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준혁 (1)
인간 능력 향상의 요람
원훈院訓이 음각된 대리석 표시석을 지나자 센터였다.
가을의 센터는 황량하다. 여름의 한 철, 무성했던 녹음을 잊어버린 산줄기는 벌써부터 앙상한 가시 왕관을 쓰기 시작한다.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한 외관이 북동풍에 부딪혀 마른 소리를 냈다. 센터는 알파와 오메가를 양질의 환경에서 관리해 인적 자원의 유실을 막는다는 기치하에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알파의 경우 형질의 발현 자체가 드물었고, 그중 우성알파는 더욱 희소해 그들 대부분은 센터까지 오기 전 어떤 형식으로든지 간에 소비되곤 했다. 일정 소득 이상인 가정에 신분적인 과시를 위해 입양되거나 압도적인 신체적 능력으로 특수부대에 차출되어 군인으로 생활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시다.
그중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센터까지 흘러온 우성 알파는 나 혼자였다.
가정폭력의 후유증으로 의사소통의 장애를 얻은 나는 마치 그 반대급부처럼 과활성화된 기억 능력으로 인해 연구 대상으로서 센터에 발탁되었다. 아무 곳에서도 나를 입양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이 곳까지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왔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말이다.
삐빅.
지문 인식 장치에 오른손 검지를 가져다 대자 출입 허가를 알리는 벨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십오 미리 강화유리로 된 자동문은 지문 인식 후 삼십 초 동안만 열리게 되어있다. 자동문에서 이어지는 복도는 정면의 데스크를 향한다. 나오던 직원이 가볍게 목례하는 것에 맞추어 인사를 하자 그는 마치 자동 버튼을 누르듯 작은 웃음을 보였다. 미소는 지중해의 여행지에서 마주한 타인처럼 온화하고 따뜻했다. 하지만 이곳은 휴가를 위해 당신이 방문한 해변이 아니며, 그들은 나의 사용인이 아니다. 플라스틱처럼 가볍고 단단하게 찍혀 나온 기성품의 미소에 나는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건네어진 미소를 가장 예의 바르게 되돌리는 방법은 그만큼의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이다. 기브 앤 테이크는 인간관계 제 일의 법칙이었다. 주고, 받기. 그러나 머리로 이해하고 있는 커맨드는 얼굴 위로 출력되지 않았다. 사회과의 선생이 본다면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그는 자주 그랬다. 하아. 정말로 넌 어쩔 수가 없구나, 하는 체념이 담긴 한숨. 음성화된 어휘를 대신하는 신체언어. 그는 그걸 내게 아주 많이 보여줬다. 내가 그 제스처를 이해할 수 없으리란 태도에서는 경멸이 느껴졌다. 나는 그를 자주 짜증나게 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 봐도 오랜만인 것 같아, 준혁이는.”
“….”
무응답인 나에게도 하얀색의 깃을 목 끝까지 채워 올린 여자는 끝까지 상냥했다. 접수계원은 내가 무표정으로 일관해도, 필요 이상의 대화를 하지 않아도 늘 입가에 걸린 미소를 유지했다. 대단히 프로였다.
“반가운 건 좋은거지. 그래. 그럼 잘 가요.”
그녀는 내 머리에 달린 커다란 혹과 혹 주변을 노랗고 푸르게 덮고 있는 멍에 대해, 그리고 찢어진 부위에 붙인 습윤 밴드에 대해 묻지 않는다. 일반 행정 직원이 센터원과 교류하는 것은 금지되어있다. 이제까지 우리가 나눈 인사의 주제는 날씨 이상의 범위를 넘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갈림길에서 멈춰선 나를 흘끗 보곤 다시 들여다보던 화면으로 시선을 향했다.
안내 데스크를 기점으로 오른쪽은 피실험체들이 거주하는 동, 왼쪽은 매니저 및 관리 직원들이 근무하는 동으로 이어진다. 평소와는 다르게 왼쪽으로 몸을 돌린 나를 보고 서류를 책상에 탁탁, 두들겨 모서리를 정리하던 그녀가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입술을 빼곡하게 채워 넣은 립스틱의 색조가 금붕어의 꼬리처럼 휘어졌다.
“어, 저기? 준혁아.”
“네.”
“미리 매니저와 상담 접수는 한 거겠지만, 한 번 더 물어볼게. 예약했니?”
“지난주, 금요일 14시 45분에 접수했습니다. 담당 매니저가 이번 주 월요일에 미팅 스케줄을 잡아줬습니다. 접수 번호는 frd0608입니다.”
“그렇구나. 역시 정확해.”
센터에서는 대개 이름 대신 식별번호로 서로를 부른다. 이곳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기 위한 친목 단체가 아니다. 감정의 개입이나 발화 여지는 철저히 차단되었다.
“준혁이랑 일하면 편해서 좋아. 꼼꼼하게 알려주니까.”
그러나 줄곧 나를 최준혁으로 부르는 그녀는 오래전에 은퇴한 스타의 팬 같았다. 퇴색하고 잊힐 법한 사실들을 기억하고 있는 소수의 조용한 사람들 말이다. 누군가가 내가 나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나는 최준혁이었을 때의 나를 잊고 싶지 않았다. 내 인생의 가장 따뜻한 기억들은 그 이름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은애원의 원감이 그 이름을 내팽개치듯 지어 붙였다 하더라도 그 옆에는 혀를 내밀며 삐죽거리던 여래가 있었다. 나는 그걸 기억해야만 했다.
“저….”
등을 돌려 다시 데스크의 앞에 선다. 노화로 인해 얇아진 그녀 눈가의 주름은 계속해 서 있는 나를 향해 이유를 묻는 듯 짙어졌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 둘은 일기예보 이상의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 사이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돌발 행동이다. 그녀를 겁먹게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지배적인 확률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다. 나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저는 오늘 퇴소장 제출을 위한 절차를 문의하려 합니다. 그래서 담당 매니저를 만나려고 예약을 했습니다.”
영문을 모르겠단 듯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당황한 나는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
“궁금해하시는 것 같아서. 저를 줄곧 보고 계시기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퇴소라니, 갑자기 왜? 어머.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겼을까?”
좋은 일. 여래를 다시 만났고, 여래와 결합했다. 불이 났었다. 여래를 잃어버렸고 여래를 다시 찾았다. 여래가 계속 함께 있자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퇴소한다. 그것은 분명 좋은 일이었다. 여래와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
“좋은 일이에요. 좋은 일입니다. 그런 것 같아요.”
