을 기미가 없는 준혁을 두고 구조대원들이 엉거주춤 일어나 자리를 피했다. 도망치려했던 죄책감을 들키지 않기 위해 흐르는 피를 닦으며 부산을 떠는 여래를 준혁이 잡았다.

“어디 갔었어?”

코맹맹이 소리가 진했다. 멍청하게마저 들리는 준혁의 목소리에 여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런 그에게 너를 버리려고 하다가 다시 돌아왔노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래가 머뭇거리자 준혁은 재차 물었다.

“다친 데는 없어? 괜찮아?”

“너… 너야말로 꼴이 이게 뭐야. 이마에 피 나고 멍들고.”

“너를 찾았어.”

“나 저기 산 위에… 있었는데… 불이 나잖아. 그래서 산 넘어서 빙 돌아 오느라구…. 아무튼 간에 난 괜찮아. 왜 헛짓을 했어. 어련히 잘 있었을라고.”

“여기… 있겠다고 했잖아.”

“오늘부로 폐업이야. 짐을 싸라 그러잖아. 그 전에 말 못 한 건 미안해. 그런데 네 핸드폰도 죽어있고 해서…. 아, 죽었다는 건 연결이 안 됐다고.”

“….”

“혹시 못 알아들을 까봐….”

변명이 어쭙잖다. 여래가 오락가락하는 사이 일어난 준혁은 구급차에서 내려와 쓰고 있던 모포를 벌렸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의 무게에 짓눌려 망가진 모습이었다. 도망치려던 스스로가 가증스럽게 여겨질 만큼 준혁이 울고 있는 얼굴을 보자 마음이 아파왔다.

웃는 법은 잊었어도 울 줄은 아는 준혁. 여래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온몸으로 부르짖는 준혁.

만약 내가 없어진다면… 그는 어떻게 될까. 누가 내 대신에 저 팔을 안아줄까. 사랑해줄까.

여기 이 그을리고 상처 입은 남자는 시계태엽 장치가 아니다. 기계도 바보도 아니다. 따뜻한 심장 소리를 들어보기 위해서 여래는 준혁이 벌린 팔 안으로 들어갔다. 얇은 겹을 이루며 다정해진 마음이 돌이킬 수 없이 단단해졌다.

여래가 안기자 비로소 안심한 준혁이 울먹이며 부탁했다.

“어디에도 가지마.”

“안 가.”

“네가 없으면 나는 안 돼.”

“알고 있어….”

그리고 그럴 수도 없다. 나는 방금 그 일에 실패함으로써 그것을 확인했다. 여래도 준혁이 필요했다. 준혁만큼은 아니겠지만, 여래도 준혁을 사랑했다. 마음의 무게를 재는 잔인한 말을 참으려 여래는 눈을 감았다. 준혁은 여래를 안은 채 중얼거렸다.

“죽으려고 했어. 네가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죽긴 왜 죽어. 사람 무섭게.”

“네가 없는 것보다 무서운 일은 없어.”

여래는 떨고 있는 가슴에 파고들었다. 더 이상 교만은 부리지 않겠다.

“나도 그래.”

너를 사랑한다. 너를 사랑하는 일의 굴레가 나를 내가 아니게 해도 이제 그것을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내가 오메가로서 살고 싶지 않다고 해도, 너와 있으면 내가 오메가로서만 살게 된다고 해도, 나는 너를 선택하겠다.

여래는 흐느끼는 준혁의 얼굴을 잡았다. 눈이 마주치자 부끄러운 말이 잘도 흘러나왔다.

“헤어지지 말자.”

이제 여래는 주변을 신경 쓰지 않았다. 누가 자신을 무엇으로 보든 상관없었다. 사람들은 무심히 그런 그들을 내버려두었다. 불은 사람들을 다그치며 아직도 타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여래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준혁은 주억거렸다.

“응… 응….”

“최준혁. 우리 계속 함께 있자.”

“응.”

“아이, 만들자.”

착하게 끄덕이던 턱이 멈칫거리며 정수리에 닿아 멈췄다. 준혁이 마지막 말에는 긍정하지 않은 것이 못내 썼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까짓것, 계속 조르면 된다. 아니면 몰래 가져버리겠다. 준혁이 생겨버린 아기를 외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마음을 바꿀 시간은 앞으로 얼마든지 있었다. 여래는 준혁의 등에 팔을 감았다.

소란의 틈바구니에서 둘은 섬처럼 외따로 떨어져 끌어안고 있었다.

* * *

준혁은 한 번, 여래는 두 번, 경찰에 불려갔다. 화재가 일어난 진상을 조사받기 위해서였다. 결국 작은 사장이 공장에 들어 있는 보험을 타낼 요량으로 화재를 조장했다고 밝혀지며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여래는 일주일간 살던 고시원을 정리하고 하숙집을 구했다. 제대로 된 집은 수능 이후에 알아보기로 했다. 준혁은 여래의 이사를 도우며 못마땅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래는 상자를 옮기던 손을 멈추고 허리를 짚었다.