“어머. 그렇구나. 나간다니 축하해. 솔직히 여기 조금 우울하잖아. 그치?”
그녀는 눈을 찡긋거렸다. 나는 나 혼자만 이 센터를 싫어하는 줄 알았기에 조금 놀란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이 생각하는 줄은 몰랐고 그걸 말해도 되는 줄도 몰랐다. 그녀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는 데에는 마치 우리 둘이 무슨 비밀이라도 공유하는 듯한 은근함이 있었다. 흥분으로 가슴이 빨리 뛰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녀는 좀 더 웃을 뿐이었다.
“섭섭하게 벌써 작별인사야? 그렇게 금방은 처리되지 않을걸. 아마 서너 달 정도는 우리 계속 얼굴을 봐야 해. 실무적인 일들이 무척 많거든.”
“그래요?”
“그래요.”
“당신을 계속 보는 건 나쁘지 않아요.”
가느다란 주름이 여자의 눈 옆으로 부챗살처럼 펴졌다.
“웬일인지 준혁이가 오늘은 무척 다정하네.”
엄마 같고 여래 같은 웃음이었다.
“그럼 또 보자. 잘 가.”
“네.”
그녀는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단 것을 빼도 특별하다.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웃는다. 다정하고 따뜻하게.
* * *
공항의 라운지를 모델로 두고 꾸며진 공용 휴게실은 너른 창과 드문드문 있는 테이블로 쾌적했다. 내가 창가의 자리에 앉자 컴퍼스를 대고 그린 듯 일정한 반경 내의 테이블이 순식간에 비워졌다. 그와 동시에 반사적인 무관심과 공포가 하수구의 김처럼 피어올랐다. 상관없었다. 담당 매니저를 만나기 전 구비서류를 한 번 더 검토해 보고 싶었기에 주변은 조용할수록 좋았다.
익숙한 침묵이 억눌린 채 내려앉았다. 매립형 스피커에서는 조용하고 인상적이지 않은 피아노의 선율이 낮게 흘러나왔다. 공기 순환 장치에서 윙, 하는 소리를 내며 외기를 유입하는 소음이 등 뒤에서 수군거리는 센터원들의 대화를 지워나갔다.
무시하자 그들은 바로 내 앞까지 왔다.
“크큭, 머리는 왜 이 지랄이 났어?”
“미친 새끼. 어디서 치고받았나. 야, 야!”
가방을 내려놓고 쳐다보자 그중 하나가 높은 톤으로 나를 불렀다.
“케이. 야, 너. 나간다며?”
케이, 야, 너.
셋 다 나에 대한 호칭이지만은 그것에 일말의 애정이나 관심이 깃드는 법은 없다.
“나가서 어쩌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도 궁금해서 묻는 것은 아니었다.
“웃긴다. 누가 너랑 살아준대?”
“너 같은 새끼랑 누가. 어떤 오메가가? 눈 뼜냐? 아님 걔도 좀 모자라?”
“정상은 아니겠지.”
추측을 마친 그들은 다시 내게로 화살을 돌렸다.
“말이나 통하냐?”
“통하겠냐? 평소에도 헛다리만 짚는 새끼가.”
“아니지. 그 뭐야, 손은 잡았어?”
나를 제외한 나를 둘러싼 모두에게서 웃음이 터졌다.
“어이구. 빠구리는 떴어요?”
“큭… 야, 드럽게. 빠구리가 뭐야.”
“섹스했냐고.”
“케이. 섹스, 해 봐.”
“섹스.”
그 단어를 발음하는 센터원의 손이 요란스럽게 맞붙었다 떨어졌다. 음란한 동작은 수치스러움을 주기 위한 의도가 명확했다. 그가 등진 무리에서 웃음이 번지자 거들먹거림은 더욱 심해진다.
“케이. 섹스는 사전에 있는 단어야. 어? 너 섹스 몰라?”
“모르면 배워야지. 너 말 배우는 기계잖아.”
“섹스, 해 보라고.”
“니 오메가랑 밤마다 떡칠 거 아니야.”
“떡치는 거가 뭔지는 알겠냐.”
“아, 그건 그렇고 너 하긴 하냐?”
“이젠 좀 서긴 서?”
센터의 보건 시간은 주로 안전하고 확실한 피임 방법과 러트, 히트사이클의 주기 계산, 페로몬의 이해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선생 없는 시청각 교육 자료가 전부인 보건 시간을 진지한 수업으로 여기는 센터원은 아무도 없었다. 강당에 모인 센터원들은 자거나 잡담을 나누는 걸로 한 시간을 때웠다. 앞을 보고 있는 센터원은 나뿐이었다.
어느 날 누구의 장난이었는지 프로젝터에서는 음란물이 틀어져 나왔다. 강당 벽을 왕왕 울리는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스크린을 적신 살색에 일제히 웃음이 터졌다.
이게 진짜 성교육이지!
외치는 센터원들은 아픈 듯 찡그리는 화면 속의 오메가에 흥분해 페로몬을 흘렸다. 진한 동물성의 냄새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거기에서 발기하지 않은 알파는 나 혼자였다.
“이 새끼 그 때랑 똑같은 거 아니야?”
“어디로 넣는지나 찾았어? 케이?”
“푸하하, 골 때린다. 진짜!”
성性, 섹스sex. 그것은 인간의 사적 영역 중 하나이다. 사생활의 침범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의식이 기반한다. 어떤 일에 대해 그렇게 과민하게 받아들이지 않아서거나, 아니면 침범 대상자를 인간으로서 여기지 않아서거나. 결론에 도달하자 빠르게 심장이 뛰고 뒷목이 빳빳해졌다. 정수리 꼭대기까지 오른 열에 귓불과 광대가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함부로 떠들어대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입을 막아야 할 것이다. 발로 차거나 주먹을 짓이겨 넣고 싶다.
싸우면 안 돼. 때린 녀석이 더 혼나니까.
그러나 나를 막아 세운 건 기억 속의 여래였다. 반성실에서 내 눈을 맞추며 당부하던 여래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러므로 지켜야 한다.
깨끗하게 씻을 것. 말을 잘 들을 것. 싸우지 말 것.
엄지를 말아 넣어 단단하게 쥐었던 주먹을 내려놓는다. 섹스라는 단어를 말하라고 종용하는 센터원의 입에 주먹을 박아 넣는 대신 자리를 옮기려고 가방을 들어 올리자 팔걸이에 가방끈이 걸려 의자가 넘어졌다. 의자가 바닥에 나뒹구는 소리에 휴게실은 단숨에 조용해졌다. 나는 의자를 향해 몸을 숙였다. 그것이 무슨 위협의 신호가 되었는지 주춤거리며 물러나면서도 센터원은 봐준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였다.
“하, 씨발. 눈깔 뜨는 것 좀 봐라?”
“희번덕거리지 마. 새끼야. 뭐 그럼, 그럼 어쩌려고!”
“야, 야! 그만해. 최준혁 레벨 알잖아….”
“개새끼가 의자를 쓸라고.”
나의 폭력 성향은 높다. 수치화될 수 있는 최고 수준이다. 센터에 입소하기 전 원감의 귀를 물어뜯고 그의 머리를 걷어찬 일만으로도 나는 이미 주의 대상이었다. 그 후 실시한 유전자 검사와 가족력 추적으로 내게 찍혀진 접근 불가의 소문은 맨손 호신술 시간 타격기를 부러뜨려 버린 이후 완벽한 사실로서 굳어졌다. 센터원들은 우성 알파인 내가 이토록 불완전한 유전자 그릇에 담겨 있단 것에 대해 호기심과 불만, 미묘한 공포와 노골적인 반발심을 동시에 가졌다.
그들에게 우성 알파란 대단한 것이어야 했다. 어눌한 말투와 위축된 성격으로 복종할 만한 권위를 보이지 못하는 나는 그들에게 자격 없음의 레테르를 단 불량품일 뿐이었다.
“무슨 일이지?”
“아닙니다.”
“그럼 자리를 좀 비켜주지 않겠어? 상담 신청이 있어서.”
“…야, 가자.”
나타난 매니저에 센터원들은 수은 구슬처럼 단번에 흩어졌다. 매니저는 곧장 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서류 좀 볼까, 최준혁?”
담당 매니저는 갑자기 퇴소신청을 받아 놀랐다고도, 무슨 이유냐고도 묻지 않는다. 심지어 의례적인 인사조차도 생략한다. 시간 낭비를 무엇보다 싫어하는 그를 아는 나는 방금의 작은 소동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매니저는 내 이마를 흘끗 쳐다본 후 제출한 퇴소장에 빨간색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퇴소 신청 양식에서 이 부분, 신원 보증인이 빠져있어.”
“저는 성인입니다. 그런데도 신원 보증인이 필요한가요.”
“그건 직업이 있는 경우만이야.”
“저는 신원 보증인으로 삼을 만한 사람이 없어요.”
“알아.”
은애원과 센터, 입학한 지 일 년이 안 된 대학이 내가 알고 있는 세계의 전부다. 그리고 그 모두에서 나는 누구와도 사귀지 못했다. 신원보증인이 되어줄 만한 이름은 아무리 뒤져보아도 떠오르지 않았다. 매니저는 초조해져 입술을 깨무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일단 너는 학생 신분이고 표면적으로는 수입이 없으니까. 센터에서 다달이 받던 연구보조금 외에 수입으로 잡히는 돈이 필요해. 센터 외의 수입 말이야. 네가 뭐, 이런저런 부업을 하고 있단 건 알고 있지만 그건 정식 직업은 아니니까. 만약 보증인이 없다면 아무런 준비 없이 세상에 너를 던져버리는 것처럼 보일 거야. 물론 네 자립심이나 사회 적응도에 대해 의문을 품는 건 아니고.”
아니, 의심하고 있다. 센터에서는 낭비되는 자원은 없다. 그것이 설령 관심이나 절차라 할지라도 그렇다.
“그리고… 만약이지만 유성그룹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어. 서류가 불완전하면 딴지 걸기가 쉬워진다고. 알지? 그 댁 도련님 성질머리.”
그 댁 도련님, 유성그룹의 막내아들인 김무영. 센터의 프로젝트 자금원의 리스트에서 항상 그룹의 이름을 제일 위에 올리는 유성그룹은 연구 심사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센터의 행정과 관리에 깊숙이 개입했다. 그중에서도 회장의 둘째 아들이자 막내아들인 김무영은 사전 방문 등록 절차를 무시하고 불시에 센터에 들이닥쳐 우성 오메가들을 골라 멋대로 데리고 가곤 했다. 실험 스케줄이 엉망이 된다며 연구원들은 투덜거렸지만 그의 앞에서 안 된다, 고 거절하는 센터의 직원은 없었다.
“네가 참여했던 연구개발사업의 협약 변경 신청을 문제 삼을 수도 있어. 허가를 하지 않으려 든다면 아주 사소한 문제라도 크게 부풀려 막을 수 있단 말이야.”
매니저가 적어온 리스트의 가장 상단에 줄이 그어졌다. 여기부터 시작인 모양이었다. 지적사항들을 속속 짚으며 매니저는 물었다.
“파트너가 연상이라고 했나?”
여래는 나보다 세 살이 많다.
“네.”
“흠… 직업은?”
여래가 먹고 자던 목재소는 불타 버렸다.
“구하고 있어요. 일하고 있던 곳은 화재 사고로 문을 닫았습니다.”
“곤란하네.”
매니저가 펜 끝으로 찌른 눈썹 위의 지점을 시작으로 이마에는 깊은 골이 팬다.
“조건이 안 좋아.”
나는 검지로 초조하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강박적, 이라고 칭해지는 빠른 리듬에 매니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알겠다고. 그럼 이렇게 하지. 파트너에게는 대충 임시로, 파트타임이라도 구하라고 해. 그리고 은행 잔고. 넉넉하게 잡아 오천 이상은 되어야 하니까 네가 잠깐 이체했다가 심사가 끝난 후에 다시 돌려받는 방식으로 잔액 증명을 하도록 하면 어때? 그럼 대충 보증인 조건에 맞을 거 같은데. 보증인임과 동시에 파트너인거지.”
그렇구나. 그런 해법이 있는 줄은 몰랐다. 대단하다. 그의 사고는 정말 유연하다. 그는 나를 위해 합리적이면서도 가능한 방법을 찾았다. 그는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는 게 고작이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 손으로는 지시사항을 메모한 포스트잇을 건넨 매니저는 볼펜으로 테이블을 톡톡 소리를 내며 두드렸다. 뭐가 남아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과자통을 흔들어 보는 듯한 태도였다. 보증인에 대한 명쾌한 해법을 내놓은 그가 망설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혹시, 혹시 말이야.”
“네.”
“돈을 가지고 잠적한다거나 뭐, 어디까진 가정이지만. 여러 가지 가혹한 상황이 있을 수가 있어. 그 점 알고 있지? 나중에 원망 들을까봐 하는 소리야.”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솔직하게 물어본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정확하게 말씀해주세요.”