“어쩔 수가 없잖아.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수능 끝날 때까지만 버티면 되잖아.”

“좋지 않아. 고시원보다 나을 것이 없어.”

“공장에서도 살았는데 뭐가 어때. 컨테이너에 비하면 천국이구만.”

“거긴 아무도 없었으니까. 아저씨들은 모두 베타였고,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무지한 부류들이었지.”

뭔가 핀트가 이상하다.

“그렇지만 산 아래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여래를 좋아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또, 여래가 끌릴지도 모르는 인간들이. 알파들이.”

여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증상이 심했다. 옆방을 드나드는 하숙생들을 노려보는 준혁의 시선이 날카로워지자 여래는 서둘러서 준혁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소곤거리는 여래를 향해 준혁이 자세를 낮췄다.

“야, 어디 밖에서 그런 엄한 소릴 해. 네 기분은 마음속에만 간직하시고요. 쪽팔리니까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어휴, 뭐래 진짜. 깜짝 놀랐네.”

“어째서. 나는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어허! 얘가.”

준혁은 투덜거리며 들고 온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 안에는 똑같은 브랜드의 똑같은 사이즈의 흰색 티셔츠가 여남은 벌, 그리고 대부업체의 메모지가 차곡차곡 접혀있었다.

“이게 뭐야?”

메모지는 연필이 번진 그림으로 가득했다. 준혁의 이마에는 흉터 방지를 위한 습윤밴드가 붙어있었다. 준혁은 흘끗 여래를 바라보더니 다시 바쁘게 손을 놀리며 말했다.

“버려도 돼.”

“뭔데?”

“여래의 얼굴.”

여래는 경박한 문구가 가득한 메모지들을 넘겼다. 즉시 대출 가능, 합리적인 이자, 정부 인가 단체, 그 빨간 단어들 아래에는 소년의 얼굴이 빛바래 있었다.

“여래가 보고 싶을 때마다 그렸어. 사진도, 영상도, 무엇도 없어서.”

시간에 닳아진 메모지 속에서 열다섯 즈음의 여래가 웃고 있었다.

“이젠 없어도 돼.”

준혁은 여래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보고 싶어 하지 않아도 되니까. 필요 없어. 여래가 여기 있으니까.”

“치.”

준혁은 가끔 이렇게 여래의 말문을 막았다. 마음의 깊이에 함몰되지 않으려, 가벼워지려 여래는 있는 힘껏 준혁을 비웃었다. 갑자기 준혁은 여래를 끌어당겼다.

“여래야, 사진 찍어도 돼?”

“갑자기 뭔데.”

“찍자. 찍어두는 게 좋아. 훈련 가서도 여래가 보고 싶었어. 그런데 사진이 없어서 곤란했어. 여래 사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됐어. 낯 간지럽게.”

여래는 준혁이 내민 휴대폰을 손을 거둬냈다. 그리고는 멍든 얼굴에 입술을 내렸다. 준혁은 이 제스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곤혹스러워하는 모양 그대로 굳어버렸다.

“보고 싶으면 이젠 언제든지 볼 수 있다며.”

여래를 보는 준혁의 눈빛이 마치 만져질 듯 강렬했다. 새삼 가슴이 두근거렸다. 머리칼 안쪽 깊숙이 새겨진 오래된 상처부터 이제 막 진물을 내는 새로운 상처 모두를 끌어안으며 여래는 속삭였다.

“이젠 안 헤어질 거니까.”

준혁이 머릴 기댄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생전 처음 하는 고백이었다.

* * *

다음 재활용 수거일, 여래는 대부업체의 메모지가 든 상자를 폐품과 함께 종이류에 내려놓았다. 옆에서는 준혁이 비닐과 플라스틱을 구분 중이었다. 지나치게 신중한 얼굴이 우스울 정도였다. 끝나기를 기다리던 여래는 준혁이 마지막 플라스틱 병을 마대자루에 던지자 웃음을 터트렸다.

“아휴, 대충 좀 하지.”

“센터에서 자원 재활용은 중요한 거라고 배웠어. 정확하게 하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어져. 지구가 오염돼.”

“아, 네에. 네에. 어련하시려구.”

“정말이야.”

“알았어, 알았어. 누가 몰라서 안 하냐? 바쁘고 그러니까 잘 못 하는 거지.”

고지식할 정도로 배운 것을 따르는 준혁은 대충이란 걸 몰랐다. 여래는 고개를 내저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제 가자.”

“….”

“어서.”

준혁은 물끄러미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았다. 예전 어느 날의 여래를 기억나게 하는 손이었다. 은애원에서도 지금도, 자신을 앞으로 이끌어 빛으로 인도하는 손에 준혁은 성큼 걸어 여래의 옆에 섰다.

“응.”

< 2권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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