“으음… 결혼 사기라거나.”
결혼 사기. 결혼을 빙자하여 금품 등의 재물을 수수한 사기 행위. 알고 있는 단어다.
“아주 없는 경우는 아니야. 자금을 이체 받은 후에 인출해서 사라진다거나 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거든. 물론 네 파트너가 그런 사람이란 건 아니지만….”
“도망갈 수도 있어요. 사라질 수도 있어요. 예전에도 그랬던 적이 있었고.”
매니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결혼사기는 범죄였다. 범죄가 연루되면 경찰이 개입한다. 관공서에 출두하여 조사받는 상황은 관료인 그로서는 질색인 상황일 터다. 매니저는 안경을 벗어들고 미간을 눌렀다. 상담이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가보겠습니다.”
더 이상 그를 성가시게 하고 싶지 않다. 가방을 정리하며 일어나려는데 매니저가 테이블을 펜 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뭐가 그렇게 급해.”
“바쁘신 것 같아서.”
“아이고, 내 사정 봐주는 거냐?”
김이 빠지듯 매니저는 피식 웃었다. 의도를 알기 힘든 웃음에 식은땀이 등을 할퀴고 지나갔다. 저 표정의 의미를 모르겠다. 매니저는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우호적인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무척 희귀한 자원이라는 뜻이다. 나는 그것을 소중하게 하고 싶다. 그러니까 실수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는 너무 서투르고 너무 많이 틀린다. 주춤대는 내게 매니저는 턱 끝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뭐라고 하는 게 아니야. 앉아봐. 어서.”
“….”
“어허, 금방이라니까.”
그의 시간을 빼앗지 않는 것과 그의 말을 듣지 않는 것, 저울은 자리에 앉는 쪽으로 기운다.
“결혼은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거야. 사회화 과정에서도 배웠을 것이고 사전적 의미로도 일반론적 의미로도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해. 어려운 개념은 아니니까. 너는 그 사람을 좋아하지?”
“네.”
“그래. 하긴 좋아하지 않고서야 이런 귀찮은 절차를 밟을 이유가 없겠지.”
맞다. 정확하다.
“그럼 그 사람 쪽은 어때? 그러니까, 음, 그래. 이름이 여기 있군. 주여래 씨? 주여래 씨 말이야.”
“네?”
똑같은 네, 지만 확인과 물음을 결정짓는 것은 어조의 차이다. 그것을 배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 언어 중추는 훼손되어있다. 나는 언어 표현과 발화에 문제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나를 깔보거나 무시하는 이유기도 했으며 내가 센터의 피실험자가 될 수 있었던 조건이기도 했다.
매니저는 주먹으로 헛기침을 막았다. 전에 없이 뜸을 들인다. 나는 이 정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른다. 무지의 자각은 불편하고 초조하다.
“그 사람도 너를 좋아하니?”
여래가 나를 좋아하느냐고?
곧바로 대답하지 못한다. 나는 자신이 없었다. 누가 나를 좋아한다는 상상은 늘 어려웠다. 누구도 나를 좋아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내 이름은 최준혁이지만 센터에서는 누구나 나를 케이라고 부른다. 처음 나를 그렇게 부른 사람은 신경외과의 닥터였다.
“얘 꼭 그, 고릴라 같네. 수화하는 고릴라.”
수화하는 로랜드 고릴라 코코Koko. 코코는 약 천 가지 이상의 몸짓언어를 할 수 있었으며 고양이를 키웠다. 고양이를 처음 만난 날 코코가 말한 수화는 호랑이, 고양이, 사랑, 찾아왔다, 이다. 고양이가 죽던 날 그녀가 한 말은 울음, 눈앞이 안 보임, 잠, 고양이, 였다. 나의 지각을 고릴라의 수준에 빗댄 것이다.
자신의 재치 있는 비유에 스스로 감탄한 그는 옆 사람을 향해 동의를 구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냥 사람 흉내나 내는 거지 뭐. 머리에 단어를 입력하고, 그걸 다시 출력하고. 단순반복 작업이라니까? 우성 알파만 아니었어봐라. 병원에나 잡혀갔을걸?”
전자기학 분과에서 파견된 여자가 검지에 입술을 댔다. 내가 ‘인간적인’이라고 부르는 표정이었다. 갈등하는 표정 말이다.
“쉿. 말조심해. 애가 듣고 있잖아.”
조심스럽게 말소리를 낮춘 전자기학에 신경외과가 빈정거렸다.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할 걸 뭘 그렇게 신경을 써? 그렇지, 코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나를 두고 전자기학은 줄곧 신경외과를 흘끔거리며 으스대는 제스처를 취했다. 허세를 떨며 과시하는 태도였다. 아, 그는 그녀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발정기의 유인원 수컷이 그러하듯.
“정말 안 어울린다. 등치가 산만한 새끼한테 코코라니.”
“그러니까 그만하라고. 사람을 앞에 두고 왜 자꾸 그래.”
“사람은 무슨. 핏. 흉내나 내는 거라니까.”
전자기학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게 고릴라의 이름을 붙여준 그는 막상 나를 ‘코코’로 부르자니 저항감이 느껴지는 눈치였다. 대신 자음만을 딴 케이케이가 된 나는 그마저도 길다 여겨져 케이가 되었다.
신경외과가 지어준 나의 별명은 곧 유명해졌다. 최준혁도 원래의 이름은 아니었기 때문에 케이라는 별칭에 불만은 없었다. 나는 나이고 어떻게 불려도 나는 변하지 않으므로 누구든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면 된다. 그러나 한 가지 걱정은 나를 최준혁으로만 알고 있는 여래가 케이라고 불린 나를 모르고 지나치면 어떡하나 하는 것뿐이었다.
다음 날, 나는 또 다른 실험실이었다.
“케이, 집중하자.”
유백색 실린더의 내벽은 거의 나를 비출 듯 매끄러웠다. 센터에서의 내가 피험자로 참가한 실험은 언어나 문자의 매개 없이 의미를 전달하는 속칭, 텔레파시 실험이다. 텔레파시, 라는 단어가 sf소설에서나 나올 법해 유치하다며 연구원들은 그렇게 부르는 걸 싫어했지만 뒤에서는 다들 그렇게 불렀다.
마이크에서 건조한 음성이 퍼져 나왔다.
“Axis mundi.”
다른 음성이 간섭한다.
“케이, 뜻은?”
실험은 테니스공의 탄성을 측정해보는 것과 비슷하다. 던진 공이 벽에 부딪힌 후 얼마만큼 되돌아오는지를 확인하는 거다. 생각을 할 때 두뇌에서는 전기장이 생성된다. 단어를 듣고 뜻을 떠올리는 두뇌의 청각피질에서 발생된 전기신호를 뇌자도측정기를 통해 데이터베이스화된 실제의 단어와 매치하는 것이 실험의 요지이다.
그 외에도 전기 자극화한 데이터를 뇌에 직접 이식하는 마인드 업로딩 실험이 있다. 연구원들은 내게 단편 소설집에서부터 비밀 암호화된 취리히 소재 다국적 은행 본점에서 다루는 VIP 계좌정보까지를 임의적으로 주입한 후 내가 그것을 얼마나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연구했다.
표면적인 연구과제를 제외하고는 흥미 위주인 지식들이 많았다. 마치 공유 폴더에 개인 자료를 올리듯 범위도 주제도 제각각이었다. 그중에서 그나마 가장 유용했던 것은 주식시장의 차트 분석법이었다. 그걸로 나는 가욋돈을 벌었다. 여래를 만나기 위해, 혹은 만난 후의 일을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가 내 머리에 저장된 약간의 정보를 활용하는 데에는 놀랍게도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지켜야 할 연구 윤리가 원래부터 없었던 까닭이었다. 연구원들은 나를 USB 정도로 생각했으며 그들은 내 대뇌피질에 전기자극을 가하면서도 내가 주체적으로 업로드된 지식을 사용하여 무언가를 할 수 있단 가능성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믹서기가 스스로 과일을 먹고 싶어 모터를 돌릴 수 있단 상상을 할 수 없듯 말이다.
나는 케이였다. 구경거리, 피실험체, 유인원. 인간과 비슷하지만 결코 같을 수는 없는 밖의 존재.
“케이? 들었니?”
생각이 길어지면 결과에 잡음이 생긴다. 내가 무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연구원들은 관심 대상이 아니다.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Axis mundi. 세계의 축.
많은 문화권에서 커다란 나무줄기의 형태로 구체화된 지계와 천계를 잇는 교량.
좁은 공간이 갑갑하다. 빨리 끝내고 싶다. 어서 생각하자. 악시스 문디. 그것은 나무다. 거대한 나무를 머릿속에 그린다. 세상을 떠받치며 또한 하늘과 이어진 통로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나무는 길산의 느티나무를 닮았다. 그래. 여름 방학의 어느 날 여래는 나를 길산에 데려갔었다. 그 때 넘어진 나를 달래기 위해 여래는 나무를 타고 올라 제일 높은 가지에 앉는 재주를 부렸다. 가볍게 달랑거리던 마른 종아리, 그 위로 쏟아져 내리던 여름의 강렬한 햇살. 번져나가는 이미지들을 필사적으로 참는다. 이것은 나의 기억이었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나만의 무엇. 나무. 나무. 악시스 문디.
“좋아, 케이.”
스피커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기계는 멈추고 나는 재빨리 실린더를 벗어났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여전히 케이였다. 케이는 전기 신호들 중 혹시 여래의 모습이 있는지 발견하고 싶고, 그래서 같이 모니터링하려 하지만 닥터들은 케이가 그것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여기지 않기에 보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설령 케이의 머리에서 나온 신호라고 해도 말이다. 대학과 대학원을 나온 닥터들에게 케이는 실험의 재료일 뿐 주체가 아니다. 양배추에게 음식의 맛을 묻는 요리사는 없다. 케이는 얌전히만 있으면 된다.
“케이, 잘했어.”
스피커가 케이를 칭찬한다.
“케이, 오늘은 이만 들어가도 좋아.”
실험실의 문이 열리면 도구들을 반납 트레이에 놓고 나온다. 연구동으로부터 방까지는 정확하게 이백사십사 걸음이다. 평균 보폭을 팔십 센티미터로 가정할 때 랩으로부터 백구십 이미터 팔십 센티를 벗어나고 나서야 케이는 비로소 최준혁이 된다.
머릿속에 주입된 단어와 개념, 일화와 지식들을 잊고 싶다. 하지만 그것들 중 어느 것이 내가 직접 깨닫고 경험한 것이고, 어느 것이 아닌지에 대해 구별해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Je sais tout est fini. 모든 것이 끝났단 걸 난 알아요.
내가 중얼거리는 이 불어 문장은 내가 배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지난주 연인과 헤어진 연구원이 밤새 웹을 검색하며 슬픈 노래만 불법 다운을 받다 같이 딸려온 유행이 지난 샹송의 한 구절이다. 삼십 분도 채 잠을 자지 못한 그는 그만 실수로 가정생활법률 용어사전과 함께 가사가 딸린 노래 묶음을 변환해 클라우드에 올려놓았고 그것은 그대로 내게 전송되었다.
De m'accorder ma chance. 나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세요.
흥겨운 리듬에 비해 구슬픈 편인 가사가 더욱 역설적으로 이별의 감상을 고조시킨다, 라는 짧은 소개 문구까지를 포함한 가사가 계속해서 떠오른다. 고개를 저었다. 이건 가짜였다. 타인이 주입한 타인의 정보와 타인의 감정이다. 경험해 보지 못한 감각이 시지각을 자극할 때면 나는 더욱 절박하게 여래를 떠올렸다.
여래는 진짜였다. 아니, 여래만이 진짜였다. 여래는 센터에서 오염되지 않은 최준혁으로서의 내가 경험한 살아있는 나의 과거였다.
Sans toi, ma mie. 내 사랑 그대 없이는
Je vogue sans but 나는 표류합니다.
Je vogue perdu 나는 길을 잃었습니다.
여래는 어디에 있을까.
머릿속의 노래를 닦아내고 싶다. 최준혁이 되고 싶다. 최준혁은 방으로 돌아오면 이를 닦고 샤워를 한다. 최준혁은 배꼽과 겨드랑이, 목 밑과 사타구니를 꼼꼼하게 비누질한다. 최준혁은 옷장 안에 걸린 티셔츠 중 가장 왼쪽의 것을 골라 입는다. 최준혁은 침대 시트를 팽팽하게 편다. 최준혁은 네 귀를 맞춘 이불 사이로 들어간다. 최준혁은 누운 채로 휴대용 단말기를 통해 필요한 정보를 검색한다. 은애원에 대한 기사는 더 이상 클리핑할 것이 없다. 은애원이 폐소한 후 조직도 상의 인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곳에 터를 두고 살던 경비와는 연락이 닿았지만 그는 원감이나 사환의 연락처를 알지 못했다. 여래를 찾으려면 역시 나가야 한다. 나가서….
그 후는 어둠이었다. 여래가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불을 어깨 위까지 끌어당겼다. 추웠다.
여래가 보고 싶었다. 상상 속에서 말고 진짜의 여래를, 그 웃음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나의 모든 것을 걸어도 좋다. 눈을 감자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어느 날, 나무 위에 올라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던 여래 위로 쏟아지던 칠월의 햇살 같은 빛이었다.
Axis mundi. 거대한 나무. 나와 세계를 이어주던 단 하나의 연결고리.
그러니까 여래다.
센터에서 나는 줄곧 혼자였다. 누구도 내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내 쪽 역시 마찬가지였다.
센터의 분기별 발달 보고서에서 나는 늘 중의적 단어 활용과 비언어적 의사소통에 문제점을 지적당했다. 문장의 앞뒤를 보고 쓰인 단어의 뜻을 유추하는 시험 문제는 공란으로 제출하기 일쑤여서 국어 성적은 늘 낮은 자리 숫자였다. 사과는 사과나무의 열매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뉘우치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 구분은 화자의 어조, 맥락, 동반 어구 외에도 기타의 많은 정보를 종합하여 이루어진다.
미묘한 차이로 이루어지는 섬세한 구분에서 나는 늘 좌절했다. 암기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언어는 바다와도 같아서 몸으로 가늠할 수 있는 깊이와 너비에는 한계가 있었다.
용례를 외우기 위해 펼친 사전의 목차는 비읍의 어딘가에서 멈춰 있었다.
설령 내가 이 모든 예시를 외운다고 하더라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내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으며 나 역시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적이 없었으므로. 센터 내에서 발표와 실험상의 응답을 제외하고 하루에 열 마디 이상을 말하는 적은 없었다. 역할극을 통한 치료 커리큘럼의 권유를 거부하자 상담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면 곤란해. n9188.
하지만 헷갈렸다.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 범람하는 의미의 홍수에서 자신이 원하는 적확한 뜻을 건져 올리는 걸까.
한 번은 뜻을 오해해서 소동을 벌일 뻔한 적도 있었다.
카페테리아에서 한 자리를 건너뛰어 앉은 알파 메일들이 자신의 여가와 성생활에 대해 잡담하는 것을 무심히 흘려듣던 나는 그들이 오메가를 먹었다, 고 한 지점에서 그만 수저를 내려놓았다.
맛있는, 신선한, 달콤한, 비린, 질긴, 여린, 탄력과 부드러움. 그들에게 구토감을 느끼며 입을 막고 일어나는 나를 두고 지능이 낮은 사람을 폄하하는 말들이 뒤따라 왔다. 그중 한 명은 내 멱살을 잡아 무리 가운데로 던져 넣으려고까지 했다. 손을 쳐내자 짧게 혀를 찬 그가 세게 뺨을 내려쳤다. 눈앞에서 번쩍 불꽃이 튀었다. 뒷목이 부서지는 듯한 강렬한 증오와 적의가 신경계를 통해 단숨에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손끝이 저렸다. 그러나 주먹 쥔 손으로 그를 때리는 대신 밀어낸 나는 화장실을 향해 달려갔다. 먹은 점심을 모두 토하고 나서 세면대에 입을 헹궈 악취를 지운 뒤 나는 관리 직원 면담을 신청했다.
내가 들은 내용을 그대로 전달한 뒤, 이 범죄의 고발 절차에 대해 문의하자 매니저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센터 내 경찰을 부르는 대신 다음 학기의 실용 국어 강좌를 하나 더 추가해 들어보라는 조언을 했다. 학내 분쟁 사항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조처할 것이라는 다짐과 함께. 당연히 나는 반발했다.
“어째서입니까. 이해가 잘 되지 않아요.”
“좀 오해가 있는 거 같아서. 아니 그게. 아이고야.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할까. 일단 얼굴부터 치료 먼저…. 부었잖아.”
“저는 괜찮아요. 걱정되는 건 오메가에 대해서예요. 분명히 들었어요. 히트 사이클의 오메가가 얼마나 맛이 있는지, 라고. 그리고 맛과 향에 대해서 삼분도 넘게 이야기를 나누었….”
“오해야, 그건.”
오해라니. 똑똑하게 들었다. 왜 범죄의 가능성에 대해 고려해주지 않는 걸까? 그저 무사 안일하게 넘어가려는 관료적인 태도를 항의하는 내게 매니저는 무언가를 참는 듯 한참 동안 입 안에서 말을 웅얼거렸다.
“그것보다 그런 이야기에 전혀 흥미가 없니?”
“없어요. 음식은 급식만으로도 충분해요. 센터는 영양학적으로 균형 잡힌 식단을 제공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홍보물에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사실입니다. 센터에 와서 이십오 센티가 넘게 자랐어요. 저는 그런 방식으로 무언가를 섭취하고 싶지 않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게 아니라.”
“제가 그래야 하나요? 저도 오메가를 먹어야 합니까?”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심폐기능을 시험해 보는 동작은 아니었다. 내가 또 실수를 했으며 그가 이를 지적하기를 망설이고 있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경험에 기초한 판단은 때때로 이해에 도움이 된다.
“뭔가, 잘못을? 제가.”
사고가 뒤엉키고 있었다. 단어가 순서를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나는 네가 오메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거나… 흥미가 생긴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는지를 물어본 거야. 네가 수동적이고 위축된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 센터에서는 걱정이 많다.”
그런 종류의 관찰까지 행해지는 줄은 몰랐다. 무감하게 보는 나를 향해 매니저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메가 이야기는 일단 놔두자. 네 얼굴 좀 봐. 폭력은 좋지 못한 것이지만 아까와 같은 경우에서라면 너는 적어도 자기방어를 위해서 힘을 쓸 필요는 있었어. 그게 싸움박질을 하고 돌아다니라는 말이 아닌 건 알지?”
“…싫습니다.”
“최준혁.”
“저는 누구도 때리고 싶지 않아요.”
“….”
“저는 제가 아버지처럼 될까봐 두려워요.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상상만으로도 몸이 굳어옵니다. 심리 상담 선생님은 그걸 트라우마, 라고 불렀어요.”
계절은 여름이었다. 절전을 위해 에어컨은 한여름까지 기다린 후에야 가동되었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커튼이 동그랗게 부풀어 오르다가 흩어졌다.
“남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저처럼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제가 맞는 게 나아요. 저는 그런 데에는 익숙하니까요. 아픈 건 참을 수 있어요.”
매니저는 볼펜의 끝으로 클립보드를 두드렸다. 그것은 신중할 때의 그의 습관이었다.
세 번, 두 번, 세 번, 한 번, 세 번, 세 번.
그가 만들어내는 수열은 늘 흥미롭고 복잡하며 새롭다. 나는 그와 일하는 게 싫지 않았다.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이 있는 훌륭한 어른이었다. 대체로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내게 조급하게 말을 재촉하거나, 아니면 지진아라는 판단을 내리곤 했다. 하지만 그는 느린 나의 반응을 신중하다, 고 표현했다. 학업에 진지하고 목표의식이 있다, 고도 했다. 기말 보고서에서 발견한 코멘트가 신선해서, 나는 다시 위로 돌아가 다른 사람의 것이 바뀌어 배부된 게 아니었는지를 확인해야만 했다.
나는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나를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공정했으며 편견이 없었다. 하지만 모든 선한 의도들이 보답 받는 건 아니다. 나는 그에게 위험할 때에는 누군가를 밀고, 치고 들이박음으로써 나를 지킬 것이라는 약속을 할 수 없다.
“죄송합니다.”
“됐어. 쓸데없는 소릴 해서 나야말로 미안하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나가려는 나를 그가 문득 불렀다.
“최준혁. 그러나저러나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는 거야?”
이상하지. 꼭 그와 친구라도 된 것 같았다.
“없어요. 여기에는 없어요.”
“흠. 별로 안 좋아.”
“여기에만 없을 뿐이에요.”
“아무튼 간에 안 좋다고. 다른 센터원들도 돌아보고 그래 봐.”
“싫습니다. 불가능해요.”
고개를 젓자 김빠진 한숨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분기 발달 보고서에는 성과 관련된 성숙도가 평균치에 이르지 못하며 사회성 발달 지연이 계속됨, 이란 코멘트가 추가되었다.
으뜸 수컷, 으로 논문에 기재되는 알파 메일의 주된 특질 중 하나는 강렬한 성적 충동과 매력이었으므로 그가 무엇을 우려하고 있는지에 대해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나의 불감을 걱정했다. 노련한 그의 예상대로 내가 학회나 모임에서 만난 몇몇 오메가들에게서 페로몬으로 자극 받는 일은 없었다. 그런 나는 호기심 또는 조롱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피곤한 일이었으며 때로는 불쾌했고 자주 비참했다.
놀림을 당하거나 나 자신을 부정당할 때면 언제나와 같이 여래가 보고 싶어졌다. 무릎을 핥아 소독해주던 혀. 원감이 소리를 지르면 귀를 막아주던 손바닥. 시시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잔뜩 얼굴을 찡그리며 웃던 얼굴. 그 옆을 떠다니던 반짝거리는 예쁜 먼지들. 가는 팔과 다리 위로 펄럭이던 낡은 면티의 헤진 촉감. 나뭇가지에 올라 먼 곳을 조망하던 시선.
나의 유일한 형이자 친구, 보호자이며 파수꾼. 잘못 인쇄된 여분의 카드 패처럼 홀수로 남은 나의 손을 잡아준 하나의 짝.
만으로 19세 이상이 되면 센터의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했다. 그 때가 되면 여래를 찾고, 찾아서, 찾을 것이다. 찾아야만 했다.
돋보기의 초점처럼 모인 생각의 끝에서는 연기와 함께 타는 냄새가 났다. 위험을 알리는 사이렌이 멈추지 않고 울렸다. 편집증 항목에 해당하는 질문이 늘어날 게 뻔했으므로 진로 계획을 묻는 상담사에게도 매니저에게도 이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여래를 그린 메모지의 낙서와 그와 나눠 가진 나무 인형을 넣은 서랍은 항상 잠가 두었다. 여래의 운동화 상자 같은 거였다. 여래와 나의 다른 점이라면 여래는 그의 보물을 내게 보여주고 만지게 해줬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아무에게도 그것을 말한 적이 없다는 거다.
이것은 나의 감정이며 나만의 것이다.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
거울 속의 내가 자라는 속도에 비해 기억 속의 여래는 늘 어렸다. 머릿속의 우리의 나이의 차이는 거꾸로 자라며 벌어져갔다. 어느새 상상 속에서 나는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래의 이마는 내 턱 끝에 닿았다. 여래는 나를 만지기 위해 발꿈치를 들어 키를 늘였다. 이마로부터 올라간 머리의 상처를 훑는 손가락이 지나치게 다정했다. 그래서 이것이 꿈임을 알면서도 나는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보고 싶다.
그가 보고 싶다.
만지고 안아서 그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다.
꿈속의 그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욕심을 낸 벌일까. 팔에 힘을 가하면 가할수록 여래는 물거품으로 부서져 흩어졌다. 매끄러운 광택의 방울들은 무지개를 띄우고 있었다. 무지개는 잡을 수 없다. 무지개는 물방울에 빛이 굴절 반사되어 나타나는 허공에서의 색상 배열이기 때문이다.
안 돼, 라고 신음하는 나를 의식하자 잠에서 깨어 눈이 떠졌다.
시간은 새벽 두 시 십삼 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에게 의사는 의무 일지에 각성 시간을 기록하도록 했다. 수면제의 처방을 위해 필요한 절차라고 그는 말했다. 노크식 볼펜을 눌러 시간을 기록한 뒤 펜과 메모지를 귀퉁이에 맞춰 바르게 놓았다.
새벽 다섯 시 칠 분이 되어도 잠은 다시 오지 않았다.
수면등을 켜고 수첩의 다음 페이지를 넘긴 나는 해바라기의 씨를 그려나갔다. 해바라기를 그리는 데는 피보나치의 수열을 이용한다. 시계 방향 나선과 시계 반대방향 나선을 그리며 좁은 공간을 촘촘하고 견고하게 만들었다. 반복 작업의 균형과 아름다움은 나를 고요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역시 잠은 오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수업 일정이 허락하는 한, 나는 보호시설의 기록을 바탕으로 그의 행방을 추적하려 했다. 원감은 아들이 살고 있는 외국으로 이민을 갈 때 기록물의 대부분을 훼손했다. 그나마의 정보 또한 권한 없음, 공개 금지의 딱지가 붙어있었다. 불법적인 알파 오메가의 수급책이었던 원감을 보호하기 위해 좀 더 높은 선에서의 감시가 이루어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나마 남은 자료에 대한 복구 프로그램 구동 여부와 백업 가능성에 대해 문의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개강으로부터 한 달째, 품었던 희망이 무색할 정도로 여래는 어디에도 없었다.
초조했다. 비대하게 웃자란 희망은 그 봄에 다시 초라하게 시들어가고 있었다. 악몽과 과부하로 잠은 점점 부족해졌으며 눈은 늘 새빨갛게 충혈되어 금방이라도 실핏줄이 터질 듯했다. 식욕을 잃었으며 학과의 훈련과 수업 역시 종종 주의를 놓치고 헤맸기 때문에 지적을 당하기 일쑤였다.
“여래.”
그런 내가 도서관의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학생들을 구경하던 무방비한 여래를 보고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시지각의 인지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염려였다. 드디어 나는 미쳐버렸나, 싶은 염려. 그것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는 그저 허상일지도 모르는 여래를 뚫어지게 보는 수밖에 없었다.
도드라진 앞니와 그 밑으로 약간 비틀어진 아랫니. 까다롭지만 순진한 표정. 허술한 차림새. 무료하게 휴대폰을 향하는 시선. 그와 함께 드리워지는 속눈썹의 그림자.
달라진 건 미용실에 갈 때를 놓친 듯 길어진 머리카락뿐이었다.
그대로. 그대로인 너. 꿈의 패턴과 그대로였다. 발견하고 다시 찾았다가 부서져버리던 여래, 그대로. 이건 꿈일까? 아니면 망상? 아니면, 가장 낮을 확률이지만 이렇게 우연히 다시 너를 만난 걸까?
심장이 뿜어낸 피의 압력이 혈관벽에 거세게 부딪혔지만 잘난 척하며 수열이니 패턴이니를 떠올릴 계제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그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위태로움과 섣불리 다가설 수 없는 두려움이 팽팽하게 나를 잡아당겼다.
그 때서야 처음으로, 그가 나를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생각했다. 내가 그를 발견하기를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슬픈 확률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태양이 눈부시다고 해서 그 빛을 거부하는 식물은 없다. 자석에 달라붙는 클립이 의지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당연한 현상처럼, 몸은 머리와 별개로 움직였다.
“…어떻게, 여기에.”
용기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를 털어 넣어 말한 문장은 완성되지 못했다. 의아하게 뜨여진 눈이 나를 바라보자 곧 후회가 나를 쳤다. 철썩, 하고 부딪친 파도가 산산이 부서져 깨어지는 느낌이었다.
바보 같아.
바보 같아.
그걸 알아서 어쩌려고?
내가 알고 싶은 건 이유나 과정이 아니었다.
오랜만이야, 라고 말하고 싶었다.
보고 싶었어, 라고 해도 좋을지 몰랐다.
잘 지냈어, 라고 물어봐도 나쁘지 않다.
우연이네, 가 가장 나을 것 같다.
하지만 뻣뻣해진 혀는 위의 어떤 보기도 선택하지 못했다. 물러나 앉는 여래에게 그만큼 다가가 앉으며 팔을 벌렸다.
“아… 아파! 최준혁.”
다정한 만큼 우유부단한 그는 팔로 가슴을 밀면서도 끝내 내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여래에게서는 달걀과 설탕의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냄새가 났다. 그 봄의 처음으로 식욕이 돌았다.
나는… 오메가를 먹었다던 알파들의 말을 이해했다.
그가 울고 빌어도 나는 여래를 먹어 치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전후좌우와는 상관없이 전적으로 충동만으로.
“야, 최준혁. 너 나 씹냐?”
“그러고 싶어.”
할 수만 있다면. 입 안에서 넣고 잘근잘근 씹고 싶어.
우성 오메가에게도 기능하지 않던 뇌하수체의 호르몬의 밸브가 힘껏 비틀어지며 개방됐다. 머리카락이 쭈뼛거리며 설 정도의 강한 욕망이 드러나지 않도록 부들거리는 손을 주먹 쥐어 무릎 위에 올렸다. 여래와 섹스하고 싶었다. 모든 절차를 생략하고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 바로 삽입하고 싶었다. 가슴을 움켜쥐고 그것을 손잡이마냥 여래를 힘껏 내게 마주 붙이고 싶었다. 철벅이는 아래를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게 흠뻑 적시고 싶었다. 발가벗겨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핥아 내려온 후 다시 역의 순서로 잇자국을 내며 타고 오르고 싶었다. 육 년 만에 처음 만난 여래에 대해 섹스 생각 밖에는 들지 않는 스스로에 대해서 어떤 해석을 내려야 할지 사회과의 선생과 보건담당의 매니저의 전문적인 의견이 궁금했으나 그런 걸 구할 시간 같은 건 물론 없었다.
“이리 와, 최준혁.”
여래를 만난 이후, 시간은 쾌속정과도 같이 수면 위에 가는 포말을 만들며 빠르게 지나갔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전개되었으며 의외의 지점에서 급선회했다. 파국이 찾아오길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해피엔딩일 수는 없을 거란 체념은 늘 하고 있었다. 여래가 나를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서도 알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시설에서 살고 있지 않다. 그 때는 둘 다 아직 어렸고, 외부의 개입은 절대적이었다. 헤어짐을 불가피한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 여래와 나는 법적으로 성인이며 자유의지가 있다. 그가… 나를 떠난다면 그것을 다르게 해석할 여지는 거의 없다. 비로소 대단원의 막이 내리게 된다.
공장에서 불이 나던 그 날, 그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완벽한 끝. 막힌 길. 가지 마시오의 표지판. 데드 엔드.
여래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래는 어지러운 사이렌과 그을음을 남기는 연기 사이로 다시 나타났고 나는 그를 포박하듯 안았다. 선택은 나의 권능이 아니므로 최선을 다해 순종할 뿐이었다. 갑자기 안겨져 쭈뼛거리며 허공을 짚던 여래의 손이 내 등을 쓸어내렸다. 설령 그 손에 후회가 깃든다 해도, 그는 이미 명령했고 이제 여래는 내게서 벗어날 수 없다.
“같이 있자.”
그래서 오늘 우리가 같이 있게 되었다. 여래의 의지로서. 그걸 생각하는 마음은 안심하면서도 동시에 위태로워졌다. 이 재회를 끝낼 수 있는 것 또한 전적으로 여래의 마음에 달려있기 때문이었다. 목숨이 키고 꺼지는 전원을 타인에게 맡긴 그런 기분이 들어 나는 종종 길을 걷다가도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심장께를 눌러보곤 했다.